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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최동일 성장소설집-아직은 초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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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심여선 (童心如仙) 댓글:  조회:1251  추천:0  2012-04-24
동심여선 (童心如仙)   김혁 (소설가)   아직도 유난히 큰 눈망울에서 소년같은 숫기와 동심을 읽어낼수 있는 최동일씨, 그가 신간을 펴냈다. 중편성장소설집 《아직은 초순이야》. “빨간것”, “운무의 저쪽”, “아직은 초순이야”, “선녀를 찾아주세요”, “노란것” 등 5편으로 무어진 작품집은 작자의 창작근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편 또 게으름없이 아동문학에 혼신을 던지고있는 작자의 창작자세를 보여주고있다. 최동일씨는 1965년 화룡현 룡문촌에서 출생했다. 간간이 잡지들에 수록되는 옛말에 현혹되여 시간만나면 잡지를 뒤적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싶다는 충동 하나로 필을 들어 첫 아동소설 “나의 동생”을 연변인민출판사 《시내물》 제3호에 발표하던때가 16살, 초중 3학년시절이였다. 그때로부터 문학은 그에게서 생각만해도 감동이 느껴지고 가슴 떨리는 존재였다. 1982년 10월, 최동일씨는 중국인민해방군 81250부대 입대하여 7년간 복역했다. 부대생활이라면 매서운 군기의 닦달질에 매인 험지라 생각되겠지만 매사에 열씸인 최동일씨는 그곳을 인생의 또 하나의 도장으로 간주하고 군복을 입었다. 그 진국인 생활자세는 지금도 퇴역전우들이 외우곤한다는 “김치사건”을 만들어냈다. 신병시절의 어느날, 련장이 최동일씨를 불렀다. 그리고 명령을 내렸다. 단시일내에 배추김치 5천근을 담그라는것이였다. 최동일씨가 눈을 휘둥그레 키우자 련장이 말했다. “널 내놓고 누가 배추김치 5천근을 담글수 있어?” 단 김치를 즐겨 먹는 조선족이라는 신분이 아닌, 매사에서 보여주는 진지함때문에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게된 최동일씨는 겁없이 그 일에 도전해나섰다. 전련의 60여명 병사들을 휘동하여 짜장 “김치담그기 전역”에 나섰다. 첫날에는 통배추 5천근을 다듬었다. 잘 다듬은 통배추를 큰 오지독에 넣고 통소금을 듬뿍 뿌린후 통배추가 잠길수 있을 때까지 물을 붓고 그 우에 물통에 물을 담아 짓눌러놓았다. 엄마가 하는것을 어깨너머로 배운대로 초절이를 한것이였다. 다음날은 “마늘까기”전역이였다. 깐 마늘만 해도 큰 대야로 두개나 되였다. 세번째날 오후 마늘을 찧고 거기에 고추가루며 맛내기며 다진 사과즙이며 사탕가루며를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5천근의 배추김치는 독을 열기도전에 맛있다는 소문이 련대는 물론 전영에 퍼져나갔다. 며칠후 련대에서는 배추김치잔치가 펼쳐졌다. 소문을 듣고 영장과 교도원도 동참하여 김치값을 올려주었다. 그 겨울, 최동일씨의 “걸작”인 배추김치는 전우들이 주말이나 명절이 되여야 맛을 보는 련대의 명물로 되였다. 최동일씨의 참된 일본새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힘든 병열생활중에서도 문학에 대한 최동일씨의 꿈은 이어졌다. 아무리 지쳐도 하루에 책 50페지 읽기와 한어단어 20개를 암송하기는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쓰기로부터 시작하여 시요, 수필이요, 소설이요 닥치는대로 써보았다. 병영에서 9시에 전등을 끄면 복도에 나와 책을 읽었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12시가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이면 기상시간 먼저 5시에 일어나 련대의 마당도 쓸고 취사반을 도와 남새 다듬질도 해주었다. 그사이 그의 수필이며 벽소설이며 하는것들이 잡지와 신문에 몇편 발표되였다. 그 노력을 보아내고 련지도부에서 그를 련대통신원으로 제발시켰다.” 이렇게 힘든 부대생활속에서도 대학교 통신공부를 원만히 끝마쳤고 중국인민해방군 제64군의 “자습인재기준병”의 영예까지 지니게 되였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힘들게 달려온, 그러나 또 너무도 삶에 충실했던 7년간의 군인생활이였다. 1989년 6월, 최동일씨는 군영생활을 마치고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 1993년 6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 3월부터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주임직을 맡아하면서 2007년 11월까지 10여년간 붙박이로 어린이들을 위한 텔레비죤프로를 제작해왔다. 25살의 피끓는 청춘으로 연변인민방송국 청소년부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최동일씨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하기에 어린이들이 노고지리처럼 재깔이며 뛰노는 교정을 찾아가는것이 그처럼 신날수가 없었고 어린이들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앉아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를 지켜보는 것이 그처럼 좋을수가 없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조동한 이듬해 그는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을 촬영하기 위해 제작일군들과 함께 수십명의 어린이들을 휘동하여 장백산에 올랐다. 신참기자로 제작팀과 함께 장백산에 오르게 된 그는 명실공히 어린이들의 생활을 책임진 “보모”였다.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촬영을 돕던중 어느날 갑자기 한 어린이가 눈이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살펴보니 벌겋게 충혈이 된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두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해 여름 어린이들속에서 눈이 부어오르는 전염병이 돌고있었던것이다. 이튿날부터 그 증상이 애들속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촬영은 계속해야겠고 애들은 눈을 뜰수 없다고 야단들이고... 하루에도 몇차례씩 어린이들의 눈을 소독해주고 약을 넣어주고는 또 아픈 어린이들을 업고 촬영현장으로 가군했다. 3박 4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날부터 최동일씨의 눈도 벌겋게 부어오르고 진물이 흘러 병원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린이들과 몸과 마음과 아픔까지 같이한 그 나날들이 있었기에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은 전국 제8회 텔레비죤프로 “금마상”평의에서 어린이프로 1등상을 따낼수 있었고 그번 촬영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묶은 다큐 “장백산을 찾아가요”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그는 어린이프로기자로 오래동안 뛰여온 자신을 기꺼이 “보모”라고 부르기 좋아한다. 그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주임으로 있는 기간에 개설한 중, 고중생들을 위한 지식, 오락성 프로그램 “청춘스타트”는 지금까지도 이어져내려와 청소년들과 여러계층 시청자들의 애대를 받고있다. 사업에서 거둔 성과로 그는 2004년에 제4회 “전국미성년보호선집사업일군”의 영예를 안았다. 다년간 청소년사업의 전초에서 뛰면서 최동일씨가아이들을 위해 펴낸 저서로는 아동소설집 《민이의 산》, 산문집 《엄마의 별》,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가 있다. 근년래 최동일씨는 청소년들의 성장기 진통에 작가의 시각을 맞추어 “운무의 저쪽”, “선녀를 찾아주세요”, “아직은 초순인가봐”, “빨간것”, “노란것”등 중편성장소설을 펴냈는데 중학생독자들속에서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있다. 근년래 량산으로 쏟아내는 그의 창작물은 지금까지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바쳐 폭넓은 령역을 감당하면서 그가 보여준 아동문학창작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근면성에서 기인된것일터이다. 그가 창작한 아동소설 “강변에 심은 꿈”은 제2회 연변작가협회 “화림신인문학상”을, 아동소설 “백조와 부체육위원”은 제9회 “백두아동문학상”을, 아동소설 “진달래꽃 필 때까지”는 제17회 “한국계몽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일전 그가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에서 연수하던 기간 밤을 밝혀 창작한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는 중국조선족 아동문단에서 10여년간 장편소설이 창작되지 못했던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제8회 “석화컵” 연변작가협회문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창작한 아동소설 “진달래꽃 필 때까지”는 중국 새아동문학계렬선집 《특소설(特小说)》에도 수록되였다. 중국 새아동문학계렬선집은 1960년부터 1979년 사이에 출생한 106명 우수한 청년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한것인데 소설, 동화, 우화, 산문, 동시 등 쟝르 총 6권으로 묶어졌다. 전문가들은 이 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중국 제5대 아동문학작가군의 집단모습이며 목전 국내에서 활약하는 아동문학 중견작가들의 창작수준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평하고있다. 2007년, 최동일씨는 연변작가협회 아동문학창작위원회 주임이라는 중책을 짊어졌다. “조선족아동문학작품을 중국 주류문단에 번역소개하는것이 급선무이다. 이는 우리 아동문학시장을 개척하고 창작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아주 유조하다.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우리의 작품질을 향상시켜야 하며 아동문학작가들의 중국 주류문학과 접목하려는 피타는 몸부림이 필요하다.”고 아동문학의 진로에 대해 분석, 그 일환으로 일련의 활동들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고있다. 해마다 아동문학창작 및 연구모임을 조직하고 6.1절을 계기로 “어린이들과 함께 하는 동시랑송모임”, “아동문학작가 봄맞이 한마당”과 같은 친선모임을 조직하여 아동문학작가들간의 련계를 강화하고 우정을 돈독히 하게 하고있다. 그러한 노력으로 2008년 아동문학창작위원회는 연변작가협회 선진창작위원회로 당선되였다. 올해부터는 아동문학작가 후비력랑 발굴에 눈길을 돌려 관련활동을 벌릴 타산이다. 그와 함께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의 창작스케줄도 빼곡히 잡고있다. 그는 중편성장소설창작을 계속 주요한 창작테마로 잡고 써내는 한편, 변혁기 조선족군체의 새로운 대이동속에서 부모들이 외국이나 대도시로 진출한뒤 남겨진 편부모 청소년들의 곡절 많은 성장이야기를 다룬 장편르포를 기획하고있다. 중국 새아동문학계렬선집 제3집《특소설(特小说)》의 행간에 그는 이렇게 자기의 문학주장을 적었다. “나의 민족, 나의 일터, 나의 사랑하는 청소년친구들이 곧 나의 프로이고 나의 소설이다. 청소년들의 성장이야기는 그대로가 한부의 소설이다. 청소년들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진실하게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그들의 현장감 넘치는 성장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나의 소설이 진정 조선족청소년들의 건실한 성장을 위해 엮어질 때라야만이 나는 명실에 부합되는 조선족 아동문학가가 될것이고 조선족 청소년들의 믿음직한 친구가 될수있을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창작주장을 그는 말없이 실천에 옮기고있다. 그의 근작들을 보면 이 시대 소년들의 고민에 앵글을 맞추고 그 고민을 작품에서 풀어보이려고 시도하고있다. 로무송출과 도시진출에 흔들리는 오늘날 조선족사회상을 보여주며 그 아픔속에서 힘들게 커가는 소년, 소녀들의 고민과 사색을 투영시키고있다. 또한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본성으로서의 동심이 세상에 어떻게 휘둘리는가를, 혹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를 보여준다. 이러한 성장이야기가 역시 이번 그의 창작집에서의 주류를 이룬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현실의 고통에 초연한 존재가 아니다. 더우기 흔들리는 조선족공동체속에서 함께 하고있는 오늘의 아이들에게는 여느시기의 아이들보다 더 멀미나고 험난한 현장이 주어지고있다. 이런 아이들의 생활을 이래도 웃고 저래도 예쁘고 하는 식으로 해석해버리면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아이들을 그려 보일 수가 없다. 때문에 최동일씨의 이번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은 마냥 밝은것만은 아니다. 현실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리지 않고 두루 비추어 보인다.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사회상이 그대로 옮겨진 교정내의 경쟁에 지치고 하학후 부모의 자리가 비여있는 가정에서 또 이리저리 치이다보니 맑았던 아이들의 눈망울에는 어느새 피곤의 때가 끼고 머리속에는 순수는 커녕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최동일씨의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춥고 힘든 현실속에서도 나중에는 밝게 웃는다. 절박한 현실도 비극적인 현실도 이 작가를 통하는 순간 맑게 걸러지고 정화된다. 현실을 넘어가버리는 락천이 아닌 현실에 탄탄하게 자리한속에서 락천적인 전망을 작품들은 그려보이고있다. 아이들의 심리를 곧바로 잡아내는 관찰력과 묘사로 이어진 사실주의정신이 그의 작품들에 내재해 있다. 비록 어떤 작품의 구성이나 갈등이 그다지 탄탄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지 못한 부족점이 보임에도 시대상황과 련관시켜 읽을수 있는 편편의 작품이 그 허점을 보강해 준다. 그리고 그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이 무양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념원하는 작가의 소망이 작품집의 행간마다에 가득하다. 세상을 너무나 잘 알아버렸기때문인것일가.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대신 어린 시절의 순수를 잃어간다. 몸은 어린시절 그때로 돌아갈순 없지만 대신 문학이라는 이름의 타임머신을 타고 마음만이라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보는건 어떨가. 어린시절 우리의 초상에서 잃어버렸던 순수를 찾을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렇게 우리는 가끔 동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그리스의 석학 소크라테스는 일찍 이렇게 력설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듣는 사람의 경험에 맞추어 말해야만 한다. 례를 들어 목수에게 이야기할 때는 목수가 사용하는 말을 써야 한다.” 우리의 학교가 줄고 부모들과 떨어져있는 편부모 자녀들이 늘면서 아이들도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혁기의 진통을 함께 겪고있는 오늘날 지성과 량지가 있는 어른들의 아이들과 동조한 눈높이가 더욱더 수요되는 시점이다.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경구가 있다. 아이들의 마음은 신선과 같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을 위한 사업에 투신하고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작품창작만을 고집하는 최동일씨, 소재면에서 편향이 없이 시종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깊이 끌어안고 필봉을 달리고있는 최동일씨, “동심여선”의 심태를 내내 잃지말고 사업과 창작에서 일가를 이루어내기를 기대해 본다. 
6    노란것 댓글:  조회:1237  추천:0  2012-04-24
      령이는 “득―” 하고 성냥을 그었다. 하지만 성냥개비에 누기가 들어서인지 아니면 손이 떨려 성냥개비를 제대로 부시에 치지를 못해서인지 기대하던 불꽃은 일지 않았다. 맹랑하게도 첫번에 불꽃을 얻지 못한 령이는 괜히 가슴이 후둑후둑 떨리기 시작했다. (웬 일일가? 왜 성냥개비에 불이 일지 않을가? 그 노란것을 가져오지 않아서가 아닐가? 노란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것일가? 혹시 아버지가 가지고 간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무슨 불상사라도… 아니 그럴수가… 먼저 이것들이라도 태워버리는거야, 그래 태우는거야…) 령이는 괜히 삼검불처럼 엉켜지려는 사색의 끈을 좁혀 쥐고 온몸의 신경을 성냥가치에 집중하며 다시 성냥개비로 부시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냥개비는 부시종이를 쭉 찢으며 빗나가더니 툭하고 허리가 불거지고 말았다. (안좋아, 성냥개비에 불꽃이 일지 않다니? 이건 분명 좋은 징조가 아닐거야. 아직도 엄마의 혼이 나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질을 치고있는지도 몰라. 과연 그런것이라면… 그 노란것은 과연 어디에 있는것일가?) 령이는 더 이상 생각을 굴리고싶지 않아 성냥을 쥔 오른손을 들어 내려오지도 않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망망한 밤하늘 여지저기에서 껌뻑이는 별들이 어지럽게 보여왔다. 그 별들 사이로 뿌연 쪼각달이 어디론가를 향해 미끌어지듯 흘러가다가 먹장구름에 가리워버렸다. 아직은 여물지 못해서 그렇다할 빛을 주지 못하던 쪼각달이였지만 정작 구름에 가리우니 주위가 캄캄하게 변한듯싶어졌다. 령이는 쪼각달이 빨리 구름속에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쪼각달이 구름속에서 빨리 얼굴을 내밀어야 성냥가치에 불꽃이 일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아리숭하게 머리를 쳐들고있었다. “호―” 령이는 실날 같은 한숨을 내쉬고는 쳐들었던 머리를 맥없이 내리뜨리며 자기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쪼각달이 구름에 가리워 주위가 캄캄하다고 생각되였지만 그래도 멀리서 비쳐지는 가로등불빛에 땅우의 물체를 헤아려볼수가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되였다. 자기의 어깨를 타고 앉은 엄마의 혼이 발밑에 무둑하게 쌓아놓은 돈을 볼수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갑갑한 마음을 달래주었던것이다. (그래, 엄마는 지금쯤 종이돈을 향해 달려오고있을지도 몰라. 성냥을 그어 종이돈에 불만 붙이면 엄마는 마음껏 종이돈을 안고 훨훨 천당으로 올라갈거야. 그러면 나는 엄마의 령혼에서 해방될수 있을것이고 아버지는 그 깊은 술바다에서 헤여나올수가 있을거야. 그래, 한개비면 돼. 많이도 필요없이 꼭 한 개비만 제대로 그으면 되는거야. 그 한개비의 파아란 불꽃이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어 놓지를 않는 엄마의 령혼을 위로해서 천당으로 올려보낼거야. 천당으로 가는 엄마의 뒤길에 그 노란것도 던져주면 엄마는 이승에서의 모든 번뇌를 던져버리고 훨훨 날아갈수있을거야. 그러면 모든것이 좋아질거야…) 령이는 “후욱―” 하고 길게 들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성냥개비를 꺼내들었다. 령이는 성냥개비를 부시종이에 치려다말고 머리를 쳐들었다. 구름송이에 가리워 얼굴을 내밀것 같지 않던 쪼각달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가던 길을 재촉하고있었다. 령이의 입가에 가는 실웃음이 피여올랐다. 령이는 성냥개비를 득하고 부시종이에 쳤다. 순간 빨간 불꽃이 팍 하고 피여났다. “호―”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빨간 불꽃은 승무를 추는 무당의 손에 들린 빨간 부채처럼 너울너울 춤을 추고있었다. 령이는 허리를 굽히며 날름거리는 불꽃을 조심조심 발밑에 무져져있는 빨간 종이돈에 가져다댔다. 종이돈에서 불꽃이 튀더니 삽시에 확하고 피여올랐다. 잠간 새에 불꽃은 종이돈무지를 감싸 안으며 뻘건 불룡을 만들어 하늘에 올렸다. 령이는 불룡으로부터 한발뒤로 물러서서 기둥을 이루며 솟아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령이의 얼굴이 불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령이는 두손을 합장하여 쥐고 날름거리는 불룡을 바라보며 열심히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떠나가요, 떠나가요 울 어머니 떠나가요 억울한 일 힘든 일들 다 걷어 안으시고 이 돈으로 로자 삼아 태평세상 찾아가요 누가 배워준적도 없고 어디서 들은적도 없는 노래였다. 그런 노래가 그렇게도 거침없이 입에서 술술 풀려나오는것이 령이로서도 놀랍게만 생각되였다. 노래소리가 익어갈수록 령이의 기분은 날듯이 가벼워졌다. 령이는 합장하여 쥐였던 두손을 풀어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사위는 익어가고 화염을 토하던 불꽃은 사그라졌다. 령이는 두눈을 꼭 감았다. 머리속에서 아물아물 뭔가가 정처없이 하늘로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아득한 머리속 저쪽 끝에서 거친 노래소리가 날아왔다. 한강수야 깊으나 옅은 물에 한강선 띄워놓고 얼씨구 놀아나 보세 령이는 꼭 감았던 두눈을 반짝 떴다. 방금까지도 가벼워서 날것 같던 기분이 살얼음우에 놓여진듯 섬뜩해졌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한강수야 를 부르며 령이를 향해 다가오고있었다. 허허허… 우리 령… 령이구나. 네가 여기서 웬 일이냐? 웬 일루 여기 있느냐? 아빠를 기다리는거냐? 그래그래… 딸이 있어야 한다니까, 한강수야 깊고 옅은 물에… 아버지는 또다시 “한강수야”를 불러댔다. “아버지!” 령이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단말적으로 소리쳤다. 그 소리에 아버지는 불르던 한강수타령을 끊고 입을 떡 벌린채 령이를 바라보았다. 령이의 두볼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계집애가 왜 소리는 지르고 란리야? 애비가 죽었어?” “왜 이래요? 왜 이렇게 살아요?” “뭐야? 이년이 미쳤나? 애비하구 웬 말대답질이냐? 간이 부었구나, 배밖으로 밀밀 나오는구나. 에익―” 아버지는 령이를 때리려고 주먹을 꼬나멘채 비칠거리며 령이를 향해 다가왔다. 령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아버지 쪽으로 다가가며 이사이로 한마디한마디 씹어뱉었다. “왜 이래요? 어디 가서 또 이렇게 술을 마셨어요?” “그래 ,마셨다. 속이 타서 강술을 마셨다. 안돼? 의견 있어?” “아버진 안보여요? 나는 살자구 별짓을 다 하고있는데. 아버진 왜 이렇게 살아요?” “하, 이년이 정녕 미쳤구나.” 아버지는 령이를 향해 후둘후둘 떨리는 손을 쳐들었다. “그래요. 내가 미쳤어요, 미쳤다구요.” 령이는 쓸어질듯 다가오는 아버지를 피하며 피터지게 소리를 쳤다. “쌍년… 썩 가서 죽어버려!” 아버지는 끝내 령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래요. 죽을게요. 내가 죽는다구요!” 령이는 아버지의 팔을 확 잡아채서 한옆으로 밀쳐버리고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앞으로 뛰여가기 시작했다. 저쪽으로부터 택시가 쏜살같이 달려오고있었다. 운전수가 달려오는 령이를 보았는지 빵빵 하고 경적을 울렸다. 하지만 령이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길에 뛰여들면서 분명 뭐라고 소리치고있었다. 모음과 자음을 감지할수 없이 기괴한 소리였다. 소리에 엄마라는 부름이 섞여있는듯 했다. “삑―” 택시가 힘들게 급정거를 하고있었다. 령이의 몸은 택시에 부딛쳐 기둥 뽑힌 나무처럼 넘어졌고 어둠속에서 검붉은 피가 천천히 땅우로 흘러내렸다. “령이야, 우리 같이 죽자. 죽어 버리자. 무슨 락을 보자구 이렇게 사냐. 령이야―” 령이는 시장바닥이라도 되는듯 웅성웅성 하는 속에서 분명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있었다. 그 소리에 령이는 천근같이 무거운 눈을 힘들게 떴다. 첫눈이 내린 허허벌판처럼 하얀것이 망막에 비쳐들었다. 령이는 눈이 시리다고 생각되였다. 그래서 다시 두눈을 감고 어금이를 꽉 깨물었다. 전신으로 모진 동통이 느껴졌다. 집에서 한겨울 날 시루떡을 쪄낼 때 가마에서 푹푹 뿜어대던 뽀얀 김 같은것이 서리서리 머리속을 감돌고있었다. 령이는 그 속에서 헤여나오고싶다고 생각되였다. 령이는 힘겹게 헉헉 숨을 톺았다. 머리가 빠개지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령이는 애써 오른 손을 들어 머리로 가져갔다. 분명 손이 머리에 닿은듯한데도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머리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감싼 보자기를 만지는 느낌이였다. 머리속에 꽉 찬 뽀얀 김 같은것을 뚫고 “뭘가?” 하는 막연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령이는 애써 천근같은 두눈을 다시 떴다. 역시 첫눈에 허허벌판 같은것이 보여지더니 차츰 그 가운이 벗겨지며 하얀것의 실체가 망막에 박혀들었다. 천정이였다. 실날 같은 금이 가닥가닥 나있는 하얀 천정이였다. (여기가 어딜가?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는것일가?) 하얀 백지우를 달리는 개구쟁이의 연필끝처럼 삐뚤삐뚤 두서없는 생각이 머리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령이는 몸을 일으켜 구경을 보고싶었다. 생각 같아서는 가뿐하게 일어설수 있을것 같던 몸이 천근 돌을 달아맨듯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령이는 온몸으로 통증을 느끼며 가까스로 아래입술을 사려물었다. “령이야, 우리 같이 죽어버리자. 이렇게야 어찌 살겠니? 혼자 죽으려 해도 네가 눈에 밟히지, 아이구― 내 팔자야― 아이구― 령이야―” 잘 부르지도 못하는 석쉼한 목소리의 타령 같은 소리가 다시 어지럽게 울렸다. 그 소리는 눈덮힌 허허벌판을 달리는 달구지소리처럼 불안스럽게 령이의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누구세요, 누가 절 불러요? 여기가 어디예요?” 령이는 꽉 막혀버린듯한 성대에 힘을 주어 높게 소리쳤다. “깨났구나. 이 계집애야?” 피곤기가 섞였지만 무딘 칼날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같다고 생각되였다. 령이는 목소리에 힘을 담아 또박또박 소리쳤다. “누구예요? 여기가 어디냐구요?” “이년아. 정말 죽지 못해 환장을 한거냐? 차라리 이 애비를 잡아먹지 그러냐? 이 곰통같은 년아.” 차츰 날을 세워가는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수염투성이의 거친 얼굴이 령이의 눈앞에 다가왔다. “아버지…” 령이는 신음비슷하게 소리쳤다. 아버지의 얼굴이 차츰 또렷하게 령이의 눈확에 안겨들었다. 턱에 말라붙은 느침자국이 우묵하게 들어간 아버지의 눈귀에 말라붙은 누런 눈곱과 조화를 이루며 지치고 힘든 로숙자의 몰골을 연출하고있었다. 초점 없는 아버지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디루룩 구을다가 령이의 얼굴에 와서 박혔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는 반쯤 남은 술병이 들려져있었다. “아버지…” “이년아, 네년이 죽는가 했다. 저레 죽어버리지 왜 살아난거냐? 내 원, 이년을 병원에 데리고 오지 말것을…” 아버지가 신경질을 가득담은 목소리로 문안인지 욕인지를 가릴수 없게 웅얼거렸다. 령이는 그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두눈을 꼭 감아버렸다. (여기가 병원이라구? 그럼 내가 병원에 누워있는건가, 무슨 사고라도 난것일가? 노란것은 어디에 있을가?) 령이는 애써 기억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김서린듯 뽀얀 머리속을 헤집었다. 4년전 령이가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어코 령이를 마음껏 공부하게 하겠다며 시골의 집을 처분하고 무작정 연길로 올라왔었다. 시골의 모든것을 포기해도 아깝지 않을만치 령이의 공부실력은 훌륭했던것이다. 아버지는 연길에 와서 먼 친척의 도움으로 건축공사장을 뛰였었다. 하지만 내지에서 밀려나온 민공들 틈에 끼여 건축현장의 막로동을 한다는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느 한번 현장에서 자그마한 일로 내지에서 온 민공들과 멱잡이를 한후부터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한다며 건축현장을 나가지 않았다. 공부를 못하고 배운 재간이 없는 아버지는 며칠이나 고민을 하다가 삼륜차를 사가지고 짐실이를 시작했다. 맡아 놓고 하는 일이 아니여서 그것도 입살이를 하기 힘들었다. 대소한 때는 온 하루를 나가 추위에 떨어도 5원 벌이를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같은 짐실이군들과 함께 상점에서 몸을 녹인다고 다마톨이를 했다. 안주도 없이 해바라기씨 한줌을 앞에 놓고 강술을 마시면서 소태 같은 일생을 통탄할라치면 술이 술을 불러서 일어날 때 쯤이면 걸음도 옮겨놓기 힘들었다. 몇번인가는 삼륜차마저 상점앞에 두고 왔다가 이튿날에 가서 찾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껌 씹듯이 잘근잘근 씹어대군 했다. 능력도 없는 남자, 제 노릇도 못하는 남자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평가였다. 처음엔 아버지도 죽여줍소사 하고 머리를 숙이고있던것이 어머니의 욕설이 심해질수록 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잔사설이 시작되기만 하면 아버지가 먼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나중에는 손찌검까지 했다. 령이는 차츰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자주 술을 마셨고 마실 때마다 어머니와 전쟁을 했다.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도 차츰 두려움을 느꼈던지 멀리서 아버지의 발자국소리만 들리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것처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불을 벗겨버리고 다가앉으며 “내가 또 술을 마셨다. 이년아, 왜 욕을 안하냐?” 하고 선창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한국에라도 나가 돈벌이를 하겠다며 첫패로 실무한국어능력시험을 쳤다. 아버지에게는 한국으로나가는것이 유일한 구명환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첫 시험에서 아버지는 점수가 요구선에 도달하게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앞길은 그 무엇에 꽉 막혀버린것인지 두번이나 추첨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두번째로 자신이 추첨 못되였음을 확인하던 그날 밤 아버지는 또 어디 가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여 집에 들어왔다. “아이구, 내 팔자야, 난 어떻게 살라오.” 아버지는 문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아버지를 부축하여 구들에 올리려고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버지는 활 풀려버린 눈을 거슴츠레 뜨고 한참이나 어머니를 올려다보더니 흐흐흐 히스테리적으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구 어서 올라 가세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재촉에도 끔쩍하지 않더니 갑자기 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알았다. 내가 왜 이렇게 재…재수 없는지를… 네년의 이…이마에 난 사…사마귀가 마귀처럼 내 앞…앞길을 막는게로구나. 흐흐흐…” 그 말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급기야 이마에 난 사마귀를 움켜쥐였다. 어머니도 어느때 났는지를 모르는 사마귀였다. 맘이 편할 때면 참 없어도 될것이 보기 싫게 났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아버지도 언제 한번 “언제 났소?” 하고 묻지도 않던 사마귀였다. 그 사마귀를 아버지가 거들어 자기의 앞길을 막는다는것이다. 령이도 아버지의 그 말에 무척이나 신경이 씌였다. (정말일가? 간대로사 사마귀때문에 집안 일이 안 풀릴라구? 아버지가 취해서 하는 소리겠지.) 령이는 상심해서 앉아있는 어머니를 위로하자고 입을 열었다. “엄마, 신경쓰지 마시요. 술먹은 사람이 헛소리를 치는걸 가지구.” 그때 어머니는 살 맞은 토끼처럼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연신 손으로 이마의 사마귀를 만지작거리고있었다. “에잇, 때…때려 죽일 년, 에…에잇, 마귀 같은 년…” 아버지는 령이에게 질질 끌려 구들에 올라오면서도 입으로는 연신 어머니에게 욕지걸이를 해댔다. 어머니의 이마에 있는 사마귀는 그렇게 아버지의 총알이 되였고 어머니는 사마귀에 대한 말만 나오면 정말 총 맞은것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가슴을 조이군 했다. 숨막히는 기분속에서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다. 그날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판을 벌렸다. 아버지가 동네상점에서 술을 마시고있는것을 어머니가 간장 사러 갔다고 보고 집으로 가자고 조른것이 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게 원인이였다. “재수가 없어서. 재수에 옴이 붙은거지. 네년의 그 사마귀가 내 청운을 막은거야, 내 청운을…” 아버지는 술냄새를 팍팍 풍기는 입으로 침방울을 탁탁 튕기며 고래고래 소리질러댔다. 매양 그러하듯이 어머니는 살 맞은 토끼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이마에 파란 피줄을 세우고있었다. “보라니까. 봐, 그 사마귀가 온 집안을 말아먹지 않는가구. 나두 잡아 먹구 딸년두 잡아 먹구… 에잇, 마귀 같은 년이.” 아버지는 비칠비칠 어머니앞으로 다가와 후둘후둘 떨리는 손을 들어 어머니의 이마에 난 사마귀를 툭툭 치면서 악담을 퍼부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와닥닥 뛰쳐일어났다. 전에 없던 행동이였다. “이… 이 년이 미쳤나? 