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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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댓글:  조회:1116  추천:1  2013-09-02
    7월 중순 동학(同學)들과 함께 중국 요녕성의 심양, 대련, 무순, 본계, 단동 등 주요도시를 방문하였다. 조선족학교와 민족문화예술관을 둘러보며, 대도시의 한족문화권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들이 민족교육과 문화를 유지·계승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하였다. 중국사회가 급격한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최근 더욱 중국사회 전체가 꿈(中國夢)을 이루기 위해, 용광로 속에서 끓고 있는는 듯하였다. 급격한 사회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기는 조선족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전통적인 집거지인 농촌마을이 붕괴되고, 조선족 청장년들은 해외로, 연해지역으로, 동북의 대도시로 뿔뿔히 흩어졌다.조선족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대련, 단동 등 동북의 연해도시에 조선족이 모이면서 새로운 집거지역이 생겼다. 1980년대초 대련의 조선족 인구는 4천명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현재 8만명에 이른다. 조선족 공동체는 급격한 인구이동으로 전통적인 폐쇄적 농촌공동체에서, 산업화·정보화·지구화시대의 유목민적 공동체가 되었다. 대도시로 들어간 조선족들이 과거와 같은 민족특성을 유지하기는 어렵다.연변과 같이 조선족이 모여살면서 거리에서 조선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민족학교가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다. 한어를 써야 하고, 민족학교를 다니기가 쉽지 않다. 부모들은 해외로,연해지방으로 돈벌러 가 아이들은 부모없이 자란다. 동북지방의 대도시에서 어떻게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것인지, 후대의 교육을 어찌 할 것인지 등이 조선족 교육계, 문화계의 고민이다. 단동시조선족문화예술관 복도에 붙어있는 “다녀야 형제고 모여야 동포다”는 표어는 이런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국경도시” 단동(丹東)에는 상이한 출신의 한인계, 즉 조선족, 한국인, 북조선인, 조선화교, 다문화가정의 자녀 등이 어울려 살고 있다. 압록강 하구의 조용한 마을이었던 단동의 변화는 놀랍다. 강을 따라서 줄지어 서 있는 이십여층의 아파트들은 건너편(북조선)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 물밀듯이 들어갈 태세를 갖춘 ‘중국식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축적된 자본이다. 단동의 신개발지인 신구국문항(丹東新區國門港)에 건설 중인 압록강대교는 이미 두개의 중심기둥이 우뚝 섰고, 상판도 거의 이어져, 몇 달 후면 중국의 컨테이너 화물차들이 물밀듯이 신의주로, 평양으로 들어갈 것이다.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고구려시대의 유적으로 알려진 호산장성(虎山長城)이 있다. 이제 중국인민들에게 이 성은 “萬里長城東端起點(동쪽끄뜨머리)”이다. 요녕성 내륙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은 “아름다운 국경도시”에서 모터보트를 탄 채 강 건너 가난한 북조선 마을 둘러보고,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올라 호연지기를 키우는 한편,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에서 미국에 싸워 이겼던 조상들의 얼을 기리며 애국심을 북돋운다. 중국의 국경만들기,역사만들기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여정(旅程)이었다. 함께 꿈꾸며 고민하며 여행했던 네 사람, 즉 단동박사, 북경출신 조선족 교수, 단동의 조선족 사업가, 재미동포 출신 조선족 연구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물론,요녕성의 조선족 선생님들께도. 재외동포신문  
10    走馬觀花 미국여행4-뉴욕 (최우길) 댓글:  조회:2640  추천:129  2007-09-27
走馬觀花 미국여행4-뉴욕최우길1. 2주간의 미국 여행을 정리한다. 2주째 마지막 뉴욕에서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있다. 늘 이렇게 마무리가 시원치 않다. 이제 여름을 끝내고 가을을 맞으려 한다. 이 글을 쓰고 나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8월17일 교토로 돌아온 후 더위와 싸운다는 핑게로 빈둥빈둥 놀면서 지냈다. 이곳이 덥기는 덥다. 35도는 보통이다. 일본 프로야구, 오사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보면서 지냈다. 한국대학은 이미 개학을 했는데, 일본대학은 9월말이 되어야 시작이다. 아직 방학기분이다. 9월부터는 내년에 만날 우리 학생들을 생각하며 책 읽고 글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2. 워싱턴 디씨가 세계정치의 중심이라면, 뉴욕은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특히 맨하탄이 그렇다. 사진으로 보던 자유의 여신상에 가 사진도 찍고 그 옆 섬에 있는 이민사박물관에 가 미국사람과 정신의 기원을 느껴보기도 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가 뉴욕을 내려다 본다. 센트럴 파크, 타임 스퀘어, 뉴요커 호텔 등도 방문하였다. 지하철을 타기도 하고 흑인거리인 할렘가를 거닐기도 한다. 컬럼비아대학은 할렘가 근처에 있다. 뉴욕양키즈 스타디엄에 내려 양키즈팀 기념품도 산다.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거닌다. <맘마미아> 등 요즘 잘 나간다는 뮤지컬 하나 볼까 했으나, 실행은 하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그 수준은 아니다. 32번가 한인가 4거리 우리은행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한국서점에 가 한글책을 뒤적이다가, 한식당 금강산에서 비싼 삼겹살을 먹는다. 센트럴 파크 잔디에 한가로이 누워 주위 마천루를 바라보다가, 자전거를 빌려 공원 안을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메트로폴리턴 박물관에 가 참 많이도 수집해 놓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실은 왜 그리 작은지, 수집품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볼품이 없는지 생각한다. 세계인을 자처하지만, 어딜 가나 출신은 어쩔 수 없음. 맨하턴에서 사흘정도 머물면서 사람들이 왜 미국으로 오는지, 그리고 뉴욕으로 오는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내가 조금만 젊다면 뉴욕에서 살아보려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별난 세상 사람들이, 잘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맨 주먹으로 일어서려는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 아닌가... 3. 뉴욕에는 여행서비스를 하는 박진수 씨가 있습니다. 박선생은 젊은 시절(지금도 젊었지요) 덴마크에서 수년간 생활하다가 200년대초 미국 뉴욕으로 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2남2녀를 두고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두 아들과 함께 그 집 아파트에서 하루 신세 졌습니다. 그 집은 뉴욕 외곽인 플러싱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한인가와 중국인 타운 등이 있는 곳입니다. 뉴욕지역 한인이 20여 만(?) 된다고 하지요. 제가 연구하는 조선족 출신도 뉴욕인근에만 1만명이 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연 플러싱에는 한인들을 위한 대형마켓, 한국 빵집(신라인가 백제인가...), 한글 간판은 수도 없고, 한인교회도 드문드문 보입니다. 좀 오래 머물면 이 곳에서 한인들이랑 조선족(중국출신 코리언)들이 어떻게 어울려 지내는지 보고 싶습니다만... 박선생 덕분에 뉴욕 잘 구경합니다. 2박3일동안 아침에 우리를 맨하탄에 내려놓고, 저녁에는 시간에 맞추어 우리를 픽업하고 하였습니다. 4. 뉴욕에는 제 조카가 있습니다. 작은 누나의 큰 딸인 현주입니다. 위스컨신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가을부터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디자인학교(대단히 유명하다는 데 이름을 잊었음)에 다니게 됩니다. 하루 저녁 만나 한식당 금강산에서 식사하고, 타임스퀘어에서 데이트하였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허드슨강 건너 뉴저지에 있는 아파트에 가 보는 것인데 그랬습니다. 맨하탄에서 지하철로 한 20분도 안 걸린다는데... 뉴욕, 그리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라 쇼핑도 해야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동생들, 일본 사촌들,  친구들 선물도 사야 한답니다. 해 진 후의 타임 스퀘어는 그야말로 자본주의 문명 그 자체라 할 만 하더군요. 네온사인..쇼핑센터, 세계에서 제일 좋은 것, 시원치 않은 것, 비싼 것, 싼 것... 다 있습니다. 뮤지컬의 거리 브로드웨이도 만나지요.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가 그 곳 종업원과 잠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메니저인지 알았습니다만, 그저 종업원이라는군요. 