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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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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낭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댓글:  조회:1854  추천:0  2009-05-16
변혁의 모진 진통속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래일을 믿고 웃음짓는 고향의 모습, 그 속에서 내 고향의 정다운 얼굴들이 자유를 본다. 얼마나 갈 망하던 자유더냐. 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4층 과학기술관청사의 창문들에서는 밤늦게까지 탐구의 불빛이 내리덮은 밤장막을 헤가르며 오늘과 래일을 이어주려는듯 꺼질줄 모르고 흘러나온다.그 길건너 맞은편에 외형은 수수하나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한 어느 한 직장의 무도청에서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어둠을 실어 저 멀리로 떠나보내는듯 그칠줄 모르고 흘러나온다. 실로 변혁되고 약하는 오늘의 시대를 온몸 뿌듯이 감촉하게 하는 시대의 축도앞에 선듯한 심정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기회의 <<집돌이>>(취재)에서 나는 감각과 시각과 청각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난것으로 하여 놀라움과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무도청에 들어서니 그 아름답고 경쾌한 음악속에 과학기술관청사를 비방하는 추잡한 잡음이 은은히 동반되여 흐르고있었다. <<책벌레들이 들어찬 벌레통>>--더 달리 부를수 없을 정도로 형상적인 개괄을 했다고 손벽치는 맞장구소리도 장단마냥 음악의 선률에 어울려 귀가에 들려왔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들의 건방진 언사에 대한 반감과 근면하고 이악스러운 <<책벌레>>들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생활을 모르는 책벌레>>들이 가련하고 측은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업할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레닌도 말한바 있지 않는가, 참 그렇다. 그 머리 하나가 모든것을 다 생각하고 감당해야 할터인데 일년 사시절, 아니 인생의 황혼이 물드는 그때까지 오직 <<골방>>에만 들어박혀있는다면 단순한 생각에도 어쩐지 그것은 기계를 기름도 주지 않고 쉬우지도 않고 내내 돌리는것과 같은 졸렬한 방법인줄로 여겨졌다. 그런데 과학기술관청사에 들어서니 역시 <<무도청>>을 조소하는 용속한 잡빛이 조용한 불빛에 섞여 흐르고있었다. <<네 배야, 내 배야, 도시의 쓰레기들이 안고도는 쓰레기통>>--뒤따른 손벽과 폭소가 조용하던 집안을 무닐듯한다. 물론 그것은 오늘에 래일을 이어 허송세월하고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고 사회의 도덕적질서를 어지럽히는 허무하고 맹랑한 <<무도쟁이>>들로부터 결론한 과잉반응이다. 흙을 담은 가마니는 홍수를 막을수 있어도 텅빈 가마니는 개울물에도 밀려간다. 이건 누구의 명언이던가. 명언이 아니고 나의 말이지만 그래도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일하나 휴식하나 그냥 온 뇌리에 <<무도>>장면만을 그려넣는 인간에게는 명언못지 않은 좌우명이 되리라. 밤일을 한다며 시어머니와 남편을 속이고 아이까지 팽개치고 매일매일 새날이 되도록 무도장에 붙박혀있는 며느리, 안해, 한 녀인의 미모에 매혹되여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달에 백여원돈을 밀어넣는다는 <<애정적인 사나이>>, 실로 이러루한 무도장견문이야 수두룩하다. 인성의 고갈, 개성의 억압, 자유의 박탈에서 해방된 인간들이 자유를 편식하고 과식하고있는것 같다. 물론 사회에 보다 밝고 민주적이고 활발한 자유가 주어질 때 그만큼 인간의 창조적 힘은 커지는것이고 사회의 성장도 급속할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질서속에서 이룩되는 자유여야 하지 아무런 약속력도 없고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는 무절제한 <<절대적자유>>라면 오히려 사회건강에 해로울것이고 개체인생의 비극의 씨앗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오직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상승적경쟁력을 가지고있는 사람만이 자유는 무한한 지혜의 원동력으로 될수 있다.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 한 훈장이 아이들한테 너무도 혹독하게 굴어 아이들의 원한을 사게 되였다. 아이들은 한번 훈장을 혼내우리라 별렀다. 동지팥죽을 먹게 되자 급장이 훈장을 집에다가 모셨다. 그런데 금방 밖에 나서자 또 한 어린이가 자기 집에 훈장을 청했다. 너도나도 청하자 훈장은 인젠 배가 불러 먹을수 없다고 사절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왜 그 애들의 낯만 봐주고 자기들의 성의는 짓밟는가고 항의했다. 훈장은 할수 없이 한집에서 한술씩이래도 뜨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맨 마지막 집을 나서면서 훈장은 올챙이배처럼 탱탱 불어난 배를 붙안고 걸음도 걷지 못했다. 훈장은 하늘을 바라고 <<아,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도다>>하고 개탄했다고 한다. 자유를 편식하거나 과식하는 인간들, 사회의 성장과 개체의 발전과는 무관하거나 지어는 해로운 <<자유>>를 선택없이 따먹는 인간들은 질탕한 방종속에서 마음이 썩어가고있다. 하나의 군체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질서속에서 선택된 자유가 있을 뿐 무절제한 절대적인 자유란 있을수 없다. 혹자가 그런 자유를 얻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금과를 따먹은것이다. 과학의 고봉으로 높이 톺아오르는 용감한 <<책벌레>>들이 무도회나 기타 오락활동을 에네르기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총명한 방법일가. 그리고 무도장에 다니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무도를 목적성없는 쾌락이나 이성에 대한 <<탐닉>>으로만 생각지 말고 진정 사회교제를 넓히고 하루로동의 피로를 푸는 수단으로 삼고 또 래일의 진보를 예언적으로 축원하는 모임으로 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미래에 대한 동경과 리상이 동반되고 생활의 정취가 짙게 깔린 자유의 락원이 아니겠는가. 자유의 락원으로 가자. 허나 랑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14    문명과 <문명악> 댓글:  조회:1876  추천:0  2009-05-16
금방 우리가 딛고선 땅이 흔들리고있다. 강력한 지진파의 충격을 당한듯 고요한 산간도시로 잠에 취해있던 시내가 벌둥지 터진것마냥 벅적 끓어번지고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모든것이 탈바꿈을 하고있다. 산업문화, 오락문화가 농경문화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오락문화가 단순한 가정문화를 충격하였다. 천여대의 택시, 거리거리에 번쩍번쩍하는 술집, 커피점, 가라OK, 나이트클럽, 사우나욕탕 그리고 유혹의 밤거리에 다채로운 음식문화의 전경을 펼쳐보이는 밤시장. 모든것이 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생경하고 환상적인것이였다. 그런데 인젠 그 모든것이 우리 생활의 현장에 유혹의 현실로 세워져있는것이다. 그때도 비록 공장에서 직장인으로 일하는 인간들이 이 도시를 메우고있었지만 그런대로 수입과 지출이 자연적 삶의 연장을 위해 고스란히 이어진,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전통적농경문화의 특성 그대로였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문화적인 욕망충족을 갈구하는 성향이 발돋움하면서 사람 호상간의 관계에서 상승적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동조자로 몰리우고말았다. 모두가 산업화, 상업화로 특징된 도시적 삶의 질서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모지름쓰고 찢기며 지어는 피흘리고있다. 차겁고 랭혹하고 인정미가 멀어진 현장에서 우리는 극복의 어려움을 절감하고있다. 인격론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 닫는 절주에 이웃이 사촌이라던 속담이 퇴색하고 우승렬패의 생존위기에 타인이 지옥으로 되여버린 사실앞에서 우리는 분명 문명의 뒤안길에서 쏟아져나오는 <<문명악>>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도덕적건강의 보호가 급선적으로 요청되고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다시 인간적향기로 채색할것이 절박히 주시되고있다. 그렇다고 다시 옛 농경문화를 복귀할수는 없다. 어제까지만도 우리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인간에게만 차례진 혜택인 의식, 지식, 지혜와는 너무나도 무관하게 고정불변적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순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되여왔다. 