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http://www.zoglo.net/blog/jinwenxue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221 ]

61    36.魯迅과 李光洙 (김문학) 댓글:  조회:5791  추천:25  2010-10-02
《신조선족》월경론 36.魯迅과 李光洙 김문학   노신과 동일문맥에서 비견되는 조선의 인물은 조선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春園 李光洙이다. 일본 유학 경험, 자국국민성 비판과 개조사상, 그리고 세계인적인 월경의 시야 등 측면에서 노신보다 11세 연하인 이광수는 매우 유사한 相似性을 띄고 있다.   단지 死後 최고의 위대한 文學家의 표상으로 낙인된 노신에 비해,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최고봉인 반면 민족의 반역자의 대명사인 “친일문학의 거두”라는 치욕스런 렛텔이 붙여있는것은 지극히 대조적이다.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의 비극 자체가 李光洙의 표상에 투영된것으로 인식할때 중국은 겨우 일제의 식민지전락까지는 면했지만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형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있다. 그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노신은 1920년 梁白華, 柳樹人 및 申彥俊, 李陵史 등 文人에 의해 속속 조선에 소개되면서 이광수에게 수용된다. 그는 1936년 일본의 「개조」잡지에 “조선의 阿鬼”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萬爺의 死」를 집필하는데 「아Q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훗날 이광수는 친하게 지낸 후배 문인 金素雲에게 “나는 아Q와  같이 바보다”고 고백,자신을“아Q형 지식인”이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일제식민지속에서 적응과 저항의 구도에서 자신들을 두고 향해진 쓸쓸한 야유였을것으로 추찰된다.   노신보다도 월등 다층다각의 얼굴을 보인 이광수는 안일하게 “친일반역적 문인”으로서 일축하기엔 무리한 인물이다. 사실 지금껏 한국이나 우리 민족이 이광수를 재는 척도는 “민족”이란 바러미터밖에 없었다. 1940년이후의 이광수의 “부일협력”의 언행은 그의 모든 평가를 집약시킨 “표상”으로 고정시켰다. 이 표상 역시 시각을 달리하여 보면 많이 일그러진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의 주장은 이문화의 경계를 살아간 이광수의 “월경적 삶”을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면 그 표상은 오히려 다른 양상으로 부상된다는것이다.   서울대의 유명한 문학비평가 김윤식교수는 1400매의 상하권 이광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999.도서출판 솔)에서 이광수의 일찍 부모를 상실하는 삶을 “내면 풍경의 발견”으로서 “고아의식”으로 규정짓고 있다. 그래서 여윈 아비를 일본제국주의에서 찾아 헤맸다는 “표상”을 제작해낸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표상”에 “완전동감”하지 못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즉 여기에 결여된것은 이광수를 이광수이게끔한 그의 이문화체험, 간단없는 월경하는 방랑에서 생성되는 경계의 지(知)적 思想을 평가의 잣대에서 빼버린것이다.   이광수 자신이 일그러진것이 아니라 이광수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리즘, 시각이 언제나 “민족”,“민족의 반역”이란 고정틀에 맞춰넣고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으로 이광수의 “표상”을 재생산 하는것이다. 오늘도 한국지식인의 이런 재생산은 정치적 이용자(노무현정부 친일파 청산정책)들에 영합하여 자기성찰과 반추도 없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친일파”의 생산공장은 “친일파”인물, 죽은 자들이 아니라 되려 오늘의 후세 정치가와 그 수하의 체제적 지식인이 아닐까? 물론 소수의 반역자는 어느 나라든지 다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런 반역자 말고 문제는 후세들이 자진해서 “친일파”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60    (20) 해방된 근대의 엉덩이 (김문학) 댓글:  조회:25922  추천:39  2010-10-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20) 해방된 근대의 엉덩이 김문학     중국 지식인들의 유머스러운 말이 있다. “수천년의 중국 華夏 역사에서 기실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었다. 타인의 엉덩이를 때리는 인간과 타인에게 엉덩이를 맞는 인간. 民國의 가장 큰 좋은 점은 중국인들의 엉덩이에 자유를 준것이다.   손문이 창설한 중화민국(1912년 1월 1일)이라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전근대적 인권차별의 지도였던 태형(笞刑)을 폐지한 쾌거에 대한 예찬의 목소리였다.   태형은 세계적으로 널리 진행된 형벌의 일종으로서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주로 엉덩이나 애들의 종아리를 매질하는것을 통해 육체적고통의 벌을 주는 행위였다.   우리 말의 “매 맞는다”, “매질한다”의 “매”란 때리는 행위중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키는데 주로 곤장, 막대기, 몽둥이, 회초리, 채찍 등이 사용되였다.  “매”에 관련된 조선어의 관용구나 속담이 많이 전해지는것 역시 그 매질이 매우 보편적이였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를테면 “매 끝에 정이 든다”, “매는 먼저 맞는 놈이 낫다”, “매우에 장사 있나”,“매맞아야 정신차린다”,“매맞은 놈이 발편잠 잔다”… 중국어에도 “매”와 관련된 속담이 많이 등장하는것은 아시아의 전근대의 “매”ㅡ형벌이 극심했다는 사회배경을 말해준다.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 《수호전》에서 양산박 영웅들의 개개인의 영웅담으로서 관아에 체포된뒤 감옥에서 한결같이 엉치를 노출시켜 “곤장 100대”의 세례를 받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거기다 뺨에 죄인의 기호가 새겨지는 굴욕마저 감내해야 한다.   이런 매맞는 엉덩이의 장면은 소설의 픽션이 절대 아니다. 명나라때부터 중국을 방문한 서양선교사들의 중국기록에는 이같은 형벌에 관한 대목들이 늘 클로즈업되군 한다. 포르투갈의 선교사 스파르다·클스(1570년대)가 집필한 《중국지(誌)》에는 감옥내 풍경을 생생하게 활사하고있다.   “(재판에서) 심문이 진행될때, 태형집행인은 한층 더 힘세게 매질하기 위해 물이 담긴 커다란 장독에 댓나무 매를 푹 담구어놓는다. 그사이 관리들은 서로 환담을 나누거나 먹고 마시고는 이쑤시개로 이를 후비면서 희희닥거린다. 매질은 대단히 잔혹하여 그 뜰안은 피자국이 낭자하다. 매질이 끝나면 마치 양을 취급하기라도 하듯 냉혹하게 범인의 한쪽다리를 잡아끌어서 로옥까지 질질 끌어간다.”   중국에서는 태형을 속칭 “타판자(打板子)”라 하며 그 력사적시원은 한나라 문제(文帝)시기인데 고대 “오형(五刑)”의 일종이다. 댓나무나 나무곤장으로서 허리이하의 엉덩이나 다리를 치는 형별이었다.   장장 수천년을 이어온 이 태형은 1911년 청국의 《대청신형률》에 의해 페지를 선포당하고 1912년 손중산의 민국에 의해 철폐당하게 된다.   그러나 1914년 여름에 발표된 북양정권의 《徒刑改遣條例》에 의해서 재다시 회복되기도 했다가 또다시 철폐당한다. 그 우여곡절 역시 태형에 대해 애착이 순순이 끊이지 않았을만큼 유구한 전통의 뉴대를 잘 설명하고있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태형철페는 녀성의 전족폐지만큼 근대적 의미를 띄는 상징적근대사상(事像)이다.   일본의 태형은 율령(律令)제도의 확립과 함께 당나라의 태형, 장형(杖刑)을 그대로 본따서 행해졌다. 그 형벌이 정비된 때는 대화(大化)개신후 천무천황시대로 추정되며 “대보, 양로” 두 율령에 태형으로서 칭하게 된다. 에도시대에도 매질하기 50회, 백회 하는식으로 중국식을 많이 답습했다. 무사(사무라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으며 명치시대에 이르러 태형, 장형이 철폐되고 그대신 “징역형”으로 대체된다.     그럼 조선은 어떠했을가?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시기 형법은 명나라의 법전인 《大明律》(1397년)과 《경국大典》(1460년이후 《大典通編》으로 개칭)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신체형벌 로서 태형을 수용했다.                                            그런데 1905년에 근대적벌률형식인 형법대전(刑法大典)이 시행되는데 그 내실은 대명률과 큰 차별이 없었으며 태형도 여전히 보류되였다.     1910년 일본에 의한 합병을 거쳐 1912년 데라우치(寺內)총독에 의해 “태형령”이 발포되는데 이는 조선인에게만 적용시키는것으로 데라우치의 혹독하고 야만한 통치가 엿보이기도 한다.   조선을 식민지로 보호시킨다는 일본의 지배하에 조선인의 인권과 엉덩이는 오히려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식민통치는 데라우치의 무단통치로부터 문화통치로 전환을 이룩하게 된다. 그것이 사이토(齊藤)총독의 새로운 시정책에 의해 1920년 3월, 태형은 페지된다. 그 《조선 태형령 페지 령안》은 폐지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본 형벌과 같이 육체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것은 현대문명사상에 의한 형벌의 성질과 어긋날뿐아니라 현재 조선인은 현저하게 향상자각했고 그 민도(民度)가 옛날같지 않기에 태형을 폐지하여 기본형인 징역 또는 벌금으로 임하는것도 형정상 조금도 지장이 없다고 인식한 까닭이다.”   일제시기, 중국은 그나마 “민국”을 형성하면서 “독립자주”의 국가로 거듭났으나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치하에서 신음해야 했던 비운을 안고있어야 했다.      근대와 함께 엉덩이는 해방됐지만 민족의 해방은 15년뒤인 1945년 8.15광복까지 기다려야 했다.  
59    (19)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김문학) 댓글:  조회:6468  추천:33  2010-09-29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9) 동아시아적 連帶의 사상가-김옥균 재발견 김문학     동경 지하철 긴자(銀座)선 외원(外苑)전역에서 내리면 “청산영원”이라는 공동묘지에 “외국인묘지”가 있다. 그속에 김옥균의 묘비가 보인다. “金公玉均之碑”라고 한자가 새겨진 암석판은 높이 3메터, 두께 15센치, 너비 1메터나 되는 자연석이다.   비석에는 한문으로 “오호, 비상한 재능을 안고있으면서도 비상한 시기를 만나 비상한 공도 못이루고 비상한 죽음을 당하도다”라는 장문이 각인돼있다. 죽어서 그 시체가 능지처참당한 김옥균의 묘는 일본과 한국에 세군데나 널려있다. 청산영원, 동경 문쿄구의 진정사안에 그리고 한국 충남 아산 고향에도 있다.   김옥균이 상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한것은 1894년 3월 28일, 청일전쟁 발발직전이었다. 그의 죽음 또한 청일전쟁의 일본측의 불씨의 하나로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김옥균이 상해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동경에서 김옥균은 청국공사이며 이홍장의 양자이기도 한 이경방(李經方)과 자주 면담하였는데 이경방의 알선으로 상해에 가서 이홍장과 면담하기위해서였다.   이미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조선개혁문제와 동아시아 3국이 연대하는 “화주의”를 이홍장에게 호소하기 위하여 중국행을 감행한다. 이홍장과 조선정부는 밀접한 관계였으므로 김옥균의 중국행은 죽음의 “함정”으로 들어가는 격이나 다름없었다는것을 김옥균은 각오하고 있었다.   손문을 지지해온 미야자키토텐(宮崎滔天)이 호위로 동행하겠다는것도 도야마(頭山滿)가 못가게 말리는것도 김옥균은 “호랑이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우기면서 결행한다.   신변에 친숙하게 달라붙는 자객 홍종우의 정체를 파악했으면서도 김옥균의 우직한 성격은 그것을 아랑곳아니하게 하고 죽음을 불사했던것이다. 오로지 한중일 3국이 련합하여 조선개혁을 이룰수 있다는 신념으로 불탔던 김옥균이다.     3월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의 일본인 호텔인 동화양행 객실에서 조선이 파견한 자객 홍종우의 흉탄 3발에 김옥균은 쓰러져 절명한다. 43세의 파란만장의 생애를 타향에서 접는다. 그 시체는 이홍장의 지시로 군함 “위정호”에 실어 조선으로 운송된다. 이홍장은 김옥균의 암살성공에 대한 축전을 조선국왕에게 보낸다.     조선정부는 양화진에서 그의 시체를 릉지처참하여 몇토막으로 절단하고 수급은 양화진에 효시하고 절단한 각 부위를 조선의 5개 도의 각처 길옆에 방치하여 새나 개가 제멋대로 뜯어먹게끔 했다. 죽어서도 또다시 비극적릉욕을 당한 김옥균선구자, 그는 나중에 식민지로 토막나는 조선의 비극 그자체의 모습이였다.     그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전 일본이 반청감정의 격랑을 일으킨다. 5월 20일, 천수백명 일본인의 김옥균 추모법요식이 거행되고 그의 유발과 의복을 청산묘지에 묻었다. 당시 일본은 매체를 총동원하여 김옥균시체처분에 대한 청국정부의 조치를 비난하고 반청감정을 환기시켰는데 일청전쟁이 김옥균의 시체문제가 쟁점인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 시체처분문제를 일본이 청일전쟁의 불씨로 이용했던것이다.   이제 일본에서 김옥균의 망명생활과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884년 12월 8일, 갑신정변실패후 12월 11일 인천항을 떠난 일본배 피토세마루를 타고 나가사키(長崎)항에 김옥균 일행은 13일 입항한다. 12월말 동경의 후쿠자와 유키치댁에 도착하여 안착한다.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잘 살아서 돌아왔다”고 반겼다. 그때 같이 망명한 개화파 인물은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류혁로, 정난교, 신응희, 변수 도합 9명이였다. 그중 김옥균, 박영효(박영효는 미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온다) 등은 일본에 남고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가버린다.   10년에 달하는 김옥균 등의 일본망명은 실의의 련속이였다. 조선정부로부터 파견된 수차례의 암살위험에서 벗어나기도 하면서 그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누카이, 오자키 등 정치가나 실업가의 생활비지원도 있었으나 일본정부는 청정부와 조선정부의 “역적”인 김옥균에 대해 냉담해지고 오가사와자섬이나 혹까이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천생 락관적이고 신조를 버리지 않은 김옥균은 그 원대한 사상과 다양한 취미, 서예로 일본인을 매료시키고 구많은 일본벗을 사귀였다. 박영효의 회억에 의하면 “김옥균의 장점은 교유이다. 실로 교유에 능했다. 문장에 능하고 화술도 뛰여났으며 시, 문, 서, 화 모두 능했다. 김옥균의 결점은 덕과 모략이 모자란것이다.”(이광수 《박영효와 만난 이야기》)     일본의 친구들은 서화발표회를 열어 김옥균의 붓글씨를 팔아 빈궁한 생활에 보태게 했다. 필자가 소장하고있는 김옥균의 서예유묵을 보면 그는 중국문인에 통하는 그런 재기횡일의 글씨를 썼던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김옥균은 개화파의 선구자일뿐만아니라 당시로서는 조선개혁을 동아시아적 시야로 구상한 선구자적인 사상가인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의 사상에 대해 잘 모르는것은 그 인물 자체에 대한 표면적 인식에 머물러있기때문이리라.   정치가로서의 그는 일본정부의 대청정책과 대조선정책의 우유부단을 비판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는 중립국화를 주장하면서 조, 일, 청 3국의 련대에 의해 구미열강과 맞설것을 창도했다. 그리고 조선이 봉건전제 체제를 철페하고 입헌군주제적 근대 독립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옥균은 “3화주의”사상을 창안했다. 조선개혁문제를 동아시아의 시야에서 구상한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탁월한 선구적인 사상이였다. 그는 《興亞之意見(흥아지의견)》을 집필하여 “일한청 3국이 제휴하여 구미동첨의 침략을 방지해야 한다”는 사상을 소리높이 주장하였다.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는 이렇게 김옥균의 사상을 평가한다. “’3화주의’는 조선과 일청 양국을 등거리에 배치하는것으로 조선문제에 대한 일청 양국의 개입을 페제하고 자주적개혁의 길을 개척하는 외교전략이였다.”따라서 그가 청국지도자 이홍장을 이 “3화주의”로 설득하여 조선 수구파에 대한 백업(지지)을 중지시켜 조선의 자주적독립의 길을 열어보자는 구상이였다. 