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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년의 채무 * 철응 댓글:  조회:1659  추천:0  2012-04-24
   1956년의 채무                                              철  응 작                                            최동일 역     아버지는 림종시에 만보산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1956년이였네라.” 아버지는 자신있게 그 시절 그 일에 대하여 회억을 더듬었다. 만보산이 태여나던 그해, 아버지는 동사자였던 리옥택에게서 돈을 꾸었던것이다. “아마도 네 어미가 병원에 가서 너를 낳을 때였을거다. 집에 있는 돈으로는 부족했었지. 그래서 나는 그때 우리 집 맞은켠에 살았던 리옥택에게서 돈 5원을 꾸게 된거다. 후에 어떻게 됐던지… 아무튼 그 돈을 갚아주지 못했단다. 올해가 2009년이지? 어느새 53년이 지났구나. 여섯째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네가 직접 그 돈을 갚아야 한다.”   만보산은 형제자매들중에서 여섯째여서 아버지는 평소 만보산을 여섯째라고 불렀던것이다. 53살에 나는 “여섯째” 만보산은 병상머리에 서서 침대에 꼬부리고 누워 힘겹게 말끝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수시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만보산이 머리를 끄덕이는것을 보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베개밑에서 볼품없이 구겨진 누런 편지봉투를 꺼내 손에 들고 말끝을 이었다. “이 봉투에 돈이 들어있단다. 그래, 물론 5원이 아니지. 5원을 53년간 정기저금을 해서 나오는 리식을 계산해넣었단다. 1956년의 정기저금리식으로 계산했거든. 기억하건대 그때 리식은 아마 백분의 5였을거다. 그러니 지금까지 계산하면 58원 가까이 되더라. 요 며칠 나는 날마다 그 5원의 리식을 반복해서 계산해보았단다. 그러니 대체로 틀림이 없을거다.” 만보산은 아버지의 손에서 편지봉투를 받아들었다. 편지봉투아래쪽에는 붉은색 명조체로 “복안시인민병원”이라고 찍혀져있었다. 그 글을 읽노라니 만보산은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말못할 감개가 괴여올랐다. (참, 못 말린다니까. 아버지는 평생을 이렇게 꼼꼼하게 살아오셨지. 병으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어느때 무슨 방법으로 이 병원의 편지봉투를 구했을가? 편지봉투 하나를 사기도 아까왔던거야!) 아버지는 웬 일인지 평소 말이 두서 없을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대체로”라는 말도 “대채로”라고 발음하거나 “침대”를 “깔대”로 표현하는것과 같은것이였다. 하기에 아버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첫 대면에서 벌써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것을 의식하고는 아버지에게 웬간해서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성인이된후 만보산은 늘 이런 생각을 굴려보았다. (사실 아버지도 궁리에 밝으신분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생 어떻게 하면 가정살림을 잘 꾸릴것인가만 궁리해오신것 같다.) 그만치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가정의 경제권을 두손에 꽉 잡고 계셨던것이다. 만보산은 얇다란 편지봉투를 마주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사실 편지봉투안에 들어있는 본금과 리자를 합한 돈의 액수를 셈 해볼 마음이 없었다.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어떠랴. 세월은 벌써 53년이 흘러버린것이다. 베개를 베고 누웠던 아버지는 갑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몸을 일으키더니 만보산을 향하여 두팔을 크게 벌리는것이였다. 그 거동은 마치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듯해보였다. 그것은 애들이 어른을 보고 응석을 부리면서 자기를 안아달라고 조르거나 누군가에게 중요한 일을 부탁하면서 다시한번 확인을 하려는듯한 자세였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 “우리 이렇게 서로를 안아야 네놈이 진짜 내 부탁을 들어줄것이다.”라고 말하는듯싶었다. 만보산은 그때 아버지의 그 자세를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에 대하여 근본 심리준비가 되여있지 않았다. 만보산이 비록 형재자매들중에서 엿섯째로 막내이지만 종래로 아버지와 그렇게 친절하게 신체접촉을 해본적이 없었던것이다. 그만치 아버지도 종래로 만보산의 어리광을 친절하게 받아준적이 없었다. 만보산은 사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친구가 별반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린색함때문이라고 만보산은 나름대로 생각하군 했다. 아버지의 린색함때문에 어린 만보산은 수시로 부끄러움을 느끼군했었다. 그렇게 살아오신 아버지가 림종을 앞두고 외국사람들이나 취할수 있는 방식으로 만보산을 안으려고 하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팔을 벌리고있었다. 아버지의 흰 머리는 다듬지 않아서 부수수한 그대로였고 눈동자는 흐릿해 보였으며 얼굴은 검으스레 해있었다. 그리고 팔과 다리는 몹시 수척해보였는데 마치도 소슬한 바람에 떨고있는 한마리 새를 방불케 했다. 아니, 그보다도 박제를 해 세운 큰 새라고 표현함이 나을것이라고 만보산은 생각을 굴렸다. 순간 만보산은 아버지를 큰 새의 표본에 비유한 자신이 놀랍게 느껴졌다. 아버지에 대한 방금전의 그 비틀려진 인상이 어느새 일종의 이름할수 없는 아릿한 련민으로 바뀌여졌다. 만보산은 포옹을 하려고 두팔을 벌린 아버지의 그 거동이 전에 보아오던 아버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만보산은 이제 곧 마감을 고하게 될 한 생명이 또 어떤 거동을 취하게 될지 알수 없는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굴려보았다. 만보산은 약간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안았다. 이미 간암말기에 이른 아버지는 가볍다 못해 뼈마저 없는것 같았다. 만보산은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맡고있었다. 