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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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진언수상록 16) 인연이란 뭐길래 댓글:  조회:6678  추천:0  2014-07-08
                                                   인연이란 뭐길래                                                                   진 언       사람은 태여나 아들(딸)이 되고 성가해서 아버지(어머니)가 되고 늙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므로 형제자매, 아들딸, 손자손녀, 친척친우…등 질기고 질긴 인연을 맺 고 살다가 로동합동기가 끝나 서로의 의무가 자연해소되듯이 죽으면 그 모든 얽히고 얽힌 관계는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다가 미구에 망각의 이끼속에 묻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상이요 인연으로 얽고 얽히며 살게 되는 인생이다. 멀고 가깝고 맺고 풀어지는 인연의 무대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고 새라새로운 인생희비극의 극본을 써내려가게 된다. 인물설정을 나의 구상대로 하는것도 아니며 나의 의지대로 등장, 퇴장을 시키는게 아니여서 천차만층 인간군상속에 나의 양상도 자연스레 포함되고 해탈불가능이 된다.     인간관계는 모든 사람들의 처세에서 난제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떨쳐낼수 없다. 고민을 넘어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사소한 일로하여 한번 어긋나면 그로부터 그냥 삐걱거리기 십상이고 본래의 관계대로 돌려놓자면 랭철함과 시간이 아주 많이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미묘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뜨겁지도 않고 차겁지도 않고 덤덤하지도 않은, 그리고 설겅설겅한것도 아닌 인연에 대해 담배연기같은 생각을 눈비같은 희로애락에 버무리게 된다. 천층만층의 인해속에도 총명한 사람들이 많다. 어떤사람들은 마음의 창문에 카텐을 쳐놓고 숨어 있다가 필요할 때 속심을 얼핏 내비치곤 곧 숨는다. 어떤 사람은 사다리같은것을 내어깨에 걸쳐놓고 한계단씩 바라오르려고 한다. 어떤이는 나를 강저쪽에 세워놓고 외나무다리로 건너오란다. 어떤사람은 내게 손을 내밀듯하다가 손등만 보이고 사라 지고 사라진 그 자리엔 배신감만 오롯이 남겨준다     꿀벌은 꽃의 단즙을 빨아내지만 꽃에 상처입히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를 맺을수 있도록 수정을 돕는다. 그러나 사람들도 남에게서 자기가 필요한것을 취하더라도 상처만은 남기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얻음에 급급하다보니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다시는 더 얻을수 없다는것도 개의치 않는다. 인간도 꿀벌과 꽃의 조화로 움을 따라배우면 꽃은 꽃대로 향기를 풍기듯이 우리네 인생의 화원에도 인정의 꽃이 만발하고 삶의 향기로 즐겁게 하련만 우리네 인심은 왜 이리도 각박할가?     사람이 무정하기 짝이 없으면 목석같다고 비유한다. 그러나 땅땅 굳어 부드러운 멋이란 전혀없는 바위틈에 뿌리내리고 렬악한 환경과 도전하는 소나무들이 있다. 이 끼만 푸른 바위도 늙으면 가슴이 넉넉해져 바람에 날려온 홀씨 하나라도 기꺼이 싹틔워준다. 비한방울이라도 흙속에 숨겼다가 목추겨주고 바람세찬 날엔 그 뿌리를 단단히 잡아주기에 마침내 상록수로 되여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게 한다.     그 딱딱하면서도 고마운 바위의 품에서 어렵사리 자란 청송은 자기그늘을 짓고 바람에 가지를 흔들며 깃을 찾는 새들을 불러들여 생명찬가를 들려주군한다. 그래서 높은 바위에 마주서서 자신을 성찰해 보게 된다. 비록 청송은 못되더라도 이름없는 풀꽃 한포기를 위해서 내몸의 한구석을 내준적이 있으며 내삶의 어느 굽이에서 인정의 감로수로 목마른 사람을 목추겨준 일이 있었던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동안은 세상이 존재하고 나라는 사람이 숨을 쉬고 움직이고 하나의 넋이 떠돌게 될뿐이다. 존재와 소실의 변증관계와 같다고할가? 허허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하나 천년고독을 파도에 씻어내는것처럼 우리 모두 인파ㅡ출렁이는 사회의 소용돌이속에 부대끼고 때오르고 짓이겨지기게 된다.     사람에게 예감이라는게 있지만 깨달음은 늘 사후청심환같은것으로서 시공의 착위로 말미암아 무용지물이 되고만다. 더부룩한 머리카라속에 손가락을 넣어 머리를 북북 긁어도, 동가슴을 탕탕치며 발을 굴러 먼지를 일구어도 소용없다. 젖은 속눈섭을 껌쩍대며 한숨을 토하며 그토록 경신하게 된 까닭은 무엇때문이지? 반성보다 발빠르게 후회가 철썩 달라붙는 우리들의 약점투성이 마음이다.     모든 사람과 좋게 지낼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나자신을 좋게 보아주고 잘 대해 주기를 바랄수는 없다. 진심으로 친해보자고 별러도 그리되지 않는 사람이 있기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야 할 리유가 없으니 그런 허황한 욕심을 가지면 자 신만 괴로울뿐다. 무중생유라는 말이 있듯이 무(無)와 유(有)는 함수관계이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지나치면 분식이 시작되고 가면구를 찾게 된다.     내가 부르면 곧 득달하고 득달하면 내마음과 하나로 되여 무거운 내마음의 문을 충정의 열쇠로 열어주고 해빛을 불러들일 그런 지기가 몇몇이나 될가? 친구의 마음은 꽃을 찾는 나비의 마음같기도 하고 행복의 물결위에 물새처럼 날아예다가도 호르 륵 날아가버릴수도 있다는것을 미리 마음에 챙겨두어야 명지하련만 어디 생각같이 터득되는 관계학인가? 친구의 준렬한 통책은 충성에서 하는것이지만 그럴듯이 발라맞 추며 웃음속에 칼을 가는 사람의 롱간술에 잘 넘어가는게 선실한 사람들이다.      너와 나사이는 나와 우주와의 관계라고, 별들은 저렇게 비좁게 안고돌아도 부딪치지 않는것처럼 군자의 지교는 담담하더라고 자기위안을 해야 하나? 눈은 별을 보기 위해 열려있고 사람은 뭇사람과 교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별빛이 없으면 하늘도 내게 소용이 없다. 우주의 눈은 별이요 내마음에 별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이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의 눈도 감기리니 별이 있어 눈에 비쳐들고 눈이 있음으로 별빛이 흐르는것이 아니랴,      하많은 그들속에 내가 있고 나도 무수한 그들곁에 있게 된다. 화가치밀때도 있고 짜증이 나고 증오와 한이 움푹하게 패일때가 많지만 함부로 할수 없다. 모두주체적인 존재로 사는 상황에서 젓가락으로 아무데나 푹푹 찔러보는 두부처럼 대할수도 없다. 누구나 자기 등뒤에 지나온 과거의 바람이 불고지나며 뒤돌아보면 내가 찍은 인생의 발자국들이 나를 규정하며 후회의 회색삼각기를 팔랑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마음속에는 마냥 선의와 덕성이 침묵하는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성악과 쟁투의 조약돌들이 달그랑거린다. 나는 이미 보통사람으로서는 꽤 오래살았다할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래도 인간ㅡ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것이 없다. 그러나 문뜩 사람은 자기를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느낌이 새삼스럽다. 그럴때면 내가 알고있고 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식별해 보느라 생각이 호들갑을 떨게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모두 만만한 두부가 아니라 살속에 뼈가 있고 뼈속에 골수가 있는 변화속에 생명체들이다.     그래서 나와 관계있으면서도 관계없는듯 하고 내가 있어 존재하는듯 하지만 나없이도 존재하는 엄연히 독립적인 존재들이여서 그 관계가 얼기설기하고 뜨뜨미지근도 하고 달아있기도 하고 모래알처럼 씹히기도 하는가? 아무튼 복잡하고 오묘하고 단순한듯 하면서도 까다롭고 얽힐듯 잘 풀리고 끊긴듯 하다가도 다시 이어져야 하는 인간관계, 그 관계를 능란하게 엮어감이 능란하다면 정말 잘난 사람들이다.     반대로 “못난이”라도 싫든궂든 세상속에 얽히고 더불어 살면서 제한된 생명권내에서 제이미지를 부각해야 하는데 까다로운 정과 한을 잘 반죽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은 누군가를 만날때와 헤여질때 가장 순수하다는것을 터득하지만 역시나 경험은 지각한다. 아, 관계학의 묘미를 뉘라서 다 터득할고!                                                          2010년 4월 25일    
379    (진언 수상록 15 ) 나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6211  추천:0  2014-07-02
                                                          나는 누구인가?                                                                    진 언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자아론에 소급되는 문제로서 철학이나 종교 등의 모든 신념체계에서 다루고있는 심오한 생명철학이기도 하다. 한어에 나를 낳기전에는 내가 누구이고 나를 낳을 때 나는 누구인가?(未曾生我谁是我?生我之时我是谁!) 라는 물음도 불교에서 말하는 륜회의 원리로부터 제기된것인지 모르지만도,     아무튼 자기도 모르게 어찌구러 이 세상에 왔다가는 갈때도 혼미지중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초로인생, 더구나 자아를 상실하고 실존적방황을 하는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려정일진대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문은 정체성 론란에 따르면서도 다양한 해답들이 상충할수 있는 엄숙한 인생주제가 된다.     흔히 “나는 누구인가?”하는 자문에“나는 나이지.”하고 자신한다면 자신은 자기 마음속에 표상인가? 이름으로 상징되는 존재인가? 아니면 타자의 심목속에 비껴있는 형상인가? 내직업이 곧 나인가? 나의 신분, 나의 생김새, 나의 희망, 나의 욕망, 나의 신앙, 나의 혈연관계…이 모든것은 표층적인 자아이거나 허적인 자아일뿐이다.     례하여 “당신은 누구요?”하는 물음에 “나는 ××현에 ×××장이요”하고 대답한다면 그는 자신의 직업, 직위를 자신으로 알고있는것이다. 직위가 곧 그인가? 그 직위는 한평생 유지될수 없다. 권좌에서 물러난후면 그는 또 누구인가? 그저 아무개라는 사람이 되는가? 이처럼“나는 누구인가?” 하는 명제는 충분히 성립될수 있고 도리가 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이 자아를 대표하는지 아무도 잘 알지 못한다.     인간촌에서 각색에 따라 수없이 부각되는 얼굴을 가지게 되는 영화배우들은 더 말할것 없고 보통사람도 누구나 두개 이상의 얼굴을 가지고있다. 공중앞에서는 물론, 일심동체라는 안해앞에서마저 본연의 얼굴을 감추기가 일쑤이다. 례컨대 외도하고 돌아온후 작은 꿀벌과 노닥거리던 얼굴은 의혹이 가득찬 안해의 눈길에 초점을 맞추느라 그렇게 달라질수밖에 없는것이다. 오로지 어두운 밤에 홀로앉아 누구의 눈길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그 얼굴이 진짜 “나”의 얼굴일가      이러할진대 혹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진실한 자아로 세상을 대할지 모른다. 순진무구하기에 사악이 없고 유치하면서도 견정한 애들은 제밸대로 하고 아첨을 모르기에 간교한 거짓미소를 짓지 않으며 곧이곧대로 애증이 표현되는 그 맑은눈 동자속에는 선악에 대한 경계가 뚜렷이 비쳐진다. 그러나 풍진세상속에서 자맥질하며 차차 성숙하면서 진실한 자아를 상실하고 두개 이상의 자아를 부각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사람은 자신을 잘 안다고 말할수 없다는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른바 자기를 안다는(自己自明)것은 문자상의 추상명사일뿐 실제상 근본적으로 이런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은 자기를 안다는것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나 는 자기를 알면서도 속이지 않는가? 하는 자문에 대답이 명랑할 사람이 극히 적다.      우리는 타인과의 비김에서 평가받으려 하고 그로써 자신을 확인하려드는 약점을 가지고있다. 실제상 우리의 리념은 거기에서 쉽게 융합될수 있는바 대방의 차이성을 존중할줄 알아야 하거니와 자신의 특점에서도 자신심이 있어야 한다. 그냥 비김에 열중하다보면 필경 눈이 붉어지게 되고 자비감에서 해탈될수 없다. 자신을 전기적인물로 분장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개미처럼 하찮게 여길 필요도 없다.      사람은 흔히 자기에 대한 평가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 두가지 표준이 있다. 쟈크 론돈은 “바다의 승냥이”에서 “누구나 자기를 보석으로 여기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서 근근히 다야몬든의 동소이위(同素异位)碳”에 불과하다. 뭇눈길은 그렇듯 저울눈이고 시금석이다”라고 하였다. 사실상 우리는 남의 눈길이라는 저울판에서 살고있다.     실생활에서 자기를 잘 모르면서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있는듯이 자처한다면 평생 자기를 알 기회가 오지 않을것이다. 누구나 자기를 속이기는 쉬우며 더우기 쉬운것은 자신을 턱없이 추대하는것이다. 그처럼 자기를 잘 모름으로써 생기는 비애는 자기를 속이는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너무 높이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을 너무 낮게 평가하지도 말아야 한다. 설사 자아를 기편하고 있다는것을 알고있더라도 자신을 솔직하게 대하려는 용기를 가진다는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도덕교과서에는 자기를 잘 알아야 참된사람이 되는데 튼튼한 기초가 될수 있다고, 자존, 자애를 가지더라도 자기에 대해 솔직하고 충실해야 자기다운 넋을 가지고 살수 있고 운명의 타격에도 견뎌낼수 있다고, 사람이 사람이 되는 전제는 성실하게 대하는것이라고, 량심의 법정에서 자신을 투시하여 장단점을 저울질할수 있어야 한다고 씌여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생만사가 책처럼 그렇게 잘 정리되지 않는다는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똑바로 산다는것, 또 빼여난다는것은 일종 매우 높은 경계이다. 일정한 의의상에서 똑바로 선다는것은 사람이 되는 도덕이고 뛰여난다는것은 곧 인생의 지혜라 할것이다. 가까운 실례로 권력은 인품의 시금석이라 한다. 고구와같은 악인은 본질적으로 권력의 몽둥이를 휘둘러 약자를 릉멸하고 해친다. 선량한 사람은 자기에게 차례진 권력으로 민생을 살피고 약자군체를 위해 헌신하려 한다. 그러나 력래로 선량한 권력자는 쌀에 뉘만큼도 안된다는것을 력사가 읽어주고있다.     일체 세속의 가치ㅡ권력, 재부, 명성 등은 그 자신에게 일종 쾌락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선과 악을 체현한다. 진실은 위인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한가지 특징으로서 자기 인생에 대한 절실한 료해로 된다. 그로써 자기에 대해, 타인에 대해 솔직한것이 바로 자기를 잘 안다는 표징이 된다.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은 태여나지 않았지만 량심적인 사람은 많다. 고층차적인 자아 (자성본아-自性本我)와 육체적자아(두뇌의식)간의 관계를 어떻게 리해할것인가? 이역시 난제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물음은 진정한 자기, 다른사람과 구별가능한 자기,“이게 바로 나입니다”라고 내세울수 있는, 자기만의 자기란 어디있으냐고 묻고있는것이다. 진정한 변별력을 지닌 내모습이라고 내세울 자기가 있다고, 그런 자기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현재 무엇이 되여있건간에 행복한 사람이다. 사이비한 자기를 진정한 자기라고 믿고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한다면 그는 래일 죽어도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그런 행운아라 할것이다.     반대로“나”라고 알고있던것들이 내이름으로 지칭되는 나의 가면의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때“당신은 평생 속히우며 살게 될 운명일것이다”라는 말이 될것이다. 주어진 운명 즉 허울속에 자신을 가두고 편안하게 안주하다가 가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않은 자기만의 행운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진정 오롯한 나자신, 본신진력(本身尽力)이라고 내세울 자기를 찾을수 있을것인가?     하지만 어른아이 할것없이 진실한 그 자신을 드러내는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리유는 자기의 진면모가 들통날가봐 두려워하기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진정한 나자신을 찾는 과정으로 여기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사회속에 나의 진면목을 숨김없이 활짝 드러내놓고 산다면 정말 멋진 인생이 되지 않을가?                                                             때때로 흐린 하늘 우러르면                                         비방울속에 내 눈물도 있다오                                         서풍불어 락엽이 흩날릴 때                                         내가 누구인줄 그 뉘가 알가?                                                                                   2010년 1월 5일
378    개구리네 합창을 들으며 댓글:  조회:5855  추천:1  2014-06-28
                                               개구리네합창을 들으며                                                              최 균 선       낮에 찔끔거리던 비가 밤에도 질질 짜고있다. 창문을 여니 난데없는 개구리울음소리가 들린다. 연집하반, 낡은주택구역이여서인가 희출망외인데 격에 맞지 않은듯 좀 이색적이나마 귀속을 파고든다. 언제부터 개구리소리도 싹잊고 살았던가. 시끌벅적한 도시의 잡다한 소음에 귀가 멍멍해진탓인가 아니면 도시문명과 자연의 소리는 인연이 없다고 아예 체념하고 있었던 탓인가, 상념이 저도모르게 세월을 거슬러 오른다.     지금도 향촌의 밤에 개구리울음소리가 요란한지… 옛날 무공해벼농사를 지을때는 개구리합창소리가 번거로울 정도였다. 모내기가 끝나서 벼포기들이 우썩 키도움할 때면 개구리들이 밤합창에 신이났더랬다. 개굴개굴,개굴개굴…겨끔내기로 울어대여서 시내사람들에게는 소음이였을지 모르지만 진종일 밭일에 지친 농부들은 개구리들의 합창을 수면곡처럼 듣다가 곯아떨어지는데 습관되였다. 종종 듣그럽긴하였지만 꿈도 노그라진 농부에게는 마다할것도 없는 자연의 소리요 귀맛좋은 소야곡이였다.     휘영청 달밝은 향촌의 한여름밤, 무논의 벼들이 지글지글 끓이던 한낮의 열기를 식혀갈때 푸른달빛도 은은하여 예이제 개구리울음소리가 자지러진다. 향촌에만 있는 꿈꾸듯 고요한 여름밤, 유정한 달그림자아래 제철을 찾은 개구리들이 향촌의 소야곡을 연주하던 모아산아래 고향마을이 잊어버리고있던 신화처럼 새삼 떠오른다…     논판에 찰랑찰랑 생명수 넘치여 살판만났다고 농부들에게 감사의 찬가를 부르는건지, 논물이 너무 얕다는건지, 밤새도록 울어야만 하는 그 사연을 알아달라는건지, 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리로 농부님네 이목을 끌어내고 관심받으려는건지 알배 없지만 아무튼 향촌에 없지못할 화성(하모니)임에는 틀림없었다. 저마끔의 생각, 제잘 난맛에 서로 제입이 크고 목청이 높다고 내기라도하듯 하는데 한바탕 밤비가 쏟아진 뒤에는 더구나 와글와글, 왁자지껄 요란스러웠다.     아이들을 훈계하기 위해 엮어진 동화속에 그 청개구리의 후손들인가? 가라면 오고 메라면 지고…한사코 정반대로 하다가 엄마의 유언대로 강가에 묻고나서 홍수지면 떠내려갈까봐 운다는 이야기대로인가? 어떤 생물학자는 개구리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이구동성 울어대는 리유는 천적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란다. 사방에서 왈가왈부하니 어느놈을 잡아먹을지 종잡을수 없게 한다고.     아무튼 한놈이“개굴”하고 선창을 떼면 일제히 개굴거리고 어느 한순간 약속이나 한듯 딱그치고 잠간 쉬였다가 다시 자지러지게 울어대며 밤을 팬다. 개구리울음소리도 들을탓이라 달빛이 어린 창호지너머 들려오는 소리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느낌이 각각이다. 도레도레미파미파, 쏠라쏠라씨도, 도씨라쏠파미레…     울음이든 노래이든 집안에서 듣거나 퇴마루에 나앉아 듣기보다 논벌이나 늪가에 앉아서 들으면 더 질감이 난다. 벼가 무성할무렵, 논코나 실도랑에 고기발을 놓고 쑥타래타는 연기에 눈을 씀벅거리며 붕어든 미꾸리든 내리기를 기다리고 앉았노라면 개구리의 울음소리에서 천지와 음양의 조화를 터득할수 있을듯싶기도 하여 그야말로 고즈넉한 심야의 향촌에는 즐거운 “소음”이라 할것이다.       그런데 천생미물인지라 아무리 요란하게 합창하지만 곡조가 엇박자여서 도무지 질정할수 없다. 어떤때는 듣다못해 소리나는 곳으로 저벅저벅 다가가서 발을 탁구르면 (실은 진땅이라 구르는 소리가 날리없지만)워낙 민감한 놈들인지라 한창 합창에 열을 올리다가도 약속한듯“한창 흥겨운데 웬 잡놈잉교? 깜짝 놀랐잖아?”하고 숨을 죽이다가 적정이 사라진듯싶으면 다시 목청을 돋우고 다시 기척을 내면 숨을 꼴깍하는데 내사 절로 싱거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개구리울음소리는 마치 밤이 되면 너나없이 무작정 울어야 한다는 단합심의 체현은 아닐터인데 낮에 자지러지게 우는 매미들처럼 극성이였다. 그런데 대합창대원들로는 부적격이다. 그러나 주어진 생명현상이요 살아서 저저 뽑아내고싶은 소리를 마음껏 토해내니 상하좌우 눈치를 보며 제할소리 다못하고 사는 인간들보다는 퍼그나 자유로운 생명들이라 할것이다.     미물들이라 지음(知音)을 알리야 없겠지만 저들만의 지음이 있어서 화답하는지도 나로서는 알턱이 없었다. 도리대로는 제소리의 근원 (근본) 을 알고 그릇됨없는 본연의 소리를 낼때 여타의 소리를 바로듣고 아는것이 지음자 (知音者)요 그래서 서로 다른 소리가 그릇됨없이 묘하게 하나를 이루는 절묘한 화음을 이끌어낼줄 알아야 일컬어 지적(知的)이 되는것이다. 그러나 지음을 모르는 개구리들이라도 때때로 엉뚱한 계시를 주기도하였다. 말하자면 인촌의 시시비비와 련관지어주는것이다.     제모르는건 남도 모르는줄 알고 제아는것은 저만 아는줄 알고 제아는것만을 고아대고 정작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아는체 고아대는 인간심사가 개구리울음과 인과관계는 없어도 련상은 가능하였다. 스스로 논판에“개구리”밖에 안되는줄 모르고 타인의 알고모름을 섣불리 판단하고 선각자연 마구 추단하며 아전인수하기에 극성이다.     누군가 어리석은자의 특징은 타인의 결점을 들어내고 자신의 약점은 잊어버리는것이라고 했다. 진실된것을 믿지않고 각자 편견에, 리해득실에 따라 믿고싶은것만 믿는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치명적약점인가? 저마끔 잘난 개구리들의 자아표현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색해야 하나? 자아중심주의시대, 자아감각의 팽창시대, 저저 잘나셨더라도, 아무리 자아가치를 표현하더라도 청개구리네는 닮지말아야 하리라.     남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대소사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없는곳이 없다. 유익한 조언이나 내마음을 빌어 남의 마음도 헤아려야 할 아량은 당초 인연이 없는듯 제어두운 속심으로 남을 밝히려는 심리는 고약하다. 네가슴, 내가슴에서부터 소통의 길을 내야만 단합을 이룰지도 모를일인데 왜 개구리들처럼“내잘난것”만 내세우려 하는지? 공생의 협화음과 갈등의 불협화음중에서 무엇을 선택할것인가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그냥 개구리사유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울자고 작정하면 참개구리,청개구리, 두꺼비…들이 덩달아 덩둘해서 울어싼다.  개구리소리는 결코 그윽하지도, 그렇다고 은은한 가락도 아니다. 그저 울고웃는 인간촌에도 산촌의 밤소리가 아니면 정한에 사무치는 개구리네의 원성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소리에서는 인간처럼 남의 불행과 고통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까지도 더불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공감같은것을 느낄수는 없다.     인류의 력사는 시간의 선위에 굴러가는 소리와 모습의 함수관계라고 할까. 세상이 달라지면 소리도 변하고 소리가 달리지면 세상도 변해갔다. 이제 지상에서 자연의 소실되면 세상의 풍성함도 소실되는것이다. 그런데 생태환경의 엉망으로 하여 대 자연의 선률은 차츰 문명의 소리에 밀려났다. 그래서 다시 들어보는 개구리소리가 이리도 감명스러운것이 아니랴싶다. 개구리울음소리는 친환경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듯싶다. 존재의 각성과 확인을 위한 메시지일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이 도시이지만 아름다움과 진실된 느낌은 향촌에서만 얻는것이 아닌데 욕망과 향락의 소용돌이속에서 자연에로 향한 감관이 마비된 모양이다. 이밤, 비소리와 조금은 이외인 개구리합창을 들으며 모든것을 잊고싶은것도 또 다른 심리파동인가, 졸문을 대충 마무리하고 다시 창문을 열고 귀기울여보니 밤깊도록 울어서 목이 쉬였는가 아니면 누가 그만 울라고 호통이라도 쳤는가? 어째 잠잠하다.                                                 2014년 5월 19일 밤                      (2014.6.20 연변일보)                      
