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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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처칠의 숨겨진 반인륜적인 범죄(보충재료)
2014년 02월 04일 17시 04분  조회:12093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처칠의 숨겨진 반인륜적인 범죄
                                      -뱅골홀로코스트|작성자 나마스테|자유 게시판
 
    역사는 승자가 쓴다의 표본, 처칠의 범죄에 대해 거짓을 말하는 미디어 - 처칠의 숨겨진 반인륜적인 범죄
글쓴이의 정보, Dr Gideon Polya라는 사람으로 MWC News의 정치와 관련해서 최고 편집장이다. 그는 130개에 달하는 글을 출판했다. 그의 다른 논설 → Other articles by this author 
    "(처칠의 벵골 홀로코스트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규모가 더 큰 학살이다." - Dr Gideon Polya(MWC News의 정치관련 최고 편집장)
   처칠이 초래한 대표적인 범죄인 1943년~1945년의 벵골 대기근, 이 기근으로 6백 만에서 7백만명의 인도인들이 영국의 식민치하에서 아사했다
  처칠은 2차대전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쉽으로 인해 우리의 영웅이다. 그러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의 범죄들, 특히 대표적으로 2차대전 당시인 1943년~1945년의 벵 골 기근 사태 시 처칠이 6백만~7백만명의 인도인들을 죽인 벵골 홀로코스트는 특별 한 영-미 및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 홀로코스트 부정에 의해 공식적인 역사에서 삭제되었다.
  남아프리카, 수단,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에서 그저 명령에 복종하는 병사로서 영국 의 식민 전쟁범죄에 가담한 것 외에, 처칠은 기성 정치인으로서, 장관으로서, 지도자 로서 다음과 같은 사태를 초래한 여러 정치적 실패에 깊숙이 관련되었다.
   1차대전을 초래한 정치적 실패들 : Dardanelles 전투, 1920년대 이라크와 크루드에 대한 폭격
  2차대전을 초래한 정치적 실패들 : 일본의 2차대전 참가를 적극적으로 유도, 싱가 폴의 방어불가에 대한 사전 인지,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사전 인지, 영국 식민으 로부터 인도 독립 반대, 1943년~1945년 벵골 대기근, 인종차별주의 시온주의 식민 주의자들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분리하기로 한 반아랍, 반유대주의 전시 결정, 분리로 인한 대학살을 수반한 힌두-무슬림 반감 촉진, 파키스탄-인도의 핵문제로 인한 현재의 교착상태
   이러한 주요한 범죄들은 아래에 약술되고, 문서로 입증될 것이다. (처칠의 범죄들에 대한 아주 상세한 참조사항이 담긴 분석을 보려면, 나의 1998년도 저서 'Jane Austen and the Black Hole of British History. Colonial rapacity, holocaust denial and the crisis in biological sustainabillity'을 수정한 최신판인 2008년도 판을 참고하라. 웹주소 - http://janeaustenand.blogspot.com/)
그러나, 그러한 홀로코스트들에 대한 악의적인 또는 무자격의 개입을 통한 처칠의 범죄들은 거대한 군단의 영-미, 시온주의 및 호주 역사가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정치 인들에 의해 대부분 역사에서 배제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확고한 영국, 미국 및 시온주의의 홀로코스트 부정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Tariq Ali의 최근 저서 '1960년대 자서전, Street Fighting(Verso, London, 2005)'의 내용 속에 나온 것일 것이다.
    Tariq Ali는 'Street Fighting' p96~p98에서 1966년에 윈스턴 처칠의 사망에 의해 야기된 애도 제안과, 다음과 같은 처칠의 범죄들을 제시하면서 그 제안에 반대한 훌륭한 반 체제,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자 Richard Kirkwood의 대응에 대한 Oxfo rd  Union(영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토론회) 토론을 설명하고 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해 무장 개입을 가장 집요하게 지지한 자가 바로 처칠 이었다. [1910년] Welsh의 Tonypandy 광부들에 대한 군대 동원을 정당화한 자가 처칠 이었다. [1911년] 몇 명의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서쪽 런던의 Sidney Street의 포위를 주도한 자가 처칠이었다. 1926년의 총파업 당시 선동가 역할을 한 자가 처칠이었다.  
