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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 창작열에 대한 진맥 댓글:  조회:3241  추천:10  2013-09-26
    . 대 담 .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열에 대한 진맥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사회자: 신금철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인물전기 “한락연”, “주덕해”의 저자)   첫 방송  2013.  08. 28   16:00FM 재방송   2013.  08. 29   08:00AM 재방송   2013.  08. 29   23:20AM         신금철: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조선족문단에서는 인물전기창작열이 한창 일고 있습니다. 저희 문학살롱에서 이미 소개드린 “한락연전”, “정률성평전”외에도 “주덕해평전”, “양림평전”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전기들이 창작되였고 또 지금 많은 작가들이 인물전기창작 기획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물전기창작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사조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소설가이며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열풍에 대해 진맥해보려 합니다. 인사. 조선족위인들의 인물평전창작, 아마도 요사이 우리문단의 신선한 기류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김혁: 요즘 우리문단과 출판계의 이슈를 뽑으라면 아마 인물전기창작 열풍일것입니다. 인물전기라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를 조선족 작가들도 뒤늦게 주목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우리문단에서는 근년들어 인물전기서의 창작과 출품이 마치 "봇물”이 터진듯 합니다.   신금철: 중국조선족문단 일반을 아울러보면 지금 어떤 작품들이 나왔는지 소개주시지요.   김혁:   그 몇부를 살펴보면 우선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와 김학철옹의 자제분인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이 중후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평전은 김학철옹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조선족문학의 거목이며 비운의 작가인 김학철옹의 삶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비장하게 손에 잡힐듯 그려져 있습니다. 책은 한국의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의해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지도자의 한분인 "조룡호 전기” (안룡정 저)도 나왔습니다. 전기는 자치주 주장직을 력임했던 조룡호의 항미원조시기로부터 자치주창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 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발전력사를 료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습니다는 평판을 받고있습니다.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김수영 저)도 출간되였습니다. 40만자에 달하는 작품은 중한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한 한 애국화교의 노력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연변대학 전 총장 림민호 평전도 발간됐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김호웅 저)라는 부제가 붙은 평전에서는 연변대학교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한 교육자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이 평전은 지난해 소수민족 준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녔지요.        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던 최채에 대한 인물전기 "불멸의 영령”(고 류연산 저)도 조한문으로 출간되였습니다.        오장숙평전 "내를 건너 고개 넘어”도 북경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역시 고 류연산 작가에 의해 집필된 "내를 건너 고개 넘어”는 풍부한 사료로 전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새중국이 배양한 우수한 조선족간부 오장숙의 일생 사업, 학습과 생활을 기록해 냈다. 평전은 중국조선족의 발전과 연변 여러 민족인민의 단결진보사업력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정계와 학계의 정평을 받고있습니다.        “아시아 주단왕”으로 불리는 광주모드모아그룹 리성일회장의 일대기를 엮은 인물전기 ”꿈의 마라토너”도 일전 출간되였습니다. 전기는 연변의 오지에서 태여난 한 조선족 기업가가 전국정협위원 그리고 아시아 주단왕으로 부상하기까지 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엮어보이고있습니다. 원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는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에서 성공의 신화를 엮은 리성일은 꿈과 야망을 지닌 젊은이들한테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다”라며 책을 독자들에게 권장했습니다.        다음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여나 30년대 상해를 무대로 맹아상태의 중국영화계를 주도하며 "영화황제"로 등극한  김염의 예술생애를 그린 인물전기 "영화황제 김염"(김창석)도 출판됐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주장인 주덕해의 일대기를 다룬 “주덕해평전”도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을 계기로 출판되였습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부주석에 의해 창작되였지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자이자 조선인민군 군가 작곡가이며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 3대 음악가로 지칭되는 "정률성 평전”도 리혜선 소설가에 의해 집필, "장백산지"에 지금 한창 련재중입니다. 리혜선 소설가는 "우선 중국에서도 위인이지만 조선족으로 놓고 볼때에도 크나큰 자랑이고 존경하는 위인이기에 민족작가로서의 사명감으로 집필에 착수하게 되였습니다”고 창작동기를 밝혔습니다. 평전은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 중점 지지작품으로 선정되여 이슈를 일으켰지요.        다음 조선인으로서 홍군의 2만5천리 장정길에 오른 양림의 려정을 쓴 "양림평전"도 리광인씨에 의해 창작, 출간되였습니다. 이 작품 역시 중국작가협회 중점지지작품으로 선정되였습니다.        그리고 룡정이 낳은 걸출한 조선족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로서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한락연에 대한 인물전기도 제가 집필해 연변일보 "종합신문"에 8개월여에 거쳐 련재를 끝냈습니다.   신금철:   이런 인물전기의 출판은 독자층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인물전기들을 어떻게 분류할수 있을가요?   김혁:   대량 산출되고있는 인물전기는 점차 새로운 독자군을 형성하고 있고 그 력사와 인물에 대한 진실한 기록으로 독자와 문단의 공명을 자아내고있습니다. 픽션(허구)작품을 압도하는 기세로 논픽션(비허구)쟝르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거지요.        그러면 우선 인물전기라는 쟝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사실 인물전기문학은 여러가지 종류로 분류 할수 있습니다. 전기물: 전기물은 어느 실존 인물의 생애를 동시대 또는 후세 사람이 기록한것입니다.   례를 들어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로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물입니다. 로신에 대해서는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조명해왔습니다. 그중에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주위의 문인, 학자들이 쓴 경우도 있고 로신이 작고한뒤 그 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여 쓴 경우도 있습니다. 자서전: 실존 인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것입니다.   례를 들면 저명한 사학가이자 문학가인 곽말약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사천성에서 태여나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학창작을 시작, 문학도로부터 갑골문에 대한 연구로 유명석학으로 발돋움하기 까지 자신의 생애를 자서전으로 출간하였다. 그 자서전의 수량은 방대하여 "북벌", "홍파곡" 등 9권이나 된다. 유명한 자서전으로는 인도의 "성웅" 간디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서안에서 1937년판 "모택동자서전"이 발견되여 재판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자서전으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의 "나의 전반생"이 있습니다. 요즘 서점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자서전은 한국의 첫 녀대통령 박근혜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绝望锻炼了我)"이다. 역림출판사에 의해 중문으로 번역, 출간되였습니다. 자서전은 한국 수뇌의 딸로 태여나 젊은 나이에 부모를 련이어 잃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소박한 필치로 들려주면서 그녀를 버티게 한 신념과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자서전의 갈피갈피에서 건넵니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인생 전반은 물론 한국 현대사가 담겨져 있지요. 회고록: 과거의 일을 그 관계자가 회상하여 집필한 기록이다. 기록한 사람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자서전적인 기록과 자신이 지켜본 력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현대문학의 거장 파금의 "수상록"이 그 일례입니다. 비록 수필형식으로 씌여졌지만 회고록의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이 "수상록"에서 파금은 문화혁명에서 피부로 겪은 피해를 회고해 보는가 하면 자기 문학인생에 대한 총결산, 그리고 문학 동지들에 대한 회고 등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고록으로는 영국수상 처칠의 전 12권으로 된 전쟁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평전: 평전은 말 그대로 비평을 곁들인 전기입니다. 전기물에 글쓴이의 평가가 담긴 기록이지요.   요즘들어 중국의 출판계에서 가장 많은 판본으로 나온 평전중 하나가 "공자 평전"입니다. 연변의 서점가를 살펴봐도 문화석학인 림어당이 쓴 공자로부터 중앙텔레비죤 백가강단의 저명한 강사 포붕산(鲍鹏山)교수의 공자, 그리고 일본의 유명한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쓴 공자 등으로 10여권은 실히 되게 서점가에 올라 있습니다. 력사적으로 유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유교의 창시자이자 아이콘인 공자에 대해 다가가려는 독자들의 구독열은 그냥 식지 않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렬전: 비슷한 일이나 업적을 남긴 사람의 개별적인 전기를 함께 모아 적은 것입니다.   례를 들면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것입니다. 상고시대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한무제 때까지의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신금철:   김혁선생님 역시 인물전기를 창작하면서 인물전기도 많이 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조선족대중들과 비교적 접근한 작품들을 꼽아본다면요?   김혁:   인물전기에 관한 리해를 돕기 위하여 우수한 인물전기 몇편을 소개할가 합니다. 우선 우리 민족의 력사와 직결된 평전 몇부를 나름 뽑아 보았습니다.        우선 님웰즈의 "아리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국 녀기자 님 웨일즈가 지난세기 30년대에 기록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로 많이 읽혀진 인물전입니다. 1920∼1930년대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살다 간 혁명가 김산의 고뇌, 좌절, 사랑, 열정, 사상의 발자취를 아름다운 문체로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항일전쟁의 열화가 중국전역에 파급되였던 1937년 6월,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의 초라한 방에서 손에 경련이 일도록 김산의 구술을 적어내려가면서 내심 감복과 찬탄을 금할수 없었던 그녀는 그후 인물전기문학의 진수로 오래동안 읽혀 내려온 "아리랑"을 집필해 냅니다.     김산의 원명은 장지락(張志樂)으로서 1905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 룡천군(龍川郡) 하장동(河張洞)의 한 자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여납니다.   1919년 일본 도꾜 제국대학에 가 고학을 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접하게 되고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저 시베리아를 향해 북상하게 됩니다. 그 길에 그는 중국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상해를 거쳐 북경 협화의과대학에 가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중국공산당창시자들인 리대소 등의 영향으로 조기공산당간행물 "혁명"잡지를 발간하면서 맑스주의를 접하게 되지요. 이 시절 중국공산당에 가입합니다.   1927년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국제주의기치를 들고 광주무장봉기에 동참합니다. 허나 봉기는 실패하여 200여명 조선인혁명가들도 목숨을 바칩니다. 퇴각해가면서 김산은 전우들의 의지를 북돋우고저 아름답고 슬픈 노래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1929년 5월부터 김산은 북경에서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면서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의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중국공산당 북평시당위원회 조직부장사업을 맡게 됩니다. 이시기 그는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벌려 일본학자 사노가꾸의 "무신론"을 중문으로 번역, 발표하는가 하면 조선의렬단 대원의 의거를 소설화한 작품 "기이한 무기"를 출판하였고 한시 "동지들이여 싸우자" 등을 발표하여 적들과 굴함없이 싸우려는 공산주의자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포이에르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번역본의 서언을 쓰면서 맑스주의철학을 터득하고 공산주의실현에 대한 굳은 신념을 다졌습니다.   1930년말 그는 국민당에 체포되였고 일본령사관에 넘겨져 갖은 혹형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과 조직관계를 절대 밝히지 않았지요.   1932년초 김산은 가혹한 고문에 페결핵에 걸려 신음하면서도 북경으로 다그쳐 돌아옵니다. 그는 리대소가 꾸린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진보적인 력사관을 전수하면서 당조직을 도와 학생운동을 이끕니다. 1933년 불행하게도 또다시 체포되여 천진 일본령사관으로 넘겨집니다. 다시한번 비인간적인 혹형을 받지만 김산은 강인한 의지력으로 적들과 싸웠습니다.   1934년 만기석방되여 또다시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김산은 당조직의 외면을 받기 시작합니다. 1936년 8월 김산은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천신만고를 겪으며 중화쏘베트지구로 갑니다. 이듬해 1월, 연안에 이른 그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초청으로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화학, 물리 등 학과를 강의합니다. 하지만 당시 섬감녕변구 보안처로부터 일본간첩으로 의심받고있는중이였습니다. 그러던 1938년 10월경, 그는 비밀리에 처형되고 맙니다.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습니다. 백색테로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을 밀고나아갔던 김산, 그는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피압박자들의 승리를 확신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은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은 조선족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고한다. 그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소개된 아버지의 력사를 알게 되면서 중앙에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판정을 시정해줄것을 바라는 편지를 띄워 봅니다. 1983년 1월, 중앙조직부에서는 몇년간의 조사를 거쳐 김산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당적을 회복할데 관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결정에서는 김산의 "죽음은 특정한 력사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억울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 "그는 당에 충성하였고 우리 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민족의 독립 그리고 공산주의의 실현과 이념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산화해 간 한 혁명가에 대해 만강의 열정으로 그려낸 "아리랑"의 저자 님웰즈는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입니다. 신문기자이자 시인이였던 그는 오랜 기간을 격변하는 아시아에서 보내면서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중국과 한국에 관하여 많은 글을 집필하였는데요 그녀는 다름 아닌 중국홍군에 대한 저서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스노와 결혼한후 남편과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중국혁명가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습니다.   신금철:   김산의 인생려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훗날 김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큰 기여를 했던 님.웨일즈의 “아리랑”이였습니다. 다음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요?   김혁: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꼽고 싶습니다.   윤동주의 생애 읽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여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만도 그의 시세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 석사학위를 받은 이가 무려 50여명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압권중의 압권이요, 경전중의 경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우리의 독자들이 너무나도 익히 알고있기에 그의 생애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략하기로 합니다.   신금철: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을 압권중의 압권, 경전중의 경전이라고 하는 리유는 뭔지요?   김혁:   우선 창작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작자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구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또 그를 중국조선족문단에도 널리 알린 "윤동주 평전"이 있습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으며 한국사 관련 론고와 학술론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등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력사학에 천착하면서도 원체 소설가라 뛰여난 작가적 감수성으로 송우혜는 10여년을 갈고 닦은 끝에 윤동주 생애에 대해 황홀하게 복원해 내였습니다. 친지와 친우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고 빈틈없는 현장답사와 풍부한 자료를 섭렵했는데요 룡정광명중학의 학적부,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동원하고 그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가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책상물림의 상상력 연 띄우기 방식이 아니라 치밀한 작업으로 실존적 고뇌와 준엄한 륜리적 태도를 지니고있는 한 고절한 시인의 마음의 행보를 샅샅이 더듬으면서 그 생생한 숨소리까지 평전은 들려주고있습니다. 평전을 읽노라면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의 려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그 외에도 평전을 통해 그 시대를 올곧게 살아내려고 애썼던 이들의 삶의 궤적을 우리는 만날수 있습니다. 민족을 위해 혼신을 던지면서 윤동주라는 고고한 별이 창공에 빛나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던 스승, 친지, 친구, 은사, 문호들인 김약연, 송몽규, 명의조, 최현배, 문익환, 정병욱 등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의 자취, 윤동주라는 별자리 주위에 모여 함께 빛을 내는 다른 별들의 공전과 밝음에 대해서도 더불어 료해할수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고향사람인 우리도 미처 몰랐던 연변지역의 당시 시대상과 풍토가 평전의 초반에 오렷이 그려집니다. 사건들을 추적하여 그 력사를 따라가면서도 다시 시의 궤적을 따라 시를 통해 력사를 읽고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 기법을 쓰고 있어서 문학인으로서는 인물전기외에도 시집, 작품론평을 읽는것처럼 "일석다조”의 감흥으로 읽혔습니다. 작가는 시인의 생의 순간순간에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대상에 대한 장악력으로 그 일거수 일투족을 묘사하는 치밀성에 엄지를 빼들지 않을수 없게 합니다. 과시 "윤동주라는 인물연구의 결정체요, 평전문학의 진수”라는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처럼 인물전기의 진수를 보여준 평전이였습니다. "윤동주평전”은 우리의 전기문학장르를 꿈꾸는 작가들에게는 범문이요, 독자들에게는 애장서격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것입니다.   신금철:   “아리랑”, “윤동주평전”외에 또 김혁작가님이 권장하고싶은 인물평전은요?   김혁:   박계원의 "중국영화황제 김염"도 참말로 읽어 볼만합니다. 중국 영화계에서 "영화황제”로 파란많은 일생을 보낸 김염의 예술인생을 조명하고 있는 평전은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중문으로 번역출판되여 지난 2012년 6월, 상해시작가협회에서 출간소식공개회를 가졌습니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향항, 북경, 대만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해영화에 두고있습니다.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 당시 상해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는데 바로 김염입니다.   김염(金焰)은 본명이 김덕린으로서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습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였습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살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 7원을 갖고 상해로 향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여 꿈을 펼치게 되였습니다. 손유감독은 햇내기의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틀)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지요. 1932년 그는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로 스타덤에 올르게 됩니다. 당시의 유명 녀배우 왕인미와 결혼했습니다. 왕인미는 영화 "어강곡(渔光曲)"에 출연, 이 영화는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영예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1934년)"를 제작했고 역시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향항을 점령했을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였습니다. 그는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이 제안한 출연요구를 거절하고 향항으로 피신했고 1947년 녀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습니다. 진이는 중국영화계의 유명한 원로 녀배우로서 "녀자롱구선수 5번"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62년 은퇴할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리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리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습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해에서 타계합니다. 현재 상해시내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신금철:   김염의 일대기를 인물전기로 펴낸 작가는 어떤 분인지요?   김혁:   중국의 유일한 영화황제 김염에 대해 다룬 저자 박규원은 1954년 서울 출생으로서 경기녀고와 리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김염 평전"에는 "-외할아버지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자 박규원은 우연한 기회에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이 자신의 작은 외할아버지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화려한 삶뒤에 불행한 력사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김염의 정신적 고뇌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자취를 따라 10년 동안 취재를 했습니다.   집필 과정에서 저자는 직접 중국어를 배우고 자료를 번역하는 등 무리하게 정진하던 저자는 건강이 나빠져서 큰 수술을 받았고 시력감퇴 및 합병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한 예술가의 삶을 재현하는 작업을 중단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 바로 이 "외할아버지를 찾아서”입니다.   이 전기물은 일찍 2003년 한국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는 세심한 자료조사와 친족들과의 인터뷰, 치밀한 현장답사를 통해 전기물이 가질수 있는 미덕을 잘 보여 주면서 중국 "영화 황제” 김염에 대한 복원과 더불어 "력사와 개인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함께 탐색하고 있습니다.   신금철:   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김혁소설가의 소개를 통하여 인물전기의 분류와 조선족대중들이 인상적으로 알고 있던 김산, 윤동주와 김염 등 위인들에 대해 알아보았고 또 그분들의 일대기를 인물전기로 펴낸 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중국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시리즈,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간 프로편집에 남철이였습니다..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 창작열에 대한 진맥 (2)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편집: 남철 사회자: 신금철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인물전기 “한락연”, “주덕해”의 저자)   첫 방송  2013.  09. 11   16:00FM 재방송   2013.  09. 12   08:00AM 재방송   2013.  09. 12   23:20A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 신금철. 지난 시간까지 세기에 걸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인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문단의 인물전기창작에 대해 조명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 두 번에 걸쳐 우리는 인물전기창작개황과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창작의 선두주자라고 할수 있는 류연산작가의 인물전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오늘 소개할 내용은요?   김: 전번기에 우리민족의 력사와 직결된 해외작가들의 우수한 전기문학작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면 이번 회는 중국조선족작가들이 근년래 창작한 우수한 작품 몇부를 추려 소개할가 합니다.   신: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 맨처음으로 김호웅, 김해양의 "김학철 평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인물전기문학이 아직 걸음마를 타고 있다고 해야 할 현시점에서 볼때 이 평전은 그야말로 평전문학의 강점들을 두루 갖춘 훌륭한 평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호웅,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은 2007년 한국 실천문학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신: 김학철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분이지요?   김: 네, 한번 그이의 파란많은 일대기에 대해 다시한번 더듬어 보기로 합시다. 1916년 식민지 조선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여난 김학철은 18세 때 민족독립을 위해 한몸 바치겠다며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상해에서 반일 테러활동에 가담했으며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하다 1941년 일제와의 호가장전투에서 한 쪽 다리를 잃고 일본군에 체포돼 4년간 나가사키 형무소에 복역하고 풀려났습니다. 일제와의 사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도 김학철은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혀진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의 투쟁의 붓자루는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정치 기제와 독재를 향해 삿대질했기에 그의 문학적 인생이 가지는 의의는 더더욱 의미심장하다고 해야할겁니다. 지난 동란시기, 우상화에 대해 반대한 소설을 쓴 연고로 김학철은 10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2001년 현대사의 질곡을 외다리로 넘어 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습니다는 걸 확인한 85살의 로작가는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21일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떴습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우편함에 담아 두만강을 타고 동해로 보내졌습니다. 김학철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드문 반골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평생 중국의 대문호 로신을 사표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제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탄압, 망명, 옥살이 등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지요.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랭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고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의 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조선의용군이 언제, 어떤 리유로 중국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였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철은 그 자체가 력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탐사의 한 리정표라는것이지요. 청화대학 왕혜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수 있습니다고 평했습니다. 평전은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항일투쟁의 마지막 증인이자 민족과 국경을 넘나드는 민족 문학가로서의 김학철의 전모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작가들은 고인이 남긴 자서전과 잡문, 기존 연구서들을 엮어 그의 인생과 문학, 철학 등을 새롭게 조명했습니다. 김학철이라는 인물의 영웅적 면모에서부터 지인들과의 관계, 가족과 일상생활 그리고 방대한 문학세계를 세세하게 그렸다. 국제주의자로서의 세계 인식, 죽음에 대한 초탈한 자세 등 그의 초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오래동안 김학철에 대해 연구해온 연변대의 유명교수 김호웅과 김학철의 혈육인 외아들 김해양이 함께 집필했기에 리론적인 면과 생활적인 면에서의 깊이와 넓이를 기할수 있었습니다.   신: 김학철선생은 자신의 삶 자체가 력사요, 교과서일뿐만아니라 소설과 잡문을 포함한 많은 작품도 우리 문단에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이 평전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경전적인 전기문학으로 되자면 반드시 전주(傳主)의 경력이나 인격 및 그 성취가 빼여날 뿐만 아니라 커다란 사회력사적인 인식가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개혁개방후의 중국조선족의 전기문학에서《진실성, 문학성, 지식성, 가독성(可讀性)》을 겸비한 외에도 사회력사적인 인식가치가 가장 풍부한 전기문학의 경전은 단연 김학철선생의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입니다. 