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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련옥(煉獄)의 소나무 댓글:  조회:2524  추천:5  2014-05-28
[김혁 독서칼럼 7]   련옥(煉獄)의 소나무 -  장편소설 “붉은 바위”   1980년대에 출간 된 "붉은 바위" 조선문 표지   당대중국문학작품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어떤 책일가? 바로 “붉은 바위(红岩)”였다. 1950년대에 출판된 이래 397차 재판,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한국등지에서 번역 출간되였으며 국내에서만1000만책의 발행량을 기록했다고 일전 청명을 맞으며 중경의 매체가 피로하였다. 소설은1949년 해방전야 중경의 사재동이라는 감옥을 배경으로 국민당의 야만적인 고문과 학살만행에도 굴하지 않는 “붉은 수인”들의 숭고한 품성과 자기희생정신 그리고 철저한 혁명정신을 구가하고있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며 국민당의 마지막 보루인 중경을 향해 매진해 오자  역전할수 없는 고립의 난국에 처한 국민당 옥지기들은 광분하면서 사재동(渣滓洞)감옥에 갇힌 혁명자들에게 마수를 뻗치기 시작한다. 소설은 감옥내에서의 투쟁과 중경시가지에서의 학생운동, 로동자운동을 교차해 보여주고있다. 더욱이 혁대, 몽둥이, 족쇄가 란무하는 련옥과도 같은 감옥내에서 불굴의 신념을 가진 혁명자들이 패망을 앞두고 미쳐 날뛰는 국민당과의 최후의 결전에 많은 필봉을 기울이고 있다. 당대문학작품으로는 국내 발행량의 최다를 기록한 책은 몇 세대 사람들의 정신을 고무했고 그들 저마다가 간주한 “문학 메모리(记忆)로 뇌리에 깊숙히 갈무리되여 있다. 소설이 미친 영향력은 컸다. 나의 초중시절 학교에는 지어 소설의 제목을 따서 박홍암, 최홍암등의 이름을 가진 애도 몇명 되였다. “붉은 바위”는 조선어로 번역 출간되였을뿐만 아니라 영화, 가극, 련환화등 각종 쟝르로 번안되고 각색되였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초대박 베스트셀러였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 “렬화속에 영생하리”의 포스터   출판계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열독물이 적었던 당시 여러번 곱씹어 읽었던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기본 가치를 알게 되였고 정신적 자양분을 흡취하였으며 작중인물들의 영웅기개에 대한 앙모의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 “렬화속에 영생하리(烈火中永生)”와 가극 “강누님(江姐)” 역시 당시의 경전작품으로 떠오르며 더불어서 그야말로 “붉은 바위”붐을 일으켰다. 중국전역에서 순회 공연을 했던 가극에서 강누님을 맡은이가 또한 조선족 배우 김만이여서 우리로서는 은근히 자호감을 머금었었다. 책의 공동 집필자들인 라광빈(罗广斌)、양익언(杨益言)은 이 집중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다. 그들은 해방의 려명을 앞두고 피와 불의 고험을 직접 피부로 겪었다. 그들은 일찍 옥중생활에 대한 회고록을 써낸적 있는데 그 회고록이 바로 소설의 모태로 되였다. 때문에 작중인물중 주인공들인 강설금, 허해봉등은 거개가 실존인물들이였다. 그저 이름자중의 한,두자를 바꾸었을뿐이였다. 문학적인 허구를 덧입혔지만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두가 옥중에서 일어난 진실한 사건에 문학의 개연성을 조금 가미한것이였다. 때문에 평단에서는 작품을 가리켜 “실화소설”이라고 정평하기도 했었다. 다문화가 다투어 각축전을 벌리고 있는 오늘날에도 소설 “붉은 바위”는 그로서의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 또 하나의 풍만한 인물형상으로 엮어진 혁명서사시로서의 작품은 흘러간 력사의 흐름을 면면히 살피면서 혁명의 간거함과 승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참대꼬챙이로 손톱눈을 들쑤시는 악행에도 굴하지 않은 강누님, 손으로 돌벽을 후벼 뚫어서 탈출의 길을 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허운봉, 감옥에서 태여나 영양실조로 머리가 커서 “무우골”이라 불린 혁명자의 후예,미치광이로 가장하고 감옥에 잠복해 탈옥을 도운 화자량, 극형의 약물주사와 거짓말 탐지기도 이겨낸 성강, 쌍 권총으로 반역자를 단죄한 “쌍총 로파”… 그들의 이야기는 독자들더러 숙연을 머금게 했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으며 갈채를 올리게 했다.     소설을 각색한 가극 "강누님"에서 주역을 맡은 조선족 유명배우 김만   참대꼬챙이로 생살을 쑤시고 고추물을 부어넣고 약물주사를 투입하는 극형도 이겨내게 한 그 힘은 무엇이였을가? 책을 읽으며 그 불가사이한 힘의 정체를 읽어내려 애썼다. 오랜 시간이 흘러 더 성숙된 독서가의 시각으로 다시금 반추해보며 더듬어낸 그들의 정신의 요체는 바로 정의로움과 신념에 대한 성실함이였다. 세계적인 사전으로 불리고 있는 “웹스터 사전”에서는 신념에 대해 “어떤 사람이나 생각이나 사물의 진실성,가치 혹은 신뢰성에 대한 확실한 믿음, 론리적인 증명이나 물질적인   증거에 의거하지 않은 믿음”이라고 정의되여 있다. 이처럼 신념은 무형의 추상적인 관념이며 어쩌면 아직 과학적으로 립증되지 않은, 립증할수도 없는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마음, 그 하나의 올곧은 마음이 력사상 세상을 바꾸기 위해 혁명과 투쟁을 선택하고 기꺼이 산화해간 무수한 영웅을 낳게 했다. 소설의 표지 디자인이 내내 인상에 남는다. 붉은 바탕을 기조로 암바위우에 우뚝 선 소나무를 새긴 목판화이다. 간결하면서도 극명하게 소설속 인물들의 견정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준 표지였다. 오롯이 작중 인물들을 은유하는 그 소나무는 신념이라는 자양분을 마시고 척박한 암바위우에서도 꿋꿋한 기상으로 강건하게 자라고 있었다.   “길림신문” 2014년 5월 2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11    그네는 누굴 위해 흔들리나? 댓글:  조회:2761  추천:7  2014-05-13
평론   그네는 누굴 위해 흔들리나 - 막언의 단편소설 “백구와 그네 (白狗秋千架)”   김 혁     막언, 이제 더는 소개가 필요없는 작가다. 서방작가들의 전용물이나 다름없던 노벨문학상의 트로피를 당당하게 앗아내 중국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룩해준 큰 작가다.   평단과 독자들은 그를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버크너,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고 극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상 그의 작품은 영화때문에 더 알려진 “붉은 수수”정도에 그치고 더 풍요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적어도 조선족문단과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막언의 작품중 굵직하고 호흡이 긴 장편외에도 단편수작들이 적지 않은데 “백구와 그네”가 바로 그중 한부이다.   소설의 배경은 막언의 여느 소설처럼 또 한적한 농촌 그의 고향마을이다. 고향을 떠난지 꼭 십년이 되여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도에서 그는 고향의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주인인 “난”을 만난다. 젊은 시절 두사람은 향 문예선전대의 골간이였다. 함께 노래부르고 악기를 다루었던 둘은 인민해방군에 가입하려는 꼭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한번 함께 그네를 타다가 그녀는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고 그 신체적 결손때문에 성정미도 포악한 벙어리 남자에게 숙명적으로 얹히게 된다. 그후 한사람은 시가지로 가서 강사로 되였고 한 사람은 오지에 남아 세쌍둥이 엄마, 데데한 시골아낙으로 전락해버렸다. 주인공은 아름답던 그녀의 비참한 조우를 피부로 부딪히고 호흡 가까이 느끼면서 고향의 실체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   전원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했던 독자들이고보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큰 형벌이다. 소설은 차겁게, 그리고 잔혹함에 가깝게 생활의 고단함을 원색 그대로 보여준다. 돌다리, 흰 강아지, 수수밭 이러한 흔히 볼수있는 고향의 다정다감한 풍경들과 그 풍경속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서로 상사한것 같지만 막언의 소설에서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매개물로 존재하고있다. “뿌리찾기(寻根)문학 류파”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막언의 작품들은 농촌의 우매함과 그 우매함에 갇힌 어둠에 대해 회피하지않는다. 고향은 그에게서 아름답게 동경하는 곳이자 루추한 현실이 숨쉬는 곳이다. 하여 그의 작품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설에서도 지어 다른 남자에게서 씨종자를 빌리는 락후한 행태마저 크라이막스로 보여주려한다. 그리고 거기서 뚝 끊음으로서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공간을 펼쳐 준다.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폭로속에 시골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질박한 추구가  슴배여 있어 이야기는 간단한듯 해보이지만 그 흙감탕의 밑바닥을 사정없이 파헤쳐 나중에 드러나는 하얀 옥석같은 내함은 실로 놀랍다.   이 소설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소설 곳곳에 장치한 상징의 적절한 리용이다. 소설에서 들머리에 등장하고 제목에도 나오는 백구는 하나의 상징이다. 농촌에서 흙길에서 뛰노는 백구는 도회지에서 재미삼아 기르는 애완견과 차이가 있다. 농촌의 토종개들은 집을 지키는 구실을 곧 잘하는 개로서 가족의 하나의 구성원이다. 여기서 강아지는 아직도 하대받는 농촌사람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늙고 병든 강아지이지만 촌부락을 손금보듯 꿰지르는 강아지로 드팀없이 고향을 지켜나가는 그들의 신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저층에서 의연하고 구순하게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네 역시 상징의미를 갖는다. 그네는 농촌에서 유일한 오락기구일수 있다. 장바 한컬레와 나무조박으로 무어진 한낱 수수한 그 그네가 주는 그 재미는 도회지에서 돈 퍼주고 타는 공원의 놀이기구에 못지 않다. 그 간단하기 그지없는 툽상스러운 기구에 몸을 맡기고 사람들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운다. 그런데 소설속에서 그 줄이 끊저져 버렸다. 이는 바로 전통과 현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 단절이 녀주인공 난의 신체의 결손을 빚었고 그 몸의 결손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빚는다. 작중인물의 이름도 나름의 뜻을 갖고있다. 녀주인공의 이름은 따스할 “난(暖)”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겪은 인생사는 차갑기만 하다. 이쁜녀로 부터 억척녀로 변한, 변해야만 했던 주인공, 차거운 세상의 밑바닥에 내쳐진 그녀는 그누구보다도 따스함에 대한 갈망으로 차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의 집 아이를 잉태하려드는 해괴한 거동은 바로 따스함과 희망에 대한 동경의 발로를 적라라하게 보여준다. 또 그녀의 애꾸눈은 아름다움이 상실된 편벽한 시안을 상징하며 작가의 눈에 이률배반으로 비친 고향의 모습을 말해 준다. 난의 벙어리 남편 역시 하나의 상징으로 볼수있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 벙어리와 낳은 세쌍둥이마저 벙어리이다. 실어는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 쌍둥이는 바로 그러한 우매가 련속되여 감을 보여주며 고난의 련속성을 암시한다. 한 시골농가의 볼썽사나운 결손가족으로부터 도농간의 경제적 격차, 빈곤의 영속화, 황폐한 농촌마을의 풍경과 그들에게 내려진 운명의 잔혹한 세례를 보여주는것이다. 소설의 초반부터 주인공의 고향순방은 커다란 상징으로 시작된다. 리향과 귀향, 이는 바로 우리의 허다한 문학경전들이 즐겨쓰는 수법으로서 정신의 보금자리에로의 깃듦을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은 시골마당에 두고 온 그네처럼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그냥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제날에 대한 회구의 마음으로 찾아 나선 고향, 고향은 아직도 무가내하게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막언은 토종개를 앞세워 우리의 독자들을 안내해서는 애꾸눈 녀주인공과 함께 하나지만 다른 눈동자에 비해 더 극명한 시선을 제공하면서 멀미 나는 그네대에 올려 놓고 흔들어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멀미나는 경험 그것은 바로 령혼의 흔들림이요, 진통이다.   초기소설이고 단편이지만 이 소설은 막언의 창작에서 전환점인 작용을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부터 그의 작품들에는 고밀향이라는 환상의 고장이 처처에 나오기 때문이다. 막언은 어느 한번의 창작담에서 “고향의 산천과 시내가, 풍토와 인정, 가족들의 별난 경력, 고향에서의 그 혹독하고 어려웠던 생활, 고향 친지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전설과 지나간 이야기 등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제 앞에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 앞다투어 나타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소설로 써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난한 소시민이 갑작스레 엄청난 재화를 얻은것처럼 소설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습니다. 쓸 만한 이야기 감이 없던 시절이 지나가고 미처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절을 맞이했습니다.”고 밝혔다. 바로 이 소설을 쓰면서 부터 막언은 중국과 해외의 우수한 작가들로부터 받은 깨우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문학 공화국”인 “고밀 동북향”을 세웠던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막언의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 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막언에게 가장 큰 고통은 쓸 만한 소재가 없다는것이였다. 종종 소재를 찾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정신없이 뒤적이고 지방의 작은 마을을 찾아다니거나 공장을 방문해 취재를 하곤 했지만 돌아온 후에는 머리속이 텅텅 비여 있는것 같았고 원고지앞에 앉아서는 단 한 글자도 쓰기 어려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 “마치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알게 된 것처럼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습니다.”고 막언은 창작담에서 말했다.   막언의 작품으로 보면 짧고 단순한 내용,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극명하게 운명의 원색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막언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숙명감이 자주 보이는데 꼭 마치 희랍의 비극물처럼 처량미와 비장미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기쁨 혹은 슬픔, 격앙 혹은 저조의 행간을 오가며 기복이 높낮은 운명의 다단함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여타의 다른 작가와 같은 골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현대인들의 메마른 심성을 흔들리는 그네의 세례를 받게 하여 농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고를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근본적인 가원(家园)인 향촌의  정신적요의(要义)에 대해 재해석하고 있다.   “도라지”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10    채플린을 다시 만나다 댓글:  조회:3402  추천:5  2014-05-10
. 칼럼 . 채플린을 다시 만나다   김 혁     1 세계 희극의 거장 찰리 채플린, 그의 영화 역사가 올해로 100년을 맞았다. 따라서 채플린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 2016년 스위스에서 문을 연다고한다. 박물관이 세워지는 곳은 그가 1977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25년 간 살았던 집이다. 채플린의 후손들은 스위스 코르시에 쉬르 브베에 위치한 그의 주택을 기념 박물관으로 재단장 하기 위한 공사가 첫 삽을 떴다고 밝혔다. 박물관에는 채플린이 이 주택에 실제 거주하면서 남긴 흔적은 물론 직접 제작한 영화ㆍ예술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2 주말, 버릇처럼 음향점 DVD매장에서 나만의 취미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매장 구석 쪽에 "채플린 영화 전집"이 보였다. 오래 전에 비디오로 갖추긴 했지만 빌려간 친구들이 내내 돌려주지 않아 몇 부가 이 빠져있었다, 또 한번 전집을 몽땅 사 들었다.   채플린의 영화를 접한 것은 초중1학년 때, 그 무렵, 나는 병환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내내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내가 한달 되도록 영화관 문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 친구들의 강권에 끌려 어머니 몰래 영화관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 채플린의 "모던시대"였다. 처음 접하는 채플린이라는 캐릭터와 그 발에 발을 잇는 코미디의 드라마,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다. 내가 좀 크게 웃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눈길이 나에게 몰부어 졌다. 나는 덴겁해 웃음을 삼켰다. 영화가 끝나 나올 때엔 애들의 눈이 새삼 의식되여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플린은 투명한 감수성의 소년이였던 나에게 이렇게 특유의 농도와 줄기로 다가왔다.   홀리우드 대작영화들, 신작 개봉 영화들에 밀려 먼지를 들쓰고 있는 채플린의 영화를 사들고 돌아와 그 중 몇 부를 다시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은 중절모, 무릎이 나온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모닝코트,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   "미키 마우스(米老鼠)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채플린. 눈물과 웃음, 유머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이다.   째질 듯 한 가난 속에 다섯 살 때 어머니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예술생애를 시작한 그, , , , , 같은 영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이다. 요즘 잊혀져간. 또한 뒤뚱거리는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의 모든 것은 늘..코믹하게만 표현되여 채플린..하면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탁월한 아이디어로 넘치는 그의 영화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깔려있다. 그의 영화 속에 깊이 숨겨진 얘기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들의 얘기, 하고싶은 얘기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나가 무가내한 삶을 살지만 눈 망울속에 절망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 배반하지 않고 뒤 돌아서지 않으며 마음이 찡할 정도의 순수와 맑음을 지녔다. 이것은 또한 채플린이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내가 맛보았던 불행, 불운이 무엇이었든 원래가 인간의 행운, 불운은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아서 결국은 바람 따라 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불행에도 그다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행운에는 오히려 순수하게 놀라는 게 보통이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설계도 없으며 철학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인간이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 중에서 뽑아본 말이다.   그가 영상에 던진 언질은 “인간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불행을 맛보았던 채플린이,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어 냈으니 어찌 감동이 없을까.   웃기자고 작정하고 드는 영화보다 삶의 신산함이 곁들인 이런 류의 코미디에 더 웃음이 난다. 웃고 나면 가슴 한구석 애잔함이 남는다. 채플린이 주는 웃음이 바로 이 종류의 것이다. 사람들이 몸짓으로 단순하게 웃기는 코미디만 좋아할 때 그는 코미디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깊이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따뜻한 연민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3 채플린은 웃음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무척 진지한 감독이였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발언해 왔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유머와 련민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유인 것이다. 바로 그 진지함이 가볍고 즐거운 웃음을 공중에 흩어버리지 않고 관객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로 지탱해왔던 힘이였다.   그가 20세기에서 첫 손꼽히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각본, 음악, 제작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도 있겠지만,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휴머니즘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물질 만능 주의이고, 우수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진정 따듯한 마음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리해하면서 살아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채플린이 어느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 구 절이다. 채플린처럼 비록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한 노력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채플린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코미디를 보고 그저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채플린 영화를 아직 집에 소장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중 몇 부라도 갖추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이른바 명작의 서렬에 든 좋은 소설이나 위대한 음악을 집에 챙겨두고 다시 보고 들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듯이 채플린의 영화도 바로 그러하게 여러분들의 서가를 빛낼 수 있는 목록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 마당 속에 흑백의 영상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큰 거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9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댓글:  조회:3349  추천:9  2014-04-30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타계 70주기를 맞는 녀류작가 강경애 김 혁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문학비 하나가  호젓이 서있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있으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여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익숙히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강경애의 문학스승 양주동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룡정으로 이주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근무했던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서의 필자.  강경애는 이주 초기, 이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고한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1939년 “화제녀성 월평”란에 삽화로 실린 강경애.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 교원 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련재당시 소설 “소금”의 삽화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조선의 동명영화 “소금”의 포스터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룡정의 비암산에 건립된 강경애 문학비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 그녀만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 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 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8    개의 순애보 댓글:  조회:1731  추천:15  2014-04-21
[김혁 독서칼럼 6]   개의 순애보 실화 “하치의 이야기” 일본 렬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세계를 울린 감동 실화 소설이다. 흰 눈이 소담하게 내리는1923년의 어느 겨울날, 시골 농가에서 황금빛 바탕에 흰 털 무늬가 섞인 강아지가 태여난다. 강아지는 시부야의 농학부교수 우에노의 집으로 보내진다. 교수의 제자가 은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보낸 선물이다. 팔(八)자 모양의 두 다리를 가진 강아지에게 우에노교수는 일본어로 수자 8을 칭하는 “하치”라는 이름을 달아준다. 우에노 교수는 벼룩도 잡아주고 욕조에서 같이 목욕도 하면서 하치를 지극히 보살핀다. 하치는 매일 아침 시부야 역까지 따라가 출근하는 우에노 교수를 배웅하고 저녁에는 마중 나간다. 받은 사랑만큼 보답하고자하는 강아지 나름의 약속, 하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약속이다. 그러던 어느 하루, 불행이 닥쳐와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은 고장난 기차처럼 탈선한다. 유달리 하치에게 애정을 쏟던 우에노 교수가 강의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한것이다. 하지만 하치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시부야 역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언젠가 기적이 울리고, 주인을 실은 기차가 도착하고, 역사(驿舍)의 문을 열고 나올 자신의 주인을 만날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하염없이 기다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치의 기다림은 그후 10여년 동안 매일마다 한결같이 계속 된다. 1935년 3월 8일, 눈내리는 시부야 역에서 기다림에 지친 하치는 눈을 감는다. 련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아름다움 마저 느껴지는 모습을 남긴채 드디여 주인이 간 곳으로 찾아간것이다. 일본 북부 아키다현에서 태여난 순종 아키다견(犬)인 하치는 일본에서 “충견”으로, “국민영웅”격으로 칭송받는다. 하치의 이야기는 일본의 소학교 2학년용 수신(修身)교과서에도 실렸고 시부야 역 광장에는 하치의 동상이 세워졌다. 일본의 저명한 화가가 조각했고 동상의 좌대에는 “충견 하치공”이라고 새겨넣었다. 한 마리 개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붙여 추대한것이다. 동상 제막식에는 당시 살아있던 하치 자신도 참석했다고한다. 하치의 시신은 박제되여 일본국립과학박물관에 지금까지 보존되여 있다.   하치의 이야기는 세월이며 국경을 초월해 불과 몇해전에도 할리우드에서 동명의 영화로 제작,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대거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해 감동의 연기를 선보였다. ​ ​ 할리우드에서 각색한 영화의 장면들     2012년 100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간 저자 신도 가네토는 씨나리오 작가로서 히로시마 원폭에 관한 작품을 쓰면서 유명해 졌다. 그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일관된 테마로 하고 있다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 독특한 일본문화에 대한 해부서인 “국화와 칼”의 저자,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은혜를 갚은 강아지”라고 그의 저서에서 하치를 언급하면서 “일본의 은(恩)이라는 글자는 충성, 친절, 사랑등 모두를 포함하면서 그 모두를 합한것보다 훨씬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면서 “충성, 의무, 의리라는 륜리관이 일본인들이 각별히 하치를 사랑하는 리유”라고 분석했다. ​ 복잡다단한 기복과 스토리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약간 재미가 덜할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애틋하고 아련한 문체로 씌여진 글발들은 동물과 인간과의 끈끈한 련결을 보여주고 따뜻한 교감을 보여주고 있어 급기야 책에 빠져들게 하고 나중에는 저도모르게 코허리가 매콤해지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 ​ 역전 광장에 세워진 하치의 동상 강아지 두마리를 키우는 애견인으로서 처음 “하치의 이야기”를 읽었을때 엄청 눈물을 흘렸었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은 직접 키워보지 못한 이들에겐 리해불가, 하지만 그 교감을 느껴본 이에겐 마법 같은 령역이다. 그래서 사내의 체면도 잊은채 볼썽사납게 눈물을 펑펑 쏟았었다. 책을 내려놓고 내 무릎가에서 잠든 애견들을 다시한번 품에 꼭 껴안았다. 무리한 독서와 컴퓨터작업때문에 안구건조증으로 늘 안약을 투약하고있던 나는 나를 울린 그 책 덕분에 그날따라 한결 맑아진 눈망울을 가질수 있었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일회용으로 계산되고있는 요즘 세월, 한 강아지의 순애보는 우리 모두가 잊고 살았던 사랑, 우정, 그리고 신뢰를 눈물속에 다시 한 번 곱씹어보게 한다. 익히 알려진 이 이야기를 재다시 읽는 리유도 금방 지나온 겨울처럼 차거운 인정을 봄날의 독서속에 녹이고픈 따뜻한 감성의 수요에서 일것이다.     “길림신문” 2014년 4월 18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07    이종격투기 아줌마 댓글:  조회:1934  추천:6  2014-04-17
. 칼럼 .   이종격투기 아줌마   김 혁     1 요즘들어 갑절 인기가 높아진 스포츠경기가 있다. 이종격투기이다. 이종격투기(异种格斗技), 문자 그대로 서로 다른 종류의 항목으로 모든 싸움기술을 사용하여 상대를 쓰러뜨리는 경기를 말한다. 종합격투기라는 별칭도 있다. 이종격투기는 주먹, 발, 무릎을 리용해 상대를 가격하기도하고 메치기, 조르기, 누르기와 관절꺾기 등 동작들이 주를 이룬다. 이종격투기의 기원은 고대 올림픽 종목이였던 “판크라티온”이라고한다. 이는 복싱과 레슬링을 합친 형태로 반칙만 범하지 않으면 한 쪽이 포기할때까지 경기가 계속된다. 근년래 인기의 상승가도를 달리고있는 이종격투기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것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 활동)의 요소를 모두 갖췄다. 몸과 몸을 부딪히며 링우에서 고투를 벌리는 선수들, 예측할수없는 최후의 결과, 균일한 규칙과 정정당당한 경쟁, 순수한 노력이 만드는 챔피언. 이것이 바로 이종격투기의 매력이다.     2 남자들의 전용물로 알았던 이종격투기장에 녀인이, 그것도 조선족 아줌마가 도전장을 내밀어 화제다. 일전 지금의 거주지 미국에서 고향 연길을 방문, 그야말로 “금의환향”한 심영희씨가 다시금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고있다. 지금은 녀자이종격투기가 남성들과 더불어 정규적인 경기도 펼치고 있지만 십여년전에, 그것도 전업훈련이 전무한 조선족 아줌마가 이종격투기장에 도전장을 내민것은 어찌보면 “달걀로 바위치기”의 무모한 도전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으로 바위를 내질렀고 그 편견의 바위를 부서뜨렸다. 중한수교가 이루어지기전인 1989년, 심영희씨는 남보다 비교적 일찍 출국의 쪽대문을 조심스레 열고 한국으로 나갔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식당의 음식배달, 공사장의 타일붙이기등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가릴 새없이 닥치는 대로 했다. 어느 한번 한 체육관에 음식배달을 하게 되였는데 그 체육관이 바로 이각수 세계격투기련맹 사무총장이 경영하는 곳이였고 그날 격투기에 대해 처음 알게된 그녀는 호기심이 부쩍 동해 관장에게 격투기를 배우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어릴때부터 륙상, 배구, 체조에서 기량을 보이며 뛰여난 운동신경을 가졌던터라 선택한 도전이였다. 밤을 패고 끼니도 거르며 련습기를 보낸뒤 조건이 구비됐음을 느낀 심씨는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이종격투기 인생을 시작했다. 근 10년이라는 노력끝에 기회가 왔다.  2007년 3월22일 메히꼬에서 열린 “월드챔피언 십이종격투기대회”, 무려 7천여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세계녀자이종격투기 챔피언인 메히꼬선수 이사벨 마르티네즈를 제압했다. 2008년 마르테네즈의 재도전에서 심씨는 또 한번 상대를 제압해 세계 챔피언의 자리를 굳혔다.  당년 44세의 연변아줌마가 22세의 새파란 세계정상급선수를 링우에서 무찌른것이다. 홈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20살짜리 딸 같은 선수와의 대결. 결코 쉽지 않은 경기였다.  경기후 우승벨트를 차면서 심씨는 링우에서 상처투성이 얼굴을 한 채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2003년 프로무대에 입문한 심씨는 불혹의 나이를 넘겼지만 젊은 선수들을 련이어 제치고 지금까지 48차의 경기에서 무려 45차나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씨는 현재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도장을 차려100여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미 미국 시민권을 따낸 심씨는 미국 경찰들에게 합기도를 전수하게 되였고 따라서 캘리포니아주로부터 경호자격을 취득했다. 심씨는 미국 부시 전대통령으로부터 4차례의 감사장을 받아 안기도 했고 박근혜 한국대통령이 2007년도 미국을 방문했을때의 측근경호원으로 선발되였으며 또 한국의 피겨녀왕 김연하의 밀착경호를 맡기도했다. 심씨는 격투기를 시작한 리유로 “녀성들도 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경기에서, 일상에서 심씨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4가지 덕목은 “백절불굴, 례의, 정직, 극기”라고한다. 심씨는 “무술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것이라고 그의 스포츠와 생활신조를 말한다.   3 “아줌마 파워”가 실감되는 요즘 세상이다. 이 수십년래 한국이나 로씨야, 일본, 미국으로 진출한 조선족은 수십만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들이 벌어들인 외화만도 수억원, 연변의 경우 길림성 외화수입에서 조선족이 단연 첫자리를 차지한다. 그중 선두주자와 절대주역은 녀성이라는 집계도 이미 나왔다. 조선족 아줌마들은 일찍 1980년대 중기,  개혁개방으로 국문이 열리기시작하자 해외의 경제구조에 대해 일찍이 눈을 돌렸으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선점해 친척방문이나 로무송출로 남들보다 재빠른 가족의 부를 이루어 왔다. 오로지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있는 우리 아줌마들이다. 입시공부때면 아이의 공부환경을 위해 맹모삼천(孟母三迁)은 기본이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리산의 아픔도 눈물과함께 삼키며 해외로 나가 몰리해와 천대속에서도 머리를 수굿하고 3D업종에서 한몸을 혹사하는 아줌마들이다. 어깨가 결리고 손목이 붓고 다리가 아프도록 가족을 위해 치렬하게 사는 우리의 아줌마들. 그들의 헌신덕에 우리 가정과 사회가 바른 궤도로, 더 높은 종착지로 이나마 굴러가는것이 아닐가! 해외에서 이종격투기라는 이색적이며 가혹한 무대에서 정상에 까지 오른 연변 아줌마 심영희씨의 경우가 그 범례(范列)라 말하고싶다.   2014년 4월 15일   “청우재/听雨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6    방촌(方寸)에 담긴 력사와 인물 댓글:  조회:2824  추천:13  2014-04-14
​ . 칼럼 .   방촌(方寸)에 담긴 력사와 인물   김 혁     1 자칭 난 우취인(邮趣人)이다. 우표를 모은 시간도 꽤 오래되고 모은 우표도 수권으로 분류할 만큼 량으로도 적지 않다. 생활고와 도난(盜難)의 아픔때문에 한동안 우표수집을 중단한적 있지만 지금도 간헐적이나마 직성에 맞는 기념우표들을 수집해 들이고 있다.    어릴적 우리집에서 주문해보는 “인민화보”에서 강치방(姜治方)이라는 우표수집가에 대한 소개를 본적 있다. 한장에 수만원이나 한다는 룡우표도 소장하고 있고 이사를 할때에는 우표만도 두개의 트럭으로 싣고 다닌다는 천방야담같은 그의 이야기에 환혹해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천진에 가서 투병하고있는 어머니의 달마다 부쳐오는 편지에 붙어 있는 색다른 우표가 나의 여리나 투명한 감수를 끄당겼다. 게다가 마침 한 반급의 그림 잘 그리는 주씨성을 가진애 (그는 지금 한 방송매체에서 촬영기자로 활약하고있다.)도 우표에 흥취를 가져 둘이는 승벽내기로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연변에 주둔하고있는 한 주둔군 부대의 퇀장님이라하는 분이 나의 우표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 나에게 찾아올지경이였다. 그때 그분이 나의 우표수집책중에서 참대곰 우표 몇장을 당시 돈으로는 엄청난 고가로 사들이려 했으나 내가 견결히 거절했고 어머니가 상당히 아쉬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분이 내 든 가격으로는 어머니가 감질나게 사고퍼 하는 압력밥솥(高压锅) 그리고 몇달 생활비로 충당할고도 남음이 있을것이였다. 그러다 1992년경 청빈하기로 책외에 책밖에 없는 나의 세방집이 도적의 환을 당했다. 그때 첫 중편소설 “미망의 도시”로 받은 고료- 300여원의 현찰과 함께 우표책 두권을 더불어 잃었다. 하남가 파출소에서도 도난소식을 받고 출두했으나 무가내였다. 그중 하필이면 문화대혁명에 관한 귀중한 우표만 정선해 꽂은 우표책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그후로 우표에 대한 나의 흥미는 벼락맞은 묘목처럼 동강이 나 버렸다. 또한 우표수집에는 만만치않는 자금투입이 들어가는것이 가난에 쭉줄렸던 당시 그 취미를 아프게 접은 요인이기도 했다. 옛날 문인들에게는 “4대 애장품”이나 “4대 취미”가 있다고 했다. 책 읽기, 영화CD모으기, 애완견 키우기 그리고 우표 모으기가 나의 애장품이요 취미요 그리고 일상이라 할수 있다. 지금도 가끔 서재에 꽂혀있는, 구도(狗盜)의 마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권의 우표책을 꺼내 음미하노라면 감흥이 한 가슴 그득 넘쳐 오르며 고단한 삶에 힐링(Healing)이 되여주는듯 하다.   2 요즘 들어 우표를 흔상하는 나의 시선과 모으는 손탁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동물우표나 항천(航天)우표에 커다란 흥미를 가졌었다. 그중에 내가 모은 진귀한 우표를 자랑해 볼작시면, 멸종위기에 이른 새 주환(朱鹮)에 대한 80년대의 기념우표나 로씨야 우주항행의 대부 가가린에 대한 60년대에 발행한 우표들은 우취인들 사이에도 보배롭게 생각하는 귀중한 우표들이다. 그리고 민국시대에 발행한 손문(손중산)에 대한 우표는 그 발행사가 백년도 넘으니 그 진가는 우취인들만 알 바이다.   요즘에는 력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나 그 행간에 우뚝 선 인물을 담은 기념우표에 갑절 눈길이 간다. 그중 우리 민족의 력사와 직결되는 인물을 담은 우표 몇장을 뽑아 읽어 본다. 우선 2007년 한국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우표 가 있다. 우표 디자인을 보면 헤이그특사 3인의 모습이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배경으로 오버랩(한 장면에 다른 장면이 겹치게 하는 촬영 기법)되여  있다.     1907년 고종황제는 일제 강압의 의한 을사륵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세상에 호소하기 위해 그해 6월 화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리상설, 리준, 리위종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다. 하지만 일제의 횡포와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리준은 헤이그에서 분사하고 리상설과 리위종은 유럽을 순회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헤이그특사 사건”은 민족항일독립운동의 려명을 연 대사건이라는 점과 렬강 45개국이 모인 외교 무대에서 동양의 은둔국 한국을 알린 최초의 특사외교라는 점에서 력사적 의의가 크다. 내가 이 우표를 아끼는 점은 리상설이 헤이그로 떠나기 앞서 개숙(開塾)한 서전서숙이 바로 내 고향 룡정에 있기때문이다. 지금의 룡정 실험소학교자리에 위치했던 서전서숙은 중국조선족 근대교육의 서장을 연 중요한 유적지이다.   다음 중국에서 발행한 김염에 대한 우표가 있다. 중국영화탄생 백주년을 맞으며 지난 2005년 발행된 우표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중국 유일의 “영화황제”로 평선되여 당년에 상해를 주름잡았던 김염은 중국 영화의 성장시대를 이끈 배우로서 아시아 영화계의 거장일뿐더러 우리 민족의 굴지의 자랑이다.     지난해 나의 장편소설 “상해 수은등”이 “중국소수민족작가 중점지지 작품”에 선정되였는데 그 추천작품이 바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는 작품이였다. 그 입선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우표책에서 김염 우표를 꺼내 감회를 머금고 들여다보았었다.   영화인으로는 또 연변 명동학교출신의 한국영화계의 거장 라운규에 관한 우표도 있다. 한국우정사업본부가 “한국의 영화 시리즈” 첫번째 묶음으로 2007년에 발행한 우표 4종 가운데의 하나로 라운규의 대표작 “아리랑”을 비롯해 “사랑을 찾아서”, “임자없는 나루배”, “춘향전” 등 초창기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소재로 한 우표 4종을 각 56만 장씩 발행했다.      이 가운데 “’아리랑’은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표현하며 초창기 한국영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춘사 라운규를 당대의 스타로 만드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던 작품”이라고 한국우정사업본부는 설명했다.     역시 명동출신으로 윤동주의 절친 문익환목사에 대한 우표도 발행되였다. 윤동주와 일년을 사이두고 태여나 숭실학교에도 함께 진학했던 문익환, 그후 “남북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문익환에 대한 우표는 2000년 조선에서 발행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윤극영의 동요 “반달” 우표도 1986년도에 언녕 나왔다. 한국 체신부에서는 민족 음악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우리 생활속에 즐겨 불리우는 민요,동요 및 가곡을 모아 그 노래에 담긴 내용을 소재로 디자인 하고 악보를 삽입한 우표를 수년간 발행하고있는데 그 일환의 하나로 “반달”이 발행되였다.        윤극영 작사. 작곡으로1924년에 만들어진 “반달”은 단순한 동요곡이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력사적 시련기였던 일제시대에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던 겨레의 노래라 할수 있는 작품이다. 어린이부터 로인에, 지역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는 “고향의 봄”과 더불어 한민족의 얼이 깊이 새겨져 있는 명동요로 꼽힌다. 그 작사, 작곡가 윤극영이 오래동안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 활동해 온 력사에 대해서는 그 당시 력사에 대해 천척하고 있는 이들이 착잡하게 반추해보고있는 후일담이다.   중국 군가의 작곡자 정률성에 대한 우편엽서도 제1회광주정률성국제음악출제를 맞으며 출시되였다. 한국 광주 출신으로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상해 등지를 전전했고1937년 연안의 로신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연안송” 등을 작곡, 그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군가”로 선정되였다.       중국인 80% 이상이 그의 곡을 노래할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바로 우리민족의 출신임은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일이다. 조선인으로서 13억 대륙을 흔든 세계적인 음악가 정률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중국에서 성세하게 기념하는 시점에서 그 우편엽서의 의미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3 4월9일,  한국 서울지방우정청이 연변 명동출신의 민족시인 윤동주에 관한 우표를 발행했다. “영원우표” 추억의 인물 시리즈 두번째 묶음으로 발행된 우표에는 민족시인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를 액면에 담았다.     우표에는 액면가격 대신 “영원우표 국내규격 25g”이라는 문구가 표기돼 있다. 여기서 “영원우표”라 함은 우편료금이 인상되더라도 사용일 당시의 국내 기본 통상우편요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계속 사용이 가능한 우표를 말한다. 무려 130여만장을 발행한 우표는 시를 통해 민족의 한을 달래주었던 민족시인 3인의 모습과 그들을 대표하는 시 구절을 담았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등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시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도 윤동주의 연희전문시절의 모습을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 “서시” 전문을 배경으로 담은 우표를 발행한적 있다. 우표에 오른 윤동주를 지켜보노라니 그의 동시 “편지”가 떠오른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부치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우표는 서로의 통신수단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데 보조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다. 우표는 가히 “력사 교과서”라고 할수 있다. 세계각지에서 발행되는 기념우표를 보면 알수 있듯이 우표는 당시의 력사적 사건, 문화등을 면밀하게 담고 있다. 방촌(方寸)의 작은 우표딱지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생활상 및 시대적 상황에 대해 배울수 있는것이다. 그만큼 우표는 문화이고 력사적 산물이며 지금도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쪽거울이다.   서신교환을 위한 제도적인 인프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던 우표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이메일의 보급으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있어 우취인으로서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우표라는 프리즘으로 우리의 민족의 력사나 그 풍운인물에 대해서도 읽을수 있으니 이러한 감흥은 단 우취인만을 떠난 모든 이들의 아취(雅趣)적이면서도 중후한 흔상의 시선이기도 할것이다.   2014년 4월 10일 “청우재/听雨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5    17억의 노예 댓글:  조회:1826  추천:16  2014-04-09
