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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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행복의 만찬
2023년 02월 24일 10시 51분  조회:292  추천:0  작성자: 남춘애
                     
     나는 일찍 감자와 깊은 인연을 가졌습니다. 먹걸이가 턱없이 부족 해서 배불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에는 배를 불려 주는 먹거리 해결사가 다름 아닌 감자였던 연고 때문입니다.
 
    해마다 감자가 여무는 계절이 되면 나는 더 없이 바빠집니다. 감자 이삭을 주어와서 나를 포함한 식구들의 허기를 달래는 일을 할 시즌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은 들에 나가서 정노동으로 일하였고 학교에 갔다가 방과 하고 집에 오는 아이들은 집 오래에 있으면서 집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었습니다. 특히 자식은 많고 일꾼이 적은 집에서는 더욱 그러했었습니다. 나는 후자에 속했습니다.
 
    감자 이삭을 줍는 시간에 나는 항상 행복과 한 식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난한 세월이긴 했어도 식구들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감자이삭을 주을 수 있어 마음 한 구석이 풍성하게 채워지는 기쁨의 크기와 깊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과 기쁨은 이삭을 줍는 내내 나의 동반자가 되어 마주 보고 웃었습니다.
 
    그나마 감자이삭이라도 주어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시절의 가진 것 없이도 넉넉했던 생산대 대상의 덕분이라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일의 품질에 평가 여부는 대장의 말 한마디로 정평이 나던 세월이 였으니까요! 생산대에서 첫물로 감자를 수확해 가면서도 나와 같은 이삭쟁이에게 재수확의 기회를 남겨주는 것은 소홀이 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자 이삭 줍기는 요즘 말로라면 기능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자 포기를 정확히 찾아내여 그에 네발삽을 대고 오른발로 힘껏 힘주어 깊숙이 땅속을 파뒤지면 까만 흙보자기에 싸여 있던 감자들이 네댓개씩 또글또글 귀엽게 걸어나옵니다. 감자는 단체성이라는 넋을 가지고 있어 혼자로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 겨레의 민족성을 닮은 데가 좀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집단성이 좋은 이 감자들은 나름의 딴 살림을 차려서 분가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여러개의 형제 감자들이 주렁주렁 한포기의 젖꼭지에 달려 대롱대롱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온답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일인자인 사람의 입맛 채우는 것으로 일생의 의미를 마무리합니다. 
 
    감자이삭은 줍는 대로 손빠르게 포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삭줍기라고는 하지만 한포대를 채우는데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감자 수학을 하는 어른들이 재벌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여지를 남겨두 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자 포대를 머리에 이고 삐뚤삐뚤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집에 오면 일터에서 귀가하신 엄마는 내가 문을 떼고 들어설 때 쏙 들어간 자라 목이 되어 있는 이 딸의 상황보다 감자 포대에 먼저 눈길을 주십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새끼가 올망졸망하여 입이 많으니 엄마의 그 절박한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듯도 했습니다. 그래서 왜 딸보다 감자가 더 먼저냐고 하는 식의 투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는 양쪽 소매가 콧물에 가죽이 된 코풀래기 두 동생이 배고픔을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엄마는 내가 이고 간 감자 포대를 주방바닥에 내려서 눕혀놓고 두손 재빠르게 먼저 큰 놈과 작은 놈을 정확히 가름하십니다. 그리고 큰놈은 밥 대용으로 윤기 반지르르한 까만색 밥솥에다가 떡대(평안도방언 =찜대)를 걸쳐놓고 그 우에 가지런히 놓고 쪄 좋습니다. 그때 감자는 온갖 식물 보약을 먹고 자란 지금의 것과는 달리 익으면 껍질이 토실토실 여러갈래로 터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터져 있는 갈래대로 감자를 몇 조각씩 쪼개서 먹곤 했습니다. 자연과 한몸이라 그때 감자는 익어서도 인간의 심성에 맞춰 껍질 처리의 편리까지 주는 아량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참 고맙기만 한 감자의 배려였습니다.  
 
     감자를 식사 대용으로 할 때는 반찬이 없이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자는 우리에게 밥이자 반찬이었기 때문입니다. 반찬이라고 굳이 내세우자면 집에서 엄마가 만드는 강된장에서 우러나오는 노란 엄마표 간장인데 거기에 금방 검은 가마솥에 쪄낸 감자를 살짝 찍어서 먹으면 일미가 따로 없었답니다. 

