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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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필)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부르노와 갈릴레이 댓글:  조회:3921  추천:38  2006-02-16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부르노와 갈릴레이 김관웅 위대한 진리의 발견자-- 코페르니쿠스 구라파는 1300년의 기나긴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거쳐서 끝내 문예부흥이라는 《가장 위대하고 진보적인 변혁의 시대》를 맞아오게 되였다. 뽈스까의 천문학가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이 위대한 시대의 거인중의 하나이다.그는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천체운행》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종교신학의 이른바 《지구중심설》을 뒤엎고 《태양중심설》을 창립하였다. 물론 그가 생각했던 태양계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있는 태양계는 아니였다. 즉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있었다.그러나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고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가지고있던 중세기적우주관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놓은 완전한 변혁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이 우주관의 변혁을 흔히 《코페르니쿠스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위대한 진리의 발견이였던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기까지 코페르니쿠스는 수많은 관찰과 연구를 거듭하였고 그 연구성과는 교회의 봉쇄로 말미암아 그가 림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행되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이 위대한 진리의 발견은 교회로부터의 거듭되는 공격을 받았는데, 심지어는 저명한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마저도 그를 《미치광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구약》의 신조를 인용하여 그의 《태양중심설》을 반대했다.이처럼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아주 험난하고 어려운 법이다. 용감한 진리의 수호자 -- 부르노 이딸리아의 천문학자 부르노(1548--1600)는 워낙 천주교의 신부였으나 나중에는 천주교를 맞서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키였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견지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용감한 진리의 수호자이다. 그는 우주는 무한하고 태양계는 무한한 우주중의 하나의 천체계통에 지나지 않으며 태양은 움직이지않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기타 행성사이의 위치는 부단히 변동된다고 인정했다. 그는 다만 학술적으로 천주교의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고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키는데 그친것이 아니라 광명은 반드시 암흑을 전승하리라는것을 굳게 믿고 중세기의 미신과 종교의 암흑한 통치를 소멸하기 위해 일떠나 싸워야 한다고 대중들에게 호소했다.결국은 로마종교재판소에 의해 체포되였고 로마교황청의 감옥에 갇혔다. 8년동안의 옥살이를 하면서 갖은 박해와 시달림을 당했으나 조금도 초지를 굽히지 않고 종교와 투쟁하고 진리를 견지하였다. 1600년 2월 27일, 로마교황청에서는 마지막으로 참회하고 신념을 포기할것을 요구했지만 부르노는 진리를 포기하고 목숨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52세를 일기로 로마의 생화광장에서 불에 타 죽는 순간까지도 부르노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르노가 화형을 당한뒤 300년이 지난 1889년, 이딸리아인민들은 세계천주교의 대본영인 바티칸교황청 청사의 의 맞은편에 부르노의 동상을 세워 목숨을 던져가면서도 진리를 지키고 견지한 부르노의 고매한 넋을 기리였다.이처럼 진리를 지키고 견지하는 길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보다 더 험난하고 어려울수도 있는것이다. 굴절적인 진리의 수호자 -- 갈릴레이 이딸리아의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1564--1642)는 필생의 정력으로 자연괴학의 부흥을 위해 길을 개척한 근대자연과학의 정초자이다. 부르노가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한데 반하여 갈릴레이는 자기가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객관적진리성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그래도 오래동안 공개적으로 《태양중심설》을 선전하고 견지하여 왔지만 정작 진리와 목숨이라는 이 량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해서는 부르노처럼 용감하지는 못했다. 1616년 3월 26일, 로마종교재판소에서 엄한 징벌로 위협을 하게 되자 갈릴레이는 자신의 전부의 원고들을 보전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포기한다고 싸인하였다. 물론 내심속으로는 진리를 포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활동을 암암리에 계속 진척시켜 나아갔다. 1632년 2월에 로마종교재판소에서는 재차 갈릴레이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당당하게 맞섰으나 형벌이 혹심해지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68세의 고령이였음에도 갈릴레이는 진리보다는 목숨을 선택했다. 아마도 부르노의 비참한 최후가 갈릴레이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준것이였다. 그리하여 갈릴레이는 친구들의 권유와 외동딸의 애원하에서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목숨을 보존하였던것이다. 갈릴레이는 미네르와산정에 있는 성마리아성당에 압송되여 핍박에 하는수없이 꿇어엎드려 참회를 한후 일어나면서 이렇게 입속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암, 지구는 이 시각에도 태양을 에워싸고 돌고있고말고!》 후에 사회의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백방으로 갈릴레이를 옥에서 구출하는 활동을 벌린 덕분에 가석방되여 플로렌스의 집에 돌아왔으나 갈릴레이는 연금되여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여전히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기의 연구성과들을 가만히 국외에 빼돌려 출판하였다. 후에 갈릴레이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이 요절하는 바람에 정신상에서 큰 타격을 받고 종일 비애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두눈마저 실명되였으며, 1642년에 78세를 일기로 험난한 진리탐구의 한생을 마쳤다. 갈릴레이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박해는 죽은 후에도 계속되였는데, 공식적으로 장례를 지내는 일도, 심지어는 묘비를 세우는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죽은뒤 3백년도 더 지난 뒤인 1980년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황은 세계주교회의에서 갈릴레이의 이 억울한 안건을 다시 심사하는게 어떤가 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휘원회는 참다운 심사를 거친뒤 갈릴레이의 무죄함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때로는 허리를 굽히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기도 했던 갈리레이의 굴절적인 일생을 통해서도 역시 진리를 발견하는 길보다 진리를 지키고 견지하는 길이 더 험난하고 어려울수도 있음을 알수 있지 않는가. 이 어찌 과학분야에만 국한되는 일이며, 이 어찌 옛날에만 국한되는 일이겠는가!!!
29    商業炒作과 요즈음의 文學評論 댓글:  조회:3352  추천:62  2006-02-15
☆단평☆ 商業炒作과 요즈음의 文學評論 김 관 웅 1990년대 중반에 산동성 곡부지구의 이름 없는, 자그만한 양조장에서 《孔府宴酒》라는 술을 만들어 내여 수억의 돈을 쏟아부어 중앙 제1 TV에서 련속 2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광고를 때렸다. 그 광고는 매일 저녁 황금시간에 이렇게 방송되였다. 《공부연주를 마시며 천하의 문장을 쓰도다!(喝孔府宴酒, 作天下文章!)》 이 상업광고 덕분에 《孔府宴酒》의 인기는 대단했고 산동성 곡부지구의 이름 없는, 자그만한 양조장은 한동안 떼돈을 벌기도 했다. 李太白이 《한 말의 술을 먹고 백편의 시를 썼다(斗酒詩百篇)》고 하니 酒客들이 《孔府宴酒》를 마시면 리태백이라도 되는가 여겼던지 한 때는 연길에서도 이 《孔府宴酒》가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孔孟之道의 영향이 깊은 한국인들은 《孔府宴酒》, 공자가문의 연회에서 마시던 술이라는 이 현란한 이름에 현혹되여 맛도 모르고 《孔府宴酒》를 선물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짜는 가짜일 따름이다. 가짜는 영원히 호황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거퍼 10년도 안 지나서 《孔府宴酒》에 떠 있던 거품은 가라앉고 《孔府宴酒》는 사람들의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孔府宴酒》를 만들었던 그 양조장은 거의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소를 넣은 알락달락한 고무풍선도 마찬가지다. 손에 쥐였던 고무풍선을 놓으면 화려하게 하늘로 잘도 올라간다. 하지만 일정한 하늘 높이까지 올라가면 팡 터져서 그 잔해들이 땅바닥으로 추락되고 만다.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다. 요즈음 문단의 상황을 볼것 같으면 사상예술성이 별 볼일이 없는 작품일지라도 평론가들이 분에 넘치게 칭찬을 해대고 떠들썩하게 홍보를 하게 되면 일약 《명작》으로 둔갑을 하여 여러 가지 현란한 문학상도 받게되고 그 작자는 문학의 월계관을 쓰고 으시댈수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고 商業炒作이라고 한다. 이 상업화의 시대에 문학이 商道를 따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商業炒作은 시간의 고험은 겪어내지 못하는 법이다. 그 작자의 벼슬이나 돈줄이나 파워가 사라지면 그《명작》우에 떠있던 거품도 자연히 걷혀지게 되는 법이다. 《위조명작》, 《고무풍선 식 명작》을 만드는데 가장 많이 동원되는 사람들이 바로 어용(御用)평론가들이 아니라 상용(商用)평론가들이다. 어용평론가는 임금을 위해 평론을 하니 그래도 품위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상용평론가는 돈이 많거나 속세의 권세가 있는 사람을 위해 평론을 하니 그 품위가 낮다. 돈을 준다면, 실리가 있다면 남의 장례집에 가서 상주(喪主) 대신 어이어이 곡(哭)이라도 할 그런 위인들이 바로 상용(商用)평론가들이다. 우리 연변에는 그런 상용평론들이 적지 않다. 정치돌출의 문화혁명 때는 三突出을 칭찬해 대면서 정치기류를 바싹 따르더니 요즈음 상업화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상업기류를 바싹 따라 장사군들의 사인비서나 파워 있는 문단거두들의 吹鼓手로 탈바꿈하여 버렸다. 고약한 것은 이런 상용평론가들이 속으로는 뻔해 가지고도 입으로는 찬송가를 불러댄다는 것이다.두말할 것 없이 먹을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용평론가들을 보면 련상되는 것이 바로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江山易改, 本性難移)》는 말이다. 리백이나 두보 같은 이들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명작으로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은 결코 작자 당대에 작자 자신의 조작에 의해, 상용평론가들의 商業炒作식 평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제 저녁 한 선배님의 사무실에 갔다가 우리 문단의 한 시인의 시작에 대한 시평집을 얻어다가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어서 이렇게 간단히 적는다. 2006.2.15 연길 자택에서
28    (단상)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댓글:  조회:3393  추천:61  2006-02-13
☆단상☆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김 관 웅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가 떡이나 먹고 오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손님임을 망각하고 남의 집 잔치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면 그건 싱거운 짓이다. 자칫하다가는 떡도 못 얻어먹고 빈축만 사게 된다. 개의 직분은 집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의 직분까지도 맡아서 쥐잡이까지 하다가는 자칫 장독이나 쌀독을 깨여 주인의 부지깽이에 얻어맞을 수도 있다. 고생을 하고도 고맙다는 소리커녕 물매만 맞아대기 십상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천하를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라(天下爲己任)》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또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도모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謀其政)》는 고훈(古訓)도 있다. 정치에 참여하더라도 자기 분수에 맞게 정치참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이 할 말이 있고, 정승이 할 말이 있고, 대신이 할 말이 있고, 민초들이 할 말이 각 각 따로 있는 법이다. 정승이 임금의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대신이 정승이 할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민초들이 대신이 할 말을 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횡설수설 입방아를 찧다가는 기필코 그 《입덕》을 입어 경하면 정배를 가고 중하면 목을 잘릴 수도 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친구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인다. 자기 집 일도 코 막고 답답한데 남의 집 대(大)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남의 집 정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남의 집 대 정치 때문에 저희들끼리 밀고, 공격 등 각가지 비루한 작태를 다 보이면서 물고 뜯는 니전투구의 혼전을 벌리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거리이다. 병술 년부터는 다들 자기 집 앞의 일이나 착실히 해가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부터는 다들 남의 집 잔치에 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망발들은 좀 작작 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부터는 다들 쥐잡이 나선 개처럼 싱거운 짓거리들을 좀 작작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 2월 10일 자택에서
27    (단상) 고슴도치 같은 인간들 댓글:  조회:3260  추천:65  2006-02-13
고슴도치 같은 인간들 김관웅 독일의 철학가 니체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동굴속에서 추운 겨울을 함께 나는 고슴도치들에 비긴적이 있다. A, B, C, D, E, F, G…..한 무리의 고슴도치들이 동굴속에서 함께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고슴도치들은 여타의 짐승들과 달리 온 몸에 송곳 같은 가시가 가득 돋쳐있는 까닭에 서로간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은 부들 부들 떨다 보면 추위를 견디지 못해 너도나도 오그작작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지면 서로 대방의 가시털들에 몸을 찔리게 되는법이다. 그러면 삽시에 고슴도치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흩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대방의 가시털들을 경계한다는것이다. 이처럼 고슴도치들은 온 겨울 내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집합(集合)과 리산(離散)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간에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다 보면 서로 모이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무슨 무슨 조직체나 동아리들을 만들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한참 가까이 상종하다 보면 서로간에 리익의 충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리익의 충돌은 반목과 질시로 이어지고, 그 반목과 질시가 도를 넘으면 생사박투에까지 치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는 우리 속담이 시사해 주다 싶이 질투는 흔히 한 조직체나 한 동아리 안에서 더 심한 법이다. 타남이야 한 다리 건느니 별로 배 아플 것도 없지 않는가. 사르트르는 그래서 이라고 한것이다. 이란 우리 속담과도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 남이 잘 되도록 도와 주는 미덕을 인간의 수많은 미덕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덕으로 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갖추기 어러운 미덕이기 때문이다. 고슴도치처럼 리기주의의 가시털이 온 몸에 가득 돋아있는 우리 인간들이 남을 찌르지 않 고 남의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마치 락타가 바늘구명으로 빠져 나가기 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리라.