. 칼럼 .   17억의 노예   김혁       지난 3월에 열린 제86회 오스카 영화상 시상식에서 미국 력사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고 인간에게 인권과 자유란 무엇인지 화두를 던진 영화 “노예 12년”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영화 "노예12년"의 포스터   1981년 미국 뉴욕에서 랍치돼 12년을 노예로 산 흑인 음악가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오스카상 최초 흑인 감독 작품의 최우수 작품상 수상이라는 력사를 만들어낸 “노예 12년”은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를 립증하며 흥행에 박차를 가하고있으며 일전 DVD로 출시되여 연길의 음향시장 매장에도 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속에서 실사(實寫)된 노예가 아니라 현대판 노예에 대해 이야기하고저 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상대방과 대화를 할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는 그야말로 몸에서 뗄수 없는 그 자체다. 게임과 채팅,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실시간 소통, 주식 투자 등 온갖 일이 가능해지면서 요즘은 그야말로 스마트폰 세상이다. 뻐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음식점에서도, 병원대기실에서도 고개를 숙이고 저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스마트폰을 주무르고 있는 장면은 요즘들어 가장 흔히 볼수 있는 풍경,  매우 익숙한 세태가 되여버렸다. 다들 잠자는 시간을 빼고 깨여있는 시간이면 스마트폰을 끼고 산다. 젊은 세대는 밥 먹을 때와 걸을 때, 심지어 화장실 갈 때도 들고 다닌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지어 사업시간에도 회의, 회식과 데이트 중에도 각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일쑤다. 따라서 스마트폰 중독의 위험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대화가 줄고 기억력이 감퇴하는것은 물론 손에서 멀어지면 생기는 불안한 증상, 같은 자세로 장시간 사용함으로 인한 척추이상과 손목터널증후군, 안구건조증,  거북목 증후군, 일자목 증후군 등 여러 가지 질환이 급증하고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경우 스마트중독이 심각하다. 식탁에서조차 스마트폰을 놓지 않고 이불속에서도 스마트폰을 리용해 수다로 밤을 새운다. 이러니 시력과 집중력 저하, 수면 부족에 과도한 통신료금에 그로인한 부모와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노예제도”라는 비륜리적인 문화의 예속에 몸부림쳐 왔다. 고대 문명은 쇠사슬을 채운 인간의 근력에 의존해 이룩되여 왔다. 장구한 시간동안 인간사회에서 만연했던 야만적인 제도가 페지된지도 이제 겨우 100여년의 시간이다.    문명의 발단은 량날의 칼처럼 그 우렬을 간직하고있다. 각종 기술의 발달로 삶의 질이 윤택해졌지만 이런 기술이 모르는 사이에 폐헤가 되고 악용되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일으킨 전화가 그 생생한 일례이다. 이를 두고 “사람이 스마트폰을 리용하는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사람을 지배하는 노예로 돼버렸다”는 준절한 지적이 나온지 오래다. 올해까지 전세계 스마트폰 사용자가 17억명, 2017년에는 100명 중 88명이 스마트폰을 사용할 전망이라니 우리모두 그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것이다. 여기서 제도나 권유로만 될 일은 아니고 본인의 의지와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 절제의 미덕으로 스마트폰에 매인 손을 풀고 스스로에게 질곡을 부여하는 부여하는 그 쇠사슬을 끊어야 할것이다. 문명의 리기를 스스로 창조해 온 인간이 그 리기(利器)에 스스로 매인다는것은 우몽 (愚蒙) 그 자체이기때문이다. 2014년 4월 9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4    아픈 시간의 음반을 돌리다 댓글:  조회:1361  추천:9  2014-04-04
. 평론 .   아픈 시간의 음반을 돌리다 성가이 단편소설 “1937년의 축음기”   김 혁    저자 盛可以   소설 “1937년의 축음기”(북경문학 2013년 3월호)는 살육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갔던 1937년의 남경대학살을 배경으로한 단편소설이다. 1937년 남경이 일제의 마수에 함락되고 주인공은 며칠째 돌아오지않고있는 아버지를 찾아 길에 나섰다가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서 일본군에게 륜간당한다. 밤, 만신창이가 되여 길녘에 버려진 그녀를 젊은 일본군관이 구해준다. 일본군관은 그녀를 집에 까지 업어다주고 며칠간 짬을 내여 보살펴 준다. 그 와중에 두사람은 사랑과 같은 미묘한 기운을 감지한다. 두 사람은 혹독한 사랑과 증오의 갈등속에서 서로를 알아가고 용서하는 시간을 보낸다. 몇달후 일본군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그제야 돌아온 아버지는 집에서 뜻밖에 일본군을 발견하고 가차없이 그 일본군관을 사살해 버린다… 잔인한 전쟁, 민족의 애증, 인성의 발로가 이 간단한 이야기에서 그렇듯 생생하게 그렇듯 극명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인류의 반성이라는 깊은 주제를 이끌어 낸다. 소설은 남경대학살이라는 그 시간대, 력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배역의 육체와 령혼의 세례로부터 진실하게 피빛력사의 진실을 복원하고 있다. 한편 그 력사의 틈새에 찡긴 사람들의 인성과 선악을 적절하게 보여주고있다. 여기서 제목으로 달고 이야기 전반을 끌고나가는 축음기는 그 참안에서 생존해 남은 사람들의 진술을 상징한다. 소설속의 몇몇 안되는 인물들인 피해자 나와 일본군관 그리고 아버지가 그 “축음기”라는 전달구도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와 정감을 표출한다.   저자 성가이(盛可以)는 1973년 호남성 익양에서 태여나 심수, 심양, 광주, 북경등지에서 기자, 편집자, 증권회사 직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중국작가협회 1급 작가로 광동성 문학원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1994년에 최초의 산문을 발표했고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수유(水乳)”가 독자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2003년 “제1회 중화문학 미디어 대상 “을 수상했다. 그후 제14회 광동성 신인작가상과 제8회 광동성 로신문학상”, “중국녀성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했다. “도덕송”, “불타는 집”, “북매(北妹)”등 6부의 장편소설과 소설집 “가이(可以)”, "당신의 방 (留一个房间给你用)”등 중단편집을 펴냈다. 그중 적지않은 작품은 영어, 독일어, 일본어, 한국어 등으로 번역, 소개되였다. 중국문단에서는 “미래의 문학대가”로 미국, 영국에서는 “떠오르는 별”, “용감과 재능을 겸비한 녀작가”라 격찬을 받고 있는 그의 작품은 언어풍격이 강렬하고 문체의 실험성을 보이고 있으며 민감한 관찰력과 차거운 격조로 사회 여러 령역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아우르고 있다. 성가이의 소설들에는 그만의 독특한 리해와 그만이 구사하는 기법이 있다. 그의 필의 성향은 날이 선 칼마냥 날카롭게 생활의 면면을 해부하는데 그 문체가 섬뜩할 정도이다. “1937의 축음기” 역시 그러하다. 소설에서는 시작부터 잔인한 륜간장면이 나오고 그 결말도 아주 충격적이다. 하지만 책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 보면 잘 만들어진 소설의 스토리가 주는 충격보다 시대적 비극에 대한 충격이 더욱 끔찍하게 다가온다. 사실 소설에 담긴 내용은 실제로 일어난 참극보다 아주 낮은 수위로 표현되여 있지만 그럼에도 읽기에 불편한 끔찍한 소재는 제국주의침략자들의 야욕과 잔학무도한 폭력성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있다. 이렇게 그녀의 작품들은 여타의 녀성작가들처럼 부드럽고 용이한 단어와 풍격에서의 화려하고 세밀함을 거부한채 정면으로 생활과 운명과 충돌한다. 때문에 평단은 그의 소설은 녀성작가의 필끝에서 나온것이라고는 믿기어렵게 “조폭”한 힘”을 갖고있다고 말한다. 그로서 미문과 환상을 버린채 혼란한 경험과 암흑한 령혼을 직면하고 포용한다. 랭정하고 예리한 필치로 도덕과 욕망이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복잡한 형국들을 그려내는것이다. 혹자는 이제는  남경대학살과 같은 소재가 낡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운것은 우리 작가들의 소재의 낡투나 중복성이 아니라 우리의 창작자들과 독자들이 안일하고 렵기적인 취미성 열독에 버릇된 독서의 미뢰(味뢰)에 버릇되여 어제의 력사와 그 진실을 잊는것이 아닐가. 거북하고 불편한 과거일지라도 일본의 군국주의가 망동이 더욱 우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있는 오늘이기에, 때문에 작가의 소명의식으로 인류력사상 전대미문의 참극이였던 남경대학살을 다시금 환기시킨 성가이의 이 소설이 더 값지게 읽혀지는게 아닌가 싶다. "도라지"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3    스크린속의 안중근 댓글:  조회:2258  추천:17  2014-04-04
. 칼럼 .   스크린 속의 안중근 김 혁 1 할빈역에서 민족침탈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를 응징한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난 1970년대말 조선영화를 통해서 비로서 접했다. 1979년에 나온 조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백인준이 씨나리오를 쓰고 인민배우 출신의 엄길선이 연출, 조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2부작 항일혁명예술영화이다.       영화는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하면서 한개인의 문제와 력사적 사건을 따로 떼여놓지 않고, 주인공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현실문제까지 련관지어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조선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배우가 총출연하고 막대한 제작비와 수천명의 조연배우들이 동원, 특히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력사의 현장인 중국 할빈에서 촬영해 사실성이 뛰여나는 등 조선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에서 근자에 내놓은 안중근 관련영화로는 “도마 안중근”이다. 안중근의 세례명 “도마”로 이름한 영화는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감옥에 수감된 뒤 수사과정에서 검찰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중근이 왼손 약지를 잘라 “단지동맹”을 뭇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과정을 년대순으로 보여주면서 의협심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안중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낸다. 한국 개그맨 출신 MC인 서세원이 씨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맡았고 유오성, 고두심등 유명배우들이 출연, 역시 중국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   민족독립운동의 화신격인 안중근의 력사적인 의거를 스크린에 올리는 작업은 그 오랜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찍 1928년에 벌써 안중근을 소재로 한 영화 “애국혼”이 제작되였다. “한국 항일영화의 효시”로 지칭되는 영화 “애국혼”은 한국 영화인들이 중국에서 제작, 상영했다. 당시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되자 정기탁등 한국의 영화인들이 중국의 상해로 이주해 영화운동을 전개했는데 “애국혼”이 그 작품 가운데의 하나다. 전창근이 각본을 쓰고 정기탁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안의사의 민족혼을 생생하게 묘사해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당시 중국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1946년 안중근의 일대기를 서술한 전기영화 “안중근 사기”가 상영되였다. 한국이 국권을 회복한 뒤 처음 선보인 영화는 애국지사 안중근의 의거를 소재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이 그의 독립정신을 회상하며 민족재건의 동력을 얻고자 했다. 그 뒤로도1959년에는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1972년에는 “의사 안중근” 을 제작, 대아의 삶을 살다 간 민족영웅의 일대기는 영화인들이 다투어 제작한 소재였다. 2 하지만 안중근 소재의 영화들은 그 애초의 훌륭한 시도에 반하여 관객들의 실망을 자아낸 경우가 많다. 조선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경우 영화의 진행은 설명이 많고 평면적이다. 중요한 대목에서 반드시 주인공의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과 선전의 효과를 강조하고 극대화하고있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몰입도를 방애한다.   조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우), 한국영화 "도마 안중근"(아래)의 안중근 의거장면   한국의 “도마 안중근”은 더구나 관객들로부터 물의를 빚었다. 영웅 안중근을 그려내려 했으나 안중근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풍모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인물의 신화화에만 골몰한다. 게다가 독립투사가 쌍권총을 쏘며 애써 쿨한 모습을 짓는 향항 갱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안중근을 인격적인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액션 영웅처럼 천박하게 부각한데서 실존 인물의 사실감과 영화의 격은 휘발되고 말았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민족이 애대하는 영웅을 소재로한 작품이라 그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라 할가? 상기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로서는 락공 (落空)의 실패작으로 보면서 커다란 유감을 토파하고 있다.   3 중국의 장예모 감독이 안중근 의사를 조명하는 한·중합작영화의 메가폰을 잡는다고한다. 한·중 친선협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장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될 영화의 대본은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단국대 석좌교수 김영호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쓰고 한·중 량국의 톱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합작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한다. 세계 무대에서 지명도가 높은 장감독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안중근 의사의 삶과 의거의 정당성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전망이라고 한국의 매체는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지난 1월 안의사의 의거 장소인 할빈역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대일 력사투쟁에 한국의 공조를 희망하는 중국이 재빨리 안중근 기념관 개관으로 화답한 시점에서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민족애와 동양평화 사상을 전해가며”, 영화를 통해 “한·중 우호 협력을 강화하하는데 한몫 할것이라”고 매체들은 분석하고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인 장예모는 소개가 필요없는 영화계의 거장이다.  장감독은 동방문화의 진수와 정서를 깨쳐 알고 자신의 모든 작품에 거쳐 늘 소재로 삼아왔다. 지난 1998년 중국 자금성에서 “서구문화가 낳은 무대예술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오페라“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려 그 특유의 감수성과 해석으로 격찬을 받았듯이 해외와 손잡은 풍부한 경험도 갖고있다. 만약 장예모가 메가폰을 잡는다면 거장의 손끝에서 한민족 영웅의 양상이 어떻게 부각될지 찬반의 론란가운데 관객들의 기대치는 증폭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의 역학관계에 안중근 의사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있는 시점에서 그를 소재로 중국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가 공감, 공조의 뉴대로 삼을수 있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바란다.     2014년 3월 30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2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어서 댓글:  조회:2478  추천:10  2014-03-31
소설가 김혁의 인물만필 시리즈 (1)   외발로 력사의 질곡을 넘어서   김학철   일전 “중국조선족 문단의 대부” 김학철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문학전기 “송엽장아래의 자국”을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중문으로 펴냈다. 모순문학상 입선후보작을 펴낸 실력있는 한족작가 우뢰에 의해 창작된 전기는 장장 70여만자의 호흡이 긴 편폭에 정의를 위해 무기와 펜을 고누잡고 일평생 싸워 온 김학철의 파란많은 자취를 추적해 냈다. 이는 처음 중문으로 창작된 김학철관련 인물전기로서 중국의 주류문단에 김학철이라는 한 조선족 작가를 다각적이면서도 립체적으로 알리는데 작지않은 역할을 놀것으로 사료된다. 책의 겉장은 중국소수민족문학관 관사 정원에 주조된 김학철의 동상으로 디자인했다. 량쪽 겨드랑이에 송엽장을 짚고 우람하게 뻗쳐 선 척각의 로인,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김학철옹의 그 강건한 모습이 다시한번 우리들의 면억(緬憶)을 불러 낸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다. 재학 시절 왜적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 거사와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온다.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반일지하테러활동에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호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들의 전형적인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탄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이때로부터 김학철이라는 가명을 사용, 반일활동을 위해 썼던 가명을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으로 썼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1937년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즉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교관이던 김두봉, 석정 등의 영향으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탈바꿈한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마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에 소속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합법화된 한국인 무장조직이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련합전선을 형성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고 후날 중국 팔로군에 편입됐다.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상을 보인다. 1939년부터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 그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0년 가을에는 팔로군에 참가하여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에서 있은 치렬한 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부상당한 몸으로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진다.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에 이송된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끼형무소에서 그 무시무시한 원폭피해흫 요행 면할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기에 총상을 입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다가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일본감옥에서 출옥한뒤의 김학철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된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부어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륙속 “담배국”, “균렬”,등 10여편을 여러 문학지에 발표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다가1947년 사회주의 리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조선으로 간다.  평양에서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다가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낸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단편집 “새집 드는 날”,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그는 극단적인 개인숭배로 치닫던 동란의 년대에 이의를 표하며 시류와 불화했다. 드문 반골기질에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는다.  10년 유기징역을 언도받고 산과 물에 둘린 추리구(秋梨沟)의 감옥에서 복역한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였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 1983년에야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리유에서였다. 1983년 국적문제를 해결보아 중국국적을 가졌으며1989년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여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였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창작에 일로매진한다. 김학철의 일부의 저서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이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6년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1987년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련이어 출간되였다. 이밖에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이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였다. 그동안 촌철살인의 수필과 잡문에 심취되여 수백편을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긋는다. 조선족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그의 작품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리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고 자호감을 머금었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랭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유명 평론가 김윤식은 “김학철은 그 자체가 력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 탐사의 한 리정표“라고 정평했다. 또 중국의 왕혜 청화대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력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수 있다”고 말한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보무당당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다.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중국소수민족문학관에 건립된 김학철 동상   반일투사이며 민족작가로서 그이는 일평생 곡절로 점철된 인생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어려서 민족독립의 청운을 안고 일제와 사투를 벌렸고 그 최전선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는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혀진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부상, 탄압, 망명, 옥살이 등 범인들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날까지 붓을 놓치않았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였다.  척각(隻脚)의 몸이지만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문단의 거봉으로 우뚝 선 김학철,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둔감해져 있는 물욕화에 절은 오늘날, 그이의 올곧고 강인한 작가정신과 실천적이고 치렬한 인고의 삶은 우리 문학에 미래지향적인 동력을 안겨주는 보귀한 재부로 간주되고있다.    “중국민족”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1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댓글:  조회:1728  추천:10  2014-03-30
[김혁 독서만필 5]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어느 중국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녀자가 열심히 읽고있는 책표지를 보고 남자친구가 비아냥거린다. 《아직도 무라카미냐? 이그 촌시러!》 일각에서는 하루키를 읽는것이 《수준이 낮다》거나 《하루키가 과대평가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는 하루키의 독창적인 어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하루키는 이제 낡투로 치부되며 고갈되여가는 작가가 아니다. 30년이 넘도록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있고 《하루키 현상》이라는 문화적인 신드롬이 확산되고있으며 하루키의 독자들이 나날이 늘어가고있다는 사실을 무시할수는 없다.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비롯해 거의 모든 문학상을 수상했고 근년에는 프란츠 카프카상, 예루살렘상, 카탈로니아 국제상 등 지구촌 굴지의 상을 휩쓸고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현시대를 살면서 문화적감각이 있다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대화가 안된다는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600만부 이상 팔릴 정도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행진을 하며 오래전부터 중국, 한국, 독일 그리고 북유럽에서 많은 애독자를 낳아왔다. 중국에서도 80년대 중기로부터 진행돼온 그의 베스트셀러 행진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다. 하루키의 작품을 적지 않게 읽었다.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댄스 댄스 댄스》, 《해변의 카프카》와 근작인 《1Q84》까지… 《1Q84》 를 금방 읽었는데 얼마전에는 신작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또 출시되였다.   하루키의 작품은 대표작으로 되는 《노르웨이의 숲》(후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개칭)을 중문판본으로 맨먼저 접했다가 후에 친지가 한국에서 부쳐온 삼진기획 88년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오래동안 《좌》의 철쇄에 매여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너무도 앞서간 그들의 성문화때문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었고 그래서 오히려 기어코 읽었었다. 당시 하루키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생각을 많이 할수 없었다. 솔직하고 감성적인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현실속에서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숨겨진 모습이 아닐가? 하는 상당히 혼란스런 느낌을 받아안았다. 그리고 나에게서 이 소설은 재미는 없었지만 길게 느껴지지 않은것은 정말 신기했다.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흥미를 갖게 되는 점은 어쩔수 없는 운명에 휩싸인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다. 책의 마지막장까지 덮고나면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듯한 느낌이다. 하루키의 작중인물들은 저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어쩔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에 당착한다. 자칫 그대로 좌초되여버릴것만 같지만 끝내는 고해의 수면밖으로 떠오르는데 성공한다. 그들에게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이 모든 일이 해결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중국식의 모식인 대단원(大團圓) 결말 같은걸 기대할수 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마지막장까지 호흡을 달구는 그 불투명함이 하루키식의 모식이라면 모식일것이다.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들은 거개가 재미있고 스릴있는 모험, 그리고 초현실적 인물이 가미되여 완성된 읽을거리가 풍성한 소설들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곳곳에 환상적인 부분을 설정함으로써 현실이 아닌 소설의 특성을 살려 다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요소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내가 늘 꿈꾸면서도 감히 행하지 못하는 꿈의 여유를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낀다. 그러나 책을 내려놓고보면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비현실적이지가 않다. 실재하기 어려운 모험적상황을 전제로 하고있지만 그렇게 설정된 상황은 또 현실주의를 뺨칠 정도로 리얼리티를 띠고있다. 현실과의 직접적회로를 갖고있는것이다. 사실은 내가 살고있는 세계도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여러가지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내가 모른채 살아가고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현실성을 가지고있다. 실제로 일본의 권위있는 문예비평가들 가운데는 하루키의 소설은 일본문학이라고 부를수 없다는 정도로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의 문체 그리고 미국문화에서나 볼수 있는, 서양문학의 영향이 마음에 안 든다는것이다. 《일본소설에는 모종의 전형적인 문체 같은것이 있는데 나는 그런것들과는 전혀 다른데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내 소설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루키의 답변이다. 그의 작품을 가리켜 《무국적성》이라든가 《가벼움의 미학》이라고도 얘기하지만 하루키문학의 외면적인 가벼움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존재의 무거움을 견뎌내려는 몸부림에 대한 표현이라 할수 있다. 또한 그 무국적성이나 가벼움때문에 변강의 오지인 이곳 사람들에게마저도 이렇게 친근하게 읽혀지고있는것이 아닐가? 어법과 소설방법론을 자신만의 독창적인것으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잘 소통하고있는 작가를 우리의 틀로 재단해보려는 시도는 어찌보면 우습광스러운 행태일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순 문학을 한답시는 개인적으로는 거개가 대중적이면서도 튀는 소설을 쓰는 하루키가 특별히 좋은 글을 쓴다고 생각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하루키의 장점이라면 그의 글을 읽으면 위로받는 느낌을 받곤 하는것이다. 그런 그가 좋아서 그의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무라카미의 소설은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데가 있다. 이는 다른 외국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다른 느낌이다. 인물의 내면들이 놀랍도록 나와 비슷하잖은가.외국사람이 쓴것인데도 하루키란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와 완전히 같은데가 있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그들의 고독감을 그려내는 우화적 에피소드들이 꼭 서로 닮아있는것이다.   우리의 작가들은 자기 격정과 독단을 제어하지 않거나 제어하지 못하고 살아가고있다. 대부분 자기가 말하는것을 전달하고 리해시키기 위하여 설명의 톤을 높인다. 그러나 하루키는 설명하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설명하는것보다 훨씬 더 소통이 잘되는 방법을 찾아낸다. 하루키는 독자들에게 주입하는 대신에 깊이 있게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린다. 최종적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리고 현란하게 기교를 부린 문장은 아예 때려치우고 캔맥주와 음악처럼 가벼운 어법을 사용한다. 작품내내 설명하지 않는 무진장한 유머와 단문으로 치달으며 일상어로 소박한 경이로움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루키가 지구촌 어디서든 독자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세월이 지날수록 독자층을 넓혀가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싶다.   "길림신문" 2014-03-29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100    짧은 글을 위한 긴 타령 댓글:  조회:2741  추천:11  2014-03-28
