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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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김관웅59) 댓글:  조회:5422  추천:88  2007-06-01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 대학에서의 교장, 행정간부와 교수집단의 관계를 론함 김 관 웅         꿀벌은 고도로 발달된 사회생활을 하는 곤충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사회생활과 아주 류사성을 갖고 있다. 게스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의 리론에 의하면 벌집이라는 이 기능적인 단위는 어쩌면 대학이라는 이 인간생활의 단위와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벌집에서의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이 삼자관계는 대학에서의 교장, 당 ․ 행정 인원과 교수집단의 삼자 관계와 대단한 류사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벌집의 구조관계는 대학의 구조적관계 및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나 감정의 훌륭한 객관대응물(客觀對應物)로 되는 것이다.       꿀벌은 가장 사회성을 띤 곤충으로서 가장 진화하였으며 항상 봉군(蜂群)이라는 하나의 기능적인 단위로 생활하고 있다. 봉군은 한 마리의 녀왕벌과 계절에 따라 그 수가 변하는 수만 마리의 일벌, 그리고 번식기인 4-9월에 나타나는 2000~3000마리의 수펄로 구성된다.      먼저 녀왕벌의 생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녀왕벌은 한 개 대학에 비하면 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만 마리의 일벌들에 의해 둘러싸인 녀왕벌을 보면 자연히 수만 명의 교직원을 거느리는 위풍당당한 교장을 련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왕벌과 일벌은 모두 암컷으로서, 똑같은 수정란에서 태여난다. 녀왕벌과 일벌의 분화는 성육(成育)하는 벌집의 방과 유충기에 주어지는 먹이의 량과 질의 차이에 따라 유충 전기에 결정된다. 녀왕벌은 선택되여 큰 방에 모셔지고 먹는 것도 일벌들과는 다른 로열젤리(중국에서는 蜂王漿이라고 한다.)이다. 로열젤리는 우화 후 일주일 전후하여 젊은 일벌들의 입에서 나오는 분비물로서 고단백의 액상물(液狀物)이다. 이 단백질은 일벌이 꽃에서 채집한 꽃가루에 의한 것으로서 일벌들이 일단 체내에 섭취하였다가 생합성(生合成)을 거쳐 영양가 높은 로열젤리가 되는 것이다. 녀왕벌의 유충은 다량의 로얄젤리를 유충기간 동안 계속 먹이는 데 비해 일벌의 유충은 유충기 6일간 중 전반 3일간은 거의 로얄젤리와 같은 일벌유(乳)를 조금씩 먹이고, 후반 3일은 봉밀과 꽃가루의 혼합물을 먹인다. 이처럼 유충기의 영양조건에 따라 여왕벌과 로동벌로 분화된다.      녀왕벌은 우화(羽化)한 뒤 7~10일 쯤 되면 보통 3~7회 공중에서 교미하여 수컷에서 얻은 정자를 저장낭에 모아둔다. 이 정자의 수는 700만개에 이르는데, 녀왕벌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계속 저장낭속에서 살고 필요에 따라 필요에 따라 수란관으로 나오게 된다. 증식기인 4-7월 사이에 녀왕벌은 하루 2000개 이상의 알을 낳아 수만 마리의 봉군을 형성시킨다. 녀왕벌의 건강과 줄기찬 생식력은 봉군의 존속을 지탱해 준다.   다음은 일벌의 생태를 보기로 하자.       일벌은 녀왕벌과 마찬가자로 암컷으로서 똑같은 수정란에서 태여 난다. 우에서 언급했다시피 유충기에 녀왕벌과 같은 먹이를 먹지 못했기에 일벌로 된 것이다. 일벌은 유충으로부터 우화하는 과정에서 생리조건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벌집의 청소, 육아, 영소(營巢), 파수 등의 역할을 하는 내근(內勤)벌과 꽃을 찾아 화밀(花蜜)이나 꽃가루를 운반하는 외근(外勤)벌로 구별된다. 수명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활동이 활발한 시기에는 30-40일, 겨울에는 6개월 정도이다.      우화(羽化)한 일벌이 최초로 하는 일은 벌집방의 청소이다. 2~3일이 지나면 봉유(蜂乳, 즉 로열젤리, 일벌유, 수펄유를 총칭한다)의 분비가 시작되면 육아에 전념하게 된다. 그 후 얼마 지나서 일벌들은 또 봉랍(蜂蠟)을 분비하여 육각형의 집을 만들기 시작한다. 약 3주일이 지나면 내근벌들은 외근벌로 이행해 간다. 꽃을 찾고 화밀과 꽃가루를 모아 운반하는 위험한 일은 로령(老齡)의 일벌이 맞는다. 분봉(分蜂)과정에서도 시종일관하게 일벌들의 주도에 따라 행해지게 된다. 이처럼 일벌은 봉군에서의 주체로서 모든 생산적인 고역을 전담하는 것이다. 마치도 인간사회에서의 인민대중과 같은  존재이다.      세 번 째로 수펄의 생태를 보기로 하자.      수펄은 일벌이 낳은 것이다. 원래 자성(雌性)인 일벌은 녀왕벌이 죽고 다음 대(代)의 녀왕벌의 육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산란을 시작하는데, 낳은 알은 모두 무정란으로서 작은 수벌로 우화한다. 수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종족유지에 필요한 녀왕벌과의 교미가 유일한 역할이다. 번식기에는 2000~3000마리에 이른다. 그러나 녀왕벌과 교미를 하는 수벌은 거퍼 10마리 미만이다. 교미가 끝나면 수펄들은 파수를 담당한 일벌들에 의해 죄다 목이 잘리고 만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곤충 공동체로서의 봉군(蜂群)과 인간 공동체로서의 대학은 이질적인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그 구조는 상당한 동질성을 갖고 있다.      녀왕벌은 한 개 대학에 비하면 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만 마리의 일벌들에 의해 둘러싸인 녀왕벌을 보면 자연히 수만 명의 교직원을 거느리는 위풍당당한 교장을 련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벌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과학연구를 하는 교수들을 주축으로 하고 대학의 각종 후근보장을 담당하는 직공들과 사무원들과 가르침을 받는 대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대학의 각 당기관이나 행정 부서의 각급 처장과 과장들은 같은 행정 간부나 당 간부는 수벌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녀왕벌이 아무리 생식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수펄들이 제공하는 정자(精子)가 없으면 봉군(蜂群)을 형성할 수가 없듯이 대학의 교장이 아무리 상징성이 높고 능력이 있고 아이디어가 훌륭하다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간부집단이 없다면 대학교를 운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봉군(蜂群)에 적정한 수량의 수펄들이 있어야 하듯이 대학에서의 행정간부들도 적정한 수량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대학들에서의 행정간부집단은 그 수량이 너무나 많다. 행정간부들에다 당계통의 간부들까지 합치면 비교학(非敎學), 비연구(非硏究) 인원이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많다. 교미기가 끝나면  파수를 담당한 일벌들이 쓸모없게 된 수벌들의 목을 잘라 죽이듯이 해야 하겠지만 중국 대학들에서는 아직까지는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중국대학들에서의 구조적인 병폐는 이런 비교학(非敎學), 비연구(非硏究) 인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서 이 수펄 같은 존재인 행정 간부들이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서 대학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교수는 다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교장》이나 《원장》이나 《처장》등 보직을 맡은 교수가 마치 더 실력 있는 교수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교수사회에는 학문연구와 강의보다는 보직을 얻거나 보직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교수들은 보직을 지키느라고 거의 한 평생을 허비한 이들도 적지 않다. 필자의 은사들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 분은 학문적 업적을 높이 쌓아올릴 기초와 조건을 훌륭하게 갖춘 분이였지만 20년 가까이 보직에 연연해 있다가 황금 같은 귀중한 학문연구의 시간을 다 놓치고 말았으며 종당에는 이른바《교수》와 《학자》라는 허울만 남았다. 이는 분명히 비극이다.         이런 전철(前轍)을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왜 아직도 《보직+교수=보직교수》식의 량 다리 걸치기 교수들이 가득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생의 학문적인 성공을 희생하면서라도 보직을 쥐려고 애들을 쓰는가?        그것은 모든 교수, 학자들이 다 영광과 실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술업적이 뛰여난 교수나 학자라고 하더라도 대학이나 학계에서 《벼슬 감투》를 쓰고《보스》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면 명예와 실리를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든지 무슨《조직》을 장악하고《행정실권》을 틀어 쥐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변대학의 경우만 보다도 그렇다. 혼자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생전에 명예와 실리를 다 챙기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기 어렵고, 대개는 교학이나 연구보다는《조직관리》나 《벼슬감투쓰기》에 능한 사람이  능력 있는 학자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글만 열심히 쓰고 강의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늙어서 외로워지기 쉽다. 이른바 《대학의 정치》를 통해 인간관계를 원활히 하고 후배 관리를 잘 해야만 늙은 뒤에 가서 《원로교수》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원래 정치적인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청정해야할 대학가에서마저 매사에 정치가 동원되니 정치에 둔감한 교수들은 언제나 불리익을 당하게 된다. 살아있을 때는 정치에 능란하여 명예와 실리를 두루 다 챙기면서 살아왔지만 죽고 나서는 잊혀져버리게 되는 교수들이 바로 이런  보직교수들이다. 그러나 현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적잖은 교수들은 사후의 일은 관계치 않는다.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서는 바로 이런 보직+교수=보직교수들이 량 손에 떡을 쥐고 좋은 일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보직교수들은 인사권, 경제권, 행정권을 다 틀어쥐게 되었기에 살아가기 윤택하고 모든 기회를 남 먼저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변대학에서 한 평생 서양문학을 가르쳐 오고 있지만 보직이 없는 일반 교수로 일관해 오다보니 유럽려행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원래 중국 고전 문학을 전공했던 한 보직교수는 장(長)자를 달더니 중국 국내의 명산대천은 두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9개 나라나 순방하고 돌아왔다. 대학에서 “로열젤리”를 먹는 것은 교장 한사람에게만  국한되여야 하겠지만 수벌 같은 존재인 보직교수와 행정간부들도 “로열젤리”를 장복(長腹)하고 있는 형국이며, 제일 얻어먹지 못하는 것은 교학과 연구에만 정진하고 있는 일벌 같은 무보직의 교수들이다.      사실 교장과 원장을 제외한 보직은 직원이 맡으면 된다. 이런 원인으로 적잖은 대학들에서는 교수와 행정직원의 구별도 별로 없다. 적지 않은 행정직원들은 이런저런 도경을 통해 쾌속으로 석, 박사를 마치고는 교수로 탈바꿈하는 까닭에 교수진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게 만든다. 이런 풍토에서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어용교수, 무능교수, 속물교수들이 속출하고 있다. 꿀도 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수펄 같은 보직교수들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는 교직원 사회에서만 아니라 학생들 속에서도 만연되여 가고 있다. 요즘 연변대학의 대학가에는 요해부문의 보직을 맡은 “아무개 아무개 교수의 석사나 박사를 해야 전도가 있다”는 말들이 학생들 속에서 파다하게 떠돌아 있으며, 심지어는 그 보직교수의 석사연구생들 사이에서 쟁총(爭寵) 끝에 드잡이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보직 없이 오로지 학문연구와 교수에만 정진하는 일벌 같은 수많은 정직한 교수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고도 많다. 필자는 연변대학에서 박사생지도교수로 십여 년 간 후학들을 맡아서 가르쳐 왔는데, 대부분은 외지 대학에서 재직으로 박사공부를 하러 온 젊은  학자들이 필자를 지도교수로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그네들에게 있어서 론문만 잘 써서 빨리 박사학위를 따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박사학위를 따는 것 외에도 취직이라든가 출국 등 학문연구 밖의 실리를 챙기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파워가 막강한 보직교수를 택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과의 한 젊은 교원이 이런 내막을 잘 모르고 필자의 박사연구생으로 공부를 했던, 외지대학에서 온 자기의 동창생에게 《너는 왜 아무개 교수(이 교수는 막강한 보직을 갖고 있는 보직교수임)를 도사로 선택하지 않고 김관웅 교수를 도사로 선택했는가?》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문 외에는 아무런 행정파워도 없는 교수를 택해서 먹을알이 뭔가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직이 없는 필자는 후학들에게 학문의 젖은 줄 수 있지만 다른 실리의 젖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박사학위를 따려는 목적도 사실은 취직을 해서 밥 먹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니 이런 실리를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보직교수들은 학문수준의 여하를 떠나서 후학들에게 인기가 아주 높다. 젖 주는 게 어미라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대학의 풍토는 학생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의 형성에도 많은 작용을 하고 있다. 즉 적지 않은 학생들은 학문에만 전념하는 교수들을 오히려 무능한 교수로 인정하고 학문보다는 《조직관리》나《벼슬감투쓰기》에 능한 보직교수들을 능력 있는 교수님으로 인정하고 아부를 하고 그 줄에 대려고 무진 애를 쓴다. 아부를 하다못해 노예에 가깝게 별별 잡역을 다 대신해 주며 보직교수들은 엎음 갚음으로 이런 젊은 친구들에게 많은 기회를 알선해 준다. 이런 풍토는 학파의 형성보다는 당파의 형성을 꼬드기며  교수사회와 대학가의 전반 물을 흐리고 있다.       이런 풍토는 적지 않은 교수들로 하여금 보직(당이나 행정직)이 무슨 큰 감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학문연구나 교수보다는 보직에 연연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펄들을 일벌이 낳았듯이 원래는 학문의 싹수가 보이던 교수들마저 권력의 유혹을 못 이겨 분분히 수팔 같은 보직교수로 탈바꿈을 하려고 한다.      이런 악과가 빚어지게 되는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중국의 뿌리 깊은 “관본위(官本位)”의 전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위(本位)는 바로 가치표준으로서  “관본위(官本位)”는 벼슬(官)의 높고 낮음을 사회가치의 계산 표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대학에서마저도  “관본위(官本位)”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벼슬”이 높으면 의례 능력이 있고, 학문이 많고, 안계가 높고, 견해도 독특하고 심각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학문연구의 성과를 평가하거나 직칭(職稱)을 평정할 때도 론문을 발표한 단위의 행정급별로 그 가치를 평가한다. 국가급 간물에 발표하면 점수가 높고, 지방급 간물에 발표하면  점수가 낮다. 그래서 연변대학의 많은 강사, 부교수들은 이른바 “핵심간물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벼슬은 확실히 사회가치의 계산 표준임을 보아낼 수 있다.        아직 중국의 대학들이 교수 사이를 평등한 수평관계로서가 아니라 관청에서와 같은 수직적 상하관계로 묶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연변대학에서는 학문으로서의 파워(power)보다도 대학 내에서의 벼슬, 보직 - 행정적인 파워가 자신의 신분을 더욱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많은 교수들의 잠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면 눈치 빠른 적잖은 교수들은 보직과 교수를 겸하여 실리를 챙기려 한다. 대학인 이상 교수직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또 교수직을 부둥켜안고 있어야 또 별로 먹을알이 없으니 량 손에 떡 쥔 식으로 보직과 교수직을 량 손에 거머쥐고 있으려 한다. 이런 교수들은 《학문적 변질》을 손쉽게 하게 되며, 량 손에 쥔 떡을 다 놓치지 않기 위하여 곡학아세(曲學阿世)까지도 서슴지 않는 서글픈 곡예사로 전락해 버린다. 부학무술(不學無術)의 학술류망들이 오히려 《능인(能人)》으로 떠받들리면서 대학가에서 보직에 교수직까지 거머쥐고 막강한 권력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심심찮케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비정상적인 분위기속에서 자기의 전공분야에 대한 독자적인 탐구만을 업으로 외곬 길을 걸어가야 할 적잖은 교수들마저 마치 정직한 일벌들이 무위도식하는 수펄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듯이 행정보직을 넘보는 학문의 외도군으로 타락해간다.      그래서 행정보직 교체기에 접어들기만 하면 교수들마저도 괜히 들떠 머리를 기웃거리며 원장, 처장, 관장 자리를 넘보는 판국이다. 사실 연변대학에서의 교수들이 벼슬자리 감투 하나 바라보고 헤덤빈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수는 강의나 잘 하고 연구만 잘 하면 되었지 무슨 행정적 파워나 벼슬감투인가 하겠지만 여기에는 그럴듯한 내막이 있다. 여기에는 연변대학만이 아닌 전반 중국 대학의 구조적 병폐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연변대학을 포함한 중국의 많은 대학들에서는 교수나 학생의 본위가 아니라 행정보직의 본위로 돌아가는 판국이기 때문이다.      벌집에서의 본위 또는 주체가 일벌이듯이 대학의 본위 또는 주체는 마땅히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와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여야 한다. 선진국의 《교수치교(敎授治校)》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듯하다. 교수협의회의 파워가 막강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수 전화 한 통화만 해도 행정인원들이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세상이다. 대학에서 행정업무는 교학(敎學)이라는 주체행위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말 그대로 보직(補職)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교수치교(敎授治校)》가 아니라 《행정치교(行政幹部治校)》형국이다. 이른바 행정간부들, 특히는 보직교수들이 쥐락펴락하는 판국이다. 그들은 말로는 《교학을 위해 봉사하는》 머슴, 청지기라고 하지만 그들의 입김이나 파워는 막강하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인사처장이나 교무처장이나 연구생원 원장, 과학연구처 처장   쯤 되어도 그 파워는 막강하다. 더 한심한 것은 강의를 하다가 수준미달로 쫓겨나 행정으로 넘어갈 경우 오히려 더 빨리 승진하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아이러니도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비서에 승용차까지 따라 붙으면 기분은 붕 뜨고 그 기세 또한 기고만장해진다. 그리고 행정은 돈을 주무른다. 월급은 쥐꼬리만 하지만 보이지 않는 돈은 적어도 노루꼬리쯤 된다. 사인에 결재에 다 돈을 주무르는 재미다. 자그마한 학과장이라도 천신을 해야 제 쌈지 돈 쓰지 않고도 술 소비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중국의 관본위 관료주의형태의 대학가내에서의 전형적인 한 보기이다. 그러니 행정직은 자연히 보직(補職)이 아니라 보직(寶職)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니 너도나도 행정보직(寶職)를 거머쥐려고 발버둥이를 친다. 그런데 얄미운 것은 보직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당하기도 어려운 교수직과 기타 학문적인 조직체의 장(長)마저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학가가 관청 같은 분위기로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들은 사실 행정직을 맡으라 해도 안 하며 또 맡겨서도 안 된다. 창의성이 있는 학자로 되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함은 물론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책을 많이 보면 볼수록 자기의 무지가 발견되면서 볼 책은 더 많아지고 연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꼬리에 잇닿는 문제점으로 하여 연구거리는 더 많아진다. 언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학문에 전력투구하는 진정한 학자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학생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풍토가 조성되여야만 대학교수는 《벼슬의 꼭두각시》나 《정치적 눈치군》이 아니라《광적인 공부벌레》나 《용감한 가설의 제출자》가 될 수 있으며 대학은 정치판이 아닌 학문연구의 전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대학들은 관본위, 행정본위의 가치관을 떠나서 학술본위, 교수본위로 가치관의 전향을 철저히 해야만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으로, 진정으로 학문적인 창의성이 있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하여 학문의 꿀을 따는 데만 정력을 바치는 부지런한 일벌 같은 교수들이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될 때 대학은 진정으로 희망이 있는 대학으로 될 것이다.                                         2007년 5월 10일 연길에서
