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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댓글:  조회:2307  추천:18  2014-02-16
. 칼럼 .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김 혁   1 올해는 정월 대보름과 밸런타인데이가 같은 날로 겹쳤다. 민족의 전통명절과 젊은 이들의 모던한 기념일이 어우러 진것이다. 그런데 이 날은 또 다른 각별한 날이기도 했다. 100여년전 할빈역에서 민족 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본이 사형선고를 내린 날인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산화해 간 안중근 영웅. 하지만 젊은이들은 련인에게 줄 꽃다발이나 쵸콜렛 챙기고 저녁에 함께 할 레스토랑의 음식주문에 바빠 민족의 영령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한국에서 한 대학교수의 제안에 의해 2월14일을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날 “안중근 데이(day)”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민족영웅을 추모하면서 밸런타인데이를 즐기고, 전통명절의 풍속을 이어가니 “일석삼조”의 시너지 효과를 볼수 있다는 참신한 아이디어 였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에서 “애국”, “애족”, “기억”, “존경”, “사랑”등 다양한 의미를 담은 쵸콜렛과 꽃다발을 련인에게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는 왕년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날로 안겨 왔다.   2 해외의 동향을 보면서 따라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도 이참에 “윤동주 데이”를 만들어 보면 어떨가하는 바램이였다. 구관조(九官鳥)처럼 곧 남을 따라하기의 흉내짓이 아니다. 윤동주의 고향에서 태여난 필자로서는 그동안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소설화하는 등 그이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작품들을 집필하고 또 각 언론사들에 윤동주 추모 관련 행사보도를 빠치지않고 줄곧 대서특필해 왔었다. 그와중에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추모가 아직도 미온(微溫)적인데 대해 안타까움과 유감을 머금던차 이번 발렌타이데이날의 참신한 아이디어에서 뒤미처 떠오른 생각이였다.     연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윤동주의 유적들 (왼쪽으로부터 시계방향순.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은진중학, 광명학교, 윤동주 시비가 건립된 용정중학, 윤동주 묘소     연변이 낳은 민족시인 윤동주에 대한 숭모사업은 고향에서 내내 이어졌음에도 그이의 아시아를 넘나드는 위상에 비해 아직 그 열기가 크지 못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그나마 큰 영향력을 과시했던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은 10년간 유지되다 마무리 되고 지금은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우리는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 론문집, 윤동주의 동시비 역시 그들 민간단체에서 펴내고 건립했다. 정부의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는 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지만 해외의 윤동주 언덕,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하면 고향인 연변은 아직도 그 숭모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조선족 민간단체들에서 펴낸 윤동주 시집, 론문과 건립한 시비   3 요즘 세월에는 그무슨 기념일들이 그야말로 소털처럼 많다. 재래로 절기가 부여한 기념일, 자신과 부모와 친지, 친구들과 관련된 대소사의 기념일외에도 왕년에는 듣도보지도 못했던 만천하의 기념일들까지도 모조리 챙기고 지어 없는 기념일까지 만들어가면서 누린다. 기억해야 할 날이 많은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다. 문제는 사회가 물질화에 빠져들면서 향락에만 젖어드는 기념일들이 란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의미로 소중히 보듬는 기념일 대신 우리가 정작 지내고 있는것은 향락주의에 젖어 질펀한 매일매일 이어지는 기념일들이다. 때문에 윤동주와 같은 고향을 빛낸 선각자들을 기리는 날이 따로 없음은 부끄러움이요, 응당 이제라도 그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는것이다. 고향의 터전을 닦고 그를 빛내여 오늘에 이르게 한 이들을 잊지않고 기리는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무라고 본다. 이는 우리 삶의 터전인 사회공동체를 지탱하는 핵심가치이자 근본원칙이다. 그 가치를 소중히 할줄 모르고 지어 무감각한 민족은 그로서의 명분과 리유를 찾기 힘들다. 이러한 기념일을 통해 민족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하고 산화해 간 그들의 력사적 업적을 제대로 알아야 할것이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껴야 할것이다. 그이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는 마음을 모아 그 뜻을 잊지 않고 계승발전시켜 우리의 공동체 사회가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더 크게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것이다. 날을 받아(탄생일, 서거일 혹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이의 생가나 묘소를 찾거나 그이의 주옥같은 시 한줄을 읊조리는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알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기회가 될것이다.   2월16일 오늘이 바로 윤동주가 일제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의혹을 남긴 채 비명에 간 날이다. 69년전, 북간도 명동촌의 춥디 추운 겨울의 마지막 날(12월 30일)에 태여나 북간도의 첫 근대교육기관인 명동학교, 룡정의 미션계 학교들인 광명과 은진중학을 나와 경성의 연희전문에 진학했고 그후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일제의 마수에 유린당한 시인은 한줌의 재로 고향에 돌아와 그가 즐겨 거닐었던 동산마루에 묻혔다. 스물아홉에 갔지만 그를 낳은 고향, 그가 학문을 닦았던 경성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에서 조차 숭모해 마지않고있는 민족의 “시성” 윤동주이다. 천형(天刑)처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문학적 열망과 민족애로 북간도 오지의 한 문학지망생이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그렇게 엮여진 그의 작품은 알알이 진주처럼 값지고 빛나오르고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읊조렸던 룡정의 하늘은 오늘도 맑고 시인이 묻힌 동산 마루 무덤에는 오늘도 "보람처럼 봄풀이 무성"하다. 닥쳐오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갈파하고 량심을 노래한 윤동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윤동주, 그런 학우(學友)같은, 형님같은, 애인같은 윤동주를 우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랴 우리도 “윤동주 데이”를 만들자!   2014년 2월 16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9    로마지지[老馬之智] 댓글:  조회:2906  추천:17  2014-02-01
 . 칼럼 .   로마지지[老馬之智]   김 혁    말 해의 벽두가 열리자 인터넷 사이트들에 말띠해에 태여난 명인들에 대한 집계가 떴다.  흥미를 가지고 클릭해 보았다.  우선 력사인물등중에 리세민과 칭키스칸이 눈에 띄였다. “정관지치”(貞觀之治) 로 유명한 당태종 리세민, 대당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군주이다. 사학가들은 "오로지 태종만이 문무를 모두 겸비한 황제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만큼 훌륭한 군주는 없었다"고 정평하고 있다. 칭기스칸은 13세기 초에 몽골 제국을 수립한 뒤 주변 국가를 차례로 정복해 력사상 가장 넓은 령토 확장을 이뤘다. 드넓은 초원에서 말 달리며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던 그에게 말띠는 참으로 일점불차 걸맞는 띠인것 같다. 지도자들로는 루즈벨트등이 있었다. 소아마비를 딛고 링컨과 함께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남는 인물, 대공황과 2차대전이라는 국난동안 4선 의 임기를 치르면서 일본과 독일을 상대로 미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국제련합을 창설했다. 또 미국의 경제 회복, 소외 계층 밎 장애인을 위한 복지, 인디안 보호정책등면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룩했다. 지도자들중 최근 온갖 구설을 만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말띠였다. 이 광분하는 말과 같은 지도자의 지속된 우경의 행보는 린국과의 불협화음, 대립으로 치닫고있다. 더구나 올해는 청일전쟁이 발발한지 120년 두갑자가 지나 또 맞는 갑오년 말띠해이다. 아베가 독선의 위험한 질주를 멈추고 “벼랑에서 말을 멈추기”를 바라면서 중요한 의미의 말띠해에 세상은 그의 다음 행보에 눈길이 쏠려 있다. 배우들중에는 할리우드의 로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들어 있었다. “황야의 무법자”등 그렇게 많은 서부영화에서 말달리며 권선징악의 전설을 펼쳤던 그에게 꼭 어울리는 한해 라 하겠다. 말띠 스포츠인중에는 권투선수 타이슨이 있었다. “핵주먹”이라는 이미지로 복싱계의 전설로 떠 올랐지만 모델을 성폭행하고 상대선수의 귀를 물어뜯는 기행으로 끊임업이 구설수에 올랐던 타이슨이 말띠해를 앞두고 “이제는 좋은 아빠가 되고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지난해12월 그는 영국 BBC와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제 깨끗하게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좁은 링우에서 광포한 검은말 처럼 포효했던 그가 여태껏 보인것이 저돌적인 이미지였다면 이제 그 오명을 벗고 진정 성숙한 스포츠인으로 다시 링우에 설수 있기기를 팬들은 바라고 있다. 말띠 작가들중에는 세계문학의 반렬에 우뚝 선 쟁쟁한 문호들이 많았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솔제니친이 있었다. 세계의 지성, 문학의 량심으로 불리는 그의 대작 “붉은 수레바퀴” 4부 전 16권이 지난해 말, 끝내 중문본으로 모두 완역되여 나왔는데 앞의 제1,2부는 몇해전 사두었고 마지막 3부 10권을 구정을 앞두고 한 질 사들었다. 말띠해 한해 그의 이 대하소설들을 한부한부 읽어나갈 계획이다. 그리고 영국의 소설가들인 버지니아 울프와  헉슬리도 있었다. 고향의 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한 우울한 삶을 살았던 버지니아 울프,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여난 작품을 남기고 갔다. 오늘도 우리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 말처럼 선하고 우울한 눈동자를 가졌던 그녀를 기리여 본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미래인류의 파멸을 예고하는 어두운 예언자적 작품을 남김으로 오늘날 다시 환기되고 있는 올더스, 헉슬리.  대표작 “멋진 신세계”로 인간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유토피아세계를 주장했던 그의 꿈처럼 새로운 한해 우리들 앞에 “멋진 신세계”가 펼쳐질수 있기를 축복해 본다. 역술인들은 올해 “문화, 교육, 농업, 목재, 언론” 분야를 호황 종목으로 점찍었다. 역시 글을 지어 밥을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올 한해 모든 작가들의 문운을 빈다.       말띠해라 각별히 말과 관련된 사자성어로 이음말을 만들어 보았다. 올 한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달리는 말우에서 겉만 보고 지나감)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호시마주(虎視馬走.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보고 말처럼 힘차게 달림)하며 마혁과시(馬革裹屍. 말가죽으로 자신의 몸을 싼다는 각오로 싸움터에 나감)의 자세로 마불정제(馬不停蹄.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아니함)하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한마지로(汗馬之勞. 말이 땀투성이가 될 정도로 달림)의 한 해를 만들어 가자. 말에 관한 명구, 속담, 사자성어가 많았지만 그중에서 “로마지지(老馬之智)”를 스스로 가려 뽑았다. “늙은 말의 지혜”라는 뜻으로 세상살이는 경험에 의하여 축적된 지혜가 난관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설림(說林)〉 상편에 나오는 이야기-  어느 해 봄, 제(齊)나라의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을 대동하고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해 겨울에야 끝이 났고 그래서 혹한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이 진퇴량난에 빠져 떨고 있을때 관중이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 면서 늙은 말 한마리를 풀어 놓았다. 군사들이 허위단심 늙은 말의 뒤를 따라 행군한지 얼마 안되여 드디여 큰길이 나타났다. 한비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을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로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로마식도(老馬識途), 로마지도(老馬知道)라고도 한다. 말의 해에 태여난 인물들은 력사의 행간에서 정열의 갈기를 휘날리며 종횡무진 각 분야를 누벼 왔다. 말은 십이지 동물중 가장 빠르며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무서운 질주 본능덕에 추진력과 도약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력동적인 한 해가 시작되였다. 우리 모두에게 왕성한 에너지와 정열로 “로마지지”- 선인들의 지혜를 롤모델로 삼아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지혜롭게 극복하고 힘차게 헤쳐나갈수있는 한해이기를 기대해 본다.  2014년 2월 1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8    천년의 향기 댓글:  조회:3482  추천:11  2013-08-15
. 칼럼 .   천년의 향기   김 혁   1 망백(望百)의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금강산에 다녀온 한국의 “지게효자”의 사연이 요즘 중국 전역에 보도됐다. 한국 인천의 리군익(41)씨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금강산을 구경시키고저 특수지게를 만들기로 했다. 등받이를 부착하고 의자와 발판이 달린 알루미늄지게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효자지게"를 만든 것이다. 한국효자의 사연을 접한 산동성 곡부에서 리씨 가족을 초대했다. 곡부는 효를 인륜의 근본으로 가르친 공자가 잠든 곳. 안개가 짙게 드리운 태산에서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오르는 리씨의 모습에 중국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의 효자가 저기 있다"며 앞다퉈 인사를 건넸고 곡부 시인협회 회장은 "한국의 효자가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 대륙을 울렸다"며 리군익 씨에게 7언시를 증정했다.               孔子故里傳佳話(공자의 옛 고향에 아름다운 이야기 전하니)               中國韓國同此心(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효심은 모두 같구나) 늙은 부모를 지게에 업어 버리는 고려장 루습이 없어지게 된 효의 옛설화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슴 따뜻한 현대설화이다.   2 문우들과 함께 유수촌으로 낚시를 갔다. 낚시질끝에 본토박이 문학도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물고기 탕 향연을 마련했다. 뤄페어(羅非魚)라는, 뼈가 연하고 살이 많은 환장하게 구수한 물고기 탕에 맛나게 술잔들을 비웠다. 우럭의 일종으로 산지가 아프리카인 뤄페어는 온수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의 발전소에서 낚시에 환혹된 이들을 위하여 전문 못을 만들고 뤄퍼어를 사육하고 있었다. 슈퍼 낚시군들로 좌석이 어우러진지라 온통 물고기와 그 낚시기법에 대한 이야기들로 주연 상은 둥글어 졌다. 낚시를 화제로 한 기문취담중에서도 뤄페어에 깃든 작은 일화 하나가 나에게 준 충격이 가장 컸다. 검실검실한 몸체에 보기에 툽상스러운 뤄페어에게는 심히 감동적인 육아방식이 있었다. 새끼 기르기에 애면글면하는 어미 뤄페어는 인기척이 나고 위험이 느껴지면 새끼를 보호하려 다급히 입속에 새끼들을 품는다고 한다. 낚시군들이 뤄페어를 낚아올려 땅에 태를 쳤는데 입속에서 숱한 새끼들이 뿜겨져 나오는지라 섬찍하면서도 은은한 감동을 느낀적이 한 두번 아니라고 한다. 단 취담으로만 들을수없는 그 일화가 주는 감동에 젖어 나는 술잔을 더 크게 비웠다. 동물계의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담을 가슴 한자락 뭉클하게 들은 그날이 또한 바로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뒤미처 깨닫고 돌아오는 뻐스에서도 내내 감개에 빠져들어 있었다. 새끼에로 향한 동물의 본능적인 사랑은 뤄페어뿐만이 아닌 많은 동물들에게서 찾아 볼수있다. 수렁이나 논바닥에서 흙 감탕에 묻혀 사는 하잘것없어 뵈는 우렁이, 그 우렁이의 새끼에 대한 사랑은 처절함에 가깝다. 우렁이는 몸 속의 알이 깨이면 제 몸을 먹여 기른다. 제 살 파 먹이기를 다한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아 물에 둥둥 뜬다. 우기 때면 비물에 벌창해진 보도랑으로 어미우렁이의 껍질이 하얗게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수있다. 우렁이는 처절한 부모의 최후를 그렇게 보낸다. 포경선(捕鯨船)의 어부들은 어미 고래를 발견하는 것보다 새끼고래를 발견하면 더 좋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끼고래를 추적하면 그 인근에 부모 고래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두 세마리를 잡을수 있기때문이다. 어시 고래의 새끼에 대한 사랑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 권에서도 우리는 어렵잖게 우리 인간들의 삶을 닮은 모습을 조감해 볼수 있다. 새라 새라웁게 느껴보면 피와 살을 갈라 자식을 낳고 젖 물려 키우고 소팔아 품삯팔아 공부까지 시키고 자식이 나이 들어도 마음에 미덥지 못해 하는 부모의 정성과 은혜는 실로 필설로는 이루다 말할길 바이없다. 희생으로만 사시는 부모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고독, 회한, 비통, 인고를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 앙금을 속으로만 삭이시는 부모님,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시고 무한한 사랑을 다 주시고도 더 줄게 없어서 서럽다는 부모님, 쓴것은 삼키고 단것은 되 뱉아 먹인다는 의 그 은혜를 자식된 우리가 어이 다 알리오! 그래서 는 그런 노래도 있나보다. 그 부모된이들의 다함없는 사랑을 기리고저 해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절,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은 부친절로 세계적인 효도의 날을 만들었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할줄 아는 민족으로 이방민족들중에 이름이 있다. 따뜻한 웃목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밥도 웃밥으로 떠 드리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으로부터 효도의 빛을 진하게 보여 드리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풍부한 민담설화고(庫)중에는 효도에 관련된 설화들이 많고도 많다. 리조 제 9대 임금 성종대왕때의 설화 한편 읽어본다. 만백성의 질고를 제 아픔처럼 여기여 현명한 군주로 수칭되던 성종대왕은 밤이면 늘 평복차림으로 수하 한 두 사람만 거느리고 항간을 두루 밟아 보군 했다. 어느 날 저녁 여느때와 같이 밤행차로 가난한 선비들이 집거해 있는 서울 남산골에 까지 닿았는데 웬 오막살이초가에서 느닷없이 사내의 노래소리와 로파의 울음소리가 혼반이 되여 흘러나오고 있는것이였다. 심히 괴이쩍어 창으로 들여다보니 상제 한사람이 저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부르고 그 곡조에 맞추어 머리를 파랗게 깎은 비구니가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술상을 마주한 파파 늙은 안로인이 치마자락으로 홍안을 가린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필유곡절이라고 성종대왕이 문을 떼고 들어가 물으니 안로인이 눈물을 씹으며 화답하는즉 궁핍하기 짝이없는 살림일망정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려드리고저 며느리가 채좋은 머리칼을 깎아 판돈으로 상을 차리고 춤노래를 벌렸는데 그 경상이 가슴에 뼈맞혀 로인이 울음을 운다는것이였다.    한자락 습윤히 젖어든 가슴으로 감개를 토하며 성종대왕 자리에서 물러 났다. 며칠후, 나라적으로 성대한 과거 시험이 펼쳐 지게 되였는데 남산골의 그 가난한 선비도 과거장에 나서게 되였다. 그런데 이해 과거의 글제는 전에없이 괴상하였다. 그 글제를 봅시면 . 즉 는 뜻이였다. 모든 선비들이 어리친 기색으로 붓방아만 찧고 있는데 그 선비는 자신의 사연을 두고 일필휘지하여 맨처음 답안을 바쳤고 드디여 정시에서 급제하게 되였다. 그후 대왕은 선비를 불러들여 나라의 중책을 맡기였고 그의 안해도 효부로 나라의 후한 상을 받게 되였다. 우리민족의 하많은 효도설담중에서 굴지로 뽑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비록 설화에 그친다 하겠지만 력사적 기재에 의하면 성종때 효도에 대해 여느때보다 중히 여긴 사례들이 많다. 현명했던 성종은 효자와 절부(節婦)를 골라 정표(旌表)를 하고 (갸륵한 행실을 칭송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는 나라에서 부과하는 요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두었고 전국의 80세 이상되는 로인들에게는 다구(茶具)등 물품을 하사하는 우대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태고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요즘 젊은 세대로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극성의 효도방식이 그렇게도 많았다.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이면 안부를 묻는 , 부모가 세상 뜨면 묘소곁에 움막을 짙고 몇 년간 치상하는 , 고향떠나 류랑하면서도 부모님의 신주(神主)와 제기(祭器)만은 꼭 짊어지고 다니면서 류랑제사를 잊지않은 ... 그중 가장 높은 효도로 부모가 앓을때 그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효도를 하는 습속으로 가 서민들사이에 널리 보편화 되기도 했다. 부모가 병고로 시달리면 약왕관음(藥王觀音)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병의 완쾌를 빌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는것이다. 즉 신령앞에서 정좌한다음 들기름을 손가락에 듬뿍 묻히고 그곳에 불을 단다. 인위적으로 손가락에 화상을 입힘으로써 그 타오르는 손가락의 아픔으로 부모의 병고를 공감하는 효도다. 이 소지효행도 , , , , 등으로 태우는 손가락의 수효에 따라 그 효심의 크기를 평가했기에 이 평가기준에 영합하기 위해 보다 많은 손가락에 불을 댕기곤 했다. 당시 대개 동네마다 신목에 새긴 , 이란 표방이 붙은 것은 이 소지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와같이 잔혹한 육체적 가학습속은 아픔을 혈족끼리 나눌수 있으며 내가 아프면 남의 아픔이 덜 해진다는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효도라는 문명적 요소와 야합해서 형성된것으로 보이며 이 자학 효도는 단 조선족뿐인 효행의 류형을 이루고 있는것이다. 또 옛날부터 효자로 정표를 받은 집터에서 살면 효자효손이 난다하여 그 집터는 다른 집보다 세곱네곱 비쌌고 그 집에 든 사람들은 효맥(孝脈)이 력력하여 너나가 정표를 받는 효자효손이 되였다고 한다.   3 허나 오늘날 가슴아피 진맥해 보면 동방례의민족이라 높이 선망되였던 우리 민족에게서 그 인습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가족의 형성, 서구적인 개인주의, 폭팔적인 물질문명의 증대와 더불어 이 한 미풍량속의 인습이 날로 담박해 지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나 같은 극단에 가까운 전례는 낡투로 치더라도 자식으로서의 부모부양의 최저의 의무마저 짐처럼 생각되여 감당하려하지 않는 철면피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 피를 주고 살을 주신 부모를 모시기 실어 형제들끼리 부양문제를 놓고 제비뽑기 추태를 벌린 다던가 그렇게 모시게 된 어머니를 언감 구박까지 주는 짓거리들을 우리는 신변가까이에서 자주 보군한다. 애젊은 나이에 수절하여 자식들을 인끔높은 신분으로 조물시켜놓은뒤 만년의 외로움을 못이겨 재가의 뜻을 보였다가 자식들의 타매를 받고 오동지에 한지로 겨난 례도 처연함에 잠겨 읽은적 있다. 지나간 삶을 보상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외면 받고 버림은채 신산(辛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행이 결여된 부박한 음지를 우리는 근년래 항간의 여러구석에서 어렵잖게 볼수가 있고 들을수가 있다. 일전 어느 소학교에서 과외 활동시간에 퀴즈놀음으로 어머니 생일 알아 맞추기를 내였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백지를 내였다고 한다. 또 어느 한 야회에서 사회자가 야회 분위기를 돋굴 양으로 고 열기띈 어조로 말했는데 한 분도 나서는 이가 없어 난감을 금치 못해 했다고 한다. 몇해전 연변에서는 전국에서도 맨 처음으로 극악범인을 향한 총기사형을 페지하고 주사사형법을 실시했다. 허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 새로운 법률조치의 생신감보다도 맨 처음 주사사형극형을 받은 범죄자의 범죄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더 컸다. 화룡에 거주하고있는 이 조선족범인은 사소한 가정사로 부모와 분기가 있게되자 불효막심하게도 절구공으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때려죽였던것이다. 자고로 시부모(弑父母)나 구부모(毆父母)죄는 륜상십악(倫常十惡)의 대죄이기에 그 장본인은 릉지처참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시키고 그 가족들을 변강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지어 그런 사건이 난 고을의 읍호(邑號)를 부나 군에서 현으로 강등시키기 까지 했다. 어제날에는 이렇듯 엄격한 륜상규제와 륜리풍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볼때 오늘의 인륜이 왜 이 지경에 까지 땅바닥에 내쳐졌나 하는것은 너나가 심사숙고해야 할 일인것이다. 효는 인간사회의 다른 도덕적인 관념과같이 인간문명의 산물이다. 효는 인간 본연의 자세이며 바른 삶의 길이다. 효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는 어른이 자기와 안해 또 형제자매들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한 인간으로 독립해 살수있게 해주었으며 형제와 친지간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협조적인 삶의 중심이자 또한 그 기둥이 되여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른이라는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례의 범절이다. 특히 이것은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내에서 사회의 질서를 튼튼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조된 필수의 덕목이다. 서양사람들에게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친애감이 있지만 동방에서처럼 관념화 형식화로 되여 있지않아서 동방의 효도를 서방인에게 설명할때면 아주 힘이 들 정도이다. 어느 한 어학자는 수십년간의 연찬중에 유럽계의 언어에서 효에 들어맞는 말을 찾아볼수도 없음을 발견하고 이는 동방민족의 전매특허이며 동방민족의 자랑이라 천명한 적이 있다.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0세이상의 로령인구가 그 총인구의 10프로 이상을 점하는 지역이나 나라를 로년형지역 또는 로령화 나라라고 한다. 삶의 질의 향상과 더불어 우리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도 로년인구가 나날이 붇고 있는 실정이다. 집계가 밝힌 데 의하면 전주적으로 이미 60세이상의 로인이 17만명으로서 총인구의 8.02프로를 점하고 있다. 이제 7, 8년후에는 60세이상의 로년인구가 24만명으로 불어나 총인구의 10프로를 넘길것이라 추산된다. 우리 이곳도 서서히 로령화지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전사회가 로령화사회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 할줄로 안다. 부양담보, 건강문제, 빈곤해탈, 배울곳과 즐길장소의 마련, 고독한 환경개선 등등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단 로인들을 위한 물질방면의 향상보다는 정신면의 리해와 지지이며 효를 알고 효를 펴는 사회적 분위기의 이룩이다. 다시 동물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어딘가 천대하고있는 미욱해 보이는 까마귀는 기실 효도할줄 아는 동물이다. 까마귀는 갓 낳아서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여 살리고 자란후에는 60일동안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했다. 하여 우리 선조들은 보은할줄 아는 까마귀를 가리켜 효조(孝鳥) 또는 자조(慈鳥)라고 불러 왔다. 일개 미천한 동물도 이럴진대 우리 인간들이 그 무엇이 모자라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할수가 있으랴? 불전(佛典)에서는 라고 감개했다. 동방례의 민족으로서 만방에 알려졌던 우리 민족에게서 태초부터 꽃 펴온 그 향기는 천년만년 무양히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것이다. 갑골문에서 늙을 로(老)자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이고 효(孝)자는 자에서 지팽이가 없어지고 아들 자(子)자가 보태여진 형상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축하여 함께 가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공자의 을 읊어보며 효도에도 때가 있는 법임을 옛사람들로부터 배운다.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樹欲靜而 風不止) 자식이 봉양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질 않는다(子欲養而 親不待)   공자의 제자들 중 이을 듣고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한 자가 열에 세 명은 됐다 한다.   새삼스레 떠올리는 효도! 낡은 화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풀려버린 치사랑의 현을 조여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7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댓글:  조회:3236  추천:10  2013-08-01
