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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채플린을 다시 만나다 댓글:  조회:3405  추천:5  2014-05-10
. 칼럼 . 채플린을 다시 만나다   김 혁     1 세계 희극의 거장 찰리 채플린, 그의 영화 역사가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따라서 채플린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 2016년 스위스에서 문을 연다고한다. 박물관이 세워지는 곳은 그가 1977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25년 간 살았던 집이다. 채플린의 후손들은 스위스 코르시에 쉬르 브베에 위치한 그의 주택을 기념 박물관으로 재단장 하기 위한 공사가 첫 삽을 떴다고 밝혔다. 박물관에는 채플린이 이 주택에 실제 거주하면서 남긴 흔적은 물론 직접 제작한 영화ㆍ예술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2 주말, 버릇처럼 음향점 DVD매장에서 나만의 취미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매장 구석 쪽에 "채플린 영화 전집"이 보였다. 오래 전에 비디오로 갖추긴 했지만 빌려간 친구들이 내내 돌려주지 않아 몇 부가 이 빠져있었다, 또 한번 전집을 몽땅 사 들었다.   채플린의 영화를 접한 것은 초중1학년 때, 그 무렵, 나는 병환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내내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내가 한달 되도록 영화관 문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 친구들의 강권에 끌려 어머니 몰래 영화관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 채플린의 "모던시대"였다. 처음 접하는 채플린이라는 캐릭터와 그 발에 발을 잇는 코미디의 드라마,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다. 내가 좀 크게 웃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눈길이 나에게 몰부어 졌다. 나는 덴겁해 웃음을 삼켰다. 영화가 끝나 나올 때엔 애들의 눈이 새삼 의식되여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플린은 투명한 감수성의 소년이였던 나에게 이렇게 특유의 농도와 줄기로 다가왔다.   홀리우드 대작영화들, 신작 개봉 영화들에 밀려 먼지를 들쓰고 있는 채플린의 영화를 사들고 돌아와 그 중 몇 부를 다시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은 중절모, 무릎이 나온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모닝코트,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   "미키 마우스(米老鼠)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채플린. 눈물과 웃음, 유머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이다.   째질 듯 한 가난 속에 다섯 살 때 어머니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예술생애를 시작한 그, , , , , 같은 영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이다. 요즘 잊혀져간. 또한 뒤뚱거리는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의 모든 것은 늘..코믹하게만 표현되여 채플린..하면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탁월한 아이디어로 넘치는 그의 영화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깔려있다. 그의 영화 속에 깊이 숨겨진 얘기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들의 얘기, 하고싶은 얘기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나가 무가내한 삶을 살지만 눈 망울속에 절망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 배반하지 않고 뒤 돌아서지 않으며 마음이 찡할 정도의 순수와 맑음을 지녔다. 이것은 또한 채플린이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내가 맛보았던 불행, 불운이 무엇이었든 원래가 인간의 행운, 불운은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아서 결국은 바람 따라 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불행에도 그다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행운에는 오히려 순수하게 놀라는 게 보통이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설계도 없으며 철학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인간이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 중에서 뽑아본 말이다.   그가 영상에 던진 언질은 “인간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불행을 맛보았던 채플린이,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어 냈으니 어찌 감동이 없을까.   웃기자고 작정하고 드는 영화보다 삶의 신산함이 곁들인 이런 류의 코미디에 더 웃음이 난다. 웃고 나면 가슴 한구석 애잔함이 남는다. 채플린이 주는 웃음이 바로 이 종류의 것이다. 사람들이 몸짓으로 단순하게 웃기는 코미디만 좋아할 때 그는 코미디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깊이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따뜻한 연민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3 채플린은 웃음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무척 진지한 감독이였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발언해 왔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유머와 련민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유인 것이다. 바로 그 진지함이 가볍고 즐거운 웃음을 공중에 흩어버리지 않고 관객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로 지탱해왔던 힘이였다.   그가 20세기에서 첫 손꼽히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각본, 음악, 제작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도 있겠지만,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휴머니즘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물질 만능 주의이고, 우수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진정 따듯한 마음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리해하면서 살아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채플린이 어느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 구 절이다. 채플린처럼 비록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한 노력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채플린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코미디를 보고 그저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채플린 영화를 아직 집에 소장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중 몇 부라도 갖추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이른바 명작의 서렬에 든 좋은 소설이나 위대한 음악을 집에 챙겨두고 다시 보고 들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듯이 채플린의 영화도 바로 그러하게 여러분들의 서가를 빛낼 수 있는 목록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 마당 속에 흑백의 영상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큰 거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9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댓글:  조회:3354  추천:9  2014-04-30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김 혁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문학비 하나가  호젓이 서있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있으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여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익숙히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강경애의 문학스승 양주동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룡정으로 이주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근무했던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서의 필자.  강경애는 이주 초기, 이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고한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1939년 “화제녀성 월평”란에 삽화로 실린 강경애.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 교원 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련재당시 소설 “소금”의 삽화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조선의 동명영화 “소금”의 포스터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룡정의 비암산에 건립된 강경애 문학비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 그녀만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 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 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8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어서 댓글:  조회:2479  추천:10  2014-03-31
소설가 김혁의 인물만필 시리즈 (1)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어서   김학철   일전 “중국조선족 문단의 대부” 김학철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문학전기 “송엽장아래의 자국”을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중문으로 펴냈다. 모순문학상 입선후보작을 펴낸 실력있는 한족작가 우뢰에 의해 창작된 전기는 장장 70여만자의 호흡이 긴 편폭에 정의를 위해 무기와 펜을 고누잡고 일평생 싸워 온 김학철의 파란많은 자취를 추적해 냈다. 이는 처음 중문으로 창작된 김학철관련 인물전기로서 중국의 주류문단에 김학철이라는 한 조선족 작가를 다각적이면서도 립체적으로 알리는데 작지않은 역할을 놀것으로 사료된다. 책의 겉장은 중국소수민족문학관 관사 정원에 주조된 김학철의 동상으로 디자인했다. 량쪽 겨드랑이에 송엽장을 짚고 우람하게 뻗쳐 선 척각의 로인,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김학철옹의 그 강건한 모습이 다시한번 우리들의 면억(緬憶)을 불러 낸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왜적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거사와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온다.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반일지하테러활동에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호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들의 전형적인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탄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이때로부터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사용, 반일활동을 위해 썼던 가명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썼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1937년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즉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교관이던 김두봉, 석정 등의 영향으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탈바꿈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에 소속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합법화된 한국인 무장조직이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련합전선을 형성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고 후날 중국 팔로군에 편입됐다.