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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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칼럼) 신 <<서옥설(鼠獄說)>> 댓글:  조회:4520  추천:56  2006-04-13
신 김관웅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일본이 도왔다'고 교과서에 버젓이 써넣어 한일 관계에 다시 '교과서 왜곡 파도'가 밀려오고 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한·일간에 다시 분쟁이 불거지고 있는 시점에서, 한승조 전(前) 고려대 명예교수의‘일제 식민지배는 축복’ 기고문 등으로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가 “친일보다 더 나쁜 건 친북”이라며 사실상 친일세력을 옹호하는 글을 올려 요즘의 한국은 시끌벅적하다. 한국에서의 국론의 분열은 한·일 관계개선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부지중 조선조 중기 임제(林悌)의 「서옥설(鼠獄설)」이라는 우화 속의 장면이 떠오면서 이를 패러디할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는 수가 없다. 조(韓)씨네 집 자손들이 왜(倭)씨네 조상이 몇 십년 전에 자기네 아버지를 타살하고 어머니를 강간하고 자기네들을 구박했다고 반세기가 지나도록 거듭 상소를 했다. 혼암한 법관은 끄떡 끄덕 졸다가 눈을 떠보니 또 이 두 가문의 후손들이 몰려와서 콩팔칠팔 떠들어 대는지라 시끄럽다는 듯이 말들을 해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피고인 왜씨네 후손들이 먼저 "한씨네는 우리들처럼 지면 졌다고 앗싸리하게 승복하는 멋도 없고, 지나간 일을 앗싸리하게 잊어버리는 멋도 없는 너무 끈질긴 족속들입니다. 이제는 백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렇게 그냥 물고 늘어지고 있지 않고 뭡니까? 물론 일부 한씨네 후손들 가운데서 일부 제 정신이 있는 친구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라고 법관을 향해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보세요, 똥 뀐 놈이 성낸다고 오늘도 말머리를 가로채는 걸!!! 왜씨네는 자기 참회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족속들입니다. 백년이 아니라 천년이 지나도 저질렀던 죄는 죄가 아닙니까? " 하지만 법관은 숫제 두 눈을 감고 있는지라 이에 조씨네 자손들은 법관을 행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그래도 법관은 못들은 체 했다. 힘의 논리, 돈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법관 역시 힘 있고 돈 있는 왜씨네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게 뻔했다. 판국이 그러하니 왜씨네는 더욱 기고만장해 졌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우리 아버님께서 손을 대지 않아도 너희들의 애비는 이미 병이 골수에 들어 다 죽게 된 거였어. 매일 술 처먹고 마누라나 패고 가정불화나 일으키고 또 게을러 빠져서 제 새끼들도 거두지 못하는 병신 같은 애비를 가지고 뭐가 생광스럽다고 그냥 떠들어대는 거야? 못난 남편을 만나 고생하는 너희들의 어미가 하도 불쌍해서 우리 아버님께서는 애첩으로 들어 앉혀 첩살림을 차려주고 너희들도 몇 십년 동안 잘 거두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강간이 웬 말이냐? 우리 아버님께서 너희들의 살림 밑천을 마련해주지 않았더라면 오늘 너희들은 아직도 쪽박을 차고 거지노릇을 하고 있을거란 말이야! 안 그래?"법관의 경향성을 눈치 채고 왜씨네 후손들의 기고만장함에 기가 눌린 한씨네 가문의 한 얼간이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래요, 계부님께서는 우리 집을 틀어쥐면서부터 가풍이 판연히 달라지고 살기도 많이 나아졌어요. 우리 집에는 계부님이 맞은 게 축복이었지요. 만일 계부님이 아니고 아라사(俄羅斯)씨나 화(華)씨 강도를 맞아들였더라면 아마도 우리 집은 아마도 풍비박산이 났을 겁니다. 오늘의 우리 가문이 건재할리가 없었겠지요. 우리 어머니를 강간하고 목을 비틀어 죽여 버렸을 것이고, 우리 자식들도 몽땅 칼로 도륙을 냈을 겁니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이야 바른 대로 해야지요. 우리가 오늘 이만큼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된 것도 모두 계부님께서 엄히 단속하고 가르친 덕분이 아니겠어요?" 이 얼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법정은 조씨네 후손과 왜씨네 후손간의 설전으로부터 조씨네 후손간의 난투극으로 번졌다. 사신(史臣) 평왈(評曰) -- 역사는 화학실험과 달라서 재연할 수가 없는 것이니 왜씨에게 당하는 것보다 아라사(俄羅斯)씨나 화(華)씨에게 당하는 쪽이 더 참혹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송사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즉 성폭행을 저지른 자가 자신의 강간죄를 자인한 뒤에야 강간을 당한 피해자가 자기가 문단속을 잘 못했다든지 혹은 평소에 헤프게 보인 것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해보아야 그 순서가 맞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약자들은 언제나 공리(公理)가 없는 이 세상을 한탄하지 말고 힘을 길러야 할 것이며, 아울러 송사에서 이기자면 언제나 수미정연하고 만중일치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에 있어서 아직도 순서가 잡히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것도 피해자 측에서 먼저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가해자의 로고를 칭송하는 얼간이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말 깨나 하고 글 깨나 쓴다는 한승수나 조갑제같은 엘리트들이 아직 한일 양국 사이의 역사청산의 순서도 모르고 있으니 더욱 한심하다.일본 우익의 ‘침략유공론’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다. 하지만 피해국 한국인으로서 누가 핍박을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자진하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예찬한 한승수나 이를 두둔하는 조갑제씨의 망언은 제 정신이면 쏟아낼 수 없는 미친 소리, 얼빠진 소리라고 할수밖에는 없다.
38    (잡문) 녀자들의 질투는 무섭다 댓글:  조회:4963  추천:79  2006-04-12
.잡문. 녀자들의 질투는 무섭다 김 관 웅 서양에서는 질투를 검은색과 흰색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상해(傷害)적 질투이고 후자는 경쟁적 질투이다. 질투의 감정은 남녀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녀자들사이의 질투에는 흰색의 질투보다는 검은색 질투가 많고 아울러 그 비례도 남자들에 비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녀자들의 질투는 끈질기고 무섭다. 한고조(漢高祖) 류방(劉邦)의 황후인 려후(呂侯)--려치(呂雉, ?—기원전 180년)는 질투심이 강한 녀자로 중국력사에서 소문이 높다. 류방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려후가 낳은 아들은 병약(病弱)한 류영(劉盈)뿐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 류영의 황태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부인들과 왕자들을 몹시 경계하였다. 기원전 195년 류방이 죽고 류영이 즉위하여 황제의 옥좌에 오르기는 했으나 려후는 뒤일이 근심스러워 류방의 다른 일곱 아들들을 차례로 죽였다. 이중에서도 척부인(戚夫人)에 대한 려후의 박해는 그야말로 지독하기 그지없다. 류방은 생전에 총비(寵妃)인 척부인의 소생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타산했었기 때문에 려후는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의 네 손발을 자르고 돼지굴에 처넣어 이른바 사람돼지—인시(人豕)로 만들어 버렸다. 류영이 재위 7년만에 콜콜 앓다가 죽으니 후궁의 아들 소제공(少帝恭)을 옥좌에 올려 앉힌 뒤에는 아무리 보아도 탐탁치 않아 소제공도 죽이고 다른 후궁의 아들 항산왕(恒山王) 홍(弘)을 세워 자신이 정권을 친히 틀어 쥔다. 그 뒤 려후는 공공연히 자기의 친정집 사람들을 요직에 올려 앉혀 류씨황실이 외척인 려씨에게 눌리고 만다. 려후가 죽자 란을 일으키려 하던 려씨일족을 조정의 대신들인 태위 주발(周勃)과 승상인 진평(陳平) 등 한고조의 공신들이 진압하여 려씨일족을 멸망시켰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것은 척부인에 대한 려후의 질투이다. 려후는 류방이 패(沛,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라는 지방에서 정장(亭長)이라는 쥐꼬리만한 벼슬을 할 때 얻은 마누라였기에 인물이나 여타의 면에서 류방이 황제로 등극한 뒤에 얻은 척부인에게 대면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남편인 류방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 하다 싶이 하니 려후인들 어찌 질투가 불붙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질투를 해도 너무 했다. 네 손발을 다 잘라 버린것도 성차지 않아 돼지굴에 처넣기까지 하다니…. 력사는 재연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우리는 강청을 현대의 려후(呂侯)라고들 하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강청이 장개석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모택동주석의 부인이라는 점은 려후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천하를 얻고 한나라라는 새로운 조대를 일으킨 한고조 류방의 부인이라는 점과 상당한 류사성이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리고 더욱 류사한 점은 강청이나 려후는 모두 정치야심이 크고 녀성 특유의 질투심도 대단하였다는 점에서도 서로 꼭 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당대 정치사에서 은 특기할만한 대사건이다. 이 와중에서 국가주석인 류소기의 부인 왕광미에 대한 강청의 질투가 을 더 한층 비극의 심연에로 끌고 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면 강청은 어떤 녀자인가? 강청(1913—1991)은 산동성 주청현 출신이다.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난 강청은 어려서 리혼한 어머니를 따라 천진의 담배공장에서 녀공으로 일한 경력도 있다. 1929년부터 자그마한 류랑극단에 들어가서 배우로 전전하다가 1934년부터는 상해에 들어가 영화배우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37년에는 일본군대가 점령한 상해를 탈출하여 연안으로 갔다. 연안 로신예술학원에서 모택동의 강의를 듣는 과정중에서 모택동과 접근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모택동과 부인인 하자진 사이에서 감정상의 갈등이 생긴 틈에 1939년 모택동과 동거하게 된다. 그러나 강청과 모택동의 부부관계는 명매정취(明媒正娶)의 관계가 아니였기에 강청은 오랫동안 합법적인 도경을 통해 맺어진 류소기와 왕광미의 관계처럼 공중들앞에서 떳떳할 수가 없었다. 해방후, 특히는 60년대이후 왕광미는 국가주석의 부인의 신분으로 늘 출국방문길에 올라 국제적인 뉴스인물로 부상하여 세계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였다. 워낙 자기가 해야 할 만인이 경모하는 제1부인의 행세를 왕광미가 하고 다니니 강청이 어찌 질투가 나지 않았으랴. 왕광미는 비단 외모가 강청을 추월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수준이나 덕성도 심지어는 가정출신마저도 강청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왕광미는 천진의 대부자집의 고명딸로서 부친은 일찍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농상부 공상사장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낸 분이다. 모친은 천진의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여나서 북양녀자사범대학을 졸업한 녀수재이다. 이런 훌륭한 가풍을 가진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왕광미는 천부마저 뛰여 나서 대학시절에는 수학녀왕으로 불리웠고 중국의 첫 원자물리학 녀석사졸업생이다. 게다가 류소기와는 찰떡궁합이여서 자식들을 줄느런히 두고 있기까지 하니 강청의 질투는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다. 왕광미에 대한 강청의 이런 질투가 문화혁명중에서 대단한 변수로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려후가 척부인을 박해한 것처럼 네 손발을 잘라내고 돼지굴에 처넣지는 않았지만, 강청과 그 일당들은 류소기를 박해해 죽이고 왕광미를 12년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었으니 그 질투심이 결코 려후에 비해 손색이 간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려후와 강청이 다른점은 그 끝장이 많이 다른 것이다. 즉 려후가 죽은 뒤에 류방의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강청의 경우에는 아직 퍼렇게 살아있는데 엽검영 등 로일대의 혁명가들이 일어나서 강청과 그 일당을 일거에 숙청한 것이다. 강청은 1976년 10월달에 감옥에 갇혀 사형 잡행유예 23년의 선고를 받았다가 1991년에 감옥에서 자살했다. 기자 양란(楊瀾)이 하고 물었을 때 왕광미의 대답은 생각밖으로 대답은 평담했다. 아마도 왕광미는 이미 녀인의 질투 같은 것은 초개같이 보는 초월적인 경지에 들어선 것 같았다. 1966년 왕광미가 아직 중남해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6세밖에 안되는 왕광미의 딸애에게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아동가요를 왕광미 앞에서 배워 주었다고 한다. 기자 양란이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물으니 왕광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에게 박해를 받아본 사람만이 궁지에 빠진 인간의 가련한 처지에 대하여 리해할수 있게 되는 법이다. 남을 용서해 줄줄 아는 그러한 너그로운 마음이 왕광미의 여생에 자유와 안녕을 가져가 준것 같다. 중앙령도간부들중에서 왕광미의 자식들만큼 잘된 자식들도 흔치 않다. 류소기의 원혼도 아마 구천에서 이 한점에 대해서만은 만족해 할것이다. 물론 왕광미가 강청이 죽었으니 말이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런 초연한 태도를 취할 수있었을까?녀권주의의 라 평가 받는 의 작자인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란 소설에서 녀자들 사이의 질투에 대해 그것을 녀자의 본능적인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 피에르와 그의 애인 프랑소아쯔는 동정심 때문에 크싸웨르라는 외성의 불쌍한 처녀를 자기들이 사는 집에 데리고 온다. 이 이녀일남 세 사람은 참신한 애정과 우정의 관계를 건립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래도 하모니를 이루는것 같던 에는 미구하여 차츰 비협화음이 끼여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두 녀인 사이에 질투가 생겨서 메울래야 메울수 없는 갈등의 곬이 패이기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나자 피에르는 참군하여 전선으로 나가고 집에 남은 두 녀인은 끝내 불구대천의 원쑤로 된다. 어느날 깊은 밤, 프랑소와쯔는 크싸웨르가 한창 자고 있는 침실에 가만히 들어와서 가스코크를 틀어 놓는다. 우리 민족의 속담에 남자를 두고 벌어진 녀자들사이의 질투와 싸움을 두고 는 말이 있지 않는가! 특히 녀자들의 질투는 흔히 살인을 부를 정도로 무서운 법이다.