26    (수필) 하로동선(夏爐冬扇)의 뜻을 되새기면서 댓글:  조회:3370  추천:60  2006-02-08
☆수필☆ 하로동선(夏爐冬扇)의 뜻을 되새기면서 김 관 웅 우리 집 식탁 유리 밑에는 염량세태를 표현한 무명씨의 시 한수가 깔려있다. 가을이 오니 비단 부채를 거둬 두는구나 무슨 일로 가인이 감정을 중히 여기겠는가 세상의 일들을 자세히 살펴 보시라 누구인들 덥고 차거움을 따르지 않는가. (秋來紈扇合收藏, 何事佳人重感傷. 請把世事仔細看, 大都誰不逐炎凉.) 또 하로동선(夏爐冬煽)이라는 성구가 있는데, 여름날의 화로(火爐)요 겨울철의 부채란 말이다. 더운 여름날엔 화로가 필요 없다. 오히려 성가신 존재다. 그래서 헛간 한 구석에 내 팽개쳐 있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떨면서 헛간에 들어가 먼지 묻은 화로를 정성껏 닦고 불을 지핀다. 부채도 추운 겨울에는 쓸모가 없다. 방 한 귀퉁이나 농짝 밑 같은 구석진 곳에 버려진 듯 있다가, 정작 무더운 여름철이 오면 주섬주섬 찾아 더위를 식히는 것이다.《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있다. 《가난하게 살면 시끄러운 저자거리에서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고, 부유하게 살면 깊은 산속 먼 곳에서도 친한 사람이 있느니라》 가난하게 살면 그 떠들썩한 시장거리에 살아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하면 심산벽곡에 숨어 지내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밥 한 끼라도 얻어먹을게 있고 돈 한 푼이라도 얻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쉐익스피어의 희곡《아테네의 타이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고대 희랍 아테네의 귀족 타이몬이 부자였을 때는 그의 집에 식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만 가세가 기울어지자 전에는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니던 친구들조차 발길을 딱 끊는다. 돈 냄새만 맡으면 달려들고 먹을알이 없으면 뿔뿔이 날아가버리는 파리떼 같은 추악한 인간들이 혐오스럽고 리익만 쫓는 인간이 세상이 싫어서 타이몬은 멀리 해변의 수림 속에 숨어살게 된다. 그러다가 수림 속에서 황금단지를 발견하자 또 숱한 사람들이 몰려든다. 타이몬은 돈이란 이 요물이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요사스럽게 만든다는 점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황금이여! 누렇고 번쩍 번쩍 번쩍하는 빛을 뿌리는 귀중한 황금이여! 이것이 조금만 있어도 검은 것이 희게 변할 수 있고, 추한 것이 곱게 보일 수도 있고, 틀린 것이 옳은 것으로 될 수도 있고 비천한 것이 존귀한 것으로, 로인이 소년으로, 겁쟁이가 용사로 변할 수도 있노라.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대사는 《화폐의 본질을 절묘하게 묘사했다》고 칭찬한바 있다. 이처럼 요사한 인간의 본성은 동양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역시 고대 희랍시기와 비슷한 시절이였던 한나라시기에 적공(翟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정위(최고재판소 소장)가 되자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자 손님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져 문 앞에 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다시 정위가 되자 또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천박한 사람들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진 그는 문 앞에 다음과 같이 크게 써 붙였다. 《한번 죽었다가 한번 살아나니 이에 교제할 때의 정분을 알게 되였고,, 한번 가난했다가 한번 부유해져서야 비로소 교제할 때의 사람의 태도를 알았으며, 한번 귀하게 되고 한번 천하게 되여서야 교제의 참된 정이 드러나게 되였다.》 세상인심이란 이렇게 사람의 재산의 빈부나 권세의 유무에 따라 표변하는 것이다. 자고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고 부족한 사람을 이끌어주는 따뜻한 정도 있지만, 더우면 모이고 추우면 흩어지는 것도 세상인심이다. 그래서 염량세태(炎凉世態)라 말하는 것이다. 젖을 뗄 때의 아기들을 보라. 엄마들이 젖꼭지에 개나 돼지의 쓸개를 발라 놓으면 아기들은 젖꼭지를 물었다가도 뱉아버린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다가서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물러서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도 있다. 어른들이 사는 세상의 인정이란 것도 하로동선(夏爐冬扇)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빌붙어 아첨하고 불리하면 멀리하거나 배척하는 간사하기 짝이 없는 어른들의 마음을 아기들이 젖꼭지가 달면 빨고 쓰면 뱉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이라고나 할런지? 오늘이라고 인간들의 이런 본성이 변한 것은 아님을 이번 설을 쇠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날 샌 은혜는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남들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런 인간의 하로동선의 본성에서 별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님을 설을 쇠면서 심심하게 느꼈다. 부모 형제와 스승, 동료, 친구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 만큼 성장했지만 내가 그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또 갚으면서 살아왔는가? 그러기에 남들이 나한테 어떻게 처사하는가를 따질 수가 없었다.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성구의 뜻을 되새기면서 나 자신은 구경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는 음력설이였다. 2006년 2월 4일 연길에서
25    (수필) 나의 자화상 댓글:  조회:3884  추천:60  2006-02-06
♧수필♧ 나의 자화상 김 관 웅 요즘 나의 관심사는 리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다. 의사도 아닌 내가 사상의학(四象醫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이것으로 내고 잘 알고 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개성이나 성격을 분석해보면 십중팔구는 맞아 떨어지니 말이다. 남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 맞아 떨어진다. 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분류한 체질이나 성질의 네 류형-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중에서 나의 성격이나 기질은 소양인(少陽人)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시 적부터 성미가 불같이 급했다. 그래서 걸을 때보다는 달음박질을 할 때가 더 많았고 설사 걷는다고 해도 언제나 앞으로 엎어질 듯 걸음걸이가 빨랐다. 그래서 내가 소학교 다니던 시절에 우리 옆집에 살았던, 나보다 네댓살 나이를 더 먹은 허은석이라는 형은 나를 《무대랑(武大郞)》이라고 불렀다. 우리 동네의 골목대장이 내 별명을 이렇게 짓자 내 또래들은 다들 나를 《무대랑》이라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내가 무대랑처럼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수호전》 련환화(連環畵) 책에 나오는 무대랑이 자기의 색시 반금련과 서문경이 왕로파의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우아(牛兒)가 귀띔하자 천방지축 달려가는 모습이 똑 마치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이 그려졌기 때문이였다. 개꼬리 삼년 묵어 황모 못 된다고 어른이 되여서도 이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 별로 급한 일이 없는데도 언제나 앞만 보고 달음박질하다시피 총총이 걸어 다니는 통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람에게도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나를 건방지다고 보거나 경망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집사람마저도 나의 걸음걸이를 두고 늘 기분 나쁜 평가를 해오군 한다. 왜 걸어도 좀 점잖게, 품위 있게 걷지를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천성이여서 마음을 지어 먹는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닌데야. 어린시절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성미가 급해서 앞만 바라보고 아래를 살피지 않았기에 때문에 신발이나 바짓가랑이에 언제나 흙을 많이 묻히고 다녔다. 비가 온 뒤 길이 질척거리는 날이면 더욱 가관이였다. 집에 들어오면 나는 언제나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이 갱충맞은 놈을 어쩌나, 쩟쩟》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내 이름을 부를 때보다는 다들 어머니의 표현을 본받아《갱충맞은 놈》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사전의 해석을 볼 것 같으면《갱충맞다》는 말은 대략 《조심성이 없고 아둔하다》는 뜻이였다. 《갱충맞은》나의 천성은 변을 볼 때도 유감없이 표현되였다. 성미가 급하다 보니 미리미리 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금 변이 나오려고 해야 뒷간으로 달음박질쳐 가다 보니 사전에 밑구멍을 씻을 수지 같은 것을 마련하지 못할 때가 십중팔구였다. 그래서 내 팬티는 언제나 샛노란 똥 꼬치들이 찍혀 있어 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또 늘 나를 《똥 누고 밑구멍 안 씻는 놈》이라고 놀려주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나는 소시적에 싯누런 콧물을 유난히도 많이 흘렸다. 《그··그 코물 닦아라, 발등 깨겠다!》 동네 아줌마들도 보기가 난처하여 늘 나를 보면 얼굴을 찡그리시군 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말은 듣기 싫어서 제 딴에는 코물 건사를 하느라고 훌쩍 들이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한 손으로 힝 풀어서는 우리 집 울타리 나무판자에 짓 발라 버리곤 하여 거기엔 내 코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나는 성미가 급하고 침착하지 못하여 어릴 때부터 장기, 트럼프 같은 놀이에는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승벽은 강해서 늘 형이나 동생과 맞붙기는 했지만 언제나 졌다. 한번은 큰 형이 재판을 서는 가운데 동생 호웅이와 장기를 두다가 두 판 련속 지고는 다시 한판 붙이자고 야료를 부렸지만 호웅이는 삼판량승이니 승부가 갈렸다고 더는 놀아주려고 하지 않자 호웅이의 멱살을 거머쥐고 싸움판을 벌리기도 한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쓰고 까근하게 따져 가면서 놀아야 하는 장기나 트럼프 같은 오락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내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무슨 일이나 빨리하고 빨리 끝내기 때문에 일이 거칠고 허점과 실수가 많았다. 일을 하다가도 이내 싫증을 느끼고 무슨 일에서나 용두사미 격으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시절의 이런 천성은 소년시절에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초중시절 동창생들과의 집체사진 한 장이 거칠고 실수 많았던 나의 천성을 형상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 목깃이 들쑥날쑥한 웃옷을 입고 찍은 이 사진을 보면서 나도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어른이 되여서도 이런 근성은 도무지 고쳐 지지를 않았다. 나는 일을 만드는 데는 능하고 개척하는 데는 일정한 추진력이 있지만 조직을 하거나 마무리 짓는 데는 흐지부지할 때가 많았다. 90년대 중반에 나는 연변대학과 사회의 소장학자들을 휘동하여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조직하여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의 전반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민간연구단체를 조직하였지만 약 2년 동안 운영하다가는 뒤를 꼬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2003년에는 첫 연변조선족사이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맡고 연변의 첫 문학사이트를 개설하고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사이버문학의 형성에 초석을 다져 놓기는 했지만 역시 뒤를 꼬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물로 여기에는 객관적 원인도 크게 작용하기는 했으나 뒤를 꼬지 못하는 내 천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달포전 몇몇 은사님들과 문단의 선배님들이 같이 또 비평가단체를 결성하자고 하면서 나를 회장으로 추대할 때도 나는 나의 이런 룡두사미의 뒤를 잘 꼬지 못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거듭 사양했다. 나는 정서의 기복이 심하고 마음속의 생각을 감출 줄 모르고 몽땅 얼굴에 드러낸다. 그래서 솔직담백하여 마음에 있는 것은 모두 털어놓으며 나쁘면 나쁘다, 좋으면 좋다고 즉석에서 태도를 표시하군 한다. 이것 역시 태여나서부터의 천성인 것 같다. 일곱 살 때인가, 누나가 나를 데리고 《인민영화관》에 가서 《닭털 꽂은 편지》라는 영화를 보다가 일본군대가 해와라는 목동이 몰고 가던 양들을 몽땅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는 《왜 남의 양을 잡아 가는가?》고 엉엉 울음보를 터뜨려 누나가 남우새스러워 나를 잡아끌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누나가 그 후 이 일로 두고두고 지청구를 해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곱 살 배기였던 내가 늘 목을 끌어안고 같이 잠을 자기까지 했던 우리 집 흰둥이 개를 개장수들이 끌어갈 때 결사적으로 대들다가 안 되니 땅바닥에 뒹굴어대면서 행악질을 해 일대 소란을 벌렸던 일도 우리 집에서 나의 괴벽한 성격을 거론할 때 늘 거들곤 하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평소에 나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또 달변이지만, 일단 정서가 흥분상태에 들어가면 논리적이지 못하며 격동될 때에는 더욱 조리가 없다. 심한 말더듬이가 되여 버린다. 그래서 때로는 옳은 시비를 가지고도 대방을 반박하거나 설득시키지 못한다. 한번은 문단에서 큰 시비로 큰 변론이 생겼는데 나는 너무 빨리 흥분되여 자기가 할말도 침착하고 조리 있게 천명하지 못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았던 우리문단의 녀류번역가 김련란 씨는 늘 나만 보면 놀려 준다.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흥분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호호호》 김련란 씨는 녀성의 특유한 섬세한 관찰력으로 나의 화상(畵像)을 그리면서《김관웅 박사 또한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라서 사람 좋고, 지식 많고, 생김새 또한 단상에 오를만도 하건만 그다지 중요시되지 못하고 한직으로만 떠도는 같다》고 내 천성의 정곡을 찌르기도 했다. 벼슬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언녕 알고 벼슬에 대해 체념한지 오래기에 무슨 한직(閒職)이고 요직(要職)이고는 별로 개의치는 않으나, 나는 확실히 김련란씨의 말마따나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 내여》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다섯 번이나 필화(筆禍)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십에 첫 보선이라고 어쩌다가 생긴 원장 벼슬자리도 《강물은 막아도 백성의 입은 막지 못한다》(2003년 3월 20일 《연변일보》에 발표되였음.)는 손바닥만한 칼럼 한편 때문에 천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다. 이 역시 성미가 너무 급하여 참을 인(忍)자의 진수(眞髓)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부모이든, 선생이든, 어른이든, 친구이든, 리해관계가 얽혀 있는 요긴한 인물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는 《거짓》이나 《아첨》같은 단어는 없다. 그래서 나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나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옳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자부하면서 제 잘난 멋에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잘잘못을 떠나서 쟁투는 언제나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와 같은 나의 저돌적인 천성으로 인해 나에게는 친구도 많지만 적도 친구만큼 많다. 한마디로 나는 애증이 분명하다.