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상을 보인다. 1939년부터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는 팔로군에 참가하여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에서 있은 치렬한 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부상당한 몸으로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진다.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에 이송된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그 무시무시한 원폭피해흫 요행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기에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일본감옥에서 출옥한뒤의 김학철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된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부어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륙속 “담배국”, “균렬”,등 10여편을 여러 문학지에 발표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1947년 사회주의 리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조선으로 간다.  평양에서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다가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낸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단편집 “새집 드는 날”,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숭배로 치닫던 동란의 년대에 이의를 표하며 시류와 불화했다. 드문 반골기질에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는다.  10년 유기징역을 언도받고 산과 물에 둘린 추리구(秋梨沟)의 감옥에서 복역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였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 1983년에야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에서였다. 1983년 국적문제를 해결보아 중국국적을 가졌으며1989년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여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창작에 일로매진한다. 김학철의 일부의 저서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6년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1987년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련이어 출간되였다. 이밖에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이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였다. 그동안 촌철살인의 수필과 잡문에 심취되여 수백편을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긋는다. 조선족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그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리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고 자호감을 머금었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랭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유명 평론가 김윤식은 “김학철은 그 자체가 력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리정표“라고 정평했다. 또 중국의 왕혜 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력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말한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보무당당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다.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에 건립된 김학철 동상   반일투사이며 민족작가로서 그이는 일평생 곡절로 점철된 인생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어려서 민족독립의 청운을 안고 일제와 사투를 벌렸고 그 최전선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혀진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부상, 탄압, 망명, 옥살이 등 범인들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날까지 붓을 놓치않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였다.  척각(隻脚)의 몸이지만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선 김학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둔감해져 있는 물욕화에 절은 오늘날, 그이의 올곧고 강인한 작가정신과 실천적이고 치렬한 인고의 삶은 우리 문학에 미래지향적인 동력을 안겨주는 보귀한 재부로 간주되고있다.    “중국민족”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7    잘 가요, 유키 티나리 댓글:  조회:3033  추천:11  2014-03-17
미니칼럼   잘 가요, 유키 티나리   김 혁       일본의  톱스타 야마구찌 모모에의 아버지역을 맡았던 “따도모 大岛茂”- 유키티나리가 타계했다.   유키티나리는 지난 14일, 만성 호흡 부전으로 숨졌다. 향년 82세. 우리가 “따도모”로 알아온 그의 본명은 우츠이켄, 1955년 "청춘 이야기"로 데뷔이후 60여년간 영화와 텔레비드라마에서 맹활약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알린것은 전설의 가수 야마구찌 모모에와 협연한 “붉은 운명" 시리즈의 한 부인 "의심스러운 혈형"이였다.     중국에서는 지난 80년대 중기 이 시리즈물을 방영, 야마구찌 모모에와 유키티나리는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초특급 우상이였다. 그들의 드라마때문에 사람들은 궁색한 살림을 털어서라도 굳이 흑백텔레비죤을 마련했다. 당시 중국의 가전제품판촉에 야마구찌와 유키티나리의 공적이 크다고 해야겠다.   나의 고중시절, 우리집 역시 그들이 주연한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을 보고저 9촌짜리 흑백텔레비죤을 구입했었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 맨처음 보았던 텔레비죤이였다. 매양 저녁 7시 드라마의 주제곡이 울려퍼지면 온 가족이 만사를 제치고텔레비앞에 몰려든곤했다.   흑백의 화상도가 낮은 화면이였지만 야마구찌의 청순한 이미지와 유키티나리의 자애로운 부친상은 매일같이 우리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더우기 포악한 이붓아비의 손에서 자랐던 나에게 유키티나리는 내 취약했던 사춘기의 정감을 위무해준 구원같은 존재였다.     당시 배우자하면 유키티나리! 아버지 하면 유키티나리!하고 이구동성, 천편일률적으로 대답할 정도로 유키티나리는 우리 모든 가족들에게 바람직한 롤 모덜이였다.   우리가 유키티나리에 열광한것은 그가 엄격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리상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줬기때문이다.   아버지의 당위성의 무게가 상실되고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못하고있는 요즈 세월을 지어 “부권(父權)상실의 시대”라고까지 말한다. 부권의 부재는 한가족의 상실, 나아가 전통적인 가치관 상실의 주요 요인이다. 이렇게 남성위기론이 대두하고 남성들이 새로운 좌표계를 찾으려 몸부림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우리들의 아버지” 유키티나리의 죽음은 갑절 애석하게 다가오는것이다.       유백색 코트에 마냥 양장과 넥타이를 고수하고 미간에는 엄숙함이 일지만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를 띄였던 유키티나리의 표상은 이제는 남성상의 소실과 더불어 흑백 브라운관속의 형상처럼 아련하게 사라져 가고있다.     잘가요, 유키티나리!   2014년 3월 16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山口百惠と三浦友和テレビ初共演ドラマの主題歌である。    
16    력사의 들머리에 새겨진 이름들 댓글:  조회:2896  추천:10  2014-02-12
력사의 들머리에 새겨 진  이름들 "조선족 인물만필 시리즈"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오늘도 그들과 만난다. 력사의 행간에 깊숙한 족적을 남긴 인걸들, 민족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산화해간 불멸의 영령들, 작금의 부박한 세속에서 하얗게 잊혀져가고있는 그이들의 이름과 혼을 오늘 글의 제단에 불러내 본다. 언젠가부터 소설, 시, 수필, 아동문학등 여러쟝르에 걸쳐 량산하던 나의 창작성향은 많이 바뀌여져 버렸다. 감상위주의 픽션에서 진솔을 기하는 논픽션에 많은 필봉을 기울여 인물전기와 력사기행, 칼럼등 쟝르에 애착을 보이고있다. 그것은 허구나 상상보다 더욱 극적인 현실의 모습에 감동하며 그 박진한 삶이 실제 인간다운 세상살이임을 실감하게 되는 나이에 이른 탓도 있을것이요, 또 문학창작과 병행해 20여년간 해온 신문사 기자라는 언론인의 직업에서 인기된것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공동체사회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시점에서 안일하고 무의미한 글쓰기의 행태에서 벗어나 민족을 위한 절박한 창작의 필요를 감득한 탓이라 하겠다. 또한 시대의 어지러움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킨 위인들의 정직한 생애와 빛나는 업적에 대한 기록을 길이 남겨야겠다는 일종의 민족작가로서의 의지 그리고 소명의식에서였다. 어떤 책무같은 그 의지에 떠밀려 근년래 윤동주, 주덕해, 한락연등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여 집필, 출판했고 또 김학철, 정판룡, 김염등 인물들의 삶을 좇은 기록물들이 바야흐로 출판중에 있다. 한 걸출한 인물의 생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살아갈수 있을지 성찰하게 해준다. 전기물의 쓰기 혹은 읽기는 결국 남의 인생에 대해 쓰고 읽는 작가나 독자 자신의 시선, 심성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고 나의 내면의 “아름다운 령혼”이 깨여날수있다면 이야말로 작가로 말하면 멋지고 바람직한 작업이 아닐까!  뒤미처 인물전기의 중요성을 깨친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 집필의 새바람이 불고있다. 하지만 많은 인물들에 대한 조명은 아직도 필이 미치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인물전기문학은 여전히 초걸음마 상태, 암중모색 중이라 할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걸들의 모습을 하루빨리 그리고 더 많이 독자에, 사회에 알릴수 있을가? 작가적 고민을 거듭하다가 인물만필 시리즈를 펴내기로 했다. ㄱ ㄴ ㄷ ㄹ 순으로 인물들을 가능한한 체계적으로 그리고 빠침없이 조명하려 한다. ㄱ 부분에서는 김학철, 김염등, ㄹ 부분에서는 리홍광, 리추악, ㅇ 부분에서는 양림, 윤동주, ㅈ 부분에서는 정률성, 정판룡, ㅎ 부분에서는 한락연… 이렇게 사전분류식으로 간결하나 비교적 완정하게 한사람 한사람 조명해 나간다면 독자들에게 포켓용 사전처럼 쉬이 찾아볼수 있고 빨리 통독할수 있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인물선정은 중국조선족 인물을 주로 다루면서 아울러 중국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거나 중국을 무대로 조선족과 함께 활약했던 겨레들, 례하면 근대교육기관을 창설한 김약연, 중국의 문호 파금등과도 교우했던 농학가 류자명, 연변지역에서 발생한 민족독립운동사상 최고의 대첩인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등 한민족의 빼여난 인물들도 더불어 조명하면서 우리 력사의 흐름을 면면이 살피려 한다. 인물을 따라가며 시대와 력사라는 전체상을 살피는 작업이라 만만치 않는 작업일 줄로 안다. 하지만 이 작업에 혼신을 쏟기로 했고 내 창작 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놓고  있다. 여러 인물전기작품의 후기에서 거듭 천명했지만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과 그 력사에 대한 조명은 분명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래서 오늘도 불멸의 영령들의 이름들을 력사의 들머리에 큼지막히 돋을새김으로 적어본다.   “중국민족”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5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댓글:  조회:2312  추천:12  2014-01-06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한락연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출간기념회에서   김 혁     몇해전부터 나는 내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수십차례의 답사와 취재끝에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3년째 련재중입니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습니다.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할 인물, 작은 글체로서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할 인물임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습니다.