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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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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심명주: 내가 만난 개들(수필) 댓글:  조회:442  추천:0  2019-07-11
내가 만난 개들 심명주   개를 내 손으로 키워보지 못한 지가 올 들어 십년째이다.  로산으로 아들을 임신하고 막달이 되기까지 나의 곁에는 마지막으로 세살배기 깜순이라는 촌강아지, 변견便犬이 있었다. 농촌에 갔다가 50원을 주고 사와 남편의 생일 선물로 충당했던 개였다.  깜순이를 키우면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기억은 그가 낳은 새끼 세마리이다. 그 때까지 아직 아이를 낳아보지 못했음에도 나는 깜순이를 도와 산후조리를 살뜰히 챙겨주었고 곧 40일 좌우가 지나 몸집이 앙바틈한 깜순이가 기세 좋게 크는 새끼 시달림에 힘들어하자 면접까지 보면서 세 집들에 또 알뜰히 분양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번엔 내가 임신을 하고 나의 자식을 키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막달이 되자 깜순이를 키우기가 힘들어서 결국 엄마집으로 보냈다. 내가 살던 집이 몇십평방메터 밖에 안되고 짖음소리에 하루 거의 20시간은 잠을 자야 되는 아기가 놀라 깰 수 있고 행동이 자유로운 깜순이한테 아기 때문에 여러가지 구속을 주려니 그것도 안스러웠고 더구나 아빠트 살림에 사람 손이 무지 닿아야 되는 개 뒤시중이 아이를 키우는 나를 힘들게 한다는 리유에서였다.   깜순이를 보내고 나니 덕분에 종래로 애견, 애묘가 차지하던 나의 품은 그 때부터 오롯이 십년째 유아독존 아들의 차지가 되였다. 2018년은 무술년 황금개띠해이다. 이미 열살배기로 성장한 아들도 몇년 뒤면 곧 어미품을 떠날 련습을 할 것이고 그러면 빈 둥지 같이 보기 좋게 비는 내 품에 나는 무엇을 담아 인생 후반의 증후군을 사그릴가.  삶에는 밥과 만두와 시루떡 같이 채울 것들이 많으나 이미 그런 것에서 포식을 느낀 현대인들은 소울을 지향하고 원한다. 아들애 태여나자 시작한 심리학공부가 거의 십년째이다. 허나 나는 거기에서도 만족을 못 얻었다. 개나 고양이 한마리를 데려다 키울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개나 고양이도 준비 안된 허전한 인간의 마음에 아무 거나 채워서 대타시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대접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매번 준비없이 받아들이고 어마지두 함께 했던 지난 동물들과의 생활에서 내가 얻어낸 결론이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우세로 나는 개나 고양이의 덕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들은 과연 나와 함께라서 진정 행복했을가. 그리고 여직껏 나는 내가 키우던 어느 개든 그의 림종까지 지키지 못했다. 이것도 어떤 자책과 아픔을 동반한 여한으로 나한테 남았으니. 황금개띠해를 맞아 그동안 내가 만났던 견들과의 일단락 추억을 지어보는 것도 내가 생각의 풋풋함에서 성숙으로 치다르는 인생의 앙상불에 하나의 매듭작용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생명이란 만남이 아닌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 만남에는 대상이 규정되지 않는다. 시간과의 만남, 계절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 동물과의 만남, 사랑과의 만남, 리별과의 만남… 걸핏하면 부딪치는 거나하고 화려한 만남 때문에 사람은 사는 동안 이토록 이승에 련련하는 것이다. 그중에 가장 좋은 만남은 자기와의 만남이려니. 아마 오늘 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무술년 개띠해를 빌미로 내가 만난 개들을 거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만남 뒤의 리별. 지난 세월 나를 스쳤던 만남들과 그에 어김없이 따라오던 리별을 생각하면 그저 사무친다는 말로는 모자라는 느낌이다. 사람하고도 그랬고 개들하고도 그랬다. 죽음과 련관되고 아픔과 이어지는 리별에는 에누리가 없었고 돌이킬 여지가 없었다. 그런 만남과 리별 와중에 시간은 공정하게 흐르고 마음은 찼다가 비였다가 나의 몸도 불었다가 줄었다가 인간이 지닌 법대로 생명 하나를 세상에 부리우고. 그리고 이제야 토로하지만 내가 만삭의 몸이 되기까지 즐겨 먹었던 음식이 있다. 바로 보신탕! 들숨날숨이 어여쁘던 강아지들이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촉촉하니 이루 말하기 어려운 코끝으로 비비닥이고 주먹 만하던 강아지가 우렁찬 성견이 되도록 나는 그들에게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느꼈던가. 숨붙은 그들이 나에게 생생한 그대로 생활의 에너지원으로 되던 순간순간들을 쌓으면 가히 집채보다도 더 많았을 것인데. 그런 아릿하니 부드러웠던 스킨십을 잊고 내가 임신한 몸으로 하루 건너 찾았던 음식점이 바로 보신탕집이였다.  가누기 힘들게 부풀어가는 아기 밴 몸이 보신탕만 생각나면 하늘 뜻을 쫓는 신도마냥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이 군침을 흘리며 한밤중에라도 기어이 개고기를 찾아서 몸에 넣기를 반복했던 임산부, 어이없게도 그게 나였다.  오로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식감으로 나는 그것이 일찍 나와 교감을 나누던 애견들이 둔갑된 육질이라는 것을 헤아릴 사이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 바라던 것을 먹고 나서도 늘쌍 뒤끝 입맛이 상쾌하지 않는 입덧 특유의 여운으로 어렴풋이 애견들과의 상념을 떠올렸다. 아니면 애견들과 늘쌍 제대로 나누지 못한 리별들을 감지했던가. 아니, 이건 별로 간사한 나의 변명이리라.  리별은 리별이로되 내가 바라는 견犬과의 리별을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것은 팔팔하게 뛰여놀던 조막 강아지가 우람해지다가 서서히 무던해지고 그다음 뒤다리를 절뚝거리고 이어서 한쪽 눈은 혹여 백태도 번지고 청력을 잃고 나중엔 실명하여 온종일 웅크리고 누워만 지내고…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죽어 식어가는 개의 육신을 그들이 살았을 때 그랬듯 내 품에 꼭 그러안고 나는 가슴으로 지긋이 통곡하리라. 살아 인연이 되였던 우리 사이를 감사하면서. 이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그들과의 잘된 리별이고 내가 바라는 모든 애견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더 길게 살아야 되는 사람은 다시 하루, 한달, 나아가 몇달, 몇년이 지나도록 그들을 잊어가면서 혹여 또 다른 애견과 만나면서 여생을 이어갈 것이리니. 림종 끝까지 개들과 나누지 못한 리별을 상상에 부칠 때면 나는 나의 자식 생산을 위해 그토록 수요하던 단백질을 넉근히 내 살집에 찌워주던 견犬들을 더욱 추억한다. 나의 살과 피로 환생했던 그들을 느끼며 내 몸을 어루쓸어본다.    내가 만난 개들은 그냥 개가 아니였다. 나에게 무엇인가 남기고 간 개들이였다. 출처:2018 제2호
29    김홍월: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소설평) 댓글:  조회:315  추천:0  2019-07-11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 김홍월   고통의 시간은 길고 깊었다. 길고 깊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우리에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길 속에 숨어있던 희망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멀어져만 가고 어찌할 도리 없이 파멸로만 치닫던 녀자와 남자는 사실 반쪽이 아닌 하나가 될 수 있는 희망과 결정된 운명이 아닌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반점에서 점이 되듯, 마침표에서 쉼표가 되듯 이들은 반쪽에서 하나로, 결정된 상태에서 비결정의 상태로 나아간다.   ‘반점’에서 ‘점’으로  - 반쪽·분렬에서 하나·통일로  빛은 명도와 채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명도와 채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녀자는 채도를 잃었다. 녀자는 무채색의 반쪽짜리 삶을 자살로 마감하려 한다.    눈이 흐려있다. 그녀는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보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흙탕물에서 금방 건져올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 것도 비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중략…) 색상도 보이지 않는 강물에 오물이라도 쏟아붓고 싶지만 그녀는 오물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가?   색을 볼 수 없을 만큼 녀자는 삶에 의미를 잃었다. 녀자의 삶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겉으로 예쁜 아이의 엄마이고 사회적으로 믿음직한 남편의 안해였지만 녀자는 아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녀자를 경멸하고 아이를 경멸한다. 애초에 이들은 뚜렷한 의미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결혼했다. 이들의 더 큰 문제는 서로가 화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스스로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부부로서도 분렬됐지만 스스로도 겉과 속이 일치하지 못하는 분렬에 시달린다.  녀자는 아이를 완전히 잊은 채 강물에 뛰여들려 했으면서도 아이 울음소리에 아이를 챙긴다. 남자는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면서도 녀자 직원들을 깍듯한 친절로 대한다. 이러한 자아의 분렬로 인해 이들 부부의 분렬은 돌이킬 것조차 없는 파탄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들 부부의 관계는 애증으로 인한 뜨거운 파탄에 이른 것이 아닌 일말의 애정조차 없는 차거운 파탄이다. 소설은 이들이 파탄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자살 기도에서부터 사랑 없는 가정생활, 분렬된 자아 그리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고통과 파탄으로만 고꾸라져가는 이들을 보며 우리에게는 점점 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트라우마가 드러날 때에 우리는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녀자가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이의 운명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녀자의 운명이 비참한 리유는 남편의 사랑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랑의 파탄은 녀성으로서의 문제에 해당하고 아이에 대한 파탄은 어머니로서의 문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녀성으로서의 운명이 파탄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녀는 아이에 대한 모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녀자가 모성애를 포기한 것은 첩보다도 못한 어머니의 비참한 인생에 대한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어머니의 인생처럼 자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까지 비참해질 것이라는 운명의식 때문이였다.   고추를 잃고 태여난 아기다. 모든 것이 반복이다. 젖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기가 자라는 것도. 엄마처럼 살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아기도 계집애다. 아기도 계집애니 아기에게 언젠가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엄마처럼 살지 말라.”일가? 그녀가 엄마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였지? 아기가 그녀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또 무엇이지? -너도… 마침내 그녀의 머리가 말을 시작한다. -너도 크면 나처럼 될 거야.   어쩌면 녀자의 주체성 없는 결혼은 적어도 어머니와 같은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소설 속에 녀자는 온전한 가정에 대한 열망만을 보여주고 가정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인 사랑에 대한 열망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만 당부했지 사랑을 가르치진 않았다. 결국 그녀가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어릴 적 새엄마와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가정에서 소외된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와 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각각의 사건들로 기적적으로 극복된다. 녀자의 트라우마와 운명의식은 “내가 힘들고 고달프다고 아기의 운명도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예요. 세상에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깐요.”라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통해 깨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남자의 트라우마는 술에 취해 우연히 부성애를 발견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녀의 고성과 함께 이미 술을 반은 넘게 깨여버렸던 남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남은 술만이 아닌 그간 마셨던 술 모두를 깬다. -아기. 아기를 싫어하고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를 판단하고 계산할 여유가 없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아기를 향해서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을 뿐이다.   그는 그 자신이 아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믿어왔지만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자신을 발견하고 아홉살에 형성되였던 트라우마와 작별한 것이다. 이렇게 트라우마를 깨뜨림으로써 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라는 직책과 모성애, 부성애라는 마음을 일치시킨다. 즉 겉과 속으로 분렬된 자아를 다시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된 이들에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들이 앞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한다.   그러는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녀자가 아닌 또 다른 녀자로 태여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녀자로 다시 태여나고 그에게 그녀는 녀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이성적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듯 부성애와 모성애로서 온전한 하나의 자아를 획득한 것을 넘어 서로 사랑하는 남편과 안해로서도 온전한 하나의 자아의 획득을 예고한다. 이러한 분렬된 자아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곧 자기로부터의 일치를 넘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부부, 가족으로서의 일치를 예고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은 반점에서 하나의 점이 되였다. 지옥 같았던 이들의 상황은 반점을 점으로 고치듯 분렬된 것들이 다시 하나로 고쳐지면서 천국으로 급변한 것이다. 마치 코딩의 세계처럼 아주 작은 차이가 현실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리고 코딩의 세계처럼 작은 사건 하나로 구호준은 고통의 순간을 환희의 순간으로 뒤바꾸는 급격한 반전을 이루어낸다.     ‘마침표’를 ‘쉼표’로  - 결정성을 비결정성으로  반전은 반전으로서의 감동이 있다. 그러나 모든 반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개연성이 없는 반전은 작위적인 것에 불과하며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녀자가 단지 정신과의사의 한마디 조언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과 남자가 단지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것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토록 자살을 시도할 만큼 강렬하게 아이는 잊은 채 운명을 비관하던 녀자가 단 한마디 말로 마음을 바꾸고, 아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멸에 가득찼던 남자가 일순간의 반사적 경험만으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또한 이들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되찾았다는 리유만으로 리성적 사랑에 관한 트라우마까지 극복되고 서로의 사랑이 다시 싹틀 것이라는 예고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급격한 반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개연성이 떨어져보임에도 불구하고 반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작품 곳곳에 숨어있던 비밀스런 알리바이, 희망의 씨앗들 때문이다. 우선, 녀자가 운명의 반복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리유는 단순히 운명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정신과의사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조언은 이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상황에 대한 방점에 불과하다. 강물에 뛰여들기 직전 녀자를 구한 것은 아이의 손길이였다. 가장 강력한 비관을 이겨낸 것은 모성애였던 것이다. 또한 녀자는 처음에는 가식으로 치부했지만 아이를 예쁘게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이 과정 속에서 모성애가 그녀의 마음의 심연에서 본능으로서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유아 홈페지 디자인을 가장 쉬운 것이라 여길 만큼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욕망과 사랑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미스 최가 켠 화면은 남자에게는 일도 아닌 그냥 애들의 장난감 같은 존재다.  유아상점의 사이트를 개설하는 것이다. 유아상점이라면 팔고 있는 상품만 생생하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어떤 기교나 느낌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아이에 대한 사랑을 단순한 흉내 내기를 통해 터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성애가 본능으로 내재되여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이복동생에 대한 증오로써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아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것이지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아기가 미워서도 아니였다. 아기가 싫어서도 아니였다, 그 순간만은. 아기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였다. 학교에 갈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트라우마를 얻게 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복동생과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성인이 된 그는 아이를 싫어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공포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듯 이들의 부성애와 모성애는 단지 억압된 것에 불과하지 이들의 모성애와 부성애는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내면 깊은 곳에 그리고 작품 곳곳에 숨어있었다. 한편, 모성애와 부성애가 이들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듯이 이성에 대한 사랑의 욕망도 이들 내면에 숨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녀자의 경우, 그녀는 전부터 원래 그러기도 했거니와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가슴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가슴을 가린다.    그녀는 아기를 받아서 가슴을 풀어헤친다.  병원이지만 상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고 같은 존재의 녀인만이 있으니 가슴을 헤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누가 문득 문을 떼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들어설 때 의사가 문에 상담중이란 패말을 붙이는 것을 봤으니깐.   심지어 진료실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슴을 가렸다. 이는 그녀가 머리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본능적으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의 이성에 대한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실장을 보며 성적 흥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는 유독 가슴에 집착한다. 그런데 하필 작품상에서는 그의 안해의 가슴이 예쁜 것으로 설정되여있다. 이는 그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의 본능이 내재되여있고 그 사랑의 본능이 향할 곳이 자신의 안해임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녀자도 자신의 가슴에 대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예민하다. 이는 녀자의 사랑에 대한 본능이 자신이 가슴을 좋아해줄 남편에게 향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녀자와 남자에게는 서로를 사랑할 본능이, 그리고 앞서 말한 모성애와 부성애의 본능이 내재되여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본능은 작품 곳곳에 은밀하게 그러나 버젓이 숨어서 소설의 급격한 반전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고통이 환희로 급격히 뒤바뀌는 반전의 개연성은 곳곳에 숨겨진 녀자와 남자의 본능을 통해 드러난다. 녀자와 남자는 모성과 부성 그리고 사랑의 본능을 억눌러왔고 그러나 자연의 리치를 거스를 수 없듯이 본능을 막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이들의 욕망은 분출되여 녀자와 남자는 아이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더 깊이 누른 용수철이 더 높이 튀여오르는 원리의 개연성처럼 억눌린 욕망으로 분렬되여 지옥에서처럼 고통스러웠던 이들의 욕망은 극단적 지점에서 분출되며 이들은 가장 높은 환희를 맞이하는 개연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이 자신의 본능을 되찾았다는 점은 이들이 주체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삶은 트라우마에 갇혀 본능을 억누르는 비주체적 상태에 있었다. 즉 이들의 현재는 과거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이며 이들의 현재의 운명은 과거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 놓여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이 억눌렸던 본능을 표출시킨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넘어서고 과거에 의해 결정된 운명에서 벗어나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해나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명의 개척을 강조하듯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예고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녀자와 남자에게 운명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운명은 쉼표의 상태로 열려있다. 마침표는 이미 끝나버린 것, 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반면 쉼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비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편 앞서 확인했듯이 마침표는 점이고 쉼표는 반점에 해당하기도 한다. 구호준은 교묘하게도 ‘.’ / ‘,’을 1차적으로는 점 / 반점, 혹은 하나·통일 / 반쪽·분렬로 해석하도록 설정했고 숨겨진 2차적 의미로는 결정성 / 비결정성으로 해석하도록 설정했다.   쓴 커피를 들이켜면서 한참을 화면과 씨름하던 남자는 마침내 문제를 찾았다. 점이 반점으로 되여있었다. ‘점(.)’과 ‘반점(,)’,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쉽게 혼돈이 생길 문제다. 부호를 수정하니 화면이 펼쳐지면서 아기용품 상점이 펼쳐진다. 점과 반점의 사이, 그 작은 사이 하나가 전체를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남자는 화면에서 움직이는 아기용품 상점의 물건들만 멍하니 쳐다본다. 마음을 빼앗는 뭔가가 보여서가 아니다. 남자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점은 옳은 것이고 반점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의 뒤로 갈수록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지고 남자는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 남자는 이미 점이 맞고 반점을 틀린 것으로 보고 있고 우선적으로 ‘.’과 ‘,’을 점과 반점으로 읽기 때문에 점을 하나·통일로, 반점을 반쪽·분렬로 해석하는 것이 1차적 해석에 위치한다. 그리고 인용문의 후반부에 은밀히 드러나는 ‘.’과 ‘,’의 마침표 / 쉼표, 결정성 / 비결정성의 의미는 2차적 해석에 위치하게 된다.     인물적 수제, 시간적 파불라 은 두가지 의미의 구성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녀자에게 밀착한 서술, 남자에게 밀착한 서술로 분렬된 두개의 서술 그리고 이 둘을 통합시켜 함께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인물을 기준으로 한 은 분렬된 것이 다시 온전히 합쳐지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인물에 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은 불완전한 반점이 온전한 점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1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두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과거-현재-미래를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시간, 혹은 시점时点을 기준으로 한 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고 억눌렸던 현재가 본능에 의해 과거의 굴레를 벗고 비결정된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시간에 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은 결정성의 마침표가 비결정성의 쉼표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2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인물에 관한 수제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분렬된 인물이 통일되는 내용이 도출되고 시간에 관한 파불라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결정된 운명이 비결정된 운명으로 나아가는 내용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렇듯 은 1, 2차의 의미에 걸쳐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킨다.  ‘점’으로 그리고 ‘쉼표’로 바꾸게 됨으로써 이들 둘은 모두 반쪽·분렬의 삶, 결정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태양의 동쪽’인 새로운 생명의 땅을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복잡하고도 치밀한 구성을 통해 의 극단적 고통이 환희로 뒤바뀌는 급격한 반전은 개연성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심리로 침투한다. 이것은 고도의 위로이다. 한올의 희망도 기대하지 못하게 독자들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에 모든 고통을 다시 환희로 바꾼다. 단순히 사라져버리라는 주문만 외운다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통을 미리 겪고 고통에서 탈출해본 자의 구체적인 경험을 치밀하게 공유하지 않는 이상 몇마디 주문 같은 말로 고통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희망은 생기지 않는다.  이제는 구호준이 이처럼 치밀한 구성을 한 리유를 알 수 있다. 극단적 고통을 환희로 위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2018 제2호
28    하영:숙명처럼 찾아든 문학(대담) 댓글:  조회:325  추천:0  2019-07-11
숙명처럼 찾아든 문학 하영   초대작가: 우광훈(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하영(《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12월 23일      하영: 안녕하세요? 우광훈작가님. 그동안 수없이 만났었지만 문학대담이라는 형식으로 마주하고 보니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크네요. 얼마 전에 한국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은퇴 후에도 우리 문학을 위해 애를 쓰시고 유익한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께 진정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훌륭한 작품을 많이 쓰시여 우리 문단의 주력으로서 중견역할을 톡톡히 해오신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의 문학인생과 창작성과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광훈: 네, 저도 그래요. 반갑습니다. 하영: 이번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의 문학인생을 살펴보는 동안 내내 가슴이 먹먹해나고 눈가가 젖어왔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다구요. 늘 밝으시고 유머적이시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분위기를 띄워주시는 선생님의 안에 그토록 큰 아픔이 있었을지 어찌 알았겠어요. 그런 상처를 무마시키기 위해서라도, 운명처럼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조여왔던 비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선생님은 더 ‘즐거워야’ 했고 더 ‘밝아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동년을 선생님은 회색으로 단정지으시죠. 사실 처음부터 회색이였던 건 아닙니다. 연길이라는 도회지에서 6남매의 막내로, 그것도 부친이 출판사에서 번역전문가로 일하시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난 출신 자체는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분홍빛이였어요. 그러나 1954년에 태여나 한창 재롱 부리며 행복하게 자라야 할 무렵인 1958년, 선생님의 가족에는 청천벽력 같은 비운이 떨어집니다. 아버지에게 ‘우파분자’라는 모자가 덜컥 씌워졌고 직장에 다닐 자격을 박탈당한 아버지는 훈춘 로동개조농장에 가시게 되였죠. 우광훈: ‘회색의 동년’이라는 말은 그 시기를 살았던 많은 동년들의 시대적인 현실이기도 했어요. 많은 동년들은 태여나서부터 굶주려야 했고 뭐든 배가 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사회인 줄로 알고 있었지요. 사실 ‘밝아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의미로 볼 때 아직 세상을 깨우치지 못한 천성적인 천진함과 순진함이 없은 것은 아니였습니다. 다행인지도 모르지요. 했기에 그런 동년에도 추억할 만한 순간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우파’라는 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농장에 가시자 저희 식구들은 생활난으로 하여 다섯곳으로 흩어져 살아야 했어요. 풍비박산이라는 말이 이런 건지 모르겠네요. 그 때 저와 저의 셋째누님은 심양의 소가툰에서 살던 외가집으로 갔었구요. 하영: 선생님은 동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그나마 외가에서 살던 시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파분자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었음에도 아직 개구쟁이였던 어린 선생님은 불운이란 게 무엇인지 알지를 못했던 거죠. 그 시기에 3년 대기근까지 시작되였지만 외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선생님은 배고픔이란 걸 몰랐고 그냥 ‘사랑이 듬뿍’이라는 표현을 써도 걸맞을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곳에서의 3년 생활이 후날 선생님에게는 향수와 같은 정서가 되였구요. 최병우교수는 “자신의 기억에 따스함으로 남아있는 자연의 공간인 외가의 기억은 우광훈소설에서 고향에 가까운 이미지로 등장한다.”고 했어요. 때묻지 않은 자연 속의 아름답고 순수한 외가는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였고 선생님에게는 곧 고향이자 그리움이였죠. 우광훈: 외가에서 지낸 3년은 저로 말하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였어요. 외가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그 때 이미 홀로 난 큰이모와 이모의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의 기억에 외할아버지는 여위신 편이였으나 장대하고 외할머니는 작달막한 키에 언제 한번 큰소리 하지 않으시는 인자한 분이셨어요. 외할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강으로 나가 고기도 잡으셨고 습지에 가 골뱅이도 건졌어요. 외할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야시장에 나가 외할아버지가 산에서 뜯어온 머루를 팔고 강에서 잡은 물고기나 골뱅이를 파는 것을 동무하기도 했죠. 물론 장에서 번 돈으로 사주는 사탕이나 과자, 놀이감에 기대가 더 컸었구요. 외할아버지와 함께 야외로 나가면 들에는 벼밭이 있었고 련못에는 련꽃들이 피여있기도 했어요. 그리고 심양과 단동을 오가는 기차들이 으르렁거리는 것도 볼 수 있었구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선반 우에는 항상 저의 몫으로 감추어둔 사과나 배 반쪽이 있었고 사탕 몇알, 과자 몇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외가는 저에게 있어서 언제나 포근하고 사랑과 인자함으로 가득한 항만에 다름 아니였어요. 지금도 외가의 풍경은 한폭의 동양화로 저의 기억에 살아있습니다. 아마 그런 기억들이 저의 문학에서 표현되는 자연에 대한 숭배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는지 모르겠네요. 하영: 부모님이 계시는 연길로 돌아온 어린 선생님은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고 그로부터 ‘우파 자식’으로서의 외로움이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훈춘에 있는 로동개조농장에 계셨고 식구들은 3년재해로 주린 창자를 안고 살아야 했으며 더우기는 우파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쓰고 어린 마음에 그 무거운 과부하를 견디며 공부를 하고 글을 깨우쳐야 했죠. 아버지의 불운은 ‘우파분자’ 하나로 끝나지 않으셨어요. 문화혁명기간에는 또 ‘5류분자’로 지목되여 매일 투쟁받는 고투를 치러야 했고 그 바람에 어린 선생님은 기가 죽을 대로 죽어있었다죠. 그 후 중학생이 된 선생님은 ‘우파분자’의 아들이라는 리유로 학교선전대에서도 자격을 박탈당하고 제명되기까지 했었어요. 한창 천진란만하게 뛰여놀고 맑은 눈으로 세상만물을 익혀야 할 나이에 선생님에게는 너무도 일찍 짙은 회색이 찾아들었습니다. 우광훈: 연길에 돌아와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동년은 끝났다고 해야겠죠. 더우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정치운동의 참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했어요. 그 때 이미 ‘우파’의 모자를 벗었던 아버지였지만 출판사의 사무실에 마련된 ‘감옥’이 아닌 ‘감옥’에서 족쇄를 차고 격리돼야 했습니다. 매일 하루 세끼 밥을 나르는 일은 아직 어려서 ‘문화대혁명’에 가담하지 못하는 저의 넷째누님과 저의 몫이 되였어요. 십여리가 되는 길을 걸어서 하루 세번 왕복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지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도시락을 가지고 가서 어른들로부터 받는 수모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도시락이라고 해봐야 수수밥에 김치 몇쪼각이 고작이건만 그것을 감시하는 어른들은 밥 속에 종이쪽지나 ‘반혁명적’인 뭔가 있나 살피려고 저가락으로 꾹꾹 찔러보며 증오와 멸시로 가득찬 눈으로 노려보는데 그 눈길을 저는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 그것도 그 시대 지식인의 눈에 그런 동물적인 눈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하영: 도시에서, 그것도 조선족 집거구인 연길에서의 ‘문화대혁명’은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심각하고 치렬했던 것 같아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돌싸움, 창칼싸움, 총싸움에 관한 얘기는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받는 모습이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던 저에게는 많이 생소한 것이였어요. 그만큼 선생님이 받은, 사회로부터 오는 피해도 엄청 컸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는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못한 것이겠죠. 학교는 지어 문을 닫고 학업을 중단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우광훈: 그래요. ‘문화대혁명’은 저의 인생의 행적을 결정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어요. 소학교 5학년 후학기부터 ‘문화대혁명’이 터졌고 그 때로부터 학업은 중단되였어요. 우리 또래들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가 된 셈이지요. 어린 소년으로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경험을 하였고 목격하지 말아야 할 참혹한 현실과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투쟁대회를 하면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자리에서 구호를 웨쳐댔고 자살을 한 사람,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어요. 연길의 ‘문화대혁명’이 가렬화되면서 총싸움으로 번졌고 열두세살이였던 저는 기관총, 99식보총, 38식 일본보총, 신형의 54식보총의 소리를 듣고도 무슨 총인가를 가려들을 수 있었어요. 무서운 현실이였죠. 하영: 그런 란리 속에서 소외까지 당했지만 다행히도 어린 선생님은 오히려 독서를 하며 외로움을 달랬다죠. 다른 친구애들이 재미나게 노는 시간에 선생님은 집에서 아동소설이나 과학서적에 심취해있었고 학교가 싫어지던 중학교시절에는 성인문학작품을 읽으며 사춘기에 들어섰다고 하셨어요. 우광훈: 아버지가 출판사에서 근무했던 덕으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습니다. 그런데다 우에 누님들과 형들이 있었기에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들이 많았고 과학서들이 많았어요. 《취미의 물리학》, 《취미의 수학》과 같은 책들이 있었고 《무엇때문에》라는 책들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죠. 뉴톤, 아인슈타인, 피다고라스와 같은 과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책을 읽고는 여름밤 밖에 나가 북극성이나 안타레스 별을 찾기도 했고 별자리를 찾기도 했어요. 특히 물리학이 그토록 재미있었습니다. 만약 ‘문화대혁명’이 아니였다면 저는 물리학자가 되였거나 어디선가 물리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영: 그 후 문 닫았던 학교들이 수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그러나 겨우 1년이 좀더 지나 선생님은 다시 ‘하방’을 하는 가족을 따라 돈화현 쟈피꺼우夹皮沟라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백여호 되는 한족마을에서 언어도 안 통하는 마을사람들과 낯선 농촌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생각만 해도 막막해나네요. 그 곳에서도 공부의 기회는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선생님은 학업을 그만두었다죠. 배움에 갈했던 선생님은 아마 그래서 몇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조선족 마을의 집체호로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문학명작들을 얻어 걸탐스레 읽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서서히 문학이 가져다주는 희미한 열망에 매료되였나봐요. 우광훈: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후학기에 아버지가 돈화현 마호공사 쟈피꺼우대대로 ‘하방’을 하게 됩니다. 그 때가 1969년 12월 13일이였어요. 이듬해 학교를 다니겠다고 공사로 갔더니 조선족학교는 중학교가 없고 소학교만 있었어요. 중학교를 다니려면 30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고 공사의 소학교에 입학한다고 해도 역시 매일 왕복 40리를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때이르게 하향지식청년이 된 거죠.  다행히 그 때 농촌에는 옛날 책들이 더러 남아있었어요. 도시에서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고 책이라는 책은 몽땅 불살라버렸지만 농촌에서는 그 여파가 심하지 않은 셈이죠. 그 때 단행본으로 된 《햄리트》, 《뿌쉬낀선집》 그리고 모파쌍, 뚜르게네브, 파금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얻어볼 수 있었어요. 감수성이 싹트기 시작하는 시기라 그런 책들이 ‘독초’라는 느낌보다는 책 속의 주인공들한테 매료되였습니다. 아마 문학인으로 되는 첫 시작일 수도 있겠죠. 당시 자신이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책이 많지 않았던 시기라 많은 책들은 아예 외워버리기도 했어요. 특히 《햄리트》는 그대로 외워서 집체호의 친구들과 내기를 하기도 했구요.  하영: 세계명작을 외울 수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총기와 실력이십니다. 또한 문학을 향한 뜨거운 끌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네요. 그 시기, 선생님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깁니다. 다름아닌 ‘첫사랑’!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다 있겠지만 그러나 영화 같고 드라마 같은 선생님의 첫사랑은 선생님 인생에 너무나 큰 자리로 남은 것 같아요. 그리고 아픔과 함께 선생님은 보다 성숙해졌지요. 우광훈: 허참, 이건 젊은 시절의 비밀인데… 젊은 날의 저의 초상은 체중 54키로그람에 174센치메터의 키를 가진 마르고 허우적거리는 멋적은 총각이였어요. 그래도 젊음이라는 호기가 있어 그 동네에 살고 있던 한족처녀와 첫사랑에 빠졌습니다. 물론 앞날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 ‘우파’의 아들인 데다 호미자루 같이 생긴 저에게 딸을 맡기려는 부모는 없겠죠. 결국 녀자애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펑펑 울어대는 녀자애를 사람들이 억지로 결혼마차에 들어올렸지요. 아마 그 때에야 저는 저라는 존재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차린 것 같아요. 사랑의 권리라는 것도 시대적인 상황을 따르는 것이였지요.  처음에는 그 아픔을 일기로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문학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이야기들이 엮어지기 시작했죠. 물론 사실에 립각한 것이였지만. 어쩌면 그 때로부터 문학이 꿈이 되여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영: 1974년, 드디여 부친께서 탄광의 총무로 공직을 회복하시며 선생님 가족은 쟈피꺼우를 떠나게 되였고 선생님은 정식으로 하향지식청년의 신분으로 3년간 집체호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1976년 12월에는 지질탐사대의 탐사공으로 인생이 바뀌죠. 어떻게 보면 매일 험한 산과 들을 누비는 고된 작업의 련속이고 또다시 적막하고 고독한 나날이 이어지는 인생일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환경 속에 몸 담고 있었기에 복잡한 인간세상을 멀리 떠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자연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고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며 그것을 원고지에 옮겨놓을 줄 아는 문학청년이 될 수 있었지 않나 싶어요.  우광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출판사에서 번역편집을 하시던 아버지는 공직회복을 하시면서 연변복동탄광의 남양갱에 총무로 발령받았습니다. 갱목을 통계하고 탄갱에 들어가는 광부들에게 복리로 빵을 나누어주는 일이였어요. 그렇게 되여 저는 그 때의 화룡현 동성공사 흥성10대의 집체호로 가게 되였고 그 곳에서 3년, 후에는 연변석탄지질대의 탐사공으로 들어가 6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집체호에서의 생활은 참담한 시기이기도 했어요. 누구는 도시로 가고 누구는 참군을 하고 누구는 대학으로 추천을 받아 갔으나 저에게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지질대의 탐사공으로 갈 무렵부터 중국의 정치정세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4인방’이 중국의 정치무대에서 물러나면서 아버지께서 억울하게 ‘우파’모자를 썼던 일이 개정을 받았고 1980년에는 출판사에 복귀하셨어요. 말 그대로 시대의 ‘봄’이 온 거죠.  탐사대의 장막에서 소설을 쓴답시고 나무판자에 원고지를 끼우고 긁적거렸습니다. 사실 그 때 발표된 많은 소설은 그렇게 무릎 우에서 씌여진 것들이였어요. 농촌마을의 골방에서, 수림 속의 나무 밑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죠. 그래도 그 시기는 아름차게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그리고 성취감이 있었으니까요. 일은 힘든 일이였습니다. 야외에서 모든 것이 철로 된 기계를 움직이고 공구를 다룬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체력을 필요로 했고 3대거리로 하는 일은 밤과 낮이 따로 없었어요. 그것도 야외에서 말입니다. 하영: 동년배에 비해 선생님은 누구보다 시대의 피해를 많이 받았고 삶이 굴곡적이였어요. 헤밍웨이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라고 했어요. 회색의 동년, 소년시절의 실의감, 빼앗긴 첫사랑으로 선생님은 너무도 일찍 인생의 쓰디쓴 고배를 마시였고 동란시대와 하방생활과 집체호생활을 거치며 세상의 삭막함을 체험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비아냥 속에 말수가 적어진 선생님은 결국 소설로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죠. 책을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과 사색하는 두뇌를 가지게 된 선생님은 쌓인 게 많고 억울한 게 많았던 만큼 한번 보뚝을 터뜨리자 산사태처럼 작품을 쏟아내셨지요. 1978년, 처녀작 단편소설 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선생님은 이듬해에 단편소설 을 발표하며 곧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향지식청년시기에 체험한 경력을 제재로 한 은 인위적인 정치운동 속에서 인간사이의 메말라가는 정과 우파분자 자식의 고독과 아픔을 진실하게 그려냈어요. 소설은 국경 30주년 응모작품 소설문학상을 수상하며 깊은 인상을 남기였고 그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소설 (작자 이름을 모르겠지만), 정세봉선생의 소설 과 함께 조선족소설사에서 상처문학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기도 하죠.  우광훈: 저로 말하면 운을 타고 났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을 발표하자 일약 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됐으니까. 1979년 6월에 발표된 와 저의 작품 은 연변에서의 첫 상처문학작품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의 작가는 저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요. 후에 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작가가 되는 선결조건은 소년시절의 고통이다.” 헤밍웨이의 이 말은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의 필수를 말한 것 같습니다만 작가가 되기 위해 이런 경험을 하라면 저는 천백번이고 다시는 그런 시대가 없었으면 합니다.  하영: 선생님은 “체험을 바탕으로 해야 소설이 진실성이 부여된다.” 고 주장하셨으며 그러한 자세로 창작에 림하셨어요. 동년기와 소년기, 청년기의 특수한 인생체험이 선생님 소설에 폭 넓게, 진실하게 반영되여있으며 이에 최병우교수는 중한수교 이전에 발표한 선생님의 소설을 외가의 체험, 하방체험, 탐사대원 생활, 한족녀성과의 사랑과 리별… 그 체험별로 주제를 나누어보기도 합니다. 리광일교수는 또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 선생님의 중단편소설을 인간,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살펴보기도 하죠. 리광일교수는 선생님의 소설중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하향지식청년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비틀어진 정치문화 속에서 인간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이런 관계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겪고 비극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였다고 했어요. 