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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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느니 이같을진저
2015년 06월 15일 19시 05분  조회:4742  추천:0  작성자: 최균선
                      흘러가느니 이같을진저
      
  공자 내가에 이르러《흘러가느니 이 같을진저…》라고 하였다던가. 불세출의 공성인께서 류수의 막무가내한 귀일(归一)을 두고 어떤 섭리를 깨치셨는지 아니면 류수같은 불귀(不归)의 인생이 속저없음을 깊이 개탄하셨는지?
 《론어. 옹야》에《지혜로운자 물을 즐기고 어진자 산을 즐기니라.》하였다면 조금은 어페가 있는듯싶다. 청산도 절로절로, 록수도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서자라 절로절로 늙어가는 인생인데 범부속자(凡夫俗子)인들 이 강산 락화류수 흐르는 물에 무심할수 있으며 꽃잎지여 떠내리는 락화의 한을 애달파하지 않으랴!
   내 본디 어진 성품은 타고나지 못하였으되 세상에 넘치는 인간악이 미운줄은 알아서 반목도, 협잡도, 권모술수도 없는 무주공간에 활개치며 그 청정함을 좋아하게 되였다. 후에 도회지문명의 혜택속에 살면서부터 차차 심령에 기름때 오르고 보이는 곳 탁류마다가 주접스러워 저도 모르게 부정에 젖게 되자 더구나 청산록수를 그리워하게 되였다. 물론 예전에 비해 훨씬 지혜로워졌다거나 어질어빠진 군자가 되였다는것은 아니다. 인생경험이 나이에서 쌓이는것이 아니요. 지혜를 낞는것도 백발이 아님에랴.
   이제 사무한신(事无闲身)이 된 인생의 막바지에 허수함과 회의만 갈마들어서인지《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청산을 찾아 즐기는 날은 시든 내 삶의 뒤뜨락에 무지개 서는날이다. 물이 하도 맑아서 가재가 나와 하늘을 구경하고 해뱇이 들어가 모래알을 헤는 그 속에 두발을 잠그고 하염없이 청산을 바라보노라면 오장륙부가 말끔히 가셔지듯, 시린 가슴에 서정도 각별하여 제사 마치 청운거사(青云居士)가 된듯하다.
   때에《청산은 내 뜻이요, 록수는 님의 정이…》하는 소리가 싱겁게 새여나오는데 물은 그새에도 어서가자고 따라오라고 지절거리며 앞서거니 뒤쫓거니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그 설쳐대는 꼴이 하도 야속하고 얄망궂어서 속으로 꾸짖는다.
 《록수야, 잠간 멈추지 못하겠느냐?무슨 사연 그리도 급해서 다시 못올 길을 밤낮으로 서둘러대느냐? 그 누가 부르는듯 흘러와도 흘러가도 뒤한번 돌아보지 아니하고 흘러도 련달아 흐르는거냐? 오냐, 산이 싫어서가 아니라 바다가 좋아서라고, 그래도 청산을 못잊어 울어예며 간다고 발명하지 말아. 지심에서 솟아올라 떠나자고 마음먹은 너를 내사 막을 힘도 없거니와 이 세상에 흘러가는것 너뿐이 아닌데야 너만 탓할 까닭도 없겠지라.》
   이렇게 혼자 물을 타매하고나서 머리를 드니 저 하늘가에 바람이 숨어버린 별무리를 스쳐흐르고 바람따라 가노라고 구름도 정처없이 흐른다.천년전의 시간도 저렇게 흐른건 아닌지…이 땅에도 보이던것, 보이지 않던것 다 흘러갔다. 창생의 사랑을 받다가 죽어간 충혼도, 만민의 저주를 받다가 죽어간 넋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는 래일은 죽음을 당겨오는데 래일을 찾아가라는 희망이란 놈의 그 엄청난 거짓말때문에 인간은 래일에로 줄달음쳐갔던가?
   아아, 참으로 무정세월 약류파(若流波)인것을 내 젊어서 알았던가, 세월따라 아득히 굽이쳐간 려로의 장하에 비낀 시비와 성패, 공과 죄를 뉘라서 헤아릴손가, 내앞에 장강의 도도한 흐름은 없어도 탁주한병 앞에 놓고 고금의 많은 이야기를 웃음속에 부치고싶건만 그럴 흉금이 내게 없고 허심탄회할 벗도 없으니 부질없는 상념만 잔물결에 띄워본다.