    그가 애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전세계의 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앙심과 적대가 끈질기게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들만으로도, 나는 일어서서, 1초의 묵념 도 하지 않겠다고 Kirkwood는 소음이 커지고 있는 속에서 외쳤다. 그는 '우'하는 야유 소리에 휩싸였는데, 일부 그의 반대자들은 문자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러나 Kirkwood는 냉정했다. 4백명 이상의 사람들이 일서서서 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우리들 중 약 25명은 앉아 있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Kirkwood는 기뻤다. 결국, 그는 볼셰비키와 맨셰비키를 구분했다.'
   1942년~1945년 사이 벵골 지역에서의 대기근으로 인한 희생자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체들이 소각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영국, 미국 및 시온주의의 홀로코스트 부정으로 말미암아, 1966년에 높은 교육을 받은 자,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식민주의자 및 반제국주의자들이 윈스턴 처칠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범죄들을 전혀 알지 못했음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여러 범죄 중 아마 가장 심한 것은 1943년~1945년 벵골 홀로코스트에서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무자비하게 6백만~7백만명의 인도인들을 아사시킨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5백~6백만명이 사망했으나, 궁핍으로 사망한 자는 6명에 1명 꼴인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규모가 더 큰 학살이다.
   1943(벵골 호랑이와 영국 사자 : 1943년 벵골 대기근 이야기), Richard Stevenson이 쓴 책
  피할 수 있는 사망의 관점에서 볼 때, 대악마인 아돌프 히틀러의 범죄와 확실히 맞 먹는 처칠의 범죄들의 (카탈로그)연대를 아래에 연대순으로 제시했다. 대영제국의 범죄들과 관련된 중요한 피할 수 있는 사망자 통계는 괄호로 표시했다
  1. 처칠의 인도에서의 대영제국의 전쟁범죄들에 군인으로서 가담[1896년~1899년 : 동성애자 학대혐의를 씌운 뒤 인도에 주둔한 자신의 연대에 입대할 것을 강요. 1757년~1947년 영국령 인도에서의 피할 수 있는 사망자들. 1895년~1897년의 기근에서 피할 수 있는 사망자 수, 약 100만명. 1899년~1900년 인도 기근, 6백 만~9백만 사망자]. Obdurman 전투 당시 수단에서의 임무[1989년 : 끔찍한 학살]. 전쟁 특파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 병사로서 남아프리카에서의 임무[1899년 보어 학살(1899년~1902년) : 영국 강제 수용소들에서 28,000명의 Afrikaaner 여자들 및 아이들 사망. 참조 : MWC News의 '호주의 비밀 학살 역사'
  2. 처칠은 1차대전 발발 전 영국 내각의 보다 호전적인 인사들 중의 하나였다 [1차대전 당시 연합국의 군과 민간인은 각각 총 570만명, 370만명이 죽었으며, 독일 연합(동맹국들)의 군과 민간인 각각 총 4백만명, 520만명이 죽었다. 1918년~1922년에 군의 이동으로 악화된 스페인 독감전염병은 전세계적으로 2천만~1억명을 죽였다. 
  3. 처칠은 1차대전 당시 지독한 터키의 Dardanelles 전투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그 전투로 20만명의 연합군과 터키군이 죽었으며, 150만명을 살해한 터키의 아르메 니아인 학살이 촉진되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터키, 인종차별주의 이스라엘 및 미국 의원들은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4. 처칠은 러시아 혁명에 대응하여 성공하지 못한 영국 및 미국의 소련 침략을 강력하게 도모했다[1917년~1919년 : 러시아 내란과 그 후의 러시아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죽었고, 1930년 경 우크라이나 기근에서 7백만명이 죽었으며, 스탈린주의자들의 대학살로 약 2천만명이 죽었는데, 이것은 2차대전의 총 사망자수와 거의 비슷한 수치이다].