김옥균은 늘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여야 한다”고 언급한것 또한 유명하다.   그 사후(死後) 100년이 되는 시점에서 재인식되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의 3국련대사상도 역시 김옥균의 3국련대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김옥균이 리드했던 100여년전의 조선자주독립사상은 그 “3화주의”사상과 함께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58    (18)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김문학) 댓글:  조회:5722  추천:33  2010-09-27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8) 근대조선 독립자주의 선구자 김옥균 김문학      청일갑오전쟁 발발 10년전인 1884년 12월 4일, 조선근대사상 유명한“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그 배경에는 1876년이래 기나긴 쇄국시대의 막을 접고 서구 및 일본에 의해 개항을 하게 되지만 조선(이씨조선)이 선택할 독립자주 근대화의 길은 유구한 전통의 봉건체제를 개혁하는것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있었던것이다.     일본이 솔선하여 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청국이나 여타 나라가 식민지화 내지 반식민지화로 전락된 까닭은 이 근대화혁명에서의 실패다. 당시 일본이 조선을 노린것 역시 조선보다 신속한 근대화성공이였고 후진국(봉건체제) 약소조선이 그 기회를 내준것이다.    당시 외국인이 쓴 조선관찰기를 보면 조선조말기의 구태의연한 봉건시스템과 전근대적 현상은 개화파 지식인, 정치가들에게 이 절망적 현상을 개혁하여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혁명의 찬스를 주었다. 선각자 젊은 김옥균(金玉均)은 이때 선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김옥균은 그야말로 조선의 근대적개혁을 완수하는것으로 그 독립자주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헌신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다. 그 김옥균이 박영효의 표현을 빌면 ‘취신자립(就新自立)’ 즉 국내를 개혁하고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독립하는 목표를 표방하는 개화파 지도자로서 ‘수구의뢰’ 즉 구체제를 고수하면서 청국과 종속관계를 지속하는 수구파에 대항하여 국왕측근의 수구파를 제거함으로써 신시대를 개척하려고 한것이 1884년의 갑신정변이였다.”(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갑신정변”의 지도자 김옥균, 그는 어떤 인물이였을가? 한국과 일본에 있는 그에 관한 전기, 자료를 섭렵해보면 그 종합적인물상이 부각된다. 김옥균은 희대의 수재라 어려서부터 명성을 날린다. 21살에 전 조선의 수재 2,000명을 소집하여 진행된 과거시험에서 수석의 월계관을 따내고 22세에 공문서관리직 홍문관 교리(교장)로 발탁, 32세에는 호조참판(재정차관)이란 고위관리에 등용된다. 그는 개화파 선학인 유대치, 오경석, 그리고 박연암의 후손인 박계수 문하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된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 홍영식 등 근대조선의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조선 근대화지향을 리드한 이들은 정권중추의 요직에 있은 청년관료였으며 그외에 어윤중, 김홍집, 김윤식 등 온건파 년장자 개혁자들도 가담하였다. 김옥균은 조선의 자주적개혁은 불가능하다는것을 일찍 터득하게 되면서 외부의 힘을 빌리려 했다. 동시에 김옥균은 또 일본의 근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열적인 지도를 받았다.   어윤중의 추천으로(1881년 방일후) 1881년 조선의 승려 이동인의 소개를 거쳐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당시 일본유학중)와 함께 후쿠자와와 해후한다. 그는 후쿠자와의 소개로 또 이노우에 가오루, 시부사와 에이치, 오오쿠마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의 거물급인물과 면회하고 론쟁을 벌리기도 했다. 후쿠자와는 조선의 첫 한글신문 《한성순보》를 제자인 이노우에를 파견하여 창간하면서 “문명개화”를 전파하기도 한 인물이였다.     당시 3차례 방일중 김옥균이 조선의 재정핍박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정부에게 300만엔 차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군비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정부는 조선의 재정개혁은 안중에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김옥균 등 개화파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1884년 청불전쟁이 벌어지면서 청국은 조선주둔군중 절반을 전쟁으로 빼돌려 조선에서의 청국전력이 대거 감소된다.     이에 국제적으로 이미 아편전쟁이래 “종이호랑이”로 날인된 청국의 이미지에서 자신감을 얻은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파는 쿠테타를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일본공사 타케조이와 접촉해 혁명의 구상을 전하고 지원을 요청한다.  그때 2,000명 청군에 비해 개화파군(150명)과 일본군(500명)은 도합 650명이였으나 사기와 무기로 보아 청군과 대결할수 있는 수준이였다.     12월 4일, 우정국개국 축하연을 리용해 수구파 정부요인들을 살해하고 개화파주도의 신정권을 수립하는 쿠테타를 감행한다. 수구파 관료인 이조연, 한규설, 민영익과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 미, 영, 청, 일 등 공사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당시 수구파들인 민영목, 민대호, 조영하 등 중신들을 참살하고 고종을 옹위하여 경우궁으로 옮겨 사실상 인질로 삼아 수구파 제거와 혁정권 수립에 성공한다.    신정권은 다음날 5일 새벽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수립되었는데 전원이 개화파관료가 내각의 충추를 점했다. 신정부는 15개항의 새 정강정책을 발표 청국으로부터의 주권동립, 신분제도의 철폐, 조세제도 개혁, 부패의 제계, 경찰순사제도 창설, 정배금고자구제, 재정일원화정책 문벌폐지,인민평등 등 근대적 국가의 형성의 필수적 조치들이 담겨있었다.   만약 그 당시 이 신정부 조치가 실현됐다면 그때부터 일본에 상응되는 근대국가가 탄생됐을것이였다. 아무튼 이 “갑신정변”을 근대조선의 획기적인 의미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린다. 민비에 의해 움직이던 고종은 창덕궁으로 돌아갔으며 민비는 청국의 힘으로 개혁파정권을 일거에 붕괘시킬 작정으로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청국 역시 조선을 잃고싶지않았기에 원세개가 인솔하는 1500명 군사가 창덕궁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혁명군은 숫자로 열세였으나 완강히 저항했다. 하지만 강력한 청군앞에서 전멸당하고 갑신정변은 종식되고 만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타케조이 공사와 함께 인천일본공사관에 이르지만 타케조이는 그들에게 냉담해진다. 12월 11일 일본의 배를 타고 망명한 김옥균 등은 기나긴 일본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개화파들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단기적 방안의 구상에서 일본에 의존했다는 치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김옥균에 대한 비판을 안이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비판은 안이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결핍한것은 그때 당시 역사로 환원시켜 역사를 발견하는 프리즘아 아닌가.   김옥균이 리드한 갑신개혁의 궤를 보면 이러한 역사를 재발견 할수 있다. 일본보다 28년이나 늦게 개국한 후진봉건제의국가 조선이 적면한 문제가 얼마나 침중한것으로 개화파들에게 파악됐으리라하는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왜 개화파가 당초 자력으로 개혁을 하려던 의도를 버리고 일본의 지원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됐을까 하는 배경에는 당시 개국이 늦어지고 절박한 열강의 위협에 비해 빈약한 재정, 군사력밖에 없는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조선왕조의 근본적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단합하면 개혁을 이룰수 있었으나 사대적인 전통에 배인 민씨 일파의 수구파들이 청군을 개입시켜 탄압시긴 그러한 대륙과 해양세력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 민족 선대들의 한계는 치명적이다. 아직 우리 내부의 근대적 “민족””국민국가”의식이 결여한탓이었다.   
57    (17)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김문학) 댓글:  조회:6647  추천:37  2010-09-25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7)  손문의 지팡이로 된 일본인들 김문학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는 근대중일관계사의 하나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근대 중일관계를 전방위로 해명하려면 과거 전쟁의 력사 말고도 손문의 혁명운동과 일본과의 관계를 규명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일본에서는 손문연구의 일환으로서 손문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연구가 앞서고있지만 중국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일본보다 뒤지고있다.” 남개대학 력사연구소 유신순(兪辛焞)교수가 그의 저서 《손문과 혁명운동과 일본》(1989 일문)의 서문에서 밝힌 말이다.   100년전 근대중일관계를 돌이켜보면 손문이 일본과 조우하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으며 일본인들 또한 손문을 지원하고 스스로 그의 지팡이로 되준것은 필연적요소가 많았다.   손문이 1895년 일본을 찾은이래 십수차례 일본에 출입하면서 그 체류기간은 도합 10여년이나 된다. 스스로 일본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은것은 김옥균, 박영효 등이 일본을 찾은 리유와 류사하다. 실제로 《손문과 코베》(진인덕, 야스이산기치 공저)를 보면 1900년 의화단운동이 치렬하던 여름 6월 21일, 코베를 찾은 손문이 망명중인 개화파 지도자의 한사람인 박영효와 만나서 회담을 한 일이 있다. 1902년 1월에도 정사량과 함께 손문은 박영효를 방문하여 아시아혁명에 대해 환담한 기록이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본제에 돌아오면 손문이 일본과의 접점은 명치유신성공을 중국혁명의 모델로 삼은데서부터 비롯된다. 근대사의 중일한 양상을 토탈적으로 보아 “억압과 피억압” 외에도 늘 상호리용구도도 존재한것을 무시못한다.   손문은 “억압과 피억압”관계에서 청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억압을 리용할 타산으로 일본인의 지원을 기대했다. 일본국가주의자의 비조이며 동아시아 련대와 침략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토야마 미츠루(頭山滿)나 정당파 수령으로 수상을 지내기도 한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및 대륙랑인(大陸浪人)이라 불린 우치다(內田良平) 등과 정치적리념이 엇갈리면서도 손잡을수 있은것은 청조를 전복할 꿈에 드높은 의협심으로 불타는 인물들이였기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계렬의 일본인 역시 조선의 김옥균, 박영효를 적극 지원한 인물들이며 명성황후 시해와 조선병합에도 관여한 인물들이기도 하여 얽힌 력사사정만큼이나 복잡한 얼굴의 멤버들이다.   중국과 일본은 동양의 같은 문화권의 형제우방이며 이래서 급속히 현대화에 성공한 강국 일본이  자신들의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해줄것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므로 손문을 도와 청나라를 뒤엎고 같은 한자문화권안에서 아시아의 “웅비”와  “련합”을 시도했던 일본인들과 손문은 자연히 손잡게 된다.   그중에서도 “손문의 가장 친한 벗이며 협력자”는 미야자키 도텐이다. 쿠마모토 하급무사 출신인 도텐은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강유위 등 7인을 일본으로 망명시키는데 성공한 인물로 명성을 떨친다. 그의 형 역시 중국혁명활동을 지원하고있다가 중도에서 사망되는데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신을 중국혁명에 다 바치게 된다. 1905년 결성된 동맹회 역시 도텐과  스에나가(末永節)들의 지원으로 흑룡회의 회장을 활용하여 수립된다. 사실 손문에게  황흥을 처음 소개시킨 사람이 곧 미야자키인것이다. 동맹회는 손문과 황흥 등이 이끈 여러 단체의 합동단체이다.   도텐의 유명한 회상기인 《33년의 꿈》에 따르면 1897년 요꼬하마에 망명한 손문을 방문했던 도텐을 향해 손문은 중국혁명은 중국인민을 위하여, 아시아황색인종, 세계인류를 위하여 궐기하는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손문의 충천하는 혁명의 정열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후 도텐은 손문과 함께 신해혁명에 정신(挺身)하여 1921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 병마로 쓰러져 사망된다.   중국혁명운동을 최우선으로 내세운 도텐은 “래일 먹을 쌀이 없다”고 울먹거리는 안해에게 “당신 혼자 방법대봐”하면서 질책했으며 조상전래의 밭을 팔아버리고 그 돈을 중국혁명활동자금으로 썼다.   미야자키 도텐, 히라야마, 그리고 도야마, 히라오카, 우메야 등의 물심량면의 후원으로 공상희(孔祥熙)의 말대로 “동경에서 황제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손문의 라이프스타일 역시 일본식에 젖어있었으며 그가 늘 입고있던  일제학생복의 에리를 고쳐서 고안해낸것이 지금의 “중산복”이다. 오늘도 대표적인 인민복, 전통적인 중국 지도자들이 즐겨입는 복장스타일로 정착되였다. 손문의 혁명적 리상, 사상도 역시 일본에서 출발된것인데 “삼민주의”,  “5권헌법” 등으로 결실된다. 그는 1894년 청국의 실력자 리홍장에게 제출한 정치개혁보고서에서 개량주의를 제창했다. 그 내실은 명치유신후 일본을 모델로 한 립헌군주제도였으나 리홍장에게 묵살당한다.   손문이 그뒤 빈번히 주장하는  “민주주의”사상은 일본의 “평균지권”의 사상에서 기인된다. 도텐의 형이 주장했던  “평균지권”사상을 배워서 “삼민주의”의 하나로 자리매김시켰다. 따라서 런던체류중 읽은 미국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민족독립, 민권주의와 같이 일본의 “평균지권”사상을 믹스시킨 복합물이다. 일본인들은 손문을 위해 재물과 사상, 리념 등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지지했으며 그가 걸어가는 지팡이로 돼주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의 이 지팡이는 손문의 청국왕조 타도에 도움이 된 한편 간접적으로 중국침략의 지팡이로도 된 2원적인 역할을 했다.   손문에게도 이같은 2원론적인 모순은 그의 일본인식에서 항상 탈피하지 못했다. 1919년 일본과 “21조조약”이 체결된 뒤 손문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고 규탄하지만 그는 동시에 일본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그 기대는 목적이고 비판은 목적달성의 수단이기도 했다”고 력사학자 유신순은 지적한다. 요컨데 손문이 일본인에게 기대한것은 물자, 재정적지원이였다. 하나의 큰 의문은 왜 손문이 일본인에게 큰 요망을 할만큼 중국내의 지원자가 많지 않았나 하는것이다. 중국인이 스스로 자문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손문이 만년에 “련쏘, 련공, 호조공동”의 사상전환을 이루면서도 1924년 겨울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인의 성원을 기대하는 유명한 강연 “대아시아주의”를 남길만큼 또 일본에 희망을 걸었을가?   김옥균, 박영효도 역시 같은 심경을 품고 일본에 기대를 걸었을가? 재고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을 둘러싼 중한의 100년의 과거, 우리들의 모습은 일본의 모습과 늘 오버랩(互搭)된다.          