뚱포 맞은 미친개처럼 어쩌라구 설치는데?” 아버지가 깜짝 놀라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그래, 내가 죽을게. 네놈앞에 내가 죽어보일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엇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릴것 같았다. 그 서슬에 아버지도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내가 죽을게. 네놈이 혼자 잘 살아봐라. 배터지게 복 누리며 실컷 살아봐라.”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다가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엄마―” 식장앞에 등을 대고 앉아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쟁을 묵묵히 지켜보던 령이가 뛰여일어나 덴겁하여 소리치며 어머니를 쫓아갔다. “놔둬라, 나둬. 어디 가서 뒈지라구 해라.” 령이는 아버지의 악담을 등 뒤로 남기며 젖 먹던 힘을 다해 어머니를 쫓아갔다. 어머니는 머리를 수굿하고 앞을 향해 달리고있었다. 쏜살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장면이였다. 정말 그 대로 뭔가 일이 날것 같았다. 령이는 단말마적으로 소리쳤다. “엄마, 서쇼. 서시요.” 하지만 어머니는 뛰여가던 그대로 달려오는 차를 덮치고있었다. 령이가 차앞까지 뛰여갔을 때 엎어져있는 어머니의 머리밑으로 검붉은 피가 쉼없이 흘러내렸다. “엄마, 엄마!” 령이는 무서운 감도 없었다. “엄마, 왜 이래? 정신을 차려. 엄마…” 령이는 소리치며 어머니의 머리를 들어 한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흰자위만 숨막히게 망울을 덮고있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갔을 때는 어머니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어머니의 액사현장을 두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난 후부터 령이는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고열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어머니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검붉은 피가 눈앞을 덮쳐왔다. 그 피는 흘러서 령이의 젖가슴이며 신다리며를 흥건하게 적시는듯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령이는 으스스 몸서리를 치며 단말마적으로 악악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에는 그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도 그 소리에 놀라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를 화장하고 난 그날 밤으로 아버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던것이다. 그렇게 사흘째 되던 날, 이웃집에 사는 할머니가 조용히 문을 밀고 들어섰다. 이웃집 할머니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령이네 집을 드나드는분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전에 속 탄 일이 있으면 곧잘 할머니를 찾아 아픈 마음을 토로했고 할머니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는 이래라 저래라 하고 충고도 해주었다. 그 며칠 사이에도 할머니는 하루에 서너번씩은 문을 열고 들어와 령이에게 밥을 먹어라, 밖에 나가 바람을 쐬라 하며 여러모로 마음을 써주고 계셨다 “얘야, 아직도 누워있니? 정신을 추슬려야겠는데. 이렇게 넋을 놓으면 쓰겠니?” 그날도 할머니는 구들에 올라오며 따뜻하게 걱정을 해주셨다. 하지만 령이는 할머니를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몸을 움직일수 없었다. 사흘째나 음식을 전페하다싶이 했으니 그럴만도 할 일이였다. 령이는 모든것이 그대로 굳어져버리는듯 함을 느끼며 초점 없는 눈길로 할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할머니께서는 령이의 곁에 다가와 앉은후 가슴우에 놓여져있는 령이의 왼손을 잡아 꼭 쥐여주었다. “애비는 아직 안돌아 왔냐?” “……” “쯧쯧쯧, 세상도 무심하지. 이 노릇을 어찌 하누?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고…”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더니 호주머니에서 노란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얘야,이걸 베개밑에 깔고 자거라.” 할머니는 말씀을 하면서 손에 꼭 쥐고있던 노란 주머니를 령이에게 넘겨주었다. 령이는 그러는 할머니를 목석처럼 쳐다보면서도 손을 내밀어 그 노란 주머니를 받으려고 하지 못했다. 할머니께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얼마나 놀랐을가? 그 못볼것을 그림처럼 똑똑하게 보았을테니… 이걸 베개밑에 깔고 자거라. 그러면 혹시 마음이라도 편해질지…” 할머니는 말씀을 하시며 노란 주머니를 손수 령이의 베개 밑에 넣어주었다. 순간 령이는 온몸으로 전률 같은것이 느껴지며 머리칼이 쭈볏이 솟구치는것 같았다. 령이는 누구에게 멱살이라도 잡혀일어나듯이 움쭐 일어서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뭐예요?” 할머니께서 령이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팥주머니다. 예로부터 붉은 팥이 액을 막아준다 했거든.” “할머니―” 령이는 별안간 할머니의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울어라, 울어. 실컷 울어라.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릴 때까지 실컷 울어라” 할머니는 소리없이 령이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그날 밤 령이는 꿈에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소복단장을 곱게 하고 령이를 향해 달려오고있었다. 그때도 엄마의 머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쉼 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령이는 엄마의 머리에서 흐르는 그 피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게 느껴졌다. 하건만 엄마는 령이의 목을 끌어안더니 령이의 어깨에다 머리를 박으며 어이어이 곡을 했다. 령이는 엄마를 떠밀며 악 소리를 지르다가 깨여났다. 창문으로 비쳐드는 괴괴한 달빛속에서 검은 형체가 눈에 안겨들었다. “악!” 령이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뛰여일어나 스위치를 당겼다. 아버지가 옷을 입은채로 한껏 몸을 옹크리고 누워있었다. 술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어디 갔다가 왔을가?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니가 아버지를 불러온게 아닐가?) 령이는 이런 생각을 굴리며 선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아버지는 꿈에서도 누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는지 웅얼웅얼 하며 손을 저어댔다. 령이는 갑자기 가슴이 턱턱 막혀오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났다. 당금 집 천정이 문어져내릴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령이는 자기가 누웠던 곳을 향해 벌벌 기여가서 베개를 들었다. 이웃집 할머니께서 베개 밑에 넣어준 노란 주머니가 보였다. 령이는 주머니를 주어 가슴에 꼭 가져다 대고 두눈을 꼭 감았다. 눈앞에서 노란 오각별 같은것들이 란무하더니 어디론가 동동 떠가는듯한 환각이 생겼다. 령이는 두눈을 감은채로 날아가는 오각별을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저도 모르게 후- 하고 긴 한숨이 터져나갔다. 가슴이 뻥 뚫리는듯싶었다. 령이는 두눈을 번쩍 떴다. 꼬부리고 누운 아버지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푸푸 입김을 뿜어대는 아버지의 입가에서 걸찍한 느침이 줄줄 흘러내리고있었다.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도 머리속을 치고 들어왔다. (나의 몸에서 이 사람의 피가 흐르고있구나. 그런데 난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싫고 무섭게만 느껴지는것이지?) 령이는 생각하면서 가슴에 가져다 붙혔던 노란 주머니를 내리워 두손으로 꼭 감싸쥐였다. 손바닥이 따뜻해나는것 같았다. 그 느낌때문인지 얼음물에 잠긴것처럼 뼈속같이 얼어들었던 가슴속 밑자락이 따뜻해지는것 같았다. (지금쯤 엄마는 어디에 계실가? 정말 저승이라는것이 있을가? 이승에서는 아버지때문에 마음고생도 많이 하시더니 저승에 가서는 부디 행복하게 살으셨으면…) 령이는 생각을 하면서 소복단장을 한 엄마가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는 환영을 보고있었다. “령이야,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아라. 아버지도 힘들게 사는분이다. 원망 말구 아버지에게 효도해라. 아버지는 유일한 너의 가족이니까.”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자냥스러운 목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령이는 으쓱 몸서리가 쳐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엄마―” 령이는 소리치며 두눈을 번쩍 떴다. 아버지는 추위를 느끼셨던지 왜소한 몸을 더욱 옹크리고있었다. 령이는 발딱 일어나 아버지의 머리에 베개를 베워드리고 이불도 덮어드렸다. 아버지는 령이의 체취를 느꼈던지 손을 흔들며 뭐라고 웅얼거리더니 잠잠해졌다. 령이는 베개우에 놓았던 노란 주머니를 다시 주어들었다. (하느님, 하느님이 정말 계신다면 울 아버지가 마음을 잡게 해주세요. 나쁜 술버릇을 던지고 나와 함께 별고없이 편하게 살게 해주세요.) 령이는 노란 주머니를 싹싹 쓸면서 보지도 못한 하느님을 향해 진심으로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몸만 쏙 빠져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어디로 갔을가?) 집이라 해야 손바닥만한 단칸방이라 어디 찾아볼 곳도 없었다. 령이는 발딱 자리를 차고 일어나 신을 찾아 신고 출입문을 열었다. 혹시 마당에라도 나가있는지 찾아보고싶어서였다. 마당을 다 돌고 뒤울안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아버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살아진 아버지가 아리송하게만 생각되였다. 혹시 꿈이라도 꾼것이 아닐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이 쏙 빠져나간 깃이 들려져있는 이불은 분명 어제 밤에 아버지가 왔었음을 말해주고있었다. 령이도 아버지가 엄청 술을 많이 마셨댔고 손을 저으며 뭐라고 웅얼거렸고 잘 튀겨진 새우처럼 몸을 옹송그리고 누워있던 기억이 생생했다. (어제 밤에 그렇게 하느님께 소원을 빌었건만 아버지는 또 나가셨구나. 그래, 내 정성이 부족했던가? 내 정성이 부족해서 아버지가 아직 마음을 잡지 못하신걸가?.) 착잡한 생각이 가슴을 괴롭혔다. 령이는 집안으로 들어가 베개밑에 곱게 넣어놓았던 노란 주머니를 찾아들었다. 긴 밤을 베개밑에 놓여져 있어서였던지 노란 주머니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 이거야. 이 주머니가 더 용해지게 다시 만드는거야, 엄청 용해지게 해서 아버지를 집에 잡아두는거야.) 령이는 노란 주머니를 손에 들고 급히 문을 나섰다. 마침 이웃집 할머니도 마당에 나와 손채양을 하고 서서 빨갛게 타오르는 일출을 바라보고계셨다. 전에도 몇번 본적이 있는 그림이였지만 그때는 무심히 흘러버린 령이였다. 하지만 이날은 할머니의 얼굴이 여간만 경건해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불타는 일출에서 뭔가를 찾아 내려는듯한 신비감까지 어려 있었다. 령이는 할머니를 향해 발볌발볌 다가갔다. 할머니는 령이의 접근을 감지하지 못하셨는지 손채양을 하고 선채로 요지부동이였다. 령이는 미동도 없이 할머니를 지켜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 “너, 나왔구나. 그래, 잘했다. 이렇게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야지.” 할머니께서 손을 내리우며 머리를 돌리더니 반색하여 령이를 맞아주었다. 령이는 입을 열지 못하고 할머니를 빤히 쳐다보며 머뭇거리기만 했다. “얘야, 너 내게 무슨 할 말이 있구나. 주저하지 말고 어서 해라. 이 할미가 다 들어줄거니까.” 령이는 자신없어 머리를 푹 숙이고 애모쁘게 발끝으로 땅을 차다가 큰 결심을 내린듯 천천히 머리를 들며 잦아드는듯한 목소리로 “할머니―” 하고 불렀다. “왜 그러니? 얼른 말해보라니까. 할미하구 뭐 못할 말이 있겠냐?” “할머니, 노란 주머니를 더 크게 용하게 만들어 주면 안됨까?” 령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며 기대에 찬 눈길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시는듯 령이를 바라보더니 호―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주머니라니? 오― 그 노란것을 말하는구나. 애두, 그건 그저 할수 없어 해보는 수작이지, 그걸 더 크게 만든다구 용해지겠냐?” 령이의 기대와는 달리 할머니는 너무도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령이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가 못내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는 령이의 마음을 알아차리셨는지 할머니는 령이앞으로 한발 다가서서 꺼슬꺼슬한 손으로 령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얘야, 너 또 무슨 속 타는 일이라도 생겼냐?” “아버지가 어제 밤에 왔었는데 깨나 보니 보이지 않슴다. 아버지가 또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함까? 할머니, 난 이 주머니를 손에 쥐고있으면 가슴이 따뜻해 남다. 나에겐 이 주머니가 정말 효험이 있는것 같슴다. 그러니 이 주머니를 더 크게 만들어서, 더 용하게 만들어서 울 아버지를 집에 맘을 붙이게 하구 술을 적게 마시게 하구 나랑 별 탈 없이 조용하게 살수 있게 해주시요. 네 할머니.” “얘야, 이 불쌍한것아.” 할머니는 령이를 당겨다 가슴에 꼭 대고는 손으로 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령이는 한동안 할머니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있다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 할머니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정말 방법이 없음까? 빨간 팥을 넣은 노란 주머니를 더 크게 만들어 지니고있으면 아버지가 마음을 잡을수 있지 않겠슴까? 할머니, 도와주시요. 네?” 령이의 애절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있던 할머니가 얼굴에 흐린 기색을 띠우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이 할미가 주책을 부렸구나. 네가 너무 안돼보여서 내가 주책을 부린거구나. 그 주머니가 무슨 쓸모 있겠냐? 옛날에 미개할 때 정말 마음을 기댈 데가 없어서 하던 노릇이지. 너의 어버지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건데. 얘야, 거기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고 너절로 정신을 차려야 하니라. 아무도 도움이 안되는거지. 저절로 일어서야 하는거지.” “할머니, 아님다. 전 속이 갑갑하다가두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니를 손에 쥐고있으면 손바닥이 따뜻해나구 가슴이 활 열리는듯 편안했음다. 나에겐 이 주머니가 꼭 효험이 있슴다.” “얘야.” 할머니는 힘들게 령이를 한마디 불러놓고는 잠간 말끝을 흐리셨다가 후― 한숨을 내쉬시며 말끝을 이었다. “정말 내가 공연한 짓을 했구나. 이러는게 아니였는데. 늙은게 도와줄 방법은 없구, 마음은 급하구 해서 주책을 부린거지. 손바닥이 따듯해나구 가슴이 편해지는것같은것은 아무 기댈 데가 없다고 생각하던 너에게 작은 언덕이라도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게다. 그까짓게 무슨 효험이 있다구그러니. 밥이랑 꿍꿍 많이 먹구 너절로 힘을 내야 하는기라.” “아버지가 영 안 돌아오면 난 어떻게 살람까? 할머니―” 령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셨다. “왜 안돌아오겠냐? 애빈데, 너의 애빈데. 잠간 힘들어서 어딘가 바람 쐬러 나갔을게다. 얘야, 가자. 우리 집에 가서 아침이나 둬 술 뜨구 애비 찾으러 나가 봐라.” 말을 마친 할머니가 령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가?) 령이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와 계절계절 노가다현장을 뛴 아버지는 사실 따로 찾을 만한 친구도 갈만한 곳도 없었던것이다. 간혹 가는 곳이라 해야 힘들고 지쳤을 때 찾군 하던 동네 상점뿐이였다. (아, 상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령이는 순간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령이는 곧추 아버지가 다니던 상점을 향해 걸음을 재우쳤다. 아니나다를가 멀리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왔다. “아버지―” 령이는 아버지를 부르며 상점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아침부터 왜 여기 있슴까?” 아버지는 령이의 소리에 머리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한참이나 령이를 바라보더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떠듬거렸다. “이…이것들이 나에게 수…술을 안준다. 나에겐 외…외상을 안준단다.” 실망에 꽉 찬 아버지의 목소리는 모기소리처럼 가냘프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꽥꽥 구역질을 하고있었다. “아버지, 이러면 안됨다. 가기쇼. 집으로 가서 아침을 잡수쇼. 내가 장국을 끓이겠슴다.” 령이가 아버지를 부축하며 애절하게 간청했다. “이것들이 나에게 술을 안 판단다. 외상을 안 준단다.” 아버지는 또 그 소리를 반복하며 사탕을 먹고싶어 애간장이 타하는 어린애처럼 쩝쩝 입을 다셨다. 령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1원짜리며 2원짜리 부스럭 돈이 몇장 쥐여졌다. 세여보니 흰술 한병은 살수 있을것 같았다. “아버지, 내가 술을 한병 사겠슴다. 집으로 갑시다.” 그 말에 아버지는 혀끝으로 입술을 감빨며 령이를 올려다보더니 입가에 헤벌쭉 웃음을 피웠다. 령이는 감자를 깎아 넣고 장국을 끓여 상에 올렸다. 김치도 들여다 곱게 썰어 상에 올렸다. 아버지는 령이가 부르기도 전에 상에 다가앉아 술병채로 마시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가 따라드리겠슴다. 천천히 마시쇼.” 령이가 술병을 뺏으려고 하자 아버지는 두손으로 술병을 검어쥐고 령이를쏘아보았다. 우멍하게 패인 피발이선 아버지의 눈에서 퍼런 빛이 툭툭 튀여나오는듯싶었다. 령이는 오싹 몸을 떨며 움찔 손을 당겨왔다. 그새 아버지는 또 술병을 입에 가져다가 꿀떡꿀떡 마셔댔다. 령이는 팔딱팔딱 뛰는 가슴을 손으로 꼭 누르며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아버지, 그게 다 아버지가 마실 술인데 좀 천천히 마시면 안됨까? 안주도 잡수면서 말임다.” “빌어먹을 놈들이 나에게는 외상술을 안준다는거다. 나 원 더러워서… 내 한국에만 가봐라. 돈을 벌면 걔네 상점 술을 다 사버리겠다.” 아버지는 잠간 말끝을 흐리우며 또 술병을 쳐들었다. 술병은 단번에 반나마 비워졌다. “아버지―” 령이는 애원하다싶이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의 손에서 술병을 나꿔챘다. 아버지는 령이가 당기는 대로 술병을 놓아버리더니 입을 떡 벌린채 한동안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왕―” 하고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는 령이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내리는것 같았다. “아버지, 왜 이램까? 아버지가 이러니 난 무서워 죽겠슴다.” 아버지는 그 소리에 잠간 제 정신을 찾았는지 뚫어져라 령이를 바라보더니 갈린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령이야, 네 엄마 사실은 영 불쌍한 사람이다. 어느때 한번 호강도 못해보구 고생만 죽게 하더니… 죽기는 왜 죽은거야. 내가 한국 가서 돈 벌어오면 잘 살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의 뿌연 눈에 이슬이 맺히더니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주먹으로 찔끔찔끔 눈확을 누르더니 흐흐흐 청승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그 사마귀가 네 엄마를 데려간거다. 그 사마귀귀신이 네 엄마를 데려갔다구…” 아버지는 한참이나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 훌렁 누워버렸다. 령이는 밥술을 뜰 생각마저 잊어버리고 잠이 들어버린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들처럼 입귀로 느침을 줄줄 흘리며 단잠이 든 아버지를 바라보며 령이는 아버지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른 아침에 상점으로 외상술 마시러 가셨을가? 아버지를 지켜드려야 한다. 내가 아버지를 보살펴드려야 한다. 아버지니까. 내 가족이니까.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잡게 하는거야, 아버지가 마음을 잡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하는거야.) 령이는 생각을 굴리다가 베개 밑에서 노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 노란것이 아버지를 술독에서 건져낼수 있는 유일한 부적처럼 생각되였다. 령이는 주머니를 손으로 싹싹 만지다가 아버지의 머리 밑에 베워드렸다. 아버지는 딴딴 팥알이 불편했던지 인차 노란 주머니를 밀어버렸다. 령이는 인차 베개를 내리워 노란 주머니 우에 놓고 다시 아버지에게 베워드렸다. 잠간 베개를 베고 누워있던 아버지가 몸을 모로 돌리자 머리는 다시 베개우에서 굴러 내렸다. 자꾸 노란 주머니와 떨어지려는 아버지의 머리를 보면서 령이는 어느새 불안한 상념에 빠지고 말았다. (웬 일일가? 왜 아버지의 머리가 자꾸 노란 주머니와 떨어지려 할가? 설마 저 주머니가 아버지에게 맞지 않는것일가? 그럼… 아버지에게 맞는것이 따로있지 않을가?) 령이의 머리속에는 접대 학교에서 오는 길에 보았던 전선대에 붙은 전단지가 떠올랐다. 그 전단지는 사람의 일생을 점쳐준다는 광고였다. 귀신처럼 사람의 전생을 알아맞추고 미래를 점쳐주며 액운을 미리 방토 해준다는 내용이였다. 전에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무심하게 보아오던 그 전단지가 새록새록 령이의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그 점쟁이를 찾아보는거야, 그 사람을 찾아가 아버지의 미래를 점쳐보고 우리 집 액운을 방토 하는거야.) 령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입가에 느침을 줄줄 흘리며 잠들어있었다. 령이는 학교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전선대들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가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전선대에서 그 전단지를 찾을수 있었다. 그새 바람에 찢겨지기는 했어도 내용과 전화번호는 똑똑하게 알아볼수 있었다. 령이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전단지에 찍혀져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뚜―뚜―” 신호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대방이 전화를 받는 동정이 알려졌다. “이보시요, 광고를 보고 전화 드리는건데 거기가 점치는 집이…” 령이가 말끝을 맺기도 전에 대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년아, 전화 올 줄 알고 기다리고있었다. 무슨 큰일을 당하려고 그러구 있는거냐? 빨랑 오지 않구 ” “네?” “뭐하고있는거냐. 빨랑 와서 액땜을 해야지?” “네? 울 아버지가 위험해요?” “위험하다뿐이냐? 그 꼴을 해가지구… 빨랑 와라.” 대방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령이는 심장이 밖으로 튀여나오는것 같았다. 령이는 전단지에서 주소를 살폈다. 점쟁이네 집은 거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령이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점쟁이를 찾아 잰걸음을 놓았다. 점쟁이네 집은 들쑥날쑥한 널판자로 울타리를 두른 보통 단층 벽돌집이였다. 40대의 아주머니 한분이 소복단장을 한 녀인의 앞에 공손히 앉아있었다. 령이는 소복단장을 한 녀인이 점쟁이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쟁이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쿨적이고있었다. 점쟁이가 시끄럽다는듯 손을 홰홰 내저으며 소리쳤다. “울지 말라니까, 제 남정두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년이 쿨쩍이기는 왜 쿨쩍여? 여태 뭐하고있었는데… 벌써 와서 그놈의 아래도리가 제 노릇을 못하게 방토를 해야지…” 점쟁이는 두눈을 지긋이 감더니 입속으로 뭐라고 념불을 시작했다. 한참 지나자 점쟁이는 쿨쩍이는 아주머니에게 빨간 주머니 같은것을 던져주고는 소리쳤다. “이것을 그놈의 이불에 꽁꽁 달아줘라. 아래도리가 닿을만한 부근에 달아야 한다, 알지? 그놈 몰래 해야 하는거야, 그놈이 아는 날에는 더 기승을 부리며 날칠거니까. 그리구 보름만 지나봐라. 쫓아도 그놈이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할걸.” 령이는 점쟁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는 알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아주머니의 일이 제대로 풀려나가는 소리를 듣는것만 같았다. (저렇게 방토를 하고 우리 아버지도 주정하는 버릇을 뚝 떼버렸으면… 집에 마음을 붙이고 열심히 살았으면…) 령이는 나름대로 소원을 빌어보며 아주머니가 일어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년아, 어쩌고 왔냐?” 점쟁이가 갑자기 손바닥을 쫙 펴서 탕 하고 상을 내리쳤다. 령이는 와닥닥 놀라 몸을 옴츠리며 머뭇거리다가 기여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워 잠든것을 보고 왔슴다.” “잠이 들었군. 무엇을 베워줬니?” “베… 베개를…” “베개를?” “네 그 밑에 이웃집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리를 깔아드렸슴다.” “이런, 이런 죽일 년을 봤나? 그게 뭐라고 그걸 베워드려? 큰일을 치자고 환장을 했구먼.” “엄마가 차사고로 돌아간 후 침침하고 아프던 가슴이 그 주머니를 베고 잔 다음부터 나아지는것 같길래…” “이년아, 패끼(팥) 몇알을 베고 자서 귀신이 떨어졌으면 사람마다 패끼 뒤주에서 살아야겠다.) “네? 그 주머니에 패끼(팥)가 들어있는걸 어떻게 암까?” “이런, 이런 죽일 년을 봤나? 그것도 모르면서 내가 자리를 깔았을가? 네 애비도 불쌍쿠나. 천당에 못가 떠돌아다니던 너의 할애비 술시중에 항상 머리뚜껑이 훌렁훌렁 해 하더니 또 억울하게 죽은 녀편네까지 끌어안게 됐구나.” “네? 그게 무슨 말임까?” “네 애비한테 물어봐라. 워낙 너의 할애비가 유명한 술뒤주였거든. 그 술버릇을 저승까지 가지고 갔다가 신령님 눈에 나서 천당에 못간거야. 그래서 아직도 이승에 떠돌며 네 애비에게 붙어서 술충이나 달래는 판이였지. 그래서 네 애비가 술주정을 부리는거야.” “설마요, 시골에 살 때는 아버지도 술주정을 하지 않았거든요.” “요런, 요런 괘씸한 년을 봤나? 그때야 신령님이 너의 할애비를 눈여겨 살펴볼 때니까 그랬지. 아직 너의 애비에게 얹히지않았을 때니까 그런거지.” “그럼 언제 부터…” 령이는 말끝을 흐리우며 점쟁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점쟁이가 또다시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하고 내리치며 입에서 침을 튕겼다. “요런, 요런 그 주둥이가 제법 야물었네. 언제부터는 언제부터야, 너희들이 시내로 게바라들어온 그때부터 잘못된거지. 쯧쯧쯧… 네 에미는 딸년이 불쌍한것도 모르고 제 남정이 불쌍한것도 모르는 년이구나. 너 하구 네 애비한테로 왔다갔다 하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날뛰는것을 보니… 이년아, 무겁지? 두 어깨가 천근같이 무겁지? 그래 안 무거우면 이상하지. 차에 치워죽은 네 에미가 동네귀신들을 한무리나 끌고 와서 팔자 좋게 척하니 너의 어깨 우에 올라앉아 헤벌써 웃고있는데 어깨가 안무거우면 이상한거지. 여보소― 놀라 죽은 귀신, 물러가소, 억울해서 죽은 귀신도 물러가소. 동에 귀신 서에 귀신 마음 곱게 잡수시고 이 년 어여삐 여기시고 물러가소, 물러가소.” 한폭의 커다란 승무도가 두려움에 떠는 령이의 머리속에 펼쳐지고있었다. “진짜 울 엄마가 나의 어깨 우에 앉아있나요?” 령이는 반신반의 하며 점쟁이에게 물었다. 점쟁이의 두눈이 홱 꼭뒤에 올라가 붙었다. “요런, 요런 맹랑한 년을 봤나? 네 에미 하나가 아니구 뭇귀신들을 끌고 올라앉아있다니까.” “그럼 제가 어쩌면 좋아요?” “이년아 그 뭇귀신들을 쫓아야 하지. 에미귀신을 쫓지 못하면 아무 일도 뜻대로 안될거다. 이년아, 왜 인제야 찾아오는거냐? 이럴 줄 알았지, 알았어. 요즘 어쩐지 내 머리가 소란스럽더라니까. 이런 귀신들을 목마 태우고 다니니까 그렇지. 물러가라, 물러가라. 놀라 죽은 귀신아, 물러가라. 억울해서 죽은 귀신도 물러가라. 동에 귀신 서에 귀신 마음 곱게 잡수시고 이년 어여삐 여기시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점쟁이는 갑자기 자리를 차고 일어나 빨간 부채를 펴들고 신내린듯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령이는 동그렇게 바람을 먹으며 돌아가는 점쟁이의 하얀 치마자락을 멀거니 바라보며 무서워서 잔뜩 어깨를 옹크렸다. 그날 령이는 돈 200원을 내고 누런 종이돈을 한아름 가져왔다. 밤 10시가 지난 후에 어머니가 차사고로 돌아간 그 자리에서 종이돈을 태우라는것이였다.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가 그 돈을 로자로 해서 천당에 간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이웃집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니도 함께 태워버리라는것이였다. 한 집안에 집지킴이가 둘이 있으면 서로 다투기에 큰 사고가 난다는것이였다. 그날 령이가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또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령이는 점쟁이의 말대로 밤에 태워버리려고 이웃집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니를 찾았다. 분명 아버지의 베개 밑에 넣어두었던 노란 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왜 없을가? 혹시 아버지가 가지고 간것이 아닐가? 그럼 어쩌지? 태워버리지 않았다가 정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령이는 근심에 쌓여 가슴을 조이다가 종이돈을 안고 어머니가 사고를 당하던 마을 길로 나갔던것이다… 령이는 차츰 어제 밤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리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차에 뛰여들었댔구나. 정말 내가 죽으려 했을가? 아닌데, 정말 죽고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제 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하도 어이없게 놀길래 치미는 분을 누르지 못하고 무작정 뛰여가다가 달려오는 차에 치인거야. 그래, 그런거야. 죽으려고 생각했다면 내가 점쟁이를 찾아가 방토를 하고 종이돈을 태웠겠어? 그래, 맞아. 점쟁이는 이웃집 할머니가 만들어준 노란 주머니도 함께 태우라고 했는데… 맞아 그것을 태우지 않아서 내가 사고를 당한거야.) 령이는 또 노란 주머니를 생각하게 되였다. 한 집안에 집지킴이가 둘이 있으면 서로 다투기에 큰 사고가 난다던 점쟁이의 목소리가 귀전에 들리는듯싶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노란 주머니를 태우지 않아서 귀신들이 서로 다투다가 내가 사고를 당한거야. 그것을 태우지 않으면 우리 집에 또 어떤 액운이 닥칠지 몰라. 그 노란 주머니를 태워버려야해.) 령이는 한시 바삐 그 노란 주머니를 불속에 집어넣고싶었다. 령이는 애써 숨을 고르고는 바싹 말라터진 입술을 감빨다가 나직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손에 술병을 들고있었다. 령이의 부름을 들었는지 아버지는 입가에 가져갔던 술병을 내리우고 령이를 찔 가로보며 웅얼거렸다. “이년아, 죽지 못해 환장을 했더냐? 차에는 왜 뛰여들어? 에미가 어디 천당에라도 갔는줄 알았어? 네가 에미를 찾아가느라고 차에 뛰여들었지?” “아버지, 그러지 마쇼. 나 힘듬다. 아버지, 그 노란것을 어쨌슴까? 아버지가 가져갔지 예?” “노란것이라니?” 아버지가 다시 령이를 가로보며 물었다. 령이는 잠간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아버지의 베개밑에 있던 노란 주머니 말임다. 그 주머니를 어쨌음까?” “아,” 아버지가 술병으로 자기의 신다리를 탁 내리치며 알은체를 했다. “그 패끼(팥)를 넣은 주머니를 그러지? 그게 뭐야?” “어쨌음까?” “흐흐흐… 난 그안에 돈이라도 넣구 꿰맸는가 해서 호주머니에 넣고 나와 길에서 뜯었봤는데 그 잘난 패끼가 와르르 쏟아지길래 그대로 던져버렸다. 흐흐흐…”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청승스럽게 웃어댔다. “아버지!” 령이는 가슴이 꺽 막혀오는 감을 느꼈다. 눈앞에서 무수한 별찌들이 탁탁 튀면서 머리가 흐릿해났다. 령이는 흐릿한 그속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노란것을 보았다. 령이는 노란것을 잡고싶었다. 잡아서 활활 타오르는 불에 태워버리고싶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나쁜 술버릇이 떨어지고 아버지가 가정에 마음을 붙일수 있다면 천번이고 만번이고 그렇게 하고싶었다. 령이는 노란것을 따라 허위허위 날아가는 자기의 환영을 보고있었다.    