377    (진언수상록14)인생의 종착역에서는… 댓글:  조회:5141  추천:1  2014-06-28
                                                          인생의 종착역에서는…                                                                        진 언           인생에 대한 비유는 각양각색이다. 인생궤적을 포물선에 비유해도 합당다면 동년은 기점이요40대는 최고점이요 로년은 종점이다. 드디어 달려온 인생궤적을 돌아보면 불혹이라는 말그대로 감개무량함과 더불어 더욱 많은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한생을 총화하는 적시(适时)는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 숨벅차던 가슴을 어루쓸며 죄이기만하던 마음의 탕개를 활 풀어놓게 되는 만년이라 할것이다.     지나온 일들을 돌아보고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인생관을 세운다는  30대 이립(而立)을 훌쩍 넘어서40대 불혹(不惑)에 경험이 쌓여 스스로 자신의 잘한 일, 못한 일을 판단하고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지만 오히려 인생에 회의를 품게 되고 (知天命) 50대에는 세상의 리치를 알고 모든 만물은 홀로 존재할수 없기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함을 깨닫고 자신과 우주의 존재를 알고 자연에 순응하게 된다지만 항간에 말처럼 저도 모르게 쉬쉬해짐을 느낀다. 한갑자 돌아오는 와중에 모든 소리를 리해하고 순하게 듣는다는 60대 (耳順)에는 자기 인생마당이 회색으로 도배질된다. 이는 년령단계에 대한 대략적인 궤도를 제시할뿐이다.     사람마다 지성으로 터득하면서 그대로 차곡차곡 챙길수는 없는 일이다. 늙으면 성찰할것도 없이 곧 감각적으로라도 감동에 가슴끓이지 않고 랭철하게 인생마당을 비질하게 된다. 뒤우뚱거리며 인생길을 시작하던 동년의 모습이 어제런듯 삼삼해지고 물덤벙불덤벙하던 소년시절을 생각하면 회심의 미소가 지어지고 혈기방장하던 젊음을 돌이켜보면 덧없는 청춘을 흐느끼며 인생무상의 진속을 가슴으로 받아안게 된다.     인생길 굽이굽이에 이런저런 경관이 펼쳐졌지만 그것을 풍부하고 다채롭다고 말할수 있으면 복받은 사람이라고 할것이다. 수도없이 스쳐지난 낯선사람들의 덤덤한 눈길도, 동업자들의 무랍없는 눈길도, 혈육, 친지들의 지어먹지 않은 미소랑 다 인생 의 풍경이라도 누구나 겪는 체험이기에 유달리 다채로울것도 없고 풍부할것도 없다. 성공자라해도 좋고 범부속자라해도 좋고 세월은 누구에게 시간을 더주거나 덜썩 갈라내지 않으나 욕심도 가끔 털어내면서 걸어야 고달픈 인생행로에 걸음이 가벼울수 있다는것은 만년에야 터득하게 되니 인생이 곤혹스러운것이다.     인생의 종착지에서는 무심히 지여 어깨에 내려앉는 락엽에도, 제멋에 겨워 날개짓하는 산새에도 감동이 일렁이지만 자별나게 좋아지는 물건도 없고 특별히 미워지는 사물도 없다. 인생의 종착지는 사면팔방으로 바람이 스쳐가는 언덕위에 정자와 비슷하다고할가, 청풍에 마음속의 온갖 먼지를 날려보낸 탓인지 마음이 청정해진다. 불합리고 비리한 세속사정에 분개하던 일도, 눈꼴사납던 인정세태도, 명리를 탐내여 수단을 가리지않던 쟁투의 현장도, 아부를 게바르던 그 얄궂던 얼굴들도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해서는 다 부질없고 뜬구름같이 속절없다.     옛말에 죽어가는 새의 울음소리는 애처롭고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은 선량하다고 하였는데 석양의 언덕에서 마음이 한껏 여리여지고 정에 약해지고 동정심이 많아진다. 그 나이에도 사람이 착해지지 않는다면 천성으로 악한 사람이 분명하다. 공자는 인생의 의의는 소신껏 생활하면서 자기의 방식으로 인자(仁者)의 경지에 이르라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사람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라는 뜻일것이다. 인성은 그 과정에서 체현되는것이다. 공자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인덕(仁德)이 있고 인성이 있어야 참된 사람이 된것이라 하였으되 진인(真人)이란 참으로 불세출이라 하리라.       사람은 늙어진후에 가장 아름다운것은 가슴에 정회(情怀)를 품은 모습일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은 한갖 자기 인생목적을 달성하는데 수단일뿐이라면 금빛야차에 나을것이 없다. 가슴에 정회(情怀)를 품은 사람이라야 따스한 가슴으로 인애를 보듬으 며 살아갈수 있다. 아니라면 일생에 한일이 명리에 동분서주했다면 소금짐을 지고 강을 건너다 잔꾀를 터득하고 그다음 솜을 지고 강은 건너며 같은꾀를 부렸다가 골탕을 먹은 당나귀에 다름없다는 자각에 더욱 인생의 허무를 안게 된다.     인생의 종착역에 퍼더버리고 앉은 로옹은 천진하고 소박해지다못해 되려 아이가 되여진듯하고 허황하던 랑만도 자연으로 회귀시킨다. 이제 남은 일은 “인생비망록” 을 한장한장 번지며 주해를 다는 일뿐이다. 그런데 일생의 비망록을 한대의 연필로 기록한다고 할 때 처음엔 뾰족하던것이 차차 닳고 닳아서 뭉툭해진대로 써왔음을 발견하게 되고 살아왔다는것은 어찌보면 수수께끼 맞추기와 같았음을 느끼게 된다. 다음은 그 다음은…하는식으로 정답을 찾지 못한다.     사람은 늙으면 천연적인“철학자”로 된다. 사람마다 저마끔의 생활방식이 있고 가치기준이 있으며 사유모식이 있고 행위준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일방적으로 이것저것 나무릴 리유도 없어지는것을 왜 지난날에는 옴니암니 내기준으로 흥량했던가싶어지며 면괴스러워지기도 한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거나 시각을 바꾸어 보았더라면 가히 리해될수 있었을것을 왜 그러지 못했던가? 아무튼 이 모든것에 대한 성찰은 인생의 막바지에서만 거둘수 있는 수확이리라.     로신의 말처럼 현명하게 세속적이 되였는지 세속적으로 현명하였는지 스스로 판단할수 있다면 흔하지 않은 지성인이라 할것이다. 니체는 “사람은 곧바로 날수는 없다. 언젠가 날기를 배우려는 사람은 우선 서고 걷고 달리고 오르고 춤추는것을 배 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인생길에서 순서점진의 과정철학을 말하는것이다. 달리표현하면 인생은 마치 자기와 이 세상과 평형을 잡을수 있는 물건을 들고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면서 시대라는 외바줄을 타기와 같다고 할수도 있겠다.     그래서 인생을 구생불득이요 구사불능(求生不得,求死不得)이라고 함축하듯이 삶이란 그것과 끝까지 겨루어야 하는 전제를 달고 주어진것이라 할것이다. 그리고 또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더라만 흔들리지 않은 인생의 쪽배란 아무도 타보지 못하고 욕망이란 미지의 대안에 행운을 부리고 만족타령을 부른 사람도 없는것이다.     인생을 거의다 살고나서 평생 바깥경계에만 마음이 쏠려왔음을 성찰하게 될 때 인생의 허무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외재세계, 외재물에 쏠리는 그 마음으로 인생가치를 해석하고 그것을 추구해온것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 욕망의 대문만 활짝 열어놓았으니 잡다한 유혹들이 밀려드는것을 말려내지 못한것이다. 하여 마음은 걷잡을수없이 흔들리였고 형용하기 어려울만치 고달프게 인생을 영위해 온것이다.     호메로스는 신을 빌려 자신을 현실밖에 두는 태도를 보이면서 서술자의 신분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세상사와 인간세상의 불행을 노래했다면 성인 맹자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 때로는 우환이 사람들을 생존하게 만들고 안일과 향락이 오히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철학을 강의한다. 호메로스와 맹자는 다른 시공과 시각에서 출발하여 똑같이 적극적인 인생태도로 사람들이 경험해온 불행과 우환속으로 함께 걸어들어오고있다. 그러나 그런 철리를 터득하기까지는 인생의 비탈길을 많이 톺아야 한다.      암담한 일생이라도 상상만큼 비참하지 않았기에 사는데까지 살아간다. 덕성으로 살다가 죽어서 사람들이 기린다면 더 바랄게 무엇이랴, 아무리 빨리하던들 노상 늦은 후회인데 희로애락으로 범벅이된 인생에 개탄한들 어쩌랴, “생은 과오일뿐 죽음이 지식이다.(실러)”그리고 쉐익스피어의 말처럼 명예로운 후퇴를 해야 마땅하다. 어즈버, 석양도 다하지 못한 사명감에 얼굴을 붉히거늘…                                                 2009년 12월 1일
376    (수정고) 시는 씌여지는가? 짜내는가? 댓글:  조회:5081  추천:1  2014-06-24
   (수정고)                                        시는 씌여지는가? 짜내는가?                                                                        야 조       시는 씌여지는가? 짜내는가? 하는 물음은 공연한것이라 인지될수도 있고 따라서 진부한것이라 말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을 엮는다는 말처럼 시도 짜내는 경우도 없지 않기에 유익한 화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가 환기하는 창조적특성을 전제로 할 때 경물ㅡ시적대상으로부터 인기된 정서를 읊조린 경물시는 읊어진것이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리에서 시구를 짜내여 엮은것이 아니였다.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씌여진것이라는 화제가 성립되는것이다.     시적감동을 “경이로움”에 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지금껏 보여져 온 세계가 아니라 새롭게 투영된 특별한 세계, 우리가 무심코 보아넘겼던 일상의 경험에 대해 새로운 경지를 펼친것으로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정경을 재인식하게 한다. 즉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복제품에 대한 일상적인식이 아니라 시적인식으로서 이미 표상된 대상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본 인식이기에 시는 씌여진다고 해야 할것이다.     전통시는 시인의 심령의 외재세계이다. 시인은 외재사물에서 계발을 받고 그 외재형태를 내재공간에 이입시킨후 제련과정을 거쳐 심령의 메아리로 울린것으로서 시 특유의 선률이였는데 창조라기보다 재현, 자연에의 모방, 복사에 가까웠기에 시적대상을 보다 형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느낌도 전달하기 위한 수사적형식에 신경을 썼다. 이 때는 시가 씌여지지만 시적감정을 치약처럼 짜내는게 아니다     시적자아로서의 시인은 자연경물에 감탄하고 혼자 자각하는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정감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시인의 핵심적기능이다. 주정시에서 시적감각은 일종 사상의 지각화가 되는바 독특한 예술적인식이며 내면화된 인식으로서의 자기 성찰이기도 하다. 주지시에서도 시적정서는 개체정서의 즉흥적류출이지만 그것은 모종 깨우침을 내재한 보편화된 인류일반의 정서로 전환시키려 애쓴다.     무릇 시적감각은 인간화된 자연이다. 아름다운 대자연에 도취하게 되고 그 경이로움에 정감활동은 치렬해진다. 달리말하면 시의 종자가 생명의 꽃을 피운다. 시적령감은 순간적인것이다. 시의 핵은 시인의 본능이기도 한 감동의 세계를 여는 열쇠이다. 시인본성의 핵심은 창조로 불타는 심정이다. 이 정감의 작용에 의하여 참됨과 선과 미를 추구하는 마음이 곧 시의 령혼인데 그것을 짜낼수는 있단말인가?     시인으로 하여금 경물과 자기 감수가 일체감을 갖게 하는 상상력이 시인의 힘을 실어주고 시에 속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전도체에 전류가 흐르듯이 심정에 정서파장이 흐른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감동과 쾌락에 있기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수는 없다. 시적감각은 때론 일종 사상의 지각화이지만 억지로 조합한 지각화가 아니다.     “사상의 지각화”도 역시 일종 시적감각이다. 감각은 감촉된 반응의 결과이지 만들어낸것이 아니다. 서방의 어느 시인은“사상의 직각화 즉 사상이 직각으로 환원될 때 장미꽃향기를 맡을수 있듯이 당신은 사상을 감지할수 있다.”고 하였다. 정서에 사상이 조명되면 정서는 가열되고 승화되며 앙양되여 시혼을 불태운다. 하지만 정서를 짜내고 그것을 미화분식하는 작업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만약 생활소재를 바다라고 한다면 문자, 사상은 그속에 용해되여있는 물질로서 일정한 조건하에서 결정체의 형식으로 현연될 때 시는 곧 그 결정체로 나타난 소금이라 할수 있다. 그것은 일종 승화이며 응결이다. 시에서 상상이 중요하지만도 정감의 파동이 없으면 서정시도 없거니와 시도 없다. 따라서 시는 미적절주의 창조이고 시인의 정감의 울림, 진실하고 아름다움의 메아리이다.      시의 사상은 정감을 통해 체현되는것이지 메가폰을 들고 하는 선전선동이 아니며 선률을 통해 연장되는것이 아니다. 유성유색(有声有色)의 시혼은 시의 절주와 음악적선률과 경지속에 존재할뿐이기에 조작은 불가능하며 조작했더라도 울림이 있을수 없다. 궁극적으로 시는 시인의 세계관에 따라 특수한 정조로 물들게 되고 독자는 그 물든 세계에 공명하게 되므로 짜내기는 무효로동이 된다. 생명이 존재해야 할 새로운 리상이 곧 시의 지향이 되고 시가 독자들에게서 읊어져 많은 감명을 줄 때 자체, 내지는 개체의 유지목적이 달성되여 시적가치가 실현되므로 더욱 그렇다.     시인의 자아도취라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 희노애락의 감정으로 와닿아 시를 낳지 않으면 안되게 한 그 내속을 옳바르게 전달하라는것이다. 시인의 감정을 움직인것이 동기가 되고 시대적요청과 사회적정서가 시의 존재의 의의로 되고 시가 지향하는 방향 등이 제대로 전달되여야 시의 존재리유가 있게 된다. 따라서 독자들의 감정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선지선각이 선행되여야 하는데 선각한체 할수 있단말인가?     시창작의 목적은 자아표현을 달성하는것으로서 참됨과 선과 아름다움을 심어주고 모종 감명과 기쁨을 새겨주어야 하므로 추상적의미보다 시적대상을 순진 그대로 감각하고 인식하도록 자극해야 하는데 말을 꾸며내다면 효과를 볼수 있을것인가? 시적감정은 인간의 자주적인 활동에 의하여 생성되기에 사상의식의 준비정도에는 따르지만 지어낼수 없다. 시를 짓기는 집짓기와 같으나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읊어지거나 혹은 씌여진다고 하는것이다.     시적정서는 시적대상의 표면에 직선적으로 비낀 모종의 정서적색가인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서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과거와 현재, 미래에로 잇닿은, 다양한 정서적색갈로 채색된 감정의 표현이기에 자연로출이고 그래서 짜낼필요가 없게 된다. 시의 정서는 생활과 인성과 인간의 심령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관념으로부터 체현되는것만큼 그속에서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인것들을 정리하는것은 결코 지어내는것도 더욱이 짜내는 신고스러운 작업도 아니다.     시적감흥은 현실생활의 정경과 현상, 경물에서 받는 단순한 감동이 아니며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일에서 촉발되는 단순한 즉흥이 아니기에 가공이 수요되지만 그것은 억지로 엮는 일과 또 다른일이다. 송가만 불러야 하던 지난시기, 구호식시는 확실히 감동된것처럼 꾸며내고 분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야겠다.     이를테면 “모내길세 모내길세 성수나는 모내길세”라는 가사가 있다면 긴긴 하루낮 땡볕아래 모를 내거나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데 비닐박막을 쓰고 모를 내면서도 정말 신이나는 감을 느끼여 흥얼거린것이 아니라 책상머리에서 합목적인 추상을 앞세우고 쓴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벼모를 내고 가을에 거둘 풍작을 생각하면 어떤 기대를 가질수는 있어도 당면하여 허리가 부러질듯한데 신이나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기때문이다. 치통을 앓으면서 소리내여 웃을수 없는 도리와 같다고할가,     그럼에도 그때 우리는 감동의 노래를 부른것이 아니라 지어먹은 “격정”으로 웨쳐대였다. 그러니 그런 “시”는 씌여진것이 아니라 짜낸것이라 말할수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담박한 료리를 볶는 주방이 없듯이 질박한 비단을 짜는 비단공장이 없다. 자연으로부터 얻는것이기때문이다. 그처럼 애써 구하거나 지혜를 짜내여 엮어낼수 있는 “시”는 있을수 있되 절대 진실된 시는 못되는것이다.     지금은 감각과 정서에서 출발한 주정시보다 지성(사상)을 강조하는 주지시(主知詩)를 선호하는 때여서 감정만으로도 되지 않고 소재와 언어를 처리하는 지적능력이 따라 붙어야 하므로 자칫 짜내기가 될수도 있다. 말하자면 주지주의시에서 격정의 분출은 생경한것으로 간주되기에 자칫 짜낸 “주지”가 서정인양 분식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2012년 1월 8일 2014년 6월 24일 (수정)
375    나이를 말하다 댓글:  조회:5514  추천:0  2014-06-22
                                                               나이를 말하다                                                                   최 균 선       살면서 꺼리는 일이 한두가지 아니고 천출백태, 각양각색이겠지만 아이들을 내놓고 어른들에게 제일 꺼림직한 일인즉 나이를 먹는일이라 하리라. 그래서 “참 젊어보입니다!”라는 덕담의 전제가 이미 늙었다는것임에도 은근히 기쁘게 듣는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어 늙는것은 생명의 마무리와 직결되기때문이다. 종교에서는 죽으면 곧 천국에 간다고 설교하지만 천당에 가기 위해 앞당겨 죽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나이”란 단순개념이 아니라 복합적개념이면서도 경험적개념이다. 나이도 아이에 게는 살, 서면어로는 세, 공문서는 년령, 년장자에게는 년세, 춘추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고전적으로 학문에 뜻을 둔다해서15세는 지학(志學), 비교적 젊은나이라 해서 20세를 약관(若冠), 뜻을 세우는 나이라해서 30세는 립지 (立志) , 40세는 불혹 (不惑) , 50세는 지천명(知天命) , 60세 이순(耳順)이라고 하는 등등.    나이는 흔히 자격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자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깔보는 말로 입에서 젖비린내 난다고 하고 “내가 먹은 소금이 네가 먹은 밥보다 더 많다”하고 혹은 “내가 건넌 다리가 네가 걸은 길보다 더 많다”하거나 까불어치는 젊은이를 두고 솜털도 안난 애숭이가 어쩌구하는 훈계의 방편으로도 내들고 나이든 사람이 제구실을 잘못하면 나값을 하라고 훈계하군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나이를 값이나게 먹을수 있을가? 이 물음에 그 누구도 단마디명창을 내놓지 못할것이다.    때때로 나이많은 재세를 잘 부리기도 하겠지만 처처에서 “나이가 원쑤” 라는것을 절감하게 되면서부터 벗어버릴수 없는 심리보따리가 될게다. 옛날엔 “동방례의지국” 이라 하여 오륜(五伦)에 “장유유서(長幼有序)라 하였고 그 전통이 지금도 제창되고 있지만 별로 위안이 되지 못한다. 술자리에서는 보통 나이에 따라 순배를 정하지만 그게 농촌말로 위촌이 되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서글픔을 느끼게도 한다.    아이때는 하루볕이 새롭다는 말처럼 나이가 우세를 점할때가 더러 있었지만 어른이 된후에는 나이가 많다는것이 결코 무슨 밑천도 아니거니와 더욱 자랑거리일수 없다. 제가 먹어야 할 나이를 먹었는데…그러나 누군들 좋아서 나무에 년륜이 새겨지듯 해마다 나이테를 두를가? 세월을 이기는 장수가 없다는 말은 진행형이면서도 미래형이며 로중청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청춘이란 재부가 있다. 그러나 늙어보지 못한 미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늙은이들은 저저히 젊었던적이 있었기에 경험과 로숙이란 재부가 덧얹힌다. 젊어서는 자신도 늙은이가 된다는 자신을 상상하기조차 싫어한다. 무정세월이 빚어놓은 현실에서 나이먹는 일이 가장 애석한 일이라는것을 느끼는 때에도 나이의 변증철학을 모른다면 견식문제가 아니라 지력문제이다. 항간에 버르장머리 없는 막된 행위를 두고 “이상을 박대하면 앉은 개○○이 부러진다.”는 속어로 훈계하군 한다.    그러나 빌어서 절받듯이 나이를 턱대고 존경을 바랄필요도 없고 누구네들처럼 지하철에서 자리를 내라고 호통치면 우를 범하는것이다. 