또한 “인간, 자연 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탐사대원생활을 제재”로 하였고 작가가 겪었던 인생경력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 부류의 작품은 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보여주었고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 하는 자연관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 자연, 인간관계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들은 대부분 1990년 및 그 이후 작품들로서 자연이 배경이 되면서 그 속에서 인간들이 형성한 여러가지 관계를 보여주었고 그 과정에서 모순, 충돌 및 조화의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결국 작가는 자연 앞에서 인간은 매우 왜소한 것이며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는 조화라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했어요. 우광훈: 지금도 저는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에 기대고 있어요. 체험한 것들, 경험한 것들만이 가슴 가장 가까이 다가와있습니다. 작품에서 생활의 진실은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저의 작품의 모든 소재는 제가 경험했던 것들과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어요. 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에 의해 소외된 인간형상이라든가 한족들의 형상, 자연들은 바로 이런 생의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역시 제가 자연을 많이 쓰게 되는 원인도 돈화의 농촌에 하향했던 곳이 심심산골이였고 지질탐사대원으로 일하면서 다닌 곳 역시 순수한 자연들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영: 창작 초기부터 선생님은 주제의 심각한 발굴과 최하층 인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세련되고 류창한 언어로 문단의 각광을 받았으며 , 등 소설로 수많은 독자군을 가지면서 30대에 벌써 우리 문단에서 중견작가로 부상합니다.  중편소설 (1986)은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시골의 어느 한족마을의 비극과 인정세태를 기본주제로 하면서 자유분방한 문체, 섬세한 세부묘사, 서정성이 강한 일인칭서술, 산문에 가까운 구성 등으로 비교적 풍부한 사회생활을 담고 해당 시기 사회면모와 생태환경을 진실하게 구현하여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198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은 동물화된 인간화신으로서의 메리가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고 충성을 다했지만 결국 주인의 손에 죽고 마는 비극을 그렸어요. 소설은 농촌에 하향한 지식청년들이 마치 “토끼를 잡은 후에 죽임을 당하는 개의 신세”와 다를 바 없으며 “그들의 부정과 반항을 메리의 운명과 죽음을 통해 은유적으로 폭로”하였다고 보기도 하는데요, 소설은 인간이 아닌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간사한 내면을 해부하고 사악한 리기주의를 타매했으며 여지없이 배반당하고 유린당한 충성심을 슬퍼했습니다.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비판한 소설은 “다의적인 상징성과 주제의 다층차성 등으로 예술적 매력을 풍기여” 깊은 사상미학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며 많은 호평을 받았지요. 우광훈: 저의 중편소설 은 돈화에서 생활한 저의 체험을 가장 집중력 있게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어요. 실말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마다 실생활의 모델들이 있고 작품에 등장하는 개 ‘메리’마저 모델이 있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생활의 진실이 예술적인 진실로 승화한 매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요. 주인공 소곤이가 죽는 장면을 쓰고 나서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한밤중이였는데 저의 흐느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놀라 일어나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소곤이가 죽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소곤이라 부르는 것을 알고 계신 어머니는 저의 등을 두드리시며 “그래, 울어주라.”고 말씀하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을 쓸 때 저는 하향세대보다 그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지식인들을 더 많이 생각했어요. 인간만이 자기의 리성과 관념으로 자연의 속성과 천성을 짓밟을 수 있지요. 누구는 사랑이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고 하지만 저는 이것이 문학의 초심이요 영원한 주제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부언하지만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 역시 돈화 시골에서의 5년간 생활이 밑거름이 되여주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영: 창작에서 진실성에 힘입어 작품의 주제를 깊이 파는 한편, 소설의 예술적 기교면에서도 선생님은 남다른 탐구를 해옵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반까지의 선생님 소설은 서정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며 그것으로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이룹니다. 지어 어떤 소설은 소설 자체가 그대로 한편의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요, 선생님의 자유분방하고 환상적이며 정열적인 시인기질은 서방의 랑만주의문학의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집시와 같은 지질탐사대 생활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도 보고 있어요. 이 시기에 쓴 이라는 단편소설은 그 제목부터 진한 서정을 담고 있죠. 소설은 탐사대원의 생활을 소재로 하여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했다는 점도 흥미 있지만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2인칭 수법을 써서 서사학적인 측면에서 실험적이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컸어요.  그런가 하면 1991년도에 발표한 단편소설 는 “과학탐구소설”, “소설미학적 의의가 큰 력작”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선생님은 “새로운 소설창작기교로 낡은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 량자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켜 참신한 양상을 부상”시키였고 자연 속의 인간을 그리여 “천인합일”의 메시지를 전달했어요. 우광훈: 따지고 보면 매 한편의 소설은 성공의 여부를 떠나 새로운 시도의 시작이 아닐 수 없어요. 많은 경우 한편의 소설을 끝내고 다른 한편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학이 매력적인지도 모르겠구요. 저의 초기소설이 랑만주의적인 요소가 섞인 작품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도 젊음의 작간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문학공부를 하면서 초반에 읽은 작품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제가 읽은 작품들은 ‘문화대혁명’전에 번역 출판된 외국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런데다 그 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로씨야 작품들이 주종이였지요. 뿌쉬낀, 레르몬또브, 쉡첸꼬 그리고 쉐익스피어… 아무튼 그 때 중국에서 조선어로 번역된 외국소설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시들도 읽고 외웠어요. 《예브게니 오네긴》이나 레르몬또브, 쉡첸꼬의 시들을 모방해 시랍시고 써보기도 했구요. 이런 것들이 저의 서사에서 시적인 냄새를 풍기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 순수한 우리 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유감으로 남아있어요. 민족언어에 대한 공부가 모자란다는 뜻이 되겠구요. 하영: (1991)를 시작으로 3년 사이에 (1992), (1993) 등 숙명계렬 소설을 련이어 써내시던 선생님은 중편소설 (1995), 단편소설 (1996), (1997), (1998) 등 소설을 륙속 발표하며 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실존주의 소설 실험에 들어갑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들끓던 조선족문학은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이르러 잠잠해졌으며 곤혹과 침체 속에서 모대기던 우리 작가들은 점차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문학본체로의 접근을 더욱 의식적으로 시도했어요. “90년대 문학의 가장 큰 변화는 무명상황 속에서의 개인 창작행위”였으며 “문학은 점차 국가적 언어로부터 개인적 언어로 전이”됩니다. 개체의 정신세계나 인간생명의 원초적인 모습에 대한 발굴이 90년대 문학의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났으며 우리 문학은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공동체의식보다 개체인 ‘나’, 객관세계보다 ‘내 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모더니즘에 대한 수용도 80년대와 같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현상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를 주축으로 하면서 모더니즘의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수용하여 다의적인 이미지 창조, 주체의 다의성, 구성의 다층차성, 표현수법의 다양화 등으로 퍽 활기를 띠였으며 서술시각의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보다 자연스럽고 세련된 모습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흐름을 타고 90년대 중반부터 선생님은 실존주의소설 실험을 통해 현실적 사회문제를 초월하여 운명의 곤혹, 정신방황을 추적하면서 미망하는 세계 속에서 자아 찾기, 확실성 찾기에 나섰으며 우리 문단에서 모더니즘 창작의 선두주자적 역할을 합니다. 우광훈: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에서는 새로운 사상해방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많은 책들이 서점에 나오기 시작하고 전에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던 철학, 종교, 인문 서적들이 쏟아져나왔어요. 그 때 처음으로 니체를 읽었고 성경을 읽었고 쇼펜하우를 알게 되였어요. 물론 많은 책들이 있었지요. 그 때 우리 젊은 문인들은 독서에 목숨을 걸었다고 할 만큼 독서에 열을 올렸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나서는 서로에게 추천하고… 그 때를 돌이켜 우리는 “목숨을 걸고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저의 작품의 모티브가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독서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사색을 하게 되고 인간과 개인적인 삶을 관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회적인 인간이면서도 개인적인 생명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고 불확실한 운명 앞에서 방황하는 생명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 때까지 저희들이 받은 교육은 집단으로서의 개인만 있었을 뿐입니다. 즉 어느 집단의 ‘라사못’이였지요. 그것에 대한 반동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인 생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면서도 무가내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또 작품을 쓰면서 글쓰기에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시도를 해봤어요. 언어라든가 문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하는 데서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실천을 했었죠. 하영: 2004년 4기부터 《도라지》잡지에 련재하기 시작한 선생님의 장편소설 《흔적》은 그 후 《도라지》 장락주문학상을 수상, 2005년에는 책으로 출간되여 연변작가협회 ‘석화’문학상까지 받기에 이릅니다. 최삼룡 평론가는 “작가는 《흔적》에서 ‘문화대혁명세대’의 정신타락과 신앙위기 그리고 사랑이 죽은 시대에 대한 조명에 필묵을 많이 들였다.”고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사람들에게 남긴 집단적 트라우마였어요. 그 리념과잉의 시대가 지나간 후 개혁개방의 시대가 되자 급작스럽게 실리가 시대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였고 이런 변화는 리념을 추구하면서 한 시대를 살았던 ‘문화대혁명세대’들이 시대변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최병우교수는 우광훈작가님이 《흔적》에서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이후 조선족사회에 일어난 변화와 ‘문화대혁명’시기의 치렬한 삶과 비극적인 체험이 현재의 삶에 드리운 상흔을 다루었으며 ‘문화대혁명’이라는 트라우마가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선족에게 미치고 있는 상흔의 양상과 그 의미를 밝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트라우마의 길고 어두운 턴넬을 벗어나는 길은 ‘문화대혁명’시기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억하여 정확히 인식하고 그를 통해 진정으로 그 시대를 애도하고 리해하고 사랑하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소설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런 ‘문화대혁명’의 상흔과 치유의 서사는 풍요로우나 고통스러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우광훈: ‘문화대혁명’은 인류의 력사에 가장 참혹한 사건으로 남을 겁니다. 그 시대를 경험한 우리 세대로서는 그 참상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요. ‘네가지 낡은 것을 타파’한다는 바람에 문화재라는 문화재는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고 불태워졌습니다. 책이라는 책은 모두 다 불살라졌으니까요. 력사와 문화에 대한 철저하고도 잔인한 청산이였죠. 그리고 인간에 대한 증오를 너무나 쉽게 배웠어요. 우리 세대는 그 시대의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가해자라는 점에서 반성을 하려고 하지 않지요. 인간적인 측면의 반성이 필요했지만 몽땅 시대의 탓으로만 돌려버렸어요. 이건 정말로 심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악을 동조했다는 걸 내놓고도 그 죄악을 무시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반성이 없다면 우리 세대는 여전히 그 슬픈 력사의 ‘턴넬’을 계속 걷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흔적》에서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던 겁니다. ‘밑바닥’을 살아가는 평범한 지식인의 반항과 추구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힘이 빠져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지요. 아직도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부언하고 싶은 건 저의 《흔적》이 빛을 보게 된 건 김홍란선생의 끈질긴 원고 청탁과 독촉이 큰 힘이 되여준 덕분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면 이 소설이 제대로 끝을 봤겠는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영: 아니, 제가 오히려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작품으로 밀어주셔서 저에겐 큰 힘이 되였는데요. 일찍 지질탐사대에서 탐사원으로 일하시던 선생님은 1983년 3월부터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문학반에서 공부하게 되셨죠.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조선족사회에서 유일한 문학양성반이기도 한데 문학적 기량이 보이는 열혈 문학청년들로 꾸려진 반으로 알고 있어요. 1987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선생님은 연변작가협회에 전직작가로 취직하여 본격적으로 창작에 전념하시였고 그 후 창작련락부 주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력임하셨으며 중국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에 가입하십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위원회 제8기 위원, 제9기 상무위원이셨고 길림성 정치협상위원회 제9기 위원에 이어 제10기 위원으로 활약하셨죠. 현재까지 선생님은 , 등 중단편소설 60여편을 발표하시였고 소설집 《메리의 죽음》, 《가람 건느지 마소》, 장편소설 《흔적》을 출간하셨어요. 또한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제6회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제5회 길림성 소수민족문학상, 연변조선족자치주 국경 30주년 문학상, 제1회 연변작가협회 중장편소설문학상, 제2회 연변작가협회문학상, 《천지》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화려한 업적을 쌓으셨고 우리 문학을 빛내셨습니다. 한편, 오래 동안 연변소설가학회 중책을 떠맡고 계시면서 우리 소설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소설가들의 창작을 격려하고 우리 소설의 제고와 번영을 기하는 일에서 연변소설가학회의 계속되는 역할을 기대해봅니다. 우광훈: 연변대학교 문학반에서 공부한 4년은 저로서는 황금시기였다고 할 만합니다. 농촌에서, 지질대에서의 문학공부는 사실상 멋모르고 여기저기를 쑤셔대는 게릴라전이였어요. 대학교에서 체계적인 문학공부를 하게 되고 특히는 체계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로서는 행운이였지요. 문학상을 두루 받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이 오히려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잊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일 수도 있지요. 본의든 타의든 사회활동에도 많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이제 정년퇴직을 했으니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정력을 집중하고 싶어요. 하영: 조선족은 중국 56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생활과 일에서 다른 민족과 어울려 살게 되여있어요. 그중에서도 한족과는 상당 부분을 함께 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 문학에 그것이 반영되는 건 극히 드물었어요. 선생님의 소설에 특별히 한족이 많이 등장하고 한족과 어울려 사는 조선족의 삶의 양상이 많이 취급되는데 그래서 진실감이 더 안겨오는 것 같아요. 그것이 선생님 소설의 특징이자 우세이기도 하구요. 우광훈: 저의 작품에서 한족이 많이 등장하는 건 저의 생활경력과 관련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의 문학은 이민문학에 속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어요. 예술의 진실은 생활의 진실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도 있구요. 우리는 한족이 주민족을 이루고 있는 중국이라는 땅에서 태여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족들이 더 많이 살고 있고 우리의 령혼에는 이미 수많은 중국문화의 요소들이 들어와있지요. 이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이민 민족으로서는 조선족의 문학이 이민문학의 범주가 아닐가요? 하물며 저는 우리 민족의 이민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학은 이 부분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영: 90년대 후반기의 어느 《도라지》문학상 시상식에 선생님께서 가족동반으로 모셔오셨던 어머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고결하시고 단아하시고 지적이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였어요. 선생님은 어머님께서 고령이심에도 독서를 즐기시고 신문이나 잡지에서 좋은 내용을 읽으시면 가위로 곱게 잘라서 잘 건사해주신다고 했지요. 작가인 아드님의 창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우광훈: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니 가슴이 아픕니다. 어머니는 1926년에 저의 외할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이주해오셨어요. 장춘과 할빈 사이의 도래소라는 곳이였는데 그 곳에서 중국사람이 꾸린 학교에서 5년간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조선어는 저의 이상 형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배웠고 연길에 오신 후에는 문맹을 퇴치하는 습자반에 다니면서 익혔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독서를 하셨고 림종의 순간에도 머리맡에 책이 있어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저의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였어요.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저의 문학이 있을 수 있었고 저의 오늘의 인생이 있을 수 있었어요.  아득히 먼 날의 어느 날이였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집체호로 찾아오셔서 습작으로 써둔 저의 작품 원고들을 태워버리면 안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으셨어요. 수많은 작가들이 필화로 감옥에서, 로동개조농장에서 ‘사상개조’를 당하고 ‘문화사업위험론’이 유령처럼 드리워있던 그 시대에 자식이 혹여 피해라도 입을가 마음 졸이신 어머니였지요. 그 애잔하고 피어린 사랑 앞에서 저는 오래 고민하지 못하고 동의를 했어요. 그렇게 저의 원고들과 일기는 몽땅 부엌 아궁이로 들어갔고 작가로 성장한 썩 후날에도 불살라진 원고 이야기는 어머니 앞에서 금기사항으로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한 작가에게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아시는 어머니는 그 때의 미안함에 그 후 평생을 두고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책은 저의 책상 앞에 눈에 띄는 곳에 놓아주셨고 좋은 글이 실린 잡지는 문장이 실린 부분을 접어서 저에게 주셨으며 신문에 좋은 글들이 있으면 스크랩을 해두었다가 저에게 주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운 가위질로 이 아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으신 것 같아 가슴이 아려납니다. 하영: 문학얘기만 나오면 항상 흥분하시던 선생님, 청년기를 넘어 중년에 와서도 문학에 흠뻑 취해 살으셨죠. 일찍 숙명처럼 찾아들었다는 문학이 선생님께는 언제나 끓어넘치는 용광로 같았고 아무리 소모해도 끝없이 솟아나는 에너지 원천 같았죠. 지금 차분히 돌아보셨을 때 선생님께 그 문학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가요? 우광훈: 저로 말하면 문학이 숙명인 건 분명했습니다. 저의 인생과 오늘의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준 것이 문학이니까요. 문학이 있었기에 그 우울한 시대를 견딜 수 있었고 세상과 대화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도 문학의 의미는 이것 이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영: 누구보다 삶을 아프게 살아오신 선생님, 그 무게 만큼이나 소설의 깊이를 보여주며 많은 력작을 펼쳐내시였고 새로운 창작수법의 실험에서도 선두자적 역할을 하시며 우리 문단에 신선함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소설의 중심에 우뚝 서계셨어요. 한동안 창작을 거의 멈추고 계시는 선생님께서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필을 들고 주옥 같은 소설을 써내시여 우리 소설사를 계속 이쁘게 장식해주실 걸 기대해봅니다. 그 보석같이 소중한 작가적 재능을 묵혀두지만 말고 아낌없이 다 사용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선생님과의 대담을 통해 삶과 문학에 대한 고뇌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감사합니다. 우광훈: 과거형은 이제 다 잊으려고 해요. 새롭게 시작을 해야겠지요. 지금도 문학에 정진하고 계시는 림원춘선생 같은 분들을 보면 제가 많이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발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차분한 마음으로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게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번 대담을 통해 저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였어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고 고마운 일도 많았는데 이렇게 자리를 함께 하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여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2018 제2호
27    살춘각: 참 고운 발(단편소설) 댓글:  조회:418  추천:0  2019-07-11
참 고운 발 살춘각   상  편 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 슬슬 뒤걸음질치고 있었다.  이게 누군가!  그리고 이게 얼마 만이란 말인가?!  “너 정말 계, 계, 계경숙이야?”  초중 2학년 때 보고 못 보았으니 30년도 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경숙이가 맞지. 나 계경숙 맞아. 호호호…”  “‘5·7농장’의 그…”  “그러엄! 룡문중학교 3반을 다니던.”  “아…”  나의 입에서 드디여 비명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맞구나.  그녀가 맞구나!  “야, 반갑다야, 계경숙. 얼마 만이야? 설마 이게 꿈은 아니겠지?”  “30년도 넘었지. 꿈은 무슨. 하늘이 새파랗구만.”  그래서 쳐다본 하늘은 정말 쥐면 묻어날듯 새파랬다.  “너 지금 어디야? 우리 당장 만나자!”  “급하기는… 나 지금 공항이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너한테 전화부터 치는 거야. 알겠어?”  “공항? 어디서 오는데?”  “한국. 일이 있어서 잠간 들어온 거야. 오늘 밖에 시간이 없어. 래일은 일 마무리짓고 나가야 돼.”  “그리 급히? 그럼 당장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네. 나 지금 공항에 갈게. 기다려!”  “그래. 뛰여와. 기다릴게. 나도 널 빨리 보고 싶기는 너만 못지 않을 거야. 호호호…”  전화 저켠에서 그녀가 파란 하늘에 금이 실리도록 맑게 웃어제꼈다.  나는 손목을 들어보았다. 시간은 열한시를 가리키려 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어림잡아 20분이면 도착하리라.  나는 내 옷차림새를 스윽 훑어보았다. 반소매에 반바지였다. 그리고 슬리퍼.  동켠에 있는 성자산성을 한번 바라보고 나는 히쭉 웃고 나서 그대로 택시에 뛰여올랐다.    그녀는 연한 살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채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늘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유표한 건 원피스 치마자락이 나팔꽃처럼 들려있어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다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공항 정문에 서있는 그녀를 보고 머뭇거리는 나한테 그녀가 두팔을 활짝 펼쳐보였다.  “용하게 알아보네?”  “당연하지. 누군데 못 알아봐.”  “난 널 못 알아보겠던데…”  “넌 옛날 그대로야. 어쩜 늙지도 않냐? 나 많이 늙었지? 실해지고?”  “실해진 건 모르겠는데 얼굴이 많이 변했어. 길에서 그냥 보면 모르고 지나치겠다야.”  “그래? 할망구가 되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너 소녀 적 내 모습을 기대했던 건 아니야? 실망했겠네. 하하하…”  그러면서 그녀는 또 한번 하늘을 쳐다보며 해바라기처럼 터지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행장은 단촐했다. 쪽걸상 만한 캐리어 하나가 다였다.  “팬티 두장 밖에 없어. 궁금해하지 마.”  택시에 앉자 그녀가 캐리어를 훔쳐보는 내 눈을 의식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쿡 웃었다.  “콘돔이라도 한박스 담아왔나 생각해보았지. 크크크…”  그녀가 내 옆구리를 찌르더니 눈을 석자나 빨았다.  “속은 파래가지구… 누나보고 못하는 소리 없네.”  계경숙은 나보다 한살 더 많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 때 우리 반 애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한살이나 두살 더 많았었다. 당시엔 락제제도라는 게 있어서 시험에서 급제를 못하면 가차없이 한학년 내려앉혔기 때문이였다. 초중에 붙지 못해 한해 더 다니고 이듬해 다시 올라오는 애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런 애들을 ‘묵은 돼지’라고 불렀다.  “묵돼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모양이구나?”  “묵돼가 뭐야? 아~ 야, 나 묵돼가 아니야. 아홉살에 늦게 학교에 입학해서 그래.”  “그래? 뻥 까는 거 아니야?”  “믿든지 말든지.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호텔 간다 왜? 30년 만에 만났는데 묵은 회포부터 풀어야제?”  “야, 나 지금 배고퍼. 시간을 봐. 열두시가 넘었어. 밥부터 먹자.”  “그건 한국시간이고 여긴 아직 열두시가 안됐어. 조금 참어.”  “야, 안된다는데두. 야, 차 돌려. 경숙이가 배가 고프다구!”  택시는 옛날 체육장을 뒤에 떨궈놓고 혁명렬사릉원을 흘겨보며 발전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경숙이가 짐짓 울상을 하고 내 무르팍을 종주먹으로 쥐여박았다.  “그냥 가만있어봐. 원래 절에 가면 중이 하라는 대로 하는 법야.”  “니가 중이가?”  “오늘만은!”  “켁.”  “쿡.”  갑자기 계경숙이 고개를 숙이더니 쓰러질듯 웃는 것이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내 사타구니였다. 내 사타구니가 엄청 부풀어있었다.  “야, 너 지금 선 거야? 내가 옆에 있는 데도?”  내 얼굴이 붉어졌는지 어쨌는지 보지 못하는 나로선 알길이 없다. 다만 망신스럽다는 생각은 좀 들었다. 그러나 이내 아닌 보살 하고 저으기 화끈거리는 낯을 그녀 쪽에 던지며 깐죽거렸다.  “그러게 누가 너더러 팬티가 다 보이는 치마를 입으라던.”  “어머머!”  그녀가 반사적으로 치마자락을 끄당겨 허벅지를 가렸다. 그러더니 나한테 속히운 줄 알았는지 꽤나 정색한 낯빛으로 말했다.  “장난도 그런 장난 치지 마. 나 그런 녀자 아니거든.”  “다 왔어. 내려.”  택시에서 내리자 그녀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여가 어디야? 호텔은 아닌데?”  “발전이다.”  “발전? 아버지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던 그 발전?!”  “응. 그래. 그 발전이 지금 이렇게 코리안타운이 돼버렸다. 맛집거리로.”  “와~ 발전이 빠른데! 발전이 그 이름값을 한다야.”  뭘 먹을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갈비집으로 아퀴를 지었다.  “젤 잘하는 집으로 가! 오늘은 이 누나가 쏜다!”  ‘마포갈비’, 내가 자주 찾는 곳이다. 주인장하고도 면목을 튼 지 오래다. 한국에서 돈 벌어가지고 여기에다 가게를 차린 지 7년째라고 했다.  “환경이 좋은데? 인테리어도 근사하고.”  경숙이가 자리에 앉더니 들어오길 잘했다는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면서 보니까 간판들이 한국인지 중국인지 안 알릴 정도로 한국을 그대로 떠옮겨왔데?”  “그니까 코리안타운이라는 거지.”  그녀는 기어이 소갈비 4인분을 시켰다. 칠레와인 한병과 함께.  “그래봤자 한국에서 한끼 먹는 반값 밖에 안돼. 걱정 말고 먹어. 나 그만한 돈은 있어.”  그녀는 내 의견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실컷 먹자. 30여년 만에 너를 만났는데.”  “그래. 먹고 죽자.”  “강산이 세번 변했는데 너는 그대로네.”  “지금은 하루밤이면 강산이 변해. 어느 옛날 소리를 하냐. 나도 늙었어. 반백이야.”  “그런가?”  우리는 쨍그랑 잔을 부딪쳤다.  “근데 너 날 어떻게 찾았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물음을 나는 이제서야 묻고 있었다.  계경숙이 나를 뜨아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것도 물음이냐고 묻기라도 하는듯이.  “넌 알려진 사람이잖아.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타나는 사람.”  “그래도…”  “니 소설은 꾸준히 읽고 있어. 니가 쓴 모든 글을 다 봤다고 감히 장담할 정도로 말이야. 이러면 믿겠노?”  “잘 믿어 안 지는데?”  갑자기 그녀가 소리내여 웃었다. 그러더니 부끄러운듯 량볼을 싸쥐며 말했다.  “너와 나 그런 사이 아니잖아. 잊은 거야 아니겠지?”  “참…”  그러면서 나도 살짝 어깨를 비틀었던가 말았던가.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녀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근데 너 그 때 나한테 왜 그랬어? 설마 정말로 날 좋아했던 거야?”  “소녀의 순정을 의심하다니! 그래갖고도 작가냐?”  15살의 어느 날, 막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녀, 계경숙이다.  “너 좀 나를 집에 데려다줄래?”  나는 잠간 머뭇거렸다. 그녀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곧추 가는 길을 놔두고 그녀는 산등성이를 타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걸었다.  내가 15살이였으니 그녀는 16살이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멀리 고모벌 되는 녀자애가 한반에 있었다. 그런 연고로 나는 학급 녀자애들과 잘 섞여놀았다. 그러나 계경숙하고는 처음이였다.  산등성이에서 내려와 약수동에 들어서자 그녀가 말했다.  “사실은 전학철이가 나한테 련애편지를 보내왔어. 그래서 너보고 데려다달라 한 거야. 무서웠어.”  그러면서 그녀 계경숙이 내 곁에 딱 붙어섰다.  “아 …”  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전류가 발끝으로부터 등골을 타고 머리 우로 치달아오르고 있었다.  “2반의 전학철이가 너한테 련애편지를 썼다고 했지, 아마?”  “응. 기억하고 있네.”  그녀가 쿡 웃었다.  “편지내용도 단마디명창이였어. ‘우리 약혼하자’. 우스워. 웃겨. 하하하…”  무서웠다는 그 말에 나는 묘하게 흥분되였을 것이다. 그 때의 그 전률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짜릿하면서도 달콤했던.  ‘5·7농장’으로 들어가는 마을어귀 우물가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던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를 통해 콩닥콩닥 뛰는 가슴소리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반짝 얼굴을 들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너 혹시 녀자 손 잡아봤어?”  나는 덴겁해서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 때 나는 확실히 많이 놀랐었다. 그녀가 그런 어뚱한 물음을 제기해오리라곤 전혀 상상도 못했으니깐.  “잡아볼래?”  나나 그녀나 얼굴이 빨개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녀자의 손이라는 걸 쥐여봤다. 작고 보드라운 손을.  “젖은 더구나 못 쥐여봤겠구나?”  나는 하마트면 심장이 밖으로 튀여나올 번했다. 가슴이 뛰다 못해 아팠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쥐여볼래?”  수전증환자의 손이면 그럴가. 사시나무가 떨면 그렇게 떨가.  더듬더듬 … 더듬더듬… 장님 코끼리 만지기.  어둠 속에 길 찾기.  “어땠었어? 그 때 그 감각이?”  그 날 묻지 못했던 것을 경숙이가 30년도 더 지난 지금 와서 묻고 있다. 그것도 부끄러움이 전혀 없이. 얼굴이 다소 붉어진 건 술기운 탓이리.  “어떻긴. 심장이 터져서 죽는 줄로 알았구만.”  “아니 그거 말고. 만져본 느낌.”  “밤알 만하대. 크크크. 손바닥 안에도 안 차. 크크크…”  “그렇게 작았어? 난 큰 줄로. 풉~”  “브래지어도 없이.”  “시대가 워낙 그런 시대였잖아. 나 그 때 생리를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되였었다.”  “그렇게 귀한 몸을 내가 만지는 영광을 지녔었나? 너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가 있었지?”  “나도 몰라. 니가 너무 좋아서였겠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 니가 첫 남자야, 나한테는.”  “자지도 않았는데?”  “꼭 먹어봐야만 맛이야?”  그러더니 카운터 쪽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언니! 여기요, 언니!!”  “네에~”  아가씨가 다가오자 경숙이가 눈초리에 힘을 주었다.  “아까부터 벨을 눌렀는데 못 들었어요? 이 집에선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손님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거예요?”  “얘, 그러지 마. 손님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 고만한 걸 갖고 야단치지 마.”  “재수없잖아. 한국에선 이러면 안돼.”  경숙이가 복무원보고 말했다.  “와인 하나 추가하구요, 갈비살도 더 내주세요. 그리고 사장님하고 물어봐요, 서비스가 있나 없나.”  “니가 말 안해도 서비스가 나와. 나 여기 단골이야.”  “그런 기본적인 거 말구.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돈을 더 쓰잖아.”  경숙의 얼굴에 달이 뜨고 있었다. 달이 빨갛게 머리를 얹고 있었다. 달무리.  “근데 너 연변말을 잘한다? 한국에 간 지 몇년 됐다 했지?”  “20년 거의 돼. 글고 사람은 자기 고향버전은 안 잊어먹게 돼있어. 연변에 오면 자연적으로 연변말을 하게 돼. 몇번 오지는 않았지만.”  오,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가 현성으로 전근하는 바람에 너와 떨어졌지만 난 널 잊은 적이 한번도 없었어. 물론 한동안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잊혀졌지만 그래도 널 많이 생각했어. 갑자기 문득문득 니가 떠오르는 거야. 그러다가 한국에 왔는데 그 때부터는 니가 미치게 그리운 거야. 그런데 너한테 련락할 엄두는 못 내겠는 거야. 내게는 훌륭한 남편에 좋은 아들이 있었거든.”  “그래? 축하한다야! 좋은 남편에 좋은 아들. 난 리혼하고 외토리 신세인데.”  “글쎄 그렇더구나. 왜 리혼했냐. 그냥 살 거지.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이 최고야. 다시 만나봤자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년이 그 년이야. 더 더러운 꼴만 보게 돼.”  “재혼할 생각은 없다. 나 자유로운 지금이 좋아.”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 얘가 편하게 사네, 하고.”  그녀의 눈이 풀리고 있었다. 와인이 두번째 병도 반나마 내려가있었다.  안주는 불판 우에서 앗뜨거를 열창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비스로 나온 꽃게무침과 과매기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난 니 글을 다 읽었어. 인터넷에 널 검색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였어.”  “보러 올 거지.”  “오면 안되지.”  “왜 안되는데?”  경숙이가 고개를 들고 몰라 묻느냐는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그래. 왜 안되는데?”  “젖까지 만져봤으니 이번엔 아래를 탐할 게 아니야. 이 바보야.”  “아, 그렇구나…”  나는 내 머리를 쿡 쥐여박았다.  “나 바보 맞네. 근데 어떻게 이번엔 어려운 결심을 하게 된 거야?”  “사실은…”  경숙이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나한테 보내왔다.  “아들이 일본에 있거든. 일본에 가게 하나 차렸는데 힘든가봐. 우리 량주보고 들어오래. 아마도 일본에 갈 것 같아서…”  “아, 잘됐네. 축하한다야, 경숙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뜻으로 술잔을 쳐들었다.  “이번이 아니면 너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래서 불문곡직 련락한 거야. 나 잘했지?”  “잘했어!”  “잘했다니까 기분 좋네.”  우리는 나머지 와인을 두잔에 똑같이 나누어 부었다.  경숙이가 약간 비틀거렸다.  “가자. 우리 이 잔 쭉 내고 2차 가자. 오늘은 죽도록 마시는 거야!”  “2차는 무슨. 너 술도 된 것 같은데 호텔 가서 자.”  “안돼.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너 오늘 하루를 나한테 바쳐야 돼. 각오해라. 오늘 우리 3차, 4차까지 간다! 잘하면 5차까지 갈 수도 있어. 다시 보지 못할 텐데 영원한 추억을 남겨야지. 안 그렇냐, 이 바보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끌려 2차, 3차, 4차까지 가게 되였다.  그녀는 마치 돈을 쓰지 못해 신들린 사람 같았다.  4차 커피숍에서 나와 보니 밤은 이미 시커먼 날개를 땅 우에 널어놓고 있었다.  “5차는 못 가겠다. 내 몸이 술을 받지 못하네.”  “그래. 호텔에 가서 푹 자. 덕분에 오늘 너무 잘 놀았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옹근 하루 시간을 나한테 할애해준 니가.”  “니 돈을 너무 많이 썼어. 그게 마음에 걸린다. 날 좀 쓰게 할 거지. 미안하게스리.”  “괜찮아. 나 돈 많잖아. 우리 둘을 위해 쓴 건 안 아까워. 흐흐흐…”  그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한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줄래?”  “열가지라도!”  “내 이름 한번 불러줘? 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 이름을 직접 두귀로 듣고 싶어.”  안아달라는 뜻이구나.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녀의 통통한 어깨를 그러안으며 내가 조용히 불렀다.  “경숙아~ 우리 경숙, 고맙다. 이렇게 날 찾아줘서. 계, 경, 숙.”   그녀 계경숙이 내 허리를 두팔로 감싸안고 있었다. 얼굴은 내 가슴에 묻은 채.  “호텔에 데려다줄가?”  “아니. 안돼.”  그녀가 내 몸에서 화들짝 떨어져나갔다.  “그것만은 하지 말자. 난 널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멋진 남자로 남기고 싶어. 내 남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 되지? 그렇게 해줄 거지? 계경숙 인생의 가장 멋진 남자. 응?”  “그래.”  나는 경숙의 머리칼을 가만히 만져주었다.  “춥겠다. 얼른 가.”  치마 아래로 그녀의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샌들을 신은 발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양말도 받쳐신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뒤걸음으로 택시를 향해 다가가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밤의 무릎 사이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떠나고 있었다.    이튿날 오전.  열시가 되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지금 공항.”  “응, 그래. 잘 가라. 만나서 즐거웠어.”  “나도 좋았어. 잘 있어라.”  이제 한시간 뒤면 그녀는 떠나리라. 핸드백 만한 캐리어를 끌고서 떠나가리라. 그리고 두시간 뒤면 인천공항에 내릴 것이다. 그녀는 한국에, 나는 중국에 서로 다른 하늘을 떠이고 살아가리라. 혹은 아들이 있는 일본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자는 인사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  편 쇼허룽에 동래사라는 절이 섰다. 개관식 때 가려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가고 동창들 모임을 핑게로 동래사에 올랐다. 세그루 천년송은 용하게 보존돼있었다.  점심은 성자산성이 내다보이는 토닭집으로 자리를 정했다.  성자산성을 넘겨다보며 나는 잠간 동하국과 거란의 영웅 포선만노를 떠올렸다. 1233년 몽골군에 포위되여 포로될 때까지도 포선만노는 저 산성 안에 있었다지. 왕후 리선아는 몽골군에 겁탈당할가 겁나 산성 남쪽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하였으니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쳐지는 바로 그 여울목이였으리라. 천년을 두고 흐른 로리커호에서 발원한 해란강은 그렇게 저 곳에서 자기 사명을 다한다.  동창이라 해봤자 네명 뿐이였다. 다들 외국에 돈벌이로 나가있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와 담배 한대 꾸질려니까 경철이가 따라나왔다.  “야, 나 며칠 전에 이상한 일을 목격했다?”  “뭔?”  “경숙이 비슷한 사람을 봤어.”  “경숙? 계경숙?”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걔 지금 한국에 있거나 일본에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에 있어?”  “아니야, 진짜야. 내가 왜 경숙을 못 알아보냐? 수상시장 끝자락에서 선지를 팔고 있더라구. 마스크를 했지만 난 대번에 걔를 알아보았지. 학교 때 나 걔 좋아했거든.”  “미친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나 몇달 전에 경숙이를 만났었다. 일본에 있는 아들한테로 갈 거라 그러던데? 아마 지금 쯤은 일본에 있을 걸. 근데 너 걔를 좋아했다는 건 좀 뜻밖이다?”  경철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가뜩이나 작은 눈이 아주 붙어버렸다.  “창피해서 말 안했지. 이젠 나이 먹으니까 부끄러운 것도 사라지고… 흐흐…”  “뻔뻔해지고?”  “그런데 계경숙이 왜 너한테만 련락하냐? 너 둘이 무슨 일이 있어? 걔 누구도 안 만나는 애야. 동창들 중에 아무도 걔를 만났다는 애가 없다?”  경철이가 의뭉스런 눈을 만들어왔다.  나는 담배 한대 꼬나물며 짐짓 그 눈길을 피했다.  “그렇다구?”  “아무래두 수상해.”  하긴 수상하긴 했다. 경철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숙이가 수상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다니?  내 앞에서 호기를 떨던 천하의 계경숙이가 수상시장 끝자락에서 선지나 팔고 있다니?!  나는 경철이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자식, 말도 안될 소리를!  나는 허청 한번 웃고 나서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끈 다음 그래도 남은 불씨가 있을가봐 침을 찍 뱉어주었다.  경숙이가 나한테만 련락을 했다고?!    며칠 지나면 7일 련휴 국경절이다. 어떤 이에겐 좋고 어떤 이에겐 나쁜 그런 긴 련휴가 될 것이다.  대충 장이라도 봐와야 할 터.  국거리감이라도 몇줌 사와야 할 터.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경숙이를 보았다는 경철이의 말이 귀에 걸려서 좀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간 귀에 나무가 자라나서 가지를 칠 것 같았다.  급기야 나는 참지 못하고 아침 5시를 겐또하여 수상시장을 찾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경철이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수상시장은 컸다. 연길시 아침시장 중에서는 가장 클 것이다. 경숙이는 그 끝자락에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북쪽 끝자락, 사범학교 쪽으로 말이다. 아마도 집이 그쪽 방향에 있지 않을가 싶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기 앞에 선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추호도 놀라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었던듯이 말이다. 오히려 놀란 쪽은 나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너무나 당당한 경숙이 앞에서 내사 허둥대고 있었으니.  “왔구나~”  드디여 경숙이가 입을 열었고 마스크를 내렸다.  나는 이 국면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몰라서 손만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같은 연길의 하늘 아래서 30여년을 함께 살아왔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코딱지 만한 연길에서. 말이나 되나 말이다.  “저쪽에 가서 담배나 피면서 기다려봐. 나 이 선지를 마저 팔고 갈게. 몇덩이 안 남았으니까 잠간이면 돼.”  나는 그녀로부터 여나문 걸음 물러서서 담배 한대 꼬나물고 섰다.  그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여있었다. 옷차림부터가 할망구다. 몇달 전에 보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그녀가 선지를 파는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속은 텅 빈 채 하나도 정리가 안되고 있었다. 조금 뒤면 그녀가 내 앞에 말뚝처럼 설 터인데 그러면 나는 이 난국을 어떻게 파헤쳐나가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자.”  그녀가 다 팔고 난 짐을 머리 우에 이더니 내 앞에서 쥉쥉 걸었다.  나는 그 뒤를 지떡지떡 따라갔다.  사범학교 쪽이 옳았다.  “며칠 전에 경철이를 봤었다. 순간 니가 찾아올 줄 알았지. 그리고 기다렸어.”  “말하더라, 경철이가. 믿지 않았어.”  사범학교를 지나자 무장경찰부대 건너편으로 새길이 나졌다. 그녀는 그 길로 나를 인도했다.  놀랍게도 거기엔 굴뚝이 있는 단층집이 있었다. 그녀가 그 집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 이런 곳에서 산다.”  미닫이로 웃방 하나를 만든 그런 집이였다.  나는 아직도 잠이 덜 깬 기분이였다.  