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somu00 블로그홈 | 로그인
림금산
<< 9월 2024 >>
1234567
891011121314
15161718192021
22232425262728
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49 ]

29    동시 두만강 댓글:  조회:2129  추천:1  2012-03-09
두만강/임금산 강 저쪽에도 하얗게 강 이쪽에도 하얗게 빨래들이 춤을 춘다. 마을마을 하아얗게 그리운 깃발. 뻔히 눈앞에 보이는 곳, 그곳에서 손 흔드는 사람들 …. 그러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주 말해 왔지요. 중국 옌볜의 조선족 림금산(1960-) 시인은 그것을 국경의 강 양쪽에서 나부끼는 빨래의 모습 으로 간단히 보여 주는군요. 그 하얀 빨래는 우리네 엄마들의 땀이 서린, 그러니까 살 비비며 살아온 우리 네 가족사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우리 집 빨래이면서, 오래도록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사연이 얹혀 우리 모 두에게 '눈에 선연한 하얀 깃발'이 되었습니다. 이제 과연 그 깃발을 내릴 때가 온 것일까요? 6/21 (수) 소설가 박덕규 (한국 "조선일보"에서)
28    수필. 흘러가 버린 꽃구름 댓글:  조회:2844  추천:0  2012-03-04
 흘러가버린 꽃구름(1)                                                림금산   그때는 초원을 달리는 들말을 보고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에 동동 뜨는 햇솜같은 꽃구름은 나의 꿈이고 재잘거리며 이 나무 저 나무 사이를 날으는 새떼를 나의 노래로, 휘늘어진 록음방초 그 진한 숲을 나의 가슴으로 생각했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열두살 아이의 아버지이고 40고개를 바라보는 녀인의 남편이고 보니 꿈은 회색을 띠기 시작했고 모든것이 정식이다. 그 무슨 환상이나 타산은 다 거짓말로 보인다.   말꼭지를 떼면 절반은 거짓말이고 절반말은 애둘러맞추는 말이니 진실한 향기는 오간데 없어졌다.   눈을 뜨면 눈길 절반은 주위환경과 주위 인간들의 눈길을 살피는데 랑비하고 절반은 웃음, 눈짓, 음험한 빛, 간사한 빛을 보내는데 쓴다. 후더웁고 믿음과 뜨거움을 철철 흘리는 눈빛은 오간데 없어졌다. 걸음을 떼면 시내를 찾아가거나 산이나 모래불을 찾아가는게 아니라 상점이나 권력자들의 집이나 노래방이나 양고기뀀점에 찾아간다. 친구를 친해도 자기한테 리득이 있는가부터 생각하고 필요없는 친구는 멀리한다. 녀자를 만나도 잘생긴 녀자를 만나고 밉게 생긴 녀자는 멀리한다. 시를 쓰면 시를 만들어내고 글을 쓰면 글을 지어낸다. 매일 성스런 일은 한가지도 못해내면서 시간이 모자라 맴을 돈다. 몸은 보기 싫을 정도로 피둥피둥 살이 찌고 머리속에선 온 하루 비루한 생각만 돋쳐낸다. 그 별밭에 수없이 쏘아올린 내 학창시절의 꿈은 지금쯤 가버렸는지 아득하다. 교정의 라일락꽃나무옆에서 친한 녀학생과 함께 속삭이던 그 비밀은 지금쯤 어느 하늘밑에 말라버렸는지 아리숭하다. 처음으로 푸른 바다 그 넓은 가슴을 안았을때 랑만의 갈매기를 따라 훨훨 바다섬으로 날아가던 그 퍼덕임은 지금쯤 어느 물보라에 휘말려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그애의 까아만 눈동자에 호올랑 빠져 진실과 량심과 신비를 헤적이던 그 숨결은 나의 페부에서 주소까지 없어졌다. 정은 말라버리고 피는 식어간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이 불타는 가을앞에 나설수가 없게 되였다. 그래서 가슴을 두드리며 밤잠을 설친다. 이젠 흘러가버린 꽃구름이지만 해는 졌다가도 다시 동녘에 솟아오르는것처럼 나의 꽃구름도 지금 저쪽에서 가득 떠오고있다. 사춘기의 미묘한 꿈도 끔찍히 아름답지만 땅을 꺼지우고 바위를 쪼개는 오춘기의 사랑은 이 불타는 가을과 함께 내 마음에 더욱 세찰것이다.       흘러가버린 꽃구름(2)                학창시절은 사람의 일생에서 제일 소중하고 아껴 사랑해야 할 절호의 시절이다.   언젠가 안해의 심부름을 하느라고 아침에 상점에 달려가 간장을 사오다가 나는 그만 놀랐다. 그렇게도 미츨하고 싱싱하게 생긴 대여섯명의 녀학생들이 치렁치렁 물결치는 머리를 휘날리며 서로서로 웃고 떠들면서 학교로 가고있지 않겠는가! 그 청춘의 물결속에 나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건 될수도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도 부러워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그애들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도 몰래 피씩 허구픈 웃음을 웃어버렸다.  게다짝을 마음대로 끄슨 나의 엉망이된 모습과 해빛을 튕기며 그냥 흘러가는 그애들의 맑진 얼굴, 참으로 선명한 대조였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던가 생각하니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애들이 랄랄라 노래부르며 좋다고 야단일때 나는 가스통을 메야 했고 그애들이 들놀이를 떠날때 나는 늙으신 아버님의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나는 아들애의 숙제를 검사해야 했고 밤중에 일어나 난데없는 전화를 받아야 하고 멀리 해변도시에 돈벌이간 옛친구한테 회답편지를 써야 했다.  집을 방금 옮겨서 전화를 다시 놓아야 하고 쩍하면 있게 되는 중학생동창회, 대학동창회에 참가해야 했다.  시시껄렁한 재미없는 일이 련달아 찾아오는 이 세상에서 하루만이라도 사라져버렸으면 속이 편할것같다. 하루만이라도 학창시절로 돌아가보고싶은, 소설도 맘껏 읽고 외우고 싶은 영어단어도 맘껏 외우고 탁구도 치고 수영도 하고 사랑도 하고싶다. 그리고 해박하고 열정이 끌어넘치는 몇몇 딱친구들과 함께 도시락 싸들고 멀리 단풍구경이라도 가고싶다.  한번쯤은 누구네 집에 모여서 남녀학생들10여명이 짝을 무어 무도회 비슷한 무슨 파티같은것도 굉장회 치러보고싶다. 그리고 아빠엄마를 졸라 돈 몇천원씩 얼려내여 우리 몇몇은 또 중국의5악중의 하나인 태산이나 황산같은 산에 한번 올라보고싶다…  학창시절은 실로 천금주고도 못사는 황금시절이다. 다신 돌아올수없는 그 빛나는 시절을 다시 아무리 설계해봤자 헛수고일뿐이다.  지금 한창 학창에 몸담구고있는 애들은 얼마나 좋을가? 생각만 해도 막 부러웁다.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옥수수밥을 먹으며 십여리길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야 했고 밭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먼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마시고 너무 배가 고파서 감자밭에 가서 생감자를 파내 씹어먹었다. 그래도 얼마나 눈물나게 재미있던지.  학창시절은 지금의 학창시절이 진짜 제격이다. 새하얀 이밥을 먹으며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택시를 타고 호주머니엔 또 얼마간 용돈도 있고…  아무리 부러워도 내겐 하등 관계없는 지나가버린 꿈이다. 새록새록 밝아오는 새날만이 나한테 새 꿈과 새 마음과 새 이야기를 엮어달라고 속삭일뿐이다. 그래 그렇지. 오늘 하루를 난 좀 재미있게 뜻있게 살아보겠다. 오늘이 지나가면 또 나와는 관계없는 추억이 되기때문에 나는 오늘은 꼭 열두가지 일을 해놓겠다. 그리고 저녁엔 중학생들처럼 고운 일기도 척 써놓겠다.  나의 학창시절은 흘러갔다지만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되는가 싶다.          흘러가버린 꽃구름(3)                        오늘도 학창시절의 노오란 꿈이 새록새록 내 마음에 꽃씨를 뿌린다. 아마도 소리날 정도로 익은 가을이 추억을 에워오기엔 둘도 없는 계절인가본다. 그때 나는 짝사랑의 왕자였다. 봉숙이라고 하는 눈이 특별히 크고 까아만 소녀가 나의 눈에 들었다. 공부는 나보다 좀 못하는 그였지만 그 유난히 반짝이는 크고 고운 눈동자는 가을날 샘물같이 시원하고 맑았다. 이팔청춘 나이에 몸이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속에 숨어있는 불씨까지 다 한창때여서 우리 사내들은 그녀가 옆에 다가와도 불이 확 일것같은 황홀감에 모대기였다. 이때라, 나는 고개넘어에서 학교에 다니는 봉숙이의 뒤를 밝았다. 어슬어슬 땅거미지기 시작하는 황혼의 고향마을은 한창 무르녹는 가을이였다. 시내물도 너무나 맑아 물밑의 자갈까지 다 들여다보이고 가끔 노란 단풍잎도 떠서 흐른다. 얼마 가지 않으니 앞에 하학하고 돌아가는 봉숙이의 동실한 뒤잔등이 보인다. 뭐라고 말을 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던 봉숙이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사위는 고요하고 누구도 없었다. 봉숙이도 무척 반가와하는 기색이였다. 우리는 누구도 수집음을 타면서 애꿏게 가슴만 동동거렸지 말한마디 하지 못하였다. 무엇이라고 말을 뗏으면 좋을지 부끄럽고 무서웠다. 마치도 고운 유리그릇을 받쳐들고 있으면서 떨어지면 깨여질가 황황해하는 기분이였다. 소홀히 지껄였다 다시 그와 단둘이서 이 산향길을 걸을수 있는 자격을 잃을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나의 일생에서 이성과 함께 그 어떤 미묘한 감정에 두근거리며 걸어본 일은 그때가 제일 인상적이고 제일 감회깊은 것이였을 것이다. 그후 나는 나의 인내와 지혜로 여러번 그애와 함께 길을 걸어볼수 있는 기회를 얻어내였다. 지금도 우리의 끓는 마음이 토옥-떨어져있는 그 고향길에 찾아가 보면 그곳 어디에나 소녀시절 봉숙이의 숨결과 눈빛이 알뜰하게 묻어있다. 가끔 시를 쓰다도 봉숙이의 눈동자는 자연스레 나의 시줄에 찰랑이며 흘러들어 나의 시를 살찌게 해주고 싱싱하게 다듬어준다… 후에 그앤 해군으로 있다가 제대되여온 미끈한 도시 남자한테 시집을 가고 나는 대학으로 날아가 문학창작의 대문을 두드리였다. 요즘엔 그와 가끔 전화도 통하는데 그앤 이미 열한살 아이의 어머니로 되였다. 아, 세월은 빠르기도 하다. 벌써 또 나는 새 가을을 맞았다. 나의 일생에서 맞는 서른 아홉번째 가을, 이 가을에 봉숙이도 그냥 무사하기를 빌면서 내 마음에 사랑이란 두 글자를 심어준 그한테 감사를 드린다     흘러가버린 꽃구름(4)     요즘 기말시험이 추위와 함께 들이닥치니 얼굴이 파리해지는 학생들이 가끔 보인다. 시험을 잘 치지 못하면 수고하시면서 뒤바라지를 해주시는 부모님한테 미안해 그렇겠지. 하지만 난 어쩐지 요즘 애들이 불쌍해보이고 가련해보인다. 공부가 별로 축이 안나고 아침부터 밤중까지 진땀을 빼는게 안타깝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때는 자유의 세상이였다. 나는 더구나 자유의 세상이여서 훨훨 날아다녔다. 공부도 매우 자유롭게 해냈는데 체육이나 놀음이나 지어련습 같은것도 자유자재로 했었다.     안개가 자오록한 고향의 강변은 새각시가 하아얀 면사포로 아기를 덮어준듯 포근하고 싱싱했다. 그러면 나는 옆구리에 교과서나 소설이나 하여튼 필요한 책을 끼고는 강변에 나가 책에 정신을 던진다. 그러면 거의 반나래는 책에 매혹되여 배고픈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한번은 일요일날에 묘포장안이 아늑하고 폭신하다고  그 안에 들어가 책을 본것이 묘목도적으로 몰린 일까지 있었다. 또 한번은 숲속에서 책에 정신을 팔다가 소낙비가 내리자 냅따뛰여 철다리밑에 가서 두시간이나 비를 끊은 일도 있었다…      나는 또 밤12시까지 책보기가 일쑤였는데 때론 밤참을 덮혀먹느라 아버지 어머니를 다 깨워놓은 일까지 많았다. 고즈넉한 저녁,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한데 나는 책속에 파묻혀 훨 훨 지식의 나라로 헤염친다… 어머니께서 나의 방에 그냥 불이 켜져있는걸 보고 잠내나는 사설을 던진다.. “둘째야, 이젠 그만하고 자거라…” 나는 나직이 “네”하고 대답하고는 그냥 책속에 빠진다… 방학이면 신체단련을 하느라고 쩍하면 20여리나 장거리달리기를 했댔는데 반년후엔 그것도 성차지 않아 축구공을 구을리며20리씩 달리군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때론 친구집에서 밥을 빌어먹고 돌아올 때도 있었고 때론 너무 더워 20리밖의 강물에 몸을 잠구고 저녁때까지 미역감은 일도 수십번이다.   등산은 자별난 애호였는데 많이는 혼자서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며 산행했다. 집에서 떠날때 고향의 주위를 휙 둘러보고 먼저 목적지를 정한다. 아무리 높은 산도 내앞에선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온 하루 산을 헤메고 나면 한몸은 더없이 거뿐하고 정신은 한결 맑아진다.   나물철이면 자연은 무더기로 나물을 선물하는데 우리 집엔 남자애들밖에 없어서 나는 나물 뜯는데 선수였다. 지금도20여가지의 나물을 알고있다. 냉이캐러 다닌 일, 도라지파러 다닌 일, 나무하러 다닌 일 실로 농민들이 해본일은 거의다 해봤다.  나의 학창시절이 이러해서 그런지 나는 자유롭게 사는 인생을 권고하고 싶다. 학창시절은 더구나 자유의 왕자여야 한다고 본다. 사회에 나오면 하는 일이 많고 또 복잡하지만 학창은 한창 날개를 키우고 꿈을 키우고 자유로운 맘을 키울 때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넥타이를 꽁꽁 매는 사람보다 웃옷 단추를 한개쯤 채우지 않는 청년을 더 좋아한다. 양복을 쭉 빼입은 젊은이보다 홀태바지를 입은 청춘을 더 부러워하고 부드런 바람에 칠칠한 머리를 기발처럼 휘날리는 녀자애들을 더욱 부러워한다.  학창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것이지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의 것이 아니다. 학창은 꿈동산이고 웃음동산이지 감옥이 아니다. 자기의 학창을 활발하고 유쾌하고 뜻깊고 매력있게 가꾸자면 남의 눈치만 볼것이 아니라 학창의 주인인 우리 자신이 자유의 기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  좀 더 떳떳하게 좀 더 자연스럽게 좀 더 생기있게 허리를 쭉- 펴고 살아보자!                                                                                                                                                                                             1999년 (중학생신문에 련재되였던 작품)
27    수필. 술에 빠진 민족 댓글:  조회:2296  추천:0  2012-03-04