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물 타기를 하거나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립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량극적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웅이는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 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 체 하는 놈》이요,《뜨개소》요,《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나는 스스로 내가 남을 헐뜯고, 암해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런 악바리나 독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를 해오거나 혹은 병고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는 즉시 용서를 해주고 증오심은 삽시에 동정심으로 바뀐다. 나는 나를 《반역자 유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XXX가 림종에 가까웠을 때는 여러 번이나 그분의 병실에 가서 간호를 하면서 전신 목욕을 시키고 머리부터 발까지 더운 물로 깨끗이 닦아 주군 했다.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일부러 꾸며서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동정과 련민의 마음이 일어서 그리했던 것이다. 몇 년 전 나와 한 학과에서 근무하는 전학석 교수는 이상 분답게 나를 보고 이렇게 충언(忠言)을 해준 적 있다. 《관웅인 사람은 좋은데 말이야, 때로는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전학석 교수의 이 말에 나는 진심으로 승복을 했다. 나는 자신이 결함투성이, 허점투성이다 보니 어느 모로 보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성격을 가진 전학석 교수를 진심으로 탄복하여왔다. 전학석 교수는 우리 연변대학의 전형적인 젠틀맨이다. 단 한 점의 허점도 없이, 단 한마디의 실언도 없이,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의 륙십 평생을 살아왔다. 옷차림새도 언제보도 깔끔하고 걸음걸이마저도 품위가 있고 점잖았다. 전학석 교수는 대체적으로 태음인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늘 전학석 교수를 나의 귀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 분처럼 완벽한 남자로 돼보자고 한 동안은 결심을 내리고 자기를 다잡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죄다 허사였다. 범을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嬪), 추녀 동시(東施)가 미녀 서시(西施)의 얼굴 찡그리는 모양을 흉내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우고 점잖게 군자처럼 처신해 보려고 하지만 리성이 조금만 왼 눈을 팔아도 내 천성의 개꼬리는 다시 빳빳이 쳐들군 한다. 아마도 내 천성의 관성(慣性)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리라. 리제마는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이라는 이 네 류형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태양인은 절대로 태음인으로 바뀔 수 없고, 소양인은 영원히 소음인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소양인이 태음인으로는 더욱 바뀔 수 는 더욱 없다는 것이다. 서쪽에 해가 뜬다고 해도 곰 같이 미욱하고 저돌적인 천성을 가진 내가 전학석 교수 같은 젠틀맨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론리다. 한마디로 천성은 하늘이 낸 것이니 변할 수 없다는 론리다. 아마도 나는 좋으나 궂으나 어쩔 수 없이 리제마의 말처럼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하늘이 낸, 결함투성이인 이 소양인의 천성을 가지고 갈 것 같다. 사람은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갖고 나오는 천성이 있다. 성별이나 체격이나 체질은 두말할 것 없고 성격이나 기질도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정해진 천성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후천적인 수련이나 수양에 의해 더러 개변되기도 하겠지만 그 기본적인 골격은 크게 개변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江山易改, 本性難移)》라는 고훈(古訓)은 바로 이런 인간의 천성을 념두에 둔 말이 아닌가한다. 다만 전학석 교수의 말처럼 가급적이면 나의 소양인의 천성으로 인해 거듭 생겨나는 너무 큰 《오버》는 피할 수 있도록 시시각각 자신을 경계하고 가다듬고 수련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한다고 하여 하늘이 낸 내 천성은 고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설사 내 천성을 고치려고 하거나 컨트롤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균의 말처럼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낸 본성은 감히 어길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 생각 할 때면 윤동주 님의 《자화상》을 떠올리군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2006년 1월 16일 연길에서
24    (문학) 신《동심(童心)》설 댓글:  조회:3469  추천:53  2006-02-05
☆나의 문학관☆ 신《동심(童心)》설 김관웅 수정으로 만든 정교한 꽃병에 꽂아놓은 비단이나 플라스틱 같은 인조재료로 만든 꽃이 그 아무리 색깔이 현란하고 모양새가 크고 아름다워도 향기가 없는 조화(造花)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시골의 들쑥날쑥한 돌각담 우에 피는 호박꽃이나 거친 산언덕에 피여난 진달래꽃이 아무리 수수하고 왜소하고 초라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꽃이며 자연의 향기를 풍긴다.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진(眞), 선(善), 미(美)는 문학작품에 대한 3대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실성과 그에 따르는 자연스러움이 문학의 최고경지하고 생각한다. 루쏘의 《참회록》이나 파금의 《수상록》같은 작품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바로 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논픽션에 속하는 수필이 이러할 할 뿐만 아니라 허구에 의한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자신의 정감을 드러내는 표현적인 장르인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문학의 부동한 장르에서의 진실성이 부동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소설이나 희곡에서의 진실성은 주로 묘사된 객관적인 인간이나 사건이나 환경이 진실해야 한다면, 시에서는 표현된 주관적인 정감이 진실해야하며, 수필에서는 드러낸 작자의 내심세계가 진실해야 한다. 특히 수필에 있어서 진실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높다. 총적으로 문학은 거짓말이나 무병신음이나 잘난 척 하는 허장성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진실은 곧 문학의 생명이다. 문학작품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자면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말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속에는 없었던 말, 또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도 없는 남의 말을 가져다가 제가 말한 것처럼 슬쩍 새로 포장하여 자기의 이름을 붙여서 창작품이라고 내놓는 것은 도둑놈의 도둑질이다. 속에는 개똥이 들어있는데 입으로는 비단 같은 말을 토해낸다면 그것은 잘난 척 하는 허장성세이고 고상한 것 척 하는 위선이다. 마음속에 아무런 상처도 없고 고민도 없으면서 아프다고, 괴롭다고 짹짹거리면 그것은 무병신음이다. 작가들이 진실한 말을 하자면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동심을 가져야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황제의 새 옷》에서 어른들은 모두 《임금님의 새 옷이 화려하다》고 칭찬했지만 유독 아이만이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은 것은 바로 아이들은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순진무구한 동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이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여 가는 과정은 부단히 각양각색의 거짓말을 하는 것을 배우고 각양각색의 허위의 옷으로 자신을 꾸미는 위장술을 배워가는 과정으로서 어른들의 사회는 거짓말을 더 잘하는 사람이, 허위의 옷을 더 많이 마련한 사람이 더 잘 살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림표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못 한다》고 한 말은 어쩌면 어른들이 사는 우리 사회의 정곡(正鵠)을 찌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백설 같이 순결한 동심이 나날이 세속의 거짓의 먼지와 위선의 오물이 묻어서 추레한 어른의 마음으로 변질돼 가는 오염(汚染)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밝음에서 어두움, 즉 무명(無明)의 상태에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은 흔히 마음에 세속의 리해득실을 따지는 리기주의나 눈치보기주의 또는 기성 륜리나 도덕적 선입견의 때가 껴서 아이들처럼 진실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진정한 문학인으로 되는 과정은 어린이로부터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어른의 마음으로부터 어린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말기의 리탁오(李卓吾)의 《동심설(童心說)》이나 영국의 랑만파 시인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리탁오의 말처럼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다. 동심을 잃으면 진심을 잃게 되고, 진심을 잃으면 진실한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의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들 중에서 동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조선 중세기의 암흑 속에서도 마음속의 할 말을 다하고 할 노릇을 다하고 간 시대의 선각자 허균은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낸 것이요, 륜리의 분별은 서인(聖人)의 가르침이니,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낸 본성은 감히 어길 수 없다》고 했다. 허균이 말한 《하늘이 낸 본성》이란 바로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정이며 욕망이다. 이는 리탁오가 말한 《동심》이나 선종에서 말하는 《평상심(平常心)》과 그 뜻이 서로 통한다. 《심우도(尋牛圖)》나 고승들의 어록들을 보면 선종(禪宗)에서는 불도(佛道) 수행에서의 마지막의 진리를 깨달은 단계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불화(佛畵)나 법어(法語)로 표현하고 있다. 설익은 수행을 하면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 단계를 뛰여 넘게 되면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개인의 리해득실을 따지거나 남의 눈치를 의식하거나 혹은 관념의 장난에 빠져서《벌거벗은 임금은 옷을 입었다》는 어른의 거짓말로 되였다가, 다시금 《벌거벗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아이의 《동심(童心)》이나 《평상심(平常心)》 또는《하늘이 낸 본성》에로 돌아온다는 얘기를 형상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문학의 최고경지가 진실에 있고 문학의 생명이 진실성에 있는 이상 우리 문학인들이 이 문학의 최고경지에 오르는 과정은 부단히 마음속에서 거짓을 추방하고 진실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오로지 자기 마음속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 거짓의 옷들을 하나둘씩 다 벗어던져야 홀가분한 몸으로 문학의 상상봉을 향해 톺아오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한 마음은 바로 동심(童心)이며 평상심(平常心)이다. 동심이나 평상심은 그 어떤 거창한 리념이나 리상이나 현란한 기교나 잔재주가 아니라 림제(臨濟) 선사가 말했듯이 《옷입고 밥 먹고 똥 싸고 사랑하는 것》이다. 추우면 옷 입겠다고 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싶다고 말하고, 뒤가 마려우면 똥 싸고 싶다고 말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검으면 검다고 말하고, 희면 희다고 말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하고 싶다고 하는 말하는 것이 바로 동심이요 평상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영원히 어린이의 동심과 어른의 위선과의 싸움이다. 잘난 척,유식한 척, 깨끗한 척, 우아한 척, 고상한 척......하는 어른들의 무수한 《척병》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동심이 이겨야만 문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림제 선사의 말은 우리가 진솔한 본성에 눈떠서 주관과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시하고 재현하고 표현할 때 비로소 선종에서 말하는 이른바 불도(佛道)가 열린다는 뜻이다. 문학을 놓고 말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주관과 객관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재현하거나 표현할 때 비로소 문학의 참된 길이 열린다는 말이다. 앞으로 나는 나날이 내 마음속에서 어른의 위선을 몰아내고 어린이의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평상심(平常心)을 가지고 진실한 문학을 하고자 한다. 나의 문학관을 한마디로 귀납한다면 바로 동심(童心)에로의 회귀이다. 비록 엄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짓이라는 이 거짓의 세계, 허위의 세계일망정 거짓에 오염된 이 어른의 마음을 버리고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동심으로 돌아가서 문학을 하고 싶다. 2006년 병술년 정월 초이튿날
23    (수기) 학석 형을 보내며 댓글:  조회:3369  추천:51  2006-02-05
수기 학석 형을 보내며 김 관 웅 연변대학의 전학석 교수가 59세를 일기로 2006년 1월 23일에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제 오전 나는 고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누구나 례외없이 언젠가는 저승행을 하지만 너무 일찍이 가셨다. 하지만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고, 생사는 명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늘에 달리고 명에 정해진 일은 인간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다. 중국 속어에는 《금무적족, 인무완인(金無赤足, 人無完人)》이라는 말이 있다. 《순전한 금은 없고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직역을 할 수 있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누군들 결점이 없겠는가 하는 뜻이다. 그러나 전학석 교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함투성이인 나 같은 인간과 비기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 한번 흐트러졌거나 망언을 하거나 실언을 하거나 실수를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말이 무겁고 처사가 신중하고 일거수일투족, 일언일행이 언제나 근엄하고 점잖고 심지어 옷을 입어도, 길을 걸어도 언제나 반듯하고 점잖았다. 연변대학의 젠틀맨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분이다. 한번은 학석 형이 나한테 이렇게 충언을 한 적 있었다. 《관웅인 다 좋은데 때론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학석 형의 이 지적을 받고 나는 학석 형을 거울로 삼고 신중하게 행동하고 점잖게 처사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워낙 점잖치 못한 덜퍼리 천성이라 쉽게 고쳐 지지를 않았다. 말이 많고 행동이 경박하여 실수가 빈발하던 내가 일조일석에 점잖게 변해지기는 어려웠다. 범을 그리려다가 오히려 고양이를 그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嚬), 추녀(醜女) 동시가 미녀(美女) 서시의 흉내를 내는 꼴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점잖을 피울것이 아니라 하늘이 낸 내 천성대로 살기로 작심했다. 나는 학석 형을 본받으려고 하는 동안에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너무 완벽하게 살려면 힘을 너무 많이 쓰고, 신경을 너무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을 심심하게 깨닫게 되였다. 석달 전, 연변에서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해로 확진하러 가던 날 학석 형은 나한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천년을 살 것처럼 아글타글하면서 사는 거야. 그것이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은 거야.》 이것이 내가 학석 형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씀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유언이라면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唐詩)에도 《백살을 넘기지 못하는 인생들이 늘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사는구나(人生不滿百, 常懷千年憂)》라는 시구가 있다. 나는 학석형이 투병 중에 있었던 이 석달 동안 늘 완벽에 가까운 이 분의 이 말을 곱씹으면서 음미를 해보았다. 학석 형이 저승에 가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근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유유자적하게 사시기를 빈다. 2006년 1월 25일 연길에서