. 칼럼 .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김 혁   일전, 장백산천지화산감측소의 일군이 장백산천지서 《괴물》을 발견했다. 장백산천지화산검측소의 무씨에 따르면 27일 아침 5시경, 무씨는 동업자와 함께 온천수온을 감측하고저 장백산 북쪽비탈 천지변에서 온천에서 나오는 기체샘플을 채집중 잠잠하던 천지물에 돌연《V》형의 파도가 일고 수면에 불명물체가 나타나더니 빠르게 앞으로 헤염쳐가는것을 봤다고 했다.  "즉시 사진기를 들고 찍었고 사진속에 머리와 비슷한것이 수면에 있었다. 물체의 륜곽이 똑똑하지 않았는데 사슴새끼의 머리와 목과 비슷했다"고 무씨는 소개했다.   △ 천지에서의 괴물의 출몰은 이미 한두번이 아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몇해전에 이를 보도했었다.  60년대에도 길림성 기상국 직원이 7~8마리의 괴물을 목격해 화제가 됐다. 60~70년대 이후 30~40여 차례 발견됐고 목격자들은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격자들이 묘사하는 괴물의 모습은 코끼리, 개, 수달, 흑곰과 목이 긴 룡 등 다양하다. 괴물에 대한 전설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광서 34년(1908년)의 ,청현통치2년의 외에도 ,에도 모두 그 기재가 있다. 기재와 전설에 따르면 장백산에는 세가지 괴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당나라 임금들이 그 가죽 갖기를 원했다는 화서(火鼠)인데.... 화산인 장백산에는 불구덩이 속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었으며 그 모피로 옷을 지어 입으면 불 속에서도 타지도 데지도 않는다 했다. 다른 한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라고 한다. 얼핏 들어보면... 빅풋(설인, 예티, 싸스콰치라고도 불린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었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인간이 장백산 괴물의 하나였다. 그 세 번째 괴물이 요즘 항간의 화제가 된 천지괴물이다. 옛 중국문헌들에도 괴물은 자주 등장했다. 청나라 강희제 년간에 사냥군 몇명이 천지변 조오대(釣鰲臺)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보았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 했다. 겁이 나 돌아서 도망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나 돌아보았더니 괴물이 사라지고 없었다 했다 광서(光緖)6년 5월에도 유복(兪福) 등 6명이 수면에 물소만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 했으며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天豁峯)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장백산 산중 민속에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천지가에 올라 막을 치고 밤을 새우는 민속이 있다. 밤중에 마치 바다에 해가 떠오르듯 환한 빛을 내며 괴물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세 번 하는 것을 본 다음 천지 물에 몸을 적시면 장수한다고 알았던 것이다. 이 괴물을 두고 천지의 바닥이 바다와 통하고 있어 바닷물이 들어 솟을 때 생기는 물기둥으로, 해안(海眼)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네스호괴물 킹콩, 고질라, 디워... 상업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린 괴물캐릭터들이다.   ▲ 천지괴물이 장백산관광홍보의 또 하나의 매개물로 되지않나 생각해 본다. 항간의 화제인 에 대해 우리는 그저 반신반의로 방치해 왔을뿐 영국의 이나 할리우드공상영화속의 , 일본괴물영화속의 , 한국괴물영화속의 , 처럼 한 지역을 징표하고 상업소재로서 적극 활용하는 높이에 까지 올려 놓지 못했다. 수차 장백산을 다녀오며 보아도 많은 명목많은 관광기념품들중에 괴물기념품은 겨우 한두점, 그것도 조야하게 만든 조각물이 구석쪽에 놓여 있을뿐이였다. 훌륭한 마스코트는 언론매체와 인터넷 웹사이트, 각종 배너 상품, 의상, 관광기념상품 등을 통해 전파되며 또한 관광마케팅의 중요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더우기 관광지의 열기와 분위기를 진작시키고 지방특색의 독특한 기념상품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도 한낱 완구의 의미를 넘어 필요하다. 미키마우스(米老鼠), 탕나드(唐老鸭)처럼 누구나 접할수 있는 진취적이고 생동감이 있고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천지괴물 마스코트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6    귀거래사(歸去來辭) 댓글:  조회:2881  추천:13  2013-01-27
. 칼 럼 . 귀거래사(歸去來辭)   김 혁     1,   지난 5월 말 칸 국제영화제가 60돌 생일을 맞았다. (칸 국제영화제는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가 공인하는 3대 영화제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창설시간이 가장 긴…) 회갑을 맞은 영화제, 여느 때보다 뜻깊은 그번의 영화제에서 한국 녀배우 전도연이 영화에서의 빼여난 연기로 녀우주연상을 수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였다. 프랑스 영화계의 로장 알랭 들롱이 - 전도연의 손등에 입맞추며 트로피(賞牌)를 넘겨주었다. (알란들 롱은 80년대 우리를 열광케했던 영화 에서 눈가리개를 하고 도포를 펄럭이며 출중한 격검술로 사악을 무찔렀던 검술영화의 주역, 정의의 기사 졸로라는 대명사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거물급배우다. ) 한 녀배우의 수상에 웬 흥감질이냐 할수 있겠지만 이는 한국영화계는 물론 아세아 영화계에서도 특기할만한 수상이였다. 지금까지 동양계 녀배우로 칸영화제 녀우주연상 수상은 향항의 장만옥에 이어 그가 두 번째이기 때문. 아릿다운 녀스타에 대한 얘기가 길어지다보니 이제야 본제로 들어간다. 한낱 가녀린 동양계 녀배우를 일약 두번째 으로 등극 시킨 이는 의 감독 리창동이다.     리창동, 누구신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흥취가 있는 이들에겐 뢰성벽력처럼 귀전에 쟁쟁한 인물이다. (전도연 역시) 리창동(李滄東) 감독은 한국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대구에서 태여난 리감독은 문화부 장관 이전에 영화감독,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 경력을 지니고 있다. 198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돼 등단,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 로 각각 리상문학상 우수상과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 력량을 인정받았다.그러다 영화에 빠져들어 어느 유명감독의 조감독도 해보고 각본도 두루 써오다가 1996년 영화 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도시화와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각본상과 영화평론가상 작품상,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한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카나다 밴쿠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20여 개의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1999년에 내놓은 두번째 영화 은 군사독재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 작품으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그 본인은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2002년 발표한 세 번째 영화 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 리감독은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였다. 관가와 문화계는 물론 일반 국민도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감추지 못해했다. 문화예술계는 예술인출신 장관의 탄생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감독으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는 리감독이 자칫 관료생활로 인해 그 동안 닦아온 예술적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인차 깨여졌다. (하는 격으로) 장관 취임이후 리감독은 기존의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과는 차별화되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줬다. 리감독, 아니 리장관은 취임초 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이제부터 , 며 문화정책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에서 직원들에게 를 권유했다.  (관직에 오르기 바쁘게 혼자 전체 직원들의 사무실보다 더 크고 채광이 좋은 독방에 일명 이라 부르는 큰 테불상에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부터 갖추는, 그 의자에 앉는 날 부터 까닭없는 위세로 얼굴이 풀 먹인것처럼 딱딱하게 굳는, 우리의 령도동지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사뭇 다르다.) 문화부장관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것을 라 표현했다. 그 스스로 청하지 않았으되 그 자신의 말마따나 시키고 문화부 장관직에 오른 것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이라는 그 에서 일년반도 못 되여 물러났다. 리장관, 아니 리감독은 레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노타이 차림으로 문화관광부에 입성했던 모습 그 대로 리임식 대신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청사를 떠났다. 재임기간에 손수 차를 몰고 출근하는 등 예술가로서 감각과 자기령역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총선때 정치권의 지역구 출마요구를 거부한 그는 다만 정치권에 섞이지 않으려는 웅숭깊은 처신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린것이다.  시간과 작품만이 그 자신을 을 거두어 가리라 생각한다고 했던 리창동은 장관 퇴임후 영화계 복귀작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 칸이 기립박수를 드린, 동양계에서 두번째 녀우주연상을 이끌어내는 쾌거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2, 이번엔 포송령(蒲松齡)의 문언(文言)소설집 에서 나오는 그 사람 얘기다. 는 (민간전설에서 널리 취하여 여우며 귀신 도깨비들을 등장시켜 인간사회를 의인화, 저승세계를 현실생활과 잘 융합시켜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 가운데 인생철학을 담은 청나라때 지괴소설-志怪小說.) 세인이 다 아는 명저이니 이쯤에서 각설하기로 하고… 광생이라는 문인에 대한 이야기다. 수백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라고 한다. 옛날, 작은 관리 하나가 작은 현에 부임했는데 청고한 문인을 벗으로 삼고저했다. 수하들이 때자국이 꾀죄죄 흐르는 문인 하나를 천거했는데, 관리는 그 문인을 자주 만나 술잔 기울이며 세상사를 담론했다. 미구에 관리는 괜찮아 보이는 그 문인에게 관직 하나를 맡겼다. (자그마한…) 그런데, 그때로부터 그 문인이 문인답지않게 후딱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상전에게는 좋은 말만 괴여 올리고 죄없는 백성들과도 호통질이 십상인데 도무지 애초의 문인맛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에 관리가 머리를 절레절레, 그 문인을 관가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포송령님은 왜 그 문인의 이름을 굳이 광생(狂生)이라 달았을가? 제 푼수도 모르는 미쳐난 서생이라는 뜻에서?   3,  옛날에는 벼슬을 하려면 문학공부를 해야만 되였다. 문장을 잘 지어 과거에 급제하면 정승도 되고 판서도 된다. 이로서 문학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였다. 벼슬자리는 적극적인 면으로는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수단이다. 그에 반해 소극적인 면에서는 부정당한 사리를 도모하고 전제와 폭정을 유발하는 도구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요즘 보면 벼슬아치들을 보면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자아가 비틀어지고 분식된다. 따라서 모두가 부여한 벼슬의 원형의 적극적 일면이 소실되고 자사자리적인 수단으로 전락된다. 어제를 돌이켜보면 이름이 쟁쟁한 문호, 문웅(文雄)들중에 벼슬길에 오른 문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굴원은 삼려대부(三?大夫)라는 관직을,리백은 한림(翰林)이라는 관직을,도연명은 팽택령(彭擇令)이라는 관직을,두보는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라는 관직을…      (관직이름이 저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서 뭔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직역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화려한 를 벗어버렸다. 루추한 서재에서 때깔좋은 관가로 옮기자 곧 자기가 거처할 곳이 아님을, 자기가 가야 할 길이 길이 아님을 발견했던것이다. 모두들의 선망속에 오른 그곳이 허환(虛幻)의 세계이고 지어 비렬한 권모술수가 란무하는 곳임을 알아차렸고  그 옥에 스스로를 가둘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고작 다섯말의 (五斗米, 당시 관리들의 월급) 쌀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리백은 스스로 술의 신(酒中仙)이라 자처하며 천자가 불러도 곁에 가지 않았다. 얼마나 멋진(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쿨!한) 화폭인가! 이러한 유유자적의 쾌의(快意)속에는 비틀어진 권세욕에 대한 멸시와 염오가 서려 있었다. 또한 그 쾌의는 자아의 찾음과 회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것은 시 한 수의 삶이 아니였다. 그것은 일종의 사상이였고 하나의 고오(孤傲)한 령혼이였다. 하기에 권력이 횡행하고 세속이 란무하는 세상에서도 작은 먹이에 연연하는 닭, 오리가 아닌 오연한 학처럼 빼여날수 있었다. (보다 더 좋은 격찬은 없나) 그들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옯겨놓고 리해하려 한다면 쉽지는 않다. 요즘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구하고 열광하는 것은 관연 무엇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권세에 아부하고 봉응(奉迎) 하는 관습에 물젖어 왔다. 오늘날 생활의 모든 가치와 요의는 흡사 권세자와 돈있는 자들의 손에만 쥐여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소유한 사회의 량지(良知)가 있는 력량은 흔히 권력앞에서 아주 미비하다. 권세자들의 횡포와야만에 비할 때 문인들이 한사코 수호하고저 하는 철칙은 그렇듯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무원조하고 고독함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시대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  서가에서 나와 관가로 달려가는, 그 문전을 기웃거리는 문인들의 모습이 보여우려되는 요즘이다. 문학에 매혹되였던 이들이 어쩌구려 벼슬에 환혹(眩惑)되여 버렸다. 그것도 룡관이 아닌 닭볏만한 오사모를 두고 서로 쓰려고 생색을 쓰고 아귀다툼을 벌린다. (왜 사람과 사람사이에 권세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그렇듯 복잡하게 허환스럽게 보이는지…) 흔히 관직에 오른 다음의 문인들을 보면 그렇게 맹렬한 창작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관직에 오르면 사소한 잡일에 매여 창작의 충분한 시간을 잃을뿐더러 설령 시간이 있더라도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 위치가 달라진 만큼 그렇게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혹은 감히 쓰지 못해서다. 그러다 필에 녹이 껴 미구에는 아주 쓸수도 없게 된다. 는 말이 있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지고, 벼슬이 많으면 몸에 고초가 있다는 명리학(命理學)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벼슬은 아집과 리기심에 바탕한 탐욕으로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한다. (속 그 반푼수의 광생이처럼) 한 문인이 권세욕망의 지배와 의지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는 리익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속적 욕망추구로 오염된 삶을 관직을 통해 무마하고자 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한, 문인의 삶을 이어나가 기는 어렵다. 유한한 권력에 취해 마른 기침하는 문인보다 무한한 창작세계에 자신을 던져 웅숭깊은 소리를 내는 작가들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명저들이 후세까지도 주목되고 애독되는 까닭은 악속(惡俗)에 물젖은 동류들과 합족하지 않고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의 령혼을 칭송하는 지은 이들의 경지 때문이다. 그곳에 명작가들의 품덕과 량지가 있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벼슬자리같은 것을 멀리한뒤의 위축감, 망연함이나 순간적인 경이로움이 아닌 장구한 령혼찬가의 절구들로 남아 있을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   벼슬자리를 팽개치고 은둔으로 일생의 한 절정을 장식한 도연명의 작품 의 몇구절을 뽑아 열뜬 문단 열뜬 그 사람들에게 드려본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覺今是而昨非 … 復駕言兮焉求 樂琴書以消憂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 이제는 깨달아 지난날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였음을 알았다… …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으랴.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을 달래리... ...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5    상생의 빛 댓글:  조회:4605  추천:24  2013-01-20
  . 칼 럼 . 상생의 빛 김 혁     반 고흐의 《해바라기》 나의 서재- 《허강재(虛崗齋》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이다. 미대 지망생 이였던 나에게서 물론 반 고흐는 익숙하다. 짧은 생애동안 1천 2백여 점의 유화와 1천 점 이상의 소묘를 제작한 광열의 화가, 살아서는 한 점의 작품밖에 싸구려 헐값으로 팔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그 작품이 최 상류층만이 소장할 수 있을 만큼 세계최고의 비싼 액수에 거래되고있는 기인... 전기적인 색채로 가득한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미술사에서 신화의 반렬에 오르고 있다.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황금빛으로 늠실거리는 《해바라기》가 압권이다. 그 그림이 미술품 경매의 기적을 탄생시켜서만이 아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에 쏟아낸 그의 에너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화폭 위에서 살아 생생하게 꿈틀거리기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열정과 작열하는 태양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그림들, 풍경 속에 태양이 보이지는 않지만 화폭 가득 그 빛은 담겨져 있다.   반고흐의 "해바라기" 반 고흐의《해바라기》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손에 잡은 총서에서 해바라기에 관련된 과학문장을 진지하게 읽게 되였다. 해바라기 씨앗의 배렬은 시계 방향과 반 시계 방향의 라선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라선수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렇게 배렬 할 때 좁은 공간에 많은 씨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꽃잎 또한 이리저리 겹치면서 효률적인 모양으로 암술과 수술을 감싸있다. 잎을 배렬할 때도 맨 우의 잎에 가리지 않고 햇빛을 최대한 받을 수 있도록 엇갈리면서 잎을 배치한다. 이러한 잎의 배렬은 결코 한 장의 잎의 립장만이 아닌, 전체 잎의 립장을 고려한 것이다. 결국 해바라기는 생존에서 최적의 수학적 해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총합으로서 최적을 추구하는 자연계의《상생의 지혜》다. 과학총서를 읽으며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화두 하나를 잡아 보았다. 그 화두가 곧바로 바로 상생(相生)!이다. 상생! 오행설(五行說)에서는 상생을 가리켜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다시 쇠를 생(生)하여 줌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자연의 리치로 생각해 보면, 목은 식물 또는 생물을 의미한다. 목은 태우면 화가 되고 화는 타고나면 재가되어 땅으로 돌아와 흙이 된다. 흙이나 바위 속에서 금속이 채취된다. 금속은 보기에는 단단하지만 불로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어 물이 된다. 수는 식물의 중요한 영양분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상생이란 서로 相자, 살릴 生자로서 서로 도와 가고 살아가는 관계,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감을 뜻한다. 또한 상생은 상극에 대립되는 말이다. 상극적 관계, 불과 물의 관계를 비롯하여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곡선과 직선 등과 같은 대립적 요소를 융화, 조화시키는 것이 상생의 본질적 특성이다. 순 우리말로는 《어우름》이란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벌레들의 합창 자연계에서 상생 즉 어우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해바라기뿐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은 사계절이 가고 오는 순리와 먹이사슬에 따른 생태계의 질서를 섭리처럼 간직하고 있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언제고 《상생의 합창》을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 하면 흔히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이다 하는 표현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물학자 다비드 애틴 볼은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저서에서 식물들은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상호의존을 통하여 번식과 번영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 지구생태계에서 생물중량 면에서 제일 으뜸은 식물들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동물들을 다 한데 모아도 식물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생태계에서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바로 곤충들이라 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을 위해 곤충은 대신 꽃가루를 날라준다. 그 대가로 식물은 곤충에게 달콤한 꿀을 제공하여 배를 불리게 한다. 이처럼 파리나 벌 등이 가루받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멸종에 직면해야 할 판이다. 만약 열심히 땅을 파고 사체를 먹어대는 개미가 없다면 토양의 영양소는 순환할 수 없을 것이고 땅에는 죽은 동물만 쌓여갈 것이다. 생태계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암벽 우의 잡목과 풀이 손을 잡듯이 서로가 협력해 상생한다. 자연계의 생물들에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일찍이 터득했다. 수와 무게에서 가장 막강한 생태계의 두 생물집단이 서로 물고 뜯는 상잔관계가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 번창한 사실은 우리네 삶에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을 둘러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의 문제들을 반추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무모한 전면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생물들보다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생물들이 우리 곁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바 자연철학의 핵심내용은 곧바로 상생(相生)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질서와 륜리, 그리고 욕망에서 벗어난 공존의 드라마를 자연은 겸허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왜가리가 이른 봄 일껏 튼 둥지를 가을백로에게 넘겨주는 양보에서 꽃을 다치거나 다투지 않고 꿀을 얻는 벌, 나비의 춤사위에서 만물의 령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얼굴 붉히며 배워야할 덕목이 보인다. 즉 상생의 덕목을 키워 오늘을 지키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혜가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화가들이 그린 의자 다시 《해바라기》를 즐겨한 반 고흐로 돌아와 보자. 반 고흐는 의자를 주제로 해서도 그림 두 점을 남겼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이다. 여기서 고갱은 19세기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물 폴 고갱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를 그린 두 개의 그림을 잘 살핀다면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의 의자》는 짚으로 엮고 소나무로 만든 수수하고 투박한 의자이다. 방 한 귀퉁이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의자에는 파이프 하나와 잎담배 쌈지 하나가 놓여 있다. 《고갱의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보다 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의 의자에는 소설책 두 권과 촛불이 놓여있으며 의자는 화려한 주단 우에 놓여 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일석(一席)의 위치를 남긴 반 고흐와 고갱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다. 1887년 프랑스 아를르에 있는 고흐의 작업실을 방문한 고갱은 고흐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함께 작업했다. 