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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3 ]

43    수필*아버지는 종이범이 아니셨다 댓글:  조회:2204  추천:0  2012-04-24
        어머니는 아버지를 “종이범”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만치 못마땅한 존재로 보이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말없이 어머니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잔일들을 찾아하시느라고 무척 애를 쓰다가도 일단 술만 몇잔 마시고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시였다. “나는 범이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어느땐가 나도 ‘따웅—’ 하고 소리칠 때가 있을기다. 꺾이면 꺾였지 네놈들에게 굽어들지는 않는다. 암 그래 내가 범이지, 범은 죽을 때 ‘따웅—’ 하고 소리치는기라.” 아버지께서 겨릅대같은 팔을 홰홰 내저으시며 “범타령”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어이없다는듯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시다가 한마디씩 하셨다. “얘, 아버지를 좀 봐라. 당신이 범이라신다. ‘종이범’이면 또 모를가. 한평생 ‘똥푸개’를 하시면서…” “ ‘똥푸개’면 어떤가? 누가 내만치 똥을 잘 푸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구 해라.누가 그 일을 내처럼 잘할수 있는가? 암, 나는 범이다.” “그래, 좋겠습꾸마. 똥 잘 푸는 범이돼서…” 어머니가 곁에서 그렇게 비꼬으셔도 아버지는 혼자서 중얼중얼 “범타령”을 하시다가 지쳐야 잠에 곯아떨어지시군 하셨다,. 입을 “하—” 벌리리고 느침까지 흘리시며 단잠에 빠져버리신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때 “아버지는 진찌 ‘범’일가 아니면 ‘종이범’일가?” 하고 유치한 생각을 굴려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네살 때로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 그날도 탁아소에서 시름없이 놀고있는데 난데없는 꽹과리 소리가 들여왔다. 우리 또래들은 그 소리에 홀려 마당에 나가 바자굽에 붙어서서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상호네 집 굽인도리에서 꼬깔모자를 쓰고 목에 개패를 건 사람들이 줄을 지어오고있었는데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이 꽹과리를 두드리고있었다. 나의 머리속에서는 “나쁜 놈들을 투쟁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그 “나쁜 놈”들속에서 놀랍게도 꼬깔모자에 개패를 건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도 나쁜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더럭 겁이나서 울음을 터뜨리며 “탁아소아매”한테로 달려갔다. 그날 내가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그후에도 “탁아소아매”는 나의 어머니를 보기만 하면 “어린것이 뭘 알았던지 그렇게 슬피 울더라니께. 그래서 나도 얘를 따라 울었다니께.” 하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날 밤에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셔서 여느날과 다름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곱드라니 아버지에게 머리를 들이대고있을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서웠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던것이다. 정말이지 그날의 그 느낌은 아버지의 몸에서 일년내내 풍기는 그 인분냄새보다도 더 싫고 역겨운것 같았다. 세상과 대화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몸에서 나는 인분냄새를 맡아야 했다. 딱히 어느해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자청을 해서 생산대의 변소를 치는 일을 도맡으셨다고 한다. 워낙 지저분하고 힘든 일이라 누구도 나서지 않고있던차에 아버지께서 자청을 하는지라 생산대에서는 지력이 차한 일군 한명을 아버지에게 붙여주면서 그 일을 떠맡기셨던것이다. 일년사시절 당나귀를 메운 인분수레를 몰고 집집을 찾아다니시며 변소를 쳤기에 아버지의 몸에서는 언제나 인분냄새가 떠날줄을 몰랐다. 형님, 누나들은 성장하면서 차츰 아버지에게 많은 불만을 가지고있었다. 특히 작은 누나는 “아버지때문에 얼굴을 들고다니지 못하겠다.” 면서 다른 일을 바꾸어 달라고 생산대에 제기하라고 아버지에게 지청구를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가타부타 아무말 없으시다가는 아침에 또 일을 나가시군 했다. 아버지는 원래 화룡현 룡수토산에서 소문난 황연기술원이셨다 한다. 아버지는 뛰여난 솜씨로 일터에서 한창 솜씨를 펴다가 갑자기 “현행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쓰게 되셨던것이다. 1961년에 아버지는 “현행반혁명분자”라는 모자를 쓴채 어머니와 나의 형님누나들 넷을 거느리고 화룡현 룡문이라는 곳으로 쫓기워오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43세에 나를 낳으셨다. 그때 식구들은 모두 아버지를 바라보고 살았다. 어머니는 병때문에 일년내내 가벼운 일밖에 못했기에 하루에 8부밖에 받지 못하셨다. 하여 가정살림은 막막하기로 이를데없었다. 해마다 보리고개를 넘기지도 못하고 쌀독이 굽이나면 어머니는 “공인집”에 가서 옥수수쌀을 꾸어다먹고 가을에 입쌀을 물어주군 했었다. 어머니는 그 사이에서 약간씩 벗겨내는 웃돈으로 우리의 학용품같은것을 사주셨다. 독한 인분냄새를 일년내내 맡으면서도 기름냄새 한번 제대로 맡아보지 못했던지라 아버지의 심신은 억수로 찌들리신것 같았다. 어느해 여름, 아버지께서는 아동저수지쪽에 있는 인분구뎅이에 인분을 싣고갔다가 부식되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돼지대가리 하나를 얻어오셨다. 아동저수지공지식당에서 버리려는것을 가져왔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도 코를 싸쥐고 당장 던져버리라고 하셨다. “왜, 푹 삶으면 아직 먹을만 하겠능게.” 어머니의 잔사설도 못들은척하고 아버지께서는 직접 소래에 돼지대가리를 담아들고 강변에 나가 검질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뒤울안에 림시 가마를 걸어놓고 깨끗하게 검질을 한 돼지대가리를 삶기 시작했다. 고기가 익어갈수록 냄새는 더 지독하게 퍼졌다. 작은 누나가 코를 싸쥐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온 동네 개들이 다 찾아왔으꾸마.” 아니나다를가 응산이네 개며 쑈산이네 개며 동범이네 개며… 마을의 개들이 총 출동하여 돼지대가리를 끓이는 가마곁에서 어슬렁거리고있었다. 그날 저녁부터 아버지께서는 돼지대가리고기를 뜯어서 자시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모두 나무라는지라 아버지께서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앉아서 고기를 간장에 뚝뚝 찍어 그렇게도 억척스럽게 잡수셨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 고기를 잡수시려고 태여나신분 같았다. 어머니께서도 더는 뭐라고 하시지 못하고 집안에서 멀거니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날 밤중에 깨여나보니 아버지께서는 또 밖에 나가 고기를 잡수셨고 어머니는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눈굽을 찍고 계셨다. 나는 그러는 어머니가 무서워 어머니의 무릎에 다가가 앉았다. 어머니께서는 말없이 나를 꼭 끌어안아주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며칠 고기를 비닐주머니에 담아서 흐르는 도랑물에 잠그어두시고 가끔 그렇게 꺼내 잡수셨지만 그로 하여 몸에 별 이상이 생기지는 않으셨다. 그처럼 어려운 가정살림에도 아버지께서는 해마다 《연변일보》를 꼭 주문하셨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을 자신후 목침을 베고 잠간 누우셨다가 일어나 그날 신문을 찾아드셨다. 아버지지께서는 신문을 눈에서 멀리쩍하게 들고는 마치도 노래를 하시듯 별나게 중얼중얼 곡을 넣어 읽으셨다. 나는 그러는 아버지가 재밌게 느껴져 곁으로 다가가 “아부지, 왜 창가처럼 신문을 봄둥?” 하고 물은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러는 나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글을 배워서 그렇지.” 하고 대답하시면서 나를 당겨다 무릎에 앉치고는 계속 노래처럼 신문을 읽으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이 세상에 “최고지시”라는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혼자만 신문을 읽은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도 늘 신문을 읽으라고 요구하셨다. “배워야 큰 사람이 된다.”는게 아버지의 삶의 신조셨다. 그때 마을에는 손버릇이 나빠서 늘 남들의 입에 오르는 한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의 누가 어느집 자류지에서 옥수수를 따다가 들켰소, 누구네 호박을 돼지풀속에 숨겨오다가 들켰소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늘 “사람은 손끝이 깨끗해야 쓰네라. 굶어죽어도 남의 물건에 가만히 손을 대면 사람구실을 못하네라.” 하고 한마디씩 하군 하셨다. 큰형이 장가를 들던 해 겨울이였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께서는 며칠전에 돼지를 팔아 마련한 돈을 들고 함에 넣을 호랑탄자를 사러 투도로 가셨다. 그날밤, 아버지께서는 예산보다 퍽 늦게 귀가하셨는데 코등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웬 일인가고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투도에 가서 호랑탄자를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연풍에 있는 큰누나네 집에 들려 술을 마셨다는것이였다. 그후 어둠을 헤치며 강뚝을 따라오다가 넘어졌는데 돌멩이에 코등을 쪼았던것이다. 아버지는 쓸어진채로 숱한 피를 쏟으셨다고 했다. 곁사람이 보기에도 상처가 몹시 아플것 같았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런 일이 없는듯 아예 개의치 않으시고 “허허허…” 통쾌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제일 좋은 호랑탄자를 골랐다니까. 이 호랑탄자에 범같이 날 쌘 손주놈을 싸안게 됐다니까. 허허허… 내가 누구라구.”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한참이나 “범타령”을 하시다가 갑자기 꺼이꺼이 황소울음을 터치셨다. “왜 또 그럼둥, 집이 부산하게…” 어머니께서 불안한 모습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무라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호랑탄자를 당겨안으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높이높이 소리치셨다. “그래 내가 범이다. 누가 나만치 변소를 잘 치는가 나와보라구 해라. 이 놈들, 내가 누구라구.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는 않는다. 내 새끼들은 시라소니가 없다. 이제 우리 집에서 숱한 범들이 나올기다. 범은 죽을 때 ‘따웅—’ 하고 소리를 치는기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엇에 꽉 막히셨던지 부르르 떨리는것 같았다.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도 머리를 외로 꼬셨다. 그 무렵, 20대중반부터 생산대 업무대장과 대대 민병련 련장으로 활약하던 큰형님이 연변대학 정치학부의 입학통지서를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하여 정치심사에서 떨어졌고 작은형님은 어느 공군부대에 뽑혀가기로 했다가 역시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정치심사에서 떨어져 의기소침해있었던것이다. 그 일들은 아버지의 가슴에 그대로 돌덩이가 되여 남아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평소 자식들앞에서 좀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1982년 1월 3일, 무던히도 춥던 그날밤에 아버지께서는 59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일곱달전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하루하루 병자랑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끝내 간경화복수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던것이다. 그때는 형님누나들이 다 장성하신후라 집 살림도 얼마간 펴이셔서 “최령감이 복이 터지게 될” 때였다. “아버지께서 지금도 살아계신다면 무럭무럭 자라나는 손군들을 지켜보면서 뭐라고 말씀하실가?” 형님누나들은 자식들을 “범”으로 키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모두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오셨다. 아버지께서 구천에서 지금 손군들의 모습을 보신다면 아마 또다시 “나는 범이다. 내 새끼들은 시라소니가 없다.” 하고 목청을 돋구실것이다. 조카들속에는 지금 기자, 대학교 교수, 컴퓨터소프트웨어설계사, 호사, 외자기업부문경리가 있다. 특히 큰누나네 둘째 아들은 카나다에서 박사후를 마치고 지금 중국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하고있다. “물질상에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준것은 빚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값진 정신을 물려받았다.” 지금도 가족들이 모여앉으면 큰형님은 가끔 이렇게 “령도강화”를 하신다. 세상의 불의에 눌리워 살면서 아버지께서는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그 정신”을 “범”이라는 맹수에 기탁하여 세상앞에 시위하신것은 아니셨을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께서는 어쩜 아버지를 잘 모르셨던것 같다. 그랬다. “꺾이면 껶였지 굽어들지 않는 정신”을 가슴깊이 숨겨두시고 십여년간 당당하게 인분차를 몰면서 떳떳하게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최기춘. 아버지는 진정 한마리의 굴강한 범으로 되여 오늘도 나의 가슴속에 살아계신다.   
42    수필*누나 댓글:  조회:3471  추천:1  2012-04-24
        카나다에서 박사후 공부중인 외조카네 부부다. 큰누님의 둘째아들인데 큰누님이 평생 농사 지으며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적어오신 만점짜리 성적표일것이다.   ***************   “누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너와 미화를 제일 근심했단다. 그래도 미화는 좋은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가서 시름을 놓았다고 좋아했는데… 너는 그냥 가슴에 걸려있었는지 ‘우리 막내를 어쩌면 좋소.’ 하고 늘 외웠단다.” 산전수전을 다 껶어오신 매형이여서인지 그 말을 하면서도 표정만은 그처럼 담담했다. 그것이 되려 나의 가슴을 그렇게도 아프게 긁었다. (누나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였는가? 누나는 어쩌면 떠나기전까지도 나를 가슴에서 놓지 못하셨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은 찢어지는듯 괴로와났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볼로 흘러내렸다. 나는 매형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아 몸을 돌려 앉았다. 창턱우에 놓인 누나의 영정사진이 눈물로 가득찬 나의 눈에 안겨들었다. 영정사진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찍은 어느 사진에서 뽑아낸듯했다. 누나는 사진을 찍던 그날에도 나를 근심했었는지 눈에는 어딘가 깊은 우수가 담겨져있었다.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누나의 사진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누나가 사진에서 나오셔서 나의 손을 잡고 “지금도 술을 마시면 그렇게 힘드니?” 하고 묻는듯싶었다. 누나의 가슴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바로 그것이였다. “큰일을 하는 사람인데 술을 그렇게 마셔서야 쓰겠니? 너 워낙 마음이 여려서 남의 말을 거절 못하는게 흠이다. 후에는 얼굴 가려워 말고 못 마시겠으면 아예 딱 잘라버려라.” 가족모임때 간혹 만나면 늘 나의 손을 잡고 하시던 누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맨날 술에 빠져사는 그런 고주망태인것은 아니다. 30살전까지는 흰술 두잔만 속에 들어가면 눈이 내려오고 사지가 나른해져 어디에라도 눕고싶은 그런 체질이였다. 30살나던 해 단위에서 중임을 맡으면서부터 부득불 술과 접촉하게 되였다. 혈기왕성하던 때라 일에서도 술에서도 누구에게 지고싶지 않은게 내 마음이였던지라 못하는 술에도 감히 달려들게 되였던것이다. 아마 그게 1996년 3월 7일밤이였을것이다. 내 인생에서 기념할만한 큰 일을 해제낀 나는 두명의 동료와 함께 사무청사에서 멀지 않은 한 양고기꼬치집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해는 겨울이 늦게 가서 3월인데도 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다른 동료들은 맥주를 청했지만 나는 웬지 눈오는 날 양고기구이에 맥주가 싫은것 같아서 흰술을 청했다. 서너잔쯤은 마실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뜻깊고 기분 좋은 날 동료들의 축하까지 받았는지라 나는 기분이 둥둥 뜨는것 같아서 속에다 흰술을 야금야금 부어넣기 시작했는데 술 한병을 다마셔버리고 말았다. 마실 때는 몰랐는데 그 술이 속에 들어가서 전쟁을 벌인것이다. “술 한병 더 가져와.” 하고 소리친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후 정신을 차리고보니 집에서 손등에 링겔바늘을 꽂고있었다.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껴지고 대단하게 느껴져 며칠후에 누나를 만났을 때 그 일을 자랑삼아 말했는데 누나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얘, 얘를 어쩌니? 큰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러면 쓰겠니?’ 누나는 언제나 나를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무슨 큰일도 아니고 그저 남들이 다니는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 출근하는 정도였지만 누나의 눈에는 그게 그렇게 큰일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고중 2학년에서 공부를 그만두고 기어코 군대에 가겠다고 나의 주장을 세우던 그날밤 누나는 저녁을 거르시고 몸이 아프다며 일찌기 벽을 마주하고 누우셨다. 그날도 진종일 밭에 나가 힘들게 일하다가 오셨다는것을 아는지라 나는 새우처럼 꼬부리고 맨 구들에 누으신 누나곁으로 다가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요도 안깔고 이렇게 누웠소? 일어나 저녁이야 자셔야지.” 누나는 미동도 없으셨다. 나는 다시한번 누나를 부르며 누나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누나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눈귀에서 고름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셨다. “너 정녕 왜 그러니? 내가 왜 널 끌어안았는데? 네가 큰일을 하는것을 보고싶었는데…” 누나는 뒤말을 잊지 못하고 흑흑 느끼셨다. “누나…” 나도 목이 꺽 막혀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때 누나의 큰아들은 12살로서 나보다 6살이 어렸다. 그뒤로 또 10살, 6살이 되는 애들이 달려있었는데 나까지 합치면 누나네 내외는 애들 넷을 기르는 셈이였다. 천성적으로 감성적이여서인지 나는 사춘기를 힘들게 넘겼다. 15살에 처음으로《연변일보》에 통신 한편을 발표하면서 당금 작가로 되는듯한 환상을 가진 나는 다른 공부는 뒤전으로 하고 글쓰기와 독서에 온갖 정력을 다 쏟았다. 그러다가 고리끼처럼 사회대학을 다닌다면서 초중 3학년 전학기에 사회에 나와버렸다. 그 사건은 온 가정을 휘딱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취재를 한다고 마을을 휩쓸고 다니면서 나의 유치한 세상체험에 미쳐있었다. 이듬해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실것이라고 믿어왔던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생활이 풍족하지는 못해도 항상 “우리 막내 우리 막내”하는 받들림속에서 자라던 나는 그때에야 앞으로는 아버지도 세상을 뜰수 있고 형제들과도 분가를 해야 할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자기의 미래에 망연자실하여 방황을 하고있을 때 누나가 나를 당겼다. “작가가 되든 땅을 뚜지든 그래도 공부는 할만치 해야 한다. 이대로 살다간 건달밖에 더 될게 없다. 이곳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싫으면 투도중학교에 다니거라. 우리 집이 투도하고 가까우니 우리 집에 와서 다녀라.” 형님들도 누나와 합심하여 나를 다시 학교에 밀어넣었다. “근심을 말고 학교에만 잘 다녀라. 나는 너를 아들처럼 생각할것이니 아무 근심도 말아아.” 다시 공부를 한다고 누나네 집에 첫발을 들여놓던날 누나는 그 한마디를 힘있게 하셨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평판을 달고 사시는 매형도 “대학에 가게 공부를 열심히 해라.”고 나에게 힘을 실어주셨다. 누나가 사는 마을에서 투도까지는 10여리나 떨어져있었다. 누나는 학교가는 내 시간이 늦을세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해서 도시락을 갖춰주셨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새벽길을 떠날 때면 누나는 날마다 사립문가에 나오셔서 나를 바래주었고 별을 이고 돌아올 때면 또 그 사립문가에서 나를 기다리군 하셨다. 비오나 눈이 오는 날에는 정말 학교로 가는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사립문가에 서있는 누나를 생각하면서 억지로 등교길에 오르군했다. “절대 배를 곯지 말야 한다. 네가 지쳐서 쓸어지면 모든게 나무아미타불이 된다. ” 이것이 누나의 신조였다. 하여 누나는 언제나 나의 도시락에 대해 신경을 써주시군 했다. 그때 학교뒤에는 두부방이 하나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은 가끔 두부방에 가서 두부를 사먹을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기름간장을 맛있게 해오는 학생”으로 통했다. 누나는 늘 두부방에 가서 두부에 얹어먹으라면서 정성들여 기름을 딱다가 파를 송송 썰어넣고 고추가루까지 살짝 얹어서 먹음직스러운 기름간장을 만들어 통졸임통에 넣어주셨다. 누나는 그렇게 며칠에 한번씩 기름 간장을 만들주셨는데 두부방아주머니들도 소문을 듣고 나의 간장맛을 보았던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누나의 자식들도 커가면서 소비가 점점 많아지게 되였다. 그때는 도거리농사가 금방 시작되던때라 누나와 매형도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쳤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나의 도시락을 챙겨주느라 힘드신 누나를, 우리들이 학교에 내는 돈을 해결하느라 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농산품을 이고 장마당을 다녀오시는 누나를 보기가 괴로왔다. 누나가 아무리 아들처럼 생각하는 동생이라지만 그때 여물지 못한 나의 생각으로는 “누나의 신세”를 지는것이 그렇게도 힘들수 없었다. 만 일년만 견지하면 대학시험을 칠수있다는 생각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그 일년을 그렇게 부담스럽게 보내다가는 지레 내가 병이 날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한 홀로서기가 군대에 나가는것이였다. 18살에 누나네 집을 떠나 군대에 갔던 나는 7년후에 연길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군대에가 있는 7년사이 누나와 형제들이 나에게 쏟은 정성은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누나와 형님들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마다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학습만은 놓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그게 힘이되여 나는 군대에 가있는 7년사이 시간만나면 공부를 했다. 그 덕에 퇴대를 할 때 연변대학성인학원 조선언어문학전업졸업증을 가지고 오게 되였다. “네가 끝내 큰일을 하게 됐구나. 이게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냐. 이제는 큰일을 하면서 잘사는 일만 남았다.” 사업에 참가한후 처음으로 누나네 집으로 갔을 때 누나는 그렇게 기뻐할수가 없었다. 겨우 제앞에 차려지는 일이나 하는 내가 누나에게는 그렇게 대견하게 보이셨는지 후에도 누나는 언제나 나의 자랑을 달고계셨다 한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누나에게 약간의 기쁨도 드렸고 근심도 만들어주었다. 내가 첫 혼인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후 누나는 그날로 달려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살에 엄마를 잃고도 사는게 사람이다. 무슨 대단할게 있다구. 기 죽지 말구 보란듯이 큰일을 해라.” 그때 나는 “누나가 말씀하시는 큰일이란 과연 무엇일가” 하고 생각해본적이 있다. 후에 새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나눈 가끔씩 술을 과음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안해를 힘들게 했던지 어느 가족모임에서 안해가 누나에게 나의 “죄장”을 공소한 모양이였다. “누나가 어쨌는지 알아요? 당신이 다시 술에 취하면 부지갱이로 치라고 했어요.” “허허허… 연길에 부지갱이가 있던가?” 내가 넉살좋게 받아넘기자 안해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래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조심 해야겠어요. 당신이 다시 술을 마시면 누나가 부지갱이를 만들어 메다 준다고 했어요.” “저런, 그 할매가 부지갱이를 지고오는 일은 없어야지.” 그후 나는 술을 마시다가도 그 말이 생가나면 속이 셈찍해서 술을 통제하느라 했다. 하지만 누나의 말처럼 내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술자리에서 남들이 두번만 “마시우.” 하고 권하면 더이상 거절을 못하고 받아마셨고 그렇게 술을 시작하면 술이 술을 청해서 또 흐트러지군 했다. 그렇게 내가 술을 마시는 사이 누나는 내내 가슴을 졸이며 사신것 같다. 나와 누나는 뭔가 텔레파시라도 통하는게 있은것 같다. 언젠가 내가 술을 과음한후 손등에 링겔바늘을 꽂고 누워있는데 누나가 전화를 걸어오셨다. “간밤에 너네 집에 홍수가 터지는 꿈을 꾸어서 근심돼 그런다. 또 술독을 들이마시잖았니?” “시름놓소, 누나. 나 인젠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전화에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웬지 가슴이 알알해나서 나는 핸드폰을 놓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인젠 정말 술을 적게 마시고 몸을 조심해라. 그래야 너네 누나가 저 세상에서라도 시름을 놓지.” 그 말을 하시는 매형의 목소라가 떨리는듯싶었다. 나는 입술을 옥물며 머리를 끄덕였다. 2009년 12월 3일, 누나는 피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시고 보름을 앓다가 63세를 일기로 급작스럽게 눈을 감으셨다. 모두들 나이가 아깝다고 누나를 아쉬워했다. 그처럼 힘든 세월에도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악착까지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이 못난 동생을 위해 아글타글 살아오신 누나— 최순자! 누나의 큰아들은 어엿한 기자로 되여 신문전선에서 뛰고있고 작은 아들은 외국에서 박사후까지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중국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큰일”을 하고 있으며 항상 나와 같이 마음에 걸려하던 딸도 좋은 남편을 만나 부럼없이 생활하고있다. 누나가 떠나가신지 1년이 되여온다. 나의 마음속에 살아계시는 누나의 존재가 약이 되였던지 나는 과연 지난 1년간 악착스럽게 술을 통제해왔다. 그때문인지 비만때문에 툭 불거져나왔던 배가 들어가면서 체중이 10키로그람이나 줄어 몸이 호리호리해졌다. 요즘 가끔 거울앞에서 보기 좋은 몸매를 스스로 바라보노라면 또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고 누나의 목소리가 귀전을 스치는것을 어쩔수 없다. “애두 이게 뭐니? 반동자처럼 곱던 얼굴이 호한삼처럼 유들유들 해진게 아니니? 너 좋은것을 너무 먹는가본데 조심해야겠다.” 어릴 때 나는 쌍까풀눈이 유달리도 까많고 살결이 포동포동하고 맑았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나를 영화 “반짝이는 붉은 별”에서 나오는 주인공 반동자를 닮았다고 입을 모았던것이다. 10여년간 내처 술을 과음해서였던지 그 시절 160센치메터를 웃도는 나의 키에 체중은 80키로그람을 넘어섰던것이다. 망가진 나의 몸매가 마음에 걸렸던지 누나는 가끔 역시 그 영화에 나오는 지주 호한삼을 거들어 나에게 롱담을 하셨던것이다. 누나는 그렇게 나의 모든것을 살피시면서 아껴주고 근심을 해주신것 같다. “유들유들하던 호한삼”이 중년의 반듯한 “반동자”로 다시 돌아온듯싶다. 애써 과음을 통제해서인지 요즘 나는 정신적으도 여유가 생긴것 같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하늘 같이 넓은 마음으로 고생을 받아안으시고 식구들을 끌어안으시던 누나의 그 소박하고 도량 넓은 삶의 자세를 배워야 겠다. 오늘의 나의 모습을 하늘나라에 계시는 누나에게 보이고싶다.  
