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http://www.zoglo.net/blog/jinkuanxiong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79 ]

19    (잡기) 어머님의 다섯가지 은혜 댓글:  조회:3560  추천:51  2006-01-16
*잡기* 어머님의 다섯가지 은혜 김 관 웅 첫번째는 생명을 주신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것이 고달프기도 하지만 참 재미가 납니다. 이 재미 나는 세상에서 웃고 떠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신 어머님의 은혜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두번째는 건겅한 몸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나를 낳으셔도 바위덩이 같이 낳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날 이때까지 감기 한번 별로 앓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머님께서 주신 가장 귀중한 자본입니다. 세번째는 바보가 아닌 머리를 주신 은혜입니다. 77세의 고령에 마작을 배워서 터득한 우리 어머님의 머리는 보통은 넘습니다. 이러한 어머님의 IQ를 조금이라도 닮아서인지 명색이나마 학자로 한평생 학문을 연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크나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네번째는 여린 마음과 착한 심성을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기질적으로 이악스럽지 못하고 리속에 밝지 못하고 주변도 없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당하면 당했지 남을 등쳐먹거나 남들앞에서 시뚝할 줄 모르는 여린 마을을 가진 분이십니다. 이런 어머님을 닮아서 나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당할 때는 많아도 당한 것만큼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섯번째는 길러주신 은혜입니다. 다른 어머님들은 자식을 길러 주시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하실 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 어머님은 아버님의 쥐꼬리만한 박봉으로 너무너무 고생하시면서 우리 칠남일녀 팔남매를 기르셨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 자식들이 서너 평생을 더 산다고 해도 다 갚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맹교(孟郊)는 그 유명한 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리였는가 봅니다. 자애로운 어머님는 바느실 잡고 먼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네. 한뜸한뜸 정성들여 누비면서 언제나 돌아올까 시름에 잠겼네 따사로운 태양의 은혜를 풀들이 어찌 갚을수 있으랴. (慈母手中線, 遊子身上衣. 臨行密密縫, 意恐遲遲歸. 誰言寸草心, 報得三春暉.) 그렇습니다. 어머님의 은혜는 저 하늘우의 태양 같은 존재입니다. 그 해볕아래 자라난 풀 같은 우리 자식들이 어찌 태양 같은 어머님의 은혜를 다 갚는단 말입니까.
18    (詩評) 재목, 배 그리고 나그네 댓글:  조회:4007  추천:49  2006-01-13
재목, 배 그리고 나그네 김 관 웅 “언, 상, 의(言, 象, 意)”론은 문학작품의 본문(本文, text) 층차(層次)에 관한 문제다. 동서양의 문론들에서는 모두 문학 본문의 구성을 표면으로부터 리면에 이르는 다층차의 심미구조로 간주하여 왔었다. 그러나 처음에 제기될 때는 단순한 본문 층차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였다. 중국 고대의 『周易·繫辭』에서는 인간의 사상의 표현문제를 탐구할 때 “글은 말을 다는 표현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는 표현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하면서“성인은 상을 세워 뜻을 다 표현한다(聖人立象以盡意)”는 견해를 내놓았다. 여기에서 제기한“언,상,의(言, 象, 意)”의 문제는 비록 본문(本文, text)을 념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광의적(문학과 비문학을 포함한) 본문 구성의 3요소로 이해할 수 있다. 후에 중국 삼국시기의 저명한 경학가 왕필(王弼)은 『周易』을 해석할 때 보다 상세하고도 명확하게 이 3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거론하였다. “상(象)이란 의(意)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言)이란 상(象)을 밝게 하는 것이다. 의(意)를 드러내는 데는 상(象)만한 것이 없으며, 상을 드러내는 데는 언(言)만한 것이 없다.언(言)은 상(象)에서 생겨나므로 언(言)을 더듬어 상을 볼 수 있고, 상(象)은 의(意)에서 생기므로 상(象)을 더듬어 뜻을 볼 수 있다. 의(意)는 상(象)으로 하여 드러나고, 상(象)은 언(言)으로 하여 드러난다.” (夫象者, 出意者也. 言者, 明象者也. 盡意莫若象, 盡象莫若言. 言生于象, 故可尋言以觀象. 象生于意, 故可尋象以觀意. 意以象盡, 象以言著.) 왕필의 견해에 따르면 “ 언, 상, 의(言, 象, 意)”는 표면으로부터 리면에 이르는 심미층차(審美層次)구조이다. 사람들이 먼저 접촉하게 되는 것은 언(言)이고, 그 다음에야 언(言)을 통해 상(象)을 엿볼 수 있게 되며, 마지막에야 비로소 상(象)이 암시하는 의(意)를 깨닫게 된다. 이 세 요소는 모두 중요한 것으로서 이 중에서 그 어느 하나가 없어도 아니된다. 중국 삼국시기 왕필이 이처럼 전면적인 본문구성관을 가졌다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언어적인 차원에만 머물러있으면 그것은 말장난이고, 형상을 만드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도 그것은 문학으로서는 높은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없으며, 유려한 언어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 속에 깊은 웅대한 뜻을 부여하여야만 높은 차원의 문학이 될 수 있다. 메타포를 동원한다면 언(言)은 재목이요, 상(象)은 배요, 뜻은 나그네이다. 언어라는 재목으로 풍랑에 견디는 튼튼한 배를 무어서 나그네를 싣고 바다를 건너 독자들이 가다리는 대안에까지 닿아야 문학의 과정은 끝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시단에는 재목을 켜고 다듬는 데 그치거나(말장난) 배를 만드는데 그치는(이미지의 폭력조합이요 뭐요 하면서 이상한 이미지조합 작업에만 몰두하는 현상) 경우가 허다하다. 설사 어렵사리 배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배에는 정체불명의 나그네가 타고 있어 도저히 독자들이 기다리는 대안에로 다가서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배에 탄 나그네가 겨우겨우 독자 곁에 다가섰다고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것 같은 국적불명, 인귀불명(人鬼不明)의 소리만 질러대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2006년 1월 12일 연길에서
17    (수필) 산의 사계절 댓글:  조회:4054  추천:32  2006-01-12
☆ 수필 ☆ 산의 사계절 김 관 웅 내가 연변의 첫 등산 동아리인 연변백두산문인산악회에 가담하여 산행을 시작한지도 어언간 10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우리들은 전문적인 산악인도 아니요, 특수한 장비를 갖추고 보기만 해도 아찔한 암반을 타거나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톺아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풍 가는 간단한차림으로 도시락과 물 한 병 넣은 배낭 하나만 달랑 메면 족하다. 그리고 교통도구도 따로 없이 대중교통을 리용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초만원 공공버스 속에서 부대끼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버스 요금을 가지고 차장아가씨와 콩팔칠팔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그래서 대부분 교통비로 충당되는 회비를 한해에 100원 남짓이 내면 별 부담이 없이 1년 동안 등산을 할 수 있다. 이만한 싸구려 여가선용은 아마 이 세상에 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행선지를 미리 정하지도 않는다. 문자 그대로 행운류수(行雲流水)다. 여유작작하게 아침 9시에 약속한 집결장소에서 모였다가 버스정류소에 나가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공공뻐스에 올라타면 어디라도 좋다. 산에 가서도 일정한 등산코스가 없다. 산짐승처럼 아무데나 산속의 울창한 나무숲을 꿰질러 다닌다. 우리와 한동안 등산을 같이 했던 한국 선문대학의 황송문 교수는 우리의 등산 스타일을 《조선족산행(朝鮮族山行)》에서 이렇게 시로표현하고 있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곳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렬 종대로 정겨운 이야기를 꽃잎처럼 날리면서 줄줄이 줄줄이 오르지만 산허리나 산의 무릎이나 겨드랑이나 어지간히 올라서 발동이 걸리면 갑자기 까투리가 되어 기자 기자 기자 기자 구구 구구 구구 구구 꽁지야 날 살리라고 옆으로 샌다. 질서 정연하게 나있는 길을 두고 길 없는 잡목들 부러뜨리며 멧돼지 치오르듯 자꾸만 오른다. 조선족 산행은 창작 실습인가 서스펜스와 스릴과 액션, 미지의 인연을 위한 복선(伏線)까지 클라이맥스로 클라이맥스로 가기는 자꾸 가는데 결말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이다. 가기는 가는데, 어디로 튈 줄 모르는 항일 빨치산 유격훈련이다. 모로 가든 세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까투리식이든 메돼지식이든 우리의 산행은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등산팀은 일년 사계절 주말이나 휴일이면 례외 없이 산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백두산을 비롯한 연변의 산들은 말 그대로 무른 메주 밟듯 했다. 한달에 4회 정도, 1년이면 50회, 만 10년이니까 500회는 몰라도 아마 400회는 웃돌 것이다. 적어도 400회 이상 산행을 하는 중에서 나는 저도 모르게 산의 정취(情趣), 산의 매력(魅力)에 푹 빠지게 되였다. 산행을 하기 전에는 멀리서 모아산(帽兒山)이나 마반산(磨磐山)을 바라보면서 일년 사시장철 변함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산행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였다. 산은 불변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 변화속에서 불변하는 동중정(動中靜)의 아름다움과 남성적인 양강지미(陽剛之美)와 녀성적인 음유지미(陰柔之美)를 한 몸에 겸비한 혼성미(混成美)의 극치를 지니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바로 이것이 산이 사람들을 영원히 잡아끄는 매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 따라 자기 나름대로 산으로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유혹한다. 봄의 산에서 나는 삶의 희망과 힘과 랑만을 느낀다. 봄은 아침이요, 소년(少年)과 청춘 그리고 꿈과 랑만의 상징이다. 그래서 봄의 산은 색동저고리 입은 소녀들처럼 알락달락 예쁘게 꽃단장을 한다. 봄의 선구자는 진달래다. 이른 봄 4월 중순 이후면 연변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치며 봄소식을 알린다. 그 연분홍 빛깔에서 나는 흘러간 청춘의 힘과 희망과 랑만을 다시 느낀다. 진달래가피면 련달아 철쭉이 피고 코언저리에 주근깨가 살짝쌀짝 보이는 시골 새악씨 같은 개나리가 수줍게 피고 이름 모를 뭇 꽃들이 다투어 피고 진다. 그리고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뾰족뾰족 새움이 튼다. 언 땅을 강인하게 비집고 돋아 올라온 씀바귀를 캐면서 생명의 위대한 힘을 실감한다. 그것을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계곡수에 대수 헹구어 점심에 오구작작 산정 우에 모여앉아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으면 온 몸에 마구 청춘의 힘이 솟구치는 것만 같다. 어쩌다가 물이 많이 나는 축축한 택지(澤地)를 지나다가 봄 미나리 밭을 만나게 되면 당장 도시락을 풀어 헤치고 초고추장에 뚝뚝 찍어 그 자리에서 즉석 봄 미나리 추렴을 한다. 그 선뜻선뜻하고 시원시원한 향기 진한 맛은 봄에만이 진짜로 느낄 수 있다. 우리같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식도락이다. 여름 산에서 나는 생명의 풍성한 성장과 뜨거운 정열을 느낀다. 여름은 정오이요, 장년(壯年)의 정진(精進)과 노력과 상승의 상징이다. 그래서 여름 산은 구척장신의 헌걸찬 사나이처럼 푸른 두루마기를 의젓하게 떨쳐입는다. 온통 푸른 색상으로 성장(盛粧)을 하고 나선다. 그 푸르른 숲의 바다 속에서, 그 무성하는 생명 앞에서 나는 나의 30, 40대 중년시절의 분투와 성장의 계절을 회상하며 한번 밖에 없는 이 생명을더욱 뜨겁게 사랑해야하겠다고 결심하군 한다. 일회 인생의 가치는 크고 성장하고 열심히, 뜨겁게 사는데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더우면 더울수록 땀을 흠뻑 흘리면서 정상을 향해 톺아 오른다. 내 꿈의 정상(頂上)을 향해 부지런히 톺아 오른다. 정상에 올라 야호 삼창을 하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면 내 생명의 나무도 한그루의 상록수로 되여 하늘높이 솟아오름을 느낀다. 가을 산에서 나는 생명의 성숙과 결실을 느낀다. 가을은 오후이요, 아직은 꺼지지 않은 초로(初老)의 욕망의 불길과 조용한 사색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산은 단풍이 물들어 울긋불긋 단장을 한다. 옛날 시인묵객들이《서리 맞은 단풍 2월 봄꽃보다 아름답구나(霜葉紅於二月花)》라고 읊조리였듯이, 《석양은 무한히 좋으나 황혼에 가까웠구나(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라고 개탄했듯이 가을 산은 아름답지만 그 것은 잠간일 뿐 이내 조락(凋落)에로 직행한다. 황금나락 출렁이던 풍년벌은 허허롭게 비워지고 청산(靑山)은 입고 있던 푸른 성장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락엽으로 날려 보낸다. 나도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내 몸둥이와 팔다리들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욕망의 잎새들을 하나 둘 미련 없이 락엽처럼 날려 보내는 련습을 한다. 채찍을 후려갈기듯 매섭고 앙칼진 삭풍(朔風)앞에서도 떡갈나무가지들에 듬성듬성 악착스럽게 붙어 있는 가랑잎들처럼 내 욕망의 잎새들을 모조리 다 날려 보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비워지는 가을 산을 보면서 나의 욕망과 욕심에 대한 정리를 적잖게 했다. 그래서 돈이나 재물보다도, 명예나 벼슬보다도 육신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이 가장 값지다는 것쯤은 알아 버린 요즈음 나는 더욱 산행에 열중한다. 가을 산을 거울로 삼아 마음 비우기, 욕심 비우기를 배우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산행을 한다. 겨울 산에서 나는 생명의 죽음과 재생의 법열(法悅)을 느낀다. 겨울은 저녁과 밤이요, 로인과 죽음의 상징이자 아울러 재생과 열반(涅槃)의 상징이기도하다. 그래서 온통 흰눈에 덮인 순백(純白)의 겨울산은 여위고 춥지만 만고풍상을 다 겪으신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호호백발(晧晧白髮)을 날리며 흰 도포를 차려 입은 도고한 모습으로 정좌(靜坐)하고 계신다. 봄의 산에서 녀성적인 우아미가(優雅美)가 느껴지고 여름 산에서 남성적인 장중미(壯重美)가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겨울 산에서는 이 두 아름다움을다 초월하는 숭고미(崇高美)가 느껴진다. 이제 초로(初老)의 언덕바지에 올라선 나는 겨울 산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할아버지들처럼 의젓하고, 점잖고, 깨끗하고, 곱게 늙어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인생은 좋은 시작보다 좋은 마무리가 더 중요함을 겨울 산을 통해 터득한다. 늙어서는 무엇보다 로추(老醜), 로탐(老貪), 로망(老妄)을 스스로 경계하여 추레하게 늙지 말아야 함을 산신령(山神靈) 같은 야위고 순백한 겨울 산의 거룩한 모습에서 배운다. 그러자면 겨울 산처럼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고 마음을 허허롭게 비우고 부귀빈천(富貴貧賤), 생사영욕(生死榮辱)을 달관하면서 살아야 할게 아닌가. 어제도 눈 덮인 마반산에 오르면서 나는 겨울 산처럼 깨끗이 살다가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개관론정(蓋棺論定)의 날을 맞이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한 산속의 바위틈에도 저 초목들의 목숨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어두운 땅속에 숨어서 바위도 얼어터지는 엄동의 혹한을 견뎌내는 뿌리의 덕분임을 나는 산행을 하면서 거듭 확인하군 했다. 그래서 산은 영원히 죽지 않고 봄이 오면 재생하여 다시 청춘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나는 내 생명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내 분신(分身)인 토끼 같은 내 새끼들의 창창한 래일을 위해서 얼마 남지 않는 인생에 무엇이라도 좋은 일을 이 세상에서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내 생명의 연장인 내 두 딸내미들을 위해 좋은 아빠, 훌륭한 아빠가 되리라고 다짐을 했다. 산속의 바위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고 폭풍설 속에서도 강인하게 버티고서 있는 겨울 나목(裸木)들을 보면서 우리 백의 겨레의 자라나는 후대들을 위해 썩은 뿌리가 아니라 튼실한 뿌리로 되여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물에 이르러 바다에 가나니 나는 어제 겨울 산에서 내리면서 이 시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저 만고에 살아 숨쉬는산처럼 나의 육체와 령혼도 내 분신인 내 자식들에게 이어지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고 《샘이 깊은 물》과 같은 우리 겨레의 창창한 래일과 이어져 영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이런 환상에 사로 잡혀보기도 하였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우리네 인생을 본다. 나는 산의 사계절에서 인생을 배운다. 2005년 12월 20일 연길에서
