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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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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변화하는 자 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 댓글:  조회:1926  추천:5  2015-02-27
벌써 2월도 마무리 되고 3월이 된다. 시간은 소리없이 흐르고 시대는 빠르게 변한다. 우리는 이런 변화속에서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여유있고 즐겁게 살아가려는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고 미래를 더 멋지게 장식하려면 변해야 한다. 변화하는자만이 살아남을수 있다. 변화하려면 바꾸어야 한다. 시간을 바꾸어야 한다. 잠자던 시간은 무엇이든지 배우는 시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터넷으로 모든 것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아직도 무엇이든 발로 뛰여다닌다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밖에 되지 안된다. 컴퓨터를 모르면 컴퓨터를 배우고, 영어를 모르면 영어를 배우고, 요리할줄 모르면서 요리를 배워야 한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갔었는데 하는 과거에 대한 집착만으로 살아가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이라도 더 성숙되고 발전된 모습으로 변화할수 있게 책을 읽고 시대를 읽어야 한다. 허송세월하던 시간은 가족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해야 한다.  장소를 바꾸어야 한다. 주말이면 그동안 스트레스를 푼다고 밤새도록 술마시고 노래부르던 그런 장소는 운동장소로 바꾸어야 한다. 한국에 있을때는 돈 버는 재미에 아픈줄 모르고 일만 지치게 하다가 중국에 가면 병원신세를 지고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동포들을 너무 쉽게 본다. 한국에 있을때에는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고 중국에 돌아가면 건강을 찾기 돈을 잃는 그런 현실은 어쩌면 우리동포들의 대표적인 지금의 모습이기도 한다. 돈을 벌겠다고 지금 건강을 잃는 것은 결국 미래의 나를 잃는것과 같다. 담배가격도 인상되였는데 이런 기회에 건강도 챙기도 돈도 아끼고 담배를 끊는것도 좋고 주말이면 장소를 산으로 헬스장으로 건강을 찾아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 고향떠나서 이국생활에 지쳐있는 우리모두에게 고향친구만큼 소중한 사람도 없다. 하지만 시대를 따르고 변화에적응하려면 항상 만나던 사람도 바꾸어야 한다. 모여 앉으면 한국사장 흉을 하고 무시당할때면 그놈의 돈이 아니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운다고 분불이를 하는 그런 맞장구 대신에 조금은 긍정적인 대화를 할수 있는 그런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한중 FTA가 이제 곧 체결되면 많은 일들이 우리동포들을 기다리게 된다. 동포들만큼 이중언어에 익숙한 인재도 없다. 동포들만큼 한중문화에 적응되여 있는 프로도 없다. 동포는 더는 3D업종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 그런 이미지로 남아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우리가 변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과 밝은 미래를 담론해야한다, 시간을 바꾸어서 배운 지식과 장소를 바꾸어서 만든 건강한 신체가 있는 한 우리는 이제 사람을 바꾸고 내가 변화하다보면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마시는 일은 줄어들고 우리의 앞길은 축제 같은 인생으로 즐겁기만 할것이다. 한국에 와서 나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열정적으로 살았다. 신용을 지키고 2시간씩남짓이 지하철을 타면서도 신용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다녀보지 않은곳이 없을정도 였다, 그러나 열정으로 살던 시대도 변했다. 이제는 열정만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아니다. 변해야 한다. 열정+변화이다. 따뜻한 봄도 다가오는데 모든 동포들이 건강한 몸을 만들고 더 많은 지식을 배우고 열정을 다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는 그런 멋진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17    걸림돌과 디딤돌 이야기 (2) 댓글:  조회:1615  추천:0  2014-12-24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이 말은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누구나 하루에도 몇번씩 삶의 돌을 만나게 된다.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돌을 걸림돌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돌을 디딤돌이라고 생각 하기때문이다. 특히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돌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 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한국에서 생활도 달라진다는 생각이다. 2004년도에 사업자를 설립하고 외국인투자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체류는 어느정도 안정되여 간다는 생각으로 나는 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그동안 통역을 하고 중국시장조사를 하던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한중무역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첫단추부터 걸림돌에 부딪히게 되였다. 크리센터(창문고리), 헤리곱터완구등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기로 했는데 자금이 문제였다. 나한테는 인민페로 수십만원이나 되는 그런 거액의 자금이 없었다.어떻게 할까? 매일매일 고민의 연속이였다. 어쩌면 자금도 없는데 웬 사업이냐고 돈이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방법에 방법을 모색했다. 뜻이 있는 자에게는 길이 있다는 말 틀린데 없었다. 나는 끝내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수익을 줄일수밖에 없는 거의 합자형식이였지만 무역은 할 수가 있었다. 내가 수입을 하고 오다를 주문한 업체에서 자금을 지불하는 방법이였다. 대신 수익창출이 절반밖에 안되였다. 그래도 첫번째 무역이 성공하자 그 기쁨은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그렇게 사업은 시작되였으나 그런 무역이 많았던 것이 아니였기에 실적을 쌓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척척 진행되는것도 아니였다 .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금도 그때 당시 출입국에 갔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아프고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당시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였고 무역을 엄청나게 많이 할수 있었던것도 아닌상태인데 체류기간은 만료되니 별수없이 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비자연장하러 갔다. 외국인들에게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문턱이 높기만 했다.담당직원이 안된다고 하면 안되고 출국해야 된다면 출국해야 할 정도로 외국인들은 출입국에만 가면 작아지는 상황이였다. 10여년전 그때까지만해도 외국인이라면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고 위장결혼이나 가짜초청으로 입국하는 것이 대부분이였던 시기였다. 아니나 다를가 담당직원의 마디마디에는 편견이 섞여있었다. “외국인투자비자를 연장하러 왔습니다.” “아줌마인지 아가씨인지 식당에서 일하는거 맞죠? 우리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무역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역은 웬 무역? 비자 연장만 해주면 또 식당에서 일할거죠?...” 마디마디가 기가 막혔다. 무역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것도 억울했지만 스스로 추측하고 식당에서 일한다면서 하지도 않는 일을 한다고 할때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비자연장은 해야 했고 그래서 꾹 참았다,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오는 소리는 정말로 사람 화를 참을내야 참을수 없게 만들었다, “실적이 이렇게 적은데 한국에서 어떻게 먹고 살아요? 3개월 연장해줄 테니 중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세요…” 세금을 납부한 것이 적다고 이렇게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그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것이였다. 한국에서 사업하기 그렇게 쉬울거 같았으면 누구나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되지 왜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힘들게 살아갈 이유가 없지 않은거 아닌가?사업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작게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커가는것이지 어떻게 시작하자마자 대박을 이룬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돌아가라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화낼수도 없었다, 막말로 혹시 잘못 찍히기라도 하면 진짜로 추방이라도 당할수도 있었으니까.