그녀가 서둘러 구들을 정리하더니 아직도 아래에 서있는 나를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단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사는 꼴이 이렇다 보니 먹을 것도 없구나. 그런대로 먹어.”  황당했다. 모든 게 황당했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황당하다고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달랑 김치 뿐인 술상 옆에서 계란이 삶겨지고 있다.  “근데 너 혼자 사냐?”  술 한모금 훔치고서 내가 물었고  “아니, 남편이 있어.”  경숙이가 턱짓으로 웃방을 가리켰다.  어, 하면서 일어서는 나를 그녀가 제지시켰다.  “인사 안해도 돼. 산송장이야. 중풍에 걸려 드러누운 지 7년째야. 아참, 기저귀를 갈아야겠구나. 미안하지만 잠간만 기다려.”  미닫이문이 열리자 눈이 한뼘은 되게 들어간 산송장이 나타났다. 온몸에 눈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재빨리 기저귀를 갈아채우더니 드르륵 웃방문을 닫았다.  “먹는데 냄새를 풍겨서 미안해.”  “괜찮아. 인간의 생리인데 뭐.”  세번째로 맞은 중풍이라고 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 남편이란 사람이 바로 경숙이한테 련애편지를 썼던 화제의 주인공 전학철이란 것이다.  내가 어마지두 놀란 눈길을 웃방에 던지자 채 닫혀지지 않은 미닫이 틈새로 전학철의 퀭한 눈이 내다보고 있었다.  “상관하지 마. 듣기만 할 뿐… 숨만 붙어있는 송장이야.”  그녀가 술을 씹고 있었다. 잘 삶겨진 계란도 옷을 벗고 올라왔다.  그녀는 전혀 안주를 집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술이 없인 살지 못해. 너를 만나기 위해 이틀 동안 안 마신 게 아마 최고의 기록일 거야.”  먼지 쌓이듯 그녀의 과거가 술상 우에 차곡차곡 내려쌓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아픈 이야기들만 골라서 양파껍질 까듯이 까고 있었다. 그리고 껍질과 함께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고 했다. 거의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할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현성에서 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얼마 뒤 그 학교에서 전학철을 만난다. 전학철의 아버지도 현성으로 전근되여왔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전학철의 협박이 이어졌다. 친구들을 데리고 길을 막는가 하면 집 문앞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말 안 들으면 경숙네 가족을 전멸시킨다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했다. 전학철이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반강제에 가까운 수락을 하고 만다. 수락과 함께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녀는 자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고 한다. 그저 아들 하나만 의지하고 믿고 살았다고 했다. 그런데 20여년을 키운 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두다리를 잃었고 두다리를 잃은 아들은 어느 날 끝끝내 5층 베란다에서 뛰여내려 자결을 하고 만다. 그 충격으로 남편 전학철은 몇번이나 쓰러졌고 그녀 경숙은 반정신병자가 되여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마신 술이 오후 늦게까지 갔고 술상도 거두지 못한 채 한켠에 널부러졌다. 술상도 거두지 못한 채 널부러졌다는 것은 눈을 떴을 때 본 광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뜬 것은 누군가의 손이 내 몸을 더듬었기 때문이였다.  경숙이닷!  내 몸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경숙이닷. 그런데 이건? 하면서도 내 몸은 아무런 거부감없이 경숙의 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얼굴을 만지던 경숙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가슴에 멈추고 있었다. 그다지 매끄러운 손은 아니였다. 가슴팍을 어루쓸던 손이 차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헙~ 나의 근육들이 펄떡펄떡 살아나고 있었다.  그녀도 내가 깨여난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엔 온갖 회환 같은 것이 담겨있었다. 그녀의 손이 내 팬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경숙은 내 얼굴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불끈 일어선 내 양물을 그녀는 거칠게 부여잡았다. 나는 가늘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길은 마치 해도 되냐고 묻는듯했다. 나도 눈으로 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묵인.  그것을 읽었을가. 그녀가 내 가슴팍을 핥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래 동안 굶주렸을 것이다. 걸신 들린듯 걸탐스레 핥고 있는 모습만 봐도 알겠다. 애무가 거의 광적이였다. 그럴 것이다. 그녀는 많이 허기져있으리라.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뒤로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허겁지겁 쳐들어갔다. 그녀는 이미 푹 젖어있었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몸을 짓이기던 내가 뭔가를 느낀 것은 그 때였다. 뭔가 이상한 감촉이 뒤통수를 찌르는 것 같아서 머리를 돌려보니 웃방 조금 열려진 미닫이 틈새로 전학철의 우멍한 눈길이 형형히 내다보고 있었다.  살아있었구나!  소름이 순식간에 등골에 쫙 퍼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보며 경숙이를 짓이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드디여 삽질은 끝났고 나는 경숙의 몸 우에 널부러졌다. 널부러져서는 전학철의 눈길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전학철도 눈길을 돌려가지는 않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였다. 경숙이도 아마 알았을 것이다.  서둘러 뒤정리하고 경숙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때 나는 들었다. 샤워소리와 함께 그녀의 간간한 흐느낌 같은 것을. 두귀를 쫑긋 세우고 그것이 정말 울음소리였는지를 확인하려 하자 그 소리는 마치 내 행동이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더 들려주지 않았다. 나왔을 때 그녀의 눈언저리는 살짝 붉어져있었다.  “가자.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줄게.”  전신무장을 하고 나서 그녀가 말했다. 팔에는 기다란 토시를 했고 발에는 두꺼운 장화를 신었다.  시계를 보니 열두시를 조금 넘어서서 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 새벽에?”  그러면서도 나는 어정쩡 따라 일어섰다.  “응. 내 일이란 게 이렇다.”  밖은 추웠다. 나는 오싹 몸을 떨었다.  달빛이 째듯했다.  그녀는 자전거를 끌었다. 자전거 짐받이에 커다란 네모난 통이 두개 달려있었다.  우리는 이름도 모를 실개천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연길에서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이런 개천이 있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가.  “어디로 가는 거야?”  “도살장.”  “도살장?”  “응. 돼지랑 소랑 잡는 곳.”  그렇게 나는 모르던 데로부터 알고 있었다. 연길에 이런 실개천이 있다는 것과 그 실개천을 따라 가노라면 돼지랑 소랑 잡는 도살장이 나온다는 것을.  그녀는 소의 피를 받으러 다니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해서 선지.  피를 끓는 물에 넣어 익히면 선지가 된다.  “선지가 맛이 있자면 피를 받기 전에 통에 소금을 좀 넣어줘야 해. 그러면 선지가 비리지도 않고 나긋나긋해져서 맛있어.  “한통에 보통 40모 정도 나와. 썰면서 한통에서 5장 정도가 깨진다고 생각하면 두통에 70장이 나온다고 보면 돼. 한장에 1원씩 팔면 70원이야. 이런 마른 벌이가 어디 있어?  “도살장에서 피는 버리는 거니까 받아오는 건 공짜야. 근데 피가 돈이 된다는 걸 알고 도살장 측에서 5원씩 받으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웃기지?”  그런데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웃기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그냥 경숙이 그녀가 안스럽기만 했다.    도살장에는 소들이 자동차로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다 흑룡강성에서 들어온다고 했다. 료녕 쪽에서도 혹간 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연변황소고기가 기실은 대부분 안쪽 소고기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속혔다는 느낌이 든다.  마당에는 소 십여마리씩 실은 자동차들이 수태 서있었다. 이제 곧 죽을 소들이였다. 늙어서 이발이 빠진 소부터 몇달 안된 송아지까지 별별 소들이 다 있었다.  소를 잡는 방법도 흐름식이였다. 뒤다리를 묶은 다음 걸쇠로 걸어서 형틀에 달면 소들은 거꾸로 매달려서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그런 것을 전기방망이 한대로 기절시키고 목에 한칼을 넣는다. 그러면 선지가 대번에 콸콸 쏟아지는 것이다.  일렬로 나오는 소의 대렬 사이에 가이드라인이 있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녀는 잽싸게 팔을 뻗어 선지를 받았다. 선지 받는 사람은 어림잡아 20여명. 소가 움직이면 그녀도 같이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몇걸음만 따라가며 받다가 안 받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오는 피는 안 좋아. 물이 많이 섞여있어. 나중에 나오는 피는 찌꺼기가 많아. 그래서 가운데 거로 조금만 받는 거야. 소가 많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받아도 반시간만 받으면 두통 골똑 채울 수 있어.”  녀자가 하기엔 거친 일이였다. 선지 받는 사람 중 유일한 녀자였다. 그런데 녀자 하나가 남자 스물보다 더 억셌다. 그녀는 몸에 피가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를 두려워하면 이 일을 못해. 조금 뒤로 물러설래? 넌 피가 튀면 안되니깐.”  그녀의 말대로 반시간 되니까 선지가 골똑 찼다.  집에 오니 새벽 네시.  경숙은 물부터 끓였다.  물이 끓자 통을 들어 조심스레 쏟아넣었다. 네모반듯한 선지 두덩이가 물속에서 익고 있다.  선지는 오래 익었다. 무려 반시간.  다 익은 선지를 그녀는 맨손으로 썰고 있었다. 그 뜨거운 선지를 손바닥 우에 올려놓고 칼질하는데 용하게 손이 베이지 않고 있었다. 가히 달인 수준이였다. 잽쌌고 가쯘했다.  두께는 대략 5cm.  길이 15cm.  너비 10cm.  “뜨겁지 않아?”  던져놓고 보니 바보 같은 물음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뜨거운지 어떤지 감각도 없다, 이젠.”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지막 한장이 손바닥 우에 남았을 때 그녀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먹어볼래?”  약간 깨져있었다. 귀퉁이가.  양념간장과 귀 떨어진 선지 한모를 상 우에 올려놓고서 그녀가 말했다.  “이로써 너는 나의 일상을 다 보았어. 더 이상 나에 대해 볼 것이 없다. 난 너한테 나의 모든 것을 발가벗겼어.”  “음~”  선지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녀 앞에서 먹는 선지가 어떻게 맛이 알리랴.  “다 보았으니 이젠 됐다. 가라. 난 지금 한통 배달하고 남은 건 시장에 내다 팔아야 돼. 빨리 가.”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시 날 보러 오지 마. 니가 오면 난 여기서 못산다. 그리고 내 말 누구하고도 하지 말아줄래. 빨리 가.”  빨리 가 를 복창하면서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마치 말 안 들으면 죽여버리기라도 하겠다는듯이.  그녀의 눈길은 서늘했다. 전에 못 보던 눈빛이였다. 그 눈빛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와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일종 말 못할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오면서 보니 경숙은 나한테 등을 돌려대고 양말을 갈아신고 있었다.  발.  그리고 보았다, 나는. 경숙의 어깨 너머로 그리 못나지 않은 하얗고 조그마한 발을.  “간다?”  “…”  경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영원한 리별인가.  손목을 들어보니 시간은 아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강남구 양재동이다.  나는 지금 다이소에 있다. 다이소에서 생활용품 몇가지를 사다가 한곳에 뚝 머물렀다.  ‘참 고운 발’. 발크림이였다.  나는 그 앞에 이윽히 서있었다. 세상에… 크림은 얼굴에만 바르는 줄 알았더니… 손에만 바르는 줄 알았더니… 발에도 바르는구나… 하고 있었다. 나로선 놀라운 발견이였다. 그리고 모르던 데로부터 알게되였다. 크림은 얼굴이나 손만 아니라 발에도 바른다.  발. 그렇다. 인간의 온몸을 받쳐주는 지탱점이 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발이 건강해야 하리라.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발부터 건강해야 하리라. 그리고 이뻐야 하리라. 비록 양말 속에 감춰져있다 하더라도. 신발 속에 숨겨져있다 하더라도. 발이 건강해야 인간도 건강하리라.  나는 저도 모르게 ‘참 고운 발’을 손에 집어들었다.  그녀 경숙의 발이 어떻게 생겼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발을 상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생각 안 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참 고운 발’.  샀다.  그녀를 주려고 산 건 아니였다.  내가 바르려고 산 것도 아니였다.  그냥 산 것이였다.  이 시각 그녀는 연길에 살고 나는 한국에 산다.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출처:2018 제2호  
26    권혁률: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작품평) 댓글:  조회:412  추천:0  2019-07-11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 권혁률   1. 인간의 삶은 자체의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폭력과의 겨룸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결하고 있는 그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현상이여서 그 괴로움을 실제로 겪고 있는 당사자조차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력에 길들여져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유의 관성’에 고착되여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의 폭력의 근원지가 우리와 결코 낯설지 않은 주변에 있다는 데에 있다. 좀더 끔찍하게 말하자면 가장 친근한 사람이 그러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폭력은 피해자에 대한 극진한 ‘친절과 배려’로 둔갑하기에 더 문제가 된다. 설명절 기간인 현 시점에 부모와 친지로부터의 ‘혼인’에 관한 너무 친절한 주목 때문에 젊은이들이 겪는 ‘관심’은 그러한 폭력의 생생한 현장이다.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가정 또는 가족 내 일상적인 폭력은 사회적 폭력으로 탈바꿈하고 사회적 폭력은 또 가족 내 일상적 폭력을 부르는 근원이 된다. 과거에 비일비재했던 자식의 종신대사를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혼인관습은 가족 내 폭력의 하나였다. 그것은 자식을 키워낸 부모의 일종의 권력으로 간주되는 사회풍습 때문에 폭력적인 그 간섭행위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둔갑하여 세세대대 이어왔었다. 부모 자식 간에 전혀 의사소통의 절차가 결여된 채 심지어 대체로 자식의 의사에 관계없거나 반대되는 방향으로 감행되였기에 그것은 분명 ‘폭력’이였다. 이러한 삶이 전근대적인 현상이였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전시대에 정치적 요소가 그러한 폭력을 부추기는 시대도 있었거니와 현재에도 전술한 현상과 같은 일상의 폭력이 여전히 우리들의 삶을 괴롭히고 있다. 그 모든 근원을 캐여본다면 당사자들 사이에 필요한 소통이 결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필요한 의사소통의 루트가 단절되였거나 아니면 이러저러한 리유 때문에 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통의 결여, 그에 따르는 일상의 폭력은 우리의 삶의 현장 곳곳에 산재되여있는 흔한 사회현상이다. 이에 대한 우리 문학의 반응은 어떠한 양상일가? 량영철의 소설에서 필자는 그 소중한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작가의 삶과 맞먹는 그리 멀지 않았던 시대에 겪었던 폭력, 현시대의 중년시대에 이르러 몸소 겪거나 목격하게 되는 일상의 폭력들이 그의 작품에서 형상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시대적 반응의 하나로 다루어보고저 하는 것이 이 글의 초심이다.   2. 량영철의 이 본고 원고청탁의 대상 텍스트이다. 이 작품 애초의 창작동기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최××이란 동창생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만났더니 이 녀석이 허풍을 꽝꽝 쳐대는 것이였다. 한국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가봤다고 돈이랑 펑펑 써제끼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정말로 믿었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들키고 나서 녀석은 도살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살장 구경을 한번 잘했다. 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면서 흐름식 생산선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언젠가는 써야지 마음 굳혔다. 물론 그 때부터 나는 선지를 먹지 않았다.(살춘각 창작후기 에서)   의 전반 경개는 우의 작가의 말과 별반 다름이 없다. 바뀐  것은 주인공이 남자 동창에서 녀성 동창으로 바뀐 것이고 당연한 짐작이 따르는 대화와 행위이다. 작가의 임무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맞추어본다면 표준 작문거리를 동원한 셈이다. 이 작품은 ‘상편’에 이어서 ‘하편’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얼핏 보기엔 사족 같은 처리이지만 작가의 말에 의거한다면 상당한 의도적인 작업의 결과이다.   하편에서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편을 설치했다. 따라서 상편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다. 마지막 한줄을 위해 나는 앞에다 천마디의 헛소리를 쳤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나 나는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너무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살춘각 창작후기 에서)   작품은 중학교 2학년 시절의 동창생 ‘계경숙’이 걸어온 전화에서 시작된다. 의외의 전화를 걸어온 열정의 소유자 계경숙은 중학교 시절 한살 아래인 ‘나’를 은근히 좋아했던 녀동창생이다. 활달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나’에게 녀자와의 첫 스킨십을 선사했고 심지어는 숫처녀의 가슴까지 서슴지 않고 선사했던 그러한 녀동창이였다. 따라서 30여년 후의 만남이였지만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대화와 행위에서 스스럼없게 된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4차를 거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행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은 작품의 리해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 “근데 너 연변말을 잘한다? 한국에 간 지 몇년 됐다 했지?”  “20년 거의 돼. 글고 사람은 자기 고향 버전은 안 잊어먹게 돼있어. 연변에 오면 자연적으로 연변말을 하게 돼. 몇번 오지는 않았지만.”    2) 경숙이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나한테 보내왔다.  “아들이 일본에 있거든. 일본에 가게 하나 차렸는데 힘든가봐. 우리 량주 보고 들어오래. 아마도 일본에 갈 것 같아서…”    3) 치마 아래로 그녀의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샌들을 신은 발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양말도 받쳐신지 않고 있었다.    우의 세 인용은 작품 중 ‘나’의 의혹이 진전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한국에서 20년간 살아온 사람으로서 너무 자연스러운 연변말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1)에서 보다싶이 잘 넘기고 있다. 하지만 인용 2)의 아들이 일본에 있다, 가게를 차렸다, 량주 보고 와서 도와달란다는 복잡한 사연을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의미심장’하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채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늘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던 그런 차림새와 어울리는 부분이다. 뭔가는 미심쩍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표정을 가리고 림기응변으로 이러저러한 사연을 꾸며내기 위한 그녀의 의도적인 표정과 차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3)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의혹을 더한층 가중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 대로 하편의 전개를 위한 복선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가정의 사연으로 일본으로 들어가기 직전 만났던 ‘계경숙’이, 4차까지 하고 다시 만나자는 인사도 없이 갈라지는 것이 상편의 마감이다.  후편에서 ‘계경숙’은 동창모임에 온 ‘나’ 친구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수상시장에서 선지장사를 하고 있다는 뜻밖의 소식이다. 그 소식을 친히 확인하는 ‘나’와 함께 상편에서 깔아놓은 복선도 일일이 은을 내게 된다.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첫 구애의 장본자 전학철과 부친의 직장전근으로 또 가깝게 되여 위협과 공갈의 폭력 아래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한 그녀, 유일한 바람으로 믿고 살던 아들은 교통사고 끝에 부모의 부담이 되지 않고저 자살로 생을 맺고 풍을 맞은 남편은 스스로 몸도 거두지 못하는 페인이 되고 만다. 불행한 혼인은 불행한 삶과 고생의 생계유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편에 보였던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스스로 남편의 구완과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그녀의 어려운 형편은 앞에서 인용한 세 부분의 점차 짙어가는 의혹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평생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를 찾아본 것은 점차 꺼져갈듯도 했던 자신의 삶의 의욕을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였으리라. 하지만 리해 가능한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누구에게도, 사랑하는 상대에게까지도 자신의 그 궁핍한 처지를 보이기 싫게 했다. 따라서 우에서 인용한 어불성설 같지만 또 재치 있는 그녀의 말에 넘어갔던 세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개연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30여년  동안 잊지 못하던 첫사랑을 모처럼 찾는 재회에서 “원피스 치마자락이 나팔꽃처럼 들려있어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다 드러나는 차림도 후편에서 그녀의 궁핍한 생활상을 예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 상편의 전개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리행하고저 몇개의 복선의 장치를 운용하고 있다. 복선의 역할을 하는 디테일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대화와 행위에 용해되여있었고 하편에서 그 복선들은 각각 암시하고 있던 바의 원모습을 재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전반 작품의 플롯의 구성과 인물의 설정에서 의도했던 바를 충실히 리행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앞에서 본고는 의 외적 형태 면에서의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를 편의에 따라 살펴보았다. 이를 차치하고 작가가 자신의 창작에서 ‘소통의 결여에 따른 일상의 폭력’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은 본고가 살펴본 작가 또는 작품의 내적 특징이다.  의 경우 의사소통의 결여로 인한 폭력은 주인공에 그치지 않는다. ‘계경숙’은 ‘나’보다 한살 이상이였기에 사랑하는 ‘나’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일정한 어려움을 겪는다. 먼 고모벌이 되는 녀자애와 친구이고 한살 이상인 그녀를 ‘나’도 서먹서먹하게 대하기는 피차일반이였다. ‘소통의 결여’의 첫쌍이였다. 다음은 ‘계경숙’의 혼인에 관한 ‘소통의 결여’이다. 련애편지를 보낸 상대를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느끼고 있는 그녀가 결국 그 ‘공포의 대상’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부친의 직장 전근으로 ‘공포의 대상’의 무차별적인 위협과 공갈에 시달린 결과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두 당사자 부친의 직장 전근이란 출세의 표현이였다. 여기에 두 당사자 사이의 ‘소통의 불가’도 문제였지만 그녀는 부모와도 ‘소통의 결여’ 상태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상상력을 좀더 풍부화해본다면 부모의 립장에서는 같은 동네에서 출세하여 타향으로 이주한 량가가 사돈으로 승격하는 것을 제격일 것으로 생각했을 법도 하다. 환언한다면 그녀의 부모 역시 ‘소통의 결여’ 뿐만 아니라 그 ‘소통 불가’의 결혼을 추진한 ‘폭력’의 장본인이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모의 립장과 체면을 전제로 한 자식‘사랑’, 그 ‘아름다운 명분’이 그녀를 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거의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할가” 라는 작가의 판단이 이를 뒤받침한다. 결국 ‘계경숙’과 ‘나’의 ‘소통의 결여’로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한 결혼은 무산되고 그녀와 부모와의 ‘소통의 결여’는 결국 그녀를 전혀 ‘소통’이 불가한 ‘폭력’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러한 것이 사랑과 혼인의 령역 그리고 가족 내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폭력’이였다고 한다면 작품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소통의 결여’를 은연중 포함하고 있다. 바로 ‘계경숙’, ‘나’의 동창, 사회적 관계 속의 ‘소통의 결여’이다. 그녀는 그 어려운 삶의 여건에서도 ‘나’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을 정도이다. 심지어 ‘나’를 만나려는 강렬한 충동으로 결국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고운 발’을 보이는 씨나리오를 출연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그녀는 30여년 동안 “자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와 ‘계경숙’만의 만남에 이의를 품은 동창생의 말에서 증명된다. 그렇다면 도무지 한 시내 안에 다섯명 밖에 되지 않는 동창생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심층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욕이 흘러넘치는 이 시대, 물질적 리익의 획득 여부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을 그녀는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막론하고 물질적 소득과 재부의 다소에 따라 친소亲疏가 확정되는 시대에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사회진출은 동창생을 망라한 사회의 한담거리로, 웃음거리로 전락되여 새로운 ‘폭력’의 짓이김을 당하리라는 점을 그녀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묵묵히 결혼에 이은 가족, 사회의 ‘폭력’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강인하게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저 혼신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정신적 버팀대가 있었다면 ‘나’의 작품이였을 것이다. 이것이 의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이 이루고 있는 전경全景이다. ‘소통의 결여’로 인한 인간세상의 ‘폭력’은 작가의 다른 한 작품 에서도 일별된다. 안해를 잃은 부친과 자식 사이, ‘소통의 결여’를 자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이, 종종 ‘폭력’적인 결론으로 대화의 매듭을 짓는다. 그 뿐이 아니다. 부친은 안해를 잃은 후에 세번의 결혼 같지 않은 짝짓기에 실패하는 바 정이 결여된 동거상태를 이어가던 중 마지막 로친에게서 호된 ‘폭력’을 당하고 만다. 자식 ‘나’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누라가 외국에 있는 상황, ‘수지’와 ‘경이’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진정 애인도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소통’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말에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너 나를 사랑하기나 한 거니?”라고 묻는 ‘나’의 이 한마디로 독자들은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일생에서 ‘소통’의 의미, 아니 모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소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과연 원활한 ‘소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가?   4. 30대의 젊은 시절 문단에 일찍 활약상을 보였던 작가 량영철은 이제 다시 재기의 기세를 보이고 있는듯하다. 얼마 동안 ‘살춘각’에서 ‘돼지’같이 살았다는 작가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회한, 안타까움, 무가내 등 정서가 착잡하게 엉켜져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야기만 꾸미는 일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모든 식자층이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삶에 대한 남다른 애착, 사랑, 고민, 사색이 필요하다. 아니 심지어는 삶에 대한 반발, 혐오의 정서까지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지 않고 어찌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으랴. “긴긴 밤을 통곡으로 지새워 못 본 자는 인생을 담론하기에 력부족이라未曾长夜痛哭者,不足以语人生”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명언과 련관시켜보아야 할 경지이다.  단 두 작품에 한정하여 량영철을 론하는 본고는 작가와의 ‘소통’이 결여된 채로 진행되였다. 은 작가의 창작의도에 맞춘다면 성공작이 될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애증이 분명했던 자기가 사랑하는 동생 벌의 남자애에게 선뜻 숫처녀의 가슴까지 허락할 정도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녀주인공, 30여년 후에 모처럼 만든 재회의 기회에도 아무런 꺼리낌없이 육담을 나눈다. 심지어 당시에 사랑했던 ‘나’의 페니스가 대담거리가 될 정도로 스스럼없다. 일관된 성격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에는 단호하게 브레이크를 걸던 그녀였다. 그런데 최후 자신의 삶의 진상을 ‘나’의 앞에 드러냈을 때 반신불수의 남편이였지만 그 ‘형형’한 눈빛 아래 ‘나’와 질펀한 정사情事를 펼친다. 이는 반평생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근원인 남편에 련대한 복수라고 해야 할가? 본고는 이에 대한 속단速断은 삼가키로 한다. 살춘각杀春阁의 살춘각, 작가 량영철과의 ‘소통’이 없는 판단은 아무래도 오단误断의 위험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의 ‘소통’이 기대되는 부분으로서 후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출처:2018 제2호  
25    살춘각: 일하면서 글쓰기 댓글:  조회:286  추천:0  2019-07-11
일하면서 글쓰기 살춘각   최××이란 동창생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만났더니 이 녀석이 허풍을 꽝꽝 쳐대는 것이였다. 한국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가봤다고 돈이랑 펑펑 써제끼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정말로 믿었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들키고 나서 녀석은 도살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살장 구경을 한번 잘했다. 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면서 흐름식 생산선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언젠가는 써야지 마음 굳혔다. 물론 그 때부터 나는 선지를 먹지 않았다.  이 소설을 구상한 지 15년이 너머 된다는 것을 예서 감히 고백한다. 그 사이 나는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왔다. 그럼에도 쓰지 못했던 것은 내 게으름 탓일 것이다.  십년 동안 눕혔던 붓을 다시 세웠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이 이 소설이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회피하고 있었다. 아마 편집부에서 독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백산》에 더구나 감사한지도 모른다.  오십대가 쓴 글하고 사십대가 쓴 글은 다르다. 내 나이가 오십대란 말이다. 어딘가 달라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온밤을 하얗게 새우던 2016년 12월 31일이 생각난다. 이 밤만 지나면 오십대에 들어선다는 현실은 나를 안절부절 방안을 바장이게 했다. 방안은 담배연기로 꽉 찼고 나는 혹 아래층에서 내 한숨소리라도 들을가봐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 카텐을 열어젖히고 어스름한 달빛 아래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성자산성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양로원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마지막 방문길에 허리춤에서 지린내에 절은 빨간 돈 몇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힘없이 자리에 누우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를 만나 아버지의 전 재산을 쥐여줄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이튿날 바로 세상을 등졌으니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향한 기다림이 그 날까지 아버지를 지탱하게 하였을 것이다.  2017년 1월 1일, 급기야 오십대의 회오리바람은 플라이어를 들고 달려와 내 녹 쓴 이발을 뽑아갔다. 그리고는 내 지나온 세월의 귀때기를 힘껏 후려쳤다. 결국 나는 내 지나온 비틀비틀 50년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문했다. 나는? 왜? 하필? 새해 정초에 아버지를 떠올렸을가? 나는 나의 후반생을 재설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3월 17일 이른새벽, 푸름한 달빛 속에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나는 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은 내 아들의 생일이였다. 나는 자못 진지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을 한번 바라보고는 한줄 쓰고 또 한번 바라보고는 한줄을 쓰고 했다. 그렇게 해서 씌여진 것이 《장백산》에 나간 살춘각 계렬수필과 이란 소설이다. 몇편의 발표도 안할 칼럼과 쓰레기 같은 시도 배가했다. 그리고 소설이 발표되는 것도 보지 않고 주저없이 내가 발 딛고 있던 연길땅을 떠나 연태행 비행기에 올랐다. 연태서 2박3일 체류하고 청도서 장학규와 몇몇 문인들과 짧은 시간 회동한 다음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날은 잊지도 못할 7월 22일이였다.    인천국제공항에 몸을 내리며 나는 다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삶을 살리라.  나는 달라지리라.  물론 글도 달라지리라.  내 서재의 한낱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살춘각杀春阁이 오늘부터는 걸어다니는 살아숨쉬는 살춘각으로 되리라… 했다.    한국에 온 지 반년이 되였고 일을 시작한 지는 석달이 되였다. 일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소설의 경우는 더하다.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들어오는 청탁은 소설이고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하면서 쓴 두번째 소설이다. 일하면서 쓴 거라 그런지 특별히 애착이 간다. 특별히 두번째 소설을 쓸 때는 소설 못지 않은 아픔을 주기도 겪기도 했다.  하나는 《도라지》에 줬고 하나는 《장백산》에 줬다. 둘 다 톱으로 나간다는 기별이다. 안 떠지는 눈을 잡아뜯으며 쓴 보람을 예서 느낀다.  일하면서 글쓰기.  한국에서의 내 일상이다.  아니, 작가로서의 숙명이요 운명이다.    인간의 복합성을 구현하기 위해 상하편으로 나눠썼다.  하편에서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편을 설치했다. 따라서 상편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다. 마지막 한줄을 위해 나는 앞에다 천마디의 헛소리를 쳤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나 나는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너무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처음에 나는 하편만으로 소설을 만들려고 했었다. 하편만으로도 소설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나는 상편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인간은 단순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또 다른 동창생을 떠올렸고 나는 그 둘을 오버랩시켜버렸다. 이것이 이 소설이 탄생한 과정이다. 아무튼 나왔으니 판단은 독자들한테 맡기련다.    창작후기인지 작가노트인지 참 쓰기가 싫다. 이것을 읽어줄 독자가 있을가 하고 잠간 생각해본다.  그래도 써야겠지? 이것도 창작의 일부이고 보면? 그래,  너는 써야 해.  너한테 다른 길은 없어.  아픈 눈을 집어뜯으면서라도 너는 쓰거라.  출처:2018 제2호
24    <장백산> 2018.1 루계217 댓글:  조회:623  추천:0  2019-07-09
장백산 총217호 2018년1호   권두칼럼 황유복        소셜미디어 시대의 문학지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김경화        겨울개구리(중편소설) 김경화        삶의 대화(작가노트) 리태복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작품평) 조원            청산리 적마(작가평)   문학대담:작가를 말하다-리원길편 김홍란       사실주의에 충실하려던 작가  소설광장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1) 김혁         잊혀진 ‘영화황제’(작가의 말)   박초란소설코너 박초란       장자의 고양이(단편소설)   계렬수필 리임원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리임원         시간이 흐름을 멈춘 곳 리임원         천년고도에서 꿈을 먹다    시인 시전 강효삼         이른봄 강물의 소리에서(시 외5수) 강혜라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시평) 기획련재 김혁          한락연평전   창작마당 김철호        검은빛(단편소설) 리여천        올겨울은 날씨가 몹시 추웠다(소설) 조광명        정유년의 마지막 어느 날,어떤 위로의 대화방식(수필) 김기덕        돌(시 외1수) 마성욱        엄마의 밥상(시)   인물탐방 최창륵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인물전기)   8090문학코너 허은명       벽(단편소설) 박영화       외할머니 전 상서(수필) 김수연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시 외2수) 김화         설국의 발레리나는 외롭다(시)   문학과 비평     김영옥       조광명 소설의 픽션과 논픽션의 탈경계(평론)   중국소수민족문학 알라무노     몽등교(수필/천년목 옮김)   장펴노설련재 림원춘       산귀신(장편소설 련재19) 구용기       해볕이 춥다(장편소설 련재8)
23    알리무노:몽등교(수필) 댓글:  조회:457  추천:0  2019-07-09
몽등교   알리무노   채운 남쪽에 위치한 운룡, 종래로 가볼 생각을 안해본 이곳의 잠들어있는 문을 노크한 것은 오직 꿈속의 다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른아침, 현성에서 출발한 우리는 비강 沘江을 따라 올라가며 마음 안에 풍아한 멋으로 남아있는 다리를 찾고 있었다. 도로는 산 사이의 협곡을 완연하게 뻗어나갔고 계곡 량안의 제전에는 무서리가 한벌 깔려있었다. 시들어진 마른풀이 벌거벗은 산마루를 차지하고 있고 들쭉날쭉한 마을이 계곡 량안에 드문드문 앉아있다. 밀봉이 잘 안된 차창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차안은 찬기운으로 감돌았다. 겨울 아침, 낯선 이 땅, 어쩌면 현세거나 혹은 후세에 다리 우의 덩쿨마냥 나와 엉킬지도 모를 이곳이 나로 하여금 서리 내린 땅을 편안하게 내딛게 한다.   내가 본 첫 다리는 장신향의 안란교였다. 안란교는 현수교悬索桥였으며 다리 옆에 세워진 대리석판 소개비에는 이 다리가 성급 중점보호문물이라고 적혀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안란교는 량안의 산사람들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 속에서 나는 신 모과를 등에 진 늙은 말의 뒤를 모과의 시큼한 향을 더듬으며 휘청이는 안란교를 건넜다. 발밑에서 흐르는 비강은 영원히 음표가 변하지 않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리어구의 주추돌 아래로 발 두쌍이 나와있었다. 한쌍은 누런색 고무장화를 신었고 다른 한쌍은 수공으로 만든 검정색 헝겊신을 신었다. 나는 이 두쌍의 발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교각에 기대여 강물소리를 사이두고 발 두쌍의 주인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누런색 고무장화 주인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가자. 그만하고 집에 가자고. 돼지죽도 아직 안 줬어.”  몇분이 지나서야 검정색 헝겊신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담에도 날 때릴 거야? 안 때린다고 담보해야 돌아가.”  고무장화 주인이 거칠게 말했다.  “안 때려. 한대 때렸다가 온 오전 쫓아다니는데 그 짓을 왜 해.”  고무장화 주인이 일어서니 헝겊신 주인도 일어섰으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리어구를 떠났다. 이번에 나는 어떤 농가의 채마밭 변두리에 둘러놓은 돌 우에 앉아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집의 들보에는 온통 옥수수가 가득 걸려있었고 참새 한마리가 옥수수들 사이에서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녔다. 나는 마치 속세 밖에 놓여있는 한알의 먼지인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계속 전진하여 통경 풍우교에 이르렀으며 이 다리의 본명은 대풍랑교라고 했었단다. 비강이 산굽이를 돈 곳에 다리가 세워져서 물살이 세고 파도소리가 리유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나라 건륭시기에 세워진 다리는 현비식悬臂式이고 단공목량单孔木梁에 교량 본체는 나무 각재를 교착가첩交错架叠 형식을 채용하였으며 다리어구로부터 층층이 강심을 향해 가려내다가 량쪽 9메터 거리에서 5개의 굵은 횡목으로 련결하였고 그런 후 나무판자를 깔았다. 교량 바닥에는 태량식抬梁式 나무구조의 교옥桥屋을 지었고 다리 량쪽 끝은 강남수향江南水乡 풍격의 륙각정을 만들어 사람들이 휴식하고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놓아서 풍우교风雨桥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고대의 아름다운 녀인이 란간을 짚고 멀리 바라보는 풍경도 없고 과거시험에 락방한 선비가 우연히 미인을 만나는 일도 없이 묵묵히 존재하고 있을 뿐 그냥 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비를 피하는 장소로만 제공되고 있다. 강 량안 시골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운룡의 주민들 대부분은 남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며 이런 풍우교는 운룡의 향마다에 하나씩 있다고 한다. 순탕을 빠져나와 멀지 않은 곳에 운룡 경내의 마지막 등교가 있다. 어쩌면 낡고 피페한 이 다리가 언제 세워졌는지 아무도모를 수 있다. 말라 끊어진 덩쿨은 쇠줄로 바뀌여있고 쇠줄도 오래된듯 세월의 풍파에 녹쓸어있다. 담배를 붙여물고 눈을 감은 채 담배연기를 둥글게 뱉어내면 뭉게뭉게 피여오르는 연기는 마치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을 영현影现하는 것 같다. 강건너 장터로 가던 아석阿昔은 일곱달 된 임신한 몸을 이끌고 산고개를 넘던 중 등교가 보이는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비강의 파도 속에 삼켜져버렸다. 아석은 그 날 강을 건너가서 꽃천 두자와 성냥을 살 생각이였다. 나는 덩쿨 사이로 두발을 뻗어 바람 속에 내놓으며 발끝에 차거움이 닿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담배연기의 몽롱함 속에서 어제 밤의 춘몽을 돌이켜보았다. 록음이 우거진 다리 우에 한가하게 누워서 다리를 건너던 어느 남자가 나를 데려가기를 기다린다. 장작불을 피워서 연기가 자오록한 집안에 데려들어가며는 화로의 각척 우에는 따뜻한 강낭죽을 끓이고 돼지우리 안에서는 돼지가 구유를 에워싼 채 먹이 달라며 보채고 닭장 안의 암탉은 몸을 옮겨 새하얀 닭알을 드러내며 공 세운 걸 알아달라는듯 꼬꼬댁 운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저녁해가 장작 틈 사이로 천만갈래의 잔잔한 빛을 들여보내여 시커먼 얼굴의 남자 몸에 비춘다. 나는 그 집의 아석이라 부르는 녀주인이다. 긴 머리로 상투를 틀고 빨간색 머리수건을 걸치였으며 어깨에 둘러멘 광주리에는 햇강낭이 가득 담겨있다. 현악기를 타는 셋째삼촌의 손가락이 나비처럼 날고 있는 게 똑똑히 보인다. 푸른빛 그림자가 뛰여노는 등교가 비강의 잔물결 속에서 휘청거리고 다리 건너 떠나간 뒤모습은 갈수록 멀어지는데 리아국은 긴 적삼에 짧은 홑저고리 차림으로 붉게 타오르는 홰불을 높이 들고 나에게 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나는 우물가에서 소금을 끓이며 생활을 건조시킨다… (천년목 옮김) 출처:2018제1호  
22    김수연: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시, 외2수) 댓글:  조회:413  추천:0  2019-07-09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1 김수연     가을바람의 소리 아, 멀리서 그리움이 걸어오는 소리다    가을바람의 얼굴 아, 추억이 길을 찾아떠나는 뒤모습    가을바람의 냄새 아, 네 안에서 너를 읽던 시간의 향기다    가을바람의 손길 아, 네가 내 안에 들어서던 순간의 설레임   가을 속에 세상이 익어가고 있다 아, 너라는 한 사람으로 꽉 찬 세상이     가을의 바이러스엔 백신이 없다 2   그냥  그대가 내 손을 잡아줬을 뿐인데 그게 뭐라고 그게 뭔 대수라고 가을조차 물들이지 못한 세상이 홀연 노란 금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아, 대수 맞네요 그 빛에 눈이 먼 나에게  이젠, 내 손을 잡아준 그대만 보이는걸요     아무렇지 않은 가을    사랑은 딱 그 깊이 만큼 가슴을 허비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 어깨를 만지는 가을비가 아무렇지 않게 내게 툭툭 던지고 갑니다    이 비가 멈추면 추위는 아무렇지 않게 이만치 더 가까이서 우리의 옷깃을 파고들 테지요 그러면 오늘 가을비 속에 흩날린 기억들은 아무렇지 않게 저만치 나에게서 멀어져갈 테지요 아, 아무렇지 않게 찾아오고 떠나갈 가을 속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가 봅니다 열심히 태운 이 시간들이 무엇으로 남을지는 아무렇지 않게, 그냥 정말 아무렇지 않게 선뜻 하늘의 뜻에 맡기는 법을 익혀야 할가 봅니다   이제 조금 더 촉촉한 가슴으로  이 가을을, 이 시간을, 이 사랑을, 이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듯이 안아주겠습니다 출처:2018제1호
21    박영화: 외할머니 전 상서(수필) 댓글:  조회:721  추천:0  2019-07-09