세월이 흘러 스스로 자괴감을 느낄것이니, 그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랴, 다 제잘난 멋에 사는 세월인데, 젊은시절에는 상상할수도 없는 인생의 다양한 의미를 깨득한것으로 아쉬움을 보듬으며 나이를 먹는것이 헛되지 않음을 자각할 때 만년의 삶은 나름대로 다르게 꾸며질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눈도 가서 돋보기를 써야 잘 보이는것은 필요없는 새새매새한것은 보지않아도 되고 필요한 큰것만 보라는것이라 생각하며 합리성을 찾아서 족한것이요 귀가 차차 멀어지는것은 귀간지러운 작은말에 개의치말고 필요한 큰말, 정설만 들으라는것이라고, 걸음이 무거워지는것은 백집사(百执事)에 근신하라는것이라고 생각해두면 존경, 불존경때문에 심사가 비틀어질 일도 없으리라. 이상사람을 존중할줄 모르는 자는 비틀어진 제인격에 스스로 참괴해할것이니 말이다.    때가 되여 머리가 하얗게 세여진것은 세월의 풍상이 남긴 기념이라고, 망각이 심해지는것은 잡다한 세상사와 시시껄렁한 일에마저 기억을 달리지 말고 좋은 사람, 좋은 일들만 기억하라는것이고, 물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바람처럼 헐겁고 청정하게 맞고 보내라는것이라고 생각하면 자위가 아니라 인생의 총화가 되기도 할것이다.    인생을 등산과 같다고 비유할진대 나이를 세월이 쌓아놓은 산으로 가정한다면 산밑에서는 주변밖에 볼수 없기에 눈에 비치는것만 보다가 차차 높이 오르면서 시야가 넓어지여 먼곳까지 볼수 있다. 그런데 산정에 올라선 사람이나 산밑에 있는 두사람의 위치는 다르지만 대방의 눈에는 서로가 미소하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년장자라고 젊은이들을 미숙하다고 보는것이 관습이고 역으로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을 한물지난 골동품을 대하듯 무기무력함을 우습게 보기가 일쑤인데 다 편파적이요 진행형에 무지함밖에 안된다.    나이란 생명의 소모일뿐만아니라 삶의 축적이며 속절없이 서러운 일이나 나이는 그저 먹는게 아니라 거듭나는 표지이기도 하다. 비유하건대 옛가구를 윤색하는 옻과 같다고 할수 있다. 혹 그게 나이값이 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한해두해 세월이 쌓일록 삶의 보람을 떨치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면 반면에 무위도식하며 자연생명을 소모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를 먹고싶지 않다고 발버둥칠 꽉 막힌 사람이야 있으 랴만 세월이 가는것만 헤아리고 남은생명을 보다 더 의미있게 연소시킬 생각은 하지 못하는것도 안쓰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공자가 로자에게 “제가 깨달은바가 있습니다. 까마귀와 까치는 새끼가 되여 자 라고 물고기는 거품에 붙어자라고 나나니벌은 탈바꿈을 하여 성충이 되고 동생이 생 기면 형이 울게 됩니다. 오호라, 제가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지 못한 위인이였던 것이니 더불어 하나이지 못한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자연과 하나이게 할수 있었 겠습니까?…”라고 설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물러나와 안회에게 말했다. “내가 지닌 도라는것은 독안에 든 바구미와 같은것이였다. 선생님께서 나의 몽매함을 깨우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하늘과 땅이 위대하고 완전함을 알지 못했을것이다.” 성인도 자기중심을 잡을수 없다는것을 말해주는가? 산우에 산이 있고 하늘밖에 하늘이 있다고 했듯이 로자의 도에 탄복하고 자기중심을 잡을수 없다는것을 개탄했는가? 이 도리를 우회적으로 설파하려 한것인가?    혹 젊은이들이 로인을 존경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만 나이많다는 리유로 우습게 보거나 비하할 권리는 없다. 문화소양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속에서 자기자신은 로인박대증이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할 사람은 없을게다. 한것은 조금이라도 인격적인 사람으로서는 남들에게 형편없는 저질로 보이려하지 않을테니까, 보다 더 중요한것은 자신도 언젠가는 로옹이 된다는 도리를 모를 천치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쌓여가는 인생을 리해하는데 높은 지력상수가 필요없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것은 주어진 생명선에서 덜어내기이지만 살아온 나날에는 더하기로도 된다. 그래서 인생은 마이너스가 아니라는것이다. 나이를 먹는다고해서 저저히 년장자다운 년장자가 되는것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나이가 많으면 어른이라 칭하고있다.    대저, 젊어서는 자신의 늙은모습을 생각하지 않지만 싫어도 늙음은 누구에게나 붙어설테니 장래를 생각하고 허무감을 가질것이다. 붙쫓고 버림당하고 얻고 잃고, 채우고 비우며 석양의 언덕에까지 오는동안 젊은시절에는 풀수없었던 숙제를 풀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자기 인생의 총화에 몰두하게 될것이다.                                                     2014년 6월 10일  
374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 댓글:  조회:5901  추천:1  2014-06-17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                                                              최 균 선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는 스탕달의 묘지명이다. 최초의 사실주의소설로 추앙되는《붉은것과 검은것》을 써서 왕정복고시기의 특권계급에 도전했고 자신처럼 아무구속도 받지않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정열적인 주인공들을 소설들에 등장시키 면서 아무리 보기싫은것이라도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기에 뒤늦게나마 세계문학의 백화원에 길이 향기만방하게 되였던것이다.     그의 이색적인 묘지명은 감성적인생,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을 얻는 전통적비결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결코 따르지 않은(또는 따르지 못했던) 한 작가의 생애를 상징하는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그는 일정한 주소나 직업을 가져본적이 없었고 집도, 자식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애인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고 대다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진정한 공감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어경에서 그에게 왜 한사코 글은 썼는가고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였을가? 이른바 불인지심(不忍之心)에서일가? 문득 열혈의 반항작가 최서해의“혈흔”의 한단락이 어방사한 대답이 될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글을 사랑한다. 글을 짓는다. 그러나 글재주가 없는것을 나는 잘 안다. 내 글은 세련이 없고 미숙하며, 내글은 현란치 못하고 난삽하며 내글은 맑은하늘, 밝은 달같은 맛이없고 흐린련못 진흙같이 틉틉한줄 잘 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지으려고 애쓴다. 나는 다만 내가슴에 서리서리 엉킨 뜨겁고 의로운 정을 쏟치면 족할뿐이다. 세상이야 웃거나 욕하거나 나는 내아들을 사랑한다. 내아들이 잘나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내 고통을 말하여 주는것은 오직 내아들 (창작)뿐인 까닭이다. 내아들은 참말 못났다. 세상에 보이기 무섭게 못생겼다. 그러나 그는 내고통을 알고 말하여준다. 나는 그러므로 사랑한다. ……”     구구절절 가슴을 울리지만 “나는 내아들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마음에 담지 못한다. 스스로 사랑한다고 말할만큼의 글이 아님을 잘 알기때문이다. 하기에 남들이 곱게 보아주었으면 하는 사치한 생각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글짓기에 몰두한다. 쥐도 한모뚫으면 성공한다고 해서도 아니다. 장끼가 아닌 아집인가? 새벽이 되여지면 수탉이 절로 우는것과 같다고 한다면 좀 웃기는 비유가 되겠지만도 하여간 저도 모르게 제소리를 내고싶은 욕망인것은 자명하다.     즉 표현욕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는것이라고 할수도 있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것을 세상과 공유하고싶은것은 물이 도랑에 이르면 절로 흘러가는것과 같다고나할가, 참으로 세월의 흐름을 모르는것이 사람의 정신이라 할것이다. 사람은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자기생명의 가치를 지닌다. 인생을 살고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한 존재이나 어떠한 삶인가는 각자의 취향과 가치추구에 따라 그 양상은 다소 달라진다.          무명인이라도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는 수단으로는 글이 제일 확실하다고 하겠다. 글로써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굴하면서 나름껏 가치실현을 할수 있기때문이다. 만일 어떤 삶이 가치있는것으로 평가되여 후세에 전할만 하다면 글로 남겨진다. 최고를 바라지는 않고 소신껏 살아가는 자국을 남기려고 자청한 고생이지만 나로서는 유익한 추구이다. 사람은 그저 생명체가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정신적존재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글을 쓰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존재의 의거가 된다. 생각이란 그 자체가 그의 인간상과 동일시되기때문이다.     그만큼 생각하는 기능과 가치를 중요시했음을 뜻한다. 가치롭다는것은 물론 나만이 아닌 보다 큰 범주로서의 공동체 즉 사회적차원에서의 유익함을 뜻한다. 인간의 삶은 대동소이하나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부각함에서 그가 써낸 글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명사진”이 될것이다. 글은 유한한 생명을 정신적으로 연장하려는 바람직한 작업이요 생명의 횃불이 타오르는 또 다른 삶의 풍경선이라 할것이다.     베이컨은 “글을 써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사라져라”는 지극히 극렬하고 신랄한 말을 한적이 있는데 살아있는 삶을 글쓰기와 동일시하였고 글쓰지 않는 삶을 죽음과 같이 여겼기에 살아있으려면 글을 쓰고 죽음과 같은 삶을 하려면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것이다. 보편성으로부터 말하면 극단이지만 아마도 글을 쓰려는 사람들에 한한것인듯싶다, 아니면 “국외인들”에게는 불공정할테니 말이다.     산이 있기에 등산하듯이 글이 있음에 글을 쓰는것이다. 뜻이 있는 이는 상황에 따라 글을 쓴다. 쓰려는 정신이 있기에 쓰는것이다. 모르긴해도 늘 생각하며 갈래갈래 이랑을 지어놓고 무언가 심어 창조의 열매를 맺고싶어하는 이들이 글을 쓸것이며 안쓰고는 못배겨서 쓰리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의 진의가 심중에 깊이 배겼을 때 글쓰기의 묘미와 의의가 감관속에서 굽이굽이 메아리칠것이다.     어쨋건 문화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바람직한 일은 글을 써서 발표하는것만큼 더 보람찬것은 없다. 생명충동으로서의 문자표현은 정신생활을 리드하고 심령세계를 꽃피우는것만은 사실이다. 본능적충동이 멈추지 않는한 운필이 멈춰지지 않을것이다. 로심초사해야 하지만 또 한가지 즐거운 인간수업인 글짓기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를 묻는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묻는것과 같다. 왜냐하면 글쓰기 자체가 작가의 인생이기때문이다.왜 발표하냐? 명예를 위해서?글을 지어 남에게 유익한 계시를 주려고? 지금같은 자기본위주의시대, 누가 누구의 말에 귀가 솔깃해 하랴만 그런줄 알면서도 그냥 이른봄 달래캐듯 글밭을 파헤치는것은 “제 잘난멋에” 고집하는 생명분투인가? 돌밭을 갈고있는 소의 고역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글짓기에는 부수적으로 다변적인 기능이 따라야 한다. 효과제일주의가 아니라도 결과는 맺혀진다. 남보다 빼여난 글을 쓰려는 분발심도 나무랄것 없지만 자기가 이미 쓴것보다 더 좋은 글을 써내려는 정성은 갸륵하다 하리라. 그런데 누구가가 작가들의 대부분은 뻐스를 놓쳐버린 사람과 같다고했다. 일차성적인 인생길에 뻐스를 놓친다면 다른 “실패자”들과 함께 길위에 남아있을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 생명의 내용과 절주는 그 자신의 수요에 따라 조절된다는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황차 자기인생은 남을 위해서 사는것이 아님에랴, 무릇 문필을 생명활동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강렬한 의욕과 의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만약 정신수요가 아니라면, 자발적표현수요 즉 글로써 자아를 실현하고싶지 않다면 그리 애모쁘게 쓰지 않아도 된다. 정신수요란 그처럼 집요하고 성스러운것이다. 인생길에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말의 의미는 누구나 인생말년에야 각별하게 인지된다.     글은 문자유희인가 유희문자인가? 문자유희, 유희문자가 무슨 가치함량을 가지랴만 상품경제시대 글이 공방형앞에 진상품이 되고있는 현실은 아닌가?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성을 제쳐놓은 자아가치의 체현일뿐이다. 만약 금전의 후광이 문자에 투영된다면 그 문자들은 오히려 색이 바래질것이다.    “제 갈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라는 단떼의 절창은 진실을 찾아걷는 작가들에게 불멸의 횃불과 같다. 스탕달이야말로 누가 인정하든말든 자신이 가야할 길을 굳건히 걸었기에“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는 세마디로 인생을 총화했을것이다. 붓쟁이로서 그의 인생궤적과 창작사상, 창작태도를 좌표로 삼고“살며 쓰고 사랑하리라”고 표방하는것은 가상하다 하리라.                                                     2014년 6월 5일  
373    부정이 능사가 아니다 댓글:  조회:5637  추천:6  2014-06-12
                                부정이 능사가 아니다.                                         진 언       한 마을에 앉을뱅이와 절름발이가 살았다. 앉을뱅이는 몹시 절뚝거리면서도 안다니는데 없는 절름발이가 부러운 나머지 질투심까지 북받쳐서 속으로 언잖게 여기였고 절름발이는 그렇게 심기비뚤어진 앉을뱅이를 아니꼽게 보는터였다. 어느날, 마침내 가시돋힌 대화가 오갔다.     ㅡ여보게, 절뚝이, 곁에서 보는 사람이 민망하게 보일만큼 절뚝거리며 어디로 그리 싸다니는가? 나같은면 남새스러워서도 걸어다니지 않겠네. 그렇게 볼품없이 걸을게면 아예 나다니지 말란말이요. 동병상련이라 진심으로 충고합세…     ㅡ허, 앉을뱅이친구가 생각도 앉아뭉개네그려. 절룩거리면서 걸어도 생명운동의 체현이 아니겠는가? 뒤우뚱거리며 걷는 오리의 선언이 있지. 걷는 방법은 다 저마끔이라구 말이네. 자네, 무슨 부조두없이 제밸을 배배꼬는게 아닌가?     ㅡ 젠장, 선의두 모르는군, 나는 이렇게 앉아있기에 남에게 보기싫은 꼴은 안보인다구. 그런데 그게 뭔가? 새앙쥐는 차라리 쥐인체 하라는 말이 있지?     ㅡ 오, 그런가? 하긴 자네는 앉아있기만 하니 보기싫은 걸음걸이를 남에게 보일 기회가 없지. 하지만 아무렇게 걷든 걸어다닐수 있다는것은 자아의 표현이구 자기 존재에 대한 확증이 아니겠는가? 한발 얕고 한발 깊어도 발자국을 남기는게 좀 좋아?     ㅡ허튼소리,     ㅡ아니지, 당신은 우물안에 떨어져도 건질것이란 그 앉은 모양새겠지…만약에 절뚝발이가 소경을 따라 걷는다면 어떻게 생각하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취한다는 도리를 말하네. 하기사 당신같이 좁은 흉금에 이런 도리가 터득이 가겠냐만…장님과 앉을뱅이가 달리기시합을 했지, 장님이 마구 내달리다가 담벽에 부딪치는것을 본 앉을뱅이가 좋은궁리가 떠올랐네. 말하지만 장님에게 업혀서 달리는것이였네. 결국 둘다 일등을 했지. 세상은 더불어 사는게라구.     ㅡ헝, 그따위 옛말은 나도 지어낼수 있다구, 말하자면 앉을뱅이가 거렁뱅이의 돈지갑을 소매치기했는데 장님이 보았다네.벙어리가 노해서 대성질호하니 귀머거리가 놀라서 펄쩍 뛰는데 등곱쟁이가 허리를 쭉 펴고 달려들었네. 이에 절름발이가 발을 날리려는데 얽음뱅이가 제낯을 봐서라두 그만두라고 말렸다네. 이에 미치광이가 말했다네. “헐, 사람은 어디까지나 리지적이여야 한다구, 모두들 랭정하세.”     ㅡ그래, 참 교훈적이군, 그런데 왜 교훈적인지 아나? 하나같이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얘기잖아? 그런데 앉을뱅씨는 어떠한가? 당신같은 그런 태생적부정심리는 결국 스스로 웃음거리를 만들고있지. 남잡이가 제잡이 된다던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는 여기서 접더라도 앉을뱅이의 심리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자기는 어쩌지 못하면서 대구 남을 부정하는 버릇은 참으로 못된 버릇이다. 흔히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고 한다. 좋은 심리지향이다. 하긴 그래야만 긍정과 부정이 얽혀도는 세상에서 스트레스인지 적게 받을테니까, 긍정과 부정은 사물내부에 포함된 두가지 상반되는 규정성으로서 대립되면서도 호상의존하는 변증적통일관계에 처해있기에 호상전화하기도 한다.     남이 한 일이나 남이 가진것을 무작정 부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긍정속에 부정이 포함되여 있고 부정속에 긍정이 있으므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긍정적사물에 자아부정의 인소가 포함되여 있고 발전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아부정의 환절을 겪으면서 자아갱신을 기약하기때문이다. 이는 대인관계에서 상호존중의 기본상식을 제시하고있다.     그만큼 긍정과 부정의 내함은 파악하기 어렵다. 변증적인 부정은 자아부정으로서 곧 내재적부정이다. 사물을 인식함에서 우선 무엇인가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것이라고 긍정되면 저것이라는것을 부정하게 된다. 례컨대 스위치를 올릴때가 긍정적인가 내릴때가 부정적인가? 이 시점에서 부정 역시 긍정이다. 정태(静态)상에서도 대립통일될뿐만아니라 동태(动态)상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뿌리깊은 문인상경(文人相轻)의 심리바탕도 부정심리다. 문인들이 상경함으로서 얻은 결과는 광채롭지 못한 평판뿐이다. 그래서 문인에 대해 폄하하는 말들이 많이 류전되였다. 문인무행(文人无行),문인무용(文人无用),문인비루(文人卑鄙),문인와 리투(文人窝里斗),문인와리반(文人窝里反),문인와리잔(文人窝里残),문인투기살인(文人忌妒杀人),문인리간도발(文人挑拨离间) 등등이다.      개체들속에 부정에 이골이 튼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인격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다. 되는 호박에 말뚝박듯이 일이 시작도 되기전에 호들갑떨며 일이 잘못되기만 바라는 자들, 다된밥에 재를 뿌리며 제사 가장 잘난체하는 자들, 속창이 좁아서 옆구리터진 도토린데 군밤인듯 재세부리는 그런 알량한 자들이 다 그렇다     이런 개체적렬근성 민족성의 일종이 되여지면 이만저만한 비애가 아니다. 뿌리깊은 근성인가? 옛날 삼국시대의 그 분렬의 극치에서 살아남은 유전인자일가? 썩어 빠진 리조시대, 분렬의 극치를 이루었던 그따위 심통의 연장선인가? 사사건건 남을 시비질하고 부정하고 부정하다보면 긍정이 되고 그냥 부정하면 자신의 광채롭지 못한 밑창이 홀랑 드러나게 된다. 남을 물에 밀어넣으려면 자기 신발도 젖기마련이듯이,     남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긍정할것은 긍정해주어야 자기의 인격력량을 확인하는것인데 그냥 자기 인식만 진리이고 절대적인듯이 생각하는것은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그런 착각은 거개 망상증을 불러올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내눈으로 보아낼수 없는 장점이 있다는것만큼은 시인해야 명지함은 몰라도 정상인의 심태일것이다. 제보고싶은것만 보는것은 작가적인 시각이 아님에랴, 긍정하기 싫다고 비아냥거린다면 동냥도 안주면서 쪽박까지 깨려는 천하에 몹쓸 심통이 아닐수 없다.      남을 부정할줄만 알고 전혀 긍정할줄 모르는것은 근거없는 오만과 형편없이 비틀린 편견에서 온 심리고질이다. 바다는 우리들에게 경고한다. “사람들은 너의 하늘을 밀어낼듯한 거한 파도를 흔상할줄알뿐 너의 원천ㅡ졸졸졸 흘러들어 온 시내물은 잊기 십상이다.”라고, 우리 민초들로 말하면 모두 시내물과 같다. 그러나 그런 천만갈래 시내물이 모여 대해를 이루지 않는가? 그래서 호한해진 바다는 그것을 잘 알고있다.     부정심리는 질투심을 안고있는 반면 겸손을 등지고있다. 왜 질투하고 부정하려만 들게 되는가? 타자에 대한 부정은 결국 나의 충분한 자질부재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 그러나 그로써 남는것은 무소불위인것 같아도 자신의 취약성을 잘 알기에 저절로 자비심을 짓씹을수밖에 없다. 그리고 곁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잘 보아내고있다.     명인들은 말한다. “겸손은 미덕중에서 가장 터득하기 힘든 덕목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보다 더 없애기 힘든것은 없다.(엘리어트)”, “겸손하기만 하다면 모든 존재가 당신에게 스승이 된다. 그러나 부처가 곁에 있더라도 전혀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겸손하지 못하기때문이다. (라즈니시)”, “겸손 할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남을 비난한다. 그는 다만 남의 허물만을 잘 알고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욕정이나 죄과는 점점 커져가게 마련이다. (똘쓰또이)”     에머슨은 말한다.“겸손한 자만이 다스릴것이요, 애써 일하는 자만이 가질것이다.” 무엇을 이루고저 한다면 부정심리로 비뚤어진 비하를 할대신 무엇이나 애써 하라, 내가 먼저 무언가 쌓아놓아야 남을 헐뜯을 건덕지라도 생길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2014년 5월 8일                (2016년 송화강 7기에 발표함)
372    (펌글) 김소월 시혼(詩魂) 댓글:  조회:7206  추천:1  2014-06-09
