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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성장소설집-아직은 초순이야

선녀를 찾아주세요
2012년 04월 24일 08시 41분  조회:1291  추천:0  작성자: 동녘해

 

 
 
 
 
A

컴퓨터앞에 앉아서 질근질근 껌을 씹는 퍼어런 눈두덩의 수금원녀자에게 돈을 넘겨주면서도 홍수는 가슴이 후둑후둑 뛰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숨마저 크게 쉬고싶지 않았다. 어쩜 “후―” 하고 날숨을 내쉬는 사이에 방금전 그 아지랑이같이 아물아물하던 기분이 “붕―” 날아가버릴것 같아서였다.
(뭐? 아직은 그런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공부할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먼저 중점고중에 붙고 그다음 명문대학에 가서나 생각할 문제라고? 깜찍한것!)
홍수는 생각할수록 눈앞에 꼭 깨물어주고싶게 귀여운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래, 분명 그 애야, “선녀”가 틀림없어!)
홍수는 저도 몰래 헤벌쭉 웃었다.
수금원녀자가 멍청이처럼 혼자 웃는 홍수를 괴물이나 바라보듯하더니 컴퓨터옆의 빈자리에 거스름돈을 탁 내려놓으며 “어이”하고 소리쳤다. 홍수는 우뚤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수금원녀자가 까아만 점이 도드라진 빠알간 입술을 외로 탈며 “승천!” 하고 짤막하게 소리쳤다.
“어, 승천!”
홍수는 수금원녀자에게 멋적게 머리를 끄덕해보이고는 컴퓨터옆에 놓은 거스름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쫓기듯 PC방에서 나왔다. 홍수는 밖에 나오자 바람으로 터질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머리를 쳐들었다.
뭇별이 깜빡이는 망망한 하늘에서 채 여물지도 못한 쪼각달이 어디론가 바삐바삐 걸음을 재촉하고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던 날
어느 골짜기 숲을 지나서 단둘이 처음 만났죠…”
홍수는 하늘에 대고 휙휙 휘파람을 불었다. 반짝이는 별들마다 “선녀”의 맑고 깊은 눈동자처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홍수는 처음으로 도시의 밤하늘에도 이렇게 많은 별들이 깜빡이고있음을 느꼈다. 홍수는 “선녀”와 한하늘을 쓰고 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홍수는 아침에도 마을 뻐스역에서 “선녀”를 만났었다. “선녀”는 역시 머리를 살며시 숙이고 2선이라고 쓴 패말밑에 오똑 서있었다. 그는 언제나 무엇을 속삭이는듯한 까아만 눈을 살짝 감았다가는 반짝 뜨고 주변을 살피는것이 어쩜 마음속으로 한없이 그리는 그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듯싶었다.
(혹시 그 애 기다리는 사람이 내가 아닐가? 정녕 그 사람이 나라면 얼마나 좋을가?)
홍수는 나름대로 제 좋은 생각에 김치국을 챙겨 마시며 저도 몰래 그 애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수는 늘 모르는척 그와 몸이라도 한번 부딪쳐보고싶었고 그것이 안되면 그로부터 풍겨오는 향긋한 체취라도 맡아보고싶었다. 홍수는 그 애가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보다도 살며시 두눈을 감고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살며시 감겨진 까아만 눈은 마치도 금방 피여나려고 파르르 떠는 꽃망울을 방불케 한다고 생각했다.
“선녀”는 또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치려는지 살며시 두눈을 감고있었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쪽지를 꺼내여 그 애옆에 떨구어놓았다. 홍수는 가슴이 활랑거리며 숨이 턱턱 막혀왔다. 홍수는 호주머니에 손을 지른채 살랑살랑 휘파람을 불며 그 애와 좀 떨어진 곳으로 가서섰다. 홍수가 타야 할 5선뻐스가 먼저 오고있었다. 홍수는 뻐스를 탈 준비를 하면서 흘끔 “선녀”를 훔쳐보았다. 종이쪽지는 아직 그의 발밑에 떨어진대로 있었다. 홍수는 마음이 조급해났다. 그 애가 종이쪽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쩔가? 그새 종이쪽지가 바람에 훌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어쩔가?
5선뻐스는 홍수네를 싣고 부르릉 소리를 내며 뻐스역을 떠났다. 홍수는 차창에 얼굴을 붙이고 “선녀”와 그의 발밑에 있는 종이쪽지를 살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선녀”는 종이쪽지를 줏지 않고있었다.
“나는 나무군, 선녀를 찾는다. 나무군의 오두막주소: ******@hotmail.com 진심으로 련락을 기다린다.”
홍수는 학교에 가서도 “선녀”와 종이쪽지만 눈앞에 삼삼거려 온종일 정신을 집중할수가 없었다. 홍수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하루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선녀”가 처음으로 홍수의 눈앞에 나타난것은 한달전, 개학 첫날이였다. 그날 홍수는 아침 일찍 뻐스를 타려고 마을 뻐스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 아빠트 굽인돌이를 지나 뻐스역에 눈길을 주었는데 하얀 적삼에 하얀 치마를 받쳐입은 낯 모를 녀자애가 첫눈에 안겨들었다. 파르스름한 가방이 하얀 옷에 어울리면서 금방이라도 날아나버릴듯 무척이나 산뜻해보였다.
(누굴가?)
사과향기 비슷한것이 하얀 옷으로부터 은은하게 풍겨와 홍수의 페부에 스며들었다. 홍수는 무심결에 하얀 옷을 훔쳐보았다.
어깨까지 찰랑찰랑 기른 생머리를 까아만 헝겊끈으로 꼭 묶어 한결 깔끔해보이는 녀자애, 큰 호수 같은 까아만 눈이 무시로 반짝이는 녀자애, 백설같이 하아얀 얼굴에 아침해살같이 마알간 웃음을 살며시 물고있는 녀자애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마치도 금방 그린 선녀도처럼 홍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홍수는 새삼스럽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활랑거렸다.
(쳇, 남자가 면목이 없이, 이게 웬 일이람. 아자, 정신 차려. 저 애가 뭔데, 정월대보름에도 본적이 없는 저 애가 내게 뭐가 되는데…)
홍수는 호주머니안으로 손을 넣어 자기의 넙적다리를 꽉 꼬집었다. 넙적다리에서 얼얼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날은 2선뻐스가 먼저 미끄러져오더니 하얀 옷을 입은 녀자애의 앞에 와 멈춰섰다. 몇 안되는 손님들이 다투어 뻐스에 오르려고 헤덤볐다. 녀자애는 손님들이 뻐스에 다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 사람으로 뻐스에 올랐다. 달리는 뻐스창문으로 하얀 옷이 유표 나게도 눈에 안겨들었다.
이튿날에도 녀자애는 같은 시간에 역전에 나와있었다. 녀자애는 그날 교복을 입었는데 ㅅ중학교의것이였다. 홍수는 그 녀자애와 한학교에 다니면 좋겠지만 한마을에 사는것만으로도 더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저 애, 이름은 뭐라고 부를가?)
알고싶었다. 홍수는 이것저것 주어서 생각하다가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쳇, 이름을 알아서는 뭐해? 하늘에서 금방 내려온듯한 선녀 같은 모습만 생각하면 되는거지. 그래, 그 애는 나의 선녀야, 나를 만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거야.)
홍수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여나고있었다.
개학 첫날에 맞은 화살때문에 홍수는 한달내내 가슴앓이를 했다. 숙제를 하다가도 멍하니 앉아있는 홍수를 보고 어머니는 벌써 몇번째나 충고를 주었다.
“홍수야, 너 요즘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있다.”
“제가 뭘요?”
“엄마 눈은 못 속인다. 너, 요즘 뭔가를 앓고있는것 같은데…”
“어머니, 그만하세요. 소설은 그렇게 쓰는게 아니거든요.”
홍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씽긋 웃어보이고는 수학숙제책을 번졌다. 녀자애의 까아만 눈이 홍수에게 뭔가를 속삭이는듯 또 홍수의 머리속에 찾아들었다. 홍수는 필을 놀리는것처럼 하면서 옆에서 사과를 깎고있는 어머니를 훔쳐보았다. 역시 어머니는 홍수를 지켜보고있었다.
