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송이의 도라지꽃이 창턱 위 사이다병에 새로이 뿌리를 내리고 새 주인의 진정을 떠보려는듯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가 학문의 문만 열리고 대화의 창은 닫힌 서책더미 속의 고독함에 묻힌 이내 삶을 가엾게 여겼는지 다시 연한 보라색 미소를 보내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담담한 시선에 스민 그 다감함에 나는 흠씬 매료되어 들어갔다.
삶터의 원전을 떠났건만 잠시 여행 떠난 여행자처럼 씩씩해 보이는 그 자태 때문인지 초라한 꽃병에서 신기한 매력이 풍겨온다. 이사를 했건만 자리 옮김이나 생존의 조건부 따위는 별로 트집하지도 않는듯 하다. 이것은 생의 본능을 지키고자 가능한 허리펴고 서있는 장한 그 모습이 전해주는 참 느낌이다. 심신이 보내오는 휴식의 강권을 받고 모처럼 시간을 내여 도라지꽃과의 만남을 가진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제발로 찾아왔다. 한복 옷고름 마냥 단아한 몸매로 나에게 보내오는 도라지의 정기는 내 마음의 빈 데에 활기를 채워주기에 족하고 넘친다.
나는 입구가 비좁은 그 사이다병이 우아한 도라지꽃과는 너무도 짝이 기우는 것 같아 다시 그에게 좀 넓고 편안한 자리가 될 수 있는 유리컵에 옮겨 꽂아주었다. 다섯 송이 중 가장 화려하게 웃고 있는 두 송이의 꽃이 내 애틋한 사랑의 시선에다 도장을 찍었다. 자세히 보니 그 두 송이는 지극히 짧은 시간에 두 번씩이나 원치 않는 이동을 당했건만 원망의 내색 조금 없이 스스로에게 마련된 현재 삶에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도라지꽃이 고유한 아련한 미감은 또한 흘러드는 해빛을 받아 사뭇 황홀한 자세를 자랑하였다. 그는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미모에 도취된 미인의 얼굴인양 긍지감에 폭 취한듯 하다. 만물의 생리가 다 그러하듯 언젠가는 해빛의 밥으로 아침이슬 되는 날이 오련만, 현재만이라도 꽃답게 피여 나만의 삶을 살겠다는 그의 당당함에 무수한 보라빛 무지개가 반짝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도라지꽃의 향은 어떠할까싶어 코를 대어 보았으나 전혀 무향이다. 아니, 무향이라기보다 무향으로 내면적 자아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심적 소양의 한 단편이겠지!
지금 막 피고 싶으나 어쩐지 주인이 낯설어 피기를 망설이는 다른 두 송이의 도라지가 다시 내 시선을 끌어간다. 생존의 옛 고향을 강제 하직하고 갑작스런 이주와 마주서게 된 꽃의 마음은 고민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나 보다. 좀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산과 어머니 숲으로 끝간 데 없는 그 넓은 품에 안겨 해빛 받아 웃기만 하면 내 인생 부족한것 없었는데, 이 컴퓨터 내음만 진동하는 이 곳에 왜 내가 밸도 없이 히물거려야 한단 말인가 하는 원망찬 질문소리를 가슴으로 들었다. 그렇겠지, 눈에 좋으면 좌우를 살펴보지도 않고 꺾어가버리는 문명인의 손에 넘어가 자리까지 옮겼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으랴. 지금 그에게는 그 놀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시간적 여백이 필요 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변화라는 시대의 거인이 달갑지 않은가보다. 그러기에 한참이 지난 후에도 사색에만 잠겨 있을 뿐, 피기를 주저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는 두 송이 자매를 보니 이제 막 찾아온 삶의 변화를 오로지 평온함밖에 모르던 옛 삶에 강요된 좌절이거나 죄인취급을 할가봐 은근히 두렵다. 그러나 아닐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지 살아있는 동안은 세상에다 예쁨을 자랑하는 것이 자기네 가족의 신조임을 그가 어찌 모르랴! 옆 친구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때맞춰 피어 보려 잠시 엉거주춤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또 도라지꽃의 진한 매력을 읽어본다. 어쩌면 심사숙고하는 그의 참한 심성은 성숙된 인간의 심장을 닮았을 지도 모르지.
이미 생기를 꺽어버린 마지막 한 송이의 도라지꽃에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바뀌어진 터전에서 거듭 태여날수 있다는데 대해선 한 눈도 팔지 않고 상실의 아픔에 절어있었다. 어깨를 맥없이 떨구고 고개를 90도로 꺾어버리고 서있다. 그 울상 앞에 서니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젖어들어오던 기쁨조각들은 연기처럼 간데가 없다. 그야말로 사랑의 물을 한없이 베풀어주겠다는 서약을 맺는다 해도 재생과는 담을 쌓고자 굳힌 그 한마음 단정코 돌려 세울순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원상복귀를 애걸하거나 슬픔의 눈물같은건 보여주지도 않았다.