뱅글라데시인인지 스리랑카인인지 입니다. 어디서 왔냐고 하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동생이 한국에 가 수 년 고생하였다. 공장에서 수개월 임금을 받지 못하였다. 참 못 돼 먹었다. 미국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법체류자라고 해도 사용자가 임금을 주지 않으면 경찰이 와서 잡아간다>. 그저 <미안하다...>고 몇 번인가 사죄하였습니다. 사실 미안하기도 하지요. 5.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 일본 한국을 비교하게 됩니다. 미국은 그야말로 풍부한 나라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한 가지 기술로 열심히 하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과 실력, 노력을 높이 사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너무 풍부하게 살아서 썩어가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컬럼비아대학을 방문한 후, 아들에게 <뉴욕에서 공부해 보고 싶지 않은가>고 물으니, <뉴욕은 쓰레기 냄새가 너무 난다>고 합니다. 뉴욕은 자본주의 문명의 최고 뛰어난 모습, 가장 추한 모습이 다 있는 곳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또는 자본주의도 자정(自淨, 스스로 걸르는 능력) 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만... 너무 풍부하게 먹어 대부분 너무 살이 쪘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쓰레기도 분리수거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일본은 분리수거에 철저하지요). 미국은 절제하지 않는, 지나친 소비사회입니다. 일본은 이에 비해 집단사회이고, 구성원들에게 절제를 가르칩니다. 사실 어떤 점에서 일본에서는 절제하지 않으면 살기 어렵습니다. 미국과는 대조적입니다. (이 점은 좀더 관찰하고 비교해 봐야겠습니다만). 그래서 우리 삶의 미래가 미국식이어야 할까, 일본식이어야 할까...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좀 어렵지만 일본식으로 살아야 좀더 많은 사람이 풍족하게 사는 것은 아닐지,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짧은 경험과 식견으로 문명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비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좀더 연구하고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이주일간의 미국여행.. 많은 것 보고 느끼고, 많은 사람 만나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읽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
9    走馬觀花 미국여행3-워싱턴 디씨 (최우길) 댓글:  조회:2752  추천:153  2007-09-20
走馬觀花 미국여행3-워싱턴 디씨 최우길 한국 선문대학교 교수1. 8월12-14일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디씨에 들렀습니다. 12일(일요일) 아침 빅토르씨의 차로 워싱턴으로 향했습니다. 빅토르씨의 위 3형제 유석 유영 희철은 화요일부터 3박4일간 교회수련회가 있다고 함께 갑니다. 메릴랜드주의 평화로운 풍경, 가끔 나타나는 바다 풍경, 도로는 메릴랜드주의 주도 애니아폴리스(미해군본부도 있음) 교회를 지나갑니다. 얼마 안 있어 워싱턴으로 막 들어가는 입구에는 고속도로 옆에 워싱턴 타임즈의 건물이 보입니다. The Washington Times는 The Washington Post와 함께 미국 수도의 주요한 일간지로 문선명 선생이 1980년대 창간한 신문입니다. 냉전 말기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 및 여론을 영향을 주어 소련과의 냉전 대결에서 자유민주주의진영이 승리하는 데 역사적으로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받는 언론입니다. WP(워싱턴 포스트)나 미국의 다른 주요일간지인 The New York Times 가 진보성향의 언론인데 비해 WT는 보수성향의 신문입니다. 워싱턴의 시내 교회 성당 등이 있는 거리에 있는 세계가정연합 워싱턴 본부에 들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배에는 늦어 참석하지 못하고... 교회 건물은 원래 모르몬교의 성전이었는데 가정연합이 오래 전에 구입해 쓰고 있는 역사적인 건물입니다. 하얀 대리석의 아름다운 건물인데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왔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모르몬교도들이 건물을 지으면서 그 본거지인 유타주 솔트레이크시(미국 서부)에서 대리석을 가져와 교회를 지었는데, 동부의 기후에는 맞지 않아 돌이 갈라진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돌이 갈라지고 부스러지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2. 워싱턴은 잘 계획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워싱턴 모뉴먼트(WM)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국회의사당(Capitol), 서쪽에는 링컨기념관이 있고, 그 사이는 잔디밭과 정원입니다. 그 동서길이가 약 6-7km, 너비는 약 5백m 는 될 것 같습니다. WM의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백악관이 있습니다. 그 사이는 모두 잔디밭과 정원입니다. 도시 정가운데 굉장히 넓은 정원이 있는 것이지요. 뉴욕에도 센트럴파크가 있지요. WM 과 Capitol 사이에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 세계적인 박물관 미술관 등이 정연히 널려 있습니다. WM 과 링컨기념관 사이에는 미국건국에 희생한 열사들기념비, 한국전쟁참전비 등이 있습니다. 참 기념을 잘 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는 문화가 대단합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자연사박물관,미국사박물관, 인디언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등을 모두 아우른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잘 보려면 하루는 걸릴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반나절 걸려 Capitol 안을 관람합니다. 테러방지를 위해 경비가 삼엄합니다. 표를 받고 3-40분 기다렸다가 서너번의 검색문을 거쳐 내부로 들어갑니다.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적인 건물이자, 작금 세계정치의 중심이기도 하지요. 2백여년의 역사인데 유물, 유적이 참 많습니다. 기념할 것도 이야기거리도 많습니다. Capitol 입장을 기다리는 중 근처의 식물관을 봅니다. 워싱천의 많은 박물관 중 우리가 관람한 것은 National Gallery of Art, 항공우주박물관, 인디언박물관 등입니다. 워싱턴의 박물관은 모두 입장무료입니다. 미국 다른 곳의 웬만한 박물관은 입장료가 보통 10-20달러이지요.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워싱턴은 박물관만 제대로 보아도 남는 것이라 하는군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는 굉장한 도움이 되겠습니다. 참 부러운 일이지요. 워싱턴을 맛만 본 기분입니다. 다음 기회에는 한 일주일 머물면서 천천히 보고 싶습니다. 마음대로 되지야 않겠지만요. 그런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지요. 3. 워싱턴디씨에서는 정진출씨댁에 머물렀습니다. 진출씨는 우리 과 96학번입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 학교의 자매대학인 미국 브리지포트대학에 진학,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미국 재무사 자격을 취득, 현재 미국식품회사(True World Foods, Inc.)에 근무 중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원리연구회의 통일운동도 열심히 하고 중국 북경에서 열린 북한청년학생과의 만남(청년세미나) 등에도 참석하는 등 열심히 생활하였습니다.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주의 중산층 주택가 아파트를 얻어 예정(초3), 찬욱(5살), 찬호 등 1남2녀를 두고 상냥한 부인과 함께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찬호가 태어난지 이제 2달 정도가 지났습니다. 워싱턴에 도착한 첫날(일요일)은 예정이와 함께 우리를 마중나와 우리를 반나절 백악관 등 시내 주요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날 저녁식사는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주 한인타운에 가 한식부페에서 먹었습니다. 월요일은 아침 출근 길에 우리를 워싱턴 국회의사당(Capitol) 앞에 내려 주고, 퇴근 길에 인디언 박물관 앞에서 우리를 픽업했습니다. 부인은 찬호를 난지 얼마 안됐음에도 우리를 위해 밥, 빨래 등을 해 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예정이는 아주 활발한 아가씨(?)로 오빠(우리 아이들)들과 축구도 하고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월요일 워싱턴 박물관 탐방길에는 함께 하였습니다.    4. 스미소니언박물관 중 항공우주박물관(Air & Space Museum)을 방문하던 중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비행기, 로케트, 우주 관련 과학적인 사안 등을 잘 정리해 놓은 곳입니다. 