                                                        시혼(詩魂)                                                           김소월                                                                                                       1.     적어도 평범(平凡)한 가운데서는 물(物)의 정체(正體)를 보지 못하며, 습관적(習慣的) 행위(行爲)에서는 진리(眞理)를 보다 더 발견(發見)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어질다고 하는 우리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밤에 깨여서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 우리는 낮에 보지 못하던 아름답움을, 그곳에서,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파릇한 별들은 오히려 깨어 있어서 애처롭게도 기운있게도 몸을 떨며 영원(永遠)을 속삭입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저가는 오묘한 달빛이, 애틋한 한 조각, 숭엄 (崇嚴)한 채운(彩雲)의 다정(多情)한 치마귀를 빌려, 그의 가련(可憐)한 한두 줄기 눈물을 문지르기도 합니다. 여보십시오, 여러분. 이런 것들은 적은 일이나마, 우리가 대낮에 는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던 것들입니다.     다시 한 번, 도회(都會)의 밝음과 짓거림이 그의 문명(文明)으로써 광휘(光輝)와 세력(勢力)을 다투며 자랑할 때에도, 저, 깊고 어두운 산(山)과 숲의 그늘진 곳에서는 외로운 버러지 한 마리가, 그 무슨 슬픔에 겨웠는지, 쉬임 없이 울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버러지 한 마리가 오히려 더 많이 우리 사람의 정조(情操)답지 않으며, 난 들에 말라 벌바람에 여위는 갈대 하나가 오히려 아직도 더 가까운, 우리 사람의 무상(無常)과 변전(變轉)을 설워하여 주는 살틀한 노래의 동무가 아니며, 저 넓고 아득한 난바다의 뛰노는 물결들이 오히려 더 좋은, 우리 사람의 자유(自由)를 사랑 한다는 계시(啓示)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고인(故人)은 꿈에서 만나고, 높고 맑은 행적(行蹟)의 거룩한 첫 한방울의 기도(企圖)의 이슬도 이른 아침 잠자리 위에서 듣습니다.     우리는 적막(寂寞)한 가운데서 더욱 사무쳐 오는 환희(歡喜)를 경험(經驗)하는 것이며, 고독(孤獨)의 안에서 더욱 보드라운 동정(同情)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다시 한번, 슬픔가운데서야 보다 더 거룩한 선행(善行)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며, 어두움의 거울에 비치어 와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보이며, 살음을 좀 더 멀리한 죽음에 가까운 산(山)마루에 서서야 비로소 살음의 아름다운 빨래한 옷이 생명(生命)의 봄두던에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나 맘으로는 일상(日常)에 보지도 못하며 느끼지도 못하던 것을, 또는 그들로는 볼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밝음을 지워버린 어두움의 골방 에서며, 살음에서는 좀 더 돌아앉은 죽음의 새벽빛을 받는 바라지 위에서야, 비로소 보기도 하며 느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分明)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보다도 맘보다도 더욱 우리에게 각자(各自)의 그림자같이 가깝고 각자(各自)에게 있는 그림자같이 반듯한 각자(各自)의 영혼(靈魂)이 있습니다. 가장 높이 느낄 수도 있고 가장 높이 깨달을 수도 있는 힘, 또는 가장 강(强)하게 진 동(振動)이 맑지게 울리어 오는, 반향(反響)과 공명(共鳴)을 항상(恒常) 잊어 버리지 않는 악기(樂器), 이는 곧, 모든 물건이 가장 가까이 비치어 들어옴을 받는 거울, 그것들이 모두 다 우리 각자(各自)의 영혼(靈魂)의 표상(標像)이라면 표상(標像)일 것입니다.                                                           2.          그러한 우리의 영혼(靈魂)이 우리의 가장 이상적(理想的) 미(美)의 옷을 입고, 완전(完全)한 음률(音律)의 발걸음으로 미묘(微妙)한 절조(節操)의 풍경(風景) 많은 길 위를, 정조(情調)의 불붙는 산(山)마루로 향(向)하여, 혹(或)은 말의 아름다운 샘물에 심상(心想)의 작은 배를 젓기도 하며, 이끼 돋은 관습(慣習)의 기험(崎驗)한 돌무더기 새로 추억(追憶)의 수레를 몰기도 하여, 혹(惑)은 동구(洞口) 양류(陽柳)에 춘광(春光)은 아리땁고 십이곡방(十李曲坊)에 풍류(風流)는 번화(繁華)하면 풍표만점(風飄萬點)이 산란(散亂)한 벽도화(碧桃花) 꽃잎만 저흩는 우물 속에 즉흥(卽興)의 두레박을 드놓기도 할 때에는, 이 곧, 이르는 바 시혼(詩魂)으로 그 순간(瞬間)에 우리에게 현현(顯現)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시혼(詩魂)은 물론(勿論) 경우(境遇)에 따라 대소심천(大小深淺)을 자재변환(自在變換)하는 것도 아닌 동시(同時)에,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한 존재(存在)입니다.     어디까지 불완전(不完全)한 대로 사람의 있는 말의 정(精)을 다하여 할진대는, 영혼(靈魂)은 산(山)과 유사(類似)하다면 할 수도 있습니다. 가람과 유사(類似)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초하루 보름 그믐 하늘에 떠오르는 달과도 유사(類似)하다면, 별과도 유사(類似)하다면, 더욱 유사(類似)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山)보다도 가람보다도, 달 또는 별보다도, 다시금 그들은 어떤 때에는 반드시 한번은 없어도 질 것이며 지금도 역시(亦是)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적어도 변환(變換)되려고 하며 있지마는, 영혼(靈魂)은 절대(絶對)로 완전(完全)한 영원(永遠)의 존재(存在)며 불변(不變)의 성형(成形)입니다. 예술(藝術)로 표현(表現)된 영혼(靈魂)은 그 자신(自身)의 예술(藝術)에서, 사업(事業)과 행적(行蹟)으로 표현(表現)된 영혼(靈魂)은 그 자신(自身)의 사업(事業)과 행적(行蹟)에서, 그의 첫 형체(形體)대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혼(詩魂)도 산(山)과도 같으면은 가람과도 같으며, 달 또는 별과도 같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시혼(詩魂) 역시(亦是) 본체(本體)는 영혼(靈魂) 그것이기 때문에, 그들보다도 오히려 그는 영원(永遠)의 존재(存在)며 불변(不變)의 성형(成形)일 것은 물론(勿論)입니다.     그러면 시작품(詩作品)에는, 그 우열(優劣) 또는 이동(異同)에 따라,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일지라도 혹(或)은 변환(變換)한 것 같이 보일는지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결(結)코 그렇지 못할 것이, 적어도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은 시혼(詩魂) 자신(自身)이 변(變)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산(山)과 물과, 혹은 달과 별이 편각(片刻)에 그 형체(形體)가 변(變)하지 않음과 마치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작품(作品)에는, 그 시상(詩想)의 범위(範圍), 리듬의 변화(變化), 또는 그 정조(情調)의 명암(明暗)에 따라, 비록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이라고는 할지라도, 물론(勿論) 이동(異同)은 생기며, 또는 읽는 사람에게는 시작(詩作) 각개(各個)의 인상(印象)을 주기도 하며, 시작(詩作) 자신(自身)도 역시(亦是) 어디까지든지 엄연(儼然)한 각개(各個)로 존립(存立)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산색(山色)과 수면(水面)과, 월광성휘(月光星輝)가 모두 다 어떤 한 때의 음영(陰影)에 따라, 그 형상(形狀)을, 보는 사람에게는 달리 보이도록 함과 같습니다. 물론(勿論) 그 한때 한때의 광경(光景)만은 역시(亦是) 혼동(混同)할 수 없는 각개(各個)의 광경(光景)으로 존립(存立)하는 것도, 시작(詩作)의 그것과 바로 같습니다.     그렇다고, 산색(山色) 또는 수면(水面), 혹은 월광성휘(月光星輝)가 한때의 음영(陰影)에 따라, 때때로, 그것을 완상(翫賞)하는 사람의 눈에 달리 보인다고, 그 산수성월(山水星月)은 산수성월(山水星月) 자신(自身)의 형체(形體)가 변환(變換)된 것이라고는 결(決)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작(詩作)에도 역시(亦是) 시혼(詩魂) 자신(自身)의 변환(變換)으로 말미암아 시작(詩作)에 이동(異同)이 생기며 우열(優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時代)며 그 사회(社會)와 또는 당시(當時) 정경(情境)의 여하(如何)에 의(依)하여 작자(作者)의 심령(心靈) 상(上)에 무시(無時)로 나타나는 음영(陰影)의 현상(現象)이 변환(變換)되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울에 눈이 왔다고 산(山) 자신(自身)이 희여졌다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초생이라고 초생달은 달 자신(自身)이 구상(鉤狀)이라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구름이 덮힌다고 별 자신(自身)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모래바닥 강(江)물에 달빛이 비친다고 혹(或)은 햇볕이 그늘진다고 그 강(江)물이 『얕아졌다.』或은『깊어졌다.』고 할 사람이야 어디 있겠습니까.                                                                  3     여러분. 늦은 봄 삼월 밤, 들에는 물 기운 피여 오르고, 동산의 잔디밭에 물구슬 맺힐 때, 실실히 늘어진 버드나무 옅은 잎새 속에서, 옥반(玉盤)에 금주(金珠)를 구울리는 듯, 높게, 낮게, 또는 번(煩)그러히, 또는 삼가는 듯이, 울지는 꾀꼬리 소리를, 소반같이 둥근 달이 등잔(燈盞)같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망연(茫然)히 서서, 귀를 기울인 적이 없으십니까. 사방(四方)을 두루 살펴도 그 때에는 그늘진 곳조차 어슴푸레하게, 그러나 곳곳이 이상(異常)히도 빛나는 밝음이 살아있는 것 같으며, 청랑(淸朗)한 꾀꼬리 소리에, 호젓한 달빛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그 곳에 음영(陰影)이 없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호젓이 비치는 달밤의 달빛 아래에는 역시(亦是) 그에뿐 고유(固有)한 음영(陰影)이 있는 것입니다. 지나(支那) 당대(唐代)의 소자담(蘇子膽)의 구(句)에『적수공명 積水空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이러한 밤, 이러한 광경(光景)의 음영(陰影)을 띠내인 것입니다. 달밤에는, 달밤에뿐 고유(固有)한 음영(陰影)이 있고, 청려(淸麗)한 꾀꼬리의 노래에는, 역시(亦是) 그에뿐 상당(相當)한 음영(陰影)이 있는 것입니다.       음영(陰影) 없는 물체(物體)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존재(存在)에는 반드시 음영(陰影)이 따른다고 합니다. 다만 같은 물체(物體)일지라도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의 여하(如何)에 의(依)하여, 그 음영(陰影)에 광도(光度)의 강약(强弱)만은 있을 것입니다. 곧, 음영(陰影)에 그 심천(深淺)은 있을지라도, 음영(陰影)이 없기도 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시인(英詩人), 아더·시몬느의 (영문 략) 라는 시 (詩)도 역시(亦是) 이러한 밤의, 이러한 광경(光景)의 음영(陰影)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시혼(詩魂)은 본래(本來)가 영혼(靈魂) 그것인 동시(同時)에 자체(自體)의 변환(變換)은 절대(絶對)로 없는 것이며,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에서 창조(創造)되어 나오는 시작(詩作)에 우열(優劣)이 있어도 그 우열(優劣)은, 시혼(詩魂) 자체(自體)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음영(陰影)의 변환(變換)에 있는 것이며, 또는 그 음영(陰影)을 보는 완상자(翫賞者) 각자(各自)의 정당(正當)한 심미적(審美的) 안목(眼目)에서 판별(判別)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탁독산(童濯禿山)의 음영(陰影)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가지 뻗어 트러지고 청계수(淸溪水) 맑은 물이 구비져 흐르는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산(山)의 음영(陰影)보다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핍((乏)할 것이며, 또는 개이지도 않으며는, 비도 내리지 아니하는 흐릿하고 답답(沓沓)한 날의 음영(陰影)은 뇌성전광(雷聲電光)이 금시(今時)에 번갈아 일으며 대줄기 같은 빗발이 붓듯이 내려 쏟히는 취우(驟雨)의 여름 날의 음영(陰影)보다 우리에게 쾌감(快感)이 적을 것이며, 따라서 살음에 대(對)한 미적(美的) 가치(價値)도 적은 날일 것입니다.     그러면 시작(詩作)의 가치(價値) 여하(如何)는 적어도 시작(詩作)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가치(價値) 여하(如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陰影)의 가치(價値) 여하(如何)를 식별(識別)하기는, 곧, 시작(詩作)을 비평(批評)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나의 애모(愛慕)하는 사장(師匠), 김억(金億) 씨(氏)가 졸작(掘作)『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내 가슴에 저저 있어요. 긴 날을 문(門)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히도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孤寂)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말아요." 를 평(評)하심에, "너무도 맑아, 밑까지 들여다 보이는 강(江)물과 같은 시(詩)다. 그 시혼(詩魂) 자체(自體)가 너무 얕다."고 하시고, 다시 졸작(掘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한 사람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歲月)을 쓸 데 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였겠습니까! 오늘날은 또 다시 당신의 가슴 속, 속 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 허수한 맘, 둘 데 없는 심사(心事)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를 평(評)하심에, "시혼(詩魂)과 시상(詩想)과 리듬이 보조(步調)를 가즉히 하여 걸어 나아가는 아름답은 시(詩)다."고 하셨다. 여기에 대(對)하야, 나는 첫째로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 자체(自體)가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에서 금시(今時)에 얕아졌다 깊어졌다 할 수 없다는 것과, 또는 시작(詩作)마다 새로이 별(別)다른 시혼(詩魂)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분명(分明)히 하기 위(爲)하야, 누구의 것보다도 자신(自身)이 제일 잘 알 수 있는 자기(自己)의 시작(詩作)에 대(對)한, 씨(氏)의 비평(批評) 일절(一節)을 일년(一年) 세월(歲月)이 지난 지금에 비로소, 다시 끌어 내여다 쓰는 것이며, 둘째로는 두 개(個)의 졸작(掘作)이 모두 다, 그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점(點)에 있었어도, 역시(亦是) 각개(各個) 특유(特有)의 미(美)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 함입니다.     여러분. 위에도 썼거니와, 달밤의 꾀꼬리 소리에도 물소리에도 한결같이 그에 특유(特有)한 음영(陰影)은 대낮의 밝음보다도 야반(夜半)의 어두움보다도 더한 밝음 또는 어두움으로 또는 어스름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을의 새어가는 새벽, 별빛도 희미(稀微)하고, 헐벗은 나무 찬비에 처진 가지조차 어슴푸레한데, 길 넘는 풀 숲에서, 가늘게 들려와서는 사람의 구슬픈 심사 (心事)를 자아내기도 하고 외롭게 또는 하염없이 흐느껴 숨어서는 이름조차 잊어 버린 눈물이 수신절부(守臣節婦)의 열두 마디 간장(肝腸)을 끊어 도지게 하는, 실솔 (귀뚜라미)의 울음을 들어보신 적은 없습니까. 물론(勿論) 그곳에 나타난 음영(陰影)이 봄날의 청명(淸明)한 달밤의 그것보다도 물소리 또는 꾀꼬리 소리의 그것 들보다도 더 짙고 완연(完然)한, 얼른 보아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인 것만은 사실 (事實)입니다.     그러나 나는 봄의 달밤에 듣는 꾀꼬리의 노래 또는 물노래에서나, 가을의 서리 찬 새벽 울지는 실솔의 울음에서나, 비록 완상(翫賞)하는 사람에조차 그 소호(所好)는 다를런지 몰라, 모다 그의 특유(特有)한 음영(陰影)의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있어서는 결(決)코 우열(優劣)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시 한 번(番), 시혼(詩魂)은 직접(直接) 시작(詩作)에 이식(移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영(陰影)으로써 현현(顯現)된다는 것과, 또는 현현(顯現)된 음영(陰影)의 가치(價値)에 대(對)한 우열(優劣)은, 적어도 기(其) 현현(顯現)된 정도(程度) 급(及) 태도(態度) 여하(如何)와 형상(形狀) 여하(如何)에 따라 창조(創造)되는 각자(各自) 특유(特有)한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의(依)하야 판정(判定)할 것임을 말하고, 이제는, 이 부끄러울 만큼이나 조그만 논문(論文)은 이로써 끝을 짓기로 합니다.                      - 개벽(開闢) 1925년 5월號
371    (시조) 본대로 느낀대로 (61-100수) 댓글:  조회:4908  추천:1  2014-06-06
                                               1.  웃물이 흐렸는데 아랫물이 맑을손가                                                         우아래 따로없이 부정축재 기승이니                                                             털어서 먼지 안날이 없다하매 풍조인가                                                   2. 반부패 철추내려 호랑이도 우왕좌왕                                                        도망길 찾는때에 파리떼도 야단났네                                                            민심은 절치부심해 천라지망 펼치오라                                                  3. 인심은 변덕많아 4월날씨 같더라도                                                        인정은 오뉴월에 양광이면 좋으련만                                                            리욕에 긴가민가라 무상함을 어쩌리요                                                  4. 고봉에 올라서서 아래사람 굽어보니                                                         미미한 한점같아 높은곳이 좋았는데                                                             내려와 올려다보니 거기서 거기더라                                                  5. 록수는 흘러가도 청산속을 못잊듯이                                                        싫어서 떠났건만 못잊을것 고향이네                                                            사람은 버리고나서 귀중함을 아는가                                                   6. 높은산 우러러도 낮은데서 쳐다보며                                                         계곡의 굽이굽이 풍경 또한 별유천지                                                             인생에 높고낮음도 이같지를 아니하오                                                    7. 지자는 심려하고 의로운자 행하니라                                                          어진자 박애하고 악한자는 악행하니                                                              초로의 인생인것을 저주맞아 쓰것느냐                                                    8. 사랑이 식어지면 미움이 곧 시작되니                                                          영원한 맹세라고 일월성신 걸지마라                                                              각별한 사랑이라도 미워지면 미움뿐이                                                    9. 꽃나무 뿌리있어 다시피면 꽃이관듸                                                          녀자는 无根花라 스러지면 그뿐일다                                                              꽃인생 로류장화로 늙어지면 어찌할고                                                  10. 착하다 칭찬하면 반갑지를 아니하고                                                           성실이 곳곳에서 코깨지는 세상이라                                                               챙김에 악바리라야 제구실에 잘한다네                                                  1. 시경에 니르기를 말한사람 죄가없고                                                           듣는이 삼가하라 하던말씀 정설인가                                                               무심히 내던진말도 멸문지화 되였으니                                                     2. 꾸민말 꽃과 같고 참된말 열매같고                                                           바른말 약과 같고 감언리설 질병같다                                                               성현들 하신 말씀을 좌표삼고 살아가세                                                     3. 몰라서 득이되고 알아서 병이되고                                                           잊어서 마음편코 잊지못해 속쓰리고                                                               세상사 번거로워서 고달픈 삶 되고지고                                                     4. 도끼로 나무찍고 그 나무 자루되고                                                           쇠덩이 마치되고 마치로 쇠벼리네                                                               륜환은 섭리이거늘 백년가지 하여이다                                                     5. 자식들 봉황되고 룡이되길 바랬어도                                                            방아간 스쳐지난 참새될수 있더란다                                                                무식한 자식들속에 천하효자 나는것을                                                     6. 