  5. 처칠은 (1914년에 영국의 침략을 받은) 이라크에서의 아랍 반란사태 진압과, 쿠르드 마을들에 대한 폭격에 개입했다[(1920년대) 독가스에서부터 (오늘날) 아이들의 대량학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폭력적인 영국의 이라크 점령은 1914년에서 현재까지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1990년~2008년 이라크의 사망자 4백만명. 5세 이하 유아 사망자 180만명. 망명자 현재 6백만명].
  6. 처칠은 대량학살을 초래한 인도 탄압에 적극 관련되었으며, 인도의 자결(독립)을 완강하게 반대했다[1757년~1947년 사망자 15억명. 빅토리아 시대 사망자 5천만명. 1901년~1947년 사망자 4천만명. 1895년~1897년 기근에서 피할 수 있는 사망자 약 1백만명. 1899년~1900년 인도 기근 사망자 6백만~9백만명. 1943년~1945년 벵골 홀로코스트 사망자 6백만~7백만명].
  7. 처칠은 1930년대에 영국 의회 의원들 중 보다 호전적인 인사의 하나였으나, 독일 나치의 부상을 세계에 경고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2차대전에서 군인 사망자 2,500만명, 민간인 사망자 약 6,700만명]
  8. 처칠은 미구을 개입시켜,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으로 하여금 2차대전에 참가하도록 적극 추진했다[1937년~1945년 피할 수 있는 중국인 사망자 3,500만명. 1943년~1945년 처칠의 고의적인 벵골 초토화 정책으로 인도인 6백만~7백만명 사망. 2차대전 동부전역에서 수백만명 이상 사망. 참조 : Rusbridger, J.와 Nave, E.(1991)의 'Betrayal at 'Betrayal at Pearl Harbor. How Churchill Lured Roosevelt into World War II(진주만에서의 배신. 처칠은 어떻게 루즈벨트를 2차대전으로 유인했는가)'
  9. 처칠은 싱가폴이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사전에 잘 알고 있었다[1941년 말레이 전투에서 사망 8천~15,000명, 포로 13만명. 호주군 14,000명, 영국군 16,000명, 인도군 32,000명 항복. 참조 :
 10. 처칠은 미국인들에게 임박한 진주만 공격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다[미국 당국자들 또한 알고 있었으나, 하와이 주둔 자국 군대에 경고하지 않았다. 참조 : Rusbridger, J.
   11. 처칠은 무슬림들, 아랍인들 및 인도인들을 증오했으며, 굶어죽고 있는 6백 만~7백만명의 인도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을 냉혹하게 거부했고,Viceroy Wavell의 청원을 거절했으며, 캐나다의 구조 시도를 봉쇄했다(6백만~7백만명의 인도인 사망. 영국의 벵골 홀로코스트 사망자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사망자 5만백~6백만명보다 더 많은 수이다. 참조 : Moon, P.(1973)
   12. 처칠은 최고의 과학적 자문을 거부했으며, 대서양 호위대를 보호하는 대신 독일 도시들에 대하 폭격을 지지했다[연합군 공군 16만명 사망. 독일 민간인 60만명 사망. 대서양 전투는 거의 패배. 1943년에 연합군 선박을 반감시키는 것과 관련된 인도양 지역의 기근으로 7백만명 사망. 참조 : Snow, C.P. (1961),
  13. 처칠은 영국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해 힌두-무슬림 반감 유지의 중요성을 인식 했다[1947년의 인도-파키스탄 분리와 관련하여 1백만명이 사망하고, 무슬림 및 힌두 망명자 1,800만명 발생].
  14. 처칠은 1944년에 파키스탄 분리에 대한 영국군의 강력한 반대를 뒤집어버렸다 [1948년에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인구의 1/3이 되었다. 현재 7백만명 이상의 팔레스 타인 망명자들이 있다. 1967년 이후, 점령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은 30만명 이상 사망 했으며, 1967년 이후 5세 이하의 유아들은 20만명이 사망했다. 인종차별정책의 이스 라엘에 의해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점령된 국가들의 총 사망자는 현재 약 2,400만 명 이상이다. 점령당한 4백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나라에서 인종 차별주의 시온주의자들에 의해 불법적인, 남용된 권한으로 투옥되고 있다].
