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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필 늑대가 태여난 리유 댓글:  조회:1721  추천:0  2016-07-06
늑대가 태여 난 이유     요즘 세월에는 옛날에는 생각도 못했을 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잠기게한다. 내가 어렸을때 아이들이 보채거나 울 때면 어른들은 “늑대 온다” “ 울면 늑대가 와서 업어 간다” 하고 얼리고 닥치군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처음으로 들려오는 뉴스가 어제 밤 누구 누구네 집의 돼지를 늑대가 물어 갔다는 소식이었다. 밤이되면, 특히 먹을이내 것을 얻기 어려운 겨울철엔 아츨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호롱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포악한 늑대를 지금은 아주 용맹한 투사로 인류의 친구로 우상으로 받들어 올리고 있다.하기야 점점 자취를 감추고있는 늑대들을 동물원에 가야 바짝 여윈 한 두 마리를 볼 수가 있을 정도로 희귀하여지니 늑대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고마운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늑대에게서 우리 인류들도 소지하고 있지 못한 고귀한, 아주 고귀한 덕성을 갖고 있다는 게 사람들을 놀래 운다. 우리 말에는 늑대, 승냥이, 이리라고 부르고있는데 실제로 늑대와 승냥이 이리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짐승의 생김새, 크기나 체중,아니면 털의 색갈 등 으로 분별한다고들 하지만 정작 실물을 보고 이게 늑대다,저게 승냥이다 이리다 하고 결단 내리가 어렵다고 한다. 한자로 이리를 豺(시)라고 써며 늑대나 승냥이는 모두狼(랑)이라고 쓴다 그들의 식성이나 생활습성 번식 서식처 등 이 비슷 비슷하다고 한다.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미제국주의를 승냥이에 비유 할 만큼 독종으로 비유되어 왔다. 독하다,악하다 하는 것은 누구가 누구에게 독,악 한가에 따라 말을 해야 한다고 이 악독한 늑대(승냥이)는 우리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늑대는 군체 생활을 한다.혹 단독으로 움직일 때도 없진 않지만 먹이를 포획하가나 적들과 싸울 때는 진짜로 똘똘 뭉친다.전투에서 부상자를 버리고 홀로 도망 가는 비겁한 자는 더욱 없다. 전투에서 적진을 정탐하고 적진을 파악하고 전략계획을 세우는데는 나폴레옹도 울고갈 지경이란다.자신들이 약세에 처했을 때에는 절대로 미련스레 적을 향하여 공세를 들이대지 않는다.늑대 무리들은 평생 공세에서 실패한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실패한 장군에게는 존엄이 있을 수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약세에 처하였을 경우, 그들은 은페된 곳에 자신들을 숨기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인내성있게 기다린다. 상대방의 허점이 나타 나길 기다리고 기다린다. 물론 이 시간을 리용하여 응원병도 불러 온다. 일단 형세가 유리롭다면 제일 적합한 시기를 선택하여 사령원의 한마디 기괴한 울음소리에 적군에게 거센 공세를 들이덴다.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이 제일 탄복하여야 할일은 그들 대오의 협력정신이다. 변절을 모르는 것이 그들의 고상한 품격이다. 인류전쟁에 사령원이 없을 수 없듯이 늑대무리에도 당당한 사령원이 있다. 위엄만 도고 할뿐 아니라 교활한 전랸적인 제질을 같고 있는 늙었으나 담량이 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지휘자의 호령이 없으면 어느 한 마리의 늑대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기률은 사람들이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엄하다. 병사들은 이 위풍이 당당한 지휘자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투력을 키워고 또 꼭 승리한다고 철같이 믿고있기 때문이다. 흉악한 늑대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동족상잔이란 비참한 일을 저지러지 않는다. 동족끼리 싸움이 있다면 사랑 싸움이 있을 뿐이다.사랑싸움은  생명을 갖 .   늑대의 사랑이나 모성애는 또한 사람을 초월한다. 유럽에서는 “늑대 같은 남자에게 시집 가라”는 말이있다. 숫늑대는 자기의 후대를 임신한 암늑대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암 늑대가 임신을 하면 수 늑대는 임신부를 끔찍하게 보호한다. 새끼가 태여나서 자립할 때까지 아빠 엄마의 보살핌속에 자란다. 그러나 일단 자립할 나이만 되면 아빠늑대와 엄마늑대는 그들 곁을 떠나버린다. 진정한 늑대로 성장길 바래서이다. 진정한 늑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순한 양의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거룩한 부모로서의 진정한, 후대에 책임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사람들이 자식이 어서 빨리 룡이되길 원하면서 젖먹이로부터 대학졸업을 한 후에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한 뉘를 바쳤으나 대학을 나와서도 일자리 하나 못 찾고 부모들의 돈을 야금야금 좀 질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늑대들은 로획한 식물을 절대로 랑비하지 않는다.뼈골이 하얗게 드러 날때까지 갉아 먹는다.못다 먹은 식물은 강이나 호수따위에 물속 깊이 숨겨 놓았다가 비상시에 꺼내여 먹는다.참으로 그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늑대가 이토록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우량한 품성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늑대는 천생 생존과 승리를 위해서 태여난 영물이다. 생존하고 승리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늑대처럼 살아야 한다.
19    2016년 해안선잡지 제2기 표지 댓글:  조회:1319  추천:0  2016-06-13
18    꽃은 피고 지고 댓글:  조회:1640  추천:0  2016-04-12
겨울 내 찬 바람 견뎌 내고 힘들게 핀 꽃이 얄미운 심술쟁이  철 바람에 낙화되어 떨어지고 봄내음은 ' 꽃피었던 빈 자리로 살며시 내려 앉네
17    해안선잡지사 응모시상식을... 댓글:  조회:1738  추천:2  2015-12-14
'해안선'잡지사, '돈꼬래컵' 생활수기 응모 시상식 진행 http://hljxinwen.dbw.cn   2015-12-11 14:55:49             수상자들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흑룡강신문=칭다오) 본사기자=지난 6일, 칭다오시 청양구 ‘화로촌’식당에서 ‘해안선’ 잡지사(총편집 김재룡)에서 주최한 ‘돈꼬래컵’생활수기 응모 시상식이 50여 명 내빈과 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해안선’잡지는 2005년에 ‘꽃노을’이란 이름으로 창간되어 10년간 33기 근 4천부를 발행하면서 산둥 지역에서 우리민족 문학의 고착과 발전에 홀시하지 못할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내부간행물로서 독자층과 발행망의 제한으로 잡지의 지명도와 영향력이 별로 크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 3월에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에서 운영하는 ‘해안선문화전파유한회사’에 귀속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해안선’잡지사는 그간 상업화를 거부하고 순수 문학의 길만을 고집해오면서 이윤근 이사장을 비롯한 잡지 운영위원회의 경비 조달과 사회 유지인사들의 후원으로 어렵게 유지해왔다. 때문에 변변한 문학행사를 몇번 조직하지 못했으며 문학상 시상은 더욱 사치였다.   흑룡강신문사를 통해 ‘해안선’잡지사의 고민을 전해들은 원 청양구조선족기업협회 정광모 회장은 평소 친분이 깊은 ‘돈꼬래’한식당의 임춘범 사장을 소개, 임 사장이 선뜻 후원금 1만 위안을 내놓으면서 ‘돈꼬래컵’ 생활수기 응모가 스타트를 떼게 되었다.   소개에 의하면 이번 응모는 올 3월 22일에 정식 가동된 후 언론매체의 홍보에 힙입어 8개월 간 수십편에 달하는 응모작품을 접수하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평심위원들의 진지한 토론을 거쳐 전향미씨의 ‘고향에는 지금도 눈이 내린다’가 1등상의 영예를 따안았다. 이 작품은 능란한 필치와 생동한 언어로 고향, 눈, 가족애의 역학관계를 해석하면서 점차 고향 감각을 잃어가는 우리민족의 현주소를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등상에는 유해금씨의 시 ‘눈 내리는 밤의 빗소리’와 차설매씨의 ‘할머니와 손녀’가 선정되었으며 3등상에는 정순금씨의 ‘스마트한 세상을 두고’, 홍영빈씨의 ‘우리의 새터전 칭다오’, 최균필씨의 ‘할아버지의 선물 꽃돼지’ 등 세편이 수상했다.   김재룡 회장은 총화발언에서 “여직껏 무료로 일해준 한춘옥, 정순금, 김명숙 등 편집일군들이 너무 고맙고 또 원고료 일전 한푼 없는데도 작품을 보내준 작가분들께 허리 굽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정광모 회장은 축하발언에서 “칭다오에 우리글로 문학창작을 하고 있는 작가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면서 “앞으로 더 많은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청양구 정협위원인 이용군 청양구소수민족연의회 상무 부회장,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이문혁 회장, 칭다오시 조선족교사친목회 최용택 회장, 칭다오KL무역 이길룡 사장 등 귀빈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16    청도생활, ”내 후손이 타민족이 된다하니..." 댓글:  조회:2274  추천:0  2014-02-14
나와  “다문화가정” 등에 청도란 이 도회지에 정착한 우리집에 크게 달라진 것이라면 뭐니뭐니 하여도 ‘단일민족가정’ 형태에서 ‘다문화 가정’으로 어마어마하게 변화한 것이다. 새로 한 사람이 우리 집안에 들어 오면서 이렇게 크다란 변화를 가져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던 일이다. 25살이 넘어도 장가갈 생각을 않고있는 아들녀석이 걱정스러워 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기 시작하여 금방 30을 바라보는 외동아들의 혼사걱정이 우리 늙은 양주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걱정거리로되였다.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누구에게도 혼사 일을 부탁할 수도 없고 매일 아침마다 부시시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출근 길에 오르는 아들이 안스럽기만 하였다. 마치 그 잘못이 부모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로하여 우리 집안에는 침묵이 흐르기 일수였다. “빨리 짝을 맞추어 주어야겠는데…” 하는 것이 일상 나와 마누라의 전부 대화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로하여 ‘니탓이니 내탓’이니 하며 다툼질이였다. 아들이 29살 나던 해, 어느 하루, 평소에 들어 보기힘든 아들의 “아버지 엄마,”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왠 일이냔 뜻 우리는 아들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만 보고있있었다. “이번 주일 날 여자친구를 집으로 대리고 올가 하는데요…” “응?!” 너무도 반갑고도 갑작스레 다가온 소식이라 당혹스러워 말문을 못찾았다   이 한 주일을 우리는 분주히 보냈다. 장래며느리감이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얼마나 커고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또 고향은 어디고 부무님은 어떤 분일까… 어쨌던 궁금한일이 너무도 많았고 주일날이 빨리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엉큼한 녀석,그래도 제 궁량 다 한단 말이야 아무렴 누구의 아들이라구,흐흐…”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드디여 주일날이 닦쳤다. 