16    (잡문) 과연 모든 망각은 죄다 아름다울까? 댓글:  조회:4511  추천:50  2006-01-11
잡문 과연 모든 망각은 죄다 아름다울까? 김 관 웅 금년에 86세인 나의 아버님은 일제시대를 살아온 분인지라 비록 소학교문앞에도 못 가보셨지만 일본말 구두어수준만은 우리 대학의 일본어학과의 교수들도 찜 쪄 먹는다.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우리 조선사람들의 성격을 두고 늘 이렇게 나무람하셨다고한다. 이 일본말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혹은 라는 말이 된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에 비하면 확실히 끈질기고 오기가 강하다. 한국의 학자 김룡운은 라는 책에서 는 소제목을 달고 조선사람의 끈질긴 와 일본인들의 맺고 끊는듯한 에 대해 재미나는 비교를 한적 있다. 일본인들은 싸우다가도 지면 후회 없는 항복을 한다고 한다. 조선말로 번역할 수 없는 일본말중에는 가 있다. 굳이 조선말로 번역한다면 혹은 라고나 할까? 그러나 의 뜻은 단순히 항복했다거나 졌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항복하고 졌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마음속으로라도 대항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이다. 칼부림을 일삼는 사무라이가 주축을 이룬 일본문화속에서 굳어져온 일본인들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칼 앞에서의 항복은 철저해야 한다. 눈 깜짝할 새에 내려와서 썩뚝 목을 베는 칼 앞에서 오기와 끈질김이 한 민족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형성될 여지란 있을 수 없다. 칼을 쳐든 강자 앞에서의 항복은 언제나 추호의 에누리가 있어서도 안 되는 법이다. 1945년 일본패망후 일본점령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맥아더장군은 라고 지적한 적 있다. 힘 센 자에게는 함으로써 철저히 항복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거꾸로 자기들처럼 에누리 없이 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일본에 의해 패한 조선사람들은 반항은 유난했다. 고종황제의 칙령을 받들고 헤그만국평화회의에 가만히 참가한 조선왕조의 밀사들, 할반역두에서의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의사의 장거, 청산리,봉오동전투 그리고 20년대 이후 중국 동북과 관내의 상해, 중경 등지에서의 독립군, 항일련군의 치렬한 반일항전.....이중에서 동경의 사꾸라다몬에서의 리봉창의 천황저격미수사건, 윤봉길의사의 상해홍구공원에서 작탄투척사건, 김일성을 비롯한 수많은 공산주의계렬의 반일투사들의 피어린 반일투쟁에서 보여진 끈질긴 저항정신은 일본인들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것이였다. 에서 이어지는 소위 으로 하여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저항하는데 대해서는 일본인들은 저들의 한 문화로는 리해할래야 리해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를 련발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싸움에 관련하여 조선사람들의 감정을 잘 담은 독특한 말로 가 있는데, 를 조선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만큼 이 말에 알맞는 일본말은 없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른바 란 이라고 되어 있으나 단순히 이런 뜻만은 아니고 진 사람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중에 보복할 것을 다짐하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어떤 곤경과 압박속에서도 똑똑히 자기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는 어려운 력사속에서 터득한 조선사람들의 슬기를 담은 말일 것이다. 물론 조선사람들은 이러한 악에 바친 태도를 미덕이나 미학이라는 낱말을 붙혀 가지고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아무튼 학대를 받을 때마다 이처럼 변형되는 것은 층분히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조선민족이 외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일본인들처럼 앗사리하게 를 선언하고 겉으로나 속으로나 죄다 외적앞에 복종을 했더라면 오늘의 조선민족이 있을리 있겠는가. 외적의 침략의 죄행을 망각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외적을 포옹했더라면 우리 민족이 어찌 오늘날까지 세계민족의 수림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자라나는 후대들을 교육할 수 있겠는가. 적아간의 모순투쟁속에서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면 자기내부의 모순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원칙과 시비를 무마하는 망각은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는데 궁극적으로는 불리하다. 확실히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추호의 반성도 하지 않는 그런 자들과 그런 자들이 저지른 비렬한 짓거리들을 망각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를테면 한 사기군이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한 집단의 명성을 더럽혔거나 남의 칼을 빌어 대방을 죽여버리자고 밀고를 했거나 그른 것을 옳다고 오래동안 주장했지만 추호의 반성의 기미도 없는데 이런 것들을 죄다 망각하라고 권장하는 것은 무슨 동기에서인가?이런 무원칙한 망각을 권장하는 진정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 밀고자들이나 리간쟁이나 사기군들에게 가장 귀 맛 좋게 들릴 말이 바로 이 아닐까. 과연 망각은 죄다 아름다운 것일까? 우리 민족의 오기나 끈질김을 구태여 이라는 거창한 말로 미화할 필요가 없겠지만 망각을 이라는 말로 미화하여 권장할 필요 또한 없는 줄 안다. 2002. 8. 4 연길에서
15    (단상) 예수와 똘스또이 그리고 로신과 김학철 댓글:  조회:4437  추천:52  2006-01-10
☆단상☆ 예수와 똘스또이 그리고 로신과 김학철 김 관 웅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여러 가지 풀이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예수의 사랑은 심지어 원쑤까지 포함되여 있는 넓은 사랑-박애(博愛)이다. 예수가 자기를 금전 30냥에 팔아먹은 제자인 유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것도 바로 유다의 밀고로 래일이면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속으로는 번연히 알면서도 이렇게 너그럽게 처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박애의 정신과 그 실천이라고 한다. 똘스또이는 젊은 시절 한 때에는 못된 짓도 하였지만 도덕적 자아완성을 통해 인간적으로 거듭난 늙어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박애주의자로 되였다. 도덕적 자아완성, 박애주의, 악에 대한 부저항이라는 이 골자로 이루어진 그의 똘스또이주의 역시 예수의 사랑의 정신의 원형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의 장편소설《부활》에서 나오는 네흘류도브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구현한 똘스또이주의의 화신이다. 이처럼 예수나 똘스또이 같은 박애주의자들은 이 인간 사회의 모든 모순을 사랑으로밖에는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산혁명자들은 있는 자와 없는 자, 압박자와 피압박자의 모순은 절대 박애로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해결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친다. 반드시 무자비한 계급투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맑스의 딸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단 마디로 《투쟁!》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로신은 《매서운 눈길로 천부의 손가락질을 쏘아보고, 머리를 수그려 유자의 소가 되겠다》했고,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한 로신은 절대 박애주의자가 아니다. 네가 이발로 물면 나도 바로 이빨로 물어뜯고, 네 눈으로 쏘아보면 나도 눈으로 쏘아보는 식의 론전과 싸움으로 점철되여 있었다. 로신선생은 자기의 론적들을 저승에 가서도 용서해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김학철 선생도 투쟁주의자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원쑤는 절대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이 점에서는 로신선생을 꼭 닮았다. 특히 반우파투쟁과 그 후의 문단투쟁에서 자기를 해친 적 있거나 뒤에서 무함한 사람들을 절대 용서를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김학철선생은 팔십객의 로옹이 되셔서도 그 전투적인 풍격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으셨다.그래서 적잖은 사람들은 김학철의 필봉에서 무슨 불똥이 자기한테 튕길가바 전전긍긍했다. 한마디 김학철의 일생은 전투적인 일생이셨다. 일제와의 투쟁,조선에서의 퇴거,중국의 좌경로선하의 모든 부조리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김학철선생의 전투의 대상은 언제나 굵직굵직한 것들이였다. 예수와 똘스또이는 사랑을, 로신과 김학철선생은 투쟁을 선호했다. 물론 투쟁에서도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투쟁과 부득이하고 피동적인 저항이라는 것이 있다. 모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세상만사는 투쟁과 통일의 변증법적관계속에서 존재하고 발전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투쟁이라는 것도 어쩌면 동전의 두면과도 같은 것일 수 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사랑과 투쟁은 영원히 공존할 것이다. 사랑이 없고 투쟁만 있는 사회는 독사와 전갈들만 넣은 항아리 같은 장소로 될 것이고, 반대로 투쟁이 없고 사랑만 있는 사회는 하나의 공중루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과 투쟁이라는 이 량극을 잘 조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정도(正道)일것이다. 2005.12.15 연길시에서
14    2005년을 보내며 댓글:  조회:4346  추천:54  2006-01-05
2005년을 보내며 김 관 웅 2005년은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긴 해임과 동시에 말썽도 많이 생긴 해였다. 큰 딸애가 석사공부를 마치고 무난하게 병원에 취직을 하고 집을 장만하고 신접살림을 시작했고, 작은 딸내미는 본과를 공부를 마치고 석사연구생으로 추천를 받았다. 두 딸내미가 스스로 잘 해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다. 금년 7월말에 나는 한국에서의 1년 반 동안의 객원교수 생활을 마치고 무사하게 귀환하였다. 춥고 어둡던 집을 처분하고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새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넓고 따뜻하고 밝아서 너무 좋다. 천하의 추운 사람이 다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고대광실 천만칸을 짓기만 하면 나는 얼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한 두보처럼 그런 드넓은 흉금을 가지지는 못하고 나 홀로만이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아 죄송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 지난해 나는 글도 적잖게 썼다. 그 글들이 다 편편히 명편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담아서 펴낸 글이니 별로 부끄러움은 없다. 내 스스로 불의에 저항해 쓴 글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니 별로 죄책감은 없다. 이런 글들은 내 개인의 생각일지라도 혼자의 독백만은 아닌 것 같아 안도감이 다소 든다. 읽는 이들과 함께 공감하다 못해 더러는 반감까지 불러일으켜서 나의 글들을 보고 나를 법에 고소하겠다는 사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던가. 앞으로 글을 쓰는데 좀 조심을 해서 부질없는 말썽을 가급적으로 줄려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결코 자라처럼 목과 네다리를 움츠리고 가렵지도 아프지도 않은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새해에는 다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좀 보면서 글을 쓰기는 쓰겠으나 나의 량심과 남의 눈을 속이려 들지는 절대 않겠다. 지난 70 ,80년대의 한국의 저항시인 김지하처럼 《글을 쓰되 좀스럽게 쓰지 않고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천에 끌려가 볼기를 맞을 지라도, 맞은지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뭐든 자구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그런 글을 쓰고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할 말은 하면서 살겠다. 2006년에도 입은 비뚤어져도 주라는 바르게 불면서 살고 싶다.
13    (단상) 황우석이 울린 경종 댓글:  조회:4594  추천:66  2006-01-04
황우석이 울린 경종 김관웅 하늘에 화려하게 떠올랐던 고무풍선이 추락했다. 하늘에 떠올랐던 거짓으로 포장된 《과학의 별》이 너무나도 처참하게 추락했다. 왜? 너무나도 이름을 빨리빨리 내려고 설쳤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가 거짓을 조작하게 종용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성급한 명예욕이 거짓을 조작하게 종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빨리 먹는 밥에 목이 멘다. 욕속부달(欲速不達)이다. 종이로 불을 싸지 못하듯이 거짓은 영원히 감쌀 수 없다. 우리문단에도 황우석의 아류들이 가득하다. 너무나도 이름을 빨리빨리 내려고 거짓말과 도적질도 불사하는 우리문단의 크고 작은 황우석의 아류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경종이 없을 줄 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벼랑 끝에서 말을 멈추라!