  15. 처칠의 홀로코스트 부정 유산, 특히 그의 유명한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쓰여 진다.'는 생각을 영국, 미국, 시온주의 및 호주가 채택함으로써, 침략, 점령, 유린 및 대학살 등의 영-미와 시온주의 만행들의 계속성이 보자외었다[(괄호 안의) 점령군들과 관련된, 1945년 이후에 점령된 국가들의 1950년~2005년 사망자 총수는 (벨기에) 3,600만명, (프랑스) 1억 4,200만명, (인종차별 이스라엘) 2,400만명, (인종차별 남아프리카 공화국) 70만명, (포르투갈) 2,300만명, (러시아) 3,700만명, (스페인) 9백만명, (영국) 7억 2,700만명, (미국) 8,200만명. 1950년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전쟁들에서 사망한 토착민들 2,500만명. 1990년~2008년 부시 전쟁들과 관련된 사망자 9백만~1,100만명. 침략 이후 점령당한 이라크에서 사망 2백만명, 망명자 6백만명. 침략 이후 점령당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자 4백만~6백만명, 망명자 4백만명].
  그러나, 영국-미국 홀로코스트가 묵살되고 있는 일부 사례들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역사물에는 1943년~1945년 벵골 홀로코스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친시온주의 교수가 저술한 영국사인 'A History of Britain (BBC, London)'
  친시온주의 교수인 Simon Schama의 최근 영국사인 'A History of Britain (BBC, London)', 심지어 호주 역사가인 Tony Taylor 교수의 저서인 'Denial. History betrayed'라는 제목의 부정에 관한 중요한 책에서도(Tony Taylor : Melbourne의 Monash 대학교수, 참조 : 나(Dr Gideon Polya)의 서평 'Denial'이란 책이 영국과 미국의 대학살 범죄를 묵살하고 있다." :
    이 특별한 영어 홀로코스트와 윈스턴 처칠의 엄청난 범죄들을 평가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야후 검색에서 '히틀러 범죄들(검색 결과, 25,000건)'과 '처칠 범죄들(검색 결과는 54건이나, 그 중 여러 건은 윈스턴 처칠이 아니라, 끔찍하게 처형당한 아메 리칸 인디언인 Ward Churchill 교수의 '인도에 대한 죄'를 언급하고 있다)을 검색하는 것이다.
   아마도, 공평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윈스턴 처칠에게는 마지막에서 두번째의 말들을 남겨두어야 한다. 여기 그 모든 것을 말해주는 윈스천 처칠의 일련의 인용문들이 있다. "현 상황에서 그들은 여분의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도의 현 생활수준에서 가장 작게 나빠지는 것(최소화 시키는 것)은 (인도인들이) 서서히 굶어죽는 것을 의미한다."
  [윈스턴 처칠, 인도인들에 대한 하원에서의 연설(1935년). 1. 하원 의사록, 윈스턴 처칠 연설, 302권, 1920년~1921년, 1935년. Jog의 인용문, N.G. (1944년)의 'Churchill's Blind-Spot(처칠의 사각지대): India (New Book Company, Bombay)' p195]
   "나는 인도인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추잡한 종교를 가진 추잡한 족속들이다."
  [인도 외무장관 Leo Amery에게 행한 윈스턴 처칠(1942년). 4. (인도 외무장관)
  "인도인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세계대전의 공포와 위험으로 부터 그리 효과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조그만 섬의 어깨 위에서 전쟁을 치루어내었다."
  [그가 1943년~1945년에 살해한 6백만~7백만명의 인도인들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책인 W.S. (1954년)의 'The Second World War', 'Churchill (1954년)' 4권, p181. 그의 진술은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 봉사한 240만명의 인도인들과 1943년~1945년의 벵골 홀로코스트에서 인도인 6백만~7백만명의 사망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거짓이다.]
