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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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이미지
2015년 04월 07일 22시 07분  조회:5447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지식인의 이미지
                     
 
   인테리겐챠란 멋스러운 말이 한때 류행되였는데 로어에서 따온 지식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지식인》이란 말도 기실 외래어에 어원을 두고있다.
   로마제국이 현대문전에 오기까지는 도덕의 도사와 인류사회에 대한 비판자의 배역을 교사(教士)들이 감당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그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일부 문인들이 미봉했는데 례하면 루쏘나 볼떼르같은 사람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의 출현과 더불어《지식인(infellectuai》이란 단어가 창출되였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범사(凡事)에 자기 량심과 리성을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방의 사인(士人) 이였으며 사회의 량심, 도의의 체현자들이였다.
   미국의 한 학자는 자기의 저서《지식인》에서 세인들이 익숙히 알고있는 루쏘,맑스, 입센, 싸르트 등을 지식인으로 꼽았다. 라쎌과 싸르트르는 철학자였고 입센과 똘쓰또이는 작가였다. 그들이 지식인으로 지칭된것은 지식이 과인하여서라기보다 지식을 무기로 사회의 불공평과 인성의 추악성을 폭로하였기때문이다. 이런 의의상에서 문인 혹은 전업인원과 지식인은 절대적인 구별이 있는것이다. 졸라는 원래 문인이였 지만 프랑스사법제도와 유태인을 배척하는 사조를 공격한 이후 지식인의 행렬에 들어섰다. 현대의 표준에서 중국에서는 로신선생을 으뜸으로 추대해야 할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문인과 사인(士人)을 같게 보지 않았다. 문인은 전업인원을 말하였고 사인(사대부)은 도의 짊어진자를 가리켰다. 문인은 꼭 무덕한자는 아니였지만 흔히 자기 한몸의 선(善)만을 꾀하였다. 그러나 사인은 자기의 량심과 리성으로 천하를 구제하려했다.  24사의《렬전》에서는 문원(文苑)과 유림(儒林)을 갈라놓았다. 유림은《문원》에 들고 벼슬을 하지 않은 사인은《유림》에 들었다.《청사렬전》에 원목(袁牧)은《문원》에 들고《천하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절창을 내놓은 고염무(顾炎武)는《유림》에 들었다.
   전업인사의 표준은 오직 지식(혹은 기능)이고 지식인을 판정하는 표준은 지식, 사회량심, 그것을 표달하는 용기 이 세가지이다. 여기서 지식인의 본질적특징이 규정 되는바 곧 무슨 일을 해내는것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시비를 의거로 무릇 옳은것은 끝까지 해내고 그른 일은 절대하지 않는바 어떠한 정황에서든지 시종일관하게 이 원 칙을 지킨다. 여기에는 중국의 인구리론전문가 마인초선생이 귀감이 돨수 있다.
   현재 대학졸업생, 석사, 박사,교수, 원사들을 지식인이라 하는데 일반적의의상에 서의 아호(雅号)일뿐 과학적의미에서의 지식인과 구별이 있다. 왜그런가? 엄격한 의미에서《지(知)》와 식(识)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합성어로서 변증법적관계를 가지고있다.《지》는 정보와 문화의 루적이고《식》은 곧 신념, 사유, 인격, 의지 등 요소를 내포하고있다.《지》는《식》의 전제이고《식》은《지》의 승화이다.《지》는 많은 배움을 말하고《식》은 높은 재능을 가리킨다.《지》의 래원이 만권책을 독파하는데 있다면《식》도 만리길을 걷는데 래원이 있다.
   그런데 자고로 중국의 지식인들은《지》를 중시하고《식》을 홀시하였기에《지》 는 있으되《식》은 결여되였다. 그리하여 범진이나 공을기 같은 고리삭은 선비들은 숱해 나왔는데 그들로 말하면《지인》일뿐《식인》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봉건시대에 는 문인들속에 수재를 인재라고 했다. 기실 글을 많이 읽었다 해서 다 인재가 된것은 아니였다.