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른다, 보통 한시간이면 이동할수 있는 거리를 지하철을 여러 번이나 잘못 갈아타다보니 2시간도 넘게 걸려서야 집에 도착했던것이다. 체류기간연장??? 나는 차라리 확 불법체류자로 남고 싶은 생각까지 가졌다. 외국인들에게는 체류기간연장이라는 것이 걸림돌일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십만명이나 되는 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전락될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나는 할수 있는데까지는 끝까지 해본다는 마음으로 출입국관리사무소 소장님한테 만장같은 편지를 썼다. 내용은 미사려구도 없이 간단했다. 체류자격에 어긋나지 않게 무역일을 해온 것이 사실인데 식당에서 일한다고 억지부르는 것은 담당직원의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라고 지적하고 당당하게 나 자신을 생각을 밝혔다. 아직은 경험부족으로 실적이 많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앞으로 꼭 잘할수 있다는 계획서와 함께 기회를 달라는 부탁을 올렸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다고 했다. 내 마음이 그대로 편지에 전달되였던것이다. 밤새워 적은 편지를 들고 다시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갔을때는 체류기간을 1년 추가 연장받을수 있었다. 어쩌면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연장을 포기 했다면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거나 불법체류자로 전락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걸림돌이라는 생각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디딤돌로 생각하고 조금더 용기를 내여 내가 할수 있는데까지 최선을 다 했던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여행사를 운영 할때였다. 중국인이였기에 그 어느 한국경쟁 여행사들보다 견적을 확실하게 뽑을수 있었고 가격도 저렴하게 할수 있었던 것이 나의 특권이였다. 또한 고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가격으로 최상의 서비스를 해드리는 것이 회사운영지침이였다. 통역을 하면서 알고 지냈던사장님 덕분에 상해-소주-항주여행을 가겠다는 단체를 소개받게 되였다. 나는 발맛사지도 대부분 여행사는 한번만 일정에 포함시키지만 나는 두번 해드리기로 일정에 넣었고 경쟁사에서는 옵션으로 넣는 자기부상열차도 , 동방명주도, 황포강유람선도 다 기본 일정에 넣었다. 그러다보니 고객님들이 중국에 가면 추가 비용이 거의 발행하지 않을정도로 정말 알차게 견적을 넣어드렸다. 일정표와 견적서를 보고 단체를 의뢰했던 담당자님은 너무 솔직하게 고객의 입장에서 일정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몇번이고 인사를 하면서 우리 여행사에 단체를 맡기겠다고 했다. 나는 단체가 거의 확정되였다는 기쁨속에 어떻게 하면 더 잘 해줄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식사에서부터 차량, 호텔관련해서 다시한번 더 확인하면서 잘할려고 신경썼다 . 그런데 후에 불은 발등에 달렸다. 그 담당자님은 나한테서 거의 모든 상세한 서비스정황을 알아내려고만 했던것이지 우리여행사를 통해서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단체비용만 몇천만원이나 되는데 어떻게 외국인인 나한테 그렇게 많은 비용을 맡길수가 있을수 있겠냐는것였다. 거기서만 끄친 것이 아닌 나만이 갖고 있던 여행상품 컨텐츠까지도 다른 여행사에 알려주고 그 여행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여행을 결정했던것이다. 이럴때에는 미치겠더라는 단어가 제일 적절한 표현일거 같았다, 한국돈 2천만이면 연변에 집을 살수 있다고 하던 당시에 5천만남짓한 여행자금을 맡긴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는 했다,하지만 그렇다면 시초부터 의뢰를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나는 아프지 않았을것이고 상처를 받지 않았을것이며 고객에 대한 믿음을 깨지 않았을것이다. 그때 당시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기분이였다. 그 단체를 할려고 난 항공사에 사전에 계약금을 내고 자리까지 확보했던 상태였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는 필경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정하면서 그 고객에 대해서 더 이상 화풀이를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했고 중국현지에 가서 주의사항과 중국어일상용어까지 프린트해서 드렸다. 그러했다, 우리는 수많은 걸림돌에 부딪힌다. 이때에도 나는 물론 실망은 했지만 걸림돌이라고 불만 불평을 부릴대신에 조금더 여유있는 마음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을 했었고 크게 실패하지 않고 반면에 이제 앞으로 어떻게 상담을 더 잘할수 있을가에 대한 디딤돌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넓은 마음을 갖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듬해 그 단체가 다시 우리여행사를 찾아왔을때였다. 사실 우리여행사 상품프로그램으로 중국여행을 진행했던 그 여행사는 고객님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못했고 일정과 다르게 옵션도 들리고 현지 식사도 좋지 않게 행사를 진행진행했던 것이다.상품은 개발자만의 특권이기에 그것을 모방한다거나 응용한다면 그만큼의 효과를 볼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미치 알지를 못했던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많은 고객들은 우리여행사를 믿고 이용해주기 시작을 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소개해주면서 여행사의 성장에 많은도움을 주었던것이다.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우리동포들에게는 모든 일에서 한계를 느낄수밖에 없다.마찬가지로 한국인들도 중국에 가면 외국인으로서 한계를 느끼게 될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그 한계를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디딤돌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우리동포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미래가 달라지는것이다. 얼마전에 여행사를 찾아온 고객님의 사연도 그렇다. H-2취업비자로 있는데 우연히 음주운전을 하여 한화로 벌금 300백만을 하게 되였다. 그때 그 고객님은 피부관리사 자격증을 이미 취득하였기에 한국에 장기거주할수 있는 F-4인 동포비자를 신청할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였다. 그런데 벌금이 2백만이상이면 동포거소비자 허가를 받을수 없게 출입국관리법은 이미 규정되여 있다. 그 고객님은 적극적으로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서 어떤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문의를 해왔다. 당시 우리가 조언해줄수 있는 대책은 벌금을 줄이는 방법이였다. 후에 변호사를 선임하여 그 고객님은 벌금을 2백만 이하로 줄이고 F-4로 체류자격을 변경했다. 동포들 대행업무를 하다보면 음주운전, 마작, 폭행, 외환법위반등으로 인해서 벌금을 하고 체류자격변경에 불이익을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그럴때마다 동포들이 대체하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위의 고객님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해결방안을 찾고 거기서 교훈을 찾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디딤돌로 생각하고 더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동포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동포를 추방한다고 불만이고 동포한테 벌금을 많이 시켰다고 불만하면서 부정적인 생각만 갖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지 않는 동포들도 너무 많이 접하게 된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할대신 모든 것을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결국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일들이 빈번한것이다. 한국에서 10여년동안 살아오면서 동포라는 동질감보다는 외국인으로서 한계를 더 많이 체험했었던것은 사실이다. 2000년대 초에는 동포들이 위장결혼이나 가짜초청등등이 많아서 돈을 벌기위해서는 가정도 버린다는 인식으로 한국인들에게 많이 남았다면 최근에는 60여만 동포들이 한국에 체류하다보니 법을 위반하는 동포들이 많아지면서 동포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그렇게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나는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이런 무시와 편견과 차별을 하나하나 체험했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우리동포들이 조금은 더 법과 질서를 지키고 당당해지고 핑계를 찾기보다는 조금더 적극적인 자세로 자신을 표현하고 우리가 어떠한 문제점에 부딪쳤을때에는 반드시 걸림돌보다는 디딤돌이라는 바른 마음으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다면 더 많은 동포들이 혜택을 볼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다. 다음호에는 욕심그릇을 줄이고 마음편히 살아가기 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나누고저 한다.