                            술에 빠진 민족                                                                  림금산   반도의 3면에 바다가 출렁이는 것처럼 반도엔 술이 출렁인다. 우리 민족이 살고있는 중국 연해도시들인 광주, 상해, 청도, 위해, 그리고 오래 동안 우리 민족이 집거해 있던 흑룡강성, 료녕성, 길림성 특히는 전 세계에 유명짜한 우리 연변엔 지금 술이 넘쳐나 파도친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다방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고 스낵에서 술을 마시고 비빔밥점에서 술을 마시고 국수집, 개장집, 쌈밥집, 지어 시장에서까지 술을 마신다. 산에 올라 술을 마시고 강에 내려 술을 마시고 울며 술을 마시고 웃으며 술을 마신다.      렬차안에서 술을 마시고 배우에서 술을 마시고 뻐스에서 술을 마시고 비행기에서 술을 마신다.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개를 잡아놓고 술을 마시고 명태를 찢어 술을 마시고 파를 장에 찍어 술을 마시고 소금알을 녹이며 술을 마신다                                              2000년 5월 23일 오전11시20분 심양시공항엔 사람들로 붐빈다. 교원과 학생들로 무어진40여명의 중국조선족소학생대표단일행은 지금 막 출구로 나간다.      자동흐름선에 실려 나아가는40여개의 트렁크가 한개,두개씩 걸린다.                     트렁크를 열자 거의 매 트렁크마다 술병 한두개씩 나온다. 고급술이다. 이나 월궈토(二锅头)주선이다.      사업일군은 술을 가지고 한국에 나가는걸 막지는 않는데 술만은 다 꺼내 손가방에 넣고 들고 나가란다. 자동흐름선에서 술병이 깨여라도지면 공항이 술내에 잠긴단다.      사실 이들 대표팀은 중국조선족후예들을 서울시 잠실체육관에서 성대히 거행되는큰 잔치에 불러준 고마운분들께 술을 가져다드리려는 심사였었다.      10여일간 서울에서, 대전에서,부산에서 견학하는 길에 여러 계층의 후한 접대를 받게 되는데 어찌 고마운분들께 술병 두어개씩 올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상자나 되는 술을 너무 무거워 각각 나누어 트렁크에 넣었던 모양. 이 경우 이들의 술을 나쁘다 할지 좋다고 할지? 하여간 술이 공항에서 첫번째 말거리로 된것만은 사실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사공이 마시던 술이 어느만큼이나 독한 술이였던지.지금 또 두만강 강뚝 공원에서 마시는 술은 어떠한 술인지. 술이 없어 알콜을 타 마시며 쓰린 가슴을 훓어내던 민족이 언제부턴가 술이 바다를 이루어 술에 빠져 허우적인다…      3년전인가 한국 어느 일보사의 편집국장과 기자 두분과 함께 연길에서 술을 마신 일이 있다.      술이 한창 간에 들어가니 수작들이 나온다. 복무원아가씨더러 노래를 부르란다.인민페 백원짜리를 꺼내들고 어서 노래를 부르란다. 복무원 아가씨가 건드러진 조선노래를 부르자 백원짜리를 자꾸만 아가씨의 가슴에 밀어넣잔다.      결국 아가씨는 돈을1전한푼 안받았지만 손님은 기세도도해 팔자걸음으로 나간다. 기분이 대단히 좋은 모양.      나는 속으로 먹은게 다 올리밀어 겨우 참았다. 개도 안먹는 돈 몇푼까지도 또 술한병에 녹자가 되여 비틀거리다니.물론 한국엔28도짜리 소주가(참이슬? 처음처럼?) 바다처럼 흐르니깐 여기서 마이는40~50도 술을 받아당하긴 좀 힘에 부칠테지만 말이다.      그냥 가는줄로 알았더니 방금 아씨한테 주자던 돈이 춤을 춰 또 꿤점에 눌러않는다.어디서 창작해냈는지 폭탄술이란다.      흰술을 한잔 가득 부어 맥주가 담긴 맥주병에 떨궈넣고는 폭탄이란다. 맥주와 함께 그안에 불궈진 흰술 한잔까지 다 마시는 망태기 술이다….      더욱 우스운건 이튿날 아침 식사때보니 키가 나보담 두어배는 더큰 놈이 자꾸 코피가 흘러내려와 얼굴을 붉힌다.           …      술은 그쪽 술만 웃을게 못된다. 우리 여기 술꾼들도 문명치 못한 작자들이 거리에 부글부글하니깐.      잔치술, 생일술, 회갑술, 제사술, 대학입학술, 출국술, 귀국술 지어 만남의 술…토요일 일요일에 못만났다고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술은 금요일까지 줄창 밀고 나간다.      축구를 좋아한답시고 이기면 기쁜 술, 지면 슬픈 술, 비기면 비긴술 지어 젊은이들 생일마저 동료, 동갑, 친구 친척들을 청한다.      출근해서는 단위분들과 사업술을 나누고 련휴일엔 자기 집에서, 부모집에서, 형제사이, 친척사이에 술이 오간다.      지난 주일엔 술에 맞아 상한 친구들이 너무 많아 나는 그만 어리벙벙해졌다.      여기에 전화치니 술마시다 다리뼈가 두대나 끊어져 수술대에 올랐단다.      저기에 전화하니 술을 마시다 택시에 부딪친게 머리에 피떨어졌단다.      동쪽에 전화치니 술을 빈속에 마신게 피를 토하고 주원했단다.      서쪽에 전하치니 술에 갑성간염과 을성간염이 함께 닥쳐들어 전염병동에 들어갔단다.      허참 기막힌 일이다. 다가 술에 상했으니 나는 술마실 친구가 없게 된게다. 동서남북이 술에 꺼꾸러지는데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은 다 또 지방간이 아니면 위장염, 이선염, 당뇨병 투성이다.      백두산 기슬으로부터 한라산까지 온 땅떵이가 술에 취해 휘청인다.      지금 이 시각도 제주의 네거리에선 똥돼지불고기에 소주가 불이 일게 팔릴것이며 서울 동대문 시장앞 거리는 술에 질펀히 젖어있을것이다. 이화여대 대학가 어느골목에서는 여대생이 취해서 부추김을 받으며 줄줄 끌려가는 처량한 모습…도 보인다.        물론 이 좋은 초여름밤에 연길의 북대시장이나 철남야시장이나 교회당앞 수상불고기집이나50도짜리 얼궈토에 함뿍이 취해 늘어졌을건 두말할것없고 심양서탑의 신화서점앞골목이나 할빈 조선족신문청사밑 지하려관 문앞은 다 반도의 말을 돌돌 굴리는 민족의 술꾼들에게 점령되였을 것이다.      묻노니, 반도여, 술에 빠져 허우적일때는 아직 일찍하지 않은가?          경제차원으로보나 문화차원으로보나 이 민족에게 통쾌한 술잔은 아직 이르지 않은가?      마실게면 차라리 눈물을 한잔 가득 부어 마시는게 우리에겐 더욱 좋을것 같은 심정이다. 아니면 칼을 가득 부어 번쩍이는 칼날을 한껏 들이마시는게 속시원하고 명치끝이 쩡 할게 아닐가?!      피치못할 사연에 그냥 술을 마셔야 할게면 차라리 술을 마시지말고 우리 함께 죽음을 마시자. 독약을 걸게 풀어 거품일게 해놓고 바다를 향해, 하늘을 향해, 여자를 향해, 반도를 향해 죽음을 마시자!!                               (2000년 여름 "현대가정"신문에서)
26    시. 날아가는 눈물 댓글:  조회:2115  추천:0  2012-03-04
 날아가는 눈물 -한국서 일하는 동생들을 울며   륙지의 눈물방울들이 바다에 가득 흘러들어 바다밑 소금에 짠 독을 가한다    비탈의 이슬들이 수천의 눈물방울로 구을러가 바다밑의 미역에 짜가운 풀칠을 더한다   소금알들은 바다밑에서 썩고 썩어 짜디짠 눈물로 염글어 폭발하고   검푸른 미역잎들은 진하게 독이 올라 바다속에 기발을 휘젓는다   갈매기들은 매일마다 구슬프게 빛나오르는 짜가운 구슬을 꿰여 갖고 저-기 해솟는 수평선에로 날아를 간다...                         2009. 3 15.      
25    시. 륙지고기 바다고기 댓글:  조회:2152  추천:0  2012-03-04
 륙지고기 바다고기   태평양 아득한 눈물의 바다 눈물을 펼쳐 날아가 보면 고기배에 오른 땅나라 사람들 흙냄새가 그리워 배전을 치며 통곡이다 잡아도 잡아도 다 못잡는 바다의 고기들이 되려 땅사람들을 다 잡아먹는다   오사카,   홍콩,   타이,   상해 제주,   부산,   쌘프랜시스코,   싸이판… 돌고돌아도 태평양은 그냥 깊은 함정으로 끝없이 소용돌이친다   어쩌다 한번 뭍에만 닿아라 저저마다 거지인양 와르르-  쏟아져 흙을 퍼담아 간다 호주머니에,  밥통에,  손수건에…   뿡-  칼을 대는 배고동이 울리면 재다시 배에 쓸어 올라와 퍼담아온 흙에 죽기내기로 코를 박는다 흙냄새를 맡는다,  땅냄새를 맡는다 고향을 마신다 눈물을 삼킨다…   태평양 아득한 눈물의 바다 눈물을 타고 날아와 보면 푸르른 논밭은 바다처럼 출렁인다… (2012년 4월 격월간잡지 "문화시대" 에서)    
24    수필 내마음의 미인 댓글:  조회:2392  추천:0  2012-03-01
수필              내 마음의 미인                                                                       림금산       망망한 바다에 하아얀 미인어가 반듯이 누워 자맥질 하고있다. 오동통한 엉뎅이, 하아얀 우유빛 젖가슴, 멋스레 휘우둠한 곡선미, 하아얀 허벅지… 허벅지밑으로는 아물아물 멀리로 보이는 지네같은 일본국, 밉게도 길게 풀어졌다 끊어졌다 이어졌다 스산하다…  누구서 반도를 호랑이나 토끼새끼같다고만 했던가? 나의 눈에 반도는 또 그대로 발가벗고 파아란 청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염치는 미인어로 보인다. 누구보다 희고 누구보다 부드럽고 누구보다 깔끔하고 누구보다 그윽하고 누구보다 섹시하고 누구보다 매력있는 미인, 그리 크지않지만 동양적이고 은은한 멋이 다분해서 경국지색이다. 너무 크고도 거쿨지면 투박하고 싱거워 보이겠지만 내맘에 딱 맞게 자그마한게 너무나 좋다. 언젠가 웽그리아 시인 뻬떼피가 한말이 생각난다. 키가 자그마하고 눈이 새까맣고 얼굴도 감실감실한 자기의 애인이 이 세상 진짜 미의 극치란다. 이 경우 아마 나도 뻬떼피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가? 반도는 차분한 미인이지만 외유내강한 모습도 력연하다. 그렇게도 부드러운 몸이지만 정열에 온 몸을 불태우기도 한다. 반도에는 꽃이 불길처럼 타는듯 함박꽃처럼 폭팔하듯 피는것과 금강산 구룡연의 쪽빛처럼 푸르디 푸른 못과 제주의 감귤처럼 빨간것과 … 하여튼 진한것이 많고도 많다. 누른하고 느슨하고 슴슴하고 밋밋한 기분이란 꼬물만큼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게 나는 너무나 좋다. 반도사람들은 성격이 칼같고 불같고 여름날 내리지지는 태양같이 뜨겁고 고추처럼 맵다. 특히 우리의 미인을 지켜선 반도의 남아들은 이런 성격이 더욱 돋보여 얼싸 안고 두어고패 도도리 하면서 울고 싶다. 리준은 네델란드 헤이그 만국회의때 일본측을 비롯한 소위 강대국들에서 회의 참가자격마저 안주자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휘뿌리며 민족을 웨쳐 순국했다. 일대 애국지사로 이 세상에 큰 획을 그어간 안중근은 말못할 괴수 이또 히로부미를 중국 할빈역에서 뭇적들속에 격사시키고 호탕하게 천하를 웃어제꼈다. 윤봉길은 중국상해의 홍구공원에 작탄을 안고 뛰여들어 장개석까지 간담이 싹 녹아떨어지게 만들었다. … 반도의 산은 날카롭다, 백두의 메부리나 금강산 귀변암이나 묘향산의 만폭동이나 속초의 설악산이나 다가 민족의 기개를 닮아 그렇게 도고하고 날카로운게 아닐가? 하기에 반도는 산곡간의 물이 락차가 심하고 또 그러하기에 물이 그만큼 깨끗하고 급하고 물살은 팩하다. 중국대륙의 시누런 황하처럼 굽이굽이 오래도록 흐르지 않고 창창 떨어지기 좋아하고 하얗게 부서지기 즐기고 깊은 골짜구니에 쪽빛 못물로 오돌차게 모이기를 좋아한다. 원색(기본색)을 거의 그대로 따오는 색채감 짙은 반도, 희디희고 푸르디 푸르고 붉디붉고 맑디맑다. 고추도 빨갛고 치마도 빨갛고 진달래도 빨갛고 감도 빨갛고 단풍도 피처럼 새빨갛다. 살결도 말쑥하게 희고 저고리도 희고 브래지어도 백설같이 희고 코신도 희고 이불안도 깨끗하게 하얗고 쌀도 하얀 입쌀, 청주도 희고 소주도 희고 한립와이셔츠도 희다. 언젠가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다가 이런 말이 화제에 올랐다. 참 지당한 말씀이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반도 여인들의 사랑은(물론 강도높은 관능적인 저질 사랑은 내놓고) 어딘가 타민족보다 더 희고 진하고 깔끔하고 맵짠데 그 매력이 있지않을가? . 우리의 반도 여인들은 하얗고 뜨겁게 피솟음으로 사랑을 다루는게 눈물겹도록 돋보인다. 성춘향의 사랑도 그렇고 황진이의 사랑도 그렇고 계월향의 사랑도 그렇다. 진함속에 소박함이 있고 소박하고 단순함 속에 고결하고 깊이가 있다. 언젠가 술집같은데 한번 가본일이 있다. 우리의 미인이 한분 들어오는데 진짜 치마저고리를 딱 받쳐입고 술상을 들고 들어와서는 무릎꿇고 앉는다. 아미를 다소곳이 숙이고. 이리 저리 삶에 대해 여자에 대해 자연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미에 대해 두루 말을 걸어보았는데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하찮은 일개 계집으로 알았는데 아니 조선사화며 중국고대실화며 한국 당대 명시며를 들고치는게 놀랍거니와 미에 대해 우리 민족 약점에 대해 일본인의 에로스에 대해 미국인의 탐욕에 대해 구구절절 아는게 아주 많았다. 만약 저고리를 풀어주면 작열하는 진달래나 무궁화로 활활 타오를 것이였다. 끼가 있고 섹시하고 온도가 높지만 또 랭가속도가 빠르고 매섭고 해당화같이 맵게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공손했다. 우리의 미인은 바로 이런 품위있고 끼가 있고 섹시한 사랑의 화신임에 손색이 없다. 반도의 음식 역시 말쑥하고 순수하고 단순하다. 순맛이다. 잡맛이 따로없다. 미인이 먹는 음식인만큼 지저분하지 않고 간단하면서도 깨끗하고 말쑥하면서도 입에 넣으면 싱그럽다. 거기에다 또 싹-싹- 씹을때의 음색까지 향기롭다.(우물우물 소리없이 먹지않는다.) 민들레는 살아오르는 그대로 말쑥하게 씻어서 맵싸한 고추장에 무쳐먹는다. 랭국이나 랭면이나 메밀묵이나 순두부나 부추쌈이나 배추김치나 깎뚜기나 기본점은 다가 말쑥하고 시원하고 깔끔하고 순수한 맛이다. 불고기같은 경우도 그저 숯불에 구워서 그냥 숯불냄새가 나는 그대로 소주에 안주해 먹는다. 돼지고기같은것도 맑은 물에 삶아내여 마늘간장에 찍어먹는다. 기름칠을 하지않고 달달 볶지않는다. 싹-싹- 음식 씹는 소리는 사과먹는 소리같다. 배추김치나 깎두기나 배추쌈이나 총각김치가 갓김치나 마늘짠지나 다가 씹는 소리부터 맛망울을 돋군다. 중국료리는 기름내와 함께  세상에 크게 알려졌지만도 어딘가 우리 구미엔 잘 맞지않는다. 지저분하게 가지수가 많고 지저분하게 양념이 많고 지저분하게 지지고 삶고 다시 볶는다. 그래서 중국인의 집에 들어서면 벽에 배인 양념냄새, 기름냄새가 코를 친다. 주방에 들어가면 기름탄내에 머리가 막 아찔해 날 지경이다. 반도는 푸른 바다에 곱게 누워 미역을 감는 미인이다. 미인의 옥같은 귀체는 순수하다. 의복이나 음식이나 다 순수하다. 순수미, 순맛, 단순함은 미인의 기품과 일관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싱싱하고 청순한 민족의 향기속에 은은히 취해사는것이 아닐가? 옥같이 하얀 몸에 옥구슬을 굴리는듯한 목소리와 성감적이고 유연하고 단순하고 부드럽고 탄력있는 우리의 미인에겐 물론 먼지 하나 없을것을 나는 두손모아 바라고 바란다. 헌데 요즘 그게 잘안되여 안타갑다. 그래서 이밤에도 나는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못 이룬다. 미치도록 사랑하고픈 그대가 그냥 그리워 나는 밤이면 밤마다 별익는 저 하늘에 날아올라 대낮같이 환한 그대 반도를 굽어본다… 1999년 여름         (연변일보에 발표.     한얼패 수필상 수상작)
23    작가초대석 로씨야시인 레르몬또브 댓글:  조회:2813  추천:0  2012-03-01
 19세기 로씨야의 랑만주의 시인 레르몬또브 (1814~1841)   신금철—문학살롱 신금철입니다. 네 지난 시간에는 미국의 민주주의시인 휘트만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또다시 19세기로씨야의 랑만주의 시인 레르몬또브와 그의 일부 작품들에 대해 살표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연변시가학회 림금산시인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림금산—네수고하십니다   신금철—그럼 먼저 뿌쉬낀시인의 뒤를 이어 역시 천재적 시재를 한껏 떨친 레르몬또브의 생평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서 부모님들을 여의였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까?   림금산—생평소개 1814年10月15日生于莫斯科。父亲是退役军官。出生后不久被送到祖母的庄园。不到 3岁,母亲去世,由外祖母抚养成人。1827年随外祖母回莫斯科。1828年入贵族寄宿中学,此时开始写诗。1830年考入莫斯科大学,次年丧父。1832年离开大学,入彼得堡近卫军骑兵士官学校。1829至1832年间写了一些长诗和剧本,以及抒情诗300余篇,约占他全部抒情诗四分之三。 这些诗篇之中比较著名的有《乞丐》、《天使》、《帆》等,最有代表性的是《一八三一年六月十一日》,诗里所抒写的“生的渴望”、行动的企求和生怕一事无成的哀愁,是他笔下的抒情主人公的感情的特点。这些抒情诗除个别一两首外,诗人在世时都没有发表过。1834年于士官学校毕业,被派到彼得堡近郊近卫军骠骑兵团服役。1835年第一次发表作品长诗《哈吉 阿勃列克》,开始引起注意。同年写了剧本《假面舞会》,主人公是一个反抗上流社会的悲剧性人物。1837年 2月8 日普希金在决斗中受伤,两日后逝世。莱蒙托夫写了《诗人之死》一诗,指出杀死普希金的凶手就是俄国整个上流社会。作者愤怒地对这些屠夫说,他们虽然躲在法律的荫庇下,公论与正义都噤口无声,但是“神的裁判”在等着他们。“神的裁判”就是指人民的裁判。诗人因此被流放到高加索。这篇诗震动了整个俄国文坛,他被公认为普希金的继承人。在流放高加索的途中,载有他的长诗《波罗金诺》的那一期《现代人》杂志出版。这首纪念1812年卫国战争的诗篇是莱蒙托夫重要作品之一,标志着他的创作活动进入成熟时期。诗中充满爱国主义,说明战争的真正英雄是人民。   经过他的外祖母和诗人茹科夫斯基的奔走,莱蒙托夫于1838年 4月返回彼得堡原部队。不久,他发表用民歌体写成的长诗《沙皇伊凡·瓦西里耶维奇、年轻的近卫士和勇敢的商人卡拉希尼科夫之歌》,写16世纪伊凡雷帝时的一个故事。 诗中青年商人不畏强权, 挺身维护自己的尊严,博得正直善良的人们的尊敬。1838年在《祖国纪事》发表了《咏怀》一诗,严厉地批判当时的一代人,谴责他们缺乏理想,没有斗争勇气。接着又写了著名的诗篇《诗人》,继承十二月党诗人和普希金的传统,宣称诗人的使命在于唤起人们崇高的思想。1840年新年,莱蒙托夫参加了一个贵族的假面舞会,写成《一月一日》一诗,引起宫廷贵族和上流社会的很大不满。是年2月因同法国公使的儿子巴兰特决斗,又遭逮捕。沙皇决定把他再度流放高加索。临行前他写了那篇有感于自己“永恒流浪”的沉痛的诗《云》。路过莫斯科时参加了果戈理命名日宴会,向果戈理朗诵了刚写好的长诗《童僧》(1839)的片断。长诗描写一个想要摆脱修道院的监狱般生活而返回家乡的少年的悲剧性故事,用第一人称叙述的方式揭示出主人公的内心活动。   莱蒙托夫于1840年4月出版的长篇小说《当代英雄》,在高加索广阔的背景上展开了主人公毕巧林的复杂的性格。