인간의 의식, 지식, 지혜가 높은 차원에서 발굴되고있음에도 원시적신화를 동경하는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요사스럽게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안전하고 자동차보다는 걷는것이 안전하다는 설법의 기저에는 상승력을 잃은 락오자의 궤변철학이 안받침되여 있을것이다. 그렇고보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사회에 대한 긍정적시선을 회복할수 있을가. 가장 바람직한것이 그래도 보다 많은 문화적투자를 하여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신변정리에 게을리하지 않는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삶의 총체성에서 사회를 통찰해보면 비록 문명의 뒤안길에서 휘몰아오는 <<문명악>>이 사람들에게 극복의 어려움을 안겨주고있지만 그러나 향상하려는 정신적독방을 갖고있는 사람에게는 그 현실적아픔이 상승적 내지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한 진통임에 다름아니라는것은 투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승적인 시각에서 볼 때 기존가치질서의 파괴나 변질은 역시 새로운 가치질서의 형성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물론 기존가치질서가 충격을 받고 아직 새로운 가치질서가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제도적으로 고착되지 못했들 때 우리는 이른바 질서의 혼란속에서 인간의 생존위기감 같은것까지도 체험적으로 살깊이느끼는수가 있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 발병률이 많은 자연법칙에 맞물린다. 그러니깐 절실한것은 우리의 문화적투자 내지 삶의 자세이다. 코페르닉세와 같은 선각자들의 인생에는 문명의 창조를 위한 희생적체험이 아프게 묻어있다. 육체적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이라거나 혹은 어제, 오늘, 래일에 변함없이 그대로 그냥 한점 공간이 되여버린 삶은 흐르는 삶, 나아가는 삶, 상승하는 삶이 아니라 굳어버린 삶, 인생의 의미를 상실한 삶이 된다는것을 말해준다. 언제나 정신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의식, 지식, 지혜에 녹이 쓸지 않게 끊임없이 참된 인생을 추구하고 문화적신변정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문화적질서, 삶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현실을 아프게 그리고 역시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 상승적,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해 문명을 창조하고 건설하는 마당에 이른바 <<문명악>>이 묻어들어오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문명까지를 밀어버리거나 외면해버린다는것은 손톱이 길어졌다고 손가락까지 잘라버리는 미련한 짓일수밖에 없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글가>>하는 우리의 속담은 영원한 인생철학이다.
13    과학의 정신=? 댓글:  조회:1815  추천:0  2009-05-16
어느 한 만화가는 <<과학자의 머리>>라는 만화에서 과학자의 머리를 <?>로 그렸다. 참으로 신통하고도 간결하게 과학자의 전부의 함의를 개괄한것이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만화를 감상하노라니 과학의 정신이란 틀림없이 바로 이런것이구말구 하는 생각에 젖고만다. 과학의 정신, 그것은 틀림없이 회의의 정신이다. 이 회의의 정신의 바탕은 자유로운 사유이다. 오직 자유분방하고 무한공간적인 사유에서만이 자연과 사회의 천태만상이 원래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놓게 된다. 학술에서의 치렬한 론쟁, 그것은 벌써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예고하는것이다. 그런데 학술자신안에서 충분한 리유로 대방을 수긍시키는것이 아니라 그 어떤 외부적인 힘 이를테면 권력이나 권위 등으로 대방에 자갈물릴 때 과학의 꽃은 요절하고만다. 서양의 찬란한 문화도 이런 비극을 극복한 토대우에서 현대문명을 창조한것이였다.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적 통일문화>>라고 일컬어진다. 이를 풀어보면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서 통일되여있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사회생활전체안에 스며들어 모든것을 감독하고 지배하였다. 하여 당시에는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 문화의 각 분야가 모두가 하나하나 그 자신안에 자기의 존재적리유나 고유의 원리를 갖고있은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의 힘에 의하여 지탱되고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 지배되였다. 하여 교회는 과학의 리론이 자기의 교설에 배치되지 않는한은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중세교설의 권위를 침범하는자는 이단이라고 하여 가차없이 처참하게 탄압하였다. 부르노가 강경한 자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여 교설에서 인정하는 <<지구중심설>>을 부정한 대가는 참으로 비참한것이였다. 문제는 바로 교회가 순수한 과학에 자기의 리념을 강요한데 있다. 교회는 절대적권위를 요하던 나머지 모드것에 대하여 분별없이 자기의 리념을 진리로 접수시키려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각 분야는 각기 독립하여 그 하나하나가 그의 존재리유와 고유의 발전법칙과 원리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무시당하고 오직 교설의 채찍아래 순종할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과학정신의 발아와 확산에 가장 큰 장애로 된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하여 종교개혁과 함께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개성해방, 정신적 개인, 신에서의 해방, 자유의식에 립각한 문화 이것이 르네상스가 추구한바였다.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전개를 가능케 함으로써 따라서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도 가능하게 되였다. 오늘 우리한테도 바람직한것은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이다. 학술에서 지나치게 통일만을 주장하는것은 리론의 고갈을 초래할 뿐이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모두 과학정신에 의해 발전한다는것을 념두에 두고, 또 과학정신이란 바로 회의의 정신이라고 바꿔볼 때 지나친 통일은 도리여 과학정신에 배치되는것이다. 왜냐하면 학자 또는 과학자의 육체에서 과학정신내지 회의의 정신, 또는<?>를 그의 생명과 함께 쫓아내지 않는한은 절대적인 통일이란 있을수조차 없는 일이기때문이다. 한 학자 또는 과학자로 놓고볼 때 회의의 정신, 또는 <?>를 자기의 머리속에서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곧 그의 과학생명의 종말을 알리는것으로 될수밖에 없다. 하기에 <?>는 과학자의 모든것이며 삶의 내용이다. 사실 복잡한 사회를 하나의 통일된 안목으로 밝혀본다는것은 너무나 아름차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비행기로 산림을 찾았다하여 바늘도 찾을수 있다고 한다면 세살먹은 아이도 입이 째지게 웃을 일이 아닐수 없다. 어떤 사물이든지간에 모두 그 자신안에 자기의 고유의 존재리유와 발전원리를 담고있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학술토론에 대해서 급급히 정치적발언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남아있다. 이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시키던 고루한 전통이 아직 우리의 머리에 남아있기때문이다. 하기에 무슨 일이든지간에 통일된 결과를 보지 못하면 잘못된것인듯싶어서 께름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인식을 통일시키려 한다. 그런데 과학정신으로는 도저히 통일을 가져올수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정신은 회의의 정신이요, 학술토론의 과학적태도는 자유로운 사유의 전개이지 결코 절대적인 통일인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는 정치적으로 학술의 통일을 꾀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란의 세월에 중국에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또는 부르노와 같은 운명의 사람이 얼마였는지 모른다는것을 기억에 떠올린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것을 재연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특히 현대화의 공정을 벌려놓고 세계적 절주와 발을 맞추려고 과학기술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오늘 우리는 결코 다시 자기의 사유를 얽어놓는 미련한 짓을 할수가 없다. 자기의 사유에서 과학적근거를 찾았을 때 한 과학자는 성공한것이고 하나의 문명도 함께 태여나는것이다.