16    한국에서 살아남기 ( 1 ) 댓글:  조회:1887  추천:1  2014-12-20
이 글은 연변여성에  올해초부터 연재했던 글이여서 시간이나 숫자등이 지금현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머리글 시간의 흐름은 류수와 같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 속담이다. 2002년도부터 중국과 한국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한국생활을 시작한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요즘은 변화발전속도가 너무 빨라서 5년이면 강산이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한국물을 마시게 되여서부터 어느덧 강산이 두번도 넘게 변했다는것이다. 과연 그동안 나한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을때는 비즈니스비자로 입국했다. 여러차례 중한 두나라를 비즈니스비자로 다니다가 한국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4년도에 나는 한화 5천만원이라는 거액을 투자를 하고 여행사를 운영하게 되였고 한국에서의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는 여행사를 운영한지가 꼭 10년째이다. 사람들은 5년이상만 사업체를 유지하면 사업할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고 말하고 8년만 유지하면 이미 성공했다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한다. 나도 그들중 한사람으로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해진다. 지금은 개인적으로는 소망여행사 대표로 있으면서 한중동포신문 자문위원. 재 한국다문화타임즈 논설위원, 경기도 외국어강사협회 중국어/일본어 강사/  중국문화 강사, 한중동포신문자문위원, 안산시 자원봉사협의회 재능기부강사,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북포럼 저자와의 만남 MC등 여러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70여만 중국동포들이 무시와 차별없이 조금은 더 좋은 생활을 하면서 한국생활에 빠른 정착할수 있도록 도움주고 싶어서이고 중국동포라는 브랜드가치는 우리 스스로가 높혀야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아직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중국동포의 정체성을 찾을수 있고 이제부터라도 중국에서 코리안드림을 실현하고저 하는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면 적게 아프고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수 있을것이다. 사람들은 나보고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두 글자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은 욕심이라는 마음으로 감히 상상한적도 없다. 단지 하루하루 큰 사건사고가 없이 웃으며 살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것이 나의 삶의 원칙이고 또한 그것으로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족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고 체류자격으로부터 사사건건 부딪칠때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힘들게 살아왔다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몇번에 나누어서 소개하려고 하니 한국에 오려고 하는 고향에 계시는 조선족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였으면 좋겠다. 코리안 드림 2002년도 중국에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나도 많은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려는 욕심 하나뿐이였다. 한국에 오기전에 나는 남편 따라서 개방도시 심수에서 살았다. 20대 청춘들의 꿈의 도시 심수였다. 그때 나는 벌써 30대에 들어섰고 어린 아이를 키워해야 했던탓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했던것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것과 무역통역을 하는 일이였다. 당시 연변에서는 과외비가 한시간에 5원밖에 안되지였지만 심수는 시간당 30원이나 되였다. 중국어무역 통역도 하루에 3백원 기준이였다. 아이키우는 엄마한테는 꽤 괜찮은 수입인거 같았다. 그러나 심수의 생활소비에 비하면 이렇게 버는 돈은 만져볼사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듣기만 해서는 좋아 보이는듯한 일자리 같지만 당시 영어를 모르는 나한테 중국어를 가르치는것이나 통역을 한다는것은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였다. 한국아이들이” 陆桥를 “육교 라고 말할 때 나는 “육군학교”를 줄여서 말하는줄로 알았다. 사실은 우리가 늘 말하는 “구름다리”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일없습다.”는 말도 서슴치 않았고 선적(船籍)이라는 단어가 뭔뚯인지 몰라서 통역한다는 내가 손짓,발짓 하면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 선적은 배에 물품을 싣는다는 뜻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썩 후의 일이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사랑하며 배웠던 조선글과 한국어는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했다. 내가 사용하는것은 중국어식 조선어라면 한국인들은 한문식 또는 영어식 한국어였다. 天气를 천기라고 하는가 하면 火车를 화차라고 부르는 한국인이였다. 이런 일에 부딪칠수록 영어를 모르는 내가 안타까왔고 한국에 대한 꿈은 커져만 갔다. 커다란 풍선처럼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뇌졸중으로 오랜기간동안 병환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돈을 많이 벌어서 병치료를 원없이 해드릴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코리안드림의 꿈은 커져만 갔다. 다행히 나는 운이 따라주었다. 통역하던 회사의 초청으로 한국행의 꿈은 이루어졌다. 회사초청으로 2주간의 비자로 왔다. 한국은 그야말로 깨끗한 도시였고 환상속의 도시였다.공항으로부터 곳곳에 한국어로 적혀있는 간판만 보아도 편안해보였고 끝이 보이지 않게 밀리는 차량만 보아도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중국어과외도 시간당 150원씩이나 했다. 심천보다 5배정도는 더 비쌌다, 순간 나는 마치도 부자라도 된듯이 기뻤고 앞길이 밝아만 지는 것 같았다. 3개월만 벌어도 중국에서 반년수입과 맞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둥둥 뜨고 마치도 첫사랑을 만난듯이 가슴설레는것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는 중국어과외부터 찾았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상은 상상일뿐이였다. 연변사투리를 팍팍 사용하는 나한테--그것도 친,인척 한사람없는 나한테 아이들의 중국어수업을 맡기려는 부모는 없었다.내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나는 인터넷과 일자리 찾는 광고지인 “벼룩시장”, “가로수”등 소식지들을 샅샅이 훝었다. 전화는 또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전화통화를 하면 상대방은 내가 거침없이 내뱉는 연변사투리에다가 한국온지 며칠 안된다는 말만 들으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후부터는 한국에 온지 오래되였다고 조금씩 거짓말도 하면서 일자리 찾는 방법도 달리했다. 그러나 방법은 달리해도 여전히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학부모는 없었다. 시간은 흘러만 갔다. 중국에서 갖고 왔던 생활비도 줄어만 들었다. 당시 나는 알고 지내던 유일한 고향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와 함께 고시원생활을 했었다. 고시원(考试院)이라는것은 원래 의미는 번호사, 검사등 좋은 직업을 가질려고 밤낮없이 공부하는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상대로 마련된것이다. 하지만 월세가 저렴해서 많은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나는 고향언니와 월세를 절반씩 지출하면서 얼마 남지않은 돈으로 진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싶이 살았다. 찬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쪼각에 한끼를 떼울때면 중국에 가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물론 식당이나 회사에 들어가서 취직하면 돈을 벌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한국행을 선택했던 목적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중국어 강사였고 짧은 기간동안에 고가의 로동력으로 많은 돈을 버는것이였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었는데 나한테는 안 통했다. 마음은 점점 급해만 갔다. 