毕巧林对当前贵族社会抱有批判的甚至是敌对的态度,他精力充沛,才智过人,在当时社会条件下得不到合理的发挥,只能在一些琐细无聊的小事上浪费自己的才力,乃至生命。毕巧林是俄罗斯文学中继普希金的奥涅金之后又一个“多余的人”形象。作者以批判的态度对待他,在《当代英雄》第二版序言中说,这个形象“是由我们这整整一代人身上充分发展了的缺点构成的”。《当代英雄》虽然带有浪漫主义色彩,但主要是现实主义的作品,结构完美,并富有特色,心理分析细致,语言准确优美,成为俄国文学中最早最出色的长篇小说之一。   莱蒙托夫于1840年6月到达高加索,7月就参加了瓦列里克河上的战役,事后写了《瓦列里克》一诗,以战役参加者的身份,用第一人称真实地描写了战役中的一切细节。对沙皇俄国发动的这种对高加索人民的战争,诗人显然是反对的,他用与《波罗金诺》迥然不同的语气写道:“这血的日子他们忘不了!”1841年1月,他得到两个月休假。2月回彼得堡,对他在中学时期动笔经过多次修改而未发表的长诗《恶魔》的稿子,作了最后的加工。《恶魔》(1829~1841)体现了诗人叛逆的思想。恶魔是一切公认的规范的破坏者,是束缚人的理性的一切力量的反抗者。他离开天国来到人间,但仍然感到孤独。他的失败证明,个人利己主义的反抗不但得不到结果,反而会带来更大的不幸;而且也表明,光是“否定”是不够的,还应当肯定积极的生活原则。《恶魔》和《童僧》一样,是莱蒙托夫浪漫主义创作的最高成就,但都洋溢着现实主义的气氛。恶魔和童僧这两个性格,可以概括诗人全部作品中的形象。他笔下的主人公基本上就是这两种性格:前者是个人主义者,后者则是自由的战士。1841年在《祖国纪事》上他又发表了另一篇重要诗作《祖国》。诗中否定了“用鲜血换来的光荣”,指出热爱祖国山河和劳动人民才是真正的爱国主义。   신금철—레르몬또브도 뿌쉬낀처럼 결투하다 돌아갔다는데 맞습니까?  지금 그때 당시 결투장에는 비석도 세워졌다면서요? 림금산—네   莱蒙托夫本想趁休假之便设法离开军队,完全献身于文学事业,但所得到的却是限48小时之内离开彼得堡返回高加索的命令。回高加索后,一些来自彼得堡的贵族唆使军官马尔特诺夫与莱蒙托夫决斗。1841年 7月27日诗人在决斗中被杀害。这是预谋的凶杀。   莱蒙托夫没有活到27岁,他成熟期的创作活动只有短短4年,但他的作品对俄国文学作出了巨大的贡献。作为诗人,他在普希金和涅克拉索夫之间起了承先启后的作用。在展示人物内心生活的心理描写方面他是俄国文学中的先驱,后来为陀思妥耶夫斯基、列·托尔斯泰等所师承和发展。   鲁迅在1907年的외국몇몇시인들에대해높이평가한가운데첫사람으로레르몬또브가있다. 。莱蒙托夫的诗篇及其小说《当代英雄》,在中国解放前早有译本,中华人民共和国成立以后陆续有较完善的新译本出版。   신금철—그렇다면  레르몬또부의 주요작품을 소개해주시죠 림금산-네, 레르몬또브에게는 시집,‘조국”, “시인의죽음”, “ 장시“악마” , 장편소설“현대의 영웅”, 극본 “가면무도회” 서정시“돛”, 등 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쪽배한척           레르몬또브 한척의 작은 쪽배가 고독하게 바다에서 항행한다 쪽배는 행복을 찾는것도 행복을 피하는것도 아니다 쪽배는 그저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발아래엔 깊고 푸르는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우엔 금빛 태양이 이글거리고… 림금산—해설 这首《一只船》是莱蒙托夫的代表作,写于1832年。诗人身处沙皇专制统治下的社会,将渴望自由与解放的情感寄托于“一只船》”的诗艺形象,以激励人们对美好生活的向往与追求。     阅读这首诗,我们的眼前会浮现出无边无际的大海,茫茫的雾霭,一只孤帆。呼啸的海风,翻卷吱吱作响的桅樯......都动摇不了它那苦苦追求的意志,阻止不了它迎风破浪永往直前。即便是风平浪静,阳光洒满碧流,帆儿也没有丝毫的留恋与懈怠,它仍在“祈求风暴”,以获得心灵上的“宁静”。     在象征性的画面中,在人格化的描摹中,诗人歌颂了向往自由、不懈追求的志向与灵魂。           나 홀로 길을 나선다                                                  레르몬또브[로씨야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 속으로 자갈길이 빛나고,                         밤은 고요하다. 황야는 하늘에 귀를 기울이고,                         별들은 별들과 속삭인다.                         하늘은 장중하고 아름답구나!                         대지는 푸른 빛 속에 잠들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 걸까?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이미 나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와 평온을 찾고 있다!                        나는 모든 걸 잊고서 잠들고 싶다!                         하지만, 무덤 속의 차가운 잠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잠들었으면,                        생명의 힘이 가슴 속에서 조곤조곤 잠들어,                        숨쉴 때마다 조용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게.                         밤새도록, 하루 종일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달콤한 목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내 위로는 영원히 푸르른,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수군거렸으면.                                                    (1841년5~6월 作)   림금산—해설 이 시는1841년5월에서6월초에 씌어졌다고 한다. 레르몬또브가 결투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7월15일이니까 죽음을 두 달 정도 앞 둔 시점이다.     그는 몹시 고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걸까?”  라고 침묵의 절규를 한다.      그가 찾는 것은 ‘자유와 평온’.......재언한다면,  그가 절원하는  "자유와 평온"이란  곧 ‘잠’이다.  "무덤속의 차가운 잠이" 아닌......     어느 평론에서 본바와 같이, 이 시는 자궁회귀로의 충동 혹은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생명이 가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잠이란 모체의 자궁 속에서의 태아의 잠이다. 밤낮으로 사랑의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머니이며  "몸을 숙여 수군거리"는"울창한 참나무’는 아버지의 형상일 것이다.  ‘나’는 곧바로 평화롭고 따스한 모체-- 자궁 속의 태아이다.   신금철—그는 또 뿌쉬낀의 죽음에 대해서도 “시인의 죽음”이란 시를 썼다면서요…  림금산—네                            레르몬또브--그는 왜서'모체에로의 회귀"를 꿈 꾸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도 총총히 떠나 간 것일까!?....     이제 다시, 그의 문학과 인생력정을 되짚어보면 그  "귀족적"인 인격과  영롱하고 치렬했던  심혼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너무 일찍 여의었던 불행한 고아(孤兒), 자신의 꿈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과 일찌감치 마주하게 된 레르몬또브......    뿌쉬낀이 결투장에서 쓰러졌을 때,  이란 시로써 무서운 분노를 터뜨렸던 레르몬또브였다. 훌륭한 천재는 램프처럼 꺼졌고 엄숙한 화관처럼 시들었다...... 너희들, 왕좌 옆에 탐욕스런 무리를 이루고 서 있는 자유와 천재와 영광을 사형에 처하는 망나니들이여! 너희들은 법의 그늘 밑에 숨어 있어 너희들 앞에서는 심판도 정의도 모두 침묵을 지키는구나! 그러나 타락의 아첨자들이여, 신의 심판이 있도다! ...............    그 詩의 발표로 말미암아  까브까즈로 추방당하였고 비정하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독설가"로써  미움을 자초, 궁정에서 꾸민 결투로27세의 나이에 유성(流星)처럼 꺼졌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그 어떤 세계에 대한 몽상에 잠겨 끝없이 방황하던 고독의 시인,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반항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했던 넋은 마침내 영롱한 아침이슬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신금철—그는 또 “현대의 영웅”이란 장편소설도 썼던걸로 알고있는데요 이 장편소설과 그의 인생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림금산-네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장편을  읽으면 작가의 문학(작품)과  운명(인생)이 너무나도 극적인데(드라마틱한데)  매료된다. 레르몬또브 자신의 초상화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뻬쵸린과 그루쉬니쯔끼--두 라이벌의 절벽 꼭대기에서의 결투........ 그리고    자신의 작품속의 그 결투장면과  꼭 닮은  형국으로,  마치도을 연극으로 각색을 하여  무대에 올린 듯이,  그렇게 결투로 쓰러졌던  불운의"퍼포먼스"의 주인공!.......       "바람구두"의 자화상                                              레르몬또브    바람구두나그네는 슬픈 남자입니다 "방황"과"안주" 두기둥사이를 오락가락 구름처럼 바람처럼 진정 없습니다 가슴은 빈 들녘......   어느날 문득 바람구두나그네는 뜻밖의" 운명"과 조우합니다 두눈을 비비고 또 비비고 봐도 꿈이 아닙니다 ~~이쁘고 귀여운  여신(女神)의" 구름편지"!......   오이신비 이 불가사의 함이여 황량하던 빈 들녘에 타오르는 모닥불 심혼을 불살라 생명의 부조리 정열로 깨어난다 바람구두나그네의 웃기는 자화상이여 림금산—해설: 여기서 바람구두나그네는 자기자신을 말하는것 같다. 방황과 고독, 고민속에서 헤매이다가 이쁘고 귀여운 여신의 편지를 받으면 마늘싹처럼 살아나는 서정적 주인공, 그는 이렇게 사랑에 불길을 일구고 사랑에 생명을 연소하는 정열적이고 서정성이 짙은 시인이며 또 이를 웃긴다고 자초하는 랑만자이다…     내가 이토록 뜨겁게 사랑하는 님은  그대가 아닙니다.                                      레르몬또브 아닙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님은 그대가 아닙니다 그대의 이쁜 얼굴도 내 마음은 울리지 못합니다. 나는 지금 그대 몸에서 나의 지난날의 고독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일찍 잃어버렸던 청춘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가끔씩 나의 예리한 눈길을  그대의 눈매에 쏟아부으며 내 심방의 정을 그대와 토로할때 사실 그것은 나와 그대가 정을 나누는게 아닙니다. 나는 바로 나의 젊은 시절의 련인과 정을 나누고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지금 다른 여인의 얼굴을 찾고 있는겁니다   나는 지금 살아있는 당신의 입술에서 언녕 침묵해버린 그녀의 입술을 찾고있는 중입니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나는 지금 꺼졌던 그녀의 불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림-해설: 아주 로맨틱하고 랑만적이고 오만한 사랑의 임자 즉 자신의 솔직하고 곧은 마음을 아주 로골적이고 직설적으로 고백한다…온갖 허위와 아첨과 위선과 장식이 없는 진솔한 심장의 고백…그는 이런 사람이였고 이런 시인이였다. 재래의사랑시와 또다른 남들의 사랑시와 판다른 그런 사랑시로 아주 돋보인다…신비감이 들만큼 돋보인다.. 또 이런 수법과 형식으로 이 시의 밑에 깔린 진정성을 더구나 잘 표달할수있은 것이다…   돛 레르몬또브   푸른 바다 안개속에 외로이 반짝이는 흰 돛 하나 너는 머나먼 나라에서 무엇을 찾느냐?   정다운 고향에 무엇을 버렸기에 파도는 춤추고 바람은 소리치냐 돛대는 휘면서 삐걱거린다   아, 그는 행복을 찾고 있는것은 아닌가? 아래에는 파아란 파도 넘실대고 위에는 황금빛 해살이 눈부신데 그는 미친듯 폭풍을 갈구한다 미친 폭풍속에 평온이 있듯이   림금산—해설: 돛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띤 풍경 철리 서정시입니다。이 시는 풍경화면에 대한 정채로운 묘사가 있는가 하면 의미심장한철리적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전반시에는 아주 절주있게 두개의 렌즈가 담겨져 있습니다. 한개 렌즈에는 돛배를 안은 망망한바다가 담겨있고 다른 한개 렌즈에는 바다가에 서있는 시인이 바다우의 돛을 응시하면서 하는 사색이 담겨져 있습니다. 시인의 눈길은 시종 바다에 떠있는 고독한 돛배에 머물러 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바다에서 이 돛배처럼 고독하게 떠있습니까?  헌데 유독 레르몬또브만이 이돛배와 자기의 젊은 인생을 련계해서 사색하고있죠 레르몬또브는 돛배한테 생명을 부여하고 돛배로 하여금 인격화 햇습니다. 바다표면엔 망망한  안개가 덮혔지요 이것은 방금사회에 진출한 한나젊은청년을 상징하는것이 되겠죠. 전도는 묘망하고 앞길이캄캄하죠 또 이렇게 씀으로써 시에 현념을 가득 부여하였지요. ㅇ요원한 타향에서 고향을 버리고 떠돌면서 고향을 그리는심태가 잘나타나있습니다. 이어서 바다의 풍경은 돌변하기시작하지요 때론 광풍이 휘몰아치고 격랑이 하늘높이 일어납니다. 또 광풍과 격랑이돛배의배전을 엄혹하게 위협하여 돛배에서는 삐꺽이는 소리가 납니다. 이소리는 돛배가 결코 광풍폭우에 굴함이없이 광풍폭우를 맞받아용감히 앞으로 전진하고있음을상징하지요. 이장면묘사는나젊은 청년이 현실에 굴함없이 악렬한 주위환경과 결연히 맞서 투쟁함을 말합니다 시인은 결코 안일한 행복을 추구하지않습니다. 하기에 여기묘사에서 보다싶이돛배는 계속 항쟁하고 투쟁하고 폭풍우를 기다립니다. 폭풍과의 끝없는 싸움속에서만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수잇다는, 그래서 고향의 안일한 행복을 떠나 폭풍속에서의 행복, 폭풍이 지나간후의 찬란한 행복을 추구하려는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인다면 돛은 시인만의 대리물이 아니고 그당시 열혈청춘들의 대리물이며 그당시일대귀족혁명청년들의상징물이지요. 또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면 이시에서의 돛은 비단 그때 대표적 청년들만을 대변한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도 곤난을 뚫고 진취전진하는 정신을 줄수있다는게 더구나 현실적 의의를 띠게하죠 이돛배는 시종 돛을 달고 광풍폭우속에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고있습니다. 레르몬또브의 시편들중에서 이 시는 대표적 걸작에 속하며 후에 이 시에 작곡가 화라모브가 곡을 붙여 로씨야의 한수의 아름다운 서정명곡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시는 잛고 함축되였지만 짧음속에 고저장단. 강약이 다있고 거대한 폭풍과 푹풍에 되받아나아가는 전투정신이 잘조화를 이루며 아주 깊이있고 무게있고 운률이 잘흐르고 내용이 풍부함을 완성하였습니다. 시의 구조도 아주 엄밀합니다 시는 모두 3련인데 련마다 첫두구절에서는 경물을 묘사하고 세번재 네번째구절에서는 서정을뿜었는데 또 각련에서는 마지막 두구절은 서로 조응되고 맞물림니다. 물음과 해답 물음과 해답 이런 식으로 시가 아주 째여들게 맞췄지요. 그리고 시는 시종 돛의 가치적 방향을 둘러싸고 씌여졌습니당.   신—네 이시간 문학살롱에서는 로씨야의 19세기랑만주의 시인 레르몬또브와 그의 일부 작품들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뿌쉬낀대문호를 이어 역시 시인적 천재를 한껏 과시한 레르몬또브, 참 아쉽게도 너무나 일찍 돌아간 시인의 숨결을 다시한번 함께느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요…오늘도 림선생님 수고많았습니다. 림—네,수고하셨습니다. 신—그럼 이것으로 오늘 문학살롱프로 여기에서 마침니다. 이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22    작가초대석 한국시인 김광균 댓글:  조회:3046  추천:0  2012-03-01