41    이 밤도 별이 빛난다 (김득만) 댓글:  조회:2290  추천:0  2010-03-11
이 밤도 별이 빛난다. 김득만 나는 가끔 밤길을 걷다가도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 본다. 그렇게 밝지는 않아도 소리 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다. 그런 즐거움을 요즘 나는 자주 느끼군 한다. 산문집 <<엄마의 별>>에 머리글을 써달라는 최동일선생의 청탁을 받고 원고를 읽으면서 자주 어린시절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그 잔잔한 감수를 느끼게 되기때문이다. 하냥 말수 적고 평범한 모습이지만 언제나 드놀지 않고 착실하게 자기의 일터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최동일선생의 모습에서 밤하늘의 평범한 별을 떠올리게 된것때문인지 아니면 작자의 마음을 담아 특별히 단듯싶은 산문집의 제목 <<엄마의 별>>이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떠올리게 한것때문이지는 몰라도 산문집을 읽는 내내 진한 감동을 느낀것은 사실이다. 1989년 6월 중순, 최동일선생은 중국인민해방군에서 퇴대하여 연변인민방송국에 배치를 받아왔다. 가담가담 그의 수필이나 동시같은것을 본적이 있는지라 나는 그가 청소년프로편집을 맡으면 물이못나게 할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후로 최동일선생과 나는 만 3년간 함께 청소년들을 위한 라지오방송프로를 만들었다. 1993년 6월, 최동일선생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가 새로운 일터에서도 패기있는 텔레비죤사업자로 맡은바 소임을 다해가는 것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지난해 4월, 나는 최동일선생이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으로 당선되였다는 소문을 들었고 5월에는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에 연수를 갔다는 소식도 접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는것도 알게되였다. 그후로 중편소설 “선녀를 찾아주세요”, “운무의 저쪽>”, 중편실화 “엄마의 마늘밭”,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를 들고 독자들앞에 나선 선생을 기쁘게 지켜보고있는데 또 산문집 <<엄마의 별>>을 내놓게 된것이다. “글은 작자의 얼굴이요 마음”이라는 말이 있다. 산문집에 수록된 소박하고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또 맡은바 일터에서 열심히 일해가는 최동일선생을 그려본다. 작자는 “어머님전 상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그동안 적어놓은 저의 습작노트를 펼쳐보노라면 저에 대한 어머님의 바다 같은 사랑을 읽을수 있고 자식에 대한 어머님만의 뜨거운 사랑방식을 배울수 있으며 또 어머님을 가슴에 묻어두고 이 세상을 살아온 저의 작은 발자욱들도 찾아 볼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어린친구들에게 추천하고싶다. 이 책을 읽노라면 잔잔한 감동속에서 동년의 꿈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될것이고 그 꿈의 씨앗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를 알게 될것이다. 나는 이 책을 부모들에게도 추천하고싶다. 작자의 소박한 글줄사이에서 부모님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떤 자세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하는가를 생각해볼수 있을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하고싶다. 소박하고 진정이 흘러넘치는 최동일선생의 글을 읽노라면 우리는 소박한 삶이란 어떤것이고 또 어떤 자세로 세상앞에 나서야 하는가를 음미해볼수있을것이다. 이 밤도 별이 빛난다. 별이 빛나는 밤은 아름다운 밤이다. 중국조선족아동문단에서 맹활약하는 중견작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최동일선생이 문학이라는 드넓은 별바다에서 하냥 소리없이 반짝이는 큰 별로 빛나기를 기도해본다. 2008년 3월 26일
40    엄마의 구새목(제1부) 댓글:  조회:2381  추천:0  2010-03-11
엄마의 구새목(제1부) *******************엄마의 구새목 시내물도 졸졸 세월도 졸졸 어른이 되고싶었던 그날 밤 강변에 심은 꿈 하얀 손수건 고향집
39    엄마의 구새목 댓글:  조회:2581  추천:0  2010-03-11
엄마의 구새목 살아가노라면 가끔씩 흘러간 동년시절이 눈앞에 떠오를 때가 있다. 벌써 가슴속밑자락 어딘가에서 곰삭을 때로 곰삭았을 그 옛날의 작은 추억이지만 오늘에 와서 다시 꺼내 다듬어보노라면 그속에서 피여나는 동년의 향연때문에 가슴이 훈훈해 난다. 그시절,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옛적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이야기며, 원숭이엉뎅이가 빨갛게 된 이야기며, 곰이 백날동안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이야기며… 어떤 이야기는 너무도 여러번 들어서 엄마가 서두를 떼면 내가 다음을 줄줄 내리 외울수 있었다. “엄마, 다른 옛말이 없수? 새 옛말을 좀 해주.” 어느날 내가 낡은 옛말에 실증을 느끼고 이렇게 투정을 하니 엄마는 “어디 보자!” 하시며 이윽히나 새 옛말을 더듬어내시느라 고심을 하셨다. “동이야, 그럼 우리집 구새목에 깃든 옛말을 해줄가?” 엄마가 드디여 시무룩히 웃으시며 입을 열었다. “우리집 구새목에 무슨 옛말이 있는데? 엄마, 거짓말이지?” 내가 두눈이 올롱해서 쳐다보자 엄마는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손사래를 하셨다. “거짓말이라니? 얘를 봐라. 우리집 구새목 옛말을 하면 네가 진짜 재미있어 할것 같은데, 싫으면 말구…”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연기가 밀밀 나오는 우리집 구새목에 옛말이있다구?)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나의 재촉에 못이기는척 하시며 천천히 우리집 구새목에 깃든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것은 옥수수들이 탁탁 물을 튕기며 오동통 염글어가던 음력 7월 중순께의 어느 점심녘이였다고 한다. 엄마가 약수동 장사래밭에서 한창 조이밭 김을 매고있는데 웃집에 사는 삼이네가 올라오며 엄마를 보고 장인에서 손님이 왔다고 기별을 넣었다. “언제 내려왔다오?” 엄마가 호마자루로 밭고랑을 짚고서서 허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내사 모르지, 방금 문앞을 지나며 볼라니까 그 재인강할망구가 문앞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허둥거리고있습데.” 삼이네가 걸걸한 목소리로 보는듯이 일러주었다. 재인강할망구라면 엄마는 짚이는데가있었다. 마을에서 60여리 떨어진 림장마을 장인골에 사는 사돈집 할머닌데 정신이 드나들어서 가끔 엄마를 찾아오군 했던것이다. “알았소. 그럼 내려가봐야지.” 엄마는 김을 잡던 조이밭고랑을 절반이나 남겨둔채 호미를 걷어들고 밭머리를 향했다. 아침에 들어서면 저녁이나 돼야 끝을 보네마네 하는 장사래밭이라 밭머리까지 나오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만삭이 된 배가 아래로 당겨져서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엄마는 허이허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속구구를 해보았다. 해산일까지는 아직도 한 사흘 남은듯 하니 래일까지 일을 하고 모레쯤에 간단한 준비를 한다면 분만에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되였던것이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니나다를가 사돈할머니는 그새 못참겠다는듯 집마당을 주름잡으며 올리걷고내리걷고 분주히 돌아치고있었다. “아매. 어떻게 오셨씀둥?” 엄마가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엄마를 발견한 사돈할머니는 씽하니 달려오며 엄마의 얼굴에 삿대질을 해댔다. “뭐 하다가 이제야 싸잡아왔노? 내가 와 보지 않구 그래 집구석을 시름놓을수 있나? 너희들이 눈에 밟혀서 내가 어떻게 그냥 살어? 아이~ 덥다, 빨라당 찬물이나 한바가지 떠올려라.” “그러게 뭐 할라고 그렇게 분주히 뛰여다녔씀둥? 그늘에 앉아서 쉬시지.” 엄마가 사람 좋게 웃으시며 문을 따고 집안으로 들어가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들고 나오셨다. “할매, 집안이 탐탐하오께 저 비슬나무그늘에 앉아서 찬물 마시며 솜 쉬이소. 내가 제꺽 점심을 끓이겠스꾸마.” 엄마는 사돈할머니와 벙글벙글 수작을 하시며 구새목으로 검불을 안으려고 들어가셨다. 엄마는 머리를 가렸던 채갑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문지르고는 검불을 안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불시에 배가 아래로 당겨지는 감이 들더니 동통이 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이구~” 소리지르며 그 자리에 퐁당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아우성에 놀란 사돈할머니가 구새목으로 달려왔다. 때는 이미 양수가 터져서 흐르던 참이였다. 사돈할머니가 소리를 쳐서 사람들이 산파를 모셔왔을 때는 갓난애가 이미 밖으로 나와버린 뒤였다. 사돈할머니는 산파의 손에서 갓난애를 받아 집으로 들여가며 카랑카랑하게 웨치셨다. “너희들 보거라, 내가 룡을 안았더라. 구새목에서 룡이 난다고 이 애가 바로 룡이 될 징조로다.” 여기까지 듣고난 나는 처음 듣는 구새목이야기가 무척이나 신비스럽게 생각되였다. “엄마, 그 구새목에서 태여난 애가 누구유?” “구새목에서 태여난 애가 호호호호… 여기 있잖니?” 엄마가 나의 코끝을 꼭 누르며 웃으셨다. 나는 엄마의 말씀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구새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났다. “아니지 엄마, 거짓말이지, 응? 그 애가 내가 아니지?” 엄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갓 태여나서 젖만 먹으면 혼자서 놀았고 놀다가 지치면 또 젖을 빨고 잠을 자군했다. 구새목에서 이 세상을 찾을 때처럼 그렇게 쉽게 자라는 나를 하늘이 질투를 했던지 두돐이 금방 지나자 나의 온몸에 작은 물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집은 붉은 당콩알처럼 커지면서 성기를 빼고는 퍼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물집이 생기면서 차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차츰 기력을 잃어가며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침깨나 놓는다는 의사들을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보름정도 지나자 나는 완전히 사색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내가 두눈을 희뜩거리더니 입에 거품을 물며 머리를 외로 탈았다고 한다. 엄마는 울면서 마을의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가 나의 눈까풀을 번져보더니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셨다. 엄마는 가슴을 뜯으며 나를 보자기에 싸서 구새목에 내다 놓으셨다. 엄마는 열네살 나던 해에 일곱살이나 이상인 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왔었다. 이붓어머니의 손에서 이붓형과 함께 째지게 가난하게 사는 아버지지만 얼굴이 조각을 한듯 잘 생기고 성품 또한 도도해서 앞으로 큰 일을 할 목이라며 엄마의 이상 올케가 자청을 하여 엄마를 아버지에게 주어버렸던것이다. 역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엄마는 이상 오빠의 손에 얹혀 살면서 이상올케의 말이면 법으로 알고 따랐었다. 자기보다 일곱살이나 이상인 아버지가 좀 어렵기는 했지만 엄마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아버지를 따라 시집이라고 왔다고 한다. 이듬해 첫 아이로 딸을 낳아서부터 엄마는 나까지 아이 여덟을 낳으셨다. 그 험한 세월에 그래도 아들 둘, 딸 둘을 살려내고 나에 이르렀던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일찌기 떠나가자고 구새목에서 그렇게 쉽게 이 세상에 나온 모양구나.) 이튿날 아침, 옷이나 갈아 입혀서 산에 묻으려고 구새목에 가서 보자기를 푸는 순간 엄마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내가 보자기안에서 꼼지락거리고있었던것이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내가 움직이는것을 보면서 엄마는 너무도 놀라고 기뻐서 하느님을 부르며 보자기채로 와락 끌어안았다고 한다. 그날부터 나의 몸에 난 물집들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물집자리에 작은 흉터들을 남기면서 아물어 붙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나의 몸에 마마꽃처럼 번졌던 물집이 가신듯이 사라져버렸다. “정말 잃어버리는 줄을 알았지, 그때 요렇게 귀여운 막내를 잃었더라면 엄마가 어떻게 살았겠니?” 엄마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꺼슬꺼슬한 손으로 나의 볼을 쓸어주셨다. 거짓말 같으면서도 너무 진지한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때 우리집 구새목이 그렇게 신비하고 안온하게 느껴졌다. 그후에도 나는 가끔 서러운 일이 있으면 구새목을 찾아서 혼자 흐느끼군 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싸움을 하고 구새목에 무져놓은 벼짚가리에 들어갔다가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온집안이 나서서 나를 찾은적도 있다. 나의 첫 고고성을 들어준 구새목, 나를 사선에서 당겨준 구새목, 이미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린지 오랜 구새목이지만 생활에서 난관에 부딛칠 때마다 나는 우리집 구새목을 떠올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신들메를 조이고있다.
38    시내물도 졸졸 세월도 졸졸 댓글:  조회:2090  추천:0  2010-03-11
시내물도 졸졸 세월도 졸졸 어느날, 나는 엄마에게서 된욕을 먹었다. 아래집에 놀러갔다가 놀이감권총 한자루를 주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권총을 되돌려주고야 말았다. 하지만 나를 나무라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집에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나는 뒤집 상옥누나를 찾아갔다. 나의 눈이 불깃불깃해진것을 본 상옥누나가 이렇게 물었다. “동이야, 왜 울었지?” “엄마가 욕 했씀다.” “엄마가? 호호호...헌데 너의 엄마가 어째서 널 욕했는지 아니?” “아래집 나무권총을 가져왔다고 욕했지 뭐.” “아니란다. 넌 너의 엄마가 주어 온 애가 돼서 욕한거란다.” “거짓말.” 나는 미덥지 않아 상옥누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상옥누나는 제법 정색해서 말했다. “너의 엄마는 너를 다리밑에서 주어왔단다.” “정말?” “정말이구말구!” “저...저, 마을 뒤 돌다리밑에서?” 나는 깜짝 놀라 다잡아 물었다. “그래, 바로 그 다리밑이지.” 상옥누나의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머리를 푹 숙였다. 순간 지나간 일들이 새록새록 눈앞에 떠올랐다. 어느 한번 엄마는 가마니 팔러 합작사에 다녀오셨다. 헌데 돌아오는 길에 누나의 양말과 형님의 모자만 사오고 나에겐 아무것도 사오지 않았었다. 나는 대번에 입이 뾰로통해났다. 그러자 엄마는 “넌 아직 어리니까 아무거나 입어도 된다”고 하셨다. 이튿날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말았다. 헌데 인제와서 생각해보니 원래는 나를 주어온 애라고 따돌린것이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분했다. 나를 주어왔다는 그 돌다리도 다시 한번 보고싶어졌다. 나는 쏜살같이 다리목으로 뛰여갔다. 다리밑으로 시내물이 졸졸 노래하며 흘러가고있었다. 나는 내물에 두 발을 잠그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였다. (내가 저기에 누워있었을가? 아니면 요기에 기대여 앉았댔을가? 엄마는 어떻게 나를 발견했을가? 호...) 그때 개울에 반쯤 몸을 담그고 맥 없이 풀숲에 의지해있는 새끼개구리 한마리가 보여왔다. 어쩐지 그 개구리가 무척이나 외롭고 갸냘프게 느껴졌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오며 새삼스럽게도 마음이 쓰려났다. (이 새끼개구리도 혹시...) 나는 새끼개구리를 두 손에 받쳐들고 오만가지 생각을 굴려보다가 소르르 잠들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가... 잠결에 “동이야-”하는 부름소리를 듣고 나는 와뜰 놀라 깨여났다. 나는 어느새 엄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나는 엄마의 품에서 몸을 빼며 주위를 살폈다. 엄마의 옆에는 빨래함지가 놓여져있었다. “동이야, 여기서 웬 일이니?”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듯싶었다. 나는 엄마를 쳐다 보지도 않고 쏘아부쳤다. “엄마, 어째 나를 속였소?” “내가 뭘 속였다고 그러니?” 엄마는 웬 일이냐는듯 다잡아 물으셨다. 나는 제법 정색해서 말했다. “뒤집 상옥누나가 다 말해주었소. 엄만 날 이 다리밑에서 주어왔지?” “뭐? 다리밑에서 널 주어왔다구?” 엄마는 갑자기 개울가가 떠나갈듯 소리내여 웃으시는것이였다. 나는 약이 올랐다. “웃긴 왜 웃소?” 그제야 엄마는 손등으로 찔끔찔끔 눈굽을 닦으며 맑은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자냥스럽게 이야기하셨다. “동이야, 그건 다 거짓말이란다. 엄마는 너를 이 돌다리밑에서 주어온게 아니란다.” 나는 멍해졌다. 상옥누나는 분명히 이 돌다리밑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올리미는 호기심을 누를길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옷자락에 매달려 정색해서 물었다. “엄마, 이 다리밑이 아니면 어느 다리밑이요?” “음, 그건...” 엄마는 한참이나 무엇을 생각하는듯싶더니 아래 말을 이으셨다. “이 내물이 아득히 먼곳으로 흘러간후이면 너도 자연히 알게 된단다.” “뭐? 이 내물이 아득히 먼곳으로 흘러간 후이면 저절로 알게 된다구? 엄마, 그게 언젠데…” 나는 아득한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시내물이 아득히 먼곳으로 흘러간 후라고? 그때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여있을가?) 시내물은 그 순간에도 졸졸졸 노래하며 어디론가 정처없이 흘러가고있었다. 나는 맑디맑은 시내물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사색에 잠겼다...
37    어른이 되고싶었던 그날 밤 댓글:  조회:2519  추천:0  2010-03-11
어른이 되고싶었던 그날 밤 나는 어른이 되고싶었던 그날 밤을 지금도 잊을수 없다. 너무나도 매정하게 엄마의 가슴에다 대못을 탕탕 박았기에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그날 아버지와 누나와 형님은 친척집으로 가고 집에는 나와 엄마뿐이였다. 하여 마을의 아낙네들이 우리집에 와서 밤낮으로 화투를 쳤다. 말새단지 아낙네들과 같이 앉자 원래 말수가 적었던 엄마도 말주머니를 헤쳤다. 남들은 젊었을 때 버섯뜯으러 갔다가 새끼범을 잡아서 허리띠를 풀어 목 매왔다는 이야기도 척척 잘 엮어대건만 유독 엄마만은 토끼새끼 한마리도 잡은적이 없었던지 고작 한다는 이야기가 이런것이였다. “우리 동이는 아직도 내가 없이는 한시도 못있는다오.” “아-니, 이렇게 큰 애가?” 말새를 잘해서 방송국이라고 불리우는 삼이네가 눈이 화등잔이 되여가지고 소리쳤다. “호호호, 그러게 말이오. 워낙 몸이 좀 허약하다고 어리광스레 키웠더니 인젠 밤에 잠들기전에 젖꼭지까지 쥐려 한다오.” 엄마는 사람좋게 웃으시며 귀여워 못참겠다는듯 나를 당겨다 품에 안고 부드럽게 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시름놓고 편하게 엄마의 품에 안겨 얼굴에서 오가는 엄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고있었다. 어쩜 그 장면이 아낙네들의 심술통을 건드렸던지 아낙네들이 너한마디나한마디 와짝 떠들며 말꼬리를 이어갔다. “어머-, 망신이다. 이렇게 큰 애가. 옛날에는 너만한 애들이 장가도 갔단다.” “호호호... 동이야, 엄마젖이 맛있던? 주글주글한게.” 낄낄 웃음을 흘리며 나를 골려주는 아낙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변명했다. “흥, 누가 엄마젖을 쥐고 잠두? 아닌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이야, 그럼 너 어떻게 자니?” 나는 짐짓 가슴을 쑥 내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혼자 자지 뭐!” “애개... 이 앨 좀 보오. 부끄러운 모양이지. 혼자 잔다오. 얘, 거짓말이지? ” 삼이네가 나의 볼을 꼬집으며 집안이 떠나가라고 웃어제꼈다. 나는 삼이네를 흘겨보며 결김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봉호랑 함께 팽이치기를 하고나니 집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이 까맣게 잊혀졌다. 그런데 이튿날 친구들을 찾아 장인강가로 나갔더니 모두들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거리는것이였다. 나는 저으기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모두들 왜 이러니?” “히히히히...” 여전히 웃기만 할뿐 누구도 영문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니? 너희들이…” “히히히...너 엄마젖이 맛있던?” 봉호가 때가 올라 까아만 손으로 입을 싸쥐고 웃으워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밤에 엄마젖을 쥐고 잔다면서?” “잠자기전에 한통씩 배부르게 젖을 먹는다면서? 옳니?” 그제야 나는 어제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화끈화끈해 나는 얼굴을 숙이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친구들의 놀림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젖꼭지-젖꼭지-” 나는 집쪽을 향해 정신없이 줄달음을 쳤다. 헐레벌떡 뛰여오는 나를 보고 엄마가 급히 밖으로 나오셨다. “동이야, 웬 일이니?” “흥, 엄마. 인젠 잘 됐소.” “너 정말 웬 일이니?” “엄마가 잘 알지!” “내가?” 엄마는 홍두깨에 뒤통수를 맞은 벙어리처럼 입을 떢 벌리고 서서 한참이나 아무말도 못하셨다. 나는 엄마를 마주 서서 입을 필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였다. “흥! 잘 됐소. 엄마, 애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지 아오? 젖꼭지라오 나를. 젖꼭지라오.” 그제야 엄마도 영문을 아시고 애꿎게 두 손을 마주쳐 탁탁 털며 못내 서운해하셨다. “아낙네들두, 말말끝에 한 얘기를 가지구 꼬챙이에 꿰면서 그런다니... 괜찮다. 동이야, 그 애들 말을 못들은척 해라, 응?” 엄마는 강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나의 손을 당겨다 옷섶에 넣어주며 분해서 터지려는 나의 기분을 어루쓸어주셨다. 하지만 나는 “놓소!” 하고 꽥 소리치며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웃방으로 올라갔다. 겉바람이 많아서 겨울에는 사람이 붙지 않는 칸이였다. 나는 웃방문을 닫아놓고 서럽게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엄마가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애두, 추운데서 이렇게 자니? 정지에 내려가 누워라.” “싫소.” 나는 발떡 일어나 앉으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애두 그저… 어서 정지에 내려가서 따뜻한 가마목에 누워라...” “빨리 나가오. 나를 걱정말구.” 나의 성난 목소리에 엄마는 끌끌 혀를 차며 정지에 내려갔다. 그날 나는 저녁밥도 웃방에서 먹었다. 그러면서 이후부터는 잠도 웃방에서 자리라고 다졌다. 나는 엄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끈으로 꽁꽁 사이문을 걸었다. 문을 거는 동정을 알고 엄마가 물었다. “동이야, 문은 왜 거는거니?” “난 오늘부터 방에서 자겠소.” “애두 그 추운데서 어떻게 잔다구 그러니. 어서 정지에 내려오너라.” “싫소.” “동이야, 너 정말 엄마 말을 안듣겠니?”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대답했다. “인젠 날 걱정마오.” “후-” 엄마의 긴 한숨소리가 사이문을 타고 들려왔다. “그럼 방에서 자더라도 문은 걸지 말어라. 새벽이면 오줌누러 꼭 일어나면서두 그러니? 그리구 아버지가 덮던 큰 이불을 내리워 덮어라, 담요도 두텁게 깔구…” 엄마는 오밀조밀 부탁도 많았다. 들어보니 엄마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듯싶었다. 나에게는 밤중에 한번씩 오줌누러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던것이다. (오줌눌 무렵에 일어났다가 문을 벗기지 못해 바지라도 적시면 어쩔가? 하지만 문을 걸지 않으면 엄마가 올라와서 잠이 든 나를 정지로 안아내려가지 않을가? 옳지, 엄마에게 다짐을 받아야지.” 나는 “음음”하고 건가래를 따며 마음을 눅잦히고는 정지간에 대고 말했다. “엄마, 내 그럼 문을 걸지 않을게. 하지만 내가 잠이 든후 정지에 안아가면 안되오. 알았지, 양?” “그래 알았다.” 약간 떨리는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꽁꽁 동여놓았던 문끈을 풀었다. 밖에서는 “윙-윙-”칼바람이 불어쳤다. “쏴-쏴-”하는 나무의 설레임소리에 나는 머리칼이 오싹해났다. 엄마가 이야기하시던 하얀치마를 입은 산귀신이 문을 긁고있는듯싶었다. 나는 저도모르게 사이문가로 다가갔다. 생각같아서는 정말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고싶었다. 하지만 낮에 친구들에게서 놀림받던 일을 생각하니 또 다시 엄마에 대한 고까운 생각이 욱 치밀었다. 나는 이를 옥물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호-나는 언제면 어른이 될수 있을가? 정말 어른이 되고싶구나. 그러면 혼자라도 무섭지 않겠는데...) 어른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잠든 후에 엄마가 방에 오라올것만 같아서 시름을 놓을수 없었다. (어쩔가?) 한참 궁리하던 나는 벽구석에 세워두었던 팽이채에서 끈을 풀어내여 문꼬리에 가로 꽂았다. (흥, 이러면 엄마가 내 몰래 방에 올라왔다 갔는가를 알수 있을테지.) 그제야 나는 시름을 놓고 잠이들었다. 새벽녘에 오줌누러 일어난 나는 문고리부터 살폈다. 끈은 여전히 문고리에 꽂힌대로 있었다. (그럼 그렇겠지.) 이 밤을 혼자 잤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못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조심조심 문을 열고 정지간에 나와 스위치를 더듬었다. 전등불이 찰칵 밝아지는 순간 나는 흠칫 그 자리에 굳어졌다. 엄마가 사이문옆에 앉은채 잠이든것이 아닌가? 어깨에 엷은 탄자를 걸치고 앉아서 쪽잠이든 엄마의 턱에서 멀건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내가 근심스러워 사이문을 지키다가 너무도 피곤하여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였다. 한껐 옹크리고 앉은 엄마의 모습은 그렇게도 가냘파보였다. “엄마!” 나는 소리치며 엄마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바람에 눈을 뜬 엄마가 나를 꼭 껴안으며 말씀했다. “동이야, 엄마는 네가 없으니 영 잠이 오지 않더구나.” “엄마, 나도 엄마가 없으니 영 무섭습데. 엄마, 나는 엄마하구 자겠소. 엄마곁에서 자겠소.” 나는 코먹은 소리로 떠듬거렸다. 그 순간 나는 어쩐지 소리내여 시원히 울고싶었다. 그러면 꽁꽁 얼었던 겁에 질린 가슴이 사르르 녹아내릴것만 같았다.나는 힘껐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시각 나는 엄마의 젖가슴에서 풍겨나오는 향긋한 엄마의 내음을 맡고있었다. 내 엄마에게서만 풍기는 달착지근하면서도 안온한 그 내음을 맡고있었다...
36    강변에 심은 꿈 댓글:  조회:2074  추천:0  2010-03-11
강변에 심은 꿈 언제나 잊지못할 고향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향집은 진작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덩실한 기와집이 보란듯이 들어앉았다. 하지만 나에게 아롱다롱 고운 꿈을 수없이 심어주던 맑디맑은 강물은 여전히 쉬지 않고 동으로동으로 흘러가고있다 “동이야, 살구를 먹어라.” 자애롭게 나를 부르시던 뒤집할머니의 정다운 목소리가 방불히 귀전을 스치는듯싶다. 어릴 때, 우리집은 생활이 몹시 구차했다. 시골마을에서 어렵사리 볼수 있는 살구나무도 없었다. 나는 살구철이 되면 늘 손가락을 입에 물고 뒤집 살구나무아래에 서있었다. 딱히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서있으면 어쩐지 작은 만족감을 느낄수 있어서였다. 그날도 내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할머니네 바자굽에 서있는데 살구 한알이 바람에 살랑 떨어져내렸다. 순간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해났다. (웬 일일가? 난 살구를 훔치지 않았는데... 아니 단 다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려했지만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나는 토끼뜀을 하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할머니네 집쪽을 살펴보았다. 마침 한낮이라 할머니네 식구들은 모두 낮잠을 자고있었다. 나는 저도몰래 바자문을 열고들어가 허리를 굽혀 그 살구를 주었다. 그후 다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구 한알을 꼭 쥐고 허둥지둥 집으로 뛰여갔다. 그러나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엄마가 이 일을 아시면 된욕을 먹을것만 같아서였다. 나는 엄마를 피하여 내가 늘쌍 낮잠을 자던 구새목으로 갔다. 아차, 세상에! 엄마가 바로 그곳에 앉아 하얗게 씻은 이불안을 깁고있지 않는가? 당황해하는 나의 기색을 보아낸 엄마가 웬 일인가고 물으셨다. “난...난...” 나는 말을 못하고 “와~”소리내여 울었다. 엄마도 당황하여 일어났다. 나를 품에 안고 달래시던 엄마는 내 손안에 꼭 쥐여져있는 살구를 발견하고 엄하게 물으셨다. “너 뒤집 살구를 몰래 땄지?” “아...아니오. 저절로 떨어진걸 주었오. 난 다치지도 않았오.” “저절로 떨어진것도 가져선 안된다.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오면 무엇이 된다고 했지?” “도...도적놈이...” “우리 동이 참 용쿠나. 가자, 엄마와 함께 가서 살구도 돌려드리고 사과도 하자꾸나.” 나는 얼굴이 빨개서 엄마를 따라 뒤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울먹울먹해서 사연을 말씀드리며 살구를 뒤집할머니한테 드리자 할머니께서 도리여 엄마를 책망하셨다. “고까짓 살구 한알을 가지고 괜히 애를 기죽이면서 그러오. 쯧쯧쯧...” “아매두, 어려서부터 좋은 버릇을 가르쳐야 합지. 동이야 인젠 됐으니 넌 밖에 나가 놀아라.” 엄마의 말씀이 떨어지자 나는 밖으로 나가 강가로 향했다. 그때 마침 영남이랑 상호랑 살구를 먹으며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고있었다. “먹고싶지 냠냠!” 그 애들은 일부러 날 골려주느라 살구를 맛나게 먹어댔다. 나는 그 애들을 쏘아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때 뒤집할머니께서 바가지에 살구를 가득 담아들고 나를 찾아 강가로 나오셨다. 할머니께서는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동이야,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니?”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아매처럼 살구나무를 많이 심어 마음대로 살구를 먹을 생각을 하고있스구마.” 그러자 할머니께서 못내 서운해하시면서 말씀하셨다. “동이야, 이 아매는 글을 못배워서 뜨락에 살구나무나 가꾸지만 너야 커서 공부를 잘 해 군함이랑 몰아야지. 자, 이 살구를 실컷 먹고 군함을 모는 꿈이나 꾸거라.” 할머니는 살구를 담은 바가지를 나의 앞에 내미셨다. 나는 강물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살구를 먹으며 잠간 군함을 모는 꿈을 꾸오보았다. 눈앞의 강물이 바다로 변하는듯싶었다. 그해 나는 일곱 살이였다...