5    선녀를 찾아주세요 댓글:  조회:1290  추천:0  2012-04-24
          A 컴퓨터앞에 앉아서 질근질근 껌을 씹는 퍼어런 눈두덩의 수금원녀자에게 돈을 넘겨주면서도 홍수는 가슴이 후둑후둑 뛰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숨마저 크게 쉬고싶지 않았다. 어쩜 “후―” 하고 날숨을 내쉬는 사이에 방금전 그 아지랑이같이 아물아물하던 기분이 “붕―” 날아가버릴것 같아서였다. (뭐? 아직은 그런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공부할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먼저 중점고중에 붙고 그다음 명문대학에 가서나 생각할 문제라고? 깜찍한것!) 홍수는 생각할수록 눈앞에 꼭 깨물어주고싶게 귀여운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분명 그 애야, “선녀”가 틀림없어!) 홍수는 저도 몰래 헤벌쭉 웃었다. 수금원녀자가 멍청이처럼 혼자 웃는 홍수를 괴물이나 바라보듯하더니 컴퓨터옆의 빈자리에 거스름돈을 탁 내려놓으며 “어이”하고 소리쳤다. 홍수는 우뚤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수금원녀자가 까아만 점이 도드라진 빠알간 입술을 외로 탈며 “승천!” 하고 짤막하게 소리쳤다. “어, 승천!” 홍수는 수금원녀자에게 멋적게 머리를 끄덕해보이고는 컴퓨터옆에 놓은 거스름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쫓기듯 PC방에서 나왔다. 홍수는 밖에 나오자 바람으로 터질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머리를 쳐들었다. 뭇별이 깜빡이는 망망한 하늘에서 채 여물지도 못한 쪼각달이 어디론가 바삐바삐 걸음을 재촉하고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 어느 골짜기 숲을 지나서 단둘이 처음 만났죠…” 홍수는 하늘에 대고 휙휙 휘파람을 불었다. 반짝이는 별들마다 “선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홍수는 처음으로 도시의 밤하늘에도 이렇게 많은 별들이 깜빡이고있음을 느꼈다. 홍수는 “선녀”와 한하늘을 쓰고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홍수는 아침에도 마을 뻐스역에서 “선녀”를 만났었다. “선녀”는 역시 머리를 살며시 숙이고 2선이라고 쓴 패말밑에 오똑 서있었다. 그는 언제나 무엇을 속삭이는듯한 까아만 눈을 살짝 감았다가는 반짝 뜨고 주변을 살피는것이 어쩜 마음속으로 한없이 그리는 그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듯싶었다. (혹시 그 애 기다리는 사람이 내가 아닐가? 정녕 그 사람이 나라면 얼마나 좋을가?) 홍수는 나름대로 제 좋은 생각에 김치국을 챙겨 마시며 저도 몰래 그 애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수는 늘 모르는척 그와 몸이라도 한번 부딪쳐보고싶었고 그것이 안되면 그로부터 풍겨오는 향긋한 체취라도 맡아보고싶었다. 홍수는 그 애가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보다도 살며시 두눈을 감고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살며시 감겨진 까아만 눈은 마치도 금방 피여나려고 파르르 떠는 꽃망울을 방불케 한다고 생각했다. “선녀”는 또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치려는지 살며시 두눈을 감고있었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쪽지를 꺼내여 그 애옆에 떨구어놓았다. 홍수는 가슴이 활랑거리며 숨이 턱턱 막혀왔다. 홍수는 호주머니에 손을 지른채 살랑살랑 휘파람을 불며 그 애와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섰다. 홍수가 타야 할 5선뻐스가 먼저 오고있었다. 홍수는 뻐스를 탈 준비를 하면서 흘끔 “선녀”를 훔쳐보았다. 종이쪽지는 아직 그의 발밑에 떨어진대로 있었다. 홍수는 마음이 조급해났다. 그 애가 종이쪽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쩔가? 그새 종이쪽지가 바람에 훌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어쩔가? 5선뻐스는 홍수네를 싣고 부르릉 소리를 내며 뻐스역을 떠났다. 홍수는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선녀”와 그의 발밑에 있는 종이쪽지를 살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선녀”는 종이쪽지를 줏지 않고있었다. “나는 나무군, 선녀를 찾는다. 나무군의 오두막주소: ******@hotmail.com 진심으로 련락을 기다린다.” 홍수는 학교에 가서도 “선녀”와 종이쪽지만 눈앞에 삼삼거려 온종일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다. 홍수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하루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선녀”가 처음으로 홍수의 눈앞에 나타난것은 한달전, 개학 첫날이였다. 그날 홍수는 아침 일찍 뻐스를 타려고 마을 뻐스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 아빠트 굽인돌이를 지나 뻐스역에 눈길을 주었는데 하얀 적삼에 하얀 치마를 받쳐입은 낯 모를 녀자애가 첫눈에 안겨들었다. 파르스름한 가방이 하얀 옷에 어울리면서 금방이라도 날아나버릴듯 무척이나 산뜻해보였다. (누굴가?) 사과향기 비슷한것이 하얀 옷으로부터 은은하게 풍겨와 홍수의 페부에 스며들었다. 홍수는 무심결에 하얀 옷을 훔쳐보았다. 어깨까지 찰랑찰랑 기른 생머리를 까아만 헝겊끈으로 꼭 묶어 한결 깔끔해보이는 녀자애, 큰 호수 같은 까아만 눈이 무시로 반짝이는 녀자애, 백설같이 하아얀 얼굴에 아침해살같이 마알간 웃음을 살며시 물고있는 녀자애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마치도 금방 그린 선녀도처럼 홍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홍수는 새삼스럽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쳇, 남자가 면목이 없이, 이게 웬 일이람. 아자, 정신 차려. 저 애가 뭔데, 정월대보름에도 본적이 없는 저 애가 내게 뭐가 되는데…) 홍수는 호주머니안으로 손을 넣어 자기의 넙적다리를 꽉 꼬집었다. 넙적다리에서 얼얼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날은 2선뻐스가 먼저 미끄러져오더니 하얀 옷을 입은 녀자애의 앞에 와 멈춰섰다. 몇 안되는 손님들이 다투어 뻐스에 오르려고 헤덤볐다. 녀자애는 손님들이 뻐스에 다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 사람으로 뻐스에 올랐다. 달리는 뻐스창문으로 하얀 옷이 유표 나게도 눈에 안겨들었다. 이튿날에도 녀자애는 같은 시간에 역전에 나와있었다. 녀자애는 그날 교복을 입었는데 ㅅ중학교의것이였다. 홍수는 그 녀자애와 한학교에 다니면 좋겠지만 한마을에 사는것만으로도 더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저 애, 이름은 뭐라고 부를가?) 알고싶었다. 홍수는 이것저것 주어서 생각하다가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쳇, 이름을 알아서는 뭐해?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듯한 선녀 같은 모습만 생각하면 되는거지. 그래, 그 애는 나의 선녀야, 나를 만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거야.) 홍수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여나고있었다. 개학 첫날에 맞은 화살때문에 홍수는 한달내내 가슴앓이를 했다. 숙제를 하다가도 멍하니 앉아있는 홍수를 보고 어머니는 벌써 몇번째나 충고를 주었다. “홍수야, 너 요즘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있다.” “제가 뭘요?” “엄마 눈은 못 속인다. 너, 요즘 뭔가를 앓고있는것 같은데…” “어머니, 그만하세요. 소설은 그렇게 쓰는게 아니거든요.” 홍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씽긋 웃어보이고는 수학숙제책을 번졌다. 녀자애의 까아만 눈이 홍수에게 뭔가를 속삭이는듯 또 홍수의 머리속에 찾아들었다. 홍수는 필을 놀리는것처럼 하면서 옆에서 사과를 깎고있는 어머니를 훔쳐보았다. 역시 어머니는 홍수를 지켜보고있었다. 홍수는 문뜩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있는 작은 물고기가 생각났다. 잡지사 편집으로 계시는 어머니는 요즘에 와서 홍수의 일상을 무척이나 열심히 살피고있었다. 초중 2학년은 인생에서 관건의 관건이라는것이 어머니의 인생철학이였다. 초중 1학년에서는 중학교생활에 익숙해지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별로 없지만 중학교생활에 익숙해진 2학년부터는 찾아오는 사춘기와 함께 새로운 버릇들이 자라기 시작한다는것이였다. 어머니는 그중에서 제일 피해가기 어려운게 사춘기의 “사랑놀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완전히 도사가 다됐네. 도사야, 하지만 지금 나의 이 감수를 어떻게 다 안다구? 어머니네 시절의 고리타분한 격정은 지나버렸습니다. 녀사님!) 눈귀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머얼건 얼굴을 바라보면서 홍수는 어머니와의 세대차이를 느끼고있었다. 10년같이 지루하게 하루공부를 끝낸 홍수는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추 PC방에 들렸던것이다. 혹시나 오매에도 그리던 “선녀”가 아침에 종이쪽지를 주어보고 홍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쯤은 PC방에 내려와 나무군을 기다리고있으리라 생각되였던것이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인터넷에 접속했다. 금방 메신저에 올라서 친구리스트를 훑어보고있는데 모니터에 대화창이 뜨며 “할룽―” 하고 인사말을 건네왔다. 대방은 “선녀는 없다”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였다. 순간 홍수는 호흡이 뚝 멎는듯싶었다. (맞아, 바로 그 애야, 나의 선녀야!) 홍수는 키보드를 누르는 손이 후들후들 떨려 자꾸 오타가 생겼다. 홍수는 두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가 후― 심호흡을 하며 또박또박 키보드를 눌렀다. “안녕?” “나 누군지 알어? ㅋㅋㅋ, 지금 어디니?” “집이야.” 홍수는 저도 모르게 집이라고 대답해버렸다. 글을 보내고나서야 홍수는 저도 몰래 거짓말을 한 자신이 사뭇 못나게 느껴졌다.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의 모습도 머리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홍수는 “선녀”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집이라고 했으니 그냥 집인것처럼 하고 대화를 나누자 생각하며 넌지시 물었다. “처음 보는 아이딘데 누구지?” “그럴거야, 하지만 아직은 비밀.” “왜 비밀인데?” “너무 빨리 알면 싱겁잖아? 모든것이 그래, 너무 익숙하면 맛이 없거든.” 홍수는 대방이 참 묘한 애라고 생각되였다. 줄것처럼 하면서도 감출줄도 아는 씹을 맛이 있는 애라고 생각되였다. 홍수는 이런 애들앞일수록 둔한것처럼, 철 없는것처럼 덤벼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 남자친구가 있니?” “ㅋㅋㅋㅋㅋㅋ…” “왜 웃는데?” “너, 참 급한 애구나. 몇살인데 벌써 그런 궁리를 하니?” “인젠 생각할 때가 됐지. 우리 어머니는 늘 옛날 같으면 장가라도 들었겠다 하시는데.” “하긴 일곱살에도 장가가는 세월이 있었다고 하더라만.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본다. 공부할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먼저 중점고중에 붙고 그다음 명문대학에 가서나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홍수는 “선녀”가 보내온 글을 읽으며 그 애가 화사한 해살만치나 해맑던 얼굴같이 말도 해박하게 할줄을 안다고 생각했다. 홍수는 이런 애와 함께라면 고독도 외로움도 없을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속에 없는 소리를 한마디 했다. “말하는것 하구는. 너, 참 우리 어머니 같다.” “왜 그렇게 말하지?” “너의 말에 철리가 쫘르르 흐르잖아. 어머니대가 아니구서야 어쩜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겠니?” “ㅋㅋㅋ, 기분이 좋아지는가? 아니, 꿀꿀해 지는것 같기도 하구. 그래, 너도 빨리 너의 엄마를 친구해드려라. 난 빨간 사과나 추렴하며 잠간 세상 사는 옛말이나 보겠다.” 홍수가 미처 인사를 하기도전에 “선녀”가 먼저 “안녕!” 하고 글을 띄워보내고는 메신저에서 사라졌다. 홍수는 파아란 잔디가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컴퓨터의 배경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구픈 웃음을 킥 날렸다. 진짜 “선녀는 없다”로 되여버렸던것이다. 엄마를 동무해드리라던 “선녀”의 말이 귀전을 스쳤다. 집이 가까와올수록 홍수는 가슴이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금 PC방에서 나올 때의 무르익은 홍시 같던 감흥은 해볕을 만난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흑구름이 감돌아있을 어머니의 얼굴이 무시로 눈앞에서 언뜰거렸다. 잘못하면 폭우도 퍼부을지 모른다는 근심까지 머리를 쳤다. (어떻게 하면 오늘밤, 젖지 않을가?) 홍수는 부지런히 속구구를 하며 집을 바라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B 홍수는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흠칫 손을 멈추고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들었다. 어쩜 지금쯤 벼락이 치려고 먹장구름이 몰려오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 판에 버젓이 초인종까지 눌러 내가 왔노라 시위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단번에 벼락이 떨어져 머리를 칠것 같았다. 홍수는 조심스레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찰칵,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수는 천천히 출입문을 당겨 열었다. 다행히 객실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후―” 홍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집안에 들이밀었다. “인제야 오는거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홍수는 혀를 홀랑 내밀며 “네!”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인젠 밥을 먹어도 되겠구나. 참, 겨우 참았네.” 아버지도 침실에서 짧은 바지 바람으로 나오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안의 분위기를 보니 의외로 벼락까지 칠것 같지는 않았다. 홍수는 자기의 침실에 들어가 가방을 벗어놓은후 인차 편한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과 손을 씻었다. “뭐 하니? 빨리 와라.” 주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홍수는 “네―” 하고 대답하며 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식탁에 앉아서 홍수를 기다리고있었다. 홍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발볌발볌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 밥 먹자. 도련님을 기다려 밥 먹으려니 여간 힘든게 아닌데. 어찌된거야? 학교에서 이렇게 늦게 오는거니?” 역시 아버지가 김치찌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며 먼저 물었다. “네.” “너희들 학교에서 이번 학기는 단단히 잡아 쥘 모양이구나. 그렇지, 너희들때는 누군가 뒤에서 자꾸 채찍질을 하며 감독을 하는게 사랑인거다. 그만치 자각이 없는 세대들이니까.” 어머니도 배추김치잎을 집어 손으로 찢으며 홍수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네. 그래요.” 홍수는 머리를 살며시 숙이고 부지런히 밥술을 옮기며 혀아래로 웅얼거렸다. 어머니는 그러는 홍수를 잠간 지켜보다가 방금 찢은 배추김치잎을 홍수의 밥술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왜? 너 무척 피곤해보인다. 배고프지?” “아니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늦었니?” 홍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속이 꿈틀해나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인제야 시작되는가?) 하는 근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그냥 PC방에 들려온다고 말해버릴가? 아니야, 그러면 당금 벼락이 떨어질거야, 지금이 어느때라고 PC방 출입이냐며 소비돈까지 자르면 긁어서 부스럼이거든. 그럼 뭐라고 해? 회의? 복습? 아니면…) “얘! 혼 나간 애 같네. 무슨 생각을 하고있니?” “네, 아, 3반 애들하구 롱구시합을 했어요. 제가 주력이였거든요. 이겼어요.” 홍수는 말을 마치고 흘끗 어머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머니의 눈길이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고있었다. 홍수는 다시 멋적게 머리를 숙이고 숟가락을 놀렸다. 밥상을 둘러싸고 잠간 사각사각 음식 씹는 소리만 오고갔다. 홍수는 숨막히는 저기압을 느끼며 점점 저 멀리로 달아나버리는 음식맛을 잡을 길이 없었다. “여보, 당신이 얘기하던 그 애는 지금 어때요?” 어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뭔 소릴가? 그 애라니?) 홍수는 머리를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굳어진듯싶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빛이 흐르고있었다. 아버지께서 김치찌개그릇에 숟가락을 가져가다말고 입을 열었다. “아, 그 애, 짝사랑하던 녀자애를 칼로 찔러버렸다는 그 애 말이지?” “네, 그 애가 몇살이라 했죠?” “열여섯살이라든가? 열일곱살이라든가.” 아버지께서 김치찌개를 한술 입에 떠넣고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출근하는 간수소에 그런 애가 갇혀있는 모양이였다. “쯧쯧쯧…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이 난다구, 저희들이 무엇을 안다구 짝사랑은 짝사랑이예요. 그럼 그런 애들은 어떻게 되는거예요. 아직은 미성년이니 제대로 판결은 못할거구요.” “아마 소년범관리소 같은데 보내야겠지. 지금 무서운 애들이 참 많소. 우리 홍수처럼 참한 아들을 둔것도 복인줄 아시구려.” 아버지께서 홍수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홍수는 후줄근히 젖지도 못하고 가슴을 조이느니 차라리 “우르릉 쾅!” 하고 우뢰가 우는쪽이 나을것 같았다. 가슴이 침침해서 “펑―” 하고 터지기 일보직전에 이른듯싶었다. 홍수는 수저를 놓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입을 열었다. “왜? 좀 더 먹지 그러니? 무척이나 배고팠을텐데.” “배불러요. 천천히 잡수세요.” 홍수는 딱딱하게 한마디 남기고는 인차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사이문을 닫아버렸다. 침대우에 훌쩍 자기의 몸을 던졌다. 충격에 시몬스침대가 슬렁 홍수를 흔들어주었다. 홍수는 두눈을 꼭 감았다. 어금이도 꽉 사려물었다.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정도로 넘어간것이 과연 다행일가? 어쩜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PC방에 들렸다가 온 눈치를 채시면서도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있는건 아닐가? 진정 그렇다면?) 홍수는 으스스 몸서리를 쳤다. 전라의 몸으로 네거리를 활보하고 난것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비참할라구. 그래 아버지 어머닌 아직도 나를 모범생으로 점찍고있는거야, 그래, 난 모범생이지. 이만하면 모범생줄에 설수 있는거야.) 홍수는 애써 자기를 위해 변명을 해보고싶었다. (그래, 아직 누구와 싸움 한번 못해보고 오늘까지 오기가 쉬운가? 게다가 반에서 학습성적은 언제나 다섯손가락안에서 오르내렸지. 반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에서 쭉 간부로 활약을 해왔었구… 이쯤하면 모범생인거지 뭐!) 홍수는 자기가 모범생인 까닭을 찾으라면 아직도 열가지는 더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마음이 열리자 그 녀자애의 하얀 얼굴이 빠끔히 머리를 쳐들었다. 흑진주같이 반짝이는 까아만 눈이 자기를 바라보며 뭔가 속삭이고있는듯싶었다. 홍수의 입가에는 차츰 홍조가 비껴오르기 시작했다. (뭐? 선녀는 없다구? 흐흐흐… 유머감각까지 푹 배인 애야, 이런 유머감이야말로 세상을 초개같이 보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지. 헌데 어떻게 하면 그 애의 마음을 열수 있을가? 뭐? 명문대학에나 가서 생각할 일이라구? 와― 그때가 언젠데…) 홍수는 벌떡 일어나 책상서랍에 잠근 자물쇠를 열고 일기책을 꺼내 펼쳤다. “그리운…” 써놓고보니 싱거운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리운 아들아!” 하고 부르는것 같이 슴슴하고 격정이 없어보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사랑하는 나의 선녀야? 으― 닭살!!! 아님? ㅠㅠㅠ…) 홍수는 만년필을 일기책 갈피에 끼워놓고 살며시 두눈을 감은채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하늘에서 하얀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춤추며 내려오고있었다. 선녀는 컴퓨터앞에 내려와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방긋이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멋지게 엔터키를 눌러 글을 띄워보냈다. 홍수는 마치도 선녀가 보낸 글을 읽는듯 아리송한 환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자, 사과나 한쪽 먹을가?” 갑자기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왔다. 홍수는 깜짝 놀라며 손으로 책상우의 일기책을 덮었다. 홍수의 반상적인 거동에 어머니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왜 이렇게 놀라니? 일기책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있는게 아니야?” “아…아니요.” “이런, 말까지 더벅더벅 더듬으며… 웬 일인데? 홍수야, 숨기지 말고 엄마에게 말해봐라. 혼자서 메고 가기 버거운 일이라면 엄마와 함께 지고 가는것도 나쁘지야 않겠지?” 어머니가 홍수의 옆에 다가서며 들고 들어온 쟁반을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홍수는 당황한 눈길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떠듬거렸다. “없어요. 그런게 없어요. 어머닌 괜히…” “그래? 근데 엄마는 자꾸 근심이 앞선다. 요즘 분명 너의 일부 행동이 반상적이거든. 혹시라도 혼자서 너무 힘들지 않을가 근심이 자꾸 나구. 엄마는 언제나 홍수의 편이 되고싶은데… 친구처럼 편한 짝이 되고싶은데…” 어머니는 침대모서리에 약간 몸을 걸치고 앉아 금방 초록을 찾아가는 대지를 어루쓸어주는 봄비마냥 잔잔하게 홍수의 마음밭을 적셔주고있었다. 홍수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말을 마치고 입술을 감빠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도 방금 끝을 맺은 자기의 작품에서 티를 찾는 까끈하고 다정다감한 화가와도 같아보였다. 홍수는 어쩐지 코끝이 시큼해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머니―” 홍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옆으로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윽한 눈길로 홍수를 지켜보고있었다. 홍수는 어머니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어머니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너, 인제야 마음이 열리는거니?” “어머니, 방금 PC방에서 오는 길이였어요.” 홍수는 낮지만 진정을 담아서 한마디한마디 마음속 말을 하고야말았다. 어머니는 홍수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여주고는 천천히 홍수의 팔에서 몸을 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늦었구나. 급히 찾을 자료가 있었다면 집에 와서 시름 놓고 찾는게 더 좋았을텐데.” “그런게 아니구요, 멘저에 올랐댔어요.” “멘저에? 친구들하구 비밀이야기라도 나눌게 있었니? 얼마나 주요한 비밀인데 그렇게 철통같이 수비를 하는거냐?” “아니예요. 그런게.” “그래, 엄마를 믿어줘서 감사하다. 이만하면 너, 나를 짝꿍으로 생각하는거지? 아들, 아자!” 어머니는 홍수에게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가는 실웃음을 입가에 물고 날리듯 침실에서 나갔다. 홍수는 사라지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자신이 너무도 허무하고 초라해보였다. 천둥번개를 맞은것이 아니라 잔잔한 봄비에 쓰고있던 가면이 홀라당 씻겨져버려 발가숭이로 네거리에 나선 기분이였다. (뭐? 어머니 고맙습니다. 멘저에 올랐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의 어깨까지 끌어안구… ㅠ―) 홍수는 어깨를 움씰하며 몸을 떨었다. 어딘가에서 선녀가 자기를 훔쳐보면서 키득키득 웃고있는듯싶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 그 애가 알면 얼마나 웃을가? 남자애가 감상에 빠져가지구? 그래, 난 마음이 여린게 문제야, 어머니의 몇마디 말에 혼이 싹 나가구, 가슴이 울렁거려가지구, 뭐? 딴에는 사내대장부라구? 이 재간을 가지고 그 애의 마음을 훔치겠다구?! 쳇― 이게 아닌데…) 홍수는 벌떡 일어나 오른 주먹으로 왼쪽손바닥을 탁 들이치며 “아자!” 하고 속으로 웨쳐보았다. 홍수는 다시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선녀야: 어제저녁에 멘저에 올라줘서 감사하다. 오늘저녁 우리 멘저에서 다시 만나자. 기다린다. 나무군!” 홍수는 멋지게 몇 글자 갈기고는 종이를 쭉 찢어 그것으로 정성 다해 종이학을 접었다. 홍수는 종이학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정히 가방 겉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 시각 홍수는 래일의 태양을 그려보고있었다. C (이걸 어떻게 줘? “어제밤 멘저에 올라줘서 고마왔다?” 이― 그럼 너무 직설적이잖아, 무드가 없어. “웬 남자애가 저래?” 하고 웃을걸, 그럼? 슬그머니 히쭉 웃으면서 “얘, 이걸?”, 그러다 그 애가 일부러 “이게 뭐니?” 하고 샐쭉하면서 안 받는것처럼 하면 어떡하지? 아하!)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있을 때 홍수가 타야 할 5선뻐스가 북쪽에서 구을러오는것이 보였다. 홍수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종이학때문에 안절부절 못했다. 더는 주밋거릴 시간이 없었던것이다.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호주머니속에서 열번도 더 날아나오려고 하는 종이학을 “선녀”에게 보내줘야 했던것이다. 5선뻐스는 칙― 소리를 내면서 역에 와서 멈추어섰다. 홍수는 호주머니에서 종이학을 꺼내들었다. 잠간 머뭇거리다가 “선녀”의 앞에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얘, 읽어봐라!” 홍수는 “선녀”를 향해 수집게 한번 씩 웃어보이고는 그의 반응도 살필 새 없이 몸을 돌려 뻐스에 뛰여올랐다. 뻐스는 “삐이익―” 문소리를 내며 부르릉 떠났다. 홍수는 뻐스창문에 붙어서서 뚫어지라 “선녀”를 바라보았다. “선녀”는 뜻밖의 놀이감을 받아쥔 익살궂은 소녀처럼 종이학을 이리저리 돌려보고있었다. (풀어봐, 어서 풀어보라니까.) 뻐스는 점점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참, 그 애가 지금쯤은 종이학을 풀어보고있을가? 만약 풀어보고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가? 흐흐흐, 날보고 참 멋진 애야! 하며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일지도 몰라. 그래, 잘한거야! 종이학을 줄 때 아마도 나의 모습이 무척이나 터프해보였을걸, ㅋㅋㅋㅋ… “얘, 읽어봐.” 목소리가 약간 떨렸던가? 그래도 괜찮지 뭐, 터프한 속에서 흐르는 약간의 격동, ㅋㅋㅋ…) 평소에는 멀게만 느껴지던 상학길이 오늘은 아름다운 상상때문인지 반이나 짧아진듯싶었다. 홍수는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교실에 들어섰다. 언제나와 같이 교실에는 일찌기 학교에 오는 몇몇 동학들이 앉아서 열심히 교과서를 뒤적이고있었다. 홍수는 얼굴에 웃음을 담고 들어서며 동학들을 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아침―” 동학들이 약속이나 한듯 머리를 들어 홍수를 바라보았다. “얘, 오다가 길에서 모아바이라도 주었니? 큰걸루?” 옆에 앉은 정호가 자리에 앉은 홍수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홍수는 시물시물 웃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여?” “너의 얼굴에 그 정도는 씌여져있다. 아님, 그렇게 입이 귀에 가 걸릴수 있을가?” “그래? 모아바이 한장에 이렇게 흥분을 할 내가 아니지.” “그럼? 그보다도 더 엄청난 기쁨이라? 어허― 수상한데. 뭘가? 아! 그렇지?” 정호가 별안간 알겠다는듯 오른손을 쫙 펴서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그 바람에 책을 보던 애들이 모두 홍수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호가 시물시물 웃으며 홍수에게 한마디 했다. “홍수, 너 아침에 해결을 봤구나.” “뭘, 내가 뭘?” 홍수가 정색해서 정호를 바라보았다. 어쩜 “선녀”에게 종이학을 날린것이 정호에게 발각되지 않았나 속이 꿈틀했다. 정호의 입가에 아릴듯말듯 묘한 웃음이 피여났다. (이 자식이 분명 눈치 챈거야, 어떻게 안거지?) 홍수쪽에서 되려 궁금증이 나 안절부절 못했다. 정호가 여전히 킥킥거리며 입을 열었다. “홍수야, 너 아침에 분명…” “오, 어떻게 알았니?” 홍수가 정호옆에 바싹 붙어앉았다. “어떻게 알긴, ㅋㅋㅋ… 네가 시원히 큰 문제를 해결하구 기분 좋게 화장실에서 나오는걸 내가 분명 봤는데.” 정호의 말을 듣고난 홍수가 어이없다는듯 주먹으로 정호의 어깨를 쥐여박았다. “에잇, 유치한 놈!” 교실에서 폭소가 터졌다. 홍수는 수학교과서를 꺼내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기분이 좋아 그런지 어렵기만 하던 수학문제가 술술 잘 풀려나갔다. 홍수는 오전 내내 꿀먹은 기분이였다. 오전공부가 끝나자 담임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오후에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에 방청을 갈 동학들의 명단을 공포했다. 모두 일곱명이였는데 홍수와 정호도 들어있었다.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학급간부들과 웅변에 재간이 있는 동학들 몇명을 뽑은것 같은데 정호는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듯싶었다. “아자!” 홍수와 정호는 나지막이 쾌재를 불렀다.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는 교원연수학교강당에서 열렸다. 시내 아홉개소 조선족중학교에서 모여온 학생들과 선생님들로 강당은 초만원을 이루고있었다. 관중들은 학교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교육국 부국장님의 개회사가 있은후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 첫 연사를 모시겠습니다. ㅅ중학교에서 온 박옥자연사입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사회자의 도어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졌다. 첫 연사라 모두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정호가 홍수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피씩 웃으며 속삭였다. “박옥자, ㅋㅋㅋ… 왕청에 사는 우리 이모가 생각난다.” “왜? 하필이면 너네 이모야?” “촌티가 줄줄 흐르잖아? 박옥자가 뭐야?” 두손을 가슴아래로 들어보이며 뚱뚱한 모습을 그리는 정호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어려있었다. 장내에서 또다시 박수소리가 울렸다. 홍수와 정호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무대우에 눈길을 던졌다. ㅅ중학교에서 온 연사가 무대우에 올라서 관중석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곱게 인사를 하고있었다. 연사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헉!” 순간 홍수는 호흡이 뚝 멎는듯싶었다. (저 애가, 저 애가, 그래! 나의 선녀야.) 홍수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헤벌리고 무대우에서 눈길을 뗄줄 몰랐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애국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빛 따스한 교실에서 마음껏 지식의 바다를 헤염치며 저는 늘 이런 생각을 굴려봅니다…” 격정에 떠는듯한 “선녀”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강당에 울려퍼졌다. “그래, 넌 뭐라고 생각하니?” 정호가 홍수의 넙적다리를 툭 쳤다. 홍수는 깜짝 놀라 정호쪽에 머리를 돌렸다. “어, 좋아하는거지 뭐.” “뭐가?” “뭘 물었는데?” 홍수는 정신을 추스리며 정호를 건너다보았다. 달콤한 기분을 망그러뜨린 정호가 입안에 들어온 사탕을 빼앗아가기라도 한듯 밉고 야속스러웠다. 정호가 홍수를 건너다보며 시무룩이 웃었다. “박옥자는 아닌것 같은데. 참 아깝다.” “뭐가?” “저 애, 저 애가 박옥자래.” “그런데? 너, 저 앨 아니?” “아니 몰라. 이쁘잖아…” “이쁜데는?” “좋거든, 보기만 해도. ㅋㅋㅋ…” “짜식!” 홍수가 눈을 뒤집으며 못마땅한듯 정호를 흘겨보았다. 정호는 홍수의 기분을 아직 읽어내지 못하고있었다. “아깝잖아.” “뭐가?” “ㅋㅋㅋ 이름이.” “이름이 왜? 그럼 넌 저 애 이름이 뭐가 됐으면 좋겠는데?” “섹시하게. 저 애 얼굴처럼 아름답게.” “자식,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홍수는 주먹으로 정호의 어깨를 슬쩍 쳐주면서 머리를 돌리고 무대우에 눈길을 주었다. “애국이란 말로만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실제 행동으로, 나부터 실천해야 하는것입니다. 학생인 우리의 실제 행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기의 신분에 충직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자기를 성숙시켜나아가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각부터, 나부터 진정 애국의 주인공으로 되자고 이 연사는 소리 높여 호소합니다.” “선녀”는 머리우로 두주먹을 올려 힘껏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장내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홍수도 그 소리에 섞여 무대옆으로 사라지는 “선녀”를 바라보며 죽어라 두손을 마주쳐댔다. “어때? 보통이 넘는 애지?” “근데, 넌 왜 이렇게 흥분하니?” 정호가 이상하다는듯 야릇한 눈길로 홍수를 바라보았다. “자식! 그럴만한 일이 있어.” 홍수는 정호에게 두눈을 끔쩍해보였다. 가슴이 활랑거리는것이 이 세상을 다 안은듯한 기분이였다. 웅변대회를 끝내고 밖에 나와보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진지 이슥한 때였다. (어쩔가? 기회를 봤다가 그 애를 불러가지고 함께 집으로 갈가?) 피뜩 홍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였다. 하지만 인차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약속대로 메신저에서 보는거야, 지금 만나서 집적거리면 사내대장부가 그새를 못 참는다고 웃을지도 몰라. 그래, 보고싶어도 참는거야.) 홍수는 먼저 어머니에게 웅변대회가 아직 끝나지 않아 늦어질것 같다는 거짓전화를 넣은 후 속웃음을 실실 날리며 흐뭇한 마음으로 PC방에 들어섰다. 수금원녀자는 오늘도 질겅질겅 껌을 씹어대고있었다. 홍수는 수금원녀자에게서 자리번호를 새긴 패쪽을 받아가지고 컴퓨터앞으로 다가가 파워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선녀는 없다”가 먼저 메신저에 올라있었다. (참, 의리가 있는 애야, 속이 깊은 애라니까!) 홍수는 아끼고있는 소중한 보석을 찾았을 때처럼 가슴이 활랑거렸다. “할룽―” 홍수가 먼저 인사를 보냈다. “어디니?” “선녀는 없다”가 뒤따라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 홍수는 잠간 망설였다. 어제밤에 생각없이 집이라고 대답을 보낸것이 속에 걸렸던것이다. (그래, 제대로 대답하자. 그게 이 애에 대한 례의야.) 홍수는 “선녀”의 얼굴을 그려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 PC방이거든. 하학하는 길에 곧장 들렸어. 너 이름이 박옥자 맞지?” 홍수는 엔터키를 누르며 혼자서 히쭉 웃었다. 낮에 이름을 들으며 정호가 왕청에 사는 이모를 떠올리던 생각이 났던것이다. “왜, 이 시간에도 PC방에 있는데? 집에서 얼마나 기다리겠니?” “선녀”는 이름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아칠하게 높이 있는 년장자마냥 공식적으로 물어왔다. 홍수는 글에서 풍기는 설교비슷한 냄새를 흠씬 맡으며 잠간 뭐라고 답을 썼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정말 이름만치나 고풍스러운 앤가? 열정에 들떠 애국을 부르짖더니 정말 머리속에 빠알간 물감만 그득 찬건가?) 홍수는 용기를 내서 한번쯤은 그 애와 다른 냄새를 풍기는 당당함을 보여주는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약속은 지켜야잖니? 난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남자거든. 멘저에 올라줘서 고맙다.” “약속? 난 약속이란 아무렇게나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하지 않은 약속은 할 필요도, 지킬 필요도 없지 않겠니?” 역시나 판에 박은듯한 속이 꽉 찬 말이였다. 홍수는 차츰 진주목걸이를 꿰기만치나 힘들어가는 자기들의 대화분위기를 의식하고있었다. (얘가 일부러 이러는건가? 아님 정말 고리삭아빠진건가?) 실망이라는 두 글자가 기분 나쁜 송충이처럼 머리속을 스멀스멀 헤쳐 지나갔다. 하얀 차림에 파르스름한 가방, 뒤로 모아서 한데 묶은 치렁치렁한 생머리, 그리고 하얀 얼굴에 함초롬히 물고있는 마알간 웃음… (아니야, 절대로 그 애에게서 삼년 묵은 토장냄새가 날수 없어, 일부러 그러는거야. 분명 그 애는 로맨틱한데가 보였어.) 홍수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대담하게 한발 다가섰다. “옥자야―” “??????????????” “우리 랠저녁, 만날가?” “……” “우리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 난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참 많거든.” 진정이였다. 홍수는 남자인 자기쪽에서 먼저 그 애에게 진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자기의 진정이 꼭 그 애로 하여금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기의 진심을 들어내게 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선녀는 없다”가 글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뭔 말을 하고싶은데? 너, 너무 스스로가 감상적이다는 생각이 안드니?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리에겐 우리만의 중요한 임무- 학습이라는게 있거든. 시간은 흘러가면 돌이킬수 없는거야. 이 순간도 이 순간에 할 일이 따로 있는거야, 얘, 꿈을 깨라. 현실을 정시하구 사나이처럼 당당하게 현실을 대하자. 우리에게 지금 할 일이 뭔데? 너 총명하니까 정답을 알고있으리라고 믿는다.” 숨막힐 정도로 부지런히 날아오는 글을 읽으며 홍수는 잠간 헤여나오지 못할 소택지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과연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뭘가? 공부? 언제면 끝날지 모르는 공부? 해도해도 끝이 없는 공부?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공부뿐일가?