아들이 가서 데려 오기로하고 우리는 집에서 장래며느리를 맞이할 음식준비를 하느라 바삐 설쳤다. 너무 음식에 신경을 써지 않아도 된다는 아들의 말이 있었지만 나와 아내는 있는 정성을 다 하였다.   정오, 아들이 여자친구를 대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팅팅이라 불러요” 그리곤 여자애게 말했다. “쯔쓰 워 빠바,마마” 뭐, 뭐 ‘팅팅’이라고? ‘빠바, 마마’ 라고?! 그러면? 오매불망 고대해 오던 며느리 감이 우리 민족이 아니란 말이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억이 막혔다. 눈앞이 캄캄해 났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마누라가 말을 땠다. “앉거라” 나는 여자애를 훓어 보았다. 훤칠한 키에 청수한 얼굴, 아주 귀엽게 생겼다. 그러나 내 마음 만은 편치 않았다. 언젠가 한번 아들애가 한족며느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그냥 무심코 요즘 세월에 흔히 보는 일이니 ‘네 마음에 들고 너희 둘만 잘살면 된다”고 한 말이 이렇게 그만 ‘화’의 근원이된 것같다.   우리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원칙에 쫓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 혼사를 묵인하고 말았다. 이 무책임한 결단이 오늘 날까지 나의 마음을 후볐다. 그때만 말렸어도, 하는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랐다. 10월에 택일을하고 결혼식을 올려 주고 이렇게 소위 “다문화가정”이 되여 버렸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시간이 흐름에 다라 우리집안에는 무었인가 차츰 변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언어이다.우리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할줄도 모르는 며느리와 일상 대화를하기 위하여 우리내외는 잘 안 돌아가는 혀를 꼬부려가며 중국말을 하여야 했다. 알아 듣기 어려운  며느리의 산동 토베기 말은 우리들을 많이 괘롭혔다.원래 고향에서 조선족 집거지구에 살아오던 우리인지라 한어에 많이 서투렀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에게(물론 선생은 내가 담당하기로하고) 우리말을 좀 익히는게 어떻냐고 조용히 물었더니 머리를 꺼득였다. 동의하는것으로 받아들인 나는 일상생활 용어를 하나 하나 가르쳐 주기로하고 서점에 달려가 한국어 교과서도 사오고 음반도 사오고 교수안도 짰다. 그러나 몇일 안지나 며느리는 일이 바빠서 천천히 배우겠다 하기에 잠시 그만두려니 여긴 것이 오늘 까지 그만 두고 말았다. 섭섭하게도 명 짧은 나의 가정교사직은 여기서 ‘해고’ 되였다.   ‘너희들은 이미 다 자랐으니 어쩔 수없고, 이제 손자 손녀를 보면 기억코 우리말을 배워 주리라’ 나는 속으로 벼루었다.   며느리는 먼저 꽃같은 손녀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나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첫째, 손녀가 돌을 지나서 부터는 우리가 키울 것이다. 둘째, 앞으로 반듯이 조선족유치원에 보내고 조선족학교에 보낼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그 누구도 막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조선족유치원에 찾아가 몇살이면 유치원에서 받아주느냐? 조선족학교에 찾아가 초중반도있고 고중반도 있느냐 하고 문의를 하며 나 혼자 부산히 쫒아 다녔다.이제 금방 태여난 아이를 두고 말이다.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참으로 황당한고 어리석은 일이였었다.   그러나 예산 못하였던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손녀의 돌잔치를 치르고 나서 나는 아들에게 말을 건늬었다. “우리말도 점차 가르켜야겠고,너희들도 사업에 바쁘니 애를 우리가 맡아 키우는게 어떠하느냐?” 말을 마친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번갈아 보았다. 한식경이 지나서 대답을한 아들의 말 “며느리한테 물어 보세요” 아, 틀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기대에 찬 눈길을 며느리에게 주었다.누가 그때 누가 나의 얼굴표정과 애원에 찬 눈길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열흘 굶은 사람이 밥 동냥하는 모습, 그대로이였을 것이다. “ 쓰마…(한참 뜸을 들인 다음 하는 며느리의 말이) 만만디 칸칸바” (그래요? … 천천히 생각 해 볼게요) 그 ‘천천이’ 가 손녀가 고중에 (중국고중)다니게 된 오늘까지로 연장되였다. 다수의 가정성원이 소수의 가정성원의 편리를 위하여 조상때 부터 물려받은 언어도 써먹지 못하게되였고 언어소통이 잘 안되니 자연 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후대의 장래는 불보듯 뻔했다. 우리민족의 글과 말은 아예 깡그리 잊어버릴것이고 결혼을 하여도 또 타민족을 찾을 것이고 한다는 말은 그때 무슨 언어로 변하여 버릴지 귀신이 아닌 나로서는 알길이 없다.   이로하여 우리집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흐린 날씨였다. 아들과 며느리도 우리 눈치를 보아가며 입을 땠고 우리 내외도 조심조심 안돼는 중국말로 의사를 표현하자니 민망스러웠으며 철없는 손녀는 우리가 하는 말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며 손벽을 친다.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정경이 매일이고 우리집안에 반복된다.   지금 세계적으로 무슨  이니 요 하며 법석이고있다.대부분이 긍정적인 말투다.그러나 나에겐 이것이 큰 재앙으로만 생각된다.내 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가슴이 아프고 내 자식이 타민족에 동화되여 가는 모습이 통곡할일이다.더욱히 나의 후대가 우리민족이 아닌 다른 어떤 민족으로 변하여 이 땅위에 살아 갈 것이라 생각하니 무서워 가슴이 떨린다. 그저 저승가서 조상들을 무슨 면목으로 뵈옵고 무엇이라 말씀드려야겠는지 매일 매일 고민으로 살아 갈 뿐이다. 후유--- 무슨 뾰족한 수 가 없을까. 
15    도시는 배 뚱뚱이 댓글:  조회:3000  추천:0  2012-10-27
풍자시      도시는 배 뚱뚱이   도시는 배뚱뚱이 먹기만 하고 토 할 줄 모른다 얼마나 먹어야 저 배가 터질까? 먹고 마시고 용트림 하는 고약한 내음새가 악취를 풍긴다   철물,시멘트, 검고 붉은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통체로 삼키고 그 것도 모자라 참새 마저  물고 뜯는다 악몽에서 깨여 날줄 모르는 도시   이제 막 불어 닥칠 폭풍이 배 뚱뚱이 도시의 코대를 쳐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배속에서 터져 나오는 오물을 다시 그 입에 쳐 넣어 깨끗한 정화수로 만들어야 하렸다.   도시는 배 뚱뚱이 밤낮 먹고 마셔도 배부르는 줄 모른다   도시는 배 뚱뚱이… 화로 불 가슴이 시려 올땐 화로불이 생각 난다 이글 이글 이는 화로불은 언제나 다정하다 부적가락으로 다듬어 주면 활짝 웃으며 얼어더는 마음 녹혀 준다   옛날엔 우리 할아버지 화로불 지펴 놓고 얼었던 내 손 꽁꽁 만져주었지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다 온 몸이 시려 나고 얼음으로 굳어진다 지금 화로불이 있다면 그리울게 없겠다 ◈
14    가을님 에게 댓글:  조회:2095  추천:0  2012-10-12
 시 가  을 님 에 게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또 다시 돌아올 길을 왜 자꾸 돌아 보시 나이까? 꽃망울 이슬방울 모두가 그대 보다 먼저 왔다 가버렸나이다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떨어진 가랑잎 발길에 채여도 남겨 놓운 여운 너무도 애닯소이다 한아름 묶어 기억속에 묻어 놓고 조용히 떠나 가시옵소서 해마다 주는 서러움인데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남겨 놓은 애잔한 그리움 그윽한 향기가되여 가시거나 말거나 마무리 짓는 삶이 아닌걸 미련 없이 그만 가시옵소서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앙상한 그 팔 벌려 손짓하지 말고 떨어진 단풍잎 사이사이로 묻혀지는 세월이 파아란 새꿈 불러 오려니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가시옵소서…      (2012.9.10)
13    두만강 혼 댓글:  조회:2256  추천:0  2012-09-14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배사공 지금은 어디로 가고 몰려온 락엽들만 저바다로 흘러 가느냐 산데리아 불빛 두만강물을 삼키는데 넋잃은 존속들 벌거벗고 춤추고있다 그리운 옛님이여 언제나 오시려나 모아산 기슭에 혼이나 묻고 가시게나
12    해질녁 바닷가에서 댓글:  조회:2842  추천:0  2012-08-01
해질녁 바닷가에 서면 흘러간 세월들이 파도를 타고 노을 속으로 사라 집니다 노을진 하늘에 옛날이 보이면 날으는 물새들 속에 추억이 묻어 그리움을 실어 옵니다 별빛어린 그 시절 담아서 달빛어린 그 시절 담아서 모래알 알알이 모두 솨--솨 파도 속으로 스며 듭니다 바다가 하늘을 품고 하늘이 바다를 품고 삼라 만상이 고요해 지면 행여나 옛날이 돌아 올가 싶어 모래 위에서 그만 굳어 집니다 그리운 그때 그때 그 시절 해질녁 바닷가에 서서 조용히 눈감고 보내 줍니다
11    사라 지다 댓글:  조회:1987  추천:0  2012-06-28
사라 지다 버들 숲속에 숨은 마을은 힘겹게 숨쉰다 청명절 빵빵 차 경적 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날아 난다 누가 이마을의 정적 깨뜨렸느냐 이젠 주인 없는 초가삼칸 히히히 간교한 웃음 소리에 거미줄 흩날린다 다리 뿌러진 안경 콧등에 건 뿌연 눈 속으로 모든것이 사라 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0    "선생" 댓글:  조회:2197  추천:0  2012-05-22
“선  생”                                          등 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예,누구세요?”   “xx선생이야”  “xx선생? 잘 모르겠는데요” “야,나,철호야 내 목소리도 못알아 듣는구나” 철호라구 나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드디어 그사람의 모습이 머리속에 어렴풋이 떠올 랐다. 나 보다 4살 아래인 소학교 다닐때의 하급생이였다.그러니 못 본지도 50여년이 된다 초중도 못 다닌녀석이 언제 어떻게 선생으로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도 훨씬위 이고 학벌도 제 보다 더 높은 선배 앞에서 “선생”으로 자칭하다니 참, 못배워도 너무 못 배운 녀석이다. 선생이란 칭호는 여러가지 뜻을 함유하고있다. 학생을 가르키는 사람,웃사람을 존대하여 부르는 말,학예가 깊은 사람에대한 존칭 이다.”씨”보다 한층 더 높은 존칭으로 쓰인다.자신을 상대방에게 소개할때 “선생”이 라 자칭한다는 것은 겸손하지 못해 좀 어딘가 건방진 사람이 틀림없다. 요지음 개방도시로 진출한 우리 조선족 사회에 “로교사친목회”가 여기 저기서 일어서고있다. 기꺼운 일이라 할수있겠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선생을 존중하여왔다.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민족의 후대 양성에 혼신을 바쳐왔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마을 훈장도 동네 어른들 앞에서 콧대를 치여들고 내가 “선생”이라 뽐낸 기록은 없다. 선생이라면 어느 정도 문화소질을 갖추었겠는데 요만한 상식쯤은 갖추고있으련만 이쯤 상식도 모르는 위인이 자칭 선생이라하니 참으로 한심한일이 아닐수없다. 대학교수라면 “나 xx 교수야” 박사가되였으면 “나xx 박사야”라고 할 사람들이다. 어느 한 여성이 “xx 선생님입니다”라고 자신을 칭하는 전화도 한두번 받은 일이있다.소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다.제가 얼마나 잘 났다고 “님”자까지 붙혀 부른단 말인가! “선생이라 칭호를 듣고 싶고,”님”붙임을 받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학생이되여  참답게 배우시고 다시 선생이 되시라!        
