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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산문집-엄마의 별

수필*누나
2012년 04월 24일 08시 04분  조회:3482  추천:1  작성자: 동녘해
 
 

 
 
카나다에서 박사후 공부중인 외조카네 부부다.
큰누님의 둘째아들인데 큰누님이 평생 농사 지으며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적어오신 만점짜리 성적표일것이다.
 
***************
 
“누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너와 미화를 제일 근심했단다. 그래도 미화는 좋은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가서 시름을 놓았다고 좋아했는데… 너는 그냥 가슴에 걸려있었는지 ‘우리 막내를 어쩌면 좋소.’ 하고 늘 외웠단다.”

산전수전을 다 껶어오신 매형이여서인지 그 말을 하면서도 표정만은 그처럼 담담했다. 그것이 되려 나의 가슴을 그렇게도 아프게 긁었다. (누나에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였는가? 누나는 어쩌면 떠나기전까지도 나를 가슴에서 놓지 못하셨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은 찢어지는듯 괴로와났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볼로 흘러내렸다. 나는 매형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싶지 않아 몸을 돌려 앉았다.

창턱우에 놓인 누나의 영정사진이 눈물로 가득찬 나의 눈에 안겨들었다. 영정사진은 여러 사람이 함께 찍은 어느 사진에서 뽑아낸듯했다. 누나는 사진을 찍던 그날에도 나를 근심했었는지 눈에는 어딘가 깊은 우수가 담겨져있었다.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누나의 사진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누나가 사진에서 나오셔서 나의 손을 잡고 “지금도 술을 마시면 그렇게 힘드니?” 하고 묻는듯싶었다.

누나의 가슴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바로 그것이였다.

“큰일을 하는 사람인데 술을 그렇게 마셔서야 쓰겠니? 너 워낙 마음이 여려서 남의 말을 거절 못하는게 흠이다. 후에는 얼굴 가려워 말고 못 마시겠으면 아예 딱 잘라버려라.”

가족모임때 간혹 만나면 늘 나의 손을 잡고 하시던 누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맨날 술에 빠져사는 그런 고주망태인것은 아니다. 30살전까지는 흰술 두잔만 속에 들어가면 눈이 내려오고 사지가 나른해져 어디에라도 눕고싶은 그런 체질이였다. 30살나던 해 단위에서 중임을 맡으면서부터 부득불 술과 접촉하게 되였다. 혈기왕성하던 때라 일에서도 술에서도 누구에게 지고싶지 않은게 내 마음이였던지라 못하는 술에도 감히 달려들게 되였던것이다.

아마 그게 1996년 3월 7일밤이였을것이다. 내 인생에서 기념할만한 큰 일을 해제낀 나는 두명의 동료와 함께 사무청사에서 멀지 않은 한 양고기꼬치집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해는 겨울이 늦게 가서 3월인데도 눈이 푸실푸실 내렸다. 다른 동료들은 맥주를 청했지만 나는 웬지 눈오는 날 양고기구이에 맥주가 싫은것 같아서 흰술을 청했다. 서너잔쯤은 마실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뜻깊고 기분 좋은 날 동료들의 축하까지 받았는지라 나는 기분이 둥둥 뜨는것 같아서 속에다 흰술을 야금야금 부어넣기 시작했는데 술 한병을 다마셔버리고 말았다. 마실 때는 몰랐는데 그 술이 속에 들어가서 전쟁을 벌인것이다.

“술 한병 더 가져와.” 하고 소리친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후 정신을 차리고보니 집에서 손등에 링겔바늘을 꽂고있었다.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껴지고 대단하게 느껴져 며칠후에 누나를 만났을 때 그 일을 자랑삼아 말했는데 누나의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얘, 얘를 어쩌니? 큰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러면 쓰겠니?’

누나는 언제나 나를 “큰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무슨 큰일도 아니고 그저 남들이 다니는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 출근하는 정도였지만 누나의 눈에는 그게 그렇게 큰일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고중 2학년에서 공부를 그만두고 기어코 군대에 가겠다고 나의 주장을 세우던 그날밤 누나는 저녁을 거르시고 몸이 아프다며 일찌기 벽을 마주하고 누우셨다.

그날도 진종일 밭에 나가 힘들게 일하다가 오셨다는것을 아는지라 나는 새우처럼 꼬부리고 맨 구들에 누으신 누나곁으로 다가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요도 안깔고 이렇게 누웠소? 일어나 저녁이야 자셔야지.”

누나는 미동도 없으셨다. 나는 다시한번 누나를 부르며 누나의 어깨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누나는 내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눈귀에서 고름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셨다.

“너 정녕 왜 그러니? 내가 왜 널 끌어안았는데? 네가 큰일을 하는것을 보고싶었는데…”

누나는 뒤말을 잊지 못하고 흑흑 느끼셨다.

“누나…”

나도 목이 꺽 막혀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때 누나의 큰아들은 12살로서 나보다 6살이 어렸다. 그뒤로 또 10살, 6살이 되는 애들이 달려있었는데 나까지 합치면 누나네 내외는 애들 넷을 기르는 셈이였다.