12    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 댓글:  조회:8477  추천:53  2005-12-26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적사명과 당면한 문제 및 그 해결책 (3)3. 중국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점들과 그 해결책 문학은 문화의 한개 요소로서 비단 자신이 속해있는 정신문화계통속의 다른 요소들과 밀접한 련관이 있을뿐만아니라 물질문화계통속의 다른 요소들과도 밀접한 련관이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중국조선족은 유태인과는 달리 공동한 지역과 공동한 언어라는 이 두개의 요소만 소실되면 자기의 총체성을 지켜내기 힘들다. 그런데 중국조선족문학 생존의 전제로서의 조선족집거구가 상당한 위기에 직면한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학자 정판룡선생은 중국조선족문화의 경제적기반의 현황과 21세기의 발전목표를 언급하면서 《오늘 중국의 조선족은 지난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전쟁과 사회혁명을 하다보니 경제생활에서 아직 락후한 상태에 머물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다수는 여전히 농촌에 거주하면서 전통적인 농경방식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있다. 생활수준은 중국경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면 그리 낮은편은 아니나 국제적수준 및 세계 다른 지역에서 사는 우리 민족돠 비해보면 퍽 낮은축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중국조선족은 《21세기에 반드시 잘살기도 해야 하거니와 자기 민족의 특성과 문화도 계속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제기하였다. 80년대초반부터 중국에서 개혁, 개방 정책이 실시된후 중국조선족의 경제생활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조선족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있으며 따라서 전통적인 농경생활방식에서 해탈되여 상품화, 도시화의 시대조류에 용감이 뛰여들기 시작했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의 진출, 발달한 나라들에로의 로무송출 같은 시대조류에 조선족은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였다. 그리고 동북아경제권이 확립되거 외국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조선족은 점차 산업화에로 나아갈 전망도 가지고 있다. 특히 두만강하류지역이 경제개발지역으로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있는데 이것이 현실로 변하기만 하면 연변이라는 이 조선족집거구는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발전의 속도가 빠른 지역으로 될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문어구에 이른 중국조선족은 지금 기회와 도전이 병존하는 아주 미묘한 력사시기에 살고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으로 볼 때는 번영의 기회보다는 준엄한 시련이 첩첩이 앞에 다가오고 있다. 즉 중국조선족이 21세기에도 계속 민족의 총체성을 지켜나갈수 있겠는가 하는데는 많은 문제점들이 나섰다는 점이다. 첫때, 조선족인구류동으로 인한 조선족집거구 해체의 위기. 개혁, 개방이후 농경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농민들이 도시로, 국외로, 외지로 진출하게 된 것은 력사적인 진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얻으며 흔히 잃게 되는 법이다. 특히 중국조선족농민들의 인구류동이 맹목성을 띤 부분이 적지 않음으로 하여 엄중한 후과들을 빚어내고있다. 조선족 농촌인구의 류동은 원래의 대분산, 소집거의 상황을 더욱 분산시켰으며 따라서 원래 조선족의 소집거지구의 격감을 초래했다. 례컨대 중국조선족사회에서의 제일 큰 집거구인 연변의 상황을 보면 연변의 도시인구는 1985년의 145만 6천여명으로부터 1994년의 204만 4천여명으로 증장되였는데 이 9년동안 도시인구는 58만 3 374명이 증가된 반면에 농촌인구는 47만 1 732명으로부터 11만 223명으로 격감되여 9년동안에 36만명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이 몇 년동안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국외나 외지에로의 이동이 많고 한족인구는 연변에로 이주하는 수자가 격증했다. 특히 조선족 농촌인구는 감소되고 한족 농촌인구는 증가되고 있다. 이리하여 1997년 연변의 조선족과 한족의 비례는 86만명 대 126만명으로 조선족이 연변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9.33%로 급격하게 내려갔다. 산재지구의 상황은 더욱 험악하다. 《흑룡강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흑룡강성의 많은 조선족촌들은 15~20%, 심지어는 40%의 조선족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는데 그런 자리에는 한족들이 이주하여 들어가고있다고 한다. 그러면 농촌의 대부분 조선족농민들은 어디로 진출하고있는가? 연변이나 기타 조선족집거구역은 중국의 동남연해지역이나 북경,상해 같은 대도시들보다 산업이 락후하고 게다가 기성산업들도 대부분 침체와 불경기의 수렁속에 헤매고있는 실정이여서 농촌을 떠난 조선족농민들이나 기타 조선족집거구의 취업자들은 중국의 산지사방에 흩어져가고 있다. 례컨대 동북지역의 중국조선족들은 산동의 청도, 연대, 위해 등 연해도시에 있는 한국기업체들을 바라고 몰려갔으나 이들은 그곳에서 뿌리가 없는 부평초같은 신세로 떠돌아다닌다. 우리 조선족은 중국이라는 이 다수민족의 망망대해속에서 한데 똘똘 뭉쳐 살아야만 자기의 총체성을 지켜낼수 있겠는데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고있는 추세이다. 이리하여 동북의 일부 지구들에서는 민족문화보존의 주요한 터전으로 되었던 조선족집거구들이 륙속 허물어져가고있다. 이중에서도 위해성이 가장 큰것은 농촌녀성청년들의 리농향도추세로 인한 농촌남성청년들의 결혼난과 그로 인한 농촌인구의 격감의 추세이다. 통계에 의하면 1993년―1994년까지 한국에로의 《국제결혼》은 나날이 증가되여가고있다. 이 4년사이에 동북조선족녀성의 국제혼인은 약 2만 1 161명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중국 내지에로의 녀성들의 대량적인 류동과 집거지도시에로의 녀성들의 이동으로 하여 농촌총각들중의 70%이상이 장가를 들지 못해서 이 《농촌총각결혼난》은 연변의 중대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 와중에서 이른바 중국조선족녀성들과 한국인사이의 위장결혼, 한국인들에 의한 중국조선족녀성들의 현지처문제 같은 것은 중국조선족녀성들의 도덕성의 타락을 반응으로 위장결혼, 로무송출, 내지진출 등으로 인한 리혼률의 급증 역시 하나의 홀시할수 없는 사회문제로 대두되였다. 농촌인구의 맹목적인 류동은 중국조선족들의 범죄률의 급증을 초래했다. 무작정하고 도시로 밀려든 농촌청년들속에는 도적, 강탈, 밀수, 사기 등 범죄행위를 하는자들이 늘어났고 젊은 여자들은 돈을 위해 매음까지 하고 있다. 1991년 연길시 류동인구중 범죄행위로 하여 법적처벌을 받은 인수는 류동인구 총수의 29.6%이고 1992년에는 49%로 증가되였다. 둘째, 농촌집거구해체로 인한 중국조선족 농촌교육의 위기상황. 우선 농촌에서의 인구감소는 농촌중소학교가 풍전등화마냥 위기에 처하게 했다. 연변만 보더라도 1985년에 조선족소학교는 419개소, 조선족중학교는 118개소였는데 1995년에 와서는 조선족중소학교는 177개소, 조선족중학교는 49개소로 축소외여 소학교는 242개소 없어지고 중학교는 69개소나 감소되였다. 흑룡강, 료녕성의 조선족산재지역의 상황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흑룡강성 상지시의 상황만 보더라도 1985년에는 조선족소학교가 20여개소였는데 현재는 4개소만 남게 되었다. 조선족 민족교육의 위기는 직접적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인구의 감소를 초래했다. 1980년대초반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였던 《연변문예》의 발행량은 7만여부이상이였으나 지금의 연변작가협회기관지인 《연변문학》의 발행량은 겨우 3,4천부밖에 안된다. 셋째, 이러한 문학인구의 감소와 중국조선족문화시장의 위축추세는 필연적으로 중국조선족의 문학생산을 포함한 정신문화생산의 위축을 초래하게 되었다. 지금 중국조선족출판업체에서 력사가 길고 인원이 방대한 연변인민출판사만 보더라도 국가재정에서 주는 경비로 직원들의 뭘급만 내주는데도 마이나스로 되고있다. 출판시장의 위축은 우리 글로 되는 책은 찍으면 찍을수록 밑지는 국면을 초래했다. 그래서 80년대중기까지만 해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우리 글로 된 책을 해마다 200여종씩 출판했었는데 현재는 자체의 돈벌이로 겨우 50여종을 출판하고있다. 북경민족출판사,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료녕민족출판사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조선족문학인들이 책을 펴내자면 제 돈으로 자비출판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많은 작가와 학자들의 원고가 책궤에서 잠자고있다.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읽을 조선글로 된 아동서적은 한족어린이들이 읽을 책의 100분의 1도 안되는 실정이다. 중국조선족문학이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상에서 렬거한 중국조선족문화의 제반 위기상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그것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생존과 발전은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민족공동체의 생존과 발전을 전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의 저면한 정치학자 리홍우선생은 《조선족의 전망》이란 책에서 《민족집거지는 민족의 존속과 발전의 기반》이라고 강조했고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고생물학자 고 안태상교수는 중국조선족의 운명을 근심하면서 중국조선족문화가 살자면 우선 연변이라는 이 최대의 중국조선족집거구를 살펴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바 있다. 연변을 살리자면 우선 연변의 경제를 살려야 한다. 경제토대는 모든 문화적요소의 전제적조건인 까닭이다. 연변경제를 진흥시키는 것은 연변조선족집거구의 안정된 발전을 도모하는 가장 전제적인 작업이다. 두만강지구개발은 연변경제진흥의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될수 있다. 두만강지구개발은 우리 민족이 하루속히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민족의 대렬에 들어서게 함으로써 이 집거구에 전국에 분산되였던 조선족인구를 다시 끌어들이는데 큰 기여를 할수 있다. 조선반도의 평화적통일의 실현에 있어서도 두만강지구의 개발은 연변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경제, 문화의 교류, 화해 등 여러 면에서 교량적작용을 더 잘할수 있게 할것이다. 그런데 두만강지구개발은 연변조선족들의 적극성에 의해서만 풀릴 문제가 아니다. 중국 성 내지 중앙으로부터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외국기업의 진출과 연변의 투자여건의 유리한 변화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해결될것으로 보고 있다.연변을 살리자면 연변의 농촌진지를 떼우지 말아야 한다. 연변의 농촌진지를 고수하는 길 역시 농촌경제를 발전시키는 길밖에 없다. 연변의 도시경제가 활성화되여야만 농촌경제도 살아날수 있다. 농촌에서의 다각경제를 발전시키고 농촌의 향진기업의 발전을 다그쳐야 할 것이다. 이래야만 맹목적으로 도시에 흘러들어간 농민들을 다시 농촌에 흡수하여들일수 있으며 따라서 농촌교육의 위기라든가 농촌인구의 감소 같은 문제들을 풀어나갈수 있다. 또 이래야만 중국조선족문학의 생족과 발전의 터전을 확보할수 있는것이다. 조선족은 흩어지면 죽고 모이면 산다. 조선족이 흩어지지 않고 모일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내는 길이 바로 문학을 포함한 전반 조선족문화를 살리는 길이다. 4. 맺는말 아널드 토인비는 《력사의 연구》라는 저서에서 그 유명한 《도전과 응전》의 력사철학, 문화철학의 중요한 명제를 내놓았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문명을 낳기 알맞은 정도의 도전을 과부족이 없는 《중용》의 도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조선족문학을 포함한 문화가 직면한 도전은 너무 가혹하여 응전해도 전혀 승산이 없는가? 아니다! 중국조선족문화는 이미 한세기 남짓한 자기발전의 행정속에서 많은 시련을 겪어왔고 여러번 준엄한 도전에서 성곡적으로 응전한 경험을 쌓았다. 지금 중국조선족문화가 직면한 도전은 우리가 일제시대나 문화대혁명시기에 직면한 도전과는 허투루 비교할수 없으나 우리 민족 전체가 용기와 힘과 지혜를 합쳐서 응전하기만 하면 이겨낼수 있는 《중용의 도전》이라고 판단해본다. 중국조선족문화라는 이 《꽃나무》는 이른봄의 꽃샘을 이겨내고 새로운 21세기에도 내내 어여쁜 꽃들을 피우면서 중국문화와 세계문화의 화원에서 자신의 어여쁨과 향기를 자랑하게 될것이라고 믿어마지않는다.
11    (론문) 문학을 통한 우리 말과 글 보존의 당위성과 가능성 댓글:  조회:8444  추천:55  2005-12-19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적사명과 당면한 문제 및 그 해결책 (2)김관웅2. 중국조선족사회에 있어서 문학을 통한 우리 말과 글의 보존의 당위성과 가능성 쏘련과 동유럽사회주의권의 붕괴, 쏘련의 해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진영사이에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던 랭전의 결속은 한 력사시대의 결속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오늘의 시대는 인류에게 반드시 정시해야 하고 대답해야 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류는 지금 바야흐로 어떠한 시대에 들어서고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결속된후 문명사이의 충돌이 시작될것이라고 예언하고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진영의 대항적인 국면을 대체하게 되는 것은 민족국가의 주체적지위의 회복이며 부동한 국가와 민족사이의 대립일것이라고 예언하고있다. 바꾸어 말하면 정치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결속된 진공상태의 공간을 민족주의이데올로기로 채우게 될것이라는 예언들이 과다하다는 점이다. 오늘의 세계는 마치도 이 예견에 증거를 수맣이 제공해주고있는것 같다. 원쏘련에 속했던 발찍해연안의 세개 공화국을 포함한 십여개 가맹공화국이 분리되여나가 저마다 주권국가로 독립했으며 수년을 지속된 원유교슬라비아의 여러 나라들간의 전쟁도 역시 민족적인 갈등이 그 기본원인이며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의 부족충돌 그리고 미국과 일본의 무역전쟁은 날로 치렬해지고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것들은 마치고 이데올로기에 의한 랭전이 결속된후 이전에는 국계를 초월한 이데올로기의 제약을 받았던 민족이나 국가들의 주체의식이 급속히 재생되였으며 아울러 민족의 리익과 가치관의 부동으로 말미암아 민족국가가 오늘 세계에서의 진정한 《개체》로 부각되여있음을 알려주고있는것 같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에는 상술한것처럼 민족주의의 상승의 국면과 동시에 지역간의 협력과 합작 나아가서는 세계 각 민족과 각 나라들사이의 교류와 합작이 그 어느때보다 활성화되여가고있다. 지금의 인류문화는 세계화와 민족화라는 이 상반되는 추세가 공존하면서 상호 충돌, 상호 보완 과정에서 발전하여 나아가고있다. 특히 본세기 후반기이후부터 인류문화는 날로 세계화의 추세를 보여주고있으며 80년대 이후로부터는 지역간의 협력 나아가서는 국제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력사적전환기를 맞이하고있다. 세계의 주류문명(主流文明)은 이미 몇백년의 발전을 거쳐서 몇천년동안 이룩한 인류문화발전의 력사적경험들을 흡취하였다. 하기에 세계의 주류문명은 일부 국가나 지역의 사람들의 지혜의 결정체인것이 아니라 전반 인류문화가 몇천년동안 발전하는 과정중에서 루적한 결정체인 것이다. 이 세계의 주류문명은 그 발전과정에서 일련의 도전에 직면했었고 아울러 이러한 도전에 대한 대답으로 대부분은 경험으로써 특히는 제도적인 문화의 형식으로 루적되였던것이다. 력사는 이미 세계의 주류문명의 흐름에 항거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파멸의 운명밖에 차례지지 않는다는것을 수없이 립증하여주고 있다. 히틀러의 파쑈주의가 바로 이를 립증하여주고 있다. 오늘의 세계를 둘러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것을 분명하게 보아낼수 있다. 즉 가장 기치선명하게 민족주의를 견지하는 나라들은 흔히 가장 강력하게 현대화의 주류문명에 대해 항거하는 나라들이며 따라서 지금 세계에서 가장 락후한 나라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세계가 바야흐로 대동세계로 변하지도 않을것이다. 민족주의가 존재하는 기초는 바로 지금의 세계에서 민족국가는 하나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라는 현실에 있다. 이 점으로부터 말한다면 민족주의는 사회생활속에서의 개인주의와 흡사하다. 한 사회내부에서 개인은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이며 이 기초에서 개인의식과 개인주의가 형성된다. 물론 이러한 개인주의를 리기주의와 동등시하지 않는것을 전제로 하여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인류세계의 범위내에서 민족국가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이다. 이러한 기초에서 전통적인 종족주의와는 구별되는 현대적인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것이다.이러한 현대의 민족국가와 서로 련계되는 민족주의는 적지 않은 경우에는 국가주의로 리해할수 있으나 중국과 같은 다민족의 국가에서는 상황이 다소 달라진다. 이상의 리유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낼수 있다. 민족국가는 국제사회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인 까닭에 민족의식의 형성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자기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은 정당하고 질책할수 없는 감정인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민족주의는 마땅히 세계의 주류문화도 영합할줄 알뿐만아니라 여타의 다른 국가나 민족과도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민족주의여야 할것이다. 바야흐로 다가올 21세기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가 하모닉을 이루는 시대일것이며 매개 민족들은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부동한 악기를 다루는 연주가들로 될 것이다. 마치도 매개 연주가들이 각기 부동한 음색과 음량을 가진 악기들을 연주하면서 심포니의 주선률에 맞추어 나가듯이 다음 세기에 있어서 매개 민족들은 각자가 자신의 부동한 문화의 특성을 지니고 세계문화의 심포니를 이루어갈 것이다. 아무런 개성도 없는 민족의 문화는 세계문화의 심포니에서는 그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것이다. 때문에 개성이 있는 민족문화일수록 세계성을 획득하게 될것이고 동시에 세계성을 획득할 때에먀만이 민족적인 독자성도 지켜낼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리치는 다수 민족의 포위속에서 살아가는 중국조선족 같은 이민사회에도 적용된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주류문화 내지 세계의 주류문화에 적극적으로 영합하는 유연한 자세를 갖추어야 할뿐만아니라 자기 민족 문화의 총체성과 독자성을 고수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러면 목전 세계에는 세계화와 민족화라는 두가지 흐름이 혼류(混流)하고있음은 분명하지만 이 량자에서 어느쪽이 주된 흐름인가? 필자는 목전 세계 각지에서 일고있는 민족주의의 팽배는 낡은 국제질서의 붕괴의 메아리임과 아울러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건의 전주곡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다음 21세기는 민족주의를 주체(主題)로 하고 민족간의 충돌이 세계의 《주요한 모순》으로 떠오르게 되는 민족주의의 세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오래동안 세계의 인류문화는 세계화와 민족화라는 이 두가지 흐름이 공존하면서 상호충돌,상호보완의 추세를 이루면서 지속될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0세기 후반기이후로부터 인류문화는 날로 세계화추세를 보이면서도 민족국가라는 이 세계구조의 구조단위가 분명해져가고 있다. 