35    하얀 손수건 댓글:  조회:2239  추천:0  2010-03-11
  하얀 손수건 빨간 피가꽃처럼 피여있는 그 하얀 손수건을 볼 때마다 나는 한 소녀를 그리군 한다. 내가 여덟살나던 해의 꽃피는 계절이였다. 온 오전 내가에 가서 놀다가 오니 비여있던 이웃집에 이사군이 와있었다. 검붉은 색이나는 낡은 농짝이며 보자기에 싼 이불이며 옹기종기 묶은 사발짝이며가 어수선하기 그지 없었다. 이사온집 식구들은 그 짐들을 집으로 날라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삽작문밖에 앉아 땀을 흘리며 짐을 나르는 이웃집 식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엄마, 다 주어모았어요.”하는 챙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그 목소리의 임자가 내또래의 녀자애라고 단정했다. 나는 흘끔흘끔 그쪽에 눈길을 돌려 목소리임자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어데서 나는 소리인지 목소리임자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어데 있어요?” 챙챙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나는 그제야 나무무지 뒤로부터 한 녀자애가 앉은걸음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손에 든 자그마한 바구니에는 노오란 콩알이 담겨져있었다. 아마 땅에 흘린 콩알을 주어모아가지고 오는 모양이였다. “저 애는 왜 걷지 않고 앉은뱅이걸음을 할가?” 나는 의심스러워 혼자 중얼거리며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엄마!” 점심상을 차리던 엄마는 웬 일이냐는듯 일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이웃집에 이사온 녀자애는 왜 앉은걸음을 하오?” 그러자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그 애는 앉은뱅이란다.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려 그렇게 되었단다.” “양? 앉은뱅이라구? 그 애는 몇 살이라오?” “아홉살이란다.” “그럼 그애는 어떻게 학교에 가오?” “변소출입도 겨우하는 애가 학교에 어떻게 가겠니?” “엄마, 그 애가 참 불쌍하지?” 나는 그애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그날 나는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른다. 웬 일인지 눈앞에 그 녀자애의 가냘픈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또 삽작문밖에 나가 앉았다. 그 녀자애가 밖으로 나오지 않을가 하는 기다림에서였다. 이웃집 출입문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니 손에다 콩바구니를 들고 힘겹게 몸을 옮기던 녀자애의 모습이 또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야~ 그 애에게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그러면 학교도 마음대로 갈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문소리가 나더니 그 녀자애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가슴이 콩콩 뛰였다. 나는 그 녀자애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앉은걸음을 하는 녀자애의 얼굴은 갓 망울을 터친 함박꽃마냥 예뻤다. 녀자애는 출입문옆의 퇴마루에 앉았다. 녀자애는 나를 보지 못한듯 머리를 갸우뚱하고 손으로 고양이잔등을 쓰다듬어주고있었다. 그 장면은 마치도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았다. 나는 저도모르게 그 녀자애한테로 다가갔다. “얘, 넌 고양이를 좋아하니?” 나의 당돌한 물음에 녀자애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가볍게 끄덕였다. “야~나도 고양이를 귀여워한다. 우린 같구나!” “정말?” “응! 넌 왜 고양이를 좋아하니?” “건 고양이가 약빠르기 때문이지!” “그럼 새들이 더 좋겠구나, 새들은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니는게 더 좋지 않니?” “아니야, 난 새처럼 날아볼 생각은 여태껏 못해봤단다.” “왜서?” “......” 녀자애는 나를 쳐다보며 해쭉 웃었다. 하지만 나는 녀자애가 무었때문에 대답하지 않는가를 생각지도 않고 기어코 캐여물었다. “얘, 넌 어째서 새처럼 훨훨 날 생각을 안하니?” “난 앉은뱅이야. 다리가 성한 애들이야 새처럼 훨훨 날 생각을 하겠지. 난 그저 이 다리를 고쳐가지고 고양이처럼 뛰여다닐수만 있어도 좋겠다.” 나는 녀자애의 말에 일시 뭐라고 대답을할수가 없었다. 너도 앞으로 새처럼 날수 있을거라고 위안의 말이라도 한마디 했더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지만 미처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앉은뱅이 콩콩, 절구방아 찧는다!”하는못된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녀자애는 동시에 머리를 들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개울 저쪽 골목길에서 철규와 성삼이가 우스운 동작을 하며 소리치고있었다. 나는 녀자애가 더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남을 모욕하는 철규와 성삼이가 더없이 미웠다. “흥, 너희들은 량심이 있니?” “히히, 우습다야, 넌 왜 계집애 편을 드니?” “그렇다고 놀려주면 그 애 마음이 좋겠니?” “너하구 무슨 상관이냐? 히히... 너, 저 녀자애 하고 잔치하겠니?” “야, 임마, 개소리 치지마!” 나는 어데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지 씽하니 개울을 뛰여넘어가 철규의 코등에 주먹을 안겼다. “야, 이 새끼, 정말이야?” 철규와 성삼이는 마구 날치며 나를 때렸다. 나는 몹시 얻어 맞았다. 나의 코에서는 뻘건피가 뚝뚝 떨어졌다. 녀자애가 나를 향해 앉은걸음으로 엉기엉기 다가왔다. 우리는 개울을 사이두고 마주섰다. 녀자애는 타는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에서 나에 대한 그애의 고마움을 읽을수 있었다. 나는 개울을 훌쩍 뛰여 건너갔다. “너의 낯에 온통 피구나. 여기 개울물에 얼굴을 씻자.” 여자애로 앉은채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절로 씻지 뭐! 그 애들은 나쁜놈이야. 우리 엄마도 남을 업신여기는 애는 나쁜 애라구 했어.” 나는 개울물에 푸푸 소리내며 얼굴을 씻었다. 녀자애가 하얀 손수건을 꺼내여 나의 귀등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물었다. “아프지?” “아니, 조금도 아프지 않아.” “거짓말!” “정말이야, 남자대장부는 피는 흘려도 눈물은 흘리지 않는대.” “그럼 넌 남자대장부니?” “그럼! 난 후에도 널 보호주겠다.” “얘, 정말 고맙다! 자, 이 손수건을 너한테 준다.” 녀자애는 하얀 손수건을 내앞에 내밀었다. 나는 인차받지 않고 머뭇거렸다. “가져라, 여기엔 너의 피가 묻어있다.” 그 말에 나는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아니나다를가 하얀 손수건에 빨간 피가 매화꽃처럼 피여있었다. “야~ 이 피는 꽃같구나!” 나의 환성에 녀자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너의 마음씨가 꽃같지 않니? 호호호...” “엉? 내 마음씨가 꽃같다구? 히히히...” 우리는 함께 손수건을 바라보며 까르르 웃음을 날렸다. 달콤한 웃음소리는 돌돌 흐르는 개울물에 동동 실려서 저 멀리로 흘러가고있었다...
34    고 향 집 댓글:  조회:2137  추천:0  2010-03-11
고 향 집 룡문이라고 부르는 나의 고향마을에서 동이네 집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해도 “학교 뒤 오막살이집”이라고 하면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만치 우리집은 마을치고도 손꼽힐 정도로 초라했다. 나는 바로 그 집에서 태여났고 그 집에서 동년을 보냈다. 그 시절 나는 그 집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기보다도 나름대로 정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한것은 바로 그 집에서 수많은 동년의 꿈이 싹트고있었기 때문이였다. 그 시절, 봄이면 봄마다 청제비들이 날아들어 집안 대들보밑에도 처마밑에도 둥지를 틀군 했다. 집식구들이 일하러 나간후이면 나는 알락고양이 미미와 동무하면서 집을 지켰다. 그해 청제비는 빨리도 새끼를 깠다. 어미제비가 어디론가 나갔다가 들어오면 입에는 벌레가 물려있었다. 어미제비가 들어오면 새끼제비들은 날개를 파닥이며 “짹짹짹”소리쳤는데 마치도 “절 줘요, 절 줘요...”하고 애원하는듯싶었다. 어느날 나는 엄마께 제비엄마는 어데가서 벌레를 잡아오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가 대답하시기를 제비엄마는 새끼를 먹여살리기 위해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아온다는것이였다. 나는 놀랐다. “날아다니는 벌레를 어떻게 잡소? 제비엄마는 손도 없는데 어떻게 잡소?”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제비엄마가 벌레를 잡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굉장히 고생스러울거라고 생각되였다. 그후부터 어미제비가 나간후이면 나는 제비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먹던 누룽지를 제비둥지에 올리뿌렸다. 새끼제비들은 그것을 알고 받아먹으려고 짹짹거렸다. 그때마다 미미는 뚫어지라 제비둥지를 쳐다보군 했다. “너도 제비새끼가 불쌍해서 그러니?” 내가 미미를 톡 치며 물으면 미미는 “야옹-”하고 맵짠 소리를 냈다. 나는 미미도 꼭 새끼제비를 불쌍히 여길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너무나도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레 퍼붓는 큰비에 지붕이 새면서 제비둥지가 떨어져 내렸던것이다. 금방 털이나기 시작한 새끼제비 여섯마리가 날개를 파득이며 짹짹 소리내여 울어댔다. 그때라고 미미가 씽-하니 뛰여가 새끼제비들에게 덮쳤다. 미미는 눈깜빡할 사이에 새끼제비를 세미리나 입에 물었다. 나는 너무도 급하여 소리치며 뛰여가 미미를 나꾸어챘다. 두마리는 이미 죽어있었고 한마리는 다리가 상해있었다. 나는 미미를 죽어라고 때려주었다. 엄마제비는 구슬프게 울면서 처마밑에서 뱅뱅 날아쳤다. 그것을 보며 나는 마음이 더없이 괴로왔다. 나는 헝겊오리를 가져다가 새끼제비의 다리를 동여주었다. 그후 나머지 새끼제비들과 같이 채발밑에 숨겨둔후 좁쌀 한줌을 뿌려주었다. 새끼제비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자기들을 보호하지 못한 엄마제비를 하소연하고 저들에게 재앙을 덮씌운 하늘을 공소하며 저들의 형제를 해친 미미를 저주하는듯싶었다. 제비새끼들은 그날 저녁부터 한마리두마리 죽어갔다. 마지막 한마리까지 눈을 감아버리자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동이야? 서럽니?” 엄마가 나에게 조용히 물으셨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머리를 끄덕였다. “참, 불쌍한것들이구나. 동이야,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저절로 자기를 보호할 힘이 없으면 저렇게 되는거란다. 이제 학교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큰 사람이 되거라! ” 엄마는 죽은 새끼제비들을 주어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창문에 붙어서서 걸어가는 엄마의 뒤모습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는 새끼제비들을 두엄무지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엄마가 하시던 이야기는 여전히 귀전에 쟁쟁하게 울리는듯싶었다. “공부를 잘 해서 큰 사람이 되자!” 큰 사람이란 어떤것이고 또 어떻게 해야 될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큰 사람”이 되고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쁜사람”임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도 큰 타격을 받게되였다. 그것은 그해 겨울이였다. 나는 헛간에 걸어놓은 마늘을 훔쳐먹으려고 엄마 몰래 헛간에 들어간적이 있었다. 나는 벽구석에 세워놓은 큼직한 널판자를 마늘타래아래에 있는 오지독우에 올려놓은후 그것을 딛고서서 통마늘을 뜯다가 그만 넘어지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 소리에 헛간으로 달려들어온 엄마는 얼굴을 흐리우며 와락 널판자를 주어들어 보다가 별안간 그 널판자를 바닥에 메쳐버렸다. 엄마는 벽구석에 세워놓은 도끼를 찾아서 그 널판자를 패기 시작했다. 널판자는 삽시에 두 동각이 나고 네 동각이 났다. 엄마는 여러 동각이난 널판자들을 주어서 부엌에 가져다 던져버렸다. (저 널판자가 무엇이기에 엄마가 저렇게도 격분해서 도끼로 패버리는것일가?) 나는 못내 알고싶었다. 나는 작은 누나에게 물어서야 그것이 바로 나쁜사람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개패”라는것을 알게되였다. 나는 가슴이 덜컹해났다. 우리집에도 나쁜사람이 있단말인가? 누나는 나에게 아버지가 “나쁜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현행반혁명분자”라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현행반혁명분자”가 얼마나 나쁜것인지를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밉고 저주롭게 생각되였다. 나는 그날 온종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방구석에 들어누워있었다. 그때로부터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친구들과도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작은누나친구들이 놀러와서 나를 보고 “뚱보최가”라고 놀려대면 예전처럼 “난 뚱보최가가 아니구 충주최감니다.”라고해서 귀여움을 받은것이아니라 까아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작은누나친구들을 흘겨보았다. 분명 작은누나의 친구들은 나의 두 볼이 통통하고 부리부리한 쌍가풀눈이 반짝이는게 귀여워 “뚱보최가”라고 놀리는것이겠지만 그 시절 나의 생각에는 아버지가 나쁜놈질할 때 빈하중농들의 음식을 많이 빼앗아먹었기에 “뚱보최가”라고 하는가부다고 생각하고있었다. 그것이 재미있다고 작은누나친구들은 나를 볼쩍마다 놀려주군했다. 나는 그러는 작은누나친구들이 정말 미웠다. 그해의 첫눈은 산과들을 소복단장으로 만들었다. 나는 때묻지아니한 첫눈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눈이 자리를 잡기시작 하자 나는 마당에 나가 신나게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주먹만한 눈이 구을고 굴러 오지독처럼 되였다. 나는 그것을 세워 눈사람몸뚱이를 만들었다. 거기에 머리도 만드어 붙이고 팔도 만들어 달았다. 그리고 숯으로 눈과 코와 입을 만들어 놓으니 제법 사람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눈사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할가? 그래, 왕성이라고 하자!) 그 시절 내가 제일 숭배하는 사람은 영화 “영웅의 아들딸”에서 수뢰로 적들을 까부시는 주인공 왕성이였다. 나는 나의 그 눈사람이 왕성처럼 나쁜놈들을 때려 없앴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밖으로 나간 나는 눈사람앞에 못박힌듯 굳어졌다. “왕성”의 목에는 종이로 만든 “개패”걸려있었다. 나는 분했다. 그 눈사람이 저주롭게 생각되였다. 나는 두 팔을 번쩍 들어 눈사람을 밀어뜨렸다. 눈사람은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나는 추운줄도 모르고 눈무지우에 풀썩 주저앉았다. 소리없는 눈물이 하얀 눈우에 뚝뚝 떨어져내렸다... 나는 아버지가 정말 미웠다. 하여 자주 이런 생각을 굴려보았다. (현행반혁명분자가 얼마나 나쁜사람이면 나까지 이렇게 놀림을 받는것일가?)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호~”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불렀다. “동이야, 저 아버지를 좀 봐라.” “아버지를? 쉬는구만. 뭘 보라구그러오?” “아버지가 저렇게 발을 떨어대는것을 보란 말이다. 청승맞게도... 저렇게 떨어대니 우리 살림이 구차할수밖에...” 엄마의 말씀을 듣자 새삼스레 구차한 우리집 살림이 생각났다. 그때 우리집에는 이불이 두채밖에 없었다. 그것도 누덕누덕 기워서 본 바탕이 잘 알리지 않는것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중의 한채를 혼자서 덮으셨고 나머지 식구들은 엄마와 함께 발이나 겨우 가리우는 형편이였다. 손바닥만한 이불을 서로 끄당겨 발을 가리울 때면 나는 언제나 아버지의 이불을 넘보군 했다. 아버지는 이불속에 두 다리를 쫙 펴고 누워 구들고래를 훑었는데 이불길이가 짧아서 빼빼 여원 발 두개가 겉으로 내놓이군 했다. 아버지는 바로 그중의 왼쪽발을 떨었던것이다. 하지만 전에는 그저 떤다는 생각뿐이였지 아버지가 그 발을 떨기에 우리집 생활이 구차하다고 생각해보지는 못했었다. “엄마, 아버지가 발을 떨어서 우리 못 사나?” “뭐 딱히 그렇기야 하겠느냐만...” “그런데 엄마는 뭐...” “너의 외할아버지 생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더구나.” 엄마는 이렇게 말꼭지를 떼더니 아래 말을 이으셨다. “먼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단다. 그중 한 친구가 잠잘 때 왼발을 떨었는데 그것도 매우 심했단다. 발을 잘 떠는 그 친구는 서발장대를 휘둘러도 거칠것 없이 가난했단다. 친구의 잘 떠는 발이 들어오는 복을 차버린다고 생각한 그의 친구는 친구가 단잠에 든후 도끼로 친구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찍어버렸단다. 그후 도망갔다가 한 십년후에 와보니 친구는 팔간기와집을 지어놓고 살더란다.” 엄마의 이야기는 그처럼 신비하게 들려왔다. (떠는 발을 찍어버리면 정말 옛말처럼 기와집을 짓고 잘 살수 있을가? 아버지의 떠는 발을 찍어버리면 우리집도 잘 살게 될가?) 나는 이렇게 엄마의 품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굴리다가 꿈나라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밥상에서는 여전히 싯누런 옥수수떡이 기다리고있었다. 아버지의 주먹만한 옥수수떡이 잘 떠는 아버지의 왼쪽발처럼 미웠다. 그날 밤, 집식구들은 모두 회의에 가고 나와 아버지만 집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정치문제 때문에 중요한 회의에는 참가할수 없었던것이다. 나는 아버지 먼저 잠든체 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인차 코를 골아댔다. 나는 낮에 준비해두었던 도끼를 찾아들었다. 아버지곁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 얄미운 발을 무시로 떨고있었다. 떨고있는 왼쪽발에는 헌 내복오래기가 감겨져있었다. 낮에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가 잘못 디뎌서 신바닥을 뚫고 들어온 싸리나무그루에 박혀 발을 크게 상했던것이다. 저녁을 잡수시면서도 아버지는 상처가 아파 무시로 이마살을 찌푸리셨다. (그래, 아무리 발을 떨어도 아버지가 계시기에 우리식구들이 따뜻한 구들에서 잘수 있는게 아닌가? 잘 살겠다고 아버지의 발가락을 찍어내면 누가 나무를 해서 불을 때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낮에 나무하러갔다가 상하신 아버지의 왼쪽발이 못내 가슴아프게 안겨왔다. 나는 도끼를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조용히 온돌에 올라와 아버지옆에 누웠다... 아버지는 그후에도 여전히 왼쪽발을 떠셨다. 엄마도 여전히 그 발을 보며 푸념을 하셨다. “청승맞게두...저 발 떠는걸 좀 보렴.” 아버지께서는 6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발을 떠셨고 우리 집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구차한 살림에서 헤여나오지못했었다. 새삼스럽게도 회억의 창고에서 어린시절의 파아란 이야기들을 펼쳐들고 보니 오늘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어쩜 돌이키기도 가슴아픈 동년의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이 밑거름이 되여 오늘의 나를 연출해낸것은 아닐가? 동년의 파아란 꿈이 싹트던 고향집이 그립니다.
33    엄마의 별(제2부) 댓글:  조회:2828  추천:0  2010-03-11
엄마의 별(제2부) 1 엄마는 사실 별에 대하여 아는것이 별반 없었다. 그저 보통이 넘는다싶을 정도로 별을 좋아하고 별을 숭배할 뿐이였다.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밤길을 걷다가도 간혹 걸음을 멈추고 서서 오른팔을 들어 북쪽하늘을 가르키며 나를 부르셨다. “동이야, 저 별을 무슨 별이라 부르지?” “삼태성이지 뭐. 효성스러운 별형제들이지.”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내가 이렇게 앞질러 종알거릴라치면 엄마는 흐믓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래그래, 저별들이 바로 삼태성이지. 북쪽하늘의 효자별들이거든.” “알어, 엄마. 옛날 세 형제가 엄마의 명대로 각자 도술을 익혔는데 어느 날은 흑룡이 해를 삼켜버려 온 세상이 온갖 혼란에 빠졌지. 그들은 자기들이 익힌 도술로 흑룡을 쳐부셔 해를 찾는 한편 해를 영원히 지키기 위해 하늘의 삼태성이 되였지. 엄마 맞지? 내 말이!” “그래그래, 우리 동이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어쩜 삼태성 옛말까지 이렇게 잘 할가?” 내가 엄마 앞서 삼태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엄마는 부러 이렇게 목소리를 한옥타부 높여가며 짐짓 과장된 표정을 지어주셨다. 나는 그게 더 신나서 손벽을 짱짱 치며 종알거렸다. “엄마, 그래서 큰형이랑, 작은 형이랑, 나랑, 이렇게 세 형제는 바로 삼태성과 같지? 맞지? 엄마!” 엄마는 언제나 이 대목에 와서는 나를 끌어다 품에 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씀했다 “요, 귀여운것아! 그래, 그렇구말구, 너희들이 바로 삼태성이지. 엄마의 별들이지! 자 말해보렴, 동이야, 삼태성이 된 형제들은 또 무엇을 했지?” “음~ 삼태성이 된 형제들은 무예를 배웠지 뭐.” “그래, 그렇구나. 그들이 무예를 잘 배워냈기에 흑룡을 물리칠수가 있었거든. 그럼 우리 동이는 어째야 할가?” 엄마는 말을 마치고 기대어린 눈길로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시군 했다. “나도 삼태성형제들처럼 무예를 잘 배워야지 뭐? 나의 무예는 바로 학교에 붙어서 공부를 잘 하는것이지? 엄마 그렇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엄마가 즐거워 한다는것을 미리 알고있었다. 어쩜 나도 엄마도 서로 다 알고있으면서도 그저 그렇게 한번 또 한번 확인을 하는 과정을 즐기고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동이야, 별은 빛을 내야 제구실을 하는것이고 사람은 덕을 쌓아야 좋은 사람이 되는거란다. 남에게 더 많은 덕을 베풀자면 공부를 잘 해서 속에 많은 먹물을 채워넣어야 한단다.” 엄마는 늘 이렇게 우리 형제를 단속하군 하셨다. 그렇게 멋진 말도 아니건만 그 시절 엄마의 말씀은 모주석어록 보다도 더 쉽게 가슴에 와 닿았었다. 친구들이랑 뒤집 박할아버지네 울바자밖에 손가락을 물고 서서 터밭에 있는 살구나무를 엿보다가 할아버지네 집에 사람이 없는것을 눈치채고 친구들이 살구서리를 하자고 서두를 때면 나는 언제나 새삼스럽게도 엄마의 그 말씀이 뇌리를 치군했다. 하여 나는 정말 살구가 먹고싶지만 그 자리를 떠나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오군 했다. 2 그날도 친구들이 박할아버지네 살구서리를 벼르는것을 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터밭앞에 있는 개울가에 앉았다. 나는 두눈을 살풋이 감고 두 발을 개울물에 담갔다. 살구가 익어번지는 칠월이라 달착지근한 살구향기가 멀지 않은 개울까지 날아와 나의 코구멍을 간질렀다. 나는 “후~”하고 길게 들숨을 몰아쉬며 향긋한 살구향기를 페부로 끌어들였다. (살구가 먹고싶다. 하지만 살구는 박할아버지네것이다. 남의것을 훔쳐먹으면 덕이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참는다…) 속으로 이렇게 스스로를 단속하고있는데 뒤에서 와짝지껄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발딱 일어나 소리나는 쪽에 눈길을 돌려보니 친구들이 “우야~” 소리치며 박할아버지네 집쪽으로부터 뛰여오고있었다. 그 뒤로 박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들이 살구서리를 하다가 박할아버지에게 들켜버린 모양이였다. “살구가 먹고싶으면 따달라고 해야지, 어른들이 없을 때 헛손질을 해서야 쓰겠냐? 살구 몇알이 대단해서가 아니구, 너희들이 나쁜버릇을 배울가 근심돼서 그런다. 쯧쯧쯧” 박할아버지께서 뛰여가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차셨다. 나는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선채로 멀리서 박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박할아버지께서도 나를 발견하셨는지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셨다. 일그러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니 저으기 가슴이 떨려났다. (혹시 박아바이가 나도 친구들을 따라 아바이네 울바자옆에까지 갔던것을 알고 계시는게 아닐가? 난 정말 살구서리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박아바이가 나까지 의심하면 어쩔가?) 할아버지께서 가까와 올수록 가슴이 콩콩 목구멍을 솟아오르려고 했다. “동이야~” 할아버지께서 끝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흠칫 놀라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네 아…아바이.” “넌 왜 저 애들과 같이 살구서리를 하지 않았니?” “저두 바자굽까지 갔다가 돌아왔스꾸마. 난 먹고싶지 않았스꾸마.” “먹고싶지 않았다구? 너 지금 거짓말을 하고있지?” 할아버지께서 나를 바라보며 벙긋이 웃으셨다. 나는 얼굴이 확 달어올라 뭐라고 말씀을 올릴수가 없었다. “동이야, 오너라 여기 아바이옆으로 오너라.” 할아버지께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나는 호들호들 떨리는 다리를 옮겨 발볌발볌 할아버지옆으로 다가갔다. “가자, 가서 살구를 실컷 먹어라. 너라고 왜 살구가 먹고싶지 않겠니? >. 할아버지께서 나의 손을 잡아끄셨다. “싫스꾸마, 아바이,” 나는 못박힌듯 선자리에서 할아버지를 향해 도리머리를 했다. “괜찮대두, 아바이가 먹으라 할 땐 실컷 먹어도 된다. 얼른 가자이까.” 나는 박할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네 터밭으로 들어갔다. “자, 시름놓구 맘대루 따서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언칠라!” 할아버지께서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고는 밖으로 나가셨다. 나는 한참이나 멀어져가는 할아버지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돌려 살구나무를 쳐다보았다. 노오란 살구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살구나무는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과도 같아보였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게 느껴졌다. 3 “엄마, 나 오늘 살구를 실컸 먹었소.” 저녁에 엄마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바람으로 나는 자랑삼아 어깨를 으쓱해가며 종알거렸다. 엄마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였다. “살구라니? 어디서 난 살구를 먹었지?” “뒤집 아바이가 나를 데리구 살구나무로 가서 실컸 먹으라 했거든.” “뒤집 아바이가?” “양, 그래서 난 살구나무에 올라가 앉아 여기저기서 막 따서 실컸 먹었소. 와~ 배터지는 줄 알았소.” 낮에 있은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신나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나처럼 그렇게 밝지가 않으셨다. 엄마는 돼지죽을 끓였던 가마를 부시며 나에게 넌지시 물으셨다. “동이야, 설마 너 박아바이 보구 살구를 먹자 한건 아니지?” “아니요, 엄마!” 나는 엄마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신나서 이야기했다. 엄마의 얼굴에 약간 화기가 돌기시작했다. “쯧쯧쯧, 아바이, 고맙기두. 그렇게 구석구석 마음을 써주시다니…” “엄마, 난 지금도 배부르우.” 나는 일부러 나오지도 않은 배를 슬슬 어루만지며 엄마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날 저녁도 우리의 주식은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가마굽에 붙혀낸 떡이였다. 그때 우리마을에선 그런 떡을 궈테라고 불렀다. 항상 먹을 쌀이 모자랐던 그 세월에 옥수수궈테는 그래도 늘 먹는 옥수수만두보다 사치한 음식이였다. 궈테를 부치려면 가마굽에 기름을 발라야 하기에 궈테에서는 어딘가 묘한 기름맛을 느낄수가 있었던것이다. “엄마, 가마치가 많이 앉게 굽어주. 양?” 나는 엄마 곁에 바싹 다가 앉으며 응석을 부렸다. 