58    사이버시대, 글로벌시대 그리고 애정의 변질 댓글:  조회:5247  추천:127  2007-05-07
사이버시대, 글로벌시대 그리고 애정의 변질 김 관 웅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사이버(cyber) 시대, 즉 가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가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호텔이나 다방이나 사무실이라든지 하는 데를 가면 종이나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造花)가 생화(生花)를 제치고 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본다. 아무리 조화가 생화보다 색채가 더 현란하고 모양이 더 곱고 앙증맞다 해도 자연의 향기가 없는 가상적인 꽃에 불과한 가짜 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 세상에서는 가짜의 꽃이나  나무들이 진짜의 생화나 나무들을 쫓아 버리고 더욱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종이나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는 생화의 대리라고 할 수 있다. 비유를 할 것 같으면 지금 세상은 본인보다 대리인이 더 우쭐하는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허구의 세계, 가짜의 세계, 대리의 세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 대부분 가정에는 텔레비죤도 있고, 컴퓨터도 있다. 텔레비죤이나 컴퓨터에 비치는 화면의 세계, 흔히 우리는 그것을 사이버의 세계라고한다. 이 가상의 세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은 누구나 절실한 체험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황산이나 미국의 나이아가라폭포 같은 관관명소를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는 텔레비죤 화면을 보는 것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유효할 수 있다. 왕복비행기표와 숙박비 몇천딸라를 내지 않고서도, 한장에 백딸라도 훨씬 넘는다는 입장권을 사지 않고서도 우리는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지난 6월의 한일 월드컵의 수많은 감동적인 장면들을 죄다 현장에서 보듯이 보지 않았던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 현실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 가상의 세계를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즉 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텔레비죤이나 컴퓨터에 비친 가상의 세계가  아무리 현실의 진짜 세계보다 더 실감이 나고 더 효과적이라고 해도 역시 앞에서 언급한 가짜 꽃인 조화가 진짜 꽃인 생화의 대리인것처럼의 현실세계의 대리일 따름이다. 그림자의 세계일따름이다.   그림자의 세계는 우리 인간의 시각인 눈을 즐겁게 해줄 수는 있지만  다른 감각기관은 별로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인간의 기타 다른 욕구는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를 테면 인간의 식욕을 그림자의 세계로서는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화병충기(畵餠充飢)라는 성구가 있고 우리 말 성구에도 리라는 말이 있는것이다. 한마디로 그림속의 떡으로는 배 고픈 것을 말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디 식욕뿐이랴.  성욕에 바탕을 둔 인간 남녀들의 성애도 가상적인 세계로써는 종국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텔레비죤에서 미스 월드의 화용월태를 본들 감질나기나 할뿐 무슨 문제를 해결하는가.  요즘은 연길에서도 컴퓨터의 대화방에 들어가 채팅을 하는게 크게 류행하고 있다. 가상적인 세계에서 생면부지의 남녀들이 서로 님이요, 남이요 하면서  숱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재미나는 해프닝들이 일어나고있다. 만족되지 못한 사랑의 욕구를 채팅을 통해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욕구의 대리배설에 불과하며, 어디까지나 감질나는 에 불과하다.    단지 생면부지의 남녀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이 일고 있는 오늘날의 가상세계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결혼 그리고 결혼에 의해 맺어지고 있는 부부관계도 준엄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그 실례를 한국 권지예의 소설 를 실례로 들어 보자. 이 소설의 제목부터 해석한다면 “마리오네뜨”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인형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제목을 단다면 이라고 달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30대중반의 젊은 부부이다. 남편은 프랑스 빠리에 가서 류학을 하고 안해는 한국 서울에서 과외지도를 하면서 어린 딸을 기르고 있고 남편의 뒤바라지를 해주면서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안해는 남편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으면 잔화를 한다. 가상적인 공간에서만 부부는 전화선을 통해서 련결되여 점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소원해지는 자기들은 부부임을 다시 확인하군 한다.   어느 날, 안해는 빠리에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빠리에 가서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이 남편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오히려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서먹서먹한 느낌이 든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부부관계도 갖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고 지나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허무감이 깃들고, 정이 안 든다. 그러던 차에 남편이 나가고 난 뒤에 안해가 방을 청소하다가  자기 것과는 색갈이나 형태가 판이한 다른 녀성의 음모(陰毛)를 발견하게 된다. 남편이 자기가 없을 때 저지른 불륜의 증거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남편의 불륜의 증거를 찾은 그날, 남편이 귀가했을 때 남편에게 화를 낼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하니 자신을 자해하는 자살극을 벌인다. 이;렇게 소동을 벌이니까 놀란 남편이 안해를 달래면서 간신히 진정되기는 했으나 안해는 영영 아물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전화라든가 컴퓨터 같은 가상적공간속의 한 가닥의 줄에 매달려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부부관계를 인형의 관계와 같다고 해서 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서울과 빠리에 전화선이 련결되여 있어서 부부가 전화를 통해 말을 주고 받기는 하지만 실제로 손을 잡고  살을 섞을수있는게 아니다. 부부의 관계는 상대방의 숨소리를 제 귀로 직접 듣고, 상대방의 체취를 제 코로 직접 맡아보고, 몸과 몸이 직접 접촉하는 그런 관계이다. 두몸이 아니;라 한몸이 되는게 부부관계이다. 텔레비죤, 컴퓨터, 전화를 심벌로 하는 오늘날의 사이버시대는 우리의 몸이 대방의 몸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시대이다.   의 부부는 부부가 아니라 인형이 되여 버린 것이다. 살과 살을 섞는 부부가 아니라 가상적인 부부, 즉 실제상에서는 남남인 가짜부부가 되여 버린 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안해는 안해 대로 스스로 인형으로 바뀌여 버린 것이다. 법적으로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이지만 유명무실한 가상적부부로 되여 버린 것이 어디 소설중의 허구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가.   우리의 중국조선족사회는 비록 아직은 진정한 아이티혁명의 시대와는 일정한 거리기 있기는 하지만 글로벌리즘시대에 들어섰음은 분명히 보아낼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이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로씨야, 프랑스, 독일, 미국, 카나다 같은 구미는 물론이고 호주, 뉴질랜드, 사이판 같은 대양주 그리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에까지 발길을 뻗치고 있다. 그래서 중국조선족을 집씨족에 비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집씨족은 류랑을 하더라도 가족을 포함한 동네 전체가 함께 류랑을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은 부부가 헤여져서 떠돌이를 한다는 점이다.   작년에는 전 연변의 제정경제수입보다도 해외에서 연변조선족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더 많았다고 한다. 표면상이나마 연변의 번영은 사실 해외에 진출한 연변의 조선족들이 벌어들인 외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요, 유득(有得)이면 반드시 유실(有失)인 법이다. 해외진출은 통해중국조선족이 잃은 것은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고 가장 큰 잃음은 인형화된 부부관계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강좌만 보아도 그렇다. 나와 나보다 네살  년상인 선배한 분를 제외하고는 기타 네명은 모두 부부리산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한창 녀자 맛, 남자 맛을 알 나이에 부부가 헤여져 사는 것이다. 2, 3년의 잠시적인 리별도 있지만 개중에는 10년 동안이나 헤여져 사는 친구도 있으니 옆에서 볼 바에도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적어도 인도주의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대학교수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리실업을 당한 로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아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부부리산의 파생물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한국에 돈벌이를 간 중국조선족들사에서 확산되여 가고 있는 림시부부현상이나 로씨야에 진출한 중국조선족들 사이에서의 따발(搭伴兒)현상이다.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사이버시대에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이런 부부관계의 가상화, 인형화추세가 더욱 심각해지지 않겠는가.  
57    과연 새로운것인가 (김관웅57) 댓글:  조회:3056  추천:104  2007-04-21
과연 새로운것인가                 - 김파의 《립체시론》 독후감                                                                 김관웅       우리 문단의 일부 문우들이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근간된 김파씨의 《립체시론》를 한번 읽어보라고 자꾸 권하기에 바쁜 와중에도 한번 대충 읽어보았다.     김파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김파씨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로부터 립체시 창작을 시도했고 그 기초우에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립체시론》을 태동하기 시작하여 금년에 《립체시론》이라는 이 소책자를 출판하였는데 태동으로부터 출판되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20년동안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김피씨가 많은 정력을 기울였음은 가상하게 생각하며 그 로고는 필자도 충분히 긍정하고싶다.    그런데 그 시학주장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미 90여년전에 미래주의의 중요한 멤버였고 후에는 초현실주의 중요한 멤버로 되였던 이폴리네르가 이른바 《립체시》를 창작하고 립체파시론을 주장한적 있으니 김피씨의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은 결코 낯설기만 한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은 이폴리네르의 《립체시》와 김피씨의 《립체시》, 그리고 김파씨의 《립체시론》을 비교하려는 목적에서 쓰는것이 아니다. 다만 김피씨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의 창의성 여부만 론하려고 한다.       김파씨는 《립체시론》에서 이른바 립체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있다.     《…즉 시주제의 다면성, 시결구의 다각성, 시형상의 양성, 시어의 다의성과  수사법의 복합성과 변이와 전환 등이 망라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구조가 외적 및 내적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립체구조, 립체형상구조, 립체수사구조, 립체어의 구조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호상 련관, 호상침투, 호상 배척되는 대립물의 통일체로 구성되여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수 있을것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있는 외적 및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있는 시라고 정의할수 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5〜16쪽.     김파씨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립체시는 모더니즘시들과는 대동소이하나 《모더니즘시에서는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복수성, 다시 말하면 주제의 복수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속에 또는 시창작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되는가 하는 그 규률성이 결여되여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65쪽.면서 자기의 립체시나 자기가 인정하는 립체시들이 모더니즘시들보다는 한수 우라고 주장하고있다.     이른바 립체시에 대해 김파씨가 숱한 말을 했으나 그 요점은《다주제》라는데 귀결된다. 그런데 묻노니, 여운이 있는 좋은 시들치고, 특히 고대 동서고금의 영물시(詠物詩)들이나 현대의 상징주의나 이미지즘이나 초현실주의 등 여러 모더니즘 시문학류파들의 시들치고 어느것이 다주제가 아닌것이 있는가?     그럼 먼저 조선조시대의 명기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례로 들어 보자.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明月)이 만공산하니 쉬여 간들 어떠하리    이 시조는 적어도 두가지 뜻(혹은 주제라고도 할수 있음), 즉 자면의(字面義)와 암시의(暗示義)를 가지고있다. 자면의(字面義)를 분석해볼것 같으면 서정적자아는 의인화된 푸른 산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물과  대화하면서 한번 바다에 흘러들어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올수 없으니 밝은 달이 있는데서 한번 놀다가 가라고 권하는것이다. 암시의(暗示義)을 분석해볼것 같으면 벽계수(碧溪水)는 사실 벽계수(碧溪守)라는 호를 가진 멋쟁이 선비를 암시하는것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 자신을 암시하는것으로서 풍류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라는 멋쟁이선비더러 자기와 더불어 놀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 쓴 시이다. 이밖에도 이 시조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는 식의 급시향락(及時享樂) ― 제 때에 향락을 누려야 한다는 주제가 내포되여있다고 해도 별로 대과(大過)는 없을것이다.      녀석의 눈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쇠창살에 칭칭 감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오로지 천갈래의 쇠창살만 보였고     그 천갈래의 쇠창살 뒤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강인한 네 발로 유연한 걸음새를 보인다만     그 걸음새는 자그마한 쇠살창 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마치도 힘의 춤사위가 하나의 중심을 에돌기만 하는듯     바로 중심에서 위대한 의지는 현기증에 걸렸도다.      다만 이따금 눈까풀을 소리 없이 걷어 올리니      한폭의 그림이 침입해 들어오지만     사지가 긴장한 적막을 통과하고나니      마음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구나.                -릴케 《표범―빠리 동물원에서》    이 시에서의 자면의(字面義)는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것과 같이 빠리동물원의 살창속에 갇혀 탈출을 시도하느라고 쉴새 없이 맴을 돌다가 맥없이 주저 앉아버린 한마리의 표범을 그린것이다. 그러나 이 표범은 단순한 표범의 이미지만 전시한것이 아이라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릴케 자신과 릴케 같은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표범은 《천갈래의 쇠창살》속에 갇혀 쉴새 없이 맴을 도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방향상실과 곤혹 그리고 방황을 상징한다. 《위대한 의지가 현기증에 걸렸다》거나 전반 《우주》의 상실은 마치도 표범의 감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상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표범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은 바로 인간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 그것이다. 시인은 로댕한테서 객관적이고 랭정하고 정확한 조각수법을 배워 추상적인 관념(힘, 의지 등)을 표범의 각종 이미지(《강인한 네발》, 《피곤한 눈길》, 《맴을 돈다》, 《현기증》, 《춤사위》 등)속에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징을 통하여 발레리가 언급했던 이른바 《추상적인 육감》과 엘리어트가 제창했던 《사상의 지각화》의 효과를 획득했던것이다. 이 시는 시종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곤혹, 방황과 고민의 주관적정서를 상징하고있다.     모택동의 시(詩)나 사(詞)들에도 다주제를 가지고있는 상징성이 짙은 시들이 많고도 많으니 김파의 말을 빈다면 립체파 시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비바람은 봄을 보내고     흩날리는 눈꽃 봄을 맞네.      아직 벼랑에 고드름이 백장인데     꽃가지는 예쁘네.     예뻐도 봄빛을 다투지 않고      다만 봄소식 전할뿐.     산에 뭇 꽃들이 만발할 때에     그 속에 웃으리.         - 모택동《복산자 · 매화를 읊노라》     중국시론의 말을 빌린다면 모택동의 이 사는 그야말로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盡而意無窮)》, 즉 그 주제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 역시 김파씨의 주장대로 라면 다주제의 립체시다.     시의 상징성과 그에 따르는 암시성, 다의성의 특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론가들이 이미 수많은 견해를 발표하여 우리 문단에서도 그것이 지난 몇년동안 시인묵객들의 입에서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러니 상식으로 된지 이미 오래다. 특히 중국고대 시론에서의 《신운(神韻)설》은 전문 이 점을 연구대상으로 한 시론범주로서 중국전통시론범주에서의 핵심적인 범주로 된다. 그리고 중국시론중의 《의경(意境)설》이나 《언의상(言意象)론》이나 서양시론중의 《층차론(層次論)》 등은 모두 정도부동하게 시가 갖고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에 대해 탐구를 진행하였다. 다만 편폭상의 제한으로 이 점에 대해 충분히 부연하고 전개를 할수 없는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김파씨는 인류가 창조한 시론들에는 김파씨 자신이 주장하고있는 이른바 《립체시》 혹은 《립체시론》의 골자들이 적어도 천년 이전에 제기되였고 수없이 론의되여왔던 시학명제나 시론범주였음을 잘 알아야 하며 결코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나 창조가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해가 중천에 높이 솟아올라 다들 일밭으로 나갔는데, 늦잠꾸레기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날이 밝아왔다고, 자기가 세상에서 첫 사람으로 일출(日出)을 보았다고 소리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서양의 상징시와 상징주의시론을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꿨다고 새로운것이 되고 창의성이 부여되는것이 아니다. 또 중국의 신운설이나 의경설을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꾸었다고 새로운 발견이 되는것이 아니다. 모태주를 다른 술병에 쏟아넣고 다른 브랜드로 바꾸었다고 해도 모태주의 술맛이 변하는것은 아니다. 한 사기꾼이 자기가 모태주를 초월하는 명주를 만들어냈다고 떠들어댄다면 얼마동안은 풋내기 술꾼들을 얼려 넘길수도 있겠지만 고참 주류(酒類) 품상가(品嘗家)의 혀와 코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누구의 말처럼《우리 시단에서 김파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에 대한 반향은 랭담하지만 오히려 한국의 시단에서 반향은 뜨거웠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05쪽.고 하여 김파씨의 립체시론이 대단해지거나 원래 없던 창의성이 부여되거나 원래 없던 과학성이 생겨나는것이 결코 아니다.                                    2005년 11월 14일 연길에서 <<문학과 예술>> 2006년 2호
56    세상은 돌고 도는 법 (김관웅56) 댓글:  조회:5311  추천:88  2007-03-29
