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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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쓸가?
2013년 12월 21일 08시 10분  조회:7458  추천:2  작성자: 최균선
                                                              무엇을 쓸가?
 
                                                                  진 언
 
    문장에 숙달하여 달필이 된 작가들은 어떻게 쓸가? 하는 문제에 먼저 집념할지 모르지만 거개 무엇을 쓸가? 하는 문제에 우선 고민을 짜내게 된다. 어떻게 쓸가? 하는 고민은 서사화의 기법 혹은 기교에 속하는 형식문제이고 무엇을 쓸가는 선재와 주제확정에 관한 내용문제이다. 재간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짓지 못하나 쌀이 있으면 곧 밥이 되는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여건이 다 구비되여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땔나무도 있어야 하거니와 우선 가마가 있어야 한다. 가마란 그안에 넣고 끓이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 전통가마의 경우, 같은 하나의 가마라도 밥을 앉히면 밥가마요 죽을 끓이면 죽가마요 국을 끓이면 국마가요 엿을 달이면 엿가마요 메주를 삶으면 메주가마, 돼지죽을 삶으면 돼지죽가마 등 내포가 달라진다. 그러나 가마의 형태와 속성이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이처럼 글을 지음에도 어떤내용을 담고 익혀야 하는 그릇이 필수적조건부로 수요된다.
    글을 지음에서“무엇을 쓸가?”는 결국 자기가 쓰는 글의 사회적효용에 직결된 가장 급선무로 나서는 문제이다. 글을 지음에서 여러가지로 많이 고민해본 사람들은 다 체험했겠지만 무엇무엇을 쓰고싶지만 써서는 안되고 쓰지말아야 한다는 잠규칙이 있음에 속을 앓게된다. 이렇게 쓰지 못할것과 쓰지 말아야 할것들이야말로 문인들게 무형울타리가 되겠고 작가의 원초적인 비애가 되는 근원이다. 무엇무엇은 써볼 욕심이 나는데 전혀 익숙하지 못한 제재이고 절실한 체험이 없으므로 첫운필에서부터 빈붓방아를 찧게 된다. 이는 매개 작가의 종합적인 국한성이기도 한것이다.
    무엇무엇은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것이여서 쓸 흥심이 발발하지 않고 무엇무엇은 써낼 엄두를 못낸다. 이를테면 신문기사는 어느 문체보다 제약성이 많다. 이는 결코 기사문자체의 제약성문제도 아니고 기자의 안광, 투시력 혹은 문장능력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에 립각하여 방향성, 선전목적성 등을 전제로 글을 써야 하는 기자의 고충은 그 누구보다 심각하다. 집필에서 잠규칙, 제약성때문에 마음이 다르고 써낸 글이 다르게 된다. 이는 특히 무형의 큰손아래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숙명적고충이다.
    창작소설은 허구가 허용되므로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 많이 주어지지만도 선재범위나 언어표현상 무한대한 창작자유가 보장되는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작가에게도 무형의 울타리가 있다는 설명이 된다. 이처럼 실용문이든 잡문이든 운필의 폭이 욕망대로 확장될수 없는것이 문인들의 원초적비애로 되였고 문자옥같은 문화비극이 재연되는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누구더러 무엇무엇을 쓰라고 권장하지 못한다. 제가 춤추고싶으니 시누이를 권하는격과도 또 다른 문제이다.