천성적으로 감성적이여서인지 나는 사춘기를 힘들게 넘겼다. 15살에 처음으로《연변일보》에 통신 한편을 발표하면서 당금 작가로 되는듯한 환상을 가진 나는 다른 공부는 뒤전으로 하고 글쓰기와 독서에 온갖 정력을 다 쏟았다. 그러다가 고리끼처럼 사회대학을 다닌다면서 초중 3학년 전학기에 사회에 나와버렸다. 그 사건은 온 가정을 휘딱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취재를 한다고 마을을 휩쓸고 다니면서 나의 유치한 세상체험에 미쳐있었다.

이듬해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실것이라고 믿어왔던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생활이 풍족하지는 못해도 항상 “우리 막내 우리 막내”하는 받들림속에서 자라던 나는 그때에야 앞으로는 아버지도 세상을 뜰수 있고 형제들과도 분가를 해야 할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자기의 미래에 망연자실하여 방황을 하고있을 때 누나가 나를 당겼다.

“작가가 되든 땅을 뚜지든 그래도 공부는 할만치 해야 한다. 이대로 살다간 건달밖에 더 될게 없다. 이곳 학교를 다시 다니기 싫으면 투도중학교에 다니거라. 우리 집이 투도하고 가까우니 우리 집에 와서 다녀라.”

형님들도 누나와 합심하여 나를 다시 학교에 밀어넣었다.

“근심을 말고 학교에만 잘 다녀라. 나는 너를 아들처럼 생각할것이니 아무 근심도 말아아.”

다시 공부를 한다고 누나네 집에 첫발을 들여놓던날 누나는 그 한마디를 힘있게 하셨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평판을 달고 사시는 매형도 “대학에 가게 공부를 열심히 해라.”고 나에게 힘을 실어주셨다.

누나가 사는 마을에서 투도까지는 10여리나 떨어져있었다. 누나는 학교가는 내 시간이 늦을세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해서 도시락을 갖춰주셨다. 해도 떠오르지 않은 새벽길을 떠날 때면 누나는 날마다 사립문가에 나오셔서 나를 바래주었고 별을 이고 돌아올 때면 또 그 사립문가에서 나를 기다리군 하셨다. 비오나 눈이 오는 날에는 정말 학교로 가는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사립문가에 서있는 누나를 생각하면서 억지로 등교길에 오르군했다.

“절대 배를 곯지 말야 한다. 네가 지쳐서 쓸어지면 모든게 나무아미타불이 된다. ”

이것이 누나의 신조였다. 하여 누나는 언제나 나의 도시락에 대해 신경을 써주시군 했다. 그때 학교뒤에는 두부방이 하나 있었는데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은 가끔 두부방에 가서 두부를 사먹을 때도 있었다. 그때 나는 “기름간장을 맛있게 해오는 학생”으로 통했다. 누나는 늘 두부방에 가서 두부에 얹어먹으라면서 정성들여 기름을 딱다가 파를 송송 썰어넣고 고추가루까지 살짝 얹어서 먹음직스러운 기름간장을 만들어 통졸임통에 넣어주셨다. 누나는 그렇게 며칠에 한번씩 기름 간장을 만들주셨는데 두부방아주머니들도 소문을 듣고 나의 간장맛을 보았던것이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누나의 자식들도 커가면서 소비가 점점 많아지게 되였다. 그때는 도거리농사가 금방 시작되던때라 누나와 매형도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쳤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나의 도시락을 챙겨주느라 힘드신 누나를, 우리들이 학교에 내는 돈을 해결하느라 주일마다 거르지 않고 농산품을 이고 장마당을 다녀오시는 누나를 보기가 괴로왔다. 누나가 아무리 아들처럼 생각하는 동생이라지만 그때 여물지 못한 나의 생각으로는 “누나의 신세”를 지는것이 그렇게도 힘들수 없었다. 만 일년만 견지하면 대학시험을 칠수있다는 생각이 없은것은 아니였지만 그 일년을 그렇게 부담스럽게 보내다가는 지레 내가 병이 날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한 홀로서기가 군대에 나가는것이였다.

18살에 누나네 집을 떠나 군대에 갔던 나는 7년후에 연길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군대에가 있는 7년사이 누나와 형제들이 나에게 쏟은 정성은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다. 누나와 형님들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마다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학습만은 놓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그게 힘이되여 나는 군대에 가있는 7년사이 시간만나면 공부를 했다. 그 덕에 퇴대를 할 때 연변대학성인학원 조선언어문학전업졸업증을 가지고 오게 되였다.

“네가 끝내 큰일을 하게 됐구나. 이게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냐. 이제는 큰일을 하면서 잘사는 일만 남았다.”