신기한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어린이들 관람객이 복작복작 많지요. 오래 전 비행기나 우주선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가 어느 우주선 앞을 지나가는 데 동양 아가씨(한국사람이겠지요!) 둘이 "하나 둘 셋" 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저는 장난끼가 발동하여 장단에 맞추어 "넷 다섯.."하며 지나갔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예정이는 나를 따라 오면서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의자에 앉으려 하는데, 동양인 남자 둘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흠찔 하면서 속으로 "왜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가" 생각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교수님..."하였습니다. 저는 "내가 교수인지 어떻게 아는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북한학과 졸업생 최 찬(아마 맞을 것임)입니다. 1학년 때 교수님 수업을 들었습니다. 현재 조지메이슨대학을 다닙니다."하는 게 아닌가요. "동생과 함께 관광 중입니다."하였습니다. 복잡한 와중에 길게 이야기 나눌 겨를은 없었습니다만... "김수민 교수께 안부전해드리지...정진출 군이라고 선배가 워싱턴에 자리잡고 잘 살고 있다. 여기 명함 줄까..."하는 정도로 위로(?)하였습니다. 아이고... 나중에 보니까, 좀 전에 내가 "넷 다섯..."한 그 아가씨들이 최찬군의 동행이었습니다.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나... 예정이랑 우리 아이들이 "낄낄낄..."하면서 나를 놀렸습니다. 어디 가나 "잘 살아야지, 나쁜 짓 하면 안되겠다"고 반성하였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워싱턴에도 나가 자리잡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정진출 선배와 최찬 군에게 축복을!!!조지메이슨대은 나중에 보니까 주영훈인가 하는 작곡가 겸 가수가 다니지도 않은 학교를 다녔다(경제학 전공하였다)고 한 그 학교이군요!        (계속)
8    走馬觀花 미국여행2 - 델마 (최우길) 댓글:  조회:2844  추천:168  2007-09-14
走馬觀花 미국여행2-델마 최우길1. 두번째 방문지는 메릴랜드 주의 델마입니다(8월9-12일). 미국 서부와 동부는 시간이 3시간 다른 것은 물론, 비행기로 5-6시간 정도 걸리더군요. 참 큰 나라지요. 시골 구석구석까지 잘 개발되어 있어 놀랍니다. 미국 전국의 모든 집 마당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요. 가히 <미국문명> 이란 말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델마는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의 시골마을입니다. 이 지역을 <델마바> 지방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델러웨어-메릴랜드-버지니아 세 주의 접경지역으로 그 첫 글자를 따 <델마바>라고 부릅니다. 이 곳에는 친구인 정종남(Victor Jeong)이 삽니다. 일본인 부인(오타 하루미 상)과 아들 5형제(유석-유영-희철-수범-태현)가 있습니다. 2년전인가 아들 하나를 더 낳았는데 아이 없는 집에 양자로 주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한 가정입니다.   2. 우리는 아침 8시30분 비행기로 미국 중부(오대호연안의 디트로이트)를 거쳐 뉴욕의 뉴아크공항에 오후 7시에 내리게 됩니다. 델마까지는 아직도 먼 거리, 워싱턴 가까운 볼티모어까지 밤기차로 오라고 합니다. 뉴아크역에서 1시간 이상 앉아있다가(밤늦어 역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아 대합실에서) 밤 9시 워싱턴행 기차를 타고 11시 30분에야 볼티모어역에 내립니다. 밤늦은 뉴아크역도 그렇고 자정 가까이 내린 볼티모어역도 그렇게 다정하지는 않습니다. 뉴아크역 대합실에는 <집없는 사람>들과 건장한 경찰이 왔다갔다 하며 숨바꼭질을 하는 등 긴장감이 넘칩니다. 낯선 곳에 밤 늦게 내린다는 것... 선입관도 있어서 지나가는 부랑인들이 두렵기도 하지요. 철모르는 두 아들은 긴 여행에 피곤하기도 하겠지요. 보채기도 툴툴 거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볼티모어역이었습니다. 볼티모어에는 두 역이 있더군요. 팬스테이션과 에어포트 스테이션. 우리는 팬역에서 내렸습니다. 우리를 영접하던 빅토르 씨는 우리가 나오지 않자 다음 스테이션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화장실에 갔다가 약간 늦게 나온 것이지. 무슨 일이지 잘 모른 채 역 앞에서 4-50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내린 다른 이들은 택시나, 마중 나온 차를 타고 하나둘 모두 가버리고... 기다리다 지쳐 옆에 서 있던 한 아가씨의 전화를 빌려 통화하였더니, 다음 역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좀 일찍 연락을 할 걸... 미국 동부 대도시, 한밤중 역전앞, 부랑인들이 왔다갔다 하고 가끔 경찰차도 지나가고, 여행가방 든 아시아계 외국인인 듯한 중년이 아이들 둘과 서 있는 모습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좀 아찔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볼티모어는 미국 대도시중 범죄율이 첫째 둘째 하는 곳이라는군요. 그런데 사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야 위험하지 않지요. 볼티모어에서 델마까지는 또 자동차로 2시간 30분여... 고속도로 시골국도를 달려, 도중에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요기도 하고, 3시가 지나서야 시골집에 도착합니다. 3. 빅토르씨와는 1990년대초 유럽에서 만난 사이입니다. 빅토르씨는 독일 쪽에 선교사로 나왔다가 스위스 옆의 작은 나라 리히텐슈타인의 교회 협회장을 지냈습니다. 저는 스위스에서 공부하면서 원리연구회 활동을 했습니다. 1998년인가 박사 마무리 차 스위스를 방문하였다가 가까운 리히텐슈타인에 가 신세를 진 일이 있습니다. 빅토르씨는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해 외국어도 잘 하고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 후 독일 원리연구회의 사업 등을 하였고, 일본-필리핀에서 중고차 수리 및 판매 등의 사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럽에서의 체류가 어렵게 되자 4년 여 전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지금은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의 작은 도시 솔즈베리(Salisbury, 인구 약 15만)에서 작은 정비소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 3년 동안 매우 어렵게 살다가 지난 해부터 좀 나아졌고 집도 1년전 은행융자를 받아 샀다고 합니다. 솔즈베리 교외의 델마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시골집입니다. 시골집이라도 집 앞까지 번듯한 도로(뚝뚝 떨어진 동네 주민들 외에는 통행이 거의 없지요)가 놓여 있어 시내에서 10분 정도면 도달하는 숲속의 전원주택이지요. 좀 오래되었으나 매우 쾌적한 서민들의 마을입니다.  4. 빅토르씨는 <미국에서는 한가지 기술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은 기회가 많은 나라인 것 같습니다. 흔히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지요. 이민의 나라이고, 기회의 나라이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남과 다른 것을 인정해 주는 나라> 입니다. 가난한 집 출신이라도 무엇 하나 잘 하면(리더십 공부 운동 예능 사회봉사 등), 장학금 받아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 집 아이들이 미국 교육의 혜택을 잘 받고 있더군요. 유석은 12학년으로 태권도 잘 하고 내년 존스홉킨스 대학에 진학하고 싶답니다. 학부를 마치고 의과대학원(Medical School, 4년)에 진학할 생각입니다. 9학년인 유석이는 이 지역의 수영대표선수입니다. 6학년 희철은 공부 축구 수영 모두 잘 합니다. 3학년 수범은 지역 유소년 축구의 스타플레이어입니다. 지역유소년 리그에서 한 게임당 평균 3골을 넣는 등 골잡이로서 활약이 대단하답니다. 미국은 학교에서 공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운동, 예능 등 교육을 강조합니다. 또한 리더십, 사회봉사 등을 강조합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과 다른 것을 잘 하는 것을 동등하게 취급해 줍니다. 가령 사회봉사를 1천시간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답니다. 공교육에서 예능 교육을 담당해주니 학부모의 부담은 적습니다. 운동을 시킬 경우도 공부는 반드시 하고 합니다. 축구의 경우 시즌(주로 방학 중)에 경기를 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나 부모에게나 부담이 적습니다. 미국의 교육제도가 흘륭하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으로 이민온다는 게 이해가 됩니다.              5. 델마에서 3박4일을 지내면서 이민가정의 아빠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아빠는 아침 7시-저녁 8시까지 일하고, 엄마는 아이들(아이가 5명이니...) 실어나르고(학교 운동 예능교육 등) 짬이 나면 정비소일(사무)도 돕고 합니다. 우리는 다행히 주말을 끼고 그곳에 갔으니 토요일을 함께 놀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토-일요일도 일하다가 최근에 일요일은 쉽니다. 