56    35.노신은 왜 중국국민성을 비판했는가? 댓글:  조회:6256  추천:34  2010-09-24
《신조선족》월경론 35.鲁迅은 왜 수미일관 中国国民性을 통렬히 비판했는가?   김문학   노신의 세계관과 사상은 日本의 异文化时空의 体验속에서 생성된다. 절강 소흥출신의 무명의 청년 주수인(周樹人)으로부터 국민적 작가 문호 鲁迅의 탄생에는 이문화체험이란 중대한 배경이 있었다.   노신은 모택동에 의해 3개의 “위대한” 라벨이 붙은 인물이지만 그런 장식어로만 규정짓기 어려운 복잡하고 다층성격의 인물상을 노정하고 있다. 필자는 노신을 바라보는 바로미터가 바로 일본에서의 이문화체험, 문화수용이라는 점이라고 지적 하고 싶다. 그는 국경을 넘은 월경적 코스모폴리탄적 시각을 갖춘 “국제인”, “세계인”이었다.   노신연구는 최근들어 신예학자들에 의해 “비판”과 함께 전례없는 활발상을 전개하지만, 그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오히려 노신을 동아시아의 대표적 문학자로 높이 숭경하는 일본학계의 그것이 더 투철하다고 생각된다.   원 노신박물관 관장이며 현재 중국인민대학 교수인 노신연구의 중진 손욱(孫郁)교수도 필자와의 대담에서 동감을 표했다.   필자가 노신에 대해 고민한 문제의식은 “왜 노신이 그토록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정념으로 중국국민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그것을 수미일관하게 그자신의 使命으로 삼았는가? ”는것이다.   이같은 문제에 대한 중국내의 학자나 저널리즘에서도 많은 연구와 발설을 했으나 정곡을 찌를 해답을 못찾아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나 혁명사상가의 차원으로 편향해 표피화되고 또 그것이 노신論의 고정트이 돼버렸던것이다.   필자는 그 해답을 노신의 주수인시대 일본유학을 통한 이문화이해의 시공간에서 찾고자 한다. 1902년 22세의 주수인은 1907년 여름까지 다감한 청년기를 일본에서 보낸다. 그곳에서 일본문화를 통해 서구문명에 開眼한다. 주수인은 일본에서 의식적으로 일본식의 생활양식에 자신을 적응시키는것을 이문화이해의 방식으로 삼는다. “늘 일본기모노를 입기를 즐겼다. 외출시에도 일본 하카마를 걸치고 헌팅캡을 머리에 쓰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유학생이 잘 안신는 게다를 그는 잘 신었으며 게다바람으로 밤시장을 거닐기도 했다”, ”간다(神田)의 중화요리점에서 중국 火腿나 두부 등 중국식품을 팔았으나 그는 한번도 사먹은적이 없다”,  “동경에서 그가 의식적으로 일본식 생활을 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인다… 중국식 생활양식에 구애없이 적극적으로 일본풍습에 진입하는데 무언가를 추구하는 지향이 있었던것 같다.” (마루야마 노보루「노신」1965)   노신이 평생 기른 수염모양도 일본유행의 팔자수염으로서 그가 일본에서부터 선호했던것으로 죽는날까지 보전하였다. 그의 수염모양새를 두고 시비를 건 무료한 지식인도 있을 정도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다싶이 그는 일본문화에 젖어 그속에 융화시키고자한 국제적인 실체험을 마침내 정신적 경계의 높이를 승화시킨다.   노신의 뒤에는 많은 일본, 일본문화가 직결돼있다. 그가 가장 일생을 통해 존경한 사람은 중국인이 아닌 일본인 스승 후지노 선생이었다. 팽생의 지기 외우(畏友) 역시 일본인 우치야마(内山完造)였으며 그와 아들 해영의 전문수진의사는 일본인 의사였다. 지어 그가 사망직전에 남긴 절필 역시 일본 외우에게 쓴 일본어였다. 노신은 “친일”에 가장 가까운 문호였다. 지어 1932년 일제가 동북3성(만주)를 강점했을때 “항일운동”에 대해 노신은 준혹하게 지적한다.”이 排日의 소리속에서 나는 감히 견결히 중국의 청년들에게 충고한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에게는 우리가 배워야 할것이 많다는 그것이다.”   필자는 노신의 작품속에서 수없이도 많은 일본어적 요소를 발견했다. 그의 언어에는 중국문법에 맞지 않는 문법구사 지어 단어까지도 일본어를 그대로 수용했던것이다. 그의 白話文은 일본어 文体에서 비롯된것이다. 그의 친일적 경향은 모두 일본의 이문화체험속에서 연유된다. 주수인이 노신으로 되는데 밑거름은 일본이었다. 그의 세계관 가치관 정립에 절대적 영향은 미친것은 우리가 간파했던 또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다.   노신의 “국민성개조”의 지향은 일본에서 H. 스미스의 「중국인의 성격」이나, 일본인이 쓴 국민성비판서, 잡지, 특히 명치말기와 대정초기에 우후죽순같이 나타난 서양 학설, 철학서를 노신은 일본어를 통해서 접했다. 그러던 그는 유학생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기도 외국문학번역서를 간행하기도 하며 언설적면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그런데 1909년 6월 귀국한뒤 그는 ‘적막’과 소침속에서 자신을 모대김에 맡길뿐이다.  왜 그렇게 중국국민성개조에 왕성한 정신력으로 불타던 그가 갑자기 귀국하여 의기소침하게 되는가? 필자는 이 단계의 노신에 대해 늘 의문을 품었다. 그가 환등슬라이드를 센타이에서 보면서 우매한 중국구경꾼들의 모습에서 중국국민성개조에 뜻을 두개 되고 문학으로 전항했다고 한 자신의 말처럼 왜 실천하지 못했을가? 실제적으로 1918년 5월 「광인일기」를 「신청년」에 발표하기 까지 그는 방황하는 주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실의에 빠져 고서를 베끼거나 탁본정리가 그의 일과이다싶이 했다.   그가 소침하고 失意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스쳐버린 중요한 대목이다. 필자가 비교연구끝에 찾아낸 답안은 한마디로 이문화체험의 시공간에서 받은 역(逆)발적인 컬쳐쇼크였다. 즉 본국 동포들에 익숙했던 중국, 중국인이 오히려 일본문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이문화”적 시간, 공간으로 보였으며 그 “후진성”에 끝없는 절망감과 지어 험오감마저 느낀것이다.   노신은 일본에서 “국제인”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체험한 조선족이 연변에 되돌아 와서 느낀 연변의 “후진성”, ”농촌적인 모습”과 연상시키면 이해가 갈것이다. 일본문화와 중국문화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물이 된 노신, 그가 귀국한뒤 중국에서 다시 본 동포의 모습은 “열등” “후진” “우매” ”고루” “아Q”등 부정적 표상으로 꽉 차있었다. 이미 다른 표상이 들어설 틈마저 없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중국인을 바라본것이었다. 그가 서거하기 며칠전 상해 일본조계에서 일본의 외우 우치야마에게 한 말이 “중국의 미래에 사막이 보인다”였다.   노신의 중국, 중국인의 “열악성”에 대한 절망감에 가까운 비판, 부정은 국제적 안목, 복수문화의 경계를 살던 사상가 노신의 숙명이었다. 그 숙명은 노신의 한계이기도 했다. 또 그 한계가 국민성비판의 최대의 작가로 뜨게했던것이다. (필자의 노신論은 저서 「노신 뒤집어 보기」에 자세히 쓸것이다)   노신이란 인생과 언설적인 대선배의 뒤를 이어 백년후 일본에서 유학, 취직 정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비슷한 이문화체험의 입지에서 노신의 視覺, 知見, 境界성에 대해 너무나 이해가 간다.   유사한 유학의 이문화체험의 여과가 없이 노신의 이같은 고층차의 세계인적 사고를 이해하기는 지난(至難)할것이다.   필자가 왜 우리 조선족의 열악성을 비판하면서 숱한 조선족의 결함, 단점을 “준혹”하게 꼬집고 그 “개조론”을 창도했던 이면에는 역시 일본이란 이문화체험자의 “경계성”으로부터 발한것이다. 필자는 늘 “세계인” ”지구촌인”하는식으로 자칭하기를 즐기는 모습을 일부 지식인들에게서 비난과 중상의 타깃으로 점찍혔던것 역시 이해한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거만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들은“세계적” “경계성”적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때문이다.   이제 신조선족의 월경은 경계성을 사는 “세계인”을 양산할것이다.    
55    (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 (김문학) 댓글:  조회:5664  추천:31  2010-09-2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6) 국경을 넘은 혁명가 손문의 뒤모습김문학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로 신해혁명의 총성이 울렸을 때 손문은 미국에 있었다. 독립한 청국 각 성은 파벌로 나뉘여 혁명정부의 소재지 및 지도자를 누구로 꼽을가 쟁의를 일으켰다. 무창봉기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손문은 쌘프란시스코에서 귀국선에 올라 12월 25일 상해에 도착, 일주후인 1912년 1월 1일 남경에 나타난다. 중화민국정부와 림시대통령의 탄생이다.   손문(1866년 11월 2일~1925년 3월 12일)은 호가 “중산(中山)”이고 자는 “재원(載元)”이며 “일신”은 구미에서 알려진 그의 이름이다. 대만에서  “국부”로, 중국대륙에서는 “혁명선구자”로 널리 존중받는 손문은 “손중산”으로 통한다. “중산”이란 호는 일본 망명시절 동경의 히비야공원근처의 려관에 묵을 때 우연히 “중산”이란 집의 패말을 보고 숙박부에 적은것이다. “중산초(中山樵, 나카야마쇼)라 칭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손중산은 혁명가로서 그 국경을 뛰여넘은 세계적인 활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에 망명했다”는 간략한 서술만 나올뿐 구체적인 궤적이나 상세한 내실에 대해서는 자상한 소개가 잘 안나온다.   그의 40년 혁명일생중 3분의 1의 시기를 일본에서 활동했는데 그 부분이 자세하게 기술되지 않는것은 너무 아쉽다.   손문은 참으로 다중성격, 다층면의 얼굴을 갖고있는 근대의 거물이다. 그는 민주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또 친일적인 혁명가이며 또한 대아시아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혁명의 제1보를 “명치유신”으로 간주하고 제2보를 중국공화혁명으로 보고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당시 일본이 아시아 각국 독립운동가들이 박해를 받으면 망명터로서 몰려드는 집결지라는 점을 잘알고 여기서 활동을 하여 “동산재기”를 하군 했다. 그가 처음 1895년 광주봉기에서 실패하자 곧 동경으로 망명한것으로 일본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그가 1905년 8월 동경에서 동맹회를 건립하고 총리로 피선, 《민보》를 창간하고  3민주의의 기치를 걸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이렇게 엄숙한 혁명가로서의 앞모습은 “교과서적”기술로 강조되지만 그의 인간적 심층이나 그 국경을 넘은 활동의 인물적인 뒤모습에 대해서는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피와 살이 붙은 더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접근해보자는 소박한 념원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인물상에 대해서 고찰하겠다. 이로써 앞뒤모습을 립체적으로 볼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사실 손문이 청년혁명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계기는 그가 1895년 광주봉기실패후 일본망명과 미국을 거쳐 영국에 이른다음 청국공사관에 구속되여 그 실체험을 본인이 《런던피난기》로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00년 5월, 손문은 재다시 일본에 상륙하여 친하게 사귀던 일본인 녀성과 하코네려관에 투숙한다. 일본을 근거지로 혁명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신해혁명 성공까지 도합 10차례의 봉기를 일으키나 번마다 실패로 끝나 “실패의 혁명가”란 라벨이 붙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혁명”에 불타는 욕망으로 꽉찬 인물이다. 아무튼 오랑캐의 청나라 왕조를 붕괴시키고 한족중심의 신설공화국을 수립하는것이 장대한 로맨이였다.   신장 156센치메터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변을 토하고 혁명의 리상을 도도하게 이야기하군 했는데 화교들은 그를 “손대포(孫大砲, 뻥튀기)”로 장난삼아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성격적으로 급하고 정서적기복이 심한 인물이였다는 증언이 많이보인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겠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그가 돈이 딸릴 때면 “박애”라는 등 글씨를 휘호하여 주위 일본인들에게 “얼마라도 좋으니까 사주세요”하면서 푸접좋게 간청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 역시 일본인의 회상기에 등장한다. 덕분에 그의 유묵이 일본에 많이 남은것은 오히려 행운이 아니였는가.   그의 활달한 성격만큼이나 휘호한 유묵 역시 가관이였다.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의 회상기에 의하면 손문이 생전에 가장 즐긴 화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혁명”이고 하나는 “녀성”이였다고 한다. 중국인 학자 림사운의 론고에 의하면 1895년 일본에 온 그가 동경이나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혁명활동을 벌일 무렵 “영웅호색” 이미지가 이미 주위에 각인돼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결혼생활에 로모정이란 안해가 있었는데 1896년 요꼬하마에서 16세의 일본녀성 오츠키(大月薰)와 결혼식을 올려 1906년 5월 그사이에 후미코(富美子)라는 딸이 태여나기도 한다. 후미코는 일본어발음으로 “후미(文)”를 따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그외 아사다라는 녀성을 사랑하여 일본 각지에 늘 동반하여 활동했는데 그녀가 죽을 때 손문은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런 녀성관계에서도 손문의 인간다운 따스한 뒤모습을 체감할수 있다.   국민당의 청천백일기를 디자인했을 때 당시 황홍이 일본의 일장기와 류사한 리유로 반대했지만 손문은 그것을 고집하여 통과시켰다. 손문의 제자격인 호한민은 후날 회상기에서 “손선생님이 왜 청천백일기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고 수상쩍어했다고 한다. 손문의 머리속에는 중일련대에 의한 아시아의 흥성을 지향한 원대한 목표와 구상을 이 디자인속에 담았던것이다.   손문의 리상과 정열은 일본인을 감동시켰고 공감을 형성시켰다. 물론 일본인속에서는 손문을 리용하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런 일본인의 지원을 손문은 역리용했던것이다. 특히 지금돈으로 환산하면 10조이상의 일본엔을 지원한 실업가 우메야(梅屋庄吉)나 평생 손문의 절대 지지자였던 혁명가 미야자키 도오텐(宮崎滔天), 그리고 원 총리대신 이누카이(김옥균을 지원한 인물이기도 함) 등 수십명의  리스트가 줄줄이 이어진다. 지어 신해혁명때 전쟁에 자진하여 참전, 전투속에서 헌신한 일본인들도 수십명 있다.   1912년 3월, 선통황제 퇴위를 조건으로 총통의 대좌를 원세개에게 넘긴 그는 토원(討袁)혁명에 실패하고 1913~16년 일본에서 송경령과 결혼하게 되면서 혁명적반려를 얻는다. 그뒤 그는 수차례 혁명을 궐기하지만 1925년 “혁명은 아직 미완성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만장의 생을 마친다.   사망전인 1924년 겨울, 일본 코베에서 한 “대아시아주의”연설은 구미의 침략주의에 대해 동양의 왕도평화를 강조하지만 일본제국주의는 손문의 경계를 무시하고 중국대륙을 침략하게 된다. 국경을 뛰여넘은 손문은 세계적혁명가로서 그의 동양평화사상은 오늘에도 자못 유효적의의를 지닌다.
