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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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술의 함정
2013년 11월 18일 12시 45분  조회:8630  추천:1  작성자: 최균선
                                                 궤변술의 함정
 
                                                     진 언
 
    혹자는 궤변술자체가 일종 방법론이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 론증방법임은 사실이나 그것의 근본적특점은 일종 외곡된 론증이다. 궤변술은 무단 (武断)과 다르고 또한 요언과도 다르다. 무단적인것은 근본상에서 리유가 없으며 요언은 무중생유로서 듣기만해도 역겨워진다. 한편 궤변이 론증에서 모종 도리가 있을때 언제나 한무더기의“근거”를 들이대는바 표면상 적지않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궤변술의 특징은 첫째, 겉보건대는 짐짓 정확한 추리수단을 리용하는듯 하지만 실제상에서는 론리규률에 어긋난것으로서 사이비한 추론을 이끌어낸다. 둘째, 무리하고 교활한 궤변론철학의 근원은 상대주의로서 상대주의는 일종 반변증법적인 철학학설이다. 맑스주의의 철학은 상대성속에 절대성이 포함되여있는바 절대는 되돌아와 상대성속에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말하자면 상대성과 절대성은 변증통일관계이다.
    궤변론자들이 궤변을 부리는 목적, 방법은 어리둥절할만큼 다종다양하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 할 때 진리를 외곡하고 부정하는 형식은 몇십가지, 몇백가지 심지어는 수천종이라 할수 있다. 연막탄을 뿌리고 슬쩍 숨거나 물을 흐리워놓고 고기를 잡는 수단과 같은 궤변술에 홀리우지 않으려면 궤변수법의 본질부터 투시해야 할것이다.
    궤변술의 상투적수법은 일반적으로 모호개념을 쓰는것이다. 즉 론증과정에 궤변론자는 론제의 명확한 원칙을 고의적으로 위반하고 론점을 애매모호하여 알쏭달쏭하고 사이비하게 조작하여 부동한 정황에 따라 부동한 해석을 늘여놓음로써 대방을 미궁에로 끌어들이여 주제를 가리워놓고 모종의 목적을 변호하기에 이른다.
    다음 개념을 슬그머니 바꿔버리여 대방의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즉 론제를 슬쩍 바꿔놓는 수법은 궤변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일종 음모술수이다. 이들이 개념을 슬쩍 바꿔놓는 수법으로선 첫째, 한개 개념의 내함과 외연을 슬그머니 바꾸어놓음으로써 다른 개념이 되게 만드는것이다. 둘째, 다의어를 부동한 개념과 뒤섞어버리는것이다.
    셋째, 개념지간의 모종 련계성과 표명되는 상사점을 틀어쥐고 부동한 개념지간의 근본적인 구별을 말살하려 시도한다. 례하면 “해결”과“치유”라는 말을 가지고 크게 문장을 지으려면 이런 음흉한 수법을 쓸수 있다. 넷째, 집합개념과 비집합개념을 뒤섞어놓는 수법을 쓴다. 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류의 사물의 정체적속성이고 비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 사물을 조성하는 매개 분자의 속성이다.
    다섯째, 론제를 슬쩍 바꿔버리는 수법이다. 궤변론자들은 론증과정에서 고의적으로 론제가 명확해야 하고 동일한 규칙이여야 한다는 잠규칙을 위반하고 슬그머니 론제를 전이시킨다. 론제를 바꾸어놓는 수법이나 개념을 바꾸어놓는 수법은 하나로 련계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론제를 바꾸는 수법은 론제중에서 어느 중요한 개념을 바꾸어놓는데서 잘 표현된다. 궤변론자들이 이런 론리규칙이나 구별점을 몰라서 궤변 부리는것이 아니기에 더 가증스럽다고 하는것이다.
    허위적론거를 라렬한다. 즉 고의적으로 론거가 진실해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하며 조작한 례증과 착오적인 원리를 론거로 내세워서 착오적인 론제를 론증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요즘 다른 국토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결말이 우습게도 모호해진 시시비비에 실소를 금할수 없게 된다. 궤변론자들은 이처럼 총명하면서도 간능한 자들이다. 순환론증도 그렇다. 론제의 진실성은 론거에 의해 론증에 의하여 증명되는바 론거의 진실성은 또한 론제에 진실성에 의해 증명된것이여야 한다. 즉 순환론증이다.