특히 80년대 이후로부터 세계구조중의 구조단위로서의 민족국가들은 개방화, 국제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력사적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국경없는 협력이 경쟁의 시대로 진입했다. 어차피 이와 같은 교류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력사적현실이다. 세계는 급속히 하나의 지구촌을 지향하면서 한민족(혹은 여러 민족)이 한 령토안에서 거주하고 활동함을 원칙으로 하는 전통적 민족의식, 국가의식이 수정되여야 할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제는 각국에서 안거하며 생업에 종사한다는 소극적인 생활태도에서 탈피하여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당당한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거주국와 모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함께 기여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지니며 활동할수 있는 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이민사를 통해서 본 중국조선족의 소극적위치와 사회적역할이 종전과는 전혀 다른 적극적차원으로 발전적전환을 해야만 하는 국제적환경이 급속히 조성되여가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미래에 있어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의 새로운 차원과 역할과 위상의 제고는 기대할수 있는것이다. 또한 이러한 시대정신과 시대론리는 중국조선족의 총체성위기극복에도 큰 의의을 부여할것으로 믿는다. 개방화, 국제화 시대라고 해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포기하여 다수민족이나 선진국 문화에 절제없이 동화되여야 한다는것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인것은 아니다. 비록 목전 우리 민족의 남북통일에는 걸림돌이 많으나 조만간에는 꼭 남과 북의 통일을 이룩하고 우리 문화의 페새성을 지양하여 세계적인 련관속에서 통일된 배달민족 문화의 위상을 찾으며 배달문화의 국제화가 진전될 때 발전지향적으로 통일된 배달문화가 창달되여가는 것으로 믿는다. 21세기의 문턱을 바야흐로 넘어서려는 이 시각에 우리는 《삼국연의》의 첫머리에 나오는 《천하대세는 무릇 합쳐지는 법》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것이다. 남북분단은 이미 반세기를 넘어섰다. 갈라진지 오랬으니 21세기의 벽두에는 아마도 통일의 종소리가 삼천리강산에 울려퍼질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싶다. 프랑스 계몽시대의 사상가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라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제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멋있게 웃는 사람》이라고 말한적 있다. 우리 배달민족은 반만년 유구한 력사과정에서 강대국의 등살에 기를 펴고 살아오지 못한적이 많았고 지금도 강대국들의 국제적력학관계속에서 민족통일을 이룩해나가는데 많은 걸림돌에 부딪치고 있다. 비록 난관은 있으나 우리 민족은 어차피 민족통일의 성업을 이룩해나갈것이고 통일과 함께 나타나게 될 종합적국력의 국제적위상을 높여줄것이며 따라서 우리 배달민족문화의 국제화는 빠를 속도로 진전되여나갈것이다. 이러한 배달문화와 국제화가 진전될 때 중국조선족사회를 포함한 해외동포사회는 더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더 유리한 위치와 자세로 우리 배달문화를 현지사회나 국제사회에서 수용되기 쉬운 방식에 의해서 전파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해외동포의 이러한 기능과 역할은 사실 오래전부터 보여지고있다. 례컨대 중국조선족은 1992년의 한중수교를 전후하여 《자발적으로 혹은 나라의 요구에 따라 오늘까지 증설된 33개의 중국의 각 대학들의 한국어학과》들에 많은 교원들을 보내주었으며 대중국진출의 한국기업체들에서도 많은 역할을 하고있으며 한국문화를 중국에 소개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매개자적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자신들이 열심히 지켜온 우리 문화의 힘과 지혜로 현지사회와 조선반도 문화발전을 위해 기여하여왔으며 또 기여할 것이다. 한국어가 미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육제도의 핵심이며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되는 SAT 시험에 제 2외국어로 채택된 것은 한편으로는 한국의 국가적성장에 힘입었지만 한편으로는 재미한국인 사회의 적극적인 역할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리하여 우리 말과 글은 미국의 한국인사회에서는 대단히 활성화되여가고있는 실정이다. 미국에는 우리 말을 가르치는 과정을 두고있는 대학이 하버드, 워싱톤, 콜롬비아, 버클리, 하와이, 등 약 70여개나 된다고 한다. 이밖에도 일본에는 5개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설치되였고 도호꾸대학 등 65개 대학에 우리 말 강좌가 설치되였다고 한다. 로씨야, 독일, 프랑스,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페스꼬슬로벤스꼬, 웽그리아, 뽈스까, 벌가리아, 뉴지리, 이딸리아, 뽀루뚜갈, 단마르크, 스웨리예, 화란, 벨지끄, 핀란드, 아르헨띠나, 브라질, 말레이시아, 타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이스라엘 등 30여개의 중요한 나라들에도 우리 말을 가르치는 학과나 과정이 설치되였는바 우리 문화의 국제화의 진전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한국어와 한국학회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워주는데서 걸림돌로 나섰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동기결여》를 치유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중국에는 《남편이 존귀하면 마누라도 따라서 존귀해진다(夫尊妻贵)》라는 성구가 있는데 이 성구를 빌어서 80년대중반이후 한국 경제력의 성장에 따른 한국 정신문화의 중국에서의 지위향상을 설명한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6, 70년대 중국의 좌적이 로선과 《문화대혁명》의 내란속에서 제발을 빼지 못하고있을 때 한국의 경제는 비약적인 급성장을 거듭했다. 짧디짧은 20년동안에 한국은 놀라운 속도로 농업국으로부터 공업국에로의 전변을 실현했고 일약 세계의 12개 무역대국의 행렬에 끼여들게 되었다. 1988년 제 24차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하나의 거대한 리정표였고 하나의 거대한 상징이였다. 이는 한국이 세계의 발달한 국가의 경제수준에로 접근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세계 경제무대에서의 홀시할수 없는 중요한 배역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십년동란이 끝나서야 비로소 중국은 한국에서 일어난 기적에 대해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고 20년사이에 일어난 자기와 한국사이의 경제적거리의 변화에 대해 놀라게 되었다. 80년대초반에 한국에 대한 중국의 흥취는 주로 경제적인 면에 머물러있었다. 왜냐 하면 한국의 경제비약의 비결을 알아내는것은 중국의 경제개혁과 대외개방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2년 중한수교후 량국간의 경제교류가 급속하게 활성화되면서 한국의 대중소기업들이 분분히 중국에 투자하고 공장들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한국어를 포함한 한국문화는 이미 관심의 범위를 초월하여 반드시 료해하고 장악해야 할 대상으로 부상되였다. 한주수교후 짧디짧은 5―6년사이에 중국의 33개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설치하여 그 수자가 프랑스어학과의 수자를 앞질러 영어, 일어, 로어, 다음으로 제4위를 차지하기에 이른 이 점은 한국 경제성장에 따른 한국어를 비롯한 한국 정신문화의 중국에서의 지위의 갑작스러운 향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즘 한국이 잠시적인 경제적난관에 봉착했지만 이 난관을 타개하고 경제적인 성장의 태세를 회복하기만 한다면 한국에 대한 중국인 들의 관심은 필연적으로 물질령역으로부터 부단히 정신문화적인 령역에로 확장되여갈 것이다. 이제 2002년 축구월드컵 공동개최국으로 한국은 또 하나의 력사적전환기를 맞게 될것이며 한국은 세계 발달국가의 행렬에 끼여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가 온것이다. 우리 말과 글의 세계적보급과 문헌의 뒷받침이 있어야 영구히 정신적국력을 문화의 형식으로 보존할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세계속의 우리 말과 글의 교육문제는 실로 력사적중대사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말과 글이 현재의 영어처럼 《세계어》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말과 글의 세계화》는 력사상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중에 있다고 할수 있다. 우리말과 글의 세계화란 한마디로 우리 말과 글이 국가와 민족의 계선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해당 언어집단에 따라 새로운 삶을 형성해나가는것을 말한다. 즉 우리 말과 글을 쓰고 배우고 가르치고 나아가서는 우리 말과 글로 창작활동을 하고 우리의 모국 내지 해외배달동포들의 문학을 연구하는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과 글을 쓰는것이 불편하거나 쓸모없이 거치장스러운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편리하고 유용하며 우리 민족의 삶의 질의 향상에 대단히 유조하며 따라서 우리 말과 글을 쓴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다주는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하게 되는것이다. 특히 중국조선족사회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우리 말과 글을 류창하게 구사함으로써 중국조선족사회의 발전은 물론 현지사회의 조선반도, 나아가서는 세계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할수 있는 그러한 미래가 바야흐로 도래하게 될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우리 말과 글의 보존의 당위성과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는데는 모국과 해외동포사회의 공동한 노력이있어야 함은 더 말할나위도 없겠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모국쪽에 있는것이다. 즉 모국의 국력이 부단히 신장하여 모국문화가 해외동포들의 현지민사회에서까지 높은 위상을 가지고있어야 한다. 적어도 같은 수준이나 우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모국문화가 해외동포들이 살고있는 현지민사회의 문화에 이바지할수 있을 만큼 주체성과 특성을 지니고있어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이 살고있는 현지사회의 주체민족인 한족들이 이미 조선반도문화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고있는 이상 이민사회인 중국조선족사회에서의 모국문화보존이 가지는 문화사적 및 세계사적 의의를 리해할 날은 오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중간의 경제거래가 계속 활성화되여가고 한국 기업체들의 대중국진출이 계속 진행되고 정치 및 외교 면의 친선관계가 계속 지속될 경우 중국조선족들은 조선반도의 혜택을 계속 볼수 있게 될것이며 조선반도문화보존에 더욱 힘을 쏟게 될것이다. 그리고 최은택감독을 초빙함으로써 연변축구팀이 중국프로축구에서 제4위권에 든 것 같은 센세이숀이 거듭 일어날 때 중국인들은 중국조선족사회에서의 조선반도문화보존을 위한 노력을 조만간에 리해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이 조선반도 및 기타 해외동포문학과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자신의 수준을 부단히 높여감에 따라 《한어가 조선어보다 간결하고 힘있다.》고 하면서 우리 말과 글의 우아하고 풍부함을 무시하고 한어를 숭배하는 문화패배주의, 문화렬등감도 조만간에 치유될수 있으리라고 전망할수 있다. 1997년 하반년에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한국텔레비죤련속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번역하고 배음하여 전국에 방송한 뒤를 이어 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이 련속드라마를 원판으로 방송하였는데 이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이면 연길의 길거리가 다 조용해질 정도로 대환영을 받았다. 지금 연변의 적지 않은 가정들에서는 위성중계를 통해 KBS, SBS 같은 서울의 텔레비죤방송을 시청할수 있게 되었는데 이 역시 중국조선족사회의 일부 사람들의 문화패배주의와 문화렬등감을 치유하는 가장 훌륭한 약재로 리용되고있는 실정이다. 사실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과 우수함에 대한 무지와 회의는 조선반도 문화와의 장기간의 격리와 한어의 충격에 의해 오염된 《연변식조선말》에 의해서 생겨났던것이다. 이른바 《연변식조선말》이란 연변지역에서 쓰이는 사투리, 오역한 한자어휘 그리고 일부 한어어휘까지 뒤섞이고 심지어는 문장구조나 표현수법마저 한어화된 오염된 말을 가리킨다. 우리의 말은 한어를 포함한 세계상의 그 어떤 말과도 그 아름다움과 풍부한 표현성을 가지고 어깨를 견줄수 있으며 우리의 조선글은 한자에 비하면 훌륭하기 그지없다. 한자는 무려 5만자를 올리찌르는 표의문자로서 그 누구도 다 알지 못하고 있다. 조선글은 28자,그것도 너무 많아서 넉자를 줄여서 24자를 쓰고 있다. 이런 문자를 쓰고있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행복한 민족이라고 할수 있다. 지구상의 50여종의 문자가운데서 조선글처럼 합리적이면서 리론적이고 편리한 문자는 별로 없다. 초성, 중성, 좋성을 한글자로 합쳐 한음의 글자를 아름답게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은 표음문자인 여타의 문자들과도 또 다르며 특이하다. 가장 간단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알기 쉬운 조선글은 인간지혜의 극치이다. 그런데 바쁘고 심오한 뜻을 함축성있게 표현하려는데는 단점도 지니고있어서 뜻글인 한자도 적절하게 리용할수 있게 되어있는것이 또 조선글의 장점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장점이 많은 표음문자인 조선글과 대표적인 표의문자인 한문을 적절히 리용하는 것은 리상적인 문자생활이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놓은 격으로 장점을 더해쓰는 슬기이다. 물론 우리 말과 글은 남북분단의 정치적현실로 하여 남북사이의 언어이질화현상이 존재하고있으며 언어통일의 부재로 하여 해외에 살고있는 동포사회에서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고 지켜가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있는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만한 정도의 이질성은 중국의 광동방언을 복건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상해말을 여타의 한족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의 이질성은 아니다.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에 존재하는 언어이질성의 차이로 인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다. 언어통일에 있어서 우런 남과 북이 통일되면 해외 배달민족 공동체들에서는 자연히 따라갈것이다. 총적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은 우리 말고 글을 지키는 튼튼한 방벽으로 존재의 가치가 있으며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인들은 우리 말고 글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민족동화를 방지하는 전위부대로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지니고있다. 앞으로 다가올 새 세기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보완하면서 공존해가는 세기일것이다.세계의 각 민족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목소리를 가지고 세계인류문화라는 이 심포니를 연주하게 될것이다. 이 세계인류문화의 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우리 민족문화는 그 어느 문화도 대신할수 없는 불가결의 요소이다. 우리 배달민족의 문화가 소외된 세계인류문화의 심포니는 하모닉을 이룰수 없는것이다. 여기에 바로 중국조선족사회에 있어서의 문학을 통한 우리 말과 글 및 우리 문화 보존의 당위성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10    (론문) 문학을 통한 우리말과 글 보존의 중요성 댓글:  조회:8674  추천:53  2005-12-16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적사명과 당면한 문제 및 그 해결책 (1)김관웅1. 중국조선족사회에 있어서 문학을 통한 우리 말과 글의 보존의 중요성 하나의 인간집단으로서의 소수 이민사회가 모국이 아닌 타국에 정착하여 세대를 이어 살아가는 경우 앞길은 크게 세가지로 말할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첫째는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지사회의 다수민족에 비해 우월하지 못해서 가능한 정도로 될수록 빨리 모국생활에서 밴 문화적특성을 잃어버리고 현지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적응, 동화함으로써 현지사회의 문화와 이민사회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현지민과의 차별성이나 갈등을 가급적으로 빨리 없애버리고 현지사회의 문화에 주동적으로 동화되여가는 길이다. 재미동포사회가 적잖게 이러한 성향 (性向)을 띤 이민사회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재일한인사회에서도 민단계통이 이러한 성향이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타국에서나마 같은 민족끼리 현지민과의 다른 하나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이민사회를 형성하고 그속에서 모국문화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길이다. 이 경우 현지사회와 단절된 이민사회는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수 있다. 따라서 현지사회가 자국내에 이러한 이민사회를 그대로 용납하느냐 하는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일본에서의 해외동포사회인 조총련계통이 다분히 이러한 성향을 견지했었으며 중국에서의 조교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세번째 길은 현지사회의 문화에 일부 순응하면서도 모국으로부터 지니고 온 자신의 기본적인 문화특징들을 대부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중용적인 길이다. 중국조선족은 한세기 남짓한 중국에서의 이민생활에서 바로 첫번째 길도 아니고 두번째 길도 아닌 세번째 길을 택하여 지금까지 드팀없이 걸어오고있다. 때문에 중국조선족문화는 숙명적으로 중국적요소와 모국적요소가 혼재한 이중적성격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조선족문화의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서의 중국조선족문학도 이중성격을 피치 못하게 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7천만 배달민족이 영위하는 세계한글문학이라는 이 대계통속의 하나의 자계통으로 존재하고있을뿐만아니라 중국의 주체민족―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56개 민족이 영위하고있는 중국문학이라는 이 대계통속의 하나의 자계통으로서도 존재하고있다.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면한 평론가 조성일선생은 중국조선족문학이 지니고있는 특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바 있다. 