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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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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월드컵단상(4) 훌리건과 붉은 악마 댓글:  조회:2844  추천:73  2007-06-29
월드컵 단상 4  훌리건과 붉은 악마  . 하나.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중에도 축구는 나온다. 그런데 << 멕베스>>, <<햄릿>>, <<오셀로>>와 함께  4대 비극이라 불리는, <<리어왕>>중에서 축구는 불미한 모습, 즉 상대를 욕하는 뜻으로 나온다. 중세기,  잉글랜드 축구는 매우 거칠고 격렬했다. 선수들끼리도 공을 쟁탈하기위해 격투를 서슴치 않았고 경기의 승패에 따라 팬들의 싸움이 이어져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되곤했다. 그래서 당시 상대를 욕하는 거칠은 욕설로는 <<이 축구쟁이야!>>였다고 한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축구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1314년 축구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당시 상황이 쉑스피어의 작품에 투영되였던것이다.     쉑스피어의 작품중의 야비한<<축구쟁이>>들을 오늘에도 찾아볼수 있다.  바로 축구장 분위기를 수은주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훌리건들이다. 훌리건(Hooligan)이란, 19세기 말 영국 런던의 한 뮤직홀에서 난동을 일으킨 아일랜드 출신 불량배에서 유래한다. 근대에도 훌리건들의 난동은 류혈참사는 물론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1964년 페루-아르헨티나의 리마경기 때 300여명 사망,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축구전쟁, 1985년 벨기에 브뤼셀 하이젤경기장에서 영국 훌리건 난동으로 스탠드가 붕괴되어 40여 명이 사상한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려됐던 훌리건들의 난동이 끝내는 일고 말았다. 25일 새벽, 독일이 스웨덴과의 16강전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뒀을때 경기를 시청하던 독일인들이 환호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잉글랜드팬들이 플라스틱 의자와 병을 집어던지며 공격했다. 이에 독일팬들도 반격을 가했고 결국 상황은 대규모 패싸움으로 바뀌었다. 수천명이 가담한 이날 폭력사태는 결국 독일경찰들이 투입된 뒤에야 중단됐다.  경찰은 폭력에 가담한 200명 이상을 연행해 조사에 들어갔다. 전날에도 지나가는 행인에게 병과 유리 등을 던진 혐의로 잉글랜드인이 무려 122명이나 체포되는 등  훌리건들의 난동에 월드컵은 골치를 썩이고 있다. . 둘 . 공무차로 서울에 갔다가 한국과 토고전이 펼쳐지기 전날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붉은 악마 셔츠 몇벌을 사가지고 돌아와 친지와 동료들에게 선물했다. 그만큼 그동안 한국에서 느낀 <<붉은 악마>>의 열기는 한 이국나그네를 감화시키기에 족했다. 2002년 한일 량국이 공동 개최한 제 24회 월드컵 대회때 한국의 응원단 소위 <<붉은 악마>>가 첫 모습을 보였다. 그때 전 세계에 붉은 악마의 모습과 함성을 깊이 각인시켰던 한국의 열정적인 응원문화가 이번 2006 독일월드컵에도 전 세계를 강타했다. 붉은 악마’가 주도한 응원은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를 창안했다. <<붉은 악마>>들은 대규모 거리응원전과 차량경적 응원,태극기 퍼포먼스 등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비록한국팀이 24일G조 조별리그 스위스전에서 16강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한국인들의 열정적인 응원은 세계의 응원문화마저 바꿀 만큼 강한 충격파를 던졌다. . 셋 . 역동과 꿈과 희망으로 빚어진 <<붉은 악마>>들, 그들은 경기장에서는 목청터져라 선수들을 응원하고 경기장 밖에서는 라이벌 응원단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화합의 장을 만들고, 길거리 응원 이후에는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깨끗이 치우는 등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 자세를 통해세계에 자기민족의 자부심을 보였으며, 폭력과 난동 등 훌리건문화에 익숙한 유럽인들에게 한층 성숙된 <<붉은 악마>>의 모습을 알렸다. 웅숭깊은 모습으로 축구를 국가와 민족, 종교와 리념, 부국과 빈국, 인종과 인류를 넘어 세계인이 모두 함께 하는 축제의 장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81    월드컵단상(5) 미스터 호나우드 댓글:  조회:3343  추천:73  2007-06-29
. 월드컵 단상 5 . 미스터 호나우드     . 하나 .   유럽과 남미의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 <<축구황제>> 펠레에 필적하는 선수, 이런 거창한 수식으로 축구팬들에게 거물급 우상으로 자리매김한 호나우드는 2002년 한일 월드컵때 까까머리에 앞 자분치만 가쯘히 기른 중국년화(年画)에서나 볼수 있는 동자같은 캐릭터로 나의 눈길을 앗아 갔었다.   그만큼 호나우드가 지난 10여년간 세계 축구계에 남긴 족적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 초반에 이 거물급 스타는 이미 한물 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에 시달렸다. 비만 의혹을 사며 77㎏였던 몸무게가 최근에는 90㎏에 육박한다는 루머가 나돌었다. 그의 굼뜬 몸놀림을 박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란무했고 지어 브라질 대통령까지 거론할 정도로 언론과 팬들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이같은 스트레스 때문에 체중이 5㎏이나 빠지는 등 마음고생을 무던히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나우두의 본능은 일본과 조별리그 F조 최종전에서 살아났다. 잠에서 깨여난 맹수마냥 두 골을 폭발시키며 12골을  기록, 자신의 우상이었던 <<축구 황제>> 펠레가 세운 월드컵 통산득점과 동률이었다.    아프리카의 강호 가나와의 16강전에서 전반 5분 선제 결승골을 성공. 자신의 월드컵 통산 15개의 꼴로 독일의 <<득점기계>> 뮐러가 지니고 있던 14꼴 기록을 뛰어넘었다. 꼴 감각을 이어나가며 <<살찐 황제>>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세간의 비난을 불식시켰다. 월드컵 력사를 새로 썼을 뿐만 아니라 팀의 8강행을 견인했고 개인적으로도 이번 대회 3골로 4골을 기록하고 있는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한 골 차로 쫓아가며 득점왕 경쟁에도 가세했다.   . 둘 .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등에 무거운 돌을 지고 건넌다고 한다. 돌이 무거울수록 평형을 잡고 더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돌덩이같은 삶의 중량을 지고 간다.  우리가 안고 있는 그 돌덩이가 크면 클수록, 그 돌을 안고 가는데 대한 고민이 더 치렬할수록 우리는 더 큰 힘과 노력을 받칠것이며 우리의 미래는 보다 더 안전하고 비전있는 대안에 이를수 있다.   몸에 무거운 짐 들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 셋 .   어찌보면 력사는 거듭되는 고난의 반복으로 인물을 주조한다. 프랑스 월드컵때에도 호나우드앞에는 이번과 꼭 같은 상황이 펼쳐졌었다. 당시 그는 부상으로 출전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조별예선부터 7차의 경기 모두를 진통제를 맞으며 뛰었고 그 속사정을 모르는 브라질 사람들은 엄청나게 호나우두를 비난했었다.   호나우두는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기록을 깰수 있어서 기쁘다. 그동안 과체중 논란등 압력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새롭게 부상할수 있는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커다란 압력의 돌덩이를 안고 벼랑 끝에서 부활의 노래를 부른 호나우두. 프랑스 월드컵에 이어 이번에도  꼭 같은 파란만장한 부활의 <<반전(反轉)>> 드라마가 있었기에 팬들로 하여금 더욱 더 피를 끓게 만든다.    호나우두,  시련의 강을 넘어선 그의 특이한 운명을 나는 사랑한다.
80    월드컵단상(6) 잔치는 끝났다 댓글:  조회:2955  추천:73  2007-06-29
월드컵단상 6월드컵, 잔치는 끝났다 . 하나 . 신들린 한달간의 광환을 거쳐 드디여  온 누리에 멍석을 깔고 펼쳤던 2006 독일월드컵 잔치가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가 프랑스와의  막판승부, 1-1 무승부에 이은 승부차기에서 5-3으로 승리, 24년만의 월드컵 우승이라는 감격을 누리며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애초에 많은 팬들은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이끄는  이탈리아가 월드컵을 포기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체코 미국 가나와 함께 죽음의 조에 편성된 이탈리아가 16강 진출도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이탈리아 국내 언론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막판승부에서도 프랑스가 이길것이라 주사위를 던지는 팬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지난 1978년 이후 단 한번도 이탈리아에게 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결승전은 지네딘 지단, 릴리앙 튀랑, 클로드 마켈렐레를 포함, 그 밖에 몇몇 선수들에게도 고별 파티가 되기 때문에 프랑스의 패배란 생각할 수도 없다. 또 이탈리아팀에는 월드컵 승부차기에서 3전3패의 실축이 항상 망령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독일-아르헨티나 경기에 이어, 잉글랜드-포르투갈에 이어 이번에도 페널티킥에서 승부가 갈려야 하는 가슴떨리는 상황이 계속됐는데  마지막 경기도 연장 접전까지 가면서 페널티킥으로 또 운명이 갈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손에 땀을 쥐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승부차기 악연을 끊고 악몽을 씻어낸 의미있는 승리를 거두었다. 시련이 오히려 이탈리아를 강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는 위기 속에서 똘똘 뭉쳐  결국 통산 네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타고난 감각과  환상적이었던 슈팅, 패기와 끈기 모두가 아름답기만 했다. 대회 내내 가장 꾸준하고 좋은 경기력을 선보인 팀이었기에 우승 자격이 충분한 팀이었다. . 둘 . 어느 팀이 결승에 진출하든 상관없이,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언제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이번 월드컵의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프랑스 축구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지네딘 지단, 지단의 프랑스팀은 98년까지는 유럽내에서는 축구 강국이아니였다. 하지만 그팀을 이끌어 우승컵을 차지해 프랑스 축구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고 유로2000의 우승, 그리고 유로2004에서도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멋진 기적을 이루어 놓은 지단이였다. 안정된 볼 키핑과 상대의 허를 찌르는 패스, 탁월한 꼴 결정력으로 경기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지단은 펠레, 마라도나, 베켄바워처럼 세계 축구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된 것이다. 이번 독일월드컵 처음에는 상태부진으로 <<늙은 호랑이>>라는 혹평의 손가락질을 받았는데 금방 달라졌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투혼 때문이었을까. 이날 지단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의 전성기로 돌아간 것처럼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련이은 에스빠냐, 브라질, 그리고 뽀르뚜갈 격파에, 이번 결승전에서 팬들은 지단이 펠레이후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신화를 창조하기를 바랬다. 2번의 월드컵 우승으로 지단이 은퇴경기에서  신화를 창조하기를 바랬다. 결승전에서 지단의 출발은 좋았다. 전반 7분에 얻어낸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선제꼴로 연결시켰다. 이로써 지단은 월드컵 결승전에서만 3골을 터트려 결승전 역대 최다골과 타이를 이뤄냇다. 지단은 9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서도 헤딩으로 2골을 뽑은 적이 있었다.하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지단의 은퇴 무대는 예기치못한 부분에서 비극으로 치달았다. 연장 후반 5분  마르코 마테라치의 <<찰거마리수비>> 에 짜증나 말다툼을 벌리다가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받아버리는 리해할 수 없는 반칙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심은 지단에게 가차없이  레드 카드를 내밀었다. 지단의 강퇴는 졸지에 프랑스의 패배를 부채질하고 말고 우승컵을 안고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던 지단의 마지막 바람은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한 물 갔다>>는 혹평과 프랑스의 탈락 위기를 극복하고 자국을 결승전까지 이끈 지단의 은퇴 무대는 꼴과 퇴장이라는 상반된 결과 속에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게 됐다. 이 34살의 로장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준 기술과 투혼 그리고 마지막 모습은 선수들에게 그리고 모든 팬들에게 인생의 한수를 가르쳐 주는상 싶었다.  . 셋 .   지난 한 달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며 우리를 울고 울렸던 2006 독일 월드컵이 이렇게 끝났다. 경기가 과열되고, 승패의 희비가 엇갈릴 때마다 세계는 흔들렸다.이렇게 세계 수십억 인구가 둥근 공 하나에 열광을 하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둥근 공은 오늘날 경쟁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변을 가장 함축성 있게 보여 주고있다. 그래서 축구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한다. 축구는 사람들이 가한 힘과 속도, 방향 등을 정직하게 전달하면서도 예측불허의 결과를 선사하며 축구에 열광하는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양한 만화경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아마 다들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지만 수많은 배움을 우리는 월드컵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우선 팀 워크의 중요성이다. 아무리 잘 하는 선수가 한두 명 속해 있더라도 결코 팀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었다.  기본을 다지고 실력을 쌓은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행을 바랄 뿐이다. 다음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흥분은 금물이다. 거친 대립과 갈등속에 흥분을 삭이지못하고 레드카드를 먹은 저돌적인 선수들은 자기뿐만아니라 팀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랭정을 유지할 수 있는 선수와 팀이 최후에 웃을 수 있었다.작은 시합이나 큰 전쟁이나 개인이나 단체가 절제하고 인내하지 않고는 시합이나 경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우리는 끝까지 절제하고 인내할 때 승리할 있다.이번 독일 월드컵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냉정한 현실이다. 그런데 누가 뭐라고 해도 월드컵의 가장 큰 가르침은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차 살아숨쉬는 령혼이 아름답다는 점이 아닐까? 이 한달간 새벽이면 눈을 집어뜯으며 일어나 경기를 지켜보면서 한순간도 졸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리유에서이리라. 너나없이 열심히 뛰어 좋은 인상을 남겼던 선수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을 안겨 주었으며, 그러한 태도는 경기장밖의 중요한 가르침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승패에 관계없이, 지난 한달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피땀 흘리며 이곳까지 달려온 모든 선수들의 투혼에 박수를 보낸다. 월드컵잔치는 이렇게 끝났고 이제 차기- 2010년 월드컵 개최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인류 대화합의 새로운 리정표를 준비하고 있다. 참으로 격정과 즐거움속에 많은 것을 얻은 축제의 시간들, 이제 새로운 리정표를 바라 우리는 경기장밖에서도 열기를 삭이지 않고 뛰여 갈것이다.    
79    미니홈을 열며 댓글:  조회:2829  추천:73  2007-06-29
소설가, 저널리스트- 座右銘- 擧世而譽之而不加勸 擧世而非之而不加沮 세상이 들고일어나 칭찬해도 뽐내지 않고세상이 들고일어나 비난해도 기죽지 않는다
78    독도를 가다 댓글:  조회:3392  추천:73  2007-06-29
. 기행문 .독도를 가다 김 혁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 독도는 우리 땅...   오래전 재즈에서 몇구절로 들어왔던 그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80년대 중기, 변혁의 문이 열리면서 본보기극의 단조로운 음조에만 버릇되였던 우리도 다양한 풍격의 음악을 접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참 들었던 이 노래는 가히 인상적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어떤 절주빠른 선률에만 심취되였고 독도라는 섬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렇게 아렴풋이 알았던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지난 5월 말, 지인들과 함께 조선족뉴스전문사이트를 운영중이였던 나는 한국의 주최로 된 해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5박6일로 된 회의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에서 열렸다. 대회일정을 훑어보니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울릉도에서의 맨 마지막날 독도행이 배치되여 있는 것이였다.   독도, 세계의 주목을 끄는 곳이였고 바다와 섬을 멀리한 변강오지에 사는 한 나그네의 호기심과 향수를 충분히 자아낼 만한 곳이였다.     독도행에 앞서 나와 중국에서 온 말짱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몇몇 《륙지오리》들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바로 배멀미, 배멀미가 우리들에겐 천적(天敵)이였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뻐스로 묵호항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겨레》호 려객선을 타고 3시간 반 정도 대여왔던 울릉도, 그 려정은 우리들로 말하면 말 그대로 련옥으로 가는 체험이였다.   《한겨레》호가 《선체가 커 온중하기 때문에 멀미 걱정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배멀미쯤이야하고 방심했더니 큰 오산이였다.   날씨가 사뭇 좋아 보이는데 반하여 무척 파도가 높았다. 우리는 금세 장난꾸러기 악동이가 심술궂게 밀어대는 그네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배가 출발하기 바쁘게 려객선 내부에는 대 혼란이 벌어 졌다. 여기저기서 무섭게 <<욱~욱~>> 토악질하는 소리가 났고 독한 술 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얼굴이 노랗게 변하여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좌석에 볼썽사납게 드러누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선원들은 선실 이곳저곳에 마련된 비닐봉지를 건네주기가 바빠 졌다. 정해진 좌석도, 2층 3층도 구분이 없어 졌다.    튼실한 신체를 믿는 나였지만 항해의 신기함을 음미 할 사이도 없이 꼭 마치 폭음한 이튿의 숙취와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배안에서 상영하는 영화에도 집중해 보고  책도 읽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한국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을 각오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울릉도였다.   3시간 30분여, 217키로메터의 해리를 뚫고 울릉도의 조그만 도동항에 도착하기 까지 우리는 발에 발을 잇는 고험에 시달려야 했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백의 멧부리 방울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청마 유치환이 애달프게 시에서 읊조린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관광의 보고》울릉도에 며칠 류하는 동안, 울릉도의 비경과 해물맛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독도에 대한 호기심은 나름대로 부풀어져만 갔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흔히 큰편인데 게다가 쉬이 닿을수 없는 특유의 섬이였기에 호기심은 더했다.   그러나 설상 독도를 딛기는 힘들다. 전세계 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높은 곳일 터이지만 설상 독도에 가본 사람은 많지 못하다.    독도로 가는 길은 현재까지는 울릉도를 거쳐 가는 도항(渡航)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독도로 출발했다고 모두 입도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입도신청서를 작성하고 허가를 받아야 독도 입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  파도가 높거나 풍랑이 치면 배가 결항(缺航)되기 때문에  웬만한 기상상태로는 입도자체가 힘들어 배가 부두에 접안을 하지 못하기에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독도를 가려면 날자를 맞추고 날씨를 살피는 려행객의 정성에 보태여 하늘의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독도 땅을 밟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독도에 상륙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관광객들의 출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자연보호를 리유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독도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입도는 불허되고 학술적인 목적 등 특별한 경우에만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심의를 거쳐 입도가 허가된다. 울릉도 어부들 도 입도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울릉도 사람들조차도 먼 이상향으로 여길 만큼 독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었다.   독도가 이렇게 된 것은 꼭 바다의 험난함 때문만은 아니다.   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간수역에 포함된 독도 주변 해역은 일본과 러시아 함정 등이 출몰하면서 군사요충지가 됐다.   해경에 따르면 500∼1000톤급 일본 순시선이 한국 령해인 독도 주변 12해리 밖을 한달에 네댓 차례 돌고 있다. 반면 독도 주변 12해리는 동해해경 소속 해경정 3척이 경비를 맡고 있다. 그중 최근에 취역한 한국의 5000톤급 《삼봉》호는 해군과 해경을 통틀어 가장 큰 경비정. 독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최신식 대형함정을 배치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수고롭고 예측 불허한 려행이 또 있을까   자칫 이번 행이 소득없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31일, 회의일정을 마감한 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해상관광을 마치고 호텔에서 오삼불고기로 점심을 든 후에 모두는 도동항에 모였다.      울릉도의 서울이라고 불리우는 울릉읍 도동은 울릉도의 행정,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깎아지른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도동항은 유람선을 위한 전용항구라고 여겨질 만큼 작고 아담하다. 독도행 유람선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고기배나 일반 선박들이 적었고 선착장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시멘트와 자갈 등 건축자재가 쌓여 있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느라 시끌했다. 태풍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중이라고 곁에서 알려 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휩쓸고간 태풍 <<매미>>에 매립돼 도동의 풍경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항구에는 우리를 독도로 태워 줄《씨플라워》호가 정박 되여 있었다.    촉박한 회의일정이었지만 배에 오르기 위해 조별로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인원 점검 끝에 배에 올랐고  드디여 독도행 《씨플라워》호는 세계각지 20여개 나라에서 모여온 동포언론인들을 싣고 파도를 가르며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92키로메터, 독도를 순회하고 되돌아오는데 총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해로는 해상의 고속도로이다. 발해민이 일본을 건널 때도 이 바다길을 리용했고,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했을 때도 이 길을 누볐다고 한다.     독도가는 흔들리는 배에서 찍은 사진, 날씨가 좋지않아 독도에 못 오를가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납물이 든 듯 시퍼렇게 변해 금세 큰 비라도 쏟아질듯 했다. 혹여 입도하지 못할가 모두가 근심에 쌓였는데 이만하면 기후가 괜찮아 순항이라고 선장이 스피카를 통해 알려주었다. 모두들의 얼굴은 금세 개운해 졌다.   배가 순항을 계속하는 사이 나는 독도에 대한 예비지식을 쌓으려 독도관광에 대한 팜플렛을 읽기 시작했다    독도! 면적 187.554평방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킬로메터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 서도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3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메터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메터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한 해풍과 척박한 토질로 인해 동식물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서식하는 짐승은 없지만 바다제비, 슴새·괭이갈매기 등 여러 종류의 곤충과 해조류가 살고 있다. 무엇보다 독도 주변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며 물이 맑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 영국에서는 《호넷》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묵호- 울릉도행에서 배멀미에 혼쭐난 우리는 너나가 멀미약을 열심히 챙겼다. 멀미약을 약갑에 씌여진 설명서대로 두시간전에 먹었고 귀바퀴에 혈위를 지압하는 멀미약도 붙였다.  약효였던지 아니면 독도로 간다는 감흥에서였던지 무서운 멀미가 더는 우리를 법접못했다.   배길을 달린 지 2시간여, 안내서에 빠져있는데 《독도다!》하는 누군가의 환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원형의 유리창에 매달렸다.   검푸른 수평선우에 거의 수직으로 솟은 섬 하나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속력을 줄이면서 배는 독도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섬 주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이 뱃전에서도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하나로 보이던 섬이 두개로 갈라졌다. 독도를 이루고 있는 쌍둥이 섬 동도와 서도다.   잠시 후, 입도가능을 알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2시에 울릉도를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항해를 시작한 지 2시간 20여분 만인 오후 4시 20분쯤 독도 접안시설에 배를 대는데 성공했다. 육중한 선체를 로프 몇 개로 부두에 달아매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거센 풍랑에  배는 잠시 주춤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우리들을 독도의 품안에 내려놓았다.         하늘이 돕는다. 1년에 단 60여일만 맑은 날씨를 보여준다는 독도다. 그만큼 범인이 접하기 힘든 섬이다. 그런 독도에 우리가 입도할때는 거짓말처럼 말짱 개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올랐고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쉬가 튀었다.   평면의 사진으로만 접했던 독도가 그저 볼품없는 돌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천혜의 비경을 연출한다.    독도주변은 해심이 무려 2천메터가 넘는단다. 그 깊이로 우려내서 그런지 바다색깔이 진한 남보라색이다. 그런 바다를 박차고 나란히 솟은 동도와 서도, 빼여난 기암절벽, 암초바위 어느 것 할 것 없이 당당함으로 가득찬 멋진 모습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얼마 안되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그 정경은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새들을 제외 하고는 사실상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해안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들이 독도의 매력 포인트. 기이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각각의 암초들은 물개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해태바위. 권총바위. 남근바위, 얼굴바위 등 생김새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섬에는 관광안내서에서 본 괭이갈매기가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며 바위며 흙길이고 상관하지 않고 날아다녔고 우리들의 어깨도 스쳤다.    독도의 아름다움을 말할라치면 어떤 진부한 수식어를 단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자연이 베푼 최고의 은혜로움이 가득한 곳 독도.   동도에는 1954년 광복절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는 독도등대와《대한민국 동쪽,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숨결로 잠재우고 우리는 한국인의 얼을 독도에 심었노라》라는 글발이 새겨져있는  《한국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도의 등대 밑에는 소총을 든 독도경비대원들이 역시 하나의 암초처럼 서서 매서운 눈초리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그전 3년간은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자비를 들여 막사를 짓고 독도를 지켰다. 동도 해안가 절벽 밑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반도는 6·25 사변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소홀한 틈을 탄 일본은 이곳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령토 표식을 하고 돌아갔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순칠씨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인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다.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기관총,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일본 함대를 격퇴시킨 것이다. 3년 동안 무려 5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니 그때부터 쟁탈전이 아주 치렬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는 B29 폭격기가 이 바위를 어선으로 착각하고 폭탄을 떨어뜨려 어민 20명이 폭사한 기록도 있다. 그만큼 독도는 슬픔을 지닌 섬이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도 짓고 간이선착장도 만들었다.                                  독도에 축조된 독도의 역사를 적은 비문     그 너른 동해바다의 작은 점이건만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당했던가?   도대체 가로세로 400m의 이 조그마한 섬에 무엇이길래 한국과 일본은 이리도 오랜 세월 한 치의 양보할 수 없는 영유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과거의 독도는 바다가운데의 작은 외딴섬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양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정치·경제·군사·학술 등 다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리유로 현재 일본과 그 영유권을 두고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해고도 외로운 섬이 깨여나기 시작했다.   근래에도 독도를 사이에 두고 한·일 량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 일본 해양탐사선이 탐사를 명목으로 독도 린근 해역으로 진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독도 린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침입해 수로 측량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독도 주변 해역 탐사계획을 중지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에 대해《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외교통상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하게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독도를 둘러싼 민간인의 활동은 한국 측이 활발한 편이다. 오프라인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고 온라인 회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다.   오프라인 쪽은《독도력사찾기운동본부(독도본부)》가 대표적인 단체로 꼽힌다. 이 단체는 신한일어업협정 폐지를 주장하는 민간단체로 2000년 출범해 현재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도수호활동은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반크(VANK)>>는 전세계 유명 교과서와 방송국, 지도, 포털 사이트 등에서 독도와 관련된 잘못된 표기나 역사, 지도 등을 바로잡는 사이버 단체다.     일본 측의 도발 의지도 만만찮다. 일본은 독도가 자국 영토인데도 한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일본의 민간 차원 대응은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나서지 않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차원에서 력사교육 강화 촉구, 홍보책자 배포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우익단체와 대학교수 등이 독도가 일본 땅임을 주장하는 책을 발간하거나 몇몇 우익단체들은 독도상륙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의 활동도 활발하다. 중앙정부는 나서지 않는 현 차원의 대응으로 비치지만 중앙정부와 련계한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다케시마의 날》 1주년 행사도 강행했다.   일본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을 비롯한 많은 수험서에는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유를 하고 있어 분쟁지가 되었다는 항목이 중요한 소재로 실려 있다.   그러나 해외의 시각은 급변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를 병기해서 독도를 표기하는 해외 인터넷사이트와 지도들이 늘고 있는 것. 이는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의 국가정보보고서 2002년판은 《일본이 독도 관련 분쟁을 제기하고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2004년판은 《분쟁이 고조되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못 박고 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하는 데에는 숨은 저의가 있다고 한국은 본다. 독도 주변에서 막대한 가스층이 발견되었고, 석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한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다.   독도 주변 해역의 경제적 가치도 향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해 수산자원이 풍부한 데다 해저자원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도를 둘러싼 한·일의 공방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런 분쟁의 초점속에도 독도에 정착해 사는 어민이 있었다.    현재 유일한 거주민은 김성도(64세, 울릉읍 도동리 산 63번지)씨. 그들 일가족은, 독도 최초 거주민이 된 최종덕씨 이후 6번째 가족이다.    심포지움기간 한국위성방송에서 김성도부부가 월드컵을 시청할수 있도록 독도에 위성접수기를 설치해준 뉴스가 나와 김성도 부부의 모습을 화면으로 접할수 있었다.   김성도씨 가족은 겨울 동안에는 울릉읍에 체류하고 3월 경부터 독도에 들어가 어업을 시작한다. 김씨가 울릉도와 독도에서 살아온 얘기는 이러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서 태여난 김씨는 1960년대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0여살 위인 최정득씨(작고)와 함께 독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복과 미역, 홍합 등 지천에 깔려있는 해산물을 채취해서 파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외로운 섬 생활의 불편은 참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전복이나 소라 등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 등지에서 해녀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단다. 그러던 최씨가 해녀들을 데려오기 위해 륙지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독도에는 김씨 가족만 남았다는 것이다. 두 살 년상인 부인 김신열과 단둘이 사는 독도 생활은 좋다고 했다.   김씨가 사는 집은 거센 바람 때문에 기초 바닥에서부터 벽, 기둥, 지붕 등이 모두 철근이 들어간 세멘트 집이라 했다.   독도에는 먹을 물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는 자기가 사는 서도에 《물골》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하루 20명이 먹을 수 있는 량의 물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독도에는 바위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나무와 화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노력은 비단 섬을 예쁘게 꾸미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해양법상 섬은 암초와 인공섬, 자연섬으로 구분된다. 영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섬뿐이다. 자연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식수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자라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하여 외로움을 이기며 한호라도 거주민이 보금자리를 틀었고 여러 단체에서 10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500여그루의 나무를 살리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현재 한국에 호적이 독도로 되어 있는 국민의 수는 약 850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독도에 태어나거나 거주한 경험이 없지만 99년부터 시작된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에 동참한 이들이다.     독도의 절경과 파란많은 사연에 한참 취해있을 때 배에서 승선하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파도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지체하기엔 위험하다는 《씨플라워》호의 통지였다.   독도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30분 지났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뉘엿뉘엿 배에 몸을 실었다.   삽시에 들끓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독도는 다시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신이 붓끝으로 눌러찍은 듯 작은 점으로 태여난 은총의 섬, 독도.   기암절벽과 하얀 갈매기들의 마냥 잔치를 벌이고 있는 섬 독도.    동해의 너른 바다우에 독도가 한 점 놓여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거리상으로도 많이 떨어져 있고 우리들 마음에서조차 다분히 멀어진 곳이다. 그러나 독도 땅에 발을 딛은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려행이였다.      급변하는 기후속에 독도는 재빛 덮개를 덮은 듯 몽롱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봐도 독도는 거기에 있었다.   철벅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견고해진 넉넉함으로 거기에 있었다.   작은 몸체에 당찬 위엄을 갖추고 세간의 풍파와 조명을 한 몸에 받아 안으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내가 찍은 독도사진 몇점  
77    애인같은 맥주, 메기같은 친구들 댓글:  조회:3991  추천:75  2007-06-29