그러나 김학철선생의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은 필경은 자서전이며, 본인의 자서전과는 다른 방관자가 쓴 《김학철평전》이 이를 받쳐주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독서계의 수요를 감안하여 나온 것이 바로 김호웅, 김해양 공저로 된 《김학철평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적시적이고 아주 필요한 책입니다… 김학철의 문학정신을 담론하는 것은 한낱 재미로나 행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우리중국조선족의 삶을 개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제 김학철정신을 궁행(躬行)하는 "실천적 김학철파”를 필요로 하지, 말로만 김학철을 기리고 칭송하는 "구두김학철파(口頭金學鐵)"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김학철평전》은 김학철의 문학텍스트들과 함께 우리문인들의 정신적 수양의 교과서로, 실천의 지침으로 될 것입니다." 평전은 20세기의 가장 처절하고 아픈 력사를 관통해온 비운의 작가를 그리지만 그 필봉을 심각함과 비장감에만 두지 않는다. 어찌보면 평전의 문체는 유머, 위트, 풍자로 점철된 산문을 수백편 펴냈던 김학철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실제 김학철 선생의 작품들을 보면 인간에 대한 선생 특유의 락관적인 믿음과 더불어 웃음의 코드가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음을 잘 알수가 있습니다. 민중에 대한 신뢰와 력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믿음이 선생의 작품의 주류를 이루면서 그 어떤 역경에서나 웃음으로 화해낼수 있는 생활자세를 준것입니다. 김학철선생의 특유의 문체적 구사를 따와서 집필을 이어나간것이 이 평전의 압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비운의 작가의 삶이 시종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손에 잡힐듯이 그려져 있습니다. 평전을 읽고나면 중국, 한국 일본 3국을 무대로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팔순의 삶을 살다 간 그이의 개인사외에도 중국과 한국 나아가 동아세아의 근현대사의 흐름을 읽을수 있고 그에 눈을 뜨게 됩니다. 평전은 그야말로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지난 세기를 오롯이 담아놓았습니다. 이것이 이 평전의 또 하나의 빼여난 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와 세상과 끝내 불화를 했던 김학철의 모진 인생과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삶과 문학은 따로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되며 진정한 작가의 자세란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 우리 시대와 문학의 참다운 사표(師表)였던 선생님은 이제 고인이 되셨습니다다. 그러나 그이의 평전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해, 사람에 대해 소중한 깨달음의 전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과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 민족의 대의를 위하여 치렬하게 왜적과 맞선 인물로서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뛰여난 문학을 이루어낸 인물로서 그래서 김학철의 길고 험한 삶의 려정을 평전으로 더듬어 보는 일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일이라 할수 있지요.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우리 문단의 태산북두로 군림했던 김학철선생님의 일생을 다시 한번 심도 있게 조명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또 어떤 작품들이 인물전기창작에서의 귀감으로 될까요?   김: 다음은 이미 작고한 류연산의 "류자명 평전"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도 가장 일찍 나온 평전이기에 특별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 류자명은 어떤 분이시죠? 우리에게는 어딘가 낯설은 이름인데요?   김: 류자명 선생은 한국충주에서 태여났습니다. 교사시절이던 1919년 학생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테러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것을 반일애국운동으로 여겼고 1921년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렬단에 가입했습니다. 1923년 발표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작성을 도왔고 항일 테러단체 결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40년부터 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한 그는 “6.25”전쟁 발발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고원지대 특수벼 재배법 등 농학분야의 뛰어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50년부터 30여년 동안 호남성 호남대학 농학원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류자명 선생은 한국과 조선으로부터 건국훈장과 3급 국기훈장을 받아 남북한으로부터 동시에 인정받은 보기 드문 독립유공자입니다. 류자명은 1930년대에 무한에서 중국의 대문호인 파금(巴金)을 만난 이후 평생동안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적 관계를 맺어간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류자명의 전기적인 행적은 파금의 작품에도 반영됐습니다. 파금의 문학활동초기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머리카락의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얘진 류자명의 모습을 보고 령감을 얻어 쓴것이라고 합니다. 류자명은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셌는데 파금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일투쟁속에서 분노와 고민때문에 흰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생겨났다고 그렸습니다. 류자명은 중국에서 농예사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았습니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호남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재배에 성공하게 되였습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습니다. 류연산의 평전이 나오기 이전인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류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장사에서 타계했습니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류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다. 2009년 호남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류자명 사적 진렬관을 꾸며놓았습니다. 김병민 감수, 류연산 집필로 된 장편인물전기 "불멸의 지사 류자명평전"은 2003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단재 신채호를 연구하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인 류자명에 관심을 가지게 돼 80년대부터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고합니다. 그러다 그 집필을 제자인 류연산에게 의뢰했습니다. 김총장의 자료와 중국에 사는 류자명의 후손 소장 자료, 그리고 당시 중국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기사 등이 이번 평전의 바탕이 됐습니다. 평전을 집필한 류연산은 "독립운동사에서 류자명의 위치를 새롭게 조명할수 있었습니다"면서 "특히 아나키스트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산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전은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항일투사의 첫걸음", "의열단", "격정시대", "농학자의 길" 등 모두 7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평전에서 류자명의 친필 한문 회상기에 대한 고증으로 드러나는 그의 인생행적을 비롯해 김구,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글과 편지, 그리고 파금(巴金) 등 중국 작가들에 대한 그의 정평이 실려 있습니다. 또 농업학자이기도 했던 류자명의 농업관련 성과도 살펴볼수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기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리회영, 김창숙, 신채호, 나석주, 조소앙 등 많은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 한민족사의 일부를  조명했습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평전의 집필을 위하여 류연산은 기성된 자료를 열심히 수집하였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자료도 깊이 있게 발굴하여 이 전기물로 하여금 문학성은 물론 력사적 진실성을 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작가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1985년 타계한 류자명 선생님의 발자취를 쫓아 철저히 고증을 통한 작품이기에 그 내용에서 베여 나온 글자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소중함을 더해주고 그 진솔함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 감회를 새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남경군관학교에 보내 군사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1926년 일본의 식민지 수탈에 맞서 나석주 의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케 한 작전도 선생이 계획과 지휘를 맡았던것으로 알려지는 등 의열단의 비밀참모로 활약한 그의 일대기가 상세하게 수록돼 있습니다.   신: 그러니까 류자명의 력사는 지금까지 편면적으로 기술되였다가 이번에 류연산작가의 평전을 통해 립체적인 인물로 부각되였구만요.   김: 그동안 류자명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거론의 대상이 아니였습니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서처럼 무정부주의련맹의 대표로 류자명이 있었습니다할 정도로 이름 한번 적힐 뿐이었습니다는 너무나 린색하고 왜곡된 표현을 바로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류자명 평전을 저술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 평전은 방대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전기인물 주인공의 의의있는 생애를 펼쳐보이고있을 뿐만아니라 타인들의 가치있는 평가도 까근히 연구해 주인공에 대한 인식적 가치를 한결 높이고있습니다. 작품을 읽어보면 력사의 현장속에서 류자명 선생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점을 감지할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류자명을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는 농학자로만 각각 기리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류자명선생을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농학자로서의 서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철저한 무정부주의 사상가로서 세계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며 자연과 공생해야함을 몸소 보여준 실천가로서의 류자명 선생에 대해 다각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물평전은 한 인물을 기념비적으로 부각하는 고고학 비슷한 신성한 작업이라고 봐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평전을 더 소개해 주시지요.   김: 다음은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의 “주덕해 평전”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을 맞아 조선족자치주의 설립을 주도한  주덕해의 평전이 출간됐습니다.        여기서 잠간 주덕해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1911년 3월 로씨야 원동지구의 한 시골에서 태여난 주덕해는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뒤 1936년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으로 류학을 떠났습니다.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 혁명의 성지로 통하는 연안으로 합류해 혁명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1949년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이자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인 주덕해는 연변에 파견됩니다. 1952년 9월 3일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설립되자, 그는 제1주석으로 선출됐습니다. 2010년부터 북경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는 련합으로 조선족인물평전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였고 《주덕해평전》이 그 작업의 중요한 일환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최국철이 그 적임자로 선정되였습니다. 최국철은 평전의 기초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기존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골라내는 작업이지요. 다음으로는 조사, 답사의 길에 나섰다. 주덕해의 자취는 중국 광활한 대지에 널려있어 이 부분의 작업량은 엄청난것이였습니다. 또한 연변자치주 창립 60돐 헌례작품이기에 작년 "9.3"전에 출간, 최국철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신: “주덕해평전”창작을 위한 답사과정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였습니다고 하던데요?   김: 2010년부터 현지답사를 시작하여 1차답사와 2차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주덕해의 국내 발자취를 따라나섰다. 할빈, 녕안, 밀산, 동경성, 서안, 연안, 남니만, 무한, 북경, 천진, 그리고 연변 8개 현시의 주덕해가 다녀갔던 모든 향진이 그의 답사코스였습니다. 관련인물도 60여명 취재하고 당안국, 도서관에 각종 문서를 열람, 서면자료, 구술, 현지답사를 통한 자료를 전부 수집하면서 인물에 대한 서술적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기초하여 전형적인 인물을 부각하기 시작했고 주덕해가 처한 국내외 시대적 배경과 주변의 환경, 겪은 력사를 통하여 주덕해의 성장과정을 그려갔다. 단순한 기술이나 묘사가 아닌 정치적, 인간적 발전단계를 설명해주는 작업이였습니다. 결과 세계속, 특히 구 쏘련의 영향속에서 중국혁명이란 력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지역이란 특수한 사업환경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방침을 충실히 집행하면서 조선족의 근본리익을 대변하는 자치주의 산파로 성장하기까지의 주덕해의 파란많은 려로를 9장 62소절 50여만자에 달하는 편폭에 담아내였습니다. 평전은 주덕해를 "탁월한 조선족 지도간부이자 오랜 시련을 겪은 공산주의전사"라며 "혁명전투 년대와 사회주의건설시기를 막론하고 시종 자신의 운명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결부시키고 피나는 노력을 다해 눈부신 공훈을 세웠다"고 정평했습니다. 평전을 통해 우리는 연변의 정초와 건설을 위해 혼신을 다한 주덕해의 헌신정신을 알게 되였고 인간적인 면을 알게 되였으며 그가 얼마나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였는가를 알게 됩니다.   신: 그러고보니 최근, 특히 2, 3년 사시에 인물전기창작이 부쩍 늘고 있고 그 량도 많이 제고되였다는 인상입니다. 또 한부 더 소개해 준다면요?   김: 근년에 창작된 조선족인물전기중에 빠뜨릴수 없는 또 한부의 작품은 리혜선의 "정률성평전"입니다.   신: “정률성평전”은 작가 리혜선선생이 금년 5월 7일부터 8월 21일까지 저의 문학살롱에 직접 출연하셔서 상세한 소개를 드렸던 작품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것은 이 작품이 우리나라의 중점지지작품에 선정되였습니다는 점이고 이 부분은 그때 상세히 소개되지 못했는데요, 오늘 기회에 그 점에 대해 소개주시지요.   김: "정률성평전"은 집필하기전에 벌써 큰 이슈를 터뜨린 작품입니다. 그의 집필기획이 중국작가협회에서 선정하는 2009년 중국작가협회 중점지지(扶持)작품목록중 기록문학 지지작품에 선정됐기때문이지요. 그후 조선족작가들의 적지 않은 작품이 국가중점지지작품에 선정됐지만 조선족의 창작작품이 이 프로젝트에 선정되기는 그번이 처음이였습니다. 중국작가협회는 2009년 중국작가협회 각 산하 단체회원단위에서 추천한 221부의 작품중 60부를 중점지지작품으로 선정했다고 공포했는데 그중 리혜선소설가의 "정률성평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평전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자인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의 예술인생을 다루고있습니다. 평전은 기본상 마무리되여 "장백산"잡지에 일년여 동안 련재중인데 아직 일부를 련재했음에도 그 치밀한 력사복구작업과 유려한 문체로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있습니다. 아직 완결하지 못했기에 간략한 소개로 그칠가 합니다.   신: 지금 조선족문단의 적지않은 작가들이 인물전기창작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 분야를 전반적으로 조명해볼때 지금의 현황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요?   김: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인물전기 창작과 출판이 활성화되기 시작한것은 근년래의 일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지난 80년대에도 다른 쟝르에 비해 인문전기문학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송정환의 "안중근", 김송죽의 "설한"등이 나왔다.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인물을 다룬 작품은 아니였습니다. 90년대 중기에 류순호 작가의 조상지"가 나왔습니다. 이 역시 타민족 인물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와 직결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오자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인걸들을 당시에 펴낸 작품으로는 리성권이 펴낸 조선족기업가 석산린의 창업기가 있습니다. 90년대 중기에 나온 회고록으로 연변대학 정판룡교장의 "고향 떠나 50년"이 절찬리에 련재되고 책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류연산작가를 필두로 시작된 인물전기 문학이 90년대말 이후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확한 통계가 아니지만 추산해보더라도 20여 종에 달하는 인물전기가 출간됐습니다. 그 중 우수한 몇부를 다시 집계해 보면 예술인, 문학인으로는 김학철, 정률성, 김염, 한락연 등이, 정치인으로는 주덕해, 조남기, 조룡호, 최채, 오장숙 등이, 항일운동가로는 류자명, 양림, 최진동 등이, 교육자로는 림민호, 정판룡, 김진경 등이, 사회인 기업인으로는  석산린, 한성호, 리성일 등등의 인물전기가 창작되였습니다. 또 민족출판사에서 "조선족 구술 시리즈"라는 기획도서들을 련줄로 출간하고 있는데 이처럼 자서전, 회고록의 출판 역시 증가세다. 굳이 인물전기라는 제목을 달지 않았더라도 인물에 대해 여러 쟝르로 탐구한 책까지 포함하면 종수는 더 늘어낙 됩니다.   신: 지금까지 창작한 작품도 적지 않구만요, 그리고 지난 번에도 얘기가 나왔지만 인물전기창작은 창작전에 작가의 참다운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자료수집, 답사, 확인, 집필 등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로 놓고 말하면 피나는 노력이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김: 무릇 글을 쓴다는것이 다 그렇지만 인물전기를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인물의 내면에 육박해 그 정신세계를 빈틈없이 포착해내야 하기때문이지요. 해당 인물의 삶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판단은 고스란히 인물전을 쓰는 작가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니 창작자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수밖에 없지요. 인물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결국엔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물의 생애와 활동을 서술하면서 인물은 물론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한 주관적 평가까지 드러내야 하는게 인물전쓰기의 어려움입니다. 이런 연유로 작가들은 평전을 쓰는 일은 결국 "글쓴이 자신의 력사적 태도와 문화적 인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 시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신: 그렇다면 작가들이 이렇게 고된 로동에 투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김: 우리의 작가들은 왜 어려운 인물전기에 적극 투신하고 있을가요? 그리고 왜 뒤늦게 인물전기문학이 문단과 출판계의 총아로 떠올랐을가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사학가들은 "력사 자체가 인물사다”라고 단언합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해 그 시대와 사회를 조망해 보는 데 인물연구의 특징이 있습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남긴 걸물들의 인물전기가 서점가에서 독자들의 눈길과 손길을 끌기 시작한것이지요.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합니다. 인물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피와 땀, 숨결이 살아 있는 인생의 면면은 지나간 시대를 오롯이 복원합니다. 인물사가 그 자체로 력사인 리유다. 인물전기에 오른 선각자들의 삶은 우리의 평범한 삶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들이 세상과 부딪치고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과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은 어떠한 영화나 드라마에 못지 않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삶을 자세하게 되살려보는것은 무척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민족사적인 립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신: 인물전기를 창작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력사를 리해해야 할가요?   김: 력사를 생동감 있게 리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대를 치렬하게 산 인물들의 인물전을 읽는 것일 겁니다. 력사 속에 박제화된 인물을 피가 돌고 살냄새 나는 인간으로 다시 만날수 있다는 데 평전의 진정한 매력이 있습니다. 또 인물전기 출간이 늘어나고 있는 리유 중 하나는 불안한 상황에 믿고 따를 만한 "롤 모델"이 부족하기때문이라고도 비평가들은 보고있습니다. 오늘날 변혁기 조선족공동체가 겪는 진통과 아픔은 우리에게 커다란 우려와 걱정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력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경험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으려 하는것이지요. 평론가들의 말처럼 "영웅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리더십과 좌표가 될만한 사람들을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인물전기가 가지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따라서 변혁기의 세상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대중들의 인물읽기가 출판계의 신조류로 자리잡은것입니다.   신: 그렇다면 인물전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요?   김: 정치인이나 예술가의 전기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일생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처했던 사회의 시대상,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룩해 낸 정치적, 예술적 업적에 대한 리해를 증진시킬수 있습니다. 우리 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 보다 남다른 삶을, 더 우수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게 하게하는 인물전이 가진 가치를 무시할 수 없지요. 인물전기의 출간이 증가하는것은 우리의 출판 시장과 독서 수준이 높아졌다는 방증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문학이 여러 쟝르로 양상을 보이고 다른 형태의 창작 소재들이 활성화 돼야 우리의 독서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할수 있는데 이는 문단의 척도와 우리 독자들의 열독 수준이 다양화 되고 성숙된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인물전기의 창작과 출판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라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신: 목전 우리 문단의 인물전기창작현황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가요?   김: 우리 인물전기 시장은 아직 열려 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기물창작에는 아직 허점이 보이고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원래 출판이 발달한 나라에서 평전 출간이 활발한데 아직 우리는 "붐"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지요. 그 밖에도 인물전기가 대부분 3,40년대를 살다간 인물들에 편중돼 있는데 균형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재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인물전을 쓸 젊은 작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인물전에 선택하는 인물들이 더 다양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력사의 향간에 묻힌 인물들 특히 영웅이나 위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물의 경우 그 조명작업에 착수하는 작가는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물선택은 "여전히 영웅사관에 갇혀 있습니다", 다양하고 더 훌륭한 사람냄새나는 인물전이 나오려면 영웅 중심, 사건 중심의 력사관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작가들의 인물연구나 창작지원 시스템도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인물전기에 관한 문학상시상식을 한번 치른다니 기대해볼만한 일입니다. 우리의 작가들이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력, 대중적인 필력만 갖췄다고 해서 모두 인물전을 쓸수 있는것은 아니다. 한 인물의 사상적·정신적 궤적을 깊이있게 다뤄야 하는 인물전기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력사와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끝나고, 후세의 사람들이 앞선 이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이가 살았던 때와 곳, 그에 맞선 그이의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들 내어진 것과 그로 인한 제반 결과물들에 대한 실증적 해석이라는데 전기의 핵이 있습니다.   신: 인물전기창작은 필경은 새로운 분야에 속하는데 목전 창작에서 어떤 부족점을 보이고 있는지요?   김: 어떤 전기물들은 인물전기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인물전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공표된 문헌을 토대로 쓰고있는데 글의 형식이며 내용도 필자 자신의 편견과 무지, 성의와 무성의가 고스란히 담긴 결함투성이의 미완성품들도 있습니다. 우리와는 무관한 인물들을 잘못 선택해 수고로움을 바치고도 그 작품이 출판조차 못되는 경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는 창작자의 창작물에 대한 선정과 창작관 그리고 그 창작자세문제입니다. 인물연구는 상대적으로 연구자의 수고가 많이 드는 연구작업입니다. 한 인물의 생애 전체를 추적해야 하는 만큼 1차 자료의 수집에만도 상당한 시간과 발품이 필요합니다. 전기 혹은 평전을 쓰는 사람은 그가 쓰고자 하는 사람의 제반 년대기적 자료를 모으고 정리합니다. 태여나고 죽은 때와 곳, 가계도와 성장 배경, 자라고 배우던 때의 증명 기록, 살아가면서 몸담은 곳에서의 제반 활동 기록 혹은 갖가지 증서의 사본은 물론 그에 대한 다른 이의 회고담 및 어울린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제반 자료를 수집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철저한 취재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료와 사료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가의 상상력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서만 얻어질수 있습니다”고 어느 평전 창작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베껴내기 식"이나 답사를 배제하고 고방에 박혀서 펴낸 "책상머리 평전"은 결코 설득력을 얻을수 없습니다. 어떤 인물전은 그야말로 작가의 년보를 그대로 베껴낸 장편리력서격으로 되여 있습니다. 그저 사처에서 자료를 퍼다가 성의없이 대충 짜깁기를 하고 만것입니다. 그러하니 인물전이 가지는 매력은 커녕 열독의욕까지 상실하게 만들지요.   신: 인물전기창작자의 올바른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다고 보는가?   김: 인물전을 쓰는 일에 대해 작가들은 "기록과 사람, 공간의 제약과 싸우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많이 읽고 만나고 돌아다녀야 좋은 인물전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전기물창작의 출발점은 표층적 자료에 대한 올바른 리해와 검증이며, 더 나아가 검증된 자료의 타당성과 진실성을 확보하면서 오류를 밝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물의 활동년도나 시대배경에서 작자의 수준미달로 오점투성이의 인물전기도 만날수 있습니다. 선택된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관심있는 독자들은 그러한 오점에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인물의 활동년대마저도 제대로 명기하지 못해 오점이 속출한 인물전도 있는데 한두곳이면 작가의 소홀이라고 볼수 있으나 여러번 이런 현상이 속출하면 이는 선택된 인물에 대한 례의의 상실, 치렬한 작가정신의 부재라고 볼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인물들, 이미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지금", "이곳"으로 끌어내 가상의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만큼 한 인물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지요. 전기는 빈틈없는 론리와 현실에 대한 탁월한 리해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쓰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가 금전적 수요에서 출발한 알량한 전기물들은 흔히 삶의 론리가 어긋나 있고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뜻과 행위의 결과가 혼재합니다. 문단과 독자들은 그런 전기물을 외면할것입니다. 해외의 여러 인물전기, 평전들을 보면 평전마다 특색이 다 다르다. 어떤 평전은 소설같고 어떤 평전은 공구서적 같고 어떤 평전은 현학적이고 어떤 평전은 지어 동화 같습니다. 이 처럼 여러가지 문체적인 특점으로 한 사람의 감동적인 일생을 정확하게 전달해야합니다. 그리고 전기물의 창작은 해외문단, 중국문단이나 우리와 같은 한글을 구하하고 있는 한국문단이 우리보다 앞선것은 물론입니다.   신: 주류문단인 중국문단과 해외문단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김: 중국문단에서는 한 위인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여러 작가들 그리고 여러 출판사가 다투어 출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례하면 모택동에 관한 인물전은 수십권도 넘습니다. 한국에서도 안중근이나 단재 신채호같은 인물에 대한 전기물은 한 두사람이 아닌 여러 작가들의 연구물로 대량 쏟아져 나오고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링컨 전 대통령 사후 무려 180여 권에 이르는 링컨 평전이 쏟아졌다고합니다.   신: 우리 문단은 여기에 어떻게 비교되는지요?   김: 우리는 우리 민족이 낳은 우리 고향을 활동반경으로 하고,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우리들만이 자호할만한 우리들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물전기 문학의 승산점입니다. 례하면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와 같은 인물입니다. 해외서 그에 대한 전기물은 벌써 5,6부정도 나왔다. 하지만 우리작가들은 이제는 아시아에서조차 그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있는 고향이 낳은 위인에 대해 아직도 조명하지 못하고있는 실정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빼여난 지어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않은 인물들의 가치를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시대의 단면을 총체적으로 증명합니다. 인물전을 쓰려면 인물이 속했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비교적 근세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가 먼 력사속 인물의 평전을 쓸때는 더욱 그렇다. 평전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특정 시대의 총체적 사회상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온전히 드러내는데 있기때문입니다. 이 작업엔 인물이 속한 시대에 대한 통사적 지식은 물론, 정치·사회·문화사적 인식이 총동원돼야 합니다. 시대에 대한 정교한 인식망이 구축된 뒤에야 인물의 행적과 언행, 인식에 대한 엄정한 평가도 가능한거지요. 여기서 학계의 동원이 필요됩니다. 인물연구만큼 학계의 연구가 필요한 분야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 인물연구의 자리는 좁다. 특별한 연구방법론이 마련된것도 아니다. 인물전이 어느 정도 각광받고 있는 것과 달리 학계의 인물 연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문학인들은 김학철과 같은 거물급 몇몇분에 치중되는 점을 볼수 있습니다. 인물연구가 학계에 흡수되지 못한채 소설이나 평전의 장르로만 자리매김 되고있는것입니다. 대학가에서 우리의 인물연구가 하나의 학문령역으로 정착됨이 좋을듯 합니다. 실제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선 전문적인 논픽션 작가들이 인물전을 주로 쓰는 데 반해 우리문단은 작가들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픽션 작가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 "력사학자들은 딱딱한 론문적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소설가들은 사료에 대한 평가와 검증 능력이 취약하지요. 서로 보완해야할 부분입니다. 단 문학인들이 고군분투하는 작업뿐아니라 력사, 철학 연구자들의 합동연구가 뒤받침 돼야 묵직한 리론과 아름다운 문체가 혼합된 훌륭한 인물전이 탄생하게 될것입니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과 그 력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열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입니다.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기술하면서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근년래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문단에서 뒤미처 인물전기가 각광받는 풍토가 일고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이제는 어중간한 수량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우수한 수작(秀作)의 미량(微量)으로 우리의 전기문학은 아직도 걸음마타기이며 그 저변이 아직도 척박하다고 봐야겠습니다. 작가들의 노력으로 력사와 지식과 정보가 담긴향기나는 인물전을, 정녕 우수한 인물전을 기대합니다.   신: 중국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을 두고 참으로 보귀한 말씀 주셨습니다.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오늘까지 4기에 걸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을 모시고 중국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을 둘러싸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우리의 작가와 독자들의 인물전기창작에 다소나마 리해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상 오늘 문학살롱 여기서 줄입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댓글:  조회:3057  추천:8  2013-08-13