 회화시인-김광균   리나 —네 문학살롱 리납니다. 지난시간에는 그 누구보다 멋지게 시를 쓰신 한국의 민족저항시인 리상화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이번 시간에는30년대 한국의 회화시인 김광균시인과 그의 일부 작품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연변시가학회 림금산시인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림금산—네 안녕하세요? 리나 —림선생님, 김광균시인을 왜서 회화시인이라고 부르는지요? 조금 궁금합니다. 림금산-네 김광균시인의 시는 세가지 특점이 있다고 할수있습니다. 김광균시의 회화성: 그의 시제목(詩題)에'오후의 구도', '벽화', '향수의 의장', '뎃상', '사향도', '풍경화'가 나타나는 것은 그의 회화적 의도가 얼마나 강렬했던가를 보여준다. 그는 대상을 시각적, 회화적 이미지로 한정해야만 사물인식이 가능한 것으로 믿었다. 한 가지 사물을 다른 사물로 전이시키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그 형태를 명확하게 한다. '기차'는 당나귀'로 전이되어 생명있는 동물로 변형되고(「북경 가까운 풍경」), '안개'는'화문'을 그리는 동작으로 전이되어 그 이미지가 선명해진다. '고달픈 기억이/슬픈 행렬을 짓고'(「창」), '옛 기억이/하얀 상복을 입고'(「정원」)와 같은 것은 모두 무형의 유형화, 추상의 구체화 수법이다. 김광균은 관념 및 추상의 시각화를 통해 관념과 추상을 제거하려고 했다. 공감각의 활용: 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  햐얀 기적소리를 남기고-「오후의 구도」 김광균시의 감상성: 이미지즘에서는 대상을 선명하게 하기 위해 시각심상을 사용하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는 가능한 통제하라고 한다. 그러나 김광균의 시에서는 대부분 우울, 슬픔, 고독 등 거의가 낭만적 요소를 띤 주관적 감정이 지적 통제의 여과를 거치지 못한 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 세가지 중에서도 회화성이 특이합니다. 물론 이 세가지 특점은 서로 동떨어진건 아니구요 서로 긴밀히 련계되고 서로 속해있는 개념이지만… 리—그럼 회화적 색채가 짙은 시들이 아주 많은데요 그중 “뎃상”이란 회화적 색채가 짙은 시 한수를 함께 감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뎃상                       김광균 1 향료를 뿌린 듯 곱단한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먼―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라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림금산-뎃상(소묘)은진짜한폭의그림이지요…  리나—진짜 시가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느낌이네요. 그럼다음으로 김광균시인의 생평을 알아보겠습니다.               림금산—소개   1914  경기도 개성 깟줄골에서 출생호는-우두(雨杜).       원종 제1보통학교.송도 상고 졸업 1926 "중외일보"에 시(당13세) 발표 1932  경성고무 사원 군산에서 근무 1935  김선희와 결혼 1936  서울로 전근  1937  신석초.서정주.이육사 등과< 자오선>동인 1938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당선 등단 1939  시집 1947  시집(정음사) 1950  납북된 동생의"건설실업"을 인수하여 경영 1957  시집 1959  국제상위 한국위원회 감사, 한일경제특위 상임위원 1960  무역협회 부회장 1969  시집(산호장) 1977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시집(근역서재) 1982  69세 때[현대문학]에5편의 시를 발 창작  재개.       시집(지식산업사) 1986  시집 1988  김기림기념사업회 회장 1989  은관문화훈장       시집(범양사) 1990  제2회 정지용문학상 1993  부암동 자택에서 뇌졸증으로 작고(장지: 경기도 고양시) 리나-그럼 아래에 김광균시인의 대표작의 하나인 시“와사등”을 함께 감상하고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와사등(瓦斯登)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빈 하늘에 걸려있다. 내 홀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날개를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헝컬어진체 상념 벙어리되어 입을 다문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소리 까닭도없이 눈물 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도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에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빈 하늘에 걸려있다 리나-이 시에서 “와사등”은 어떤 등불을 말하는지요? 그리고 단어 “차단한”이란 단어는 어떤 단어인지요?   림금산-해설 시어시구 와사등: 가스(gas)등, 등불 → 어둠을 밝히는 시인의 내면 의식. 떠남을 알리는 신호 차단-한: 차디찬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물질 문명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슬픈 심정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어둠을 날개를 접는 새에 비유함(감각어)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도회인의 고독감과 불안, 고민 반영 핵심정리 성격-회화적, 감각적, 주지적 심상-시각적, 촉각적, 공감각적 어조-애상적 어조, 암울한 어조 제재-와사등 주제-현대인의 고독감과 불안 의식 구성- 1연: 현대 문명 속에서 현대인의 방향 감각 상실 2연: 현대인의 무정향성(無定向性)의 근거 제시 3연: 도시적 삶에서 느끼는 비애 4연: 현대인으로서의 종말의식과 중압감 5연: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 이해와 감상 회화적 이미지를 중시한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기수였던 김광균의 이 시는 문명의 도시에서 느끼는 고독과 낭만적인 감상을 시각화하여 보여 주었다. 이 시의 제목인 와사등(瓦斯燈)이란gas등을 말한다. 현대 도시문명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밤 거리를 거닐면서 바라본 가스등의 차가운 불빛은 시인에게 슬픔을 느끼게 한다. `와사등'의 빛은 따뜻함을 주는 불빛이 아니라`차단-한' 불빛이며, `비인 하늘'에 걸려 있는 쓸쓸한 불빛이다.   화자는 와사등을 마치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자신에게 갈 길을 재촉하는 신호처럼 느끼고 있다. 가스등 외에도 도시의 거리를 채우고 있는 풍경은 화자에게 슬픔과 방황, 그리고 공허함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해가 지는 것을`황망히 나래를 접고'로 표현한다거나, 도시의 늘어선 고층건물을 묘지에 세워진`묘석'으로 보고 있다거나, 찬란한 야경을 헝클어진 잡초로 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비애와 슬픔으로 가득찬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슬픔에 차 있을 수밖에 없다. 화자는 군중 속에서도 공허를 느끼며,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나 고층 건물에서 죽음과 슬픔만을 느낀다. 화자가 와사등을 차갑고 쓸쓸한 불빛으로 느끼고 도시를 묘지처럼 죽음과 두려움으로 느끼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까닭도 없이 눈물'겹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명백하게 보이지 않는 비애와 공허의 이유를`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신호이냐고 독백하는 마지막 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갈 곳을 모르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지향과 목표 없이 방황하기 때문에 그는 까닭도 없이 슬프고 어두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등잔불과는 달리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가스등의 창백한 불빛 아래 갈 곳 없이 도시의 거리를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김광균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하였다.   자신의 생활 근거지인 도시를 묘지로 생각하는 이의 비애는 김광균의 시에 방황하는 사람으로 자주 드러난다. 삶의 목표와 그 방향을 잃은 이가 흥성스러운 도시를 거닐다 문득 올려다 본 빈 하늘에 홀로 켜진 차가운 가스등 불빛이 그에게 새삼스런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절망과 비애를 통해 도시문명을 비판하며 개체의 고독을 회화적 수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김광균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림금산-해설: 리나-김관균시인의 시를 이해하자면 모더니즘에 대해서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되는데요. 모더니즘에 대해서 한번 더 짚어주고 넘어갔슴 좋겠습니다. 림금산—네 모더니즘: 현대주의 또는 근대주의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성의 도덕과 권위를 부정하고 기계 문명과 도회적 감각,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사조이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은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 등을 가리킨다. 한국의 경우에는 프로문학이 퇴조하고 일제의 군국주의가 노골적으로 대두한1930년대에 영미(英美)의 주지주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사조로 불린다. 김기림이 시의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기술주의를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소설에서는 최재서와 이상이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이다. 모더니즘의 특징: 지적이고 시각적이다.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을 나타내기도 한다. 의식적이고 기교를 추구한다. 회화적이고 기교를 추구한다. 8.15이후 박인환, 김경린 등 동인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1930년 모더니즘 시의 시대적 배경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배경으로 흔히 등장하는 도시와 현대 기계 문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193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이른바 식민지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였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이러한 위기에서 탈출하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조선에 대한 자본 수출이 본격화된다.   그로 인해 조선에는 중화학 공업(특히 군수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1930년대 모더니즘은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시대적, 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미의 모더니즘(주지주의) 이론의 영향에 의해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리나—이 즈음에서 공감각이란 말이 자주 나오던데요 공감각이란 또 어떤것을 말합니까? 림금산-네 공감각(共感觉) 어떤 자극에 의하여 일어나는 감각이 동시에 다른 영역의 감각을 일으키는 일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소리'를 듣고`빛깔'을 느끼는 경우의 감각을 공감각이라 한다. 한 가지의 감각이 자극되어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감흥 속에서 다른 종류의 감흥을 묘사할 때 적용되는데 색채와 소리의 관계, 색깔과 냄새의 관계, 소리와 냄새의 관계 등에서이다. `감각전이' 혹은`감각유추' 등으로 불리는 이 현상의 예로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종모양의 꽃들이 음악소리 같은 종소리를 내어 그것이 마치 히야신스의 향내인 양 느껴진다는 쉘리의 「예민한 식물(The Sensitive Plant)」을 들 수 있다.   호머 이래의 문학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공감각의 심상은 특히19세기 중기와 후기의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 많이 개발했다. 김광균의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 “부서져내리는 돌바람의 귀”「우물터에서」, 정의홍의 “오솔길 피 먹은 얼굴로 산비탈을 넌지시 내려오고 있다”「가을이미지」 등은 모두 공감각의 표현이다. 리나-그럼 역시 김광균시인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시 “설야”를 함께 감상하고 해설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양 흰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홀로 밤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곳의여인의옷벗는소리 희미한눈발 이는어느잃어진조각이기에 싸늘한추회이리기쁘게설레이느뇨 한줄기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쌓여 내슬픔 그위에  고이 서린다. 조선 일보>(1938.1) 리나-아름다운 시라고 생각되는데 또 조금은 애상적인 기분이 드는데요 림금산—해설 이 시는 눈오는 날 옛 여인의 그리운 소식이 온 줄 알고 희망을 가지고 뜰에 나와 눈을 보며 그 옛날 화자를 위하여 여인이 옷을 벋는 모습을 상상하며 가쁘게 설레이나 여인이 먼 곳에서 혼자 차단한 의상을 하고 기다리는 모습을 생각하니 슬프다는 내용이다. 화자는‘한밤’에‘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을‘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으로 생각한다. 깊어 가는 밤에‘처마 밑에 호롱불’은 기름이 다해‘야위어 가’는데‘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기온은 차가워‘하이얀 입김’이 나오고 이렇듯 추운 방에 잠 못 들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절로 가슴이 메’이는데‘마음’ 속‘허공에’는 희망을 잃지 않고‘등불을 켜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을 듣기 위하여‘홀로 밤 깊’은‘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벋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희미한 눈발’은‘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처럼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머언 곳에’서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 있었던‘여인의 옷 벋는’ 추억을 상기시킨다. 