37    (수필)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관한 명상 댓글:  조회:4718  추천:70  2006-04-06
(수필) 인간의 실존과 본질에 관한 명상 김관웅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온다. 코끼리부부한테서는 코가 길다란 새끼 코끼리가 나오고, 기린부부한테서는 목이 길다란 새끼 기린이 나온다. 백인부부한테서는 흰둥이 자식이 생겨나고, 흑인 부부한테서는 검둥이 자식이 생겨난다. 이는 만고불변의 유전학적인 법칙이다. 생물학적인 각도에서 볼 때 자연계나 인간계의 모든 물종이나 인종은 태여 나면서부터 본질이 주어지는 것이다. 본질이 존재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적 존재임과 동시에 문화적, 사회적 존재이다. 문화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문화적 및 사회적 본질에 대해 이상의 법칙을 가지고 론하는것은 언어도단이다.문화대혁명 초기 북경의 하룡(賀龍)원수의 아들 같은 일부 고위급 간부 자제들로 무어진 이란 홍위병조직에서는 라는 혈통론을 고취했다는 소문을 우리는 시골에서 전해 들었다. 솔직히 이에 반발하여 나는 반란파조직에 가담했었다.우리들이 소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는 과문에 의하면 하룡원수도 젊은 시절에는 한낱 호남 상서지방의 무지렁이 장사군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자기들은 룡이고 봉이고 할 수 있는가? 문화대혁명 초기에 극성을 떨었던 이른바 , 은 바로 는 어거지주장의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일 나는 중국력사를 공부하면서 봉건사회에 들어선후 중국농민봉기의 첫 두령이였던 진승이 밭두렁에 올라 서서 하고 소리쳤다는 말에 언제나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군 했다. 개혁개방이후 서양의 문학사조를 접하면서 나는 잡다한 문학류파들중에서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에 제일 큰 공명을 일으키군했다. 문화적인 차원에서 는것은 실존주의철학의 전제적인 명제이다. 인간은 나서부터 천생적으로 자기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의 각도에서 볼 때 인간은 한장의 백지장처럼 태여 난후 사회화하는 장구한 과정중에서 그 백지에 자기의 일생의 궤적을 그려 넣게 되고 따라서 점진적으로 자기의 본질을 형성해 가게 되는것이다. 인간은 태여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시각각 변화, 발전하는 과정중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고정불변의 본질이 없으며 그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력사적 조건과 그속에서 그가 처한 구체적 상황속에서의 그때 그때의 그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이 그때 그때의 그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 이런 까닭에 오직 죽어서 관속에 들어간 뒤에야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그 어떤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력사로 존재할 뿐이다. 일제식민지 시대를 살아왔던 리광수나 홍란파 같은 조선 현대문화의 거물급 명사들의 영욕이 점철된 애족과 매족의 전후의 변절과정을 돌이켜 보노라니 더욱 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된다. 금년(2002년) 3.1절을 계기로 하여 발표된 일제시기의 708명의의 친일파 명단과 요즘 인터넷의 문학 홈페지에 오른 전광(오성륜)의 흑(黑)과 백(白)처럼 선명한 일생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실존주의철학을 립증하는 증거이기라고 한 것 같다. 사실 영웅과 비겁쟁이도 인간의 선택하기 나름이다. 전광은 그야말로 오랫동안 일제와 중국의 반동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전설적인 영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일셍의 마지막의 선택에 의해 그는 비겁한 변절자와 일제의 주구로 전락했다. 좋은 시작보다 좋은 결말이 더 아름다움을 반증(反證)하는 좋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한번이나 두번 혹은 세네번의 옳바른 인생선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으나 한평생 그 어느 중대한 선택마저도 죄다 옳바르고 떳떳하게 할 수있겠는가 하는것을 나는 요즘 자꾸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임을 뼈저리게 느끼군 하는 것이 요즘의 나의 심경이다. 그래서 윤동주님도 은 아닐까?
36    (수필) 가난, 억압 그리고 사랑 댓글:  조회:4732  추천:54  2006-04-04
수필 가난, 억압 그리고 사랑 김 관 웅 우리 집 칠남일녀 팔남매중에서 이미 셋은 박사학위를 땄고 둘은 지금 박사학위를 따려고 국외에서 류학을 하고있는중이다. 말하자면 항렬로 셋째인 나와 넷째인 호웅이는 연변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땄고, 다섯째인 철웅이는 일본 고찌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땄으며, 여섯째인 영웅이와 일곱째인 정웅이는 각각 한국의 서울대학과 일본의 대학에서 채육학박사와 정치학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중이다. 한 로동자가정의 칠형제 대학생중에서 박사가 다섯이나 나왔다고 국내외의 신문, 방송이나 텔레비죤 기자들로부터 여러 번 인터뷰를 당하였었다. 그럴때마다 기자들이 이른바 《우리형제들이 성공한 비결》을 묻군했으며 또 그럴때마다 우리들은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하군했다. 지난 섣달그믐날에도 한국 KBS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역시 대답을 못해 우물우물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해놓은 일이 별로 없고 갈 길이 아직 멀고도 먼 우리 형제들을 두고 《성공했다》고 표현하는것은 당치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시점까지는 상대적으로 탈없이 잘 크고 공부를 열심히 해온 것만은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KBS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있은 뒤의 이 며 칠 동안에는 이른바 그 《성공의 비결》에 대해 여러 모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집은 결코 세세대대의 학문적인 전통이 있는 선비집안도, 돈 많은 부자집안도, 떵떵거리는 고위급간부집안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은 결코 남보다 뛰여 난 머리를 타고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성공의 비결》을 억지로 총화를 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아니겠는가고 귀결해 본다.첫째는 건강한 몸, 둘째는 가난했던 가정살림, 셋째는 정치적인 억압과 그에 따르는 심리적 고통, 네째는 부모형제들 사이의 뜨거운 사랑바로 이 네 가지 조건이 주어졌기에 우리 형제들은 그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배움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은것 같다. 금년에 85세인 나의 부친은 지금도 저전거를 씽씽 타고 다닐만큼 근력이 좋으시다. 젊은 시절에는 위만주국 전국 자전거 전능우승을 련거퍼 3년이나 확보한 챔피언이였으며 위만주국에서 선정한 1940년 동경올림픽의 종자손수였다. 물론 이것은 그 무슨 나라에서 의도적으로 양성해서가 아니라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의 약배달부로 어려서부터 자전거를 익힌 덕분이였고 타고난 건장한 체질 덕분이였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칠형제에게 준 가장 귀중한 유산은 건강한 몸이였다. 하기에 우리 칠형제들은 그 엄혹한 가난의 시련속에서도 감기 한번 크게 앓지 않으면서 몇 십 년을 하루와 같이 학업에 정진할수 있게 되였다. 병들고 벌레 먹은 꽃나무가지에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만개할수 없듯이 병치레만 하는 집안에서 심신이 건강한 자식들이 속출할수 없음은 정해진 리치가 아니겠는가. 나의 부친은 조실부모하고 소학교문전에도 다보지 못하고 사회의 최하층에서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노가다판의 뜨내기로, 료리집의 심부름꾼으로, 약방의 약배달부로 그야말로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셨다. 일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위만군 운수부대에 들어가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운 것이 밑천이 되여 평생의 밥통으로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죄로 되여 해방후 계급투쟁을 기본으로 했던 수 십년 동안의 세월속에서는 혹독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만 했으며 우리 팔남매에게까지 련루되였다. 남들이 다 드는 소선대나 공청단 심지어는 홍위병이나 홍소병에마저 들여주지 않고 성적이 높아도 제가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수 없는 억울함으로 인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심리적 고통을 우리 형제들은 너무도 일찍이 또 너무도 많이 당해 보았다. 그때는 이 모든 것들이 죄다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역경은 사실 우리 칠형제의 의지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아주는 숫돌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 칠형제들은 그 계급투쟁의 엄동설한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얻었다. 온실의 꽃들은 온실밖으로 나와 한번 서리바람을 만나게 되면 그 순간에 죽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엄동의 시련을 겪은 풀들은 봄이 돌아오면 소생하게 되는 법이다. 우리 칠형제는 극좌로선이 살판치던 정치적인 겨울을 이겨낸 자그마한 일곱 포기의 야초에 비길 수 있다.싸움이 없는 곳에 승리가 없듯이 시련이 없는 곳에 값진 성공은 있을 수 없다. 복(福)은 쌍으로 오지 않지만 화(禍)는 흔히 쌍으로 겹쳐서 온다. 우리 집은 부친의 70원 남짓한 월급으로 열 식구의 입을 막아야 했다. 6억 인구에서 3천만명이 굶어죽은 지난 세기 60년대초에 우리 집 열 식구중에 한명도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로 인한 간염같은 병에도 걸리지 않고 전원이 무사했다는 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수 없다. 부모가 주신 건강한 몸과 부모님들의 눈물 나는 자식사랑이 우리들을 살려냈다. 어머니는 연길시 근교의 모아산 등지의 후미진 산자락에 가만히 밭을 일구어 열콩, 옥수수, 감자같은 것을 심어 식량을 보태였고 철따라 산에 가서 산나물 뜯어다 반찬감을 마련했으며, 가을이면 우리 형제들을 이끌고 콩이삭, 벼이삭, 감자이삭, 고구마이삭 줍기에 나섰다. 겨울철이면 복장공장으로부터 단추구멍 틀고 휘갑을 감치고 실밥을 따는 등 바느질감을 목이 부러지게 이여다가는 밤늦도록 삯바느질로 푼전을 벌기도 하시였다. 그때 우리 팔남매는 모두 한창 자랄고비인지라 언제나 허기진 배를 가누기 어렵던 때였다. 하루 세끼 돌이라도 삭이는 우리 팔남매에게 시래기를 가득 썰어 넣은 콩장이나 호박풀데기죽이나마 건데기로 퍼주고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허여멀건 국물이나 철없는 우리들이욕심을 부려서 먹다가 남긴 것이나 거두어 자시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시군 했다. 그때 나는 열서너 살이여서 지각이 전혀 없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배를 주리는 줄 알면서도 그나마 얌얌해서 제 몫은 다 먹고는 어머니에게 약간이나마 남겨진 국물마저 훌훌 빼앗아 먹어 버리는 얌체 짓을 저지르 군 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하루는 갑자기 마당에서 졸도하여 들것에 실려 연변병원 구급실에 옮겨지는 장면을 울면서 따라가서 지켜본 후에야 차츰 이런 얌체 짓을 하지 않게 되였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담배와 술도 끊으시고 한평생 반반한 양복 한 벌 입어 보시지 못하고 우리 형제들의 공부 뒤바라지에 모든 정성을 쏟으셨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을 먹고 자라났다. 정작 먹을 것이 떨어져도 우리 집에는 언제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일 줄 몰랐으며 엄혹한 정치적 억압이 몇십년 계속되여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학교에서 소외당하고는 울면서 하소연하는 우리들을 부등켜 안고 통곡하시다가도 옥수수죽이나마 대수 요기하시고는 언제 통곡하셨더냐듯이 전등불밑에 쪼크리고 앉아 밤새도록 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였다. 그러면 철든 형님과 누나는 어머니를 위로하려는 마음에서 밤늦도록 실밥을 따고 단추구멍을 틀면서 어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우리집 부모형제들은 바로 이렇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 기나긴 가난과 정치적인 억업을 이겨내 왔다. 집살림이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업당하기만 해서도 안된다. 가난과 억압이 있으면서도 부모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의 후더운 정이 흘러 넘쳐야만 자식들이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다. 가난과 억압만 있으면 쭈그러든다. 곱다곱다 어루만지기 하면 자식들은 버릇이 고약해지고 의지가 약해진다. 잘 먹고 잘 입어서 키는 장대처럼 크고 인물도 희여멀끔하지만 철이 들지 않고 응석이 데룽데룽 달린 나의 자식들을 보면서 나는 늘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바꾼다》는 우리 속담을 되뇌이군 한다. 물질적인 가난과 정신적인 고통은 사랑과잉으로 자라나는 요즘의 신세대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35    (수상록) 기다려지는 토요일 등산 댓글:  조회:4356  추천:44  2006-03-30
수상록 기다려지는 토요일 등산 김 관 웅 오늘은 등산날이다. 하루라도 본연의 나를 찾을 수 있는 날이여서 기다려지는 날이다. 자기의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게 인생인데 등산날만은 자기의 마음대로 사는것 같은 착각을 주는 날이여서 귀중하다. 내가 등산날을 기디리듯이 아마도 다른 분들도 모두들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을것이다. 기다림은 고통스럽고도 행복한 일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기디림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베케트의 부조리극 에서처럼 인간은 기다리는 대상과 영원히 만날 수 없으면서 숙명적으로 기다리면서 사는가 본다. 인생의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살아 가야 할것이다. 오늘 등산의 행선지는 연집 남계골안으로 해서 뻗은 골짜기 웃자락의 무명의 봉우리...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길에서 고사리, 기름고비, 미나리를 캐면서 고 읊었던 도연명 같은 은사(隱士)가 된 기분이였다. 잡놈들이 들끓는 속세를 떠나서 단 하루라도 때묻지 않은 친구들과 청정한 자연속에서 거닐수 있는게 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는지 모른다. 우주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티끌의 티끌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희로애락, 애욕의 오정육감을 지닌 우리 인간들이 속세에 몸을 담기만 하면 피치 못하게 타인들과 싸우고 질투하고 걸리고 걸면서 티끌 먼지 이는 속세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살겠다고 아등바등 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싸우고 인간과 싸우는 그 재미가 무궁하다고 한 모택동의 말도 얼마간 리해가 된다. 인간은 이처럼 속세를 둘러싸고 초월과 일탈의 욕구만 지니고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 침잠의 욕구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법이다. 수리개처럼 창공을 높이 높이 치솟아 올라 오연히 날아예고도 싶고 메돼지처럼 먹고 살겠다고 땅을 뚜지고 산속을 쏘다니면서 천적을 만나면 윽윽거리고 삐죽한 주둥이와 이빨로 떠박아 넘기려고도 하고 싶은 충동을 지니고 살아 가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34    (단상) 수필과 거울 댓글:  조회:4417  추천:48  2006-03-23
