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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겁쟁이
해님이 나와야만 따라나오지요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날은
집에서 나오지 않고
캄캄한 밤에는 저 혼자 자나봐요
오래전에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면서 베끼게 했던 한국동시이다. 아이들은 시의를 인차 터득하였지만 더 알고싶어 꼬치꼬치 캐여물었다. 막무가내로 그림자에 대해 많이 아는체 횡설수설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림자를 음영(阴影)이라 하는데 빛을 등져서 어두워진 부분을 그늘(음ㅡ阴)이라 하고 그 물체때문에 다른 물체우에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그림자(영ㅡ影)라고 한다.
그늘(음) 빛의 강약이나 물체면의 상태, 반사광 등에 따라 미묘한 변화가 생긴 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어 그늘이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림자가 곧 그늘이지만 나무의 그림자는 보통 그늘이라 하는데 사람의 그림자는 그늘이라 하지 않는다. 그때는 대충 말해주었지만 오래 살아가면서 그림자ㅡ그늘은 모종 의미에서 미학일지 인생철학일지 나로서는 단언할수 없어 생각의 그림자가 되여졌다.
무더운 여름날, 정신이 아찔해나도록 자동차행렬이 마라손경기를 하는 큰 거리 변두리를 찾아 스적스적 걷다가 길섶에 작은 가로수 그늘아래 땀들이면 그도 행복한 시간이다. 머리만 겨우 가리울 그늘이라도 소중히 여기면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나무그늘은 등급관념이 없기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 그늘밑에 잠간 한가해진 틈새로 생겨나는 사색의 오솔길을 더듬으며 그늘에 대한 소박한 감상속에 치밀하지는 않지만 현학적인 묵상을 삶의 여백에 적어보는 고마운 그늘, 오뉴월 염천에 그늘을 마다할 사람이 없듯이 마냥 반가운 존재이다.
불볕으로 내리지지는 한낮의 땡볕아래 화단의 작은 꽃들은 자신의 목마름만을 올인하는 동안 강뚝에 백양나무들이나 길섶에 흙먼지를 들쓰고 예이제 말없이 서있는 가로수들은 그늘을 펼쳐놓고 걸음 지친 나그네에게 “잠간 들어와서 쉬였다 가시오” 하고 말하는듯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날개짓에 지친 참새들을 품어안는다.
나란히 선 나무들과 그림자 크기를 다투지 않고 묵결로 더 큰 그늘을 마련하며 쨍쨍하기만 하던 태양이 차차 초점을 잃어가는 석양녘까지 왼심을 쓴다. 낮새들은 어둠속에서는 노래하지 않는다는것을 깨달으며 말없이 놓아주는 나무그늘,우리는 살아가면서 불볕아래 허덕이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나무그늘처럼 누구를 품어주는 고마운 존재가 되여진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에 그늘이 진다는 말처럼 이런 그림자는 눈에 보이는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혹자는 그림자란 바로 자기라고 하고 혹자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하며 혹자는 나의 철천지 원쑤라고 하고 그림자는 악마라고도 한다. 식영(息影)이란 글을 본적이 있는데 직역하면 그림자도 쉰다는 뜻으로서 왜 그리 정했는지 까닭을 적은 글이 식영정기(息影亭記)이다.그 일부를 아래에 인용한다.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사람이 빨리 달아나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달아나면 천천히 쫓아오면서 끝끝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다급하여 나무그늘아래로 달아났더니 그제야 그림자가 사라졌다…그림자는 언제나 그 본형(本形)을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장대기가 곧으면 그림자도 곧다. 사람이 이 세상에 처신하는것도 이 리치와 똑같다. 옛말에 꿈에 본 환상과 물에 비친 그림자가 참으로 허망하다 하였는데 정말 덧없고 무상한것이 인생이다.
그림자가 천번 변한것은 본형(本形)의 처분에 달려있고 사람이 천번 변한것도 또한 조물주의 처분에 달려있으므로 사람은 마땅히 조물주가 시키는대로 따를뿐이다. 아침의 부자가 저녁에는 가난하고 옛적에 귀한 사람이라도 지금은 천한것은 다 조물주의조화로 되는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지 아니한가.
예전에는 높은 관을 쓰고 큰 띠를 두르고 조정에 출입하다가 지금은 대나무지팽이와 짚신으로 유유자적하고있지 아니한가. 오미(五味)의 맛있는 음식을 다 버리고 한바가지 물과 하나의 도시락을 달게 여기지 않는가....내가 바라는것은 조물주와 더불어 대지우에 놀며 그림자마저 없도록 하여 사람이 바라보고 손으로 가리킬수도 없게 하고자 함이다. 그런즉 정자이름을 식영(息影)이라 함이 어떠할가.”(략)
물리적인 그림자는 잠시 제쳐놓고 별종으로서의 그림자는 일종 의념 혹은 일종 사유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것이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면 무엇이 되고 아울러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면서 당신을 바싹 따라다닌다. 당신이 쓰러지는 때에야 그림자도 쓰러진다. 그림자에서 가장 기특한것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 일편단심이다. 해나 달을 등지고 걸으면 앞에서 우쭐거리며 걷고 해달을 마주하고 걸으면 뒤를 졸졸 묻어다닌다. 촌보도 떨어질세라 바싹 따른다. 종래로 말이 없이 곧으면 곧은대로, 기울어지면 기운대로, 절뚝거리면 절뚝거리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서있는 곳에 그늘이 진다면 어디선가 빛이 비추기때문일것이다. 빛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머리우를 비추고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상식이긴 하지만 빛이 없다면 그림자 ㅡ그늘이 없고 그늘 ㅡ 그림자가 없다면 빛이 없다는 표징이다. 세상은 항상 빛이 되라고 하지 그림자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는 신학적인 말이 있지만 사람은 항상 빛이 되기는 어렵거니와 그늘이 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늘은 빛의 다른 모습일뿐이다. 빛과 그늘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고 공존하고있음에도 늘 추운 계절이면 볕이 잘 드는 쪽을 택하려 하고 더우면 그늘을 찾아드는게 인간상정이다.엄동설한속에 뜨거운 태양을 그리워하고 어둠속에서 모대기기에 빛을 갈망한다. 빛을 밝히는 일은 음침한 절반의 그림자를 전제로 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빛을 안고 서면 등뒤에 그늘이 지듯 우리의 삶은 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바장인다.
우리들의 정신세계에는 빛이 없어도 의연히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다. 그런 그림자란 도대체 무엇인가? 빛은 언제나 희망과 꿈을 기약하지만 낮과 밤이 교차하듯 희망은 절망으로, 꿈은 현실로 뒤바뀌기도 하지만 어둠을 향해 빛을 등진다면 삶은 어두울수밖에 없다. 생각은 이 빛과 경계를 가늠하는 힘이 되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의가 아니게 그림자군(影子群)밑에서 살게 된다.
어려서는 부모의 그림자밑에서, 어른이 되면 상급의 그림자밑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그림자곁에서 살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자기의 그림자에 쫓기며 산다. 우리가 만약 노상 밝음속에서만 살려 한다 해도 그림자를 의식할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에 대한 그림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림자 ㅡ 그늘의 미학은 그렇게 인생철학이 되기도 하는것이다. 그림자는 곧 내 자신이니까.
그림자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허상이면서도 무와 유의 경계선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무는 만물의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날마다 빈것에서 출발하여 빛을 채워간다면 그것은 인생을 사는 지혜를 터득한것이다. 달리 말하면 빛과 흑암이 교체되고 겹쳐지는 그림자세상에서 저마다 실상이면서도 허상인 자기를 가꾸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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