    한편의 글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가 못하느냐는 재치있는 표현기교보다 작자의 사유의 심도에 달려있다. 작자의 심층사유는 독자들에게 오래 사색하도록 충격을 주고 사색의 창신성이 없이 겉충도는 문자유희는 독자들에게 초를 씹는맛을 줄것이다. 골기가 있고 량지가 있는 작가라면 비정하고 타락한 시대, 집체무의식속에 침체된 민중을 깨우쳐 인문신념을 다시 건립하도록 인도할것이다. 그러한 창작정신은 바로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를 수행하려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로신이 말한것처럼 무궁한 머나먼 곳과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나와 련관되여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만이 보편적으로 공리화되고 세속화된 작금의 어경속에서도 엄숙한 창작관념을 수립할수 있다. 연후에 무엇을 쓸것인가 명확해진다. 희망사항에 속하지만 한 작가의 바람직한 경지는 우선 적자(赤子)가 되여 시대의 임무를 발견하고 공동체ㅡ민초들의 조우와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쏟는 창작사상이라 할것이다. 생명의 정의감은(正义感) 그 어떤 리익보다 높으며 인간의 가치는 그 어떤 권위보다 고귀하다는 신념을 고양하는 작가야말로 참된 작가라 하겠지만 쉬운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상은 진리를 신장시키려는 사상이다. 이 시점에서 작가군을 크게 두개 부류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부류는 자기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들로서 기실 넓은 의미에서는 개인경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한부류는 사상령역에 대한 개척자들이다. 제1차세계대전전야 프랑스를 들썩하게 한“드레푸스사건”을 두고 “나는 고발한다”라고 납합한 졸라와같은 작가들이다.
   이 부류의 위대한 작가들은 정신문명의 좌표뿐만이 아니라 작가적량심의 귀감으로서 호한한 문자세계에 찬란한 항성들로 빛나게 된것이다. 이와달리 소박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은 암흑속을 비추는 꺼질줄모르는 등불이다. 그들의 머리위에서 빛나는 등불은 인류의 심령세계를 밝히는 자명등이기도하다. 작가적리상주의가 거의나 붕괴된 이 시대, 참된작가의 정신가원을 수호하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리욕의 망령만이 어슬렁거리는 허무주의사막에서 미와 량심, 진리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나 가는 그런 작가들이야말로 무엇을 쓸것인가를 잘 알고있는 명실상부한 작가이다.
    례를 들어 수필이 아무리 자기를 벗어보이는“라체”의 글이라도 남부끄러운 은사는 아무도 곧이곧대로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는다. 더러운 빨래는 집안에서 하라는 나뽈레옹의 명언이 있듯이 혼자만 주물럭거릴수 있는 은사나 궁리여서 체념하지 않을수 없다. 풀어서 말하면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 있듯이 글로 쓸게 있고 못쓸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누가 나무릴 리유가 없는 작가의 합목적인 사심이다.
    무슨무슨, 어떤어떤 내용범위가 주어진 원고청탁을 받고 요구한 제재 혹은 주제가 자기소관과 무관할때는 막무가내로 긁적거린다해도 치약을 짜내는격이 된다. 무엇무엇을 쓸가해서 생각을 굴리다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암탉을 잡아 알을 꺼내는 작동 같은 운필은 스스로도 무모하다는 느낌을 줄것이다. 억지로 문자조합을 하여도 결과적으로 억지춘향을 만들려던 변학도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이것저것 피해가며 정작 발굴, 제련하려면 열어젖힌 아리바바의 동굴에서처럼 보 물들이 쏟아져나오지 않는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한 파란많은 인생일지라도 자기 신변잡사ㅡ자신, 가족, 친구들의 사연 등등을 쓰고쓰다가 바닥이 아니날수 없다. 그리 고나서는 어쩔것인가? 유한한 작가의 생명권내에서 무한정으로 글이 엮어질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나 체험 혹 감수도 국한성이 있기마련이다.
    대체로 무엇을 쓸가? 하고 생각하는것은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수 없다. 문제의식에는 참여의식이 그림자처럼 슬며시 붙어서게 된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사람은 사유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싸고돈다. 자아표현에 너 무 집착하면 뛸데없이 자신의 신변잡사만 눈앞에서 새로운 경지인듯 펼쳐질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자아감각이지 사회적효응의 거도는 못된다.
    결국 인생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확대, 발전되면 인간의 문제로 객관화되고 문제의식으로 살아움직이게 된다. 문제의식은 인간의 근원적인 과제와 련결되며 나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문제가 되고 인류공통의 문제로까지 확대될수 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쓸가? 하는 난제의 해답범위가 될런지 모르겠다. 유감이지만 필자의 궁리계선이 여기에서 그칠뿐이니,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감명스럽게 표현하여 살아있음에 대한 표징으로 자족한다면 자기안계에 짙은 색안경을 걸어주는격이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의 발굴은 경험세계, 체험의 소울타리속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무엇을 써서 자신이 존재하고있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것인가? 특히 수필창작에서 제기되는 이 문제에서 내용의 선택성과 가치함량은 꼭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체현되는것이 아니다.