칼럼   짧은 글을 위한 긴 타령 - 창작후기를 대신하여   김 혁       1 지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카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가 빚은 이슈는 단편작가로는 첫 노벨상 수상이라는 기록이였다. 그로서 서점가들은 요즘 단편소설 읽기가 탄력을 얻고 있다고한다. 서점가와 인터넷을 보면 소설작품들이 그야말로 홍수를 이룬다. 장르나 작가들이 천문수자처럼 많고 그 수준여하가 천차만별이다. 그렇게 풍성한 책의 향연앞에서 어떻게 옥석을 가려 낼가? 독자로서는 혼란에 빠질때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접근은 어떨까? 아주 짧은 시간내에 볼수 있는 작품, 그로서 작품의 진미를 재빨리 맛볼수 있는 작품, 그렇다면 짧은 소설이 그 적격이라고 본다. 단편이냐, 장편이냐 아니면 중편이냐하는 쟝르의 분량을 두고 창작의 우렬을 편가름하는것은 어리석은 짓거리일터지만 오래동안 창작실천을 해오면서 짧은 소설에 대한 매력을 때때로 느끼게 된다. 짧은 소설 쟝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부름말이 있다. 초단편소설, 미니소설, 미형소설, 콩트(conte), 혹은 장편소설(掌篇小說), 엽편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장편소설(掌篇小說)은 길다는 장(长)자가 아니라 손바닥 장(掌)으로서 손바닥 같은 정도의 량을 말하며, “엽편소설(叶篇小說)'이란 나무잎만한 크기라는 뜻, 개념도 장편(掌篇)소설과 동일한것으로 볼수 있다. 요사이 중국문단에서는 또 “미(微)소설”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냈다. 위챗(핸드폰등 정보통신의 메신저)으로 볼수 있는 몇백자 소설로서 위챗(微信)을 말하는 중국어의 첫 단어를 따서 만든 용어이다. 쉽게 핸드폰 소설이라 리해해 두면 된다. 하지만 핸드폰 소설이라 해서 작난에 그치는 글장난이 아니다. 모든 군더더기를 뺀 짤막한 이야기들이라 부담 없이 읽기에 좋고 그 속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미소설”의 가장 현요한 특징은 현실에 접근하고 사회현실을 반영하며 시대풍모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중국의 위챗 가입자가 3억이라니 보수적으로 집계해봐도 그 독자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자이다. 이렇게 부름법들이 다양하지만 한마디로 촌극(寸剧) 즉 지극히 짧은 소설을 가리킨다. 흔히 2천~3천자 좌우로 유머, 풍자, 기지가 넘치는 문체로 인생의 한 단면을 짧고 재치 있게 표현하면서 소설의 묘미를 나타내는 쟝르라 하겠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짧은 글 짓기에서 빼여난 기량을 보인 세계적인 작가들로는 모파상, 체호브, 오헨리 등이 있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매치의 선물”의 오 헨리는 오로지 짧은 소설을 닉애(溺愛)하여 “마지막 잎새”, “경찰관과 찬송가”등 300편에 가까운 잛은 소설을 남겼다. 하여 모파상, 체호브, 오 헨리는 세계 3대 단편소설 작가로 꼽힌다. 그외에도 도데, 뚜르게네브 그리고 헤밍웨이등의 작가들도 모두 짧은 소설에 심취하여 기꺼이 필봉을 바쳤다. “로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헤밍웨이, 글을 집필할때면 한쪽 발을 들고 쓰면서 자신을 강압하여 간결한 문장을 지어 낸다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써냈다. 그의 번쩍이는 천재성을 보여준 그 일화를 보면, 어느 한 글쟁이가 헤밍웨이에게 내기를 요청했다. "단 10개의 단어로 사람을 울리는 짧은 소설을 써내면 당신이 이기는겁니다." 이 얼토당토한 내기를 헤밍웨이는 단 6개의 단어로 이겨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그 소설은- 팝니다, 아기 신발, 한번도 신어보지 못한… 어쩌구려 어린 자식을 잃고 그 유품을 팔아야하는 신산한 부모의 처경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짧디 짧은 소설이였다. 여기서 유명 초단편소설 몇편으로 감흥으로 더 읽어 본다.   미국의 과학환상소설작가 프레드릭 브라운이 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과학환상소설- 지구의 마지막 사람이 앉아 있는데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미국 “시대주간”에서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그물 (网)   세상에서 가장 짧은 현념(悬疑)소설- 남편이 아프리카로 사냥려행을 갔는데 안해에게로 전보가 왔다. “남편이 사자에 물려 죽었음” “시신을 보내시오” 하지만 도착한것은 사자의 시체였다. “사자가 아니라 남편의 시신을 보내시오.” “시신은 사자의 배속에 있음”…   세상에서 가장 짧은 황당소설- 길을 가던 빵은 지치고 배가 고팠다. 빵은 자신을 먹어 치웠다.   그야말로 기지와 위트가 번뜩이는 작품들이다. 단순하게 량의 다과(多寡)로만 장편과 단편이 구분되는것은 아니고 쟝르들이 어느것이 우위고 어느것이 하위인 우월의 관계가 있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장대한 스케일과 복잡, 미묘한 사건의 전개로 오랜 시간 읽어야 하는 장편소설보다 단일한 사건전개와 결말의 반전, 단일한 주제가 주는 짜릿한 독서 쾌감은 짧은 소설만이 주는 독특한 맛이다.       2 근년래 중국문단에서 짧은 소설은 거족의 발전을 해왔다. 중국에서 소설은 고대신화, 진나라이전의 우화(寓言),륙조지괴(六朝志怪), 당대전기(唐代传奇)、송원화본(宋元话本), 명나라 청나라의 장회(章回)체등으로 각 력사시기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해 왔고 그 단편가작들은 모래알처럼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사학가와 문학평론가들은 사실 포송령의 “료재지이(聊斋志异)”가 바로 짧은 소설의 전범이라 평하고 있다. 근년들어서도 이를 소소설(小小說)이라 지칭하면서 이에 투신하는 중국작가가 수천 수만명을 넘기고 그 전문간행물도 수백종을 넘긴다. 평론가들은 “이 20여년래 중국의 소소설 문학의 발전이 보여준 대중문화적 의의는 소소설로 하여금 현,당대문학사상 백화문이 나온 이래의 중요한 문학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높이 정평한다. 그에 편승하여 연변에서 꾸리던 중문판 “천지”도 일찍 재빨리 소소설 전문지로 탈바꿈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고있는줄로 안다. 하지만 타지역의 방흥미애(方兴未艾)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의 초단편소설창작은 내내 미온(微温적이다. 이 우수한 쟝르에 대해 망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조선족문단은 초단편소설에 대해 일찍 접해 왔었다. 80년대 조선족 간행물들에 호시 신이치라는 작가의 작품들이 적지않게 소개된적 있다. 일본추리소설붐이 일면서 모리무라 세이이치, 등 작가들에 곁들어 소개된 작가이다. 하지만 그 작가가 초단편의 대가인줄을 우리는 미처 다 알지못했다. 신이치는 현대 일본 대중문학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이름이다. 그를 일본문단은 “쇼트-쇼트”의 대가”라 부른다. 쇼트-쇼트(short-short)란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일컫는 말이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아주 작은것 또는 미세한것을 이르는 말) 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호시 신이치는 1997년에 작고할 때까지 그런 쇼트-쇼트를 1000편 이상 발표했다. 일본에선 전집이 출간되고 작품들이 교과서에까지 실렸으며 그의 작품들은 세계 3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여 3000만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작가들 하면 추리소설가들만 협애하게 기억하던 시기, 우리는 촌철살인(寸铁杀人)의 짧은 소설의 대가의 면모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도깨비 축문 읽듯” 읽어 왔던것이다. 지금 우리 작가들중에 전문 짧은 소설 창작에 주력하는 작가는 전무하다싶이 돼버렸다. 한때 훈춘의 조은철, 료녕의 김군등이 초단편에 열성을 보여 수상도 하고 창작집도 냈었다. 하지만 두분 다 애닯게 일찍이도 타계하면서 초단편 전문작가가 아주 단절되여 버렸다.    3 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치여 매일매일을 분망히 뛰는 현대인들에게 긴 시간과 끈기를 요구하는 장편 읽기보다는 단숨에 읽어 인생의 지혜를 얻고 지적 쾌락을 맛보는 단편 읽기가 더 우선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문학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아직도 세부 단위와 낮은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문학뿐아니라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온통 큰것만을 지향하는 일색이다. 큰것 위주로 굴러가는 이런 사회는 작은 단위에 의해서만이 진정 큰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는것을 모른다. 초단편소설에는 순발력과 재치가 있으며 정보를 얻기에 앞서 읽는 즐거움과 평안함이 있다. 길기만 한 무색무취의 글에 비해 간결속에 숨은 좋은 소재, 엄밀한 결구, 풍부한 함의 그리고 의외의 결말로 독자의 의표를 찌른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초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요즘의 작가들을 보면 “대망(大望)”에 빠져 장편에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다음에는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홀시하는 경향이 보이며 때문에 급박한 그런 욕망으로 짜임이나 무게감이 미달인 장황설의 작품을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진들보다는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작가들이 수두룩한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평론가들은 “장편을 발전시킬 필요는 있지만 먼저 단편으로 탄탄한 내공을 갖춘 뒤 장편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단편의 재발견은 의미가 있다”고 모를 박는다. 이처럼 문학도들 그리고 작가들은 문학적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단편의 미학부터 닦아야 한다. 정작 나자신을 보면 여태 펴낸 소설작품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스스로 놀란적이 있다. 100편에 가까운 다량의 소설작품중에서 중편소설이 단편보다 많았던것,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도 두, 세편을 제외한 외 거의 전부다가 중편이였던것이다. 짧은 글에 취약한것 같고 무얼 정리하려고 들면 한없이 길게 늘어진다. 잘 버리고 잘 비워야 청안한 법인데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은지 질질 끌고 꾸역꾸역 늘여놓기 바쁘다. 문학도의 초심으로 돌아가 초단편 습작으로부터 거듭나려 한다. 아 똘스또이의 “단편은 작가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학교”라는 금언을 명기하면서… 짧은 글에 대한 지론을 펼치다 또 긴 글이 되여 버렸다. 이만 차설(且說)하고 초단편 소설들을 련이어 선보인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9    피빛 령혼의 만가 댓글:  조회:2037  추천:15  2014-03-20
  【김혁 독서칼럼 4】   피빛 령혼의 만가 - 장편소설 “금릉 13채”     요즘 들어 남경대학살, 그 끔찍했던 기억이 자주 회자(膾炙) 되고 있다. 일부 몰지각한 섬나라의 우익분자들이 공공연히 남경대학살과 그 침략력사에 대해 부정하면서이다. 따라서 남경대학살 소재의 픽션작품들이 다시 서점가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한다. 남경대학살 소재의 소설작품들중에서 압권을 꼽으라면 바로 “금릉 13채 (金陵十三钗)”이다. 장예모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금릉 13채”가 흥행가도를 달리기 이전에 나는 이미 그 원작소설의 작가 엄가령에게 빠져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창작하면서 문혁관련 장편들을 닥치는대로 읽던차 역시 문혁소재를 다룬 엄가령의 작품 “천욕(天浴)”을 읽으면서 그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한것이다. 조선족 독자들에게는 그의 중편 “녀자의 목초지 (雌性的草地)”가 “연변문학”지에 의해 번역, 소개된적 있다. 상해의 문인가정에서 태여난 엄가령은 20대 초반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서른살 무렵에는 미국으로 류학, 시카고콜롬비아 예술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저력있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대부분 탄탄한 스토리 전개와 리얼리티, 섬세하고 절제된 묘사, 휴머니즘의 깊이, 력사적 시각 그리고 예술적 력량까지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천욕”, “한 녀인의 서사시” 등이 있다. 그중 “둬허 이모(小姨多鶴)”는 2009년 중국소설학회가 뽑은 “올해의 가장 좋은 장편소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묵직한 소재와 빛나는 문체로 사랑받는 녀류작가 엄가령   “금릉 13채”는 일제에 의해 자행된 남경대학살이라는 거대한 주제와 중국영화계의 거장 장예모감독이 대작영화로 제작했다는 두가지 이슈를 낳은 작품으로 엄가령의 작품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은 2005년 경 중편소설로 먼저 발표되였다가 그후 엄가령이 새롭게 확보한 자료와 사실적 고증에 근거해 보다 호흡이 길고 내용이 풍부한 장편소설로 재창조되였다.    소설은 남경대학살 당시 13살의 소녀였던 맹서견(孟书娟)이 조각난 력사의 증언을 찾아나서며 회고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눈길에 좇아 피빛으로 물들었던 끔찍한 과거, 결코 되풀이되여서는 안될 전쟁의 참상이 적라라하게 펼쳐진다. 1937년의 추운 겨울, 일장기를 단 일제의 땅크가 남경성에 진입하고 광분하는  일제의 총칼아래 아름다운 남경은 삽시에 피범벅이 된 몸뚱들이 네거리에 뒹굴고 길녘 배수구로는 피물이 벌창해 흐르는 지옥의 나락으로 변한다. 잉글먼 신부는 미처 남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윌슨교회당에서 맹서견을 비롯한 13명 성가대의 어린 녀학생들과 함께 몸을 숨기고있다. 어느 날, 차림새가 요염하기 짝이 없는 녀인들이 교회당에 나타난다. 옥묵(玉墨)이라는 녀자를 선두로 한 이들은 청루의 창녀들이였다. 이어 세명의 중국 군인까지 혈전에서 살아남아 교회당에 찾아 든다.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을것 같았던 순수한 녀학생과 천대받던 창녀들, 외국의 신부와 중국 군인들이 교회당에서 함께 어우러지게 된다. 본의아니게 창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맹서견은 입으로 끊임없이 육두문자를 내뱉는 방종한 모습의 그녀들을 몹시 혐오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차 안전할것만 같았던 교회당에도 일본군의 마수가 뻗친다. 일본군관은 교회당에 숨어있는 13명의 소녀들을 발견하고 며칠후의 성탄절날 소녀들이 군영으로 가서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달라고 강요한다. 이미 한명의 창녀와 소녀가 그들의 유린에 의해 처참히 목숨을 잃는다. 이제 일본군들이 득실거리는 군영으로 간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지 뻔한 일이였다. 어린 소녀들이 일제의 유린을 모면치못할 관두에 소녀들을 대신해 열세명의 창녀들이 나선다… 세월이 흘러 일제전쟁범들을 재판하는 국제법정에서 맹서견은 일제의 죄행을 증언하는 한 녀자의 목소리가 당년의 옥묵과도 꼭 닮았음을 느낀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그녀가 아니다. 원체 옥묵은 그날 일본군관에 의해 얼굴에 상처를 입고 그후 돌팔이 의사에 의해 치료를 받지만 얼굴모습이 완전히 변했던것이였다. 오래동안의 수소문을 거쳐 맹서견은 자신들을 위해 나섰던 열세명 창녀들의 최후를 알게 된다. 그들중 일부는 반항하다가 당장에서 살해당하고,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죽고, 일부는 자결하고 겨우 옥묵 한 사람만이 4년간이나 일제의 고위관원에 시달리다 도망쳐 나온것이였다. 청루에 더럽힌 몸을 가진 창녀들이지만 선과 악의 충돌, 악몽같은 전쟁의 고난중에서 그녀들은 남다른 온정을 보여준다. 전쟁의 잔혹한 선택앞에서 창녀들은 생명의 세례를 바탕으로 신분에 대한 자각과 인격의 승화를 가져온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인성의 아름다움과 빛을 발한한것이다. 재난은 인성에 대한 가장 큰 고험이다.미천한 존재로 조소했던 창녀들의 의연하면서도 아픈 선택은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하며 잔혹한 전쟁에서의 그녀들의 선량한 인성의 거듭나기는 처량한 비장미마저 느끼게 한다.  소설은 정면으로 남경대학살의 장면들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자그마한 교회당은 전반 남경의 축도와도 같다. 이 작은 곳에서 남경성에서 자행된 일제의 온갖 만행들이 프리즘으로 재현된다. 절제된 묘사이지만 작가는 광기로 물든 전쟁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내고 어떻게 인간을 유린해가는지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소설은 비천과 고귀함, 더러움과 순결함을 저울에 달아 독자들로 하여금 그 무게와 전률을 느끼게 한다. 제목에 나오는 “금릉”은 남경의 별칭이다. 지금의 남경의 종산을 춘추시기부터 금릉산이라부르면서 생겨난 명칭, 예로부터 불려진 남경의 아치하면서도  또 다른 명칭이다. 그리고 “13”이라는 수자도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흔히 “13”은 서방에서는 불길함을 내포한 상징적인 수자이다. 여기서 이 수자는 마지막까지 교회당에 남겨진 창녀들과 소녀들의 공통된 수자일 뿐만 아니라 소설속 화자인 맹서견의 나이이기도 하다. 또한 남경이 함락 된 력사적 비극의 그날이 겪는 아픔과 고통에 대한 암시이다. “13”이라는 수자는 소설속 인물들의 개인적 아픔이자 전체 남경의 비극을 상징한다. 이처럼 작가 엄가령은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플롯의 줄기에 “13”이라는 수자를 적절하게 장치해두었다.       동명영화 "금릉 13채"의 포스터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모파쌍의 명단편 “비게 덩어리”가 생각났다. 전란속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동행자들을 보호해 내지만 나중에는 그들의 버림을 받는 한 창녀의 이야기를 다룬 “비게 덩어리”와 “금릉 13채”는 어딘가 닮은데가 있다. “비게 덩어리”가 한 창녀의 희생으로부터 인간의 탐욕과 위선을 차가운 시선으로 묘사해 냈다면 “금릉 13채”는 더 장대한 스케일로 남경대학살이라는 세상의 시선이 집중된 대무대에 처한 여러 명 창녀의 희생으로부터 그 전대미문의 인류력사의 참극과 그 속에서 보여준 인간들의 인성의 빛갈을 현란하게 보여 주었다. 리기주의가 가치체계의 구성원리로만 기능하고 타인의 희생만을 요구하고있는 오늘의 사회상에서 소설은 그로서 또 다른 열독가치가 있다고 본다.   일전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는 해마다 12월13일을 남경대학살조난자 국가 추모일로 지정했다. 그 소식을 접하고 서가에서 다시 꺼내 본, 력사적 시각으로 인류의 아픈 력사를 적절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을 읽으면서 그 어제를 반추해 본다.  [ 길림신문 ]  2014-03-15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8    원숭이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댓글:  조회:2133  추천:12  2014-03-20
  김혁 독서칼럼 3   원숭이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영원한 고전 “서유기”  흑룡강민족춢판사에서 출간한 "서유기"     동년시절 아버지가 신발장을 고쳐 만들어주었던 내 서가에 꽂혀있는 책등중에서“보물 1호”는 단연 “손오공이 백골정을 세번 치다”라는 련환화였다. 동네애들이 감질내며 보여 달라 지청구를 들이대도 다른 그림책에 비해 절대로 빌려 안주던 책, 요즘처럼 아동을 상대로 한 읽을거리가 풍성하지 못해 어른들의 책을 빌어 독서욕구를 간신히 말리던 그 시절, 그야말로 독실한 신자가 경서를 어루만지듯  그 그림책을 보풀이 일도록 보고 또 보았었다.  그러다 완정하게 제대로 읽은건 1983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3권본 “서유기”를 읽고서였다.       어린시절 그림책으로 맨 처음 접했던 "서유기"     그동안 “서유기”를 그저 당승과 그의 세 제자들이 서역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는 모험담으로만 읽어왔었다. 하지만 단순히 현란한 환상으로 이어지는 려행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자기 극복과 구도의 과정으로 다시 읽은것은 근자의 일이다. 오승은의 천재적인 필끝에 의해 “서유기”에는 정말로 정채로운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의 성격 또한 판이한데 오공은 용맹하지만 외골수이고 저팔계는 탐욕스러우면서도 간계한 일면이 있고 사승은 충직하지만 약간 미련한 구석이 보이고 당승은 독실하고 진지하지만 무능력자로 그려진다. 여기서 자연히 주인공인 손오공이라는 원숭이를 다시금 괄목(刮目)하게 되였다. 생명을 점지해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돌에서 태여난 원숭이, 치기가 넘쳐 흘렀던 시절 미후왕(美猴王)이라는 용모보다는 우미한 이름을 스스로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는 아름찬 작위를 스스로 내려 자신의 위력을 뽐내기도 한다. 근면이 결여 한지라 수보리조사의 문하에서 쫓겨난 뒤에도 약간의 재주와 도술(道術)을 믿고 룡궁의 보배 여의봉을 빼앗는가하면 하늘의 천도복숭아와 미주, 금단을 훔쳐 먹는등 온갖 난장판을 벌린다. 천지높은줄을 모르고 석가여래와 맞장뜨다가 “부처님 손바닥우의 손오공”이라는 천고의 속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은 바위속에 갇혀버리는 형벌을 받게 되고 만다. 치기와 속안으로 우쭐대다가 꼼짝 못하고 다시 본래 태여났던 대로 돌이 되는 운명에 처하는것이다. 바위틈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500년이라는 몇겁의 시간을 지내다 드디여 당승을 만난다.  이로서 손오공은 그 운명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손오공은 부처의 손바닥에서 들까부는 잔나비에 불과했다. 그러다 언제 끝날지 모를 징벌을 온몸으로 겪고 서역으로 가는 길에서 구구 팔십일 의 난(難)을 거치고 갖가지 요괴를 퇴치하면서 결국 득도(得道)를 하게 된다. 이로서 “서유기”는 한 원숭이의 성장사(成長史)라는 보편적인 의미와 가치를 갖고있는 명작이기도 하다.     “서유기”는 남녀로소가 모두 좋아하는 뛰여난 고전이다. 요즘 판타지물의 흥행으로 “반지제왕”과 “해리포트”등 해외의 판타지물을 읽는 열조가 일고 있지만 이들은 그 수천년전에 나온 동양 최고의 판타지 “서유기”에 대해서 그처럼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서유기”를 단순한 랑만주의 색채로 충만한 신화소설로 여기며 단지 온갖 기괴한 요괴와 마귀들이 기묘하게 변신하는 렵기적인 이야기로만 감상하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손오공이라는 이 립체적인 인물에 대해 다 아지 못했다. 당승은 자기 일생을 걸고 서역으로 가서 불경을 갖고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났고 그 와중에 시종 선두에서  그의 안위를 보필한 이는 손오공이다. 읽는 이들은 재미있어도 오공에게는 무지하게 어려운 고행의 나날들임에 틀림없다. 살이 타들어 가는 열기를 내뿜는 사막, 깊이를 알수 없는 누른 강에는 어김없이 푸른 털 요괴, 꼬리 아홉 개 달린 요괴,들이 칩복해 있으면서 손오공을 기다렸다. 당승 일행의 후견인격인 관음보살과 석가여래는 때때로 의도적으로 요괴들을 사주하여 일행의 길목을 지키게 만든다. 불법을 향해 떠나는 당승 일행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 요괴들은 서천으로 구법의 길에 오른 이들의 허점만을 노려 파고 든다. 당승의 자비심, 저팔계의 탐욕, 사승의 어리석음등 허점들을 온갖 수단으로 파고든다. 공공연한 랍치와 협박, 부귀영화를 눈앞에서 흔들어대는 유혹, 살 떨리는 미인계 등등… 이러한 무차별 공격에 선두에서 대응한 이가 바로 손오공이다. 81난의 어려움에 당착한 오공, 하지만 손오공은 힘껏 변신술을 부리고 여의봉을 사납게 휘두르면서 악착빼기 요괴들을 하나 둘 섬멸해 간다. 손오공이 요괴를 물리치는 장면은 사실 구도자를 시험하는 심마(心魔)를 물리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때로는 저돌적으로 보이는 오공이지만 취경의 의지와 우직함은 변함이 없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원숭이의 속태를 벗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두려움과 고통과 힘듦을 직시하면서 말이다. 그는 스승과 팔계, 사승의 무정함과 몰리해에도 도망가지 않고 자기를 시험하는 81난을 스스로 한몸으로 받아가며 깨달음의 계기로 삼았다.  하기에 다시 읽어보면 “서유기”는 한 원숭이의 성장기요, 깨달음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구법기(求法記)로 읽을수도 있다.       갑오년 음력설을 맞아 새로 개봉된 "서유기"소재의 영화 "대뇨천궁"의 포스터     요즘 들어서도 “서유기”에 대한 독자들의 애대는 변함없다. 갑오년을 맞아 설기간에 개봉된 영화 "서유기- 대뇨천궁(大闹天宫)"이 흥행 수입 10억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중국영화의 신화를 다시 쓰고 있다.  독자들의 “서유기”에 대한 세기를 넘는 지속적인 애대를 보여준다. 그동안 오승은의 이 경전은 손오공의 72가지 술법의 그 유명한 분신처럼 하나의 손오공 이야기가 끝나기도전에 또다른 손오공을 볼수있을 만치 끊임없이 반복되며 모든 세대를 거쳐 사랑받아왔고 수없이 번안되고, 리메이크 되여 왔다. 홀리우드의 영화 “아바타”를 보았지만 돈을 퍼부어 만든 그들의 상상력도 “서유기”에 비하면 부분에 불과하다. 이번에 리메이크 된 영화의 주목할점은 액션 스타 견자단을 비롯해 우리가 익숙한 주윤발, 곽부성등 톱스타가 대거 출연하는 막강 라인에도 있지만 바로 처음으로 되는 “서유기” 3D 영화 라는것이다. 3D물, 거리지각의 착시를 강화시킨 3차원영화 즉 립체영화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개발과 고선명 비디오 표준의 등장과 맞물려 요즘 크게 류행하고 있다. 3D물을 관람하듯이 여러 각도로 들여다보니 “서유기” 그리고 그 당당한 주인공 손오공이 다시 보인다. 누리꾼들은 재미삼아 오공에게 현대식 상장을 발급했다. 그 헌사를 불후의 고전속 주인공으로 인기가 변함없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에게 바친다. “손오공 동지는 불경을 구하는 신성한 사명을 위하여 백절불굴의 의지와 완강한 의력,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으로 하루와 같이 신근한 로동으로 수많은 요괴들을 물리쳤고 당승등 령도를 종경하고 저팔계등 동지들과 우의를 화목하게 하면서 서천으로 가서 불경을 구해 왔는바 그 성적이 돌출하여 이 상장을 발급함”     “길림신문”2014년 3월 9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7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댓글:  조회:1956  추천:12  2014-03-20
[김혁 독서칼럼 2]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한 책자는 많이 나왔고 나의 서가에도 적지않게 꽂혀 있다. 지난 1980년대 장춘의 송정환 선생이 집필한 인물전기 “안중근”, 조선족 시인 김파의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으로부터 한국의 유명작가 리문렬이 안중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장편소설 “불멸”에 이르기까지 안중근 관련전기물들을 픽션과 논픽션물로 여러권 소장하고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접하는 순간 제목부터 강렬하게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고 감질난 독서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책은 짧은 단편 력사소설로 포켓(袖珍)용으로 발간되였다. 몇해전 한국행차에서 이 책을 접했고 귀국하는 비행기내에서 단숨에 독파해버렸다. 몇십분내에 읽을수 있는 분량이였지만 읽고난뒤 그 느낌은 강렬했다. 책은 한국의 력사학자 리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와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의 후손인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 교수가 집필했다. 력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소설형식을 빌었다.   안중근     안중근의 할빈 거사 30년 후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둘째 아들 안준생은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남산 장충단에 지은 절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죄의 머리를 숙인다. 이튿날 일본과 한국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각 신문들은  톱소식으로 "안중근의 아들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라고 전했다. 안중근의 거사에 두손 번쩍 쳐들었던 전체 민족의 환성이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이였다. 안중근은 민족의 이름으로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죽었고 그로서 안중근은 나라 잃은 조국과 민족에 불세출의 영웅으로 남았고 력사에 큰 획을 그으며 잠들었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 최고의 영웅의 아들은 대체 왜 이런 력사를 거꾸로 뒤집는 선택, 터무니없는 행각을 벌렸을가?   안중근이 중국 려순의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뒤 일제치하에 남겨진 가족의 생은 분명 곤고했다. 큰 아들은 일곱살 어린 나이에 일제의 끄나불이 넘겨준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었고 안중근 일가족이 김구선생을 찾아 상해로 가지만 림시정부가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자 급히 철퇴하면서 안중근의 유가족을 챙기지 못해서 둘째아들 안준생은 타지에 버려졌다. 책은 바로 그 둘째 아들 준생의 힘겨운 성장과정을 극화시켜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 가족은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조국과 민족만 생각했던 아버지, 영웅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평화와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과 감시속에 촌보난행의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버지 안중근의 아들로 태여나 형은 피살당하고 일제의 방해와 횡포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근근득식하면서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간 그다. 그런 안준생을 향해 일제가 손을 내민다. 그 배후에는 력사를 기만하려는 일제의 야욕이 숨어있었다. 일제는 안준생이 다름 아닌 안중근의 아들이기에 “내선일체”에 리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 민족말살정책에 안준생을 끌어들이고자 악랄한 수법을 꾸몄던 것이다. 그만큼 안준생의 고뇌는 깊었다. 일제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그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누이까지 죽이겠다는 협박이 그의 잔등을 윽박질렀다. 무릎을 꿇으면 일시 안정된 삶이 주어질터지만 그때로부터 친일파, 변절자라는 오명이 따라 붙을것이였다. 그러다 모진 세월을 견디다 못해 그만 아버지가 단죄한 그 민족의 원쑤의 후예에게 사죄의 머리를 숙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과 우리 민족을 향해 복수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앞자리 맨 왼쪽 안준생, 오른 쪽이 이토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 같은 자식). 안준생에 쏟아진 가장 큰 비난이다. 영웅 안중근의 삶과 그 뒤에 가려져 고난의 삶을 살아야했던 영웅의 아들의 엇갈린 간극을 보여준 소설, 하지만 책은 그에 대해 단죄하고 묻어버리기 보다 그를 그렇게 만든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 묻고 그 심연에 대해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책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겨레를 더럽히는 선택을 강요받는 극단적인 비극에 던져져야 했던 한 심약한 령혼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근년래 문체혁신에 고민하는 소설가들에 의해 대체력사(代替历史, Alternate History)물이라는 새로운 쟝르가 나왔다. "실제 력사가 다른게 전개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하에 그 뒤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가상소설의 한 기법이다. 제목만 보면 대체력사소설처럼 보일 소설, 하지만 그런 현학적인 문체로 쓰지않고 담담히 내려간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외려 더 강한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다. 요즘들어 섬나라의 몰지각한 지도자들에 의해 우경화의 행보가 더 우심화되고 중국 할빈의 역두에 드디여 안중근 기념관이 설치된 시점에서 다시 읽은 책, 작은 책자가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욱 강했다.   “길림신문” 2014년 2월 15일       안중근의 의거를 재현한 유화(김봉학 그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6    말잔등에 실려온 휴머니즘의 감동 댓글:  조회:1669  추천:11  2014-03-20
[김혁 독서만필(1)]   말잔등에 실려온 휴머니즘의 감동     -중편소설 《군마(战马)》       소설 《군마》의 중국판 표지     갑오년 말띠의 해에 읽을만한 책을 추천하라면 아마 올 한해의 주인공이요 용맹하면서도 진취적인 기상인 말에 관한 책이 가장 적격일것이다. 영국 작가 마이클 모퍼고의 《군마(战马)》(남해출판사)는 말에 관한 픽션작품중에서 단연 수작이 아닐가싶다. 저자 모퍼고는 지금까지 100여권이 넘는 작품들을 발표해온 탁월한 이야기군이자 영국의 계관 아동문학가이다. 또한 그의 대표작 격인 《군마》는 30년간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으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아왔다. 소설은 지난해 《신들러 명단》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 제84회 오스카 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등 총 6개 부문에 선정되여 전 세계 언론과 팬들의 이목을 이 작품에 집중시켰다. 영화의 흥행에 때맞추어 출시된 소설을 읽었다.       할리우드에서 각색한 영화 "군마"의 한 장면     영국의 한 자그마한 농장, 술 취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온 태여난지 여섯달도 안된 망아지 조이는 순박하고 수줍음 많은 열세살 소년 앨버트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늘 술에 절어있는 주인보다 그 아들 앨버트와 교감하며 조이는 건장한 말로 훌쩍 자란다. 앨버트는 조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1차세계대전이 시작된 어느 여름날, 폭우때문에 농사를 망치고 돈이 궁했던 아버지는 조이를 기병 장교에게 팔아버린다. 조이는 그렇게 전쟁터 한가운데로 끌려가게 된다. 불비가 쏟아지는 전장에서 조이는 군인들과 함께 적진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고 진창길에서 대포를 끌기도 하고 부상병들을 야전병원으로 옮기기도 하면서 평범한 농장의 말에서 차츰 용감한 군마가 되여간다. 조이가 전쟁터에 끌려갈 때는 어렸던 앨버트가 그후 자원입대한다. 수의가 되여 전장에 나선다. 앨버트는 폭탄의 충격으로 잠시 시력을 잃는다. 앞을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애마(愛馬)의 생김새를 세세히 설명하면서 찾고찾아 결국 극적으로 조이와 해후한다.       소설 《군마》의 저자 마이클 모퍼고     작품속에서 말은 독보적인 주인공이다. 이야기는 담담하게 조이의 서술에 의해 진행된다. 인간이 아닌 말의 립장에서 서술하기때문에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비교적 담담하게 전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저자는 화려한 문체가 아닌 그저 일기를 쓰듯이 써갔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 가슴을 울리게 한다. 그건 아마도 조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담아낸 진실성이 아닐가싶다. 작품을 읽으면서 붉은 갈기를 날리며 코잔등에 허연 표시를 갖고있는 멋진 말 조이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읽는 내내 조이의 무사귀환과 주인 앨버트와의 조우를 빌었다. 따뜻한 작품이였다.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그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들의 삶에 포커스를 맞춰 그 모습들을 아름답게 그려보였다. 절망속에서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들이 작품의 행간에 마구간의 건초향기처럼 깊게 배여있다. 전쟁의 배경은 어둡고 질척하고 공포스러웠지만 군마 조이는 그 연무를 뚫고 잔등에 진한 휴머니즘의 감동을 싣고 독자들앞으로 다가왔다.   [ 길릴신문 ]  2014-02-01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5    잘 가요, 유키 티나리 댓글:  조회:3030  추천:11  2014-03-17
미니칼럼   잘 가요, 유키 티나리   김 혁       일본의  톱스타 야마구찌 모모에의 아버지역을 맡았던 “따도모 大岛茂”- 유키티나리가 타계했다.   유키티나리는 지난 14일, 만성 호흡 부전으로 숨졌다. 향년 82세. 우리가 “따도모”로 알아온 그의 본명은 우츠이켄, 1955년 "청춘 이야기"로 데뷔이후 60여년간 영화와 텔레비드라마에서 맹활약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알린것은 전설의 가수 야마구찌 모모에와 협연한 “붉은 운명" 시리즈의 한 부인 "의심스러운 혈형"이였다.     중국에서는 지난 80년대 중기 이 시리즈물을 방영, 야마구찌 모모에와 유키티나리는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초특급 우상이였다. 그들의 드라마때문에 사람들은 궁색한 살림을 털어서라도 굳이 흑백텔레비죤을 마련했다. 당시 중국의 가전제품판촉에 야마구찌와 유키티나리의 공적이 크다고 해야겠다.   나의 고중시절, 우리집 역시 그들이 주연한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을 보고저 9촌짜리 흑백텔레비죤을 구입했었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 맨처음 보았던 텔레비죤이였다. 매양 저녁 7시 드라마의 주제곡이 울려퍼지면 온 가족이 만사를 제치고텔레비앞에 몰려든곤했다.   흑백의 화상도가 낮은 화면이였지만 야마구찌의 청순한 이미지와 유키티나리의 자애로운 부친상은 매일같이 우리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더우기 포악한 이붓아비의 손에서 자랐던 나에게 유키티나리는 내 취약했던 사춘기의 정감을 위무해준 구원같은 존재였다.     당시 배우자하면 유키티나리! 아버지 하면 유키티나리!하고 이구동성, 천편일률적으로 대답할 정도로 유키티나리는 우리 모든 가족들에게 바람직한 롤 모덜이였다.   우리가 유키티나리에 열광한것은 그가 엄격함과 상냥함을 겸비한 “리상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줬기때문이다.   아버지의 당위성의 무게가 상실되고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못하고있는 요즈 세월을 지어 “부권(父權)상실의 시대”라고까지 말한다. 부권의 부재는 한가족의 상실, 나아가 전통적인 가치관 상실의 주요 요인이다. 이렇게 남성위기론이 대두하고 남성들이 새로운 좌표계를 찾으려 몸부림하고 있는 요즘이기에 “우리들의 아버지” 유키티나리의 죽음은 갑절 애석하게 다가오는것이다.       유백색 코트에 마냥 양장과 넥타이를 고수하고 미간에는 엄숙함이 일지만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를 띄였던 유키티나리의 표상은 이제는 남성상의 소실과 더불어 흑백 브라운관속의 형상처럼 아련하게 사라져 가고있다.     잘가요, 유키티나리!   2014년 3월 16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山口百惠と三浦友和テレビ初共演ドラマの主題歌である。    
94    봄 우뢰 댓글:  조회:1786  추천:11  2014-03-13
. 력사 칼럼 .   봄 우뢰   김 혁        우뢰, 여름철 소나기 올때 하늘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대기 중의 방전(放电)현상으로 생기는 큰 소리이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순 우리말이다.   또 천둥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动)이 변한 말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나는것 같다고 해서 천고(天鼓)라는 표현도 썼었다.   우뢰는 장마철이나 여름철에 많고 봄에는 드물다. 그래서 봄우뢰를 신뢰(新雷)라고도 했다.        연변지역은 비교적 한랭한 기후이니 봄 우뢰가 우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5년전 지금의 연변지역 즉 당시의 북간도에서는 세상을 놀래는 “봄 우뢰”가 울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3.13 반일시위 모습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주의  (民族自決主义)에 자극받아 독립지사들은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전역을 무대로  성세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온 겨레가 떨쳐 일어 선 이 장거에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적극 호응하여 “간도의 서울”인 룡정에서 반일시위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3일, 이른 새벽부터 연변각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룡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로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3만여명의 민중들이 분분히 대렬을 지어 룡정에 도착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였다.   대회에서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랑독한 뒤일본간도총령사관을 향해 나아가며 거리시위를 단행했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룡정의 거리와 골목에 우뢰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다. 군경들은 적수공권인 군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이날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피못에 쓰러졌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명이 체포되였다.    그후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14명 수난자들을 룡정 동남쪽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고히 안장했다.   룡정의“3.13”반일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학계에서 “해란강의 봄 우뢰”라고 지칭되는3.13반일운동의 천둥은 연변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퍼지여 앙양된 반일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좌로부터 김약연, 림민호, 한락연     3.13반일운동과 직결된 인물들은 많고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빛낸 여뢰관이 (如雷贯耳 우뢰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는것 같이 명성이 자자하다) 의 인걸들이 적지않다. 그 몇분을 뽑아보면-   김약연.   당시 간도지역의 “대부”로 연변 초기의 이주민 마을인 명동촌의 지탑을 잡고있던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자 연해주로 파견되여 갔다. 연해주에서 김약연은 각지에서 파견 되여온 독립지사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고 룡정반일시위를 기획하였다. “3.13”반일시위가 일제에 탄압을 받은후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를 빌미로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연변의 초기의 근대 교육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 그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림민호.    반일시위가 일던 날 대회장 가녁의 교회당 첨탑우에 올라가 구경하고있던 한 소년이 교회당의 종소리를 울렸고 그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였다. 종소리를 울려 성세호대한 반일시위를 촉발시킨 그 홍안의 소년이 바로 후일 연변대학의 교장으로, 조선족교육의 정초에 크게 기여를 한 림민호교장이였다.    한락연.   당대 중국미술발전사와 중국현대혁명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여 “중국의 피카소”라 지칭되고 있는 그는 당시의 반일시위에 적극 동참하여 대회에 사용 될 기발을 만들고 프랑카드를 써서 대회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시위자들과 함께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한목청을 높였었다. 룡정의 외곽 합성리에 조선된 "3.13" 반일 의사릉     조선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탁월한 승려인 혜장을 높이 치하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 명성이 우뢰처럼 크게 떨쳐   사방의 호걸들이 얼굴보기를 원했지     오늘이 바로 해란강반에서 반일의 봄우뢰가 터진 3.13반일시위 95돌이 되는 날이다.    이를 계기로 또 한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 몸 바친 인걸들의 “여뢰관이”한 이름을 크게 새기며 망각과 무심으로 안일했던 마음들을 들깨우기를 바란다.   2014년 3월 13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3    남자의 목젖 댓글:  조회:1321  추천:8  2014-03-10