여인과 화자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는 지는 모르나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과거의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싸늘한 추회(追悔: 지나간 일을 후회함.)’이다.그렇지만 여인과 함께 있었던 과거는 생각만 해도 화자의 마음을‘이리 가쁘게 설레’이게 만든다. 그러나 지금 화자와 헤어진 여인은‘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을 맞으며‘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이도록 화자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슬퍼진다. 이제‘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을 전해주는 눈이 반갑지 만은 않다. ‘호올로’ 쓸쓸하게‘차단한 의상을 하고’ 있을 여인을 생각한다. 내리는 눈의 쌓이는 양만큼 화자는 여인과의 추억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 생각만큼 화자의‘슬픔’이‘눈 위에 고이 서리’는 것이다. 이 시에서‘눈’이 시적 자아의 정화된 슬픔을 상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히 화자는‘눈’을‘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 ‘서글픈 옛 자취’,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라 하고 있다. ‘눈’은 먼 곳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는 매개체이면서 추억을 상기시키는 매개체이다. 눈은 매개체이면서 한편으로 여인에 대한 생각 또는 추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5연)’는 여인과의 추억을 계속 생각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화자의‘슬픔’은‘흰 눈’ ‘그 위에 고이 서리’고 있다. 그러므로‘눈’과‘슬픔’이 한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화자는 눈 속에서‘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벋는 소리’ 떠올린다. 이를 눈이 내리는 소리로 보는 것은 시 해석에서 상상력의 과잉 개입이다. 이는 화자의 상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이러한 상상을 하였을까? 이는 화자와 여인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화자가 과거에‘여인의 옷 벋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이러한 표현을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와 여인은 보통 관계가 아닌 아주 긴밀한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여인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은‘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벋는 소리’를 상상한 뒤에 이어서 상상한 여인은‘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옷을 벋은 여인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호올로’ 추운 상태로 있는 것이다. 여인이‘향기도 없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볼 수 없다. 헤어진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역사적으로 일제에 강점당한 조국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2004.10.27 수 오전8:05 리나—다음은  김시인이만년에쓴것같은  시“목상”을함게감상해보도록하죠   목상                 -김광균 집에는 노처(老妻)가 있다 노처(老妻)와 나는 마주앉아 할말이 없다.   좁은 뜨락엔 오월이면 목련이 피고 길을잃은비둘기가   두어마리잔디밭을 거닐다간다.   처마끝에등불이켜지면 밥상을마주앉아 또할말이없다.   년년세세(年年歲歲) 세월(歲月)이지나는동안에 우리둘은목상(木像)이돼가나보다.                                                 *****   목상(木像)이 될만큼 서로가 서로을 바라만 보아도 알수있는 삶을 살아오신 시인의 마음에도 그 침묵의 시간을 이겨내기위해 마음의 비탈진 시간을 오르고 내려갔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년년셋세살없이 살며 노부부의 마음에 쌓인 믿음의 의중이 흐르는것은 그만큼 세월을 이겨낸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세대는 의목상의 마음을 잃고 살아간다 말이없다는 것은 재미가 없다는 둥, 유머감각이 부족하다는둥, 스스로에 대한 자제력을 잃고 살아간다 그만큼 자기합리화에 강한 삶을 살고있다 이는 깨달음이 부족한 결과이리라 김광균시인의 목상에서 깨달아야 할것은 저녁밥상을 물리고 아무 말없이 허기침 두어번이 오고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지어미와 지아비라는믿음의 뿌리가 얼마나 깊게 자리하고 있는가 라는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세월속에 침묵이 가르치는 법이 있고 시냇물처럼 졸졸거리는 소리가 가르치는 것이있다 묵상은 바로 김광균시인께서 노처(老妻)의 침묵속에 흐르는 삶만으로도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법을 일러주는 설법과 같이 느끼게 해준다 이는 자제력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애써 배워야 하는 숙련된 삶의 기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시형식에서도 아주 그림같은 회화적 감각이 이 시에서도 확연히 들어납니다. 두 로인이 우리 앞에 그림이나 사진처럼 안겨오지요… 리나—그렇다면 김광균시인의 시의 특징을  규납해본다면 어떻게 규납해볼수 있을가요? 림금산-네, 김광균시의   특징 김광균은  모더니즘의 실천가로 잘알려진 시인이다. 그의시에선도시냄새가풍겨나고, 쓸쓸한 정서가 짙게 묻어난다. 하지만 그의시를 읽으면 한폭의 그림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김광균의 독특한‘회화적특성’이 그의 시에 녹아있기때문이라고그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한바이다. 이를귀납해보면--- 1‘위에’ 있는공간(공간적이미지) 2. 마음을색칠한하얀, 푸른, 초록, 빨강, 검은(색채이미지) 3. ‘소리’ 에귀기울이면알수있는모양(청각적이미지) 4. 어두운 밤을 밝히려는 등불(어두운이미지) 5. 고향을 떠나온 도시(부정적이미지) (1) 세계관 ① 상실의식:  그의 시는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살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근원적인 상실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상실의식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고향을 생각하고 지향한다. 그러나 김광균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하는 고향의 모습은 어린 시절 기억의 희미한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② 패배의식:  김광균 시를 면면히 흐르는 것은 짙은 슬픔과 애수와 비애의 정조이다. 그에게 현실은 적대적이며 부정적이며 신뢰할 수 없다. 그는 현실에 대한 피해의식과 패배의식에서 오는 고통과 슬픔과 애수의 정서를 과장하는 데 급급하다. 이러한 과도한 감상벽 이외에도 그의 시에는 현실밖에 존재하는'어느 먼 곳'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나타난다. ③ 소외의식: 김광균의 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는 이국적 이미지, 색채적 이미지, 감각적 이미지이다. 현실은 이국적 이미지를 통해 낯설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김광균의 이국적 이미지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세계의 극단적 변용과 왜곡을 통해 현실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의식의 소산이다. 실제와 상관없는 색깔을 부여함으로써 그는 그 존재의 본래의 가치와 의의를 무화시키고 있다. 시의 감각적 이미지는 대부분 곱고, 눈부시고, 화려하고, 찬란한 속성을 가진다. 그는 사물의 미화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은폐하려고 한다. 그는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극단적으로 변용시킴으로써 현실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낯설음을 표현하고 있다. 리나---이상으로 색채시인, 이미지시인, 회화시인 김광균시인의 작품을 살펴보는 시간을 함께 가졌습니다. 이시간을 빌어 시청자여러분들이 현대시의 여러가지 창작방법을 료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였다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네, 오늘도 림선생님 수고많았습니다. 림금산—네,수고하셨습니다. 리나—그럼 오늘문학살롱프로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이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21    작가초대석 인도시인 타고르 댓글:  조회:2863  추천:1  2012-02-29
타고르의 생애와 작품 신금철—문학살롱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독일의 랑만주의 문학가이며 민중시인인 하이네와 그의 시작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오늘은 우리 동양에서 제일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시인-타고르에 대해서 살펴보려합니다. 오늘도 연변시가학회 림금산 시인님을 마이크 앞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림금산—안녕하세요?   신금철: 타고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명성높은 시인입니다. 동양의 시성이며 나아가서는 세계적 시성으로 눈부신 빛을 발하다 간 시인이지요. 특히 동양시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별문학상을 수상했다는것이 더욱 주목을 끌고있지않는가 생각합니다. 먼저 타고르의 생평에 대해서 소개해주시지요.   림금산— 타고르(1861~1941)는14남매 중 막내아들로 인도의 도시 칼캐타에서 태어났다.   타고르의 집안은 대대로 인도의 전통과 격조 높은 교양을 엄수하면서도 사상적 예술적 향취가 짙은 가정으로 인도의 귀족계급에 속해 있었다. 말하자면 타고르는 이러한 존귀한 가정의 영향 속에서 일찍부터 예술과 사상에 눈뜰 예지를 부여받은 셈이었다.   한편 타고르가정은 계급적 귀족인 동시에 정신적 귀족성에 있어서도 드문 가계를 갖고 있었다.   생전에‘프린스’(哲人)라는 존칭으로 불리던 타고르의 조부는 매우 명랑하고 풍부한 성격으로 인생을 당당하게 향수하며 마쳤고, 그의 생애와 대조적으로 타고르의 부친인 데벤드라나드는 종교적 명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성격이었다. 그리하여 만년에는‘大賢’이라 부름 받을 정도로 종교정신에 투철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부친은 로이의 친우였다. 람 모한 로이는 인도의‘브라흐마 사마지’ 교단의 창시자였다. 로이의 사망 후 이 교단은 타고르의 부친에 의해 이끌어졌다.   따라서 타고르의 소년시대에 그의 가정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감은 ‘무형의 神과 이성에의 존경’이란 특징을 몹시 강한 영향으로 오랫동안 남게 했다.   훨씬 뒤에 타고르는 시인이 되어 람 모한 로이(1772~ 1833)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는 정신 가운데 힌두교와 회교와 또 기독교적 교양을 진정으로 합일시키려는 마음의 넓이를 지닌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배타주의가 아니고 완전한 이해에 기본을 둔 진리에 충실하게 사는 인도의 대표자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상 일부 우리 동포들에게 거부당했다고 했을지라도 나는 그를 모범으로 삼으려 한다” 이상과 같이 타고르가 그의 청년시대에 받은 위대한 감화는 바로 람 모한 로이었다.   신금철—타고르의 형제중에 예술가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이같은  가정배경이 타고르에게 미친 영향도 크지 않았겠는가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   림금산—네 타고르의 형제들은 음악가, 철학자, 관사들이었다. 가정의 분위기 자체가 예술적이요, 철학적인 속에서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의 위대한 시인, 철인, 사상가에로 이르게 할 수 있었던 가정적 은혜로움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고르는 그들 선구자에 이어서 막 타오르는 새 아침의 태양처럼 나타나  국민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어려서부터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는 정규학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동년배의 소년들과의 친교도 수업시간도 이 민감한 영혼의 소지자에게는 참기 어려운 폭력으로마저 느껴졌다. 그의 부친은 끝내 이러한 어린 문제아 타고르에게 정규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철저한 가정교사교육으로 충분한 지능의 개발에 힘썼다.   신금철-영국에 유학 간적도 있었다면서요? 영국에 가서 주로 어떤 학문을 배웠습니까? 이시기가 그의 인생에 준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하는데요.   림금철—네 1878년, 列國의 인도에의 진출이 한창일 때, 타고르는 거꾸로 그의 형을 따라 영국에 유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유익한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도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러나 타고르가 영국에 머무는 동안 런던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듣고19세기의 쉘리나 워즈워드, 브라우닝의 시연구에 몰두했고 시창작에도 힘썼다.   후일 타고르는 그의 저서‘시인의 종교’, ‘미의 정수의 찬가’에 대한 커다란 찬탄을 쉘리에게 보냈고‘인격론’에는 월트 휫트먼에 대한 존경의 念이 들어있기도 하다.   일년간의 런던유학은 짧았지만 타고르의 예술형식에 퍽 많은 도움을 주었다. 캘커타로 돌아온 후의 세월을 타고르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독서와 시작에 몰두했다. 여기서 그는 시형의 인습적인 형식을 부수고 자유로운 유동의 힘을 표출함으로써 타고르 시의 특징을 드러냈다. 당시에 써 모은 시는1878년 그의 첫 시집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서는 막연한 이유 없는 어떤 슬픔이 전체를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서히 눈뜨기 시작한 삶은 깊숙한 의미와 함께 유년시대와 소년시대를 결별하고 꿈으로부터 현실에 닿는 청년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뭔가 아직 명확치는 않으나 커다란 동경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신금철—타고르의 시는 동서방문화의 조화를 이루는데 큰 공헌을 했다면서요?