이 기간은 두 대가에게서 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그러나 또한 매우 비극적인 시기였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의 교류를 통해서 각자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갈등과 더불어 서로 성격이 부딪치면서 드디여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흐와 고갱의 의자 최근 독일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고흐의 《귀 절단사건》에 대한 새로운 설이 나와 미술계를 놀래 우고 있다. 지금까지는 반 고흐가 고갱과 싸우다가 격분해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것이 정설 이였다. 허나 사학자들이 1888년 당시의 경찰 보고서와 사고 무렵의 상황을 분석한 결과, 유일한 목격자였던 고갱의 행동에 미심쩍은 데가 너무 많았다. 고갱은 사고가 난 다음 서둘러 빠리로 떠났고 경찰들이 조사한 그의 소지품 목록에 펜싱 장갑은 있었으나 펜싱 검만은 빠져 있었다. 따라서 고갱이 서두른 나머지 펜싱 검만 챙겨 달아났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펜싱 검을 휘둘러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펜싱 검이란 유럽의 검술에 쓰이던 가늘고 긴 검의 일종. 반 고흐가 그린 두개의 의자그림은 두 화가의 역학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반 고흐 자신의 실상과 고갱의 이미지와의 대비로서 그들 지간의 라이벌 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 속의 의자가 놓였는 집에서 고갱과 한집살림을 하며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급기야 유명한 반 고흐의 《귀 절단사건》을 유발시켰으며 그 뒤 반 고흐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의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 의자들은 대화를 하고 있다. 두 의자의 주인도 그렇게 대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결과는...   고흐와 고갱 사대부들의 풍경 조선 후기 실학자로 리중환(李重煥)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세상천지를 떠돌아다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저서 《택리지(擇里志)- 인심》조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무릇 사대부가 사는 곳 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리유는 사대부들이 당파를 만들어서 일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권세와 리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리중환은 사대부들이 《자신의 행실을 잘 닦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론하는 것을 싫어하며…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과는 한 곳에서 살지 못한다.》라고 엄연하게 비판했다. 몇 백년전에 남긴 글이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리유는 오늘날 우리의 풍토가 그때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 반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처럼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례가 우리 주변 《사대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재현되고 있다. 너나가 그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꺼내기 싫어하는 화제이지만 짚고 보면 《문인상경(文人相敬)》이 아니라《문인상경(文人相輕)》의 부박한 바람에 문단이 썰렁한 한기를 느낀 지가 오라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수년 여 동안 내내 불어 치고 있으며 갈수록 그 부조리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어제 날 함께 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정차고 벅찬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이 하나 둘 서로 반목해 버렸다. 세대는 세대끼리, 장르는 장르끼리, 녀류는 녀류끼리... 간혹 가다 맞 띄우면 소 닭 보듯 혹은 먼 산 보기를 하는가 하면 아예 고개를 탈아 버린다. 문학관련 달변들을 토하고 작품을 읊조리던 입으로 상대에 대한 험구를, 독설을 뿜는다. 서로에게 아주 못질을 해 댄다. 지어 문학행사가 펼쳐진 장소에서조차 팽팽한 기분으로 서로의 파벌을 찾아 짝지어 앉는 모습들이 눈꼴에 시리다. 환란이 끝임 없던 춘추전국시대면 오죽할 가 싶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인들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신만이 문단의 일인자요 자신의 작품만이 력작이라고 역설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한 본위적 생각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편협한 자세, 스스로의 힘만을 믿는 자세 때문에 오만과 방자함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의로움이요 진리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너야 어떻게 되든 나만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하겠다는 독선과 대립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인집단과 문인리더의 위상상실과 그에 동반한 인간소외, 왕따, 금전만능주의, 집단리기주의... 등등으로 파생된 현상들은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단전체로서의 최대 리익보다는 개인이나 개인을 둘러싼 작은 집단의 리익을 최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지독한 개인 리기주의가 팽배해 있어 전체적인 조화와 총합으로서의 최선을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로서 사회에 존경받는 이미지로 남아야 할 문인들이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데 린색한 사람, 맡은 바 일에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 남을 헐뜯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각인 되여 버렸다. 이러한 풍조의 다년간의 루적은 문단 인심을 그만큼 메마른 불모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제 함께 공멸(攻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형의 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으스스 들곤 한다. 부끄러움의 부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문인들의 초상이다. 처절한 싸움판으로 변해가고 있는 오늘의 문단상황을 보면 인간에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잘된 것으로 생각을 하는 속성이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문학을 알건 모르건, 상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건 말건, 오직 상대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금 아귀다툼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싸워서 얻는 행복이 타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악에 지나지 않는 바, 타인을 짓밟고 행복을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원망과 저주를 받아 점점 그 독성에 물들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인데... 이는 문학에 심취 되여 문단에서 양명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아니라 개개인의 치사하고 야비한 속물적 근성이 발휘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되어 우리는 마음속에 서로를 구분 짓고 생활 속에 차별을 두며 너무 오랫동안을 대항 론리 속에서 살아오게 된 것 일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경우에는 그 어느 쪽도 리득을 얻기는커녕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갉아져 있는 오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잔인성과 시기심에 근거를 둔 이러한 악취미를 계속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결투문화를 정착시켰던 로마인들은 크게 지은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끼리 서로 참살하는 장면을 보고는 흥분하고 열광했었다. 그러한 결과 끝내 로마제국에서 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몰아내고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러한 비극은 옛날 얘기만은 아닌 듯 하다. 인간관계에선 서로의 격려와 사랑 속에 생의 에너지가 창조됨은 물론이요, 미완의 존재인 인간의 결점을 서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대결구도를 취하게 되면 발산되던 에너지마저 줄어들게 되고 인간의 결점은 상대의 시기와 공격을 받아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점을 저마다 똑 부러지게 나오는 우리의 《사대부》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섣부르고 설익은 몰지각한 행태는 상생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상생. 인간사에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이 언제 중요하지 않을까 마는 요즘 우리 문단만큼 절실할까 싶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지금까지의 인류력사는 대립과 경쟁 그리고 투쟁의 력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의간의 태생적 갈등관계와 불협화음, 그 속에서 수많은 인간이 깊은 원과 한의 질곡 속에서 피와 눈물을 흘렸고 죽어갔다. 그 력사의 장하(長河)속에 우리의 민족도 참으로 오랫동안 싸우며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사고 방식은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적대론리와 투쟁론리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왔다. 옳은 내 편과 틀린 네 편을 갈라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적대적 관계를 열심히 만들어 왔다.《싸워야 잘 큰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다시피 타자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극과 극의 생짜 개념에 버릇 되여 왔다. 부패무능 한 지배 계층으로 인한 탈향(脫鄕)이 그 한 양상이며, 일제하 왜적에 대한 항거가 그러했으며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 그러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더욱 그러하였다.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한다. (年年講,月月講, 日日講》란 표어가 네거리에 붙여있는 환경에서 저마다 투계 닭처럼 목 볏 살리듯 하고 지내왔다. 이외에도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 브로커들의 사기행각과 그로 인한 서로의 거부와 반발 역시 또한 그러한 양상의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제 우리의 력사, 우리의 삶은 적개심과 대항의 구도가 아니라 리해심과 사랑으로 서로 더불어 껴안고 서로 생명을 살려 나아가는 상생의 구도와 철학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략과 상생의 철학이 시나브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 아는 《순망치한》 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먹여 보자. 脣 : 입술 순 亡 : 잃을 망 齒 : 이발 치 寒 : 차가울 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함께 지내던 사람이 망하면 다른 한쪽 사람도 위험하다는 뜻. 춘추시대 말엽, 우(虞)와 괵은 린접한 형제 국으로 우는 강국 진(晋)에 이웃해 있었다. 진나라는 진작부터 두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형제 국인 만큼 그 중 한 나라가 도울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었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진나라는 건널목인 우나라 왕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우나라의 궁지기(宮之寄)라는 현인이 진나라의 속셈을 간파하고 우왕에게 간언 했다. 《괵나라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옵니다. 만약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했습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왕은 충신의 간언도 무시한 채 진나라에 길을 내주었다. 우나라가 길을 내준 터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했고 궁지기의 예견대로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포로로 잡았다. 우나라 왕은 궁지기의 《순망치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專)》에 수록된 이야기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만 같다. 입술과 이발처럼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보다 중시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미덕이었다. 우리 민족의 지명편람을 보면 약수동이요 청수동이요 하는 지명이 많고도 많다. 동은 물(水)을 함께(同) 쓴다는 의미로 선조들은 마을이 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임을 리해하고 한 우물 한 강을 쓰며 오순도순 살아 왔다. 허나 오늘날 그러한 공공적 가치나 공동선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지축을 뒤흔드는 극적인 변화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은연중 흔들리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 조선족위기설이 나올 지경으로 그 현안은 여실하다. 이러한 급변 속에서도 내부의 갈등과 분렬에 빠져있다는 암매가 두렵다. 개개인의 아픔에 사로잡혀 과거의 상흔에 안주하고 반목과 불평만 하는 것은 인과의 진리를 모르는 소치(所致)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안은 누가 누구를 밟고 얼마를 버는가 하는 소아적 리기심을 충족시키는 싸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의 명분에 얽매어 입술을 잃고 이를 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정으로 상생의 묘수가 필요한 때이다. 급변하는 세상을 상대로, 미래를 책임질 상생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존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상생의 해법을 찾아 나아가는 성숙한 모습을 모여줄 필요가 있다. 강하고 힘있는 민족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가능해 진다. 갈등과 분렬을 극복해낼 줄 아는 상생을 통해서만이 작지만 힘있는 민족을 이룩해 나아갈 수가 있다고 본다. 반목과 질시가 풍조로 되고있는 속에서는 힘있는 민족으로 남을 수가 없다. 반목과 질시를 극복하고 선진민족의 양상을 마음속에 새기며 손에 손잡고 목전의 진통을 이겨 나아가야 한다. 상생만이 우리의 불안한 불면을 잠재워 주고 고난의 암초를 피해 가는 주문을 열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의 무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이어진 세계임을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상극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생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의 문단은, 나아가서 우리의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렇듯 상생은 우리의 미래의 비전과 직결 되여 있다. 일상 곳곳에서부터 서로가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양장을 한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함께 팔 겯고 걸어도, 햄버거 집에서 콜라 마시면서 김밥을 우겨먹어도, 오페라와 판소리가 한 무대에서 만나도 어우러질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시대다. 서로가 정면대응으로 시퍼런 펜싱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의자를 마주하고 무릎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며, 발맞추어 박자에 맞추어 상생의 군무(群舞)를 추는 것이 바람직한 세상이다. 진부한 살풍경의 의식에 채찍을 날리면서 한 가닥 기대를 가져본다. 모두가 우리 안의 염치를 되살리면서 오래 동안 굳어빠진 관행을 떨쳐버리고 욕망의 크기를 조금씩만 줄이고 상반된 립장을 잘 조화시키면서 흔쾌히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때, 또 이를 아름답게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상생의 기운이 넘칠 터이니 빛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전후좌우 둘레둘레 어우러진 따사로운 풍경을 치유와 공생을 담은 량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가! 새해에는 상생을 좌우명으로 삼고 청정한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함께 하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기를 약속해 봄이 어떨가? 찬바람이 부는 계절, 봄바람처럼 훈훈한 우리 공동체를 살려 가는 진정한 상생의 화두를 던져 본다.  
14    해장국의 지혜 댓글:  조회:2856  추천:11  2013-01-04
. 칼럼 .   해장국의 지혜 김 혁 몇해전 어느 한 주간지의 청탁으로 그 부간에 태조 이성계의 왕조창업을 내용으로 한 력사소설을 연재한적 있었다. 그런데 기성작품을 련재한 것이 아니라 일면 창작하면서 일면 연재했기에 신고가 작지 않았다. 편집의 재촉성화도 있었거니와 본인의 필재의 미달, 그리고 오래동안의 기자생활에서 버릇된 습작습관 때문이였다. 신문의 발간을 턱 앞에 앞두고 현장에서 하여 원고를 바치던 습성대로 작품의 한기 분량을 원고교부를 하루 앞두고 하루 저녁새에 써서 바치곤 했다. 고약한 버릇인줄 알면서도 체질화된 창작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웠다. 50 여회의 련재를 그렇게 써냈다. 연재가 끝나는 동안 내내 채무자를 밖에 둔 빚짐에 눌린 사람처럼 지내왔다.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 것이 곧바로 술이였다. 한기 분량의 연재를 끝내고 나면 나 때문에 늘 주필께 신칙받는 편집을 끌고 맥주 집으로 가곤 했다. 억벽으로 술을 마시곤 했고 따라서 숙취에 이튿날이면 난산에 당착한 아낙네들처럼 다른 신고에 시달려야 했다. 위약을 한웅큼씩 집어먹어도 보고 도 들이켜 보고 알로에 줄기를 으적으적 씹어도 보고... 오만상이 죽상이 되어 타작마당 콩단처럼 굴러봐야 허사. 그러다 체증이 어린 내 가슴을 염천의 소나기처럼 후련하게 씻어준 것이 있었다. 바로 해장탕이였다. 그때 나는 실로 해장탕의 진한 맛과 신묘한 힘에 새삼스레 그리고 내심 감복을 했었다. 역사소설창작이니 당시의 지리, 풍토는 물론 자질구레한 복장 음식에까지 해당자료를 훑어보며 세세히 고증해 봐야 했다. 그러다 자료더미에서 재미나는 일화 하나를 뽑아내게 되었다. 글쎄 그 맛갈스런 해장탕의 발명이 글쎄 태조 이성계와 끈끈한 연계을 가지고 있는 것이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다음,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로 했다. 초옥 한채를 짓는데도 온갖 길흉을 따지는 경향이 심하던 때이므로 리태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유지 선정에 무등 신경을 썼다. 그러던 중 드디여 도읍의 명지를 찾아내고는 심히 기뻐 촌부락에서 소를 잡고 백관과 더불어 축하연을 펼쳤다. 그렇게 축하잔치가 사흘 낮 사흘 밤 펼쳐졌는데 사흘째 되던 날 음식제작을 맡은 내시들이 난감한 기색을 짓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원체 대동한 인수가 많아 소고기를 다 발라내 먹어버리고 뼈만 남은지라 임금님에게 변변한 음식상을 갖추어 드릴 수 없는 연고였다. 이를 전해 들은 이태조는 남은 음식으로라도 활용하여 대충 응부할 음식을 만들라고 헌활(軒豁)하게 분부했다. 이에 내시들이 고기가 붙지 않은 소뼈라도 우려내고 콩나물이며 무, 파를 넣고 마침 쇠 선지도 남은지라 그것도 함께 넣어서는 국도 아니고 반찬도 아닌 언감 을 안쓰러운 기색으로 임금상에 조심조심 올렸다. 모두가 임금님의 반응을 곁눈질로 훔쳐보는데 한 모금 떠서 맛보던 태조가 무릎을 탁 치는 것이였다. 그 맛도 별미려니와 숙취에 트짓하던 속을 쏴악 씻어주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것 이였다. 그 후로 해장탕은 궁중음식으로 까지 지목되였다고 한다. 항간에서 전해진 야담설화일터지만 해장탕이 우리 왕조의 건국설로부터 유래되였다는 것은 처음 듣는일, 이는 주벽(酒癖)이 심한 애주가인 나로 말하면 작품창작 중에서 거둔 하나의 수확이였다. 이방인들의 풍속례습에 대해 힐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 민족들의 숙취를 푸는 비법은 우리들에 비해 엉성한데가 많은 것 같다. - 몽골사람들의 해장방법은 기상천외하기 그지없는바 데운 일년감 즙속에 식초에 절인 양의 눈알을 넣어 숙취자가 한꺼번에 삼켜야 한다. - 독일사람들은 절인 청어토막과 양파를 함께 삶은 다음 맥주를 뜨끈뜨끈하게 데워서는 함께 먹는다고 한다. - 아이띠 사람들의 해장법은 어딘가 미신적 색채까지 띠고 있다. 숙취자가 마셔버린 술병을 찾은 후 술 마개에 13개의 머리핀을 꽂아 넣으면 취한 사람이 깬다고 믿는 것이다. - 이렇게 불가사의한, 지어 해괴하기까지 한 방법들에 비해 인체에 필요한 원소들을 대량 포함하고 있는 소뼈, 콩나물, 무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만들어진 우리의 해장법은 그야말로 맛나고 만들기 쉽고 일상화 된 자랑할만한 음식이라고 격찬하고 싶다. 여느 때보다도 주연이 둥글어지는 설 명절이 겹 띄운 요즘, 우리의 고유한 맛과 멋이 담겨진 해장탕 한 숟가락이 어쩐지 가볍게 안겨오지 않는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드라마_대장금_OST  
13    대하소설을 읽다 댓글:  조회:3251  추천:17  2012-11-06
. 수필 .   대하소설을 읽다   김 혁       요즘처럼 시간을 쫓고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서 부피가 벽돌장처럼 두툼하고 쌓아놓으면 자신의 키높이는 족히 될 다부작 대하소설을 완독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한 작업이 아닐수 없다. 마치 “초고새 계곡을 날아넘기”, “올챙이 바다를 횡단하기”로 힘에 부치는 작업일것이다. 어쩌면 홀리우드의 빅스타 톰.클루주가 주연한 영화제목처럼 완수할수없는 “불가능한 미션(任务)”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량적인 기준으로 분류할때 단편, 중편, 장편, 대하소설등으로 나눌수 있다. 여기서 대하소설(大河小说)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와가 맨처음 지어낸 말이다. 그는 대하소설에 대해 “이야기 줄거리의 전개가 완만하고 등장인물이 수없이 많으며 사건이 련속으로 쌓여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큰 강과도 같은 감을 주는 장편소설”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대하소설로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家)”,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꼽았다. 우리민족의 최초의 한문소설은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이고 국문소설은 17세기 초의 “홍길동전”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은 가운데 가장 긴 소설이 어느것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바로 “완월회맹연(玩月会盟宴)”이라는 소설이다. 조선 숙종- 철종년간에 쓰여진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소설이다. 180권 180책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으로 4대에 걸친 가족사와 함께 영웅들의 활약상, 궁중음모등을 그리고 있는데 그 책의 부피나 이야기전개의 방대한 스케일을 봐도 명실공히 대하소설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대하소설에 대해 학술계는 이렇게 정리한다. 량적인 면에서 장편소설보다 길다고 해서 단순히 대하소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사건이 길게 이어지되 단순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작가의 력사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여야 한다. 시대의 삶과 력사가 작가의 력사의식에 의해 재구성돼야 한다는것이다. 때문에 자수가 얼마냐, 권수가 몇권이냐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는거다. 그럼에도 대하소설이라 출품되는 작품들을 보면 거개가 몇권, 지어10여권으로 그 부피가 어마어마하다. 짧은 소설을 나무 잎사귀처럼 작다고 하여 잎 “엽”자를 달아 엽편(叶片)소설이라고도 하는데 큰 강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니 대하소설은 결국 스케일이 클수록 유명세를 타는것이다.   내가 맨 처음 읽은 대하소설은 무협지였다. 김용의 “록정기(鹿鼎記)”. 무협지라니 순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색안경끼고 우숩게 볼는지 모르지만 김용의 14부의 작품가운데서 맨 마지막 봉필(封笔) 작품인 이 대하소설은 그 무슨 순문학의 전당에 오르지 못할 아류의 문학이 아니라 그와 견주어도 추호의 손색이 가지 않을, 오히려 그 엄숙을 깨치고 정상에 오를만한 대작이다. 소설의 장대한 스케일, 해박한 력사지식, 종교, 민속, 생활상에 대한 묘파(描破)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때문에 “홍루몽”연구회의 “홍학(红学)”처럼 발족된 김용문학 연구회 “김학(金学)”에서는 김용을 가리켜 “당대 최고의 신필”이라 하지않았던가. 80년대, 무협지가 풍미하던 시절 그 소설에 홀딱 반해5권으로 된 소설을 어눌하기 짝이없는 한어수준으로 사전을 뒤져가며 읽었다. 금방 걸음마 탄 아기의 아장걸음으로나마 천리를 가려는 몰악스런 심산으로 밤이고 낮이고 사전을 대조해가며 읽었는데 아마 지금껏 사전에 그렇게 극악스레 매달렸던것은 그때 처음이였던것 같다. 다 읽는데 몇달은 족히 걸렸다. 그후 한국에서 우리말로  “록정기”가 번역출간, 장장 12권으로 되였는데 그때의 설욕전(雪辱战)을 치르련듯 거뜬히 스무날동안에 읽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적있다.   뒤미처 읽은 대하소설은 아마 “림꺽정”이였던것 같다. 오랜 판본이라 내리줄로 되여 있어 주린 닭이 모이를 쫓듯 고개를 바지런히 주억거리며 읽었다. 무엇보다 걸쭉한 육담과 사투리에 감탄하며 귀밑을 붉혀가며 읽었다. 조선 중기 백정 출신의 의적(义贼)  “임림꺽정”의 활약상을 통해 민중의 삶을 생생히 보여준 소설은 작가인 벽초 홍명희가 월북하면서 한국에서 오래동안 금서로 치부되였고 조선에서도 80년대 중반에야 다시 읽혀졌다고 한다. 중국이 금방 좌(左)의 철쇄에서 벗어난 원활해진 풍토에서 연변에 80년대초에 알려졌으니 우리 독자들로 보면 과히 늦은편도 아니다. 더욱이 “우리 말의 풍부한 보고(宝库)”라고 김학철 선생이 극찬한 책이라 문학도로서 퍽 어린 나이였지만 그 책을 찾아들었다.   세계경전 대하소설을 읽은것은 구 쏘련 작가 미하일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이 처음이였다. 90년대 초, 중앙텔레비죤 3채널에서 일요일마다 방영되는 명작영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채널을 통해 우리는 많은 명작을 접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磨)”라고 그렇게 좋은 작품들이 어쩌면 늦은 저녁 12시부터 방영되곤했다. 그리고 일일드라마처럼 매일 방영하는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편씩만 방영하곤했다. 하다 보니 4부작으로 된 “고요한 돈”을 다 보려면 한 달은 실히 걸려야 했다. 심야에 시작한데다가 중간중간에 광고까지 “문 걸고 맛있는 아욱국 먹는데 불청객이 노크하듯” 불쑥불쑥 끼여드는지라 새벽 두시가 다 돼 서야 한편을 간신히 볼수 있었다. 게다가 밀려드는 졸음에 저울추라도 매단듯 내려오는 눈두덩이를 원쑤처럼 쥐여뜯다보니 영화를 완정하게 보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고요한 돈”은 3권으로 된 련환화(连环画)로도 갖추고있었지만 그 무슨 덩치 큰 기계의 설명서처럼 간략하기 그지없는 그 줄거리 압축본에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서 번역출간한 8권본으로 된 “고요한 돈”을 구해서 완정하게 읽었다. 소설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방대한 “소설 로씨야혁명사”였다. 돈강류역의 까자흐 집단이 1차 세계대전과 로씨야혁명, 내전이라는 력사적 격동속에서 겪게되는 여러 부류 인간들의 운명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다. “고요한 돈”은 1928년에 제1부가 나와서 1940년에야 제4부가 완결됐다. 