우물에 가서 슝눙 달라고 싶었다. 어차피 한국에서 나를 누구한테 알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나는 한국어라도 능숙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고시원주인언니 아들한테 중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료였다. 하지만 그 학생한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얻었던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한국학생들은 연예인으로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다는것도 알게 되였고 한국에서는 스카이(S.K.Y) 서울대, 연세대,고려대학교를 제일 선호한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학부모들은 서울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소원성취 한걸로 생각하기에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서 아끼는 것이 없다는것도 잘 알게 되였다. 무료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고시원주인언니는 아들한테 무료교육을 한다고 고맙다고 고시원비를 받지 않기도 하고 또 맛있는 과일을 주기도 했었다. 더 기뻤던 것은 나한테 충무로에 있는 사장님한테 중국어를 가르칠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것이다. 뜻이 있는데는 길이 있다는 말이 나한테도 통하는것 같았다. 주인언니가 소개해준대로 충무로에 일주일에 두번씩 강의하기로 하고 한달에 1500원정도 받을수 있는 중국어과외를 할수 있게 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안산에서 서울에 있는 충무로까지는 지하철로 2시간씩 이동을 해야 했다. 8시부터 진행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5시부터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기쁘기만 했고 신나기만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듯이 살거 같았고 앞이 밝아보였다. 누군가가 나를 믿고 나한테서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는것만으로도 그냥 좋기만 했다. 나는 10분, 20분씩 더 강의를 해주었다. 회사에 오는 중국어팩스도 무료로 번역해주었다. 돈은 몇푼벌지 못했지만 나는 내가 할수 있있는 것 최선을 다해서 했다. 세상은 언제나 노력하는자의 편인것 같다. 중국어 교육을 받던 사장님은 나의 끈질긴 노력에 감동되여 지인분한테 내가 중국어를 잘 가르친다고 입소문내주어 수업 하나를 더 맡을수 있게 되였다. 식당이나 회사나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동포들은 한달에 인민페로 만원씩 번다는데 나는 3천원을 받으면서 즐거워 했다. 어차피 내가 욕심낸다고 해결된 부분은 없다고 생각했고 꼭 해낼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뻗쳤다. 그 힘은 당시 남들은 7,8만원씩 지불해야만 한국행을 선택받을수 있었지만 나는 회사에서 무료로 초청해주었기에 비행기표밖에 지출하지 않았다는것이 마음의 위안으로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3개월 체류비자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였다. 중국어를 배우시던 사장님께서 중국 유리관련 시장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런데 비자체류기간이 만료 된다고 하자 사장님께서 선뜻이 초청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향한 나의 두번째 걸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뒤로 연이어 초청비자를 발급받을수 있었다. 만약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고 나도 당시에 일당이나 하면서 돈을 벌겠다고 악착같았다면 오늘의 내가 과연 있을수 있었을가를 가끔씩 돌이켜 보기도 한다. 초청비자는 체류기간이 길어야 3개월이다. 관광비자나 초청비자로 한국에 다녀본 사람들이 요즘은 많아서 알겠지만 3개월에 한번씩 중국에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였다. 숙식비나 해결할 정도로 번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려면 항상 번 돈이 부족되였다. 2002년도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국땅을 밟으면 불법체류를 하는 것이 기본이였고 불법체류를 하려고 7,8만원씩 돈을 냈던 시기였다.나도 불법체류하고 싶어졌다. 돈을 좀 모아보고 싶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게다가 회사초청비자로 4차이상 한국방문했더니 초청장없이도 3개월 체류가능한 비자를 발급해주었다.불법체류를 해도 초청해준 회사측에 불이익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귀국하는것과 불법체류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갈등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되였다. 당시 아이가 4살밖에 안되였다. 만약 불법을 선택하면 아이를 쉽게 볼수 없다는 마음과 마음이 불안해서 일도 제대로 할수 없을것 같은 나의 소심한 성격때문에 결국 힘들더라도 3개월에 한번씩 다녀야 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단기비자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이 제한 되여 있었다. 그러했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뛰였던거 같다. 서울,부산, 제주 3박4일 중국대표단 통역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제주도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날씨변화가 있는곳이라 그날도 기상청 날씨예고와는 무시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항공편을 더 이상 뜰수 없게 세차게 세차게 사정없이 내렸다. 우리의 일정과 상관없이 제주-부산 항공편도 전부 결항이였다. 아침8시 항공편은 오후 2시지나서 정상운행할수 있었다.그러다보니 경주와 부산일정은 전부 늦추어져서 호텔에 들어왔을때는 이튿날 새벽 1시도 지난뒤였다. 지친몸을 이끌로 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주체측에서는 폭우에 고생했다고 정해진 통역비외에 800원을 더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날자를 초과한것도 아니라고 원래 결정한대로만 받으면 된다고 거절했었다.물론 고생했다고 주는거니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해서 받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디에서 그런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이 생겼는지 믿겨지지 않을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과 행동은 나한테는 또다른 통역을 맡을수 있는 기회가 되였고 많은사람들에게 성실함을 보여줌으로써 믿음을 얻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2년남짓이 한국을 다녔지만 3개월에 한번씩 중국을 다녀야 하는 단기비자였기 때문에 버는 돈은 없었다. 일자리도 고정된 것이 아닌 통역이나 중국어과외뿐이였기에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던것이다. 남은것이 있었다면 한국문화에 조금 더 익숙해졌고 한국어가 많이 능숙해진것뿐이였다.중국어과외만 하면 대박을 터뜨릴 것 같던 아름다운 꿈은 서서히 깨지는듯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렇게 수년을 다닐수는 없을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두고 돈도 벌지 못하면서 다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였다, 나의 마음은 아픔과 함께 점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한국생활도 많이 적응되였다는 것을 깊이 느꼈을때에는 이미 한국에 지인분들도 좀 만나게 되였고 중국어를 가르쳐달라는 엄마들도 꽤 있었던 탓에 더 이상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 불법은 못하겠고 합법으로 장기체류할수 있는 방법을 찾던중에 투자비자가 있었다. 인민페 40만정도였다. 나한테는 꿈속의 숫자였고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돈이 있으면 중국에서 좋은 아파트 사놓고 즐겁게 살수도 있는데 고생스럽게 한국에 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꿈이 깨여지나싶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평소에 내가 통역을 많이 해주었던 사장님께서 나의 고초를 알고 도와주시기로 했다. 폭우속에서 제주도 통역을 열심히 해드렸던 그 사장님이셨다. 주는 돈도 거절할수 있는 나의 마음의 여유에서 나의 미래를 인정해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신용하나로 투자비자를 발급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때는 2004년도 3월이였다.