54    34.체험하는 異文化의 時空 (김문학) 댓글:  조회:4767  추천:26  2010-09-23
《신조선족》월경론34.체험하는 異文化의 時空김문학 異文化理解의 가장 효과적인 方法은 그것을 體驗하는것이다. 옛날과 달리 외국이나 국내 이동, 여행이 日常化된 현재, 우리는 아마 아래와 같은 체험을 늘 겪었을것이다. 일테면 며칠간 외국 또는 중국의 남방에 여행이나 출장갔다 고향으로 귀가했다고 하자. 그런데자기 집도 時差나 空間적 차이로 생기는 모종의 생소감같은 부적응성 반응이 나타날때가 많다. 같은 맥락에서 수년간 외국에 체류해 있다가 귀국하면 역시 크나큰 부적응 반응이 수시로 생긴다. 자신이 익숙해있던 자기 나라 문화나 환경이 어느새 “他文化”로 돼있는것이다. “여기가 분명 내가 살았던 그렇게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내고향 맞아?”하면서 꼭 홀가분만한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기간 체류했던 타향이나 외국이 더 익숙한 자신의 고향 또는 나라로 낙인되는것이다. 필자 자신도 중국에 돌아가면 이미 또 하나의 이문화공간이 되어 그 이문화를 만끽하는 재미가 있다. 중국에서 노점시장 특히 야시장이라 불리는 그런곳에서 필자는 이국적 정취, 엑조틱을 느껴 몹시 滿悅한다. 대도시의 일주에서 전개되는 야시장에서 19세기말기적인 전근대와 21세기의 근대문화가 회립하는 교차로적, 용광로적인 양상은 언제 보아도 마냥 즐겁다. 그 다이내믹한 활력을 통해 필자는 중국 다수 기층인들의 억세고 근면한 생활력에 경이감을 느끼군 한다. 그리고 그속에는 분명 일본에서는 박물관에나 남아있음직한 도구나 기물들, “원생적 야생적 思考”라고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브 • 스토레스가 지칭했던 민초들의 독자적 생존원리와 세계관 같은 요소들이 혼재해 있었다. 한국에 가서 장기간 체류했던 신조선족들도 중국에 귀국했다가 적응을 못하여 다시 한국을 찾아가는 케이스는 또 하나 붐에서 낳은 출국붐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문화체험”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경계적”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것이다. 이문화자체가 “경계적”인 까닭에 그속에 들어가서 숨쉬고 일하고 사는것은 그 경계적 시간, 공간을 사는 얘기가 된다. 왜냐면 이문화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같은 “시간”이긴 하지만, 자신이 여직껏 속해있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며, 그 공간 역시 더 말할 나위없이 이질된 공간이기때문이다. 문화인류학에서 이런것을 “경계적 시간, 공간”이라 지칭하며, 이문화속에서 시공을 헤염치면서 자기 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의 시간 공간을 실체험하게 된다. 이문화의 공간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쉽다. 민족, 언어, 종교, 습속 등 문화가 다른 나라. 집단사회의 공간은 당연히 이질공간이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문화 시간이 다르다고 하면 좀 고개를 갸웃들거리는 대목일것이다. 다같은 시간인데 어디가 이질적이냐는 의문이 앞선다. 그러나 세계에는 근대적 의미의 “시간관념”이 아닌 각자의 사회전통적 시간도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나 중국에도 지금의 시간관념과 이질된 사고가 있었으며 오늘의 일본에도 서양일력이 아닌 “皇紀X千年”하는 시간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현존하는 일본의 원호, 일테면 平成,昭和,大正,明治하는것은 明治이후 일본은 시간을 天皇의 재위기간으로 획을 긋는 사고가 있었기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호연대(元號年代)를 잘 몰라서 헷갈릴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런것들은 근대적 시간과는 이질된 일본 특유의 독자적 상징적 시간관념이라는 문화를 노정하고 있다. 이 독자적 文化속에는 흔히 그나라 독특한 문화가 슴배어있기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는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일본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일본의 이같은 시간문화를 터득하기에는 쉽지 않을것이다. 시간과 함께 공간으로서의 “이문화체험”은 중요하다. 더우기 오늘날 21세기와 같이 인간, 물건, 정보, 금전이 수시로 이동하는 글러벌세계속에서 이문화공간으로 들어가는것(관광, 여행, 회의, 장단기간 체류, 유학, 취직, 이민, 망명)등이 용이한 시점에서 그어떤 서책이나 인터넷 정보나 지견보다도 실체험만큼 유효한것은 없을것이다. 시야, 사고방식에서 우선 체험과 미체험에서 생기는 갭은 엄청나다. 내가 최초로 일본에 왔을때 일본에 대한 체험담이나 인상담을 국내 친지들에게 들려주면 그중에는 이해자도 있었지만 “이 양반이 일본만 높이 추켜올리고 중국은 폄하시키냐”는 식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필자가 발표했던 비교문화론적인 한국문화론이나 「조선족개조론」같은 논조에 대해 한국에나 조선족의 식자나 대중들은 거이 미체험에서 오는 무지와 편견에서 오는 반발이 많았다. 그들이 이미지속에 각인된 고정된 일본표상(허구적인 요소가 많음)을 무기로 필자에게 오히려 “황국사관”이니 “일본예찬”이니 하는 수없이도 많은 편견의 렛벨을 필자에게 붙인것이다. 특히 연변 조선족 일부 소수의 지식인의 그런 편향적인 “무지”의 일본지식에 필자는 페구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것은 일본 실체험이 있게 된 대중들이 오히려 일본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뒤 필자에게 “그때 당신이 말하던 일본론을 이제 일본에서 실제로 보면서 알았다”고들 이구동성으로 찬동을 표한다. 대중들의 해외 문화체험이 오히려 진부한 지식인의 고리타분한 답습적 인식보다 월등 우수하다는것을 필자는 신조선의 탄생을 통해서 더 실감하게 되었다. 신조선족이 해외에서의 다양한 이문화의 시공간적 체험은 이제 우리 조선족에게 새로운 혈액요소로 되어 되돌아 올것이다. 지금부터 좀더 이 실혈액을 소중히 하는것이 바람직한것이라고 필자는 권장하고자 한다.
53    33. 神은 우리에게 ‘明鏡’을 주었다(김문학) 댓글:  조회:7194  추천:23  2010-09-19
《신조선족》월경론33. 神은 우리에게 ‘明鏡’을 주었다김문학신선사장(神仙思想)에 나타나는 東王父, 西王母가 사용하던 ‘거울’이 아니다. 절세미인 양귀비가 화장시 쓰던 아릿다운 거울은 더구나 아니다. 성경에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했다면 필자는 “우리에겐 ‘거울’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거울은 곧 “異文化”라는 이름의 거울이다.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알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쳐주는 “明鏡”이다. 월경민족에서 탄생된 조선족에게는 수미일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선물받았다. 漢族과 기타 소수민족과의 조우를 통해 우리의 1,2세대 선대들에게도 막연하지만 어떤 “異文化”라는 거울을 갖게 된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 거울을 오늘의 신조선족 같이 유효하게 사용했는가는 의문은 많이 남는다. 글러벌리즘의 시대 중국 연해로, 바다건너 해외로 진출함에 따라 조선족에게는 하나 또 하나의 “이문화”라는 거울을 획득하게 된다. 물론 우리 스스로 획득했지만 그 축복받을만한 성격을 필자는 神에게 하사받은 선물로 고맙게 생각한다. 고정적인 이문화 거울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일거에 우리앞에 전개되는 시대, “이문화 이해”의 시대가 조선족역사의 새장을 열어놓았다. 이래서 우리는 기성관념을 깨고 새롭게 리누얼하면서 우리의 모습 자체를 변용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문화 이해”란 무엇인가? 문화인류학적인 해석을 보자. “자기와 他者 또는 자기집단과 타집단이란 관계의 문맥에서 자기 내지는 자문화에 대하여 “異質的存在”로서의 他者내지는 他文化를 알기 위한 지적(知的), 실천적 영위”를 가리킨다. 인류학의 주요내용이 文化的他者의 이해인것 같이, 인간자체의 생활에도 지금은 他者이해가 日常化되고 있다. 특히 신조선족의 경계를 넘는 경제, 문화활동의 빈번함과 일상화는 꼭 타문화 이해로 직결되는것이 특징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문화이해”라고 해도 사실상 그 내실에는 여러가지 이해의 수준과 특질이 존재한다. 심리인류학자 스파이로(SPino)는 예전에 이문화이해-습득에는 다음과 같은 5종의 수준, 내지 단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1)이문화의 어떤 사실을 알게 됐다 (2)그 의미(배경이나 이유)가 알게 됐다 (3)그것을 “정확하다” 또는 “적절하다”고 믿는다 (4)그것을 자기자신도 “할수 있게”된다 (5)그것이 내면화 된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착안된다) 여기서 (1)은 초보적 이문화의 차이점을 알게됬다는것이고 점차 상승, 심도있는 인식을 거쳐 (5)단계에서는 그 이문화는 이미 他者가 아닌 자기의 내면의 일부분으로 소화흡수되어 공감을 이룬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문화이해는 이문화라는 「明鏡」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 인식하는데로 회귀한다. 이같은 他者와 自己사이에 “설치”된 “영경”을 통해서 타자 이해를 자신의 이해로 동시에 섭취하는 과정은 새로운 “自己”의 形成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 수준과 질적인 정도는 개개인의 사정과 이해력, 적응력에 따라 같지 않지만 이 거울은 우리가 매일 아침 세수하고 자기 얼굴을 보듯이 자신을 비쳐주는 중요한 ‘장치’-문화장치-인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용모를 볼수 있는 장치는 “거울”이 있기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말할수 있는것은 異文化의 존재, 그 理解가 곧 이런 文化的 거울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20년동안 소식이 불통이었던 중학동창 N씨를 최근 서울에서 만났다. 중학 졸업후 농민으로 일하던 그녀는 서울에서 생활한지 15년, 농촌의 부인에서 이미 세련된 도시 “마담”모양으로 탈바꿈 했다. 지성과 외모의 세련을 겸비한 그녀의 변신에서 필자는 해외 근대문화속에서 십분 적응시킨 이문화이해의 “달인”을 발견했다. 물론 외모적 변모뿐만 아니다. 이미 서울의 근대도시문화를 내면화시켜 그 자신도 서울 근대문화의 수준으로 승화시킨것이다. 그녀와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들이키며 환담하면서 이문화의 명경은 역시 村婦도 都市모던 여성으로 이쁘게 화장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구나고 실감했다. 일본에서 만났던 60대의 연변출신의 남자 E씨는 필자와 환담하면서 “일본체험에서 얻는것은 무엇인가”라는 필자의 인터뷰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에 온지 8년째입니다. 말그대로 8년 항전이지요. 중국에 있을때도 대련, 청도 연해도시에서도 살아봤습니다만, 일본에서 느낀것은 역시 하나입니다. 조선족이 살아남는 진짜 방법은 연변오지와 같은 땅을 떠나서 밝은 선진문화도시나 지역, 나라로 아주 나와 살아야 한다는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 땅에 너무 집착했기에 땅밖에 모르는 “땅벌레”로 전락되지요. 만일 내가 연변에서 그냥 농민으로 있었다면 너무나 비참했을겁니다. 세상을 모르고 사는 “땅벌레”였을거니까요. 김선생님이 이런 생각들을 책으로 써서 우리 조선족들을 좀 호되게 깨우쳐주십시오.” 이문화라는 명경에서 결국 발견된것은 우리들의 고루한 “토착형” 인간모습이었다. N씨와 E씨, 이들은 이문화의 실체험으로 우리 조선족의 땅에 연연하는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의 목소리는 우리의 일부 고루한 지식인의 사고방식보다 수백배 현실적이고 선행성을 띤다. 신은 우리에게 이문화란 明鏡을 주었다. 이것을 버릴것인가 살려서 우리의 변신에 활용할것인가 하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52    (15)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김문학) 댓글:  조회:6794  추천:18  2010-09-16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5) 100년전 조선인들은  안중근을 어떻게 평가했나김문학1909년 10월 26일 아침, 30세의 청년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제 조선정책의 설계사인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살해한 의거는 세계를 진감한 충격적 뉴스였다. 따라서 2000만 조선인 사회에 미증유의 대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 및 평가는 여러가지로 복잡한 양상을 나타냈다. 안중근의 의거가 1907년이후 격앙하는 민족운동의 활동속에서 일거에 발생했으므로 그의 의거 및 인물은 숭경하는 민족독립운동가의 모델, 투사로 높이 평가되였다. 그의 거사에 환호작약하는 조선인이 많았다는것은 당시의 신문보도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1910년대초기에 그에 대한 전기가 다수 출판되는 점이 주목된다. 처음 안중근의 행동을 정리한 전기는 그가 사형당한 3주후인 1910년 4월 15일자 한국에서 발간된 《근세력사》란 책자다. 