엄마는 나를 곱게 흘겨보며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알았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두 모를상 싶게 맛있게 굽어줄거니 기다려라 응?” 엄마는 말을 끝내고 일어나 손에 사발을 들고 헛간으로 내려가셨다. 헛간은 사실 우리집 창고였다. 겨울에 먹을 쌀로부터 다음 때 부엌에 넣을 나무며, 간장독, 된장독으로부터 엄마가 약처럼 쓰시는 찹쌀가루며 추석에 한사람당 반근씩 나누어준 소고기를 삶아서 소금에 절인것이며 하는 것들이 다 헛간에 들어있었던것이다. 엄마는 사발에 찹쌀가루를 담아들고 헛간에서 나오셨다. 우리집으로 말하면 엄마의 이 거동은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찹쌀가루와 소고기를 소금에 절인것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다치는것인줄 알고있었던것이다. “엄마, 손님이 오우? 울집에?” “왜 그렇게 묻니?” “엄마, 찹쌀가루를 떠오잖우?” “뒤집 아바이 고맙게두 우리 동이에게 살구를 실컸 먹게 했는데 어찌 가만 있겠니? 찹쌀 지짐이나 서너장 구워 들여가자구 그런다.” “와, 맛있겠다.” “쯧쯧쯧… 말하는거 하구는, 고마운 아바이께 맛있게 구워다 드리우 해야지.” 엄마의 핀잔에 나는 혀를 홀랑 내밀어 보이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반죽한 찹쌀가루로는 지짐 여섯장을 곱게 구을수가 있었다. 엄마는 사발에 붙은 찹쌀가루 반죽을 빡빡 긁어서 작은 지짐 한장을 구워 나에게 주며 말했다. “우리 동이, 오늘 고운 일을 했다니 엄마두 동이에게 상을 줘야지. 이건 우리 동이 몫이다. 뜨거울때 제꺾 먹어라.” 목젖이 방아를 찢는것을 겨우 참고 있던차라 나는 너무도 좋아서 손으로 찹쌀지짐을 넙쩍 받아들었다. 금방 구워낸 것이라 몹씨도 뜨거웠다. 나는 찹쌀지짐을 다른 손에 넘겨쥐고는 제꺾 한입 베여물었다.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입천정을 델라.” 엄마가 방금 부쳐낸 찹쌀지짐을 사라에 곱게 담으며 말했다. “와~ 정말 맛있소. 엄마.” 나는 엄마곁으로 한발 다가서서 반쯤 남은 찹쌀지짐을 엄마의 입에 넣어주려 했다. 엄마는 지짐이를 쥔 나의 손을 밀치며 머리를 저었다. “방금 지짐이를 굽느라 기름냄새에 질려서 그런지 먹을 생각이 없구나. 너나 먹어라.” “정말? 엄마!” “그래, 뜨거울 때 제꺽 먹어라.” “양, 엄마.” 나는 마지막 남은 지짐이 한쪼박을 제꺽 입에 넣어버렸다. 4 일은 그날 밤에 생겼다. 아버지와 큰 형님은 회의하러 나가시고 누나는 친구들을 찾아 마실을 가고 집에는 나와 엄마만 남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차츰 명치끝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냥 그러다 말려니 하고 생각했다. 전에도 배가 아프다가는 변소에 한번 갔다가오면 인츰 괜찮아졌던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니였다. 명치끝이 꽉 막히는듯 갑갑하고 안으로 죄여드는것 같더니 숨쉬기 좇아 힘들어졌다. 나는 배를 끌어 안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배 아파 죽겠소.” “보자보자, 어디가 아프니?” 엄마는 나의 배를 국꾹 누르며 물었다. “여기,여기오. 아이구 나 죽소 엄마.” 나는 튀겨놓은 새끼새우처럼 몸을 옹크리고 앓음소리를 냈다. 엄마는 나를 끌어다 무릎을 베워주면서 계속 나의 배를 문질러주었다. “그래그래, 우리 동이 배가 아프지? 엄마의 손이 약손이란다. 아픔아, 물러가라. 우리 동이 편해지게… ” 엄마는 중얼거리며 부드럽게 나의 배를 어루쓸어주었다. 전에도 엄마는 내가 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면 이렇게 나의 배를 어루쓸며 “엄마 손이 약손이다. 아픔아, 물러가라.”를 흥얼거렸던것이다. 전에는 엄마의 손이 스쳐가면 정말 아픔이 가셔지는듯싶었었다. 하지만 그날밤은 아니였다. 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머리에서는 어느새 식은 땀이 배여서 뚝뚝 떨어졌다. 입술마저 파아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제야 나의 증상이 보통이 아님을 느꼈던지 목소리를 떨기 시작했다. “동이야, 진정을 하고 제대로 말해봐라. 정말 그렇게 아프니?” “양, 엄마 나 죽소. 밸이 끊어지는것 같소.” “너 큰병이 난게로구나.” 엄마는 나를 부축하여 바당으로 내려가더니 바삐 신을 찾아신고 나를 둘쳐 업었다. 배에서 오는 동통으로 하여 나는 뭐라고 깐죽거릴 힘도 없었다. 엄마가 당기는 대로 등에 업혀 머리를 엄마의 잔등에 부쳐버렸다. 엄마는 어둠을 헤치며 아래마을에 있는 의사네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합작의료를 하던 때라 우리 대대에도 위생소가 하나 있었는데 아래마을에 자리를 했던것이다. 그믐까리라 밤은 코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어두웠다. 엄마는 나를 업고 반달음을 하면서 연신 물었다. “어떠냐? 그냥 아프냐?” 대답할 맥도 없었다. 나는 엄마의 등에 얼굴을 기댄채로 죽은듯이 두눈을 감고있었다. 내가 반응이 없자 엄마는 연신 소리쳤다. “동이야, 정신차려라. 동이야, 의사네 집이 눈앞이다. 정신을 놓으면 어떡할려구 그러니.” 엄마의 목소리는 울음에 흠벅 젖어 바스음을 연주하고 있었다. 뭐라고 엄마께 대답을 하고싶었다. 하지만 배에서 오는 동통은 작은 소리를 내기도 힘들게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 엄마…” “그래, 동이야, 말해, 말해 봐라.” 엄마는 머리를 돌리며 나에게 소리쳤다. 순간 엄마는 어디에 걸채였는지 몸을 피끗하면서 평형을 잃으셨다. 나는 던져진 보리자루처럼 엄마의 등에서 훌렁 떨어져버렸다. 엄마도 쿵하고 엎어졌다. “엄마,” 무서움까지 느껴져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엄마를 불렀다. 엄마도 피갈린 목소리로 소리쳐 나를 찾고있었다. “동이야, 어딨니? 동이야.” 엄마는 나를 보지못하고있었다. 엄청난 눈병으로 하여 왼눈을 가제로 싸매고 사시는 엄만지라 오른쪽 눈의 시력도 주먹만한 물건이나 겨우 가려보는 정도였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 엄마는 분명 아무것도 모지못하고있었다. “동이야, 엄마목소리가 들리지? 엄마쪽으로 기여오너라, 엄마가 여기 있다. 여기에.” 엄마는 끝내 흑흑 느끼고있었다. “엄마, 가만 있소. 내가 엄마를 찾을게.” 나는소리나는 쪽으로 간신히 기여가며 있는 힘을 다하여 엄마께 소리쳤다. 끝내 허우적거리는 엄마의 손이 나의 손끝에 맞혀왔다. “동이야!” “엄마!” 엄마는 나의 손을 잡아 당기며 무릎걸음으로 나의 곁에 다가왔다. 나는 무너지듯 엄마의 품에 안겼다. 엄마는 나를 와락 품에 당겨 안았다. 손으로 나의 등을 두드리며 울음을 삼키셨다. “이것아, 어쩌자구 아프니? 이것아, 엄마가 놀라 죽는걸 보려구 그러지?” 엄마는 다시 나를 둘쳐 업었다. 너무나도 놀랐던 탓인지 칼로 에이는듯하던 아픔이 좀씩 살아지는듯 싶었다. 나는 손으로 가볍게 엄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엄마, 천천히 걷소. 첨 보다 덜 아프오.” “엄마등에 배를 꼭 붙이고 있어라. 의사네 집에 금방 도착한단다.” 엄마는 헉헉 모진숨을 톺으며 힘겹게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5, 문제는 낮에 먹은 살구 때문이였다. 의사는 체증이 있는데다 급성위장염까지 겯들인것 같다고 하면서 나의배에 침을 여섯대나 꽂아주었다. 한참 지나자 배에서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나더니 트림이 올리밀었다. 배가 한결 시원해지는듯 했다. 의사가 나의 병을 보는동안 시종 안절부절못하시며 두손만 마주 뿌비던 엄마가 그제야 한시름을 놓으신듯 침대옆에 있는 쪽걸상에 살풋이 앉으셨다. 엄마는 나의 손을 더듬어 꼭 쥐여주셨다. 그때 나는 엄마의 손이 몹시도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꼽이 두둠히 내배인 두 눈을 슴벅거리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나의 손을 쥔 모양 그대로 몸을 한껏 낮추어 침대에 머리를 기대고 계셨다. 엄마는 빚어놓은듯 움직이지 않으셨다. 엄마가 너무 갸냘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쩜 이 몸으로 나를 업고 그렇게 달릴수있었을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쳤다. “동이야, 동이야!” 하고 애처럽게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울리는듯 했다. 나는 엄마를 편히 쉬게 하고싶었다. 마침 동쪽 벽을 기대여 빈 침대가 하나 있었다. 나는 살며시 손을 당겨 빼며 낮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흠칫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어느새 잠에 빠졌던지 엄마의 입귀에는 건침이 흥건히 흘러나와 있었다. 엄마는 내가 볼세라 급히 손등으로 건침을 훔치셨다. “이 정신 봐라, 그새 잠이 들었네.” 엄마는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들어 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엄마 손이 약손이우.” 엄마께서 웃으셨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아까는 정말 얼마나 무섭던지… 동이야? 인젠 좀 낳아졌니?” “양, 안 아프오.” “그래, 다행이다. 큰 일을 칠번 했잖니? 담에는 그렇게 음식을 폭식해서는 안된다. 알겠니?” “뒤집 아바이가 살구를 맘대루 먹으라 하기에 너무 좋아서 배터지게 먹었더니 이렇게 됐소.”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게면쩍게 웃었다. 엄마는 다시 한번 나의 이마를 쓸어주며 말했다. “동이야, 오늘밤에 앓은 일을 뒤집아바이에겐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우?>. 나는 엄마의 말씀이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엄마는 나의 얼굴을 지켜보며 잠간 뭔가를 생각하시는듯싶더니 자냥스럽게 이야기 했다. “네가 체해서 앓은걸 아시면 뒤집 아바이가 얼마나 가슴아파 하겠니? 뒤집아바이는 우리 동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살구를 맘대루 뜯어먹게 했는데, 네가 조심하지 않아 언쳐서 급병을 했으니, 뒤집아바이가 알면 몹시도 놀라실게 아니니? ” 엄마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뭔가를 알겄 같았다. “엄마, 그게 바로 감나무밭을 지날 땐 신끈도 고쳐 매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은게지.” 엄마는 잠간 멍해있더니 인차 얼굴에 웃음을 띄우셨다. “그래, 그게 비슷하구나. 우리 동이,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다 했지?” “엄마가 들려준 옛말이 아니우? 히히히…” 한마디 멋진 말을 했다고 생각하니 저으기 기분이 좋아져서 까르르 웃어버렸다. 엄마는 나를 보며 곱게 눈을 흘기더니 입을 열었다. “웃음소리가 커진것을 보니 낫긴 나은 모양이구나. 그래, 인젠 배침을 빼도 되지 않을가?” 엄마는 의사를 부르러 웃간으로 올라가셨다. 6 지난밤에 너무나 급하게 앓아서였던지 이튿날 아침까지도 도무지 기운을 차릴수가 없었다. 병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지 얼굴이 발가우리 하게 달아올라있었다. 어제 밤에 회의에 갔다 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며 형님들이며 누나까지도 웬 일이냐는듯 나에게 이상한 눈길을 보냈다. 엄마가 나를 대신해서 말했다. “어제 밤에 열이나서 병원에 갔다가 왔단다. 아마도 감기에 걸렸던 모양이구나.” “우리집 뚱보최씨가 왜서 그렇게 급병을 했을가?” 작은 누나가 눈까풀이 무거워 지긋이 감고있는 나의 볼을 살짝 건드리며 키득거렸다. 엄마가 작은 누나의 손등을 톡 쳤다. “얘, 아프다는 애들 가지구 그러지 말아라.” “엄마, 재밌잖소? 두볼이 사과처럼 빠알간게…” “누나는 아픈게 그렇게 좋소?” 나는 누나를 등지고 앵돌아져 누으며 볼부은 소리를 했다. 그러는 내가 재밌다고 누나는 여전히 캐득거리고있었다. 그날 엄마는 아픈 나를 혼자 집에 둘수가 없다며 나를 데리고 일밭으로 나갔다. 그날은 약수동덕에 있는 장새래밭에서 조이밭김을 매는 일이였다. 장새래밭까지 가려면 약수동장대를 넘어야했다. 어른들은 의례 걸어다니는 줄을 아는 곳이였지만 나에게는 약수동장대를 넘는 일이 너무도 먼 장정이였다. 내가 하도 맥이 없어 다리를 질질 끌며 늦장을 부리자 엄마는 나를 등에 업히라고 하셨다. 엄마등에 훌쩍 뛰여오르고 싶었지만 어제 밤에 보았던 엄마의 갸냘픈 모습이 눈앞에서 알른거려 도무지 척하고 엄마등에 오를수 없었다. 엄마가 나의 앞에 등을 들이밀며 재촉했다. “동이야, 꾸물거리지 말구 제꺽 업혀라, 엄마가 일에 늦어진다.” “엄마두 맥이 없는데 어떻게 나를 업겠소?” “괜찮다. 어서 업혀라. 엄마는 언제 든지 너를 업을수 있단다.” 엄마의 말이 분명 거짓말이라고 생각되였다. 나는 암마의 말을 이어 바투 들이댔다. “엄마, 내가 큰 담에도 업을수있소? 거짓말이지?” “그럼, 엄마는 언제나 자식을 업을수 있는 거지.” “내가 엄마보다도 더 무거울 때도?”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거든.” 엄마는 매우 자신있게 말씀했다. 리해할수없었다. 도무지 불가능할것만 같았다. 하지만 또 엄마는 정말 그렇게 할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때까지 세상에서 엄마는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 왔던것이다. 나는 조금 시름이 놓여 엄마의 등에 업혔다. 엄마는 등에 나를 업고 오른 손에는 호미를 들고 왼손에는 물통을 들고 허이허이 약수동 장대를 톺아 올랐다. 말그대로 장사래는 길기도 했다. 밭머리에서 앞을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김을 매기 시작하면 점심먹을 때라야 한번 밭머리에 나올수있다고 했다.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거라 응. 맥이 없으면 이 자리에 누워서 잠간 잠도 자구. 마구 헤덤비다가 나무그루에 질리면 랑패를 보니까.”엄마는 나를 밭머리에 있는 작은 비술나무 그늘밑에 앉혀놓고 김을 매기 시작했다. 갸냘픈 몸을 밭고랑에 붙이고 힘겹게 김을 매나가는 엄마가 못내 안스럽게 생각되였다. 날씨는 점점 무더워졌으나 엄마는 쉴념을 안했다. 밭고랑을 타고 힘있게 김을 매며 앞으로 나아가는 엄마를 바라보니 애틋한 감정이 새삼스레 생겨났다. 나는 “호~”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였다. 나의 머리에는 별생각이 다 떠올랐다. (야~,바람이나 불어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그럼 울엄마가 시원해하겠는데, 바람은 어데서 불어올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올가? 아니면 참새처럼 날개가 있어 저절로 훌훌 날아올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둥글소를 타고올가?...)나는 정말 한오리의 바람으로 변하고 싶었다. 그래서 밭머리에 앉아있다가 엄마가 더워하시면 홀랑 날아가서 엄마를 시원하게 해주고싶었다. (그러면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거, 시원한 바람이로구나!>하고 말씀하시겠지? 그러면서도 엄마는 그 바람이 나인줄을 모르실거야. 아~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가...) 속으로 멋진 꿈을 꾸며 나는 나름대로 기분이 좋아 방그레 웃어보았다. (그래, 엄마가 시원하게 물을 마시게 해야지.) 나는 물통을 손에 든채 엄마를 찾아 장사래밭고랑을 타고 탁박타박 걸어갔다. 빤히 바라보이는 거리였지만 졻은 밭고랑을 타자니 어간만 어려운것이 아니였다. 엄마가 김을 매다 호미질을 멈추고 일어나 손으로 옆구리를 툭툭 치며 머리를 돌렸다. 내가 손에 물통을 들고 걸어오는것을 발견한 엄마가 호미를 밭고랑에 놓고 마주오며 소리쳤다. “여기는 왜 오는거니? 더운데 밭머리에 있지.” “엄마, 물을 마시오. 목이 마르지.내가 물을 가져왔소.” “애두, 오다가 넘어라도 지면 무릎을 벋길번 했잖니? 어제 밤에 앓아서 아직두 맥이 없을 텐데.” 엄마는 내곁으로 다가와 머리에 친 채갑수건을 풀어서 나의 이마에 뽀질뽀질 돋아난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나는 엄마를 힐끗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엄마가 더 힘들지뭐. 시원히 물을 마시오.” 엄마는 나의 손에서 물통을 받아 머리를 젖치고 꿀꺽꿀꺽 몇목음 마시더니 얼굴에 함북 웃음을 담고 흐믓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동이 가져온 물이 정말 시원하구나. 동이에게 감사해서 어쩌지?>. “히히히 감사하긴 엄마. 물이 시원하지? 힘이 나지?” “그럼그럼, 이 고랑을 단번에 다 맬것 같네. 그새 우리 동이 밭머리에 나가서 엄마를 기다려라. 응? 오라 잖으면 점심 때가 될꺼니까.” 나는 엄마에게 등을 밀려 다시 밭머리로 나갔다. 엄마를 위해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나는 밭머리에 앉아 김을 매나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파아란 조이밭에 하나의 점만침이나 작게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였지만 그 시각 새삼스럽게 엄마가 더없이 커보였다. 엄마는 정말 세상 무엇이나 다 할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엄마가 할수있는 일을 세여보았다. 정말 많고도 많았다. (그래, 내가 갓 태여났을 때 엄마는 나에게 젖을 먹여주었지. 그 다음은 날마다 세수를 시켜주고 옷을 입혀주고 이따금 손톱, 발톱을 깎아주고 숱한 옛말도 들려주었지. 엄마는 또 어떻게 하면 좋은 애가 되고 어떻게 하면 나쁜 애가 된다는것도 다 알고있거든.) 새삼스럽게 어느 땐가 엄마와 함께 산으로 버섯따러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은 소낙비가 퍼부은 후의 반짝 개인 어느 오후였다. 나는 버섯따러 가는 엄마를 따라 나섰다. 비온뒤라 산길은 몹씨 미끄러웠다. 엄마는 나를 보고 조용히 타일러 주었다. “동이야, 마구 헤덤비지 말고 엄마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너라 응.” 그때 나는 웬 일인지 엄마 발자국을 따라 걷는게 재미없다고 생각되였다. 나절로도 얼마든지 잘 걸을수 있을것 같았다. “엄마, 엄마는 왜 자꾸 엄마 발자국만 디디며 걸으라 하오?” 엄마는 별 당연한것을 다 묻는다는듯 대답했다. “그래야 넘어지지 않고 나무가지에도 걸리지 않지.” “나 절루두 잘 걸을 수있는데, 엄마발자국만 밟으며 걷다가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하오?” 엄마가 나의 이마를 톡 튕겨주며 웃으셨다. “엄마가 없기는 왜 없겠니? 쯧쯧쯧… 애들은 원래 엄마의 뒤를 따라 걷는 법이란다.” 엄마는 말을 마치고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가자.”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산길을 걸으며 속으로 많은 잡생각을 굴렸다. (엄마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니 정말 넘어지지 않는구나. 하지만 큰 다음 학교에 다닐 때도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을수는 없지 않는가? 그때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가...) 엄마는 여직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밭고랑을 타고 멀어져 가는 엄마를 바라 보노라니 불현듯 엄마가 안계실 때 뭔가 혼자서 큰일을 해보고 싶었다. 엄마가 걷지 않은 풀숲을 헤치며 저절로 걸어보고싶어졌다. 나는 밭머리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산비탈로 내려갔다. 파아란 풀숲에는 가담가담 뭇꽃들이 피여있었다. 하늬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는 뭇꽃들이 그처럼 아름다와 보였다. 나는 꽃을 보면서 한가지 일을 구상해 냈다. (그래, 저 꽃들을 꺾어서 엄마께 꽃둘레를 엮어드리자. 점심에 엄마가 김을 다 매고 밭머리에 나오면 엄마의 머리에 쓴 채갑수건을 풀어내고 대신 꽃두레를 씌워드리자. 야- 그러면 엄마는 꽃처럼 이뻐질거야,) 생각만 해도 신나서 둥 뜨는듯한 기분이였다. 나는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며 탐스럽게 피여난 꽃들을 꺽었다. 비록 이름모를 뭇꽃들이였지만 송이마다 그렇게 이뻐보일수 없었다. 꽃둘레를 쓰고 빙그레 웃음을 지을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꽃을 찾아 엄벙덤벙 풀숲을 헤치노라니 발이 미끌어 몸이 휘청거렸고 바지가랭이가 자꾸 작은 나무가지에 걸렸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엄마 몰래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도 자신이 못내 장하게 생각되였다. 7 조이밭 두벌김은 그날 점심에 끝을 보았다. 엄마는 내가 엮은 꽃둘레를 머리에 쓰고 나의 손을 잡은채 김매러 갔던 아주머니들과 함께 흥겨운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동이엄마, 오늘은 시집 가는 기분이겠네. 새색시처럼 이쁘구만.” 삼이네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가며 손사래를 했다. “그러게 말이오. 아들덕분에 오늘 꽃둘레까지 다 써보구.” 성호네 엄마도 뒤질세라 한술 떳다. 엄마의 얼굴에는 금방 싱글벙글 웃음이 피여 넘실거렸다. “자식놈이 해준거라 그런지 벗기 싫다니까.” 엄마도 변죽좋게 받아넘기며 꽃둘레를 들었다가 다시 번듯하게 눌러썼다. “가기오. 이 길루 식당으로 가기오. 생산대에서 랭면을 먹는다는데.” “그래두 그렇지, 호미를 들구 랭면 먹으로 가겠오. 집에가서 세수도 하고 얼굴에다 분딲지도 바르구 가야지.” 온 오전을 김매기에 지쳤으련만 아주머니들은 무엇이 그렇게 기쁜지 하냥 깔깔깔 하늘이 떠나가라 웃음판을 벌리셨다. 나중에는 집에 가서 세수하고 분바르고 연지바르고 광을 낸 다음 식당에 모여 랭면을 먹자는데로 의견이 모아졌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단장을 하실 생각은 하지 않고 터밭으로 나가 오이를 뜯어다가 오이랭국을 만드느라고 돌아쳤다. 엄마를 지켜보는 내가 되려 조급해 났다. (다른 집 엄마들이 먼저 식당에 가서 랭면을 다 먹어버리면 어쩔가? 엄마도 오늘 오전에 김을 매느라고 엄청 힘들었을 텐데…) 엄마는 여전히 식구들의 점심을 갖추기에만 골몰하셨다. 나는 끝내 참지못하고 엄마의 옷자락을 당겼다. “엄마 빨리가오. 다른 집 엄마들이 먼저 가서 국수를 다 먹겠소.” 엄마는 내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살풋이 웃음을 먹음으셨다. “엄마는 점심에 식당에 안갈란다.” “왜 그러우? 엄마, 국수가 그렇게 맛있는데.” “엄마는 우리 동이랑 같이 랭국에 밥을 말아먹을 란다. 엄마는 그게 더 좋거든.” “야, 어떻게 그게 더 좋소, 국수를 먹는게 더 좋지.” “애두, 엄마는 우리 동이랑 같이 있는게 훨씬 더 좋은데.” 엄마는 나의 이마에 돋아난 땀방울을 훔쳐주며 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말씀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쩜 랭국에 밥을 말아 먹는게 그 맛있는 국수를 먹는것보다 더 좋을수가있을가?) 나는 부지런히 밥술을 놀리는 엄마를 바라보며 속으로 많은 생각을 굴려보았다. 엄마가 오후의 일을 나갈려고 서둘를 무렵에 생산대의 부녀대장이 엄마를 찾아왔다. 엄마는 반색을 하고 나가 부녀대장을 맞아주었다. 나도 엄마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동이는 집에 들어가 있어라. 엄마가 부녀대장과 할 말이 있거든.” 엄마가 나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럴수록 엄마가 부녀대장과 무슨 말을 할가 하는것이 궁금하기만 했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문턱에 붙어서서 바같에서 나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부녀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간하면 식당에 가서 국수를 먹지 그랬오.” “그냥 한그릇 먹어두 그렇구, 안먹어두 그렇구. 애도 아프지 해서 안갔소.” “동이엄마는 그저…모두들 동이엄마가 그 돈이 아까와 식강에 못 가는줄을 알고있소..” 부녀대장은 호주머니에서 1원짜리 종이돈을 한장 꺼내여 엄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국수 먹으러 가지않은 사람들에게 1원씩 보조해 주기로 했소. 받소.” 엄마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고 부녀대장의 손에서 돈을 받아쥐였다. 그래서였구나! 나는 엄마가 랭국에 밥을 말아 먹는것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돈을 아끼느라고 식당에 가지 않았음을 알게되였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엄마는 모든개 활동에 가지 않고 그기서 나오는 보조 돈 1원을 받아서 소금이나 성냥같은 생활용품을 사는데 보태던 생각이 났다. (우리 집은 어째서 이렇게 못 살가? 엄마는 얼마나 국수가 먹고싶었을가?) 남들이 다 먹는 국수도 먹지않고 돈을 받아 생활을 꾸려가는 엄마가 너무도 고맙고 또 그만침 가슴아프게 생각되였다. “동이야, 오후엔 혼자 집에 있을 만하지? 밖으로 나가지말구 집에 가만히 있어라. 알겠지?>. 엄마는 일을 나가며 시름이 놓이지 않아 오밀조밀 부탁도 많았다. “양, 엄마 알았소. 갔다오우.”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엄마를 위해 뭔가를 해놓으리라 윽별렀다. 하지만 내가 엄마를 위해서 할수있는 일이 무엇인지 인차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집앞에 흐르는 강가에 나갔다. 두발을 흐르는 강물에 담그고 두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았다. 하늘하늘 꼬리를 저으며 물을 가르는 새끼물고기들이 보여왔다. 나는 손으로 무릎을 톡 치며 방긋 웃었다. (그래, 물고기를 잡는거야, 저녁에 엄마가 돌아오시면 물고기탕을 끓여드리는거야,) 생각이 굳어지니 날뜻이 기뻤다. 나는 헛간에 걸어둔 반두를 꺼내들었다. 작은 바께쯔를 물고기통으로 찾아들었다. 마침 그때 한마을에 사는 송아지친구 철진이가 우리집 앞을 지나고 있었다. “철진아, 어디가니?” 누구와 같이 물고기잡으러 갈가 하고 생각을 굴리던 중이라 나는 주저없이 철진이를 불렀다. 철진이도 마침 심심해서 동네도리를 하고있던 참이였다. 물고기잡이를 가자는 말에 철진이도 쾌히 응해나섰다. 강가에 도착한 나는 철진이에게 물고기통을 들게하고 내가 강에 들에가 반두질을 했다. 나와 동갑인 철진이는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절기에 물에 들어서기 불편 했던 것이다. 나는 물을 따라 올라가며 돌틈과 풀속을 더듬어 고기를 잡았다. 해질녘이 되여 바게쯔를 들여다보니 미꾸라지며 버들치며가 두어 사발 푼히 되여보였다. 온집 식구가 얼큰한 물고기탕을 한때 훌륭하게 해먹을수 있을것 같았다. 자기의 힘으로 잡은 물고기를 보며 우리는 더없이 기뻤다. 마을 어구까지 와서 우리는 백양나무 밑에 앉아 물고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가 직접 물에 들어서서 잡았다는 특세를 대고 물고기를 철진이보다 좀 더 가졌다. 철진이는 어딘가 서운해 하기는 했지만 내놓고 따지지는 않았다.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 엄마는 일밭에서 돌아왔다. “엄마, 인제야 오우?” 삽작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나는 엄마를 마주가며 소리쳤다. 엄마도 얼굴에 함뿍 웃음을 담고 나를 향해 달려 오셨다. “엄마 맞춰보우, 내가 뭘 잡아왔나?” “그래, 동이도 맞춰봐라. 엄마가 뭘 사왔나.” 엄마는 다리를 굽혀 앉아 나의 허리를 잡아주셨다. 궁금했다. “뭘 사왔소? 엄마 먼저 말해보우.” “자, 먹어라, 사탕이다.” 엄마가 적삼호주머니에서 누른 종이봉지를 꺼내여 나한테 내밀었다. 나는 냉큼 받아서 헤쳐보았다. 개눈깔사탕이였다. “와, 사탕. 엄마 어디서 났소? 엄마가 산거요?” “그래, 우리 동이 먹으라고 엄마가 합작사에 들려 사왔지. 얼른 먹어라. 자, 그리구 인젠 말해보렴 아까 동이가 뭘 잡아왔다구?” “저녁에 물고탕을 끓여먹기우. 강에 가서 잡아왔소.” 나는 개눈깔사탕을 녹이며 신나서 손사래를 쳤다. 내가 물에 들어가 잡았기에 철진이보다 내가 더 많이 가졌다는 대목을 자랑하자 엄마의 기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동이야, 방금 네가 철진이보다 물고기를 더 가졌다고 했니?” 나는 제 기분에 들떠 엄마의 표정이 굳어지는것을 보아내지 못하고 여전히 종알거렸다. “양, 고기는 내가 몽땅 반두질을 해서 잡은거요. 그러니 내가 응당 더 많이 가져야지. 그렇지 엄마?” “동이야, 함께 갔으면 응당 똑 같게 나누는게 더 좋지 않니? 그리구 철진이는 또 다리를 잘 쓰지못하는 애인데 함께 잡은 물고기를 너보다 적게 가지고 가면서 얼마나 서러웠겠니?” 엄마는 자냥스럽게 조곤조곤 이야기하시며 기대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엄마는 분명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리해하기를 바랐겠지만 나는 어쩐지 나의 처사가 옳은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래도 내가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구 철진이는 강역에서 물고기통만 들고 따라다녔는데 뭐.” 엄마는 나의 말을 듣더니 차츰 낯색을 흐리웠다. “물고기를 좀 더 가지고 안 가지고 하는것보다 친구를 그렇게 대하는게 안돼서 하는 말이란다. 내가 일을 좀 더 했다고 친구지간에도 옴니암니 따져서야 쓰겠니?” 엄마는 말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기분이 잡혀 머리를 폭 숙이고 엄마의 뒤를 따랐다. 엄마는 식장에서 사발을 내리우더니 물고기를 담은 바게쯔에서 물고기를 반쯤 떠내였다. “철이야, 이 물고기를 철진이한테 가져다 주어라!”나는 인츰 사발을 받지 않고 몸을 외로 탈며 머리를 돌렸다. “동이야, 어서 가져다 주라니까.” “내가 들춘건데 뭐.”“그애는 너의 친구가 아니냐? 좋은 애라면 친구를 더 생각할줄 알아야지.”