 수 필  애인같은 맥주, 메기같은 친구들  김 혁       내가 호주가(豪酒家)라는것은 문객들이고 보면 다 아는 일이다. 10년전이던가 내가 경모하는 어느 한 작가분이 이외의 사고로 애닯게 요절했을때 비감을 못이겨 동년배 문우 s와 함께 맥주 한박스를 다 재끼고도 열병을 더 터뜨려 마인 일화가 있듯이 주량도 크고 그 애주사도 꽤 길다 할수 있다. 내가 선호하는 쪽은 맥주쪽, 일상에 치대여 볼품없이 이즈러진 몸과 마음의 구김살을 펴이러 미샤를 가는 사람처럼 명심해 찾는곳이 맥주집이다. 회사에서는 조금 멀리 벗어나 국자가로 곧추 대여 가다 옛 뻐스역 부근의 꿈속같이 조매로운 골목길을 찾아들면 작은 간판을 이마전에 떠인 내 단골맥주집이 나타난다. 맥주집. 술군들의 역반심리를 꼬드기는 차암 묘한 이름의 맥주집, 그 는 곳으로 나는 자꾸만 온다.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몸매도 성미도 맥주같이 풍요로운 맥주집 마담의 반겨맞는 웃음이 맥주거품처럼 부풀어 오른다. 마담이 소방두같은 손으로 북북 찢어서 마른 안주를 챙겨준다. 랭장고에 언녕 넣어두었던 찬 기운이 불려앉은 맥주병을 날라온다. 언제봐도 반갑기만 한 맥주병을 가슴앞에 다정스레 껴안고 살풋이 마개를 딴다. 배불뚝이 유리컵에 맥주를 넘쳐날듯 부어 놓는다. 그다음에는 맥주를 마이기전의 나만의 독특한 제슈체어(行爲)가 있다. 저가락 뒤끝으로 맥주잔을 몇번 휘젓는것이다. 그러면 맥주거품이 활화산의 용암처럼 자오록히 분만해 오른다. 거품은 단지 외적인 멋스러움뿐아니라 탄산가스의 방출을 억제하고 공기와 접촉해 맥주맛이 변하는것을 막는 차단막역할을 한다. 때문에 차고 거품많은 맥주를 나는 좋아한다. 사랑순위에서 맥주를 마누라 먼저 놓는 독일사람들은 맥주거품을 이라고 부른다. 부르멘이란 독일어로 꽃이라는 뜻. 그렇게 꽃에 입맞추는 기분으로 거품이 피여나는 맥주에 입술을 담그고 두눈을 느스름히 감은채 단번에 비운다. 울대뼈가 피스톤처럼 작동하며 지극히 신선하고 지극히 구수하고 지극히 아싸한 맛이 식도를 타고 가슴가운데로 흘러내린다. 일신의 혈관을 들말처럼 줄달음놓는 그 감미에 정신이 노곤해 진다. 육체와 정신의 엑스타시상태가 곧 바로 이 순간이다. 불에 달구어진 무쇠처럼 정신이 노글노글해지고 기분이 좋은 이때면 어느 시인의 맥주를 바다와 애인에 비유하여 읊은 시가 맥주잔속에서 굼닌다. 술에 대한 나의 감수성도 이 한수의 시처럼 자유분방하다. 비해 말한다면 매운 소주는 내게서 형님같고 걸죽한 탁주는 내게서 외할배같고 화려한 포도주는 내게서 귀부인 같다. 그리고 맥주는 내게서 애인같다. 어덴가 걸맞지 않는 련상인지는 몰라도. 시시때때 보고 싶고 유독 나만의 맛망울을 알아주고 내가 버려도 결코 나를 버리지 아니하는 맥주, 사내들이 은근히 추구하는 애인의 양상이요 타입이 아닌가?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혹애하는 특이한 안주가 있다. 마른 메사구 안주이다.즉 포를 뜬 메기를 말한다. 보기에 해볕에 그슬린 농부자 나그네의 근육이 삐여지고 검실검실한 팔뚝같은 그 툽상스럽기 그지없는 메사구의 맛이 그렇게 맥주에 꼬옥 사개맞을수가 없다. 메사구 안주 하나면 맥주좌석을 충분하게 둥글게 가꾸어 갈수있다. 우리 문인들중에서 메사구안주를 전파한 장본인이 바로 나다. 어느 한번 신문사에서 밤일을 하고 자정이 넘게 되였는데 불빛이 있는 맥주집을 찾았다가 처음 메사구안주를 접하게 되였다. 북어가 다 떨어지고 없기에 주인이 이라며 메사구 안주를 내놓은것이다. 그런데 미안쩍게 내놓는 그 메사구 안주가 맥주에 벼려진 맛망울에 일점불차없이 들어 맞을 줄이야! 지만 이렇게 맛나는 술안주를 어찌 나만 맛볼수 있으랴! 그래서 역시 나처럼 맥주라면 사죽을 못쓰는 친구들을 메사구집에 청해들였다. 다도(茶道)를 전수하는 사범처럼 조심스레 메사구를 찢어주며 맛보라고 했다. 쓴 첩약맛보기처럼 어덴가 보기에 안쓰러운 메사구를 조심스레 입에 넣던 그들의 입에서 급기야 맥주거품과 함께 굳(good)!호우(好)! 조오타!가 연줄로 튀여 나왔다. 술몇잔 못하면서도 안주만은 무척 가리는 까탈스런 량반들은 골살을 찡그렸지만 성미가 헌활한 우리 친구들은 거개가 메사구를 즐겼다. 그로부터 맥주를 좋아하고 메사구를 좋아하는 그룹이 자연스레 형성되게 되였다. 그중에는 소설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평론가도 있고 박사도 있고 편집인도 있고 요사이엔 녀류작가들도 몇분 가세하여 제법 문학파티, 메사구 파티가 열려 지고 있다. 날씨가 자못 쾌청한날, 퇴근을 반시간쯤 앞둔 즈음에 핸드폰이 울리면 그것은 어김없이 메사구집에가서 맥주를 들자는 신호이다. 주고받는 통화도 지극히 간단하다. 암호같은 짤막한 말마디를 주고받고 나서는 택시를 타고 절박하게 달려가 이제는 문학인들의 쌀롱이 되다싶이 한 그 메사구집에서 만난다. 는 술군들의 유머가 있다. 밥과 물이 육체의 수요라면 술은 정신의 수요라 할가? 여하튼 일상에서 술이 없으면 외려 마음의 좌표를 정하지 못하는 우리다. 사흘에 한번꼴로 잦게 만나서 맥주잔 기울이고 메사구를 뜯군한다. 이 몇년간 우리가 뜯은 메사구가 화물차로 몇바곤쯤은 될거다.우리가 단골자리를 바꾸자 몇몇 메사구집은 문을 닫은 일례 까지 있다. 메사구맛에 환혹된 우리들에게 자밌는 일화도 많다. 어느 한번 누군가 술상에서 얼결에 묻자 너나가 말문이 딱 막혀 버린적 있다. 내가 중국어 음을 따서 우수개로 이라고 번역했더니 했더니 친구들이 구을러 가며 웃었다. 허나 그에 대한 문학박사 G의 분석은 자못 진지하다. 라 함이 어떠냐고 했다. 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沒)는 없다는 뜻, (色)은 불교에서 말하는 즉 비였다는 뜻, (鬼)는 말그대로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니 역시 형체가 없다는 뜻, 몸과 마음을 비운 편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는것이다. 그 명분석에 감복하여 갈채를 올리며 우리는 술 석잔씩 크게 기울였다. 시인 L은 국외에서 몇달간 체류한적 있는데 그곳의 이방적인 음식이 입에 쇠통 맞지 않아 식탁에만 앉으면 온통 고향의 bc맥주와 메사구가 머리에 떠오르더란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들리지 않고 트렁크를 든채로 메사구집으로 곧추 찾아 갔다. 시원하고 입맛에 맛는 고향산 bc 맥주에 오매불망 그리던 메사구를 어금이 아프게 아귀아귀 뜯고나서 그제야 직성이 풀린듯 만족의 신음을 토하며 집으로 갔다고 한다. 몇달전에는 전국각지의 뜻맞는 기성문인끼리 인터넷 동호회 하나를 만들었는데 문학정보담이며 우정이 담긴 이야기가 오가는 동호회게시판에서 메모뒤끝이면 의례히 메사구가 등장한다. 메사구가 그 무슨 련인들지간의 사랑의 징표인 장미나, 토착민들이 동굴을 여는 주문처럼 우리들의 사용빈도가 높은 어페로 되여 버렸다. 하도 메사구가 많이 등장하기에 우리 동호회 홈에 들렸던 한국문인 몇몇이 하고 궁금증을 삭이지 못하겠다는듯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다. 마른 메기안주를 말한다고 말하자 한국에서는 메기로 탕을 하지 포는 뜨지않는다며 그 무슨 황궁의 임금이 맛보는 이기나 한듯 메사구에 대해 흥취를 보이는것이였다. 명년의 연변행차 스케쥴을 잡고 만남과 교류를 약속하는 한국문인들의 메일뒤끝에도 어김없이 라는 메모가 덧붙군 했다. 이제 메사구는 연변의 작은 맥주집 식탁에 오르는 평범한 안주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세계적인 메사구로 되였다. 맥주안주로는 단것을 피하고 땅콩이나 쏘세지, 햄, 팝콘, 샐러드 같은것을 곁들면 좋다고 료리백과에 씌여있다. 료리의 왕국인지라 중국에서는 술에 따라 곁드는 료리에 대한 학문이 더구나 많다. 에는 새우나 게같은 어류 료리, 에는 닭고기 료리, 에는 불고기, 에는 단것을 곁들어 먹어야 제격이고 했다. 허나 우리에겐 단 메사구면 족하다. 우리 메사구친구들은 랑비벽이 심한 신세대와는 다르다. 거개가 청빈한 문인들인지라 얄팍한 호주머니사정에 맞춰 싸구려 안주가 있는 메사구집에 온곱게 모여드는것이다. 그 사정을 헤아린듯 마담이 볶은 해바라기며 자기집에서 먹던 마늘장아찌며를 곁들어 주어 그 유니크(獨特)한 단위법으로 우리의 매일같은 술상이 만들어 진다. 메사구를 뜯으며 만드는 우리의 화제는 간단한 안주상과는 달리 풍요롭다. 요즘 읽은 판타지 의 환상세계며, 요즘 상영되고있는 드라마 에 대한 감동이며, 애급금자탑 발굴과 관련한 기문이며, 컴퓨터 조작에서의 난해점이며, 영원한 숙제같은 가정문제며...고금중외 동서남북을 넘나드노라면 상이 둥굴어지고 머리속도 맥주배처럼 그윽히 차오른다. 그러다 메사구 육질같은 툽상스런 상소리도 가끔 올라 술상이 들썽하게 웃음잔치가 벌어질때도 있다. 술을 보면 로자로 남은 몇낱의 엽전마저 호기롭게 내쳤던 김삿갓은 안주가 없이도 술마시고 천하의 문장을 지어냈다. 그가 시구로 적다싶히 , 즉 안주가 없이 소금으로 안주를 삼고서도 시상에 취해 즐거워 마지 않아 한것이다. 우리가 간단한 메사구안주에도 술잔을 기껍게 기울이는 리유도 그와 비슷한데가 있는것 같다.   술을 즐기다보니 너나가 술에 관한 취문도 많이 알고 있고 우리가 취문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미국의 생리학자 크리스찬, 아돌프가 발견한데 의하면 술에 엉망으로 취한 사람들을 세워놓으면 자기마당의 작용인지는 몰라도 10명에서 8명은 동쪽으로 간다고 했다. 이 론문발표를 듣고 로스안젤스의 경찰들이 실험을 해 보았는데 술집에서 나오는 취한들을 단속하여 벌금을 시키고 경찰서에서 내보내면 처음에는 어리벙벙해 하다가 모두가 동쪽을 향해 가더란다. 우리 메사구동아리들중 술량이 크다고 자부하는 이는 나와 평론가 f이다.모두다 다혈질이라 술을 마셔도 크게 마신다. 허나 묘하게도 두 사람 다 집이 동쪽켠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아리들은 그렇게 술을 억벽으로 마셔도 집은 곧게 찾아간다. 소설가 c는 일전, 만취한 귀가길에 태기가 있는 안해가 시쿤 포도가 먹고싶다던 말이 요행 떠올라 밤시장에서 포도 몇송이를 사들었다. 새끼걸음을 꼬며 가다가 목이 갈해서 가는 도중에 포도를 다 뜯어먹고 맨 포도줄기만 들고 집에 들어섰다. 그래도 자기를 잊지않은 고주랑망태 남편이 고마워 안해는 꿀물을 진하게 풀어 드리더란다. 이렇게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우리 애주가들이다. 란세를 버리고 오골있게 살아간 옛 선비동아리들중의 대표로 떠오른 , 세상의 탁음이 싫어 대나무숲에 들어가 한평생 올바르게 살고자한 선비였던 그들은 한결같이 애주가였다고 한다. 그들중 맏이인 원적은 련일 60일을 술마신 기록이 있고 어머니가 림종했을때는 두말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외 류령은 15말, 산도는 8말로 주량이 엄청 컸고 술을 제일 적게하는 혜강은 술을 마시고는 노래와 사를 읊어 술상을 둥글게 했으며 팔달은 괴이한 버릇이 있어 아예 발가벗은채 몸과 마음을 한껏 풀어놓고 마셨다고 한다. 그들은 술도 모르는 속물을 보면 백안(白眼) 즉 흰눈으로 대하고 술 지기를 보면 청안(靑眼) 즉 보통시선으로 대한 일화로 유명하다. 벼슬을 싫어했던 그들중에서 원적이 군관직의 말단의 벼슬이라도 맡은것은 군영의 창고에 수백석의 술이 저장되여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였다고 한다. 또 주량을 알수없는 대주가 류령은 술의 효용(效用)을 칭송하는 이라는 작품을 짓기도 했다. 유유자적한 그 술의 찬미는 번거로운 현실에서 빠져나와 천지자연과 일체가 되고자 함이였다. 넉넉한 생성과 소멸의 섭리에 몸을 맡기는것이야 말로 참된 인간존재의 모습이라는 로자사상의 리념을 보여주고 있는듯하다. 이 장대한 몽상을 자신의 몸속에 끌어들이는것이 바로 술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우리의 메사구 동아리도 마침 일여덟명, 매사가 환금성으로 가늠되는 요즘 세월에 하필이면 문학에 현혹되고 문학에 기대여 사는 인물들이다. 우리는 장난기에 절어 스스로를 이라고 부른다.이란 의 준말. 분위기에 어울리는 화제와 술병을 찾아놓고야 비로서 풍류를 아는 선비로 대접했던 옛선비들처럼 일정한 술량과 메사구 안주를 즐기는 이들로 우리는 무어졌다. 우리들은 터무니 없고 매끄러운 대인관계를 싫어하고 금전 권력 명예따위에 초연하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문인상경(文人相敬)이 문인상경(相輕)으로 전락되여버린 요즘의 가슴 아픈 풍조속에서도 문인의 우정을 첫자리에 놓고저 하는 사람들이다. 술마시기 위한 본래적 행위가 아니라 술로써 매개되는 다른것을 이룩하기 위한 동감이 오가는 동아리이다. 이 어우러지면 맥주 한박스쯤은 잠간새에 동이 난다. 리백님이 으로 유명하다지만 당시 도량형으로 1두는 바로 1홉, 지금으로 보면 2리터의 분량이니 그닥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술을 그렇게 애착하면서도 문학공부에는 게으름없이 문단의 중견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 친구들이 바로 오늘의 이요, 라고 자호하고 싶다. 그리스인들은 친구끼리 술상에서 약속을 다질때면 한손은 술잔, 다른 한손은 서로의 성기에 얹는다고 한다. 그들처럼 만취해서도 우리는 자못 진지하다. 우리도 술상에서 서로 약속을 다질때가 많다. 거개가 작가 아니면 편집인이라 서로의 문학지에 작품을 써주겠노라고 다짐하는것이다. 물론 그리스신들처럼 괴의한 방식이 아니여도 마음에 마음을 얹고 서로 이한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며 빈혈증세를 보이고 있는 우리의 문학예술지들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할것을 서약하는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에서는 품값의 일부를 맥주로 지불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농민은 하루에 1리터, 관리원 학자들은 5리터, 녀직원들도 대추야자의 과즙을 탄 달콤한 맥주를 좀씩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정기적으로 맥주를 신심속에 주입해야 하는 우리는 문학의 위상이 떨어진 요즘세월에도 붙박이로 문학의 터전을 고수해나가는 자신들을 스스로 맥주라는 상패로 안위하고 장려하는것일가? 그 무슨 희한하지도 않은 메사구 하나를 놓고 흥감질이냐고 혹자는 웃을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메사구가 좋다. 그런 BC가 좋다. 중국속담에 고 했고 로씨아 속담에는 고 했다. 사람의 인품을 알려면 함께 술을 마셔봐야 안다고 했다. 즉 는것이다. 나는 나의 도타운 메사구 동인들을 사랑한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있는 문학을 사랑한다. 그 툽상스러우면서도 소박하고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친구같은 메사구와 순하면서도 사납고 사나우면서도 귀여운 애인같은 맛의 술을 사랑하듯이! 지리에서 북위 40~ 50도 사이를 라고 부른다. 밀위키며 삿뽀로며 뮌헨이며 맥주가 많이 나는곳이 전부 다 이 위도에 위치해 있기때문이다. 그렇게 지도에 기록될만큼 맥주는 온 누리의 사내들이고보면 생명으로 선호하는 음료이요, 생명수다. 술은 사내들의 영원한 지중해이다. 그 물결속에는 사내들의 소모되여버린 수많은 추억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고 사내들이 넘어야 할 수많은 시련의 파도가 기다리고 있다. 매일같이 호매롭게 술의 해양속으로 잠수하는 사내들, 그곳에 진정 사내들만의 천지가 있다. 정토의 신천지를 찾아 미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추수감사절때면 오염된 물이 몸과 마음을 더럽힐가봐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한다.하여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술(spirit)이란 말은 령혼이라는 말과 꼭 같이 쓰인다. 잔잔한 술로 머리를 식히고 유쾌히 마시는 기분으로 삶의 의욕을 다시 북돋아주는 술, 나는 한잔의 술이 나의 령혼을 맑게 정화해 주리라 애주가의 변(辯)이 아닌 마음으로 믿는다. ♡  
76    귀거래사(歸去來辭) 댓글:  조회:3113  추천:73  2007-06-29
. 잡문 . 귀거래사(歸去來辭) 김 혁   1, 지난 5월 말 칸 국제영화제가 60돌 생일을 맞았다. (칸 국제영화제는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가 공인하는 3대 영화제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창설시간이 가장 긴…) 회갑을 맞은 영화제, 여느 때보다 뜻깊은 그번의 영화제에서 한국 녀배우 전도연이 영화<<밀양>>에서의 빼여난 연기로 녀우주연상을 수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였다. 프랑스 영화계의 로장 알랭 들롱이 <<칸의 녀신>>- 전도연의 손등에 입맞추며 트로피(賞牌)를 넘겨주었다. (알란들 롱은 80년대 우리를 열광케했던 영화 <<졸로>>에서 눈가리개를 하고 도포를 펄럭이며 출중한 격검술로 사악을 무찔렀던 검술영화의 주역, 정의의 기사 졸로라는 대명사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거물급배우다. ) 한 녀배우의 수상에 웬 흥감질이냐 할수 있겠지만 이는 한국영화계는 물론 아세아 영화계에서도 특기할만한 수상이였다. 지금까지 동양계 녀배우로 칸영화제 녀우주연상 수상은 향항의 장만옥에 이어 그가 두 번째이기 때문. 아릿다운 녀스타에 대한 얘기가 길어지다보니 이제야 본제로 들어간다. 한낱 가녀린 동양계 녀배우를 일약 두번째 <<칸의 녀왕>>으로 등극 시킨 이는 <<밀양>>의 감독 리창동이다. 영화 <<밀양>>의 녀주인공 전도연과 칸영화제에 참석한 리창동 리창동, 누구신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흥취가 있는 이들에겐 뢰성벽력처럼 귀전에 쟁쟁한 인물이다. (전도연 역시) 리창동(李滄東) 감독은 한국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대구에서 태여난 리감독은 문화부 장관 이전에 영화감독,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 경력을 지니고 있다. 198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돼 등단,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운몀에 관하여>>,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각각 리상문학상 우수상과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 력량을 인정받았다. 그러다 영화에 빠져들어 어느 유명감독의 조감독도 해보고 각본도 두루 써오다가 1996년 영화 <<초록물고기>>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도시화와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각본상과 영화평론가상 작품상,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한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카나다 밴쿠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20여 개의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1999년에 내놓은 두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군사독재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 작품으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그 본인은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2002년 발표한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 리감독은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였다. 관가와 문화계는 물론 일반 국민도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감추지 못해했다. 문화예술계는 예술인출신 장관의 탄생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감독으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는 리감독이 자칫 관료생활로 인해 그 동안 닦아온 예술적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인차 깨여졌다. (<<종살이가 주인집 마님의 속옷 걱정>>하는 격으로) 장관 취임이후 리감독은 기존의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과는 차별화되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줬다. 리감독, 아니 리장관은 취임초 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이제부터 <<노타이(넥타이 no!)다!>>, <<형식이 굳 으면 내용이 살지 못한다. 문화예술인들을 자주 만나는 문화관광부 공무원들은 권위주의보다 일상적 감각과 형식을 통해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며 문화정책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에서 직원들에게 <<형식파괴>>를 권유했다.  (관직에 오르기 바쁘게 혼자 전체 직원들의 사무실보다 더 크고 채광이 좋은 독방에 일명 <<로반상>>이라 부르는 큰 테불상에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부터 갖추는, 그 의자에 앉는 날 부터 까닭없는 위세로 얼굴이 풀 먹인것처럼 딱딱하게 굳는, 우리의 령도동지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사뭇 다르다.) <<영화감독은 내 본업이다. 장관직은 사실 내 인생의 일정표에 없었던 일이다. 장관이 되기 전에 많이 고민했지만 돌이켜보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문화부장관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것을 <<인생의 아이러니>>라 표현했다. 그 스스로 청하지 않았으되 그 자신의 말마따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안테나를 정지>>시키고 문화부 장관직에 오른 것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이라는 그 <<크고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에서 일년반도 못 되여 물러났다. 리장관, 아니 리감독은 레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노타이 차림으로 문화관광부에 입성했던 모습 그 대로 리임식 대신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청사를 떠났다. 재임기간에 손수 차를 몰고 출근하는 등 예술가로서 감각과 자기령역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총선때 정치권의 지역구 출마요구를 거부한 그는 다만 정치권에 섞이지 않으려는 웅숭깊은 처신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린것이다.  시간과 작품만이 그 자신을 <<장관으로 보는 시선>>을 거두어 가리라 생각한다고 했던 리창동은 장관 퇴임후 영화계 복귀작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 칸이 기립박수를 드린, 동양계에서 두번째 녀우주연상을 이끌어내는 쾌거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영화 <<밀양>>의 포스터 2, 이번엔 포송령(蒲松齡)의 문언(文言)소설집 <<료재지이>>에서 나오는 그 사람 얘기다. <<료재지이>>는 (민간전설에서 널리 취하여 여우며 귀신 도깨비들을 등장시켜 인간사회를 의인화, 저승세계를 현실생활과 잘 융합시켜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 가운데 인생철학을 담은 청나라때 지괴소설-志怪小說.) 세인이 다 아는 명저이니 이쯤에서 각설하기로 하고… 광생이라는 문인에 대한 이야기다. <<료재지이>> 수백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라고 한다. 대략 간추려보면-   옛날, 작은 관리 하나가 작은 현에 부임했는데 청고한 문인을 벗으로 삼고저했다. 수하들이 때자국이 꾀죄죄 흐르는 문인 하나를 천거했는데, 관리는 그 문인을 자주 만나 술잔 기울이며 세상사를 담론했다. 미구에 관리는 괜찮아 보이는 그 문인에게 관직 하나를 맡겼다. (자그마한…) 그런데, 그때로부터 그 문인이 문인답지않게 후딱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상전에게는 좋은 말만 괴여 올리고 죄없는 백성들과도 호통질이 십상인데 도무지 애초의 문인맛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에 관리가 머리를 절레절레, 그 문인을 관가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포송령님은 왜 그 문인의 이름을 굳이 광생(狂生)이라 달았을가? 제 푼수도 모르는 미쳐난 서생이라는 뜻에서?   3, 옛날에는 벼슬을 하려면 문학공부를 해야만 되였다. 문장을 잘 지어 과거에 급제하면 정승도 되고 판서도 된다. 이로서 문학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였다. 벼슬자리는 적극적인 면으로는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수단이다. 그에 반해 소극적인 면에서는 부정당한 사리를 도모하고 전제와 폭정을 유발하는 도구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요즘 보면 벼슬아치들을 보면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자아가 비틀어지고 분식된다. 따라서 모두가 부여한 벼슬의 원형의 적극적 일면이 소실되고 자사자리적인 수단으로 전락된다. 어제를 돌이켜보면 이름이 쟁쟁한 문호, 문웅(文雄)들중에 벼슬길에 오른 문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굴원은 삼려대부(三?大夫)라는 관직을,리백은 한림(翰林)이라는 관직을,도연명은 팽택령(彭?令)이라는 관직을,두보는 공부원외랑(工部?外?)이라는 관직을…      (관직이름이 저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서 뭔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직역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화려한 <<오사모>>를 벗어버렸다. 루추한 서재에서 때깔좋은 관가로 옮기자 곧 자기가 거처할 곳이 아님을, 자기가 가야 할 길이 길이 아님을 발견했던것이다. 모두들의 선망속에 오른 그곳이 허환(?幻)의 세계이고 지어 비렬한 권모술수가 란무하는 곳임을 알아차렸고  그 옥에 스스로를 가둘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고작 다섯말의 (五斗米, 당시 관리들의 월급) 쌀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리백은 스스로 술의 신(酒中仙)이라 자처하며 천자가 불러도 곁에 가지 않았다. 얼마나 멋진(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쿨!한) 화폭인가! 이러한 유유자적의 쾌의(快意)속에는 비틀어진 권세욕에 대한 멸시와 염오가 서려 있었다. 또한 그 쾌의는 자아의 찾음과 회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것은 시 한 수의 삶이 아니였다. 그것은 일종의 사상이였고 하나의 고오(孤傲)한 령혼이였다. 하기에 권력이 횡행하고 세속이 란무하는 세상에서도 작은 먹이에 연연하는 닭, 오리가 아닌 오연한 학처럼 빼여날수 있었다. (<<군계일학>>보다 더 좋은 격찬은 없나) 그들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옯겨놓고 리해하려 한다면 쉽지는 않다. 요즘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구하고 열광하는 것은 관연 무엇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권세에 아부하고 봉응(奉迎) 하는 관습에 물젖어 왔다. 오늘날 생활의 모든 가치와 요의(要?)는 흡사 권세자와 돈있는 자들의 손에만 쥐여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소유한 사회의 량지(良知)가 있는 력량은 흔히 권력앞에서 아주 미비하다. 권세자들의 횡포와야만에 비할 때 문인들이 한사코 수호하고저 하는 철칙은 그렇듯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무원조하고 고독함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시대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 서가에서 나와 관가로 달려가는, 그 문전을 기웃거리는 문인들의 모습이 보여우려되는 요즘이다. 문학에 매혹되였던 이들이 어쩌구려 벼슬에 환혹(眩惑)되여 버렸다. 그것도 룡관이 아닌 닭볏만한 오사모를 두고 서로 쓰려고 생색을 쓰고 아귀다툼을 벌린다. (왜 사람과 사람사이에 권세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그렇듯 복잡하게 허환스럽게 보이는지…) 흔히 관직에 오른 다음의 문인들을 보면 그렇게 맹렬한 창작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관직에 오르면 사소한 잡일에 매여 창작의 충분한 시간을 잃을뿐더러 설령 시간이 있더라도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 위치가 달라진 만큼 그렇게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혹은 감히 쓰지 못해서다. 그러다 필에 녹이 껴 미구에는 아주 쓸수도 없게 된다. <<재다신약(財多身弱)이요, 관다신형(官多身刑)이라!>>는 말이 있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지고, 벼슬이 많으면 몸에 고초가 있다는 명리학(命理學)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벼슬은 아집과 리기심에 바탕한 탐욕으로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한다. (<<료재지이>>속 그 반푼수의 광생이처럼) 한 문인이 권세욕망의 지배와 의지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는 리익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속적 욕망추구로 오염된 삶을 관직을 통해 무마하고자 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한, 문인의 삶을 이어나가 기는 어렵다. 유한한 권력에 취해 마른 기침하는 문인보다 무한한 창작세계에 자신을 던져 웅숭깊은 소리를 내는 작가들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명저들이 후세까지도 주목되고 애독되는 까닭은 악속(?俗)에 물젖은 동류들과 합족하지 않고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의 령혼을 칭송하는 지은 이들의 경지 때문이다. 그곳에 명작가들의 품덕과 량지가 있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벼슬자리같은 것을 멀리한뒤의 위축감, 망연함이나 순간적인 경이로움이 아닌 장구한 령혼찬가의 절구들로 남아 있을수 있는 것이다. 벼슬자리를 팽개치고 은둔으로 일생의 한 절정을 장식한 도연명의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몇구절을 뽑아 열뜬 문단 열뜬 그 사람들에게 드려본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覺今是而昨非 … 復駕言兮焉求 樂琴書以消憂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 … 이제는 깨달아 지난날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였음을 알았다. … …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으랴.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을 달래리 사족(蛇足): 멋진 그 사람 리창동감독이 지금까지 만든 4부의 영화중에서 시중(市中)에 팔리고 있는 것은 <<오아시스>>, <<박하사탕>>도 가끔 볼수 있으나 <<초록물고기>>는 찾기가 쉽지 않다. 나도 DVD를 못구하고 비디오 테잎으로 간직하고 있다. 칸을 놀래운 영화 <<밀양>>은 아직 DVD로 출시되지 않았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영화라 한다. 꼭 갖추어야겠다. <<밀양>> 예고편  
75    독서하는 민족 댓글:  조회:2937  추천:73  2007-06-29
. 잡문 . 독서하는 민족 김 혁 하나 해마다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책의 날(World Book Day)>>이다. 유네스코는 지난 1995년 세계인, 특히 청소년들의 독서 증진을 위해 이 날을 만들었다. (이날은 또한 세계적인 대문호 쉑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날이면 에스빠냐에서는 책과 장미의 축제가 개최되고, 영국에서는 이날을 전후해 한달 동안 부모가 잠자리에서 아이들에게 20분씩 책을 읽어준다고 한다. 올해 제13회 <<세계책의 날>>을 맞아 연변에서도 제1회연변독서절을 개최했다. 서적기증활동, 만명<<책을 사랑하기>>서명활동, 무료독서활동, <<내가 가장 즐기는 한권의 책>>글짓기콩클 등으로 다채로운 활동이 7월말까지 쭉 지속적으로 펼쳐 졌다. 이에 앞서 연변주 선전부 부장이 보도출판계의 회의에서 열심히 독서할 것을 특별히 주문했다. 리흥국 연변조선족자치주선전부장은 <<한사람이 매일 저녁 8시부터 10사이에 무엇을 하느냐가 금후의 방향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명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대에 손님접대에 바쁘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독서할 뿐 일년에 책 한 권도 완전하게 읽지 않는다>>면서 이는 아주 위태로운 현상이라고 경고했다. 늘 술좌석에 퍼져있기가 일쑤, 텔레비를 보고 인터넷도 접속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로 독서를 대체할수는 없다면서 독서를 하지않는 그릇된 풍조에 일침을 가했다.  둘 여기 독서에 자별한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세계에서 가장 독서를 많이 하는 민족은 유대인 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의 책에 대한 익애(溺愛)는 자별하다. 사람들은 유태인을 부지런히 학습하고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민족이라고 부른다. 독서가 사람의 운명을 바꿀수 있음을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태인들의 집에 많은 것을 세가지로 들수있다. 그릇 포도주와 책이다. 그릇과 포도주는 그들의 신앙생활때문이고 책은 그들의 왕성한 독서욕때문이다.유태인의 집거구인 이스라엘에서는 14세 이상의 사람들은 평균 매달 한권 이상의 책을 읽는데 이는 세계 여느 나라의 굴지로 꼽힌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각 촌과 진에는 환경이 우아하고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이나 열람실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인구가 겨우 500만인 그들은 900여종의 잡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100만 여명이 도서관 차용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유태인들은 묘지에 제물과 함께 책도 놓곤 했다. 밤이면 고인이 나와 책을 읽는다고 그들은 여겼다. 고인들의 적막함을 달래주기위해 꼭 책을 놓는것이 어떤 제례처럼 진행되었던 것이다. 유태가정의 많은 집들에서는 아이들이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책의 갈피에 꿀을 발라놓곤 한다. 애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을 번지면 달콤한 맛을 느끼는데 독서는 지겨운 것이 아니라 달콤한 일이며 책을 읽어야 너의 미래도 달콤할수 있다고 어려서부터 독서의 중요성을 교묘하게 환기시켜준다. 또한 아이들은 입학하면 누구나 <<만약 집에 불이 났다면 무엇부터 구하겠는가?>>하는 질문을 받곤 하며 <<금전이나 재물이 아니라 지혜 곧바로 책부터 구해내야 한다>>, <<재물은 불에 타거나 도적맞힐수도 있지만 지식은 영원히 간직할수 있다>>는 교육을 받는다. 유태인의 <<탈무드>>에는 <<책이 없는 집은 령혼이 없는 몸 과 같다.>>, <<생활이 궁핍 하면 금, 은 보석을 제일 먼저 팔고 , 그래도 궁핍하면 집을 팔고, 다음에 땅을 팔아라. 그러나 아무리 궁핍해도 책을 팔면 안되느니라>>, <<지갑과 책이 땅에 떨어지면 책부터 주어라>> 등등 독서에 관한 수많은 경구가 기록 되어 있다. 유태인들의 끈질긴 학습정신은 풍성한 보람을 가져왔다. 전세계 유태인은 1282만으로서 세계인구의 0.23퍼센트를 차지한다. 하지만 20세기 640여명의 노벨상수상자 중에 유태인 출신이 121명이나 있다. 많은 과학자를 배출했을뿐더러 억대부호도 여느 민족에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손꼽는 억대부호들 중 유태인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럽의 상류층 사람들과 미국의 력대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유태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 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중에는 인류력사의 반렬에 우뚝 서는 쟁쟁한 명성의 인물도 많다. 프로레타리의 도사 칼 맑스, 세계적인 발명왕. 전구, 전신기, 영사기, 축음기의 발명자인 토마스 에디슨, 상대성 리론을 정리한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아인슈타인,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드, 세계 최고의 갑부이자 <<인터넷 황제>>인 빌 게이츠, 저명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 미국역사상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독서를 비롯한 민족의 지식력 육성, 전통문화에 대한 끝질긴 사수가 방랑의 길에서 그토록 험난한 수난을 겪는 민족을 세계에서 제일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게 했던것이다. 셋 우리 조선족이 <<동방의 유태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있다. 유태인의 디아스포라의 중심지가 알렉산드리아였던 것처럼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과 그 거주지 역시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기에 동양 문화의 중심인 중국에 속한 조선족은 <<민족적 동양 문화>> 즉 <<자신만의 민족 문화>>를 꽃피워내야 한다는 글. 민족의 전통, 의식을 제대로 지켜온 지구상의 존경받는 유태인들의 정신을 깨닫고 우리 조선족도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자라는 취지에서 비롯된 지론(至論)이다. 격변기의 오늘날 도시진출, 해외로무송출 그에 따른 인구의 마이나스 장성, 조선족학교의 학생원감소, 게다가 시장경제법칙에 걸맞지 않는 출판부문의 일부 페단, 각종 미디어물의 빠른 보급으로 받는 충격. 하루살이와도 같은 향락적인 생활신조의 만연... 등등으로 책과 담을 쌓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요인은 중국조선족사회의 독서열의 랭각과 도서인구의 급락을 낳았다. <<축구의 고향>>이요, <<가무의 고향>>이요하고 자부를 머금었던 우리 민족이지만 독서의 그 무엇 이라 붙일만한 명분은 없다. 독서는 삶에 많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우선 좋은 책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은 참으로 크다. 몰입해서 책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대단하다. 좋은 책을 읽고,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고, 배운 지식을 주변과 나누고, 그럼으로써 생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순환 고리이다. 독서는 즐거움 그 자체뿐 아니라 깊이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독서는 살아가기 위한 예비련습 과정이며 생존을 위한 도구가 된다 지혜와 지식이 풍부 해지고, 자기 정신세계의 확대와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유익한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꾸려나가는 데는 책만 한 것이 없다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을 통해서 인생을 배운다고 해도 독서를 통한 경험분량의 확대를 따라 갈수 없는 것이다.<<자신을 주기적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느냐>>가 지식사회의 새로운 화두다 지식정보화사회, 지식기반사회로 변화해 가는 지금 시점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더구나 책을 들어야 한다.어느 한 사주명리학자는 팔자를 고치기 위해 적선을 하고, 눈 밝은 스승을 만나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독서라고 말했다. 또 <<명심보감>>에서는 독서는 집안을 일으키는 근본이라 했다. 책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고, 이 험한 세상 건너는 징검다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할때, 어쩌면 온 민족을 통한 책읽기는 우리 민족이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비전할 수는 또 하나의 완연한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미국 시인 휘트먼이 시구에서 적듯이 <<우리의 미션(任務)은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태여나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운명을 지닌 인간에겐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꼭 읽어 나가야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공동체 성원 모두가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듯 독서에 빠져드는 그런 풍조를 기대해 본다.  
74    어떤 기우(杞憂) 댓글:  조회:3266  추천:73  2007-06-29
. 칼럼 . 어떤 기우(杞憂) 김 혁 1…어느때부터인가 빠지는 머리카락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자고나면 베개잇에 흘려진 머리카락들을 무심히 주어던지다가 어느 한번은 한웅큼 정도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보고나자 섬찍한 생각이 갈마드는것이였다. (이러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대머리아저씨》로 되여버릴가보다!)황황한 마음을 안추르며 머리칼이 재생하는데 좋다는 방법들을 써보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빗을 사서는 짬만 나면 극성스레 빗기도 했고 안해보고 미역국을 끓여달라 하여 몸 푼 아낙네들처럼 들이키기도 했다. 컴퓨터공부를 하면서 배운 포토 샵기술로 숱 많은 어느 배우의 머리칼에 내 얼굴을 합성해보기도 했다. 풍성한 모발의 나 같지 않은 나를 지켜보며 자아위안을 머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안해가 못말려! 하고 웃었다. 《레닌동지처럼은 안될거니 근심 마세요. 가문에 대머리가 없잖아요. 번대머리는 십중팔구 유전에서 온다던데…》하지만 거울앞에 마주 설 때면 은근히 신경이 쓰여지는 숱 적은 내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이 한오리씩 빠질 때면 누구나 그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 그 한오리 한오리가 이어져 나중에 번대머리의 악효과를 초래하는것이다. 이를 철학에서 《대머리 론증(論證)》이라고 한다. 같은 현상은 수목에서도 나타난다. 콜로라도 협곡의 어느 산등성이에 400년 경륜을 기록하는 거목이 있었다. 항해가 콜롬부스가 이곳에 상륙했을 때 벌써 이 나무는 서있었다. 오랜 세월속에 나무는 폭풍우와 눈사태의 세례를 받아왔고 14차나 벼락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무는 의연히 꿋꿋이 뻗쳐서서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왔었다. 그러던 나무가 어느날인가 돌연히 넘어져버렸다. 무엇이 세기의 창상을 이겨낸 나무를 순식간에 넘어뜨렸을가? 생물학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연구해본 결과 그 원흉은 어이없게도 개미였다. 한무리의 개미들이 나무의 뿌리에 은둔해서 부지런히 수근목피를 갉아댄 결과 창창 거목으로 여겼던 나무가 어느 하루 간지러운 미풍에도 그만 우지끈 넘어가버린것이다. 이런 현상을 생물학에서 《개미효응(效應)》이라고 한다. 생물학 실험의 사례를 한가지 더 들어보기로 하자. 미국 칸내얼대학의 연구일군들이 개구리를 두고 실험을 한적 있다. 먼저 실험용개구리를 끓는 물에 던져넣어보았다. 그러자 그 위기일발의 순간 개구리가 끓는 가마에서 풀쩍 뛰쳐나오는것이 아닌가! 다시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고 그 용기(容器)에 천천히 열을 가했다. 개구리는 여유작작해 찬물에서 헤염치고있었다. 온도가 뜨거워졌으나 개구리는 전혀 느끼지 못한듯 했다. 마치 온수욕이나 하는듯 그냥 물에서 노닐고있었다. 결과 개구리는 점차 끓어오르는 물에 데여 죽고말았다. 2은연중 이러한 사례들을 닮은 현상들이 우리가 살고있는 주변 도처에서 보여져 걱정이다. 그닥 흥미없는 생물학 사례들을 구구히 늘여놓는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례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가? 하는 괘념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락미지액(落眉之厄)도 모르는 그 어리버리한 개구리를 닮은 꼴이지 않나 하는 자괴(自愧)때문에서이다. 이는 결코 《모기를 보고 비행기야!》하는식의 흥감질이나 《하늘이 무너질가 두려워하는 기(杞)나라 사람》식의 부질없는 근심이 아니다. 요즘처럼 사회적현안들이 보물처럼 터진적은 별로 없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인구의 대량이동으로 촌부락이 소실되고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섭외혼인으로 남녀비례가 실조되여 농촌총각들이 가정을 못이루고 그로서 인구가 마이너스장성을 기록하고 그에 이은 련쇄반응에 학교가 페교되고 조선족아이들이 한족학교로 가고… 과거 한세기동안 우리가 피와 땀을 바쳐 이루어왔던 공동체와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가치관이 눈에 띄이게 흔들리고있다. 우리가 정성들여 심고 우리가 일껏 가꾸어왔던 생명의 나무가 열매를 달지 못한채 잎이 떨어져내리고 가지가 말라들어 넘어지려 하고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우리의 공동적 삶의 바탕이 위협당하고 송두리째 파괴될수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대머리를 괘념하는것보다 더 크게 마음을 괴롭힌다. 우리가 한오리의 머리칼처럼, 한마리의 개미처럼 무심히 방임해온 일상의 징후가 루적되여 최종의 악효과를 초래할수 있는것이다.우리 공동체의 기본 구조와 토대를 은근히 위협하고있는 다가온 위기와 그에 따른 대책을 언급해야할 때에 우리는 위기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기대처에 대한 무지를 실감하고있다. 늦게나마 위기의식에 대해 우리 사회에 권장하고싶다. 이제부터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마음속으로 음미해볼 시점에 와있는것이다.3위기란 말은 원래 돌연한 병상(病狀) 변화를 뜻하는, 의학용어에서 쓰이던 말이다. 그러한 어원에서 비롯되여 위기는 어떤 상태의 안정에 대해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수 있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일러 말한다. 위기는 인간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인 면을 비롯하여 한 나라의 정치, 사회체제, 나아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발생하는 각 상황의 변화에 력점을 부여해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있다. 실직, 파산, 질병, 사망, 리혼, 불경기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재난, 더 큰 의미로는 식량위기, 생태위기, 인구폭발위기, 물위기, 에너지위기, 핵위기 등이다. 이러한 급격한 정세변화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최근 세계 각지에서는 위기관리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게 되였다. 그것은 어떤 상태에서 위기를 느꼈을 경우, 위기를 효률적으로 관리하여 그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재빨리 평상상태나 그에 가까운 상태로 회복시키는것을 의미한다. 일본 《닛산》자동차회사가 세계자동차시장에서 굴지의 위치를 계속 확보할수 있은 비결이 바로 그 위기관리를 도입한 결과이다. 그들 특유의 경영관리모식을 보면 평소에 늘 모든 직원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회사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직원들의 사기가 둔감해져 수익성 있는 회사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를 놓치게 되기때문에 위기감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는것은 기업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더욱 중요한것은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필연적으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궁극적변화를 통해서 각자의 가정과 직장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사회 전체로 파급되는 효과를 발생한다고 믿는것이다.권투훈련에도 이러한 방식은 적용된다. 《그림자복싱》이라는 훈련방식이 있다. 마치 권투왕 아리나 타이썬, 루이스와 같은 강대한 라이벌과 게임을 치르는것처럼 가상하고 하는 련습이다. 위기상황을 상상하면서 중추신경의 기전을 리용한 훈련방법, 평소의 훈련에 지나지 않지만 위기를 환기시키고 그로서 비롯되는 흥분을 불에 기름을 붓는 활력소로 간주한다. 이렇게 오래 하면 어느새인가 그런 위기상황이 머리에 그려지게 되여 실전에 림해도 온건한 효과를 거둘수 있게 된다고 한다. 위기를 역으로 리용할수 있는 이런 기능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도록 준비를 했느냐, 위기극복책을 강구할 취지가 토의되였느냐에 달려있다.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것이 아니고 천천히 조금씩 잉태되면서 우리 다수가 느끼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것이다. 평온한 일상을 꿈꾸다 사람들은 문득 저며오는 통증을 느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육체적통증을 넘어 도덕적통증이나 사회적통증을 느낄수 있다는점이다. 뿐만아니라 그 고통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해나갈줄도 안다. 육체적통증을 제어할수 있는 신경면역체계처럼 사회적통증을 제어할수 있는 면역체계를 세우자면 그것이 바로 한 사회가 보유하고있는 위기에 대한 인식정도가 아닐가 생각한다. 위기에 대한 인식은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가려내기 위한 첫 진단인셈이다. 진단조차 할수 없다면 이 사회의 건강성은 제대로 유지될수 없다. 위기상황에 처하면 신속한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이건 동물의 개체보존의 본능적반응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면 위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 조선족은 여태껏 량호한 자아감각을 가지고 지내왔기에 위기의식과 우환의식이 아주 결핍하다. 치명적인 내장의 아픔을 껴안고도 우리가 남들앞에 각인된 이미지란 술 잘 마시고 놀음 잘 노는 모습이다. 거리에 나서면 한집 건너씩 길을 향해 늘어서있는 다방, 술집, 노래방, 사우나, 족발안마… 뿌리가 썩어가고있는 상황을 의식 못한채 언제 봐도 마치 가무승평(歌舞升平)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앞에는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처능력이 박절히 제기되고있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위기의식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민족의 리지(理智)도와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다. 현실속에서 우리가 겪고있는 위기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조선족으로서의 기본단위를 어떻게 운영할것인가에 관한 민족성원들의 공동적인식을 확립하지 못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우리가 나타나고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제때에 인식 못하고 그에 대한 시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문제점들을 도외시하고 제때에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자기의 양상과 위치를 상실하고말것이며 락후한 민족으로 전락되고말것이다.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이 있다. 전성에서 외화수입 앞자리, 인구당 택시가 제일 많은 도시, 춤과 노래의 고향… 등등의 번지르르한 수식에 환혹(幻惑)되여 흥타령만 불러서는 안된다. 따스한 물에 담겨져 기분 좋은 개구리처럼 탕개가 풀려서는 안되는것이다. 평소에 우리가 당착한 위기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하며 이에 대한 시대적 각성과 성찰을 해봐야 하는것이다. 인생에는 늘 위기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 위기는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도 하고 보다 새로운 삶을 향한 리정표가 되여주기도 한다. 중국어로 《위기》는 두글자로 이루어져있다. 한글자는 위험을 나타내고 다른 한글자는 기회를 나타낸다. 또 브레덴 백과사전에서 위기는《좋아지고 나빠지게 되는 갈림길》이라 씌여있다. 즉 위기는 그 자체가 부정적요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상황을 낳는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우리 사회의 위기해법은 우리 자신에 있다.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수한 문화유산을 지니고있는 우리 민족에게 목전의 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여건들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랭정히 인식할 때 우리는 이 위기를 벗어날수 있으며 비로소 우리는 이 총체적난국을 풀어가는 주인으로 설수 있을것이다. 많은 우족지사(憂族之士)들이 나타나 위기의식을 품고 민족의 현황과 미래를 재검토하면서 문제점들을 착중하여 밝힌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허우적이고있는 진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있는것이다.《렬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서 나오는 하늘이 무너져내릴가 근심한 기나라 사람의 우화에 대해 모두가 알고있지만 그에 이은 속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적은것 같다.하늘이 무너지지 않음을 깨우쳐 알고 기나라 사람이 마음을 놓고 크게 기뻐했고이것을 깨우쳐준 사람도 또한 함께 기뻐했지만 그후 장려자(長廬子)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하늘이 무너지지나 않을가 하고 근심한것은 근심을 지나치게 하는것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지만 무너지지 않는다고 단언하는것도 옳바른 일은 아니다.》 다음 《렬자(列子)》의 말을 빌어서 《하늘이 무너지거나 무너지지 않거나, 그런것을 알고 그런것에 혼란하지 않는 마음의 경지가 중요한것이다.》라고 하였다.나 개인의 머리칼 한오리의 미세한 변화를 걱정하듯이 민족의 일에 대한 괘념을 가지는것이야말로 민족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응분의 마음가짐인줄로 안다. 현실을 방임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더 높은, 더 힘찬 비전을 위해 위기에 대처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기른다면 우리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가?오늘도 내 숱 적은 머리칼이 바람에 스친다…    