그 냄새는 만보산으로 하여금 주방구석에 오래동안 처박아두었던 기름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며칠후, 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으셨다.    만보산은 꼭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어드리고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아버지가 빚 졌던 돈 5원을 갚아드리기 위한것이 아니였다. 만보산은 늘 병상에서 아버지가 힘껏 벌렸던 그 팔을 보는것 같았던것이다. 병든 새를 방불케 했던 아버지의 그 자세는 수시로 만보산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것 같았다. 만보산은 림종시 보았던 아버지의 그 마지막 순간이 늘 머리속에서 배회하는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만보산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 돈을 갚아야만 아버지의 그 형상이 머리속에서 사라지게 될것이라고 느꼈다. 아버지는 림종시 만보산을 보고 그 돈을 “직접” 전하라고 특히 강조했었다. 그 뜻인즉 리옥택을 찾아가 직접 돈을 넘겨주라는 뜻이라고 만보산은 나름대로 생각하고있었다. 아버지의 그 유언을 따르려면 만보산이 직접 북경으로 가야만 했다. 만보산은 아버지가 생전에 다니던 공장의 동사자들로부터 북경에 있는 리옥택의 구체적인 주소를 수소문하였다. 공장의 많은 사람들이 리옥택의 주소를 알고있었다. 그들은 만보산에게 리옥택의 주소를 적어주었을뿐만아니라 리옥택이 지금 퇴직을 하고 아들과 함께 사는데 그 주소는 아들네 집의 주소라는것도 세세히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봄에 세상을 떴지만 만보산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가을을 맞게 되였다. 만보산은 성인이 된후 한 중등전문위생학교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게 되였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분가를 했었다. 만보산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생계를 이어가는 편이였다. 간혹 생활비가 여유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도 만보산은 북경으로 가는데 들게 될 경비를 세세히 핵산하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 했다. 만보산은 절대로 경솔하게 행동할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학교에서는 건국 60돐 경축행사로 가을에 교직원들을 조직하여 륜번으로 북경참관을 하게 되였다. 만보산은 이 참관이야말로 직접 리옥택에게 돈을 전해줄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조직하는 북경참관비용은 학교측에서 안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이번 참관은 사실 공비로 즐길수 있는 북경일일유람이라고 할수 있었다.   집을 떠나기전 만보산은 리옥택에 대하여 곰곰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만보산의 머리에는 리옥택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리옥택에 대한 인상이라면 대부분 큰형에게서 얻어들은것뿐이였다. 전에 리옥택네와 만보산네는 방직공장주택구에서 문을 마주하고 살았었다. 만보산의 아버지는 그때 공장선전과에서 공장신문편집으로 일했고 리옥택은 공장의 기술원으로 일했었다. 큰형은 그때 리옥택네는 언제나 자기네보다 더 좋은것을 먹었다고 회억했다. 리옥택의 아들 리가심과 만보산의 큰형은 소학교동창이였다. 리가심은 늘 만보산의 큰형에게 자기의 아버지는 여름만 되면 자기에게 수박을 사준다고 자랑했다는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보산의 아버지는 만보산네 형제들에게 치약껍질을 모아팔라고 요구했다. 치약껍질을 팔아 받은 돈은 물론 아버지에게 바쳐야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3전씩 용돈을 주었는데 한달에 록두로 만든 얼음과자 한대씩밖에 사먹지 못하게 했다. 후에 리옥택은 북경으로 전근되여 갔는데 그해 만보산은 아직 세살도 채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꾼 돈을 갚지 않고있다는 사실은 만보산이 어릴 때부터 알고있는 사실이였다. 소학교 일학년 때의 여름방학에 만보산과 몇몇 친구들은 늘 아빠트대문어구에서 얼음과자를 파는 할머니를 둘러서서 얼음과자를 사먹느라고 법석대군했다. 만보산과 그의 친구들은 그 할머니의 얼음과자는 외상으로 사먹을수 있다는것을 모두 알고있었던것이다. 할머니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종업원의 가속으로서 만보산과 그의 친구들과 익숙한 사이였다. 하기에 그들은 먼저 얼음과자를 먹고 후에 집에 가서 돈을 가져다가 물어줄수 있었던것이다. 만보산도 외상으로 얼음과자를 사먹고 후에 돈을 물어주고싶었다. 만보산이 정말 외상으로 얼음과자를 사먹으려고 하자 만보산보다 좀 나이가 많은 애가 만보산을 손가락질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까밝히기라도 하겠다는듯이 소리쳤다. “저애네 집 어른들이 남의 돈을 꾸고 아직 갚아주지 않고있어요.” 만보산은 그 고함소리에 데기라도 한듯이 내밀었던 손을 훌쩍 당겨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보산은 “창피스럽다”는 말로 자기의 심정을 표달할줄을 몰랐었다. 하지만 돈을 꾸고 갚지 않는다는것은 실로 머리를 들수 없는 일이라는것만은 명백하게 알고있었다. 나이를 몇살 더 먹은후 만보산은 1956년에 돈 5원의 가치가 어떠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따라서 꾼 돈 5원을 갚지 않았다는 문제의 엄중성을 더 한층 느끼게 되였다.    1956년, 북경과 3백키로메터나 떨어진 어느 성의 한 도시에서 아버지는 한달에 로임 36원을 받으셨는데 그 돈으로 여덟식구를 먹여살려야 했던것이다. 가정살림은 매우 군색했지만 그런대로 겨우 연명할수는 있었다. 1956년에 고급기숙제소학교 학생의 한달 화식비는 12원 5십전이였다.      