금요일 저녁 함께 외식하고 근처 교핑몰 구경하고 온 가족과 함께 볼링치고 토요일에는 미국 동부 대서양 해안 오션시티에서 해수욕을 했습니다. 해안이 끝이 안보일 정도로 긴데 파도가 셌습니다. 아이들은 재미있게 놉니다. 여행의 피로를 풀면서 바다와 자연을 즐깁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군요.               6. 다음은 일본에 돌아온 후 제가 빅토르가정에게 보낸 글입니다. 유석 유영 희철 수범 태현 아빠, 엄마...교토입니다. 이제 막 도착하였습니다. 델마, 오션시티, 워싱턴, 뉴욕...뉴욕에서는 힘들기도 했으나, 모두 값진 경험이었습니다.우리 아이들이 델마가 가장 좋았다고 하는군요. 유석이네 나름대로 자리잡고 사는 모습, 보기 참 좋았습니다.감사한 일입니다.  리히텐슈타인이 어제 같지요.유석이 어리지만 으젓하던 모습, 유영이 까불던 모습, 희철이 울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아빠 엄마 티꺽태꺽 사랑싸움(?) 하던 모습도 ... 아이들이 보기 좋게 자랐고...부모들은 중년을 넘겨, 모습은 그대로이나, 그만큼 성숙했고(?)... 세월이 빠르기도 하고 (무상까지는 아직 아님)... 한편 수확을 잘 거두려면 지금부터 모두 잘 하시길 기원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주어진 자리에서 항상 감사하면서, 욕심 부리지 말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델마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지혜를 얻어옵니다.이번 여행에서 얻은 제일 귀한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태현 아빠 엄마도 자부심을 가지고...(늘 그리 하시겠으나, 노파심에서 부탁드림) 하루하루 감사하며 생활하길 기원합니다. 저희 가정도 그리하지요. 하늘로 인한 인연에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아이들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God Bless Your Family !!! (계속) 
7    走馬觀花 미국여행1-LA (최우길) 댓글:  조회:2303  추천:127  2007-09-12
走馬觀花 미국여행1-LA 최우길 # 저는 2007년 8월 3일-17일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의 이모저모와 본 것, 느낀 점 등을 간단히 정리해 올립니다.1.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LA)에서 일주일, 동부인 델마(메릴랜드주), 워싱턴, 뉴욕에서 각각 2박3일 씩 지냈습니다. 델마에서는 미국 시골의 평화로움을 느꼈고, 워싱턴은 세계정치의 중심, 뉴욕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의 거대함, 미국문명의 힘과 허실(虛實)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지인들을 만나 옛 정을 나누는 한편, 그들이 미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배울 수 있어 알찬 경험이었습니다.   2. 미국에 간 것은 조카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큰누님의 첫째(딸)가 8월5일 결혼하였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젊은 남녀의 결합은 보기 좋은 것이었습니다. 모임은 오후 2시-밤 10시까지 결혼식- 피로연- 댄스파티 순으로 LA 교외에서 열렸습니다. 신랑(Paul Lip)은 아버지가 중국계,어머니는 태국계의 아시아계 미국인입니다. 신부(Danielle Hoe. 한국명 허경원)는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부모가 1970년대 중반 미국유학을 가 그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현재 실내디자인 회사에 근무하고, 신랑은 마이크로 소프트계 자회사에 근무합니다. 신랑의 아버지 집안은 기독교 선교사로 태국에 가서 살다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1970년대초 미국으로 이민왔다고 합니다. 신부 아버지는 17-8년 전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큰누님이 홀로 키운 딸이 아름답게 성장하여 결혼하게 되었으니 축하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더우기 신랑도 충실하고 검소한 가정 출신의 착한 청년(?)으로 보여져 감사한 일입니다.            3. 미국에 갈 것인가 좀 고민을 하였습니다. 2007년은 제 안식년으로 우리 가족 모두 일본에 나와 생활하고 있지요. 미국을 혼자 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고, 가족이 모두 움직이는 것은 좀 무리이고(우리 가족이 좀 많지요)... 고민하다가 아들 둘(호재 중3, 준용 초등 6년)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사촌의 결혼을 포함한 이주일 간의 여행이 좋은 경험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4. 결혼식에는 한국에서 신부의 할머니, 고모, 외삼촌 둘(나를 포함하여), 이모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신랑 측은 아버지 형제(3)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형제(2남2녀)가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결혼식 다음날(8월6일)은 우리 형제들이 LA 근교 한국인이 많이 사는 오렌지 카운티의 한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즐겼습니다. 저는 잘 치지 못합니다만... 미국에서 골프는 대중운동이지요. 덕분에 형제들과 담소하며 반나절 푸른 잔디 위를 잘 거닐었습니다. 5. 8월 7일-8일은 아이들을 위해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방문하였습니다. LA는 할리우드로 유명하고,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The Entertainment Capital of LA 라는 이름으로 자랑하더군요. 양쪽 모두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그야말로 풍부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미국 각지, 아니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 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만명씩 들기는 것을 보면 참 잘 만들어 놓기도, 투자를 잘 하기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를 타기 위해 최소 30분, 최대 90분씩 기다리면서도 질서있게 즐기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LA지역은 비도 별로 없고 약간 더운 정도였으나, 날씨가 일년 내내 좋다고 합니다. 특히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면서, 특수효과 등을 아이들의 흥미를 끌도록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겠지요. 올 가을에는 우리 딸들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에 꼭 가야겠습니다.       (계속)
6    새해 희망 찾기 댓글:  조회:1857  추천:146  2007-04-04
                                새해 희망 찾기                                                         최우길   새해가 밝았다. 본래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사람들은 새해라고 가름한다. 새 날의 시작이라니, 좋기는 좋다. 부끄러운 과거를 잊고 새 출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날을 정리해 보자. 아름다운 새 날을 그려 보자.내 마음이 얼마나 평화로웠는가. 분수를 넘는 욕심, 괜한 시기와 질투로 잠 못 이루지는 않았는가. 내 좁은 소견으로 세상사를 재단하지 않았는가. 내 기분대로 행동함으로써 상대의 심정을 유린한 일은 없었는가. 이웃들에게 나는 얼마나 좋은 벗이었던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나는 어떠한 노력을 했는가.올해는 “기본으로 돌아가 진실함에서 출발하자”를 표어로 삼을 만하다. 옛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날마다 세 번 내 몸을 살폈다(三省吾身). 그 날 행한 일 가운데 정성을 다해 남의 일을 도와주었는가. 친구에게 믿음이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가. 스승의 가르침을 잘 배웠는가. 세 가지를 반성했다. 우리도 일일삼성(一日三省)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거짓과 허위가 자리 잡을 틈이 없을 것이다.우리 공동체는 어떠한가. 가족, 학교, 나라에 거짓은 없는가.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운가. 학생은 학생답고 선생은 선생다운가. 노동자는 노동자답고 경영자는 경영자다운가. 국민은 국민답고 지도자는 지도자다운가.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기보다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 반성할 일이다.어느 신문은 ‘개띠 해 5계명’을 제시하면서 새해에는 “개처럼 살라” 한다. 새해에는 ‘개처럼’ 철저하게 이 순간에 충실하고 나중으로 미루지 말자. 날마다 새로운 흥미를 갖고 즐겁게 놀자. 새해에는 ‘개처럼’ 신명나고 즐겁게 일하자. ‘개처럼’ 힘들어도 웃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우리 모두 새해에는 “개처럼 살자!”새해에는 무엇보다 희망을 이야기하자. 나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존재임을 인식하자. 우리 학교의 ‘애천·애인·애국’의 건학이념을 자랑하자. 우리 겨레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약소민족에게 희망과 꿈을 주는 생명의 공동체임을 자긍하자. 세상은 서로 도우며 살고(共生), 함께 번영하며(共榮), 더불어 참됨을 찾아갈 것(共義)임을 희망하자. 2006/01/03  선문대신문