. 대담 .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  몇해전 한춘선생님과 나누었던 대담을 다시 게재하는 것으로 삼가 고인을 기리고자 한다.   대담자 김혁&한춘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한춘: 시인, 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   김혁: 한춘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이렇게 메일로 “변강의 오지” 연변에서 “동방의 빠리” 할빈에 있는 선생님과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어 참 기쁘군요. 한춘: 반갑습니다. 김혁작가님. 김혁: 그런데 생님이 보내신 대담고가 저의 컴퓨터의 시스템이 구식이여서 파일이 열리지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려 신식 시스템을 쓰시는군요. 오늘 저희들이 이야기하려는 화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각 TV채널들에서 드라마 “신판 수호전”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붐을 타서 90년대판 “옛 수호전”도 어떤 채널들에서 더불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신구 드라마를 비교하하면서 시청하노라니 느끼는바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불변하는 명작의 매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가 합니다. 한춘: 네.마침 중국 항간에 도는 이런 말이 떠 오릅니다."나이들어서는'삼국(연의)'를 읽지 않고 어려서는'수호(전)'을 읽지 않는다(老不看三国,少不看水浒)" 말하자면 다 명작은 명작인데 부동한 년령에 따라 부동한 자세로 작품을 접수한다는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명작일진데는 명작으로서의 '매력'이 객관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 할때 응당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긍정하고 보편적으로 존중하고 보편적으로 선호한다는 공성을 띄고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이런 대담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조설근의 ”홍루몽” 원문을 읽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홍루몽”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30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만화책을 읽고 알게 되였다는 것, 영화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에니메이션을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테레비 특강을 듣고 알게 되엇다는 것,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엇다는 등 그 도경은 각기 달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공동한 점이 있으니 ”홍루몽”이 중국의 명작이고 보옥, 대옥, 보차의 삼각관계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는 점입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비록 작품 원문을 읽지 않았지만 ”홍루몽”이란 작품을 대체로 긍정하고 대체로 선호하며 대체로 숭상한다는 이 점입니다.  김혁: 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명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발표이후 오랜 시간 국계와 민족을 넘어 여러계층의 인류에 회자되는 명작들은 지난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있지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물결속에 “옥석”을 가려내기는 쉽지않습니다. 여기서 널리 회자된 명작들을 찾아드는것이 바로 그 옥석을 가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일겁니다. 그러고보면 명작들은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게 아닙니다. 명작만이 가지고있는 매력은 우리 독자들 더욱이 우리 문학창작자들이고 보면 영원히 읽어가야 할, 연구해 나가야할 화두이겠지요. 한춘: 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이 그 명작들을 소외하고 있다는 그점이지요. 학생들에게 다른 한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잎 얼마이던가(夢里花落知多少)를 읽어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수풀처럼 손을 들더군요. 나는 이 책을 한 30페지쯤 읽고 더는 읽어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작품의 재미는 20대 좌우 청춘남녀들의 구미에 맞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일흔을 바라는 나의 독서취미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혁:     곽경명은 어느 설문조사에서 로신, 파금(巴金), 로사(老舍), 가평오(贾平凹), 여추우(余秋雨)와 더불어 중국10대작가명단에 올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0대작가이지요. 제 딸애도 곽경명의 팬 입니다. 곽경명이 주필을 맡고있는 잡지 “최소설(最小说)”을 창간호부터 소장해 두고 있습니다. 몇백만부가 나가는 신세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알고있습니다. “소설월보”나 “수확”, “망종”같은 80년대 베스트 잡지를 읽어온 저의 세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보이는 잡지였습니다. 다른건 제쳐놓고도 오늘의 세대와 오늘 독자층의 미감을 겨냥한 모던한 잡지로서 그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잡지를 딸애네 또래들은 걸탐스레 읽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을 읽으라고 몇권 굳이 추천하니 “그런 ‘구닥다리’를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딸애또래들의 이런 반응을 보노라니 곽경명이 10대작가에 선정된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리던 비평가들의 론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비평가의 남다른 분석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청소년들은 류행문화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고있고 독자의 독서취미와 문화형성은 종합적인 형성과정이다. 례를 들면 류행가요, 네트워크 등은 청소년들의 문화형성에 거름을 주고있으며 문학은 단지 류행문화의 일부분일뿐이다.하기에 억지로 독자들에게 로사,파금의 작품을 읽게 하는것은 이제 더는 현실적인 독서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론점으로 볼때 신세대들을 위한 그들만의 적성에 맞는 열독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춘: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와 명작의 구별점을 화닥닥 팔리는 것과 오래 오래 줄곧 팔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사실 지금 신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취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있을 따름입니다.그러나 명작은 어느 한 사람의 취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은 다 문학감상과 예술감상에서 자기의 취미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내심 수요에 따라 좋아하는 어느한 풍격이라던가 어느 한 내용이라던가 혹은 어느 한 형식에 취미를 가질수있습니다.이런 취미는 타고 난 천성이며 천성이기 때문에 당당한 당위성과 합리성이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취미의 각도와 시점과 층차와 차원이 각기 부동할 뿐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표준과 대중적인 표준이란 두가지 표준이 있습니다.때로는 대중적 표준과 개인적 표준이 통일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때문에 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본다면 백사람이면 백 하나의 답이 있을수 있습니다. 김혁: 이른바 명작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요즘 독자들은 우수개로 말하더군요.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게 “명작”이라는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들어 달라진 독자들의 “열독취미”대로 명작은 대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려행기”,  “돈키호테”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른바 “잘 읽혀지는 명작”이라 할수 있지요. 이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라 하겠지요. “제인에어”, “몽떼그리스도 백작”, “삼총사”같은 작품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되겠죠. 다음 한가지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강”, 또스또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까뮈의 “페스트”, 유고의 “93년”같은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작가와 작품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완정한 문학 텍스트로 읽지 못한 이들이 많지요. 책의 분량이나 문체의 표현, 구성방식이 독자들뿐아니라 전문 창작자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유고의 “레미제 라블”같은 명작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듯 합니다. 한춘: 여기서 독자들의 시각을 헤아려 볼수 있겠지요. 로신이 ”홍루몽”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독자의 감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경학자들이 읽으면 '점치기'로 볼것이요 도가들이 보면 남녀 상열지사로 볼것이며 문인들이 보면 사랑이야기로 볼것이며 혁명가들이 보면 청나라를 반대하는것으로 볼것이고 난봉꾼이 보면 대궐안의 스캔들이라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라 할 때 명작으로서의 기본 요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예술표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작 예술 표준에도 여러가지 설법이 있겟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서 명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고 봅니다. 첫째 독자의 기본 심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 요소입니다. 이 매력요소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리론과는 좀 다른 견해일것입니다.모택동은 ”홍루몽”을 세번이나 읽었다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후에 두번 다시 읽으면서 홍루몽을 통해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력사를 읽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즉 작품의 심각한 철리, 사상, 시대성 등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령 철리나 사상이라 할때 이와같은 사상이나 철리는 다 우리 내심의 기본심성 본체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존재한것입니다.공자나 로자, 장자, 그리고 맑스나 헤겔이나 칸드의 사상이 다 위대한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고금중외 대현인, 대사상가,대철학가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만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튀워줄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본 심성의 각성을 대치할수는 없는것입니다. 명작이라 할때 작품에서 제시하려는 사상을 자기가 체득한 인간 심성의 보편적인 감수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일생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로 남아 있게 합니다.즉 명작은 작자의 감수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수를 새롭게 살려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둘째 명작은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를 개우쳐 준다.인간심층의식이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역성을 초월하여, 시간의 전후를 초월하여, 피부색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전달하는 하늘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예하면 궤테의 ”파우스트”는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일단 그 희구가 실현되었던가 자기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면 그 즉시 파멸, 추락,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는 영원한 추구의 힘을 실어다 줍니다.이점은 인간 실존의 기본이라고도 말할수 있거니와 이와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심층의식의 각성은 작품의 예술감화력, 즉 작품의 매력과 정비례가 됩니다.   셋째 명작은 남다른 독특한 작품 형식과 수사법으로 읽는 이의 신경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쌓은 ”금병매(金甁梅)”는 역사이야기를 쓴 ”삼국연의”나, 영웅전기를 담은 ”수호전”이나. 판타지같은 ”서유기”와 달리 인정세태, 세상물정을 쓴 명작입니다.서문경이 갑부로 된 이야기로부터 그가 쇠락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인정세태를 묘파하기 위하여 작자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그에 합당한 형식인 간결한 묘사(白描)법을 아주 능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로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금병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자는 당시 인정세태와 세상물정을 통달하였으며 손금보듯 환하게 잘 알고 있다. 작자가 형용한 것을 보면 혹은 류창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인 폭로로, 혹은 함축적인 풍자, 때로는 여러가지 수법을 겸용하여 서로 어울리어 변화무쌍하게 하는 등 정말 무릎을 칠 정도다.’금병매’작자의 간결한 묘사법에 관한 한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한 인믈을 쓸때 그 말투로부터 시종 일관하게 그 인물의 기본 성격을 그려냈는바 간결한 묘사 몇 마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었다" 그 어떤 형식을 취했든, 그 어떤 수법을 취했던 작품의 표달방식과 전달형태에서 독특한 개성을 구비했을 때 독자들의 취미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틀, 즉 형식이 있으며 이 형식이야 말로 읽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수 있습니다. 김혁: 네 때문에 비록 손쉽게 접하는 명작이라 해도 읽는자의 시각에 따라 틀릴수도 있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그 극적인 스토리와 뛰여난 판타지성격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에게도 매우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뛰여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젊은 층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들어 있어 베스트라는 쉬운 범주로는 묶을수 없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어눌한자의 코믹한 무용담으로 보이겠지만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지요. 또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데서 그 작품이 가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작에 대한 번안, 개작작업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진행되고있는것이지요. 그중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끊임없이 번안되고 드팀없는 사랑을 받는 “삼국지”를 일례로 들수 있겠지요. 한춘: 아시다싶이 중국, 한국, 일본은 이른바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서 고대로부터 상호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일찍 당나라시기 일본과 신라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 장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당나라는 빈공과를 설치하여 이와같은 외국 유학생의 과거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신라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그중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취록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신라방 사적이 유명합니다.즉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화가 일본과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상황을 살펴볼때 조선조 초기 선조(1568――1608제위)가 ”삼국지연의”를 읽었습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다니는 사절단들이 중국의 소설을 행장에 몰래 넣어 들여 왔고 가장 처음 정음으로 소설을 지은 허균(1569――1618)의 중국문학소개를 보면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서유기”등 중국의 명작이 이미 한국에 전파되였습니다.원래 유일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한 국가가 중국이며 이로서 중국문화에 경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시기 아주 발달한 중국의 소설문학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 소설에 경도되는것은 가히 리해할만한 일입니다.이때로부터 ”삼국지연의”에 관한 내용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재탕되었는데 시조에도 자주 나오고 서울 잡가에도 나오며 유명하기는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마당으로 자리를 굳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야기로 남게 되였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에 물젖은 한국인들의 사유방식과도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쇄문화의 발달과 다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삼국지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삼국지 파생물이 소비자들의 구미를 한껏 돋우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번역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찍 월탄 박종화의 번역이 있었으며 이어 리문열, 황석영의 번역서와 중국 조선족 리동혁의 번역서가 줄줄 이어 나오면서 한국독서계의 장안화제로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삼국연의란 명작 자체의 브랜드 자원을 빌린것도 있겠지만 전투장면의 세밀한 묘사, 대규모 전쟁의 용병술, 일대 일 교전의 충격,명책사, 명재상, 명장군 등 각 부동한 력사인물의 개성적인 성격과 그들의 운명 등이 가슴에 구멍이 나도록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놓고 볼때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높고 적극적으로 외국 문화를 접수하는 전통이 있으며 한국의 고전 군담소설에서 삼국지와 같이 인기를 끌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익숙하고 또 접수 수용에 거부감이 적은 중국의 삼국연의를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것은 선진문화에 대한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김혁: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는 그 정평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방영되고있는 “신판 수호전”에 앞서 “신삼국연의”가 새로운 버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화제가 끊기지않고 있지요. 총 95회라는 방대한 용량에 중국 최고의 연기자 군단과 거대한 투자가 결합되어 화려하고도 거대한 영상미와 숨 가쁜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진정 명작이라는 그 웅숭깊은 문화력의 력동을 보아낼수 있었습니다. 한춘: 이 현상은 마치 오월단오가 중국에서 유래되였다고 하더라도 오월단오에 담은 문화내역이 완전히 한국화되었고 또한 극대화 되어 강릉단오제가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여 유네스코에 기록된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도 한국의 종묘제레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 무형문화로 지정되고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지만 한국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여러 문화, 종교 령역에서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화라는것은 류동하고 접목되고 파생하는 특징을 갖고 잇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다 자체의 국한성과 제한성과 빈 공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타국이나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접수, 수용, 개조, 활용하여 자체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것이 인류뮨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김혁: 장예모의 영화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그 복색차림이나 미술배경이 일본의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 擇 明) 의  영화 “란(亂)”을 많이 닮았다고 비평가들이 꼬집었는데 면바로 보았지요. 그 복장설계는 다름아닌 구로사와의 손녀가 맡았던거지요.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서 장예모는 그 우수한 영상미를 수용하고 활용해 냈던거지요. 사실 구로사와 자신도 영화 “란”의 모티브는 쉑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따오지 않았습니까. 장예모의 경우 그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는 류항(刘恒)의 명작 “복희(伏羲伏羲)”를 개편한것이고 그 영화가 다시 무극으로 개편된적 있습니다. 또 이딸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세계적인 오페라 “투란도트(图兰朵)”도 장예모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적 있습니다. 조선족의 저명한 테너 김영철도 극중에서 한 인물을 맡은걸로 알고있는데요. 이렇게 명작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독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 수용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로운 명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대미감에 걸맞는 새로운 쟝르와 문체로 변화하여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거지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말하자면 그중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의 개편현상도 일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한춘: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된것은 커뮤니케이선이 고도로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그 진원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놓고 볼때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이런 문화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혁: 네.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어 있는 나라이지요. 일본에서는 오래전 90년대초에 이미 “삼국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2009년전에야 삼국지를 애니메이션화 했는데 그것도 제작진을 살펴보니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한춘: 네 그것이 이제는 또 게임으로 변화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또 한차례의 고조를 이루었으며 지금 중국도 청소년들이 여기에 매몰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은 도박성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인데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집을 저당잡히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편에 빠지면 안해까지 팔아 먹는다." 도박이 사람을 끄는 그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명작 게임같은것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력이 약한 그들에 끼치는 피해는 너무너무 엄청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태여나면서 즐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운것은 번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선호하고 이를 좋아하고 이를 반기는 청소년들이 많아 시장전경은 언제나 밝다. 이것이 명작 게임이 시들지 않는 원인입니다. 에니메이션은 게임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내 손녀가 지금 1학년에 다니는데 학교 가기전까지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데로부터 지금은 테레비나 컴퓨터앞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글자도 한 2천자쯤은 읽을수 있는 형편이며 슈제트 발전변화도 가히 알수 있는 처지라 집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여 손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아동프로만 보는데 주로는 에미메이션을 봅니다. 일단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하면 할매 할배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밥도 테레비 앞에서 독상을 차리고 먹습니다.아주 생동하고 기이한 인물 이미지 디자인, 그리고 층격을 주는 등장인물(등장물)의 엑션동작, 맑고 밝은 화면설계 등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끄는데는 너무도 충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손녀의 생활이 너무도 단조롭기에 테레비나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견문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출발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드문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제접 청산류수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이어 엮는다.말하자면 에니메이션은 아동들의 지력개발에 일정한 도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하기에 애니메이션제작이 요즘 영상 제작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미식”으로 되여 있지요.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꼬마양과 승냥이(喜羊羊 与灰太狼)”라는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캐릭터에 권선징악의 낡은 제재를 되풀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7억여원의 수입흥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춘: 그러나 여기에 역작용도 있을것입니다. 그 역작용은 적어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테레비같은 시청에 취미를 붙이면 앞으로 독서취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김혁: 저희 세대까지도 흑백텔레비 그리고 컴퓨터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환경을 지내왔습니다. 변변한 대중매체가 없어 어차피 도서에 친숙하게 되였지요. 그런 우리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에 로출된 요즘 세대가 독서에만 매여 있는다는게 사실 쉽지않은 일로 되여버렸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모바일등 을 통한 다양하고 현대화한 기기들을 통해 새로운 독서방식이 새 세대들에게 널리 풍미되고있습니다. 한춘: 도서는 인류문명에서 지금까지 창조한 가장 최고, 최상의 문화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성장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취미는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여야 하는것이지 다 큰 다음에 새로 독서습관을 키운다는것은 가능성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학을 지망한다던가 인문과학에 취미를 붙였다면 몰라도 대체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명작의 내용을 거의 다 알게 되면 앞으로 명작 본문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결과 그는 명작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명쟉을 읽고 읽지 않는것은 한 사람의 문화품위와 관계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긴 컴퓨나 테레비가 없을 때도 명작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해진 지금 작가지망생이 아니면 꼭 명작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것 또한 고루한 생각일것입니다.  김혁: 네, 절주빠른 요즘의 현대생활에서 몇권 지어 수십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작품의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등 여러가지 탓도 있을 것이구요. 때문에 명작을 번안함에서의 현대독자들의 새로워진 감수에 맞추기 위해 제작자들은 고심하고 있지요. 