9    아,금강산! 댓글:  조회:3537  추천:1  2012-05-19
아, 금 강 산! 김  재  룡 지난해 칠보산의 뒤를 이어 금년에는 조선 금강산을 다녀왔다. 원래4월14일 뱃길로 일정이 잡혀있었으나 조선측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다보니 항공편으로 평양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여 우리 관광객들에게는 오히려 화가 복이된샘이다. 4월28일,심양에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하니 오후3시경이었으나 수하물 찾는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여 조선금강산관광지도국의 버스에에 올라 원산으로 향했을때는 저녁먹을 시간이 되였으나 내일의 정상적인 관광을 고려하여 오늘로 원산에 가서 주숙하기로하고 평양을 떠났다. 조선의 출입국 수속이 작년보다 훨씬 간편하고 세관 검사가 까다롭지않아 이번 려 행의 첫 인상과 기분이 가벼웠다.사진기나 록화기도 그저 수량만 체크하고 넘어갔다. 개방의 분위기가 더짙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원산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나니 밤12시가 가까웠다.평양서 원산까지 200여km이 나 세멘트로 포장된 길이라하지만 덜렁거려 속도를 뽑을수없어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둠의 장막속에 잠겨있는 신비한 조선의 산천 구경은 궁금한데로 내일로 기대 할수밖에 없었다.   새날이 어슴프레 밝아오자 어제 하루로정의 피로를잊고 모두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원산시에서 제일로 꼽힌단는 이 호텔은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듯한 정결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원산시의 동해안 기슭에 자리 잡고있는 이 호텔은 중국의4성급에 상당한 12층 건물이였음에도 호텔이라 부르지 않고 려관이라한다. 조선의 아침은 맑았다. 우리 일행은 접대원 처녀들의 친절한 봉사속에서 기분좋게 아침을 먹고 또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원산서 금강산까지 108km라한다.만약 원산서 고성으로 배길로 간다면 106km라한다.고성서 금강산 입구까지는 8km다.   우리는 금강산 온정구역에 자리를 잡고있는 에 행낭을 두고(여기서 이튿밤을 자게된다) 정식적으로 금강산을 구경하기로 한다.   금강산호텔은 1958년에 착공하여 1981년에 완공된 외국인 전용호텔로서 러시아식 건축인데 지하1층,지상12층,총13층으로되여있고 호텔로비에는 5메터에 이르는 천장높이에 건축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또한 남북리산가족의 행사장소이기도하며 남북적십자회담 및 장관급 회담의 장소이기도한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대외봉사국에서 운영해오다가 2003년6월,한국 현대아산그룹에서 임대하여 약1년3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였는데 지금은 조선서 운영하고있다. 봉사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로 금강산의 첫인상은 여기서 얻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으로는 해금강,서로는 외금강인 가운데 놓여있는 온정구역은 금강산의 첫 입구이 기도하다.이구역의 서,남,북쪽으로 톱날같이 솟은 기암준봉이 둘러서있고 동쪽은 확트이였으며 호텔 정원주위에는 진달래며 여러가지 꽃들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향기를 피우며 우리를 향하여 방긋 웃고있었다.아침마다 식당종업원들이 생화를 꺽어 식탁에 꽂아 싱그러 꽃내음새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오늘의 려정은 외금강의 구역이다. 만물상은 층암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악미로 하여 금강산에서 가장인상적 으로 남성미를 갖춘 곳이기도하다.만물상은 이세상의 모든 물체들을 이 한곳에 모아 놓은것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물론 보는사람들의 충분한 상상력이 따라가야한 다.여기에는 무사바위를 비롯한 삼선암,얼굴이 험상궂게 도깨비처럼 생겼다하여 불리워진 귀면암,7층으로된 바위위에 사람모양의 큰돌이 놓여있다하여 칠층암,절부 암,독수리,곰,자라 등 각가지 짐승과 새들의 모양을한 기암들이 줄지여서있다.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좌우량쪽 산기슭에 미인송이 수림을 이루고있었다.여기 미인 송은 장백의 미인송처럼 어쩐지 더 미끈하지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감이 들었다. 아마 장백의 미인송보다 더 늙어서일까?장백의 미인송도 300여년이 된것도있는데… 30대후반인듯한 엄씨라는 여성 안내원은 금강산 구경을 하자면 두가지를 “아껴”야 한다고하였다.  그중 하나는 “아!아!”하는 감탄사를 아껴야한다고한다.아!아!감탄사를 련속 내뿜으면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금강산 구경을 놓쳐버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진 필림을 아껴야한다는것이다, 처음부터 마구 이것 저것 사진을 찍다보면 필림이 떨어져 갈수록 더 좋은 경물을 찍지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이다.사실 그러하였 다.높이 톱아 오를수록 아!아!소리는 련속 나갔고 모두들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 다. 무러익어 가는 늦은 봄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의 골짜기에는 녹지않은 눈들이 해살에 반사되여 멀리서 보면 마치 은띠를 산비탈에 내리드리운듯 녹아내려오는 폭포수에 어울려 한결 금강산의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안심대를 지나 망양대에서 왼쪽 가파로운 길로 헐떡그리며 약100메터를 오르니 작은 샘이 나타났다.이라는 사시장철 마르지않고 아무리 큰비가 와도 넘쳐나지 않는다는 샘이다.그기에 물맛까지 좋아서 마시면 장수힘이 솟아나서 짚고갔던 지팽이도 잊고 간다고하여 망장천이라 이름을 달았다한다 그런데 이물은 딱 한모금만 마시야하지 너무 많이 마시면 젊어지다 못해 아기가되여 홀랑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버린다고 안내원이 익살스레 이야기하였다.모두가 그래서인지 한모금 씩 물을 마시고 계속 벼랑길을 톱아 오르기시작했다.이렇게 자연 돌문인 일명 하늘문이라고도 불리우는 에 이르렀다. 이 문은 높이가 두어길가량되여 보였고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으며 문벽에는 “금강제일관”이라 새겨져있었다.만약 이문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천선대를 발견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천일문을 나서서 철근으로 만들은 경사70도도 넘는 사다리를 수없이 굽이 굽이 갈아타고 금강의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에 올랐다.네게의 삐죽삐죽 솟은 바위가 기둥처럼 겨우10여명이 들어 설수있게 둘러서 있었는데 이전망대는 천주봉줄기가 뻗어져 내려 가다가 잘리운 끝에 놓여있어 허궁에 떠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신비로운 주위를 바라보면 수정기둥에 서리꽃이 서린것 같기도하고 은으로 주조한 붓처럼 뾰죽한 산악들이 사처에서 번득이였다. 동남방향으로 금강산에서 제일 높이를 자랑하는 비로봉(1639메터)이 멀리 멀리에서 아물거렸였다.금강산에 다녀온후 많은 사람들의 중국에 장쟈졔보다 좋으냐,황산과 비해 보면 어떠한가 등등의 물음을 수없이 받았다.장쟈졔에 가도,황산에 가도 볼수없는 신비한 산악이 바로 금강산이였다.생김세나 기세나 중국의 그 어느 곳에서 보아낼수없는 그 무엇이 바로 이 금강산에 숨어있었다.백두대간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강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조선반도의 숨결이 보여지고 들려오는 곳이 아닌가싶 다.마치 백호가 엎더려있는듯한 지형을가진 금강산맥은 뻗어나간 줄기도 호랑이 등줄 기 무늬를 방불케했다.그렇틋 금강산은 숭엄한 기백이 산줄기마다 골짜기마다 봉오리 마다에 담겨있었다.   천선대에서 내려와 세지봉 동쪽에 망양대가있다한다. 그기에 오르면 동해바다가 바라보이며 바다가운대 섬들이 마치 물속에 고기들이 헤염치느듯한 절경이라하나 이번 관광코스에는 그곳이 없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오리라고 어렸을때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어느누구도 통계를 내여 본적이없다한다.그러나 제일봉인 비로봉에 올라가보면 이 일만이천봉이 몽땅 보여질 것만 같은 생각이든다.지금까지 비로봉을 정복해본 경력이없다는 해설이다.중국의 쵸모랑마봉은 많은사람들이 올랐다는 보도를 들은 이야기지만 금강산의 비로봉은 나는 새 외에 그 누구도 오를수없으리라고 여겨진다.산세의 험악성과 수직으로된 가파로움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의 준엄한 모습에 기가 꺾여 사람들이 오를 념도 못한다 봄이 마땅 할것이다.그토록 엄숙스러운 금강산의 비로봉이였다. 헐떡거리며 산발을 타고 오르고 내리다 보니 많은 경물을 보지 못하고 아쉬움을 한아름 품고 하산하고 말았다. 저녁전에 금강산온천욕을 하였는데 이 온천은 500여년전 부터 유명해졌는데 광물질 규토 온천으로 여러가지 심장장애,고혈압증등에 리롭다한다. 물의 온도는 40도 좌우여서 우리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중국의 몇개온천을 다녀 보았지만 모두가 이 물보다 더웠다.한국사람들이 금강산 유람길에 올랐을때도 이 온천은 개방되지 않았고 우리가 처음으로 리용하는 관광객이 되였다한다.참으로 이번 관광은 이래 저래 많은 우혜를 받은셈이였다. 풍성한 저녁식사에 반주술 한잔을 곁들이고 객실에 돌아와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 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부시도록 이부자리가 깨끗하고 객실의 정연함에 놀랐다. 려관마다 물이나 전기가 풍족히 쓸수가있었다.지난해 칠보산려행길과는 달랐다.   오늘은 외금강구역에서도 으뜸가는 구룡폭포를 비롯하여수많은 폭포들과 소(沼)들 이 집결되여있는곳으로 떠났다.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옥류동이라 이름지은 곳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하였다.금강산에서 제일 큰 담수인 옥류담의 면적은 600평방메터나되며 깊이는 6메터나된다한다.