22    (단상)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 댓글:  조회:3304  추천:36  2006-02-05
단상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 김 관 웅 2006년 1월 22일 오후, 《백연(白燕)》잡지의 창간호 발행식이 세기호텔에서 거행되였다. 신라방이 즐비했고 신라의 유민들이 나그네로 떠돌아다녔던 절강 이오에서 잡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잡지의 주역은 바로 연변에서 문학청년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스스로 문학에 미쳐 사는 김춘택이라는 3급장애자이고, 그 후원자는 절강 이우에서 무역을 하고 있는 김춘택 씨의 동창생 공기철씨였다. 불구자 동창생을 믿고 거금을 내여 책자를 만들어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인 연변에서 출간식을 하려고 몇 만리를 차를 몰고 달려온 공기철 씨의 사내다운 패기와 진지한 우정에 깊이 감동했다. 거짓과 허위가 란무하는 이 감동증발시대에 처음으로 진한 감동을 받은 뜻깊은 문학행사에 참가했다. 휄체어에 앉아서 내내 기념식을 지켜보고 앉아 있는 김춘택씨를 바라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두 발이 성한 이들도 언감생심 하지 못하는데, 김춘택 씨는 휄체어를 타고 황하, 장강을 넘어서 강남의 대지, 로신의 고향 절강 땅에서 한글문학의 씨앗을 파종하였다. 신라방이 즐비했던 강남땅에 또 다시 배달문화의 꽃씨를 심었다. 너무나 장한 일을 한 것이다. 우리민족의 후대들 중에 이러한 뜻있는 젊은이들이 있음으로 하여 가슴이 뿌듯했다. 문학은 아픔으로 크는 것이다. 아픔을 디디고 오늘까지 문학의 길을 끈질기게 걸어온 김춘택 씨가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아픔도 용감하게 디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장해적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도산 안창호선생은 《락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했다. 그러니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고 할 수 있다. 김춘택, 공기철 같은 뜻있는 청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우리민족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졌다. 두 젊은이가 뿌린 배달문화의 꽃씨가 강남땅에서 움트고 자라고 꽃을 맺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요절된 신라방의 꿈이 영원토록 무궁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김춘택, 공기철 씨의 건투를 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 연변문인들의 사심없는 지원과 성원을 진심으로 빈다. 2006년 1월 24일 연길 자택에서
21    (단상) 인격과 문격 댓글:  조회:3252  추천:38  2006-02-05
☆단평☆ 인격과 문격 김 관 웅 문여기인(文如其人),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성구가 있다. 작가의 인격(人格)과 문격(文格)은 같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같은 정도가 문학의 각 장르마다 서로 다르다. 허구를 능사로 여기는 소설에서는 인격과 문격이 완전히 통일된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장끼를 부리는 시에서도 인격과 문격이 완전히 통일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조(自照)적인 문학으로서의 수필문학에 있어서, 진실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수필문학에 있어서는 진솔한 인격과 진실한 문격의 통일을 더 없이 강조한다. 때문에 우수한 수필은 진솔한 인격과 진실한 문격이 서로 유기적인 결합된 것이다.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꼭 문격이 높은 수필을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격이 낮은 사람이 높은 문격을 갖춘 수필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설사 높은 문격을 갖춘 것처럼 가장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필경은 거짓이다. 탕녀(蕩女)가 숙녀(淑女)처럼 수필을 쓴다고 하여도 그것은 위장술에 지나지 않으며, 소인(小人)이 군자(君子)처럼 수필을 쓴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2006년 2월 3일 자택에서
20    (우화)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 댓글:  조회:3618  추천:46  2006-01-23
☆신작우화☆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 김 관 웅 100년에 있으나 마나한 큰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600여 호 되는 한 마을에는 집 한 채도 쌀 한 톨도 남김 없이 몽땅 큰물에 씩쓸이를 당했다. 국제적십자 기구에서는 텐트, 식량, 의료기구와 약품 등 극히 제한된 구호물자를 공수(空輸)를 통해 이 마을에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 마을의 촌장과 몇몇 촌민위원회의 간부들이 이 구호물자들을 골고루 분배해준다는 명분으로 몽땅 차지하였다. 물론 소학교의 복학(復學) 위해 텐트 몇 개를 내놓기는 했다. 이러구러 여름,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닥쳐 왔지만 촌장 주위의 몇몇 간부들만 텐트 안에서 밥을 끓여 먹고 감기가 걸리면 감기약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냈다. 국제적십자기구에서는 자기들이 보내준 구호물자들을 어떻게 분배했는가 찾아와서 실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뒤가 쫄리지도 않았다. 600여 호의 촌민들은 여전히 추운 한지(寒地)에서 거적을 치고 살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였지만 누구하나 왜 구호물자들은 우리들한테 분배를 해주지 않고 너희들만 텐트 안에서 구호식량을 먹고 구호약품을 쓰면서 편안하게 지내느냐고 따지고 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일부 굶주린 촌민들 중 개별적인 약삭빠른 이들은 텐트 안을 기웃거리다가 그안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밥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기신기신 텐트 안에 들어가서 촌장한테 아첨하면서 턱찌끼나 얻어먹곤 했다. 그러고는 촌장의 지지와 옹호자들이 되여 뒤구석에서 투덜거리는 일부 불평객을 무마하는 선무(宣撫)공작대원으로 탈바꿈하곤 하였다. 이런 선무공작대원으로 된 인간들은 달갑게 노복으로 되려하는 인간 쓰레기들이고 불평이 있어도 감히 불평을 부리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파금 옹의 말을 빈다면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이다. 이른바 이란 몸은 노예로부터 풀려난지 오래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컬은 말이다. 21세기의 오늘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시골의 무지렁이 사회만이 아니라 시대의 량심과 지혜들이 운집해있다는 지성인 사회에도 이런 이 가득하다. 오호라, 노예사회가 지나 간지도 몇 천 년이 지났건만 노예근성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구나!!! 2006년 1월 23일 연길에서
19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 -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 댓글:  조회:3955  추천:50  2006-01-19
☆평론☆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 -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 김 관 웅 김학철 옹은 중국조선문학의 대부(代父)라고 평가되고 있는 분이다. 김학철 옹(1916〜2001년)은 함경남도 원산사람이다. 우리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해항일투쟁에 자진하여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워온 투사이고 이 세상의 모든 불의에 몸을 던져 저항한 중국 조선족동포문단의 저명한 소설가이고 수필가이다. 김학철 옹은 군자(君子)요 의인(義人)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002년 10월 김학철 옹이 타계하기 직전에 한마디의 유명한 유언을 남기셨다.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고 사람답게 살려면 불의에 저항하라” 김학철 옹의 의미심장한 이 유언은 사실은 자신의 일생에 대한 고도의 개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의(義)와 이(利)는 선택의 문제임을 시사하고 있다. 의(義)와 리(利)는 흔히 겸하여 얻을 수 없으므로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해야 함을 맹자는 다음과 같이 메타포를 동원하여 비유하고 있다.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대 어물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대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兼得, 舍魚而取熊掌也. 生, 我所欲也; 義, 我所欲也.二者, 不可兼得, 舍生而取義也.)”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김학철 옹은 어물도 걷어 안고, 웅장도 걷어 안은 그런 욕심쟁이 속물이 아니다. 웅장만 택하고 어물은 미련 없이 버렸다. 즉, 김학철 옹은 의(義)와 리(利)의 양자택일(兩者擇一)에서 한평생 의(義)만 선택하여온 분이다. 김학철 옹의 일생은 대중의 이익과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한평생 정의를 견지하고 불의에는 목숨을 던지면서 싸워 온 일생이었다. 맹자님의 말씀을 빈다면 김학철 옹은 “부귀에도 음탕해 지지 않고 권세와 폭압에도 굴복하지 않은(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舍生取義)” 군자요, 의인(義人)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학철 옹의 이러한 군자, 의인으로의 본질은 자신의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따라 가듯이 결코 남들을 추종하다가 얻어진 것은 아이라 주체의 자유선택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저는 이 점을 「김학철 옹과 자유선택」이라는 수필에서 언급한적 있다. 지금도 저의 홈페지에 들어가시면 이 글을 볼 수 있다. 중국말에 《개관론정(蓋棺論定)》이라는 말이 있다.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죽은 다음에 가서야 옳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김학철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경력과 그 와중에서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평생 정의를 위해 싸우셨고 죽는 그 순간까지 80여성상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사신 분은 세계문화사적인 견지에서 보아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는 일본의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大村益夫)수가 2003년 10월에 있었던 김학철선생 1주기추모 및 김학철선생문학선집 출간기념모임에서 김학철 옹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방관자청(旁觀者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방인인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의 평가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이다. 김학철 옹은 불세출의 투사이며 인격자이시다. 지난 한세기 남짓한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가장 주체성 있게 살아오신 지성인의 귀감이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김학철 옹같은 문학과 인격의 거목의 모시고 있었다는 것을 뿌듯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요즘 나는 대학의 강단에서 실존주의문학의 철학적인 기초인 사르트르의 존재과(存在觀)을 강의할 때마다 김학철 옹의 생애를 실례로 들어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군 한다. 주지하다시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의 총론점은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란 태여날 때는 하나의 백지장 같은 존재이다. 결코 엄마의 배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여 나는 것은 아니다. 김학철 옹도 예외일 수 없었다. 소년시절의 김학철 옹은 탐스럽게 열린 남의 집 호박을 활로 쏘아서 벌집을 만들어놓는 개구쟁이였고, 《넉가래는 못 받아오고 온통 오리만 받아와서》어머니에게 늘 지청구를 듣는 평범한 소년으로서 그 무슨 신동으로 태여 나신 분도 아니다. 그리고 투사의 본질을 지니고 태여 나셔서 어려서부터 반일의식을 갖고 있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5학년부터는 국사라는 것을 배우는데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니 신무천황(神武天皇)이니하는 따위를 내리 먹였으나 별 거부감 없이 그대로 배웠다. 오히려 재미가 있을 지경이었다.”김학철 옹은 자서전 《최후의분대장》에서 자신의 철없던 소년시절을 이렇게 술회하셨다. 우리 인간들은 우연하게 이 세상에 주어졌을 뿐이다. 먼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태여 나서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인간의 주관성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야 인간의 행동이 있게 된다.한 인간의 본질은 그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아의 개인의지에 따른 부단한 자유선택에 의해서만 악한 사람이냐 착한 사람이냐, 군자냐 소인이냐, 투사냐 반역자이냐, 용감한자이냐 비겁한 자아냐를 판단할 수 있으며 비로소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며 자기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실존주의에서 일컫는 존재란 자아의 존재를 뜻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아가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할 것 같으면 인간은 한 장의 백지장에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어떤 내용의 그림을 그리고 어떤 색채, 선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나름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다 빈치의 《모나리자》같은 명화가 될 수도 있고 화장실의 락서같은 추잡한 그림으로 될 수도 있다. 김학철 옹이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기 위한 첫 번째의 자신의 개인의지에 따른 자유선택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올라와서였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이상화의 유명한 시와 군자금을 모으러 서울로 들어왔다가 체포당해 징역을 살게 된 “서원준사건”은 청년 김학철이 직업혁명가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로 되였다고 한다. “가출을 결행하는 날 ‘학교 유도(柔道) 부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트렁크에다 유도복과 다른 옷가지 따위를 버젓이 챙긴 뒤에 짐짓 례사롭게 휘파람을 불면서 집을 나서는데 머리가 착잡해서 ‘내가 미친 짓을 하잖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김학철 옹이 대한제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혈혈단신 상해로 떠나던 그날의 내심의 모순상태를 술회한 부분이다. 이처럼 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선택하는 자유선택의 과정은 심리적인 모순과 갈등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날 김학철 옹의 생각이 바뀌어 서울에 눌러앉으셨다면 김학철 옹의 인생은 아주 다른 양상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무사하게 상해에 도착하여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김학철 옹은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이념선택을 하셨고, 국민당군대로부터 나중에는 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총을 들고 일제와 피 어린 투쟁을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김학철 옹의 본질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늘 변화, 발전하고 있으며 태여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시각각 크고 작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김학철옹에게 있어서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 선후에 자신의 본질에 대한 선택은 더욱 준엄하셨다. 