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습니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는 그는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습니다  .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습니다  .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였던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락천적이고 활당한 인간미의 소유자로서 불굴의 혁명가적 기질을 드러냈으며 국제적인 반파시트로서 국경을 초월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도 갖춘 걸출한 인물이였습니다.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 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입니다 . 주은래 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 했듯이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되여야 마땅합니다.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서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 부가 나왔을 뿐이였고 한국에서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 있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빼여난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전기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실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작가로서 반드시 서둘러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안고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착수하기로 했다.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등 지역을 답사하였습니다. 다년간의 작품활동에서 속필을 자랑하고있던 나였지만 이 한부의 인물전기의 완수에는 2년여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동안 함께 했던 많은 고마운이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한 생면부지의 조선족작가에게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고 진귀한 사진자료를 선뜻 넘겨주신 한락연의 딸 한건립녀사,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며 신뢰를 보여준 룡정 한락연연구중심의 책임자들, 나의 인물전기 집필에 련이어 도움을 준 적십자회 오장숙선생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신순칠화가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덕해의 이야기”에 이어 그와 두번째로 손을 잡았다. 작품의 정서를 민감하게 포착하여 핍진한 화폭들을 그려주어 작품의 생동성을 보태주었습니다. 한석윤 회장에게 머리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한생을 바치고있는 그는 지역사회와 청소년들을 위한 많은 일에 로심초사하는 와중에 아이들을 위한 인물전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애초의 주덕해의 이야기로부터 이번의 한락연 인물전이 나오기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면려를 주었습니다. 변혁기, 우리 민족 공동체가 미중유의 부침을 겪고있는 시점에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저의 창작성향은 근년들어 뚜렷이 바뀌고 있습니다. 금후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으로서의 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펴내는 작업을 이어나갈것을 약속드립니다. 더 성숙된 사유와 문체로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우리 민족의 제반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김염, 김약연 윤동주 김학철 리홍광 리화림 양림 정판룡등 인걸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펴낼것이며 반드시 펴낼것입니다. 이를 저의 창작스케줄의 가장 뚜렷한 시간대에 놓고 그 결과물을 보여줄것입니다. 이제 곧 그 일환으로 “김학철”과 “윤동주”의 이야기를 들고 여러분과 만날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4    붉은 별과 파란 눈의 저널리스트 댓글:  조회:2622  추천:10  2013-12-24
  인물만필   붉은 별과 파란 눈의 저널리스트   김 혁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간한 “스노 평전”     1, 지난세기 80년대까지만해도 집집마다 모택동주석의 초상화며 빠지들을 갖추어두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그 빠찌들을 웃방 정면의 벽에 붉은 주단을 걸고 그우에 주렁주렁 달아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 내가 아끼는 빠찌가 있었다. 조금은 젊은 나이의 모택동주석이 연안요동앞에서의 모습. 풀빛 군모우에 반짝이는 붉은 별이 유난히 눈길을 끌던 삐지였다.  어려서 그런 오각별 하나 가져봤으면 하는것은 당시 어린 홍소병들의 숙망이였다. 그 사진을 외국사람이 찍어주었다는것을 알게된것은 썩후의 일이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찍었다고 했다.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섬서성을 방문취재해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펴냈는데 그 책은 80년대 중국에서 초인기를 누리며 베스트셀러로 되였다. 그후 나 역시 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에드거 스노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요즘 에드거 스노의 평전이 뒤늦게 출판되였다. 용기와 재능을 갖춘 저널리스트에 관한 보고서인 동시에 그가 사랑했던 중국의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수 있는 매력적인 평전이였다. 그 평전을 읽으며 중국을 사랑한 이 외국기자의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2,     스노는 미주리대학교 신문대학 출신으로 졸업후 신문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평생 기자로 지냈지만 처음부터 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증권투자로 약간의 돈을 거머쥔 이십대 초반의 미국인 청년은 머리도 식히고 삶의 에너지도 재충전할 겸 중국려행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서 목도한 중국의 모습은 이 청년의 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애초에 스물두 살의 청년 스노는 한 1년쯤 세계를 돌면서 모험을 즐길 마음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쳐진 중국을 목격하면서 그 참상은 그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휴머니즘을 부추겼고 거대한 시대의 흐름은 그를 력사의 중심부로 이끌어들였다.       젊은 시절의  에드거 스노 1936년 스노는 송경령의 도움으로 서안을 거쳐 섬북 소베트지역에 도착했다. 이 기간 그는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각 지방에서 취재를 진행하면서 중국 2만5천리 장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이듬해에 그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당정권이 장기간 거짓 선전을 진행한 탓으로 국민당 통제 구역내 인민들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홍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 스노는 홍군 지역에서 취재를 진행한 외국 기자중의 첫사람으로 아무런 정치적 편견과 당파 색채가 없는 립장에서 직접 따낸 대량의 취재 자료에 근거해 객관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했으며 전중국 나아가 전세계가 진실된 중국공산당, 중국 홍군 그리고 지도자들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책으로 당시 곤경에 처해있던 중국공산당과 홍군에게 큰 도움을 줬고 그 역시 이 책으로 세계적인 명예를 취득했다. 이후 중국에서 많은 글과 책을 발표했고, 중국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모택동과 함께 한 스노     1941년 중국에서 결혼한 안해 님 웨일스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2년 전쟁 특파원으로 세계각지를 돌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취재했다. 력사의 기록자로서 스노는 북경과 모스크바, 뉴델리와 워싱턴서울 등지를 종횡하며 모택동, 송경령, 로신, 루즈벨트, 간디, 네루,등 수많은 인물들과 만나 력사가 이루어지는 격변의 현장에서 려행자의 감수성과 언론인의 집요함으로 세계사적인 사건들의 진실을 포착해 서방에 알렸다.   공산주의에 온정적인 그의 태도때문에 매카시즘이 만연하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활동에 제약을 받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   기자로서 스노의 취재 범위는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기울인 곳은 중국이였다. 그는 끝까지 혁명 중국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다. 1960년과 1964년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주은래와 회담했다. 1969년에도 방문하여 중국 지도부로부터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다면 우리는 그를 환영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때까지 중국과 미국은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채 랭랭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닉슨이 방중하기 불과 엿새 전에 “자신이 뿌린 씨앗의 발아를 보지 못한 채” 1972년 2월 15일, 제네바에서 암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뉴욕과 북경에 나뉘여 묻혔다. 그가 암으로 투병하자 주은래총리는 그를 위해 중국인 의사들을 파견하기도하였다.   3,   스노의 이름은 또 한 명의 작가 님 웨일스와 련결돼 있었다. 님 웨일스는 중국 땅에서 싸웠던 조선인혁명가 김산의 삶을 그린 “아리랑”의 저자이다.   스노의 부인 님 웰스   자유분방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미모와 두뇌를 겸비한 녀성인 님 웨일스는 스노와 비슷한 무렵에 중국에 와 대사관 직원, 학생, 자유기고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던 중 스노와 만나 열애에 빠졌다. 스노역시 무한에 체류하던 시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과도 깊은 우의를 맺었었다. 님웰스는 스노와 결혼한후 남편과 함께 중국을 누비며 중국혁명가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스노는 부인 님 웰스와 함께 제국주의와 자유주의와 전체주의가 뒤엉켜 피비린내 나는 력사를 만들어내는 20세기의 현장을 온몸으로 관통한 빼여난 저널리스트였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12월 23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3    조선의용군 작가 김사량 댓글:  조회:4445  추천:12  2013-12-02