73    불의 제전 (1) 댓글:  조회:2849  추천:73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김 혁 …… 모든 악장(樂章)은 끝났는데 그치지 않고 울리는 선률이여 착지(着地)할수 없는 다리여 멈출수 없는 팔이여 몸체에서 떨어져나간채 떠돌아다니는 팔 조약하는 자세로 뻗쳐있는 다리여… 모든 악장은 끝났는데 착지할 땅이 없어 허공에서 수직으로 거듭 꽂히기만하는 다리 없는 토슈즈(발레배우들이 신는 무용신)여 ―정한모의 《춤의 판타지아》에서      진, 불을 느끼다     진(眞)이 가장 무서워하는것이 하나 있었다. 엄동이면 홀쭉한 배로 눈빛이 매워져 부락까지 내려오는 늑대가 아니였다. 숲을 지나다 무심히 건드려도 사정없이 이마빼기를 쏘는 말벌이 아니였다. 부락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들것에 들려나가게 하던 온몸에 창이 생기는 병도 아니였다. 진이 가장 무서워하는것은… 바로… 불이였다! 초동머리적, 화덕앞에서 장난질치다가 그만 이글거리는 화덕에 엎어졌다. 어머니가 재빨리 일으켜세웠지만 얼굴 반편이 불에 데이고말았다. 지금은 왼편 이마전에 동전잎만한 흉터로 남았지만 불이 주던 강렬한 인상의 아픔은 마음속 깊은 곳에 력력히 찍혀있다. 불을 무서워하던 진이 불을 좋아하기 시작한것은 어느 봄, 부락에서 화신제(火神祭)가 있은 날부터였다. 마을의 남쪽에 우뚝 치솟은 산, 적봉(赤峰)기슭에서 화신제 잔치가 펼쳐졌다. 매양 봄이 오면 부락에서는 불을 다시 지핀다. 족장과 부락의 년장자들이 적봉의 동혈(同穴)에 모신 불로부터 집집의 아궁이의 불까지 모두 꺼버리고 새로 불을 지핀다. 불도 일년내내 같은 불을 계속해서 쓴다면 기운이 쇠진한다는 뜻에서 부락사람들은 새불을 일으켜 새봄을 맞이하곤 했다. 이날이면 부락사람들 모두가 떨쳐나 해가 떨어지도록 화당(火塘)에서 타오르는 불을 둘러싸고 광열의 춤을 추곤 했다. 그렇게 진이네 부락, 남하(南河) 사람들은 불을 숭배하는 족속이였다. 그날 명절기분에 아침부터 붕― 떠있는 사람들을 묻어서 진은 화신제가 열리는 적봉기슭으로 나왔다. 화당은 여느때보다 더 넓게 꾸며져있었고 그속에는 불땀이 좋은 잘게 팬 장작들이 가득 무져있었다. 정오가 되였다. 화신제가 열리는 시간이다. 장대한 키꼴을 가진 족장 굉(宏)이 마을 년장자들의 옹위하에 나타났다. 름름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고나서 굉이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족장을 따라 수천명의 부락사람들이 무너지듯 무릎을 꺾었다. 족장의 입에서 격앙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땅을 굽어살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춥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배를 곯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불처럼 따뜻하게 하소서… 부락사람들이 따라서 족장의 말을 복창하였다.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하늘 우러러 비원(悲願)을 마치고나서 족장이 무언가 머리우에 받쳐올렸다. 거울, 금박칠을 올리고 테두리에 문양을 새긴, 양경(陽鏡)이라는 이름의 불을 지피는데 사용되는 거울이였다. 족장이 양경을 들어올릴 때 그 번쩍이는 빛이 눈에 쏘여와 진은 눈시울을 좁혔다. 족장이 양경을 들어 화당의 장작개비에 대고 비추었다. 정오의 태양은 찬란했고 양경에서는 태양의 빛이 반사되여 쏟아져나오고있었다. 모두들은 숨을 죽이고 양경을 지켜보았다. 수천쌍의 눈이 오목거울이 실어낸 빛줄기가 몰부어져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있었다. 이때,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나지막한 북소리가 울렸다. 나지막하지만 사람들의 눈귀를 순간에 앗아가는 북소리가 울렸다. 십여명의 동자들이 저마다 손북을 두드리며 동굴부터 나오고있었다. 동자들은 저마다 머리에 빨간 천을 두르고있었고 빨간 버선을 신고있었다. 무용단의 춤추는 아이들이였다. 화신제때면 춤을 추는 아이들을 부락에서는 화동(火童)이라고 불렀다. 부락에는 화신무용단(火神舞踊團)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화신무용단 성원들은 족장 굉 다음으로 부락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였다. 화동들의 북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잦아지는 북소리와 더불어 동굴에서 짐승 한마리가 뛰쳐나왔다. 화견(火犬)이였다. 불을 먹고 사는 불개였다. 일신이 붉은 털로 덮여있는 개는 무용단에서 기르는 령물이였다. 개가 하늘을 바라고 컹컹 짖었다. 이어 동굴로부터 또 한사람이 나왔다. 백발동안의 로인이였다. 유난히도 긴 눈섭을 가진 로인은 붉은 수건으로 이마를 질끈 동이고있었다. 웃동은 벗고있었는데 해볕에 그을린 몸체는 검붉었다. 허리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있었고 신은 동자들처럼 역시 빨간 버선이였다. 그 사람이 다름아닌 명(明)이였다. 명은 무자(舞者)였다. 화신무용단을 거느리는 최고의 무용수였다. 무자는 부락에서 뛰여난 무용수에게 주는 급별이였고 한부락에 무자는 단 한명뿐이였다. 무자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칭호는 부여된다. 부락사람들의 응시속에 무자는 두팔을 량쪽으로 뻗었다. 머리를 뒤로젖혔다. 북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무동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소리와 함께 홀연, 새가 하늘로 솟아오르듯이 몸을 훌쩍 솟구며 무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훨훨! 훨! 훠어얼! 불이여 타올라라 타올라라 불이여… 북소리가 높아져갔다. 양경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줄기가 굵어져갔다. 자작나무에서 실연기가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컹컹! 불개가 짖어댔다. 무자의 춤사위가 거세여져갔다. 훨훨! 훨! 훠어얼! 내가 불이여라 네가 불이여라 북소리가 높아져갔다. 양경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줄기가 점점 굵어져갔다. 자작나무에서 파란 실연기가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컹컹! 불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무자의 춤사위는 절정에 치달아있었다. 풋풋한 땀냄새를 떨어뜨리며 춤에 몸을 내던지고있는 무자는 꼭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그는 부락사람 모두를 흥분하게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있었다. 드디여 자작나무에 불이 확! 댕겨졌다. ―불이다아! 사람들이 환희에 넘쳐 괴음들을 질렀다. 우르르 화당을 둘러쌌다. 따스한 불의 기운에 눈을 느스름히 감으며 만족의 신음을 토했다. 족장이 양경을 거두며 껄껄 방성대소를 하였다. 그러나 무자의 춤은 멈추지 않고있었다. 무자의 왕소금이 돋은 등어리가 화염처럼 꿈틀거렸다. 불을 둘러싸고 무자는 맴을 돌고있었다. 불을 탐하는 한마리 짐승처럼 불을 먹으려, 불을 먹으려. 북채에 달린 붉은 술이 춤사위에 맞추어 나붓기고있었다. 북소리도 끊기지 않고있었다. 노래소리도 끊기지 않고있었다. 북소리속에서 노래소리속에서 무자는 완연 타오르는 한줄기 불이 되여있었다. 훨훨! 훨! 훠어얼! 내가 불이여라 네가 불이여라 우리는 불이여라 진이 철이 들어 처음 보는 화신무(火神舞)였다. 잔뜩 키워진 동공으로 해빛과 불줄기와 사람들이 어우러져 열기로 출렁이는 춤마당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의 기억속에서 잠자고있던 그런 풍경인것 같았다. 진은 단쇠가 걀?닿았을 때처럼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진의 작은 가슴은 금세 뜨거운 불씨 한톨을 머금은듯했다. 그 불씨는 혈관을 타고 진의 사지로 뻗어나갔으며 나중엔 명치끝에 모여 타올랐다. 그 불길은 진의 작은 육신을 태워버릴것만 같았다. 정체불명의 충동이 륵막쯤에서 솟구쳤다. 불의 장력(張力)에 끌리듯 진은 저도 모르게 량팔을 펴들고 팔죽지를 길게 뻗쳤다. 무자의 춤사위를 모방하여 머리를 뒤로 젖혀버렸다. 정오의 대공에서 태양은 빛나고있었고 진은 눈확 가득 넘쳐오르는 눈물을 주체할길 없어했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떠올라도 화신제의 열기는 식을줄 몰랐다. 화신제는 홰불놀이로 이어졌다. 달이 뜨면 아이들이 각자 홰불을 들고 벌판에 모여든다. 밭가운데 지경을 그어놓고 홰불싸움을 벌린다. 어른들이 불싸움이 위험하다고 아이들을 못나가게 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홰불을 더 크게 만들어주면서 나가서 용감히 싸우라고 등을 떠민다. 예로부터 홰불싸움에 나가지 못하면 성인대접을 못받는다고 여기기때문이다. 곧 홰불싸움은 일종의 성인식(成人式)이였다. 들은 불천지였다. 함성이 일었고 서로 부딪치는 홰불에서 불찌가 꽃살처럼 튀였다. 불이 무서웠던 진이 홰불을 들고 맨앞에서 달린다. 어제날 불이 무서웠던 진이 아니였다. 목청 깨져라 소리소리지르며 홰불을 휘두르는 진은 어느결에 훌쩍 웃자라있었다. 온몸이 검댕이투성이가 되여 들어서는 진을 보고 어머니가 놀란 눈매를 지었다. ―홰불놀이에 갔어요. 얼굴이 거멓게 그을린 진이 이발을 하얗게 빛내며 말했다. 어머니가 다가가 진을 껴안아주었다. 그을음냄새가 나는 진의 머리를 꼭 껴안아주었다. ―우리 진이 다 컸구나. 어머니는 화신제날이면 집집마다 먹는, 빨간 실고추를 넣어 해처럼 둥글게 부친 전(煎)으로 저녁상을 마련해놓았다. 떡을 뜯다 말고 진이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나 힘이 실린 소리로 말했다. ―오마니 나 춤 배우고싶어. 진, 불을 찾아가다   적봉(赤峰)은 잠든 화산(休火山)이였다. 그리고 불을 숭배하는 남하(南河)족에게서 적봉은 성산(聖山)이였다. 역시 불을 숭배하는 건너부락 산북(山北)족에게도 적봉은 성산이였다. 남하족과 산북족은 본디 뿌리가 같은 족속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지 왜서였던지 서로 창을 들이대고 화살을 쏘아대면서 반목했고 지금은 두 부락으로 나뉘여져 살고있는것이다. 두 부락사이에 지경으로 표시하는 돌각담이 쌓여져있다. 적봉의 화산돌을 주어 쌓은 담이였다. 담은, 어찌나 길었던지 그 길이를 재일수 없었다. 모두들 남하부락을 끼고 흐르는 강만큼 길거라고 했다. 담은, 어찌나 높았던지 그 높이를 재기 어려웠다. 모두들 적봉의 반높이는 될거라고 했다. 그 담을 사람들은 《곡성(哭城)》이라 부른다. 두 부락에서 상잔의 변을 일으키면서 무수히 죽어간 령혼들이 그 담부근에 묻혀 밤이면 음울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화신무용단은 적봉기슭에 화산석으로 지은 돌집에 있었다. 불춤을 배워주는 그곳을 가리켜 부락에서는《화택(火宅)》이라 하였다. 화신제를 치른 이튿날, 진은 화산석으로 계단을 깐 산길을 치달아 《화택》으로 찾아갔다. 멀리서부터 북소리가 들려왔다. 《화택》의 볕바른 마당복판에 석등(石燈)이 세워져있었고 그 등을 둘러싸고서 화동들이 맴을 돌며 춤기량을 익히고있다. 절박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진의 앞을 개 한마리가 뛰쳐나와 막았다. 불청객인 진을 바라고 컹컹 짖어댔다. 개의 입에서 불똥이 튀였다. 화신제날 보았던 불개였다. 온몸통에 붉은 색 털이 뒤덮인것이 인상적이다. 가락맞게 울리던 북소리가 뚝 멎었다. 집앞 평상(平床)에 앉아있던 무자 명이 몸을 일으켰다. ―불독아! 명의 부름을 들은 개가 그의 발치에 가 공손하게 쪼그리고앉았다. 긴 눈섭을 날리며 명은 진을 지켜보았다. ―뭐냐 너? 진이 명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진이라고 하옵니다. 화동이 되고픔다. 거두어주십쇼. 명의 긴 눈섭이 움찔했다. 조금은 놀란듯한 얼굴로 진을 보았다. ―너 누구의 문하(門下)였더냐? ―아직 스승이 없슴다. ―그럼 학당패(學堂牌)를 내보여라. 《학당패》는 부락에서 학당을 나온 사람들에게 발급하는 징표였다. ―패가 없슴다. 공부도 못한 놈임다. 큭큭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동들의 눈길이 일제히 진을 향해 쏠려있다. 별 한심한 놈 다 보겠다는 눈길들이였다. 명이 이마살을 모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라! 여긴 거지를 수용하는 곳도 활량이나 키우는 곳도 아니어늘. 명이 짧게 뱉고나서《화택》으로 들어가버렸다. 화동들이 북채를 잡았고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진이 성큼성큼 춤의 대오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화동의 손에서 북과 채를 앗아냈다. 애들이 진에게서 북을 되빼앗아내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뜰에서 작지 않은 소요가 일었다. 덮쳐드는 애들에게서 잽싸게 빠져나와 진이 성큼 평상우에 뛰여올랐다. ―아니 저 새끼가?! 스승만이 앉을수 있는 평상우에 흙발로 뛰여오르는 진을 보고 격노했으나 다음 순간 애들은 그 자리에 주춤 서버리고말았다. 북소리 울리며 진이 춤을 추기 시작했던것이다. 평상을 무대로 삼아 진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화동들이 일제히 눈확을 키웠다. 그네들이 일년 사계절 배워도 익히지 못한 춤사위가 진에게서 그럴듯하게 지어지고있었다. 《화택》의 문이 삐걱 열렸다. 명이 다시 나왔다. 내심 놀라워하며 물었다. ―어데서 배운 춤이냐? 숨을 고르며 진이 대답했다. ―어제 무자님이 추는 모습을 보았더랬슴다. 명의 긴 눈섭이 다시한번 움찔했다. 족장을 위시하여 마을의 장로 10명이 적봉의 동굴속 석상(石卓)을 둘러싸고 모여앉았다. 동굴에는 화신상(火神像)이 모셔져있었고 그앞의 화당에는 불이 이글거리고있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장로들은 불씨가 모셔져있는 동굴속에 모이곤 했고 부락의 대소사는 모두 이들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부락의 운명을 손에 쥐고있는 터주대감들의 발치에 무자 명이 두손을 모으고 서있다. 족장의 미심쩍은 눈길이 명의 얼굴에 가 머물렀다. 명이 다시한번 간청했다. ―크게 일 불은 불씨에서 알아볼수 있습니다. 나 무자의 눈썰미를 믿어주십시오. 족장이 크악! 큰소리로 가래침을 뱉고나서 입을 열었다. ―자. 투석(投石)을 시작하게나. 장로들이 부스럭거리며 저마다 옷소매속에 무언가 꺼냈다. 돌멩이였다. 적봉에서 주어온 붉은 돌멩이와 강에서 주어온 흰돌멩이였다. 붉은 돌멩이는 긍정을 표하고 흰돌멩이는 부정을 표하는 뜻이였다. 달라당! 달라당! 석상우에 돌멩이를 놓는 소리가 동굴속에서 공명이 되여 울렸다. 족장이 석상우에 놓여진 돌멩이를 헤아리고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선포했다. ―학당패가 없는 진을 무용단에 받아들이는 문제 최종결재요. 백석(白石)이 4개, 홍석(紅石)이 6개, 채택되였소! 명의 얼굴에 미소가 피여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이 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명이 진에게 북 하나와 북채 하나를 넘겨주었다. 화동 하나가 다가와 북채끝에 붉은 술을 달아주었다. 명이 북채를 들어보였다. ―이곳에서 북채를 가리켜 뭐라 하는지 아느냐? 몽척(夢尺)이라 한다. 이제 이걸 잡고 네 꿈을 펼쳐보아라. 진은 북과 북채를 가슴에 꼭 품었다. 유난히 빛나는 눈으로 스승을 쳐다보았고 스승의 머리우로 솟아있는 적봉을 쳐다보았다. 적봉은 소소리 높았다. 적봉이 품고있는 들을 굽어보았다. 들은 무연하게 넓었다. 들에는 화경(火耕)이 시작이였다. 화전농들이 놓은 불이 들을 메우며 번져나가고있었다. 불길은 봄을 맞아 놀란듯 피여난 들꽃처럼 온 벌판을 수놓고있었다. 조무래기들이 떼를 지어 불을 쫓으며 연기를 쫓으며 소리지르고있었다. ―불아. 쥐를 그을러라. 불아, 쥐를 그을러라. 진은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있던 짐승 한마리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는것을 느꼈다. 한껏 충일된 가슴으로 그 아이들처럼 진도 목청 깨져라 소리 질렀다. ―내가 화동이 되였어요! ―내가 화동이 되였어요! 진, 불앞에 맹세하다 ―내 몸을 움직여서 내 몸을 도구로써 연주할수 있는 춤, 그것처럼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이 어데 있겠느냐? 우리의 육체에 더하여 우리의 몸속에 령혼도 담고있으니 몸과 혼이 하나가 될 때까지 춤을 추어라. 스승의 급훈을 받으며 진은 장대한 래일에로 열린 길의 첫 자국을 떼였다. 진의 어머니가 화신제날에만 먹는, 마른 실고추를 넣은 전(煎)을 가득 부쳐가지고 《화택》으로 찾아왔다. 무자 명이 나와 어머니에게서 떡을 담은 그릇을 받았다. ―애가 만나지 않겠답니다. 어머니가 머리를 후딱 쳐들었다. 놀란 눈매를 지어졌다. ―3년후, 진짜 춤군으로 이름을 닦은뒤 떳떳하게 어머님을 만나겠대요. 참, 옹골찬 애를 두셨군요. 어머니가 옷소매로 뜨거워나는 눈시울을 찍어눌렀다. ―알겠습니다. 애를 잘 부탁합니다. 어떡하나 애를 선생님 같은 큰 춤군으로 만들어주십쇼. 어머니는 《화택》을 향해 눈길 한번 주고나서 돌계단을 따라 산을 내렸다. 《화택》의 창문틈으로 진은 어머니의 사라지는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묻어있는 떡그릇을 든채 배여나온 물멀기를 지우려 눈을 슴벅이였다. ―기다려주십쇼 오마니. 누군가 그런 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낮에 진의 북채에 붉은 술을 달아주던 화동이였다. 화동이 진을 향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교(狡)라고 해. 진도 얼른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진.   며칠후, 진은 새로 사귄 친구 교를 따라 적봉의 동굴을 찾았다.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오르는 계단은 무척 좁고 가파로왔다. 그 계단을 두사람은 헐씨금거리며 올랐다. 그들의 뒤를 녀자애 하나가 바싹 쫓아왔다. 그뒤를 불독이도 따랐다. ―야 교! 교오, 어델 가는거냐? 새로 온 아이를 끌고? 무용단에서 함께 춤하는 녀자애 염(艶)이였다. 부모한테 버림받고 길에서 걸식하는걸 무자 명이 불쌍해 데려다 밥먹여주며 춤군으로 키운 애였다. 염의 부름을 듣는척도 않고 교는 진을 끌고 곧추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화당에서는 언제나와 같이 불이 타오르고있었다. 이글거리는 불이 둘이의 얼굴을 발갛게 비추었다. 불을 만난 불독이 화당을 헤집으며 한입 베여 물었다. 따가워 흥흥거리며 불덩이를 삼켰다. 진과 교는 화신상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가 입을 열었다. ―화신이시여 증명해주옵시사. 나 교와. 교가 팔꿈치로 진을 건드렸다. 진이 바삐 말을 받았다. ―나 진은… ―춤에 생을 바치기로 일심을 먹었사옵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말을 마치고나서 교가 화당가에 흩어진 재를 모아담고 굴 천정의 종유석(鐘乳石)을 타고 흘러내리는 락수를 받았다. ―야, 니들 대체 뭐 하고있는거냐? 뒤미처 따라온 염이 그들의 짓거리를 지켜보며 물었다. 교가 재를 삭힌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진도 그의 본을 내여 재를 락수물에 삭혀 단숨에 들이마셨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이구동성으로 서약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옵소서! 그제야 영문을 알아낸 염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머물렀다. 염도 그들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가슴언저리에 얹고 따라서 서약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옵소서!       <계속> ㅓㅎ
72    불의 제전 (3) 댓글:  조회:3247  추천:73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3)김 혁 진, 스승을 잃다   대각소리가 울렸다. 투명한 고음으로 소리는 부락을 뒤흔들었다. 족장 굉이 두 볼을 팽팽히 살리며 대각을 불었고 그  소리에 부락 사람들이 바삐바삐 적봉 기슭에 모여들었다. 화신제를 빼고 보면 오랜만에 부락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족장과 10명의 장로들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저마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살벌한 기운이 굼베굼베 적봉의 산발을 타고 서려 올랐다.    해가 뜨겁다. 등이 후끈 달아오른다. 불덩이를 담은 커다란 솥뚜껑이 등판에 얹혀 있는 것만 같다. 뙤약볕을 이고 어떤 불길한 예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 앞에 포리들이 결박을 지운 사람 하나를 끌어냈다. 사람들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새여 올랐다. 끌려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마을에서 가장 인끔 높은 무자- 명이였다.   사람들의 맨 앞에 줄지어 선 화신무용단 성원들은 그 누구보다도 두려움에 지지름을 당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기의 스승님을, 온 부락에 인끔 높은 무자를 오라를 지워 끌어낸 것인지 영문을 알길 없어 했다.   족장이 크악! 크악! 가래침을 돋구어 뱉고 나서 입을 열었다.   - 명은 화신무용단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사사로이 지경(地境)을 넘어 산북에 기여 들었다.  산북 무용단의 춤을 훔쳐보다가 산북 사람들에 의해 나포 되였고 다시 반송 되였다. 이에 본 부락에서는 부락의 명성을 더럽히고 두 부락지간에 결성된 상호불침입 조약을 깨뜨린 죄로 명에게 엄벌을 가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은 그 누구보다 높뛰는 가슴을 느꼈다.   - 명! 너 자기의 죄를 시인하느냐?   명이 머리를 쳐들었다. 까랑까랑한 소리로 대답했다.   - 그게 왜서 죄인지 알 수 없구려. 난 그저 분단돼 있으며 맥(脈)을 달리 한 우리 춤의 파생된 부분들을 찾아 다시 화합의 춤 마당을 만들어 보려 했을 뿐이요. 한 무자의 소박한 꿈이 죄라면, 만약 그것도 죄라면 같은 피들을 갈라놓고 서로의 심장에 창을 박으며 피바다를 만든 어떤 사람들의 죄 값은 어떻게 치러야 하는 거요???   - 저런 발칙한 놈 봤나? 그런 망언도 서슴없이 하다니   명의 말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족장의 정곡을 찔렀고 장로들이 기겁을 하며 염소수염을 달달 떨었다. 족장이 씹어 뱉듯 말했다.   - 투석으로 결정합세다.   원로들이 부스럭거리며 돌멩이들을 내놓았다. 홍석, 백석, 백석, 홍석... 그 돌멩이들을 헤아려 보고 나서 족장이 소리 높여 심판결과를 선포했다.   - 월경죄에 상전모욕죄로 명에게 척목형(刺目刑)을 가한다.   좌중이 놀란 소리로 들끓었다.《척목형》이란 그 형벌의 참혹함으로 부락에서 오래 동안 끊겼던, 두 눈을 찔러 멀게 하는 극형(極刑)이였다. 사람들의 소요를 족장의 다음 말이 눌렀다.   - 허나, 그 동안 명이 화신무용단을 이끌고 부락에 공헌한 점을 헤아려 쌍목형(双目刑)은 면하고  단목형(單目刑)으로 실시한다.   《단목형》은 한쪽 눈만 찌르는 형벌이다. 포리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명을 말뚝에 비끄러매였고 형구(刑具)들을 날라 왔다.   - 선생님!!!  무동들이 부르짖으며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 화신무용단성원들을 포리들이 창으로 윽박질러 뒤로 물러서게 했다.   포리들이 명의 이마를 쇠사슬로 감아 말뚝에 단단히 비끄러 매였고 그중 하나가 화로에 시뻘겋게 달군 부저가락을 들고 명을 향해 다가갔다. 명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지릅뜬 눈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찌르륵거리는 부저가락을 지켜보았다. 땀으로 얼룩진 명의 얼굴은 검붉은 색이 심하게 번져 부패한 나무 잎 같다. 연기를 내뿜는 듯한 긴 숨을 토하고 나서 어금니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왼 눈의 시력이 약하니 오른 눈을 보존해 주소.     상체가 우람하고 목이 굵고 짧은 포리가 볼따구니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고 나서 발로 명의 허벅지를 밟았다. 눈께 까지 흘러 내려 온 명의 긴 눈섭을 걷어올렸다. 몇 번이고 견주다가 명의 왼 눈을 푹- 들이찔렀다.   피를 문 비명이 울렸다. 사람들 속에서 염이 혼절해 넘어 갔다.       교와 진 그리고 염이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늘에 별은 얼음 조각인 양 차갑게 빛났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서 별이 흐르는 소리도 들릴듯하다. 왼쪽 눈에 안대(眼帶)를 댄 명은 평상에 앉아 자기가 아껴온 제자들을 굽어보았다. 끔찍한 시달림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 스승의 하나밖에 없는 눈은 이제 고요하다.   - 교, 받거라   명이 북채를 들어 교에게 넘겨주었다. 스승의 북채였다. 손때가 올라 반질반질한, 끝머리에 명이라는 스승의 함자가 새겨진 북채였다.   - 이제 화신무용단의 중임을 네가 맡아보거라.   교가 놀란 듯 스승을 쳐다보았다.   - 나 원체 너희들을 나를 초월한 절세의 춤꾼으로 키워 보려 꿈꾸어 왔는데... 지금의 이 모양 이 심기로는 안 되겠다. 조용히 나의 마음, 나의 리론을 정리해 볼 터이니 일 후 무용단의 대소사를 네가 챙겨 주렴아.      스승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몸으로 《화택》을 나섰다. 창백한 별 빛을 발끝으로 차며 산을 내렸다. 진이 뒤를 따랐다. 산 기슭아래  길이 나설 때까지 스승을 바랬다.   -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진의 등을 밀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 진정한 춤꾼으로 된다는 것은 결코 록록한 일이 아니어늘 진아,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춤에 전력하거라.   아스라한 적봉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명은 길을 떠났다. 옷자락을 떨치며 떠나는 스승의 뒤 모습을 지켜보다 진은 무릎 꺾어 큰절을 올렸다.    《화택》쪽에서 불독이 짖어 대는 소리가 들린다.     진은 또 한번 적봉의 동굴 속 화신 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왜 하필이면 우리의 스승입니까? 왜 스승께서 당치않은 죄로 소중한 신체까지 바쳐야 합니까? 왜 동족을 짓밟고 올라선 사람들이 외려 정의로운 자로 둔갑해서 예술밖에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문죄를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진의 눈에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고 목소리는 갱엿이라도 걸린 듯 메여 있었다. 호소하듯 떨리는 소리로 말하는 진을 지켜보며 토우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너에게 뿔 황소를 재낄만한 대력사(大力士) 같은 힘이라도 있느냐?   그 뜻 모를 질문에 진이 어리둥절해져 머리를 저었다.   - 없삽니다.  - 너에게 만전옥답을 가진 대호(大戶)처럼 금붙이라도 있느냐?  - 없삽니다.  - 너에게 남에게 죄를 내리는 족장과 같은 권세라도 있느냐?  - 없삽니다.   - 그렇다면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력사의 왜곡 앞에서 네가 할 일이란 대체 뭐 갰느냐?   진이 대답을 못했다. 토우가 말에 력점을 찍었다.   - 춤(舞)이다.   진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 한마디를 주고 나서 흙 인형은 눈을 내려 감고 있다. 진, 사랑을 잃다     명이 떠난 뒤에도 《화택》에서 북소리는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제 날 같은 중후함과 신명을 잃고 있었다. 스승의 당부를 받은 교는 화신무용단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모두들은 중심을 지탱해주던 철심 하나가 쑥 빠져나가는 듯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힘에 부쳤던지 교 역시 무용단 일에 더는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처럼 닭이 첫 홰를 침과 함께 일어나 북소리를 울리는 사람은 그저 진밖에 없었다. 스승이 형(刑)을 받던 정경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라 진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스승처럼 역시 담을 넘은 자기의 행적을 누가 엿본 것 같아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스승의 상처받은 신상이나 자기의 파격적인 사랑에 대한 괘념이 들 때면 진은 북채를 잡았고 춤을 추곤 했다. 춤이 사념과 번뇌를 벗게 해주는 명약 이였다. 그만큼 진은 이제 춤의 진미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거미줄이 서리고 먼지에 묻혀 있던 곡성 곁 과수밭의 막사는 진과 유로 말하면 천국의 루각임에 다름없었다. 밤이면 타는 목마름으로 화급하게 담을 넘었고 막사로 가서 유를 만났다. 이제 진과 유는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유는 진의 반려였고 춤의 동력 이였으며 생활의 전부였다. 그들은 부락사이의 반목의 물결이 밀어낸 금기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이였다.   - 언제면 우리가 남들 앞에서 떳떳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그날이 올까요?     유의 말소리가 낮게 막사에 깔렸다. 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유가 여느 때보다 감상에 젖은 소리를 했다. 모호한 슬픔, 그리고 약간의 불안기 같은 것이 유의 엷은 눈꺼풀을 스쳐 감을 진은 본다.   - 창천(蒼天)에도 눈이 있다면 우리들의 사랑을 갈라놓지 않을 거요.   깊은 밤 소반에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 달보고 절하며 가약을 맺었던 둘 이였다. 함께 있다는 현실감을 붙잡기 위해 유는 진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언제 나처럼 사랑이 담겨져 그윽하다. 그러던 유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 이상해요.  - 뭐가?  - 오늘따라 당랑이 불을 켜지 않아요? 왠지?   유의 예감은 적중했다. 말을 마치기 바쁘게 막사 밖에서 《홍모》가 다급하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발 구름소리와 함께  막사의 문설주에 걸친 가마니때기가 훌떡 젖혀지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밝은 홰불 빛이 밀려들었다. 그 엄청난 광량(光量)에 둘은 흠칫 몸을 떨었다.      진과 유는 가지런히 옥사의 대청에 꿇리여 앉았다.    매처럼 좁고 빛나는 눈길을 가진 산북의 족장이 포교(捕校)의 동반을 받으며 나타났다. 매 눈으로 두 사람을 한동안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참기 어려운 고문 이였다. 드디여 침묵을 깨며 족장이 포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 남하 놈팽일 10대 치고 풀어줘라.   포리들이 어리둥절해서 족장을 쳐다보았다.   - 젊은 놈들이 혈기가 끓어올라 붙어먹은 짓이고 또 여태 두 부락사이에서 처음 있은 일이라 형을 가볍게 내렸다. 그저 이 이후로 더는 남의 부락 녀자를 넘보는 발칙한 짓을 안 저지르겠다는 다짐장만 쓰면 없는 일로 묵과하겠다. 그리 알고 대답을 올려라.   - 어서 족장 님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사를 올리지 않고  뭘 해?   포교가 곁에서 윽박질렀다. 진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사랑에는 지경(地境)이 없습니다. 우린 잘못한 것이 없어요.    - 이런 간뎅이가 부었나? 봐줬더니만 새 이불홑청에다 오줌싸려 드는구나.   포교와 포리들이 흘금거리며 저희들 족장의 눈치를 보았다. 시퍼렇게 돌아서는 족장의 눈에 퍼런 번개가 친다.   - 그래 다짐 안 하겠느냐?    진은 유를 건너보았다. 유도 진을 지켜보고 있다. 둘은 서로의 눈빛에서 힘을 얻었다. 진이 이를 사려 물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포교가 몸을 으스스 떨었다.   - 넨장, 환장하겠어.   족장이 포교를 불러 귀가에 무어라고 속닥거렸다. 포교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어 포교가 두 사람을 향해 호령했다.   - 그렇다면 산북의 법대로 산북사람을 단죄하겠다는 족장 님의 분부 시다.   진과 유가 머리를 쳐들었다.   - 너희가 이 벌을 이겨낸다면 하늘의 뜻으로 알고 내 허락해 주리다.   족장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족장의 눈에서 서슬 퍼런 랭기가 흘렀고 그 눈빛에 대청의 사람들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 불기와 지짐이라고 들어 봤느냐?   대령해 선 포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표정들이 크나큰 경악에 어려 일그러진다.   그 형벌에 대해 진은 어른들에게서 귀동냥해 들은 적 있었다.《불기와 지짐》이란 유부남과 간통한 녀자나 풍류방(風流房)의 기녀, 그리고 남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무당 년들에 가하는 잔학한 형벌 이였다. 발가벗겨 매여 달고 치부와 온 몸의 곳곳을 달군 기와 장으로 뜸질하는 형벌이다.   진이 주체할 길 없이 높아진 소리로 반문했다.   - 저 녀자에게 무슨 죄가 있나이까? 남의 유부남을 빼았앗나이까? 뒤 골목에서 몸을 팔았나이까? 아니면 온 마을에 마마가 돌라고 저주라도 했나이까?   유가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수정처럼 차게 빛나는 눈으로 족장을 직시했다.   - 망극하나이다. 족장 님께서 그런 형벌로라도 저희들의 사랑에 허락을 주신다면 소녀는 달갑게 받겠나이다.   - 안돼. 유!   진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 후회 안 하겠느냐?   족장이 더욱 빛깔이 깊어진 매 눈을 치뜨며 유를 보았다. 살갗 깊숙이 박히는 그 시선을 받아내며 유가 한층 나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랑을 위한 일이 온데 무슨 후회가 있겠사옵니까.    포리들이 쩔그럭거리며 형틀을 챙겼다. 유는 포리들에게 잡혀 몸부림치며 안 된다고 소리소리지르는 진을 바라보았다.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진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몸을 돌렸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순백의 몸뚱이를 빛내며 차가운 형틀 우에 누웠다. 포리들이 어리친 눈길로 족장을 쳐다보았다. 족장의 볼이 불끈 경련하고 있었다.  벌겋게 단 기와 장들이 차례순으로 유의 여린 살갗 우에 놓여졌다.   치직- 살 타는 냄새가 대청에 퍼졌고 그와 함께 노란 연기가 피여 올랐다. 기와 장에 살갗이 척척 묻어 났다. 그러나 대청의 사람들은 녀자의 비명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유! 유!! 유!!!   부르짖으며 진은 눈을 지 질러 감았다. 눈앞에서 수십 마리 나방 떼가 어른거린다. 눈을 감아도 한 장 한 장의 기와장이 유의 몸에 놓여지는 형상이 선명히도 떠올랐다. 때마다 진은 자기도 달군 기와장에 대인 듯 몸을 꿈틀거렸다.  랭혹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족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옥사를 박차고 나갔다. 말에 올라탔다. 말등자를 바로 밟지 못해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부하들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말고삐를 당기려다 말고 족장이 감탄인지 욕설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로 내뱉었다.   - 지독헌 년        과수밭,  진은 유를 업어다  뉘였다. 맹금(猛禽)의 부리에 걸려든 듯 유는 온 몸이 찢겨져 있었다. 우박을 맞은 꽃잎처럼 유는 지치러 들어 있었다. 만개한 꽃 같은 커다란 화흔(火痕)이 온 등판에 번져나가 있었다. 유의 몸에 약초를 짓찧어 붙여주는 진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내렸다. 눈물에 약초를 반죽해 진은 유의 온몸에 붙여 주었다. 《홍모》가 끙끙대며 혀를 내밀어 주인의 덟어진 얼굴을 핥는다.   - 진...    언제 깨여났던지 의식이 돌아온 유가 진을 불렀다. 힘겹게 돌아누운 그녀의 퀭한 눈 그늘이 섬뜩하도록 어둡게 느껴졌다. 가까스로 눈망울을 크게 열고 유는 진을 쳐다본다. 진이 눈물을 훔쳐내며 다급히 유의 머리 전에 엎드렸다.    - 진, 날 꼭 안아주세요.   그 나지막한 소리를 귀 울림같이 들으며 진이 유를 껴안았다. 상처자리가 아파 유가 이마 살을 모았다. 진의 품속에서 그녀는 작은 공 벌레처럼 꼬부라졌다. 그런 유를 두고 진은 어쩔 바를 몰라했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유의 몸이 유리잔처럼 깨여져버릴 것만 같았다.   진의 품에 안겨 유는 진을 올려다보았다. 상처 입은 산짐승의 눈처럼 개개한 눈동자로 진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반월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처량하게 웃었다.   - 진, 날 잊지 말아줘요.    유의 눈 기운이 혼혼해 졌다. 그리고 몸이 점점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졌다. 진이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가슴을 문지르고 팔을 문지르며 손끝에서부터 발끝으로 번져 나가는 퍼런 빛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유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 진의 어깨에 둘려졌던 유의 팔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안돼! 날 버리지마 유. 죽지마 유! 안돼. 죽지마.   진은 눈물의 폭포를 쏟아내며 유를 불렀다.   - 날 버리면 안돼 유, 족장이 우리 사랑을 허락했는데. 하늘이 우리 사랑을 허락했는데. 죽으면 안돼 유! 유!!   과수밭에 어스름이 내린다. 막사주위에서 화당랑들이 뛰여와 더듬이에 불을 켜들었다. 불 화환이 되어 막사 주위에서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었다.                                     진, 스승을 찾아가다    두 부락을 가른 곡성의 거대한 몸체가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우직한 선머슴 같은 성채의 무릎 아래에서 부락사람들은 갈라져 살고 있다. 세월의 더께가 청태처럼 까실까실 앉은 돌 각담은 이젠  슬픔 짙은 빛깔로 음울하게 서 있을 뿐이다.   진은 매일이고 곡성 곁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진은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진은 멀리 산북의 밋밋한 산등성이를 타고 펼쳐진 과수밭을 점도록 바라보곤 했다. 그 과수밭에, 밤이면 화당랑이 저마다 더듬이에 등롱을 켜들던 그 천국의 풍경 같은 과수밭에 이제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꿈의 자락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와 담장 곁에 붙어선 그 눈빛에는 항상 애수와 여한이 안개처럼 젖어 있다. 그는 이 몇 달 동안 마치 다른 시간의 경계를 지나 온 것처럼 단정하던 얼굴빛을 잃어버렸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어지러웠고 얼굴에는 어두운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은밀하게 빚었던 사랑에 대한 향수를 이루지 못한 채 유는 갔다.   스스로 그어 돋우어진 상처를 운명인 양 받아들이며 유는 갔다.   하늘이 준 만큼 사랑이며 목숨을 건사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덧없음을 진에게 깨쳐주며 유는 갔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 불어와 먼 곳의 향기를 묻혀 놓는다. 과수밭에는 하얀 꽃이 백사지 같이 피여 있다. 두 부락의 사람들은 곡성지경에 남북과(南北果)라는 과일을 심었다. 도작(盜作)하는 과수농들이 가만히 산북종과 남하종을 접종하여 배육해 낸 과일, 과육이 많고 그렇게 달콤했다. 가을이면 달디단 과즙의 향이 백 리 밖까지 내달렸다. 가만히 재배하지만 두 부락의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과일 이였다.   접목 되여 꽃 피우고 열매를 다는 과일처럼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꽃을 피우려 했는데, 풍성한 결실을 맺으려 했는데...   - 차라리 꿈이였더면은 …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슬픔에 사무쳐 눈을 감았다.   그 사이 불독이 새끼를 낳았다. 산북의 《홍모》와의 사랑의 결정 이였다.   미물도 저렇게 거침없이 사랑을 나누는데...   새끼 개의 함함한 털을 쓰다듬으며 감개에 젖어 진은 또 다시 눈물을 쏟았다.   심산(心散)하기 그지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진은 구명(求命)처럼 한 사람을 머리에 떠올렸다.    호수 위로 어둠이 성깃성깃 내리고 있다. 어둠 살이 묻어나는 호수는 극도로 붓을 아낀 수묵화 같았다. 스승 명은 깊은 산 속 호수 가에 기거하고 있었다. 속세를 떠나 깊게 은둔해 있었다.   오래 동안 보지 못했던 스승은 많이 늙어 있었다. 탈색시킨 광목 같이 노리끼리하게 파리해진 얼굴 군데군데에 앉은 검버섯, 들뜬 잇몸, 허나 하나밖에 없는 눈빛만은 귀기가 어릴 정도로 형형하게 살아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은 목 울대가 조여들고 콧등이 시큰해 난다.     호수가의 너누룩한 돌에 정좌하여 스승은 반듯한 수면을 지켜보고 있다. 독락(獨樂)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 스승님.    진이 가까이 다가가며 불렀지만 스승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다. 진도 스승을 불러놓고는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래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없어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스승을 찾았던 진은 스승의 골몰한 모습에 말을 삼키고 스승의 눈길을 쫓았다.   호수의 복판에서 불이 피여 오르고 있었다. 파란 불길이 피여 오르고 있다. 오래 된 못에 침전된 가스로 생기는 불 이였다. 미약한 바람에도 불길은 춤꾼의 허리처럼 흔들거렸다. 스승이 몸을 스르륵 일으켰다. 강물 한가운데 떠서 삿대 없이 스스로 흘러가는 뗏목처럼 스승이 몸을 움직였다. 진을 방임한 채 혼자처럼 스승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스승의 춤사위가 이전보다 많이 바뀌어있음을 진은 느낄 수 있었다.   춤을 추며 명이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수면 우에 어린다. 저음의 피리소리 같다.  - 물의 흐름을 찬이 보아라.   물은 맑고 깨끗한 심상을 지녔다. 물은 풍요한 덕성을 지니고 있어서 세상 모든 것을 부드럽게 만져준다. 불의 흐름이 강한데 비해 물의 흐름은 유연하다.   불의 열정을 지니되 물처럼 행동할 것을 바란다. 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린 다면 물은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새로운 창조를 기약할 수 있다. 거친 불 뒤의 물은 새로운 재생을 말해 준다.   불춤을 추는 우리가 물로 만나자는 의미는 불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열기를 더 크게 살리기 위함이다. 탁하고 어지러운 것이 사그러진 후의 순결한 재萱?위함이다.   네가 물의 흐름을 모를 때 불의 타오름도 다 리해할 수 없을 거다. 이것이 내가 산북의 춤과 우리 춤에서 더듬어 낸 전부다 ....   스승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춤사위에서 진은 그 전하고자 하는 춤의 언질을 뒤미처 받아 안았다.  세상을 버리려는 듯, 세상을 안으려는 듯한 그 무아의 몸짓에서 한낱 애욕의 틈바구니에 보잘것없이 서있는 자신을 보았다.  호수에 꽃은 없었지만 진은 분명 향기를 맡았다. 시린 상처가 피워 올리는 향기였다.                        진, 동인들을 보내다     밤  늦도록 진은 석등이 타오르는 뜰에서 하나 하나의 춤사위에 땀 벌창이 된 몸을 싣고 있다.   오랜만에 스승을 뵈였다. 회한과 미련으로 삶의 갈피마다 어찌할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인간적 약점으로 부대끼면서 그런 드팀없는 스승을 대하는 진은 눈가에 슬몃 부끄러운 눈물이 맺혔다. 마음자리 마디마디에 접붙여진 스승의 말을 떠올려 보노라니 자기를 떠밀어온 모든 감정과 책무, 삶을 속박했던 육신의 욕망, 그리고 그 주기에서조차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시 북채를 잡았고 새로운 춤사위에 자신을 잡아넣었다. 스승의 언질을 들으면서 진은 단전(丹田)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기(氣)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진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북채를 잡게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치도록 가슴아프게, 때로는 너무 서글프다 못해 더러 유쾌한 느낌을 주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그는 춤에 자기를 바쳤다.      춤을 추면서 한편 진은 교를 기다리고 있다. 불독이 진의 곁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린다. 한나절부터 불독의 새끼가 보이지 않았다. 불독을 따라 새끼를 찾아 나섰던 진은 어느 개울가에서 개의 목에 걸어주었던 액세서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개의 털을 발견했다. 언뜻 짐작이 가는 쪽이 있었고 진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눈곱이 잔뜩 끼고  진득한 콧물이 흐르는 개, 새끼 잃고 주눅들어 처량해하는 불독이 가여워 턱과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개는 진의 팔에 얼굴을 비벼댔다.   문뜩 노래 소리가 들렸고 돌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교였다. 턱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교가 올라 오고있다. 교는 몹시 취해 있었다. 늘 불쾌하게 취해있는  교의 그런 모습이 진의 속을  울컥 뒤집었다. 뜰에 섰는 진을 발견하자 교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 왜? 너도 한잔 할려나?     교가 주기가 력력한 눈으로 앞을 막는 진을 쳐다보았다. 괴춤에 달린 술 조롱박을 내밀었다. 그 조롱박을 진이 밀쳤다. 교의 몸에서 풍기는 썩은 과일 같은 술 냄새를 참으며 진이 물었다.    - 개를 어찌한 거니?  - 몰라   시치미를 따며 지나치려는 교의 손목을 진이 감쳐 잡았다.   - 말해봐. 개를 어찌한 거냐구? 불독의 새끼를.   교가 몸을 가누며 진을 쳐다보았다. 입 귀에 야비한 웃음을 물고 자기의 배를 가리켰다.   - 이 속에 들었다. 왜?   진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 개고기 냄새를 맡으면 하늘의 신선도 내려온대.   - 뭐야?   짐작한 바였지만 그의 입으로 사실을 확인한 진은 격노를 참지 못했다. 교의 면상을 주먹으로 내 질렀다. 교가 석등 앞에 뒹굴었다. 그런 교의 멱살을 끄잡아 진이 일으켰다.   - 너 왜 이러고 있어? 선생님의 당부도 잊었어? 지금 넌 이 무용단의 유일한 책임이야.   요즈음 교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교는 완연 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춤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반면, 제멋대로 《화택》을 뛰쳐나갔다는 밤늦어야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얼마 전에는 무용단 애들을 끌고 족장이 첩을 맞아들이는 잔치로 가서 춤을 추어주었다. 그때 함께 가자고 잡아끄는 교를 진은 단호히 밀쳤다.   - 우리는 신을 노래하는 무용단성원이지 족장의 노리개가 아니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적봉의 나래 부러진 매로 살지언정 속세의 나래 성한 닭으로 살지 말라던 그 말씀이.   하지만 교는 몇몇 애들을 끌고 기어이 잔치에 참석했다. 오늘도 족장의 생일이라 보신용으로 개를 잡아 바친 것 이였다. 일전에 장에서 산 일월이 새겨져있는 도자기도 교는 족장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권세 자들에게 비굴과 아첨을 보이는 교에게 진은 릉멸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인에 대한 굳은 믿음에 균렬이 생기고있음을 진은 느낀다.   