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세대차이라고 밀막아붙이겠지만 어쩜 같은 길을 걷고있는 이 애에게서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것일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달통되지 않았다. 어딘가 배심 비슷한것이 꿋꿋이 머리를 쳐들고있었다. (그래, 만나는거야, 만나서 그 애의 진정을 근 떠보는거야, 그 애도 어쩔수 없는 녀자인거지 뭐, 내숭이 없으면 녀자라고 할수도 없는거구. 에잇, 깜찍한것.) 홍수는 제 생각에 머리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알았다. 너의 설교를 듣고나니 앞이 다 환해지네. 래일 만나서 너의 정치강의 한시간 더 들어줄게. 약속, 우리 만나는거다.” 홍수는 멋지게 오른손 약지를 놀려 글을 띄웠다. “꼭 만나야 해?” “그럼!” “그래, 좋다. 래일저녁 8시에 만나. 마을 뻐스역에서!” “와~” 홍수는 오른 주먹으로 자기의 넙적다리를 탁 내리쳤다. 미칠것만 같았다. 살아숨쉬는듯 생생한 선녀도가 클로즈업되여 머리속을 꽉 채우며 펼쳐졌다. (너, 참 멋진 면이 있어. 남자의 매력이 풍긴단 말이야.) “선녀”가 분명 이렇게 속삭이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홍수는 으스스 어깨를 떨었다. 다시한번 모니터에 뜬 글을 읽으며 어깨를 쩍 벌려보았다. 홍수는 무척이나 성숙되고 당당해진 자신을 보는듯싶었다. D “홍수야, 아버지는 우리 한번 참답게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사뭇 정색해서 홍수를 건너다보며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그 서슬에 홍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아버지를 건너다보았다. 아버지는 어느새 깔끔하게 경찰복장을 차려입고계셨다. (아버지께서 웬 일로 대화를 청하실가? 오늘밤, 지금껏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홍수는 아버지가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아까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와 “늦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때도, 저녁밥을 먹을 때도, 아버지의 표정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헌데 홍수가 저녁밥을 다 먹고 침실에 들어오자 아버지께서는 기다렸다는듯 이렇게 경찰복장까지 차려입고 침실로 따라 들어온것이다. (낮에 어머니께 웅변대회가 늦게 끝나서 늦어질것이라고 전화를 했으니 오늘 늦어진 일을 가지고는 다른 의심이 없을것이고… 혹시 어제저녁에 내가 PC방에 갔던 일을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일러바친것이 아닐가? 에잇, 녀자들이란 믿을수 없다니까!) 홍수는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한번 아버지를 힐끗 훔쳐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진채로 있었다. “이야기하세요.” 홍수는 혀아래로 기여들어가듯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아버지께서 홍수의 앞으로 한뽐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우리 서로 실말을 하기로 하자. 서로 속이기 시작하면 자연히 믿음이 없어지고 믿음이 없어지면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겠지?” “알았어요, 아버지, 무슨 말씀 하고싶은데요? 잘 들을게요.” 홍수는 아버지께서 말머리에 다는 긴 볏이 사뭇 부담스럽게 생각되였다. 아버지는 평소 홍수와 이야기를 할 때 종래로 이렇게 긴 볏을 달아본적이 없었다.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하고싶은 말씀만 하고 하회를 기다리군 했던것이다. 전에 없던 행동을 보이시는 아버지의 표정도 여느때없이 경직되여있다고 생각하며 홍수는 다시한번 아버지의 표정을 읽었다. “그래, 홍수야, 우리 약속한거다. 말해봐라, 오늘 어째서 이렇게 늦었니?” “웅변대회가 늦게 끝났어요,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더랬는데요.” 홍수는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다 이야기했을텐데 하는 투로 별생각없이 가볍게 대답해버렸다. “오, 웅변대회가 늦게 끝났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크게 떨리고있었다. 아차! 홍수는 순간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쳤다. 오늘밤 대화의 시작을 잘못 뗀것이 아니냐는 위구심이 몰려들었다. 드디여 아버지께서 오른발을 탕 하고 들었다 놓으며 소리쳤다. “임마! 뭘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그 서슬에 홍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홍수는 아버지의 이같이 성난 모습을 보는것이 처음이였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손으로 걸상등받이를 꾹 짚고 서서 아버지의 입술만 지켜보았다. “정말 실망이다. 홍수야, 아버지는 여태껏 우리 홍수만은 굳게 믿었거든. 자기절로 자기를 단속할줄 알고 분촌은 얼마든지 잡아가며 행동할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이다. 헌데 너, 다시한번 묻는다, 어디 가서 뭘 하다가 인제야 왔어!” “저…저, 아버지.” “또 웅변대회가 늦게 끝나서 늦었다고 말 할래?” “아…아니요.” “솔직하게 말해봐!” 홍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이글이글 타고있었다. “치…친구 집에 갔다가 느…느…늦었어요.” “그래, 친구 집에 갔다가 늦었지. 말해봐. 친구, 누구네 집에?” “저…정호요, 정호네 집에요.” “끝까지 곧은길로는 안 가려는군, 자식!” 아버지는 거쿨진 손바닥을 쫙 펴서 홍수의 얼굴을 힘껏 갈겨주었다. 순간 홍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왜 때려요?” 홍수는 얼얼해나는 얼굴을 싸쥐고 아버지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왜 때려? 것두 말이라고 묻니? 정호가 널 찾아 전화가 왔었는데 그래도 거짓말을 하고싶니?” 홍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완전히 범죄자를 다룰 때처럼 경멸에 차있었다. “오늘밤, 시간을 준다. 잘 생각해보고 래일아침, 정답을 내놔봐. 그래도 거짓말이 나오는가 보자!”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침실을 나갔다. 경찰복을 차려입은 아버지의 우람한 뒤모습은 홍수에게 말 못할 위압감을 주고있었다. 홍수는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깊고깊은 나락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많이 늦어지는가요?” 객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소.” 아버지의 대답이였다. 이어 “쾅” 하고 출입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나가셨다.) 딱히 뭘 바라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홍수는 아버지께서 이 순간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속을 맴돌았다. 홍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께서는 뭘 하고계실가?) 어머니의 표정이 어떠한지 무척이나 궁금해났다. 홍수는 사이문에 잠간 귀를 가져다대고 객실의 동정을 살폈다. 잠잠한것이 객실에서 무거운 고요가 흐르고있는듯싶었다. 홍수는 살그머니 사이문을 밀어열고 객실로 나갔다. 어머니는 텔레비죤도 켜지 않은채 그린듯이 쏘파에 앉아계셨다. 홍수는 일부러 “으흠!” 하고 건가래를 떼며 어머니를 흘끔 훔쳐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셨다. 아예 홍수의 존재는 잊은듯했다. 약간 서운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홍수는 주방에 들어가 일부러 고뿌를 식탁에 딸랑 부딪쳐 소리를 내고는 정수기에서 생수를 뽑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홍수는 다시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면서 객실에 눈길을 던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쏘파에 굳어진듯 앉아서 인정에 다욕한 마귀할멈처럼 으스러지게 자기의 감정을 끌어안고있었다. 홍수는 침대에 몸을 던졌지만 두눈이 올롱해나면서 도무지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왕―” 소리를 내는 홍수의 머리속으로 육박해오고있었다. “오늘밤, 시간을 준다. 잘 생각해보고 래일아침, 정답을 내놔봐. 그래도 거짓말이 나오는가 보자!” 그 시각, 아버지의 날이 선 목소리가 홍수의 귀전을 때리고있었다. 가슴이 갑갑해났다. 래일아침, 래일아침에 마주하게 될 아버지의 얼굴이 그처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래일아침, 과연 아버지에게 무엇이라고 대답을 준담?) 홍수는 정말 “선녀”와 메신저를 하느라고 늦었다고 이실직고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앞에서 그것까지 밝혀지는 날이면 아버지의 그 거쿨진 주먹이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하다면 래일아침, 아버지께 뭐라고 말해? 또 거짓말을 해?) 홍수는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아래 단추도 내리내리 잘못 채워지게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홍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에서 쪽배 같은 쪼각달이 외롭게 흐르고있었다. 까아만 밤하늘에서 홀로 가는 쪼각달을 쳐다보노라니 저도 몰래 서글프고 외로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달은 어디로 가고있을가? 무슨 일로 저리도 외롭게 가는것일가?) 홍수는 도로 침대에 누워 두눈을 꼭 감았다. 어제밤처럼 어머니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어머니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고싶었다. 하지만 오늘밤, 홍수는 어머니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런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쳤다. 사람과 사람지간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보듬어 안으려면 그 상대가 누구든간에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사실로 증명이 되는것 같았다. “휴―” 삼뭉치 같은 한숨이 홍수의 침침한 가슴을 훑고 지났다. (랠아침, 아버지께 “선녀”와 메신저를 하느라 늦었다고 실토를 해야 할가?) 홍수는 다시한번 똑같은 물음을 자기에게 던졌다. 이 시각에 와서 홍수는 아까처럼 아버지의 손바닥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실토를 하고 난후 자기가 처할 처지가 더 근심되였다. (아버지는 분명 다시 “선녀”와 거래를 하겠는가고 물을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수 있을가? 나에게는 과연 “선녀”와 다시 거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건가?) 홍수는 홀연 눈앞에서 춤추는 선녀를 보았다. 선녀는 하얀 날개옷을 하늘거리며 운무처럼 하늘을 날아오르고있었다. 다시는 그 선녀를 보지 못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것만 같았다. 홍수는 책상앞으로 다가가 서랍에 잠근 자물쇠를 열고 일기책을 꺼내서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나무군은 선녀를 찾아야 한다. 꼭 찾아 떠나야 한다. 나무군은 선녀를 놓칠수 없다.” 홍수는 멋지게 마침표를 찍고는 만년필을 일기책 갈피에 척하고 내려놓았다. 그날 밤, 홍수는 꿈에 선녀를 보았다. 선녀가 아득히 먼곳에서 홍수를 향해 손짓을 하고있었다. 홍수는 한달음에 선녀를 향해 달려가지 못하는것이 죽도록 안타까왔다. 하지만 선녀와 홍수 사이에는 깊고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었다. 홍수는 그 골짜기를 날아 넘으려고 두팔을 힘껏 퍼덕거려보았다. 아래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워나서 도무지 날수가 없었다. 홍수는 해리포터처럼 마술의 비자루라도 있다면 타고 갈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홍수는 애타게 점점 무거워지는 아래다리를 꼬집다가 눈을 떴다. 홍수의 손은 허벅다리를 누르고있었다. 그때 허벅다리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홍수는 손에 묻어 찐득찐득한 액체를 살펴보면서 말 못하게 가슴이 찜찜해났다. 홍수는 부석부석한 두눈을 비비며 일어나 알람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시 반이 좀 넘은 뒤였다. 피뜩 머리속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또 어제저녁에 어디 가서 돌아다니다 왔는가를 따질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지?) 역시 정답이 없는 물음이 홍수의 머리속을 치고 들어왔다. 홍수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조용조용 교복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시간표를 보면서 가방에 교과서를 바꿔 넣었다. 홍수는 아버지 어머니를 깨울가 두려워 세수도 못한채 살그머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후―” 하고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후에야 어찌 되든간에 이 시각만은 용케도 아버지의 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니 한시름이 놓였던것이다. E 뻐스에서 내린 홍수는 교실을 바라고 여드레 팔십리 걸음으로 늘쩡늘쩡 걸었다. 다른 때 같으면 10분이면 걸을 길을 얼마나 더 걷는지 몰랐다. 학교옆에 있는 식품상점을 지나노라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먹구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어디 먼저 먹구보자.) 김밥 한곽을 게 눈 감추듯 먹고 음료까지 한병 꾸르륵 해치우니 아래배가 든든해진것 같았다. 홍수는 상점 동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6시 30분, 여느때보다 십분쯤 일찍 했지만 그래도 교실문은 이미 열어놓았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홍수는 상점에서 나와 학교를 바라고 발걸음을 옮겼다. “홍수야―” 금방 학교 대문에 들어서자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수는 소리를 따라 뒤로 머리를 돌렸다. 정호가 헐레벌떡 뛰여오고있었다. 정호를 보는 순간 홍수의 머리속에는 문제의 어제밤이 떠올랐다. (정호, 저 자식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고?) 홍수는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뭔가 욱하고 올리치미는것을 느꼈다. 홍수는 걸음을 뚝 멈추고 정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호는 아침에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번지르르 번지고있었다.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자기는 좋아 죽겠다는듯 해시시 해있는것이 보기만 해도 미워났다. “얌마, 너 어제밤에 정말 좋은 일을 했더구나.” “홍수야, 미안, 사실은 너에게 수학숙제를 물어보려구 전화했었는데 네가 집에 없더구나. 어데 갔댔니?” “왜? 알고싶어?!” 홍수가 무서운 눈길로 정호를 향해 찔 흘겨보았다. 홍수의 그 눈길에 정호는 혀를 날름해보이며 한풀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홍수야, 왜 그러니? 너, 설마 나의 전화땜에 고역을 치른건 아니지?” 홍수는 가슴에서 치솟는 울분 그대로 정호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자식,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전화야? 내가 아버지에게 왕창 터지니 너 깨고소한거지? 아침도 못 먹구 도망쳐나왔다. 너 어쩔래?” 한바탕 퍼붓고나니 속이 다 후련해났다. 정호가 홍수를 훔쳐보며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너의 아버지가 별말씀이 없이 그저 함께 웅변대회에 갔댔냐고 묻기에 첨엔 그냥 함께 갔었다고 말해버렸다.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네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었냐고 물어서야 나는 네가 집에 들어가지 않은것을 알게 됐거든. 근데 너 어디 갔댔니? 그 시간에?” 정호가 무척이나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듯 홍수곁에 한발 다가섰다. 홍수는 타는듯한 눈길로 정호를 쏘아보다가 한마디 하며 돌아섰다. “달나라에 갔다가 왔다. 됐니?” “홍수야, 홍수야―” 뒤에서 정호의 부름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홍수는 시끄럽다는듯 머리도 돌리지 않고 교실을 바라고 씨엉씨엉 걸음을 재촉했다. 첫 시간부터 숙제검사가 있었다. “자, 오늘도 파도를 거슬러올라가신분들이 계시겠죠? 그 얼굴을 한번 자랑해볼가요?” 언제나 반어법을 구사해서 동학들속에서 “꺼꾸로 샌님”이라 불리우는 수학선생님이 한손으로 교탁을 떡하니 짚고 서서 시물시물 웃으며 동학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차, 수학숙제!) 홍수의 머리속에서는 “윙―” 하고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맘때면 단골로 일어서는 몇몇 동학들이 삐딱하니 책상모서리를 짚고 섰다. 홍수는 차마 따라 일어설수 없었다. 여느 동학들처럼 이런 장면에 습관이라도 됐더라면 이다지 난처하지는 않을것 같았다. “자, 거룩하신 얼굴들이 다 나타나셨나?” 수학선생님이 동학들에게 다시한번 눈길을 주었다. 홍수는 마지못해 머리를 푹 숙이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수학선생님이 퍽 놀라는 눈치였다. “저런저런, 간부님도 계시네. 인젠 간부들이 앞장서서 모범역할을 하시겠다? 참 좋습니다. 좋아요. 자 거룩하신분들 모두 잘 들으세요. 시간이 끝난 다음 왜서 수학숙제를 못해오셨는지 시말서를 써서 올리세요. 이만, 오늘시간을 보겠습니다.” 수학선생님이 교과서를 번졌다. 정말 요강덮개로 물 떠먹은 기분이였다. 홍수는 중간체조시간에 나갔다 오고는 오전 내내 교실에서 책상에 머리를 틀어박고있었다. 정호가 그러는 홍수를 보기 미안한지 옆에서 집적거렸다. 홍수는 그러는 정호의 행실이 마치도 병 주고 약 주는 시누이 같아서 여간만 밉지가 않았다. 정호는 그런줄도 모르고 지겹게도 홍수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아, 괜찮대두. 남자가 이 정도 좌절이야 웃으면서 넘길수 있어야지. 매일 숙제를 안해서 선생님께 욕을 보는 애들이 어디 한둘이니?” “……” “그리구 어제밤의 일도 그렇지. 너의 아버진 벌써 그 일을 까맣게 잊고있을거다. 그럴거라니까. 근데 홍수야, 너 어제밤에 진짜 어디 갔댔니? 설마 련애하러 갔던건 아니지?” 평소 같으면 그저 “실컷 씨부렁거려라!”하고 흘려버릴 말이였지만 그 순간만은 꼭 마치도 무엇인가를 비꼬아 시까스르는것처럼 들려서 도무지 참을 길이 없었다. 홍수가 책상을 탕 내리쳤다. “너, 그냥 씨부렁거려?” 정호가 깜짝 놀라서 입을 하 벌리고 홍수를 건너다보다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너, 어쩌라구 깜짝깜짝 소리쳐 사람을 놀래우니? 별소리도 아닌데.” “에잇, 질려. 질린다구!” “야, 웃자구 한 말인데 진짜 성격을 내는게 아니니?” 정호의 기분도 차츰 흐려지고있었다. 홍수는 그러는 정호옆에 탁 하고 침을 뱉으며 코웃음을 쳤다. “웃어? 웃음이 나오니? 발랑개비 같은 자식!” “발랑개비라구? 너 말 다했니?” 정호가 홍수의 턱밑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래, 다했다. 어쩔래?” 홍수가 주먹으로 정호의 가슴을 한대 툭 쳐버렸다. 정호도 지지 않고 홍수를 향해 슬쩍 주먹을 날렸다. “속이 좁아가지구, 뭔 일을 하겠니? 뭘 대단한 일이 터졌다구, 오늘 내내 이렇게 궁시렁거리니? 남들은 진작 잊어버린지 오랜데?” “그래, 내 속이 좁은걸 인제야 알겠니? 흥, 너 같은 새끼를 친구라고…” 홍수는 코앞으로 다가서는 정호를 옆으로 밀치며 몸을 돌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정호가 옆으로 나가 너부러졌다. 정호가 발딱 일어서며 홍수에게로 덮쳐왔다. 홍수는 주먹으로 정호의 얼굴을 냅다 갈겼다. 정호의 코구멍에서 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를 본 정호가 “악―” 소리 지르며 죽기내기로 홍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그냥 놀음으로 생각하고 지켜보고있던 동학들이 욱 몰려들어 싸움을 뜯어 말렸다. 홍수는 그러는 친구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나쁜 새끼, 소박채가 쥐구멍만해가지구. 가다가 뒈지기나 해라.” 정호의 앙칼진 욕설이 홍수의 등을 사정없이 때리고있었다. 한숨에 학교밖으로 피해 나온 홍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물아물해지는 눈길로 멍하니 학교건물을 바라보았다. 고역 같던 오전일상이 언뜻언뜻 머리속을 스쳐서 다시는 학교안으로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에잇―” 홍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어느새 ㅅ중학교에 거의다 오고있었다. (왜? 내가 왜 여기로 왔을가?)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입가에 가는 실웃음이 피여났다. 아름다운 선녀도가 아늑하게 눈앞에 펼쳐지고있었다. (오늘밤 8시, 마을 뻐스역에서!) “선녀”와의 약속이 뇌리를 쳤다. (그래 만나는거야, 만나서 나의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는거야, 그 애라면 나의 마음을 리해할수 있을것이고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수 있을것이야, 저녁 8시, 그래 만나는거야.) 홍수는 터질듯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어디에 주체할 길이 없었다. 홍수는 손가락을 비벼 딱 소리를 내며 풀을 만난 망아지마냥 앞으로 뛰여갔다. 오후 내내 PC방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하며 끝내는 밤 8시를 눈앞으로 당겨왔다. 홍수는 미리 결산을 하려고 카운터로 다가가 10원짜리 돈을 건네주었다. 수금원녀자가 질근질근 껌을 씹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얼굴도 돌리지 않고 서랍에서 1원짜리 한장을 꺼내 홍수앞에 던졌다. (아홉시간?) 홍수는 저로서도 흠칫 놀랐다. 그제야 아직 점심밥도,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홍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가 7시 4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홍수는 PC방에서 나와 곧추 마을 뻐스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의 뜻이였기에 서로를 리해하면서 행복이라는 보짐을 메고 눈부신 사랑을 했죠…” 홍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뻐스역에는 사람이 없었다. 홍수는 가로등 불빛을 빌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56분이였다. (4분, 4분만 있으면 “선녀”가 나타날것이다. 그 애는 분명 약속을 지킬것이다.) 홍수는 흥분으로 하여 가슴이 폭발할것만 같았다. 홍수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선녀”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그 애를 만나서 어떻게 말을 걸가? 나와 줘서 감사하다? 이― 너무 맹맹하잖아. 격정이 없단 말이야, 기다렸다. 난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 으― 닭살!) 홍수가 깨고물 같은 생각을 혼자 굴리며 활활 타는 눈길로 어둠을 가르고있을 때 남쪽 아빠트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홍수는 가슴이 쿵쿵 방아를 찧었다. 홍수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점점 가까와오고있었다. (아니잖아?) 익숙한듯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모습이였다. 홍수는 바람 빠진 기구처럼 어깨가 처져내렸다. 홍수는 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혹시나 그리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처량한 가로등아래로 음침한 정적만이 무겁게 흐를뿐이였다. 홍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8시 3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이럴수가 없는데, 이럴수가 없는데…) 홍수는 속으로 아파지려는 자기의 마음을 보듬으며 머리를 돌렸다. “앗!” 홍수는 순간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두어발 떨어진 곳에 어머니가 그린듯이 서있었다. 옳았다. 아까 분명 익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하고는 련계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오래 기다렸니?” 어머니께서 홍수쪽으로 걸어오며 부드럽게 물었다. “네,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라니? 우리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네? 어-머-니!” 어머니께서 홍수쪽으로 한발 다가서며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쪽지를 꺼내여 홍수앞에 흔들어보였다. “아직 때가 아닌거야, 그래서 이 쪽지가 너의 ‘선녀’를 찾아가지 못한것이지. 그날, 엄마가 출근하다가 땅에 떨어져있는 이 쪽지를 주었거든.” 어머니는 잠간 말을 멈추고 홍수의 표정을 읽었다. 홍수는 당금 튀여나오려는 심장을 누르고 서서 애타게 발뿌리로 땅바닥만 우벼댔다. “세상일이란 이런거란다, 무슨 일이나 때가 돼야 결과가 있는것이지. 아마 이 쪽지가 엄만데로 오는게 제일 합당할것 같아서 하느님이 엄마에게 전해줬나보구나.” 어머니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홍수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 홍수는 도무지 뒤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어머니앞에 서있는 자신이 그렇듯 작고 초라하게 생각되였다. (내가, 내가 이 며칠 무슨짓을 한것일가?) 홍수는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홍수야, 엄마는 아직도 홍수를 믿고있다. 엄마는 우리 홍수가 요즘, 고약하게 아픈 사춘기를 앓고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꾸고있는거지, 꿈이 깨면 홍수는 꼭 제자리로 돌아와있을거다. 홍수야, 어때?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홍수의 가슴을 찢고있었다. 홍수는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욱 올리밀어 목구멍이 꺽 막혀왔다. 몸을 픽 돌렸다. 눈귀에서 뜨거운것이 맺혔다가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홍수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채 둥글어지지도 못한 쪼각달이 망망한 밤하늘에서 정처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있었다. 홍수는 집을 바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는듯한 노래소리가 쓸쓸하게 어둠을 가르며 홍수의 뒤를 밟고있었다. … 선녀를 찾아주세요, 나무군의 그 얘기가 사랑을 잃은 이내 가슴에 아련히 젖어오네요…  
4    아직은 초순이야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2-04-24
    거울속에서 둥글둥글한 까까머리가 내다보고있었다. 웅진이는 순간 자기의 머리통이 수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점을 잃은듯 퀭하니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외까풀눈은 슬픈듯, 담담한듯 뭐라고 딱히 이름을 지을수가 없었다. 웅진이는 천천히 손을 올려 으스러지게 두눈을 비벼댔다. 약간 통증을 보이던 눈이 잠간새에 지끈지끈 빠지는듯 아파났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손님의 머리를 깎다말고 불안한 표정으로 웅진이를 살피던 노랑머리리발사가 낮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물었다. 웅진이는 눈굽을 비벼대던 손길을 멈추고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노랑머리리발사는 웅진이를 지켜보고있었다. 웅진이는 노란 불티가 탁탁 튀는듯한 두눈을 슴뻑거리며 노랑머리리발사를 힐끗 쏘아보고는 인차 머리를 외로 탈며 “아니.” 하고 칼로 두부 자르듯이 대답했다. “10원이야, 5원만 받을게.” 리발사의 목소리도 잘 드는 칼로 싹둑 무우를 자르듯이 간결했다. 웅진이는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5원짜리 돈을 집어내여 노랑머리리발사에게 던져주고는 머리를 푹 숙이고 볼부은듯 씨엉씨엉 미장원을 걸어나왔다. 층집들 창문으로 빠져나온 희미한 불빛들이 괴괴하게 미장원마당을 비춰주고있었다. 희미한 불빛만치나 마음에도 뽀얀 운무가 서린듯 침침하기 그지없었다. 웅진이는 오른 주먹으로 말없이 가슴팍을 두어번 툭툭 치다가 오른손을 쑥 올려 머리통을 쓸어보았다. 탐스럽게 한줌 팍 쥐여오던 머리칼은 오간데 없고 까칠한 느낌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전률 같은 그 느낌은 오른팔을 타고 쑥 올라와 페부로 날아들더니 인차 가슴을 탁 치며 “흑―” 하고 한숨을 톺게 했다. 웅진이는 잠간 두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 하나 없이 캄캄한 밤하늘에서 뿌연 초생달이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고있었다. (아직은 초순인가봐.) 삼검불같이 엉켜진 머리속으로 채 여물지도 못한 초생달이 비집고 들어오려는것이 웅진이로서도 야릇하게 생각되였다. 웅진이는 손등으로 번갈아가며 두눈을 비비다가 다시한번 쪼각달을 쳐다보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어디라 딱히 방향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겨놓으며 웅진이는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옴을 느끼고있었다. 무던히도 힘에 부치는것 같았다. 웅진이는 선채로 “후―” 하고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옮겨 가로수아래에 설치되여있는 간이의자로 다가갔다. 간이의자는 툭하니 무너져내리는 웅진이의 엉덩이를 아무 부담없이 받아주었다. 웅진이는 천근같이 무거워나는 엉덩이를 지그시 간이의자에 눌러 박고는 두손으로 넙적다리를 꾹 누르고 수박 같다고 생각되던 머리통을 무게 그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뜨렸다. 목이 빠듯하게 당겨졌다. (내 머리통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었나?) 그 와중에도 이런 유머스러운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쳐드는것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웅진이는 픽 하고 허구픈 웃음을 날리며 입안에서 혀끝을 방향없이 굴리다가 척하고 머리를 들었다. 수박 같은 머리통에 고여있던 수박속같이 빠알간 피가 순간적으로 아래를 향해 흘러내려서인지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찌릉찌릉―” 문뜩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넙적다리에서 전률 같은것이 느껴졌다. 까아만 공간을 타고 날아오는 그 전률은 웅진이에게 묘한 흥분을 던져주고있었다. 웅진이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넙적다리에 가져갔다. 호주머니안으로 넙적다리우에 놓여진 핸드폰이 찌릉찌릉 진동을 하고있었다. 웅진이는 오른손을 호주머니안에 쑥 집어넣어 요동을 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막에는 “깜찍이”라는 세 글자와 함께 예쁜 얼굴모형이 튀여나와 찌릉찌릉하는 박자에 맞추어 혀를 홀랑거리고있었다. “은영이!” 웅진이는 신음 비슷이 핸드폰저쪽에 서있을 “깜찍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찌릉― 찌릉―” 핸드폰은 다시 웅진이를 불러댔다. 웅진이는 이번에도 선뜻이 핸드폰을 받을념을 못하고 애꿎게 오른손바닥으로 핸드폰소리입구를 막아 쥐고 툭툭 튀는 가슴쪽으로 당겨갔다. 끝없이 울어대던 핸드폰이 입을 다물었다. 웅진이는 “흑―” 하고 큰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핸드폰을 내려서 보기 좋게 눈앞으로 가져갔다. 이때 핸드폰이 또 한번 “찌르릉” 하고 울렸다. 웅진이는 흠칫하며 어깨를 떨다가 정신을 가다듬어 핸드폰에 눈길을 주었다. 깜찍이로부터 문자가 날아와있었다. 웅진이는 약간 떨리는 손끝으로 문자함을 열었다. 막에는 달랑 “?”표만 찍혀져있었다. 웅진이는 한참이나 “?”표를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미장원 거울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있던 수박 같은 까까머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순간 웅진이는 확∼ 얼굴에 열이 오르는것을 느꼈다. 가슴이 툭툭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웅진이는 눈을 감은 그대로 지그시 아래입술을 깨물며 오른손바닥을 쫙 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눌러주었다. “웅진아, 오늘저녁이다. 알았지? 내가 전화 할가? 아님 네가 전화 할래?” 은구슬 굴리는듯한 은영이의 목소리가 방불히 귀전에서 울리는듯싶었다. 웅진이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 3학년 “제1차 학부모회의” 통지를 받은것은 오전 4번째 시간이 끝나서였다. 숨막히게 하는 1년간의 장거리달리기경주에서 첫 려정을 점검하는 순간으로 되는것이였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담임선생님의 약간은 촌스럽다고 생각되는 빠알간 입술을 지켜보고있었다. 안경너머로 작은 눈을 깜빡이며 한참이나 동학들을 참빗질하던 선생님의 입술이 드디여 열렸다. “오늘은 토요일, 오전공부만 합니다. 대신 잊지 말고 부모들께 통지를 해야겠습니다. 학부모회의는 오늘오후 4시에 열립니다. 부모들중 한분은 꼭 와야 되겠습니다. 동무들의 현재정황을 부모들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만 약을 써서 동무들을 구할수 있습니다. 우리 학급에서 절반을 휠씬 넘기는 동무들은 약을 써야 합니다. 약을 써도 상당히 써야 할듯합니다.” 여기서 선생님은 다시한번 작은 눈을 껌뻑이며 안경 너머로 동학들을 쓸어보았다. 마치도 어느 구석에 어떤 자세로 웅크리고있어도 단번에 찾아낼듯한 기세였다. 웅진이는 그 눈길이 싫어서 머리를 책상머리에 대고 숨소리마저 크게 내지 않으려고 고심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빠알간 입술은 금방 기름을 쳐서 잘 여닫기는 문접시마냥 너무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가시있는 말들만 골라냈다. “네, 얼굴이 붉어지면 그렇게라도 머리를 책상에 틀어박고 반성을 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집에서 어떻게 동무들을 뒤바라지하고있고 또 어떤 희망을 동무들에게 걸고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험성적이 부모들의 기대에 못미쳐도 너무나 못미치는 동무들이 참 많습니다. 얼굴이 붉어져야 합니다. 최저로 얼굴이 붉어져야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고중입시가 1년도 못 남았는데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 이렇게 시험을 맞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3학년에서의 첫 월고를 이 지경으로 쳐놓고 얼굴마저 붉히지 않는다면 그를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머리칼이 길다고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까?” 교실에서 폭소가 터져올랐다. 딱히 누구라고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마지막 그 한마디는 예리한 갈퀴가 되여 웅진이의 가슴을 아프게 긁어댔다. 웅진이는 호주머니안에 손을 넣어 죽어라고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머리에서 “웅―” 하고 소리가 나며 더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들었다. 머리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다음에 느껴지는 굳어진 증상이였다. 웅진이는 아래우 입술을 번갈아가며 죽어라 빨아댔다.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더부룩한 머리카락안으로 뽀질뽀질 진땀이 배여오르는것도 직감으로 알수 있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마디마디가 고문으로 느껴졌다. 웅진이는 빨리 이 고문에서 풀려나고싶었다. “한칼에 한놈을 죽였다. 한칼에 두놈을 죽였다. 한칼에 세놈을 죽였다…” 웅진이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속으로 이렇게 주문처럼 외워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드디여 선생님의 고문도 끝나고 동학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진이도 채는듯이 가방을 집어들고 바람처럼 교실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교정을 벗어나서 큰길에 들어섰다. 9월치고는 찌물쿠는 날씨였다. 웅진이는 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자전거를 밀고 가로수 그늘을 찾아 길섶에 들어섰다. 약간 서늘함이 느껴졌다. 침침하던 가슴이 열리는듯했다. 웅진이는 호― 가는 숨을 내쉬며 머리를 돌려 오던 길을 돌아다보았다. 은영이가 잰걸음으로 쫓아오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기분이 상쾌해났다. 괜히 가슴이 떨려왔다. 웅진이는 은영이를 향해 오던 길을 조여가며 사뭇 여유가 있는척 휘파람을 불었다. “야, 머리칼이 길다고 사람이라 생각하니?” 스포츠머리를 한 길수가 은영이를 지나 자전거를 타고 씽― 하니 달려오더니 웅진이옆을 지나며 시까스르듯 한마디 했다. 웅진이는 곱지 않게 길수를 쏘아보며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머리칼에 가져갔다. 참빗이라도 사르르 흘러내릴듯이 함치르르한 탐스러운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끝에 느껴졌다. 어깨에 닿일듯말듯 찰랑이는 머리칼은 웅진이의 자랑이였다. 어찌나 윤기가 흐르는지 녀자애들마저 “너 땋고 다니지 그러니?” 하며 괜히 질투를 하고 시비를 걸어왔다. 머리칼은 또 웅진이에게 시끄러움을 불러오기도 했다. 담임선생님만 해도 그랬다. 언제나 무슨 불쾌한 일이 있을 때면 웅진이의 긴 머리칼을 두고 시비를 했다. 그때마다 웅진이는 “날 죽여주쇼―” 하는 마음가짐으로 억지로 버텨왔다. 그래도 버티기 바쁠 때면 미장원에 가서 제딴에는 제일 솜씨가 좋다고 생각되는 노랑머리리발사에게 부탁해서 정성들여 몇번 가위질을 했던것이다. “머리칼이 길다고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까?” 웅진이가 생각해도 오늘 선생님의 마지막 한마디는 너무한듯싶었다. (사람이 아니면 그래 짐승이라도 된단 말인가? 어쩜 선생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입에서 겨불내가 확확 풍겨올랐다. 웅진이는 걸음을 옮기면서 한 손으로 으스러지게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었던지 두피가 빳빳하게 당겨지며 진한 아픔이 느껴졌다. “왜 그래? 머리가 아프니?” 웅진이의 옆에 다달은 은영이가 손끝으로 웅진이의 팔을 톡 치며 물었다. “아니.” 웅진이는 움켜쥐였던 머리칼을 놓으며 짧게 대답했다. 은영이의 입가에 고운 웃음이 맺혀 찰랑이고있었다. 