 . 인물만필 .   조선의용군 작가 김사량   김 혁      연극 "노마일기"의 한 장면 일전 연극 “노마일기”가 한국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의 작가 김사량의 삶과 문학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은 연극은 김사량 작가의 “노마만리”를 원작으로 이외에 “김사량 평전”,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여러 편의 론문과 영상기록, 사진 등을 분석해 무대에 올렸다. 연극에서 작가 김사량은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던중 신변의 위협 느끼고 일본으로 도피한후 중국으로 노마만리의 려정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1941년 12월의 호가장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겨울의 새벽,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조선의용군의 꽃다운 젊은이 네 명이 숨지고 한명은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총상을 입은 젊은이는 일본의 나카사키 감옥으로 압송되여 옥고를 치르다가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 젊은이가 바로 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인 김학철 선생이다. 김사량은 이 호가장전투와 조선 의용군의 삶에 대해 상세히 쓰기 시작한다. 연극은 김학철이라는 인물을 통해 김사량의 모습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평양에서 김사량과 깊은 우의를 맺었던 김학철, 일본감옥에서 석방되던 당시의 사진이다.     풍운의 작가 김사량은 1914년 평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김시창으로서 사량은 필명이다. 1928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광주학생운동 2주년을 맞이하여 일어난 동맹휴교사건에 관여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 학교를 그만 둔 후 1932년 가을 무렵에 교토 제국대학에 다니고 있던 형 김시명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큐슈에 있는 사가(佐賀)고등학교 입학하여 2학년 때인 1934년에는 식민지 시대 빈민굴인 평양 토성랑에 살던 최빈민의 생활을 묘사한 소설 “토성랑” 등의 습작을 창작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에 입학하여 동경을 무대로 하여 형성된 조선인 지식인들의 그룹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동경제국대학의 독일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된 “제방” 동인에 참가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제방” 잡지에 “토성랑”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14년에 태여나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40년 일본어로 쓴 소설 “빛 속으로”로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작품으로 선정되였다. 이후 여러 작품을 발표하는데, 주로 식민지 하의 조국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일본과 조선에서 식민주의의 지배에 협력하고 있는 인간군상을 강하게 비판하는 작품들이였다. 1940년 12월 일본 동경 소산서점에서 일본어 소설집인 “빛 속에서”를 발간하였다. “사상범예비구금법”에 의해 예비검속되였던 그는 1942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와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그해 4월 제2소설집 “고향”을 일본 교토 갑조서림에서 출간하였다. 많은 작가들이 식민주의에 협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역작 “태백산맥”을 1943년 2월부터 그 해 10월까지 『국민문학』에 연재하여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 사진으로 겨우 몇장 안되게 남은 김사량의 모습 (왼쪽)     1945년 5월 국민총력조선련맹 병사후원부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된 조선인 출신 학도병을 위문하고자 북경에 갔다. 김사량에게 이는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했다. 일본어로 저작 활동을 하면서도 그안에 나라잃은 민족의 현실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작가였던 그는 일제로부터 량심에 반하는 “황군 위무” 의 임무를 강요받게 되자 항일 근거지로의 탈출을 노렸던것이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다행히도 믿을 만한 끈을 잡아 탈출길에 오른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느라 밤길을 달리기도 하고 처음에는 기차를 리용했지만 나중에는 나귀 를 타면서 탈출 행로를 이어 마침내 연안에 도착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항일기행문 “노마만리”는 바로 그 탈출의 자초지종을 다루고 있다. 광복과 더불어 조선의용군 선발대의 일원으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그 해 12월 10일 서울을 방문하여 12월 13일 조선문학동맹 결성식에 참가하였고 “노마만리”를 잡지에 련재하였다. 그후 북조선예술총연맹의 국제문화국장직을 맡으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희곡 “뢰성”,”호접” 등의 희곡도 본격적으로 창작하였다.평양에 머물렀다. 1946년 10월 단행본 “노마만리”를 발간하였다. 1948년 1월 해방후 창작한 작품을 모아 작품집 “풍상”을 발간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종군하였다가 후퇴하면서 원주 부근에서 락오하였는데 후퇴길에 병사한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중국 연길에서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 및 조선의용군연구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2010년8월 5일에는 항일문학가 김사량과 김학철의 위업을 기리는 문학비가 지난 5일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그날 하북성원씨현인민정부와 연변작가협회, 한국실천문학사가 공동히 주최한 “김학철항일문학비”, “김사량항일문학비” 제막식이 당년 김학철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그후 김사량선생이 그곳을 지나면서 유명한 전기문학 노마만리를 써냈던 하북성원씨현흑수하향호가장촌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중국 하북성 호가장에 세워진 김사량 문학비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60주년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60주년에 즈음하여 열린 중요한 국제행사였다. 조선에서는 일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로 김사량에게 뒤늦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다. 재일교포문학의 1세대 작가로 아쿠다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촉망받는 작가, 중국 태항산 지구의 항일 근거지로 탈출하여 일제와 맞서 싸웠던 망명작가, 한민족 근현대사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으로 남과 북에서 동시에 소외됐던 작가 김사량, 그는 일제치하 저항문학의 대표로 언급되는 윤동주, 리육사, 한용운등과는 또 다르게 적극적인 저항을 함으로써 “일제 암흑기의 한반도 근대문학사를 밝힌 빛나는 문학인”으로 뒤늦게 떠오르고 있다.   참고문헌- “김학철 평전” (김호웅, 김해양 지음. 실천문학사 2007년) “김사량평전” (안우식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0년) “빛 속으로” (김사량 지음. 소담출판사 2001년)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김학철문학연구회 지음.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2    간(肝)을 위한 랩소디 댓글:  조회:2877  추천:15  2013-08-26
. 칼럼 .   간(肝)을 위한 랩소디     김 혁     1,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 보다 간암 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 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때가 많은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2,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뻔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민족의 “구토지설(龟兎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한국 연세대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 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 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 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 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 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간"의 육필고   3,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 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기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준는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랩소디: (rhapsody) 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채를 지니는 환상풍의 음악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8월 26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1    피카소,실크로드 그리고 한락연 댓글:  조회:2840  추천:12  2013-07-17
1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거론하고자 할때 이 사람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써 내려갈수 없다. 바로 피카소이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에스빠냐에서 태여나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서양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19세기 화가들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몇걸음 더 나가 평면의 화면에 립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미술사에서의 큐비즘(립체파)의 탄생이였다. 피카소는 그림, 판화, 조각, 도자기등 모두 4만여 점의 방대한 량의 작품들을 남겼는데 대표작으로는 본격적인 립체파 운동의 계기가 된 “아비뇽의 처녀들”, 에스빠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게르니카”등이 있다.   2 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의 서안으로부터 토이기의 이스탐불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다. 그 옛날 동방과 서방에서 서로 비단, 보석, 옥, 직물 등이 전해지면서 동서 교류의 큰 역할을 한 길.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던 력사적인 길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였다. “비단의 길”이라는 우미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크로드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꿈의 길은 아니였다. 대상들이 물건을 락타에 싣고 오갈때 그 물건을 노린 도둑떼가 범강장달이처럼 덮쳐들었고 게다가 한치 앞을 알수 없는 거친 날씨에 땡볕을 이고 모래바람을 헤치며 걸었던 길이였다. 서한시기 장건이 포로로 잡혀 지낸 십여 년의 세월이 이어진 길이고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다. 우리의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바로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도 대서특필했던 실크로드이다.    3 일전, 한락연탄신 115주년 기념 한락연회화작품전시회가 연변박물관에서 열렸다. 연변주당위, 연변주인민정부, 중국미술관에서 주최하고 연변주당위 선전부, 연변주문화국, 연변박물관등 단체에서 폭넓게 주관한 전시회는 조선족혁명가이고 예술가이며 국제반파쑈전사인 한락연의 웅숭깊은 행위와 메세지를 다시한번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였다. 2010년 총투자가 3백만원, 부지면적이 2천여평방메터 되는 락연공원을 조성하고 그 이듬해인 2011년 한락연동상건립, 한락연예술전, 연구포럼에 이은 그이를 기리는 또 하나의 대형의 기념행사이다. 1898년 룡정촌에서 태여난 그는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중국조선족 첫 공산당원이며 동북의 초기 공산당 창건자의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유화와 수채화의 서양화법으로 키즐석굴의 벽화를 모사한 사람이다. 본세기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 화가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였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락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락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였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그의 미술전에서 현란한 색감의 작품과 더불어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을 경모의 눈길로 다시금 읽는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댜큐멘터리 "실크로드 삽곡" (Silk Road O.S.T)
10    간도체험을 대하소설로 펴낸 안수길 댓글:  조회:3587  추천:10  2013-07-12