외할머니 전 상서 박영화   높아진 하늘을 따라 그리움이 늘어가는 추억의 계절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한자락에도 괜히 울컥해지는 감성 충만한 계절에 가을의 쓸쓸함과 고독을 유독 많이 담은 윤동주시인의 을 읊어본다. 부끄러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은은하게 들려주고 자아성찰과 반성이 얼마나 멋들어진 일인지를 가장 느낌 있게 전달하는 시인, 윤동주 만큼 가을에 어울리는 시인도 드물 것이다. 이름 석자만 대충 알고 지냈던 소시적에 작문선생님을 따라 무작정 윤동주 생가에 다녀온 뒤에도 마냥 이런 시인이 이런 곳에 머물렀었구나, 이 마을 사람들이 자주 모여서 무슨 일인가를 많이 했나 보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평화치 않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처럼 차분하고 분위기 있는 시를 지어낸 시인에 대한 동경도 따라서 커져갔다. 그러면서 하나의 별에 자신의 고민과, 마음과 그리고 온 우주를 담고 싶어했던 시인의 먹먹함이 조금씩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시인 윤동주는 비물이 호수에 담기듯이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에 다가와서 조용히 내 감성을 적셔주곤 했다.  들판에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이 온통 황금빛을 자랑하는 이맘 때면 산타마냥 자식들에게 나눠줄 선물꾸러미들을 옹기종기 쌓아놓고 기다리시던 외할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민족과 시대를 잃은 거창한 부끄러움과 그것들을 지켜내지 못한 반성은 아니지만 적어도 부끄러움과 아픔, 그 감정들만은 시인을 꼭 닮은 채 살다 가신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난치병을 앓는 큰아들을 둔 자책감과 그에 따른 온갖 설음과 짐들을 오롯이 홀로 짊어지고 감당해내신 분이셨다. 늘 다소곳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삶의 현장을 지켜오신 외할머니는 큰아들을 앞세운 아픔의 무게를 못 견디고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났다.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부재한 세상에서 살게 된 막내외손녀가 오늘은 윤동주시인의 의 쓸쓸함과 감동을 빌려 높은 가을 하늘에 외할머니 전 상서를 띄워본다. 외할머니한테도 아무 걱정 없이 자연을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을가. 다시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외할머니께서 어느 곳이 경치가 좋더라, 어떤 꽃이 예쁘더라고 하셨던 기억이 없다. 이곳저곳 마을 사람들과 려행을 다녀오신 뒤에도 그 사진 속에서도 외할머니의 눈빛은 늘 자연을 즐긴 사람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려행 후일담에도 자연에 대한 감상평은 없으신 채 큰외삼촌이 어느 곳을 갔는데 힘들어했다, 어디에선 좋아했다 뿐이였다. 외할머니 생활의 대부분은 큰외삼촌 챙기기로 채워져있었지만 정작 그 정성과 마음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큰외숙모가 선택한 결혼이였지만 지병이 있는 아들을 장가보내서 딸의 인생을 망쳤다는 사돈들의 눈초리는 명절 때면 더욱 심해졌고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성우로 활약할 만큼 재능 많고 의젓했던 큰아들이 위축되는 게 싫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뒤돌아 술로 서러움을 삼키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왔었다. 그렇게 외할머니에게는 삶의 어느 모퉁이에도 숨통이 트일만한 곳이 마련되여있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라도 곁에 계셨더라면 덜했을 외로움과 서글픔들을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림도 잘 그리고 손수 가구도 만들고 기관사로도 지낸 적이 있는 다재다능한 분이셨다고 한다.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진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에도 큰 병은 아니였던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셨고 중병을 앓는 큰아들의 병치료만으로도 버거웠던 가정형편을 걱정하여 식음을 전페하고 약도 안 드신 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남편을 여의고 자책감의 무게를 키워온 외할머니의 생은 한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가슴 시린 삶이였다. 그럼에도 외할머니는 끝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쌀 줄 아는 마음 따뜻한 분이였다. 엄마 손에 이끌려 외할머니댁에 가는 게 동년시절에는 제일 신나는 일이였고 제일 행복한 려행이기도 했다. 조금 더 커서는 틈만 나면 옷가지를 대충 챙겨가지고 혼자서 찾았던 외할머니댁은 항상 사촌들과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했던 원인도 있겠지만 손주들은 물론이고 사돈아이들까지도 외할머니를 잘 따랐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어린 우리들에게 류행가를 가르치고 그 당시엔 리해하지도 못하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때론 술에 취해 춤도 곧잘 추던 외할머니댁은 우리에게 가장 큰 놀이터였고 따뜻한 쉼터였다. 가갸거겨도 겨우 알가말가 하는 손주들을 불러놓고 일본어로 개사한 노래를 가르치며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일본어로 수업하고 일본어만 사용하게 했다는 외할머니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신기했고 깨끗하게 정돈될 틈이 없을 정도로 늘 어질러진 채로 분주했던 외할머니 집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 이어 큰아들마저 앞세운 외할머니는 끝내는 슬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야 말았다. 외할머니의 모진 인생이 더 힘들어진 것도 큰아들 때문이였지만 외할머니의 유일한 삶의 끈 또한 큰아들이였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큰아들을 살리겠다는 의지 하나로 꿋꿋하게 버텨오던 외할머니는 큰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마지막 한오리의 지푸라기마저 놓았던 것 같다. 손톱, 발톱이 빠지도록 큰아들을 위해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밭일을 하면서 안 좋은 심장 탓에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면서도 늘 강철마냥 탄탄해보이던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졌고 더 이상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던 할머니의 손발은 나어린 우리 것보다도 희고 곱게 변해갔다. 늘 숨이 차서 헐떡이던 모습도 차츰 사라져 아이처럼 평온하게 잠에 들곤 하셨다.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을 한달이고 두달이고 감췄다가 다른 자식들 몰래 큰아들 집에 올려가시던 외할머니는 계절마다 제철 과일도 찾고 드시고 싶은 음식도 사다달라고 했다. 그렇게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6년 동안 치매를 앓으신 외할머니는 막내딸인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늘 우리 집을 큰아들 집이라 우기셨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막내딸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현실부정이겠지만 엄마도 나도 당시엔 그게 늘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전화만 받으면 내 이름만 부르곤 해서 다른 손녀들의 서운함까지 산 외할머니,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하시고 그 긴 시간을 천장만 하염없이 쳐다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셨을가? 어쩌면 외할머니가 좋아하던 모든 아름다운 말들을 되뇌고 있던 건 아닐가. 언젠가 젊어서는 ‘고운 새댁’으로 불리웠던 적이 있다고 롱담처럼 하셨던 말씀 대로 외할머니에게도 밝고 싱그러운 청춘이 있었을 테니가… 그리고 어쩌면 백일홍을 그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언젠가 여름방학에 찾았던 외할머니댁 터밭 가장자리에 피여있던 꽃을 보며 막연하게 ‘꽃을 심을 여유도 있으시네.’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외할머니는 늘 빚을 진 자세로 힘겹게 삶을 감당해냈던 것이다. 언제 어떤 연유에서 심어진 꽃들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아마 모두가 잠든 희붐한 새벽녘에 당신의 고뇌와 아픔을 담아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희석시켜보려고 심었던 것은 아니였을가.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온 아픔들이 그 순간이나마 꽃으로 피여나고 꽃으로 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그 꽃 하나하나에 당신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와 그리웠을 어머니를 담아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때늦은 바람이라 부질없긴 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유독 오래동안 피여있는 꽃이 백일홍이기도 하다. 쉽게 피였다 쉽게 지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게 적어도 일년에 백일 동안은 외할머니 곁을 밤낮없이 지켜줬으니 참 고마운 꽃이다. 또 어쩌면 끔찍이도 아끼고 우애가 깊었던 형제자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젊어서 요절한 막내녀동생과 셋째동생과 고국에 남겨진 남동생과 마지막까지 의지했던 큰오빠를… 아니면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에 씌여져있던 외할머니의 이름 석자를 보고서야 안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누이, 동생, 언니로만 살다 가신 외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이 너무나도 서글프게 안겨왔으니까. 그이들을 추억할 잠간의 여유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불공평한 운명에 내버려졌던 외할머니를 위해 좋은 기억만 허락한 6년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랬으면 참 좋았을 시간이였다.  이제 내가 대신 외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그 존재들의 이름을 불러드릴가? 그러면 잠시나마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달래질 수 있을가? 외로움과 그리움과 서글픔으로 반죽된 인생을 힘겹게 견뎌온 외할머니, 이제 외할머니가 누워계신 파란 언덕에도 수많은 별빛들이 내려앉아 말동무도 되여주고 술친구도 되여주었으면 좋겠다.  아스라이 먼 별로 떠나셨지만 또 손에 닿을듯한 거리에서 별처럼 반짝이고 계시는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별에도 백일홍이 피였다가 진 시원한 가을이 왔기를, 별 하나하나에 외할머니를 추억해본다.  출처:2018제1호  
20    허은명: 벽(壁)(단편소설) 댓글:  조회:386  추천:0  2019-07-09
벽(壁) 허은명   출항 상해 우숭구국제크루즈터미널. 출렁이는 바다 속에 거인같이 서있는 8만톤 크루즈, 드디여 승객들이 하나 둘씩 탑승하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한시다.  오전 열시부터 와서 내내 대기만 몇시간째다. 투덜거리며 내 불만 만큼이나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크루즈에 올랐다. “SkySea 탑승 환영합니다!” 예쁜 서양 승무원이 탑승입구에서 구면처럼 웃어준다. 벌써 이 놈의 낡아빠진 늙다리 크루즈에 오른 지 다섯번째라 별로 신나지도 않는다. 안전검사 마치고 방키를 받아들고 나는 방이 아닌 11층으로 곧장 향했다. 11층에 위치한 SHISKIN, 스파와 면세점이 같이 있는 회사 운영 매장이다. 이곳 스파에 회사 아카데미가 있다. 륙지에서는 여러 법규 때문에 진행 불가한 프로젝트들이 여기 공해를 리용해 진행된다. 난 이번 아카데미 진행과 강의 통역을 담당한다. “직원이 또 바뀌였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프런트데스크를 지나 아카데미 라이브가 진행될 스파룸 두개를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새로 온 녀직원이 역시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 들어온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가요?” “래일 라이브 진행 시 침대를 오른쪽에 더 갖다 대주세요. 탁자 우 모든 물건은 다 치워주세요. 수술포 펼 자리예요. 룸 두개 사이 문은 열어주시고 테이프로 고정해주세요.” “아…” 그제야 직원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영등도 잘 고정해주세요. 배가 많이 움직일 수도 있으니.” “아, 네.” “방마다 하나씩요.” “네…” 대답에 귀찮음이 묻어난다. 그러는 직원을 보며 난 약이라도 올리듯이 “부탁해요” 하고 웃어보이며 스파를 나섰다.  뒤죽박죽인 가방 속을 한참 휘저어 방키를 꺼내보니 418번 룸, 실망이다. “아 뭐야 짝수잖아…” 짝수는 배머리 쪽, 홀수는 배의 뒤부분, 스파는 배의 뒤부분, 11층 식당도 배의 뒤부분… ‘출근길’이 멀다. 한참을 찾아 겨우 방에 들어오니 침대 두개인 심플한 방이다. 창으로는 바다수면이 거의 눈앞에 보인다. 특별히 요구한 2인실이다. 여기서 설명하자면 크루즈 룸과 룸 사이 방음은 안 좋다. 난 옆방 휴대폰 벨소리도 방구소리도 말소리도 코 고는 소리까지도 다 들은 적이 있다. 예민해서 잠도 깊이 못 자는 나에겐 정말 최악인 셈이다. 하여 이번엔 특별히 침대 두개로 왼쪽이 시끄러우면 오른쪽에, 오른쪽이 시끄러우면 왼쪽에 이렇게 번갈아 잘 생각이다. -띵똥- “잘 도착했어?” “밥은 먹었어?” 남자친구다. “응, 이따 먹으려고.” “감기는 좀 어때?” “내가 사다준 홍삼차는 두고 갔더라? 왜 갖고 가서 마시지.” “래일 몇시부터야?” “자기야, 나 짐정리 좀 할게.” “그래 알겠어…” 조금 풀이 죽은듯한 남자친구와의 대화를 끊고 나는 그대로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벌써 방안은 어둡고 창밖엔 검은 바다가 넘실거린다. 휴대폰을 보니 신호가 없다. 곧 공해에 들어선다는 표시다. 쿵쾅대며 등을 켜고 인터넷련결을 결제하려고 SkySea 메신저앱을 등록하는 순간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크루즈 내 메신저 앱, 방번호로 서로 련락이 자유롭게 되여있다. “안전훈련(安全演习)에 안 가셨어요?” 헉, 누구지? 하고 발신 방번호를 보니, 416번 바로 왼쪽 옆방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안전훈련시간이다. 출항하기 전 가장 중요한 안전훈련이다. 승객전원은 물론 선원들 모두가 대극장에 모여 안전훈련을 진행한다. “놀라지 마세요, 금방 그쪽 방에서 소리가 크게 나서.” “…” “려행이신가요? 전 그렇습니다만.” “… 어디서 유시진의 말투를…” 난 무시해버리고 49불을 지불하고 인터넷을 련결했다. 순간 띵동띵동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자기야 밥 먹었어?” “출항했어?” “난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지금 뭐 해?” 옆방이 신경쓰인 나머지 난 조금 짜증이 났다. “얼른 밥 먹고 쉬여. 이제 출항이야.” “그래 이따 또 련락할게~” 남자친구 문자가 끝나자 바로 또 들어오는 문자 한통. “그럼 좋은 려행 되세요.^^”   공해 전쟁이다. 공해의 깨끗한 비취색 바다를 구경할 틈도 없이 나는 원장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고 있다. 어렵게 모셔온 국제전문가시라 한치 불편함도 갖게 해서는 안되는 게 내 역할이다. 강의부터 시작하여 라이브 동시통역까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의대를 나오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의료업계에서 그것도 삼년씩이나 일하게 되였는지 나조차도 신기할 따름이다.  “제니는 의대 가자.” 원장님이 제일 자주 하시는 롱담이다.  “차라리 원장님한테서 지방흡입수술 받는 게 더 쉬워요!” 뚱뚱하다고 지방흡입하라고 하실 때마다 홀랑 벗고 어찌 수술해요, 수술 받고 나서 어떻게 원장님 얼굴 보고 일해요, 하면서 머리를 젓던 나다. “실리프팅의 여러 방식 중 고정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가 큽니다. 고정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요. 요즘은 측두부위 절개하여 고정하는 방식으로 하기도 합니다. 효과는 좋은 반면 유지기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지요.” “이번 아카데미에서는 먼저 간단한 모노실과 가시가 달린 코그실을 리용한 시술방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땀이 난다. 누군가는 통역이 얼마나 쉽냐고 입만 놀려 돈 번다고 하겠지만 징그럽게 힘이 드는 게 통역이다.  특히나 강의통역을 위해 몇날 밤을 꼬박 샜는지… 얼굴 신경과 동맥 이름은 왜 그리 어려운지… “커피 한잔 하자.” 원장님의 뒤를 따라 11층 뷔페식당에 들어섰다. 식사시간대가 훌쩍 지나 이미 메인료리들은 치워져있고 샐러드와 과일만 보였다.  손에 커피 한잔씩 들고 갑판에 올라갔다. 바람이 시원하다. “언제 결혼하니?” “다음해 2월에요.” “예비신부가 나 때문에 맨날 외박이구나.” 곧 결혼을 앞둔 내가 출장 나온 것이 조금은 미안하신지 원장님이 장난스럽게 놀리신다. 나는 웃으며 대답 대신 어두운 밤바다를 멀리, 최대한 멀리 바라보았다. 저기가 끝인가? 아니면 더 가야 끝인가… “집사람이랑 딸이랑 같이 탔으면 좋았을걸.” 원장님은 가족이 그리우신가보다. 다시 11층에 내려와 라이브를 저녁 여덟시까지 마치니 11층 로천BAR에서 파티가 열렸다. 다들 손에 맥주 혹은 칵테일을 들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평소 꽁꽁 봉인을 해뒀던 령혼들이 풀려나와 자유롭게 소리지르고 광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그들 속을 간신히 빠져 지나가려던 그 순간 나의 손을 스치고 지나는 손 하나! 흠칫 놀랐지만 내가 예민한 거겠지 생각하며 가까스로 사람들 속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남자친구의 문자가 수두룩이 들어와있다. 첫번째 문자를 확인하려는 중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갑자기 긴장이 되고 옆방 쪽으로 신경이 쏠린다. 방문 쪽에서 이쪽 창가 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난다. 뚜벅뚜벅… 창가에 멈췄다 다시 랭장고 쪽으로 걸어간다. 뚜벅뚜벅… 그러다 다시 침대 쪽 정확히 내 옆에 앉는 소리가 난다. 나는 다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서 난 한참을 숨 죽이고 옆방에 신경쓰고 있었다. “아침에 정장 입고 나가는 모습이 예뻤어요.” “!” 내가 듣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듯이 416번 방에서 날아온 문자, 여전히 도둑고양이마냥 숨 죽이고 듣기만 하는 나… “12층 다용도실에서 강의하시는 걸 봤어요. 예뻤어요.” 여전히 숨 죽이고 있는 나… “손이 차거웠어요.” “!” 또 한번 가슴이 뛴다. 아까 나의 손을 스치고 지나가던 손 하나가 생각난다. 부드러운 손이였다. 아니, 이 남자가! “무례하시네요. 다시 문자 보내지 마세요.” 하고 아주 바보 같은 답신을 보내고 난 급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내 문자를 무시라도 하듯 또다시 날아온 문자. “래일 후꾸오까 려행, 저 혼자인데 같이 할래요?” 그리고 나의 방에도 그의 방에도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참 후 날아온 그의 문자… “잘 자요. 래일 봐요.” 그렇게 나는 수두룩이 회신을 못한 남자친구의 문자를 멍하니 보며 결국 잠을 설쳤다.   후꾸오까 후꾸오까 하까따항의 맑은 경치를 구경하며 원장님이랑 크루즈에서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 자유의 몸이 되였다. 원장님은 바로 크루즈를 내리셔서 후꾸오까-서울 비행기로 돌아가셨다. 벌써 방문 앞 복도는 시끄럽다. 맞은켠 방도 방문을 활짝 열고 후꾸오까 관광에 들뜬 소리란 소리는 다 내고 있다. “뭐 입지?” 하며 옷장에 걸어놓은 옷들을 만지던 중 첫날 입었던 정장이 눈에 들어온다. 저도 모르게 어제 밤 그 한마디가 생각난다. “래일 후꾸오까 려행, 저 혼자인데 같이 할래요?” 귀신에라도 홀린듯 난 그 정장을 꺼내입었다. 려행엔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불편한 정장차림, 그럼에도 이 설레임은 뭘가? 떨쳐내듯 와락와락 벗어내고는 간단한 반바지에 티를 입고 도망치듯 방문을 나와버렸다.  후꾸오까는 귀여운 도시다. 낮고 아담한 지붕이며 정갈한 나무들이며 고운 백사장이며 오래 머물렀다간 사랑이 싹틀 것 같은 신비로움마저도 있다. 그 도시 속을 걷고 있으니 이 한달간 아카데미를 준비하며 고생한 모든 지겨움들이 다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다.  “자기야, 나 지금 후꾸오까 도착했어.” 남자친구한테 사진 한장 찍어 보냈더니 10초 만에 문자폭풍이다. “기분 좋아?” “후꾸오까는 좋아?” “날씨는 어때?” “운동화 신었지? 편하게 하고 다녀 알았지?” “감기는 어때? 약은 먹었어?” 남자친구답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는 정말이지 나 바라기이다. 나 밖에 모른다. “나 후꾸오까 벌써 세번째야…” 언제부턴가 난 나의 무뚝뚝함을 남자친구의 열정을 죽이는 무기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배여있다. “선물 뭐 사다줄가? 저번에 그 안약?”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살갑게 굴어봤다. “아니야, 자기 사고 싶은 거 많이 사고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 돼, 난 됐어.” 착해서 얄밉다. 가끔은 저 착함이 날 피곤하게도 한다.  우리는 촬영이라는 같은 취미 때문에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만났음에도 장장 6년이라는 시간을 련애만 해왔다. 서로 사귀자는 말도 없었고 결혼하자 프로포즈는 더욱 없었다. 불 같은 나의 성격과는 달리 온순하고 잔잔한 성격의 남자친구는 마냥 나를 받아주고 예뻐하기만 했다. 조금은 심심하고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던 우리의 관계가 결혼으로 넘어가게 된 건 내가 삼십대 중반으로 넘어가자 로산이 걱정이 된 나머지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결혼날자를 받아오셨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후꾸오까에는 유명한 이색스타벅스가 있다. 이 스타벅스만 다른 인테리어로 되여있다고 한다. 후꾸오까에 올 때마다 들리는 곳이다. 오늘도 나는 홀로 이곳에 들려 아메리카노 한잔 주문하고 멍을 때리기로 작정했다. 천장의 나무격자 인테리어는 보고만 있어도 빠져드는 묘한 느낌이 있다. “반바지도 이쁘세요.” 하고 해살같이 웃으며 내 앞에 앉는 한 남자. “스토커예요?” 그 웃음에 홀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잘 잤어요?” 그의 눈은 크지는 않으나 눈동자가 깨끗하고 빛났다. “결혼하셨네요?” 결혼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은 길고 부드러워보였다.  “전 재하라고 해요.”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저 애인 있어요.” 심장이 쿵쾅대고 있다. 분명 나는 화나고 당황한 것일 거다. “밤에 크루즈에서 같이 맥주 한잔 해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의 몸에서 싱그러운 향이 나의 얼굴을 감싼다. 그렇게 안절부절하는 나를 남겨놓고 그는 사라졌다. 크루즈의 밤은 항상 열기가 넘친다. 후꾸오까 하까따항을 떠나기 시작하는 크루즈의 움직임에 따라 내 마음도 야릇하게 숨가빠온다. 꼭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는듯이 나는 조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방에 돌아가면 왠지 안될 것 같은 마음에 갑판에서 밤바람을 쐬여보지만 머리는 여전히 뜨겁다. 그렇게 젊은 피들의 파티가 조용해질 때까지 멍하니 있는 나의 옆으로 싱그러운 그 향이 다가온다. 아까 낮이랑 조금 다른 느낌으로. 큰 키는 아니지만 곧고 다부진 체격이다.  “한잔만 해요.” 그는 역시 홀리울 것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의 손에 맥주 한병 쥐여준다. 호가든의 향긋함이 코끝을 스친다. 어데서 난 용기인지 나는 머리를 돌려 과감히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그도 웃으며 바라본다. 나와 남자친구가 이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부인은 같이 안 타셨어요?” 나는 그의 결혼반지를 슬쩍 보면서 입을 열었다. “헤여진 지 2년 됐어요.” 그의 눈에 한오리 슬픔이 살짝 비추었다가 연기같이 사라진다. “어떤 분이셨어요?” 실은 헤여진 리유가 궁금했다. “강한 녀자예요. 강한 나머지 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맥주병을 입에 갖다 댔다. 한모금에 반이 내려갔다. “제가 어떻게 사랑해줄지 몰라서 보내줬어요.” 문득 얼마 전 다투던 중 남자친구의 한마디가 귀가에 울린다. “너 너무 강해서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왜 갑자기 그 한마디가 다시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로 훅 들어온다.  “저기요!” 당황한 나머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요!” 여전히 내 얼굴 가까이에서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나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는듯이 그는 낮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손만 잡을게요.” 차거운 내 손 우로 그의 부드럽고 기다란 손가락이 올라탄다. 조금씩 조금씩 손끝에서 손등으로, 그리고 약지를 스치며 나의 손바닥을 펴서 깍지를 낀다. 나는 얼어붙은 자세 그대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이 당황스러움과 마음을 간지럽히는 그 무엇이 나를 어쩔 바를 모르게 하고 있다. 그러는 나를 그는 꿰뚫어보기라도 하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다.  “참 예쁘네요.” 그의 목소리는 선체를 치는 파도와 바람소리와 잘 어울리고 있다. “놀랐어요?” 역시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는 나를 끌어당겨 갑판 란간에 기대선다. 나의 손을 잡은 채로. 나는 그 손을 뺄 힘도 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말없이 손만 잡은 채 나란히 서서 보이지도 않은 밤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나의 모든 신경은 깍지를 낀 손에 쏠려있고 그의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였다. “놓으세요!” 갑자기 정신이 들기라도 한듯 손을 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나의 몸 뒤로 그의 눈빛과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온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가슴을 붙들고 있었다. 나의 손에는 아직도 그 온기와 향이 남아있다.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던 그의 얼굴이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오른쪽 침대에 누워 왼쪽 방 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리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공해 마지막 하루다. 간밤의 숙면 덕에 몸도 머리도 가볍다.  창문 밖에 보이는 파도가 예쁜 에메랄드 보석처럼 부서지고 있다. 그 파도들을 보고 있으니 어제 밤 갑판이 생각난다. SkySea 메신저 앱을 열어보았다. 문자가 없다. 뭐지? 내가 지금 뭘 기다리는 건가? 이러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면서도 나는 저도 몰래 왼쪽 침대로 자리를 옮겨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다. 이름 모를 실망감이 밀려온다. 옆방 그 사람한테도 이러는 나한테도. 캐리어에서 3일 간 잊고 살았던 책 한권을 꺼낸다. 커피를 마시려고 포트에 물을 올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또박또박. 제 구두소리가 자동차 바퀴소리와 어울려 너무도 생생히 들리는 늦은 밤의 귀가길 속에서 녀자는 자기의 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스라이 머나먼 곳에 있는 별들처럼 자신의 꿈도 저 멀리 있는 현실이 서글펐습니다…” - 속 구절 인용   얼마나 읽었을가… 복도 저 끝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발걸음소리 천천히 그리고 무게 있게 한걸음 한걸음 이쪽을 향해 아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뚜벅뚜벅… 그 발걸음은 내 방 앞에 몇초 간 멈추었다 다시 옆방 문앞으로 간다. 이내 들려오는 방안의 소리들…  그는 웃옷을 벗고 있다. 그의 웃옷은 옷장에 걸리고 있다. 그는 구두를 벗고 있다. 그리고 창가로 걸어가고 있다. 마치 그가 나의 방안에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그를 보고 또 듣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꺼내든다.  ‘탁~’ 하고 맥주캔 따는 소리가 난다. 바로 나의 휴대폰에 문자 하나가 들어온다. “방에 있죠? 같이 마셔요.” 아까 내 방 앞에서 몇초 간 멈춤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맨발로 조심조심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들을가 두렵고 또 묘하게 흥분이 된다. 가만히 열었음에도 문에서는 ‘덜컹’ 소리가 천둥소리 만큼이나 크게 난다. 문 앞에는 맥주 세캔이 놓여있다.  귀신에라도 홀린듯 나는 왼쪽 침대에 앉았다.  ‘탁~’ 나는 용기를 내서 캔을 땄다. “오늘은 파도가 유난히 이뻐요.” 그는 나한테도 이쁘다고 했었다. “그러네요. 오늘은.” 나도 모르게 ‘오늘’에 힘을 주게 된다. “곧 밤이 어두워지겠죠.” 그의 문자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있다. 나 역시 이름 모를 아쉬움에 마음이 떨린다. ‘탁~’ 다시 들려오는 맥주캔 따는 소리…  나도 두번째 캔을 땄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요.” 그의 얼굴과 미소가 또다시 보인다. “여전히 무례하시네요.” 지금 나의 미소를 그는 보았을가? “우리 같이 있을래요?”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쿵쾅쿵쾅. 심장이 튀여나올듯이 뛰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들킬가봐 나는 가슴을 꼭 부여잡았다. 그가 침대에 올라 벽 쪽에 다가온다.  “가까이 와요.” 그의 문자가 그의 목소리로 변해 내 귀가에 울리는 듯하다. 나는 손을 들어 벽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천천히…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곳에 멈추어 등을 대고 앉았다. 그의 향기가 또다시 나의 얼굴을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듯하다. ‘탁~’ 나는 세번째 캔마저도 땄다. 이어 한뼘 벽 뒤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난다.  묘한 행복함이다. 가슴 속에 노루만 뜀박질을 살살 해준다면. “제가 갈가요?” 그는 달콤하게 그리고 위험하게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나는 대답 대신 살며시 벽에 얼굴을 댔다.  그 역시도 미동조차 없다. 창밖으로 높아진 파도소리만 출렁출렁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나는 등뒤로 그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마치 사랑을 나눈 뒤 련인마냥 말없이 조용히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띵똥 “래일 아침에 도착하지?” “데리러 갈게.” 남자친구다. 뭐라고 회신을 해야 할지 몰라 괴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주차장이 머니까 걸어나오지 말고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남자친구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꼭 마치 길을 잃은 나를 찾으러 나온듯이 매 한글자마다 나를 잡아끌고 있다. “보고 싶어 많이…” 문자 속에 남자친구의 착한 얼굴이 나를 슬프게 바라본다. 난 발치에 놓인 따기만 하고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맥주 세캔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난다.  배가 흔들거리며 방도 침대도 내 눈물도 같이 부르르 떨린다. 이미 차겁게 식은 벽에 대고 나는 가만히 얘기했다. “잘 자요.”   하선 “승객 여러분, 상해 우승구국제크루즈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SkySea 크루즈를 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방문 앞에 멈춰서서 머리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창가엔 페지가 접힌 책 한권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놓여있다. “좋은 아침!” 나는 만족하며 방문을 나섰다. 출처:2018제1호  
19    최창륵: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인물전기) 댓글:  조회:398  추천:0  2019-07-09
가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지성인 -김병민선생 략전 최창륵     선생은 20여권의 저서, 백여편의 론문, 수십편의 문학평론과 수필 등 정열적인 문필활동을 펼치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주류 학계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 주자로 활약한 저명한 학자이다. 또한 10여년 간 연변대학교 부교장과 교장을 력임하며 제도적 정비와 통합캠퍼스 신축을 통해 21세기 민족교육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한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이기도 하다.  선생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태여나 ‘개혁개방’을 전후한 시기에 학업을 완성하고 탈리념적인 글로벌 시대에 학문활동을 펼친 전형적인 중국조선족 3세대 학자이다. 그리고 이 세대 학자들은 다원적인 시각과 리론에 의한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의 구축, 력사와 현실 그리고 세계와 지력사회의 력동적 관계 속에서 중국조선족 교육 및 사회문화적 전통의 계승과 갱신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완성하여야만 하였다.  중국조선족은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 및 중국 동북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과 맞물린 근대 이민과정에서 형성된 극히 현대적인 특수 집단이다. 이들이 해방전쟁,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력사적 사변들과, 중·조, 중·한 관계의 복합적인 력학 관계 속에서 체험한 삶은 타집단의 추측을 불허할 만큼 특수하며 복잡한 것이다. 그 다난한 현대 과정에서 겪은 특수한 력사적 체험은 사회, 정치, 문화 및 지역적 경계지대에 위치한 다중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특징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반이라 할 것이다. 력사적 체험이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개개인의 삶의 경험이 루적되고 합쳐져 집단적 기억과 경험이 되는 법인 만큼 ‘중국조선족’의 사회·문화적 내포는 리념과 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얻어지는 것이였다.  연변대학교의 ‘평민교장’으로 널리 존경받은 선생은 실제로 가장 평균적인 중국조선족으로서의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학계는 물론 중국의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연변대학교의 동료들이나 제자들, 외국의 지인들 모두에게 늘 감동으로 다가가며 젊은이들에게조차 친근한 벗인 선생은 바로 중국조선족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지혜와 미덕을 일신에 지닌 분이다. 그럼으로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피는 작업은 곧 중국조선족의 력사적 현장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1. 가난이 준 선물 1951년 음력 9월, 선생은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 향수촌(响水村)에서 태여나셨다. 향수라는 마을 이름은 마을 서북쪽을 감돌아 흐르는 목단강 물이 락차로 인해 멀리까지 그 여울소리가 들린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이곳 입쌀은 예로부터 황실에 공납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된 현무암 우의 충적층에서 자라기 때문에 차지고 빛갈 곱기로 유명하다. 선생의 가문은 1918년 할아버지이신 김인국(金仁国)이 자식들을 거느리고 국경을 넘으면서 중국에 정착하였고 선생은 조선족 9세대가 오붓하게 모여사는 작은 동네인 웃향수에서 태여났다.  선생은 부친 김윤학(金允学)과 어머니 천숙선(千淑善) 사이의 4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는데 태여나서 50일 만에 촉한을 앓던 아버지를 여읜다. 그 때 어머니 년세가 33세, 큰형이 11살이였다. 그리고 36세에 남편과 시숙을 잃은 큰어머니가 딸과 조카딸을 데리고 선생의 집에 들어와 살았으니 그 가난이야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선생의 7살 되는 셋째형과 4살 되는 누나가 동시에 페염에 걸리는데 항생제인 페니실린을 맞아야만 살아날 수가 있었다. 페니실린 한대 값이 쌀 한가마니 값이였고 집에는 식량이라고는 고작 쌀 두가마니 뿐이였다. 선생의 어머니와 큰어머니는 의논 끝에 쌀 한가마니만을 팔아서 셋째형을 살리고 가슴 터지는 아픔을 누르며 누나가 죽는 것을 그대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만한 가난이였다. 언젠가는 어머니가 식량에 보태기 위하여 동네에서 30 리 가량 떨어져있는 산으로 도토리 줏기를 떠난 적이 있었다. 어린 선생은 호기심으로 그 뒤를 따라갔고 점심으로는 몸에 지닌 수수떡 하나가 고작이였다. 그것을 선생에게 먹이고 난 어머니는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지고 만다.  그럼에도 가난이 선물한 것이 있으니 끈끈한 사랑과 사은(谢恩)의 마음이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섬약했고 유복자나 다름없는 막내였기에 어머니와 형님들의 류다른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선생은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학교를 매일 오고가야 했는데 “신발과 털모자는 형님들이 쓰던 것을 물려받았지만 엄동설한이라 발이 얼고 귀가 얼기가 일쑤였다. 그 때 겨울은 왜 그다지도 추웠던지 꽁꽁 얼어서 동태가 되여가지고 손을 호호 불면서 울상이 되여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는 랭수를 담은 토기대야에 내 발을 담가서 랭기를 빼주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의 그 모습은 오늘도 내 가슴을 한없이 아프게 한다.”(1)소박한 도리이지만 이 세상에서 정녕 값진 사랑은 가난 속에서의 사랑인 법이다. 그것은 삶에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이겨가는 방법을 배워주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소중함과 인간적 존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가난은 삶이란 많은 이들의 도움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중국어 속담에 ‘물 한방울의 작은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한다(滴水之恩, 涌泉相报)’는 말이 있는데 이는 주변 사람들이 흔히 선생을 형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선생은 산문집 《와룡산 일지》에서 자신에게 베푼 타인의 은혜에 대해 일일이 적고 있다. 례컨대 조선 류학시험을 앞두고 직접 기숙사를 찾아 시험 지도를 해준 허문섭선생에 대한 고마움이나 선생의 건강을 념려해 돼지염통을 구해다가 보이라실 연탄불에 구워준 김동익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감명깊이 전하고 있다. 선생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살펴보도록 한다.    사람은 세상에 태여나서 남들의 구원을 받고 도움을 받고 출세를 한다. 제가 잘나고 수준 있고 능력 있어 출세했다고 득의양양해서는 안된다. 불행아인 너의 인생길에 길목마다 귀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지어다. 그래서 너는 좋은 운을 가지게 된 게다. 은인을 잊는 자는 소인배다. (…중략…) 반드시 지나친 욕심과 야심을 버리고 량심을 지켜라. 이것이 인간도리이니라.(2)   이처럼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태여난 선생이 가난과 가족, 고향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지혜는 인정을 소중히 여기는 소박한 농가의 정서였으며 그 사랑과 보은의 마음이 선생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다.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선생의 큰형이였다. 열한살에 아버지를 잃은 큰형은 듬직한 소년가장이였다. 소학교 시절에 오전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 어린 선생을 업어 달래곤 하였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단과대학인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퇴하고 사범학교 단기반을 거쳐 소학교 선생으로 취직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민족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큰형의 훈육으로 선생은 1957년 강서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 간 우등생으로 공부하였다. 특히 시와 산문에 능한 문학청년이였던 큰형은 일찍부터 선생에게 그림책, 동화, 아동소설을 사주어 책을 가까이 하게 하였으며 선생은 중학시절에도 큰형의 서가에서 《서유기》, 《삼국지》 등 중국의 고전은 물론 조선현대문학 작품선집 등을 접하게 된다. 일찍부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운 선생은 살벌하였던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서점을 들이쳐 반동적인 서적이라며 닥치는 대로 책을 불사를 때에도 면목이 있는 홍위병에게 사정하여 《청춘의 노래》, 《홍기보》 등 중국 당대 작품들을 몰래 빼내 읽곤 하였다. ‘문화대혁명’의 발발로 하여 청소년기의 선생은 큰 역경에 처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가장 힘든 고비마다 큰형이 삶의 방향타가 되여주었다. 1966년, 선생은 발해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고중 입시를 준비하던 중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다시 1968년 4월에 이르러서야 녕안중학교 고중부 2학년에 편입되나 같은 해 10월 정부의 지시로 귀향하여 농민이 되고 만다. 그 당시 선생이 계속하여 지적 성장과 사회적 진출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군복무였다. 1970년 12월, 입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게 된 선생을 앞에 앉혀놓고 큰형은 정중히 3가지 엄명을 내린다. 첫째는 중국어 수준을 제고해야 하며 둘째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군관으로 발탁되여야 하며 셋째는 시골 처녀에게 련애편지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였다. 그만큼 큰형은 선생이 훌륭한 사람이 되여 더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랐고 장차 선생의 사회적 진출을 위해 고심참담하였던 것이다. 큰형의 가르침 대로 군복무 기간 선생은 매일 중국어로 된 신문 읽기와 독서를 견지하였다.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휴대용 사전인 《신화자전》을 찾아보곤 하였는데 군복무를 마칠 때가 되여서는 사전의 글들을 거의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중국어로 일기를 쓰고 독서필기를 하였으며 집에 보내는 편지도 중국어로 쓰곤 하였다. 하여 선생의 중국어 수준과 필력은 빨리 제고되였으며 중대 지도원의 눈에 들어 보고서와 흑판보 작성, 무기 관리 등을 담당하는 중대 문서로 발탁이 되였다. 비록 군복무를 마칠 때 공교롭게도 군편제 축소가 실행되여 군관으로 발탁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간 닦은 중국어 실력은 장차 선생이 거대한 지식의 장이자 인류문명의 주요한 패러다임의 하나인 중국문화에로 시야를 넓혀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였다.  선생이 제대한 뒤, 군련대 정치부에서는 성실하고 공부에 열중하며 많은 성과를 올린 제대군인이니 직업배치를 해주거나 대학에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며 지방정부에 특별히 추천서를 보내주었다. 이에 지방정부에서는 선생에게 수력발전소 혁명위원회 부주임 자리를 제안하나 이때에도 큰형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대학진학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에 선생은 대련경공업대학교에 추천되나 큰형은 공과보다 문과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지방정부와의 몇차례 교섭 끝에 선생이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큰형은 무엇보다 시골 소년인 선생에게 보다 큰 세상을 향한 포부와 꿈을 심어준 분이였다. 선생의 좌우명인 왕지환의 “더 높은 봉에 오르라(更上一层楼)”라는 시구는 젊은 시절 큰형이 종이에 써서 늘 벽에 붙여두었던 시구이기도 하였다.(3)실로 큰형은 선생에게 역경과 다난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다른 한 힘, 즉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마음가짐을 심어주어 이 또한 선생의 삶에는 큰 선물이였다. 선생은 1975년 9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며 비로소 본격적인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선생은 은사이신 정판룡선생을 만나 자신의 인간적, 학문적 폭을 키우고 큰 학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를 맞는다. 정판룡선생은 1950년대 중반에 쏘련 류학을 떠나 모스크바대학교에서 후보 박사 학위를 따낸 외국문학 학자이다. 정판룡선생은 국제적 시야를 지닌 학자였을뿐더러 뛰여난 식견과 드넓은 흉금, 문화 융합적 리념으로 시대를 선도한 대가였다. 선생이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는 정규적인 교육이 불가능하였다. 학생들은 1년 간, 연길에서 북쪽으로 수십키로 떨어져있는 황초구(黄草沟) 학교농장에 이르러 오전은 로동을 하고 오후에야 수업을 보곤 하였다. 그 때 정판룡선생은 기숙사 구들 우에서 흑판이나 준비된 강의안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엥겔스의 《반 듀링론》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시공간의 무한성이며 물질과 정신의 관계 등에 대한 명쾌한 해석들이 선생의 마음속에 현상 너머의 철학적 세계에 대한 탐구심과 동경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1978년 7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중국현대문학강좌에 교원으로 남게 된다. 이에 학부장이였던 정판룡선생은 선생더러 중산대학교 중문학부에 이르러 1년 간 연수를 하고 돌아오라고 하명한다. 명문대인 중산대에는 거물급 학자들이 많으므로 “중산대학교에 가서 학문이 무엇인가를 알고 오오. 큰물에서 큰 고기가 노는 법, 사람도 깊은 물에 들어가보아야 용기도 생기고 지혜도 커지는 법”(4) 이라며 선생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1979년 2월 21일, 선생은 사흘 간 꼬박 일반석에 앉아 광주에 이른다. 연수 기간 지도교수인 중문학부 학부장 오굉총(吴宏聪)은 항일전쟁 당시 곤명에서 설립되였던 전시 림시 대학인 서남련합대학교 출신으로서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학자인 문일다선생의 애제자이기도 하였다. 중산대학교에서 선생은 중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되였으며 로신 연구로 유명한 진측광(陈则光)교수의 명강의를 들으며 로신문학에 심취되기도 한다. 불타는 학구열에 선생은 연수기한을 1학기 더 늘였으며 중국 고전문학과 고대한어를 포함한 다양한 학과목들을 청강하였다. 이처럼 중산대학교에서의 공부는 선생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학문적 눈높이를 키워주었을뿐더러 중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에 대한 탄탄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선생이 장차 중·한 비교문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다져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광주에서의 생활은 가난의 련속이였다. 선생의 월급은 고작 38원이였는데 호조금 5원과 식비 29원을 빼고 나면 한달에 4원 정도 남곤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은 중문학부 자료실을 통해 많은 책을 구입하다나니 88원이라는 거금을 빚지게 되였다. 마침 약혼녀 김인옥(金仁玉)녀사가 결혼식에 입을 진품 외투를 사오라고 일금 150원을 보내오는데 선생은 그 돈으로 밀린 책값을 물고 대신 값싼 ‘짝퉁’ 외투를 사서 돌아간다. 그 사실이 나중에 들통이 나고 말아 친인척 간에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2월 선생은 대학 동기이자 평생의 반려자인 김인옥녀사와 결혼을 한다. 사모님은 장녀로 태여나 성품이 너그럽고 의연한 분으로서 사정이 어려웠던 시댁 식구들을 오랜 세월 일일이 보살피며 선생을 열심히 내조한 분이다. 또한 선생께서 마음 편히 공정한 공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차례 연변대학교 교수로의 전근기회를 단호히 물리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번역국에서 전문가로서 많은 성과를 내신 분이다.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중국 교육부의 외국류학연구생시험에 합격하여 1982년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교로 떠나게 된다. 그 때 역으로 환송을 나온 정판룡선생은 꼭 학위를 받아가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교 박사원에서 리동원(李东源)교수를 지도교수로 현대문학을, 김춘택교수에게서 고전문학을 공부하게 되며 1985년 4월 15일 문학 준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나중의 일이지만 선생은 1992년 3월에서 5월까지 방문학자로 한국의 한양대학교를 다녀왔으며 방문 기간 고전문학연구회, 민족문학사연구회, 동방비교문학연구회 등 학회의 월례 학술회의에 참석하여 론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 학계와도 많은 학문적 소통을 하게 된다. 또한 1995년 7월에서 1996년 1월 사이에는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을 받아 특별연구원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에 머물면서 서울대 조동일교수, 고려대 정규복교수, 성균관대 임형택교수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과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 최원식 등 저명한 학자들과도 인연을 쌓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력으로 하여 선생은 남북을 아우르는 포용적인 학문적 시야를 갖출 수가 있게 되며 학문 활동의 폭도 넓혀갈 수가 있었다.  