5    '좋은 맘과 뜻으로’ 동포들의 맘에 상처 주는 일이 없기를 댓글:  조회:2102  추천:139  2007-02-20
[82호] 2007년 02월 15일 (목) 17:30:19 최우길 woogill@hanmail.net “好心好意辦錯事.”(하오신하오이 빤추어쓰)  “좋은 맘 좋은 뜻으로 일을 그르친다.”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방문취업제 말이다. 김일남 회장(중국동포협회)은 이렇게 한 마디로 방문취업제를 평가한다.  이 제도의 취지는 재외동포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국과 구소련지역 등 소외된 지역의 동포들에게 출입국 및 취업의 기회를 확대하여 그들을 포용하자는 것이다. 늦기는 한참 늦었지만 그 동안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좋은 맘과 뜻’은 이해할 만 하다. 이 제도는 중국 및 구소련 동포들이 법이 정한 ‘정당한 재외동포’로 인정받아 자유왕래가 전면 실시되기 전까지의 잠정적인 조치일 것이다. 입안을 주도한 법무부는 이 제도가 “희망을 여는 약속”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전개되는 상황은 우리에게 반드시 희망을 열게 하지는 않는다. 방문취업제의 핵심인 한국어시험부터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신청자가 몰려들 것이니, 한국어 시험을 통해 자격을 갖춘 사람을 선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도가 시행되기도 전에 시험을 둘러싼 잡음들이 들려오고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서는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조선말이 아니라, ‘한국어’를 잘 해야 한다”면서 학원을 차려 놓고 3주 강의에 5천 위엔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방문취업제로 오려는 동포들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일 터인데, 작은 돈이 아니다. 최근 연변자치주 공안국은 방문취업제를 이용한 사기 피해가 늘고 있다면서 대중에게 경고하고 있다. 좋은 맘과 뜻으로 의도된 정책이 다시 한 번 사기꾼들이 날뛸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이 제도의 대부분 수혜자일 농촌의 재중동포들은 대부분 우리말과 글을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 와서 일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구태여 한국말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우습다. 50점을 맞으면 자격을 준다는 시험을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써가면서 치를 이유가 없다. 자격자 중 추첨을 통해 방문취업자를 선정한다는데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따로 없다. 지난 9일 동포문제 관련 민간단체들은 공동으로 <방문취업제 어떻게 시행되나>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막상 제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될지 설명해야 할 당국자는 보이지 않았다. 민간단체와 동포들만 모여서 정책의 문제를 지적하고 정부를 성토하는 장이 되었다. 책임 있는 답변이 있을 리 없었다. 방문취업제가 3월부터 시행된다고 하더니, 최근 보도는 한국어시험이 9월이 되어야 실시된다고 한다.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망가지는 것은 동포들의 삶이다. 최근 ‘여수참사’를 들지 않더라도, 그동안 중국 동포들이 한국과의 관계에서 치른 비용은 만만치 않다. 돈 문제만이면 괜찮겠으나, 마음이 멀어지고 멍들고,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것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동포들은 한국정부의 정책을 “콩으로 메주 쑨다 해도 곧이듣지 않는다.” 상책(上策)은 자유왕래를 빠른 시일 안에 시행하는 것이다. 차선책은 부작용이 불 보듯 뻔한 한국어시험을 고집하기보다, 한국과 연고가 없는 젊은 농촌총각과 사기피해자 등을 먼저 오게 하는 방법 등 보다 나은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정부당국자들은 그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 온 민간단체의 전문가 및 동포들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좋은 맘과 뜻으로’ 다시 한 번 동포들의 맘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4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민족교육의 과제 댓글:  조회:1843  추천:90  2007-02-20
조선족 사회의 변화와 민족교육의 과제  2006/08/26 흑룡강신문 1. 들어가는 글   ‘격변하는 조선족 사회’라는 말은 이제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익숙한 구절이 되었다. 조선족 사회는 불과 십여 년 동안 농업사회에서 산업 및 서비스 중심사회로 변모하였고, 이제는 정보사회 또는 지구촌사회로 급격하게 나아가고 있다. 중국 정부가 개혁 개방정책을 채택한 지난 30년 동안 중국 전체 사회의 변화도 대단히 컸지만, 인구의 국내 또는 해외로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국 조선족 사회의 급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90년대 조선족 사회는 가히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그 방향이 어딘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조선족 지식인들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歸宿은 어디인가”(1995년 흑룡강신문사 특집보도)라는 물음을 던질 정도로 변화의 돌풍은 대단하였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부정적인 시각에서 ‘조선족 사회 붕괴론’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지만, 한편 중립적인 견해로서 ‘사회발전 불가피론’ 또는 ‘사회변화 적응론’도 대두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조선족 사회는 그 동안 개혁 개방 및 사회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조선족 연구가들은 조선족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구촌 시대 조선족 기여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진단하고, 지구촌 시대의 조선족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민족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술하고자 한다. 교육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육의 과제를 논하기에 앞서 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필자는 우선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중국 조선족은 동아시아 조선족으로, 나아가 지구촌 시대 조선족으로 진전하고 있다”는 명제로 설명하고자 한다. 지구촌 시대의 조선족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민족교육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필자의 능력 범위에서 나름대로 제시할 것이다.   2. 조선족 사회의 변화: ‘중국 조선족’에서 ‘동아시아 조선족’으로   우선 개인적인 경험 몇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논의를 전개해 보자. 나는 지난해 말과 올해 조선족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모임에 몇 차례 참석하였다. 첫째 모임은 일본의 중국조선족연구회(회장 이강철)가 도쿄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였다. ‘在日本中國朝鮮族’이 주도하는 이 모임은 1999년 결성 이후 매년 5~6차례 보고회를 갖는 등 꾸준히 활동을 해오다가,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현재 일본에는 4~5만명의 중국조선족이 있으며, 이들 중에는 사업가, 교수, 연구생 등으로 일본 사회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많다. 이 회의는 ‘다문화사회에서의 민족교육’을 주제로, 조선족 학자와 사업가는 물론, 일본인 및 재일동포 학자, 브라질 국적 日系人, 재일 화교, 중국 및 한국학자 등이 참석해 알찬 발표와 열띤 토론을 펼쳤다. 중국조선족연구회는 ‘在日조선족’이 중심이 되어 ‘다문화 다국적 공동체로서의 일본과 동아시아’를 고민하고 있었다. 중국조선족연구회는 이 회의의 결과를 정리하여 올 7월 '朝鮮族의 글로벌한 移動과 國際네트워크'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하였다. 在日朝鮮族은 天池協會, 延邊大學友會 등 여러 형태의 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두 번째 모임은 ‘在韓조선족 유학생네트워크(KCN)’의 모임이었다. 