간도체험을 대하소설로 펴낸 안수길 김 혁 북간도의 항일 투쟁과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안수길의 대하소설 “북간도” 전3권이 한국 글누림에 의해 재출간되였다. 안수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북간도”는  조선말기 간도에 이주한 리씨 일가의 4대에 걸친 수난사를 그린 작품으로서 구한말부터 8·15광복까지 한민족이 겪은 아픔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1959년 “사상계”에 처음 발표된 뒤 한국의 대표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이 작품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저자 안수길  안수길은1911년 함남 함흥에서 아버지 안용호(鎔浩)와 어머니 김숙경(金淑卿) 사이의 2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여났다. 아호는 남석(南石)아다. 아버지는 간도 룡정 광명고등녀학교의 교감을 지냈다. 6세 때 흥남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2년 간도로 이주했다. 1926년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동맹휴교사건과 관련해 자퇴했다. 1928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으로 15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과 학비문제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32년 룡정에서 천주교 계통의 소학교인 해성학교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안수길은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은후 몸이 쇠약해 1933년 건강회복을 위해 해성학교를 사직하고 흥남 석왕사에서 요양한 뒤 다시 룡정으로 돌아온다.   1932년 동인들과 함께 문예동인지 “북향(北鄕)”을 펴냈고, 1936년부터 간도일보사, 만선일보사 기자로 근무했다. 1945년 6월 건강이 악화되여 고향으로 돌아왔고 1948년부터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 차장, 조사부 부장을 지냈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부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서라벌예대 교수, 리화녀대 강사, 한양대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리사를 력임하였다.  안수길은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꽁트 “붉은 목도리”가 “조선문단”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1940년후로부터 단편 “사호실”, “원각촌”, “목축기”, 중편 “벼” 등 작품들을 연줄로 펴내며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1943년에는 만주의 농촌을 무대로 한 12편의 중편과 단편을 모아 첫번째 작품집 “북원(北原)”을 발간하였다. “북원”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척하는 조선인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50년대에 “제3인간형”, “초련필담(初戀筆談)”, 1960년대에 “풍차”, “벼” 등 4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1959년부터 1967년까지 그의 필생의 력작이자대표작으로 되는 북간도”를 “사상계”에 “련재했다. 소설은 북간도를 배경으로 1870년부터 1945년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여 리창윤 일가 4대의 수난과 항쟁의 력사를 그려보이고있다. 소설에서는 북간도 벌판에서 조선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인들과 갈등을 겪는 모습, 그리고 침략자 일제에 맞서 항쟁하는 민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여 있다. 소설은 방대한 분량으로 간도에서 펼쳐지는 조선 이주민들의 삶의 고투를 통해 한국근대사의 비극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거개가 평범한 서민의 고뇌와 용기, 정의감을 주제로 삼아 시대와 력사를 다루고있는바 사실적이며 세세한 관찰과 온건한 필치가 어울려서 진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있다. 특히 안수길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우리글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던 1943년 만주에서 첫 창작집 북원(北原)을 간행했다. 일제에 의해 민족어가 숨을 거두었던 시대 안수길은 이 한글판 창작집으로 한국문학사의 단절을 막아냈다. 이 시기 한글판 문학 작품으로는 만주에서 간행된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1941) , "재만조선인시집"(在滿朝鮮人詩集(1942)이 있었으나 문학인의 개인 창작집은 "북원"이 유일하다. 1977년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장편소설 "동맥(冬麥)"을, 경향신문에 "리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를 련재하던 중 4월 18일 돌연 타계했다.  병원으로 가면서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원고지와 만년필, 잉크를 가지고 갔다니 그의 작품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남달리 인품이 고매하여 평소 문단사회에서 ‘학(鶴)’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그는 단편ㆍ중편ㆍ장편 등 1백여 편의 소설 이외에도 수십 편의 주옥같은 수필을 발표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    청산리 전투 승리에로 이끈 서일 댓글:  조회:3233  추천:13  2013-07-08
청산리 전투 승리에로 이끈 서일   김 혁       ▲ 백포 서일     지난 6월 중순  한국 학술계 인사 6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이 흑룡강성 밀산 독립운동유적지를 탐방하고 시위,  시정부 관계인사들과 더불어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서일(徐一)선생을 테마로 한 학술좌담회를 가지였다. 답사단에서는 독립운동의 최초 해외무장기지였던 밀산지역을 답사, 중점적으로 서일선생의 반일활동 발자취를 역추적하면서 그의 삶의 궤적과 민족사의 진수를 체험하고 항일 정신과 력사적가치를 평가하고 재조명했다.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로 력사에 기록돼 있다. 우리 반일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교육자,종교인, 언론인이기도한 서일선생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대종교와 연을 맺다   서일선생은 1881년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여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함일(鏡城咸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여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气)를 살리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한 나날의 련속이였다. 스물다섯에 을사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해야만 했다. 서일은 고향의 암담한 현실에 통분해했고 반일투쟁의 새로운 모색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 반일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지역에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였다. 31세때인 1911년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북간도 왕청현으로 떠났다.그는 왕청 덕원리에서 물밀 듯 이주해오는 조선인자녀들을 가르치며 민족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 1911년 서일은 홍암(弘岩) 라철(罗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귀의했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민족기원 신화에서 비롯되였으며 교리에 민족의 정통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구국일념으로 불탔던  라철종사는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종지에서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 라철과 김교헌   서일이 왕청현 덕원리에 와서 자리잡을 때는 대종교가 화룡현 청호에 총본사를 두고 그 뿌리를 각 곳에 내리기 시작할 시기였다. 홍익인간의 리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바람세찬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 김좌진, 홍범도, 리범석등 독립군 지도자들 리시영, 신규식, 조성환등 림시정부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였다. 서일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团)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였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서일은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련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韩独立宣言书)”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강도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했고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론조를 내세웠다. 서일은 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의 모범을 보였고 나아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수전병행(修战竝行)의 삶을 살았다.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언제나 대종교 깨달음의 상징인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전한다.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울리다   1919년 7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서일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정규병력 1천5백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로씨야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더럭 겁을 먹고 서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 이라는 보고서에는 그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여 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西大坡沟)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鮮內地)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라중소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一下) 동원소집을 할수 있을 것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무장력량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들을 눈에 든 가시로 벼르던 조선총독부는 몇달간의 계획하에 대토벌을 준비한 끝에 수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일제는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미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강적이 박근해오자 그 예기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백두산 밀림으로 이행했다. 그러던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세기의 접전이 드디여 펼쳐졌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호상 배합하며 병력과 장비상 몇 갑절이나 우세한 일본 토벌군과 싸운 단병상접의 백열전이였다. 의복과 식량까지도 막대한 곤란으로 조성된 조건하에서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어랑촌전투․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거쳐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야말로 민족의 반일운동사상 가장 우렁찬 승전고를 울리고 눈부신 기념비를 세워 놓은것이다.       ▲ 청산리전투의 현장- 백운평 직소에서의 필자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올린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 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서일이 총재로 추대되였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흑하에서 참변을 당하다   이때 서일은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경제적 뒤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토비(土匪) 수백명이 야간에 내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는 흑하사변(黑河事变)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재기를 도모하던중 설상가상으로 8월 26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았다. 마지막 한 부분의 자그마한 력량마저 피바다에 쓰러졌고 발붙이고 있던 마을과 백성들까지 참화를 당하였다. 이 치명적 타격은 서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궁지에 밀어넣었다. 서일은 락망하였고, 자기의 책임이 너무도 중하다는 자책으로 하여 환멸의 나락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뒷산으로 올랐다.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나서 대종교의 폐기법(废气法)으로 자결했다.  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서일의 묘소를 찾아   그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였다가 1927년 봄에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으로 이장하였다. 