1956년, 가로무늬카키천으로 만든 중산복 한벌을 사자면 6원 30전을 들여야 했다.   1956년, 어머니는 만보산을 낳은후 시골로 가서 산후조리를 하게 되였는데 장도뻐스에서 내린후 역전앞의 작은 음식점에 들어가 10전을 주고 닭알국 한사발을 청해 잡수셨는데 큼직한 그 사발에는 닭알이 10개도 더 들어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1전짜리 동전만한 기름방울이 두툼하게 떠서 사발을 꽉 메우고있었다는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머니는 후에 백번도 더 외우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이 이야기를 온 가족이 모여앉아 식사할 때 하는것을 매우 좋아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만 있으면 따로 료리를 볶지 않아도 입맛이 돈다고 했다. 식구들은 한손에 옥수수가루만두를 하나씩 들고 그것을 기름이 가득 발린 닭알로 생각하면서 맛나게 먹었다.   1956년, 돈 5원은 평범한 중국가정의 큰 재산이라고 할수 있었다. 아버지가 돈 5원을 꾼 맞은켠의 리옥택네는 말그대로 “한 울타리안에 살아서 시도 때도 없이 보게 될” 사람들이였다. 아버지는 그 시절 무슨 방법으로 2년도 넘게 그 돈을 갚아주지 않았을가? 만약 2년후에 리옥택이 북경으로 전근되여 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날마다 리옥택과 얼굴을 마주할수 있었을가? 그래도 그냥 리옥택을 보려면 아버지는 정말 쇠같은 얼굴에 강철같은 신경이 있어야 했을것이다. 만보산은 그날 외상으로 얼음과자를 먹으려다가 친구들에게 “적발”된후 어머니에게 그 일을 물은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두손바닥을 탁탁 마주치다가 또 한손바닥으로 다른 손등을 때리면서 맞은켠 집 리씨네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기여들어가고싶다고 푸념을 했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는 일자리가 없는 가정주부로서 근본 가정의 경제권이 없었다. 어머니는 2전짜리 성냥 한갑을 사려고 해도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던것이다. 나이를 몇살 더 먹게 만보산은 어느날 용기를 내서 아버지를 찾아가 그 일에 대하여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흥분을 하지 않고 되려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 돈 5원 말이냐? 갚아야지. 나는 종래로 갚지 않겠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단다. 리옥택네는 아들 하나밖에 없어서 우리 집 보다 살림이 얼마나 더 좋은지 모른단다. 리옥택도 종래로 나를 보고 그 돈을 갚으라고 재촉한적이 없단다.” 아버지는 또 자신이 노력해서 그 돈을 갚으려고 하던 그 무렵에 리옥택이 북경으로 전근되여 갔다고 자신을 변명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어떤 리유를 가지고 자신을 변명해도 모두 억지감밖에 줄수 없다는것을 만보산은 잘 알고있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리옥택이 아들 하나밖에 두지 않아 살림이 좋기에 응당 자식이 여섯이나 딸려있는 자신에게 구제를 해야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것이다. 어머니는 어느 한번 이렇게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남들이 어떻게 당신을 두고 뒤공론을 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새끼를 낳을줄만 알았지 꾼 돈은 갚을줄을 모른다고 해요.” 그러자 아버지는 즉시 이렇게 받아쳤다. “그래, 그래서 여섯째까지 낳은후 나도 새끼를 더 낳지 않는게 아닌가?” 그 말을 들으면서 만보산은 실로 어머니의 생육도 끝이 났고 아버지가 돈을 꾸는 행실도 끝이 난거라고 생각했다. 만보산이 알건대 말도 많던 그 “5원의 채무사건”이 있은후 아버지는 정말 평생 다른이에게서 돈을 꾸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도 사실은 공장의 동사자들이 뒤에서 자신을 씹어대는것을 그렇게 달가와 하지는 않고있었다. 그리고 동사자들의 그 뒤공론이 자기 새끼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것도 짐작하는것 같았다. 리옥택이 비록 아버지앞에서 직접 그 돈을 갚으라고 재촉을 한적은 없지만 사실 동사자들의 뒤공론이 처음 리씨네 집으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은 자명한 일이였던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꾼 “유명한 전설”은 리옥택네 일가가 북경으로 이사를 간후 잠시 한단락 끝나는것 같았다. 그러자 아버지의 다른 습성—궁상맞은 “구두쇠본질”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구두쇠”, 어쩌면 그 말을 듣기 좋게 “극단적으로 절약”을 중시한다고 표현할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표현되는 “구두쇠본질”은 정상을 초월한 집착 같은것이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거리로 남새 사러 나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가지를 살 때 큰것을 하나 사나? 아니면 작은것을 두개 사나? 내 생각에는 그래도 큰것을 하나 사는게 좋을것 같아. 뭣때문인줄 알아? 작은 가지 두개라면 가지꼭지가 하나 더 있게 되니 그만큼 무게가 더 나가게 되는것이지.” 집에서 아버지는 늘 몸소 절약을 체험하고 힘써 실천했다. 먹다가 남긴 쉬쉬해진 남새국이며 기한을 넘긴 약 같은것도 아버지는 달게 잡수셨다. 그리고 15와트 이상의 전등은 켜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종래로 위생종이를 사지 않았다. 그는 직업의 편리를 리용하여 프린트를 한 공장신문을 집에 가져다가 아기들 손바닥만하게 베서는 변소에서 쓰게 했다. 자식들이 종이가 너무 작아서 뒤를 깨끗하게 처리할수 없다고 불평을 부리자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종이를 유용하게 사용할것인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후에도 그 일만 생각하면 만보산은 말못할 괴로움을 느끼군 했다. 아버지는 또 연탄을 톱으로 켜서 유명해진적이 있다. 연탄 한장을 두쪽으로 갈라 두번에 나누어 화로에 넣으면 더 깨끗하게 탄다는것이 리유였다. 그러는 아버지를 보면서 만보산은 그게 과연 그럴가고 의심했다. 아버지는 연탄을 넣는 작은 움을 만들고 그 움에 자물쇠를 잠근후 열쇠를 허리에 차고다녔다. 아버지가 자물쇠를 열지 않으면 누구도 연탄 한장 다칠 생각을 말아야 했다. 식구들이 만두를 찌거나 료리를 볶다가 연탄이 다해서 한장 더 넣으려고 해도 아버지가 없은면 어쩔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쌀이나 밀가루, 기름 같은것을 넣은 통에는 더구나 명심해서 자물쇠를 잠궜다. 