설립 2주년을 맞이한 이 모임은, 그동안 악화되어 온 한국사회와 조선족간의 불협화음을 조율하려는, ‘在韓조선족’ 엘리트들의 목소리 내기 시도라 할 만하다. 유학생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할 문제를 토론하면서, 재한 조선족사회의 발전 및 한국사회와의 상호이해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이 모임은 한국 내의 중국동포문제를 다루는 많은 시민단체(NGO) 등과 교류 협력하면서 한국에서의 소수자 인권보호 및 다문화사회 진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 번째 모임은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하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가 주최한 교포정책포럼이었다. 포럼에는 재미동포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 재일동포로서 세계적 부호 한창우 회장, 중국 작가협회 김 철 중앙위원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 재외동포사회의 다양성과 의미를 깨닫게 하고 한국정부의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과 정책의 개선을 촉구하는 좋은 기회였다.   마지막 모임은 올 6월말에는 북경사범대학에서 개최한 ‘동북아지역화논단: 동북아지역화와 민족주의’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중국 · 일본 · 북조선 · 한국의 4개국 교수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조선족 교수들이 회의의 실무와 통역을 맡아 노력하였다. 회의 조직은 연변대 교수, 통역은 중앙민족대학의 조선족 학생과 북경사대의 사학교수 한 분이(모두 조선족) 맡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최근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아시아 삼국 국영 TV 방송국(중국의 CCTV, 일본의 NHK, 한국의 KBS 등)들의 국제회의에서 각국 대표들은 자기 나라 말을 하는 가운데, 在日 朝鮮族 유학생들이 삼국 사이의 통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바 있는 나로서는 북경사범대학 회의에서 조선족이 동아시아 삼국 간 이해와 협력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는 ‘동아시아의 조선족’이라는 화두를 생각하였다. ‘朝鮮族’은 이제 단순히 ‘중국의 조선족’이라거나 한반도 재외동포의 일원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선족은 지구화 시대, 새로운 동아시아 시대의 교량역할을 할 사람들이다. 새로운 공간이 짜여지는 시대, ‘가깝지만 먼 이웃’들인 중국, 일본, 한반도를 누가 이어줄 것인가. 나는 감히 ‘동아시아 조선족’이 상호이해와 소통의 다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선족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가랑잎처럼, 바람꽃처럼 흩날리며 떠돌았다. 이제 그들은 역사의 주역으로, 和同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는 평화와 화해의 ‘열린 동아시아 시대’를 기원한다. 한반도가 통일되고, 중국 일본 몽골 한국 등 지역국가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동아시아인’으로 함께 사이좋게 살기를 기대한다. 조선족은 ‘중국조선족’에서 ‘在日조선족’, ‘在韓 조선족’을 넘어 ‘동아시아 조선족’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3. 지구촌 시대의 조선족 사회   조선족의 분포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흑룡강신문사가 2005년 특별기획으로 “중국 조선족사회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제목 아래 조선족 인구의 중국 국내 도시이동 실태에 대해 취재한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사실 이 취재가 보다 완전하려면 조선족 인구의 국내이동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확산을 덧붙여야 했다. 조선족은 한국에 거주하는 15~20만명, 일본 4~5만명, 러시아 5~8만명, 미국 5만명, 중동 4~5만명 등 약 40만명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해외로 나간 조선족 중에는 중국으로 돌아올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 일본 미국 등의 조선족은 이미 현지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그들은 ‘중국출신의 조선족’이지만 더 이상 ‘중국조선족’이 아니라, ‘在韓조선족’, ‘在日조선족’ 등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최근 뉴욕 조선족 사회의 활동에 대한 뉴욕조선족통신(nykca.com)은 1990년대 초 이래 미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들이 어떻게 생존과 생활을 위해 모임을 만들고 조직 및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지, 또한 한인지역사회 및 화인사회에 참여하고 있는지 보도하고 있다. 이 예는 조선족이 어떻게 글로벌 사회에 진출하여 나름대로의 네트워크를 만들면서 적응해 생활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흑룡강신문사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 조선족 사회는 전통적인 거주지인 동북 3성(내몽골 지역 포함 약 120만명)을 비롯, 華南지역(深圳 廣州 등지 6만명-한국인 4만 명), 華東지역(上海 南京 등지 8만5천명-한국인 6만명), 山東지역(靑島 威海 등지 18만명-한국인 12만명), 수도권지역(北京 天津 등지 17만명-한국인 12.5만명) 등 5대 집거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서부대개발 사업의 진전으로 成都, 西安 등지에도 2만명이 사는 집거 지역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중국의 5대 경제구역에 조선족이 분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족 인구의 확산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중국 경제가 세계화함에 따라 전 지구적 구조와 맞물려 있다. 조선족 인구의 전 지구적인 확산은 海外韓人사회의 존재 및 華人-華僑 네트워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렇듯 조선족의 생활공간은 이미 세계화하였다. 2백만명의 조선족 인구 중에서 50만명 이상이 동북지방 이외의 수도권 및 연해지방을 생활근거지로 살아가고 있고, 40만명 이상이 해외로 진출하였다는 것은 조선족의 생활공간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흑룡강성 영안 출신 어느 在韓朝鮮族 인사의 경우, 두 자녀 중 한 자녀는 미국 유학 중, 다른 한 자녀는 연해지방의 한국회사에 근무 중이며, 부인은 동북의 대도시에 진출하여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예는 조선족 가정의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족은 어느 인구집단 보다 지구화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족 사회의 변화를 在日 중국조선족연구회의 이강철 회장은 발전단계 측면에서 朝鮮人(前朝鮮族段階, 19세기후반-20세기전반) -> 中國朝鮮族段階(1950-80년대) -> 後朝鮮族段階(1990년대 이후)로 나누고, 그 성격을 로칼(동북)조선족 -> 국가적(내쇼날)조선족 -> 지역적(동아시아)조선족 -> 글로벌조선족으로 설명하면서, “조선족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지방에서 세계로 이행하고 있다”고 논술하고 있는데 의미 있는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조선족의 다중적 성격과 重層적 구도는 해외 코리안 네트워크 및 화교-화인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조선족’ 및 ‘글로벌 조선족’을 논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글로벌화하는 조선족 사회에서 후대의 교육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4. 민족교육의 과제   조선족 민족교육은 사회의 변화가 급격한 만큼 위기에 처해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 농촌지역 민족학교 수의 감소, 전통적 집거지역에서 후세들이 민족학교를 떠나는 현상, 새로운 집거지역 민족교육의 부재, 민족언어 상실현상, 이중언어 사용으로 인한 교육부담 과중의 문제, 민족교육 내용의 부족문제 등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여기에서는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조선족 교육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도록 한다.   우선 조선족 사회가 ‘동아시아 조선족’ 또는 ‘지구화한 조선족’으로 나가기 위해서 多文化主義 교육이 필요하다. 다문화주의라는 것은 “한 국가 내부에 복수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인정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문화적 사회적 불평등의 시정을 정부 정책의 방향으로 삼는 주의”를 말한다. 