그 좋은 일레가 삼국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중국 방송국들은 삼국지를 드라마로 만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완연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삼국지”의 재래의 판본들은 전체적으로 류비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조조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러한 틀을 버리고, 삼국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그려냈으며 “간웅” 조조를 시대의 영웅으로 발굴해 새롭게 력사의 무대에 올려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지”하면 무조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도원결의”는 이번 작품에서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 언어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정통사극 형식을 따르면서 매우 “난해한” 용어들이 많았다면, 신작의 경우에는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웅장하고 스케일이 넘치는 화면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도로 바쁜 절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참조계의 “성찬”에 미뢰을 잃고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는 독자군에게 명작의 진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지요. 서점가에서 보니 “자동차족(汽车族)”들에게 명작의 일독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족들의 CD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명작 고전들을CD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나오고있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도라 볼수 있습니다. 명품차를 몰고 달리면서 “동으로 흐르는 강물/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성패 다 씻어가 버렸네”하고 “삼국지”를 경청하는 장면, 그야말로 현대인의 맛과 멋이 우러나는 쿨한 풍경이 아닌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온라인에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고있는 “타임머신 삼국지”에서는 “보마”승용차를 몰고 동한말기로 돌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명작의 패러디 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가 합니다. 명작에 대한 패러디는 상업에 치우친 결과물일가요? 아니면 명작에 대한 비하일가요?   한춘:  명작의 페러디 현상을 단순한 모방작으로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넓게 파생작품으로 확대하여 볼때 할말이 많아집니다.  십수년 전 섬서성의 유명한 작가 가평오(贾平凹)가 장편소설 “페허의 도읍(廢都)”을 발표한 즉시 평단의 빛발같은 지탄을 받았다. “금병매”를  흉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어보아도 그 지탄이 과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왕씨 노친이 서문경에거 금병매를 접근할때 술상에서 맘을 떠는 열가지 수작을 서술한 “금병매”와 “수호전”의 그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서안일대의 인정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수작이 틀림이 없다. 곽경명의 성공작(成名作) “꿈속에 지는 꽃 그 얼마이던가”는 완전히 도작이라는 볍원결론까지 나온 작품입니다. 비록 그가 도작한것은 명작은 아니지만 그가 도작하여 새로 쓴 작품은 베스트가 되였다. 곽경명은 도작이라는것을 승인하면서도 공개사과서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우겨 지금까지 나왔다. 이처럼 패러디 현상이 문단을 흐리는 일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 하는것은 이런 패러디가 아니라 파생작, 이를테면 명작을 견본으로 한 다른 예술쟝르의 개작, 예하면, 후속작(續作), 개작(아동판, 축소판), 드라마, 영화, 회곡, 만화, 에니메이션, 음악, 미술작품 등을 두고 몇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형식으로 파생되었던간 명작 원작은 이로서 괴멸됩니다는 점입니다. 즉 원작은 사라지고 개변된 작품만 살아있게 됩니다. 개변된 작품은 원작을 두번이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한다. 첫째는 예술형식의 개변이요, 두번째는 시대적 개변입니다. 부동한 예술 형식은 부동한 예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하여도 원작 원유의 예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한 시대에 부동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원유 예술의 지향과 멋과 맛과 향기를 변형없이 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열기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신편삼국연의”와 “신편수호전”, 그리고 얼마전에 구설이 많았던 “신편홍루몽”은 거대한 투자와 최고의 출연진, 최고의 연출 들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보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원작에 물든 사람을 끌기에는 택부족한 것입니다.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그나마 전쟁장면이나 격투 장면이 있어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일정하게 안구를 흡인할수 있지만 “홍루몽”은  안구를 끌수 있는 장면을 만들 그런 ‘감’이 별로 없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혀 볼품없이 됩니다. 예하면 림대옥의  ‘명작’, “홍루몽”의 주제시라고 할수 있는 “꽃을 묻으며 읊은 시(葬花詩)” 는 림대옥의 애절한 심경을 가장 핍진하게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 대목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림대옥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차적인 시청각 예술로서 시청자의 시간적 음미여지를 주지 못한다. 때문에 림대옥의 인물성격을 요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존재하고 자원은 그것을 활용할때라야 충분히 자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문화자원의 가치는 시장가치와 예술가치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문화가 무대를 만들고 경제가 주역이 되어 출연한다”라는 말이 성행했고 각지의 관원들의 입말이 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이 말에 어페가 있습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도 하나의 산업이 되어 얼마든지 재부를 창출할수 있습니다는 일념이 선것입니다. 장이모오의 영화 한편의 입장권 요금이 2억원을 넘는것이 있습니다고 하니 그가 창조한 문화제품의 재부는 대단한것입니다. 명작의 여러가지 파생물은 문화자체가  문화자원을 개발하여 일정한 예술가치와 시장가치를 잘 결합시키려는 한 도경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극(越剧)  “홍루몽”은 원작의 묘미를 다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월극으로서의 예술미는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또한 월극이 중국의 국수(國粹)나 다름없기 때문에 문화자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시장을 겨누고 명작을 리용하는것은  예술의 ‘매력’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것일뿐입니다. 지금 많은 명작 파생물에 돈냄새가 너무 나는것이 현실이며 이 또한 어쩔수 없는 시장경제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같은 생각입니다. 명작은 영화나 예술 작품에 무궁무진한 모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쟝르와 국적, 세대간의 벽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된 명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유기”의 경우를 보아도 그 패러디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그중 홍콩의 코믹영화의 선두주자 주성치가 패러디한 몇부는 이제 오승은판 서유기가 아닌 주성치판 서유기로 새로운 경전으로 자리매김되여있습니다. 영화에서 손오공은 시시때때 깝쳐대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랑의 순애보에 빠진 인물로, 당승은 진지한 승려가 아닌 수다스러운 아낙네로 나오고 대사도 지어 영어나 신조어로 란무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 그리고 제법 깔끔한 촬영화면, 공력들인 몬따쥬 구성으로 영화팬들의 환영을 받고있는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시장경제에 매여 란발하는 차용이나 그 시장의 생리에 무릎꿇은 조야한 개편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피겨경기에서 명성에 대해 급급한 욕망으로 젊은 피겨선수가 히틀러의 복장을 하고 나치스의 행위를 패러디하다가 그자리에서 분노한 관중들과 심판들에 의해 쫓겨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또 고전의 굴지로 꼽히는 “홍루몽”도 “외설 홍루몽”이라는 아예 에로영화로 개편된 일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패턴의 정신적 진수가 아닌 겉면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고 지어 왜곡한다면 그건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의 타매를 받게 되는거지요.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혼돈세계에서 자맥질하고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랄(moral)을 찾고 패턴(样式)을 찾는 과정에 명작을 패러디 하고 적극 번안하면서 그 무진한 매력속에서 자신의 생활에서의 답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또 명작을 차용한 직장생활 지침서들도 수두룩히 쏟아져 나오고있지요.   한춘: 2003년 성군억(成君憶)이 “삼국연의로 본 경영관리(水煮三国)”란 책을 출판하여 한때 베스트가 되였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환영받는 경영류 도서작자라는것을 대충 알고 있었고 또 “삼국연의”와 경영을 어떻게 비빔했는가가 궁금하여 해적판 한 권을 구입해 보았다. 제법 재미있게 썼다. 다른 경영류 도서를 읽지 않아 비교할수 없은 탓인지 인상이 괜찮았다.매마르고 까다롭고 추상적인 경영학, 시장학, 관리학의 이론을 삼국지의 인물에 담긴 이야기와 묘하게 빈죽하여 유모어적이고 해학적으로 '정숙'하게 썼다. 새롭고 기이하고 생동하고 재미있는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구미에는 맞을것 같았다.   2005년 여름 마침 성군억이가 할빈에 와서 서명판매활동을 가지게 되였다.그날 서명판매가 거의 끝날 때쯤 내가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책 한권을 사든 나는 그에게 기자인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습니다니깐 시간이 없다면서 사절했습니다. 하긴 그는 중국 경영류 도서 1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니깐 지방신문의 기자쯤은 별로 눈에 차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때 내가 한국의 출판계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책은 전에 이미 읽어보았고 시장전경이 괜찮아 보여 한국과 판권무역을 추진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찾아 본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반짝 정기가 돌았더군요.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후에 메일이 두세번 오고 갔는데 판권가격이 맞지 않아 판권 무역은 파탄 되였습니다. 그후에 도서시장을 보니 성군억의 '水煮'란 아이디를 빌려 후삼국이니 초한풍류니 춘추전국이니 잇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복제품이 이처럼 줄지어 내려오는 현상은 력사를 설쩍 데쳐 낸것이 아니라 아예 폭삭 무르게 끓여 버리고 말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런 도서는 독서구미나 당기게 할수 있지 직장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긴 부동한 직장인에게 부동한 역할이 있겠지만 이런 직장 지침서에 취급한 그 비결, 책략, 수양,인격, 품위 등은 어느 한두권의 책을 보아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현실상생활중에서 터득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것입니다. 경영관리는 과학입니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성실, 신뢰를 앞세웠을 때라야 그것이 장기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일차적이고 일시적인 수작을 쓰는 한탕치기로는 그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것입니다. 독서 취미가 았는 사람이라면 좀 문학적으로 다룬 책자를 선택해 재미로 읽고 유모감이나 해학담을 키우는것쯤은 바랄만 합니다. 전업 리론이 아닌 이야기식 이른바 '경영학'책은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라는게 나의 견해다.그래서 나는 경영, 관리 지침서는 이 한권으로 완전 졸업했습니다.    김혁: 요즘은 “시크릿(秘密)”이라는 지침서가 대세이군요.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탐구한다는 책인데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그 비밀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나와 있더군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서와 같은 논픽션(非虚构)서적들이 소설과 같은 픽션(非虚构)서적보다 더 잘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지침서 전문코너가 따로 비치되여있는거지요. 한춘: 인생지침서는 이와같은 실리적인 지침서와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때 베스터 1위에 올랐던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谁动了我的奶酪)”는  인생의 생존 본질은 부단한 추구와 노력과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가히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생지침서다. 인생 지침서는 심심하면 이책 저책 둘쳐 읽는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끄는 인생지침서는 공자의 “론어”와 로자의 “도덕경”입니다.  남들은 이 책을 치국(治國)지침서로 읽는다는데 나는 수신(修身)지침서로 읽고 있습니다. 김혁: 네. 번안작품, 애니메이션, 지침서 여러가지 참조물을 통해 여러가지 문체로 명작을 다시 접해보는 그 감수의 농도와 줄기가 다릅니다. 요즘 저도 명작들을 다시한번 체계적으로 읽어보려고 독서계획을 다시 세우고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하루에 단 몇페지씩 읽더라도 오랜 시간을 잡고 죽- 다시 읽어내려가려 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린 불운한 운명때문에 희망이 저버려지는 순간순간에도 버릇처럼 되여버린 독서로 명작들을 다시금 읽으며 감동을 받고 아픔을 잊는 시간은 내 창작과 독서생애에 가장 값진 시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학도 시절 읽은 눈과 지금의 읽고있는 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제는 남이 읽으니 나도 읽는다는 식으로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어 학교와 선생들의 강요에 가까운 권장에 숙제하듯이 읽기까지 했던 명작들 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갈피갈피에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면서 하나씩 깨치는건 남다른 맛입니다. 10여년후, 지어 20여년후 다시 읽는 순간 나는 그전에 느꼈던 전혀다른 백설공주와 어린왕자와 달따냥과 에드몽 당떼스와 에스메랄다와 보바리와 그랑데와 쏘렐과 닥터 지바고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흥미진진 스토리를 쫓아가며 읽었다면 지금은 그 스토리를 있게한 력사와 사회배경을 읽게 되고 이전에는 주인공의 용모를 살폈다면 지금은 주인공의 내심 심경을 살피며 읽게됩니다. 그리하여 진지한 얼굴,  성숙된 얼굴로 명작과 다시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전의 주인공사이의 해피엔딩에 대한 바람과 같은 설익은 질문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과 사랑과 종교와 민족에 관련된 대담을 건넬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명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명저”를 읽게되지요. 여기서 작(作)은 지을 작이지만 저(著)는 두드러질 저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말장난같지만 그저 이름난 작품에서 빼여나고 두드러진 작품으로 그 진미를 알고 읽게 된거지요. 명작에 대한 진수를 인제야 깨쳐 알고 읽기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을수록 외려 생겨나는 지적 공허감, 그 공복의 꾸르럭대는 욕망의 소리 같은 허전한 부분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명작이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명작은 세계 문화권의 공동 문화자산이며 강물처럼 흘러온 인류문화의 원천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유산가운데 그렇게 훌륭한 명작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이러한 명작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성을 고매하게 만들고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삶의 조건을 바람직하게 꾸미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읽지 않고서도 아는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과거 발달되지못한 참조계나 왜곡된 미디어로 잘못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서가의 한구석에서 크게 팔을 벌린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 듣게 되여, 아니 보게 되여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빨리 컴퓨터와 머리속에 시스템을 새로 깔도록 하지요. 한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깔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안녕히.   "도라지" 2011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댓글:  조회:2577  추천:7  2013-01-15
 . 대담 .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자: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19   16:00FM 재방송   2012.  12. 20   08:00AM 재방송   2012.  12. 20   08:00F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네 번에 걸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인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를 방송해 드렸습니다. 그 시리즈가 방송된후 중국의 조선족시청자들과 네티즌들이 “문학살롱”프로에 뜨거운 반향을 보인것은 물론, 해외의 네티즌들도 저희 방송프로그램과 김혁작가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열기에 이어 오늘도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운 내용의 프로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을 화제인물로 정했습니다. 인사.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은 최근에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등 문학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장편소설 “춘향”을 창작하여 제10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은 최근의 화제인 “준마상”부터 시작하여 김인순작가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 김인순은 한마디로 70후 녀류작가들의 선두주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우리 문단에는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일전 제10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에서 장편소설 "춘향”으로 수상의 영예를 지니면서 알려지게 되였지요. 신: 준마상은 어떤 상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족작가들 가운데서 준마상을 받은 분들이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인지? 김: 1981년에 제정,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준마상”은 "모순문학상”, "로신문학상”, "전국우수아동문학상” 등과 함께 국가급 4대 문학상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에는 김인순외에도 김호웅, 심승철이 각각 보고문학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ㅡ조선족교육가 림민호평전””, 번역작품 “불멸의 영령ㅡ최채”로 "준마상””을 수상했지요. 김인순은 우리 민족의 고전 "춘향전”을 번안한 장편소설 "춘향”으로 이 묵직한 상을 수상했는데 그 이전에 역시 "춘향”으로 길림성의 최고문예상- "장백산문예상”을 수상한바 있습니다. 신: 김인순의 준마상 수상은 조선족문단에 어떤 의의를 부여했습니까? 김: 이번기 ”준마상”의 장편소설부문은 무려 70여편이 각축전을 벌여 경쟁이 치렬한 가운데 선정되여 그 함금량이 무거웠습니다. "준마상” 심사위원들은 "나는 이 장편소설이 특별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생활을 서술하는 작자의 방식은 동방고전의 시적인 정취와 함께 현대예술의 운치를 풍기고있습니다. 초심토론시 나는 이 작품을 심시위원들한테 정중히 추천했습니다. 예술상 정교한 이 장편소설은 모든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았고 최종 수상작품중 하나로 선정되였습니다."고 그 선정 경위를 밝혔습니다. 신: 사실 조선의 고전명작인 “춘향”에 대해서는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김인순작가는 어떤 기법으로 “춘향”을 썼기에 그렇듯 농익은 이야기, 그리고 전혀 새로운 느낌을 줄수 있을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중국 주류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요? 김: 중국문단에서 그 독보적인 기량을 보이고있는 조선족 작가 김인순은 신작 "춘향”에서 한민족의 불후의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있으며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를 선보였습니다. 신: 김인순작가는 조선족이지만 한문으로 창작하고 있는데, 그러한 김인순작가가 어떤 계기에 의해 “춘향”을 쓰게 되었는지요? 김: 장편소설 "춘향”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을 받게 돼 기쁘다. 이는 나와 나의 작품에 대한 긍정이라고 본다. 사실상 춘향의 선재는 특수하다. 심사위원들이 이를 받아들인것은 그들이 큰 포용심을 갖고있음이 아닌가싶다. 고전 ‘춘향전’을 읽고 나서 ‘춘향’을 쓸 결심을 했습니다. 우연히 고전 ”춘향전”을 돌이키며 주인공 ”춘향”을 하나의 인물로 사고할 경우 녀성의 형상은 이런 "인형”형상이 아니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간이야기가 보여주는 전통적인것을 완전히 다르게 엮어보면 재미있을것이라 생각하고 쓰게 되였습니다. 춘향전이 중국 고전에 비해 스토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선족으로서 고전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확장하는 소설을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내 작품은 원전과는 전혀 다르다. 작품의 결말에서 춘향은 리몽룡과의 혼인을 거절하고 기생으로 됩니다. 자유를 위해서이지요." 신: 그러니까 “춘향전”의 원래의 줄거리를 180도로 대전환을 시켰다는 말로 됩니다. 김: 네. “춘향전”을 아주 환골탈태시켰지요. 김인순은 "춘향”의 결말부분은 후에 고친것이라고 창작과정에 대해 말했습니다. 처음엔 ”춘향”과 "리몽룡””이 결혼하는것으로 결말을 맺었는데 왜서인지 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춘향”이 "리몽룡”을 거절하고 자유를 선택하는것으로 소설을 끝냈던 거지요. - 신: 그럼 객관적 시각에서는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요? = 김: 매체는 김인순의 "춘향”을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廂記)"에 견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했습니다.   장편 "춘향"의 표지   - 신: 우에서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이 준마상을 받은 정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김인순작가의 상세한 정황에 대해 소개 주시지요.  = 김: 김인순은 데뷔한 이래 줄곧 중문으로 창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다년간의 창작과정을 거쳐 중국 문단에서 "70후” 대표작가의 반렬에 올랐습니다. "70후”란 출생년대를 기준으로 1970년대 이후에 태여난 작가를 말합니다. 1998년부터 문단에서 하나의 사조를 이루었는데 광주, 소주, 하남 등 남방에 대표적 작가들이 있습니다. 김인순은 "북방대표”라 불립니다. - 신: 문단에서는 “70후”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정평하고 있습니까? = 김: 중국문단에서 "70후”작가들은 "60후”작가들을 돌파하고 "80후”작가들을 껴안으며 문단의 중견력량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70후”작가들은 몇해전부터 실력을 인증 받으며 중국문단에서 부쩍 강세를 보이고있습니다. 몇해전 중국의 한 실력파 잡지가 10명의 "70후”실력파 “미녀작가”를 평선했는데 그중에는 용모와 실력을 구비한 김인순도 당선되였습니다. 그중 김인순은 유일한 소수민족이였습니다. 그 호칭에 걸맞게 그녀는 무용수같은 날씬한 몸매에 얼굴선이 아름다운 40대 초반의 녀류작가이지요. 그의 당선리유에 대해 작가들은 "김인순은 ‘70후 작가군에 새로운 숨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침묵속에서 폭발하거나 침묵속에서 자취를 감출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김인순의 폭발을 기다린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근년에 들어서 김인순은 창작에서의 폭발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 신: 김인순의 고향은 어디이고 그의 유년기부터 창작을 하기까지의 정황은 어떠한지요? = 김: 김인순은 1970년 길림성 백산시에서 출생, 길림성 희극학원에서 희극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4남매중의 막내로 아버지는 문화계통의 일군이였고 어머니는 소학교 교원출신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당시 구락부(극장)의 주임으로 있습니다보니 밥 나르는 심부름을 하면서 영화를 볼수 있는 행운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책도 많이 사주어 어려서부터 독서에 빠졌는데 그녀는 "후에 소설을 쓸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고중때부터는 작품을 투고했는데 원고료가 한달 생활비보다도 더 많을 때가 있었습니다. 미대지망생이였던 김인순은 길림예술학원 미술시험을 보러 왔다가 그냥 좋아하던 영화생각이 나서 연극문학학부에 입시하였는데 합격되였습니다. 그후 1학년때 우연히 숙제로 쓴 소품이 동북3성 공연에서 2등상을,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렇게 캠퍼스에서 꽤 알아주는 "작가”가 되였고 대학과정중에 10여편의 소설을 쓰게 되였습니다. 졸업후 잡지사 편집으로 배치받으면서 다시 문단과의 인연이 시작되였습니다. 2002년 김인순이 "작가”잡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물가의 아디야(水边的阿狄雅)"가 영화 "록차(绿茶)"로 각색, 제작되였습니다. “록차”는 강문, 조미 등 중국 연예계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당시 큰 화제를 모았지요. 이로서 김인순은 중국문단에서 문명을 얻었을뿐만아니라 영화계에도 명성을 날렸습니다. “록차”가 영화로 히트를 하자 그녀의 소설에서 갖는 시장효과의 비중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물음들이 제기된적 있었습니다. 이에 김인순은 "나는 글을 쓸때 시장효과를 종래로 념두에 두지 않는다. 시장효과는 영화텔레비죤이 많이 이끌어낸다. 어떤 영화텔레비죤작품은 문학엔 아무런 기여도 없지만 시장엔 기여가 아주 클수 있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 때문에 작가가 크게 뜰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그의 또 한편의 작품 "시체멋 선생(时尚先生)"도 영화로 각색되였습니다. - 신: 그럼 김인순의 본격적인 창작은 어느때부터 시작되였습니다고 볼수 있는지요? = 김: 1997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랭기류(爱情冷气流)", "백일몽처럼(仿佛一场白日梦)" 등 지금까지 백만자에 달하는 소설과 산문을 창작했습니다. 그가 창작한 많은 중단편소설은 중국문단의 주요 문학지들인 "수확”, "작가”, "화성”, "종산”, "대가” "소설선간(小说选刊)", "소설월보”, "중국문학”, "단편소설선간” 등 잡지에 발표되였습니다. 그중 소설 "기(伎)"는 "20세기 중국 단편소설선집”에, "물가의 아디야”는 "2002년 중국 년도 최고 단편소설”에, "해변의 풍경은 아름다워라(人说海边好风光)"는 21세기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평선에 당선되였습니다. 2009년에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 "돈황”으로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습니다. "돈황”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 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 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습니다. 이외 산문집 "백일몽처럼”, "달빛아 달빛(月光啊, 月光)" 그리고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 등 다양한 쟝르의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 신: 김인순의 창작특점은 무엇이며 작품의 주제성향은 어떠합니까? 주로 어떤 분야의 내용을 다루었는지요? = 김: 김인순은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현시대 젊은이들의 삶의 양상에 대해 다루었고 또 민족의 운명을 묘파한 작품도 간간히 써내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 신: 김인순의 수상정황은 어떠한지요? 다년간의 꾸준한 창작활동을 거쳐 김인순은 풍성한 창작성과를 쌓아올렸습니다. 그 성과들을 돌이켜보면- 2002년 단편소설””물가의 아디야(水邊的阿狄雅)"로 중국소설학회 단편소설 순위 제4위, 제1회 길림문학상 수상.     2004년 화극””타인(他人)"중국 제8회 종목상, 감독상, 표현상, 조직상 수상.     2005년 시나리오"록차(绿茶)" 제1회 장춘문학상 금상 수상.     2008년 단편소설””상호(彼此)" 중국소설학회 2007년 단편소설 순위 제1위.     2008년 단편소설””소나무진(松树镇)""중국소설격년상””수상.     2010년 단편소설"돈황(敦煌)"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     2010년 장중문(庄重文) 문학상 수상.     2011년 장편소설””춘향(春香)"장백산문예상 수상.     2011년 단편소설””벽오동(梧桐)"작가출판그룹상, 민족문학년도상 수상.     그리고 올해 2012년에 장편소설”춘향”으로 제10회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준마상 수상했습니다. . - 신: 김인순은 산재지역에서 생활해온 작가인데 드라마속의 주요장면은 조선족집중지 역의 생활이다. 그럼 그는 이런 생활체험을 어떻게 구사했는가? = 김: 김인순의 작품중 우리 민족을 제재로 한 작품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춘향”외에도 “벽오동”(梧桐), “종달새(雲雀)”, "도라지(桔梗)", "고려옛일(高麗往事)", "판소리(盤瑟里)" 등 작품들은 모두 우리 민족의 력사를 소재로 하고있습니다. 조선 말은 못하지만 조선족으로서 한민족에 관심이 많다고 김인순은 루차 밝힌적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조선족을 볼수없는 산재지구의 탄광구역에서 자라면서 성장환경의 제한으로 민족언어문자를 배우지 못했지만 내 마음은 완전한 조선족이다. 음식을 포함한 모든 가정생활환경은 순 조선족문화이다. 지금도 집안에서는 김치를 담그고 장국도 늘 끓여먹는다. 때문에 우리 민족 생활을 다루고싶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중문으로 번역된 관련서적을 통해 우리 민족 문화 풍속 등을 료해하기도 했다."고 그녀는 민족의 락인이 찍힌 자신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낙언대로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이 나왔습니다. 연길을 배경으로 한 8부작 작품은 중앙텔레비죤드라마채널의 청탁을 받고 각색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에 선물한 헌례작품이였습니다. 작품은 2002년 중앙텔레비 8채널에서 방송되였지요. 당시 김인순은 두 편의 영화를 선보인후 소설에만 집념해 오면서 씨나리오 제의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을 제재로 하는 내용의 청탁이였기에 자치주설립 기념 헌례에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한다는 소명감으로 흔쾌히 응낙했다고 합니다. 김인순은 누구도 알리지 않고 홀로 조용히 연길에 가서 한주일간 체류하면서 생활체험을 했습니다. 송기호텔에 류숙하면서 매일 호텔에 딸린 장국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조선족 고유의 그 맛과 멋이 너무 인상깊었습니다. 하여 이를 제재로 드디여 우리민족 고유의 맛이 다분히 풍기는 "엄마의 장국집”이 창작된것입니다. 앞으로도 조선족제재의 영상작품을 쓴다면 농촌제재보다는 도시제재, 현대생활을 제재로 쓰고싶다고 그는 또 밝혔습니다. "례로 연길을 쓸 경우 민족풍토와 인정이 있는 특별 히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보겠다. 적어도 라싸, 샹그릴라처럼 관중들의 심목속 에서 중요한 위치가 느껴질수 있는 영상작품을 만들고싶다."