쌀을 떠낼 때, 아버지는 늘 특별한 용기를 사용하군 했는데 그 용기란 바로 어머니가 친정에서 가지고 온 호두나무로 만든 사발이였다. 만보산의 인상속에서 자기의 동년과 소년 시절은 모두 배고픔의 련속이였다. 만보산과 그의 형제자매들에게는 그 시절 한번도 배부르게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 시절, 식구들은 누구나 아버지가 출장을 가기를 고대했었다. 아버지가 출장을 가면 마음대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을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출장이라는것을 가지 않았다. 사실 방직공장에 아버지가 가야할 출장은 없었던것이다.   2009년 가을의 그 아침, 만보산은 북경으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호주머니에는 아버지가 손수 넘겨주신 리옥택에게 갚아야 할 돈이 들어있었다. 만보산은 렬차에 앉아가는 내내 군음식을 먹지 않았고 돈을 주고 물 한병 사 마시지 않았다. 차안에서 식품을 파는 밀차가 몇번이나 옆을 오갔다. “와하하영양음료”며 여러가지 스낵이며 빵이며 차잎에 간장 등을 넣어 삶은 달걀이며 해바라기씨며 우유락화생사탕이며… 밀차에는 실로 없는것이 없었다. 함께 차를 탄 교원들은 밀차에 가득 담겨있는 식품들을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맘에 드는것을 고르느라고 복새판을 벌렸지만 만보산은 시종 덤덤한 표정이였다. 만보산은 문뜩 자기의 그 절약정신이 어쩜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은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밀차에 담겨져있는 비닐봉지에 정교하게 포장되여 있는 노랗게 구워진 빵을 보면서 만보산은 소년시절 딱 한번 맛 보았던 그 빵을 떠올렸다. 그날 아버지는 뜻밖에도 출장을 떠났는데 기일은 10일이나 걸린다고 했다. 성에서 대형종업원문예회연을 하게 되는데 방직공장에서 “태양의 빛발 금북과 같아라”라는 제목의 녀성소합창을 무대에 올리게 되였던것이다. 아버지는 그 합창의 가사창작에 참여했었다. 하기에 공연팀을 따라 성소재지로 갈수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출장도 집에 남아있는 식구들을 시름 놓고 밥을 먹을수 있게는 하지 못했다. 집을 떠나기전에 아버지는 진작 만단의 준비를 해놓았던것이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10일간 먹을 쌀을 내놓았는데 자신의 몫은 빼버린것이였다. 아버지는 쌀과 밀가루가 들어있는 통에 자물쇠를 잠그는것도 잊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통에 자물쇠를 잠그기전에 밀가루 반사발을 빌었 다. 어머니는 그 밀가루로 풀을 써야할 일이 있었던것이다. 만씨네 식구들은 종래로 신을 사 신지 않았다. 식구들은 누구나 어머니가 손수 지은 헝겊신을 신었던것이다. 신바닥을 만들려면 반드시 풀이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난로에 풀을 끓을 때 만보산은 늘 어머니곁을 맴돌기 좋아했다. 만보산은 밀가루와 물이 섞여 부글부글 끓으면서 내는 향긋한 냄새를 맛기 좋아했던것이다. 풀이 다 끓으면 만보산은 어머니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식지를 쑥 내밀어 풀을 찍어서는 게눈 감추듯 입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에 묻은 풀을 다 빨아먹고도 만보산은 아쉬워서 오래도록 식지를 빨아대군 했다. 만보산은 풀 향기가 식지에 며칠은 남아있을것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여섯째를 달랬다. 아버지가 쌀이나 밀가루를 담은 통에 자물쇠를 잠그는것은 모두 식구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하기 위한것으로서 후날 굶지 않으려면 “정량”을 먹어야 한다는것이였다. 만보산은 “정량”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있었다. 그 시절에는 “정량”외에 돈이 있어도 어디 가서 쌀이나 밀가루를 살수 없었던것이다. 사실 그때 만씨네는 쌀이나 밀가루가 충족해도 살만한 돈이 없기도 했었다. 10일후에 아버지는 성소재지에서 돌아왔다. 만보산은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는 익숙할대로 익숙한 흰색 비행기가 찍혀져있는 검푸른 색갈의 돛천으로 된 들가방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2009년 섣달에 아버지가 입원하실 때까지 비행기모형이 어슴프레 해지고 쟈크까지 망가진 옛 들가방은 여전히 이버지를 따라다녔다.) 만보산은 들가방이 불룩하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은 만보산을 사뭇 흥분하게 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맛나는것을 사온것이 아닐가?) 부식품이 매우 부족하던 그 년대, 대부분의 아이들은 출장을 다녀온 어른들의 손에 들려있는 들가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것이다. 아버지의 손에 들려진 가방에는 과연 무엇인가가 들어있는듯싶었다. 아버지가 꺼낸것은 빵 여덟개였다.   아버지와 방직공장의 공연팀이 기차에 앉아 성소재지로 갈 때 어느 큰 역전을 지나게 되였는데 기차방송에서 통지하기를 그 역전에서 기차표를 보이고 빵을 구입할수 있다는것이였다. 기차표 한장에 빵 하나를 준다고 했다. 방송에서는 또 볶은 산초와 소금을 다져 가루로 만든 조미료를 넣고 잘 발효시킨 밀가루로 정성들여 만든 빵은 량표를 받지 않는데 하나에 5전이라고 자랑하듯 말하는것이였다. 기차에 앉아 달리던 아버지는 그 방송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량표를 받지 않는다는것은 대단한 혜택이였던것이다. 무엇이나 표를 내밀어야 살수 있었던 그 년대, 량표를 내지 않고 빵을 살수 있다는것은 그야말로 빵을 거저 준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에는 기차역전의 플래트홈이 아니면 어디서도 량표를 받지 않는 부식품을 살수 없었다. 아버지는 민첩하게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차에 있는 동사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빵을 사겠는가고 물었다. 트럼프를 치느라고 경황이 없던 몇몇 녀자들이 사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성소재지에 도착하면 때마다 공짜로 식사를 할수 있었던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의 기차표를 걷어 손에 쥐였다. 