세상은 돌고 도는 법   김 관 웅     동양사람들은 순환론적 사고방식을 갖고있다.    즉 세상만사는 돌고 돈다고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추운 겨울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춘, 하, 추, 동은 돌고 돈다.   봄에 만개했던 꽃도 하루 아침에 시들어 떨어지는 법이고, 시들었던 꽃도 봄을 맞으면 다시 꽃이 피는 법이다. 꽃이나 풀 같은 산천초목도 돌고 돈다.        아침에 동천에 욱일승천하던 아침해도  저녁이면 서산에 맥없이 지는 법이고, 어두은 밤이 지나면 또다시 아침해가 동천에 솟아오르는 법이다.   달은 둥글어졌다가도 기울어지고 기울어졌다가도 둥글어지는 법이다.      해도 돌고, 지구도 돌고, 달도 돌고, 별도 돈다. 일(日), 월(月), 성(星), 진(辰)은 돌고 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로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맑게 개였던 날씨도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면 음침한 날씨로 변해지고, 련며칠 장마비도 그치면 쨍 하고 해뜬 날이 된다.     그래서 중국에는 "山不轉水轉"이라는 말이 있다. 설사 산은 돌지 않는다고 해도 물은 돌지 않는가.     자연현상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제반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청년, 장년시기가 지나면 노년과 죽음의 시기가 다가오는 법이고 노인들은 죽어가고 젊은이들은 자라나는 법이다.    얻게 되면 언젠가는 잃게 되는 법이고, 잃게 되면 언젠가는  얻게 되는 법이다.     개인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한 집단이나 국가 같은 인간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합쳐진지 오래면 헤여지는 법이요, 헤여진지 오래면 합쳐지는 법이다.     천하를 석권하고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도 두 대를 넘기지 못하지 않던가. 천하절색 양귀비도 때가 지나니 그만이지 않던가. 그래서 "삼십년하동, 삼십년하서(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라는 말이 있잖은가.     세상의 정치세력이나 정치판도는 돌고 도는 법이다. 오늘의 여당이 래일에는 야당이 될수도 있고, 오늘의 야당이 래일에는 여당으로 될수도 있는 법이다.    청명한 세상이 어지러운 세상으로 변할 수 있고, 또 세상이 어지러워 진지 오래면 맑아지는 법이다.     바른 길을 걷다가도 비뚠길로 들어갈 수 있고, 비뚠 길을 오래 걷다가는 바른 길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래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상만사는 바른 길로 돌아오게 되여있는 법이다.   요즘 우리문단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동양의 순환론이 다 틀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2007년 3월 22일  연길에서
55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가는 김응룡 시인 댓글:  조회:2538  추천:79  2007-03-24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가는 김응룡 시인                                                                          김 관 웅        동양 시문학의 력사적 흐름속에서 사실주의전통은 시창작의 각도에서 볼 때《시경》을 원류로 하여 당나의 두보나 백거의에 이르러서는 도도한 흐름을 이루게 되었고, 시론의 식도에서 본다면 공자의 《시가이원(詩可以怨)》의 현실비판, 현실참여의 시학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유(韓愈)의 《불평스러우면 울어야 한다(不平則鳴)》는 시학주장에 이르기까지 역시 사실주의적인 시학주장이 도도한 흐름을 이루었다. 당나라시기의 사실주의시인 백거의는 《글은 그 시대에 맞추어 짓고, 시는 그 시대의 사건에 맞추어 읊어야 한다(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했었다.   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유와 백거의의 시학 주장을 종합하여 말한다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시대에 울고 싶은 사람들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유명한 시인들은 대부분 그 시대를 대신하여 운 사람들이다. 10년 전 필자는 이 시대를 대신하여, 우리 민족을 대신하여 우는 문학경향을 《민족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하여 부른 적 있으며, 력사의 격변기에 처한 우리 민족문학에 있어서 《민족적 사실주의》는 가장 바람직한 문학경향이라고 인정해 왔으며 이를 적극 권장하여 왔다. 그 후로 필자는 시종 이 자대로 우리중국조선족문학을 평가하군 했다.    김응룡 시인은 최근 몇 년래 중국조선족, 특히는 중국조선족 농촌, 농민, 농업 이 삼농문제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농촌, 농민이 직면한 절실한 문제들을 자기의 시창작의 소재로 다루면서 우리의 농민과 농촌을 대신하여 구슬프게 울어주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 민족의 오늘날의 준엄한 실존적인 상황은 오불관언이라면서 유미주의의 상아탑 속에서 콧노래만 부르는 그러한 시인들과는 판연히 다른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드팀없이 나가고 있는 민족적 사명감과 량지가 있는 참여파 시인이다.   지면상의 제한으로 김응룡 시인의 지난 한 해에 창작하여 연변문학 2006년 제8월호와 12월호에 게재된 《기다림》,《시골개구리들의 울음》, 《향수》, 《가을의 울음》4수의 시와 작년 한국 《문예시대》2006년 해외동포문학상을 받은 수상작 《둥지》1수 도합 5수만 텍스트로 삼아 최근 김응룡 시인의 민족적 사실주의 창작경향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정오무렵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시골마을에 개가 짖는다 컹컹   마을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녀인 보고 이 집개 저 집 개 짖어댄다 목 메여 짖어댄다   산비탈 메밀에서 다락논에서 김을 잡던 외기러기 사내들 약속이나 한 듯 일손 놓고 일어선다   행여 행여… 저마다 부서지는 마음을 추슬러 본다        - 김응룡 《기다림》   이 작품은 세련미와 함축미를 갖고 있어 진한 감동과 더불어 간 사색의 여운을 남기는 수작이다. 녀성이 증발해 버린 우리 농촌들에서 살아가는 《외기러기 사내》들이 정오 무렵에 한적한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녀인에 대한 동일한 통하여 리농향도(離農向都), 해외로무송출 등으로 인한 부부리산의 아픔, 로총각들의 결혼난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농촌에서의 가정의 해체화 경향을 잘 보여주었다. 우리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실존상황을 아주 짧지만 특색 있는 모멘트를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준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중국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쪽박을 차고 두만강 ․ 압록강을 넘어 온 이민집단으로서 처음부터 농업이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 하기에 오래 동안 중국조선족문화의 기반은 시골에 있었으며 농민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주체였다. 시골에 우리중국족의 삶이 터전이 있었고 우리의 순후한 인심과 민속이 있었고 우리의 교육과 문화가 있었다. 한마디로 농촌과 농민은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이고 뿌리였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맞아 중국사회가 산업화를 발걸음을 다그치면서 전반 중국은 날로 농업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의 변신해가고 있으며 나날이 도시화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추이(推移) 속에서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지금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역사의 대 격변기에 처해있다. 이농향도(離農向都)의 시대적인 추세 속에서 이미 20만 명 달하는 중국조선족농민들은 중국연해지역의 도시들에 이동해갔고,  2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레안 드림에 휘말려 한국으로,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 있다. 가장 팔팔한 일여덟 명에 한명 꼴로 한국에 나가있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농민들은 전에 비해 돈은 벌어 어느 정도 부유해 지게는 되였으나 그 대가로 많은 시골의 농민들은 가정의 행복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 형국이다. 조선족농촌의 해체화 경향은 농민 가정의 해체화 경향으로 나타난다. 농촌에서의 노총각들이 장가들지 못하고 기존 가정은 중국의 내지 진출과 해외진출 인해 《외기러기 아빠》, 《외기러기 엄마》들이 속출하고 , 어린 자식들이 부모들과 헤어져서 살아야만 하고 도처에 폐가들이 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이자 뿌리인 농촌과 농민들은 날로 영락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객관사실이며 따라서 중국조선족문화의 본거지인 농촌의 해체는 중국조선족공동체 및 그 문화가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조선족시단에는 이른바 순수시의 상아탑 속에 깊이 묻혀서 언어유희나 때 지난 언어장난이나 기교장난에만 골몰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응룡 시인은 이 몇 년 동안의 근작시들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뿌리의 흔들림을 농촌과 농민들의 오늘날의 실존 상황을 통해 깊이 감지하고 민족적인 우환의식을 안고 우리농촌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중국조선조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로 남긴 시들을 많이 창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한 이미지화를 거쳐서 표현한 시작이 바로 바로 「까치둥지」이다.   지는 잎들이 받들어 올린 까만 그리움 하나 백양나무 가지에 동그랗게 걸려 쳐다보는 나의 눈 이슬 젖는다   언어도 음악도 삶의 온기마저 잃은 비인 둥지 주인은 어데 갔나   동구밖 나선 할배할매 눈이 허는데 반가운 기별은 전하지 않고 늙은 총각들 술병 안고 쓰러졌는데 오작교는 놓지 않고   생기가 떠나간 자리 까만 그리움 하나 행복했던 나날들이 락엽되여 뒹구는 시골 백양나무가지에 높이높이 걸렸구나     - 김응룡 《까치둥지》전문      이 시에서는 우리 농촌에서의 가정의 해체화의 현실을 《백양나무가지 우에 동그랗게 달려있는 빈 까치둥지》라는  객관적대상물을 통해 표현했다. 까치는 우리민족의 상징체계에서는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는 길조이다. 그러나 우리의 농촌에서는 그런 길상(吉祥)스런 까치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언어도 음악도/ 삶의 온기마저 잃은/ 비인 둥지"밖에 남기지 않고 애오라지》 《까만 그리움만 하나》만이 《백양나무 우에 높이 높이 걸렸구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표현된 정서가 다소 회색(灰色)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시인의 민족적인 우환의식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정서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민족적 사명감에서 우러난 김응룡 시인의 우환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이 시는 우리중국조선족시단의 현실외면, 현실도피의 바람직하지 못한 시창작 경향과는 달리 민족적인 실존상황에서 감득(感得)한 진실한 정서를 비교적 생동한 시적형상화를 통해 표현한 점이 높이 평가되여 한국《문예시대》2006년 해외동포문학상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아가는 김응룡 시인의 시창작은 계속 심화되여 가고 있는데, 근작시《향수》, 《가을의 울음》 역시 우에서 소개한 시적 추구의 심화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올감자에 하얀 김이 서리고 된장 찐 풋고추 향을 피워 올리면 내사 65도 배갈 한 병 마셔도 취하지 않소   앞강의 여울소리 긴긴 절설 풀어내고 숲속의 새들 딸기빛 사랑을 노래했소 젊은 시인은 심장을 뽑아 미루나무에 걸고 둥둥 북을 쳤소   먼먼 지평선 저쪽 내가 태를 묻은 땅이 있으련만 강물의 여울소리도 새들의 사랑노래도 들리지 않고 안개만 자욱하오   불볕에 달아오른 세멘트길 따라 홍개미 한 마리가 포복전진하오 35도 배갈에 취해 비틀 비틀     - 김응준 《향수》전문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눈앞에 비쳐지는 것은 사랑도 희망도 빛바래진 농촌의 현실이고 그 속에서 실의에 빠져 취생몽사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게 오늘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김응룡 시인의 《향수》에서 표현된 노스텔지어(Nostalgia)에는 센티멘털(sentimental)한 애수와 우환(憂患)이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이러한 시들은 우리농촌의 쓸쓸한 만가(挽歌)처럼 쓸쓸하게 들려온다. 하기에 들려오는 우리시골의 가을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김응룡의 《가을의 울음》)도 쓸쓸하기만 하다.    어둠이 깃든 시골 개구리들이 운다 눈물도 없는 개구리들이 울음 높이 질벅하다   비도 오지 않아 강가 모래불에 묻은 엄마 물에 밀려갈 근심도없는데 왜 우느냐 물었더니 아니란다 개굴개굴   개구리들이 우는 리유 아는지 모르는지 이영이 고삭은 초가에서 진작 잠에 곯아떨어진 늙은 량주 꿈을 꾼다   꿈에 안아보는 손자손녀 재롱에 행복의 웃음 느침으로 흘러내려 베개잇 적신다   이 시골 인적 늙은 량주마저 초가에 묻힐가바 개구리들은 운다 밤새껏 밤새껏     - 김응룡 《시골개구리들의 울음》전문      이 시에서 시골의 여름밤의 개구리울음 소리는 초상난 집에서 애고애고 들려오는 곡성처럼 청승맞기 그지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개구리소리는 시인의 애타는 호소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감정이입의 표현수법이 아주 잘 구현된 수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총적으로 김응룡 시인은 날로 황페해 가는 우리 농촌과  날로 령락해 가는 우리 농민들을 대신하여 울어주고 있는 시인이다. 철두철미하게 민족적 사실주의에 립각하여 우리민족의 실존적 현실을 직시하고 표현하고 있는, 강렬한 민족적 우환의식과 민족적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는 시인중의 한 분이다. 최근 김응룡 시인의 시 창작은 우리 시단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김응룡 시인의 시들은 아직도 높은 요구에 비해보면 아직은 거리가 있다. 특히 무엇을 말했는가 보다는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예술적 표현 문제에서 아직은 제고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직설보다는 이미지화를 통한 시적인 형상화 작업을 중요시하여 시작들을 더욱 갈고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탄광의 광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광부들에게 위험을 알렸다고 한다. 민족적 사명감과 우환의식이 있는 우리의 시인들이나 작가들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 비슷한 존재이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력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김응룡 시인의 상기 시들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김응룡 시인이 앞으로도 민족적사실주의 길로 드팀없이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2007년 1월 28일 연길 민항아파트에서   2007년 3월호  
54    야누스, 구미호 그리고 미문(美文)(김관웅54) 댓글:  조회:5066  추천:79  2007-03-18
        야누스, 구미호 그리고 미문(美文)                                   김관웅야누스(Janus)는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이다. 야누스의 머리 앞뒤에 같지 않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영국 소설가 스티븐슨의  소설『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야누스라는 이 고대신화의 원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킬박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로서 훌륭한 도덕성과 연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 내심속의 선(善)과 악(惡)의 부동한 경향을 탐구하기 위해 약을 발명하게 되는데, 그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자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이드씨라는 자기의 화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지킬박사와는 달리 하이드씨는 철두철미한 악한이였다. 하이드는 가지가지의  악행을 저지르다가 나중에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 이처럼 지킬박사는 선(善)과 (惡)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량면파로 되어 버린다. 나중에는 악한 하이드씨가 착한 지킬씨를 압도하게 되자 경찰이 체포하러 오기 전에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리론중의 심리구조설과 인격구조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인 도덕과 량지와 본능적인 욕구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도덕적인 나인 초아(超我)와 본능적인 나인 본아(本我)의 량극적인 대립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리론에 의하면 야누스 같은 량면성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으로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갖고 있는 인간들의 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량면성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우리 문단에는 한 녀류 문인이 있는데, 이 친구는 가장 전형적인 야누스적인 량면파이다. 돈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이 녀자는 도처에서 남의 돈을 홀려낸다. 그리고 탕녀인 이 녀자는 남자들을 호려서 간도 내어먹는 구미호(九尾狐)이다. 이 구미호 때문에 여지 없이 망신을 당하고 불행을 당한 남자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남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글은 온갖 미사려구와 가짜 감정을 동원하여 가장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미문(美文)으로 꾸며졌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고 하지만, 이 여자의 미문(美文)만 읽는 독자들은 자칫하다가는 글의 작자를 천사로 련상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이 여자의 본질을 간파할 수가 없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위장한 꽃뱀 같은 존재이다. 이 꽃뱀은 살모사에 못지 않은 극독약을 지니고 있어 한번만 물리면 남자들은 치명상을 입는다.      한마디로 이 녀류문인은 가장 추레한 영혼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할 줄 아는 언어의 련금술사이다. 이런 가짜문학은 자기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수많은 독자들을 기만하는 사기행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신성한 문학에 대한 모독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아름다운 문학작품은 선량하고 고상한 령혼의 샘터에서 솟아나는 깨끗한 샘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우리 모두 글과 인격은 작가에게 있어서 마치도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여서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모자라도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2007년 3월 12일 연길에서 
53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녀인 댓글:  조회:5266  추천:150  2007-03-16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녀인 김관웅  2004년 5월의 하루, 북경 경도 신원반점에서는 뜻 깊은 만남이 있었다. 문화혁명기간에 왕광미의 남편인 류소기는 모택동에 의해 억울함을 당해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왕광미 자신은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의 박해를 받아 진성감옥에 10년 이상 갇혀서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므로 왕광미에게 있어서 모택동과 강청은 불구대천의 원쑤임이 틀림없을 것이고, 고양이와 쥐보다도 더한 앙숙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광미가 모택동의 두 딸인 이민(李敏)과 이눌(李訥) 그리고 두 사위와 자식들을 만나서 함께 회식을 하였던 것이다. 두 시간 남짓한 회식 자리에서 왕광미는 모택동의 딸들인 이민(李敏)과  이눌(李訥)을 보고는 “몸을 주의하고 잘 살아가라“고 당부했고, 이민(李敏)의 딸과  이눌(李訥)의 아들을 보고도 여유 있게 덕담을 했다고 한다.      이민(李敏)은 모택동과 하자진(何子珍) 사이의 딸이나 이눌(李訥)은 모택동과 강청 사이에서 태여난 딸이다. 왕광미는 강청의 질투로 인해 감옥에서 10년 동안이다 옥살이를 하고 구사일생으로 문화혁명이 끝나자 출옥했던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돌아 문화혁명이 끝나자 강청은 사형을 언도 받고 유예집행으로 감옥살이 10여 년 만에 옥사를 했다.      이 날 왕광미의 의도에 의해 마련된 모씨 가문과 류씨 가문의 만남의 자리는 두 가문 사이에 얽히고설킨 지난날의 은혜와 원한을 다 잊자는 그런 만남의 자리였던 것 같다.     2005년 10월 21일 왕광미가 별세하자 모택동의 두 딸과 자식들은 왕광미를 모신 령당에 찾아가서 조문을 했고, 강청의 외손자인 왕효지(王效芝)는 닷새동안이나 매일마다 왕광미의 령당을 떠니지않고 고인을 지켰다고 한다.       원쑤를 갚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원쑤를 영원히 복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원쑤를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방식이다.      왕광미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은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세의 범속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마음을 초월한 거룩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선택이다.     휴머니스트인 빅토르 유고는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바 있다.   “대지보다 더 넓은 것은 바다이고, 바다 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왕광미는 가히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3월 11일 연길에서 