여기서 또 약 200메터쯤 올라가니 조그마한 담소우에 련주폭포가 걸려있었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 비봉폭포전경이 보이는데 마치 봉황새가 나는듯한 모습이라하 여 이 이름을 달았다한다. 비봉폭포는 금강산 4대폭포중 하나로서 폭포는106메터 나되는 특이한 바위벽으로 쏟아져 내려와 우리들을 신비경으로 몰아갔다.이폭포의 오른쪽에 또 무봉폭포가있어 아주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문자 그대로 폭포와 소,기암 들로 이루어진 한폭의 풍경화였다. 여기를 떠나 우리는 계속 올라가니 길 오른쪽켠에서 수많은 은구슬을 날리는듯한 이름모를 폭포가 물보라를 날리며 쏟아지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를 넋없이 살펴보다 보니 일행의 사람들은 가많게 저 멀리 가버렸다.그래서 대오를 따르려고 한식경이나 숨이 턱에 닫도록 무엇이 무언지도 모르고 달려 무대바위라는 곳에 가서야 대오를 만났다. 무대바위란 폭포아래에 내려가는 계천위에 무대처럼 생긴 넓직하고 평평한 바위였는데 먼저 도착한 우리 사람들이 그기서 훨훨 춤을 추고있었다.   더디여 구룡각에 이르러 구룡폭포의 전경이 요란한 물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 구룡폭포는 조선의 3대 폭포중하나라고 안내원이 소개하였는데 금강산에서는 으뜸가는 폭포로서 높이가74메터,너비는4메터의 아름다운 폭포였다.수많은 세월동안 폭포의 떨어지는 물방아로하여 깊이13메터의 을 만들어 놓았다.옛날에 9마리의 룡이 여기서 살았다하여 구룡연이란 이름을 달았다나… 9세기에 이곳을 찾은 한시인 너럭바위 위에 아래와 같은 한시 한수를 남겼다. 천길 흰 비단필이 내리운듯 하고 만섬 진주알이 쏟아지는듯 하여라.      구룡폭포에서 사진도 찍고 잠간의 휴식을 끝내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구룡폭포를 만들어내는 상팔담으로 가기 위하여서였다.연담교를 건너 상팔담 오름 길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아바이”는 그만 두는게 좋다는겄이였다. 여기서약700 메터의 길은 상상도 못할 가파로운 산발을 타야한다고하였다.한참 망서리고 있은데 함께 갔던 친구가 올라가지 말자고하여 아쉬운데로 단념하고 말았다.  앉아서 쉬면서 상팔담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히 수림들사에에서 나타났 다 숨었다 하는데 올려다만 봐도 아찔하였다. 집에 돌아온 지금에도 올라 가보지 못한것이 내내 후회가되였다. 상팔담에 오르면 구룡대란것이 있다한다.여기에서 골짜기에 푸른물을 담은 소(沼) 들이 층층이 련달아있는것이 보인다한다.그 가운데 큰것8개를 팔담이라하는데 이 팔담을 내금강에 있는 만폭동의 팔담과 구별하기 위하여 상팔담이라 한다고한다. 이렇틋 험악한 돌산 꼭대기에 담소가있고 흘러내리는 물이 있다는것이 신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는 하도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하고 올라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금강산은 우리들이 잘 알고있다싶히 외금강구역,내금강구역,해금강구역,이렇게 크게 3개구역으로 나뉜다.내금강은 무었때문인지 우리들에게 개방되지 않고있어 이번에는 외금강의 만물상구역과 구룡연구역의 구경을 마치고 해금강구경이 남았다.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지역이라 이것,저것 주의하라는 당부도 많았다.그중 몇가지를 들어 보면 지정된 곳 외에는 가지말것,전쟁시기에 각 군이 묻어 놓은 지뢰들이 있어 위험하다는것,군사요지여서 아무곳에나 기웃거리며 다니지 말것,(아닌게 아니라 바다옆 산기슭에 해안포들이 배치되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함부로 아무데나 오줌을 갈기지 말것,이에 진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안내원의 이야기는 여기서 특히 남자들 이 아무데고 오줌을 갈기다가 땅벌(이고장 사람들은 땡삐라한다)에 쏘여 거시기가 방망이 만큼 크게 뿔어나 고통을 겪는다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서 남으로 보면 얼마 멀지 않은곳에 자그마한 섬이 보인다 그섬이 바로 군사분계선이여서 어민들의 어선도 그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이쪽에서 작업을 하고들 있었다. 우리가 본 해금강은 바다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길이300메터좌우 넓이50메터 좌우의 아주 제한된 구역이였다.그러나 경관은 륙지부분이 아닌 해상경물이였다. 여기에는 해만물상이라는 섬들이 있었다.바다속에 우뚝솟은 립석,소나무가 무성한 솔섬(松島)전설로 가득찬 사공바위,다정하게 마주서있는 부부암,사자바위등이 다투어 서있었으며 크고 작은 섬들이 구슬마냥 해빛에 반짝이고 있었다.특히 볼거리는 해저 만물상인데 그곳은 바다 밑이라 아직 개발되지않아 구경할수 없었다. 뭐니 뭐니하여도 해금강의 해돋이를 보지 못한것이 크다란 유감으로 남았다.해금강 에서 제일 장쾌하고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수 있는것이 해금강의 해돋이라한다. 백사장에 서서 불덩이 같이 이글이글 타는 해가 솟아 오르는 모습을 바라 본다는 것은 상상만 하여도 황홀하였다. 나는 구경거리도 마다하고 저—쪽 남녁땅쪽으로 눈길이 끌리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분계선 넘어 저멀리에서 푸른바다와 푸른하늘이 잇다여 있었다. 한때는 쪽문이나마 빠끔이 열려 남쪽에서도 이곳으로 관광을 다녔고 리산가족도 이곳 온정리에서 만나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지금은 리산가족 만남의 장소로 쓰이던 건물은 문이 닫긴체로 외롭게 쓸쓸하게 서있었다. 해금강 구경을 마치고 삼일포 구경을 갔다. 삼일포는 호수들과 섬들,그 기슭에 명 승들이 포괄된다. 삼일포는 예로부터 관동 8경의 하나로 불리우며 호수경치로서는 뛰여난 모습을 가지고있었다.섬중간에있는 마치 소가 누워있는듯 하다하여 와우도라 이름을 달은 섬위에 소나무들이 멋진 풍경선을 이루고있었다. 삼일포주위에 영랑호니 감호니 하는 담수호들리 있다고하나 모두가 멀리서 보일뿐 이였다. 여기 상점에서 한병을 샀는데 유로를 인민패로 환산하니 9원60 전 가량 나와서 10원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찾아줄생각도 하지않는다. 조선의 화페개혁이후 돈액면의 수가 가장 큰것이 5000원 짜리였다. 5딸라쯤 된다.보통 관광 안내원의 한달 월급이 1500원인데 딸라로 환산하고 다시 인민패로 환산하니 7--8원가량되였고 조선암시장에서 쌀한근에 12—15원한다한다.   삼일포를 둘러보고 돌아오는길에 기차역이 보였다. 그래서 저 기차역이 무슨역인가 물어 보았더니 이전에는 이 기차길이 남으로 쭉 통하였는데 지금은 여기서 동강이 났단다.이 끊겨진 철길의 마감역전의 이름은  이라 불렀다. 원산서 고성까지 오면서 녹쓸은 철길이 외롭게 누워있는것이 자주 눈에 띄우군하였 다.   여기서 금강산관광은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외금강,내금강,해금강 외에도 돌기둥이 빽빽히 서있다고 하여 총석정이라 불리우는 총석정의 이채를 띠는 돌과 물과 동굴,그리고 망경대구역,망군대구역,태상구역,구성 구역,백운대구역,만폭구역,만천구역,은선대구역,송림구역,발연소구역,백정봉구역,선하구역,천불동구역,선창구역,등 등 수많은 경관구역을 짧은 며칠사이에 다 둘러본다 는것은 욕심에 불과한일이다.이쯤의 구경을 하게된것만 하여도 하나님에 감지 덕지할 일이다.나머지 구경은 후에 관광 올사람들에게 남겨놓는다. 이곳을 떠나면서 나는 머리를 돌려 한 특수한 건물에 다시 한번 눈길을 보냈다. 온정리에 마땅히 지금 이시각에도엗남북의 수많은 리산가족들이 여기에서 모여 서로 부등켜안고 회포를 배풀어야할 남북 리산가족면회장소의 건물이다. 2007년12월에 준공된건물인데(어느쪽에서 투자하여 지은 건물인지는 알아 보지 않았다)12층으로 동시에 천여명을 수용할수있는20개의 객실이있다한다.그후 금강산 사고(박왕자 피격사건)로 인하여 관광이 중단되여 개관식은 못하고 2010년3월에서 11월5일까지 남북리산가족 만남의 행사를 진행했다.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리산가족 의 비운을 남겨둔채 이건물의 문은 굳게 닫겨져있었다.   아침을 먹고 행장을 들고 나와 호텔종업원과 관광안내원들의 배웅속에서 우리는 원 산으로향했다. 조선의 봄은 농민들을 모두 논밭으로 불러 내였다. 일찍 부은 수상모는 파릇파릇 자랐으며 지금 한창 모판을 닦는 곳도 있었고 경운기(천리마뜨락또르?)로나 여윈소들 이 힘겹게 쟁기를 끌고 사람은 소앞에서 소를 끌며 논밭을 갈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언덕에서 나물케는 아낙네들과 어린애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아직 자라지 못한 풀들을 뜯고있는 소들이나 양들은 여위여서 피골이 상접한 모양이 마치 강원도의 벌거벗은 산들의 모습과 같았다.이곳의 산들은 덤성덤성 소나무들이 서있는 외에 풀들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어려운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기려는지 하는 걱정이 절로났다.   금강산을 떠나와 고성에서 원산으로 가는데 통천이라는 고장을 지나게된다. 한국현 대그룹의 정주영회장의 고향이다.가난뱅이 정주영씨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땅에 500마리의 소와 500대의 자동차를 보내주었다한다.수년이 지난 현재 그 소들이 아직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관광길에 타고 다닌 버스가 아이러니하게 현대차였다. 그리고 갈마반도 해안에 그 옛날 라 노래로 불리워지던 명사십리 가 뻗어져 있는것을 볼수가 있었고 평양을 거의 다 갈무렵 동명왕의 무덤이 옆으로 삐여져 나간 쭉벋은 도로 저 끝에서 얼씬 보였다.     이날은 5.1로동절이여서 조선에서도 근로자들의 명절이라 하루 휴가가 있는 모양이였다. 길가에서 각종유희놀이를 하는 무리들이 보였고 끼리끼리 숲속에서,강가 에서 밥보따리를 풀어 놓고 점심들을 먹고있는것이 보였다.학생들이나 종업원들은 단체로 들놀이를 조직한듯 싶었다.배구시합을 하는곳도 있었고 달래기하는 곳도 있었고 춤판 노래판이 벌어진곳도 있었다.원산시에서는 온시민들이 명절옷차림으로 해변 광장에 모여들어 온갖 놀이가 한창이였다.우리 일행중에 누군가 우리도 잠간 차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날의 귀중한 휴일은 평양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즐거운 날로 되여있었다. 평양시구 에 들어서니 길가의 나무 밑에서나 공원에서도 무리무리로 술들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정경이 기분좋게 우리눈에 안겨 왔다.우리가 투숙하게 되는 호텔앞 수림속에서도 몇무리의 술판이 벌여졌있는것이 보여 있었는데 그들의 환보의식에는 눈살이 찌프러졌다.먹은후에 남긴 쓰레기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며 바람에 흩날려 주위를 어지럽혔다.