기차는 서서히 홈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나는듯이 기차에서 내려가 삽시간에 형성된 길다란 구매행렬에 끼였다. 아버지는 그 행렬의 앞으로 세번째 자리에 서게 되였다. 아버지는 손에 들려진 기차표를 세보았다. 자신의것을 빼면 기차표 7장을 얻은 셈이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빵 여덟개를 사게 되였던것이다. 아버지네 공장의 동사자들은 평소 아버지가 구두쇠임을 모두 알고있었다. 그런 구두쇠가 한번에 빵 여덟개를 사는것을 본 동사자들은 모두 이상하다는듯 아버지앞에서 의론이 분분했다. “꼼꼼하기로 소문난 만쓰푸(师父)님이 오늘 뭔가 잘 못 계산한게 아닌가요? 빵을 사는데 량표를 내지 않았으니 물론 득을 본듯 하시겠지만 그렇게 많은 빵을 언제 잡수려는거죠? 아니라면 그 빵을 열흘간 먹지 않고 보관해둔단 말씀인가요? 그새 빵은 퍼렇게 곰팽이가 낄건데요.”   아버지는 남들이 자기를 구두쇠라고 해도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기를 구두쇠라고 하는것도 자신이 돈을 꾸고 갚지 않은것 하고는 본질적으로 구별이 된다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하기에 아버지는 평소 자기의 어떤 우점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듯 사람들이 자기를 구두쇠라고 부르는것을 만족스럽게 받아드렸던것이다. 아버지는 지어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의론할 때 참견까지 했다. 아버지는 여덟개의 빵을 가방에 넣으면서 이렇게 해석했다. “성소재지에 가서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통일적으로 식권을 나누어줄겁니다. 만약 그 식권을 다 쓰지 못하면 돌아올 때 남은 식권에 따라 량표와 돈을 돌려줄겁니다. 식권 한장에 적어서 량표 넉량에 돈 30전은 주겠지죠. 나는 빵 하나로 한끼를 해결할겁니다. 그렇게 남긴 식권으로 량표와 돈을 바꿔야지요. 누가 이 점을 생각이나 했습니까?” 아버지의 말은 사람들에게 큰 흡인력으로 되였다. 몇몇 동사자들이 아버지처럼 해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한발 늦었는지라 량표를 받지 않는 빵을 살수 없었다. 하지만 성소재에 도착한후 아버지의 예산도 빗나가고말았다. 그번 공연활동중의 식사는 식권을 사용하지 않았던것이다.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식권이 없이 마음대로 식사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수 있다는것은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사뭇 흥분하게 하는 일대 사변이였다. 그 년대에 “마음대로 먹을수 있다”는것은 날마다 그들에게 로임을 발급한다는것과 다를바없이 흥분되는 일이였던것이다. 꿈과도 같이 마음대로 음식을 먹을수 있다는 이 혜택앞에서 아버지의 들가방속에 들어있는 여덟개의 빵은 사람들의 예측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흘만에 곰팽이가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빵을 던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초대소의 창턱을 깨끗이 닦은후 여덟개의 빵을 일자(一)로 널어 볕쪼임을 시켰다. 빵 한쪽을 다 말린후 아버지는 침대를 쓰는 작은 비자루로 겉에 돋은 곰팽이를 말끔하게 쓸어버렸다. 그후 빵을 번져서 다른 쪽을 볕쪼임 시켰다. 그 열흘간 여덟개의 빵을 번져가며 볕쪼임을 시키는 일은 아버지의 유일한 재미였다. 열흘후 아버지는 그렇게 정성들여 말린 빵을 다시 들가방에 넣어 왔던것이다. 후에 아버지의 “빵사건”은 공장에 널리 퍼지게 되였다. 선전과에서, 차간에서 그리고 여름날 그늘아래에 앉아서 땀을 들이면서 그번에 성소재지에 다녀왔던 사람들은 그 일을 이야기 삼아 흥미롭게 되네이군 했다.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재미나는 세절들이 더해져 전설로 되여갔다. “빵사건”이 의론될 때마다 당사자인 아버지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도와 세절적인 자료들을 보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침대를 쓰는 작은 비자루로 마른 곰팽이를 쓸어냈다는 세절은 아버지 스스로 부충한것이였다.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현장에서 직접 보충까지 하는 이야기때문에 언제나 즐거워했다. 만보산은 아버지가 빵을 가져왔던 그날밤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있다. 만보산에게 있어서 그밤은 즐겁고 아름다운 밤이였다. 저녁을 먹을 때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옥수수죽을 끓이려는 어머니를 말리고 나섰다. “오늘 죽 한때를 절약하게 되였네. 내가 마른 음식을 좀 가져온게 있거든.”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들가방에서 여덟개의 마른 빵을 꺼내 밥상에 둘러 앉은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아버지는 나중에 자기에게 차려질 그 빵을 만보산에게 넘겨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섯째야, 네가 막내니까 두 사람 어치를 먹어라.” 형과 누나들은 부러운 눈길로 만보산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여섯째는 아직 힘을 낼만한 나이가 아니여서 두 사람 어치를 먹을 필요가 없다는것이 리유였다. 어머니는 빵을 당겨다가 아버지앞에 밀어놓았다. 아버지는 그러는 어머니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새 이렇게 살이 찐게 보이지 않소? 나는 이번 걸음에 참으로 잘 먹었다우. 이번 활동기간에 우리는 때마다 마음대로 배부르게 먹을수 있었소. 누구도 수량을 제한하지 않았다니까.” 말을 마친 아버지는 빵을 들어 다시 만보산의 손에 쥐여주었다. 만보산은 한손에 빵 하나씩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만보산은 아버지가 정말 두볼이 퉁퉁해지고 윤기가 도는듯싶었다.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만보산이 더욱 재미나다고 생각한것은 아버지가 걸친 가짜적삼목깃이였다. 아버지의 목에 둘러져있는 그 가짜적삼목깃은 어머니가 파랗고 하얀 네모칸이 엇갈려 있는 몇개의 손수건쪼박을 무어 만든것이였는데 어깨까지 약간 가리울수 있었다. 