평양에서의 류학생활을 마치고 모교로 돌아온 선생은 1987년 9월에 정판룡선생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리암, 김관웅 등 선생과 동기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정판룡선생은 박진석, 리홍순, 주홍성, 주칠성, 허호일 등 연변대 최고의 학자들을 조직하여 연변대학교 1기 박사연구생들을 위해 조선사, 동방철학사, 일본문학사 등 다양한 학과목을 개강함으로써 이들의 학문적 폭을 키워주기에 힘쓴다.  1990년 3월, 선생은 박사학위청구론문 의 집필을 완성하였다. 정판룡선생의 요구에 따라 중국어로 론문을 작성하여야 했고 이에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특히는 보풀이 일 정도로 현대한어사전, 수사학사전, 문학묘사사전 등 중국어 사전을 뒤졌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학위론문을 완성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체득을 얻는다. “첫째, 학문은 노력의 결정체이며 둘째, 연구자 인격의 반영이며 셋째, 연구시각과 방법론이 성패를 결정하며 넷째, 학문적 열정이 곧 론리의 힘으로 작용하며 다섯째, 성실하게 타인의 성과를 받아들여야 좋은 론문이 된다.”(5) 1990년 6월 27일, 박사학위론문 심의를 통과한 선생은 연변대학교에서 양성한 첫 박사가 되였다. 이에 9월 26일, 연변대 본관 4층 회의실에서 성대한 학위 수여식이 거행되였는데 선생은 겸연쩍다 하여 학위복 착용을 한사코 거부하다가 지도교수인 정판룡선생에게서 꾸중을 당하기도 하며 선생에게 학위증을 수여한 박문일교장이 학위모의 술을 왼쪽으로 돌려주는 것을 잊고 지나치는 등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맹자》에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한 사람에게 큰 소임을 맡기려 할 떄에는 필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몸을 고단하게 하며 배고픔과 야윔에 시달리고 가난케 하며 하는 일을 어지럽힘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강인함을 키워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법이다.”라고 하였으니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선생의 성장 과정과 늘 힘겨운 고비를 넘겨야 했던 배움의 길은 선생을 대성(大成)으로 이끈 시대적 기운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바탕에는 어머니에게서 터득한 사랑이, 큰형에게서 자극된 세상을 향한 진취적 욕구가, 스승이신 정판룡선생을 모시고 갈고 닦은 인간적 폭이 아로새겨져있다 할 것이다.    2. 학문적 폭과 깊이 1990년대 중반 선생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로 부상한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적 성과와 탈랭전시대의 세계사적 변화가 맞물리는 시점에 선생이 조선-한국학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지난 시기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한계, 중국어와 외국어에 능란치 못한 언어적 한계 때문에 중국조선족 학자들의 학문 활동이 미비하였던 상황에서 왕성한 학문 활동을 통해 조선-한국학연구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리론적 높이에로 끌어올렸으며 그 영향력을 널리 과시하였던 까닭이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우선은 근대 이행기를 기점으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고 중·한 비교문학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냄으로써 폭넓은 학문적 령역을 개척해냈음에 있다.  선생의 본격적인 첫 학문성과로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준박사학위 청구 론문인 을 들 수 있는데 선생은 2년 반 동안의 심혈을 기울여 1984년 12월에 원고를 완성하고 1985년 2월에 론문 심의를 통과한다. 계몽기 소설을 총괄적으로 다룬 이 론문은 그간 학계에서 간과되여오던 1910년대의 많은 작가와 소설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근대소설 창작의 문학사조적 특징과 창작방법 등을 천명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전체적 양상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선생의 학문적 출발로서 이 론문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선문학은 물론 동아시아문학 전반에 있어서도 근대이행기는 커다란 분수령이였으며 근대이행기란 고전과의 내적인 계승 관계를 지니고 있는 한편 근대적 기획의 다양한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선생은 지도교수인 리동원선생으로부터 신채호 문학유고가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되여있음을 알게 되자 1984년 겨울 학위론문 집필이 끝나는 대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3개월 동안의 자료 수집에 이어 선생은 다시 3개월의 시간을 리용하여 20만자에 달하는 저서 《신채호 문학연구》를 탈고한다. 선생은 신채호선생의 애국정신과 통찰력, 달필에 심취되여 밤낮 없이 붓을 달렸으며 그 유고도 정성껏 필사하였는데 손에 물집이 생겨 늘 붕대를 감고 글을 써야 했다. 이에 김일성종합대학교 위생소에서는 의사를 파견하여 한주에 한번씩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단재 사상의 변화 과정과 미학사상, 다양한 쟝르에 걸친 문학 창작에서 보여준 주제와 예술성 등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와 평가를 시도한 《신채호 문학연구》(1989)는 나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출간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북경대학교의 박충록교수가 서평을 써주었고 한국에서는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선생이 일면부식의 한 젊은 해외 학자를 위해 단행본 서언을 써주었다. 신채호의 문학창작에 주목한 첫 연구로서 이 저서는 국내외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별도로 편집 출간한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5)과 함께 지금까지도 신채호 연구의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선생은 (2014) 등 1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여 신채호와 아나키즘의 관련성, 중국에서의 활동 등에 대해 지속적인 보완작업을 이어갔다.  다시 선생은 박사학위 과정을 거치며 보다 앞선 시기인 자발적인 근대적 사상이 태동하던 18세기 실학파 문학에 관심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은 1991년 정상급 학술지 《외국문학연구》에, 은 2002년 중국 최고의 학술지인 《문학평론》에 발표가 되면서 중국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또한 박사학위론문 《조선중세기 북학파문학연구-청대문학과의 관련성 겸론》(중문판, 연변대학출판사, 1990)은 북학파를 하나의 문학류파로 파악하고 그 형성 발전 과정과 문학관, 미학, 작품 창작의 실제와 의의 등을 체계적으로 접근, 론의했다는 점에서, 북학파문학과 청대문학 간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전면적으로 천명하였다는 점에서, 비교문학, 수용미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방법론과 리론적 시야를 동원해 고전문학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 등에서 론문심사위원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북경대학교의 위욱승(韦旭升)교수는 한국의 조동일교수에게 “중국의 외국문학 박사학위론문으로서는 최고의 수준이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론문은 나중에 연세대 허경진교수의 주선으로 한국에서도 단행본으로 출간이 되며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문학 연구자들인 정규복, 임형택 등 교수들도 선생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 그 발상의 새로움이나 론리적 힘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북학파문학연구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령역을 고전문학으로 확대하였을뿐더러 특히는 중국문학과의 관련성 연구에 주목함으로써 학문적 폭을 크게 확장하였다. 중·한 비교문학연구를 통해 선생은 중국문학과 영어·로씨야어문학연구가 주도적인 중국 주류학계에서 조선-한국문학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다. 편저인 《조선문학의 발전과 중국문학》(1994), 《조선 실학파문학과 중국문학의 관련성 연구(전2권)》(2007) 등과 (1993), (2001), (2002) 등 론문들을 통해 선생은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중·한 비교문학의 새로운 과제들을 개척하였다.  선생은 근·현대문학연구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바 주요 론문으로는 (2002), (2005), (2017) 등이 있다. 실제로 근·현대문학과 고전을 아우름으로써 선생은 중국에서의 조선-한국문학 연구령역을 넓히고 수많은 차세대 학자들을 양성해낼 수가 있었다. 실제로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현재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전문학, 근대문학, 현대문학, 중국조선족문학 등으로 학문적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대가인 남경대 장백위(张伯伟)교수는 “중국의 한국학 영재는 모두 김문(金门)에서 양성되였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바가 있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시대에 앞서 남과 북을 아우르는 통합적 연구시각을 이루어내고 새로운 리론과 연구방법론을 도입함으로써 조선-한국문학연구의 풍조를 일신함에 있다. 중·한 수교 이전에 중국에서의 조선 근·현대문학에 대한 리해는 랭전체제의 영향으로 주로 조선의 지식체계에 근거하였으며 리광수, 김동인 등은 물론이요 렴상섭이나 한용운, 정지용 등을 포함한 많은 민족주의 계렬 작가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상황이였다. 1994년 선생이 펴낸 《조선문학사(근현대부분)》는 당시의 지적 상황에서 급시우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그동안 거의 반 이상이 루락이 되여있던 근·현대 작가, 작품 및 문학적 사실들을 통합적 시야에서 복원한 기념비적 저서이다. 문단상황, 문학사조, 창작방법, 문학비평 등의 발전과정에 대해 깊이 있게 서술하였으며 그 체계성과 론리성의 명징함, 풍부한 문학적 사례 등으로 선후하여 4번에 걸쳐 간행을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학부 및 기타 중국 내 한국어학과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로 빛을 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다양한 리론적 시야를 조선-한국문학연구에 도입함으로써 중국 내 주류 학계와의 학문적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일찍 (1989)에서는 수용미학 방법론을, (1993)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영향연구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으며 (1992)에서는 원형 비평 방법론을, (1995)에서는 맑스주의 철학리론을, (2005)에서는 비교문학에서의 류형학 방법론을, (2016)에서는 탈식민주의 비평리론을 활용하여 연구의 깊이를 더하는 한편 연구의 다양성을 기하기도 하였다.  방대한 량의 저술을 펴낸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쉽게 정평을 내리기가 힘들다. 특히 로익장으로 선생의 학문연구는 지금도 진행형인바 2014년 10권으로 된 《중국현대문학과 한국 자료총서》를 펴낸 데 이어 2016년에는 로 조선족 학자로서는 최초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무게 있는 연구 프로젝트인 국가사회과학기금 중대과제를 따냈다. 그럼에도 굳이 선생의 학문 전반에 관통된 학술사상을 언명한다면 특히 두가지가 주목된다.  우선 선생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에 의한 사회발전관에 기초하여 꾸준히 북학파문학 및 근대문학이 담지하고 있는 근대지향성과 원동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여왔다. 선생의 제자인 류연산은 “선생님의 학문과 인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두분” 가운데 한분이 신채호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6) 선생이 신채호를 사표로 삼은 데는 무엇보다도 단재의 인격적 독립성과 주체성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근대적 혁신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신념에 체현된 미래지향적 가치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지닌 리유 또한 중세의 암흑에서 헤쳐나기 위하여 미래적인 지향을 보인 력사적 주체들에 대한 긍정에서이다. 선생은 박지원의 소설 에 대하여 그 문화적 반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 소설을 통하여 독자들은 중세기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친 18세기 지성인들의 웨침을 엿듣게 된다. 그것은 그대로 력사의 교체기를 자각한 조선의 웨침이였고 시대의 웨침이였다.”(7) 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이 (《한국한문학연구》 36, 2005)에서 근 150년이라는 시간을 뛰여넘어 현대 중국의 대문호 로신과 18세기 조선조 박지원의 문학사상을 비교할 수 있었던 것도 두 작가 모두가 시대가 부여한 소명을 다한 선구자라는 인식에서였으며 시대를 앞서간 연암의 근대지향성과 로신의 투철한 근대 계몽적 정신이 내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의 이러한 학문적 사상은 다난한 사회적 현실을 이겨온 선생의 삶의 현장에서의 고투 및 그 체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신이 몸소 겪은 사회적 변화의 현장에서 선생은 사회적 합리성과 ‘진보’를 갈망하여왔으며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그 진실한 영향과 의미를, 그리고 시대를 개척하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선구자적 투혼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깊이 있게 체득하였던 까닭이다. 다음으로 선생의 학문적 사상은 타문화에 대한 포용적이며 개방적인 자세와 문화의 상생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생이 주된 학문적 대상으로 하였던 신규식, 신채호, 류자명 등 근대적 인물들이나 북학파 문인들은 모두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든 초월적 인물들이였으며 그들의 중국서사 혹은 연행문학은 중·한 문화 융합지대 혹은 탈경계적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생이 북학파문학에 대해 큰 관심을 지녔던 또 하나의 리유는 “북학파들은 명을 ‘대중화’(大中华)로 보고 조선을 ‘소중화’(小中华)로 보면서 청清을 오랑캐(胡)로 보던 기성된 인식에서 뛰여나와 자신들을 스스로 ‘호(胡)’로, 청과 같은 존재임을 시인했고 아울러 청과 화하(华夏)를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였다.”(8)는 평가에서 보다 싶이 문화적 평등관에서 기인한 것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관은 문화적 교류에 있어서 주체성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였다. 선생은 에서 북학파 시인들의 시문이 청 문단에서 일으킨 큰 반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북학파 문인들의 왕사정 및 그 문학에 대한 수용과 창조적 응용은 조선문학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으며 중·조 문학의 쌍향교류를 힘있게 추진하였다”(9)며 일방적인 영향관계를 넘어선 상호 영향 관계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선생은 나아가서 문화융합과 그 상생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량계초의 수용을 두고 선생은 “조선 근대소설에 미친 량계초의 영향은 일면으로는 량계초 소설리론의 시대성과 국제적 의의를 충분히 과시하며 타면으로는 중·조 두 나라 근대소설발전의 융합성과 생명력을 실증해주기도 한다.”(10)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선생은 반일투쟁 과정에서 이루어진 중·한 련대가 지닌 반폭력, 반파쑈적 성격과 의미를 높이 사며(11) 류자명의 중국체험 서사를 자신의 언술능력을 상실한 식민지 지식인이 중국이란 제3의 공간에서 저항담론을 일구어냄으로써 “조선민족의 정신사적 공백을 망명공간에서 슬기롭게 메워나간”(12) 사례라고 파악함으로써 근대 중·한 관계의 복합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선생은 일찍 중국조선족 문화를 론함에 있어서 중국조선족은 중·한 문화교류에 있어서 단순한 가교적 역할이 아니라 문화융합 촉진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생은 “오늘 우리 민족은 중국이라고 하는 이 망망대해의 한汉문화권에서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주체민족인 한족과의 문화적 교류를 끈질기게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13) 즉 선생은 문화경계 공간에서의 삶의 체험을 통해 민족문화와 중국문화라는 두개의 좌표축 내에 스스로를 위치함으로써 협소한 민족인식 혹은 문화관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상보·상생의 가치 탐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3. 실천하는 지성인 선생은 1990년 3월, 박사학위 청구론문의 집필을 완성하자 바로 조선언어문학학부 부학부장을 맡게 되며 2년 뒤인 1992년 3월에는 학부장을 맡게 된다. 그 때만 하여도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가 저조한 상황이였다. 이러한 시기에 선생은 ‘정판룡 교육종사 40주년 학술회의’를 조직하여 학과 내의 학문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1992년 8월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중국조선민족문화학술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학문적 소통과 교류를 무엇보다 중시하였던 선생은 그 이후로도 국제고려학회 문학분과 주최의 ‘세계 조선민족문학’ 국제학술회의(1997), 중국조선-한국문학연구회와 한국한문학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된 ‘한문학의 전통과 전망’ 국제학술회의(1999), 창작과비평사와 공동으로 주최한 중·한 수교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인 ‘중·한 문화교류의 력사와 전망’ 학술세미나(2002.7) 등 영향력이 큰 학술행사들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1992년 9월, 선생은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임명이 되여 1996년 6월까지 4년간 중임을 맡는다. 일찍부터 학문에만 뜻을 둔 선생은 이를 여러차례 사절하나 결국 학교 지도부의 간곡한 당부에 등이 밀려 본격적인 학교 행정 직에 몸을 담그게 되였던 것이다. 임직 기간 선생은 중국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학점제 교무 관리 시스템을 개발하여 연변대학교에 도입한다. 선생은 학점제란 시장경제라는 보다 거시적인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 대학제도 개혁의 핵심적 사안임을, 학생의 종합 능력과 개개인의 창의력 양성에 그 취지가 있음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 대학들의 앞선 경험을 널리 수용하여 선생이 몸소 집필한 은 기타 4개 대학의 실천안과 함께 학점제 개혁의 전범으로 뽑혀 청화대학출판사에서 묶은 단행본 《중국학점제》에 수록이 되며 길림성 교수연구 성과 1등상을 수상한다.  한편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은 교원들의 양성 특히는 학문적 시야를 넓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이에 이들의 외국류학을 적극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3년 사이에 영어와 일본어 등 출국 류학시험에 통과하였으나 마땅한 대학교와 련락이 닿지 않아 류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22명의 젊은 교원을 전부 외국의 대학교와 연구기관으로 파견하였다. 특히 선생은 한국의 대학교들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여 연변대학교의 교원과 직원들이 연수를 다녀올 수 있도록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선생은 교무처장 임직 기한이 끝나는 대로 학과에 돌아가 학자로서의 삶에 전념하려 하였으나 교육부의 개혁조치에 의하여 연변대학교과 연변의학원,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 연변농학원, 연변예술학원 등 연변의 5개 대학이 합병을 하게 되면서 박문일 교장의 부름을 받아 1996년 7월에 사범학원 원장을 맡게 된다. 당시 연변대학교 사범학원은 교수진과 학생이 모두 한족 위주인 단과대학 연변사범고등전과학교와 구성원 대부분이 조선족인 연변대학교의 일부 인문학과를 합병한 대학이였으며 교직원 360여명에 학생 3000여명의 큰 규모였다. 선생은 학생 자질 양성을 위한 사범교육 개혁을 중심으로 학과 간 모순을 봉합하였고 인내심과 포용력 그리고 공정성과 원칙성을 지킴으로써 사범대학 내의 진정한 융합과 민족단결을 추진하였다.  그 이후, 선생은 1998년 11월에 부교장으로 발탁이 되고 다시 2003년 1월에는 교장으로 임명이 되여 2012년 6월에 이르기까지의 9년 반 동안 연변대학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소임을 다하게 된다. 선생은 교장 임직과 동시에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도 당선이 되여 직업 행정인의 길을 걷게 되였지만 스스로를 랭정이 반성하면서 학자로서의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에 선생은 중국조선족 교육과 문화 및 학문 발전을 위한 지성인으로서의 력사적 소명을 다하는 한편 ‘학자형 교장’의 길을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변대학교는 비록 1996년에 연변 지역 5개 대학의 합병을 완성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양새에 그치고 실질적인 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이에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내적인 통합이 가장 주된 숙제라고 판단하였으며 우선 설립 50년이 넘도록 명문화되지 못한 학교 교훈과 건학리념 등을 정비함으로써 대학정신을 새롭게 부각하는 작업에 착수를 하였다. 연변대학교의 건학 취지와 정신사적 의미들을 깊이 있게 읽어내기 위하여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많은 학자들과 의론, 소통을 거듭하였으며 친히 수많은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연변대학교의 력사에 대해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력사 현장 속에 살아있는 선현들의 지혜와 참된 뜻을 추출해내게 된다. 선생이 몸소 정립한 연변대학교 교훈인 ‘진리, 선행, 융합’에는 지식과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추구라는 대학의 기본 정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기여라는 휴머니즘적 인문정신 그리고 다민족, 다문화, 다원적 가치의 융합이라는 연변대학교의 지역적, 구성적 특징에 기초한 문화존중과 가치창조의 정신이 담겨져있다. 이와 함께 선생은 주변부만이 지닌 문화적 힘을 자각하고 다문화 경계지대의 우세를 살리며 학문을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질 높은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등을 골자로 하는 구체적인 건학리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선생은 제도적 역할을 중시하여 학문성과를 주된 평가기준으로 하는 인사제도와 장려제도를 확립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학문 연구에 대한 교수들의 열의를 동원하였다. 선생이 갓 교장으로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는 대학 평가에서 길림성 6위에 그쳤으나 2006년에는 3위로 부상하였으며 2012년에는 중국 내 126위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SCI 등재지 론문의 경우만 하여도 2002년의 30편에서 2012년의 300편으로 급증하였으며 조선언어문학학과가 국가 중점학과(2004)로, 조선-한국연구센터가 교육부 중점연구기지(2006년)로,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이 교육부 중점실험실(2007)로 선정되여 정부지원을 받게 되였다. 교장 재임기간 선생이 이룩해낸 주요한 성과의 하나는 세간에서 ‘제2의 창업’으로 일컬어진 연변대학교 캠퍼스 확장공사이다. 1949년에 개교한 연변대학교는 1958년에 연변대학교,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공학원으로 나뉘였으며 나중에 설립된 연변예술학원까지 포함하여 연길시 및 룡정시의 여러 캠퍼스에 나뉘여져있었는데 수십년 간 각자의 전통과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나니 행정효률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자원에 대한 랑비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캠퍼스 확장공사는 2004년에 기획을 시작하여 2007년에 착공을 하였고 2010년 8월에 이전이 끝났으며 2011년 5월 16일에 준공식을 마무리하였으니 실로 ‘대장정’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였다. 그 과정에서 선생의 로고 또한 막심하여 후두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여 캠퍼스 이전식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등 인고의 시간을 견디여내야만 했다. 2010년 8월 28일 이전식이 진행되는 날, 선생은 북경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수많은 위로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자 선생은 그간 뜻을 함께 한 이들에게 “장백산의 기상과 두만강의 랑만에 실려 통합캠퍼스 공사를 끝낼 수가 있었습니다.”라는 진정어린 메시지를 날린다. 또한 선생이 2003년 교장에 부임하였을 때 연변대학교의 채무는 그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수자에 가까운 3억 2천원이였다. 이에 선생은 정부의 자금지원, 은행대부금과 사회자금의 유치 등을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하였으니 선생이 친히 방문한 국가와 각급 정부의 지도자, 기업 총수들은 100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여러번 병환으로 몸져누웠으나 “연변대학교를 위해 지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겨냈다. 한편 젊어서부터 학자로서 고고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머리를 수그려야 한다”, “연변대학교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곤 하였다고 한다. (14) 2005년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성부공건(省部共建)’ 대학교로 격상시키기 위하여 여러차례 교육부 주제(周济) 부장을 방문하였다. ‘성부공건’이란 준교육부 직속 대학교로 인정을 받아 교육부와 소속 성정부에서 공동으로 중점 지원하게 되는 국가차원의 프로젝트였는데 연변대는 이미 서부건설 대학으로 선정된 탓에 중복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였다. 교육부를 찾아간 선생은 정문 초소에서 검문에 걸리면 다시 뒤문 초소를 찾아가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증을 내보이고 들어갔으며 부장이 난색을 지으면 ‘앉아 버티기’, 끈질긴 설복과 협상 작전을 벌였다. 선생은 처음부터 연변대학교 통합캠퍼스 추진을 제안한 바 있는 주제 부장에 대한 믿음으로 “민족지역 대학인 연변대학교의 건설은 교육부와 길림성정부의 공동 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장님과 저 역시 소명을 다해야 하는 력사적인 사안입니다.”라고 맞장을 뜨기도 하였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주제 부장은 선생이 그간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부황을 뜬 자국이 목덜미에 선명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묻고 나서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연변대학교는 끝끝내 ‘성부공건’ 대학교로 선정이 되며 해마다 정부로부터 2천만원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게 되였을뿐더러 캠퍼스통합에 필요한 토지 양도세의 반환 등 여러가지 정책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였다.  연변대학교의 캠퍼스 확장공사는 그 전체 면적이 57.36만평방메터, 건축면적이 총 37.5만평방메터이며 투자금액은 14억 8천만원에 달한다. 선생은 재임 기간 연변대학교를 위하여 38동이나 되는 강의동과 기숙사 등 현대식 건물들을 신축하였다. 더우기는 룡정시에 있는 농학원 부지를 그대로 보유한 채 자신이 임직하기 전에 이미 있던 학교 채무조차 대폭 줄였으니 사업가로 비유하여도 그만한 업적을 이루기가 힘든 것이였으며 력사적 사명감이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불가사의를 이루어냈다고 할 것이다.  교장 재임 기간에 선생은 행정 관료가 되고 마는 것을 스스로 늘 경계하였으며 중국조선족 학계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선생은 한국 고등교육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연변대학교 아시아연구센터를 설립하고 110만딸라의 지원금을 유치하여 ‘와룡학술상’을 설치하고 학술 년례행사인 ‘두만강포럼’을 개최하였다. 또한 일본의 마루한회사 및 북경 억리(亿利)그룹의 후원을 받아 장백산 생물자원과 기능분자 실험실 주관의 ‘장백산포럼’을 개최함으로써 두 포럼이 자연과학 분야와 인문과학 분야의 2대 학술 브랜드로 성장하게 하였다. 한편, 선생은 한국녀성문학회의 지원으로 룡정시 비암산 기슭에 ‘강경애 문학비’(1999.8.8)를 세웠으며 중국조선족 문화단체의 지원으로 연변대학교 캠퍼스 뒤동산에 ‘정판룡 문학비’(2004.10.7)를 세움으로써 선현들의 문학적·학문적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에도 앞장섰다.  특히 선생은 연변대학교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학술활동을 통해 중국조선족학계와 중국 조선-한국학연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선생은 중국의 《문학평론》, 《외국문학연구》, 《사회과학전선》, 《외국문학》, 《민족문학》 등 정상급 학술지에 많은 론문을 발표하여 학자로서의 학술적 영향력을 확대하여갔을뿐더러 정판룡선생의 뒤를 이어 중국 조선-한국문학연구회 회장의 중임을 맡아 학회를 개편 확대시켰으며 중국비교문학학회 리사(2002)와 상무리사(2014), 동방문학연구회 부회장(2005), 길림성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2003) 등 주요 학술단체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중국 주류학계에 한국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로 선생은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교육가이자 사회 지도자로서 소신 있는 삶을 살아온 분이다. 선생은 확고한 교육·사회 리념을 지니시고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서 그것은 우선 학문과 인격의 독립성을 으뜸가는 가치로 내세웠음에서 볼 수가 있다.  선생은 학문에 대한 사랑과 집요함이 유난했다. 보직생활 내내 연구와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음에도 선생은 행정에 몸 담고 있는 자신을 ‘반쪽학자’라고 자평하곤 하였다. “저명한 국문학자이신 서울대학교의 조동일교수 앞에서 스스로 반쪽학자라고 평하였을 때 조교수는 ‘민족대학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였다.”(15) 달리 보면 이는 선생이 얼마 만큼이나 학문에 대해 신성시하고 소중히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생은 학문의 근본적 의미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조선족 정신사의 귀한 전범이 되고 있는 《와룡산 일지》에서 많은 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연변대학교의 선현들을 기리는 50만자에 달하는 《와룡산 일지-인물로 보는 연변대학의 력사와 전통》은 선생이 2009년 개교 60돐을 계기로 2012년까지 지속적으로 창작한 실기 작품이다. 선생은 2005년 5월부터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 그 이후로는 매일 수면제를 복용해야 했다. 이에 선생은 밤마다 객실에 나와 밥상을 마주하고 《와룡산 일지》를 쓰면서 선현들과의 령혼의 대화를 통해 그 불면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그 글들에서 선생은 대학의 가치를 사회의 세속적 특징과의 차별성에서 찾고 있다. 선생은 “행정권력중심이 아닌 학술전문가중심, 대학자치 혹은 학술자치, 나아가서 학자의 인격독립은 대학문화정신을 지켜가는 담보”(16)라 보았으며 교수는 대학의 령혼이고 대학운영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있다.  선생은 실생활에 있어서도 늘 학문연구를 첫자리에 두었다. 4년 동안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으로 있으면서도 대외 교섭이나 술자리 등을 모두 외면한 채 근무 이외의 모든 시간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정부 기관이나 중학교, 교장들조차 선생이 연변대학교 교무처장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부교장으로 승진 결정이 내려졌을 때 길림성당위 조직부의 지도자가 선생에게 그 소식을 알리며 소감을 물으니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하여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연구생 강의를 하면서 사무실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출입문에 ‘수업중,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큼직한 글자를 써서 붙인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17) 선생은 아무리 공무가 바쁘더라도 “집에 들어오면 먼저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뒤적거려야 되고 침대에 누워도 꼭 책을 몇줄 보고야 잠들 수 있다. 출장 가도 책을 갖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꼭 무엇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반드시 시간을 충족히 내여 책을 읽어야만 시름이 놓”(18)여하는 성품이였다.  다음으로 선생의 교육·사회 리념으로는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사고에 기초한 지식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들 수가 있다. 선생은 교육은 미래를 위한 사업으로서 “대학은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를 중요한 사명으로”(19)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생은 연변대학교 초대교장인 주덕해의 공적에 대해서도 지방병 예방치료, 사과배 재배, 연변황소 신품종 육성 등에 기울인 노력을 들면서 연변대학교가 ‘지역경제와 사회발전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였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선생은 지성인의 사회적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여 조선족 의학자 로기순박사에 대해서 “개인의 영달과 명예보다는 연변인민들의 부름을 따랐다. 이것이 바로 의사이며 학자인 로박사의 인격적인 매력이다.”(20)고 보고 있다. 2012년 8월 16일, 선생의 교장 퇴임식에서 당시 연변대학교의 당위서기였던 김웅선생은 “김병민 교장은 학문을 숭상하고 진리를 추구할뿐더러 지고의 선과 조화로움 및 공존의 정신을 사랑하는 인격자이며 겸허하고 드넓은 흉금과 과학적인 사고 및 실천적 예지를 지니신 분으로서 국내외에서 공인하는 조선-한국학 연구령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일뿐더러 연변대학교의 가장 존경스럽고 친근하며 사랑스러운 교장입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선생은 연변대학교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학문적·사회적 사명을 다하였을뿐더러 중국조선족 지성사의 미덕을 집대성하고 그 지혜를 일일이 실천하신 분이라 할 것이다. 비록 교장 퇴임식에서 선생은 “연변대학이 한그루 나무라면 나는 이름 없는 나무잎이 되리라.”는 시구로 그 겸허함을 보이고 있음에도 선생은 미시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이 지리멸렬한 시대에 학문과 교육 그리고 인격의 근본적인 가치를 몸소 실행하고 주어진 사회적 사명을 다함으로써 직업인이 아닌 가치자(价值者)로서의 길을 당당히 걸어온 지성인이자 사회적 지도자였다.  2013년 3월 5일, 선생은 한국의 제17회 KBS 해외동포상 인문사회부문상을 수상한다. 수상소감으로 선생은 여생을 학자로 남겠다고 밝힌다. 실제로 2014년 2월, 선생은 명문대인 남경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수석전문가로 초빙되며 같은 해 6월, 산동대학교 인문사회과학 1급 교수로 초빙되여 학문으로의 귀환을 실행하였다. 실로 선생은 가난한 중국조선족 시골 어린이로 태여나 다난한 세월을 거치면서 학문의 길을 통해 변화된 세상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간단없이 스스로를 완성해온 인격체라 할 것이다. “난 큰 일물은 절대 아닙니다. 진실하고 책임성 있게 살았을 뿐입니다.”라는 선생의 자평(21)은 많은 후학들의 심중에 오래도록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1)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15페지. (2)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74페지. (3)한정일·량고범, , 《길림신문》, 2006.5.9. A2면. (4)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73페지. (5)김병민, ,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6)류연산, , 《도라지》 3, 길림시조선족예술관, 2005, 2~11페지. (7)김병민, ,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5페지. (8)김병민, , 《동아시아문화연구》 20, 한양대학교출판부, 1992, 89페지. (9)김병민, , 《文学评论》 4,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2002, 64페지. (10)김병민·吴绍纨, , 郑判龙主编: 《조선학―한국학과 중국학》, 중국사회과학출판사, 1993, 327페지. (11)김병민, , 2017, 미발표작. (12)김병민, , 《한국문학과 예술》 21,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7, 354페지. (13)김병민, . 《예술세계》 4, 연변인민출판사, 1992, 47~49페지. (14)김병민, , 2017년 8월 17일 필자에게 제공한 원고. (15)전윤길, , 장연하, 전윤길 외, 《신화를 엮어가는 겨레의 선두주자들》, 연변인민출판사, 2013, 47~57페지.  (16)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422페지.  (17)최일, , 《문학과 예술》 6, 연변문학예술연구소, 2012, 16~21페지.  (18)김병민, , 《청년생활》 3, 연변인민출판사, 2003, 17페지.  (19)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11페지.  (20)김병민, , 《와룡산 일지》, 연변인민출판사, 2013, 82페지. (21), 2017년 8월 13일 김병민선생이 필자에게 보내준 메일. 출처:2018제1호  
18    마성욱: 엄마의 밥상(시) 댓글:  조회:383  추천:0  2019-07-09
엄마의 밥상 마성욱     딸깍, 딸깍… 어머니의 흔들거리는 틀이  부딪치는 소리 째깍, 째깍… 시침 돌아가는 소리가  경주하듯 절주 있게 들려온다…   순수하고 조촐한 밥상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넉넉히 보여지는 아침상 낡고 깨끗한 그릇들은 소리 없이  각자 사명들을 끝까지 할 것처럼  점잖게 자리 틀고 있다.   구수한 갈비장국 물론 맛은 옛맛이지만 예전처럼 구수할 리가 없다 가난에 물젖었던 그 때 그 시절과 비교는 안되지만 년로하신 어머님의 건망증과 정성이 함께 어우러져 끓인 갈비장국이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맛있게 먹는다 이제 몇번 더 먹을 수가 있을가, 생각해봤다. 그리고 개뿔 같은 타발도 늘여놓는다 그래도 어머니는 타령으로 들으신다 세상 어머니들은 그 멋에 사는 것일가? 끝까지 자식새끼들에게   하늘 같은 정성 깡그리 다하심이 그렇게도 즐거우실가… 그래서 인생이란 이름자가 붙여진 걸가?  또다시 들려온다 째깍째깍… 딸깍딸깍… 그릇 부시는 소리  엄마의 틀이소리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행복해진다 저 시계바늘도 언젠가는 멈춰버리지나 않을가…   아롱아롱 엄마의 손때 묻은 밥상 우의 낡고 깨끗한 그릇들   얼굴은 파였지만 고왔던 밥상처럼 어느새 활처럼 구부정한 나의 영원한 밥상 출처:2018제1호  
17    강혜라: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시평) 댓글:  조회:340  추천:0  2019-07-09
흙냄새는 밥냄새보다 구수하다 -북방 강효삼 원로시인의 근작시에 기대여 강혜라   북방 조선족시단에는 본래 3두마차가 있었다. 의 리삼월시인(본명 리경희), 의 한춘시인(본명 림국웅), 의 강효삼시인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이제 리삼월시인과 한춘시인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셨고 망팔을 넘어 70대 중반의 강시인이 아직도 지칠 줄 모르는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펼치며 건재함을 세상만방에 알리고 있다. 특히 강효삼시인은 다른 두분에 비해 짙은 서정이 특징적이며 요즘은 현실고발의 명칼럼들을 쏟아내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리삼월시인이나 한춘시인이 도시적인 시들을 쏟아내신 데 반해 강효삼시인은 오로지 흙에 두발을 깊숙이 파묻고 헌걸찬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북방의 흑토에 대한 다함없는 감정을 활화산마냥 분출해오신 원로시인이시다. 원로시인이라는 호칭에 늘 의견이 많은 강시인은 밥냄새보다 흙냄새를 더 구수하게 여기고 농민들의 삶을 항상 눈물 그렁한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농사를 짓지 않는 농민시인이다. 그의 시에 너무 몰입된 탓일가? 그한테서는 어쩌면 된장에 풋고추 냄새가 날듯하고 밭두렁 흙냄새마저 그대로 묻어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런 강시인의 구수한 근작시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럴 때는 커피 대신 숭늉 한대접 옆에 떠놓고 권연 대신 구수한 엽초를 실팍하게 말아쥐고 성냥을 드윽 그어 불을 붙인 다음 원고를 마주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는 아닌 게 아니라 북방의 강이 등장하고 있다. 시작부터 우리 말들이 들려온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이 풀린다더니’ 이 한행으로 이 시는 시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우리 민속도 속에 함몰시켜버린다. 이어 등장하는 ‘북방의 강’은 ‘움찔움찔 몸을 풀 차비’를 하고는 ‘울컥거리며 제 목소리를 낸다’ 북방 농민의 모습에 다름 아닌 강은 그렇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여럿의 소리를 합칠수록’ ‘웅글은 소리로 범람한다’. 그것은 어떤 소리인가? 그것은 ‘두터운 얼음장에 눌렸어도 / 침묵하지 않았기에 낼 수 있는 소리’이다. ‘모두가 제 목청을 감추며 사는 계절에 / 남먼저 목청 터진 저 강물의 소리는 … 깊은 어둠 쪼개는 칼의 소리’인 것이다. 순박한 농민의 목소리다. 순수하지만 자신만의 색갈이 있다. 해토무렵의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살펴보면 례사롭지 않은 목소리요, 그런 목소리의 여운은 사뭇 길다고 해야겠다. 에서는 락엽을 ‘노오란 교훈’이라고 이름을 달아주고는 삶과 죽음의 철학을 펼쳐보이고 있다. 살아가면서 가지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결론은 시인의 인생 나이테에서 우러나온 경험일 것이고 ‘저렇게 말끔히 가진 것 다 내려놓고 … 본래의 그 무로 돌아갈 수 있는가’라는 시구는 락엽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며 시인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이다. ‘가장 낮은 땅바닥에 뒹구’는 락엽이고 ‘가진 것이란 온통 절망할 것들 뿐’인 락엽은 결코 후회도 원망도 없다. 또 ‘더러는 아직 아픔이 남아있는듯 / 밟으면 아삭바삭 뼈 부스러지는 / 소리 들리기도 하’는 락엽이다.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인은 세심한 관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철학을 견인해낸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세상에 보여주고저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버리며 살아야겠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이다. 에는 거거익심, 점입가경, 흥미진진, 화룡점정 등 사자성어들이 총동원될 수 밖에 없다. 나무잎 하나를 가지고 시인은 시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나무잎 하나하나는 그대로 문장부호가 된다. 그리하여 나무는 많은 문장을 품에 안고 있고 수림은 나무가 쓰는 대작들을 집대성한 서림으로 된다. 또 산은 서림을 가득 진렬해놓은 도서관이다. 시인이 상상력을 극대화시킨 결과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그토록 ‘혼신을 다해 쓴 글이지만’ 한해가 지나면 ‘나무는 미련없이 훌훌 다 지워버리고’ 단 한줄만 몸통 속에 나이테로 새겨둔다. 시에서 ‘유명하다 저명하다 따위 / 턱없이 춰올리는 형용사는 외면하는’ 나무의 덕성을 닮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겠지만 여기서는 저명한 시인이 아니라도 이렇게만 쓰면 유명한 시가 맞다고 우기고 싶다. 시인의 타이틀이 되다 싶이 한 을 보기로 하자. 시인의 눈에서 북방은 ‘진창에 흙이 매달려도 걷고 싶은’ 곳이며 ‘솔나무가 한결 더 싱싱한 곳’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인 북방은 ‘도처에 빙판길’이여도 그리움도 즐거움도 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얀 백골’이 있는 곳이다. 배고픈 우리에게는 그대로 찰떡이 되는 곳, 내 겨레가 있고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인 것이다. 이 시에는 북방에 뿌리 내린 시인이 고향땅에 대한 경건한 마음과 끝없는 사랑을 그대로 려과없이 토파하고 있다. 북륙의 칼바람에서 푸른 기상 잃지 않는 소나무의 지조를 가진 시인의 고향사랑이 눈물겹다. 에 대한 시인의 풀이를 들어보자. ‘고향’, ‘어머니’라는 말처럼 따스한 좋은 말이 정이란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 비빔밥처럼 섞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꽁꽁 언 사람에게 김이 문문 나는 따끈한 국밥 같은 것’이란다. 정은 ‘흩어져 제각기 제 갈길만 가던 물줄기들이 / 한데 모이는 것’이란다. 묵은지로 끓인 찌개 같은, 질박한 옹배기 속 텁텁한 탁배기 같은, 메주내와 썩장내가 감돌거나 함지 냄새, 돌절구 냄새 같은 그 모든 것이 고향으로 대변되고 그 모든 것이 정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과 두고 온 고향과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시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효삼, 강효삼 하는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상징인 는 시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가. 이번 근작시들 중 가장 짧은 시이다. 그런데 단시의 묘미를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분명 제 또래들보다 일찍  바람난 시골 계집애가 분명하다  사랑이 무엇인지 딱히 몰라도 이성에 대한 집착만은  놀랍도록 무서워서  부끄러움도 잊고 왈칵 터뜨린  빨간 사랑고백                                       - 전문   그랬다. 진달래는 봄이면 가장 먼저 꽃이 핀다. 그리고 그 꽃은 핑크색이다. ‘일찍 바람난 시골 계집애’라는 표현이 찬탄을 자아내고 ‘부끄러움도 잊고 왈칵 터뜨린 / 빨간 사랑고백’에 엄지손가락을 펼쳐들게 된다. 내숭도 없고 짐짓 부끄러움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순수한 그대로 토종 그대로의 것이다. 그래서 사랑스럽다. 진달래도, 시골 계집애도 그리고 이런 시를 터뜨린 원로시인마저도… 이상 강효삼시인의 근작시 몇수를 살펴보았다. 모두어보면 북방을 대변하는 원로시인 강효삼선생은 흙냄새를 밥냄새라고 생각하고 북륙의 흑토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토로함에 있어 잔잔한 시내물이 아닌 폭포수처럼 쾅쾅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 언젠가 《도라지》 문학행사에 같은 뻐스로 동행한 적이 있었다. 아침 여섯시 출발하는 뻐스라 우리 젊은이들이 아침 챙겨먹지 못할 것을 미리 짐작하신 선생은 찰떡을 사가지고 뻐스에 오르셨다. 그 때 먹었던 그 콩고물의 찰떡맛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배고플 때 찰떡 같은 존재이신 강효삼시인께서 새해 더욱 문운형통하시기를 기원해본다. 출처:2018제6호  