홍수는 문뜩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있는 작은 물고기가 생각났다.
잡지사 편집으로 계시는 어머니는 요즘에 와서 홍수의 일상을 무척이나 열심히 살피고있었다.
초중 2학년은 인생에서 관건의 관건이라는것이 어머니의 인생철학이였다. 초중 1학년에서는 중학교생활에 익숙해지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별로 없지만 중학교생활에 익숙해진 2학년부터는 찾아오는 사춘기와 함께 새로운 버릇들이 자라기 시작한다는것이였다. 어머니는 그중에서 제일 피해가기 어려운게 사춘기의 “사랑놀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완전히 도사가 다됐네. 도사야, 하지만 지금 나의 이 감수를 어떻게 다 안다구? 어머니네 시절의 고리타분한 격정은 지나버렸습니다. 녀사님!)
눈귀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머얼건 얼굴을 바라보면서 홍수는 어머니와의 세대차이를 느끼고있었다.
10년같이 지루하게 하루공부를 끝낸 홍수는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추 PC방에 들렸던것이다. 혹시나 오매에도 그리던 “선녀”가 아침에 종이쪽지를 주어보고 홍수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쯤은 PC방에 내려와 나무군을 기다리고있으리라 생각되였던것이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인터넷에 접속했다. 금방 메신저에 올라서 친구리스트를 훑어보고있는데 모니터에 대화창이 뜨며 “할룽―” 하고 인사말을 건네왔다. 대방은 “선녀는 없다”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였다. 순간 홍수는 호흡이 뚝 멎는듯싶었다.
(맞아, 바로 그 애야, 나의 선녀야!)
홍수는 키보드를 누르는 손이 후들후들 떨려 자꾸 오타가 생겼다. 홍수는 두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가 후― 심호흡을 하며 또박또박 키보드를 눌렀다.
“안녕?”
“나 누군지 알어? ㅋㅋㅋ, 지금 어디니?”
“집이야.”
홍수는 저도 모르게 집이라고 대답해버렸다. 글을 보내고나서야 홍수는 저도 몰래 거짓말을 한 자신이 사뭇 못나게 느껴졌다. 집에서 기다릴 어머니의 모습도 머리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홍수는 “선녀”를 놓치고싶지 않았다. 집이라고 했으니 그냥 집인것처럼 하고 대화를 나누자 생각하며 넌지시 물었다.
“처음 보는 아이딘데 누구지?”
“그럴거야, 하지만 아직은 비밀.”
“왜 비밀인데?”
“너무 빨리 알면 싱겁잖아? 모든것이 그래, 너무 익숙하면 맛이 없거든.”
홍수는 대방이 참 묘한 애라고 생각되였다. 줄것처럼 하면서도 감출줄도 아는 씹을 맛이 있는 애라고 생각되였다. 홍수는 이런 애들앞일수록 둔한것처럼, 철 없는것처럼 덤벼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 남자친구가 있니?”
“ㅋㅋㅋㅋㅋㅋ…”
“왜 웃는데?”
“너, 참 급한 애구나. 몇살인데 벌써 그런 궁리를 하니?”
“인젠 생각할 때가 됐지. 우리 어머니는 늘 옛날 같으면 장가라도 들었겠다 하시는데.”
“하긴 일곱살에도 장가가는 세월이 있었다고 하더라만.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본다. 공부할 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먼저 중점고중에 붙고 그다음 명문대학에 가서나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홍수는 “선녀”가 보내온 글을 읽으며 그 애가 화사한 해살만치나 해맑던 얼굴같이 말도 해박하게 할줄을 안다고 생각했다. 홍수는 이런 애와 함께라면 고독도 외로움도 없을것 같다는 상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속에 없는 소리를 한마디 했다.
“말하는것 하구는. 너, 참 우리 어머니 같다.”
“왜 그렇게 말하지?”
“너의 말에 철리가 쫘르르 흐르잖아. 어머니대가 아니구서야 어쩜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겠니?”
“ㅋㅋㅋ, 기분이 좋아지는가? 아니, 꿀꿀해 지는것 같기도 하구. 그래, 너도 빨리 너의 엄마를 친구해드려라. 난 빨간 사과나 추렴하며 잠간 세상 사는 옛말이나 보겠다.”
홍수가 미처 인사를 하기도전에 “선녀”가 먼저 “안녕!” 하고 글을 띄워보내고는 메신저에서 사라졌다. 홍수는 파아란 잔디가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컴퓨터의 배경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구픈 웃음을 킥 날렸다.
진짜 “선녀는 없다”로 되여버렸던것이다. 엄마를 동무해드리라던 “선녀”의 말이 귀전을 스쳤다.
집이 가까와올수록 홍수는 가슴이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방금 PC방에서 나올 때의 무르익은 홍시 같던 감흥은 해볕을 만난 안개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흑구름이 감돌아있을 어머니의 얼굴이 무시로 눈앞에서 언뜰거렸다. 잘못하면 폭우도 퍼부을지 모른다는 근심까지 머리를 쳤다.
(어떻게 하면 오늘밤, 젖지 않을가?)
홍수는 부지런히 속구구를 하며 집을 바라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B

홍수는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흠칫 손을 멈추고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아들었다. 어쩜 지금쯤 벼락이 치려고 먹장구름이 몰려오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 판에 버젓이 초인종까지 눌러 내가 왔노라 시위한다면 모르기는 해도 단번에 벼락이 떨어져 머리를 칠것 같았다. 홍수는 조심스레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찰칵,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수는 천천히 출입문을 당겨 열었다. 다행히 객실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후―”
홍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을 집안에 들이밀었다.
“인제야 오는거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홍수는 혀를 홀랑 내밀며 “네!”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인젠 밥을 먹어도 되겠구나. 참, 겨우 참았네.”
아버지도 침실에서 짧은 바지 바람으로 나오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안의 분위기를 보니 의외로 벼락까지 칠것 같지는 않았다. 홍수는 자기의 침실에 들어가 가방을 벗어놓은후 인차 편한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과 손을 씻었다.
“뭐 하니? 빨리 와라.”
주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울렸다. 홍수는 “네―” 하고 대답하며 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식탁에 앉아서 홍수를 기다리고있었다. 홍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발볌발볌 식탁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 밥 먹자. 도련님을 기다려 밥 먹으려니 여간 힘든게 아닌데. 어찌된거야? 학교에서 이렇게 늦게 오는거니?”
역시 아버지가 김치찌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가며 먼저 물었다.
“네.”
“너희들 학교에서 이번 학기는 단단히 잡아 쥘 모양이구나. 그렇지, 너희들때는 누군가 뒤에서 자꾸 채찍질을 하며 감독을 하는게 사랑인거다. 그만치 자각이 없는 세대들이니까.”
어머니도 배추김치잎을 집어 손으로 찢으며 홍수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네. 그래요.”
홍수는 머리를 살며시 숙이고 부지런히 밥술을 옮기며 혀아래로 웅얼거렸다. 어머니는 그러는 홍수를 잠간 지켜보다가 방금 찢은 배추김치잎을 홍수의 밥술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왜? 너 무척 피곤해보인다. 배고프지?”
“아니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늦었니?”
홍수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속이 꿈틀해나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인제야 시작되는가?) 하는 근심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그냥 PC방에 들려온다고 말해버릴가? 아니야, 그러면 당금 벼락이 떨어질거야, 지금이 어느때라고 PC방 출입이냐며 소비돈까지 자르면 긁어서 부스럼이거든. 그럼 뭐라고 해? 회의? 복습? 아니면…)
“얘! 혼 나간 애 같네. 무슨 생각을 하고있니?”
“네, 아, 3반 애들하구 롱구시합을 했어요. 제가 주력이였거든요. 이겼어요.”