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까지 나는 한국과 중국을 오고가기를 수십번했고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D-8 체류코드로 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은 내 마음은 날듯이 기뻤고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불법체류를 하지 않기를 천만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를 내다보았던 선견지명에 난 나자신에게 스스로 큰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지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였고 진심은 어디에서도 통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운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달에 3천원을 벌려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어보시라. 약속시간을 지키겠다고 조금이라도 늦을거 같으면 수업료에 맞먹는 택시비를 지출하면서 신용을 지켜온 사람이 몇 명이 있냐고 물어보시라. 한달에 3천원밖에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 통역을 무료로 해줄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있냐고 물어보시라. 돈 몇푼 더 준다면 여기 저기 사업장을 옮겨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현실이였다. 돈 벌러 갔다가 빚지는 인생이였지만 나는 한국문화를 익숙히 할수 있다는것에 감사한 마음이였고 나를 믿고 일을 맡겨준다는 것이 늘 고맙게 생각되였다. 더욱이 통역 몇번 했다고 초청까지 해주시는 그 따뜻한 마음은 오늘까지도 잊지못하고 있다. 투자비자를 도와주신 사장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 그대로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눈앞의 돈보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큰 행운과 행복과 즐거움을 준다고 말한다. 진실은 언제든지 통하는 법이니까요. 나도 3년동안 불법체류를 했다면 어느정도 돈을 벌었을수는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도 식당이나, 호텔이나, 제조업등 한국인들이 말하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을것이다. 비록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까지 힘들고 경제적으로 남는것 없었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대표 김선녀라는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을수 있었을것이다.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이제는 우리 동포들도 자신의 브랜드가치를 높혀서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업종에서 늘 수모를 당하면서 돈 벌러온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대신 한국사회에서 꼭 필요한 한국인들과 일자리경쟁에서 이길수 있는 그런 조선족으로 거듭나야 할때라는 생각이다. 누구나 다 더 멋진 삶을 추구하려고 한다 . 하지만 그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걸림돌이앞을 가로막는다는 핑계로 또다시 주저안기도 한다. 다음호에는 걸림돌과 디딤돌 사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걸림돌을 디딤돌로 상황변환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저 한다.  
15    동포사회 타인을 스타로 만들려는 자세가 필요 동포 댓글:  조회:1988  추천:0  2014-12-19
지난 9월19일 중국 최대의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했다. 당연 주목받은 인물은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 회장이다. 하지만 마윈 회장만큼 눈길을 끈 남자가 있다. 바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손회장은 미국의 정보기술(IT) 버블 붕괴가 진행 중이던 2000년 당시 중국의 작은 벤처회사에 불과했던 알리바바에 2000만달러(208억7200만원)를 투자했다. 그리고 상장 직후를 기준으로 손회장의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34.4%의 알리바바 지분 가치는 749억달러(약 78조원)에 이른다. 14년 만에 4000배 가까운 수익이다. 아리바바의 기술력을 높게 평가한 손 회장은 7살 아래인 마윈 회장에게 “힘들더라도 잘 버티고 있으라”고 격려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결국 손회장이 투자한 2000만달러는 알리바바가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비즈니스위크는 “당시 손정의 눈에 비친 알리바바 창업자인 마윈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물 밖의 물고기처럼 비쳤다”며 “손정의 후광 덕에 마윈은 중국에서 스타로 떠올랐다”고 최근 보도했다. 왜냐하면 마윈은 대학 입시에 두 차례나 연거퍼 떨어졌고 3수를 했다. 그럼에도 4년제 대학에 갈 성적이 안됐던 그는 결국 전문대로 분류되는 항저우사범학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처럼 학력이나 지위나 경제적으로 가진 것도 없는 그한테 투자한 사람은 손정의 회장이다. 손 회장은 마윈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주었고 당연히 손정의 회장은 그 이상의 스타로 되었다. 우리가 살면서 스타로 되는 방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스스로가 스타로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서 본인이 스타로 된다는 것이다. 바로 손정의 회장처럼 말이다, 우리 동포사회에도 다른 사람이 스타로 되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연말이고 행사가 많은 최근에 시상식도 많다. 시상식에 참가해보면 대부분이 단체 회장들이 상을 받는 것을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마치도 단체를 리더해온 것이 본인이 상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가서 상을 받았다고 카카스토리, 페이스북이나 밴드에 자랑하기 바쁘다. 한중수교가 된지도 20년이 지났고 동포들도 한국에 와서 식당, 무역, 제조업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이미 부를 창조했고 일정하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단체를 운영하는 대부분 리더들도 이러한 분야에서 크게 또는 작게라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동포들이 부를 나눌 수 있고 명예를 나눌 수 있게 나눔을 실천해서 서로가 도와주는 그런 아름다운 미덕을 보여주어 상대를 스타로 만들어서 본인이 스타로 되는 그런 멋진 리더가 된다면 그것보다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중 언어를 잘 알고 있는 동포들 가운데에 손정의회장같은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중 FTA도 타결 되였고 중국은 무섭게 발전하면서 한국인들은 앞으로 중국은 한국이 생존할 수 있는 의뢰국가라고까지 말한다. LG그릅에서 중국어로 면접시험을 보고 직원을 채용했다는 뉴스만 보아도 중국어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만든다. 중국어를 잘 알고 중국문화에 익숙하고 중국에 인맥을 갖고 있는 우리는 중국을 겨냥하고 있는 한국인 사업가들을 충분히 스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은 동포들만이 어울려서 단체를 만들고 자신이 스타로 되기 위한 노력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금처럼 분열에 분열을 이어 수십개의 단체가 있듯이 앞으로 계속 경쟁 상대가 많아지고 질투의 눈총 속에서 새로운 단체가 탄생이 되는 그런 악순환의 연속을 피해갈 수가 없다. 시대가 변했고 정책이 변했다. 샤오미 휴대폰이 삼성휴대폰을 제치고 중국에서 1위를 달리는 시대이고 비자비만 투자하면 3년복수를 발급받을 수 있듯이 동포정책도 좋아졌다. 변화된 사회에서 우리 동포 단체에서도 리더가 상 받고 스스로가 스타로 되려는 그런 마음을 버리고 변화에 적응할 줄 아는 진정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 작은 범위로는 단체를 예를 들면 봉사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단체로 성장될수 있었다는 것은 회원들의 정신이 있었기에 상은 회원들에게 돌려주는 나눔을 줄수 있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가 필요하다. 큰 범위로는 이미 성공을 했고 더 큰 성공을 하려는 동포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의 한팔이 되어주고 그들을 스타로 만드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 더는 차이타타운의 조선족이라는 단어 대신에 한국에서 조선족으로 빛나야 할 때이다, 그러려면 내가 스타로 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스타로 만들어주는것이 더욱더 보람찬 일이다.