12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댓글:  조회:2032  추천:0  2009-05-16
부엉이는 온 힘을 다해 동쪽을 향해 날아간다. 얼마나 날았는지 기진맥진한 부엉이는 울창한 수림속 어느 한 나무가지에 털썩 내려앉아 황황거리며 숨을 돌렸다. 때마침 수림속에서 쉬고있던 산비둘기가 부엉이의 씩씩거리는 꼴을 보고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이리 급히 어디로 가시나요?>> <<난 동쪽으로 이사해가려하오.>> <<왜 이사하려 하나요?>> <<흥, 몰상식한 서쪽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듣기싫다며 나를 욕하질 않겠소. 그래 내 그들이 싫어서 아예 이사해버리려는 거요.>> <<이사하면 문제가 풀릴것 같아요? 내 보건댄 당신이 자기의 목소리를 고치지 않는다면 동쪽의 사람들도 결국 마찬가지로 당신을 싫어할거예요.>> 산비둘기의 사리밝은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부엉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랭가슴만 앓았다. 이것은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화란 사람들에게 그 어떤 진리와 생활의 철리를 설명해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엮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화란것은 공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기침을 떼거나 수염을 쓸면서 자손들이나 어린이들한테 들려주어 그들을 교양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만 여기고있다. 실은 만약 어느 총명하고 글 잘 읽는 어린이가 <<총명한 잇규>>처럼 제구실 못하는 공민권사용자들에게 우화를 들려주어 경종을 울려준다면 그것이 도리여 별미일것 같고 또 어찌보면 우화란것이 워낙 어른들을 위해 꾸며진것만 같다. 사회를 살아가는 기성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것부터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것과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직접 사회건설의 한 귀퉁이를 담당하여 <<벽돌>>을 쌓고있는 어른의 잘못을 깨우쳐준다는것은 결국은 사회란 이 청사의 질적보장에 관계되는것이요, 그만큼 그것은 인간의 미래와 직결되기도 한다. 앞에서 들려준 우화의 경우도 그렇다. 그것을 어린이들한테 들려준다면 자기의 결점이나 착오를 깨끗이 시정하는것만이 밝게 성장하는 길이지 부엉이처럼 자기의 그 듣기 싫은 목소리는 고치려하지 않고 못나게 집을 옮기는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데가나 마찬가지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도리를 깨쳐줄수 있는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인제 그것을 어른들에게 들려준다면, 그것도 제 잘못은 모르고 남의 일깨움을 되려 공격하는것으로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도리를 깨치고 서로의 마음을 열수 있는 밝은 환경을 마련할수 있을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꾸며주는 삶의 현장에서 어른들의 질서를 이어받으면서 사회문화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만큼 어른들은 어린이의 보기가 될수밖에 없다. 바꾸어말하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푸른꿈을 키워주는것도 어른들이요, 동심에 상처를 주고 락서하는것도 어른들이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꾸며가고있는 사회의 현주소는 어떻고 또 기성세대의 현모습은 어떠하던가. 자아를 찾은 인간들--우리는 철저하리만치 자아를 찾았다. 봉건륜리도덕에 의하여 부모(자식)의 자식(부모), 남편(안해)의 안해(남편), 형님(동생)의 동생(형님), 자(매)의 매(자), 시어머니(며느리)의 며느리(시어머니)...로 아주 자아를 잃어버리고 남의 <<노예>>로 봉사적인 삶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날인가부터 갑자기 자아를 찾고 자유를 획득하였다. 인간의 주체의식인지 개체의식인지 하는 자아중심적인 생명욕구가 보둑을 터친 홍수마냥 강한 <<생명력>>으로 사회를 잠궈버렸다. 인간은 인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여 다시 물질의 노예로 전락했다.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사랑의 노예>>, <<향락의 노예>>..., 그러나 어쨌든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노예>>가 아니라는것은 충분하게 자아를 찾은것이요, <<절대적인 자유>>를 얻은셈이다. 서로의 감옥--절대화된 자아와 자유는 인간대 인간을 불신이라는 장벽으로 막아버렸다. 그래서 자아중심적인 홀로서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적기틀이 되여 누구도 믿을수 없다는것이 <<철학적 결론>>이 되였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하는것은 간릉한 아첨이요, 잘못을 일깨워줌은 위험한 도전이다. 모든것을 믿을수 없으니 모든것을 배척하게 되고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고 관용의 마음으로 남을 리해하고 접수할수 없다. 인성에서 다시 본능에로--철저한 자아중심적인 삶의 자세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인간사회전체에 그대로 적용시킨다. 전진적이고 상승적인 경쟁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네라는 생사판가리로 동류상잔이다. <<남편죽이기>>, <<안해죽이기>>, <<아이죽이기>>, <<천재죽이기>>...아뭏튼 나한테 걸림돌이 되면 주저없이 제거해버려야 자기보존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제 누군가 자기의 그림자를 죽였다는 뉴스도 듣게 될것이다. 두려움이 부실부실 가슴에 내린다. 하얀 백지같은 동심세계에 우리 어른들이 그리고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락서이다. 못난 부엉이처럼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 령혼을 세탁하려는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이 그냥 마음가는대로 남을 쥐여박고 인생을 찢어발기는, 사냥물을 노리는 포수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들한테 어떤 삶의 자세를 가르쳐줄수 있을가. 속수무책인고로 다만 여기에서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를 공민권사용호들에 선사할 뿐이다.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11    소와 호랑이의 계주 댓글:  조회:1783  추천:0  2009-05-16
<<금닭이 홰를 치니 천하가 밝아온다>> 제6차5개년계획의 시작을 알려 금닭이 홰를 치던 1981년 닭해, 어느덧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을 달려 이제 막 그 마무림을 지은 소해가 계주봉을 제7차5개년계획의 첫시작을 떼게 되는 호랑이해에 넘겨주었다. 날쌔고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호랑이가 대견스럽고 자신만만하게 계주봉을 받아쥐였다. 호랑이가 날래게 첫 스다트를 뗀다. 그결에 세기는 나래를 펼친다. 이 순간 다시 머리를 돌려 금방 계주봉을 넘겨주고 숨을 돌리고 있는 소를 바라보노라니 소에게 미더운 눈길과 아낌없는 찬사가 쏠리게 되는 심정이니 이는 또 무엇때문일가. 결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아니다. 래일을 향해 새로움을 바라는것, 이것만이 리상의 대문에 들어설수 있는 길이요, 과거를 붙들고 통곡하거나 자만하는자에게는 나귀가 연자를 돌리는 격으로 처참한 맴돌림이 있을뿐이라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에 대한 미련이 아마도 새로움을 추구하는것 역시 오늘이 우리의 미래였을 때 오늘이였던 어제가 매 순간순간이 그렇게 알매지고 빛발치였기때문이라는데서 오는 소에 대한 편애인것 같다. 편애이면 또 어떤가. 오늘을 딛고서서 래일을 당겨오는 사람에겐 어제가 신심의 믿음이 되고 신념의 바탕이 되여있는것이 분명하다. 그 믿음이 진정 미더운것이고 그 바탕이 진정 튼튼할 때 미래에 대한 새로움의 추구는 비로소 희망의 문턱에 닿게 될것이다. 하기에 호랑이한테까지 달려온 소는 그토록 미더웠다. 미욱할만치 유순하면서도 끈질기고 느린듯하면서도 부지런한 소의 걸음은 사실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가르쳐준것이 아닌가. 소는 수레를 끌고 높은 언덕도 거침없이 오르고 깊은 골짜기도 서슴없이 내려서 얼마만한 짐이래도 가야할 곳까지 기어코 가고야마는 고집스런 견지성과 멍에에 목덜미가 벗겨지도록 수걱수걱 일만하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제 호랑이가 빨리 달릴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맹수가 목표물을 쫓는 경우가 아니라 진흥과 발전을 예기하는 현대화장정이라고보면 소의 그런 성격이 퍽 보배롭고 미더웁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갈마들면서 호랑이의 날램에 소의 끈질김과 부지런함을 합치면 그거야말로 과연 <<호랑이한테 날개를 달아주는격>>이 아닐가싶다. 될듯한 일이다. 그래서 소가 끈질기고 부지런하지만 좀만 빨라야겠다는 생각에서 계주봉을 빨리 뛰는 호랑이한테 넘겨준것인지도 모른다. 계주봉을 받은 호랑아, 날래게 뛰라. 허나 소처럼 끈질기고 부지런하게. 일사천리로 내달려라, 허나 소처럼 착실하게, 실속있게!