홍수는 말을 마치고 흘끗 어머니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어머니의 눈길이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고있었다. 홍수는 다시 멋적게 머리를 숙이고 숟가락을 놀렸다. 밥상을 둘러싸고 잠간 사각사각 음식 씹는 소리만 오고갔다. 홍수는 숨막히는 저기압을 느끼며 점점 저 멀리로 달아나버리는 음식맛을 잡을 길이 없었다.
“여보, 당신이 얘기하던 그 애는 지금 어때요?”
어머니가 화제를 돌렸다.
(뭔 소릴가? 그 애라니?)
홍수는 머리를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굳어진듯싶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야릇한 빛이 흐르고있었다. 아버지께서 김치찌개그릇에 숟가락을 가져가다말고 입을 열었다.
“아, 그 애, 짝사랑하던 녀자애를 칼로 찔러버렸다는 그 애 말이지?”
“네, 그 애가 몇살이라 했죠?”
“열여섯살이라든가? 열일곱살이라든가.”
아버지께서 김치찌개를 한술 입에 떠넣고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출근하는 간수소에 그런 애가 갇혀있는 모양이였다.
“쯧쯧쯧…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이 난다구, 저희들이 무엇을 안다구 짝사랑은 짝사랑이예요. 그럼 그런 애들은 어떻게 되는거예요. 아직은 미성년이니 제대로 판결은 못할거구요.”
“아마 소년범관리소 같은데 보내야겠지. 지금 무서운 애들이 참 많소. 우리 홍수처럼 참한 아들을 둔것도 복인줄 아시구려.”
아버지께서 홍수를 흘끔 건너다보았다. 홍수는 후줄근히 젖지도 못하고 가슴을 조이느니 차라리 “우르릉 쾅!” 하고 우뢰가 우는쪽이 나을것 같았다. 가슴이 침침해서 “펑―” 하고 터지기 일보직전에 이른듯싶었다. 홍수는 수저를 놓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께서 입을 열었다.
“왜? 좀 더 먹지 그러니? 무척이나 배고팠을텐데.”
“배불러요. 천천히 잡수세요.”
홍수는 딱딱하게 한마디 남기고는 인차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사이문을 닫아버렸다. 침대우에 훌쩍 자기의 몸을 던졌다. 충격에 시몬스침대가 슬렁 홍수를 흔들어주었다. 홍수는 두눈을 꼭 감았다. 어금이도 꽉 사려물었다.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정도로 넘어간것이 과연 다행일가? 어쩜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PC방에 들렸다가 온 눈치를 채시면서도 저렇게 시치미를 떼고있는건 아닐가? 진정 그렇다면?)
홍수는 으스스 몸서리를 쳤다. 전라의 몸으로 네거리를 활보하고 난것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비참할라구. 그래 아버지 어머닌 아직도 나를 모범생으로 점찍고있는거야, 그래, 난 모범생이지. 이만하면 모범생줄에 설수 있는거야.)
홍수는 애써 자기를 위해 변명을 해보고싶었다.
(그래, 아직 누구와 싸움 한번 못해보고 오늘까지 오기가 쉬운가? 게다가 반에서 학습성적은 언제나 다섯손가락안에서 오르내렸지. 반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에서 쭉 간부로 활약을 해왔었구… 이쯤하면 모범생인거지 뭐!)
홍수는 자기가 모범생인 까닭을 찾으라면 아직도 열가지는 더 찾을수 있을것 같았다.
마음이 열리자 그 녀자애의 하얀 얼굴이 빠끔히 머리를 쳐들었다. 흑진주같이 반짝이는 까아만 눈이 자기를 바라보며 뭔가 속삭이고있는듯싶었다. 홍수의 입가에는 차츰 홍조가 비껴오르기 시작했다.
(뭐? 선녀는 없다구? 흐흐흐… 유머감각까지 푹 배인 애야, 이런 유머감이야말로 세상을 초개같이 보는 오늘의 우리 모습이지. 헌데 어떻게 하면 그 애의 마음을 열수 있을가? 뭐? 명문대학에나 가서 생각할 일이라구? 와― 그때가 언젠데…)
홍수는 벌떡 일어나 책상서랍에 잠근 자물쇠를 열고 일기책을 꺼내 펼쳤다.
“그리운…”
써놓고보니 싱거운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리운 아들아!” 하고 부르는것 같이 슴슴하고 격정이 없어보였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사랑하는 나의 선녀야? 으― 닭살!!! 아님? ㅠㅠㅠ…)
홍수는 만년필을 일기책 갈피에 끼워놓고 살며시 두눈을 감은채 걸상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하늘에서 하얀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춤추며 내려오고있었다. 선녀는 컴퓨터앞에 내려와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방긋이 웃고있었다. 그러다가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멋지게 엔터키를 눌러 글을 띄워보냈다. 홍수는 마치도 선녀가 보낸 글을 읽는듯 아리송한 환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자, 사과나 한쪽 먹을가?”
갑자기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왔다. 홍수는 깜짝 놀라며 손으로 책상우의 일기책을 덮었다. 홍수의 반상적인 거동에 어머니가 흠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왜 이렇게 놀라니? 일기책에 무슨 큰 비밀이라도 있는게 아니야?”
“아…아니요.”
“이런, 말까지 더벅더벅 더듬으며… 웬 일인데? 홍수야, 숨기지 말고 엄마에게 말해봐라. 혼자서 메고 가기 버거운 일이라면 엄마와 함께 지고 가는것도 나쁘지야 않겠지?”
어머니가 홍수의 옆에 다가서며 들고 들어온 쟁반을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홍수는 당황한 눈길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떠듬거렸다.
“없어요. 그런게 없어요. 어머닌 괜히…”
“그래? 근데 엄마는 자꾸 근심이 앞선다. 요즘 분명 너의 일부 행동이 반상적이거든. 혹시라도 혼자서 너무 힘들지 않을가 근심이 자꾸 나구. 엄마는 언제나 홍수의 편이 되고싶은데… 친구처럼 편한 짝이 되고싶은데…”
어머니는 침대모서리에 약간 몸을 걸치고 앉아 금방 초록을 찾아가는 대지를 어루쓸어주는 봄비마냥 잔잔하게 홍수의 마음밭을 적셔주고있었다. 홍수는 천천히 머리를 돌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말을 마치고 입술을 감빠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도 방금 끝을 맺은 자기의 작품에서 티를 찾는 까끈하고 다정다감한 화가와도 같아보였다.
홍수는 어쩐지 코끝이 시큼해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머니―”
홍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의 옆으로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어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윽한 눈길로 홍수를 지켜보고있었다. 홍수는 어머니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어머니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너, 인제야 마음이 열리는거니?”
“어머니, 방금 PC방에서 오는 길이였어요.”
홍수는 낮지만 진정을 담아서 한마디한마디 마음속 말을 하고야말았다. 어머니는 홍수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여주고는 천천히 홍수의 팔에서 몸을 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늦었구나. 급히 찾을 자료가 있었다면 집에 와서 시름 놓고 찾는게 더 좋았을텐데.”
“그런게 아니구요, 멘저에 올랐댔어요.”
“멘저에? 친구들하구 비밀이야기라도 나눌게 있었니? 얼마나 주요한 비밀인데 그렇게 철통같이 수비를 하는거냐?”
“아니예요. 그런게.”
“그래, 엄마를 믿어줘서 감사하다. 이만하면 너, 나를 짝꿍으로 생각하는거지? 아들, 아자!”
어머니는 홍수에게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가는 실웃음을 입가에 물고 날리듯 침실에서 나갔다. 홍수는 사라지는 어머니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자신이 너무도 허무하고 초라해보였다.
천둥번개를 맞은것이 아니라 잔잔한 봄비에 쓰고있던 가면이 홀라당 씻겨져버려 발가숭이로 네거리에 나선 기분이였다.
