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 학기에 들어서면 정해진 커리큘럼(课程)의 배정에 따라 <한국문학사>이란 교과목을 가르치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학사라면 단순히 문학이 걸어온 자취가 루적된 력사의 장이라는 인식에 머물수도 있겠지만 가르치는 실천의 현장에서 본인이 쌓아온 경험에 의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듯 합니다. 크게 뭉뚱그려서 본다면 력사란 그릇에는 일개 민족의 발전의 흐름과 그것을 문자화하여 문학의 그릇에 담은 문학작품이 필연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가령 어떤 력사가가 문학을 홀대시하여 문학작품을 력사의 그릇에서 삭감하거나 삭제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력사라는 이 거목은 생존의 뿌리를 뽑히는 것과 맞먹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력사는 문학의 원천지이고 본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력사의 자식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식 잃은 부모의 인생 가치는 어디 있을까요! 그리하여 양자는 언제나 아기자기하게 한 집안에서 상호 화목으로 사는 법인가 봅니다.
물론 한국문학사가 살고 있는 집 뜰안을 들여다 보면 기성된 문학의 소속 여부에 의문부가 달려있는 것들이 상당하여 갈래가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그 의혹을 문제시하기보다 원상 그대로 받아들여 고대 인접국 문화와의 상호 공유지에서 일어났던 융합의 가치를 읽어내는 것이 정확한 자세라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리유로 문학의 력사를 가르치는 시각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은 학습자들이 난해해 한다고 작품의 제목만 줄세워서 대체로 에지볼(擦边球)식으로 짚고 가거나 또는 작품들의 스토리만을 라열하며 지나치지 말고 력사의 뒤엉킨 갈피들을 풍만하게 장식하고 기존하는 대표 작품들의 영혼에 대해 눈여겨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선택지입니다.
오리지날 한족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단에 서는 것이 원인이 되어 모국어의 반사작용 때문에 받침이 없는 발음이나 또는 ‘ㅅ’를 ‘ㅊ’로 사람을 ‘차람’으로, ‘공항’을 ‘고향’으로, ‘중국’을 ‘중구’로, ‘학교’를 ‘하교’...... 등으로 발음하는 친구들 이 속출하여 종종 표정의 평행수위를 잃을때가 많습니다만 그들에게서 보이는 사물의 본질을 판독하는 지혜를 감안한다면 발음에 걸린 문제는 문제시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토론장에 내놓으면 유의미한 내용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또한 사전에 토론 째마를 정해주거나 과제를 매개인에게 배분하면 수업시에 상당한 감흥을 얻게 됩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흘러간 력사들을 그냥 이왕지사로서 기억의 더미에 쌓아두는데 그치지 말고 력사와 현재의 우리 삶에서 접점을 찾아 지심(至深)이 잠들어있는 력사의 령혼을 재현시키는 길을 알아내는 것이 더없이 유익하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컨대 당조 때 16년 동안 당나라에서 류학을 했고 절강성의 지방 관리 경력까지 가진 신라의 최치원과 그의 작품을 공부할 때는 작품 속에 있는 중한 문화교류의 찬란한 력사를 읽게 되는 것 이외에도 자국 문화의 파워와 융성발전했던 당조를 자랑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애국의 마음을 부르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 우리 조상들이 신라, 백제, 고구려 중의 어느 한 나라의 백성으로 생활하였을 것이지만 현재를 존중하는 자체는 책임적이고 영원한 력사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최치원 작품을 잘 음미해보면 타국의 일개 류학생에게 지방관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는 중국인의 흉금과 포용이라는 대인 관계 매력도 감탄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태평성세를 공유하고 소유물을 아낌없이 서로 나누며 살아왔던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문명 발전의 최고 성과를 누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밖에도 고급 대신으로 중국에서 26년을 머물며 황제를 보좌하였던 이제현의 한시 작품들이나 박지원의 장편기행문 <열하일기>… 등을 대할 때도 동일한 감흥이 솟아납니다. 력사의 크고 작은 그릇과 그릇들에 알맹이로 자리잡힌 이러한 작품들을 현재에 걸맞는 문화적 접점만 하나하나 찾아주면 금방 피와 살이 섞인 한 모태의 생명으로 부활하여 생생한 모습으로 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빈출하는 박물관이란 용어가 바로 이것을 설명해 주고 남음이 있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힘을 갖춘 령혼체들이 뭉쳐서 가까운 오늘의 삶의 담벽에 청청한 채색을 올리는 것이 살아있는 박물관의 력사 작용이기도 합니다.
조선시기의 판소리계 소설이고 한국의 3대 고전으로 불리우는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에 대하여서도 이러한 리치는 역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고매한 형제 우애를 그린 <흥부전>은 협력 정신을 제일의 보자에 올려놓은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에 굉장한 에너지를 부여하게 될 것이고 <춘향전>은 사랑이 상업의 힘에 매도되어가는 현시대의 사랑 관념에 상당한 정화력을 과시하는 현실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특히 현재 외동자식의 핵가족화가 성행하는 사회에서 <심청전>에 담긴 효사상 전파 역할은 참말로 거대합니다. 물론 본인의 경우는 이미 인생의 대학에서 삶을 배운지도 벌써 반백년이 넘는 원인으로 효가 무엇인지, 효를 행하는 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마음길이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만 외독자로 자란 아이들이 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어지간히 우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효에 대해 리론으로 다가선다면 소화가 어려워지고 역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인데 대비해 일단 <심청전>이라는 문학 작품에 대한 강의로 다가선다면 자연스럽게 접목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효에 대한 해석이 아무리 천만가지라고 해도 그것의 외의를 벗기고 보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 전부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봤을 때 어린 나이때부터 이집저집 동냥한 밥을 자기는 먹지 않고 아버지께 대접하거나, 아버지가 다시 광명을 볼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몸을 바다에 던져야 함에도 서슴치 않는 <심청전>에서의 심청의 치사랑이야 말로 자식을 위해 생명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님의 자식사랑을 그대로 답습한 효심의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 이는 또 현대인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강심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치기 어려우나 작품에 대한 토론을 거쳐 효심의 아름다움을 간접 체험하고 부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이것이 보귀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하기에 력사의 문학 창고에서 유출하는 령혼의 에너지를 현실 속 우리 삶에 이식하는 작업은 참으로 보람이 차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은 령혼을 재활시키는 시너지를 끊임없이 방출하게 됩니다.
<심청전>을 토론하면서 한 사람에게 있어서 특히 자식으로 사는 모든 외독자들에게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하는 시간임을 알게 됩니다.
예까지 글을 써 내려가노라니 문학의 큰 무대로 사는 력사의 존재에 사뭇 감동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력사의 구성원 중 일성원으로 사는 모든 문학작품들이 수천년이 흘러도 자기의 곱고 빛나는 빛을 잃지 않을 수 있은 것은 더넓은 흉금의 나라- 력사가 있기 때문인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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