52    [문학]『文人相輕』再論 (1) (김관웅52) 댓글:  조회:4206  추천:106  2007-03-16
『文人相輕』再論 (1) 김 관 웅   중국의 유명한 당대소설가 리국문은 “문인상경(文人相輕)을 꿰뚫어 말한다면 한마디로 문인상질(文人相嫉)이다”라고 지적한바 있다. 즉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궁극적인 원인은 문인들은 서로 질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첫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악습은 길고도 긴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건안문학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조조의 아들 조비는 『전론 ‧ 론문』에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는 것은 자고이래 이러했다(文人相輕, 自古而然)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으로부터 1800년 전의 조비가 이렇게 개탄했으니 문인들이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이 시간적으로 아주 길다는 것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둘째로 문인들이 서로 가벼이 보고 서로 질투하는 이 악습은  공간적으로는 아주 넓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다.   동양의 문단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단도 이러하다. 그 단적인 실례를 든다면, 지금은 사실주의 문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발자크는, 그토록 방대한 저작량과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선거에서는 번번이 떨어졌다고 한다.     셋째로 문인들의 질투는 그 정도가 인간사회의 여타의 분야에 비해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문인들의 질투와 그 질투로 인한 반목과 질시는 조만해서는 끝이 나는 법이 없다. 심지어는 한평생을 서로 질투하면서 살아간다. 마치도 개들이 진흙탕 우에서 서로 물고 뜯는 니전투구(泥田鬪狗)의 형국이다. 승부도 없이 물고 뜯다 보니 양자의 입에는 모두 대방의 개털만 가득 묻었을 뿐이다. 붓으로 하는 싸움은 흔히 승부가 없는 지구전이다.   칼부림을 하는 무인들의 사회에서도 질투는 있으나 승부가 명백하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가 없다. 무인들은 일단 무예를 겨루어 지면 깨끗하게 승복한다.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승복하지 않다가는 경하면 팔다리가 부러지고 중하면 목숨까지 잃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호전』제2회에서 간신고구의 박해를 피해 도주 길에 오른 80만 금군 교두인 왕진을 알아 보지 못하고 달려들었던 구문룡 사진은 곤봉겨룸에서 가슴팍을 찔려 벌렁 나자빠지고 나서는 대뜸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왕교두를 스승으로 모시지 않던가.       권력방망이를 휘두르는 벼슬아치들의 사회에도 질투는 있으나 상하의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철칙이 있으므로 문인들 사회처럼 질투가 끈질길 수 없다. 관계(官界)에서는 한 급만 높아도 남을 눌러 죽일듯한 위세를 갖고 있으니 적어도 언감생심 상전하고는 질투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질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이다. 평등한 만큼 동배들뿐만 아니라 선후배 사이에도 질투는 여전하다.   그 원인은 문인들 사이에서의 붓으로 하는 싸움에서는 칼부림과는 달라 명확한 승부를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에는 완전히 객관적이 통일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이 없고, 치밀하게 량이나 질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렵고, 따라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표준이 많이 작용하기에 문인들은 서로 제가 잘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문인들은 언제나 자아감각이 좋아서 제 잘난 멋에 살면서 자기의 작품은 한 송이의 꽃으로 보고 남의 작품은 쓰레기로 보는 폐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주관에 묻혀서 사는 문인들은 다들 정도부동하게 과대망상증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정신질환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이다.   그래서 문단은 언제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언제나 질투와 질시의 눈빛이 번개처럼 오고 가고,  언제나 뒤에서 남을 헐뜯는 험담들이 무성하여 한마디로 시끌벅적하다. 여기에 파벌싸움까지 곁들어지면 더더욱 저자거리처럼 소음으로 하여 단 한시각도 귀청이 평온을 찾을 새가 없다.   요즘은 연변작가협회의 개선(改選) 시즌이라 더욱 기관이다.                                     2007년 3월 15일 연길에서
51    [사회] 패기와 사나이 (김관웅51) 댓글:  조회:3694  추천:77  2007-03-11
패기와 사나이 김 관 웅  물론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의식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자신의 신체를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과 구별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욕구와 더불어 다른 인간의 선망에 대한 욕구, 즉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즉 어떤 가치나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가치욕구는 우선 순수한 위신을 위한 투쟁에서 기꺼이 목숨을 거는 자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로씨야의 시인 뿌쉬낀이 자기의 안해를 유혹하는 단테스에게 아무런 승산이 없었으면서도 결투를 걸었고 그로 해서 36살에 자기의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헤겔에 따르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욕망으로 인해 두 명의 전사(戰士)는 서로 상대에게 자신의 인간다움을 인정받을 욕심으로 목숨을 걸고 치명적인 결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편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로 인해 두 손을 들었을 때, 두 전사 사이에는 주군(主君)과 노예(奴隸)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추구와 수호는 인간이 기타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서 처음으로 묘사되었는데, 여기서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에는 욕망(慾望) ‧ 이성(理性)  그리고 그가 말하는 튜모스(Thymos), 즉 “패기(覇氣)” 의 세가지부분이 있다고 갈파했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처음 두 가지부분, 즉 욕망과 이성의 조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욕망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구하도록 인간을 충동하며, 인간은 이성 또는 계산에 의해 그것을 손에 넣는 최선의 방법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나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기 자신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그와 같은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성은 오늘날 일상 쓰는 말로 하자면 “자존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존심을 느끼는 속성은 인간 영혼의 “패기(覇氣)” 라고 부르는 부분에서 발생한다.   오늘날 인욕(人慾)이 횡류(橫流)하는 이 물질주의의 시대에  인간의 욕망은 넘쳐나서 주체할 바를 모르고 또 각자는  그런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술수는 다 부리고 갖은 계산을 다 하면서 살아가야 하므로 이성도 대단히 발달하여 가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가장 발달되지 못했고 오히려 나날이 증발해가는 것이 인간 영혼 중의 “패기(覇氣)” 라는 이 부분이다. 김학철 옹의 말에 대입을 한다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패기(覇氣)”이다.   특히 우리 남자들에게서 이런 패기가 점점 증발해버리고 있는 추세이다.  패기가 없는 남자는 골격이 없는 무골충이다. 남자로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설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가장 일상적인 가정생활이나 부부생활에서 마누라한테 사람 이하의 수모를 당하고도 그냥 머리를 숙이고 살아가겠다는 남자는 적어도 패기가 있는 남자라고 볼 수 없다.   오쟁이를 지고서도 “어쩌겠는가? 아이들을 보고서라도 다시 살아야지”하면서 정부와 놀아나서 5, 6년씩 바깥에서 나돌던 여자를 용서하고 복혼을 해서 살고 있는 남자는 패기를 상실한 남자이다. 혹은 “어쩌겠는가? 마누라가  돈을 그냥 자식한테 송금하는데…” 하면서 다른 남자와 외국에서 임시 부부로 살아가는 것을 번히 알면서도 알량한 돈 타산 때문에 모르는 체 하거나 눈을 질끈 감아주는 남자는 패기를 숫제 포기한 남자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마누라가 위장결혼하는데 동의를 하는 남자는 패기만이 아니라 쓸개까지 빠져버린 남자다. 진정한 사내대장부들에게 있어서 패기는 바로 생명 그 자체임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바보 같고 등신 같은 패기를 상실했거나 포기한 남자들이 기수부지이다.      패기를 상실했거나 포기한 남자는 노예 그 자체이다.                                                                 2007년 3월 8일 연길에서
50    신 “칠거지악(七去之惡)” (김관웅50) 댓글:  조회:5732  추천:142  2007-03-09
신 “칠거지악(七去之惡)”  김 관 웅   여자들의 명절인 3.8절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여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외람되기는 하지만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컴퓨터에 마주 앉았다.   남권주의 시대의 이혼의 조건이나 이유를 동양에서는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규정했었고 이혼하지 못하는 조건과 이유로 “삼불출(三不出)”로 규정했다.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불출(三不出)”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무릇 아들을 못 낳거나, 음탕하거나,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거나, 말이 다사하거나, 손버릇이 나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으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삼불출(三不出)”은  “어디 갈 데가 없거나, 시부모님의 삼년상을 다 마쳤거나, 빈천한 남자가 부귀해진 후에는 마누라를 내치지 못한다” 고 규정했다.   물론 이것은 남편의 일방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안해로 된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은 안해가 어쩌다가 밥을 설게 지었다고 내쫓았다고 한다. 지금 말로 하면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서 나는 진짜로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남권주의 시대가 이미 사양기(斜陽期)를 맞았고 그 대신  여권주의시대가 도래하여  문자 그대로 여성파워가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소박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남자 소박데기들이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 우리 남편들의 가련한 처지의 현조소다.    작년 10월 3일, 한국 여성축제에서는 이른바 "신 칠거지악(七去之惡)"이 공개됐다고 한다. 그 일곱 조목을 그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명절 때 시부모는 30만원, 친정부모는 10만원 줄 때,  2. 딸을 낳았는데 남편이 아들타령을 할 때,  3. 섹시한 안해의 눈빛을 외면할 때,  4. 안해가 직장동료와 회식하는 걸 알면서도 자꾸 전화할 때,  5. 밥상에 마주 앉아 반찬 투정을 할 때,  6. 의처증, 안해구타, 알콜중독 걸렸을 때,  7. 안해 비상금 집어가지고 시치미 뗄 때.     이상의 7항조목중 어느 조목에 든지 해당될 경우에 안해는 남편을 가차없이 "엄벌" 하거나 집에서 내쫓을 수있다는 것이다.     "신 칠거지악"은 우리 연변에도 있다. 물론 무슨 여성축제에서 공식적으로 피로된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연변에서 불문률로 된지가 오래다.   연변의  "신 칠거지악"은 한국과는 대체적으로 비슷하나 좀 다르기도 하니 아래에 소개한다.    1. 돈을 못 벌어들이는 남편(혹은 다른 남편들처럼 잘 못 벌어들이는 남편),  2. 술을 잘 먹는 남편,  3. 손이 가벼워서 안해를 구타하는 남편,  4. 장인 ‧ 장모한테 등한한 남편,   5. 안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 살피는 남편,  6. 말투가 거칠고 매너가 없는 남편,  7. 가무를 잘 돕지 않는 남편.   무릇 이 7항 조목의 어느 조목에 해당돼도 안해는 남편을 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혼부가 위장결혼을 하는데 남편이 거치장스러울 때도 이혼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안해들이 남편들을 내치는 이유는 많고도 많다고 한다.   우리 연변의 남편들이 소박데기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이 조항들에 저촉되지 않도록 말조심, 손조심, 눈조심, 술조심하면서 그냥 숨만 쉬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조심해도 남편들의 신세는 별로 호전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게 요즘 실태다.   안해들의 맹렬한 공세에 의해 남편들이 수세에 밀린  오늘 이 세상에서  이래저래 소박데기는 대부분 안해가 아닌 남편들이다. 수천 년 동안 남편들에게 억눌림을 당했던 그 앙갚음을 요즘에 와서 한꺼번에 해치워 버리자는 잡도리인지  이 암범들의 기세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사회적 지위나 지식이나 재부나 모든 면에서 남편보다 더 나은 점이 꼬물만치도 없는 주부들마저도 오늘날 날로 신장해가는 여성파워에 편승해서 신수 멀쩡한 남편들을 법원에 끌고 다니고 망신을 주고 야단법석 소란을 피워대는 것이다. 다달이 월급을 봉투채로 마누라에게 바치고, 퇴근해서는 집으로 직행하는 남편이라도 어쩌다가 자기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게만 되면 법원놀음까지 불사한다. 이런 암범들의 사전에서는 “양해”라거나 “양보”라는 낱말은 찾아볼 수 없다. 남편을 궁지에 빠지게 하고, 온갖 망신을 다 시키고야 직성이 풀려 한다.    이런 싸가지 없는 암범 같은 독부(毒婦)들이 속출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편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책략이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첫째 부류의 남편들은 이런 싸가지 없는 여자들에게 고분고분 길들려서 아침마다 장바구니를 들고 장거리에서 기웃거리거나 허리에 행주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지지고 볶는 가정주부(家庭主婦)가 아닌 가정주남(家庭主男)으로 약삭빠르게 변신을 한다. 심지어는 마누라는 놀음판에서 밤을 패우는데도 남편은 집에서 앞치마 두르고 밥하고 빨래하면서 "내조"를 정성껏 한다.  또 적잖은 남편들은 숫제 안해를 돈 버는 경제 제1선에 내세우고 자기는 암탉처럼 집을 지키면서 자식들을 챙기고 있다. 외국서 목돈을 손에 쥐고 들어어 왔겠다 또 바깥 세상에서 이런저런 남자 맛도 많이 봤겠다 ........ 안해들은 집에 돌아와서 시골오지에서 사는 남편을 보니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데라고는  없단다. 남편들은 똥진 오소리처럼 몇년 동안 집을 지키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별별 수고를  다했지만 여전히 안해들 앞에서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기가 죽어서 숨소리마저도 조심스럽게 지낸다. 마누라가 이혼을 하겠다는 말을 밥먹듯이 해도 눈 한번 흘기지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삭일 수밖에는 없는 가련한 남편들이 적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가정주남(家庭主男)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서 마누라가 공개적으로 이혼으로 협박을 해도 불깐 황소같이 큰 눈만 슴벅거리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주변에 마누라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잡아 잡수" 하고 무비의 인내성을 발휘하는 남편들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 부류의 남편들을 이 급변한 시대의 발걸음을 맞추지 못해 많은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다. 마누라와 우연하게 싸움을 벌였다가는 코피가 터져 녹다운(knock down)돼서 남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구기고 안해의 판정승으로 끝나기가 십중팔구다. 코피가 터지고도 그런 암범 같은 마누라의 "슬하(膝下)"에 다시 기신기신 기어들어가야만 하는 비극은 아마도 인생 비극중의 최대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국문예부흥 시대의 토마스 모어가 영국의 원시축적시대의  “울치기운동”을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유했듯이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양처럼 유순했던 우리의 적지 않은 여성들이 표독스러운 암범으로 변해가고 , 반대로 우리의 적지 않은 남편들은 기세당당한 호랑이로부터 점점 순하디순한 양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호랑이가 양한테 잡혀 먹히는 비극이 심심찮게 우리 눈에 띠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호 애재라, 암범으로 변해가는 마누라들에게 날로 억눌리고 수모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불쌍한 우리 남편들이여!!!!     오호 애재라,  신 “칠거지악(七去之惡)”의 등쌀에 하루하루를 전전긍긍 살아가는 가련한 우리 남편들이여!!!!!     오호 애재라, 여자들이 여자들의 본성을 잃어가게 하는 이 수상한 세상이여!!!!!   오호 애재라, 음(陰)이 날로 성해가고 양(陽)이 날로 쇠퇴해가는 이 이상한 세태여!!!!!   2007년 3월 5일 연길에서
49    [단상] 아기의 웃는 얼굴 (김관웅49) 댓글:  조회:3844  추천:85  2007-03-04
                     아기의 웃는 얼굴                                                                       김관웅     방정환의 그 유명한 수필 『어린이 예찬』에서는 아기들의 웃는 얼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어린이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는,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 성낸 얼굴, 슬픈 얼굴을 못 짓게 된다. 아무리 성질 곱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이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험상궂은 얼굴을 못 가질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앉을 때 - 적어도 그 잠깐 동안은, 모르는 중에 마음의 세례를 받고, 평상시에 가져 보지 못하는 미소를 띤 부드러운 좋은 얼굴을 갖게 된다. 잠깐 동안일망정 그 동안은 순화된다. 깨끗해진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동물세계의 아기들인 강아지도, 망아지도, 송아지도 웃을줄 몰른다. 애오라지 인간세계의 아기들만이 웃을 줄 안다. 누가 배워주지 않아도 천성적으로 웃을 줄을 안다. 조물주가 우리 인간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아기의 웃는 얼굴은 바로 천사의 얼굴이다.   천사는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붕아래의 조촐한 방안의 요람에서 달게 자면서 방그레 웃는 아기의 얼굴에 있다.   아기-천사와의 20일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 동안에 내 영혼이 순화(純化)되여 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이 지저분한 사바세계이라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아기처럼 밝게, 맑게 웃으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2007년 3월 1일 연길에서