10    명인일화에서 받은 계시 댓글:  조회:2042  추천:0  2009-05-16
 명인들의 일화속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오지리의 저명한 음악가 요한 스트라우스가 집에 왔다가 어지러워진 옷들을 벗어놓고 새옷들을 갈아입고 나간후 그의 안해 티제는 남편이 벗어놓은 옷견지들을 뒤적이다가 그의 적삼소매끝에 오선보가 가득 씌여져있는것을 발견하고 입으로 흥얼거려보니 곡이 과연 우아하고 듣기 좋았다. 그래서 그는 그 적삼을 꺼내여 한켠에 따로 두었다. 그런데 티제가 일이 있어 잠간 밖에 다녀온사이에 어느 세탁소일군이 그 적삼까지 한데 걷어가버렸다. 안달아난 티제는 차를 몰고 온 시가지의 눈에 띄우는 세탁소를 참빗질했지만 적삼의 행방은 나지지 않았다. 나중에 사맥이 풀린 그가 한 주막집부인의 안내에 으슥한 곳에 자리잡은 한 조그마한 세탁소에 들어서니 면바로 세탁공이 그 적삼을 비누물에 막 담그려고 서둘고있었다. 티제는 그 세탁공한테 와락 달려들어 적삼을 나꿔챘다. 천만다행이였다. 이 <<옷소매곡>>이 바로 세계음악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이름 높은 원무곡 <<아름다운 다뉴브강>>이다. 이 명인일화를 읽어보다가 홀연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크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이 티제처림 그런 훌륭한 <<안해>>로 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것이다. 지식을 토대로 하고 지능을 동력으로 하는 현대화건설은 여러 류형의 인재들을 많이 현대화건설장에 보내줄것을 요구하고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자면 한쪽으로는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양성해야 하고 한쪽으로는 이미 양성한 인재를 버리지 말고 합리하게 리용해야 한다. 이 짐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가에 개혁시기의 지도일군들의 형상적특징이 체현된다. 지금 이런 두 부류의 못난 지도일군이 있다. 한 부류는 안락과 향수와 권세만 추구하면서 곤난과 시끄러움을 두려워하여 이 두 짐을 아무데나 마구 팽겨쳐버리고 전혀 도외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시대가 준 중임을 떠메고 책임을 다 하느라고는 하나 도대체 어느것이 아껴야 할 <<보배>>이고 어느것이 버려야 할 <<쓰레기>>인지조차 몰라 장님 막대질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다. 틀림없이 전자는 력사에 책임지지 않고 직책을 희롱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시대를 인식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노력에 헛막대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거니, 바로 티제에게는 그들이 본받아야 할 두가지 특점이 다 겸비되여 있다. 어떻게든 그 명곡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리라 애끓게 뛰여다닌 티제의 높은 책임감이 첫 부류의 사람들이 배울바라면 아름답고 듣기 좋은 명곡임을 가려낼수 있은 티제의 내항적인 지혜가 둘째부류의 사람들이 본받을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깐 그렇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은 인재를 스트라우스로, 자기를 티제로, 인재의 발명, 창조를 <<아름다운 다뉴브강>>으로 비유해보라. 힘써 노력하여 <<아름다운 다뉴브강>>을 발견하고 구해내라. 티제처럼 다행감을 느낄 때 거기에 희열과 영광이 함께 숨쉰다.
9    배 곯은 성냥갑 댓글:  조회:2003  추천:0  2009-05-16
우리 집에서 성냥의 용처는 내가 담배피울 때와 안해가 불을 지필 때뿐이다. 그런데 성냥 한보이면 열갑인데 거퍼 며칠 못가면 거덜이 나는것이 이상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처음엔 안해가 성냥 그을줄도 몰라서 씀씀이가 헤프다고 생각하고 큰 소문없이 가정에서 살짝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내가 <<절약교육>>을 들이대자 안해는 금방 <<항의>>를 제기하면서 내앞에 배가 촐촐 곯은 성냥갑들을 내놓았다. 말이 궁해진 나는 도리여 안해한테 <<관료주의>>를 부린것을 검토하고 사과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나는 그 길로 상점에 가서 성냥 한보를 사다가 한구들 가득 헤쳐놓고 다시 한놈한놈씩 배를 불려놓기 시작했다. 먹는 놈이 배가 커서인지 제배의것을 몽땅 털리고 나앉은 놈이 저그만치 세갑이나 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냥 소화불량이 되도록 너무 쑤셔넣은것도 아니였다. 퍽 오래전 내가 아직 어려서 손등으로 코를 썩썩 씻으며 신끈에 불을 달아 폭죽을 터치우던 때를 끄당겨보면 그때의 성냥들은 확실히 공장에서 인품 후하게 먹인데서 갑마다 배가 불룩하여 갑 웃면이 밖으로 거북등처럼 부풀어 올랐던걸로 기억된다. 어이쿠, 이거야 너무하지 않은가. 한갑차이래도 속으로 묵새겨버리련만. 중국어 성구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풀이하면 사물이 극한에 달하면 모름지기 그 반면에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뜻일것이다. 물론 생산과 경영에 미립이 튼 그들이 붓이나 휘두르는 나보다 경제원리를 모르는바는 아니겠으나 사실로부터 보면 그래도 그들이 모름지기 경제적 지도원리를 빗나가고 있는법도 했다. 기업소의 생산목적은 물론 자체의 경제수익이겠지만, 그러나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경영원리는 공급과 수요라는 시장원칙을 떠날수 없을것이다. 공급의 립장에서 시장원칙을 운운할 때 경영자, 생산자는 무엇보다 먼저 수요자의 리익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바꿔말하면 소비자관점을 수립하여 소비자들의 리익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경영의 근본적인 지도원리일것이다. 높은 리윤은 시장확보내지 확대에서 짜내야지 소비자들한테서 빨래를 비틀어짜듯이 해서는 안된다. 사실 소비자들의 리익을 보호하는것은 생산자가 그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자로서는 상품경영활동에서 시장보호관점을 지도원리로 할 때만이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수 있고 또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 때만이 공고한 시장을 확보하여 자기의 상품경제활동의 증대와 련속성을 보장받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소비자들의 리익을 손상주어 자기의 리윤을 높이려 한다면 결국은 스스로 시장을 허물게 되여 긍정코 들어오는 눈앞의 리익에 악성후과가 인츰 뒤따르게 될것이다. 경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의 만성자살일뿐이다. 보따리장사군처럼 눈앞의 리익만 따지는 한치보기가 되지 말고 줄을 길게 늘여 큰 고기를 낚는 참된 사업인이 되여야 한다.