16    리태복: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작품평) 댓글:  조회:362  추천:0  2019-07-09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 -소설 와의 정신분석학적 대화 리태복     1.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경화의 손을 거쳐 생성된 텍스트를 접할 때면 언제나 표제를 은유나 상징적인 맥락에서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과제에 먼저 부딪치게 된다. 한 것은 그의 소설표제들이 대개는 련상이나 상징에 의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의 표제 역시 그러하다. 라는 표제에서 우선 련상되는 표상은 무엇일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동면’일 것이다. 그 리유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북온대의 지리적 환경에서 개구리의 겨울철 존재양상은 ‘동면’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구리의 동면은 주지하다 싶이 일종의 생존을 위한 방어메커니즘이다. 가을에서 봄으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겨울이라는 단계에서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과도적 양상인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생성에는 혹독한 추위라는 외적 환경 즉 기후변화의 법칙과 생명증후를 조절하는, 례하면 영양물질의 축적과 소모절감, 최소한도의 호흡보장 등 개구리 자체의 능동적 선택이 아우러져있다. 개구리를 하나의 주체로 상정한다면 이는 욕망을 최소한도로 응축시킨 결과이며 쾌락원칙이 억압되고 현실원칙이 작동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개구리가 인간과 같은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맥락에서의 해석은 이 텍스트를 리해하는데 한층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에서 작중 인물들의 ‘동면’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우선 제1주인공이며 3인칭 객관적 시점 인물인 ‘그’의 상황을 보자. ‘그’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진취적 방향이 아닌 퇴행적 방향을 선택한다. 작품에서 ‘그’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경험을 하며 한국으로 떠난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일자리들을 전전하면서 부딪쳐보지만 결과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돈은 계속 딸린다. 이는 ‘그’가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로의 진출에서 적어도 그 때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답보양상은 어쩌면 ‘그’의 무의식으로 하여 초래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한계를 벗어난 저돌적인 실험은 원래의 자신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한 데서부터 생겨난 자기방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그’는 용식이가 잣 따는 일을 부탁하자 기꺼이 승낙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은듯 페로부터 나오는 깊은 숨을 내쉬였다. 오랜만에 쉬는 깊은 숨이였다.” 그러니까 ‘그’의 쾌락은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 과거와 현재의 자신에게 알맞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때 그의 결핍사항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으로 보완되고 욕망도 제한적으로 충족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된 후에도 그는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샘골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길을 선택한다. 양로원에 맡기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 한번 더 새로운 질서에로의 진입을 시도해볼 기회와 조건이 주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산을 선택하고 잣따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겉으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무의식 혹은 의식의 기저에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나 포기가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서 소설의 첫머리에 나오는 ‘적당한 온도의 물’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개구리는 그 ‘적당한 온도’에서 결국은 모지름을 쓰다가 죽는다. 자신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한국이라는 ‘적당한 온도의 물’에서 ‘모지름을 쓰다’가 죽어가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이 ‘그’의 의식에서 방어메커니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퇴행적 자기방어 행위는 언제나 따뜻한 동굴과 같이 안전함을 제공해주는 딱딱한 껍질이나 말랑말랑한 보호막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현실원칙으로서의 보호막들이 사회 도덕적 기준에서 선(善)의 범주로 분류될 때 그 전통성과 당위성은 한층 용이하게 확보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리타(利他)적 리유(사실은 핑게이다)들은 정당성을 얻어 독자들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장치로 치환된다. 양로원의 렬악한 환경, 음침한 분위기, 동생의 몰인정, ‘그’와 동생 민호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 등은 이러한 ‘핑게’를 정당화하는 소재들이고 또한 효도와 보은이라는, 수천년을 내려온 딱딱한 껍질을 가진 도덕적 허상들은 ‘동면’을 위해 준비된 ‘땅속’이요 ‘동굴’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을 시도해보았고 그곳에서 ‘민주’라는 재도전의 리유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래의 자리로 물러서서 ‘동면’을 선택한 인물이라 하겠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긴 동면을 경과한 인물은 ‘그’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목사고로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과부의 인생을 살아간다. 수십년 동안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고 강압도 있었을 것이지만 어머니는 ‘끝내 버텨냈다’. ‘아릿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는’ 아들들을 지켜내며 버텨냈다. 물론 이러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문학적 시선은 다양할 수 있기에 그녀가 왜 자식들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다양할 수 있다. 그녀는 두려웠을 수도 있다. 자식을 버린 나쁜 년이라는 사회적 지탄이, 어린 자식의 원망과 먼 후날 성장한 자식들의 외면이 그리고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선택에 수반되는 이름 모를 불안과 예견되는 고통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피해갈 수 있는 선택을, 즉 과부인생의 선택을 합리화해주는 여러가지 환경적 요소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사회활동에서 ‘외삼촌’의 ‘아버지’ 역할의 분담, 렬녀나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에 대한 주위 여론의 찬사 등은 장기간의 ‘동면’에 대한 선택을 가능케 한 방어메커니즘 작동의 외적인 요소라 하겠다. 새로운 선택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삶의 리유들이였던 남편과의 정, 자식들에 대한 사랑 등을 모두 부정해야 하고 사회적 도덕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온전한 이미지를 갈갈이 찢어버려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시 전통적 미덕이라는 견고하고 포근한 ‘동굴’ 속에서 기나긴 동면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2. ‘그’와 민주는 한 사람일가 두 사람일가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혼란과 곤혹을 겪고 있던 ‘그’는 민주라는 ‘손도 조그맣고 발도 조그맣고 목소리도 작은’ ‘조그만 녀자’를 만나자 바로 마음의 설렘을 느낀다. 소설의 내용 대로라면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두 인물은 만남 그 이전에 경력의 교집합이 전혀 없고 또한 이성 욕망에 대한 사전 서술도 없기에 사랑을 배태시킬 환경적 여건이 마련되여있지 않다. 때문에 두 인물의 상호간의 신속한 흡인과 인지는 오히려 동일시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한층 적절하고 합리적이라 하겠다. 인간은 스스로를 온전한 이미지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유아가 파편적으로 자신을 인지하듯이. 그리고 유아는 거울을 통해서 처음 온전한 자신의 이미지를 인지하게 된다. 아, 내가 원래 저런 모습이였구나 하고. 하루하루를 일과 잠으로 채우고 번 돈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만을 위해 살아오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정신과 육체가 어울린 자신의 형상을 돌아볼 겨를도 인지할 리성도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를 보는 순간 ‘그’는, 그의 유아단계의 의식은 아! 저게 바로 나의 현재의 모습이다! 고 놀랍게 인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민주도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선다. ‘그’는 위태한 ‘동면’의 과정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유리잔 대하듯 조심스러웠고’, ‘녀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는 난데없는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위태함과 통증을 사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서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것이다. 다만 무의식의 작동이기에 그 자신의 의식이 이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동일시는 대상과의 분리를 거부하고 소유의 욕망을 유발하게 된다. 마치 유아가 엄마와의 동일시 때문에 엄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하여 ‘녀자와 그 사이에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의 몸을 달구’게 된다. 그리고 ‘그’와 민주 사이의 상호 동일시는 서로의 경력과 현황의 확인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그 외연이 확대된다. 맏이로서 어머니의 로후와 동생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현재의 고생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그’, ‘삶의 무게’, ‘맏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현실의 무게,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바로 이러한 선택과 삶의 리유로 내세워지는 ‘그’다. 그리고 막내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늙어버린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민주, 어머니를 양로원에 맡겨둔 죄책감과 결혼을 하는 남자친구와 헤여지게 된 원인 제공의 짐을 ‘가냘픈 어깨’로 떠메고 있는 민주가 ‘그’와 함께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과 녀자 사이에 어떤 통로 같은 게 생겨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 작품 속 두 인물은 사실 동일한 의미를 가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여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시점까지. 그러나 서로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참조물로서 혹은 메커니즘으로서 서로를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사라지고부터 이러한 성격의 중첩은 균렬을 가져온다. 어머니의 뇌경색과 반신불수로 ‘그’는 한층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였고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퇴행적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반해 민주는 어머니의 죽음과 형제들과의 사실상의 절교로 그녀를 억압하고 압박하던 많은 요소들이 사라진다. 즉 ‘동면’을 할 정당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분리는 두 인물의 리별로 현실화된다. 서로 기댈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일부 독자들이 민주가 왜 샘골에 남아 ‘그’와 함께 생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괜찮은 답일듯 싶다.   3. 겨울의 뒤에는 정말 봄이 있을가 겨울개구리는 동면을 끝내면 다시 세상으로 나와 산란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가? 정말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가?   이미 ‘동면’이 끝난 인물, 결과가 알려진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 민호이다. 우선 어머니, 그녀에게 따뜻한 봄날은 결국 차례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며 효도를 다하는 살가운 아들들도 없고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손자손녀도 없다. 남은 것이란 작은아들의 ‘배신’, 큰아들의 무덤덤함, 아무 색채도 없는 허름한 산속의 방 그리고 그 자신의 ‘아무 것도 담겨져있지 않’는 ‘텅 빈 눈’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동면’을 시작하면서 환상하고 희망한 것들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쾌락욕망을 억압하며 참아온 ‘동면’의 과정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들마저도 모두 상실하여 거의 절대적 결핍상태에 놓이게 된다. 긴 ‘동면’에서 깨여나보니 봄은 없고 한층 혹독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의 동생 민호도 단계적 과정이 완성된 인물이다. 민호는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고 대학 다니는 동안 바보라는 소리, 별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련애도 안하고. 죽어라 공부만 한’ 인물이다. 학비를 제공해주는 형님에게 보은을 맹세하고 자신을 학대 수준으로 억압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민호는 드디여 새로운 질서에의 편입에 성공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임을 텍스트는 알려주고 있다. 그는 현실원칙에 따른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지속적으로 억누르고 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한 상태는 그의 의식에 투사된 하나의 환영일 수도 있기에 어떤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맞으면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그 자신도 이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무자비하게 과거와 선을 긋고 자학적인 울분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결과만 본다면 민호에게는 봄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존재양상은 위태로운 상태의 지속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으며 욕망의 응축과 억압으로 이루어져있기에 봄이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기쁨과 쾌락이 결여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품고 있는 칼’이 언제든 남을 찌를 수도 있고 자신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동면’을 끝낸 민주에게는 봄이 찾아올가? 소설에서 민주는 ‘그’와의 데이트 중 영화보기를 제안했고‘지루하고 재미없어’하는 ‘그’와는 달리 영화에 몰입한다. 어쩌면 이 대목이 독자들에게 중요한 단서와 징후를 제공해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영화는 ‘잣따기’와 대립되는 문명을 상징하는 기호이며 현실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세상의 표상이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선택은 이미 결정이 되였는지도 모른다. 민주는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의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과거와의 결렬에 단호하다. 장례식을 끝으로 언니 등 혈육으로 이어진 과거와의 끈들을 확실하게 정리하였다면(긴긴 잠을 매개체로) 그녀가 샘골을 찾아온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남녀 사이의 정을 끊기 위해서일 것이다. 민주는 ‘끝내 고개를 돌리고’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민주의 이러한 결연한 선택이 그녀에게 봄날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편입하려는 질서, 그러니까 텍스트의 표현 대로라면 ‘남에게 서빙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서빙을 시키는’ 그러한 질서에 편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록록치 않고 그녀의 력량이 그 견고한 질서를 뚫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시련과 겨울을 또 겪더라도 그녀가 다시 ‘동면’의 상태로 회귀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에 실린 그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물론 ‘그’의 ‘동면’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텍스트 속에 명시된 ‘동면’의 리유 대로라면 어머니가 돌아가면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질듯이 보인다. “그래,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올 것 아닌가.” 하고 텍스트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독자들이 그대로 믿기에는 여건들이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게 차례질 봄날의 의미를 민주와의 재회나 결합이라고 상정한다면(다른 욕망은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는 지난한 목표이다. 그 전제가 바로 민주가 욕망하는 질서에 편입되여 성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동면’ 후 ‘그’가 맞이하게 될 미래는 한층 험난한 도전이 아니면 더욱 소극적인 퇴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봄날은 아직 텍스트의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아스라하니 먼곳에 있는듯하다. 이 점에서 독자나 평자는 지은이가 텍스트의 마무리에 펼쳐놓은 근거 없는 환영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랑만적 환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만 있다면.  출처:2018 제1호
15    <장백산> 2019.1 루계223 댓글:  조회:536  추천:0  2019-07-08
장백산 총223호2019년1호   권두칼럼 최국철        문학상 잡담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허무궁        아버지의등(수필, 외2편) 허무궁         창작담(작가노트) 장춘식          인간의의무와책임그리고정체성(작품평) 리여천          수구초심의멋진나그네(작가평)   기획코너 김   혁           리얼하게그리고치렬하게(작가의 말) 김   혁            【인물평전】강경애평전(장편인물평전, 련재1) 우상렬            【문단좌표】우리문학의새지평(평론)     김경화소설코너 김경화     언니(중편소설)   소설광장 조정철    아버지의 고향은 감옥이였다(단편소설)   계렬수필 살춘각          춘천 나들이(기행수필)        시인 시전 김동진           락엽의길에는부서진꿈이없더라(시, 외4수)   리해연           꿈 꿀 권리(시평) 창작마당 정세봉        소설, 그 “상상과 언어의 ‘공동의 땅’”(칼럼) 연   서                와인마시는녀자(단편소설) 나   경                그녀와 ‘일기일회一期一会’(수필) 전한나                 목소리의색상(수필) 지영호    아침은나무가지에둥그런꿈을걸어놓는다(시, 외1수) 리명희                  산에살고싶소(시, 외1수) 김철우                  첫사랑(시, 외1수)   8090문학코너 신   조                 작은방(단편소설)  미   주                 조선문잡지주문을류보한다(칼럼) 김   해                  소원(수필) 박민걸                  밤의서정(시, 외2수)   문학과 비평 리화& 오상순 무의미와의미, 우연과 필연의 변증적 관계(평론)   중국문학       강   북      개고기 서령감 (단편소설 / 김견 옮김)   장편소설련재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7) 구호준       여백(장편소설 련재5)
14    강북江北: 개고기 서령감(단편소설) 댓글:  조회:433  추천:0  2019-07-08
개고기 서령감 강북       서령감이 나타난 것은 서북풍이 기승스레 휘몰아쳐 연구소 옥상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금방 찢겨나갈듯 기를 쓰고 펄럭거리던 그 날이였다.  소장이 현수막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고 몇 안되는 남자직원들보고 누가 옥상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볼 사람 없느냐고 묻자 멀뚱멀뚱 서로를 마주보던 남정들은 혹자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혹자는 고혈압 때문에 올라갈 수 없다며 하나같이 도리질만 할 뿐이였다.  어쩔 수 없이 비대한 체구에 반백이 훨씬 넘은 소장이 몸소 나서야 했는데 남산 만한 배를 내민 채, 헐금씨금 기여오르느라 추운 날씨임에도 금세 땀벌창이 되여 헐떡거리면서 욕지거리는 차마 못하고 이런, 이런…만 련발하고 있었다. 서령감이 고양이처럼 살금 나타난 것은 바로 그 위태위태한 순간이였다. 별로 힘들이는 내색도 없이 여차여차하더니 금세 옥상에 올라선 서령감이 손을 뻗어 현수막 한쪽 귀퉁이를 냉큼 잡아채는 것이였다. 그 바람에 더 이상 마음껏 펄럭일 수 없게 된 현수막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때껏 아래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사람들은 손짓발짓 해가면서 왼쪽, 오른쪽 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저마다 지휘에 열 올리고 있었다. 한편 옥상에서 상체를 수굿한 채 목을 잔뜩 빼들고 현수막을 들고 있는 서령감은 얼핏 볼 바엔 《미녀귀신》에서 나오는 시뻘건 혀를 기다랗게 빼문 귀신할망구를 련상케 했다. 그러는 서령감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장이 누구라 없이 물었다.  “저치 누구지? 제법인걸.” 그에 누군가가 응수했다. “그러게요. 정말 날래죠. 꼭 무슨 날다람쥐 같은걸요.” 이윽고 옥상에서 내려온 서령감을 살펴보니 그 걸음걸이가 얼마나 잽싼지 발이 땅에 닿는 기미도 없이 이리저리 다니는 양이 정말 날다람쥐 따로 없지 싶었다. 서령감은 보일러 때는 일거리나 찾아하려고 왔노라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보일러공은 이틀 전에 금방 받아두었으니 어떡하지? 그 말에 서령감은 한대 맞은 놈처럼 맹랑한 표정이 되여 좀 전의 그 생기 넘치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당금 그 자리에 주저앉기라도 할듯 축 처져있었다. 마누라의 성화로 돼지 흥정 때문에 지체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맹랑한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누라가 패주고 싶도록 미웠다. 볼품 없이 가무잡잡하고 왜소한 몸집에 자글자글 주름투성이 얼굴, 게다가 시선을 내리깔 때 유표하게 푸들거리는 안대까지… 보는 사람이 다 불편해지는 몰골이였지만 그 시각,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련민의 정을 자극한 것은 다름 아닌 그 꾀죄죄하고 애가 바싹 탄 몰골이였다.  그런다고 련민의 정 따위에 련련해 원칙을 어길 순 없는 일이고 해서 사람들은 그러다 돌아가겠지 하고 뿔뿔이 흩어져가는데 혹 가다 명년엔 좀 일찍 와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그 쯤에서 물러날 줄 알았던 서령감이 소장의 꽁무니를 졸졸 묻어다니며 수작을 거는 것이였다. 뭐, 아까 보니 옥상에 현수막을 고정하는 가름대도 변변치 못하던데 그대로 놔뒀다간 조만간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자기가 쇠갈고리로 단단히 고정해놓겠다는 둥, 그리고 자긴 벽 쌓고 회칠하는 등 일에도 능해서 집 지을 때도 거진 혼자 손으로 했다는 둥, 손짓발짓 해가며 시늉까지 해보이는 양이 꼭 ‘손시늉 보고 알아맞추기’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람 같았다. 그 쯤 되자 사람들 모두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시름없이 웃었고 그에 소장도 저으기 난감한 모양 허허 웃기만 할 뿐이였다. 그런데 그 악의 없는 웃음에 서령감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 그로서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못 믿어서 웃는 건지 아니면 자기 일솜씨를 의심해서 그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끈 달아난 서령감은 목소리까지 변조되여 볼멘 소리로 웅얼거렸다. 저기 대문 앞 계단이며 2층 창틀도 잘 손봐야지 아니면 몇참 못 가 군데군데 떨어질 거라고, 그만한 일은 자기 혼자서 넉근히 해낼 수 있다고. 미구엔 정문 앞 공터를 가리키며 이제 눈이 오면 저기 쌓인 눈도 자기가 알아서 칠 거라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애원 어린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집을 짓느라 8천원 남짓 꾼 리자돈도 갚아야 하고 뇌위축증으로 여나문살 되도록 바로 걷지도 못하는 아들까지 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령감은 일남이녀를 두었는데 큰딸이 다섯살 나던 해에 뇌위축증으로 죽고 나서 아들딸 쌍둥이를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쌍둥이 역시 뇌위축증을 앓았는데 그마저 딸애는 이태 전에 죽고 지금 아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이였다. 원체 과학기술연구기관이라는 리유로 서류관리일군까지 전부 대졸 이상만 받는 연구소라서 그런지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의 반응 역시 지극히 론리적이였다. 남자직원들 대부분은 그런 상황이라면 유전자 검사부터 해봐야 한다며 면역력 결핍은 아닌지 검사해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녀직원들은 회임기 음식물 섭취에 문제 있었던가 아니면 방사선에 로출된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론리들을 알아먹을 리도 없었거니와 애초에 여겨들을 념조차 않던 서령감은 자기만의 지론, 그러니까 좀 유명하다는 점쟁이가 그러는데 조상들의 묘자리를 잘못 쓴 탓에 귀신이 ‘작간’한 것이라고 우겼다. 그 황당한 지론에 기막히고 어처구니 없는 한편 측은한 생각이 든 사람들이 생명 형성의 원리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려고 하자 서령감은 개 벼룩 씹듯 도리머리만 홰홰 저을 뿐이였다. 하긴 지식인과 일개 농군의 주장을 동일선상에 놓고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를 일. 이 또한 후담이지만 말이다. 그 무렵 보일러공의 월급이 6백원 정도였고 1년 중 난방기가 6개월이였으니 년수입이 3600원인 셈. 겨울철에 아무런 수입도 없는 농군으로 말하자면 꽤 유혹적인 일자리였을 것이였다.  어쩌면 그래서 원하던 바를 얻지 않고는 절대 물러설 줄 모르는 서령감의 성격이 더 여실히 드러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밑도끝도 없이 늘어놓는 자기 자랑에 현혹되였는지 아니면 뇌위축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는 말에 측은지심이 발동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서령감이 소장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것은 틀림없어보였다. 그런데 소장으로서도 참으로 난감한 일이였다. 금방 이틀 전에 계약한 보일러공은 또 무슨 리유로 해고하는가 말이! 아무런 리유 없이 사람을 내쫓을 순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해서 소장은 일단은 서령감부터 구슬려 보내놓고 조주임을 찾아가서 반나절 남짓 입씨름을 해야 했다.  그렇게 퇴근 무렵이 다돼서야 조주임은 맥관염脉管炎에 걸린 오른다리를 절룩거리며 뒤울안으로 향했고 몇참 안 지나 보일러실로부터 악에 받쳐 내뱉는 욕설과 함께 쾅쾅 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죄 없는 보일러실 문이 서령감 대신 봉변을 당한 것이였다. 모르긴 해도 서령감도 사람이였다면 그맘때 쯤 배갈 한종지 삼킨 것 만큼 귀볼이 화끈거렸을 것이였다.  그렇게 조주임은 서령감의 은인이 되였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서령감이 첫 출근을 하던 날 첫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사람들은 자연스레 서령감의 호언장담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한참 만에 마당에 나타난 서령감이 보리밭 둑길을 련상케 하는 도형을 만들며 분주히 눈을 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보리밭 한가운데 중뿔나게 자라난 인삼과를 방불케 했다. 그렇게 출근 첫날, 서령감은 실제행동으로 자신의 부지런한 성품을 증명해보인 셈이였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시작하긴 쉬워도 뒤감당은 쉽지 않은 법. 그러나 그러한 리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서령감이였고 일개 잡역부라고 해서 그 지능지수까지 낮아야 한다는 법은 없는갑다. 아니, 어쩌면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뛰여난 두뇌의 소유자일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렇게 연구소에 취직한 서령감은 온갖 잡다한 일을 시켜도 군말 없이 수걱수걱 잘해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궂은 일이더라도 우물쭈물, 저어하는 법 없이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곰상곰상 굴었다. 서령감의 가장 큰 우점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사람들이 뭐라고 쑥덕거리든 일절 토 다는 법 모르고 시비를 따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수년 세월이 지나고 이젠 사람들과 제법 익숙해진듯 싶어지자 서령감도 툭하면 보일러실 환경이 너무 렬악하다느니, 도처에서 찬바람이 숭숭 새들어온다느니 하며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수년 전부터 보일러실을 개조한다고 벼르고는 있는데 재정문제로 지금껏 미루고 있는 거라고 설명해주면 서령감은 대뜸 “암, 개조해야죠, 해야 말구요.”라고 응수하곤 했다.  근데 사실 서령감은 보일러실 개조가 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로동개조 전과가 있었던 터, 개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로동개조를 떠올렸고 무릇 개조가 들어간 어휘면 그저 수고스레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줄로 어림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할일 없을 때면 온통 철로 만들어진 그 거무튀튀한 녀석을 쳐다보면서 머리를 굴려보기도 했지만 대체 저딴 녀석을 어떻게 개조한다는 건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해서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그만 궁리하기로 했다. 사실 서령감은 평소에 욕지거리를 곧잘하는 편이였다. 혼자서 울적하고 답답할 때 욕지거리를 하면 채소밭에 비료 주듯이 속이 다 시원해졌던 것이다. 그런다고 직장에서까지 욕지거리를 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한번은 월급 타던 날, 돈을 세다가 무망간 “염병할!” 하고 내뱉었다가 출납원 아가씨의 따끔한 눈총과 함께 언사에 주의하라는 경고까지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날 월급을 받아들고 계단을 내려오던 서령감은 자기 뺨을 후려치며 좀 전의 실수를 뉘우쳤고 그로부터 ‘염병’ 같은 욕지거리가 다시는 입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각별히 주의했다. 그만한 일은 연구소 직원들한테는 일도 아닐 것이였지만 일개 잡역부 서령감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였다. 그렇게 해가 가고 달이 바뀌는 동안, 서령감은 자기가 갈수록 말린 오이처럼 시들시들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원체 성품이 어고 무른 사람이라서 그런갑다고 생각하는 모양, 툭하면 서령감과 롱을 지껄이기도 했다. “령감님이 우리 연구소에 들어온 지도 한참 되는데 여기가 뭐가 좋다고 그러십니까. 쥐꼬리 만한 월급에 환경도 렬악한데. 이제 빚도 거진 다 갚으셨을 텐데 때려치지 그래요!” 그러면 서령감은 제법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투로 공손하게 개올리곤 했다. “이곳 사람들 너무 좋아서요. 정말 기막히게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그에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웃으면 그는 상대가 자기 말을 믿지 못해서 그러는 줄 알고 손으로 지페를 세는 동작까지 곁들여가면서 아주 정색하여 설명을 붙이곤 했다. “저 거짓말 같은 거 안해요. 있으면 있는 대로,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구요. 달마다 꼬박꼬박 월급을 주지 얼마나 좋다구요.” 그러면 사람들은 또 와그르르 배를 잡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웃으면 덜컥 겁부터 앞세우는 서령감이였다. 그래서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는가 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머룩머룩 쳐다보고 있기가 일쑤였다.  서령감의 말은 사실이였다. 거의 모든 업체들이 상호 련쇄채무관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렇고 그런 시절이다 보니 민공들의 월급을 밀리는 일도 허다했고 걸핏하면 해고다, 생산정지다 하던 시절이였던 만큼 서령감으로서는 그렇게 달마다 꼬박꼬박 월급을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한 일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 좋은’ 서령감이였지만 정작 사람들한테 서령감에 대해 물으면 좋다는 사람도 있고 별로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보다는 글쎄… 라며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서령감에 대한 이 같은 평판은 조주임의 작용이 컸다고 해야 할 것이다. 조주임은 총무주임으로서 소장과 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외 연구소 내에서는 거의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가깝지 않은 정도라면 또 모를가,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경원시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조주임은 사람들이야 자기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심드렁한 투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람들이야 뭐라 하든 영화에 나오는 여느 부자집 집사처럼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일일이 다 간섭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게 총무주임의 역할이다 보니 자기 소임을 리행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평판 따위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직원들의 복리라든가 로동보장, 식당화식 등 문제들을 일일이 체크해야 하는 게 그의 직책이였고 그 밖에 로동질서까지 감독해야 했던 것이다. 전에는 정치사상업무를 책임진 리서기가 로동질서를 담당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중엔 조주임 소관이 된 것이였다.  조주임은 직무 수행에 있어서 인정사정 보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였다. 무릇 사무에 한해서는 얼굴을 푹 떨어뜨린 채, 아무리 별난 사람이라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터, 지어 소장과 서기가 조퇴를 하더라도 조주임한테 청시해야 했으니 여타 직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조주임은 모든 임직원들의 지각, 조퇴, 병가, 휴가 등 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해두었다가 월말이면 그 명세서를 재회과에 넘기곤 했다. 간혹 누군가가 그 명세에 불복하여 몇월 며칠 기록이 잘못되였다고 따질라 치면 조주임은 일절 해명 따위를 하는 법 없이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고 그러다 수 틀리면 한바탕 욕바가지를 퍼붓기도 했다. 그러면 욕을 얻어먹은 사람은 대꾸 한마디 못하고 물러가기 일쑤였고 속으로는 조주임을 개니 돼지니 하고 욕하며 잔뜩 벼르기 마련이였다.  그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조주임의 처사에 앙앙불락이였지만 언제 봐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대하는 조주임이였던 터, 어떤 꼬투리를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일에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게 있다. 애초 서령감이 조주임과 부쩍 친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조주임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이 작용한 것도 있었겠지만 서령감한테도 조주임의 덕을 보려는 속셈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한동안 두 사람은 정말 끔찍하다 할 만큼 각별히 친했다. 그 끔찍함은 조주임 일이라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서는 서령감의 태도에서 여실히 반영되였다.  그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조주임이 전횡을 일삼는다느니 갑질을 한다느니 하며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 모두 과거 조주임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악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조주임의 일거일동을 살폈고 무슨 일이든 조주임과 털끝 만치라도 관계되는 일만 있으면 얼씨구나 하고 들고 일어나 롱성을 벌이곤 했다.  그러던 하루는 조주임과 서령감이 오전 시간에 공구를 챙겨들고 출타한 일이 있었는데 사실 그만한 일은 일도 아니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일이였다. 그런데 그 당자가 조주임이였으므로 문제는 심각해질 수 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복도에 나와 서성이며 서령감이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실내온도가 15~16도 밖에 안된다며 볼펜도 바로잡을 수 없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복도로 나온 소장이 조주임네 부서 직원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조주임네 집 스팀이 고장나서 서령감을 데리고 수리하러 갔다는 것이였다. 그에 소장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가 이윽고 두부주임을 불러놓고 몇마디 당부하였다.  이윽고 두부주임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다들 추우면 서류실에 가서 전기난로를 쪼이라고 했다. 두부주임은 조주임 못지 않게 소장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였는데 조주임이 소장의 총애를 받는 리유가 오랜 시간 소장 아래서 일해온 충실한 심복이기 때문이라면 두부주임의 경우는 좀 달랐다. 두부주임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일처리가 야무지고 확실한 사람으로 연구소 내 대외사무는 거진 그가 총괄하다 싶이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 두 사람은 소장의 왼팔, 오른팔인 셈이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들 두 사람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회사 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였다. 두부주임과 좀 가깝다는 이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그 주변에서 촐싹거리며 은근히 싸움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에 두부주임은 아무 대꾸도 태도표시도 안했지만 얼굴 가득한 동감조의 미소만은 굳이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아부와 험담을 일삼는 이들은 아주 신명이 나서 사실을 기껏 부풀리고 외곡하여 조주임을 헐뜯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쯤 되자 그 자리는 숫제 살벌한 규탄대회장으로 돼버렸다. 과거지사에서부터 오늘 일에 이르기까지, 월급을 깎인 일에서부터 억울하게 처분받던 일까지… 그렇게 각자 속에 쌓인 불만을 토로하다가 결국 오늘 조주임의 조퇴도 월급을 깎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되였다. 배가 출항하려면 누군가 뭍에서 떠밀어주는 이가 있어야 하듯이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려면 누군가 그 동력이 될 만한 화제, 사건을 제시해야 했다. 말하자면 느슨해진 이야기보따리 매듭을 슬쩍 끌러놓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단 누군가 선코를 떼놓으면 이야기보따리는 이내 활활 풀어헤쳐지고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게 되는 법. 그렇게 하나, 둘 이야기들을 들춰내다 보면 그중에 쓸 만한 내용들이 꽤 많을 것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책상 우에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수북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 동참한 이들 모두 할일없이 입방아나 찧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잔뜩 벼르고 있던 사람들이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얘기들 중에는 속이 뻥 뚫릴 만한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해서 잔뜩 심사가 뒤틀린 몇몇 사람들이 다시 두부주임을 찾아갔다. 굳어진 표정으로 출퇴근기록부를 마주하고 앉은 두부주임은 찾아온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였다. 누군가 왜 그러느냐고 조심스레 묻자 두부주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별일 아니라고 일축했고 누군가 이내 그 속셈을 알아채고 기분을 맞춰주느라 알랑거리자 가뜩이나 꿀꿀하던 차,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꽤 있다는 생각이 든 두부주임은 마침내 속에 쌓였던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역시 피해자인 양, 눈치껏 응수하는 게 가장 명지한 방법일 것이였다. 조주임은 이젠 볼 장 다 본 사람이지만 두부주임은 이제 막 동녘하늘에 떠오르는 태양 같은 존재라는 것을 연구소 직원들 치고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무렵, 문을 밀고 들어선 소장이 이달 지출금액을 묻다 말고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는 은근히 놀라운 눈빛이더니 이내 롱조로 무슨 회의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에 좌중 모두 입 닥친 채 긴장된 눈빛으로 두부주임만 바라보고 있는데 두부주임이 재치 있게 둘러댔다.  “다들 궁금해하지 뭡니까! 서령감이 조주임네 집 스팀 수리하러 간 건 근무리탈인지, 아니면 뭔지 하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기막힌 림기응변이요, 좌중의 말문을 트기 위한 절묘한 암시였다. 비로소 좌중은 왁자지껄 열띤 토론을 재개하였다.  처음 한동안은 그래도 사람 좋게 웃으며 응수하는가 싶던 소장은 나중엔 안되겠던지 이마살이 꽈배기처럼 잔뜩 뒤틀려있었다. 그에 좌중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도로 삼켜야 했다. 아주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식인이라는 이 민감한 집단, 이들이 처세술에 능하고 말고를 떠나서 말하자면 그것은 오랜 세월 계급투쟁 경험으로부터 몸에 배인 본능이였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소장은 조주임 일에 대해 해석을 했다. 소장의 해석을 가만 들어보니 그 역시 맞는 말이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조주임이 종래로 5.1절이나 10.1, 설날 같은 휴가를 제대로 쉬여본 적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소장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다 말고 사람들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고는 하나, 둘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이윽고 사람들이 다 가고 없자 소장은 비로소 두부주임과 독대하게 되였다. 바빠맞은 두부주임이 무어라 변명하려고 입을 열려는 것을 소장이 눈짓으로 제지하고는 이제 다시 이 같은 일이 있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떻게 가만두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마 소장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일 것이지만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두부주임은 모욕감에 가슴이 답답해나며 목구멍에 가시가 걸려 뱉어낼래야 뱉어낼 수 없고 삼킬래야 삼킬 수도 없을 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얘기는 결국 서령감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였고 서령감은 어느 날 두부주임이 차 수리하는 것을 거들던 중 몸은 비록 조주임과 가까이 있지만 마음만은 항상 두부주임을 향해있다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그에 두부주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시물시물 웃기만 할 뿐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날 이후로 서령감은 정말 조주임과 소원해지려고 작심한듯 종전처럼 주동적으로 앞마당에 나가 일하지도 않고 하루종일 보일러실에만 틀어박혀있었다. 해서 조주임은 무슨 일 있으면 절름거리며 뒤울안까지 가서 서령감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서령감은 조주임이 시키는 일 만큼은 군말 없이 잘했다. 닭 몇마리 돌보는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닭들은 서령감이 연구소에 취직하던 해 봄, 조주임이 얻어온 것이였다. 연구소 뒤울안에는 닭 몇마리가 아니라 양계장을 꾸려도 좋을 만큼 널직한 공터가 있었다. 거기에는 과거 숙직을 서던 장령감이 짬짬이 일구어놓은 터밭이 있었는데 장령감이 일을 관두고 나서도 조주임은 그 터밭에 파나 배추 따위 채소를 심어 가꾸었다. 그리고 거기에 닭 몇마리까지 가세하면서 제법 그럴듯한 전원풍경의 몰골을 갖추게 된 것. 틈만 나면 터밭에서 기음을 매지 않으면 땅을 고르고 터밭 여기저기서 닭들이 모이를 쫏느라 분주한 양이 보는 이들을 은근히 시골정취에 빠져들게 하였다. “저녁노을 잔잔한 채마전 한가운데 기음 매는 농군 따라 오리새끼 박박거리고…”라는 시구가 떠오르는 풍경이였다.  그 터밭 덕에 점심 때면 식당 식탁에는 어김없이 싱싱한 야채수프나 야채무침이 오르곤 했다. 그것을 먹으면서 소장이 연구소가 시골과 도시 린접지역에 위치해있는 고로 상점과 채소시장이 없어서 고생이였는데 이젠 자체로 채소 뿐만 아니라 닭까지 쳐서 잡아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엉너리를 치면 아무도 그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썩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속으로는 그 터밭만 아니였어도 화식형편이 좀더 좋아질 수도 있겠건만 그 놈의 터밭 덕에 소장인 당신이야 글쎄 돈을 절약해서 좋겠지만 직원들 모두가 본의 아니게 소식素食주의자가 돼버리는 건 어떡하느냐는 거였다.  한번은 누군가가 닭 두어마리 잡아서 화식 좀 개선하자고 장난조로 말했다가 퉁 맞은 일이 있었다.  “조주임 명줄 같은 닭을 잡아먹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자고! 한번은 글쎄 조주임이 수탉한테 손등을 쪼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녀석을 한대 쥐여박을 생각조차 않더라니까.” 그 때 잠자코 듣고 있던 장회계가 불쑥 끼여들었다. “어느 비 오던 날, 닭들이 널판자 아래 오구구 모여들어 비를 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널판자는 너무 작고 닭들은 많다 보니 암탉 한마리가 밖으로 밀려나게 되였더라구요. 근데 한참 만에 그 털빛 고운 수탉이 글쎄 널판자 밑에서 성큼 나오더니 밀려난 암탉한테 자리를 양보하고 자기는 고스란히 비를 맞고 서있는 거예요. 참, 어찌나 감동스러운지 정말이지 사람보다 낫구나 싶더라구요.” “조주임보다는 낫네요!” 누군가가 그렇게 롱조로 말을 받았다. 물론 그것은 악의 없이 그저 웃자고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또 한 녀직원이 불쑥 끼여들었다.  “아니죠! 수탉이 암탉을 보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그 암탉들 다 수탉의 처첩일 거잖아요! 