진이 《화택》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북채를 벗겨들고 나왔다. 스승 명이 교에게 넘겨준 북채였다.   - 선생님의 믿음에 미안하지도 않아? 남들 앞에 본을 보여 줘야 할 네가 왜 이러는 거냐? 왜?   일심으로 춤의 길을 걷자고 맹세하던, 그렇게도 양양하던 꿈 몰이의 초반이 생각나 진이 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 혼자서 잘난 척 말어.   교가 손사래를 쳤다.   - 나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밥되는 거 없고 돈 되는 거 없는 춤에 명줄을 달고 싶지 않다구.   교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 이 숨막히는 곳에 나를 가둬놓고 안주하며 난 세상에 춤만이 최고라 믿어왔어. 헌데, 헌데 모두가 허상 이였어.     그 말에 자제에도 불구하고 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북채를 쳐들며 말했다.   - 이 몽척(夢尺)에 미안하지 않아? 그래 신 앞에서 다짐한 초지(初志)를 버리겠단 말이냐? 꿈을 이루려고 맹세했던 우리가 아니였나?   교가 웃겨 하는 표정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 맹세? 뭘 맹세해? 무자가 된답시고? 무자가 되는 길이 뭔지 너 알어? 난 이제야 알 것 같다. 무자, 그 표준의 금을 긋는 사람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야. 너도 봤지. 춤 경색에서 춤을 잘 춰도 못 춰도 평점은 그 사람들이 내린다구. 이게 현실이야. 이 세상에 진정한 무자(舞者)란 없어.     교가 물지 똥 같은 랭소를 피식 흘리며 진의 손에서 북채를 앗아냈다. 석등의 불 집에 던져 넣었다.   - 너 미쳤냐?   진이 덴겁해 불 집에 손을 넣어 북채를 끄집어 내였다. 불붙는 북채를 훅훅 불어 불을 껐다. 타다가 반 남아  남은 북채를 들여다보며 혼자 말처럼 말했다.   - 무릎이 부스러지더라도 나는 이 길을 갈 생각이다. 달리 다른 길을 알지 못하므로.   교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아집 강하고 딱 부러진 진의 성격에 질려 버렸음이 확실했다. 술이 조금 깨인 듯한 눈으로 진을 보다 말했다.   - 나 이곳을 떠날 거야.     며칠 안 되여 교는 과연 《화택》을 떠났다. 밤중에 슬그머니 떠나버렸다. 산을 내린 교는 엉뚱한 방향에서 출세 줄을 탔다. 부락의 곡창지기라는 작은 벼슬을 가졌다. 북채를 들었던 손에 쌀 담는 되를 들었다.   교의 떠남에 유감을 보이던 염도 뒤미처 떠났다. 응집된 환상이 깨어진 뒤에 동인들은 자아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간다.  염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부락의 대부호의 조카였다. 무용경색에서 돈 많은 삼촌 때문에 방에 올랐던 그 조랑말 타고 으스대던 사람, 지금은 그도 산북장사치들과의 밀수거래로 부락에서 손에 꼽는 부호로 되었다.   사인교가 화택에 까지 와서 염을 맞아갔다. 떠나면서 염은 진에게  무언가 남겨 주었었다. 북채에  다는 붉은 술 이였다.   - 지난 봄, 장거리서 산 거야. 원체 일찍 주려 했었는데...   염은 뒤 말을 흐렸다.   - 춤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못난 우릴 닮지 말고.    염이 사인교에 올랐다.   - 잘 살아 봐. 행복해야 돼.   조금 서글픈 마음을 감추며 진이 조용히 축복해 주었다. 자기를 향해 짓는 그 미소 속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이 느껴져서 염은 좀 무안해졌다.   사인교가 《화택》을 떠났다. 사인교의 뒤를 따라가며 불독이 컹컹 짖어 댔다. 진은 사인교를 둘러싸고 장구 치고 나팔을 불며 내려가는 혼례대오를 지켜보았다.     - 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뭘까. 세상은 얼마나 자질구레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 걸까. 세상 것 가운데 욕망과 황금과 치환할 수 없는 것이 정녕 있는 걸까.    《화택》의 뜰에서 진은 초겨울 빈 들판에 홀로 꽂힌 허수아비인 양 오래도록 서있었다. 뿌리를 보이면 죽는다는 모종(苗種)을 옮기듯 반 도막남은 북채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감싸쥐고 서있었다. 그러다 진이 그 누구의 지령을 받은 사람처럼 북채를 쳐들었다. 휘둘렀고 북소리를  따라 몸을 솟구었다. 마치 자신을 소진(消盡)시키듯 격렬한 춤을 추었다.   사인교가 멀리 굽이를 돌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햇빛이 완전히 사월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적봉에 달이 뜰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진, 금기를 범하다       비의 계절 이였다.   비의 오지랖 넓은 손길에 세상 천지 젖지 않은 것이라곤 아무도 없다.   비는 벌창해진 성미로 산 홍수를 몰아왔다. 홍수는 적봉기슭의 《화택》을 무너뜨렸고 부락 사람들의 가옥이며 전답을 밀어 버렸다.   초미(焦眉)의 문제는 부락에서 불씨가 하나 둘 꺼진 것 이였다. 무심했던 사람들은 급기야 당황해 졌다. 불씨를 얻으러 백방으로 애썼다. 그러나 저장해둔 발화목(發火木)들이 비에 눅눅해진지라 나무를 비벼대도, 화도(火刀)를 극성스레 쳐대도 불을 일으켜 내는 수가 없었다. 족장이 총애하는 교를 불러 화신무도 추게 하면서 화신에게 치성을 드렸지만 종시 불을 일으켜내는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며칠째 취연(炊煙)을 볼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밤이면 집집마다 켜들던 호롱불을 볼 수 없었다.   마을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등이 꺼진 《화택》의 뜰에서 진은 비에 갇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대줄기 비를 맞으며 진은 산을 내렸다. 곡성을 넘었고 무언가를 짊어지고 다시 넘어 왔다.   그의 등에 진 것은 불을 저장하는 장화통(藏火筒)이였다. 진은 담 곁의 높은 산 더기에 잠간 멈추어 서서 비안개에 뽀얗게 가려진 산북의 산을 바라보았다. 물빛 알갱이들이 허공 속을 내리긋는 게 보였다. 과수밭가에 묻고 온 유가 이 찬비에 떨고있을 것을 생각하니 목이 메였다. 한편 남하의 곤궁을 헤아려 불씨를 선선히 넘겨준 산북 사람들이 고마웠다.     적봉 동굴 속의 화신을 모신 화당에 다시 불이 피여 올랐다. 집집의 창문마다 불빛이 송이송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굴뚝에는 연기가 피여 오르기 시작했다. 기쁨과 감격에 들뜬 마을사람들이 삶은 음식을 들고 《화택》에 찾아왔다. 불씨를 얻어준 진을 에워싸고 춤 마당을 펼쳤다. 진의 춤사위에는 전에 없는 활력이 묻어 있었다. 그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춤에 대한 보람을 진은 피부로 느낀다.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성이 나 흘러 넘치던 비가 조금씩 줄기 시작했고 드디여 멎었다. 그리고 하늘 깊숙이 스민 붉은 빛이 서서히 부락의 상공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어느 아침, 누군가 적봉을 가리키며 깨지는 소리를 질렀다. 적봉의 산정에서 놀라웁게도 검은 실연기가 피여 오르고 있는 것이다. 적봉은 연기를 뿜고 있었고 달빛인지 별빛인지 모를 박명(薄明)에 서려있다. 수상쩍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산을 쳐다보며 말세가 오려나고 부락사람들은 저마다 불안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 경악의 불길에 기름을 부으며 대각 소리가 울렸다. 족장 굉이 두 볼을 팽팽히 살리며 대각을 불었고 그 소리에 부락 사람들이 바삐바삐 적봉기슭의 《화택》에 모여들었다. 족장을 위시하여 10명의 장로들이 앞에 나섰다. 누구의 이마에나 음습하게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사람들은 읽을 수 있었다. 살벌한 기운이 축축한 대기 속에서 굼닐었다.   포리들이 결박을 지운 사람을 끌어냈다. 진이였다.   월경(越境)하여 산북의 불씨를 훔쳤고 또 사사로이 불씨를 나누어주었다는 것이 죄였다. 불씨는 매년 초봄, 부락에서 화신제를 연 뒤 부락의 권위인물이 가가호호에 나누어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한낱 춤꾼이 족장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불씨를 나누어주었으니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장이 들 씌워진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진이 일전에 지경을 넘어 산북의 녀자와 사랑을 나눈 일까지 들고 나왔다.   족장이 크악! 크악! 가래침을 돋구어 뱉고 나서 입을 열었다.   - 진은 이웃 산북에 넘어가 불씨를 훔쳤다. 이는 두 부락사이의 적대감정을 극화시키는 도화선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부락의 허락도 없이 아무사람에게나 나누어주었다. 여러분이 그의 죄를 낱낱이 까밝혀 문죄하기 바란다.   진은 연막 낀 눈으로 족장과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홍수에 밀린 《화택》을 수건하고 넘어진 석등도 세우며 밤을 패였던 진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피로해 보였다.    장로 하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 진이 비록 불을 훔쳐왔다지만 일방적으로 그를 문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진은 마을사람들이 불을 지피지 못해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정경을 보고 그들을 구하자는 일념에 그 후과를 알면서도 월경했던 것이옵니다.      또 한 사람이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아시다시피 적봉이 이상한 기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한낱 춤쟁이가 망동한데서 산신을 노엽힌 결과라고 봅니다. 그를 중죄로 다스려 신의 감정을 무마시키는 것이 도리인가 봅니다.   - 잠깐요. 상기의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진은 화신무용단의 맥을 이어나갈 인재입니다. 그런 그에게 중형을 내리면 우리 남하족은 하나의 출중한 춤꾼을 잃게 될 겁니다. 족장 님께서 명찰하시옵소서.     진은 함구무언 머리를 숙이고만 있었다. 숙인 머리통 속의 새하얀 속살과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촘촘히 밴 땀을 보이고 있다. 그의 반발은 무력하고 막막했다. 그의 정당성의 전개를 허용할 만한 어떤 종류의 빌미도 족장은 만들어 주질 않았다. 그런 족장의 태도는 진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족장이 길어지는 변론을 무참히 끊어 버렸다.    - 투석으로 결정하세나.   장로들이 부스럭거리며 저마다 옷소매 속에서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사람들 저마다 숨을 꺽 죽이고 돌멩이를 지켜보았다. 홍석은 문죄(問罪). 백석은 사면(赦免)이였다.   홍석이 다섯 개 백석이 다섯 개가 나왔다.   투표를 다시 했다.   역시 홍석 다섯 개 백석 다섯 개가 나왔다.   - 문죄와 사면으로 의견이 각이 한데 공정을 위해 몇 사람 더 선발해 아퀴를 짓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장로하나가 제안했다. 마을에서 신분 있다는 몇 사람을 불러냈다. 그 사이에 교와 염도 끼여 있었다.   투석이 다시 되었다. 염이 선 참으로 백석을 던졌다. 그런데 교가 머뭇하고 있었다.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교가 침을 소리나게 삼키고 나서 꼭 움켜 쥔 손을 펼쳤다.   홍석이였다.   염이 당혹한 눈길로 교를 쳐다보았다. 교는 염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껴보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인 것이다. 한 무용단에서 예술의 비상을 위한 둥지를 틀었고 매일이고 나래 치는 련습을 하면서 고통과 영욕을 같이 나누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속에 족장이 소리 높여 심판결과를 알렸다.   - 결과가 나왔다. 홍석이 15개, 백석이 13개. 명의 전철을 밟은 진을 쌍목형으로 문죄한다.    - 안되오. 진이 우리에게 불씨를 주었는데 오히려 그에게 벌을 내리다니.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었다. 두꺼운 겹 주름이 뒤룩뒤룩 덮인 시푸르뎅뎅한 얼굴로 족장이 사람들을 흘려보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포리들을 불렀다. 족장에게 사람들의 반대의 소리는 쥐가 벽을 갉아대는 소리쯤으로 들렸다. 포리들이 형틀이며 화로, 부저가락 등으로 형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중복되는 잔혹한 행태에 몸서리를 쳤다. 포리들이 진을 말뚝으로 끌어갔다. 말뚝에 머리를 얽동이려 하였다.   - 잠깐만  진이 소리질렀다.    - 청구 하나가 있나이다.   - 뭐냐?   족장이며 모두들의 눈길이 진에게 쏠려 졌다.   - 마지막으로 화신무를 한번 추고 싶습니다.   족장이 턱짓을 했다. 포리들이 결박을 풀어 주었다. 염이 눈물을 삼키며 북과 북채를 찾아 주었다. 아스라한 절망이 감돌던 진의 눈이 호수 같은 온정을 찾아 있었다. 북채, 반도막이 난 그 북채를 진이 추켜들었다.   북 소리가 울렸다. 습기를 먹은 북이 좀 틀린 듯 하나 더 웅숭깊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골수를 쪼개고 들어갈 정도로 처량했다. 진이 덫에 치인 짐승처럼 몸을 흔들었다. 마음속 가득 찬 공포와 울화를 털어 내련 듯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춤에는 애절한 인내와 맵싸한 고통이 배여 들어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슬픈 사연을 흐느껴 하소연하기도 하고 벅찬 가슴을 감싸며 하늘을 우러러 열락(悅樂)의 몸짓을 짓기도 한다. 진은 마지막 춤으로 응어리진 정한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둘러선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가슴을 찔러서다.   평상 우에서 진이 춤을 마무리했다. 하나의 청동 조각처럼 굳어져 춤의 마지막 소절을 마쳤다. 진은 호흡을 고르며 눈을 들어 사위를 둘러보았다. 포악을 떠는 족장이며 형구를 갖추며 채비를 하고있는 포리들이며, 속수무책의 련민으로 쳐다보는 마을사람들이며, 그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염이며, 슬그머니 돌아서 사람들 틈바구니를 빠져가고 있는 교의 뒤 잔등이며, 끙끙대며 젖은 털을 혀로 핥는 불독이며, 아아 하게 솟은 적봉이며. 멀리 길게 누웠는 곡성이며...를 동공 속에 낱낱이 새겨 두었다.   - 시간이 되었다.   족장의 포효가 울렸고 포리들이 진에게 결박을 지우려 평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진이 들린 사람처럼 간간하게 웃었다. 하늘 우러러 대갈일성(大喝一聲)을 지르며 두  손가락을 곧추 세워 자신의 눈을 힘껏 들이찔렀다.                                  진, 불과 만나다     토우 앞에, 진은 꿇어앉았다. 무릎은 으깨져 피투성이였다. 더듬으며 넘어지며 찾아온 화신이 모셔졌는 동굴, 피범벅이 된 얼굴에 화당의 온기가 끼쳐왔다. 아직도 온몸 골골샅샅에 밴 채 응어리로 남아도는 통증에 정신이 가물가물해 졌다. 진은 화신이 모셔졌을 곳을 짐작으로 확인해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했다. 피를 뚝, 뚝 흘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앉았다.   흙 인형이 입을 열었다.   - 고통스럽느냐?  - 예,   터진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진은 꺼져 가는 소리로 말했다. 용암으로 지져놓아 움푹 패인 듯한 몸과 마음의 깊은 고통을 술회할 길 없어 몸부림하는 그의 텅 빈 눈확으로 눈물이 배여 나왔고 그것은 이내 묽은 피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 고통에서 해탈 할 방책을 대줄 가?  - 대주옵소서.    화신이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 춤을 버려라.   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부림하는 그의 손에 옷 속에 품은 반도막의 북채가 만져졌다.   - 버릴 수 있겠느냐.   진이 말이 없자 토우가 다시 한번 물었다. 북채를 뿌지직 소리나게 잡으며 진이 또박또박 말했다.   - 못, 못 버리겠삽니다.   그런 진을 지켜보다 토우가 감개를 토했다.   - 업연소치(業緣所致)라. 모든 것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더니, 너무나도 질긴 업장이로구나.   진에게 들붙은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신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윽고 눈도 감아버렸다.       적봉의 산정에서 피여 오르던  실연기가 굵어져 갔다.   적봉 우를 까맣게 뒤덮으며, 괴이쩍은 울음을 울며 새들이 날아갔다.   적봉으로부터 화산재가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화산재는 부락을 무채색의 전경으로 만들었다. 하늘은 재빛 모포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산도 집도 사람도 온통 재 빛이었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도 먹물 이였다. 재가 날리는 바람 속에는 온통 녹슨 쇠붙이 냄새와도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그와 함께 마을사람들은 산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뢰소리를 방불케 하는 그 소리는 산 속 깊이로부터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날짐승들의 불안한 소리에 뒤섞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도 있었다.   북소리였다. 북 소리는 적봉아래의 《화택》으로부터 울려오고 있었다. 《화택》은 화산재가 뒤섞인 재 빛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북소리는 운무를 비집으며 집요히 울려나오고 있었다.   - 천렬지화(天裂之火)가 닥치려나 보다.   머리에 화산재가 한 켜나 앉은 족장이 몸을 으스스 떨었다.     드디여 어느 아침, 꽈르릉!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적봉의 꼭대기로부터 화염이 뿜겨 나왔다. 잠자고 있던 적봉이 몸을 틀며 용트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은 삽시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남부녀대하고 집과 가축을 버린 채 사람들은 천방지축 마을을 뜨기 시작했다. 산의 골을 타고 진 붉은 용암이 터져 내렸다. 용암은 홍수처럼  골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흘러내려 가옥들을 태웠고 나무와 풀을 핥았으며 곡성을 밀어 버렸다. 사람들은 아우성이며 불을 피해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 난장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쪽을 마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진이였다. 적봉으로 난 돌계단을 톺아 더듬이며 비칠이며 진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불안한 듯 주위를 경계하며 불독이 사납게 짖어댔다. 날카로운 이빨이 불빛 속에서 번뜩인다. 불독이 진의 바지가랭이를 물어 당겼으나 주인의 확고한 발길을 돌려내는 수가 없다. 주인의 용의를 알아 개는 이젠  주인의 앞에 나섰다. 앞에서 향도를 해주었다.   용암이 터져 오르는 굉음에 귀때기가 잘려나갈 듯 했다. 날리는 화산재에 목이 메였다. 회오리를 만들며 불어온 불의 열기가 진의 얼굴을 할퀸다. 머리칼을 불불이 세운다. 그러나 진은 손톱 세우고 덤벼드는 불의 열기를 맞받아 앞으로  걸어간다. 어릴 적 불에 데였던 진의 왼편 이마 전에 동전잎 만한 흉터가 력력히 돋아난다. 북과 북채를 가슴 앞에 꼭 그러안은 채 진은 오로지 돌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그 길이 진에게는 자기가 념원하는 궁극에로 통한 회랑(回廊)을 걸어가는 것과도 같게 생각 되였다. 그는 지금 화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벌창해진 용암이 계단을 핥으며 흘러 내렸다. 불붙는 소리가 우우 귀가에 들려 왔다. 가까워지는 불을 느껴 진이 사력을 다해 북을 두다렸다. 불의 춤을 추었다. 불의 노래를 불렀다.     훨훨! 훨! 훠어얼!불이여 타올라라타올라라 불이여     캐갱! 앞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들을 삼키며 길을 안내하던 불독이 비명을 질렀다. 처연하게 짖으며 용암에 묻혔다 순식간에 하얀 뼈의 몸뚱이만 남았고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그 뼈마저 용암이 녹여버렸다.  훨훨! 훨! 훠어얼!내가 불 이여라 네가 불 이여라      <끝>
71    불의 제전 (2) 댓글:  조회:3249  추천:73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2)김 혁     진, 세상과 부딪치다 적봉,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산은 세월가도 벌거벗은 진솔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적봉, 그 넉넉한 산세의 품에 안겨 북소리의 주술을 타고 화동들은 서서히 자랐다. 적봉, 그 기슭에 자리잡은 《화택》에서 북소리는 가득했다. 초가집 지붕에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고 멀리 물레방아 방아공이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은 그 은은한 북소리가 매일같이 부락의 아침을 깨웠다. 춤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든 《화택》은 몽환이 뒤얽힌 또 하나의 세계였다. 거기에 박혀 고치에서 나오려는 작은 벌레처럼 날개를 털면서 진은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진에게서 삶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그 얼굴에는 분명 천상의 기쁨이 어려있었다. 학당패가 없기에 마냥 말석의 위치가 차려졌지만 춤을 출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진은 가슴이 들떴다. 그 와중에 초동머리를 겨우 면한 나이에 무용단에 입단했던 진이 어느새 코밑이 거뭇한 청장년으로 자라있었다. 뜰의 평상에 앉아 명이 진과 교와 염을 불렀다. 그들의 작고 느린 성장을 독려해왔던 명에게 세사람은 이미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위치에 서있었다. ―이제 너희들이 한번 익힌 기량을 펴보일 때가 왔다. 남하족은 3년에 한번 꼴로 무용제를 펼치곤 했다. 다른 부락에서도 이 성대한 축제에 동참해 춤군들을 송파(送派)하곤 했다. 경색에서 방(枋)에 오른 이들을 부락에서 크게 장려했다. 부림소 한마리와 밭 세마지기를 상으로 내렸고 그 집안의 화세(火稅)를 3년간 면해주었다. 그보다도 이는 무용권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화신무용단에서의 위치의 승격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무용제는 남하족과 산북족을 가르는 지경인 곡성부근에서 거행되였다. 행사는 사흘씩 열렸다. 이는 화신제날에 못지 않은 부락의 큰 행사였다. 부락사람들이 좋은 나들이옷들을 꺼내 입고 희희락락 모여들었다. 담곁에 커다란 무대가 설치되였다. 족장과 장로들, 그리고 무용계의 권위들이 나와 평을 맡았다. 역시 투석(投石)으로 평점을 했다. 진의 어머니는 무용제가 열리기 며칠전부터 서둘렀다. 아들에게 줄 《천인병(千人餠)》을 빚었다. 한집 한집 다니며 쌀을 한줌씩 빌었다. 그렇게 빌린 쌀을 찧어 떡을 빚었다. 그 백명, 천명의 손을 거친 정성어린 떡을 먹고 진이 방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춤경색이 열리는 장소까지 나가지 못했다. 아들의 성적에 념려되여서였다. 그저 무용제가 열리기 전날 《화택》으로 찾아가 명에게 《천인병》이 들어있는 떡보자기를 넘겨줬을뿐이였다. 드디여 무용제가 열렸다. 수천의 깃털이 날아오르듯 명절의 장소는 노란 해빛으로 가득했다. 등장을 앞두고 진은 어지간히 긴장된 모습이였다. 이는 3년간 해달을 이고 뛴 고심에 대한 한차례의 검증이였다. 학당패도 없는 몸으로 온갖 수모를 삼키며 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였다. 혜안으로 발탁해준 무자 명에 대한, 홀몸으로 아들의 양명을 바라며 지내온 어머니에 대한 보답의 시간이기도 했다. 진의 긴장을 보아내고 스승이 먼저 교를 내보냈다. 언제 보나 자신으로 넘쳐있는 교. 교는 홍석 8개, 백석 2개의 평점을 받았다. ―잘했어! 명이 무대에서 내려온 교를 포옹해주었다. 염을 올려보냈다. 염은 홍석 6개 백석 4개의 평점을 받았다. 명이 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허나 염은 울상이 되여 담아래 쪼그리고앉아버렸다. 맨나중에 진이 올랐다. 긴장의 너울을 뒤집어쓴채 손아귀에 흥건한 땀을 쥐고 올랐던 진은 무대에 오르자,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짜장 다른 사람이 되여버렸다. 머리우에서 빛나오르는 태양은 어머니가 빚어준 《천인병》처럼 둥글었다. 그 병을 잡으련듯 진은 팔을 길게 뻗쳤다. 태양은 뜨거운 열기의 손을 펼쳐 진의 온몸을 만져주고있었다. 그 빛의 은혜에 보답하련듯 진은 하늘을 우러르며 뛰고 솟고 굴렀다. 진이 팔다리를 저을 때마다 춤사위에 묻어오르는 해빛을 사람들은 보았다. 잘헌다아!!! 무대아래의 사람들이며 돌담에 가맣게 매달린 산북사람들마저도 갈채를 보냈다. 진의 춤사위를 면밀히 주시해보는 명의 긴 눈섭이 격동에 푸들푸들 뛰였다. 진은 홍석 9개 백석 1개의 평점을 받았다. 지금까지 제일 높은 평점이였다. 화동들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진을 우르르 에워쌌고 환성을 지르며 진을 헹가래쳐올렸다.   이튿날, 돌담에 경색결과를 알리는 방이 나붙었다. 격전뒤에 찾아드는 무기력감으로 해가 적봉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꼬박 내리 잠을 자고난 진은 게나른해서 방을 보러 갔다. 방앞에 가맣게 모여 목을 빼들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진을 향해 몰부어졌다. 그 눈빛들을 축복처럼 받으며 진은 의기양양 돌담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의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방의 으뜸에 오른 사람은 진이 아니였다. 무용단 성원도 아닌, 집에서 사인무용도사를 모시고있는 어느 응모자가 방의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조랑말을 타고 시중군을 거느리고 생색을 내며 춤경색장에 나타난 한 존재를 진은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홍석 10개로 만점의 평점을 받았다. 현기증으로 눈앞이 어지러워하고있는 진을 향해 개가 뛰여왔다. 불독이 진을 바라고 다급하게 짖어댔다. 진의 바지가랭이를 물어당겼다. 불독이 그렇게 안달을 떠는 모습을 진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늦은 더듬이로 진의 머리속을 후볐다. 진은 얼른 불독의 뒤를 따라나섰다.   불독은 진의 집으로 곧추 뛰여가고있었다. 진이 헐레벌레 달려 이른 그곳에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큰 참화(慘禍)가 진을 기다리고있었다. 진의 집에 불이 났던것이였다. 《천인병》을 빚어 만드느라 며칠밤을 샜던 어머니가 그만 아궁이앞에서 잠에 떨어졌는데 튀여나온 불똥에 집이 타고 어머니는 불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한것이였다. 진, 가르침을 받다 그해 여름을 진은 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지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가슴이 내려앉는 현기증속에서 보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방에서 떨어진 렬패(劣敗)감에 사로잡혀 보냈다. 산다는게 이처럼 불확실한것이였을가? 불운이 예고하고 닥치는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닥친 불운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엄청난것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춤경색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의 백부가 부락에서 가장 큰 대호(大戶)였다. 돈으로 구워삶은것이 뻔했다. 그 내놓고 거래되는 부정에 진은 경악을 금치 못해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진은 북채를 잡지 못했다. 불앞에 나서지 못했다. 불이 무서웠다. 불은 이미 진의 생활 전체를 휘둘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육신을 사른 불이 그렇게 무서울수가 없었다. 진은 다시 어제날의 불을 무서워하던 아이로 돌아가있었다. 동인인 교와 염의 권고도 스승 명의 엄벌도 진을 북채를 잡지 못하게 했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력감에 짓눌려 우두커니 누워있기만했다. 세상의 외진 곳으로 달아나고만싶었던 진은 홀로 적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톺았다. 화신상이 모셔져있는 그 동굴속으로 향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튀는 소리를 내며 언제나처럼 화당에서 불이 이글거리고있다. 불이 더운 숨을 내뱉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들이 알큰한 냄새를 풍기며 동굴안으로 퍼진다. 깊은 물에 잠기듯 어지러우면서도 아늑하다. 그 불의 기운에 진은 잠시 멍해지고만다. 진은 화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화신상이라야 흙으로 빚어만든, 아이들 인형에 다름없어보이는 작은 토우(土偶)였다. 화당의 정가운데 삼발이(三脚架)를 놓았는데 그우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정좌한 형상인 토우를 모셨다. 푸짐한 불빛이 토우의 작은 몸에 금박을 입혔다. ―불이 무섭더냐? 문뜩 동굴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메아리친다. 진이 움찔 놀라며 머리를 쳐들었다. 토우가 눈을 번쩍 치뜨고있다. 그리고 입술을 어눌하게 놀리며 묻는다. ―참말로 불이 무섭더냐? 그 조화(造化)에 놀라 멍청해있는 진에게 또 한번 물음은 날아왔다. 작은 토우의 목소리는 생각밖에 웅장하였다.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동굴을 맴돌았다. 진이 급기야 머리를 끄덕였다. 낯빛이 심한 어지러움으로 무눌져 심각한 혼돈에 자맥질하는것 같다. 절실한 두려움으로 입을 열었다. ―무섭습니다. 참말로. 무서워서 더는 가까이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는 춤을 출수 없을거 같아요. 불구덩이의 불은 진한 선홍빛으로 물들어 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색조 현란한 꽃잎 같은 불빛에 진은 눈이 아프다. 토우가 그런 진을 내려다보았다. ―괴로움도 좋은데 쓰면 약이 된다. 어머님을 여읜것은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고통의 벼랑인셈이다. 그러나 춤에서 락방한것은 네가 아직 완숙치 못한 신을 신고 섣불리 길을 나선 결과다. 무엇이 되겠다고 규정하는 순간 세상은 그것이 욕망임을 안다. 네 이름자 껍질에 너무 집착하지 말어라. 진은 미처 다 알지 못한 표정으로 화신을 쳐다보았다. ―저 불을 보아라.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화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진은 답했다. 불의 화기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얼굴이 그 화기에 쓸려 쓰라리다. 토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신에게 불을 내려주기를 바랬더니 신은 불을 주었다. 불만 준것이 아니라 죽음도 더불어주었다. 불에는 청정(淸淨)한 불과 부정(不淨)한 불이 있다. 불은 락원에서도 빛나고 지옥에서도 탄다. 불이 따스하고 그 빛도 화려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불에 닿는것은 파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은 감미로움이며 또 고통이다. 네 몸을 태우는 불은 결국은 네 자신의 손에서 인다. 큰불에도 꿈쩍 않고 버티며 살아가다가도 내부에서 튕기는 불꽃에 끝내는 마음이 타서 무너지고만다. 외부의 불보다 더 무서운 불은 언제나 너의 내부에 있다. 네 마음속의 부정한 불을 버려라. 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말을 마친 토우는 눈을 내려 감고 입을 다물고있다. 자신의 감성을 리성의 쇠도리깨로 내려친 화신의 말 마디마디가 선명한 울림으로 진의 가슴에 꽂혔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는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듯하다. 질러져있던 쇠빗장이 조금 열리려고 한다.   밤, 화택의 동자들은 아닌 밤의 북소리에 잠에서 깨였다. 진이 석등을 밝혀놓고 마당에서 뛰고있었다. 진, 사랑에 눈뜨다 곡성부근에서는 간혹 장이 펼쳐지곤 했다. 칼자루를 잡은 이들에 의해 같은 족속끼리 서로 반목했지만 생계를 위해 암암리에 펼쳐지는 민간적인 교역은 막아내는수가 없었다. 돌담의 틈새로 서로 건너가고 서로 건너와서는 서로의 토산물을 바꾸곤 했다. 남하에서 나는 과일과 산북에서 나는 약재를 바꾸기도 했고 산북에서 구워만든 도자기와 남하에서 결어만든 대바구니를 바꾸기도 했다. 바람이 잦다싶으면 두 부락사람들이 슬렁슬렁 모여들었고 구석구석에 자잘한 생필품들로 난전이 펼쳐졌다. 이에 대해 부락의 족장들은 한눈은 감고 한눈은 뜨고있다. 그러다가도 지나쳤다싶으면 문뜩 장터에 뛰여들어서는 재수없이 걸려든 이들에게 벌금을 시키고 징벌로 태형(笞刑)을 가했다. 그날은 좋은 날씨였다. 날씨는 너무 맑아 해가 쨍그랑쨍그랑 명랑하게 소리내어 웃는것처럼 보인다. 진은 교와 염과 함께 장으로 나갔다. 개가 킁킁대며 뒤를 따른다. 어데 가나 진의 뒤를 묻어다니는 불독이다. 교는 떠오르는 일월이 새겨져있는 도자기를 사들였다.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진은 북채에 달았던 붉은 술이 닳아져 패물난전을 찾았다. 패물이 일매지게 늘여진 가게에서 붉은 술을 보아내고 값을 물었다. ―그냥 넣으세요. 진은 눈을 치떴다. 패물가게의 주인은 진을 보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가게의 물품으로 보아 산북의 장사치였다. 섶을 깔끔하게 여민 옷매무새의 녀자는 산수화속의 인물처럼 단아하고 고즈넉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진을 보고 녀자가 웃으며 말했다. ―화신무 추는걸 봤습니다. 저번 춤경색때… ―춤 좋아해요? 진이 물었다. ―예. 녀자가 아미를 숙이며 대답했다. 녀자의 볼에 홍조가 번졌다. 곁에서 불독이 어딘가를 바라고 컹컹 낮은 소리로 짖었다. 그러자 그쪽에서도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북종의 화견(火犬) 한마리가 조금 떨어진 돌담근처에 오줌을 지린다. 녀자가 손짓으로 개를 불렀다. 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진이 귀엽게 개의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반들반들한 코가 손바닥에 와닿는다. ―홍모(紅毛)얘요. 우리 개. 귀엽죠. ―저, 저의 개는 불독인데요. 진도 자기 개자랑을 했다. ―전 유(柔)라고 합니다. 우린 건너말서 살아요. 어느사이 산북종과 남하종의 개는 서로 어울려 꼬랑이를 흔들며 목털을 비빈다. 그런 개들을 재미있게 지켜보다 녀자가 붉은 술을 진에게 내밀었다. ―선물하지요. 이름난 화신무용단 춤군인데… 그런 그들을 한쪽에서 염이 눈을 동그랗게 뜬채 매초롬하여 지켜보고있다. 그의 손에도 붉은 술 한개가 들려있었다. 이때 개들이 다급하게 짖어댔다. 장터에서 급작스런 소요가 일었다. 누군가의 깨지는듯한 비명이 터져올랐다. ―포리(捕吏)가 온다아! 진은 얼핏 고개를 돌렸다. 대도를 차고 창을 꼬나든 남하의 포리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흩어지면서 닭이 풍겨올랐고 개들이 짖어댔다. 남하의 사람들은 가까이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산북의 사람들은 돌각담을 넘느라 허둥대였다. 서로 찾고 부르는 사람, 넘어져 비명지르는 사람, 포리들에게 잡혀 울부짖는 사람… 장거리는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였다. 분만해오르는 먼지속에 진은 담을 넘지 못해 설레발치는 녀자를 보았다. 산북의 그 녀자를 보았다. 무거운 패물이 가득든 함을 껴안은채 녀자는 담을 넘지 못해 쩔쩔매고있었다. 그러다 밀쳐 넘어졌다. 패물들이 땅에 흩어져널렸다. 포리들의 추상같은 호령을 등뒤로 하며 진은 달려가 흩어진 패물들을 주어담아주었다. 그리고는 담아래 넙죽 엎드렸다. 자기 등을 밟고 넘으라고 손짓해보였다. ―빨리 타요! 머뭇거리던 녀자는 포리들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진의 등을 밟고 담으로 올랐다. 그리고 담우에 선채로 진을 내려다보았다. 녀자의 눈에 진한 감동이 어려있음을 진은 볼수 있었다. 잠시후 녀자는 청남색 치마자락을 부풀리면서 담 저쪽으로 뛰여내렸다. 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전에 진의 목에 쇠사슬이 철렁 걸렸다. 장을 보다가 두수없이 걸린 사람들은 태형 20대의 엄벌을 받아야 했다. 산북의 장사치를 도왔다는 죄명에 진도 태형을 받았다. 그러나 화신무용단 성원이고 무자 명의 간청이 있었기에 매는 10대로 줄었다. 하지만 엉뎅이가 흐드러져 진은 근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리에 엎드린 자세로 진은 벽에 걸린 북과 북채를 바라보았다. 경황중에도 손에 꼭 품고 온 붉은 술이 북채에 달려있었다. 장터에서 돌아온 뒤로 산북녀자의 붉은 도화볼이 진의 눈에 어려 삼삼히 떠나지 않았다. 단지 일별만으로 그만두기엔 무언가 설명못할 미진함 같은것이 진의 마음에 걸려있었다. 발목을 잡아채는듯한 끈끈한 느낌, 그것을 일컬어 인연이라 해야 할가. 유! 마음속에서 돋아오르는 순(筍)같은것을, 참을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하면서 진은 입속말로 녀자의 이름을 자그맣게 되뇌여보았다. 그날 이후로 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태형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볼에는 붉은 화색이 돌았고, 가끔 떠오르는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는 마음속의 희열을 내비치고있었다. 그런 진을 두고 교며 염이 이상한듯 눈을 마주쳤다. 컹! 컹!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독의 소리가 아닌것 같았다. 환청인듯싶어 창을 열고 보던 진이 경희에 차 소리질렀다. ―홍모야!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려왔던지 산북종의 홍모가 뜰에 나타나 짖고있다. 홍모의 목에 바구니가 걸려있었고 바구니에 서찰 한통이 담겨져있었다. 적봉에 해 떨어지면 곡성곁의 과수밭으로 오세요.― 유. 진은 흥분에 몸을 떨며 홍모를 그러안았다. 붉은 털을 어루만져주었다.       진, 담을 넘다      밤, 진은 담을 넘었다.   밤, 진은 긴장과 흥분을 억누르며 곡성을 넘었다.   밤, 진은 야경순찰사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월경죄로 옥에 떨어 질 위험도 무릅쓰고 담을 넘었다.    담을 넘자 날카롭고 사나운 풀숲이 이어졌다. 바늘같이 메마른 풀 넝쿨들이 다리를 긁고 팔을 긁었다. 어느 결에 손등에 새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주술처럼 닥쳐온 사랑의 전갈은 그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담을 넘고 숲을 가르게 했다.      오래 동안 방치해 둔 데서 무인지경인 곡성부근은 둘도 없는 옥토로 되였다. 두 부락의 과농(果農)들은 가만히 이곳에 숨어들어 과수밭을 일구었다. 점호를 앞둔 화동들처럼 종대로 나란히 렬을 지은 과수나무, 그 나무들이 천국의 풍경을 그리며 어우러져 있는 곳에서 진은 유를 만났다.     - 오셨군요.      옷에 가득 봄밤 냄새를 묻히고 나타난 진을 유가 수태를 머금고 반겼다. 그 한마디는 천년의 행복보다 길고 아름다웠다. 어둠 속 이였지만 그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온유함과 기쁨, 밝음을 진은 분명 보았다.   둘은 과수나무에 등을 붙이고 나란히 섰다. 유는 말없이 풍성한 머리다발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손가락에 말렸다가 도르르 풀어지는 머리칼이 진에겐 싱싱한 이파리처럼 보였다. 얼핏 드러나는 어깨가 동그랗고 목선이 매끈하다. 그 모습에 진은 어질머리가 인다.     부끄러움을 잉태한 침묵이 과수밭에 흘렀다.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다행 이였다. 그렇지 않다면 유의 붉어진 볼과 진의 손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을 샅샅이 비출 것 이였다. 홀연 진의 발치에서 불덩이가 폴짝 뛰여올랐다. 어지간히 놀란 진이 그처럼 풀쩍 뛰였다. 유가 웃었다. 그 불덩이를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작은 몸체에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벌레였다. 벌레들은 더듬이 끝에 자그만 불을 켜 달고 있었다.     - 당랑이 얘요. 화당랑(火螳螂). 짝짓기 할 때면 정수리에 불을 켜들죠.     유가 알려 주었다. 그제야 진은 마을의 년장자들에게서 화당랑이라는 신기한 벌레에 대해  들은 생각이 났다. 화당랑은 산북에서만 나는 곤충인데 산북사람들은 화당랑을 잡아두었다가는 밥 지을 때 불을 지피면서 땔나무와 함께 아궁이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유리 병 속에 가두어 놓고 그 불빛을 빌어 책을 읽기도 한다고 했다.     - 이 세상 당랑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싶은 적이 있었어요.     유가 문뜩 감개에 젖은 소리를 했고 그 소리에 진은 놀라하며 유를 쳐다보았다. 유가 이야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무더웁던 유월, 산북사람들과 남하사람들은 서로에게 창부리를 들이대고 활촉을 겨누었다. 토포(土炮)까지 제작해 가지고 서로에게 포탄을 퍼부으며 상잔에 혈안이 되었다. 포에 화약을 재워 넣고 화당랑을 집어넣으면서 사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화당랑을 잘못 떨군 바람에 화약통이 폭발하면서 유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몇 명이 비명에 갔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에게서 화당랑은 보지 못한 할아버지를 죽인 원흉으로 생각 되였다. 밤만 되면 뜰에 뛰여드는 화당랑을 잡아서는 발로 짓이겨 죽였다고 한다.     - 다시 생각해보니 버러지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모두다 한 혈통끼리 죽인다 살린다 원쑤를 만든 사람들의 탓이지요.     진은 사색 깊은 유의 얼굴을 새삼스레 지켜보았다. 손바닥에 쳐든 화당랑의 불빛이 유의 반 쪽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절반 얼굴만으로도 유는 예뻤다.     - 이제는 화당랑과 친구가 됐는걸요.     유가 입술을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은은한 휘파람소리가 과수밭에 메아리쳤고 다음순간 진은 희한한 광경에 입을 퀭하니 벌리고 말았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풀숲의 여기저기서 화당랑들이 폴짝 폴짝 뛰쳐나왔다. 저마다 정수리의 더듬이에 불을 켜들고 뛰여왔다. 뛰여 와서는 진과 유를 에워싸고 맴을 돌았다.      주위가 등롱을 켜든 것처럼 환해 졌다. 유의 청순한 얼굴이며 갈람한 몸매가 불빛에 드러났다. 길고 숱 많은 머리털이 흩어져 후광처럼 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진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불에 데였던 왼편 이마 전에 동전잎 만한 흉터가 력력히 돋아났다.     진은 유의 손을 당겨 잡았다. 진의 몸 속에 욕망의 열기가 서서히 고여 오고있었다. 여태껏 춤밖에 모르고 지내온 일심이 욕망의 건드림에 흔들렸다. 유가 수줍은 손을 뺄 듯 뺄 듯하다가 자기의 허리 전에 놓아주었다. 허리띠가 잡혀 졌다. 진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를 잡아 당겼다. 유가 핑그르르 맴을 돌았고 당랑의 날개 같은 옷이  스르르 벗겨져 내렸다. 유의 농익은 몸매가 드러났고 진은 넉을 잃고 바라보았다. 불빛 어린 유의 몸매는 뇌쇄(惱殺)적으로 아름다웠다.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뚜렷하다. 어깨가 좁다랗고 가슴은 높다. 엉덩이는 알밤같이 도드라졌다. 화당랑의 움직임과 함께 유의 몸매에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유의 볼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목선 아래의 쇄골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높은 가슴에 머물렀다. 묵직한 가슴아래 머무른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풍요로운 배를 타고 내려 기름진 숲에까지 그림자는 머물렀다.     진이 유의 살갗에 손을 가져갔고  손길이 닿자 유는 진을 향해 전신이 무너져 내렸다. 진의 손과 혀 바닥은 불줄기가 되었다. 불줄기가 되어 유의 일신을 훑어 내렸다. 유가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높아졌고 그 소리에 당랑들이 일제히 더듬이에 켜든 불을 죽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을 켜들었다. 두 사람의 몸 속에 내연하고있던 불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밀어젖히며 받아 안으며 애욕의 춤사위를 벌렸다. 과수나무를 품은 산줄기도 이렁이렁 떠도는 것 같다.     적봉에 떠올랐던 달이 서천으로 콩알처럼 굴러 떨어질 때에야 진은 유와 갈라졌다. 진과 유의 사랑을 목격한 화당랑 하나가 손바닥에 놓여져 진의 밤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진은 경쾌한 몸짓으로 담을 넘었다.   이때 진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처럼 날렵하게 담을 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계속>  
70    2005년 연변문학 윤동주 문학상 심사평 댓글:  조회:2889  추천:73  2007-06-29
  판타지의 매력  2005년 연변문학 윤동주 문학상 심사평 (절록)  김호웅 (연변대학 교수)     김혁의 《불의 제전》은 판타지(fantagy) 소설이라 이를 순문학으로 볼수 있는지 쟁론할 여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상상이 빈약하고 언어가 거칠고 메마른 오늘의 문단사정을 념두에 둘 때 현실에 안주할줄 모르는 김혁씨의 대담한 실험정신과 이 소설에서 보여준 풍부한 상상력, 미끈하고 윤택한 언어구사력 및 우리 민족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은 특별히 주목된다.   《불의 제전》을 보면 적봉(赤峰)을 성산으로 우러르는 남하족(南河族)과 산북족(山北族)이 곡성(哭城)이라는 담을 사이 두고 은연중 갈등과 마찰을 빚어내고있는데 이를 배경으로 남하족의 진(眞)이라는 화동(火童)의 눈물겨운 성장사와 그의 비장한 운명을 다루고있다.   불을 무서워하던 진이 화신무(火神舞)에 열광하게 되고 산북족의 유(柔)라는 처녀애와 열연에 빠지기도 하며 월경(越境)하여 산북의 불씨를 가져다가 가가호호에 나누어주는 등 여러 가지 남하족의 금기(禁忌)를 어긴 죄로 두 눈을 잃게 되지만 불과 회신무에 대한 집념은 버릴수가 없다.   나중에 진은 미친듯이 춤을 추고 북을 두드리면서 터져오르는 적봉의 용암속으로,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 열반(涅槃)한다.   이 소설은 우선 불을 매개(媒介)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있다.   상고시대 북방의 여러 부족과 삼한의 여러 나라가 봄, 가을에 있었던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음주(飮酒), 가무(歌舞)한 국가대회》도 불을 둘러싼 군중의 광희(狂喜)로 이어진 제의(祭儀)였다. 그리고 불은 우리민족의 경우 신화에서는 왕권, 영웅탄생, 정화(淨化) 등을 의미하고 우리 무속이나민속에서는 열정, 정화를 의미했으며 우리 풍습에서는 생명력과 복(福), 벽사(辟邪)를 의미하고 유교에서는 개화(改火), 불교에서는 자기 멸각(滅却)을 통한 승화를 의미하였으며 력사와 문학에서는 위기와 정열을 의미했다. 《불의 제전》에서는 불의 다양한 상징적의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있는데 그 중에서도 어지러운 세상을 정화하고 멸각을 통한 승화의 의미에 포인트를 주고있다.   화신무에 열광하고 불속에서 열반하는 주인공 진의 형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것은 예술에 대한 집착, 열정적인 사랑, 만민을 위한 헌신성, 스승에대한 존경과 같은것들이다.   이러한 덕목들은 무지막지한 족장(族長)과 리해타산에 밝은 동료인 교(狡)와의 대비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환상적인 인물과 사건을 다루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암시하는바는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국토의 분단을 극복하고 대동세계를 이루는 길은 우리민족 전체가 불의 세례를 받아 스스로를 정화하거나 재생해야 함을 암시하고있다.   이 소설은 작자의 해박한 지식, 환상적인 플롯, 장려한 언어구사와 깊이 있는 주제의 발굴로 말미암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한다.    