어깨아래는 물론 빈것이였다. 그 가짜적삼목깃은 겨드랑이 아래에 고무줄을 리용하여 몸에 고정하게 되여있었다. 그 세월에 아버지는 종래로 적삼을 사입지 않으셨다. 가짜적삼목깃은 그렇게 양복밑에 입는 목깃 대신으로 사용되였던것이다. 방금 아버지는 집에 들어선후 급히 겉옷을 벗고 애들에게 빵을 꺼내주느라고 덤벼치다보니 가짜적삼목깃을 벗는것을 잊었던것이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가짜적삼목깃을 두른채로 있었는데 가짜적삼목깃밑에는 방직공장에서 생산한 너무 오래 입어 판나서 여러 곳을 기운 회색침직가을내복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 모양은 마치도 턱밭치개를 두른 유치원 어린이 같아보였다. 만보산은 가짜적삼목깃을 두른 아버지에게 벌씬 웃어보였다. 만보산은 걸탐스럽게 빵을 뜯기 시작했다. 빵은 너무도 딴딴하게 말라서 돌멩이를 씹는듯 했다. 만보산의 이발은 빵을 떼지 못하고 연신 빵우에서 미끌어져내렸다. 하지만 만보산은 빵에서 풍기는 볶은 산초와 소금의 은은한 향을 맡을수 있었다. 그날밤, 만보산은 침대에 누워서도 이발 사이에 끼인 빵쪼각을 뚜져내서 다시다시 씹어보았다. 만보산은 그 빵조각마저 그저 삼키는것이 못내 아쉽다고 생각했다. 만보산은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빵조각을 입에 문채 달콤하게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후에 만보산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아버지가 빵을 말리던 이야기를 들었다. 만보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부터 울화가 치밀어오르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 울화는 여전히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빵을 먹던 그 순간의 달콤함을 없애버릴수는 없었다.   그새30여년이 흘렀다. 만씨네 자식들은 모두 성장하여 부모의 슬하를 떠나 다른 도시에 가서 가정을 이루고 선후로 자식들을 낳아 길렀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지나친 린색함에 두려움을 느꼈던지 하나같이 아버지 가까이에서 살려고 하지 않았다. 여섯 형제자매중에서 만보산이 그래도 아버지 가까이에서 산다고 할수 있었다. 만보산의 집과 아버지네 집은 거리 두개를 사이 두고 있었던것이다. 무엇이나 표를 받던 시대가 지나갔다. 서민들의 생활은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입쌀이나 밀가루도 마음대로 살수 있게 되였다. 사람들은 료리를 볶을 때 아쉬움이 없이 기름을 팍팍 넣을수 있게 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구두쇠정신”만은 여전히 변할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여전히 쌀이나 밀가루를 통에 넣고 자물쇠를 잠구었다. 아버지는 값이 싼 물건을 사기 위해 꼭 재래시장을 다녔다. 닭알도 병아리가 들어안기전의 곰삭은 닭알을 사군했다. 지난세기 80년대, 만보산은 부모들에게 인조가죽으로 된 쏘파 한쌍을 사드린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틀날로 쏘파를 들고 나가 팔아버렸다. 아버지는 쏘파를 판 돈마저 호주머니에 깊숙히 넣어버렸다. 아버지는 낯 익은 사람들을 만나면 “쏘파말이여, 돈이 들구 자리를 찾이하는 쓸데 없는 물건이란 말이여.” 하고 푸념을 했다. 퇴직을 한 아버지에게는 남아도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만보산을 보고 소학교에 다니는 만보산의 딸을 자기의 곁에 두고싶다고 했다. 하지만 만보산의 안해는 견결히 반대해 나섰다. 그렇게 되여 딱히 할 일이 없게 된 아버지는 자청하여 남새를 사들이는 일을 맡았다. 아버지는 사실 남새를 산다기보다 남새를 줏는다고 하는것이 나을것이였다 날마다 장사를 마칠 무렵이면 아버지는 시장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남의 눈을 전혀 개의치 않고 남새장사군들이 팔지 못해 버리는 남새잎이나 우거지 같은것들을 주어모았다. 운수가 좋은 날에는 꽤 먹을만한 남새를 얻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금방 싹이 트려고 하는 감자나 방금 쇄기 시작한 미나리 같은것들이였다. 아빠트에 사는 이웃들은 늘 아버지를 보고 “고기라도 한근 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돼지고기를 볶아서 원이 없이 먹을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것이였다. 아버지는 그 말에 몹시 기분이 상해하면서 “생활개선을 하자고 고기를 줏겠느냐? 마음만 먹으면 나는 오늘이라도 생활개선을 할수 있다.”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이웃들은 시물시물 웃으면서 어떻게 생활개선을 하려는가고 바투 들이댔다. 아버지는 그러는 사람들에게 “돼지고기미나리볶음”을 해먹으련다고 시뚝해서 대답했다. 그바람에 이웃들은 배를 끌어안고 돌아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어투에는 조금도 롱담기가 섞여있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린색함은 더 이상 생활의 핍박이 아니였다. 린색함은 바로 아버지 인생의 일종 “신앙”이나 생명의 동력이였다. 아버지의 린색함은 실로 아버지의 인생과 잠시라도 떨어질수 없는것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린색함은 아버지에게 그 어떤 영광을 가져다주는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돈을 절약하는것이야 말로 영광”이라고 믿고있었다. 이것은 돈을 꾸고 갚지 않은것과 별개의 개념으로서 확실히 자신을 위한 즐거움이라고 할수 있었다. 이 즐거움은 누구의 생활을 방해하는것도 아니여서 누구도 왈가왈부할수 없는것이였다.  기차는 서서히 북경역에 들어섰다. 만보산은 동사자들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려 플래트홈을 벗어났다. 그들은 학교의 통일적인 배치에 따라 천안문광장을 참관했고 “새둥지”와 “수립방”도 돌아보았다. 만보산과 동사자들은 도시의 웅장함에 감탄을 련발하면서 그야말로 수도가 다르기는 다르다고 혀를 찼다. 2009년의 북경은 바로 1년전에 올림픽을 주최했던 도시였고 공화국 창건 60돐을 맞은 수도였다. 하기에 만보산은 북경이 자기가 살고있는 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수도의 하늘은 푸르디 푸르렀고 곳곳에 화초가 만발해있었다.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얼기설기 어울려 우후죽순마냥 솟아오르고있었다. 