《조선족문학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 중국 각 시대의 력사적생활공간에서 이루어온 문학으로서 모국의 국민과 모국문학과의 내재적인 정신적, 문화적 력사적내용이 수용되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족문학이 비록 조선어문학권에 속하는 다른 문학과는 달리 많은 경우 중국의 력사변천, 중국의 독특한 사회생활, 중국의 자연풍경, 중국국민과의 가치관념, 도덕규범, 사유방식, 심리갈등, 심리추구 등을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이것은 조선족문학의 중국적특성을 설명해주는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릴수 있다. 즉 중국조선족문학이란 중국에 정착하여 사는 중국조선족이 모국과는 다른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환경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가지고 영위하고있는 문학이다. 자기의 말과 글로 하는 문학이라는 점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만족, 장족, 회족 등 기타의 중국의 소수민족 문학과는 판이하다. 이로 하여 우리는 언제나 자긍심을 지녀왔으며 동시에 중국문학계통속에서 늘 변두리에 처해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의 개별적인 문인들이 한어 (汉语)로 문학창작을 하고는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조선족문학의 주된 흐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국조선족문학은 배달민족의 해외 500만동포 문학계통속에서 가장 긴 문학발전의 력사를 지니고있을뿐만아니라 또한 자신의 《문단, 작가집단, 문학단체, 문학지, 문학작품생산, 문학출판사, 문학활동》 그리고 문학소비집단 등 문학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조건을 갖추고있으며 또한 자기 민족의 말과 글로 문학을 영위하고있음으로 하여 《조선문학 한국문학과 더불어 세계조선어문학권의 3대산맥중의 일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중국문학속에서의 위상은 보잘것없다. 심지어는 한어로 창작하는 비중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학보다 훨씬 더 많은 티베트족이나 몽골족의 문학의 위상보다 못한 형편이다.그리고 직관적인 무용이나 회화, 음악, 같은 기타 예술형식의 중국에서의 영향에 비해볼 때 중국조선족문학의 중국에서의 영향은 아주 미미한 형편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조선족문학이 중국의 통용문자와는 다른 우리말과 글을 가지고 문학을 영위하고있기때문이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한다. 얻으면 잃는 법이요, 잃으면 얻는 법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은 늘 중국문학속에서 변두리위치에 처해있었으니 이는 분명이 잃었음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변두리위치는 오히려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이 시종 자신의 말과 글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적특색을 확보할수 있게 했으니 이는 분명히 얻음이였다. 우리는 이 잃음과 얻음의 량자중에서 후자가 더 크고 귀중하다고 생각해오고있다. 한 민족의 문학이 자기의 말과 글을 상실하여 타민족의 말과 글을 빌어서 소위 민족문학을 영위한다고 하는것은 어디까지나 절름발이식의 민족문학이기 때문이다. 설사 중국조선족문단의 모든 문인들이 한족문화에 동화되여 한어로 창작을 한다로 해도 중국조선족문학이 중국문학의 중심적위치에로 이동해갈수는 없다. 일부 사람들이 중국문단에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의 개선을 위해 중국조선족문학작품에 대한 한역(汉译)사업에 힘을 기울이고있고 또 일부 조건을 갖춘 작가나 시인들이 한어로 창작활동을 하고있는것은 바람직하지만 결코 이것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주된 흐름이 아니며 또 주된 흐름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말과 글을 통한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드팀없이 견지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정도(正道)이다. 중국에서는 해방후 《민족》이란 이 낱말을 해석할 때에는 늘 쓰딸린의 민족에 대한 정의를 빌려오군 했다. 쓰딸린은 민족을 《력사적으로 형성된 공동한 언어, 공동한 지역, 공동한 경제생활 및 공동한 문화우에서 이루어진 공동한 심리적소질을 가지고있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인간공동체》라고 규정한바 있다. 민족을 분류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언어를 민족분류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데 이는 공통의 언어가 민족성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대전제이고 또 언어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심성과 밀접하게 련관되여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유태민족이나 중국의 회족같은 민족은 쓰딸린이 지적한 민족구성의 4요소중에서 앞의 세가지 요소는 상실한지 오래지만 애오라지 공통된 문화우에 이루어진 공동한 심리적소질을 확보함으로써 민족의 총체성과 독자성을 잃지 않고있다. 유태민족이나 회족을 두고 말할 때 이들의 공통한 민족소질 형성과정에서 가장 큰 기능을 수행한 것이 이들이 강인한 종교와 신앙이였음은 주지하는바이다. 말하자면 리산의 쓰라림을 맛보면서 1천 8백년 이상의 오랜 세월동안 타민족에 동화되지 않고 유태인의 독자성을 지켜온데는 주로 이들의 강인한 종교전통과 유태교가 절대적진리라고 굳게 믿는 드팀없는 신앙정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이라고 믿는 민족적자부심, 드높은 교육열 같은것이 크나큰 정신적기둥으로 되여왔던것이다. 중국조선족이 모국문화로부터 이어받은 문화전통속에는 바로 유태인과 같은 종요신앙의 전통이 결여되여있었다. 이런 까닭에 중국조선족에게는 민족을 응집시키고 민족구성원들을 종교적뉴대로 응집시키는 종교신앙적장치가 결연되여있었다. 하기에 공동한 지역과 공동한 언어라는 이 두개의 요소만 소실되면 중국조선족의 총체성이나 독자성은 물먹은 흙담처럼 무너지고만다. 게다가 우리의 모국문화는 몇천년동안 중국문화의 강대한 영향권에서 생활해왔으며 미국의 저면한 동양시 연구가 라이샤워 페어뱅크의 말을 빈다면 한국의 전통문화는 《중국문화의 하나의 변형》에 불과하다. 우리 모국의 문화전통은 적잖은 부분이 강한 중국문화의 장기간의 영향아래에서 형성된것이며 인종적으로도 모두 황인종의 같은 피부,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있는 까닭에 이방인들의 눈에 비쳐진 한국문화와 중국문화의 차이성은 극히 적다. 《한국과 일본의 고도문화 (高度文化)는 쳔년이상동안이나 중국의것과 너무나도 흡사하기때문에 그들에게는 사실상 중국문화와 동일하다고까지 보여진다. 이 두 나라가 남겨놓은 훌륭한 미술의 대부분은 중국의 원형과 거의 식별할수 없을 정도이고 그들의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순문학적 저작들조차도 어느 모로 보아도 중국이느이 저작이라고 보여질수 있는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특히 그러한바 그 서적의 대부분은 중국인의 저술과 거의 구별할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그 정치제도나 종교적, 륜리적 개념에 있어서나 또 예술, 문학에 있어서나 오래동안 동아문화권에 완전한 일원이였다. 특히 한국은 중국문화와 너무나도 밀접하게 닮았기 때문에 그 고유명사들조차도 중국식인 형(形)을 따르고 있다. 한국의 지명의 대부분은 발음은 약간 다르지만 한자로 적어놓으면 중국의 지명과 구별이 안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인명은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인명과 동일하여 성이 한자이고 이름이 두자로 되는것이 정형적이다.》 이밖에도 일상의 풍속이나 년중행사 같은 면에서도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와 대동소이하다. 음력설부터 섣달 그믐날까지의 중요한 명절마저도 전통사회에 있어서는 거의 같았다. 바로 이러한 문화의 동질성과 인종적인 면에서의 류사성은 력사적으로 중국에 건너온 배달민족의 이민사회가 거퍼 한세기이상을 지탱하지 못하고는 중국문화라는 이 망망대해속의 몇방울의 물로 변해버리게 했다. 당나라시기 중국의 동남연해지역과 양자강연안의 도처에 널려있던 신라인들의 이민사회― 신라방이 지금은 어디에 있으며 원명청(元明淸) 여러 조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동부지역에 건너온 수많은 배달민족의 이민사회는 다 어디에 있는가. 명나라초기에 료동지방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하던 고려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말았고 지금은 료녕성과 하북성에 있는 두 박씨 마을을 통해서만이 그 옛날의 배달민족 이민사회의 존재를 겨우 확인할수 있는 형편이였다. 중국조선족의 문화계통속에는 강인한 종교신앙적장치가 결여되여있으므로 공동한 언어와 문자의 상실은 곧 민족의 총체성, 독자성의 상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을 지키고 문화의 독자성을 지키는 유일한 문화적 장치요 방선이라고 할수 있다. 중국조선족이 한세기 남짓한 세월속에서 자기 민족의 총체성과 문화의 독자성을 우지하년서 지금까지 굳건하게 생존해올수 있은 것은 첫째로는 자기의 집거구를 가지고 공동한 지역에서 똘똘 뭉쳐 살아온 덕택이며 둘째로는 이 집거구를 발판으로 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교육을 끈질기게 견지해온 덕택이였다. 우리의 민족교육과 더불어 우리의 문학과 예술 그리고 출판, 언론, 언어연구 등 분야들을 동화와 비동화(非同化)의 모대김속에서 민족의 얼을 지키고 민족의 총체성, 독자성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지워버릴수 없는 큰 공로를 세웠다. 이중에서도 문학이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단순한 오락적기능이나 심미적기능만 수행하여온것이 아니라 시종여일하게 우리 민족의 얼을 담고 문화를 담는 기능을 수행했고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기능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여왔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중국조선족문학은 심미적기능만 강조하는 순문학이나 오락성과 상업성만 강조하는 통속문학, 상업문학과는 담을 쌓아왔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의 창작주체는 우리 말과 글을 지켜온 문화부대의 역할을 남김없이 수행하여왔으며 우리의 시, 소설, 수필, 극들은 우리 문화를 담는 가장 중요한 그릇으로 존재하여왔다. 일언이페지하면 비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중국조선족문화는 필연적으로 교육이나 문예 같은 세속적인것을 통하여 전승되고 발전되여왔으므로 앞으로도 우리 문화의 보존은 바로 이상의 두 요소에 많이 힘입게 될 것이다.
9    (수상록) 총명스러움과 바보스러움 댓글:  조회:7971  추천:37  2005-12-15
•수상록• 총명스러움과 바보스러움 김관웅 18세기, 청나라시절의 유명한 서화가 정판교(鄭板橋,1693--1765)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요즘 나는 늘 내 자신을 두고 이 말의 숨은 뜻을 음미하고 있다. 소학교 공부부터 시작하여 박사공부까지 했으니 얼마간은 총명스러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총명스러움은 어디까지나 학문령역에서의 지식과 정보량의 확장으로 해석할수 있는것이지 개인적나 사화적인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처리하고 자기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능란하게 보호하는 삶의 지혜와 예술 같은 대총명은 아니다. 한마디로 장강의 물처럼 웅숭깊은 대총명이 아니라 접시에 담은 물처럼 옅디옅은 소총명이다. 장강의 물은 소리없이 묵묵히 흘러가지만 소오줌 줄기만 실개천이 더 촐랑대듯이 대총명의 소유자들보다는 소총명의 소유자들이 오히려 자아표현, 자아홍보에 더 신경을 쓰고 남들앞에서 시뚝하고 으시대고 쩍하면 교육자의 립장에 자기를 내세워 남들을 훈계하기 좋아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요즘 내가 바로 소오줌 줄기만한 실개천처럼 촐랑대는 소총명의 소유자임을 절감하게 되였다. 그것은 두 젊은 문학도와 나 사이에서 일어난 크지도 작지도 않은 트러블로부터였다. 약 한달전의 일이다. 한번은 내가 문단의 한 모임에서 한 젊은 문학도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켜 보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한적(그때 나는 선의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있다.며칠이 지나서 나는 그 나 젊은 문학도로부터 항의에 가까운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겉으로 사과를 했을 뿐 속으로는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었다. 오히려 하고 자기가 아닌 남을 탓했던것이다. 이 일이 있은지 한달도 채 안되는 며칠전의 일이다. 역시 남을 훈계하기 좋아하는 버릇이 또 사건의 발단으로 되였다. 나는 평소에 이 젊은 문학도에 대해 비상한 관심과 배려를 돌려 왔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것은 공식적인 사제간은 아니지만 내가 문학에 대해 직접 가르쳐 준적 있고 작품에 대해서도 다듬어도 주고 적극 내 홈페지를 통해 홍보해 준적도 있었으니 나는 훈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몇편의 시와 글들이 지면에 발표된 후에 살펴본 그의 태도들에서 나는 반드시 교정(校正)을 하여 주어야 한다고, 내 딴에는 비뚤게 자라나는 곁가지들을 전지(剪枝)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나는 내 소신대로 그를 소위 하느라고 좀 이상한 방법(즉 갑자기 랭대를 하고 무시를 해버리는 등)을 취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빗나갔다. 자존심이 하늘만한 그는 나의 소위 과 를 접수하기는커녕 강렬한 반발을 하여 왔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거듭 류사한 일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타인들에게도 물론 마땅히 교정이나 전지를 해야 할 결함들도 있겠지만 우선 나에게 마땅히 교정하고 전지를 해야 할 결함들이 훨씬 더 많음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닫기 시작하였다. 먼저 학생노릇을 하고 후에 선생노릇을 하라고 누군가 말한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가? 이것이 직업병인지 나 개인적인 인격적인 약점인지는 잘 몰라도 나는 언제나 남들앞에서, 특히는 젊은이들앞에서 선생노릇만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태도나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훈계만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칭찬하여 젊은이들의 전정(前程)을 그르치는 봉살(捧殺)도 나쁘지만 자라나는 젊은이들을 움을 마구 따버리고 자존심을 마구 짓밟아 버리는 매살(罵殺) 역시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것이다. 이번 두 사건을 통하여 남을 교정만 하고 전지만 하려고 무모하게 접어들었던 내가 젊은이들로부터 교정을 받았고 전지를 당했던것이다. 아무튼 두 젊은이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러면 이제 나에게 남은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래서 로자도 >고 하지 않았던가. 한 인간이 큰 지혜, 큰 총명을 지닌다는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총명스러움으로부터 바보스러움에로 전환한다는것은 인격의 질적인 비약이요, 고차원에로의 승화이다. 이것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음을 지어 먹고서라도 꼭 이룩해 내고야 말것이다. 그 결심의 징표로서 나는 내 아호(雅號)를 바보라고 정식으로 확정하는 바이다.
8    (수상록) 흙탕물속에서 꼬리를 끄는 거부기 댓글:  조회:4861  추천:53  2005-12-14
§수상록§ 흙탕물속에서 꼬리를 끄는 거부기 김 관 웅 에는 이런 얘기가 기록되여 있다. 莊子가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초나라의 임금이 두 신하를 파견하여 임금의 뜻을 전하게 했다. 莊子는 낚시대를 쥔 채 돌아 보지도 않고 말했다. 莊子는 道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도가사상의 핵심은 한마디로 自由,自然 이 두 마디로요약할 수 있다. 어떠한 인위적인 구속이나 속박에도 거부하고 한 점의 걸림도 없는 대자연인, 대자유인으로 逍遙自適하면서 살기를 바랐던 莊子에게 있어서 초나라의 정치를 맡아 달라는 부탁은 눈썹 찌푸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나라 임금의 뜻을 전하려고 찾아온 두 신하를 쳐다 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묘당에 모셔진 神龜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흙탕물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는 거부기가 되겠다는 비유를 내뱉았던 것이다. 莊子는 지위나 명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위나 명성이 있다고 하여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벼슬이 높은 자는 사실 삼중, 사중의 바줄에 결박되여 자유를 상실하고 살아 간다. 첫째는 일의 바줄이요, 둘째는 명성의 바줄이고. 셋째는상하좌우 인간관계의 바줄 같은 것이다. 연자방아를 돌리는 나귀처럼 일에 결박당히여 오도가도 못하고, 남들보다 높은 명성을 보전하기위해서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도사려야만 하고, 상전의 눈치를 살피고 동급들의 기분을 파악하고 하급들의 동향을 장악하느라고 한 시각도 느긋해 질 수 없는게 벼슬하는 사람들의 생태가 아닌가. 그러나 인간들은 흔히 자진하여 이런 삼중 사중의 바줄에 칭칭 결박당하여 살려고 아득바득한다. 요즘의 세태를 보아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온통 벼슬길에 나가기는 쉽게 하고 벼슬길에서 물러 나기는 어렵게 하는 속물들로 가득 차 있다.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도 찾아 보기 힘들다. 아예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 자체를 거부한 장자의 莊子의 태도는 지나치게 독선주의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지위와 명예를 위한 인간으로서가 아닌 자유를 위한 인간으로서 살기를바랐던 그의 정신은 오늘 지위와 명예에 중독된 우리가 높이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7    (수상록) 모래성 댓글:  조회:4692  추천:65  2005-12-12
§수상록§ 모 래 성 김 관 웅 우리는 세상에서 얻어지는 권력, 재산, 녀색, 명예 이런 것들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얻어 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일생을 바쁘게 뛰여 다니면서 남과 다투기도 하고 남에게 손해를 끼쳐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이 림박하여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 하나하나 어렵게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버리고 만다. 부처님은 이것을 아이들이 강가의 백사장에서 모래를 가지고 성이나 집을 만들어 , 하고 제각기 남이 손도 못 대게 하면서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 오면 마음은 성에서 떠나 모두 내팽개치고 가버리는 것에 비유했다. 현대인들은 항상 초조와 긴장 속에서 살아 간다. 이것이 마음이 무엇인가에 크게 얽매이고 집착해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이 쌓은 부귀의 성이 아이들이 강가에서 모래로 쌓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살이는 좀더 느긋할 수 있지 않을까.