지금 화룡시의 외곽에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한 장지가 그대로 있는데 그 주소로는 화룡시 청룡향 청호촌이다. 외곽의 작은 구릉우에 서일의 묘소가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라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력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아 보았다. 룡정에서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30여분간 달리니 드넓은 평강벌을 가슴에 품은채 2백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청파호가 우리를 반겼다. 청파호 부근에서 무릎을 치는 수풀을 헤치고 작은 언덕을 올랐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언덕에 반쯤 묻힌 토굴이 보였다. 입구가 벽돌로 봉해진 이 토굴은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라고 한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렬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를 지나 좀 더 언덕을 오르니 드디여 삼종사묘소가 보였다. 묘역에는 중간에 라철선생이 그 좌우로 서일장군과 김교헌선생이 어깨를 나란히 한채 평강벌을 굽어보고 있었다. 묘소앞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묘”, “대종교 종사 백포 서일 신해지장”, “대종교 종사 무원 김교헌 신해지상”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 화룡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관리되고 있어 철책으로 둘러져 있는20여평 남짓한 묘역에는 “반일지사무덤 (反日志士墓葬)”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있다.     ▲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은 필자. 맨 왼쪽이 서일의 무덤이다.        1대교주 라철은 1916년 추석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한 후 대종교 교인들은 제1대 교주 라철의 유언에 좇아 그의 유해를 화룡 청파호에 이장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녕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제2대 교주 김교헌을 1924년 1월에 그의 유해를 역시 화룡 청파호에 옮기였다. 1989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촌 로인회에서 삼종사묘소를 수선하면서 잃어진 김교헌의 비석을 다시 세우니 대종교 삼종사묘소는 다시 빛을 보게 되였다. 그뒤 1991년 9월 1일, 화룡시인민정부 공고로 되는 삼종사묘소—반일의사무덤이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됨에 따라 삼종사묘소는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나타난다. 이렇게 대종교의 선각자들이 당년에 일제와 처절한 사투를 펼쳤던 곳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서일은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리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와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렬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41세에 자진순명(自尽殉命)한 그는 짧은 생애 가운데 나중 10년을 장백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 그의 묘소앞에 섰노라니 민족위기의 관두에 선두에서 피를 토하듯 내지른 사자후(獅子吼)가 생생히 들려오는듯 하다.   (끝)   참고문헌- “중국조선족력사상식”. 연변인민출판사 |998년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종교사”. 민족출판사2006년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2009년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종교” 국학자료원 2002년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만주항일유적지답사”. 장산출판1996년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일~ 7월 7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    달의 몰락을 읊다 댓글:  조회:3289  추천:13  2013-06-14
. 작가의 말 .   달의 몰락을 읊다   - 장편력사소설 "완용 황후" 의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1,   지난 80년대 중기, 당시로서는 큰 흥행을 보였던 “마지막 황후”라는 영화가 있었다. 문학의 꿈을 안고 연길로 상경했던 나는 연길의 예술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번홍이 주역을 맡은 영화였기때문에 힘들게 표를 구해서 굳이 보았다. 그녀의 연기에 심취되여 영화지 “대중영화”에서 펼친 우수배우 추천표에 번홍을 적어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극성맞은 팬이였던 나는 정작 번홍이 열연한 그 영화의 원형인 완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극물인 영화의 알둘말둥한 줄거리보다는 영화주역의 용모와 연기에만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던것이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흐른후, 주말마다 어김없이 찾아가 영화를 보았던 예술극장자리가 원 연길감옥자리였고 그곳에서 조선족투사 30여명의 성공적인 탈옥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이 놀랐었다. 그후 다름아닌 또 그 자리에서 영화 “마지막 황후”속의 진실한 완용이 최후를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소스라쳐 놀랐다.   2,   황후의 이미지라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금의옥식과 사치함 등 단어가 먼저 떠오를것이다. 하지만 지존의 여느 황후들에 비해 완용의 운명은 달랐다. 황후로 책봉된 그 날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였다. 청나라 통치가 무너지자 완용은 부의와 함께 력대의 왕후장상들이 기거하고있던 황궁에서 가차없이 쫓겨났다. 그뒤로 장춘에 위만주국이 건립되였을때는 “꼭두각시 황후”, “괴뢰황후”로 력사의 정곡에 위배된 왜곡된 삶을 살았다. 괴뢰황제의 황후로서 완용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는 너무나 미약하고 난처한것이여서 생활에서의 불여의와 정신적 고통을 피할수 없었다. 결국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다 곁에 친지 한 사람없이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감옥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거두어 줄 사람조차 없은 그의 시신은 연길 모아산의 어느 산자락에 무주고혼으로 묻혔다고한다. 완용의 일생은 가히 비극적이였다. 암흑한 봉건왕조와 잔혹한 일제는 그녀를 꼭두각시로 조종하다가 나중에는 망각과 방치의 나락속에 처넣었다. 만월을 꿈꾸었던 완용은 초승달같은 청승맞은 삶을 간신히 영위하다가 력사의 제물로 영영 이즈러지고 말았다. 중국의 마지막 황후가 스러진 현장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가 유흥을 즐기던 영화관자리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쩌면 우리와는 상관이 전혀 없을번한 마지막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그후에도 간헐적으로 그냥 들려왔다. 지난 2007년 연길에서 어느 행상가의 후손에 의해 완용의 담비털옷이 발견되여 나는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그 기문을 “코리안 타운” 주간지에 보도한적도 있었다. 사실 력사서를 두루 읽어보면 완용의 선조는 연변의 초기 개척과 직결된 사연들을 가지고있었다. 문무가 겸비하여 광서황제로부터 “길림장군”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적 있는 완용의 증조부 곽포라 장순은 길림과 조선의 무역에 관한 상주서를 조정에 올려 연변의 화룡욕(룡정시지신향), 광제욕(룡정시 개산툰진 광조향), 서보강(훈춘시 삼가자향)등에 국(局)을 설치하여 무역활동을 추진하게 한 공신이였다. 천보산 광산의 개발도 그의 제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동북지구의 첫 통사인 “길림통지”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위만주국 “강덕황제”역시 연변과 련관의 동아줄이 이어져 있다. 개산툰에 설치된 “어곡전”, 우리 선조들의 벼재배 기술에 감복한 “임금”에게 진상하고자  우리 신변에서 “어곡미”를 산출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먼듯 가까운 마지막 황후 완용, 그러한 력사의 세절이 주는 우연과 일치가 소설가로서의 나의 창작충동을 건드렸다.   3,   근년들어 력사제재는 다시 한번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텔레비의 채널을 임의로 틀어봐도 어느 채널인가에서는 꼭 력사드라마를 상영할 정도로 력사제재에는 아닌 호황이 도래했다. 하지만 지극히 “야담” 스러운 력사드라마의 인기는 보는이들로 하여금 한면으로는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상업적 흥행과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춘 인물 형상의 상투성, 선정적 묘사, 출세담과 복수담의 범람으로 뻔한 스토리에 획일적인 끝맺음을 내세운 작품들이 소설지면과 브라운관에 넘쳐나고 있다. 요즘의 력사물들은 진부한 구도에서 반복재생산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곡된 정통성에의 집착이 이른바 후궁들의 “적자 다툼”의 소재와 란세의 영웅주의와 사대주의를 표방하는 성숙미달의 이야기들… 그런 력사물의 홍수가 서점가에 넘쳐나고 TV의 채널을 메우지만 그래서 나는 사극 열풍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다른 한면 이러한 열풍에도 우리 작가들은 제재의 무풍지대에 처해 있다. 창작성향에서 력사물 한편 배출하지못하는 우리 작가들의 미온적인 태도 또한 불안하다. 중국제재의 소설 “대지”로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작가 펄벅의 일련의 중국소재의 력사소설은 각설하고 봐도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 마저도 중국의 력사제재에 끊임없는 흥심을 가지고 끊임없는 번안물과 창작물을 내놓았다. 일본의 시바료 타로, 한국의 정비석, 박종하 등이 내놓은 “삼국지”, “초한지”등은 중국 본토작가들의 경전에 못지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몰아오고있다. 근래에도 한국작가들에 의해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 당나라의 무측천, 양귀비, 중국동북의 항일제재, 지어 연안생활을 제재로 한 작품까지 창작, 출간되고있다. 할진대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으로의 그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 우리 조선족 작가들 역시 거대하고 풍부한 중국의 력사소재에 눈길을 돌리고 필봉을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또한 소재의 편협함에 좁은 소로에서 붐비는 우리문학의 병폐에도 넓은 활보의 지류를 열어주지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소설에 투영된 진지한 작품, 진지하게 시대의 문제를 성찰하는 작품. 그러면서도 그 속에 독자들의 재미성향을 보유할수 있는 작품을 써내려는것은 모든 작가들의 로망일것이다. 그러한 로망에 걸맞는 쟝르로는 력사소설이 적격일것이다. 또한 변혁기 당시 사회상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주인공들의 치렬한 갈등을 보여줄수있는 그런 쟝르작품에서 작가의 여느 쟝르보다 더 진지한 창작자세가 보여질것이다.   완용에 대한 기록물은 부의를 위한 방대한 연구의 한개 편단으로, 혹은 부가적으로 간략서술되여있을뿐 그를 위한 창작물은 단 한편도 없다는 그 공백이 나의 창작충동을 지긋이 건드리다 종내는 농도와 줄기 다른 필을 들게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삶을 영위하고자 했으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왜곡된 인생을 마감한 한 비극적 인물, 력사의 고루한 관습에서 허우적거리며 더러는 충돌하다 결국은 좌절하는 황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속에 우리 민족과도 직결되는 동북인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위만주국의 우수꽝스러운 생성과 몰락과정을 그려보이고자 한다. 새로운 도전으로 중국력사제재를 선정하여 시작한 네번째 장편소설, 한 비운한 황후의 비극물, 연길로부터 시작하는 그 이야기의 첫페이지를 조심스레 펼친다.     "도라지" 2013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제곡    