☆단상☆ 수필과 거울 김 관 웅 나에게 있어서 수필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독자들에게, 젊은 후진들에게 문학이나 철학의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메가폰이기도 하고, 우주와 인생에 대한 나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대화의 수단이기도 하고, 또 사회의 부조리를 까밝히고 비판하는 투창이나 비수 같은 무기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수필은 또 나 자신을 비추어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수필의 이상의 여러 가지 기능들 중에서 이 마지막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허구를 허용하는 소설이나 여러 가지 표현기법을 활용하여 갖은 재주를 다 피우는 시에 비해 수필의 주인공은 영원히 남이 아닌 나요, 또 작자인 나의 개성이 적라라하게 드러나야만 수필로서 매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수필이 은페하거나 모호성 속에 가릴 수도 있는 기교적 장치를 지니지 않고 드러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격이 도야(陶冶)되고 개성이 멋들어서 품위 있는 김학철 선생 같은 분의 글은 개성이 로출된다고 하여 나쁠게 하나도 없지만, 아직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천박한 나 같은 사람의 글에서는 개성의 로출이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거울 앞에 앉히고 자기의 성격적이거나 인격적인 결함을 바라보고 또 드러내는 글을 쓸 엄두를 감히 내지도 못했다. 남들앞에서 자기의 유식함을 자랑하거나 자기가 아닌 사회에 대해 비판의 투창을 날리기는 쉽지만 거울에 비낀 자신의 추한 모습을 정시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고 그렇게 개운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서 스스로 자기를 미추(美醜)을 가늠해보기 위하여 방안에서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나, 자기의 《심적 라상(心的裸像)》을 수많은 독자들앞에 적라라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고 했고, 중국의 옛 사람들도 《인간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은 자기를 아는 명석함이 있는 것이다(人貴有自知之明)》라고 했으리라. 나는 2년 전 심심풀이로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내가 운영하고 있는 문학 홈페지에다 회상록을 시리즈로 올려보았다. 그중에서 《나의 카인콤플렉스》라는 나의 심적 라상 드러낸 보인 글 한편을 《도라지》에 보냈고, 그 글이 미구에 실리게 되였는데 독자들로부터 나의 자기 드러내기의 솔직성에 찬사를 보내는 이메일편지들을 적잖게 받았다. 나는 이로부터 수필은 자기의 심적 라상을 솔직하게 드러낼 때야만 독자들의 공명대(共鳴帶)를 울려놓는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였다. 그래서 앞으로 남보다는 자기를 엄하게 해부하는 수필들을 많이 써보려는 생각을 그때부터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루쏘의 《참회록》이나 파금의 《수상록》처럼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는 용단은 그리 쉽게 내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은 나에게 있어서는 갈수록 심산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수필 쓰기가 점점 두려워지고 점점 어려워짐을 절실하게 느낀다. 내 마음의 창문을 열어서 독자들에게 모든 것을 진솔하게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또 그래서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감동적인 수필을 정말로 써낼 수 있겠는가 늘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전전긍긍 수필을 써가는 요즈음이다. 내게 있어서 수필이란 내 자신의 《심적 라상(心的裸像)》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라는 것을 리성적으로는 분명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 2005년 12월 6일 연길 자택에서
33    (단평) 김치담그기와 수필쓰기 댓글:  조회:5104  추천:67  2006-02-26
☆단평☆ 김치담그기와 수필쓰기 김 관 웅 배추김치의 맛을 좌우하는 것은 우선 배추김치를 만드는 재료의 근본인 배추의 품질에 의해 좌우된다. 이밖에도 좋은 고추, 마늘, 생강, 젓갈류 등 배추김치를 담그는 데에 소요(所要)되는 기타 자료의 품질도 아주 중요하다. 화학비료를 가득 쳐서 재배한 배추는 인체에 안 좋을 뿐만 아니라 달지도 않다. 앓지 않는 청정한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가 최상이다. 기타 재료도 마찬가지다. 수필쓰기도 마찬가지다. 우선은 수필의 재료인 글감(소재)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띠고 개성적이고 참신해야 한다. 가장 좋기는 자기의 체험에서 얻어낸 글감이 최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앓지 않는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만일 자기의 체험과는 관계가 없는 남의 얘기거나 또는 체험과는 관계가 다소 있다고 하더라도 거짓을 뒤섞은 얘기라면 마치도 《화학비료를 가득 쳐서 재배한 배추》같은 수필의 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우리 수필들을 둘러보면 소재의 선택에서 문제가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흔히 오늘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절실한 체험이 아니라 그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들을 글감으로 선택하여 아프지도 가렵지도 수필을 만든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준 것은 류광철의 근작수필 《수캐와 나》이다. 이 수필은 자신이 8년동안이나 겪어오고있는 기러기아빠의 아픔과 고독과 슬픔을 우리민족의 많은 부부리산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수많은 중장년부부들의 보편적인 아픔과 고독과 슬픔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커다란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마디로 이 작품이 성공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 로 재배한 배추》같은 진실성, 보편성, 개인성을 두루 갖춘 훌륭한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배추김치는 재료만 좋아서 좋은 맛을 내는 것은 아니다. 담그기도 잘 해야 한다. 김장철에 김치 담글 때 처음에 나서는 가장 관건은 초절이를 할 때 소금을 얼마 뿌리는가 하는 것이다. 깨끗이 다듬고 물에 잘 씻은 배추에다 소금을 너무 적게 뿌려 넣으면 초절이가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소금을 너무 많이 뿌려 넣으면 마치도 끓는 물에 데쳐놓은 시래기처럼 다 죽어버리게 된다. 소금을 적당히 쳐야 배추가 적당하게 절여지면서도 사각사각한 신선도를 보전할수 있다. 초절이가 잘 되여도 배추를 버무려넣을 때 양념장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김치가 너무 짜고 양념장에 소금을 너무 적게 넣어도 김치가 너무 싱거워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글쓰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마치도 김치 담그는 데 있어서의 소금과도 같은 존재로서 소금과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너무 적어서 사상이나 철학이 빈약한 글은 절대 상품(上品)으로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과잉된 글은 마치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까닭에 김치가 너무 짜서 잘 익지를 않고 또 그래서 김치가 맛이 없는 것처럼 역시 상품(上品)으로 될 수 없다. 김치를 담는데 있어서 소금을 적절히 넣는 것만 요긴한 것이 아니다. 초절이를 한 김치포기마다에 버무려넣을 양념장에 들어가는 각종 재료의 비례가 적절해야할 뿐만 아니라 소금도 적당히 넣어야 한다. 양념장에 새우젓이나 꼴뚜기젓 같은 동물성 재료를 넣으면 좋다고 하여 너무 많이 넣으면 오히려 김치가 비릿하여 상큼하고 시원한 맛을 살릴 수 없고,마늘이나 고추의 비례가 너무 많으면 쉽게 배추를 상하게 하거나 너무 매워서 먹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다른 양념의 재료도 비례를 적당하게 넣어야 함은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양념장은 당한 비례를 좇아야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는 것이다. 김치를 담그는데 있어서 양념장은 마치도 글을 쓰는데 있어서의 고사, 성구나 격언, 속담 등의 인용에 비길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고사, 성구나 격언, 속담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람용하거나 과도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글의 맛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문단의 일부 문인들의 글을 보면 자기의 체험이나 그것에 대한 감수나 느낌은 극히 적고 대부분 지나간 고금중외의 력사나 고사, 성구들을 무절제하게 끌어들여 자기의 글을 장식하고 있는 폐단이 있다. 중국 송나라시기의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무일자무래처(無一字無來處)》, 《점철성금(点鐵成金)》은 당나라시기에 많은 시인들이 숱한 좋은 시들을 이미 써놓아 그것을 초월하기 어려운 상황하에서 그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 책략으로서 당시에는 일정한 영향을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고사, 성구, 격언, 속담이나 남의 시구들을 작품속에 끌어들이는 바람에 창의성을 잃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청신한 시의 맛을 잃어버렸다. 마치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양념장을 너무 버무려 넣어 김치가 사각사삭하고 시원하고 상큼한 맛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용전(用典)을 많이 하면 독자와 작품사이에는 무언9無言)의 장벽이 가로 막히게 된다. 이런 작자들은 자기의 심오하고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것으로 여길지는 모르지만 독자들은 그것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중국문론에서는《격(隔)》과 《불격(不隔)》이라는 미학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른바 《격(隔)》이란 작품의 감상과정에서 작품과 독자사이에 간극이 생김을 의미하고 불격(不隔)》이란 작품의 감상과정에서 작품과 독자사이에 간극이 생기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격(格)》하기보다는《불격(不隔)》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문학은 본질상에서 작자가 자기 만들어낸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난해하거나 난삽한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을 무절제하게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은 마치도 대화에서 대방이 알아 못 듣는 말이나 듣기 싫어하는 말을 그냥 해대는 것은 실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문학작품에 대한 감상은 흔히 직각(直覺)적이고 즉흥적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독자들은 자기가 모를 난해하고 난삽한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이 갈피갈피에 끼여 있으면 오리무중에 빠져 짜증을 내거나 독서를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흔히는 평이하고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작자가 말하고 하는 바를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필에서는 더욱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한 때는 남이 잘 모르는 고사, 성구, 격언, 속담들을 대량적으로 인용하면 좋은 글이 되는 줄로 착각하여 왔었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안지는 별로 오래지 않다. 《대자연속에서 무공해농법으로 재배한 배추》에 맞춤하게 소금을 뿌리고 맞춤하게 양념장을 버무려넣어, 잘 익은 맛있는 배추김치를 만들듯이 앞으로는 가급적이면 자기의 일을 자연스러운 자기말로 올곧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맛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 2006년 2월 24일 연길에서
32    (문학)《강아지파》와 《도깨비파》 댓글:  조회:4459  추천:45  2006-02-26
《강아지파》와 《도깨비파》 김관웅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나의 임금 환공은 당시 제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공(畵工)을 불러서 그림그리기에 대해 의론하게 되였는데, 먼저 환공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이 나라에서 제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이 세상 만물가운데서 무엇을 그리기 제일 어려운고? 》 이에 그 화공이 다음과 같이 아뢰였다. 《강아지나 송아지나 망아지 같은 것을 그리기 제일로 어렵사옵니다》 이 대답에 환공은 의아쩍게 여기면서 되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강아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익숙히 보아왔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니 좀만 틀리게 그려도 누구나 다 흉허물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래서 자연히 제일로 그리기 어려운 것들이옵니다. 》 환공이 들어보니 사리에 맞는 말이라 또 다른 문제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만물 중에서 무엇을 그리기 제일 쉬운고?》 이 물음에 화공은 아무런 사색도 없이 대뜸 입을 열었다. 《귀신이나 도깨비가 제일로 그리기 쉽사옵니다.》 이 대답에 환공은 역시 의아쩍게 여기면서 되물었다. 《그건 왜 그런고?》 이에 화공은 다음과 같이 아뢰였다. 《귀신이나 도깨비나 허깨비는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 않사옵니까?》 《그래 그렇지.》 《그러하오니 이 세상에 귀신이나 도깨비를 본 사람이 사실은 없사옵니다. 꿈속에나 보았겠지요. 누구도 보지도 못한 도깨비는 아무렇게나 그려도 되옵니다.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도 되고, 둘이 달려도 되고 백개가 달려도 무방하옵니다. 또 형체가 있어도 되고 형체가 없어도 되옵니다. 한마디로 아무렇게나 상상을 해서 그려도 누가 틀리게 그렸다고 할 사람은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그리기가 아주 쉽사옵니다.》 이 말에도 환공은 머리를 끄덕이였다고 한다. 이 고사(故事)가 어찌 회화에만 국한되는 얘기이겠는가. 문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상하고 해괴한 이른바 《파격적인 이미지》, 《낯선 이미지》만들어내는 시작업은 마치도 화공이 귀신이나 도깨비나 허깨비를 그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초현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꿈이나 광기, 환각》등 무의식세계를 자동기술법에 의해 마음대로 그려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미친 생각, 허튼 생각들을 아무런 예술적 가공도 없이 자동적으로 기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깐. 그리고 한때는 미국의 선봉파들이 고양이 앞발에 붓을 비끌어 매여주면 고양이가 즉흥적으로 마구 찍어놓고 오려놓은 그림들을 명화라고 버젓이 갤러리에 전시를 해놓기도 하였으니깐. 사실 이런 미친 자들의 이른바 《예술실험》들은 이미 한물 갔다. 필자는 이런 황당한 예술적 추구를 하는 자들을 일러《도깨비류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러나 예술사나 문학사에 오랜 예술적 생명력을 가진 작품들을 창작해낸 사람들은 대부분 제나라 화공의 말처럼 《강아지나 송아지나 망아지 같은 것을 그렸다.》 다른 실례는 그만두고 한국의 현대시문학의 력사만 대충 둘러보아도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시적인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오히려 오래오래 독자들속에서 사랑를 받아왔음을 잘 알 수 있다. 한룡운의 《나루배와 행인》,《님의 침묵》 이나 김소월의 《진달래》나 《접동새》, 정지용의 《향수》,《파도·2》로부터 당대의 서정주의《국화꽃이 필때까지》나 김수영의 《풀》이나《폭포》, 구상의 《초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늘 가깝게 보고 평범한 소재를 취해서 이미지화를 했음을 알수있다. 그중 김수영의《풀》과 《폭포》 보기로 하자.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 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전문 (1968년, 현대문학)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가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을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김수영 《폭포》김수영의 《폭포》는 정치적인 시로도 볼 수 있고 시인의 억압된 리비도가 시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상황에 대한 분노로 환치되여 표현된 《은폐적 대리배설》의 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씌여진 1960년의 4.19혁명 전야의 1950년대 후반의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할 때 으로부터 정치적인 성향이 강한 상징시라고 볼 수 있다. 《폭포》는 곧 《민중》을 가리키는 것이며, 《무서운 가색도 없이 떨어진다》는 표현은 민중이 집단적으로 뭉쳐 군중심리에 편승했을 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집단행동은《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된다. 하지만 그 물결은 결국 《고매한 정신》이 되여 정의의 편에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이다.평소에 잠복되여 있던 민중의 힘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다. 밤에는 실제로 모든 소리가 특별히 크게 들리는데, 기차의 기적소리라든지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특히 그렇다. 여기서 《밤》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어둡고 막막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하에서 민중의 힘은 《곧은 소리를 내며》떨어지는 것이다. 곧은 소리는 곧 정의 소리이며, 《민심이 천심이다》라고 했을 때의 《천심》이다. 힘은 곧 정의요, 힘은 힘을 부른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가 의미하는 것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의 파급효과라고 하겠다.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통해 프랑스혁명 때 파리시내를 뒤덮은 데모군중이라든지, 4.19때 서울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모대의 행렬 같은 것을 련상할 수 있다. 이런 시들은 비록 가장 평이한 소재를 다루었고 따라서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않은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엄청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김수영 같은 시인들을 《강아지류파》라고 명명하고 싶다. 우리문단의 시인들속에는 《도깨비류파》도 있지만 《강아지류파》도 있다. 필자는 그래도 《강아지류파》가 시문학의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도깨비류파》에 미혹된 일부 문학신인들은 그 동기는 아름답기 때문에 비록 《도깨비류파》의 현란하고 또 그래서 선동적인 선전에 잠시 귀가 솔깃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문학의 정도에로 되돌아 설것이라고 믿는다. 2006.2.24일 연길 자택에서