14    카멜레온형자만이 살아남기 댓글:  조회:2497  추천:1  2013-09-04
카멜레온의 색변화 원리는 일반적으로 주변의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색깔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 실제로는 카멜레온 색변화 원리는 카멜레온 자신의 의지대로 몸의 색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에서의 자외선 노출정도나, 카멜레온 기분에 따라 자연적으로 몸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글의 서두에 카멜레온의 색변화 원리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 다문화가족은 이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든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도 카멜레온처럼 변화를 가져오는 삶을 살아야만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가족 집합체를 살펴보면 언어는 기본적인 장벽이고 문화적인 차이로 받는 오해와 차별 그로 인한 아픔, 뿐만 아니라 취직하기 쉽지 않은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게 해준다. 이런 현실은 이혼으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적으로 다문화가족에 대한 무시와 편견을 갖게 해준다. 사회적으로 다문화에 대한 인식이 바르게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많은 다문화가족은 이미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았다. 하지만 더는 이런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 되고 소통과 사회통합으로 이런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자신 스스로가 문제를 풀어가야 할 시대이다. 우선적으로 우리자신을 보호하기위해서는 자신만의 브랜드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다문화가족은 언어의 장벽을 갖고 있는 동시에 본인이 조금만 노력해서 배우면 이중 언어를 알고 있는 매력적인 장점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 이중언어강사에 종사하고 있는 선생님들도 150여명이라고 한다. 이주민자녀만 해도 초, 중, 고생 5만 명을 돌파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중언어강사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누구나 꼭 이중언어강사로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우리스스로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그 가치를 높이면 충분히 할일이 많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관광가이드, 통역번역, 언어발달지도사,심리상담사,통번역사,사례관리사등 여러 가지 다문화관련일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직 이중 언어를 알고 이중문화에 익숙해져있는 다문화가족만이 최고로 잘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문화가족이라고 혜택만을 바라지 말고 스스로 배움에 노력하고 배움에 투자를 해야 하고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2002년도에 두번째로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중국시장조사, 중국어통역, 중국어강사등 일들을 지금보다 훨씬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인등록자가 10만명도 안 되었고 외국인라면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갖기도 했다. 그만큼 경쟁상대도 치열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150여만 외국인이 함께 숨 쉬고 있다. 다문화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경쟁력도 높아졌다. 시대가 글로벌화 되면서 이제는 이중언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살아남기는 힘들다.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에 따라 스스로가 변해야 하고 프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얼마전 세차의 달인 윤영순대표의 이야기를 tv에서 본적있다. 2인 1조로 각 파트별로 분업화해 신속하게 세차를 하며, 손잡이에 묻은 매니큐어나 손톱자국을 아세톤으로 닦는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윤영순 대표는 사업 초창기에 600만 원 정도 수리비를 물어준 적도 있다고 했다. 차에 붙은 하루살이가 지워지지가 않아 수세미로 지우다 차가 다 벗겨져 그랬다며 하소연을 했다. 프로가 되기전까지는 아픔도 고통도 동반했던 것이다. 이미 다문화가족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다. 이런 기회들은 우리가 얼마만큼의 노력과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가에 달려있다. 다문화가족이라고 혜택을 받기만 바라는 시대도 이제는 지나갔다. 스스로가 자립하고 자신을 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자이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여러 가지 모든 방면에서 다문화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다. 열심히 살다가도 지칠 때도 너무나 많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젖 달라고 응석을 부릴 때도 아니고 젖 주지 않는다고 울어서도 안 된다. 카멜레온 형처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환경에 따라 스스로가 변해야 되는 시대이다.
13    인간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 댓글:  조회:2430  추천:2  2013-08-10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제는 한국사람 다 되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다기도 한다. 내가 봐도 가끔씩은 그런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사람은 살아온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했다. 한국에서 살아온 10여년동안 나는 중국에서 살던때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2001년도 처음으로 한국왔을때였다.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뛰여가는것이였다.“어? 저곳에 사건,사고라도 생겼나?”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사실은 초록색신호등이 소멸되기전에 횡단보도를 건느려고 뛰는 사람들이였다. 중국에 있을때는 싸우거나 차사고가 났거나 그러할 때 볼수 있는 풍경이였으니까...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기억으로 떠오르지만 그때는 너무나 신기했다. 얼마전에 고등학생들 상대로 중국문화 강연한적 있다. 중국사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것이 무엇인가는 대답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무단횡단”이라고 했다. 뜻밖의 대답이라 중국사람으로서 나는 놀랍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지금 한국에 온지 10년 넘었어요. 선생님도 중국사람인데 무단을 할까요? 안할까요?” 나의 질문에 아이들은 또 약속이나 한 듯이 “안합니다.”라는 대답을 주었다.선생님도 중국사람인데 왜 무단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는 질문에 아이들은 대답을 잃었다. 나는 한가지 질문을 더 했다. “미국사람이 좋은가요? 중국사람이 좋은가요?” 90프로 이상되는 대부분 아이들이 미국사람이 좋다고 대답했다. 10프로는 중국인 강사눈치를 봐가면서 중국사람이라고 했을정도였다. 왜 미국사람이 더 좋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또 대답을 잃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대답을 하고도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중국사람이나 미국사람에 대해서 알수 있는것은 언론이나 어른들의 대화를 통한 간접적인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언론을 살펴보면 중국인에 대해서 긍정적인 보도가 20프로 정도라면 나머지 80프로정도가 부정적인 보도이다. 하기에 중국인이 일으킨 사건, 사고가 한건이라도 일어나면 모든 중국인이 나쁜것처럼 매도되는 경우가 있는가 한국법에 익숙하지 못한 중국인들은 가끔씩 저도 모르게 과대처벌을 받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 체류중인 많은 중국사람들은 한국의 문화에 익숙할만큼 익숙해졌다. 특히 50여만 동포들가운데서 10여년이상 한국에 체류한 사람들이 많은가 하면 그들은 이미 언어, 행동, 복장, 화장,생활등 여러방면에서 한국인과 별다른 차별이 없을정도이다. 그만큼 예의바르고 질서를 잘 지키는 한국문화라는 환경이 중국사람들도 문명하게 발전시켰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박근혜대통령이 일본보다 먼저 중국을 방문하고 미국보다 중국에 수행인원을 더 많이 인솔하고 갔고 시진핑주석의 고향인 시안까지 방문하면서 한중관계는 많은 호전을 가져왔다. 게다가 칭화대학에서 중국어로 약 4분간 강의를 들은 네티즌들도 친미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고 반감을 갖고 있던데로부터 친중 박근혜대통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 대한 심리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지금은 한중관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아주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것만큼 한국이라는 사회가 소통할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언론이나 민간으로부터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것보다 긍정적인 것을 더 많이 알려지도록 한다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모든 중국사람들도 더 좋은 모습으로 사회통합을 하는데 기여할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중 두나라 우의를 증진시키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12    CHINA-KOREAN은? 댓글:  조회:5593  추천:2  2013-07-14