    . 칼럼 . 남자의 목젖 김혁                                                                      오랜만에 동창회를 갔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녀동창생들은 (어느덧 눈 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줌마 티 나는 녀동창생들은) 십여 명 잘되는데 남자는 나까지 해서 고작 두 명뿐 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의례 노래방에 갔는데 술에 약한 그 남 동창생 님께서 쓰러지는 바람에 남자란 나 하나만 남은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다. 녀성중대를 거느린 당대표의 심정이 되여 흥취 거나한 녀성분들을 맞추어 주었다. 그들에게 끌려 일당백으로 일일이 대창을 하고 나니  나중엔 목소리가 쉬여 나가주질 않았다. (잔 등과 이마 전은 땀으로 질펀했고) 솔직히 즐거워야 할 동창회가 힘들어 죽을 뻔한 기억으로 남았다.    오랜 기자생활에 버릇이 되였던지 나는 가끔 시장거리의 음식가게에 끼여들어 아무나 (초 두부요 순대요 옥수수 죽이요 하는 음식들을) 잘 먹어준다. 그러면서 볼라니 음식을 만들어 파는 아낙네들의 배후엔 나그네들이 있었다. (한결같이) 그 나그네들이 한결같이 하는 일이란 쌀도 사오고 간장도 사오고 기름도 사오는 일, 헌헌대장부들이 아낙네들의 뒤치닥거리를 도와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다 손님이 뜸한 주말 같은 때면 그 나그네들끼리 모여 술잔도 기울인다. 어느 한번 귀 도적질하여 들은 나그네들의 말이 례사롭지 않았다. 녀편네 쪽을 흘깃거리다 감개하여 내뱉는 나그네들의 말을 요약해 보면  “요즘 같은 세월에 남자구실 하기가 정말 힘들어 죽겠구만이라!”였다.       몇 해전인가 한국의 어느 댄스그룹이 이곳에 와서 음악회를 연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장마비가 내렸다. 음악회 신문발표회에서 어느 지도자 님의 기인 연설을 듣느라 우리 기자 수십 명은 그만 시간을 늦추게 되었다. 헐레벌레 체육관으로 달려가 보니 음악회가 당장 시작될 기미였지만 체육장 출입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팬들의 소란이 무서워 큰 대문은 열지 못한 채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작은 문만 열고 있었다. 주최측의 전갈을 받고 대문을 지켜나선 경찰들이 기자들을 우선 들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팬들까지 우르르 합세하는 바람에 장내는 그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음악회는 시작되여 음악소리가 쿵쾅거리는데 아직도 대문 밖에 내쳐진 기자들을 보고 어느 경찰 분이 방법을(사뭇 엉뚱한 아이디어를) 댔다.   “녀 기자들은 우선 문으로 들여보내고 남자 기자들은 대문을 뛰여 넘으시오!”   체육장의 대문은 엄청 높았다. 하지만 취재임무를 위해 우리는(남자기자 분들만은)울며 겨자 먹기로 철창에 매달렸다. 정수리를 쫓는 비속에 미끈거리는 쇠창살을 한사코 부여잡고 (어떤 령장류 동물처럼)아득바득 넘는데 누군가 탄식을 뿜는 소리가 비속에 들렸다.   “허이고! 하필이면 남자가 돼갔고”...     요즘 세월에 남성으로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남성은 과연 강한 존재인가?    인류의 진화에 대해 천명한 다윈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생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밝혀주었다. 혼자서는 자손을 만들 수 없는 생식계의 부수적인 존재, 암컷과 유전자를 이어 쉽게 멸종되지 않는 종으로 거듭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퇴화의 위기에 처한 제2의 성. 그것이 남자의 진면목이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연구결론에 의하면 남자는 뭐 “자연의 유일한 실수"라나?!" (맙시사!)      이제 남자는 심지어 새끼가 태어날 때 필요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전 정자 없이  란자의 복제만으로 태어나는 데 성공한 복제 양 “돌리”는 우리 남성들에게 과학성취의 경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어떤 자격지심을 유발하는 소식이였을지도 모른다. (과학환상소설을 읽기 좋아  해 라는 잡지를 내내 주문해 보고있는 나에게서도 돌리의 존재는 별루다. 더욱이 얼마 전 그 “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된 어떤 야릇한(?) 자아위안의 감정.)    유명한 동물학자들은 원체“녀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진화했다"라고 설명한다. 그 지론을 구구히 펴보면-   뇌 단층의 연구로 보면 녀자는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말을 잘한다.   후각, 청각, 촉각 등 오감 역시 녀자는 남자보다 민감하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녀자는 남자보다 커서 오래 생존하고 넉넉한 지방 덕에 (녀자 25% 남자 12.5%) 배고픔에도 잘 견딘다.   또한 대표적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면역력을 억제해 남자는 녀자에 비해 가난과 질병, 독신생활, 위험에 견뎌내는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태어난 후에도 남자는 녀자와 달리 색맹과 같은 X염색체의 결함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죽을 통계적 확률도 남자가 녀자에 비해 훨씬 높다나?      요약하자면 남성의 육체는 녀성에 비해 구조적으로 불완전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녀자가 남자보다 우세라는(어느 모로 보나) 이야기다.    이렇게 인간의 성별에 대한 의식이 점차 성숙돼 가고 있긴 하지만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시행착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선 실존의 차원에서 본다면 남성에게서 그 특징은 의지력, 대담성, 목표지향성, 독립성, 등으로 요약돼 왔다. 녀성의 특징은 그 반대쪽에 선다. 허약함, 겸손함, 관용, 순종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량극적인 성 모델은 일종의 사회적 강령처럼 우리는 내내 받아들여 왔다.    사내아이는 사춘기를 전후해 남자라는 혹독한 부여를 (억다지로) 받는다. 그를 통해 그때까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고독과 고립무원의 감정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는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가 속한 성에 모든 것을 맞춰나가려 한다. 아직 성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남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윽박지른다. 특히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민족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달리 강한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이 남성들에게 강력한 자기 최면과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답습시킨 데서 온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자는 끊임없이 사회적인 요인들에 좌우지 될 수밖에 없는 압력을 갖고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도태돼야 하는 불행한 숙명을 안고 있다. 결과 남성은 스스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조되여 눈물을 감추고 진솔한 감정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진 “씩씩한” 인공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녀성의 사회무대로의 등장이였다. 금세기 들어 녀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고 그 자각의 결과들이 사회에 꽃펴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흐름을 조소하고 저항하던 남성들도 이젠 이를 대세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강하고 지배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남자에 대한 통념이  뒤집혀 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페미니즘(女性主義)의 한 조류로서 남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제 페미니즘은 녀성만의 화두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남성의 화두이기도 하다.    남성의 기존 권위는 (소리내며) 무너지고 있다. 약한 남성이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정에서 발언권이 줄어들고 가무 일이며 육아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 대신, 사회에선 여전히 강한 남성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서 남성들의 위기는 자신에 대한 위기, 사회의 위기로 직결된다. 즉 남성들이 위기에 처했다면 이 사회 또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총체적 위기를 제대로 바라보고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남성의 주체적 자각과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리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지금의 남성사는 백지상태에서 다시 씌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녀자의 손에서?)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폭력적인 남성 문화 속에서 녀성들이 살아나기가 어렵지만 물론 남성 또한 살아나가기가 (심히) 어렵다. 지나친 성별 고정 관념에 의하여 받침 되고있는 현재와 같은 사회구조 내에서 지나친 경쟁, 권위주의에 매달려 끊임없이 더 높은 효률과 생산을 위해 무작정 뛰기만 하는 과정에서 남자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성도 남성 지배문화의 피해자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글을 짓는 순간도 우리 남성들은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쓰린 가슴을 달랜다. 직장에서는 넘쳐나는 업무와 경쟁력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정에서는 갈수록 사나워지는 녀편네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밀려난 삶의 변경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자 미로를 헤매인다. (불쌍할 손 남자들이여!)    남자의 성대는 18mm로서 녀자(13mm)보다 길다고 한다. 녀자의 후두도 남자의 7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남자는 큰 목젖을 흔들며 거센 시원(始原)의 음성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어떻게 남자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자다운 호기에 젖은 쩌렁쩌렁한 소리를 다시 낼 수 있을가?   동창회 그날 노래방에서 쉰 소리를 짜 내여 (짐짓 뜻 있는 가사를 골라)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 말을 다시 적어 본다.    남자는 너무 피곤해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이 피곤해    남자는 도움도 받을 수 없고 혼자 버티기도 힘들어    남자도 울고 싶지만 늘 화장실에 숨어 울어야만 하지    남자는 너무 힘들어    사랑하는 것도 힘들어    건강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유머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취미도 있어야 하고    랑만도 있어야 하지.    나는 아무 것도 없는데    저기 저 아름다운 아가씨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데...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2    요절 문인 댓글:  조회:1799  추천:9  2014-03-07
  미니 칼럼   요절문인   김혁       1937년의 오늘, 일본 도꾜제국대 부속병원에서 폐결핵이 악화된 한 시인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폐병의 절망을 안고 기생과 동거하며 난해한 초현실주의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써내 천재적 면모를 보였던,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절망 끝에 건너간 도꾜에서 “멜론이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생을 접고 만 리상이다. 리상외에도 김소월, 라도향, 최서해, 강경애, 전혜린, 모파상, 뿌쉬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路遥, 萧红, 顾城, 王小波등 세계문단사에는 그 재능을 다 펴지못하고 일찍 스러진 “별”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요절(夭折), 여기서 요(夭)자는 무성하다, 절(折)은 부러지다는 뜻이다. 싱싱함과 향기를 채 뿌리지못하고 꺽이고 말았다는 그 뜻말에 조차 애통함이 깊이 담겨 있다.   일전 답사차로 룡정 대포산을 오르다가 길녘에서 뜻밖에도 허흥식 시인의 묘소와 마주쳤다. 무성한 풀잎속에 쓸쓸하게 방치된 그 묘소앞에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리숙여 묵도를 드렸었다. 우리 문단에도 안타깝게 요절한 문인들이 적지 않다. 류연산, 윤림호,  남주길, 리화숙, 박향숙, 조은철, 윤광수… 병환으로, 사고로 애닯게 일찍이도 간 그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젖어 오른다.      해외에서는 요절문인들에 대한 추모방식이 정례적으로 진행되고있다. 주기(周忌)를 꼭 챙겨 기념하고 그이들을 위한 문학비를 건립하거나 랑송회를 열며 또 요절문인 작품집도 내고있다. 우리 문단 역시 작고문인들을 추모하고 있지만 가족이나 몇몇 친구들의 작은 방식으로만 그칠뿐 보다 장중하고 조직적인 추모 방식은 결여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생의 황홀에만 매몰되지 말고 그늘속 죽음에도 눈길을 주라”하고 어느 한 평론가는 말을 했다.  작고문인들에 대해 정례적으로 눈길을 돌리고 그이들이 우리 문단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것은 문단의 전승과 발전에도 필수적인 례식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이들을 추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이들이 남긴 작품을 읽는것이다.   2014년 3월 7일   “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1    난 로봇이다 댓글:  조회:1592  추천:5  2014-03-06
미니 칼럼   난 로봇이다   김 혁                과학환상소설의 거장 아시모프의 “로봇단편소설전집”이 중문으로 출간되였다. 유태인 방아간집에서 태여난 아시모프는 평생에 걸쳐 200여편의 과학환상소설작품을 창작, 로봇의 개발과 응용 과학의 대중화에 거대한 작용을 놀았다.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지금도 해외에서 그 인기가 높아 몇해전에도 할리우드에서 그의 단편을 개작한 영화 “난 로봇이다”가 크게 흥행을 보였다.      다양한 쟝르소설의 수용과 창작이 척박한 조선족문단에서는 과학환상소설은 제때에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서러운 쟝르"이다. 지난 80년대 조선말 과학 종합지에서 간혹 단편과학환상소설을 실으며 아시모프라는 이름이 잠간 소개된적 있었던것 같다.                                  아시모프의 환상의 필끝에서 “천방야담”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로봇이 생활속으로 빠르게 파고 들고 있다. 해외에서는 가정용 로봇은 이미 가사와 방범, 오락, 교육 등 일명 “가족 도우미” 형태로 다양화되고 있다. 업체 관계자들은 첨단기술의 집합체인 로봇산업이 21세기에 가장 성장잠재력이 높은 산업이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홍병용 교수    일전, 여러 매체의 주도로 펼쳐진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선발에서 유난히 인기를 끄는 인물이 있었다. 할빈공업대학의 홍병용교수이다.   "중국로봇축구의 아버지"로 지칭되고있는 그는 명실상부하게 중국로봇문화예술분야의 개척자로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으로 마이크로 마우스를 연구 개발해 냄으로써 당시 중국에서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붐을 일으켰으며 우주공간 연구프로젝트의 국내에서 선도적인 위치로 우주항천부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더우기 시뮬레이션 로봇축구경기와 완전자률형 로봇축구경기, 상응한 경기 플랫폼을 개발해 냈다.       첨단 과학 분야에 이름을 남긴 중국 조선족인걸, 그 이름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신기 그 자체인 로봇처럼 경외스럽고 자랑스럽다.   2014년 3월 6일 “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0    혁명과 로맨스 소설 댓글:  조회:1451  추천:6  2014-03-06
미니 칼럼   혁명과 로맨스 소설   김혁     18세기 유럽에서는 “서간소설”읽기 열풍이 일었다. 주로 편지 형식으로 젊은 남녀가 전통적인 권위와 자유로운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비극적인 운명에 빠져드는 내용으로 된 로맨스 소설들이다. 볼테르, 루소, 디드로등 프랑스 계몽주의 학자들의 사상이 1798년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적 불씨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력사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진 지 오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관념이 허상에 불과할뿐 사실은 로맨스 소설이 프랑스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흥미있는 주장이 나오고있다. 사회 어두운 곳에 감춰져 있던 인권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바로 서간소설의 류행이며 그 로맨스 소설 읽기가 평등을 주장한 프랑스 혁명의 지적토대 형성에 공헌했다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한때 우리도 대만 녀류작가 경요의 로맨스 소설에 환혹하던때가 있었다. 중국독자들은 십여년이 되도록 경요가 만들어낸 사랑의 왕국에서 그 주인공들과 울고웃었다. 그 붐에 편승하여 필자도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던 당시 경요의 “불타는 천국”등 유명 단편들을 신문에 번역 게재하기도 했었다. 요즘들어서도 로맨스 작품의 인기는 여전히 상승가도를 달리고있다. 인터넷에서는 로맨스 웹소설이, 서점가에서는 로맨스 소설이, 텔레비에서는 로맨스 드라마가 넷에 넘쳐나고, 서가를 메우고, 브라운관을 달구고있다. 이러한 업계의 로맨스 “편애”에 대해 전문가들은  “물신화로 변질된 사랑에 대한 실의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추구를 더 갈망하게 한다”며 따라서 “컨텐츠로써의 사랑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고 정평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문단에서 순수한 “순애보”식 로맨스 소설과 전문 창작자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들의 수요를 멀리한 쟝르소설에 대한 폄하의식이 그 단조로운 쟝르와 메마른 문체의 범람을 야기시킨것이다. 붓대에서 힘을 빼고 로맨스 소설 한편 습작해 볼가나?   2014년 3월 2일 “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9    한국 스크린에 비친 조선족의 이미지 댓글:  조회:4457  추천:21  2014-02-28
칼 럼 한국 스크린에 비친 조선족의 이미지 김 혁 1 한국 영화 "신세계"를 DVD 로 갖추었다.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 한국 영화계의 대목들이 모두 나와 열연을 펼쳤다. 누아르 (noir. 범죄나 범죄자들을 다룬 영화)  영화 하면 이 쟝르의 매니아들은 미국영화 “대부”를 압권으로 뽑고 홍콩의 “무간도” 역시 경전으로 뽑는데 “신세계” 역시 한국 누아르 영화들 중에서는 정말로 몇편 안되는 수작으로 꼽을만한 영화였다. 영화 개봉당시 "’대부’나 ‘무간도’의 베끼기다”라는 혹평도 있었었다. 물론 케릭터와 상황설정에서 닮은데가 보인다. 하지만 그로해서  평가절하될 영화가 아니였다. 두 작품에 뿌리를 담그고 있지만 "신세계"는 나름의 시도에 완성도까지 갖춘 작품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 하나를 허투루 쓰지 않고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면서 질척하고 잔인한 조폭세계를 투영시켜 인성의 밑바닥까지 파헤친 작품이다. 이제는 진부해질만도 한 소재를 가지고 흥미롭고 섬세한 구성으로 변모시킨 제작진의 로고가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깡패세계의 잔혹한 쟁투를 실사적으로 묘사한 피로 얼룩진 화면때문이 아니였다. 영화에서 또 한번 조선족 비하가 자행되고있기때문이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선족은 지난번 물의를 일으켰던 영화 "황해"처럼 또 살인청부업자이다. 우스꽝러운데다 잔혹하기 까지 한 조선족 청부 살인자가 저그만치 넷이나 된다. 그들은 이름조차 없다. 그저 “연변 거지”라 통칭한다. 때자국이 꾀죄죄한 차림새에 시종 멍청한 표정들,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듯 공항에서 허둥대고, 남의 제사집에 가서도 게걸스럽게 상차림의 물건들을 손으로 집어먹는다. 하지만 살인에 들어가서는 네거리에서도 천연덕 스럽게 총질을 하고 녀자를 잡아서는 피투성이로 만들어 드림통에 구겨 넣을만큼 그누구보다 잔혹하다. 조선족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새로운 “신 세계”를 꿈꾸며 고국 한국으로 달려 갔다. 하지만 그들이 직면한것은 영화속과도 같은 몰리해와 편견의 세계였다. “신 세계”에 이어 영화 “숨박꼭질”을 보았다. “장밋빛 인생”, “추적자”로 조선족 관중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배우 손현주가 나온다니 기대를 하고 보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조선족은 역시 주접스럽기 짝이 없는 몰골의 형상으로 나온다. 봉두란발에 때자국이 꾀죄죄한 얼굴, 카드를 긁을줄 조차도 모르는 얼간이 형상인데 주인공을 몽둥이를 들고 급습하는 장면에서는 여느 조폭 성원 못지않게 몽둥이를 제법 능란하게 휘두른다. 그러다 주인공에게 체면을 수습하기 어렵게 늘씬하게 두드려맞고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다. 바짝 긴장을 머금고 재밌게 보던 스릴러 영화가 우리에게는 그 집중도와 맛을 잃게하는 순간이였다. 2 한국 영화들에서의 조선족의 형상은 영화의 흐름새나 주역의 연기를 위해 잠간 “도구”처럼 쓰인다. 하지만 그 찰나의 등장임에도 어김없이 폄하와 조롱의 대상임을 면치 못한다. 영화에서 조선족이 담당하는 역은 한결같이 청부살인자, 보이스피싱, 창녀가 전부이다. 게다가 용모가 괴상하고 복장이 람루하고 말씨가 어눌한 바보, 못난이, 반편, 얼간이, “쫌 모자란 놈”으로 나온다. 한국 영화에 나오는 조선족의 인물형상들 우로부터 아래로 "황해", "신 세계", "숨박꼭질" 비단 한국의 영화뿐 아니라 개그프로나 버라이트 쇼에서도 그렇게도 많은 연예인들이 조선족의 어눌한 말투를 모사하는것을 특기로 삼고있다. 조선족의 적지않은 관중들이 그들의 열렬한 팬임에도 말이다. 영화 “황해”에서 살인청부업자, 개장수로 봉두란발에 짐승 뼈다귀를 메고 다니는 조선족의 일그러진 형상에 대한 갑론을박의 쟁론이 오래도록 인터넷을 달구었음에도 그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서 만든 개그프로 “황해”에서도 조선족 비하는 여전히 진행, 그 시청률이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소설작품들에서도 조선족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테러의 시”라는 소설이 있다. 젊은 한국 녀류작가에 의해 창작된 이 소설에서는 조선족 제니라는 창녀가 등장하는데 “모래로 뒤덮인 황사의 도시의 돼지우리에서 자란” 그녀를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가 사창가에 팔아버린다. (돼지우리에서 자란 아이, 자기 친딸을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조선족 아버지, 이런 모습을 조선족의 현실적인 사례에서 몇이나 찾아볼수 있을가?) “문명사회의 리기를 폭로한 작품”이라고 한국의 언론과 평단은 이 작품을 정평하지만 “섹스와 폭력을 즉물적으로 묘사하는 장식 없는 문체가 빛나다”는 이 젊은 녀류작가의 작품에서 돼지우리에서 자라, 아비에게 팔려 섹스클럽에서 매춘부가 됐다가, 어느 집 가정부로 일하던중 과외 교사와 눈맞아 도망쳤다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다가, 목사와 눈이 맞아 임신까지 했다가, 실은 그녀의 포주였던 목사에 의해 도로 몸을 팔게 됐다가, 다시금 영국인 애인과 달아난다는 설정의 조선족 녀인을  읽는 조선족독자들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지극히 편치 못하다. 영화쪽에 대한 담론이니만큼 쟝르의 차이로 소설에 관한 례는 이만 략하기로 한다. 그나마 조선족의 형상이 온전하게 나마 나오는 영화는 “댄서의 순정”이다. 하지만 언니대신 가짜 비자로 한국에 나간 조선족이 그렇게 경쟁력 치렬한 한국의 무용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는 개연성 적은 설정은 조선족들과는 거리가 먼, 그저 웃으며 볼수 밖에 없는 “천일야화”속 이야기 같은것이였다. 그런대로 영화가 조선족 관중들에 인기를 얻은것은 “한국의 국민녀동생”으로 불리는 문근영이 잘 소화해낸 연변처녀의 순박하고 진솔한 모습의 연기덕일터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 비쳐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한 피줄을 나눈 동포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중국 국적을 지닌 외국인이기도 한 조선족은 보듬어 주고 손잡을 존재가 아니라 외려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로 되여 버렸다. 잘사는 고국에서 돈 좀 벌어볼 목적으로 고향땅 버리고 한국으로 나가 3D업종을 비롯해 내국인이 기피하는 직종에 몸을 혹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믿었던 고국인들과 빚어진 불협화음, 결국은 리념의 차이 그리고 일종의 문화 충돌이 빚어진 결과라 볼수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몰지각한 조선족들을 현실에서 전혀 찾아 볼수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독들은 왠지 감독이고 보면 너나가 생색을 내며 걸고다니는 그 색안경 너머로 뒤안길에 헤매는 조선족들에게만 조명의 조도를 어둡게 하고 앵글을 삐딱하게 맞추며 음악도 칙칙한 사운드쪽으로 깔아준다. 한국의 영상물들에서 조선족은 주로 돈을 위해서는 범죄도 서슴치 않는 폭력적 존재로 묘사되면서 조선족=범죄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지만 실제 조선족 범죄는 외국인 전체 범죄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외국인 밀집지역의 범죄와 치안실태 연구”를 보면 2011년 기준 10만명당 외국인 범죄자 국적별 검거인원은 몽골(7064명)이 가장 많았고 미국(6756명), 캐나다(4124명), 러시아(3785명), 태국(3634명), 파키스탄(2995명), 우즈벡(2986명) 그리고 중국(2921명ㆍ조선족 포함) 이 뒤를 이었다. 그럼에도 범죄 캐릭터에는 조선족을 선두로 그리고 어김없이 범죄자의 단골역으로 나오는것이다. 영화, 예능프로에서 련이어 이어지는 조선족 비하, 이제는 그 수위를 넘기고 있음에도 영화다, 오락쇼다, 웃음으로 봐달라고 파문을 일으킨 이들은 말한다. 하지만 장난으로 “작은 돌멩이”를 던진 이들은 즐거울터지만 맞는 “개구리”는 얼마나 아픈지를 모른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자주 던지니 개구리”에게는 그 유흥으로 던지는 “작은 돌멩이”가 “흉기”가 될수도 있을터다. 영화들을 보면서 "자기 동포를 조롱과 조소의 대상으로 그냥 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던 어느 준절한 댓글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유감과 아픔을 다룬 글들이 인터넷에 떴다하면 곧 그에 대한 갑절로 되는 비하와 조롱의 댓글이 발을 잇는다. 진지한 론의의 장이 아니라 입에 담지 못할, 우리 모두가 꼭 같게 쓰고있는 아름다운 문자에서 가장 험한 단어들만 말짱 골라낸 육두문자, 금칙어들을 동원하여 장대비같은 쌍욕의 세례로 그 작자를 공격한다. 3 물론 조선족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한국 영화도 있다. “녀자 김기덕”이라 불리는 이한나 감독의 영화 “슬리핑 뷰티”에서는 밀입국해 한국의 어느 치벽지 시골에 와서 집주인의 폭력에 으스러져 가는  조선족 처녀의 모습을 련민의 시각으로 그리고있다. 영화는 옴니버스 (omnibus.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영화나 연극의 한 형식) 형태로 만들어 졌는데 영화 포스터에 조선족 처녀를 내세울만큼 감독의 이 소재에 대한 애착을 볼수있다. 영화에서 집주인의 성침해에 의해 임신한 처녀가 그야말로 미약한 광선아래 거울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멀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바로 감독의 조선족에 대한 진지한 시선이였다. 영화  “슬리핑 뷰티”의 포스터와 영화속 조선족 처녀의 모습 김기덕 감독의 제자로 “녀자 김기덕”이 불리는 이한나 감독 말고 진짜 김기덕 감독이 조선족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영화제작사 김기덕필름이 새로 선보이는 영화 “메이드 인 차이나”가 한창 제작중인데 이 영화에서 작지않은 비중으로 연변처녀가 등장한다고 한다. 김기덕 감독은 그의 거의 전부의 작품이 중국에서 DVD로 출시되고 그 본인도 중국상해 영화제에 장동건과 더불어 초청될만클 중국에서도 지명도가 있는 감독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인 “악어”, “수취인 불명”, “사마리아”등 작품들은 한국의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반면 아직도 연변의 CD점들에서 손쉽게 구할수 있다. 그 김기덕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이 신작에서 조선족의 영상이 또 어떤 형상으로 비칠지 궁금하다.   2014년 2월 28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8    속죄 (贖罪) 반세기 댓글:  조회:2092  추천:12  2014-02-24
칼 럼   속죄 (贖罪) 반세기   김 혁    1, 나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시기 “57간부학교”에서 모진 질곡의 나날을 보냈다. 이른바 “5.7간부학교”란 주자파, 반혁명분자, 수정주의 분자들이 로동교육을 받는 기관으로서 사실은 변상적인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였다. 그때의 고생이 빌미로 되여 줄곧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문혁이 끝나자 몇해 못되여 40대의 젊은 나이에 한많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당신을 혹독하게 고문하던 가해자의 이름이며  설명절에도 범인들에게는 깡마른 옥수수밥을 먹이면서도 집지기 개에게는 고기소 만두를 먹이던 일이며, 간수의 눈을 피해 냄새나는 널변소에 가만히 숨어들어 누룽지를 목메게 씹어 먹던 일이며를 얘기해 주었다. 소학생인 나에게 조차 그 끔찍했던 기억을 토파할 정도로 아픔과 한은 깊었던 모양이다. 나의 초동머리적 인상에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는 내내 병원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때의 아픈 인상이 내 여린 심성에 골수 깊숙히 각인되여 내 생애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다름 아닌 문혁제재의 작품이였다.     나의 문혁제재의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문학에 심취되여 룡정에서 연길로 상경해 문단활동에 열성을 보이던중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혹독하게 대했던 그 당사자를 문단에서 만나게 되였다.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함자를 대였다. 한창 흥감스럽게 떠벌리던 그는 금세 함구를 했다.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후로 그분은 공석에서 나만 보면 몸둘바를 몰라했고 바삐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문학권이라 싫어도 자주 마주쳐야 했고 어느 한번은 시상대에 올라 함께 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다.  어느 날, 어린 후배앞에서 외려 쭈뼛거리며 그분은 자신의 신간작품집을 굳이 내게 선물했다.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과분하게 호칭한 싸인을 담은 책을 넘겨주면서 그분은 “그저 성의와 미안함을 담아 드리는것이나 책을 던져버려도 할말이 없소”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몇해 못되여 그분 역시 병으로 타계했다. 그때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나마 내게 사과(반성 혹은 속죄?)를 한것일가? 지금도 나의 서가에는 그분의 작품집이 여전히 꽂혀 있다.     2 전대미문의 동란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의 선두주자였던 녀맹장이 일전 뒤늦게 반성과 사과의 눈물을 쏟았다.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귀국한 송빈빈은 문혁 당시 모교의 학교의 변중운(卞仲耘) 부교장이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을 막지 못하고 교사들을 비판한것을 참회했다. 송빈빈은 1500자 분량의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범죄집단과 투쟁하기를 반대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 자신들의 교장을 구타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고 참회하면서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문화대혁명시기 북경사범대 부속녀중학교에서 홍위병을 이끌었던 송빈빈이다. 송은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모주석은 송의 이름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뜻의 ‘빈(彬)’자가 들어간것을 보고 “무(武)자가 필요(要)하군”하고 말했다. 그뒤 송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대신  ‘요무(要武)’라고 불리웠고 그 이름으로 서명한 ‘나는 모주석에게 붉은 완장을 채워 드렸다’라는 글이 전국의 온갖 잡지들에 게재되였다.   사과하고있는 송빈빈   지난세기 60년대 전 중국 전역을 토네이도처럼 휩쓴 문화대혁명은 극좌정치로선이 빚어낸 인간비극이였다. 문화대혁명은 시작된 1966년 부터 10년간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수십만 명은 넘는것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와 도덕적 붕괴 등 극심한 혼란을 낳았다.   조선족들이 운집한 연변에만 해도 집계된 피해자가 무려 3만 1,532명에 달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태여난 필자와 같은 4,50대들의 김혁, 문혁, 안혁, 위동, 위병등 이름자에서도 알수 있듯이 우리의 세대의 생활과 창작의 모태로 되는 기억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문혁(文革)의 10년이 있다. 문혁시기 홍위병 맹장으로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길길이 뛰였던 송빈빈외과 같은 이들에게도 심적 부책감의 골짜기는 깊었나 보다. 반세기를 숨죽여 살아온 송은 “문혁의 피해자와 력사에 대해 반성해 왔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호소한 그녀의 글 곳곳에는 깊은 회한과 절절한 참회가 담겼다. 그처럼 적지않은 가해자들이 근년래 서면을 보내고 잡지에 인터뷰를 게재하고 개인 블로그등을 통해 사과의 뜻을 보이고있다. 당시 뚜렷한 적용의 기준도 없이 무자비하게 시대가 휘둘러 대는 폭력 앞에서 선택은 단 두가지이였다. 동참이냐 아니면 타도(打倒)를 당하느냐이다. 제3의 선택으로서, 의심이란 있어 볼 수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였다. 의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허락되지는 않는 반항으로서 곧 타도를 맞는 쪽으로 선택함과 다름 없었고 한번쯤 의심을 가지기에는 시대의 풍조에 골몰되여 지나치게 뜨거웠던 머리속에서 상황에 대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릴수 있는 제대로 된 “지적사유”를 하기가 힘들었던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가해자이자 역시 시대의 피해자 역할로도 충당된 사과자들은 “문혁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하는것은 개개인이 자유지만 헌법을 위반하고 인권을 침해한 비인도적 행위는 다시 재발되여서는 안된다”며 당시의 상황이나 환경을 핑계로 삼아 개인적 잘못을 덮지 않겠다는 자세를 뒤늦게나마 보이고있다.     모택동주석에게 완장을 채워드리는 송빈빈   3 문혁이 지난지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경험자들은 신심의 “트라우마”를 안고 시종 력사의 망각 그리고 침묵과 줄다리기를 벌리고 있다. 문혁 연구가들은 “이는 정치 과잉의 그 시대 사람들이 모두다 갖고있는 통병이자 상처”라고 말한다. 문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성 기억이 존재하는데 만약 한 시기의 기억이 고통과 수치로 점철되였다면 흔히 심리성 망각증세를 보인다”고 진맥했다. 문혁의 광란이 인성에 대한 말살과 그로서 생긴 후유증에 대한 우려는 지성인들의 공동의 관심사이다. 문제는 상처가 아물자 아픔을 잊은것 처럼 문혁의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 버리고 있다는것이다. 이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버린 것은 상처투성이의 과거와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새 시대의 도래사이, 간극이 너무 짧았던것과 련관시켜 볼수있다. 물신화가 급격히 추진되면서 경제 과잉, 물질적 풍요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이야기하는건 또 다시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는 흥감질이 아니다.   력사는 이미 참극으로 랑자한 피자국을 닦고 그 페지를 번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흘러가는 시간속에 력사의 잘못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 더우기 피해자들에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시시때때 육신을 괴롭히는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아름다운것에 대한 파괴와 인성의 왜곡과 전민중에 대한 집단적 최면은 지울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때문에 그런 아픈 기억들을 반추해 력사의 거울로 삼자는 이사위감(以史爲鑑) 정신의 실천은 아직도 필요하며 앞으로도 내내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당사자들의 반성과 성찰을 감안한 진정한 반성을 모두는 바라왔었다. 가해자들의 광분했던 행위를 “문혁”이라는 당시의 큰 환경에 원인을 돌릴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당시의 동란은 정당화될수 없으며 개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력사의 기억은 지워질수는 없다. 이는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 력사에 대한 전 사회적인 명의의 승낙이라고 볼수 있다. 때문에 후회라는 진실과 마주하지않으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기억은 더 또렷해지고 그 부책감도 더 무거워 질것이다. 문혁에 대한 력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갑론을박의 그 귀결점은 모두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인권유린의 참극이였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끔찍한 자연재해와는 달리 문혁은 인재(人災)였다. 이는 인류가 두고 두고 반성해야 할 력사다. 문혁은 우리의 력사에 우리들의 신상에 흉물스러운 종양처럼 틀고 앉았다. 그 독소를 없애는것은 문혁이라는 악몽을 피부로 경험했던 일대뿐이 아니라 새로운 일대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 경력자들뿐이 아니라 후세들도 명심할 대목이다. 일찍 문화대혁명박물관을 세우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파금선생은 “가면을 벗고 량심을 끄집어내고 똑똑히 기억해두어야 력사가 다시 점철을 밟는것을 막을수 있다고 말했다. 상처를 받아 안은 피해자들에게는 사죄와 반성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않고, 또 그 반성이 화해로 이어가지 못하더라고 가해자들이 오랜 세월뒤에라도 이미 그런 자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반성과 속죄는 그 의의가 있다. 가해자들은 속죄의 말미에 “다시는 이 같은 동란과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지만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이 없이는 문혁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량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령혼의 정화, 사회의 진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과거를 털어내는 심각한 반성의 소리는 필요하다. 이는 국가와 민중들이 함께 짐져 나가야할 책임인것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장차 나아갈 길이 분명히 흔들리지 않을것이며 더 큰 꿈을 위해 더 크게 더 빨리 도약할수 있는 자세가 생길것이다. 새로운 력사의 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때 열린다.     2014년 2월 20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7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댓글:  조회:2306  추천:18  2014-02-16
. 칼럼 .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김 혁   1 올해는 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데이가 같은 날로 겹쳤다. 민족의 전통명절과 젊은 이들의 모던한 기념일이 어우러 진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또 다른 각별한 날이기도 했다. 100여년전 할빈역에서 민족 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본이 사형선고를 내린 날인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산화해 간 안중근 영웅. 하지만 젊은이들은 련인에게 줄 꽃다발이나 쵸콜렛 챙기고 저녁에 함께 할 레스토랑의 음식주문에 바빠 민족의 영령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한국에서 한 대학교수의 제안에 의해 2월14일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날 “안중근 데이(day)”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민족영웅을 추모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고, 전통명절의 풍속을 이어가니 “일석삼조”의 시너지 효과를 볼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 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애국”, “애족”, “기억”, “존경”, “사랑”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쵸콜렛과 꽃다발을 련인에게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왕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날로 안겨 왔다.   2 해외의 동향을 보면서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도 이참에 “윤동주 데이”를 만들어 보면 어떨가하는 바램이였다. 구관조(九官鳥)처럼 곧 남을 따라하기의 흉내짓이 아니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태여난 필자로서는 그동안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소설화하는 등 그이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작품들을 집필하고 또 각 언론사들에 윤동주 추모 관련 행사보도를 빠치지않고 줄곧 대서특필해 왔었다. 그와중에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추모가 아직도 미온(微溫)적인데 대해 안타까움과 유감을 머금던차 이번 발렌타이데이날의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뒤미처 떠오른 생각이였다.     연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윤동주의 유적들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순.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은진중학, 광명학교, 윤동주 시비가 건립된 용정중학, 윤동주 묘소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숭모사업은 고향에서 내내 이어졌음에도 그이의 아시아를 넘나드는 위상에 비해 아직 그 열기가 크지 못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그나마 큰 영향력을 과시했던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은 10년간 유지되다 마무리 되고 지금은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우리는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 론문집, 윤동주의 동시비 역시 그들 민간단체에서 펴내고 건립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는 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지만 해외의 윤동주 언덕,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하면 고향인 연변은 아직도 그 숭모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조선족 민간단체들에서 펴낸 윤동주 시집, 론문과 건립한 시비   3 요즘 세월에는 그무슨 기념일들이 그야말로 소털처럼 많다. 재래로 절기가 부여한 기념일, 자신과 부모와 친지, 친구들과 관련된 대소사의 기념일외에도 왕년에는 듣도보지도 못했던 만천하의 기념일들까지도 모조리 챙기고 지어 없는 기념일까지 만들어가면서 누린다. 기억해야 할 날이 많은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가 물질화에 빠져들면서 향락에만 젖어드는 기념일들이 란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의미로 소중히 보듬는 기념일 대신 우리가 정작 지내고 있는것은 향락주의에 젖어 질펀한 매일매일 이어지는 기념일들이다. 때문에 윤동주와 같은 고향을 빛낸 선각자들을 기리는 날이 따로 없음은 부끄러움이요, 응당 이제라도 그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것이다. 고향의 터전을 닦고 그를 빛내여 오늘에 이르게 한 이들을 잊지않고 기리는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가치이자 근본원칙이다. 그 가치를 소중히 할줄 모르고 지어 무감각한 민족은 그로서의 명분과 리유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기념일을 통해 민족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하고 산화해 간 그들의 력사적 업적을 제대로 알아야 할것이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그이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마음을 모아 그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공동체 사회가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날을 받아(탄생일, 서거일 혹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의 생가나 묘소를 찾거나 그이의 주옥같은 시 한줄을 읊조리는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알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기회가 될것이다.   2월16일 오늘이 바로 윤동주가 일제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의혹을 남긴 채 비명에 간 날이다. 69년전, 북간도 명동촌의 춥디 추운 겨울의 마지막 날(12월 30일)에 태여나 북간도의 첫 근대교육기관인 명동학교, 룡정의 미션계 학교들인 광명과 은진중학을 나와 경성의 연희전문에 진학했고 그후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일제의 마수에 유린당한 시인은 한줌의 재로 고향에 돌아와 그가 즐겨 거닐었던 동산마루에 묻혔다. 스물아홉에 갔지만 그를 낳은 고향, 그가 학문을 닦았던 경성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에서 조차 숭모해 마지않고있는 민족의 “시성” 윤동주이다.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문학적 열망과 민족애로 북간도 오지의 한 문학지망생이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그렇게 엮여진 그의 작품은 알알이 진주처럼 값지고 빛나오르고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읊조렸던 룡정의 하늘은 오늘도 맑고 시인이 묻힌 동산 마루 무덤에는 오늘도 "보람처럼 봄풀이 무성"하다. 닥쳐오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갈파하고 량심을 노래한 윤동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윤동주, 그런 학우(學友)같은, 형님같은, 애인같은 윤동주를 우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랴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2014년 2월 16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6    력사의 들머리에 새겨진 이름들 댓글:  조회:2892  추천:10  2014-02-12