안중근의 출생으로부터 의거, 공판, 사형의 순간까지 기술돼있으며 그의 의거는 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지향한 거사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그때 발행된 안중근전기를 보면 선후로 1910년 김택영의 필사본 《안중근전》, 1911년 《대동위인 안중근전》(호놀루루 신한국보사), 1914년 유명한 박은식의 《안중근》(상해 대동편집국), 1914년 가을 《만고의 안중근전》(《권업신문》 해삼위), 1916년 리건승의 《안중근전》(중국 연변《해경당수초》 수록) 등이다. 그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며 역사학자로서 명성을 떨친 박은식의 《안중근》이 유명한데 그의 《한국통사》(1914)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1920)는 조선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거사와 평화독립지향의 정신을 찬양한데만 그친것이 아니라 그의 추모활동이나 이족을 지원하는 활동도 벌였다. 사형직후 독립투쟁을 고무하기 위해 《안중근의가(义歌)》가 창작되여 애창되였으며 1912년에는 《영웅모범가》가 그의 행위에 대해 례찬했다. 그리고 해외 동포신문들 이를테면 하와이의 한국신보사, 울라지보스또크의 권업신문 등에서는 기념캘린데를 만들고 안의사의 사진도 게재했다. 그림엽서도 안중근의 얼굴초상사진을 우에 놓고 그아래 이토히로부미의 한국통감모자를 쓴 얼굴사진을 배치해놓음으로써 “사생취의 살신성인”의 영웅모범적표상을 돌출화시켰다.     1920년 상해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박은식의 《안중근》을 게재하여 “우리 민족을 위해 신성한 피로 조국산천을 물들이고 정의의 총탄으로 세계만방을 경이케 한 아시아 제일의협”이라고 격찬했다. 당시 만주에서 발행된 《신진소년》잡지 1926년 2월 22일 기사의 “독립군가”에서는 “을지문덕, 리순신과 함께 안중근의 의렬심을 따라배워 우리도 적을 쏘아눕히자”고 기사가 등장한다. 1928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긴 한국 영화인들은 《애국론》이란 제목의 안중근의거 영화를 촬영, 상영하여 중국인들로부터도 공명을 일으켰다. 어디 그뿐인가. 안중근은 민족이 따라배울 영웅, 모델로 당시 조선인사회의 제일급투사로 자리매김되었다. 1926년 4월 28일, 독립운동가 송학선은 당시의 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는 거사를 일으킨다. 결과 사이토는 못 죽이고 다른 부회 의원 세명을 살해했다. 체포된 그가 일본경찰의 취조에 이렇게 떳떳이 대답한다.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숭배하여 그의 본을 따서 사이토를 저격했다”고. 리창봉,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의 뒤를 이은 독립거사는 근대사의  “반일의거”의 큰 계보를 이룬다. 이렇게 당시 안중근투사에 대한 영웅적모범표상이 확립되고 일제제거의 민족운동의 롤 모델로 되면서 조선인사회의 큰 공명대를 이룩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100년전의 신문, 잡지, 외교자료 등을 두루 섭렵해보면 안중근의 이미지는 긍정적모델과 함께 부정적형상으로 평가된 경향도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한 인물을 둘러싸고 특히 한국에 깊숙이 침투된 일본의 영향이란 역사적 상황의 복잡한 배경이 있었으므로 그 평가, 이해는 복잡할수밖에 없을것이다. 당시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했던것이 조선 카톨릭교회의 신자들이였다. 안중근의 행위가 살인행위이고 이토를 죽인 범인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있었다. 그들은 순전히 “살인”이란 죄목의 차원에서만 안중근을 인식했으며 민족독립운동이란 측면에서의 인식은 결여했기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은 충격을 받고 “이토는 동양의 인걸로서 실로 우리 나라의 자부(慈父)이다. 이 자부에 해를 끼친 자는 아마도 사물의 도리를 모르는 해외유랑자일것이다”(일경의 보고서) 고 말했다고 한다. 아마 부득이하게 일본정부에 대한 외교적사령으로 부인한 말로 판단된다. 당시 조선의 친일파는 이토의 죽음에 거개 동정을 표했는데 친일실업가인 박영철은 공개적으로 이토를 죽인 안의사의 행동을 “참사”로 보고 이토 암살을 오히려 “식민지화를 제공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장본인이 안중근”이라고 생각했다. 이토가 아무리 점진적 한국병합을 설계했다고 해도 당시 이런 판단은 보통 조선민중에게는  받아들이기가 무리였을것이다. 당시 상황이 상황인만큼 이토를 살해한 “테러”로 하여 일본의 탄압정책이 더욱 강화될것이라는 위구심이 확실히 유식자들가운데 있은것은 사실이다.                                         부평군수 이명헌은 이토 암살이 오히려 일본의 대한정책을 강경화로 나아가게 할것이라고 평하고 서양흥, 윤백헌도 동감이였다. 3.1운동후 민족운동속에서 분해된 사회주의자들도 친일파같은 부정은 안했으나 안중근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태도를 취했다. 윤해(사회주의운동가)는 1924년 북만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안중근의 과격한 행위로 빨리 말할지어니 과격주의는 백해 무일리하다”고 발언한다. 연해주 조선인공제회 회장, 로씨야귀화인 초봉준이 일본총령사관을 찾아가서 안중근을 무뢰한, 흉한이라고 지탄한다. 부회장인 김병학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고있다. 그들은 안중근의 행동을 비난하면서 “없었어야 할” 인물상으로 간주하고있다. 100년전 안중근에 대한 평가, 이미지가 이렇게 복잡하게 갈라지는것은 일본식민지와 피지배자의 복잡한 립장이 얽히면서 그에 따른 양상도 복잡다양해진 력사자체의 반영일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안중근의 행동속에 숨긴 독립자존, 동양평화의 숭고한 지향에 대해서 점차 인식을 가지면서 침략자 원훈 이토를 격살한 민족투사라는 인식으로 통일된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년을 계기로 그의 사상체계에 대해서 세계와 조선민족사회에서 깊은 쟁의식이 요망된다.      
51    32.海鯨과 鰍魚의 比較論(김문학) 댓글:  조회:5559  추천:27  2010-09-16
《신조선족》월경론32.海鯨과 鰍魚의 比較論 김문학고래와 미꾸라지. 메타포적 레토릭을 구사한것이다. 바다건너 越境하는 신조선족의 해양성, 개방성적 視野 및 스케일과, 연변의 일부 구조선족의 퇴영(退嬰)적 前近代的 폐쇄성과 泥臭性의 視野 및 그 스케일을 比較하는 메타포.이 레토릭이 처음 니카에 뜨자 다수 네티즌의 안구를 자극하면서 주가를 높인듯 했다. 이는 작년 8월말 필자가 니카의 인터뷰에 응할때 사용한 비유였다. “장장 10년을 연변 일부 수구파지식인들에게서 ‘매국노. 반역자’…로 비방, 중상을 한몸에 받으면서 왜 한번도 대응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에서 등장한다.필자의 원어는 이렇다. “바다에서 사는 고래가 언제 한번 개천에서 노는 미꾸라지들에게 시선 주는거 밨습니까? 사는 곳, 스케일, 시야가 다른데 왜 고래가 미꾸리의 흙탕물 장난에 신경을 쓸 이유가 있겠나요? …”니카 인터뷰문에는 “고래와 미꾸라지의 관계”라고 적혀있던데, 필자는 이들 사이의 그 어떤 “관계”가 아닌, 異質性, 異時代性을 언급했던것이다.지금껏 수없이도 많은 팬, 독자와 매스컴으로부터 “왜 일절 대꾸 안했나?”는 점이 너무 궁금했던 까닭인지 이 질문을 필자는 무수히도 많이 받게 되었다. 오늘 이 지면을 빌어 단 한마디로 명확히 대답드리겠다.“서로 사는 무대와 时代가 다른 까닭에 일말의 反論의 가치도 여지도 없었다고 판단 했기때문이다”고.굳이 한마디 더 부언하자면 “잠꼬대 같은 말장난의 소모전에 나는 내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소모시킬 이유가 없었기때문이다. 내 자신에 대한 인물평과 작품의 판단은 시간에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자는 성격적으로 유연성이 있어 그런 비난 받는것도 립지(立地)적으로 감안할때 당연지사라고 인식했으며 그에 무돈지(無頓智)했다.2년전 68세로 작고하신 어머니는 필자에게 인간은 작게 태어나도 마음은 커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무의식중  이 모교(母敎)가 필자의 좌우명이 된듯 하다.상해 海派文化인의 대표인 중국 당시 문학계, 독서계의 왕자로 불리는 여추우(余秋雨)선생님은 필자와 오랜 친분을 나눈 인물인데, 그가 2000년 8월 히로시마서 필자와 상봉했을 때 이런 체험 교훈을 들려주었다.“사람은 유명해지면 수시로 수많은 비난, 중상을 받기마련이므로 김선생도 앞으로 이런 경우에 꼭 조우할것이니 절대로 섯뿔리 대응하거나 그런 소모전에 말려들지 않도록 근신(謹愼)해야 합니다…”당시 여선생님은 필자에게 이런 文句를 써주었다.春雨大雅能客物秋水文章写人事죄송하게도 어쩌다 말이 좀 샜으니 본제로 돌리자. “해경과 추어의 比較 ”에서 사실 필자가 노린것은 고래와 미꾸라지를 신조선족의 개방성 사고의 스케일과 구조선 일부 수구파의 전근대성 폐쇄적 사고의 스케일을 지극히 对照적인 표상(表象)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이다.그럼 고래와 미꾸라지의 담론을 좀 더 체험적 근접적 거리에서 어프로치 해보기로 하자. 필자가 “고래”에 대한 이미지에 지대한 관심을 품게 된것은 대학교 1학년때 일본어역으로 Herman Melville(1819-1891)의 장편소설 「백경(白鯨)」(흰 고래)을 읽게 되면서였다.  사마세토 모금에 의해 “세계10大長篇小說”에 꼽힌 이 소설은 거대한 백경(白鯨) 모비딕한테 왼쪽 다리를 먹히운 선장 예하브가 보복을 위해 세계의 해양을 항해하면서 그 백경을 찾는 모험소설이다.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고 시작되는 소설은 이슈메일이란 화자의 구술로써 이야기가 전개된다. 본질적 의미에서의 키퍼슨(중요인물)은 선장이 아닌 젊은 수부(水夫)인 화자이며 그 백과전서적인 고래에 대한 지식은 그야말로 “박물지”적이며 역사, 과학, 신화, 언어학적 제반 영역에까지 섭렵되는 고래에 관한 知見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이야기의 구조는 다원구조로서 풀기어려운 복잡한 인용, 상징의 그물 세계를 이룬다. 그것은 정치소설, 종교소설, 또는 모험, 실험, 해양, 인간, 인간과 고래, 인간과 인간의 격투…를 현란하게 묘사하고 있다.고래가 사는 무대는 해양—불루오션(청색바다)이다. 고래에 대한 필자의 지식은 여기서 시작되며, 해양에 대한 동경도 여기서 시작된다. 내륙 심양에서 자란 조선족 학생으로서 “바다”는 동경이 황홀경이도 했다.“왜 세계를 文明史적으로 동양, 서양 하는 식으로 海洋의 “洋”으로 표현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필자는 18세의 다감한 시절에 자문자답하면서 “해양”을 몹시 의식하게 되었다. 필자가 당시 고민했던 문제의식은 왜 인류가 육지에 살면서도 그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개념은 동륙(東陸) 서륙(西陸)이 아닌 동양, 서양인가 하는 소박한 테제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필자는 당시 중국대학에서의 석사공부를 단념하고 동양의 선진국 일본의 한문세계에서 아카데미즘을 흡취하고 동양 3국인 文化의 比較를 겨냥했다.이유와 목표는 개개인에게 다르지만 이렇게 조선족의 해양을 향한 청색의 월경시대는 사실 바다 해양문명에 대한 역경이 근저에 숨쉬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번에는 “미꾸라지”의 표상에 대해 얘기하자.“기름종깨과의 민물고기, 논, 개천 등 흙바닥속에서 살면서 길이 15cm, 가늘고 길며 미끄러움”사전에는 이런 해석문이 일반적이다. 우아한 한자를 차용하여 추어(鳅魚)라 일컽는다. 미꾸라지는 약하여  “미꾸리”라고도 한다. 우리 육지인의 친숙한 민물고기지만 그에 대한 표상은 어딘가 야유적 풍자적인것이 많다.일테면 “미꾸라지를 먹고 용트림한다” ”미꾸라지 용 됐다”등 미꾸라지는 보잘것 없는 비천하고 토속적이고 폐쇄된 스케일이 작은 인물로 규정돼 있다.  “미꾸라지국”은 일명 우아한 “추어탕”으로 불리는데 필자의 대호물(大好物)이다. 경상남도 출신의 할머님이 끓이는 추어탕은 일대 미미(美味)였다. 개육탕, (보신탕)은 필자는 즐기지 않으나 이 추어탕은 참 맛있다. 한국에서도 보급된 식당메뉴이기도 하며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도 즐겨 먹는다. 일본에서는 도죠, (泥鰌)라고 하는데 그 흙냄새를 꺼린 그들은 오히려 바다의 뱀장어를 특별히 선호한다.식문화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부언하면 중국 대륙 문화의 식문화는 그 요리명칭에 거개가 「火」자변이 붙는다. 炒、燒、烤、爆、煮…등 고기나 나물을 불로 가실가는 소재의 신선함을 죽이는 특징이다. 대조적인것이 일본인데 그 요리에는 「魚」자변이 많이 따른다. 거의 생선문화, 그것은 海洋性을 나타내는 문화이기도 하다. 하다면 우리 한국 (조선족 포함)은 「火」자변과 竹(초)자변 즉 나물이 많아 거개가 땅에서 나는 나물과 육류다. 맛있다는 장어도 우리는 민물 장어, 육류도 당연 개고기 같은 육지의 육류가 대호물이 된다.미꾸라지국은 좋지만, 미꾸라지적인 땅에만 직찹하는 좁은 시각과 스케일은 아무래도 타개해야할 우리의 문제일것이다. “미꾸라지”역시 개천에서 용이 탔다는 말과 같이 넓은 바다의 개방성 시야와 사고를 갖추면 “고래”로 변실 할수 있다. 그런데 기어이 좁은 개천 흙바닥으로 뚫고 들어가면서 재롱피우겠다면 그건 그 자신의 선택이니 그 자유는 존중한다.그러나 조선족이 개천을 탈출하여 넓은 바다에서 청색시대, 월경의 시대를 살면서 이미 “해경”으로 변신하고 있는 경하 할만한 변화가 이룩되고 있다. 그들이 바로 개방성 인간으로 거듭난 “신조선족”이다.좁은 개천에서 살지라도 넓은 바다의 시야와 사고를 지향하면 영낙없이 거대한 “해경”으로 거듭날것이다.전장 10m, 체중 4500kg의 웅대한 건물과 같은 고래, 집채같은 고래의 무대는 넓고 넓은 해양이다. 고래들은 말한다. “바다, 이문화의 바다에는 세계 가장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고 백경같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세계 그 어디로 질주하는 뜨거운 피들.추어들의 초라한 표상에서 더욱 극명적으로 뜨는것은 거대하고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신조선족의 청신한 표상이다.이제부터 신조선족의 겟텔은 “해경(海鯨)”이다! 그리고 심벌(상징적) 로고마크는 바다를 달리는 “해경”으로 디지안 돼 있어야 할것이라 생각한다.  