지금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정경이다.   호텔 엘리베트에서 연변서 이곳으로 나와 담배공장을 한다는 술취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5.1절이라 술을 마신게 그만 취하였다한다. 조선생활이 재미있느냐는 물음 에 그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이튿날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왔다가 또 다른 한 연변에서온 강씨라는 젊은이를 만나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투자환경이 어떠하냐는 물음에 모든것이 어렵다고 말하였다.그는 현재 우리조선족들이 평양에 나와 크고 작은 기업을 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된다고 하였다.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심양에서 황해북도에 광산 고찰을 갔다 돌아오는 한족친구는 아주 락관적으로 투자환 경을 전망했다.        평양에서 첫번째로 만경대 탐방이였다.김일성주석의 생가를 배알하고 온 평양거리 가 한눈에 안겨오는 만경대에 올라섰다.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을 품에 안고있는 평양 시는 평화스럽게 보였고 아름다웠다. 평양은 이라는 일명을 갖고있다. 柳京이란 뜻은 버드나무가 우거졌다는 뜻에서 온것인데 거리에 수양버들이 휘휘늘어져있었으며 대동강이나 보통강은 온통 버드나무숲에 묻혀있었다.버드나무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도있었다. 저녁을 먹고 평양 야경을 보고싶다고 청을 들었더니 조선측 려행사책임자가 흔쾌이 받아 주었다.김일성광장에서는 모두가 사진도 찍고 시원한 대동강변의 밤 공기에 취 하였다.다음 주요거리를 버스에 앉아 돌아 보았다.듣는 소문과는 달리 평양의 주요거  리는 불빛으로 장식되여있었고 조용하였다. 그러나 주민구역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까막나라였다. 대동강유보도에서 거니는 사람들의 무리는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5월2일,귀국하는 날이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정오쯤이여서 아침을 먹고 또 평양구경을 떠났다. 처음으로 찾아 간곳이 만수대였다.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이 정중이 모셔져 있는곳이다. 2012년4월14일에 제막식을 가지고 한달후인 오늘 우리들이 찾아 보게되였다. 평양시민들이 출근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들에게 경견히 허리굽혀 묵례를하고 간다. 우리 일행은 꽃다발을 사들고 (이 꽃다발은 조선측에서 삿음) 줄을 지어 묵레를 하고 한참 주위를 살펴 보았다. 천리마 동상도 보였고 모란봉도 보였으 나 모란봉극장은 나무숲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모란봉은 생각보다 나즈막하였다. 의사당(중국의 인민대회당에 상등하다)도 한눈에 흘러 들어왔다.이것 저것 궁금한것 을 알아보고 모두가 차에 올라 개선문으로 향했다. 개선문은 프랑스 빠리의 드골광장에 서있는 49.54메터 개선문보다 10메터나 더높게 흰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20년간의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개선한 김일성장군의 위업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위하여 세운 기념성적 건축물로서 김일성탄생 70주년인 1982년4월에 건립했다.정중하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이 건물은 지금 평양의 상징물로되여있다. 높이는60메터,정면너비52,5메터,아치문높이는27메터,너비는18메터이고 개선년대를 상징하는와라는 글자가 좌우로 갈라져 새겨져 있었고 의 가사가 중간 윗부분에 새겨져있다.개선문 사각마다에 진달래무늬가 새겨져있었는데 각기 70송이라한다.이는 김일성주석의 탄생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개선문의 또하나의 특징은 모든건물의 정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지만 이 개선문의 정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리유는 김일성주석이 항일혁명의 불길을 지핀곳인 백두산이 북쪽에 있다는데여섰다.   이번려행에서 사진을 찍거나 록화를 하여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출입국검사소를 지날때도 사진기속의 내용을 검사하지도 않고 통과 시켰다. 나는 조선의 전기가110볼트로 알고(조선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전압이220볼트였다) 사진기충전기를 가져고 가지 않아서 바떼리부족으로 많은 귀중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것 이번 려행길에서 가장 큰 유감으로 되였다.   지리적으로 조선반도는 복받을 땅이다.만약 이땅에 전쟁의 불운이 없어더라면, 력대로 렬강들의 간섭이 없었더라면,남북이 좀더 랭정한 정치머리를 가졌더라면, 한민족이라고 말로만 하지말고 서로들 믿어 준다면,이땅에 평화가 깃들고 백성들이 대복속에서 살수있는 땅덩어리에 틀림이 없을것이다. 그날이 빨리왔으면 하고 하늘에 빈다.◈2012-5-9                               
8    장백산 봇나무 댓글:  조회:3422  추천:1  2012-03-01
   장백산 봇나무 장백산을 조선이나  한국에서는 백두산이라 부른다. 나도 어렸을때는 백두산이라 불러 오다가 그 언제 부터인지 장백산이라고 부르기시작했다. 이 민 족의 성산을 열두 이름을 붙여 불러도 산은 한 산이니 시시콜콜 캐볼일은 아니다.그러나‘   백두산’이라 고 입에서 먼저튀여나오는것을 어쩔수없다. 내가 처음으로 이 산을 찾았을 때는 호기심에서 찾아가 보았고 두번째는 그 산속에서 자라고있는 나무--- 봇나 때문이었다. 언제인가  어느한  잡지에서 보았는데 장백산에 ‘岳樺’라는 수목이 어쩌구어쩌구하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오, 그런 나무도 이 세상에 있구나, 아마  樺자가  붙었으니 봇나무의 일종이리라”  라는 정도에서 그쳤는데 두번째 장백산유람길에 오르자  안내원 아가씨가  장백산의 식물을 소개 하면서 이 나무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 하였다.소개를 들어며 나는 흥안령에서 보아온 계곡에서 조잘대며 흘러 내리는 계수를 껴안고 있는 산턱에 봄이면 파아란 계관을 반짝이며 수많은 나무들 중에 멋진 백마 왕자 마냥 뽐내고 가을이면 금빛모자를 머리에 쓰고 온 골짜기를 유혹하는 흰 봇나무를 머리속으로 그려 보았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수목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봇나무었으니 이번행차에 또한번더 볼수있는 기회가 왔으니 마음부터 설레이었다. 관광차에 올라 천지를 향하여 굽이굽이 산길을 톱아 오르는 운전기사들의 운전솜씨는 경악할 정도였다. 금방 눈앞에  돌로만든 안전란간이 코앞에 닥쳐 차가 코방아를 찍고 산아래로 굴러 떨어질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 ,운전기사는 눈깜짝할 사이 헨들을 꺽어 또 앞에 있는 란간을 향하여 질주를한다.이렇게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다 보니 산천경계 구경할 짬이없었다. 천지에서 내려와 구경간 곳이 ‘악화림’이었다. 《岳桦林》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높은 산악지대에서 생장한다는 뜻이겠는데 수풀林자를 써놓고 보니 내가 눈으로 본 정경과는 판이한 감이들었다. 林이라는것은 나무들이 꼳꼳하게 총총이 서서 서로들 함께 모여있는것이라 설명된다.눈앞에 펼쳐진 이정경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려고 발돋움하고있는 흥안령산맥의 봇나무와 너무나도 달랐다. 모두가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만 쳐들고 앞을 향하여 돌진하고있는 전쟁판의 군사들을 방불시켰다.’포화’에 타고 그슬린 몸둥아리는 볼품없이 거치렀다. 나무의 생김세나 뻗어 나가는 가지들의 모양도 모두가 달랐다. 그러니 전쟁판에서 포복전진하고있는 병사에 비교함이 아주 적절할겄이라 여겨진다. 기니긴 세월속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면 허리가 저렇게 휘였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흥안령의 봇나무는 한참이고 키를 키운 다음 가지들이 씨원스럽게 벋어 나가지만 여기 이 악화는 얼마 크지 않은 키에 성급하게 가지들이 이리 저리 성글게 뻗어져있다.몸매는 보잘것없다. 저으기 실망이 들었다.실망끝에 이 못난이가 예쁜봇나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허위적이라고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꿈틀 거리렸다. 장백산을 다녀온후 나 는 이 나무의 신상자료를 찾아보았다.결과 나는 또한번 실망감을 느꼈다. 유람지 소개패쪽에 씌여있는라는 더이상 신통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나는 내 마음속의 봇나무와 이나무는 한 종자가 아니라고 고집하고 싶었다.꼬물만큼이라도 같은  유전자를같고 있지않고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그러나 사전에도 이렇게 밝혀져 있으니 부정한다는것은 아둔한일이고 원인없는 고집을 견지 한다는것은 너무 한심한 일이라 그냥 어정쩡  지나가고 말아야겠다고 일시 생각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것을알았다. 너무나도 내가 일찍히 본 봇나무에 미련을 갇고 있는터라 아무튼 봇나의 일종이라니 사촌쯤은 좋히 되려니 역시 나의 마음을 잡기에는 족할것이요  나처럼사람도 못난 사람이 있으니 굽은 등 마저 나와같은 모양이니 내가 그를 멀리하고 받아 주지 않는다면 내가 내 자신을 시인하지않는 것으로된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300여년전에 폭팔이있었다는 이 화산기슭에, 요지음 또 폭팔될 가는성이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떠도는 장백산에 신기하고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이 나무가 일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나의 머릿속을 감돌고있음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한다. 아마 고향의 봇나무와 함께 영원히 내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으리라! 