장회계가 만약 조주임의 처첩이라면 역시 조주임의 보호를 받았을 거구요.” “너야말로 조주임 처첩 아냐?! 그래서 저번에 조퇴했을 때 기록하지도 않았던 거고!” 그 쯤 되자 두 녀인은 잔뜩 독이 올라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무렵, 문 열고 들어서다가 잠자코 듣고 있던 두부주임이 입을 열었다. “고만한 일로 두 사람이 아웅다웅할 게 뭡니까. 이 모든 게 결국 그 망할 놈의 수탉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처첩 여섯씩이나 거느리고 살면서 이건 엄연히 일부일처제에 위배되는 행위지 뭡니까. 참 재간도 좋지요. 글쎄 처첩 여섯씩이나 거느리고도 아무 탈 없다니 말입니다.” 두부주임이 짐짓 혀까지 끌끌 차면서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미처 그 말뜻을 가늠할 수 없어 어정쩡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실내에는 일순 침묵과 함께 어딘가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데 그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걸가, 아니면 좀 전에 자기가 한 말을 둘러맞추기 위함이였을가? 아무튼 두부주임이 침묵을 깨뜨렸다. “수탉이 사람 쪼은 것도 누군가가 그 처첩을 건드려서 화났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자기 처첩을 건드리는데 어느 바보인들 가만있겠습니까!” 두부주임이 그렇게 얼버무리고 나간 뒤 아까 두 녀인이 가만 생각해보니 자기들까지 곁들어 수모를 당한 기분이였다. 화가 꼭두까지 치민 두 녀인은 워낙 조주임과의 관계가 그닥 좋지 않았음에도 그 길로 조주임을 찾아가 두부주임이 한 말에 식초, 양념 쳐가면서 전후사연을 설명했다. 그렇게 그 말은 결국 조주임은 색마라는 뜻으로 번져지게 되였다.  평생을 수더분하게 살다가 퇴직을 앞두고 이런 얼토당토 않은 소리나 듣는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가만있지는 못할 것이였다. 해서 두부주임과 조주임이 식당 장부를 맞추던 날,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그 시절 장부에 약간 차질이 생기는 건 큰 문제가 아니였다. 하지만 조주임은 그 차질 생긴 장부를 근거로 두부주임을 맡은 바 일에 열중하지 않는다느니, 선배를 존중할 줄 모른다느니, 인격을 모욕한다느니 하며 혼쭐나게 닦아세웠다. 처음엔 어떻게든 해석을 해보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다시 변명을 늘어놓던 두부주임은 아무래도 안되겠던지 미구에는 제 쪽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에 조주임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비록 그 목소리는 두부주임보다 높지 못했지만 말 마디마디가 정곡을 찔렀고 빈말 한마디 없었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였다! 그 일로 소장 역시 두부주임을 단단히 꾸짖고 나서 조주임이 그렇게 한 것은 다 널 더 잘되라고 그런 거라고 타일렀다. 그에 상황파악을 잘하는 두부주임은 변명 한마디 안했지만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더니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되였던 뾰루지까지 선명하게 드러나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두부주임이 조주임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했다면 글쎄 좀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그 망할 놈의 수탉을 뼈에 사무치게 미워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였다.  그런 내막을 감감 모르는 서령감은 매일같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머리를 수굿한 채, 식칼을 휘둘러 닭모이를 쪼아주곤 했는데 그 리듬감 있는 몸놀림으로 보아서는 아주 신명나 죽겠다는 투였다. 서령감이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두부주임의 두눈에 차츰 싸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서령감한테 그 사건의 전말을 소상하게 얘기해주었고 그 날 이후로 서령감이 낮에 닭모이를 쪼아주는 모습은 다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서령감은 정말 눈치 9단이였다. 연구소 내 직원들이 누가 어떻고 어떻다는 것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어떤 사람에겐 얼마 만큼 잘해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주 적절하게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겨울, 연구소에서 지출을 줄이기 위해 숙직 서는 사람을 내보낸 고로 휴무일이나 설명절 때면 직원들이 륜번으로 당직을 서야 했던 터, 몇몇 특수부서를 제외한 3분의 2 정도의 직원들 모두 당직을 서야 했다. 춥고 더운 건 둘째 치고라도 그 큰 건물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야 하는 당직을 누군들 서기 좋아하겠소만, 그보다는 무료하고 적적하다는 점이 제일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간혹 이상한 소리라도 들리면 덜컥 겁이 나서 속이 한줌 만해지고… 해서 녀직원들의 불만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소장의 한마디에 다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들 힘들더라도 좀만 극복하자구! 연구소에 경비가 없는데 별도리가 없지 않은가!” 처음 한동안 당직 서는 사람들은 그저 고스란히 앉아서 시간만 열심히 때웠다. 그러다 점심 때 쯤 되면 의례 서씨가 나타나서는 주전자를 들고 물 길러 오지 않으면 신문이나 빌려보자는 등 리유로 찾아와 은근슬쩍 수작을 걸다가 이윽고 지나가는 말처럼 고작 집 지키는 일인데 자기가 대신할 테니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한다. 그러면 상대는 미안해서 연신 아니, 아니요를 련발하기 마련, 그러면 서령감은 뱁새눈을 슴벅이며 왜, 사람 믿지 못해 그러느냐며 아주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고 그러면 상대는 손사래를 치며 그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런다 하고 그러면 서령감은 사람 좋게 웃으면서 걱정 말고 가보라고. 당신 욕보이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한다. 그렇게 그 직원은 서령감의 미소 띤 얼굴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좀 세심한 사람들은 서령감이 모든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그렇게 잘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말하자면 서령감의 도움을 받았던 이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서령감한테 일러주었고 반대로 도움을 받지 못한 이들은 심사가 뒤틀려 뒤에서 꼴에 권세에 빌붙는다고 험담이나 하기가 일쑤였다. 두부주임이야 물론 서령감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겉으로는 서령감에게 아무런 의사표시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름지기 소장보고 휴무일 당직 서는 일을 이제 그만 서령감에게 맡기자고 제안하면서 각 소조별로 10원씩 거둬서 서령감에게 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수차 설득한 결과, 소장도 마침내 그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 같은 은덕은 서령감이 조주임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두부주임한테 진일보 다가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였다. 서령감의 식견머리로 글쎄 “시대의 흐름을 아는 자가 인물이다”라는 성구까지는 모른다 치더라도 막말로 “고기를 얻어먹지 못할 거면 비린내나 옮아다니지 말라.”는 리치 정도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추운 겨울날이면 조주임은 닭장을 보일러실에 들여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조주임은 아침이면 제일 우렁차게 울어대던 수탉이 닭장 안에서 몸을 옹크린 채 옴짝 않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가지로 수탉을 적신적신 건드려보았지만 여전히 근근해있었다. 보일러실 내부 조명이 어두운 데다 시력도 안 좋다 보니 어찌된 영문인지 살펴볼 수도 없고 해서 닭장과 문 하나 사이 둔 안쪽에 대고 서령감을 불렀더니 서령감도 감감 대꾸가 없었다. 그래서 손전등을 켜들고 안으로 들어가 부스럭거렸지만 서령감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에 다시 돌아져 나와 손전등으로 비춰본즉, 볏이 거무죽죽하고 눈을 꼭 감은 수탉이 거기 누워있었던 것이다. 기겁한 조주임이 냉큼 손을 뻗어 수탉을 꺼내 보니 놈은 이미 싸늘한 시체로 굳어있었다.  조주임은 한대 맞은 사람처럼 그렇게 오래동안 서있었다. 수탉을 받쳐든 두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천만금 재산 중에 털 달린 짐승만은 재산으로 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수탉의 죽음을 지극히 례사로운 일로 간주했다.  유독 조주임만은 어떤 묵직한 것에 가슴을 짓눌린 것처럼 무시로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으며 배속에 무언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무시로 꾸르륵꾸르륵 소리가 진동하곤 했다.  죽은 수탉의 입가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조주임은 누군가 때려죽인 게 아니면 냅다 메쳐서 죽인 거라고, 틀림없이 서령감의 소행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래 봤자 겨우 닭 한마리가 아니냐는 대수롭잖은 눈치였고 일부에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잘코사니를 부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주 뒤, 닭 두마리가 또 죽었던 것이다.  그 쯤 되자 대수롭잖게 생각하던 이들까지 더럭 겁이 났다. 설령 접때 수탉을 죽인 이가 서령감이라 하더라도 한마리를 죽였으면 됐지 계속해서 이런 불미스런 일을 저지른다는 건 사람이 인격적으로 문제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한편 두부주임은 그 사건에 관해 자기가 서령감한테 직접 물어봤다면서 서령감은 족제비가 한 짓이라고 하던데 아무 증거 없이 사람을 모함하지 말자며 닭이 병들어 죽거나 족제비한테 물려 죽는 건 지극히 례사로운 일이라고 잘못되였다면 닭을 사람 자는 집안에 들인 것부터가 잘못된 게 아니냐고 이건 엄연한 인간차별이라며 서령감을 대신해 하소연했다. 듣고 보니 그 말 역시 일리 있는지라 사람들은 옳거니 그르거니 쟁론을 벌이다가 결국 서령감 역시 나름 말 못할 고초가 있겠지 하고 입을 모았다.     어찌됐든 서령감은 조주임과는 그렇게 철저히 틀어졌고 두부주임과 부쩍 친해졌다.  한편 조주임은 닭의 죽음보다는 사람 때문에 상심이 컸던 터, 난생처음 퇴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등골이 다 오싹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길에 미끌어 넘어진 뒤로는 그것을 핑게로 출근하지 않았다. 몇몇 연구소 령도들이 병문안 갔을 때, 조주임은 30여년을 하루같이 일했고 이제 1년만 있으면 퇴직하게 되는데 먼저 내부퇴직을 하고 싶다면서 월급이나 복리 모두 관례 대로 하고 때가 되면 퇴직수속을 밟겠노라고 했다. 그만한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리유가 없었던 터, 소장은 좀 만류하는 척하다가 결국 그 요구를 수락했다.  헤여질 무렵, 조주임은 식당에 일러서 남은 닭들을 잡아 직원들한테 대접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닭들은 사실 퇴직할 때 기념물 삼아 남겨둘 생각이였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에 사람들은 비로소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식당 료리사가 자기 손으로는 닭을 잡지 못하겠다고 나눕는 바람에 닭을 붙잡아오는 일에서부터 닭 모가지 비트는 일까지 서령감 혼자서 해야 했다. 식칼이 언뜰하더니 닭 모가지에서 시뻘건 피가 솟구쳤고 그렇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잠간 사이에 후딱 해치워서 사람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반사발 정도 받은 닭피는 아무도 요구하는 사람이 없어서 서령감이 보일러실에 갖고 가서 맛있게 끓여먹었다. 입가 가득 피가 게발린 그 모습은 《흡혈귀2》에서 나오는 흡혈박쥐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제 왔는지 저편에서 서령감의 뒤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두부주임은 한참 만에야 자기가 지금 왜 여기 와있는지를 상기하고는 인기척을 했다.  때는 두부주임이 조주임을 대신해 주임으로 승차한 뒤였다. 그런데 조주임과는 달리 두주임은 직원들과의 관계가 아주 좋았던 터, 일부 사무적인 일들은 오히려 규정 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난감했다. 이를테면 누가 지각하거나 휴가를 내거나 또는 조퇴하는 등 문제들을 규정 대로 처리하자니 너무 난처했던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서 누구는 언제 조퇴했소, 누군 지각했소 하며 일일이 따지고 들 때는 정말 머리가 터질 지경이였다. 해서 아예 그런 일은 상관하지 않기로, 보고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그러다 년말이 되여 선진일군을 선출하게 되자 소장이 두주임보고 출퇴근기록부를 가져오라고 했다. 이왕 같았으면 조주임이 그 기록부만 척 내놓으면 다들 아무 의견이 없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기록부에 아무런 기록도 없으니 누가 열심히 출근했고 누가 태만했는지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도 물러설 념을 않고 서로 자기가 선진으로 선출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다 나니 선거는 란장판이 되고 말았다. 소장이 붉으락푸르락하여 고개를 푹 떨군 채 입 닥치고 있는 두주임을 노려보다 말고 버럭 소리질렀다.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러자 두주임은 기다렸다는듯 소장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소장님, 우리 차라리 선진일군 장려제도를 취소하고 말죠!” 그에 소장이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마주보고만 있자니 두주임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일거량득일 거잖아요. 우리 연구소 지출도 줄이고 직원들 간에 경쟁할 일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직원들끼리 맨날 경쟁을 해봤자 각자 업무실력은 다 비슷하고 한데 절대적으로 누군 잘했고 누군 못했다고 평가한다는 게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소장이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한 얘긴지라 직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런저런 리유를 들어가며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 두주임이 그럼 직원들 골고루 돌아가며 그러니까 진급을 눈앞에 두었거나 상을 타게 될 직원들을 우선순으로 하고 다음은 선진에 당선되지 못한 직원들 순으로 돌아가면서 선진이 되는 건 어떠냐고 했다.  그 제안에는 찬성, 반대가 반반이였던 터, 소장이 그럼 거수표결로 결정하자고 했다. 결과적으로 두주임이 내놓은 방법이 비록 정당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다 선진에 당선될 기회가 있었으므로 해마다 몇몇 직원들한테만 기회가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에 그 제안은 결국 통과되였다.  그번 선거가 끝나자 두주임은 이제 더 이상 로동질서를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나누웠다. 소장이 그 까닭을 뻔히 알면서도 짐짓 왜냐고 물었더니 두주임은 그저 죽어라 도리질만 해댈 뿐이였다. 그 뒤로 사람들은 아침시간에는 복도에 서있다가 오후에는 각 부서 사무실에 불쑥불쑥 나타나곤 하는 소장을 종종 보게 되였고 직원들 모두 그 까닭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터, 멋대로 지각, 조퇴하는 일도 전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 소장의 감독방식은 조주임과는 전연 달라서 정말 예측불허였다. 조주임은 매일마다 감독했던 데 반해 소장은 며칠 가다 한번씩, 아무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분명 회의하러 갔다가도 퇴근 무렵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 때도 있었고 해서 그런 날 멋대로 자리를 비운 사람은 재수에 옴 붙은 날이였다.  그런 일이 루차 반복되자 사람들은 차츰 겁을 집어먹었고 정말 휴가를 내야 할 일이 있더라도 소장한테 청시할 념을 못했다. 월급 몇푼 깎이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소장의 눈에 나기라도 할가봐 저어되였던 것이다. 다해봤자 스물 남짓 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단체라지만 여타 큰 기관단체와 다를 바 없이 승직, 진급, 직함 따위를 통과하려면 우선 상급령도와의 관계부터 잘 처신해야 했으므로 괜한 일로 큰일을 그르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참 안 가서 지각, 조퇴 현상은 거의 근절되였고 직원들 모두 전에 없이 자각적으로 로동질서를 잘 지켰다.   다시 월말이 림박했고 결산을 마친 두주임은 소장을 찾아가 식당 재정 보조금을 달라고 했다. 그에 소장은 무척 당황한 모양,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였다. 사실 오래 전부터 소장에게는 누군가 돈 얘기만 꺼내면 어쩔 바를 모르고 쩔쩔 매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때는 이태 째 직원 로동보험금도 발급하지 못하고 난방비도 수년이 지나도록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무렵이였다. 게다가 홀몸인 녀직원은 난방비를 대주지 않는다는 규정까지 내왔던 터, 몇몇 리혼한 녀직원들은 성차별을 한다며 남녀평등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까놓고 말해서 이 연구소와 같은 작은 단체들이 재정난에 쪼들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겨울철 보일러 때는 석탄마저도 마음껏 들여오지 못하고 아껴 때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장은 서령감을 볼 때마다 석탄 좀 아껴 때라고 당부했고 서령감이 아껴 때느라 하면 사람들은 춥다고 아우성치며 서령감을 탓하기 일쑤였다. 해서 처음엔 묵묵부답, 그저 헤헤 웃어넘기던 서령감도 여기저기서 핀잔을 너무 듣고 나니 더 이상 못 참겠던 모양, 한번은 불만을 토로하고야 말았다. “에라, 못해먹겠네. 이 짓거리 집어치우면 차라리 방구라도 시원하게 뀌지. 이거라구야 원, 방구 한번 속시원히 못 뀌고 맨날 뀔락말락 뉘 눈치만 살피다 말게 생겼으니.” 그에 사람들이 거참 적절한 표현이라며 배를 끌어안고 웃으면 서령감은 못 알아먹을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게 뭐가 그리 웃긴다는 건지 모르겠다는듯 머룩머룩 사람들 얼굴만 쳐다보곤 했다.  애초부터 식당의 모든 지출은 줄곧 재정보조금으로 충당해온, 말하자면 직원들에 한한 일종 복리인 셈이였다. 재정형편이 넉넉한 단체라면 글쎄 있으나마나한 액수겠지만 이 연구소 같은 소규모 단체로 놓고 보면 식당에 들어가는 비용도 사실 적지 않은 지출이였다. 스무명 남짓이 식사하는데 한끼에 료리 한가지, 국 한가지 표준으로 치더라도 매달 천원 남짓 되는 액수였으니. 게다가 료리사 월급까지 꼬박꼬박 지급해야 했으니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일! 어쩌면 조주임 같은 비교상대만 없었더라도 그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쩜 소장은 영화 《백모녀》에 나오는 악덕지주 황세인 비슷한 존재였다. 조목조목 상세하게 기록한 장부를 한참이고 들여다보던 소장이 이윽고 탁 소리나게 장부책을 덮어버리면서 말했다. “조주임이 있을 땐 왜 항상 여유가 있었는데 자네 손에 가선 왜 항상 모자라기만 한 거지?”  그 말에 두주임은 폭탄이라도 맞은듯 한동안 귀가 먹먹해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마주앉은 그는 와락와락 주산알을 미친듯이 튕겨댔다. 저편에 앉아있던 출납이 눈치껏 밖으로 나가면서 10원짜리 한장을 두주임 책상 우에 올려놓더니 장회계가 반날 휴가를 맡으면서 내고 간 돈이라고 했다.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손동작을 멈추던 두주임이 그 지페를 움켜쥐고 곧장 소장을 찾아갔다.  “전에 조주임 때는 지각이나 조퇴, 또는 휴가를 내면 월급에서 깎아낸 돈을 전부 식당화식 비용으로 충당했지만 지금은 그 수입이 전무한 상태잖습니까!” 그 말에 소장은 웃도 울도 못하고 있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는 것도 같았다. 직원들이 지각, 조퇴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식당 화식비용이 모자란다는 건 참으로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런다고 직원들한테 지각, 조퇴를 선동할 순 없는 일!  아무래도 재정보조금을 내놓기 싫었던 소장은 두주임보고 직원들로부터 화식비용을 거두자고 부추겼다. 그러자 두주임이 펄쩍 뛰면서 이제껏 무상이다가 이제 와서 돈 내라면 자기만 죽일 놈이 될 게 아니냐고 했다.  그에 소장은 아무튼 재정보조금은 한푼도 건드리지 못하니 그리 알라고 잘라 말했다.  그 쯤 되자 두주임은 마지못해 화식비용을 거두어야 했다. 무상일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돈소리가 나오자 그것은 개인의 리익과 직접 관계되는 일이였으므로 지식인의 본새가 금방 드러났다. 저마다 불평조로 툴툴거리는 품이 누가 봤으면 몇십원이 아니라 수백, 수천원을 내놓으라고 하는 줄로 알았을 것이였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두주임이 절약할 줄 모른다는 둥, 과거 조주임이 있을 때는 매일 인원수를 확인한 뒤 인원수에 맞게 쌀을 저울에 떠서 안치곤 했는데 지금은 뭐든 눈대중으로 하다 보니 언제 봐도 음식이 남지 않으면 모자라곤 한다는 둥, 또 두주임은 료리사보고 묵은 밥이나 반찬을 이튿날 그대로 올리게 한다며 묵은 음식은 인체에 좋지 않아 자칫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둥, 서령감이 나올 때면 일부러 밥을 넉넉히 안치게 했다가 서령감을 먹인다는 둥, 요즘 들어 식당 화식은 점점 말이 아닌데 돈은 점점 모자란다 하니 그럼 그 돈은 대체 어딜 간 거냐는 둥… 아무튼 별별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 뒤공론은 어김없이 두주임 귀에까지 들어갔을 터, 그 며칠 동안 두주임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누르께한 얼굴에 잠 못 잔 사람처럼 부스스한 게 탈망살이에 빠진 사람 같았다.  조주임이 아닌 이상 조주임 방식으로 돈을 얻어올 수는 없는 일. 한동안 골머리를 앓는듯 싶던 두주임은 미구엔 뒤울안의 공터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뒤, 그 공터의 절반에 작은 창고까지 곁들여 임대 주기로 결정되였다. 합의서를 체결하던 날, 연구소에서는 여태 밀렸던 직원들의 난방비와 로동보험비를 한꺼번에 지불했다. 그에 무척 흡족해진 소장은 두주임을 창의적인 신형 인재라며 엄지를 내들었다.  다시 겨울이 오고 서령감이 출근해보니 그렇게 널직하던 뒤울안이 절반이나 뭉청 잘려져나가고 그것마저 보기 흉한 철제란간으로 분단돼있었다. 란간 저쪽에서는 털빛이 시커먼 개 한마리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개를 보고 있노라니 서령감은 자기도 개 한마리 있었으면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서령감네 마을 사람이 경운기를 툴툴거리며 개 한마리를 실어왔다.  누런 털빛의 그 개는 평범한 당지 똥개였는데 털빛이 눈부실 정도로 하르르하고 몸매가 늘씬했으며 눈과 코는 마치 황금조각상에 박힌 흑마노처럼 윤기 반들반들한 게 례사 똥개들보다는 뭐가 달라도 달라보였다. 무엇보다 누렁이는 눈치 빠르고 령리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놈은 앞쪽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 자기네 식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누군가 창문으로 이쪽을 내다보면 이쪽저쪽 신나게 뛰여다니며 재롱을 부리곤 했다. 그러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눈 덮인 뒤울안을 이리저리 뛰여다니는 놈은 마치 온통 은백색 세계를 굴러다니는 황금빛 요정처럼 생기 넘치고 눈뿌리가 즐거워졌다. 그 누렁이를 가장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두주임이였다. 어느 눈 내리던 저녁, 서령감이 잠잘 채비를 하다가 밖에서 개 짖는 소리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에 시계를 쳐다보니 8시가 넘은 시각이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하며 옷을 걸치고 나갔는데 철대문 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누렁이가 금세 짖음을 멈추더니 애교를 부리듯 끼잉~ 끄응~ 하며 간드라진 소리를 뽑아내는 것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두주임이였다. 문을 열어주면서 이 늦은 시간에 웬 일이냐고 물었더니 말없이 들어서던 두주임이 그 주위를 뱅뱅 맴도는 누렁이를 툭툭 치면서 그릇 하나 내놓으라고 했다. 보일러실에 들어가서 세수대야를 두주임 앞에 내밀었더니 두주임이 손에 들고 있던 비닐주머니에 든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부었다. 실내에는 대뜸 료리냄새가 진동했고 반대야 남짓 되는 그 음식물을 보면서 서령감은 다른 그릇을 내놓을 걸 하고 후회스러웠다. 그 세수대야는 접때 마누라가 엉덩이를 씻었던 건데… 그런 생각을 굴리는 중, 두주임은 벌써 문 열고 바깥에서 낑낑거리는 누렁이를 불러들였다. 벌써부터 냄새를 맡은 누렁이는 냉큼 달려들어 게걸스레 먹어대는 품이 세수대야 채 통채로 먹어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운 모양이였다.  “그러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천천히.” 두주임이 흐뭇한 눈길로 누렁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경을 지켜보다 말고 서령감은 까닭 없이 속이 알알해나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니미 젠장할.” 누렁이는 대야를 다시 씻을 필요도 없게 아주 깨끗이 먹어치웠다. 그에 두주임이 누렁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 이 놈이 령감님보다 더 깔끔한걸요.” 그 말에 서령감은 그저 헤헤 하고 헤식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누렁이는 서령감이 시샘할 정도로 두주임을 끔찍하게 따랐다. 해서 서령감은 오다가다 툭하면 누렁이를 발길질하곤 했는데 그것도 저녁이면 더 시름놓고 걷어차곤 했다. 개우리는 전에 조주임이 닭장을 세워놓았던 자리에 만들어놓았는데 그것도 두주임이 손수 만든 것으로 안에는 두툼한 솜을 깔고 그 우에 접때 말썽이던 그 현수막을 담요로 깔아두어서 누렁이가 그 우에 척 드러누우면 얼핏 봐선 시뻘건 피못에 드러누운 것 같았다. 해서 서령감도 오다가다 몇번이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십여년 전부터 불면증에 시달려온 서령감은 잠잘 때 무슨 인기척이나 미세한 소리가 들려도 머리 속에 사발시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재깍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주임이 있을 때는 닭들 때문에 고생이였는데 지금은 또 누렁이가 있어서 머리 밖에까지 사발시계 하나 있는 셈이라, 머리 안팎에서 쉼없이 재깍거리는 시계소리에 시달려 서령감은 두눈이 아주 등잔처럼 퀭해져있었다. 그 날도 잠 못 이루고 궁싯거리던 서령감은 화김에 습관처럼 누렁이를 걷어찼다. 까닭 없이 얻어맞은 놈이 끼잉끼잉 애처롭게 울며 꼬리를 사타구니에 가둬붙인 채 튕겨나가자 서령감은 기다렸던듯 이내 문을 닫아걸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몇참 안 지나 이번에는 바깥에서 문 허비는 소리가 온갖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이였다. 그동안 따스한 보일러실에서 잘버릇한 놈을 이제 다시 살을 에는 밤추위에 석탄더미에서 자라고 내쫓는다고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씩씩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선 서령감은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벌컥 문을 열고는 누렁이를 향해… 이튿날, 누렁이가 다리를 심하게 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서령감을 너무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었던 모양, 서령감을 사정없이 몰아세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격분한 두주임은 서령감 면전에 얼굴을 바투 들이대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그 서슬에 어마지두 놀란 서령감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살아서 머룩거릴 뿐이였다. 겨우 개 한마리 때문에 왜들 이렇게 란리법석인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것이였다. 하면 나 서모모가 개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나중에 일이지만 “당신들 눈엔 개가 무엇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개는 그냥 개고기일 뿐이다.”라는 게 서령감의 지론이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니였다. 장자도 왜 “세상 어디든 도道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동한 사상, 생존환경에 따라 생명의 의의도 각자 부동하기 마련. 과학연구소 직원들 눈에 비친 개는 소중한 생명이요, 존중이 필요한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서령감 눈에 비친 개는 그냥 배를 불리기 위한 고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그러니까 백정의 눈에 비친 돼지는 사지를 다 떠놓은 돼지고기일 뿐이요, 말 또한 사지를 떠놓은 말고기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는 커피로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리치일 것이다. 그런데 연구소 직원들은 이 같은 차이를 홀시하고 있었다. 이는 자칫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그들의 실책이였다. 그리고 분명한 건 사람들은 지금 서령감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였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 출납이 누렁이한테 고기뼈다구를 주려고 창문을 열고 누렁이를 찾다가 갑자기 누렁이를 무어라 불렀으면 좋을지 궁리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던 중, 새삼 서령감의 그 개고기리론이 떠올라서 “개고기야, 개고기!” 라고 불러보았다. 그러나 누렁이는 움쩍도 하지 않았고 해서 출납은 다시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다가 아무래도 서령감을 불러내야겠지 싶어서 “서령감, 일루 와봐요!”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서령감이란 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누렁이가 쫑드르 이쪽으로 뛰여오는 것이였다. 그에 장난기가 발동한 출납은 동료들보고 누렁이가 ‘서령감’이라고 불러주면 좋아하더라고 했다. 그렇게 그냥 장난으로 해본 소리였는데 후일 누렁이한테 먹거리를 던져줄 때면 사람들 모두 습관처럼 “서령감, 일루 와!”라고 부르게 되였다.   한편 사람들이 부르는 ‘서령감’이 자기가 아닌 누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서령감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이렇게 모욕해도 좋은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서러운 감정들이 욱 하고 치밀면서 과거 극력 억제해왔던 욕지거리들이 우르르 목구멍으로 튕겨나오는 것이였다. 그리고 누렁이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독기와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에 사람들은 서령감이 요즘 들어 너무 생소해졌다고, 너무 생소해서 과거 그 공손하고 친절하던 모습들 다 꾸민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서령감은 누렁이가 한창 단잠에 빠져있을 때, 보일러탱크 문을 열어젖히고 부지깽이로 불을 뒤적거려서는 누렁이 몸에 불꽃이 옮아붙게 한다던가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누렁이를 괴롭혔다. 그러다 한번은 이글거리는 석탄덩어리가 통채로 누렁이 몸에 떨어지는 바람에 누렁이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튕겨나가 밤새 낑낑 신음한 적도 있었다. 누렁이 몸에 커다란 화상 자국이 생긴 것을 본 사람들은 또 서령감을 한바탕 비난했지만 그런 비난 따위는 이제 서령감에게 씨도 먹혀들지 않았다. 내 개를 내가 어떻게 하든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무슨 생명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따위 개방구 같은 소린 됐다고 해라는 투였다. 그렇게 서령감은 누렁이 문제에서 자신의 완고불변의 개성을 여실히 과시해보였다. 그러던 하루는 누군가가 개가 그리 싫으면 팔아버리면 그만 아니냐고, 말 못하는 짐승을 그렇게 괴롭혀선 뭐 하느냐고 넌지시 뚱겨주었다.  그 말에 서령감은 크게 깨도되는 바가 있어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지난 며칠 동안, 누렁이는 서령감에게 정말 악몽 같은 존재였다. 놈 때문에 맘 편히 잘 수 없었을 뿐더러 여러 직원들과의 관계마저 껄끄럽게 되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서령감은 맞은편에 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서령감이 누렁이를 팔아버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 모두 서령감에게 그런 제안을 해준 사람을 질책했다. 그에 그 사람은 자기도 얼결에 해본 소린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며 이젠 정말 영낙없는 개고기가 되였구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소식을 들은 두주임이 서령감을 찾아가서 누렁이를 팔겠으면 자기한테 팔라고 했다. 그에 서령감이 두주임이 사겠다면 그저 드리겠노라고 하자 두주임은 자기가 사서 그냥 보일러실에서 기를 거라고, 대신 다시는 누렁이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그에 두주임을 멀거니 바라보고 섰던 서령감은 불현듯 울컥 화가 치밀며 얼굴근육이 심하게 구겨지는가 싶더니 울 때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입귀를 실룩거리며 말했다. “두주임이 가져다 기르겠다면 그냥 드리고 아니면 식당에 팔 겁니더.” 그것은 두주임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바, 참으로 주책머리 없고 귀찮은 령감탱이였다.  “내게 팔지 않을 거면 팔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시고 내가 팔지 못하게 할 거니까!” 그렇게 한마디 내뱉고 자리를 뜬 두주임은 곧장 식당 사장을 찾아갔다. 식당 사장은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 두주임의 비위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자칫 연구소 손님들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서령감이 다시 찾아오자 그는 두주임이 다녀갔다는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 쯤에서 두주임에 대한 울분은 과거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여태 마음속 깊이 억누르고만 있던 울화는 마침내 이글거리는 불길로 타번지기 시작했고 그 불길은 갈수록 점점 세차게 타올랐다.  사실 서령감은 성격이 꽤 거친 사람이였다. 걸핏하면 마누라며 아이들한테 손찌검질 하는가 하면 촌민들하고도 쩍하면 치고 박고 해서 마을 사람들 모두 서령감이라면 멀찌감치 피해다녔다. 지금 심정 같았으면 정말이지, 한바탕 치고 박고 싸우고 싶은 서령감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보일러가 고장났다.  몸소 뒤울안에 찾아온 소장이 서령감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서령감은 횡설수설하기만 할 뿐, 반나절이 지나도록 그 명백한 리유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초조해난 소장이 당신 뭐 해먹고 사는 인간이냐고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서령감으로서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한잠 자고 일어나 보니 그리 된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다고 곧이곧대로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그리 됐더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 그런데 소장한테까지 욕을 얻어먹고 나니 속이 부글거려서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았다. 누르고 눌렀던 울화가 이젠 딸꾹질처럼 목구멍까지 올라와 부글거려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한편 보일러가 고장나면 수리비가 들어야 할 것이였으므로 사실 소장도 화가 날 만도 했다. 다만 소장은 화김에 서령감의 립장을 홀시했던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 서령감이 불쑥 내뱉었다.  “그래요, 저 개보다도 못한 인간입니더!” 그 무렵, 서령감의 울분은 극에 달해있었다.  그 날 밤 꿈에 서령감은 바닥 가득 흥건히 고여있는 자기 피를 보았다. 난방기가 이제 막 끝나가고 있던 어느 날 오후, 두주임이 사람 몇명 대동하고 뒤울안으로 왔다. 그 사람들은 측량기구로 여기저기 재보기도 하고 도면도 그리고 하더니 마지막으로 보일러실까지 둘러보는 것이였다. 잠자코 구경만 하다 말고 서령감이 두주임보고 무얼 하는 거냐고 묻자 두주임이 심드렁한 투로 말했다.  “우리도 더 이상 보일러 땔 일 없게 됐시유. 이젠 집중난방을 한답니다.” 비로소 서령감은 보일러 개조란 보일러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개조해버린다는 뜻이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홀연 무언가가 가슴을 마구 휘저어놓는듯한 느낌과 함께 눈앞이 서리가 내린 것처럼 흐릿해졌다. 그렇게 사람들이 손짓발짓하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노라니 어느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가 싶더니 더 이상 귀에 들리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다만 저만치서 신나게 뛰여다니는 누렁이가 어슴푸레 보일 뿐이였다. 그런데 신나게 뛰여다니던 놈이 홀연 이쪽을 돌아보고 씨물씨물 웃는 것이였다! 어라, 저 놈이 시방 웃었어! 서령감은 곧추 식당을 찾아가 식칼과 바줄을 빌려왔다.  그리고 뒤울안에 말뚝 하나 세우고 거기에 쇠갈고리를 걸어놓고 그렇게 자기의 일솜씨를 남김없이 발휘해보일 모든 준비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그 날 오후, 뒤울안에서 들려오는 애처로운 개 비명소리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눈길 속에서 서령감은 목 매달고 껍질을 벗기는 등 일련의 도살과정을 일매지게 마무리했다. 시뻘건 피가 하얀 눈을 빨갛게 물들였고 서령감의 두눈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김견 옮김) 출처:2019제1호  
13    미주: 조선문 잡지 주문을 류보한다(칼럼) 댓글:  조회:438  추천:0  2019-07-08
조선문 잡지 주문을 류보한다   미주           요즈음 위챗 모멘트에는 2019년도 조선문 잡지를 주문해볼 것을 독려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나의 위친(위챗친구) 중에는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조선족 문학에 애정을 갖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이들은 누군가의 독촉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서 홍보에 열의를 다하는 것이다. 조선족 문학을 사랑하는 내 마음 또한 이들에 못지 않아 주문광고를 올리는 데는 동참하지만 정작 내 본인이 잡지를 주문할지를 두고서는 류보상태이다.    돈이 아까와 주문을 망설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1년치 잡지 가격이라고 해도 책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한국 학술도서 한권 가격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 언젠가 조선문 잡지 만드는 일을 하는 동창에게 너희 잡지를 팔아 남는 돈이 있냐고 우스개 소리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표정이 어두워진 그네의 얼굴빛에 그 답은 씌여져있었다. 쓰잘데기 없이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해주면서도 조선문 잡지를 사보지 않은 지 꽤 되였다.    십여년 전 조문학과를 다니던 학부 시절에는 길거리에 있는 잡지가게에서 조선문 잡지들을 사보았는데 말이다. 그 시절에 겪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내 자신을 잡지가게의 단골고객이라고 자부했던 것과 달리 그 잡지가게의 주인인 한족아주머니는 내가 주로 무슨 잡지를 사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한번은 《장백산》을 달라고 하니, ‘롼허软盒’를 달라는지 아니면 ‘잉허硬盒’를 달라는지 물어봤다.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흡사 빨간 휴지를 줄가 파란 휴지를 줄가 하는 귀신이 등장하는 화장실 괴담 같은 이 시츄에이션을 어떻게 리해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혹시 잡지가 이제는 커버가 다른 두가지 버전으로 출판되는 건가? 머리 속에 커다란 의문부호를 걸고 그것이 무슨 얘기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장백산표 담배를 사려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흡연을 두고서 무조건 불량한 자의 이미지와 련결지어 생각하던 나인지라 내가 어딜 봐서 흡연자인 것 같냐는 항변을 하지 못하고는 담배 말고 잡지를 달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담배 피는 녀자’로 보이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깨우침이 찾아왔다. 아, 잡지에 대한 수요가 동명의 담배에 미치지 못하니 판매자 립장에서는 담배가 먼저 떠오를 수 있겠구나 하고.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조선문 잡지 구매자로 살아가다가 집을 이사하게 되였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갖고 가지 않고 버려야 할 물건도 정해야 하는 일이였다. 무거운 책짐은 몇박스가 되였고 가족들은 ‘다 본 책’들은 버릴 것을 권했다. 결국 류비가 아두를 들어메치는 것과 같은 착잡한 심정으로 버린 것은 그동안 애지중지 사서 모은 조선문 잡지였다.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지속되여왔다.   취사선택에 있어 단행본 도서들과 달리 잡지는 ‘함부로 던져도 될 책’으로 취급하게 된다. 이러한 ‘편애’의 발생은 잡지는 천성적으로 ‘한번 보며는 그만’인 ‘경전반렬’에 오르지 못하는 인쇄품이라는 편견을 갖게 하는 인쇄물이기 때문이다. ‘일반독자’에 상정하여 잡지의 지위는 대략 이러할 거다. 그러나 나는 명색이 문학연구자이고 조선문 문학작품들을 나의 잠정적 연구텍스트로 간주한다. 그러니 조선문 잡지는 나에게 한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조선문 잡지를 주문함으로써 내 미래의 연구를 위한 재테크를 하지 않는 ‘변명’을 해본다면 보관하기가 불편해서이다. 타국에서 박사과정에 다니는 중인지라 중국에서 출판되는 잡지들을 국제택배로 받아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택배비를 고려할 때 애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다. 주문해서 고향 집에 모아둘 생각도 해보았지만 내가 향후에 정착할 곳이 어디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잡지들을 다시 옮길 일도 고역일 것 같았다. ‘신중한’ 고민들 끝에 나는 ‘나쁜 실용주의자’로 전락되였고 조선문 잡지들을 주문하지 않았었다.    한술 더 떠서 ‘궤변’을 늘여놓는다면 비록 잡지를 주문하지 않지만 위챗계정에 올라오는 조선문 잡지에 실렸던 글들은 빠짐없이 읽고 즐겨찾기에 추가해둔다. 사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유의미하다고 출판시장 발전에는 불리한 ‘어거지’를 도둑질해서라도 책소유에 집착을 보이는 공을기보다는 내가 좀 났네 하는 심정으로 부려보는 바이다. 위챗 인기가 시들해져 어느 날 갑자기 해당 콘텐츠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가끔씩 든다.    조선문 잡지를 주문하지 않은 탓에 연구텍스트로 보고저 하는 작품이 실린 잡지가 수중에 없어 애달플 때가 종종 있다. 다행히도 출판계통에 종사하는 지인들을 둔 덕분에 구해볼 수 있는 루트를 수시로 ‘개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문 잡지를 구하는 그 길이 수월하지 않은 것이 설령 해당 잡지사라고 해도 출간되였던 모든 잡지들을 빠짐없이 보관할 정도로 보관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였다. 또 구하고저 하는 잡지의 관계자 분들 중에 지인이 없을 때에는 명망 없는 일개 박사생인 나로서 입을 떼기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론문을 씀에 있어 가끔 연구자료로 활용하고저 하는 글들 대다수가 근년에 나온 작품이 아닌 2000년대 이전 혹은 초반에 나온 조선문 잡지에 실린 것이다. 해당 시기에 출판된 잡지들은 내가 다니는 한국 대학의 도서관에서 한호도 빠짐없이 서울출판사에 출판된 하드커버를 씌운 영인본으로 보관되여있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조선문 잡지를 구함에 있어 지인들의 신세를 조금이나마 적게 질 수 있으니 마음의 무거움을 덜 수 있었다. 커버에 금빛 글씨까지 박아넣은 도서관의 소장본 잡지들을 볼 때마다 내 미래의 책장에 년도별로 묶은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진 조선문 잡지들이 진렬되였으면 하는 욕심을 내게 된다.    ‘신생사물’을 보고 기분이 들떠 조선문 잡지들을 묶음용으로는 출판하지 않냐는 문의를 하기에는 기한에 맞춰 얼마 안되는 인력으로 조선문 잡지를 발간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을 것임을 먼저 떠올려볼 때, 메아리처럼 회음을 기대할 수 없는 혼자말이 될 것 같아 내뱉기를 꺼리게 된다.    잡지를 주문하지 않으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이 참으로 고약한 짓임을 나도 뻔히 잘 안다. 나쁜 사람을 자처한 바 하고는 몇마디 더하고 싶다. 조선족 인구 전체를 잠재적 독자군으로 상정하고 추측을 해보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도서 소비시장이 형성되기는 어렵다.    경제적 가치 생성 여부만을 따져볼 때 ‘돈값 못’하는 ‘존재’들은 아웃될 것을 권고받게 된다. 그러나 인문학이라고 하는 령역을 두고 경제적인 실용성만을 갖고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조선문 출판물들이 많이 출간되지 못하는 ‘난임’을 앓는 출판구조에서 조선문 잡지들은 그야말로 손이 귀한 집안의 귀하디 귀한 ‘자식’들이다. 미래적 가치를 따져볼 때 문학작품은 후세에 전해져야 할 한 시대의 실존에 대한 기록이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서 잡지들도 데이터 베이스화되고 있다. 책 한권 크기 만한 경량의 태블릿 pc에 어마어마한 량의 책들이 담겨져있고 독자들은 가뿐하게 이를 하나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독서를 즐긴다. 설령 구매기간을 놓친 오래전의 잡지라 하더라도 온라인으로 구매하여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조선문 잡지에는 전자책으로서의 소비구독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사를 할 때마다 페기대상 1호로 생각하면서 잡지들을 주문하고 품에 죄다 끌어안기에는 그 잡지들 미래의 거처를 두고 견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 자꾸만 이동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주형태에서는 종이로 된 잡지 보관이 용이하지 않다. 유목민처럼 사는 사람이 어디 나 뿐이랴. 어쩌다 보니 잡지와 나는 상부상조하면서 오손도손 살지 못하게 되였다.   ‘우리’의 긴밀한 관계 구축을 다시 형성하기 위해서는 태블릿 pc에 전자화된 조선문 잡지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날이 빨리 옴으로써 더 이상 종이로 된 잡지를 놓고 보관이 불편하다는 리유로 주문할지 말지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될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곡하게 희망할 뿐이다.    추억을 더듬어보니 조선문 잡지의 데이터 베이스화는 갑자기 떠오른 구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바라오던 숙원이다.   출처:2019 제1호  
12    신조: 작은 방(단편소설) 댓글:  조회:467  추천:0  2019-07-08