고 말했습니다. - 신: 비록 한문으로 창작하는 작가이지만 김인순이라는 이름자체는 참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이름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할가요? = 김: 김인순이라는 이름 참 고전적이고 민족적인데 다른 작가들처럼 구태여 흥감스럽게 요란한 필명이 필요없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 이름자를 듣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마다 그녀는 아주 기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을 들여 우리 말, 우리글을 배울 타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 도 껴안고 있더군요. "조선족이라는 신분은 나한테 있어 큰 보고(宝庫)이다. 한족작 가와 같은 자원을 갖고있으면서 조선족이라는 ‘무기’를 더 갖고있기때문이다. 한켠으로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면 어디서나 나는 주변인물(邊緣人)이라는 것이다. 연변문단에서는 외지인이라는것때문에, 한족작가들 앞에서는 조선족이 라는 것때문에, 한국문학계에서는 중국작가라는것때문에… 많은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고 그는 언젠가 고백한적 있습니다. - 신: 김인순작가는 우리와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그의 현상황은 어떠합니까? 앞으로의 창작행보를 어떻게 잡고 있는지요? = 김: 현재 장춘에 거주하면서 전직작가로 몹시 빼곡한 창작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중국 70년대생 작가는 이전 문학의 정치적 편중에서 벗어나 인간 자체에 관심을 돌린 첫 세대라 할수 있습니다. “창작은 반드시 현실생활의 무엇을 반영해야 한다. 현실 리념이 저도 모르게 작용을 하게 된다. 문학은 문학다워야 살아남는다."고 자신의 창작리념을 밝혔습니다. 또 "현 국제상 열점으로 떠오르는것이 바로 민족의 국제 융합인데 세계적으로 이민이 점점 많아지면서 국가와 민족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순, 충돌 그리고 어떻게 융합을 이루는가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방향이 다. 나 역시 소설창작시 조선족, 민족적인 요소를 많이 쓸것이다."고 앞으로의 창작행보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준마상”을 받은 “춘향”은 김인순이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 다음 장편소설 창작은 그에게서 큰 도전이라고 수상소감에서 밝힌바 있습니다. “다음 장편소설은 현재의 생활을 쓸터이지만 지금 은 단편소설창작에 한창이다.”고 밝혔습니다. “문학은 나에게 있어 신앙과 같은 존재이다. 문학이 랭대받을 때에도 나의 심목속에는 문학이 최고였다.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쓸것이다. 나의 바람 이라면 ‘내가 죽은후에도 나의 소설이 단 몇편이라도 계속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말했습니다.   - 신: 어느 매체와의 취재에서 문학창작에 관심있는 조선족 청년 들에게도 조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어떤 조언을 주었는지요? = 김: "우선 그들이 모어로 창작할수 있다는것이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 된다. 모어로 창작된 작품이 중국 나아가 세계문단에 오르려면 번역손실문제에 부딪치지만 사실상 이는 그 어느 작품이나 다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은 번역의 ”시련”을 견뎌내기때문에 모어로 창작할수 있는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음, 여러 나라 우수작품을 다 보며 국제적인 흐름을 료해하고 시야를 넓히자. 적어도 문학교 류의 무대에 오르자는것이다. 내가 보는 작품중 80%는 외국작품이다. 언어의 감각, 구조, 사용방법이 다 변화하고 있기에 이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 다."고 김인순은 좋은 창작담을 들려주었습니다. - 신: 오늘 김혁소설가의 소개를 통해서 주류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선족작 가 김인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마련된 문학살롱 프로 역기서 줄입니다.     . 대담 .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2)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자: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26   16:00FM 재방송   2012.  12. 27   08:00AM 재방송   2012.  12. 27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시며 중견작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중국 주류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70후 조선족녀류소설가 김인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계속하여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김인순작가의 작품에 대해 한층 깊이 조명해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김인순작가의 신상정보를 포함한 프로필과 창작성향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사실 김인순작가는 한문으로 소설창작을 한 시간이 길지만 조선족대중들에게는 뒤늦게야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은 그분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인순의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가요? = 김: 그러면 우선 “록차”, “돈황”, “춘향”등 김인순으로 말하면 대표작으로 되는 작품 몇편들을 오늘은 상세히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영화 "록차" 포스터 - 신: 우선 김인순의 소설 “록차”는 영화로도 제작되였습니다고 했는데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어떠한지요? = 김: 동명영화로 김인순의 문명을 알린 “록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록차"는 맞선을 자주 보는 한 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 오방(吴芳)은 맞선 자리에 나가 항상 록차를 시키는 녀자이고 유별나게 친구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녀는 데이트 자리에서는 반드시 록차를 주문하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녀는 한잔의 록차로 상대의 애정의 깊이를 점칠수 있습니다고 믿고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그녀는 진명량(陈明亮)이라는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그는 딱딱해 보이는 맞선녀에게 관심조차 없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이 남자는 그녀의 록차를 마시는 습관을 조소합니다. 첫번째의 실망스러운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들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나갑니다. 정작 그녀는 그의 진지한 고백을 받아주지 않고 련락까지 두절됩니다. 그렇게 상심해있던 남자가 친구를 따라 한 카페에 갔다가 피아노를 치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피아노 치는 녀자가 오방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각각의 사랑에 관한 사고방식,각각의 과거의 연애 편력을 주축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사랑이 전개됩니다. "인생의 배짝 찾기"라는 흔한 스토리같지만 작자는 주인공을 두 가지 내면을 가진 녀자로 분렬시켜 보여주었습니다고 독자들은 그에서 각자 자신의 애정관과 숨겨진 과거를 지니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현대 도시 젊은이들의 사고와 생활자세에 대해 엿볼수 있게 됩니다.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대번에 길림 백산시의 한 조선족 녀류작가를 전국에 알렸다. "붉은 수수"에서 열연을 펼치며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강문과 경요의 드라마 "환주거거"로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던 “새끼제비” 조미가 남녀주역을 맡았습니다.   - 신: 강문, 조미 등 쟁쟁한 배우들이 조선족작가 김인순의 작품을 영화로 찍은 작품에 등장했다면 김인순에 대한 홍보효과가 대단했을줄로 여겨지는데요? = 김: 물론이지요. 사실 배우들뿐아니라 영화감독 역시 중국의 “제6대 감독”중 선두주자로 불리는 장원이 맡았습니다.   - 신: “록차” 다음으로 김인순의 작품 “돈황”도 제목자체부터 인기작으로 생각되는데요, 소설 “돈황”의 줄거리와 작품이 발표된후의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는가요? = 김: “돈황”은 중국문학대계에 수록되였습니다. 단편소설 "돈황"은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습니다. 작품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 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습니다. "돈황”에서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입니다. 북방련합출판미디어유한회사와 춘풍문예출판사는 "전문가의 시각, 권위적인 선정, 세기의 문학을 위한 자료보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마다 중국문학의 정수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 조선족 녀류작가로서 김인순이 처음으로 그 작품선에 선정되는 영예를 지녔습니다.   -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김인순의 작품 “록차”와 “돈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에도 이미 거론되였지만 김인순작가는 우리민족의 고전작품인 “춘향”을 새롭게 번안시켜 독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으며 또 이 작품은 “준마”상까지 수상했다고 했는데요,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 주시지요. = 김: "준마" 수상작 장편소설 "춘향"은 2009년 중국녀성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작품입니다. 당시 저는 새책 소개를 한적 있습니다 김인순의 "춘향”에 대해 출판계는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厢记)" 에 견줄만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삼척동자마저도 익숙한 그 춘향전을 념두에 두고 읽는다면 당신은 "막걸리를 기대했는데 카페라떼를 맛본” 어리친 기분일것입니다. 김인순은 "춘향”에서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도 선보이고있습니다.   - 신: 이 소설은 원작 “춘향전”을 대담하게 개작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구체기법에 대해 말씀 주시죠. = 김: 소설은 원작에 과감하게 정형(整形)의 메스를 댔습니다. 우선 김인순의 "춘향”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퇴기가 아니라 약제사입니다. 그는 미혼약을 제작해서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를 대처합니다. 변학도의 집요한 스토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춘향은 어머니의 가업을 계승해 미혼약을 제조하는 약제사가 됩니다. 리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보니 춘향은 어제날의 춘향이 아니였다. 이에 몽룡은 커다란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 신: 확실히 원작의 줄거리를 확 바꾸어놓았네요. = 김: 영구불변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에 대한 찬가로 향그럽던 원작은 김인순에 의해 그야말로 미혼약에 취한듯한 이야기로 이목구비를 잃고 "성형”되여버렸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버릇되였던 고전 "춘향전”의 팩트(骨組)에 새로운 픽션을 입힌것입니다. 작품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닳아도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점철되였던 우리의 경전적인 사랑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알쏭함에 이마살을 모으며 읽는 와중에 경전적인 설화가 퇴장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과 륜리의 중압감을 맛보게 됩니다. 김인순은 경전적다 못해 찬란하기 그지없어 바라보기마저 눈이 아픈 모두가 선망하는 사랑속에서 고전의 금고(禁锢)에 얽동였던 몽룡과 춘향 두 사람을 마음껏 풀어주었습니다다. 맹세나 언약 같은것으로만 위장되였던 사랑을 풀어주어 다른 감동과 해법을 독자들에게 전시해보였지요. 이제는 죽어버린 고전의 시신우에 현대관념의 혼을 불어넣은것입니다.   - 신: 원작에서는 리몽룡이 긍정적인 인물형상으로 감동적인 사랑을 완성시키는 주인공인데 김인순의 작품에서는 리몽룡의 가치가 추락된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 김: 소설에서 몽룡은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두번째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춘향의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내줍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춘향과 그의 어머니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관조와 리행으로부터 두 세대 녀인의 정과 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있습니다.   - 신: 김인순작가는 창작동기부터 시작하여 이 작품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는데요, 그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 김: 김인순은 준마상을 수상한 뒤에 있은 창작담에서 "춘향”은 우리의 경전적인 고전이지만 나는 그 뻔한 이야기에 어쩐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왔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백사전”, "량산백과 축영대”, "맹강녀” 등 고전에 비해보면 그 전기적 색채가 좀 뒤쳐진다는 생각을 가졌다고합니다. 그래서 자기나름으로 고전을 언감 재해석해보고싶은 충동을 가졌던거지요. 김인순은 "중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있는 자신에게서 ‘춘향’의 집필은 자기 민족에 대한 마음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온 지구촌이 글로벌화로 박차를 가하고있는 요즘 세월, 소수민족작가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써내릴 때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량호한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바 세계속에 자신을 융화시켜야 합니다”고 자신의 창작주장을 펼치고있는 김인순은 그래서 과감히 민족의 고전에 메스를 가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사유의 실리콘을 넣어 봉합했고 춘향을 새로와진 심미안의 세상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볼륨감있게 세워주었습니다. 소설은 전형적인 번안소설 형태를 띠고있습니다. - 신: 여기서 잠깐 번안소설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 주시지요. = 김: 네. 번안소설(翻)작품이란.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치는 창작방식을 일컫더 말합니다. 요즘 용어로는 리메이크라고도 하지요. 사실 번안소설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왔습니다. "춘향전”처럼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도 한국작가들에게서 몇번이고 번안되였습니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충격을 준 작품은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이 번안한 "심청전”입니다. "련꽃의 길”이라 개칭된 이 소설에서 임당수에 빠졌다가 구조된 심청이는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지를 주유하며 부자의 첩으로 악사로, 만두집 사장으로, 기생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번안소설은 원저를 벗기고 그에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 시체옷을 입히면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정신을 디자인해 넣어 독자들의 심미변화에 동조합니다.   - 신: 그럼 이러한 현대적인 시각 혹은 새로운 시대적 사조에서 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리해해야 할까요? = 김: 흔히들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즐겨 고전을 선택하는 리유는 "고전을 통하여 도야(陶冶)된 정신이 인간관계나 사물에 관하여 판단하고 추리하는데 유용하기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합니다. 그래서 번안물이라는 쟝르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애대를 받으며 리메이크를 거듭하고 있는것입니다.   - 신: 중국에는 고전이 많기로 유명한데요, 중국주류문단도 세계적인 사조에 뒤떨어져있지는 않겠지요? = 김: 중국작가들도 번안물에 커다란 흥심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인 "백사전”, "후예가 해를 쏘다”, "맹강녀” 등도 몇해전 모두다 소설로 번안되여 계렬도서로 나왔습니다. 올해도 “백사전”이 리련걸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지 않았습니까. 춘향과 몽룡시절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입밖에 내는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제와는 다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철저한 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고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물질에 둔화되고 순수하게 향유하려 하지 않는 황페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는 수요되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춘향과 리몽룡의 사랑타령이 오페라로, 발라드로, 댄스가요로, 힙합으로 변용되여 지칠줄 모르고 번안되고 리메이크되고 있는것입니다. 동배기름 가르마에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옷고름을 배배 탈며 두눈을 내리깔던 춘향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받쳐신고 카페라떼를 마시는것 같은 기분의 춘향이를 보면서도 우리가 김인순의 "춘향”이가 결코 낯설지 않은것도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을 반기는 수요에서일것입니다.   - 신: 사실 우리 조선족작가들은 지금까지 주류문단에 진출한 작가들이 전무한것은 아니였지만 문단의 중시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 학계에서 이분들을 많이 조명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김인순을 포함한 주류문단에 진출한 작가들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 김: 주류뮨단과의 접목에 나선 조선족 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자. 김관웅 교수는 "김인순씨의 문학은 속지주의(属地主义) 자대나 속인주의(属人主义) 자대로 재여보아도 모두 명실공히 중국조선족문단에 속한다. 중국조선족문단이라는 이 체계 속에는 문자매체로 분류를 한다면 두 자(子)계통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모어창작의 자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어창작의 자계통이다."며 김인순과 같은 중문창작으로 우리의 문학범위를 확장하고있는 작가들의 출현에 대해 크게 반기고 있습니다. 사실 김인순외에도 중국문단에서 자기 독보적인 존재를 과시하며 우리 문단에 경희로움을 준 조선족작가가 몇분 더 있습니다.   - 신: 또 어떤 분들이 있는가? = 김: 우선 전용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작가를 지난 2007년 전국청년작가창작회에서 만나뵜었는데요. 올해 초 상해에서 열린 "제18회 상해 TV 축제"에서 “낭떠러지()”라는 작품으로 "최우수 드라마 작가상"의 영예를 안은 전용선(全勇先). 최근 중국 드라마계와 문단을 떠들석하게 한 조선족 출신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이밖에도 "최우수 작품상", "여우주연상"등을 휩쓸며 중국 최고 드라마로 선정됐습니다. 드라마 작가로 활동한지 10여년 만에 최고 영예를 안은 전용선은 "리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량한 것에 대한 경외심이 ‘낭떠러지’의 성공을 이끌어 낸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전용선은 작품 완성도에 대해 완벽함을 추구하며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창작 욕구가 넘치는 작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흑룡강 가목사시 (佳木斯)에 살았던 전용선은26세 청년시절 한중수교 이전이였던 당시 전용선은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로역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합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 전 가목사에 있는 "삼강만보"라는 신문사에서 10여년동안 기자로도 일하기도 했지요. 34세가 되던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 영화학원에서 공부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됩니다. 그 후 드라마 작가로 변신한 전용선은 "세월(歲月), "설랑(雪狼)", "모친(母親)"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 신: 김인순, 전용선외에 또 어떤 분들이 주류문단에 진출했습니까? = 김: 다음은 정용호입니다. 료녕성 영구시 조선족청년작가 정용호(43세)의 산문 《아버지》와 《약속은 하늘나라에서의 상봉》이 중국산문가협회에서 편집하고 중국문사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당대산문정선》에 수록되였습니다. 이에 앞서 정용호 작가의 산문 《아버지》는 또 《민족문학》에 발표된 바 있습니다.   - 신: 정용호작가의 프로필에 대해 소개 주시죠. = 김: 길림성 반석현에서 출생하여 일찍 20대 초반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많은 문학서적을 섭렵하면서 창작에 정진하려고 하다가 생계를 위해 경제생활에 뛰어들면서 문학의 꿈을 접어 두었다가 2004년부터 다시 창작에 정진하기 시작한 정용호 작가는 문학창작을 재시작하면서 중국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창작을 동시에 활발히 해온 그의 인터넷작품들은 그가 참가한 클럽에서 언제나 인기를 한몸에 모았으며 따라서 많은 중문문학지들에서 원고청탁이 왔고 따라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면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부터 우리글로도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선후로 《송화강》, 《흑룡강신문》, 《도라지》, 《장백산》 등 신문잡지들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외에도 애초에 소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영화계에서 크게 성장한 장률 등을 들수있습니다. 또 천화, 윤금단 등 작가들이 있지만 그 작가수와 작품의 지명도가 미흡하여 큰 기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신: 현실적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은 중국경내에 존재해 있으면서도 중국의 주류문단과는 가깝고도 먼 거리에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비해 조선족작가들은 주류문단진출이라는 이 장구한 과제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 김: 주지하다싶이 중국조선족문학은 자기의 독특한 민족적특성을 갖고있습니다. 백년이상으로 줄잡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조선족문학은 거의 절대 대부분이 민족언어문자에 의해 창작되였습니다. 때문에 그 성적에도 불구하고 주류문단이라 일컫는 중국문단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우리 조선족 작가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다년간 중국 주류문단에 우리 작가들의 작품은 많이 알려지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모어로만 창작하고 번역가대오가 결핍한 등 허다한 문제를 들수 있습니다. 근년 들어 중문창작을 통해 중국조선족문학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하고있는 조선족출신의 작가들이 적지않게 나타나고있는데 이는 기꺼운 일입니다. 이들은 우리 정서를 바탕으로 한 중문작품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고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위치에서 벗어나서 중국주류문학 내지는 세계문학에로의 진출에서 전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밝은 비전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김관웅교수는 "중국조선족문학통사"에서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연변조선족문학은 중국주류문학과 소통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김인순씨 같은 한어로 창작하는 작가들과 먼저 소통하여야만 합니다. 이래야만 우리문학이 변두리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중국주류문학에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할수 있을것입니다."   - 신: 김인순 같은 작가들은 조선족문단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류문단진출에서는 이들이 선구자역할을 했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 김: 창작에서 언어는 기본입니다. 더우기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언어적 기술을 요구합니다. 한어문화권에 대한 리해와 사회 력사적 지식, 개인적 체험 등이 몸에 배였지만 그 언어에서 탈피해 새로운 언어로 작품을 쓴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지요. 전문가들의 분석에서도 알수있다싶이 조선족작가들의 이한 노력은 중국주류문단에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리 조선족문단에 커다란 촉매역할을 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중국의 주류문단에서도 움츠러들지않고 자신의 끼와 민족적인 운치를 자랑하며 활보하고있는 김인순 등 작가들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소설가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김인순의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조명해 보았고 또 지금 중국주류문단에 진출한 일부 조선족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마련된 문학살롱프로 여기서 줄입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    막언과 노벨문학상 (4) 댓글:  조회:3556  추천:7  2012-12-21
  . 대담 .   막언과 노벨문학상 (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세아의 문호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스쳐 지났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번 시리지의 마지막 시간으로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아세아의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고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도 스튜디오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작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지금까지 중국을 여러번 스쳐 지났지만 아세아에서는 수상자가 여러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 김: 인도의 타고르,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와 프랑스국적을 가진 고행건 등 4명이 있습니다.     - 신: 타고르는 그 유명한 시로 만방에 널리 알려진 문호인데 그가 수상한 정황과 그분의 신상에 대해 말씀 주시지요. = 김: 우리에게 "시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 시인이며 사상가입니다.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유명한 가문에서 열네번째 자녀중 막내로 태여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였습니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세에 벌써 시를 썼습니다. 가문의 배경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내내 저조했습니다. 14세 때인 1875년에 타고르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된것도 이 즈음의 일이였습니다. 타고르 가문은 당대의 다른 인도 명문가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호의적이였고 사회 및 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덕분에 타고르는 일가친척이 발행하는 여러 문학잡지를 무대로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뽐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타고르가 관직이나 사업같은 분야로 진출하기를 바랐지요. 1878년 이후 타고르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어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한편 문학에 매진하여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쟝르의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린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였습니다. 그는 이 곳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였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였지요.   - 신: 그럼 그후로도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이어졌는가요? = 김: 하지만 이 즈음에 타고르는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안해와 부친, 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련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벌린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그 빚짐을 충당하게 됩니다. 20세기 초의 10여 년간 타고르가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여 1910년에 발표된 한 권의 시집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였습니다. 여기서 기탄잘리란 헌시(獻詩)라는 뜻입니다.   - 신: 문학은 역시 아픔의 호소라고 볼수있구만요. = 김: 타고르는 1912년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로 간행된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했고 런던에서 만난 한 영국인 친구에게 그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 원고를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보여주었고 W. B. 예이츠라는 시인이 원고를 읽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출간을 주선했습니다. 그해 말에 영어판 "기탄잘리"가 영국에서 간행되였습니다. 이 작품집 덕분에 타고르는 하루아침에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듬해인 1913년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습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 겸 유명인사로 존경받았습니다. 194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타고르가 평생 받은 유일한 학위증명서였습니다. 1941년 타고르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래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7일에 결국 사망했습니다.   - 신: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뿐만아니라 그후의 활동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했는데요, 그럼 학계에서는 타고르의 공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 김: 현대 인도문학에서 타고르의 지대한 영향력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에는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 말고도 22개에 달하는 지역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도 각지의 지역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쓸수 있습니다는 자신감을 인도인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전형적이고 랑만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타고르의 업적은 결코 폄하(貶下)할수가 없는것입니다. 나아가 형식면에서도 타고르는 현대 인도문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개척자로 평가됩니다. 아세아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타고르는 문학상에 대해 개의치 않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은 명예에 환호하고 있는것이다."고 수상직후 말했습니다. 사실 타고르 본인은 문학보다도 산티니케탄에 설립한 학교를 더 큰 업적으로 여겼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였지요.   - 신: 타고르의 문학작품창작정황은 어떠했습니까? = 김: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는데 대표작으로는 시집 "기탄잘리", "초승달", 희곡 "우체국", 소설 "고라"(1910), 평론 "인간의 종교"(1931), "문명의 위기"(1941) 등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아 두 나라의 국가도 그의 손에 의해 창작되였습니다. 