6    (수상록) 남성의 직선적사유와 녀성의 그물식사유 댓글:  조회:4547  추천:78  2005-12-07
남성의 직선적인 사유에 비해 녀성은 그물식사유를 한다고 미국의 녀류학자 헬렌 페시르는 라는 저서에서 주장한다. 그러면 그물식사유란 어떤 사유인가? 그물식사유란 서로 관련되는 요소들에 대해 련관적으로,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사유방식을 뜻한다. 중국말에 는 말이 있지만 이는 남자들에게는 맞는 말이지만 녀성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 속담에 녀자들은 는 말이 있다. 아마도 녀성들은 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속담이 생겨난 것 같다. 녀성들은 보채는 아기를 추슬러 업고 얼리면서 쌀을 씻음과 동시에 국이 넘어 나는가 살펴야만 한다.. 녀성의그물식사유의 일상생활에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번잡한 일상사무를 처리하는 비서노릇이 녀성들의 적성에 맞는것도 녀성의 이런 그물식사유와 무관하지 않다. 잡다한 일들을 함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은 사무실에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내가 근무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사무실에는 비서로 일하는 20대후반의 주송희라는 젊은 녀성이 있다. 재직연구생으로 연구생공부를 하면서 학과의 과정배치, 학생들의 성적관리 같은 잡다한 일상사무를 함께 처리 할뿐만 아니라 학과의 출납원 겸하였고 또 복사기를 사용하고 관리하고 있으며 학과의 수많은 문건들도 주송희의 손에 의해 타자된다. 비서, 타자원, 출납원, 연구생, 가정주부 …… 주송희씨는 그야말로 일신다역으로 눈코 뜰새 없이 분망히 보내지만 어느 때 보아도 해놓은 일이 빈틈이 없고 깐지다. 그래서 나는 주송희야말로 그물식사유를 한다고 생각해 오군 했다. 마치도 서커스단의 녀자배우들처럼 수많은 접시를 두 손으로 동시에 돌리지만 떨구는 일이 없듯이 그 번잡한 일들을 동시에 척척 처리해 나가는 주송희를 볼 때마다 나는 그저 부럽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10여년전 내가 연구생공부를 할 때는 집안에 들어 박혀 책만 보면서 학교의 가장 중요한 회의나 행사마저 잘 참가하지 않아서 얼마나 선생님들부터 지청구를 들었던가. 이것은 게으른 나의 천성 탓이기도 하였겠지만 나란 인간은 한가지 일에만 전념해야지 두가지 이상의 일을 벌리면 이미 벌려 놓은 한가지 일마저 잘 하지 못하는 남성적인 직선적인 사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지금도 나는 한가지 일을 끝내야만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아마도 남성적인 직선사유가 나의 몸에서 가장 선명하게 표현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녀성적인 그물식사유를 하는 남성분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은사인 정판룡선생님이 바로 녀성적인 그물식사유방식을 가진 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판룡선생님은 연변대학에서 부교장이라는 보직도 10여년 동안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박사생도사도 겸하고 거기에다 누구보다 왕성한 사회활동도 줄기차게 벌이셨다. 그야말로 일신다역으로 한 생을 분망하게 보내셨다. 우리는 정판룡선생님 같은 분을 쌍견도(雙肩挑)간부라고 불렀다. 즉 두 어깨에 모두 멜대를 멘 간부라는 뜻이다. 남성은 본질적을 한 어깨로만 멜대를 멜 수 있고 녀성은 본질적으로 두 어깨에 멜대를 멜 수 있다. 그러면 남성의 직선사유와 녀성의 그물식사유는 어떻게 생겨 난것인가? 몇백만년전, 인류의 조상들은 동아프리카에서 살 때부터 이미 불을 지필 줄 알았고 코끼리나 들소, 멧돼지 같은 대형 동물들을 잡아 먹고 사는 수렵생활을 시작했다.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이런 큰 짐승들을 잡을 때 남자들은 반드시 모든 정력을 집중해야 했다. 수풀속에 몸을 감추고 짐승들의 동정을 살피면서 기회를 노렸다가 갑자기 출격해군 했다. 만일 조금만 정신을 딴데 팔아도 맹수들에게 짓밟히거나 잡혀 먹히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 남성들의 조상들은 들소나 멧돼지를 잡을 때 잡생각들을 모두 버리고 생각을 한 곬으로만 하게 되였으며 한 보조가 끝나면 다른 한 보조를 생각해 나가는 직선적인 사유방식을 굳히게 되였던것이다. 자기가 뿌린 투창에 맞아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도망치는 멧돼지를 뒤아가다가 들소를 만나면 쫓던 멧돼지를 포기하거나 멧돼지와 들소를 한꺼번 다 잡겠다고 설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십중팔구는 멧돼지도 들소도 다 잡지 못할 것이다.그러니 남자들은 정신을 집중하여 하던 일은 끝을 보아야만 새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였던 것이다. 아마도 이래서 남성들의 직선사유의 원형이 형성되기 시작한것이라고 하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녀성들의 그물식사유는 그녀들의 원시사회에서의 소임과 갈라놓을 수 없다. 녀자 조상들의 소임은 이 지구상의 어느 동물들보다도 간거하였다. 그녀들은 지극히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하에서 오랫동안 자립할 없는 아이들을 양육해야만 했다.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서 엄마로 된 녀자의 조상들은 동시에 많은 일을 하여 야만 했다. 배암이 슬슬 기여 들고 있지나 않은지, 번개 치지나 않는지, 캐여온 들나물이나 들과일들에 독이나 없는지, 졸음이 와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업고 옛말을 해달라고 하는 좀 큰놈한테는 옛말을 해주고 늙은 이들의 잔소리도 들어 주야 야 하고… 아무튼 녀자의 조상들은 이런 잡다한 일들을 함께 하는데 버릇이 되였고 따라서 녀성의 그물식사유방식의 원형은 점점 형성되여 갔던 것이다. 출근을 앞둔 우리 집 마미의 거동만 보기로 하자. 아침을 하다가는 내가 회의에 참석할 때 입을 정장을 고르느라고 옷장을 발칵 뒤집기도 하고 작은 애의 대학입시성적을 알아보느라고 전화를 하고 자기의 도시락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진행된다. 21세기에는 이런 녀성적인 그물식사유가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 나 같이 쥐처럼 한구멍만 뚫는 직선적사유를 하는 사내들은 살아 남기 어렵지 않겠는가.
5    (칼럼) 사과배와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5094  추천:66  2005-11-25
사과배와 중국조선족 ― 中國朝鮮族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管見 金寬雄 요즘은 아마도 연변에서는 사과배의 수확이 끝난 계절이어서 연변의 집집마다 사과배 몇 상자씩은 쌓여 있을 것이다. 어제도 집사람이 거리가 가까웠으면 사과배를 댓 상자 보냈으면 좋겠다고 메신저에서 대화를 하다가 안타까워하면서 말했다. 연변의 특산물 중에는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도 있지만 아무리 손을 꼽아보아도 연변의 으뜸가는 명물은 단연코 사과배다.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 같은 것은 다른 고장에도 있다. 그러나 사과배만은 연변조선족문화의 가장 큰 창조물이고 연변에서만 나는 연변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에는 1960년대 초에 나타난 유명한 사과배에 대한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대략 이러하다. 연분홍 진달래야 춤추어 다오. 우리 마을 과수나무 꽃피어 난다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소문이 높아서 손님도 많소. 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사과배는요 삼복철 스리 살살 녹는 꿀맛이라네. 사과배는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노래를 늘 부르군 한다. 이 강연고를 쓰다보니 문학인이 필자는 저도 모르게 내 고향인 연변의 사과배가 떠올랐습니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樹)이다.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연변의 돌배나무에서 가접(嫁接)해서 두 나무가 결합하여 새로 나타난 과수품종이다. 園藝學에서는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접수(接穗)라고 연변의 돌배나무를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뿌리까지 있는 나무를 이용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래야만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서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배 품종 - 사과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과배는 연변의 토종인 돌배보다는 비할바 없이 크고 달며 심지어 북청의 배보다 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山東 래양의 배나 韓國의 나주배가 유명하다고는 하나 필자는 연변의 사과배 보다는 그 맛이 못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추석에 누가 나주배를 한 상자 선물로 주어 실컷 먹기는 했지만 필자는 그 나주배를 먹으면서도 늘 연변의 사과배 생각을 했고 봄철이면 마치 흰 눈이 내리기라도 한 듯이 몇 십리 이어진 帽兒山 산자락을 덮고 있는 용정과수농장의 사과배꽃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매봉가절(每逢佳節倍思親)이라는 시구처럼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에 사는 필자의 부모형제들과 200만 우리중국조선족동포들을 생각했다. 필자에게 있어서 한국이 비록 모국이기는 하지만 고향은 아닌 까닭이기도 하리라. 그럼 순서를 잠깐 바꾸어서 먼저 중국조선족부터 말하고 나중에 중국조선족과 사과배의 연관성을 말하려고 한다. 1. 中國朝鮮族의 槪念 우리들은 스스로 우리 자신을 中國朝鮮族이라고 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해서 말하려면 우선 '중국조선족'이란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족칭(族 ) '중국'과 '조선족'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지역성, 시간성, 정치성을 다분히 띠고 있는 족칭이다. '중국조선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고있는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조선민족을 뜻한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국공민이 가지고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으로서 혈통과 문화전통 면에서 한반도와 같은 맥을 잇고 있으며 한반도의 민족과 동일한 민족이라는 것 역시 간과해서도 안 된다.중국의 조선족은 역사상 朝鮮半島에서 中國으로 이민하여 들어온 민족공동체로서 150년 남짓한 세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 참여하면서 점차 중국문화를 몸에 익히게 되고 점차 中國의 한 小數民族으로 형성되었다." 2. 中國朝鮮族의 歷史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재미동포나 재일동포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또 많은 부동한 특점을 갖고 있다. 그 가장 뚜렷한 부동점은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등 다른 지역의 백의민족동포사회와는 달리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고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이미 다 개척해 놓은 남의 나라 땅에 들어가서 그 기존질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재미, 재일 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고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자기 민족적인 주체성, 능동성이 在日, 在歐美 동포들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첫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이민사와 개척사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재독, 재유럽, 재남미 동포들처럼 다른 민족들이 이미 다 개척해 놓은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영국의 청교도이민들이 미국 동부에 이민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개간했듯이 중국조선족도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민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땅을 개간했다. 중국조선족의 이민은 開拓移民의 性向이 아주 강하다. 중국조선족 移民史에서 가장 이른 移民은 1845년으로 遡及된다. 1845년 평안북도 초산군의 80여세대의 농민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요녕성 통화, 관전의 훈강 유역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지었고 그 뒤를 이어서 환인, 신민, 안동 등지에 조선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 뒤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함경북도의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서 지금의 연변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의 동북지역에로의 이민은 중국관내에서의 한족 및 기타 민족의 '촹꽌뚱(闖關東)'과 軌를 같이 하며 중국의 漢族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함께 동북의 미개척지를 개척했으며 중국조선족은 동북 땅에 도작문화(稻作文化)라는 동북 땅에는 없었던 농경방식을 도입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東北지방을 開拓하는 開拓民으로서 중국에 공헌이 있는 민족이며 좌향기성(坐享其成)의 다른 이민집단들과는 그 性向이 다르다. 둘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鬪爭史와 革命史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중국에로 이주하기 시작해서 20세기 50년대초까지 한족등 중국의 기타 민족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반제반봉건투쟁과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중화민족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그리고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위하여 불후의 공헌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의 붉은색 바탕에는 우리 중국조선족의 붉은 피도 적잖게 녹아있다.중국의 구민주의혁명시기 식견 있는 조선인들은 孫文을 따라 청왕조를 전복하는 투쟁에 헌신했고, 1920년에는 김좌진, 홍범도의 지휘하에 獨立軍은 鳳梧桐, 靑山里 전투에서 일제를 타격했고, 중국의 북벌전쟁 중에서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참가하여 공훈을 세웠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제1기부터 제 7기까지 교관과 학생 중 20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1927년 중공이 영도했던 광주, 남창 봉기 중에 조선인이 각각 200명, 150명이 참가했고, 2만리5천리 장정대오에도 양림, 무정 같은 우리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동북의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중국조선족은 더욱 많은 피를 흘렸다.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14년 동안 동북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10여만의 조선족인민들이 참전했고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족이 항일 聖戰에서 목숨을 바쳤다. 연변지역의 항일전쟁시기 조선족 열사는 3026명인데, 연변지역 항일열사의 96.8%를 차지한다.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렀으며 불멸의 공헌을 세웠다. 1946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4년 해방전쟁 중에서 조선족 청년이 6만 3천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제 4야전군의 164사, 166사, 156사 등은 조선족을 위주로 구성되었다.遼沈, 平津 戰役과 湘西 토비숙청, 四川해방, 海南島 해방에 모두 우리 조선족이 목숨 바쳐 싸웠다. 해방전쟁시기 연변 6개 현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입대한 조선족이 5만 2천명에 달했고 민병, 공안, 지방 무장대오 등을 합치면 모두 10만 명이 참가했다. 그래서 중국의 시인 賀敬之는 "산기슭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솟아 있네(山山金達萊, 村村烈士碑)"라고 읊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바로 이런 중국에 대한 공헌으로 당당하게 중화인인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중국조선족이 기타 해외동포와 다른 중요한 특점이며 중국의 기타 소수민족과도 다른 특점이다. 세상만사는 塞翁之馬라고 중국조선족의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참여의식은 부작용도 파생시켰다. 자기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과분한 정치적극성을 발휘할 때가 있다. 특히 연변의 조선족들이 이러하다. 그래서 "중국의 혁명은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조크가 생겨나기까지 했다. 아무튼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특수한 투쟁사와 혁명사를 갖고있으며 이로하여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서 그 피의 代價로 중국으로부터 당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鄭判龍의 말처럼 '중국에서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며느리 신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특히 중국공산당에 대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3.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아이덴티티 - 문화정체성 중국조선족의 특수한 민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한 분은 정판룡 선생이다. 이 분은 주장을 간단하게 "조선족문화의 이중성"으로 귀납했으며 문학인답게 대가족에 시집 온 며느리 처지로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입지를 메타포를 동원해 비유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시집을 온 며느리이기에 시집에서 갖고 온 문화적인 계승성도 있고 동시에 시집에 와서 익힌 시집의 특성도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우선 시집살이를 잘 하고 다음에는 친정집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분의 주장이다. 특히 시집살이를 하면서 늘 친정 생각만 한다면 시집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따라서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정판룡 선생의 '이중성론'과 '며느리론'을 계승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보다 합리하게 내세운 사람은 중국조선족의 소장학자 연변대학정치학부의 김강일 교수같은 친구들이다. 김강일은 『중국조선족사회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이란 책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문화의 변연성"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물론 이는 문화인류학에서 구미의 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김강일 씨가 이 이론을 중국조선족문화의 연구에서 활용했을 따름이다. 김문학 씨는 중국조선족문화, 특히 연변조선족문화를 '박쥐형문화'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나 자기를 '무국적세계인'이라고 뻥튀기를 한 것도 다 구미의 문화인류학에서의 '다이애스포라' 거나 '경계인(境界人)' 개념에서 힌트를 받고 떠벌린 것이다. 본인도 중국조선족문화가 "文化의 邊緣性"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첫째, 변연문화란 부동한 문화의 변두리에서 일정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으며 자기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태인 공동체, 유럽의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의 퀘벡의 프랑스후예에는 이런 문화계통이 존재한다. 변연문화구역은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질을 갖고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문화구역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 性格에 있다. 둘째,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계통에서는 갖출 수 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론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문화계통간의 부단한 교류로 인해 복합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가 교유했던 전통적인 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며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 어떤 변연문화계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존재의 합리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부단히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필연적인 반응이고 적응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생활리듬의 가속화로 더욱 그러할 것 이다. 변연문화의 함의에는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문화계통이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이 서로 맞닿은, 문화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형성될 수도 있고 문화의 중심지역에서도 형성될 수도 있으며 또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들간의 상호 문화교류과정에서 형성될 수도 있다. 예컨대 중국조선족사회는 전자에 속한다면 미국의 한인사회는 문화의 중심지역에 형성된 변연문화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민족공동체는 모두 두 개 이상 문화계통간의 교차형태를 이루고있기에 그것들은 모두 변연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변연문화계통의 가장 돌출한 문화적인 특징은 그것이 갖고있는 강력한 文化轉換機能에 있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정보화시대, 지식산업시대라고 한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변연문화는 세계의 각종 문화를 轉換하여 傳達하는 정보망의 망점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영역의 발전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변연문화계통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이라는 문화공동체는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자기의 민족문화전통을 굳건히 지킴과 동시에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었다. 이 둘 중에서 그 어느 한 쪽을 홀시해도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문화계통으로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조선족이 현지사회인 중국의 문화만을 수요하면서 자기의 문화전통을 포기했다면 13억 중국인 중의 하나로 되어 자기의 개성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고, 만일 자기의 민족문화의 전통만 고수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수용을 포기했다면 중국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총체적으로 보아서볼 때,중국성구를 동원해 표현한다면 "각답량지선(脚踏兩只船)", 즉 중국과 한반도라는 이 "두 文化의 배"에 발을 붙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다. 이 점을 두고 정판룡은 중국조선족문화를 '이중성'을 갖고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중성, 복합성은 다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지금도 옳은 말씀이다. 