 요즘은 세월이 빨리 흘러서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으니 그동안 강산도 두 번은 바뀔 법하다. 하지만 중국동포의 정체성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고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CHINA-KOREAN은? 외국인등록증에 보면 CHINA-KOREAN이라 밝혀져 있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발급한 등록증에는 외국인으로 표기되어 있고 심지어 이름마저 한글이 아닌 영어(병음)발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중국에서 발급한 여권은 중국국적이여서 한자로 표기했겠지만 한국에서 발급한 신용카드에는 KIM SUNNYU라고 한국식 영어 표기입맛에 맞게 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진정한 KOREAN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없다. 부모님은 한민족핏줄을 잊지 말라고 김선녀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지만 이 이름은 고국인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중국동포는 허울 좋은 KOREAN이지 ‘속살’은 외국인일 뿐이다. 그동안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좋은 생각만 하고 살려는 것이 내 삶의 원칙이었다. 사실 외국인으로 살면서 편견이나 차별을 받을 때도 적지 않았고 심지어 슬프고 억울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가짐을 바로잡으면서 열심히 살려고 했고 항상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만 했다. 이렇듯 긍정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에게 심기를 살짝 건드리는 사건이 있었다. 최근에 언론매체에서 150만 외국인시대라고 다문화시대를 웨치면서 떠들썩하고 있다. 50여만 중국동포들을 위해서는 과연 어떠한 일을, 어떠한 정책으로 어떻게 풀어가고 있을까? 궁금했다.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살펴보았다. 물론 한국에 입국하기 힘들었던 5·6년 전보다 여러 가지 체류 가능한 정책이 많이 완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체류만 가능할 뿐, 동포들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격만 상대적으로 많이 좋아졌을 뿐 여전히 돈을 벌려고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일 뿐이다. 며칠 전 휴대폰을 새것으로 바꾸면서 그동안 아들애의 명의로 된 보증금을 이제는 환급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문의를 했다. 안된단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국인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보증금은 아들애가 미성년자이고 외국인이기 때문에 휴대폰요금을 납부하지 않고 귀국할 것을 염려해서 통신사에서 휴대폰을 개통할 때 보증금으로 20만원을 받아놓는 것을 일컫는다. 아이의 엄마인 나는 2005년부터 011폰을 사용하고 있고 VIP고객이다. 휴대폰 요금도 자동이체 시켰고 연체한 적도 없다. 아이도 2008년도부터 지금까지 같은 번호로 같은 통신사를 이용하고 있고 역시 자동이체 시켰고 통신요금을 연체한 적이 없다. 그리고 휴대폰을 개통할 때 아들애가 요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엄마가 책임져야 한다고 엄마의 동의를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신용을 지키면서 살았건만 외국인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여전히 보증금은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보증금을 안 주는 것도 아니고 휴대폰을 해제할 때에 체납된 것이 없으면 전액 돌려주거나 또는 아이가 성인이 되면 보증금을 환급받을 수 있단다. 험한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내 아들애는 외국인이기에 휴대폰 요금을 납부하지 않고 도망갈 수도 있는 용의자인 것이다. 말로만 동포이지 이처럼 실제적인 업무처리에서는 외국인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신용을 지키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애의 신원하나 보증할 수 없는 무능력한 엄마로 만드는 다문화사회 현실이고 동포들에 대한 "혜택"이다. CHINA-KOREAN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에 와서 사업하면서 정이 많은 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던 나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하지만 한 번 또 한 번 이와 같은 아픔을 겪을 때면 과연 나는 누구일까? 가슴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한국 땅에서 동포로 체류하면서 이런 차별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아들애가 알까봐 두렵기도 하다. 부모라는 존재는 자녀의 신원담보 보증수표가 아닌가!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이와 같은 천리(天理)를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이 정말 가슴 아프다. 이것이 CHINA-KOREAN의 정체성이 불러오는 결과가 아닐까!
11    기다림의 미학... 조급하면 사기당하기 쉽다. 댓글:  조회:2262  추천:0  2013-07-04
                                                                             "불법체류자를 합법시켜준다는데 돈 얼마 내면 해줘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다. "아직 정확한 정책이 확정된것도 발표된것도 없습니다. 소문을 믿지 말고 정책이 나오면 조건이 되는가부터 확인해보고 그때 상담해도 충분합니다." 나는 친절하게 고객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설명해주었다. "딴 여행사는 문자도 왔던데 그 여행사는 아직도 소식 모르는가보네. 그래도 소문에 거기서 뭐나 친절하게 잘해준다해서 전화했더니..."        진심으로 상담해주었다가 무능한자로 취급되는 순간이였다. "정책이 발표되면 하루, 이틀에 없어지는것은 아닙니다.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돈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시간적여유를 갖고 법부무공지가 발표되기를 기다려보시는것이 좋을거 같습니다." 친절하게 상담해준다는 소문듣고 전화했다는데 끝까지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거기선 못하면 그냥 못한다고 하면 되지,,," 고객님은 전화기를 끊어버린다. "하, 하, 하 "직원하고 나는 기가 막혀 허그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살아간다는것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힘들것이라는것은 이해하지만 아직 확실시된것이 하나도 없고 떠도는 소문만 믿고 결과를 얻으려고 하는 그 다급한 마음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동포정책은 하루하루 좋아지고 대행사들도 우후죽순마냥 생겨서 요즘같은 세월에는 꾹 참고 기다리다보면 충분히 원하는것을 편하게 얻을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유언비어나 일부 과대수수료를 받을려고 인맥동원한다는 그런 말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만 아프다. 2011년도 불법체류자를 합법화해줄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불법이면 무조건 해결해주는걸로 알고 돈을 주었다가 일부 고객님들은 구제도 못받고 돈도 받지 못했다고 고충털어놓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보았다. 그리고는 내탓 아닌 남의 탓으로 한다. 위명이던 불법이던 구제정책이 나오면 언제까지나 정책에 정해진 범위내에서 구제가 가능한것이지 돈으로 해결된다는것은 아니다. 본인이 대행사를 믿고 선불을 내던  여권을 맡기고 찾지 못하던, 등록비를 내던 그것은 언제까지나 본인의 책임이다. 물론 불안해하는 동포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대행사들이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요즘처럼 모든 것이 오픈되여 있는 현실에서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을 책임질때가 되었다는것이다. 이런 전화상담을 이제는 한달도 더 넘게 받고 있다. "아닌 때 굴뚝에서 연기나는 일 없다"는 말처럼 어떤방식으로던 정책이 나올거 같기는 한데 소문은 소문대로 전달되고  기다리는 정책은 오늘까지도 안 나오고 있다. 물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많다는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림에 조금 지쳤다고 버스를 기다리기 힘들어 택시를 타면 목적지는 같지만 비용은 더 많이 지불되기 마련이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서 버스를 탈수 있는 그런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한 때인거 같다.  모든 동포들이 사기당하는 일 없고 아픔이 없는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김선녀  ( 악플없는 세상 善플을 만들어 가는 女자 )                                                                                 