7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댓글:  조회:3231  추천:10  2013-04-27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김 혁   청년문사 송몽규    지난 2월,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유품 기증 특별전이 한국 연세대학교 삼성 학술정보관에서 개막했다.   윤동주 시인의 큰 조카인 윤인석 씨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육필원고들과 유품들을 시인의 모교에 기증했다.   그 유품가운데서 윤동주의 중학교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였다.   류례없이 까까머리를 한 윤동주가 학우들과 함께 룡정의 허허벌판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의 맨 오른쪽에 앉은이는 송몽규이다.   지난 2월 공개된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사진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윤동주에게서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였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명동촌의 송몽규 생가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명동학교 시절의 윤동주(가운데 줄 맨 오른쪽)와 송몽규(가운데 줄 오른쪽 세번째)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계속)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4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    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댓글:  조회:3064  추천:11  2013-01-31
. 칼럼 . 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김 혁     주말, 버릇처럼 음향점 DVD매장에서 나만의 취미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매장 구석 쪽에 "채플린 영화 전집"이 보였다.오래 전에 비디오로 갖추긴 했지만 빌려간 친구들이 내내 돌려주지 않아 몇 부가 이 빠져있었다, 또 한번 전집을 몽땅 사 들었다. 채플린의 영화를 접한 것은 초중1학년 때, 그 무렵, 나는 병환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내내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내가 한달 되도록 영화관 문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 친구들의 강권에 끌려 어머니 몰래 영화관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 채플린의 "모던시대"였다. 처음 접하는 채플린이라는 캐릭터와 그 발에 발을 잇는 코미디의 드라마,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다. 내가 좀 크게 웃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눈길이 나에게 몰부어 졌다. 나는 덴겁해 웃음을 삼켰다. 영화가 끝나 나올 때엔 애들의 눈이 새삼 의식되여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플린은 투명한 감수성의 소년이였던 나에게 이렇게 특유의 농도와 줄기로 다가왔다. 홀리우드 대작영화들, 신작 개봉 영화들에 밀려 먼지를 들쓰고 있는 채플린의 영화를 사들고 돌아와 그 중 몇 부를 다시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은 중절모, 무릎이 나온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모닝코트,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 "미키 마우스(米老鼠)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채플린. 눈물과 웃음, 유머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이다.   째질듯 한 가난 속에 다섯 살 때 어머니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예술생애를 시작한 그, , , , , 같은 영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이다. 요즘 잊혀져간. 또한 뒤뚱거리는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의 모든 것은 늘..코믹하게만 표현되여 채플린..하면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탁월한 아이디어로 넘치는 그의 영화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깔려있다. 그의 영화 속에 깊이 숨겨진 얘기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들의 얘기, 하고싶은 얘기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나가 무가내한 삶을 살지만 눈 망울속에 절망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 배반하지 않고 뒤 돌아서지 않으며 마음이 찡할 정도의 순수와 맑음을 지녔다. 이것은 또한 채플린이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내가 맛보았던 불행, 불운이 무엇이었든 원래가 인간의 행운, 불운은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아서 결국은 바람 따라 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불행에도 그다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행운에는 오히려 순수하게 놀라는 게 보통이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설계도 없으며 철학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인간이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 중에서 뽑아본 말이다. 그가 영상에 던진 언질은 “인간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불행을 맛보았던 채플린이,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어 냈으니 어찌 감동이 없을까. 웃기자고 작정하고 드는 영화보다 삶의 신산함이 곁들인 이런 류의 코미디에 더 웃음이 난다. 웃고 나면 가슴 한구석 애잔함이 남는다. 채플린이 주는 웃음이 바로 이 종류의 것이다. 사람들이 몸짓으로 단순하게 웃기는 코미디만 좋아할 때 그는 코미디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깊이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따뜻한 연민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채플린은 웃음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무척 진지한 감독이였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발언해 왔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유머와 련민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유인 것이다. 바로 그 진지함이 가볍고 즐거운 웃음을 공중에 흩어버리지 않고 관객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로 지탱해왔던 힘이였다. 그가 20세기에서 첫 손꼽히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각본, 음악, 제작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도 있겠지만,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휴머니즘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물질 만능 주의이고, 우수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진정 따듯한 마음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내가 소장한 채플린의 영화와 그림책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리해하면서 살아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채플린이 어느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 구 절이다. 채플린처럼 비록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한 노력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채플린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코미디를 보고 그저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채플린 영화를 아직 집에 소장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중 몇 부라도 갖추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이른바 명작의 서렬에 든 좋은 소설이나 위대한 음악을 집에 챙겨두고 다시 보고 들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듯이 채플린의 영화도 바로 그러하게 여러분들의 서가를 빛낼 수 있는 목록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 마당 속에 흑백의 영상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큰 거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채를린의 영화 "라임 라이트"주제곡 "Terry's Theme"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    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댓글:  조회:3478  추천:16  2012-07-19
  잊혀진 녀걸 - 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김 혁    (30년대의 리화림)   올해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침략괴수들을 향해 폭탄 의거를 단행한지 80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날 세상을 놀래운 윤봉길의 의거를 도와 공원까지 동행한 20대의 녀인이 있었으니 바로 리화림이다. 필자는 리화림녀사의 헌금과 그의 이름으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였고 90년대초 연변일보 기자로 뛰던 시절, 대련지역의 조선족민속절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인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어리뜩하기 짝이 없는 어린 문학도였던 나는 그이가 우리의 민족력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녀걸이라는 존재를 미처 다아지 못했다. 그 참괴를 금할수 없어 이 몇년간 필자는 여러모로 리화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오늘 윤봉길의거 기념일을 맞으며 리화림이라는 력사의 행간에 묻혔던 인물을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한다.   홍구공원을 들썩케 하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양장 차림의 한 젊은 녀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나타났다. 녀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세상의 이목은 온통 상해를 바라고 몰부어졌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물병을 개조해 만든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놀라운 거사가 발생한것이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녀인이 바로 리화림이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테러작전으로 해내외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드높이고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윤봉길 폭탄투척사건이 일기 몇달전인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리화림이였다. 리봉창에 대한 인상을 리화림은 이렇게 말했다.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도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 보였다.” 리화림이 만들어준 “특제 훈도시”에 수류탄을 숨기고 도꾜에 도착한 리봉창은 일본 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이(溥儀)와 도꾜 교외의 련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 김구에게 관병식을 기회로 거사를 결행한다는 뜻을 알리는 암호전문을 타전했다. 1932년 1월 8일 도꾜 고지마치 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리봉창은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비호같이 달려나오며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뿐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며칠후 중국의 신문들에 “조선인 리봉창 일황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라는 제목의 리봉창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글이 실렸다. 리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상해에서 리봉창의 순국을 접하고 리화림은 눈물을 흘렸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리봉창의 의거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조선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림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중국 정부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일본은 이 의거의 영향으로 한층 거세진 중국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련종승려 피살사건(日莲宗和尚被杀事件)”을 빌미로 “상해 1.28사변”을 일으켰다. 두번째 의거인 “홍구공원”의거에 앞서 김구의 지시로 윤봉길의사와 위장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놓았다.