저자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숄로호브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세계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196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평을 읽으면서 안 일이지만 소설 출간에는 우리가 애대하는 쏘련작가 고리끼의 도움이 컸다고한다. 고리끼는 “고요한 돈”을 가리켜 “넓디넓고 바르고 재능이 넘친 시각을 제공했다"고 평했다 8권을 다 독파하고나서 마지막 페지를 지겨운듯 아쉬운듯 덮어버리니 스며드는 그 뿌듯함, 난생처음 대하소설을 독파한 감수가 해일처럼 한 가슴 가득 밀려왔다. 바로 이 멋이구나! 말가웃 되는 큰잔에 넘쳐나게 부은 맥주를 울대뼈를 부지런히 자아올리며 깡그리 비워낸 호주가의 흔쾌한 맛이랄가! 마라손 경기의 마지막 코스까지 완주한 선수의 뻑적지근하면서도 호쾌한 감이라할가! 그즈음에 또 10권본으로 된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신문사의 선배 L에게서 빌려 읽었다. 거의 반년을 읽었다. 지난세기 40년대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벌어진 빨찌산 투쟁등 좌우익 충돌을 주로 다룬, 집필 기간만 6년, 200자 원고지 1만6500장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금기시되던 빨찌산 투쟁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려낸게 이곳 작가들에게도 그 어느 한국작품보다 먼저 읽히게 된 리유였다. 책을 빌려주었던 선배는 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가 당시는 온 시가지를 통틀어 흔하지 않던 그 대하소설을 “꿀꺽”하지 않았느냐는 걱정에 어서 돌리라고 극성스레 재촉했지만 오랜 시간에 겨우 다 읽고 돌려드렸다.   다음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을 읽었다. “길림신문”사의 기자로 뛰던 시절이니1990년경으로 생각된다. 나에게 대하소설 한 질을 빌려주고 오랜 시간 돌리지 않아 매일이고 닦달질하던 그 선배기자가 대단한 한국작가가 왔다며 취재를 나갔다. “광주다방”에서 선배님이 만난 분은 바로 “혼불”의 작가 최명희였다. 소설 “혼불”의 무대는 만주까지 확장되여 이 곳에 흘러든 조선인들의 비극적 삶과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위한 모습이 형상화되고있는데 최명희는 만주부분을 쓰기위해 체험차 중국으로 온것이였다. 그때 선배가 찍어온 사진으로 최명희 작가를 처음 보았다. 조신한 기품의 단발이 단아한 녀작가, 아, 대하소설을 만드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나, 그 무슨 신화속 삼두륙비(三头六臂)가 아니고 평범한 중년의 녀인일수도 있고나하고 사진들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며 감개를 머금었었다. 당시 최명희의 혼불”은 4권까지 나왔었는데 그 책을 선물받고 선배는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자랑하다싶이 나에게 보였다. 그러다 내가 또 빌려달라할가 서둘러 가방에 넣었고 소리나게 지퍼를 주욱~ 닫아버렸다. 그때 애숭이 문학도라고 멀리서 온 유명작가의 존안을 뵈일 기회조차 주지않는 선배가 울컥 야속하기만 했었다. 썩 오랜후에 완결된 10권본을 찾아 읽었다。 80년 에 시작하여 17년만에 원고지 1만2천장으로 마무리한 이 대하소설은 종부(宗妇) 3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탄압에도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고 있던 시대를 고뇌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아름답게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도 적중한 언어들을 종자벼씨 정선하듯 골라 새겨내린 작품이다.   요즘 읽은 대하소설은 유주현의 실록소설 “조선총독부”이다. 아침산책으로 자주 들리곤하는 연길수산시장, 세상 온갖 물목들이 잡다하게 펼쳐져 복작거리는 그곳에는 책난전이 어울리지않으나마 제법 몇군데가 펼쳐져있다. 그 책난전에서 뜻밖에 만난 “보물”이다. 헌책가게에서 간혹 원하던 좋은 책을 만나면 그야말로 “송사리떼만 란무하던 작은 내에서 고래라도 낚아 올린듯” 월척(越尺)한 기분이다. 5권본으로 된 그 책을 남에게 빼앗길세라 후딱 사들었고 사흘사이에 독파해버렸다. 1967년의 판본이 고스란히 내 손에 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오래 된 책이라 코를 송곳끝처럼 들쑤셔대는 삭은 곰팡이 냄새에 재채기를 해가면서도 극성스레 읽었다. 근년들어 민족의 근대사에 흥미를 가지고 그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작품들을 창작하고있는지라 민족의 수난을 다룬 그 부피가 큰 책이 빨리 읽혀졌다고 해야겠다.   그 무슨 등산애호가처럼 대하소설이라는 봉우리를 하나 또 하나 독파하면서 그 와중에 가장 감명깊게 읽은것이 박경리의 “토지”다. 한국 문학과 정신의 한 표상 박경리 선생의 필생의 력작이다.  간도와 서울, 일본등을 공간 배경으로 아우르고 4대에 걸친 모계 중심의 가족사를 추적하면서50여 년에 걸친 민족수난기를 담은 대작. 7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들의 고난의 운명, 현실 극복의지를 통해 민족의 한과 력사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을 시도한 대작이다. 전쟁에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기르며 또 체제에 맞선 사위가 옥고를 치르고 집필기간 유방암 선고까지 받은 작가가 이 책을 내놓기까지는 2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히지만 무거운 쇠사슬을 휘감긴듯한 고통의 나날들을 떨쳐내고 내놓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대작에 대중과 평단이 저마다 엄지를 뽑아들었다. 이를 원작으로 삼아 영화로도 제작됐고 유수의 유명 방송국들이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다. 또 서사음악극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여러 장르로 끊임없이 변용돼 오고있다. 작가가 집필한 곳은 문학공원으로 꾸며지고 작품의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작품속의 공간이 된 곳에서는 해마다 작가를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한부의 대하소설의 가치가 그만큼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토지”는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작품으로서 서구에 비해 짧은 력사를 가진 한국 근대문학을 절정기에 올려놓은 대작이라고 말한다. 몇해전 박경리선생이 타계했을때 외신들은 부음기사에서 저마다 “토지”를 소개할때 무엇보다 대하소설의 뜻을 갖는 단어로 소개하면서 “토지는 한부의 전설, 영웅서사”이다고 격찬했다. “토지”는 인터넷에 해박한 어느 후배에게서 파일로 넘겨 받아 읽었다. 종이책이 아니고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읽은지라 솔직히 근 일년여가 되여서야 읽을수 있었다. 책을 읽고나서 나는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사비를 털어 소설“토지”의 루트를 따라 문학기행을 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2006년 6월, 나는 무작정 박경리선생님의 창작자취를 따라 나섰다. 강원도 원주시의 “박경리문학공원”이며,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의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며,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이며를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때 혼자만의 문학기행에서 맺은 인연이 끈끈히 이어져 지역과 국경을 넘는 문학행사로 이어졌다. “토지”를 읽고싶다는 나의 간청에 의해 박경리문학공원과 원주문인협회와 토지사랑회로 구성된 “원주-연변, 소설 토지문화교류단”이  2010년 연변으로 날아왔고 “토지기증식”을 갖고 연변의 문학단체며 학교, 독서사들에 무려 28질에 달하는 “토지”를 증정했다. 그리고 연변에서는 은연중 대하소설 읽는 열조가 일었다.     대하소설을 읽는 묘미는 말그대로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읽는것과도 같다. 뒤척이며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력사와 세월의 행간을 흘러가는 수많은 사건의 명멸, 인물들의 부침, 그 유장한 진행을 시간을 들여 읽는데 그 벅찬 묘미가 있는것이다. 그 읽는 시간동안 독자들은 단숨에 읽을수 있는 호흡이 짧은 편폭의 작품으로서는 흉내낼수 없는 깊고 그윽한 맛의 읽기에 심취하게 된다. 그 읽지 않고서는 알수 없는 아편의 원액과도 같은 묘미가 요즘처럼 절주빠른 세월에도 하필이면 대하소설을 읽는 리유일것이다. 하지만 대하소설을 읽는다는건 또한 큰 산맥을 종주하는것처럼 어려운 일이기도하다. 평소의 독서관습보다 좀 더 빠른 속도를 붙여도 몇달씩 걸리고 소설의 력사배경을 헤아리려면 그에 따른 어중간한 지식을 갖추어야한다. 무엇보다 중간쯤 이르면 앞부분의 등장인물을 깜박 잊어버릴만큼 이야기 전개도 길고 구성도 복잡하다. 발이 부르트도록 길을 재촉해 이 굽이에 이르면 지나온 저 굽이가 어디던가 가물가물 잊혀지는 형국이다.    그래도 읽는다. 읽어야 한다. 한페지 한페지 번져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스토리를 익히고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을 헤아리노라면 높아만 보여 지레 겁먹었던 큰 산맥 사이로 작은 내물이 흐르고 작은 들꽃이 피여 있고 숲사이로 노루며 강아지, 토끼들이 뛰노는것같은 섬세함도 느낄수 있다. 그렇게 큰 터밭을 구석구석 알뜰히 가꾸려 한 문체의 독창성도 발견하게 된다. 언어의 즐거움, 표현의 즐거움, 이야기의 즐거움이 고통과 함께 하는것이다. 끊어질듯 하다가 이어지는 수많은 삶들의 실경을 때론 장쾌하게 때론 애타게, 때론 깊은 슬픔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생명서사의 대하작품에서 우리는 세파의 긴 강을 헤여나가고있는 소설속의 인물들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행동이나 태도, 그의 대인관, 세계관을 읽게 되며 사랑. 행복. 불행. 질투. 기쁨. 슬픔. 분노. 증오를 읽게 되며 또한 부조리. 불평등. 억압. 빈부. 소외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맞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인권. 행복같은 가치관을 저자가 구현하고있음을 드디여는 읽어내게 된다. 이처럼 잘 씌여진 대하작품 한권은 오감뿐만 아니라 평생을 좌우한다. 어쩌면 대하소설을 읽는다는것은 나에게 있어서 작중인물과 작가와 함께 하는 카타르시스의 한 형태라 말할수 있다. 이들의 힘겨운 작업의 결과물, 그 폭과 수준, 인류의 공동의 보편성이 녹아있는 작품을 읽노라면 과연 작가적인 바른 삶이란, 높은 정신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또 이렇게 읽는데만도 힘에 부친 대하소설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작가는 대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잠시 담론의 줄기를 바꾸보면, “손목터널증후군”이라는 병명도 괴상한 병이 있다. 오래동안 손목을 혹사하면 신경과 인대가 지나가는 손목속 통로가 터널처럼 좁아지며 결국 신경이 눌려 손이 저리게 된다. 그래서 설거지와 걸레질, 빨래를 되풀이하느라 손목이 잠시라도 쉴틈이 없는 주부들이 많이 앓는 병, 그리고 작가 조정래가 앓은 병이라 한다. 컴퓨터 시대에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길 집념"으로 고집스럽게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써온 작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6년 동안 쓰면서 10권본의 작품을 모두 손 글씨로 메웠다. 손목 통증이 심해지자 만년필조차 무겁게 느껴져 결국 가벼운 세라믹 펜으로 바꾸어가며 썼다고한다. 그렇게 써온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모두 700만부가 넘게 팔렸고 200쇄를 돌파했다. 대학가의 필독서 격이고”태백산맥”을 읽었느냐 못 읽었느냐가 문학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 이른바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지표”처럼 통한다고 한다. 작가의 노력은 치렬했고 이는 독자들의 공감과 애대로 돌아온것이다. 자신과 싸우며 작품이 잘 안 써질수록 벽쪽으로 다가붙어 기어이 고비를 넘어서고야 만다는 어느 한 대하소설작가는 창작담에서 창작행위를 “폐관 수련"(무술을 배우는 사람이 어느 한 특정 지역에 머물러 모든 련락수단을 끊은 뒤 수련하는 행위를 말함)이라고 했다. 또 한분의 대하소설작가 박경리는 생전에 스피노자, 사마천, 도스도옙스끼, 정약용, 윤선도, 굴원, 두보의 고통을 말하며 “수동적 고통에서 능동적으로 자유를 거머잡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이들이라고 사례로 든적 있다. 글쓰기를 통해 개인과 사회에 걸친 령혼과 구원에의 길로 나간 성인들, 그들은 문학과 실제 삶 모두에서 닥쳐온 고난에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바쳐서 믿을수 없을만큼의 집중력과 처절한 로동이라고 부를수밖에 없는 혹독한 집필작업을 통해서 엄청난 량의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들의 인생 자체는 내면적 인고와 승화를 통해 삶이 고통에서 자유로 나아간 문학과 예술의 연역(演绎)과정이였다. 이들처럼 육신의 고통을 넘은 개인적 소망들을 바람직한 공동체를 향한 비전으로 승화시킬수 있다면 그 고통은 정녕 값진것일것이다.   문학은 무엇이고, 작가는 어떤 제단에 바쳐야 되는것일가? 내가 써온 소설은 과연 어떤 위로를 나의 독자들에게 주었는가? 오래전부터 지긋이 나를 결박해오고 괴롭혔던 질문들을 대하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을 만드는 작가들의 창작자세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들에게 감복의 머리를 숙이며 돌이켜보니 그 사이 미션을 완수하지 못하고 내려놓은 대하소설도 적지않다. 근래에 채 읽지못하고만 작품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솔제니친의 “붉은 수레바퀴(红轮)”등이다. 그 백과사전을 뺨치는 방대한 정보량에 질려, 력사에 대한 천착과 갈파로 점철된 방대한 륜곽에 주눅들려 완독하려고 몇번이고 시도하다가 되내려놓고 말았다. 또 지난해 모순문학상 수상작가인 장위(张炜)의 대하소설 ”당신은 고원에서(你在高原)”는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할인가로 사두었지만 세트채로 서재에 쌓아둔 채로 아직 첫장도 펼치지 못하고있다. 10권에 450만자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에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린것이다”. 다시금 게으른 심성에 채찍질을 해보며 오늘도 대하소설을 찾아 든다. 이제 속세를 멀리한채 정갈하게 작품에만 매달리는  “폐관”적 수련이 나에게 수요되는 시점이다. 촌음을 아껴, 미션을 완수하듯이, 대하소설을 읽고저 한다. 대하소설을 쓰고저 한다.   “연변문학” 2012년 8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2    고도를 기다리며 댓글:  조회:3271  추천:12  2012-10-28
. 칼럼 . 고도를 기다리며   김 혁   사뮈엘 베케트 하나 . 더러는 엉뚱하지만 더러는 진지한, 여하튼 유명짜한 극이다. 문학도 시절에 서에서 처음 극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로 접하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졌다가 후에 완정한 극본을 찾아 읽었다. 극장가에 앉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지만 변강의 오지에 살고있는 지라 그런 사치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해전 한국행차를 했을 때 서초구 에서 극작가의 탄신일을 기념해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귀국날자와 겹치여 아쉬움을 씹으며 돌아선적 있다. 4만원의 표값이라도 내치고 볼려 작심했었는데… 그러다 작년 봄 이라는 DVD물을 사들여 화면으로나마 드디여 이 명극을 보게 되였다. 작자 베케트 탄생 100주년만에 드디여. 그로서 다년간의 감질난 욕구를 달랠수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일명 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여버린 지루한 기다림을 과제처럼 수행해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본다. 고도의 사자(使者)인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타나 하고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튿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흗날에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아일랜드 출신의 괴재스러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1952년 발표된 극작품, 1953년1월3일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다. 초연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려 극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상대인 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은 그 의미를 깨치려 애쓰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자동차 운전수라고 혹자는 빵이라고, 혹자는 명배우라고 혹자는 신이라고 혹자는 사람이 하니라 희망이나 동경, 자유라고... 로 인해 베케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여 구 유럽 무대를 휩쓸었고 새로운 연극운동의 한 방향을 제시하는 부조리 연극이라 칭송되여 1961년에는 국제출판 대상을, 1969년에는 실존주의 시대의 부조리극을 이끈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감옥 공연까지 허락되어 수천 여명의 죄범들을 열루(熱漏)에 젖게 했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누군가 집요하게 물을라치면 라고, 그자신도 기다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의 정체에 대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기다림의 상대에 대한 정의는 관객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다. 각자의 바램에 따라 그 기다림의 대상이 변할수 있는거고…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실제로 극중인물들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리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마음 가운데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여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다. 무대우에서도 무대아래에서도 기다림의 활극은 계속된다.   둘  기다림에 대해 너나가 다른 각자의 체험을 갖고 있으련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기다림에 남다른 체념적인 역고를 치러 왔었다. 결혼초기, 부평초 같은 셋방살이 신세에 부대끼다 못해 시교를 멀리 떨어진y향의 장모님 집에 얹혀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길까지 차로 대어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했다.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아침6시를 좀 넘겨 정류소로 나와야 했다. 추위에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리기가 십상이었다. 연길 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공공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발을 잇는 또 한 번의 기다림... 저녁에 돌아올 때도 마냥 한 본새였다. 목을 빼들고 굽이 길목을 바라 조갈 들게 차를 기다리는 그것, 그것이 그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 때 안해는 임신7개월, 허나 생활의 부하에 못 이겨 박봉이라도 바라면서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 숨 가쁜 몸으로 정류소의 일각에서 추위에 몸 떨며 피곤한 모습으로 기다려 서있는 아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살같이 아픈 시각의 밀착이었다. 어느 한번, 막차를 놓치고 요행 개체운수를 하는 소형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사람이 다 차서 오를 수 없다며 나와 안해의 간절한 애청을 매정히 물리쳐 버렸다. 사위는 어스름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차만 놓치면 친척집에 가서 군색스럽게 한밤을 지내지 않으면 려관방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얼굴에 두툼히 철판을 깔고 달리기 시작한 차를 따라 달리며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차가 멈춰 섰다. 안해가 일루의 희망을 품고 무거운 몸을 숨 가삐 놀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 엔진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맥을 놓으며 서 버렸는데 차가 또 멈춰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숨이 턱에 닿아 차를 따라잡았는데 차는 또 한 번 우리를 코앞에 두고 내빼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는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갔다. 주먹으로 차 유리를 내질렀다. 옆쪽 차 우리가 산산 조각이 났고 나와 그 덕성이 무여지한 운전수 사이에 드잡이가 오갔다. 결국 서로가 코가 깨지고 눈 두덩이가 참대 곰을 꼭 닮은 모습으로 단락을 맺고 말았다. 터진 입술을 감빨고 섰던 내가 결김에 친척집에서 한밤을 지내자고 애원하는 안해의 청을 무질러 버리고 우둔한 짓거리를 벌이고 말았다. 30여리 밤길, 금방 눈 온 뒤의 길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t촌 부근까지 왔을 때 앞서서 분기를 곰 삭이며 씨엉씨엉 걷기만 하던 내가 머리를 돌렸다. 힘겹게 뒤를 따르고 있는 안해, 안해는 분명 울고 있었다. 깃을 세워 올린 외투 속에 목을 잔뜩 움 추리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입김에 서리가 하야니 불린 앞 머리칼, 달빛에 번뜩이는 안해의 추연한 눈물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소중한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송진처럼 눈귀로 꾸역꾸역 배어 나왔다. 코를 훅 들이마시며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을 기다려왔고 지겨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셋  국제 만화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일본만화 한 폭을 감개에 젖어 본적이 있다. 이란 표제의 만화. 전통의상차림의 중년 녀인 하나가 나들이 행색으로 철길 곁에 다소곳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조용한 맵시로 기다리고 있는 그녀 앞에 놓인 철길은 앞뒤가 단절된 토막 난 짧은 레일. 그 어떤 교통도구도 실어낼 수 없는 짧다란 레일 토막이였다. 이 만화 한 폭이 내게 준 감회는 컸다. 이 녀인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멀리 고향 계신 친정어머니의 일 년에도 몇 번씩 속구구를 뼈 물러야 이룰 수 있는 딸집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회지에서 재교 중인 대학생 아드님의 방학 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대주의 중임을 떠메고 타향에서 땀 동이 흘리다 돌아오는 막벌이꾼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읊조리게 하며 무정하고 랭혹한 현실처럼 안타까이 눈앞에 놓여 진 짧은 레일, 아무도 올 수 없고 갈수 없는 그 레일 앞에서 인고(忍苦)에 각인된 듯 한 뒷모습으로 녀인은 그렇듯 조용히, 그렇듯 온 곱게 기다려 서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인의 기다림은 어차피 영겁(永劫)의 기다림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각 시각마다 변용되어 일상에 숨어 있는 기다림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기다림의 련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벤치 곁에서 땀에 흥건한 손으로 생화송이를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선 련인, 창가에 고착된 듯 정물처럼 박혀 자식의 귀환을 기다리는 머리 발 센 어머님, 가물철에 감농군들마다가 조갈 든 입술을 감빨며 기다리는 단비, 조국을 잃고 천하에 집도 없이 광복의 날을 기원하는 지사의 일념, 술 사환을 멀리 주막에 보내고 목이 타는 애주가의 고민, 진통 끝에 다듬어낸 글발을 투고한 뒤 채용을 기다리는 문학도의 잠재울 수 없는 마음. 패전에 당착하여 응원 병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병의 눈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추구, 동경, 환락, 리상, 목표는 언제나 멀리에 있다. 그 긴 추구의 려정을 통하여 우리는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막바지로 이르는 과정이 바로 기다림이다. 위수 가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한자로 꾀한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문왕을 기다려내어 력사의 한 획을 그은 강태공의 일화도, 고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으로 굳어져 버린 맹강녀의 전설도 모두 다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 세월의 이랑에 씨 뿌리고 퇴비 주고 물주며 달디 단 열매를 맞아온 인간의 끈질긴 인고의 상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지고 경전적인 신화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시교와 린접된 우리 동네에는 로무의 선풍이 불어치고 있다. 연이 아버지도 선호 아버지도 란이 아버지도 너나없이 싸이판으로 리비아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갔다. 2년이고3년이고 희망을 약조한 채... 그와 함께 눈물겨운 기다림도 막을 열었다. 남편이 탄 선박이 해풍을 만나지나 않을는지? 그 곳의 폭양이 너무 뜨겁지 않을는지? 그 고역을 남편이 견디여 낼만할는지?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매일을 일일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는 그네들, 자식 양육의 중임과 부모공경의 의무를 달가이 묵묵히 리행해 가고 있는 그네들, 그네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정녕 가정이란 소중한 진주를 빚기 위해 아픔을 참는 조개의 몸부림이었고 기다림이였다. 대나무를 심으면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둘째 해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셋째, 넷째 해에도 똑같다. 그러나5년 째 무렵에는 대나무 뿌리가 이미 땅 밑으로 쫘악 퍼져 있다. 그리고 작은 죽순들이 땅을 뚫고 조금씩 올라온다. 그리고6주 정도 기다리면 온 산을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린다 대나무의 성장과도 같은 그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며 관망하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삶을 가꿔가는 연이 어머니, 선호 어머니, 란이 어머니... 데데한 그 시골 아낙들이 요사이 어쩐지 범연히 안겨 오질 않는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거다. 기다림에 당착하여 지치면서도 어차피 그 기다림의 양상을 무양히 보존해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의 소망에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소망도 있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소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기다림에는 행복에 대한 바람과 설렘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다. 기다리는 동안 홀로 피 흘리는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살을 으깨는 고통을 거쳐 마침내 새살이 돋는다. 유가(儒家)에서는 라고 했다. 진정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일상을 누릴 줄 알며 래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현재에 살면서 래일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 지향적 추구의 배불림을 위해 우리는 울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같이 아름다운 시로 기다림에 대해 갈파한 시인 김영랑의 천고절창(天古絶唱)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족(蛇足): 그 유명한 가 일전에 중국의 국수(國粹)인 경극과 만났다고 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적 경극과 결합해 주목받고 있는 대만의 당대전기극장이 출품, 6월말에는 한국으로 까지 출두하여 공연했다고 한다. 경극으로 분칠 다시 하고 나온 는 베케트의 연극을 경극의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표현했고 중국의 전통시가를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실로 명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1    모니터속의 달 댓글:  조회:2964  추천:11  2012-10-07