10    중국국적인 한국인 댓글:  조회:3027  추천:4  2013-06-29
 올해 년초에 내가 세웠던 첫번째도 두번째도 "자신을 오픈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사회와 어울리기" 였다. 그동안 저녁이면 기업체출강때문에 사람들과 만나지 못한것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핑게일뿐이였다. 외국인으로서 살면서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만나고 어울리는것을 많이 싫어했던 나를 발견하게 되였다. "한국 온지 몇년됐어요?" . "벌써 10년도 더 됩니다." "와~오래됐네요, 그럼 한국국적이겠네요” “아니요, 영주권입니다.” “한국인과 결혼한거 아닌가보네요.?" “네.” "10년전엔 결혼 아니면 한국 오기 힘들었겠는데 어떻게...?" "일 땜에 몇번 왔다가 후에 투자해서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면서 머르게 되였습니다." "그래요? 어쩐지 당차 보인다 했더니, 대단하시네요..." 그랬다. 나도 나 자신이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게 사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면 늘 이런 "대질심문" 같은것을 받아야만 하는것을 마음으로 거부했거나 아니면 힘들어 했던것 같다. 모든 욕심 버리고 건강하고 맘 편하게 항상 밝은 미소잃지 않고 살려고 하는것이 내 인생목표였는데 이런 질문을 받는것은 나의 소심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던것이다. 될수록 피하면서 내가 원하는대로만 살면서 즐겁게 보내려했던것이다. 그동안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게 살았던거 같지만 외국인으로 살아가는것을 나도 모르게 아픔으로 안고 살았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최근에 몇차례 공식적인 행사에 참가한적 있다. "은둔생활 종결짓고 드디여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네요." 지인분들은 이런 농담으로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새로운 사람 소개받을때면 "한국온지 몇년 되였어요?" 똑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상처라도 받을가봐 될수록이면 피하려 했던것을 지금은 마음껏 부딪히면서도 즐길수 있게 된것은 고정욱박사남과의 만남이다. “들이대! 아니면 말고!” 고박사님을 만나게 되면서 더불어 가는 사회는 남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야 된다것도 깊이 알게 되였다. 고박사님은 장애1급이지만 150여편의 책을 출판했고 여러학교를 다니면 강연을 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2억5천이나 되는 인세를 기부까지 했다. 어쩌면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중의 한 한사람일수도 있는 그는 사회에 도움되는 사람으로 되였을뿐만아니라 많은이들에게 힘과 꿈을 주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되였다,  동포들도 150여만 다문화사회로 진입하는 대한민국에서 다문화에 대한 혜택이나 정책을 바라기만 할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립하고 적응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무시와 편견은 내 스스로가 줄이고 없애야 한다것이다. 고박사님의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문화는 달라도 사람사는 것은 똑같다”는 주제로 중국문화특강을 하면서 자신감과 즐거움이 주는 기쁨도 배로 되게 하는거 같다. “한국온지 몇 년되였죠?” , “그럼 한국국적이겠네요.” 이런 질문은 앞으로 살면서 계속 받을것이고 어쩌면 죽을때까지도 내가 받아야 할 질문일지도 모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자랑스럽게 말할수 있다. “나는 중국국적인 한국인입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더 많이 사랑하니까,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고 그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고 있으니까...                                                     악플없는 세상 ---善플을 만들어가는 女자  (김선녀)                                                                               
9    결혼과 위장결혼 댓글:  조회:2489  추천:0  2013-06-25
  "결혼의 성공은 적당한 짝을 찾는데 있는거이 아니라 적당한 짝이 되는데 있다"는 텐드우드의 명언이다. 이 말에는 섬김과 돌봄의 뜻의 포함되여 있다. 오늘은 뜨거웠던 날씨만큼 내 마음도 뜨거워졌던 하루였다. "와이프가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자마자 집에 안 들어오고 도망가버렸어요. 어떻게 해야죠? " 출근해서 받은 첫번째로 걸려온 전화였다. 이럴때 내가 할수 있는 답은 없다. 신고하라고 하자니 그 친구도 자기나라에서 결혼중개인한테 일정한 수수료를 주고 빚지고 입국했을텐데...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신고하지 말라고 하자니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살아갈 고객님이 ...걱정되기도 하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다가 그 친구가 마음을 돌려서 미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찾아 오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나 사기결혼 당했어요. 어떻게 해야죠?" 이번에는 여자고객님이 화난기색으로 찾아왔다. 혼인관계증명서를 떼여보고서야 남편이 이혼후 3개월도 안되여 전부인과 재결합했던 사실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1년도 안되는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외도로 협의이혼에 동의를 했는데 외도상대가 전부인이였다는것이다... 결혼이민자관련 상담을 많이 하다보니 이런 질문에 많이 익숙해진줄로 알았는데 오늘따라 마음이 많이 아프게 느껴진다. 결혼은 인생대사인데 과연 위장을 목적으로 결혼했을까하는 의문도 많이 남는다.  정말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입국을 했었고 돈 얼마 챙기려고 가짜이혼을 했을까?   결혼이민자들이  겪는 상처는 생각보다 많았다. 외국인이라고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가진거 없이 시집왔다고 시댁에 가면 설자리 앉을자리 불편해서 묵묵히 일만 하다가 온다고 한다. 또 어떤이는 형제들이 외국인이라고 함께 모이기를 거부해서 명절이면 형제들이 날자별로 나뉘여서 부모님인사하러 가는 가족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어느 집은 부모가 외국인과 결혼한 자식명의로는 재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여기서 외국인은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조금 어려운 나라에서 온 결혼이민자라는것이 더 가혹한거 같다.   이런 사연들을 접할때가 많아서인지 아들, 딸 잘 낳고 사는 결혼이민자들을 보면 항상 존경스럽고 그들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게 되고 박수를 치게 된다. 문화차이가 다르지만 그 차이를 극복하고 남편과 공동명의로 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도, 시댁식구들과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서 친정식구들도 동행하게 되였다고 기뻐하는  모습도, 당당하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연들,,,화목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결혼이민자들 많아도 너무 많다 . 그런데 사회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면만 보고 안좋은 결과만 선별해서 뉴스로 보도할때면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다.   결혼이라는것은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 해보게 하는 하루다...그리고 위장결혼이라는 단어가 이 사회에서 더는 살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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