언제나 봐도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웃음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그 웃음을 바라볼수가 없어 눈길을 돌리며 다시한번 손가락을 쫙 펴서 자기의 머리칼을 훑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은영이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머리칼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니?” “아니.” “그럼 왜 아까부터 머리칼을 움켜쥐고 그러니?” “괘…괜히 그…그러지 뭐.” 웅진이는 자기의 불편한 심사를 들킨것 같아서 은영이의 눈길을 피하며 더벅거렸다. “웅진이, 너. 크크크… 아까 선생님의 말을 듣구 맘이 불편해서 그러지? 맞지? 참, 넌 귀구멍이 너른것이 흠이라니까. 아까 선생님이 뭐 너의 이름을 지명한것도 아니구…” “이번 월고, 너 성적 괜찮겠지?” 웅진이는 부끄러운듯 눈길을 내리깔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나? 쳇. 노력한만큼 나오겠지 뭐! 넌 어떨것 같니?” 웅진이는 은영이의 물음에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자신없이 도리머리를 했다. 그러는 웅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은영이는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이러구보니까 너 정말 머리칼이 또 길었구나. 어깨를 넘으려네. 웅진아, 오늘저녁 너 머리를 깎지 않을래? 내가 함께 가줄게.” “정말?!” 웅진이는 그러는 은영이를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참, 이제 시작이지 뭐. 월고, 월고. 이놈의 월고가 우리를 숨 못 쉬게 할거다. 으― 어쩜…” 은영이는 공부에 대한 말이 나오면 언제나 그러듯이 약간 볼부은듯한 목소리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웅진이는 그러는 은영이가 참 고맙다고 생각되였다. 은영이가 있어서 힘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치 자기의 못난 모습을 은영에게 보이는것이 미안스럽기도 했다. 웅진이는 두손으로 머리칼을 빗어 넘기며 은영이를 향해 살짝 윙크를 보냈다. 은영이도 웅진이를 향해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 학부모회의에 갔다 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천둥번개전의 검푸른 하늘이였다. 웅진이는 속으로 “아차!”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곧 무슨 일이 터지리라는것은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도 생동하게 말해주고있었다. 웅진이는 자신없이 머리를 푹 숙이며 “오셨어요?” 하고 한마디 하고는 잽싸게 몸을 돌려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어디로 들어가?!” 인차 어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웅진이는 침대를 향해 가다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문이 거칠게 열려졌다. 어머니의 굳어진 얼굴이 침실안으로 쑥 들어왔다. 웅진이는 한발 왼쪽으로 비켜서며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어머니의 왼쪽볼에 있는 입쌀알만한 검은 기미가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폭풍전야의 개시곡이나 다름없는 풍경이였다. “어… 어머니.” 웅진이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있었다. “어머니? 무슨 낯으로 어머니를 불러? 나에게 언제 너 같은 아들이 있어? 뭐야, 40명에서 38등? 이 등신아. 남들이 공부할 때 넌 뭘 하고있었기에 이 모양이냐? 정녕 골이 둔한거냐? 아님 뒤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다니는거냐? 나쁜 놈!” 어머니의 사설은 끝을 볼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각 웅진이는 되려 그것이 마음의 위로가 되는듯싶었다. 웬 일인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쿵쿵 절구질을 하던 가슴에 평온이 찾아들며 이상하리만치 느긋한 기분이 느껴졌다. “미안하지도 않아? 이놈아. 이 나쁜 놈아! 나는 그렇다손치더라도 한국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너의 아버지에겐 좀 미안한것을 알아야지. 너도 알지? 아버지가 공지에서 허리를 상하고도 그 돈을 벌려고 억지로 일하러 다닌다는것을. 누구를 위해서니? 내 잘 먹구 아버지 호강하자고 그러니? 돈 좀 모아서 너를 류학이라도 보내보자고 그러지…” 어머니는 입에 게질게질 거품을 물면서 웅진이를 향해 죽어라 삿대질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눈굽에는 벌써 이슬이 맺혀 번쩍이고있었다. 좀만 흔들면 두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릴듯싶었다. 어머니의 정서가 도를 넘어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진이는 방금 느긋하던 기분이 차츰 가셔지며 은근하게 긴장이 갈마들었다. (어머니, 제발 1절만 하세요.) 웅진이는 속으로 이렇게 사치한 생각을 굴려보았다. 언제나 이렇게 시작한 어머니의 사설은 1절을 하고 2절을 넘어 3절을 지나 4절 5절까지 갈 때도 있었다. 그쯤하면 어머니도 지치고 웅진이도 흥분을 하군 했다. 일단 흥분을 하면 웅진이로서도 걷잡을수없이 입에서 구렝이도 튀여나가고 호랑이도 뛰여나가군 했다. (참자, 참는거야.) 웅진이는 어금이를 꽉 다물고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호주머니안에서 손가락으로 넙적다리를 톡톡 치면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칼에 한놈을 죽였다. 한칼에 두놈을 죽였다. 한칼에 세놈을 죽였다. 한칼에 네놈을 죽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웅진이를 덮쳤다. 웅진이는 피할 사이도 없이 어머니에게 머리칼을 잡혔다. “이 나쁜 놈아. 그래, 그래 넌 좋은것은 배울수 없는거냐? 이 머리도 그렇지. 나 원 낯이 뜨거워서. 너의 반에 너처럼 머리가 긴 애, 또 누가 있니? 선생님도 그렇게 너의 머리를 두고 말을 많이 했다면서? 그래도 그냥 이 모양을 하고 다닌다면서? 그렇지. 매일 아침 머리를 감을 때부터 알아봐야 하는건데. 내 오늘 이 머리에 콱 불을 질러버릴테다.” 어머니는 손에 힘을 넣어 죽어라고 웅진이의 머리칼을 흔들어댔다. 웅진이는 두피가 지끈지끈 당겨져 모진 아픔을 느꼈다. 어머니가 흔들어대던 그 맵시로 머리칼을 확 나꿔챘다. 어머니의 손에 머리칼이 한줌이나 뽑혀져나왔다. “악!” 웅진이는 순간 저도 몰래 단말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웅진이로서도 자신을 걷잡을수가 없었다. “왜 이래요? 왜 이러냐구요?” “왜? 왜?!” 어머니의 매서운 눈길이 웅진이의 얼굴에 와서 꽂히고있었다. 활활 타는듯싶은 눈길은 웅진이의 모든것을 발기발기 찢어버릴것만 같았다. 웅진이는 발딱 일어섰다. 이어 문쪽으로 씽하니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등뒤로 남기며 웅진이는 벌써 신을 신고있었다. 어머니가 뛰여와 웅진이의 옷자락을 거머쥐였다. “가긴 어디로 가? 못 간다. 오늘 나가면 다신 이집에 못 들어올줄 알아라.” “안 들어올게요. 안 들어와요. 됐어요? 시원해요?” 웅진이도 어머니를 향해 건침을 탁탁 튕기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못 나간다. 못 나가. 못 나간다구! 이 나쁜 놈아. 이대로는 못 나간다!” 어머니는 웅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옷섶을 거머쥔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있었다. 웅진이는 그러는 어머니를 멀거니 내려다보다가 다시한번 “악!”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힘껏 몸을 탈아 빼며 출입문을 쾅 밀어열고 뛰쳐나갔다. “웅진아, 웅진아―” 뒤에서 어머니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처량하게 울렸다. 웅진이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흔들어대며 층계를 내렸다. “찌릉찌릉―” 호주머니안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했다. 웅진이는 잰걸음을 멈추고 호주머니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집어냈다. 세차게 진동을 하는 핸드폰막에는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찍혀있었다. (어머니?!) 웅진이의 뇌리에는 어머니의 손에서 뽑혀져나오던 머리칼이 클로즈업되여 또렷이 떠올랐다. 웅진이는 죽어라 온몸을 떨었다. 어머니의 얼굴도, 뽑혀진 머리칼도 더는 생각을 하고싶지 않았다. 어딘가에 가서 조용히 죽어버리고싶다는 생각만 헝클어진 머리속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웅진이는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으며 잠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층집사이의 한적한 공간이 보였다.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던 공간이였지만 그 순간은 어쩐지 거기 가면 시원한 바람을 맞아 갑갑하던 가슴이 열릴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웅진이는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 잰걸음으로 그곳을 찾아 올라갔다. 건들바람이 불어와 헝클어진 머리칼을 날려주었다. 제법 시원하게 느껴졌다. 웅진이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두팔을 들어 자기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방금까지도 “웅―” 하고 소리가 나던 머리속에 하얀 운무가 서려오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되여가는것일가? 내가 어떻게 이런 꼴이 됐단 말인가? 과연 내가 나쁜 놈이란 말인가?) 소학교때까지만 해도 웅진이는 괜찮은 학생이였다. 품질은 더 말할것도 없고 학습성적도 학급에서 중상등에서 오르내리군 했다. 선생님들도 그렇고 부모들도 그렇고 모두 “좀만 더 노력하면 앞자리에 설수 있을것”이라고 웅진이에게 힘을 실어주군 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와서 학과목이 많아지고 진도가 빨라지자 웅진이는 점점 공부가 힘에 부쳐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암송을 많이 하는 과목은 그런대로 따라갈수 있었지만 수학 같은 과목은 정말 어쩔수가 없었다. 1학년 첫 학기 기말시험에서 22점을 맞은 수학시험지를 집에 가져갔을 때 어머니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 쇼크하기 1분 직전에 이르렀었다. “이 못난 놈아, 너 뭘 하고 다니는거냐? 이것도 시험지라고 받아왔냐? 너의 머리는 돌대갈이더냐? 한 학기 얻어들은 풍월만 읊어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그날 밤 어머니는 상처 되는 말만 골라서 웅진이의 가슴을 벅벅 긁어댔다.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입에 거품을 물며 자기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어머니를 낯선 아줌마 보듯하면서 웅진이는 처음으로 자기가 못나보이고 세상이 싫어보이고 앞날이 암담해보였다. 어머니의 사설은 끝이 없었다. “너 말해봐라. 한 학기동안 과연 뭘 하구 다녔는가? 설마 참답게 공부를 했으면 이 정도가 될리는 없을거구, 친구를 잘못 친한거냐? 아니면 련애를 한거냐? 말해보라니까 말해봐. 어이구!” 어머니는 물먹은 담마냥 자리에 무너져내리더니 꺼이꺼이 소리 내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좋니? 어쩌면 좋아. 두메산골에서 자라면서 공부 못하던 한을 자식놈한테서나 풀어보자고 그렇게도 애를 썼건만. 제 애비는 저 등신을 뒤바라지하자고 외국에서 그렇게 소처럼 벌고있건만, 아이고 내 팔자야―” 평소 웅진이의 작은 잘못에도 엄하게 눈을 흘기는 어머니였지만 이 같은 추태는 처음인지라 웅진이는 숨소리마저 크게 내지 못하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날 어머니는 저녁밥도 드시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웅진이도 저녁밥을 먹을 엄두를 못 내고 자기의 침실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생각할수록 공부가 두렵게 생각되였다. 그럴수록 웅진이의 학습성적은 떨어지기만 했다. 2학년 첫 학기초인가 시내의 사립예술학교에서 웅진이네 학교를 찾아와 무용학원을 모집했다. 웅진이는 담임선생님에게서 그 소식을 들으며 저도 몰래 흥분에 가슴을 떨었다. 어쩌면 지지리도 힘든 공부로부터 탈출할수 있다는 희망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80메터를 바라보는 자기의 호리호리한 체격이면 무난히 춤을 출수 있을것 같은 자신심이 생기기도 했던것이다. 그날 저녁 웅진이는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자기의 뜻을 밝혔다. “뭐야? 세상에 남자가 춤을 춰? 딴따라를 하겠다구? 그짓을 하라고 어미 애비가 뼈 빠지게 뒤바라지를 하는것 같냐? 안돼 안돼! 악을 쓰고 공부해서 하다못해 전문학교에라도 가야지. 네가 대학생이 되는것을 보고야 엄마는 죽어도 눈을 감을거다.” 어머니의 견결한 태도는 웅진이의 싹터오르던 무용가의 꿈을 무참히도 밟아버렸다. 그 뒤로 웅진이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싶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접고 그냥 아침이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저녁이면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일상에 자기를 맡겨버렸다. 시험성적이 발표되는 날이면 웅진이는 가끔 이렇게 어머니와 한판씩 붙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지쳐갔고 웅진이는 웅진이대로 자기의 처지가 비참해서 가슴을 치다가 잠이 들군 했다. 숨막히는 일상속에서도 웅진이의 메마른 가슴에 단비로 되여주는것은 은영이의 해맑은 웃음이였다. 학습성적은 웅진이보다 좀 나은편이지만 역시 학급에서 중하등을 맴도는 은영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이슬 같은 미소를 함뿍 머금고 조용히 웅진이의 옆을 지켜주고있었다. (은영이―) 웅진이는 나직하게 은영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늘저녁 너 머리를 깎지 않을래? 내가 함께 가줄게.” 낮에 갈라질 때 하던 은영이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웅진이는 건듯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처량하게 보여올뿐 주위는 고요한대로 있었다. 은영이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은영이에게 전화 할가?) 웅진이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손가락을 “1”자우에 가져갔다. 은영이의 이름을 1번에 입력시켜놓았던것이다. 웅진이의 입가에 반짝 미소가 스쳐갔다. 오른손 식지에 힘을 넣어 1번을 누르려던 웅진이가 갑자기 건반에서 손을 뗐다. 웅진이는 핸드폰을 두손으로 꼭 움켜쥐고 다시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집에서 쫓겨나 이 구석으로 쫓겨온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은영이가 본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할가? 하는 우려심이 가슴을 쳤던것이다. 웅진이는 이 시각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죽도록 싫어졌다. “이게 아닌데, 정말 이게 아닌데.” 웅진이는 고통스럽게 두손으로 자기의 머리칼을 잡아쥐고 흔들어댔다. 어머니의 손에서 뽑혀져나오던 머리칼이 다시 갈퀴로 되여 웅진이의 가슴을 허비기 시작했다. “머리가 길다고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까?” 낮에 있었던 담임선생님의 시까스름이 고름처럼 웅진이의 가슴에 녹아내렸다. (머리칼, 머리칼이 긴데는 어떻단 말인가? 이 머리칼하고 나의 학습성적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머리칼이 짧아지면 공부성적이 쑥쑥 올라갈수 있단 말인가?) 웅진이는 처음으로 자기의 머리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이 머리칼이 문제일가? 어머니도 선생님도 첨에는 학습성적이 낮다고 사설을 하다가도 나중에는 머리칼을 공격목표로 삼아 건달이라는둥, 나쁜 놈이라는둥 하지 않는가? 그래, 이 원쑤 같은 머리칼을 잘라버리는거야, 깨끗이 철저히 검질해서 그들에게 보여주는거야!) 웅진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진이는 반달음으로 미장원을 향해 뛰여 갔다. “어서 오세요.” 노랑머리리발사가 로봇마냥 판에 박은 인사를 건네왔다. 웅진이는 의자를 찾아 씽하니 다가갔다. 노랑머리리발사가 웅진이에게 가운을 입혀주며 물었다. “살짝 칠가?” 리발은 거의 이 미장원을 리용하기에 노랑머리리발사와는 허물없는 사이였다. 웅진이는 성가시다는듯 노랑머리리발사를 찔 째려보고는 자르듯 소리쳤다. “아니. 빡빡 밀어.” “뭐?” “못 들었어? 빡빡 밀라니까.” “설마… 꽝터우(까까머리)?” “그래, 뺀지골. 알아? 빡빡 밀라니까. 밀라구!” “진짜 꽝터우(光头)?” “말이 많네!” 웅진이가 의자에서 빨딱 일어섰다. 노랑머리리발사는 얼굴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두팔을 올려 조용히 웅진이의 어깨를 눌러 앉히고는 전동리발기를 들었다. 잠간이였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두피가 선뜻해나더니 윤기 흐르는 머리칼이 웅진이의 무릎우에 떨어졌다. 웅진이는 “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두눈을 꼭 감았다. 죽어라고 아래입술을 깨물었다. 전동리발기는 “윙윙―” 소리를 내며 웅진이의 머리칼을 밀어나갔다. 오른쪽을 먼저 깎는지 오른쪽이 더 허전하게 느껴졌다. 웅진이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오른쪽이 허옇게 홀라당 깎여있었다. 나무 한대 없는 민둥산 같은 오른쪽이 함치르르한 머리칼이 남아있는 왼쪽과 대조를 이루면서 사뭇 우스운 장면을 연출하고있었다. 웅진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눈을 슴뻑거리며 거울속에서 내다보는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고있었다. 웅진이의 표정을 읽었는지 노랑머리리발사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와…” * “엄마, 저 형님이 나쁜 놈이야?” 웅진이는 그 소리에 맥없이 아래로 떨어뜨렸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대여섯살쯤 되여 보이는 꼬마가 엄마의 손을 잡고 웅진이앞을 지나면서 종알거리고있었다. “크크크… 그렇게 보여?” 엄마는 꼬마를 자기옆으로 살짝 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가 계속 종알거렸다. “엄마가 말했잖아. 공부하기 싫어하면 커서 나쁜 놈이 된다구, 저렇게 뺀뺀대가리를 한다구.” “얘, 듣겠다. 목소리를 낮춰. 크크크크…” 엄마는 꼬마를 끌고 잰걸음을 놓고있었다. 꼬마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리를 돌려 웅진이를 바라보고있었다. 웅진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두커니 서서 엄마의 손에 끌려가는 꼬마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엄마가 말했잖아. 공부하기 싫어하면 커서 나쁜 놈이 된다구, 저렇게 뺀뺀대가리를 한다구.” 꼬마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웅진이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수박 같다고 생각되던 자기의 까까머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아까 거울에 비쳐있던 자기의 모습이 과연 죄범 같았던가를 떠올려보았다. 웅진이는 문득 방금 그 꼬마만할 때 받았던 충격을 떠올렸다. 그날 웅진이는 어머니와 함께 복무대로옆을 지나고있었다. 그곳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가운데는 십여대의 해방표자동차가 세워져있었는데 적재함우의 란간을 붙잡고 목에 이름표를 건 까까머리남자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엄마, 저 사람들이 어째 저렇게 서있나?” 웅진이가 어머니의 손을 흔들며 물었다. 어머니는 자애로운 눈길로 웅진이를 내려다보면서 자냥스럽게 말씀했다. “웅진아, 봤지? 저렇게 목에 ‘개패’를 메고 서있는 사람들은 나쁜 놈이고 옆에 두리모자를 쓰고 서있는 사람들은 경찰이란다.” “나쁜 놈들의 목에는 왜 ‘개패’를 메웠나?”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느라고 메웠겠지.” “저 사람들은 어째서 나쁜 사람이 됐나?” “음… 아마도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나쁜 사람이 됐겠지. 우리 웅진이는 학교에 가면 공부를 잘할수 있지?” 웅진이는 어머니의 기대어린 물음에 두눈을 깜빡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뒤로 웅진이는 다시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진작 사라진줄로 알고있던 그 장면이 그렇게도 생동하게 기억에 남아있을줄은 웅진이도 생각밖이였다. 웅진이는 또다시 오른손을 들어 자기의 머리를 쓸어보았다. 어디라 없이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잡생각을 굴렸다. (내 모습이 과연 죄범처럼 보이고있을가? 내가 과연 죄범이 될수 있을가? 지금 나는 죄범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있을가?) 사색은 헝클어진 삼뭉치마냥 머리속을 어지럽히고있었다. “씨팔― 보기는 뭘 봐?” 웬 사나이의 거친 목소리가 어지럽게 귀청을 때렸다. 웅진이는 사색에서 뛰쳐나와 소리나는쪽에 머리를 돌렸다. 웅진이는 어느새 북안시장부근에 와있었다. 길옆으로 음식난전들이 줄느런히 앉아있었다. 난전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느라 분주했다. “쌍년이, 오줌 싸…싸…싸는걸 못 봤냐? 왜?” 가로수아래에서 20대의 남자가 바지춤을 내리우고 소변을 보고있었다. 저만치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녀자애 둘이 지나가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있었다. “씨팔― 재간있으면 참아봐라. 네년들이 어애냐…” 남자는 가로수에 오줌을 갈기면서 련속 뭐라고 궁싯거리고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사나이의 머리통이 유독 빛났다. 까까머리였다. 면도칼로 빡빡 밀었는지 두피가 퍼렇게 보였다. 웅진이는 버러지를 씹은듯 이마살을 찡그리며 본능적으로 자기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야! 뭘 봐? 오줌 누는것도 구경이냐?” 남자가 바지춤을 추스르다말고 또 소리쳤다. 웅진이는 머리에서 손을 내리우며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주위에는 자기를 내놓고 아무도 없었다. 남자가 웅진이를 보고 시비를 걸어오는것이 분명했다. 괜히 그 남자가 미워지면서 부아통이 터졌다. 하지만 남자는 웅진이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지껄여댔다. “구경이라도 났냐? 뺀뺀대가리, 널 그런다.” “헉!” 웅진이는 순간 숨이 꺽 막혀오는듯싶었다. (뭐? 나더러 뺀뺀대가리라구? 버러지 같은 자식.) 웅진이는 사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뛰여갔다. 남자가 바지춤을 채 추스리기전에 오른발을 씽 날렸다. 남자는 저만치 나가 푹 쓰러졌다. “어… 어! 얘들아―” 남자가 웅진이의 발길을 피해 두손으로 벌벌 기며 괴성을 뽑았다. 삽시에 어디선가에서 남자또래 청년들이 뛰여나오더니 웅진이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웅진이는 길바닥에 큰대자로 너부러졌다. 어지러운 발길이 우박처럼 웅진이의 몸에 떨어졌다. 웅진이는 매집을 좁히려고 큰대자로 너부러진 몸을 가누어 한껏 옴츠렸다. 그리고 두팔로 수박 같다고 생각되는 그 머리통을 한껏 움켜잡았다. 한참이나 욕질에 매질에 열을 올리던 남자들은 직성이 풀렸는지 다시 길옆난전으로 들어가며 길게 호기를 뽑았다. “까불고있네. 한줌거리도 안되는 놈이!” 웅진이는 두팔로 머리통을 움켜잡고 온몸을 새우처럼 옹송그린채 그 욕설을 듣고있었다. 온몸이 빠개지는듯 아파났다. 웅진이는 “으윽―” 하고 길게 한숨을 뽑아올렸다. 어디론가 둥― 떠나가는듯싶으면서 가물가물 묘한 기분이 머리속을 감돌고있었다. “쯧쯧… 저 코피를… 건달들이 무리싸움을 했나봐!” 지나가는 녀인의 목소리가 아물아물 웅진이의 머리속을 파고들고있었다. 이상했다. “건달”이라는 말을 듣자 저도 몰래 쿡 하고 웃음이 터지는것이 이상스러웠다. (내가 건달이였나? 내가 과연 건달이였나?) 웅진이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어머니들은 여전히 자식들의 손을 잡고 여유롭게 가로등아래를 걸어 지나고 련인들은 여전히 팔을 끼고 까르르까르르 웃음소리를 흘리고있었다. 나그네들은 여전히 길섶난전에서 맥주를 마시며 호기를 뽑아 올리고있었고 난전주인들은 여전히 양고기꼬치를 구우며 누런 이발을 들어내고 눅거리웃음을 팔고있었다. 웅진이는 머리를 숙여 자기의 몰골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구을렀던지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코등이 지끈지끈 아파났다. 웅진이는 코등을 눌러보았다. 코등은 퉁퉁 부어있었다. 손등으로 코밑을 쓱 긁어보았다. 손등에는 뻘건 피가 묻어졌다. 웅진이는 이윽토록 코피가 묻은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맥없이 오른팔을 축 내리뜨렸다. 순간 어릴 때 복무대로앞에서 보았던 그 죄범들은 만인의 눈앞에 “개패”를 메고 서서 무엇을 생각했을가가 궁금해졌다. 웅진이는 후들후들 떨리는 두다리를 착 붙이고 서서 머리를 푹 숙였다. 어쩐지 그 순간 그렇게 서있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앞에 그렇게 서서 자기의 몰골을 적라라하게 보이고싶었다. “찌릉찌릉―” 갑자기 넙적다리에 강한 전률이 느껴졌다. 웅진이는 와뜰 놀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막에는 “깜찍이”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찍혀져있었다. 그리고 문자표식이 떠있었다. 웅진이는 약간 떨리는 손끝으로 문자함을 열었다. 막에는 “??”부호가 또렷이 찍혀있었다. (은영이!) 맑은 웃음을 날리는 은영이의 하얀 얼굴이 클로즈업되여 웅진이의 눈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아까 은영이가 보내온 “?”표도 떠올랐다. 싸늘한 웃음이 웅진이의 얼굴을 스쳤다. 웅진이는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행인들이 흘끔흘끔 웅진이를 여겨보고있었다. 저희들끼리 뭐라고 소곤소곤 귀속말을 건네기도 했다. 웅진이는 그들이 자기를 죄범 같다고 손가락질한다고 생각했다. 어쩜 자기를 소매치기나 좀도적일수 있을 거라고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니 강도나 강간범일수도 있을것이라고 씹어칠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였다. (왜? 내가 왜? 저희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보기는 뭘 봐? 쌈을 좀 했을뿐인데, 코피를 좀 흘렸을뿐인데, 몸에 먼지가 좀 묻었을뿐인데…) 웅진이는 푹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쳐들었다. (볼테면 보라지.) 생각을 고쳐먹으니 어딘가 당당해진듯싶었다. 웅진이는 손등으로 연신 피 묻은 코밑을 쓸며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셋 구령을 높이 부르며 머리를 숙이지 말고 새로운 인생 위해 개조의 첫발자국 내디디자 …… 어디선가 우렁찬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웅진이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들었다. 철조망을 설치한 커다란 담장이 눈에 안겨들었다. “아?!” 웅진이의 입에서 피 같은 신음소리가 짤막하게 터졌다. 분명 노래소리는 담장안에서 울려나오는것이였다. 웅진이는 말 못할 현기증을 느끼며 못박힌듯 굳어져서 커다란 담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조명등이 괴괴하게 비추이는 담장은 웅진이에게 말 못할 공포를 던져주고있었다. * (저안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있을가? 저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을가?) 문득 찾아들던 공포가 서서히 가셔지자 웅진이의 머리속에는 담장너머에서 일어나고있을 모든 일이 그렇게 궁금할수가 없었다. 일년전의 어느날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이 피뜩 머리속을 스쳤다. 음침하게 흐린 어느 아침인듯싶었는데 400여명의 죄수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큰 마당에 줄지어 쪼크리고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그들이 줄지어 쪼크리고 앉은 그 마당이 여간만 번쩍이지가 앉았다. 웬 일인지 그래도 머리가 길다고 할수 있는 몇몇이 되려 닭무리속에 선 게사니처럼 눈에 유난히도 뜨이고있었다. 여러가지로 화면이 바뀌며 2분 가량 지속되던 그 장면을 보면서 내가 만약 저 무리에 가서 앉는다면 어떤 심정일가 하고 막연한 생각을 굴린적이 있었다. 어떻다 할 답안을 찾지 못한채 그 장면을 지내보낸후 웅진이는 한번도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적이 없었다. 헌데 그 순간 그렇게도 담장너머를 살펴보고싶은 충동이 생기는것은 웅진이 스스로도 이상스러웠다. (세상과 동떨어진 담장 저쪽에서 자유를 박탈당한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가?) 그것이 호기심에서인지 공포심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시각 웅진이는 그것이 꼭 보고싶었다. 웅진이는 흘끔흘끔 주위를 살피며 높은 담장밑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담장은 개미 한마리도 기여나갈수 없을만치 견고해보였다. 담장 네 귀를 두번이나 돌아보았건만 어디다 눈길을 박을만한 곳이 없었다. 저도 몰래 “호―” 하고 한숨이 터져나갔다. 웅진이는 희망을 접으며 몸을 돌려 천천히 큰길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공공뻐스정류소가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아래의 정류소는 여간만 한적해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공공뻐스가 있나?) 하는 생각이 피뜩 스쳐지났다. 순간 공공뻐스에 앉아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진이는 공공뻐스정류소를 바라고 발걸음을 다그쳤다. 정류소에 도착해보니 자기또래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무슨 말인가를 하고는 좋아서 못 참겠다는듯 까르르 웃음을 터치고있었다. 행복한 그들을 보노라니 저도 몰래 자기의 처지가 서글퍼났다. 웅진이는 그들과 떨어져서 간이의자의 제일 끝쪽에 가 어깨를 웅크리고 앉았다.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게임을 할가?” “무슨 게임?” “재밌는 게임.” “어떻게?” 남자애가 녀자애의 귀에 입을 대고 한참이나 뭐라고 소곤거렸다. 녀자애가 갑자기 몸을 당기며 주먹으로 남자애의 어깨를 북 치듯했다. “얘가, 얘가 미쳤어, 미쳤어. 변태야. 나 인젠 널 안 만날래.” “참. 누가 변태야. 재밌잖아.” “뭐가 재밌어?” 녀자애가 남자애를 쳐다보며 물었다. “딱 네가 진다는 보증도 없잖아? 가위바위보는 녀자애들이 눈썰미가 빨라서 더 잘 논다는데. 네가 이기면 오늘밤 내게 업혀 집까지 가는 호사를 할수 있잖아.” “그러다 내가 지면?” 물어보는 녀자애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져있었다. “네가 질수는 없겠지만 그러다가 정말 네가 지면 그냥 못이기는척 속도를 내는거지 뭐?” “으― 구렝이, 남자들은 다 구렝이야. 암튼 내가 질라구. 하자, 해보자.” 녀자애는 손가락이 배쪽에 닿게 하고 깍지를 걸어 신비스럽게 눈앞에 당겨다가 뭔가를 살피더니 한결 흥분된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싸― 죽어봐라. 집까지 단숨에 가기다. 죽었어!” “그래 죽어보자.” 둘은 유치원마당에 앉은 짜개바지악동들처럼 손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가위바위보!” 두주먹이 운명을 결정하고있었다. “아싸― 이겼다.” 남자애가 흥분에 들떠 벌떡 일어섰다. “으악!” 녀자애가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남자애가 녀자애의 목을 와락 끌어안더니 녀자애의 입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녀자애는 남자애에게 입술을 점령당하면서도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두팔을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웅진이는 눈앞에서 벌어지고있는 적라라한 드라마를 넋을 놓고 보고있었다. 가슴이 세차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네가지가 없는 년놈들.” 이사이로 욕설이 터져나갔다. “어때? 또 한번 할가?” 남자애가 녀자애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고 히쭉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몰라, 몰라!” 녀자애가 얼굴을 싸쥐고 땅에 쪼크리고 앉았다. “너 설마 우는거니?” 남자애가 오른손가락을 쫙 펴서 녀자애의 긴 머리칼사이에 꽂으며 능청을 떨었다. 녀자애의 어깨가 가담가담 떨리고있었다. “괜찮아. 까짓걸 가지구 뭐. 내가 책임진다니까. 걱정 말아.” “몰라, 몰라!” 녀자애가 발딱 일어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을 놓았다. “한칼에 한놈을 죽였다. 한칼에 두놈을 죽였다. 한칼에 세놈을 죽였다. 한칼에 네놈을 죽였다. 한칼에 다섯놈을 죽였다…” 웅진이는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자기또래의 남녀를 바라보며 자기만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악!” 하는 처량한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들려왔다. 웅진이는 본능적으로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자동인출기를 장치한 작은 영업청앞이였다. 한 녀인이 아래배를 부여잡고 무너지고있었고 손에 가방을 든 한 남자가 오토바이에 올라타고있었다. 녀인은 오토바이에 오르는 남자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더니 “악!” 하고 소리칠 때보다 한결 힘이 빠진 목소리로 “강도다― 강도를…” 하고 소리치다가 쓰러져버렸다. 사나이는 어느새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웅진이는 잠간 어정쩡해있다가 차츰 정신을 추스려 방금 본 장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답이 나왔다. 강도가 쓰러진 녀인의 가방을 강탈한후 녀인의 아래배를 흉기로 찔렀고 그다음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쳐버린것이였다. (저 녀인은 지금 어떤 상태일가?) 긴급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다. 웅진이는 쓰러져있는 녀인을 향해 뛰여갔다. 녀인이 쓰러져있는 땅에는 뻘건 피가 흥건히 흘러나와있었다.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리십시오.” 웅진이는 감히 녀인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고 두손을 마주 비비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녀인은 간신히 몸을 탈아 웅진이를 바라보더니 띠염띠염 말했다. “전화해주세요. 언니께요.” “네, 번호는?” 웅진이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며 말했다. “1390443****” “1390443****” 웅진이는 낮은 소리로 번호를 외우며 건반을 눌렀다. “누구세요?” 대방에서 인차 전화를 받았다. “사고가 났습니다. 녀동생이라고 하는데요. 감옥남쪽 자동인출기앞입니다.” “네? 상했어요?” “카… 칼에 좀…” “알았어요.” 대방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꺼버렸다. “전화했어요.” 웅진이가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녀인은 못 들었는지 다시 몸을 땅에 착 붙인채 죽은듯 누워있었다. 상처자국에서 여전히 피가 흐르는듯싶었다. 이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진이는 허리를 꺾어 앉으며 녀인을 흔들었다. “우리 먼저 병원에 갑시다. 제가 전화 받은 사람을 병원으로 오라 할게요.” “가… 감사합니다.” 녀인이 반응을 보였다. 웅진이는 녀인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달려오는 택시가 보였다. 웅진이는 길 중앙에까지 나가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칙―” 하고 웅진이네 옆에 와서 멈춰섰다. “병원, 병원에 실어갑시다.” 웅진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운전수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인차 내려와 웅진이를 도와서 녀인을 들어 뒤좌석에 앉혔다. “연변병원.” 웅진이가 짤막하게 말했다. 운전수는 대답도 없이 속력을 뽑기 시작했다. 녀인의 상처를 소독하고 긴급처치를 금방 끝냈을 때 언니라는 녀인도 들어섰다. 언니라는 녀인의 뒤로 40대의 나그네와 대여섯살쯤 되여 보이는 꼬마가 따라 들어섰다. “옥녀야, 이게 웬 날벼락이냐? 어느 개새끼가 널 이렇게 만들었냐?” 언니라는 녀인이 칼에 찔린 녀인에게로 엎어질듯 달려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나이도 침대에 누워있는 녀인쪽으로 다가갔다. 의사가 종이에 뭔가를 쓰다말고 말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몹시 놀란듯싶습니다.” 언니는 여전히 쿨쩍이며 넉두리를 했다. “이 둔한것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무슨 큰일을 보겠다고 이 밤에 현금을 찾았냐? 정신 없는 년.” “여보!” 나그네가 언니라는 녀인을 툭 쳤다. 언니는 몸을 돌려 나그네를 찔 흘겨보더니 두손을 쫙 펴서 얼굴을 가리우며 땅에 쪼크리고 앉았다. “나그네도 없이 리혼하구 혼자서 외롭게 살더니… 봐라. 우리 옥녀를 어떻게 하면 좋니?” “언니, 저… 저 사람에게…” 칼에 찔린 녀인이 언니라는 녀인의 말을 중둥무이하고 맥없이 손을 들어 웅진이를 가리키며 떠듬떠듬 말했다. 언니라는 녀인이 손등으로 찔끔찔끔 눈굽을 찍다말고 웅진이를 흘끔 쳐다보았다. 순간 웅진이의 눈길이 허공에서 언니라는 녀인의 눈길과 마주쳤다. 웅진이는 흠칫 몸을 떨며 머리를 돌려버렸다. “어느 나쁜 개새끼가 우리 옥녀를 이렇게 만들었냐? 감옥쪽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감옥에서 도망쳐나온 죄범이 아니더냐?” 언니라는 녀인의 거친 욕설을 들으며 웅진이는 어쩐지 현기증 같은것을 느꼈다. 웅진이는 조용히 급진실을 나와 복도의 걸상에 몸을 실었다. 스르르 피곤이 몰려들었다. 웅진이는 살며시 두눈을 감고 몸을 벽에 기댔다. “형님이 우리 이몰 병원에 데려왔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웅진이가 눈을 떴다. 나그네뒤를 따라 들어오던 그 꼬마였다. 꼬마의 눈이 맑고 빛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진이는 벽에서 천천히 몸을 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놀랐지? 너의 이모니?” “네, 한국 갔던 우리 이몹니다. 우리 이모는 나를…” 이때 언니라는 녀인이 웅진이네쪽으로 걸어오더니 소리없이 꼬마의 팔을 확 나꿔챘다. “어―엄마.” 꼬마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었다. “들어가, 아무하고나 말하는게 아니야.” 언니라는 녀인이 몸을 픽 돌려 웅진이를 째려보았다. 웅진이는 흠칫 몸을 떨며 저도 몰래 손을 들어 자기의 머리를 만졌다. 꺼슬꺼슬한 느낌이 손바닥을 타고 왔다. “엄마, 저 형님이 이몰 데려왔대. 저 형님은 나쁜 사람 같지 않아. 엄마 말이 틀려.” “뭐가, 뭐가 틀려? 빨리 들어가지 못하겠니?” 언니라는 녀인이 꼬마를 급진실안으로 끌며 말했다. “엄마가 말했잖아? 나쁜 놈들이 뺀뺀골을 한다구. 저 형님도 뺀뺀골인데, 이모를 데려왔는데… 저 형님은 나쁜 놈이 아니야!” 꼬마가 언니라는 녀인의 손에 끌려 급진실로 들어가며 머리를 돌려 웅진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 눈길은 그렇게도 맑아보였다. 웅진이는 벌떡 일어섰다. 출입문을 향해 씨엉씨엉 발걸음을 옮겼다. “형님, 가?” 어느새 또 나왔는지 꼬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고있었다. 병원출입구를 나서며 웅진이는 저도 몰래 코끝이 시큼해나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저 형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꼬마의 목소리가 너무도 파랗게 살아서 웅진이의 아픈 가슴을 쓸어주고있었다. 웅진이는 두눈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애꿎게 입술을 감빨았다. 두볼을 타고 물방울이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웅진이는 손등으로 얼굴을 닦으며 어금이를 떡하니 깨물었다. “찌릉찌릉―” 갑자기 넙적다리에 강한 전률이 느껴졌다. 웅진이는 얼굴을 닦던 손을 내리워 호주머니에 가져갔다. 핸드폰에 “깜찍이”라는 세 글자가 또렷이 찍혀있었다. 웅진이는 핸드폰덮개를 열었다. “웅진이니?” 은영이가 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웅진이는 입술이 파르르 떨려서 도무지 말을 할수가 없었다. “웅진아, 말해봐! 뭔 일이 생겼니?” “은영아, 나 뺀뺀골을 했다. 흑흑― 은영아, 그래도 난 나쁜 사람이 아니란다…” 말을 마친 웅진이는 핸드폰을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으며 선자리에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어깨가 세차게 들먹여지고있었다. 웅진이는 “꺽―꺽―” 흐느껴지는 소리가 입술을 타고 나오려는것을 억지로 누르며 천천히 머리를 들어 하염없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빛 한점 보이지 않는 까아만 밤하늘에서 뿌연 쪼각달이 처량하게 어디론가 미끌어져가고있었다. (그래, 아직은 초순이야.) 웅진이는 문득 이런 생각을 굴리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3    운무의 저쪽 댓글:  조회:1578  추천:0  2012-04-24