“그래도 내가 잡은건데 뭐, 그 앨 그렇게 많이 주고 우리는 어떻게 물고기탕을 해먹소?”나는 여전히 발끝으로 바당을 차며 손톱눈을 썰었다. “동이야, 너 정말 말을 안들을려니? 엄마 말을 들으면 랑패가 없을 텐데.”“……” “너 정말 고집이 웬간하지 않구나. 된욕을 먹어야 쓰겠니?” 엄마는 바당비자루를 거꾸로 잡아들었다. “어서 가져가거라! 가져다주라는데...”“내가 들춘건데 뭐, 엄마는 몰라가지구…”“아직도 그 소리냐?”엄마는 끝내 비자루로 나의 엉뎅이를 후려쳤다. 깜짝 놀랐다. 난생 처음 엄마 한테서 맞는 매여서 그런지 너무도 분하고 서러웠다. 울음이 터졌다. 나는 하는수 없이 물고기를 담은 사발을 들고 철진이네 집으로 향했다. 8 절인배추잎 만치나 죽어있는 나의 표정을 보고 철진의 어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동이야, 너 엄마에게 된욕을 먹었구나. 그렇지?” 나는 철진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몰래 눈물이 찔끔찔끔 솟아나 어느새 두볼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나의 상심한 표정에 철진의 어머니는 사뭇 놀라는 표정이였다. “애개~ 이 애봐라, 정말이네 쯧쯧쯧… 웬 일루 이 귀여운것을 이렇게 서럽게 만들었노? 동이야, 말해봐라. 엄마가 어째서 널 이렇게 섭게 만들었냐구?” “철진에게 이 물고기를 더 가져다 주라고 하는 말을 제때에 듣지 않았다구 바당비자루로 나를 때렸씁구마.” “쯧쯧쯧 너 에민 그렇게 고정한게 흠이라니까. 어린것들이 뭘 안다구. ” 철진의 어머니는 물고기를 세수소래에 쏟아놓고는 맑은물을 떠서 물고기를 담았던 사발을 깨끗이 씻었다. 그후 소래에서 큼직한 두부를 한모 들어내여 사발에 담아주며 말했다. “가지고 가서 두부장이나 끓여먹어라.” 나는 촉촉한 눈길로 철진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머리를 저었다. “싫습꾸마. 엄마가 보고 또 나를 욕할게꾸마. 남의 것을 가져왔다구.” “봐라봐라, 아낙네두, 애들 기를 다 죽이면서, 어른들이 줘서 가겨가는건 좋은 일을 하는거니까 가지구 가서 엄마께 그렇게 말씀 올려라.” 철진의 어머니는 두부를 담은 사발을 나의 손에 쥐여주며 가볍게 나의 등을 다독거렸다. 나는 철진의 어머니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엄마가 그렇게 성을 내시고 바당비자루로 나의 엉뎅이까지 때린것이 억울하게만 생각되였다. (혹시 엄마가 나를 고와하지 않는것이 아닌가? 아니라면 왜 철진에게 물고기를 더 가져다주라며 나를 때릴가?) 엄마의 진정을 알고싶어졌다. 집이 가까와 오자 나는 일부러 다리를 잘 쓰지못하는듯 쩔뚝거리며 간신히 걸음을 옮겨놓는 시늉을 해보였다. “동이야, 웬 일이냐?” 마침 뒤집에 사는 상옥누나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놀란듯 소리쳤다. 나는 상옥누나를 힐끗 바라보며 고통스러운듯 얼굴을 찡그렸다. “동이야, 너 어디서 다리를 상했니?” “아니요.” “내가 업어다 줄가? 쯧쯧쯧… 너네 엄마도 참, 아픈 애에게 무슨 심부름은 시킨다니. 자, 업혀라 내가 업어다 줄게” 상옥누나가 급히 뛰여와서 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싫어요. 엄마가 알면 욕해요.” “어쩌다 다리는 상했니?” “상한게 아니구요…” “상한게 아니면?” 상옥누나가 두눈을 치떴다. 나는 상옥누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울 엄마 나를 때렸어요. 바당비자루를 꺼꾸로 쥐구서요.” “그랬구나. 쌔게 때렸니?” “네 비자루로 쌔게 한매를 때렸어요.” “쌔게 한매를 때렸구나. 쯧쯧쯧… 아픈 애를 심부름까지 시키구, 이리 다구, 내가 두부사발을 들어다 줄게” 상옥누나가 나의 손에서 두부사발을 받아들고 깔깔깔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9 집문 앞에 독착했지만 나는 좀처럼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를 고와도 하지 않는 엄마가 있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삽작문가에 서서 울안 동정을 살펴보았다. 작은 누나가 터밭에서 마늘을 뽑고있었다. 나는 작은 누나가 나를 볼가와 문뒤에 몸을 숨겼다. 나는 누나가 허리를 펴고 울밖을 내다보고있었다. (혹시 작은 누나가 나를 보지 않았을가?) 나는 생각하며 몸을 쪼크리고 문뒤에 앉았다. 작은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동이는 왜 아직도 안온다우?” “동이는 엄마의 심부름을 갔단다. 오늘 철진이랑 물에가서 물고기도 잡아오구.” “많이 잡았다오?” “그래, 두어사발 잡은걸 우리동이가 기특하게도 친구를 도 생각해야한다면서 철진에게 더 많이 주고 집에는 한때 물고기탕을 끓이만침 남겼단다.” “우리 동이, 그렇게 어른스러운 일도 다 할줄 안다오? 엄마!” “우리 동이, 얼마나 셈이 든 애라고 그러니. 그만한 것은 저절로 알아서 척척하는데.” 엄마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저도몰래 얼굴이붉어졌다. (아닌데, 나 절로 주고싶어서 준게 아닌데. 엄마는 왜 누나에게 저렇게 말씀하실가?) “순이야, 너 동이 마중을 가봐라. 오늘 물고기를 잡느라구 그애 더리가 몹시 아플게다.” “양, 엄마.” 작은 누나는 뽑은 마늘을 손에 들고 터밭에서 나왔다. 누나가 몇발자국만 더 걸은면 삽작문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된다. 어쩔가? 내가 문뒤에 숨어서 집안에서 나오는말을 였들은것을 누나에게 들키우고 싶지않았다. 나는 발떡 일어서서 삽작문을 밀어열었다. 느나가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반가와서 소리쳤다. “우리 동이 오는구나, 오늘 대단한 일을 했다면서? 너 어떻게 그 물고기를 철진에게 더 많이 주자고 생각했니? 그렇게 귀한 생각을 말이다.” 작은누나가 나를 건뜩 들어 안아주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작은 누나의 눈을 피해 얼굴을 돌렸다. 누나는 나를 안은채로 집안에 들어섰다. 엄마는 가마목에 앉아서 밸을 딴 물고기를 맑은물에 헹구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숙인채로 엄마를 훔쳐보았다. 엄마는 마를 돌아보지않고 말했다. “제대로 가져다 주었니?” “양. > “철진이 엄마에게 두부를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는 하구?” “양!” “됐다. 놀아라.” 엄마의 목소리는 아까 “우리 동이 귀한 일을 했다”고 누나에게 자랑할 때 처럼 그렇게 높지도 상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를 피해 웃간으로 올라갔다. 어쩐지 엄마를 대하기가 몹시도 어렵다고 생각되였다. 나는 웃방 창문턱에 붙어서서 손으로 볼을 고이고 어스름히 깃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청제비 한마리가 빨래줄에 앉아서 짹짹 초조하게 울고있었다. 올봄에 태여난 새끼제비임을 한눈에 알아볼수있었다. (어도 엄마에게 욕을 먹었니? 어째서 그렇게 서럽게 우니?) 새끼제비를 보며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을때 엄마제바가 날아왔다. 엄마제비는 입에 물고온 먹이를 새끼제비의 입에 넣어주었다. 새끼제비는 노오란 부리르 쪽 벌려 엄마가 넣어주는 먹이는 날름 받아물었다. 그장면을 보는 순간 엄마가 사다준 대눈깔 사탕이 생각났다. 나는 바지호주머니에서 사탕봉지를 꺼냈다. 아까 첫알을 먹다가 엄마께 된통 당하고 그대로 넣어둔것이였다. 나는 봉지에서 사탕한알을 꺼내여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사탕이라 그렇게도 맛있었다. “엄마, 사탕을 잡수.” 나는 사탕봉지를 들고 정지칸으로 쫑도르르 내려 갔다. 그날 밤, 엄마는 나에게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 (정말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천벌을 받게 될가?)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번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야릇한 생각이였다. 그만침 나에게는 신비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라지오에 사람이 들어있다 해도 정말로 곧이듣던 그 시절이라 뭐나 다 궁금하고 직접 부딛쳐보고싶었다. 오늘까지도 나의 마음밭을 적셔주는 잊을수 없는 첫파종도 아마 그 무렵에 있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엄마의 말씀 한마다에 마음이 동해서 한 그번의 파종은 오늘도 한토막의 신비로운 추억으로 남아 나를 그 옛날의 파아란 동심에로 부르군한다. 그해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나는 엄마를 따라 자류지로 갔다. 늘 엄마를 따라 밭에 다니며 때이르게 농사일을 알하게 된 나는 땅에서 감자가 자라고 옥수수가 달리는것이 못내 신비하게 생각되였다. 어느 하루 나는 엄마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엄마, 우리 강냉인 왜 금자네 강냉이 보다 크오?”“오- 그거말이니? 그건 우리 밭이 기름지다보니 아무거나 심어도 잘 되기 때문이란다.”“우리 밭이 기름지다구?”“그래, 그래서 콩을 심으면 콩이 잘 되고 팥을 심으면 팥이 잘 되지!”“히야~그럼 해바라기를 심으면 해바라기도 잘 되겠네?!”“그럼, 거야 이를데 있니?”엄마의 이 한마디 말씀은 천진한 나를 유치한 환상의 세계에로 이끌어갔다.이 일이 있은지 며칠 안되여 나는 생일을 맞게 되었다. 생일 날 아침, 엄마는 나에게 닭알 두알을 삶아주었다. 나는 한알만 먹고 한알은 남겨두었다. 식구들이 모두 일밭으로 간후 나는 닭알을 들고 터밭으로 나갔다. 나는 밭에 자그마한 구덩이를판후 거기에 닭알을 넣고 보드라운 흙으로 살짝 묻었다.이튿날부터 나는 매일 고무신으로 샘물을 퍼다가 닭알 묻은 곳에 쏟아주었다. 이제 엄마의 생일이 돌아오면 닭알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닭알을 따다 엄마께 삶아드리자고 생각하니 마음은 고무풍선 처럼 둥~ 하늘을 나느듯 싶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되여주지 않았다. 강냉이는 벌써 개꼬리가 나고 이삭까지 패였는데 내가 심은 닭알은 싹도 트지않았다. 나는 막 애간장이 탔다.기다리고 기다리던 나는 끝내 묻었던 흙을 파헤치고 말았다. 닭알은 여전히 넣은 대로있었다. 그저 노란껍질이 검스레 변했을뿐이였다. 나는 너무도 맹랑하여 소리없이 울었다. 두볼을 타고 흐르는 방울방울의 눈물이 갓 파놓은 구덩이에 뚝뚝 떨어졌다. 그해 여름 내가 품고있던 꿈은 진정 그것이 아니였다. 나의 꿈속에서 닭알나무에는 분명 주렁주렁 닭알이 열려있었다. 11 (엄마는 왜 생일을 쇠지 않을가?) 깨여진 꿈을 아파하는 여섯살 소년에게 그해 여름은 너무도 길고 지루해보였다. 거부기같은 여름의 등에 올라 엉금엉금 세월을 기면서 가끔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의문덩이리가 바로 엄마의 생일이였다.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엄마는 내 생일만 돌아오면 이밥을 하고닭알 두개씩 삶아주군 했다. 전에는 그저 생일이면 의례이런 대우를 받는법인가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파종의 아픔을 마음속 끝자락에 담고있는 이듬해 봄, 엄마의 생일이 가까와 오면서 나는안정부절할수없었다. (엄마들의 생일은 원래 쇠지 않는 법일가? 아니라면 엄마는 왜 종래로 생일을 쇠지않을가? 엄마께 생일을 쇠드리면 엄마가 몹시도 좋아하실텐데.) 나는 엄마의 생일을 꼭 쇠드리기로 작심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손꼽아 엄마의 생일을 기다렸다. 음력2월 19일, 엄마의 생일이 돌아왔다. 나는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드리려고 작심했다. 엄마가 밭으로 나가신후 나는손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부엌아궁이에 토막나무불을 지펴놓고 물을끓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가마안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엄마가 평소 무엇을 제일즐겨 자시던가? 옳지엄마는 누룽지를 제일 즐겨자시지. 나는엄마가 때마다 물에퍼지운 누룽지만 자시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하여 나는 아침에 엄마가 자시다가 남겨놓은 강냉이밥 누룽지를 가마에 쏟아넣었다. 나는 또 생각해보았다. 그렇지 엄마는 배추김치잎을 즐겨자시지. 때마다 신선한 배추김치를 들여다가는 썰어서 줄기는 아버지한테 드리고 잎은 엄마가 자시는 것을 보아왔던 것이다. 나는 씽하니 김치움에 나가 배추김치를 들여다가 잎쪽을 베서 사발에 곱게 담아 담아놓았다. 엄마는 또 무엇을 즐겨 자시던가? 나는궁리하던 끝에 또 한가지를 생각해냈다. 어느 땐가 한번 “야, 참 시원하구나!”하고말씀하시며 즐겨 자시던 소고기국이였다. 나의 머리에는 아버지께서 며칠전에 가마니를 판 돈으로 사온 소고기가 생각났다. 그날 한 끼 국을끓여 먹은후 남어지는 간장에 졸임하여 단지에 넣어둔채로 있었다. 나는헛간에 나가 단지를 들고들어왔다. 얼마남지않은 소고기를 몽땅가마에 쏟아넣었다. 그러고 엄마가 좋아하는 노야기가루와 고추가루를 다섯숟가락이나 떠넣었다.점심때가 되자 엄마가 지친다리를 끌며 집에 오셨다.“엄마, 오늘이 엄마 생일이오. 내가 엄마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소.”나는 배추김치잎이 담겨져있는 사발을 상우에 놓고 푹퍼진 누룽지 한사발, 소고기국 한그릇까지 밥상우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말없이 서서넋을 놓고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언제나 방그레 웃음을 짓던 얼굴이 굳어진듯 움직이지않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슴찍해났다. (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지른게 아닌가?) “엄마!” 나는 기여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자신없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갑자기 나를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나무껍질같이 터실터실한 손으로 연신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때 엄마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있었다. (엄마는 왜 말없이 울기만 하실가?) 나는 정말 모르고있었다. 12 그날 밤, 엄마는 나에게 팔베개를 베워주시고 고향마을에 대한 옛말을 해주셨다. “동이야, 우리 마을을 어째서 룡문이라 부르게 되였는지 너 아니?” “룡이 문을 열고들어와서 룡문이라 부르게 됐지.” 엄마에게서 역시 몇번이나 들은적이 있는 옛말이였다. 나는 들을 때마다 엄마에게 그 룡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엄마는 천진한 나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면서도 또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그 룡이 아마 뉘 집에선가 잘 크고있을게다. 이 곳에서 오래 살아가느라면 그 룡이 뛰쳐나오는 것을 보게될것이다. 참, 뉘집에서 나오겠는지...”깜박이는 동심과 함께 뛰놀고있던 칠색의 환상은 해맑은 동년의 가슴속에서 파아란 꿈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연히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무르익어갔다.엄마는 동네 아낙네들과 한담을 하시다가 내가 태여나기 전에 괴상한 꿈을 꾼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는 꿈에 버섯뜯으러 산에 가셨다가 똬리를 틀고있는 큰 뱀 한 마리를 보셨다고한다. 생시라면 기겁했으련만 엄마는 아무 무서운 생각이 없이 그 뱀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그때 다시 보니 그것은뱀이 아니라 갓 태여나서 보동보동한 룡이였다는것이다..“동이에미, 어찌나 동이를 잘 키우오. 커서 룡이되게 말이오.”그랬으면 좀 좋겠소.”어른들의 한담가운데 나온말이였건만 나는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졌다.룡이란 무엇일가? 어찌하여 룡은 날수있을가?어떻게 하면 룡이 될수있을가?어느날 나는 엄마께 이런것들을 물었다. 정색한 나의 얼굴표정을 보고 엄마는 한참이나 웃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세상에는 불로초란 약초가 있단다. 옛말에 그 약초를 달여먹으면 룡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만은...”(불로초? 룡!)모든것이 정말로 느껴졌다. 어느날, 나는 노루목산에 올랐다. 나는 룡이 되고싶었다.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식구들은 나를 찾아헤맸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불로초를 찾아 산속을 헤맸다. 지치고 목이말랐다. 샘물을 찾은 나는 손바가지로 마음껏 샘물을 떠마신후 땀에 얼룩진 얼굴을 따스한 모래불에 붙인채 소르르 쪽잠에 들었다....내가 눈을 떴을 때는 엄마의 품속에 안긴후였다. “동이야, 어쩜 엄마속을 요렇게 태워주는거니?”나는 겁에 질려기여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 난 룡이되고싶었오. 그래서 불로초를 찾으려고...” “동이야!” 엄마는 손으로 나의 얼굴을 받쳐들고 낯모를 사람을 바라보듯 뚫어지라 바라보며 아래말을 이었다. “동이야, 불로초란 산에 있는것이 아니란다.” 나는 엄마의 말씀이 못내 의심스러웠다. “아니지, 엄마, 전번에 그래 불로초를 먹으면 룡이 된다고 하지않았소? 불로초가 산에 있지 않고 어디에 있소?” “불로초는 여기, 여기에 있는거란다.” 엄마는 속삭이며 나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까르르 움음을 터뜨렸다. “엄마, 웃긴다. 여기서 어떻게 풀이 자라오? 거짓말이지, 엄마.” “애두 거짓말이긴. 우리 동이가 공부를 잘해서 큰 사람이 된다음이면 저절로 여기서 불로초가 자라게 되였있단다. 그러니 우리동이도 이제 학교에 붙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알겠니?”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도 천방야담처럼 나의 가슴을 울려주었다. 13 (글을 배우자, 공부를 잘해서 가슴에 불로초가 자라게 하자 그래서 룡으로 돼보자.) 꿈은 아름다운것이고 꿈은 철없는 개구쟁이에게 용기를 주는것이였다. 나는 작은 누나에게 글을 배워달라고 떼질을 썼다. 작은 누나는 나의 성화에 못이겨 학교에 갔다와서는 나에게 조선글 자모를 배워주었다. 배우고싶은 글이여서였던지 글을 배우는것이 재미났고 속도도 빨랐다. 조선글자모를 배우기시작해서 한달이 안되여 나는 신문을 뜯어볼수있었다. 일곱살에 나는 오막살이집 막둥이가 신문을 읽는다는 소문이 입소문을 타고 트지않는 룡문마을에 퍼졌다. 작은 누나의 친구들이 간혹 우리집에 놀라와서는 나에게 신문을 읽혀보이는것이 빠지지않는 뉴앙스로되였다. 신문읽기라면 자신이 있는 나인지라 누나들이 나에게 신문을 읽으라는 요청이 그렇게도 기쁠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 공사합작사에 “밤중에 우는 닭”이라는 그림책이 들어왔다. 친구들이 사서보고는 “지주놈이 소작농들을 일찍 일밭에 내몰기위하여 밤중에 닭장에 들어가 닭울음소리를 내다가 소작농들에게 두들겨 맞는이야기는 그렇게도 나의호기심을 끌었다. 나는정말 그림책을 한권갖추고 싶었다. 나는별르고 벼르다가 큰마음을 먹고 엄마에게 청을들었다. “엄마, 돈이 있으면 좀 주오.”엄마는 머리를 돌려나를 지켜보더니 “후~”하고 긴 한숨을 내쉬였다.“어쩌니 동이야, 지금은 정말 집에 돈이없단다...”어머니는 말끝을 흐리셨다.그때, 우리 집은 정말서발장대를 돌려도 거칠것 없이 가난했다. 나는얼굴을 붉혔다. 소시적 어린나이에도 우리집 살림형편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차마 입을못열고 며칠이나 머뭇거린것도 엄마의 입에서 돈이 없다는 말이나올가 두려워서였다. 나는머리를 폭 숙이고 입술을 감빨며 애꿎게 발끝으로 서까래를 우볐다. “동이야, 돈을 해서 뭐하려고 그러지?” 엄마의짧게 물었다. 나는잠간 머뭇거리다가 기여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합작사에 <밤중에 우는 닭>이 왔소. 대단히 재밌다는데. 사보고싶어서 그러오.” “꼭 보고싶은 책이냐?” 엄마의 목소리에 어딘가 힘이배여나왔다. 나는 두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나의얼굴을 뚫어지라 지켜보며 잠간 침묵을 지키셨다. 나는 엄마의 옆에 오도카니 앉아기대어린 눈길로 엄마를 지켜보았다. “동이야,”이렇게 입을 여신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자냥스럽게 말씀하셨다. “사랑칸에 엄마가 모아둔 헌 신바닥이 몇근잘되게 있단다. 그걸팔아서 책을 사려무나.”“내가 팔라구요?”나는 가슴이 철렁해났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무었때문이였던지 그 시절에는 남들이 페품을 수매소에 가져가서 풋돈을 받아오는 것이 그처럼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들이 어떻게 그 안에 발을 들여놓을수가 있을가가 의심스러웠다.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꼭 보고싶은 책이라면 어찌 부끄러운 것을가리겠니? 사내대장부라면 대담해야지.”그날 엄마는 차근차근 많은이야기를 하셨다. 나는끝내 헌신바닥을 싼 보꾸러미를 들고 문을 나섰다. 하지만 걸음을 얼마 떼지못하고 벽에착 붙어서서 오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없었다. 나는한달음에 수매소까지 뛰여가서 신바닥꾸러미를 저울판에 올려놓았다. 얼굴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렸다.페품수매원은 안경을 건 30대의 빼빼 여윈 사나이였다. 그는나의 아래우를 한참이나 훑어보더니 날카롭게 물었다.“너 이것을 훔친거지?”“아...아닙니다. 울 엄마가 모은겁니다.”나는잦아드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했다.“헌데왜 그렇게 당황해하니? 엉?”사나이는 벌떡 일어서더니 꽥 소리치며 주산으로 저울판에 올려놓은 헌 신바닥을 탁 쳐버렸다. 나는 너무도 억울하여 풍덩 주저앉았다. 한참후 신바닥꾸러미를 주어들고 수매소를 나섰다. 눈물이 왈칵솟아올라 앞이 잘 보이지않았다. 그래도 나는뛰였다. 뛰고 또 뛰였다. 그러다가 무엇엔가 걸려서 훌렁 넘어져 버렸다. 이마 왼쪽켠에서 선지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이를 옥물었다. 누가볼가 두려워 소리쳐 울지도 못했다. 나는상처자욱을 꽉 움켜쥐였다. 손가락사이로 붉은 피가 슴배여나왔다. 그날, 이마에 피를 흘리며 페품꾸러미를 옆에끼고 집에들어선 나를 보고 엄마는 그렇게도 서럽게 우셨다. 나를 위해 흐느끼는 엄마의 갸냘픈 모슴을 보며나는 상처자국이 아프다는 생각보다도 커서 큰 사람이 되여 안경을 건 그 사나이를 혼내주려는 생각뿐이였다.그 시각그것은 나의 유일한 꿈이였다. 그날의 풍경이 더오르면 나는 가끔 생각해본다. 안경을 건 그 사나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가? 하지만 나는 다시 그를나무라고 싶지않다. 그것은 그 사나이가 나에게 처음으로 치욕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엄마는 <,밤중에 우는 닭”을 손에들고 오셨다. 나는너무도 기뻐서 상처가 아픈것도 잊고 엄마의 목에동동 매달렸다. “엄마, 돈이 없다더니 어떻게 샀소? 이 그림책을?” “뒤집 아애네 집에가서 돈을 빌어서 샀단다. 동이야, 발리 그림팩을 보거라. 저녁읋 해먹구 우리밖에나가 바람을 쏘이며 엄마에게 그림책을 본 엣말을 해줘야 한다.읽알겠니?” 엄마가 나의 볼을 쓸어주며 말했다. “양, 엄마 제꺽 저녁을 하오. 내 그새 단번에 다 <밤중에 우는닭>을 다 읽을게.” 정말 세상을 다 얻은듯 기뻤다. 그날밤 엄마는 말그대로 저녁 설걷이까지 끝낸후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바자굽에 붇쳐만든 나무걸상에 앉았다. 저녁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서 밖은 집안보다 퍽 수원했다. 엄마는 나의손을 잡아 손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동이야, 지금도 이마가 아프니?” “아니, 엄마 하나도 안 아프오. 내 <밤중에 우는닭>을 엣말해줄게.” 나는 흥이나서 그림책을 본 이애기를 해나갔다. 엄마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번이나 통쾌하게 소리내여 웃으셨다. “엄마 고옥보는 참 총명한애지?>. “그래 고옥보는 참 총명하고 슬기로운 애지. 그리구 우리 동이도 고옥보처럼 용감하구.” “내가?” 나는 은근히 기뻐서 엄마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래, 우리 동이가 오늘얼마나 큰 일을 했는데. 처음으로 페품수매소에도 갔다가 오지않았니? 부끄러워 가지못하던것이 처음으로 갔다온것만해도 얼만한 대단한 일인데.” 페품수매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또다시 기분이 잡쳐졌다. 나는 낮에 가슴속에 서려두었던 생각을 엄마에게 텅털어놓았다. “엄마, 내 크면 그 안경을 건 아저씨를 혼내줄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보구 헌 신바닥을 도덕질했다구 하면서.” 내가 격분에 차서대답하자 엄마는 나의손을 잡아 끌어 꼭 잡아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거란다. 동이야. 그 사람도 뭔가를 잘 못 알고 그렇게 생각한거겠지. 우리 동이만 마음이 든든하면 어느땐가 그 사람도 우리동이를 잘못나무렸구나 하는것을 알게되거든.” 나는 엄마의 얼굴을 이윽하 바라보았다. 달빛속에서 안겨오는 엄마의 얼굴음 부드러운 달뻗맣㎱犬� 부드럽게 자애로와보였다. 엄마는 말을마치고 머리를 들어먼 하늘을 지켜보았다. 엄마의 눈은 멀리 북쪽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엄마, 별이 많지?” “그래 하늘에 참 별들이 많기도 하지, 옛날 사람들이 그러는데 당우에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하늘에도 별이얼마나 많단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늘에 별자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거든.” “엄마, 그럼 나의 별은어느것이오?>. “동이의 별이라? 음~ 엄마는 저 별이 동이의 별이였으면 좋겠다.” 손끝으로 먼 하늘을 가리키는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떨리고 있었다. “엄마, 북두성을 그러지? 저 북두칠성옆에서 반짝이는 저 별을 그러지?” 나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 북쭉 하늘을 쳐다보면서 또랑또랑 대답을 하군 했다. 엄마는 자못 신나하시면서 말꾸러미를 헤치셨다. “그래, 우리 동이가 참 용하구나. 그래그래, 저 별이 바로 북두성이지. 북두성은 언제나 저 자리에서 드놀지 않고 저렇게 반짝이고 있단다.>. “양, 엄마. 산에서 길을 잃으면 그래서 당황해 하지 말고 저 별을 마주하고 서서 방향을 잡아야지?” 인젠 너무 들어서 암송할수있을 만침이나 익숙해져버린 북두성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엄마는 번마다 그렇듯 기뻐하며 일에 스쳐 꺼슬꺼슬해진 투박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래, 그렇지. 우리 동이 정말 대단하네, 북두성을 마주하고 섰을 때 얼굴을 향한 쪽이 북쪽이고 뒤통수가 향하는 쪽이 남쪽이지.” “그리구 오른손 편이 동쪽이구 왼손 편이 서쪽이지? 글치 엄마?” “그래 북두성은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이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여준단다. 언제나 드놀지않고 한자리에서 곤난에 처한 사람에게 길잡이가ㅡ되여주는 북두성이 얼마나 멋지니?” “양, 엄마 내꼭 북두성이 될게, 근데 엄마의 별은 어느것이오?>. 나는 엄마를 건너다보며 호기심어린 눈길로 물었다. “엄마의 별? ” 엄마는 잠간 말끝을 흐리웠다가 맑은 목소리로 말씀했다. “엄마도 모르겠네. 동이야 네가 찾아봐라 엄마의 별이 과연 어느 쯤에 있을가?” 엄마는 기대어린 눈길로 엄마를 바라보는 나의 볼을 살짝 튕겨주며 이야기했다. “엄마, 나는 엄마의 별이 저 북두칠성이 됐으면 좋겠소. 그러면 엄마랑 나는 그냥 가까이에 함께 있을수있겠는데. 엄마두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니? 암튼 엄마의 별은 우리 동이가 찾아주렴. 어마의 별은 이하늘에서 제일 크고 제일 빛나는 것이였으면 좋겠구나.” 나는 엄마의 말씀을 들으며 그말뜻을 다는 리해할수없었다. 하지만 저 하늘에서 드놀지않고 반짝이는 북두성 보다도더 밝고 빛나는 그런 별을 찾아 엄마께 드리자고 윽별렀다. 이 밤도 하늘에서 뭇별이 반짝인다. 과연 엄마의 별은 어느 쯤에 있을가…
32    엄마의 마늘밭(제3부) 댓글:  조회:5759  추천:0  2010-03-11