1943년, 태항산 지역에 있는 산서성 호가장 전투에서 김학철 옹은 왼쪽 대퇴골이 파편에 깎여 나가는 중상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다. 이는 아마도 김학철 옹의 일생에서 가장 준엄한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그것은 죽음이냐 삶이냐 하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나는 들것에 들려서 일본군과 함께 황망히 퇴각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 편이 쏘는 탄알들이 전후좌우에 누리떼 튀듯 하는 가운데 나는 난생처음으로 일말의 공포감도 없이 태연할 수가 있었다. ─제발 한방 맞아만 다오. ─우리 탄알에 맞아죽으면 얼마나 고마우랴.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려울게 없다는 경지에 전생애를 통해 내가 딱 한번 이르렀던 순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본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곤난이나 시련은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학철 옹의 비범한 용감성과 초인간적인 의지는 바로 이러한 피와 불과 죽음의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석가장의 나카사키 형무소에서의 3년 이상의 감옥살이도 김학철 옹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차례진 것입니다. 김학철 옹은 징역을 살고 다리 하나 일본 땅에 묻을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으셨다. 3.1절을 맞으면서 한국의 한 단체에서는 7백명이 넘는 친일파들의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광수, 최남선을 필두로 하여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많은 거물급의 인물들도 섞여있었다. 암흑기에 친일파로 전략한 많은 거물급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반일적인 의식과 감정을 지니고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선각자들이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얼빠진 선택으로 하여 이광수 류들은 영원히 역사의 치욕주에 이름이 아로새겨지고 말았지 않았는가. 이광수 류들을 두엄무지를 헤집는 닭무리들에 비긴다면 김학철 옹은 창공을 나는 수리개에 비길 수 있다!!! 해방이후 김학철 옹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자유선택은 더욱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일생을 바쳐서 충성한 이념과 제도가 흔들리고 그리고 수령의 결함으로 인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0년 동란 시기에 심지어는 곽말약 같은 중국문단의 거물들도 4인방에게 비굴하게 허리를 굽석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댔지만 김학철 옹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신의 고귀한 머리를 한번도 숙이지 않으셨다. 김학철 옹의 추호의 두려움도 없는 저항정신을 알려면 중국의 문학거장과 비교를 할 필요가 있다. 로신은 추호의 노예근성도 없이 뼈마디가 가장 억센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흔히 파금 옹은 로신 선생처럼 용감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들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비교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로신은 36년에 별세하여 그 후의 문단투쟁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신이 살아 있었으면 어떻게 되였을까? 이런 가설을 내놓고 로신이 해방 후 쭈욱 문화대혁명까지 계속 살아 계셨더라면 여차여차 했을 것이라는 것은 공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력사에는 가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금 옹과 김학철 옹은 비교의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파금 옹과 김학철 옹은 모두 해방 후 살아 계시면서 쭈욱 문화대혁명까지 겪으셨기 때문이다. 파금 옹이 문화대혁명의 호된 충격을 받고나서 개혁개방 후에야 《신은 없다》고 말씀했지만 김학철 옹은 이미 파금 옹보다 20여년 앞선 1965년에 이미 《20세기의 신화》에서《신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김학철옹은 파금 옹을 포함한 중국의 그 어떤 문학대가들에 비해서도 조금도 손색없는 시대의 선두에 서셨던 선각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파금 옹은 결코 낮추 평가할 수 없다. 파금 옹이 《수상록》에서 보여준 자아폭로, 자아비판의 참회정신은 김학철옹의 저항정신보다 더욱 전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금 옹 같이 문화대혁명중에서 한신(韓信)처럼 남의 두 가랑이 사이로 기여 나가는 굴욕을 참으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문화대혁명 중에서 대다수였다면 김학철 옹 같이 목숨을 불사하면서 똑 부러지게 그 시대에 저항 투사는 지극히 개별적인 까닭이다. 파금 옹의 《수상록》이 보여주고 있는 기본정신은 문화혁명 중에서의 불의와 폭압에 용감하게 저항하지 못했던 부끄러웠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아폭로, 자아비판의 참회정신이다. 파금 옹은 자기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을 통하여 사회상의 보편적인 불의를 꾸짖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루쏘와 로씨야의 대문호 똘쓰또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문학적 성취와 중국문학에서의 지위 같은 것은 그만 두고 단 저항정신만을 비교한다면 중국에서 로신을 포함해서 다리뼈, 허리뼈, 목뼈가 가장 단단한 분은 아마도 우리의 김학철옹 일 것이며 저항정신이 가장 투철하고 치렬한 분은 아마도 김학철 옹일 것이다. 척각(隻脚)으로 이 땅에 계셨었지만 가장 올곧게 서 계신 분은 아마도 김학철 옹이실 것이다.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을 쉽게 표현한다면 바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다라도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는》정신이며, 《시퍼런 칼이 숨통을 겨누어도 할 말은 다하는》정신이다. 김학철 옹이 10년 옥고를 치르고 사회에 돌아오셨을 때는 65세의 고령이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또 한번의 중대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씀을 다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겠다는 비장한 결의였습니다. 김학철 옹은 자신의 이 선택을 비범한 노력으로 충실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거의 대부분 글들은 바로 출옥후의 만년에 불철주야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2001년 여름에 김학철 옹은 또 한번의 비장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의료사고로 받은 내상이 도지자 김학철 옹은 자신의 유언에서처럼 《사회와 가족들에게 부담을 더 주지 않기 위해》결연히 죽음을 선택하였다. 삶에 연연한 분이라면 병원에 입원해서 고급약을 쓰고 치료를 받으면 아마도 2, 3년은 수명을 얼마든지 연장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학철 옹은 단호히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추도회도 하지 못하게 하셨고 몇몇 생전의 친우들과 문단의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시면서 조용히 두만강물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든 절차까지도 선생께서 일일이 선택하여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냉철한 이성으로 죽음과 그 방식을 선택한 문인은 이 세상에는 아마도 유일무이할 것이다. 김학철 옹은 여러 차례의 중대한 인생선택에서 단 한번도 부끄럽고 추레한 선택을 한 적이 없이 떳떳하고 깨끗한 선택을 하셨다. 단 한번도 불의를 선택하여 불의의 편에 선적이 없이 언제나 정의를 선택하셨고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불사하시면서 용감히 싸우셨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 옹은 편안함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기구한 80여성상을 살아오셨다. 그리하여 윤동주 님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80여성상을 사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내시였다. 이는 실로 우리 속인(俗人)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성(聖)의 경지 아닐 수 없었다. 김학철 옹이 장구한 사회실천 속에서 만들어 오신 가장 귀중한 억센 사나이의 정신, 불요불굴의 저항정신, 백절불굴의 강철 같은 의지, 특히 만년에까지 보여준 그 추호의 노예근성과 아첨기도 없이 날카롭게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비리를 행해 투창을 날리는 그 용기와 의지와 작가적 양지(良知)는 아마도 앞으로도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상당히 긴 동안 그 계승자가 없을 것이다. 학술사나 예술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살아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가운데 후세에까지 두고두고 남을만한 독창적인 업적이나 고매한 인격을 남긴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다. 그것은 살았을 때 유명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유행사조 그리고 당대의 가치관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부하여 명예를 누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고 나면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일수록 죽어서도 이름을 휘날리려고 죽기 전에 자기를 명예롭게 만들어놓으려고 애쓴다. 시비를 세운다, 문집을 만든다 하면서 부산을 떨지만 이는 죄다 부질없는 짓거리이다. 이렇게 부산을 떤다 해서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촐랑거리는 인간들과는 달리 김학철 옹은 분명히 살아생전에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세상을 뜬 후 더욱 그 영명(英名)이 빛을 뿌리고 있다. 비록 생전에 김학철 옹의 문학비가 세워지지 않았지만 사후에는 문집이 출판되였고 국내외에서 김학철문학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학철옹의 작품세계와 그의 고매한 인격은 진작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기념비로 우뚝 솟아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멸의 기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김학철 옹이 80여성상 자아의 가장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해 자신의 수준 높은 문학의 기념탑과 인격의 산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일 김학철 옹처럼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에 좇아 《자유선택》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지만 따른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쇠사슬에 결박당한 노예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바람에 따라 돛을 달고, 동풍이 불면 동풍파요, 서풍이 불면 서풍파요, 남풍이 불면 남풍파요, 북풍이 불면 북풍파로 변신하는 눈치꾼, 바람잡이들이 득실거리는 이 황당한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니 김학철 옹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학철옹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올곧은 선비인 것 같다. 김학철 옹의 치열한 문학정신은 마땅히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문학정신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학철 옹도 결함이나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분의 맹렬한 비판정신은 자연히 조화성과 포용성이 모자라게 했으며 일부 독선(獨善) 적인 경향도 존재하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김학철 옹이 살아 계셨을 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옹의 필봉에서 또 무슨 불똥이 자기 몸에 튕길까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이 속세에서 누구나 김학철 옹처럼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은, 네모반듯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은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 있어서는 한낱 이상(理想)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항로를 가리켜주는 등대(燈臺) 같은 존재이며, 휘날리는 전진의 기치이고, 어둠을 밝혀주는 홰불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는 무엇이 있소? 하고 묻게 되면 선뜻 우리에게는 김학철 옹이 있다고 대답한다. 정녕 중국조선족문인들은 김학철 옹 같은 어르신님을 모셔온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로지 김학철 옹이 밝히고 있는 등대를 향해 나아가야만 우리 중국조선족동포문학은 자기의 올바른 항로를 따라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1월 17일 연길에서
18    (잡기) 어머님의 다섯가지 은혜 댓글:  조회:3459  추천:51  2006-01-16
*잡기* 어머님의 다섯가지 은혜 김 관 웅 첫번째는 생명을 주신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것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참 재미가 납니다. 이 재미 나는 세상에서 웃고 떠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신 어머님의 은혜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두번째는 건겅한 몸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나를 낳으셔도 바위덩이 같이 낳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날 이때까지 감기 한번 별로 앓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머님께서 주신 가장 귀중한 자본입니다. 세번째는 바보가 아닌 머리를 주신 은혜입니다. 77세의 고령에 마작을 배워서 터득한 우리 어머님의 머리는 보통은 넘습니다. 이러한 어머님의 IQ를 조금이라도 닮아서인지 명색이나마 학자로 한평생 학문을 연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크나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네번째는 여린 마음과 착한 심성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기질적으로 이악스럽지 못하고 리속에 밝지 못하고 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당하면 당했지 남을 등쳐먹거나 남들앞에서 시뚝할 줄 모르는 여린 마을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런 어머님을 닮아서 나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당할 때는 많아도 당한 것만큼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길러주신 은혜입니다. 다른 어머님들은 자식을 길러 주시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하실 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 어머님은 아버님의 쥐꼬리만한 박봉으로 너무너무 고생하시면서 우리 칠남일녀 팔남매를 기르셨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 자식들이 서너 평생을 더 산다고 해도 다 갚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맹교(孟郊)는 그 유명한 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였는가 봅니다. 자애로운 어머님는 바느실 잡고 먼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네. 한뜸한뜸 정성들여 누비면서 언제나 돌아올까 시름에 잠겼네 따사로운 태양의 은혜를 풀들이 어찌 갚을수 있으랴.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은혜는 저 하늘우의 태양 같은 존재입니다. 그 해볕아래 자라난 풀 같은 우리 자식들이 어찌 태양 같은 어머님의 은혜를 다 갚는단 말입니까.