7    장백의 미인송 댓글:  조회:2718  추천:0  2012-02-27
  장백의 미인송 우리민족의 성산 장백산에는 무진장한 보배들이 숨겨져있고 신비한 수수깨끼들이 묻혀있다. 천지의 물은 밤낮없이 사시장철 앞록강, 두만강으로 흘러 나가고 들어 오는 물은 없어도 천지의 물깊이는 언제나 그대로 있는것이 신기로운 일이며 천지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괴물도 신기롭고 늙을수록 더욱 아름다워 지는 미인송도 신비로운 일이다. 꽃은 늙으면 시들어 떨어지고 아무리 꽃같이 어여쁜 여자도 늙어면 꼴볼견이란다. 그런데 장백의 미인송만은 늙으면 늙을수록 아름다워 진단다. 해마다 한번씩 뱀처럼 탈피하고 이듬해면 뽀얗게 볼그스럼하고 말쑥한 피부를 세상에 자랑하며 키를 키운다. 장백송이라고도 하고 미인송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가보다. 이 미인송은 안도현 장백산 북쪽기슭, 해발700m에서 1600m사이에 위치하고있는 이도백하란 지방에 널리 분포돼여 생장하고있는 특유 소나무의 일종이다. 장록교목으로 25-30m의 키를 자랑하고있는 이 고장의 미인송은 보통 직경이 25cm—40cm 이고 현재112헥타르나 돼는 넓은 면적에 자리하고있는 이 지방 미인송만이 순수 품종으로 알려져있는바 그중 제일 키가 큰것이 107호로서 이 나무의 지름이 무려 84cm나 돼고 높이는 32m이며 나이는380년이다. 다음은 167호 나무로서 역시380년의 나이를 갖고있는데 30m의 높이, 85cm의 지름, 108호 나무는 나이가360년,높이26m,지름이82cm,103호 나무는 320년 나이에 지름이80cm,높이32m를 뽐낸다. 이전엔 국보급인 이 미인송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주민들이 란벌하여 가구도 짜고 장작으로 토막내여 화목으로 리용했다한다.그후 등소평어른이 장백산에 다녀 왔을때 이나무의 특수성과 귀중함을 알고 이 나무를 보호하고 널리 번식할것을 관계부문에 지시를 내렸다 한다. 그래서 매 그루의 나무마다 번호를 메겼고 ‘호적’ 이 있게 되였다. 장백미인송은 여늬 품종의 소나무와 달리 취위나 더위에 잘 견디고 병충해를 입지 않는 용감하고 건강한 수목이다.늘씬한 키가 하늘을 찌를듯이 서로 키 다툼을하고 자 라고있지만 이나무는 우둠지가 거의없다.  이렇게 매력을 갖고있는 수목을 내가 처음으로 장백산 구경을 갔을때 안내원이 해설을 하여 주었련만 화려한 그의 자태에 반해 해설을 귀 밖으로 흘려 듣다 보니 미인송에대한 아무런 신상자료를 가져 오지 못한것이 자못후회돼여 언젠가 다시 장백산 유람의 기회가 있게되면 도정신하여 들어 두어야겠다고 벼루었다. 그래서 온갖 도편과 자료들을 찾아 보기에 노력을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몇해가 지난 지금 까지 다시 한번 아름다운 미인송을 보려 가는 기회가 마련되지 않고있다     웅심 깊은 천지 물과 도고한 미인송에 우리민족의 얼이 섬베여 있다고 생각하니 날로 약해져 가는 민족의 장래도 슬거머니 우려가된다. 부질없고 어리석음을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헛된 걱정을 해 본 것이리라. 
6    국동이 댓글:  조회:2988  추천:4  2012-02-17
 국동이 제주도 려행길에 오른 우리일행 48명은 두 관광버스에 갈라 앉아 아침7시에 호텔을나와 제주도의 남단 서귀포로 향했다. 4박5일 려행코스의 첫날이 시작되였다. 우리가 탄 차의 담당가이드는 오국동이라는 젊은이였는데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이었다.그래서인지 우리는 뜨거운박수로   첫인사로 보내주었다. 대자연이 인류에게 선사한 제주도는 신비로웠다.삼다도라 노래에서 알고있던 제주도의 풍경이 차창밖으로 흘러갔다. 제주도에 대하여 이것저것을 소개하던 그는  한참 말을 멈추고 있더니 너닷없이 “우리아버지는 우리를 버렸습니다.저는 아버지가 죽도록 미워요!” 우리 일행은 의아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그가 려행길에서 짬짬이 들려준 이야기를 아래에 정리하여 적어본다.   “우리아버지는 미남이 였답니다.재간도 좋구요,할빈에서도 유명한 용접공이었니깐요, 16년전 아버지는 한국으로 돈벌려  떠났습니다. 돈 많이 벌어 올터이니 공부 잘하고 엄마 말잘듣고 있으라고 철석같은 약속을 남겨놓고 떠나갔습니다.처음 몇해는 학교에 다니는 우리에게 돈을 자주 부쳐오군하였습니다.용접에 남다른 기술을 갖고있는 우리아버지는 돈도 잘벌었답니다.아버지가 돈을 부쳐 오면 우리는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습니다.기운이난 우리남매는아버지를 그리며 어머니와 함께 서로 살피면서 잘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그렇게 몇해가 지나자 나는 고중에 다니게되였고 녀동생도 초중에 가게되였습니다. 우리는 커가고 있었으며 돈도 헤퍼졌습니다.그런데 아버지가 집으로 부쳐오는 돈의 차례수나 액수도 점점 적어졌습니다. 전화에 아버지는 돈벌이가 잘안되여서라고 말씀을 되풀이 하였습니다.그러다가 아버지의 전화도 받아 보기 힘들어졌고 아버지의 돈줄은 영영 끊어져 버렸고 우리는 궁벽에 빠졌으며 어머니 얼굴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우리남매를 불러 않혀놓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가야겠다.가서 아버지도 찾아보고 돈도 벌어서 너희들의공부 밑천도 마련 하여야겠으니 국동이 너는 동생을 잘 보살피거라” 아마 어머니는 마음상 준비가 다 되여있었고 출국수속도 다 되여있은 모양이 였습니다.    일주일후 어머니는 비행기편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 두번전화를 하시더니 얼마후엔 어머니의전화마저 끊어져 버렸습니다.그때야 나는 무엇인가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빠로서 나의 짐이 더욱 무거운감을 느꼈습니다. 철없는 여동생은 아빠엄마 보고싶다고 칭얼거렸습니다.그 럴때마다 나는 우는 동생을 달래느라 무진 애를썼지만 동생을  부여 안고 울음을 터 뜨릴때도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내가공부를 그만 두더라도 동생을 끝까지 공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내머리속에 굳어지기 시작하 였습니다. 동생을 학교합숙에 맡겨놓고 돈벌이할 궁량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왕 돈벌이 길에 나서자면 그래도 한국이였습니다.  한국에가서 아버지 어머니도 찾아보고 돈도 벌어보자는 심산이였습니다.” 온갖 수단을 다 하여 반년후 한국길에 오를수있는 모든 수속이 끝났습니다.   우리 일행은 천지연 폭포를 처음으로 구경하고 외돌개에 잠간 들렸다가 주상절리로 향하여 다시 관광버스에  올다.주상절리는 태고때 지각의 변동으로 깍아 세운듯한 육각의 검은 기둥모양의 바닷가 절벽이였는데 수많은 기둥들을 한테 붙여 세워놓은 것이 매우 장관이였다.중국의 해안선에서는 볼수없는 경물이었다. 첫날,점심식사는 소문난 제주도 흑돼지고기로 포식을하였다. 제주도 인심은 한국 답지않게 후했다.4박5일동안 때마다 풍성한 대접을 받았으며 고기던 무엇이던 먹다 모자라면 인심좋게 푹푹 보충을하여 주었다.  점심후 계속 관광길에 올랐다.차가 한식경 달린후 젊은가이드의 뒷일이 궁금하여서인지 누군가 그 후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달라고 청을들었다. 그는 주저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계시는곳으로 찾아갔습니다.나를 만나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아버지에대한 모든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여기 서울에서 다른 한 여인과 셋집을 맡고 살 고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에 오기전 벌써 그들은 동거하고있었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였다는것을 저는 잘알고 있습니다.그러던 아버지가 우리남매를 버리고   또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하던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함께 살다니, 그럴수가 없었으며 그러면 않될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였으며 바로 우리집, 어머니와나, 그리고 여동생에게 떨어진 재앙이였습니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믿고 싶지않은 현실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말리는것을 뿌리치고 아버지가 살고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안계시고 그 여인이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어디 가셨습니까?' ‘일 나갔셨어요’ ‘좀 불러주십시요!’그 여인은 끅끅 거리며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전화를 좀 걸어 주십시요,내가 말할게요’ 그 여인이 전화를 하는지 어쩌는지 하는 사이 나는 집안을 둘러 보았습니다. 텔레비며,전자레인지며,선풍기며 갖출것은 다 갖추어 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습기찬 반 지하실에서 선풍기 하나없이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데,하는 생각이 쿡 머리에 스치는 순간, 나는 그만 자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소리외함께 손에 닿는데로 발길이가는데로 메치고 차버리고 삽시간에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방안의 물건들을 몽땅 박살내고 주방으로 맹수처럼 달려갔습니다.주방의 물건도 남김없이 부숴버렸지요.더는 부셔 버릴 물건이 보이지않차 나는 손을 멈추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두눈을 부럽떠고 굳어버린듯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인기척이 나고 출입문이 열리더니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어요.잠시 나에게 눈길을 보내고 아버지는 난장판이된 집안은 아랑곳하지않고 침대에 걸터 앉아 담배만 태웠습니다. 그렇게도 눈에 익은 아버지의 모습이였습니다. 나는 밖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습니다.눈물이 나도 모르게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집을 나서려는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로 몸을 돌리고 입을 땠습니다. ‘아버지, 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 고가겠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한번 마지막으로 불러본 아버지었으며 마주본 아버지의 얼굴이였습니다. 말을 맺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며 눈에는 이슬이 가랑가랑 맽혀있었다.   그후 그는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한다.그리고 짬만있으면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지식을  넓히는데 게으러지 않았다. 닥치는데로 보고 배웠다. 그 후 일자리를 제주도로 옮기고 중국식 샤브샤브 전문식당을 차 리고 식당이름을라 간판을달고  어머니 모시고 여동생 대려다 공부 시키며 한편 관광가이드도 맡아 짭짤하게 돈 잘벌며 재미있게 살고있다고한다. 관광길에서 우리는 그가 한국의 인문,지리,력사나 중국의 지리,력사 등 여러면에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아쉬운 관광의 마지막날, 그는 무거운 입을 때고  말했다. “지금 아버지와 그 여인은 중국할빈 어디에서 살고 있지만 만약 언제이고 아버지가 오고 갈곳이 없어 우리를 찾아 온다면 모셔야지요, 아무튼 우리를 낳아 주시고 키워준  아버지니깐요. 정말, 가정만 지켜주었어도…”말을 마치는 그의 눈에는 또 눈물이 고이었으나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지않으려고 그는 급히   차에서 내려버렸다.