력사의 들머리에 새겨 진  이름들 "조선족 인물만필 시리즈"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오늘도 그들과 만난다. 력사의 행간에 깊숙한 족적을 남긴 인걸들, 민족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산화해간 불멸의 영령들, 작금의 부박한 세속에서 하얗게 잊혀져가고있는 그이들의 이름과 혼을 오늘 글의 제단에 불러내 본다. 언젠가부터 소설, 시, 수필, 아동문학등 여러쟝르에 걸쳐 량산하던 나의 창작성향은 많이 바뀌여져 버렸다. 감상위주의 픽션에서 진솔을 기하는 논픽션에 많은 필봉을 기울여 인물전기와 력사기행, 칼럼등 쟝르에 애착을 보이고있다. 그것은 허구나 상상보다 더욱 극적인 현실의 모습에 감동하며 그 박진한 삶이 실제 인간다운 세상살이임을 실감하게 되는 나이에 이른 탓도 있을것이요, 또 문학창작과 병행해 20여년간 해온 신문사 기자라는 언론인의 직업에서 인기된것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공동체사회의 위기론이 대두되는 시점에서 안일하고 무의미한 글쓰기의 행태에서 벗어나 민족을 위한 절박한 창작의 필요를 감득한 탓이라 하겠다. 또한 시대의 어지러움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킨 위인들의 정직한 생애와 빛나는 업적에 대한 기록을 길이 남겨야겠다는 일종의 민족작가로서의 의지 그리고 소명의식에서였다. 어떤 책무같은 그 의지에 떠밀려 근년래 윤동주, 주덕해, 한락연등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여 집필, 출판했고 또 김학철, 정판룡, 김염등 인물들의 삶을 좇은 기록물들이 바야흐로 출판중에 있다. 한 걸출한 인물의 생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살아갈수 있을지 성찰하게 해준다. 전기물의 쓰기 혹은 읽기는 결국 남의 인생에 대해 쓰고 읽는 작가나 독자 자신의 시선, 심성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고 나의 내면의 “아름다운 령혼”이 깨여날수있다면 이야말로 작가로 말하면 멋지고 바람직한 작업이 아닐까!  뒤미처 인물전기의 중요성을 깨친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 집필의 새바람이 불고있다. 하지만 많은 인물들에 대한 조명은 아직도 필이 미치지 못하고 있고 그만큼 인물전기문학은 여전히 초걸음마 상태, 암중모색 중이라 할수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걸들의 모습을 하루빨리 그리고 더 많이 독자에, 사회에 알릴수 있을가? 작가적 고민을 거듭하다가 인물만필 시리즈를 펴내기로 했다. ㄱ ㄴ ㄷ ㄹ 순으로 인물들을 가능한한 체계적으로 그리고 빠침없이 조명하려 한다. ㄱ 부분에서는 김학철, 김염등, ㄹ 부분에서는 리홍광, 리추악, ㅇ 부분에서는 양림, 윤동주, ㅈ 부분에서는 정률성, 정판룡, ㅎ 부분에서는 한락연… 이렇게 사전분류식으로 간결하나 비교적 완정하게 한사람 한사람 조명해 나간다면 독자들에게 포켓용 사전처럼 쉬이 찾아볼수 있고 빨리 통독할수 있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인물선정은 중국조선족 인물을 주로 다루면서 아울러 중국조선족의 생성과 발전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거나 중국을 무대로 조선족과 함께 활약했던 겨레들, 례하면 근대교육기관을 창설한 김약연, 중국의 문호 파금등과도 교우했던 농학가 류자명, 연변지역에서 발생한 민족독립운동사상 최고의 대첩인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등 한민족의 빼여난 인물들도 더불어 조명하면서 우리 력사의 흐름을 면면이 살피려 한다. 인물을 따라가며 시대와 력사라는 전체상을 살피는 작업이라 만만치 않는 작업일 줄로 안다. 하지만 이 작업에 혼신을 쏟기로 했고 내 창작 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놓고  있다. 여러 인물전기작품의 후기에서 거듭 천명했지만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과 그 력사에 대한 조명은 분명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래서 오늘도 불멸의 영령들의 이름들을 력사의 들머리에 큼지막히 돋을새김으로 적어본다.   “중국민족” 2014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5    양철북을 두드리다 댓글:  조회:2653  추천:11  2014-02-08
칼 럼   양철북을 두드리다 김 혁   1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라고 하는 일본작가가 있다. 자살특공대를 소재로 한 소설 “영원(永遠)의 제로”를 출간, 3백만부가 팔리면서 유명해 졌고 최근 그 소설이 영화로 제작돼 인기리에 상영중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가 람발한 련이은 망언이다.   ▲ 망언 제조기 햐쿠타 씨   도꾜 신주쿠(新宿) 와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내 뱉은 그 망언들을 볼작시면: - "세계 각국은 남경대학살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 -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에 의한 도꾜 대공습과 원폭 투하는 비참한 대학살이다”, “일본인 전범을 단죄한 도꾜재판은 이(대학살)를 지우기 위한 재판이었였다" -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했는데", "20세기 전쟁에서 선전포고가 이뤄진 전쟁은 거의 없다" - "아마 일부 (일본) 군인들에 의한 잔학 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인뿐 아니라 미군도 하고 중국군도 하고 쏘련군도 했다", "이런것을 의무 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리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학 사관을 심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햐쿠타는 평화헌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문화계의 대표적 우익 인사로서 아베 신조총리와 친분이 깊다. 아베는 신사참배를 앞두고 햐쿠타의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2 햐쿠타씨의 망언과 행각을 지켜보노라니 또 다른 한 작가가 머리에 떠 올랐다. 귄터 그라스,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작가이다. 나치 점령에서 2차대전까지 독일의 력사와 사회상을 촘촘히 그린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1980년 제52회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내가 소장한 소설 “양철북”의 중국판 표지    필자는 지난 1994년경에 소설 “양철북”을 접했으나 부피가 만만치 않고 문체도 까다로워 채 읽지 못하고 영화로 먼저 보았었다. 성장을 멈춘 소년 오스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는 장면, 괴성을 질러대면 거리 유리창들이 부서지는 초현실주의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연하다. 후에 다시 중문판 소설을 소장해 까근히 읽었다. 요란한 양철북 소리와 날카로운 괴성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소년 오스카의 저항방식을 황당한 필치로 은유해 보인것이였다. 작품은 나치의 광기와 그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린 민중에 대한 통렬한 은유로 평가 받는 고전으로 귄터 그라스를 세계 대문호의 반렬에 올려 세웠다.   ▲ 영화 “양철북”의 한 장면.  이 소설에 대해 평단은 칭찬일색으로 자자했다. 노벨상도 진작 받았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는게 문단의 중론이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몇년후 귄터 그라스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라는 자서전을 발표했다. 그 자서전을 읽은 애독자들 그리고  여론은 들끓었다. 자서전을 통해 귄터 그라스는 자신이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음을 뒤늦게 고백했던것이다. 그는 나치 친위대 대원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7세에 자원입대해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1945년 2월까지 그는 “SS”가 새겨진 군복을 입고 히틀러의 병사로 지냈다. 그는 평생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어했지만 량심의 혁편질에 못이겨 결국은 고백하고 말았다. 그는 "나는 평생 이 문제를 떠나지 않았고 이 문제와 함께 있었다"며 심적 고통을 토로했다.   ▲ 저자 권터 그라스   전체 독일민중은 찬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듯 그만 어안이 벙벙해 졌다. 자부하며 애대했던 작가가 나치라니?! 한때 찬양했던 작가에 대한 비판이 장대비처럼 쏟아졌고 그의 노벨문학상을 박탈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귄터 그라스는 그 비평을 고스란히 한몸으로 받아안았다. 과거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학식, 덕망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결과가 될것이라는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스는 늦게나마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들춰냈고 여태 짐져왔던 량심의 책무를 갚으려 했다.  용기있는 행동이였고 숙고된 자아성찰의 결과였다. 소설 “양철북”을 세세히 읽어보면 그 거대한 은유속에 자신을 포함한 20세기를 살았던 독일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는 마음속 짐을 필생의 역작을 통해 속죄했던것이다.   소설 "양철북" 주인공의 캐릭터   3 똑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戰犯國)인데도 일본과 독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독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스딸린그라드 전투 희생자를 기리는 승전국 행사에 고위 정치인이 거의 매년 참가해 거듭 사죄와 반성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일본의 우경화 행보는 이제 자기 제어능력을 잃고있다. 그 행보의 근저에는 반성 없는 과거사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극우의 준동(蠢動)은 국제사회에서 더 고립되고 더 몰락하는 악순환을 초래할수도 있다. 력사는 감추고 싶다고 감춰지는게 아니다. 아무리 력사를 인위적으로 부인하려 하면 할수록 진실된 력사에 대한 “죄책감”에 계속 시달리게 될것이다.   력사에 대한 인식에서 작가들마저도 일본과 독일은 서로의 차이를 보여준다. 작가가 력사의식을 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시공간속의 진실이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청맹과니같은 의식으로 작가가 되여 세상을 향해 떠들게 되면 어떻게 될까 ? 그 작품은 시간의 고험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류작으로 남을것이며 그 작가 역시 극소수 특정 독자층의 구미나 맞추는 알량한 3류작가로 남을것이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울림이 큰 커다란 양철북과 북채가 주어져 극우작가들의 졸렬한 심안(心眼)을 깨우는 각성의 양철북을 세차게 두드리고 싶다. 요즘 중국에서도 잘 팔리고 있는 역시 일본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没有色彩的多崎作与他的巡礼日子)”에 나오는 한 구절을 청맹과니같은 일본 극우작가에게 드린다. "기억을 어딘가에 감췄다 해도 또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력사를 지울수는 없다” 2014년 2월 5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4    로마지지[老馬之智] 댓글:  조회:2902  추천:17  2014-02-01
 . 칼럼 .   로마지지[老馬之智]   김 혁    말 해의 벽두가 열리자 인터넷 사이트들에 말띠해에 태여난 명인들에 대한 집계가 떴다.  흥미를 가지고 클릭해 보았다.  우선 력사인물등중에 리세민과 칭키스칸이 눈에 띄였다. “정관지치”(貞觀之治) 로 유명한 당태종 리세민, 대당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군주이다. 사학가들은 "오로지 태종만이 문무를 모두 겸비한 황제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훌륭한 군주는 없었다"고 정평하고 있다. 칭기스칸은 13세기 초에 몽골 제국을 수립한 뒤 주변 국가를 차례로 정복해 력사상 가장 넓은 령토 확장을 이뤘다. 드넓은 초원에서 말 달리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그에게 말띠는 참으로 일점불차 걸맞는 띠인것 같다. 지도자들로는 루즈벨트등이 있었다. 소아마비를 딛고 링컨과 함께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남는 인물,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난동안 4선 의 임기를 치르면서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련합을 창설했다. 또 미국의 경제 회복, 소외 계층 밎 장애인을 위한 복지, 인디안 보호정책등면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룩했다. 지도자들중 최근 온갖 구설을 만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말띠였다. 이 광분하는 말과 같은 지도자의 지속된 우경의 행보는 린국과의 불협화음, 대립으로 치닫고있다. 더구나 올해는 청일전쟁이 발발한지 120년 두갑자가 지나 또 맞는 갑오년 말띠해이다. 아베가 독선의 위험한 질주를 멈추고 “벼랑에서 말을 멈추기”를 바라면서 중요한 의미의 말띠해에 세상은 그의 다음 행보에 눈길이 쏠려 있다. 배우들중에는 할리우드의 로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들어 있었다. “황야의 무법자”등 그렇게 많은 서부영화에서 말달리며 권선징악의 전설을 펼쳤던 그에게 꼭 어울리는 한해 라 하겠다. 말띠 스포츠인중에는 권투선수 타이슨이 있었다. “핵주먹”이라는 이미지로 복싱계의 전설로 떠 올랐지만 모델을 성폭행하고 상대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기행으로 끊임업이 구설수에 올랐던 타이슨이 말띠해를 앞두고 “이제는 좋은 아빠가 되고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해12월 그는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제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좁은 링우에서 광포한 검은말 처럼 포효했던 그가 여태껏 보인것이 저돌적인 이미지였다면 이제 그 오명을 벗고 진정 성숙한 스포츠인으로 다시 링우에 설수 있기기를 팬들은 바라고 있다. 말띠 작가들중에는 세계문학의 반렬에 우뚝 선 쟁쟁한 문호들이 많았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솔제니친이 있었다. 세계의 지성, 문학의 량심으로 불리는 그의 대작 “붉은 수레바퀴” 4부 전 16권이 지난해 말, 끝내 중문본으로 모두 완역되여 나왔는데 앞의 제1,2부는 몇해전 사두었고 마지막 3부 10권을 구정을 앞두고 한 질 사들었다. 말띠해 한해 그의 이 대하소설들을 한부한부 읽어나갈 계획이다. 그리고 영국의 소설가들인 버지니아 울프와  헉슬리도 있었다. 고향의 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한 우울한 삶을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여난 작품을 남기고 갔다. 오늘도 우리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말처럼 선하고 우울한 눈동자를 가졌던 그녀를 기리여 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미래인류의 파멸을 예고하는 어두운 예언자적 작품을 남김으로 오늘날 다시 환기되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  대표작 “멋진 신세계”로 인간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유토피아세계를 주장했던 그의 꿈처럼 새로운 한해 우리들 앞에 “멋진 신세계”가 펼쳐질수 있기를 축복해 본다. 역술인들은 올해 “문화, 교육, 농업, 목재, 언론” 분야를 호황 종목으로 점찍었다. 역시 글을 지어 밥을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올 한해 모든 작가들의 문운을 빈다.       말띠해라 각별히 말과 관련된 사자성어로 이음말을 만들어 보았다. 올 한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달리는 말우에서 겉만 보고 지나감)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호시마주(虎視馬走.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보고 말처럼 힘차게 달림)하며 마혁과시(馬革裹屍. 말가죽으로 자신의 몸을 싼다는 각오로 싸움터에 나감)의 자세로 마불정제(馬不停蹄.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아니함)하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마지로(汗馬之勞. 말이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달림)의 한 해를 만들어 가자. 말에 관한 명구, 속담, 사자성어가 많았지만 그중에서 “로마지지(老馬之智)”를 스스로 가려 뽑았다. “늙은 말의 지혜”라는 뜻으로 세상살이는 경험에 의하여 축적된 지혜가 난관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설림(說林)〉 상편에 나오는 이야기-  어느 해 봄, 제(齊)나라의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을 대동하고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해 겨울에야 끝이 났고 그래서 혹한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이 진퇴량난에 빠져 떨고 있을때 관중이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 면서 늙은 말 한마리를 풀어 놓았다. 군사들이 허위단심 늙은 말의 뒤를 따라 행군한지 얼마 안되여 드디여 큰길이 나타났다. 한비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로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로마식도(老馬識途), 로마지도(老馬知道)라고도 한다. 말의 해에 태여난 인물들은 력사의 행간에서 정열의 갈기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각 분야를 누벼 왔다. 말은 십이지 동물중 가장 빠르며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무서운 질주 본능덕에 추진력과 도약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력동적인 한 해가 시작되였다. 우리 모두에게 왕성한 에너지와 정열로 “로마지지”- 선인들의 지혜를 롤모델로 삼아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지혜롭게 극복하고 힘차게 헤쳐나갈수있는 한해이기를 기대해 본다.  2014년 2월 1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3    악마의 포식 댓글:  조회:3545  추천:12  2014-01-26
. 칼럼 .   악마의 포식   김 혁     1 지난 1980년대 흑룡강조선족출판사에서 출간한 “악마의 락원”이라는 책자가 있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신작, 책은 조선족독자들중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당시 추리물이 상당히 류행되였는데 모든 조선족간행물에서는 다투어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추리소설을 싣곤했다. 그의 대표작 “인성의 증명”을 각색한 영화도 전국각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였고 영화의 삽곡 “초모자의 노래”가 네 거리의 스피카를 타고 울려퍼졌다. 어찌보면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작품이 잡지발행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동안 독자들중에서는 “모리무라 붐”이 일었었다. 또 한편의 정채로운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악마의 락원”을 펼쳤지만 이번의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라 다큐물이였다. 처음에는 좀 실망한듯 했지만 독자들은 인차 책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공포와 경악속에 그 책을 접했다. 작품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일본군731 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라는 경악한 실상을 다루고있었다.  작품은 일본에서1982년에 련재되여 단행본으로 출간되였다가 중문으로 번역, 1985년경에 조선족독자들에게도 알려 졌으니 당시 락후한 우리 말 출판풍토에서 보면 그야말로 신속히 나온 책이였다. 일본판본의 원제는 “악마의 포식”,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악마의 락원”으로 개칭되여 나왔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 731 부대나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아세아 여러나라에서 일반에 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실상이였다.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흑룡강성 할빈지역에 주둔하며 생체 해부실험과 랭동실험등을 자행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731의 만행은 명명백백히 일어난 사실이였다는것이 밝혀졌다. 이 책이 나온 뒤에야731 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이 세상에 공개되였고 세상은 경악으로 입을 하느라지가 다 보이게 딱 벌리고 말았다.     저자 모리무라 세이이찌 2 여기서 “마루타”는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악마와 같은 일본군은 산 사람을 생명없는 마루타처럼 취급했다. 중국땅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근자에도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불과 한달전에도 길림성 기록보관소는 지난 1950년대 장춘시의 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일본 관동군 문서 10만여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최근 731부대와 관련된 문서들을 다수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731부대 관련 일본군 기록물은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건의 문서, 70여건의 시청각 자료다. 길림성 기록보관소는 일제 관동군이 패주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속에 묻은 이들 문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372명의 중국인, 조선인, 쏘련인 등이 731부대로 “특별이송” 돼 생체실험 등 세균 무기 개발의 도구로 씌였다고 발표했다. 731부대가 현재의 길림성 장춘시와 농안(農安)현 일대에서 세균전 준비 활동을 벌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관동군헌병대가 731부대에 수시로 “범죄자”들을 특별이송했다는것이다. 관동군헌병대가 1938년 1월 제정한 “특별이송에 관한 통첩”은 이송 대상자인 범죄자를 크게 간첩(파괴분자)과 사상범(민족해방운동가 및 공산주의운동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어 일제가 독립투사 등을 마루타로 몰아 생체 실험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731부대의 생체실험도   마루타중에는 조선인도 적지않은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조선인 4명을 포함한 318명에 관해서는 이름과 별명 공작명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학력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상세히 밝혀졌다. 조선인 6명중 신원이 나타난 4명은- 리기수(李基洙)ㆍ28ㆍ함북 신흥군 동흥면ㆍ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 30ㆍ함북 경성군ㆍ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함북 길주군ㆍ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ㆍ42 강원 회양군 난곡면ㆍ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것으로 기록됐다. 이 문건은 731문제 전문가 한효(韓曉)와 김성민(金成民) 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흑룡강성, 길림성 등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냈다. 이 문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사령관이 서명해 발송한것으로 표지에는 “특별이송”과 “절밀(絶密)”이라고 적혀 있다. 3 요즘 섬나라 지도자들의 행각이 심상치 않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아베는 앞장서서 자신들의 침략 력사를 부인하고 각가지 기행과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위안부는 필요한것이라고 버젓이 말하고 웃으면서 731 이라는 수자가 적힌 자위대 훈련기에 올라타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중국, 한국등 동북아시안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731이라는 수자가 적혀진 훈련기를 타고 웃고있는 아베는 그 수자에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여있는지 모를가?   아베는 정계에 금방 나온 황구지작(黃口之雀). 입술이 노란 새끼 참새, 풋내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731부대가 중국 및 아시아 여러개 국에 대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하면서 인류양심과 국제적 도리와 위배된 정반대인 잘못된 력사관을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다싶이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여 드러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질뿐이다'(欲盖彌彰 越抹越黑)”   아베는 지금 위험한 나락을 향해 활보하고있다. 일부 극우 열기에 눈이 가려 자신과 일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와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협력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리기적인 우경화의 행보,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 리익만을 차리려는 소아적 외교정책은 주변국과의 마찰과 불협화음을 피할수 없다.  아베의 행각은 그야말로 인류의 리성과 량심에 대한 새로운 “생체실험”이다.  마루타의 원혼(寃魂)이 아직도 거치른 만주의 옛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데… 2014년 1월 23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bbs_contents p{margin:0px;} The Last Of The Mohicans O.S.T. - Main Title          
82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댓글:  조회:2311  추천:12  2014-01-06
      왕붓으로 돋을새김 할 그 이름- 한락연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출간기념회에서   김 혁     몇해전부터 나는 내고향 룡정의 력사와 인물을 정리하는 작업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독립과 반일의 전초였던 룡정에 대한 긍지와 자호감을 머금고 수십차례의 답사와 취재끝에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물"을 집필하여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3년째 련재중입니다. 그 와중에 한락연이라는 이름과 다시금 만나게 되였습니다. 비록 예전의 력사총서들에서 한락연에 대해 접하지않은것은 아니지만 룡정의 대사기,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의 력사를 세세히 쫓는 가운데서 나는 한락연은 응당 기행문의 한단락으로 쉽게 묘사할 인물이 아니라 대서특필해야할 인물, 작은 글체로서가 아니라 대문자로 돋을새김해야할 인물임을 심심히 느끼게 되였습니다. 한락연, 그를 지칭하는 칭호는 많습니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람하게 적혀있는 그는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습니다  .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습니다  .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였던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락천적이고 활당한 인간미의 소유자로서 불굴의 혁명가적 기질을 드러냈으며 국제적인 반파시트로서 국경을 초월한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도 갖춘 걸출한 인물이였습니다. 그 생애에 초연이 피여 오르는 력사의 현장에서 수많은 역경을 겪어왔지만 운명의 굴레에 짓눌려 지내지 않고 예술가적 기질을 보이고 실천한 동시에 고매한 혁명가적 기질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한락연을 통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고난을 대하는 그의 락관주의적 풍모를 대할수 있을것입니다 . 주은래 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냐”고 애석해 했듯이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되여야 마땅합니다. 그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서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 부가 나왔을 뿐이였고 한국에서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 있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빼여난 혁혁한 인물인 그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전기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실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작가로서 반드시 서둘러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안고 한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인물전기 집필에 착수하기로 했다. 한락연 관련 신문기사, 인물소개들을 수차 간행물들에 기고, 발표하였고 연변일보 “종합신문”에 그의 인물전기를 8개월간 련재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사비를 털어 한락연의 자취를 찾아 심양, 할빈, 치치할, 상해등 지역을 답사하였습니다. 다년간의 작품활동에서 속필을 자랑하고있던 나였지만 이 한부의 인물전기의 완수에는 2년여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시간동안 함께 했던 많은 고마운이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한 생면부지의 조선족작가에게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고 진귀한 사진자료를 선뜻 넘겨주신 한락연의 딸 한건립녀사,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며 신뢰를 보여준 룡정 한락연연구중심의 책임자들, 나의 인물전기 집필에 련이어 도움을 준 적십자회 오장숙선생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신순칠화가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덕해의 이야기”에 이어 그와 두번째로 손을 잡았다. 작품의 정서를 민감하게 포착하여 핍진한 화폭들을 그려주어 작품의 생동성을 보태주었습니다. 한석윤 회장에게 머리숙여 감사를 전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한생을 바치고있는 그는 지역사회와 청소년들을 위한 많은 일에 로심초사하는 와중에 아이들을 위한 인물전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애초의 주덕해의 이야기로부터 이번의 한락연 인물전이 나오기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면려를 주었습니다. 변혁기, 우리 민족 공동체가 미중유의 부침을 겪고있는 시점에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저의 창작성향은 근년들어 뚜렷이 바뀌고 있습니다. 금후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으로서의 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펴내는 작업을 이어나갈것을 약속드립니다. 더 성숙된 사유와 문체로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우리 민족의 제반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김염, 김약연 윤동주 김학철 리홍광 리화림 양림 정판룡등 인걸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펴낼것이며 반드시 펴낼것입니다. 이를 저의 창작스케줄의 가장 뚜렷한 시간대에 놓고 그 결과물을 보여줄것입니다. 이제 곧 그 일환으로 “김학철”과 “윤동주”의 이야기를 들고 여러분과 만날가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1    조선족위인의 업적을 기리는 드라마틱한 인물전기의 매력 댓글:  조회:2283  추천:6  2013-12-27
조선족위인의 업적을 기리는 드라마틱한 인물전기의 매력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를 평함   리광일(연변대학)   조선족 중견작가 김혁이 중국조선족청소년을 위한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를 펴냈다. “인민예술가”, “중국의 피카소”로 일컬어지며 주은래총리가 생전에 “왜 한락연을 위한 전기물이 나오지 않느냐”하며 애석해했던 한락연의 전기가 조선족작가에 의해 드디여 완성되였다. 이는 한락연에 관한 처음으로 되는 인물전기이며 특히 조선족에 의해 만들어진 첫 청소년인물전기라는 점이 주목된다. 인물전기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로써 조선족작가들도 뒤늦게 주목하였고, 요즘들어 우리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의 “봇물”이 터졌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인물전기는 거의 불모지인 상황에서 김혁작가가 처음으로 ≪주덕해의 이야기≫로 이를 개척해냈고 또한 이번의 작품으로 이 령역을 계속 개척해가고있다.   작품 ≪한락연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은 특점을 지니고있다. 첫째, 규묘가 방대하다. 15만자의 편폭에, 16개 장으로 구성되였으며 그 내용은 한락연의 인생전반에 소급되였다. 구체적으로 룡정촌 토성포(지금의 지신진 공농촌)의 조선인가정에서 태여나 간도국립보통학교 (그 전신이 서전서숙)에서 공부를 마친 한락연의 출생경위, 1919년, “3.13”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여 태극기와 프랑카드를 만들어 시위자들에게 나누어준 이야기, 일제군경의 검거를 피해 상해로 가서 상해미술전과학교 서양화학부에 입학한 이야기, 1923년, 여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조선족 그리고 중국미술계에서도 가장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과정,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심양에 와서 당의 사상을 전파하고 조직을 건설하는 와중에 동북의 첫 사립 미술전과학교인 봉천미술전과학교의 설립과정, 1925년 할빈에서 중국공산당 동북지구의 통일조직인 중공만주림시성위를 설립한 경위, 치치할에서 공원감리의 신분으로 당사업에 종사하면서 치치할의 하나의 경관인 독특한 유럽식정자인 “격언정”의 설계, 1931년, 프랑스 루브르예술학원에 입학하여 프랑스에서의 고학, 1937년  프랑스와 독일에 류학한 10명의 공산당원과 단원의 일원으로 양호성장군과 함께 귀국, 무한으로 가서 주은래가 령도하는 “동북항일구국총회”에 참가하여 펼친 구국운동, 연안에서 모택동의 접견을 받은 이야기, “국민당 당정위원회” 소장지도원의 신분으로 산서성일대의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주둔지를 다니며 진행한 통일전선사업, 1940년,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여 서안 “국민당특종구류소”에서 치른 옥고, 석방된후 제자와 함께 섬서와 사천지역에서의 사생, 서북에서 화가의 신분으로 국민당고급장령들과 사귀면서 서북지역의 평화적해방을 위해 펼친 통일전선, 신강, 감숙, 청해 등지를 다니며 현지풍물을 그리고 돈황과 키질의 천불동석굴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 돈황에서 프랑스류학시기의 친구 상서홍(常书鸿)과 함께 한 벽화의 모사, 조수들을 거느리고 키질 천불동에서 벌린 3개월간의 발굴과 모사작업, 비행사고로 인한 사망, 후일담으로 한락연의 고향 룡정시에서 조성한 한락연의 이름으로 명명된  “락연공원”의 신축 등 한락연의 일대기를 생동하게 펼쳐보였다.   둘째, 예술가이고 혁명가이며 동방인인 한락연의 인생을 다채롭게 보여주었다. 한락연에 대한 칭호는 많다. “인민예술가”, “정치활동가”, “반파쑈투사”, “동북지구 공산당의 초기 창시자”, “조선족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예술가”, “중국의 피카소” … 여러가지 타이틀로 력사의 갈피에 그 이름이 우련히 적혀있다. 한 사람을 두고 이렇듯 평가가 다채로운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그만큼 다채롭다는 방증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한 지성인들의 귀감이였다. 이주민의 후예로서 룡정에서 출생한 한락연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혼신을 바쳤으며 국공량당의 통전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는 락천적이고 활당한 인간미의 소유자로서 불굴의 혁명가적 기질을 드러냈으며 국제적인 반파시스트로서 국경을 초월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도 갖춘 걸출한 인물이였다. 또한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였던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비록 그가 살았던 세상과는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많은것이 바뀌여버렸지만 그가 보여준 삶과 정신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셋째, 기성인물전기, 평전 등의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기타 장르의 기법들을 재치있게 활용하였다. 전작인 ≪주덕해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몽따주수법을 도입해 전국과 세계각지를 주름잡은 한락연의 방대한 이야기들을 립체감있게 다각적으로 정리하였으며 또한 이야기의 공능을 충분히 확대시켜 자칫하면 년보식으로 풀이될 인물전기를 재미있게 엮은것이 특징이다. 한 인물의 사상적, 정신적 궤적을 깊이있게 다뤄야 하는 평전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력사와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이다. 감흥보다는 리성을 앞세우는 인물전기이지만 소제목으로부터 문자구성에까지 작품전반에 걸쳐 시종 아름다운 문체를 선보였다. 뿐만아니라 전작인 ≪주덕해의 이야기≫에 비해 스토리를 집약해 엮었고 방대한 사건과 인물들을 선정해내는 취사선택의 경지가 더 성숙했음을 보여주었다.   넷째, 기존자료를 충분히 참조하였지만 직접 새롭게 조사하고 발굴한 자료들이 돋보인다. 한락연에 대한 조명은 여러모로 진행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정한 인물전의 결여로 그의 생애는 편파적으로 알려져 있어 커다란 유감을 남기고있다. 중국에서도 그에 대한 추모문집 한부가 나왔을 뿐이였고 한국에서 그에 대한 조명한 문장이 더러 있으나 겨우 수만자 미만, 몇편 정도의 미비한 량에 그쳐있었다. 인물전기라면 출처와 인용에 대한 근거확보는 인물전의 리얼리티를 담보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것이다. 김혁작가는 이미 발표된 문헌에만 매인것이 아니라 방대한 관련 도서는 물론 사료의 연구에서 평면화되고 단일화된 연구자료뿐아니라 영상물까지 대량 보이면서 인물전의 신빙성과 가독성을 높였다. 뿐만아니라 위인에 대한 경의감을 품고 그의 자료확보에 모든 힘을 몰부었는바 사비를 털면서 동북지구를 포함해 한락연의 발자취가 담긴 곳들을 답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력사에 묻혀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수집하여 이 작품에 체현함으로써 작품의 전면성을 최대한 기했다. 그리고 한락연의 가족을 통해 진귀한 자료의 저작권1차성 사용권을 부여받음으로하여 기존 문장들에 비해 1차성적자료의 풍부성을 확보하였다. 김혁작가는 한락연의 국가와 민족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심심한 사랑과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몸소 실천을 보여준 인생, 중외를 넘나들며 펼친 혁명활동, 예술활동들과 그의 중국과 서방예술에 대한 리해 그리고 력사와 생활에 대한 감수와 자세를 다각적으로 그려냈다.   주지하다싶이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중국조선족의 수많은 인걸들중에서도 빼여난 혁혁한 인물인 한락연에 대한 체계적인 인물전기조차도 없다는것은 어찌보면 우리 후세로서는 실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작가로서 반드시 서둘러 기록해야 할 의무감을 안고 같은 고향의 위인에 대한 숭모의 감정을 품고 김혁작가는 인물전기 집필에 착수해 2년간의 신고끝에 이 작품을 내놓았다.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시대의 단면을 총체적으로 증명한다. 이 인물전은 한 화가의 파란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는 한편, 민족의 항일, 중국공산당의 창건, 국공합작, 중국의 첫 미술학원의 탄생, 고고학의 발굴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중국력사와 중국미술사의 발전흐름을 보여줌으로써 중요한 사료적가치를 갖고있다. 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파란많은 근대중국의 력사를 파노라마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또 이 인물전의 가치를 사고싶으며 따라서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되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김혁작가는 몇해전부터 한락연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사비와 발품을 팔아 연구한것으로 알고 있다. 또 이 몇년간 한락연에 대해 여러가지 쟝르로 해내외에서 대량의 한락연 관련 전기와 신문기사, 칼럼, 수필들을 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차후 련이어 여러부의 청소년인물전을 펴낸다고 알고있다. 력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연예만 흥행하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하면 김혁작가의 청소년인물전기사업이 우리 후대들의 머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민족의 발전에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큰 성원을 보내지 않을수 없다. 앞으로 더욱 성숙되고 완성도가 더욱 높은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는바이다.   2013년 12월 26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0    붉은 별과 파란 눈의 저널리스트 댓글:  조회:2620  추천:10  2013-12-24