31    (수필)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부르노와 갈릴레이 댓글:  조회:4030  추천:38  2006-02-16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부르노와 갈릴레이 김관웅 위대한 진리의 발견자-- 코페르니쿠스 구라파는 1300년의 기나긴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거쳐서 끝내 문예부흥이라는 《가장 위대하고 진보적인 변혁의 시대》를 맞아오게 되였다. 뽈스까의 천문학가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이 위대한 시대의 거인중의 하나이다.그는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천체운행》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종교신학의 이른바 《지구중심설》을 뒤엎고 《태양중심설》을 창립하였다. 물론 그가 생각했던 태양계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있는 태양계는 아니였다. 즉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있었다.그러나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고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가지고있던 중세기적우주관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놓은 완전한 변혁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이 우주관의 변혁을 흔히 《코페르니쿠스혁명》이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위대한 진리의 발견이였던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기까지 코페르니쿠스는 수많은 관찰과 연구를 거듭하였고 그 연구성과는 교회의 봉쇄로 말미암아 그가 림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간행되였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이 위대한 진리의 발견은 교회로부터의 거듭되는 공격을 받았는데, 심지어는 저명한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마저도 그를 《미치광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구약》의 신조를 인용하여 그의 《태양중심설》을 반대했다.이처럼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아주 험난하고 어려운 법이다. 용감한 진리의 수호자 -- 부르노 이딸리아의 천문학자 부르노(1548--1600)는 워낙 천주교의 신부였으나 나중에는 천주교를 맞서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키였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견지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용감한 진리의 수호자이다. 그는 우주는 무한하고 태양계는 무한한 우주중의 하나의 천체계통에 지나지 않으며 태양은 움직이지않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기타 행성사이의 위치는 부단히 변동된다고 인정했다. 그는 다만 학술적으로 천주교의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고 《태양중심설》을 발전시키는데 그친것이 아니라 광명은 반드시 암흑을 전승하리라는것을 굳게 믿고 중세기의 미신과 종교의 암흑한 통치를 소멸하기 위해 일떠나 싸워야 한다고 대중들에게 호소했다.결국은 로마종교재판소에 의해 체포되였고 로마교황청의 감옥에 갇혔다. 8년동안의 옥살이를 하면서 갖은 박해와 시달림을 당했으나 조금도 초지를 굽히지 않고 종교와 투쟁하고 진리를 견지하였다. 1600년 2월 27일, 로마교황청에서는 마지막으로 참회하고 신념을 포기할것을 요구했지만 부르노는 진리를 포기하고 목숨을 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52세를 일기로 로마의 생화광장에서 불에 타 죽는 순간까지도 부르노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르노가 화형을 당한뒤 300년이 지난 1889년, 이딸리아인민들은 세계천주교의 대본영인 바티칸교황청 청사의 의 맞은편에 부르노의 동상을 세워 목숨을 던져가면서도 진리를 지키고 견지한 부르노의 고매한 넋을 기리였다.이처럼 진리를 지키고 견지하는 길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보다 더 험난하고 어려울수도 있는것이다. 굴절적인 진리의 수호자 -- 갈릴레이 이딸리아의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1564--1642)는 필생의 정력으로 자연괴학의 부흥을 위해 길을 개척한 근대자연과학의 정초자이다. 부르노가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한데 반하여 갈릴레이는 자기가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의 객관적진리성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였다. 그는 그래도 오래동안 공개적으로 《태양중심설》을 선전하고 견지하여 왔지만 정작 진리와 목숨이라는 이 량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해서는 부르노처럼 용감하지는 못했다. 1616년 3월 26일, 로마종교재판소에서 엄한 징벌로 위협을 하게 되자 갈릴레이는 자신의 전부의 원고들을 보전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포기한다고 싸인하였다. 물론 내심속으로는 진리를 포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연구활동을 암암리에 계속 진척시켜 나아갔다. 1632년 2월에 로마종교재판소에서는 재차 갈릴레이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당당하게 맞섰으나 형벌이 혹심해지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68세의 고령이였음에도 갈릴레이는 진리보다는 목숨을 선택했다. 아마도 부르노의 비참한 최후가 갈릴레이의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준것이였다. 그리하여 갈릴레이는 친구들의 권유와 외동딸의 애원하에서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목숨을 보존하였던것이다. 갈릴레이는 미네르와산정에 있는 성마리아성당에 압송되여 핍박에 하는수없이 꿇어엎드려 참회를 한후 일어나면서 이렇게 입속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암, 지구는 이 시각에도 태양을 에워싸고 돌고있고말고!》 후에 사회의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백방으로 갈릴레이를 옥에서 구출하는 활동을 벌린 덕분에 가석방되여 플로렌스의 집에 돌아왔으나 갈릴레이는 연금되여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여전히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자기의 연구성과들을 가만히 국외에 빼돌려 출판하였다. 후에 갈릴레이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이 요절하는 바람에 정신상에서 큰 타격을 받고 종일 비애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두눈마저 실명되였으며, 1642년에 78세를 일기로 험난한 진리탐구의 한생을 마쳤다. 갈릴레이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박해는 죽은 후에도 계속되였는데, 공식적으로 장례를 지내는 일도, 심지어는 묘비를 세우는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죽은뒤 3백년도 더 지난 뒤인 1980년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황은 세계주교회의에서 갈릴레이의 이 억울한 안건을 다시 심사하는게 어떤가 제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의 유명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휘원회는 참다운 심사를 거친뒤 갈릴레이의 무죄함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때로는 허리를 굽히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기도 했던 갈리레이의 굴절적인 일생을 통해서도 역시 진리를 발견하는 길보다 진리를 지키고 견지하는 길이 더 험난하고 어려울수도 있음을 알수 있지 않는가. 이 어찌 과학분야에만 국한되는 일이며, 이 어찌 옛날에만 국한되는 일이겠는가!!!
30    商業炒作과 요즈음의 文學評論 댓글:  조회:3470  추천:62  2006-02-15
☆단평☆ 商業炒作과 요즈음의 文學評論 김 관 웅 1990년대 중반에 산동성 곡부지구의 이름 없는, 자그만한 양조장에서 《孔府宴酒》라는 술을 만들어 내여 수억의 돈을 쏟아부어 중앙 제1 TV에서 련속 2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광고를 때렸다. 그 광고는 매일 저녁 황금시간에 이렇게 방송되였다. 《공부연주를 마시며 천하의 문장을 쓰도다!(喝孔府宴酒, 作天下文章!)》 이 상업광고 덕분에 《孔府宴酒》의 인기는 대단했고 산동성 곡부지구의 이름 없는, 자그만한 양조장은 한동안 떼돈을 벌기도 했다. 李太白이 《한 말의 술을 먹고 백편의 시를 썼다(斗酒詩百篇)》고 하니 酒客들이 《孔府宴酒》를 마시면 리태백이라도 되는가 여겼던지 한 때는 연길에서도 이 《孔府宴酒》가 불티나게 팔린 적이 있다. 孔孟之道의 영향이 깊은 한국인들은 《孔府宴酒》, 공자가문의 연회에서 마시던 술이라는 이 현란한 이름에 현혹되여 맛도 모르고 《孔府宴酒》를 선물하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짜는 가짜일 따름이다. 가짜는 영원히 호황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거퍼 10년도 안 지나서 《孔府宴酒》에 떠 있던 거품은 가라앉고 《孔府宴酒》는 사람들의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孔府宴酒》를 만들었던 그 양조장은 거의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소를 넣은 알락달락한 고무풍선도 마찬가지다. 손에 쥐였던 고무풍선을 놓으면 화려하게 하늘로 잘도 올라간다. 하지만 일정한 하늘 높이까지 올라가면 팡 터져서 그 잔해들이 땅바닥으로 추락되고 만다.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다. 요즈음 문단의 상황을 볼것 같으면 사상예술성이 별 볼일이 없는 작품일지라도 평론가들이 분에 넘치게 칭찬을 해대고 떠들썩하게 홍보를 하게 되면 일약 《명작》으로 둔갑을 하여 여러 가지 현란한 문학상도 받게되고 그 작자는 문학의 월계관을 쓰고 으시댈수도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것을 두고 商業炒作이라고 한다. 이 상업화의 시대에 문학이 商道를 따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商業炒作은 시간의 고험은 겪어내지 못하는 법이다. 그 작자의 벼슬이나 돈줄이나 파워가 사라지면 그《명작》우에 떠있던 거품도 자연히 걷혀지게 되는 법이다. 《위조명작》, 《고무풍선 식 명작》을 만드는데 가장 많이 동원되는 사람들이 바로 어용(御用)평론가들이 아니라 상용(商用)평론가들이다. 어용평론가는 임금을 위해 평론을 하니 그래도 품위는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상용평론가는 돈이 많거나 속세의 권세가 있는 사람을 위해 평론을 하니 그 품위가 낮다. 돈을 준다면, 실리가 있다면 남의 장례집에 가서 상주(喪主) 대신 어이어이 곡(哭)이라도 할 그런 위인들이 바로 상용(商用)평론가들이다. 우리 연변에는 그런 상용평론들이 적지 않다. 정치돌출의 문화혁명 때는 三突出을 칭찬해 대면서 정치기류를 바싹 따르더니 요즈음 상업화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상업기류를 바싹 따라 장사군들의 사인비서나 파워 있는 문단거두들의 吹鼓手로 탈바꿈하여 버렸다. 고약한 것은 이런 상용평론가들이 속으로는 뻔해 가지고도 입으로는 찬송가를 불러댄다는 것이다.두말할 것 없이 먹을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용평론가들을 보면 련상되는 것이 바로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江山易改, 本性難移)》는 말이다. 리백이나 두보 같은 이들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명작으로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은 결코 작자 당대에 작자 자신의 조작에 의해, 상용평론가들의 商業炒作식 평론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어제 저녁 한 선배님의 사무실에 갔다가 우리 문단의 한 시인의 시작에 대한 시평집을 얻어다가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어서 이렇게 간단히 적는다. 2006.2.15 연길 자택에서
29    (단상)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댓글:  조회:3506  추천:61  2006-02-13
☆단상☆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김 관 웅 남의 집 잔치에 가서는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가 떡이나 먹고 오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손님임을 망각하고 남의 집 잔치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면 그건 싱거운 짓이다. 자칫하다가는 떡도 못 얻어먹고 빈축만 사게 된다. 개의 직분은 집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의 직분까지도 맡아서 쥐잡이까지 하다가는 자칫 장독이나 쌀독을 깨여 주인의 부지깽이에 얻어맞을 수도 있다. 고생을 하고도 고맙다는 소리커녕 물매만 맞아대기 십상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천하를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라(天下爲己任)》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또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도모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謀其政)》는 고훈(古訓)도 있다. 정치에 참여하더라도 자기 분수에 맞게 정치참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금이 할 말이 있고, 정승이 할 말이 있고, 대신이 할 말이 있고, 민초들이 할 말이 각 각 따로 있는 법이다. 정승이 임금의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대신이 정승이 할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민초들이 대신이 할 말을 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횡설수설 입방아를 찧다가는 기필코 그 《입덕》을 입어 경하면 정배를 가고 중하면 목을 잘릴 수도 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설쳐대는 친구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인다. 자기 집 일도 코 막고 답답한데 남의 집 대(大) 정치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남의 집 정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남의 집 대 정치 때문에 저희들끼리 밀고, 공격 등 각가지 비루한 작태를 다 보이면서 물고 뜯는 니전투구의 혼전을 벌리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짓거리이다. 병술 년부터는 다들 자기 집 앞의 일이나 착실히 해가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부터는 다들 남의 집 잔치에 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망발들은 좀 작작 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부터는 다들 쥐잡이 나선 개처럼 싱거운 짓거리들을 좀 작작하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병술년 2월 10일 자택에서
28    (단상) 고슴도치 같은 인간들 댓글:  조회:3365  추천:65  2006-02-13
고슴도치 같은 인간들 김관웅 독일의 철학가 니체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동굴속에서 추운 겨울을 함께 나는 고슴도치들에 비긴적이 있다. A, B, C, D, E, F, G…..한 무리의 고슴도치들이 동굴속에서 함께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고슴도치들은 여타의 짐승들과 달리 온 몸에 송곳 같은 가시가 가득 돋쳐있는 까닭에 서로간에 찔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은 부들 부들 떨다 보면 추위를 견디지 못해 너도나도 오그작작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지면 서로 대방의 가시털들에 몸을 찔리게 되는법이다. 그러면 삽시에 고슴도치들은 서로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흩어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대방의 가시털들을 경계한다는것이다. 이처럼 고슴도치들은 온 겨울 내내 모였다 흩어졌다 하면서 집합(集合)과 리산(離散)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서로간에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고독하고 외롭고 힘들다 보면 서로 모이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무슨 무슨 조직체나 동아리들을 만들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한참 가까이 상종하다 보면 서로간에 리익의 충돌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리익의 충돌은 반목과 질시로 이어지고, 그 반목과 질시가 도를 넘으면 생사박투에까지 치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는 우리 속담이 시사해 주다 싶이 질투는 흔히 한 조직체나 한 동아리 안에서 더 심한 법이다. 타남이야 한 다리 건느니 별로 배 아플 것도 없지 않는가. 사르트르는 그래서 이라고 한것이다. 이란 우리 속담과도 통하는 말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 남이 잘 되도록 도와 주는 미덕을 인간의 수많은 미덕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덕으로 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갖추기 어러운 미덕이기 때문이다. 고슴도치처럼 리기주의의 가시털이 온 몸에 가득 돋아있는 우리 인간들이 남을 찌르지 않 고 남의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마치 락타가 바늘구명으로 빠져 나가기 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리라.