5    료녕성에 조선족민속촌이 섰다는 소식을 보고 댓글:  조회:2296  추천:17  2012-02-16
 료녕성에 조선족민속촌이 섰다는 소식을 보고 얼마전에 료녕성 관전현 하로하진에 이섰고 료녕성관전현 촬영협회의 촬영기지로 지정되였다는 보도를 흥미있게 읽어 내려가던중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지 날로 사라만져가는 우리 민족의 이모저모가 몹시 안타깝게 여겨만 지던 우리들에게 이 소식은 이점을 걱정하고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아닐수 없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다 읽고난 나는 저으기 실망의감을 느꼈다. 어느 포부넓은 우리민족의 젊은 기업인이나 아니면 유지인사가 이 뜻깊은 일을 하여 놓았다고 미루어 감탄하였는데 글쎄 이런 장거의 주인공이 한족 공윤평씨라고 소개되여있었다. 이 공윤평씨가 우리민족의 민속에 흥취를 갖고있는것은 분명하나 경제적으로 적지않은 돈을 투자하여 타민족의 민속문화를 재현시킨다는 원인과 목적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일은 아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감 숨길수 없었다. 아무턴 마땅히 우리가 하여야할일을 남이하였다하니 사람이 제구실못한것 처럼 여겨진다. 이러나 저러나 누구라고 탓할 것없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지금 연변의 이곳저곳에서 우리민속 문화살리기에 열이올랐다. 참으로 기꺼운일이 아닐수 없다.   아무쪼록 천추만대 길이 전해지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4    조선유람 3박4일 댓글:  조회:4053  추천:3  2012-02-10
기행문 조선유람3박4일 김 재 룡   벼르고 벼르던 조선유람길에 올랐다.많은 사람들은 평양이요 모란봉이요 묘향산이요 아리랑 공연이요 하는것을 유람 코스로 선택했으나 나는 고집스레 몇차례나 그기로 가는것을 거절하고 이번 칠보산행을 택했다.왜서냐는 물음에 딱히 설명할 리유는 없었지마는 나는 조선의 자연 실태 그것을 친히 내 육안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마 주요로 되는 원인이 아닌가 나 스스로 결론을 가져본다.   3박4일의 짧은 시간에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하여있는 칠보산까지 왕복하였다는것은 거의 매일 매일 관광 뻐스에 앉아있는 시간이 대부분 시간을 점하였다는것을 말하여 준다.정확한 기록과 계산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연길서 중국의 삼합 해관까지의 거리를 계산에 넣지않고 조선땅인 회령에서 함경북도 수부인 청진을지나 명천군 경내에 자리잡고있는 칠보산까지 대충270km는 되리라고 본다.그런데 조선은500m가1리가 아니고400m를1리로 친다.그러니 자그만치 구불구불 도는 길을 모두 계산한다면 왕복 조선 리수로1500리를 달린셈이다.조선의 도로는 중국 처럼 포장된 길이 아니고 모래길이긴 하였으나 수많은 도로 수축공들이 도로 수리를 하는 덕분에 원래 생각 보다는 훨씬 적게 덜렁거렸다.관광차는 일본제였으나 모두가 낡아서 중국 같아서면 언녕 “퇴직”년령에 달한 차들이였다.그나마 이 차들은 중국관광객들을 모시는 차여서 고급스런 차들이였다. 군용 터럭을 제외하고는 휘발유를 쓰는 차들은 보기가 힘들었고 민간인들이 몰고 다니는 차들은 연료가 부족한 조선에서는 장작을 태워서 가스를 만들어 저축기에 저축하여 그 가스가 타서 폭팔하여 원동력이되여서 차를 움직이게하는 차들이 연기를 활활 뿜으며 가다가 가스가 떨어지면 또 차를 세워 놓고 장작을 태워 가스를 만든다.이런 차들이 조선에서는 주요로 민간인들이 타고 다니며 화물들을 실어 나른다. 조선의 시골에는 공공 버스가 거의 없단다.혹 일이있어 집을 나서면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 도구이고 장거리 출장은 이런 가스차를 리용하여야하고 누구나 길가에서 손을 들면 운전 기사는 차를 세우고 어디 가느냐는 간단한 물음을 한후 태워 준다한다.    첫날, 앞에 달리던 가스차가 뿜는 연기가 차창으로 우리가 타고 가는 차안으로 메케한 연기를 몰아 넣었다. 이에 일행중 한 친구가 좌석밑에 무었이 탄다고 놀라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차를 급 정거하고 검사한결과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놈의 장작을 때며 달리는 가스차의 작간이였던 것이였다.  회령 해관의 조선측 검사는 얼마나 까다로운지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돈은 얼마나 챙기고 있느냐, 무슨물건을 소지하였느냐,왜 한국전화번호가있는 전화기록부를 갖고 다니느냐,보따리며 가방을 쌔가리 훗듯 샅샅이 뒤져 본다.사진기며 촬영기는 전부 등록하여야 했고 내용물은 엄격한 검사를 거쳐야했다.그들의 사업효률은 생각보다 더 굼뜻다.현대 전자 검사기는 없고 모두가 인공으로 진행하였기에 우리들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검사원들의 말씨는 매우 상냥 스러웠다. 회령땅에 들어서자 관광안내가 회령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김정숙동지의 동상으로 안내하였다. 조선에서는 김일성과 동등하게 김정숙을 존경하였고 김정일 역시 그들과 같은 서렬에 서있기에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처럼 모택동이요 후진토요하고 이름 석자만 부러는것은 용허가 돼지 않으며 반드시 그들의 이름뒤에 동지라고 붙여 부러거나 “원수님”“장군님”하고 불러야 하고 일반사람들과는 그저 동무라 부른다.   안내원은 우리들을 선생이라고 호칭하였다. 김정숙동지에게 모두가 묵도로 경의를 표시하고 긴긴 해설을 들은후 또 덜렁데는 차에 앉아 청진을 향하여 출발했다.   조선의 산천은 아름다웠다. 남에서(조선백성들은  3.8선 이남을 아랫마을이라고 부른다.)말하는것 처럼 백성들이 굶주려 나무겁질을 모두 벗겨 먹어 버렷다는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정경이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졌다.가로수는 주로 아카시아 나무였고 백양 나무도 자주 눈에 띄였다. 나무의 굵기로 보아 심은지 5--6년 좌우로 되여 보였고 산에는 아름들이 소나무며 이깔나무와 황철나무 등 많은 수목들이 산마다 꽉 차있었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샘물은 귀맛좋게 조잘조잘 반가운 노래로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조선의 냇물과 하천은 흐린물을 볼수가없었다.그토록 맑았다. 회령이나 청진에서 그리고 도로가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나는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들의 복장은 중국에서70년대 농촌 주민들의 복장 차림을 련상케 하였다. 면화와 면방직 공업이 락후한 진 모습 그대로였다.나이론이나 데틀론을 주 원료로 만들어진 원단은 화려한 염색을 받아 주지 못하는 원인으로 모두가 거므스레한 색갈이였으며 짙은 국방색이 아니면 회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그러한 색이였으며 공무원들은 이런색의 나일론 천으로 만들어진 김정일 장군님이 입고 다니는 쟘버복이였고 조선에서 근년에 류행이 돼고 있다는 장군복이 눈에 자주 띄우곤 하였다 여성들은 대부분이 적삼에 바지 차림이였지만 고운 꽃점삼에 멋진 바지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산동성의 제일 락후지방인 이멍산 시골에서 살고있는 농민들도 이보다 화려한 옷차림이다.그러나 호텔이나 려관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들의 복장은 한결 화려한 편 이었다. 도시에 살고있는 사람이나 농촌에 살고있는 사람이나 어른이나 학생들이나 남자나 여자나 얼굴은  모두가 청일색으로 검고 초최한 모습들이였다.까마잡자하고 수심에 낀 모습들이였으며 웃음을 볼수 없는 얼굴들이었다.청진에서 일행은 김일성 원수님의 동상에 꽃다발을  20원주고 사서 증정하고 묵례를 한후 잠간 광장에서 놀고있는 사람들을 살펴 볼 기회가있었다.청춘남녀가 손잡고 거니는 모습은 하나도 볼수 없고 혹 전동기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조선은 침울한 나라이다.어딜가나 모두가 엄숙한 얼굴이였으며 도보로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삼삼오오 때를 지어 웃으며 떠들며 활개치며 다니는 중국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웃음을 볼수없거니와 또한 뚱보가 없는 나라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비료가 모자라서 앙상하게 자라고있는 논밭의 정경이나 다를바 없다.한창 꽃나이에 활짝피여날 처녀들의 가슴은 모두가 평면을 이루고 있었으며 풍만한 엉덩이를 갖고있는 녀인들은 볼수가없다.혹 보인다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호텔의 종업원이나 고급간부의 자녀들이다.그들의 얼굴은 희고 뽀얗고 화장품도 바르고 다니는게 눈에 띄였다.   지구촌에서 제일 미녀산지인 조선의 녀인들이 이런 모양이니 별스런 생각이든다.  식량이 모자라고 로동강도가 심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칠보산의 민박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한집의식구가3명이던4명이던 한달에20kg의 량곡을 배급주고 나머지는 자체로 해결한다 한다.그곳에서는 그런대로 바다를 끼고 있어 조개같은 해물들을 잡고 또 산비탈에 뙤기밭을 일쿠어 옥수수며 콩을 심어 보충을 할수있다한다.지리적 우세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의 주민들이 그렇게 엄중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감은 느껴 보지 못하였다.더군다나 굶주려 사람마저 해친다는 이야기는 아마 과장도 이만 저만한 과장이 아닌가 싶다.   길거리에서 도로공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넘겨 보았는데 옥수수에 나물을 섞어 지은 밥으로 보이고 반찬은 역시 나물과 장으로 보였다.고된 로동을 하고있는 그들에게는 량으로 보아도 충족하지 못한 량이었다. 우리들에게 보여준 청진 제강소 유치원 어린이들의 공연은 참으로 놀라웠다.그들의 천진하고 높은 예술의 기교에 우리는 손벽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웃음속으로 눈물을 삼켯다. 귀여운 어린이들이었건만 한명도 복실 복실 피여 나는 모습은 않보였고 수척하고 파리한 모습들이였다. 어린이들이 공연하면서 짖는 웃음도 어색하였다. 조국의 미래고 조국의 꽃봉오리라고 하는  그들에게 차려진 현실은 락관적이 못되는뜻 싶었다     조선은 세가지가 무료로 백성들이 아주 만족감을 느낀다.   첫째,세금이 없다.   둘째,11년제 교육을 무료로 한다.(학년전1년,소학교4년,중학교6년)   셋째,의료비가 무료다. 그외에 더 보충한다면 조선에는 개인 소유의 집이없다. 공장이나 광산로동자들이나 농촌 협동조합의 농민들의 집은 모두가 나라에서 지어준다.그저 몽뚱이만 들어가면 그기에 모든것이 가추어져있다.