(뭐? 어머니 고맙습니다. 멘저에 올랐습니다? 거기다가 어머니의 어깨까지 끌어안구… ㅠ―)
홍수는 어깨를 움씰하며 몸을 떨었다. 어딘가에서 선녀가 자기를 훔쳐보면서 키득키득 웃고있는듯싶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 그 애가 알면 얼마나 웃을가? 남자애가 감상에 빠져가지구? 그래, 난 마음이 여린게 문제야, 어머니의 몇마디 말에 혼이 싹 나가구, 가슴이 울렁거려가지구, 뭐? 딴에는 사내대장부라구? 이 재간을 가지고 그 애의 마음을 훔치겠다구?! 쳇― 이게 아닌데…)
홍수는 벌떡 일어나 오른 주먹으로 왼쪽손바닥을 탁 들이치며 “아자!” 하고 속으로 웨쳐보았다.
홍수는 다시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선녀야:
어제저녁에 멘저에 올라줘서 감사하다. 오늘저녁 우리 멘저에서 다시 만나자. 기다린다. 나무군!”
홍수는 멋지게 몇 글자 갈기고는 종이를 쭉 찢어 그것으로 정성 다해 종이학을 접었다. 홍수는 종이학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소중한 보물이라도 다루듯 정히 가방 겉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 시각 홍수는 래일의 태양을 그려보고있었다.

C

(이걸 어떻게 줘? “어제밤 멘저에 올라줘서 고마왔다?” 이― 그럼 너무 직설적이잖아, 무드가 없어. “웬 남자애가 저래?” 하고 웃을걸, 그럼? 슬그머니 히쭉 웃으면서 “얘, 이걸?”, 그러다 그 애가 일부러 “이게 뭐니?” 하고 샐쭉하면서 안 받는것처럼 하면 어떡하지? 아하!)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있을 때 홍수가 타야 할 5선뻐스가 북쪽에서 구을러오는것이 보였다. 홍수는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종이학때문에 안절부절 못했다. 더는 주밋거릴 시간이 없었던것이다.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호주머니속에서 열번도 더 날아나오려고 하는 종이학을 “선녀”에게 보내줘야 했던것이다.
5선뻐스는 칙― 소리를 내면서 역에 와서 멈추어섰다. 홍수는 호주머니에서 종이학을 꺼내들었다. 잠간 머뭇거리다가 “선녀”의 앞에 다가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얘, 읽어봐라!”
홍수는 “선녀”를 향해 수집게 한번 씩 웃어보이고는 그의 반응도 살필 새 없이 몸을 돌려 뻐스에 뛰여올랐다. 뻐스는 “삐이익―” 문소리를 내며 부르릉 떠났다. 홍수는 뻐스창문에 붙어서서 뚫어지라 “선녀”를 바라보았다. “선녀”는 뜻밖의 놀이감을 받아쥔 익살궂은 소녀처럼 종이학을 이리저리 돌려보고있었다.
(풀어봐, 어서 풀어보라니까.)
뻐스는 점점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참, 그 애가 지금쯤은 종이학을 풀어보고있을가? 만약 풀어보고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있을가? 흐흐흐, 날보고 참 멋진 애야! 하며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일지도 몰라. 그래, 잘한거야! 종이학을 줄 때 아마도 나의 모습이 무척이나 터프해보였을걸, ㅋㅋㅋㅋ… “얘, 읽어봐.” 목소리가 약간 떨렸던가? 그래도 괜찮지 뭐, 터프한 속에서 흐르는 약간의 격동, ㅋㅋㅋ…)
평소에는 멀게만 느껴지던 상학길이 오늘은 아름다운 상상때문인지 반이나 짧아진듯싶었다.
홍수는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교실에 들어섰다. 언제나와 같이 교실에는 일찌기 학교에 오는 몇몇 동학들이 앉아서 열심히 교과서를 뒤적이고있었다. 홍수는 얼굴에 웃음을 담고 들어서며 동학들을 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아침―”
동학들이 약속이나 한듯 머리를 들어 홍수를 바라보았다.
“얘, 오다가 길에서 모아바이라도 주었니? 큰걸루?”
옆에 앉은 정호가 자리에 앉은 홍수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홍수는 시물시물 웃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여?”
“너의 얼굴에 그 정도는 씌여져있다. 아님, 그렇게 입이 귀에 가 걸릴수 있을가?”
“그래? 모아바이 한장에 이렇게 흥분을 할 내가 아니지.”
“그럼? 그보다도 더 엄청난 기쁨이라? 어허― 수상한데. 뭘가? 아! 그렇지?”
정호가 별안간 알겠다는듯 오른손을 쫙 펴서 책상을 탕 내리쳤다. 그 바람에 책을 보던 애들이 모두 홍수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호가 시물시물 웃으며 홍수에게 한마디 했다.
“홍수, 너 아침에 해결을 봤구나.”
“뭘, 내가 뭘?”
홍수가 정색해서 정호를 바라보았다. 어쩜 “선녀”에게 종이학을 날린것이 정호에게 발각되지 않았나 속이 꿈틀했다. 정호의 입가에 아릴듯말듯 묘한 웃음이 피여났다.
(이 자식이 분명 눈치 챈거야, 어떻게 안거지?)
홍수쪽에서 되려 궁금증이 나 안절부절 못했다. 정호가 여전히 킥킥거리며 입을 열었다.
“홍수야, 너 아침에 분명…”
“오, 어떻게 알았니?”
홍수가 정호옆에 바싹 붙어앉았다.
“어떻게 알긴, ㅋㅋㅋ… 네가 시원히 큰 문제를 해결하구 기분 좋게 화장실에서 나오는걸 내가 분명 봤는데.”
정호의 말을 듣고난 홍수가 어이없다는듯 주먹으로 정호의 어깨를 쥐여박았다.
“에잇, 유치한 놈!”
교실에서 폭소가 터졌다.
홍수는 수학교과서를 꺼내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기분이 좋아 그런지 어렵기만 하던 수학문제가 술술 잘 풀려나갔다.
홍수는 오전 내내 꿀먹은 기분이였다.
오전공부가 끝나자 담임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오후에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에 방청을 갈 동학들의 명단을 공포했다. 모두 일곱명이였는데 홍수와 정호도 들어있었다.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학급간부들과 웅변에 재간이 있는 동학들 몇명을 뽑은것 같은데 정호는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듯싶었다.
“아자!”
홍수와 정호는 나지막이 쾌재를 불렀다.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는 교원연수학교강당에서 열렸다. 시내 아홉개소 조선족중학교에서 모여온 학생들과 선생님들로 강당은 초만원을 이루고있었다.
관중들은 학교별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교육국 부국장님의 개회사가 있은후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시조선족중학교애국주의교양웅변대회, 첫 연사를 모시겠습니다. ㅅ중학교에서 온 박옥자연사입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사회자의 도어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졌다. 첫 연사라 모두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정호가 홍수의 귀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피씩 웃으며 속삭였다.
“박옥자, ㅋㅋㅋ… 왕청에 사는 우리 이모가 생각난다.”
“왜? 하필이면 너네 이모야?”
“촌티가 줄줄 흐르잖아? 박옥자가 뭐야?”
두손을 가슴아래로 들어보이며 뚱뚱한 모습을 그리는 정호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어려있었다.
장내에서 또다시 박수소리가 울렸다. 홍수와 정호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무대우에 눈길을 던졌다. ㅅ중학교에서 온 연사가 무대우에 올라서 관중석을 향해 허리를 굽혀 곱게 인사를 하고있었다. 연사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헉!”
순간 홍수는 호흡이 뚝 멎는듯싶었다.
(저 애가, 저 애가, 그래! 나의 선녀야.)
홍수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헤벌리고 무대우에서 눈길을 뗄줄 몰랐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애국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해빛 따스한 교실에서 마음껏 지식의 바다를 헤염치며 저는 늘 이런 생각을 굴려봅니다…”
격정에 떠는듯한 “선녀”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 강당에 울려퍼졌다.
“그래, 넌 뭐라고 생각하니?”
정호가 홍수의 넙적다리를 툭 쳤다. 홍수는 깜짝 놀라 정호쪽에 머리를 돌렸다.
“어, 좋아하는거지 뭐.”
“뭐가?”
“뭘 물었는데?”