   갈래갈래 실개천 모이고 합치여 강하를 이루면 흉용팽배하는 급류로 협곡을 뚫고지나면서 절승경개도 명승고적도 아랑곳없이 갈길만 재촉하는 류수, 무변광야를 복된 생명수로 누비며 잔잔히 흐르다가도 바람이 일고 구름이 뒤번지면 격랑을 솟구치는 너의 분노와 파괴의 연유를 인류는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확실히 력동적이고 매력적인 대자연의 우렁찬 악장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차고 더움과 크고작은 구별이 있겠지만 류수는 어데서나 류수요, 세류이든 급류이든 청류이든 탁류이든 너는 무정한 류체이다. 허지만 청산을 고별할 때까지는 수줍은 순정 그대로였건만 인류의 문명권내에 들어서면 가두어지고 소모되고 나중에 탁류로 전락하고 마는것은 너의 비애냐?우리 령장들의 비애냐? 내 좁은 가슴에 대하는 흐를수 없고 실개천만 조잘거리니 너의 그 사연 다 알바없구나.
   류수야!네 아름다운 의지대로 흘러흘러라. 외곬으로만 흐르던 내 상념 곁길로 빠져흐르는구나.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이 세상엔 네 흐름보다 더 불가항력적이여서 그 어떤 전제주의자도 말려내지 못하는 호한한 흐름이 있단다. 그게 무어냐고? 흘러들어도 흘러들어도 끝끝내 다 메우지 못한 저 바다보다 더 큰 욕망의 바다에로 쏟아져 흐르는 인심의 류향이란다. 너는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지만 인심은 높은데서 높은데로 흐르거니 네어이 비길소냐? 이 골물 저 골물 합수하여 주절주절 흘러가는 인심의 격류에 이 골령 저 골령의 마을과 마을이 흘러가는것은 참으로 슬픈 흐름이 아닐수 없다.
   그 옛날 망국의 설음을 짓씹으며 흰옷의 서러운 사람들이 여기로 흘러들었다. 끈덕진 생명의욕으로 무딘괭이를 휘둘러 화전일구고 땀으로 걸구어 피로써 지켜낸 복된 고향이 이 골 저 골에 있었더란다. 영영 다시 못가고만 향수의 눈물머금고 눈을 감은 할배, 할매들의 고달픈 넋들은 저 북망산기슭에 세기적 꿈을 묻었건만 지금 그 후손들이 다시 제 살길을 찾아 흘러나갔다.
   반갑기만 하던 시골의 서정도 도시의 가면구 쓴 얼굴앞에선 너무 무색해졌던가, 높은 저 고개너머엔 유혹의 세계가 눈부시고 뛰여들지 않고서는 못견딜 욕망의 바다 출렁이거니 류수야, 너도 보았지, 청수동의 처녀들도, 강역마을 새각시들도 그 누가 불러낸듯 다 흘러나가고 왕거미줄을 치는 집들만 늘어갔다. 다만 보이느니 힘없는 할머님네와 장가못서 열통이 뒤번진 로총각대군들의 애꿎은 담배연기만 허물어져가는 울바자굽을 맴돈다.
   청계천에 오구작작 물장구치던 개구쟁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글소리도 정답던 학교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았다. 뻐스가 통하는 남산고개길에 외로운 할미꽃처럼 등을 꼬부린 할머니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 가버린 손녀를 기다리고 선 그모습 눈물겨웁더라.
   마을마다에 슴배인 가난과 락망이 홍혼에 조으는데다 흘러가과마는 조상들의 삶터를 이제 지켜갈자가 누구냐? 전통은 유구한것, 전통이 유구할수록 관성도 커지는법이라고 자타를 위안하랴, 강물을 메울수 없듯이 전통은 베버릴수 없다고 마른 선동을 하랴, 낡은 전통이 모든 새로운 사회형식가운데 침전되여 떠내리고 격변기의 인심의 류동은 필연적이라고 아예 체념해버랴야 하나《산이 높고 물이 막혀 갈길이 없는가 하였더니 / 버들방천 만말한 꽃밭을 지나니 또 한 마을이 나타났네.》를 기대하기는 영원히 그런것 같구나.
   내 본디 세상물정에 밝지 못한데다가 세속에 잘 어울리지 못하여 경세지언 같은 미문은 지어내지 못하고 다만 얼마간 하잘것없는 글이나 지어서 답답한 제 마음이나 위로할뿐이라 이 모든것 앞에서 망연하기만하다. 다행히 타고난 고지식한 성미대로 별로 기피하는것이 없이 보는대로 듣는대로 직언하기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아, 맑고맑은 고향의 강이여,》라거나《눈물젖어 그려보는 내고향 산골…》하는 식의 우직한 문자유희를 해놓고는 뒤늦게야 사리를 어겼음을 깨닫고 얼굴 붉힌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오늘 언감생심《흘러가느니 이 같을진저…》에 덧없는 사색을 얹어보는것도 제 혀를 깨물기식이 아닐지…찬물에 젖은 두발 이제 어디로 옮겨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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