지는꽃 무심한데 대옥이는 유정하고                                                           류수는 뜻있는데 보옥이는 무정하네                                                               만물은 볼탓에 따라 느낌마저 각각이라                                                     7. 복받은 지성인은 세상에 많지 않고                                                           득세한 시정배는 천추에 많더라네                                                               자고로 세상만사는 얼룩덜룩 그런기라                                                     8. 가져야 가진건가 넘쳐나야 남는건가                                                           베풀어 내주는게 가진겐줄 모르나니                                                               세상이 시끌한것이 이들때문 아니리오                                                     9. 일컬어 쌀독에서 인심난다 하였는데                                                           지금은 넘쳐나도 인정사정 바닥나네                                                               배곯고 살던 그때는 인심하난 좋았는데                                                   10. 자고로 늙어지면 물러남이 례였건만                                                           지금은 앉은석동 연연하여 기승일세                                                               권세란 무엇이길래 진할줄을 모르난가                                                      1. 강산도 변하건만 사랑만은 늙지않네                                                           고대의 미인이나 신사숙녀 류행아씨                                                              사랑가 부르는데는 중외고금 따로없네                                                    2. 리별의 역전이냐 상봉의 출찰구냐                                                           환희의 신호이냐 눈물의 기적이냐                                                               인생에 悲欢离合은 두갈래 레루로다                                                    3. 도시엔 얼굴있고 향촌엔 정이있고                                                          도시엔 가면구요 시골엔 민낯인데                                                              작금엔 도시나 향촌 덞어가서 같고같네                                                     4. 화내면 즉시바로 그 속심이 드러나고                                                           웃으며 대하는자 그 속심을 모를레라                                                               처세에 첫승부수는 이에서 곧 갈리거늘                                                                                 5. 로구에 병이들면 백약이 무효인데                                                           볶은콩 주어먹듯 령약을 장복하며                                                               얼러덩 죽어야 하지 하는말씀 유머여라                                                     6. 밀물이 있으매로 썰물이 있는듯이                                                           달이차면 기울기요 寒来署往 섭리같이                                                               어즈버 비환리합에 울고웃는 인생마당                                                     7. 속상한 마음으로 지난날을 생각말고                                                            불안한 마음으로 앞날두고 공상말고                                                                순응의 마음가지고 오늘을 살펴가소                                                                               8. 너렁청 넓은방도 흉금에는 못비기리                                                           대궐이 대수인가 인생길에 주막인데                                                               육신이 편안함보다 마음편해 더좋으리                                                     9. 증명서 잡다히니 묶인인생 아니던가                                                           출생증 호구부에 졸업증에 신분증에                                                               자신을 증명하는것 이뿐이면 비애로다                                                 10. 남더러 어찌이리 대하냐고 탓을말고                                                         그리된 대접받는 자기부터 돌아보소                                                            대소사 인생일사가 남들탓이 아니거늘                                                                                                                                                            
370    친구의 결혼, 환갑연축사 댓글:  조회:8365  추천:1  2014-06-01
                                    친구의 결혼축사                                             진 언       존경하는 귀빈여러분!     친애하는 친척, 친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께서 백망중에도 저의 친구의 결혼식에 왕림하시여 자리를 빛내주신데 대해 더없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운 딸이 어느덧 다 커서 오늘 자기의 행복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였으니 딸을 보내는 애절한 마음을 사위를 삼는 기쁨으로 보듬으며 일희일비하실 아버님, 어머님께 충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올림니다.     오늘은 저의 절친한 친구에게 경사로운 날이지만 시집가는 친구에게 당부의 말로 결혼축사를 대신하려 합니다. 크게 년장자는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몇걸음 앞서 답사한 경험자로서 제가 당부하려는 말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결혼이란 1+1=2가 아니라0.5+0.5=1 이라는것입니다. 남편과 안해는 모두 자기의 개성의 절반을 버리고 타협과 관용을 준비해야 합니다. 결혼은 두몸이 하나로 된다기보다 하나의 방향을 따라 한길로 나가기 위한 승낙이기때문입니다.       진정한 련애는 기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음부터 시작됩니다. 시작되는 일체는 사랑의 서막이며 풍부하고 정채로운 내용은 이후의 장절이 되는것입니다. 격정의 충돌에 쏠리든 사소한 쟁의가 따른 화해이든 모두가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결혼이란 굳어진 기념비가 아니라 흐르는 강물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서로의 지난일을 돌이킬 때 자기를 부인할 필요도 없고 더우기 사랑하는 사람의 한단락의 생활속에 숨겨진 비밀적인 사연을 부인하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입니다, 그것이 졸졸 흐르는 지류이든 물보라와 같은것이든간에 말입니다.     우리 현대청년들은 왕왕 대방의 뛰여난 점에 매료되는데 랑만시가 끝나 산문시같은 결혼생활에 들어서서는 그 예기가 대방을 상하게 할수 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집문턱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그 예기를 거두고 대방의 뾰족한 점을 용인할 아량을 챙기는것이 바로 남남끼리 얽힌 정이 만고장청할 비결입니다.    둘째는 사랑하기에 결합된 소가정은 물이 못새는 도자기꽃병이 아니라 꽃바구니로 되여야 할것입니다. 즉 관용이란 틈서리가 충분히 마련되여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혼은 했지만 이왕의 이런저런 사회교제는 단절될수 없기에 부부호상간에 애매몽롱한 일들이 수시로 생길수도 있다는것을 심적으로 챙겨둬야 할것입니다.     마음을 대번에 다 털어낸다면 빈창고처럼 될것입니다. 무언가 보류해두는것이 오히려 더 신비감과 흡인력을 갖게 할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충성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음을 선행시켜야지 그냥 사랑을 확인하는것을 선행시키지 말라는것입니다. 결혼은 점유가 아니라 결합, 아니 융합입니다. 설사 결합이라해도 그것은 혈맹같과 같은것으로서 우선 대방을 존중하는것이 사랑의 초석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귀뜸하고싶은것은 가정이란 시비를 가르고 도리를 따지는 곳이 아니라는것입니다. 가정이란 사랑학교로서 서로 강의를 받는 학생으로 자처하고 몸을 낮추는것이 최선입니다. 자고로 남자는 흙이고 녀자는 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개성이 강한 내친구가 남편을 흙보살을 빚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한다는것이 그만 저도모르게 애정학강의가 되였군요. 진지하고 참된사랑이 행복한 가정의 기둥이 된다는것을 명기시키느라고 별러서 하는 말이라 길어졌습니다. 긴긴 축복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끝으로 이 친구는 충심으로 신랑신부가 깨알이 쏟아지는 미만한 결혼생활을 가꾸면서 백년해로하기를 미리 축원하는바이다, 두분!백년을 하루같이 행복하세요.     존경하는 귀빈여러분! 친애하는 친척,친구여러분!      겸하여 여러 어르신들도 가정이 화목하고 신체가 건강하시며 하시는 일들이 순리 로워서 일취월장하시기를 삼가 옷깃여미고 축원,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20××년 ×월 ××일                                                                                                                                                                     화갑연축수         귀빈여러분, 친척친우, 동창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님의 80탄신축수연과 ×××녀사의 고희축수연이 베풀어진 이 기쁜 날에 ×××녀사의 동창의 신분으로 삼가 축수를 올리고자 합니다.     두보의《곡강》이라는 시에 “酒債寻常行处有,人生七十古来稀)술빚이야 가는곳마다 흔히 있지만 인생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옛날엔 70세가 인생의 막바지였던가 봅니다. 그런데 60이 청춘이라는 말도 무색해지고 지금은 90이 환갑이라는 좋은 세월에 살게 되였으니 참으로 5복을 다 누리고 있다고 할것입니다. 신로심불로라 청산을 두루 밟았어도 세월은 늙지않는다고 했지요.     보통70 이 넘으면 새 친구가 거의 생기지 않고 옛친구들도 차차 멀어진다고 했는데 ×××님과 ×녀사님은 워낙 인품좋고 덕망이 높아서 귀빈들과 친구들, 옛동창들이 이 넓은 대청에 가득히 모여 인정의 꽃을 피우니 삶의 향기란 이런것이겠지요.      로년엔 표정도 담담해진다 하는데 오늘 두분은 고목봉춘이라 저리도 강건하시고 만면춘풍이니 얼마나 보기좋습니까? 인제는 인생 100세의 시대가 되였습니다. 인생의 저문언덕에서 걸어오신길 돌아보니 감구지회가 깊을것입니다. 인생길은 풍상고초로 시작되여 희로애락으로 닦아진다고 했으니 일구난설일것입니다.     다사다난했던 세월, 굽이굽이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 헤치며 삶의 터전을 열심히 가꾸신 두분은 자식들도 잘 키워내여 부모된 의무도 완성했으니 인생에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이 있겠습니까? 힘들고 고달팠지만 쉴생각도 못하고 생명의 횃불 높이추켜들고 고래희고개에 올랐으니 인제 마음의 빚도 벗어놓고 불타는 석양처럼 여생을 더 찐하게 물들이기를 바람니다. 서두르지 말라, 그러나 쉬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년장수를 념원하는 재미있는 유모아가 있습니다.      60세 회갑(回甲)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지금 안계신다고 여쭈어라.      70세 고희(古稀)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아직 이르다고 여쭈어라.      77세 희수(喜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지금 로년락을 즐긴다 여쭈어라.      80세 산수(傘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아직 쓸모 있다고 여쭈어라.      88세 미수(米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쌀밥을 더 먹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90세 졸수(卒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그리 서둘지 않아도 된다고 여쭈어라.      99세 백수(白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때를 보아 저절로 가겠다고 여쭈어라.     108세 다수(茶寿)에 하나님이 부르시거든 차한잔 하고 가겠다고 여쭈어라.     옛글에 인명재천이라 하였으나 인생백세가 욕심만이 아닌 이 시대입니다. 짧은 인생에 긴것은 예술만이 아닙니다. 백세인생보다 더 긴것이 있었으니 그것을 천년시름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시름 훌훌 털어버리시고 오늘처럼 이렇게 강건하고 만복을 누리는 모습으로 생명의 터밭에 로년의 꽃을 오래오래 꽃피우기를 바랍니다.     산이 부르면 산으로 가시고 강물이 손짓하면 강으로 가시고 하고싶은 취미생활을 슬카장 즐기십시오. 인생에 유감이야 없으리만 소중하고 미더운 반려와 손을 꼭잡고 서로 보듬으며 인생의 의미를 담론면서 여생을 즐기시기를 길이 축원합니다.     귀빈여러분,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교수님과 ×녀사는 로년의 꽃을 참 곱게도 피워가고 있습니다. 두분의 백년장수를 축원하면서 마음의 큰 술잔에 축수를 가득 채우고 우리의 장생불로도 기약하며 건배합시다!!     감사합니다.                                                                                               20××년 ×월 ××일  
369    (잡감록 96 ) 말도 때론 뒀다해야… 댓글:  조회:5381  추천:0  2014-05-27
                                                     말도 때론 뒀다해야…                                                                  진 언        말하라고 생긴 입을 가진 사람치고 언어장애자를 내놓고 말을 토해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행을 일러 “말한다”고 하지만 말하는 내용이나 의미적색채에서 똑같은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말하다에도 참말을 하다. 실말을 하다. 속심말을 하다. 쓸데없는 말을 하다 등이 있는데 참말을 하다는 “언어상품”중에서 희귀품이라 할수 있다. 비유하건대 장밤을 울어싸는 개구리의 울음같은 말은 쓸모없는 말이고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홰치는 소리같은 말은 유용한 말이라 할수 있다.    “로잔유기(老残游记)” 에서 황인서(黄人瑞)가 “무릇 사람의 배속에 말이 나오는 곳이 두곳이 있는데 하나는 단전(丹田)아래에서 나오는 말은 자기 말이고 목구멍아래에서 나오는 말은 응수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무심결에 말이 나가기는 쉬워도 작심하고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서 나온 말이든 말을 청산류수처럼 잘하면 달변이라 하는데 달변이라 해서 언제, 어디서나 달변가일수는 없다.     살다보면 어떤 말을 할수도 있고 할수 없기도 하고 능히 말할수 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거나 말할줄 알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는데는 그럴만한 사정과 원인이 있을것은 당연하다. 원래는 무슨말을 하고싶으면 무슨말을 하고 어떻게 말하고싶으면 어떻게 말하는것이 정상적인 말이고 정상인이 할수 있는 말이건만 하고싶은 말을 다 털어내면 속이 통쾌할수 있으나 매양 그런것만도 아니기에 “세치혀끝을 주의하라”고 옛날부터 어른들이 일러왔던것이 아니랴,     중국작가 가운로(柯云路)가 사람은 살면서 세가지 말을 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여러사람앞에서 하는 말로서 진속일수도 있고 거짓말일수도 있는데 혹시 명인이 되여지면 텔레비화면에 나타나 말하거나 신문에 낼수도 있다. 둘째는 사사로히 하는 말로서 역시 진담일수도 있고 헛소리일수도 있다. 성이나서 하는 말은 듣는 사람의 귀를 자극하나 바람처럼 곧 사라진다. 셋째는 마음속에 말로서 어떤 말은 그냥 배속에 숨겨두고 발설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래서 관속에 들어갈때까지 막말은 하지 말라는 고훈이 남겨진것이다. 남이 나에게 막말을 하면 어찌할려고,     아이때는 말을 많이 하면 말도 잘한다고 칭찬받았지만 성숙된 어른으로 말하면 다사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으면 좋을것없다. 말을 하면서 좀더 생각하고 내가 다치지않기 위해서 말을 아끼는게 아니라 서로가 다치지않기 위해서 말을 하기전에 잠간 생각한 다음 내뱉든지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 칼날을 내쪽으로 해서 상대방에게 건내주듯 건네는 말에 어페가 없도록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성숙된 사람이다.     이소프가 노예질을 할 때, 주인은 혀바닥연회를 베풀었는데 가장 맛있는 료리가 각종 동물들의 혀로 만든것이고 가장 나쁜 료리도 각종 동물들의 혀로 만든것이였다. 이로써 혀는 가장 좋기도 하고 가장 나쁘기도 하다는것을 비유하였다. 물론 생각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지만 무엇을 말할것인가? 어떻게 말할것인가? 지금 당장 말을 할것인가 아니면 아꼈다가 할것인가? 등등 어경에 주의해야 하는데 특히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중요할 때가 있는 인간세상이다.     개체인간의 망언은 듣는 사람들에 국한되지만 공공언론은 전파매체를 타고 곧장 온 세계에 퍼진다. 이런 망언은 국제적인 분규까지 초래할수 있어 그 책임이 막중하다. 허망한 억측을 내놓고 정설인양하던 호들갑들은 보통 제무안같은것을 모르며 자괴감에는 얼굴이 소가죽이다. 요즘 어떤 대변인이 앞뒤가 꽉 막히게 망언하고 곤욕을 치르던데 망발이란 그렇게 뒤감당이 어려운것이다.                                                           2014년 5월 17일
368    (펌글) 妄语感言 댓글:  조회:10246  추천:0  2014-05-23