중국은 다민족국가로서, 소수민족 정책의 근본줄기인 소수민족문화의 보호, 민족언어 사용권의 보장, 소수민족의 풍습 및 종교신앙의 존중 등을 잘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一民族突出型多民族國家’로서 ‘中華民族多元的一體格局’을 강조하는 점, ‘中華民族主義’를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근대국민국가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점, 중화민족주의는 사실 단일민족적 관념이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선진국들의 다문화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정치발전 단계 및 국제정치 상황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는 만큼 여기서 다룰 성질의 문제는 아니다.   조선족의 민족교육과 관련해 지적할 것은, 조선족 교육계가 주어진 현실 안에서 동아시아 공동체가 가능한 시대,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국경, 민족,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는 ‘지구적 시민’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在日조선인학자 權香淑 등의 在日本中國朝鮮族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젊은 부부들은 “자녀들에게 어떤 교육을 받게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70.0%가 多文化-多言語敎育, 14.2%가 조선족으로서의 교육, 7.5%가 중국인으로서의 교육을 시키겠다고 응답하고 있다. 재일조선족 젊은이들은 다문화적 다언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민족교육의 경우, 중국 정부가 부여한 자치권의 범위 안에서 가능한 민족교육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국학자들이 행한 조선족 사회 및 교육조사는 조선족 어린이들의 민족 역사에 대한 지식이 대단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조선족 후세들이 세종대왕, 이순신 등 민족위인을 모른다고 한다. 한글은 민족언어이며, 언어는 민족정신의 표현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분이며,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존재를 가능케 한 분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민족언어를 잊으면 안됨은 물론, 언어라는 형식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현재 민족학교에서는 중국 조선족의 역사도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 및 언어교육을 어떻게 하면 좀더 잘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5. 나오는 글   이 글은 조선족 사회의 변화가 중국조선족을 ‘동아시아 조선족’ 나아가 ‘지구촌의 조선족’으로 진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지구촌의 조선족은 華僑 華人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지구촌 朝鮮人(韓人)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하다. 조선족이 생활공간은 이제 세계화하였고, 조선족은 그 존재 자체가 多重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은 ‘새로운 세기, 열린 공동체’의 가능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집단이다. 몇몇 일본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공동의 집’을 제안하기도 하고, 한국의 지식인들도 ‘다국적 민족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중국도 국제무대에서 多者主義的 접근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선족은 한반도의 통합과정에 이미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 일본 한반도의 상호이해 및 협력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유럽을 비롯한 다른 지역은 脫近代를 이야기하며 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지역통합의 시대를 열고 있는데, 동아시아 지역은 ‘新民族主義의 등장’을 염려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비극은 단일민족적 관념을 가진 가장 큰 나라들이 여전히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경을 넘어 사는 華人 또는 韓人, 특히 조선족의 존재는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조선족의 민족교육은 위와 같은 포부를 가지고 기획되어야 한다. 지구화는 통합의 방향 뿐 아니라, 破片化를 낳기도 한다. 글로칼라이제이션(Glocalization, 세계화와 지방화를 합친 造語)이라는 말이나,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nd act locally.)”라는 충고는 지구화와 파편화가 함께 옴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계의 시민’이 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남는 것이다. 건전한 지구화 교육은 알찬 민족교육의 터전 위에 가능한 것이다. 민족언어, 문화, 역사에 관한 교육이 없이는 정체성이 확고한 ‘세계적 시민’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민족교육이 ‘통일적 다민족국가’ 중국의 국가교육을 바탕으로 하되, 민족자치의 범위 내에서 내용이 충실한 민족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최우길  
3    정판룡선생과의 만남 댓글:  조회:1667  추천:74  2007-02-20
          최우길입니다. 저는 선문대학교 국제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국의 민족문제 민족정책 조선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2001년 4월말부터 5월초까지 일주일 동안 중국 동북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심양, 연길 그리고 두만강 유역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4월 마지막 날 오후 두 시간 가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州都 연길에서 연변대학의 정판룡 교수를 만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광규 교수님(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재외동포사업본부의 일꾼들과 함께 정교수님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다음은 정교수과 우리 팀과의 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지성인 중 가장 존경받는 분으로 본인의 삶과 조선족 사회 변화와 전망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에게 모두 알리고 싶어서 정교수님과의 만남을 정리하였습니다. 정리된 글은 최우길의 기억과 기록에 따른 것이므로 잘 못 이해하거나 정리된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정교수와의 만남이 이렇게 밝혀지는 에 대해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았음을 밝혀 둡니다. 다만,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을 밝힙니다. 기록은 존칭을 생략하고, 말씀을 비교적 단순화법으로 전달하겠습니다. 1. 자신의 근황에 관하여: 1999년부터 햇수로 3년째 장암으로 고생하고 있다. 北京의사들은 암진단을 하면서, 3개월 정도 살 수 있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죽다가 살아났다. 아니, 지금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을 천천히 가고 있다고 할까. 딱 체념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놓이더라. 글도 써야 하고 대학원생들도 졸업시켜야 하고, 죽음은 잊고 열심히 글쓰고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올 여름 고희 기념문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현재 장백산 등 두 개의 문예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 4월초 북경을 다녀왔다.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작가상’을 준다고 하기에 다녀왔다. 무리한 것 같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또 다르다. 김학철 선생님은 86세 이신데 불구하고, 아직 펜을 놓지 않고 계신다. 대단한 분이다. 그 분에 비하면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겁이 없어졌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겁이 없어진다. 2. 조선족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중국 사회는 총적으로 격변기에 있다.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화는 격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족 사회도 진통을 앓고 있다. 19세기말 20세기초 한반도에서 조선사람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올 때, 주로 그들은 단순한 농민들이었다. 농경문화와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한 토박이들이었다. 잘 살아보겠다고 온 것이고, 개혁 개방 전까지 잘 하기는 잘 했다(항일투쟁, 교육 등). 