홍수는 정신을 추스리며 정호를 건너다보았다. 달콤한 기분을 망그러뜨린 정호가 입안에 들어온 사탕을 빼앗아가기라도 한듯 밉고 야속스러웠다.
정호가 홍수를 건너다보며 시무룩이 웃었다.
“박옥자는 아닌것 같은데. 참 아깝다.”
“뭐가?”
“저 애, 저 애가 박옥자래.”
“그런데? 너, 저 앨 아니?”
“아니 몰라. 이쁘잖아…”
“이쁜데는?”
“좋거든, 보기만 해도. ㅋㅋㅋ…”
“짜식!”
홍수가 눈을 뒤집으며 못마땅한듯 정호를 흘겨보았다. 정호는 홍수의 기분을 아직 읽어내지 못하고있었다.
“아깝잖아.”
“뭐가?”
“ㅋㅋㅋ 이름이.”
“이름이 왜? 그럼 넌 저 애 이름이 뭐가 됐으면 좋겠는데?”
“섹시하게. 저 애 얼굴처럼 아름답게.”
“자식,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홍수는 주먹으로 정호의 어깨를 슬쩍 쳐주면서 머리를 돌리고 무대우에 눈길을 주었다.
“애국이란 말로만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실제 행동으로, 나부터 실천해야 하는것입니다. 학생인 우리의 실제 행동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기의 신분에 충직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자기를 성숙시켜나아가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각부터, 나부터 진정 애국의 주인공으로 되자고 이 연사는 소리 높여 호소합니다.”
“선녀”는 머리우로 두주먹을 올려 힘껏 흔들며 격앙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장내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홍수도 그 소리에 섞여 무대옆으로 사라지는 “선녀”를 바라보며 죽어라 두손을 마주쳐댔다.
“어때? 보통이 넘는 애지?”
“근데, 넌 왜 이렇게 흥분하니?”
정호가 이상하다는듯 야릇한 눈길로 홍수를 바라보았다.
“자식! 그럴만한 일이 있어.”
홍수는 정호에게 두눈을 끔쩍해보였다. 가슴이 활랑거리는것이 이 세상을 다 안은듯한 기분이였다.
웅변대회를 끝내고 밖에 나와보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진지 이슥한 때였다.
(어쩔가? 기회를 봤다가 그 애를 불러가지고 함께 집으로 갈가?)
피뜩 홍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였다. 하지만 인차 머리를 저었다.
(아니야, 약속대로 메신저에서 보는거야, 지금 만나서 집적거리면 사내대장부가 그새를 못 참는다고 웃을지도 몰라. 그래, 보고싶어도 참는거야.)
홍수는 먼저 어머니에게 웅변대회가 아직 끝나지 않아 늦어질것 같다는 거짓전화를 넣은 후 속웃음을 실실 날리며 흐뭇한 마음으로 PC방에 들어섰다.
수금원녀자는 오늘도 질겅질겅 껌을 씹어대고있었다. 홍수는 수금원녀자에게서 자리번호를 새긴 패쪽을 받아가지고 컴퓨터앞으로 다가가 파워버튼을 눌렀다.
컴퓨터가 날카로운 전자음을 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선녀는 없다”가 먼저 메신저에 올라있었다.
(참, 의리가 있는 애야, 속이 깊은 애라니까!)
홍수는 아끼고있는 소중한 보석을 찾았을 때처럼 가슴이 활랑거렸다.
“할룽―”
홍수가 먼저 인사를 보냈다.
“어디니?”
“선녀는 없다”가 뒤따라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
홍수는 잠간 망설였다.
어제밤에 생각없이 집이라고 대답을 보낸것이 속에 걸렸던것이다.
(그래, 제대로 대답하자. 그게 이 애에 대한 례의야.)
홍수는 “선녀”의 얼굴을 그려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금 PC방이거든. 하학하는 길에 곧장 들렸어. 너 이름이 박옥자 맞지?”
홍수는 엔터키를 누르며 혼자서 히쭉 웃었다.
낮에 이름을 들으며 정호가 왕청에 사는 이모를 떠올리던 생각이 났던것이다.
“왜, 이 시간에도 PC방에 있는데? 집에서 얼마나 기다리겠니?”
“선녀”는 이름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아칠하게 높이 있는 년장자마냥 공식적으로 물어왔다. 홍수는 글에서 풍기는 설교비슷한 냄새를 흠씬 맡으며 잠간 뭐라고 답을 썼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정말 이름만치나 고풍스러운 앤가? 열정에 들떠 애국을 부르짖더니 정말 머리속에 빠알간 물감만 그득 찬건가?)
홍수는 용기를 내서 한번쯤은 그 애와 다른 냄새를 풍기는 당당함을 보여주는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약속은 지켜야잖니? 난 말하면 말한대로 하는 남자거든. 멘저에 올라줘서 고맙다.”
“약속? 난 약속이란 아무렇게나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하지 않은 약속은 할 필요도, 지킬 필요도 없지 않겠니?”
역시나 판에 박은듯한 속이 꽉 찬 말이였다. 홍수는 차츰 진주목걸이를 꿰기만치나 힘들어가는 자기들의 대화분위기를 의식하고있었다.
(얘가 일부러 이러는건가? 아님 정말 고리삭아빠진건가?)
실망이라는 두 글자가 기분 나쁜 송충이처럼 머리속을 스멀스멀 헤쳐 지나갔다. 하얀 차림에 파르스름한 가방, 뒤로 모아서 한데 묶은 치렁치렁한 생머리, 그리고 하얀 얼굴에 함초롬히 물고있는 마알간 웃음…
(아니야, 절대로 그 애에게서 삼년 묵은 토장냄새가 날수 없어, 일부러 그러는거야. 분명 그 애는 로맨틱한데가 보였어.)
홍수는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며 대담하게 한발 다가섰다.
“옥자야―”
“??????????????”
“우리 랠저녁, 만날가?”
“……”
“우리 만나자,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 난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참 많거든.”
진정이였다. 홍수는 남자인 자기쪽에서 먼저 그 애에게 진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자기의 진정이 꼭 그 애로 하여금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기의 진심을 들어내게 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선녀는 없다”가 글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뭔 말을 하고싶은데?
너, 너무 스스로가 감상적이다는 생각이 안드니?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리에겐 우리만의 중요한 임무- 학습이라는게 있거든. 시간은 흘러가면 돌이킬수 없는거야.
이 순간도 이 순간에 할 일이 따로 있는거야, 얘, 꿈을 깨라. 현실을 정시하구 사나이처럼 당당하게 현실을 대하자.
우리에게 지금 할 일이 뭔데? 너 총명하니까 정답을 알고있으리라고 믿는다.”
숨막힐 정도로 부지런히 날아오는 글을 읽으며 홍수는 잠간 헤여나오지 못할 소택지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과연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뭘가? 공부? 언제면 끝날지 모르는 공부? 해도해도 끝이 없는 공부? 과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공부뿐일가?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세대차이라고 밀막아붙이겠지만 어쩜 같은 길을 걷고있는 이 애에게서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것일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달통되지 않았다. 어딘가 배심 비슷한것이 꿋꿋이 머리를 쳐들고있었다.
(그래, 만나는거야, 만나서 그 애의 진정을 근 떠보는거야, 그 애도 어쩔수 없는 녀자인거지 뭐, 내숭이 없으면 녀자라고 할수도 없는거구. 에잇, 깜찍한것.)
홍수는 제 생각에 머리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알았다. 너의 설교를 듣고나니 앞이 다 환해지네. 래일 만나서 너의 정치강의 한시간 더 들어줄게. 약속, 우리 만나는거다.”
홍수는 멋지게 오른손 약지를 놀려 글을 띄웠다.
“꼭 만나야 해?”
“그럼!”
“그래, 좋다. 래일저녁 8시에 만나. 마을 뻐스역에서!”
“와~”
홍수는 오른 주먹으로 자기의 넙적다리를 탁 내리쳤다. 미칠것만 같았다. 살아숨쉬는듯 생생한 선녀도가 클로즈업되여 머리속을 꽉 채우며 펼쳐졌다.