엄마의 마늘밭(제3부)   1 넓직한 터밭을 반이나 메운 파아란 마늘싹들이 따스한 5월의 미풍에 시름없이 하느작이고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늘밭은 마치도 수많은 생명을 키워낸 아늑한 초원을 방불케했다. 나는 바자테를 잡고 서서 이윽히 마늘밭에서 눈을 떼지못했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지렁이마냥 왜소한 몸을 마늘밭고랑에 착 눌러 붙이고 열심히 김을 잡아나갔다. 세상밖의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듯 묵묵히 호미질을 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아무런 부호도 없이 무표정해보였다. 흙을 가르는 호미질소리만이 쓰륵쓰륵 바람에 날려왔다. 호미질소리는 부드러운 엄마의 숨소리가 되여 나의 귀속을 파고들며 잔잔한 감동과 아릿한 괴로움을 운무처럼 내 마음밭에 뿌려주었다. 엄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원래 저 마늘밭에는 아버지 대신 엄마가 서계셔야 했다. 머리에 올려썼던 채깝수선을 풀어내려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엄마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셔야 했다. “동이야. 이 마늘들을 좀 봐라. 검푸르게 독을 쓰는게 올해도 어김없이 마늘풍년이 들것같구나.” 하지만 오늘은 터밭에서 지렁이같은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만이 처량하게 보여올 뿐이였다. 엄마가 안계시는 마늘밭을 바라보면서 나는 뭔가를 열심히 찾았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동년의 파아란 꿈을 줏던 어린시절이 마늘밭 어딘가에 숨어있을듯싶어 가슴이 설레였고 숙명처럼 마늘과 끈끈한 사랑을 나누며 마늘밭에 인생을 기탁해오시던 엄마의 향기도 마늘밭 어딘가에서 풍겨올듯 싶었다.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밭은 유일한 생활의 기탁이셨고 마늘밭을 손질하는 그 순간들은 무한한 행복의 쪼각들이였다. 마늘밭이 있는한 생명은 이 터전에서 땅의 자양분을 만끽하며 언제나 왕성한 약동을 할것이라고 믿고있던 엄마였다. 마늘밭에 온갖 사랑을 쏟아오시던 엄마는 그 무렵, 마늘밭에 대한 미련과 사랑과 집착을 가슴에 고이 묻은채 조용히 집안에 누워계시고있었다. 멀고 가파로운 가시밭길을 허이허이 달려온 늙은 암소마냥 깊은 숨을 톺으며 병석에 누워계셨다. 2 엄마는 퍼어런 피줄이 굴뱀처럼 끔틀끔틀 살아난 누르끼레하고 앙상한 손으로 알릴듯말듯 미약하게 온돌을 두드리셨다. 방금 밖에서 들어와 엄마의 곁에 앉아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엄마의 동정을 살피고있던 나는 엄마의 그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놓지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곁에 한뼘 다가 앉아 엄마의 가냘픈 어깨를 다독였다. “엄마, 무슨 할 말이 있수?” 엄마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입술을 힘들게 실룩거리며 분명 뭐라고 말씀을 하고 계셨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낮아서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나는 몸을 한것 낮추어 엄마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너의 아버지, 지금 무어…엇 하고있니?” 들릴락말락 거칠고 미약하게 새여나오는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지금 터밭에서 마늘밭 김을 잡고있수.” “마늘밭 김을 잡아? 내가 이러고 누워있는데 마늘밭 김을 잡아?” 엄마의 미약한 목소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 그대로 새여나왔다. 나는 가슴속 밑자락에서 올리미는 슬픔을 가까스로 눅잕히며 촉촉한 눈길로 엄마를 내려다 보았다. 왼쪽 얼굴을 다 덮은 가제밑으로 고약한 냄새와 함께 시누런 고름이 질퍽하게 배여나와 있었다.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수건을 들어 가제밑으로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으며 엄마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자냥스럽게 말했다. “엄마, 내가 나가서 아버지를 불러 올가?” 마는 천천히 머리를 저으셨다. 우멍하게 들어간 오른쪽 눈이 초점을 잃고 슴뻑거리고있었다. 엄마가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한마디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 “동이야, 엄마는 어쩜 이렇게 숨이차고 가슴이 갑갑해나니? 자꾸 무서운 생각도 드는구나. 어째서 이렇게 무서울가? 너의 아버지, 마늘밭을 몇고랑이나 맸더니? 후~ 그래, 마늘을 잘 자래워서 호-온-자 많이 먹으라구 그래라…” 엄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말못할 서운함이 두툼히 깔려 있었다. 나는 뭔가를 하소연하는듯한 엄마의 얼굴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찢어지는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엄마는 눈을 감은채로 한동안 입술을 푸들푸들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동이야, 너의 둘째형은 언제 온다니? 보고싶구나.” 엄마는 어제 오후 둘째형수와 함께 결혼잔치를 보러 아래마을에 가있는 둘째형을 찾으며 꾹 감고있던 눈을 간신히 뜨셨다. 완전히 풀려버린 엄마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에서 구을고있었다. “엄마, 그럼 내가 가서 둘째형을 불러올가?” 나는 엄마의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물었다. 엄마는 알릴듯말듯 머리를 그떡이는것으로 대답을 가름했다. “엄마, 기다리우, 내 가서 제꺽 불러올게.”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마늘밭고랑을 타고있었다. “아버지, 들어가서 엄마를 지켜줍소. 방금 엄마가 아버지를 찾습데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높게 소리쳤다. 아버지는 호미질을 멈추고 천천히 허리를 펴더니 주먹으로 옆구리를 툭툭치며 머리를 돌렸다. “이 고랑만 다 매구 들어가겠다. 동이야, 넌 어디로 가려고 그러니.” “둘째형 데리러 아래마을에 갔다 오겠습니다. 지금 정지칸에 엄마가 혼자 계시니 인츰 들어가서 지켜드립소.” 나는 재삼 아버지에게 이르고는 헛간에 들어가 자전거를 꺼내가지고 나왔다. 자전거에 올라앉아 페달을 돌리면서도 눈앞에는 엄마의 파리한 얼굴이 떠올라서 불안을 감출수 없었다. 아버지를 찾으며 서운해하던 그 모습이 내내 가슴에 맞혀왔다. (무슨 뜻일가? 마늘을 잘 자래워서 혼자 많이 잡수시라는 엄마의 말씀은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일가? 아니면 진정 마늘밭에 대한 근심을 아버지 땜에 덜게됐다는 안도의 말씀이실가?) 돌이켜보면 엄마의 일생에서 마늘밭은 정말 엄마와 떨어져서는 안될 소중한 재부였고 숙명 그자체였다. 엄마의 진한 마늘사랑 때문에 내 인생의 첫 추억도 마늘과 얽혀있었다. 3 아마도 내가 네살나던 해라고 생각된다. 그해의 겨울은 춥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할 놀이도, 놀이감도 없었던 시골애들에게는 그 추위가 별로 무서운것이 아니였다. 그 무렵 나는 둘째누나가 입던 꽃부리솜옷을 고쳐서 비둥비둥 껴입고 진종일 밖에 나가 막대기로 굴암퇘지를 똘구어가지고 다녔다. 어느날, 해가 서산에 떨어져서야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나니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뒤잔등이 으슬으슬 추워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코까지 꽉 막혀서 여간만 답답한것이 아니였다. 나는 설걷이를 하는 엄마의 옆에 붙어 앉아서 코가 멘다고 칭얼거렸다. “진종일 밖에서 돌더니 꼬불에 걸린게로구나.” 엄마가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씀하면서 물기묻은 손을 행주에 대수 닦고 나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런이런 이걸 어떡하지? 이마가 불덩이네. 그래그래. 동이야, 조금만 참아라. 엄마가 제꺽 약을 해서 붙혀줄게.” 엄마는 설걷이를 하다말고 일어나 헛칸으로 나가더니 큼직한 통마늘을 뜯어가지고 들어왔다. 엄마는 솜씨재게 마늘쪽을 잡아서 껍질을 벗겼다. 엄마는 껍질바른 마늘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일부는 납작납작하게 썰어놓고 일부는 칼등으로 두드려 찟찧어놓았다. 나는 그러는 엄마의 솜씨를 홀린듯 바라보기만했다. 마늘이 보드랍게 찧어지자 엄마는 서랍에서 가제를 찾아내더니 잘 찧겨진 마늘을 가제에 골고르 발라놓았다. 그리고는 가마에서 뜨거운 물을 퍼서 세수소래에 담았다. 엄마는 세 “동이야, 이리 오너라. 자, 이 무릎을 베구 반듯이 누워라.” 나는 기신기신 기여가 엄마의 무릎을 베고 반듯이 누웠다. 엄마는 뜨꺼운 물에 적신 세수수건으로 나의 이마를 깨끗이 닦아주셨다. 뜨끈뜨끈한 수건이 이마에 닿자 삽시에 머리가 훈훈해나면서 말못할 편안함이 느껴졌다. 이마를 다 닦고난 엄마는 마늘을 바른 가제를 나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아릿한 감각이 살짝 피부를 건드리며 간질간질 묘한 느낌이 생겨났다. 엄마는 이어 빨갛게 상기된 나의 볼을 손으로 살살 만져주더니 납작납작 썰어놓은 마늘을 주어 나의 코에 한잎한잎 밀어넣었다. 맵사시글 콕 쏘는 마늘냄새가 꾹 막혔던 코속을 파고 들어오는 순간 막혔던 코구멍이 뻥 뚤리는듯한 시원함을 느낄수있었다. “엄마~ 통했수. 뻥 뚫렸수.” 내가 누운대로 손벽을 치며 환성을 올리자 엄마의 얼굴에는 시무룩하니 웃음발이 피여났다. “봐라. 엄마의 손이 약손이라니. 마늘이 최고지, 명약이지.” 엄마는 흐믓해서 돌아앉아 설걷이를 계속하며 마늘자랑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은 꼬불에만 효험이 있는게 아니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늘 묵직한 “개패”를 목에 걸고 나가 조리돌림을 당해야했다. 웃쪽에 검은 색으로 죄명을 쓰고 그 아래에 손바닥만큼씩이나 큰 글씨로 명함을 쓴 네모난 널판을 가는 쇠줄에 걸어서 만든 “개패”를 메고 서있노라면 어느새 가는 쇠줄이 목살을 먹어들어갔다. 시간이 가면서 아버지의 목에서는 시누런 피고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긴긴 겨울밤 내내 개패를 목에 걸고 조리돌림을 당하고 나면 아버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여 집으로 들어왔다. 심신이 지친데다가 고름이 흐르는 목살로하여 아버지는 뼈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조리돌림을 당하며 욕을 보는 아버지를 함께 나가 지켜보면서 역시나 심신이 지쳐버리는 엄마였지만 날마다 먼저 따쓰한 물로 피고름이 흐르는 아버지의 목상처를 정성스럽게 닦아주고 그 우에다가 마늘을 찟찧어 가제에 싸서 부쳐주군했다. 금방 부치고나서 아버지는 매운 마늘즙이 상처자리를 치면서 아프다고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래도 엄마는 마늘즙을 바른 가제를 상처자리에 지긋이 눌러주며 어린아이 달래듯 어르군했다. “그래도 참으랑께, 마늘이 균을 죽인당께, 그래야 랠 나가서 또 개패를 메지그라이.” 마음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바쁜 삶을 살면서도 엄마는 언제나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비법과 느긋한 아량으로 그렇게 현실을 헤쳐나가군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개패를 메고 조리돌림을 당하러 나가는 날이면 또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깨끗이 껍질을 바른 마늘을 몇쪼각 넣어드렸다. 그때 마을 변소들을 돌며 인분을 쳐서 비료를 만드는 일을 하셨던 아버지의 몸에서는 일년내내 인분냄새가 지독히도 났었다. 냄새도 냄새려니와 공수도 8부밖에 받지 못하는 인분치기는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제일 천한 일이였다. 생산대에서는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계급의 적으로 락인이 찍혀져있는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변소치는 일을 맡겼다. 백여호나 되는 집들의 변소를 혼자서는 칠수가 없기에 생산대에서는 지력이 차한 나그네 한사람을 아버지에게 조수로 부쳐주었다. 형들도 누나들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억울해 야단이였지만 아버지만은 그런 태도가 아니였다. 생산대에서 아버지에게 개조를 할 좋은 기회를 주었으니 감사히 생각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변소를 치겠다는것이였다. 아버지가 정말 직심으로 일을 한데서 어느 집에서도 변소가 넘친다는 고소가 없었다. 엄마는 인분냄새에 펴가 나빠 진다면서 가끔 마늘즙을 내서 아버지에게 대접했고 깨끗이 바른 마늘쪼각을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 때는 먼저 마늘을 두어쪼각 씹으라고 이르기도 했다. 그러면 몸에서 나는 인분냄새가 사라지고 마늘냄새가 난다는것이였다. 마늘냄새가 인분냄새보다 백번은 더 났다는게 엄마의 신조였었다. 엄마의 마늘덕분인지 아버지의 목살은 헤쳐졌다 아물고 또 헤쳐졌다 또 아물고 하면서 그 험한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의 년대를 용케도 견뎌오셨다. 4 이만치 엄마에게 있어서 마늘은 생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엄마의 생활 구석구석에서 마늘은 언제나 엄마와 함께 하고있었다. 마늘이 잘 염글어 삭걷이를 하는 날은 일년중 엄마에게 제일 행복한 날로되였다. 이날이면 엄마는 새벽닭이 치기를 기다려 일어나서는 아침밥을 지어먹고 온 집식구들을 터밭으로 이끌었다. 엄마는 비자루로 퇴마루를 깨끗하게 쓸고는 식구들이 뽑아오는 마늘을 퇴마루에 곱게 널었다. 엄마는 마늘대가리가 벽쪽으로 가게 방향을 잡아 퇴마루가 넘쳐나게 마늘을 널어놓고는 무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퇴마루를 바라보았다. 곰삭은 이영아래 하아얀 바람벽 발치에 잘 영근 마늘을 덮고 누운 퇴마루는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련상시켰다. 그리고 얼굴에 풍년의 희열을 그득 담고서서 행복의 미소를 날리는 엄마의 모습은 그 한폭의 풍경화를 더욱 싱그럽게 꾸며주었다. 이렇게 퇴마루에다 마늘을 사나흘쯤 건기드리고 난 다음 엄마는 제일 크고 잘 생긴 마늘을 골라서 종자마늘로 따로 남겼다. 종자마늘다래를 땋는 일은 엄마에게 신도들의 종교의식만침이나 정중한 행사로 자리잡고있었다. 엄마는 쌀뜨물에 정성들여 머리를 감은후 곱게 가리마를 내서 얹었다. 그후 깨끗하게 씻어서 다려놓은 옷을 꺼내 입으셨다. 다음은 공고리를 깨끗하게 닦은후 특별하게 골라남겼던 종자마늘을 내다가 타래를 땋아나갔다. 다 땋은 마늘타래는 추녀밑에 주렁주렁 걸어서 말렸다. 마늘삭걷이를 하고난 우리집 추녀밑은 언제나 종자마늘에 겨울나이마늘까지 해서 굵직굵직한 마늘타래들로 풍성해 보였다. 엄마는 마늘을 심는데도 자기만의 노하우가 따로 있었다. 엄마는 마늘밭고랑을 넓직하게 내고 갈지자로 촘촘하게 종자마늘을 주었다. 마늘싹이 무성하게 돋아나면서부터 엄마는 그것들을 쏙아 봄철 내내 입맛돋구는 반찬들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그렇게 뽑아서 먹느라면 어느새 마늘들은 보기좋게 거리들을 맞추어 나갔다. 엄마의 손에서 마늘은 신비한 도깨비방망이가 되여 눈깜짝할 사이에 맛나는 반찬으로 둔갑하군 했다. 제일 간단한 료리가 마늘싹무침이였다. 엄마는 촘촘하게 들어선 마늘싹중에서 여리고 먹음직스러운 마늘싹을 솎아 깨끗이 씼은후 마늘싹 길이 그대로에 간장을 듬뿍 두고 거기에 고추가루와 젠치가루를 뿌려 한 십분쯤 재워두었다. 그러면 마늘싹이 한풀 죽어지는데 그때 반찬으로 먹으면 사라졌던 밥맛도 금방 돌아섰다. 그때 우리는 깔깔한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가마굽에 부쳐서 구워낸 떡을 궈테라고 불렀다. 옥수수껍질이 떡떡 씹히는 궈테는 정말 그냥 넘기기 힘든 음식이였다. 엄마는 궈테를 부쳐낸후 칼로 사이를 자르고 그속에 간장에 재워낸 마늘싹무침을 한벌 깔아서 밥상에 올렸다. 매콤한 마늘싹이 입안에서 향긋한 봄기운을 피워주는 멋에 우리는 궈테도 별맛으로 먹을수가 있었다. 그런 궤터를 들고 친구들이 노는데로 찾아가면 저마다 한입만 한입만 하면서 나의 손에 눈독을 드리군하던 기억이 새롭다. 부러움에 찬 친구들의 눈길을 한몸으로 받으며 “한번 먹어볼래?”하고 시뚝해 하던 그 재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마늘싹을 넣은 궈테가 바로 그 시절 엄마만의 햄버거가 아니였을가? 5 엄마의 마늘료리는 마을에서도 유명하기로 정평이나 있었다. 엄마는 이점을 두고 은근히 기뻐하면서도 한면으로는 썩 달가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때문이였다. 아버지는 평소 무던히도 술을 반가와 하셨다. 그때 우리집은 한갑에 2전씩하는 성냥도 별러서야 사는 형편이라 아버지는 좀처럼 술을 사서 마시기가 조련치 않았다. 그 시절, 친척집에 마실을가거나 동네집 어른들의 환갑같은 군일이 있을 때면 한병에 1원씩하는 흰술을 한병 떠가지고가는것이 큰 부조가 되였다. 우리집은 친척도 많치 못하여 술을 떠가지고 찾아오는 손님이라해야 십여리 떨어져 사는 큰 매형이 고작이였다. 큰 매형이 간혹 공사마을로 볼일이있어서 왔다가는 흰술 한병에 개눈깔 사탕 한봉지를 들고 들어오면 아버지도 생신을 쇠는 기분이고 나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생각같아서는 그 흰술 한병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지만 아버지는 술이 아까와서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오래오래 두고 술충이 올라올 때 두어잔씩 마셔서 눌러야하기 때문이였다. 아버지는 3푼짜리 알각잔에다가 술을 따라서는 단목음에 쪽 마시고는 캬아~ 하고 맛있어 죽고싶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다음 마늘짠지 한쪼각을 집어 잘근잘근 씹어서 안주를 했다. 그렇게 석잔을 마시면 밥상이 끝났다. 두어시간 지나면 아버지는 또 식장문을 열고 술병을 내리웠다. 먼저 마개를 딴 술병을 코앞에 가져다 대고 크게 들숨을 들이쉬셨다. 병아구리를 따라 올라와서 그대로 아버지의 코속으로 숨어드는 술냄새를 맡으며 아버지의 얼굴에는 말못할 행복감이 어리셨다. 아버지는 술병에 엎어 씌웠던 3푼짜리 알각잔에다가 술을 따라서 또 단목음에 쪼옥~ 소리를 내며 마시고는 마늘짠지를 한쪼각 집어 입에 넣었다. 저녁후에 마시는 술은 딱 한잔, 아버지의 말씀을 빌면 술충을 누르기 위함이란다. 엄마는 그러는 아버지를 곱지않게 바라보시며 아버지 배에 있는 술충은 우물집 굴암돼지 보다도 더 크고 렴치 없을것이라고 했다. 해마다 새끼를 여라문마리씩이나 낳는 우물집 굴암돼지가 겨울이되면 늘 우리집 뒤울안에 와서 엄마가 애써 무져놓은 검불들을 주둥이로 쳐서 무너뜨려 엄마를 기분상하게 했던것이다. 그러건 말건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그렇게 아끼고 마시기를 좋아하셨다. 하기에 아버지는 괜찮은 술친구들도 몇이 되셨다. 범이네 아버지, 금자네 아버지, 성이네 아버지는 손아래 친구들이고 호일이네 아버지, 동세네 아버지같은 분들은 손우의 친구들이였다. 누가 청해서 미역쪼박에 소금알을 빨면서 다마톨이로 두어냥 마신 다음이면 아버지는 식장 아래칸에 고이 모셔둔 술이 몇냥쯤 있다고 자랑을 했다. 그렇게 자랑을 할수있을 때가 아버지에겐 제일 행복한 순간이였을것이다. “안주가 없어서 그렇지 우리집에 가서 두어냥씩 더 하면 좋겠는데.” 아버지께서 이렇게 운을 떼시면 술친구들은 별 근심을 다 한다는듯 되려 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주는 웬 안주여, 마늘 두어 쪼각이면 술 두대두박이라도 하겠구먼.” 이쯤 되면 아버지는 손사래를 하며 친구들에게 빨리빨리를 부르셨다. 초벌 다마톨이에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거칠어진 아버지와 친구들이 무작정 문을 열고 집에 덮치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엄마였을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싫은 내색 한번 못내시고 아버지의 술친구들을 맞아드렸다. “빨랑빨랑 술상을 차리라이까.” “안주가 마'잖아서 뭘 가지구 술상 볼가이.” “갖추느라 마이소, 마늘이나 두어쪼각 올려놓으면 되지비.” 아버지의 술친구들은 웃목에 다리를 토시고 자리를 잡고앉았다. 이쯤 되면 엄마는 별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술상을 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헛간에 나가서 겨울나이마늘을 타래째로 벗겨들여왔다. “마늘된장볶음”은 엄마가 손쉽게 올릴수있는 료리였다. 엄마는 먼저 솥에 물을 붓고 부엌에 내려가 불을 지폈다. 다음은 부엌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으며 마늘껍질을 발랐다. 마늘을 한종지쯤 껍질바르고나면 솥에서 물이 끌어번졌다. 엄마는 껍질을 바른 마늘을 팔팔 끓는 물에 지긋이 데쳐냈다. 다음은 냄비에 기름을 약간 두르고 된장을 지글재글 닦다가 데친마늘을 넣어 돌려내면 구수한 된장냄새에 향긋한 마늘냄새가 섞여오르는 마늘된장볶음이 완성되였다. “통마늘구이”도 엄마가 즐기는 료리의 한가지였다. 엄마는 먼저 잘 생긴 통마늘을 골라서 뿌리와 꼬리부분을 깨끗하게 잘라냈다. 다음 통마늘을 절반크기로 짐작을 해서 곱게 잘랐다. 잘라낸 마늘을 깨가루며 젠치가루며 소금가루며를 두루쳐서 만든 소스에 잠간 잠궜다가 채발살에 올려놓고 뽀질뽀질 마늘기름이 배여나올 때까지 연한 불에 구웠다. 그사이 양념소스가 마늘에 배여들어가서 마늘구이는 맵시그레하면서 고소한 맛을 뿜어올렸다. 잠간새에 만들어낸 마늘안주 두어가지에 김치나 된장찌개같은것을 곁들이면 제법 먹음직한 술상이 되여버렸다. 술친구들은 마늘안주칭찬에, 엄마의 작식솜씨 칭찬에, 세상사는 설음에, 세상사는 재미까지 두루 쳐서 안주를 하느라면 시간가는줄을 몰랐다. 대개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실러와서야 술자리가 파해지군했다. 긴긴 겨울밤을 옆에서 말뚱한 정신으로 술안주에 끼이는 엄마의 표정이 고울리 없었다. 술친구들이 돌아간후이면 엄마는 아버지의 잠자리를 봐드리며 입속으로 웅걸거리셨다. “귀신은 어디 가서 뭘 하구 있다니? 왜 저런 술고래들을 이승에 두고 잡아두 안가는데. 귀신할배도 술추렴에 세상이 녹두알이 되는가보다.” 그때면 아버지는 기분이 둥~ 떠서 손을 저으며 혀꼬부랑소리를 하셨다. “내 밖에 나가서는 십년을 똥치개루 죽은듯이 살아두 집에서는 떵떵 소리나게 산다아이가, 이것들아.” 아버지는 맥이 진할 때까지 혼자서 웅얼웅얼 시설질을 하시다가 술기운이 빠져야 스르르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술버릇때문에 엄마는 무던히도 시집살이를 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다시 오면 아무것도 술상에 안올린다며 벼르고있다가도 정작 그들이 집에 닥치면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늘타래부터 찾으셨다. 6 하지만 우리식구들이 마늘도 마음놓고 먹지못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 1974년 봄이라고 생각된다. 어느날 밤, 나는 잠결에 두런두런 울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묵직한 눈까풀을 겨우 떼고보니 아버지와 엄마가 나란히 누워 까아만 어둠음 가르며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참, 세상이 뭐가 될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이? 시골에 살면서 터밭에다 남새도 맘대로 심어먹지못하면 어이 하는겨…” “자본주의 꼬리를 자른다지 않는겨? 남남이 다 제멋대로 심어먹으면 나라건설에 수요된다는 담배랑은 어디다 심겠소?” 이어 “후~”하고 길게 내쉬는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엄마가 픽 웃으며 격하게 한마디 했다. “나라건설에 수요되는 담배가 백성들의 손바닥만한 터밭에서 나와야 한단 말인겨? 터밭에 마저 담배구, 아마구 하는걸 심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겨? 긴긴 겨울엔 뭘 먹구 일하는겨? 안됩니더. 우리 터밭엔 그래도 남새를 심어야 합니더.” 엄마의 목소리에는 예리한 날이 서서 번뜩이는듯싶었다. “됐십니더. 잡시다.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가면 되겠구먼.” 아버지께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셨다. 엄마는 잠간 말이 없다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부시럭 돌아누으며 한마디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말을 따라야 합니더. 우리 터밭엔 담배를 못 심씀니더.” 엄마는 당장 그 누구하고라도 대드리로 한판 붙어볼려는듯 흥분되여있었다. 아버지와 엄마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뭔가가 잘못되여 가는구나 하고 생각을 굴려보았다. (무었때문에 터밭에다가 담배랑 아마만 심으라 할가? 그런것만 심으면 마늘은 어디에다 심을가? 마늘을 심을 자리가 없으면 우리는 마늘을 어디가서 얻어 먹을가?) 혼자생각에도 한심한 일 같았다. 마늘이 없는 우리집 밥상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아버지와 엄마는 아침상을 받으면서 터밭 이야기를 나누셨다. 역시 엄마쪽에서 흥분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글쎄말입니더.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합시더.” 하고 애매모호만 대답만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그 태도가 몹시도 맘에 들지않는지 가끔 아니꼬운 눈길로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차츰 사원들사이에서도 귀속말로 터밭을 두고 토론이 오갔다. 그것이 사실로 되면서 도마도는 몇포기 이상을 심어서는 안되고 땅꽈리는 또 몇포기를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소문까지 돌아았다. 마늘은 한고랑을 넘겨서는 안된다고 규정을 했다는것이였다. 사원들은 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지만 모여앉으면 서로 남들은 터밭에 무엇을 심으려는지를 탐문해보군했다. 청명절이 가까와 올수록 엄마는 더구나 안절부절 못하셨다. 마늘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청명날에 씨를 뿌려야 제격이라고 믿고있는 엄마였던것이다. 그날 밤에도 한잠을 푹 자고 깨여나보니 아버지와 엄마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회의에 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였다 “기어이 마늘을 한고랑만 심을라이까?” “그리야지, 우에서 정식으로 내리먹이는것 같은데, 어이 할 방법이 없는게 아이가? ” “그럼 올해 겨울은 뭘 먹구 살라꼬? 긴 겨울 하마 담배잎을 삶아먹구 살라는건 아이겠져?” 엄마의 목소리는 듣기 거북할정도로 퉁명스럽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의 탁한 말소리가 또 어둠을 갈랐다. “넬이야 어이됐드이, 우리는 마늘을 심읍시데이. 긴긴 겨울나이도 생각해야제?” “그러다가 웃사람들 눈에라도 나면 어이할라꼬?” 아버지의 목소리는 불안에 떨리고있었다. 엄마는 더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청명날 아침, 엄마는 일찌기 일어나 아침을 짓고 쌀뜨물에 곱게 머리를 감아 얹었다. 씻어서 다려 농짝안에 넣어두었던 하아얀 적삼을 꺼내 입으셨다. 엄마는 전날 물에 퍼지웠던 종자마늘을 조리로 퍼서 큼직한 소래에 담아 이고 터밭으로 나가셨다. 온 아침을 불안스러운 모습으로 엄마를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창문에 붙어서서 터마전으로 나가는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기어코 마늘을 심을라능기요?”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종자마늘을 담은 크소래를 터밭머리에 내리워 놓고는 호미를 들고 깊숙히 쳐놓은 밭고랑을 타고 앉으셨다. 엄마는 호미로 구멍을 뚜지고는 마늘종자를 떨구어넣었다. 머리를 푹 수그리고 부지런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엄마의 모습은 마치도 움직이는 작은 바위를 방불케했다. 아버지는 오전 내내 창문에 붙어서서 마늘을 심는 엄마를 바라볼뿐 좀처럼 밭에 나올 엄두를 못내고있었다. 엄마는 오전나절에 마늘 여덟고랑을 심으셨다. 전에 비해 두고랑이 적었다. 엄마는 머리에 쓰고있던 채깝수건을 풀어내려 이마를 닦으며 흐믓한 눈길로 마늘을 심은 밭고랑을 바라보고 계셨다. 마늘은 검푸르게 독을 쓰며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엄마는 마늘싹이 한뼘쯤 될 때부터 솎아다가는 마늘싹무침도 하고 마늘싹을 버무려 옥수가루 지짐도 부쳤다. 시걱 때마다 마늘싹으로 만든 반찬을 상에 올리는 엄마의 얼굴이 차츰 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마늘을 여덟고랑이나 심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엄마는 그냥 무사히 이 봄을 넘기는구나 하고 시름을 놓는 표정이셨다. 나는 엄마의 덕분에 상에 오르는 마늘반찬을 맛나게 먹으면서 엄마에게 참으로 믿음이 갔고 다시 한번 엄마가 든든한 바위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끝내 터지고야 말았다. 어느날, 엄마가 오전 일을 끝내고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마늘고랑을 타고서서 한창 독이오르는 마늘을 뽑고있었다. “여보소, 미쳤수?>. 엄마가 터밭으로 뛰여들어가며 소리쳤다. 그 바람에 아버지가 우뜰 놀라며 머리를 돌렸다. 타는듯한 엄마의 얼굴에서 퍼런 피줄이 꿈틀거리는 이마가 유표하게 안겨왔다. 아버지는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볼 자신이 없는듯 머리를 돌려버렸다. 대신 풋마늘을 뽑는 아버지의 행동이 보다 거칠어졌다. “여보소, 그만하라이까, 왜 이럭하는데이?” 엄마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푹 잦아든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울렸다. “오전에 생산대에 불리워갔었당께. 우에서 인차 검사를 내려온다는게우. 마늘을 뽑아버리지 않으면 자본주의 꼬리로 쳐서 베여버리겠다고 하더랑께.” 엄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씽하니 달려가 아버지를 밀치며 단말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그럭하이, 싱싱하니 자라나는 마늘을 뽑아버리우. 하늘이 굽어보지, 하늘이 굽어봐유!” “이아낙이 집을 말아 먹을려고 작정을 했는가보이. 애들도 펑펑 커가는데 누구에게 해 될락고 기어이 이까짓 마늘을 안고 살겠다는기여.” 조금 떨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차츰 제자리를 잡아갔다. 