27    (수필) 하로동선(夏爐冬扇)의 뜻을 되새기면서 댓글:  조회:3492  추천:60  2006-02-08
☆수필☆ 하로동선(夏爐冬扇)의 뜻을 되새기면서 김 관 웅 우리 집 식탁 유리 밑에는 염량세태를 표현한 무명씨의 시 한수가 깔려있다. 가을이 오니 비단 부채를 거둬 두는구나 무슨 일로 가인이 감정을 중히 여기겠는가 세상의 일들을 자세히 살펴 보시라 누구인들 덥고 차거움을 따르지 않는가. (秋來紈扇合收藏, 何事佳人重感傷. 請把世事仔細看, 大都誰不逐炎凉.) 또 하로동선(夏爐冬煽)이라는 성구가 있는데, 여름날의 화로(火爐)요 겨울철의 부채란 말이다. 더운 여름날엔 화로가 필요 없다. 오히려 성가신 존재다. 그래서 헛간 한 구석에 내 팽개쳐 있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떨면서 헛간에 들어가 먼지 묻은 화로를 정성껏 닦고 불을 지핀다. 부채도 추운 겨울에는 쓸모가 없다. 방 한 귀퉁이나 농짝 밑 같은 구석진 곳에 버려진 듯 있다가, 정작 무더운 여름철이 오면 주섬주섬 찾아 더위를 식히는 것이다.《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경구가 있다. 《가난하게 살면 시끄러운 저자거리에서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고, 부유하게 살면 깊은 산속 먼 곳에서도 친한 사람이 있느니라》 가난하게 살면 그 떠들썩한 시장거리에 살아도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다. 먹을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유하면 심산벽곡에 숨어 지내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밥 한 끼라도 얻어먹을게 있고 돈 한 푼이라도 얻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쉐익스피어의 희곡《아테네의 타이몬》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고대 희랍 아테네의 귀족 타이몬이 부자였을 때는 그의 집에 식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만 가세가 기울어지자 전에는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다니던 친구들조차 발길을 딱 끊는다. 돈 냄새만 맡으면 달려들고 먹을알이 없으면 뿔뿔이 날아가버리는 파리떼 같은 추악한 인간들이 혐오스럽고 리익만 쫓는 인간이 세상이 싫어서 타이몬은 멀리 해변의 수림 속에 숨어살게 된다. 그러다가 수림 속에서 황금단지를 발견하자 또 숱한 사람들이 몰려든다. 타이몬은 돈이란 이 요물이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요사스럽게 만든다는 점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황금이여! 누렇고 번쩍 번쩍 번쩍하는 빛을 뿌리는 귀중한 황금이여! 이것이 조금만 있어도 검은 것이 희게 변할 수 있고, 추한 것이 곱게 보일 수도 있고, 틀린 것이 옳은 것으로 될 수도 있고 비천한 것이 존귀한 것으로, 로인이 소년으로, 겁쟁이가 용사로 변할 수도 있노라.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대사는 《화폐의 본질을 절묘하게 묘사했다》고 칭찬한바 있다. 이처럼 요사한 인간의 본성은 동양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역시 고대 희랍시기와 비슷한 시절이였던 한나라시기에 적공(翟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정위(최고재판소 소장)가 되자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자 손님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져 문 앞에 새 그물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다시 정위가 되자 또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천박한 사람들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진 그는 문 앞에 다음과 같이 크게 써 붙였다. 《한번 죽었다가 한번 살아나니 이에 교제할 때의 정분을 알게 되였고,, 한번 가난했다가 한번 부유해져서야 비로소 교제할 때의 사람의 태도를 알았으며, 한번 귀하게 되고 한번 천하게 되여서야 교제의 참된 정이 드러나게 되였다.》 세상인심이란 이렇게 사람의 재산의 빈부나 권세의 유무에 따라 표변하는 것이다. 자고로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고 부족한 사람을 이끌어주는 따뜻한 정도 있지만, 더우면 모이고 추우면 흩어지는 것도 세상인심이다. 그래서 염량세태(炎凉世態)라 말하는 것이다. 젖을 뗄 때의 아기들을 보라. 엄마들이 젖꼭지에 개나 돼지의 쓸개를 발라 놓으면 아기들은 젖꼭지를 물었다가도 뱉아버린다. 그야말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다가서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물러서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성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도 있다. 어른들이 사는 세상의 인정이란 것도 하로동선(夏爐冬扇)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빌붙어 아첨하고 불리하면 멀리하거나 배척하는 간사하기 짝이 없는 어른들의 마음을 아기들이 젖꼭지가 달면 빨고 쓰면 뱉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이라고나 할런지? 오늘이라고 인간들의 이런 본성이 변한 것은 아님을 이번 설을 쇠면서 실감할 수 있었다. 날 샌 은혜는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남들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런 인간의 하로동선의 본성에서 별로 자유로운 인간이 아님을 설을 쇠면서 심심하게 느꼈다. 부모 형제와 스승, 동료, 친구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 만큼 성장했지만 내가 그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또 갚으면서 살아왔는가? 그러기에 남들이 나한테 어떻게 처사하는가를 따질 수가 없었다.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성구의 뜻을 되새기면서 나 자신은 구경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는 음력설이였다. 2006년 2월 4일 연길에서
26    (수필) 나의 자화상 댓글:  조회:3988  추천:60  2006-02-06
♧수필♧ 나의 자화상 김 관 웅 요즘 나의 관심사는 리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다. 의사도 아닌 내가 사상의학(四象醫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럴만한 리유가 있다. 이것으로 내고 잘 알고 있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개성이나 성격을 분석해보면 십중팔구는 맞아 떨어지니 말이다. 남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상의학(四象醫學)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 맞아 떨어진다. 나는 사상의학(四象醫學)에서 분류한 체질이나 성질의 네 류형-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중에서 나의 성격이나 기질은 소양인(少陽人)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소시 적부터 성미가 불같이 급했다. 그래서 걸을 때보다는 달음박질을 할 때가 더 많았고 설사 걷는다고 해도 언제나 앞으로 엎어질 듯 걸음걸이가 빨랐다. 그래서 내가 소학교 다니던 시절에 우리 옆집에 살았던, 나보다 네댓살 나이를 더 먹은 허은석이라는 형은 나를 《무대랑(武大郞)》이라고 불렀다. 우리 동네의 골목대장이 내 별명을 이렇게 짓자 내 또래들은 다들 나를 《무대랑》이라고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내가 무대랑처럼 키가 작아서가 아니라 《수호전》 련환화(連環畵) 책에 나오는 무대랑이 자기의 색시 반금련과 서문경이 왕로파의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우아(牛兒)가 귀띔하자 천방지축 달려가는 모습이 똑 마치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이 그려졌기 때문이였다. 개꼬리 삼년 묵어 황모 못 된다고 어른이 되여서도 이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 별로 급한 일이 없는데도 언제나 앞만 보고 달음박질하다시피 총총이 걸어 다니는 통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람에게도 제대로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나를 건방지다고 보거나 경망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집사람마저도 나의 걸음걸이를 두고 늘 기분 나쁜 평가를 해오군 한다. 왜 걸어도 좀 점잖게, 품위 있게 걷지를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이것도 천성이여서 마음을 지어 먹는다고 고쳐지는 것이 아닌데야. 어린시절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성미가 급해서 앞만 바라보고 아래를 살피지 않았기에 때문에 신발이나 바짓가랑이에 언제나 흙을 많이 묻히고 다녔다. 비가 온 뒤 길이 질척거리는 날이면 더욱 가관이였다. 집에 들어오면 나는 언제나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제일 많이 들었다. 《이 갱충맞은 놈을 어쩌나, 쩟쩟》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내 이름을 부를 때보다는 다들 어머니의 표현을 본받아《갱충맞은 놈》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사전의 해석을 볼 것 같으면《갱충맞다》는 말은 대략 《조심성이 없고 아둔하다》는 뜻이였다. 《갱충맞은》나의 천성은 변을 볼 때도 유감없이 표현되였다. 성미가 급하다 보니 미리미리 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금 변이 나오려고 해야 뒷간으로 달음박질쳐 가다 보니 사전에 밑구멍을 씻을 수지 같은 것을 마련하지 못할 때가 십중팔구였다. 그래서 내 팬티는 언제나 샛노란 똥 꼬치들이 찍혀 있어 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또 늘 나를 《똥 누고 밑구멍 안 씻는 놈》이라고 놀려주기도 했다. 어디 이뿐이랴. 나는 소시적에 싯누런 콧물을 유난히도 많이 흘렸다. 《그··그 코물 닦아라, 발등 깨겠다!》 동네 아줌마들도 보기가 난처하여 늘 나를 보면 얼굴을 찡그리시군 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 말은 듣기 싫어서 제 딴에는 코물 건사를 하느라고 훌쩍 들이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한 손으로 힝 풀어서는 우리 집 울타리 나무판자에 짓 발라 버리곤 하여 거기엔 내 코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나는 성미가 급하고 침착하지 못하여 어릴 때부터 장기, 트럼프 같은 놀이에는 소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승벽은 강해서 늘 형이나 동생과 맞붙기는 했지만 언제나 졌다. 한번은 큰 형이 재판을 서는 가운데 동생 호웅이와 장기를 두다가 두 판 련속 지고는 다시 한판 붙이자고 야료를 부렸지만 호웅이는 삼판량승이니 승부가 갈렸다고 더는 놀아주려고 하지 않자 호웅이의 멱살을 거머쥐고 싸움판을 벌리기도 한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침착하게 머리를 쓰고 까근하게 따져 가면서 놀아야 하는 장기나 트럼프 같은 오락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내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무슨 일이나 빨리하고 빨리 끝내기 때문에 일이 거칠고 허점과 실수가 많았다. 일을 하다가도 이내 싫증을 느끼고 무슨 일에서나 용두사미 격으로 마무리를 잘 짓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철부지 아이시절의 이런 천성은 소년시절에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초중시절 동창생들과의 집체사진 한 장이 거칠고 실수 많았던 나의 천성을 형상적으로 증언해주고 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워서 목깃이 들쑥날쑥한 웃옷을 입고 찍은 이 사진을 보면서 나도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어른이 되여서도 이런 근성은 도무지 고쳐 지지를 않았다. 나는 일을 만드는 데는 능하고 개척하는 데는 일정한 추진력이 있지만 조직을 하거나 마무리 짓는 데는 흐지부지할 때가 많았다. 90년대 중반에 나는 연변대학과 사회의 소장학자들을 휘동하여 연변조선족문화연구회를 조직하여 연변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의 전반문화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민간연구단체를 조직하였지만 약 2년 동안 운영하다가는 뒤를 꼬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2003년에는 첫 연변조선족사이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맡고 연변의 첫 문학사이트를 개설하고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사이버문학의 형성에 초석을 다져 놓기는 했지만 역시 뒤를 꼬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물로 여기에는 객관적 원인도 크게 작용하기는 했으나 뒤를 꼬지 못하는 내 천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달포전 몇몇 은사님들과 문단의 선배님들이 같이 또 비평가단체를 결성하자고 하면서 나를 회장으로 추대할 때도 나는 나의 이런 룡두사미의 뒤를 잘 꼬지 못하는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거듭 사양했다. 나는 정서의 기복이 심하고 마음속의 생각을 감출 줄 모르고 몽땅 얼굴에 드러낸다. 그래서 솔직담백하여 마음에 있는 것은 모두 털어놓으며 나쁘면 나쁘다, 좋으면 좋다고 즉석에서 태도를 표시하군 한다. 이것 역시 태여나서부터의 천성인 것 같다. 일곱 살 때인가, 누나가 나를 데리고 《인민영화관》에 가서 《닭털 꽂은 편지》라는 영화를 보다가 일본군대가 해와라는 목동이 몰고 가던 양들을 몽땅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는 《왜 남의 양을 잡아 가는가?》고 엉엉 울음보를 터뜨려 누나가 남우새스러워 나를 잡아끌고 영화관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누나가 그 후 이 일로 두고두고 지청구를 해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곱 살 배기였던 내가 늘 목을 끌어안고 같이 잠을 자기까지 했던 우리 집 흰둥이 개를 개장수들이 끌어갈 때 결사적으로 대들다가 안 되니 땅바닥에 뒹굴어대면서 행악질을 해 일대 소란을 벌렸던 일도 우리 집에서 나의 괴벽한 성격을 거론할 때 늘 거들곤 하는 사례 중의 하나이다. 평소에 나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또 달변이지만, 일단 정서가 흥분상태에 들어가면 논리적이지 못하며 격동될 때에는 더욱 조리가 없다. 심한 말더듬이가 되여 버린다. 그래서 때로는 옳은 시비를 가지고도 대방을 반박하거나 설득시키지 못한다. 한번은 문단에서 큰 시비로 큰 변론이 생겼는데 나는 너무 빨리 흥분되여 자기가 할말도 침착하고 조리 있게 천명하지 못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았던 우리문단의 녀류번역가 김련란 씨는 늘 나만 보면 놀려 준다. 《말하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흥분해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호호호》 김련란 씨는 녀성의 특유한 섬세한 관찰력으로 나의 화상(畵像)을 그리면서《김관웅 박사 또한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내는 성미라서 사람 좋고, 지식 많고, 생김새 또한 단상에 오를만도 하건만 그다지 중요시되지 못하고 한직으로만 떠도는 같다》고 내 천성의 정곡을 찌르기도 했다. 벼슬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언녕 알고 벼슬에 대해 체념한지 오래기에 무슨 한직(閒職)이고 요직(要職)이고는 별로 개의치는 않으나, 나는 확실히 김련란씨의 말마따나 《속심의 말은 참지 못하고 다 뿜어 내여》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다섯 번이나 필화(筆禍)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십에 첫 보선이라고 어쩌다가 생긴 원장 벼슬자리도 《강물은 막아도 백성의 입은 막지 못한다》(2003년 3월 20일 《연변일보》에 발표되였음.)는 손바닥만한 칼럼 한편 때문에 천신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입덕》을 많이 입은 셈이다. 이 역시 성미가 너무 급하여 참을 인(忍)자의 진수(眞髓)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야마는 성격을 가졌다. 설사 상대가 부모이든, 선생이든, 어른이든, 친구이든, 리해관계가 얽혀 있는 요긴한 인물이든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는 《거짓》이나 《아첨》같은 단어는 없다. 