48    가치관의 선택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명상 댓글:  조회:3586  추천:98  2007-03-02
  사람들은 이 세상의 똑 같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모두 나름대로의 부동한 가치관에 좇아 부동한 가치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를테면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부동한 이해와 판단은 부동한 가치관의 차이에서 인기되는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인격을 잃으면」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부(富)를 잃으면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무엇인가 잃은 것이다.인격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 빌리 그레이엄 「인격을 잃으면」전문   그러나 프랑스 고전주의 희극의 대표적 희곡가인  몰리에르의 희극 「수전노」의 주인공 아르빠공이 시를 지으라고 한다면 상황은 180도로 달라 질것이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지을 것이다. 인격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건강을 잃으면 무엇인가 잃은 것이다.부(富)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인격만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가치에 대해 부동한 판단을 내리게 되기 마련이다.   항가리아의 투사이며 시인이었던 뻬떼피는 「자유」라는 유명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생명이 중한들 사랑보다 귀중하랴내 자유를 위해서는생명도 사랑도 바치리      - 뻬떼피의 「자유」전문 그러나 영국의 문예부흥시대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애정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들인 애정지상주의자 로미오나 줄리엣더러 시를 지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지을 것이다.  생명이 중한들 자유보다 귀중하랴 내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도 자유도 바치리  가치관의 차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똑같은 대상을 놓고 부동하게 생각을 하게하고 가치판단을 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매개 인간들의 각이한 본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상한 인격자가 되던지, 땡전 한 잎에도 울고 웃는 너절한 수전노가 되던지, 정의를 위해 목숨마저 바치는 용감한 투사가 되던지, 사랑을 위해서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애정지상주의자가 되던지 모두 자기 나름의 가치관의 선택에 달린 것이리라.                         2007년 3월 2일 연길에서
47    '이정관물(以情觀物)' -정을 가지고 사물을 보다 댓글:  조회:3364  추천:90  2007-03-02
 며칠전, 유협의 『문심조룡』을 장춘의 큰 딸집에서 번역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큰 딸내미는 석달 동안의 산후 휴가를 마치고 자기의 직장인 길림대학 병원에 나갔다가 저녁 무렵에 퇴근해 집에 돌아왔다. 한창 외손녀를 어르고 있는 나를 보고 큰 딸애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앨범을 가지고 병원에 나갔더랬지요. 그런데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과 젊은 의사동료들이 우리 지연이 사진앨범을 보고는 고작 한다는 게  ‘애가 건실하다’, ‘영리하게는 생겼다’ 이런 평가뿐이지 뭐예요. ‘곱다’, ‘예쁘게 생겼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없고요. 정망 우리 지연이가 못생겨서 그럴까요?”   큰딸은 기대 밖이라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나한테 회보했다.   이때는 내가 마침 유협의 시인의 감정과 경물(景物)의 관계에 대한 논술을 번역하고 있는 중이라 이렇게 허두를 떼었다.    “아빠가 지금 번역하는 이 부분에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말이 있구나”   “우리 지연이 말인데 무슨 왕청 같이 책속의 얘기예요?”   웬 동문서답(東問西答)이냐고 큰딸애가 시쁜 소리를 했다.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개념은 말이야,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을 지니고 객관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본다는 뜻이야.”   “그런데요?”   “너나 외할미, 외할배인 너 엄마나 나나 이모인 네동생 정은이나 모두 우리 지연이한테는 뜨거운 감정을 갖고 대하지만 네네 직장 동료들이야 그렇지 않잖어? 사람이란 감정에 좌우되면 객관성을 잃기 쉽다 그 말이지. 중국성구에 ‘애인의 눈에서 서시(西施)가 나온다’는 말이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의 털은 함함하다 한다’는 우리속담이 바로 이정관물(以情觀物)이라는 개념을 형상적으로 표현한 말이지. 미는 객관성도 있지만 주관성을 띠고 있는 거야……”  이에 큰 딸이 더 크게 실망해서 입을 다시 열었다.  “아빠 말을 듣고 보니 역시 우리병원동료들의 태도와 비슷하구만요. 우리지연이가 이쁘게 생기지는 않았으나 자기 외손녀이니까 이쁘다 그 말이지요,  객관적으로는 이쁘게 생기지 않았지만 감정이 있으니 이쁘다 그 말이지요 안 그래요?”   “아니지, 우리 지연이는 객관적으로 이쁘게 생긴 점이 많지. 얼마나 똘똘하게 생겼다구, 우리 지연이 그렇지?!”   나는 계속 지연이를 어르며  큰 딸의 말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날 외손녀 지여이를 두고 나와 큰딸사이의 논쟁은 결론도 없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사실 그렇다. 만일 아기가 육손이나 언청이 같은 선천성 불구아라면 아무리 제 새끼라도 이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미에는 객관적 표준이 꼭 있는 것이다.    미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되어 산생 것이라는 이택후의 말은 맞는 말이다.                              2007년 3월 2일 연길에서
46    우리 문단의 흑마 ― 김관웅교수 (조성일) 댓글:  조회:4668  추천:35  2007-02-28
김관웅교수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거친 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면서 질주하다가는 문뜩 멈춰 서서 갑자기 무엇에 노했는지 두 앞발을 건뜩 쳐들고 울부짖는 한필의 야생 흑마(黑馬)를 연상하군 한다. 흑마(黑馬)를 영어에서는 다크 호스(dark horse)라고 한다. 영어에서 다크 호스는 단순히 털빛이 검은 검정말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크 호스는 선거나 경기 등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상대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영어의 뜻 빛깔이 한어에 영향을 주어 흑마(黑馬)라는 이 낱말은 영어와 비슷한 뜻 빛깔을 가지게 되였다. 1970년대 말, 김관웅교수는 대학교 학부생 1학년 때 단편소설 《청명절》로 문단에 데뷔하였다. 처녀작인 이 작품이 개혁개방이후 연변의 첫 문학상에서 수상하게 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5년 단편소설집 《소설가의 아내》로 문단에 호적을 붙이기는 했지만 김관웅교수가 《강력한 우승후보나 선수》 또는 《유력한 경쟁자》의 이미지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지는 못했다. 김관웅교수가 진정으로 우리 문단의 한필의 흑마로 내 시야에 유표하게 안겨들어 오게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후였다.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학사, 석사, 박사를 거쳐 10년 이상이나 대학교에서 두문불출하고 공부에만 정진하고 있던 김관웅교수가 소설창작에서 문학평론에로 전향하여 유망한 평론가로 갑자기 문단에 부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쓰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한번 쓰기만 하면 문단을 놀라게 하는 그러한 평론들이 김관웅교수의 손에서 속사포마냥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래 그가 내놓은 저서들과 논문 그리고 평론문장들의 골자만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론저서들로는 《조선고대소설서사방식연구》, 《조선고대소설사고》, 《조선문화와 문학의 이해》, 《조선고전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 《중조고대소설비교연구》, 《중조시가비교연구》, 《조선문학의 이해》, 《외국문학사》, 《서양문학사》, 《서방모더니즘 문학사론》, 《수필창작논》 등 10여권이 있고, 60여 편의 학술논문과 70여 편의 중국조선족문학과 관련된 비평문장을 써냈다. 이밖에도 그는 문학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아 칼럼, 수필에서도 자기의 개성과 장끼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달성한 학문적인 수준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였는데, 적어도 조선문학이나 중한비교문학 등 분야에서는 중국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조선반도의 남과 북을 비롯한 세계 각 국의 조선―한국학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였다. 이는 중국조선족평단에서는 있어본 적이 없는 일로서 우리 노일대의 문학이론가, 평론가들이 해내지 못한 장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학문적 수련과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김관웅교수는 대학강단에서 서양문학, 서방모더니즘문학, 조선문학, 20세기서방문학이론, 문학이론, 비교문학, 문화학, 세계문화사, 수필창작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가르치고 학사, 석사,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함과 동시에 이런 와중에서도 학문연구와 문학창작의 쌍 풍수를 거두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부터는 《우리동네 문학동네》라는 개인홈페지를 운영하면서 품위있는 연설고, 강의고,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치는 글들과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칼럼, 비평문장들을 쏟아내어 우리 문단의 이목을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개인홈페지가 우리 문단에서의 문학적 영향은 어중간한 문학지를 능가한다. 그 가운데서 특히 중국조선족문단 평론계에서 김관웅교수의 눈부신 활약상이 가장 주목된다. 그의 비평문장의 가장 큰 특점은 우리 민족의 현실문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민족적사실주의론》에서 잘 보여진다. 이밖에도 그의 비평문학은 새로운 문학비평방법론에 립각한 엄밀한 론리성과 심각하고 날카로운 사회, 문화 비판성에서 보여진다. 이를테면 《식민주의사관과 김문학현상》, 《김문학의 <반문화지향의 중국인>을 평함》, 《민족적 사실주의로 나아가는 우리 소설문학》, 《여성과 시》, 《문화혁명시기 중국여성의 애정비극과 정치》 등은 그의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비평문장들이다. 이에 대해 북경대학 박충록교수는 90년대의 중국조선족평론문학을 논하면서 김관웅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평론가 김관웅은 학자형의 평론가로 그의 장끼는 비교문학평론이다. 그는 근년에 새별처럼 평단에 등장하여 맹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문학의 여러 장르에 다 장끼가 있는데, 평론에서도 다방면시각에서 문학을 평론하는 인기평론가로 부상하였다. 그의 평론이 돋보이는 점은 그가 동서방의 문학에 정통하고 맑스주의문예학, 유럽의 예술수법을 잘 알고 있으며 조선문학에도 익숙하다는 점이다. 그 이론전개가 넌리적이고 설복력이 강하다… 김관웅은 동서방문학에 정통한 학자형 평론가로 우리 문단의 작가들의 창작을 잘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망한 평론가이다. 평단은 그에게 기대하는바가 크다.》(박충록 《중국조선민족문학비평연구》. 민족출판사. 2003년. 107∼109쪽을 참조.) 박충록교수의 평가처럼 김관웅교수는 동서고금의 문학사와 문학리론에 대해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역사, 문화 등 문학 밖의 기타 문화 분야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그릇이 큰 학문적 스케일과 합리한 지식구조를 가진 김관웅교수는 50년대에 대학공부를 한 우리 같은 기성세대문인들에 비하면 분명히 우세를 갖고 있다. 김관웅교수는 한필의 흑마마냥 선배평론가들의 유력한 경쟁자로 나타났다. 《청출어람이승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이고, 후에 난 뿔이 우뚝하다고 나는 우리 평단에 김관웅교수 같은 유망한 신진평론가가 나타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는 김관웅교수에게는 탄탄한 학문적인 준비만이 아니라 천생적인 평론가의 기질도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수한 평론가는 작품의 해명과 취미의 교정가이면서 불의에 도전하는 영원한 《도전자》이고 《시비군》이여야 한다. 한사람이 평론가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감상능력의 수준여하에 달릴 뿐만아니라 그 사람이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고 변별력이 강한가 약한가에도 달린다. 극히 이지적인 소크라테스로부터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니체에 이르기까지 무릇 대평론가들은 모두 불의에 도전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쟁투적 비평을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평론가들은 세상만사에 대하여 시비 가르기를 좋아하는 《시비군》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스페인 투우장의 뜨개소 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기질을 가져야 한다. 김관웅교수는 천성적으로 이런 뜨개소 같이 용감하게 뜨고 박는 저돌적인 성향과 기질을 갖고있다. 김관웅교수는 급하고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를 갖고 있다. 그는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않는다.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한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은 워낙 시비를 마음속에 두고 겉으로 관용을 내비쳐야 하는 법이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관청에서 벼슬을 하는 것보다는 글방에서 선비노릇을 하는 게 적성에 더 맞는 것 같다. 김관웅교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선생이든, 선배이든, 친구이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정계의 요인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김관웅교수의 사전에는 숫제 《거짓》이나 《아첨》 같은 단어는 없는상 싶다. 그는 학문적 견해나 정치적 견해를 그때 그때의 세류에 따라 수정하거나 바꾸는, 바람 따라 돛 다는 속물근성이 가득한 평론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대 바른 인격의 소유자이다. 김관웅교수는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다보니 최근 몇년동안만 해도 다섯번이나 필화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그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십중팔구는 그가 옳았다. 김문학씨와 김관웅교수사이의 오랜 논쟁과정에서 그는 처음에는 문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고 많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그가 완전히 옳은 것으로 판정이 났다. 이처럼 김관웅교수는 쟁투로 점철된 문단생활을 하다 보니 많은 동지를 규합하게 된 동시에 또 많은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였다. 한마디로 그는 애증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은 분명히 밝히려 고집한다. 그는 사랑과 증오,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거나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다고 똑 부러지게 말한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양극적이다. 그래서 김관웅교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체하는 놈》이요, 《뜨개소》요, 《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사리를 볼 때 동양사람들 이를테면 우리 조선족은 그 사리를 객관적, 이성적인 논리구조에 따라 보는 서구인에 반하여 주관적, 감성적으로 보려는 극단적인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 예컨대 로씨야의 위대한 문호 똘스또이는 생전에 악처에 늘 시달렸다. 똘스또이 자신은 물론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은페한다는 법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였다 한다. 그런 사실이 주관적 사고를 하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큰 착오로 여겨져 말썽이 자자하기 마련이지만 객관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들은 똘스또이의 이미지에 루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조선족은 사리를 봄에 있어서 훌륭하면 모두가 훌륭해야 하고 그렇지 말아야 한다는 극단 논리에 사로잡히는 것이 상례이다. 우리는 이런 극단적인 구조에서 헤어 나와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전면적으로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과(過)로 공(功)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요즘 우리 평단의 어떤 평론가들은 온통 중간에서 시비를 캐는 것을 말리고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찬송가만 부르고 만세삼창만 외치고 있다. 심지어 자기를 욕하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욕해도 비평은커녕 맞장구를 치면서 잘한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또 어떤 평론가들은 오늘날의 상업주의에 물젖어 돈이나 생기고 이득이나 생기면 달갑게 거짓말을 하고 칭찬을 한다. 이런 유순한 무 골격 평론가, 세류를 따르는 바람잡이평론가, 상황에 따라 향배(向背)를 달리하는 눈치보기평론가들이 번성하는 이 문단에서 문학은 일정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고 있다. 문학창작에 대한 감시와 감독의 기능을 잃고 있다. 이런 지조 없고 주체성이 없는 문인들이 있는 문단에서 좌충우돌하며 불의와 싸우는 흑마 같은 김관웅교수가 있다는 것은 우리 문단의 자랑이고 희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관웅교수의 인격적 매력은 바로 그 저돌성과 쟁투성에 있고,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그 의로움에 있다고 본다. 비록 이러한 저돌성과 쟁투성이 앞으로도 그에게 많은 불이익을 가져다줄 소지는 많지만 그렇다고 그 모난 것을 다 죽이고 점잖은 젠틀맨이 되고자 한다면 그때는 김관웅교수가 자기의 본질을 잃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김관웅교수가 김관웅교수로 되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는 하지만 모난 돌이야말로 좋은 돌이다. 우리 문단의 흑마(黑马)― 김관웅교수가 앞으로도 그 날카로운 모를 죽이지 말고, 그 강인한 초지(初志)를 굽히지 말고 계속 용왕매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시에 문단쟁명에서 경우에 따라 자제도 하고 수단과 방법에도 유의하고 표현의 강약완급에도 신경을 쓰길 바란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야 비판적 사실주의문학을 올바른 궤도에로 올려 세우고 러시아문학의발전방향을 리드한 벨린스키처럼 김관웅교수가 중국조선족문학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대비평가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연변문학>> 2006년 7월호에서 전재
45    나와 문학의 인연 댓글:  조회:2375  추천:63  2007-02-28