   인재의 함의는 뭐냐? 인재는《인과 재》의 원만한 결합을 의미한다.《인》은 곧 도덕과 정신을 말하고《재》는《인》의 연장이다. 만약 인재를 한그루의 나무에 비한 다면《인》은 뿌리이고《재》는 가지라 할수 있다.《인》과《재》는 물과 소금처럼 융화도여있는바 우선 사람으로 되는 가운데서《재》가 형성되고 인재로 되는 과정에서 사람으로 된다. 명실상부한 지식인들은 그 민족의 중추신경이고 그 시대, 그 사회 의 중견들로서 국경을 초월한 전 인류적인 사회재부이다.
   그러나 고금동서의 력사는 지식인을 너무나 혹독하게 우롱하였다. 어느 사학가가 구중국의 력사는 제왕과 수재의 력사라고 개괄하였는데 어디까지나 벼슬한자는 인재이고 그렇지 못한자는 인재가 아니라는 관본위(官本位)의 사상관념에서 출발한 불가지론이다. 따지고보면 구중국의 지식인들은 정권이라는 소가죽우의 털의 신세였다. 미관말직(微官末职)한자리 못가져보고 원혼이 된 천하기재는 또 얼마였던가? 성인 공자, 시선 리백,시성 두보도 다 일생이 여의치 못했고 도연명이나 소동파 같은 대문인도 은거생애를 마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반만년 문화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사회정수들은 우선 경제압력을 모면하려고 전전긍긍해왔지만 분서갱유(焚书坑儒)로부터 발단하여 건륭의 문자옥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정치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현대에 와서도 언론자유가 없거니와《빵》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자유와《빵》,량자중에서 어느것이 더 소중한가를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빵》에 먼저 매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또 《빵》은 제능력으로 바꿔와야지 빌어가져서는 안된다는것을 알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선택된 자들은 제왕의 은총을 입어 진충보국(尽忠报国)하는 영광을 지녔으되 언제 목이 날아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명철보신하였다. 물론 해서같은 강직하고 대바른 명관들이 있었으나 그 운명은 비참하였다. 이렇게 루루천년을 내려온 인격력량 의 선천성부족과 후천적심리실조는 자질이 낮은 약자대오를 형성하였고 그 치명적인 약점을 현대문인들에게 유전시켰다.
   옛날 선비들은 딱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청운의 뜻을 이루려고 주림을 달래가며 들보에 상투를 달아매거나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학문을 닦아《지식인》성공 은 뜬구름이였고 행운은 달에 걸려있었다. 수염이 허옇게 세도록 고심참담하게 경영하였던 학업이 풀이슬로 사라지기가 비일비재였으니 그 소침하고 울적한 정서에 뒤따 른것은 염세뿐이였다.
   따라서 할일이 없다는것은 실락한 력대문인들의 가장 좋은 핑게가 되였고 억눌린 인격가치와 자존에 대한 자기위안이 되였다. 비틀어진 그들의 사회지위는 력사가 빚어놓은것이였건만 그래도 사회중임은 문인들이 짊어져야 했으니 숙명인가, 이률배바인가?
문인들에게 있어서 골기와 지조는 담량과 식(识)의 문제였다. 문인이 지조와 기개를 잃는것은 그들 자신의 비애이고 지조높고 덕망있는 지식인을 진정으로 용납하지 않은것은 그 시대의 비극이였다. 이렇듯 지식인들에게 가장 수요된것은 자유도(自由度)였다. 그 자유도는 공간속에 육체의 행동자유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심리세계의 자유 특히는 사상의 자유도인것이다.
   옛날은 암흑한 봉건사회여서 그렇다치고 문명의 시대에는 왜 그런 비극이 지속되 였던가? 우리 중국의 경우 건국이래 련이어 일어난 정치운동은 매번 지식인들을 《운동원》으로 내세웠고 지식과 과학은 정치와 권력행사의 희생품이 되였다. 호풍에 대한 탄압, 마인초의 투옥, 그리고 수천수만의《우파》들이 그 례이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1950년대중기까지는 지식인을 존중하면서도 일면 경계하였고 1957년 이후에는 개조대상으로 전락시켰으며 1960년 후반기부터 10여년은 철저한 독재대상으로 되여《고린내나는 아홉째》로 불리웠다. 유물주의가 가장 제창되던 시 대에 유심주의가 가장 심하게 범람했던 아이러니컬한 인문환경에서《지식이 많을수록 반동》이라는 황당무계한 론조가 지식인을 다스리는《상방보검》이 되였으니 자률인가 타률인가? 아무튼 지식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렴가인 정신로 동자로 전락되였다.