그래서 나는 조화보다는 쟁투가 더 많은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그 쟁투가 번번이 나의 옳음과 대방의 그름으로 인해 벌어진 것만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옳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자부하면서 제 잘난 멋에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 잘잘못을 떠나서 쟁투는 언제나 적을 만드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이와 같은 나의 저돌적인 천성으로 인해 나에게는 친구도 많지만 적도 친구만큼 많다. 한마디로 나는 애증이 분명하다.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물 타기를 하거나 줄타기를 하거나 중용적 립장을 취하지 않는다. 미우면 밉고 고우면 곱다. 에누리하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객관의 평가도 아주 량극적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웅이는 겉보기에는 터프해도 사귀여 보면 다정다감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가와 함께 《잘난 체 하는 놈》이요,《뜨개소》요,《괴짜》요 하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다. 나는 스스로 내가 남을 헐뜯고, 암해하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그런 악바리나 독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잘못을 뉘우치거나 사과를 해오거나 혹은 병고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는 즉시 용서를 해주고 증오심은 삽시에 동정심으로 바뀐다. 나는 나를 《반역자 유다》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XXX가 림종에 가까웠을 때는 여러 번이나 그분의 병실에 가서 간호를 하면서 전신 목욕을 시키고 머리부터 발까지 더운 물로 깨끗이 닦아 주군 했다.남들의 눈을 의식해서 일부러 꾸며서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동정과 련민의 마음이 일어서 그리했던 것이다. 몇 년 전 나와 한 학과에서 근무하는 전학석 교수는 이상 분답게 나를 보고 이렇게 충언(忠言)을 해준 적 있다. 《관웅인 사람은 좋은데 말이야, 때로는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전학석 교수의 이 말에 나는 진심으로 승복을 했다. 나는 자신이 결함투성이, 허점투성이다 보니 어느 모로 보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성격을 가진 전학석 교수를 진심으로 탄복하여왔다. 전학석 교수는 우리 연변대학의 전형적인 젠틀맨이다. 단 한 점의 허점도 없이, 단 한마디의 실언도 없이,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단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거의 륙십 평생을 살아왔다. 옷차림새도 언제보도 깔끔하고 걸음걸이마저도 품위가 있고 점잖았다. 전학석 교수는 대체적으로 태음인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늘 전학석 교수를 나의 귀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 분처럼 완벽한 남자로 돼보자고 한 동안은 결심을 내리고 자기를 다잡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죄다 허사였다. 범을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嬪), 추녀 동시(東施)가 미녀 서시(西施)의 얼굴 찡그리는 모양을 흉내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꼬리를 사타구니에 끼우고 점잖게 군자처럼 처신해 보려고 하지만 리성이 조금만 왼 눈을 팔아도 내 천성의 개꼬리는 다시 빳빳이 쳐들군 한다. 아마도 내 천성의 관성(慣性)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리라. 리제마는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이라는 이 네 류형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태양인은 절대로 태음인으로 바뀔 수 없고, 소양인은 영원히 소음인으로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소양인이 태음인으로는 더욱 바뀔 수 는 더욱 없다는 것이다. 서쪽에 해가 뜬다고 해도 곰 같이 미욱하고 저돌적인 천성을 가진 내가 전학석 교수 같은 젠틀맨으로 변할 수는 없다는 론리다. 한마디로 천성은 하늘이 낸 것이니 변할 수 없다는 론리다. 아마도 나는 좋으나 궂으나 어쩔 수 없이 리제마의 말처럼 화장터에 갈 때까지 하늘이 낸, 결함투성이인 이 소양인의 천성을 가지고 갈 것 같다. 사람은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갖고 나오는 천성이 있다. 성별이나 체격이나 체질은 두말할 것 없고 성격이나 기질도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정해진 천성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것은 후천적인 수련이나 수양에 의해 더러 개변되기도 하겠지만 그 기본적인 골격은 크게 개변되지 않는다고 한다. 《강산은 쉽게 변해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江山易改, 本性難移)》라는 고훈(古訓)은 바로 이런 인간의 천성을 념두에 둔 말이 아닌가한다. 다만 전학석 교수의 말처럼 가급적이면 나의 소양인의 천성으로 인해 거듭 생겨나는 너무 큰 《오버》는 피할 수 있도록 시시각각 자신을 경계하고 가다듬고 수련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한다고 하여 하늘이 낸 내 천성은 고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설사 내 천성을 고치려고 하거나 컨트롤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균의 말처럼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낸 본성은 감히 어길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 생각 할 때면 윤동주 님의 《자화상》을 떠올리군 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엽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2006년 1월 16일 연길에서
25    (문학) 신《동심(童心)》설 댓글:  조회:3568  추천:53  2006-02-05
☆나의 문학관☆ 신《동심(童心)》설 김관웅 수정으로 만든 정교한 꽃병에 꽂아놓은 비단이나 플라스틱 같은 인조재료로 만든 꽃이 그 아무리 색깔이 현란하고 모양새가 크고 아름다워도 향기가 없는 조화(造花)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시골의 들쑥날쑥한 돌각담 우에 피는 호박꽃이나 거친 산언덕에 피여난 진달래꽃이 아무리 수수하고 왜소하고 초라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꽃이며 자연의 향기를 풍긴다.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진(眞), 선(善), 미(美)는 문학작품에 대한 3대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실성과 그에 따르는 자연스러움이 문학의 최고경지하고 생각한다. 루쏘의 《참회록》이나 파금의 《수상록》같은 작품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바로 진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논픽션에 속하는 수필이 이러할 할 뿐만 아니라 허구에 의한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자신의 정감을 드러내는 표현적인 장르인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문학의 부동한 장르에서의 진실성이 부동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소설이나 희곡에서의 진실성은 주로 묘사된 객관적인 인간이나 사건이나 환경이 진실해야 한다면, 시에서는 표현된 주관적인 정감이 진실해야하며, 수필에서는 드러낸 작자의 내심세계가 진실해야 한다. 특히 수필에 있어서 진실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높다. 총적으로 문학은 거짓말이나 무병신음이나 잘난 척 하는 허장성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진실은 곧 문학의 생명이다. 문학작품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자면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면 무엇을 말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속에는 없었던 말, 또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도 없는 남의 말을 가져다가 제가 말한 것처럼 슬쩍 새로 포장하여 자기의 이름을 붙여서 창작품이라고 내놓는 것은 도둑놈의 도둑질이다. 속에는 개똥이 들어있는데 입으로는 비단 같은 말을 토해낸다면 그것은 잘난 척 하는 허장성세이고 고상한 것 척 하는 위선이다. 마음속에 아무런 상처도 없고 고민도 없으면서 아프다고, 괴롭다고 짹짹거리면 그것은 무병신음이다. 작가들이 진실한 말을 하자면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동심을 가져야 한다. 안데르센의 동화 《황제의 새 옷》에서 어른들은 모두 《임금님의 새 옷이 화려하다》고 칭찬했지만 유독 아이만이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은 것은 바로 아이들은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순진무구한 동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이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여 가는 과정은 부단히 각양각색의 거짓말을 하는 것을 배우고 각양각색의 허위의 옷으로 자신을 꾸미는 위장술을 배워가는 과정으로서 어른들의 사회는 거짓말을 더 잘하는 사람이, 허위의 옷을 더 많이 마련한 사람이 더 잘 살아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림표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못 한다》고 한 말은 어쩌면 어른들이 사는 우리 사회의 정곡(正鵠)을 찌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은 백설 같이 순결한 동심이 나날이 세속의 거짓의 먼지와 위선의 오물이 묻어서 추레한 어른의 마음으로 변질돼 가는 오염(汚染)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밝음에서 어두움, 즉 무명(無明)의 상태에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은 흔히 마음에 세속의 리해득실을 따지는 리기주의나 눈치보기주의 또는 기성 륜리나 도덕적 선입견의 때가 껴서 아이들처럼 진실한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진정한 문학인으로 되는 과정은 어린이로부터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반대로 어른의 마음으로부터 어린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명나라말기의 리탁오(李卓吾)의 《동심설(童心說)》이나 영국의 랑만파 시인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였다. 리탁오의 말처럼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다. 동심을 잃으면 진심을 잃게 되고, 진심을 잃으면 진실한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 이 세상의 사람을 감동시키는 글들 중에서 동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조선 중세기의 암흑 속에서도 마음속의 할 말을 다하고 할 노릇을 다하고 간 시대의 선각자 허균은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낸 것이요, 륜리의 분별은 서인(聖人)의 가르침이니,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낸 본성은 감히 어길 수 없다》고 했다. 허균이 말한 《하늘이 낸 본성》이란 바로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정이며 욕망이다. 이는 리탁오가 말한 《동심》이나 선종에서 말하는 《평상심(平常心)》과 그 뜻이 서로 통한다. 《심우도(尋牛圖)》나 고승들의 어록들을 보면 선종(禪宗)에서는 불도(佛道) 수행에서의 마지막의 진리를 깨달은 단계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불화(佛畵)나 법어(法語)로 표현하고 있다. 설익은 수행을 하면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다》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 단계를 뛰여 넘게 되면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개인의 리해득실을 따지거나 남의 눈치를 의식하거나 혹은 관념의 장난에 빠져서《벌거벗은 임금은 옷을 입었다》는 어른의 거짓말로 되였다가, 다시금 《벌거벗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아이의 《동심(童心)》이나 《평상심(平常心)》 또는《하늘이 낸 본성》에로 돌아온다는 얘기를 형상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문학의 최고경지가 진실에 있고 문학의 생명이 진실성에 있는 이상 우리 문학인들이 이 문학의 최고경지에 오르는 과정은 부단히 마음속에서 거짓을 추방하고 진실성을 회복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오로지 자기 마음속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 거짓의 옷들을 하나둘씩 다 벗어던져야 홀가분한 몸으로 문학의 상상봉을 향해 톺아오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실한 마음은 바로 동심(童心)이며 평상심(平常心)이다. 동심이나 평상심은 그 어떤 거창한 리념이나 리상이나 현란한 기교나 잔재주가 아니라 림제(臨濟) 선사가 말했듯이 《옷입고 밥 먹고 똥 싸고 사랑하는 것》이다. 추우면 옷 입겠다고 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싶다고 말하고, 뒤가 마려우면 똥 싸고 싶다고 말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검으면 검다고 말하고, 희면 희다고 말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섹스하고 싶으면 섹스하고 싶다고 하는 말하는 것이 바로 동심이요 평상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영원히 어린이의 동심과 어른의 위선과의 싸움이다. 잘난 척,유식한 척, 깨끗한 척, 우아한 척, 고상한 척......하는 어른들의 무수한 《척병》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동심이 이겨야만 문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림제 선사의 말은 우리가 진솔한 본성에 눈떠서 주관과 객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정시하고 재현하고 표현할 때 비로소 선종에서 말하는 이른바 불도(佛道)가 열린다는 뜻이다. 문학을 놓고 말한다면 우리가 진실하게 주관과 객관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거짓 없이 진실하게 재현하거나 표현할 때 비로소 문학의 참된 길이 열린다는 말이다. 앞으로 나는 나날이 내 마음속에서 어른의 위선을 몰아내고 어린이의 동심(童心)으로 돌아가 평상심(平常心)을 가지고 진실한 문학을 하고자 한다. 나의 문학관을 한마디로 귀납한다면 바로 동심(童心)에로의 회귀이다. 비록 엄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짓이라는 이 거짓의 세계, 허위의 세계일망정 거짓에 오염된 이 어른의 마음을 버리고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동심으로 돌아가서 문학을 하고 싶다. 2006년 병술년 정월 초이튿날
24    (수기) 학석 형을 보내며 댓글:  조회:3474  추천:51  2006-02-05