(너, 참 멋진 면이 있어. 남자의 매력이 풍긴단 말이야.)
“선녀”가 분명 이렇게 속삭이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홍수는 으스스 어깨를 떨었다.
다시한번 모니터에 뜬 글을 읽으며 어깨를 쩍 벌려보았다.
홍수는 무척이나 성숙되고 당당해진 자신을 보는듯싶었다.

D

“홍수야, 아버지는 우리 한번 참답게 대화를 나눌 필요성이 있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사뭇 정색해서 홍수를 건너다보며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그 서슬에 홍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아버지를 건너다보았다. 아버지는 어느새 깔끔하게 경찰복장을 차려입고계셨다.
(아버지께서 웬 일로 대화를 청하실가? 오늘밤, 지금껏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홍수는 아버지가 이상스럽게 생각되였다. 아까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와 “늦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때도, 저녁밥을 먹을 때도, 아버지의 표정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헌데 홍수가 저녁밥을 다 먹고 침실에 들어오자 아버지께서는 기다렸다는듯 이렇게 경찰복장까지 차려입고 침실로 따라 들어온것이다.
(낮에 어머니께 웅변대회가 늦게 끝나서 늦어질것이라고 전화를 했으니 오늘 늦어진 일을 가지고는 다른 의심이 없을것이고… 혹시 어제저녁에 내가 PC방에 갔던 일을 어머니께서 아버지에게 일러바친것이 아닐가? 에잇, 녀자들이란 믿을수 없다니까!)
홍수는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한번 아버지를 힐끗 훔쳐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진채로 있었다.
“이야기하세요.”
홍수는 혀아래로 기여들어가듯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아버지께서 홍수의 앞으로 한뽐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우리 서로 실말을 하기로 하자. 서로 속이기 시작하면 자연히 믿음이 없어지고 믿음이 없어지면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겠지?”
“알았어요, 아버지, 무슨 말씀 하고싶은데요? 잘 들을게요.”
홍수는 아버지께서 말머리에 다는 긴 볏이 사뭇 부담스럽게 생각되였다. 아버지는 평소 홍수와 이야기를 할 때 종래로 이렇게 긴 볏을 달아본적이 없었다.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하고싶은 말씀만 하고 하회를 기다리군 했던것이다. 전에 없던 행동을 보이시는 아버지의 표정도 여느때없이 경직되여있다고 생각하며 홍수는 다시한번 아버지의 표정을 읽었다.
“그래, 홍수야, 우리 약속한거다. 말해봐라, 오늘 어째서 이렇게 늦었니?”
“웅변대회가 늦게 끝났어요,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더랬는데요.”
홍수는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다 이야기했을텐데 하는 투로 별생각없이 가볍게 대답해버렸다.
“오, 웅변대회가 늦게 끝났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크게 떨리고있었다. 아차! 홍수는 순간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쳤다. 오늘밤 대화의 시작을 잘못 뗀것이 아니냐는 위구심이 몰려들었다. 드디여 아버지께서 오른발을 탕 하고 들었다 놓으며 소리쳤다.
“임마! 뭘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그 서슬에 홍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리고있었다. 홍수는 아버지의 이같이 성난 모습을 보는것이 처음이였다. 홍수는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손으로 걸상등받이를 꾹 짚고 서서 아버지의 입술만 지켜보았다.
“정말 실망이다. 홍수야, 아버지는 여태껏 우리 홍수만은 굳게 믿었거든. 자기절로 자기를 단속할줄 알고 분촌은 얼마든지 잡아가며 행동할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이다. 헌데 너, 다시한번 묻는다, 어디 가서 뭘 하다가 인제야 왔어!”
“저…저, 아버지.”
“또 웅변대회가 늦게 끝나서 늦었다고 말 할래?”
“아…아니요.”
“솔직하게 말해봐!”
홍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이글이글 타고있었다.
“치…친구 집에 갔다가 느…느…늦었어요.”
“그래, 친구 집에 갔다가 늦었지. 말해봐. 친구, 누구네 집에?”
“저…정호요, 정호네 집에요.”
“끝까지 곧은길로는 안 가려는군, 자식!”
아버지는 거쿨진 손바닥을 쫙 펴서 홍수의 얼굴을 힘껏 갈겨주었다. 순간 홍수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왜 때려요?”
홍수는 얼얼해나는 얼굴을 싸쥐고 아버지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왜 때려? 것두 말이라고 묻니? 정호가 널 찾아 전화가 왔었는데 그래도 거짓말을 하고싶니?”
홍수를 쏘아보는 아버지의 눈길은 완전히 범죄자를 다룰 때처럼 경멸에 차있었다.
“오늘밤, 시간을 준다. 잘 생각해보고 래일아침, 정답을 내놔봐. 그래도 거짓말이 나오는가 보자!”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침실을 나갔다. 경찰복을 차려입은 아버지의 우람한 뒤모습은 홍수에게 말 못할 위압감을 주고있었다. 홍수는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깊고깊은 나락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많이 늦어지는가요?”
객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소.”
아버지의 대답이였다. 이어 “쾅” 하고 출입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나가셨다.)
딱히 뭘 바라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홍수는 아버지께서 이 순간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속을 맴돌았다. 홍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니께서는 뭘 하고계실가?)
어머니의 표정이 어떠한지 무척이나 궁금해났다. 홍수는 사이문에 잠간 귀를 가져다대고 객실의 동정을 살폈다. 잠잠한것이 객실에서 무거운 고요가 흐르고있는듯싶었다. 홍수는 살그머니 사이문을 밀어열고 객실로 나갔다. 어머니는 텔레비죤도 켜지 않은채 그린듯이 쏘파에 앉아계셨다. 홍수는 일부러 “으흠!” 하고 건가래를 떼며 어머니를 흘끔 훔쳐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셨다. 아예 홍수의 존재는 잊은듯했다. 약간 서운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홍수는 주방에 들어가 일부러 고뿌를 식탁에 딸랑 부딪쳐 소리를 내고는 정수기에서 생수를 뽑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홍수는 다시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면서 객실에 눈길을 던졌다. 어머니는 여전히 쏘파에 굳어진듯 앉아서 인정에 다욕한 마귀할멈처럼 으스러지게 자기의 감정을 끌어안고있었다.
홍수는 침대에 몸을 던졌지만 두눈이 올롱해나면서 도무지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왕―” 소리를 내는 홍수의 머리속으로 육박해오고있었다.
“오늘밤, 시간을 준다. 잘 생각해보고 래일아침, 정답을 내놔봐. 그래도 거짓말이 나오는가 보자!”
그 시각, 아버지의 날이 선 목소리가 홍수의 귀전을 때리고있었다. 가슴이 갑갑해났다. 래일아침, 래일아침에 마주하게 될 아버지의 얼굴이 그처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래일아침, 과연 아버지에게 무엇이라고 대답을 준담?) 홍수는 정말 “선녀”와 메신저를 하느라고 늦었다고 이실직고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앞에서 그것까지 밝혀지는 날이면 아버지의 그 거쿨진 주먹이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하다면 래일아침, 아버지께 뭐라고 말해? 또 거짓말을 해?)
홍수는 첫 단추가 잘못 채워지면 아래 단추도 내리내리 잘못 채워지게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홍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에서 쪽배 같은 쪼각달이 외롭게 흐르고있었다. 까아만 밤하늘에서 홀로 가는 쪼각달을 쳐다보노라니 저도 몰래 서글프고 외로운 생각이 갈마들었다.
(달은 어디로 가고있을가? 무슨 일로 저리도 외롭게 가는것일가?)
홍수는 도로 침대에 누워 두눈을 꼭 감았다. 어제밤처럼 어머니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어머니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고싶었다. 하지만 오늘밤, 홍수는 어머니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런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쳤다. 사람과 사람지간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보듬어 안으려면 그 상대가 누구든간에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사실로 증명이 되는것 같았다.
“휴―”
삼뭉치 같은 한숨이 홍수의 침침한 가슴을 훑고 지났다.