문화적인 성격으로 보면 중국조선족문화의 기반은 母國文化인 韓半島文化의 要素로서 그것이 민속, 생활방식, 사고방식, 언어 등 면에서 아직도 강하게 나타나므로 중국조선족문화의 主體는 여전히 韓半島文化 要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총체적으로 볼 때 韓半島에서 갖고 온 모체문화의 접본에 중국문화라는 접목을 가접시켜 새롭게 생겨난 문화라고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이런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변연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북조선 북청에서 가져온 잡목에다 연변의 돌배라는 접본(接本)에 가접시켜서 만든 새로운 배품종이다. 연변의 명물 사과배와 유사한 것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이다. 본인은 대학학부생시절에 연변대학의 한어학부를 '사과배계'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것은 한어전업은 조선족대학생이라는 이 접본에 중국언어문학 이라는 이 접목을 가접(嫁接)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일언이폐지하면 중국조선족의 복합문화도 원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을 보전한 기초 우에서 중국문화를 수용하였다. 이 점이 중국조선족 문화의 주체성 확보에 더 없이 중요하다.이러한 주체성이 확보되면 일정한 기한과 조건하에서도 동화란 결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변연문화계통은 문화자체의 주체성만 확보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체문화보다도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된다. 즉 원 문화계통속에는 없는 언어중개와 문화중개의 작용이 있음은 물론이고 두 개 문화 계통을 연결하는 문화전환계통까지 생겨나게 된다. 특히 변연문화구역은 지리적으로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위치에 처해 있으므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분야에서 교류의 중요한 매개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의 문화전환기능으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효과적으로 두 개 부동한 문화계통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다. 하기에 이러한 변연문화는 일반적인 문화계통에서는 구비할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 적인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사회는 조선의 페쇄성으로 말미암아 반폐쇄상태에 처해 있기에 자신이 갖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수한 기능을 완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분적인 기능은 한국과 중국간의 교류에서 많이 나타나나고 있는데, 지정학적인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만일 조선이 개방한다거나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조선족 사회가 지니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징이 충분히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그의 戰略적인 위치도 급격이 부상될 것이다. 4.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한 생각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長點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의 많은 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에 문화에 발을 붙이고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런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근 10만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다.작년 년말에 발생했던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우리동포들의 국적포기운동은 모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전 김문학씨가 연변조선족들을 "바람에 불리는 갈대"라고 공격한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중국은 우리의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문화를 포기하여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우리 민족문화를 견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우리의 변연문화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사회는 한반도의 원문화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중국진출이나 중국에서의 한반도진출에도 다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나 중국에서도 다 중국 조선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무 쪽으로 보나 유리하다. 우리가 이러한 입지를 계속 갖추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뿌리를 잘 살려야 한다. 즉 자기의 민족문화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마치도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를 그 母本으로 하였듯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자기문화의 뿌리인 민족문화를 굳건히 지켜야 할 것이다. 연변은 사과배의 원산지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연길현 로투구의 한 조선족농민이 조선 함경남도 북청에서 배나무가지를 가져다가 당지의 野山에서 자라는 야생 돌배나무 세 그루에 접목을 했더니 그 해 겨울을 나니 한 그루가 죽고 두 그루가 살았다. 이 두 그루의 연변 사과배나무의 원조(遠祖)는 아직도 로투구에 있다. 이 두 그루의 배나무가지를 접목한 돌배나무가 연변 사과배나무의 단초를 열어놓았다고 한다. 접목법에서는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가지는 접수(接穗)라고 하고 로투구의 야생 돌배나무는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접목하는 구체적 방법은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좀씩 다르기는 하나 대부분 접본을 땅에서부터 조금 웃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그 끝을 세로 짜개고 목질부와 껍질 사이에 접수(接穗)를 꽂아 잘 밀착하도록 헝겊으로 꼭 잡아매고 흙을 발라두기도 한다. 사과배만이 아니라 다른 품종의 과일나무도 접목의 리치는 마찬가지이다.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사과인 후지도 그 뿌리는 야생종인 매조의 일종이라고 한다. 매조의 열매는 크기가 도토리보다도 보잘 것없는 나무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미국의 원예학자들이 접목을 통해 만들어 낸 피스(Peace)라는 유명한 장미꽃은 그 예술적인 색깔과 모양으로 세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열렸던 제1차 유엔총회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모두 이 피스--평화라는 장미꽃을 가슴에 꽂았다고 한다. 이 피스의 접본은 찔레꽃나무뿌리였다. 연변의 사과배거나 한국의 후지 사과거나 미국의 피스 장미거나 간에 그 생명의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그것은 나무의 생명의 바탕은 례외 없이 그 나무의 뿌리인 까닭이다. 한 식물의 종(種)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많이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은 자연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생물공학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서 생각하고 있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야생 식물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부임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한 민족이나 나라의 문화에서의 핵심이요, 뿌리는 물질문화가 아닌 정신문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만 따르다가는 자칫하다가는 문화의 뿌리를 잃고 말수도 있다. 그러면 한 민족의 정신문화의 핵과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관념문화에 있고 그 관념문화를 담고 나르는 문자부호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같은데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아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의 권위자라고 해도, 또 아무리 대단한 작가나 예술가라도 그가 영원한 인간이 되려면 그 정신의 접본은 제 민족의 정신문화와 그 역사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재작년 『중국조선족문학작품정수』(한문판) 발행식에서 한 연변조선족 자치주 부주장 왕효동 씨의 연설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가 연설 중에서 끌어낸 에피소드는 바로 이점을 증명하는 생동한 사례였다. 그 에피소드의 요(要)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를 당해 만신창이 되여 수많는 일본인들이 락망하고 우왕좌왕하고있을 때 한 일본의 철학가가 일본이 재기하려면 스모, 바둑, 가부끼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 삼자는 일본의 국수(國粹)요, 정신문화 상징이다.말하자면 일본문화의 뿌리인 셈이다. 이상에서 든 접목의 리치대로라면 접본인 셈이다. 이 접본을 잃지 말아야만 외래의 그 어떤 문화도 자국의 문화에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리치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접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의 접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 , 그리고 우리의 말과 글을 그릇으로 삼아 담아내는 우리의 문학과 예술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길시 하룡촌에 가면 마을 동쪽의 펑퍼짐한 언덕에 세 그루의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사람들은 그 우람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만 바라보고 모두 감탄한다.그러나 그 나무가 왜 그처럼 거목으로 자랐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 나무가 수백년에 걸쳐서 그처럼 크게 자란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그처럼 나무를 키워온 까닭이다. 어떤 나무를 막론하고 그 나무의 크기는 결국 땅속에 뻗어 있는 그 나무의 뿌리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또 나무가 말라 죽고있는 까닭은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공동체로서의 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도 나무에 뿌리가 있고 강에는 근원이 있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생기발랄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왕성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현실적으로 쇠락해 가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선명한 개성을 지니고 중국의 56개 민족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민족문화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은 민족이 큰 민족에게 동화되어야 하는 시기거나 세계가 하나의 민족으로 되여야 하는 대동세계가 아니라 민족문화가 개화 발전해야 하는 시기이다. 즉 세계 각 민족 문화의 다원공존의 시기이다. 하기에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자기의 땅속 깊이 내린 민족문화의 뿌리를 통해 부단히 자양분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본인은 「한치 보기들의 난동」, 「네가 연변을 떠나지 않는 이유」등에서 밝힌바 있다.물론 우리는 소수민족이니 우리의 이런 생각을 중국 주체 민족이 존중해주는가 안 주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 중국조선족이 자신의 변연문화의 특성을 살려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의도에 의해 전이되는 일이 아니니 오늘은 약하기로 한다.
4    (칼럼) 디아스포라, 사과배 그리고 문화의 뿌리 댓글:  조회:5242  추천:42  2005-11-22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원래 성서의 신명기(申明記)에 나오는 말로 고국 팔레스타인의 땅을 쫓겨난 유태인들의 민족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최근 20세기후반에 들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중국조선족의 문학은 디아스포라 문학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 문학을 중국조선족 북방 시단의 원로시인 리삼월의 (1993)을 통해 보기로 하자. 접목의 아픔을 참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 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곳 토질에 맞게 이곳 비에 맞춤하게 이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든든한 테를 둘렀거니 큰바람도 두렵지 않고 한 마당 나무들과도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그러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 가끔 메아리로 되돌아오면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을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의 나무에 접목된접수(椄穗)에 비유한다. 이 어린 나뭇가지는 타향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해 튼튼하게 자라났고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었으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소리”만은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와 생활사를, 우리민족의 정체성의 갈등을 뛰어난 은유와 상징기법으로 노래한 시라고 하겠다. 다만 우리를 중국조선족을‘남의 뿌리’에 접목한 접수(椄穗)하고 한 것은 어딘가 탐탁치가 않다.반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문화의 뿌리에다 남의 문화의 가지를 가져다 접목시켰다고 보는게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중국조선족은 모국을 떠나 타국에서서 살아가는 이민 민족이요, 또 그러는 가운데서 중국문화와를 자기 문화의 뿌리에 접목을 시키게 된 것이다. 이런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연변의 특산물인 사과배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용정시 로두구(老頭溝)의 한 조선족농민이 조선 함경남도 북청에서 배나무가지를 벼여 가져다가 당지의 야산에서 자라는 야생 돌배나무 세 그루에 접목을 했더니 그 해 겨울을 나니 한 그루가 죽고 두 그루가 살았다. 몇 년 후 접목한 이 두 그루의 돌배나무에는 특이한 열매가 달렸다. 추운 연변의 풍토에서는 열릴 수 없는 크고 달고 시원한 배가 열렸던 것이다. 그 껍질이 마치 사과처럼 반나마 붉은 빛을 띠어서 사과배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연변 사과배나무의 원조는 아직도 로두구에 있다. 이 두 그루의 배나무가지를 접목한 돌배나무가 연변 사과배 나무의 단초를 열어놓았다고 한다. 봄철이면 마치 흰 눈이 내리기라도 한 듯이 몇 십리 이어진 모아산(帽兒山) 산자락을 덮고 있는 용정과수농장은 거의 대부분 사과배를 재배하는 초대형의 과수원이다. 접목법에서는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가지는 접수(椄穗)라고 하고 로투구의 야생 돌배나무 뿌리는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접목하는 구체적 방법은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좀씩 다르기는 하나 대부분 접본을 땅에서부터 조금 윗 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그 끝을 세로 짜개고 목질부와 껍질 사이에 접수(椄穗)를 꽂아 잘 밀착하도록 헝겊으로 꼭 잡아매고 흙을 발라두기도 한다. 사과배만이 아니라 다른 품종의 과일나무도 접목의 리치는 마찬가지이다.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사과인 후지도 그 뿌리는 야생종인 매조의 일종이라고 한다. 매조의 열매는 크기가 도토리보다도 보잘 것 없는 나무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미국의 원예학자들이 접목을 통해 만들어 낸 피스(Peace)라는 유명한 장미꽃은 그 예술적인 색깔과 모양으로 세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1946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렸던 제1차 유엔총회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모두 이 피스--평화라는 장미꽃을 가슴에 꽂았다고 한다. 이 피스의 접본은 찔레꽃나무뿌리였다. 연변의 사과배거나 한국의 후지 사과거나 미국의 피스 장미거나간에 그 생명의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그것은 나무의 생명의 바탕은 예외 없이 그 나무의 뿌리인 까닭이다. 한 식물의 종(ðú)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많이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은 자연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생물공학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서 생각하고 있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야생 식물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부임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한 민족이나 나라의 문화에서의 핵심이요, 뿌리는 물질문화가 아닌 정신문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만 따르다가는 자칫하다가는 문화의 뿌리를 잃고 말수도 있다. 그러면 한 민족의 정신문화의 핵과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관념문화에 있고 그 관념문화를 담고 나르는 문자부호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같은데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아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의 권위자라고 해도, 또 아무리 대단한 작가나 예술가라도 그가 영원한 인간이 되려면 그 정신의 접본은 제 민족의 정신문화와 그 역사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를 당해 만신창이 되여 수많는 일본인들이 락망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일본의 철학가가 일본이 재기하려면 스모, 바둑, 가부끼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 삼자는 일본의 국수(國粹)요, 정신문화 상징이다.말하자면 일본문화의 뿌리인 셈이다. 이상에서 든 접목의 리치대로라면 접본인 셈이다.이 접본을 잃지 말아야만 외래의 그 어떤 문화도 자국의 문화에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다.이와 마찬가지 리치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접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의 접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 , 그리고 우리의 말과 글을 그릇으로 삼아 담아내는 우리의 문학과 예술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길시 하룡촌에 가면 마을 동쪽의 펑퍼짐한 언덕에 세 그루의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사람들은 그 우람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만 바라보고 모두 감탄한다. 그러나 그 나무가 왜 그처럼 거목으로 자랐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 나무가 수백년에 걸쳐서 그처럼 크게 자란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그처럼 나무를 키워온 까닭이다. 어떤 나무를 막론하고 그 나무의 크기는 결국 땅속에 뻗어 있는 그 나무의 뿌리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또 나무가 말라 죽고 있는 까닭은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공동체로서의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모두자기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도 나무에 뿌리가 있고 강에는 근원이 있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생기발랄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왕성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현실적으로 쇠락해 가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중국조선족이 자기의 선명한 개성을 지니고 중국의 56개 민족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민족문화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은 민족이 큰 민족에게 동화되어야 하는 시기거나 세계가 하나의 민족으로 되여야 하는 대동세계가 아니라 민족문화가 개화 발전해야 하는 시기이다. 즉 세계 각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시기이다. 하기에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자기의 땅속 깊이 내린 민족문화의 뿌리를 통해 부단히 자양분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2005년 3월 9일 한국 배재대학 국제교류관에서
3    (수필) 나와 문학의 인연 댓글:  조회:4477  추천:51  2005-11-22