한 시인이나 작가와 문학사이에 맺어지는 인연은 각양각색이다. 첫째는 타고난 문학천부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라고 할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 시인 리규보가 일곱살때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네》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니 분명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고 로씨야의 뿌쉬낀은 아홉살때 극본을 만들어 연출까지 담당했다고 하니 역시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다. 1958년, 나는 연길시신흥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1964년 연길시3중에 입학하여 바야흐로 3학년에 올라가려고 하던 1966년 6월에 문자 그대로 《력사상에서 전례를 찾아 볼수 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소위 《혁명반란》의 탁류속에 뛰여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10년동란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자연과학이나 공업기술 분야에 몸을 담고있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을것이다. 그것은 소학, 중학 시절에 나는 생물이나 산수, 수학, 물리에는 취미가 있었고 성적도 괜찮았지만 어문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장차 문학가로 되여보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 다윈처럼 세계일주를 하면서 온갖 괴이한 짐승들을 다 구경할수 있는 동물학자가 아니면 우리 집 식구들이 살고있는 단층짜리 흙집을 고층건물로 바꾸어 놓을수 있는 건축기사로 되려는 꿈을 갖고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동란의 시절에는 백일장이요, 글짓기대회요 하는 이벤트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판국이라 나는 나한테 문학천부가 숨어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해볼 단 한번의 기회도 갖지 못했었다. 둘째는 부모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인 조식(曺植)이나 조비(曺丕)는 탁월한 시재를 가진 조조(曺操)의 아들이고, 유명한 애정소설 《춘희(椿姬)》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뒤마는 《몽테크리스토백작》, 《삼총사》 같은 대작을 내놓은 뒤마의 아들이여서 문학사가들은 이 두 동명의 작가를 구분하기 위해 아들은 작은 뒤마, 아버지는 큰 뒤마라고 부른다. 근적근묵(近赤近墨)이라고 묵향(墨香)이 풍기는 문인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란 사람들이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소치가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이런 행운이 차례지지 않았다. 나는 1951년 7월 20일 연길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은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모친은 집이 가난하여 소학교 5학년밖에 다니지 못한 분들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문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분들이였으니 나와 문학의 인연은 부모로 하여 맺어질리가 없었다. 물론 어린시절에 평양에서 미국 개신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기독교 교회에 다닌 경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하든가 콜롬브스의 신대륙발견이라든가 아브라함 링컨의 성장담같은것을 얻어듣기도 했지만 이런것을 문학과의 인연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억지감이 난다. 셋째는 형제자매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명나라시기의 중요한 문학류파인 공안파(公安派)는 맞형 원종도(袁宗道, 1560-1600),둘째 원굉도(袁宏道, 1568-1610), 셋째 원중도(袁中道, 1570-1623)가 주축으로 되였는데 두 동생보다 열살 더 먹은 맞형 원종도의 문학적영향이 지대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그리고 조선의 허균네 형제자매들이나 독일의 그림형제나 영국의 브론데자매나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 집의 맏이인 봉웅형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1961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비록 나는 문학에는 뜻을 두지 않았지만 맏형이 사오거나 빌려온 책을 통해서《안데르센동화》, 《고요한 돈강》, 《고리오 령감》, 《바이론시선집》, 리기영의 《고향》, 《수호전》 같은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이 두루 읽어본 경력은 있었고, 맞형과 친구들의 한담설화속에서 귀동냥으로나마 세계명작가나 세계명작의 이름들을 대충 얻어 듣기는 했다. 이것을 나와 문학의 인연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어설픈 인연이 아닐수 없다. 넷째는 주변환경이라는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이딸리아의 피렌체는 현재 인구가 약 40만명밖에 안되는 소도시이니 지금으로부터 6,7백년 전의 문예부흥시기에는 아마도 몇만명의 인구밖에 안되는 작은 동네였을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환지지(彈丸之地)에서 단떼를 필두로 하여 페드라르카, 보카치오, 다 빈치, 미켈란젤로같은 전반 구라파의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세계적인 문학예술의 거인들이 쭉 이어지면서 나타났다는것은 주변환경의 영향이 문학예술인재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 연길시를 언감생심 피렌체에 비길수 없지만 내가 태여나서 자란 연길시 중앙가(후에는 광명가라고 고쳤음) 9거는 그 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50년대로부터 70년대까지는 연변 문학예술계의 중진들이 운집한 특수한 동네였다. 말하자면 내가 유년, 소년, 청년시절을 살아온 동네는 명실공히 《별들의 동네》였다. 연변시단의 원로들인 리욱선생과 채택룡선생을 필두로 하여 시인 김철, 임효원, 리행복선생 그리고 민간문학가 정길운, 연변가무단 단장 김태휘씨 등 중국조선족문단의 거두들이 오래동안 우리 집과 이웃으로 몇십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왔다. 이밖에도 김창걸, 현남극 같은 문학교수들이나 한수동, 김길련선생과 같은 문학편집이나 기자들도 우리 집과 거의 한동네 속하는 가까운 곳에 살고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한동네 이웃집 아저씨들처럼 시인이나 작가로 되여보겠다는 야망을 품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석으로 만날수 있는 이런 동네 아저씨들이 지은 노래를 부르고 옛말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친근감을 느꼈던것만은 분명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인격 그리고 그 잘잘못까지 빤히 들여 다 보면서 살다보니 내 눈에는 문학인들의 세계가 별로 신비해보이지 않았다. 별난 사람들이 아니야, 이런 배짱마저도 은연중에 생겨났던것이다. 더우기 반우파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면서 우리 동네의 문학인들이 갖가지 원인으로 하나하나 타도대상이 되여 가는것을 보고는 문학이란 이 직업이 아주 위험한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니 여전히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해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주변환경은 은연중에 나와 문학사이에 인연이 맺어지게 한것만은 분명하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작가론적연구 또는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연구를 어려서부터 직관을 통해 할수 있게 되였다고도 할수 있다. 다섯째는 자신이 종사하게 된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다. 영국의 디켄즈나 미국의 마크 투웬이나 헤밍웨이는 기자로 뛰다가 점차 문학에 입문하여 대성하게 되였고 우리 주변에도 많은 분들이 언론이나 편집, 교원같은 직업에 종사하다가 문학에 입문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나와 문학의 인연도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진것이지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것은 아니다. 1973년, 군대에서 말이나 노새들을 먹이고 부리는 마부로 허드레일을 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연변군분구에서 꾸리고있는 《동북민병》 잡지사로 전근하게 되였다. 명색이 잡지사였지 온통 번역만 하는 업무였고 저절로 기사 한편 쓸수 없게 되여있는 순 번역잡지였다. 나는 이 잡지사에서 약 3년동안 번역과 편집업무를 배우면서 이른바 언론계에 몸을 담게 되였으나 문학과 참말로 인연을 맺기에는 역시 10만 8천리나 거리가 있었다. 1976년, 근대에서 제대하여 연변사전편찬판공실(현재 연변언어연구소의 전신임)에 배치 받아 일하게 되였으나 초중 2학년의 학력밖에 없는 나에게 있어서 사전편찬과 언어연구는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게다가 매일마다 카드에 낱말의 주석이나 적어넣는 서캐를 캐는 따분한 일이 내 적성에도 맞지 않지도 않았다. 이러구러 10년 동란이 끝나고 새 시기를 맞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하지만 초중2학년의 학력이 고작인 나에게 있어서 리공과를 선택한다는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문과에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였다. 거의 대부분 시간을 들여 수학을 복습했지만 수학에서 단 5점을 맞은 까닭에 겨우겨우 연변대학 한어학과에 입학한 때가 바로 1978년 9월경이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따라가듯이 학교에서 배정한 과목에 따라 말없이 수강만 했을따름이였다. 나와 문학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하게 맺어졌다. 1978년에 함께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조문학부에서 공부하게 된 동생 호웅이가 문선습작과목의 숙제로 바친것이 바로 《산속에 핀 진달래》라는 단편소설이였다. 호웅이는 나에게 비하면 문학천부가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글재주가 나보다 월등하다는 점은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제씨들도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동생 호웅이에 비해 더 갖춘 무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남다른 승벽심이라고 할수 있다. 동생이 쓰는 소설을 내라고 못 쓰겠는가, 이런 승벽심의 소산이 바로 나의 처녀작 《청명날》이다. 비록 모방기와 어색함이 데룽데룽 달린 치졸한 작품이였지만 호웅이의 《산속에 핀 진달래》와 두달 사이두고 《연변문학》에 실렸을뿐만아니라 또 호웅이와 함께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되는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때 40원 미만의 죄꼬리만한 월급으로 살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300원이라는 상금은 당시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수자나 다름없는것이였다. 미상불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명리쌍수(命利雙收)가 아닐수 없었다. 아무튼 나와 호웅이는 첫포를 쏘자마자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였다. 문학상(文學償)의 기능을 나는 나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호웅이가 그런 숙제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처녀작이 생겨날수 없었을것이고 또 그 처녀작이 없었더라면 첫번째의 문학상수상이 있을수 없을것이고 또 그 수상으로 인한 거대한 고무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문학에 자신심을 갖지 못했을것이며 문학에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자신을 리기영같은 거물에게 견주는것은 좀 외람되기는 하지만 리기영은 《오빠의 비밀편지가》가 1922년에 공모에서 수상하지 못했더라면 자기는 아마도 문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에 종사했을수도 있었을것이라고 술회한적이 있다. 나의 경우도 리기영선생과 대단히 흡사하다. 만일 1979년의 그 문학상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문학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는 본격적인 소설창작에 들어 섰으며 학부생 4년동안에 《소설가의 안해》라는 소설집을 묶어 낼수 있었다. 학부생 생활을 마치면서 나는 문학을 나의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하였고 문학석사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나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마치였고 문학준비과정에 옹근 10년의 시간을 들였다. 중국에는 《낫을 가는 일은 나무를 하는 품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10년 공부를 마치니 나는 이미 사십이 넘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창작은 거의 포기하게 되였고 문학평론과 시간이 적게 드는 수필창작에 손을 대게 되였다. 대학강단에 선 교수라는 이 직업은 우리 평단과 소설이나 수필창작에 깊숙하게 개입할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수필창작을 나의 하나의 부업으로밖에 대할수 없게 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나는 나름대로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어 왔다. 우선 마누라의 바가지와 잔소리를 말리려고 문학번역(사실은 돈벌이임)도 적잖케 했다. 이럴 경우에는 3, 4류의 저질적인 무협소설도 돈만 준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역자의 이름을 밝히는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쪽제비도 낯짝이 있다지 않는가. 그러나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똑히 차리랬다고 돈벌이하는 재미에 빠졌다가도 용하게도 본업에 되돌아오군 했다. 내가 주요한 시간과 정력을 몰부어 하고있는 본업은 물론 순수문학에 관계되는 글농사이다. 《큰 포전》의 글농사는 두말할것 없이 본과, 석사. 박사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양문학사,서양모더니즘문학사, 한국고대소설사, 동서문론비교, 중조고대문학비교연구, 비교문학리론, 조선력사와 문화 같은 문학연구관계의 교과서나 론저나 론문의 집필이다. 10년 남짓한 동안에 10여권의 교과서나 학술저서들을 냈고 80여편의 학술론문들을 발표하고 국가급과학연구항목도 3개나 완성하여 7,8년 사이에 강사로부터 박사생도사로까지 되였다. 이밖에도 나는 부업으로 하는 《뜨락농사》도 열심히 지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에 관한 평론이나 수필창작이다. 연변대학에서는 이런 글들을 《잡글》로 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7, 8년 동안에 이런 잡글들을 100여편이나 발표했다. 중국에 《한 마음으로 두가지 일을 할수 없다(一心不可二用)》는 말이 있듯이, 마음을 여러 곳에 쓰다 보니 나의 문학은 점점 사불상(四不像)이 되여 간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교육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창작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문학평론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번역가로서도 자격미달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의 전문가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문학의 잡가(雜家)와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문학을 한답시고 20여년간 분주히 돌아쳤으나 오늘날까지 여전히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아마추어―비전문가이다. 그래서 적지않은 문단의 선배나 친구나 동료들이 《좀 <바람>을 작작 피우고 학문에만 전념하라》, 《먹을 황금처럼 아끼라(惜墨如金)》라는 권고하군 한다. 비록 이런 충언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냥 《바람기를 잠 재우지 않을것이고》 앞으로도 계속《잡글》들을 줄기차게 써나갈것이다. 솔직하 고백하면 대학교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는 이른바 《론문》이나 《론저》들의 집필보다는 중국조선족 문학이나 예술에 관련되는 평론, 수필, 칼럼, 기행 같은 이른바 《잡글》을 쓰는데 더 애정이가는것을 나로서는 어쩌는수가 없으니 말이다.그것은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런 잡글들에 의해 영위되고있는 현실문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있기때문이다. 위기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유태인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군한다.인류 력사상에서 유태인만큼 지혜롭고 끈질긴 문화의 힘을 가진 민족은 없다. 2천년간 나라 없이 도처에 흩어져서 온갖 박해를 받아왔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다. 죽일수록 살아나고 흩어질수록 단합되여 마침내는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 주변의 수억의 아랍인들과 맞서서 반세기 이상 싸우고 2천만밖에 안되는 소수 민족이면서 노벨상 전체의 3분의 1이나 차지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민족이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가? 그 힘은 바로 강인한 종교와 교육에서 나왔지만 어디까지 유태문화와 민족응집력의 핵은 종교이다. 종교는 유태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주요한 문화의 그릇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비종교적 문화이다. 때문에 우리의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가장 주요한 그릇은 교육과 문학예술같은 세속적인것이다. 문화기능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문화가 앞으로 도 건재하려고 한다면 교육이나 문학예술 같은것들이 마땅히 유태인문화에서의 종교 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의 크고 작은 교육, 문화기관이나 단체들이나 잡지사같은것은 유태교의 사원 같은 존재이고 우리의 교원들이나 문학예술인들은 랍비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은 유태인들의 문화계통에서의 종교같은 기능을 대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이런 주장을 두고 많은 분들은 문학예술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건다고 코웃음을 칠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히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이 우리 민족문화를 보전하고 지키는 기능을 잃는 날이면 우리중국조선족문화가 일조에 봄눈마냥 녹아버릴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을 고창해왔다. 한마디로 나의 문학관은 대단히 공리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다. 나와 문학사이의 인연은 나의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것이다. 불교의 삼세륜회설이 참말이고 래세가 참말로 있다면 나는 죽어 래세에 가서라도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할것이다.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내가 좋아하는 《잡글》들을 계속 쓰면서 중국땅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영생을 누리고싶다. 2003년 3월 6일 연길에서
44    [수필] 나의 좌기(坐驥) 댓글:  조회:4530  추천:78  2006-07-18