69    "불의 제전" 창작후기 댓글:  조회:2756  추천:73  2007-06-29
      [불의 제전] 창작후기       김혁       판타지 작품 한편을 습작해 보았다.   우리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어딘가 낯 설은, 이른바 판타지란 영상, 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과 같은 쟝르문학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말, 네즈비트라는 작가가 환상적인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하면서 마술적 이야기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썩 오래 전에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 되여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 되여 왔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아동용 환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쟝르로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성인을 위한 동화인 셈이다.   지금 세계는 판타지작품에 열광하고 있다. 그 정상에 오른 작품은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이다.    《해리 포터》는 영국에서 출간된 이래 전 세계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 2천만 권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세계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국 최고문학상인 위트브레드상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셔머스 히니와 각축을 벌인 끝에 한 표 차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작가인 30대의 아기엄마 조앤 K. 롤링은 명가의 덤에 올라  권위지가 선정한 세계저명인사 100명 중 25위를 기록했고, 녀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 받았다. 《해리 포터》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른용까지 출간됐을 정도다.   남아프리카의 작가 톨킨이 창작한《반지의 제왕》도 출간된 후부터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지 않는 것은 용서될 수 있지만, 소설의 독자들이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각종 영미 문학 걸작 25위, 20세기 최고의 소설 4위, 100권의 책 4위 등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미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 딱히 영미 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판타지애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접할만한 시대를 초월한 명저이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은 여러 가지로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두 작품 모두가 판타지작품이라는 점에서 판타지라는 장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를 강타하는 붐에도 무감각한 우리문단에 얼굴 붉히며 늦깎이로나마 한편 만들어 보았다.   기실 판타지는 서방의 전용물만이 아닌 것 같다. 중국의 고전들인 《서유기》,《봉신연의》,《료재지이》등은 그 지칭(指稱)이 달라 그렇지 같은 범주의 작품이라 본다.   첫 판타지를 만들면서 박래품에 대한 모방으로 그치지 않으려 애썼다. 북유럽 권의 판타지 베스트와  중국고전의 장점을 두루두루 따서 그리고 풍부한 유산인 우리의 민속풍토를 많이 차용해서 이 쟝르의 첫 습작에서 보이는 모자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특색의 판타지를 만들려 시도해 보았다.                                             (2)          한비자(韓非子)에서 나오는 얘기인데... 옛날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코끼리를 보고싶은 소망이 간절했지만 그게 어려워서 어디선가 죽은 코끼리의 뼈를 구해 다 보면서 코끼리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로서 사람들이 마음으로 상상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모두 象(상)이라고 했고 상상(想象)이란 말은 이렇게 되어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때로는 환상이 실제보다 현실을 더 잘 드러낸다. 대개 상상이란 길잡이를 통해 전개되는 환상이야기는 세태를 과장하거나 현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가상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의 직접적인 현실의 한 측면을 적라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창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는지. 결국은 내가 공상하고 상상하고 추상하는 이미지의 구현인 것이다. 이러 저런 현답들이 많을 테지만 결국은 이 象(상)이란 글자 안에 담겨져 있는 게 아닐까 싶다.                                          (3)    어느 한번, 문학도 몇몇이 나보고 선생님은 여러 가지 장르를 다루고있는데 그중 한가지만 선택이 주어졌다면 무얼 택하겠는가고 물었을 때 나는 두말없이 동화를 쓰겠다고 대답한 적 있다. 그리고 나의 문학을 정리해야할 그때가 오면 모든 장르를 접고 동화창작에만 몰두할 것이라고 했다.      뛰어난 상상으로 독자들에게 크나큰 즐거움과 황홀한 미감을 주는 것이 바로 동화의 문예적 특성과 우수성이다. 공상적이면서도 가능성을 지닌 미적 표현을 통하여 인간일반의 보편적 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시에 가까운 산문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훌륭한 장르에 대한 애착이 점점 깊어진다.    문학의 원형이라 말하는 체험을 토대로 작가는 작품세계를 형성해 간다. 그러나 상상의 활동을 통해서 작가의 그 체험이 비로소 보편적인 확대와 효력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볼 때, 이러한 표현방식이야말로 과학적인 개념과 대응되는 이른바 문학의 궁극적인 단위가 아닐까.    오늘도 내 무거운 머리통에 날개를 달아본다. 그리고 떠난다. 저 멀리서 귀를 흔들며 상아를  빛내이며 뚜벅뚜벅 거닐고있을, 내가 찾는 궁극의 령물- 《코끼리》를 만나러...               ;/DIV>
68    겨울새 댓글:  조회:3005  추천:73  2007-06-29
  . 수필 .   겨울새  (1993년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수상작) 김 혁     두 번째 눈이 내리던 날, 그러니까 11월 초순께의 일이었다.   신문사 이웃부인 사회교육부의 동료인 A선생이 아침나절에 나를 불렀다. 20년간 기자행업에 몸 담근 연장자인데다가 원체 성정미가 도고한지라 돋보여 평소에는 요긴한 말 외에는 구구한 면담도 없이 여태껏 지내 온 선배였다. 나는 약간 어줍은 기색이 되어 그의 뒤를 따랐다.     A선생이 악동같이 장난기 묻은 웃음을 지으며 조금조금 사무실 서랍을 잡아 당겼다. 서랍 속의 실체를 일별하는 순간, 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경아성이 튕겨 나갔다.     새였다.   빨간 부리, 비취색 깃을 가진 새였다. 얼핏 보기에는 미니완구로 착각이 들 만큼 작은 새 한 마리였다. 할딱이는 흰 가슴, 자주 깜박이는 작은 눈은 그 역시 하나의 소중한 생명임을 말해주는 상 싶었다.   홀연 새가 되알진 소리로 우짖었다. 그렇게 높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한 사무실, 스팀속의 출렁이는 물소리와 서걱서걱 글 쓰는 소리만이 단조로운 음향의 그라프를 긋는 사무실에서, 이색적인 그 모난 우짖음이 주는 공명성은 컸다. 하여 주춤 놀라기 까지 한 나였다.   A선생은 출근길에 길가에서 주어 온 이라고 새의 출처를 밝혔다. 빙설에 박제된 콘크리트 숲에서 추위와 소음에 떨고 있는 가여운 생명을 보고 그저 지나칠 수 없어 큼직한 외투호주머니에 신주 모시듯 하여 왔다는 것이었다. 한편 집집마다 굳게 창을 봉한 이 혹한에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 새인지 로를 일이라며 의뭉스런 낯빛을 지었다.       모두가 자연을 멀리한 책상물림들이어서 새의 이름을 감별하기 어려워했다.     A선생과 함께 제 나름대로  새의 이름 짓기 작업에 뇌 즙을 짜던 나의 노리로 저도 모르게 시인들이 즐겨 구사할 그런 조합이 획을 그었다.       A선생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여직 돌의 표피처럼 딱딱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던 A선생 이 그렇듯 즐겁게 홍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신문과 편지를 조달해 주는 통신원 여자애가 새를 보고 귀여워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우체국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집에 들려 좁쌀까지 한 줌 넣고 왔다.   나는 좁쌀알을 손바닥위에 펴놓고 새의 부리 앞에 내밀었다. 새는 조금 멈칫거리다가 머리를 주억거리며 쪼아 먹기 시작했다. 작으나 억센 부리가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잠자리의 날개 짓처럼 미세한 감각의 파장이 일신에 뻗쳐왔다. 나는 간지러운 나머지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피부에서 가슴으로 뻗치는 아릿하면서도 무거운 그 감동은 가슴 속에 침전되어 있던 인간의 원초적인 박애의 감정을 환기시켜 주는 듯 했다. 한 작은 생령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만부해 오름을 억제할 길 없어 했다.   점심, A선생이 맥주 집으로 가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해 왔다. 나는 흔쾌히 따라 나섰다.   우리는 삶은 조개를 안주로 맥주를 흠뻑 마셨다. 비닐 컵에 담긴 0,5킬로 생맥주를 대번에 굽 냈고 쇠돈을 조개껍질의 틈바구니에 박아 넣어 벌컥 젖히고는 그 속에 솔 곳이 담겨진 붉은 살을 걸 탐스레 후벼먹었다. 경쟁이 강요되는 요즘세월, 긴장한 호흡만이 흐르던 일상 중에 서로 가려왔던 생경한 탈을 벗기듯 딱! 딱! 신나게 조개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였다.   요즘 풍미되고 있는 애견 열(熱)이며, 맥주의 안주 챙기기며, 힘들게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며, 베스트셀러 이며, 상품시대 방황하는 문인들의 현황이며...에 대해.   작은 새의 출현은 여유 없던 우리들의 사이에 그 어떤 공명을 유발시켰으며  그 새를 화제로 하여 우리는 서로 갑문을 터치고 추호의 가감도 없는 세계에서 구애됨이 없는 면담을 나눌 수 있었다.   그날로부터 새를 돌보는 일은 우리들의 따분한 일상에 신선한 활력을 주입하는 일과로 되어 버렸다.   손목 시큰하고 어깻죽지 뻐근하게 글을 쓰다가도 A선생의 사무실로 찾아 들어가서는 그 무슨 진귀품이라도 감상하듯 새를 구경하곤 했다 .먹이도 때때로 주고 보온병 덮개에 물을 담아 먹이기도 했다. 퇴근 시에는 스팀과 제일 가까운 서랍 속에 넣어두고는 호흡에 영향이라도 줄까봐 서랍을 빠끔 열어놓고 가기도 했다.   동 시장 부근에 가면 새 초롱을 파는 전문매장이 있다고 열심히 알려주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고 롱을 걸어오는 시럽 쟁이 동료도 있었다. 모여 선 사람바자 속에서 새는 꺅! 꺅! 사뭇 즐겁게도 우짖었다. 빙설로 박제된 계절이지만 새는 인위로나마 따뜻한 봄내음을 주조해 주는 상 싶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꼭 닷새밖에 안 되었다. 신선한 맥락으로 이 며칠을 지내오던 우리들의 가슴 가슴에 새로운 충격이 밀착해 왔다.   새가 죽었던 것이다. 새가 죽었다. 낡은 책상서랍의 뒤 부분에 구멍하나가 뚫려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날아 내린 새가 차가운 콘크리트바닥에서 한 밤을 지새우다 얼어 죽었던 것이다.       A선생이 추연한 눈빛이 되어 말했다. 혹여 살아날 수 있을까 새를 털모자에 싸서 스팀위에 올려놓아도 허사였다.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새는 하나의 잘 만들어진 박제품을 방불케 하였다. 죽음 역시 아름다울 때가 있고나하고 나는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새의 죽음에 지지름을 당하고 있는 마음을 느껴 나는 앙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허전한 감이 한가슴 가득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A선생은 새를 버리지 않았다. 새를 창턱에 놓인 화분통의 꽃을 떠내고 그 밑에 묻었다. 그 무슨 대장(大葬)이라도 치르듯 묵연한 몸가짐을 지켜보노라니 홀연 어느 문예지에서 읽었던 시 한수가 환청같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새의 음향이/나의 동공에 안기어/싱싱한 꽃 피우면/   나의 마음은/레몬 빛 단 즙에 취하여/꿈을 꾼다./   꿈속에 아리송하게 보이는/ 봄 언덕 봄 다리를 지난 나는   열매 맺힌 새의 이름을/앞산더기 밭고랑에 뿌렸다.    새는 죽었다.   겨울새는 죽었다.   하지만 겨울새가 묻혀있는 화분통의 선인구(仙人球 )는 여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자라났다. 물기를 머금은 동근 초록빛 몸체는 새의 파란 깃을 방불케 했고 몸체의 융기점마다 돋친 가시는 새의 부리를 방불케 했다.   그 선인구를 볼 때마다 새를 생각하곤 한다. 겨울새를 생각하곤 한다.   살아가기가 너무 힘이 부친 요즘의 엄동에, 우리 사무원들의 메마른 인정세계에 윤활한 우짖음을 뿌려주고 간 새, 계절을 앞질러 준 한 마리의 겨울새를...   이제 정녕 봄이 오면 새의 심성이 담겨있는 꽃은 더 예쁘게 더 싱싱하게 자라오를 것이고 온갖 철새는 무양하게 떼 지어 찾아 올 것이고 그때에 우리는 화려하게 물드는 지상의 계절 한  켠 에서,  초록의의 향연 속을 거닐며 짧으나마 우리에게 봄 양기를 만끽하게 해준 한 마리의 영물- 겨울새를 다시 그려보게 될 것이다.   "연변일보" 1993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67    환(幻)을 말하다 댓글:  조회:3484  추천:73  2007-06-29
 평론 환(幻)을 말하다21세기 신문학 코드- 판타지 김 혁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 이론의 여지없이 21세기는 <<판타지의 세기>>다. 현재 진형행인 판타지물은 현학(玄學), 신화, 무협, 과학환상, 동화, 로맨스, 추리, 호러 등 인소를 용납해 들여 읽을라치면 <<현혹>>될수 밖에 없는 신종의 쟝르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정상에 오른 작품으로는 단연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들수 있다. 《해리 포터》는 영국에서 출간된 이래 전 세계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 2천만권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세계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국 최고문학상인 위트브레드상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셔머스 히니와 각축을 벌인 끝에 한 표 차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작가인 30대의 아기엄마 조앤 K. 롤링은 명가의 덤에 올라  권위지가 선정한 세계저명인사 100명 중 25위를 기록했고, 녀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 받았다. 《해리 포터》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른용까지 출간됐을 정도다. 현재 6권까지 출간, 모두 7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해리 포터》시리즈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소설 속에 감추어진 주제들을 찾아 내는 것이다. 작자 롤링은《해리 포터》에서 보통 판타지 문학에서 즐겨 다루는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를 초월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탐색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진 주제는 혼혈 마법사들에 대한 순수혈통 마법사의 편견이라는 주제이며 또 한가지 상류층 출신과 중류층 출신사이의 계급 갈등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 우리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근거 없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포스트모던적 주제도 발견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의 작가 J. R. R. 톨킨(1892~1973) 이 창작한《반지의 제왕》도 출간된 후부터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지 않는 것은 용서될 수 있지만 소설의 독자들이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각종 영미 문학 걸작 25위, 20세기 최고의 소설 4위, 100권의 책 4위 등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미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 딱히 영미 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판타지애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접할만한 시대를 초월한 명저이다.     톨킨이 최초로 출판한 책은 <<호빗>>이라는 동화였다. 전설의 일부 요소들이 등장하는 <<호빗>>은 예상 외로 독자들의 엄청난 반응을 끌어냈고 후편의 출판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인간과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는 중간계(Middle Earth)라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고 다양한 종족들의 언어와 풍습, 겨4사까지 만들어 낸 <<반지의 제왕>>은 1954년에 처음 출간된 후 12년 만에 완성됐다.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모험소설로서 뿐 아니라 러브 스토리로 그리고 당대 사회에 대한 강력한 고발장으로도 읽을 수 있다. 우선 이 판타지는 위험한 려정을 떠나기 위해 뭉친 인간과 마법사들 사이의 상호 교류를 묘사하면서 위기의 시기에 일어나는 각기 다른 인종들 사이의 사랑과 애정, 그리고 동정과 리해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톨킨은 그 반지가 절대권력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의 상징이라고 암시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지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버리러 간다는 사실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곧 절대권력은 갖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4년 2월 29일, 7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누구도 꿈꾸지 못했을 기적이 일어났다. <<반지의 제왕 3>>이 자그마치 11개 부문의 상을 독식하며 이날의 주인공이 됐는데, 특히 세인들의 주목을 끈 것은 이 작품이 역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거머쥔 판타지영화라는 점이였다. 전세계의 관객과 평론가들은 수십 년 동안이나 가상의 괴물과 마법사, 난쟁이들을 스크린에서 목격하고도 판타지물의 진정한 가치를 이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후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100대 영화>>에 뽑혔다. 가족 판타지물 각색 된 <<해리포터>>도 아직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세계적으로 관림인수 9억 2610만 명의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은 여러 가지로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두 작품 모두가 판타지작품이라는 점에서 판타지라는 쟝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환기시키고 있다.   판타지란?   우리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어딘가 낯 설은, 이른바 판타지란 영상, 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과 같은 쟝르문학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 말 E. 네즈비트는 마술적 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 가운데 과학리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 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 등을 가리킨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류행하였지만 괴기소설․암흑소설에 밀려 A.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 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례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 걸작은 잉글랜드 및 북유럽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우리가 잘 알고있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그 대표적이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쟝르로서 <<판타지>>를 쓰고 있다. 한편 심리학 용어로서 판타지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을 떠올려 욕망의 충족을 꾀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최근 심층심리학․정신분석학은 공상력의 작용이 무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발견, 판타지문학과 심리학을 련관시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중국은 판타지의 비조(鼻祖) ? 중국에서는 판타지를 기환(奇幻)소설, 혹은 현환(玄幻)소설이라 부른다.     일찍 육조(六朝) 시대에 지괴소설(志怪小說)이라는 쟝르가 십분 풍미되였다. 오늘의 판타지를 꼭 닮은, 귀신, 선술(仙術), 괴담, 이문(异聞)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후날 당대(唐代)의 전기(傳奇)를 거쳐 명청(明淸)으로 그 맥을 이어간다. 대표적인 작품을 들어보면 <<신이경(神异經)>>, <<렬이전(列异传)>>, <<사기,유협렬전(史记 .游侠列传)>>, <<수신기(搜神记>>, <<장한가전(长恨歌传)>>, <<남가전(南柯传>> 등을 들수 있다. 너나가 익숙한 <<서유기>>, <<봉신연의>>, <<료재지이>>등은 <<신마소설(神魔)>>이라는 명칭을 띠고 있지만 두말할것없이 오늘날의 기환, 현환작품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인것이다. 로신선생도 이러한 류의 작품을 산출한적이 있다. 바로 <<고사신편(故事新编>>에 수록된 <<미간척(眉间尺)>>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말 고전도 환상을 떠나서는 존립하기 어렵다. <<구운몽>>, <<춘향전>>, <<홍길동전>>, <<박씨부인전>>이 그 대표적인 례이다. <<구운몽>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량반사회의 리상을 반영한 본격적인 고전 이다. 현실에서 꿈, 꿈에서 현실에로 돌아오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환몽구조를 가진 작품들의 원형이 되고 있다. 판소리를 텍스트로 한 <<심청전>>은 장님인 아버지를 위해 못에 몸을 던진 심청이가 룡궁에서 환생하고 아버지가 눈을 뜨는 등 환상적 요소가 다분하다. <<박씨부인전>>에서는 못생겼다고 구박받던 박씨 부인이 어느 날 아름다운 녀인으로 변한 후, 초인간적 힘으로 17세기에 조선을 침입한 청나라 장수를 물리쳐 나라를 구한다. 최초의 국문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적서차별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고발하고 있는데 서자로 태여나 출세 길이 막힌 홍길동은 도술을 부려 탐관오리를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왜 판타지인가? 문학계에서뿐아니라 영화계에서 2001년부터 작년까지 6년 련속 세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는 판타지영화가 독식(獨食)했다. 판타지영화만 나오면 북미 흥행 3억 딸라는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는 초대형 판타지 시리즈도 바로 이 시기에 탄생했다. 그렇다면 대중들이 21세기 들어서 판타지의 매력에 갑자기 푹 빠져버린 근본적 리유는 뭘까? 독자가 판타지 소설에 중독되는 리유는 답답하고 궁색하고 진부한 현실의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대한 스케일 안에서 위대한 영웅을 만나고 랑만적인 로맨스를 대리 경험하면서 한번 쯤 상상해 봄직한 환상의 세계를 누려보기 위함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에 자신의 감정이 이입이 되면서 현실에서는 못이룰 꿈을 이루는 쾌거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현실의 삶이 어렵거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종종 공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롤링은 남편 없이 어린 딸을 키우며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던 음울하고 어두컴컴한 아파트에서 <<해리포터>>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환상의 세계가 있어 현실에서 초라하고 비참한 나 대신 행복하고 근사한 자기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여태껏 판타지물은 문학이나 영화 쪽에서도 가장 경계가 모호한 쟝르로 치부되여 왔다. 문학사에서 판타지 문학은 오래동안 문학의 주류로부터 제외되여 왔다. 부적절하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되여 눈에 띄지 않았으며 주변부에 위치해 왔다. 환상 문학이 문단에서 차지하는 주변적인 위치 때문에 작가들은 판타지 소설 쓰기를 꺼려했으며 비평가들 역시 그것이 비리성과 광기를 포용한다는 리유로 판타지 문학을 늘 폄하해 왔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발간 애초에 숱한 비평가들로부터 <<유치한 쓰레기 작품>>이라는 지금은 믿기지 않는 혹평을 받아왔다. 그 근본적 리유는 19세기 이후 팽배한 사실주의 숭배 풍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래동안 독자와 관객과 평론가들의 작품 평가의 척도는 리얼리즘 쪽에만 머물러 있었다. 판타지물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책임과 사고를 회피하도록 유도하며 그들을 무지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 비평계의 주장이다. 판타지물의 직선적 세계관이나 권선징악적 주제, 인종차별적 요소 역시 집중 비평 대상이였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였다. 판타지 문학은 상상 속의 환상적 즐거움을 위해 현실 세계를 버리지는 않았다. 전혀 단순하지 않으며 현실 도피적이지도 않는 것이다. 오늘의 판타지 문학은 환상 속으로의 려행을 통해 리얼리즘의 관습을 재점검하며, 현대 독자들에게 맞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우리를 환상 속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써 판타지 문학은 우리의 일상 리얼리티가 사실은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래해하도록 해준다. 오늘의 판타지 문학은 언제나 자아와 타자, 픽션과 리얼리티, 또는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따라서 판타지물의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전통적 정의에 따르면, 판타지물은 <<마법, 초자연 현상, 가상의 동물, 공상의 세계 등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세계와 병존하는 가상의 세계를 다룬 판타지물들은 현실적이며 대중 친화적이였다. 많은 독자, 관객과 평론가들은 21세기의 판타지물들이 현실의 도피도구가 아닌 현실을 해명하는 도구로 그 역할이 변질됐음을 주목했다. 오히려 이전까지 현실과 전혀 관계없는 별천지였던 판타지의 세계가 점점 현실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독자와 관객들은 비로소 마법과 상상의 동물 등 판타지물의 허무맹랑한 요소들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이런 경향은 평론가들이 목 놓아 외치던 <<리얼리즘>>이라는 요소를 판타지물이 자발적으로 흡수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리얼리티의 또 다른 측면인 환상 령역을 탐색하는 판타지 문학이 새로운 주요 소설 쟝르로 부상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따라서 급기야 판타지 열풍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들의 판타지 세계를 강타하는 판타붐에도 무감각한 우리문단에 얼굴 붉히며 나는 몇해전 늦깎이로나마 판타지 한 편을 만들어 보았다. <<불의 제전>>- 민족의 통일을 얼개로 영원한 주제인 로맨스와 한 예술가의 구도자적인 삶을 형상화 한 작품은 나의 소심한 출산이였지만 이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먼저 나의 홈페이지며 블로그에 등재, 다시 문학지에 투고했는데 톱소설로 실리고 그해 <<윤동주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첫 판타지를 만들면서 박래품에 대한 모방으로 그치지 않으려 애썼다. 북유럽 권의 판타지 베스트와 중국고전의 장점을 두루두루 따서 그리고 풍부한 유산인 우리의 민속풍토를 많이 차용해서 이 쟝르의 첫 습작에서 보이는 모자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특색의 판타지를 만들려 시도해 보았다.   문학의 원형이라 말하는 체험을 토대로 작가는 작품세계를 형성해 간다. 그러나 상상의 활동을 통해서 작가의 그 체험이 비로소 보편적인 확대와 효력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볼 때, 이러한 표현방식이야말로 과학적인 개념과 대응되는 이른바 문학의 궁극적인 단위가 아닐까. 우리 문단에서 가히 처음으로 되는 판타지물을 만들며 가지는 감흥은 깊었다. 판타지- 환상, 상상 등 력동적인 단어로 묶인 새로운 쟝르다. 판타지 문학은 그만의 순발력으로 앞으로 살아남을 뿐 아니라 순수 문학이 남겨놓은 진공 상태를 차지하며 번창해 나갈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예견하고 있다. 또한 고대 신화와 전설과 민담, 그리고 컴퓨터 게임 모두의 영향을 받은 판타지 문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픽션과 리얼리티를 효과적으로 뒤섞으며, 현대 사회와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반영해 나갈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탁월한 수준의 문학을 산출할 수 있는 한, 판타지 문학의 미래는 분명 밝고 고무적일 것이다.      아직은 미개척지인 우리의 판타지의 모습은 어떠할지 아렴풋이 기대해 본다.  
66    베르테르 효과 댓글:  조회:2741  추천:73  2007-06-29
  베르테르 효과김 혁   △ <<젊은 베르테르의 번뇌>>. 독일의 문호 괴테의 서간체 소설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엄격한 위계질서속에 신분제 사회와 융화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젊은 지식인의 전형을 형상화했다.   아름다운 베르테르의 이야기는 숱한 <<모방자살>>을 불러왔다. 베르테르식 열병을 야기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끼쳐 책은 1775년 판금당하기도 했다. <<베르테르 효과>>란 자살이 류행처럼 퍼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 연길경내에서 사흘새에 련속 두명이 기차길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주목을 모으고 있다.   7월 3일 저녁 10시 27분경, 연길역에서 도문방향으로 운행하는 화물렬차가 연길목재공사부근에 이르렀을때 30대의 한 녀자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이 사고로 렬차운행이 12분간 지연되였다.    이틀전인 7월 1일에도 한 남자가 기차가달려오는 레루에 뛰여들었다.   불과 보름전에도 연길시 모 목욕오락쎈터에서 한 녀인이 9층에서 뛰여내려 자결하려 한 소동이 빚어졌다. 사건제보를 접한 경찰과 소방지대특수근무중대에서 출동하여 한시간 반좌우의 구조사업을 벌려서야 마침내 자살활극을 제지, 이 녀성을 구조할수 있었다.   ▲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세상 살아갈 리유도 재미도 없고 힘들고 지쳐서, 하려고 하는 일들이 뜻대로 안돼서 등의 여러가지 리유로 목숨을 끓는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방지협회(IASP)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자살은 교통사고와 각종 재난, 질병에 이어 1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인에 속한다.   중국에서도 상황은 심각하다. 중국심리위기 연구 및 예방센터에 의하면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25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15-34세 년령층에서는 압도적인 사인이 되고 있다. 또 매년 200만명이 자살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폐암과 교통사고가 사망원인 제 1위, 자살로 인한 사망이 사망원인은 제 5위에 이른다.  자살적 태도의 발생 리론은 크게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리론으로 나뉜다. 심리학가들은 <<가장 두드러진 경제, 사회적 변동, 즉 고도의 도시산업화가 현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은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행위>>일 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사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엄청났겠지만 자살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더구나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죽음의 의미는 당사자보다도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므로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짐을 친지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주변에서 잇따른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자살소식은 우리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따라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체계를 마련에 더욱 중시를 돌려야할것이다. 예방적 차원에서 가족간의 뉴대강화, 사회에서의 소통체계를 활용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려야 한다. 우리 모두 따뜻한 사회적 련대를 구축해 힘들어하는 이들을 부축해 나가야 <<베르테르 효과>>를 두절할수 있는 것이다.
65    인간문화재 댓글:  조회:2750  추천:73  2007-06-29
   . 칼럼 .인간문화재 김 혁 △ 민담구술가 황구연전집이 10권중 3권이 일전 출간되었다.   <<땅 한뙈기를 물려주기보다 책 한권을 물려주는것이 소원이다.>>고 하던 황구연옹(翁)의 말씀을 명기하고 20여년간 황구연구비전승수집정리에 진력해온 원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김재권선생의 로고로 전집의 일부가 빛을 보았다.   자금난 등 원인으로 2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출간, 나머지 7권도 육속 나온다고 한다.   황구연옹은 <<중국 3대이야기대왕>>중의 한분으로 중국민간이야기분야의 정상급수준을 대표하는 우수한 민간문예가이다.    1909년 한국 경기도 양주군의 한 선비가정에서 출생, 1937년에 일제의 만행에 못이겨 홀몸으로 룡정에 이민와서 가정을 이루어 살다가 1987년 12월에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시골에서 농사로 일생을 보내면서 무려 1030컬레의 이야기를 구술하였다. 견식이 넓고 비교적 높은 문화적함양과 예술적자질을 갖춘 독특한 문인형의 민담구술가로 정평이 나있는 그는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이야기를 구술 했다.    그의 구술에 의해 정리된 저서로는 <<천생배필>>, <<파경노>>와 한문으로 된 <<황구연고사집>> 등이 있다.   연변민간문예가협회가 주최로 몇해전 황구연학술토론연구회도 열렸고 그의 구비전승을 유네스코민간문화재로 신청하는 사업도 진척중이다. 일전 연변주의 제1기 비물질문화유산명록선정에서도 그의 이름이 상모춤, 널뛰기, 그네, 회갑잔치, 전통혼례, 등 진귀한 비물질문화유산과 더불어 등재되였다.   △ 한편 연변TV방송국과 연변문화예술연구센터의 합작으로 된 다큐멘터리 《민간예인 신옥화》가 일전 심양시 소가툰구에서 촬영을 개시했다.  다큐멘터리는 민간예인으로 유명한 신옥화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신옥화는 1920년 한국 전라북도 전주군에서 태여나 17세에《서도판소리》를 전공했다. 1939년 6월 20일, 남편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이주, 다시 심양시로 옮겨와 정착했다. 1953년 소가툰에서 연변가무단과 인연을 맺으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연변예술학교 건립시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국가 일급 예술인들인 전화자, 김선옥 등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 이 땅에 그들이 살고 있다. 오랜 세월 재주꾼으로 살아오면서 재기(才氣)를 갈고 닦던 민족문화의 보석들이. 그들의 공적은 이야기 한컬레, 노래 한대목의 의미를 넘어 민족문화사에 길이 남을 재부로 각인된다.  세월이 덧없어 중요문화재 예능보유자들중 많은 분들이 애닯게 가고 그 보석 같은 인간문화재들이 맥이 끊기고저 한다. 그 소재와 소유자가 서로 다르고 분산되여 있기에 산재한 문화재들을 고히 보존하기란 쉽지않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집념을 뜨겁게 보듬어야함은 우리 후세들의 몫이다. 세상을 살아내며 다듬어진 그들의 숨결과 혼을 지켜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날 문화재, 인간문화재의 새로운 등재와 보존은 민족적 자긍심, 지역사회의 인지도, 경제적 효과 등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을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히 펼쳐나감으로써 그 영구적인 효과와 영향을 기대해본다. 이는 귀중한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아울러 옳바른 력사관을 고취하는 데도 움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져가는 <<일회용 속찬시대>>라 일컫는 요즘세월, 하기에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보존의 의무를 각별히 지켜나갈 때이다.
64    피서(避暑)의 방식 댓글:  조회:2689  추천:73  2007-06-29
 . 칼럼 .  피서(避暑)의 방식 김 혁 △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사람을 들볶는다. 불볕더위란 말이 명실상부하게 다가온다. 이 더위를 어떻게 지낼지 짜증부터 앞선다.올해는 력사상 가장 뜨거운 한해라고 한다.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 기후연구소는 2007년이 장기간 평균 1.20 도 더 높았던 1998년의 가장 더운 해 기록을 깰 확률은 60%라고 밝혔다. 2007년 최악의 더위를 예상하는 리유는 현재 태평양에서 진행중인 순환적으로 일어나는 엘니뇨 때문이다. 올해의 엘니뇨는 1998년보다는 강하지 않지만 인간 활동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기온 상승과 함께 지구 최고 기온을 깰 수 있다고 한다.  △ 요즘 세월에는 에어콘이다 선풍기다 랭장고다 해서 더위를 쉽게 보내지만 옛날의 우리 선조들은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열(熱)로서 더위를 다스리는 <<이열치열 (以熱治熱)>>의 방법이 있다. 이맘때 딱 좋은 음식으로 삼계탕과 개장국을 든다.당연히 <<이랭치열(以冷治熱)>>의 방법도 있다. 참외, 수박 같은 과일을 흐르는 물에 담가두었다가 먹고 싶을 때 꺼내 먹곤 하는데 그 시원 달콤한 맛은 무더위를 싹 가시게 한다. 남녀로소 할 것 없이 즐겨 입었던 것은 삼베옷, 모시옷이다. 더위가 계속 이어질 때는 생모시로 된 고의, 적삼 또는 치마를 해 입었다. 이런 옷들은 습기를 흡수하고 통풍이 잘 되였다. 통풍과 햇볕 가림을 하기위해 발을 치고 돗자리를 깐다. 발이 처진 방안에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더위도 한 발 물러서게 마련이다. 낮잠이라도 청할 양이면 없어서는 안될 것이 목침이다. 다음 탁족(濯足)이라는 방식이 있다. 말 그대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흐르는 물에 더위를 씻어내는 일이다. 록음이 만드는 짙은 그늘과 귓가를 스치는 요란한 물소리가 한여름 더위를 단번에 사라지게 한다..더위 피해 물 가에서 다투어 발 담그니(避暑水邊爭濯足)…<<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 중의 한 구절이다. 탁족은 몸의 열을 내모는 기 순환의 원리를 리용한 것이다. 즉 발은 모든 신경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을 식힘으로써 온몸에 찬 기운을 불어넣는 리치이다.  ▲ 옛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유용한 피서법으로는 책읽기가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사촌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할 뿐,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겨나갈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사실 책읽기 정말 힘든 계절이다. 눅눅한 습기와 끈적끈적한 무더위, 어지간히 책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손에 책을 잡고 있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더위를 책을 통해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 여름과 책의 관계는 역설 그 자체이다.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書)>>, 그리고 <<피서(披書)>>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보니 <<피서(披書)>>와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다. 독서야말로 습하고 더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쉽고 매우 저렴한 길이 아닐가 한다. 올 여름엔 독서삼매경에 빠져 망서(忘暑)하리라!   
63    투우의 진미 댓글:  조회:2784  추천:73  2007-06-29
  . 칼럼 .   투우의 진미     김 혁    △ <<라틴 문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수식어가 정열과 랑만이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춤 그리고 투우이다. 투우는 에스빠냐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남미 각국의 춤과 투우를 모르고는 라틴 문화를 리해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기원전부터 사람들은 소를 도구로 하는 놀이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그 근원은 목축과 농업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황소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서 비롯되였다. 중세부터 17세기까지 널리 행해졌지만 왕이나 귀족들만 즐기는 귀족문화였다. 18세기 초 부르봉 왕조 시대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일반 군중들 앞에서 구경거리로 행해졌다고 한다.   헤밍웨이나 피카소 같은 세기의 작가, 예술가들은 투우의 열성적인 팬이였다고 한다. 피카소는 습작기때부터 투우도를 그려왔고 헤밍웨이의 명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도 에스빠냐 북부도시 팜플로나에서 매년 열리는 투우축제가 세세히 그려진다.   △ 소!하면 우리에게 가장 도탑게 다가오는 것은 연변황소이다. 자료기재에 따르면 연변황소의 형성 력사는 이미 100여년, 알심들여 양육한 우량종 자원으로서 중국 5대 지방우량소중의 하나로 국내외에 명성이 높다.   연변황소는 적응성이 강하고 내한성이 좋으며 거친 사료도 잘 먹는 특점이 있어 기나긴 세월동안 줄곧 농촌의 주요 농경 동력과 비료 원천으로 되였다. 이외 연변황소는 골격이 발달되고 근육부착률이 높으며 살찌운 다음의 육질 또한 부드러워 동류중에서 최고로 불리우고있다.       국가에서는 연변황소 유전자원에 대한 보호 및 개발에 아주 중시를 돌리고있는바 농업부는 연변황소를 국가품종자원 보호목록에 넣어 중점보호를 실시하고있다.  ▲ 연변에서 두번째로 민속투우대회가 펼쳐졌다. 1만여명의 관중들이 경기가 펼쳐지는 도문시에 운집하여 투우를 구경했고 연변의 보도매체는 물론 중앙TV도 두만강변을 뜨겁게 달군 이 투우축제를 집중조명했다 연변주 각지에서 알선한 29마리의 연변황소가 출전, 박진감넘치는 경기를 펼쳤다. 최종 왕청현 대천거리 삼합촌 고월산씨의 13번 황소가 《투우왕》보좌에 올랐다.   에스빠냐에서 투우는 문화인 동시에 하나의 산업으로 간주되고 있다. 투우 산업은 투우사에서 소 사육사에 이르기까지 약 20만명을 고용하고 있고 년간 15억유로(약 20억딸라)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연변에서 갓 선을 보인 투우도 문화, 경제, 스포츠 제분야에서 많은 값어치창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도 어덴가 생경해 보이는 투우가 새로운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새로운 민속축제로 그리고 연변목축업생산의 <<일인자>>인 연변황소를 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해 본다.  
62    로총각 증후군 댓글:  조회:2718  추천:73  2007-06-29
    . 칼럼 .   로총각 증후군  김 혁    1, 총각의 어원을 살펴보면 총(總)은 <<모두>>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꿰맬 총>>, <<상투 짤 총>> 등으로 쓰였다. <<각(角)>>은 물론 <<뿔 각>>이고.옛날 머리양식을 보면 년소자들은 머리를 량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머리를 가리켜 <<총각>>이라고 했다. 이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개 장가가기 전의 남자였다. 총각은 여기에 연유해 생긴 말이다, 우리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총각김치는 손가락 굵기만한 어린 무우를 무우청 째로 양념에 버무려 담은 김치인데, 그것이 마치 총각의 머리와 같은 모습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2 로총각증후군(症候群)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지 오래다.변혁기를 맞아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농촌 처녀들은 모두 도회지로 해외로 떠나 갔다. 도시의 삶에 익숙해 지고 그 편의성에 심취된 처녀들이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았고 거기에 국제결혼까지 겹치면서 농촌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주 모 시 농촌의 31세부터 40세사이 남성들중 미혼남성이 864명이나 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족이 769명으로 거의 90%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것은 41세부터 45세까지 장가가지 못한 261명 고령남성중 조선족이 93.5%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기타 현, 시의 정황도 매일반이였다. 주인구및계획생육위원회 인구발전전략처의 관련책임자는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혼인가정구조, 소비구조, 로력구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주고 범죄, 매매혼인 등 행위가 늘어날수 있어 사회에 막대한 우환과 불안정요소를 가져다줄수 있다>>고 분석했다. 로총각들의 혼인문제는 이제 개인의 사생활 령역의 자유나 소관으로 맡겨 두고 구경만 하고 있을 지경이 아닌 것이다. 3 요즘들어 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연변주에서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로총각인구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조사하고 상응한 당안을 만들어 인터넷, 신문, TV,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사회에 그 정보를 공개한다. 도문시 인구계획생육국에서는 로총각 구혼 홈페이지를 만들어 아주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여러 계획생육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남녀청년련합회를 뭇고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나서고 고있다. 화룡시 두도진에서만 해도 진과 촌의 100여명 계획생육간부들이 100여명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되였는데 이미 8쌍이 인연을 맺고 결혼등록을 하였다.로총각들에게 치부정보를 제공해주고 소액담보대부금을 내주어 창업, 치부의 길로 이끌었다. 올해 연변주 인구계획생육위원회에서 내준  소액담보대부금은  120여호, 110만원에 달한다.  그외에도 로동부문과 손잡고 로총각들에게 취업강습을 시키고 로무송출 기회도 마련해주었으며 감숙, 사천, 운남, 흑룡강 등지와 련계하여 그들에게 배우자를 알선해주도록 힘쓰고있다. 엄연한 사회문제의 복판에 서있는 로총각들이 하나둘 가족단위를 이루어 사회와 영농에 매진할 수 있는 풍토가 이룩되기를 바래본다.    