     그런데 그 천하일미는 것도 한 두 번에 걸쳐 먹었을 때 하는 맛의 느낌인것 같습니다.  세월을 먹고 자라면서도 끼마다 감자만 먹고 자라서인지 차츰 감자의 진맛을 못 느끼게 되었습니다. 찐 감자는 꼴도 보기 싫어졌습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느낌들이 몇 십년 세월을 뒤로 보낸 요즘에도 찐 감자라고 하면 벌써 오만상부터 찡그려부칠 정도로 나의 식단에서 감자는 둘도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타임즈에서 감자를 만능의 식품이라는 왕좌에 앉힌지도 오래 되었지만 그가 숨겨둔 영양의 완벽함과는 달리 감자에 대한 입맛은 변함이 없어 지금도 식탁에서 감자와 만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감자를 채썰어서 볶는것이나 찐 감자를 으깨여 만든 것이나 구운 것이나 제아무리 천변만화의 변신을 이루어도 감자라고 하면 나는 두 눈을 감고도 알아 봅니다.
 
      그래도 찐 감자로는 그런대로 배를 채울 수 있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겨울의 유린을 받아 영혼이 없어진 감자는 생김생김부터가 꼴불견입니다. 고 모양은 아프리카의 최고급 흑인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까맣게 죽어얼었습니다. 엄마는 언 감자 한 톨도 버리는 일 없었습니다. 봄의 햇빛이 대지에 찾아들기 바쁘게 그 언 감자들을 배불룩이 독단지를 채운 물에 담궈 놓습니다.  그리고 이삼일 지난 후 다시 건져서 껍질을 벗깁니다. 얼었던 감자는 물속에 들어가면 껍질의 존엄을  세울 수 있는 기력이 조금도 없어 사지를 뻗고 맙니다. 그래서 물을 먹은 언감자는 껍질 따로 몸 따로 놀게 되는데 껍질을 벗기는 데는 저그만치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언감자는 령혼은 까맣게 죽었어도 베품의 넓은 아량은 여전히 살아 있었나 봅니다.
 
    엄마는 일단 손질된 언감자를 독에 담고 하루에 한번 물갈이를 해 주면서 물에 오일 정도 불궈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묵직한 돌로 눌러 줍니다. 그래야 추위의 유린을 당해 얼게 되었을 때 생긴 독성이 그 놀림에 무릎을 꿇고 슬금슬금 기여 나간다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손질 된 흑색 언감자를 헛간 지붕우에 널어 말리웁니다. 널어놓은 감자는 봄의 꽃샘 추위에 표층이 꾸득꾸득 마르는가 싶어도 속은 얼음의 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 한을 풀어주려면 연자방아 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을 엄마는 그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연자 방앗간까지 이고 가서 연자 돌판우에 놓고 갈고 갈아 가루를 내는 일에 달라붙어야 했었습니다. 연자 방아는 나귀가 돌립니다. 그런데 방아간 부림에 순순히 따를 수 있는 나귀는 잡아 오기도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생산대 마굿간에 한마리도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들판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귀를 찾아서 잡아와야 했습니다. 그때에 제일 필요한 것이 꼬맹이 대장부들의 도움이다 보니 동년 시절에는 고추 달린 남자 친구가 꽤 많았던 기억입니다. 함께 나귀도 타고 함께 돼지 몰이도 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동년의 코풀래기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남자애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익숙해진 나는 어린 시절에 많이는 오빠가 다니는 전쟁놀이터를 자주 따라 다니며 나무총을 쏘군 했었습니다. 고추가 달린 아이만 가질법한 그런 기억이 지금도 자주 내 눈앞에 선하답니다. 가난은 했었으나 자연의 의미를 그만큼 터득하면서 동년을 살았다는 것은 배고픔의 기억보다 행복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연자방아로 갈아낸 언감자가루는 다시 까만 언 감자떡으로 거듭납니다. 약간 쫄깃해서 먹기에 무리가 없긴 하지만 그 많은 감자가 한자리에 오구구 처박혀 함께 얼어서인지 언감자떡에는 언제나 특유의 냄새가 슴배어있었습니다. 나의 혀는 아직도 그 맛을 확연히 기억합니다. 미끄덕미끄덕 사암사암 쿵큼하면서도 은근한 구수한 그 맛이 봄마다 두려웠지만 배가 소리 야단을 치면 그것을 먹어주면서 달래는 수밖에 없었던 언감자떡이었습니다.
 