(펌글)  1.                             妄语感言                                                             北京 秦泽忠)   妄语: “中国城市污染不是汽车造成的,而是自行车造成的。自行车的污染比汽车更大!”ㅡㅡ“国家畅通工程”专家组组长,东南大学交通学院院长王炜。 感言; (略) 妄语:“腐败和贿赂是权力和利益转移及再分配的一个可行的途径和桥梁,是改革过程 得以顺利进行的润滑剂,在这方面的花费,实际上是走向市场经济的买路钱,构成成本费。” 感言:(略) 妄语:“没有那么多坏账,哪来那么多富人” ㅡㅡ原中行副行长吴晓灵。 感言:(略) 妄语:“老百姓的住房观念有待改变,现在很多人买不起房就埋怨政府和开发商,是不对的。”ㅡㅡ全国政协委员茅永红。 感言:(略) 妄语:“我觉得80后男孩如果买不起房,80后女孩可嫁给40岁男人,80后男人如果有条件,到40岁再娶20岁女孩也是不错的选择。”ㅡㅡ全国政协委员梁蓓。 感言:(略) 妄语:“医改如果成功了,是全国人民的悲剧!”ㅡㅡ全国政协委员梁蓓。宗立成。 感言:(略) (출처: 《잡문보》2014년 5월 16일 제 5면에서   (펌글) 2. 妄语 秦泽忠)   “对于公费出国旅游,我认为很难轻易就说它完全符合贪污罪,现在这种公费旅游、公款吃喝的现象太普遍了,如果都简单地往贪污上靠,贪污罪的发案率得有多高啊?”——北京京都律师事务所主任、北京市首届“十佳律师”田文昌。 感言:杀人、放火、抢劫、偷盗、流氓、诈骗……所以入罪,盖因行此类恶者还不够多,没有形成普遍现象,待何时像公费旅游、公款吃喝(甚至赌博、嫖娼)那般“太普遍了”,也就很难轻易说它完全符合罪名了。否则,“如果都简单地”往罪名上靠,那“发案率得有多高啊”?发案率高终归不是什么好事,所以,为了降低发案率,就需怂恿众人去杀人、放火、抢劫、偷盗、耍流氓、诈骗——北京市首届“十佳律师”,田先生出语不凡! 妄语:“‘红包’也可看作作医患感情交流的一种方式,这种可利于医患关系和谐发展的良性互动应被社会认可。”——全国政协委员、山西医科大学教授、副校长吴博威。 感言:后辈儿孙中倘有立志于悬壶济世投身医学者,我必支特,但绝不允许其报考吴委员任副校长的山西医科大学——学得到学不到仁术尚不可知,却恐其被教唆得丧失仁心! 应该请精神病专家为这位医科大学教授会诊一番了,看其是否有患上阳热亢盛心神昏乱的癫狂病的可能——《素问·厥论》中讲:此病的常见症状之一,便是“妄见而妄言”。 妄语:“中国虽然存在贫富悬殊、医疗昂贵、就业困难等问题,但这些都是次要的。几十个国家留学生在北大、清华、复旦等各大高校留学,这与盛唐当时情况极相似。而且中国政治局势空前稳定!”——复旦大学金融与资本市场研究中心主任、教授谢百三。     感言:教授先生一席话,令愚茅塞顿开——方知吾国“政治”的着眼点不在于改善民生,而是为吸引洋人。至于贫富悬殊、医疗昂贵、就业困难、百姓死活,不过“都是次要的”。只要洋人赏脸前来留学,便是“中国政治局势空前稳定”的标志。 长见识了!——难怪“政治挂帅”了几十年,住房、医疗、教育等等至今依然如山压得老百姓喘不过气来呢! 妄语:“我们不能提高劳动者的工资,低工资是我们的优势,否则,外国投资都跑到越南等工资比我们低的地方去了。”——中国社会科学院研究生院教授李剑阁。 感言:按李教授的思路延伸下去,如果1分钱的工资都不给劳动者,让他们给外国投资者白干,“我们的优势”岂不体现得更加淋漓尽致?如是,何愁全世界的投资者不蜂拥而至统统跑到我们中华人民共和国来?但是,吸引外国投资的目的,就是为了让劳动者像亡国奴那样任外国资本家奴役剥削给其当牛做马吗? 妄语:“在休息与休闲时间方面,中国人已经处于国际领先水平。在闲暇时间保有量方面,已经超过了美国和英国。”——中国人民大学商学院博士魏翔。 感言:全国政协委员、华南理工大学工商管理学院教授沙振权调查发现,落实带薪休假比较好的主要集中在党政机关、事业单位、大型国有企业、外资企业,而一些民营企业、中小企业落实起来相对差一点。据此,他在3月初的两会上直言:“我国职工带薪年休假天数与世界平均水平有较大差距,中国老百姓的休息权并没有得到较好的落实,目前老百姓满意度较低的休息权与‘幸福’相去甚远。”(3月8日《羊城晚报》)     沙委员所言,是在经过深入调查的基础上得出的结论。不知魏博士所言,依据的是什么?即使懒得去调查,只要稍微关注一下新闻,也知因长期超负荷劳动透支生命而“过劳死”的现象在我国时有发生。敢问吹嘘“在休息与休闲时间方面,中国人已经处于国际领先水平”的魏博士,那些为了生计长年累月被迫加班得不到适当休息而被累死的清洁工、快递员、农民工等底层劳动者,是不是“中国人”?     哗上几声,本为邀宠取宠。未料因了这“覆隐实”之“异语”,却让世人窥到了一颗龌龊的“不净心”! 牛bb文章网:http://www.niubb.net/article/994157-1/1/   작성자: 리기와 오만과 편견은  량지도 구겨박고 망발도 꺼리지 않게 되는것인가? 사람을 경탄하게 하는 나머지 경악하게 하고있다. 참으로 제노라하는 소위 사회정영들의 인문정신의 절경(绝境)이라 하리라. (보충함) 近年来学界怪论批判 http://view.QQ.com   2006年08月23日15:30   北方网   张绪山   自决心以读书为终生事业以来,我一直对“知识分子代表社会的良心”这个信念深信不疑,并以此为目标,激励自己位卑不忘忧国、劳苦不忘民瘼、追求正义和真理。然而,读了一些史书后,便逐渐产生了怀疑,御用文人和形形色色“刀笔吏”的不绝史书,使我难以释怀于文人的助纣为虐,仔细思量起来,觉得文人作起恶来其实比武夫更为可恨。武夫杀人,明目张胆,以弱肉强食为理所当然,毫不掩饰;而文人作恶,不露声色,仁义道德,冠冕堂皇,阴险毒辣又非武夫可比。揆诸古今历史,使人不能不谓之信然。现今社会已不是帝制时代,文人作孽的方式自然有与从前大不相同,但说假话、帮闲、出卖良心,则古今为一。试看21世纪中国学界不时出现的诸多怪论,则知吾言不谬。 怪论之一:“中国城市环境污染不是由汽车造成的,而是由自行车造成的”。 据说,这是国内某知名大学交通学院院长2003年发布的“重要研究成果”。实际上,只要稍有思维能力,任何人都可以明白这个结论的荒谬。这个命题涉及三个要素:城市环境污染,自行车,汽车;城市环境污染是果,自行车和汽车是因,因此,只要考虑自行车和汽车两个方面所涉及的问题即可明了。 自行车是否造成污染,取决于两个因素:自行车本身是否产生污染?中国大城市中自行车在数量上的增长,是否造成大量排污?汽车是否为污染之源,也取决于两个因素:汽车本身是否产生污染?汽车交通堵塞是否是由汽车数量的增加造成? 就前一个方面而论,答案是很清楚的:自行车并非以燃料为动力,本身不会制造污染;而且,现在的自行车数量虽有增长,但并没有超出既定的自行车道而侵夺汽车道。如果说交通堵塞造成汽车大量排污,是由自行车造成,那么,为何不说交通堵塞是由人口太多造成呢?要知道,人口过多才是中国客观实在的国情。也许,我们那些可爱的研究者们应该再作进一步推论:人口过多是造成城市污染的根本原因,因为人口众多造成了汽车行驶不畅,所以消灭人口是根治城市污染的唯一出路。这样的结论才可称为绝论呢! 就后一个方面论,答案也是很清楚的:汽车以燃料为动力,是制造污染的源头;而且,近些年来随着汽车工业的飞速发展,汽车工业成为国民经济的支柱之一,公共车辆的增多是明显的事实,而发展势头迅猛的私家车——这在污染问题出现前是根本不可想象的事情——的增多,更是不争的事实。公、私车辆的增多所形成的交通堵塞,在目前各城市已达到这样的程度:即使完全没有自行车存在,机动车辆也会形成堵塞现象。因此,结论是很显然的:超限度的机动车辆的存在,才是造成大城市污染的根本原因;根治污染的出路只有一条:限制私人汽车,大力发展公共交通。但在各级政府把私家小汽车的生产和销售作为重要政绩指标,认为私家小汽车增长是人民生活水平提高的情况下,希望限制私家汽车数量无异是痴人说梦。这就是国情。 这项逻辑上狗屁不通的“成果”之所以重要,不仅在于它多么明目张胆地欺人自欺,视全国人民为智力欠缺的“刘阿斗”,也不仅在于它以怎样的形式显示一些所谓学者的所谓“学问”堕落到何等可笑的地步,更在于它反映了当代文人在助纣为虐方面的新特点:很显然,它不再是为专制统治的权力欲所诱惑,希望从统治集团的既得利益中分得一杯羹,而是完全屈从于滚滚物欲,为更加实际的物质利益抽去了灵魂。在物质诱惑中,一部分所谓“学者”(或者更高雅一点,“文化人”)实际上变成了没有脊梁的哈巴狗,只要有人扔给他一根带有些许肉丝的骨头,他就会感恩戴德地服从施主的意志,失去理智判断,不分好歹地狂吠乱咬。显然“城市环境污染是由自行车造成”这样的怪论,即属此类。对于这样荒谬的结论,任何一个稍有逻辑思维能力的人,都会明白其错误所在。它的邪恶在于,它出自被当下社会公众信赖的打着“社会良心”招牌的学者之口,具有极大的欺骗性。“修辞立其诚”,是每一个正派学者处世立命的起码道德底限,准此而言,有些所谓学者的行为实在太离谱了。 怪论之二:从传统文化中借鉴反腐败经验。 “传统文化”是一个模糊概念。客观地讲,“传统文化”包含丰富的内涵,对于“传统文化”的价值和意义,任何人似不宜简单地肯定或否定。但是,“从传统文化中借鉴反腐败经验”这个命题所指向的,似乎不外两个方面的内容,一是诸如“民为重,社稷次之,君为轻”之类的“重民思想”,一是传统官僚政治文化中的吏治经验。如果是从前者,那么我们不能不指出,“民为重,社稷次之,君为轻”之类的“重民思想”,在“传统文化”中从来就处于很微末的地位,历来都不曾受到统治者的重视,它所体现的不过是一些具有政治参与意识的书生一相情愿的理想而已;而“水可载舟,亦可覆舟”的“惧民观念”,则是亲历民众反抗活动的统治者本能的感悟,这种观念在依靠血统继承皇位的后继者那里是没有多大分量的。但是,无论是来自具有政治参与意识的书生的“重民思想”,还是来自“打天下”的王朝开创者的“惧民观念”,从来就没有对传统官僚政治形成实质性冲击,形成相应的“重民制度”,因而也就谈不上对中国传统官僚政治的根本影响。 实际上,盛行于今日政坛的所谓“人民公仆论”——人民是主人翁,官员是人民公仆——在深度上早已超出了传统的“重民思想”,既然“人民公仆论”无法阻挡滚滚腐败之流,那么以历史上统治集团根本利益为出发点的“重民思想”或“惧民观念”,焉能在今日的反腐败斗争发挥作用?因此“从传统文化中借鉴反腐败经验”这个命题所要表达的,应是“从传统官僚政治文化中借鉴反腐败经验”这曾含义,但问题是,这可能吗? 中国传统官僚政治在本质是小农经济为基础的专制集权政治。这种政治文化的根本信条是“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其特征则是严格的等级关系。在这种权力等级结构中,上对下拥有绝对的权力,下对上必须绝对服从。由此造成一个必然结果是,国家政治生活能否正常运转,廉洁高效,取决于两个不可或缺的条件:一是以皇权为代表的最高权力是否能保持强大控制力,二是这个最高权力本身能否能保持廉洁。但问题是,最高权力在不受制约的情况下,实际上最易腐败的,一旦最高权力腐败,整个官僚政治绝对不可能保持其强大控制力和清洁高效,因此腐败成为不可避免之事。作为受这个权力体系压迫的民众,几乎没有对这个体系的任何制约力量。只有当整个腐败的官僚集团的压迫达到无法承受时,民众便揭竿而起,推翻整个权力集团,建立同样结构的权力系统。王朝虽有更迭,其制度结构却没有本质的变化。近代以前的一部中国历史,其实就是一部王朝更迭史;在这部王朝更迭史中,人们惟见兴衰治乱,却看不到制度上脱胎换骨的更新。 就统治集团的所谓经验而论,不过是严刑峻法,如朱元璋的“剥皮实草”之类,但这严刑峻法永远脱离不了事后惩罚的老套路,因此根本无法杜绝官员腐败于未萌;而且,一部中国历史告诉我们,从来没有哪个王朝将严刑峻法贯彻到底,最先破坏法律的往往正是最高权力集团的成员,他们享有的特权是对法律的最严重的腐蚀剂。所谓“王子犯法与庶民同罪”,充其量不过是欺人自欺的遮羞布。传统官僚政治以及它所造就的“传统政治文化”所具有的宗法专制特性,决定了它不可能为今日的反腐败提供借鉴。如果传统官僚政治及其文化真能为历代统治者提供跳出治乱兴衰循环圈的良策妙方,那么中国历史早就不会有王朝更迭了。说到底,宗法专制官僚体制本身的缺陷乃是政治腐败的根本,因此,从所谓“传统文化”中学习“反腐败经验”,真无异于缘木求鱼。如果对这样的胡言乱语信以为真,其情形无异于一个人想提着自己的头发而脱离地面。 怪论之三:“中国死人最多的不在煤矿,在小轿车(交通事故),每年12万!”“中国煤矿死人没法避免!因为中国的老百姓太穷了。”“你不该生在中国,你不该做中国人,谁叫你不幸生在中国了?” 矿难原因“主要是穷,而不是腐败”。 这是一位自称集“哲学家”、“科学家”和“学者”于一身的所谓“院士”的高论。这样的怪论出自一位“院士”之口,似乎说明一些所谓拥有最发达大脑的人,连起码的逻辑能力都十分低下。我们不妨稍微剖析一下其中的逻辑混乱。 首先,称“中国死人最多的不在煤矿,在小轿车(交通事故)”,是把两件没有可比性的现象生拉硬扯地联系在一起,其本身就是逻辑不通的表现。且不说煤矿矿难死者人数是否真的要比小轿车交通事故死亡人数少,即使果真如此,将这二者放在一起加以比较也是不伦不类。我们知道,交通事故的发生,十之八九是汽车司机违反交通规则造成(如违章强行、超速、疲劳驾驶,酒后驾驶,等等),在绝大多数情况下是由司机个体的错误行为造成,因此,对交通事故负责的大多都是个体之人。避免交通事故的发生,是可以由司机本身的主观上的谨慎驾驶(遵守交通规则)减少到最低程度或避免的;反观矿难事故,动辄几十人、上百人被埋在矿井中,这些人的苦难和死亡,是他们可以主宰的吗?那些黑心矿主勾结号称“人民公仆”的贪官、恶官,为了攫取最大利润,漠视矿工的生命,无视安全措施上的漏洞,才是矿难屡屡发生的根本原因;而矿难之所以不能得到遏制,根本上是因为贪官、恶官的存在,以及他们为黑心矿主提供的保护;任何一桩矿难的发生,背后都有一桩桩肮脏的官商勾结的罪恶勾当,因此,任何一桩矿难的发生,都不是矿工个人主观上的谨慎可以避免的,是根本不应与交通事故相提并论的。 其次,即使矿难死亡人数比交通事故死亡人数为少,那么就能证明矿难死人的合理性和正当性吗?在矿难事故中,死难者所面对的是一个强势力量——矿主,这个强势力量团体具有以矿工生命为代价攫取最大不义之财的强烈欲望和动机,这是众所周知的,也是天底人人皆知的秘密。在当今社会,这种以人的生命为代价获取财富的方式,无论这个代价是多是少,其本身都脱不掉不义性质,都是不能容忍的。我们真的不明白,在一个号称“以人为本”的社会里,一个戴着“院士”桂冠的人,怎能以矿难死亡人数的多少来证明矿工死亡的正当性,为那些无视安全漏洞的矿主开脱罪责呢?否则,这样的比较又能说明什么问题? “中国煤矿死人没法避免!因为中国的老百姓太穷了。”“你不该生在中国,你不该做中国人,谁叫你不幸生在中国了?” 矿难“主要是穷,而不是腐败”。这位大“院士”的这些惊人之论所表现的逻辑混乱真是匪夷所思。首先,“煤矿死人没法避免”是什么意思?是的,即使在安全防护措施十分完备的发达国家,矿难死人也无法根绝、完全避免,但是否可以将目前这样频繁发生的几十人、上百人乃至数百人被埋在井下的矿难视为“没法避免”呢?这样的矿难如此频繁地、恶性地发生,难道真的“没法避免”?我想,如果这位大“院士”的儿子也在矿井中挖煤的话,他头脑中的逻辑大概就会稍微健全一点,肚子里就会稍微多一点“人”的心肠,也就不会从“中国的老百姓太穷,”“生在中国”“做中国人”这样的事实推出活该死于矿难的结论。在我看来,这种“因为你是贫穷的中国人,所以就该死”的逻辑,真堪与希特勒发明的“因为德意志民族是优等民族,所以就该统治全世界”的逻辑相媲美。 大“院士”很聪明,但聪明反被聪明误,一句矿难“主要是穷,而不是腐败”,把自己那根紧藏着的尾巴暴露出来了,使人不免惊叹一声“原来如此!”说来说去,“腐败”不是矿难发生的根本原因,这就是大“院士”所刻意达到的结论。如果人们读一下1955年这位大“院士”批判梁思成建筑思想,说故宫就像一滩污泥浊水一样挡住北京的交通,建议推倒故宫的的文章,回忆一下他这些年来的种种令人恶心的“帮闲”行为,再回国头来看看他今天的种种怪行怪论,人们必定会再次发出“原来如此”的惊叹。                                  2014년 5월 20 일
367    감정이 문제로다 댓글:  조회:5563  추천:2  2014-05-22
                                               감정이 문제로다.                                                          진언       인간의 중요한 지혜의 하나는 인간은 리성의 동물이 아니라 감정동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것이란다. 플라톤은 “리성이여, 감정을 통제하라!”고 웨쳤고 니체는 그에 반하여“초인이여, 자기 감정을 긍정하라”고 호소하였다. 세기적철학자들이 이렇게 감정문제를 중요시한것은 인간을 지배하는것은 주로 감정이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심오하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항간에는“사람은 감정동물인데 그럴수도 있지…”라는 말이 류전된지 오래고 별로 유식하지 않은 촌부도 곧잘 써먹는 말이다.     호메로스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노래하지 않은 어둠에 싸인 력사의 첫새벽에 인간으로서 겪는 모험과 인간적삶의 본질을 표현하여 인류문학예술의 모체로 된 불후의 걸작은 서사시《일리아드》,《오듀쎄이아》라는것을 알것이다. 눈앞에서 돌아가는 잔혹한 세상을 보지못한 맹인시인 호메로스는 "신은 후대사람들이 노래할 소재가 부족하지 않도록 불행을 만들었다"고 말하였다.《일리아드》에서 시인은“노래하소서! 인간들의 모든 감정을!”라고 소리높이 읊고있다.     고대희랍인들의 감정이 가장 격화되는 곳은 바로 피묻은 창칼이 부딪치고 아비규환이 처절한 전쟁터였다. 여기서 인간의 감정은 격노와 살기로 소용돌이친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누구는 분노하고 누구는 질투한다. 아가멤논에게 분노했던 아킬레우스가 다시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가는 리유도 바로 분노때문이였다. 아킬레우스는 분노하는 청년의 전형이지만 모든 영웅들에게서도 감정상의 고뇌를 읽을수 있다.     이들을 움직인것은 바로 감정으로서 트로이야전쟁이 일어난 원인도 바로 파리스와 헬레네사이에서 튕기였던 사랑때문이였다는것을 알면《일리아드》에 관통된 주제는 바로 인간들을 들끓게 하는 감정이였음을 새삼스레 절감하게 된다. 인류사가 증명하듯 인생의 운행기제는 결국은 감정문제에 귀결된다. 현대인들이라서 다를것이 없다. 문명해질수록 일거수일투족이 감정에 매이고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     인간은 왜 친화적인 감정외에도 도발적감정동물로 진화되였는가? 류인원때로부터 자기를 잘 대해주고 도와준 동류에게 좋은감정을 가졌을진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있는 파괴적인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들과 관련된 외곡된 생각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초창기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에 사활을 걸었기에 앞질러 자사자리적인 본성이 형성되고 그로부터 피를 부르는 대립적감정이 생겼는가?     고대인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현대인의 감정분류의 기본은 호악(好恶)이다. 좋게 보면 결함도 기특해 보이고 나쁘면 발뒤축이 달걀같아도 밉상이란다. 감정은 개체의것이지만 군체적으로 응결될수도 있다. 민족감정. 지역감정…등등, 그래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호칭에도 감정색채를 침투시킨다. 그리하여 력사적연원으로하여 의분을 가지는것은 민족감정의 자연적인 발로였고 욕설과 저주로 체현되기도 한다.     배달민족에게 불구대천의 원쑤였던 일본인, 미국인에 대한 혐오감에서“왜놈, 쪽바리, 양키”이고 종족기시의 감정에서 “깜디, 검둥이” 등으로 호칭되고 한국에서는 반중감정에“뙤놈, 짱꼴라”이다. 비틀린 감정에서 같은 민족에 대하여“연변거지”라는 말도 서슴치않는 한국인들도 많고 그에 반발하는 중국조선족들의 감정도 격해져서 민족비극의 산물인 여기 삼각지대에서도 갈수록 삐꺽소리가 요란하다.      사람은 느끼고 깨닫는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인간의 기본감정을 분노, 슬픔, 혐오, 두려움, 놀라움, 행복감 등을 들고있는데 그중에서 기초적인 감정은 분노이다. 그러한 감정들에 수반되는 뒤틀린 생각들이 감정파동의 주요인소가 된다. 감정갈등과 폭력을 행사하려는 행위의 뿌리는 분노한 인간의 감정과 사고방식에 있다. 결국 지성이 아닌 감정이 인간을 좌우지하는것이다.       감정은 복합적인 마음의 한갈래이다. 심리천평에서 감정의 분동은 리기심쪽으로 기울게 되여있다. “리기(利己)”에서“리(利)”는 마음이고 “기(己)”는 감정이다. 주관의식에는 리기성이 농후한바 감정에 의해 일을 처리하게 되는 불가피적인 요인이다. 한어에 “感情用事”라는 말이 있는데 리성의 지배를 제시하고있다. 그러나 일단 감정의 호수에 격파솟아 리성을 삼키면 진실이건 진리이건 네미덜머리다. 그렇게 탈선한 감정은 자칫 모든것을 한순간에 허물어뜨리고 후회막급의 사단의 근원이 된다.     그처럼 사람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며 목적한바를 향해 물불을 가리지않고 자기를 내몰게 된다. 같은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얼마큼의 공정성이 있는가에 따라 좋고나쁨, 사랑과 미움이 어긋난다. 그리하여 변형된 감정은 왕왕 그 사람의 인격과 인성을 마멸시키고 심령세계를  허로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격한 감정은 그런것을 일일히 챙길 여유가 없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생을 꼬이게 만드는 나쁜감정에 휘둘릴 때가 많이 있는데 뜻하지 않게 격발된 감정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두뇌작동시스템을 멈춰야 한다고 서양의 한 지자가 권고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문제는 리론으로 운행되지 않는다. 아니면 리성이라는 심리방파제가 수요되지 않았을것이다.     감정이 비틀리면서 생기는 불쾌감과 온갖 걱정과 번뇌를 떨쳐버리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도 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고 한다. 도리가 전혀없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흉포한 인간만행을 보고 긍정적으로 느낌을 달릴수 있는가? 역시 절대적일수 없다. 눈은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여있다. 상쾌한 아침을 맞으라 한다. 아침이 상쾌한지 울적한지는 마음먹기에 달렸다기보다 인생일사, 자연현상이 우선한다.      종교적설교에 상용어인 말로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한다. 비정한 현실을 빚으면서도 아닌보살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할수 있으며 기도한들 먹힐수 있는가? 스스로 마음을 무겁게 하지말라고 한다. 죽지않으면 살 소리이다. 그누가 무거운 마음이기를 자청한단말인가?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한다. 말은 존재의 집이요 사상의 옷이다. 객관존재가 긍정적이지 않은데 긍정적인 말을 하라는것은 제마음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라는격이다. 결국 머리에서 엮어진 횡설수설이다.     인생과 처사에 도움이 되는 좋은글을 읽어야 한다. 도리가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말들은 인생의 좌표가 될수 있지만 생활은 책에 쓰인것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게 문제이다. 좋은사람들과 좋은만남을 가지라한다. 역시 좋은말이다. 그러나 지천으로 널린 나쁜사람들은 누가 상종하는가? 인생은 좋은사람들과 나쁜사람들로 뒤섞여 돌아가는데 어쩐단말인가?     인간만사가 감정으로 얽히지 않은것이 없다. 수시로 폭발할수 있는 인간감정의 지진대, 화산지대에서 사는 인간은 그만큼 감정제동에 선천적으로 무기력하다. 배달민족이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데올로기로 분렬된것 같지만 심리바탕은 기득권자들의 감정문제이다, 홍익인간사상을 제창한 단군의 정기로 이어진 민족감정마저 세쪽이 나고말았다. 뭉치여도 어떨가 한 정글법칙의 민족지림에서 아웅다웅하는 민족이 또 있는가? 유일한 “귀감”으로 우리 배달민족뿐이다.     루쏘가 리성이 인간을 만들어낸다면 감정은 인간을 이끌어간다고 하였지만 피는 물보다 진할진대 동족일반에 대하여 식민주의자였던 일본족보다 더 이를 갈고있으니 감정이 뒤틀리면 이리와 양을 바꾸는가? 무고한 백성들도 싸잡아 비하하는 동족대결의 감정은 인간의 감정치고는 참으로 싸가지없는 감정이다. 위대할손 배달족, 다시 한번 외워보자. “인간의 감정이 문제로다. ㅡ(마르코 폰 뮌히하우젠)”                                                       2013년 4월 8일                                                                                                                                                                                                                                                                                                                                                                                                                 년
366    “롱간술의 심전(心战) 댓글:  조회:5500  추천:3  2014-05-17
                                                    “롱간술의 심전(心战)                                                                 진 언       “롱간술의 심전ㅡ(捣鬼心传)”이란 로신선생의《남강북조집》에 수록되여있는 잡문이다. 심전(心传)이란 본디 불교선종의 용어인데 글을 남기지 않고 경권(经卷) 에도 의거하지 않고 오로지 스승과 제자가 말없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하는 전법수업을 가리르킨다고 주해를 달고있다. 로신이 이를 제목으로 단것은 당시 통치계급의 롱간술을 배웠다는것을 의미한다. 졸문은 이를 본따서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롱간술에“심전(心传)”을 심전(心战) 으로 바꾸고 좀 다른 화제를 엮으려 한다.     일단 화제가 로신의 잡문으로 시작되였으니 서두를 인용해 보자.“중국사람들은 기괴하고 요망스러운것을 즐겨하는 습성이 좀 있어서 보리꽃이 피는것보다 고목에서 빛이 나는것을 보기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기실 그들은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것이다. (략)“에서 고목에서 빛이 난다”는것은 미신관념이니 두말할것없고 보리꽃이 피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것은 롱간질은 잘해도 아무실정도 모르는 자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래서 롱간질할 얄팍한 심사가 생겨나는것이다.     롱간(弄奸)질은 글자에서 짐작되다싶이 다른 사람을 속여 피해를 주는 간사한 짓거리로서 교활함, 사악함, 간사함, 간계 등을 떠올리게 하는 재수없고 불쾌한 의미의 단어이다. 롱간질은 그처럼 허다한 온갖 “질”치고는 제일 나쁜“질”이라 할것이다. 하건만 인간이 문명개활할수록 이를데없이 간특해지면서 롱간의 “심전(心战)”에 사활을 건듯이 한사코 롱간질하다보니 이골이 튼 자들이 부지기수이다.     로신은 글에서 “…그러나 사람이 하늘보다 롱간을 썩 잘 부린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 재주도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것은 롱간을 부리는 묘리는 절대로 발휘하지 말아야 하는데 즉 함축성이 있어야 하는데 있기때문이다.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함축적인것보다 심원하지 못하여 영향도 그때문에 희미해지는것이다.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내가 한도가 있다고 하는것도 이를 두고하는 말이다.”라고 롱간질 일반에 대해 풍자하고있다.     롱간질은 뇌리에서 조작되는것이지만 말, 특히는 글로써 잘 체현된다. 그것이 장편대론이든 토막글이든 롱간질을 간파하였을 때는 로신의 응전술을 리용하면 가장 좋 을것이다. “…단죄하고 규탄하는 공개된 글은 그 힘이 왕왕 속삭이는 귀속말보다 못한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분명한데 하는 속내를 짐작할수 없기때문이다. 가령 그 때 락빈왕이 대중앞에 나서서 눈살을 찌프리고 머리를 저으며 ‘나쁘기 그지없다. 나 쁘기 그지없다.’라고만 하고 어째서 나쁘다는 말을 실례를 들어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효력이 그 글보다 나았을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 금과옥조이기때문이다.     이런 응전술은 기묘하다. “…속내를 모르게 하는 위엄은 사람들을 저상케하며 속내를 모르게 하는 묘방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게 한다…롱간에는 술책이 있고 효과도 있지만 그것은 한도가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큰 일을 성사한 사람은 자고로 없다.”고 롱간질의 악습을 사정없이 질타하였기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롱간질하는 사람에게는 필경 치명적인 타격이 될수밖에 없다.     누군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의론보다 더 재수없는 일이 딱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아무도 당신에 대하여 의론하지 않는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글을 써서 사회에 내놓은후 평가는 둘째치고라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허허 사막에서 저혼자 목쉬게 웨친후 씁쓸하고 싱거운 허탈감에 빠지는것과 같은 심정일것이니 말이다.     