    봉이는 두팔로 무릎을 꼭 감아쥐고 천근같이 무거워나는 머리를 아래로 푹 숙였다. 그리고 으스러지게 어금이를 깨물며 지그시 두눈을 감았다. 삼검불같이 헝클어진 머리속은 운무에 휩싸인 소택지만치나 한치 앞도 가려볼수없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있었다. 봉이는 그 운무속에서 자기를 내리누르는 무형의 쇠덩이를 보고있었다. 분명 지지리도 힘들게 자기를 괴롭히고있지만 또 그것이 사랑이라는 허울에 가려져서 숨쉴수조차 힘들게 칭칭 감겨들고있는 엄마의 눈길처럼, 담임선생님의 목소리처럼 떨어버릴래야 떨어버릴수도 없게 느껴졌다. “후―” 세워서 꼭 감아쥐고있던 무릎이 은근히 저려오며 호들호들 떨리기 시작했다. “힘들어, 힘들어!” 하고 무릎이 하소연을 하는것 같았다. 봉이는 더욱 으스러져라 무릎을 부둥켜안았다. 어쩜 어디론가 무작정 도망가려는 자기를 고중입시라는 거대한 그물에 잡아두려고 버럭버럭 애를 쓰시는 엄마의 눈길처럼 꼼짝도 못하게 무릎이라도 잡아쥐고싶어서였다. 호들호들 떨려오던 무릎이 후들후들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억!” 봉이는 저도 몰래 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평생 놓지 않을듯 열손가락을 쫙 펴서 깍지를 걸어 감싸쥐였던 무릎을 풀었다. 손으로 땅을 짚어 몸체를 의지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봉이는 천천히 머리를 쳐들었다. 찌뿌둥한 마음마냥 하늘도 뿌옇게 흐려있었다. 봉이는 바위아래로 보여지는 저수지에 눈길을 주었다. 뽀얀 운무속으로 저수지 수면이 보일듯말듯 술래잡기를 하고있었다. 이름 모를 아기 새 한마리가 구슬프게 울어대며 어디론가 날아가고있었다. 보고싶지 않았다. 봉이는 다시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면서 머리를 외로 탈았다. 멀지 않은 곳에 너럭바위가 있었다. 흘러가는 운무에 받들려있는 큼직한 바위는 어딘가 서글픔까지 더해주고있었다. 그 바위우에 빠알간 운동복차림의 한 녀자애가 서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고있었다. 가슴앞에 두손을 합장하고 서서 약간 머리를 쳐들고 하염없이 반짝이는 수면을 바라보고있는 녀자애의 모습은 마치도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 장면을 방불케 했다. “아!” 봉이는 저도 몰래 이사이로 신음 비슷한것을 뽑아올렸다. 녀자애의 모습이 전해주는 그 어떤 감동을 읽는듯했다. 녀자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위끝을 향해 걸어가고있었다. 뿌연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타는듯 빠알간 녀자애의 옷이 아프도록 두눈을 자극해오고있었다. (불타는 심장?) 봉이는 그 드라마에 제목을 달아보았다. 순간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스쳤다. 과연 저 심장이 타오르려는것일가? 봉이는 두손을 눈가에 가져다대고 촬영사가 화면구도를 그리듯 손가락으로 네모를 만들어 “불타는 심장”을 그안에 집어넣었다. 운무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수면까지 화면에 잡을수있었다. 봉이는 손가락으로 만든 네모를 눈앞으로부터 멋스럽게 천천히 밀어갔다. 머리칼을 날리며 바위끝을 향해 걸어가던 “불타는 심장”이 불현듯 네모에서 사라지고있었다. “앗! ” 봉이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수면우로 빠알간 점이 보였다. 봉이는 그 점을 향해 정신없이 뛰였다.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녀자애는 두팔로 물을 치며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순간 물속에 쑥 들어갔다가는 다시 물우에 솟아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버렸다. 녀자애가 서있던 바위까지 뛰여간 봉이는 등에 지고있던 멜가방을 바위우에 던져버리고 주저없이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옷을 입은채로여서 헤염을 치기가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봉이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자맥질을 했다. 녀자애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와졌다. 녀자애는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봉이는 머리를 물속에 박아넣었다. 꾸무럭거리는 빨간 옷이 물속에서 아렴풋이 보였다. 봉이는 빨간 옷을 향해 헤염을 쳐갔다. 금방 잡힐듯한 거리였다. 봉이는 빨간 옷을 향해 오른팔을 힘껏 뻗어보았다. 빨간 옷이 쥐울듯싶더니 쑝 하고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가버렸다. 참! 봉이는 물우로 솟아올라 한껏 참고있던 숨을 푸하― 토하며 빨간 옷을 살폈다. 빨간 옷은 마치도 한마리의 빠알간 금붕어마냥 유유히 강역을 향해 헤여가고있었다. 봉이는 황소숨을 몰아쉬며 빨간 옷을 향해 헤염을 쳤다. 빨간 옷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 너럭바위에 올라섰다. 얼굴에 좋아죽겠다는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칼을 두손으로 훑어내리고있었다. 어깨에 닿을듯말듯한 머리칼끝에서 무수한 물방울이 구술인양 떨어지고있었다. 빨간색으로 된 엷은 운동복이 몸에 착 달라붙어 묘하게 곡선을 그리고있었다. 봉이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녀자애가 머리를 숙였다가 건듯 쳐들어 머리칼을 날렸다. 그 바람에 물방울이 날아서 금방 바위우에 올라선 봉이의 얼굴을 스쳤다. 녀자애는 바위우에 놓여져있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유유히 얼굴을 문다지고있었다. 순간 봉이는 마음이 허전해났다. 저으기 부아통이 터지려 하고있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뭘 하는거니?” 녀자애가 깜짝 놀라는듯 봉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두눈이 반짝 웃고있었다. “너, 헤염을 참 잘 치던데…” “뭐, 헤염?” 봉이는 목구멍까지 올리미는 그 무엇을 억지로 삼키며 떡하니 입만 벌리고 섰다. “수영은 언제 배웠니?” 녀자애는 역시 두눈을 빤짝하면서 봉이에게 물어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듯 목소리까지 가볍게 뜨고있었다. 봉이는 자기의 심장이 튀여나오려고 발버둥질을 치고있음을 느꼈다. “너, 괜찮니?” 말을 마친 봉이는 주먹으로 힘껏 자기의 허벅지를 갈겨주었다. (이게 아닌데, 분명 이게 아닌데! 나의 허벅지가 아니라 저 애의 뻔뻔한 얼굴을 갈겨줘야 하는건데.) 봉이는 빗나가는 자기의 행동이 죽도록 미워났다. 녀자애가 봉이를 향해 또 한번 방긋 웃어주었다. “괜찮지 그럼. 얼마나 자극적이였는데…” 봉이는 수집은듯 녀자애의 눈길을 피해 머리를 숙이며 떠듬거렸다. “그런걸 난 또…” “ㅋㅋㅋ, 내가 자살이라도 하나 했지? 그래서 목숨을 건거야? ㅋㅋㅋㅋ… 그래서 목숨을 건거 맞지? 뢰봉아!” “뭐? 너…너,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 “뭐? 너의 이름? 내가 어떻게 안다구?” 녀자애가 두눈을 올롱하게 치뜨고있었다. 봉이는 점점 오리무중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 방금…” “방금? ㅋㅋㅋㅋ… 너 설마 이름이 뢰봉이야 아니겠지?” “맞아, 내 이름이 려봉인데.” “뢰봉?” “응, 려봉!” “난 또, 너의 이름이 려봉이였구나. 난 너의 그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하는 정신을 높이 모셔서 뢰봉이라 부른건데…” 녀자애가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너…너!” 봉이는 꺽꺽 말을 톺다가 홱 머리를 돌렸다. 녀자애가 끝내 아래배를 움켜잡고 무너져 내렸다. 찔끔찔끔 주먹으로 눈부리를 찍어대고있었다. “얘, ‘뢰봉아’. 너 학교에서 진짜 모범생이지?” “모범생은 무슨…” 봉이가 녀자애의 옆에 가 앉으며 뒤말을 얼버무렸다. “ㅋㅋㅋ… 아니라네. 환히 보이는데. 너 집에서는 엄마 말을 엄청 잘 듣는 얌전한 아들이구…” 녀자애도 봉이옆에 나란히 앉으며 하얀 웃음을 배실배실 흘리고있었다. “얌전? 흥! 얌전 좋아하구있네. 얌전하면 이렇게 가출했겠니?” 봉이가 몸을 픽 돌리며 고개를 번쩍 쳐들고 녀자애를 바라보았다. “뭐야? 가출?!” 녀자애의 동공이 확 튀여나오려 서두르고있었다. “그래, 가출! 왜, 안되니?” 봉이의 입가에 가는 웃음이 살짝 스쳐지났다. “네가, 가출을 했다구?” 녀자애가 외계인이나 바라보듯 봉이를 바라보았다. “흥……”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가슴을 쑥 내밀었다. “얘, 말해봐. 어째서 가출을 했는데?” “마음이 불편해서지.” “저런, 저런…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으면… 말해봐라. 어째서 맘이 불편했는데?” “……” 봉이는 여전히 쓴맛 나는 찬웃음을 씩 날리며 녀자애를 일별했다. 녀자애가 봉이의 옆으로 한뽐 더 다가앉았다. “얘, 말해봐라. 응, 왜 가출했는데?” “헤잇!” 녀자애의 닥달에 봉이가 저도 몰래 산이 무너지듯 긴 한숨을 내쉬였다. “얘, 어서!” 녀자애가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듯 안달이 나했다. “어제밤, 엄마하구 한판 붙었더랬어!” “왜, 왜? 왜 붙었는데?” 녀자애의 눈이 봉이의 심장이라도 꿰뚫고 영문을 알아내겠다는듯 번뜩거렸다. “나도 속이 상하거든. 상당히 괴롭단 말이다.” “알아, 알아, 원인을 말해얄게 아니니? 왜 불편하구 괴로운데?” 녀자애가 손으로 봉이의 어깨를 톡 치며 재촉했다. “이번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떨어졌거든. 보기 좋게 락하산을 탄거지.” “5등급이나? 저런, 그럼 몇등이 되는데? 설마 마지막 일등은 아니겠지?” 녀자애의 눈에 잠간 긴장이 흐르고있었다. “비슷해! 9등밖에 못했거든.” “9등, 앞으로?” “앞이지, 그럼!” “앞으로 9등? 설마 너네 반에 학생이 아홉명밖에 없는건 아니지?” “쉰일곱이다, 왜?” 봉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나왔다. “뭐? 얘, 쉰일곱에서 9등이면 완전히 별나라에 있는것 아니니?” 녀자애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별나라라니? 5등급이나 떨어졌는데. 그래 뭐 내가 똥별이라도 됐단 소리니?” “와― 도저히, 내 사유로는 리해가 안 가는데. 얘, 그럼 넌 몇등이나 하면 좋겠니?” “못해도 5등안에는 들어야지. 그래야 정상이구, 그래야 우리 엄마도 선생님도 동학들도 딴눈으로 안 본다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가능하지 못한것을 가능하게 만드는게 능력이구,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가는게 인생이래.” 말해놓고보니 봉이도 우스웠던지 제풀에 피씩 웃어버렸다. 그러는 봉이를 바라보며 녀자애가 뚫어지게 봉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웃기지, 내가?” “왜 웃긴다고 생각해?” “인생을 론하고보니 저절로도 참 웃겨보여서. 하지만 우리 집에선 이게 하나도 웃기는 일이 아니거든. 마치도 내가 살아가는 전부의 의미가 중점고중에 붙는것인것 같아. 아직 고중시험까지는 1년이나 남아있건만 우리 집의 모든 화제는 중점고중이야.” “그래서 힘드니?” “폭발할것 같아.” “가슴이?” “그렇지. 마냥 자신이 공부하는 기계 같아 보이거든. 찰칵찰칵 고르롭게 기계가 돌아갈 때면 옆에서 착착 박수를 쳐주구, 혹시나 기름이 떨어져서 덜커덕덜커덕 힘겹게 돌아갈 때면 하늘이라도 무너질듯 온 집안이 란리법석이구…” “알면서, 벗어나려고는 생각 안해봤니?” 녀자애가 도전적으로 물어왔다. 봉이는 놀란듯 녀자애를 빠금히 바라보다가 또 한번 피식 웃었다. “벗어난다구? 어디서? 엄마의 잔소리속에서? 아님 선생님의 눈초리밑에서?” “그럼 넌 어떻게 하면 편할것 같은데?” “학급 1등, 아니 학년 1등을 하면 편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몰라, 이렇게 죽기내기로 공부를 하는데아직은 학급 1등도 못해봤거든. 아마 1등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잠간이지만…” 봉이의 말을 들으며 녀자애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봉이는 갑자기 자기가 그 어떤 끈에 묶여서 끝도 없이 허위허위 어디론가 끌려가는듯한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녀자애를 향해 소리쳤다. “너, 너… 정말 이러기야?” “왜? 내가 어쩌는데.” 녀자애도 따라 일어서며 야릇한 눈길로 봉이를 쳐다보았다. 봉이가 손가락으로 녀자애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너무 하는거 아니니? 너…너, 왜 나만 가지구 씹어?” “아니지. 너만 가지구 씹는게. 당전 형세를 놓고볼 때, 너의 가출이 의사일정에 오른거 아니니? 가출이란 참 무서운 개념이거든, 발등에 붙은 불부터 끄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네 코도 석자 같은데? 아까 분명 보아낼수 있었거든. 너 뭔가 아주 심각해보였어.” 봉이는 아니냐는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녀자애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녀자애가 봉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살짝 웃음을 날렸다. “정말? 아까 내가 정말 그렇게 보였어?” “정말이라니까. 난 정말 큰일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니까? 너도 솔직히 말해봐! 구경 뭔 일로 물에 뛰여들었어?” 녀자애를 바라보는 봉이의 얼굴이 자못 진지해보였다. 녀자애는 여전히 까르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너 눈썰미 하나는 죽여주는구나. 그래, 아까 난 사망훈련을 해보았다.” “뭐? 사망훈련?!” 봉이가 튀여나오려는 심장을 누르며 녀자애에게 물었다. “그래, 사망훈련! 헌데 왜 그렇게 놀라니? 사람이란 다 그런게 아니니? 태여나는 날부터 죽음을 향해 엉금엉금 기여가는거지. 죽음의 신은 언제나 호시탐탐 우리의 삶을 노리고있는거구. 이렇게 죽으면 어떨가? 저렇게 죽으면 어떨가? 한번쯤 죽음을 두고 열심히 리허설을 해보는것도 로맨틱한게 아니니?” 봉이는 자기와 나이도 비슷해보이는 이 녀자애의 머리에 이처럼 해괴한 리론이 고름처럼 들어차있다는 자체가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면서 녀자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얘, 넌 어디서 이런것들을 배웠니?” “어떤것들을?” “뭐, 이를테면 ‘엉금엉금 죽음을 향해 기여간다’는것 같은…” “그것도 배워야 아는거니? 넌 책도 안 보니?” “책? 어느 책에 그런게 씌여져있니?” “ㅋㅋㅋ… 이런 샌님이라구야? 그래 맞아. 너희들이 말하는 책이야 바로 교과서 그 자체지. 그래, 열심히 교과서를 뚜져라. 그래야 떨어진 5등급을 따라잡지. 즐거웠다.” 녀자애는 어느새 건기가 들어가는 옷자락을 당겨서 두어번 툭툭 털고는 두손을 머리속에 깊숙이 넣어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르면서 듬성듬성 엉켜 붙었던 머리칼이 떨어지면서 묘한 기분을 연출하고있었다. “야, 너 이름이 뭐니?” 봉이는 녀자애를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웨침 비슷한것이였다. 어쩜 이 순간을 놓치면 수수께끼 같은 이 녀자애를 다시 볼수 없다는 그런 긴박감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녀자애가 바위우에 놓여있던 파란 가방을 주어들다말고 머리를 돌렸다. “내 이름? 알고싶어?” “그럼! 넌 다 알아버렸잖아. 나에 대해.” “알려달라고 한적이 없는데, 난.” “그래두 결과적으로는…” “넌 참 재밌는 애야!” “뭐?” “ ㅋㅋㅋ… 내 이름도 너만치나 재밌거든. 내 이름은…” 녀자애가 말끝을 잡고 함뿍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마주쳐 딱하고 소리를 내며 아래 말을 이었다. “쿠야.” “엉?!” “내 이름을 물었잖아? 내 이름, 쿠야 쿠!” “쿠, 쿠라구?” “쿠쿠가 아니구. 쿠라니까.” 말을 마친 녀자애는 몸을 픽 돌려 걸음을 옮기더니 다시 머리를 돌렸다. “너, 빨랑 집에 돌아가라, 너에겐 아직 가출이 어울리지 않거든. 다시 만나―” 빠알간 등이 파아란 가방을 업고 봉이의 눈에서 멀어져가고있었다. 사라져가는 녀자애를 바라보노라니 “쿡!” 하고 뭐라 해석할수 없는 소리가 봉이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뭐? 이름이 쿠라구? 설마 진짜야 아니겠지? 그게 진짜라면 어떻게 불러? 김쿠? 박쿠? 정쿠? ㅋㅋㅋ… 동쿠? 세상에…) 봉이는 마치 짜릿한 마술에 걸렸다가 풀려나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닐거야, 절대 그 이름이 진짜일수가 없어! 뭐? 사망훈련? 과연 그게 가능한걸가? 이것도 절대 진짜일수가 없어! 그 애에게는 분명 엄청난 미스터리가 있는거야. 아까 그 순간 바위 끝을 향해 걸어가는 그 발걸음은 비장하기까지 해보였는데… 혹시 배우지망생? 그래. 이거야. 그 비장함이 꾸며낸거라면 그 애는 분명 배우지망생일거야!) 봉이는 주먹으로 자기의 허벅다리를 탁 쳤다. 사흘 낮 사흘 밤을 힘들게 하던 수학문제가 일시에 풀려나가는 그런 기분이였다. (세상에 이렇게 사는 애도 있구나.) 봉이는 바위우에 던져져있는 자기의 가방을 주어들었다. (그 애, 그 애가 어디로 갔을가? 어디서 사는 애일가? 나이는 얼마나 될가?) 마음이 가벼워지자 엉뚱한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속으로 기여들기 시작했다. 봉이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면서 녀자애가 사라진쪽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삐뚤삐뚤 저 멀리로 뻗어간 오솔길에는 뻘건 황토가 여미지 않은 시골아줌마의 쭈그렁가슴처럼 들어나있었다. 봉이는 그 오솔길을 딛고 어디론가 가버렸을 그 녀자애를 찾아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를 내려서 두어발작 걸음을 옮기던 봉이는 길우에 떨어져있는 손수건 한장을 발견했다. 봉이는 다가가 손수건을 주어들었다. 하얀 바탕의 손수건우에는 빨간 매화꽃 서너송이가 새겨져있었다. 접때 녀자애가 얼굴을 닦고나서 손수건을 가방끈에 걸어놓던 생각이 났다. 아까는 주의해서 보지 않았지만 분명 하얀 판에 빨간 점이 있는듯했었다. 가는 길에 녀자애가 주의하지 않아 떨어뜨린것이 분명했다. 봉이는 손수건에 눈길을 주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수건 아래쪽에 “사랑의 집”이라는 파란 글이 새겨져있었다. “사랑의 집?” 순간 봉이는 고아원을 떠올렸다. 소학교 6학년 때 “6.1절”을 맞으면서 학급에서 “사랑전하기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간단한 기념품과 위문편지를 가지고 시교에 있는 “사랑의 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봉이는 그곳에 가서야 아빠도 엄마도 형제도 없는 고아라는 이름을 가진 애들이 이 하늘아래에 그렇게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을 보면서 봉이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떠올려보았다. 그날 저녁 봉이는 아빠앞에서 두팔을 머리에 올려 하트를 만들며 “아빠, 사랑해요!”를 연출했다. 아빠는 깜짝 놀라는듯하더니 봉이에게 큼직한 꿀밤 하나를 얹어주며 말했다. “자식, 하지 않던 놀음을 하면서.” 분명 봉이가 아빠를 놀리고있는줄로 아는것 같았다. 그날 봉이는 아빠를 향해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고는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일기책을 펼쳐들었었다. “나는 정말 행복하다. ‘엄마, 아빠!’하고 부를수 있는 사람이 내곁에 있다는것이 행복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고있다는것도 눈물나게 고맙다. 불쌍한 고아원의 애들을 자주 찾아봐야겠다…” 그날이 있은지도 어느덧 3년철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봉이는 그새 한번도 고아원을 찾지 못했다. 일이란 그렇게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은가보다. 봉이는 문뜩 “사랑의 집”을 찾아보고싶어졌다. 그곳에 가 불쌍한 애들을 만나보고싶은것인지 아님 “쿠”라고 하는 그 녀자애와 어떤 인연이 닿아있을법한 그곳을 다시한번 보고싶은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꼭 한번 들려보고싶은 마음만은 간절해졌다. 봉이는 빠알간 등이 파아란 가방을 업고 사라지던 그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반시간쯤 걸으니 오솔길이 끝나있었다. 봉이는 시내구역에 들어서서 십분쯤 더 걸어 공공뻐스들이 정차하는 간이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6선뻐스를 타고 가다가 종점에서 내려 다시 십오분쯤 걸으면 “사랑의 집”에 도착할수 있는걸로 기억하고있었다. 간이역 서쪽켠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속에서 흥겨운 기타소리가 울려나왔다. (웬 일이람?) 봉이는 호기심이 동해 사람들이 모여선 그곳으로 다가갔다. 두세겹으로 둘러선 사람들속에서 머리를 길게 자래우고 노란 부리찌를 낸 잘생긴 남자애가 신들린듯 기타를 타고있었다. 궁금했다. “안에서 웬 일이세요?” 봉이가 곁에 선 사나이에게 물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가끔 볼수 있거든. 기타를 참 잘 타지 않니?” “저렇게 돈을 버는 앤가요?” “아니, 간혹 소비돈을 던져주는 사람은 있더라만 프로는 아닐거야, 저 애 입으로 직접 돈을 구걸하는걸 못 봤거든.” “그럼 뭘 하는 애래요?” “글쎄다…” 사나이가 머리를 저었다. “여러분, 정말 우리의 마음마저 찌물쿠게 하는 계절입니다. 공부에 지친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황금빛태양이 축제를 여는 광야를 향해서, 계곡을 향해서 려행을 떠나볼 의향은 없으신지요? 이 시각도 여러분의 자식들이 교과서와 씨름하느라 지쳐가고있다것은 알고계시는지요?” 남자애가 격동에 넘쳐 열변을 토하고는 흥겹게 기타줄을 튕겨댔다. “메아리소리가 들려오는 / 계곡속에 흐르는 물 찾아 / 그곳으로 려행을 떠나요.” “려행을 떠나요”라는 귀에 익은 노래였다. 7월의 찜통더위에 진땀을 짜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시원하게 적셔주는 싱싱한 노래였다. 둘러선 사람들속에서 무시로 박수가 터져올랐다. “좋소, 좋소~” 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절찬속에서 남자애는 완전히 무아상태에 빠진듯했다. 봉이는 문뜩 그 남자애가 무지무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해나가는 그 용기가 부러웠고 낯선 사람들앞에서 저렇게도 당당하게 열창을 할수 있는 남자애의 자신심이 부러웠다. “공부에 지친 자식들의 손목을 잡고 황금빛태양이 축제를 여는 광야를 향해서, 계곡을 향해서 려행을 떠나볼 의향은 없느냐”고 하던 남자애의 뜨거운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으며 일시 코끝이 물먹은듯 시큰해났다. 드디여 6선뻐스가 역에 들어섰다. 봉이는 아쉬운듯 그곳을 떠나 뻐스를 향해 뛰여갔다. 봉이는 해살을 마음껏 마실수 있는 차창 곁을 찾아 앉았다.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봉이의 머리칼을 날려주었다. 봉이는 손가락을 쫙 펴서 머리를 뒤로 쓸어올리며 스르르 두눈을 감았다. 봉이는 잠간이지만 머리속에 비여있는 하아얀 공간을 발견했다. 그 공간속에는 공부도 없었고 선생님도 없었고 아빠도 없었고 엄마도 없었다. 그 공간속에는 쿠라고 하는 녀자애도 없었고 신들린듯 기타를 탈줄 아는 남자애도 없었고 지난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내리꽂힌 봉이라는 락방자도 없었다. 봉이는 두눈을 감은채로 달리는 뻐스에 몸을 맡겨버렸다. 시교여서 그런지 뻐스는 무시로 들추어댔다. 덜커덩덜커덩할 때마다 하얗게 비여있던 공간속으로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꾸물꾸물 기여들기 시작했다. 역시나 먼저 달려오는 모습이 쿠라고 하는 녀자애였다. (쿠? 그것이 과연 그 애의 진짜 이름일가? 쿠하고 “사랑의 집”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을가?) “배우지망생”이라고 믿고싶던 녀자애의 모습이 “사랑의 집”이라는 파아란 글자와 어울리면서 마음속으로부터 아릿한 기분을 만들어주고있었다. “사망훈련”이라는 말도 무딘 칼끝이 되여 봉이의 사색을 뚜져댔다. 만약 녀자애가 “배우지망생”이 아니라 할 때 “사망훈련”을 떠올릴만치 내심세계가 심각하다면 그 애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있는것일가? 봉이는 탱탱 소리가 나는체 밝은 허울을 걸치고 혼자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무형의 보따리에 눌려 힘겹게 가파로운 오솔길을 걸어가는 녀자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빨리 돌아가라. 너에겐 아직 가출이 어울리지 않거든.) 떠나가면서 남긴 녀자애의 마지막 말이 다시 귀전을 울렸다. 봉이는 지그시 두눈을 감고 자신없이 머리를 저었다. (가출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구? 하다면 나에게 어울리는것은 과연 어떤것일가? 얌전한 애? 공부를 잘하는 애? 엄마 말씀 잘 듣는 애?) 봉이는 잠간 자기가 살아온 16년간의 발자취들을 더듬어보았다. 4살 나던 해인가 한번은 엄마의 손을 잡고 공원에 간적이 있었다. 엄마는 봉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봉이는 엄마가 볼 사이도 없이 저절로 아이스크림봉지를 벗겨버렸다. “엄마~” 봉이가 엄마를 향해 소리쳤다. 딴에도 대단한 일을 해낸듯싶어서였다. “우리 봉이 참 용쿠나, 저절로 아이스크림봉지를 다 벗겼네.” 하면서 엄마가 어깨를 다독여주기를 바라서였다. 하지만 아니였다. 엄마는 봉이의 옆에서 뒹구는 아이스크림봉지를 가리키며 말씀했다. “쓰레기를 저렇게 마구 버리면 나쁜 어린이가 됩니다. 빨리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세요.” 어머니의 말씀은 후둑후둑 내리치는 우박처럼 봉이의 여린 마음을 아프게 했다. 봉이는 자기가 던진 아이스크림봉지를 주어서 쓰레기통에 가져가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참 무섭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뒤로 봉이는 쭉― 생존의 두려움을 느끼고있었다. 친구들과 싸우면 나쁜 사람이 되고 주은 물건을 호주머니에 넣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되고 어른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고… 봉이는 소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할수가 있었다. 1학년 전학기 한어과 기말시험에서 75점을 맞은 시험지를 받아가지고 학교 대문을 나오던 날, 어머니는 봉이의 손을 끌고 집으로 가다가 길거리를 쓰는 청소공아저씨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봉이야, 너 봤지?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저런 사람이 된단다.” 그후로 봉이는 길을 가다가도 길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피해서 걸었고 걸으면서 (저 사람들은 정말 힘들게 사는것일가?) 하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기도 했다. 그래서 봉이는 죽기내기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공부도 생각대로 되는것이 아니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도 소학교에서는 내내 10등 주위를 맴돌았다. 엄마는 내놓고 실망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얼굴에 서운함을 떨치지 못하고있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그래도 5등 주변을 맴돌수 있었다. 엄마는 늦은 골이 튼다면서 1등을 향해 열심히 뛰라고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그만치라는 한계가 있는것인지 봉이는 지금껏 최고로 3등을 초과하지 못하고있었다. 봉이는 손만 내밀면 거머쥘것 같은 1등의 월계관이 어쩜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멀리 있는 그림의 떡으로 생각될 때가 많았다. 봉이는 점점 학교가 무서워지고 공부가 무서워지고 시험이라는 그 자체가 무서워졌다. 갈수록 어머니가 무서워지고 아버지가 무서워지고 집이라는 그 자체가 무서워졌다. 어제밤에도 어머니는 하늘이 내려앉기라도한듯 락루를 하셨다. “어쩌니? 어쩌니! 고중시험이 당금인데… 5등급을 뛰여올라도 모르겠는데 되려 떨어지다니. 우리 봉이를 어쩌면 좋니?” 그러잖아도 가슴이 터져버리기 5분 직전에 이른것 같은데 어머니가 붙는 불에 키질을 하니 도무지 감정을 누를수가 없었다. “어쩔가요? 어머니! 내가 와락 죽어버릴가요?” 너무도 반상적인 봉이의 반발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려 침실로 들어가셨다. 봉이도 자기의 침실에 들어가 안으로 문을 잠가놓고 침대에 벌렁 들어누웠다. 온밤 머리가 아홉개 달린 도깨비들에게 쫓기워다니다가 날이 푸름히 밝아오자 어머니와 말도 없이 가방 하나를 달랑 챙겨들고 밖으로 나와버렸던것이다. (과연 어디로 갈가?) 봉이는 어지럽게 사색을 굴리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다가 마주 오는 뻐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살펴보니 시교로 나가는 32선공공뻐스였다. 가방을 내리워 무릎앞에 가져오는 순간 봉이는 저도 몰래 서글픈 웃음을 날렸다. 가출을 시도하며 들고 나온 가방안에 교과서며 필기장이며 과외훈련집 같은것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던것이다. 32선종점에서 내린 봉이는 잠간 망설이다가 홍월저수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홍월저수지는 그곳에서 반시간쯤 걸으면 도착할수 있는데 주변에 바위도 있고 나무도 많아서 제법 유원지로 통하고있었다. 빨간 옷을 입은 쿠라는 녀자애를 만난것도 바로 그 홍월저수지에서였다… 뻐스는 심술 많은 아낙네만치나 신경질적으로 삑~ 소리를 내면서 멈춰섰다. 봉이는 차에서 내려 잠간 위치를 둘러보았다. 6선뻐스종점에서 서쪽으로 잠간 가면 비포장도로가 있는데 그 도로를 따라 다시 20분쯤 올라가면 “사랑의 집”인것으로 짐작되였다. 봉이는 그 도로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느 예쁜 손이 심어놓았는지 길섶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소담하게 피여있었다. 마음껏 향기를 풍기며 시름없이 흐느적이는 꽃들은 봉이에게도 한가슴 그득 자연의 정취를 불어넣어주고있었다. 봉이는 힘껏 꽃향기를 마시며 큼직큼직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의 집”이 멀리로 보였다. 봉이는 토닥토닥 가슴이 뛰였다. “사랑의 집” 옆은 남새밭이였다. 파아란 물결이 남새밭을 덮어서 한결 아늑한 느낌을 주고있었다. 한무리의 아이들이 남새밭 중간에서 뭔가를 하느라 분주했다. 봉이는 그곳을 바라고 발걸음을 조였다. 남새밭과 가까운 3층청사 모퉁이에 이르니 남새밭의 정경이 환하게 보였다. 가담가담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까지도 들을수가 있었다. 남새밭에는 고추가 심어져있었다. 애들은 한창 고추를 따느라 즐거워했다. 그들은 자기들 손가락보다도 더 큰 고추를 부지런히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검푸르게 독이 올라있는 고추는 여느 사람들이 보면 저도 몰래 입맛이 확 당겨할것 같았다. 하지만 봉이는 아니였다. 봉이의 어머니께서 자극성이 강한 음식은 대뇌의 발달에 영향이 있다면서 봉이를 못 먹게 한데서 아직까지 봉이는 고추맛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누나, 점심에는 이 고추를 장에 쪄서 먹었으면 좋겠슴다.” 애티나는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봉이는 집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서서 애들쪽에 눈길을 주었다. 까까머리를 한 일여덟살쯤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옆에 선 녀인에게 고추를 듬뿍 담은 바구니를 들어보이고있었다. 채갑수건을 목에 걸고 헐렁한 꽃부리적삼을 입은 녀인은 그 시각 봉이와 등을 돌리고 서있었다. 녀인은 바구니에서 고추를 한줌 움켜쥐더니 연극대사를 치는듯한 과장된 목소리로 서글서글하게 남자애를 칭찬했다. “우리 용길이 참 용쿠나. 고추를 많이도 땄네. 그래 점심에는 주방에 말해서 이 고추를 장에 쪄서 먹자꾸나.” 말을 마친 녀인은 목에서 채갑수건을 내리워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이 봉이를 마주하는 순간 봉이는 깜짝 놀라고말았다. 봉이는 정말 자기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꽃부리적삼을 입고 채갑수건을 목에 건 그 녀인은 뜻밖에도 쿠였던것이다. 애들이 좋다고 퐁퐁 뛰며 손벽을 쳤다. “와― 좋아라. 점심엔 고추찜을 먹는다.” “누나, 토장에 찔 때 고추는 작은걸로 하기쇼. 영미는 큰 고추를 매워서 못 먹슴다.” 용길이라고 불리운 그 남자애가 자기옆에 선 대여섯살쯤 돼보이는 녀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쿠는 용길이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용길이의 옆에서 애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추를 따느라 여념 없는 영미를 훌쩍 안아올렸다. 쿠는 영미의 얼굴을 당겨다가 자기의 얼굴에 몇번 비비더니 채갑수건으로 영미의 코를 닦아주며 말했다. “그래그래, 우리 영미 맵지 않게 제일 맛나는 작은 고추를 골라 쪄달라고 해야지, 응?” 그리자 영미가 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캐득캐득 웃음을 토했다. “야― 신난다. 그럼 점심엔 밥을 많이많이 먹어야지―” 영미의 목소리는 그처럼 신나고 맑아보였다. 어쩜 영미는 쿠라고 하는 저 녀자애를 엄마로 착각하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봉이의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 (옳구나, 쿠는 정말 고아원에 사는구나. 아니면 저렇게도 스스럼없이 아이들과 한가족이 될수가 없는거야!) 봉이의 눈앞에 바위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던 빨간 그림이 또 한번 스쳐지났다. 봉이는 가방앞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사랑의 집”이라는 네 글자가 네개의 예리한 칼끝이 되여 자기의 가슴을 저며내는듯 괴로왔다. (어쩜, 어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수가 있을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것이든, 아니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것이든 얼굴에 연출되는 그 행복한 표정만은 거짓이라고 할수 없겠지?) 봉이는 스스로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녀자애에 비하면 자기는 어쩜 고민을 하는 그 자체가 행복한 투정이라고 생각되였다. 봉이는 손수건을 움켜 가슴에 가져다댔다.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아릿한 그 무엇이 꾸역꾸역 올리밀어 봉이의 가슴을 괴롭히고있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만나서 상처받은 그 애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싶었지만 또 선뜻 나설수도 없었다. 그처럼 도고하던 녀자애가 이 장면에서 꽃부리적삼을 입고 채갑수건을 목에 건채 자기를 만난다면 얼마나 난처해할가 하는 생각으로 저으기 주저심이 들었던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대로 돌아가는거야. 뭔가를 준비해가지고 다시 와서 조용히 만나는거야…) 봉이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천천히 몸을 돌려 오던 길을 재촉했다. 봉이가 녀자애를 다시 찾은것은 이튿날오전 아홉시쯤이였다. 봉이가 수발실 창문을 두드리자 50대의 구레나룻을 한 아저씨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저씨.” 봉이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래, 웬 일이냐?” “아저씨, 쿠를 찾아왔거든요.” “뭐라구? 누구를 찾아왔다구?” 아저씨가 턱을 약간 쳐들며 다시 물었다. “쿠, 쿠…쿠를 찾아왔다구요.” 급하니 말머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아저씨는 모르겠다는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젓다가 혼자말 비슷이 웅얼거렸다. “쿠쿠라고 했나?” 아저씨가 목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며 봉이에게 물었다. “왜 여기 와서 쿠쿠를 찾는데?” “꼭 볼일이 있어서요. 여기 있죠?” “있긴 있다만… 허, 참! 너 어디서 온다 했지?” “시3중에서 공부하거든요. 쿠가 지금 어디 있어요?” “주방에 있겠지, 그래 저 왼쪽켠에 앉은 집, 주방으로 가봐라.” 아저씨의 말에 봉이는 기뻐하며 인사를 올린후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쿠를 만나게 된다. 그 애를 다시 만나게 된다.) 봉이의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워졌다. (그래, 조용히 불러 단둘이 만나는거야, 그리구 먼저 손수건을 건네주면서 말을 거는거야, “받아, 너의 손수건이다.” 그럼 그 앤 어떤 표정을 지을가?) 봉이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지. 그렇게 했다가 그 애가 괜히 모르쇠를 놓으면 어떻게 할가? 그럼 아예 “아야! 너 어떻게 여기 있니?” 하고 깜짝 놀라서 죽는 시늉을 해보여?) 두눈이 튀여나올듯 깜짝 놀라는 그 녀자애를 보는것이 그렇게도 재미있을것 같았다. 봉이는 시무룩이 웃으며 오른손으로 가방을 꾹 눌러보았다. 손가락끝으로 손수건이 맞혀왔다. 그리고 그옆에 있는 책 같은것도 느껴졌다. 그것은 빨간 하트가 찍혀진 다이어리였다. 그 다이어리 갈피에는 자기가 평소 모아두었던 소비돈 3백원이 들어있었다. “사랑의 집”에서 생활하려면 꼭 소비돈을 넉넉히 쓸수 없으리라 생각되였던것이다. 녀자애가 받지 않으려고 하면 “사랑의 집”에 드리는 자기의 성의일뿐이라고 둘러댈 생각이였다. 주방문은 열려져있었다. 봉이는 주먹으로 열려져있는 주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50대가 푼히 됨직해보이는 아주머니가 물고기를 손질하다말고 머리를 돌렸다. “누구를 찾니?” “안녕하세요? 아줌마, 쿠를 찾아왔어요.” “누구를 찾는다구?” 아주머니의 눈길이 빨리 돌아갔다. 봉이는 아주머니의 거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저기요. 쿠, 쿠를 찾는다구요.” 봉이의 말에 아주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두 웃긴다야, 여기 와서 쿠쿠를 찾아선 뭘 하려구. 호호호호…그래 있긴 있지. 저게 아니냐?” 아주머니가 빨간 지시등이 보이는 전기밥솥을 가리켰다. “허!” 