사업에 참가한후 처음으로 누나네 집으로 갔을 때 누나는 그렇게 기뻐할수가 없었다. 겨우 제앞에 차려지는 일이나 하는 내가 누나에게는 그렇게 대견하게 보이셨는지 후에도 누나는 언제나 나의 자랑을 달고계셨다 한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누나에게 약간의 기쁨도 드렸고 근심도 만들어주었다.

내가 첫 혼인에서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후 누나는 그날로 달려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살에 엄마를 잃고도 사는게 사람이다. 무슨 대단할게 있다구. 기 죽지 말구 보란듯이 큰일을 해라.”

그때 나는 “누나가 말씀하시는 큰일이란 과연 무엇일가” 하고 생각해본적이 있다. 후에 새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나눈 가끔씩 술을 과음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안해를 힘들게 했던지 어느 가족모임에서 안해가 누나에게 나의 “죄장”을 공소한 모양이였다.

“누나가 어쨌는지 알아요? 당신이 다시 술에 취하면 부지갱이로 치라고 했어요.”

“허허허… 연길에 부지갱이가 있던가?”

내가 넉살좋게 받아넘기자 안해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래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조심 해야겠어요. 당신이 다시 술을 마시면 누나가 부지갱이를 만들어 메다 준다고 했어요.”

“저런, 그 할매가 부지갱이를 지고오는 일은 없어야지.”

그후 나는 술을 마시다가도 그 말이 생가나면 속이 셈찍해서 술을 통제하느라 했다. 하지만 누나의 말처럼 내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술자리에서 남들이 두번만 “마시우.” 하고 권하면 더이상 거절을 못하고 받아마셨고 그렇게 술을 시작하면 술이 술을 청해서 또 흐트러지군 했다.

그렇게 내가 술을 마시는 사이 누나는 내내 가슴을 졸이며 사신것 같다. 나와 누나는 뭔가 텔레파시라도 통하는게 있은것 같다. 언젠가 내가 술을 과음한후 손등에 링겔바늘을 꽂고 누워있는데 누나가 전화를 걸어오셨다.

“간밤에 너네 집에 홍수가 터지는 꿈을 꾸어서 근심돼 그런다. 또 술독을 들이마시잖았니?”

“시름놓소, 누나. 나 인젠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전화에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웬지 가슴이 알알해나서 나는 핸드폰을 놓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인젠 정말 술을 적게 마시고 몸을 조심해라. 그래야 너네 누나가 저 세상에서라도 시름을 놓지.”

그 말을 하시는 매형의 목소라가 떨리는듯싶었다.

나는 입술을 옥물며 머리를 끄덕였다.

2009년 12월 3일, 누나는 피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시고 보름을 앓다가 63세를 일기로 급작스럽게 눈을 감으셨다.

모두들 나이가 아깝다고 누나를 아쉬워했다. 그처럼 힘든 세월에도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악착까지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이 못난 동생을 위해 아글타글 살아오신 누나— 최순자!

누나의 큰아들은 어엿한 기자로 되여 신문전선에서 뛰고있고 작은 아들은 외국에서 박사후까지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중국과학원 화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큰일”을 하고 있으며 항상 나와 같이 마음에 걸려하던 딸도 좋은 남편을 만나 부럼없이 생활하고있다.

누나가 떠나가신지 1년이 되여온다. 나의 마음속에 살아계시는 누나의 존재가 약이 되였던지 나는 과연 지난 1년간 악착스럽게 술을 통제해왔다. 그때문인지 비만때문에 툭 불거져나왔던 배가 들어가면서 체중이 10키로그람이나 줄어 몸이 호리호리해졌다.

요즘 가끔 거울앞에서 보기 좋은 몸매를 스스로 바라보노라면 또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고 누나의 목소리가 귀전을 스치는것을 어쩔수 없다.

“애두 이게 뭐니? 반동자처럼 곱던 얼굴이 호한삼처럼 유들유들 해진게 아니니? 너 좋은것을 너무 먹는가본데 조심해야겠다.”

어릴 때 나는 쌍까풀눈이 유달리도 까많고 살결이 포동포동하고 맑았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나를 영화 “반짝이는 붉은 별”에서 나오는 주인공 반동자를 닮았다고 입을 모았던것이다. 10여년간 내처 술을 과음해서였던지 그 시절 160센치메터를 웃도는 나의 키에 체중은 80키로그람을 넘어섰던것이다. 망가진 나의 몸매가 마음에 걸렸던지 누나는 가끔 역시 그 영화에 나오는 지주 호한삼을 거들어 나에게 롱담을 하셨던것이다.

누나는 그렇게 나의 모든것을 살피시면서 아껴주고 근심을 해주신것 같다.

“유들유들하던 호한삼”이 중년의 반듯한 “반동자”로 다시 돌아온듯싶다. 애써 과음을 통제해서인지 요즘 나는 정신적으도 여유가 생긴것 같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하늘 같이 넓은 마음으로 고생을 받아안으시고 식구들을 끌어안으시던 누나의 그 소박하고 도량 넓은 삶의 자세를 배워야 겠다.

오늘의 나의 모습을 하늘나라에 계시는 누나에게 보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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