(랠아침, 아버지께 “선녀”와 메신저를 하느라 늦었다고 실토를 해야 할가?)
홍수는 다시한번 똑같은 물음을 자기에게 던졌다. 이 시각에 와서 홍수는 아까처럼 아버지의 손바닥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실토를 하고 난후 자기가 처할 처지가 더 근심되였다.
(아버지는 분명 다시 “선녀”와 거래를 하겠는가고 물을것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수 있을가? 나에게는 과연 “선녀”와 다시 거래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건가?)
홍수는 홀연 눈앞에서 춤추는 선녀를 보았다. 선녀는 하얀 날개옷을 하늘거리며 운무처럼 하늘을 날아오르고있었다. 다시는 그 선녀를 보지 못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미칠것만 같았다.
홍수는 책상앞으로 다가가 서랍에 잠근 자물쇠를 열고 일기책을 꺼내서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나무군은 선녀를 찾아야 한다. 꼭 찾아 떠나야 한다. 나무군은 선녀를 놓칠수 없다.”
홍수는 멋지게 마침표를 찍고는 만년필을 일기책 갈피에 척하고 내려놓았다.
그날 밤, 홍수는 꿈에 선녀를 보았다.
선녀가 아득히 먼곳에서 홍수를 향해 손짓을 하고있었다. 홍수는 한달음에 선녀를 향해 달려가지 못하는것이 죽도록 안타까왔다. 하지만 선녀와 홍수 사이에는 깊고깊은 골짜기가 가로놓여있었다. 홍수는 그 골짜기를 날아 넘으려고 두팔을 힘껏 퍼덕거려보았다. 아래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워나서 도무지 날수가 없었다. 홍수는 해리포터처럼 마술의 비자루라도 있다면 타고 갈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홍수는 애타게 점점 무거워지는 아래다리를 꼬집다가 눈을 떴다.
홍수의 손은 허벅다리를 누르고있었다. 그때 허벅다리는 흥건히 젖어있었다. 홍수는 손에 묻어 찐득찐득한 액체를 살펴보면서 말 못하게 가슴이 찜찜해났다.
홍수는 부석부석한 두눈을 비비며 일어나 알람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시 반이 좀 넘은 뒤였다.
피뜩 머리속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또 어제저녁에 어디 가서 돌아다니다 왔는가를 따질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지?)
역시 정답이 없는 물음이 홍수의 머리속을 치고 들어왔다. 홍수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조용조용 교복을 찾아 입었다. 그리고 시간표를 보면서 가방에 교과서를 바꿔 넣었다.
홍수는 아버지 어머니를 깨울가 두려워 세수도 못한채 살그머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후―” 하고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후에야 어찌 되든간에 이 시각만은 용케도 아버지의 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니 한시름이 놓였던것이다.


E

뻐스에서 내린 홍수는 교실을 바라고 여드레 팔십리 걸음으로 늘쩡늘쩡 걸었다. 다른 때 같으면 10분이면 걸을 길을 얼마나 더 걷는지 몰랐다. 학교옆에 있는 식품상점을 지나노라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먹구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어디 먼저 먹구보자.)
김밥 한곽을 게 눈 감추듯 먹고 음료까지 한병 꾸르륵 해치우니 아래배가 든든해진것 같았다. 홍수는 상점 동쪽 벽에 걸려있는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6시 30분, 여느때보다 십분쯤 일찍 했지만 그래도 교실문은 이미 열어놓았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홍수는 상점에서 나와 학교를 바라고 발걸음을 옮겼다.
“홍수야―”
금방 학교 대문에 들어서자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수는 소리를 따라 뒤로 머리를 돌렸다. 정호가 헐레벌떡 뛰여오고있었다. 정호를 보는 순간 홍수의 머리속에는 문제의 어제밤이 떠올랐다.
(정호, 저 자식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해바쳤다고?)
홍수는 가슴속 밑자락으로부터 뭔가 욱하고 올리치미는것을 느꼈다. 홍수는 걸음을 뚝 멈추고 정호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호는 아침에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번지르르 번지고있었다.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자기는 좋아 죽겠다는듯 해시시 해있는것이 보기만 해도 미워났다.
“얌마, 너 어제밤에 정말 좋은 일을 했더구나.”
“홍수야, 미안, 사실은 너에게 수학숙제를 물어보려구 전화했었는데 네가 집에 없더구나. 어데 갔댔니?”
“왜? 알고싶어?!”
홍수가 무서운 눈길로 정호를 향해 찔 흘겨보았다. 홍수의 그 눈길에 정호는 혀를 날름해보이며 한풀 기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홍수야, 왜 그러니? 너, 설마 나의 전화땜에 고역을 치른건 아니지?”
홍수는 가슴에서 치솟는 울분 그대로 정호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자식,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전화야? 내가 아버지에게 왕창 터지니 너 깨고소한거지? 아침도 못 먹구 도망쳐나왔다. 너 어쩔래?”
한바탕 퍼붓고나니 속이 다 후련해났다. 정호가 홍수를 훔쳐보며 떠듬떠듬 변명을 했다.
“너의 아버지가 별말씀이 없이 그저 함께 웅변대회에 갔댔냐고 묻기에 첨엔 그냥 함께 갔었다고 말해버렸다. 너의 아버지가 나에게 네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었냐고 물어서야 나는 네가 집에 들어가지 않은것을 알게 됐거든. 근데 너 어디 갔댔니? 그 시간에?”
정호가 무척이나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듯 홍수곁에 한발 다가섰다. 홍수는 타는듯한 눈길로 정호를 쏘아보다가 한마디 하며 돌아섰다.
“달나라에 갔다가 왔다. 됐니?”
“홍수야, 홍수야―”
뒤에서 정호의 부름소리가 바람에 날려왔다. 홍수는 시끄럽다는듯 머리도 돌리지 않고 교실을 바라고 씨엉씨엉 걸음을 재촉했다.
첫 시간부터 숙제검사가 있었다.
“자, 오늘도 파도를 거슬러올라가신분들이 계시겠죠? 그 얼굴을 한번 자랑해볼가요?”
언제나 반어법을 구사해서 동학들속에서 “꺼꾸로 샌님”이라 불리우는 수학선생님이 한손으로 교탁을 떡하니 짚고 서서 시물시물 웃으며 동학들을 내려다보았다.
(아차, 수학숙제!)
홍수의 머리속에서는 “윙―” 하고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맘때면 단골로 일어서는 몇몇 동학들이 삐딱하니 책상모서리를 짚고 섰다. 홍수는 차마 따라 일어설수 없었다. 여느 동학들처럼 이런 장면에 습관이라도 됐더라면 이다지 난처하지는 않을것 같았다.
“자, 거룩하신 얼굴들이 다 나타나셨나?”
수학선생님이 동학들에게 다시한번 눈길을 주었다. 홍수는 마지못해 머리를 푹 숙이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수학선생님이 퍽 놀라는 눈치였다.
“저런저런, 간부님도 계시네. 인젠 간부들이 앞장서서 모범역할을 하시겠다? 참 좋습니다. 좋아요. 자 거룩하신분들 모두 잘 들으세요. 시간이 끝난 다음 왜서 수학숙제를 못해오셨는지 시말서를 써서 올리세요. 이만, 오늘시간을 보겠습니다.”
수학선생님이 교과서를 번졌다.
정말 요강덮개로 물 떠먹은 기분이였다. 홍수는 중간체조시간에 나갔다 오고는 오전 내내 교실에서 책상에 머리를 틀어박고있었다. 정호가 그러는 홍수를 보기 미안한지 옆에서 집적거렸다. 홍수는 그러는 정호의 행실이 마치도 병 주고 약 주는 시누이 같아서 여간만 밉지가 않았다. 정호는 그런줄도 모르고 지겹게도 홍수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아, 괜찮대두. 남자가 이 정도 좌절이야 웃으면서 넘길수 있어야지. 매일 숙제를 안해서 선생님께 욕을 보는 애들이 어디 한둘이니?”