. 수필 .    모니터속의 달   김 혁   추석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청청 맑고 소소히 높다. 무심코 이고 다니던 도시의 대공이 이렇게 맑고 높아 뵈기는 처음이다. 청량한 과즙(果汁)같은 바람이 뺨을 쓸어주어 기분이 호쾌하고 추석을 맞느라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오가는 이들의 손마다에 들린 월병구럭이 눈맛에 즐겁다. 허나 올 추석은 잡지사의 청탁에 밀린 빼곡한 창작스케쥴 때문에 안해를 친정집에 보내고 홀로 맞게 되었다. 컴을 마주하고 옹근 사흘을 보냈다. 모두가 뻐근히 즐기는 명절에도 홀로 남아 죽어라 자판기를 두드려 대야하는 이 껄렁한 문인신세, 환절기의 날씨처럼 마음은 감개무량하다. 홀로 맞은 추석날 아침에는 한국 MBC방송 프로로부터 생방송 취재를 받았다. 중국 조선족들의 추석을 쇠는 모습을 자상히 소개해 드렸다. 대담중에 재미나는것은 한국측의 PD나 아나운서가 중국의 월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것이였다. 송편과 같은 음식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담의 많은 부분을 할당해서 월병의 형태며 맛에 대한 소개를 해드렸다. 요사이 문우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문학동호회 게시판에도 해외문인들로부터 월병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 열심히 해답을 주었다. 음식문화의 차이와 그 비교로부터 배우고 교류를 나눈 즐거운 시간이였다.    조선족의 전통추석음식으로는 송편 시루떡 인절미 등등으로 각양각색인데 그중 송편을 대표음식으로 꼽는다. 송편속에 꿀 밤 깨 콩 등속을 넣어서는 가마에 솔잎을 깔고 쪄낸다. 송편을 보기좋게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하여 처녀들이 예쁜 손자욱을 내며 알뜰히 빚는다. 이렇게 단 미각뿐이 아닌 후각과 시각의 맛과 멋을 골고루 내는 송편이다. 만월(滿月)이 뜨는 추석에 반달형의 송편을 빚는것은 반월이 일일성(日日盛)하므로 발전의 상징에서 너와 내가 모두 빚어 꽉 찬 달이 아니라도 하루하루 채워간다는 공동체의식의 표현이라고 민속학가들은 운운. 그처럼 중국의 월병만들기도 무척 재미있다. 이라는 시구가 있듯이 월병은 중국의 추석명절에서 빠칠수 없는 주요 음식이다.  달제를 지내며 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호두 땅콩 팥을 넣고 빚어만드는 과자등속, 달의 형태를 따온것도 있겠지만 일가족이 둥글게 모이고 해나가는 일이 원만하라는 길상의 의미가 부여되여 둥글게 빚어 만든다. 월병은 일찍 은나라와 주나라때에 강소 절강 일대에서 발상되여 애초에는 태사병(太師餠), 호병(胡餠)으로 불려져 왔다. 당나라때에 이르러 당태종과 함께 달을 감상하며 호병을 맛보던 그 유명한 양귀비가 호병이라는 말이 속되니 달의 형태와 비슷한 이 맛나는 과자를 월병이라 부르자 하여 지어진 이름. 요즘의 월병은 단 맛보기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친우끼리 서로 명절례물로 선물하면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 해나가는 매개물로 되고 있다. 월병의 포장도 더 아치하고 운치있게 변하여 포장곽에 달을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구나 경구 리언들을 새겨넣거나 중국 4대고전의 유명 인물상도 계렬로 그려넣어 다 먹고도 던지기 아까울 정도, 작년에 먹고난 월병포장지를 나는 지금도 소장해 두고 있다. 올해는 록색식품을 선호하는 세계적인풍조에 맞추어 월병포장의 디자인에서도 록색이 주류라고 한다. 이렇게 유래도 많은 월병을 홀로 씹으며 그 멋과 맛을 새삼스레 음미해 보다 머리도 쉬울겸 메일을 열어보니 고마웁게도 친구들이 보내온 명절축복의 메일카드도 넘쳐나게 들어 차 있었다.  모두가 추석맞이를 내용으로 한 메일카드였다. 황금빛 풍요로운 가을밭에 악동이처럼 섰는 허수아비와 그 코끝에 앉은 잠자리가 그려진 카드, 딩동!하는 초인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정교롭게 포장한 월병 선물꾸러미가 나타나는 카드도 있었고 광야에 떠있는 달아래 면면한 우수를 자아내게 하는 얼후(二胡)명곡 이 흘러나오는 음성메일도 있었다. 대접에 들먹히 담겨진 먹음직한 송편이 그려져있고 그 여백에 라는 글발이 씌였는 카드는 안해가 홀로 쇠는 명절이 마음에 안스러워 추석날에 기어이 PC방을 찾아 도문에서 내게로 보낸 카드였다. 그중에도 나의 이목을 끄는 메일은 옛도읍의 밤경치를 그린 수묵화카드였다. 교교한 달빛아래 옛장안의 루각들마다에는 등불이 휘황했고 그림 위로 너나가 애송하는 리백의 천고절구 이 운치있는 붓글씨로 떠오르고 있었다. 보내온 카드중에서 달밤에 하얀 저고리입고 껌정고무신을 신은 개구장이 오누이가 두눈이 올롱해 달을 쳐다보며 과일을 따는 그림을 택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그러한 메일의 축복속에 나는 홀로이지만 명절의 기분을 짙게 체취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축복과 면려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에 편집부의 청탁을 맡은 4편의 작품을 쳐냈다. 흡족한 기분으로 월병을 안주로 하여 홀로 할빈맥주 세병을 거뜬히 축냈다. 추석무렵이면 곡식이 익어가고 햇과일이 나오고 계절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즐길만한데서 이라는 말이 있더니 글 타작을 끝내고 유유자적하면서 그 기분을 알것 같다. 이렇게 명절때마다 나는 친지와 친우들로부터 많은 축복과 문안을 받군한다. 그 축복들을 나는 삭제해 버리지않고 메일보관함에 저장해 두곤 한다. 그렇게 보관함에 저그만치 60여쪽의 축복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절친한 문우가 보낸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이 있는가 있는가 하면, 창작에 애면글면하는 나의 신체를 걱정하며 머리 좀 쉬우라고 금방 출간한 도색잡지 가위의 발가벗은 모델의 누드사진을 업로드(下載)해 보내는 달작(達作)스러운 선배님도 있고, 어느 장난기 짙은 문학도가 보낸 코밑에 왕방울만한 코방울을 달고 개구쟁이가 요란한 소리로 재채기를 하는 라는 애니메이션메일도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충격속에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로의 문안방식도 재래의 길고 격정에 넘치는 서한문안으로부터 육성을 가려들을수 있는 전화문안, 이제는 아무곳에서도 시시때때 보내고 받을수 있는 컴문안에 까지 이르렀다. 급변하는 생활양식속에 당혹감을 머금으면서도 그 양식을 어차피 받아들이는 오늘의 현대인들이다.   이 며칠간의 중앙TV뉴스에서 볼라니 개인 컴퓨터의 비주얼베이직(可視圖像)을 통해 추석문안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시간에 매여 스케쥴에 매여 하루하루를 매끈하게 꾸며나가는 현대인들에게서 명절이면 술빚고 떡치고하던 생활양식은 돈후한 어제에 대한 추억을 안고 색바랜 앨범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련찮게 모두가 함께 모여 어제를 추억하며 화끈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을테지만 복받은 현대화한 통신계기들을 충분히 리용하여 서로의 따뜻한 문안과 격려를 나누는것도 오늘의 시체멋나는 좋은 방식이라 보여진다.  물질의 향상과 더불어 매일이고 되풀이되는 명절같은 나날에 더 문명하고 더 실용적인 명절맞이방식이 우리에게 소기(所期)된다. 이는 현대생활양식은 구경 어떤 양상이여야 하는가? 하는 숙제로 우리 모두에게 부과되여 있다.  스모그(매연, 안개)에 오염된 요즘의 세태에서도 추석달은 예이제이없이 떠오른다. 는 렬양세시기(冽陽歲時記)중의 속담 한구절이 생각난다.    홀로 월병놓고 컴앞에서 지낸 추석, 어제에 대한 반추와 래일에 대한 동경으로 혼반된 감구에 쌓인 나의 눈에 모니터속에 비낀 달은 의연 밝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    2052 댓글:  조회:3323  추천:13  2012-09-23
. 칼럼 .   2052   김 혁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때문에 망신살 한번 톡톡히 뻗친적 있다. 대학가의 문학도들이 조직한 문학기행에 초청받아 함께 한적 있는데 그중 몇몇이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간청하니 금방 사들인 무라카미의 신작을 추천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사뭇 좋아하는 일본작가이다.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거의 닥치는대로 다 읽었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댄스 댄스 댄스”,”해변의 카프카”, 단편집과 근작인 “어둠의 저편”까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는 모 문학지에 장문의 독서만필까지 썼던 나였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 (후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개칭)이였다. 중문판본으로 먼저 접했다가 후에 친지가 한국에서 부쳐온 삼진기획 88년 판본으로 이곳에서도 비교적 일찍이 읽었었다. 십년동란을 거치며 오래동안 “좌”의 철쇄에 매여 살아오면서 무미건조,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작품 몇몇부에 길들여졌던 우리 세대의 흠상척도에 있어서 맨 처음 무라카미의 책을 접했을때의 그 신선함은 말로는 이루다 표현못할만큼 강렬한것이였다.   그래서 문학도들에게 그의 작품을 대뜸 추천한것이였다.  “ ‘아이큐84’라고 금방 나왔는데 그 책 무지 재밌다” 그런데 초동머리로 보았던 그 문학도들이 허리까부라져 웃어대는것이 아닌가! “선생님 그 책 제목 “아이큐84”가 아니라 “일큐84”인데요”     그날 집에 돌아와서 분명 “아이큐84”로 알고 읽었던 책을 서가에서 뽑아 다시 눈을 화등잔처럼 지릅뜨고 훑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IQ84가 아니라 1Q84였다. 미술체로 적은 책 제목의 맨 앞글자가 아라비아 수자 1인지 영문자모 I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공연히 애매한 제목 달아 갖고…)    무지 좋아했던 작가였지만 그날만은 무라카미가 흥감질 많은 아낙네처럼 밉기만 했다. 수자에 영어자모를 떡 버무리한 제목의 소설 “1Q84”는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다. 두 개의 달이 뜨는 1Q84의 세계에서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덴고는 랭철한 녀자 킬러 아오마메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또 천재적인 문학성을 가진 열일곱살 소녀 후카에리를 만나며 기이한 모험에 빠지게 된다. “1Q84”는 두 남녀의 첫사랑 이야기를 펼쳐나감과 동시에 현실과 다른세계로 접어드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또 한번 독자들을 강렬하게 끌어들인다. 한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책의 초반부는 하루키의 여느 책들처럼 몰입이 힘들다. 하지만 어느 정도 페지를 넘기고나면 그만의 스토리에 빠져들어 가속도가 붙으며 빨리 읽혀진다. 다만 중간중간 나오는 외설스러운 내용이 미간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우리의 정서와 너무도 앞서간 그들의 성문화때문에 처음부터 그의 작품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기어코 읽었었다. 책을 읽는 동안 피곤한 눈을 쉬우며 창을 열어젖히고 하늘을 쳐다보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혹시 하루키의 펜이 그려낸 세계에서처럼 달이 2개 뜨지나 않을가?하는… 늘 그렇듯이 역시 하루키는 뭔가 다르다. 문체가 간결하고 흡입력 있다. 스토리 구성 자체가 탄탄하고 무엇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상천외의 상상력을 갖고있다. 제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여하튼 제목조차 요상한 그의 근작 소설때문에 나는 애송이 문학도들앞에서 망신살 한번 무지개살 뻗치듯 했다.   2   다시 살펴보면 하루키의 소설제목처럼 수자로 제목을 단 영화나 소설작품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먼저 영화부터 골라보면 1부터 100까지 세여도 끝없을듯하다. 칸느영화상 수상작으로 대만중산층 가족의 고난과 희망에 대해 다룬 대만영화 “일일”, 80년대 중국에서 히트를 했던 로씨야의 멜로영화 “두사람의 정거장”(코믹한 분위기의 영화이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에 눈물흘리게 하는 영화이다.), 깡패집단의 셋째가 첫번째 자리에 오르려 광분하는 한국 조폭영화 ”넘버 “3”(깡패제재이지만 뭔가 사색을 남기는 영화), 네개의 스릴러로 구성된 타이의 공포영화 “4”, 외계괴물들과 싸우는 프랑스의 과학환상영화 “제5원소”, 우리가 오감으로 느낄수 없는 제6의 감각을 보여준 공포영화 “6 (꼬마 주인공의 완숙한 연기가 인상에 남는 영화였다. 이 영화로 그 꼬마 주인공은 영화사상 최년소로 오스카 남우수주역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할리우드 꽃미남 스타 브래드 피터가 주연한 정탐영화“7 (탐식, 탐욕, 나태, 음란, 교만, 시기, 분노…  성서에 나오는 7가지 죄악을 살인의 모티브로 사용한 범인을 쫓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그토록 강렬했던 어둠의 분위기, 그리고 주인공과 단역들의 열연. 수자와 관련한 영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작이 아닌가 싶다), 동북항일련군의 처절한 항쟁을 그린 중국영화 “마지막 여덟사람”, 판타지영화 “아홉번째 문”, 종교영화 “십계”등등으로 눈앞이 현란한데 그중 나름 감명깊에 본것은 “21그램”이라는 영화였다. 인간이 사후 줄어드는 무게가 21그램이라고한다. 영화는 심장이식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감수를 그려내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로서는 찾아보기힘든 선(禪)적인 힘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리고 올해에 꼭 보아야 한다는 영화 “2012”가 있다. 최고의 재난영화라는 호평이 붙는 영화는 올해 2012년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이슈로 관중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 내는데 성공한 영화이다. 거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특수효과로 시각적인 놀라움을 주는 볼거리 풍성한 영화였다. 스토리는 엽기성에 힘을 실은 재난영화의 전형적인 스텝을 밟고 있지만 나중에 "가족애", "인류애"라는 주제를 받쳐주고 있어 그나마 격을 살린 영화였다.  “2046”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다. “화양년화”의 감독 왕가위의 영화이다. 장자이, 공리와 더불어 일본의 톱스타 기무라 타쿠야등 일류 배우들이 다국적으로 한 스크린에 오른 영화. ”2046” 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녀자와 기억을 공유하는 호텔방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쓰고 있는 환상소설속의 특정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영화속에서 “2046” 은 모든것이 영원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잊혀진 기억들을 되찾기 위해서 “2046” 으로 떠나는 기차를 탄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고 사람들은 드디여 깨닫는다. 사랑의 허무, 혹은 허구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묘사, 무엇보다 시나리오의 완벽한 상징성으로 내내 여운을 느끼게하는 수준높은 문학적 영화이다.   수자로 된 제목의 소설도 적지않다. 우선 불후의 고전 “삼국연의”로부터 시작하여 코난도일의 “4인의 서명”, 김용의 “천룡8부”, 장예모감독이 각색한 남경학살제재의 소설 “금릉 13채”, 마쯔모도 세이쬬의 “스무개의 얼굴을 가진 괴도”, 쥘 베른의 과학환상 명저 “80일간의 세계일주”, “바다밑 2만리”등등… 그중에서도 맨 처음 문학도였던 내 “배내머리”를 세차게 두드린 작품은 민족출판사에서 80년대에 번역,출간한 장편 “93년”이였다. 그때는 프랑스 랑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빅또르 유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 그저 “오, 제목을 이렇게 달수도 있구나”하면서 “소경 단청 구경”으로  읽은 작품이였다. 문학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시금 정독, “유고의 마지막 소설”답게 그의 인물에 대한 창작력과 탁월한 리념이 최대한 발휘된 소설이였다.   93년은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가 빠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벌린 해이다. 작품은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내란을 배경으로 스승과 제자, 종조부와 종손, 공화파와 왕당파라는 묘하고도 어지러운 관계속에서 마주한 세 사람이 1793년에 벌리는 사상과 인간성의 일장 활극을 보여주고있다. 93년이라는 수자는 이에서 그 순간의 광대함을 보여준다. 수자로 제목을 단 소설중에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작품은 영국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조지 오웰의 “1984년”일것이다.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서점가에서만도 “1984년”은 적어도 10여개의 각종 판본을 찾아볼수 있다. “1984년”은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2차대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48년도에 36년 후의 세계를 묘사했으니 미래소설이고 전체주의의 본질을 어느 작품보다도 적나라하게 그려냈으니 정치소설”이라는것이다. 1903 년 인도 벵골 몬티하리에서 태여나 영국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조지 오웰은 결핵이라는 당시의 불치병에 걸린 절망적 순간에도 “동물농장” 이라는 풍자소설을 써냈고 대망의 미래정치소설인 “1984년”을 련이어 집필했다. 기지와 공상이 번뜩이는 이 소설은 곧 세계 각국에 번역돼 베스트셀러로 군림했으며 미국에서만도 4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전체주의의 가상적 위험에 대한 그의 경고는 동시대 사람들과 후세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또한 이 책의 제목과 그가 만들어낸 구절들은 현대 정치의 폐해에 대한 패러디와 격언으로 되고있다. “1984년”은 로씨야 작가 E. 자마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20세기에 나온 3대 “디스토피아(부정적 미래) 문학”으로 꼽힌다.   3   미래소설하면 또 한부의 유명한 작품 “유리알 유희”가 있다. “20세기 문명비판서”라고 정평이 나있는 이 소설로서 작가 헤르만 헤세는1946년 70이 가까운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유리알유희”는 25세기를 무대로 쓴 미래소설이라고 한다. 작자는 “카스탈리엔”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내세워 세상에선 찾아 볼수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그려내며 아울러 현대물질문명의 세계와 대조하면서 농도짙은 비판의 필묵을 든다. 동서양철학을 모조리 섭렵하여 쓴 책, 인생의 황혼에 선 지성이 삶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모두 쏟아 쓴 책, “헤세 문학의 완결판”이라는 수식어와 찬사가 붙은 그대로 이 책은 굉장히 난해하다.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조차도 헷갈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이 책을 읽어보려는 몇번 시도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요즘 다시 읽으려해도 여전히 록록치는 않다. 미래소설은 중국에도 있다. 그것도 꼭 한세기이전, 100년전에 나왔다. “새 중국”이라는 제목의 미래환상소설. 2010년 2월, 연길시 2중부근의 책방에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곧 열리게 될 상해엑스포의 열기를 타고 재판된 책, 모두가 사는지라 “비단 올이 춤을 추니 베올도 춤 추는 격”으로 덩달아 사들었다.  작가는 청조때의 소설가 륙사악(陆士谔.1878~1944)이다. 륙사악은 강소 청포 (江苏青浦 지금의 상해에 속해있다)에서 태여났는데 원명은 륙수선(守先)이며 호가 사악이다. 의원(医员)직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 소설창작도 겸해 하여 “새 중국”과도 같은 놀라운 작품을 써냈다. 그의 환상소설 “새 중국”(일명 ”립헌 40주년후의 중국”)에는 놀랍게도 백년후에 열리게 될 상해포동만국박람회가 상세하게 묘사되여 있다. 그 책을 읽은지 불과 몇달 안되여 나는 상해 엑스포의 현장에 섰다. 륙사악이 저술한 상해포동만국박람회의 장면은 마치 현재의 상해엑스포와 너무나도 닮았다. 지하철이 건설되고 황포강에 대교가 가로 놓이고 강밑으로는 터널이 가로지난다. 포동은 개발되여 국제금융중심으로 되며 인민광장에는 상해대극장이 세워지고 길은 넓고 반듯하다. 그가 묘사한 지하철과 대교, 터널이 현재의 남포대교와 지하철1호선, 연안동로의 터널과 일치하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근 일주일간 현장에서 본 상해 엑스포의 소설을 빼닮은 모습은 나에게 놀라움과 감개 그 자체였다. 미래소설, 나도 미래소설 한편을 써볼가 한다. 원체 각종 문체와 장르소설 실험에 단기필마(单骑匹马)로 매진했던 나로서는 퍼그나 유혹이 가는 장르가 아닐수 없다. 소설 소재와 제목도 나왔다. “2052”. 올해가 자치주 성립 60돐이니 40년후 즉 100돐을 맞는 세기의 자치주의 운명에 대해 쓰고자 하는것이다. 하필이면 흥감스럽게 미래소설이냐?고 물을수도 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 이전 어느때보다 걱정되는 우환의식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휘황찬란하고 자랑스러웠던 과거에 비해 우리는 지금 모종의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 대도시와 외국으로의 대이동, 그에 따른 인구의 급감, 농촌과 교육터의 황폐화, 언어의 소실, 인재결핍, 리혼률 증가, 자녀교양의 부재 등 문제들이 해일처럼, 지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앞에 들이닥쳤다. 우리는 지금 변강지대의 고로한 농경민족에서 발달한 대도시의 현대민족으로 거듭나는 세기적 변화와 진통을 겪고있는것이다. 하지만 력사는 그 굽이굽이에서 변혁의 진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생존앞에 들이닥친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는 수용하는 자세와 자기를 변화시키는 용기,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거창한 변혁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적인 자세로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력사를의 물꼬를 터야할것이다. 미래사회의 문제는 오늘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곧바로 오늘의 현안이다. 허다한 공상소설, 미래소설들은 오늘과 동떨어진 미래를 그리고 있음에도 결코 오늘을 떨칠수는 없다. 미래를 투영하는 오늘의 력사의식이 작품속에 살아서 작용하는것이다. 그리고 미래소설들은 흔히 여느 소설처럼 희망과 위안거리를 남겨두고있다. 례하면 미래의 외계인들과 로보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로보트가 가질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정감, 신앙, 신뢰, 분발, 의지… 그것이 있기에 인간은 절망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과 제약을 뛰여넘으려 애쓰고 때론 성취하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내가 미래소설에 흥미를 가지는 리유이다. “비단 올이 춤 추니 베 올이 춤추는” 망동에서가 아니다. 소설적 재미와 함께 사회적 성찰도 두루 엿볼수 있는 “일석이조” 혹은 “일석다조"의 효과를 노리는것이 근년들어 나의 창작성향이라 할수 있다. 그래서 “조선족문제테마소설계렬”이라는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펴내면서 판타지, 과학환상, 호러(공포)등 장르들을 활용하였고 그 작품들로 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요즘들어 무척이나 환영받는 이 새로운 장르로 지금 흔들리고 있고 존페의 위기론, 비관론에 잠긴 우리 공동체의 현황과 래일에 대해 적극 진맥해보고자 한다. 그만큼 이 문제에 천착해 온 작가로서 나의 모든 정열과 창작의취를 바쳐야하는 줄로 안다.  남들이 웃던 말든 철저한 소명의식을 안고서 말이다. “2052”. 타임머신을 타고 가본 내 작품속 그곳에서는 지천에 진달래꽃, 사과배꽃이 만발한 가운데 여전히 우리 말의 향기가 농익어 풍기고 우리의 장단이 신들린듯 울려퍼지고 우리의 상모, 옷고름이 희망처럼 휘날리는 진경이 끈끈히 펼쳐질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원했던 그 사라질줄 모르는 유토피아의 도시처럼…     “연변문학” 2012년 9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    윤동주라는 아이콘 댓글:  조회:3473  추천:15  2012-09-18
윤동주라는 아이콘 김 혁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2010년 1월호부터 윤동주의 생애를 그린 장편 “시인 윤동주”를 일년간의 련재를 거쳐 마무리 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다. 고향이 낳은 시인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그동안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 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50여명 그에 대한 연구론문들이 수백편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의 인생을 그려낸 소설작품은 1992년에 한국에서 나온 “윤동주”가 겨우 한편 그것도 방송드라마를 각색한 드라마소설이였다. 그 공백이 나에게 어떤 사명감이 가미된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 와중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이 작품의 기획을 제7회 연변작가협회계악작가작품으로 선정, 작품에 대한 명분을 더해주어 고마왔다.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걸출한 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하는 부담감에 창작 슬럼프에 시달렸다. 근 일년간 한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반면 윤동주 관련 평전, 론문, 전기물과 력사서적 그리고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 문학작품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한국으로 출국해서도 윤동주관련 서적들을 모조리 사들고 왔는데 그렇게 수집하고 읽은 책이 저그만치 60여권은 되였다. 그동안 윤동주시인의 친녀동생인 윤혜원녀사를 두번 만나 장시간의 취재를 가졌고 “윤동주 평전”의 일본판 역자 아이자와 가크씨(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를 만나 창작에 수요되는 자료를 얻고 위인의 생애에 대한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연변일보” 문화부기자로 뛰던시절, 윤동주 생가의 복원과 윤동주 탄생 50주기 학술회를 취재했고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일본학자 오오무라교수님과도 여러번 만나 대담을 가졌고 명동학교의 복원, 일본과 한국에서 일고있는 윤동주 붐에 대한 취재 등 그동안 윤동주관련 신문기사도 적지않게 펴냈었다.    지금 윤동주의 시비가 경립되여있는 룡정중학(원 대성중학)이 나의 모교이고 , 윤동주일가가 룡정으로 이사와 거처를 잡은 영국더기에 소학시절 학교의 자류지가 있어 교직원들이 함께 추수를 다녔고,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이 례배를 다녔던 룡정 중앙교회 옛터가 내가 문학도시절 설익은 소설작품을 들고 선배들을 찾았던 룡정시 문화관자리이며, 아침마다 조깅을 했던 중심소학교가 원 서전서숙의 옛터였다. 이렇게 룡정에서 나서 자란 내게서 윤동주의 숨결은 어디나 서려있었다. 집필하는 동안 윤동주의 생가며 묘소들을 5,6차 다녀오면서 윤시인님의 자취를 다시 밟아보는등 이 동안은 매일이 시인의 혼령과 함께 해온 나날들이였다. 그렇게 근 2년간의 신고끝에 장편을 마무리했다. 45만자, 련재를 하면서도 계속 탁마를 하고있는데 적당한 기회에 국내외에서 책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부끄러움의 시인” 등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그의 시는 어떤 민족에게 한정된특수한 상황하에서 지어진것이지만 그의 의식은 창작당시의 상황을 훨씬 릉가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승화되여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적어내려간 메시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과거”의 것이 되는것과 같은 유한한것이 아니라 무한성을 가진 언제나 “오늘”의 소리 그리고 “미래”의 소리로 남아있다. 그의 시가 시대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강하게 인상과 감동받기를 계속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날 윤동주는 단 시인이라는 수식을 뛰여넘고 있다. 윤동주는 어떠한 암울한 시대에서도 자포자기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고 그 느낌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표출해 냈다. 이 처럼 시대를 넘어 민족문제를 가로질러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목표로 한 작품이기에 개인의 고뇌와 시대적 압박에 의해 생성된 시이지만 그것의 열매는 그 틀에 그치지않고 더 높고 더 높이 향기를 뿜고 있는것이다.    그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아이콘을 그려내는 벅찬 작업을 완수할수있게된데 대해, 그리고 그 작품이 시인의 타계와 조명붐에 편승할수 있어 뿌듯하다. 이제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이미 내 삶속에 한발자욱 깊게 들어와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bbs_contents p{margin:0px;}          