하지만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후 서방사회에서는 유색인종의 수상을 로골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고 심지어 인도 내에서도 타고르의 명성은 과장된것이라며 헐뜯는 목소리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편파적인 서구의 편견에 의해 그후 50여년이 지나서야 아시아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습니다. 그가 바로 가와바다 야스나리입니다.     - 신: 아세아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소개가 요청됩니다. = 김: 일본의 소설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899년 6월 11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여났고 1968년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중국의 로사가 문학상에 거론되였으나 그가 자살하고 상은 야스나리에게 돌아가게 된거지요. 그후 가와바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 두사람의 인연은 우연이라도 기막힌 인연입니다. 오사카에서 태여나 동경대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문예시대"와 같은 문학지를 창간했고 "신감각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신감각파의 작가로서 주목되여지고 또 시평가로서도 이름이 높습니다. 우수에 젖은 서정성을 통해 고대 일본문학의 전통을 현대어로 되살려낸 작가입니다. 어려서 량친을 잃고 고아가 되였으며 청년시절에 가까운 친척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1924년 도꾜제국대학을 졸업한뒤 1926년 "이즈의 무희"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 소설은 중국인들에게는 8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저도 이 영화CD를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보아도 영상미가 뛰여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이 소설은 자서전적인 그늘이 많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의 문학 류파의 미학은 대부분 다다이즘, 표현주의 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문예사조에서 따왔습니다. 1948년에 그 유명한 소설 "설국 (雪國)"을 발표합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1935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결말 부분을 여러번 고쳐 쓴 끝에 12년이나 지난뒤에야 완성되였다고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대 서정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였으며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종의 외국어로 널리 번역되였습니다.   - 신: “설국”은 문자 그대로 눈 나라라는 뜻인데요, 어떤 작품인지? = 김: 작품은 에치고유자와라는 곳의 온천장을 배경으로 게이샤인 고마코와 미소녀 요코의 미묘한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산문시와 같은 세련된 문체는 작가가 재발견한 신감각파적 수법의 극치를 이룹니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처럼 서정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며 신비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눈의 배경과 함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정경이 배경을 이룹니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니이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는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인데 작가는 직접 이곳에 머물면서 소설을 집필했습니다고 합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는 싸늘하고 청결합니다. 제목에서부터 환상적이고 청순한 분위기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 소설속에 그려진 사랑의 모습도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과 대비되는 유한하고 고독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바로 "설국"이 그려내는 현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외에도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천우학(千羽鶴)"과 "산소리(山音)", "잠자는 미녀", "고도(古都)" 등의 대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줄곧 서정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서정문학의 장을 열었습니다.   - 신: 문학창작을 제외하고 기타 사회활동은 어떠했습니까? = 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외에도 일본 문화훈장 등 여러가지 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 세인이 주목을 한 몸에 안고있던 이 대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은뒤 얼마 되지 않아 또 그 길을 가게 된거지요. 소설 "금각사"로 이름난 미시마 유키오 역시 세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였고 추천을 받았은 사람으로서 일본문학에서 주요한 일석을 차지하는 작가입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가와바다의 작품 대부분에 짙게 깔려 있는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은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입니다. 노벨상을 받았을때도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와바다의 문학에는 불법의 범신론적세계관이 있고 불교적세계관의 무위로 타락하는 가치이상으로, 서구전위예술의 사상과 련결되여 있습니다.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라고 말한적 있는데 이 말은 그의 문학적 경향을 몇마디로 응축한것입니다.     - 신: 아세아의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역시 일본사람인 오에 겐자부로라고 했는데요, 그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 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는 1935년 1월 31일 일본 에히메 현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여났습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합니다. 7형제의 3남으로 태여났으며 할머니에게서 예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에를 가르치면서 "하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기"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책에 반한 나머지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18세에 프랑스 문학을 배우기 위해 도꾜로 상경했습니다.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도꾜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습니다. 그의 졸업론문 역시 "사르트르 소설의 이미지에 대하여"라는 테마였습니다. 23세의 나이에"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문단 최고의 작가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이 외에도 핵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습니다. 1963년,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여났습니다. 이로부터 오에 겐자부로의 창작성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지요.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였습니다. 1964년, 장애자 아들의 출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풋볼은 미식축구를 말하는거지요. 이 작품으로 최년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습니다.   - 신: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요? = 김: 작품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로 하여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였을 당시의 수상리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꾜방언에 대항하는 시적인 문체로 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겐자부로 역시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였습니다. “노벨문학상도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습니다.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2003년에 일본이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극명한 립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중국과도 관계가 아주 돈독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수상한 막언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와서 남경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북경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일본 관료들과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입니다”라고 비판의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 신: 인지와 량지가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듭니다. = 김: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적중한 예언으로 화제를 몰고오기도 했습니다. 지난 월드컵때 문어 한마리가 경기 결과를 맞추어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오에 겐자부로도 그에 못지않은 예언으로 주목받고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뒤 오에는 "앞으로는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중국의 막언, 그리고 토이기의 오르한 파무크, 한국의 황석영이 유력하다"고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부터 오에의 예언은 줄줄이 실현됐지요.  이듬해 곧바로 오르한 파무크가 수상했습니다. 해마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 1순위로 꼽히다가 미끄러졌던 파무크는 오엔의 예언이 나오면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것입니다. 2년 뒤인 2008년에는 르. 클레지오가 또다시 "오엔의 예언"을 실현했습니다. 르 클레지오 역시 프랑스 소설계에서 현존 최고의 작가로 꼽히다가 마침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에 이어 중국의 막언 역시 올해에 소원을 성취한것입니다. 이제 남은 작가는 한국의 소설가 황석영입니다. 오에의 "예언"이 과연 실현될지 한국매체들은 이 에피소트를 대서특필하면서 기다리고있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트이지만 이 모든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그냥 문학에 대해 관조하고 세계 각국 작가들의 창작성향에 대해 연구한 결과라 볼수 있지요.     - 신: 점괘와 같은 무근거한 억측이 아니라 세계문단을 꿰뚫어보는 혜안이라고 봐야겠지요. 아세아의 네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고행건은 중국이름 같은데요? = 김: 고행건(高行健)은 중국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번역가, 연출가, 화가입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1940년 1월 4일 중국 강서성 간주(赣州)시에서 은행 간부인 아버지와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때부터 연극과 글쓰기에 흥미를 갖도록 북돋워 주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후,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환경 덕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룰수 있었고 그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후날 그가 소설가로, 극작가로, 비평가로, 또 화가로 여러 장르의 예술활동을 펼칠수있게 된 바탕에는 이와 같은 유년기의 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북경 외국어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문학과를 전공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78년 이후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습니다. 1987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1997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 신: 고행건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요? = 김: 그는 2000년에 “보편적 타당성과 날카로운 통찰력, 언어적 독창성으로 가득 찬 작품을 통해 소설과 드라마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희곡 “절대 신호”, "뻐스정류장", "도망", "산해경전 (山海经传)"등이 있습니다. 1989년에 대표작이자 자전적인 소설인 "령혼의 산 (灵山)"을 내놓았습니다. 소설은 내면으로의 순례임과 동시에 현실과 허구, 기억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반성적 려정의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아세아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막언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은 리유는 어디에 있습니다고 봅니까? = 김: 모두어 보면-  막언의 작품들은 여타 동서방 작가들의 작품에 견주어 보아도 서사의 힘과 문체의 다변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서 금번의 막언의 수상은 크게는 중국문학과 중국작가들의 성공일뿐더러 곧바로 막언의 문학적 특징의 성공이기도 하다고 말할수 있지요. 막언의 소설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리유는 첫째로 그의 서사방식에 있다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문학사조면에서 어디에 속하든지 그의 작품은 중국문학의 전통적 서사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늘 고향과 고향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작가의 이념, 사상, 상상력이 부과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목격한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때 민속 문화적 요소들이 불가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습니다. 1981년 등단한 이래 30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그의 창작의 안목은 아직도 락후한 치벽지인 고향에 머물고 있으며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향인 중국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 오고있는것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져 있습니다. 막언 문학의 핵심적 요소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입니다.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공간을 마주 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거지요.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립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기피하면서 허무한 개인적인 정서와 취미에 머문 작품들을 부끄럼없이 내놓고 있는 현실의 “병태적 창작”에 비하면 막언의 민간립장, 현실립장의 창작자세는 소중하며 존경할만한것입니다.   - 신: 막언작품의 주요한 제재였던 고향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풀이해야 될까요? = 김: 고향을 주무대로 다루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들은 또 단지 고향이라는 공간,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있습니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 문학의 일부인 중국 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습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습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 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입니다. 고향의 일상과 간단한 자연주의를 넘어서 텅 비고 무의미한 형상과 력사에 대한 맹목적인 락관과 비관을 극복하고 이에 민간적인 기질, 신념과 의의를 부여한것입니다. 좁게는 고향인 산동 지방의 농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는 작품들에서도 분방하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 신: 그럼 우리는 막언의 문학관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가요? = 김: 막언의 창작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것은 문체의 각도에서 문학을 인식하고 있는 그 점입니다. 그는 부동한 방식과 형식의 필법으로 문학을 기록하고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여타의 작가들의 작품이 한가지 방식으로 부동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반해 막언은 부동한 방식으로 한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막언은 일찍부터 마르케스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나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魔幻)현실주의소설의 결구 방식을 배웠던거지요.  소설의 서사결구로부터 소설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막언은 온갖 실험을 적극 시도해왔습니다. 농촌, 군사, 력사, 괴담, 로맨스, 반부패 등 다양한 주제의 돌파와 개척으로부터 서사방식에서는 다인칭 시점에 지방언어, 문화대혁명시기의 언어, 민간창법, 및 경전문학작품을 차용, 흡수하면서 실험적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중국 전통의 소설형식인 장회체(章回體)를 사용하는가 하면 의식의 흐름기법이나 판타지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적지않은 작품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비슷해 유럽에서는 막언이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합니다. 작품들에서 다양한 기법을 적극 실험하는 작가여서 한 문예사조로 국한되기를 거부하지만 막언을 현대 중국의 문예사조로 따져본다면 1985년부터 불기 시작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學, 전위파)계렬의 작가로 볼수있습니다.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은 “좌”의 철사에서 벗어나 국문을 열어 젖혔고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거치면서 세계와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편승해 세계적인 사조와 문학성과들을 중국의 작가들은 민감하게 포착하고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립장에 든든히 발붙이고 자신들의 작품에서 간거한 탐색과 사색을 이어나갔습니다. 막언은 그들과 함께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学) 계렬의 작가이며 그 선두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물론이고 개혁개방 초기의 상흔(伤痕)문학과 반사(反思) 문학에서 벗어나 “삶의 문제”를 주제로 한 문학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가 그에 일관된 작품을 다량으로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편 서구의 영향을 외양으로 중국전통의 창작방식을 골조로 하면서 그 상호작용에 의한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들을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 작가와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사조와 호칭을 갖다 붙일수 있는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그가 폭넓은 문학 세계에 침잠하여 다양한 문체나 서술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한데서 쌓을수 있은 성적가리인것입니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쉴줄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를 신랄한 비판, 고난속에서도 결코 놓치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작가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습니다.   - 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까지 네 번에 나누어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김혁소설가를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를 방송해 드렸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문학살롱 여기서 줄입니다.   (끝)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조바니 마라디의 피아노 연주곡들    
3    막언과 노벨문학상 (3) 댓글:  조회:3776  추천:7  2012-12-16
막언과 노벨문학상 (3)   노벨상과 어깨를 스친 중국의 작가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 계속으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막언은 중국공민으로는 노벨문학상을 처음 수상한 사람이지만 막언에 앞서 중국문단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문호들이 적지 않은걸로 알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리스트에는 중국의 적지 않은 작가들이 유력한 후보로 그 이름이 물망에 올라 있었습니다. 대문호였던 로신(魯迅)과 로사(老舍), 심종문(沈從文), 전종서 등입니다.   - 신: 로신은 중국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작가이지만 그의 문학생애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 김: 문학가 겸 사상가로서 "중국문학의 대부"로 대접을 받고있는 로신은 "광인일기","아큐정전(阿Q正传)"등의 명저로 그 이름이 해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신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며, 로신 이후 중국문학은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중국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될 정도의 강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왜 아직도 로신일까?" 하는 물음에 문학계에서는 “로신은 이미 인류의 고전이고 그가 없이 중국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왜서? 로신은 지난세기초, 중국의 근대이행기의 암흑과 민족적 절망속에서 끊임없이 "신"과 "구"의 갈등을 몸으로 겪어왔기때문입니다. 문학을 통해 봉건례교를 비판하고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인간의 참다운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항상 고민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를 거듭하면서 1936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로신의 본명은 주수인(周树人)으로 1881년 절강성 소흥에서 태여났습니다. 주씨네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였으나 조부가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꾀하다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집안은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을 대느라 재산은 탕진되였습니다. 집안의 장남인 로신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기울자 차갑게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습니다.         1902년 로신은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고 의학은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여지없이 깨집니다. 수업시간 일본선생들은 틈틈이 환등을 돌려주었는데 그가 본 환등은 로일전쟁 당시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였습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는데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내린 중국인들이였습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양 멍하니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무감각한 모습앞에서 로신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로신은 의대를 그만뒀다. 그가 저서 "납합"에서 갈파했듯이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신이 다음에 구한 행동반경의 답은 문학이였습니다. 어리석은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였습니다. 펜으로 "중국인의 렬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고 로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로신이 중국문학사에서 그처럼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1918년에 발표한 단편 "광인일기(狂人日记)"가 있습니다.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를 그린 "광인일기"는 평범한 구어체를 사용하면서, 중국의 낡은 전통을 철저히 공박하는 내용을 담은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로 "아큐정전"과 함께 "낡은 유교관념을 버리자"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문학혁명"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 신: 소설외에도 후에는 잡문이 로신의 문학적 인생을 더욱 승화시켰다고 생각되는데요? = 김: 로신을 세상에 알린것은 또한 그가 애용하는 쟝르인 잡문이였습니다.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는듯하지만 기실 그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뿐입니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여 있고 그 이후부터 세상뜰때까지는 잡문쓰기에만 치중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군벌들의 폭정, 권력에 굴복하면서도 정인군자인 체하는 하는 지식인. 로신의 붓끝은 그 모두를 까발려 놓았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김학철 선생이 경모해 마지않으면서 역시 많은 필봉을 돌렸던 쟝르였던 그의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면서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로신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그의 잡문을 통해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외세와 봉건세력과 마주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였습니다.        이렇듯 로신은 일생동안을 봉건의식에 젖어 있던 무지한 중국인을 일깨우기 위해 로심초사했습니다. 그러한 그이의 학문과 정신을 높이 기리여 그가 타계했을때 중국인들은 그의 시신을 "민족혼"이라고 쓴 비단으로 감싸 깊은 추모의 뜻을 표했습니다.   - 신: 로신의 이와 같은 문학적 공로가 당시에는 세계적인 인정도 받았는데 그는 왜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 김: 1930년대까지 노벨문학상은 영어권에만 돌아갔습니다. 우선 심사위원들이 각국의 언어를 리해하기 어려워 영어나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을 검토해서 심사하기 때문에 영어권이 아니면 정당한 평가를 받기가 힘든 상태였지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이에 미안했던지 1930년대 초, 동양권 나라의 작가에게 주기로 작정하고 수상자를 물색해 보았다. 마침내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로신에게 주기로 결정하여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신은 "서양 놈들의 상을 내가 왜 받나?"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사실 로신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안된다"며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로신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중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당시 서구인들은 로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로신의 위대한 작품들은 양헌익(杨憲益)의 주옥같은 번역에 의해 로신 사후에 서구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양헌익은  "홍루몽"을 영어로 번역한 학자였습니다.     - 신: 로신외에도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익숙히 알고 있는 로사 역시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였습니다고 들었는데 로사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 김: 극작가인 로사(老舍)는 1899년 2월 북경에서 가난한 만주 기인(滿洲旗人)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본명은 서경춘(舒庆春)입니다. 해학적 풍자소설과 단편소설 작가로 등단했으나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애국적이며 선전적인 풍의 희곡과 소설들을 썼습니다. 로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하층 서민에 대해 동정의 시각을 키웠다. 1917년 북경 사범학교를 졸업한후 한동안 교직생활을 했으며 5•4신문화운동때부터 백화문(白話)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동양대학에서 표준중국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때 5년 동안 명청시기의 소설 "금병매 (金甁梅)"의 공동번역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영어실력을 키우기 위해 읽게 된 찰스 디켄즈의 소설로부터 자극을 받아 첫번째 소설 "장선생의 철학 (老张的哲學)"을 "소설월보(小说月報)"에 발표해서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6년간의 류학생활중에 "이마 (二马)" 등 지식인의 생활상을 씁쓸한 유머로 묘사한 장편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1931년 귀국후 제남의 제로대학과 청도의 산동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계속해서 희극적이고 행동성이 강한 작품들을 써나갔습니다.         1936년 로사는 대표작인 "락타상자(骆驼祥子)"를 발표합니다. 군벌 통치하의 북평(북경)을 배경으로 인력거꾼으로나마 생활을 개선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상자(詳子)의 비극적 운명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구사회를 고발, 단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북경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는 평을 받습니다. "락타상자"는 5.4 이래로 도시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그 주제사상의 깊이와 폭에서나 인물형상의 창조에서 모두 이전에 쓴 작품을 훨씬 릉가합니다. "락타상자"는 그후 1945년 미국에서도 영문으로 출판되였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여 로사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떨치게 됩니다.        1946년 문화보조금을 받아 미국을 려행하면서 강의를 하고 작품의 번역본을 검토했습니다. 미국에 머물러있는 기간, 100만 자가 넘는 3부작 "사세동당(四世同堂)"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 점령하의 북경에서의 4대가 함께 살고 있는 대가족 식구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세세하게 그려내고있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되고 중국으로 돌아와 그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북경시 문련 주석 등의 요직을 계속해서 력임했습니다. 그때 선전적인 희곡들을 계속 써나갔습니다. 이 가운데 "룡수구" 등은 북경의 변한 모습과 새로운 생활을 묘사하여 새 중국을 칭송한 희곡작품입니다. 이외에도 연극명작 "차집 (茶馆)"을 비롯해서 2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하면서 민간대중예술의 부흥과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시달림에 못이겨 늪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채 로사는 1978년 6월에 복권, 명예회복이 되였습니다.   - 신: 로사의 문학활동은 국제적인 인정도 받았고 노벨문학상과 아주 가깝게 접근했던 경력과 자격이 있었는데 왜서 수상자의 반렬에 오르지 못했는지요? = 김: 그동안에도 노벨문학상은 그냥 서양 문학가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1968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다시 동양권에 문학상을 주기로 내정하고 중국의 소설가이자 학자에게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의 아비규환에 시달리고있었습니다. 