봉이는 너무도 허무해서 입을 떡 벌리고 선채 킬킬 웃음을 흘리는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롱담이 아닌데요, 아주머니. 정말인데요. 쿠라고 하는 녀자애를…” “나도 롱담이야 아니지. 여긴 쿠쿠라는게 저 밥솥밖에 없어. 사람이름이 쿠쿠라구 호호호호…” 아주머니가 또다시 배꼽을 쥐고 돌아갔다. “정말 그런 애가 없어요?” 봉이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없다니까. 그렇게 못 믿겠으면 저기, 숙소에 가봐라. 그곳 복도에다가 우리 원생들의 사진을 쭉 붙여놨으니까 혹시 낯익은 얼굴이 있는가 보거라.” 아주머니는 물고기를 손질하던 손을 그대로 들어 북쪽으로 앉은 빨간 벽돌집을 가리켰다. 손에서 걸직하고 뿌연 물이 뚝뚝 떨어져 진한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있었다. 봉이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올린후 비린내만치나 찜찜해나는 마음을 걷어가지고 숙소를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아니나다를가 숙소 복도 벽에 걸린 액틀에는 원생들의 사진이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어림짐작으로도 20명은 될것 같았다. 봉이는 쏘는듯한 눈길로 사진들을 훑었다. 없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는 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봉이는 아쉽고 서운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었다. (어디로 갔을가? 그래 정말 이곳에 있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던 모습은 어떻게 된것일가?)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지는듯했다. 봉이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어쩔가? 방마다 돌아라도 볼가? 혹시 쿠가 제 이름이 아닐수도 있으니까, 아니야, 이름이 아니라도 얼굴이야 뛸수 없겠지. 분명 쿠의 얼굴은 사진에서 볼수가 없는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쿠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봉이는 쿠가 어제 함께 고추를 따던 애들이라도 만나 사연을 묻고싶어서 다시 아주머니를 찾아가 애들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하지만 일이 안되려고 그러는지 원생들은 집체로 박물관 참관을 갔다는것이다. “분명 봤는데요. 어제 쿠가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는것을.” “그럼 누굴가? 이곳엔 평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단다. 어제는 내가 직일이 아니라서 누가 왔댔는지 모르지…” 아주머니가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참, 정말 다시 그 애를 못 보는걸가?) 봉이는 말 못할 아쉬움을 남기며 공공뻐스 간이역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간이역 서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람들속에서 건들어진 통기타소리와 함께 구성진 노래가 흘러나왔다. “굽이 또 굽이 깊은 산중에 / 시원한 바람 나를 반기네 하늘을 보며 노래 부르세 /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 부르세…” 어제 보았던 남자애가 오늘도 그곳에서 신들린듯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봉이는 사람들 틈에 머리를 들이밀고 그 남자애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와~”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랑만으로 가득찬 푸름의 계절에 자식들의 손을 잡고 려행 한번 다녀오시는것은 어떨가요? 이 시각도 공부에 지쳐 힘들어하는 자식들이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남자애가 열띤 목소리로 침을 튕기고있었다. 봉이는 (넋을 놓고 저 애의 설교를 듣는 어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았다. 그 시각 봉이는 웬지 자기보다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있는 그 남자애를 보는것이 괜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으며 돌아섰다. 열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서 멀거니 뻐스를 기다리자니 어딘가 멋적은 생각이 들었다. 봉이는 역에 있는 간이서점으로 다가갔다. 금방 나온 신문이며 잡지 같은것들이 유리창문에 달라붙어 길손들을 부르고있었다. 봉이는 성의없이 유리창 너머로 보여오는 잡지의 표지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눈에 띄였다. 1학년때 주문하여 보던 조선글로 된 잡지였다. 심심풀이삼아 한책 사서 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신호로 한책을 골라들었다. 봉이는 먼지가 뿌연 간이걸상을 종이로 대충 닦고 앉아서 책장을 번지기 시작했다. 역시나 예상하던대로 학교소개며 공부방법소개며 학생작문이며가 책갈피를 메워가고있었다. 뒤표지 안쪽에 실려있는 “사색”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봉이의 시선을 끌었다. 백양나무에 매달린 노오란 잎새 하나를 찍은 사진이였다. 봉이는 인차 작자의 이름에 눈길을 가져갔다. “아!” 봉이는 깜짝 놀라며 짤막하게 소리를 냈다. 분명 쿠라고 찍혀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사범학교 06년급 고사반이라고 밝혀져있었다. 봉이는 후둑후둑 가슴이 떨려났다. (혹시 이 애가, 이 애가 아닐가? 쿠! 옳을거야, 이같이 괴상한 이름이 그렇게 흔할수가 없어! 그렇다면 이 애가, 이 애가 사범학교 학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접때 “사랑의 집”에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던 그 모습은 무엇일가? 혹시 “사랑의 집”에서 살다가 사범학교에 붙었을가? 그래서 휴일을 리용하여 그곳에 들린것일가?) 이런 생각이 머리를 치자 봉이는 가슴속 밑자락에서 일종의 련민이 아릿하게 솟아오르는것을 발견했다. (그래 사범학교, 그곳에 가서 쿠를 찾아보는거야!) 봉이는 큰 결심이나 내린듯 사범학교방향으로 가는 29선뻐스에 몸을 실었다. 29선뻐스가 사범학교 정거장에서 도착한것은 10시 반을 금방 넘겨서였다. 봉이는 당금 쿠를 볼수 있을것 같은 예감에 가슴을 들먹였다. 봉이는 조용히 가방앞주머니를 눌러보았다. 네모난것이 약간 손끝에 맞혀왔다. 봉이는 주머니의 쪼로로기를 열고 그 네모난것을 꺼내들었다. 어제 홍월저수지에서 주은 빨간 꽃이 있는 손수건이였다. 봉이는 손수건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가방앞주머니에 넣고는 사범학교 정문쪽으로 발걸음을 다그쳤다. 금방 큰길을 넘어 인행도에 올라섰을 때 사범학교 정문 북쪽으로부터 한 사나이가 쏜살같이 뛰여오고있었다. 모양이 마치도 드라마에서 경찰에게 쫓기우는 좀도적을 방불케 했다. 봉이는 달려오는 그 사나이를 눈여겨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정문 북쪽의 굽인돌이에서 경찰복장을 입은 사나이 둘이 뛰여나오며 소리소리 웨쳐댔다. “서라, 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총을 쏜다.” 봉이도 길가던 길손들도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선자리에 굳어졌다. 쫓기우던 남자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다시 죽기내기로 뛰기 시작했다. “범죄자구나!” 봉이는 금방 무슨 판국인지를 알것 같았다. (싱겁게 남의 일에 나서지 말고 몸을 돌봐야 한다. 사고라도 나면 고중시험에 영향이 있으니까.) 늘 이렇게 당부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이 생기는것이 안 생기는것보다 못하다는것이 어머니의 생활신조였던것이다. “서라, 서라!” 경찰들이 계속 소리치며 남자를 쫓아왔다. 쫓기는 남자가 사범학교정문을 지나는 순간이였다. 문안에서 한 녀자애가 뛰여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쫓기우는 남자에게 안걸이를 걸었다. 쫓기던 남자가 보기 좋게 한쪽으로 나가 넘어졌다. 녀자애는 잽싸게 쫓기던 남자를 가로타고 앉아 남자의 얼굴에 강타를 먹였다. 구경을 하던 길손들이 그쪽으로 뛰여갔다. 쫓아오던 경찰들도 도착하여 쫓기던 남자를 붙잡아 수갑을 철컥 채워버렸다. 몰려간 길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봉이도 박수를 치며 그 녀자애에게 눈길을 주었다. 녀자애는 두손을 마주 쥐고 서서 손가락을 꺾으며 히쭉이 웃어보였다. 봉이는 너무도 뜻밖의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말았다. 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있는 그 녀자애는 뜻밖에도 쿠였다. 경찰들이 범죄자를 앞세우고 떠났다. 쿠도 파아란 가방을 고쳐 메고는 몸을 돌렸다. 어디론가 떠나는 행장 같았다. “쿠야,” 봉이가 녀자애쪽으로 뛰여가며 소리쳤다. 녀자애가 걸음을 멈추고 봉이쪽에 머리를 돌렸다. “쿠야, 정말 대단해!” 봉이가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진심으로 말했다. “너, 뢰봉?!” 녀자애가 깜짝 놀라는듯싶더니 봉이를 보고 히쭉 웃었다. 봉이도 녀자애를 향하여 웃음을 날렸다. “네가 진짜 뢰봉이지. 방금 참 멋졌어.” “그래?” “방금 다 보았거든. 어쩜 그렇게 잽싸고 용감할수 있었니?” “그래? 내가 잽싸보였어?” “그렇지. 잽싸보였지.” “와— 속이 다 시원하다. 난 한번 나의 태권도솜씨를 써먹어보려구 기회를 찾던중이였는데.” 녀자애의 얼굴이 악동처럼 번져갔다. “너, 태권도를 배웠니?” 봉이가 호기심이 동해서 녀자애에게 물었다. “그럼, 난 이미 1단을 꺾었거든. 2단도 꺾으려고 생각하다가 녀자애가 뭘 이쯤하면 되지싶어서 잠간 손을 놓고있는중이야.” “와— 어디까지가 너의 진면모냐?” “진면모?” 녀자애가 무슨 말이냐는듯 야릇한 눈길로 봉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의 진짜모습! 넌 사진도 찍잖아?” “사진? 너, 걸 어떻게 아는데?” 녀자애의 눈길이 다시 의문으로 반짝였다. “알지, 봐라.” 봉이가 가방앞주머니에서 잡지를 꺼내여 녀자애앞에 흔들었다. 녀자애가 금시 얼굴에 밝은 웃음을 피워물었다. “너, 그 잡지를 봤구나. 지난가을에 찍은 사진이야, 가을의 외로움을 말하려고 했는데, 맘에는 안 들어. 어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본딴것 같은 느낌이 들기두 하구.” “바로 그 장면을 재연한것이잖아. 난 그래도 좋은데. 희망을 보는것 같아서…” 그들은 말하는 새에 간이역까지 왔다. 둘은 란간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섰다. “봉이야, 근데 너 어디로 가는 길이였니?” 녀자애가 그제야 생각이 난다는듯 이상한 눈길로 봉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에 봉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녀자애를 쳐다보다가 가방앞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녀자애에게 돌려줄 손수건이며 특별히 녀자애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다이어리며가 손끝에 만져졌다. 다이어리 갈피에 끼워져있을 소비돈도 머리속에 떠올랐다. 봉이는 잠간 망설이다가 네모나게 개인 손수건만 꺼내 조심스럽게 녀자애앞으로 내밀면서 떠듬거렸다. “사실은 너에게 이것을 전해주려고…” 손수건을 본 녀자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이게 내 손수건이 아니냐? 어떻게 이게 너한테 있니? 난 아예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어제…” “홍월저수지에서? 그랬구나. 그래서 없은게로구나.” “그래, 네가 떠난후 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주었어. 어제 네가 이것으로 얼굴을 닦던 생각이 나서 네것이라고 생각했지.” 봉이는 여기서 말을 끊고 녀자애의 얼굴을 살폈다. 녀자애의 눈길이 봉이를 향해 반짝이고있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것을 어떻게 알았니?” “여기서…” 봉이가 녀자애에게 잡지를 내밀었다. “아, 그래. 여기에 나의 주소가 찍혀있지.” “근데 여기 ‘사랑의 집’이라는건 뭐야?” 봉이가 손수건을 내밀며 녀자애의 기색을 살폈다. “사랑의 집”이라는 말이 녀자애의 마음속 상처를 건드릴가 두려워서였다. 녀자애가 방긋 웃었다. “왜, 궁금해?” “아니, 그냥 조금, 어제 네가 ‘사랑의 집’에서 애들과 함께 고추를 따는걸 봤거든. 부르려다가 그만 돌아섰댔어…” “왜?” “네가 거기 있는걸 나에게 보여주고싶지 않아할것 같아서.” “왜 그렇게 생각했지? 오― 넌 내가 고아인줄 아는구나. 그치?” 봉이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녀자애가 까르르 웃었다. “넌 참 재밌는 애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아니야? 그럼?” “난 그곳의 자원봉사자야. 한달에 두번씩 토요일에 가거든. 어제가 바로 ‘사랑의 집’에 가는 날이였어. 그래서 어제 홍월저수지에 사진 찍으러 갔다가 돌아오던 맵시로 그곳에 들렸던거야. 너 진짜 나를 찾아 그곳까지 갔었니?” 녀자애는 다시한번 봉이에게 물었다. 봉이는 녀자애를 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려봉이, 난 정말 너의 자상함에 손을 들었다니까. 어쩜 이 손수건때문에 그곳까지 날 찾으러 갈 생각을 다 했니?” 녀자애는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듯 봉이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냥…” 봉이는 녀자애의 얼굴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잠간 발끝으로 땅을 뚜지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진짜 정체가 뭐니?” “정체라니?” “난 네가 정말 미스터리처럼 생각된다.” “웃긴다. 너 참! 봉이야, 너, 나를 몰라서 그래. 나처럼 세상앞에 다 들어나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구.” 녀자애는 보라는듯 봉이앞에 두팔을 쫙 펴보였다. 하지만 봉이는 녀자애를 향하여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아직도 못 믿겠다구?” “그럼.” “말해봐, 뭔데?” “우선 너의 그 ‘사망훈련’이라는것이…” 봉이가 녀자애를 바라보며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왜? 믿기지 않아? 물론이겠지. 문제는 네가 모든 일을 그렇게 정식으로 심각하게 생각하는거야. 왜 그래? 그냥 개구쟁이녀자애의 렵기적인 행동쯤으로 생각하면 안돼? 그 시각 난 뽀얀 운무속에서 빠끔히 머리를 내미는 물속에 풍덩 빠져보고싶은 충동이 생겼거든. ㅋㅋㅋ… 글구 내가 물에서 허우적거리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가도 궁금했구. 사실 어제 네가 머리를 숙이고있을 때 내가 너의 옆으로 지나갔던거야. 사실 난 너의 정체가 더 궁금했거든.” 녀자애는 구수한 옛말이라도 엮어가는듯싶었다. 그러는 녀자애를 바라보면서 봉이는 외계인을 보고있는듯한 기분이였다. (뭐? 내가 궁금했다구? 큰일이 났다고 내가 놀라서 허둥댈 때 나의 행동을 깨고소하게 살펴보고있었다구?) 봉이는 마치도 전라의 몸으로 네거리에 나선 기분이 들었다.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뭔가 욱하고 머리를 쳐들었다. 봉이는 반상적으로 소리쳤다. “글구 너, 그 이름은 뭐야!” “이름이 왜?” 녀자애도 봉이 못지 않게 도전적으로 물었다. “이름이 왜, 왜 쿤가 말이다.” “멋지잖아? 필명이야, 쿠! 넌 쿠를 어떻게 생각해?” “쿠쿠가 생각되거든.” “밥솥?” “그럼. 나뿐이 아니야.” 봉이는 아까 “사랑의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너뿐이 아니라구?” 녀자애가 바투 들이댔다. 그 바람에 봉이가 도리머리를 했다. “아니야. 괜히 해본 소리거든.” 봉이는 녀자애쪽으로 한발 다가서며 약간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무슨 뜻이야? 쿠라는게.” 녀자애의 얼굴에 가는 웃음발이 스쳐지났다.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듯했다. “없어! 아무 뜻도. 너 생각해봐! 한어에서 쿠라면 무슨 뜻이 되니?” “잔혹하다고 해석되는가?” 봉이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다음은?” “극도로? 깊게?” “그렇지 뭐. 깊게, 찐하게, 대개 그런 뜻이야. 간단해!” “간단해?!” 봉이는 또 한번 혀를 빼물었다. 이렇게 “간단한것”을 두고 어제밤에 무척이나 심각하게 생각을 했던 자신이 못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 너 진짜 이름은 무엇인데?” 봉이가 끝을 보고야말겠다는듯 바투 들이댔다. “무척 알고싶어?” “그냥 궁금해서.” 녀자애의 얼굴에는 여전히 만만한 여유가 내비치고있었다. 봉이는 멋적은듯 뒤말을 얼버무려버렸다. 녀자애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려주지 뭐. 내 진짜 이름은 김순녀야, 김순녀! 어때? 나하구는 잘 안 어울리지? 그래서 그냥 부르기 좋게 쿠라고 필명을 단거야. 사는게 그런거지 뭐. 쿨하게… 재밌잖아!” 세상을 손안에 넣은듯 당당하게 말하는 녀자애의 모습이 말 그대로 쿨하고 당당하게 느껴졌다. 이런 애라면 정말 “사망훈련”도 할법하다고 생각되였다. “난 오늘 등산을 가는 길이야. 마반산이라구 알지? 기차 타구 도문으로 가는 길옆에… 산이 보통이 아니래. 오를 맛이 난다는거야. 한번 가보고싶잖아?” 녀자애가 봉이를 바라보며 말하다가 인차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아니지. 넌 공부를 해야 하니까. 궁금증이 풀렸으면 인젠 집에 돌아가거라. 나 떠나야 하거든.” “아니, 함께 가자.” 봉이가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럴거 없어. 넌 나하구 한길이 아니거든.” “뭐? 한길이 아니라구?” 봉이가 도전적인 눈길로 녀자애를 찍어보며 물었다. “그래, 난 진작 보아냈어. 넌 지금 잠간 방황을 하고있을뿐이야. 지난 기말시험에서 5등급이나 떨어졌다면서, 너의 새로운 목표는 그 5등급을 따라잡는거야. 그게 너의 진정한 기쁨이고 부모님들의 기대일거야.” “그게 너무 힘들어, 난.” 봉이는 어느새 녀자애를 향해 진심을 토로하고있었다. 봉이의 진심을 읽으며 녀자애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네가 방황하고있는걸! 중점고중, 그것은 마치도 좁디좁은 외나무다리 같은거야. 천군만마가 그 다리를 지나서 어디론가 가려고 헤덤벼치니까. 마치도 다리 저켠에 노아의 방주가 있는것처럼 말이야! 갈수만 있다면 다리 저켠으로 가보는것도 참 좋은 일이지.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될수 없다는거야!” 녀자애는 흥분했는지 제법 손사래까지 해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나도 한때는 너 같은 고민을 하고 방황을 했었어. 부모님하구 엄청 싸우기도 했지.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알고있었거든. 난 분명 아니였던거야, 나의 흥취는 애들을 고와하는것, 나의 꿈은 마음껏 사진을 찍는것,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보는것이였어. 교원이라면 꼭 훌륭한 교원이 될 자신이 있었거든. 그래서 부모들을 설복하여 사범학교에 온거야. 첨에 부모들은 나의 선택을 동의하지 않았어. 돈을 내고라도 중점고중에 붙여준다는거야. 부모들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거든. 평범한 출근족으로서 자식 뒤바라지를 하기가 어디 쉬운거니? 난 그런데 돈을 쓰고싶지 않았어. 내 인생의 목표대로 하고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쿨하게 살고싶었단 말이야!” 녀자애는 말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하며 봉이를 바라보았다. 봉이는 쿠라고 부르는 남다른녀자애- 김순녀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이때 역전으로 가는 30선공공뻐스가 들어섰다. 녀자애가 사뿐 일어서며 가방을 주어들었다. “봉이야, 믿는다. 아자!” 녀자애는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보이며 봉이에게 웃음을 날리고는 어느새 뻐스에 뛰여올랐다. 봉이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선자리에 서서 부르릉 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30선뻐스를 바라보았다. 녀자애는 차창 너머로 봉이를 향해 손을 저었다. 봉이도 녀자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뻐스와 함께 멀어져가는 녀자애의 빨간 옷이 한점의 뜨거운 태양으로 되여 봉이의 가슴속 구석구석에 서려있던 뽀얀 운무를 걷어가는듯싶었다. 봉이는 으스러지게 주먹을 틀어쥐였다. 그랬다. 운무의 저쪽은 파아란, 빠알간, 노오란 칼라가 살아 숨쉬는 황홀한 채색의 세계였다.    
2    빨간것 댓글:  조회:1000  추천:0  2012-04-24
      기차는 숨막히는 어둠을 삼키며 기승스럽게 질주하고있다. 분명 갈길이 정해져있는 기차여서 자기가 목적한바를 향해 달리고있을것이지만 그속에 몸을 담근 응이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를 바라고 달리고있는지가 묘연하기만 하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자.) 서정시의 한 단락 같은 아이디어 하나를 가슴에 담아들고 가방 하나를 어깨에 달랑 걸친채 무작정 떠난 길이여서 응이로서는 더욱 막연한지도 몰랐다. (선택을 잘한거야, 나의 이 선택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할수만 있다면 나도 행복한거야.) 응이는 애써 서글퍼지려는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그게 달랜다고 해서 달래지는것이 아닌것 같았다… “헉헉…” 그때 아빠는 거칠게 숨을 톺고있었다. “헉헉…” 숨소리가 거칠어갈수록 빨간것은 세상 무서운줄을 모르고 크게크게 부풀어졌다. 한뽐도 안되던 그 빨간것이 아빠의 입김을 받아먹고 한순간에 배뚱뚱이로 되여가는것을 신비한듯 바라보면서 응이는 짝짝 손벽을 치고 토끼뜀을 하면서 가무스름한 얼굴에 맑은 웃음발을 피워올렸다. “커진다, 커져. 하늘처럼 커진다. 잘한다, 울 아빠. 하늘처럼 잘한다.” 호들갑에 가까운 응이의 재롱이 아빠의 신경을 건드렸던지 아빠는 연신 황소숨을 내뿜으며 응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아빠의 얼굴은 그 빨간것처럼 뻘겋게 부풀어올랐고 눈알은 당금 튀여나올듯 충혈되여갔다. “아빠!” 응이는 갑자기 새된 소리를 질렀다. 당금 무슨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이 머리를 쳤던것이다. 그 소리에 아빠는 흠칫하면서 두눈을 더 크게 치뜨며 모두숨을 내뿜었다. “팡!” 소리와 함께 빨간것은 산산쪼각이 나며 사방으로 뿌리워져나갔다. 응이는 파편처럼 흩어지는 빨간 쪼박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받쳐주던 하늘이 와그르르 무너지는듯한 아픔을 느끼며 단말마적으로 “아빠~”하고 실망을 터쳐올렸다. 그 서슬에 응이는 번쩍 눈을 떴다. 카텐을 뚫고 뿌우연 쪼각달이 심드렁하니 얼굴을 들이밀고있었다. (꿈이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났다. 응이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몹시도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몸은 왼쪽으로 누워져있었는데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진 오른손이 신통하게도 심장을 누르고있었다. 몸에 깔린 왼쪽팔이 저렸다. 응이는 몸을 추스려서 천정을 쳐다보게 한 다음 오른손으로 저려나는 왼팔을 잠간 주무르다가 몸 그대로를 큰대자로 만들어버렸다. 늦가을의 누런 잔디밭에 누워있는듯한 환영이 머리속을 치고 들었다. 구름 한점 없이 푸른 하늘이 참 높다고 생각되였다. 높은 하늘에서 빨간것이 바람에 날려오고있었다. 파아란 하늘에서 한점의 붉은 점은 웬지 그렇게 처량하게 느껴졌다. 응이는 잠간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파아란 하늘의 빨간 점 하나. 기억의 저편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여나오고있었다. 응이가 여덟살 나던 해였다. 초롱초롱한 두눈에 눈물 마를 새 없던 그해 가을 내내 기별도 없이 꿈에 나타나서 응이의 새우잠을 설쳐놓던 빨간 점이였다. 꿈을 꾸고 깨여나면 그렇게 외롭고 무서울수가 없었다. 응이는 어미닭의 품을 파고드는 햇병아리마냥 아빠의 몸에 자신을 밀착시키군 했다. 벌써 길들여졌을법도 한 냄새지만 여전히 길들여지기 힘든 매캐한 톱밥냄새가 응이의 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냄새도 꿈을 꾸고난후의 외로움이나 무서움하고는 비길바가 못되였다. 악착스럽게 아빠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틀어박을라 치면 날 잡아갑수 하고 드릉드릉 코를 골아대던 아빠도 어느새 잠을 설치고 꺼슬꺼슬한 손바닥으로 응이의 배를 천천히 만져주면서 잠기 어린 목소리로 “오줌이 마려워?”하고 물으셨다. “아니.” “그럼 자야지. 랠 또 학교에 가야 하니까.” 말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아빠는 또 드릉드릉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응이는 그러는 아빠가 참 밉다고 생각되였다. (난 무서운데. 꼭 껴안아줄거지. 엄마라면 나를 꼭 껴안고 머리를 쓸어주면서 “자장자장— 내 아들아.” 하고 자장가를 불러줄텐데.)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또 엄마가 떠나가던 날 공항의 하늘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펼쳐지군 했다. 엄마가 한국으로 떠나던 그날도 하늘이 파아란 늦가을의 어느날이였다. 공항 휴계실의 차디찬 대리석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범 나와라 곰 나와라 하고 발버둥질을 치며 엄마를 가지 말라고 생사결단을 하다가 아버지의 거쿨진 손에 질질 끌려 밖으로 나와서였다. 아빠는 택시를 부르느라고 허둥거리고있었고 고모는 그때까지도 두발을 동동 구르는 응이를 어찌할지 몰라 “그만해라, 그만해라~”를 련발하고있었다. 그때 무서운 굉음이 울려왔다. 따라서 고모가 소리쳤다. “응이야, 봐라. 네가 이렇게 울어대니 엄마가 끝내 하늘로 오르는게 아니냐? 봐라, 저 봐! 엄마가 하늘로 오른다.” 고모의 잔사설에 놀라 응이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머리를 쳐들어 소리나는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높고 푸르다고 생각되였다. 높고 푸른 하늘로 은색의 비행기가 앞을 가르며 치솟고있었다. 비행기의 옆구리에 붙은 뭐라고 씌여진 빨간색 타원형포스터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웬 일인지 비행기의 거대한 몸뚱이보다도 타원형의 그 빨간 포스터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고무풍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저게 터지면 어떡해? 고모…” 응이가 울음을 그치고 멀어져가는 빠알간 포스터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얘는, 불길하게 웬 소리냐? 비행기가 왜 터져?” 고모가 못마땅하다는듯이 응이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응이는 응이대로 하늘 어디에선가 그 빨간것이 “팡!” 하고 터져버릴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로부터 응이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가끔 그 빨간것을 떠올렸고 그러는 밤이면 또 하늘로 떠다니는 그 빨간것을 꿈에 보군 했었다. 꿈에 그 빨간것은 언제나 하늘 어디에선가 “팡!” 하고 터져버렸고 응이는 그 소리에 놀라 잠을 깨군 했다. 그때마다 응이는 외롭고 무서워서 아빠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들이밀군 했다. “자야지? 랠 또 학교에 가야 하니까.” 응이를 어르는 아빠의 대사는 목수라는 변하지 않는 아빠의 직업만치나 변함이 없었다. 터져버리는 빨간것에 놀라 잠을 설치고난후 외로움에 떨고 무서움에 떨며 긴가민가 풋잠이 들면 응이는 또 호랑이에게 쫓기우고 사자에게 먹히우며 힘든 밤을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일어나면 아빠는 아빠대로 부엌에서 아침준비를 하고계셨다. 아침이라 해야 대개는 전날 저녁에 먹던 국이나 반찬물에 밥을 말아서 한공기씩 비우면 그만이였다. “가자, 학교에 가야지.” 아빠는 매캐한 톱밥냄새가 코를 찌르는 작업복을 툭툭 털어서 몸에 걸치며 응이를 불렀다. 응이는 그 톱밥냄새를 맡으며 심드렁하니 아버지의 뒤를 따르군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어느때부터인지 그 빨간것은 응이의 머리속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응이도 다시는 밤에 가위 눌려 잠을 설치는 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응이는 어느새 아빠와 다른 침실을 쓰는 열여덟살의 소년으로 자라났고 아빠도 어느때부터인지 “자라, 랠 학교에 가야지.” 하는 걱정을 하지 않으셨다. 그랬다. 응이는 어느새 고중 1학년생이 되여있었던것이다. 오후 세번째 시간은 작문시간이였다. 명제작문이 주어졌다. 제목은 “시간의 힘”이였다. “시간의 힘은 위대한것입니다. 좀만 노력하면 우리는 곳곳에서 시간의 힘을 느낄수가 있습니다. 나에게서 시간은 어떤 위대함을 과시했는지? 살며시 두눈을 감으시오. 툭툭!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위대한 시간의 발걸음소리가 가느다란 초침의 등에 실려 나에게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수업시간이면 곧잘 이렇게 격정을 토로하군 해서 “김격정”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번대머리 김선생님이 또 가슴을 치며 시간의 위대함을 호소했다. 응이는 선생님의 호소에 최면에라도 걸린듯 어디론가 빨려들고있었다. 그 시각 응이는 머리속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빠의 얼굴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보고있었다. 너무나 익숙한듯하면서도 피뜩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이여서 몹시 괴로왔다. (아버지에게서 “시간의 힘”이란 과연 어떤것일가?) 하는 생각이 내내 응이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하학하여 집에 오니 아버지가 먼저 퇴근해있었다. “응이야, 소배필을 끓인다. 옷 갈아입구 빨랑 와라. 소탕에 시원히 밥 말아먹자.” 신을 벗는 응이를 보고 아버지께서 싱글벙글했다. “네.” 응이는 외마디대답을 하면서 아버지를 눈여겨보았다. 아버지는 그때 뽀얀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르는 큰 남비곁에 서서 파를 송송 썰고있었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간 10년 내내 보아오던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수 없는 풍경이였다. 응이는 인차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밥상앞에 앉았다. “국물이 뽀오얀게 기름이 동동 뜨는걸 봐라. 제법 밥맛이 당길것 같구나.” 아버지께서 응이의 앞으로 소금통을 밀어놓으며 말씀했다. “네.” 응이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가루소금을 한숟가락 푹 떠서 국에 넣었다. “얘, 무슨 소금을 그렇게 많이 넣어?” 아버지가 된겁하여 소리쳤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국물을 먹어보니 짜기는 짰다. 하지만 응이는 밥을 말아놓으니 그런대로 먹을수 있을것 같아 술목이 부러지게 밥을 입에 떠넣었다. 그러면서도 머리속에서는 하냥 “시간의 힘”이 맴돌이쳤다. 응이는 밥술을 뜨면서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에 눈길을 박았다. 어릴 때 참 멋지다고 생각되던 아버지의 쌍까풀눈이 피곤한듯 우멍하게 꺼져있었고 눈확에 얼기설기 주름이 실려있었다. (아버지도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이였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니?” 응이의 반상적인 행동을 보아냈던지 아버지께서 쑥스러운듯 괜히 귀밑머리를 쓸어보며 바스음을 토했다. “아니요.” 응이는 머리를 돌리며 밥술을 입에 밀어 넣었다. 웬 일인지 목이 꺽 메여왔다. 딸꾹질이 잇달았다. “물을 넘겨라, 천천히 먹지 그러니…”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을 하시며 물고뿌를 들어 응이의 앞에 내밀었다. 응이는 물고뿌를 받아 꿀떡꿀떡 몇모금 마셨다. “내려갔니?” “네.” “올해는 작년보다 김장배추를 일찌기 사야겠다. 작년에 늦었더니 괜히 비싸기만 하더구나.” “네.” “조선사람은 그래두 김치를 먹어야 하는거야. 김치힘이라는게 있거든. 허허허허… 로씨야마우재들이 빠다힘을 쓰는것처럼 말이다.” “네.” 응이는 외마디대답을 하면서 다시한번 아버지를 훔쳐보았다. 아버지도 그 순간 응이를 바라보고있었다. 응이가 입가에 웃음을 피워올리며 말했다. “아버지, 흰머리가 많이 났습니다.” “어, 흰머리? 그래 나이가 얼만데. 휴~ 오십도 넘었구나. 응이야, 올해 내 나이 쉰 몇이던가? 허허허허…” 아버지는 애써 목소리를 맑게 내려고 소리를 한 옥타브 높이고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되려 파르르 떨리기만 했다. “아버지.” “그래, 쉰둘이지. 허허허허… 너를 서른 네살에 낳았으니까. 그때 너의 엄마가 서른두살이였나? 집체호에서 제일 막차를 타고 시내에 들어와 자리를 잡느라구 고생을 하다나니 좋은 세월이 싹 흘러버린것이였어.” “아버지도 집체호에 갔댔어요?” 응이가 밥술을 뜨다말고 뜻밖이라는듯 물었다. “그럼, 갔댔지.” “처음 듣는데요. 왜 그런 말씀을 일찍 안했어요?” “그래? 허허허허… 살려구 버둥거리다나니 그런 말을 할 새가 없었나보다. 집체호로 가던 해가 열여덟살이였으니, 그게 74년도던가? 참, 그러고보니 지금 너하구 같은 나이였네.” 아버지는 일어나 응이의 앞에 놓인 수저와 빈 밥사발을 주어들고 몸을 돌려 수도앞으로 다가가며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어떠했을가? 문뜩 그것이 알고싶었다. 하지만 응이는 이미 아버지와 너무 많은 말을 한듯싶어서 궁금증을 속으로 누르며 침실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어떠했을가? 그 생각이 집요하게 응이를 놓지 않고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기 시작했다. 오른 볼이 확확 달아올랐다. 응이는 손을 들어 자기의 오른 볼을 만지작거렸다. “말해봐, 내가 몇번째야? 몇번짼가 말이야.” 응이는 볼을 만지던 손을 내리워 자기의 오른쪽 허벅다리를 만졌다. 접때 그 허벅다리를 꼬집으며 소리소리 질러대던 지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떠올라서였다. 그날 응이가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네가 나의 첫 키스상대라고 아무리 해석해도 지려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당황함이 없이 키스를 하는 그 자세가 너무 로련해보인다는것이였다. 응이가 더 어떻게 해석할수 없어 쩔쩔매고있을 때 지려가 갑자기 덮쳐들어 응이의 볼을 할켰다. 응이는 오른쪽볼이 따끔해남을 느끼면서 손을 볼에 가져갔다. 빨간것이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까불구있어. 내가 몇번째냐구? 난 처음이야, 누구에게도 나의 첫 키스를 허락한적이 없었다구. 알아둬. 넌 나의 첫 키스를 훔쳐간 도둑놈이야.” 지려는 발뒤꿈치를 들어 빨갛게 피가 맺힌 응이의 오른 볼에 뻑 소리를 내고는 응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이 도둑놈아.” 그날 응이는 학교에서 단지부활동을 한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지려와 함께 맥주 두병을 마셨다. 지려의 말대로라면 열여덟살 성인식을 치르는것이요 소녀에 대한 고별식을 치르는 자리라는것이였다. 첫 키스를 도적맞혔다고 응이의 허벅다리를 꼬집을 때와는 달리 그렇게도 담담하게 맥주잔을 홀짝이며 키득거리는 지려를 보면서 응이는 과연 “고별식”이라는 낱말로 이렇게 소녀의 첫 키스를 대체할수도 있을가를 생각해보았다. 어쩜 충분히 그럴수 있을것 같았다. “고별”이란 무엇인가를 떠나보낸다는 말일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를 떠나보낼 때면 늘 이런 식을 하게 될것이니 “고별식”이란 역시 그렇게 가슴을 들먹일 필요는 없는것이요 첫 키스란 역시 간단한 “고별식”으로도 스쳐버릴수 있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둑놈아!” 하는 소리를 가슴 쩡하게 들으며 지려에게 끌려올 때의 흥분이나 공포 같은것이 우수경칩에 대동강 녹아내리듯 맹랑하게도 응이의 뜨거운 가슴속에서 사라지고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묘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컵을 들어 맥주 두어모금을 입에 쏟아넣으며 시까스르듯 말했다. “지려, 너 알지. 넌 나한텐 고마와해야 하는거야?” “엉? 건 또 무슨 얼어 죽을 론린데?” “당신을 도와 소녀에서 고별시켜준 그대! 고맙잖아.” “야, 이 짭새야, 누가 소녀와 고별했어? 너 남의 규수를 로처녀귀신 만들 일이라도 있냐? 꿈에라도 그런 소리를랑 말어라. 나 시집 못 가면 너 책임질라니?” “허, 시집은 가야겠는 모양이지?” “시집을 안 가면? 짜식, 총각귀신은 몽당귀신이라는데 처녀귀신은 크크크크… 미칠한 비자루귀신이라도 되려나?” 지려는 키득거리며 오른손을 쑥 내밀어 할퀴워서 뻘건 줄이 나있는 응이의 오른 볼을 뻑 쓸어주었다. 바로 그 뻘건 줄이 새삼스럽게 회억의 쪽문을 열어젖히는것이 이상하다고 응이는 생각했다. 그날 밤 잠들기전까지 그 뻘건 줄은 내내 응이의 사색을 삼뭉치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의 열여덟살은 과연 어떠했을가? 큰대자로 누운 응이는 은은하게 당겨오는 아래배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으로 지그시 아래배를 눌러보았다. 방광이 째지듯이 아파왔다. 전에 없던 일이였다. 저녁때 아버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소고기국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것이 탈이 난 모양이였다. 못 견디게 목이 타며 물이 당겨서 자리에 눕기전에 생수를 벌컥벌컥 몇 고뿌 들이켰던것이다. 딱 일어나기 싫었다. 응이는 잘 튀겨진 새우처럼 한껏 몸을 옹송그리고있다가 저려오는 아래배를 슬슬 문지르며 부시시 일어나 어정어정 침실문을 열었다. “어!” 응이는 잠간 선자리에 굳어졌다. 화장실에 전등이 켜져있었던것이다. 웬 일일가? 응이는 머리를 돌려 동쪽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는 새벽 1시 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참, 아버지가 화장실을 쓰고 깜빡해서 전등을 끄지 않은 모양이구나.) 응이는 주저없이 화장실문을 당겨 열었다. “앗!” 순간 응이는 새된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버지가 알몸으로 화장실 거울앞에 서있었던것이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간후 꼭 십년간 밥하고 빨래하고 돈 벌어들이던 그 거쿨진 손으로 뭔가를 꾹 거머쥐고 거울앞에 서있었다. “수… 수… 수으응아.” 아버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응이는 두눈을 꽉 감고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리며 “탕!” 소리나게 화장실문을 닫아버렸다.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나서 좀처럼 걸음이 되여주지 않았다. 응이는 허둥지둥 벽을 짚으며 용하게 침실을 찾아들어갔다. 가슴이 활랑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났다. 더 이상 생각을 굴리고싶지 않았다. 밤은 길기도 했다. “얌마, 응이 너 오늘은 좀 변태스럽다.” 지려의 손이 어느새 응이의 어깨우에 찰싹 떨어졌다. “짜식, 뭐가?” 응이는 웬 일이냐는듯 지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니야, 그럼?” “그게 뭔데.” 지려가 모니터에 뜬 남색으로 된 아이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두눈을 올롱하게 치떴다. “너 언제 그런데 관심이 생겼어?” “어떤데?” “파란 아이디에…” “오~ 아냐, 그저 그런게 있어.” “설마 너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버리는건 아니지?” “짜식, 너 날 뭘루 보구 떠벌이는거야? 떠벌이긴.” 응이는 악의없이 지려의 어깨를 툭 치며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지려가 역시 아니라는듯 응이를 뚫어지게 건너다보며 말했다. “그럼 아니냐? 