61    련재잇기 댓글:  조회:3196  추천:73  2007-06-29
.  잡 문 .   련재잇기  김 혁     하나,   련재소설은 19세기초 프랑스에서 생겨난 소설의 한 형태다. 1829년 <<르뷔 드 빠리>>를 창간한 베롱은 소설을 그의 잡지에 싣는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새롭고 기발한 착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하여 문학적으로도 격조높은 작품들이 정기간행물에도 안주하기 시작했다. 련재는 신문이라는 매체가 보듬어주었기에 신속한 발전을 기할수 있었다. 애초의 신문들에는 이미 문예란이라는 메뉴가 존재했으나 소설이 아닌 문화 전반에 관한 잡다한 글들을 실었다. 그러다 소설을 싣기 시작, 문예란을 통해 발표되는 소설들은 분절된 형식으로 되여 있었다. 당시 력사 소설가인 영국의 월터 스콧트의<<아이반 호>>와 쿠퍼의 <<최후의 모히칸족 >>이 련재되여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여기서 신문사 사장들은 대중들의 요구와 취향을 보고 재미있는 소설과 신문을 접목하면 더 많은 정기구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을 갖게 되였고 신문들마다 다투어 련재물을 게재, 마침내 일간지의 대중시대가 열린다.대뒤마의 <<삼총사>>와 <<몽테그리스도 백작>>등이 모두 이 무렵의 대표적인 련재소설이였다.    한글로는 일본인들의 신문제작 방법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되였는데, 1903년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련재된 <<대동애전 大東崖傳>>이 최초의 신문소설이라 한다. 지은이가 밝혀져 있는 최초의 작품은 1906년 <<만세보>>에 련재된 리인직의 <<혈의 루>>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부터 소설은 대부분 신문에 련재되었다. 당시의 련재물들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개화운동의 추진을 도모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련재들이 한결같이 미신타파, 새 학문에의 동경, 자유결혼의 례찬, 남녀평등 사상의 고취 등을 내세우면서 대중계몽의 구실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리광수의<<무정(無情)>>도. 홍명희의 <<림꺽정>>도 신문에 련재소설형태로 나타났다. 대중계몽의 역할을 했다는 점, 문학사적으로는 신소설이 현대소설로 그 면모를 바꾸었다는 점 등등으로 보아 련재소설은 그 신종으로서의 구실을 착실하게 한 것 같다.이때로부터 소설이 신문지면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둘,   제목에서 밝힌바와 같이 련재읽기가 아니라 련재잇기다. 문학도시절, 내게 재밌게 읽혔던 기억의 련재물로는 항간에서 수사본(手寫本)으로 읽혀지다가 <<연변일보>>에서 번역, 련재되였던<<매화사건>>, <<연변문예>>에 련재되고 방송으로도 나가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용식님의 력사소설 <<규중비사>>, <<장백산>>지에서 련재한 김래성의 <<청춘극장>>등이였다. 그때 그 작품들을 고작 한회에 몇천자분량, 또는 한달씩 기다려 읽는 것이 내게는 (당시 독자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이였다. (이 작품들을 잡지에서 조심조심 찢어내여 두터운 마분지로 가위를 대여 서투르게나마 제본해 두었는데 연거번거 이사하던 중에 아깝게도 분실하고말았다.) 내가 언감 설익은 자기 작품의 련재를 시도했던 것은 열아홉나던 때였다. 당시 룡정에서 문학애호가들이 <<희망봉>>이라는 문학동호회를 설립, 동명의 등사판 문학지를 간행했다. 나는 그 문학애호가협회(당시에는 문학동호회들을 모두 문학애호가협회라 호칭했다. 좀 촌시럽지만…)의 비서장직을 맡았었다. 그 조야하기 그지없으나 문학도들의 열기가 페이지마다에 뚝뚝 듣게 슴배인 잡지에 나는 력사소설 <<피로 물든 야명주>>를 련재하기 시작했다. 자희태후의 장중보옥이였던 야명주가 도난당했는데 무림호걸들이 그 야명주를 찾고저 군벌과 토호들의 끄나불들과 혈투를 벌린다는 내용의 무협작품, 4만자가량으로 완수해서 련재하기 시작했는데…  항용(恒用 )그러하듯이 문학도들의 순 치기로 무어진 문학동호회는 얼마 못가 해산되였다. 그러자 자연히 우리네 동호지 <<희망봉 >>도 겨우 3기를 꾸리고 정간(?)되고 말았고 나의 련재 <<피로물든 야명주>>도 그로서 끊기고 말았다. 지금도 그 투박한 동호지를 나는 그 무슨 옛문사들의 진품인양 고이 소장해 두고 있다. 나의 두번째 련재물은 번역작품이였다. 1996년 스무살나이에 필재를 인정받고<<길림신문>>기자로 발탁되였는데 나를 천거(?)해 주신 이는 당시 주필을 맡고 있던 윤효식 은사님이셨다. 미륵보살처럼 귀가 유난히 크신 윤주필님은 나를 당시 유명 짜했던 작가 호연처럼 만들겠다며 커다란 관심을 몰부으셨다. 따라서 나에 대한 요구도 지엄했다.  기라성 같은 문필고수들이 운집한 편집부 사무실에서 <<촌닭 관청에 온듯>> 떨떠름해 있는 나에게 처음으로 맡겨진 임무는 련재실화 <<당신대지진>>의 번역이였다. 당산에서의 대지진 발발(勃發) 10주년을 기념하면서 나온 장편 실화 <<당신대지진>>은 당시 문학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킨 작품이였다. 그렇게 부피도 두텁고 묵직한 상도 수상한 작품을 번역하라니 나 같은 초라니(민속 탈놀이에 나오는 가볍고 방정맞은 인물) 가 큰 먹이를 료리해 내는 수가 있나! 속담 그대로 <<초라니 대상 물리듯>> 질질 끌기만 하는데 한쪽에서 선배들이 독촉하고 편집부 주임이 독촉하고 주필이 독촉하고… 밤을 패면서 숙소에서 번역해도 제때에 교부못해 땀에 눈물을 반죽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진짜 련재다운 련재를 시작한 것은 1994년 <<중학생신문>>에 련재한 소년소녀력사소설 <<혼불>>이였다. 세조대왕이 주살(誅殺)한 충신 <<사륙신(死六臣) >>의 사화를 모태로 한 작품이였다. 석달가량 신문에 련재, 후에 방송소설로도 각색되여 련재방송되였다. 그 매기마다 련재되여나오는 신문들을 받아보면서 성우의 박력있는 음조로 다듬어져 나오는 방송을 들으면서 (<<규중비사>>를 랑독했던 그 유명한 성우님이 나의 작은 련재물을 읽어주셨다) 나는 오! 이거구나 하고 드디여 련재작가의 느낌 같은 것을 만끽할수 있었다. 그런데 그번 련재는 기성작품이 아니라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했기에 또 한번 시간과 글재주의 미달에 딸려 무척 신고했었다.   95년 연변축구팀이 오랜만에 갑A시즌에 출전하면서 축구팬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당시 <<연변일보>>문체부 기자로 뛰면서 문예취재 외에 체육보도도 겸해 했던 나는 그 분위기에 맞춰 추리소설 <<스포츠 살인>>을 창작, <<스포츠>>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축구스타의 의문의 죽음을 추종해 나선 열혈팬의 추리담. 이번 련재 역시 순탄치 못했다. 금방 연변일보로 전근하여 일선기자로 진동한동 뛰면서 낮에는 취재하고 밤에는 작품창작할라니 도저히 제 시간에 련재를 바쳐내는수가 없었다. 13기까지 나가고 (축구스타는 볼썽사납게 의문사를 당하고 열혈팬은 눈물 휘뿌리며 꼭 흉범을 잡아내겠다 맹세하는 요긴한 대목에서) 련재가 끊겼다. 당시 편집부인원들은 물론 축구팬들은 련재의 중단에 몹시 애석해 했다. 그다음 시작한 련재는 소설이 아니라 실화쪽이였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만연되는 출국붐과 더불어 일확천금을 꿈꾸는 조선족들을 상대로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벌린 전대미문의 사기사건을 전방위로 취재한 르포. 먼저 <<청년생활>>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다시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간행되였다. 400여명에 달하는 사기피해자들을 찾아 만나고 수천건의 신고문을 읽으며 일면 취재, 일면 련재하노라니 힘에 부쳐 죽을 지경이였다.  (그때는 또한 혼인이 파렬된 고통으로 모대김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한기는 잇지못하고 자리를 비운 <<사고>>까지 있었다.   20여 만자에 달하는 분량의 장편르포는 98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뒤 요즘 같은 기황(飢荒)의 출판풍토에서도 5천부라는 엄청난 발행량을 기록했고 나는 그 작품으로 <<청년생활>>화연문학상, <<흑룡강신문사>> 한얼패 대상,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을 거듭 수상했다. 그 다음의 련재는 룡두사미격으로 중도하차의 실패에 실패의 거듭이다.  <<도라지>>잡지에 호러소설계렬을 일년동안 6편을 발표하기로 기획, <<산장>>, <<육가락>> 두편을 쓰고 잇지 못하고 말았다. 원체 우리문단에서 보기드문 호러물(공포, 현념소설의 일종)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시도, 단 오락물에 그치지 않고 그에 흔들리는 우리사회의 아픔들을 접목하여 재미도 보고 무거운 메시지도 던지려는 <<일석다조>>의 효과를 꾀했는데… 솔직히 끊은 리유는 작품을 본 독자들의 반영이 미지근했던것이다. 스스로는 홀리우드에서 호러영화로 리메이크해도 좋을 작품이라 여겼는데… (리메이크: 예전에 있던 영화, 음악, 드라마 따위를 새롭게 다시 만듦을 이르는 말.) 역시 <<도라지>>에 독서만필을 계렬로 련재하려다가 무라카미에 대해 한 회 쓰고 그치고 말았다. (지금도 버릇처럼 책만 읽으면 독후감을 남기군 한다. 이제 일정한 분량이 차면 다시 기고하여 편집들의 간절한 청탁을 저버린 참괴(慙愧) 를 미봉하려 하는데…)   나의 두번째 장편 역시 련재물의 형태로 나왔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내놓은지 두달도 못되여 <<연변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한 작품이다. 운명의 진공(眞空)속에 살아가는 녀성 주역을 내세워 그네들이 치렬하게 통과해온 삶을 직성 풀리게 쓰고싶다는 구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안나 까레니나 같은, 제인 에어 같은, 빠리노뜨르담 아래의 에스메랄다 같은, 더버빌가(家)의 테스 같은 그렇게 분명 기억될 녀인들을 쓰고싶었다. 내 머리 속과 창작스케줄 속에 각인 되여 있는 그러한 녀성 주역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첫 장편의 고역에 찌든 몸을 추슬리며 잇달아 두번째 장편에 뛰여든 것이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큰 변고가 일었다. 두수없는 사건에 말려들어 공직을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된것이다. 한쪽으로는 <<대적(大賊)을 주멸(誅滅)하려는 듯한>> 기세로 조사조가 들이닥치는 형국에 한쪽으로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賦課)해야 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다. (나땜에 이름있는 문학지의 현요한 위치를 비울순 없지, 첫 장편을 초월하려는 향상심으로 쓰는 두번째 장편인데 어떻게든 마무리해 나가야지!)하는 생각에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다. 조사를 받고는 돌아와 저녁도 거른 채 2만여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 난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 앞에 앉을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편의 주요편집이였던 <<연변문학>> 조성희님의 로고가 컸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와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했다. 아울러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않았다. (후문이지만 조성희님은 나 때문에 편집에 영향을 받고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그냥 보고있다, 문학의 줄을 놓지말고 시련을 이겨내라고 혹은 메일로 혹은 인편으로 혹은 찾아와서 격려를 주었다. 그들의 따뜻한 위무(慰撫)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困苦)했던 기간을 16회 40만자에 달하는 련재를 쓰는것으로 메워나갔다. 어쩌면 련재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 모른다.   셋,     지난해 한국 울릉도에서 열린 재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석했다가 공무를 마친후 사재를 털어 문학기행을 마련한적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선생님의 창작자취를 따라 나섰다.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학관>>이며,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의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며,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이며를 찾아 보았다. <<토지>>는 박경리 개인에게나 한국문학에 있어서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한국 현대 문학 100년 력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로 손꼽힌다.1969년 이후부터 박경리는 대하소설 <<토지>>의 창작에 몰두, 《현대 문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지면을 옮겨가며 련재하여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25년 만에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선생님의 온갖 경험과 사상이 반영된《토지》에는 력사적 인물이 100명, 소설 속의 인물이 700여명, 국내외의 력사적 사건이 130여차, 속담 438개, 풍속 및 제도 자료가 179개가 등장하여 3만 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피륙우에 수놓은 대작으로 대하소설의 방대함을 가진다. 원고지 분량은 3만1200매.  <<토지>>가 집필기간, 원고 매수에서 세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길에 올라 생소한 지역을 더듬으면서 나는 본질적인 질문 들이 사방팔방에서 나를 향해 압박해오는 걸 느꼈다. 문학은 무엇이고, 작가는 어떤 제단에 바쳐야 되는 것일까. 내가 써온 소설은 과연 어떤 위로를 나의 독자들에게 주었는가? 오래전부터 지긋이 나를 결박해온 질문들이였다.무려 25년 동안 작품에 진력하셔야 했고 소설 속의 세계는 소우주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긴장을 어디서 끌어오셨는지 궁금하다는 모두들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내가 글을 쓰는 것은 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동과 글쓰기는 일종의 정화 작용입니다. 로동을 하거나 글을 쓰면 우리의 슬픔이나 이런 것이 왜 있는가에 대해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잡다한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의 지속성을 위해서 <토지>를 썼다는 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옛날부터 <<글 쓴다>>라는 말을 안하고 그냥 <<일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글짓기는 자신을 <<고독에 처단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선생님은 고독을 껴안고 속세를 멀리한채 정갈하게 작품에만 매달렸다.선생님은 평생을 바쳐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집중력과 처절한 로동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혹독한 집필작업을 통해서 엄청난 량의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는 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건축물을 통해 우리에게 문학의 영원함과 위대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박경리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명작가들을 임의로 뽑아보니 이런 수치가 나왔다. 레브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 6년의 시간을 거쳐 창작하다. 작품에 상회하는 등장인물만 500여명발자크의 24권으로 된 전집 <<인간희극>>. 장편 및 단편 소설은 90여편을 수록하다.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집필하기위해 자료수집에만 20년을 바치다.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을 집필하는데 14년. 1928년 제1부가 발표된 후 1940년에 제4부가 완결되다. 조정래, 83년 원고지 1만6천5백장 분량인 <<태백산맥>>을 현대문학에 련재하기 시작해 89년 완결하다. 하루 8시간씩 원고지 30장 분량의 소설을 쓰는 것이 평생 몸에 배어여있는 그는 90년 다시 대하소설 <<아리랑>>연재를 시작해 95년 총 2만장의 집필을 완료, 이어 98년부터 다시 10권짜리 <<한강>>의 집필에 들어가 2002년에 끝내다. 로신, 평생 지은 작품 1000만자. 그중 저술이 600만자, 편집교열과 서신이 4000만자 호적, 전집 44권, 자수 20000만자.대만의 현역작가 리오, 창작품 1500만자… 이들의 행보가 보여 주다싶이 <<정신의 끌로 피를 묻혀가며 새기는 처절한 기호>> 가 없이는 진정한 작가, 진정한 대가의 길로 갈수 없는 것이다.   사실 이 몇 년간 나는 위험수위에 다다를 만큼 마음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말자! 피를 말리는 련재같은거 더는 하지 말자. 하고 스스로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몰아넣었고 자페의 우물속에 박혀 있었다. 어려서부터 불우한 운명에 내쳐져 현실과의 불화는 지속되였다. 내게서 그 불화를 해소할수 있는 방편은 오직 문학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내부에 서식하는 역마직성의 시키는 바에 따라 나는 부지런히 소설에 매달렸고 작품을 통해 낯선 인물들을 만나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일들을 대신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다만 림시라도 웬만큼은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행위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엄청난 시행착오의 과정일 뿐이였다.. 세상은 얼마나 복잡하고, 사람은 얼마나 기기묘묘한지를 뒷전에 둔 채 나는 일방적인 글에만 묻혀 세상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며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본질과 그 현실을 극복하는 복잡한 구조를 나는 너무도 단순하게 정리해 버렸고 따라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신은 사회와 괴리된 <<쓰일모없는 괴물 같은 인간>>으로 전락되여 버린것이다. (내가 바라본 세상의 깊이는 얼마나 형식적이고, 미시안적이였던가!)10대에 글 쓰기를 시작하여 40대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운명은 결코 나에 대한 조롱을 놓지않았다. 나는 스스로 껴안은 위안이 결국 나를 망치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는 것을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받으며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은 그래도 문학에 대한 나의 화두를 그동안 놓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히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성숙한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숙고하면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학이 그런 아픔과 한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    <<이 끔찍한 괴로움이여, 다시 또 한번!>>하고 니체가 웨쳤듯이 결국 나는 괴로운 글쓰기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길로 또 한번 련재를 택했다. <<장백산>>지에 <<령혼의 비늘>>(처음에는 <<패러독스의 향기>>라고 달았다가 너무 현학적이 되여 보여 제목을 바꾸었다.) 이라는 표제하에 명상시리즈를 1년반째 련작해 오고 있다. 그동안의 사색을 명상의 형식으로 담은 련재물이다.  다시 문학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솔직히 역시 두려움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고통. 한 자, 한 줄, 한 장에 진을 빼는 그 희생을 나 역시 외면하고 싶다. (문학도 일차적으론 자기 욕구에서 나오고 자신을 위한 작업이지않는가! )하지만 그것들은 극복해 낼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인생과 문학의 가치를 향한 순례의 로정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야한다! 하는 강박관념에 불안해하면서도 나는 늘 창작의욕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고단한 인내를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작가가 자기감정에 얽매이는 나약한 태도에서 벗어나 보다 견고한 자세로, 근원적이면서 소명적인 기상으로 제 역할을 다해야 하는줄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직한 문체로 전력투구(全力投球)할수밖에 없다. 작품은 삶이 깊어지면 더 진국이 되여 나올 것이고, 이제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 작품들을, (련재물들을) 딛고 나는 고개너머의 빛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삶이 깊어지고 마음이 충만해 진다면 문학은 더욱더 그윽한 향기를 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독감을 앓는 열병 같은 아픔으로 하나의 련재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또 다른 한 련재의 미혹에 뛰여드는 나의 리유다.     사족(蛇足): 몇해간 <<중국조선족테마소설 계렬>>이라는 제명으로 조선족사회의 현황을 다룬 소설작품을 각 문학지에 련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10여편에 이르렀다. 이 련재물이 언제 끝날는지 기약할 수는 없다. 나의 필봉이 멈추지 않는한 우리 민족의 비전을 위한 한 문필가의 고뇌적인 동참작업은 그냥 될것이니깐!  
60    락방거자 댓글:  조회:2781  추천:73  2007-06-29
. 칼럼 .락방거자  김 혁    △ 이달 들어 가장 힘들게 \"홍역\"을 치르는이들이 아마 고등입학시험결과를 조갈들게 기다려온 입시생들이 아닐까 생각한다,그것도 수험생 한사람만이 아니고 온 가족들이 눈과 귀가 동시에 한군데로 쏠리면서 그야말로 바늘 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는게 상례이다.이제 드디여 그 홍역도 끝나고 곧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될턴데 바라던 좋은 대학에 합격한 학생은 날듯이 기쁘겠지만 기대에 어긋나거나 락방한 학생은 살맛 마져 잃어져 심한 허탈감에 허덕이게 될것이다. 그렇다면 합격은 행복의 시작이고 불합격은 불행의 시작인가? △ 옛날 과거에 응하는 자를 일컫어 거자(擧子)라 하였고 락방한 자는 말그대로 락방거자(落榜擧子)라 불렀다. 고금중외에 이름 쟁쟁한 인물들중에도 락방거자는 적지 않다. 영국수상 처칠은 12년 동안 4번이나 락제한 과거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교시절 수학 이외에는 모두 락제점이였고 대학입시에도 락방했다. 독일의 서정시인 하이네도  시험만 치르면 락방을 했다고 한다. \"료재지이\"의 작가 포송령은 여섯번이나 락방을 했고 시성으로 불리우는 두보도 역시 락방거자출신이다. 비록 시험에서 락방의 고배를 마셨지만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한 사람은 우에 렬거한 몇 사람 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 나는 정말 바보이며 아무 것도 할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가 하는 심한 자괴감에 함몰되여 자학하는 락방생들을 볼수 있다. 늘 회자(膾炙)되는 말이지만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인간의성공과 행복이 결코 성적순이 아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다만 주어진 시간 안에서의 승부일 뿐이다. 단 한번의 입시승부를 진정한 삶의 승패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력발산 항우( 項羽 )도 락상할 때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기운이 센 천하의 항우라도 보잘것 없는 돌부리에 걸려서 쓰러질 경우가 있다는 말이니, 아무리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도 실패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올랐다고 기고만장 하거나 떨어졌다고 락심천만 할 리유가 없다,이럴때일수록 짓누르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곰곰히 따져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진로를 선택함이 중요하다. 락방과 불합격이 미덕은 아니지만 패덕 또한 아니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합격을 하고도 목표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락방을 기폭제 역할로 삼아 끝끝내 결실을 보는 사람도 있으니 안방에 들어박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말고 눈을 들어 보다 높이 그리고 보다 넓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꿈이 살아있고 부단한 노력이 있는한 인생에는 결단코 두번다시 실패란 있을수 없나니...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7년 08월  
59    [자치주55돐특집] 소설 조선족이민사 (1) 댓글:  조회:2716  추천:73  2007-06-29
    . 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조모의 傳說 (1)  김 혁                   ... 그때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나의 할머니는 이야기하셨다. 백세를 바라보는 세기의 로인임에도 우리는 그이를 <<쌍가매(가마)>> 할머니라 불러 버릇 했다. 할머니의 이마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 가마가 자리를 틀고 있었다했다. 년세가 든후에는 머리가 많이 빠져 이제 더는 가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찾아볼수없는 쌍가마의 정체와 마찬가지로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는 전설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민화나 전설으로 지나 칠 한 대목 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확신의 어조로 말 하군 했다. 어거지에 가까운 어조였다. 유치원 다니는 증손녀와도 아니고 누구를 보나 그렇게 말 하군 했다. 우리는 그저 로후의 로인의 망녕든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지나치군 했다. 할머니는 이제는 틀이 끼기조차 힘들어져 체념하고 푹 패인 합죽이로 부대처럼 훌쭉한 볼을 풀럭이면서도 어눌거리는 말씨로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군 하셨다. 모시빛저고리에 검정 몸베를 받쳐입고 어깨가 시려나는지 무명실수건을 마냥 어깨에 걸치고 한쪽 무릎은 세운채 오두마니 앉아서 할머니는 형형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가 즐겨 말하는 그 우물은 현성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고색 창연했던 이 현성에서 하나의 풍경구가 되여있다. 현성에 들리는 사람 치고 그 우물을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주변에는 철책(鐵柵)을 두르었고 우물 아구리는 철판을 대여 커다란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었다. 우물아구리에 놓인 용드레틀도 평소에는 보이지않았고 명절이나 유람객들이 운집하는 관광 호황기에만 그 무슨 무대세트처럼 얹었다가는 다시 떼여 내군 했다. 여하튼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으며 우리고장의 이름도 그 우물 그 룡을 따서 달았다는데 대해선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전설은 그 우물로부터 시작 되군 했다. 사람끼리 잡아먹었다는 기사년 대기(大飢)의 고개를 넘어 백년전 쌍가매할머니의 아버지는 이곳에 이르렀다.      * 이주민들이 건넌 눈물 젖은 두만강     봇짐을 풀던 첫날 칠척의 장한은 대동해 왔던 가족들 앞에서 땅을 치며 목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풍문에 이곳은 물고기가 논 코에 욱실거리고 꿩이 가마에 절로 날아들고 뜰에서 몽둥이로 노루를 때려잡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했다. 허나 그들을 맞아준것은 천만년 묵은 진펄에 갈대 숲이 우거지고 야수가 출몰하는 인적기라고는 없는 고장 이였다. 천재(天災)를 입은 고향의 풍토가 거칠다고는 하지만 이곳 만주 땅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삼을 굽는 구덩이를 파놓고 길쌈을 잘했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네들을 삼굽집이라 불렀다. 그들의 고향에는 3년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었다. 떡갈나무에 개피를 뿌리며 강우제를 지냈지만 무심한 하늘은 비한방울 내리기에 린색했다. 그리고 집에는 라병환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굶는 서러움에 <<문둥이집>>이라 사람들로부터 오는 소박에 등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향할 생각을 뼈물러 머금었던 것이다. 떠나면서도 삼을 구워야한다며 쌍가매의 어머니가 삼씨 반 사발을 보짐에 품고 왔다. 그들 일가처럼 수효를 셀수 없는 사람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망건에 헌 삿갓, 퇴색된 휘양을 쓰고 무명두루마기를 걸치고 미투리를 신은 사람들... 너나가 다를 바없는 따라지 목숨들 이였다.     * 장사진을 이룬 이주민 행렬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왔고 갑산군에서 왔고 정성군에서 왔다. 김액 김씨, 전주 이씨, 미량 박씨들이 왔다. 삼굽는 사람도 왔고 총을 든 포수도 왔고 곡하는 사당패출신도 왔고 안경 건 훈장도 왔다. 대짝같은 보퉁이를 지고 남부녀대하고 밤도와 강을 건너 왔다. 둥지 털린 멧새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서 날아와 이러구러 동네를 이루었다. 향수에 볼을 적시는 눈물을 뻑 문지르고는 이튿날부터 황무지개간에 나섰다. 버들과 갈을 베고 불을 달았다. 그때 실향민들이 놓은 불은 옹근 하루밤 하루낮을 타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개간의 첫 모지락괭이를 박았다. 사력을 다한 그네들의 힘으로 비탈에 밭이 일구어지고 갈대숲 무성하던 사득판에 논이 풀리였다.     * 춘경에 나선 간도 이주민의 모습 그런데 고생중의 고생은 마실 물이 없는것이였다. 리씨성을 가진 훈장 하나가 풍수를 볼줄 아는지라 물 자리를 찾아 나섰다. 풍수를 본즉 이곳은 원체 왕후지지 (王侯之地)도 못비길 명당자리라고 했다. 땅 밑에 룡이 틀고 누워있다는 것이다. 우물자리를 잡고 동네에서는 간소하나만 주과포(酒果脯)를 차려 천지신명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고나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모래와 자갈을 들어 내고 돌을 까 내니 샘줄기가 터졌다. 쌍가매의 아버지가 우물맛을 보니 쌉스름하고 이발이 쩡쩡 시려나고 배속을 시원히 찌르는 것이 틀림없는 룡수였다. 물을 마셔본 사람마다가 물맛이 좋다고 절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 아구리를 정성스레 쌓고 물을 긷기 좋도록 용드레를 앉혔다. 우물가에 수양버들도 한그루 옮겨다 심었다. 좁장한 마을 안자락에 숨은 듯 주저앉아 있는우물가는 한컷의 흑백수묵화를 방불케했다. 곱게 쌓은 돌가퀴우에 룡드레 틀 하나 얹혀져 있고 우물벽체를 이룬 돌틈사이엔 물이끼가 꽃처럼 피여나고... 우물자리에서 룡수가 터지던날 쌍가매 어머니의 양수도 터져올랐다. 쌍가매는 그날 타향에서 탯줄을 끊었다. 어머니는 탯줄을 노전밑에 가만히 감추었다.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면 그곳에 묻어 주려는 것이였다. 그리고 우물물에 쌍가매를 씻겨 내렸다. 찬물의 세례에 쌍가매는 영악스레 울어댔다. <<썅놈의 종간나(계집애)가 악바리질하고 울어대네.>> 덧불어난 입을 두고 아버지는 귀찮게 뱉었고 문둥이오빠는 가까이에는 오지 못하고 문 짬으로 갓난 애를 들여다보며 못나게 웃었다. 어른들의 타향살이의 애수가 쌍가매에게 옮았던지 아가는 울보가 되여 종일 울음이 그칠새 없었다. 그때마다 칭얼이는 애를 안고 어머니는 어릴적 배웠다는 노래를 흥얼이군 했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대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썩후에야 쌍가매는 한 곡조 밖에 흥얼일줄 모르는 어머니의 그노래가 <<월강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정부는 월강하여 언감 자기들의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람들이 날로 불어만 났고 그네들의 한을 담아 싣고 이 노래는 널리 불리워지고 있었다. 쌍가매의 어머니가 다른 노래는 부를줄 모르고 하여 실향민들의 한이 서렸던 <<월강곡>>은 쌍가매에게서 자장가로 불려 졌다.   * 청태조 누르하치,청정부는 선조가 태여난 장백산 지역을 신성시하여 봉금령을 내렸으며 월강하여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 우리의 선조들이 월강하여 맨 처음 이른곳 사이섬 간도라는 이름도 이 섬에서 연유되었다. 어느 달이 휘영청 밝은 밤, 고향생각에 잠머리가 뒤숭숭해져 잠에서 깬 쌍가매의 아버지는 문을 나섰다가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글쎄 우물에서 서기가 뿜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위는 일광단을 펼친 듯 백주처럼 환한데 뒤미처 무지개가 우물우에 비끼고 하늘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우물속으로 부터 언뜰하고 솟아올랐다.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그것은 틀림없는 룡이아닌가?! <<룡이다!!! 우물에서 룡이 났소! 우물에서 룡이 났소!>> 아버지가 소리소리질렀고 잠에서 깬 포수네 집에서 사당패네 집에서 훈장네 집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다투어 우물을 들여다 보았다. 우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삼굽집 서방의 꿈이 아니면 환각 이였다고 후에 사람들은 말했다. 허나 우물에서 룡이 승천하면 후세에 장수가 나고 이 고장에 행운이 트일 것이라고 동네사람들은 쌍가매아버지의 말을 믿고 룡제를 지냈다. 남에 비해 살림이 조금은 윤택했던 사당패 김씨네가 먼저 자금을 선대하여 이웃 중국동네에 가서 석공을 청해 석비(石碑)를 세웠다. 리훈장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시에 우물가에서 룡을 보았다고 비문에 써넣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증조할머니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물에서 나온 룡을 자기가 직접 본 것으로 바뀌어져 갔다. 할머니의 확고함에 가까운 어거지 같은것에 의해 룡의 전설은 우리 가문의 전설처럼 만들고 있는것 이였다. <계속>
58    [자치주55돌특집] 소설 조선족이민사 (2) 댓글:  조회:3608  추천:73  2007-06-29
. 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조모의 傳說 (2)  김 혁     우물가는 애들의 둘도 없는 놀이터였다. <<머리칼 떨구지 마라. 침 흘려넣지 마라. 부정탈라.>> 어른네들이 백당부했지만 우물가에는 늘 야청옷을 입고 쥐꼬리만한 머리태를 기른 쌍가매네 또래들이 모여 놀군 했다. 그때 집집마다에 서는 바퀴성화가 극성이였다. 어른들은 롱조로 바퀴장례를 치러주면 바퀴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바퀴장례를 치렀다. 파지로 고깔상모를 만들었고 나무가지로 걸채?만들었다. 걸채의 앞과 뒤를 포수네 아들과 훈장네 아들이 들고 사당패집 아들은 앞에서 어른들의 본을 내여 아이고데고 호곡소리를 내였다. 그뒤를 쌍가매가 졸졸 묻어 다녔다. 피는 속일수 없는 법, 사당패의 혼줄을 타고 태여났던지 녀석은 어른들의 목돌림을 심통히 받아서 곡조를 제법 잘 넘겼다. 북망산천 어디메뇨 저기 저산 북망일세 내 집이 어디메뇨 무덤이 내집이로구나 그래도 바퀴는 없어지지 않았다. 밤이 되면 집 뒤의 수풀속에서는 귀신불이 날아 다녔다. <귀신불이 아이다. 가둑낭기(나무)나 도토리낭기 썩으면서 그 썩박이 뿌리가 밤이 되면 파란 빛을 뿜는게다.> 얼굴바닥이 계집애들처럼 하얀 훈장네 아들애가 열심히 해석해 주었지만 그 귀신불이 못내 무섭기만 한 쌍가매는 밤중이면 오줌누려도 못나갈 지경이였다. 사당패집 애가 돌배 세 개를 들고나와 누가 귀신불 떠올수 있겠냐고 내기를 걸었다. 얼굴이 구운 밤돌처럼 반질반질한 박포수네 애가 나섰다. 썩박나무가지를 들고와 애들앞에 놓았다. 썩박나무에서 푸른 불들이 눈부시게 끓어 번졌다. 쌍가매는 우악 혼절할듯한 소릴 지르며 집으로 뛰여들어가 버렸다. 겨울이 오면 연놀이를 했다. 사당패집 아들이 한족마을에 가서 백지를 사 가지고 온다. 훈장네 아들이 연을 만든다. 수수대목을 갈라 다듬고 종이를 접어 자르고 어머니의 반짇고리에서 몰래 가져온 무명실로 단단히 걸어 매여 연을 만든다. 포수네 아들은 사금파리 조각들을 주어와서는 김치독 누르는 단단한 몽돌로 사금파리들을 산산이 부순다. 사금파리들은 몽돌에 맞아 사방으로 흩어지며 눈부신 빛을 발한다. 연체에 종이를 바르고 양 옆과 가운데에 꼬리를 단다. 연줄이 견디도록 사금파리 가루를 풀에 섞어 발라서 날을 세운다. 드디여 장방형에 십자살을 붙힌 왕연이 형체를 드러낸다. 가슴이 철렁하도록 맑은 얼음장같은 하늘. 문풍지 소리를 내며 얼레에서 풀리는 은빛 연줄을 타고 연이 오른다. 연은 자유롭게 간도벌의 대공(大空)을 누볐다.   머슴애들은 연싸움에 해가는줄을 몰랐다. 쌍가매가 곁에서 지켜보면 애들은 더구나 신나 한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넌들넌들한 코물을 흡흡 들이마시며 머슴애들은 얼레를 한껏 풀고 활개를 크게 벌려 힘차게 잡아 당긴다. 쌍가매는 해빛에 눈이 부셔 찡긋거리면서도 오래도록 젖힌 목고개가 아파 목을 쩔레 쩔레 흔들면서도 계속 하늘을 쳐다본다. 맞바람을 탄 연은 쌍가매의 머리위 높은곳으로부터 위용을 떨치면서 서서히 다가온다. 머리우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기도 한다. 얼레가 감겼다 풀렸다하는 소리속에 연은 곧장 하늘로 날아 올랐다가는 대지를 향하여 독수리처럼 나래를 꺼수수 펴고 내려오다가 땅에 닿기전에 연줄을 풀어주면 다시 연머리는 하늘로 향한다. 연줄과 연줄이 부딪히는 소리가 우물가에 가득하다. 사금파리를 잔뜩 먹인 연줄의 얽힘속에 누군가의 줄 끊긴 연이 팔랑거리다 몸체를 흔들며 떨어져 나간다. 박포수아들의 연이다. 훈장의 아들의 연은 하늘로 우뚝 솟구쳤다가는 백학처럼 멀리 사라져 간다. 사당패집아들의 연은 날고 날아 우물가에 심은 버드나무에 가 걸렸다. 애들이 버드나무를 향해 우르르 몰려 갔다. 연이 갖고 싶은 쌍가매는 맨 앞에서 뛰여 갔다. 박포수네 애가 잽싸게 나무에 올라 연을 내리워 주었다. 가까이 까지 달려온 쌍가매에게 연을 넘겨주다 포수의 아들이 불현듯 쌍가매의 머리결을 함부로 만졌다. <<쌍가매는 스나(남자)가 둘이래>> 내숭기 많은 훈장네 아들이나 행위가 애매한 사당패집 아들에 비해 박포수의 아들은 그 성미가 숭글숭글했다. 쌍가매는 부끄러운 나머지 연을 받아들고 정신없이 집으로 뛰여들어 갔다. 그 서슬에 문 짬에 끼여 연이 찢어져 있었다. 쌍가매는 그저 그 연이 아까울 뿐이였다. 동네 녀자애들중에서 발군(拔群)의 미모를 가진 처녀애로 자라고 있는 그였지만 자신의 농익어가는 몸의 싱그러움과 그 몸이 바라는 꿈과 갈구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쌍가매였다. 현성에 사숙이 섰다. 공부할수 없는 동포들을 계몽시키기위하여 사숙의 교원들은 마을을 돌며 야학을 열었다. 야학에서는 신문화를 적극 전수했고 어려운 살림들에 도움을 주고저 양잠, 양봉업도 곁들어 배워 주었다. 구학공부 5년에 <<대학>>, <<론어>>를 읽었다는 리훈장이 이곳의 교원직을 맡게 되였다. 물푸레 회초리를 들고 리훈장은 엄하게 아이들을 대했다. 그런 훈장에게 마을사람들은 아이를 시름놓고 맡겼고 가을이면 <<교원쌀>>을 내주군 했다. 작으나마 공터가 있는 우물가가 교실이였다. 리훈장의 열성적인 동원에 마을사람들은 한사람 두사람 야학에 모여 들었다. 옹색한 김서방도 자기집에서 애지중지하던 남포등을 가져와 우물가의 버드나무에 내걸었다. 나중에는 우직한 박포수마저 야학에 나왔고 그 청동방울 흔들어대는것 같은 소리로 훈장에게서 식자본을 따라읽었다. 가을볕과 쓰르라미의 울음소리속에 들판의 곡물들이 빛나게 익어갔고 마을사람들은 사당패집에서 울려나오는 흥겨운 노래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어얼싸 좋구나 농사한철 해보세 어얼싸 좋은데 무슨 농사 해볼가 어얼싸 좋으니 조농사나 해보세 옥토금토 량전에 어떤것을 뿌릴가 만알박이 왕옥조 느실느실 방치조 천리타향 강남콩 오동총백 비단콩 황금보화 황참외 개똥전에 떡참외 어서빨리 박으세 어서빨리 놓으세... 이렇게 아슴한 현기증같은 풍수의 희열에 젖었는 그들앞에 느닷없이 누군가가 나타났다. 중국사람 하나가 살쾡이 처럼 나타났다. 진화가 덜된 원숭이 같은 상판을 가진 그 사람은 발목을 덮는 남색 호복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의 곁에 화승총을 거꾸로 멘 사람들이 묻어 서있었고 발치에서 갓난 송아지만큼 트대 큰 개가 혀를 빼물고 있었다. 황둥개는 황모꼬리를 흔들며 흰옷 입은 마을사람들을 보고 사납게 짖어 댔다. 어흠 어흠 헛목을 다듬고 나서 그 호복차림의 사람은 마을사람들이 도무지 알아 못들을 말마디들을 사금파리 긋는듯한 거북살스런 소리에 담아 질렀다. 그 귀신 씨나락 까먹는듯한 사금파리 긋는 소리를 훈장이 간신히 알아듣고 해석한 결과 동네사람들이 부쳐 먹고있는 땅은 이 왕씨성을 가진 사람의 땅이라는 것이였다. 마을사람들은 금세 덫을 맞은 듯 벙벙해졌다.     *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모습  <<바위돌은 뉘기 들구 가재는 뉘기 먹는담둥?>> <<곁방살이 큰방 차지 할려문 주인집양반 옴치고 있겠수? 남의 땅 함부로 뚜져놨으니 별쉬 없지비. 후유- >> 바람이 들이닥친 도적떼처럼 마을을 한바퀴 저었다, 한결 결이 세진 가을바람에 마을 사람들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만만치 않은 서슬로 왕씨가 돌아간뒤 몇 해간 마을사람들이 손톱눈 다슳게 사득판을 번져 만든 옥답은 일조일석에 왕씨네 땅으로 되고 말았다. 마을들은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왕씨와 같은 중국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들은 산마루나 골짜기와 시냇물을 경계로 토지점유세를 납주하면서 이민들을 받아들였다. 동네사람들은 이런 땅주인들을 <<지팡이(地方)>>이라고 했고 중국사람들은 월강해 온 사람들을 개간민 이라하여 <<컨민(墾民)>>이라고 불렀다. 그날 감때사납게 마을사람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나서 왕씨는 목이 갈하다며 우물물을 맛보았다. <<호우(好)!>>하고 엄지를 뽑아들며 감탄을 련발했다. <<기럼 이 우물꺼정두 지팡이네 우물이 된담둥?>> 물을 긷던 쌍가매 어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비껴들었다. 강 건너 웃마을, 자두나무가 빽빽히 섰는 산더기 앞에 고래등같은 왕지팡네 기와집이 있었다. 왕지팡네 땅은 어찌나 넓은지 그가 하루동안 말을 타고 돌아다녀도 남의 땅은 밟지 않는다고 했다. 린근에서 내놓고 건가래를 뗄 넉넉한 재물과 세도가 있었던 왕지팡은 집에 사병(私兵)까지 네댓명 기르고 있었다. 그 위세에 눌려 <<컨민>>들은 가을에 가서 벼수확의 6할을 왕지팡네 집에 바쳐야 했다. 수확을 초곡채로 밭에서 왕지팡네 집 마당에 실어다 부리고 타작하여 알곡을 뒤주에 까지 넣어주었다. 그러고 나면 한해 식량이 태부족 이였다. 벼농사를 짓고도 입쌀밥을 먹지 못하고 왕지팡네 집에서 조며 옥수수며를 빌어먹었다. 자기 땅을 소작 지으려면 이곳에 입적을 해야 했다. 청나라에 입적한 <<귀화인>>들은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었다. 허나 그러자면 반드시 상투를 자르고 만인(滿人)들이 입는 호복을 입어야 했다. <<치발역복(雉髮易服)>>을 해야 했다.     * 청나라에 입적한 <<귀화인>>들은 상투를 자르고  그들이 입는 호복을 입어야  했다. 즉  <<치발역복(雉髮易服)>>을 해야 했다