거리를 거니는 행인들은 저마다 활력에 차넘쳤다… 동사자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만보산에게는 사진기가 없었다. 만보산은 한 교원에게 청을 들어 “새둥지”앞에서 기념사진 한장을 남기고는 인솔자인 부교장에게 청가를 맡았다. 자기의 핸드폰으로 북경에서 통화를 하면 로밍서비스를 받아야 하기에 통화비가 많이 나온다는것을 알고있는 만보산은 자기의 핸드폰에 전지가 나갔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부교장의 핸드폰을 빌어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종업원들이 알려준 번호대로 리옥택에게 전화를 했다.   리옥택이 인차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통해 만보산은 리옥택이 가는 귀가 먹은 목소리가 우렁우렁한 로인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만보산은 로인에게 높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명함을 들먹이면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로인님께 문안을 전하려 한다고 말했다. 만보산은 전화에서 리옥택에게 아버지가 꾼 돈을 갚아주려 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마주 앉아서 차근차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리옥택은 여전히 아버지를 똑똑하게 기억하게 있었다. 50여년전에 외성의 어느 방직공장주택구에서 문을 마주하고 살던 이웃이라는것까지도 똑똑하게 기억하고있었던것이다. 리옥택은 매우 기뻐하면서 만보산과 자기의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리옥택은 만보산에게 자기네 집으로 오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또 아들이 오늘 집에서 큰 파티를 열게 되여 집이 좀 복잡할것이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나기에는 별 지장이 없을것이라고 하면서 아예 만보산도 함께 파티에 참가하여 술을 마시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라고 했다. 만보산은 일시 “파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필경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술을 마시는 일과 관련이 있을것이라고 추측했다. 통화를 마친 만보산은 “새둥지”역에서 지하철 10호선을 타고 순리롭게 리옥택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은 “록수장원”이라고 이름한 별장구역이였다. 만보산은 황금으로 된 기린이 조각되여 있는 두개의 큰 검은색 철대문을 마주하고서야 공장종업원들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종업원들의 소개에 의하면 리옥택의 아들 리가신은 부동산경영을 하고있다는것이였다. 리옥택은 아들과 함께 편안한 만년을 보내고있는데 그 생활은 그야말로 행복의 극치라는것이였다. 만보산은 어떻게 그 장원으로 들어설가를 두고 근심에 쌓였다. 그때 감색제복을 입고 어깨에 누런 견장을 단 보안원이 경비실에서 뛰여나오는것이였다. 보안원이 만보산에게 성씨를 묻자 만보산은 자기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보안원은 인차 만보산을 깎듯이 대하면서 방금 A8좌의 업주가 자기들에게 통지를 하여 손님을 들여보내라고 했다는것이였다. 보안원은 만보산을 안내하여 대문안으로 들어선후 열정적으로A8좌로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다. 앞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선후 아치형다리를 지나 다시 앞으로 200메터쯤 가면 도착할수 있다는것이였다.  만보산은 보안원이 가리켜준대로 걸어서 아치형다리에 이른후 기계적으로 다리우에 올라섰다. 아치형다리는 경사도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경간은 매우 넓었다. 만보산은 머리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물속의 수련, 못을 둘러싼 대면적의 잔디, 분수, 나무의자 그리고 매우 진귀해 보이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만보산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내려와 앞으로 200메터쯤 걸었다. 그는 도중에 몇 채의 흰 별장과 누른 별장을 지났다. 만보산은 어두운 회색으로 된 거부기등모양의 유점토로 된 기와를 얹은 붉은 색 별장을 보게 되였다. 만보산도 자기가 왜 그 붉은색 별장지붕우의 유점토로 된 거부기등모양 기와에 눈길을 돌리게 되였는지를 몰랐다. 어쩌면 전에 외국영화에서 그런 형태의 지붕을 보았던것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쯘하게 수선을 한 잔디밭이 별장을 감싸고 넓게 펼쳐져있었다. 잔디밭은 얼핏 보기에도 천여평방메터는 됨직했다. 정원대문의 베이지색 모석(毛石)문기둥에는 “A8”이라는 글자를 새긴 적동문패가 박혀있었다. 만보산은 문어구에 멈춰섰다. 담장안에는 성인 키의 절반쯤 되는 흰 나무란간이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마루바닥에 닿는 큼직한 창문과 그 창문에 달린 흰색의 큰 베란다가 눈에 안겨들었다. 몇몇 로인들이 그 베란다에 앉아 가을날의 쾌적한 해볕을 즐기고있었다. 만보산은 그 로인들속에 리옥택이 있을것이라고 짐작했다. 장원의 잔디밭에는 백설같이 흰 보를 친 장방형 음식상이 놓여져있었다. 번쩍이는 은쟁반에는 여러가지 과일과 과자 그리고 고기가 담겨져있었다. 만보산은 그 고기가 꼭 불고기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기를 구을 때 쓰는 화로가 세워져있었다. 그곳에서는 흰색의 높은 모자를 쓴 두명의 료리사가 분주하게 돌아치고있었다. 고기를 굽는 냄새는 기름냄새와 함께 날아와 만보산의 코를 간지럽혔다. 일부 남자들과 녀자들 그리고 좋아라 뛰여다니는 어린이들, 그들은 앉거나 서서 아니면 잔디밭을 거닐면서 무엇인가를 먹고 마시고 한담을 하고있었다. 다섯살쯤 되여보이는 가리마를 낸 머리를 한 남자애가 어머니인듯 보이는 녀인을 향해 소리쳤다. “난 프랑스의 ‘에비앙’을 안 마실거야, ‘에비앙’을 안 마신다구. 난 방금 마셨던 한 병에 26원씩 하는 ‘무량장천(无量藏泉)을 마실거야. 한병에 26원 하는 그 샘물을 달란 말이야.”   장원안으로 들어가려고 마음 먹었던 만보산은 A8좌의 나무란간밖에서 저도몰래 몸을 돌리고말았다. 