  인물만필   붉은 별과 파란 눈의 저널리스트   김 혁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간한 “스노 평전”     1, 지난세기 80년대까지만해도 집집마다 모택동주석의 초상화며 빠지들을 갖추어두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그 빠찌들을 웃방 정면의 벽에 붉은 주단을 걸고 그우에 주렁주렁 달아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어린 내가 아끼는 빠찌가 있었다. 조금은 젊은 나이의 모택동주석이 연안요동앞에서의 모습. 풀빛 군모우에 반짝이는 붉은 별이 유난히 눈길을 끌던 삐지였다.  어려서 그런 오각별 하나 가져봤으면 하는것은 당시 어린 홍소병들의 숙망이였다. 그 사진을 외국사람이 찍어주었다는것을 알게된것은 썩후의 일이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거 스노(Edgar Snow)가 찍었다고 했다. 서방 기자로서는 최초로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던 섬서성을 방문취재해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펴냈는데 그 책은 80년대 중국에서 초인기를 누리며 베스트셀러로 되였다. 그후 나 역시 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에드거 스노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요즘 에드거 스노의 평전이 뒤늦게 출판되였다. 용기와 재능을 갖춘 저널리스트에 관한 보고서인 동시에 그가 사랑했던 중국의 당시의 시대상을 읽을수 있는 매력적인 평전이였다. 그 평전을 읽으며 중국을 사랑한 이 외국기자의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2,     스노는 미주리대학교 신문대학 출신으로 졸업후 신문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평생 기자로 지냈지만 처음부터 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증권투자로 약간의 돈을 거머쥔 이십대 초반의 미국인 청년은 머리도 식히고 삶의 에너지도 재충전할 겸 중국려행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서 목도한 중국의 모습은 이 청년의 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애초에 스물두 살의 청년 스노는 한 1년쯤 세계를 돌면서 모험을 즐길 마음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쳐진 중국을 목격하면서 그 참상은 그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휴머니즘을 부추겼고 거대한 시대의 흐름은 그를 력사의 중심부로 이끌어들였다.       젊은 시절의  에드거 스노 1936년 스노는 송경령의 도움으로 서안을 거쳐 섬북 소베트지역에 도착했다. 이 기간 그는 모택동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각 지방에서 취재를 진행하면서 중국 2만5천리 장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이듬해에 그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을 발표했다. 당시 국민당정권이 장기간 거짓 선전을 진행한 탓으로 국민당 통제 구역내 인민들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홍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때 스노는 홍군 지역에서 취재를 진행한 외국 기자중의 첫사람으로 아무런 정치적 편견과 당파 색채가 없는 립장에서 직접 따낸 대량의 취재 자료에 근거해 객관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했으며 전중국 나아가 전세계가 진실된 중국공산당, 중국 홍군 그리고 지도자들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책으로 당시 곤경에 처해있던 중국공산당과 홍군에게 큰 도움을 줬고 그 역시 이 책으로 세계적인 명예를 취득했다. 이후 중국에서 많은 글과 책을 발표했고, 중국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모택동과 함께 한 스노     1941년 중국에서 결혼한 안해 님 웨일스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2년 전쟁 특파원으로 세계각지를 돌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취재했다. 력사의 기록자로서 스노는 북경과 모스크바, 뉴델리와 워싱턴서울 등지를 종횡하며 모택동, 송경령, 로신, 루즈벨트, 간디, 네루,등 수많은 인물들과 만나 력사가 이루어지는 격변의 현장에서 려행자의 감수성과 언론인의 집요함으로 세계사적인 사건들의 진실을 포착해 서방에 알렸다.   공산주의에 온정적인 그의 태도때문에 매카시즘이 만연하던 1950년대 미국에서는 활동에 제약을 받아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했다.   기자로서 스노의 취재 범위는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기울인 곳은 중국이였다. 그는 끝까지 혁명 중국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다. 1960년과 1964년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주은래와 회담했다. 1969년에도 방문하여 중국 지도부로부터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다면 우리는 그를 환영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때까지 중국과 미국은 국교를 수립하지 않은채 랭랭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닉슨이 방중하기 불과 엿새 전에 “자신이 뿌린 씨앗의 발아를 보지 못한 채” 1972년 2월 15일, 제네바에서 암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뉴욕과 북경에 나뉘여 묻혔다. 그가 암으로 투병하자 주은래총리는 그를 위해 중국인 의사들을 파견하기도하였다.   3,   스노의 이름은 또 한 명의 작가 님 웨일스와 련결돼 있었다. 님 웨일스는 중국 땅에서 싸웠던 조선인혁명가 김산의 삶을 그린 “아리랑”의 저자이다.   스노의 부인 님 웰스   자유분방하고 독립심이 강하며 미모와 두뇌를 겸비한 녀성인 님 웨일스는 스노와 비슷한 무렵에 중국에 와 대사관 직원, 학생, 자유기고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던 중 스노와 만나 열애에 빠졌다. 스노역시 무한에 체류하던 시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조선족 화가 한락연과도 깊은 우의를 맺었었다. 님웰스는 스노와 결혼한후 남편과 함께 중국을 누비며 중국혁명가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스노는 부인 님 웰스와 함께 제국주의와 자유주의와 전체주의가 뒤엉켜 피비린내 나는 력사를 만들어내는 20세기의 현장을 온몸으로 관통한 빼여난 저널리스트였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12월 23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9    조선의용군 작가 김사량 댓글:  조회:4444  추천:12  2013-12-02
 . 인물만필 .   조선의용군 작가 김사량   김 혁      연극 "노마일기"의 한 장면 일전 연극 “노마일기”가 한국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되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의 작가 김사량의 삶과 문학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은 연극은 김사량 작가의 “노마만리”를 원작으로 이외에 “김사량 평전”,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등 여러 편의 론문과 영상기록, 사진 등을 분석해 무대에 올렸다. 연극에서 작가 김사량은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던중 신변의 위협 느끼고 일본으로 도피한후 중국으로 노마만리의 려정을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1941년 12월의 호가장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겨울의 새벽,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조선의용군의 꽃다운 젊은이 네 명이 숨지고 한명은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총상을 입은 젊은이는 일본의 나카사키 감옥으로 압송되여 옥고를 치르다가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 젊은이가 바로 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인 김학철 선생이다. 김사량은 이 호가장전투와 조선 의용군의 삶에 대해 상세히 쓰기 시작한다. 연극은 김학철이라는 인물을 통해 김사량의 모습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평양에서 김사량과 깊은 우의를 맺었던 김학철, 일본감옥에서 석방되던 당시의 사진이다.     풍운의 작가 김사량은 1914년 평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김시창으로서 사량은 필명이다. 1928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광주학생운동 2주년을 맞이하여 일어난 동맹휴교사건에 관여하였다가 퇴학당하였다. 학교를 그만 둔 후 1932년 가을 무렵에 교토 제국대학에 다니고 있던 형 김시명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큐슈에 있는 사가(佐賀)고등학교 입학하여 2학년 때인 1934년에는 식민지 시대 빈민굴인 평양 토성랑에 살던 최빈민의 생활을 묘사한 소설 “토성랑” 등의 습작을 창작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에 입학하여 동경을 무대로 하여 형성된 조선인 지식인들의 그룹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동경제국대학의 독일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이 된 “제방” 동인에 참가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제방” 잡지에 “토성랑”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14년에 태여나 동경제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40년 일본어로 쓴 소설 “빛 속으로”로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작품으로 선정되였다. 이후 여러 작품을 발표하는데, 주로 식민지 하의 조국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일본과 조선에서 식민주의의 지배에 협력하고 있는 인간군상을 강하게 비판하는 작품들이였다. 1940년 12월 일본 동경 소산서점에서 일본어 소설집인 “빛 속에서”를 발간하였다. “사상범예비구금법”에 의해 예비검속되였던 그는 1942년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와 소설 쓰기에 매달렸다. 그해 4월 제2소설집 “고향”을 일본 교토 갑조서림에서 출간하였다. 많은 작가들이 식민주의에 협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역작 “태백산맥”을 1943년 2월부터 그 해 10월까지 『국민문학』에 연재하여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 사진으로 겨우 몇장 안되게 남은 김사량의 모습 (왼쪽)     1945년 5월 국민총력조선련맹 병사후원부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된 조선인 출신 학도병을 위문하고자 북경에 갔다. 김사량에게 이는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했다. 일본어로 저작 활동을 하면서도 그안에 나라잃은 민족의 현실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것을 잊지 않았던 작가였던 그는 일제로부터 량심에 반하는 “황군 위무” 의 임무를 강요받게 되자 항일 근거지로의 탈출을 노렸던것이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다행히도 믿을 만한 끈을 잡아 탈출길에 오른다.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느라 밤길을 달리기도 하고 처음에는 기차를 리용했지만 나중에는 나귀 를 타면서 탈출 행로를 이어 마침내 연안에 도착했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항일기행문 “노마만리”는 바로 그 탈출의 자초지종을 다루고 있다. 광복과 더불어 조선의용군 선발대의 일원으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그 해 12월 10일 서울을 방문하여 12월 13일 조선문학동맹 결성식에 참가하였고 “노마만리”를 잡지에 련재하였다. 그후 북조선예술총연맹의 국제문화국장직을 맡으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희곡 “뢰성”,”호접” 등의 희곡도 본격적으로 창작하였다.평양에 머물렀다. 1946년 10월 단행본 “노마만리”를 발간하였다. 1948년 1월 해방후 창작한 작품을 모아 작품집 “풍상”을 발간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종군하였다가 후퇴하면서 원주 부근에서 락오하였는데 후퇴길에 병사한것으로 추정된다.   2006년 중국 연길에서 “김학철 김사량 항일문학 및 조선의용군연구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2010년8월 5일에는 항일문학가 김사량과 김학철의 위업을 기리는 문학비가 지난 5일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 입구에 세워졌다. 그날 하북성원씨현인민정부와 연변작가협회, 한국실천문학사가 공동히 주최한 “김학철항일문학비”, “김사량항일문학비” 제막식이 당년 김학철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그후 김사량선생이 그곳을 지나면서 유명한 전기문학 노마만리를 써냈던 하북성원씨현흑수하향호가장촌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중국 하북성 호가장에 세워진 김사량 문학비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60주년 및 세계반파쑈전쟁승리 60주년에 즈음하여 열린 중요한 국제행사였다. 조선에서는 일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로 김사량에게 뒤늦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했다. 재일교포문학의 1세대 작가로 아쿠다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촉망받는 작가, 중국 태항산 지구의 항일 근거지로 탈출하여 일제와 맞서 싸웠던 망명작가, 한민족 근현대사의 이념적 갈등과 혼란으로 남과 북에서 동시에 소외됐던 작가 김사량, 그는 일제치하 저항문학의 대표로 언급되는 윤동주, 리육사, 한용운등과는 또 다르게 적극적인 저항을 함으로써 “일제 암흑기의 한반도 근대문학사를 밝힌 빛나는 문학인”으로 뒤늦게 떠오르고 있다.   참고문헌- “김학철 평전” (김호웅, 김해양 지음. 실천문학사 2007년) “김사량평전” (안우식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0년) “빛 속으로” (김사량 지음. 소담출판사 2001년)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김학철문학연구회 지음.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8    꼭두각시들의 궁전 댓글:  조회:2759  추천:13  2013-11-12
. 력사기행.   꼭두각시들의 궁전 - 장춘 위만황궁을 찾아서 김혁     황금의 시월, 내가 창작, 련재중인 장편력사소설 “완용 황후”와 인물전기 “마지막 황후”의 집필을 위해 장춘 위만황궁(伪滿皇宮)을 찾았다. 몇해전 문학상시상식 참가차 다녀온후로 오랜만에 찾아보는 장춘이였다. 오늘날의 장춘은 길림성의 성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 “자동차, 삼림, 영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80년 전 장춘은 일제의 사주와 협박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수도였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자 이미 고리삭은 청나라는 물먹은 토담처럼 주저앉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는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채 퇴위하게 된다. 이어1924년 풍옥상 (冯鈺祥)의 부대에 의해 부의는 력대의 왕후장상들이 기거하고있던 황궁에서 가차없이 쫓겨났다.  1932년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천진에 기거하고있던 부의를 장춘으로 데려와 회유와 공갈로 이른바 만주국을 세운다. 이는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통해 중국의 동북땅을 침노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였다. 그때부터 동북 지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전락되였다.   위만황제 부의의 표준상 위만황궁을 찾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장춘 기차역에서 동북쪽으로 두 정거장 거리, 1.5km가량 떨어진 광복로(光复路)5호에 위치해 있었다. 위만황궁은1962년 위만황궁박물관으로 개조되였다.  부의가 위만주국의 괴뢰황제로 있을때 거주하던 궁전옛터우에 건립한 궁전옛터형박물관이였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우에 “국가AAAAA급관광명승구”라는 패쪽이 유표하게 걸려 있었다. 80원씩하는 입장권을 끊고 들어섰는데 명색이 황궁이지 그 규모가 작았다. 그 규모가 13만7,000㎡에 달한다고 했다. 비록 황색 기와를 사용해 황궁임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이미 존위를 상실한 꼭두각시 황제를 위한 공간이라 그런지 황궁이라는 느낌보다는 대저택이란 느낌을 줄뿐이였다. 일제는 소금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얼렁뚱땅 황궁으로 개조하고 부의를 들였다.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에 소금 보관창고가 그 일대에서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창고가 황궁으로 변신하는 이변을 겪게 된것이다.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수 밖에 없었다. 수인(囚人)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궁핍하게 지내며 1932부터 1945년까지 13년 4개월 동안 “조롱속의 새”로 머물렀다.   부의의 집무실 앞에서의 필자 위만황궁은 크게 부의가 공무를 보던 외정(外廷)과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内廷)으로 나뉘여 있었다. 외정은 부의가 정무를 처리하던 장소로 부의의 사무실이 있는 근민루(勤民楼)와 회원루(怀远楼), 가락전(嘉乐殿)이 외정에 속하며, 이 외에도 화원, 가산(假山), 양어지(养魚池), 수영장, 테니스코트, 골프장, 승마장, 창고 등 기타 부속장소가 속한다. 내정(内廷)은 부의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구역으로 그 중 집희루(辑熙楼)는 부의와 그의 황후 완용(婉容)의 처소였으며, 동덕전(同德殿)은 부의의 첩이였던 복귀인(福贵人)의 처소였다. 위만황궁내의 크고작은 10여채의 건물은 벽돌과 나무 구조로 된 중국의 전통적인4합원 건축과 유럽식의 층집, 동양식전각 풍격을 두루 보여주고있었는데 그 혼잡함이 엇갈린 모양은 위만주국의 식민지색채와 위만황제의 괴뢰성을 띠고있는듯 했다. 전시관에는 위만주국의 유물과 문서등 당시의 시대상을 알수 있는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여 있있다. 부의가 타던 자동차로부터 모자, 개화장,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쓰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여 있었다. 부의의 자서전, 부의에 대한 연구서적들 그리고 부의가 탔던 자동차 모형도 파는 등 기념물도 다양했다.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 집희루를 자세히 돌아보았다. 이곳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운명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 집희루는 19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길림-흑룡강 대외 교통국 건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집희루의 랑하에 완용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랑하에 걸린 사진속에서 보이는 완용은 무가내의 초췌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있었다. 완용의 일생은 가히 비극적이였다. 황후로 책봉된 그 날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였다. 이 위만주국 황궁에서 완용은 “꼭두각시 황후”, “괴뢰황후”로 력사의 정곡에 위배된 왜곡된 삶을 살았다. 괴뢰황제의 황후로서 완용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는 너무나 미약하고 난처한것이여서 생활에서의 불여의와 정신적 고통을 피할수 없었다. 결국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다 곁에 친지 한 사람없이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감옥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거두어 줄 사람조차 없은 그의 시신은 연길 모아산의 어느 산자락에 무주고혼으로 묻혔다.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 (밀랍인형) 일본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의 밀랍인형도 있었다. 당시 황제는 북경 자금성에서와 같은 위용을 이미 잃고있었다. 수족을 동아줄에 얽동이고 그 동아줄에 의해 움직여야하는 꼭두각시처럼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인들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매달 관동군 사령관을 찾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해야 했다. 그저 꼭두각시 역할밖에 할수없었던 부의의 궁상이 경직된 인형에 그대로 내비쳐 있었다. 황금련휴기간이라 황궁을 찾아 력사의 유적을 밟고 그 정체를 확인하려는 유람객들로 황궁의 랑하와 층계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비였다. 대만에서 까지 찾아온 유람대오도 있었다. 위만황궁을 나오니 바로 곁에 “9.18 만주사변 전람관”건물이 일떠서 있다. 이곳은 일본의 만주 침략사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이다. 위만황궁은 지금 북경의 자금성, 심양의 고궁과 함께 중국 3대 궁정 유적지로 지정, 일본의 중국 침략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변보되여 있다. 그리고 1981년에 길림성인민정부는 위만황궁을 길림성문물보호단위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위만황궁박물관은 이미 홍색관광, 문화레저, 관광비즈니스 봉사를 두루 갖춘 찾아볼만한 인문풍경구로 부상하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 야욕이 그대로 드러난 곳인 위만주황궁은 오늘날 여러 가지 내함과 독특한 가치로 하여 중국 근대식민지문화의 전형적인 기념지와 경고성적인 교육기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제곡
77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댓글:  조회:2414  추천:15  2013-10-12
. 칼럼 .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김 혁 해마다 시월이면 한차례의 이채로운 문학수업을 받는 기분이다. 수확의 계절인 이 달이면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TV, 인터넷, 핸드폰을 풀가동해놓고 그 소식을 기다리노라면 그야말로 월드컵시즌최강전의 결과를 기다리는것같은 마음이다. 올해 후보로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유력했다. 문학도시절 부터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하고 읽을지경으로 그에 대한 광팬인 나 역시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지난해 중국 작가 막언에게 밀렸듯이 이번에도 그는 고배를 마셨다. 여섯번이나 노벨상후보에 추천되였던 그에 대해 평단은 “가장 비장한 후보”라는 수식까지 달아주었다. 우리말 언어권에서 모두가 기대하던 한국의 원로시인 고은 역시 락방했다. 우리시간으로 10일 저녁 7시경, 스웨덴 한림원은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카나다의 녀류작가 앨리스 먼로라고 선포했다. 우리에게는 많이 생소한 작가, 중국에서도 그의 작품은 “떠남 (逃离)”이라는 단편소설집 한부가 달랑 소개 되였을뿐이다. 앨리스 먼로는 녀성으로서는 13번째, 카나다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북미권에서 수상자가 나온것은 1993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0년 만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 사상 처음으로 단편소설로 상을 거머쥐였다는 점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스토리텔링이 정교하다. 명료하고, 심리적인 리얼리즘을 담아냈다”고 시상 배경을 설명했다.  “섬세한 관찰력과 빼여난 구성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한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 앨리스 먼로는 그동안 세계 주요 언론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체호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전문작가”, “북미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려왔다. 1931년 캐나다 토론토 서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녀는 1968년 단편소설집으로 등단, 이어 그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들의 춤”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70년대 미국의 정예 잡지 “뉴요커”에 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세계3대문학상인 맨 부커 국제상을 비롯, 유수의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 먼로는 그간 “왜 장편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아 왔다고한다. 하지만 그의 단편에 농축된 성찰과 감동은 웬만한 장편에 못지않았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의 엥룬트 종신 사무총장은 "그녀는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은 단편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택했고 그것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녀는 단 20 페이지 작품을 통해 보통 장편소설 한 편보다 훨씬 더 많은것을 말할수 있다. 그녀는 단편소설 하나에다 수십년간을 성공적으로 집어넣을수 있다"라고 극찬했다. 앨리스 먼로는 수상 발표 직후 카나다 관방TV의 전화인터뷰에서 “단편이란게 단순히 장편을 쓰기 위해 끄적거리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앨리스의 단편집 "떠남" 금번의 노벨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창작성향이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크다. 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작가이고 보면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그 창작초지를 잃거나 홀시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진들보다는 많은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 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연변일보" 2013년 10월 12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6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 창작열에 대한 진맥 댓글:  조회:3240  추천:10  2013-09-26
    . 대 담 .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열에 대한 진맥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사회자: 신금철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인물전기 “한락연”, “주덕해”의 저자)   첫 방송  2013.  08. 28   16:00FM 재방송   2013.  08. 29   08:00AM 재방송   2013.  08. 29   23:20AM         신금철: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조선족문단에서는 인물전기창작열이 한창 일고 있습니다. 저희 문학살롱에서 이미 소개드린 “한락연전”, “정률성평전”외에도 “주덕해평전”, “양림평전”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전기들이 창작되였고 또 지금 많은 작가들이 인물전기창작 기획을 세우고 자료를 수집하고 답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물전기창작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사조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중국조선족문단의 중견소설가이며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열풍에 대해 진맥해보려 합니다. 인사. 조선족위인들의 인물평전창작, 아마도 요사이 우리문단의 신선한 기류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김혁: 요즘 우리문단과 출판계의 이슈를 뽑으라면 아마 인물전기창작 열풍일것입니다. 인물전기라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를 조선족 작가들도 뒤늦게 주목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우리문단에서는 근년들어 인물전기서의 창작과 출품이 마치 "봇물”이 터진듯 합니다.   신금철: 중국조선족문단 일반을 아울러보면 지금 어떤 작품들이 나왔는지 소개주시지요.   김혁:   그 몇부를 살펴보면 우선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와 김학철옹의 자제분인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이 중후한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평전은 김학철옹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조선족문학의 거목이며 비운의 작가인 김학철옹의 삶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비장하게 손에 잡힐듯 그려져 있습니다. 책은 한국의 최대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에 의해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지도자의 한분인 "조룡호 전기” (안룡정 저)도 나왔습니다. 전기는 자치주 주장직을 력임했던 조룡호의 항미원조시기로부터 자치주창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 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발전력사를 료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습니다는 평판을 받고있습니다.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김수영 저)도 출간되였습니다. 40만자에 달하는 작품은 중한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한 한 애국화교의 노력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연변대학 전 총장 림민호 평전도 발간됐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김호웅 저)라는 부제가 붙은 평전에서는 연변대학교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한 교육자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이 평전은 지난해 소수민족 준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녔지요.        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던 최채에 대한 인물전기 "불멸의 영령”(고 류연산 저)도 조한문으로 출간되였습니다.        오장숙평전 "내를 건너 고개 넘어”도 북경민족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역시 고 류연산 작가에 의해 집필된 "내를 건너 고개 넘어”는 풍부한 사료로 전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새중국이 배양한 우수한 조선족간부 오장숙의 일생 사업, 학습과 생활을 기록해 냈다. 평전은 중국조선족의 발전과 연변 여러 민족인민의 단결진보사업력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정계와 학계의 정평을 받고있습니다.        “아시아 주단왕”으로 불리는 광주모드모아그룹 리성일회장의 일대기를 엮은 인물전기 ”꿈의 마라토너”도 일전 출간되였습니다. 전기는 연변의 오지에서 태여난 한 조선족 기업가가 전국정협위원 그리고 아시아 주단왕으로 부상하기까지 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엮어보이고있습니다. 원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는 "파란만장한 인생려정에서 성공의 신화를 엮은 리성일은 꿈과 야망을 지닌 젊은이들한테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다”라며 책을 독자들에게 권장했습니다.        다음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여나 30년대 상해를 무대로 맹아상태의 중국영화계를 주도하며 "영화황제"로 등극한  김염의 예술생애를 그린 인물전기 "영화황제 김염"(김창석)도 출판됐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주장인 주덕해의 일대기를 다룬 “주덕해평전”도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을 계기로 출판되였습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부주석에 의해 창작되였지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자이자 조선인민군 군가 작곡가이며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 3대 음악가로 지칭되는 "정률성 평전”도 리혜선 소설가에 의해 집필, "장백산지"에 지금 한창 련재중입니다. 리혜선 소설가는 "우선 중국에서도 위인이지만 조선족으로 놓고 볼때에도 크나큰 자랑이고 존경하는 위인이기에 민족작가로서의 사명감으로 집필에 착수하게 되였습니다”고 창작동기를 밝혔습니다. 평전은 처음으로 중국작가협회 중점 지지작품으로 선정되여 이슈를 일으켰지요.        다음 조선인으로서 홍군의 2만5천리 장정길에 오른 양림의 려정을 쓴 "양림평전"도 리광인씨에 의해 창작, 출간되였습니다. 이 작품 역시 중국작가협회 중점지지작품으로 선정되였습니다.        그리고 룡정이 낳은 걸출한 조선족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로서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한락연에 대한 인물전기도 제가 집필해 연변일보 "종합신문"에 8개월여에 거쳐 련재를 끝냈습니다.   신금철:   이런 인물전기의 출판은 독자층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이런 인물전기들을 어떻게 분류할수 있을가요?   김혁:   대량 산출되고있는 인물전기는 점차 새로운 독자군을 형성하고 있고 그 력사와 인물에 대한 진실한 기록으로 독자와 문단의 공명을 자아내고있습니다. 픽션(허구)작품을 압도하는 기세로 논픽션(비허구)쟝르의 붐을 일으키고 있는거지요.        그러면 우선 인물전기라는 쟝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사실 인물전기문학은 여러가지 종류로 분류 할수 있습니다. 전기물: 전기물은 어느 실존 인물의 생애를 동시대 또는 후세 사람이 기록한것입니다.   례를 들어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인 로신의 생애에 관한 전기물입니다. 로신에 대해서는 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조명해왔습니다. 그중에는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주위의 문인, 학자들이 쓴 경우도 있고 로신이 작고한뒤 그 분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하여 쓴 경우도 있습니다. 자서전: 실존 인물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것입니다.   례를 들면 저명한 사학가이자 문학가인 곽말약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사천성에서 태여나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문학창작을 시작, 문학도로부터 갑골문에 대한 연구로 유명석학으로 발돋움하기 까지 자신의 생애를 자서전으로 출간하였다. 그 자서전의 수량은 방대하여 "북벌", "홍파곡" 등 9권이나 된다. 유명한 자서전으로는 인도의 "성웅" 간디의 자서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1년 서안에서 1937년판 "모택동자서전"이 발견되여 재판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자서전으로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의 "나의 전반생"이 있습니다. 요즘 서점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자서전은 한국의 첫 녀대통령 박근혜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绝望锻炼了我)"이다. 역림출판사에 의해 중문으로 번역, 출간되였습니다. 자서전은 한국 수뇌의 딸로 태여나 젊은 나이에 부모를 련이어 잃고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소박한 필치로 들려주면서 그녀를 버티게 한 신념과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자서전의 갈피갈피에서 건넵니다.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인생 전반은 물론 한국 현대사가 담겨져 있지요. 회고록: 과거의 일을 그 관계자가 회상하여 집필한 기록이다. 기록한 사람의 생애를 중심으로 한 자서전적인 기록과 자신이 지켜본 력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 있습니다.   중국현대문학의 거장 파금의 "수상록"이 그 일례입니다. 비록 수필형식으로 씌여졌지만 회고록의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이 "수상록"에서 파금은 문화혁명에서 피부로 겪은 피해를 회고해 보는가 하면 자기 문학인생에 대한 총결산, 그리고 문학 동지들에 대한 회고 등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고록으로는 영국수상 처칠의 전 12권으로 된 전쟁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 있습니다. 평전: 평전은 말 그대로 비평을 곁들인 전기입니다. 전기물에 글쓴이의 평가가 담긴 기록이지요.   요즘들어 중국의 출판계에서 가장 많은 판본으로 나온 평전중 하나가 "공자 평전"입니다. 연변의 서점가를 살펴봐도 문화석학인 림어당이 쓴 공자로부터 중앙텔레비죤 백가강단의 저명한 강사 포붕산(鲍鹏山)교수의 공자, 그리고 일본의 유명한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쓴 공자 등으로 10여권은 실히 되게 서점가에 올라 있습니다. 력사적으로 유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유교의 창시자이자 아이콘인 공자에 대해 다가가려는 독자들의 구독열은 그냥 식지 않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렬전: 비슷한 일이나 업적을 남긴 사람의 개별적인 전기를 함께 모아 적은 것입니다.   례를 들면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것입니다. 상고시대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한무제 때까지의 제왕과 제후를 위해 일했던 인물들의 전기를 주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신금철:   김혁선생님 역시 인물전기를 창작하면서 인물전기도 많이 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조선족대중들과 비교적 접근한 작품들을 꼽아본다면요?   김혁:   인물전기에 관한 리해를 돕기 위하여 우수한 인물전기 몇편을 소개할가 합니다. 우선 우리 민족의 력사와 직결된 평전 몇부를 나름 뽑아 보았습니다.        우선 님웰즈의 "아리랑"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국 녀기자 님 웨일즈가 지난세기 30년대에 기록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로 많이 읽혀진 인물전입니다. 1920∼1930년대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살다 간 혁명가 김산의 고뇌, 좌절, 사랑, 열정, 사상의 발자취를 아름다운 문체로 고스란히 담아냈습니다. 항일전쟁의 열화가 중국전역에 파급되였던 1937년 6월,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의 초라한 방에서 손에 경련이 일도록 김산의 구술을 적어내려가면서 내심 감복과 찬탄을 금할수 없었던 그녀는 그후 인물전기문학의 진수로 오래동안 읽혀 내려온 "아리랑"을 집필해 냅니다.     김산의 원명은 장지락(張志樂)으로서 1905년 3월 10일 조선 평안북도 룡천군(龍川郡) 하장동(河張洞)의 한 자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여납니다.   1919년 일본 도꾜 제국대학에 가 고학을 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접하게 되고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저 시베리아를 향해 북상하게 됩니다. 