8    오늘의 <엽공> 댓글:  조회:1996  추천:0  2009-05-16
<<엽공이 룡을 즐기다>>라는 고사가 있다. 말 그대로 엽공은 룡을 무척 즐겼는바 방안 벽마다 룡을 그렸고 기둥에도 룡을 새겨넣고... 아무튼 그의 방은 룡으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하늘의 진짜룡이 이 말을 듣고 그의 집에 내려와 머리를 남쪽창문으로 기웃이 들이밀고 꼬리를 북쪽창문에 걸쳤다. 엽공은 이것을 보고 그만 혼비백산하여 온 몸을 사시나무떨듯하면서 황급히 숨어버렸다. 실은 그가 즐기는 것은 가짜룡이지 진짜룡이 아니였다. 그런데 현실생활에서 우리 주변에는 엽공과 같은 사람도 없지 않다. 가슴을 치면서 사내대장부라고 호언장담을 뽑다가도 일단 남이 위험에 처한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주자를 놓는 인간, 호랑이 없는 골안에서 원숭이가 왕질한다는 격으로 안중에 약자로 보이는 사람앞에서는 호통질을 곧잘 하다도 저보다 강해보이는 사람앞에서는 굽실거리며 머리를 낮추는 인간도 현주소를 가진 <<엽공>>이라 하겠지만 그보다도 시대의 개혁자라로 자처하는 일부 지도일군의 옳지 못한 소위는 옛날의 엽공마저 무색할 정도이다. 사회발전에 유리한 것이면 언제나 푸른등을 켜주련다고 말은 아름답게 뱉으나 그것이 자기의 리해타산과 마찰이 생기면 그냥 사정이 달라진다. S국의 한 국장님은 말끝마다 합리하고 현명한 인재등용설을 부르짖으나 S국산하의 어느 한 공장의 공장장이 그의 공장에 조동시키려는 국장의 조카를 언감생심 시험을 쳐 받으려 하자 그만 혈압이 높아질양으로 대노하더니 정신적프레스로 그 공장장을 꽉 눌러놓아 공장장은 범의 수염을 다친 자기의 미련함을 한탄하면서 별 수 없이 이사짐을 싸지않으면 안되였다 한다. 옛날의 엽공이 진짜룡을 보고 혼비백산한것은 그래도 담 작은자의 명철보신이라 하겠으나 S국 국장의 한심한 처사는 바로 리해관계라는 이 령혼심처에서 오물처럼 괴고 있는 비도덕적이고 비량심적인 도척같은 사리사욕임이 틀림없다. 개혁을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인재의 합리한 등용을 개혁의 필연적인 요청이라고 쏘프라노로 웨치면서도 그것이 일단 자기앞의 현실로 나타나 자기의 리익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되면 그만 온 몸이 추워나고 혈압이 올라가면서 시비를 전도하고 인재를 죽이는것마저 서슴치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리상이 있고 포부가 있으며 하다못해 자그마한 욕망이래도 있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래일에 미련을 두고 오늘을 분투한다.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다면 인간은 어제, 오늘, 래일을 반복하는, 성장이 없는 동물적인 삶에 무의미한 수명을 연장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를 서로 어울리며 살아간다. 욕망이 서로 다른 인간이 한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장치가 바로 도덕과 법에 의한 질서이다. 그만큼 질서는 어떤 가치이기전에 벌써 인간이 서로를 제약하여 서로가 피해를 입지않기 위한 방책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더라도 어디까지든 능동적으로, 상승적으로 쟁취해야지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느땐가는 자기도 피해를 입게 된다. 남을 물에 끌어들이려면 자기도 한발 빠진다는 말처럼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서도 남을 피해주는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덕을 쌓는다는것은 남에게 베풀어 자기를 충실히 하고 세상 인심을 얻는 순리적인 인생자세다. 인심이 희박해지고 믿음이 퇴색하는 현실에 살면서 낯을 익힌 주변인간들의 긍정과 관심을 받는것보다 더 큰 얻음이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천냥주고 못산다고 했다. 돈이나 권력은 몸외의 물건이다. 이는 옷을 입을수도 있고 벗을수도 있는것처림 돈이나 권력도 한 때의 향수나 기능에 불과한것이고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잘못 알면 어느날 아침 갑자기 돈도, 권력도, 인심도 모두 잃은 알거지가 될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이 사회에 선택된 인간의, 사회를 주도해나가고 인생을 윤택하는 하나의 수단이나 에너지가 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게 될것이고 평화의 질서가 지켜질것이다. 가짜룡을 좋아하는 엽공이 되느니 차라리 강을 건늬워주는 사공이 됨이 나을것이다.
7    궁전에 들어야 할 <왕>들이건만 댓글:  조회:1950  추천:0  2009-05-16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은 위대한 자연이 모든 생물에 부여한 기본적인 생존본능이다. 인류가 원시적인 때가지만도 그러했다. 그러나 인류가 차차 동물세계로부터 인간사회에로 전화함에 따라 상기 정의는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은... 하는식으로 고쳐져야만 하였다. 인류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실천활동은 더는 생을 위한 본능적인 수단으로만 되지 않으며 이성이 결합하여 남편되고 안해되여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되고 어머니되여 자식을 키우는 것이 다만 대를 잇기 위한 본능적인 결합만이 아니다. 오늘을 딛고서서 미래를 당겨오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신념으로 확고해지고 있다. 과연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왕>>들이 살게 될 사회를 마련하는 <<신하>>들이며 <<백성>>들이다. 그들을 잘 보호하고 건실하게 키우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의무와 도덕적책임이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집을 털고 나앉더라도 자식만은 공부시킨다>>는 참으로 빛나는 삶의 신조를 지켜왔다. 16~17세기 영국의 저명한 철학가 프란시스 페겐의 <<지식은 곧 힘>>이라는 명언이 좌우명으로 된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지식을 중시한 미덕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여 자호를 느낄만하다. 특히나 지식과 능력으로 삶의 길을 개척해야만 하고 고도로 첨단적인 문명을 창조하는 시대에 생을 허락받은 우리고보면 조상들이 굳혀준 이 삶의 신조가 얼마나 보배롭고 미더운지 모르겠다. 하기에 파릇파릇 새싹같이 래일에 피려고 방긋 웃는 어린 자식을 너무도 일찍 금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부모는 그 자식한테 죄짓기에 먼저 우리 조상님들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부모의 소행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병페로 그것이 만연될 때 그 위해성은 전체 민족의 건강에 미치게 되며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날로 황페화되여가고 있는 농촌에서 인제 어린들이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부모들이 가난때문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정부의 재정난으로 교원들이 로임을 받지 못하여 교단을 떠나 학교들이 페허로 되고 쑥대만 무성히 자란다. 나라의 왕, 미래의 주인인 어린이들-이들은 인류의 창조물중에서도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가치있고 가장 신통력이 있는 재부이다. 이 재부가 있는한 미래는 역시 우리에게도 속한다. 만약 혹자가 자기를 위해 어린이를 포기했다면, 만약 그들이 오늘을 위해 미래를 차던졌다면 과연 그보다 더 한심한 리기주의, 그보다 더 한심한 한치보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결코 한 가정의 재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인류적인 <<창조물>>이다. 보다 고급적인 사유와 보다 과학적인 사회는 한세대한세대를 거쳐 현실로 된다. 세계가 지구촌으로 좁아지고 문명이 정보화로 창조되는 시대에 호미로 땅을 뚜지는 원시로력을 미련없이 생산해낸다면 우리 민족은 동화에 먼저 시대의 락오자로 도태당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웃세대가 아래세대에 대해 사회적의무감과 도덕적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사회력사의 필연적인 요청이다. 이에 대한 거부는 력사에 대한 반역이요, 민족에 대한 배신이다. 그것은 결국 미래의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고만다. 학교는 미래의 행복이 창조되는 책원지이다. 그만큼 그것의 질적가치는 높이 긍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결코 응부적으로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뜻깊은 사회적학과로서 틀림없이 전 사회적으로 눈길을 모아야 하며 능동적인 제도적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6    금을 잃고 도금을 얻는 사람 댓글:  조회:1922  추천:0  2009-05-16
한국에 다녀온 한 친구가 담배가게에서 외제담배를 사려고 손을 들어 왼쪽으로 몇번째 담배를 가리키자 가게주인이 영어로 씌여있지 않으냐며 얼굴에 아주 비웃는 표정을 짓기에 그만 얼굴이 확 뜨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동행한, 어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있는 친구가 짐짓 영어로 이것저것 묻자 가게주인은 또 <<한국인>>같은데 그렇게 유식한체 할것 있느냐며 꼬집더란다. 그러고보니 그 가게주인도 영어는 기껏 안다는 것이 자주 구입하고 있는 물품명이나 기억(암기)한 정도인듯 했다. 술상에서 금방 친구의 소개로 낯을 익힌 친구가 물흐르듯 류창한 중국어로 일장 <<연설>>이다. 이쪽이 중국어에 퍽 낯설어서 겨우 의미전달이나 하자 그 친구는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가 왜 그 꼴이냐 하는 야릇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당신은 우리 말을 아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그게 무슨 대순가 하는 떳떳한 얼굴로 전혀 모르거니와 또 알아서 무슨 쓸모가 있는가고 하는 것이였다. 그러니 모국어를 모르는 것은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고 영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것이 도리여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과연 장소나 신분에 따라 영어나 중국어에 견습공수준을 보여줄 때면 어느정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다민족국가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에게 있어서 그 주체민족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공간이나 자활력이 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된 사회에 선택된 인간들이 사회 적응력의 부족에서 가지게 되는 안타까움이지 수치심은 결코 아니다. 