잠시 마음자락에 연민의 정이 매달린다. 피어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두었을 걸, 그러면 지금도 자연의 품에서 웃고 떠들며 세상사는 축복을 즐길지도 모를걸…
아무튼 그 자세를 보아하니 새 주인의 묻지마 행위에 큰 충격을 먹은 나머지 삶의 의지를 싹 접어버렸나 보다. 새 것도 변화도 그에겐 꼬물만한 인기도 없는듯 하다. 그의 폴싹해진 모습은 분명 만사가 귀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에게 자생자멸의 자연밖에 두 번째 길은 없을 것은 자명하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상심한 나머지 사상의 지킴이를 찾아가도록 밀어주었다.
원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을 그의 본 모습이 무엇보다 궁금해진다. 현란하지는 못 할, 그렇다고 생생하지도 않을 그러한 꽃으로 산 것은 아니였는지, 다만 꽃나무에만 매달려 꽃인체 사는 가련상으로 살지는 않았는지… 나름대로의 짐작이 마음에 머문다.
거울이 크다해도 스스로의 진상을 비춰보지 못할 때는 원상태 그대로를 고집하기 마련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의 집에서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인데 힘들여 이리저리 뜯어고칠 필요가 무언가 하며 팔자타령을 부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피여있는 꽃, 피려는 꽃, 그리고 쓰러져버린 꽃! 인간은 그 어느 누구든 이러한 꽃송이의 피조물 일지도 모른다. 인간도 꽃이라 함이다. 토양과 종자가 다를 뿐. 삶의 들판에 피여있는 꽃이란 종의미는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또 누구인가? 이러한 당혹스러움 때문에 스스로에게 메시지를 보내 물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아시다싶이 인간에서 정답이란 것이 없어진지도 퍼그나 오래다. 분명한 것은 인생은 항상 공사 중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심산 속에만 피는줄 알았던 도라지꽃이 시가지의 포장도로 길가에 피여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음 불능이다. 그래서 피어있는 도라지꽃을 가리키며 주인장님께서 재배하신건가고그 가든의 주인님께 물어보는데까지 갔다. 재배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내 침실의 꽃병 속에 자리잡은 이 다섯 송이 도라지꽃은 분명 꽃씨들이 가을 여행을 택해 자율적으로 삶터를 옮기는 행렬을 따랐다는 증언이다. 산이 아닌 주택가나 길가에서도 장미꽃이나 월계화 못지 않게 한 송이의 꽃으로 필 수 있다는 자신의 꿈을 생에다 옮기는 마당에 나선 것이다. 그들은 그 꿈을 펴보기까지 수없이 많은 세월의 오리들을 휘여 잡았을 것이다.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 가끔 고민도 하였을 것이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어지기 마련이고, 얻어지는 것이 있으면 잘려나감이 있게 됨은 자연이 준 평행의 이치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도라지꽃은 늘 이러한 자연의 심성에 미소로 대할 수 있는 마음 준비가 되여 사는 삶에 익숙해 있었다고 해야 하겠지! 그래서 그들은 내 꽃병에로 이사한 후에도 핸재 삶에 후회 않고 재량껏 삶을 폈을 것이다. 인간이 그들의 우아함에 반해 지성을 아끼지 않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
아랫턱에다 손을 고이고 고개를 숙이면 인간도 한 송이 꽃과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는 마음 심처에 부활의 힘을 품고 넘치는 사랑수로 스스로를 가꾸어 만드는 리성과 정의 꽃나무로 산다. 그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유리컵에 꽂힌 도라지 꽃마냥 하루에 10년사를 대서특필할 수 있는 영혼의 꽃나무로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을 영장이라고 이름하겠지만, 인간이 삶을 가꾸어가는 길에서 도라지꽃의 그 웰빙 단백소는 필요이상으로 필요하다. 잔잔히 흐르는 물 위에다 돌맹이를 하나 뿌려 던져 튕겨나오는 물방울에 옷을 적셔보고, 일찍 없었던 큰 소리로 자신을 찾아 보았을 때 우리네 삶에는 쪽문이 아닌 대문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대문으로 아름다운 차량이 드나들 수도 있고, 대문가에는 소박한 코스모스를 심어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정원은 한결 아담하게 꾸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발표내역: (2007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