문이 열리자, ‘우리가 제일 못 사는구나’하는 ‘민족적 자각’에 이르게 되었다. 연변 사람들 ‘우리도 잘 살아야겠다’ ‘돈 벌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연변은 이제 더 이상 조선족의 최대집거지구가 아니다. 대련 단동 천진 청도를 잇는 발해만지구에 조선족 인구가 더 많게 될 것이다. 지금 정확한 통계는 아무도 모른다. 농촌을 기반으로 했던 조선족의 이민사는 이제 ‘도시로 나가는 붐’으로 다시 쓰여져야 한다. 이제 전 세계에 한민족(한국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조선족이 있다. 조선족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한국으로 나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돌려세울 힘은 없다. 한 10년은 이 상태로 끌려갈 것이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혹자는 ‘조선족은 망한다’라고도 하고, 혹자는 ‘조선족 사회가 앓고 있다’라고도 한다. 또는 ‘조선족 사회는 필연적인 진화과정에 놓여 있다’고도 한다. 망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심하게 앓고 있지만, 필연적인 과정이 아닐까. 3. 조선족 사회에 대한 전망: 첫째, ‘한국바람’이 앞으로 십 년은 지속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소득격차가 있는 한 노무수출은 막을 수 없다. 중국 정부도 장려하는 바이다. 조선족 자신으로는 이제 습관이 되었다. 둘째, 도시로 나가는 추세도 되돌릴 수 없다. 도시로 나가서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한 10년이면 큰 부자들이 나올 것이다. 돈 벌고 나면 “이 돈으로 무얼 하지.. 우리 민족을 위해 무얼 할까...”하는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러면 조선족 사회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 인구 감소도 그리 걱정할 것만은 아니다. 조선족 인구가 일 년에 약 1만명이 감소하고 있고, 연변의 조선족 인구는 일 년에 약 5천명 정도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반가운 현상은 연변에서 살고 이 곳에서 죽겠다는 準조선족이 많이 생기고 있다. 해외에서 이 곳에 와 살다보니 정이 드는 것이다. 사실 류연산이 ‘혈연의 강’에서 쓰고 있듯이, 조선사람은 유사이래 이 곳에서 늘 살아왔다. 없는가 하면 있다가, 있는가 하면 또 없다가 하면서 흑룡강-송화강-두만강-압록강에서 살아왔다. 조선족은 농촌을 떠나는 반면, 한국사람이 도시에 가득하고, 북조선사람들이 시골과 산골에 가득하다. 조선말은 잃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족은 조선말을 잃어 가는데, 중국에서 한국말의 값어치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말 배우기에 열심이다. 총적으로 보면, 중국 조선족 사회는 한 십 년은 이런 저런 얘기도 많고 탈도 많을 것이지만, 십 년 지나면 비교적 안정을 찾아 지금보다 잘 살게 될 것이다. 4. 조선족자치주의 미래에 관하여: 조선족자치주는 중국으 민족정책이 수요하는 것이다.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지나친 것이다.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우대는 중국의 자랑이다. 민족교육을 계속할 것이고 민족학교도 없애지 못한다. 학생이 한 명만 남더라도 지속할 것이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의 경우, 조선족들은 자치현 않겠다는데, 중국 정부에서 계속하는 것이다. 민족자치는 중국의 國策이다. 5. 두만강개발계획에 관하여: 유엔이 나서서 시도하였던 건설계획은 잘 된 게 없다는 것이 세론이다. 두만강개발계획은 90년대 초부터 유엔개발계획(UNDP)가 나서서 시작한 것인데 지지부진하다. 중구은 동해로의 출구가 없으므로 이 계획을 통해 동해와 태평양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중국이 제일 적극적이다. 북조선은 경황이 없고, 러시아는 소극적이다. 일본과 한국의 자본도 아직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유엔에서 시작한 것이므로 계속되기는 하겠지만, 낙관적이지는 않다. 중국 정부는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훈춘시에 2000년 14개 개방도시 중 하나로 권리를 주는 등 적극적이다. 6. 연변경제에 대한 전망: 최근 재정이 많이 나아지고 있다. 공산당이 경제에 성과를 보고 있다. 간부들의 봉급이 4-5백원 오른다. 퇴직한 사람도 2백원 오른다. 아직 부족하지만 상당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 영도하의 정치가 지속될 것이다. 경제가 나아지는 한,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연변의 경우도 한국이 어려우면 직접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서서히 자생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7. 민족개조론에 관하여: 최근 연변에서는 ‘김문학 현상’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문예지 장백산에 연재되고 있는 그의 ‘민족개조론’이 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리가 없지 않은 면도 있다. 그러나, 매도하기 보다는 건전하게 비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2    조선족의 사명 댓글:  조회:1839  추천:103  2007-02-20
* '중국동포타운신문'이라고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사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발행되는 신문입니다. 2004년 9월말 특집호를 낸다고 글을 부탁해 와 한 마디 썼습니다.‘동아시아 공동의 집’과 조선족의 사명중국과 한국 사이에 고구려 역사논쟁이 뜨겁다. 최근 한국언론은 간도의 귀속문제를 심심치 않게 제기하고 있다. 고대사문제에 영토분쟁까지 불거질 전망이다. 지난 수년 동안 재외동포법 문제, 불법체류문제, 한국체류 조선족의 한국적 신청문제 등으로 재중동포들의 삶은 대단히 고단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서 조선족은 그리 편안할 것 같지 않다.역사의 고비마다 우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자각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미래를 기약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조선족’ 또는 ‘한국에 사는 조선족’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과거의 공적은 잠시 덮어두고, 보다 나은 앞날을 기대하면서 미래의 모습을 짚어보자.첫째, 우리는 민족국가시대를 넘는 새로운 동아시아의 시대의 교량역할을 할 사람이다. 바야흐로 세계화․지구화 시대라고 한다. 국경이 의미를 잃는 시대, 사람․자본․상품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시대이다. 지리적 공간이 새롭게 구성되는 시대이다. 유럽대륙은 이미 국민국가의 시대를 넘어서 유럽연합(EU)을 이루고 연방국가의 수립을 꾀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미래도 유럽을 쫒을 것이다. 누가 중국․한국․일본을 이어줄 것인가. 바로 조선족와 재일교포들이다. 제대로 된 통역과 번역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백 수십 년 또는 수십 년, 중국과 일본 땅에 살면서 그 곳 문화와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아직도 민족주의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시켜 줄 아교가 바로 우리들이다. 역사의 풍랑 속에서 가랑잎처럼 바람꽃처럼 흩날리며 떠돌던 우리들이 이제 역사의 주역으로, 화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둘째, 우리는 남북통일을 위해 한반도에 다가온 사람들이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가 가능하려면, 우선 한반도에서 남북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북조선과 한국을 공히 이해한다. 양쪽에 친척과 친지들이 있다. 한국동포들에게 묻는다. 조선족 2백만을 보듬지 못하는 너희들이 어찌 감히 북조선 2천만 동포와 통일하겠다고 하느냐. 우리들이 십수년 전부터 ‘통일의 전령’으로 한국에 왔으되 너희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북쪽 동포에게도 충고한다. 더 이상 늦기 전에 우리를 따라 배우라. 개혁․개방을 통해 새 시대를 호흡하라.셋째, 우리는 한국과 관계를 맺으면서 중소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한 일을 벌써 잊었으리라.우리는 열린 동아시아 시대를 기원한다. 한반도가 통일되고, 중국․일본․한국․러시아․몽골 등 지역국가들이 공동체를 이룩하고 ‘동아시아인’으로 함께 사이좋게 살기를 기대한다. 그 날이 오면 동북 3성은 그 중심이 된다. 중국 조선족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듯이, 새 시대의 선도자가 될 것이다. 미래는 분명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좁은 민족주의․국가주의의 틀을 넘어 함께 ‘共生․共榮․共義의 집’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오늘 성심껏 준비할 것이다.
1    프로필 댓글:  조회:1780  추천:96  200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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