엄마에게 양보를 하지못하겠다는 시위 같았다. 어쩜 집을 지키고 자식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식의 자아방위가 아니였는지 모른다. 현행반혁명으로 몰리워 갖은 박해를 받으며 인분차를 끌고 마을의 변소를 치면서 터특해낸 아버지만의 인생철학이 아닌지도 모른다. 엄마도 녹녹히 물러설 태세가 아니였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당신은 상관 마이소. 내가 안을랍니더. 내가 안아여.” 엄마는 아버지를 마늘밭고랑에서 밀어내려고 빡빡 힘을 썼다. 아버지는 잠간 그러는 엄마를 쏘아보다가 팔을 휘둘러 저쪽으로 확 밀쳐버렸다. 엄마는 너무나도 볼품없이 나동댕이쳐졌다. 아버지는 일어나려고 허우적거리는 엄마를 피끗 훔쳐보고는 무엇이고 발기발기 찢어버리기라도 하려는듯 잡히는 대로 마늘잎을 잡아챘다. 마늘잎들은 중등이가 뜯기우기도 하고 뿌리채 뽑혀나오기도 했다. 그러는 아버지를 넋없이 바라보던 엄마는 홀연 땅을 치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는 그렇게도 슬프게 터밭을 울렸다. 아버지의 손에 중등 잘려 뽑혀진대로 나뒹구는 마늘잎들도 엄마의 울음소리에 파르르 떠는듯싶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저녁을 드시지 않고 골방에 들어가 누으셨다. 둘째누나가 저녁을 차려서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았다. 엄마가 없는 밥상은 초상집 밥상처럼 청승스러웠다. 밥상을 앞에 놓고 멀거니 내려다 보던 아버지가 신경질적으로 호령했다. “동이야, 가서 술이나 받아와라.” 아버지가 바지호주머니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일원짜리 돈 한장을 꺼내주면서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무서워 두말없이 튕겨일어나 술병사리를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만 꾸역꾸역 내쉬며 혼자서 랭수마시듯 벌컥벌컥 술을 마셔댔다. 그 모습에서 나는 3푼짜리 알각잔에 술을 따라 쪽~ 마시고는 캬~악 소리를 내며 짭짭 혀끝을 빨던 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스러워 보였던지를 새삼스럽게 느꼈다.련속 몇목음이나 마셨던지 아버지는 술병을 밥상우에 내리워 놓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서 멀거니 밥상우를 내려다보셨다. 밥상우에는 마늘싹무침이며 묵은 마늘장아찌며 마늘을 듬뿍 넣어 담근 무우김치며가 옥수수가루 궈테와 함께 올라있었다. 아침에 엄마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였다. 이 음식을 만들 때만 해도 엄마의 얼굴은 활짝 피여있었다. 터밭에서 푸릇푸릇 커가는 마늘싹들을 보면서 그 누구와의 내기에서 이겼구나 하는 그런 긍지가 피여있었다. 하지만 짧디짧은 하루해를 보내고 엄마는 락태한 고양이마냥 패배의 아픔을 누르며 상심하신채 골방에 누워계셨다. 그 싸움이 아버지와의 싸움이였을가? 아니면 마늘 한고랑도 맘대로 심어먹지 못하게 하던 그 세월과의 싸움이였을가? 언제나 엄마와의 겨룸에서 패자를 충당하던 아버지였지만 골방에서 오열을 토하는 엄마를 보면서 도무지 승자의 희열을 느낄수 없는 모양이셨다. 아버지가 별안간 저가락을 탕하고 밥상우에 내리워놓았다. 우리는 깜짝 놀라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이… 이! 못 살 세상같으니라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밥상을 들어서 바당에 활 팽개쳐버렸다. 짤라당하는 소리가 어지러이 나면서 사발이며 종지며 접시들이 사처로 튕겨나갔다. 마늘싹무침이며 묵은 마늘장아찌며 마늘을 듬뿍 넣어 담근 무우김치며 옥수수가루로 만든 궈테며가 바당에 산산히 뿌려졌다. “아부지, 왜 이러능기요?” 둘째누나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아버지는 술병을 들고 바당에 내려섰다. “왜 이러능기요? 일년마늘을 다 잡아먹더니 미쳤능기요? 미쳤다이가. ” 골방에 누웠던 엄마가 시설질을 하며 뛰여나와 아버지의 손에서 술병을 앗아내려고 달려들었다. “노라이까. 이걸 노라이까” 아버지가 술병을 가슴으로 움켜 안으며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한손으로 아버지의 팔을 부여잡고 다른 한손으로 아버지가 품고있는 술병을 낚으려고 허우적거렸다. 둘째누나가 달려들어 끝내 아버지의 손에서 술병을 앗아냈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라 없이 삿대질을 하며 “이것들이. 이것들이…”하고 외곬을 톱다가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는 비틀비틀 멀어져가는 아버지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다리를 후둘후둘 떨었다. 갑자기 엄마가 그 자리에 무너지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였다. 아무 말도 못하시고 꺼이꺼이 울음을 집어삼켰다. 그때 엄마는 바위가 아니였다. 설음에, 공포에, 분노에 몸을 옹송그리고 흐느끼는 엄마는 분명 가냘픈 녀인네였다. 한참이나 오열을 토하고 나서야 엄마는 찔끔찔끔 눈굽을 찍으며 일어나 어지러진 바당을 거두기 시작했다. 바당에 널려진 묵은 마늘장아찌와 옥수수궈테는 주어서 사발에 담았다. 그 와중에도 묵은 마늘장아찌와 옥수수궈테는 씻어서 다시 먹으려고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였다. 나머지 것들을 비자루로 쓸어서 쓰레바끼에 담으면서 엄마는 련속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7 그날 너무도 흥분을 하셨던 탓인지 엄마의 눈병은 또 발작했다. 무시로 왼쪽눈이 아파 나고 밤을 자고 나면 눈으로도 보아낼수있을 만침이나 뽀두라지가 커져있었다. 엄마의 눈병을 말하자면 그때부로부터 6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엄마는 나를 낳아서 1년반이 푼히 지난후 또 임신을 하게 되였다. 이미 나까지 자식 여덟을 낳아서 셋을 먼저 보내고 다섯을 키우고있던 엄마는 정말 더는 자식을 낳아 자래울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였다. 마침 그때 임신중절수술이라는것이 갓 보급되던 때라 엄마는 임신중절수술을 결심했다. 수술은 우리 마을에서 20여리떨어진 투도라는 진병원에 가야 할수있었다. 어느날 엄마는 드디여 수술길에 올랐다. 엄마가 임신중절수술을 끝냈을 때는 점심시간도 훨씬 지난후였다. 병원복도에 한시간가량 앉아서 아침에 가지고간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충 에때운 엄마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귀로에 올랐다. 찌물쿠는 삼복날씨에 방금 임신중절수술을 한 몸으로 걸음을 옮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5리가량을 걸어서 룡평에 도착하니 목에서 겨불내가 나고 다리가 천근같이 무거워 더는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엄마는 잠간 쉬기로 작심하고 룡평교밑으로 내려갔다. 그때까지 개울물은 크게 오염이 되지 않고있어서 길손들은 목이 마르면 그냥 흐르는 물을 한웅큼 퍼서 마시는것이 습관이였다. 엄마는 쪼크리고 앉아 손바가지로 개울물을 푸려고 깊숙히 허리를 굽혔다. 순간 엄마는 눈앞이 캄캄해나며 눈두덩이가 무엇에 찔리우는듯한 통통을 느꼈다. 그렇게 몇초가 흘러서 눈앞이 다시 밝아졌지만 왼쪽 눈두덩이에서 오는 쿡쿡 쏘는듯한 통증은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가끔씩 느껴지군했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는 왼쪽눈이 너무도 깔깔하고 아파서 거울앞에 다가섰다. 왼쪽 눈두덩이에 좁쌀알만한 뽀두라지가 튀여나와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다래끼가 났는가?) 엄마는 이정도로 가볍게 생각을 하며 아침을 짓기시작했다. 하도 바쁜 세월이라 엄마는 후에도 가끔 눈으로부터 오는 통증과 불편함을 느꼈지만 언제 특별히 그것을 챙길사이가 없었다. 보통 다래끼로 알고있던 그 뽀두라지는 없어지지 않고 피곤하거나 몹시 흥분을 하고 난 후이면 거짓말같이 커지군했다. 그로부터 3년후인가 투도에서 의사로 있는 외가편6촌형이 우리집에 왔다가 엄마의 눈을 보고 그저 일 같지 않다면서 전면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엄마는 그해 겨울 돼지를 판 돈을 손에 들고 연길로 내려가 전면검사를 했다. 의사들은 딱히 이거다 하고 진단은 없었지만 세포조직으로 봐서 저절로 없어질 가능성이 없다면서 수술을 권고했다. 그때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는 이미 열콩알보다도 더 큰 혹으로 번져있었다. 엄마는 수술후 일주일가량 입원해있다가 돌아오셨다. 네모꼴 안대로 왼눈을 가리운 엄마는 그때 나에게 무척이나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수술을 하고나면 금방 나을것 같던 엄마의 눈은 수술후 한달이 지나자 또 그 자리에 뽀두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전에처럼 피곤하거나 몹씨 흥분을 하고난 후이면 커졌는데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생산대에서는 엄마의 정황을 고려하여 엄마에게 생산대 탁아소에서 아기들을 돌보는 일을 맡겨주었다. 엄마는 생산대의 관심이 감사하다면서 열심히도 일에 충성을 하셨다. 눈에 난 뽀두라지도 더 커지는 눈치가 없었다. 엄마도, 식구들도 그 뽀두라지가 그냥 이 정도로 자리를 잡으려는가부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명날 마늘밭사건으로 하여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가 또 작간을 부리기 시작한것이였다. 엄마는 눈으로부터 오는 통증을 느낄 때마다 마늘을 찟개여 가제에 발라서는 뽀두라지가 난 눈두덩이에 부치군 했다. 엄마의 느낌 때문이였던지 아니면 정말 마늘이 림시구급효과가 있어서였던지 그렇게 마늘즙을 바른 가제를 눈두덩이에 부치고나면 뽀두리지 부위의 열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통증도 서서히 없어지군 했다. 하지만 뽀두라지가 작아지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온집식구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를 살피고있었다. 엄마도 무던히나 열심히 마늘치료를 견지했다. 8 생산대의 검사 때문에 마늘을 한고랑밖에 살리지못한데서 그해 마늘은 약처럼 귀했다. 종자마늘을 남기고 나니 그해 김장마늘도 부족한 형편이였다. 엄마는 가끔 헛간에 들어가서 몇줄밖에 안되는 마늘다래를 멀거니 바라보며 한참씩 서있기도 했다. 엄마는 마늘관리를 알뜰하게도 하셨다. 전에 마늘이 많을 때는 가끔 통마늘을 뜯어다가 화로불에 구워서 호호 불어 식히며 군입질도 했지만 그해는 웬간해서 그런 호사를 못하게 막았다. 애들의 마음이란 그런것인지 엄마가 막을수록 마늘의 매력은 점점 더 유혹적이였다. 그날 오후, 엄마가 일을 나간후 룡이랑 상호랑 우리집에 놀러왔었다. 우리는 화로불을 사이에 놓고 앉아 호랑이 담배피울 적의 이야기며 여우가 닭사냥을 나갔던 이야기며를 한컬레씩 해나갔다. 그러면서 상호가 호주머니에 넣어가지온 옥수수를 화로불에 넣어서 튀겨먹기도 했다. 어쩌다가 마늘꼬치에 대한 말이 나오게되였다. 마늘꼬치라면 내가 그래도 전문가나 다름 없었다. 나는 애들에게 손을 저으며 마늘꼬치가 여차여차하게 맛있다고 구구이 자랑을 늘여놓았다. 아니나다를가 친구들이 화로불에 마늘꼬치를 해먹자고 나를 꼬드꼈다. 나는 우쭐우쭐 헛간으로 나가서 잘 염근 통마늘과 낡은 자전거살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하던대로 통마늘을 터뜨려 쪼각을 뜬후 겉껍질을 발라버리고 깨끗해진 마늘쪽을 낡은 자전거살에 쭉 꿨다. 그렇게 꿴 마늘꼬치를 이글이글 타는 화로불 우에 올려놓고 돌렸다. 잠간 지나자 마늘에서는 뽀지직뽀지직 노르스름한 기름이 돋아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침을 삼키며 가므스름하게 타들어가는 마늘을 뚫어지라 지켜보았다. 우리는 잘 구워진 마늘쪼각을 자전거살에서 빼내여 껍질을 바른후 참깨가루와 가루소금을 섞어 만든 소스에 찍어 맛나게 먹었다. 마늘꼬치도 맛있고 마늘꼬치와 함께 엮어가는 옛말도 재미났다. 그리고 재미나는 옛말과 함께 흐르는 시간들도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었다. 어느새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드디여 엄마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셨다. 온집안에 가득찬 연기며 구들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마늘껍질을 보아낸 엄마는 너무도 억이막혀서인지 한동안 말없이 멍하니 서있었다. 엄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가고있었다. 순간 큰일을 쳤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나의 머리를 쳤다. 친구들도 엄마의 표정이 무서운지 기신기신 기여일어나서 자기의 신을 찾아신고 몸을 뺐다. 나도 엄마의 불호령이 터지기전에 친구들을 따라 집을 나와버렸다. 상호를 따라 상호네 집으로 간 나는 저녁 때가 되여도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못했다. 상호의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권해도 도리머리만 하면서 상호네 웃방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아셨던지 나를 데리러 상호네 집으로 오셨다. 엄마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나는 정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심정이였다. “마늘꼬치가 그렇게 먹고싶데?” 엄마가 한마디하셨다. 나는 불시에 설음과 무서움이 머리를 쳐서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얘가 왜 이러니? 엄마가 어디 욕이라도 했데이?” 엄마가 부드럽게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엄마의 손이 무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나는 엄마의 그 따뜻한 손이 외려 나를 엄청 두드려 준다면 속이 더 시원할것만 같았다. 그날 엄마는 한마디도 나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말없은 엄마의 그날 모습에서 나는 반성이란 무엇인가를 배운것 같다. 그후에도 밥상에서 마늘반찬을 보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혹시 손님이 오거나 아버지의 술친구들이 닥쳐야 마늘반찬 두어가지를 상에 올리군했다. 마늘을 매일같이 먹을 때는 사실 마늘반찬이 질린적도 있었지만 정작 맘대로 먹을수가 없으니 마늘비위가 은근히 나는것을 참을수가 없었다. 그런 느낌은 나만이 아닌듯 싶었다. 마늘반찬에 대한 유혹은 둘째누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밤, 나는 웃방에 앉아 옛말을 해달라고 둘째누나를 졸랐다. 둘째누나는 정지칸을 내려다보더니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띄우며 나를 당겨 앉혔다. 둘째누나는 나의 귀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동이야, 너 헛간에 나가서 마늘을 뜯어오너라. 마늘구이를 해먹으며 옛말을 해줄게.” 며칠전의 일이 생각히워서 나는 도리머리를 했다. 그러자 둘째누나가 한술 떴다. “괜찮다. 엄마가 뭐락하면 누나가 막아줄게.” “정말이제?” “그래 정말이지!” 둘째누나가 확실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 몰래 바같문으로 해서 헛간으로 들어갔다. 손더듬으로 스위치를 찾아 켜고 마늘타래를 걸어놓은 동쪽벽에 붙어섰다. 나의 키로는 까치발을 해도 손이 마늘타래에 닿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벽구석에 세워놓은 네모난 나무판대기를 발견했다. 나는 나무판대기를 마늘타래 밑에 있는 작은 오지독 우에 올려놓고 딛고 올라섰다. 손은 마늘타래 중간쯤까지 뻗을수가 있었다. 한손으로 통마늘을 당기니 잘 뽑히지가 않았다. 나는 까치발을 하며 두손으로 통마늘을 당겨뽑았다. 까치발을 하고 웃몸에 힘을 너무 많이 준 탓인지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마늘타래를 더욱 힘스레 당겼다. 오지독이 넘이지면서 나는 오지독우에서 떨어졌고 그때까지 잡고있던 마늘타래도 따라 떨어졌다. 마늘타래가 풀리며 통마늘이 사처에 흩어져버렸다. 오지독안에 있던 마늘장아찌도 쏟아지고 간장도 흘러서 바닥을 적셨다. 넘이지면서 어디에 박혔던지 이마가 빠개지는듯 아팠다. 벌컥하고 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헛간으로 달려들어오셨다. 헛간안의 살풍경에 너무도 억이막혀서인지 엄마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말 한마디 없으셨다. 나는 그러는 엄마가 무서워 바들바들 떨었다. 그제야 엄마는 달려와 나를 안으며 손으로 이마를 만져주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아기주먹 만침이나 큰 혹이 생겨났었다. “왜 이럭하니? 왜?” 엄마는 나의 이마에 난 혹을 문다지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셨다. 나는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며 개미소리만치나 낮게 떠듬거렸다. “엄마, 다…다신 아…안 그럴게, 잘못했수.” 엄마는 무서움에 떠는 나를 품으로 꼭 당겨 안아주셨다. 나는 엄마의 품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엄마의 젖가슴을 뚫고 토닥토닥 세차게 높뛰는 엄마의 심장소리가 나의 귀속을 파고 들었다. 어쩐지 코끝이 시큼해나며 와~ 하고 울음이 터졌다. 엄마는 꼭 안았던 나를 품에서 밀어내며 유심히 나의 얼굴을 살피더니 쯧쯧쯧 혀를 찼다. 엄마는 오지독을 일켜세우다가 오지독 옆에 있는 네모난 널판자를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엄마는 널판자를 주워들어 보다가 별안간 그 널판자를 바닥에 메쳐버렸다. 엄마는 벽구석에 세워놓은 도끼를 찾아서 그 널판자를 패기시작했다. 널판자는 삽시에 두 동각이 나고 네 동각이 났다. 엄마는 여러 동각이난 널판자들을 주어서 부엌에 가져다 던져버렸다. (저 널판자가 무엇이기에 엄마가 저렇게도 격분해서 도끼로 패버리는것일가?) 나는 못내 알고싶었다. 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웃방으로 올라갔다. 둘째누나는 진작 무서워서 이불을 쓰고 자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둘째누나에게 방금 사연을 말하면서 그 널판자에 대해 물었다. 무척이나 궁금하던지 슬그머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온 둘째누나가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 널판자가 바로 아버지가 조리돌림을 당할 때 목에 메고 다니던 개패라는것이였다. 아버지의 목을 지지리도 무섭게 누르던 개패는 이틀날 아침 엄마에 의해 부엌으로 들어가 활활 타버렸다. 빠알간 재로 내려 앉는 개패를 보면서 엄마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셨을가? 오늘까지도 나는 내내 그것이 궁금해진다. 9 그후에도 엄마의 눈에 난 뽀두라지는 검푸르게 독을 쓰며 날마다 더 커졌다. 마늘즙을 말라도 더는 열이 내리지 않았고 통증도 가셔질줄 몰랐다. 자본주의 꼬리를 자르노라고 온 나라가 악마구리 끓듯 끓어 번지던 그 해의 겨울은 몹시도 길고 추웠다. 이듬해 봄, 엄마는 큰형님과 함께 연길병원으로 눈을 검사하러 갔다. 병원에서는 또 수술을 권장했다. 힘든 수술을 거쳤지만 한달쯤 지나자 엄마의 눈두덩이에는 또 뽀두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번 보다 커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내가 아홉살 나던 해의 봄, 세번째 수술을 할 때는 병근원을 뽑아버려야 한다면서 완전히 눈까풀을 제게해버렸다. 하지만 밉살스러운 그 뽀두라지는 엄마의 왼쪽 눈귀에 뿌리를 박고 또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렇게 다섯번이나 대형수술을 하면서 나중에는 눈알까지 도려냈지만 그 악착스러운 뽀두라지는 여전히 머리를 쳐들군했다. 나중에 엄마는 다시 수술을 하지않겠다고 나누웠고 식구들도 번마다 수술을 마치고는 또 다시 절망에 빠지는 엄마를 보기가 괴로와서 더는 수술을 권장하지 못했다. 아픈 눈때문에 그렇게도 심신의 고통을 'M으면서도 엄마는 봄만되면 명심해서 마늘밭을 가꾸셨다. 행운스럽게도 그 이듬해부터 생산대에서는 터밭에 대한 공제를 더는 하지 않아서 엄마는 엄마대로 마음껐 마늘을 심을수가 있었다. 엄마의 마늘밭이 해를 거듭하며 마늘을 생산해내듯이 우리집에도 해를 이어 많은 변화가 생겼다. 1976년 10월에 “4인무리”가 분쇄된후, 옹근 10년이나 남의 집 변소치기를 하면서 최하층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도 “현행반혁명”이라는 모자를 벗고 변소치기에서 해탈되여 집에서 잡일들을 보시며 만년을 보내게 되였다. 하지만 동란의 그 년대에 받은 심신의 상처때문인지 아버지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셨고 언제나 시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명철보신을 하셨다. 그 몇해사이 형님 두분이 다 장가를 들고 둘째누나도 시집을 갔다. 형님들이 춰서면서 가정살림도 많이 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마늘 말고도 간소하게 나마 밥상을 둥글게 꾸밀수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봄이오면 숙명처럼 마늘심기에 집착을 보이셨다. 1981년 봄에 들어서면서 엄마의 다른 한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엄마는 기력도 날로 못해지면서 바같출입도 하기 무서워했다. 하루 대부분 구들장을 등지고 누워서 앓음소리를 내시던 엄마가 청명이 가까와 오자 기적처럼 일어나 아버지를 보고 마늘밭고랑을 짓지 않으신다고 푸념을 했다. “여보, 터밭을 엎어야제? 오라잖아 청명인데 마늘밭고랑을 잡아야제.” 그날 엄마는 창문밑으로 가새다리를 하고 누워 담배를 껌벅껌벅 태우시는 아버지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며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여전히 뻐끔뻐끔 담배만 태울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으셨다. “령감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궁리가 없구서야, 마늘은 청명날에 심어야 제격이랑께. 올해도 내가 나가서 마늘밭고랑을 지어야 하나보네…” 아버지 옆에 다달은 엄마는 뼈만 앙상하니 남은 까슬까슬한 손으로 아버지를 흔들며 힘겹게 숨을 톺았다. 그제야 아버지는 누운채로 담배를 재털이에 부벼끄며 마땅치 않다는듯 중얼거렸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을라고 그러나? 아픈 사람이 곱게 앓아야제, 괜히 참견은 뭔 놈의 참견이 이렇게 많노?” “내사 참견하고 싶어서 참견하끄마? 말 안하믄 리태백이 갑수청산 구경하는 꼴이 돼서 그래제이. 어느 해, 내손 안바라고 마늘을 심었데이?” “알았다. 알았다 아이가.” 아버지는 등에 졌던 구들장을 털어버리고 일어나 주섬주섬 신발을 찾아신었다. 아버지께서 터밭으로 나가시자 엄마는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끌며 기어이 밭머리에 따라나가 아버지께서 밭고랑을 일구는것을 구경하셨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밭고랑은 좀 더 넓게 잡아야하고 고랑깊이도 반뼘은 더 내려가야한다고 지휘를 하셨다. 아버지는 그러는 엄마를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흘겨보셨다. 하면서도 수걱수걱 엄마의 지휘에 따라 삽날을 깊숙히 박아서 넓적넓적 밭고랑을 잡아나갔다. 그러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엄마는 얼굴에 그렇듯 행복한 미소를 띄우셨다. “저 엄마를 좀 보오. 어쩜 마늘밭에 저렇게 집착을 할가?” 마늘타래에서 통마늘을 뜯어내여 쪽을 잡으며 큰 형수가 넌지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아무래도 엄마는 한생에 마늘하구 떨어져서 못살 명인가 보지무.” 나는 큰 형수의 말을 받으며 시무룩히 웃었다. 엄마의 병이 위태로와 질수록 아버지는 명심해서 마늘밭을 돌보셨다. 어쩜 병으로 신음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 동안 엄마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지못했던 자신을 후회하는지 그해 봄 마늘밭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집착에 가까우리 만침 강했다. 엄마는 간혹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나서는 창문턱을 집고 서서 아버지를 멀거니 바라보군했다. 부지런한 지렁이마냥 묵묵히 마늘밭을 손질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엄마는 가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오른쪽 눈을 슴뻑거리기도 했다. 그때면 우멍하게 패여들어간 엄마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맺쳐 반짝이였다… 10 1981년 5월 2일. 그날 오후 한시가 다 되여서야 나는 둘째형과 형수를 불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엄마는 이미 운명을 하신 후였다. 엄마의 시신은 웃방에 모셔져있었고 시신에는 엄마가 평소에 쓰던 이불이 덮여져있었다. 거짓말같이 싸늘한 시신이 되여 누워있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울음좇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는듯 눈을 꼭 감고있는 엄마의 검푸른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나는 그 시각52세라는 너무도 짧은 인생을 험악하고 힘들게 살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계시는 엄마의 령혼을 찾아 어디론가 달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1929년 윤 2월 19일, 장인이라고 하는 작은 산골마을에서 전주최씨로 태여나신 엄마는 최신옥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도 누구네 딸냄이, 누구의 엄마로 더 많이 불려지면서 자신의 진정한 삶은 잊은채 험난한 인생을 허이허이 달려오셨다. 엄마의 시신은 농촌의 풍습대로 3일장을 했다. 장성덕에다가 엄마의 시신을 묻고 오던날 저녁, 큰형수는 밥상을 앞에 두고 엄마를 기리며 또 찔끔찔끔 눈굽을 찍으셨다. 그날 내가 둘째형님을 데리러 간 후에도 엄마는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큰형수가 엄마께 아버지가 마늘밭을 손질하고 계신다며 불러오라는가고 묻자 엄마는 힘없이 도리머리를 하더니 스르르 마지막 눈을 감더라는것이였다. “그날 엄마가 나에게 아버질 보구 마늘을 잘 자래워 혼자 많이 자시라고 합디다.” 나는 끝내 입안에 맴돌던 말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어쩜 살아계시는 아버지에게 한생 못이되여 가슴에 박힐것 같아서 차마 이 말만은 하지말자고 그렇게 자신을 단속했건만 림종을 하던날, 엄마의 서운해하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에게 이 말을 털어놓지 않으면 안될것 같은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충동을 느끼고있었다. 형님들도 형수들도 머리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까지 모색하리만침 눈물을 아끼시던 아버지께서 머리를 돌리며 억 하고 소리를 꺾으셨다. 주먹같은 눈물이 아버지의 두눈에서 주르르 굴러떨어져 내렸다. “마지막 길까지도 그렇게 맘속에 옹이를 박아가지고 갔구나. 마늘밭이 뭐기에… 내가 마지막 길에 곁을 서주어야 하는건데…” 아버지는 주먹으로 구들을 탕탕 내리치며 황소처럼 꺼이꺼이 울음을 터치셨다. 아버지의 얼굴은 고통으로 하여 무섭게 일그러지고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엄마가 없는 집안에서 창문을 뚫고 새여 들어오는 별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끔 어디선가 풍겨오는 향긋한 마늘냄새를 맞는듯한 환각을 느낀적이 있다. 그때면 엄마의 마늘밭이 파아란 주단처럼 눈앞에 펼쳐지군 했다. 엄마는 여전히 혼자 마늘밭고랑을 타고서서 김을 매고 계셨다. 김을 매는 엄마의 얼굴에서는 늘 말못할 쓸쓸함이 새여나오는듯싶었다. 이듬해 1월 3일, 바람 세차고 무지도 춥던 그날 밤에 아버지는 간경화복수로 60세의 험난한 일생을 마치셨다. 어쩜 저승에 가서라도 두분이 다시 만나 오손도손 마늘밭을 가꾸며 이승에서 채 못나누신 사랑도 진하게 한번 나누어 보고 이승에서 누려보지 못한 호강도 맘껏 누렸으면 하고 그렇게 간절히 빌고 빌건만 엄마는 여전히 혼자 꿈길에 나타나시여 숙명처럼 마늘밭을 가꾸고있다. “마늘을 잘 자래워 혼자 많이 먹으라 해라!” 꿈에 엄마를 보고 깨여 난 아침이면 나는 늘 피고름같은 엄마의 이 말씀이 세차게 귀전을 치는것을 어쩔수 없다. 과연 엄마는 아직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것일가? 오늘도 엄마의 마늘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31    로신문학원에서의 나날 (제4부) 댓글:  조회:1983  추천:0  2010-03-11
로신문학원에서의 나날 (제4부) *********************기회는 잡는것이다 로신문학원의 밤은 잠들줄 모른다 고양이들이 이 밤도 설친다 있을 때 잘해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천년의 감동 정들면 집 소녀와 두개의 돌멩이 고양이를 위해 울다 8월의 사색 로신문학원 이곳에 남긴것과 얻은것은 원점 그리고 새로운 스타트 새 악장을 기다리며 아자, 힘내자!