  "처칠은 1940년 2월, 내각에서 힌두-무슬림 불화를 영국의 인도 지배의 보루로 간주한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Irving, D. (1987년)의 'Churchill's War(처칠의 전쟁)' 1권, The Struggle for Power(권력투쟁) (Veritas, Bullsbrook, WA) p381]. 이것을 통해, 우리는 미국을 전쟁에 개입시키는 것은 1941년에 처칠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1941년 일본 주재 영국대사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1941년 10월에, 나는 숙고한 후의 의견으로 거의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일본의 종전의 희망은 일본이 마침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게 된다면, 그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떤 변수로 작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미국에 대해서건, 또는 일본에 대해서건, 적절한 영국의 어떤 영향력의 부재는 궁극적으로 발생하게 될 파국의 가능성을 확대시킬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41년에 일본 주재 영국대사 R. Craigie 경이 Anthony Eden (1943년)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최종 보고서. R. Craigie 경이 1943년에 Eden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보고서는 Rusbridger, J. and Naver, E. (1991년)의 'Betrayal at Pearl Harbor. How Churchill Lured Roosevelt into World War II (Summit, New York)', Rusbridger & Nave (1991년) 부록 I에 복사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경구는 윈스턴 처칠의 말이라고 한다.
                                    결론
 
묵살된 역사는 반복되어 나타난다. 과거 영국의 제국주의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영-미 제국주의로 변질된 21세기에, 이 특별한 홀로코스트 범죄, 홀로코스트 부정 및 홀로코스트 묵살은 이 경구의 객관적인 교훈이다(부시의 여러 전쟁으로 1990년 ~1008년 현재 총 9백만~1,100만명이 사망했다). 명망있는 미국과학진흥회(AAAS)에 의하면, 세계는 핵문제, 온실효과문제 및 빈곤문제 등으로 아주 심각한 위협에 직면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15,000개와, 핵테러주의자, 전쟁범죄자, 인종차별주의 이스라엘의 200개를 비롯한) 25,000개의 핵무기가 있다. 현재의 387 ppm의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거대한 북극의 빙산이 녹는 것, 많은 종들의 소멸, 산호초 괴사 등과 이미 관련되어 있는 기후 비상사태이다. 최고의 과학자들은 350 ppm 이하로 줄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600만명이 빈곤과 빈곤으로 악화된 질병으로 피할 수 있는 죽음을 당하고 있다. 과학적 위험관리는 거짓에 대한 무관용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간성을 위협하는 거짓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다. 부작위에 의한 거짓이건, 작위에 의한 거짓이건, 거짓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무관용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종차별자이며, 전쟁도발자로서, 대량학살을 일으키는 영국, 시온주의자 및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거짓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단호히 반대하고 폭로해야 한다. 이제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평화는 유일한 길이나, 침묵은 사람 을 죽이며, 침묵은 공범자가 된다.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아는 바를 알려라
………………………………………………………………………….(략) 
영국 군사과학자들이 수백명의 인도 병사들을 가스실로 보내, 그들을 독가스에 노출시켰다고 가디언(Guardian)지에 의해 밝혀진 문서들이 밝혔다. 가디언지는 영국 군이 인도 병사들이 어떤 질병들을 발전시켰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들 뒤에 그 병사들을 검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가스가 암과 다른 질병들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 인정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식기를 비롯하여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여러 날, 심지어 수주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일부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 실험들은 전면적인 규모의 실험들을 처음으로 확인해 주는 국립기록보관소에서 새로이 발견된 문서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인도가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시기에 인도 군대는 영국군의 지휘 하에 있었다.
실험들은 현 파키스탄의 Rawalpindi 군사시설에서 2차대전 전과 중에 10년 이상 동안 실시되었다. 그 실험들은 Wiltshire의 Porton Down 화학무기공장에서 일본을 향해 사용할 독가스를 개발하기 위해 아대륙에 배치된 과학자들에 의해 실시되었다. 인도 실험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Porton 대인 화학무기 실험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1916년과 1989년 사이 Porton에서 2만명 이상의 영국 병사들이 신경 가스와 미란성 독가스와 같은 독가스와 관련된 화학무기 실험들에 참여했다.