모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 그것도 모국어는 몰라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대하기가 도리여 부끄러운 노릇이다. 주체민족어에 잘 통하지 못하는 사람을 얕보기전에 벌써 그는 자기 조상을 외면해버린 사람, 현대 <<진화>>를 겪어 동화된 <<이민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신분증을 확인하고보면 그는 워낙 중국어밖에 모르는 <<중국인>>인데 구태여 조선사람으로서 과연 중국어를 잘 한다고 감탄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그가 중국이란 이 땅덩어리에서 인간가치를 실현하는 유일한 의미는 그가 이미 중국인으로 동화되였다는 것외에는 달리 자리매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어에 잘 통하지 않으면 생존공간이 좁아지니 자활력이 약해지니 하는 것부터가 바로 우리는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이기를 고집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이 땅에 민족의 원색적인 문화터전을 마련하려는 모지름 때문이다.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월강죄에 걸리면 사형까지 당할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바 <<룡흥지지(龍興之地)>>에로 대거 천입한 조선족은 봉금령의 페지와 함께 또 앞머리를 깎고 만복을 입는 <<치발역복( 髮易服)>>이란 민족동화정책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죽더라도 조선족이기를 바라고 조상한테 치욕을 주기를 한사코 원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갖은 릉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끝끝내는 <<자기>>를 잃지 않았지만 일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마침내 그에 순종하여 <<치발역복>>하고 점산호(占山戶)의 마름이 되거나 지어는 점산호가 되여 천여쌍의 땅을 소유한 으리으리한 부호가 되고 조선족소작농을 부렸다. 한일합방을 탄압적으로 <<실현>>한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민족어를 말살하려 할 때에도 우리 민족은 돌틈에 솟아나는 풀마냥 끈질긴 생명력으로 민족의 얼을 고스란히 지켜냈지만 역시 창씨개명하고 넔마저 빼앗긴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수치심이란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일에 떳떳하지 못할 때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를 아예 잃어버린 사람앞에서 모국어는 <<정통>>하고 주체민족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수치심을 가질 리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나 역시 간혹 때와 장소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다. 그것이 대학을 나온 이른바 선택된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면 신분적차원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으나 그것이 아니고 그냥 중국어가 신통치 않다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사회 일반에 흐르는 의식이라면 그 수치심은 우리 민족의 체면의식의 변질된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리조량반의식을 보여주는 <<선비정신>>이 인제 빈 껍데기만 남았을 때 그것은 허례허식과 유식을 자랑하는 것이였다. 사회에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그냥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세속을 묻지 않았던 량반들은 고리타분한 유흥에 달을 보고 풍월을 잡으면서 유식을 자랑했다. 바로 그것이 비탈려 어떤 경우라도 절대 체면 하나만은 잃어서는 안된다는 민족의 변질된 체면의식으로 확대된듯 싶다. 그리고 그런 체면의식이 절대화되면 경우불문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뽑히운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수치심을 느낄 대신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는 것이 퍽 민망스럽다. 연변오동팀의 영웅이라고 할만한 문지기-블라이마가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안스러움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연변의 중국인이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불편함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여자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잘 탄다고 해도 남자의 불능으로 아이가 없다면 여자가 임신못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남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수치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리치이겠으나 조선말을 전혀 몰라도 좋다는 것은 벌써 마음속으로 조선족이기를 포기한 것인데 그래도 여기에 <<표범의 반점을 지워도 의연히 표범>>이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가. 민족어를 잃어도 민족의 넋은 잃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타민족도 그 민족의 문화를 알면 그 민족으로 될 수 있다거나 또는 쪼각난 것을 풀로 붙이면 의연히 새것이 된다고 하는 억지임에 다름아니다. 곰이 옥수수따는 격으로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다거나, 지어는 순금보다 화려한 도금쪽에 마음을 빼앗겨 귀중한 것을 잃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5    문학인은 철학인생을 살아야 한다 댓글:  조회:2002  추천:0  2009-05-16
기계마다 자기의 성능이 있듯이 사람은 태여나면서 천성적인 기질이 있다. 유아교육의 가장 기본은 어린이의 천성적인 기질, 특장을 잘 발굴하고 키워주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많은 투자를 하여 자식을 어릴 때부터 어떤 인재로 양성하려다가 결국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 격이 되고만 가장 원질적인 요인이 바로 남의 성공적인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식의 기질, 특장 판단이 빗나간데 있다. 억지로 딴 참외 달지 않은듯 아이가 전혀 무관심이거나 거부감까지 있는 일을 강박관념으로 채찍질한다면 그 아이는 에누리없이 그 일을 해낼 수는 있으되 덜 익은 참외처럼 썩 잘 해내지는 못하고 만다.  그만큼 재능에서 기질이 바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재능이 최고의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가장 관건적이고 확실한 요인은 결코 기질이 아니라 심, 즉 마음 또는 정신이다. 그 일을 꼭 하고싶다는 강렬한 욕망,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 내리라는 강한 의지, 꼭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리라는 드팀없는 신념, 이런 내적인 또는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어야만 기질을 바탕으로 재능이 그 자신의 체질적인, 그리고 소망적인 한계까지 쭉 치달아오를 수 있다.  고종훈이 오동팀의 령혼으로 될 수 있은 것은 기질적인 바탕에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직업의식, 그것이 직업축구선수의 심적인 자아완성이다.  고봉이 학해동보다 어리고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되면서도 마침내는 한 머리 솟아오르지 못한 것은 바로 심적인 자아완성을 가져오지 못했기때문이다. 북경국안팀에 있을 때에도 술을 마시고 지도와 배짱을 부려 출전하지 못한 경력이 있었는데 금년에 전위환도팀에 와서 다시 한번 력사를 재현하였다. 정신적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잘 정리되지 않으면 왕성한 의력이 있을 수 없다. 망동은 멸망에 앞서간다는 말이 있듯이 심적인 자아완성이 없으면 아무리 천부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도 종당에는 예기가 꺾이고 만다.  문학도 례외일 수 없다. 천부적인 언어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문학인재로 될 수 있다는 판단은 옳은 것이고 그런 기질이 없으면서도 선택착오로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을 위한 특별한 노력만 있다면 시인, 소설가 또는 무슨 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한 것이지만 꼭 남보다 한 머리 뛰여날 수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문학이 그냥 기술적인 조작에만 그치고만다면 생명력이 있을 수 없고 지어는 언어유희에 그치고말 수도 있다.  율곡 리이는 <<도(道)가 나타난 것을 문(文)이라 하니 도는 문의 본(本)이요 문은 도의 말(末)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깐 도에 근본을 두고 문으로 도를 꿴다는 것이다. 