57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댓글:  조회:2904  추천:73  2007-06-29
. 칼럼 .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김 혁 △ 8월들어 장백산 천지에서 <<괴물>>을 목격한 관광객이 100여명이나 된다고 언론들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 19일 오후 4시 경 장백산 천지 한 복판에 정체 불명의 물체가 나타나  약 10분 동안 호수 표면에 머물러 있다가 거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곧 종적을 감췄다. 그 모습이 마침 장백산을 찾은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잡혔다. 사진을 촬영한 장모씨는 <<촬영 당시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천지를 헤염치다 수면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고 주장했다. 이 사진이 여러 포털 사이트에 소개되면서 검색 톱순위에 오르는 등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포착된 천지괴물 사진들   △ 천지에서의 괴물의 출몰은 이미 한두번이 아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몇해전에 이를 보도했었다.  60년대에도 길림성 기상국 직원이 7~8마리의 괴물을 목격해 화제가 됐다. 60~70년대 이후 30~40여 차례 발견됐고 목격자들은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격자들이 묘사하는 괴물의 모습은 코끼리, 개, 수달, 흑곰과 목이 긴 룡 등 다양하다. 괴물에 대한 전설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광서 34년(1908년)의 <<장백산강강지략>>,청현통치2년의 <<장백회정로>> 외에도 <<봉천통지>>,<<무송현지>>에도 모두 그 기재가 있다. 기재와 전설에 따르면 장백산에는 세가지 괴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당나라 임금들이 그 가죽 갖기를 원했다는 화서(火鼠)인데.... 화산인 장백산에는 불구덩이 속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었으며 그 모피로 옷을 지어 입으면 불 속에서도 타지도 데지도 않는다 했다.다른 한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라고 한다. 얼핏 들어보면... 빅풋(설인, 예티, 싸스콰치라고도 불린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었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인간이 장백산 괴물의 하나였다.그 세 번째 괴물이 요즘 항간의 화제가 된 천지괴물이다. 옛 중국문헌들에도 괴물은 자주 등장했다. 청나라 강희제 년간에 사냥군 몇명이 천지변 조오대(釣鰲臺)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보았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 했다. 겁이 나 돌아서 도망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나 돌아보았더니 괴물이 사라지고 없었다 했다 광서(光緖)6년 5월에도 유복(兪福) 등 6명이 수면에 물소만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 했으며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天豁峯)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장백산 산중 민속에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천지가에 올라 막을 치고 밤을 새우는 민속이 있다. 밤중에 마치 바다에 해가 떠오르듯 환한 빛을 내며 괴물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세 번 하는 것을 본 다음 천지 물에 몸을 적시면 장수한다고 알았던 것이다. 이 괴물을 두고 천지의 바닥이 바다와 통하고 있어 바닷물이 들어 솟을 때 생기는 물기둥으로, 해안(海眼)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네스호괴물   킹콩  고질라  디워 킹콩, 고질라, 디워... 상업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린 괴물캐릭터들이다.   ▲ 천지괴물이 장백산관광홍보의 또 하나의 매개물로 되지않나 생각해 본다. 항간의 화제인 <<천지괴물>>에 대해 우리는 그저 반신반의로 방치해 왔을뿐 영국의 <<네스호괴물>>이나 할리우드공상영화속의 <<킹콩>>, 일본괴물영화속의 <<고질라>>, 한국괴물영화속의 <<용가리>>, <<디워>>처럼 한 지역을 징표하고 상업소재로서 적극 활용하는 높이에 까지 올려 놓지 못했다. 수차 장백산을 다녀오며 보아도 많은 명목많은 관광기념품들중에 괴물기념품은 겨우 한두점, 그것도 조야하게 만든 조각물이 구석쪽에 놓여 있을뿐이였다. 훌륭한 마스코트는 언론매체와 인터넷 웹사이트, 각종 배너 상품, 의상, 관광기념상품 등을 통해 전파되며 또한 관광마케팅의 중요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더우기 관광지의 열기와 분위기를 진작시키고 지방특색의 독특한 기념상품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도 한낱 완구의 의미를 넘어 필요하다. 미키마우스(米老鼠), 탕나드(唐老鸭)처럼 누구나 접할수 있는 진취적이고 생동감이 있고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천지괴물 마스코트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56    [자치주55돌특집] 소설 조선족이민사 (3) 댓글:  조회:3171  추천:73  2007-06-29
  . 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조모의 傳說 (3) 김 혁     이듬해 쌍가매는 등돌린 미운 신랑을 꼭 닮은 아들을 낳았다. 그해 겨울은 여느때보다도 추웠다. 어느 별도 성긴 어두운 밤, 훈장네 아들이 느닷없이 마을에 나타났다. 거쿨진 사람 몇을 거느리고 마을로 찾아 왔다. 뒤따른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리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치깎고 있었고 볼이 홀쭉하게 패여있었으나 혁대를 두르고 발목에 각반을 친 훈장의 아들은 그렇게도 기품이 있어보였다. 성에 불린 도수안경속으로 보다 명징하고 날카로워 진 그의 눈길을 모두들은 느낄수 있었다. 그 타는듯한 눈길이 허공에서 쌍가매의 눈길과 얽혔고 쌍가매는 부지중 머리를 숙여 버렸다.   오랜만에 나타난 훈장네 아들의 품에는 돐도 안된 아이가 피륙에 쌓여 안겨 있었다. 그가 낳은 아이라고 했다. 밀림에서 생사를 함께 하던 녀자와 결혼했?아이를 보았는데 일본토벌대의 습격에 녀자가 죽었던것이다. 배가 고팠던 애는 꽃잎같은 입술을 열며 애자지게 울었댔다. 어떤 련민이 쌍가매의 가슴을 모질게 훑고 지났다. 쌍가매는 품에서 자는 자기 애를 내려 놓고 낯선 아이의 입에 젖을 물렸다. 가슴을 파고드는 애의 태열과 황달이 채 가시지않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훈장집 아들을 꼭 닮은 아기를 꼭 껴안으면서 쌍가매는 왠지 구름덩이같이 붙잡을수 없는 이름할수 없는 미열(微熱)을 느꼈다. * 궐기해 나선 항일련군 전사들  * 김좌진장군이 일본군 수천명을 전멸한 청산리대첩 유적지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떠난후로 훈장의 아들은 자주 마을로 찾아왔다. 허나 아이를 보러 온것이 아니였다. 마을의 청년들을 무어 동맹청년단을 만들었다. 삼굽집이 그들의 거점으로 되였다. 원체 라병환자의 집으로 소박맞던 집이니 일본사람들이 기피하기에 안전하다는 것이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밤이면 살며시 모여들어 훈장집 아들의 연설을 들었고 그에게서 노래를 배웠다. <<만주의 벌에 불이 붙는다 시뻘건 화염 그속에서 반일하는 대중의 함성이 난다...>> 여직껏 노래라고는 엄마가 부르던 <<월강곡>>밖에 몰랐던 쌍가매는 열심히 <<총동원가>>라는 그 노래를 배웠고 훈장아들의 불꽃튀는 연설을 들었다. 나지막하나 박력있는 그의 소리에는 사람을 옭아매고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방안에는 겨릅대등의 불빛으로 밝은 귤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격앙된 노래가 등의 불티처럼 튀여오르고 있었다. 불빛에 익은 얼굴얼굴들이 유약을 바른 질그릇처럼 번들거렸다. 스러진 아궁이에 솔가지를 꺾어넣고 모여온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부어 놓고는 아이를 껴안고 곁에서 훈장아들의 선창을 받아 노래를 부를때면 충격이 달군 인두처럼 쌍가매의 가슴을 지지고 있었다. 신심을 다잡는 노래를 흥얼거리노라면 불꽃 사윈 가슴에 뜨는 별빛을 쌍가매는 은연중 느낄수 있었다. 훈장아들이 보급한 노래소리는 한사람 두사람에 걸쳐 온마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노래는 뒤산 자락의 자두나무숲에도 이슬처럼 내렸고 내가 갈대숲에서도 바람처럼 서걱이였고 아낙들이 빨래하는 우물가에도 잠자리처럼 내려앉았다. 우물곁에 섰는 버드나무의 수천수만의 잎사귀에도 노래의 음조는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쌍가매는 은근히 훈장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푸다말고 두레박을 늘어 뜨린채 멍해 있기가 일쑤였고 겨릅대등 밝힌 집에서 사념에 잠겨있기가 일쑤였다. 로인들은 겨릅대등의 등찌가 우로 꾸불면 손님이 오고 아래로 꼬불면 안온다고 미신 했다. 쌍가매는 겨릅대등의 등찌가 우로 꼬불기를 바랬다. 쌍가매는 자신속에 움추려있는 어떤 주체할수 없는 기다림을 스스로 느낄수 있었다. 일본총령사관놈들과 그들이 사촉하여 무어 만든 자위단이 마을로 덮쳐든것은 그해 겨울이 지난 봄께였다. 총칼차고 군화를 절걱이며 누렁옷을 입은 한무리의 군대가 광분하는 맹수처럼 덮쳐들었다. 혼겁한 나머지 참깨처럼 줄어든 마을사람들은 둔탁한 총박죽에 날큼한 창끝에 윽박질려 우물가로 끌려갔다. 우물가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밀려 한폭의 벽화같이 고착되여 버렸다. 매운 봄바람이 사람들의 이마를 날카롭게 베며 지나갔다. * 항일지사들을 체포하고있는 왜놈토벌대 일본 토벌대가 황구처럼 질질 끌고 온 사람 하나를 마을사람들앞에 내 세웠다. 비인간적인 구박으로 그 사람은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매돌속에 들어간 물불린 콩알처럼 으깨여져 있었다. 피투성이 얼굴에 깨여진 안경이 간신히 걸려 있었다. 등뒤로 결박을 지운 그 사람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섰다. 바람에 피로 적셔진 그의 머리칼이 불불이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은 꼭마치 화염처럼 보였다. 마을사람들을 향해 그사람은 피발린 얼굴을 비틀어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사람을 겨우 헤아려 본 쌍가매가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그는 다름 아닌 훈장의 아들이였다. 집총자세를 하고 저승사자처럼 험상궃은 표정을 한 왜놈들 무리앞에서도 훈장의 아들은 두렴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참하게 몰골이 일그러졌지만 그 미소만은 금속같이 세련된 미소였다. 그 찬란한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타앙! 총성이 울렸다. 공포에 응고된 침묵을 찢어발기는 총소리속에 훈장의 아들은 우물가에 천천히 모로 쓰러져 버렸다. 쌍가매는 터져나오는 공포와 울음을 막으려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두눈을 지질러 감았다. 구(區)의 서기직무를 맡아나서 일제의 주구와 악패지주를 청산하고 무기를 탈취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성세호대하게 벌려나가던 훈장의 아들은 광복을 앞둔 어느 날, 그 어떤 신념을 미소와 함께 머금고 쓰러졌다. 산더기마다 류혈하듯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여나던 봄날이였다.           * 항일련군전사를 참살하고있는 일본토벌대 그날 훈장네 일가족도 일본토벌대와 자위단에 의해 몰살당했다. 놈들은 훈장네 집에 불을 질렀고 일가족의 시체를 우물에 처넣었다. 토벌대가 간후 마을사람들은 시체를 건져내고 우물을 가셨다. 우물가 높은 더기의 락엽을 걷어내고 부엽토 밀어내고 붉은 흙속에 훈장아들의 시체를 묻었다. 훈장네 아들은 우물의 수호자로 되여 우물가에 묻혔다. 그후로 봄만 되면 사람들은 그 무덤가에 진달래가 아름벌게 놓여 있는것을 볼수 있었다. 훈장네 집은 일가족이 다 죽고 다행이도 밀영에서 낳은 그 돌잡이만이 살아 남았다. 훈장의 아들이 참살당한 우물가에서 쌍가매는 등짝이 터질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포수의 아들이 죽었을때 속울음을 울었던 그는 이번에는 소리내여 울었다. 련줄로 자기곁을 떠나는 인연밭은 이들의 죽음을 두고 내장을 토해낼듯 한 뜨겁고 깊디긴 오열을 느꼈다. 빨갛게 짓무른 눈으로 쌍가매가 그 강보의 애를 맡아 나섰다. <<어째 이래냐? 니하구 훈장집 아들이 무슨 사지어금이라구 다른 사람도 아니구 니가 나서서 이래냐?>> 아버지가 야단을 떨었고 동네 사람들도 의뭉스런 눈을 치떴지만 쌍가매는 흔연히 그애를 맡아 나섰다. 자기의 삶에 조용히 련루되여 있는 훈장의 아들을, 번개맞고 연기나는 자기의 삶에 힘과 정열을 주었던 훈장의 아들을 쌍가매는 잊을수 없었던것이였다. 아이들은 도담도담 잘도 자랐다. 탐스런 머리칼, 호박(琥珀)색피부, 통통히 살이 오르는 손목, 그 작은 생령들을 지켜보는 쌍가매의 부연 눈빛도 아이들의 눈을 닮은 검은 생기로 빛났다. 그리고 그애들을 위해 한 몸을 던졌다. 비행장이나 신작로를 닦는 근로봉사대속에 끼여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기도 했고 정미소에서 벼겨를 넘겨다 팔며 푼돈을 벌기도 했고 솔뿌리를 뽑아 기름 짜는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산에 가 쑥을 뜯어 쑥떡을 해 먹였고 다 캐여간 감자밭을 뚜져 감자알을 얻어냈으며 눈밭을 헤매며 배추뿌리를 캐였다. 애들이 방안이 비좁다하게 텀벙텀벙 기여다니고 장난감같은 이로 질긴 음식을 씹어댈때 그녀의 깎은 듯 패인 볼에 발가우리한 홍조가 떠올랐고 여직껏 경직된 얼굴을 하고 있던 아버지도 험상을 풀며 애들을 바라 소리없이 웃었다. 세월지나도 우물은 그 우물이였다. 피는 꽃과 지는 잎의 섭리를 우물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사당패집 아들이 다시 마을로 나타난것은 그후로 썩후의 일이였다. 그때 쌍가매는 물초롱을 이고 물을 긷고 있었다. 장님거지처럼 어정거리며 마을어구에서 사당패집 아들은 쌍가매가 물긷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이제는 그제날의 청초함이 사라진 쌍가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보폭하나 틀림없이 건강하게 걷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소곤대기 좋아하는 아낙들이 옮긴 풍문에 의하면 사당패집 아들은 사금판에서 정말로 떼돈을 벌고 국자가에서 작부퇴물림과 살림을 차리고 짐벙진 한때도 누렸었지만 그 눈맞고 배맞았던 요상스런 녀자에게 재산을 하루밤새에 몽땅 떼웠다고 했다. <<송충벌거지(벌레) 솔낭구(나무)잎 떠나 못살지비유>> 허기끝의 탐식처럼 사당패집 아들은 우물물을 정신없이 들이마셨다. 자기앞에 섰는 쌍가매와 비온뒤의 제비쑥처럼 자라난 자기를 꼭 닮은 아들과 친형제처럼 곁에 바싹 붙어섰는 훈장네 아들을 면괴에 어린 눈길로 바라 보며 시래기처럼 푸석푸석한 머리를 피나도록 긁적이였다. 쌍가매는 똬리를 만지작이며 허공에 아연하게 떠 있었다. 입에 엿 머금은 사람처럼 우물거리다 아무말도 못했다. 가슴 깊은곳이 막연하게 아프고 습기차 있고 걷잡을수 없는 슬픔에 모대기게 하던 그 사람이 막상 나타나고 보니 욕 한마디도 할수 없었다. 그사이 표나게 수척해진 그가 겨울을 지난 목이 긴 새처럼 허기져 보였고 따라서 그에 대한 대책없는 련민을 느꼈다. 사당패집 아들이 나타나던 날, 마을사람들은 그의 출현보다 더 큰일에 흥분하고 있었다. 간도의 상공으로 비행기가 날아 지났다. 사당패집 아들의 경력담을 들을려고 그의 집에 몰려들었던 마을사람들은 비행기의 동음에 너도 나도 집을 뛰쳐나왔다. 목을 젖히고 비행기를 우러르 었다. 비행기의 꼬리쪽에서 무언가 하얗게 너울너울 날아 내리고 있었다. 하늘의 선녀가 꽃을 뿌리듯 날아 내린것은 삐라였다. 삐라는 우물가에도 날아내렸다. 사람들은 몸을 솟구며 신변에 까지 날아온 그 삐라들을 허겁지겁 받아들었다. 삐라에는 조선글과 중국글이 힘찬 글발로 새겨져 있었다. 그 전문은 이러했다. <<일본은 무조건 투항을 했다! 이로서 약소민족은 해방되였다!>> 삐라를 집어들고 소리내여 읽던 이가 마른 소리로 웃음을 웃었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웃음을 따라 우물가에 개벙하게 모여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웃기 시작했다. 질마를 벗은 소처럼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을 탁 터놓고 웃음들을 토해 냈다. 쇳목이 잠길때까지 환희의 웃음을 웃고 또 웃었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은 조서를 발표하여 전세계에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알렸다 * 1945년 중국 동북지역에서 투항하는 일본군     근 10년세월이 지난뒤에야 나타난 사당패집 아들에게는 이전과 같은 여유와 흥감질이 없었다. 조용히 돈을 내고 사람을 불러 우물의 드레박을 다시 앉혔다. 드레박줄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마을사람들이 삐라장을 받아들고 눈굽젖어 만세를 높이웨치던 그날 사당패집 아들은 자기의 실수를 조목조목 회고했고 인연의 자락을 놓지못해 속을 앓아 왔던 쌍가매는 끝내는 배신했던 그를 용서해 주었다. 쌍가매의 조건이라면 렬사의 후대인 훈장 아들의 자식을 함께 키우자는 것 뿐이였다.   돌아오자 사당패집아들은 그 기간의 밀린 세대주의 힘을 보상하련듯 두 아들의 혼사를 치러주었다.   해방의 기쁨을 맞았으나 그 희열을 눅잦힐 사이가 마을사람들에게는 없었다. 중국에서 국공량당지간의 전면 내전이 일었다. 해방받은 동북해방구조선족들은 고향의 승리의 열매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연히 동북을 해방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는 투쟁에 궐기해 나섰다. 현성과 마을에서는 전에 없던 참군열조가 일었다. <<군대에 나가는것은 영광스럽다>>는 것은 그때의 기풍이였다. 마을의 청장년들이 분분히 싸움에 탄원해 나섰다.   잔치를 치른 이튿날로 쌍가매의 아들은 전장에 나갔다. 쌍가매는 아들은 전장에 보내면서도 훈장아들 자식의 참군요구만은 부득부득 우겨가며 밀막아 바렸다. 자기의 친혈육을 내보내더라도 렬사의 후예를 아끼려는 마음에서 였다.   아들을 전선에 내보낸 뒤로 쌍가매는 밤만 되면 우물가로 나가곤 했다. 우물물을 길어 대접에 부어놓고 대접을 우물가장자리에 놓고는 언젠가 보았던 엄마의 본을 내여 비손질을 했다. 아들이 전투에서 공세우고 돌아 오기를 빌었고 무양히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었다.   허나 마을 앞산더기의 진달래가 색색이 연분홍 등롱을 켜들었을때 쌍가매는 아들의 비보를 듣고야 말았다. 아들은 장춘 동정거장을 함락하는 전투에서 류탄을 맞고 쓰러졌던것이다. 물긷다 억장이 무너지는 비보를 접한 쌍가매는 두레박을 우물 속에 떨어뜨리며 그자리에 퍽적지근 주저앉고 말았다. 두레박줄이 다르르 풀어져 내리는 소리가 공명으로 들렸다. 어머니의 마음도 그처럼 깊은 곳으로 추락해 내렸다. 곧 이어 나의 아버지가 유복자로 태여났다.     예이제이없이 그네들이 일구고 다듬어 온 들판의 곡물들이 무르익어 빛나오를 무렵, 드디여 민족자치의 숙원이 이루어져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고고성을 울렸다. 마을에서도 성대한 자치구성립경축대회가 열렸다. 우물가에 경축회장이 꾸며 졌다. 우물 곁 버드나무에 매단 스피카에서 노래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사당패집 아들의 목소리였다. 스피카를 통해 튀여나온 노래소리는 그렇듯 구성지게 명랑한 가을공기를 휘젓고 있었다. 포장이 터지도록 울리는 흥겨운 가락에 맞추어 상모를 돌리고 장고를 두다리며 흰옷 입은 사람들은 신들린듯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너나의 마음을 담은 노래소리는 강을 타고 산발을 타고 랑랑히 울려 퍼졌다. <<에헤라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 에헤라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 자치구 세웠네>>    * 1952년 9월 3일 자치구 성립을 선포하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초대구장 주덕해       환락의 도가니로 끓고 있는 성립대회 회장으로 차 하나가 달려와 섰다. 차에서 젊은 간부 하나가 내렸다. 사람틈바구니를 헤치고 달려와 <<어머니!>>하고 쌍가매를 얼싸안았다. 귀티가 나는 깔끔한 젊은이였다. 그도 아비를 심통히 닮아 안경을 걸고 있었다. 그는 지금 자치구에서 비서직을 맡아하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차에서 자치구의 구장어른이 내렸다. 주씨성을 가진 구장은 땀발을 씻어 내리며 곧추 우물가로 다가갔다. 명절옷 단장을 한 쌍가매가 새것으로 줄을 바꾼 드레박을 힘껏 우물에 던져 넣었다. 드레박에 물을 푸어 다시 대접에 받아서 구장에게 받쳐 올렸다. 대접을 단숨에 굽 내고 나서 구장이 걸걸한 소리로 웨치다싶이 말했다.   <<우물맛이 차암- 좋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구장의 팔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치의 기쁨에 넘쳐 춤을 추고 또 추었다.      춤에 신명을 바치는 쌍가매의 춤사위는 정말로 고왔다. 희열에 굽이쳐 돋솟아오르는 눈물을 씻어내리며 쌍가매는 춤의 휘모리에 묻혀들었다.  축제를 맞는 마을은 숫제 봄을 다시 당겨 온듯 마을사람들이 정성껏 결어 만든 꽃송이에 묻혀있었다.   용드레틀도 꽃송이와 채색기로 정성껏 단장이 되여 있었다.   보다 다수워진 가을 해살을 담아 안고 우물물은 빛나 오르고 있었다.     쌍가매는 크렁하게 젖은 눈으로 우물물을 들여다보았다. 그 우물을 지켜보며 쌍가매는 이 맑은 하늘을 별똥별처럼 장식하고 사라진 훈장의 아들을 생각했고 포수의 아들을 생각했고 자기의 아들을 생각했다. 그의 눈에 오늘의 우물가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고 그렇게도 비장해 보였고 그렇게도 신성스러워 보였다. 군청색의 이끼가 돋은 돌쯤사이에서 우물은 그 깊숙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내재하고있는 오래된 신산스럽고 고통에 쌓인 삶을 불러 일깨웠고 그 사랑과 증오를 하나하나 되새김하는 그녀는 우물과 자신이 하나로 화함을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의 전설은 이즈음에 와서 끝나군 했다. 허나 세월의 층적층에는 묻힌 사연들이 많았다.     * 조선전쟁이 일자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는 정부의 호소에 맞추어 중국의 젊은이들이 압록강을 뛰어 넘었다.    광복이 나고 땅을 분여받고 복구건설이 시작되고 조선전쟁이 일고 그다음엔 중국에서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이 일었다.   그해 반란파들에 의해 구장과 그 주변의 일군들이 옥에 갇혔고 <<낡은것을 청산한다>>하여 우물의 석비는 깨여지고 우물은 묻어버렸다. 우물을 묻던날 구장의 비서는 우물을 묻는 반란파들을 제지시키려 했다. 그러다 <<완고분자>>로 락인되여 그들에게 머리를 깎이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길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수모를 더는 이겨내지 못하고 렬사의 후예는 우물자리의 버드나무에 목을 매 달았다.   우물을 묻어 버린뒤 할머니는 밤이면 가만히 우물자리를 찾군했다. 엎드려 우물자리에 귀를 대여 보았다. 그때 할머니는 분명 땅밑에서 굽이치는 물소리를 들을수 있었다고 했다. 물소리는 호곡하는 녀자의 울음소리처럼 음울하게 들렸다고 했다.    * 중국전역을 휩쓸며 10년간 지속된 광란의 의 문화대혁명 많은 조선족들이 이 전대미문의 비극에 휘말려 들었다.     그로부터 10년후, 구위비서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뒤집어 썼던 모자를 벗고 하나하나 평판을 받았고 온 중국이 오금꺾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정보(正步)로 가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월강족속의 제4대로 내가 태여 났다.   정부에서는 우물자리를 다시 복원했다. 구두쇠로 이름 있던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우물복원에만은 거액의 돈을 내놓았다. 물론 그렇게 된데는 우물과 끈끈한 사연의 동아줄로 얽동여진 할머니의 지청구에 의해 서였다.   그 동안 우리의 조부들이 첫괭이를 박았던 사득판은 촌마을에서 부락으로, 부락에서 현으로, 현에서 진으로, 진에서 시로 탈바꿈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의 할머니의 쌍가매 진 머리는 창포에서 백발로 바뀌 였고 숱많던 머리가 빠져 이제는 쌍가매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할아버지도 앞세웠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만추에도 잎사귀를 떨어뜨리지 않는 고목처럼 그 누구보다 정정하셨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등맞은 고양이처럼 만곡된 허리로 할머니는 자주 우물자리를 찾군 했다. 복원된 우물을 희한과 련민과 애상 어린 눈길로 쓸어보군 했다.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도 아프게 하기도 슬프게 하기도 안도하게 하기도 했던 우물을 지켜보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뜰줄을 몰라 했다.   모두들 나의 증조할머니가 백세까지는 앉을것이라고 했다. 조선족집거구인 현성의 우리말 텔레비에서 <<세기의 로인>>이라는 제명으로 할머니를 취재한 특집프로를 만들기도 했다. 취재시에 옹근 한 세기를 가로질러 새 세기의 문전까지 닿아온 그 건강의 비결을 물었을때 할머니는 그중 하나가 매일 랭수 한 사발씩 마이는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할머니는 매일이고 빠침없이 랭수를 마시군 했다. 나중에 바깥출입도 할수 없었던 할머니는 <<씨원-한 우물물 한번 마셨봤음 좋겠는데...>>하고 감질나게 되뇌이군 하였다. 우리가 드링크에 포장한 약수물을 랭장고에 넣었다 다시 드려도 할머니는 <<그때 그 우물맛에 비하겠냐? >>하고 감개를 머금군 했다.   할머니는 증손을 보기를 원했다. 허나 증손녀가 태여나기를 며칠 앞두고 할머니는 끝내는 백세의 정수(正數)를 채우지 못하고 운명하고 말았다. 애가 물이 찌고 나시시 배내머리가 자라고 얼굴모양이 잡혔을때 집식구들은 그만 감개에 젖은 환음(歡音)을 질렀다. 아이의 머리 앞부분에 작은 가마가 하나가 소담히 틀고 앉아 있었던것이다.   <<격세유전이란 말이 있더니 할매를 꼭- 떼닮았네>>   친척친우들이 희한해 마지 않았다.      아이가 돌잡히던 날, 돌잔치를 치르고 나서 우리가족은 우물가를 찾았다. 할머니의 유상을 앞에 모시고 딸애를 안고 우물가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흰 수건을 낭자쪽에 겹쳐서 앞이마를 가리우고 하얀 무명실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모시빛저고리를 받쳐입은 모습으로 할머니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유현한 눈길로 할머니는 당신의 마늘타래처럼 주렁주렁한 자식들과 당신이 파시고 마셔오고 지켜오신 우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진을 다 찍고도 나는 오래도록 우물가를 뜨지못했다. 새삼스레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우물은 꼭 마치 우멍눈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영원을 찰나 속에 품은 듯한 외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우물물도 가버렸지만 순간 나는 코를 푹쌍 찌르는 물내음을 맡을수 있었다. 세월의 더께를 밀어내고 청렬한 우물물냄새를 맡을수 있었고 가슴속에 넌출거리는 우물의 창명(彰明)한 물결을 볼수 있었다. 그리고 우물물이 룡트림쳐 솟아오르는 소리를 환청으로 들을수 있었다.   우물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악기의 하현찰(下弦擦)처럼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구색이 잡힌 현성의 력사와 그 력사의 년륜에 새겨진 사람들의 전설을 소리에 담아 우물은 무겁고 웅숭깊은 유장한 소리로 세기의 오페라를 속울림으로 연주하고 있는것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지리하고 조악한 삶을 밟아온 할머니의 섬약하나 끈질긴 아집과 그 와중에 기어코 전하고자하는 할머니네 세대들의 상상력에 수렴되는 룡의 전설이 주는 언질을 나는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전설에 비하면 돈과 명리에 매이고 빈약한 상상력에 기대인 요즘 삶의 풍속이 얼마나 부박한 것 인가한 것 을 깨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설을 받아서 이어나가야겠다는 자긍심과 사명 같은 것에 사로잡혀 들기 시작했다.     딸애의 앞이마에 숙명처럼 틀고 앉은 가마를 자꾸만 매만지면서 나는 오래도록 우물가를 뜨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금 할머니의 전설을 되새김 해보았다... ♡    * 본 작품에 인용한 귀중한 사진자료들은 "중국조선족사화집", "중국동북년감", "중국옛사진모음집", 용정민속박물관, 한국독립기념관 등 곳에서 차용, 출처를 밝히며  졸고를 빛내준 귀중한 사진자료에 감사를 드린다.    
55    9월의 축제 댓글:  조회:3001  추천:73  2007-06-29
. 칼럼 . 9월의 축제 김  혁   △ 에루화 어절씨구 좋구나좋네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화호하네에루화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연변조선족 자치구 세웠네… 신들린듯 구성진 노래소리속에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대회가 연길시에서 펼쳐져 자치구인민정부 주석인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의 탄생을 만방에 선포했다. 1954년 4월,중공 길림성위와 성인민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의 규정에 근거,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그해 12월에 열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인민대표대회 제2차회의에서 자치구를 자치주로 선포하고 주덕해를 주장으로 선했다.   △ 9월3일은 이제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일일뿐더러 우리민족전체의 축제의 날로 부상되였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명절의 분위기에 흠씬 젖어들어 여러가지 의미있는 행사들이 연변을 주무대로 연줄로 펼쳐진다. 올해도 9.3명절에 즈음하여 유엔세계관광조직, 유엔개발계획서와 국내 전문가들로 무어진 도시고찰단이 왕림하여 <<세계에 소개할 가치가 제일 큰 중국명도시-연변>>>라는 제명의 도시보급교류회의도 열고, 번영발전하는 연변의 시대적특징과 농후한 민속특색을 생동하게 그려낸 중앙TV 의《경국경성(傾國傾城》》문예야회가 펼쳐졌으며 제2기 중국.연길 국제투자무역상담회도 성황리에 개막되였다. 서기로운 가을바람속에 여느때보다 명절의 열락(悅樂)에 빠져든 자치주이다.    ▲ 자치주창립이래 연변은 가난하고 페쇄되고 락후한 면모를 철저히 개변하여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번영하고 민족이 단결하며 변강이 안정되고 인민이 즐겁게 생활하는 새로운 국면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근년들어 자치주는 변혁기의 진통도 더불어 겪고 있다. 인구의 대량이동으로 촌부락이 소실되고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섭외혼인으로 남녀비례가 실조되여 농촌총각들이 가정을 못이루고 그로서 인구가 마이너스장성을 기록하고 그에 이은 련쇄반응에 학교가 페교되고 있다. 과거 한세기동안 우리가 피와 땀을 바쳐 이루어왔던 공동체와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가치관이 눈에 띄이게 흔들리고있다. 이제부터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피부로 음미해볼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자치주는 올해로 쉰다섯의 년령을 맞았다.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는 50대를 천명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위기해법은 천명을 아는 우리 자신에 있다.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수한 문화유산을 지니고있는 우리 민족은 목전의 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여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모두가 위기의식을 품고 민족의 현황과 미래를 재검토하고 문제점들을 착중하여 밝히면서 시종여일하게 과학적 발전관과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시달하고 경제발전전략을 전면 실시한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잠시 빠져든 진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있는것이며 경제가 더욱 번영하고 생활이 더욱 유족하며 사회가 더욱 조화롭고 환경이 더욱 좋은 비전을 가져올것이다.       
54    횡단보도 풍경 댓글:  조회:2851  추천:73  2007-06-29
횡단보도 풍경 김 혁  △ 횡단보도, 중국어로는 얼룩말선(斑馬線)이라 부른다. 횡단보도의 표지가 얼룩말의 무늬를 꼭 닮은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얼룩말은 주로 아프리카에 분포하여 서식한다. 얼룩말하면 아름다운 무늬로 유명할뿐더러 조화로운 단체 생활로도 이름있다.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데 많이는 그 수효가 수천 마리의 큰 무리를 이룬다고 한다. 령양이나 기린들과 곧잘 어우러지는 온순파인 그들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이면 물을 찾아 먹는데 그렇게 많은 수효임에도 늙은 수컷이 이끄는대로 줄을 지어 물을 먹는다고 한다. 참으로 동물계의 위계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게하는  가관이다. △  연변에 가면 횡단보도가 필요 없슴돠.    그냥 냅다 뛰여가면 자동차가 느려가지고     사고가 나더라도 상처가 안남돠. 해외인터넷에서 류행되고 있는 연변개그다. 그저 개그로만 웃어 넘길수 없는 대목이다. 해외에서도 거론될만큼 사거리에 나서면 붉은 등을 무시한채 무단횡단을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횡단보도가 마치 자기 집 뒤뜰인양 지축자축 노량으로 지나는 아저씨, 붉은 등을 그 무슨 모델쇼의 조명등으로 아는지 무시한채 교태를 흘리며 지나는 아가씨, 혼자서는 직성이 풀리지않는양 어깨동무 하고 무리지어 지나는 이들... 하기에 순경들이 목청깨져라 소리 지르고 곤봉을 내저으며 질서바로잡기에 마냥 드바쁘다. 그야말로 부끄럽기짝이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보행자와 자전거의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교통사고 및 교통체증을 유발시킬뿐더러 한개 도시와 도시인들의 위상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교통부문에서 교통질서 확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 줄을 긋는다는 것은 방향을 정해주고 기호로 만들어 조직화하는 행위이다. 줄무늬는 자연의 무질서를 질서 있게 정돈해서 정화시키고 재정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을 접하는 횡단보도의 풍경은 줄지은 얼룩말들이 찾은 못가와도 같은 미경이 아니다. 가장 지능화 된 동물로 군림하여 만물의 질서를 규제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기본적인 질서를 흩트리고 있는것이다. 이로볼때 줄무늬도 구도적으로 잘 새겨진 얼룩말의 행동반경은 인간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 질서 바로잡기라는 화두는 다만 교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모두에게 부여된 구체화되고 인성화 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너나가 이 공덕의 대시험장에서 참다운 응시자의 자세를 보일때 이는 량호한 사회품질 및 개인수양의 발현으로 자리잡게 될것이다.횡단보도, 눈과 발로 걷던 그곳을 마음으로 건너본다.  