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어떤 작품입니까?   림금산:  그의 시혼은 수천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인도의 지혜로 만들어지는 한편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구라파 정신도 깊이 흡수하여, 타고르의 시는 동양과 서양이 신비한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고 명확한 시정신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가‘기딴쟈리’의 영역시집을 들고 나와 조용하고 엄숙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1913)을 수상하게 되고 동방의 시성으로 받들어지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노벨상을 탄 시는 시집 “기탄쟐리”(헌시)이다 여기에는 그의 시130여수가 있다. 영역시집이다.   신금철—한때 인도 간디와도 서로 교제했다면서요? 서로 어떤 관계고 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까?   림금산—네 한때 간디와 손잡고 직접 반영운동(영국반대운동)을 하다가 간디의 양해하에 그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간디의 교육정신은 타고르에게서 오고 타고르의 평화이념은 간디의 철학과 이어진다. 타고르는1941년80세를 이승의 고비로 숭고한 이상이 무모한 전쟁과 유혈속에서 무참히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을 감았다.     신금철—타고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면서요?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남겼습니까?   림금산:  타고르는 시뿐만 아니라 음악과 회화, 또 소설 그리고 연극에 이르는 많은 예술적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1883년12월9일, Bhavatarani와 결혼 이후, 그가 예술분야 또는 현실의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방법의 활동에서 돌연 은거자의 형태로 돌아가 버린 만년의 생활 즉 산띠니께딴의 명상생활에 돌입하기까지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후기의 시집으로는 ‘신월’ ‘과실따기’ ‘건널목’, 소설로는 ‘고라’ ‘난파’ ‘고향’ 등, 희곡으로는 ‘찟뜨라’ ‘봄의 윤회’ ‘우체국’ ‘암실의 왕’ 등, 논평으로는 그의 사상의 근저를 말한 아름다운‘사다아나’(1952)   '창조적 통일‘(1922) '내쇼날리즘’ 등의 출간물이 있다.   특히 타고르는 깊은 명상과 범우주적인 관찰력과 신비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들로 완전히 온 세계를 매혹하여 버림과 동시에, 미와 혼의 평화와 정신의 고귀를 설하고 간소하고 순수한 통일된 조화적 인간성의 실현을 바라고 또 그것을 훌륭하게 실천한 희유의 인격으로서 문자 그대로 시성으로서 일세의 경애를 받은 것이다. 또 앞으로도 영원한 경애를 받을 것이다. 신금철—네  타고르의 생평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보았는데요. 아래에 그의 시작품을 감상하면서 림금산선생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먼저 시 “당신곁에”입니다. 당신곁에                                       타고르 하던 일 뒤로 미루고 잠시 당신 곁에 앉아 있고 싶습니다   잠시라도 당신을 못 보면 내 마음 안식을 잃고 고뇌의 바다에서 내 하는 일 모두 끝없는 번민이 되고 맙니다   불만스러운 낮 여름이 한숨 쉬며 오늘 창가에 와 머물고 있습니다 꽃핀 나뭇가지 사이사이에서 꿀벌들이 잉잉 노래하고 있습니다   임이여, 어서 당신과 마주앉아 목숨 바칠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신비로운 침묵 흐르는 이 한가로운 시간 속에서   신금철: 네 타고르의 시였는데요. 이 시에 대해서 좀 해설해주시지요.   림금산—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번역상 원문의 묘미는 잘 느껴지지 않지만 “당신과 마주앉아 목숨바칠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등의 시구들은 놀라웁고 대단한 상상의 깊이가 아닐수 없습니다.[출처]당신곁에/ 타고르(인도)  타고르의 많은 작품가운데서도 특히 신앙의 차원에까지 높여 구슬처럼 영롱하게 빛을 더하는 것은 물론 시다. 그의 시는 인도의 거대한 전통과 장엄한 자연이 합성되어 이룩된 인도문화의 집약도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문화전통이 그 불길 같은 천재성에 의하여 연소되었기 때문에 그 빛은 온 인류의 영혼 속에 숭고하고 따뜻하며 아름다운 음악을 낳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르의 시는 국경을 초월하고 인종과 빈부와 시대를 뛰어넘어 온 세계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세계를 뒤흔든 시인이 일찍이 있었던 가 할 정도의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인류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하여 사색과 전통을 버리지 않는 한 타고르의 시는 끝없는 영혼의 벗이 되어줄 것이다.   타고르의 시는 심오한 철학과 엄밀한 신비성을 지녔다. 아름다운 음악이 용해되어 있고 격조 높은 삶의 관찰이 드리워져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시인의 경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시의 이상적 극치를 엿보이고 있다.   타고르의 시는 일상용어이며 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거기에도 엄밀성은 편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작에 있어 기교의 완벽성 때문이다. 이 기교의 완벽성 때문에 사실상 타고르의 시는 기교에 대한 훈련이 없는 독자라도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이것은 타고르 시의 단순의 정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어떤 결론을 유추해낸다면 ‘타고르의 시는 단순한 정직성의 완벽한 신비’라고 하겠다.   신금철—네 그럼 계속하여 다음 시입니다. 타고르의 “바다가에서”라는 시인데요. 함께 감상하고 림금산선생님의 해설을 듣겠습니다. 바닷가에                              타고르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 껍데기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로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오가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 던져 고기잡이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 없는 물 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 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신: 이 시에 대해서도 해설 해주시지요.   림금산—15세에 발표된 “바다가에”, ‘들의 꽃’에 이어‘저녁의 노래’, ‘아침의 노래’가 초기서정시의 정점을 이룬다.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정취가 소년기 시의 전체적 주제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 행복에 대한 꿈, 생의 은은하고 깊숙한 거룩함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 등이 이 시기의 어느 시편에서도 숨김없이 그냥 들어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인간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서를 발굴하려는 의지적인 소년의 노력이 詩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신금철—다음은 타고르의 시 “나는 바다가 되리라”를 함께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바다가 되리라                      타고르 자아는 살아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삶과 죽음은 서로 평행을 이루어  동시에 계속적으로 진행된다. 우리가 자아에게 어떤 고정불변의 형태를 주고자 할 때, 자아가 스스로 자라나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때 또 한계를 정해놓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그 때에도 죽음을 부르는 것이다. 아침 햇빛이 퍼지게 되어 등불을 끄는 것과 같을 뿐, 결코 빛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가장 진실한 욕망에 눈을 뜨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림금산—해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섬광처럼 반짝이는 예지들로 꽉 차있으며, 인도의 동화나 사랑의 얘기가 소재로 많이 쓰여졌다. 짧은 영국여행이었지만 천재 타고르는 타고르 자신이 몸담아 있는 이 지구상의 구조적 움직임에 대하여 민감하게 눈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시는 강한 구조주의 철학의 성격과 아울러 사랑이 주제를 이룬다. 물론 타고르의 전 생애의 시 가운데서 종교나 철학의 짙은 성격이 깊숙이 깔려있지 않은 작품은 없으나, 이 시기에는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결백한 도덕성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애정을 바탕으로 한 사랑, 말하자면 형제애 또는 우정 등의 광범위한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이 이 시기를 특징짓는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는 도덕과 종교와 철학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때로는 깊은 명상을 추구하며 생활했으니 이 시기는 그가 출판한 잡지 ‘사다아나('명상’1913)’의 이름을 따서 사다아나의 시기라고도 하며, 시집‘金舟’ ‘찟뜨라(1892)’ 희곡의‘祭物犧牲’ 등은 이 시대의 대표작품이다.   1901년‘벵갈평론’을 냄으로써 그는 종래의 고전적 양식에서 탈피하고 수구파와도 결별, 문체를 일신하여 새로운 리듬으로 열렬한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적 자각을 위해 실제 일선에 나서는가 하면 낡은 교육을 지양하고 인도를 위해 인도인의 새로운 교육을 부르짖었다.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의한 인도독립운동과 때를 맞추어 타고르의 목소리는 인도 국민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새로운 인도의 사상적 움직임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고오라(1924)'와 힌두교도의 가정생활을 비판한'難破( 1921)' 를, 시집으로는‘건널목’ 등을 내놓았다. 한때 간디와 손잡고 직접 반영운동을 하다가 간디의 양해하에 그는 문화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간디의 교육정신은 타고르에게서 오고 타고르의 평화이념은 간디의 철학과 이어진다. 타고르는1941년80세를 이승의 고비로 숭고한 이상이 무모한 전쟁과 유혈속에서 무참히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을 감았다.   신—만년에는 또 은거생활을 햇다면서요?  그러면서 명상의 시기를 보냈다면서요?   림—네 타고르는 자신의 개인적 능력에 우선하여 여러 가지 예술분야에 손을 댔으나, 그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영원한 시인으로 표상되기를 원한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모든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그가 태어난 캘커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띠니께딴 숲속에서 은거생활의 막을 열었다. 이시기를 명상의 시기로 부르는 것은 그가 이 시기에 극도의 내면적 갈구를 위해 영혼을 불살랐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시의 엄밀성을 말하는 침묵의 시수업을 했으리라는 결정적인 생각에서 더욱 이 시기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외면적으로 이 시기는 애국애족주의적 편협에서 탈피하여 영혼을 보편의 세계로 넓히려는 성자적 생활의 시기이기도 하다. 삶의 다양함속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변화의 불멸법칙이 바로 만년에 타고르가 추구했던‘예술정신’이었다. 그리하여 경건한 종교시인이 되고 사랑과 평화와 국제주의에 입각한 교육자로서 헌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1866~1948)에 대하여 깊은 존경을 드렸지만, 그의 비협동과 인도 자치정신의 편협한 애국주의를 비판할 만큼 철저한 넓은 사랑의 시야와 세계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의 사후에 발표된 유고가운데서 귀중한 빛을 보인 작품들이 근자에 독자들에게도 소개된 바 있다. 말하자면 이 시편들은 모두 열다섯 편의 작품으로 그의 인생의 정리에 해당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신비로운 언어의 마법들이 보여진다. 타고르를 슬프게 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열광적으로 이 동방의 시성을 찾아 그의 시와 사상가운데서 새로운 복음을 들으려 했다. 오늘에 이르는 詩聖 타고르의 시와 그 안에 깊이 깔린 인도철학사상은 미래에도 또한 세계를 향하여 찬란한 빛을 비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신—타고르는 한국에 대해서도 시를 남겼다면서요? 어떤 일로 시를 남기게 되였는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시입니까?   림금산—네 “동방의 등불”입니다. 일본에 왔다가 한국기자를 만나서 써주었음. 동방의 등불                            타고르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잠을 깨소서   신금철—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한룡운시인님도 타고르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답니다. 또 그래서 시까지 써서 그 감동을 읊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 함께 한용운님의 그 시를 감상해보면서 타고르의 시적 경지를 다시 느껴봅시다. 타고르의 시(詩)를 읽고                                                한용운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신금철—네 오늘 작가초대석시간에는 림금산선생님을 모시고 인도의 타고르시인과 그의 부분적 작품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상세한 소개로 타고르를 재인식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선생님 오늘도 수고많았습니다.   림금산—네 수고하셨습니다.   신금철—그럼 마지막으로 노래한수 드르시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서 마칩니다. 이시간 프로편집에 김철운이였습니다.   -------- 노래------