  그 영국 병사들 중 다수가 속아서 그 실험들에 참여했다고 진술했는데, 그들은 그 실험들이 끝난 뒤 몇년 동안 건강을 손상당했다.
  그 보고서들은 어떤 경우, 인도 병사들은 마스크만 착용한 채 독가스에 노출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번은 인도 용병(민간인)의 가스 마스크가 벗겨지는 바람에 그는 눈과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 실험들은 전장에서 살상하려면 가스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942년에 Porton의 과학자들은 인도 및 영국 실험대상자들 중 다수가 가스로 인해 화상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일부는 화상이 매우 심해 병원에 가야 했다. 심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은 아주 비참했고, 절망에 빠졌으며, 불편한 생활을 했다고 과학자들은 말했다. 다른 병사들은 직접 독가스의 결과를 측정하기 위해 '훈련용 반바지와 면으로 된 카키색 노타이 셔츠'를 입고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1주일 동안 병원신세를 졌다.
  그러한 실험들은 Porton의 과학자들이 영국인 피부보다 인도인 피부에 더 심한 피해를 가할 독가스를 찾아내려고 한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다. 5백명 이상의 영국인 및 인도인이 독가스에 노출되었다.Porton에서 실험 대상이 된 영국 군대를 대변하는 변호사 Alan Ca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히, 그러한 실험들이 제왕의 시대에 행해진 상황에서, 이들 인도인 실험대상자들이 그러한 실험에 참여하는 데 대한 어떤 유효한 동의를 했다면,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하략)
        ㅡ 보충재료 ㅡ
 히틀러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규모가 더큰 홀로코스트 인도대기근 [비밀문서][서프라이즈]
리뷰 TEDDY- K |2014/03/17 02:10|서프라이즈앱으로 보기
1943년 인도 벵골
굶주림에 야윈 처참한 모습들 거리마다 즐비한 시체들 이는 인도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이었고 이로인해 700만명이 굶어 죽는다.

67년이 지난 2010년 인도 벵골
벵골대기근을 연구하던 미국의 역사학자 무케르지가 문서 하나를 발견한다. 그문서에는 벵골대기근에서 죽은 700만명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 죽었다는 기록이 담겨있었다.
미국 공익대 역사학과 교수인 마두우수리 무케르지 [Madhusree Mukerjee] 벵골 대기근을 연구하기위해 직접 벵골지역을 찾아갔는데 연구하는 과정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던 1943년당시 벵골에서는 가뭄과 홍수같은 자연재해도 없었고 쌀수확량도 평년과 크게 다르지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어떤이유에서인지 최악의 대기근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7백만명이나 사망한 것이었다.
벵골대기근에 대한 의문은 점점더 커져만 갔는데그러던 어느날 당시 벵골지역에 고문서를 검토하던중 비밀문서 하나를 발견한다. 그문서는 1943년에 있었던 대기근에 대해 당시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이 기록해 놓은것이었는데 이 비밀문서에 대기근이 발생한 이유가 자연재해나 기상기후때문이 아니라 영국군이 자행했던 쌀수탈 정책때문이라고 기록되어있었다.
영국군들은 벵골지역에서 판매되는 쌀들은 물론이고 각가정에 있던 쌀이란 쌀은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런데 더욱놀라운것은 이런 쌀 수탈 정책을 지시한 사람이었다. 그사람은 바로 당시 영국의 수상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이었다. 처칠은 제 2차 세계대전당시 세계평화를 지키기위해 전체주위에 맞서 연합군을 이끌던 영국의 지도자 였다. 처칠은 왜 700만명이나되는 인도인들이 굶어 죽도록 쌀을 빼앗아 갔던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당시인 1942년 영국은 동남아쪽으로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는 일본과 미얀마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일본에 밀려 당시 영국 지배려이었던 미얀마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만다. 처칠은 인도에게 미얀마를 빼앗긴후 인도까지 빼앗길까 두려웠다. 영국의 마지막 보류였던 인도를 잃는다는것은 영국이 아시아에서 모든 패권을 잃는다는것을 의미했다.