8    “큰 바위 얼굴”과 룡가미원 댓글:  조회:3484  추천:12  2012-09-13
  . 칼럼 . “큰 바위 얼굴”과 룡가미원 김 혁     미국 서부 지역의 최대 관광명소는 어디일가? 두말할것없이 전세계인들에게 “큰 바위 얼굴”로 잘 알려진 러시모어산이 꼽힐것이다. 사우스다코타주 산악군의 한자락인 러시모어산 꼭대기에는 력대 미국 대통령 4명의 조각상이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그 주인공들로는 조지 워싱톤(초대), 토마스 제퍼슨(3대), 에이브러햄 링컨(1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26대)이다.   워싱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있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제퍼슨은 미시시비강 서쪽의 광대한 령토를 프랑스에서 사들여 대륙국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닦았다.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련방을 보존했으며 노예해방을 실시하여 인권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 루즈벨트는 빠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혁신시대를 이끌면서 20세기 세계의 중심 무대로 미국을 끌어올렸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대국을 세우고 발전시킨 주역으로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손꼽고있는 위상높은 인물들이다.        “큰바위 얼굴”로 불리고 있는 조각상들은 얼굴이 18메터인 그 거대함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루즈벨트의 수염만 해도 6메터가 넘고 링컨의 얼굴에 붙은 사마귀의 크기마저도 3메터나 된다니 “걸리버 려행기에 나오는 대인국에 빠져든것처럼 놀라움 그 자체다. 우람한 위용을 뽐내며 서있는 “큰 바위얼굴”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미국의 가치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키우는 곳으로서 미국인들의 자랑거리로 충분하다. 매년 전 세계에서 200만명의 관광객들이 이 거대한 조각품을 감상하러 이곳에 몰려든다고 한다. 지역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지와 력사학가들이 러시모어 조각상을 구상했고 드디여 미 의회의 동의를 이끌어내여 1927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서 총지휘는 당시 미국의 유명 조각가 존 거츤 보글럼이였다. 보글럼은 마을사람들과 광부들을 조수로 휘동하여 가파른 산을 누비며 이 위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거대한 조각물을 만드는 작업은 실로 고난의 련속이였다. 가파른 지세, 렬악한 도구, 강풍과 폭설이 장애물이 되여 작업을 가로막았다. 또 자금 조달이 어려워 공사를 여러번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인들의 찬란한 정신적 유산을 남기겠다는 열정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우선 이곳에 오기까지 권양기와 케이블. 착암기등 장비를 운반할 도로가 없자 시골마을의 남녀로소 모두가 참여해 원시적인 방법으로 긴 도로를 닦았다. 그리고 조각물을 새길 부분의 들쭉날쭉한 바위들을 폭파하고 다시 세심한 수작업에 들어 갔다. 폭파해낸 바위의 중량만 해도 약 2억 톤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해 볼수 있다. 세밀하게 작업해야 할 눈, 코, 입 부분은 소형 착암기와 끌, 망치를 사용해 완성했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사람들이 직접 권양기의 케이블에 매달려서 위태롭게 작업해야 했다. 네개의 얼굴륜곽이 완성단계에 들어갈 무렵인 1942년 봄의 어느날 갑자기 보글럼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한동안 작업이 중단 됐으나 처음부터 아버지 곁에서 조수 역활을 한 아들 링컨 보글럼이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고생끝에 거대한 작업을 마무리 하게 되였다. 1941년 완공하기까지 무려 14년의 세월이 걸렸다. 착공식에서 링컨 보글럼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말과 얼굴을 하늘 가까이 높이 새겼다. 비와 바람만이 닳게 할뿐 그들의 얼굴은 영원할것이다”라고 감개를 표했다. 이렇게 러시모어에는 자연의 위풍과 인간의 집념이 결합되여 이루어진 미국력사의 한 페이지가 상징물로 우뚝 솟아 있다.   지난 10월, 룡가미원(龍家美苑)이라 불리는 시교의 어느 한 가든에 하나의 얼굴이 새겨졌다. 예관 신규식선생의 조각상이다. 신규식선생은 한국림시정부 수립후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외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산파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특히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맹하여 신해혁명에도 동참한 첫 조선인이다. 그는 손중산으로부터 “나의 오랜 조선의 동지”라는 도타운 평가를 받았다. 저명한 독립활동가, 사상가, 교육가이자 시인으로서 중화민족과 동고동락한 벗이였으며 국혼적인 애국자로서 그의 인생, 사상과 철학은 후세대들에게 큰 계시를 주고있다. 이 인물상의 조각도를 잡은 이는 룡가미원의 주인장 필충국(弼忠極) 화백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문시 장안향 룡가촌에 필충극화백은 사재를 털어 이 미술원을 앉혔다. 푸른 호수, 백옥같은 회벽집, 아담한 정자, 그 주위에 미인송이며 사과배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개나리, 진달래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치 도연명이 읊조린 “세외도원”을 방불케 한다.  정원의 조경은 이로서 끝난것이 아니다. 돈품 먹인 규모나 조경에만 신경썼더라면 여느 가든, 여느 별장에 다름없었을것이다. 다른곳과 차별화된점은 룡가미원에는 “큰 얼굴”들이 새겨져 있는것이다. 신규식외에도 한락연, 정률성, 김학철등 위인들의 얼굴이 새겨져 모셔져 있다. 모두다 필충국화백의 손끝에서 주조된 작품들이다. 한락연은 인류문화의 유산인 돈황벽화의 연구에 몰두하다 실크로드에 혼을 묻은 인물이요. 정률성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함께 “조선인민군 군가”까지 지은 걸출한 음악가요. 김학철은 외다리로 험난한 인생을 굳은 신조의 자국을 남기며 걸어간 대표적인 중국조선족작가이다. 이 민족의 엘리트들의 얼굴을 새기기 위해 화백은 자기의 사재를 아낌없이 털었고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 기념조각물을 하나 둘 세웠다. 풍요로운 도시를 뒤로하고 호젓한 교외에서 만나보게 되는 이들의 얼굴은 더듬어 볼수록 민족엘리트들의 빛나는 공헌과 치렬한 생애가 슴배여 빛나오르고있다.   미술관이나 화랑이라는 흔한 장소에 전시되는 작품과 달리 우리 민족 엘리트들의 군상을 운집해 놓은 이곳은 화가의 민족혼을 표방한다. 각박한 도시환경에 자극을 주고 민족적 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화가의 이러한 창작행위가 돈이나 명예보다는 예술가의 사려깊은 생각과 의지속에 있다고 본다. 시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쳐 산화해간 위인들의 삶에 대한 새김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키워줄것이다. 민족의 긍지를 살리고 후세에 알리기위한 한 화가의 은근한 프로젝트는 이제 그 지역의 하나의 경관으로 되였다. 역시 큰 얼굴들이 새겨진 “룡가미원”이 메마른 도시생활 속에서 공리에 매달린 시민들이 잊어버린 어제의 혼과 마음의 풍요와 삶의 활력을 찾을수 있는 곳으로, 연변의 러시모안으로 부상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한 지역은 한 문화의 결정체이다. 이 명제를 잘 실천하고 있는 곳이 “룡가미원”이 아닐가 싶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    문학 아고라 댓글:  조회:4298  추천:12  2012-08-21
. 칼럼 .    문학 아고라 김 혁     1   아고라(agora)란 희랍어로 “광장”, “회의장소” 혹은 “시장”이라는 뜻이다. 희랍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나오는 “아고라”는 동상, 제단, 나무, 분수로 장식되여 도시 한복판이나 항구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주위에는 공공건물과 사원과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희랍에서는 어쩌구려 남자들이 장 보러 다녔는데 그들은 아침 일찍 장바구니를 끼고 “아고라”에 나와 채소도 사고 잡담을 나누거나 정치를 론하고 예술가, 웅변가들의 연설을 듣기도 했다. 명절기간에는 연극 무대와 운동장으로도 씌이곤했다.   “아고라”는 이렇게 시민들의 일상적인 경제활동과 문학, 예술. 정치 활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공간이였던것이다.   2   치솟는 여름의 열기속에 “시와 시민의 만남- 중한 시화전”이 펼쳐져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2009 연변독서절 계렬행사》의 일환으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와 도문시문련에서 주최하고 연변시인협회, 연변작가협회, 한국시민문학협회의 협력으로 열린 시화전에는 해내외에 명성이 높은 시인들뿐만아니라 농민, 의사, 공무원들도 동참하여 최근작들을 시에 걸맞는 아름다운 화폭과 함께 전시했다. 지난달 연길공원에서 개최되여 두만강변에서도 계속 펼쳐지고있는 시화전은 연변주정부의 깊은 관심을 받았으며 국내의 15개 매체들에서 동원되여 도보하는 등 사회의 눈길과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3   문학을 성립시키는 요소중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는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이다. 작가는 또하나의 독자이며 독자 또한 작가로 될수 있다. 따라서 작가는 가장 먼저 자신의 경험을 함께 공유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 협력자는 문학령역에서 뛰여난 사람들만은 아니다. 당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애독하는 평범한 대중일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독자들이 작가의 작품을 작가자신을 변화시킨다. 작가에게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독자와의 교감중에서 작가는 자신이 한곬에 버릇되였던 틀에서 벗어나 더 넓은 상상력이 이끄는 다른 방향으로 펜의 성향을 바꿀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독자의  의견에 귀를 귀울이는 과정에서 점차 성숙되여 간다.   그런 경험이 글에 녹아들고 그 글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한다면 그게 바로 베스트셀러이고 명작이고 그 작가가 바로 어엿한 명작가로 대접받게 되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감탄하고 있는 명작들은 모두가 세대와 류행을 뛰여넘는 문학적 가치와 안목있는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비탈진 굴곡이 있고 타인의 심장을 울릴만한 애틋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작가들은 시대가 안고있는 이러한 고민과 아픔들을 우리 시대에 걸맞는 어법과 감성으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어필할 작품을 만들어내야할 의무가 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구축한 “아고라”에서 함께 읽고 함께 얘기하고 함께 눈빛에 기쁨을 갖노라면 서로의 기쁨은 전달되고 외로움과 어려움은 물리칠수 있을것이다. 모든것이 물질적 효응으로  계산되는 오늘날, 문학이 주는 작지않는 기쁨을 맛볼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장점을 융합햐여 문학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것이 바로 문학적 상생(相生)과 효응을 실천하는 길이 된다.   “시와 대중의 만남”이라는 작은 시도가 반가운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국악]숙명여대 가야단 - 연주곡21  
6    독도를 가다 댓글:  조회:3660  추천:12  2012-08-14
  . 기행수필 . 독도를 가다   김 혁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 독도는 우리 땅... 오래전 재즈에서 몇구절로 들어왔던 그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80년대 중기, 변혁의 문이 열리면서 본보기극의 단조로운 음조에만 버릇되였던 우리도 다양한 풍격의 음악을 접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참 들었던 이 노래는 가히 인상적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어떤 절주빠른 선률에만 심취되였고 독도라는 섬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렇게 아렴풋이 알았던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지난 5월 말,  서울에서 한국재외동포재단의 주최로 열린 해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5박6일로 된 회의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에서 열렸다. 대회일정을 훑어보니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울릉도에서의 맨 마지막날 독도행이 배치되여 있는 것이였다. 독도, 세계의 주목을 끄는 곳이였고 바다와 섬을 멀리한 변강오지에 사는 한 나그네의 호기심과 향수를 충분히 자아낼 만한 곳이였다. 독도행에 앞서 나와 중국에서 온 말짱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몇몇 《륙지오리》들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바로 배멀미, 배멀미가 우리들에겐 천적(天敵)이였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뻐스로 묵호항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겨레》호 려객선을 타고 3시간 반 정도 대여왔던 울릉도, 그 려정은 우리들로 말하면 말 그대로 련옥으로 가는 체험이였다. 《한겨레》호가 《선체가 커 온중하기 때문에 멀미 걱정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배멀미쯤이야하고 방심했더니 큰 오산이였다. 날씨가 사뭇 좋아 보이는데 반하여 무척 파도가 높았다. 우리는 금세 장난꾸러기 악동이가 심술궂게 밀어대는 그네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배가 출발하기 바쁘게 려객선 내부에는 대 혼란이 벌어 졌다. 여기저기서 무섭게 토악질하는 소리가 났고 독한 술 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얼굴이 노랗게 변하여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좌석에 볼썽사납게 드러누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선원들은 선실 이곳저곳에 마련된 비닐봉지를 건네주기가 바빠 졌다. 정해진 좌석도, 2층 3층도 구분이 없어 졌다. 튼실한 신체를 믿는 나였지만 항해의 신기함을 음미 할 사이도 없이 꼭 마치 폭음한 이튿의 숙취와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배안에서 상영하는 영화에도 집중해 보고  책도 읽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한국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을 각오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울릉도였다. 3시간 30분여, 217키로메터의 해리를 뚫고 울릉도의 조그만 도동항에 도착하기 까지 우리는 발에 발을 잇는 고험에 시달려야 했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백의 멧부리 방울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청마 유치환이 애달프게 시에서 읊조린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관광의 보고》울릉도에 며칠 류하는 동안, 울릉도의 비경과 해물맛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독도에 대한 호기심은 나름대로 부풀어져만 갔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흔히 큰편인데 게다가 쉬이 닿을수 없는 특유의 섬이였기에 호기심은 더했다. 그러나 설상 독도를 딛기는 힘들다. 전세계 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높은 곳일 터이지만 설상 독도에 가본 사람은 많지 못하다.  독도로 가는 길은 현재까지는 울릉도를 거쳐 가는 도항(渡航)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독도로 출발했다고 모두 입도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입도신청서를 작성하고 허가를 받아야 독도 입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  파도가 높거나 풍랑이 치면 배가 결항(缺航)되기 때문에  웬만한 기상상태로는 입도자체가 힘들어 배가 부두에 접안을 하지 못하기에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독도를 가려면 날자를 맞추고 날씨를 살피는 려행객의 정성에 보태여 하늘의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독도 땅을 밟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독도에 상륙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관광객들의 출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자연보호를 리유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독도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입도는 불허되고 학술적인 목적 등 특별한 경우에만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심의를 거쳐 입도가 허가된다. 울릉도 어부들 도 입도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울릉도 사람들조차도 먼 이상향으로 여길 만큼 독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었다. 독도가 이렇게 된 것은 꼭 바다의 험난함 때문만은 아니다. 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간수역에 포함된 독도 주변 해역은 일본과 러시아 함정 등이 출몰하면서 군사요충지가 됐다. 해경에 따르면 500∼1000톤급 일본 순시선이 한국 령해인 독도 주변 12해리 밖을 한달에 네댓 차례 돌고 있다. 반면 독도 주변 12해리는 동해해경 소속 해경정 3척이 경비를 맡고 있다. 그중 최근에 취역한 한국의 5000톤급 《삼봉》호는 해군과 해경을 통틀어 가장 큰 경비정. 독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최신식 대형함정을 배치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수고롭고 예측 불허한 려행이 또 있을까 자칫 이번 행이 소득없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31일, 회의일정을 마감한 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해상관광을 마치고 호텔에서 오삼불고기로 점심을 든 후에 모두는 도동항에 모였다.  울릉도의 서울이라고 불리우는 울릉읍 도동은 울릉도의 행정,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깎아지른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도동항은 유람선을 위한 전용항구라고 여겨질 만큼 작고 아담하다. 독도행 유람선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고기배나 일반 선박들이 적었고 선착장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시멘트와 자갈 등 건축자재가 쌓여 있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느라 시끌했다. 태풍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중이라고 곁에서 알려 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휩쓸고간 태풍 에 매립돼 도동의 풍경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항구에는 우리를 독도로 태워 줄《씨플라워》호가 정박 되여 있었다. 촉박한 회의일정이었지만 배에 오르기 위해 조별로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인원 점검 끝에 배에 올랐고  드디여 독도행 《씨플라워》호는 세계각지 20여개 나라에서 모여온 동포언론인들을 싣고 파도를 가르며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92키로메터, 독도를 순회하고 되돌아오는데 총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해로는 해상의 고속도로이다. 발해민이 일본을 건널 때도 이 바다길을 리용했고,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했을 때도 이 길을 누볐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납물이 든 듯 시퍼렇게 변해 금세 큰 비라도 쏟아질듯 했다. 혹여 입도하지 못할가 모두가 근심에 쌓였는데 이만하면 기후가 괜찮아 순항이라고 선장이 스피카를 통해 알려주었다. 모두들의 얼굴은 금세 개운해 졌다. 배가 순항을 계속하는 사이 나는 독도에 대한 예비지식을 쌓으려 독도관광에 대한 팜플렛을 읽기 시작했다 독도! 면적 187.554평방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킬로메터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 서도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3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메터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메터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한 해풍과 척박한 토질로 인해 동식물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서식하는 짐승은 없지만 바다제비, 슴새·괭이갈매기 등 여러 종류의 곤충과 해조류가 살고 있다. 무엇보다 독도 주변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며 물이 맑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 영국에서는 《호넷》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묵호- 울릉도행에서 배멀미에 혼쭐난 우리는 너나가 멀미약을 열심히 챙겼다. 멀미약을 약갑에 씌여진 설명서대로 두시간전에 먹었고 귀바퀴에 혈위를 지압하는 멀미약도 붙였다.  약효였던지 아니면 독도로 간다는 감흥에서였던지 무서운 멀미가 더는 우리를 법접못했다. 배길을 달린 지 2시간여, 안내서에 빠져있는데 《독도다!》하는 누군가의 환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원형의 유리창에 매달렸다. 검푸른 수평선우에 거의 수직으로 솟은 섬 하나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속력을 줄이면서 배는 독도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섬 주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이 뱃전에서도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하나로 보이던 섬이 두개로 갈라졌다. 독도를 이루고 있는 쌍둥이 섬 동도와 서도다. 잠시 후, 입도가능을 알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2시에 울릉도를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항해를 시작한 지 2시간 20여분 만인 오후 4시 20분쯤 독도 접안시설에 배를 대는데 성공했다. 육중한 선체를 로프 몇 개로 부두에 달아매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거센 풍랑에  배는 잠시 주춤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우리들을 독도의 품안에 내려놓았다. 하늘이 돕는다. 1년에 단 60여일만 맑은 날씨를 보여준다는 독도다. 그만큼 범인이 접하기 힘든 섬이다. 그런 독도에 우리가 입도할때는 거짓말처럼 말짱 개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올랐고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쉬가 튀었다. 평면의 사진으로만 접했던 독도가 그저 볼품없는 돌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천혜의 비경을 연출한다.  독도주변은 해심이 무려 2천메터가 넘는단다. 그 깊이로 우려내서 그런지 바다색깔이 진한 남보라색이다. 그런 바다를 박차고 나란히 솟은 동도와 서도, 빼여난 기암절벽, 암초바위 어느 것 할 것 없이 당당함으로 가득찬 멋진 모습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얼마 안되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그 정경은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새들을 제외 하고는 사실상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해안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들이 독도의 매력 포인트. 기이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각각의 암초들은 물개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해태바위. 권총바위. 남근바위, 얼굴바위 등 생김새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섬에는 관광안내서에서 본 괭이갈매기가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며 바위며 흙길이고 상관하지 않고 날아다녔고 우리들의 어깨도 스쳤다.  독도의 아름다움을 말할라치면 어떤 진부한 수식어를 단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자연이 베푼 최고의 은혜로움이 가득한 곳 독도. 동도에는 1954년 광복절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는 독도등대와《대한민국 동쪽,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숨결로 잠재우고 우리는 한국인의 얼을 독도에 심었노라》라는 글발이 새겨져있는  《한국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도의 등대 밑에는 소총을 든 독도경비대원들이 역시 하나의 암초처럼 서서 매서운 눈초리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그전 3년간은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자비를 들여 막사를 짓고 독도를 지켰다. 동도 해안가 절벽 밑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반도는 6·25 사변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소홀한 틈을 탄 일본은 이곳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령토 표식을 하고 돌아갔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순칠씨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인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다.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기관총,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일본 함대를 격퇴시킨 것이다. 3년 동안 무려 5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니 그때부터 쟁탈전이 아주 치렬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는 B29 폭격기가 이 바위를 어선으로 착각하고 폭탄을 떨어뜨려 어민 20명이 폭사한 기록도 있다. 그만큼 독도는 슬픔을 지닌 섬이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도 짓고 간이선착장도 만들었다. 그 너른 동해바다의 작은 점이건만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당했던가? 도대체 가로세로 400m의 이 조그마한 섬에 무엇이길래 한국과 일본은 이리도 오랜 세월 한 치의 양보할 수 없는 영유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과거의 독도는 바다가운데의 작은 외딴섬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양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정치·경제·군사·학술 등 다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리유로 현재 일본과 그 영유권을 두고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해고도 외로운 섬이 깨여나기 시작했다. 근래에도 독도를 사이에 두고 한·일 량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 일본 해양탐사선이 탐사를 명목으로 독도 린근 해역으로 진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독도 린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침입해 수로 측량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독도 주변 해역 탐사계획을 중지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에 대해《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외교통상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하게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독도를 둘러싼 민간인의 활동은 한국 측이 활발한 편이다. 