20    (탐방) 북녘땅 천리행 댓글:  조회:2894  추천:0  2012-02-26
 북녘땅 천리행                      -산재지구 소학교육현장 탐방                                                              림금산 앞서가는 교장과 앓아누운 교원 차창으로 뉘연한 흑토벌이 북으로 북으로 거무슥하게 널려져있는 것이 보인다 마음은 어쩐지 무겁고 착잡하기만 하다 글소리 랑랑하던 우리 민족학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서 스러져가고 있는듯 하다. 조선족집거구인 연변지역이 학교소실속도가 아주 빠른데 비해 산재지구의 학교들은 어떤 형편인지? 가을이 깊이 물든 지난 10월 24일 저녁녘에야 우리 취재팀은 산재지구조선족소학교육현장을 찾아서 북녘땅천리행의 첫역으로 서란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대문을 노크하였다.                     초겨울에 접어들 준비를 하느라 그런지 그날따라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짓눈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가 취재차 찾아간다는 기별을 미리 전달받은 이 학교 김필선교장은 이미 퇴근시간이 다 되였어도 널찍하고 호화로운 교장실에 정히 앉아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김교장은 우리의 취재의도를 유심히 듣더니 덕육부교장, 업무부교장과 유치원원장님까지 학교주요지도부성원들을 몽땅 불러놓고 학교소개와 우리의 여러가지 질문을 일일히 답하였다. 학교는 너무나 좋았다.  지난해 첫학기까지만도 아주 헐망하던 학교를 김교장과 주요 지도부성원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싶이하여 많은 자금을 인입받아왔고 그래도 자금이 모자라자 학교의 부지면적을 더러 팔아가면서까지 총투자 600만원으로 이 호화롭고 현대화적인 교수청사를 새롭게 지어내는데 성공했단다. 부지면적이 1만 8천평에 건평이 5천평인 이 호화청사는 원래의 낡은 교사보다 7백평이나 더 크단다. 그간 김교장은 여러차 눈물까지 흘리면서 학교의 래일을 위해 피땀을 쏟았단다. 우리는 이들의 한숨과 악땀으로 이루어진 학교청사를 일일이 돌아보면서 눈이 부시여 부지런히 카메라 샤타를 눌러댔다. 1936년에 창립된 이 학교는 지난해 후반년부터는 현대적으로 건설되여 최고급 전기화실,  밝고 호화로운 교실, 내부장식이 너무나도 이쁘고 난방설비가 잘되여 있는 기숙사, 꼬맹이들 마음에 꼬옥 들게 꾸며진 아담한 유치원놀이장과 학교음식점…모두가 그렇게도 잘 다음어져 마치도 포근한 부자집에 들어선듯 하였다. 기숙생들은 네분선생님이 친히 보도하는 야간교실에서 숙제공부를 마치고는 넓고 큰 객실에 모여 텔레비도 시청하고 또 4학생씩 취침할수 있게 꾸며진 11개의 침실에서  꿈속에 들어간단다. 침실마다 문어구엔 4명학생의 이름과 채색사진이 꼭꼭 박혀있고  침대마다 학년과 반이 밝혀있었다.  또 저급학년애들을 위해 책임진 선생님이 데리고 자는 칸이 두개나 되여 있어 진짜 개인집 침실과 꼭 같았다. 이들의 빨래는 몽땅 교원들이 해준단다. 헌데 너무도 크고 호화로운 학교청사에 비해 학생이 고작 160여명밖에 안되여 너무나 아쉬웠다… 그날저녁, 우리들속의 류락현부사장과 농학원시절의 동창이고 친구인 서란시 농업국 리국장이며 또 나와 함께 안도현2고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조양진 녀당위서기 주영화며 그들의 남편과 부인들까지 모두 찾아와서 우리를 반기였으며 소학교령도들을몽땅 이끌고 개업한지 한주일밖에 안되는 서란시에서 제일 호화술집에 우리를 초대하여 수년간 서로 얼굴도 못보았던 회포를 풀었고 끈끈한 한민족의 피를 나누면서 학교의 앞날을 진맥해보고 앞으로의 작전을 많이도 담론하였다… 이튿날 우리는 서란시 평안진에 있는 또 다른 학교 서란시 평안진조선족소학교에 찾아갔는데 학교학생은 40명밖에 안되였다. 수십년간 이 지역 촌소로부터 돌며 교편을 잡으면서 우리 소년보사에 많은 원고를 보내주었고 또 서란지구의 꼬마기자들을 많이도 배양해주셨으며 서란지구에 소년보를 많이도 홍보해주신 김룡환선생이 바로 이 학교에 있다는 소식과 또 그 김선생이 페암으로 심하게 앓고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이미 신문사에서 떠날때부터 알고 있었던것이다. 우리는 김선생을 꼭 찾아보고 위안의 말이라도 올리고 싶어 덜컹거리는 시골길에 택시를 들이밀었지만 아쉽게도 김선생은 학교에 없었다. 이 학교 현임교장 신명숙(50세)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김룡환선생은 암증세가 너무도 엄중하여 3-4개월 심하게앓다가 이미 길림시에 있는 부대병원으로 갔단다…우리는 가슴한구석을 꼭 물어뜯는 아픔을 느끼며 전국에 있는 조선족꼬마독자들을 대표하여 김룡환선생의 건강회복을 빌고 또 빌었다…   오상시의 민족의 요람에서                         1934년 3월에 오상충인국민학교란 이름으로 건립된 이 학교에 들어서니 흑룡강성모범교사이고 올해에 4 4세인 이 학교제13대교장 추옥단선생님께서 회의도중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학교의 연혁으로부터 학생수며 특색활동에 대해서 취재를 펼치는데 김분화부교장, 과학을 책임진 김명화주임, 덕육을 책임진 장미옥주임 등 말짱 젊은 녀교원들이 교장실에 올라와 우리와 일일히 인사를 나누면서 취재를 받아주었다.   교장실옆칸이 바로 그 유명한 “민족문화교실”(제7호)인데 2008년에 오픈한것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고급학년학생들이 저급학년학생들한테 도도리를 배워주고 있었다. 현대화적인 널직한 장소인데 민족무용, 민족례절과 민속 등을 위주로 랑독시합이나 대형행사를 진행할수 있는 좋은 활동실이였다. 지어 떡이나 김치같은 민속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여기서 가르친단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다재다능한 소녀로 소문이 자자한 6학년1반의 정세나를 만났다 올해에 12살인 그애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껏 시종무용을 배웠는데 때로는 두다리가 시큰해나고 어깨마저 부어나 얼음찜질까지 해가면서도 련습을 견지하여 학교선전대일원으로 여러가지 경축대회와 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였으며 수많은 영예들을 따냈단다.작년 예술절에 그가표현한은 할빈시1등상까지 안아왔단다. 그애는 또사회도 곧잘 하는데1학년에 입학하여서부터 지금껏 부반장직무를 맡고있으면서 학급에서 조직하는 주제반회나 활동과를 할 때면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공인하는 인기사회자로 활약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주최하는 이야기대회, 노래자랑, 랑독, 랑송대회에도 참가하면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지난6월에 있은 할빈시중소학교글짓기경기에서 그애가 쓴 작품은 또한번1등의 영예를 안아왔단다. 그애는 또한 생활의 강자이기도 하단다. 아빠, 엄마가 두살짜리 어린 동생과 그애를 남에게 맡겨놓고 출국하였지만 현실을 정시하고 성격이 명랑하고 배움의 즐거움과 생활의 유쾌함을 즐기면서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굳게 다짐하곤 매일 하학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동생을 보살폈고 집일도 도왔지만 이6년간 학습성적은 시종1, 2등을 다툰단다… 1만 6천평이나 된다는 운동장으로 나와보니 하너른 것이 눈앞이 시원히 트이였다. 건평이 2280평인 이 학교는 시중심에서 좀 나와있어서 환경이 아름답고 록화가 잘돼 있었다. 벌써 한두시간 취재해보니 학교는 각종 시스템이 잘 짜여 있었고 교원대오도 깔끔하고 탄탄함을 직감으로 알수 있었다. 2003년에 새로 지었다는 학교청사는 아직도 너무나 새것 그대로였으나 여러가지 시설들이 굳건히 현대화적으로 짜여들고 있는 시점에 학생수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로 조금 아쉬웠다. 15년전까지만해도 600여명 학생으로 번창했다는 이 학교가 지금은 270명이란다. 270명이면 흑룡강성에서는그래도 꽤 많은 학생수였으나우리 마음은 그냥 서글펐다. 올해 입학생수는 39명으로 그래도 요즘은 학생수가 조금은 온정되여 간단다. 김분화부교장은 말한다. “광휘향중심소학교와 소산자진중심소학교가 합병했다가 2006년에 소실되였습니다. 밀락향중심소학교는 이번 학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도 어딘가 그늘이 비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편         정세나와 같은 재간많고 강직하고 귀여운 학생들이이학교를  빛내주고 추교장을 위수로한 젊고 패기있는 골간들이 있음으로 하여 이 학교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위안도 받아안게 되였으며 마지막까지 산재지구에서 우리 민족소학교육현장을 굳건히 지키는 그들에게 머리숙여 경의를 드렸다.   3. 북방의 모스크바는 마냥 부유하지만…   우리는 흑룡강신문사 정봉길주임의 소개로 100여년의 력사를기 록하고 있는 도리구조선족소학교로 찾아갔다. 언제나와 함께준수하고 깔끔한 모습의 백미옥교장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널직하고 호화스런 교장실에서 우리는 이 학교가 부유한 학교임을 인차 감득할수가 있었다. 이날 오후 일본손님들이 학교를방문한다기에 우리는 더는 지체하지않고 다그쳐 취재에 들어갔다. 백교장의 소개에서도 이 학교는 가난티를 벗어메치고 부유의 길로 가고있음이 확연히 알렸다. 우리는 일부러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듯한 2학년 1반의 꼬맹이들의 주제중대활동도 구경하였다. 화려하게 한복을 차려입은애들이 소선대대기를 들고 중대활동을 펼치는데 주제는 공중례절을 잘 지키자는 것이였다. 너무나 재미나게 부드러운 활동이여서 우리는 연신 샤타를 눌렀다. 활동이 끝난후 우리는 이 학교의 특장생 두애를 불러보았다. 한애는 6학년의 원래는 5학년이여야할 애가 하도 공부가 출중하여 6학년으로 뛰여올랐다는 최중람인데 한족애였다. 그애는 7가지 외국어를 배우고 있었고 전교에서 공부가 계속 1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미 할빈공업대학 부속중학교입학시험을 보았는데 3천여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점수가 도달했단다… 다른애는 5학년 1반의 류지림인데 역시 한족녀자애이고 꼬마무용수였다. 그는 여러차 할빈시중소학생문예경연에서 무용1등을따냈으며 홍타민컵예술경연에서도 1,2등을 따냈었다. 학생수가 168명밖에 안남은 이 학교를 계속 살려내자면 백교장의 방법은 특장생배양과 특색교육의 대폭적인 인입이란다. 도리구는 상업구여서 통근차를 내서 돌아다녀도 학생이 없단다. 1995년까지만도 600여명학생을 용납했던 이 학교가 1998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것이 막을래야 막을수없는 하강세를 그었단다. 올해 입학생수는 23명밖에 안되였단다. 그래서 백교장은 한족학교에서는 진행할래야 할수없는 무용이나 민속례절, 민족체육 등을 틀어쥐여 린근 한족학교의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우의 두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여 이 학교의 홍보역할을 썩 잘해주고 있어 학교립장에서는 아주 보귀한 재부로 된다고 한다… 돈도 있고 학교청사도 그만하면 현대화적인데 고프고 모자란건 역시 학생래원임을 우리는 재차 정시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옮겼다…   늘 시간이 급한 우리는 차머리를 돌려 동력구조선족소학교로 질주하였다. 조선말은 잘못하지만 한족말은 한족보다도 더 잘한다는  최명옥교장이 역시 조선말을 잘하는 나젊고 해박한 설금옥주임을 옆에 불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는 700-800명의 학생을 용납했다는 이 학교에 들어서니 교장실은 너무나도 크고 호화스러웠다. 최교장은 완전히 미인타입인데 한어말을 너무 잘하는것이 우점이였고 조선말을 잘하지 못하는것이 결함이였다. 우리는 서로명함장을 교류하고 기념촬영도 남기였다. 설주임은 벌써 학교구경부터 시키려는 낌새였다. 우리는 김교장과 설주임의 안내하에 돈내가풍기는 학교의 이모저모를 구경하였다. 진짜 현대화설비에 현대적 시스템이였다. 300-400만원을 투자하여 장식했다는 학교는 모든것이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행복의요람이였다. 열람실, 무용연습실, 체육실, 도서관, 소발명실, 전기화교실, 실험실 등이 모두 최고급이였을 뿐만아니라 교원들의 사무실도 독칸이 아니면 많아야 두명씩 정해있는데 책상이나 쏘파나 다가 알른알른한 새것이고 고급적인것이여서 보기만해도마음이 개운해 났다. 1층에 내려가니 이 학교유치원이였는데 유치원에만 140만원을 투자하여장 식했단다. 식당이며 잠자리며 놀이터며 지어위생실까지 모두가 깔끔하였다. 진짜 동화속의 꼬마왕자들과 꼬마공주들이 별장속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는 모습이였다. 유치원학생수는 그래도 한족학생들을 포함하여 85명으로 상승세를 긋고 있어 다행이였다. 허나 아이들은 우리 말이 잘 안되여 혀를 홀랑 내밀었고 일상용어가 거의가 한어였으며  이번학기 학교1학년 입학수는 27명밖에 되지않아 우리는 돈내풍기는 속에서도 위기감은 버릴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학교 5학년에서 또 중국무술계의 새별로 떠오른 지홍원이란 남학생을 만났다. 너무나도 잘생기고 건강미가 철철 넘치는 애였는데 무술운동은 너무나 출중하여 전국1등상만도 여러개나 따냈단다. 금박색 무술운동복을 거뜬히 입고 금에달을수두룩히 목에 걸고 량손에 쥐고있는 그의 모습을 나는 기쁜 심정으로 렌즈에 담았다. 이 학교운동장에는 또 너르고 큼직한 호케이장이 있는데 이 학교 호케이팀은 여러차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안아왔단다.   4.조상지장군의 고향에서   할빈역 남강려객운수잠에서 장도뻐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10월 27 저녁녘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조상지장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상지시에도 착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상지진조선족소학교로 곧추 들이닥쳤다. 학교는 너무나 오래된 건물이였고 모든 것이 이미 색이 날았고 한물지어있었다. 저녁녘 우리의 돌연적인 출연에 이게 웬 홍두깨냐 는듯 구용수교장은 어쩡쩡해 있었다. 우리는 여차여차 자초지종을 말하고 명함장을 교환했으며 수인사를 마쳤다. 새로 갓교장으로 부임된 구교장은 려로에 지친 우리 모습을 인차 감득하고 업무능수이고 오랜 학교령도인 강원옥부교장을 불러 함께“외할머니장국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할빈에서 중국음식에 혼이 떨어진 우리는 완전 연변맛을 돋구는 장국을 훌훌 마시면서 구용수교장의 구수한 창업담을 거의두시간가량 들었다… 시골소학교에서 다년간 교장사업을 했던 구교장은 지금 한창 상지조선족소학교를 꾸리느라 불철주야 로심초사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관건은 경제가 잘풀리지않아 애타하고 있었다. 학생수는 그래도 유치원까지 합해서 300명정도였는데 경제래원이 희미하였다. 국에서는 학생인수에 따라 돈을 내려보내는데 그걸 가지고는 학교일상지출은 겨우겨우 에때우지만 학교건설은 못한단다. 그래서 구교장은 장사하는 친구들이나 친척, 동창 등 두루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다 찾아서 돈구걸하는 “거러지”신세로 매일매일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번 교사절에도 수년만에 퇴직로교원들을 모셔다 학교운영에 대해서 회보하고 좌담을 조직했는데 퇴직교원들까지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 3천여원을 내놓더란다. 