수기 학석 형을 보내며 김 관 웅 연변대학의 전학석 교수가 59세를 일기로 2006년 1월 23일에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제 오전 나는 고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누구나 례외없이 언젠가는 저승행을 하지만 너무 일찍이 가셨다. 하지만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이고, 생사는 명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하늘에 달리고 명에 정해진 일은 인간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다. 중국 속어에는 《금무적족, 인무완인(金無赤足, 人無完人)》이라는 말이 있다. 《순전한 금은 없고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직역을 할 수 있다. 옥에도 티가 있다고 누군들 결점이 없겠는가 하는 뜻이다. 그러나 전학석 교수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함투성이인 나 같은 인간과 비기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제 한번 흐트러졌거나 망언을 하거나 실언을 하거나 실수를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말이 무겁고 처사가 신중하고 일거수일투족, 일언일행이 언제나 근엄하고 점잖고 심지어 옷을 입어도, 길을 걸어도 언제나 반듯하고 점잖았다. 연변대학의 젠틀맨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분이다. 한번은 학석 형이 나한테 이렇게 충언을 한 적 있었다. 《관웅인 다 좋은데 때론 오버를 해. 그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학석 형의 이 지적을 받고 나는 학석 형을 거울로 삼고 신중하게 행동하고 점잖게 처사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워낙 점잖치 못한 덜퍼리 천성이라 쉽게 고쳐 지지를 않았다. 말이 많고 행동이 경박하여 실수가 빈발하던 내가 일조일석에 점잖게 변해지기는 어려웠다. 범을 그리려다가 오히려 고양이를 그린 형국이 되고 말았다. 동시효빈(東施效嚬), 추녀(醜女) 동시가 미녀(美女) 서시의 흉내를 내는 꼴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어색하게 점잖을 피울것이 아니라 하늘이 낸 내 천성대로 살기로 작심했다. 나는 학석 형을 본받으려고 하는 동안에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너무 완벽하게 살려면 힘을 너무 많이 쓰고, 신경을 너무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을 심심하게 깨닫게 되였다. 석달 전, 연변에서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상해로 확진하러 가던 날 학석 형은 나한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천년을 살 것처럼 아글타글하면서 사는 거야. 그것이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게 될 때는 이미 늦은 거야.》 이것이 내가 학석 형으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씀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유언이라면 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唐詩)에도 《백살을 넘기지 못하는 인생들이 늘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사는구나(人生不滿百, 常懷千年憂)》라는 시구가 있다. 나는 학석형이 투병 중에 있었던 이 석달 동안 늘 완벽에 가까운 이 분의 이 말을 곱씹으면서 음미를 해보았다. 학석 형이 저승에 가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근심을 훌훌 털어버리고 유유자적하게 사시기를 빈다. 2006년 1월 25일 연길에서
23    (단상)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 댓글:  조회:3400  추천:36  2006-02-05
단상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 김 관 웅 2006년 1월 22일 오후, 《백연(白燕)》잡지의 창간호 발행식이 세기호텔에서 거행되였다. 신라방이 즐비했고 신라의 유민들이 나그네로 떠돌아다녔던 절강 이오에서 잡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잡지의 주역은 바로 연변에서 문학청년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스스로 문학에 미쳐 사는 김춘택이라는 3급장애자이고, 그 후원자는 절강 이우에서 무역을 하고 있는 김춘택 씨의 동창생 공기철씨였다. 불구자 동창생을 믿고 거금을 내여 책자를 만들어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인 연변에서 출간식을 하려고 몇 만리를 차를 몰고 달려온 공기철 씨의 사내다운 패기와 진지한 우정에 깊이 감동했다. 거짓과 허위가 란무하는 이 감동증발시대에 처음으로 진한 감동을 받은 뜻깊은 문학행사에 참가했다. 휄체어에 앉아서 내내 기념식을 지켜보고 앉아 있는 김춘택씨를 바라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두 발이 성한 이들도 언감생심 하지 못하는데, 김춘택 씨는 휄체어를 타고 황하, 장강을 넘어서 강남의 대지, 로신의 고향 절강 땅에서 한글문학의 씨앗을 파종하였다. 신라방이 즐비했던 강남땅에 또 다시 배달문화의 꽃씨를 심었다. 너무나 장한 일을 한 것이다. 우리민족의 후대들 중에 이러한 뜻있는 젊은이들이 있음으로 하여 가슴이 뿌듯했다. 문학은 아픔으로 크는 것이다. 아픔을 디디고 오늘까지 문학의 길을 끈질기게 걸어온 김춘택 씨가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아픔도 용감하게 디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장해적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도산 안창호선생은 《락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했다. 그러니 《청년이 살면 민족이 산다》고 할 수 있다. 김춘택, 공기철 같은 뜻있는 청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우리민족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졌다. 두 젊은이가 뿌린 배달문화의 꽃씨가 강남땅에서 움트고 자라고 꽃을 맺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요절된 신라방의 꿈이 영원토록 무궁하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김춘택, 공기철 씨의 건투를 빈다.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 연변문인들의 사심없는 지원과 성원을 진심으로 빈다. 2006년 1월 24일 연길 자택에서
22    (단상) 인격과 문격 댓글:  조회:3363  추천:38  2006-02-05
☆단평☆ 인격과 문격 김 관 웅 문여기인(文如其人),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성구가 있다. 작가의 인격(人格)과 문격(文格)은 같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 같은 정도가 문학의 각 장르마다 서로 다르다. 허구를 능사로 여기는 소설에서는 인격과 문격이 완전히 통일된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가지 장끼를 부리는 시에서도 인격과 문격이 완전히 통일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조(自照)적인 문학으로서의 수필문학에 있어서, 진실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수필문학에 있어서는 진솔한 인격과 진실한 문격의 통일을 더 없이 강조한다. 때문에 우수한 수필은 진솔한 인격과 진실한 문격이 서로 유기적인 결합된 것이다.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 꼭 문격이 높은 수필을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격이 낮은 사람이 높은 문격을 갖춘 수필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설사 높은 문격을 갖춘 것처럼 가장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필경은 거짓이다. 탕녀(蕩女)가 숙녀(淑女)처럼 수필을 쓴다고 하여도 그것은 위장술에 지나지 않으며, 소인(小人)이 군자(君子)처럼 수필을 쓴다고 하여도 그것은 사기술에 지나지 않는다. 2006년 2월 3일 자택에서
21    (우화)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 댓글:  조회:3717  추천:46  2006-01-23
☆신작우화☆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 김 관 웅 100년에 있으나 마나한 큰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600여 호 되는 한 마을에는 집 한 채도 쌀 한 톨도 남김 없이 몽땅 큰물에 씩쓸이를 당했다. 국제적십자 기구에서는 텐트, 식량, 의료기구와 약품 등 극히 제한된 구호물자를 공수(空輸)를 통해 이 마을에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 마을의 촌장과 몇몇 촌민위원회의 간부들이 이 구호물자들을 골고루 분배해준다는 명분으로 몽땅 차지하였다. 물론 소학교의 복학(復學) 위해 텐트 몇 개를 내놓기는 했다. 이러구러 여름,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닥쳐 왔지만 촌장 주위의 몇몇 간부들만 텐트 안에서 밥을 끓여 먹고 감기가 걸리면 감기약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냈다. 국제적십자기구에서는 자기들이 보내준 구호물자들을 어떻게 분배했는가 찾아와서 실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뒤가 쫄리지도 않았다. 600여 호의 촌민들은 여전히 추운 한지(寒地)에서 거적을 치고 살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였지만 누구하나 왜 구호물자들은 우리들한테 분배를 해주지 않고 너희들만 텐트 안에서 구호식량을 먹고 구호약품을 쓰면서 편안하게 지내느냐고 따지고 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일부 굶주린 촌민들 중 개별적인 약삭빠른 이들은 텐트 안을 기웃거리다가 그안에서 풍겨 나오는 구수한 밥 냄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기신기신 텐트 안에 들어가서 촌장한테 아첨하면서 턱찌끼나 얻어먹곤 했다. 그러고는 촌장의 지지와 옹호자들이 되여 뒤구석에서 투덜거리는 일부 불평객을 무마하는 선무(宣撫)공작대원으로 탈바꿈하곤 하였다. 이런 선무공작대원으로 된 인간들은 달갑게 노복으로 되려하는 인간 쓰레기들이고 불평이 있어도 감히 불평을 부리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파금 옹의 말을 빈다면 마음이 노예가 된 인간들이다. 이른바 이란 몸은 노예로부터 풀려난지 오래지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일컬은 말이다. 21세기의 오늘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시골의 무지렁이 사회만이 아니라 시대의 량심과 지혜들이 운집해있다는 지성인 사회에도 이런 이 가득하다. 오호라, 노예사회가 지나 간지도 몇 천 년이 지났건만 노예근성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깊이깊이 뿌리를 내렸구나!!! 2006년 1월 23일 연길에서
20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 -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 댓글:  조회:4060  추천:50  2006-01-19
☆평론☆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 -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 김 관 웅 김학철 옹은 중국조선문학의 대부(代父)라고 평가되고 있는 분이다. 김학철 옹(1916〜2001년)은 함경남도 원산사람이다. 우리 민족의 국권회복을 위해항일투쟁에 자진하여 참가하여 용감하게 싸워온 투사이고 이 세상의 모든 불의에 몸을 던져 저항한 중국 조선족동포문단의 저명한 소설가이고 수필가이다. 김학철 옹은 군자(君子)요 의인(義人)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002년 10월 김학철 옹이 타계하기 직전에 한마디의 유명한 유언을 남기셨다. “편안하게 살려면 불의를 외면하고 사람답게 살려면 불의에 저항하라” 김학철 옹의 의미심장한 이 유언은 사실은 자신의 일생에 대한 고도의 개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의(義)와 이(利)는 선택의 문제임을 시사하고 있다. 의(義)와 리(利)는 흔히 겸하여 얻을 수 없으므로 양자택일(兩者擇一)을 해야 함을 맹자는 다음과 같이 메타포를 동원하여 비유하고 있다.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대 어물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대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兼得, 舍魚而取熊掌也. 生, 我所欲也; 義, 我所欲也.二者, 不可兼得, 舍生而取義也.)”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김학철 옹은 어물도 걷어 안고, 웅장도 걷어 안은 그런 욕심쟁이 속물이 아니다. 웅장만 택하고 어물은 미련 없이 버렸다. 즉, 김학철 옹은 의(義)와 리(利)의 양자택일(兩者擇一)에서 한평생 의(義)만 선택하여온 분이다. 김학철 옹의 일생은 대중의 이익과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한평생 정의를 견지하고 불의에는 목숨을 던지면서 싸워 온 일생이었다. 맹자님의 말씀을 빈다면 김학철 옹은 “부귀에도 음탕해 지지 않고 권세와 폭압에도 굴복하지 않은(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舍生取義)” 군자요, 의인(義人)의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김학철 옹의 이러한 군자, 의인으로의 본질은 자신의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따라 가듯이 결코 남들을 추종하다가 얻어진 것은 아이라 주체의 자유선택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저는 이 점을 「김학철 옹과 자유선택」이라는 수필에서 언급한적 있다. 지금도 저의 홈페지에 들어가시면 이 글을 볼 수 있다. 중국말에 《개관론정(蓋棺論定)》이라는 말이 있다. 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죽은 다음에 가서야 옳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김학철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경력과 그 와중에서 한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평생 정의를 위해 싸우셨고 죽는 그 순간까지 80여성상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사신 분은 세계문화사적인 견지에서 보아도 하나의 기적입니다.》 이는 일본의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교(大村益夫)수가 2003년 10월에 있었던 김학철선생 1주기추모 및 김학철선생문학선집 출간기념모임에서 김학철 옹에 대해 내린 평가이다. 방관자청(旁觀者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방인인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의 평가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이다. 김학철 옹은 불세출의 투사이며 인격자이시다. 지난 한세기 남짓한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가장 주체성 있게 살아오신 지성인의 귀감이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김학철 옹같은 문학과 인격의 거목의 모시고 있었다는 것을 뿌듯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요즘 나는 대학의 강단에서 실존주의문학의 철학적인 기초인 사르트르의 존재과(存在觀)을 강의할 때마다 김학철 옹의 생애를 실례로 들어 학생들에게 설명을 하군 한다. 주지하다시피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철학의 총론점은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이란 태여날 때는 하나의 백지장 같은 존재이다. 결코 엄마의 배 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여 나는 것은 아니다. 김학철 옹도 예외일 수 없었다. 소년시절의 김학철 옹은 탐스럽게 열린 남의 집 호박을 활로 쏘아서 벌집을 만들어놓는 개구쟁이였고, 《넉가래는 못 받아오고 온통 오리만 받아와서》어머니에게 늘 지청구를 듣는 평범한 소년으로서 그 무슨 신동으로 태여 나신 분도 아니다. 그리고 투사의 본질을 지니고 태여 나셔서 어려서부터 반일의식을 갖고 있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5학년부터는 국사라는 것을 배우는데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니 신무천황(神武天皇)이니하는 따위를 내리 먹였으나 별 거부감 없이 그대로 배웠다. 오히려 재미가 있을 지경이었다.”김학철 옹은 자서전 《최후의분대장》에서 자신의 철없던 소년시절을 이렇게 술회하셨다. 우리 인간들은 우연하게 이 세상에 주어졌을 뿐이다. 먼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태여 나서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인간의 주관성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야 인간의 행동이 있게 된다.한 인간의 본질은 그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자아의 개인의지에 따른 부단한 자유선택에 의해서만 악한 사람이냐 착한 사람이냐, 군자냐 소인이냐, 투사냐 반역자이냐, 용감한자이냐 비겁한 자아냐를 판단할 수 있으며 비로소 자기의 본질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며 자기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실존주의에서 일컫는 존재란 자아의 존재를 뜻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자아가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비유를 할 것 같으면 인간은 한 장의 백지장에다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다. 