나의 좌기(坐驥) 김 관 웅 며칠 전, 나는 학교로 가다가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는 나의 제자 마금과(馬金科)를 만났다. 한국 충북에 있는 제천대학 중문학과에서 중국어를 배워주는 객원교수로 있다가 여름방학에 휴가차로 올아 온 터였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서 내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무람없이 한어로 롱담을 걸어왔다. 《선생님의 좌기(坐驥)는 여전하십니다. 허허허》 좌기(坐驥) - 앉을 좌(坐)자에 천리마 기(驥)자의 합성어이니까 타고 다니는 천리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비루먹은 말이나 조랑말 따위가 아니라 옛날 무사들이 전장에서 종횡무진으로 타고 다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마(戰馬)를 일컬을 때 쓰는 고색(古色)이 창연한 낱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자의 롱담에 응수를 했다. 《암 여전하구말구, 내게는 이 좌기(坐驥)가 관운장의 적토마(赤ꟙ馬)요, 동키호테의 로시난테란 말이야, 허허허》 아마도 누구라 없이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한국의 교수님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여서 이런 롱담을 한 것이리라. 한국에서 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요, 또 어쩌면 사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연길이고 연변대학이 아닌가 한다. 작년 내가 한국 대전의 배재대학에 객원교수로 있을 때의 광경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교수들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적잖케 자가용을 끌고다녀서 학교의 캠퍼스는 말그대로 승용차 천지였다. 때로는 학생들이 교수님들의 전용주차장에 주차를 시켜서 말썽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런 갈피 없는 생각에서 잠겼다가 문득 끌고 가는 내 자전거를 내려 보노라니 12년 전을 회상하게 되였다. 큰 딸애가 17살 초중을 마치고 연길시 2중에 입학하게 되였을 무렵이였다. 연변1중에 지망했지만 단 5점 차이로 1만 2천원을 내야만 연변1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 1만 2천원을 내놓겠으니 연변1중에 가겠는가고 딸애에게 물었었다. 제힘으로 안 되는 일을 엄마, 아빠의 억울한 돈을 팔아가면서는 절대 안 하겠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큰 딸내미가 대견스러웠지만 집사람은 기어코 돈을 팔면서도 가라고 설복하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안가겠다고 뻗쳤다. 큰 딸내미는 고집스러운 점만은 나를 꼭 빼닮았다. 1만 2천원을 안 쓰게 된 우리 부부는 그 대신 자전거라도 좋은 걸 사주려고 그때 600백 원을 호가(呼價)하는 제일 좋은 소형 곤차(坤車 )-녀자용 자전거를 사주었다. 자전거바퀴의 대소에 따라 중국에서 자전거는 28, 26, 24로 나뉘는데 큰 딸애의 자전거는 제일 작은 24이다. 아이들의 장난감 자전거보다 바퀴가 좀 더 클 따름이다. 큰 딸내미가 고중을 다니던 3년 동안을 타다가 외지대학에로 가고 작은 애가 자전거를 탈 나이가 되였지만 왼손잡인지라 자전거도 왼쪽에 써서 끄는 꼴을 보니 하도 안돼서 언니자전거를 물려주는 것을 내가 오히려 말렸다.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고 마침 내가 술 먹고 자전거를 잃어버리다 보니 큰 딸내미의 소형 곤차(坤車)는 내가 물려받게 된 것이다. 그 때로부터 장장 9년 동안 큰 딸내미의 소형곤차는 나와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 나의 애지중지하는 좌기(坐驥)로 되였다. 173cm의 키에 80kg의 체중을 가진 내가 자전거를 탄 모습은 사실은 적토마를 탄 관운장이나 로시난테를 탄 동키호테에 비기기보다는 땅딸막한 나귀를 탄 뚱보 산쵸 빤싸에 비기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마누라도, 제자들도 교수의 체신에 맞지 않는다고 타고 다니지 말라고 했으나 체신이고 뭐고 돈 안들고 편리하기만 하면 그만이 아닌가. 나의 좌기(坐驥)는 적어도 땡전 몇 푼이 안 들고 아무런 품도 안 들어서 좋다. 내가 이 좌기를 타고 다닌 9년 동안 자전거 수리방에 가본지 거퍼 서너번 번도 안 된다. 길거리에서 바람을 넣느라고 20전만 팔면 무난하게 두어주일씩은 타고 다닌다. 부대에서 나는 마부노릇을 하면서 말을 많이 타보았기에 말타기가 얼마나 거치장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여물을 먹이고, 물을 먹이고, 마구간에서 분뇨를 쳐내고, 매일마다 털을 빗겨주고, 정기적으로 말발굽을 깎아내고 철을 신겨야 하고 .... 정작 타고 출타를 하려면 말안장을 올려야 하고 자갈을 물려야 하고 참으로 거치장스럽기 그지없다. 어디 이뿐인가. 군마(軍馬)가 하루에 먹는 여물 값은 우리 병사들이 화식대보다 서너 배나 더 많았다. 나의 좌기(坐驥)는 돈 안 들고, 품 안 드는 리점만 있는게 아니다. 또 내 좌기(坐驥)는 무공해 교통수단이다. 이 지구에 단 한점의 유독가스도 방출하지 않으면서 매일 가장 효과적인 신체단련을 한다. 캠퍼스 안에서는 물론이고 시가지에 나가도 나는 언제나 내 좌기를 타고 다닌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량쪽 귀전과 량 볼로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그렇게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다. 자가용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놓았다고 해야 이렇게 시원하고 쾌적할 수 있을까? 요즈음은 우리 연변대학에도 자가용바람이 세차게 불고있다. 내가 소속된 조선-한국학 학원에만도 이미 4명의 교수가 자가용을 굴리고 있다. 캠퍼스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자가용 안에서 내가 내 좌기를 타고 다니는 것을 건너다보면서 미소를 짓군 한다. 아마도 대부분은 선의적인 미소들일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시대의 발전에 뒤처져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나를 비웃는 웃음도 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웃든 말든 나는 내 사랑하는 좌기(坐驥)와 더불어 10년 이상은 연변대학 캠퍼스를 더 누벼야 할 것 같고, 30년 이상 사랑하는 연변 땅을 더 누벼야 할 것 같다. 금년에 90세인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자전거를 거뜬히 타시고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들을 누비시지 않은 데가 없으시다. 만주국시절 전 만주국의 사이클 챔피언의 당년의 름름한 모습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작년에는 홀로 자전거를 타시고 연길에서 도문까지 하루 동안에 거뜬히 왕복행을 하기도 하셨다. 기니스북에 오를만도 한 장거(壯擧)이니 자식된 나로서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나의 아버지만큼 자전거를 타고 건강하게 살려면 아직은 34년이라는 긴 세월이 더 흘러야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은 아버지를 이어받지 못하더라도 자전거사랑만은 이어받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사랑하는 좌기(坐驥)를 타고 내 고향 연길의 거리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 2006년 7월11일 연길에서
43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 그리고 제3의 인간형 댓글:  조회:4590  추천:46  2006-04-20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 그리고 제3의 인간형 김 관 웅 지난 여름의 어느 등산의 점심시간이였다. 산정의 나무 그늘밑에서 도시락들을 거의 다 비워가고 가지고 간 맥주캔들도 다 비워질 무렵에 륙십에 가까운 XX형이 늦장가를 드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으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아직 미성년인 제 새끼 둘에 후처감으로 지목된 녀자의 미성년의 자식 둘, 이렇게 자식 넷을 재구성하여 여섯식구의 새 가정을 꾸리시겠다는게 당사자 XX형의 드팀없는 결심이였다.처음에는 나를 비롯한 반대론자들이 우세였다. 득과 실을 따져 볼 때 득(得)이 전혀 없는것이 아니라 실(失)이 너무 크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이구동성의 의견이였다. 늦게 장가를 든 XX형은 자연히 자식농사도 늦게 시작하여 큰 아들라고 하여 금년에 대학에 들어갈 고3이고 작은 애는 겨우 소학교 졸업학년이다. 녀자쪽도 아이가 둘이여서 상황은 비슷했다. 그러니 자식들의 뒤바리지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였다. 그런데 서발 장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것이 아무것도 없는 살림형편에 바야흐로 외지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고 고중을 다녀야 할 각성받이 네 자식의 뒤바라지를 과히 해낼 수 있느냐 하는것 이 반대파들의 가장 주된 반대의 의거였다. 반대파의 맹장들인 녀자들이 가장 실제적인 측면에서 xx형을 설복하려고 하였다. 정 마음이 든다면 대방도 과부이고 xx형도 홀아비이니 서로 사랑하는 애인으로 서로 오가면서 사는게 좋지 법률적인 책임과 도덕적 의무에 결박당하는 결혼 같은 모험은 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권고했다. 분명히 충언이였다. 별로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 충언이였다. 이런 충언에도 xx형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연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녀자의 집에 가서 살림을 합한다는게 아닌가. 게다가 연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작은 아이까지 녀자가 있는 도문에 전학시켜 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녀자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여 졌다. xx형이 이렇게 대꾸하자 반대파 녀자들쪽에서 항의가 쇄도했다. 이렇게 되자 XX형도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어떤 녀자이기에 xx형이 아파트를 처분하는것마저 불사하고 기어코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가? XX형보다 10년이나 년하라니 얼마나 젊고 예쁠까? 음식솜씨나 매너마저 사람을 죽여 준다니 다들 그 녀자한테 호기심이 동하여 다음 등산은 도문으로 행선지를 정했고, 산에서 내려와서는 곧바로 그 녀자의 집으로 가서 약혼턱 겸 신부감 구경도 하기로 했다. -- 남자들이란 녀자한테 빠지기만 하면 세상이 다 녹두알만해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옛날 당현종은 양귀비에 혹해 3천궁녀도 마다하고 조정의 정사(政事)마저 게을리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옛날뿐이랴. 지난 세기 30년대에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는 40도 넘은 과부 심프슨부인한테 반해 임금의 옥좌마저 마다하지 않았던가. 우리 XX형이 민초로 태여났으니 이 정도에 머물렀지, 만일 룡종(龍種)으로만 태여났으면 결코 당현종이나 애드워드 8세에 짝지지 않을 정종(情種)으로 세상에 소문을 냈을텐데... 나는 XX형과 반대파들 사이의 설전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이런 생각을 굴리였다. XX형은 금년에 쉰아홉이니 공자의 말대로 하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서 이순(耳順)의 나이에 접어 든다. 분명히 청춘의 나이가 아니다. 그러나 20대나 30대의 청년들처럼 자기를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봄에는 봄에 할 일이 있고 ,여름에는 여름에 할 일이 있고, 가을에는 가을에 할 일이 있고, 겨울에는 겨울에 할 일이 있다. 객관에서 볼바에 xx형은 인생의 가을이라도 마가을에 와 있는데 마땅히 인생의 봄철에 해야 할 일을 인생의 마가을에 들어 서서 하시려는 잡도리이다. 마치도 강남의 농사군들이 이모작을 하듯이 다시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그 사랑의 곡식을 가꾸려 하고 있는것이다. 북국(北國)의 기후와 농사절기를 모르고 농사를 짓는 농부에 비길수도 있다. 바로 이런 동심에 살기에 XX은 나이에 비해 언제나 젊어 보이고 혈기 또한 좋은것 같다. 또 바로 이런 동심이 계속 살아 있기에 시를 쓰고 있지 않는가. 3년전에 내가 롱담 반 진담 반으로 XX형의 성격을 류형학적으로 분류를 할 것 같으면 타입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리웠던 것이 아주 적중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심리학에는 타입을 객관적 현실상황을 정시하지 않고 주관적인 리상이나 동기나 판단이나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주관적 성향을 지닌 심리류형을 가리킨다. 랑만주의자라고 할수 있다. 현실이란 이 자기가 서있는 립지를 무시하고 리상의 하늘에서 날으려고만 하는 랑만주의자들은 참으로 지금 한창 류행되고 있는 시체말로 표현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쑈싸(瀟灑)한 인간이고 삶의 의욕과 용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인간임이 분명하다. 단 하루를 살더라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들의 이러한 이 별로 오래 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남을 나는 적지 않게 보아 왔다. 한 인간을 다음과 같은 메타포를 동원하여 설명할수 있다. 비행기의 가장 큰 기능은 하늘에서 나는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하늘에 나는 목적은 인간을 한 고장으로부터 다른 한 고장의 지면에 내려 놓으려는데 있는 까닭에 비행기는 하늘에서 일정한 시간을 비행하다가는 반드시 지면에 착륙해야만 한다. 하늘에서 날기만 하고 땅에 내릴 줄 모른 비행기는 비행기(飛行機)가 아니라 살인기(殺人機)이다. 마찬가지로 주관적리상만 추구하고 객관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동키호테타입의 인간들은 흔히 하늘에 떠오르기는 했으나 땅에 내릴 수 없는 비행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하늘에 떠오르기가 무서워서, 하늘에서 날다가 땅에 착륙할 수 없을가바 무서워서 그냥 활주로에 정박해 있는 비행기는 비행기기 아니다. 비행기인 이상 리륙하여 하늘에 날아올라 가 보아여 할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XX형은 용감한 인간, 아름다운 인간임이 분명하다. 단 하루를 살더라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랑만주의자, 리상주의자임이 분명하며 제 주장과 생각대로 살아가는 동키호테타입임이 분명하다. 동키호테타입과 정반대의 타입은 햄리트타입이다.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주관적인 리상이나 동기나 목적 같은 것이 분명한 점에 있어서는 동키호테타입의 인간들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햄리트타입의 인간들은 그 실현의 객관적가능성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쓴다. 생각은 뻔하지만 객관적인 여건만 고려하면서 우물쭈물 자기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마치도 햄리트가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앞뒤 좌우를 재기만 하고 눈치만 보다가 복수의 기회를 다 놓치고 종당에는 자기의 목숨마저 잃는것처럼 햄리트타입의 인간들은 주저하고 꾸물거리고 좀자르다가 일생을 다 보내기가 일수이다.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생각에서는 거인이나 행동의 난쟁이라면 동키호테타입의 성격을 가진 인간들은 생각에서는 난쟁이나 행동에서는 거인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과에는 대학시절의 두 동창생이 있다. 한 분은 에서 나오는 장비나 애서 나오는 리규 같은 생김생김에 완전히 동키호테적인 타입의 성격을 갖고있어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남을 웃기는 일도 만들어 냈으나 남들이 해보는 일은 거의 과감하게 다 해 본데 반해 다른 한 분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느는 소심한 군자여서 한평생 살아 오면서 큰 실수를 저지른적은 한번도 없으나 또 그렇다고 대단한 업적을 쌓아올렸거나 세인을 놀래우는 장거를 한 일도 없다. 사실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은 각자가 모두 각자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허물없는 사이인지라 나는 늘 이런 롱담을 건네군 한다. 동키호테타입의 상격을 가진 그 형의 일생은 바다의 파도처럼 기복이 있고 모험과 실패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스릴이 있는 일생이라고 할수 있다. 이와 달리 햄리트타입의 성격을 가진 그 형의 일생은 마치도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고 변화와 자극이 적은 일생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늘 이 두 형을 맞대 놓고도 이런 롱담을 하군 한다. 동키호테타입의 인간이나 햄리트타입의 인간이나 모두 인간류형의 량극이여서 그다지 바람직한 인간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향은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아라는 이 량극의 복판에 있는 제3의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꿈과 랑만도 있고 현실감각도 뛰여난 인간들이 바로 이런 제3의 타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주관과 객관 그리고 리상과 현실, 목적과 수단을 잘 조화시키고 통일시켜 나가는 능력을 가진 인간성격은 우리가 희구하는 바람직한 인간형인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리상적인 인간형을 만들어 내자면 동키호테와 햄리트를 한데 골고루 반죽하여 새로운 제3의 인간형을 빚어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같은 절대자이면 또 모르겠으나 나 같이 바보적 기질이 다분한 인간이 동키호테타입과 햄리트타입이라는 이 량극 사이에서 적절한 도를 장악하느라고 줄타기를 한다는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42    (책서문) 나의 익우량사-채영춘 댓글:  조회:4650  추천:39  2006-04-18
(책서문)나의 익우량사-채영춘 김 관 웅 무슨 책이든 읽고 리해하려면 우선 그 책의 작자의 인간성을 알아야 하고, 그 인간성을 알려면 어린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영춘이가 나보다 석달 먼저 《귀가 빠쪘다》고 언제나 《형》이라고 으시대기는 하지만 사실은 모두 1951년에 태여난 동갑이다. 영춘이와 나는 다섯살때부터 집안의 말소리마저 서로 다 들리는 이웃에서 함께 자라난 송아지 동무이고, 소학교 6년 세월을 한 반급에서 그림자처럼 붙어다닌 불알친구이고, 중학교도 한 학교 이웃 반급에서 함께 마친 클라스메이트나 다름없는 중학동창생이다. 어디 이뿐이랴. 영춘이는 집체호를, 나는 군대를 거쳐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서로 비슷한업(영춘이는 주로 언론과 출판, 나는 주로 문학)에 몸을 담고있다 보니 보름이 멀다하게 각종 문화인들의 행사에 참가하여 회의를 같이 하고 술자리를 같이하군 한다. 그리고 그 인연이 계속 이어져 지금은 사돈(나의 막내동생과 영춘의 막내 누이동생은 부부이다)까지 되였으니 영춘이와 나 사이의 인연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하니 내가 영춘이의 인간성을 안다고 해도 아마 머리를 저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춘이 부친 채택룡(1913∼1998)선생은 1927년부터 《카프》계렬의 잡지에 처녀작을 발표하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아동문학의 원로일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학의 중요한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문학이라도 주로 아동문학울 하는 엄부(嚴父)의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서 영춘이의 예술적 천부는 일찍부터 우리들의 눈에 띄이기 시작했다. 늘 영춘이의 손을 잡고 습자련습을 시키거나 영춘이가 영화만 보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지갑을 꺼내여 돈을 주시군 하는 영춘이 아버님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그리고 영춘이가 싫어하는데도 예술학교에 피아노레슨을 받도록 손목을 잡고 가는 영춘이 아버지의 뒤 모습을 바라보거나 혹은 북경이나 외지에 출장 갔다가 영춘이에게 사다주었다는 고급스러운 크레용이나 연필 같은것은 구경할 때에 그저 부럽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은 영춘이의 부친이 의도적으로 예술에 대한 자식의 흥미를 키워주고 나아가서는 예술쪽으로 자식을 이끌기 위한 고심(苦心)이였음이 분명하다. 벌써 일여덟살 때부터 영춘이는 부친의 옥필(玉筆)을 닮아서 글씨를 아주 이쁘게 썼고 그림도 아주 재치 있게 그렸다. 나와 함께 아이스호케이경기를 보고 와서는 공책이나 지어는 베니다로 만든 자기집 미닫이에도, 판자나무로 막은 동네의 울타리들에도 언제나 영춘이가 그려놓은 그림들로 울긋불긋했다. 아무튼 부친이 배양한 덕분인지 아니면 본인의 천부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영춘이의 예술적 재능은 일찍 피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춘이는 소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님으로부터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늘 들어왔으며, 나는 집에서 영춘이의 이런 예술적 재능 때문에 나의 어머님으로부터 늘 꾸지람을 들어왔다. 이뿐만 아니라 원족에 갔다와서 마저도 영춘이 때문에 며칠씩 두고 내 어머님한테 욕을 먹군했다. 영춘이는 노래를 시키니 벌떡 일어나서 그렇게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너는 뭣이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지 못해 하는냐, 주로는 이런 욕들이였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리론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유년시절의 조기경험과 기억들은 마치도 암벽(岩壁)에 글자를 아로새기듯이 영원히 마멸되지 않는 흔적을 남겨놓게 되는 법이다. 이런 것들은 한 인간이 어른이 된 이후의 인격이나 재능의 형성에 커다란 영형을 미친다. 한마디로 영춘이가 유년기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예술계몽교육은 어른이 된 후에 언론, 방송, 출판분야의 지도자로서 훌륭하게 소임을 다 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작용을 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영춘이가 벼슬길로 전향을 하지 않고 화가의 길을 계속 걸어 왔더라면 오늘날에는 큰 화가로 대성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도…… 영춘이가 유년기와 소년기에 누린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영춘이의 부친이 영춘(永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자식의 앞길이 영원히 봄빛으로 무르녹을 것을 바란 기대와는 달리 영춘이의 앞길에는 너무나 일찍이 무정한 서리와 폭설이 내렸다. 이 때 아닌 서리와 폭설은 영춘이에게 따사로운 봄빛 같은 사랑을 몰부어 주셨던 영춘이의 부친이 1959년에 이른바 《우파》라는 감투를 쓰게 되면서부터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영춘이의 부친과 함께 《우파》로 두들겨 맞았던 난우(難友) 김학철선생의 말을 빈다면 이른바 《반우파운동》은 《선량한 지성인들울― 정직한 지성인들을― 미친개 때려잡듯 마구때려잡은 치욕의 력사》이고 진시황을 찜쪄먹을 《제2의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같은 철부지마저 소학교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9년 늦은 봄부터 영춘이네 집에는 비운이 감돌기 시작함을 어슴프레하게 나마 느꼈다. 나는 영춘이네 가정의 비운을 통해 정치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인간비극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철부지시절에 너무나도 일찌기 알게 되였다. 1964년, 날로 우심해지는 정치적인 박해로 하여 채택룡선생이 조선에 건너 간 뒤로 영춘이네 집은 더욱 비참해졌다. 내가 대학학창시절의 고한문시간에 《학정이 맹호보다 무섭다(虐政猛於虎)》는 맹자의 말을 배울 때 저도 모르게 련상한것은 영춘이네 집식구들이 정치운동의 풍파속에서 겪어온 수난사였다. 영춘이네 집식구들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정치적인 박해만이 아니였다. 남편과 생리별한 20년 가까운 세월속에서 영춘이의 모친은 자갈치고 모래치는 노가다판의 뜨내기로, 심심산중을 무른 메주 밟듯하는 약초군으로, 심지어는 매탄장(賣炭場)에서 연탄을 실어 나르는 리어커군으로 그야말로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셨다. 아마도 영춘이 모친의 희생적인 모성애가 없었다면 영춘이네 집은 언녕 풍지박산이 났을것이다. 우리 속담에 《초년 고생은 금울 주고도 못 바꾼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집이 가난하고 불행만 해도 안된다. 가난과 억압만 있으면 자식들이 주눅이 든다. 가난과 억압이 있으면서도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자식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자랄수 있고 따뜻한 마음을 키워갈수 있는것이다. 온실의 화초들은 온실밖으로 나와 한번만 서리바람을 만나게 되면 순간에 얼어 죽어버릴수 밖에 없지만 엄동의 시련을 겪은 들꽃이나 야초들은 어지간한 추위에는 얼어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다. 