50    (14)“상투는 못 잘라” (김문학) 댓글:  조회:6436  추천:34  2010-09-14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4) “상투는 못 잘라” 김문학   “1896년은 조선에 있어서 작년의 깊숙한 우울을 헤여나지 못한채로 다가왔다. 작은 반란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각급 관료가 살해되고 서울까지 쳐들어갈 반란군도 있었다.〞   국내 전체가 동요되고 몇가진가 심각한 폭동이 일어난데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바로 1895년 12월 30일 정부 칙령에 의한 ‘상투’를 자르는것이였다. 이것이 조선전역을 훨훨 타오르게 했다. 얄미운 일본이 기승을 부려도, 또는 왕비가 암살(189년 명성황후 암살사건)되여도, 국왕이 유페동연한 대우를 받아도 꾹 참아왔던 조선인들이 상투를 자르라는 왕명에는 견딜수가 없었다. 조선인에 있어서 ‘상투’는 청국인에 대한 변발보다 월등 중요한것이다. 청국인의 변발은 정부에 복종함 또는 충성심을 나타낸 징표에 불과하며 머리카락이 자란 유년기부터 태를 땋는다.” 이것은 조선을 여행했던 유명한 영국인 관찰가 이자벨라.비숍여사가 1897년 출간한 《조선기행 》의 한단락이다.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에 대한 조선민중의 대거 반항을 관찰한 대목이다. 비숍의 글은 또 이렇게 이어진다.    “하지만 조선인에 대하여 ‘상투’는 조선인이라는 상징이며 태고로부터 전해지는 관습이며(500년전 또는 2000년전) 역사가 깊은 까닭으로 신성시했는바 이를테면 실제로 몇살밖에 안되는 아이라 해도 사회적 법적으로 성인이라는 상징이며 또한 성씨와 함께 후세에 남기는 조상의 위패에도 씌여질 두가지 이름을  갖고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조상숭배와 함께 결혼도 ‘상투’와 밀접히 연관돼있으며 혼례에 관한 장에서 얘기하다싶이 ‘상투’가 없는 조선인은 중년이 되여도 이름도 없는 아이로 취급하게 된다. 결혼도 못하고 ‘상투’를 튼 자는 ‘반성인(절반어른)이란 레테르가 붙어졌다.”   한말 유명한 학자인 황현도 그의 저술 《기려수필》에서 단발령이 내린 시초에는 전국이 분노했고 그래서 의병의 봉기가 우후죽숙마냥 격동되었다고 밝히고있다.   조선 전통문화의 최후의 심벌이가도 한 상투, 또한 근대화앞에서 그것은 보수적인 상징이였다. 상투의 보존은 전통적인 관습, 생활양식의 보전 그자체였으며 친일내각 김홍집, 유길준 등의 명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또한 민족주체성 그 자체와 상투는 동일시돼 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근대를 보면 조선은 이렇게 일본이라는 여과장치를 거쳐서야 서양의 근대와 만나게 되는데 보수적인 투쟁은 따라서 근대에 대한 저항과 함께 “일본”이라는(실질적 식민지지배자) 상대에 대한 저항이란 이중성격을 띄고있다. 그것은 청말 한족이 근대화를 지향함에 있어서 근대 서양에 대한 저항(또는 수용)과 함께 이민족인 만주족에 대한 저항, 제거로 이중적인 성격을 띤것과 류형상에서는 류사한 모습이 있다.   청나라의 상투는 “번발(辯髮)”로 불린다. 동북아시아 소수민족의 전통습속으로 두발의 일부분만 남기고 깎아버리고 남은 모발을 길러서 태로 땋는 스타일이다. 만주족의 그것은 앞머리부분을 깎고 뒤머리를 길러서 타래로 땋는것이 특징적이다.   여진족(만주족)이 1644년 청조를 세울 때 순치황제는 한족들에게도 변발을 강요했다. 유교전통에서 모발을 포괄한 신체를 상처내는 일은 터브이므로 한족들은 그 변발에 저항했지만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19세기에는 전국에 변발이 보급되고 점차 “중국적인 풍습”으로서 이미지를 남겼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돼지꼬리”로 멸시당하는 끄트머리로 되였다. 일본인도 불과 30여년전에 자기네들도 쵼마게라는 일종의 변발비슷한 상투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국인을 싸잡아 “돈미(豚尾)야로”비하하기도 했지 않은가.   1911년 신해혁명승리와 함께 단발령이 내렸다. 당시 조선인이 웨치던 “상투는 못잘라!”하는 반항풍경이 여기저기서 빈발했다. “머리는 잘릴지언정 변발은 못자른다”고 근대문명에 반항했던 지식인, 관료들도 많았다.     근대화의 도도한 조류앞에서 중국의 변발은 조선의 상투, 일본의 쵼마게와 함께 잘라버려야 할 낡은 보수의 상징이였다.   중국인의 표상속에서는 세계 모든 야만인종이 변발을 하면서 문명인이 되였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자신들의 변발도 잘려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것이 바로 근대혁명이다.   1851년에 발발한 태평천국혁명시기 변발을 푼 홍수전 “장발적”을 탄압한지 불과 60년이 안지나 청나라는 무너지고 그 변발은 잘리우는 비극으로 끝난다. 근대혁명가로서는 청나라를 구축하는 혁명에 투신해온 손문이 솔선 변발을 잘랐다. 변발을 후지산에 빗댄 노신도 일본에서 유학시에는 변발을 잘랐지만 다시 1909년 귀국해서는 가짜변발을 쓰고 다녔다는 일화가 전해지니 변발은 역시 전통의 끈질긴 상징임이 잘 알린다. 일본인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상투(즉 쵼마게)를 자른다. 1871년 9월 23일, 명치정부에 의해 발령된 산발탈도령이 하달되자 절대다수가 리해하고 호응하였다. 따라서 서양복을 착용하고 남녀혼욕금지, 나체금지 등 서양식 생활양식을 제도적으로 급격히 도입하였다. 명치천황도 솔선하여 쵼마게를 잘랐다.   그때만 해도 육식을 안하던 일본인은 서양인을 따라배워 육식을 장려하고 우유를 먹게 되며 녀성들도 양식 스커트를 입고 모던걸로 활보하게 된다.   상투, 변발, 그리고 쵼마게.   각기 동양3국의 전통적머리스타일이 서양문명의 충돌속에서 잘리워야 하는 운명에 아우성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3자의 상투가 잘린 양상과 속도가 근대화를 달성하는 양식과 속도와도 맞먹는다. 근대화는 생활양식의 근대화이기도 한것이니까.  
49    31.2050년의 우리는(김문학) 댓글:  조회:4723  추천:28  2010-09-14
《신조선족》월경론31.2050년의 우리는 김문학신조선족이 바로 動熊的時期가 탄생시킨 것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20세기를 돌이켜 보면 인구이동과 “월경”이 글러벌화 아래서 전개된 세계사적인 공동현상이기도 했다. 조선족은 1990년이래 세계 월경의 최전선에 서서 세계의 움직임과 同步的인 행동을 보인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월경은 단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형이상학적인데서 보다 중요하게 부상된다. 즉 부(富)와 함께 사고방식의 변용, 유연하고 풍부한 사고양식을 100년 조선족의 유례를 볼수 없는 형태로 학습, 산출시킨 것이다. 조선족의 생활사와 정신사에서 이는 특기할만한 변용이었다. 필자의 조선족문화에 근 미래에 대한 展望은 비관적이 아니라 오히려 낙관적이다.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식의 조선족 文化의 20년 주기설(波動性)으로 앞날을 조망하면 어둡지는 않다. 물론 각자 보는 견해나 지견은 각기 다른것은 시각의 차이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필자는 이제 2010-2030년의 조선족은 상대적인 “半靜半動熊시기”에 들어서면서, 외부에서 새로운 집거지를 형성하여 그동안 쌓은 경험을 安靜하여 반추, 저작하면서 “신조선족집단공간”형성에 힘을 주입 할것으로 보인다. 한편 연변의 전통적 민족공간도 월경을 통해 해외에 나갔던 回归者의 신선한 혈액에 의해 文化反省을 하게 되면서 하나의 신생의 “연변조선족민족공간”이 재편성 되리라 예견된다. 또한 한국과 북조선이란 (통일한국은 더 좋고) 굵은 핏줄이 우리의 뒤에 있다. 그리고 신조선족의 해외파들은 그 선진국에서 자신들의 집단공간 (일테면 재한국조선족의 30~40만)이 새로운 “조선족 공간”을 구성할것이며 일본,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에서는 “집단적 공간”의 물리적 “공간”보다는 “文化的공간”으로서 그 유대가 튼튼히 구성 될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2050년 까지 이런 “신조선족”의 추세대들에 의해 “신조선족의 문화공간”이 다시 세계적인 넷트워크의 “신공간”으로 재구축, 1950년대 以后, 신백년의 “新신조선족”이 탄생 될것이다. 이제 100년후에도 조선족은 멸망 되지 않는다. 공간의 축소는 새로운 공간을 의미하고 농민으로서의 토지 상실은 도시시민으로서의 시민문화권 형성을 의미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농민의 근대 및 전 근대적 문화차원을 질적으로 비약을 이룬 고차(高次)적 도시文明空间으로의 新生을 상징한다. 우리에게 조선족 멸망의 우려보다 “신조선족”을 어떻게 재건, 재구축시킬까를 고심하는것이 더 요망되며 바람직하다.  
48    30.조선족문화의 波動性 댓글:  조회:5063  추천:29  2010-09-13
《신조선족》월경론30.조선족문화의 波動性 김문학필자는 조선족문화의 연구와 조선족문화論에 있어서 무엇보다 重要한 것은 조선족 文化의 構造를 “越境”으로 포착하는것이라고 사료한다. 越境民族으로서 시작된 우리의 역사는 아마 역시 越境으로 끝날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숙명적으로 “월경”과 직결된 집단이라는것을 망각할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文化를 구조적으로 규명할때, 이 越境 및 그것으로 동반되는 모든 諸事像들을 빼놓고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생각된다.  유감스럽게 우리의 지식인이나 학자들이 조선족文化(또는 精神史)를 越境에 의한 文化의 波動性에 대해서 귀납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100년의 역사를 文化史적인 周期性 을 귀추하여 文化史的法测적 方法으로 文化를 논하고 내일을 展望하는 발상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하다.  林語堂은 中國 漢民族의  文化를 論한 「吾国吾民」(1935년)이란 영문저서에서 한족이 외래 民族의 침습에 의한 수혈을 받고 매번마다 약 800년 주기로 종결됐다고 지적한다. 이 역사 周期說은 물론 임어당 자신의 독창적인 발견이 아니라 1926년 顧頡剛(중국 저명한 역사가) 「古史辨自序」에서 지적한것은 원용한것이다. 顧氏는 “만일 五胡,契丹,女真,蒙古의 侵入이 없이, 漢族에게 신선한 혈액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한족은 아마 오늘 날까지 구연(苟延)되지 못했을것이다”고 직설했다. 북방의 소수민족의 침입(월경)이 한족에게 신생명의 입김을 취입시킨 중대한 역사적 주기성을 갈파한 대목이다.  일본의 근대 사학자, 나이토고난의 제자이기도 한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역시 그 저서 「東洋 朴素주의적 민족과 문명주의적 사회」에서 같은 역사설을 전개시키고 있다. 북방이나 주변의 朴素주의적 非文明 소수민족이 문명대국 중국을 침입하여, 소박한 요소를 취입시킴으로써 한족에게 신혈액을 주입, 한족의 “신생”을 초래했다고 논점을 제기한다.  중국 文明史는 漢族만이 아닌 諸“야만”민족의 마이너리티의 침입(越境)에 의해 구성된 중요한 史实은 오늘 그 누가 부정할수 있으랴.  거대한 대륙 文化에도 우리의 상상을 절(絕)하는 越境의 드라마가 있거늘, 하물며 우리 작은 마이너리티로서의 越境이 그 구조적인데 이를 어찌 외면할수 있으랴. 이제 필자는 조선족 문화의 파동성(주기성)에 대하여 간단히 논술하고자 한다. 조선족이 외부문화에 대한 행동은 (1) 靜熊적인것과 (2) 動熊的 및 (3) 半靜半動熊的 시기로 不麦性,連續性을 보이고 있다.  해방후 조선족의 외부문화에 대한 대응, 對外意識은 주로 적극적인 인구이동의  越境을 주축으로 노정하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  “靜熊的”인것은 집단적으로 安定, 정착하면서 외부文化 (즉 주로 漢族文化)에 대해 受熊的 태세를 취하며 반발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獨自性을 지키려하는 시기이다. “動熊的”인것은 외부文化(漢族,海外)에 대해 安定,定着의 수동적 반발, 수용을 깨고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한족文化空间(대도시)와 海外로 越境하여 지근 거리에서 외부文化를 접촉수용하는 양상이다. “半靜半動熊”는 이상 양자가 복합된 형태로 靜熊的 安定性을 지키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외부文化를 수용하고자 行動으로 실천하는 양상이다. 1950년대~1960년대(20년) 靜熊的时期 1970년대~1980년대(20년) 半靜半動熊时期 1990년대~2010년(20년) 動熊的时期 “越境的移動”의 특징적 기준으로 조선족의 文化는 20년 주기성(周期性)의 波動性을 나타내고 있다.  이같은 20년 사이클을 가지고 귀추해보면 조선족의 문화는 주로 半靜半動熊 및 動熊를 반복하면서 외부문화에 대한 단순한 反발을 넘은 적극적 수용융합이 월경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특성을 진단해 낼수 있다.  정치문화(국가적 의식)에 대한 우리 조선족 태세는 물론 적극적이고 민족문화(습속적 사고, 행동양식)에 대한 우리의 独自性을 보유하면서 越境을 통해 많은 외부 文化의 요소를 흡수하고 있다. 