“……”
“그리구 어제밤의 일도 그렇지. 너의 아버진 벌써 그 일을 까맣게 잊고있을거다. 그럴거라니까. 근데 홍수야, 너 어제밤에 진짜 어디 갔댔니? 설마 련애하러 갔던건 아니지?”
평소 같으면 그저 “실컷 씨부렁거려라!”하고 흘려버릴 말이였지만 그 순간만은 꼭 마치도 무엇인가를 비꼬아 시까스르는것처럼 들려서 도무지 참을 길이 없었다. 홍수가 책상을 탕 내리쳤다.
“너, 그냥 씨부렁거려?”
정호가 깜짝 놀라서 입을 하 벌리고 홍수를 건너다보다가 키득키득 웃어댔다.
“너, 어쩌라구 깜짝깜짝 소리쳐 사람을 놀래우니? 별소리도 아닌데.”
“에잇, 질려. 질린다구!”
“야, 웃자구 한 말인데 진짜 성격을 내는게 아니니?”
정호의 기분도 차츰 흐려지고있었다. 홍수는 그러는 정호옆에 탁 하고 침을 뱉으며 코웃음을 쳤다.
“웃어? 웃음이 나오니? 발랑개비 같은 자식!”
“발랑개비라구? 너 말 다했니?”
정호가 홍수의 턱밑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래, 다했다. 어쩔래?”
홍수가 주먹으로 정호의 가슴을 한대 툭 쳐버렸다. 정호도 지지 않고 홍수를 향해 슬쩍 주먹을 날렸다.
“속이 좁아가지구, 뭔 일을 하겠니? 뭘 대단한 일이 터졌다구, 오늘 내내 이렇게 궁시렁거리니? 남들은 진작 잊어버린지 오랜데?”
“그래, 내 속이 좁은걸 인제야 알겠니? 흥, 너 같은 새끼를 친구라고…”
홍수는 코앞으로 다가서는 정호를 옆으로 밀치며 몸을 돌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정호가 옆으로 나가 너부러졌다. 정호가 발딱 일어서며 홍수에게로 덮쳐왔다. 홍수는 주먹으로 정호의 얼굴을 냅다 갈겼다. 정호의 코구멍에서 뻘건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를 본 정호가 “악―” 소리 지르며 죽기내기로 홍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그냥 놀음으로 생각하고 지켜보고있던 동학들이 욱 몰려들어 싸움을 뜯어 말렸다.
홍수는 그러는 친구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나쁜 새끼, 소박채가 쥐구멍만해가지구. 가다가 뒈지기나 해라.”
정호의 앙칼진 욕설이 홍수의 등을 사정없이 때리고있었다.
한숨에 학교밖으로 피해 나온 홍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물아물해지는 눈길로 멍하니 학교건물을 바라보았다. 고역 같던 오전일상이 언뜻언뜻 머리속을 스쳐서 다시는 학교안으로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에잇―”
홍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가 보니 어느새 ㅅ중학교에 거의다 오고있었다.
(왜? 내가 왜 여기로 왔을가?)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입가에 가는 실웃음이 피여났다. 아름다운 선녀도가 아늑하게 눈앞에 펼쳐지고있었다.
(오늘밤 8시, 마을 뻐스역에서!)
“선녀”와의 약속이 뇌리를 쳤다.
(그래 만나는거야, 만나서 나의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는거야, 그 애라면 나의 마음을 리해할수 있을것이고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수 있을것이야, 저녁 8시, 그래 만나는거야.)
홍수는 터질듯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어디에 주체할 길이 없었다. 홍수는 손가락을 비벼 딱 소리를 내며 풀을 만난 망아지마냥 앞으로 뛰여갔다.
오후 내내 PC방에서 컴퓨터와 씨름을 하며 끝내는 밤 8시를 눈앞으로 당겨왔다. 홍수는 미리 결산을 하려고 카운터로 다가가 10원짜리 돈을 건네주었다. 수금원녀자가 질근질근 껌을 씹으며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얼굴도 돌리지 않고 서랍에서 1원짜리 한장을 꺼내 홍수앞에 던졌다.
(아홉시간?)
홍수는 저로서도 흠칫 놀랐다. 그제야 아직 점심밥도,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홍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가 7시 45분을 가리키고있었다. 홍수는 PC방에서 나와 곧추 마을 뻐스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의 뜻이였기에 서로를 리해하면서
행복이라는 보짐을 메고 눈부신 사랑을 했죠…”
홍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뻐스역에는 사람이 없었다. 홍수는 가로등 불빛을 빌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56분이였다.
(4분, 4분만 있으면 “선녀”가 나타날것이다. 그 애는 분명 약속을 지킬것이다.)
홍수는 흥분으로 하여 가슴이 폭발할것만 같았다. 홍수는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선녀”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그 애를 만나서 어떻게 말을 걸가? 나와 줘서 감사하다? 이― 너무 맹맹하잖아. 격정이 없단 말이야, 기다렸다. 난 널 진심으로 좋아한다? 으― 닭살!)
홍수가 깨고물 같은 생각을 혼자 굴리며 활활 타는 눈길로 어둠을 가르고있을 때 남쪽 아빠트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홍수는 가슴이 쿵쿵 방아를 찧었다. 홍수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점점 가까와오고있었다.
(아니잖아?)
익숙한듯하면서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모습이였다. 홍수는 바람 빠진 기구처럼 어깨가 처져내렸다. 홍수는 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혹시나 그리운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처량한 가로등아래로 음침한 정적만이 무겁게 흐를뿐이였다. 홍수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계는 8시 3분을 가리키고있었다.
(이럴수가 없는데, 이럴수가 없는데…)
홍수는 속으로 아파지려는 자기의 마음을 보듬으며 머리를 돌렸다.
“앗!”
홍수는 순간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두어발 떨어진 곳에 어머니가 그린듯이 서있었다. 옳았다. 아까 분명 익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머니하고는 련계시키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오래 기다렸니?”
어머니께서 홍수쪽으로 걸어오며 부드럽게 물었다.
“네,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라니? 우리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
“네? 어-머-니!”
어머니께서 홍수쪽으로 한발 다가서며 호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쪽지를 꺼내여 홍수앞에 흔들어보였다.
“아직 때가 아닌거야, 그래서 이 쪽지가 너의 ‘선녀’를 찾아가지 못한것이지. 그날, 엄마가 출근하다가 땅에 떨어져있는 이 쪽지를 주었거든.”
어머니는 잠간 말을 멈추고 홍수의 표정을 읽었다. 홍수는 당금 튀여나오려는 심장을 누르고 서서 애타게 발뿌리로 땅바닥만 우벼댔다.
“세상일이란 이런거란다, 무슨 일이나 때가 돼야 결과가 있는것이지. 아마 이 쪽지가 엄만데로 오는게 제일 합당할것 같아서 하느님이 엄마에게 전해줬나보구나.”
어머니는 말을 마치고 천천히 홍수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머니.”
홍수는 도무지 뒤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어머니앞에 서있는 자신이 그렇듯 작고 초라하게 생각되였다.
(내가, 내가 이 며칠 무슨짓을 한것일가?)
홍수는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홍수야, 엄마는 아직도 홍수를 믿고있다. 엄마는 우리 홍수가 요즘, 고약하게 아픈 사춘기를 앓고있다고 생각한다. 꿈을 꾸고있는거지, 꿈이 깨면 홍수는 꼭 제자리로 돌아와있을거다. 홍수야, 어때?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어머니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홍수의 가슴을 찢고있었다. 홍수는 가슴속으로부터 뭔가 욱 올리밀어 목구멍이 꺽 막혀왔다. 몸을 픽 돌렸다. 눈귀에서 뜨거운것이 맺혔다가 주르륵 굴러 떨어졌다. 홍수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채 둥글어지지도 못한 쪼각달이 망망한 밤하늘에서 정처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있었다.
홍수는 집을 바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우는듯한 노래소리가 쓸쓸하게 어둠을 가르며 홍수의 뒤를 밟고있었다.

선녀를 찾아주세요, 나무군의 그 얘기가
사랑을 잃은 이내 가슴에 아련히 젖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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