오프라인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고 온라인 회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다. 오프라인 쪽은《독도력사찾기운동본부(독도본부)》가 대표적인 단체로 꼽힌다. 이 단체는 신한일어업협정 폐지를 주장하는 민간단체로 2000년 출범해 현재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도수호활동은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는 전세계 유명 교과서와 방송국, 지도, 포털 사이트 등에서 독도와 관련된 잘못된 표기나 역사, 지도 등을 바로잡는 사이버 단체다. 일본측의 도발 의지도 만만찮다. 일본은 독도가 자국 영토인데도 한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일본의 민간 차원 대응은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나서지 않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차원에서 력사교육 강화 촉구, 홍보책자 배포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우익단체와 대학교수 등이 독도가 일본 땅임을 주장하는 책을 발간하거나 몇몇 우익단체들은 독도상륙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일본 시마네현의 활동도 활발하다. 중앙정부는 나서지 않는 현 차원의 대응으로 비치지만 중앙정부와 련계한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다케시마의 날》 1주년 행사도 강행했다. 일본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을 비롯한 많은 수험서에는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유를 하고 있어 분쟁지가 되었다는 항목이 중요한 소재로 실려 있다.   그러나 해외의 시각은 급변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를 병기해서 독도를 표기하는 해외 인터넷사이트와 지도들이 늘고 있는 것. 이는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의 국가정보보고서 2002년판은 《일본이 독도 관련 분쟁을 제기하고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2004년판은 《분쟁이 고조되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못 박고 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하는 데에는 숨은 저의가 있다고 한국은 본다. 독도 주변에서 막대한 가스층이 발견되었고, 석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한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다. 독도 주변 해역의 경제적 가치도 향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해 수산자원이 풍부한 데다 해저자원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도를 둘러싼 한·일의 공방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런 분쟁의 초점속에도 독도에 정착해 사는 어민이 있었다. 현재 유일한 거주민은 김성도(64세, 울릉읍 도동리 산 63번지)씨. 그들 일가족은, 독도 최초 거주민이 된 최종덕씨 이후 6번째 가족이다. 심포지움기간 한국위성방송에서 김성도부부가 월드컵을 시청할수 있도록 독도에 위성접수기를 설치해준 뉴스가 나와 김성도 부부의 모습을 화면으로 접할수 있었다. 김성도씨 가족은 겨울 동안에는 울릉읍에 체류하고 3월 경부터 독도에 들어가 어업을 시작한다. 김씨가 울릉도와 독도에서 살아온 얘기는 이러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서 태여난 김씨는 1960년대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0여살 위인 최정득씨(작고)와 함께 독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복과 미역, 홍합 등 지천에 깔려있는 해산물을 채취해서 파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외로운 섬 생활의 불편은 참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전복이나 소라 등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 등지에서 해녀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단다. 그러던 최씨가 해녀들을 데려오기 위해 륙지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독도에는 김씨 가족만 남았다는 것이다. 두 살 년상인 부인 김신열과 단둘이 사는 독도 생활은 좋다고 했다. 김씨가 사는 집은 거센 바람 때문에 기초 바닥에서부터 벽, 기둥, 지붕 등이 모두 철근이 들어간 세멘트 집이라 했다. 독도에는 먹을 물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는 자기가 사는 서도에 《물골》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하루 20명이 먹을 수 있는 량의 물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독도에는 바위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나무와 화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노력은 비단 섬을 예쁘게 꾸미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해양법상 섬은 암초와 인공섬, 자연섬으로 구분된다. 영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섬뿐이다. 자연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식수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자라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하여 외로움을 이기며 한호라도 거주민이 보금자리를 틀었고 여러 단체에서 10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500여그루의 나무를 살리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현재 한국에 호적이 독도로 되어 있는 국민의 수는 약 850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독도에 태어나거나 거주한 경험이 없지만 99년부터 시작된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에 동참한 이들이다. 독도의 절경과 파란많은 사연에 한참 취해있을 때 배에서 승선하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파도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지체하기엔 위험하다는 《씨플라워》호의 통지였다. 독도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30분 지났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뉘엿뉘엿 배에 몸을 실었다. 삽시에 들끓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독도는 다시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신이 붓끝으로 눌러찍은 듯 작은 점으로 태여난 은총의 섬, 독도. 기암절벽과 하얀 갈매기들의 마냥 잔치를 벌이고 있는 섬 독도.  동해의 너른 바다우에 독도가 한 점 놓여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거리상으로도 많이 떨어져 있고 우리들 마음에서조차 다분히 멀어진 곳이다. 그러나 독도 땅에 발을 딛은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려행이였다. 급변하는 기후속에 독도는 재빛 덮개를 덮은 듯 몽롱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봐도 독도는 거기에 있었다.  철벅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견고해진 넉넉함으로 거기에 있었다. 작은 몸체에 당찬 위엄을 갖추고 세간의 풍파와 조명을 한 몸에 받아 안으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장백산" 2006년 5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독도와칸코쿠(1).mp3   
5    隱遁하는 령혼 댓글:  조회:3432  추천:12  2012-08-08
. 칼럼 .   은둔하는 령혼   김 혁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집필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것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군》이였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년대를 조명하려 시도했던 나에게서 역시 미국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미국사회상을 다룬 샐린저의 작품이 좋은 보기로 되였기때문이였다. 50년대초에 발표된후 전 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떠오르며 사랑받는 고전자리를 지켜온 《호밀밭의 파수군》의 저자 샐린저는 언론에 로출되길 꺼리면서 일체 인터뷰를 거부하는 은둔자적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십년째 미국의 한 시골에 칩거하고있다. 책을 낼 때마다 샐린저는 작품에 해설문을 붙이지 않고 작가 사진도 싣지 않는다. 이는 그가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맥스웰 쿳시, 10여년간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돼온 쿳시는 한 작가에게 두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영국 최고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도 두차례 받았을 정도로 뛰여난 문학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아온 작가다. 그 역시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하다. 두차례에 걸친 부커상시상식에 불참했으며, 노벨문학상 발표뒤에도 작가와 직접 련락이 닿지 않아 스웨리예 한림원은 수상소식을 직접 알리지도 못했다.   올해에도 일본문단에서 또 한명의 은둔작가가 나타났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중 한명이 일체의 신상정보를 거부하고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길 원하기때문》이 다. 평의원들에게 전해온 작가의 짤막한 메시지에서 수상이라는 명예대신 작품만이 기억되길 바라는 작가의 은둔자적인 자세를 느낄수 있었다.   허명(虛名)에 창작력을 랑비하는 이들이 보이는 요즘의 문단풍토이다. 고작 몇편의 작품을 내고는 좀 뜬다싶으면 유명한 작가요 시인임을 자처한다. 수식이 요란한 명함을 찍고 화려한 필명부터 지으며 자비로 출판한 책에도 자기의 조야한 얼굴들을 문지광(窓門)처럼 크게 싣는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로 남을 폄하(貶下)하면서 자기만이 《조선족문단의 기수》니 뭐니 망언한다. 나르시시즘(自愛)의 거울을 마련해놓고 해종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붙인 화려한 수식에 자아만족의 미주를 기울인다. 나가는 글은 멋지고 고상해보여도 한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자기만 봐달라고 앙탈하는 애들 같다.   굳이 자기를 내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 배후엔 명리(名利)라는 흑심이 뱀처럼 커다란 똬리를 틀고있다. 명리의 론리는 겸손을 뒤전으로 한다. 명리는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없이 몸을 뒤채고 경박하게 떠들어댄다. 문학도시절, 홀로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궤적을 남기던 행태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는 무대우의 주인공이 되려고 뒤질세라 요란하게 치장하고 남보다 한목청 높은 소리를 내느라 분주살스럽다. 그 모든 가증스럽고 천박한 행동거지, 자기 현시욕과 극도의 리기주의, 독선, 그리고 꼴같잖은 오만으로 점철된 저렬한 의식구조에 문단이 병들어있으며 따라서 문인상경(文人相輕)의 아수라장의 결과를 초래하고있는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고있다.   명리를 앞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무리속에, 이 욕심이 란무하는 시대에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들은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것인데…   사실 거슬러보면 문학과 예술의 뿌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닿아있다. 개인으로서의 작가, 예술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중국의 옛 선비들은 세속의 영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아나가는 은둔자를 현인으로 여겼고, 깊이 은거할수록 명성의 높이는 그에 비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각 조대를 살펴보면 학문과 자기 수련에 혼신을 던지면서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수없이 은거하고있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았다. 또 그러한 은둔을 통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별개의 독자적세계인》이 되고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얽매여있지 않는 자유를 찾아나설 용기》를 얻게 되였던것이다. 이는 어떤 자아적인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심으로 정신세계를 심화, 확장해가려는 순수 문학정신의 표출이다. 그들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澄)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남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다. 그런 고독의 세계에서도 작품에 자기의 모든것을 거는 재능과 용기를 가진 그들에게는 진정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월도 거스르는 명작의 감동과 그 진가의 리유는 과연 무엇일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성에 자족하지도 않고 편승하지도 않으며 명리를 따지지 않는 작가의 자세와 그에서 우러나온 정신에서 비롯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작품이 만고류방(萬古留芳)으로 매우 지적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것은 자신의 외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가 짐작해볼수도 있겠다.   《범인(凡人)작가는 로동자이고, 뛰여난 작가는 감독(監督)이며, 대작가는 건축가이다. 소설의 보통독자는 신자이고 참다운 의미의 정독자(精讀者)는 승려이면, 그중에서도 위대한 정독자는 스스로 승좌(僧座)에 앉아서 근행(勤行)하는 수도승이다.》   어느 평론가가 남긴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작품의 창작에 림하는 작가의 자세와 정신적풍모 그리고 그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정신에 의해 문학의 사상성을 형상화하여 예술성으로 결정(結晶)된다. 때문에 여기에는 작품에 몰두하는 창작의 자세가 중요하다. 세속적인 욕망의 거품이 걷혀지지 않은채 글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부르는것은 혼돈이다. 시간의 응축된 에너지가 없이는 누구나 이 명예를 가질수 없다. 속된 현시욕으로 단지 공리에 매여 글을 짓는것은 문학적흐름을 간과한 어리석은 짓이며 그러한 작품 그러한 작가가 오래가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스위스나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으로 칼과 가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며, 명장(明匠)이 만들었던 오래된 칼과 가위는 엄청 높은 값에 팔리고있다고 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기계에 의해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때문에 옛날과 같은 장인과 제도도 거의 사라져가고있다. 그러나 장인들이 가지고있는 철저한 직업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것으로 여기지 않을수 없다. 자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킬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직업에 림(臨)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할수 있는것이다. 그러한 장인들이 후세에 경모를 받는것은 그 무엇보다도 조용히 세월의 행간을 메워나가며 인간존재를 해명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모습이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다울수 없기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가(家)라면 그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가! 우리가 명작과 대가에 근접할수 없음은 은둔한 장인들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고독을 고고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급급한 현시욕적인 속물근성의 잠재의식때문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러한 은둔자들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예술적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요청된다. 최근에는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량산되고 글짓는 이들에게 너무나 쉽게 명예가 부여되는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작가와 작품들이 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시대와 력사에 한획을 긋는 그런 작품으로 그런 예술적주인공으로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취해야 할것은 무엇보다 작가들이 부박(浮薄)한 풍토에서 벗어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서재에 묻히는 자세가 아닐가!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    난 '상어'로소이다 댓글:  조회:3747  추천:16  2012-08-01
  . 칼럼 .  난 “상어”로소이다  김 혁           1   누가 나에게 무슨 띠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 못하고 문칫거릴때가 많다. 처음 신문기자생활을 시작했던 그 시기 나이를 물을라 치면 “토끼 띠”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필재 하나만 인정받고 파격적으로 스무살에 신문사에 입사했던 나는 애송이 얼굴의 나에게 몰부어지는 미심쩍어하는 눈길들에서 어린 나이를 감추고자 자기 나이를 몇 매듭 올려 붙인것이였다. 요즘은 누가 물어볼라치면 난 “양 띠”라 말하곤 한다. 이번엔 몇 매듭 내려 붙인 나이다. 한 옥타브 낮추어 웅얼거리는 그 혀아래 소리에는 어느새 훌쩍 가버린 청춘에 대한 추억 그리고 아직도 파랗게 남아있는 꿈에 대한 동경이 슴배여있다고 해얄것이다. “김작가 나인 고무줄 나이요? 대체 무슨 띠게?” 호기심 많고 캐묻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이 “진드기”인양 진짜 나이를 집요하게 물을라 치면 난 한숨에 섞어 이렇게 괴여 올린다. 나 상어 띠 올시다! 뭐? 상어 띠? 띠를 물을라 치면 자신의 혁대를 내보이면서 장난 삼아 “물소가죽 띠”, 혹은 “악어가죽 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만 하필이면 왜 상어 띠냐 또 한번 집요한 물음이 나를 닦달질 한다.    왜 상어 띠냐고? 대답이 좀 길어진다.     2   매양 작품의 들머리나 책의 앞갈피에 작가 프로필을 적을때면 난 또 한번 난감해지곤한다. 문자 그대로 희비참반(喜悲參半)이다. 사실 창작 략력을 적을라치면 나름 적을 거리가 많다. 열아홉에 첫 소설을 발표하여 지금까지 곰바지런히 필밭을 경작해 왔으니깐.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대고 김을 잡고 거두어 들이고… 달을 이고 나가 해를 지고 돌아오는 우직한 농부자처럼 그렇게 필밭을 경운한지도 어언 20여년 철이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그 무슨 역마살이라는 주유(注油)를 받은 기계마냥 피스톤의 작동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그 하나의 단조로운 짓거리에 내 옹근 젊음과 삶을 바쳐왔다.   기자와 작가라는 완충지대에서 픽션과 논픽션사이를 오가며 각종 쟝르와 문체의 바다에 물이 그렇게 좋을수 없는 다이빙 선수처럼 기꺼이 옹근 나를 던졌다.    소설로 등단했지만 한때는 시에 빠져 시를 300여수 발표하기도 했고 아동문학에 심취되여 아동문학상의 수상으로 작가협회에 입문하기도 했다. 한해에 장편 두부를 동시에 련재하는 혈기를 보이기도 했고 한해에 문학상 4개를 연거번거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또 쟝르문학에서 단기필마(单骑匹马)로 독주(独走)하며 판타지, 초현실주의, 호러, 사이버, 력사제재의 소설들을 발표함과 아울러 그 작품들로 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꽤 부피가 커 보이는 창작의 적목을 쌓아올렸음에도 번마다 프로필에서는 어쩐지 헛헛함이 엿보인다. 바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명함 다음 줄에 또록또록 적어 넣는 모모대학 졸업이라는 그 부분이 비여 있는것이다. 수백 수천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10여권 가까이 작품집을 묶어내여 프로필이 장문으로 길기만 하지만 마냥 그 위치 그 자리만은 솎아낸 무우밭마냥 한줄 비여 있다. 사실 일찍 통신대학을 다니고 마흔 넘어 늦깎이로 석사연구생공부도 했지만 그 뒤에는 함수와 수료라는 딱지가 어김없이 붙어있다. 그 딱지는 내게서 보이지 못할 흉허물 같은 그닥 떳떳치 못한 딱지다. 마치 팔십만군교두 림충이나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처럼 위용이 뛰여날지라도 이마빡에 정배살이 신세라는 자자(刺字)가 새겨져 있는 그것같다고 해야할가. 그래서 그 무가내의 초근(草根)영웅들이 청사(靑丝)를 길게 땋아내려 살속 깊이 각인된 운명의 자자를 감추듯이 난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 빈자리가 커보여 은근히 써넣고 나면 왠지 “백정이 가마타고 대학 모퉁이”를 도는듯한 참괴감을 금할수 없다. 그러니 내내 써 넣지도 써 못넣지도 못하는 껄렁한 마음이다. 그리고 또 나이가 토끼띠 혹은 양띠 혹은 그 어느 문패에도 없는 “상어 띠”로 굴러가고 굴러오듯이 어느 대 어느 문하를 나왔느냐 묻는 말에는 “내가 상어띠니 한번 맞춰보세유”하고 는적거리거나 동문서답을 괴여올릴수 밖에 없어 한다. 그럼 대체 왜서 상어 띠냐? 여기서 잠깐 “사해(辞海)”를 펼치고 상어에 관한 전문지식을 빌려보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상어의 수는 약 400종이다. 상어의 조상이 지구에 나타난것은 고생대인 5억여년 전, 그러니 상어는 살아 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한때 유아독존으로 지구를 제패하다 간 공룡보다도 더 일찍 나타난 동물이니깐. 상어의 몸은 원통형 또는 방추형을 이루고 있다. 등지느러미는 보통 2개이나 1개인 경우도 있고 꼬리지느러미의 모양은 초승달을 닮았다. 골격은 연골성이고 특히 위가 발달하여 대부분 주머니를 뒤집듯이 소화되지 않은것들을 입에서 밖으로 내보내는것이 가능하다. 또 직장샘이 있어 염류의 배출에 관여한다.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수백메터 떨어진 곳에서 나는 냄새도 알아낸다. 시각도 색을 구별하는 원추세포가 있어 고도로 발달되여 있다. 그밖에도 상어의 주둥이와 머리에는 동물에게서 나오는 미약한 전류를 감지하는 로렌치니병이라고 하는 특수한 감각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먹이를 찾아낼때 리용되며 어두운 곳이나 바닥에 몸을 묻고 숨어있는 먹이를 찾아내는데 마치 레이다 같은 기능을 한다. 바다 생태계에서 가장 힘이 센 포식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어는 놀라울 만큼 약한 동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부언한다. 놀랍게도 상어에게는 다른 물고기와 달리 부레 기관이 없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부레로 부력을 조절해 물속에 떠 있게된다. 하지만 상어는 부레가 없어 부력은 유영하는것으로 유지한다.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또 유영함으로써 호흡을 하는데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가미호흡이 일어나지 않아 죽게 된다. 때문에 지느러미와 온 몸의 근육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다른 물고기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휴식의 방법은 뇌의 30%씩 돌아가면서 잠을 자고 나머지 70%는 깨여 있어 그냥 몸을 조절한다고 한다. 상어가 다른 어종이 비하지 못할 힘찬 근육과 우람한 몸체를 갖게 된것은 상어가 그렇게 쉼 모르고 끊임없이 깊은 바다, 넓은 바다를 누빌수밖에 없는 “결손”을 가지게 된것이기때문이다.    숨차게 빙~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 “부레”가 없다. 바로 학력이라는 부레다. 부레가 없는 상어에 대한 백과지식을 우연히 읽고 느닷없는 감동까지 일었었다. 이것이 내가 하필이면 자신을 “상어 띠”라고 자처하는 리유다.   3   흔히 작가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모모 대학, 모모학부를 나왔노라고 꼭 빠침없이 써넣는다. 요란한 미술체로 새기고 현란한 네온싸인으로 둘레를 쳐서 거리를 향한 현요한 위치에다가 내 거는 간판처럼. 그리고 전공도 문학쪽이 아니고 그 주변 학문일지라도 그예 써넣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무대에 나설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력이라는 것이 도대체 작가가 되고 창작을 하는데도 꼭 필요한것일가? 도대체 종이장 정도의 졸업장이라는것이 글을 쓰는데 왜서 중요한가? 이와 같이 로골적으로 질문을 했을때 아니!라는 대답도 무성하다. 여기서 잠깐 비록 학력이 불명이지만 그래도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몇몇 작가들의 사례를 감히 거들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모파쌍은 스무살도 못되여 군입대 하고 그 후에는 자그만 직원으로 일했기에 학력을 따낼 겨를이 없었고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마크 투웬은 열두살때부터 생계유지에 나서 우체국 배달부, 광부로 혹사했기에 학교란 운운하기도 어려웠으며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 역시 양치기, 회계등 직에 종사했기에 학력과 인연이 없었다. 이외에도 “현대시의 원조”로 불리우는 보들레르, “미국의 리얼리즘의 대표작가” 존 스타인백, “프랑스 현대문학의 정점(顶点)” 앙드레 말로 등등이 역시 줄느런히 무학력자의 서렬에 서게 된다. “좁은 문”, “전원교향악”등 명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앙드레 지드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루기 전에 그만두어 학위의 문전에 거의 가 닿을번하기도 했다. 그중 카프카가 학력이 있긴 한데 있다손 쳐도 그는 문학과 매치가 안되는 의학쪽의 학력이였다. 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허다한 명가들조차 학력에서는 낮은 모습들이 많다. 194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는 학교를 두번이나 중퇴하여 학력을 얻지 못했고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는 고중도 졸업못했으며 가까이 2007년 수상자인 영국 녀작가 도리스 레싱도 겨우 초중학력이였다. 중국쪽으로 보면 “멜로 소설의 녀왕” 경요(琼瑶), “동화대왕” 정연결 (郑渊洁)도 그렇고 “령혼과 육체”를 쓴 유명작가 장현량 (张贤亮), 변혁기 공업제재를 다루어 온 작가 장자룡 (蒋子龙) 그리고 요즘 드라마인기작가인 해암 (海岩) 도 들수가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뛰여난 작품을 남겨서 문학사에 길이 남는 유명하고 위대한 문인의 반렬에 드는 작가들이다. 몇해전 연변작가협회에서 사이트 관리를 맡아하면서 회원들의 신상명세와 창작상황을 데이터 베이스(数字库)화 하다가 놀라운 집계에 컴앞에서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지금의 중견으로 활약하고있는 3.40대의 작가의 거의 전부가 “부레가 없는 상어”의 신세였던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교육제도나 학력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도 독학으로 훌륭한 작품을 쓰고 문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경우가 우리 주변에까지도 수두룩하다. 어느날 갑자기 추종불가의 신선함으로 문단을 놀래우는 작품을 내놓는 작가, 그런데 그에게는 모두가 선참 따져보는 학력이 없다. 이외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결코 “짧지도”, “낮지도” 않다. 어쩌면 작품들이 사회 뒤골목에 내쳐진 밑바닥 삶을 사는 부류들처럼 거칠고 다부지며 치렬하다. 학위조차도 없으니 자연 그렇다할만한 명예나 지위도 없을 작가 자신이 실제로 사회 뒤골목에서 그런 삶들에 몸을 적셔 본 결과다. 