    사람을 가지고 론거로 삼는수법은 한사람의 품질을 평가함으로써 그 사람이 제출한 론단을 평가해버리는 작법이다. 바꾸어말하면 대방의 품질평가로 론제의 론증을 어물넙쩍 대체해버리는 기량이다. 다음 권위로서 론증하려 하는것인데 어떤 권위의 편단적인 말을 꺼내들고 사람을 놀래우고 기편하려든다. 환언하면 어떤 권위인사의 개별적인 언론으로 론제의 론리적론증을 대체해버리는 술수이다. 권위로서 론증하는것은 사람을 론거로 삼는 수법의 일종 특수한 표현이라 할수 있다.
    인신공격법은 론쟁상대를 있는 사실, 없는 사실로 마구 욕질하는것으로 구체적인 론제의 론증을 대체해버린다. 심각하고 공공적인 문제일 때는 어용문인, 어용매체를 리용하는데 우리 여기서는 건국후 문단쟁론에서 이런 악질기량들이 잘 발휘되여 무고한 작가들을 매몰시켜버렸다. 과거도 그렇거니와 자국만이 아니라 어떤 주변국에서 지금 한창인 국사론쟁에 이 수법이 동원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는 론쟁에서 가장 악렬한 작풍이고 지략이 아닌 모략이다.
    기계적류비도 곧잘 운용하는데 성질이 근본적으로 부동하거나 혹은 표면상에서 모종 면이 같거나 상사한 두개의 대상을 류비하는데 그로부터 그 중에 어느 한개의 대상에 고유한 성질로부터 다른 한 대상에 고유한 모종성질을 추출하여 론증하려는 수법이다. 이런 기계적류비에 의해 도출된 결론은 보편적으로 믿을수 없다.
    편면적인것으로 전부를 덮으려는 알량한 수법도 있다. 즉 불충분한 조건으로 전면인양 우겨댄다. 마치 나무의 어느 가지가 병들어 말라죽은것을 보고 옹근 나무가 죽는다고 고아대는격과 같다. 원래 론쟁의 시발점이 되였던 론점을 증명할수 없을 때 슬그머니 순환론증하면서 론점을 바꾸어 가지를 쳐놓고 그게 간파되면 다른 론점을 끌어내고 그렇게 부단히 론증이라는 나무에 고의적으로 곁가지를 무성하게 뻗치면서 원줄기ㅡ원쟁론의 시점이 묻히게 한다. 궤변론자들은 단매에 쳐죽이고 싶을만큼 그렇게 교활하고 악랄하고 악착스럽다.
    총체상에서 말하면 궤변술에는 늘 착오적판단이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착오적판단이 궤변이라고 말할수는 없다. 하나의 고립적이고 론리적모순을 가지지 않은  착오적판단은 객관실제에 부합되지 못할지라도 궤변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착오적판단을 론제로 내세우고 정확하다고 론증하려 기도하거나 혹은 그것을 론거로 삼으려할 때 기타 판단이 정확하더라도 궤변으로 된다. 이런 철학이야기가 있다.
    “ 너는 무엇을 배우려느냐?”
     어떤 청년이 천산만수를 넘어 대서양의 버무다군도의 삼각해역중에 한 작은섬에 이르러 거기에 은거하고있는 철학가에게서 심오한 지식을 배우려 하였다. 청년이 철학가에게 자기가 온 목적을 얘기하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들었다. 이 철학가는 원래 궤변술대사였는데 몇마디 안짝에 청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다.
    철학가: 너 지식을 배우고싶다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그러면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들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아니요. 나는 이미 알고있는것은 배우고 싶지않습니다.
    철학가: 음,그러면 너는 네가 알지못하는것을 배우고싶다는거지?
    청년: 그렇습니다요.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것을 배우려합니다.
    철학가: 만약 네가 말이 있다는것을 전혀 모른다면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할것이냐?
    청년: 아니요.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을수 없습니다. 철학가님, 나는 말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세상엔 확실히 말이라는 동물이 존재하니까요
    철학가: 잠간, 내가 무엇을 물으면 무엇을 대답하라, 화제를 딴데로 돌리지말구 내가 다시 묻도록 하라. 만약 네가 버무다삼각해역에 하나의 신비한 작은섬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그 섬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나는 내가 근본 모르는 작은 섬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없습니다.