17    (詩評) 재목, 배 그리고 나그네 댓글:  조회:3894  추천:49  2006-01-13
재목, 배 그리고 나그네 김 관 웅 “언, 상, 의(言, 象, 意)”론은 문학작품의 본문(本文, text) 층차(層次)에 관한 문제다. 동서양의 문론들에서는 모두 문학 본문의 구성을 표면으로부터 리면에 이르는 다층차의 심미구조로 간주하여 왔었다. 그러나 처음에 제기될 때는 단순한 본문 층차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였다. 중국 고대의 『周易·繫辭』에서는 인간의 사상의 표현문제를 탐구할 때 “글은 말을 다는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는 표현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하면서“성인은 상을 세워 뜻을 다 표현한다(聖人立象以盡意)”는 견해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제기한“언,상,의(言, 象, 意)”의 문제는 비록 본문(本文, text)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광의적(문학과 비문학을 포함한) 본문 구성의 3요소로 이해할 수 있다. 후에 중국 삼국시기의 저명한 경학가 왕필(王弼)은 『周易』을 해석할 때 보다 상세하고도 명확하게 이 3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였다. “상(象)이란 의(意)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言)이란 상(象)을 밝게 하는 것이다. 의(意)를 드러내는 데는 상(象)만한 것이 없으며, 상을 드러내는 데는 언(言)만한 것이 없다.언(言)은 상(象)에서 생겨나므로 언(言)을 더듬어 상을 볼 수 있고, 상(象)은 의(意)에서 생기므로 상(象)을 더듬어 뜻을 볼 수 있다. 의(意)는 상(象)으로 하여 드러나고, 상(象)은 언(言)으로 하여 드러난다.” (夫象者, 出意者也. 言者, 明象者也. 盡意莫若象, 盡象莫若言. 言生于象, 故可尋言以觀象. 象生于意, 故可尋象以觀意. 意以象盡, 象以言著.) 왕필의 견해에 따르면 “ 언, 상, 의(言, 象, 意)”는 표면으로부터 리면에 이르는 심미층차(審美層次)구조이다. 사람들이 먼저 접촉하게 되는 것은 언(言)이고, 그 다음에야 언(言)을 통해 상(象)을 엿볼 수 있게 되며, 마지막에야 비로소 상(象)이 암시하는 의(意)를 깨닫게 된다. 이 세 요소는 모두 중요한 것으로서 이 중에서 그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아니된다. 중국 삼국시기 왕필이 이처럼 전면적인 본문구성관을 가졌다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언어적인 차원에만 머물러있으면 그것은 말장난이고, 형상을 만드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도 그것은 문학으로서는 높은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없으며, 유려한 언어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 속에 깊은 웅대한 뜻을 부여하여야만 높은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있다. 메타포를 동원한다면 언(言)은 재목이요, 상(象)은 배요, 뜻은 나그네이다. 언어라는 재목으로 풍랑에 견디는 튼튼한 배를 무어서 나그네를 싣고 바다를 건너 독자들이 가다리는 대안에까지 닿아야 문학의 과정은 끝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시단에는 재목을 켜고 다듬는 데 그치거나(말장난) 배를 만드는데 그치는(이미지의 폭력조합이요 뭐요 하면서 이상한 이미지조합 작업에만 몰두하는 현상)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어렵사리 배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배에는 정체불명의 나그네가 타고 있어 도저히 독자들이 기다리는 대안에로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배에 탄 나그네가 겨우겨우 독자 곁에 다가섰다고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것 같은 국적불명, 인귀불명(人鬼不明)의 소리만 질러대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2006년 1월 12일 연길에서
16    (수필) 산의 사계절 댓글:  조회:3939  추천:32  2006-01-12
☆ 수필 ☆ 산의 사계절 김 관 웅 내가 연변의 첫 등산 동아리인 연변백두산문인산악회에 가담하여 산행을 시작한지도 어언간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전문적인 산악인도 아니요, 특수한 장비를 갖추고 보기만 해도 아찔한 암반을 타거나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톺아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풍 가는 간단한차림으로 도시락과 물 한 병 넣은 배낭 하나만 달랑 메면 족하다. 그리고 교통도구도 따로 없이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초만원 공공버스 속에서 부대끼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버스 요금을 가지고 차장아가씨와 콩팔칠팔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그래서 대부분 교통비로 충당되는 회비를 한해에 100원 남짓이 내면 별 부담이 없이 1년 동안 등산을 할 수 있다. 이만한 싸구려 여가선용은 아마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선지를 미리 정하지도 않는다. 문자 그대로 행운류수(行雲流水)다. 여유작작하게 아침 9시에 약속한 집결장소에서 모였다가 버스정류소에 나가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공공뻐스에 올라타면 어디라도 좋다. 산에 가서도 일정한 등산코스가 없다. 산짐승처럼 아무데나 산속의 울창한 나무숲을 꿰질러 다닌다. 우리와 한동안 등산을 같이 했던 한국 선문대학의 황송문 교수는 우리의 등산 스타일을 《조선족산행(朝鮮族山行)》에서 이렇게 시로표현하고 있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렬 종대로 정겨운 이야기를 꽃잎처럼 날리면서 줄줄이 줄줄이 오르지만 산허리나 산의 무릎이나 겨드랑이나 어지간히 올라서 발동이 걸리면 갑자기 까투리가 되어 기자 기자 기자 기자 구구 구구 구구 구구 꽁지야 날 살리라고 옆으로 샌다. 질서 정연하게 나있는 길을 두고 길 없는 잡목들 부러뜨리며 멧돼지 치오르듯 자꾸만 오른다. 조선족 산행은 창작 실습인가 서스펜스와 스릴과 액션, 미지의 인연을 위한 복선(伏線)까지 클라이맥스로 클라이맥스로 가기는 자꾸 가는데 결말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항일 빨치산 유격훈련이다. 모로 가든 세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까투리식이든 메돼지식이든 우리의 산행은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등산팀은 일년 사계절 주말이나 휴일이면 례외 없이 산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백두산을 비롯한 연변의 산들은 말 그대로 무른 메주 밟듯 했다. 한달에 4회 정도, 1년이면 50회, 만 10년이니까 500회는 몰라도 아마 400회는 웃돌 것이다. 적어도 400회 이상 산행을 하는 중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산의 정취(情趣), 산의 매력(魅力)에 푹 빠지게 되였다. 산행을 하기 전에는 멀리서 모아산(帽兒山)이나 마반산(磨磐山)을 바라보면서 일년 사시장철 변함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산행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였다. 산은 불변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 변화속에서 불변하는 동중정(動中靜)의 아름다움과 남성적인 양강지미(陽剛之美)와 녀성적인 음유지미(陰柔之美)를 한 몸에 겸비한 혼성미(混成美)의 극치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바로 이것이 산이 사람들을 영원히 잡아끄는 매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따라 자기 나름대로 산으로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유혹한다. 봄의 산에서 나는 삶의 희망과 힘과 랑만을 느낀다. 봄은 아침이요, 소년(少年)과 청춘 그리고 꿈과 랑만의 상징이다. 그래서 봄의 산은 색동저고리 입은 소녀들처럼 알락달락 예쁘게 꽃단장을 한다. 봄의 선구자는 진달래다. 이른 봄 4월 중순 이후면 연변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치며 봄소식을 알린다. 그 연분홍 빛깔에서 나는 흘러간 청춘의 힘과 희망과 랑만을 다시 느낀다. 진달래가피면 련달아 철쭉이 피고 코언저리에 주근깨가 살짝쌀짝 보이는 시골 새악씨 같은 개나리가 수줍게 피고 이름 모를 뭇 꽃들이 다투어 피고 진다. 그리고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뾰족뾰족 새움이 튼다. 언 땅을 강인하게 비집고 돋아 올라온 씀바귀를 캐면서 생명의 위대한 힘을 실감한다. 그것을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계곡수에 대수 헹구어 점심에 오구작작 산정 우에 모여앉아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온 몸에 마구 청춘의 힘이 솟구치는 것만 같다. 어쩌다가 물이 많이 나는 축축한 택지(澤地)를 지나다가 봄 미나리 밭을 만나게 되면 당장 도시락을 풀어 헤치고 초고추장에 뚝뚝 찍어 그 자리에서 즉석 봄 미나리 추렴을 한다. 그 선뜻선뜻하고 시원시원한 향기 진한 맛은 봄에만이 진짜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같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식도락이다. 여름 산에서 나는 생명의 풍성한 성장과 뜨거운 정열을 느낀다. 여름은 정오이요, 장년(壯年)의 정진(精進)과 노력과 상승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름 산은 구척장신의 헌걸찬 사나이처럼 푸른 두루마기를 의젓하게 떨쳐입는다. 온통 푸른 색상으로 성장(盛粧)을 하고 나선다. 그 푸르른 숲의 바다 속에서, 그 무성하는 생명 앞에서 나는 나의 30, 40대 중년시절의 분투와 성장의 계절을 회상하며 한번 밖에 없는 이 생명을더욱 뜨겁게 사랑해야하겠다고 결심하군 한다. 일회 인생의 가치는 크고 성장하고 열심히, 뜨겁게 사는데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더우면 더울수록 땀을 흠뻑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톺아 오른다. 내 꿈의 정상(頂上)을 향해 부지런히 톺아 오른다. 정상에 올라 야호 삼창을 하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면 내 생명의 나무도 한그루의 상록수로 되여 하늘높이 솟아오름을 느낀다. 가을 산에서 나는 생명의 성숙과 결실을 느낀다. 가을은 오후이요, 아직은 꺼지지 않은 초로(初老)의 욕망의 불길과 조용한 사색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산은 단풍이 물들어 울긋불긋 단장을 한다. 옛날 시인묵객들이《서리 맞은 단풍 2월 봄꽃보다 아름답구나(霜葉紅於二月花)》라고 읊조리였듯이, 《석양은 무한히 좋으나 황혼에 가까웠구나(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라고 개탄했듯이 가을 산은 아름답지만 그 것은 잠간일 뿐 이내 조락(凋落)에로 직행한다. 황금나락 출렁이던 풍년벌은 허허롭게 비워지고 청산(靑山)은 입고 있던 푸른 성장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락엽으로 날려 보낸다. 나도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내 몸둥이와 팔다리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욕망의 잎새들을 하나 둘 미련 없이 락엽처럼 날려 보내는 련습을 한다. 채찍을 후려갈기듯 매섭고 앙칼진 삭풍(朔風)앞에서도 떡갈나무가지들에 듬성듬성 악착스럽게 붙어 있는 가랑잎들처럼 내 욕망의 잎새들을 모조리 다 날려 보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비워지는 가을 산을 보면서 나의 욕망과 욕심에 대한 정리를 적잖게 했다. 그래서 돈이나 재물보다도, 명예나 벼슬보다도 육신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이 가장 값지다는 것쯤은 알아 버린 요즈음 나는 더욱 산행에 열중한다. 가을 산을 거울로 삼아 마음 비우기, 욕심 비우기를 배우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산행을 한다. 겨울 산에서 나는 생명의 죽음과 재생의 법열(法悅)을 느낀다. 겨울은 저녁과 밤이요, 로인과 죽음의 상징이자 아울러 재생과 열반(涅槃)의 상징이기도하다. 그래서 온통 흰눈에 덮인 순백(純白)의 겨울산은 여위고 춥지만 만고풍상을 다 겪으신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호호백발(晧晧白髮)을 날리며 흰 도포를 차려 입은 도고한 모습으로 정좌(靜坐)하고 계신다. 봄의 산에서 녀성적인 우아미가(優雅美)가 느껴지고 여름 산에서 남성적인 장중미(壯重美)가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겨울 산에서는 이 두 아름다움을다 초월하는 숭고미(崇高美)가 느껴진다. 이제 초로(初老)의 언덕바지에 올라선 나는 겨울 산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의젓하고, 점잖고, 깨끗하고, 곱게 늙어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인생은 좋은 시작보다 좋은 마무리가 더 중요함을 겨울 산을 통해 터득한다. 늙어서는 무엇보다 로추(老醜), 로탐(老貪), 로망(老妄)을 스스로 경계하여 추레하게 늙지 말아야 함을 산신령(山神靈) 같은 야위고 순백한 겨울 산의 거룩한 모습에서 배운다. 그러자면 겨울 산처럼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고 마음을 허허롭게 비우고 부귀빈천(富貴貧賤), 생사영욕(生死榮辱)을 달관하면서 살아야 할게 아닌가. 어제도 눈 덮인 마반산에 오르면서 나는 겨울 산처럼 깨끗이 살다가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개관론정(蓋棺論定)의 날을 맞이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한 산속의 바위틈에도 저 초목들의 목숨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어두운 땅속에 숨어서 바위도 얼어터지는 엄동의 혹한을 견뎌내는 뿌리의 덕분임을 나는 산행을 하면서 거듭 확인하군 했다. 그래서 산은 영원히 죽지 않고 봄이 오면 재생하여 다시 청춘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나는 내 생명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내 분신(分身)인 토끼 같은 내 새끼들의 창창한 래일을 위해서 얼마 남지 않는 인생에 무엇이라도 좋은 일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 생명의 연장인 내 두 딸내미들을 위해 좋은 아빠, 훌륭한 아빠가 되리라고 다짐을 했다. 산속의 바위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폭풍설 속에서도 강인하게 버티고서 있는 겨울 나목(裸木)들을 보면서 우리 백의 겨레의 자라나는 후대들을 위해 썩은 뿌리가 아니라 튼실한 뿌리로 되여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물에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나는 어제 겨울 산에서 내리면서 이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 만고에 살아 숨쉬는산처럼 나의 육체와 령혼도 내 분신인 내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샘이 깊은 물》과 같은 우리 겨레의 창창한 래일과 이어져 영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런 환상에 사로 잡혀보기도 하였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우리네 인생을 본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인생을 배운다. 2005년 12월 20일 연길에서