순간 뭐라 할수 없는 처량함과 함께 온몸이 후둘후둘 떨려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만보산은 잔디밭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가봐 두려웠다. 만보산은 잔디밭에서 바로 리옥택이 말하던 “파티”가 벌어지고있는것이라고 단정했다. 만보산은 공장종업원들의 말을 통해서 리옥택네 부자가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는것은 알고있었지만 이 정도일줄은 상상도 못했던것이다. 방금 그 애가 달라고 하던 한병에 26원씩 하는 샘물은 만보산으로 하여금 자기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아버지가 림종시까지 들먹이던 그 58원의 돈을 떠올리게 했다. 이 장원에서 58원은 겨우 샘물 두병을 살수있는 돈밖에 안되였다. 리옥택과 그의 아들은 과연 옛 이웃이 돌려주는 돈 58원을 어떻게 생각할가? 잔디밭에서 이 정도의 파티를 열고있는 그들이 정녕 53년전에 다른 사람에게 꾸어주었던 돈 5원을 기억하고있을가? 만보산은 자신에 대하여 일종의 원망과 분노를 느끼고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이곳에 왔는가? 53살이나 되는 나그네가 몇백키로메터를 달려와서 별장에 사는이들에게 주제 넘게, 당당한듯 주름이 가득한 보잘것 없는 봉투를 건네줘야 한단 말인가?) 만보산은 자신의 행실이 너무도 해학적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막연함마저 갈마들었다. 자기의 행동이 꼭 “해학적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만보산은 A8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만보산은 자기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멀리에 보이는 아치형다리를 향해 걸음을 재우쳤다. 만보산의 걸음은 생각외로 매우 가벼웠다. 만보산은 어느새 다리아래에 도착했다. 만보산은 다리를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지나자 장원대문과 가까와 졌다. 그때 만보산은 별안간 다리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감을 느꼈다. 만보산은 더는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만보산은 도무지 다리우에 올라설수 없었다. 만보산은 잠간 숨을 고르고는 다른 다리를 먼저 내디뎌보려고 악을 썼다. 하지만 그 다리도 도무지 만보산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만보산은 자신이 귀신에게라도 홀린듯싶었다. 하지만 만보산은 절대 귀신의 조화일수 없다고 단정했다. 잠간후 만보산은 애써 정신을 진정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A8좌를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귀신에게라도 홀린듯 하던 다리가 차츰 만보산의 뜻을 따라주었다. 만보산은 그 힘을 빌어 다시 돌아서서 다리우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자 두다리는 또다시 마법에라도 걸린듯이 만보산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만보산은 뻣뻣한 다리로 힘겹게 땅을 딛고 서서 아치형다리에 몸을 기댔다. 그 모습은 마치도 무엇인가를 깊이 사색하는 연박한 철학자를 방불케 했다. 석양이 불타고있었다. 널다란 잔디밭에서 연을 날리고있는 몇몇 아이들이 만보산의 눈길을 끌었다. 만보산은 애들처럼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만보산은 하늘 높이 날아예는 새들을 보았다. 제비, 지네, 수리개… 붉은 부리의 검은 수리개가 날개를 쫙 펴고 제일 높이 날고있었다. 수리개는 위풍당당하게 대지를 굽어보고있었다. 그 시각, 만보산은 하나의 형상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병상에서 두팔을 쫙 펴들고 무엇인가를 갈구하던 소슬한 바람속의 큰 새와도 같던 아버지의 형상이였다. 만보산은 하늘을 나는 검은 수리개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혹시 아버지의 령혼이 하늘에 떠서 자기를 굽어보는것이 아닐가 하는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만보산은 종래로 미신을 믿어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만보산은 속으로부터 일종의 두려움이 스물스물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만보산은 그런 느낌속에서 몸을 돌려 다시 A8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만보산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만보산의 다리는 워낙 병이 없었던것이다. 만보산은 자기의 다리가 아주 건강한 다리라고 확신했다. 만보산은 고르로운 발걸음으로A8좌를 향해 걸었다.  검은 수리개는 여전히 만보산의 머리우에서 유유히 날아예고있었다. 그 모양은 어쩌면 만보산을 감독하는듯 했고 또 어쩌면 만보산을 호송하는듯싶었다. 만보산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고 또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한결 시원했다.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인가가 드믄 곳에는 언제나 사람그림자가 없을것이라고 만보산은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그 낯선 장원에서 만보산은 놀랍게도 하늘을 향해 두팔을 젖고싶어졌다. 마치도 하늘의 큰 새가 자기에게 손이라도 저어 화답하는듯한 환영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던것이다. 만보산은 자기가 용감하게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렸을 때 오래동안 가슴속에 숨어있던 그 무언가가 소리를 치며 몸밖으로 솟아오르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따라서 오래동안 움츠려있던 가슴이 펴지면서 얼마간 편안함을 되찾은듯한 기분이였다.     철응: 녀, 1957년 북경에서 출생. 장편소설 《장미문》, 《분화(笨花)》등이 있음. 그의 중단편소설은 여러차례 “전국중단편소설상”을 받음. 중편소설 “영원은 얼마나 멀가?”가 제2회 “로신문학상”을 받음. 현임 중국작가협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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