    글을 어떻게 썼는가는 심미향수를 줄수 있지만 글이 특별한데가 없어도 쿡 찌르는 충격이 있는것은 주로 무엇을 썼는가에서 비롯된다. 은은한 감동을 주는 수필이라면 자아실현의 주체척도가 되고 개인의 심미표준이 되면서도 나아가서 인간공유의 정감을 건드린것이여야 신변잡기식의 전통적수필에서의 탈피가 아닐가 생각한다. 수필에서 자아감정에 도취되는것은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격이다.  보건대는 흥겨운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싱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예술에서 반복은 죽음이라는 말은 창작의 독특성을 권장하는 말이지만 소재의 중복성을 경계하는데도 적용될수 있다. 부단한 창작인만큼 노루친막대 삼년을 우려먹기가 되여서는 안된다. 열달잉태도 힘들고 난산일수밖에 없다. 그것이 곤혹이다. 수필에서 자아표현의 도취나 발설이 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으라는 법은 없다. 한편의 수필에 무엇을 담을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시종 난제로 제기될것이다. 자기 자신의 심령세계를 파헤칠 때 생명의 본질이 파악되지만 무엇으로“료리”해야 독자들이 잘“잡수실가”는 벌써 다른 문제이다.
    주제는 작가의 인생관이나 사상에서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인생관 그 자체가 꼭 주제가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쓸가?”에 대한 물음에 해답은 대관절 무엇인가? 내용이 교훈적인것, 비평적인것여도 그 전달에서 독자가 느끼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동화효응은 어떻게 쓰느냐에도 달렸지만 사색적이고 저돌적이기도 한 현대독자들에게는 무엇을 썼느냐가 더욱 요긴한 관심사이다. 소재는 자기감동여하를 기준으로 선택하지만 주제전달은 독자의 접수로서만 완성된다는것을 망각한다면 패필로 될수밖에 없다.
    무엇을 쓸가?는 정서의 지성화문제이다. 정서의 지성화란 정서를 객관화, 보편화함으로써 자기감정의 순화와 독자공명에 이르는것이다. 지성화가 부재하면 자아도취에 빠지면서 감상일변도의 정서를 과장하여 글을 허공에 뜨게 한다. 그렇게 되면 어 떻게 쓰느냐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생은 짧으나 체험은 많다. 그러나 쓸거리가 많다는 의미와는 등호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구나 골머리가 아프다.
    저저의 인생에는 사연도 많고 정한도 많지만 다같은 콩알이라도 알알이 골라서 심듯이 선재ㅡ무엇을? 심을가에 고심참담하게 된다. 글짓기를 뼈를 깎는일이라것은 무엇을 쓸가보다 어떻게 쓸가를 두고한 말이지만 어떻게 쓸가하는 고민은 “미사려구” 에 매인 문제라 할수 있고 무엇을 쓸가는 사상, 주의문제로서 민감성에 직결되는 문제이자 벙어리 랭가슴앓듯 하게 되는 창작의 전제이다.      
    사유의 각도에서 지혜는 속박받지 않는 사상이다. 사상(思想)에서“사”는 사유능력을 가리키며 일정한 실천성이 전제로 된다. “상”은 루적한 지식과 경험, 관념 등 회억과 선택을 가리킨다. 지혜로운자는 사상에서“상”의 상태에 있는것이 아니라 “사”의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틀어쥐고 쓰느냐가 선행되는것이다.
    공자가 가라사대 “인자불우, 지자불혹, 용자불구(仁者不忧,智者不惑,勇者不惧)” 라 하였다. 인자도 많고 지자도 많으나 유독 용자가 희귀한 현실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실패할지언정 당신이 싫어하는 일에서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 있거니와 명지한 사람은 원래 물덤벙 불덤벙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무엇이나 다 쓰는“용자” 가 되여 불구(不惧)할것인가? 물음을 제기하는 필자도 답이 꽉 막힌다.
 
                                              2013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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