53    월병소고 (小考) 댓글:  조회:3833  추천:73  2007-06-29
  . 칼럼 . 월병소고 (小考) 김 혁    △ 해마다 추석을 앞둔 이쯤이면 시장은 월병판매공세로 시끌벅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월병이 없는 추석은 상상할 수 없다. 추석이 되면 친지나 이웃들은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월병을 선물로 주고받아왔고 이 풍습은 수천 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중국에서는 추석을 전후해 무려 20만톤의 월병을 먹어치우며 월병 판매액이 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그런데 시장경제 도입 이후 매년 초호화, 초고가 월병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미풍량속이 뢰물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자 이에 국가질량총국과 국가표준위원회는 급기야 이라는 월병법을 만들어 너무 비싼 월병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이라는 긴급조치도 실시, 지난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방안에 따르면 월병 포장재는 월병 가격의 25%를 넘지 못하고 포장 부피도 내용물인 월병의 35%를 초과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이제는 월병의 호화포장을 통한 뇌뢰물수수 관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하북성의 석가장에 황금월병이 등장했다. 월병은 순수 황금으로만 만든 것으로 개당 가격이 2천180원에서 비싼 것은 2만6천160원에 이른다. 황금월병을 만든 상인은 고 강조하면서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적합한 마케팅기법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황금월병이 풍미하는데 대해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라고 비난을 쏟고 있다.  ▲ 한 식구나 친지, 뜻 맞는 사람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나누어 먹음으로써 일심동체 단란을 도모한다 하여 이라고도 불리는 월병이다. 월병은 떡 표면에는 , 등의 길상스러운 글귀가 새겨져있거나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 등 그림이 그려져 있게 마련으로 순탄과 건강장수를 기원하는 저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일년의 신고 끝에 맞는 추석, 수확의 계절에 맞는 첫번째 명절에 둥글고 맛좋고 보기 좋은 월병을 좋아하는 듯 하기도 하다. 따라서 떡이란 곡식으로 만든 먹거리 중에서 가장 맛있고, 고귀하고 정결하다는 리유로 제사나 집안의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준비해 왔는데 떡문화는 이러한 아름다운 것과 먹음직스러운 양쪽 명제를 모두 만족시키는 음식 문화의 대표적인 례이다. 이렇게 한가위를 징표하는 유구한 전통의 음식이 다른 용처의 로 변하고 있는 데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 한다. 지구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먹거리를 만들어 낸 인간들은 유무형의 가치를 미각과 시각적 요소로 환치시키려는 욕망을 끝없이 발산시켜왔다. 그런데 그 욕망이 변형되고 도를 넘으니 그 맛이 외려 쓸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7- 9- 25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2    용두레우물 댓글:  조회:4041  추천:73  2007-06-29
. 칼럼 .   용두레우물 김 혁     △ 우물은 끊임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우물의 위치를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물맛이 좋아야 복덕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우물을 파거나 칠 때에도 반드시 길일을 택했다. 용두레우물은 두레박이 달린 두렛대가 설치된 우물로 이는 기중기와 같은 지레대의 원리를 리용한 것으로서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날 정도로 유래가 깊다. 함경북도나 평안북도와 같은 지방은 날씨가 추워 겨울에도 얼지 않은 물을 구하려면 깊은 지하수를 찾아야 했는데 긴 줄을 다루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용두레를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 룡정은 조선족들이 이주해온 력사가 아주 긴 고장이다. 19세기 7, 80년대에 조선사람들이 이주해와 살면서 이곳을 용드레촌이라 불렀다. 룡정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우물에서 룡이 날아 올라갔다고 하여 룡정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고를 바친 곳의 길상을 기망(祈望)하는 개척민들의 흥감스러운 전설일테지만 여하튼  이 우물로 말미암아 이곳에 마을이 들어서게 되였다. 고증에 의하면 용두레우물은 1839년부터 1880년사이에 조선이민인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 되었다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녀진족이 쓰던 우물이였다.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지자 두레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1934년 11월에 용두레촌의 리기성의 발의로 우물을 수선하고 약 2메터 높이의 비석을 세우고 비문에 이라 새겼던 것이다. 광란의 문화혁명시기, 비석은 는 사조에 의해 홍위병들의 손에 산신이 부서져 자취를 감추었고 우물도 메워져 버렸다. 그러다 1986년 룡정인민정부에서 애국주의 교육과 향토애교육의 차원에서 력사문물인 용두레우물을 수건하고 비석을 복원했다. 지금 룡정지명지우물터는 시민들의 휴식과 국외관광객들이 다투어 찾는 유람명소로 부상되였다. ▲ 용두레우물은 룡정의 상징, 이주민들의 애환의 상징물로 고착되였지만 이 유명 우물에 대한 관리는 미비한 점들을 보이고 있다. 우선 같다던 그 소문난 우물의 물을 마실수 없다. 우물 아구리에 철판을 대고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다. 그러니 진짜 우물보다는 그 무슨 무대세트를 방불케 한다. 관리자에 따르면 우물에 가로 막힌 돌 때문에 우물 밑에까지는 물이 직접 들어오지 못하고 거기에 가설한 지하 20메터 도관을 통해 스위치를 눌러야 우물에 물이 차게 된다고 한다. 그 절차가 번거로워 현재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시정건설은 해마다 진행되고있지만 룡정지명지 우물에 대한 관리와 개선작업은 확연히 뒤떨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우물주위가 트럼프나 화투를 치는 유한자들이 모여드는 장소로 전락되여 살풍경이다. 이라고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민족 문화의 발상지이고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책원지인 고도(古都) 룡정에서 룡정지명지우물이 가지는 의미는 한낱 갈증을 해소해주는 도구의 의미를 넘어 깊고 크다. 과학적인 규획, 원상태 복구와 보존의 원칙하에 보호와 중시 그 대책이 시급하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1    은행나무잎 설레일때 (1) 댓글:  조회:3203  추천:73  2007-06-29
은행나무잎 설레일때- 제6차 중국청년작가창작회의 일지 1 제6차 중국청년작가 창작세미나가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수도 북경에서 열렸다.중국청년작가창작회의는중국작가협회와 중국공청단중앙에서 주최,  중국전역을 상대로 우수한 엘리트들을 선정하여 5년에 한번씩 소집는 전국성적인 대규모의 회의이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소집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제6회에 이르렀다. 중국문단의 엘리트들뿐만아니라 중국56개소수민족작가대표들도 동참해 문학계와 세인들의 주목을 끄는 회의로 자리매김되였다. 이번 세미나에는 전국각지에서 선정되여 온 청년작가 317명(그중 쫭족, 위글족, 몽골족, 장족, 조선족 등 소수민족대표 50여명)이 참가하였다. 필자는 1997년에 하북성 석가장에서 열리는 전국청년창작회의에 처음으로 참석한후, 2000년 전국청년작가대표대회에 이어 세번째로 성대한 문학성회의 대표로 선출되는 영광을 지녔다. 회의개막식은 중국공산당 11기3중전회가 열리는 그 의중깊은 력사적인 장소에서 열렸다. 중국공산당 제17차전국대표대회가 열린 후 잇달아 열린 문학계의 대행사,  회의는 줄곧 사명감과 비전으로 관통된 한차례의 성회였다. 또한 2008년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현장으로 그 뜨거운 열기를 도시 곳곳에서 실감할수 있었다.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리장춘등 지도자들이 회의장에 찾아와 작가들을 위문, 중요한 연설을 하였고 중국작가협회 당조서기 김병화가 기조발언을 하였다. 김병화는 “원항길에 오른 새세기 젊은 문학”이라는 제명의 기조 발언에서 청년작가들은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건설의 홍류에 뛰여들어 대량의 우수한 작품들을 량산, 인민군중의 사상문화소질을 제고하고 날로 증가하는 정신문화수요에 만족을 주는데 커다란 작용을 놀았는바 청년작가군은 이미 우리나라 문학사업의 발전을 추진하고 대번영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력량으로 부상되였다고 격찬하였다. 새로 부임된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은 “청년들에게 넘치는건 힘이다. 그들은 수림을 만나면 평지로 만들고, 들판을 만나면 나무를 심고, 사막을 만나면 우물을 판다”는 로신의 말을 인용하면서 청년작가들의 면모가  중국문학의 미래를 징표하는바 청춘, 격정, 리상, 신념이라는 문학의 원한 주제를 간직하고 문학이라는 심령의 창에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고 생활의 이채로움을 발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회의는 시종 다채로운 활동으로 발에 발을 이었다. 14일, 외교부 부장 장업수의 국제형세보고를 청취, 당전 국제형세의 발전과 우리나라의 외교전략에 대해 알아보았다. 15일, 국방과학위원회달탐측공정센터의 주임 호호의 “상아1호”위성발사성공전후에 대한 주제보고를 들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달탐측공정의 총체적인 정황과 따낸 거대한 성적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어 2006년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에 선정된 무장경찰모부 정치위원 “외팔영웅”으로 이름난 정효병의 보고를 청취하였다.  전시회가 열리는 중국군사박물관 “부흥의 길(復興之路)”은 “대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한 중국의 근현대사를 재조명,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전까지 “대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겪은 굴욕과 분투의 근현대사를 그린 대형전시회이다“부흥의 길”은 역사적인 기록을 바탕으로 작은 단서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중국이 멸망이라는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화민족이 각성하고 길을 모색했던 역사와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개혁 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형성한 과정,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학 발전리념과 조화로운 사회 수립을 위한 이념과 사상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또한 근현대사에서의 굴욕과 수모에서 벗어나 중화민족의 재기와 글로벌 대국으로써의 부흥을 위해 현대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긍지와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17일 대표들은 중국현대문학관을 참관하였다. 로신, 파금, 모순, 곽말약, 정령 등 중국현대문학을 주도한 거장들의 편력과 작품을 소개한 곳에서 청년작가들은 또 한번 대가들의 위대한 정신과 예술적 정취를 한몸으로 만끽할수 있었다. 회의기간 전국각지에서 운집해온 작가들은 청년작가들의 창작성향, 작가대오의 형성, 창작의 새로운 도경과 방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론의하면서  시종 “꿈, 격정, 창작, 생활, 책임, 청춘, 자신, 행복” 등 으로 점철된 토론의 장을 펼쳐 나갔다. 회의가 열리는 철도호텔과 북경의 네거리는 황금색 은행나무잎의 농익은 색조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회의에 참석해 중국청년작가들의 새로운 추구의 향기와 희망찬 조약의 자세와 동조하면서 필자는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황소(黃巢)의 시를 떠올려 보았다. 하늘 찌를 향기 장안에 스며들어(衝天香陣透長安)온 성 모두가 황금갑옷 둘렀네(滿城盡帶黃金甲)    대회주석단, 대회개막식이 열리는 경서호텔은 1978년 중국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이 중국의 전면적인 개혁개방을 선언한곳,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바로 그곳에서 소집되였다.   필자,10년전 처음 참석했을때의 발랄함과는 달리 이제 청년작가라는 호칭을 떠나야할 시점에서 참가한 회의로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회의장 일각, 전국각지에서 선출된 317명의 대표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리장춘등 지도자들이 회의장에 찾아와 작가들을 위문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우요동(만족), 필자, 절강성 소주에서 온 조선족 녀류작가 리진화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188341');
50    은행나무잎 설레일 때 (2) 댓글:  조회:3086  추천:73  2007-06-29
    은행나무잎 설레일 때 - 제6차 중국청년작가창작회의 일지 2나의 소수민족 문우- 아부리커 애신   창작회기간 나와 동숙(同宿)한 문우는 신강에서 온 위글족 작가 아부리커무 애신이였다. 동화작가인 그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긍지감을 크게 갖고 있는 작가였다. 위글족의 생활상에 대해 어눌한 한어로나마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고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여 있는 귀여운 두 오누이의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실한 무슬린 신교자인 그는 대회에서 마련한 성찬을 거부하고 회의기간 내내 멀리 밖에 있는 청진사에서 꾸리는 식당으로 가서 간소한 식사를 하였다. 그 역시 우수한 위글족 작품들이 중국문단에 적시적으로 소개되지 못하고 더 넓은 무대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황에 대해 걱정을 품고 있었다. 20여부나 되는 대하소설을 창작한 걸출한 위글족 작가도 있지만 외인들은 그에 대해 알지못한다며 통탄하기도 했다.  위글족, 장족 등 소수민족 대표들과 함께   소수민족문학의 활보와 그 향후 진로에 대한 사고는 대회에 참가한 소수민족작가들 너나가 괘념하고 있는 동질성의 문제였다. 이면에서 많은 소수민족작가들은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솔직히 대회에 참가하여 나는 처음으로 흘로(仡佬)족이라는 소수민족에 대해 알게 되였다. 회의기간 활달한 성미로 뭇눈길을 끈 흘로족 대표 왕화는 20세 초반의 애된 처녀였다. 그의 고향은 귀주성의 변연지구, 오지인지라 마을에 결혼하지 못한 홀애비만도 500여명이나 된다고 했다. 문학에 심취되여 작품들을 륙속 발표하였으나 어느 출판사도 그의 작품을 책자로 묶어주려 하지 않았다. 작품은 훌륭하나 시장이 없다는것이였다. 왕화가 작품속에 써넣은것은 우유차를 마시고 참깨떡을 먹는 흘로족의 낯선 모습이였던것이다. 그의 창작재질을 보아내고 출판상들은 도시제재를 쓰거나 혹은 드라마 시나리오를 창작하라고 귀뜸해 주었다. 허나 이 붙임성 좋지만 주견이 뚜렷한 흘로족 처녀는 자신의 창작자세를 한사코 버리지 않았다. 우유차와 참깨떡으로 뼈를 굳혀온 고향에 대한 끊임없는 묘술이야말로 그자신의 창작과 힘의 원천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하기 직전 왕화는 금방 장편소설 창작을 마쳤다. 역시 흘로족의 특유의 생활상을 그려낸 작품, 작품의 제목은 “가원(家园)”이였다. 대회기간 마련한 련환회에서 그가 부른 노래는 “고향길 18리”였다. 전업가수를 뺨치는 구성지고 격앙된 노래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녀의 생활자세와 창작자세를 읽어낼수 있었다. 적지않은 소수민족작가들은 웅심을 가지고 있으나 자비감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소수민족지구의 소수민족작가이기에 고독과 무원조함 그리고 분위기의 삭막함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비감과 렬세를 억누루기위한 방편으로 기꺼이 창작에 림하고 있었다.    운남성 소통의 소수민족작가들이 이룩한 “소통현상” 또한 우리에게 많은 계시를 주었다. 운남의 1500여명 작가들중에 소수민족 작가는 나시족, 푸미족, 하니족, 이족등으로 겨우 58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적은 수효였지만 이미 일정한 소수민족 작가군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적지앟은 문학동호회가 결성되고 열정적인 문학애호가들로 어우러졌다. 그들은 시종 엄숙한 창작자세를 견지하면서 력사문화의 훈육속에 시종 자기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소재로 삼았다. 이 문학대오는  문학분위기의 군체적형성에 주의를 돌림으로써 뛰여난 응집력으로 많은 문인들을 조직하여 자신의 생존상황에 대해 적시적으로 표달할수 있었다.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이들은 중문으로 창작활동을 구사할수 있었으나 근래에는 자신들의 모어로 창작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를 가리켜 “창작에서의 본연에로의 회귀”라고 기꺼이 말하고 있었다.   고비사막에서 천애지각에서 심심산골에서… 전국의 방방각지에서 모여온 소수민족 작가들에게서는 저저마다 농후한 생활습성에 안받침 된 심후한 문화충적을 독특한 언어매력으로 표달해내며 문학의 “본색”에로 접근하려는 몸부림이 엿보였다. 고향의 외진 환경은 외려 그들에게 더 큰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신구사물이 교차하고 다종사물이 병존하는 고향, 력사가 유구하고 인문환경이 극히 풍부한 고향은 창작의 가능성을 다각적으로 마련해 주었고 더욱 큰 정신적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자기민족의 견인함과 돈후함, 근로한 품질, 그리고 고집과 협애 봉페된 정신상태는 모두 창작소재로 될수 있었는바 이 속에 흐르는것은 민족의 령혼, 골격과 정신이였다. 이를 흡수하고 융합시키고 저장시키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면모와 정신세계를 창조해 냈다. 물욕이 팽배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경배가 와해되는 대배경속에서도 소수민족작가들은 자신의 우수함과 렬근에 대해 동시에 꼭 붙잡고 놓지않고 있다. 신구관념의 격돌과 복잡한 생활환경속에서 그 고유함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고 리해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해 알고 깨치고 다시 돌아보는 와중에 그들은 페쇠에서 벗어나 초월에로 이를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많은 작품에서는 무병신음이나 거짓이 보이지 않고 묵직한 자세가 보였다. 지금 우리조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에 부침(浮沈)을 겪고있으며 우리의 문학이 과연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반성과 모색이 더욱 요청되는 때이다. 문학을 명예나 날리고 고독이나 달래는 소일거리로 대하며 섣부른 안주에 빠지는가 하면 작가들이 상업주의와 영합하여 싸구려 시정배 꼴이 돼 버리는 작가들이 보이는 요즘이다. 자기 의존적 가치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실과 괴리되여 바라만 보는 관조미학의 온상 속에서 자기 소모적인 글쓰기에 정력을 허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박한 현상이 우리 문학의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탁월한 소명의식을 지닌 다른 민족작가들의 작품, 작가들을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시대정신과 민족적인 문화의식이 뚜렷하게 결합되면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그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소수민족작가만의 독특한 창조적인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관여하면서 문학이 우리 삶의 경험이 되도록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코드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공동체의 운명 속에 몸을 던지고 우리의 삶과 인생에 따뜻한 시선을 주면서 우리 사회가 겪고있는 각종 문제들을 아우를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문학적인 기법과 장치를 리용하여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그러한 삶의 의지, 혹은 소망을 다각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만의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문학의 가장 선차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봉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우리만의 생각을 글에 담는 작가들이 많아야 우리의 소수민족문학이 살고 우리의 개개인의 문학이 세월과 지역의 시련을 이겨내고 불후에로의 접근을 시도할수 있게 될 것이다.   (계속)     련환회에서 열창하고 있는 소수민족대표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15227');
49    은행나무잎 설레일 때 (3) 댓글:  조회:3512  추천:73  2007-06-29
은행나무잎 설레일 때- 제6차 중국청년작가창작회의 일지 3  오감만족, 뮤지컬의 매력  회의기간 대표들은 미국의 뮤지컬 대작 “42번가”를 관람하였다. 변강의 오지의 작은 도시에서 뮤지컬은 TV에서나 DVD물로 간혹 접했지만 극장에서 피부로 접할 기회는 적었다. 더우기 연출팀 전원이 미국에서 날아 온 오리지널팀의 공연이라 행운과 같은 기회였다. 중국송경령기금회와 동방국제극장유한회사에서 손잡고 이 풍성한 향연의 중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련했다. 1700명의 좌석을 갖고있는 북전(北展)극장은 관객으로 차고 넘쳤다. 관람권은 보통석 280원에서 귀빈석 2300원으로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극장문전에는 표를 사지 못해 아쉬워 하며 극구 표를 구해보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공연을 앞둔 시간에 관람권과 함께 배당된 팜플렛을 자세히 읽었다. 1980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42번가”는 력동적인 탭댄스, 화려한 의상, 빠른 무대전환 등으로 가장 짜릿한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서만 6천 여회의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일찍 2001년에는 희극계 최고상인 토니상 3개 부문을 수상했다. “42번가”는 1930년대 대공황기에 브로드웨이의 중심인 42번가를 배경으로 스타를 꿈꾸는 청순발랄한 새내기- 주인공 페기가 노력에 의하여 일약 시골처녀로부터 스타로 탄생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그렸다.야망과 사랑을 겸비함 연출자, 거만한 스타 녀주인공과 복잡한 남자 관계, 삼각관계와 오해, 녀주인공의 발목 부상으로 인한 공연 중지, 이로 인해 예상치 않은 행운을 잡아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새내기, 연출자와의 사랑의 성취… 열정을 바치는 무용수와 눈부신 무대장치는 관객의 숨을 가쁘게 몰아갔고, 그 와중에 무명배우가 스타로 되는 일대기가 관중들앞에 박진감있게 펼쳐졌다. 눈부신 금빛, 은빛 의상으로 치장한 배우들의 군무가 호화로운 아름다움과 눈요기 거리를 가득 펼쳐 놓으며 과거의 향수에 빠져 들고자 하는 관객들의 감수에 불을 지폈다. 특히 무대아래 30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가 직접 연주하는 라이브 무대는 감동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경쾌하고 정확하게 떨어지는 비트, 숨막히는 탭, 번쩍이며 흔들리는 스팽글 의상,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센세이셔널한 노래, 마법처럼 춤추는 탭 탭 탭…” “귀에 가득, 눈에 가득, 가슴에 가득!! 눈부시다!!” 등등이 “42번가”에 대한 매스컴의 찬사였다.  무대왼편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흐르는 자막을 고개를 꺾으며 읽어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경쾌한 속도감과 무대 공간의 충만함은 훌륭했고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공연 내내 갈채가 이어졌고 극이 끝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하여 몇분동안 이어진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은 산업혁명이후 서민들의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바탕으로 태여났다. 현대적인 뮤지컬이 처음 탄생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 신대륙에 뮤지컬의 씨가 최초로 뿌려진 것은 영국의 식민지 시대인 1751년으로 알려진다. 이때 영국의 발라드 오페라인 “거지오페라”가 있었는데 실제는 이보다 훨씬 앞선 1730년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폴로라”라는 발라드 오페라가 공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20세기로 넘어 오면서 뮤지컬은 황금기를 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과 련이은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정서적 상처를 입은 대중들은 좀 더 락천적이며, 유희적인 문화를 갈망하게 되였다.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의 불바다였던 유럽대륙에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전된 뮤지컬은 새롭게 변신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예술 쟝르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사운드 오브 뮤직(音乐之声)”이 당시의 대표작이다.보다 락천적이며 유희적인 요소와 거대한 사업 흥행제작자에 의한 막대한 투자와 스타배우중심의 전국적인 순회공연을 통하여 대중적인 예술로서 뮤지컬은 성공하게 되였다. 이어 1960, 70년대는 뮤지컬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이때 역시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되어 뮤지컬의 락천적인 면이 사라지는 반면에 사회적 문제들이 사실적으로 반영되는 진지한 작품들이 나왔다. “에비타”, “캐츠(猫)”, “오페라의 유령” 등이 당시 상업적으로 대성공한 문화 상품들이다.뮤지컬은 복고적인 주제와, 오페라가수를 능가하는 뮤지컬전문연기자의 가창력과 연기, 컴퓨터를 리용한 스펙타클(壮观)한 무대미술과 현장감 넘치는 음악. 그리고 이를 뒤받침하는 기획사의 엄청난 제작능력으로 전 세계 관객을 감동시키며, 그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뮤지컬 “42번가”는 북경뿐아니라 상해, 남경, 무한, 항주 등지에서도 80여차례 공연, 공연마다 관객들이 자리를 빈틈없이 메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소주에서의 VIP표 가격은 지어 2만원에 달했지만 모두 팔렸다고 한다.  뮤지컬의 때늦은 풍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풀이하면 우선 뮤지컬의 독보적인 존재때문이다. 본국에서 제작진 및 출연진이 바로 그대로 넘어와 “정통적 고급품” 이미지가 강하다. 뮤지컬 공연은 오늘날 무엇이나 복제가 쉽게 되는 사회에서 비복제 문화로 존재한다. 대중적이고 유니크하고 특별한 장르이다. 이러한 존재가 뮤지컬의 매력을 가배시켰다. 또 사실상 뮤지컬이라는 형식 자체는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니 대중이 소화하기 어렵지 않은 쟝르다. 중국인들의 뮤지컬 이란 쟝르에의 애착은 갑자기 생겨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장르 자체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다만, 뮤지컬 공연 문화가 시대흐름을 타고 떠올랐다 봐야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뮤지컬의 구성도 자유롭고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최근 뮤지컬에는 록과 랩, 재즈 등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음악들이 극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 변화의 몸짓이 고급계층만이 아닌 여러계층의 사람들을 안방에서 극장으로 불러들인것이다. 또한 중국인들의 달라진 문화소비 형식 때문이였다. 풀이해 보면 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고급문화” 향유 붐에 의해 뮤지컬이 새로이 떠올랐다 봐야할 것이다.요즘 우리의 일상은 인터넷, 텔레비죤, DVD등 형형색색의 참조계의 자극적인 현란함에 너무나 많이 로출되여있다. 따라서 우리의 순수했던 감각 신경에 굳은 살이 두텁게 안자있다. 그 무뎌진 감각을 새롭게 깨워준 뮤지컬이였다. (계속)   관람 티켓과 팜플렛
48    은행나무잎 설레일때 (4) 댓글:  조회:3627  추천:73  2007-06-29
은행나무잎 설레일때- 제6차 중국청년작가창작회의 일지 4 20세기 중국문학의 전당- 중국현대문학관회의의 마지막 날인 17일, 대표들은 중국현대문학관을 참관하였다. 필자는 2000년 청년작가대표대회에 출석하던시 처음 문학관을 참관했고 이번이 두번째, 하지만 감동은 여전하였다.중국현대문학관은 중국 북경시 조양구(朝陽區) 문학관로(文學館路) 45호에 자리잡고 있는데 2000년 5월에 정식으로 개관하였다. 이 문학관은 현대문학관 신관으로서 북경만수사(萬壽寺) 서로(西路)에는 중국현대문학관 구관이 있다.            1981년 2월 14일, 중국현대문학의 거두인 파금(巴金)선생이 처음으로 중국현대문학관 건립을 제안하였다. 중국작가협회위원회에서는 회의를 소집하여 현대문학관 건립 제안을 론의하고 중앙정부에 사업 착수를 건의, 이로부터 4년 뒤인, 1985년 3월 26일에 중국 현대문학관의 성대한 개관식을 가지게 되었다. 1993년 4월, 강택민주석이 중국현대문학관 신관 건립에 관한 파금선생의 새로운 건의를 받아들였다. 1996년, 국가계획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국고에서 자금을 마련, 중국현대문학관 신관을 건립하기로 결정지었다. 신관은 세 번에 나누어서 시공에 착수, 건축면적은 14만 평방메터였다. 그해 11월 25일에 드디여 문학관신관 시공의식을 가졌는데 강택민주석이 직접 참가하여 휘호를 남겼다. 1999년 9월 20일에 신관이 준공, 이사를 하기 시작하여 2000년 5월 하순에 정식으로 개관을 하기에 이르렀다. 파금은 중국 현대문학관의 건립을 정부에 제안한 뒤 꾸준히 이를 추진해 결국 병석에서 소원을 이뤘다. 그는 문학관 건립을 위해 82년에 원고료 15만원과 8000여권의 소장저서를 기증함으로써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전국 각계각층으로부터 모두 300만원의 성금이 답지했고, 문학관은 마침내 문을 열었다. 이날 파금은 병석에서 TV를 지켜보면서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지금 문학관 출입문의 동으로 만든 손잡이는 파금선생의 손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문학관의 설립을 위해 로심초사했던 위인과 악수를 남길수 있다.     중국현대문학관 신관은 모두 4층에  걸쳐 4개의 전시대청이 있다. 1층 입구에는 지난 100년 동안 사회적 격동기를 이끈 작품중 주인공들의 모습이 벽화에 새겨져 있다. 제1층은  “20세기대사풍채" 전시대청. 중국현대문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로신과 파금, 모순등의 얼굴이 선참 보인다. 이밖에도 로사(老舍) 곽말약(郭末若) 정령(丁玲) 주양(周揚) 애청(艾靑) 등 유명 작가의 저술은 물론 그들의 육필 원고와 일기, 편지, 번역서, 사진, 영화와 유품 등 갖가지 관련 자료가 보존, 전시돼 있다. 제2층은 “중국현대당대문학" 전시대청인데 주로 20세기 중국현대당대문학발전개황 및 그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3층은 “작가문고" 전시대청인데 유명 작가나 기증자들의 문고가 만들어져 있다. 책상과 펜 서고 등도 함께 있는데, 이처럼 기증받은 문고가 70여개라고 한다.지하1층은 “문학관장서표원작" 전시대청인데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52명의 화가들이 중국현대문학관의 개관을 기념하여 그린 장서표들을 전시하고 있다. 문학관내에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갖춘 다기능대청이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문학좌담회라든가 연구토론회 및 강연회 등 모임을 가지기도 한다. 이 외에도 또  TV청과 후기제작실, 커피숍과 음식점 등이 설치되어 있어서 문학교류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중국현대문학관 신관은 아름다운 원림속에 자리잡고 국내외의 유명한 미술가, 조각가, 공예가들이 신관의 건립을 기념하여 창작한 벽화, 작가조각상, 작가의 서명이 찍힌 도자기 등 많은 예술품들이 진렬되여 있다. 로신의 얼굴을 비롯해 대표적인 작가들의 동상이 실제인물 크기로 곳곳에 배치돼 있다. 널찍한 공간, 작가의 정신과 예술적 정취가 한데 어울리는 풍경이다.운영은 작가협회가 주도, 로사의 아들인 서을(舒乙)이 초대관장을 맡았고 지금은 저명한 작가 진건공(陈建功)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중국현대문학관은 중국현대문학의 자료연구센터로서 국가급 박물관, 즉 문학박물관, 문학도서관, 문학당안관 및 문학자료연구와 교류센터 등 여러 가지 역할과 기능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문학 연구를 뒷받침하고자 모든 관련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놓았다. 중국현대당대작가들의 저작, 초고(手稿), 역본, 서신(書信), 일기, 록음, 록화, 사진, 문물 등 문학당안 자료들과 이와 련관된 저작평론, 문학간행물, 신문 등을 수집하거나 보관 또는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문학연구의 본산으로 자리잡고 있다.중국현대문학관에서는 문학의 정치적 관점, 예술적 유파 및 풍격에 관계없이,  20세기 이래의 신문학자료 모두를 수집하고 있다. 특히 향항, 오문, 대만 및 해외 여러 작가들의 작품과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문학관에는 30여만건의 기념품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서적이 17여만 권, 잡지가 2천1백여종 보존되어 있으며, 142종의 신문과 1만970건의 육필원고, 8천282점의 사진과, 7천887건의 서신이 보존되여 있고, 453개의 록음테이프와 773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물 2천959건이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문학작품과 작가를 연구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들이며 소중한 문물이기도 하다.20세기 중국의 작가 상당수는 암울했던 구시대의 폭력과 퇴행에 맞서 자유와 진보의 정신을 일깨운 첨병이었다. 오늘날 이들의 작품은 이곳에 정연하게 소장되여서 더욱 널리 읽히고 현대문학은 물론 중국 건설에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의 삶과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전시회와 세미나가 여기서수시로 열린다그중 괄목할만한 성과는 문학관의 “중국현대작가대사전”으로서 1992년 1월에 신세계출판사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며 1994년에는 영문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외에도 “당대대만작가대표작대계”를 공동으로 편집, 1993년에 장강문예출판사에서 출판하였고 1997년에 편집하기 시작한 “중국현대문학백가”총서는 108명의 현대작가들의 선집모음으로서 화하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또 한편 국내외 여러 계층과 광범한 교류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데 “구추백(瞿秋百)생평전람", “파금창작생애60년전람", “빙심창작생애70년전람", “로사(老舍)창작생애전람", “엽성도(葉聖陶)창작생평전람", “모순(茅盾)백년기념전람" 등의 행사를 활발하게 전개하였다.“중국현대문학연구총간”이라는 계간지를 내고있고 외국의 문학박물관과 정보 교환도 활발하다. 일본근대문학관, 독일연구협회, 향항대학 등과 업무상 련계를 가지고 있다. 1998년에는 중국현대문학관과 하남대학은 공동으로 현대문학박사학점을 설립하였다. 문학관을 찾은 해외문학인들과 문학애호가들은 국가적인 투자로 이렇게 드넓은 공간에서 문인들이 만나고 토론하며 작품을 탐구하고있는 공간이 자국에서는  미비하다며 부러움과 격찬을 금치못해 하고있다.세상에는 문학에 생애를 기울인 그의 작가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문학관이 많다. 그것은 전시효과의 착상에 따라 도서관, 미술관, 영화관, 박물관 등으로 개념이 달라져 확장된다.정지된, 생명력 없는 유물 전시관, 박물관도 적지않다. 현대의 박물관 전시관의 의미는 그런 썰렁한 거리감이 배제돼야 한다. 고인의 위패를 안치한 사당이나 제각일 수 없는바 피가 통하는 전시관으로 달라져야 할것이다.보다 활발한 홍보와 그 보급효과를 통해 문학장소가 지속적인 문학 마케팅의 모델 하우스이게 할 시대이다. 지금 문학관 앞길은 문학관로라고 불린다. 중국 20세기문학의 집대성으로서의 중국현대문학관은 수도 북경의 또 하나의 자랑스런 문화경관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다 (끝)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546128');
47    무자년 단상 댓글:  조회:2835  추천:73  2007-06-29
 . 문화칼럼 . 무자년 단상 독고혁  1 세방살이에 밀려 부초처럼 떠돌 때의 일이다. 세방값이 싼 쪽을 택하다보니 시교쪽에서 지낸적 있는데 그 세집이 밭과 가까워 쥐가 들끓었다. 몇천권에 달하는 소장한 책들을 마땅히 둘곳 없어 헛간에 까지 무져 두었는데 그 집을 떠나오면서 보니 맙시사! 책들이 쥐떼의 화를 입은것이 아닌가! 쥐들이 하필이면 책을, 한 두책도 아니고 무려 백여권 되는 책을 썰었는데 어쩌면 한결같이 서배(書背)를 썰어놓은 것이였다. 분석해 보니 책을 제작할 때 바른 서배의 풀을 핥고 갈아 먹은 것이였다. 그때로부터 원체 혐오스러운 형상의 쥐는 나에게서 가장 꺼리는 동물의 1순위로 각인되였다. 2 새해가 되면 보통 그 해의 띠로 상징되는 동물의 의미를 담아 덕담을 건네곤 한다. 그러나 올해는 사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다름아닌 쥐띠해이기때문. 쥐에 대한 이미지는 늘 부정적이다. 쥐는 농작물을 해치고 곡식을 훔쳐먹으며 불결한 곳을 들락거리며 전염병을 옮기기도 한다. 이에 인간들은 옛날부터 쥐 퇴치에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지탄의 대상이 되여온 쥐이기에 관련된 속담이나 표현도 부정적인 면이 더 많다. 쥐뿔도 모른다, 쥐 뜯어먹은 것 같다, 쥐포수 같다(사소한 리익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을 비유), 쥐구멍에 홍살문 세우겠다. (가당치 않은 일을 주책없이 이루려함을 이름), 쥐구멍으로 소 몰려 한다. (도저히 되지 않을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듦) 하지만 사실 쥐는 인간과 가장 인연이 깊은 동물이다. 이미지와는 달리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도 깊다.쥐는 지구상 인류와 함께 가장 널리 분포됨을 자랑하고 있다. 구석기 유적의 화석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쥐가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함께 해온 것을 알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에서 쥐가 사라지면 집이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집을 수리했고 쥐들이 높은 지대로 이동하면 홍수가 날 징조로 보고 그에 대비했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과 떨어질수 없는 컴퓨터, 그 조종기 격인 마우스- 역시 영어로는 쥐라는 뜻이다.  쥐띠는 평생 부자로 산다고 알려져 있으며, 근면하고 성실하게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쥐가 선천적으로 눈치빠르고 어려운 여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습성에서 나온 것이다.  쥐는 력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표상으로 나타난다. 중국에서 갑을병정(甲乙丙丁) 등의 십간(十干)과 자축인묘(子丑寅卯) 등의 십이지(十二支)의 글자를 아래우로 맞추어 날짜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3천년 전, 이것을 년대로 표기한 것은2천년 전, 한대(漢代)로 부터였다. 십이지의 첫자리에 쥐가 놓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하필 많은 동물 중 쥐가 첫자리에 놓이게 되였을가? 사연을 말해 주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동물들에게 지위를 주고자 했다. 그 선발 기준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월 초하루에 제일 먼저 천상의 문에 도달한 짐승으로부터 그 지위를 주겠다고 했다. 정월 초하루가 되여 동물들이 앞다투어 달려왔는데 소가 가장 부지런하여 제일 먼저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소에게 붙어 있던 쥐가 뛰어내리면서 가장 먼저 문을 통과하였다. 쥐는 자신의 한계를 일찍 파악하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결국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것이다. 쥐는 문화적으로 재물, 다산, 풍요기원의 상징으로 간주되였으며 그 근면성과 인내력은 칭찬을 받아 왔다. 농사의 풍흉(豊凶)과 인간의 화복뿐만 아니라 배길의 사고를 예시하거나 꿈으로 알려주는 령물로 받아 들여졌다. 문학 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중국 최초의 시가집인 “시경”의 “석서(碩鼠)”편에는 큰 쥐가 백성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거둬들이는 것을 탓하는 장면이 있다.… 큰 쥐야 큰 쥐야 우리 식량 앗아가지 말라/3년이나 널 보살폈는데도 날 보살필 생각은 없구나/이제 너를 버리고 저 평화로운 지역을 찾아가련다 다산 정약용의 노행(奴行)이라는 시에서 쥐는 간신과 수탈자에 비유된다.…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기름 마르고 피 말라 뼈마저 말랐다네 이 작품들에서 쥐는 폭정을 일삼는 임금을 은유하고 군주의 정치가 간신배들에 의해 피폐화됨을 나타내고 있다.  3 대망의 2008년 무자년(戊子年) 새해가 밝았다. 무(戊)는 만물이 자라서 풍성하게 얽혀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 자(子)는 태아가 자리 잡은 모습을 본뜬 글자로 자손을 의미, 글자풀이만으로도 풍성함을 의미한다. 또한 쥐는 12지 동물의 으뜸으로서 새로운 한 시대를 열어가는 상징적 의미도 지닌다. 강한 활동력과 부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21세기에 사뭇 어울리는 띠라고도 할 수 있다. 올해 무자년, 쥐의 지혜와 생명력으로 희망을 열어가는 풍요로운 한 해가 됐으면 한다.       기자 블로그: http://blog.hani.co.kr/kh99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8- 2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2165015\');
46    문인존중 댓글:  조회:2971  추천:73  2007-06-29
  . 문화칼럼 .  문 인 존 중 김 혁   1 오랜만에 동창만회를 했다. 당년의 애송이들이 이제는 불혹의 나이가 되여 만나게 되니 사뭇 흥분된 심정이였다. 그러나 흥분은 얼마 안되여 곰삭고 말았다. 적지 않은 작품을 량산하고 작가라는 수칭을 달고 있는 신분이였지만 나의 작품을 읽은 동창생이 거의 없었다. 개인적인 고까움은 제쳐놓고 애들의 시선은 온통 일본에서 10여년 돈벌이를 하고 돌아왔다는 동창에게로 몰부어져 있었다. 학교적엔 중등에도 못가는 애였는데 어쩌구려 졸부가 되여 돌아오니 상대접을 받고 있었다. 동창만회는 그 녀석의 독주로 되여 갔다. 기분이 사물사물 좋아진 녀석은 지갑에서 지페 몇장을 꺼내 흔들며 <<니들 일본돈 구경해 봤냐>>고 흥감을 떨었다. 그러자 동창들이 그 무슨 희세의 진품(珍品)이라도 구경하듯 하며 필요이상의 감탄들이 자지러졌다. 나는 싸인해 지니고 갔던 나의 신간도 선사하지 못한채 역시 쓴 입을 다시는 몇몇과 함께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정성껏 펴낸 저서보다 얇다란 외화 몇장이 외려 더 인기인 풍토, 나는 그 밤을 개탄과 실면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동창생과 동창만회보다는 외화나 치부담쪽에 잔뜩 신경이 쏠려있는 동창생들이 알는지 모르지만 사실 엔화에는 다른 화폐들과는 달리 작가들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나쓰메 소세키 구권 1000엔 화폐에 그려진 사람은 일본 <<사소설의 대가>>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널리 알려진 그는 근대 일본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처한 곤경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명료하고 설득력있는 문장으로 그려낸 일본 최초의 소설가이다. 많은 대작을 남겼으며 작품에서 다룬 자아의 문제는 당시 일본이 겪은 사회적 갈등임과 동시에 영원한 테마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히구치 이치요신권 5000엔 화폐에 그려진 녀자 또한 소설가이다. 히구치 이치요. 근대의 려명기인 메이지시대를 한 자루 붓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치요는 1896년 스물넷이라는 짧은 생애로 요절했지만 <<흐린 강>>, <<십삼야>>등을 발표하고 <<키 재기>>로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평론가들에게 극찬의 대상이 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녀는 일본 최초의 녀성작가, 메이지 문단의 천재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본의 <<문인존중 풍토>>가. 국민들이 매일 같이 쓰는 돈에 작가들의 삶과 형상을 기록함으로써 일본을 빛낸 지성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그들의 태도는 참으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2  여기 문인존중의 사례들을 몇 개 뽑아본다-  아담 스미스  영국,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 스미스가 한번은 공작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가 객실에 들어섰을 때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 신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스미스가 매우 어색해 하면서 모두더러 앉으라고 했지만 곁에 서있던 피트 영국수상이 정중하게 <<당신이 먼저 앉지 않으면 우리도 앉지 않을 것입니다. 학생이 어찌 선생님에게 자리를 내여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고 말했다고 한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무뢰한 하나가 길에서 말다툼하다가 싸움을 말리는 신사의 멱살도 함께쥐여잡았다. 그러던 그 무뢰한의 주먹이 스르르 풀렸다. 싸움을 말리던 상대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였던것이다. <<당신의 시를 제 녀자친구가 가장 애송하고 있답니다>> 시인의 명작품은 치한(痴漢)의 광기도 주눅들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똘스또이 로씨아, 역전에서 려객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려는 급한 일념에 창문으로 행리를 던져넣었는데 그만 한 사람의 몸에 맞고 말았다. 뒤미처 차에 오른 그 려객의 얼굴이 금시 붉어졌다. 려객이 어눌한 소리로 말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존경하는 레브똘스또이님>>그 려객은 연신 사과하고나서 사뭇 흥분되여 려행도중 내내 톨스토이의 작품에 대해 담론했다고 한다. 3  일전 <<환구시보>>에 론평 한편이 실렸다. <<지식인을 존중하는 사회풍토를 만들자>>라는 표제의 론평은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 영국의 세계적인 거장으로는 쉑스피어를 떠올릴 수 있고, 독일에서는 괴테, 칸트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루소와 빅토르 유고 등을 꼽을 수 있다.안타깝고 부끄럽지만 중국에는 이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거의 없다. 비록 중국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가>> 혹은 저명한 인물로 불리고 있지만 이들은 세계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3억 인구대국 중국으로서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다.론평은 수천 년 문명대국인 중화대륙에서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을 분석, 중국의 사회 기풍과 문화적 토양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일침을 박았다. 참으로 우리들의 사회구조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 론평이였다. 작금의 사회 분위기를 한 단어로 표현해보자면 <<물욕의 년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추구하는 것은 물질차원의 부이며 갈망하는 것 역시 그것이다. 사회에서 기준하는 한 사람의 성공 척도도 역시 물질의 많고 적음이다. 물질주의가 지배할 때 경박한 행위도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정이 희박해지며 도덕도 상실되고, 매일 분주하게 뛰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풍토가 이러하니 그런 시선에서 문인들이 뵈일리 없는것이다. 수십권의 책을 펼쳐낸 문인들보다 한 개의 영업방 업주, 하다못해 해외 노가다판에서 구을다 와도 괴춤이 두둑한 이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바뀜하는 요즘의 풍토다. 아무리 우리 문학인들이 사회에 대한 절절한 애정을 붓끝에 담고 사회의 요모조모를 세세히 조망하고 있어도 말이다.  옛날에도 지금에도 배고픈 문인, 예술인이 많다. 그래서 각오없는 사람은 감히 그 길을 걷지 못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고된 외길을 줄다리기하며 문학다운,예술다운 지성의 터밭을 일구어낸 이들, 맑은 혼과 실천하는 량심으로 어제의 어둠을 거두고 래일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그들이다. 그들의 로고가 있었기에 우리는 문화생활의 즐거움을 간택(揀擇) 할수 있었다. 즐거운 삶을 향유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그렇게 본디 존경의 대상이 되여야 마땅할 문인들이 요즘 일부에서는 그 최소한의 선망마저 고갈되여 가고 외려 무시, 조소, 타매의 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는 때로는 현실적인 권력과 힘의 론리를 생산하는데 앞장서고 갖추어야 할 덕목을 버리는 있는 문인들이 보이기에 파생되는 폐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바 다수의 문인들은 아직도 공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끊임없이 자각하며 참된 글짓기에 자신을 바치고 있다.  이어령 한국의 석학 리어령은 이러한 행태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문화라는 게 원래 보이지 않는 실이에요. 문학의 대상을 텍스트(text)라고 하고 옷감을 텍스처(texture)라고 하잖아요. 문화나 옷이나 같은 계통이얘요. 허구지요. 자연계에 비추면 인간의 (제도를 포함) 모든 것이 허구입니다. 그것을 리얼리즘으로 벌거벗겨 버렸을 때 존경할 대상을 잃고 문화자체가 붕괴, 야만과 반달리즘(도시의 공공시설이나 문화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 으로 욕망과 알몸으로 만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권위와 존경을 받았던 계층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까지 모두 벌거벗겨 버렸어요. 어떻게 다시 이들에게 옷을 입힐지 걱정입니다.>> 존경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가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존경이라는 것이 생성되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을 우리는 일회용시대, 속찬시대라 일컫는다. 그래서 공리화, 자신이 중심이 되는 나르시시즘이 팽배하면서 거래나 계약대상은 있지만 존경의 대상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은 일회용 속찬이 아닌 무궁한 정신적 식량을 생산하고있는 지성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여 이끌어가는 사회가 되여야 이 사회가 진정 합리적이되고 론리적인 사회로 변모할수 있다는 것이다이 가치의 무정부 상태에서 실추된 문인과 문단의 위상을 살리고 공동체를 조화시킬 존경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안타깝고 궁금하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4381816');
45    축배가 댓글:  조회:3616  추천:73  2007-06-29
. 칼럼 .   축 배 가 김 혁     1, 축배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부르게 작곡된 친목적인 주제의 노래를 일컫는것으로서 19세기의 오페라에서 관례적으로 나온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유럽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축배의 노래는 미국 뮤지컬에도 고정적으로 나오는 노래가 되였다. 20년대 미국의 어느 한 극단의 책임자는 미국 의회에 출두해 축배의 노래가 금주령에 의해 위축됨으로써 미국 뮤지컬 극단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며 금주령에 대해 항의하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각나라에서 “축배”의 참뜻은 “건강”이라 한다.   만찬에 초대한 손님과 잔을 높이 들며 "건강을 위하여!"하고 건배하는 오늘의 품습은 우정을 강조하고 래일을 기원하는 흐뭇한 제스처라고 하겠다.    2, 마시자/즐거운 잔속에 아름다운 꽃이 피네/마시자/사랑의 잔속에 참행복 얻으리다 오페라 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이딸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제1막 제2장에 나오는 유명한 권주가 “축배의 노래”의 한 구절이다. 이는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부르는 축배가이기도 하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가 배출한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8년 발표한 유명한 소설 “동백꽃 아가씨”가 원작. 빠리 사교계의 빛나는 무희, 그 불같은 사랑과 비극적 운명으로부터 사랑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인간적인 헌신을 보여준 명저이다. 소설의 호평에 힘입어 작자는 이를 5막의 희곡으로 각색, 1852년 상연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세계 3대 테너인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카레라스가 각축전을 벌리듯 이 축배가를 불렀었다. 조선족의 유명한 성악가 김영철과 림정도 중앙TV에 출연하여 이노래를 열창한적있다. 음악과 문학의 조화, 거기에 연기와 연출, 무대미술, 조명, 의상 등의 요소가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룬 유명한 오페라, 유명한 축배가이다.  3, 우리 조선족에도 축배가가 만들어 졌다. 중국의 소수민족들 저마다 자기민족의 축배가가 있는 반면 〝노래와 춤에 능수능란한 민족〞이라 지칭(指稱)되는 우리 조선족에게 자체의 축배가가 없는 실정을 감안, 연변음악가협회가 “중국조선족 축배가응모활동”을 벌렸다. 동북3성에서 도합 81수의 응모곡을 접수, 최종 16수의 축배가가 입선, 황운선 사, 박학림 곡의 “축배의 노래〞가 1등상을 수상했다.  조선족들의 간암, 위암 발병률이 다른 민족보다 높다는 적신호는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자치주 연변의 경우, 암 환자가 년 평균 3000명 속도로 늘어나고 해마다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2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길림성 평균수준보다는 높은 수치, 조선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간암, 위암 발병률이 한배가량 높다. 장기간의 음주가 암발생의 화근이라 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암증을 유발하는 음주, 식사 등 여러 면에서 효과적으로 통제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년말년시 술의 계절이 돌아왔다. 송년회, 망년회, 동창회 등등으로 음식업소들이 여느때보다 흥청거린다.  축배가가 널리 보급되여 건강한 음주문화를 고착하는데 일조할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축배의 노래    
44    초상화 만들기 댓글:  조회:2917  추천:73  2007-06-29
. 문화칼럼 . 초상화 만들기 김혁 1,  내가 맨 처음 읽은 인물전기는 어쩌면 춘추전국시대 법가의 대표인물인 상앙 (商鞅)의 이야기였다. 소학시절에 번역서로 읽었는데 통일국가 진(秦)을 세우는 데 공헌을 바친 한 사상가의 삶을 알고 읽은것 아니라 유생들의 코를 베고  말에 매달아 거렬형(車裂刑)에 처하는 끔찍하면서도 생광스러운 이야기에 끌려 읽은 것이였다. 진짜 전기다운 전기를 읽은 것은 “체 게바라 평전”이였다. 아르헨띠나의 한낱 의학도로부터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 판단하고 혁명가로 거듭나 파란의 삶을 살다간 그의 생애에 반한 나머지 편역본으로 된 평전을 읽은뒤 다시 포토로 엮은 그의 화전(畵傳)도 사들였었다.검은 베레모에 덥수룩한 수염, 랭소적으로 입가에 물린 려송연, 비쩍 말랐지만 형형한 눈빛… 이젠 세계적으로 캐릭터화 된 그 형상에 깊이 매료되였고 불굴의 투쟁의지와 만난을 헤쳐나가는 추진력과 결단력, 그 열정적인 자세에 존경을 머금었었다.  그 후엔 문학, 예술계 명인들의 전기를 주로 읽었는데 로신평전, 윤동주평전, 서지마전기, 카프카 이야기  등을 읽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읽으면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는 왜 인물전기 쟝르가 소외되고 있는지에 유감을 가졌었다. 2, 뒤미처 우리문단에서도 인물전기서들의 “봇물”이 터진듯 하다. 우선 연변대 김호웅 교수와 김학철옹의 자제분인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이 중후한 모습으로 나왔다.평전은 김학철옹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다. 조선족문학의 거목이며 비운의 작가인 김학철옹의 삶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비장하게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장춘의 로작가 김수영의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도 출간되였다. 40만자에 달하는 작품은 중한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한 한 애국화교의 노력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던 “최채평전”도 올해부터 대형문학지 “장백산”에서 련재중이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근년래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다. 3,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기술하고 있는 인물전기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로 우리가 새로이 주목할 만한 령역이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 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옛날부터 초상그리기를 진영(眞影)이나 영정(影幀), 화상(畵像)이라 불렀다. 얼굴 그림은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야 그 진가가 인정되였다. 마음까지 아우른다는 뜻에서 초상화그리기를 사심(寫心)이라고도 했다.따라서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기는 빈틈없는 론리와 현실에 대한 탁월한 리해력을 바탕으로 한다. 작중인물의 생애와 사상의 얼개를 짜 맞추는 과정에 그 정신과 마음을 온전히 기술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인 것이다. 어떤 인물전기들은 자료가 빈약하기도 하거니와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거나 부정으로 일관 짓는다. 또 쓰고자 하는 사람의 삶의 론리가 어긋나 있고, 협소한 안목과 어수룩한 필재가 혼재할 때 진정한 인물전기의 품격과 괴리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공(功)과 과(過)를 엄밀히 평가하고 진실을 바라보는 랭정과 온유와 절제의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수작을 읽을수 있기를 독자들은 바라고 있다. 변혁기 흔들리고있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할 때다. 작가들의 필끝에 누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그 영향과 함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에 따라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을 새롭게 투영하여 만방에 자랑스럽게 과시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氣)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4496591\');
43    원앙새 쌍쌍 댓글:  조회:4323  추천:76  2007-06-29
. 칼럼 .   원앙새 쌍쌍 김 혁   1 계절을 앞질러 유난히 화창했던 4월11일, 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가르는 부르하통하에 느닷없이 원앙새가 나타났다. 족히 50 여마리는 될 원앙새들은 현란한 깃털의 고운 자태를 뽐내며 짝을 지어 유유히 강심을 누볐다. 부르하통하는 이 몇년간의 기초건설과 환경건설을 통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으로 간주되여 있는데 그로서 물고기도 점점 많아지고 또 뭇새들이 날아들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시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모여들어 연변에서는 보기힘든 조류인 원앙새를 희한하게 관람했다.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원앙새를 폰렌즈에 담기도 하면서 감탄들이 자지러 졌다. 2 명의 리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원앙을 일컫어 “암수가 어우러져 종일 물에서 노닌다. 숫놈을 가리켜 원, 암놈을 가리켜 앙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원앙은 중국과 로씨야,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원앙의 몸체는 보통 43㎝정도, 삼림이 울창한 산골짜기 계곡에서 생활하는데 겨울에는 저수지, 호수와 늪, 해변, 내가에서 무리로 겨울을 난다. 한 배에 7∼12개의 엷은 황갈색 알을 낳고 28∼30일이면 부화된다. 풀씨, 나무열매, 달팽이류, 민물고기 등을 먹는다. 원앙은 세계적으로 20,000∼30,000여 마리 밖에 남아있지 않은 새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각 나라들에서는 다투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원앙(鸳鸯)이라는 두 글자가 음양(阴阳)이라는 음에서 전화되였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원앙새를 부부애가 지극한 동물로 인정했다. 그래서 이제 막 혼인 례식을 치르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가 “원앙처럼 금실 좋게 살라”고 당부하곤 했고 이어 나무로 만든 원앙 한 쌍도 선물로 주곤 했다. 원앙금(鴛鴦衾)이라는 원앙을 수놓은 이불과, 원앙침(鴛鴦枕)이라는 베개모에 원앙을 수놓은 베개도 신혼부부의 행복을 위해 당연히 주어지는 필수품이였다. 요즘 원앙새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깊어지면서 우리들의 바램과는 달리 수컷은 바람기 많은 무책임한 녀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지만 원앙은 시대와 력사를 통해 부부 금실의 상징으로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사랑이 지속되길 바라는 우리의 마음이 원앙에게 깊숙히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3 조선족은 본래 중국이란 거대한 다민족 국가에서 살아오면서 70년대 말까지 도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금욕사상이 뿌리 깊어 결혼관과 정조관이 가장 보수적이였다. 그리하여 조선족은 아주 순결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던 조선족 사회가 개혁개방을 맞아, 특히 한중수교 이후 결혼관과 정조관은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었다. 가족의 안정성보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되고 부부와 부모자녀 사이의 책임과 의무보다 선택과 자유가 우선시되면서 요즘 우리의 가정은 속전속결로 깨지고 있다. 조선족의 리혼률은  20%로 치달아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 높다는 통계도 나왔다 리혼률의 급증은 우리의 공동체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 떠올랐고 우리 는 이미 그 후유증을 톡톡히 앓고 있다. 사실 리혼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 의 시작이다. 변화하는 사회여건상 리혼이 늘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이를 예방하고 줄이기 위한 조처와 노력 역시 중요시 되여야 할 것이다.  가족의 쇠락과 위기를 경험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요즘들어 가족의 공동체성 회복이 강력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의 안정이냐 일신의 행복이냐를 대립적 가치로 설정하기보다 가족의 행복이 개인의 안정과 성숙을 가져오는 지름길임을 각성하자는 것이다. 변치않는 사랑의 상징- 원앙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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