47    (13)일제시기 일본인의 “조선민족성론”(김문학) 댓글:  조회:5741  추천:23  2010-09-13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3) 일제시기 일본인의 “조선민족성론”김문학수년전 필자가 근대 사료를 찾다가 일제시기 1927년(소화2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편집 발간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조선통치책을 원만히 실시하기 위해서 발간된 책자로서 그 당시 “일본인이 본 한국인론”으로서는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갖춘 문헌자료이다. 지금껏 발굴된 일제강점시기 “조선인의 민족성”치고 이렇게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집대성한 자료는 필자의 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없는듯 하다. 자료에 반영된 시간은 1910년대에서 20년대 당시 조선인의 성격기질을 파악하는데 일정한 가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3.1운동후 식민통치정책을 스무드하게 추진시키기 위한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민속, 풍속, 문화, 국민성(민족성)종교, 신앙 등 조사를 행하여 자료집으로 발간했는데 무려 40여종이 넘는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도 총독방관조사과(문서과)에서 낸 그 자료중의 제20집이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경이감을 느낀 점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기질로서의 큰 특징의 하나가 매사에 서두르고 “빨리빨리”하는식의 급한 성격인데 그때 당시의 조사로 보면 정반대로 느긋하고 매사에 서둘지 않는 유장한 조선인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정서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그때 백년전의 조선인은 감정을 잘 노출하지 않고 정서적이지 않았다는 대조적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민족성, 국민성은 역시 고정불변 하는것이 아니라 전쟁, 이민족지배 등 역사체험을 통해 변화하는것이다. 오늘날 조선민족의 정서적 기질이나 매사에 서두르는 등 성정은 이같은 역사의 시공간적 체험을 바탕으로 점차 형성된것으로 추찰된다. 이 책의 내용을 드려다 보기로 하자. 서문에서 이 책 출간의 취지를 “본집은 주로 조선인의 사상 및 그 성격을 조사연구하는 자료로 간주하여 각 방면으로 본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관을 잡연히 모아 집성시킨것에 불과하나 이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조선을 이해를 함에 도움될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본편은 (一)조선인의 개관, (二)조선인의 성정(性情), (三)조선인의 사회경향 등으로 구성됐는데 조선인의 민족성 기질은 주로 제2편에서 다루고 있다. “조선인의 일반적 성정”으로서 각종, 각분야의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집성하여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조선인의 성벽(性癖)으로서  방종, 사치, 낭비, 사행(요행을 노림). 조선인의 주된 성격기질로서는 ①표면적, 형식적인것을 즐김 ②부화뢰동 ③모방성  ④무기력 (5)怯懦、회색、보신술 ⑤利已적 판단 ⑥진지함이 모자람 ⑦조선인의 진지함 소유 ⑧감격성의 결여 ⑨의뢰심 강하고 또한 보은성이 결여 ⑩독립심이 적고 조선독립은 그 국민성에 맞지 않는다 ⑪ 감각이 무디고 인내심이 강하여 울어도 진짜 감정에서 우러나서 우는것이 아닌듯 하다 ⑫각도사람의 심성(적성) 평안도 함경도 사람은 성질이 강경하고 용맹하여 군인에 적합하고 전라도 사람은 기예나 미술공업에 능하고 충청경기도 사람은 지모변재에 능해 정치에 적합하며 경상, 강원도 사람은 순수질박하여 문학의 재능이 있으며 황해도 사람은 理财에 우수하니 상업에 적합하다. (이것은 1920년 6월에 창간된 《개벽》잡지 1926년 7월호 青吾의 글을 일어로 번역한것임) 그리고 “조선인의 성격관”으로 이하와 같은 특성을 열거한다.①사대성 ②면종배복 ③음모성  ④허영심〝조선인의 특성〞으로서 그 특성을 또 이렇게 나열한다.①사상의 고착성, 유독성이 결여한것  ②사상의 종속성, 모든 사상을 지나(중국)에 종속시키고 그 어떤 조선의 독창성 사상으로 간주할수 있는것이 생기지 아니했다는것, 그 예로서 언어, 문학, 제도, 종교에서 모두 지나의것을 전면 수용하여 독창성이 결여하다고 판정하고 있다. ③형식주의, 도덕, 윤리상 형식을 중요시하고 그 실질을 추구하지 않는다  ④당파심, 조선인이 다수 모이면 자연히 당파를 뭇고 파쟁을 하게 된다  ⑤문약(文弱)함, 일본이 상무국인데 비해 조선은 종래로 상문의 나라이다  ⑥심미관 결여,고물보존에 있어서도 심미관이 있는 일본이 능하지만 조선은 운치의 차가 있다.  ⑦공사혼동, 이조의 피폐한 실례를 들면서 사욕에 배를 불리는 관료에 조선 가족주의 중국을 그대로 답습한데서 그 근원을 찾는다.  ⑧관용, 느긋하고 대범함, 일본인과 비교하여 이 성정은 칭찬해야 할 특성이다. 조선인의 성질은 기분이 유장하고 감정을 격심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속담에 조선인의 긴 얼굴과 긴 담배대는 기가 유장한 “三长”이라 한다. 유장은 관용과 같이 감정이 평정한 평화태연함을 상징한다. 일본인은 그와 비해 종일 바삐 돌아치고 향수할줄 모른다. 또 조선은 예의를 옛날부터 중시하고 공자다운 예의국인바 李朝에 나타난 인물도 큰 인물이 많았다. ⑨락천적인 성격, 그 발생원인으로서 유장한 성격, 본분을 지키는 성격, 긴장속에서도 여유를 찾을줄 아는것이다. 요컨데 조선인 성격사상의 결정으로서는 형식주의 비심미적, 문약, 당파심, 공사혼동의 “6대특징”이며 장점으로서는 관용·느긋함, 순종, 낙천이 “조선인의 3대우점”으로 꼽고 있다. “매사에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다”는 점은 100년전 조선을 찾은 서양인의 기록에도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이런것으로 추찰되는것은 그때의 우리 선조들은 느긋하고 유장한 성격이었다는것이다. 이같은 느긋한 성격은 일제의 억압속에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성급함으로 변질, 그리고 6.25 조선전쟁 등 수난을 체험하면서 급급히 매사에 서두르는 조급성격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는가 심료된다. 아무튼 일제시기 총독부 산하에서 나온 이 책은 정책적 추진을 위한 조선인의 의식구조, 민족성 파악을 목적으로 했다는 “정책을 위한 봉사”의 큰 한계를 갖고 있다. 《국화와 칼》이 미국 국무성의 일본인 점령책의 문화적 근거를 삼기 위해 여류인류학자 루즈.베네텍트가 위촉을 받고 쓴 허상과 실상이 혼합된 “일본인론”이듯 이 책의 옥석혼재에 대해서는 그 진가를 가를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과거 우리의 많은 허상과 함께 실상이 혼재되면서 그 허상을 물론 비판해야 한다. 또한 비판적 시각으로 우리 과거의 “거울”의 한쪼각으로 될수 있는 가치는 우리가 신중하게 재고 해야 하지 않을까.  
46    29.靑色時代 (김문학) 댓글:  조회:4848  추천:30  2010-09-10
《신조선족》월경론 29.青色時代     김문학피카소의 “청색시대”가 아니다. 친구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쇼크를 받은 그가 무기안료의 침울한 청색을 표현하려 했던 암청색조의 무거운 청색, 절망의 청색이 아니다.   필자가 얘기하려 하는것은 때로는 진하다 못해 에메랄드의 광택이 반짝이는 바다의 청색이다.   오늘의 조선족은 전례없는 개방시대를 지향파한 해양의 청색시대를 살고 있다. 그것을 필자는 토지에 연연했던 농경지향의 대륙적인 황토의 황색시대, 또는 이데올리기의 홍색시대와의 상대적 개념을 전제로 한것이다.   내륙오지의 연변을 이탈하여 연해도시, 바닷가의 개방성 대도시로의 이동, 그리고 푸른 바다를 넘어 해외의 선진국문명권에서 해양의 개방성과도 같이 青色時代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바다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희망의 바다다. 미풍은 속삭이고… 휘파람 불며 가자. 희망의 바다로!”   우리의 민요 「꽃마차」의 “거리”가 “바다”로 바뀌고 있다. 본디 바다의 청색은 “희망”의 의미이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는 해양의 아시아에서 탄생했다”고 문명사학자 가와가츠 헤이다(川勝平太)가 갈파했다. 그는 이렇게 창신한 언설을 펼치며 “해양”을 “발견”한다. 고대 문명은 아시아 “대륙”에서 형성되는데 반해 근대 문명은 비아시아 “해양”에서 탄생된다. 세계사의 다이내미증을 낳은 무대는 아시아에서 비아시로, 대륙에서 해양으로 바뀐 이유를 문화전파의 실크로드인 “육상의 길”의 역전적인 “해상의 길”에서 찾는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맑은 문물들이 아시아대륙에서 해상의 길을 통해 유럽으로 흘렀다.   이래서 역사는 해양아시아로 무대를 옮긴다. 서양 최초의 산업국가 영국과 동양 최초의 산업국가 일본은 거대한 해양아시아를 통해 역사의 시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즉 근대의 세계사가 막을 연것이라고 한다.   가와가츠는 유물사관과 육지(陸地)사관을 초월하여 “문명의 해양사관”이란 참신한 이론을 발안한다. 그는 유물사관, 육지사관을 이데올로기와 육지(땅)의 사관은 어디까지가 육지 중심적이며 거기에는 중대한 바다에 향한 시점, 이 바다로부터의 시점이 통채로 결락돼 있다고 지적한다.   해양아시아(대륙적 아시아에 대치한 개념) 의 인팩트에 대한 레스폰스로써 해양국가 일본과 유럽에 신문명이 출현됬다는 해양사관 테제.   21세기는 현재의 추세가 지속되면 세계 최대의 바다인 태평양이 무대로 되는것이 틀림없다. 장래의 「태평양문명」을 짊어질 APEC의 중요한 멤버로서 일본도, 한국도, 그리고 중국도 해양지향의 길에 이미 들어섰다.   그리고 서양의 근대사회 자체도 해양을 무대로 생성된것이며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전부가 해양국가였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라 불린 페루낭 부로테르(1902~1985)는 그의 명저 「地中海」에서 역사에 향한 눈길은 육지에서 바다로 전환시켰다고 선언했다.   중국대륙의 문명에 한해서 담론할때 동양사학의 권위인 구와바라지츠조(桑原隲藏) 박사가 1925년 유명한 논문 「역사상에서 본 남북중국(지나)」에서 회하를 분수령으로 남북중국설을 전개하면서 남방문화가 북방문화를 능가했다고 갈파했다. 정치중심의 북방과 경제중심의 남방이 천여년전에 이미 형성됐으며 북방은 정치 얼굴의 “대륙중국”, 남방은 경제 얼굴의 “해양중국”설을 제시했다.   “대륙중국”과 “해양중국”의 이원론은 대단히 현실적 의의를 띤 언설이다.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남방순회에서 걸러낸것도 이같은 배경을 잘 설명한다. 경제와 문화적 누적이 중한 남방, 해변가 도시에서의 개방성을 활용한 속셈은 너무나 탁견이었다. 아니,탁견이라기보다는 그 역사적 전통의 특징을 그대로 이용한것이였다.   만약 정치의 도시, 홍색이데올리기로 팽창된 북경에서의 개혁은 무리였을것이다. 중국의 근대의 많은 혁명, 유산은 남방에서 생성, 탄생되어 북방에 오면 북경에서 종식되는 “근대사의 법칙”을 필자는 “발견”한다. 강유위 양계초의 무술변법도 손문의 신해혁명도 북경에 이르면 다 패북의 좌절로 무산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중국에도 홍색지대와 청색지대의 전통적 공간이 존재했다. 그러나 북경의 홍색이데올로기가 팽창되면 청색도 기가 죽는다. 문화대혁명은 기실 완전히 홍색의 해양, 홍색의 광란이었던 점에서 중국의 홍색문화는 여전히 연연한 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중국 북경정부도 이미 등소평이래 해양지향의 청색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상해, 청도, 대련, 심천 등 대도시는 청색시대의 청색문화가 농후한 공간이다.   조선족이 이런 연해도시의 청색문화지대에 진입하여 국내적 청색시대를 만끽하고 있는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그리고 바다건너 월경을 통해 해외에서 살고있는 조선족 역시 해외 청색시대의 개방성 문명의 수혜자이며 전도사이기도 하다.   누런 농경지 땅을 배경으로 한 황색시대, 붉은 이데올로기 중심의 홍색시대를 넘어서 해양지향의 조선족이 청색시대의 주인공이 된것. 이는 조선족의 축복이다.   중국 전체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해양성지향의 선진국가로 탈바꿈하는 이 격동의 시대,조선족의 청색시대는 많은 의미에서 국내마이너리더의 해양문화지향의 선구자이다.   선구자의 앞에는 항상 푸른 바다가 있다.        
45    28. 지식인의 무덤 (김문학) 댓글:  조회:6088  추천:41  2010-09-07
《신조선족》월경론 28. 지식인의 무덤 김문학  구조선족의 종말과 함께 또 하나의 ”종말”을 선고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지식인의 종말”이란 테제이다. 아니 지식인 전체가 아니라 우리 조선족 지식인, 좀 더 구체화시켜 直言하면 연변조선족의 일부 “수구파+좌파(?)지식인”의 종언.  사실 10년전 「조선족 개조론」에서 필자는 이미 그 시점에서 그들이 종언을 예언했다. 최종회 「장백산」(2001년 6기) 「조선족 지식인 비판」「지식인의 精神病理學과 우리 자신의 제한성」「우상, 이제 없다」등 문장에서 그들의 죽음을 정신병리학 원리로 分析하면서 경종을  울리었다.  그런데 비극적인것은 당시 그들은 이 글을 쓴 필자에 대한 외곡적인 해독과 몰이해의 까닭으로 정서적인 열광적 반발의 광란극을 벌이는데 열중하여 필자의 지적을 간과 했거나 역시 해독할 수준도 능력도 결핍했던것이다.  오늘도 불가사의 한것은 그때 왜 그들이 냉철하게 읽는 해독(解讀)도 자기 省察도 없이 무조건 반발, 반박, 부정의 광란극을 펼쳤는가 하는것이다. 그 점이 오늘까지도 궁금하고 한편의 전인미답의 희극을 보는듯 재미있었다.  그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비판했던 “연변좌파병원”의 그 극중의 배우들을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연(自演)의 배역을 맡았던것이다. 세상에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고 유순호씨도 미국에서 킬킬킬 조소한다.  그들 자체가 자신들을 위한 종언의 “무덤”을 만들었다는것이 결론일것이다. 필자는 그때 조선족의 일부 수구파의 단점과 그 형성원인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 지식인자체가 농경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살면서 그것이 무의식중에 체질화된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끼리만 집중된 지역에서는 지식인의 농경성격이 여타 이민족과의 실질적인 접촉이 없어도 전혀 생활에 부자유가 없으며 또한 그것을 특별히 필수하지 않은 전제하에서 그것들이 더욱 비대화로 발전하여 클로즈업되기 십상이다. 여기에는 고대 그리스, 중세의 베네치아, 근대의 영국 등 재해양민족에게 보여지는 《바다야말로 내가 일하고 사는 고향이며 영원히 잠들수 있는 무덤》이라는 사고가 없다. 즉 내가 나가서 내가 사는 곳이 어떤 이경(異境)이라 할지라도 내 고향이라는 개방적인 사고와는 무연하다. 이미 한세기여동안 중국에서 정착해오면서 고정불변의 내 《고향》을 만들고 고수하기에 여념이 없어진것이다. 따라서 고질로 된 고향을 떠나면 죽을것만 같은 사고로 점철돼있으며 고향리별의식은 없으며 끝까지 《성역화》시킨다.  이런 지식인의 의식은 일원적(一元的)이며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충만돼있으며 원패턴(한가지 류형)의 사고에 포로돼 내부로부터든 외부로부터든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언론이나 행동은 모두 이단시(異端視)되고 타도의 타깃으로 되기마련이다.  거기에다 《정치적투쟁》의 유전자까지 투기적인 정열이 가미되다나니 우리 지식인이 《성역》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무슨 일인들 못해내랴. 불보듯 뻔하지 않은가!  나라나 민족을 막론하고 지식인중에는 어디에나 보수적인것과 개방적인것으로 이분되는 일은 흔하다. 일본에도 보수적인 우익지식인의 목소리가 크며 한국에도 보수적인 지식인의 세력은 상당하다. 그러나 비교를 통해 보면 우리 조선족지식인의 보수성은 더욱 렬악하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촌놈》의 레벨을 벗으려면 아직 멀었다. 이 표현 말고 딴 표현을 아무리 찾아도 더 적중한것을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이고 아이러니컬한것은 우리 지식인의 보수성은 이미 고향을 이탈하고 땅을 떠나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많은 농민의 당찬 모습에 비하면 너무 왜소하고 영양실조처럼 보인다. 그러고도 《우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솔자》인양 행세를 하려 드니 진짜 촌놈으로 추락된것을 실감한다.  21세기의 첫시작부터 우리 지식계, 문단에서 새로운 《의식혁명(意識革命)》의 물고를 터쳤다. 우리 민족의 전례없는 《의식혁명》의 홍류다. 내가 소리높이 웨치고싶은 말은 누구보다도 먼저 반성하고 개방해야 할 사람은 많은 대중이나 농민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지식인 자신들이라는것이다.  열린 개방의 길만이 우리 지식인,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일부 조선족의 결점을 필자는 구조선족의 “농경성”에서 규명했으며 “고향을 이탈하고 땅을 떠나 모험의 길로 나아가는 농민” 즉 “신조선족”에 비교해도 후진적인것, “우리 시대의 인솔자”로서는 失格이라고 지적했다.그러므로 이미 그 시점에서 그들의 失格은 그들의 역사적 무대에서의 退埸을 의미했다. 마치 포스터모던이라 불린 1980년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지식인의 무덤』에서 밝혔듯이 지식인의 기능의 실조를 선언했던것과 유사하다.  20세기 후반 세계적 권위적 인물로서 앙가주망(사회참여)사상의 기치를 든 장 폴 사르트르가 1968년 5월 학생운동때 연설하던 그에게 “사르트르, 이제 말을 그만둬라!”는 쪽지를 청년들에게 부터 전달받는다. 사르트르는 그 메모지를 보고 목연해진다. 이미 자신이 청년학생을 리드하는 지도자의 헤게모니적 시대는 지났다고 실감했다.  이 운동에 에설 푸코의 모습이 보였다. 『언어와 물질』이란 저서로써 사르트르를 “인간의 종말”을 선언했다고 비판하면서 사르트르의 시대가 푸코적인 지식인의 리드시대로 새로운 장을 열었다.   마치 조선족의 지식인의 “최후의 보루요”, “흑마백마요” 자찬하던 “수구파 지식인”의 “종말”은 작년 니카의 젊은이들에 의해 선고당한다. “신조선족”의 발랄한 등장이었다.   그 “보루”는 멋있게 붕괴되어 마침내 자신들의 “무덤”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필자는 노신의 “물에 빠진 개를 매질하는 식”의 극단적 수단은 찬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냉철하게 자성하고 반추하는 여지를 주는것 역시 우리 선대 역사의 지혜가 아닌가. 그러면 그 삭막한 무덤에도 봄이 오면 꽃이 필것이요 풀이 무성할것이다.