15    (잡문) 과연 모든 망각은 죄다 아름다울까? 댓글:  조회:4388  추천:50  2006-01-11
잡문 과연 모든 망각은 죄다 아름다울까? 김 관 웅 금년에 86세인 나의 아버님은 일제시대를 살아온 분인지라 비록 소학교문앞에도 못 가보셨지만 일본말 구두어수준만은 우리 대학의 일본어학과의 교수들도 찜 쪄 먹는다.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우리 조선사람들의 성격을 두고 늘 이렇게 나무람하셨다고한다. 이 일본말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혹은 라는 말이 된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 비하면 확실히 끈질기고 오기가 강하다. 한국의 학자 김룡운은 라는 책에서 는 소제목을 달고 조선사람의 끈질긴 와 일본인들의 맺고 끊는듯한 에 대해 재미나는 비교를 한적 있다. 일본인들은 싸우다가도 지면 후회 없는 항복을 한다고 한다. 조선말로 번역할 수 없는 일본말중에는 가 있다. 굳이 조선말로 번역한다면 혹은 라고나 할까? 그러나 의 뜻은 단순히 항복했다거나 졌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항복하고 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마음속으로라도 대항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이다. 칼부림을 일삼는 사무라이가 주축을 이룬 일본문화속에서 굳어져온 일본인들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칼 앞에서의 항복은 철저해야 한다. 눈 깜짝할 새에 내려와서 썩뚝 목을 베는 칼 앞에서 오기와 끈질김이 한 민족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형성될 여지란 있을 수 없다. 칼을 쳐든 강자 앞에서의 항복은 언제나 추호의 에누리가 있어서도 안 되는 법이다. 1945년 일본패망후 일본점령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맥아더장군은 라고 지적한 적 있다. 힘 센 자에게는 함으로써 철저히 항복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거꾸로 자기들처럼 에누리 없이 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에 의해 패한 조선사람들은 반항은 유난했다. 고종황제의 칙령을 받들고 헤그만국평화회의에 가만히 참가한 조선왕조의 밀사들, 할반역두에서의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의사의 장거, 청산리,봉오동전투 그리고 20년대 이후 중국 동북과 관내의 상해, 중경 등지에서의 독립군, 항일련군의 치렬한 반일항전.....이중에서 동경의 사꾸라다몬에서의 리봉창의 천황저격미수사건, 윤봉길의사의 상해홍구공원에서 작탄투척사건, 김일성을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계렬의 반일투사들의 피어린 반일투쟁에서 보여진 끈질긴 저항정신은 일본인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것이였다. 에서 이어지는 소위 으로 하여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하는데 대해서는 일본인들은 저들의 한 문화로는 리해할래야 리해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를 련발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싸움에 관련하여 조선사람들의 감정을 잘 담은 독특한 말로 가 있는데, 를 조선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만큼 이 말에 알맞는 일본말은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른바 란 이라고 되어 있으나 단순히 이런 뜻만은 아니고 진 사람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중에 보복할 것을 다짐하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어떤 곤경과 압박속에서도 똑똑히 자기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는 어려운 력사속에서 터득한 조선사람들의 슬기를 담은 말일 것이다. 물론 조선사람들은 이러한 악에 바친 태도를 미덕이나 미학이라는 낱말을 붙혀 가지고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학대를 받을 때마다 이처럼 변형되는 것은 층분히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조선민족이 외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일본인들처럼 앗사리하게 를 선언하고 겉으로나 속으로나 죄다 외적앞에 복종을 했더라면 오늘의 조선민족이 있을리 있겠는가. 외적의 침략의 죄행을 망각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외적을 포옹했더라면 우리 민족이 어찌 오늘날까지 세계민족의 수림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자라나는 후대들을 교육할 수 있겠는가. 적아간의 모순투쟁속에서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면 자기내부의 모순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원칙과 시비를 무마하는 망각은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불리하다. 확실히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추호의 반성도 하지 않는 그런 자들과 그런 자들이 저지른 비렬한 짓거리들을 망각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를테면 한 사기군이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한 집단의 명성을 더럽혔거나 남의 칼을 빌어 대방을 죽여버리자고 밀고를 했거나 그른 것을 옳다고 오래동안 주장했지만 추호의 반성의 기미도 없는데 이런 것들을 죄다 망각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무슨 동기에서인가?이런 무원칙한 망각을 권장하는 진정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밀고자들이나 리간쟁이나 사기군들에게 가장 귀 맛 좋게 들릴 말이 바로 이 아닐까. 과연 망각은 죄다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 민족의 오기나 끈질김을 구태여 이라는 거창한 말로 미화할 필요가 없겠지만 망각을 이라는 말로 미화하여 권장할 필요 또한 없는 줄 안다. 2002. 8. 4 연길에서
14    (단상) 예수와 똘스또이 그리고 로신과 김학철 댓글:  조회:4325  추천:52  2006-01-10
☆단상☆ 예수와 똘스또이 그리고 로신과 김학철 김 관 웅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여러 가지 풀이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의 사랑은 심지어 원쑤까지 포함되여 있는 넓은 사랑-박애(博愛)이다. 예수가 자기를 금전 30냥에 팔아먹은 제자인 유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것도 바로 유다의 밀고로 래일이면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속으로는 번연히 알면서도 이렇게 너그럽게 처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박애의 정신과 그 실천이라고 한다. 똘스또이는 젊은 시절 한 때에는 못된 짓도 하였지만 도덕적 자아완성을 통해 인간적으로 거듭난 늙어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로 되였다. 도덕적 자아완성, 박애주의, 악에 대한 부저항이라는 이 골자로 이루어진 그의 똘스또이주의 역시 예수의 사랑의 정신의 원형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의 장편소설《부활》에서 나오는 네흘류도브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구현한 똘스또이주의의 화신이다. 이처럼 예수나 똘스또이 같은 박애주의자들은 이 인간 사회의 모든 모순을 사랑으로밖에는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산혁명자들은 있는 자와 없는 자, 압박자와 피압박자의 모순은 절대 박애로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해결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반드시 무자비한 계급투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맑스의 딸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단 마디로 《투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로신은 《매서운 눈길로 천부의 손가락질을 쏘아보고, 머리를 수그려 유자의 소가 되겠다》했고,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한 로신은 절대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네가 이발로 물면 나도 바로 이빨로 물어뜯고, 네 눈으로 쏘아보면 나도 눈으로 쏘아보는 식의 론전과 싸움으로 점철되여 있었다. 로신선생은 자기의 론적들을 저승에 가서도 용서해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김학철 선생도 투쟁주의자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원쑤는 절대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이 점에서는 로신선생을 꼭 닮았다. 특히 반우파투쟁과 그 후의 문단투쟁에서 자기를 해친 적 있거나 뒤에서 무함한 사람들을 절대 용서를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김학철선생은 팔십객의 로옹이 되셔서도 그 전투적인 풍격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으셨다.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은 김학철의 필봉에서 무슨 불똥이 자기한테 튕길가바 전전긍긍했다. 한마디 김학철의 일생은 전투적인 일생이셨다. 일제와의 투쟁,조선에서의 퇴거,중국의 좌경로선하의 모든 부조리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김학철선생의 전투의 대상은 언제나 굵직굵직한 것들이였다. 예수와 똘스또이는 사랑을, 로신과 김학철선생은 투쟁을 선호했다. 물론 투쟁에서도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투쟁과 부득이하고 피동적인 저항이라는 것이 있다. 모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세상만사는 투쟁과 통일의 변증법적관계속에서 존재하고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투쟁이라는 것도 어쩌면 동전의 두면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사랑과 투쟁은 영원히 공존할 것이다. 사랑이 없고 투쟁만 있는 사회는 독사와 전갈들만 넣은 항아리 같은 장소로 될 것이고, 반대로 투쟁이 없고 사랑만 있는 사회는 하나의 공중루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과 투쟁이라는 이 량극을 잘 조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정도(正道)일것이다. 2005.12.15 연길시에서
13    2005년을 보내며 댓글:  조회:4218  추천:54  2006-01-05
2005년을 보내며 김 관 웅 2005년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긴 해임과 동시에 말썽도 많이 생긴 해였다. 큰 딸애가 석사공부를 마치고 무난하게 병원에 취직을 하고 집을 장만하고 신접살림을 시작했고, 작은 딸내미는 본과를 공부를 마치고 석사연구생으로 추천를 받았다. 두 딸내미가 스스로 잘 해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다. 금년 7월말에 나는 한국에서의 1년 반 동안의 객원교수 생활을 마치고 무사하게 귀환하였다. 춥고 어둡던 집을 처분하고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새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넓고 따뜻하고 밝아서 너무 좋다. 천하의 추운 사람이 다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고대광실 천만칸을 짓기만 하면 나는 얼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한 두보처럼 그런 드넓은 흉금을 가지지는 못하고 나 홀로만이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 지난해 나는 글도 적잖게 썼다. 그 글들이 다 편편히 명편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담아서 펴낸 글이니 별로 부끄러움은 없다. 내 스스로 불의에 저항해 쓴 글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니 별로 죄책감은 없다. 이런 글들은 내 개인의 생각일지라도 혼자의 독백만은 아닌 것 같아 안도감이 다소 든다. 읽는 이들과 함께 공감하다 못해 더러는 반감까지 불러일으켜서 나의 글들을 보고 나를 법에 고소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던가. 앞으로 글을 쓰는데 좀 조심을 해서 부질없는 말썽을 가급적으로 줄려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결코 자라처럼 목과 네다리를 움츠리고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새해에는 다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좀 보면서 글을 쓰기는 쓰겠으나 나의 량심과 남의 눈을 속이려 들지는 절대 않겠다. 지난 70 ,80년대의 한국의 저항시인 김지하처럼 《글을 쓰되 좀스럽게 쓰지 않고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천에 끌려가 볼기를 맞을 지라도, 맞은지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구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그런 글을 쓰고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할 말은 하면서 살겠다. 2006년에도 입은 비뚤어져도 주라는 바르게 불면서 살고 싶다.