그 길에 그는 중국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상해를 거쳐 북경 협화의과대학에 가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서 중국공산당창시자들인 리대소 등의 영향으로 조기공산당간행물 "혁명"잡지를 발간하면서 맑스주의를 접하게 되지요. 이 시절 중국공산당에 가입합니다.   1927년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국제주의기치를 들고 광주무장봉기에 동참합니다. 허나 봉기는 실패하여 200여명 조선인혁명가들도 목숨을 바칩니다. 퇴각해가면서 김산은 전우들의 의지를 북돋우고저 아름답고 슬픈 노래 "아리랑"을 불렀다고 합니다.    1929년 5월부터 김산은 북경에서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면서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대학의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중국공산당 북평시당위원회 조직부장사업을 맡게 됩니다. 이시기 그는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벌려 일본학자 사노가꾸의 "무신론"을 중문으로 번역, 발표하는가 하면 조선의렬단 대원의 의거를 소설화한 작품 "기이한 무기"를 출판하였고 한시 "동지들이여 싸우자" 등을 발표하여 적들과 굴함없이 싸우려는 공산주의자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포이에르바하, 레닌, 맑스의 인생관"번역본의 서언을 쓰면서 맑스주의철학을 터득하고 공산주의실현에 대한 굳은 신념을 다졌습니다.   1930년말 그는 국민당에 체포되였고 일본령사관에 넘겨져 갖은 혹형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과 조직관계를 절대 밝히지 않았지요.   1932년초 김산은 가혹한 고문에 페결핵에 걸려 신음하면서도 북경으로 다그쳐 돌아옵니다. 그는 리대소가 꾸린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진보적인 력사관을 전수하면서 당조직을 도와 학생운동을 이끕니다. 1933년 불행하게도 또다시 체포되여 천진 일본령사관으로 넘겨집니다. 다시한번 비인간적인 혹형을 받지만 김산은 강인한 의지력으로 적들과 싸웠습니다.   1934년 만기석방되여 또다시 북경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김산은 당조직의 외면을 받기 시작합니다. 1936년 8월 김산은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천신만고를 겪으며 중화쏘베트지구로 갑니다. 이듬해 1월, 연안에 이른 그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초청으로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와 화학, 물리 등 학과를 강의합니다. 하지만 당시 섬감녕변구 보안처로부터 일본간첩으로 의심받고있는중이였습니다. 그러던 1938년 10월경, 그는 비밀리에 처형되고 맙니다.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습니다. 백색테로에서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쟁을 밀고나아갔던 김산, 그는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피압박자들의 승리를 확신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은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은 조선족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고한다. 그는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소개된 아버지의 력사를 알게 되면서 중앙에 아버지에 대한 잘못된 판정을 시정해줄것을 바라는 편지를 띄워 봅니다. 1983년 1월, 중앙조직부에서는 몇년간의 조사를 거쳐 김산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취소하고 그의 당적을 회복할데 관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결정에서는 김산의 "죽음은 특정한 력사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억울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 "그는 당에 충성하였고 우리 나라 인민의 혁명사업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민족의 독립 그리고 공산주의의 실현과 이념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산화해 간 한 혁명가에 대해 만강의 열정으로 그려낸 "아리랑"의 저자 님웰즈는 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입니다. 신문기자이자 시인이였던 그는 오랜 기간을 격변하는 아시아에서 보내면서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중국과 한국에 관하여 많은 글을 집필하였는데요 그녀는 다름 아닌 중국홍군에 대한 저서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스노와 결혼한후 남편과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중국혁명가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고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습니다.   신금철:   김산의 인생려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훗날 김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큰 기여를 했던 님.웨일즈의 “아리랑”이였습니다. 다음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요?   김혁: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을 꼽고 싶습니다.   윤동주의 생애 읽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여 독자들과 만났습니다. 한국에서만도 그의 시세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 석사학위를 받은 이가 무려 50여명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압권중의 압권이요, 경전중의 경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동주에 대해서는 우리의 독자들이 너무나도 익히 알고있기에 그의 생애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략하기로 합니다.   신금철: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을 압권중의 압권, 경전중의 경전이라고 하는 리유는 뭔지요?   김혁:   우선 창작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작자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사를 전공,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구요. 작품으로는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또 그를 중국조선족문단에도 널리 알린 "윤동주 평전"이 있습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으며 한국사 관련 론고와 학술론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등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력사학에 천착하면서도 원체 소설가라 뛰여난 작가적 감수성으로 송우혜는 10여년을 갈고 닦은 끝에 윤동주 생애에 대해 황홀하게 복원해 내였습니다. 친지와 친우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고 빈틈없는 현장답사와 풍부한 자료를 섭렵했는데요 룡정광명중학의 학적부,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동원하고 그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가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책상물림의 상상력 연 띄우기 방식이 아니라 치밀한 작업으로 실존적 고뇌와 준엄한 륜리적 태도를 지니고있는 한 고절한 시인의 마음의 행보를 샅샅이 더듬으면서 그 생생한 숨소리까지 평전은 들려주고있습니다. 평전을 읽노라면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과 문학의 려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그 외에도 평전을 통해 그 시대를 올곧게 살아내려고 애썼던 이들의 삶의 궤적을 우리는 만날수 있습니다. 민족을 위해 혼신을 던지면서 윤동주라는 고고한 별이 창공에 빛나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던 스승, 친지, 친구, 은사, 문호들인 김약연, 송몽규, 명의조, 최현배, 문익환, 정병욱 등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의 자취, 윤동주라는 별자리 주위에 모여 함께 빛을 내는 다른 별들의 공전과 밝음에 대해서도 더불어 료해할수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고향사람인 우리도 미처 몰랐던 연변지역의 당시 시대상과 풍토가 평전의 초반에 오렷이 그려집니다. 사건들을 추적하여 그 력사를 따라가면서도 다시 시의 궤적을 따라 시를 통해 력사를 읽고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 기법을 쓰고 있어서 문학인으로서는 인물전기외에도 시집, 작품론평을 읽는것처럼 "일석다조”의 감흥으로 읽혔습니다. 작가는 시인의 생의 순간순간에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대상에 대한 장악력으로 그 일거수 일투족을 묘사하는 치밀성에 엄지를 빼들지 않을수 없게 합니다. 과시 "윤동주라는 인물연구의 결정체요, 평전문학의 진수”라는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처럼 인물전기의 진수를 보여준 평전이였습니다. "윤동주평전”은 우리의 전기문학장르를 꿈꾸는 작가들에게는 범문이요, 독자들에게는 애장서격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것입니다.   신금철:   “아리랑”, “윤동주평전”외에 또 김혁작가님이 권장하고싶은 인물평전은요?   김혁:   박계원의 "중국영화황제 김염"도 참말로 읽어 볼만합니다. 중국 영화계에서 "영화황제”로 파란많은 일생을 보낸 김염의 예술인생을 조명하고 있는 평전은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중문으로 번역출판되여 지난 2012년 6월, 상해시작가협회에서 출간소식공개회를 가졌습니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향항, 북경, 대만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해영화에 두고있습니다.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습니다. 바로 그 당시 상해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는데 바로 김염입니다.   김염(金焰)은 본명이 김덕린으로서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습니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습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였습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살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 7원을 갖고 상해로 향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여 꿈을 펼치게 되였습니다. 손유감독은 햇내기의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틀)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지요. 1932년 그는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로 스타덤에 올르게 됩니다. 당시의 유명 녀배우 왕인미와 결혼했습니다. 왕인미는 영화 "어강곡(渔光曲)"에 출연, 이 영화는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영예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1934년)"를 제작했고 역시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향항을 점령했을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였습니다. 그는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이 제안한 출연요구를 거절하고 향항으로 피신했고 1947년 녀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습니다. 진이는 중국영화계의 유명한 원로 녀배우로서 "녀자롱구선수 5번"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62년 은퇴할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리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리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습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해에서 타계합니다. 현재 상해시내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신금철:   김염의 일대기를 인물전기로 펴낸 작가는 어떤 분인지요?   김혁:   중국의 유일한 영화황제 김염에 대해 다룬 저자 박규원은 1954년 서울 출생으로서 경기녀고와 리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김염 평전"에는 "-외할아버지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저자 박규원은 우연한 기회에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이 자신의 작은 외할아버지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화려한 삶뒤에 불행한 력사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김염의 정신적 고뇌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자취를 따라 10년 동안 취재를 했습니다.   집필 과정에서 저자는 직접 중국어를 배우고 자료를 번역하는 등 무리하게 정진하던 저자는 건강이 나빠져서 큰 수술을 받았고 시력감퇴 및 합병증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한 예술가의 삶을 재현하는 작업을 중단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 바로 이 "외할아버지를 찾아서”입니다.   이 전기물은 일찍 2003년 한국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는 세심한 자료조사와 친족들과의 인터뷰, 치밀한 현장답사를 통해 전기물이 가질수 있는 미덕을 잘 보여 주면서 중국 "영화 황제” 김염에 대한 복원과 더불어 "력사와 개인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함께 탐색하고 있습니다.   신금철:   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김혁소설가의 소개를 통하여 인물전기의 분류와 조선족대중들이 인상적으로 알고 있던 김산, 윤동주와 김염 등 위인들에 대해 알아보았고 또 그분들의 일대기를 인물전기로 펴낸 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중국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시리즈,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간 프로편집에 남철이였습니다..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 창작열에 대한 진맥 (2)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편집: 남철 사회자: 신금철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인물전기 “한락연”, “주덕해”의 저자)   첫 방송  2013.  09. 11   16:00FM 재방송   2013.  09. 12   08:00AM 재방송   2013.  09. 12   23:20A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 신금철. 지난 시간까지 세기에 걸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인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문단의 인물전기창작에 대해 조명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 두 번에 걸쳐 우리는 인물전기창작개황과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창작의 선두주자라고 할수 있는 류연산작가의 인물전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오늘 소개할 내용은요?   김: 전번기에 우리민족의 력사와 직결된 해외작가들의 우수한 전기문학작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면 이번 회는 중국조선족작가들이 근년래 창작한 우수한 작품 몇부를 추려 소개할가 합니다.   신: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 맨처음으로 김호웅, 김해양의 "김학철 평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인물전기문학이 아직 걸음마를 타고 있다고 해야 할 현시점에서 볼때 이 평전은 그야말로 평전문학의 강점들을 두루 갖춘 훌륭한 평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호웅,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은 2007년 한국 실천문학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신: 김학철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아주 익숙히 알고 있는 분이지요?   김: 네, 한번 그이의 파란많은 일대기에 대해 다시한번 더듬어 보기로 합시다. 1916년 식민지 조선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여난 김학철은 18세 때 민족독립을 위해 한몸 바치겠다며 교복을 입은 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상해에서 반일 테러활동에 가담했으며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하다 1941년 일제와의 호가장전투에서 한 쪽 다리를 잃고 일본군에 체포돼 4년간 나가사키 형무소에 복역하고 풀려났습니다. 일제와의 사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도 김학철은 문학이라는 또 다른 수단으로 잊혀진 민족사를 묘파하고 복원하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의 투쟁의 붓자루는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정치 기제와 독재를 향해 삿대질했기에 그의 문학적 인생이 가지는 의의는 더더욱 의미심장하다고 해야할겁니다. 지난 동란시기, 우상화에 대해 반대한 소설을 쓴 연고로 김학철은 10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2001년 현대사의 질곡을 외다리로 넘어 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습니다는 걸 확인한 85살의 로작가는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21일간 단식 끝에 세상을 떴습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은 우편함에 담아 두만강을 타고 동해로 보내졌습니다. 김학철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드문 반골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평생 중국의 대문호 로신을 사표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제한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탄압, 망명, 옥살이 등 어려운 현실로 인해 글쓰기가 쉽지 않았지만 죽는날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시대와 너무도 많은 경험을 토대로 간결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문체로 격동적인 시대와 그 도가니속 삶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냈지요. 평론가들은 김학철의 작품은 1990년대 랭전붕괴 이후 그때까지 "좌익금기"에 속박당했던 한국의 문학지형을 흔들고 현대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고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의 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조선의용군이 언제, 어떤 리유로 중국태항산까지 넘어가게 되였는가를 증언하는 기록은 김학철의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학철은 그 자체가 력사요, 기구한 한·중·일 현대사의 광대한 미발굴 지층탐사의 한 리정표라는것이지요. 청화대학 왕혜 교수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어떻게 유효하게 저항하고 그것들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과제를 풀고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는 데 김학철 문학이 긴요한 역할을 할수 있습니다고 평했습니다. 평전은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항일투쟁의 마지막 증인이자 민족과 국경을 넘나드는 민족 문학가로서의 김학철의 전모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작가들은 고인이 남긴 자서전과 잡문, 기존 연구서들을 엮어 그의 인생과 문학, 철학 등을 새롭게 조명했습니다. 김학철이라는 인물의 영웅적 면모에서부터 지인들과의 관계, 가족과 일상생활 그리고 방대한 문학세계를 세세하게 그렸다. 국제주의자로서의 세계 인식, 죽음에 대한 초탈한 자세 등 그의 초인간적인 모습을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오래동안 김학철에 대해 연구해온 연변대의 유명교수 김호웅과 김학철의 혈육인 외아들 김해양이 함께 집필했기에 리론적인 면과 생활적인 면에서의 깊이와 넓이를 기할수 있었습니다.   신: 김학철선생은 자신의 삶 자체가 력사요, 교과서일뿐만아니라 소설과 잡문을 포함한 많은 작품도 우리 문단에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존재하지 않을까요?   김: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이 평전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경전적인 전기문학으로 되자면 반드시 전주(傳主)의 경력이나 인격 및 그 성취가 빼여날 뿐만 아니라 커다란 사회력사적인 인식가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개혁개방후의 중국조선족의 전기문학에서《진실성, 문학성, 지식성, 가독성(可讀性)》을 겸비한 외에도 사회력사적인 인식가치가 가장 풍부한 전기문학의 경전은 단연 김학철선생의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입니다. 그러나 김학철선생의 《항일독립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자서전》은 필경은 자서전이며, 본인의 자서전과는 다른 방관자가 쓴 《김학철평전》이 이를 받쳐주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독서계의 수요를 감안하여 나온 것이 바로 김호웅, 김해양 공저로 된 《김학철평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아주 적시적이고 아주 필요한 책입니다… 김학철의 문학정신을 담론하는 것은 한낱 재미로나 행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우리중국조선족의 삶을 개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제 김학철정신을 궁행(躬行)하는 "실천적 김학철파”를 필요로 하지, 말로만 김학철을 기리고 칭송하는 "구두김학철파(口頭金學鐵)"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김학철평전》은 김학철의 문학텍스트들과 함께 우리문인들의 정신적 수양의 교과서로, 실천의 지침으로 될 것입니다." 평전은 20세기의 가장 처절하고 아픈 력사를 관통해온 비운의 작가를 그리지만 그 필봉을 심각함과 비장감에만 두지 않는다. 어찌보면 평전의 문체는 유머, 위트, 풍자로 점철된 산문을 수백편 펴냈던 김학철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습니다. 실제 김학철 선생의 작품들을 보면 인간에 대한 선생 특유의 락관적인 믿음과 더불어 웃음의 코드가 창작의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음을 잘 알수가 있습니다. 민중에 대한 신뢰와 력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믿음이 선생의 작품의 주류를 이루면서 그 어떤 역경에서나 웃음으로 화해낼수 있는 생활자세를 준것입니다. 김학철선생의 특유의 문체적 구사를 따와서 집필을 이어나간것이 이 평전의 압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비운의 작가의 삶이 시종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유려하게 손에 잡힐듯이 그려져 있습니다. 평전을 읽고나면 중국, 한국 일본 3국을 무대로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팔순의 삶을 살다 간 그이의 개인사외에도 중국과 한국 나아가 동아세아의 근현대사의 흐름을 읽을수 있고 그에 눈을 뜨게 됩니다. 평전은 그야말로 고난과 격동으로 점철된 우리 민족의 지난 세기를 오롯이 담아놓았습니다. 이것이 이 평전의 또 하나의 빼여난 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와 세상과 끝내 불화를 했던 김학철의 모진 인생과 문학을 통해 우리는 삶과 문학은 따로 떨어져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되며 진정한 작가의 자세란 무엇인지 알게 되지요. 우리 시대와 문학의 참다운 사표(師表)였던 선생님은 이제 고인이 되셨습니다다. 그러나 그이의 평전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해, 사람에 대해 소중한 깨달음의 전언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과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 민족의 대의를 위하여 치렬하게 왜적과 맞선 인물로서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뛰여난 문학을 이루어낸 인물로서 그래서 김학철의 길고 험한 삶의 려정을 평전으로 더듬어 보는 일은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일이라 할수 있지요.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우리 문단의 태산북두로 군림했던 김학철선생님의 일생을 다시 한번 심도 있게 조명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또 어떤 작품들이 인물전기창작에서의 귀감으로 될까요?   김: 다음은 이미 작고한 류연산의 "류자명 평전"에 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도 가장 일찍 나온 평전이기에 특별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신: 류자명은 어떤 분이시죠? 우리에게는 어딘가 낯설은 이름인데요?   김: 류자명 선생은 한국충주에서 태여났습니다. 교사시절이던 1919년 학생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돼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테러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것을 반일애국운동으로 여겼고 1921년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렬단에 가입했습니다. 1923년 발표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작성을 도왔고 항일 테러단체 결성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1940년부터 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한 그는 “6.25”전쟁 발발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에 남아 고원지대 특수벼 재배법 등 농학분야의 뛰어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50년부터 30여년 동안 호남성 호남대학 농학원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류자명 선생은 한국과 조선으로부터 건국훈장과 3급 국기훈장을 받아 남북한으로부터 동시에 인정받은 보기 드문 독립유공자입니다. 류자명은 1930년대에 무한에서 중국의 대문호인 파금(巴金)을 만난 이후 평생동안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적 관계를 맺어간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류자명의 전기적인 행적은 파금의 작품에도 반영됐습니다. 파금의 문학활동초기의 대표작인 단편소설 "머리카락의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얘진 류자명의 모습을 보고 령감을 얻어 쓴것이라고 합니다. 류자명은 젊은 나이에 머리가 하얗게 셌는데 파금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일투쟁속에서 분노와 고민때문에 흰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생겨났다고 그렸습니다. 류자명은 중국에서 농예사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았습니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호남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재배에 성공하게 되였습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습니다. 류연산의 평전이 나오기 이전인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류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장사에서 타계했습니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류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다. 2009년 호남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류자명 사적 진렬관을 꾸며놓았습니다. 김병민 감수, 류연산 집필로 된 장편인물전기 "불멸의 지사 류자명평전"은 2003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김병민 총장은 단재 신채호를 연구하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인 류자명에 관심을 가지게 돼 80년대부터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왔다고합니다. 그러다 그 집필을 제자인 류연산에게 의뢰했습니다. 김총장의 자료와 중국에 사는 류자명의 후손 소장 자료, 그리고 당시 중국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기사 등이 이번 평전의 바탕이 됐습니다. 평전을 집필한 류연산은 "독립운동사에서 류자명의 위치를 새롭게 조명할수 있었습니다"면서 "특히 아나키스트들의 행적을 연구하는 산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평전은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항일투사의 첫걸음", "의열단", "격정시대", "농학자의 길" 등 모두 7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평전에서 류자명의 친필 한문 회상기에 대한 고증으로 드러나는 그의 인생행적을 비롯해 김구,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글과 편지, 그리고 파금(巴金) 등 중국 작가들에 대한 그의 정평이 실려 있습니다. 또 농업학자이기도 했던 류자명의 농업관련 성과도 살펴볼수 있습니다. 특히 독립운동 기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리회영, 김창숙, 신채호, 나석주, 조소앙 등 많은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 한민족사의 일부를  조명했습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평전의 집필을 위하여 류연산은 기성된 자료를 열심히 수집하였을 뿐만아니라 새로운 자료도 깊이 있게 발굴하여 이 전기물로 하여금 문학성은 물론 력사적 진실성을 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작가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1985년 타계한 류자명 선생님의 발자취를 쫓아 철저히 고증을 통한 작품이기에 그 내용에서 베여 나온 글자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소중함을 더해주고 그 진솔함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 감회를 새롭게 해주고 있습니다. 청년들을 남경군관학교에 보내 군사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1926년 일본의 식민지 수탈에 맞서 나석주 의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케 한 작전도 선생이 계획과 지휘를 맡았던것으로 알려지는 등 의열단의 비밀참모로 활약한 그의 일대기가 상세하게 수록돼 있습니다.   신: 그러니까 류자명의 력사는 지금까지 편면적으로 기술되였다가 이번에 류연산작가의 평전을 통해 립체적인 인물로 부각되였구만요.   김: 그동안 류자명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거론의 대상이 아니였습니다.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에서처럼 무정부주의련맹의 대표로 류자명이 있었습니다할 정도로 이름 한번 적힐 뿐이었습니다는 너무나 린색하고 왜곡된 표현을 바로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류자명 평전을 저술하였습니다고 했습니다. 평전은 방대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전기인물 주인공의 의의있는 생애를 펼쳐보이고있을 뿐만아니라 타인들의 가치있는 평가도 까근히 연구해 주인공에 대한 인식적 가치를 한결 높이고있습니다. 작품을 읽어보면 력사의 현장속에서 류자명 선생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점을 감지할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류자명을 독립운동가로, 중국에서는 농학자로만 각각 기리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류자명선생을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농학자로서의 서술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철저한 무정부주의 사상가로서 세계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살아가야 하며 자연과 공생해야함을 몸소 보여준 실천가로서의 류자명 선생에 대해 다각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물평전은 한 인물을 기념비적으로 부각하는 고고학 비슷한 신성한 작업이라고 봐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평전을 더 소개해 주시지요.   김: 다음은 연변작가협회 주석 최국철의 “주덕해 평전”을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을 맞아 조선족자치주의 설립을 주도한  주덕해의 평전이 출간됐습니다.        여기서 잠간 주덕해의 일생을 요약해 보면- 1911년 3월 로씨야 원동지구의 한 시골에서 태여난 주덕해는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뒤 1936년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으로 류학을 떠났습니다.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 혁명의 성지로 통하는 연안으로 합류해 혁명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1949년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위원이자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인 주덕해는 연변에 파견됩니다. 1952년 9월 3일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설립되자, 그는 제1주석으로 선출됐습니다. 2010년부터 북경 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는 련합으로 조선족인물평전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였고 《주덕해평전》이 그 작업의 중요한 일환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최국철이 그 적임자로 선정되였습니다. 최국철은 평전의 기초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기존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골라내는 작업이지요. 다음으로는 조사, 답사의 길에 나섰다. 주덕해의 자취는 중국 광활한 대지에 널려있어 이 부분의 작업량은 엄청난것이였습니다. 또한 연변자치주 창립 60돐 헌례작품이기에 작년 "9.3"전에 출간, 최국철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신: “주덕해평전”창작을 위한 답사과정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였습니다고 하던데요?   김: 2010년부터 현지답사를 시작하여 1차답사와 2차답사를 마무리하면서 주덕해의 국내 발자취를 따라나섰다. 할빈, 녕안, 밀산, 동경성, 서안, 연안, 남니만, 무한, 북경, 천진, 그리고 연변 8개 현시의 주덕해가 다녀갔던 모든 향진이 그의 답사코스였습니다. 관련인물도 60여명 취재하고 당안국, 도서관에 각종 문서를 열람, 서면자료, 구술, 현지답사를 통한 자료를 전부 수집하면서 인물에 대한 서술적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기초하여 전형적인 인물을 부각하기 시작했고 주덕해가 처한 국내외 시대적 배경과 주변의 환경, 겪은 력사를 통하여 주덕해의 성장과정을 그려갔다. 단순한 기술이나 묘사가 아닌 정치적, 인간적 발전단계를 설명해주는 작업이였습니다. 결과 세계속, 특히 구 쏘련의 영향속에서 중국혁명이란 력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지역이란 특수한 사업환경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방침을 충실히 집행하면서 조선족의 근본리익을 대변하는 자치주의 산파로 성장하기까지의 주덕해의 파란많은 려로를 9장 62소절 50여만자에 달하는 편폭에 담아내였습니다. 평전은 주덕해를 "탁월한 조선족 지도간부이자 오랜 시련을 겪은 공산주의전사"라며 "혁명전투 년대와 사회주의건설시기를 막론하고 시종 자신의 운명을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결부시키고 피나는 노력을 다해 눈부신 공훈을 세웠다"고 정평했습니다. 평전을 통해 우리는 연변의 정초와 건설을 위해 혼신을 다한 주덕해의 헌신정신을 알게 되였고 인간적인 면을 알게 되였으며 그가 얼마나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였는가를 알게 됩니다.   신: 그러고보니 최근, 특히 2, 3년 사시에 인물전기창작이 부쩍 늘고 있고 그 량도 많이 제고되였다는 인상입니다. 또 한부 더 소개해 준다면요?   김: 근년에 창작된 조선족인물전기중에 빠뜨릴수 없는 또 한부의 작품은 리혜선의 "정률성평전"입니다.   신: “정률성평전”은 작가 리혜선선생이 금년 5월 7일부터 8월 21일까지 저의 문학살롱에 직접 출연하셔서 상세한 소개를 드렸던 작품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것은 이 작품이 우리나라의 중점지지작품에 선정되였습니다는 점이고 이 부분은 그때 상세히 소개되지 못했는데요, 오늘 기회에 그 점에 대해 소개주시지요.   김: "정률성평전"은 집필하기전에 벌써 큰 이슈를 터뜨린 작품입니다. 그의 집필기획이 중국작가협회에서 선정하는 2009년 중국작가협회 중점지지(扶持)작품목록중 기록문학 지지작품에 선정됐기때문이지요. 그후 조선족작가들의 적지 않은 작품이 국가중점지지작품에 선정됐지만 조선족의 창작작품이 이 프로젝트에 선정되기는 그번이 처음이였습니다. 중국작가협회는 2009년 중국작가협회 각 산하 단체회원단위에서 추천한 221부의 작품중 60부를 중점지지작품으로 선정했다고 공포했는데 그중 리혜선소설가의 "정률성평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평전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자인 조선족 음악가 정률성의 예술인생을 다루고있습니다. 평전은 기본상 마무리되여 "장백산"잡지에 일년여 동안 련재중인데 아직 일부를 련재했음에도 그 치밀한 력사복구작업과 유려한 문체로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있습니다. 아직 완결하지 못했기에 간략한 소개로 그칠가 합니다.   신: 지금 조선족문단의 적지않은 작가들이 인물전기창작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실정인데요, 이 분야를 전반적으로 조명해볼때 지금의 현황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요?   김: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인물전기 창작과 출판이 활성화되기 시작한것은 근년래의 일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지난 80년대에도 다른 쟝르에 비해 인문전기문학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송정환의 "안중근", 김송죽의 "설한"등이 나왔다.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인물을 다룬 작품은 아니였습니다. 90년대 중기에 류순호 작가의 조상지"가 나왔습니다. 이 역시 타민족 인물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와 직결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나오자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인걸들을 당시에 펴낸 작품으로는 리성권이 펴낸 조선족기업가 석산린의 창업기가 있습니다. 90년대 중기에 나온 회고록으로 연변대학 정판룡교장의 "고향 떠나 50년"이 절찬리에 련재되고 책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모두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류연산작가를 필두로 시작된 인물전기 문학이 90년대말 이후로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확한 통계가 아니지만 추산해보더라도 20여 종에 달하는 인물전기가 출간됐습니다. 그 중 우수한 몇부를 다시 집계해 보면 예술인, 문학인으로는 김학철, 정률성, 김염, 한락연 등이, 정치인으로는 주덕해, 조남기, 조룡호, 최채, 오장숙 등이, 항일운동가로는 류자명, 양림, 최진동 등이, 교육자로는 림민호, 정판룡, 김진경 등이, 사회인 기업인으로는  석산린, 한성호, 리성일 등등의 인물전기가 창작되였습니다. 또 민족출판사에서 "조선족 구술 시리즈"라는 기획도서들을 련줄로 출간하고 있는데 이처럼 자서전, 회고록의 출판 역시 증가세다. 굳이 인물전기라는 제목을 달지 않았더라도 인물에 대해 여러 쟝르로 탐구한 책까지 포함하면 종수는 더 늘어낙 됩니다.   신: 지금까지 창작한 작품도 적지 않구만요, 그리고 지난 번에도 얘기가 나왔지만 인물전기창작은 창작전에 작가의 참다운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자료수집, 답사, 확인, 집필 등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로 놓고 말하면 피나는 노력이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김: 무릇 글을 쓴다는것이 다 그렇지만 인물전기를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인물의 내면에 육박해 그 정신세계를 빈틈없이 포착해내야 하기때문이지요. 해당 인물의 삶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판단은 고스란히 인물전을 쓰는 작가에게 맡겨집니다. 그러니 창작자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질수밖에 없지요. 인물전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결국엔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물의 생애와 활동을 서술하면서 인물은 물론 그가 속한 시대에 대한 주관적 평가까지 드러내야 하는게 인물전쓰기의 어려움입니다. 이런 연유로 작가들은 평전을 쓰는 일은 결국 "글쓴이 자신의 력사적 태도와 문화적 인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 시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신: 그렇다면 작가들이 이렇게 고된 로동에 투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가요?   김: 우리의 작가들은 왜 어려운 인물전기에 적극 투신하고 있을가요? 그리고 왜 뒤늦게 인물전기문학이 문단과 출판계의 총아로 떠올랐을가요?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사학가들은 "력사 자체가 인물사다”라고 단언합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면밀히 추적해 그 시대와 사회를 조망해 보는 데 인물연구의 특징이 있습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남긴 걸물들의 인물전기가 서점가에서 독자들의 눈길과 손길을 끌기 시작한것이지요.