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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산소에 가져갈 음식을 준비하며
래일이 청명이다. 해마다 그러하듯이 래일엔 고향에 모셔져있는 부모님의 산소로 가서 가토도 하고 제도 지내야겠다.
벌써 며칠전에 한국에 계시는 큰형님이 전화를 걸어와서 “막내야, 올해도 네가 수고를 해야겠구나.” 하고 미안한듯 말씀하셨다. 요 몇년간 청명이나 추석때면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와서 하시는 말씀이라 그냥 “시름을 놓소. 해마다 가는건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버렸다. 따져보면 부모님의 산소에 가는것은 해마다 청명에 한번 추석에 한번 치르는 가족의 행사라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믿어오는터였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16살나던 해인 1981년에 일곱달을 사이두고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해수로 따지면 올해가 30년이 되는것이다. 그 30년간 내가 부대에 가있는 7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에 다녀왔던것이다.
지난세기 90년대만해도 형님들이며 형수님들이며 조카들까지 해서 한번에 일여덟명이 함께 산소에가 가토를 하고 제를 지낸후 가지고 갔던 술이며 음식들을 나누어 마치도 가족들놀이 같은 느낌이였다. 그래서 늘 바쁜 일상속에서도 언제면 청명이나 추석이 되여 형제들과 함께 부모님의 산소로 다녀올가 하고 어린애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느낌까지 있었다. 부모님의 봉분을 마주하고 앉아서 형제들과 나누던 그 풋풋한 정이 좋았나보다.
새천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우리 가족에도 외국나들이 바람이 불어치기 시작했다. 먼저 작은 형수가 한국으로 떠나고 다음은 작은 형님이 떠나고 큰형님네 내외가 떠났다. 하여 그후로는 나와 나의 안해가 단촐하게 산소로 다녀오군했다.
형님들이며 형수님들이 떠난후 안해가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부노님 산소에 가지고 간다고 돼지고기며 낙지며 과일이며 사탕과자며를 사들이는것을 보면서 그냥 안해는 그렇게 해야하는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던 안해마저 지난 2월에 한국으로 나가버린것이다. 지난번 형님의 전화를 받은후 (전날에 장마당에 가서 청명날 가지고 갈 음식을 후딱 사면 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있었다.
아침에 안해가 전화를 걸어와서 산소에 갈 준비는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다.
“오후에 나가서 사면 되겠지.”
나는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안해는 전화저쪽에서 근심이 태산 같단다.
“과일을 잘보고 사요. 흠이 있는것을 가지고 가면 안되니까요. 명태나 낙지는 세마리씩 사되 좀이 먹지 않았나 잘보세요. 혹시 명절 때라고 옛날 적치됐던것을 가지고 나올수도있으니 잘 보고 골라야해요.”
안해는 그외에도 돼지고기는 끓일 때 소금을 적당히 넣어야 하고 찹살가루 지짐은 구을 때 반죽을 되게 해서 납짝납짝하게 빚어 구워야 하며 두부는 전날저녁에 물기를 빼놓았다가 구워야 한다는 등등을 구구히 설명해주는것이였다. 나는 어린아이 근심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안해가 고마우면서도 웃음이 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난 추석때였다. 안해가 상소물이라고 사온 사탕이 보기에 먹임직하길래 하나를 꺼내 먹은적이 있었다. 안해는 기절하듯 놀라면서 “부모님 산소에 갈 음식을 왜 먼저 입질하느냐”는것이였다. 안해가 하도 정색을 하길래 나는 허허 웃으며 “우리 엄마는 내가 먼저 먹는것을 뭐라 안하거든.” 하고 받아넘긴적이 있었다. 하지만 안해는 “아무래도 그렇지 산에 갈 음식에 먼저 손 대는 법이 어디 있냐”고 양보하려 않는것이였다. 안해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냥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오후 2시쯤되여 나는 래일 가지고 갈 음식들을 사자고 장마당으로 나갔다. 장마당에는 대부분 아줌마들이였다. 좀 멋적은대로 아줌마들속에 끼워 물건들을 골랐다. 생각같아서는 돈만주면 언제라도 생신한 과일을 살수 있을것 같았는데 정작 과일을 고르니 손이 떨렸다. 안해의 말대로 허물이 없는 과일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던것이다. 어느 과일이나 여기가 아니면 저기에 약간의 허물이 있었다. 안해의 말이 떠올라서 그냥 아무거나 살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내 부모님산소에 가지고 갈 음식인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던것이다. 정말이지 내 손으로 직접 마음을 쓰며 물건들을 고르노라니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감수가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다. 비록 본적도 없는 시부모님산소이지만 갈 때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안해의 마음을 알것 같았다. “손끝에서 정이 돈다”는 말도 이래서 생겨났다보다.
한참을 공들여 산 물건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머리속을 맴도는 진한 그리움 같은것을 새록새록 감지할수 있었다. 비록 내 어린시절에 돌아간 부모님이지만 그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만은 내 가슴속 한구석에 내내 자리를 잡고있었던것이다.
청명에도 외국에서 마음으로만 부모님을 그려야 하는 형님들의 심정을 알것 같았다. 그들의 마음에도 분명 부모라는 이름이 앙금처럼 남아있으리라. “부모”라는 그 이름을 나와 함께 가슴에 담아두고있다는 그 연연한 끈이 우리를 형제로 이어놓는것이 아닐가?
무엇때문에 청명이나 추석이면 형님이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와서 “걱정”을 하는지 알것 같았다.
래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돼지고기도 끓이고 두부전도 부치고 닭알도 삶고…
형님이나 형수님들 그리고 안해의 마음까지 담아서 정성껏 부모님산소를 모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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