대천세계에 벼라별 사람들이 다있으니 평판도 제나름일것이고 중구난방이여서 종잡을길 없거니와 듣그러울것이다. 여론마당은 명칭그대로 의론이 정상적현상이지만 이미 내놓은 글이 변질될것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이 무너져 작자를 매몰시킬 일도 아니니 마이동풍은 불가하되 스스로 성찰을 앞세우는것은 바람직하다.        프랑스 계몽기 사상가 볼테르의 후대 작가가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 며 표현의 자유의 관용성을 강조한바있다. 미국의 련방대법원 판사였던 홈즈란 사람이 “사상의 자유란 우리가 동의하는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의 자유다” 라고 하였는데 아무나 미칠수 있는 사상경계는 아니지만 심히 교훈적이다.     닉명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도 사상표현의 일종이라고 할수 있되 형식이나 결과나 암전이다. 설사 명중하였더라도 암전을 쏘는 자는 어디까지나 광채롭지 못한 “궁수”이다. 그렇게 일종의 심리롱간을 부리지만 자칫 자신의 밑창을 드러내게 된다. 그만큼 닉명으로 롱간술을 발휘하기만 하면 롱간한 노릇이 밝혀지고 제한도 생기므로 계발이나 조언으로서의 영향력은 거꾸로 되고말것이다. 로신의 말처럼 “일리가 있으면 일페가 있는 법이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우리로 하여금 불쾌하게 하는 일은 자질구레하고 시시한 일일때가 많다. 우리는 거대한 코끼리는 피할수 있어도 파리는 피할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이것저것이 이래저래 한이 될수도 있다. 중국작가 장애령은 인생에 세가지 큰 한이 있는데 첫번째 한은 붕어가 가시뼈가 많은것이고 두번째 한은 해당화가 향기없는것이고 세번째 한은 “홍루몽”이 미완성작이 된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천층만층이니 품게 되는 한이 대동소일할수 없을진대 이것저것 한이 되더라도 남을 탓하다보면 스스로 심리혼란을 다잡지 못고 전전긍긍하게 될것이다.     인생은 마치 담담한 한고뿌의 물같지만 설탕을 넣으면 달착지근해지고 소금을 넣으면 짧짤해지고 고추가루를 풀어놓으면 맵싸하게도 된다. 세상에 동그란 네모꼴이란 없듯이 완전완미한것은 없다. 그만큼 자신의 완미함을 바랄수 없듯이 남들이 완전완미하기를 바라는것은 되우 무료한 일이나 롱간술의 심전은 무서운것이다. 세사람만 우겨대면 호랑이도 만들어낼수 있고 도깨비로 둔갑시킬수도 있다지 않는가!     얽혀도는 세상이라 회피하기 어렵지만도 공연히 사사건건 관여하고 시시비비에 열중하면 생활내용이 다양해질것이나 이것저것 아파하기엔 우리네 인생이 너무짧다. 무서운 롱간질의 심전에서 아파하더라도 의기소침해지지는 말아야 한다. 고소원이면 불감청이라고 혹 롱간술의 심전이 성찰할 계제나 반면교재도 될수도 있으니말이다.     관용과 아량은 성격에 뿌리를 두고있지만 성격이 좋다는 평판을 들을만큼 호방한 성격의 사람이 작가로서는 적임자가 아닐수도 있다. 그 반증으로 작가는 흔히 고지식한 생활의 “약자”이기 쉽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풍부한 내심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모종의 고통으로 그늘져있기가 십상이다. 조금 신경질적이거나 심지어 심적문제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전(心传)” 은 바랄수 없고 “롱간술의 심전 (心战)”에 성찰로 마주하면 일패도지는 하지 않을수 있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견해로 인해 박해 받는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했다.”는 사람은 성자의 사상경지를 가진 사람이라 할것이다. 잡다한 롱간질로 운행되는 세상이니만큼 롱간술에 능한 자들이 지천이다. 그러나 롱간질로 일시 득세할수도 있겠지만 나중엔 그저 그러고 말것이다.     “어이하여 청산속에 사느냐 물으면 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아도 마음 스스로 한적하여라, 도화꽃 류수에 흐르는 별유천지라 인간세상 아니여늘. (問予何事捿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라는 리백의 명시로 횡설수설을 마무리하면 얼추 뒤끝이 맺어질지 모르겠다.       2014년  5월 10일
365    시조 (본대로 느낀대로 31-60) 댓글:  조회:5642  추천:1  2014-05-10
1. 자고로 莫须有도 죄명이 되얏스매 코걸이 귀걸인가 귀걸이 코걸인가                          죄인을 만들어내여 재판하는 호로묘라                         2. 유달리 키가 크면 구부정해 몸낮추고                          력발산 아무때나 힘센자랑 안하는데                          난쟁이 높은데 서서 꺽다리라 으시대네                         3. 쥐×도 몰랐다는 옛말이 있더라만                          자신도 모르면서 허풍치니 어찌하오                          관둬라 용렬한자가 젠체하는 세속을                         4, 리념이 무엇이고 주의란 뭣이관듸                          혈안에 티각태각 서로잡을 칼을가니                          물보다 진한 피건만 불구대천 웬말이요                          5. 위선자 명인되고 패류가 호걸되고                          악인이 득세하니 세상사 알쏭달쏭                          두어라 릉연각상에 진짜얼골 뉘일고                         6. 수림에 우난새가 류류별별 각양인데                          제사연 自音으로 우짖으니 노래런가                          우리도 自律로 우는 새같으면 좋으련   7. 앞집개 멍멍하니 뒤집개도 왕왕하네    목쉬게 짖어대도 자음은 없는거냐    어덩덩 남의 장단에 춤추면 저같지라                         8. 강산이 결딴나니 청청하늘 보이잖네                          티끌이 몽몽하니 홍진세상 가관일다                          해맑은 하늘기운을 조물주야 돌려다오                         9. 하늘이 높푸르고 말살찌는 호시절에                          논벌에 황금물결 덕이에는 과일향기                          페쇄된 농경사회도 풍년들어 흥그럽네                        10. 첩첩한 험산준령 만리성이 주름잡아                          구름속에 굽이쳐 하늘끝에 닿았는데                          흉노병 울바자넘어 중원땅을 휘몰았네                         1. 석양은 나무끝에 댕그랗게 올라앉고                        지평선 아득하야 하늘끝에 닿았는데                        이몸은 허허공중에 티끌보다 미소해라                       2. 강건너 불구경에 손짓발짓 하리오만                        남북의 동족상쟁 아짜아짜 뼈저리다                        아서라 녹쓸은 리념 자승자박 되리라                       3. 핵우산 펼쳤던들 안전지대 어드메냐                        불구름 치솟으면 대천세계 넓을손가                        자타를 훼멸시키는 인간유희 황당해                       4. 매미가 요란해도 한곡조라 무료한데                        한가한 부채질에 무더위가 기승일세                        관두소 이상기후에 지구촌 도가니라                       5. 황페한 시골마을 인적없어 한적하고                        돛개짐승 우는소리 하품하는 개도없네                        주인장 랭수좀 주소 앗차 실언 빈집이네                       6. 도시라 여기메는 매미소리 자최없네                        록음이 없어서냐 자연정취 말째이냐                        매미도 도시문명이 귀찮은가 보오이다                       7. 시골의 빈집마당 쑥대밭이 엉성하고                        참살구 기다림에 옆구리가 터졌구료                        쓸쓸히 돌아서나니 무주공산 마중오네                       8. 사계절 우는소리 대자연의 절주로다                        새우는 봄이가면 우뢰우는 여름오고                        벌레가 울던 가을끝 삭풍불어 동삼이라                       9. 사계절 엇바뀌는 풍경선을 누가긋냐                        봄산은 아물아물 울울한 여름산천                        불타는 추색의 정취 생각잠긴 겨울강산                      10. 명산은 관광지라 새소리도 쫓겨가고                        발길이 잦은곳에 산천초목 몸살하네                        산신령 갈곳을 몰라 천방지축 하느니                                                                    1. 하늘은 창망해도 자사자리 설곳없고                        대지는 넓었어도 사리사욕 담지않고                        일월은 밝디밝아서 어둔구석 없노라네                       2. 구름이 드리운들 하늘마저 변색하며                        해달이 엇갈린들 광명이야 빛바래랴                        우주의 운행 거슬린 령장들만 징벌받지                       3. 酒家에 네온등이 먹자만세 꼬신다만                        여느때 즐비하던 호화차들 자취없음                        식음도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알괘는고                       4. 석양에 홀로서서 갈곳몰라 바장이다                        돌아설가 하는차에 걸음잡혀 바라보니                        락조가 하도 뜨거워 식은가슴 끓이네                       5. 시새운 먹구름이 일륜명월 가리우네                        하여도 구름속에 웃는달을 어이릿고                        인간촌 시기질투도 저같지를 아니한가                       6. 명리에 혈안되여 무고자도 잡아들여                        고문에 인간학대 천직인듯 하시다가                        드대어 같은꼴 되니 아비규환 처절할사                       7. 꿈자리 사나워도 이생에만 꾸는것을                        긴밤이 지겹다고 푸념질을 하지마라                        월색이 처량하던들 저승에는 없으매로                       8. 청풍은 천지간에 차넘치는 정기런가                        거칠것 없노매라 오고감이 스스럽네                        浮云의 부귀영화도 바람같더 하리라                       9. 소나기 요란해도 귀를 막는 날새없고                        번개가 찢기여도 눈을 감는 조류없네                        구린뒤 켕긴 이들만 전전긍긍 하오리다                      10. 가랑비 왔노라고 연못우에 점선찍고                        미풍은 가노라고 긴머리칼 흩날리네                        민초라 미천한 목숨 흔적조차 없으리라          
364    길을 따라 나는... 댓글:  조회:4791  추천:0  2014-05-09
                                                                길을 따라 나는 …                                                                      최 균 선       인간이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하면서 먹거리를 찾아 헤매일때는 아직 길이란 없없다. 길은 문명과 함께 시작되였고 그 속성은 열림이였고 사통팔달이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길이란 막힐수도 있다. 그래서 궁지란 말이 만들어진것이 아닌가싶다. 창창 열린 바다는 가는곳이면 다 길같지만 암초를 피해서 선정한 길이 따로있고 철길도 무한히 뻗어날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부설될수 있는 곳에만 부설된다.     산길, 대통로, 고속도로…그 모든 길은 인간의 두발이 본능으로 낸 흔적이 아니라 대자연에 그린 일종의 문명의 부호이다. 인간은 대자연을 정복하며 벼라별 부호를 수없이 끄적거려놓았다. 그것을 누군가는 인간의 언어라고 칭하였고 인간의 속성이라 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가는곳에 길이 생기였고 길이 열린곳에 하나 또 하나 문화의 새 언덕이 나지게 되였다.      길은 과거로부터 흘러온것인가? 미래로 굽이쳐가는것인가? 길이 리별의 포물선이라면 만나는 길은 집함점인가? 귀가와 탈가, 리향과 귀향, 인간과 사회의 부딪침에서 갈래갈래 찢어진 그 오리들이다. 길은 유혹인가? 기다림인가? 길은 유혹이고 손짓이기도하다, 일송정기슭에 태줄을 묻은 나의 동년의 유혹은 아지랑이 흐믈거리는 칼바위 벼랑길이였고 저녁때거리를 마련하려 장마당에 가신 큰엄마가 무엇인가 머리에 이고 룡문교를 건너 어스름을 밟으며 돌아오실 강변길이였다.      길은 동경을 그린것인지도 모른다. 길없는 길은 해란강 얼음판을 언발로 미끄럼 타고 철교를 넘어,옛그날 룡드레우물가의 골목길 에돌아 참으로 가고프던 “3.1학 교” 로 나를 불렀다. 화룡행 기차의 긴 기적소리가 저녁해를 흔드는 퇴교길에서, 여름방학 허청리를 지나 20리 수레길로 탈탈 먼지털며 걷던 길에서 부채골의 누님네 집울안에 무르익은 오얏나무의 부름을 들었다. 입하나 덜려고 방학마다 눈치밥 먹으러가면 보리밥을 가득 오이랭국에 말아주며 여윈 내등허리를 도닥여주던 사돈할머니의 주름잡힌 웃음이 배부름이였다. 그래서 누님이 사는 부채골길은 부름이였고 희망이기도 하고 기다림이기도 하였더랬다.     학교를 쉬는 날 얼씨구 찾아올라간 칼바위에서 비암산고개를 넘어 굽이굽이 화룡벌을 주름잡던 신작로는 우물안 개구리이던 내게는 넓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 그 자체였고 어서오라고 휘젓는 손짓이였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배부를수 있는 곳이면 어데든지 정처없이 가고픈 길이기도 하였다.    수림속 산길에는 노루가 뜀박질하는 길이있고 산토끼가 곤두박질하는 길이 있듯이 인생에도 각자 걸어야 할 길이있다. 민초로서 개개인의 삶이 이질적일수는 없어도 공동배수로 설명될수 있는 계산식은 아니다. 누구의 삶에나 꿈과 현실, 희망과 절망, 웃음과 눈물, 명상과 광기 등으로 얽히고 얼룩져있다.     나의 반평생이 시들어버린 향촌의 길은 내 삶을 찌들게 한 고난의 행군길이다. 호미메고 황혼빛 물들어가는 덕이를 내릴때 먼지를 피우고 지나가는 마지막 뻐스가 모아산 고개너머 사라지던 신작로는 내 갈망을 늘여갔다. 길은 희망을 따라 떠나고 그리움을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느긋한 마음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길은 나에게는 타향만리에 널린 내 형제를 그리던 리별의 연장선으로 침묵하면서 만남의 감탄호를 찍어주지는 않았다. 금의환향은 아니더래도 돌아오는 길이란 언제나 편안이 깔려있는 법이다.     당신은 소잔등에 깔단을 얹고 해저무는 논길을 터벅터벅 걸어본적이 있는가? 일밭에서 돌아오는 농부의 길은 고달픈 휴식이 기다리는 길이고 밝는날 새벽같이 일어나 일밭에 나가며 하품이 기지개켜는 길이였다. 벼이삭 고개숙인 논길에 농부의 재미가 누워있고 시골샘터로 가는 단풍든 숲길에 시골사람들의 소박함과 풋풋한 인정이 숨쉬고있음을 느껴본적이 있는가? 산과 고개를 펑 뚫고 일직선으로 뺀 고속도로 에서 자가용을 질주하며 속도의 쾌감을 느낀다면 길의 견고함을 잘알수 있겠는지는 몰라도 힘들게 걸어야 하는 인생길의 끈기를 오래 짓씹을수는 없을것이다.     한겨울 새벽바람속에 소수레몰고 이듬해 쓸 보막이용 가둑나무를 실러 동냥골로 가던 그날의 두메길은 너무나 멀었고 무거운 나무짐지고 모아산 비탈길 내리던 저녁길은 인생수업 그 자체였다. 모아툰을 떠나 영성학교의 교단을 바라고 자전거를 달리던 그 굽이길은 그렇듯 울퉁불퉁하였고 불안한 길이였다. 그리하여 내가 한평생 걸은 길들은 그대로 삶의 희로애락, 희망과 좌절, 득의와 실의의 자국이 얼룩진 길이였다.     길은 같은 길이여도 물동이 이고 걷는 색시들 똑같은 걸음새로 걷지않듯이 인간군은 일매진 자세로 인생길을 걷지는 않는다. 어떤 이는 감성을 더 앞세우고 어떤이는 리지를 앞세운다. 어떤이는 아무길이나 따라서 떠돌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뿌리박은터에 호박이 넌출을 뻗듯이 울타리를 맴돌며 순리대로 살기좋아한다.     봄, 진달래웃는 고개의 길은 젊은이들의 걸음처럼 경쾌할수 있고 민들레꽃씨 락하산을 타는 들길은 처녀애들의 웃음처럼 밝을수 있다. 이처럼 같은 길이라도 삶의 긍정적인 화폭을 그리는 굵은선일수도 있지만 불행과 슬픔이라는 삶의 그늘이 어둡게 드리워있는 오불꼬불한 연장선일수도 있다.     이 지구촌에 갈래갈래 뻗은길은 누구에게는 꿈길이고 락망이 돌아오는 길일수도 있다. 아무튼 길은 인간이 지구에 남기는 이런저런 락서이다. 인간에 의해 금이 그어진 길이라는 선을 따라 욕망은 동분서주하지만 문화라는 꽃을 피우는 인간들을 말없이 고이받들어가고 있으니 또 그런 길이야말로 성스럽지 않으랴,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리고 인간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수도 있고 서사시가 될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길에서, 아메리카대륙을 그물처럼 누비던 인디안인들의 오솔길에서 인류의 비극을 읽을대신 현대화고속 도로에서 문명의 서사시를 읽는다면 그것은 눈물어린 아이로니이리라,     대명동, 뽀뿌라나무 그늘진 두만강가 숲길에서 강건너 마을로 통하는 수레길을 눈빗질하며 서러운 고국애를 느끼였던 내가 너무 쎈치멘탈한것이였을가? 산천을 누비며 꿈을 꾸는듯한 마을들을 이어놓은 향촌의 옛길들에서 서정을 느낄수 있었던것도 인제는 숲속으로 숨어버린 산길처럼 서글픈 추억의 오솔길이 되였다. 그대신 바쁘고 시끌벅적한 대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골목길에서 인간이 자연과 박자를 맞출수 없는 비인간화된 현대문명의 삶을 체험한다면 내가 너무 보수적인것일가? 인간의 냄새가 풍기는 길을 묻어버린 인간은 우습게도 이제와서 산길을 선호하니 너무나도 리기적인것은 아니란 말인가?     내 생각이 당치않더라도 버드나무 그늘진 해란강뚝길을, 벽계수 돌틈사이로 흐르는 대동골 시골길을 하냥 걸어보고 싶어진다. 명상적이면서도 청청한 민요가락같은 향촌의 길에서 논과 밭, 산과 계곡, 구름과 산바람, 자연의 친근하고 고르로운 숨소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느껴보는것은 고달픈 꿈을 다독이는 소야곡이기때문이다.     시대의 현대교통의 성과를 과시하고 속도의 쾌감과 더불어 길은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넓어진다. 그러나 그 옛날 수레길들에 추억이 끌리고 미련을 흘린다면 그것이 곰팽이낀 랑만이나 시대락오자의 거부감때문인가? 아니다. 자연과 길의 조화로운 만남속에서 살다가 가기를 바라는 마음때문이다.                                                              2007년 7월 10 일             (연변문학 2014. 제5기 )
363    가재는 게편인지라 댓글:  조회:5762  추천:2  2014-05-05
                                             가재는 게편인지라…                                                          진 언       가재는 게(蟹)로 보고 “석해(石蟹)”라 한다. 가재는 새우와 게의 중간형으로 뒷걸음질을 잘하는 특징이 있다. 게는 “거스르는 이”의 준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옆으로 걸으나 뒤로 걸으나 보편적인 걸음을 거스르는것이다. 그래서 '가재는 게편' 이라는 속담이 유래된것인가? 속담은 모양이나 형편이 서로 비슷하고 인연이 있는것끼리 서로 잘 어울리고 사정을 보아주며 감싸주기 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초록은 한빛이라는 말도있다. 우리 연변농촌에서는 오리 오리무리를 따른다거나 다리부러진 노루 한곬에 모인다거나 다같은 통속이라는 의미에서 한바지가달안에서 논다는식의 토속적인 말을 잘 썼다.     얼핏 떠오르는 력사사실을 례로 들어보자. 악명높은 일본놈들의 “731부대”의 창설자의 한놈이자 생체실험을 한 괴수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란 놈을 패망후에 모든 연구자료를 제공받는 대가로 미군이 보호했다. 미국은 점점 확대되여가는 랭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전쟁범들과 거래했던것이다. 뉴른베르그에서 독일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있는 동안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은 철저하게 무시되였다. 대부분의 일본전범들은 불기소 처분되였던것이다.     수십명의 독일전범은 사형당하거나 투옥되였지만 1960년이후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일본인 과학자는 단한놈도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2차대전후 프랑스는 나치스독일 점령아래서 부역했던자들을 2,071명을 사형했으며 39,900 명을 판결했다. 벨기에서는 55,000명, 네덜란드에서는 50,000명이상 징역형을 내렸다. 다른 유럽국가들도 수만명에 이르는 부역자들을 처단하여 다시 그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였다. 이는 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순리에 따른것이기도 하였다.       2차 대전뒤 150여개의 독립국이 생겼는데 핵심권력을 독립운동에 몸바쳤던 사람들이 잡았다. 사실 미국과의 협정아래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전혀 출간되지 않 았던것이다. “731부대”의 대다수 살인악마들처럼 이시이도 생물학자로서의 명예를 계속 유지했고 도쿄대학학장까지 력임했다. 미국은 저들의 장원한 전략적구도를 그 리며 일컬어 황군이 반인류적인 만행을 저지르도록 종용한 자가 천황인데도 미국은 그를 전쟁범의 괄호밖에 고스란히 모셔두었다.     진주만 기습공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죠 히데키이하 일곱명의 A 급전범이 도쿄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것이 1948년12월23일이였는데 똑같이 A급전범으로 체포되여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여있던 기시노부스께는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뿐아니라 도죠 등이 처형된 다음날 자유의 몸이 되였다. 그자는 만주는 “내작품’”이였노라고까지 으시댄 악명이 자자한 놈팽이였다.     기시노부스께의 다음과 같은 “옥중일기”가 그것을 증명하였다.“랭전은 조만간 열전으로 변할것인데 비록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고배를 마셨다고는 하나 동양에서 으뜸가는 소질을 지닌 민족으로서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맡아야 할 세계사적임 무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식견과 포부, 용기와 결단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출현이 기다려진다. (1947년 9월20일)”     세월이 지나니 “아니나 다를가?”의 현실이 펼쳐졌는가? 