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합니다. 인물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피와 땀, 숨결이 살아 있는 인생의 면면은 지나간 시대를 오롯이 복원합니다. 인물사가 그 자체로 력사인 리유다. 인물전기에 오른 선각자들의 삶은 우리의 평범한 삶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들이 세상과 부딪치고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각과 그 속에 담겨있는 진리를 파악하는 탁월한 능력이 발휘되는 과정은 어떠한 영화나 드라마에 못지 않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삶을 자세하게 되살려보는것은 무척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민족사적인 립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신: 인물전기를 창작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력사를 리해해야 할가요?   김: 력사를 생동감 있게 리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대를 치렬하게 산 인물들의 인물전을 읽는 것일 겁니다. 력사 속에 박제화된 인물을 피가 돌고 살냄새 나는 인간으로 다시 만날수 있다는 데 평전의 진정한 매력이 있습니다. 또 인물전기 출간이 늘어나고 있는 리유 중 하나는 불안한 상황에 믿고 따를 만한 "롤 모델"이 부족하기때문이라고도 비평가들은 보고있습니다. 오늘날 변혁기 조선족공동체가 겪는 진통과 아픔은 우리에게 커다란 우려와 걱정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실제로 력사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경험을 통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으려 하는것이지요. 평론가들의 말처럼 "영웅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리더십과 좌표가 될만한 사람들을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인물전기가 가지는 의미가 큰 것"입니다. 따라서 변혁기의 세상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대중들의 인물읽기가 출판계의 신조류로 자리잡은것입니다.   신: 그렇다면 인물전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요?   김: 정치인이나 예술가의 전기는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일생은 물론이고, 그 사람이 처했던 사회의 시대상,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룩해 낸 정치적, 예술적 업적에 대한 리해를 증진시킬수 있습니다. 우리 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 보다 남다른 삶을, 더 우수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 자아를 확립하게 하게하는 인물전이 가진 가치를 무시할 수 없지요. 인물전기의 출간이 증가하는것은 우리의 출판 시장과 독서 수준이 높아졌다는 방증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문학이 여러 쟝르로 양상을 보이고 다른 형태의 창작 소재들이 활성화 돼야 우리의 독서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할수 있는데 이는 문단의 척도와 우리 독자들의 열독 수준이 다양화 되고 성숙된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인물전기의 창작과 출판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라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신: 목전 우리 문단의 인물전기창작현황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가요?   김: 우리 인물전기 시장은 아직 열려 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기물창작에는 아직 허점이 보이고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원래 출판이 발달한 나라에서 평전 출간이 활발한데 아직 우리는 "붐"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하지요. 그 밖에도 인물전기가 대부분 3,40년대를 살다간 인물들에 편중돼 있는데 균형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재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인물전을 쓸 젊은 작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인물전에 선택하는 인물들이 더 다양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력사의 향간에 묻힌 인물들 특히 영웅이나 위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인물의 경우 그 조명작업에 착수하는 작가는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물선택은 "여전히 영웅사관에 갇혀 있습니다", 다양하고 더 훌륭한 사람냄새나는 인물전이 나오려면 영웅 중심, 사건 중심의 력사관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작가들의 인물연구나 창작지원 시스템도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인물전기에 관한 문학상시상식을 한번 치른다니 기대해볼만한 일입니다. 우리의 작가들이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력, 대중적인 필력만 갖췄다고 해서 모두 인물전을 쓸수 있는것은 아니다. 한 인물의 사상적·정신적 궤적을 깊이있게 다뤄야 하는 인물전기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력사와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끝나고, 후세의 사람들이 앞선 이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이가 살았던 때와 곳, 그에 맞선 그이의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들 내어진 것과 그로 인한 제반 결과물들에 대한 실증적 해석이라는데 전기의 핵이 있습니다.   신: 인물전기창작은 필경은 새로운 분야에 속하는데 목전 창작에서 어떤 부족점을 보이고 있는지요?   김: 어떤 전기물들은 인물전기가 형식과 내용 면에서 인물전으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공표된 문헌을 토대로 쓰고있는데 글의 형식이며 내용도 필자 자신의 편견과 무지, 성의와 무성의가 고스란히 담긴 결함투성이의 미완성품들도 있습니다. 우리와는 무관한 인물들을 잘못 선택해 수고로움을 바치고도 그 작품이 출판조차 못되는 경우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이는 창작자의 창작물에 대한 선정과 창작관 그리고 그 창작자세문제입니다. 인물연구는 상대적으로 연구자의 수고가 많이 드는 연구작업입니다. 한 인물의 생애 전체를 추적해야 하는 만큼 1차 자료의 수집에만도 상당한 시간과 발품이 필요합니다. 전기 혹은 평전을 쓰는 사람은 그가 쓰고자 하는 사람의 제반 년대기적 자료를 모으고 정리합니다. 태여나고 죽은 때와 곳, 가계도와 성장 배경, 자라고 배우던 때의 증명 기록, 살아가면서 몸담은 곳에서의 제반 활동 기록 혹은 갖가지 증서의 사본은 물론 그에 대한 다른 이의 회고담 및 어울린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으로 제반 자료를 수집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철저한 취재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사료와 사료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작가의 상상력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서만 얻어질수 있습니다”고 어느 평전 창작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베껴내기 식"이나 답사를 배제하고 고방에 박혀서 펴낸 "책상머리 평전"은 결코 설득력을 얻을수 없습니다. 어떤 인물전은 그야말로 작가의 년보를 그대로 베껴낸 장편리력서격으로 되여 있습니다. 그저 사처에서 자료를 퍼다가 성의없이 대충 짜깁기를 하고 만것입니다. 그러하니 인물전이 가지는 매력은 커녕 열독의욕까지 상실하게 만들지요.   신: 인물전기창작자의 올바른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다고 보는가?   김: 인물전을 쓰는 일에 대해 작가들은 "기록과 사람, 공간의 제약과 싸우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많이 읽고 만나고 돌아다녀야 좋은 인물전이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전기물창작의 출발점은 표층적 자료에 대한 올바른 리해와 검증이며, 더 나아가 검증된 자료의 타당성과 진실성을 확보하면서 오류를 밝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물의 활동년도나 시대배경에서 작자의 수준미달로 오점투성이의 인물전기도 만날수 있습니다. 선택된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관심있는 독자들은 그러한 오점에 민감하게 반영합니다. 인물의 활동년대마저도 제대로 명기하지 못해 오점이 속출한 인물전도 있는데 한두곳이면 작가의 소홀이라고 볼수 있으나 여러번 이런 현상이 속출하면 이는 선택된 인물에 대한 례의의 상실, 치렬한 작가정신의 부재라고 볼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고인이 된 인물들, 이미 우리와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지금", "이곳"으로 끌어내 가상의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만큼 한 인물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얘기지요. 전기는 빈틈없는 론리와 현실에 대한 탁월한 리해력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쓰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가 금전적 수요에서 출발한 알량한 전기물들은 흔히 삶의 론리가 어긋나 있고 도저히 리해할수 없는 뜻과 행위의 결과가 혼재합니다. 문단과 독자들은 그런 전기물을 외면할것입니다. 해외의 여러 인물전기, 평전들을 보면 평전마다 특색이 다 다르다. 어떤 평전은 소설같고 어떤 평전은 공구서적 같고 어떤 평전은 현학적이고 어떤 평전은 지어 동화 같습니다. 이 처럼 여러가지 문체적인 특점으로 한 사람의 감동적인 일생을 정확하게 전달해야합니다. 그리고 전기물의 창작은 해외문단, 중국문단이나 우리와 같은 한글을 구하하고 있는 한국문단이 우리보다 앞선것은 물론입니다.   신: 주류문단인 중국문단과 해외문단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김: 중국문단에서는 한 위인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여러 작가들 그리고 여러 출판사가 다투어 출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례하면 모택동에 관한 인물전은 수십권도 넘습니다. 한국에서도 안중근이나 단재 신채호같은 인물에 대한 전기물은 한 두사람이 아닌 여러 작가들의 연구물로 대량 쏟아져 나오고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링컨 전 대통령 사후 무려 180여 권에 이르는 링컨 평전이 쏟아졌다고합니다.   신: 우리 문단은 여기에 어떻게 비교되는지요?   김: 우리는 우리 민족이 낳은 우리 고향을 활동반경으로 하고,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우리들만이 자호할만한 우리들의 인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물전기 문학의 승산점입니다. 례하면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와 같은 인물입니다. 해외서 그에 대한 전기물은 벌써 5,6부정도 나왔다. 하지만 우리작가들은 이제는 아시아에서조차 그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있는 고향이 낳은 위인에 대해 아직도 조명하지 못하고있는 실정입니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빼여난 지어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않은 인물들의 가치를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시대의 단면을 총체적으로 증명합니다. 인물전을 쓰려면 인물이 속했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비교적 근세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라, 시간적 거리가 먼 력사속 인물의 평전을 쓸때는 더욱 그렇다. 평전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가 특정 시대의 총체적 사회상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온전히 드러내는데 있기때문입니다. 이 작업엔 인물이 속한 시대에 대한 통사적 지식은 물론, 정치·사회·문화사적 인식이 총동원돼야 합니다. 시대에 대한 정교한 인식망이 구축된 뒤에야 인물의 행적과 언행, 인식에 대한 엄정한 평가도 가능한거지요. 여기서 학계의 동원이 필요됩니다. 인물연구만큼 학계의 연구가 필요한 분야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 인물연구의 자리는 좁다. 특별한 연구방법론이 마련된것도 아니다. 인물전이 어느 정도 각광받고 있는 것과 달리 학계의 인물 연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문학인들은 김학철과 같은 거물급 몇몇분에 치중되는 점을 볼수 있습니다. 인물연구가 학계에 흡수되지 못한채 소설이나 평전의 장르로만 자리매김 되고있는것입니다. 대학가에서 우리의 인물연구가 하나의 학문령역으로 정착됨이 좋을듯 합니다. 실제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선 전문적인 논픽션 작가들이 인물전을 주로 쓰는 데 반해 우리문단은 작가들의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논픽션 작가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다. "력사학자들은 딱딱한 론문적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소설가들은 사료에 대한 평가와 검증 능력이 취약하지요. 서로 보완해야할 부분입니다. 단 문학인들이 고군분투하는 작업뿐아니라 력사, 철학 연구자들의 합동연구가 뒤받침 돼야 묵직한 리론과 아름다운 문체가 혼합된 훌륭한 인물전이 탄생하게 될것입니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과 그 력사에 대한 새로운 조명열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입니다.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기술하면서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근년래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문단에서 뒤미처 인물전기가 각광받는 풍토가 일고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이제는 어중간한 수량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우수한 수작(秀作)의 미량(微量)으로 우리의 전기문학은 아직도 걸음마타기이며 그 저변이 아직도 척박하다고 봐야겠습니다. 작가들의 노력으로 력사와 지식과 정보가 담긴향기나는 인물전을, 정녕 우수한 인물전을 기대합니다.   신: 중국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을 두고 참으로 보귀한 말씀 주셨습니다.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오늘까지 4기에 걸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을 모시고 중국 조선족문단의 인물전기창작을 둘러싸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우리의 작가와 독자들의 인물전기창작에 다소나마 리해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상 오늘 문학살롱 여기서 줄입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5    김혁 문학自敍傳 (1) 댓글:  조회:2786  추천:17  2013-09-06
. 문학자서전 1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동란의 문화대혁명이 일던 첫해의 어느 가을날, 고색 짙은 변강의 오지인 룡정현에서 시장부근의 한 교원가정은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봉당에는 보자기에 동여진 아기 하나가 그 무슨 물건처럼 내쳐져있었다. 태여 난지 이제 겨우 사흘이 되는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현에 있는 어느 처녀가 결혼 전에 아기를 뱄는데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항간의 눈이 무서워 룡정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낳고 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를 룡정 어느 소학교의 아이 낳이를 못하는 교원이 안아왔는데 아이가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지라 막 버리려던 참이었다.   이때 이웃집 영감이 여느 때와 같이 마실 돌이를 왔다. 봉당에 놓인 들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와 그 사연을 들은 영감은 자기가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나섰다. 중의경력이 있다지만 고주망태로 이름 있는 데데한 영감인지라 집 식구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영감이 부엌으로 씽-내려가더니 솥 가마를 뽑아들었다. 웬일이냐고 모두들 경악하는데 영감이 가마 밑굽에 앉은 흙 그을음을 긁어내더니 대접에 물을 담아 그 먼지를 삭혀냈다, 먼지를 삭혀낸 물을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목구멍에 꽉 막혔던 담이 내려갔고 아기가 급기야 미약하게나마 울음을 터뜨렸다.   민간토방법의 힘을 입어 가마 밑굽의 먼지를 삭힌 물을 먹고 살아난 아이,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을 버리지 않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동 년   옹근 동년을 나는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대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릴 적 내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가 되 박처럼 크고 눈이 알전구만한 가분수모양, 꼭 마치 할리우드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같은 형상이다. 나의 생모가 배속의 나를 떨어뜨리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결과였다.   신체가 약한 만큼 성정미도 여리였던 나는 종일 양모의 치마꼬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 간 휴학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심심풀이삼아 나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다섯 살에 나는 철자를 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학교에 붙던 날, 나는 등록하는 선생들 앞에서 고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주석의 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이며를 줄줄 외워 모두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장 출입에 온 몸 어디라 없이 주사바늘을 꽂고 부어오른 곳을 뜨거운 물어 담근 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며 아파서 우는 나를 달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그림책을 사주는 것 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서 내내 그림책하고 벗해 지냈다. 어찌 보면 련환화(連環畵) 읽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48권으로 된 며, 40권으로 된 이며, 22권으로 된 며, 15권으로 된  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적 3부작  ,   ,  이며를 나는 맨 처음 모두 그림책으로 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한꺼번에 한 질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사이 두고 한 권 한 권씩 나오는 바람에 그 기다림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 이였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매일이고 서점에 붙박여 신간 련환화들이 나오면 모조리 사들였다.(지금도 룡정 신화서점의 퇴직일군들은 당년의 극성스런 꼬마단골이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신발장에 페인트를 칠해서 책장을 만들어주었고 나중에 더 넣을 자리가 없게 되자 또 찬장을 고쳐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신발장 책장에, 찬장 책장에 잃어질세라 서배에 번호를 단 련환화들을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이렇게 옹근 동년에 나는 천 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소장했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렸다.   그렇게 진중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내가 어느 한번 온 룡정을 놀래 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어쩌다가 방화범이 되여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불은 헛간을 다 태우고 번져 나와 곁에 붙여지은 변소와 이웃집 반 채를 태워버렸다. 온 동네가 불끄기에 떨쳐나섰고 소방차 두 대까지 동원되어서야 드디어 불을 끌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김치 움에 숨은 채 큰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웃 아낙에게 발견되어 어스름이 내릴 때에야 김치 움에서 끌려나왔다. 모두가 그 영문을 따져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가 저지른 동기를 말했다.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홍군의 덕택으로 소작농이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토비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홍군토벌음모를 꾸미는지라 토비들을 소멸하게 위해 소작농의 아들애가 소중한 자기 집에 불을 다는 그런 이야기의 그림책, 그 그림책을 읽고 나는 소작농의 아들의 본을 내여 그처럼  거사를 치르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후로 소학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   ,   ,   ,   ,  ... 지금처럼 어린이들의 심성에 맞는 아동도서가 많지 못했던 그 시절 죄다 어른들의 책을 읽었다. (많지 않은 아동도서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구 사회를 경유해온 이의 자서전적 소설였다)   그러다 비판용으로 앞머리에 모택동주석의 어록이 몇 폐지나 붙은   이 나왔는데 그 록림호걸들의 이야기는 나를 환혹시키기에 족했다. 수호전을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선생들이 아직도 철자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훈시하는 말의 한마디가 아무 반급의 혁이라는 애는 장편을 왕왕 내리읽는다던데 너희들은 이게 무슨 꼬라지냐?였다.) 반급 애들이 내게서   이야기를 들으러 방과 후면 우리 집에 가맣게 모여들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한 구들 모여 앉은 그 양말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는 방에서 재봉침우에 올라앉아 나는 중국 옛 찻집의 평서(評書) 이야기꾼처럼 장회체로  을 내리엮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였지만 나에게 친아버지 못지않은 사랑을 몰 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화대혁명 때  나치스집중영 같은 에서 치른 옥고를 빌미로 장기간 투병 끝에 한 많은 눈을 감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장례 날, 동료들이 많이도 모여왔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리였다. 모두들 비감에 물젖어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조총을 쏠때 튕겨 나온 탄알 깍지가 못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허겁지겁 탄알 깍지를 줏는데 어머니가 하고 오열하며 나의 뒤통수를 철썩 아프게도 때렸다.(나의 첫 장편소설  중에 이러한 나의 동년의 모습이 가감 없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때 탄알 깍지나 탐내던 개구쟁이였던 나는 양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덧쌓여지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74    간(肝)을 위한 랩소디 댓글:  조회:2875  추천:15  2013-08-26
. 칼럼 .   간(肝)을 위한 랩소디     김 혁     1,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 보다 간암 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 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때가 많은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2,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여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 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뻔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민족의 “구토지설(龟兎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들어 한국 연세대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 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 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 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 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 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 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 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간"의 육필고   3,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 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기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 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준는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랩소디: (rhapsody) 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채를 지니는 환상풍의 음악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8월 26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3    천년의 향기 댓글:  조회:3480  추천:11  2013-08-15
. 칼럼 .   천년의 향기   김 혁   1 망백(望百)의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금강산에 다녀온 한국의 “지게효자”의 사연이 요즘 중국 전역에 보도됐다. 한국 인천의 리군익(41)씨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금강산을 구경시키고저 특수지게를 만들기로 했다. 등받이를 부착하고 의자와 발판이 달린 알루미늄지게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효자지게"를 만든 것이다. 한국효자의 사연을 접한 산동성 곡부에서 리씨 가족을 초대했다. 곡부는 효를 인륜의 근본으로 가르친 공자가 잠든 곳. 안개가 짙게 드리운 태산에서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오르는 리씨의 모습에 중국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의 효자가 저기 있다"며 앞다퉈 인사를 건넸고 곡부 시인협회 회장은 "한국의 효자가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 대륙을 울렸다"며 리군익 씨에게 7언시를 증정했다.               孔子故里傳佳話(공자의 옛 고향에 아름다운 이야기 전하니)               中國韓國同此心(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효심은 모두 같구나) 늙은 부모를 지게에 업어 버리는 고려장 루습이 없어지게 된 효의 옛설화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슴 따뜻한 현대설화이다.   2 문우들과 함께 유수촌으로 낚시를 갔다. 낚시질끝에 본토박이 문학도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물고기 탕 향연을 마련했다. 뤄페어(羅非魚)라는, 뼈가 연하고 살이 많은 환장하게 구수한 물고기 탕에 맛나게 술잔들을 비웠다. 우럭의 일종으로 산지가 아프리카인 뤄페어는 온수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의 발전소에서 낚시에 환혹된 이들을 위하여 전문 못을 만들고 뤄퍼어를 사육하고 있었다. 슈퍼 낚시군들로 좌석이 어우러진지라 온통 물고기와 그 낚시기법에 대한 이야기들로 주연 상은 둥글어 졌다. 낚시를 화제로 한 기문취담중에서도 뤄페어에 깃든 작은 일화 하나가 나에게 준 충격이 가장 컸다. 검실검실한 몸체에 보기에 툽상스러운 뤄페어에게는 심히 감동적인 육아방식이 있었다. 새끼 기르기에 애면글면하는 어미 뤄페어는 인기척이 나고 위험이 느껴지면 새끼를 보호하려 다급히 입속에 새끼들을 품는다고 한다. 낚시군들이 뤄페어를 낚아올려 땅에 태를 쳤는데 입속에서 숱한 새끼들이 뿜겨져 나오는지라 섬찍하면서도 은은한 감동을 느낀적이 한 두번 아니라고 한다. 단 취담으로만 들을수없는 그 일화가 주는 감동에 젖어 나는 술잔을 더 크게 비웠다. 동물계의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담을 가슴 한자락 뭉클하게 들은 그날이 또한 바로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뒤미처 깨닫고 돌아오는 뻐스에서도 내내 감개에 빠져들어 있었다. 새끼에로 향한 동물의 본능적인 사랑은 뤄페어뿐만이 아닌 많은 동물들에게서 찾아 볼수있다. 수렁이나 논바닥에서 흙 감탕에 묻혀 사는 하잘것없어 뵈는 우렁이, 그 우렁이의 새끼에 대한 사랑은 처절함에 가깝다. 우렁이는 몸 속의 알이 깨이면 제 몸을 먹여 기른다. 제 살 파 먹이기를 다한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아 물에 둥둥 뜬다. 우기 때면 비물에 벌창해진 보도랑으로 어미우렁이의 껍질이 하얗게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수있다. 우렁이는 처절한 부모의 최후를 그렇게 보낸다. 포경선(捕鯨船)의 어부들은 어미 고래를 발견하는 것보다 새끼고래를 발견하면 더 좋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끼고래를 추적하면 그 인근에 부모 고래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두 세마리를 잡을수 있기때문이다. 어시 고래의 새끼에 대한 사랑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 권에서도 우리는 어렵잖게 우리 인간들의 삶을 닮은 모습을 조감해 볼수 있다. 새라 새라웁게 느껴보면 피와 살을 갈라 자식을 낳고 젖 물려 키우고 소팔아 품삯팔아 공부까지 시키고 자식이 나이 들어도 마음에 미덥지 못해 하는 부모의 정성과 은혜는 실로 필설로는 이루다 말할길 바이없다. 희생으로만 사시는 부모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고독, 회한, 비통, 인고를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 앙금을 속으로만 삭이시는 부모님,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시고 무한한 사랑을 다 주시고도 더 줄게 없어서 서럽다는 부모님, 쓴것은 삼키고 단것은 되 뱉아 먹인다는 의 그 은혜를 자식된 우리가 어이 다 알리오! 그래서 는 그런 노래도 있나보다. 그 부모된이들의 다함없는 사랑을 기리고저 해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절,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은 부친절로 세계적인 효도의 날을 만들었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할줄 아는 민족으로 이방민족들중에 이름이 있다. 따뜻한 웃목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밥도 웃밥으로 떠 드리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으로부터 효도의 빛을 진하게 보여 드리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풍부한 민담설화고(庫)중에는 효도에 관련된 설화들이 많고도 많다. 리조 제 9대 임금 성종대왕때의 설화 한편 읽어본다. 만백성의 질고를 제 아픔처럼 여기여 현명한 군주로 수칭되던 성종대왕은 밤이면 늘 평복차림으로 수하 한 두 사람만 거느리고 항간을 두루 밟아 보군 했다. 어느 날 저녁 여느때와 같이 밤행차로 가난한 선비들이 집거해 있는 서울 남산골에 까지 닿았는데 웬 오막살이초가에서 느닷없이 사내의 노래소리와 로파의 울음소리가 혼반이 되여 흘러나오고 있는것이였다. 심히 괴이쩍어 창으로 들여다보니 상제 한사람이 저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부르고 그 곡조에 맞추어 머리를 파랗게 깎은 비구니가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술상을 마주한 파파 늙은 안로인이 치마자락으로 홍안을 가린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필유곡절이라고 성종대왕이 문을 떼고 들어가 물으니 안로인이 눈물을 씹으며 화답하는즉 궁핍하기 짝이없는 살림일망정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려드리고저 며느리가 채좋은 머리칼을 깎아 판돈으로 상을 차리고 춤노래를 벌렸는데 그 경상이 가슴에 뼈맞혀 로인이 울음을 운다는것이였다.    한자락 습윤히 젖어든 가슴으로 감개를 토하며 성종대왕 자리에서 물러 났다. 며칠후, 나라적으로 성대한 과거 시험이 펼쳐 지게 되였는데 남산골의 그 가난한 선비도 과거장에 나서게 되였다. 그런데 이해 과거의 글제는 전에없이 괴상하였다. 그 글제를 봅시면 . 즉 는 뜻이였다. 모든 선비들이 어리친 기색으로 붓방아만 찧고 있는데 그 선비는 자신의 사연을 두고 일필휘지하여 맨처음 답안을 바쳤고 드디여 정시에서 급제하게 되였다. 그후 대왕은 선비를 불러들여 나라의 중책을 맡기였고 그의 안해도 효부로 나라의 후한 상을 받게 되였다. 우리민족의 하많은 효도설담중에서 굴지로 뽑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비록 설화에 그친다 하겠지만 력사적 기재에 의하면 성종때 효도에 대해 여느때보다 중히 여긴 사례들이 많다. 현명했던 성종은 효자와 절부(節婦)를 골라 정표(旌表)를 하고 (갸륵한 행실을 칭송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는 나라에서 부과하는 요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두었고 전국의 80세 이상되는 로인들에게는 다구(茶具)등 물품을 하사하는 우대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태고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요즘 젊은 세대로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극성의 효도방식이 그렇게도 많았다.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이면 안부를 묻는 , 부모가 세상 뜨면 묘소곁에 움막을 짙고 몇 년간 치상하는 , 고향떠나 류랑하면서도 부모님의 신주(神主)와 제기(祭器)만은 꼭 짊어지고 다니면서 류랑제사를 잊지않은 ... 그중 가장 높은 효도로 부모가 앓을때 그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효도를 하는 습속으로 가 서민들사이에 널리 보편화 되기도 했다. 부모가 병고로 시달리면 약왕관음(藥王觀音)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병의 완쾌를 빌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는것이다. 즉 신령앞에서 정좌한다음 들기름을 손가락에 듬뿍 묻히고 그곳에 불을 단다. 인위적으로 손가락에 화상을 입힘으로써 그 타오르는 손가락의 아픔으로 부모의 병고를 공감하는 효도다. 이 소지효행도 , , , , 등으로 태우는 손가락의 수효에 따라 그 효심의 크기를 평가했기에 이 평가기준에 영합하기 위해 보다 많은 손가락에 불을 댕기곤 했다. 당시 대개 동네마다 신목에 새긴 , 이란 표방이 붙은 것은 이 소지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와같이 잔혹한 육체적 가학습속은 아픔을 혈족끼리 나눌수 있으며 내가 아프면 남의 아픔이 덜 해진다는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효도라는 문명적 요소와 야합해서 형성된것으로 보이며 이 자학 효도는 단 조선족뿐인 효행의 류형을 이루고 있는것이다. 또 옛날부터 효자로 정표를 받은 집터에서 살면 효자효손이 난다하여 그 집터는 다른 집보다 세곱네곱 비쌌고 그 집에 든 사람들은 효맥(孝脈)이 력력하여 너나가 정표를 받는 효자효손이 되였다고 한다.   3 허나 오늘날 가슴아피 진맥해 보면 동방례의민족이라 높이 선망되였던 우리 민족에게서 그 인습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가족의 형성, 서구적인 개인주의, 폭팔적인 물질문명의 증대와 더불어 이 한 미풍량속의 인습이 날로 담박해 지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나 같은 극단에 가까운 전례는 낡투로 치더라도 자식으로서의 부모부양의 최저의 의무마저 짐처럼 생각되여 감당하려하지 않는 철면피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 피를 주고 살을 주신 부모를 모시기 실어 형제들끼리 부양문제를 놓고 제비뽑기 추태를 벌린 다던가 그렇게 모시게 된 어머니를 언감 구박까지 주는 짓거리들을 우리는 신변가까이에서 자주 보군한다. 애젊은 나이에 수절하여 자식들을 인끔높은 신분으로 조물시켜놓은뒤 만년의 외로움을 못이겨 재가의 뜻을 보였다가 자식들의 타매를 받고 오동지에 한지로 겨난 례도 처연함에 잠겨 읽은적 있다. 지나간 삶을 보상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외면 받고 버림은채 신산(辛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행이 결여된 부박한 음지를 우리는 근년래 항간의 여러구석에서 어렵잖게 볼수가 있고 들을수가 있다. 일전 어느 소학교에서 과외 활동시간에 퀴즈놀음으로 어머니 생일 알아 맞추기를 내였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백지를 내였다고 한다. 또 어느 한 야회에서 사회자가 야회 분위기를 돋굴 양으로 고 열기띈 어조로 말했는데 한 분도 나서는 이가 없어 난감을 금치 못해 했다고 한다. 몇해전 연변에서는 전국에서도 맨 처음으로 극악범인을 향한 총기사형을 페지하고 주사사형법을 실시했다. 허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 새로운 법률조치의 생신감보다도 맨 처음 주사사형극형을 받은 범죄자의 범죄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더 컸다. 화룡에 거주하고있는 이 조선족범인은 사소한 가정사로 부모와 분기가 있게되자 불효막심하게도 절구공으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때려죽였던것이다. 자고로 시부모(弑父母)나 구부모(毆父母)죄는 륜상십악(倫常十惡)의 대죄이기에 그 장본인은 릉지처참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시키고 그 가족들을 변강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지어 그런 사건이 난 고을의 읍호(邑號)를 부나 군에서 현으로 강등시키기 까지 했다. 어제날에는 이렇듯 엄격한 륜상규제와 륜리풍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볼때 오늘의 인륜이 왜 이 지경에 까지 땅바닥에 내쳐졌나 하는것은 너나가 심사숙고해야 할 일인것이다. 효는 인간사회의 다른 도덕적인 관념과같이 인간문명의 산물이다. 효는 인간 본연의 자세이며 바른 삶의 길이다. 효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는 어른이 자기와 안해 또 형제자매들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한 인간으로 독립해 살수있게 해주었으며 형제와 친지간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협조적인 삶의 중심이자 또한 그 기둥이 되여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른이라는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례의 범절이다. 특히 이것은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내에서 사회의 질서를 튼튼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조된 필수의 덕목이다. 서양사람들에게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친애감이 있지만 동방에서처럼 관념화 형식화로 되여 있지않아서 동방의 효도를 서방인에게 설명할때면 아주 힘이 들 정도이다. 어느 한 어학자는 수십년간의 연찬중에 유럽계의 언어에서 효에 들어맞는 말을 찾아볼수도 없음을 발견하고 이는 동방민족의 전매특허이며 동방민족의 자랑이라 천명한 적이 있다.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0세이상의 로령인구가 그 총인구의 10프로 이상을 점하는 지역이나 나라를 로년형지역 또는 로령화 나라라고 한다. 삶의 질의 향상과 더불어 우리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도 로년인구가 나날이 붇고 있는 실정이다. 집계가 밝힌 데 의하면 전주적으로 이미 60세이상의 로인이 17만명으로서 총인구의 8.02프로를 점하고 있다. 이제 7, 8년후에는 60세이상의 로년인구가 24만명으로 불어나 총인구의 10프로를 넘길것이라 추산된다. 우리 이곳도 서서히 로령화지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전사회가 로령화사회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 할줄로 안다. 부양담보, 건강문제, 빈곤해탈, 배울곳과 즐길장소의 마련, 고독한 환경개선 등등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단 로인들을 위한 물질방면의 향상보다는 정신면의 리해와 지지이며 효를 알고 효를 펴는 사회적 분위기의 이룩이다. 다시 동물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어딘가 천대하고있는 미욱해 보이는 까마귀는 기실 효도할줄 아는 동물이다. 까마귀는 갓 낳아서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여 살리고 자란후에는 60일동안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했다. 하여 우리 선조들은 보은할줄 아는 까마귀를 가리켜 효조(孝鳥) 또는 자조(慈鳥)라고 불러 왔다. 일개 미천한 동물도 이럴진대 우리 인간들이 그 무엇이 모자라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할수가 있으랴? 불전(佛典)에서는 라고 감개했다. 동방례의 민족으로서 만방에 알려졌던 우리 민족에게서 태초부터 꽃 펴온 그 향기는 천년만년 무양히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것이다. 갑골문에서 늙을 로(老)자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이고 효(孝)자는 자에서 지팽이가 없어지고 아들 자(子)자가 보태여진 형상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축하여 함께 가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공자의 을 읊어보며 효도에도 때가 있는 법임을 옛사람들로부터 배운다.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樹欲靜而 風不止) 자식이 봉양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질 않는다(子欲養而 親不待)   공자의 제자들 중 이을 듣고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한 자가 열에 세 명은 됐다 한다.   새삼스레 떠올리는 효도! 낡은 화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풀려버린 치사랑의 현을 조여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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