구교장은 말한다. “학교를 살리자면 민족체육과 민족문화, 예술을 흥기시켜야 합니다. 한족학교의 모식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또 상지시조선족체육계에서는 원로이며 성팀에도 여러 운동원을 수송한 건장이며올해60세인그분, 또 그의    5.목단강은 고요히 흐르고 민족학교는 파도를 일구고. …   또 새벽이다. 나는 키보드를 두두리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시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나의 머리속에는 학교운영경비부족으로 이 밤을 설치고 있을 상지조선족소학교구용수교장의 한숨소리가 고패치고 매일 매일 키가자라는 새교사를 두고 잠못들었을 새로 부임된 명국교장의 초조한 얼굴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1천만의 투자, 그걸 어떻게 잘 리용하여 보다 보다 현대적이고 보다 질감높은, 오늘의 아이들 특점에 맞는 교육창구를 건설할것인가? 다년간 한족중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해온 박명국교장은 장동권같은 미남형의 교장이였는데 한어고시도 창작하고 말주변도 상당한 패기있고 열정에 넘치는 분이였다.  다년간 한족중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해온 박명국교장은 장동권같은 미남형의 교장이였는데 한어고시도 창작하고 말주변도 상당한 패기있고 열정에 넘치는 분이였다.  건물외관은 한국모회사에서 설계한 치마저고리색갈을 본딴 민족풍이 짙고 참신한 도면이 10여개도면가운데서 시정부의 긍정을 받았다. 시에서 1천만원을 조달하여 짓는 이 건물때문에 박교장은 매일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면서 발바닥에 불이일 정도로 달아다니고 있었다. 건평이 원래학교보다 1천평은 더 된다는 새교사는 지금 막 시공중에 열기를 띄고 있어 박교장은 많이 흥분해있는 편이였다. 여기저기 자금을 인입하여 요긴한테 들이밀고 교학과 시공을 동시에 틀어쥐다보니 늘 다망했다.  학교건설기간 조선족중학교에 얹혀살면서 8개의 교실을 빌어들고 2부제로 교학하는 그들은 누구라할것없이 드바삐 보내고 있었다. 흑룡강성에서 학생수가 제일 많은 이 학교(목단강조선족소학교)는 560여명의 학생수를 보유하고 있는데 박교장한테는 엄청난수자가 아닐수없다. 다년래 이학교에서는 결손가정애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않았다. 명절때면 기숙사애들은 서로 함께 단란하게 명절을 쇠고 그중 누구의 생일이면 생일파티를 꼭꼭 차려주어 애들을 두고 출국한 부모들은 많이 안심하고 있단다. 특색활동도 목단강지구에선 으뜸으로 축구, 달리기, 배구등운동은 다년래 전시적으로 계속 앞자리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이학교빙상운동은 전시의 이름난 꽃이란다. 1934년에 건립된 이 학교는 이제 새교수청사에 든후 80돐잔치도 성황리에 맞을것이다. 6.젊은 교장의 오돌참과 열정   우리는 해빛밝은 녕안시조선족실험소학교 정원에 들어섰다.  어저께 할빈에 회의갔던 김련희교장이 오늘 우리가 학교에 취재를 간다니 밤도와 돌아와 김화주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머나먼 할빈에서 밤도와 녕안까지 와준 그의소행과 토요일휴식날인데도 우리의 취재를 반가이 접수해주는데 대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되였다. 눈이 크고 이쁘게 생긴 김교장은 너무나 나어린 교장이였다.  31살에 녕안시교육국으로부터 교장으로 부임돼 와서 올해는 34살이란다. 그는 벌써 이몇년간 층층마다 실내위생실을 다 꾸몄고 란간도 교육국이 이사할때 그 낡은 걸 다 가져다 새로 칠해서 가설했고 난방설비도 재빠르게 다 갖춰놓아 올겨울은 따뜻이 보낼수가 있어 전교사생들이 행복해 한단다. 이 학교는 흑룡강성에서학생이 두번째로 많아 목단강학교 버금으로 가는 학교였다. 유치원학생수도 제일 많을때(고봉기)는 200명까지 된단다. 우리는 그래도 이 학교에서 학생수에 대해선 신심이 생겼고 앞이 내다보였다. 교원대오건설에서도 인재전략에 능한 교장이였다. 각지 촌소나 작은 학교들이 수시로 무너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김교장은 재능있는 교원들 을인차인차 이학교로 파오고 있었다. 연변작가협회회원이며 흑룡강성에서도 중견으로 활약상을 보이고있는 리창현시인부부도 김교장이 2년간의 노력으로 파왔던것이다. 지금 리창현선생은 학교11개반급에서 유일한 담임교원이자 유일한작가이다. 그는 이 학교의 교원, 학생에 대해 글을 써서 사회에 홍보하고있으며 자신도 많은 시와 수필을 문단에 발표하고있고 맡은바 사업도 착실히 잘해 김교장의 칭찬이 자자하다. 그의 부인은 학교출납원으로 일하는데 나젊고 부지런하여 역시 학교의 중견일군으로 활약하고 있단다. 이 학교에서는 학교운영에서 모든것을 점수제로 하고 있었는데 우리 신문에 문장을 발표하면 전국급신문에 발표되였다고 최고점수를 준단다. 교학도 마찬가지이다. 교학질이 높으면 점수가 올라가고 아무리 로교원이라도 교학질이 낮으면 그만큼 점수가 내려간단다. 지각, 조퇴, 결석 등이 모두 점수제로 되여있고 지어 학생이 문제생겨도 그 학생을 책임진 담임의 점수가 떨어진단다. 학기말에 가면 선진선거도 점수가 높낮음에 따라 자연히 알려진단다. 이 학교에서는 그 드바쁜 특색활동과 교학의 와중에도 신문이나 잡지구독에 대해 아주 착실하게 밀고나가고 있었다. 학교현관에 들어서면 제일 유표하게 보이는것이 신문잡지를 알뜰히 오려붙인 벽보란인데 거기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여러가지 쟝르의 문장들이 붙어있었다. 우리 소년보를 오려붙인것이 제일 수자가 많았다. 우리 신문구독수도 제일 많았다. 300여명학생에 200여명 학생이 우리 신문을 읽고있었다.   7. 열한명밖에 안남은 학교   10월 29일, 우리는 동경성쪽으로 차고삐를 돌렸다. 해빛이 호듯호듯 떨어지는 운동장에서 깔깔대며 뛰놀던 성동향중심소학교랑 우창소학교랑 그리고 발해소학교와 향수소학교랑 그냥 그 자리에 있을가? 우리 흑룡강취재팀은 이번 취재활동의 마지막역으로 녕안시동경성진성동향중심소학교를 찾았다 헌데 이 학교옛터는 이미 쑥밭으로 무성하고 학교는 다른데로 이사했는데 학생이   11명밖에 안되였다. 나의 눈앞에는 이 학교에 아직도 200여명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던 10여년전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이 학교는 이상하게도 창문마다 널문을 해서 달았었는데 낮에는 광선때문에 널문을 열어젖히고 상학하고 저녁이면 널문을 꽁꽁닫아걸어놓고 있었다. 교장한테 원인을 물으니 저녁마다 술취한 사회청년들이 학교부근에 와서 돌총을 놓아 유리창을 다 마사버린단다.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저 재미로 그런단다. 조치를 대다못해 나중엔 창문마다 널문을 다는 방법아닌 방법을 찾아낸 것이란다 나는 그때 억이 막혔다. 널문을 단 교실남쪽창문과 북쪽창문을 세여보니 200여개나 되였다. 그때 운동장에는 또 옆의 목재가공공장에서 실어다놓은 통나무가 여기저기에 무져져 있어 아이들의 활동장소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헌데 그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이악스레 공부하던 애들이 지금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마당은 온통 쑥대밭이 되였고 교실들은 이미 다 헐망한대로 목재가공공장의 창고로 되여버렸다. 우리는 억이 막혔다. 학교소실속도가 이토록 빠를수가 있는가?  당시 이 학교부근 어느 촌소에서 교원사업을 했던 리창현선생도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우창소학교, 향수소학교랑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발해소학교는 지금 학생이 40여명밖에 없는데 원래의 성동향중심소학교는 지금 11명학생밖에 없는데 오라지않아 역시 소실될거라고 했다. 그도 가슴이 아파   연신 한숨만 쉬는것이였다. 우리는 아쉬웁고 무거운 마음을 안은채 한때는 700여명학생이 왁짝 거렸다는 성동중심소학교옛터를 떠났다…     결속어 근 한달간의 산재지구교육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직접 보고 피부로 느꼈고 귀로 들었다. 제일 가슴아픈건 우리민족학생래원이 점점 적어지고 학생수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또 산재지구의 학교를 살리려고 특색교학과 특색활동, 최고급교학설비와 교학방법의 도입 등으로 버티고 있는 민족교육사업일군들과 교원들이 있음으로 하여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곳의 학교들은 차츰 학생수가 상대적 온정성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 학교는 여러가지방법과 수단의 과학적인 작용으로 학생수가 불어나고 있음도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가 제일 기쁘고 가슴뿌듯하게 느낀 점은 그래도 우리 민족교육현장에 아직도 수많은 민족혼을 가슴에 불태우고 있는 존경스런 교원들과 그들을 탄탄하게 묶어세우는 교장선생님들이 있다는 그것이였다. 그들은 많은 경우 무보수로동과 밤을 패고코피를 터뜨리는 로고로 높은 민족적 자각을 보이고 있는것이다. 이런 민족적 자각이 있기에 우리 민족교육 역시 그 미래가비참하지 않을것이고 이런 민족적 자각과 민족혼은 이 시대를 살아본 우리 민족사회와 앞으로의 우리 민족력사에 길이길이빛을 뿌릴것이다.                                                                                                             (2011년 12월 인터넷 길림신문에 발표된 글)
19    시. 금강산시초 댓글:  조회:2140  추천:0  2012-02-25
  옥류동   옥같은 몸을 꽈-악 짜서 푸르른 물감을 휘-휘-  흘린다 록색의 치마를 부드러이 펼쳐서 만물의 목을 적셔준다 내 마음조차 션하다 내 몸에서 돌돌히 흘러내리는 고운 소리 내 맘에 염글어 떨어진다 밑창까지 찰랑찰랑 쪽빛에 젖는다…          2.구룡폭포   룡이 허리를 비탈아 춤을 날름거리니 절벽이 핑글핑글 도도리 하고 내리꼰지는 긴- 탄식에 뼈는 패여 고름으로 고인다 절벽에 몸을 던진 피부가 퍼렇게 멍들어 출렁인다… 바위가 전설을 물고 하늘에 날아오르고 수천의 흰뱀들이 다닥다닥 벼랑을 난다           3. 금강산 돌길   갈색 이파리가 찬 이슬에 내려앉아 신비를 터친다 수천년 고이 누워 귀인들의 발을 받쳐 천당을 보여주고 말없이 신령한 기운을 터쳐 세상을 려과한다 자국마다 아파하도록 이끼를 푸르게 안고 통곡소리는 뼈에 잠재운다…                4. 계곡   집채만큼 크나큰 돌덩이가 계곡사이에 누워서 늘어지게 자고있다   그우에 발가벗은채로 누워 나도 신선이 되여 한잠 늘어진다   량옆엔 바위가 소나무를 총총히 줄세워놓고 이마를 튕겨보고 여기저기서 소나무가 잘 생긴 바위를 살살 간지른다   겨드랑이밑으론 구름이 흐르고 머리우론 맑은 바람 휘파람분다                     5. 개성   천년묵은 은행나무가 고풍스런 옛말을  많이도 토한다. 자남산호텔이  쓰르람이의 합창에 함빡이 젖어버린다   내려가기 싫은 걸음 이제 한발짝만 더 내려가면 나는 눈을 뜰수가 없다 하지만 새빨간 매미차는 한사코 남으로 남으로 철쪼망을 향해 끝간데없이 미끄러  내려를 간다…   피묻은 철쪼망 두 눈은 딱- 감기고 머리끼가 곤두선다…  
18    시. 명상이 꽃처럼 피여날때 댓글:  조회:2026  추천:0  2012-02-25
 명상이 꽃처럼 피여날때     뇌속의 벌통에서 꿀벌이 기여나와 온갖 꽃가루를 쏘아 화밀을 채집한다   널어놓은 빨래가 하늘 한복판에 걸린 태양을 감싸안고 온기를 짜먹는다   캄캄한 밤하늘의 신비로운 별밭에서 사랑이 뛰여다니며 눈동자를 캐여낸다   신경은 먹구름 헤치고 하늘에 날아올라 솜같은 양떼들을 몰고온다
17    시 배추김치 댓글:  조회:2263  추천:0  2012-02-25
 배추김치   하아얀 소금물에 샤워를 했다 연지분으로 발그레 화장도 했다 푸른 치마는 수집게 앞섶을 여미고 잘익은 속살은 부드럽게 향기로 진동한다 순하고 썅한 입술을 자꾸만 내입에 가져다 댄다 사각사각 맛망울에 마음밑창까지 개운해 진다..
16    시. 그대의 고운 입으로 댓글:  조회:2043  추천:0  2012-02-19
 그대의 고운 입으로   그대의 고운 입으로 고추가루가 뿜겨져 나왔다 나의 입으로 푸른 뱀이 기여나왔다 육과 육이 맞붙었다 불이 일었다 번개가 쳤다. 화약냄새가 꼬올똑 아침, 둘다 곤혹속에 쓰러졌다 눈물은 말라붙어 얼룩지고 아파하는 그대곁에 나의 신음소리 심는다 아파하는 그대맘에 나의 더운 입김 불어넣는다 허나,  미동도 하지않는 꽃가지 아지사이로 설한풍이 쌩-쌩 오,  언제면 또다시 그 향그런 머리채 나를 휘감아줄가?  
15    시. 바다 2 댓글:  조회:2470  추천:0  2012-02-19
 바다 2   이리 펼치고 저리 펼치며 바다는 하얀 책장 자꾸 펼친다 알알이 하얀 글이 쏟아져나와 숱한 말을 던지곤 사라진다 하루에도 몇만톤 언어를 쏟아놓고 푸르게 검푸르게 넘실댄다 내가 백사장에 써놓은 시를 하얀 혀로 다 핥아먹고는 저-쪽 수평선으로 달아난다...
14    시. 수석 댓글:  조회:2017  추천:0  2012-02-19
 수석         어려서는 바다에서 눈에 록색 잎이 피도록 물구경만 푸르게 했다     커서는 감히 파도를 불렀고 금빛 은빛 부귀와 영화는 아예 술독에 처박았다   어른이 다 되여서는 곧은 직성으로 뼈가 휘도록 파도를 거슬렀다.     늙어서는 파도에 떠밀려 하나의 유물로 남았지만   어,  천고의 기막힌 수련으로 종내는 뼈를깎아 영생을 찾았구나  
13    시. 꽃의 해산 댓글:  조회:2143  추천:0  2012-02-19
 꽃의해산   산의 목을 메이게 하는 그윽한 향기를 마시고 꽃은 이슬을 한가득 낳는다   별같은 그 이슬을 마시고 이슬들은 원무하면서 저 불덩이 태양을 뿜는다   타끓는 열기를  시원히 마시고 태양의 머리칼들은 맑디 맑은 달을 토한다   달의 속심은 은하수의 시원한 비말을 맞으며  한줌 두줌 별을 뿌린다 (격월간잡지 "문화시대" 2011년 모모기 뒤표지에서)  
12    시. 실련 1,2,3 댓글:  조회:2026  추천:0  2012-02-19
 실련(失恋) 1                         눈물 가득 솟구쳐 올라 저하늘 구름수건 무겁게 적시다 하늘천정 검푸르게 달아올라 아픈 마음 꽈-악 짜다 우르릉…쾅- 우뢰가 터지다 소나기가 퍼붓다 -------------- 실련(失恋) 2                 바다 이쪽서 바다 저쪽까지 파도가 길길히 높습니다 갈매기 울음 꽈-악 차오릅니다. 땅끝에서 하늘끝까지 아득한 구만리 물안개 아프게  넘쳐납니다. 저-멀리로 푸르게 태질한 내 마음의 잔디밭 수천의 봄잔디 푸른 잎새마다 진주이슬 방울방울 푸르게 희게 소금으로 가득 돋습니다 -----------------     실련3          그렇게도 가슴하늘에 꼭 박혀 반짝반짝 타들어가던 담배불 종내는 시원히 파내여 저만치 멀리로 던지는 또 하나 후련함   세월을 살아가는                                               그 재미속엔 못을 뽑아 던지는 재미도 한때인가?   뽑을땐 아프더라도 던질땐 아쉬웁더라도 곪기는 살점은 떼여버려야지...    
11    시. 요 지독한 님아, 댓글:  조회:1731  추천:0  2012-02-19
 요 지독한 님아,     너의 살결은 구름을 갈아 만든거냐 달빛갈아 만든거냐  어쩌면 그렇게도 힐가?   풀잎손은 너무나 부드러워 잡기도 무서운데 늘어뜨린 머리채는 하늘로 날아가는 향수구나   꽃에 묻은 먼지도 하루해 털어내고 마이는 물도                      씻어 마이는 요 지독한 삶아!   나는 어제 저녁에도 너의 별많은 눈동자에 빠져 이 마음 함빡이 적시고 너의 아지치는 긴 속눈섭에는 목을 매고 죽었다.      
10    시. 바다 댓글:  조회:1861  추천:0  2012-02-19
  바다 1     아침이 불그레 화장을 할때 파도 차고 일어나 싱싱한  맵시로  푸른 이남박에 세상을 자꾸인다   모든 일상을 다 삼키고 하얀 소금으로  웃어주어 바라보는 속세의 눈길을 안스럽게 만든다   저녁 놀속에 삼라만상이 모두 그속에 드러누으면 눈빛도 염글어 진다 오롯이 돋아오르는 짭쪼름한 사색 발을 쭉- 뻗고 깊은  검푸름속에 한껏 빨려든다    
‹처음  이전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