어떤 내용의 그림을 그리고 어떤 색채, 선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나름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다 빈치의 《모나리자》같은 명화가 될 수도 있고 화장실의 락서같은 추잡한 그림으로 될 수도 있다. 김학철 옹이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기 위한 첫 번째의 자신의 개인의지에 따른 자유선택은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올라와서였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 이상화의 유명한 시와 군자금을 모으러 서울로 들어왔다가 체포당해 징역을 살게 된 “서원준사건”은 청년 김학철이 직업혁명가의 험난한 길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계기로 되였다고 한다. “가출을 결행하는 날 ‘학교 유도(柔道) 부에서 합숙훈련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트렁크에다 유도복과 다른 옷가지 따위를 버젓이 챙긴 뒤에 짐짓 례사롭게 휘파람을 불면서 집을 나서는데 머리가 착잡해서 ‘내가 미친 짓을 하잖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는 김학철 옹이 대한제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혈혈단신 상해로 떠나던 그날의 내심의 모순상태를 술회한 부분이다. 이처럼 한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선택하는 자유선택의 과정은 심리적인 모순과 갈등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날 김학철 옹의 생각이 바뀌어 서울에 눌러앉으셨다면 김학철 옹의 인생은 아주 다른 양상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무사하게 상해에 도착하여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선 김학철 옹은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이념선택을 하셨고, 국민당군대로부터 나중에는 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총을 들고 일제와 피 어린 투쟁을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김학철 옹의 본질이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늘 변화, 발전하고 있으며 태여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시시각각 크고 작은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김학철옹에게 있어서 직업혁명가의 길에 들어 선후에 자신의 본질에 대한 선택은 더욱 준엄하셨다. 1943년, 태항산 지역에 있는 산서성 호가장 전투에서 김학철 옹은 왼쪽 대퇴골이 파편에 깎여 나가는 중상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일본군의 포로로 되었다. 이는 아마도 김학철 옹의 일생에서 가장 준엄한 도전이고 시련이었다. 그것은 죽음이냐 삶이냐 하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나는 들것에 들려서 일본군과 함께 황망히 퇴각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 편이 쏘는 탄알들이 전후좌우에 누리떼 튀듯 하는 가운데 나는 난생처음으로 일말의 공포감도 없이 태연할 수가 있었다. ─제발 한방 맞아만 다오. ─우리 탄알에 맞아죽으면 얼마나 고마우랴.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려울게 없다는 경지에 전생애를 통해 내가 딱 한번 이르렀던 순간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본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곤난이나 시련은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학철 옹의 비범한 용감성과 초인간적인 의지는 바로 이러한 피와 불과 죽음의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석가장의 나카사키 형무소에서의 3년 이상의 감옥살이도 김학철 옹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차례진 것입니다. 김학철 옹은 징역을 살고 다리 하나 일본 땅에 묻을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으셨다. 3.1절을 맞으면서 한국의 한 단체에서는 7백명이 넘는 친일파들의 명단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광수, 최남선을 필두로 하여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많은 거물급의 인물들도 섞여있었다. 암흑기에 친일파로 전략한 많은 거물급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반일적인 의식과 감정을 지니고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였던 선각자들이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얼빠진 선택으로 하여 이광수 류들은 영원히 역사의 치욕주에 이름이 아로새겨지고 말았지 않았는가. 이광수 류들을 두엄무지를 헤집는 닭무리들에 비긴다면 김학철 옹은 창공을 나는 수리개에 비길 수 있다!!! 해방이후 김학철 옹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자유선택은 더욱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일생을 바쳐서 충성한 이념과 제도가 흔들리고 그리고 수령의 결함으로 인기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0년 동란 시기에 심지어는 곽말약 같은 중국문단의 거물들도 4인방에게 비굴하게 허리를 굽석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댔지만 김학철 옹은 10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자신의 고귀한 머리를 한번도 숙이지 않으셨다. 김학철 옹의 추호의 두려움도 없는 저항정신을 알려면 중국의 문학거장과 비교를 할 필요가 있다. 로신은 추호의 노예근성도 없이 뼈마디가 가장 억센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흔히 파금 옹은 로신 선생처럼 용감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들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비교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로신은 36년에 별세하여 그 후의 문단투쟁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신이 살아 있었으면 어떻게 되였을까? 이런 가설을 내놓고 로신이 해방 후 쭈욱 문화대혁명까지 계속 살아 계셨더라면 여차여차 했을 것이라는 것은 공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력사에는 가설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금 옹과 김학철 옹은 비교의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파금 옹과 김학철 옹은 모두 해방 후 살아 계시면서 쭈욱 문화대혁명까지 겪으셨기 때문이다. 파금 옹이 문화대혁명의 호된 충격을 받고나서 개혁개방 후에야 《신은 없다》고 말씀했지만 김학철 옹은 이미 파금 옹보다 20여년 앞선 1965년에 이미 《20세기의 신화》에서《신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김학철옹은 파금 옹을 포함한 중국의 그 어떤 문학대가들에 비해서도 조금도 손색없는 시대의 선두에 서셨던 선각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파금 옹은 결코 낮추 평가할 수 없다. 파금 옹이 《수상록》에서 보여준 자아폭로, 자아비판의 참회정신은 김학철옹의 저항정신보다 더욱 전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파금 옹 같이 문화대혁명중에서 한신(韓信)처럼 남의 두 가랑이 사이로 기여 나가는 굴욕을 참으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문화대혁명 중에서 대다수였다면 김학철 옹 같이 목숨을 불사하면서 똑 부러지게 그 시대에 저항 투사는 지극히 개별적인 까닭이다. 파금 옹의 《수상록》이 보여주고 있는 기본정신은 문화혁명 중에서의 불의와 폭압에 용감하게 저항하지 못했던 부끄러웠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아폭로, 자아비판의 참회정신이다. 파금 옹은 자기를 꾸짖고 비판하는 것을 통하여 사회상의 보편적인 불의를 꾸짖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루쏘와 로씨야의 대문호 똘쓰또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문학적 성취와 중국문학에서의 지위 같은 것은 그만 두고 단 저항정신만을 비교한다면 중국에서 로신을 포함해서 다리뼈, 허리뼈, 목뼈가 가장 단단한 분은 아마도 우리의 김학철옹 일 것이며 저항정신이 가장 투철하고 치렬한 분은 아마도 김학철 옹일 것이다. 척각(隻脚)으로 이 땅에 계셨었지만 가장 올곧게 서 계신 분은 아마도 김학철 옹이실 것이다.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을 쉽게 표현한다면 바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다라도 황제를 말에서 끌어내리는》정신이며, 《시퍼런 칼이 숨통을 겨누어도 할 말은 다하는》정신이다. 김학철 옹이 10년 옥고를 치르고 사회에 돌아오셨을 때는 65세의 고령이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또 한번의 중대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씀을 다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시겠다는 비장한 결의였습니다. 김학철 옹은 자신의 이 선택을 비범한 노력으로 충실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거의 대부분 글들은 바로 출옥후의 만년에 불철주야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2001년 여름에 김학철 옹은 또 한번의 비장한 자유선택을 하셨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의료사고로 받은 내상이 도지자 김학철 옹은 자신의 유언에서처럼 《사회와 가족들에게 부담을 더 주지 않기 위해》결연히 죽음을 선택하였다. 삶에 연연한 분이라면 병원에 입원해서 고급약을 쓰고 치료를 받으면 아마도 2, 3년은 수명을 얼마든지 연장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학철 옹은 단호히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추도회도 하지 못하게 하셨고 몇몇 생전의 친우들과 문단의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시면서 조용히 두만강물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든 절차까지도 선생께서 일일이 선택하여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냉철한 이성으로 죽음과 그 방식을 선택한 문인은 이 세상에는 아마도 유일무이할 것이다. 김학철 옹은 여러 차례의 중대한 인생선택에서 단 한번도 부끄럽고 추레한 선택을 한 적이 없이 떳떳하고 깨끗한 선택을 하셨다. 단 한번도 불의를 선택하여 불의의 편에 선적이 없이 언제나 정의를 선택하셨고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불사하시면서 용감히 싸우셨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 옹은 편안함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기구한 80여성상을 살아오셨다. 그리하여 윤동주 님의 서시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80여성상을 사시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내시였다. 이는 실로 우리 속인(俗人)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성(聖)의 경지 아닐 수 없었다. 김학철 옹이 장구한 사회실천 속에서 만들어 오신 가장 귀중한 억센 사나이의 정신, 불요불굴의 저항정신, 백절불굴의 강철 같은 의지, 특히 만년에까지 보여준 그 추호의 노예근성과 아첨기도 없이 날카롭게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비리를 행해 투창을 날리는 그 용기와 의지와 작가적 양지(良知)는 아마도 앞으로도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상당히 긴 동안 그 계승자가 없을 것이다. 학술사나 예술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살아생전에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가운데 후세에까지 두고두고 남을만한 독창적인 업적이나 고매한 인격을 남긴 사람들은 지극히 드물다. 그것은 살았을 때 유명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사회적 통념이나 유행사조 그리고 당대의 가치관에 영합하고 권세에 아부하여 명예를 누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죽고 나면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일수록 죽어서도 이름을 휘날리려고 죽기 전에 자기를 명예롭게 만들어놓으려고 애쓴다. 시비를 세운다, 문집을 만든다 하면서 부산을 떨지만 이는 죄다 부질없는 짓거리이다. 이렇게 부산을 떤다 해서 아름다운 인간의 본질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촐랑거리는 인간들과는 달리 김학철 옹은 분명히 살아생전에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세상을 뜬 후 더욱 그 영명(英名)이 빛을 뿌리고 있다. 비록 생전에 김학철 옹의 문학비가 세워지지 않았지만 사후에는 문집이 출판되였고 국내외에서 김학철문학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학철옹의 작품세계와 그의 고매한 인격은 진작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기념비로 우뚝 솟아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들의 마음속에 불멸의 기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김학철 옹이 80여성상 자아의 가장 주체적인 자유선택에 의해 자신의 수준 높은 문학의 기념탑과 인격의 산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일 김학철 옹처럼 개인의 주체적인 의지에 좇아 《자유선택》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의지만 따른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인이라는 쇠사슬에 결박당한 노예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바람에 따라 돛을 달고, 동풍이 불면 동풍파요, 서풍이 불면 서풍파요, 남풍이 불면 남풍파요, 북풍이 불면 북풍파로 변신하는 눈치꾼, 바람잡이들이 득실거리는 이 황당한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니 김학철 옹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학철옹은 아마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올곧은 선비인 것 같다. 김학철 옹의 치열한 문학정신은 마땅히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문학정신으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학철 옹도 결함이나 맹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분의 맹렬한 비판정신은 자연히 조화성과 포용성이 모자라게 했으며 일부 독선(獨善) 적인 경향도 존재하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김학철 옹이 살아 계셨을 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옹의 필봉에서 또 무슨 불똥이 자기 몸에 튕길까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이 속세에서 누구나 김학철 옹처럼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은, 네모반듯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에 김학철 옹의 문학정신은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 있어서는 한낱 이상(理想)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항로를 가리켜주는 등대(燈臺) 같은 존재이며, 휘날리는 전진의 기치이고, 어둠을 밝혀주는 홰불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는 무엇이 있소? 하고 묻게 되면 선뜻 우리에게는 김학철 옹이 있다고 대답한다. 정녕 중국조선족문인들은 김학철 옹 같은 어르신님을 모셔온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로지 김학철 옹이 밝히고 있는 등대를 향해 나아가야만 우리 중국조선족동포문학은 자기의 올바른 항로를 따라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1월 17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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