오늘의 개념으로는 도를 철학으로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기술적으로 허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 인간학이기때문이요, 그리하여 문학은 군체동물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체를 파악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근본일 수 밖에 없으니 과연 문학의 궁극적인 성공은 철학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을 택하는 길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에서조차 개인적인 차원, 가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의 원리가 립체적으로 파악될만큼 작가는 지극히 철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시끌벅적하고 허둥거리는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가치를 판단하고 사물의 본질을 진맥하려면 문학인 자체가 벌써 철학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되고 덕행과 학문에 의한 심적인 자아완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심적인 자아완성은 모든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적인 빈곤내지 사회적인 빈곤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충족한 철학인생을 살아가려는 자세를 갖출 때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자고로 청빈은 선비정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빈을 가난하고 말끔하다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청백하여 가난하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청백하기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다함은 선비의 깨끗하고 굳은 지조를 말해주면서도 또 어찌보면 부자로 되는 길은 선비의 길이 아니요, 선비는 오직 마음의 부자가 되여야 함을 표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문학의 선택은 가난을 딛고 세상을 옳게 조명할 수 있는 정신적독방을 가질 때라야만 성공을 약속받을 수 있는 것이고 문학을 다만 장끼로 표현하거나 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출세의 수단으로 리용한다면 마음조차 가난해지게 된다.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모든 영욕을 버리고 오직 마음의 부자로 인정사회를 구축하려고 문학이란 이 초불을 켜들고도 그 자신이 벌써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 또 어디 있겠는가. 몸은 문학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돈과 권력의 주변에서 활약한다면 그것은 욕망이 실천능력을 넘쳐난 것이요, 어찌하면 처음 문학을 전공하려는 것부터가 선택착오일 수 있다.  사실은 문학뿐이 아니고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로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역시 마음이 근본이다. 재능이 없으면 한 무능함이요, 마음이 서지 않으면 한 간릉함이다. 심리건강이 좋지 못하고 자기를 지키는 도덕적장치가 마련되여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게 되거나 자칫 인생에 락서를 하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인간의 군체속에서 유익무해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역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정신과 사명감이 있는 작가라야 인정이 메말라가는 사회에 하나의 오아시스를 마련해줄 수 있다.  학자는 산속에서 나고 철인은 목동의 오두막에서 난다고 했다. 세속에 몸을 담고있으면서도 정신은 멀리 비켜서서 사회를 조명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철학인생이다. 아, 고달픔이여, 고행이여.  오직 내몸을 위하여야겠다는 일념에 가슴태우는 사람은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선택착오를 실감할 것이니 그냥 세속에 <<하해(下海>>하는 것이 바람직한 계산적조치이리라.
4    정설도 역설로 바꾸면 힘이 생긴다 댓글:  조회:1939  추천:1  2009-05-16
정설을 역설로 바꾸는 전술은 군사전략에서는 <<류백온병법>>에서 말하는 <<반전(反战)>>에 속한다. 여기서 말하는 <<반전>>은 전쟁을 반대함이 아니고 바로 흔히 쓰는 전략에 전혀 상반하는 전술을 말한다. 이는 전쟁에서 사람들이 흔히 일종 습관적인 사유방식을 고집하여 그냥 사물의 발전법칙에 따라 적의 행동을 판단하는 약점을 대비하여 쓰는 총명한 전술이다. <<안자춘추>>의 기재에 의하면 제경공(齐景公)은 수렵을 즐겼는데 특히 매를 키워 토끼를 잡는 것이 재미였다. 그런데 한번은 촉추(烛邹)가 부주의로 그만 매 한 마리를 놓치고 말았다. 경공은 일시적인 노여움에 촉추를 끌어내 목을 치라고 하였다. 이때 안자가 경공을 배알하고 아뢰었다. <<촉추는 삼대죄상이 있으니 어찌 그렇게 쉬이 죽일 수 있으리까? 신이 하나하나 밝힌 후에 죽임이 어떠하옵니까?>> 경공은 그리하라고 하였다. 안자는 촉추의 코에 삿대질하며 말했다. <<촉추, 너는 대왕의 새를 키우고는 도리어 달아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죄상이요, 대왕께서 새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시게 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죄상이요, 너를 죽이면 천하의 제후들이 대왕께서 신하보다 새를 중히 여기신다고 불만이겠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상이노라>> 그쯤 듣던 경공이 안자를 보고 말했다. <<죽이지 말지어다. 짐이 그대의 뜻을 알겠노라>> 안자는 촉추한테 짐짓 이치에 어긋나는 죄명을 씌우므로 방관자로 된 경공의 비리를 밝혔던 것이다. 사실 촉추한테 씌운 죄명은 바로 경공이 범하는 죄명인 것이다. 마인초(马寅初)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경제학가이다. 그는 미국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는 국민당의 재정부장 공상희(孔祥熙)를 아니꼽게 보았다. 공상희의 50돐 생일연회에서 누군가 우스개를 잘하는 공상희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연회석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마디씩 우스개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때 마인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전에 어떤 삼형제가 있었는데 맏이는 이름을 년기(年纪)라 하고 둘째는 학문(学文), 셋째는 소화(笑话)라 하였지요. 하루는 그들 부모가 세 형제를 산에 가 땔나무를 해오게 하였지요. 저녁무렵에 삼형제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년기는 많이 해왔으나 학문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소화만이 한단 큼직이 지고 왔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상희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워낙 마인초는 공상희를 빗대고 <<나이(년기)는 많으나 학문은 없고 오직 우스개(소화)만 잘하더라>>고 풍자한 것이었다. 자기가 하려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에돌아 말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암시하거나 지어는 긍정(부정)적인 것을 부정(긍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반전술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예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3    유머로 체면과 존엄을 세워라 댓글:  조회:1918  추천:0  2009-05-16
악의를 품은 적수와 정면충돌하다간 크게 해를 입거나 둘이 다 만신창이 될 수 있다. 풍자적인 유머는 악의를 품고 공격해오는 적수를 신사답게 물리칠 수 있는 통쾌한 반격수단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냥 무심히 농담조로 당신을 희롱하여 난처하게 만들었을 때 자조하는 듯한 유머를 선택하면 모여있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 1984년 레간이 미국대통령선거로 적수와 텔레비전 설전을 할 때였다. 그의 적수가 레간의 나이를 목표로 공격을 들이대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 대통령을 하기에는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레간은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이를 너무 먹었다고 하는데 나는 적수가 나이가 너무 어려 아직 성숙되지 못한 것 같은 문제를 선거 경쟁에서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유머는 청중들의 웃음 속에서 레간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진의는 중국의 고위급 지도자들 중에 유머가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한번은 국내외기자회견에서 서양의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들이댔다.<<최근 중국이 미제U-2 고공정찰기를 떨구었는데 어떤 무기를 사용하였는지요? 도탄인지요?>> 국가기밀에 속하는 질문이지만 진의는 그냥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풍치 짙은 유머동작으로 공중에 손 자세를 펼쳐 보이더니 익살스럽게 말했다.<<기자선생, 우리는 죽대로 찔러서 떨어뜨렸습니다.>> 장내는 금방 웃음으로 부드러워졌다. 어떤 사람이 바둑 고단과 열심히 세 판을 두었으나 번번이 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마음이 개운하지 않은데 옆에서 짐짓 알면서 모르는 척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처참한 결과를 그냥 승인하기에는 얼굴이 뜨거운지라 아주 천연덕스레 응수했다.<<첫 번은 내가 이기지 못했고 둘째 번은 그가 지지 않았고 세 번째 번은 내가 무승부로 하려는데 그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 지혜로운 유머에 사람들은 크게 웃었고 그의 실패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생활일상에서도 유머와 악의 없는 풍자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주고 인생에 색채를 더해주는 효모가 될 수 있다. 리챠가 뉴욕 중심 역으로 시간을 재촉하며 금방 홈에 들어서는데 살집이 좋은 중년부인이 그의 뒤에서 달려오다가 그냥 대자로 대리석 바닥에 미끄럼 치며 넘어졌다. 뒤집어진 거북이모양을 하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리챠가 부축해 세우려는데 벌써 그녀 절로 일어나더니 그한테 눈을 깜박해 보이며 태연하게 말했다.<<늘 미녀가 당신을 보고 엎어져요?>> 그 말에 리챠는 한바탕 크게 웃었다. 벼락치듯 갑자기 들이닥친 곤경에서 유머와 악의 없는 풍자는 신사풍모와 자아존엄을 지켜내는 가장 슬기롭고 바람직한 수단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역경이나 난국 또는 인격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 오뚜기모략-유머전술이다.