비록 사치스러운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조선에는 사유재산이 극도로 재한을 받고있다. 조선에는 한개 체널밖에 더는 수신할수 없지만 텔레비도 널리 보급되고있는겄이 지붕위로 굴뚝과 같이 높이 세워진 안테나선으로 보아 낼수있다.내가 들었던 보촌 민박집 주인집은2층건물이였는데 아래층은 주인집4식솔이 살고있었고2층은 객방이었는데 객방의 이불장과 이불 요,그리고 침대등 모든것은 나라에서 장만하여 준것이고 아래층의 살림 살이도 역시 기업에서(이 민속촌은 나라의 한 기업체에 속한다 한다.) 마련하여 주었다 한다.그러나 텔레비만은 자체로 사들이었단다.이집의 학생 둘은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10분정도 거리의 학교로 다니고 조선에는 아무리 험악한 산골에1명의 학생이 있어도 학교가 있다하니 나라에서 얼마나 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을  넉넉히 보아낼수있다. 비록 밥은 배불리 먹지 못하고 옷은  화려한 옷을 입지는 못하는 인민들의 생활이지만 인민들의 애국심은 높고 수령에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는것을 이나라의 에서 알아 볼수있다.   란 김정일 장군께서 창도한 미제국주의를 위수로한 외세의 침략과 업수임을 막기 위하여 먼저 군사력량을 키워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위한 정치로서 매년8월25일,이날을 경축한다.이 나라 인민들은 일하여 번 재부를 국방건설에 투입하고 자신들이 헐벗고 굶주림은 마땅한것으로 여긴다.그래서 두차례의 핵무기 실험을 아주 자랑으로 간주하고 자오감을 느낀다고 려행 안내원이 말하었다.백성들은 오직 이렇게 하는것만이 애국심이요 나라를 위하여,장군님의 지시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일이라고 간주하기에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을 동시에 생각해서 잘먹고 잘 살아 보자는 욕심 조차 가져 본적이 있는것 같지를 않았다. 가는곳 마다 “장군님의 선군정치 만세!”의 대폭 구호를 볼수있고 “장군님만세!”의 구호에 비추어 아주 작으마한 “부강대국”이란 구호는 혹간 보여도 “잘먹고 잘사는 나라로 건설하자”는 구호는 눈에 띄우질 않았다.그러나 중요한것은 이 봉쇠된 나라에도 개혁이란  거세찬 물결에 약간이나마 문이 열린듯 싶었다. 관광차 안에서 틀어 놓은 노래속에 흘러간 옛노래도 두어곡이 흘러 나왔고 안내원과의 이야기 속에서도 유머적인 육담도 부담없이 듣고 나눌수 있었다.또 아랫마을의 술자리에서 흔히 부르는 “위하여”라는 웨침소리도 그들의 입으로 세여 나왔으며 식당 접대원 처녀들은 노래를 마추어 허리와 엉치를 흔들며 디스코도 제법이었다. 그런가하면 정치적인 내용을 담지 않은 이야기는 려관 경비원이나 청소공이나 민박집 주인들과 시름없이 나눌수가 있었고 좀 민감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재치있게 돌려대군하였다.기타 주민들과는 접촉이 허락이 되여있질 않아 말할 기회가 없어서 알고싶고 묻고싶은 일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려행 목적지인 칠보산에는 이튿날인8월23일, 점심때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고 해수욕장에 매인당 인민페10원을 주고 해수욕을 즐겼다. 조선 동해바다의 물은 그 이상 더는 맑을 수 없었다. 허리까지 깊은 물속에서도 조개들을 볼수있었고 우리들은 어린이들 마냥 많은 조개를 잡아내였다.해가 기우러 지고 으슬으슬 추워지자 우리는 물속에서 나와 미리 주문하여 놓은 털게와 조개구이에 조선술을 마셨는데 술은 20도 짜리이여서 마신후 머리가 아플가봐 걱정이 많았지만 이튿날 아침에일어나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식당 접대원 처녀들이 구워 주어서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였고 윤희라 부르는 처녀는 한컵이나 되는 술을 단숨에 마셔 우리들을 놀래웠다. 그리곤 젓가락 장단에 노래를 시켰드니 가는 곳마다에서 듣는 또 그이였다.청진 유치원어린이들이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이 노래였고 경성에서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누구나 이 노래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저녁 식당에 들려 또 중국에서 가져간를 마시고 해당된 숙소로 제각기 헤여졌다.               칠보산은 조선에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명승지이다.    칠보산은 이 산중에 금,은,호박,차거,마노,산호,진주 등 일곱가지 보물이 있다고하여 칠보산이라 불리웠다하나 오늘날까지 한가지 보물도 발견을 못하였다 한다.   칠보산은,,의 경관으로 나뉘여져있는데 우리가 주숙하고있는곳이 바로였다.    칠보산을 삶은 달걀에 비유하면 해칠보는 달걀 껍질에, 외칠보는 흰자위에,내칠보는 달걀의 노란자위로 비유 할수있다 한다. 점점 볼거리가 더 많고 더 좋다는 말일것이다.   에서 뭐니 뭐니 해도 해돋이 구경이 제일 장관일 것이다.   아침4시반에 해가 뜬다하여4시부터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이렇게 상쾌한 아침은 난생 처음인것같다. 쏴—쏴 소리치며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동녁이 트기 시작한다.수평선 저 끝에서 천태 만상의 구름이 조화를 부리며 창창한 수림으로 변하였다가 고층빌딩이 줄줄이선 도시로 되어 눈앞에 나타 나기도 하였다가 삽시에 버들숲속에 싸여있는 농가들로 탈바꿈하여 붉게 물든 아름다운 아침 노을에 수집은듯 사라지기도한다.그런가하면 수려한 칠보산의 모습 그대로 담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누구집의 강아지인지 아침 이슬을 밟으며 수풀속으로 뛰여간다.(개는 주민들이 키우는것인데 집집 마다 개를 키우고있다.사람들 조차 먹을게 없다면 개에게 먹일 여유가 있겠느냐는 나 혼자 해보는 추측이다.)   몇일전에 새끼를 낳은듯한 엄마소가 아기소의 등에 내린 찬 이슬을 한가히 핥으며풀숲에 누워 있다.(이 소는 협동조합의 소유이다.) 동해바다의 해돋이를 렌즈에 담고 기념사진도 몇장 남기고 식당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기다렸다.   오늘은 좀 일직 서둘러서 외칠보와 내칠보를 모두 둘러 보아야 하였다.    칠보산의 주봉은 해발659m인데 경관으로는 덕곡폭포와 부월암,촉혈암,장군바위 개심사,승선대,피아노바위,부부바위,비석바위,도끼바위 등 수많은 경관이있으며 그기에 모두가 그럴듯한 전설들이 얽혀있었다.덕곡폭포에서는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한다고 해서 몇몇녀성들은 쏟아지는 폭포앞에서 두손을 마주잡고 빌기도하였고 남폭포,녀폭포에 가서는 그물에 손을 씻으면 부처간에 모두 건강하게 잘산다하여 다투아가며 손들을 씻었다.    특히 내칠보에 위치하고있는 만물상에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수없는 변화 무쌍한 경물들을 발견할수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칠보산은 중국의 장쟈제(張家界)처럼 거창한 산들과 그 무엇인가 다른 수려하고 청아하고 맑은감을 관강객들에게 남겨주는 그런 산이었다.    계곡도 쥬자이꺼우(九寨溝) 계곡 못지않았고 계곡량안에 촘촘이선 단풍나무를 보니 붉게 물들10월 단풍계절에 또 오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 산속에 많은 약초와 산나물들이 있으련만 채집하여 파는것을 볼수가 없었다.  개심사에서 한봉지에20원하는 고사리를 여러사람이 샀다.      조선에서는 중국인민페가 류통이되고있어 무었이던 살수있으나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칠보산에서 말린 낙지를 한키로 사고.조선지도한장을20원주고 삿는데 도문에서는50원에 판다.조선해관에 오니 왜 가져온돈을 쓰지않고 그대로 가져가는냐는 웃기 는 물음를 한다.    경성온천에서 한칸에2명이 들어가 온천욕을 하는데 중국인민페로30원을 주었다 .아이스케키라고 물에 단물을 섞어 얼쿤 얼음덩이를1원을 받았으며 로점상들이 과자며 청량음료 등속을 팔고있는것이 군데군데서 보였으나 기회가 없어서 사서 먹어보지 못하였다.    차를 타고 지나갈때 청진이나 경성의 길거리 양쪽에,, ,, 등 여러가지 가게들이 눈에 띄우군하였으나 출입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우지않았다.    여러모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다는것이 확연하였다.    그러나 길거리 포스터에 씌여있는바와 같이  “조선은 결심만하면 한다”  “장군님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굳은 의지를 지닌 조선인민들의 용기와 마음을 손쉽게 읽을수있었다.  더욱히 “가는길은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그들의 락관적인 정서는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그 언제고 남북이 소통이되여 통일이되고 손에 손잡고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웃으며 행복하게 잘살아 볼날이 반듯이 오리라고 굳게믿는다. “말타고 꽃 구경”하는식으로3박4일의 조선유람 소감을 이렇게 줄여서 적어려니 어쩐지 석연한 마음을 금할수없다.  (2011—8—28)
3    귀향 댓글:  조회:2806  추천:1  2012-02-06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 곳 먼지이는 돌담집 찾아 갔더니 주인 잃은 멍멍이 꼬리치고 찾아와 올리 뛰고 내리 뛰고 반겨 맞는다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 곳 두렁길 비틀데며 찾아 갓더니 민들레꽃 하늘하늘 손짓 저어며 수집은듯 조용히 반겨 맞는다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곳 조상 무덤 조심조심 찾아갓더니 쑥밭된 무덤위에 하얀 혼이 호되게 꾸짖는다 "이 후레자식 같은 놈"
2    몽롱시를 두고 댓글:  조회:3440  추천:6  2012-02-04
문을 꼭 닫아 걸고 커피와 달콤한 술로 류통과 령을 쌓는다 마치 숲속에 날아예는 나비 잡는 철부지 처럼 알룩달룩 한줌 잡아서 바늘로 꼭꼭 찔러 죽여 새도안이라 그려 내는 그들 몽유병 환자처럼 웅얼웅얼 동에서 한마디 서에서 한마디 여기서 한가닥 저기서 한가닥 주섬 주섬 주어온 알송달송으로 그대의 눈을 뿌옇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몽롱 시란다
1    고향길 댓글:  조회:2757  추천:1  2012-02-04
비내리는 날 듣는 슬픈 노래는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길을 걷는것은 엄마 젖줄기 찾아 가는 외로운 길이랍니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기타소리는 터벅터벅 발걸음 메워 주는 자장갑니다 언제나 마냥 가고푼 길은 반길 사람 없는 그  곳이랍니다 비와 함께 듣는 구슬픈 노래 속에 허넉이며 가는 외로운 길손 오늘도 우산없이 걸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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