우리의 노벨상 후보는 "미국간첩"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홍위병들에게 매일이고 끌려 다니면서 구타를 당하고 강압에 못이겨 자아비판을 하면서 고통을 겪고있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소식에 관련부문에서는 그냥 "그런 사람 찾을수 없다”며 이 소식을 일축해 버렸습니다. 이에 스웨덴에서는 문학상을 동양권의 문학가에게 주기로 한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 로사 대신으로 "설국(雪国)"을 쓴 일본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시상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노벨문학상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쳐가게 된거지요.     - 신: 로사의 경우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아픔이였습니다. 다음은 중국에서 최고로 장수한 작가인 파금도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라고 들었는데 파금의 경우에 대해 소개주시지요. = 김: 파금은 중국 문단에서 로신,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로사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6대 거장(大師)"으로 손꼽힌다. 파금(巴金)은 본명이 리요당(李堯棠)입니다. 자는 불감(芾甘)으로 1904년 11월 25일에 삼국시대 촉나라의 수도였던 사천성의 성도시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프랑스 류학을 마치고 돌아와 20년대부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여기 그의 창작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반일활동가이고 또한 이름난 농학자였던 류자명과의 교분입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고 류연산선생이 평전을 쓴 바로 그 류자명입니다.        50년대 호남성에서 조선교민으로서 농업연구를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던 류자명은 1970년대에 북경 주재 조선대사관에 가서 국가훈장을 받았다. 몇 해전에 그의 무덤은 호남성에서 한국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사람의 절친한 중국친구가 바로 파금이였습니다. 파금문학활동초기의 단편소설 대표작 "머리카락의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얘진 류자명의 모습을 보고 령감을 얻어 쓴것입니다. 류자명은 어릴적부터 흰 머리카락이 많았는데 파금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일투쟁속에서 분노와 고민 때문에 흰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생겨났습니다고 그렸습니다.         파금의 작품은 "힘과 정(情)과 열기가 종이를 뚫는다"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의 분량이 방대한 작품 중에서 첫 손 꼽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있는 장편소설 3부작인 "격류 3부곡(激流三部曲)"- "집(家)", "봄(春)", "가을(秋)"입니다. 성도시의 방대한 고(高)씨가문을 무대로 하여 봉건가정의 암흑한 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은 현대중국문학사의 걸작중 걸작으로 인정된다. 지난세기 30~40년대에 이 책을 통해 봉건사회의 부패성을 인식하고 낡아빠진 가부장제도를 뒤엎어야 합니다고 깨달아 공산주의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파금의 장편 "집"은 중국 언론이 뽑은 "20세기의 100대 예술작품"에 들어갑니다. 파금은 1983년부터 중국작가협회 주석 직을 맡게됩니다.        파금은 빈번히 일어나는 정치운동에서 고초를 겪곤 했는데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그는 하루에 3, 400자씩 쓰는 속도로 꾸준히 글을 써서 8년만에 150여 편의 글이 담긴 5권으로 된 "수상록(隨想录)"을 내놓았다. 파금은 당시 수상록 집필을 앞두고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것, 뜨뜨미지근한것, 남이 말하니 나도 따라서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쓰나마나 한 글이 결코 아니다"라며" 소리없고 힘없는 하나의 절규로서 위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에 참여하고자 합니다"고 집필 방향을 밝혔다. 파금은 말년에 파킨슨병 등을 앓아 상해에서 6년간 식물인 상태로 병마와 싸우다가 101세에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파금은 17세인 1921년에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1999년에 옛 친구를 추억하는 글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문학생애는 장장 79년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으나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상 평심단은 파금의 작품에 대해 "아주 좋은 소설들입니다. 미래의 중국 연구자들이 지난 세기 사천인들의 생활상을 알려면 꼭 파금의 작품을 읽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2004년 11월 25일 100돌 생일에 국무원에서는 그에게 "인민작가"라는 큰 칭호를 주었습니다. 우리 작가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입니다.     - 신: 중국문단 더욱이 해외에서는 심종문에 대해서도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요, 그 역시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가까웠던 작가의 한분이지 않습니까? = 김: 고대문화 연구가이자 작가인 심종문은 호남성 봉황현(鳳凰)에서 묘족의 혈통을 지니고 태여났습니다. 중국 농민들의 투쟁과 승리를 주제로 하여 35권 이상의 소설을 썼습니다. 소년시절을 군대에서 보냈는데 그의 부대의 지휘관은 고적과 고서화를 좋아했습니다. 글을 아는 심종문에게 분류와 관리를 맡겼는데 이때 심종문은 적지않은 력사서적을 읽었습니다. 군복을 벗고 심종문은 북경으로 갔습니다. 겨우 푼돈만 남았지만 대학생이 되고자 했지만 시골 청년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학 주변을 맴돌고 해가 지면 석탄 창고를 찾아갔습니다. 고도인 북경은 거대한 박물관이였습니다. 온종일 책방에 서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프고 몰골은 말이 아니였지만 심종문은 그책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기적이였습니다. 그는 글로만 접했던 욱달부(郁達夫)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북경대학 통계학과 강사 욱달부는 낯선 청년의 편지를 받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발신자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욱달부는 신보부간(晨报副刊)의 새로운 편집인이였던 서지마(徐志摩)에게 심종문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총명해 보이는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서지마는 채택되지 않았던 심종문의 원고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욱달부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서지마는 심종문의 글을 연달아 독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심종문은 하루아침에 호적(胡適), 량계초(梁启超), 문일다(聞一多)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후 그에게 북경을 대표하는 "경파(京派)문학의 령수"라는 명칭이 씌워졌습니다. 그는 번역문으로 읽은 서구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은 자유스럽고 통속적인 문체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단편•중편•장편 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장편소설 가운데 대표적인것은 항일전쟁중에 쓴 "장하(长河)"이며, 단편소설로는 "춘등기 (春灯记)"•"흑봉기 (黑鳳记)"등입니다.         문혁기간에 그역시 박해를 받고 문단과 북경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대륙과 대만 량쪽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였습니다. "분홍작가", "립장이 없는 기녀작가"로 비판당하며 고초를 겪었던 그는 "4인방"이 거꾸러지고 개혁개방과 함께 복권되였고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의 독자들은 "심종문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작 "변성"은 풍경 수려한 향촌에서의 삶과 인정을 서정적 필치로 그려내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걸작입니다. 담담한 수채빛으로 그려지는 세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인상적인것은 중국의 전통사회와 중국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입니다. 서구렬강들의 침탈에서 비롯된 20세기초 중국사의 격변기에 로신같은 작가가 중국인을 "아큐"라고 꾸짖으며 계몽의 목소리를 드높일때 심종문은 "남을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일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여들어들어야 합니다"며 중국인들의 본성적 휴머니즘에 주목했습니다. 한소공같은 중견작가들은 바로 심종문의 향토주의적 미학의 계승자로 꼽힙니다.   - 신: 심종문은 무슨 원인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김: 1988년에 심종문은 후보는 물론 초기 선정에 포함됐으며 5명의 최종 후보에 올라 선정위원으로부터 가장 호감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기 5개월전에 사망해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종문 소설 3권의 완역본을 번역, 출간한 노벨상평심위원 말름크비스트는 신문학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로 심종문을 꼽습니다. 2007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그는 다시 심종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발표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것이 아직도 애석하다. 88년 10월의 노벨 문학상은 당연히 심종문의 것이였다."고 애석해 했습니다.     - 신: 유감스럽게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단의 문호들이였지요. 그 가운데는 전종서도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 능통하고 뛰여난 재능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학자인 전종서는 1910년 강소성 무석에서 태여났습니다. 19세에 청화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32년부터 상해 광화(光华)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35년 전종서는 양강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류학을 떠났습니다. 2년후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빠리대학으로 가서 연구활동을 하였습니다. 1938년 청화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였습니다. 항전이 끝나고 그는 상해 제남대학교 외문과 교수 겸 남경중앙도서관 영문관이 출판하는 "서림계간(書林季刊)"의 편집인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동안 작품집인 "인수귀(人兽鬼)", 소설 "포위된 성(围城)"등을 련이어 내놓아 문단과 학술계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53년부터 문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송시역주(宋诗译主)"를 완성하였고 "중국문학사" (당, 송 부분) 공저 작업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중에 부인과 함께 하남성의 "5.7간부학교"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1972년 3월 북경으로 돌아와서 계속 연구에 종사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특별고문을 력임하였습니다. 1998년 12월 19일 북경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전종서의 "포위된 성"은 중국 현대문학사상 독특한 풍격을 지닌 풍자소설입니다. "포위된 성"은 1944년에 집필이 시작되여 1946년에 탈고되였습니다. 당시 작자는 상해에 칩거중이였는데 일본 침략군의 만행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전종서는 철저하고 꼼꼼한 자세로 인생의 깨달음과 학문의 사유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입하면서 소설 "포위된 성"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포위된 성" 초판의 머리말에서 "현대 사회의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류의 인물을 쓰려고 하였습니다."고 자신의 창작 의도를 자술하였습니다. 소설은 지식인 계층의 청년 남녀의 애정 갈등속에서 포위되고 탈출하는 과정을 엮으면서 함몰된 지식인의 정신세계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심각한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포위된 성"은 세태와 인심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고도의 심리 묘사를 표현해 내고 있으며 그 묘사는 시종 조롱과 풍자라는 희극적인 문체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곳곳에서 올곧기도 하고 삐뚤어지기도 하며 고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으며 신기한 비유와 각종 경구가 점차적으로 등장하고 반복하여 나타게 하여 언어를 더욱 풍부하고 지적으로 만들어 내였습니다.   - 신: 전종서는 왜서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없게 되었는지요? = 김: 전종서는 중국문화계에서 문화곤륜(文化崑崙)"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전종서는 1988년에 노벨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피선되였습니다. 전종서를 떠올리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종서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 노벨이라는 사람은 화약보다도 노벨상을 만들어 인류에 더 큰 해를 끼쳤다”며 불쾌해했습니다.   - 신: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호들의 개별적 사안들에 대해 말씀 주셨습니다. 통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중국작가들이 지금껏 노벨문학상과 그렇게도 접근했으면서도 받지 못했던 리유를 주객관적으로 어떻게 볼수 있습니까? = 김: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노벨문학상 선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1938년까지 아시아 작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학계와 세계문단은 분석하고있습니다.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는 1960년대에 "아시아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주기로 내부방침을 정한뒤 6,7년 동안 치렬한 토론을 벌렸다”고 합니다. 17번이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주임을 맡았던 스웨덴의 유명한 시인, 셸 에스마크(82)가 로신과 로사, 심종문 등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본인의 사양(로신)과 죽음(로사, 심종문)으로 수상하지 못했습니다고 밝혔다. 중국의 현대문학에서 그 선두주자로 달리면서 노벨문학상의 문턱까지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로신, 로사, 심종문, 파금 등 이들은 작가마다 작풍(作风)이 다르기 때문에 우렬을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히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올해 문학상을 받은 막언은 이들의 영향아래 중국의 고대 민간 서사(敍事)에 서구의 근대성을 융합시킨 작품으로 세계로 나아가는데 성공하게 된것입니다.   -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노벨문학상과 아쉽게 연이 닿지 않았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 약속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서 접겠습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    막언과 노벨문학상 (2) 댓글:  조회:3878  추천:9  2012-12-05
막언과 노벨문학상 (2)   막언의 대표작 해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주 이 시간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소설가 김혁선생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으로 막언작가의 프로필, 문학창작의 길,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붉은 수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막언의 장편소설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의 첫 방송을 통해 우리는 중국공민으로는 첫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막언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막언의 장편소설들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리겠는데요, 어떤 장편소설들이 있습니까?   = 김: 막언의 장편소설은 모두 11부인데 거개가 력작이라 말할수 있지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대표작격인  "풍유비둔 (丰乳肥臀)", “생사피로 (生死疲劳)”, "박달나무 형벌 (檀香刑)", "개구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신: “풍유비둔”의 한자어 해석대로 하면 풍만한 젖가슴과 엉덩이라는 뜻인데요, 아마도 여성상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인상이 느껴집니다.           = 김: “풍유비둔”이라는 제목은 모성 그리고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1996년에 발표된 소설은 그 이듬해 제1회 "대가 홍하문학상 (大家.红河文学奖)"을 수상했습니다. 당시로 말하면 거금인 10만원이라는 상금의 수상과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한때 가장 물의를 빚었던 작품입니다.          줄거리를 보면-   청나라 말기에 태여난 어머니 상관로씨(上官鲁氏)는 중국의 "치욕의 전매물"인 악명 높은 전족(纏足)의 고통을 겪으면서 소녀로 성장하고 결혼한 뒤에는 무기력한 남편을 만나 시어머니의 구박속에서 하루가 지겹게 살아갑니다. 아들을 낳아야 집안에서 사람대접을 받을수 있는 처경에서 로씨는 아들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임신하는데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고모부이기도 하고 우연히 마을로 들어온 장사아치거나 떠돌이 의사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화자인 금동이는 비극적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금동이 태여나는 날 일본인들이 마을에 진입하고 금동의 일가족은 소름 끼치는 전쟁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전쟁과 출생, 신생의 희열과 죽음의 재난이 한 가정의 마당에서 무대극처럼 동시에 펼쳐집니다. 금동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며 바로 문화적 숙명이 되는거지요.   그런 금동은 점차 커가면서 녀자의 유방에 집착하는 편집적인 행동을 보이며 사체 강간범으로 징역을 살게 되기도 하는 기이한 운명을 살아갑니다. 작가는 소설에서 혼혈아인 상관금동을 통해 중국인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문화의 이원성(二元性)을 말하고자 합니다.   9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사건들은 20세기 중국의 여러 사건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지난 20세기 중국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모든 중대한 력사적 사건들이 소설에 등장합니다. 8국련합군의 침입, 일본군의 침략, 국공의 내전, 중국의 동란시대에 련달아 일어나는 정치운동, 그리고 1990년대의 시장경제까지 한데 어우러져 중국의 근현대사를 소설 한권에서 한눈에 살펴볼수 있습니다.        "풍유비둔", 살찐 젖과 엉덩이라는 뜻으로 자칫 잘못하면 외설적인 느낌의 제목이 될수 있을지 모르는 작품입니다. 하여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한때 판매가 금지되였다가 다시 판금조치가 풀리기도 한 문제작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어머니, 즉 모성애입니다. 어머니라는 생명의 모체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의 한풀이를 하고 싶었던것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우리가 알고있는 륜리적이며 도덕적인 어머니가 아닙니다. 따뜻하고 친근한 어머니와 달리 막언의 필끝에서 주조된 이 어머니는 어쩌면 쉽게 용납할수 없는 행위들을 일삼는다. 대를 잇기 위해 누구와도 쉽게 잠자리를 하는가 하면 근친상간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시부모를 죽이며 심지어 외국 국적의 목사와 한쌍의 혼혈아를 낳기도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은 파격적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하나의 부호로 나타납니다. 작가는 "유방 콤플렉스"라는 병적에 가까운 환자의 행태로부터 은유적인 수법으로 작품을 전개해 나가면서 어머니의 일대기를 통해 20세기 중국의 정치와 민간의 생존방식을 조명합니다. 병태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위는 어머니의 전형성에 손상을 주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의 위대함과 불멸의 원시적인 모성애의 창조력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항간에서는 외설적인 작품으로 "색 안경"을 끼고 읽히고 있고 작가는 참혹한 모습들을 어딘가 흥미로운 스토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속에는 중국의 힘든 근대사를 살아와야 했던 녀인네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아픔과 련민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나름의 성모마리야와도 같은 민간녀신을 주조해 내려 꾀합니다. 중국의 전형적인 어머니를 통해 대륙의 비극적 근현대사의 아픔을 이야기하려는것입니다.   한시기 평론가들과 독자들에 의해 폄하(貶下)당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은 창작자인 막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창작생애에 있어서 가장 막중한 작품"이라고 간주 되여 있습니다. "풍유비둔"은 막언으로 말하면 민간서사성 방식의 창작에서의 성공적인 실험작이였습니다.   - 신: 한 가정의 이야기속에 중국의 근현대사를 담아냈고 또 이를 통해 모성 그리고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했던 막언의 장편소설 “풍유비둔”이였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작품입니까?         = 김: 다음 소개해드리려는 작품은 장회체로 펼쳐지는 인생극장인 “생사피로 (生死疲劳)”입니다. 2006년 작가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이 작품은 "중국고전소설과 민간서사(叙事)라는 우리 고유소설들의 위대한 전통에 경의를 드린 큰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주인공이 나귀, 소, 돼지, 개, 원숭이를 거쳐 새로운 천년인 2001년 세기의 아이로 환생한뒤 그가 륜회과정에서 보고 겪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술의 형태로 진행합니다.   - 신: 장편소설 “생사피로”의 줄거리는 어떻습니까?   = 김: 줄거리를 보면-    고밀 동북향의 지주였던 서문노는 토지개혁시기에 악덕지주로 몰려 동네사람들에게 총살당합니다. 염라전에서 서문노는 염라대왕에 의해 서문집안의 나귀로 환생합니다. 환생하여 돌아와 보니 둘째부인 영춘(迎春)은 서문노의 자식인 금룡과 보봉을 데리고 서문집안의 머슴이였던 람검(蓝脸)에게 개가를 했고 셋째부인 추향은 서문노를 총살한 민병대장에게 개가를 했습니다. 서문나귀가 륜회하던 날 람검과 영춘의 아들 람해방이 태여납니다. 람검과 영춘은 서문나귀를 극진히 보살피고 토지개혁으로 서문촌의 모든 이들이 인민공사에 가입했으나 람검은 혼자만 개인농사를 고집합니다. 그러는 람검을 서문촌 촌장 홍태악(洪泰岳)이 락후분자라며 괴롭힙니다. 서문나귀는 석수쟁이 한씨네 암나귀와 정을 통하고 촌민위원회 서기인 방호의 애마가 되였다가 어느 한번 부상을 당해 목숨을 잃습니다.   1964년, 서문노는 다시 소로 환생해 소시장에서 팔려 람검네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람검부자는 홍위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참다못해 이때 강제로 교미를 시키려던 사람들을 피하다가 서문소는 또 한번 죽음을 맞습니다. 세번째로 서문노는 서문촌 농장에서 새끼돼지로 환생합니다. 본처인 백씨의 보살핌으로 서문돼지는 으뜸가는 종자돼지로 자라납니다. 그동안 서문노의 본처인 백씨는 홍태악의 희롱을 받고 분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 자살합니다. 서문돼지는 한겨울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다 죽음을 맞습니다. 네번째에는 개로 환생한 서문노는 람해방의 집에서 자라게 되지요. 부현장 자리에 오른 람해방은 방호의 딸과 사랑에 빠져 아들 람개방(蓝开放)을 버리고 마을에서 도주합니다. 마을에 남은 늙은 람검과 함께 서문개는 죽음을 맞고 다시 염라전에 불려가게 됩니다.   서문노는 마지막으로 방봉황(庞凤凰)과 서문환이 데리고 다니면서 공연하는 원숭이로 환생합니다. 서문환은 서문금룡의 아들, 즉 서문노의 손자입니다. 동네 건달무리들에게 서문환이 죽임을 당하자 봉황을 련모하던 람개방은 봉황을 돌보며 어렵사리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는데요. 봉황과 결혼하겠다는 람개방의 말에 람해방은 사실 봉황은 람개방의 큰아버지의 딸이라는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이에 분노한 람개방은 봉황의 원숭이를 쏴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습니다. 2000년 새해의 어느 밤, 서문촌 역전의 한 려관에서 봉황이 람개방의 아이 람천세를 낳습니다. 하지만  봉황은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후 람천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륜회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것으로 소설은 대매를 장식합니다.          어찌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작품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나면 막언은 참말로 탁월한 이야기 꾼이고나 하는 감탄을 머금게 됩니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중국이 성립된후의 새해인 1950년 1월 1일부터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1년 1월 1일까지 반세기의 중국의 력사를 파노라마로 펼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토지분배가 이루어지고 인민공사라는 집단소유제가 실시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됩니다. 이처럼 중국은 20세기 인류력사의 상징적인 실험장이였습니다.   작가는 즐겨 다루던 중국현대사의 질곡과 급변하는 현실이라는 소재에, 륙도륜회라는 동양만의 상상력을 더했습니다.     "생사피로"는 그 반세기동안 중국 농민들이 겪은 경험과 아픔과 력사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속에 깊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막언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운명적인 륜회를 바탕으로 중국사의 운명적인 륜회를 이야기합니다. 력사의 큰 흐름속에서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력사의 흐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줍니다. 한편 소설에서 막언은 "인간사의 덧없음과 고달픔"이라는 깊은 주제를 읽는 재미를 살려 탁월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있습니다.        소설속 주요 화자는 인간이 아닌 동물입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로 살면서 바라본 세상사, 참으로 지극히 객관적이며 아이러니적입니다. 돌고 도는 인생사라는 옛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래세가 아닌 현세를 잘 살아야 하는 인생이란 어차피 달콤한 즐거움이 아닌 쓰디쓴 고통과 슬픔도 안겨주는 것이라는 각오를 깨닫게 합니다.   장회체라는 중국 전통의 서사방식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낸 이 소설은 기괴하고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능청스럽게 펼치는 그 입담이 절정에 다달았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이 작품은 2008년 미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였습니다. 영문으로 출간된뒤 주요 언론의 조명을 받았으며 최근 유럽 출간에 맞춰 개최한 랑독회에서도 열띤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 신: 막언의 장편소설 “생사피로”, 중국고전소설모식인 장회체 식으로 쓴것과 륜회의 형식을 통해 인물의 형상을 보여준것이 특징적이였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형식으로 된 작품입니까?   = 김: 휴머니즘의 파노라마--"박달나무 형벌 (檀香刑)"입니다.   - 신: 제목자체부터 이색적인 느낌이 듭니다.       = 김: 네, 개인적으로 말하면 이 작품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막언의 작품입니다.   2008년 상해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이 작품은 백여년전, 서방 8국련합군이 북경에 마수를 뻗치던 시기, 청조말 산동성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한편의 짜여진 드라마를 보는듯한 작품은 혁명과 민족, 법과 량심, 사랑과 그에 따른 시련이 박진감 넘치면서도 훈훈한 인간애로 관통되여있습니다.    1900년 독일이 원세개(元世凱)의 지원아래 중국에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합니다. 산동성의 어느 한 류랑극단의 단장 겸 배우인 손병(孙丙)은 독일인이 안해를 희롱하자 몽둥이로 후려쳐 죽이게 됩니다. 이 우발적인 사건으로 독일병사들은 안해와 두 아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피신해 떠돌던 손병은 "의화단"에 가입해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독일군과 맞서다가 관병에 붙잡히게 됩니다.   한편 손병의 딸 손미랑(孙眉娘)은 아버지를 따라 연극을 하던 배우 출신이며 백정의 젊은 안해로 개고기 주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보적인 고을 현령인 전정(钱丁)과 신분과 나이의 차이를 극복한 파격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 출신인 현령 전정은 물산이 풍부한 자신의 고장을 더욱 잘 다스리며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는 관리입니다. 그러나 청조말의 혼탁상과 렬강들의 침탈에 어떻게 조정의 무능한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을 돌볼수 있을까 고심합니다. 의화단의 봉기로 외세에 저항하는 손병의 민족정신을 십분 리해하면서도 전정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가 자신의 젊은 애인 손미랑의 아버지임을 알면서도 하는수 없이 손병을 체포합니다.    원세개와 독일 총독은 손병에게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참형을 가하도록 지시합니다.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이 된 박달나무 형벌을 행합니다. "박달나무 형벌"이란 참기름에 잘 삶은 매끄러운 박달나무 꼬챙이를 항문으로부터 박아넣어 내장을 상하지 않게 관통시켜 목뒤로 빼낸 다음, 다시 십자기에 매달아 놓아 5일간 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세계력사상 유례없는 가장 참혹한 형벌입니다.        조갑(赵甲)은 30여년간 북경에서 범인 수백명을 처형한 최고의 회자수로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귀향하여 아들과 며느리 손미랑과 살고 있습니다. 조갑은 혁명가이자 사돈에 대한 례우로 최대한 장엄하게 그 형벌을 가합니다. 하지만 그 집행관인 현령 전정은 민족의식이 되살아나 독일의 뜻대로 그 형벌이 성공하지 못하게 손병을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손미랑은 친아버지에게 참형을 가한 시아버지 조갑을 찔러죽인다. 작품은 비장한 막을 내립니다.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볼수있는 굴곡적인 스토리로 소설은 숨가쁘게 이어지고 잇지요.        배우였던 손병의 연극같은 랑만적인 인생과 혁명적인 비장한 삶. 고을 현령 전정의 법과 량심의 괴리, 그리고 조갑이 행할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체제의 법 질서와 사형의 미학. 손병의 딸이자 조갑의 며느리인 손미랑의 자유분방한 사랑 등을 그린 이 작품은 중국 대륙의 력사와 문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몰락하고있는 청나라의 파란많은 사건들을 소설은 죄다 끌어안고 있습니다. 무술변법, 의화단, 외국식민지렬강들의 수탈 등등… 이러한 잔혹한 운명 앞에서 몸부림치며 극한에 처한 환경을 이겨내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절실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박달나무형벌"은 민중의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평을 얻은 작품입니다. 막언은 "력사적 난관을 극복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내 고향 력사와 전통을 토대로 씌어진 이 실험적 력사소설을 읽으며 중국의 문화적 풍토를 리해해주길 희망합니다"고 자신의 창작의도를 밝혔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방대한 서사형식을 두고 평론가들은 "막언은 짙은 북방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치는 동시에 전통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고 분방하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구사해 세계적 반렬에 올랐다"고 평했습니다.        