2    이기려면 정곡을 찔러라 댓글:  조회:1917  추천:0  2009-05-16
상업전쟁이나 논쟁에서 이기려면 관건은 마음을 공략해야 한다. 마음을 공략하는데는 정면공략과 유인공략이 있다. 고금의 허다한 사건들을 보면 정면공략의 사례도 많으나 유인공략의 성공률이 무엇보다 높다. 진선(秦宣)태후는 궁중에서 과부생활하기에는 너무나 도색이 강하여 대신인 위추부(魏丑夫)와 몰래 붙어 죽자살자 하였다. 후일 태후는 병이 위중하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그냥 위추부를 잊을 수 없었던 태후는 자기가 죽게 되면 위추부를 배장(配葬)하라고 칙서를 내렸다. 혼비백산한 위추부는 태후의 측근들을 찾아다니면서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대신 강예(康芮)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 주었다. 그는 태후를 배알하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죽은 사람도 지각이 있나이까?>> 태후는 떠듬거리며 대답했다.<<없지>> <<과연 지각이 없다면 왜 살아서 사랑하던 사람을 죽은 사람과 합장하여 생매장을 하려 하나이까? 또 죽은 사람이 지각이 있다면 음간에 계시는 선왕께서 원한을 쌓은 지도 오래일 것이니 태후께서 음간에 가셔서 사죄할 것도 많은데 무슨 여가가 있어 위추부와 좋아하겠나이까?>> 그러자 태후는 한동안 신음하다가 이를 물고 간신히 내뱉었다. <<그만둘지어다>>. 죽은 사람은 지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내들고 처음부터 태후가 물러설 자리가 없도록 몰아 부친 것이다. 그 다음 만약 죽은 사람이 지각이 있다면 이생의 업보를 음간에 가서 선왕한테 질책 당할 수 있다는 추리로 태후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이다. 정면공략과 유인공략을 교묘하게 배합한 일례라 할 것이다. 만약 그냥 정면공략만 쓴다면 공연히 태후의 심기만 건드려서 도리어 해를 입을 수 있으나 유인공략을 배합하므로 태후를 위해 말하는 것처럼 꾸며 마음을 돌려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 얼마나 많은 일본병사들이 무사도정신으로 배를 가르는 비극을 출연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한 미국병사의 우스개 한마디가 십 여명의 일본병사들을 고스란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도록 하였다. 미군은 큰 대가를 내고 태평양에 있는 일본의 섬 하나를 공략했다. 그런데 잔병 십 여명이 한 산굴에 틀어박혀 한사코 대항했다. 할 수 무가내한 상황에서 한 미국병사가 무심히 우스개 한마디를 했다. 너희들이 투항하면 할리우드를 보여주겠다. 그런데 이 우스개 한마디가 과연 효과를 볼 줄이야. 금방 총성이 멎더니 잔병들이 하나하나 동굴을 기어 나와 총을 받치고 투항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미군사령부는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과연 비행기로 포로들을 할리우드에 보내어 눈요기를 시켰다. 유머가 짙은 유인공략의 일례이다. 일본병사들은 골수에 무사도정신이 배어있지만 필경은 20대의 청춘들이었다. 할리우드라는 이 몽환세계는 벌써 미국의 히트영화들을 통해 마음에 자리잡은 것이었다. 욕심내지 욕망을 위하여 실천하는 인간이므로 상대방이 갈망하는 희망사항을 알고 유인공략을 써서 어떤 승낙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먹이를 주어 짐승을 길들이듯 하는 불패의 오뚜기모략 - 공심법(攻心法)이다.
1    성공하려면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라 댓글:  조회:1857  추천:0  2009-05-16
흔히 사람들은 어떤 모임이나 일에서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한테 호감을 가지고 같지 않은 견해를 가진 사람을 멀리하거나 지어는 적의까지 품는다. 이럴 때는 적의를 풀어버리는 것이 이길 수 있는 관건이다. 전술적으로 보아도 적을 많이 만들면 포위공격이나 숨은 화살에 맞을 위험이 큰 것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는 마음으로 친하고 조금 사이가 비뚤어진 사람이라도 그냥 웃는 낯으로 대할 수 있고 일에서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자신의 평화로운 생활공간을 넓히고 적수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류백온병법>>에서 자주 언급한 신변의 힘을 모아 먼 것을 치고 적을 분화하거나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등은 바로 적을 감화시켜 벗을 만드는 전쟁모략의 하나이다. 류백온은 또 일상의 인지관계에서 상대방의 적의나 불만정서를 풀어주는 방법에 대해 말하기를 논쟁을 피하고 정서를 풀어주면 싸움을 방지할 수 있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10년이 넘도록 낡아빠진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자동차판촉사원들이 고기를 본 파리처럼 달려들어 새차로 바꾸라고 구슬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한사코 바꾸지 않겠다고 고집일뿐더러 그들을 아주 매정하게 내쫓았다. <<당신의 차는 오랜 것이어서 사고나기 쉬워요>>, 혹은 <<이런 낡은 차는 수리비가 엄청 나겠죠>>하는 말들이 그의 비위를 거스르고 마음을 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중년 판촉사원이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판촉사원은 판매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이것저것 한담을 하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당신의 차는 아직 반년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금 그냥 바꾸기도 좀은 아쉽군요.>> 마음속으로는 벌써 새차를 바꾸려던 그였던지라 판촉사원의 말은 그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다음달이 되자 그는 그 판촉사원으로부터 새차를 구매하였다. 앞선 판촉사원들은 그한테 차를 팔기 위해 한사코 그의 낡은 차를 헐뜯었다. 사실적으로는 별로 틀리지 않았지만 그 차를 애지중지하던 주인으로 보면 그냥 자기를 비평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그들한테 거부감을 느낀 것이었다. 후에 나타난 판촉사원은 그가 이런 거부감이 강렬할 때 그의 집을 방문하고 낡은 차에 대해 주인의 입장에서 연민의 정을 보여주므로 그의 마음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또 한 판촉사원의 이런 일화가 있다.<<인간중년>>이란 영화를 보고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라 어느 연구소의 화장품 판매를 지원해 나섰다. 그는 중년 지성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홍보연설을 했다. <<사람이 사십을 넘으면 흰머리가 하루하루 많아져요. 얼굴의 주름도 갈수록 많아져 눈에 띠이게 늙어가지요. 여러분의 노쇠를 늦추고 누추한 모습을 가리워 드리려고 몇 가지 화장품을...>> 여기까지 말을 하자 중년들은 하나둘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남한테 부족한 것을 지적 받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다. 어떤 사람이나 그의 장점을 말해주고 부족한 것은 개변할 수 있다는 신심을 넣어주면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상업전쟁에서는 <<고객의 환심을 사라>>는 것이 격언이다. 어떤 수단을 쓰던지 고객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동정하는 말, 칭찬하는 말 한마디가 천 마디 설교보다 낫다. 그만큼 인간은 칭찬에는 익숙하고 비평에는 인색하다. 오뚜기 특성이 영원히 넘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대인관계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좋은 인맥관계를 마련하는 것이 불패의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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