다른 때는 나의 눈을 피해서 녀자애들을 꼬시느라 정신없더니만 오늘은 웬 일이야? 웬 남자사냥이냐구?” “남자사냥?” 응이가 되물으며 두눈을 커다랗게 뜬채 지려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시각 지려의 눈길은 뭔가를 알고싶어 죽겠다는듯 무시로 반짝이고있었다. 응이는 지려의 얼굴로부터 머리를 돌리고 모니터에 나타난 남색아이디들을 훑어보다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그런게 있어.” “어떤게?” “녀자애가, 자꾸 설레발을 떨래?” “설레발이라니? 거 무슨 뜻인지나 알구 써먹어? 난 지금 진지하단 말이야.” 지려가 응이옆에 바싹 다가앉으며 노려보고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한참이나 더 지켜보다가 서글프게 픽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나 지금부터 남자들을 연구해보려구.” “뭐? 너 끝내는 미쳤구나.” 지려가 발딱 일어섰다. “50대의 남자들을 연구해보려구 그런다.” “왜?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너 설마…” 지려가 자기의 무릎을 탁 치며 발딱 일어섰다. 세기의 말일이 도래했다면 그보다 더 놀랄가싶을 그런 표정이였다. 응이가 목소리를 낮추어 킥킥거렸다. “크크크크… 아가씨. 소설을 쓰지 마세요. 나 오늘부터 아버지와 친해질려구 그런다. 안되니? 아버지들을 알아야 친해질거 아니냐?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할거구. 됐어? 까불긴, 계집애가.” 응이는 50대방에 들어가 마우스로 모니터에 뜬 남색아이디들을 눌러 “안녕? ” 하고 인사를 보내며 지려를 까박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지려는 그러는 응이의 태도를 개의치 않고 응이의 옆에 한뽐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재밌네, 넌 참 미스터리하단 말이다. 왜 아버지를 연구하려고 했는데? 동기가 있을거 아니야? 말해봐. 내가 내심하게 들어줄거니까.” 응이는 필요이상으로 흥분하는 지려를 바라보며 (너도 필경은 녀자구나.) 하는 생각을 굴렸다. 고중에 입학하여 지려와 친해지던 이 몇달사이 지려는 사실 필요이상으로 기본에도 없는 웅성적인것을 나타내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런지 응이를 부르는 칭호도 항상 “얌마”가 아니면 “짜식”이였다. 그래서 응이는 지려라면 여느 애들처럼 그렇게 어지간한 일에 놀라거나 흥분을 하지 않을거라고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있는터였다. 하지만 아니였다. 응이는 “픽”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계집애들은 참. 뭐가 그렇게 궁금하니?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려구 그런다. 왜? 녀자만 심청이 되라는 법이 있냐? 내가 남자심청이 되자구 그런다. 됐냐?” “암튼 못 말린다니까. 너 진짜 소설을 쓰렴. 뭔가 될것 같은데. 근데 네가 연구하고싶은 남자들 부류는 어떤 부륜데.” “둔하긴,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면 되지. 50대 초반, 와이프가 한국 간지 10년! 됐냐?” “뭐야? 어머니가 한국 간지 10년이나 됐니? 그럼 그사이 넌 어떻게 살아왔는데?” “……” 응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간 입술을 씹었다. 얼굴에 한가닥 서글픔이 흐르고있는듯했다. 지려는 좀전의 흥분을 누르며 잠간 응이를 지켜보다가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싫으면 관두구. 암튼 남자 낚는데는 내가 전업대가 아니냐. 내가 금방 하나 낚아줄게.” 자신있다는듯 자기의 컴퓨터앞에 다가앉으며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는 지려의 목소리가 지려답게 명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지려를 바라보며 응이가 “흥!” 하고 코방귀를 뀌였다. “너의 아이디로 들어갔다가는 네가 먼저 낚일걸.” “뭐야? 사람 어떻게 보구.” “쳇, 채팅방을 몰라 그래? 남자와 녀자가 만나서 무슨 말들을 하는데? 아가씨, 또 무슨 고별식을 하지 않도록 자중하세요~” 응이가 지려를 보며 벌씬 웃을 때 “반갑습니다~” 하는 문자가 모니터에 떴다. 문자의 주인은 “영원한 신사”라는 아이디를 가진분이였다. “어, 한마리 물렸다.” 응이는 모니터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흥분한듯 소리치며 자판을 두드렸다. -네, 저도 반가와요. 선생님은 50댄가요? -그래요, 50대 초반이거든요. 근데 남성분이신가봐요??? “영원한 신사”가 물음표 세개를 달아서 날려보냈다. 응이의 얼굴에 알수 없는 웃음기가 짧게 피여올랐다. “봐, 싫다잖아? ‘나는 녀사님들을 기다리고있습니다.’ 하는 말이거든 저건.” 지려가 모니터를 손가락끝으로 톡톡 치면서 말했다. 그러건말건 응이는 잽싸게 자판을 두드렸다. -맞아요. 저 남자거든요. -남성분이라면 무슨 일로 저에게… -이러고보니 미안하네요. 선생님은 꼭 녀자들하고만 대화하나보죠?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수 있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환영이죠. 하지만 챗방에 와서는 이렇게 대놓고 남자들을 찾는 남성 대화상대가 적어서요. 제가 결례를 범했나요??? “영원한 신사”는 이번에도 물음표 세개를 달아서 날려보냈다. 응이는 그 물음표들이 마치도 큰 갈구리 같다고 생각되였다. 그 갈구리라면 대방의 무엇도 모두 걸어낼수 있다는 무언의 장담이나 되는듯이 생각되였다. 이렇게 자신있는 사람이라면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원하는 대화를 이어갈수 있을듯싶기도 했다. 응이는 더 뜸을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했다. -결례라면 제가 되려 미안하죠. 오늘 선생님의 시간을 좀 허비시켜야 할것 같은데요. -재밌네요. 마치도 어떤 인터뷰석상에 앉은 기분이네요. 대방이 어떤 화제를 던져올가 하는 궁금증? 아니면 대화에 대한 기대감이라 할가요?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필요이상으로 긴 웃음이 문자끝에 달려서 넘어왔다. 응이는 마치도 눈확에 주름이 얼기설기한 나그네의 석쉼한 웃음소리를 듣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웃음이 가슴 편하게 느껴지면서도 또 어딘가 누군가에게 자기의 유치함을 보인듯싶어서 기분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응이는 짐짓 무게를 넣어 문자를 꾸며보았다. -무언가에 대해 기대를 가진다는것은 참 좋은 일이죠. 저도 그런 기대감에 들떠있다구요. 선생님은 50대 초반의 남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50대 초반의 남자라면 대개 모두들 누군가의 아버지가 돼있겠죠? 잘 나가는 자식을 두었다면 대학생 아버지로 돼있을거구요. -행복하세요? 그들은 행복할가요? -네? 선생님은 년세가………… 역시 필요이상으로 이어지는 줄임표를 보면서 응이는 “웬 일이냐?” 하고 눈을 치뜨는 나그네의 형상을 그려보았다. 눈확에 주름이 쪼록쪼록할 아저씨가 녀자들처럼 올롱하게 눈을 치뜨는 모습이 꼭 렵기스러울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응이는 갑자기 “영원한 신사”를 골려주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크크크크… 년세까지는요. 아저씨, 저 올해 열두살이거든요. “얘는 미쳤구나, 미쳤어. 쯧쯧쯧…” 방금까지도 진지해서 자판을 두드리는 응이를 한참이나 지켜보고있던 지려가 깜짝 놀라며 응이의 허벅다리를 꼬집었다. -뭐야, 애들이 왜 이 시간에 pc방에 온거야. 너 오늘 학교를 땡땡이 쳤지? “맞아요, 땡땡이. 아저씨 이 자식 볼기짝을 쳐주세요.” 지려가 키득거리며 응이의 엉뎅이를 두드려댔다. “까불구있네. 그만해라.” 응이는 지려에게 눈을 흘기고는 진지하게 다시 시작했다. -아저씨, 미안해요. 롱담했어요. 저 올해 열여덟살이거든요. 학생이구요. 10년간 아버지의 손등을 씻어먹으면서 자랐어요. 오늘 문뜩 아버지를 알고싶어졌어요. -그래? 그 말이 진짜라면 감동이구나. 아버지를 알고싶다? -그래요. 아버지를 알고싶어요. 아저씨네 열여덟살은 어떠했어요? 약지로 자판을 눌러 문자를 띄워보내면서 응이는 잠간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저녁 아버지와의 대화가 머리속에 떠올라서였다. 대방에서 인차 문자가 날아왔다. -집체호라고 들어봤니? -네. 저의 아버지도 집체호에 갔었다고 했어요. -그럼 아버지에게서 많이 들었겠네. 그 시절 열여덟살의 이야기를. -전 불효자거든요. 아버지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여직 생각 못했어요. 자판을 두드리는 응이의 얼굴이 스스로 붉어졌다. -그럼 오늘 돌아가서 들려달라구 해라. -네? 응이는 순간 가슴이 꺽 막혀오는감을 느꼈다. 오늘 돌아가서 들어보라구? 과연 내가 오늘 아버지를 마주하고 아버지의 열여덟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를수 있을가? 생각하고싶지 않은 어제밤이 또 머리속에 찾아들었다. 응이는 창문으로 비쳐드는 괴괴한 초생달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굴려보았다. 하지만 응이에게서 아버지는 밥하고 빨래하고 몸에서 톱밥냄새를 풍기는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수 없는 아버지일뿐이였다. 아버지는 워낙 그런줄로만 알고있었다. 아버지는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하는줄로만 알고있었다. 그런것에 길들여진 응이였기에 지친 다리를 끌며 집에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고도 그렇게 덤덤할수가 있었고 그런것에 길들여진 응이였기에 어지러워진 옷도, 지어는 뭔가 묻어있는 팬티까지도 스스럼없이 벗어서 세탁기에 던져넣으며 “씻어줘요.” 하고 말할수가 있었다. 응이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쉼터였고 항구일뿐이였다. 동틀무렵에 깜빡 재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시계는 여섯시 반을 향해 달리고있었다. 지루하게도 긴 밤을 치렀지만 생물시계는 용하게도 기상시간을 기억하고있은 모양이였다. 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문을 밀어 열려다가 흠칫했다. (아버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있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 평소처럼 스스럼없이 아버지를 대할 자신이 좀처럼 서지 않았던것이다. 응이는 잠간 서서 궁리를 하다가 침실문손잡이를 놓고 돌아서서 옷장문을 열었다. 아버지 몰래 조용히 학교에 갈 생각이였다. 시간이 약이라고 아침만이라도 아버지 얼굴을 보지 않으면 덜 난처할것 같아서였다. 응이는 조용조용 옷을 찾아 입은후 책가방을 손에 들고 조용히 침실문을 밀었다. 객실이며 주방쪽이 너무도 조용해있었다. (웬 일일가?) 무겁게 느껴지는 고요가 부담스럽다고 생각되였다. 응이는 발볌발볌 주방쪽으로 다가가 목을 쑥 빼들어 주방안을 살펴보았다. 아버지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아버지는 주방에서 아침준비를 하고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주방의 밥상우에는 고추가루를 곱게 올려 볶아낸 두부반찬이 있었다. 한 접시가 그대로 있는것을 보아 아버지는 수저도 댄것 같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자 차마 그대로는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응이는 출입문가로 다가가며 아버지의 침실쪽에 대고 소리쳤다. “학교 갑니다.” 신을 다 신을 때까지도 대답이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침실이 아니라 화장실에 앉아서도 “알았다∼” 하고 한마디 던져줄 아버지였다. (웬 일일가?) 이상한 생각이 머리를 쳐드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응이는 아버지의 침실로 다가가 침실문을 밀었다. 침실도 비여있었다. 화장실에도 없었다. 아버지는 분명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침도 안 드시고 어디로 갔을가? 아직 출근시간이 안됐는데.) 응이는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의 행방을 찾지 않고는 시름을 놓을수가 없어서였다. 마침 핸드폰에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밥 먹어라. 먼저 간다.” 아버지가 보내온것이였다. 일단 “후—” 하고 안도의 숨이 새여나갔다. 응이는 몇 글자밖에 안되는 문자를 세번이나 읽었다. 거쿨진 손으로 문자를 때렸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웬지 목이 메고 코끝이 시큼해났다. 응이는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아버지의 얼굴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힘들고 지루한 하루를 용케도 마치고 응이는 하학하는 길에 곧추 pc방을 찾아들었다. 막연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뭔가를 찾아낼수 있을것만 같은 기대 비슷한 생각이 충동을 했던것이다. 응이가 금방 번호판을 받아들고 컴퓨터를 찾아 앉았을 때 지려가 pc방에 나타났다. “불여우 같은 계집애.” 하고 응이가 선수를 치자 지려도 “매너 없는 곰탱이.” 하며 응이의 옆에 찰싹 붙어앉았다. “얌마, 안해?” 지려가 응이의 어깨를 톡 쳤다. “엉?” 응이는 흠칫 놀라며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안하니?” “뭘?” “그 아저씨하구…” 지려가 손끝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바빠? “영원한 신사”로부터 어느새 문자가 날아와있었다. -아니요. 잠간 뭔가 생각을 굴리느라구요. -그래? 난 또… -근데 어쩌죠? 전 오늘 아버지에게서 열여덟살의 이야기를 들을것 같지 못한데요. -하긴 아버지도 아들앞에서 흘러간 그 이야기를 하고싶지는 않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이는 리해할수 없다는듯 물었다. -회억이란 즐거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으니까. 힘들었던 그 세월을 아들을 상대로 이야기한다는것, 어쩜 즐거운 일이 아닐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세요? -넌 소고기 몇점때문에 울어본적이 있니? -…… “무슨 뜻일가?” 응이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수 없어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놀구있네, 생뚱같이. 얌마, 있다구 해. 난 소탕을 먹기 싫어서 구정물통에 던져넣다가 엄마한테 엉뎅이를 맞아 운적이 있거든. 왜? 실감이 안 나? 크크크크…” 지려가 캐득거리며 손사래를 칠 때 모니터에 문자가 날아들었다. -내가 열여덟살에 집체호에 가서 이듬해 추석이였으니 열아홉살 나던 해였겠지. 생산대에서 추석이랍시고 소 한마리를 잡았거든. 인구가 3백명도 넘는 생산대에서 소 한마리라니 상상할수 있잖아. 한 사람당 고기 3냥씩 돌아갔단다. 그 주일 식사당번을 서는 녀자애는 손부리가 여물기로 소문난 애였거든. 두고두고 썰썰할 때 먹는다며 얼마 안되는 소고기를 세등분 냈어. 추석날 저녁에 그중 한등분을 삶았었는데 소가 장화를 신고 지나간 물 4촌이나 됐겠지. 긴긴 여름 고기냄새를 맡아보지 못한 우리들이였는지라 그날 소탕은 큰 유혹이였다. 고기 두어점씩 놓은 소탕을 큰 사발에 그득 담아들고는 얼마나 가슴이 부풀던지. 우리 남자애들은 옥수수쌀을 섞어 지은 밥을 사발에 넘쳐나게 말아서 먹기 시작했단다. 못사는 년이 고추가루 팔러 가면 바람질이라고 그 며칠 나는 감기때문에 코물을 훌쩍거리며 다녔었다. 뜨끈뜨끈한 소탕에 밥을 말아서 후룩후룩 먹어대는데 그놈의 코물이 어떻게나 흘러내리는지. 연신 코물을 훔치며 밥을 조겨주는데 그만 그 렴치 없는 코물이 소탕에 똘랑 떨어져 들어가는거다. 고기는 아까와서 얼마 먹지 않고 소탕에 만 밥만 먹고있었는데 코물이 떨어져 들어갔으니 사발에서 고기를 건져먹을수도 없는짓이고, 아쉬운대로 구정물통에 넣는수 밖에 없었지. 고기는 한점씩 헤여서 사발에 담았는지라 남은것이 있을리 만무하고, 멀건 국물을 다시 떠서 밥을 말아먹느라니 그때까지도 소고기를 입에 넣는 애들이 얼마나 밉고 부럽던지. 그날 밤따라 열이 나고 목이 마르고 해서 잠은 잘 안 오구, 던져버린 그 소고기 몇점이 눈앞에서 아롱아롱 춤을 춰대는것이… 저절로 눈물이 두르르 굴러떨어지더라. “크크크크… 이 나그네 웃긴다야. 그렇게 먹고싶었으면 코물 떨어진 소고기를 건져 먹지 그랬니? 이 나그네 아마두 식충인가봐. 소고기 몇점이 뭐라구 남자가 울기까지.” “영원한 신사”가 보내오는 문자를 도정신해서 읽어보던 지려가 갑자기 키득거리며 배를 끌어안았다. 여느때 같으면 뭐라고 몇마디 손벽을 쳐주었을 응이지만 웬지 그 시각만은 그럴 흥미가 없었다. “지려,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사뭇 정색해있는 응이의 얼굴이 놀음 같지 않아서였던지 지려가 혀를 홀랑 내밀며 한마디 했다. “아니, 그렇다는 얘기지 뭐. 너라면 울겠니?” “모르겠다.” “크크크크… 재밌다야, 그냥 옛말을 시켜라.” 지려가 응이의 손등을 쳤다. 응이는 못마땅한듯 지려를 흘겨보며 자판을 두드렸다. -아저씨,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요? -생각하기나름이지. 슬플 때 생각하면 슬프구 성공의 희열에 벅찰 때 생각하면 감동이구. 돌아보면 다 지나간 일이긴 하지만. 응이는 “영원한 신사”의 문자를 읽으면서 은은한 아픔이 느껴져오는듯싶었다. 응이는 잠간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을 놀렸다. -아저씨는 어느때가 더 많아요? -너의 아버지는 어떨 때가 더 많았니? -네? 응이는 또 한번 가슴을 흠칫하며 할 말을 잃었다. 지려가 못 참겠다는듯 자판을 자기앞에 당겨다가 두드려댔다. -리해가 안되네요. 소고기 몇점때문에 울지 말고 소를 가득 길러서 매일 잡아먹지 그랬어요? -크크크크, 너 역시 아직 어리구나. -네? 제가 어리다구요? 지려가 바람소리 쌩 나게 문자를 날리며 약이 오른 고양이처럼 쌕쌕 모두숨을 몰아쉬였다. -그래. 너희들이 아직 태여나지 않았던 그 세월에 우리 나라도 배고픈것이 젤로 무섭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때는 쌀들이 다 어디 갔었게요? 지금은 농민들은 쌀을 팔지 못해 아우성이구만. -글쎄다. 그 쌀들이 다 어디루 갔었는지… 배가 고프면 잠이 잘 안 온단다. 배에서 꼬륵꼬륵 소리가 나 잠을 못 이루는 밤이면 옆에 누운 친구를 깨우기 마련이지. 그러느라면 어느새 한칸에 자던 친구들이 모두 눈을 뜨구 합의가 맞는 애들은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는거다. 여름이면 농민들집 채소밭에 기여들어 오이며 가지며 닥치는대로 따서 먹구 겨울이면 하다못해 부엌에다 감자라도 집어넣어 익혀먹군 했더랬지. 그것도 없으면 김치움에 들어가 생무우를 꺼내다 무우추렴을 하든가, 그럴 때면 벽 저쪽에 자던 녀자애들도 솜옷을 우에 걸치고 슬금슬금 남자들 호실에 마실을 오는거다. 그런 날 밤이면 옛말잔치가 벌어지는데 이야기를 할라치면 시내에 두고 온 엄마가 그립구 아버지가 보고싶다구 녀자애들은 엉엉 울구. 그러면 남자애들도 보통은 눈굽에 손이 올라가거든. 언제면 시내로 돌아갈수 있을지. 정녕 부모들옆으로 돌아갈수는 있을지? 정말 한치 앞도 안 보이더라. 그때는 힘든 일에 몸이 힘들고 암담한 전도에 심신이 피로하고… -크크크크… 아저씨 소설을 쓰는거 아니예요? 녀자애들과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았다면서요, 함께 술두 마시구 노래도 부르구 춤도 추구 맘 맞는 애들끼리 서로 좋으면 련애도 하구. 부모들의 잔소리도 없는데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어요? -참 재밌는 애네. 그 세월 농촌을 벗어날수 있는 도경이라면 빈하중농들의 추천을 받아 군대에 가거나 공농병대학에 가거나 아니면 쌀에 뉘만치도 안되는 명액을 얻어서 시내에 로동자로 들어오는것뿐이였지. 그런 판국에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고 련애하면 빈하중농들의 추천을 받을수가 있었겠니? 죽기내기로 일하는 길밖에 없었지? -크크크크… 새파란 나이에 남자애 녀자애들이 벽을 사이 두고 련애도 못하면 어떻게 살아요? 그 말 누가 믿어요? “야, 너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응이가 문자를 날리려는 지려의 손을 잡았다. “왜, 재밌잖아? 그냥 듣자야.” “그래두 그렇지 아무 소리나 하겠니? 상대는 어른이야. 50 고개를 넘긴 선배라구.” “크크크크… 세상을 먼저 산 선배들의 무용담, 어떻니? 날아라.” 지려는 끝내 오른손 약지를 살짝 눌러 문자를 날려보냈다. 응이는 지려앞으로부터 자판을 활 나꿔채오며 볼 부은 소리를 했다. “그러는거 아니지. 오늘 저 아저씨의 정서가 슬플수도 있잖아. 적당히 하자, 응? 이 철 없는 아가씨야.” “온다, 온다.” 지려가 응이에게 혀를 홀랑 내밀어보이며 손끝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넌 상상할수 없다는거지? 그래.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놀랍지. 벽을 하나 사이 두고 녀자애들의 잠꼬대를 들으며 어떻게 그 시절을 지나왔던지가. 한번은 우리 남자애들이 내기를 했단다. -무슨 내기를요? 응이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여름날 아침에 일어나면 보통 집체호 마당앞의 빨래줄에 밤을 잔 빨래들이 걸려있었단다. 보통은 너무 씻어서 색바랜것들이구 또 진때가 잘 나가지 않아서 거무칙칙 꼴불견인것도 있었지. 그러다가도 가끔 옷가지들사이에 꽃부리팬티가 걸려있을 때도 있었지. 어느날 우리 남자애들 몇이 그 꽃부리팬티임자를 맞출 내기를 했단다. 지는 놈이 다음번에 석탄이 오면 굴에 퍼들이기로 약정하구. 맞춰봐. 결과가 어떠했을가? 기실은 누구도 못 맞췄단다. 애들마다 제 맘에 두고있는 녀자애의 팬티라는거다. 기실 그 팬티임자는 집체호 웃집 아주머니의 팬티였으니까. 얼마나 맹랑하던지. 허허허허허허허허허… “영원한 신사”는 또 긴 웃음을 끝에 달아보냈다. 응이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그 문자를 보면서 (정녕 이런 이야기도 저렇게 웃으면서 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며 자판을 때렸다. -아저씨는 지금 행복하신가봐요. 이렇게 통쾌하게 웃을수가 있으니 말이죠. -너의 아버지는 지금 행복해하고있는것 같니? “영원한 신사”가 보내온 문자를 읽으면서 응이는 손으로 자기의 넙적다리를 탁 하고 내리쳤다. 알고싶은 문제마다에 아버지를 거드는 신사가 미웠던것이다. 응이는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때려 문자를 날렸다. -아저씨는요? -50대는 불행한 사람들이란다. -왜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집체호라는 소택지에 빠져 몸도 마음도 그리고 파아란 소년도 힘든 세례를 받은것이 우리 50대거든. 배운게 없이 시내에 올라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으니 세상은 변했지. 아까 너 십년이나 아버지의 손등을 씻어먹었다고 했지? 안해가 없는 그 10년을 아버지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너 아니? 사람들은 40대를 인생의 두번째 사춘기라 하거든. 너의 아버지의 두번째 사춘기도 열여덟살 첫 사춘기때처럼 그렇게 힘들고 비참했을거다. 얘야, 너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려야 한다. 그게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길일것이다. -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구요? 응이는 뽀얀 운무속에 가려진듯한 “영원한 신사”의 묘한 글을 읽으며 또 한번 오리무중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뭔가 잡을듯하면서도 또 그것을 잡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힘이 작은듯한 느낌이였던것이다. 응이는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속으로 외워보았다. “아싸… 걸렸다.” 갑자기 지려가 신명나서 소리쳤다. 응이는 깜짝 놀라며 지려쪽에 머리를 돌렸다. 지려가 득의양양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얌마, 이 짭새가 날 보구 밥 사준단다. 이걸 어떻게 차놓을가?” “그만하자. 지려야, 날이 저물었거든.” 응이는 흥미 없다는듯 지려에게 한마디 하며 “아저씨, 대화 감사했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날렸다. “왜? 재밌잖아? 잠간 데리구 놀다가 뻥 차버리는 멋!” “엄마가 기다려요. 아가씨, 집에 가자 응?” 응이는 모니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려도 아쉽다는듯 컴퓨터를 돌아보며 못마땅한듯 응이를 따라 일어섰다. 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깃들어있었다. (벌써 어두워졌나?) 응이는 낮이 참 짧다고 생각되였다. “집에 갈래?” 밖에 나서자 지려가 물었다. “그럼 집에 가야지. 넌 또 어디로 가고싶은데?” “아냐, 집에 가야지. 반기는 사람은 없지만.” 지려도 언제 까불었냐는듯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어둠이 지려에게 시름을 얹어주는가보다고 생각하며 응이가 물었다. “반기는 사람이 없다니? 지금쯤이면 할머니께서 ‘왜 오늘두 이렇게 늦냐?’ 하며 층계를 내려와 기다릴텐데.” “그래, 할머니가 불쌍해서라도 집에 들어가야겠다.” 지려의 목소리는 흐려있었다. 응이는 그러는 지려를 돌아보고는 기분 나쁜 대화를 더 하고싶지 않다는듯 낮은 목소리로 “그만하자.” 하고 한마디 하고는 앞에서 씨엉씨엉 걸어갔다. “랠 만나.” 지려가 뒤에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시각 지려의 목소리가 참 처량하게 들렸다. 그렇게 소탈하게 살려고 애쓰는 지려도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시는 집으로 들어가는 이 시간만큼은 두렵고 부담스러운 모양이였다. 응이는 돌아보지 않고 뒤에 대고 손만 흔들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지금쯤 뭘 하고계실가?)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던 “영원한 신사”의 문자가 또 머리속을 헤집어 기분이 착잡해났다. (내가 50대 초반의 남자를 알겠다고 채팅방에서 사이버세계를 헤집고 다닐 때 아버지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셨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치자 아버지도 오늘 꼭 일손이 잡히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소처럼 아버지를 대하자. 어제밤에 있었던 일때문에 아버지께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하자.) 아빠트앞에 도착해보니 다행히도 집에는 전등이 켜져있었다. 응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응이는 1층 슈퍼마케트에 들어가 맥주 세병을 사들고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술을 부어드리면서 “오늘도 수고했습니다.” 하고 너스레라도 떨고싶어서였다. 비록 전에 없는 행동이여서 아버지가 좀 어색하게 생각은 하겠지만 맥주가 두어병 속에 들어가면 모든것이 편해질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밖으로 전등불빛이 새여나오던 집인데 출입문은 잠겨진대로 있었다. 응이는 일부러 주먹으로 문을 탕탕 두드려댔다. 아버지가 달려나올 시간이 지났건만 집안은 조용한대로 있었다. (못 들으셨나?) 응이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역시 집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하네! 혹시 잠이라도 드셨나?) 응이는 생각을 굴리며 옆구리에서 열쇠뭉치를 꺼내 자물쇠구멍에 꽂았다. 객실엔 전등이 켜진대로 있었고 문가에는 아버지의 구두가 놓여져있었다. 응이는 신을 벗자 바람으로 주방쪽에 머리를 기웃거려보았다. 주방에도 전등만 켜져있었다. 응이는 주방에서 나와 아버지의 침실로 다가갔다. 침실문은 닫긴대로 있었다. 응이는 조용히 침실문을 밀어 열었다. 아버지는 침실바닥에 쓰러져있었고 옆에는 술병 하나와 김치사발이 댕그러니 놓여져있었다. (혼자서 술을 마셨나?) 응이는 이상한 생각을 굴리며 술병을 주어들었다. 병은 이미 굽이 나있었다. “조양왕?” 응이는 상표에 눈길을 주었다. 집에서 본적이 없는 술병인것으로 보아 올라올 때 사들고 온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혼자서 흰 술 한병을 다 마신것이 아닌가? 응이는 아버지의 주량을 알고있었다. 혹시 친척집 군일에라도 가서 흰 술 서너냥을 마시면 얼굴이 새빨개나서 몹시 힘들어하군 했던것이다. 그러던 아버지가 김치쪼박에 흰 술 한병을 다 마셨으니 아버지의 상태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 같았다. 순간 응이는 아버지를 푹 쉬게 하고싶었다. 응이는 빈 술병과 김치사발을 주어 주방으로 가져간후 베개를 내리워 아버지의 머리에 베여드렸다. 아버지는 두어번 손을 흔들며 뭐라고 입속으로 우물우물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한껏 몸을 옹송그렸다. 응이는 이불을 내리워 옹송그린 아버지의 몸에 덮어드리고는 불을 끄고 침실문을 닫았다. 응이는 객실로 나와 쏘파에 쪼크리고 앉았다. 현관등만 켜놓은 집안에서는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응이는 그 괴적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두손으로 턱을 받쳐들었다. 이때 갑자기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었다. 응이는 와뜰 놀라며 튕겨일어났다. “따르릉따르릉~” 전화벨이 련속 울어댔다. 전화기의 번호판을 여겨보니 외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머니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쳤다. 응이는 수화기를 거머쥐기 바쁘게 소리쳤다. “어머니, 맞죠? ” “응이니!” “어머니.” 응이는 절절하게 어머니만 불러댔다. 응이의 다급한 반응에 놀랐는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섭게 떨리고있었다. “응이야,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어머니, 돌아오세요. 네? 어머니. 돌아오세요. 어머니는 돌아와야 해요.” “응이야, 도대체 웬 일이냐? 낮에는 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서 다짜고짜 들어오라구 그러더니, 너도 두마디 안짝에 돌아오라구 그러니? 말해봐라,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니?” “어머니, 제발 빌어요. 돌아오세요. 네? 어머니. 인젠 돌아올 때가 됐잖아요?” 어느새 응이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묻어있었다. 그러건말건 어머니가 전화 저쪽에서 소리치고있었다. “다 큰 사내애가 울기는. 말해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니? 돌아오라면 당금 돌아갈수 있는줄 아니? 나도 여기서 많은 일들을 벌여논게 있어서 당분간 돌아갈수 없구나. 그리구 돌아가서는 어떻게 하겠니? 10년간 쌓아놓은 공적이 다 이곳에 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수 있겠니? 안된다. 못 돌아간다. 나는 못 돌아간다.” “못 돌아오면 어떻게 해요? 우리 집은 어떻게 하구 아버지는 어떻게 해요?” “10년이나 이렇게 잘 견뎌오지 않았니? 차라리 네가 한국에 나오너라. 여기서 고중공부를 하구 여기 대학에 들어가거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츰 리성을 찾아가고있었다. 응이도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정말 집에 돌아오지 못하겠다는거예요? 정말 그런 말씀인가요?” “영 못 간다는것은 아니구, 당분간은 안된다는 말이지. 어머니도 여기서 힘들거든. 하루도 너의 생각을 안하는 날이 있는줄 아니?” “그런데 왜 못 돌아와요? 아버지를 버리고 저를 혼자 한국에 오라구요?” 응이의 목소리는 저도 몰래 날이 서갔다. “그럼 어쩌겠니? 엄마는 한국에 일자리가 있구 아버지는 중국에 자신의 생활이 있는것을. 낮에 아버지와 이야기가 통했다. 나는 돌아갈수 없으니 동의되면 너의 한국수속을 시작하라구 말이다.” “참으로 감사하네요. 하지만 저 한국으로는 안 갈거예요.” 응이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어머니는 어떻게 아버지를 집에 두고 나를 한국에 데려갈 궁리를 했을가? 나까지 한국으로 간다면 아버지에게는 무엇이 남는걸가?) “영원한 신사”와 나누던 이야기들이 귀전을 스쳤다.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리라던 “영원한 신사”의 이야기가 귀전을 스쳤다. (정녕 어떻게 해야 아버지에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드렸다고 할수 있을가? 아버지는 스스로 아버지 자신을 버리고있는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있는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없다면 아버지는 자기 스스로를 찾으려고 하시지 않을가? 나에게 쏟던 정성을 자기 스스로에게 쏟지 않을가…) 순간 응이는 아버지를 보고싶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한껏 몸을 옹송그린채 잠들어있었다. 연신 “푸푸~” 하고 입바람을 불 때마다 입가에 흘러내린 느침이 파르르 떨리고있었다. 응이는 손으로 아버지의 입가에 흘러내린 느침을 닦아주며 이윽토록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이 순간만이라도 아버지를 편하게 쉬게 하고싶었다. 응이는 아버지를 침대우에 올려 눕히려고 허리를 굽혀 아버지를 안았다. 한숨에 건뜻 들렸다. 키가 한메터 칠십을 넘기는 아버지가 이렇게 가벼울줄은 정말 생각밖이였다. 응이는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수 없었다. 사실 이제까지 응이는 아버지를 산으로 알고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아버지가 받쳐주고 홍수가 오면 아버지가 막아줄것이라고 든든하게 믿고있었다. 그래서 괜히 아버지에게 밥투정도 부리고 옷투정도 부리군 했었다. 그래서 어제밤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버지를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냥 그러려니만 생각했던것이다. (아버지는 52년 세월속에서 과연 자신을 위한 인생을 몇년이나 살아오셨을가? 아버지도 열여덟살에 집체호로 나갔다니 역시 그 아저씨처럼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하여 고민했을거고 항상 배를 곯으며 허기를 느꼈을거고 벽 하나를 사이 두고 들려오는 녀자애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힘겨운 밤들을 보냈었겠지? 가정을 이루고는 또 이렇게 나를 돌보느라 10년세월을 덧없이 흘려보내고있구나.) 응이는 아버지를 침대우에 곱게 눕힌후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바지를 벗겨드렸다. 앙상한 아래도리를 감싼 꽃부리팬티밑으로 뭔가가가늘게 꿈틀거리는것이 보여왔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푸하푸하~” 입김을 불며 단잠에 빠져있었다. 응이는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드린후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래, 나도 인젠 자립을 할수 있는 나이다. 아버지곁을 떠나는거야. 넓디넓은 이 땅우에 내가 살아갈수 있는 땅이 없을가? 하지만 한국에는 안 갈거야. 아버지와 한하늘아래에서 아버지의 행복을 지켜보면서 살거야.) 응이는 아버지에게 자기의 생각을 적어내려갔다. 꽉 막혀서 터져버릴것 같던 가슴이 펑 뚫리는듯싶었다… “덜커덩덜커덩…” 레루를 씹어삼키는 둔중한 기차바퀴소리가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불안하게 들린다. (래일아침 나를 기다리는것은 구경 어떤 풍경일가? 이 밤이 새고나서 내가 정착해있을 항구는 과연 어디일가?) 응이는 천근같이 무거워지는 두눈을 스르르 감았다. 머리속 한구석으로부터 갑자기 천길나락으로 떨어져들어가는듯한 막연함이 덮쳐들면서 말 못할 피곤이 몰려들었다. 10년전 어머니를 싣고 가던 비행기 옆구리에서 보았던 빨간 타원형포스터가 클로즈업되여 눈앞에 나타났다. 응이는 그 빨간것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빵!” 하고 터져버릴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1    책머리에 댓글:  조회:846  추천:0  2012-04-24
    책머리에 저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작은애는 올해 열살, 아직까지는 보고싶은 그림영화를 마음대로 보면 좋아하고 먹고싶은 새우깡을 마음대로 먹으면 좋아하고 하고싶지 않은 숙제를 빼먹어도 욕을 먹지 않으면 만족해하는 때묻지 아니한 순진한 개구쟁이입니다. 하지만 올해 열아홉살에 나는 큰애는 아닙니다. 남들이 사춘기를 앓느라 힘들어하는 열대여섯살 때까지만 해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학교생활을 착실하게 해서 우리 부부는 “저 애에게는 사춘기가 없는 모양”이라고 롱담을 하며 시름을 놓았더랬습니다. 헌데 지난해 중점고중에 붙은 다음부터 차츰 신상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초중때까지만 해도 부모들이 머리를 감았냐고 물어야 겨우 뜨거운 물을 찾던 애가 요즘은 날마다 머리를 감고야 학교에 가고 남들이 간다면 우스워하던 pc방에도 몰래 다니는 눈치입니다. 전에는 교과서공부밖에 모르던 애가 요즘은 부모들 몰래 서점에 다니며 공포나 련정에 관한 자극적인 책을 사다가 밤도와 읽군 합니다. 다른 애들보다는 좀 늦게 온 사춘기지만 필경 내 아들도 사춘기를 앓는것이였습니다. 그래도 로골적으로 문제를 만들지 않고 반항적으로 부모들과 엇서는 일이 없어서 한시름은 놓이지만 날로 변해가는 아이의 신상변화를 읽으며 과연 우리 아들은 별고없이 사춘기를 넘길수 있을가가 무척 근심스럽습니다. 직업적인 민감성이라 할가,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묵묵히 아들의 모든것을 살폈고 진정 오늘의 소년소녀들은 어떻게 사춘기를 넘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여 인터넷에 올라 사춘기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고 여러가지 아이디로 소년소녀들과 채팅도 했으며 인터넷에 싸이를 만들어놓고 아들 친구들과 1촌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아동문학작가의 작은 공간”이라는 부제를 달고 “소년소녀들”이라는 블로그를 개설하여 사춘기를 겪는 소년소녀들과 대화도 시도했습니다. 그러한 공간을 통하여 저는 오늘을 살고있는 소년소녀들의 희로애락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수 있었습니다. 따져보면 우리는 소년소녀들을 교정안에 있는 부류와 교정밖에 있는 부류로 나눌수 있습니다. 하다면 교정안에 있는 친구들이 행복할가요? 아니면 교정밖에 있는 친구들이 행복할가요? 어느 정도 오늘의 소년소녀들을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그 생각 자체가 천진하다고 느껴질것입니다. 교정안에 있는 친구들은 응시교육의 멍에에 눌리워 성적순으로부터 오는 압력에 숨도 바로 쉴수 없어하고 교정밖에 있는 친구들은 암담한 자기의 미래로부터 오는 불안때문에 방황을 하고있습니다. 사춘기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어할 나이에 우리 조선족소년소녀들은 또 새로운 민족대이동으로부터 오는 부모들과의 리별, 부모들의 불화로부터 오는 가정의 파탄 등 원인으로 하여 이중, 삼중의 성장통을 겪고있습니다. “운무의 저쪽”에서 성적순때문에 고민하는 봉이의 형상, “아직은 초순이야”에서 자기만의 개성적인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려다가 불량아로 점찍혀 방황하는 웅진이의 형상 그리고 “노란것”에서 알콜중독이 된 아버지와의 갈등때문에 힘들어하는 령이의 형상 등은 정말 누구라도 머리를 돌리면 볼수 있는 이웃집 소년소녀의 형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거나 보고서도 그냥 스쳐버린 형상들이 많을것입니다. 정말 “아이들을 구하라!”고 호소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조선족청소년들을 위한 아동문학작가라고 자부하는 저로서는 방황하고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의무감 같은것을 느꼈습니다. 큰일은 할수 없지만 오늘날 청소년들의 진실한 형상을 세상앞에 보여주고 대중들로부터 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불러낼수 있다면 그 이상 더 바랄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나이 올해 마흔다섯, 소년소녀들과 몇 세대를 사이 두고있지만 아직도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 하고싶습니다. 그들과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춘기라는 인생의 보리고개를 넘는 소년소녀들의 지팽이로 되고싶은 마음입니다. 2009년 5월 4일 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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