이 소설에도 역시 막언은 전례없는 실험성을 보이고있습니다. 작품은 주인공들이 직접 화자(話者)로 나서 독자와의 대화, 혹은 독백체로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듯 털어놓습니다. 연극 같이 주인공들이 직접 화자로 나서 작품을 이끌다가 그 작품의 중간에 작가가 화자로 나타나서 이야기의 전개상황을 설명하며 또 인물의 됨됨이도 평합니다.   "인민일보"는 이 작품을 "21세기에서 으뜸가는 위대한 중국 소설"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 신: 다음 작품은 지난해 모순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 “개구리”인데요, 이 작품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 막언의 장편소설 “개구리”는 넓은 감성과 깊은 사색을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2009년에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출간된"개구리"는 산아제한 정책인 "계획생육"의 실무자로서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며 임신부를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했던 한 산부인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루고있습니다. 소설은 극작가인 "올챙이(蝌蚪)"가 스기타니 요시토(杉谷义人)라는 일본작가에게 5통의 긴 편지를 보내여 향촌 산부인과 의사인 고모의 인생경력을 이야기하는 서한체 수법으로 되여있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조카가 일흔이 넘은 고모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고모는 실력 있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천여명의 아이들을 접생하므로써 “살아 있는 보살이자 삼신 할멈”으로 린근에 소문이 높다. 그러나 정부에서 계획생육정책을 펴면서 고모는 임신중절수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들을 보려는 욕심에 "불법임신"을 계속 감행합니다. 당에 대한 충성심과 락태시술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고모는 점점 폭력에 의존하게 됩니다. 임신부를 병원에 데려가 락태시키기 위해 무장민병을 동원하고 뜨락또르를 몰고 나서 집을 허물겠다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조카인 올챙이의 안해가 수술대에 올랐다가 뜻밖에 세상을 뜨지만 고모는 계획생육의지를 더욱 불태울 뿐입니다.   고모는 임신 7개월인 왕담(王胆)을 체포하고자 강에서 추격전을 벌인 끝에 복숭아를 운송하는 뗏목에 숨은 그녀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왕단은 뗏목우에서 조산하게 되여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이가 없어 고심하던 주인공 올챙이는 대리모를 써서 아들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대리모가 왕담이 떼목에서 낳은 딸임이 밝혀진다. 화재로 온몸에 화상을 입어 일을 할수 없는데다가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를 당하자 생계를 위해 그녀는 대리모로 나선것입니다. 출산후 애끊는 모정에 실성한 왕담의 딸이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올챙이는 거절합니다. 부조리한 정책때문에 안해와 배속 아이를 잃은 피해자였던 올챙이가 그녀와 자기 아들의 인권을 짓밟는 가해자로 돌변한것입니다. 분쟁이 커지자 고모는 거짓증언으로 올챙이가 아이 친권을 인정받게 돕게 됩니다.   자신이 락태수술한 아이들과 수술도중 사망한 녀인들에 대한 죄책감에 고모는 뒤늦게 회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모는 스스로 목매여 자살하려 하다가 올챙이에 의해 구조됩니다. 은퇴한 고모는 자신이 락태한 아이들의 모습을 흙 인형으로 빚으며 속죄의 모습을 보입니다.        막언은 "개구리"에서 중국 최초로 "계획생육"을 정면으로 다루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계획생육"이라는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막언의 관심은 역시 력사적 풍랑에 휘말린 인간과 그들의 삶입니다. 무가내한 시대의 소용돌이에 처해 있는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인물지간의 갈등을 세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번 힘든 시대의 상황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숨 쉬는 민중의 생명력을 찬미합니다. 이어서 당대 중국 지식분자들의 미비한 령혼에 대해 일격을 가합니다.      작품의 제목으로 된 개구리는 강력한 생식력으로 다산의 상징으로 꼽히며 중국에서는 년초에 집 문전에 붙이는 민화에 단골로 등장합니다. 또한 "개구리(蛙)"는 갓난아기를 뜻하는 와(娃)와 동음어이며, 중국 고전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해낸 녀신 녀와(女娲)를 련상시키기도 합니다. 작가는 "개구리"를 통해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여성의 출산조차 법으로 옭아매려는 력사적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숨 쉬는 민중의 생명력을 찬미하고있습니다.   - 신: 참으로 개구리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고 생각됩니다.   = 김: 소설 “개구리”의 한대목을 읽어보기로 합시다. 사실 개구리가 뭐 무서워요? 사람과 개구리는 조상이 같잖아요. 올챙이랑 사람 정자랑 모습도 비슷하고, 사람 난자랑 개구리 난자도 별반 차이 없어요. 그리고  3개월 된 태아 표본 본 적 있어요? 긴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이 변태기 개구리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고요.    "개구리"에서 막언은 또 한번 구성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합니다. 이번에는 서신체와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이 등장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자전적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며 마지막 편지에는 9막짜리 극본이 붙어 있습니다. 형식상 서한체가 분명하지만, 내용은 소설처럼 읽히고 어찌 보면 소설인데 분명 서한체입니다. 허구와 진실이 번갈아 등장하는 방식과 "연극속에 연극이 들어있는" 일종의 소격(疏隔)효과는 소설의 서사 공간을 크게 확대시켜 소설을 더욱 풍부하고 다의적으로 만들어 주지요.   십년이 되도록 구상해서 4년을 걸친 집필, 세번의 수개를 거쳐 내놓은 력작 "개구리"에서 막언은 많은 부작용과 론난을 량산하고 있는 이 문제에 최초로 문제 제기를 했고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막언은 "소설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것이며 나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쓰기로 했다"고 "개구리"의 창작담에서 말했습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막언은 이 작품에서 인간의 외로움과 공포, 리기심, 잔인함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한편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로동자·농민을 대하는 그 세월 체제의 허위를 폭로하고 관료주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중국넷"은 "민감한 주제를 다룬 대담한 소설”이라고 평했고, "남방주말"은 이 책이 "넓고 깊은 감성으로 력사가 수많은 이들에게 입힌 아픈 상처를 품어주고 있습니다."라고 극찬했다. "개구리"는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11년 제8회 모순 문학상을 수상했다. 막언으로 말하면 당시 이 작품으로 인생 최고의 상을 수상한것입니다.        막언의 몇몇의 작품에서 살펴봤다싶이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농민과 하층민을 사회의 중추적 세력으로 등장시켜 중국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고있습니다. 또 다양한 문체와 쟝르적 수법을 거침없이 구사하면서 거센 력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민중의 삶을 거침없이 그려내고있습니다.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김혁소설가를 모시고 막언의 장편소설 "풍유비둔", “생사피로”, "박달나무 형벌"과 "개구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막언의 작품세계를 한층 깊이 조명해본 시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주 계속하여 “막언과 노벨문학상” 세 번째 시간을 기대해 주십시오. 오늘 프로 여기서 마칩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    막언과 노벨문학상 (1) 댓글:  조회:3142  추천:9  2012-12-01
막언과 노벨문학상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10월 11일 저녁 7시에 중국인들을 흥분시키는 기쁜 소식이 노르웨이로부터 전해왔습니다. 바로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작가 막언이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는 첫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감동의 순간도 이제 한달 너머 지나갔지만 그 감격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에서 물결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시며 중견작가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이 같은 타이틀로 막언의 작품세계, 막언의 새로운 창작시도, 아시아의 노벨문학상수상작가들등으로 네번에 나누어 막언작가의 노벨문학상수상을 주제로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먼저 김혁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인사.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던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다시 한번 회고해 주시지요.   = 김: 해마다 시월이 오면 문학인들의 심장은 유난히 높뛰게 됩니다. 바로 세계가 선망하는  노벨문학상이 면사를 벗는 달이기 때문이지요. 또 한분의 위대한 작가, 주옥 같은 작품들을 우리는 성숙의 가을에 만나게 됩니다. 지난 10월 11일 19시,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는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중국 작가 막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翰林院)은 선정 리유에 대해 "판타지와 리얼리티, 력사와 사회를 폭넓게 조화시키면서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복잡다단한 문학과 닮은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중국 고전문학과 구전문학의 전통으로부터 또 다른 차별화 지점을 발견했다. "고 밝혔습니다.   - 신: 참으로 거창한 평론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막언작가의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공력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 김: 이 몇년간 중국의 적지않은 작가들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여왔습니다. 여화, 엄가령등이 그 후부로 물망에 올랐지요. 아시다싶이 여화는 “삶”을 쓴 작가이고 엄가령은 얼마전 장예모 감독이 영상화한 “금릉13채”의 원작가입니다. 지난해에는 엄가령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오보가 나가기도 했었지요. 그만큼 중국작가들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사회적인 열망과 기대치도 컸더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막언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내내 거론되여왔습니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련상시키는 거침없는 서사를 통해 중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일찌감치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중국 소설가로 사람들의 인상속에 각인되여왔습니다. . 막언의 작품은 근현대 중국민중의 삶을 그리면서 그 인물들의 부침(浮沈)에서 삶의 보편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노벨문학상을 거머쥐게 된것입니다. .   - 신: 노벨문학상은 비록 중국 사람들한테는 늦게 다가왔지만 아세아에서는 수상자가 몇분 되지 않습니까?   = 김: 노벨 문학상은 1913년에 인도의 “시성”으로 불리는 타고르가 수상했구요. 1968년에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두번째로 수상했지요. 그 유명한 “설국”을 쓴 작가입니다. 우리 조선족독자들에게는 “이즈의 무희”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다음은1994년에 또 일본작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했습니다. 그는 이번에 수상한 막언과 절친한 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0년에 중국 태생의 극작가 고행건이 아시아에서 네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중국태생의 고행건(高行健)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기에 중국 국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는 막언이 처음입니다.   - 신: 막언의 노벨문학상수상은 참으로 신주대지를 진감한 사건인데요, 막언의 수상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 김: 막언의 수상소식을 들은 중국의 문학계와 학계는 공동의 기쁨을 전달했습니다. .        유명한 작가 왕몽은 매체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는 아주 좋은 일입니다. 중국 현대작가와 중국 현대문학 성과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작가 맥가는 “막언의 수상은 중국의 작가군락에서 의의가 비범한바 "올림픽에서 서해봉이 첫 금메달을 따낸것과 같다는 감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상해문예출판사는 막언의 제8회 모순문학상 수상작 "개구리"등 여러부의 서적을 출판한적 있는 출판사입니다. 이 출판사의 관계자는 "막언의 문학창작은 그의 고향 고밀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의 창작은 단 한 번도 자기의 향토를 떠난 적 없다. 그는 ‘현실과 환상. 역사와 현실’을 아우르는 문학작품으로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역경을 거쳤지만 시종 아름다운 생활을 동경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가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훌륭한 품격을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        유명한 작가 봉학명은 "전통적인 독서가 도전을 받고 있을 때 막언의 창작은 세계문학의 최고 영예를 안아왔다. 이는 리얼리즘의 창작방법을 견지하고 문학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와 독자들에게 커다란 고무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        제6회 모순문학상 수상자인 호북성 문련 주석 웅소정은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념비적인 의의는, 중국문학이 세계로 나가자면 중국풍격. 중국정신과 중국기백을 견지해야 합니다는데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        북경사범대학 문학원의 장청화(張淸華) 교수는 "막언의 수상은 중국어문학이 자체의 예술수준과 문화실력으로 세계적인 승인을 받았다는 중요한 징표가 됩니다"고 표시했습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입니다. "가 세계문화의 공통인식이 된 오늘날 막언이 민족문화특색이 다분한 작품으로 성공의 본보기를 마련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스웨리예 문학원 원사이며 한학가인 마열연도 축하를 보냈는데 그의 기쁨은 아마 남다를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막언의 많은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문학권에 소개했기때문입니다. 그는 “막언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것은 그가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이기때문이라면서" “그는 그 자신이며 남이 하는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싶은것만 쓰며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 신: 당과 정부에서도 막언작가에게 축하를 보낸줄로 알고 있는데요.   = 김: 외교부는 인차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한 정례 소식공개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막언선생의 문학조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있습니다. 중화민족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갖고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류의 공동의 부입니다. .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벗들이 더 많이 중국의 문화를 료해하고 우수한 중국문학의 매력을 느끼는것을 환영합니다."        중공중앙 17기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장춘은 막언의 수상소식을 접하고 중국작가협회에 편지를 보내여 축하했습니다. 리장춘은 축하편지에서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신속한 발전과 함께 중국의 문학도 거대한 창조적 활력을 나타냈다면서 광범한 중국의 작가들이 인민생활과 민족전통의 깊은 땅에 뿌리를 박고 중국 특색과 중국 풍격, 중국 기상이 있는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했는바 막언이 바로 이들중의 걸출한 대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또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중국 문학의 번영과 진보를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종합국력과 국제영향력의 부단한 상승도 구현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      또 교육부에서는 실제행동으로 이에 축하를 표시했습니다. 교육부는 막언의 상당수 작품을 한문교과서에 게재하기로 한것입니다. 중학교 교과서에 막언의 초기 단편작품을 대거 수록하기로 했는데 막언의 초기 단편소설 "투명한 홍당무우"를 포함한40여편을 초, 고중 교과서에서 만날수 있게 됐습니다. 교육부 관련인사는 막언의 교과서 작품수록 여부와 이번 노벨상 수상이 관계가 있습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막언의 작품이 수업이나 독서교재로 쓰이기에 충분한 작품성을 갖고 있습니다고 강조했습니다. . 전문가들은 이같은 중국 관련당국의 조치는 중국 문학의 국제적 우수성을 알려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막언의 작품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것으로 분석했습니다. .   - 신: 막언작가의 노벨문학상수상을 우리는 하나의 성공사례로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문학창작에 정진하면서 겪었던 하나하나의 사연들, 프로필을 포함한 그런 부분들이 자연히 대중들의 관심사로 되고 있겠는데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 김: 막언은 1955년 중국 산동성 고밀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가을이면 붉은 수수로 온 마을이 붉게 물들던 그곳은 그의 문학적 모태가 태여났던 곳이였습니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으로 "막언(莫言)"은 글로만 뜻을 표할뿐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필명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굴곡 많았던 중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온 과정이였습니다. 째지게 가난했던 그의 가족에서는 형제들이 너무 배가 고파 나무껍질과 풀을 뜯어먹었을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습니다. 유년시절의 이런 시골생활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였고 그후 농촌생활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경험이 됐습니다. 소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한채 농촌에서 일했습니다. 열여덟살때부터 면화 공장의 로동자로 지냈고 1976년 중국인민해망군에 입대해 반장, 보밀원, 도서관리원, 교원, 간사 등 직을 력임하였다. 1981년 단편 "봄밤에 비는 내리고(春夜雨霏霏)"로 데뷔했습니다.  1986년 해방군예술학원을 졸업, 1991년 북경사범대학 로신문학원 창작연구생반을 수료한 그는 여러편의 향토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문단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중ㆍ단편소설을 주로창작했는데 사회현실을 독자들에게 진실하게 보여주는 형식의 작품을 주로 발표했습니다. .       그의 문학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은 1987년 중편소설 "붉은 수수(紅高粱)"를 발표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당년에 역시 무명이였던 장예모감독이 1988년 영화로 만들었고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 이는 장예모 감독, 녀배우 공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후로 막언의 작품이 20여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막언이 전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된것입니다. .        그후로 막언은 10여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희곡, TV 드라마 극본 등을 통해 뛰여난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유머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의 삶을 묘파하며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이딸리아 노니노 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향항 "홍루몽" 상 등을 휩쓸면서 명실공이 중국문단 중견작가의 반렬에 올랐지요. 2007년에는 중국 문학평론가 10인이 선정한 중국 대표작가 1위에 올랐고 지난해인 2011년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모순(茅盾)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중국 민중의 삶을 소재로 한 10여편이 넘는 장편소설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거둔 성과라 할수있습니다.        편안하고 친근한 동네아저씨 인상인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롱반진반으로 말했지만 "작가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것은 작가가 되면 수입도 짭짤하고 일년에 겨우 한번 꼴로 맛보던 물만두를 마음대로 먹을수 있는 큰 유혹에서였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막언이 노벨상을 수상한후 그의 부인에 의해 또 한번 거론되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막언은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창작에로의 매진은 한끼를 배불리 먹기 위해서였고 농촌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창작을 하게된 외재적인 공리성 인소(功利性因素)였다고 여러번 말한적이 있습니다. 배고품은 막언에게 가장 가슴아픈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만두 하나를 놓고 누나와 다툼을 벌렸고 고기가 먹고싶어 남들이 버리는 병든 돼지고기를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막언은 가끔 슈퍼에 들릴 때마다 허리를 굽혀 쌀의 싱그러운 향기를 맡아 본다고 합니다. "그때는 도저히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진수성찬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무껍질, 지붕에서 자라던 야생풀, 썩은 고구마 말랭이 등이 전부 훌륭한 음식재료였습니다. 배고픔의 가장 큰 영향은 모든 것을 기억에서 지우고 매일같이 먹을것만 생각합니다는 것이였습니다. 저처럼 자란 사람들은 커서 배불리 먹을수 있게 되고 나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인간세상에서 가장 보귀한 것이 식량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황금이나 보석이 아닙니다."고 막언은 감개를 표했습니다. .   - 신: 참으로 가식없는 리얼한 감정토로였다고 보아집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각도에서는 그의 상금액수와 앞으로 막언작품의 출판 등에 대해서도 많이 관심이 쏠린다고 생각됩니다.   = 김: 노벨상 규정에 근거하면 노벨문학상 상금은 원래 1000만 스웨리예 크랑인데 이는 인민페로 환산하면 937만 8224원이 됩니다. 하지만 구라파금융위기로 상금이 800만스웨리예크랑으로 줄어 막언은 인민페로 약 750만원을 받게 됩니다. 얼마전 매체들이추산한데 의하면 막언의 금년소득이 2억에 달해 중국작가중 갑부에 속할것이라고 합니다. 막언의 첫수입은 노벨문학상입니다. 중국의 개인소득세법에 따라서 국제기구에서 발급한 문학, 과학 등 방면의 상금은 개인소득세를 면합니다.   더욱 큰 수입은 막언 작품의 저작권료에서 나오게 됩니다. 곧 출판하게 되는 "막언문집"은 20부의 작품으로 되였습니다. 한세트의 가격이 700~800원이고 백여만책을 인쇄할 예정이라합니다.  100만책이 700원일 경우 정가총액은 7억원에 갑니다. 이밖에 북경 정전박유문화발전유한공사의 원 계획에 따르면 올해 막언의 새책 4권이 시장에 나가게 됩니다. 이미 그중 한 권인 “변화(变)”라는 작품이 서점가에 나왔는데 저도 며칠전 연길시 2중부근의 화신서점에서 그 책을 이미 샀습니다. 대략적인 계산에 따르면 "막언문집"은 막언에게 7000만원의 저작권료를 가져다주고 새책의 저작권료에서만도 막언은 1.1억원의 수입을 올릴수 있습니다보고있습니다.   이밖에 영화, 텔레비죤 판권각색비도 있습니다. 막언이 수상한후 10여시간안으로 20여개소의 영화공사에서 북경 정전박유문화발전유한공사에 매매문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 영화텔레비죤제작사에서 말한데 따르면 국내 지명작가의 판권각색비가 20만~30만원이기에 막언은 "최소한 백만을 얻을수 있습니다”고 합니다. 막언이 몇년전에 창작한 텔제비죤련속극은 계속 방치되다가 막언이 수상한 이튿날 누군가 120만에 이 원고를 사겠다고 나타났다. 여기에 이미 출판된 작품의 금년 저작권료, 해외 판권수입 등을 합합니다면 막언의 금년소득은 2억원이 문제없을것입니다.   - 신: 노벨문학상이라는 이 계관의 영향력에 저도 몰래 경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 김: 여기서 자꾸 수입에 대해 말하니 속된것 같기는 하지만 구태여 말하고저 하는것은 당년에 물만두를 먹고싶어 작가의 길에 오른 산동성 고밀현의 굶주린 청년, "외로움. 허기가 내 창작 자산"이라고 토로했던 중국 오지의 가난한 문학청년은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되였다는 그것입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나와 금빛찬란한 한림원으로, 문학의 전당으로 오르게 된것입니다.   = 신: 자, 이제 막언을 화려한 무대에 등장시켜주었던 그 작품들에 대해 짚어주시지요.   영화 "붉은 수수"의 포스터  = 김: 막언의 문학세계의 진수를 보여줄수있는 주요작품들로는 "붉은 수수"를 비롯한 중단편소설과 "풍유비둔(丰乳肥臀)", "박달나무 형벌 (檀香刑)" "사십일포(四十一炮)", "생사피로(生死疲劳)", "개구리" 등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대표작 몇부를 세세히 보기로 합시다.        많은 수작(秀作)들을 량산해 내였음에도 막언의 작품을 꼽을라치면 뭐니뭐니 해도 그의 문명(文名)을 세상에 알린 붉은 수수(红高粱)일것입니다. .      1987년에 발표된“붉은 수수”는 막언이 중국당대문학에 선물한 초기의 거작입니다. 그의 문학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당년에 역시 무명이였던 장예모감독이 이듬해 영화로 만들었고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는 장예모 감독, 녀배우 공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제5대 중국영화감독들의 전격적인 출두를 세상에 알렸다. 그후로 이 작품은 또 막언의 작품이 20여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막언이 전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된것입니다.   사실 "붉은 수수"는 영화로 각색되기 이전인 1987년에 이미 전국중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의 진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붉은 수수"는 중국의 력사, 현대사, 문화, 설화, 민족성 등이 뒤섞여 막언이 간직한 민족의식이 극대화되였습니다. 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 줄거리를 보면-   "붉은 수수"의 배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산동성 고밀현입니다. 바로 막언이 현실에서 살고있는 고향이름 그대로입니다. . 이곳에서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마을사람들은 온갖 착취와 부역 등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게 되며 피비린내 나는 항일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소설은 그 력사의 고통안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비범한 중국 민초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문둥병을 앓고 있는 고량주 양조장(釀造場)집 아들에게 노새 한 마리를 받고 팔리듯 시집가던 대봉련(戴凤莲)이 결혼 첫날 꽃가마를 메는 여점오(余占鳌)와 사랑에 빠져 "나"의 아버지를 잉태하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여점오는 양조장에 일꾼으로 들어가 있다가 점차 리더적인 면모를 보이며 린근의 사람들을 통솔하기 시작합니다. 십년의 세월동안 그들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군이 양조장의 큰 어른인 루할아버지를 가죽을 벗겨 처참히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격분한 여점오는 강적 일본주둔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양조장의 안주인이였던 녀주인공 대봉련이 총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일본군의 학살은 더욱 잔인하고 거세지지만 여점오는 민중을 진두지휘하며 일본군에 저항합니다. 모진 세월을 강하게 헤쳐나간 한 녀인의 삶과 민중들의 원초적 생명력, 뜨거운 민족심 등이 뒤얽힌 "붉은 수수"의 세계에 빠져 작품을 읽노라면 내내 눈앞으로 붉게 일렁이는 수수밭이 펼쳐지는것 같은 기분입니다. 작품속에는 중국민족의 력사와 신화, 생명의식과 전통문화,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복합적으로 뒤엉켜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맛은 알싸한 고량주처럼 놀랍게도 강렬합니다.   소설은 "나"가 주되는 화자로 서술하는 동시에 "나의 할머니ㆍ할아버지ㆍ아버지ㆍ어머니"가 더불어 화자로 등장함으로써 이들 가족의 오래전 옛이야기를 바로 현 시점에까지 끌어내리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로써 조그마한 마을의 붉은 수수밭에서 살아가던 수수한 가족과 침략자 일본군과의 혈전의 씨줄과 날줄의 사연은 작가의 거침없는 입담과 필치에 힘입어 두드러집니다.        실제로 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쪽이 더욱 복합적이고 립체적이고 풍부하며 성찰적이고 실험적입니다. 영화는 원시적 생명력과 남녀의 사랑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의 5배 분량은 실히 될 원작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중국인들의 장대한 력사를 담아냅니다.   소설은 민간의 시각에서 항일전쟁을 묘사하고 생존을 위한 욕망을 그려냈다는데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항일전쟁시기를 배경으로 하고있지만 재래의 전쟁제재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 다른 점이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 내였습니다.   재래의 항일제재, 전쟁제재의 소설들을 보면 정의와 사악의 흑백론리의 대결로 현실에서는 볼수 없는 완미하기 그지없는 영웅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붉은 수수"에서 그려낸 영웅들은 문제투성이고 지어 사회 아류들입니다. . 그들은 선명한 항일의식을 갖고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난장의 년대속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운명에 맞닥뜨린 고난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나타낸다. 그들은 완강하게 또 오연하게 생명의 자유를 지켜내였습니다. 이로서 립체적이며 생선처럼 살아숨쉬는 생생한 생명과 인성을 가진 인물들이 독자들앞에 나타나게 되지요.       이처럼 20여년전에 출판된 "붉은 수수”에는 노벨문학상이라는 문학 최고의 전당에까지 오르게 된 작가 막언의 후날의 가능성들이 충분히 잠재되여 있습니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 전설 그리고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 거기에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 공간을 마주 세우거나 겹침으로써, 성찰을 작동시켜 만든 작가의 창작물은 극히 다채롭습니다.   지금 연길시의 여러 서점가들에서도 이 작품의 여러가지 판본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막언의 작품의 주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의 일독을 권장합니다.     - 신: 막언과 그의 작품에 대한 김혁소설가의 자세한 소개를 잘 들어봤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막언과 노벨문학상” 이 같은 제목으로 막언작가의 프로필과 문학창작의 길, 그리고 막언의 대표작품인 “붉은 수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프로 여기서 마칩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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