처칠은 인도를 지키기위해 고민했고 한가지 방안을 생각해냈다. 처칠은 벵골 지역쌀을 모두 거두어 들이면 일본군이 처들어 오더라도 보급품 부족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칠에 명령에 따라 영국군들은 벵골지역의 쌀을 모조리 수탈해갔다. 굶주림에 지친인도인들은 어떻게든 쌀을 구하기위해 몸부림 쳤지만 쌀은 점점더 구경조차 힘들게 되었다.
쌀수탈정책이 시작되자마자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4개월만에 쌀값이 무려 61%나 폭등했고 그후 6개월만에 다시 4배나 올랐다. 쌀수탈 작전이 몇달 되지않아 거리는 옴통 굶주림에 지쳐 앙상하게 야윈 사람들로 가득찼고 죽음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즐비하게 수북히 쌓이는 참담한 모습들이 이어졌다.

영국에서 파견되어 식민지 국무장관을 수행하고 있던 레오 아메리는 이모습을 보다못해 긴급구호 식량을 보내 달라고 영국 정부에 건의한다.
"여기 아녀자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중이라 하더라도 ... 최소한의 인권은 보호할수 있도록....구호식량을 빨리보내주십시오"
레오 아메리 국무장관이 영국정부에 여러차례 긴급구호 식량을 요청했지만 처칠은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벵골대기근이 영국의 쌀수탈정책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알지 못했던 국제사회는 벵골지역 사망자가 계속늘어나자 벵골지역에 구호식량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심지어 처칠은 다른나라 배들이 직접 쌀을 싣고오자 그배들이 정박하지 못하도록 항구를 폐쇄해 버렸다. 결국 벵골은 국제 사회의 도움도 받지 못한채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죽음의 땅이 되고 만다.
처칠의 행동에 크게 실망한 레오 아메리 국무장관은 자신의 일기에 "인도 문제에 관한 한 처칠이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적어 놓기도 했다. 벵골대기근에대한 진상이 외부에 알려지기를 두려워 했던 영국정부는 처칠이 당시 벵골의 쌀수탈 정책을 지시했던 공식 회의록이나 보고서들은 모두 파기했고 벵골에서 있었던 대기근은 사람들에게 자연재해로 인한 참사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던 2010년 역사학자인 무케르지의 저서 <처칠의 비밀전쟁>[CHURCHILL'S SECRET WAR] 을통해 벵골 대기근이 자연재해가아닌 영국의 쌀수탈정책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폭로했다. 전세계 언론들은 벵골 참사로 사망한 700만명은 제2차 세계대전당시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 600만명과 맞먹는 수준이라며 처칠의 벵골 홀로코스트는 2차대전당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보다 더 규모가큰 학살이라고 처칠의 행위를 비난했다.
인도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으로 700만명이 굶주림속에 죽어간 벵골 대기근 그동안 당시 대기근이라고만 알려져왔던 벵골대기근의 진실은 한지도자의 전쟁에 대한 야망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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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작성자
날자:2014-02-07 21:46:57
독자님,맞는 말씀입니다. 처칠에 대한 나의 표상도 독자님과 같이 위인, 위대한 일화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여기에 퍼다가 함께 공유하려 한것입니다. 편짐같은것을 하지 않고 원문대로 옮기려했지만 너무 길어서 생략도 하였습니다. 작자의 서술이 이렇게 되여 있습니다. 원래 보기에도 끔찍한 사진이랑 올리려 했는데 사진은 옮겨지지 않네요.
다음의 검색창에 <시사평론. 정론직필>이라 써넣으면 나옵니다.거기에 최신글창에서 찾는데 제5(페지?)에 전문이 있습니다.
전달이 제대로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1   작성자 : 독자
날자:2014-02-06 22:56:32
좋은 재료인것 같은데 상세한 내용을 제대로 리해하기 힘듬니다. 리해하기 쉬운 단어들을 많이 썼으면 합니다. 어떤 문장은 리해하기 쉽게 쓸수있을것 같은데 어렵게 엮어 표현하는것 같습니다. 지금껏 처칠에 대해 좋게만 여겨왔는데 선생님의 소개를 보니 처칠도 살인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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