작가의 사고방식과 창작성과는 흔히 동시대의 감성에서 피여난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파악이나 전달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난해한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가능한 쉽고 딱딱하지 않게 그런 “감성”으로 접근하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생활을 자신이 피부로 접하고 느낀 그만의 “감성”으로 설명할수 있다는 점은 무학력자들의 툽상스럽긴 하지만 하나의 우세라 할수도 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상상력과 직관과 자유로 자신을 키워나간다. 대학문전도 못 가본 초라니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때로는 대학가 최고의 명문의 작품보다 더 명쾌한 경우도 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설익은 것 같으나 책상머리에서의 개념적인 작업이 아닌 몸으로 느낀 감성의 작업이 바로 그들이 열애하는 문학에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이요, 첫걸음이 된다. 다른 화려한 어종에 비해 부레가 없다는 결손때문에 하루종일 몸부림치는 상어처럼 또 이러한 이들은 졸업장조차 없다는 결핍때문에 언제나 끝까지 가보려 시종여일의 작심하는 정신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다산을 낳고 그 와중에 수작(秀作)을 낳기도 한다. 작업에 림하면서 온몸을 던지고 끝장을 보려는 가렬처절한 문학정신. 그 열렬한 작업은 독자들을 전염시키고 감동시킨다. 작가가 직접 생활에 몸을 담그고 문학과 삶을 련결시키는 그들만의 작업에서 그 작가적 덕목이 더 핍진하게 잘 드러나는것이다. 때문에 고졸도 못해 학력 콤플렉스에 무척 시달려 온 귄터 그라스는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에 이런 구절을 적어 넣었다.    “고중도 졸업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좋은 점이 있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그 고중학업을 마치려고 노력적인 자아구원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학벌 지상주의”세상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학력은이 때로는 훈장으로 때로는 족쇄로 평생 따라다닌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여기서 학맥(学脈)은 부정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현실을 규정짓고 움직이는 거역할수 없는 작용을 논다. 학력보다 능력이 소중하다는 목소리들이 나오지만 현실속에서는 “마이동풍”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상에 편승하여 지나치게 합리적인것만을 추구하는 고등학부의 교육방식에 따끔히 일침을 가할 필요는 있다. 사실 근년래, 지어 십여년을 거슬러 보아도 우리 대학가가 배출한 작가가 몇이나 될가? 솔직히 몇손꼽아도 넉근히 헤아릴수 있을만큼 적을것이다. 한 사람의 능력을 보는 대신 학력과 학벌등이 갖춰지지 않은 개인을 무능력자로 락인찍는것도 문제다. 때문에 후진력랑에 엄연한 단층이 생기고 있는 문단은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학력지상주의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작가는 대부분이 풍부한 생활중에 일가를 이룬다. 진정한 작가와 우수한 작품의 탄생은 그 작가의 생활의 풍부한 루적과 그 와중에 깨닫는 돈오(頓悟)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런 작가들의 창작모식이나 성과를 그 어느 학부에서도 배양하거나 복제해 낼수 없다.    우리가 작가로 성정하는 첩경(捷径) 내지 왕도(王道)는 무엇이냐? 이 문제에서 답안은 학력과 무관하다. 고학력은 작가의 화려한 포장에 또 다른 멋진 옷에 다름 아니다. 학력으로 작가의 성패를 가늠짓는것은 작가나 문학에서의 병페가 아닐수 없다. “가방 끈이 짜른” 학벌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려온 사람으로서 때로 이런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깟 학력이 뭐 그리 대수야? 글쓰는 일이란 결국 누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느냐 하는것이 중요한것일테고. 누가 사회의 속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리해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어떻게 맛깔스럽게 전달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느냐의 재능이 아닐가? 그리고 글을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획득되는 테크닉, (테크닉 technic. 재간 있게 부리는 기술이나 솜씨)을 갖추고 그 무엇보다는 남보다 곱배로 되는 노력으로 로동력과 시간을 바치면 되니깐.)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과 지식적인 접근이 필요한 지점에서 학력의 유무론을 들먹이는것은 일종의 도피적인 사고 방식, 지어 무지한 소행일수도 있다. 깊은 학문은 정신을 열어주고 사물에 대한인식을 넓혀주고 견해나 성찰을 더욱 심오하게 한다. 요즘의 문학은 복잡한 현대인의 삶만큼이나 복잡다단한데 때문에 탄탄하고 깊은 학문과 성실한 립장을 가진 진정한 작가의 배육과 배출을 문단 그리고 사회는 바라고 있다.   해마다 세계각지에서 상어는 30만톤이나 어획되며 고기는 식용된다고한다. 힘줄은 줄에 리용되고 가죽을 말린것은 핸드빽이나 칼자루 장식으로 쓰기도 한다. 상어의 간에 함유되어 있는 스쿠알렌은 고급화장품이나 약품의 원료로서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그럼에도 다른 해양동물들에 비해 상어는 유난히 인간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동물이다. 가끔씩 생기는 인명 피해는 상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대화시킨다. 그 수는 극히 미미하더라도 이 때문에 “상어=식인어”란 오해를 종종 받는다. 어찌보면 상어는 돌고래처럼 귀엽지도 고래처럼 장엄하지도 거북이처럼 구순하지도 해파리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바다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상어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상어가, 거의 5억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한 상어는 최근 20년간 대량의 포획으로 멸종위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룡처럼 상어라는 족속이 몽땅 멸종되여 그 뼈조각이나 줏고 그 가상도를 볼때가 되면 아마 사람들은 상어를 다시 그리워하게 될것인가? 그리고 그때서야 “부레가 없으나 바다의 제왕”으로 위풍당당 행진을 해나가던 이 오연한 생령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생각해볼 지도 모른다. 한 마리의 외로운 상어처럼 신체의 결손을 엎누르며 몸퉁이 흔들고 지느러미 저으며 어두운 심해에서도 오연하게 앞길을 헤여나가고있는 우리 문단의 “상어 띠”들, 문뜩 그네들이 대견해 지고 자랑스러워 진다. 그네들의 지속되는 선전(宣战)과 당당한 활보를 흥감스러움이 아닌 “동병상련”, “부레없는 상어”의 진솔함으로 비원해 보면서 모든 “상어 띠”들에게 그리고 상어를 좋아하는, 미워하는 모든이들에게 한국 시인 권대욱의 “바다 상어를 위한 변명”을 선물한다.   바다 상어는 외롭다 정말 아프다 생존을 위한 본능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의 존재 컴컴한 세상의 바닥에서 번득이는 눈빛으로 잠시 평온을 위한 여유를 망각하고 산호초의 평원에서 상실되었던 야성이 포만 겨운 날을 찾았을 뿐이다   여기 배고픈 존재가 갈구한 풍요를 위하여 묽은 피를 뿌렸던 바다에도 생명의 시작과 역동의 날이 머물고 재생을 기약하는 소멸이 있었기에 죽음의 사자가 육신을 부둥켜안아도 황홀한 봄이 찾아온다   외로운 삶 하나는 떳떳하게 울부짖고 있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 이 바다에서 그냥 살아온 상어의 절규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태초에서부터 그렇게 들려온다   포효하는 격랑, 약육강식의 질서속에서 이 바다의 자양분으로 부활하는 날까지 바다 상어는 혼자 아프다.     “도라지” 2012년 3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    축구를 모르는 리더 댓글:  조회:3552  추천:11  2012-07-02
  . 칼럼  축구를 모르는 리더  김혁   1 월드컵축제로 매일이 명절같은 기분인 요즘, 만약 직장상사가 축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닥 즐겁지 못할것이다. 밤을 패며 리그전을 관람한뒤 직장에 나와서도 그 감흥을 못이겨 동료들과 경기의 엄청난 반전이며, 심판의 오심이며 경기의 하이라이트이며에 대해 격앙된 소리로 나누고 싶지만, 상사는 무감각한 얼굴로  아침부터 오직 직장규률이며 사업수치에 대해 지지콜콜 따질것이다. 또한 밤을 새며 소진한 체력때문에 효률추구를 채찍질하는 상사의 신칙도 받을 것이다. 참, 대략난감한 형국이다.   2 여기 축구를 사뭇 좋아한 리더 한분이 있다. 1977년 7월 30일, 북경로동자체육장에서 국제축국요청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좌석에 키가 작달만한 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조용한 출현이였지만 그의 모습은 경기장의 모든 관람자들을 놀래웠다. 너나가 기립하여 박수와 갈채를 올렸다. 일개 관람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그는 다름아닌 등소평이였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순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경기장에서의 등소평의 오랜만의 현신은 중국에서의 등소평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력사적인 한 장면이였다. 축구를 혹애(酷愛)했던 등소평은 이렇게 자신의 정치생애에서의 세번째 출마를 보여줬다. 일찍 프랑스로 류학했을때 자기 단벌 옷을 전당잡히고 국제축구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등소평은 축구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5,60년대 북경청년축구팀에 많은 배려를 돌려 늘 선농단 경기장으로 갔고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위한 경기마저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고 한다. 로후에 중임을 젊은 지도층에게 맡긴뒤 평생을 로심초사했던 그는 충분한 여가시간을축구에 돌릴수 있었다. 1990년 월드컵경기때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경기를 52차생방송했는데 그는 50차를 보았고 빠친 경기는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다시 보았다고 한다. 해바라기씨 한접시, 차 한컵과 담배 한갑을 준비하고 경기장이나 텔레비죤앞에 앉아 그는 자신을 잊고 축구의 신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로 우러러 지칭(指称)되는 등소평, 그는 정녕 풍운이 감도는 경기장에서 진부한 팀을 인솔하여 첩첩한 리그전에서 벗어나 높은 순위에 오르게 한 감독같은 안목과 제슈체어로 중국의 위상을 개변시켰던 것이였다.   3 외국의 대기업들에서는 직원 채용 기준으로 운동이나 예술쪽에 기량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같은 조건이면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대체로 건강한 사람이 많으며 축구 같은 단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리유이다. 태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여러사람들이 같이 모여 경기를 하고는중 몸을 부딪치면서 친해지고, 단합의 힘이 다져지고,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 질것이며 물론 그것이 업무의 성과로 련결된 다는것이다. 운동 경기와 경영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경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력량이 출중해야 하고, 그것을 팀웍(협동작업)을 통해 성과로 련결해야 한다. 축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 팀웍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팀웍이 약해 무너지는 팀이 얼마나 많은가? 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뛰여난 개인이 많아도 리더가 이들을 팀웍으로 묶지 못한다면 각자가 알량한 개인기만 부리다 마는 오합지졸의 굿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 경영지침서들은 적고 있다. 함께 일하는 부하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감각적이지 못한 경우,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는 많다. 마냥 회사의 체계적인 수칙에 경직된 얼굴만 고수하고있는 무감각한 리더의 운영 메커니즘이 그만큼 시대에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과 끈끈한 뉴대관계를 갖고 부하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리해력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원칙을 많은 리더들은 흔히 잊어버리는것 같다. 우리의 리더들이 꼭 갖추어야 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매너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직원들을 움직이고자 하는 리기적이고 일방적인 보다는 직원 개개인의 고충과 취미를 알고 숨은 능력을 일깨우고 발전시켜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축구의 축제가 열리는 이 여름철, 월드컵을 통해서 회사일군의 반쯤은 축구전문가가 되는걸 지켜보자. 우리가 좋아하는 팀이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 어느 선수는 뭐가 문제인지, 상대팀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전략을 제시하듯이 경기장 밖에서도 회사에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자세를 기르도록 기대해 봄도 좋을듯하다. 더우기 출국, 리향, 산재의 삶을 살고 있는 요즘 풍토에서, 줄어들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각 분야에서의 훌륭한 리더가 가지는 작용은 막강하며 또한 중요하다. 리더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리더십이란 사기를 진작시키는 창조적이고도 직접적인 힘이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고 휘동해 나갈수 있는 큰 리더,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융통과 원활한 힘을 발휘시키는 리더, 만민이 지켜보는 경기장의 풍운대세를 휘잡을수 있는 감독같은 그런 리더가 우리에겐 절박하게 필요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    인저리타임 댓글:  조회:3831  추천:12  2012-06-24
. 칼럼 .   인저리타임   김 혁             1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경기가 종료되는 시점에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수자판을 추켜드는 모습을 볼수 있다.   축구는 롱구등 경기와는 달리 부상이나 선수 교체 등의 상황이 발생해도 전광판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정규 경기 시간인 45분을 넘어서 경기가 진행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기에서 잃어버린 시간만큼 경기가 재개, 지속되는 것이다.   45분씩의 정규시간이 끝난이후 적용되는 이 시간을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이리고 한다. 보통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선수교체 및 부상으로 인한 경기지연, 반칙·코너킥·프리킥·페널티킥 등으로 허비한 시간랑비를 보충하기 위해 주심의 재량(裁量)으로 그 시간을 결정한다. 주심은 이를 계산하기 위해 경기진행을 위한 시계 이외에 별도의 시계를 차고 나온다고 한다.   2   “인저리 타임”은 보통 2~3분의 짧은 시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흔히 기적은 이 짧은 시간에 터진다. 인저리타임에서의 선수들의 집중력에 따라 각 팀의 명암이 갈리고 있다.   지난 독일월드컵때에는 인저리타임에서 무려 12꼴이나 터져나와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는 “인저리 타임”의 기적을 심장이 터지는듯한 흥분속에 접할수 있었다.   비록 8강 진출에서 좌초됐지만 16강 진출이라는 예기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아시아 축구의 숨은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한국팀, 17일에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에서 한국은 전반 16분에 자책꼴을 내줬고 전반 30분 또다시 추가꼴을 허용했다. 하지만 지칠줄 모르고 역습을 시도해 1분이 주어진 인저리타임에서 골을 넣었다. F조 본선리그 1차전에서는 동유럽의 강호 슬로바키아가 뉴질랜드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며 다잡았던 승리를 놓쳤다. 슬로바키아의 승리로 끝이 날것같던 경기는 경기종료 직전 원점으로 돌아갔다. 인저리 타임 3분때 막판 공세에 나선 뉴질랜드가 슬로바키아 수비진을 제치고 솟구쳐 올라 천금의 헤딩골을 터뜨린것이다. 24일  C조 잉글랜드- 슬로베니아의 최종에서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 반전의 결과가 펼쳐졌다. 이미 승점 4점을 챙겨놓은 슬로베니아는 축구종가(宗家)를 상대로 0-1로 뒤진채 경기를 마쳤다. 비록 경기에는 졌지만 같은 시간 벌어지고 있던 미국(승점2)과 알제리(승점1)의 경기가 막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해, 그대로 무승부로 끝날 경우 조 2위로 16강에 올라가는 상태였기때문에 슬로베니아 선수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하지만 드라마는 바로 미국- 알제리전의 인저리 타임에서 일어났다. 추가 3분을 알리는 인저리타임 메시지가 화면에 등장하고 후반 46분에 바로 터진 결승골은 미국에게 기적과도같은 승점 3점과 16강행 티켓 선물을 안겼다.기쁨에 겨워 잉글랜드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하던 슬로베니아 선수들은 뒤미처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처럼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막판 “인저리 타임”에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집중력을 잘 유지하느냐가 승부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축구 해설가들은 종종 시작하고 5분, 끝나기 전 5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충고도 들린다. 경기 막판 “인저리 타임”에 터지는 골은 끝까지 노력을 잃지 않고 꼴문을 두드리는 팀이 얻는 응분의 결실이며 수확이다.   3   어찌보면 우리네 삶의 력정도 한판의 축구게임과도 같다. 우리는 태여나서 너나없이 주어진 삶의 그라운드에서 달려야 한다. 그 너넓은 생의 그라운드에서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질때가 많다 방향을 알수없는 쪽에서 걸어오는 상대방의 란폭한 태클에 쓰러지고 권위를 악용하는 편파적인 심판의 야비한 판결에 당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찬스라고 뼈물러 날린 공이 빗나가는 어이없는 실축도 겪는다. 이처럼 우리 삶에... 완벽이란 없다. 때문에 오직 최고를 향해 가는 최선만이 존재한다.   막판이 가까워 올수록 방심을 하다가는 자칫 평생의 유감을 남길수 있는 일. 경기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릴때까지 끝까지 노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축구는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축구선수들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도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는것것은 “인저리 타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것은 “인저리 타임”에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만든다.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지게 되는 안일함과 라태, 도덕적 해이, 긴장감의 실종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인저리타임에 숨어있지 않나 싶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    다섯번째 사과 댓글:  조회:3603  추천:15  2012-06-04
  . 칼럼 .   다섯번째 사과   김 혁   1   매양 아침이면 안해는 나에게 사과 한개를 권한다. 아침일찍 먹는 사과가 몸에 좋아 “황금사과”라는것이다. 싫증을 보이면 믹서기에 갈아서 음료처럼 만들어서라도 극구 마시라고한다. 극진히 권하면서 사과의 네가지 좋은점에 대해 구구히 설명한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수분이 많은 사과는 변비에 좋고 고혈압을 막고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당뇨병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나… 달큼한 사과즙액을 마시면서 “세상을 움직인 4개의 사과”에 대한 일화를 떠올려 보았다.     2      첫번째 사과는 성서에 나오는 “아담의 사과”이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사악한 뱀의 꼬임에 들어 선악과를 다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기를 어기고 그 사과를 따고 말았다. 결과 인간은 락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많은 특권을 상실한다. 그 사과 때문에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고 땀의 결과로 생명을 이어나가게 되며 뺏고 빼앗기는 굴레에 살게되고 유한한 생명을 갖게 된다.    두번째 사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사과”이다 바다의 녀신 테티스가 결혼식을 치르는데 그 파티에 녀신 에리스를 그만 빠쳐놓는다. 그런데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는 다름아닌 “불화의 신”이였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불화의 신을 빠쳐놓다니. 앵돌아진 에리스는 파티장에 황금사과 한개를 던져놓고 가버린다. 그 황금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녀신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파티장에 모인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녀신은 서로 자신이 그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린다. 이에 뭇신들의 천거를 받고 트로이 왕의 아들 파리스가 사과의 주인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된다. 파리스는 권력이나 지혜를 주겠다는 다른 신들 대신 미인계를 내세운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넘겨준다. 그 조건으로 파리스는 미인 헬렌을 품에 안게 된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맺어준 헬렌은 이미 스파르타 왕의 왕비가 된 몸이였다. 이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스 련합군의 공격을 받아 트로이는 멸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한개의 사과 때문에 한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된것이다   세번째 사과는 스위스 사냥군 “월리엄의 사과”이다. 14세기초 스위스는 오스트랄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오스트랄리아의 총독 게슬러의 횡포는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이 폭군은 자신의 모자를 광장에 걸어놓고 지나가는 스위스인들에게 인사를 하게 강요했다. 스위스의 활쏘기 명수였던 월리엄 텔은 일부러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에 위병들이 불경죄로 윌리엄을 체포했다. 총독앞에 끌려간 월리엄은 자신의 아들의 머리에 얻어놓은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키라는 잔인한 벌을 강요받는다.  아들의 생명을 내건 형벌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간신히 사과를 명중시켰지만 월리엄은 끝내는 류배형에 처해진다. 용감한 월리엄은 류배지에서 탈출하여 결국 총독을 화살로 쏘아 죽인다. 월리엄의 사과는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된것이다     네번째 사과는 “뉴톤의 사과”이다. 1665년경 전 유럽일대에 흑사병이 돌게되자 뉴톤은 전염병을 피하고 휴양차 고향 집에 내려간다. 고향집 정원의 나무에서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톤은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착안해 모든 물체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존재에 대해 밝혀내게 된다. 한 개의 사과에서 받은 령감이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3 이 4개의 사과가 유럽의 문명을 바꾸었다면 이외에도 다섯번째 사과를 나름 선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섯번째로 “세잔의 사과”를 꼽는 이들이 있다. 세잔은 폴 고갱, 반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 화가로 꼽히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립체파, 추상파에 큰 영향을 미친 세잔을 일컫어 “20세기 미술의 아버지”라 높이 정평하기도 한다. 세잔은 사과를 중심으로 한 정물화와  고향의 산수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 등을 많이 남겼는데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리면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세잔의 사과가 유명한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색채와 톤을 표현하려 했던  그의 집요한 노력때문이고 이러한 노력이 바로 립체파 화풍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다섯번째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Apple. 사과) 컴퓨터회사의 CEO이다. 새 차원의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그의 발명과 개쳑은 현대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더러 다섯번째 사과를 굳이 뽑으라면 나는 우리의 사과배를 뽑고 싶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사과배.   사과배는 연변 특산의 독특한 과일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연길현 로투구의 한 이주민이 조선 함경남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당지에서 자라는 야생 돌배나무 세 그루에 접목을 했는데 이렇게 접목한 돌배나무가 조선족사과배나무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사과배는 색깔과 모양이 사과와 배를 반쯤씩 닮았다. 게다가 달콤한 즙액이 풍부해 상큼하면서 시원한 맛이 일품인데 자체의 잡종우세를 발휘하여 사과나 배가 지니지 않는 특유의 맛과 향기를 뿜고 있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치르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 150여년의 이민정착 력사를 경유해 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 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우리 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리념을 키워온 조선족문화를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기때문이다. 근년래 변혁기의 광풍속에 그 사과배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자기의 주체성을 계속 보존해 가면서 존속해 나갈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국조선족에게서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로 놓였다. 하지만 요즘은 또 “퓨전의 시대”, 즉 세계 각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변혁의 복잡다단한 환경속에 중국조선족은 존속의 근원, 접목의 힘을 찾고 믿어야 할 것이다. 동심일체가 되여 민족적정체성을 고이 간직하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면서 중국이라는 대가정과 세계라는 넓은 하늘의 바람과 공기, 자양분을 한껏 섭취하면서 뿌리깊은 나무로 무성한 가지를 뻗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사과배의 일화는 여느 세상을 움직인 사과들의 일화에 못지않게 한 민족의 웅숭깊은 력사를 생동하게 보여준다. 아침나절에, 혹은 시장에서 무심코 집어든 사과배, 우리모두 사과배에 깃든 이야기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자. 분명 새로운 향기와 맛에 젖을 것이다.     “문화시대” 201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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