한 시인이나 작가와 문학사이에 맺어지는 인연은 각양각색이다. 첫째는 타고난 문학천부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라고 할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 시인 리규보가 일곱살때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네》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니 분명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고 로씨야의 뿌쉬낀은 아홉살때 극본을 만들어 연출까지 담당했다고 하니 역시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다. 1958년, 나는 연길시신흥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1964년 연길시3중에 입학하여 바야흐로 3학년에 올라가려고 하던 1966년 6월에 문자 그대로 《력사상에서 전례를 찾아 볼수 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소위 《혁명반란》의 탁류속에 뛰여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10년동란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자연과학이나 공업기술 분야에 몸을 담고있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을것이다. 그것은 소학, 중학 시절에 나는 생물이나 산수, 수학, 물리에는 취미가 있었고 성적도 괜찮았지만 어문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장차 문학가로 되여보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 다윈처럼 세계일주를 하면서 온갖 괴이한 짐승들을 다 구경할수 있는 동물학자가 아니면 우리 집 식구들이 살고있는 단층짜리 흙집을 고층건물로 바꾸어 놓을수 있는 건축기사로 되려는 꿈을 갖고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동란의 시절에는 백일장이요, 글짓기대회요 하는 이벤트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판국이라 나는 나한테 문학천부가 숨어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해볼 단 한번의 기회도 갖지 못했었다. 둘째는 부모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인 조식(曺植)이나 조비(曺丕)는 탁월한 시재를 가진 조조(曺操)의 아들이고, 유명한 애정소설 《춘희(椿姬)》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뒤마는 《몽테크리스토백작》, 《삼총사》 같은 대작을 내놓은 뒤마의 아들이여서 문학사가들은 이 두 동명의 작가를 구분하기 위해 아들은 작은 뒤마, 아버지는 큰 뒤마라고 부른다. 근적근묵(近赤近墨)이라고 묵향(墨香)이 풍기는 문인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란 사람들이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소치가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이런 행운이 차례지지 않았다. 나는 1951년 7월 20일 연길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은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모친은 집이 가난하여 소학교 5학년밖에 다니지 못한 분들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문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분들이였으니 나와 문학의 인연은 부모로 하여 맺어질리가 없었다. 물론 어린시절에 평양에서 미국 개신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기독교 교회에 다닌 경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하든가 콜롬브스의 신대륙발견이라든가 아브라함 링컨의 성장담같은것을 얻어듣기도 했지만 이런것을 문학과의 인연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억지감이 난다. 셋째는 형제자매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명나라시기의 중요한 문학류파인 공안파(公安派)는 맞형 원종도(袁宗道, 1560-1600),둘째 원굉도(袁宏道, 1568-1610), 셋째 원중도(袁中道, 1570-1623)가 주축으로 되였는데 두 동생보다 열살 더 먹은 맞형 원종도의 문학적영향이 지대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그리고 조선의 허균네 형제자매들이나 독일의 그림형제나 영국의 브론데자매나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 집의 맏이인 봉웅형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1961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비록 나는 문학에는 뜻을 두지 않았지만 맏형이 사오거나 빌려온 책을 통해서《안데르센동화》, 《고요한 돈강》, 《고리오 령감》, 《바이론시선집》, 리기영의 《고향》, 《수호전》 같은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이 두루 읽어본 경력은 있었고, 맞형과 친구들의 한담설화속에서 귀동냥으로나마 세계명작가나 세계명작의 이름들을 대충 얻어 듣기는 했다. 이것을 나와 문학의 인연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어설픈 인연이 아닐수 없다. 넷째는 주변환경이라는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이딸리아의 피렌체는 현재 인구가 약 40만명밖에 안되는 소도시이니 지금으로부터 6,7백년 전의 문예부흥시기에는 아마도 몇만명의 인구밖에 안되는 작은 동네였을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환지지(彈丸之地)에서 단떼를 필두로 하여 페드라르카, 보카치오, 다 빈치, 미켈란젤로같은 전반 구라파의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세계적인 문학예술의 거인들이 쭉 이어지면서 나타났다는것은 주변환경의 영향이 문학예술인재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 연길시를 언감생심 피렌체에 비길수 없지만 내가 태여나서 자란 연길시 중앙가(후에는 광명가라고 고쳤음) 9거는 그 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50년대로부터 70년대까지는 연변 문학예술계의 중진들이 운집한 특수한 동네였다. 말하자면 내가 유년, 소년, 청년시절을 살아온 동네는 명실공히 《별들의 동네》였다. 연변시단의 원로들인 리욱선생과 채택룡선생을 필두로 하여 시인 김철, 임효원, 리행복선생 그리고 민간문학가 정길운, 연변가무단 단장 김태휘씨 등 중국조선족문단의 거두들이 오래동안 우리 집과 이웃으로 몇십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왔다. 이밖에도 김창걸, 현남극 같은 문학교수들이나 한수동, 김길련선생과 같은 문학편집이나 기자들도 우리 집과 거의 한동네 속하는 가까운 곳에 살고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한동네 이웃집 아저씨들처럼 시인이나 작가로 되여보겠다는 야망을 품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석으로 만날수 있는 이런 동네 아저씨들이 지은 노래를 부르고 옛말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친근감을 느꼈던것만은 분명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인격 그리고 그 잘잘못까지 빤히 들여 다 보면서 살다보니 내 눈에는 문학인들의 세계가 별로 신비해보이지 않았다. 별난 사람들이 아니야, 이런 배짱마저도 은연중에 생겨났던것이다. 더우기 반우파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면서 우리 동네의 문학인들이 갖가지 원인으로 하나하나 타도대상이 되여 가는것을 보고는 문학이란 이 직업이 아주 위험한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니 여전히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해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주변환경은 은연중에 나와 문학사이에 인연이 맺어지게 한것만은 분명하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작가론적연구 또는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연구를 어려서부터 직관을 통해 할수 있게 되였다고도 할수 있다. 다섯째는 자신이 종사하게 된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다. 영국의 디켄즈나 미국의 마크 투웬이나 헤밍웨이는 기자로 뛰다가 점차 문학에 입문하여 대성하게 되였고 우리 주변에도 많은 분들이 언론이나 편집, 교원같은 직업에 종사하다가 문학에 입문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나와 문학의 인연도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진것이지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것은 아니다. 1973년, 군대에서 말이나 노새들을 먹이고 부리는 마부로 허드레일을 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연변군분구에서 꾸리고있는 《동북민병》 잡지사로 전근하게 되였다. 명색이 잡지사였지 온통 번역만 하는 업무였고 저절로 기사 한편 쓸수 없게 되여있는 순 번역잡지였다. 나는 이 잡지사에서 약 3년동안 번역과 편집업무를 배우면서 이른바 언론계에 몸을 담게 되였으나 문학과 참말로 인연을 맺기에는 역시 10만 8천리나 거리가 있었다. 1976년, 근대에서 제대하여 연변사전편찬판공실(현재 연변언어연구소의 전신임)에 배치 받아 일하게 되였으나 초중 2학년의 학력밖에 없는 나에게 있어서 사전편찬과 언어연구는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게다가 매일마다 카드에 낱말의 주석이나 적어넣는 서캐를 캐는 따분한 일이 내 적성에도 맞지 않지도 않았다. 이러구러 10년 동란이 끝나고 새 시기를 맞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하지만 초중2학년의 학력이 고작인 나에게 있어서 리공과를 선택한다는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문과에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였다. 거의 대부분 시간을 들여 수학을 복습했지만 수학에서 단 5점을 맞은 까닭에 겨우겨우 연변대학 한어학과에 입학한 때가 바로 1978년 9월경이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따라가듯이 학교에서 배정한 과목에 따라 말없이 수강만 했을따름이였다. 나와 문학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하게 맺어졌다. 1978년에 함께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조문학부에서 공부하게 된 동생 호웅이가 문선습작과목의 숙제로 바친것이 바로 《산속에 핀 진달래》라는 단편소설이였다. 호웅이는 나에게 비하면 문학천부가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글재주가 나보다 월등하다는 점은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제씨들도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동생 호웅이에 비해 더 갖춘 무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남다른 승벽심이라고 할수 있다. 동생이 쓰는 소설을 내라고 못 쓰겠는가, 이런 승벽심의 소산이 바로 나의 처녀작 《청명날》이다. 비록 모방기와 어색함이 데룽데룽 달린 치졸한 작품이였지만 호웅이의 《산속에 핀 진달래》와 두달 사이두고 《연변문학》에 실렸을뿐만아니라 또 호웅이와 함께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되는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때 40원 미만의 죄꼬리만한 월급으로 살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300원이라는 상금은 당시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수자나 다름없는것이였다. 미상불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명리쌍수(命利雙收)가 아닐수 없었다. 아무튼 나와 호웅이는 첫포를 쏘자마자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였다. 문학상(文學償)의 기능을 나는 나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호웅이가 그런 숙제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처녀작이 생겨날수 없었을것이고 또 그 처녀작이 없었더라면 첫번째의 문학상수상이 있을수 없을것이고 또 그 수상으로 인한 거대한 고무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문학에 자신심을 갖지 못했을것이며 문학에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자신을 리기영같은 거물에게 견주는것은 좀 외람되기는 하지만 리기영은 《오빠의 비밀편지가》가 1922년에 공모에서 수상하지 못했더라면 자기는 아마도 문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에 종사했을수도 있었을것이라고 술회한적이 있다. 나의 경우도 리기영선생과 대단히 흡사하다. 만일 1979년의 그 문학상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문학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는 본격적인 소설창작에 들어 섰으며 학부생 4년동안에 《소설가의 안해》라는 소설집을 묶어 낼수 있었다. 학부생 생활을 마치면서 나는 문학을 나의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하였고 문학석사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나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마치였고 문학준비과정에 옹근 10년의 시간을 들였다. 중국에는 《낫을 가는 일은 나무를 하는 품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10년 공부를 마치니 나는 이미 사십이 넘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창작은 거의 포기하게 되였고 문학평론과 시간이 적게 드는 수필창작에 손을 대게 되였다. 대학강단에 선 교수라는 이 직업은 우리 평단과 소설이나 수필창작에 깊숙하게 개입할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수필창작을 나의 하나의 부업으로밖에 대할수 없게 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나는 나름대로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어 왔다. 우선 마누라의 바가지와 잔소리를 말리려고 문학번역(사실은 돈벌이임)도 적잖케 했다. 이럴 경우에는 3, 4류의 저질적인 무협소설도 돈만 준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역자의 이름을 밝히는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쪽제비도 낯짝이 있다지 않는가. 그러나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똑히 차리랬다고 돈벌이하는 재미에 빠졌다가도 용하게도 본업에 되돌아오군 했다.내가 주요한 시간과 정력을 몰부어 하고있는 본업은 물론 순수문학에 관계되는 글농사이다. 《큰 포전》의 글농사는 두말할것 없이 본과, 석사. 박사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양문학사,서양모더니즘문학사, 한국고대소설사, 동서문론비교, 중조고대문학비교연구, 비교문학리론, 조선력사와 문화 같은 문학연구관계의 교과서나 론저나 론문의 집필이다. 10년 남짓한 동안에 10여권의 교과서나 학술저서들을 냈고 80여편의 학술론문들을 발표하고 국가급과학연구항목도 3개나 완성하여 7,8년 사이에 강사로부터 박사생도사로까지 되였다. 이밖에도 나는 부업으로 하는 《뜨락농사》도 열심히 지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에 관한 평론이나 수필창작이다. 연변대학에서는 이런 글들을 《잡글》로 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7, 8년 동안에 이런 잡글들을 100여편이나 발표했다. 중국에 《한 마음으로 두가지 일을 할수 없다(一心不可二用)》는 말이 있듯이, 마음을 여러 곳에 쓰다 보니 나의 문학은 점점 사불상(四不像)이 되여 간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교육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창작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문학평론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번역가로서도 자격미달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의 전문가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문학의 잡가(雜家)와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문학을 한답시고 20여년간 분주히 돌아쳤으나 오늘날까지 여전히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아마추어―비전문가이다. 그래서 적지않은 문단의 선배나 친구나 동료들이 《좀 을 작작 피우고 학문에만 전념하라》, 《먹을 황금처럼 아끼라(惜墨如金)》라는 권고하군 한다. 비록 이런 충언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냥 《바람기를 잠 재우지 않을것이고》 앞으로도 계속《잡글》들을 줄기차게 써나갈것이다. 솔직하 고백하면 대학교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는 이른바 《론문》이나 《론저》들의 집필보다는 중국조선족 문학이나 예술에 관련되는 평론, 수필, 칼럼, 기행 같은 이른바 《잡글》을 쓰는데 더 애정이가는것을 나로서는 어쩌는수가 없으니 말이다.그것은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런 잡글들에 의해 영위되고있는 현실문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있기때문이다. 위기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유태인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군한다.인류 력사상에서 유태인만큼 지혜롭고 끈질긴 문화의 힘을 가진 민족은 없다. 2천년간 나라 없이 도처에 흩어져서 온갖 박해를 받아왔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다. 죽일수록 살아나고 흩어질수록 단합되여 마침내는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 주변의 수억의 아랍인들과 맞서서 반세기 이상 싸우고 2천만밖에 안되는 소수 민족이면서 노벨상 전체의 3분의 1이나 차지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민족이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가? 그 힘은 바로 강인한 종교와 교육에서 나왔지만 어디까지 유태문화와 민족응집력의 핵은 종교이다. 종교는 유태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주요한 문화의 그릇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비종교적 문화이다. 때문에 우리의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가장 주요한 그릇은 교육과 문학예술같은 세속적인것이다. 문화기능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문화가 앞으로 도 건재하려고 한다면 교육이나 문학예술 같은것들이 마땅히 유태인문화에서의 종교 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의 크고 작은 교육, 문화기관이나 단체들이나 잡지사같은것은 유태교의 사원 같은 존재이고 우리의 교원들이나 문학예술인들은 랍비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은 유태인들의 문화계통에서의 종교같은 기능을 대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이런 주장을 두고 많은 분들은 문학예술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건다고 코웃음을 칠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히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이 우리 민족문화를 보전하고 지키는 기능을 잃는 날이면 우리중국조선족문화가 일조에 봄눈마냥 녹아버릴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을 고창해왔다. 한마디로 나의 문학관은 대단히 공리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다.나와 문학사이의 인연은 나의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것이다. 불교의 삼세륜회설이 참말이고 래세가 참말로 있다면 나는 죽어 래세에 가서라도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할것이다.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내가 좋아하는 《잡글》들을 계속 쓰면서 중국땅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영생을 누리고싶다. 2003년 3월 6일 연길에서
2    (수필) 굴원과 어부 댓글:  조회:4450  추천:46  2005-11-22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성구는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옛날 고서(古書)들을 읽다보면 오늘의 삶속에서도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요즘은 겨울 방학기간이라 시간적인 여유가 좀 생겨서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노라니 현실의 문제들도 많이 련상된다. 요즘 주희(朱熹)의 『초사집주(楚辭集注)』를 펼치다가 그 유명한 「어부사(漁父辭)」를 다시 읽게 되었다. 초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냈던 굴원(屈原)이 상강(湘江)이 흐르는 오지(奧地)로 추방을 당하여 호수 가에서 시나 읊조리면서 다녔는데 그 옷차림이 람루하고 안색이 초췌하여 꼴이 아니었다. 한 늙은 어부가 굴원을 보고 “그대는 초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던 분이 아니시오? 무슨 연고로 이 고장에 왔소?” 라고 물으니, 굴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은 깨끗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오로지 나만은 깨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추방을 당한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어부가 입을 열었다. “성인은 사물에 구애됨이 없기에 막히어 머무르지 않는 것이오. 세속과 더불어 옮아가며 변동하는 것이오. 그대는 왜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할 때 그 진흙을 파버리고 그 흙탕물을 퍼내지 않았소?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했을 때 왜 그 술지게미를 먹지 않고 그 술을 마시지 않았소? 무슨 연고로 그렇게 생각을 깊게 하고 행동을 고상하게 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했단 말이오?” 이에 굴원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퉁겨 털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오. 어찌 자기의 결백한 몸이 지저분한 물건에 더럽혀 지게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럴 것이면 오히려 깨끗한 강물에 몸을 던져 고기의 밥이 되는 게 낫소. 어찌 백설 같이 깨끗한 이 몸이 세속의 진창 위에서 뒹굴 수 있단 말이오?” 어부는 빙긋이 웃으면서 노를 저어 가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강물이 맑으면 가히 내 갓끈을 씻을 수 있고요, 강물이 흐려지면 가히 내 발을 씻을 수 있다네” 어부는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노를 저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청명(淸明)한 세상에서만 살수 있는 굴원보다는 청명(淸明)한 세상이나 혼탁(混濁)한 세상에서나 다 융통성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늙은 어부가 훨씬 살기 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굴원보다는 늙은 어부의 삶의 방식이 월등하게 지혜롭다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설사 겉으로는 드러내고 칭찬을 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늙은 어부의 처세의 방법을 흠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월등하게 많다.세속의 더러운 진창 속에서 자기의 몸을 더럽힐 것이면 깨끗한 강물에 몸을 던져 고기밥이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굴원, 강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강물이 흐려지면 발을 씻으면서 세속과 더불어 옮아가며 변동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늙은 어부, 너무나 대조적인 삶의 자세이고 처세방식이다. 이「어부사」를 읽으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김학철 옹과 정판룡 선생이 머릿속에 떠올렸다. 김학철은 굴원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면 정판룡 선생은 늙은 어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 내가 언젠가 김학철 옹을 네모반듯한 방정한 성격유형의 전형이고 정판룡선생은 둥굴둥굴한 융통성 있는 성격유형의 전형이라고 말한 적 있다. 너무나도 양극적이고 그래서 대조적인 성격유형이다. 김학철 옹의 일생은 우리들에게 정의를 위해서라면 '감히 황제라도 말잔등에서 끌어내리고(敢把皇帝拉下馬)"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라고 가르친다. 반대로 정판룡 선생의 일생은 "시대의 변화를 아는 자가 준걸(識時務者爲俊杰)"이니 저 혼자 고고(孤高)하게 탁류(濁流)를 거슬러 오르려는 어리석은 짓을 벌리지 말라고,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난 2004년 10월 7일에는 연변대학 캠퍼스의 산정 우에 "정판룡문학바"가 세워졌고, 12월 23에는 연길에서 "김학철문학국제학술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보다시피 김학철과 정판룡은 지금 중국조선족문단에서의 두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일까? 혹자는 이런 물음 자체를 흑백논리에 물젖은 발상이라고 공박을 해올 수도 있다. 실로 이 가치다원회의 시대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고, 옳다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내 개인의 생각을 밝힌다면, 비록 나 스스로도 굴원처럼 살 수 있겠는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래도 어쩐지 굴원 쪽에 마음이 더 간다. 다만 김학철옹에게 쏠리는 내 마음 섭공호룡(葉公好龍)이 아니기만을 바랄뿐이다 2005,1.10 배재대학교 국제교류관에서
1    김관웅 프로필 댓글:  조회:4100  추천:56  2005-11-22
김관웅 약력 1951년 7월 연길시 출생. 1978년 연변대학 입학,1991년 박사학위 취득. 연변대학 교수,박사생도사 력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정년퇴직. 수십 권의 학술저서,소설집,수필집,번역서 출간. kuanxiong@hanmail.net http://www2.yb.jl.cn/woori
‹처음  이전 1 2 3 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