    철학가: 만약 태양계의 작은 별에 한 외계인이  “외계인이 만든 소행성”을 가지고있는데 이 소행성은 네가 당연히 모를것이다. 너는 이 작은 소행성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느냐?
    청년: 아니요. 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가질리없습니다.
    철학가: 그렇다면 네가 알지 못하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란 말인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은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 사물은 어디까지나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 혹은 네가 모르는것도 례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
   청년: 예? 정말 그렇단말입니까?
      철학가: 만약 배울것이 없다면 여기까지 찾아와서 뭘한단말인고?
      철학가의 궤변술에 미혹된 청년은 구경 무엇을 하려왔는지 알둥말둥해졌다.
   이 철학가야말로 개념을 슬쩍 바꾸어놓는 마술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하다면 이 철학가는 무슨 “마술”로 먼곳에서 온 청년을 함정에서 헤여나올수 없게 하였는가? 기실 철학가가 화두에서 제출한 세번 물음과 청년의 세번 대답에서 가히 엿볼수 있다. 그들의 처음 토론문제는 “너는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인데 이 문제에는 실제상 두개의 작은 문제가 포함되여있다.” ①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은 존재하는데 너는 이미 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장악하고있기에 배우고싶은가? 생각이 없는가이다. ② 너는 모종 사물이 존재한다는것을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너는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아직 장악하지 못하고있는데 배우고싶은가? 아니배우고 싶은가이다.
    첫번째 물음에 청년은 부정하였고 두번째 물음에는 긍정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대담에서 두사람이 사용한 “것”이 표달하는것은 모두 “지식”의 개념이다. 그것을 알고있는 철학가는 뒤미처 세개의 가정구(假设句)형식으로 “너는 네가 아직 알지못하나 존재하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원래의 토론문제를 슬쩍 바꾸어버린것이다.
    이에 청년은 부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철학가는 다시 “이제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라고 옥죄였다. 이역시 개념을 바꾸어 버린것이다. 본래“것”이란 단어가 앞에서 표달한것은 “지식”인데 여기서 철학가 그것을“사물”로 표달되는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이 술수를 보아내지 못하였다. 표면상에서 보면 세개의 질문구가 뒤섞였는데도 결과적으로 속히워서 긍정적인 대답을 해버렸던것이다.
    철학가는“것”이라는 이 불완전명사속에 “지식”과 “사물”이라는 두개의 개념을 들이밀어“고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라는 결론을 내렸고 청년은 철학가의 롱간질에 머리가 어리벙벙해지였다. 서방철학사상에서 헤겔이야말로 궤변론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비판한 철학가라 할수 있다. 그는 일찍“궤변은 흔히 임의의 방식으로 허적인 근거를 빌어오거나 혹은 진짜 도리를 부정하면서 동요를 기도하거나 혹은 허위적도리로 비상히 듣기좋게 작간질하기에 마치 정말인것처럼 여기게 한다.” 《哲学史讲演录》,第2 卷,第7 页》。
    헤겔의 이 한단락의 론단은 궤변론이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뒤섞는 특점을 에누리없이 까밝힌것이다. 일상적인 쟁론은 그럭저럭 헛소리나 어거지로 치부해버리고 사실로 밝히게 되여있지만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는 대방의 궤변술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각성을 높여야지 어덩덩해서 대방의 물음을 제기하는대로“옳소, 아니오”하고 끝없이 끌려다니다보면 자신이 제기한 원론도 흐지부지하게 되고 대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만들것이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그 한일념에 매달려 사유가 “단순”해질수 있으나 진실을 덮어버리려고 작정한 궤변론자들은 대방의 순진성을 롱락하면서 문제를 왕청같은데로 끌어가버리고 나중에 원문제가 뒤로 밀리도록 넓은마당에 알짜와 쭉정이를 마구 널어놓는식으로 론쟁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무슨 말을 했냐 안했냐로부터 시작된 문제를 이리저리 비틀다가 하나하나 밝혀지니까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되돌아가서 지엽적인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여론을 호도한다. 뭘 한다는 사람들은 음모술수를 잘 부리는 궤변론자들의 궤변술을 역으로 읽어야 하련만...
 
                          2013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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