     식용유가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는 아무리 큰 감자일지라도 채썰어 볶아 먹는 건 자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감자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좀 남아 있다면 작은 놈으로 하는 감자장졸임이었습니다. 엄마는 앞마당 채소밭의 풋고추를 따다 함께 넣고 마당에 임시로 만들어진 로천 주방에 걸려있는 커다란 가마솥에다 장졸임을 해 주셨습니다. 돼지 비게를 졸여 돼지 기름을 식용유 대용으로 먹다보니 기름이 빠지고 난 돼지고기 기름깡치까지 섞여있었지만 고기가 턱없이 그립던 시절이라 그것을 기름 대신으로 넣곤 했었는데 그것마저 칠 형제한테 나누어지는 것이라 한번만 당첨되어도 참 맛있게 씹어 먹었던 기억입니다. 그 고소함이 어찌 지금의 참기름인들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와서 학문적으로 표현해 보면 가난 속에도 행복은 린색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어떤 경우에도 반찬이 지금처럼 화려하지가 않습니다. 결혼 경사가 있는 집에도 최고급 반찬이 돼지 잡고 소 잡고 해서 푹푹 삼고 썰어서 소금 간장에 찍어 먹는 수육 음식이었던 기억입니다. 그때 우리 집은 끼마다 반찬공황이 들어 아침에도 감자, 점심에도 감자, 저녁에도 감자였습니다. 감자가 제일 화려하게 변신 할 때는 싱싱한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만든 하얀 감자떡이지만 품이 너무 많이 ㄷ는 리유로 엄마는 그 많은 식구가 먹을 감자떡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우리 집 정로동력이었습니다. 엄마가 생산대의 공수(점수기록을 하여 년말에 분홍을 함)를 한푼이라도 더 많이 벌어야 년말 분홍 때 빚을 지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등잔 밑 시간 마저 우리들의 꿰여진 옷을 깁군 하셨습니다. 두 언니가 시집 갈 나이가 되었을 때도 공수를 벌어야 한다는 한가지 집념에 잡혀 엄마는 음식의 개량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는 감자덕분에 건강하게 자라 쉰 인의 오번출구 앞까지 왔습니다만 감자로 살았던 시절이 괴롭거나 고통스럽지 않았습니다. 쌀밥이 그리워 내내 설만 기다리던 기억이 또렷또렷하게 살아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행복으로 거듭나고 있다는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삶의 색채가 단색이라는 것에 불만을 하지 않고 삶의 마당에 닥쳐온 생활의 본연의 적응하며 사는 곳에 삶의 의미가 살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도 나는 8월의 서막이 열려오기 바쁘게 행복의 지름길로 통하는 감자들을 한알 한알 가슴에 담고 고향으로 향하는 7035 푸른색 골동품 느린뱅이 열차에 몸을 싫었습니다. 어느덧 내 눈앞에는 내가 고향의 집 앞에만 도착하면 발목까지 오는 긴 검정앞치마를 두르고 고추 따던 자세로 삽작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딸을 보며 환히 웃으시는 엄마가 선히 떠오릅니다. 고향 집 안마당 담장 안에 맏이를 등에 없고 둘째를 이끌고 선 옥수수들이 엄마의 키운 정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모습들도 선하게 안겨옵니다. 여름 내내 태양과의 사랑에 빠져 있던 해바라기가 제법 영글어진 까만 뾰족열매를 잉태하고 토담우로 무거운 몸을 드리우고 서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푸름의 절정에 서서 빨간 미소를 짓고 있는 고추밭의 고추들이며 홀로서기 련습을 위해 엄마의 몸에서 솟기를 시작한 마늘밭의 마늘쫑들, 탱글탱글 열매를 품고 하얀 꽃 몽골몽골 귀엽게 피우는 감자꽃도 보입니다.
 
     아, 고향과 설레임과 그리움은 언제나 한 가족인가 봅니다. 고향을 향한 내 마음에는 향토의 내음이 듬뿍 스민 그림이 그려집니다. 인생 기억의 집을 꽉 채워주는 감자의 향기가 내 이 가슴에다 행복의 만찬을 차리고 있습니다!
 
 
 
 
 
                                                                원제목: <가난과 행복의 거리>
                                                             
                                                                발표내역: <장백산> (2019년 제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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