아니면 오래전에 벌써 해두었던 계산서의 두루말이가 슬슬 풀리는걸가? 요즈음 미국의 오바마의 언동에서 그것이 확증되였다. 오바마는 4월 23일, 요미우리(讀賣)신문과의 서면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섬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훼손하려는 그 어떤 일방적 시도에도 반대한다” 선언했다.     일본과 중국이 령유권을 놓고 분쟁하고 있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면서 일본령토라고 쐐기를 박는 언동이다. 일본에 대한 지지가 로골적으로 도를 넘어서고있다. 중국을 자극하고 일본을 위하는것에서 최근 이보다 더 적라라한 도발은 없다. 미국의 남에게 공개할수 없는 의도는 무엇인가? 실질은 늑대와 승냥이의 야합인것이다.     오바마는 대일 찬사에서 한술 더 뜨고있다. “집단자위권행사에 따르는 제약사항을 재검토하는것을 포함해 일본의 방위력을 강화하고 미군과의 협력을 심화하려는 아베 총리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아베가 추진중인 집단자위권행사에 대해 오바마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일본을 방문하기 직전에 한 인터뷰라고 하지만 가히 드러내놓고 하는 대찬사가 아닌가? 파격적이다. 미국의 력대의 대통령가운데서 일본의 집단자위권행사에 드러내놓고 지지를 표명한 대통령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의 신문리론가권위인 맥클린교수는 일찍 개가 사람을 물어놓은것은 뉴스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물어놓은건 뉴스라고 하였다. 가재가 게편을 하고있다는것은 개가 사람을 물어놓았다는식의 뉴스이지만 “일본의 재무장”이라는 개념을 현실적 으로 상기시키고 있어서 뉴스로 되고있다. 이는 마치 미국이 2차대전 종전후 무장해 제시킨 일본을 이제 서서히 재무장시키기로 방침을 결정한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시아중시정책으로 대외정책을 수정한 미국이 아태지역 패권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활용할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로 예상해볼 수 있는것이 일본의 재무장이다. 아태지역에서 패권을 쥐려는 미국이 자신의 리해 관계와 어떻게든 재무장을 실현하려는 일본의 리해관계를 일치시키려 하는것이다. 일본의 집단자위권행사준비 움직임을 두고 오바마가“국제안보에서 큰 역할을 맡고자 하는 일본의 의욕으로 규정했다는것은 붙는 불에 키질인것이다.     민주주의리념을 가장 요란하게 웨치고다니는 나라가 미국이다. 초대강국이라 불리우는 미국은 각종 전쟁에 개입하거나 사단을 일으켰고 “세계평화를 위해” 서라는 미명하에 세계적인 분쟁과 폭력의 원흉으로 종횡무진하고있다. 합법과 비법, 허용과 금지를 누구 마음대로 정하는가? 체력단련을 하는데 허용되는 동작과 금지된 동작이 있고 허가를 받아야 하는 동작이 있고 맘대로 해도 되는 동작이 있던가?     미제는 법이 아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법이다. 과거 리념대립의 시대에는 실익보다 명분, 리념이 중요했으나 현시대는 리익을 최선으로 내세우기에 미국이 공공연히 일본편에 나서고 있는것이다. 러셀 미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는 2014년 3월 4일 일본의 집단적자위권행사가 필요한 핵심적인 리유로 미사일 방어체제를 제시했다. 일본이 집단적자위권행사를 주장하고 있는것도 사실은 미국이 종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처럼 “가재는 게편”이라는 속담이 주는 역설적인 계시는 심각하다. 문명, 정의라는 구호가 얼마나 자가당착적이고 비리성적인 구호인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현시대, 지구촌엔 정의로 포장된 힘의 론리밖에 없다. 외국동화속에서 마귀할머니나 양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가 바로 미국이다. 요즘 미국국방장관 척 헤이글은 11일 오 노데라 이쓰노리(小野寺五典) 일본방위상과 회담을 하고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수 있도록 한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지금 늑대가 승냥이, 이리를 끌어들여 제뒤에 줄을 세우고있다. 그러나 저들 말마따나 영원한 친구란 없는법, 가재가 게편을 하여도 게를 똑바로 걷게 할수는 없다. 영원한 적이 없다는 론리대로 승냥이를 살찌우는데 장차 실익에 금이 간다고 할 때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것인가? 결과 예상되는 편짜기이다.                                   2013년 7월 1일ㅡ2014년  7월 11일              
362    《놀부학원》 학생모집공고 댓글:  조회:5774  추천:0  2014-05-04
                                   《놀부학원》 학생모집공고                                                     최 균 선       교단을 떠난후 아무 할일도 없고해서 쓰잘것없는 잡궁리들을 이리저리 끄적거리며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던차2004년 8월 8일 이딸리아의 북부도시 오스타에서 세계최초의 게으름뱅이 경험교류대회가 열리였다는 뉴스를 보고 생활의 활력을 찾은듯싶었다.    대회에서《라태자선언》을 발표했는데 세계적행사로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매년 민족대표 50명을 추천할수 있다는 구절에서《놀부속성학원》을 세울생각이 문득 떠올랐던것이다. 별로 승산있는 구상은 아니지만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던 사립학교들처럼 학생래원의 고갈로 걱정할 일만은 없을것 같다. 신주대지에 지천으로 널린게 라태한자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해마다 열릴 그 대회에 보낼 대표선발이라는 미명하에 모집광고를 낸다면 필경 대성황리에 초생사업이 진행될것이다. 큰거리, 작은 골목의 그늘진 곳곳에 광고 를 붙이면 명주바지에 도꼬마리가 달라붙듯이 할것은 물론《농부일생이 무한 (无闲)》이라던 농부가가 지금은《농부일생이 유한이로세》로 고쳐불려지니 버덕마을이든 시골이든 지원자가 많을것이 당연하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나는 다 닳아빠진 붓을 찾아내여《학생모집을 알림》이라고 일필휘지하였다. 광고라는 두글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것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원장과 교원대오를 밝혀야 하는 대목에서 붓이 방아를 찧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당분간 명성높은 인재를 등용할수 없으니 내가 림시원장을 맡아야 할것같다. 나로 말하면 학문적으로는 아무 명성이 없으나 게으름병이라면 원근에 꽤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말이다.     쉽게 한두가지 례를 든다면 발가락에 무좀이 먹는 한여름에도 일주일건너 한번 발을 씻으나마나한데 그나마 마른수건으로 닦아낼 때가 푸술하다. 머리도 두달에 한번 감으면 고작이고 목욕은 더울 때 물한대야면 다하고도 남는다. 드믈게 치솔질을 해도 좌우로 흔들기 귀찮아서 숫제 턱을 두어번 흔들고 등이 가려워도 벽에 고정해 놓은 등긁개에 등을 대고 앉았다섰다하는 수준이니 원장이 될만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리론강의와 실습지도를 할 교수들을 초빙하기가 쉽지 않다. 로신선생의 아Q씨가 적격인데 어째 죽는지도 모르고 죽은 원혼이 됐으니 청할길 없겠고…덧없는 세상이지만 게을러서 서두르지 않고 하잘것없는 신세이지만 게을러서 변통을 못하고 지낸 리규보의 그 거사같은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배달족대표로 추천하련만 죽은아이 자지만지는격이라. 교사대오건설은 차차 보기로 해야겠다. 나는 다시 붓을 날리였다.     모집대상:     게으름병이 있다면 공농상학, 정계, 교육계, 의료계통 등 각계통들과 사회구역의 모든 성원들이면 다 등기신청할수 있다. 구체대상으로 말한다면 기계를 돌린채 낮잠을 자다가 들통이난 사람, 직장에서 도박놀다가 제명당한 사람, 까다로운 완성품 질검사도 늘 눈감아버리는 사람, 일에는 베돌이, 먹는데는 악돌이, 팥죽함지에 코가 빠져도 입을 벌리기 귀찮아하는 사람, 힘든 일은 땀이나서 싫고 경한 일은 푼돈벌이라고 싫다는 사람, 쌀독에서 바가지긁는 소리가 나도 뺀낫자루같이 장기판이나 도박판을 쫓아다니는 백수신사, 걷기도 싫고 뛰기도 싫고 걸음마다 일마다 다 귀찮아 하는 구제불능의 무위도식자들… 이 가장 적격의 대상자들이다.     농촌의 경우, 벼모기르기가 귀찮아 이집저집에서 빌어다가 농사짓는 사람, 한뙈기 터밭에 범이 새끼치건만 호미를 대지 않는 사람, 후치질이 처졌는데도 문구장에서 행복하게 웃는 사람, 비가 새건만 지붕에 올린 벼단이 썪는줄 모르는 사람, 울바자에 개대가리 나들어도 돌멩이를 주어다 얼추 막아놓는 사람…     학교로 말하면 숙제를 밀렸다가 친구것을 베껴내는 학생, 명작한권을 일년두고 다읽지 못하는 대학생, PC방에서 밤을 패우고 수업시간마다 게침흘리는 고중생, 훈련문제나 작문숙제를 심열하기 싫어서“검사”두글자와 날인을 하고마는 교원제씨들, 정규수업에는 나그네말죽을 먹이고 자기가 꾸린 보도반에 끌어들이는 독직자 등…      정부기관으로 말하면 차물 몇고뿌, 신문 한장으로 반나절을 보내는 사람, 마작판에서는 초병의 혜안처럼 빛나도 회의장에선 기웃뚱하고 코노래하는 사람, 먹을알이 없으면 연구타령 하다가도 안속챙길 일이면 사타구니에 비파소리를 내는자, 사무실 서가에 와자자하게 진렬해 놓은 책들은 한페지도 읽지 않으나 별도로 꾸린 휴식실에서《호색경》은 열심히 파고드는 서문경류의 위군자, 상급앞에선 입다물새 없다가도 하급은 웃음으로 대하기를 싫어하는 고리삭은 관료들…      과정안배표:      본학원에서 가장 인기학부는 현대행정관리계인데 그중 비서문직의 비결일것이다. 여러가지 공문작성과 령도의 연설고를 쓰는게 전업인 비서로 말하면 꼭 게으름의 묘책에 무릎을 칠것이다. 이를테면 매번 미사려구, 류행어, 텅빈말, 틀에박은 말, 큰소리치기기법을 전수하는 대목이다. “××시는 세계로!세계는 ××시로!”라는 구호를 서두로 한다거나 “관념을 갱신하여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든가 “또 한층 새로운 차원에로 비약했다.”거나 “다시 더 새로운 창신의 광휘”등의 말은 아무 신문에서나 옮겨올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 비결은 일거량득이다. 기실 게으름을 피운것이지만 령도에서는 필력이 강하고 문채가 빛난다고 치하할것이다. 조사연구가 필요할 때도 반드시 령도에서 중시하는 단위로 내려가야 한다. 그곳 사람들은 상하가 다 말재주가 있을것이여서 입술놀림과 함께 눈섭이 춤출것이고 말이 청산류수처럼 쏟아져 나올것이다. 어느것이 진실이고 어느것이 가짜인지 분간할수 없을만큼 경험들이 조리정연하게 회보될것이다. 그경우 일호차착이 없이 그대로 리용하고 신문을 적당히 참작하면 그보다 쉽게 엮어지는 조사보고가 없을것이다.     매번 재료를 쓸때면 사무실이 번잡하여 깊이 사색할수 없다는 핑게를 둘러대고 집에서 쓰도록 조건을 창조한다. 독촉이 오면 수정하는 중이라고 말하고 다시 며칠후 독촉이 오면 다시 윤색하는 계단이라고 대답한다. 두어시간 정신을 집중해 완성해 놓으면 큰대자로 누워 낮잠자도 좋고 음악을 흔상해도 좋고 아가씨를 찾아 사우나로 가도 되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걸직한 육담으로 시간을 수식해도 누가 뭐라 말할수 없다. 이런 게으름이야 말로 신선놀음이 아닌가?     혹시 창신성이 수요된다면《공문서사작대전》을 내놓고 서두방식이나 문장결구 요구대로 쓰면 랑패없다. 번마다 생신한 맛이나게 작성한다는것은 진정 문필이 뛰여나고 성근한 비서들의 몫이지만 지금 세월에 누가 황소처럼 미욱하게 일한다던가? 게으름을 피울줄 모르면 그게 바보스러운 사람이다. (이하 략)      특수생모집조건:      본학원에서는 다음 부류의 특수생을 우선모집한다. 앞에서 마른 비행기를 잘태우는 부하를 선호하는자, 책보기도 싫어하고 진취심도 없는자, 여러가지 훈련반에 대신 보내면 열심히 필기하는자를 중용하는자, 수업강당에 얼굴 한번 내밀지 않고 시험한번 치지 않고도 석사, 박사증을 획득한 뛰여나게 머리좋은자……     리규보할아버지가 량심을 찍는 도끼로는 녀자가 첫째요, 내장을 상하게 하는 약으로는 술을 가리킨다 하는데 대낮이면 위엄이 뚝뚝 흐르다가도 밤이면 숨겨둔 작은 꿀벌네집에서 남녀평등이 되는 위군자들…총적으로 본학원에서는 무재무덕하고 무위무능한 상급아래에서는 게으름을 피우기 쉽다는 밀방 등을 터득할수 있다.     연구생 연구항목:     본학원에서는 어떻게 체력소모를 감소시키고 생활절주를 완화시키면서 마음에 맞게 느러진 삶을 영위할데 대한 기초리론을 선행시키면서 게으름병자들의 공통한 특점이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 등 경험교류를 자주 조직하여 현시대의 인문환경에 알맞게 게으름을 피우는 기술과 예술성을 련마시킨다.    본학원에서는 게으름병을 치료하고 마음을 돌리여 인의를 공부하려는 장한 뜻을 가진이들과 랭수마시고 룡트림하는자, 까기전에 병아리를 세려는자, 등 싱겁둥이들은 일률로 문전사절한다. 아마 이 조목에 대해 오해하고 그만큼 반향이 나쁠수 있으나 병을 치료하여 사람을 구한다는 의학상의 도리를 체현시킬수 없음을 고하는바이다. 독은 독으로 친다는 속담처럼 스스로 게으름의 극치에 도달한 다음 그 위해성을 깨달았을 때 자연히 정도로 나갈수 있을것이다.     게으름병은 특히 우리 민족권에 만연되고있다. 게으름은 인성악의 일종으로서 빈궁의 길동무이다. 남의 사돈이야 가거나 말거나 제코나 옳게 닦으라고 조소할수도 있겠다. 접수하되 개정키 어렵다고 실토한다. 게를 똑바로 걷게 할수는 없으니까. 세상엔 악한으로 보이기 원하는 악한은 없듯이 자기가 게으름뱅이로 보이기를 원하는 게으름뱅이는 없다. 남을 넌지시 비난하며 자화자찬을 한다고 오해하지 말기바란다..     본인은 이미 신세를 망친 사람이지만 개교식날 훈사는 멋있게 할것같다. 화두는 이렇게 시작될수 있다.《당신이 만약 재산을 잃었다면 약간한것을 잃은것이고 만약 영예를 잃었다면 적잖은것을 잃은것이며 만약 근면을 잃었다면 그것은 인생의 전부를 잃은것이라고,     각종 우혜대우:     국제게으름뱅이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어떻게 현대수법으로 체력을 절약하고 생활절주를 느리게 하여 마음놓고 나름대로 안빈락도를 영위할수 있는 비법들을 배워오게 되며 일단《라태,안일도락의 권리》증서를 발급받은자는 국제라태자기금회에서 보내는 년금으로 생활을 보장받을수 있다. 초생수가 유한하다는것을 명기하라.                                  2006년 9월 10일       
361    콩이냐 팥이냐해도 댓글:  조회:7134  추천:1  2014-05-04
                                                       콩이냐 팥이냐해도                                                                  최 균 선                                 만약 달걀이 표준어냐? 계란이 표준어냐? 닭알이 표준어냐? 라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한다면 소학생도《픽》웃고 돌아설게다. 따져봐야 거기서 거기이고 같고 같아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때문이다. 사실 우리 말에는 달리 표현되는 동일개념이 많고도 많다. 이를테면 강냉이, 옥수수, 옥수끼, 옥씨(사투리), 면화와 목화, 솜, 남새와 채소, 푸성귀, 감자와 마령서와 감재(사투리), 입쌀과 백미, 흰쌀, 국가와 나라…등등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조개떡이나 빈대떡이나 번져놓고 뒤집어 놓아도 그 떡이 그 떡이다. 동질의것이니까,      한국어(조선어)의 호칭문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그 다른 국가나 지역에서 어떻게 호칭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때문이다. 알고보면 이에는 력사적 연원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조선어라는 명칭만 존재했었으나 1948년에 조선어를 공 용어로 하다가 남북에서 동시에 정부를 수립하면서 각국의 공용어를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 다는데서 문제의 발단이 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1949년 건국 당시 조선을 조선반도의 유일정부로 승인하였기 때문에 조선어로 호칭되였다. 하여 우리 중 국조선족은 조선어라고 한다. 그러다가 한국수교후 문화교류가 활성화되면서부터 “한국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러나 조선어가 쓰이는 지역이 력사적으로 조선반도였기때문에 학계 또는 공문서에서 는 조선어라고 부르는것이 관례이다. 한편으로 한국의 지성적인 학자들속에서 한글이라는 명칭의 사용이 잘못되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언어명에 관한 정해진 규칙이 없이 습관적으로 민족명, 국명, 그 언어로 종족을 나타내는 단어등에 “~어”를 붙여서 언어명을 짓는 관례에 지나지 않으며 “한국어”에 대해서도 단지 문자명에 기원한 언어명에 관례가 없다는것이다. 분명한것은 조선조시대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 창제한 글은 조선어이다.    그런데 요즘 조선어(연변조선족어)가 선진적이냐 한국어가 선진적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말씨름이 많은데 이한 문제도 정체상에서 그리고 속성상에서 달걀과 계란문제와 비슷 한 문제가 아닐가싶다. 지방에 따라 형님을 성님이라고 하고 매부를 매형이라 하는데 어느 호칭이 더 문화적이고 선진적인가? 조선반도라는 말은 락후한 개념이고 한반도라 해야 선진적이란 근거가 확실한가? 소고기라 하면 경제락후국의 언어이고 쇠고기라 하면 선진국 냄새가 나는것이냐?     한마디로 조선어나 중국조선어나 한국어의 일부 차이를 비유하건대 함경도 방언과 제주도방언, 평안도말이나 경상도말의 어투, 어조, 일부 단어의 사투리적표현의 차이에 불과할뿐 어휘체계나 음원체계에서 성질상 확 바뀌여 버린것이 아니다. 중국 조선족과 조선사람, 한국사람이 대화할 때 번역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숫구멍에 온기가 없는 사람일것이다. 원인은 자명하다.     여기 중국에서는 상류에서는 금사강이라 부르고 중류에서는 장강이라 부르고 옛날에는 양자강이라고도 하였는데 강이 달라진것은 없다. 중국에서는 도문강이라 하고 조선반도력사에는 두만강으로 새겨지고 장백산이 백두산으로 되고 있는 문제와 같고 같은 문제이다. 죽은 풀어져도 가만안에 있다. 리념문제든 존엄문제든 한 사물에 대한 부동한 명칭을 달더라도 우리는 현실존재 리유를 무시하지 않는다. 아바이라 하면 촌티나고 할아버님 하면 문화적이고 할배라 하면 상놈냄새가 나는지 모를 일이지만도 말이다.    조선반도나 한반도가 나름대로 부르는데 다 맞는 명칭이다. 물론 한반도라 부르 던 때 남북이 갈라진것이 아니니《북한, 남한》이란 명칭은 론거부족이 아닐수 없다. 그처럼 한국어나 조선어나 뿌리가 같고 달린 열매(기본단어군)도 대동소이한 정황하에서 한국어와 조선어를 기본성질상에서 외국어인양 가르는것은 부질없다. 이른바 한국어에 새 단어와 조선어에 생성된 단어와 중국조선족어에서 인입한 많은 단어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표현이 다를뿐 성질은 왕청같은것이 아니다. 콩이야 팥이야 시비했대야 콩이 팥이 될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어떻게 자칭하든 하나의 동일민족이다. 언어상에서도 동일개념을 가지고 편을 가르자니 무중생유의 말썽이 생기는것이다. 외래어람용을 선진화, 세계화한듯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근원적으로 빌어온 고양이는 내집 고양이가 아니며 빌어온 고양이가 알락달락하다고 해서 쥐를 더 멋지게 잡는다는 법이 없다.     언어가 발전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로서의 발전이 아니라 민족정신의 고양과 민족문화전통 등 거창한 문제와 더불어 발전변화 하는것이다. 언어의 발전변화는 단순히 부동한 개념의 인입이 아니라 민족문화의식과 더불어 발전변화는게 법칙이다. 시공간적으로 낡은 서사규범은 어느것이고 새 서사규범은 어느것이라고 누가 딱 부러지게 말할수 있는가?     시간적으로 오랜것이라해서 낡은 서사규범이라 할수 있는가? 중국조선어문법도 건국후 한글맞춤법, 조선의 맞춤법을 가져다 쓰다가 썩 후에야 자기식의 문법규범을 내왔는데 그것도 뛸데없이 원래의 한글맞춤법, 조선어맞줌법에 뿌리를 둔것이다. 문법규칙상에서 근원적으로 신구의 차이를 론할 계제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리조때 국명이 조선이였으니 조선글이라 한것이고 1897년 고종이 국호를《대한제국》이라 개칭하면서 한반도라는 말이 생겨나고 한글이란 말이 뒤따르고 그뒤 현대 한국이 생겨서 한국어라 지칭하게 된것을 력사가 말하고있지 않는가?     고대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어로 대표되는 북방 부여계언어와 신라어로 대표되는 남방한계(韓系)언어로 나뉘였는데 두지역 언어사이에 언어적차이가 있었다. 신라가 반도통합후에 경주방언 중심의 한계, 신라어에 바탕을 둔 중앙어화를 거치게 되였다. 그러다가 고려의 건국으로 조선반도의 언어는 또 다시 조정을 거치게 되였는데 경주중심의 신라어가 개성중심의 고려중앙어로 옮겨지게 되였다. 그것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중앙어로 된다. 결과적으로 현대한국어의 형성은 고려중앙어에서 비롯 되였다고 볼수 있다.     현재 조선의 조선어니, 한국의 한국어니, 중국조선어니 하지만 다 뛸데없는 우리 말, 우리 글이다. 일종 지역적인'방언'차이라고나 할가. 조선어니 한국어니 중국 조선어니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리념적 내지는 정서적으로 주관적인것에 불과하다. 배나무 가지에 사과나무가지를 접목해서 사과배라는것이 생겼지만 고유의 그 뿌리이다.    경제론리에 따라 발전국의 언어가치가 고양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 세상에서 변화발전하지 않는것이란 없다는 시점에서 너무 극단적으로 일변도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돌고돌아서 결국 우리 단군족의 말에 귀속된다. 선진국에 경도되여 언어 문화적가치취향도 결정되겠으나 조선-한국의 전통문화의 우수성에는 우렬이 없고 그것을 모체로 한 중국조선어의 우수성도 마멸될수 없다.     가로뛰나 모로뛰나 언어의 동질성, 민족의 혈연성으로 하여 불가분리적이요 조선어에서 다듬은 극단적인 단어와 중국조선어의 중국식단어, 한국어에 영어식잡탕과 두음법칙의 공연한 오해를 제거하면 남는것이 무엇일가?각자 우결점이 있으니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서로 감싸고 보완하며 동시에 발전할 일이지 내 잘났니, 네 못났니 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는것은 무모한 짓이다.     현재는 서로의 수레를 제 산으로 끌어올리느라 안깐힘을 쓰지만 사회발전의 필연성에 따라 통일의 광장으로 밀고오게 되여있다. 그러니 현재의 명칭을 잠시 승인해 두고 시대발전에 따라 창조되고 인입된 새 단어, 개념들은 수요되는대로 수용하면서 삼각지대에서 공동히 발전시키는것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다. 막대기 두개는 쉽게 넘어지지만 삼각으로 벋쳐놓으면 든든하지 않던가?    누구들이 선호하고 경도되자고 해서 아교풀로 널판지를 붙이듯이 통합될 언어도 아니거니와 원래 정체적으로 통합되여있고, 아니 융합되여 있기에 넘어지고 번져져도 그냥 한함지에 엎어질것이니 시야비야할것 없이 언어발전규률에 따르자. 그리고 시대 의 변이와 발전양상에 발맞추고 호흡을 조절하며 공동히 전진하자. 뭉쳐야 살수 있다. 모래알이 되면 죽게 되여진 오늘 지구촌의 험악한 공기가 아닌가?!                                         2008년 9 월 24 일         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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