   지식인은 무상로동과 정신산품의 로동자ㅡ필수적인 생산력이라는것을 몰라서가 아니였다. 한 개인의 로동가치가 그 개인의 존재, 사회지위, 사회신분의 반영임을 알면서도 압살해버린것이다. 하여 문화대혁명시기 지식의 가치는 령이 되였고 그후 10 년은 마이나너스였으며 새 시기에 진입해서야 비로소 정수로 되였다.그러나 력사시대 가 남긴 후유증은 현시대 지식인들에게도 고질로 되였다. 이런 병태는 상품경제시대의 도래와 함께 여지없이 표현화되였다.
   개혁의 춘풍은 이들에게 새명충동과 활력대신 심리혼란과 자기쇠락의 경향을 초래시켰다. 그도그럴것이, 오래동안 조롱속에 갇혔던 새가 자유의문을 열어주어도 창공에 날아오른지 못하듯이 당시 중로년지식인들은 치부하라고 푸른등을 켜주었다해도 거개 일거리조차 찾지 못했다.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려는 진취심, 순발력도 선천적으로 약했거나와《군자는 리익을 말하지 않고 군자는 자고로 청렴했거니…》라는 낡아빠진 신조를 뇌까리며 자신의 무위무능을 숨기였고 개탄속에 자신마저 기만했을뿐이다. 이런 경화된 가치관념은 수천년의 봉건사회가 벗어놓은 청고함이기도 하지만 기실 관념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제2의 인생을 개척할 용기와 잠재력이 부족하 다는것을 시인해야 했다.
   상품경제시대의 충격은 거대하였다. 그러나 자타에 충격을 안겨준것은 상품경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거족적발전행정에 필연적일지도 모를 질서혼란이였다. 예기치 못한 혼란이 낳은 사회분배의 불공평,사회부조리라는것을 단순한 전통적관념으로 똑 똑히 해석할수 없었다.지식인은 또 한번 시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개혁초기 모종 의미에서《독서무용론》이 기괴하게 맞아떨어졌던것이다. 전국범위내에서 벼락부자들의 문화차원은 거꾸로되여 지식을 조롱한 셈이다. 소학문화정도의 사람이 보스(老板)질 하고 고중졸업생이 품팔이대오에 끼여들고 대학졸업생은 사처로 뛰여다니며 구직등록 표를 써야 했다는 시대의 회색유모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마침내 시대는 제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식인을 우롱했던 력사는 영원히 물러가고 과학의 새봄이 오자 지식인들앞에 찬란한 앞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격변하는 시대는 낡은 절대적무력함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구시지식인의 절대적청고함은 절대적무력함을 폭로했을뿐만아니라 군체적인 시대락오자도 낳았다. 이제 지식인들에게는 가치관념의 대전환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길만 남았다.
   자유경재의 시대,적자생존의 섭리가 도처에서 시시각각 경고하고있으니 어쩐단말인가? 비록 세기적숙망이였던 자유도가 넓어지기는 하였지만 결코 그들자신의 실천과 등호로 된것은 아니였다. 사람에게서 진정한 자유는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데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것까지 세세히 보살펴준단말인가?
   비약하는 시대는 지식인의 활무대이다. 날로 팽창하는 지식상품화의 조류에 힘입어 지혜가 응당 있어야 할 에네르기를 생성시켰다. 지식이 없으면 촌보난행의 시대가 도래한것이다. 리성도 일종의 선택이다. 새 시대의 지식인들은 리성을 선택할수밖에 없다.  화페의 돌개바람은 지식인들의 응집력을 천애지각에 날려보냈다. 하해(下海)의 물결이 일고 출국풍이 일자 지식은 사회의 재부로 축적되고 중국지식인은 세계공민, 전 인류의 재부로 환원되였다. 예로부터 문인의 시비는 특별히 분명하다고 했다. 하다면 21세기 중국지식인ㅡ인테리겐챠의 새 이미지는 어떠해야 할가? 감히 단언할수 있는것은 영광의 시대는 필연코 지식인들의것이라는 이 한가지이다.

                                            19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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