영춘이가 어린시절에 겪은 역경은 의지의 칼날을 시퍼렇게 세워주는 숫돌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세태염량(世態炎凉)을 일찍이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선생같은 기능을 수행했다.로신선생은 부친이 갑자기 벼슬자리에서 나떨어지고 옥살이를 함으로 하여 남들로부터 백안시를 당했던 어린시절의 아픈 기억에 비추어 《가세(家勢)가 갑자기 기울어지게 되면 세태염량을 몸으로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적 있는데, 이는 영춘이의 경우에도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역경은 영춘이로 하여금 인간을 뜨겁게 사랑할 줄도 알고 불의(不義)를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할줄도 아는 애증(愛憎)이 분명한 성격을 부각시켜 주었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국난을 당해야 충신이 나오고 집안이 어려워져야 효자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 가세가 기울어진 까닭에 영춘이가 효자로 되였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영춘이는 오늘의 현실속에서는 보기 드문 효자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말씀을 빈다면 보통정도의 효자가 아니라 《효자문(孝子門)을 세워야 마땅한 효자》이다. 그런데 부모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마음은 결코 《효》라는 한 글자에 죄다 포괄시킬수는 없다. 영춘이에게 있어서 비록 짧았지만 엄부(嚴父)의 교화(敎化)는 인생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한 귀중한 가르침이였고, 자모(慈母)의 피눈물 어린 사랑은 추운 엄동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수 있게 해준 은혜로은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아버님에 대해서는 천리인륜(天理人倫)적인 《효》외에도 복잡한 감정이 내재해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춘이는 부친를 통해서 자기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을수 있고,부친의 귀환 그리고 부친의 명예회복을 통해서야 만이 모친과 자기 그리고 모든 가족 나아가서는 자기 부친처럼 억울함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맺혔던 한을 풀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영춘이가 조선에 나가서 조선공민으로 국적을 바꾸고 19년이나 살아온 부친을 다시 중국으로 모셔와서 억울한 루명을 벗기고 모든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고 공직까지 회복시켜서 천수(天壽)를 다 하도록 극진히 봉양한 일은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글에서 반드시 언급되여야 할 것은 바로 영춘이가 부친를 모셔오기 위해 조선측과 벌려 온 장기적이고도 일구난설(一口難說)의 어려운 교섭과정이다. 영춘이도 이 일에 대해서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너무 자세한 사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춘이가 조선측의 안전부, 외교부 심지어는 김일성수상에게 이르기까지 수 백 통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만은 나도 알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영춘이의 끈질긴 노력과 다함없는 효성은 끝내 조선측 해당부문의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측에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채택룡선생이 부인과 자식들이 살고 있는 중국에로 귀환하는 것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구체적인 내부사정을 알 수 없는 조선측 회령해관의 출입국을 관할하는 일군들이 《이런 전례가 없었다》는 말을 거듭 되뇌이면서 채택룡선생의 려권과 증명서류들을 검사하고 또 검사했다는 에피소드만은 영춘이가 나한테 대충 말해준적이 있다. 자기의 부모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어찌 남들을 사랑할 수 있고 나아가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연변탤레비죤방송국과 연변출판국에서 지도자로 있으면서 쏟아 부은 연변지역사회와 우리 민족에 대한 영춘이의 뜨거운 사랑을 그의 지극한 효심(孝心)의 연장으로 보고 있다. 영춘이가 묶어 내놓은 이 에세이집에는 도합 15편의 연설문, 편의 수필, 8편의 론문이 수록되였는데, 그 대부분이 연변T방송국과 연변신문출판국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발표한 연설과 론문들 중의 일부분이다. 이 글을 통해 연변TV프로그램 총체전략의 주요한 설계사, 지휘자 그리고 연변민족출판 생존발전전략의 기획인 그밖에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의 뚜렷한 민족우환의식, 확실한 문화자세, 랭철한 사고와 판단력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현실화하는 조직력과 실천력을 엿볼 수 있다. 연변TV의 20년을 반추하면서 영춘이는 다음과 같이 연변TV가 가져여 할 바람직한 자세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세계화시대를 열어가는 연변사람들의 자세와 안목을 키워주는 향도의 방송, 세계에서 한점의 부끄럼도 없는 연변사람의 떳떳한 삶을 부각하는 창조의 방송, 〈연변을 세계에로의〉꿈을 영글어 가게 하면서 21세기 새 연변의 부흥을 이끌어가는 견인의 방송, 중국조선족의 문화창출과 민족문화의 진로개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선도의 방송이여야 한다.》민족언론의 당면한 자세와 당면한 자세에 대해 영춘이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장경제체제의 충격과 조선족공동체가 겪고 있는 혹심한 위기로 우리 말 언론은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이 존재하는 한 우리 언론은 쓰러질 수 없다. 조선족동포사회가 전방위적인 곤혹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언론이 조선족 동포사회를 잘 이끄는 견인차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비상시기라고 생각한다.》 연변의 축구는 단순히 스포츠의 범위를 초월하여 연변의 자존심과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나아가서는 13억 중국에 연변 나아가서는 200만 중국조선족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여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점이다. 연변축구구락부 초대회장으로서의 영춘이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연변TV방송국 국장으로서 연변축구구락부회원 초대회장을 맡아 나섰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축구사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뛰여 다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유태민족이나 서장의 장족같은 종교적인 성향이 강한 민족과는 다른 민족이다. 유태민족이나 장족의 경우에 있어서 그네들의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이 종교인데 비하여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 민족문화를 담는 그릇은 비종교적인 교육, 문학예술 및 스포츠 그리고 언론, 출판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특히 우리의 말과 글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교육, 문학예술, 언론, 출판 같은것이 살아야만 우리 민족은 자신의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인생태도의 측면에서만 영춘이와 나를 비교한다면 영춘이는 입세(入世)적이고 나는 출세(出世)적이여서 영춘이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웅심을 품은 유가(儒家)적 선비형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의 리상을 지닌 도가(道家)적인 은사(隱士)형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인간세상의 벼슬을 시답잖케 보는 내가 영춘이를 존중하는것은 결코 영춘이가 TV국장,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에 있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춘이는 지금에 이르기 까지 TV국장이나 출판국장 같은 벼슬자리를 자기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벼슬자리 지키기에만 고심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는 참된 파수군이 되여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고 살려나가기 위해 자신의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며, 아울러 오래 동안 벼슬길을 걸어 왔지만 영춘이가 본연의 참된 인간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춘이를 단순한 친구로만이 아니라 언제나 부모에 대한 나의 효심(孝心)과 민족에 대한 나의 애심(愛心)을 비추어 보고 내 삶의 자세와 의지를 점검해 보는 귀감(龜鑑)으로 여기여 왔다. 특히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환경이 그렇지 않다고, 시운(時運)이 없다고 스스로 한탄하고 주저 앉으려 할 때마다 나는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 군 했으며, 그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군 하였다. 내가 군대에서 나의 아버님의 해방전 력사문제로 하여 입당하는데 큰 난관에 봉착했을 때도, 그토록 되고 싶던 군관으로 승진되지 못하고 퇴대하여 지방에 돌아온 후 좌절과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방황할 때도 영춘이를 머리속에 떠올리고는 다시 삶의 용기와 의지를 되찾 군 했다. 왜냐하면 내가 삶의 길에서 봉착한 난관들은 영춘이가 봉착한 난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기 때문이다. 영춘이나 나나 아직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나이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어깨의 짐은 무겁다. 나는 내 친구 영춘이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 강인한 의지와 투혼으로 자신의 삶의 길을 걸어나가고 우리의 연변 지역 사회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 창달을 위해 더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함과 아울러 계속 나의 익우량사(益友良師)로 되여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필을 놓는다.
41    (잡문) 매문자(賣文者)와 매심자(賣心者) 댓글:  조회:4753  추천:56  2006-04-14
잡문 매문자(賣文者)와 매심자(賣心者) 바 보 매문자(賣文者)는 옛날부터 있었다. 옛날에는 비록 지금처럼 한 손으로 원고를 주고 한 손으로 돈을 받는 직거래식의 매문은 아니였지만 돈 외의 벼슬이나 봉록 같은 다른 것으로 보상을 받았으니 말이다. 매문자들 가운데서 가장 차원이 높은 매문자는 어용문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용(御用)이라는 이 낱말의 본의는 는 것이다. 그러니 어용문인이란 원래는 임금님이 부리는 문인이라는 뜻 이였으나 후에는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에 영합하여 그 리익을 위해 활동하는 등 자주성이 없는 것을 경멸하여 이르는 말로 되였다. 어용문인은 권력본위시대의 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는 권력본위의 시대가 아니라 금전본위의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시대를 자본주의시대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또 그래서 금전본위의 시대라고 하면 어페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자본주의시대와 마찬가지로 역시 금전, 아니 점잖게 표현한다면 공방(孔方)선생의 위력이 대단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의 속담에는 는 말이 있는데, 지금도 이 속담은 유효하다. 귀신도 부릴 수 있는데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문인도 오곡잡량과 기름, 간장, 소금을 먹고 사는데 문인이라고 돈을 싫어 한다는 법은 없지 않는가. 몰락 량반의 자제인 필자의 조부는 지난 세기 20년대의 평양에서 대서업(代書業)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하니 역시 매문자였음이 분명하다. 현대의 문어구에서 살아오신 필자의 조부는 아마도 조선현대사회의 가장 일찍한 매문자의 한분이였을것이다. 필자 조부의 매문이라야 고작해서 문맹들을 대신하여 편지나 써주고 법원에 올리는 진정서, 상소문 따위의 문서나 대신 써주는데 그쳤던것이다. 만일 30년대말기 일제식민통치의 말기인 암흑기까지 사셨다면 혹시 친일적인 매문이라도 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으나 그때까지 사시지 못한 조부이다 보니 친일파의 반렬에 오를 기회마저 없었다. 매문자는 대개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하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자였다면 필자의 조부님이 어찌 자기는 일본의 륙법전서를 통탈한 유식한 문인이면서도 자기의 아들(필자의 아버지)은 학교문에도 보낼 수 없었겠는가? 어찌 18세밖에 안 되는 아들(필자의 부친)이 살 길을 찾아 산 설고 물 설은 만주땅에로 혈혈단신으로 떠나가는데도 붙잡지 않았겠는가?조부를 본적 없는 필자는 언제나 조부의 말이 나오기만 하면 로신의 소설 에서 나오는 동명주인공을 련상하군 한다. 필자의 조부님이 사셨던 지난 세기 20년대에 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은 많이 변하긴 했다. 그러나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처지는 그리 많이 변한 것은 아니다.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금전만능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지마는 돈이 없으면 한 시각도 못사는 시대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문학의 상업화, 상품화의 추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우리 모든 문인들에게 육박해 오고 있다. 오늘날 중의 주류문단인 한족문단에서의 상품화경향은 아주 심하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리국문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한평생을 살겠다고 버득거려도 고급승용차는 고사하고 오토바이 한대, 호화형 아파트는 고사하고 비둘기장 같은 아파트 한 채를 천신하지 못하는 우리 연변의 수많은 문인들에게 있어서는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북경이나 상해 같은데 비하면 우리 연변의 상업조합식의 문학생산은 너무나도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 한 점만 보아도 우리의 문학이 순결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연변은 절해고도가 아니므로 한족 주류문단의 상업화, 상품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몇 년전부터 우리 연변에고 아무 아무개가 돈을 받고 누구의 오체르크를 써주었다, 아무 아무개가 무엇을 대가로 누구누구의 글을 대신 써주었다 등등 소문이 심심치 않게 우리들의 귀에 전해오군 했다. 하지만 리아무개, 장아무개가 무슨무슨 장사를 하는 김아무개의 전기체 장편소설을 써주고 각각 만원씩 받았다던가 하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장편대작을 써주고 고급승용차나 호화형 아파트 같은 것은 가지지 못하더라도 고작해서 만원이라니?! 오히려 돈 많은 놈들한테서 착취를 당했다는 억울한 생각마저 들고 련민과 동정의 마음마저 생긴다. 요즘에도 아무개가 어쩌고 저쩌고 뒤골목들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다. 다들 집도 장만해야 하고 아이들도 공부를 시켜야 하고 자기의 호주머니에 얼마간의 용돈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팔아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 이 상품화의 거세찬 조류속에서 물방울 하나 묻지 않고 살아 간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 세상에 완인(完人)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설사 이렇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인들은 적어도 최저한도의 시비감별 능력만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부자가 된 보스나 정상적인 문화활동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번 명류들을 위해 좀 나발통이 되여 주는 것쯤은 충분히 량해할 수 있다. 또 돈을 받으며 글을 써주어도 무방하다. 매문(賣文)도 하나의 정신로동이니깐. 사실 필자도 매문의 일을 한적이 없지는 않다. 미적가치를 조금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도 원고료를 푸짐이 준다니 밤을 패워가면서 무협소설들을 번역한 경력이 있는 필자로서는 매문이라는 이 직업이 그리 쉽지는 않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길목을 지키다가 보짐을 빼앗거나 은행의 금고를 털어온 강도(량산박의 호걸들이나 청석동의 림꺽정이나 홍길동 같은 의적들은 제외하고)를 위해 수비립전(樹碑立傳)---비석을 세워주고 전기를 써주었다면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김문학은 사실 보짐을 빼앗거나 금고를 턴 도적이나 강도보다도 더 용서할수 없는 죄를 지은 문적(文賊)이다. 자신을 포함한 전반 민족을 팔아먹고 나라을 팔아 먹은 매국배족의 망나니이다. 이런 망나니를 위해 사례금을 받고 글을 써서 하늘 높이 올리 추고도(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몇년동안이나) 추호의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인간은 실로 문제의 인간이다. 잘못한 것보다 잘못한 것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더욱 문제이다.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매문자들보다는 자기의 잘못을 번연히 알면서도 계속 리속만 따지고 풍향만 살피면서 매문자노릇을 계속해 나가는 문인들이 더더욱 문제이다. 필자는 이러한 매문자들을 매심자(賣心者)들이라고 인정한다. 즉 글을 파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인의 마음---량심과 량지마저 파는 자들이라고 인정한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매문자로 되는 것은 용서하더라도 매심자는 절대 되지 말고 또 매심자에 한해서만은 절대 용서하지 말자는 것이 필자가 우리 문단의 여러 문우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맹세이다.
40    (단상) 종교의 소외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4602  추천:87  2006-04-13
종교의 소외에 대한 단상 김관웅인간이 신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가? 나는 물론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고는 오히려 자기가 만들어 낸 신이 인간을 만들어 냈다고 여길뿐만 아니라 달갑게 오체투지(五體透地)를 하면서 신의 노복으로 되여 모든 면에서 신의 의지에 따르려고 한다. 이런 경우를 두고 종교의 소외라고 한다. 이러한 종교의 소외가 다 나쁠까? 유태인은 하나님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신앙은 강인하고 우수한 유태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첫째, 유태인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유일신-예호와. 즉 하나님을 모시는 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로서 저희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선민의식은 유태인의 독선주의적 성향을 조장해줌과 동시에 강렬한 민족자존의식을 가지게 했다. 유태민족의 민족적자신감은 바로 이런 선민의식과 밀접한 련관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유태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과 약속을 한 민족이고 하나님은 꼭 자기들을 버리지 않고 구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까닭에 유태인들은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락심을 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 1800년 동안이나 소실되였던 유태인의 나라를 다시 하나님이 가리켜 주었다는 가나안땅-팔레스티나의 땅에 이스라엘국가를 재건한 기적은 이 점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셋째, 유태인과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의 구약은 그들의 경전으로 되였고 또 이런 경전은 유태인들로 하여금 언제나 경전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게 하여 유태인으로 하여금 문화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으며 뛰여난 머리를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노벨상 수상자 총수의 3분의 1이 유태인이라는 점은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가. 넷째,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그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확립시켜 주었고 민족을 결집시켜주는 강력한 점착제 같은 구실을 하였다. 확실히 하나님은 유태인들이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유태인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은 또 유태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의 노복이 된 값어치를 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2006년 4월 10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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