12    (단상) 황우석이 울린 경종 댓글:  조회:4474  추천:66  2006-01-04
황우석이 울린 경종 김관웅 하늘에 화려하게 떠올랐던 고무풍선이 추락했다. 하늘에 떠올랐던 거짓으로 포장된 《과학의 별》이 너무나도 처참하게 추락했다. 왜? 너무나도 이름을 빨리빨리 내려고 설쳤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가 거짓을 조작하게 종용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성급한 명예욕이 거짓을 조작하게 종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빨리 먹는 밥에 목이 멘다. 욕속부달(欲速不達)이다. 종이로 불을 싸지 못하듯이 거짓은 영원히 감쌀 수 없다. 우리문단에도 황우석의 아류들이 가득하다. 너무나도 이름을 빨리빨리 내려고 거짓말과 도적질도 불사하는 우리문단의 크고 작은 황우석의 아류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경종이 없을 줄 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추라!
11    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 댓글:  조회:8265  추천:53  2005-12-26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적사명과 당면한 문제 및 그 해결책 (3)3. 중국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점들과 그 해결책 문학은 문화의 한개 요소로서 비단 자신이 속해있는 정신문화계통속의 다른 요소들과 밀접한 련관이 있을뿐만아니라 물질문화계통속의 다른 요소들과도 밀접한 련관이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중국조선족은 유태인과는 달리 공동한 지역과 공동한 언어라는 이 두개의 요소만 소실되면 자기의 총체성을 지켜내기 힘들다. 그런데 중국조선족문학 생존의 전제로서의 조선족집거구가 상당한 위기에 직면한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학자 정판룡선생은 중국조선족문화의 경제적기반의 현황과 21세기의 발전목표를 언급하면서 《오늘 중국의 조선족은 지난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전쟁과 사회혁명을 하다보니 경제생활에서 아직 락후한 상태에 머물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다수는 여전히 농촌에 거주하면서 전통적인 농경방식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있다. 생활수준은 중국경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면 그리 낮은편은 아니나 국제적수준 및 세계 다른 지역에서 사는 우리 민족돠 비해보면 퍽 낮은축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조선족은 《21세기에 반드시 잘살기도 해야 하거니와 자기 민족의 특성과 문화도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제기하였다. 80년대초반부터 중국에서 개혁, 개방 정책이 실시된후 중국조선족의 경제생활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조선족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있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농경생활방식에서 해탈되여 상품화, 도시화의 시대조류에 용감이 뛰여들기 시작했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의 진출, 발달한 나라들에로의 로무송출 같은 시대조류에 조선족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였다. 그리고 동북아경제권이 확립되거 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조선족은 점차 산업화에로 나아갈 전망도 가지고 있다. 특히 두만강하류지역이 경제개발지역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있는데 이것이 현실로 변하기만 하면 연변이라는 이 조선족집거구는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지역으로 될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문어구에 이른 중국조선족은 지금 기회와 도전이 병존하는 아주 미묘한 력사시기에 살고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으로 볼 때는 번영의 기회보다는 준엄한 시련이 첩첩이 앞에 다가오고 있다. 즉 중국조선족이 21세기에도 계속 민족의 총체성을 지켜나갈수 있겠는가 하는데는 많은 문제점들이 나섰다는 점이다. 첫때, 조선족인구류동으로 인한 조선족집거구 해체의 위기. 개혁, 개방이후 농경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농민들이 도시로, 국외로, 외지로 진출하게 된 것은 력사적인 진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얻으며 흔히 잃게 되는 법이다. 특히 중국조선족농민들의 인구류동이 맹목성을 띤 부분이 적지 않음으로 하여 엄중한 후과들을 빚어내고있다. 조선족 농촌인구의 류동은 원래의 대분산, 소집거의 상황을 더욱 분산시켰으며 따라서 원래 조선족의 소집거지구의 격감을 초래했다. 례컨대 중국조선족사회에서의 제일 큰 집거구인 연변의 상황을 보면 연변의 도시인구는 1985년의 145만 6천여명으로부터 1994년의 204만 4천여명으로 증장되였는데 이 9년동안 도시인구는 58만 3 374명이 증가된 반면에 농촌인구는 47만 1 732명으로부터 11만 223명으로 격감되여 9년동안에 36만명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이 몇 년동안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국외나 외지에로의 이동이 많고 한족인구는 연변에로 이주하는 수자가 격증했다. 특히 조선족 농촌인구는 감소되고 한족 농촌인구는 증가되고 있다. 이리하여 1997년 연변의 조선족과 한족의 비례는 86만명 대 126만명으로 조선족이 연변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9.33%로 급격하게 내려갔다. 산재지구의 상황은 더욱 험악하다. 《흑룡강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흑룡강성의 많은 조선족촌들은 15~20%, 심지어는 40%의 조선족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는데 그런 자리에는 한족들이 이주하여 들어가고있다고 한다. 그러면 농촌의 대부분 조선족농민들은 어디로 진출하고있는가? 연변이나 기타 조선족집거구역은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이나 북경,상해 같은 대도시들보다 산업이 락후하고 게다가 기성산업들도 대부분 침체와 불경기의 수렁속에 헤매고있는 실정이여서 농촌을 떠난 조선족농민들이나 기타 조선족집거구의 취업자들은 중국의 산지사방에 흩어져가고 있다. 례컨대 동북지역의 중국조선족들은 산동의 청도, 연대, 위해 등 연해도시에 있는 한국기업체들을 바라고 몰려갔으나 이들은 그곳에서 뿌리가 없는 부평초같은 신세로 떠돌아다닌다. 우리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이 다수민족의 망망대해속에서 한데 똘똘 뭉쳐 살아야만 자기의 총체성을 지켜낼수 있겠는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고있는 추세이다. 이리하여 동북의 일부 지구들에서는 민족문화보존의 주요한 터전으로 되었던 조선족집거구들이 륙속 허물어져가고있다. 이중에서도 위해성이 가장 큰것은 농촌녀성청년들의 리농향도추세로 인한 농촌남성청년들의 결혼난과 그로 인한 농촌인구의 격감의 추세이다. 통계에 의하면 1993년―1994년까지 한국에로의 《국제결혼》은 나날이 증가되여가고있다. 이 4년사이에 동북조선족녀성의 국제혼인은 약 2만 1 161명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중국 내지에로의 녀성들의 대량적인 류동과 집거지도시에로의 녀성들의 이동으로 하여 농촌총각들중의 70%이상이 장가를 들지 못해서 이 《농촌총각결혼난》은 연변의 중대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 와중에서 이른바 중국조선족녀성들과 한국인사이의 위장결혼, 한국인들에 의한 중국조선족녀성들의 현지처문제 같은 것은 중국조선족녀성들의 도덕성의 타락을 반응으로 위장결혼, 로무송출, 내지진출 등으로 인한 리혼률의 급증 역시 하나의 홀시할수 없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였다. 농촌인구의 맹목적인 류동은 중국조선족들의 범죄률의 급증을 초래했다. 무작정하고 도시로 밀려든 농촌청년들속에는 도적, 강탈, 밀수, 사기 등 범죄행위를 하는자들이 늘어났고 젊은 여자들은 돈을 위해 매음까지 하고 있다. 1991년 연길시 류동인구중 범죄행위로 하여 법적처벌을 받은 인수는 류동인구 총수의 29.6%이고 1992년에는 49%로 증가되였다. 둘째, 농촌집거구해체로 인한 중국조선족 농촌교육의 위기상황. 우선 농촌에서의 인구감소는 농촌중소학교가 풍전등화마냥 위기에 처하게 했다. 연변만 보더라도 1985년에 조선족소학교는 419개소, 조선족중학교는 118개소였는데 1995년에 와서는 조선족중소학교는 177개소, 조선족중학교는 49개소로 축소외여 소학교는 242개소 없어지고 중학교는 69개소나 감소되였다. 흑룡강, 료녕성의 조선족산재지역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흑룡강성 상지시의 상황만 보더라도 1985년에는 조선족소학교가 20여개소였는데 현재는 4개소만 남게 되었다. 조선족 민족교육의 위기는 직접적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인구의 감소를 초래했다. 1980년대초반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였던 《연변문예》의 발행량은 7만여부이상이였으나 지금의 연변작가협회기관지인 《연변문학》의 발행량은 겨우 3,4천부밖에 안된다. 셋째, 이러한 문학인구의 감소와 중국조선족문화시장의 위축추세는 필연적으로 중국조선족의 문학생산을 포함한 정신문화생산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다. 지금 중국조선족출판업체에서 력사가 길고 인원이 방대한 연변인민출판사만 보더라도 국가재정에서 주는 경비로 직원들의 뭘급만 내주는데도 마이나스로 되고있다. 출판시장의 위축은 우리 글로 되는 책은 찍으면 찍을수록 밑지는 국면을 초래했다. 그래서 80년대중기까지만 해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우리 글로 된 책을 해마다 200여종씩 출판했었는데 현재는 자체의 돈벌이로 겨우 50여종을 출판하고있다. 북경민족출판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료녕민족출판사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조선족문학인들이 책을 펴내자면 제 돈으로 자비출판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많은 작가와 학자들의 원고가 책궤에서 잠자고있다.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읽을 조선글로 된 아동서적은 한족어린이들이 읽을 책의 100분의 1도 안되는 실정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상에서 렬거한 중국조선족문화의 제반 위기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것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생존과 발전은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을 전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의 저면한 정치학자 리홍우선생은 《조선족의 전망》이란 책에서 《민족집거지는 민족의 존속과 발전의 기반》이라고 강조했고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고생물학자 고 안태상교수는 중국조선족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중국조선족문화가 살자면 우선 연변이라는 이 최대의 중국조선족집거구를 살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바 있다. 연변을 살리자면 우선 연변의 경제를 살려야 한다. 경제토대는 모든 문화적요소의 전제적조건인 까닭이다. 연변경제를 진흥시키는 것은 연변조선족집거구의 안정된 발전을 도모하는 가장 전제적인 작업이다. 두만강지구개발은 연변경제진흥의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수 있다. 두만강지구개발은 우리 민족이 하루속히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민족의 대렬에 들어서게 함으로써 이 집거구에 전국에 분산되였던 조선족인구를 다시 끌어들이는데 큰 기여를 할수 있다. 조선반도의 평화적통일의 실현에 있어서도 두만강지구의 개발은 연변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경제, 문화의 교류, 화해 등 여러 면에서 교량적작용을 더 잘할수 있게 할것이다. 그런데 두만강지구개발은 연변조선족들의 적극성에 의해서만 풀릴 문제가 아니다. 중국 성 내지 중앙으로부터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외국기업의 진출과 연변의 투자여건의 유리한 변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해결될것으로 보고 있다.연변을 살리자면 연변의 농촌진지를 떼우지 말아야 한다. 연변의 농촌진지를 고수하는 길 역시 농촌경제를 발전시키는 길밖에 없다. 연변의 도시경제가 활성화되여야만 농촌경제도 살아날수 있다. 농촌에서의 다각경제를 발전시키고 농촌의 향진기업의 발전을 다그쳐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맹목적으로 도시에 흘러들어간 농민들을 다시 농촌에 흡수하여들일수 있으며 따라서 농촌교육의 위기라든가 농촌인구의 감소 같은 문제들을 풀어나갈수 있다. 또 이래야만 중국조선족문학의 생족과 발전의 터전을 확보할수 있는것이다. 조선족은 흩어지면 죽고 모이면 산다. 조선족이 흩어지지 않고 모일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내는 길이 바로 문학을 포함한 전반 조선족문화를 살리는 길이다. 4. 맺는말 아널드 토인비는 《력사의 연구》라는 저서에서 그 유명한 《도전과 응전》의 력사철학, 문화철학의 중요한 명제를 내놓았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문명을 낳기 알맞은 정도의 도전을 과부족이 없는 《중용》의 도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조선족문학을 포함한 문화가 직면한 도전은 너무 가혹하여 응전해도 전혀 승산이 없는가? 아니다! 중국조선족문화는 이미 한세기 남짓한 자기발전의 행정속에서 많은 시련을 겪어왔고 여러번 준엄한 도전에서 성곡적으로 응전한 경험을 쌓았다. 지금 중국조선족문화가 직면한 도전은 우리가 일제시대나 문화대혁명시기에 직면한 도전과는 허투루 비교할수 없으나 우리 민족 전체가 용기와 힘과 지혜를 합쳐서 응전하기만 하면 이겨낼수 있는 《중용의 도전》이라고 판단해본다. 중국조선족문화라는 이 《꽃나무》는 이른봄의 꽃샘을 이겨내고 새로운 21세기에도 내내 어여쁜 꽃들을 피우면서 중국문화와 세계문화의 화원에서 자신의 어여쁨과 향기를 자랑하게 될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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