30    기회는 잡는것이다 댓글:  조회:1845  추천:0  2010-03-11
기회는 잡는것이다 2007년 5월 12일(토요일) 오늘 저녁에 컴퓨터수리공이 와서 컴퓨터에 조선글계통을 안장해주었다. 가격은 50원, 우리 연길과 별반 차이가 없다. 수리공은 남방에서 온 젊은이였는데 안장하는 2시간사이, 말도 별로 없이 매우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모습이 고마와서 커피도 한잔 타서 대접했더니 정말 감사한 표정이였다. 컴퓨터로 조선글을 칠수있으니 정말 큰 근심을 던것같다. 5월 8일에 학원에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와보니 컴퓨터가 있기에 정말 둥~ 뜨는 기분이였는데 컴퓨터에 조선글계통이 없을줄이야. 며칠간 저절로 갖은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저절로는 쩔수가 없었다. 어데 가서 컴퓨터수리공을 찾을가하는 궁리로 근심이 가득했다. 부성문에 있는 <<로신박물관>>을 참관하고 뻐스를 타고 오는 길에 우연히 길에서 컴퓨터수리라고 쓴 간판을 보게 되였고 그 간판에서 련계전화를 보았다. 어쩜 피뜩 궁리가 돌아서 인차 핸드폰을 꺼내들고 그 번호를 기록하였다가 숙소에 돌아오는 길로 그 수리부에 전화를 넣었더니 조선글계통을 안장할수 있단다. 야호! 아마도 이럴 때 웨치는 소리같다. 저녁 6시 20분좌우에 수리공이 온다는 전화가 왔다. 5분후에 진짜 키작고 얼굴이 하얗고 뒤통수가 툭 튀여나온 가냘프게 생긴 남자수리공이 숙소에 들어섰다. 약간 입가에 웃음을 띄우는것으로 인사를 가름하고 안장을 시작했다. 퇴근후 저녁도 먹지못하고 달려와 일에 열중하는 모습에서 북경이라는 이 땅덩어리가 얼마나 사람을 힘겹게 하는가를 알수 있을것 같았다. 고마운 수리공이 까근하게 조선글계통을 안장해준 때문인지 컴퓨터가 어제보다 더 쓰기 좋아진것 같다. 뭔가를 쓰고싶은 충동이 일기시작한다. 아마도 환경지배라는것이 참 무서운 모양이다. 중국의 유명한 아동문학가들이 모여온 이곳, 로신문학원- 아동문학작가 고급연구반에서의 생활이 이 점을 더욱 잘 말해주는듯싶다. 여태껏 나는 무엇을 해왔고 구경 무엇을 생각했는가를 자신에게 묻게 된다. 어쩜 군대에서 자신의 출로를 놓고 고민할 때처럼 말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하고 조선족어린이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한다는 책임감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렇다. 진정 인젠 글을 써야 할 때가 온것이다. 이곳에서 한족작가들과 교류도 많이 하고 그들의 창작경험도 많이 배워야겠다. 어쩜 작품을 한어로 번역하여 중국문단에 소개할수 있는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기회는 잡는것이다. 두 눈을 크게 뜨자~
29    로신문학원의 밤은 잠들줄을 모른다 댓글:  조회:2130  추천:0  2010-03-11
로신문학원의 밤은 잠들줄을 모른다 2007년 5월 20일 (일요일) 지난 8일에 로신문학원에 도착했으니 어느덧 열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느라고 바삐보냈다. 1989년도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 입사하여 오늘, 여기까지 오느라고 정말 쉴틈없이 뛰여왔다.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랄가, 연변작가협회의 추천으로 중국작가의 전당-로신문학원에 오게 되였다. 중국 아동문단에서 신생력량으로 뛰고있는 50살 이후의 작가 53명이 이번 연구반에 모여왔다. 평소 중국한족문단에 대하여 별로 료해가 없던 나인지라 첨에는 그냥 나처럼 평범한 과외작가들이 모인곳인가고 생각했다. 날이갈수록 학원들에 대한 료해가 깊어지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 이미 장편소설을 십여부 발표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중국아동문학의 최고상이라 할수있는<<빙심아동문학상>>을 3차례나 받은 작가도 있었다. 한족작가들사이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작가군! 하고 서로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정말 중국아동문학의 최고지에 와있는듯한 느낌이다. 암튼 소중한 이 기회를 잘 틀어쥐고 로신문학원에서의 이 시간들을 진정 자신의 창작재질을 한층 승화시키는 발판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교학은 한주일에 3일정도 있다. 첫 4주간은 국내외의 시사와 나라의 해당법규, 정책, 그리고 로신문학원의 력사에 대한 교육이라고 한다. 로신문학원은 1950년 10월에 중앙문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였다. 유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첫 소장을 담임했다. 1954년에 중국작가협회문학강습소라고 개칭했다. 그러다가 1958년, 당시 정치형세의 핍박으로 문을 닫게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4년후인 1980년에 중공중앙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중국작가협회문학강습소>>라는 이름으로 회복되였다가 1984년에 정식으로 <<로신문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여 지금까지 중국에서 유일하게 전문작가를 양성하는 전문기구로 자기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중국문학계의 대부들인 모순, 곽말약, 조수리, 엽성도 등 유명한 작가들이 일찍 교학을 담당한적 있다. 당대 중국 유명작가들인 마라친부, 왕안억, 장자룡, 막언 등 수많은 작가들이 로신문학원을 거쳐갔다. 로신문학원 5층에는 제4기중청년작가고급연구반-소수민족작가반 학원들이 로신문학원에 증정한 커다란 액자가 걸려있는데 그 액자에 연변의 중견작가들인 최홍일, 리성비, 진설홍선생님의 명함도 찍혀있다. 집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로신문학원에 와서 고향 작가들의 이름을 보니 너무나도 친절하게 느껴진다. 이미 중국작가협회부주석 고홍파, 중국종교국국장 엽소문, 중국청소년문제연구중심 주임 손운효, 청화대학인문학원 교수 류병 등 지도자들과 전문가들의 강좌를 들었다. 너무나도 신선한감을 주었다. 진정으로 문학을 알자면 문학방면의 지식뿐만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지식을 두루 설렵한 박식가로 되여야 하겠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게하는 순간들이였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음미하게 된다. 집에 있을 때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프로그람 제작과 사회활동으로 조용히 앉아서 사색하고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로신문학원에서의 하루하루는 시각마다 문학과 창작을 둘러싸고 흐르기에 자연히 문학이라는 열띈 분위기에 말려들지 않을수가 없다. 첫 장편소설창작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조선족가정과 그런 가정에서 자라나는 소년소녀들의 미궁과도 같은 성장고민, 그리고 그들의 방황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인생에서 기회란 흔치 않다. 어쩜 로신문학원에서의 이 석달이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지 않을가 생각해본다. 웃층에서 아직도 걸상을 끄는 소리가 들린다. 3층 바로 우에는 사천 남충에서 온 미녀작가가 있다. 그도 아직 잠을 못이루고 창작에 몰두하는가싶다. 그렇다. 로신문학원의 밤은 잠들줄을 모른다.
28    고양이들이 이 밤도 설친다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0-03-11
고양이들이 이 밤도 설친다 2007년 5월 22일 (화요일) 어제 오전, 중국외교학원 국제관계연구소의 장력력교수가 학원에 와서 <<우리나라의 외교정책>>이라는 내용으로 강좌를 했다. 장교수는 강의 중에 한국과 조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특히 조선의 핵문제를 말할 때 많은 학원들이 자기의 관점을 제기했다. 53명의 학원중에 유일한 조선족으로서 장교수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참 묘했다. 얼마전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한 <<디아스포라문학>>에 대한 세미나에 참가했을 때의 그 묘함이 다시 반추된것이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학원들이 간혹 나의 침실에 들어와서는 조선글로 소설을 쓰는 나를 보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이런 글을 어떻게 배워냈는가고 묻는다.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고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여났다고 설명하면 오~ 하고 머리를 끄덕인다. 누가 뭐래도 우리의 뿌리는 조선반도에 내려있다. 우리는 오늘 어쩔수 없이 바람을 따라 이 땅에 떨어졌다. 이 땅의 영양을 갉아먹고 이 하늘이 내려주는 비를 맞으며 이 땅의 한폭의 풀로 되여버렸다. 역시 누가 뭐라해도 철같은 사실이다. 이 땅의 한폭의 풀일진대 이 땅의 소들을 위해 자기를 잘 키우는 일이 내가 응당해야 할 일인듯싶다. 모양 없이 크는 풀이 잘 크는 풀이 아니다. 꼭 자기의 원래 모양 그대로에 한점 부끄러움 없이 깨끗하게 꿋꿋하게 크는것이야말로 잘 크는것이라고 본다. 2005년도 6월, 한국YMCA에서 주는 <<우리동요보급대상>>을 받으러 서울에 갔을 때 한국 아동음악계의 원로 한분이 나의 손을 잡고 어쩜 중국에서 조선말로 된 동요보급을 위해 이렇게 좋은 일을 할수 있었는가고 감개무량해하셨다. 나는 그분께 우리는 중국땅에서 우리 민족의 글을 배우고 우리민족의 동요를 부르며 우리민족의 혼을 고스란히 키워가고있다고 말씀올렸다, 사실이다. 어떤 모습으로 세인들께 다가설지 모르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당당하게 조선족이라는 이름에 한점 부끄럼이 없이 살아가려고 애쓰고있다. 소리가 커서 풀이 나무로 되는게 아니다. 아니라고 해서 날아온 씨앗에서 돋아난 풀이 이 땅의 풀들과 같을수는 없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법칙이 주어져있다. 그 풀이 돌틈에서 자라든 강역에서 자라든 그냥 보듬어주고 이뻐해주는 아량이 있었으면 좋겠다. 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려온다. 로신문학원 정원에서 살찐 고양이 십여마리가 살고있다. 고양이들이 이 밤도 설친다
27    있을 때 잘해 댓글:  조회:2041  추천:0  2010-03-11
있을 때 잘해 2007년 7월 2일(월요일) 로신문학원 뒤의 어느 공지에서 전기가설을 하기에 오늘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정전을 한다는 공시가 게시판에 나붙었다. 뜨거운 물을 떠나서는 살지못하는 한족사람들이라 뜨거운 물 걱정이 제일 컸다. 모두들 아침 7시전에 일어나지 못할것이라며 어제 밤에 뜨거운 물을 떠놓느라 법석을 떨었다. 여기와서 뜨거운 물에 습관이 되여가는지라 나도 그들속에 끼여 뜨거운 물 한 보온병을 받아다놓았다. 시름놓고 자다 일어나보니 아침 여덟시, 혹시나 해서 컴퓨터 버튼을 눌러보니 역시나 까막나라다. 문학원에서 와서 오늘까지 반복되는 일상이 강의를 듣고, 창작을 하고, 불로그를 돌아보는것이였는데 오늘은 이 모두를 할수 없게 되였다. 죽은듯 반응이 없는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잠간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정말이지 일상의 것들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응당 있어야 하는 일쯤으로 간주하고 살아왔었다. 그 모든것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지를 생각도 하지 않은채 그냥 향수만 하면서 살아온것이다. 전에 집에 있을 때도 혹시 정전이 되는 때가 있었지만 그냥 번다한 일에서 잠간 해방되여 시름놓고 휴식을 즐기는 시간쯤으로 기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문학원에 와서 컴퓨터 하나에 모든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정전이란 나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 되는가 하는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는 왕왕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것이 중요함을 느끼지 못한다. 전기만이아니라 가족의 사랑, 친구의 우정, 동사자의 관심 등 모든것을 그렇게 당연한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안해가 3일째 전화가 없기에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있는게 아닌가싶어 어제 밤 집에 전화를 했었다. 안해의 말이 글쓰는데 방해가 될것같아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것이다. 전화받는 시간이 얼마나 든다고 그러느냐 했더니 전번날 전화했을 때 내가 글을 쓰고있다며 “일 없으면 그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더라는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날 한창 작품에 빠져 글을 쓰는데 안해가 전화를 걸어와서 큰아들 민이가 기말시험을 친 이야기며 작은아들 성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며 장모님이 요즘 마작운이 붙지않아 가슴앓이를 한다는 이야기며를 늘여놓기에 급한 마음에 “그만!”하고 전화를 끊었던 생각이 난다. 아마도 안해는 내가 자기의 전화를 부담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3일째 전화가 없으니 그립고 기다려지는 안해의 전화, 역시 나는 저녁마다 걸려오는 안해의 전화를 받으며 전화선을 타고 오는 그 진한 감동을 느끼지못했고 그 소중함을 몰랐던것 같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노래말이 떠오른다.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때임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있는것에 감사해 할 줄을 알며 살아야겠다. 고맙게도 5시에 온다던 전기가 3시가 좀 지나자 왔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것 만치나 기쁘다.
26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댓글:  조회:2154  추천:0  2010-03-11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2007년 7월 6일 (금요일) 로신문학원 후근부에서 컴퓨터관리를 책임진 쑈치가 키보드를 가지고 나의 숙소를 찾은것은 점심 12시 25분경이였다. 쑈치는 얼굴에 가는 웃음을 띄우며 원래의 키보드를 눌러보더니 별 소리없이 들고온 키보드를 바꾸어주고는 역시 얼굴에 살풋이 웃음을 달고 숙소에서 나갔다. 문어구까지 따라가며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와 키보드를 눌러보노라니 가슴속으로부터 작은 감동같은것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제 오후였다. 별 일 없던 키보드가 자판을 누르면 자모가 겹치여 뜨면서 도무지 글을 칠수가 없었다. 혹시나 조작문제인가고 저절로 이것저것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제 점심을 먹으려고 학원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쑈치를 만났다. 그는 식당마당에서 학원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고있었다. 며칠전 학원에서는 7월 하순에 <<작품연구모임>>이 있다면서 목전 국내아동문단에서 베스트셀러로 되고있는 책들을 구매해다가 학원들에게 나누어주겠으니 연구쩨마를 짜서 연구모임에 내놓으라는 통지가 있었던것이다. 맞띄운김에 쑈치에게 키보드가 마사져서 글을 칠수 없다고 했더니 오후에 숙소에 와보겠다는것이였다. 선선히 대답을 하는 쑈치가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되였다. 하지만 어제 오후 3시까지 기다려도 쑈치는 오지 않았다. 볼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면서 볼라니 쑈치는 책을 마당에 펴놓은채로 동료들과 함께 탁구를 치고있었다. 책타러 오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일보러 나갔다 올 때까지도 그는 그냥 탁구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어제 오후 내내 은근히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한강에 물부은 식이됐구나.>> 하고 서운한 생각을 하며 이놈의 키보드를 어떻게 해결할가 하고 속구구를 했다. 오늘 오전 내내 혹시나 하고 쑈치를 기다렸지만 역시 그는 오지않았다. (오지못할 사연이 있겠지.) 하고 좋게 생각을 하면서도 여차여차해서 못 바꾸어 준다고 말 한마디 없는것만은 못내 서운했다. 나는 정말 방법이 없으면 제돈을 내서라도 키보드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아직 쓰지못한 원고가 있었던것이다. <<미운놈 대보름날에 만난다>>고 오늘 점심 식당에서 또 쑈치를 보게 되였다. 이미 기대를 버린지라 전처럼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가름하고 다시 키보드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별 말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에 와서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있는데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일어나 문을 열고보니 쑈치가 키보드를 들고 왔던것이다. 어쩜 컴퓨터관리를 책임진 그가 이 정도 일을 하는것은 당연하다고도 할수 있겠지만, 그래서 왜 안 고쳐주냐고 싫은 소리를 해도 누가 그르다고 하지 않았겠지만 그냥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하고 좋게 생각하면서 기대를 하지 않고있다가 받은 혜택이라 그런지 정말 감동까지 하게 되였다. <<마음을 비우고 살라>>던 선인들의 말씀이 뇌리를 친다. 서로를 리해하면서 좀 더 마음을 비우고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가져본다면 우리는 내내 감동을 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수가 있지 않을가?
25    천년의 감동 댓글:  조회:2380  추천:0  2010-03-11
천년의 감동 2007년 7월 8일 (일요일) 아직도 가슴이 따뜻해 난다. 어제 받은 문자가 떠올라서이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10시가 넘은 뒤, 두고갔던 핸드폰을 찾아 열어보니 그새 친구 권학씨로부터 날아온 문자가 기다리고있었다. <<7월 7일은 천년에 한번 맞을수 있는 길일이니 모든 일이 뜻대로 되라>>는 덕담이였다. 생각밖의 문자를 받고나니 잔잔한 감동이 가슴을 울려주었다. 황권학씨는 나의 직장 1년 선배로서 우리는 1993년부터 함께 일해왔다. 13년을 쭉~ 한 부서에서 일하다가 2006년 봄에 그가 주필판공실 주임으로 발탁되여 우리 부서를 떠났다. 나보다는 다섯살이 어리지만 부서의 선배답게 소리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다가 구멍이 보이면 꼼꼼히 챙겨주어 늘 고맙게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합작하여 만든 많은 프로들이 시청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7년 7월 7일. 참 재미있는 날을 그냥 지나쳐버렸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황권학씨의 문자 때문에 그래도 이 날이 다 가기전에 가슴으로 작은 감동을 느끼며 천년에 한번 오는 길일을 기억하게 되였다. 권학씨의 멋진 모습이 떠오른다.
24    정들면 집 댓글:  조회:2104  추천:0  2010-03-11
정들면 집 2007년 7월 14일 (토요일) 기차에서 내려 리무진뻐스에 앉아 로신문학원으로 들어오며 새삼스럽게도 집으로 오는듯한 편안함이 가슴을 누볐다. <<제법 집으로 오는 느낌이지?>> 옆에 앉은 몽골족 작가 소용에게 한마디 했다. <<어디든 정들면 집인가 봐여.>> 소용이 시무룩히 웃으며 말했다. 정들면 집이라, 어쩜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7월 8일에 사회실천활동으로 산동성 연태를 바라고 떠나서 오늘까지 6박 7일째, 가는 날 밤과 어제 밤을 기차에서 보내고는 내내 3성급호텔에서 그래도 편하게 보냈다고 할수 있는데 어쩜 그새 벌써 심신이 지쳐버린듯, 고작 두어달가량 지내온 문학원의 내 보금자리 - 211호 침실이 그리워 났다. (과연 무엇이 그리웠을가?) 조용히 생각해보면 그새 문학원에서 굳어진 나의 새로운 생활습관이 그리웠을것이다. 말타고 꽃구경식으로 연태시며, 위해시며, 봉래시까지 두루 돌아보고 왔다. 가는 곳마다에서 연해도시의 변화의 숨소리를 듣는듯싶었다. 그 목소리에서 우리민족도 한몫을 크게 담당하고있다는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첫날 연태기차역을 나가 아동문학작가들과의 모임이 잡혀있는 연태10중으로 가는 길에서 수많은 조선글간판을 보았다. 그 간판들이 희귀하게 생각되는지 함께 간 동창들이 무슨 뜻이냐고, 어떻게 읽느냐고 연신 물어왔다. 비록 표기법이 틀린 간판이 대부분이였지만 낯선 도시에서 조선글간판이라는것이 무척이나 친절하게 느껴졌다. <<연태시한국인학교>>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울안에서 한국말로 소리치는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 7월 9일 밤, 위해시 전자호텔앞 바다가, 50대의 민간예인이 잔잔한 밤파도소리를 친구하여 신나게 피리를 불고있었다. 산동성 래일출판사의 환영파티로 거나하게 맥주잔을 기울인지라 동창들은 흥이나서 민간예인을 둘러싸고 이곡저곡 노래요청을 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거들며 조선족작가가 있으니 한국곡을 연주할수 없는가고 물었다. 민간예인은 주저 없이 <<도라지>>를 연주했다. 동창들이 조선춤을 추라며 나를 앞으로 떠밀었다. 그렇잖아도 <<도라지>>곡을 들으며 온몸으로 흥분을 느끼고있던지라 저도몰래 덩실덩실 손발이 움직여졌다. 동창들도 나의 뒤에서 열심히 팔다리를 놀렸다. 저마다 조선춤을 춘다고 성수나 했다. 나의 체격에 춤을 추면 얼마나 잘 추었으랴만 한국을 지척에 두고 위해의 앞바다에서 보낸 그 순간은 이 시각도 조선민족이라는데서 오는 진한 감동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태양을 맞이한다는 성산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가이드가 이곳이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소개를 할 때 진정으로 무궁화의 향기를 피부로 느끼는듯싶었다. 아직도 길에서의 피곤이 풀리지 않은 상태, 길에서의 에피소드들이 쪼각쪼각 머리를 스칠뿐이다. 조용히 사색의 갈피를 더듬고 지난 일주일간의 감동을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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