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거사 당일 두 사람이 김구 앞에서 선서를 하기까지 했으나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수는 없다.”고 만류했다. 또한 리화림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데다 두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로출될 념려가 있다는 념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봉길 혼자 거사하는것으로 결정됐다. 의거후 윤봉길은 상해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여 수감되였다가 12월 18일 가네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인을 놀래웠는데 국민당 총통 장개석도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을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리화림은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개입핶고 리봉창의 천황요격사건에도 가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 거사에 모두 참여한 력사의 증인으로 되였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오다   리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시 경창리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선렬도에서 번진 "3.1"운동에 도 적극 가담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성진, 안주 등으로 다니면서 당활동을 했다. 1930년 3월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당시 그의 오빠 둘은 이미 중국에서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빠들의 영향으로 그가 평양에 머무르지 않고 평양보다는 비교적 활동영역이 넓은 중국행을 택했을것이다.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 이르른 리화림은 상해로 가서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자원했고 김구는 그의 간절한 청을 수락해주었다. 그때부터 리동해라는 가명을 썼다. 리화림은 리봉창, 윤봉길과 더불어 명실공히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이였다. 리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경비로 충당했다.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동안 리화림은 테러로는 민족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갈등”을 거듭하고있었다. 드디여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리화림은 조선인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운집해 있던 광주로 떠났다. 리화림의 이야기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김구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와 민족운동방식의 로선 차이를 느낀 리화림이 김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떠났기 때문일것이라고 사학가들은 추정하고있다. 1932년 늦가을, 리화림은 의렬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2학기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였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당시 중산대학에는 조선학생 30여 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조선인이 수학할수 있었던것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지사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중산대학에서 리화림은 진광화등과 “조선인용진학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중산대학 법학부의 김창국과 정이들어 가정을 이루고 그 이듬해에는 아들 우성이를 보았다. 그러나 안해가 내조하길 바라지 독립혁명운동에 참여하는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남편때문에 가정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후 아들하고도 헤여져 종내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리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 시기 리화림은 또 10살 년상의 리집중과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불과 반년도 못되여 또 갈라지고 만다.   조선의용대에 가입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였다. 조선의용대는 좌파련합인 조선민족전선 련맹 산하의 무장집단으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조선인들의 군사조직이였다. 민족의 반일역량을 총결집하여 국외에서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품고 결성한 조직이다. 규모는 100-300명 수준이였지만 대원들의 지적, 언어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때 가히 정예집단이였다.   1939년 3월, 리화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입대, 부녀대 부대장으로 당선되였다.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리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리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42년5월,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졌다. 리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등을 공부했고 또 한번 부녀대 대장이 되였다. 이렇게 거치른 산야에서 불철주야로 일제와 맞서는 전장에 몸을 둔 탓인지 리화림은 녀자의 이미지를 넘어 남성다운 면이 컸다고 한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을 지낸 김학철은 회고록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리화림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리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녀자는 녀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것이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한, 속이 옅은, 경박한 편이였으므로 덩달아 리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리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다. 당시 대원들속에는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가진 사람도 잇었다. 이에 리화림은 우리의 민요”도라지”곡조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어 “미나리타령”을 창작했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여기서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은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회의감을 떨치기 위한것이였다. 녀성대원들은 합창공연을 했고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1944년 리화림은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연안으로가서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였지만 리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별 질문을 들이대도 리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은 리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무정장군의 설득에 리화림은 의과대에서 유일한 조선인으로 남아 계속 공부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이 중경담판을 마치고 돌아올때 학교에서 학생대표로 비행장에 마중나가 악수를 하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전 재산을 후대에 바치다   1946년 11월 21일  리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뛰여들었고 전후에는 새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시기 벼라별 박해를 다 받다가 1978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리직휴양한후 리화림은 아껴먹고 아껴써서 모은 로임 2만여원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그의 헌금에 힘입어 그의 이름윽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은 올해로 9회째 이어져 오며 조선족문단의 중요한 상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1999년 2월 10일, 스무살 꽃나이에서 구순(九旬)에 이르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리화림은 대련에서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림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동안 력사의 전초에서 민족을 위해, 주의(主義)를 위해 위해 자신의 안일은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산화(散花)해간 선렬들이 있다. 저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피로 강산을 물들이며 스러져간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은 가능했다. 하지만 사랑도 꿈도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제것이라 할만한건 모두 민족에 바친 그들을 우리는 은연중 잊어가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중요한 력사이고 인물인데도 점점 잊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리화림의 일대기에서 드러나는 민족사랑, 희생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가치라 하겠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심금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한국 시인 리윤옥의 녀걸 리화림에 대해 읊은 시 한수를 곁들어 본다.   화려한 불빛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중   일본 사쿠라다몽으로 떠나는 리봉창 가슴에 안겨 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이루지 못했어도 혼비백산한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뒤 상하이홍구 공원 물샐틈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리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삼림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 ...    
4    [명상시 4] 習慣 댓글:  조회:3240  추천:12  2012-05-20
      습  관 - 김혁 暝想詩 시리즈 4 떼었던 담배를 다시 붙였다. 루습(陋習)이 고스란히 남아 책을 들거나 Tv앞에 앉으면 담배부터 찾아 든다.  라이터를 기분좋게 만지이며 니코틴의 습지에 빠져든다.  습관이란 정말로 무서운 거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습관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습관이란 후천적으로 습득된 행동이며 사고이다. 파스칼은 제2의 천성인 습관이 제1의 본성을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습관을 조정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좌지우지할 수가 있을 건데... 루습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짜증 난다. 짜증나니 담배 한 대  피워 야겠다(?)      
3    [暝想詩 3] 어둠속을 걷는 법 댓글:  조회:3348  추천:10  2012-05-14
    ​ 어둠 속을 걷는 법 - 김혁 暝想詩 시리즈 3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빠져드는 블랙홀 캄캄하다 탈출구는 없다 어둠에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2    [暝想詩 2] 구멍 댓글:  조회:3496  추천:11  2012-05-11
       구 멍 - 김혁 명상시 시리즈 2 협착한 세상 갑갑하다 숨구멍을 만들어야겠다. 연장을 들고 구멍을 만들었다 그런데 구멍이 컸나 보다 바람이 미여지게 불어와 나를 춥게 한다 다시 구멍을 막아야겠다.      
1    [暝想詩 1] 얼굴 댓글:  조회:4010  추천:15  2012-05-05
      ​ 얼 굴  - 김혁 暝想詩 시리즈 1    얼굴이란 우리말의 참 의미는 얼: 령혼이라는 뜻이고 굴: 통로라는 뜻이라 한다.   얼굴의 참말을 알게 된 후로 무심코 보던 거울 다시금 들여다 보았다. 내 령혼에 먼지가 묻었나 때가 묻었나     Sous Le Ciel De Paris - Edith Pi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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