44    (12) 근대 “時間”의식의 생성 (김문학) 댓글:  조회:5517  추천:23  2010-09-02
근대 재발견 100년전 한중일(12) 근대 “時間”의식의 생성김문학 1910년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을 뒤이어 근대적 “시간의식”이 형성된 시기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시간(時間)이란 단어도, 시계(時計)라는 말도 모두 일본에서 수용한것이다. 서양적 의미의 근대적 시간의식, 시각제도는 사상과 문명과 함께 근대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시간”이란 말을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다. 한국 사상 일본유학제1호인물인 그는 1895년 4월, 일본에서의 유학체험을 바탕으로 유명한 《서유견문》을 간행하여 일본문명을 통해 한국인을 계몽한 거물지식인이었다. 그는 그 책에서 “정치학” “과학” “경계” “언어”등 어휘와 함께 “시간”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근대적 시간관념이 한국에도 중국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時辰)”이란 용어가 말해주듯이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는 태양의 운행을 바탕으로 “신시” “말시”하는 격으로 시각을 측정하였는데 정밀한 시간관념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1601년에 마테오리치가 선교사 자격으로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 신종황제에게 선물로 자명종을 헌상했는데 중국인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그뒤 청국을 통해 조선황실로도 시계가 선물로 들어오는데 역시 조선인들은 신기한것으로 놀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청나라 강희, 건륭은 모두 시계를 몹시 즐겼는데 그것을 재미로 기교지물(奇巧之物)로 보았을뿐만아니라 몸소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계사용은 조정이나 왕실에 불과했고 사회전체가 “시간의식”을 갖추게 되는 때는 20세기 초반까지 기다려야 했다. 사실 중국이나 한국에 근대 “시간관념”을 보급하도록 등을 밀어준것은 일본유학생과 일본을 다녀온 식자들이었다. 일본은 명치유신후인 1872년 11월에 “개력(改历)”령을 발포하고 서양의 태양력을 도입, “표준시간”에 따라 국민의 시간의식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대도시 도쿄나 오사카에서 오포(午砲)는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것으로 인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일본인들이 모든 생활절주를 “시간”에 맞추어 작식하고 철도교통, 공장, 학교의 근대적 시간을 엄수하는 광경을 보아왔던 유학생이나 관찰가들은 그때로부터 일본인을 본따서 서양식 일부, 시간으로 일기를 적기도 했다. 문호 노신의 일기를 보면 시간단위로 일과를 적고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1904년 경,직예고등공업학당의 수업풍경을 보면 교실중앙에 걸린 벽시계가 20세기초 중국에서 시계가 학교에도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새 사실을 알수 있다. “시간을 계량하는 장치”라는 뜻의 시계가 전근대적 느슨한 시신(時辰)속에서 대충 대충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수자로 표상되는 시, 분, 초의 시간속에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규률에 예속시키기로 한 근대의 삶이 시작된것이다. 중국에서는 1912년(민국원년) 1월 2일 개력이 실행되어 태음력을 폐지하고 서양적 太陽력이 채용됨으로써 세계의 표준시각제도에 들어섰다. 이리하여 사실 지금의 시계가 보급되기 시작하는데, 이때로부터 우리가 시간을 보면서 시간관념속에서 살아온것은 백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시간관념”의 생성은 1910년 일제 강제 병합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물론 그전에도 “시계”란 단어와 함께 실제로 시계가 사용되긴 했으나 근대적 의미의 시간관념은 이 시기라 하는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한말 외국인의 기록이나 일본인의 기술에도 그때 조선인이 느긋하고 유장하게 행동했다는것은 근대적인 시계에 의한 시간관념이 희박했다는 증거로도 될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1910년 4월 3일, 세간이 주목한 시계광고가 상해에서 나온다. 그 무렵 상해 최대의 백화점 혜라( 惠羅公司)가 낸  회중시계 광고이다. 《시계의 문화사》(카도야마)에 의하면 그것은 미국제로서 단가가 하나에 2.5원이었는데 성능이 좋아서 일본에서도 20년전 수입되어 잘 팔렸다고 한다. 염가시계로 하여 시계가 급격히 시민들속에 보급되며 거기에 싼 손목시계까지 등장하여 시계는 국민의 일용품으로 정착된다. 그것이 1910년대 중반이다. “시간에 쫓긴다. 매여산다”는 일상용어는 그때부터 탄생되며 오늘날의 시간관념은 바로 그때부터 생성 보급되었다. 20세기초 중국신문 《신문화보》(新聞畫報)에는 개가 사람들의 하루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을 극화한 그림이  게재되였다. 9시에 학생이 등교하고 12시 장사군이 지나가고 동냥꾼이 나타나고 4시에는 손님접대를 하고 6시에는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인간세상의 일과를 개의 눈으로 바라본 내용이다. “狗眼看人”(구안간인)의 만화로 흥미롭다. 근대 중국인의 일상은 시간의식에 지배돼있다는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동아시아에 전파된 “시간의식”은 사상 문화의 팩터와 비견되는 중대한 의식 혁명이다. 프랑스의 학자 바스두우 불기에일은 “시간의 해석과 일본의 영향”이란 논고에서 그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시간을 단지 주기적, 직선적 시간의 조합으로만 생각하던 중국인이 시간을 미래와 결부시키는 감각은 원래 없었으나” ”그 역사적 거울로서의 시간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포섭한 "앞날"을 의식하게 되었다.” “중국인이 일본에서 본 표준화 시간은 과거에만 시간의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보다 더 중요하며 이런 시간의식의 정신적 변혁은 젊은 중국지식인들로 하여금 과거에 대해 재고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거리를 두고 생각할수 있게끔 했다.” 상고문화(尚古文化)에 비중을 둔 중국인이 “진보관념”을 통해 “진보사상관념”을 의식하게 되고 개안(開眼)하게 된것은 중국인에게는 큰 사상적 혁신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3국의 근대 역사는 이런 의미에서 ”시간”의 역사 또는 “시간의식”의 역사라고 칭할수 있다.
43    《김문학 동아시아 문화연구계렬》출판키로 댓글:  조회:3014  추천:25  2010-08-27
귀주인민출판사 《김문학 동아시아 문화연구계렬》출판키로본사소식  현대출판사의 총편집이며 저명한 출판편집기획자인 장영청씨의 제안, 기획으로 귀주인민출판사(북경사무소)에서 《김문학 동아시아 문화연구계렬(시리즈)》형식으로 재일조선족비교문화학자 김문학씨의 주목받는 동아문화, 문명령역의 저작들을 출판, 발행하기로 하고 20일, 우선 제일탄으로 《근대재발견?00년전 중한일》 등 7권을 출간하기로 출판계약을 체결했다.   장영청총편집과 중유세기문화전파공사의 리사장 번경표는 이 시리즈 발간취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김문학은 대륙이 낳은 동아시아 3국문화연구의 유일무이의 개척자이자 제일인자이다. 그는 이것으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큰 명성을 확보하면서 동아시아연구와 문화리해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그러므로 그는 동아시아 상호리해와 인식을 위한 귀중한 존재이다. 그의 저작출판을 통하여 그를 연구하며 그의 문화적 교량작용과 다문화주의적 사상, 독특한 타문화 상호리해의 위상을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현실적의의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출판을 통하여 김문학을 연구, 인식하는 자료와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한편 북경의 일부 출판사에서는 금후 김문학씨와 당대 저명한 일류 문화인, 지식인 여추우(余秋雨)와의 문화대담을 기획중이고 다음달(9월)에는 중국우의출판공사에서 김문학씨의 중문신작 《3국인의 성격》을 출간하게 된다. 그리고 8월 20일, 김문학씨가 발굴한 조선총독부의 대외비자료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 서울 지식려행사에 의해 출간됐고 금년 년말께는 서울에서 이어령박사와의 문명대담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료녕조선문보 리덕권기자                               
42    26.생존유지주의와 유교로서의 “越境” (김문학) 댓글:  조회:5121  추천:33  2010-08-26
《신조선족》월경론26.생존유지주의와  유교로서의 “越境” 김문학 조선족의 越境을 필자는 생존욕망의 구조와 유교전통의 가족관념에서 해독하고자 한다. 흔히 우리는 越境에 의한 조선족의 문제를 모두 “民族”이란 개념의식의 틀안에다 몰아넣고 사고하는 버릇이 있으나 이 추상적인 “틀”로만 규정시키기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듯 하다. 조선족 다수를 점하는 대중들의 이동적인 “월경”의 행위구조의 리면에는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한다”는 당위성과 자각성이 존재하는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족 사회 공동체안에서 획득하지 못한 행복(부와 정신적 차원)을 추구하는 “월경”에 뒷바침 해주는것은 거창한 민족의식이 아니라 그것은 개인과 가족의 생존욕구 구조와 유교전통속의 가족관념 및 그 가치뿐이다. 100년전 조선족의 중국으로의 월경은 자각적인것과 정책적 (일제의 정착)인 요소가 있었다면 100년후 오늘의 월경은 조선족사회의 집단적 헤게모니에 의해 정책적으로 그 어떤 사상과 이론의 지시에 따라 행해진 것이 아니다. 즉 강유력한 정책과 어떤 정권의 이데올로기의 지대한 지도와 간섭이 있은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조선족 자신들의 자발성적인 행위였으며 그 자발적 행위구조를 이해하는 작업은 반드시 그 원초적 생존욕구 구조와 유교의 가족관 등으로 이해하는것이 너무나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문화인류학자 크리포드 기어츠의 경제적 인류의 원리에 의하면 농민, 대중은 일종의 살아가는 “경제인”으로서 그 의식 가치관을 “생존유지 제일주의”로 이해할수 있으며 또한 대중의 의식구조를 “개인이익 제일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전자를 “모럴.에코노미”로 후자를 “폴리티컬.에코노미”로 지칭한다. 대중들의 가치관, 생존구조를 이 두가지 유형의 구조로 이해하면 역시 인간의 욕망구조가 그 얼마나 동질적이며 민족이나 그 어떤 이데올기에 의해 규정짓기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민족”관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규정적 틀로서 사용하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욕망구조의 2차적, 차요적 요소인것이다. 그리고 조선족은 유구한 유교적 전통, 그중에서도 사회규범과 개인적 규범으로서 가족관념, “우리 가족을 위하여”라는 관념이 동아시아에서도 유별나게 발달돼있다. 이같은 관념이 생존욕망구조의 생의 에네르기로 충당되는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자신과 후세의 행복을 위하여”가 조선족의 행복찾기 월경의 경제, 문화활동을 보다 왕성하게 진행되게끔 보장해준다. 앞에서 거론했던 네티즌 대중들의 언설은 이 “욕망구조+유교가족관념”의 “월경”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집을 떠나 타지 또는 모국, 타국등으로 나간 모두들의 꿈인 행복을 이룩하기 위해 땀흘리는것은 현재의 어려움보다 미래의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하는 당연한 행동”으로 한 네티즌이 “월경”을 규명진 문장을 본적이 있다. 이 지적은 고명한 지식인의 “공론”이나 “민족담론”보다 수십배 현실적이고 원초적이며 조선족 월경을 원론(原論)적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개개인의 조선족이 월경을 통하여 획득한 물질적 부와 정신적 부는 다같이 마침내 민족의 것으로 귀추될것이다. 지식인에게 만일 그 헤게모니성이 있다면 월경에 대한 일방적 부(負)의 가치를 강조하는것을 버리고 그 플라스적 가치를 탐색하고 이론화하여 신조선족의 비전에 방향을 제시하는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신조선족”의 배경에는 유구한 유교적 가치와 인간의 생존욕구라는 든든한 구조로 지탱되었다는 사실을 재발견하면서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