작은 방   신조           문밖의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준이는 눈을 떴다. 두터운 흑갈색 카텐과 창문 사이의 얼마 안되는 틈으로 해빛이 꾸역꾸역 방안으로 기여들어오고 있었고 흐릿하던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모여들면서 방안 정경이 하나 둘 눈망울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준이가 누워있는 2인용 침대 그리고 침대 왼쪽에는 노트북과 갖가지 배달용 전단지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작은 책상이 보였고 그 밑으로는 책가방이 걸려있는 걸상 하나가 빠금히 뒤태를 보이고 있었다. 침대 오른쪽에는 나무로 된 량문형의 큼지막한 옷장 하나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천으로 된 간이옷장 하나가 나무옷장과 출입문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출입문을 열면 금세 부딪칠 것만 같이 위태해 보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로도 모자라 이제는 쏴- 하는 물소리까지 고요한 준이의 방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준이의 방과 함께 북쪽에 붙어있는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다. 그리고 이 소리가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준이는 귀찮다는 얼굴로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10평방 남짓한 이 방에 오게 된 지도 벌써 석달여,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였다. 준이가 살고 있는 집은 원래 남향의 방 2개와 서재용으로도 볼 수 있는 북향의 방 1개를 가지고 있는 3방 1거실의 90평방이 조금 넘는 25층 아빠트의 9층에 위치한 집이였다. 하지만 집주인이 거실을 막아 방을 하나 더 만들다 보니 집은 거실이 없는 4방짜리 아빠트로 바뀌였고 준이는 그중 북향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북 방향으로 되여있는 이 집은 서쪽에 문이 있고 문에 들어서서 오른손 편에 거실을 변형시켜 만든 방에는 동년배 조선족 녀자 두명이, 그리고 바로 그 옆의 작은 방에는 입주한 이래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조선족 남자 한명이 살고 있었고 그 옆의 화장실이 달린 큰 방에는 한족 커플이 살고 있었다. 남쪽의 거실이 막힌 데다 북쪽에 유일하게 남은 베란다마저 빨래가 빼곡이 걸려있어 집안은 늘 어두컴컴했다.    조선족 녀자 두명은 늘 아침 8시 쯤에 집을 나가 저녁 7시 쯤에 귀가를 하는 평범하면서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고 조선족 남자는 아침 8시 30분 쯤에 집을 나가 저녁 10시 쯤에 귀가하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며 한족 커플은 저녁 6시 정도에 집을 나가 새벽 2시가 넘어 귀가를 하고는 11시 좌우에 기상하는 결코 평범해보이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석달이 넘는 백수생활이 알려준 집안의 기본정보를 리용하여 준이는 그들과 거의 마주치지 않는 생활을 해왔고 사실상 별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원래 준이가 살던 집은 여기가 아니였다. 시중심은 아니지만 그동안 준이는 꽤나 괜찮은 지역의 2인1실의 집에서 합숙하면서 나름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녀자친구가 편히 놀러 올 수 있게 혼자 집을 잡고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사실 월급의 반 가까이 월세로 나가는 것을 고려하면 그 집도 준이에게는 사치라면 사치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녀자친구가 놀러 오면 금요일, 토요일 이틀씩은 준이네에게서 편히 쉬고 갈 수 있다는 것과 회사가 도보로 15분 거리라는 것이 위로 아닌 위로였다.        “미안해, 준이씨.”   열심히 일했던 직원에게 퇴사통보를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 아쉬워서인지 판단이 안되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사장님이 귀퉁이에 김준이라는 이름이 씌여있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던 것이 석달 전의 일이였다.    그동안 몸이 아파도 이를 악물며 출근을 견지하고 어떻게든 회사에 보탬이 되고저 했던 하루하루를 통하여 준이는 어느 정도 감이 왔다. 이 회사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준이는 이 회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벌써 회사를 몇번이나 옮겨다니며 겨우 잡은 기회였다. 단지 돈벌이 수단이 아닌 커리어를 쌓기 위한 미래에 대한 투자였었는데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겨우 반년이 고작이였다.    돈봉투를 건네는 사장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회사의 모든 직원이 며칠간 밤을 새면서 준비한 계약이 무산되는 순간 지금의 이 자리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자리가 되여버렸다. 준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였다. 이 회사에서의 경력 그리고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만큼의 시간, 어렵게 잡은 기회였건만 그것도 이젠 여기까지인 것이다. 그래서 준이는 사장님이 부를 때 이 방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 벌써 준이 먼저 몇명이 사장실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나왔다. 몇 안되는 직원이 벌써 반이 넘게 사장실을 오갔다. 저기에서 어떤 말들이 오갔을지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준이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최소한 너는 남아달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례외는 없었다. 결국 준이는 사장님과 마주앉게 되였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이는 자신을 향해 내민 그 봉투에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봉투를 반납하는 대신 조금만 이 회사에 머물게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욕심이라는 생각에 준이는 저도 몰래 눈물이 났다. 어떻게 통과한 면접인데,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겨우 잡은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 달 급여에 조금 더 넣었어. 알다 싶이 더 이상 회사운영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아. 이 돈이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하루라도 빨리 안정적인 회사 찾기 바란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준이는 그런 사장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돈이 아니였다. 원하는 것이 돈이였다면 준이는 스쳐갔던 그 몇몇 회사들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회사에서 받는 월급보다 훨씬 나은 혜택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준이는 그 회사들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지금의 이 회사를 선택했다. 도무지 맞지 않는 적성에 매일매일을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준이는 감당할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두번의 업종변경과 일곱번의 직장이동을 경험했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이 좋아할 수 있고 견지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힘들게 들어온 회사인데 하필…   “아무런 경험도 없는 저를 받아주시고 가르쳐주셔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준이는 봉투를 꽈악 움켜쥐고 사장실을 나섰다. 자리에 돌아온 준이는 컴퓨터에 있던 자료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갔다. 그리고 혹시라도 남았을 자신의 개인정보를 삭제하기 위하여 드라이브 하나하나를 포맷하기 시작했다. 포맷 완료를 기다리면서 준이는 그사이 정이 무척이나 들어버린 사무실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었다. 때가 가득 낀 중고랭장고, 쩍하면 고장이 나 모두를 곤욕에 빠뜨렸던 구식 프린터,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라는 사훈과 함께 계획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벽, “지성이 곧 경쟁력이다”라는 의념하에 조금씩 채워가던 책장, 고물 책상과 의자, 밥상 겸 회의용 탁자였던 거무틱틱한 타원형 회의용 책상 우에 어지러이 널려진 서류들까지… 준이는 지난 반년간의 체취 하나하나가 묻어있는 이 50평방 남짓한 사무실과 서서히 리별을 준비해야만 했다.        문이 두개나 닫혀있는 데도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쏴- 하는 소리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한여름이라 땀이 많이 난다고 하지만 아침 출근시간에 샤워를 하는 것도 모자라 공용화장실을 30분 넘게 리용하는 것은 사실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백수생활을 하는 준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속되는 물소리와 함께 며칠 전 그 일이 떠오르면서 한창 젊은 나이의 준이 몸에 금세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짜증이 나버린 준이는 베고 있던 베개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속으로 젠장을 련발했다.        며칠 전 아침이였다. 합숙인들이 집을 비우기 전에는 거의 자신의 방을 나서지 않던 준이가 방을 나서게 된 건 지나치게 부지런한 택배아저씨 때문이였다. 전화소리에 잠을 깬 준이는 대충 옷을 걸쳐입고 까치둥지머리를 손볼 여유도 없이 살금살금 자신의 방에서 나와 1층까지 내려가 택배를 받았다. 엘레베터에서 주민들의 힐끔거리는 눈길을 온몸으로 받으며 준이는 속으로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온 택배아저씨와 고장나버린 벨을 저주했다. 빼앗듯이 받아든 택배를 가지고 다시 조용조용 자신의 방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준이는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그리고 눈길이 문을 연 이가 아닌 그 뒤의 사람에게로 이동해감과 동시에 이른아침의 적막을 산산히 부셔버리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팬티만 입고 있던 녀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두팔로 가슴을 가리며 그대로 주저앉는 녀자를 뒤로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던 녀자가 급히 뛰쳐나오며 문을 거세게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또 한번 집안을 뒤흔들었다.    “화장실 앞에서 뭐 하는 거야!”   거침없는 반말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준이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 녀자의 속사포 같은 욕설이 뒤를 이었다.    “사람이 있는 화장실을 기웃거리다니. 너 변태야? 어? 무슨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생긴 것도 돼지처럼 생겨가지고 감히 이런 변태 짓거리를 하다니.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야! 어?”   “난 그냥 택배…”   그 녀자는 도무지 준이의 말을 들어볼 념을 안하면서 계속해서 듣기 거북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쯤 되니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여버렸다. 제일 먼저 그동안 본 적이 없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고 그 뒤를 이어 한족 커플이 나왔지만 그들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런지 그냥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물론 자신들의 단잠을 깨웠다는 짜증을 얼굴에 그대로 달고 말이다. 그들의 등장으로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녀자의 욕설이 겨우 멈췄다. 준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저기요. 저는 다만 택배 받으러 나갔다가 지금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닙니다.”   “그 말을 지금 나 보고 믿으라고? 뭘로 증명할 건데?”   “금방 누군가 밖에 나갔다 온 건 맞는 것 같은데…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아침에 화장실을 너무 오래 쓰는 건 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소리 때문에 화장실에 있던 녀자들은 듣지 못했지만 방에 있었던 앞방 남자는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조용히 한마디 거들었다. 얼마 전 화장실을 오래 쓰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언성이 높았던 적이 있은 건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그 때 방안에서 듣기만 할 뿐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준이도 불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갑자기 배가 너무나 아픈데 도무지 비여지지 않는 화장실로 인해 방안 휴지통에서 급한 일을 해결한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변태라는 락인이 찍히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조선족 바닥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 집을 벗어난다고 해서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네. 저는 택배를 받아가지고 방으로 가던 길이였습니다. 진짭니다. 갑자기 화장실 문이 확 열려서 너무 놀라서 멈춰섰을 뿐 절대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닙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놀래우려고 했던 건 진짜 아니였는데…”   서둘러 사과까지 한 준이는 조심스럽게 그 녀자의 반응을 살폈다. 한참 씩씩거리던 녀자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자신의 방을 향해 걸어가면서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 바로 신고해버릴 테니까.”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개자식이라는 소리를 언뜻 들은 것 같았지만 준이는 개의치 않고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쿵쿵 뛰였다. 차라리 큰소리를 내면서 나갔다 올걸, 차라리 같이 욕이라도 해줄걸 하는 생각들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였다. 준이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앞방에 살고 있던 남자까지 출근을 해버리자 집은 또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녁이 되자 녀자들이 어김없이 귀가를 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지 주방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그녀들이 하는 대화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조용한 준이의 방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조심해야 돼. 남자들도 있는 집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니까.”   “그러게 말야. 아침에 놀란 걸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진정이 안된다니까.”   분명 준이에게 들으라고 하는 날 선 말이였고 준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이를 악물고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닌 것이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다. 녀자와 싸워봐야 남는 것도 없다는 생각만 머리 속을 온통 지배했다. 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그 작은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준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 작은 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였다. 꽈악 움켜쥔 주먹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앞방 남자까지 귀가를 하고 집에는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준이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아침의 그 소동이 떠오르면서 그 녀자의 욕설이 귀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준이는 결국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주방으로 가 랭장고문을 열고 자신의 캔맥주를 모조리 꺼내왔다. 마른 명태도 몇마리 있었지만 한가롭게 그걸 뜯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 책상에 앉자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요동을 치며 식도를 지나 텅 빈 위장을 헤집고 다녔다. 그제서야 끓어오르던 화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래. 참자, 참아. 이미 밟아버린 똥 어쩔 수도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구해 이 방구석을 벗어나야지. 더러워서 원.”   준이는 입속으로 낮게 되뇌이며 부지런히 맥주를 위안에 쑤셔넣었다. 비여가는 캔이 점점 많아질수록 준이도 서서히 취기를 느꼈다. 저녁을 걸러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꼭 어울리는 하나 밖에 없는 작은 창을 통해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다되였는데도 길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경주하듯이 달리고 있었다. 저들은 누군가가 기다리기에 저리도 분주하게 달리는 거겠지,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기에 돌아가는 길이 저리도 당당한 거겠지… 준이는 갑자기 녀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그 작은 품에 안겨 괜찮다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이렇게 힘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술기운 때문이였을가? 준이는 갑자기 녀자친구를 안고 싶어졌다. 몸은 점점 달아올랐고 도저히 주체가 되지 않았다. 결국 준이는 노트북을 열어 성인영화를 틀어놓고 마스터베이션을 했다. 홀로인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끔 있는 일이였고 또 익숙한 일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떠오른 얼굴은 녀자친구가 아닌 아침에 보았던 그 녀자들이였다. 뽀얀 살결과 탐스러운 가슴, 잘록한 허리와 미끈한 다리, 손바닥 만한 팬티에 은근히 비치던 검은 숲 그리고 자신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던 녀자의 반팔티에 가려졌으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알리던 볼록한 돌기 두개… 온몸 구석구석을 휘감아치던 희열이 절정을 지나 서서히 잦아들 때까지도 준이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녀들 생각 뿐이였다. 하지만 작은 방에 또다시 적막이 찾아오자 준이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그녀의 욕설에 화조차 내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했으며 화장실 사용 문제로 당당하게 말하던 앞방 남자와는 달리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과 비교되면서 더더욱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이 와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욕망에 몸부림치는 이 배알 없는 몸뚱이도 저주스러웠다. 준이는 결국 그 날 밤 모든 맥주를 마셔버리고는 치우지도 못한 채 침대에 쓰러졌다.        직장을 잃은 첫 몇주는 그나마 괜찮았다. 이곳저곳 리력서도 보내고 그동안 시간이 없어 밀렸던 애니메이션도 밤을 새우면서 보았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녀자친구와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준이는 포서에, 녀자친구는 포동에 살고 있었다. 거리가 먼 탓에 주말에만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모자라 그동안 주말마저 반납하고 일한 탓에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매일이다 싶이 하던 전화는 한주일에 한번으로 바뀌였고 주말마다 하던 데이트도 한달에 한두번으로 줄어들었다. 출근이라는 좋은 핑게거리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렇게 힘들게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그런 준이였기에 녀자친구와 수시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방 하나 달랑 있는 집에서 친구랑 같이 살고 있었기에 준이는 그녀의 집에서 머무를 수가 없었고 시간이 늦어지면 호텔을 잡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호텔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고 그녀와 데이트를 하고 두시간이 넘는 시간을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고역이였다. 편해지면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던 생각은 허황된 상상일 뿐이였다.    포동에서 회사를 구해 그리로 이사를 가는 것, 그것이 준이의 다음 목표로 되였다.    전공은 별로였지만 준이가 졸업한 대학은 번듯했다. 다녔던 대학이 있던 도시에서는 그래도 나름 알아주는 학교였고 그 학교 졸업생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었다. 남자가 어찌 좁디좁은 웅뎅이에서 살 수 있냐며 더욱 큰 도시에서 보란듯이 성공하겠다며 다니던 회사를 뒤로하고 객기를 부리면서 찾아왔던 이곳, 상해는 결국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름 중점대학이라는 곳을 졸업했지만 이 도시에는 그보다 뛰여난 학교들이 수두룩했고 졸업장 하나만을 믿고 뛰여들기에는 상해라는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피 튀기는 치렬한 경쟁, 졸업을 했던 도시에서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돌멩이를 던져서 맞히는 사람들 중 십중팔구는 명문대 졸업생이였고 그중 절반은 류학파였다. 작은 도시의 중점대학에, 거기에 보잘 것 없는 전공으로는 그야말로 명함을 내밀기도 쑥스러울 지경이였다.    준이는 거의 매일이다 싶이 모든 구직사이트를 뒤지면서 관련 업종이 보이는 족족 리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이 보낸 리력서가 통과된 곳은 겨우 세곳, 그마저도 두곳은 준이의 관련 경력이 별로 없어 어려울 것 같다는 뉘앙스를 면접을 보는 내내 은근슬쩍 흘려댔다. 마지막으로 면접을 봤던 회사는 경력을 보지 않는다고 하여 은근히 기대를 하고 갔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빈번하게 바꿔온 직장, 이런 저런 리유를 댔지만 면접관의 얼굴은 굳어있었으며 별로 볼 것도 없는 리력서를 신경질적으로 번져가면서 몇번이고 보고 또 봤다. 준이에게는 별로 눈길도 안 주면서 말이다. 면접실을 나오는 순간까지도 면접 볼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인사치례로 하긴 했지만 준이의 속은 편치 않았다. 한편으로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직장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준이는 머리를 휘저어 불길함을 쫓아내려고 애썼다.        “어째 배가 더 나온 것 같다. 오빠 요즘 전혀 운동 안하지?”   오랜만에 놀러 온 녀자친구가 준이의 아래우를 훑어보며 눈살을 찌프렸다. 그런 그녀에게 준이는 허허 웃어버렸다.    “좀 바빴어. 나도 나름 먹고 살려고 열심히 하다 보니.”   “아무리 바빠도 운동 좀 해. 출근할 때야 바쁘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요새는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여유를 낼 수 있잖아.”   “알았어. 헬스장은 좀 그러니까 가끔 나가서 뛸게.”   준이의 말에 녀자친구는 활짝 웃어보이며 아직까지 걷어내지 않은 두터운 카텐을 열어젖히고는 준이의 침대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면서 눈길은 책상 우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배달전단지에 가 멈췄다.    “귀찮아도 집에서 밥 좀 해먹지. 맨날 시켜먹으면 몸에 안 좋잖아.”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너가 해주는 밥 먹으면 되지. 그 때까지는 참을란다.”   피식 웃으며 언제나 그리 될지 하면서 넉두리를 하던 그녀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얘기해주었고 준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련애한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작은 키에 평범한 외모, 통통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또 뭐든 열심히 하는 온천한 스타일이였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녀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진가가 서서히 빛을 발했다. 자신 스스로도 열심히 사는 사람이였지만 자신의 주위 사람들한테도 그 열정을 나눠줄 줄 아는 녀자였다. 준이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왜냐하면 대화의 끝은 늘 준이가 외면하고 싶은 화제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오빠. 이젠 아무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일을 그만둔 지 벌써 반년이 돼가. 나 너무 걱정돼. ”   “네 눈에는 내가 놀고 있는 것으로 보여? 나도 나름 일자리 구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안 그래도 일이 안 풀려서 짜증 나는데 볼 때마다 꼭 이래야 돼?”   듣기 좋은 말도 세번 들으면 질리는 법이다. 하물며 자신의 아픈 부분을 만날 때마다 얘기하는 녀자친구의 말이 이쁘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조곤조곤한 그녀의 말투에 결국 준이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런 그에게 녀자친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나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 한다고, 하고 있잖아.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너랑 같이 살려고 포동 쪽에 일자리도 찾고 있어. 그런데 잘 안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오빠 지금 그게 말이나 돼? 아직도 하고 싶은 일 타령이야? 오빠 그러다 진짜 길 바닥에 나앉을 수 있다고. 일단 아무 일이나 하면서 생활하는 게 우선 아니야? 일단 정기적인 수입이라도 있어야 오빠가 하고 싶은 일을 구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구?”   “수입은 걱정 마. 안 그래도 요즘 아르바이트로 번역일을 구해놨어. 일을 마치면 적어도 2만원은 받을 수 있어. 그 정도면 한동안 버틸 수 있으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준이의 말에 녀자친구는 전혀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대화를 하는 내내 작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하, 오빠, 진짜… 그건 말 그대로 아르바이트야. 오빠가 무슨 프리랜서야? 그런 불안정한 거로는 안된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내가 남이야? 그건 그렇고. 저번에 내가 리력서 보내보라는 데는 보냈어?”   준이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버렸다. 영어 6급, 관련 직종 경력 최소 2년… 준이가 유일하게 한국말을 류창하게 할 수 있는 조선족이라는 것 외에는 회사가 원하는 자격 중 어느 하나 부합되는 것이 없었다. 눈빛을 피하는 준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녀자친구가 채근을 시작했다.    “설마 진짜 안 보낸 거야? 대체 왜 그러는데?”   “얘기했잖아. 거기는 조건이…”   “꼭 그런 것이 아니래두 그러네 진짜. 그리고 오빠 경력으로는 웬만한 회사는 조건 만족시키기 어려워. 되든 말든 일단 리력서라도 넣어보라니까.”   “됐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 맨날 오빠 걱정하는 내 생각은 안하는 거야?”   “한번으로 끝내자. 어차피 얘기 길어져봤자 답이 없는 건 너도 알잖아.”   준이는 마주보고 있던 그녀를 외면한 채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확 열어젖히고는 담배 한대를 빼여물었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준이식 의사표현이였다. 그걸 모를 녀자친구도 아니였다. 결국 녀자친구는 그 길로 준이의 작은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랜만에 왔는데 자고 가라는 얘기를 준이는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돌아선 등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각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어 쾅 하는 문소리에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홀연 가슴에서 무언가 새나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은 방에 언제는 홀로가 아니였던 것처럼 갑자기 허전함이 찾아왔다. 그렇게 작았던 방이 오늘따라 어쩐지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준이는 한참이나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요즘 들어 준이의 일과는 단순했다. 잠에서 깨여나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다양한 구직사이트를 훑으며 리력서를 넣는 일과 이젠 떨어질 대로 떨어져 기사회생할 가망조차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식과 펀드상황을 살피는 일과 길어질 대로 길어져버린 하루하루를 한숨으로 흘려보내는 일이였다. 그나마 번역일이라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 준이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였다. 며칠 전 석달치 월세인 5000이 넘는 거금이 통장을 빠져나갔다. 백수가 된 지 반년, 드디여 준이의 통장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름 아껴쓴다고 해도 다달이 빠져나가는 식비와 생활비는 도저히 줄일래야 줄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술과 담배값까지 소소하게 나가다 보니 얼마 안되는 잔고가 결국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준이는 녀자친구와 가끔 통화를 할 뿐 만나자는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호텔비는 고사하고 데이트 비용까지 줄여야 했던 준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였다. 그렇다고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거나 그녀한테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차라리 안 만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준이는 지금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비가 들어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남은 돈으로 그 때까지만 잘 나눠쓰면 또 반년은 버틸 수가 있다, 그 사이에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 준이의 머리 속에는 온통 그 생각 뿐이였다.       라면 하나를 끓여먹고 또다시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전화가 울렸다. 혹시 하는 생각에 급히 휴대폰을 집어들었지만 기다리던 면접전화가 아닌 친구 호석이의 이름이 액정에 찍혀있었다. 얼굴을 찡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던 준이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응, 호석아. 잘 지내고 있지?”   “요! 브로. 나야 늘 잘 지내고 있지. 그런데 우리 브로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야 늘 그렇지. 한동안 잠잠하더니 무슨 일이냐?”   “육아에 바빠 도통 시간이 나야 말이지.”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호석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육아?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든 준이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를 속으로 되뇌였지만 설마는 역시나 사람을 잡았다. 호석이네 공주님이 다음주 토요일에 첫돌 생일을 쇤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꼭 오라는 얘기를 몇번이나 강조했다. 축의금 같은 건 필요없으니 그냥 오면 된다, 그래도 아이의 첫돌 생일인데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준이는 어쩔 수 없이 그러마 하고 통화를 끝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호석이의 그 한마디는 웃는 얼굴로 돌멩이를 쥐여준 격이 되여버렸다. 준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들어 통장 잔고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편으로는 머리 속으로 돌잔치 축의금을 내면 번역비가 들어올 때까지 하루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 빠른 속도로 계산해봤다. 답이 없었다. 입에서 또다시 긴 한숨이 새여나왔다. 호석이는 몇 안되는 친구였다. 그리고 상해에 처음 왔을 때 물심량면으로 준이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호석이에게 그 날 일이 있다고 참여가 힘들다는 얘기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 것을 빤히 알고 있기에 축의금 같은 건 필요없다고 얘기를 한 것일 테지만 준이는 그런 호석이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자리에 빈손으로 가기에는 준이의 그 얄팍한 자존심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이는 라면그릇도 치우지 않은 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불쌍한 머리칼을 쥐여뜯었다. 아직까지 쳐져있던 카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작은 방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만 같았다.       무정한 시간은 단 1분 1초도 기다려주지 않고 느긋하게 흘러갔고 결국 호석이네 공주님 첫돌 생일날이 되였다. 느긋하게 잠에서 깬 준이도 슬슬 외출준비를 서둘렀다. 집을 나서는 준이의 기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사람 죽어라는 법은 없는지 다행히 주말에 통역일이 생기는 바람에 1600원이라는 생각지 못한 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준이는 오랜만에 사우나에 가서 묵은 때도 벗겨냈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물론 그건 준이만의 생각이였다. 오랜만에 찾아 입은 셔츠는 불어날 대로 불어난 준이의 몸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금방이라도 터질듯 빵빵하고 셔츠가 벌려지지 않도록 불안불안하게 잡고 있는 단추들은 위태로워보이기만 했다.    “살을 빼기는 빼야겠구나.”   준이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올라선 체중계를 보면서 준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173cm의 준이가 어느새 110키로가 넘어갔다는 것은 스스로도 몰랐다. 날씬하지는 않았어도 비게가 출렁이지는 않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여있었다. 한달 가까이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뭘 자꾸 주어먹었더니 그것이 모조리 살로 갔나 보다. 물론 그동안 출근을 하면서 잦아진 야근 때문이 더욱 컸겠지만 준이는 그것마저 의식하지 못했다. 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동안은 말로만 한다한다 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조차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자각했기 때문이다.    식장에 도착할 때 즈음 준이는 땀으로 샤워를 한 것만 같았고 어느새 속옷도 축축히 젖은 것 같았다. 뻐스를 타고 왔기에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날씨가 무덥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식장의 1층 로비에서 한참이나 땀을 들이고서야 준이는 식장으로 이동했다.    돌잔치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해주었고 준이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몇달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했다는 포만감이였다. 집으로 들어가 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술은 자제를 했던 터라 오히려 음식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돌잔치가 마무리되자마자 귀가를 하려던 준이를 친구들이 잡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까지 신나게 달리자. 주말인데 급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   “그래. 어차피 노래방도 잡아놨으니 오랜만에 한곡 뽑아야지?”   호석이까지 만류하고 나섰고 다른 친구들은 준이가 백수가 된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호석이에게 준이는 왠지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준이도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인지 그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버렸다. 오케이 싸인을 보내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대 태우고 있는데 익숙한 전화벨이 울렸다. 녀자친구만을 위해 설정한 벨소리, 반가운 마음에 준이는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빠 어디야? 지금 좀 만나.”   “응. 지금 친구 딸아이 돌잔치에 와있어. 오후에 오랜만에 애들이랑 어울리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야? 저녁에 보면 안될가?”   “괜찮아. 잠간이면 돼.”   잠간이라는 말에 준이는 친구들에게 량해를 구하고 부랴부랴 그녀를 만나러 달려갔다. 그리고 둘의 만남은 그녀의 말대로 진짜 너무나도 잠간이였다. 커피숍에 앉아 아직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녀자친구는 리별을 고했고 커피가 나왔을 때에는 녀자친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준이는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모조리 녹고 플라스틱컵에 맺혔던 물방울들이 모두 사라지도록 오래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깊은 신음과 함께 무거운 머리를 든 준이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앉아있다가 겨우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얼마나 마셔댔는지 그리고 또 언제 집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으나 아직도 하늘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준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엉금엉금 정수기로 기여가 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오늘따라 비게가 출렁이는 몸뚱아리가 한결 더 무겁게 느껴졌다.    두터운 흑갈색 카텐 사이로 빛이 꾸물꾸물 기여들어오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방안은 어둠이 떡진 준이의 머리칼 만큼이나 두텁게 깔려있었다. 물을 마시고 벽에 기대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달랜 준이는 벽을 짚어가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지를 내리려다가 그대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토악질을 해대도 어제 저녁의 한심했던, 지금 현재 가장 버리고 싶은 그 기억들은 결코 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비여지는 위 속에까지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이 차곡차곡 들어차는 것 같아 준이는 변기를 잡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났다. 토악질에 쓰라린 비강 때문인지 아니면 이 령혼을 점점 잠식해가는 괴로운 기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눈물이 났다. 취기에 사라졌다고 믿었던 어제 저녁의 일들이 꾸역꾸역 밀려와 준이의 목을 조여왔다. 준이는 더 이상 토가 나오지 않는 그 입을 통하여 새여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입을 앙다물고 견뎌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가 바로 망각이라고 했다. 그 어떤 괴로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농도가 희석되여 결국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으니 말이다. 준이는 할 수만 있다면 불도 켜지 않은 이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지금 이 찢어질듯이 아픈 기억도, 물밀듯이 밀려드는 후회도 모두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그리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상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는 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준이의 몸뚱아리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안 그래도 팽창할 대로 팽창해졌던 오줌보는 쭈그리고 앉은 덕분에 아예 터지기 일보 직전이였고 눈물이 흘러나오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비상을 보내는 뇨의는 그의 슬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우기 이 화장실은 준이 혼자만이 사용하는 공간도 아니였다. 결국 준이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내며 화장실 청소까지 마치고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겁기 그지없었으며 속은 쓰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살짝 들려진 카텐을 정리하러 가는 그 짧은 순간마저도 준이에게는 크나큰 고역이였다. 카텐 사이를 비집고 힘겹게 흘러들어오던 빛 한줄기마저 차단되니 순간 방을 가득 채운 어둠의 무게가 배는 되여버린듯 싶었다. 결국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준이는 침대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적막의 밀도마저 높아져버렸는지 유일하게 슬픔을 흘려주던 눈물샘마저 막혀버렸다. 이 작은 공간은 시간마저 멈춰버린듯했다. 준이는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대도시 상해에 온 지도 어언 5년차, 준이는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지난 5년 동안 두번의 업종변경과 일곱번의 직장이동은 조금씩 준이를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일에 가까이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넘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급여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운명의 녀신은 더 이상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마지막 직장이 부도가 나면서 출근한 지 반년 만에 또다시 직장을 잃고 이사까지 한 준이에게 지난 4개월 동안 그 어떠한 회사도 단단히 닫혀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쓰린 속을 달래며 겨우 눈을 뜬 준이는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였다. 오전 11시 11분, 휴대폰 시계의 수자가 모두 같은 수자로 보여진다면 누군가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과연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을 그리워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준이는 힘없이 휴대폰을 제자리에 다시 돌려놓았다. 그동안 면접통지 한번 없이 집을 사라느니, 영어교육 학원이니, 거기에 잘못 걸려온 전화까지 빼면 준이의 휴대폰은 그야말로 스마트한 시계에 불과했다. 가끔씩 술 한잔 하자던 친구들도 요즘은 련락이 뜸해졌고 잘 지내냐는 안부 한번 없는 위챗에는 무음으로 해놓은 여러가지 모임들의 메시지 수자만 멈출 줄 모르고 증가하고 있었다.    맞은편 방에 살고 있는 커플이 점심을 하고 있는지 향기로운 냄새가 문틈을 스멀스멀 비집고 들어왔다. 한참 전에 한 토악질 때문인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준이는 시장함을 느꼈다. 주방에는 엄연히 준이만의 공간이 배정되였지만 거기에는 가끔씩 준이한테 들리던 녀자친구가 밥을 해준다고 사들였던 식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먼지만 먹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밥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재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준이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겨우 일으켜 책상으로 다가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음식물 배달전단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해장국을 배달해줄 조선족 식당을 찾아 해장국을 시키고는 컴퓨터를 켰다. 지금 이 상황에서 컴퓨터를 켜봐야 일을 할 수는 없어도 그거라도 켜지 않는다면 완벽한 혼자라는 사실에 더욱 서글퍼질 것이 자명했다. 아무 소리라도 이 어두컴컴한 작은 방을 메워야만 했다. 평소에 즐겨보던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놓았지만 준이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방청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지금의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더욱 다운되였다.    해장국 한그릇, 밥 두도시락, 서비스로 온 깍두기 몇점, 이것이 준이의 점심식사였다. 준이는 아무 드라마나 하나 틀어놓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밥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틀어놓았지만 그의 몸은 계속하여 땀방울을 쏟아냈고 뜨거운 국물이 들어가니 겨우 속이 풀리기 시작했다. 배가 불러오자 준이는 순간 편안함을 느꼈고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밥 한그릇이 슬픔으로 차고 넘쳤던 마음을 위로해서가 절대 아니였다. 오히려 그것은 어제 저녁의 그 곤혹을 치르고도 변함없이 허기를 느끼는 배알 없는 자신의 몸뚱이 때문이였고 녀자친구로부터 받은 질책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였으며 구제불능의 자신에 대한 끝없는 패배감 때문이였다.    실컷 울고 났더니 어제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커피숍으로 들어오던 그녀의 싸늘한 눈빛은 평소에 익숙했던 그녀의 것이 아니였다. 순간 불안감이 준이를 두텁게 감쌌다. 잘 지냈냐는 안부 말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던,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었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붉은 입술 사이로 헤여지자는 말이 튀여나오는 순간 준이의 령혼은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하였다. 지금의 준이에게 그녀의 리별선고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준이는 묻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었냐고, 그동안의 추억이 소중하지 않았었냐고, 함께 미래를 꿈꾸지 않았었냐고, 지금 빈털터리여서 리별을 고하는 것이냐고, 너한테 나는 겨우 이 정도의 사람이였느냐고… 하지만 준이는 그 말들을 결코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자비감이 아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그녀의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긍정을 얘기할가봐 오는 두려움 때문이였다.    모든 감정을 무너지는 억장 속에 감춘 준이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여나왔다. 나와 헤여지려는 리유가 나의 뚱뚱함 때문이냐고. 어쩌면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비참함을 감추려는 준이의 마지막 절규였을지도 몰랐다.    그 말을 하던 순간 준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올라 겨우겨우 내뱉은 그 한마디는 결국 울먹임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되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준이는 그녀에게 한번만 용서해달라는, 앞으로는 진짜 잘하겠다는, 제발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결코 뚱뚱한 오빠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자신의 뚱뚱함을 비관으로 일관하는 자신감 없는 오빠가 싫을 뿐이고 자신의 뚱뚱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오빠가 싫을 뿐이고 날씬함을 동경하면서도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겁쟁이 오빠가 싫을 뿐이야.”   일정한 속도로 높낮이 없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그녀의 리별에 대한 리유, 노트에 적어 달달 외우고 나온 것이 아니였나 의심이 갈 정도로 조리정연한 그녀의 말은 결코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했고 좀처럼 곁을 주지 않던 녀자친구로 인해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성인영화를 틀어놓고 그 날 아침 보았던 이웃 녀자의 뽀얀 젖가슴을 상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던 그 날 밤보다도 더욱 비참했다.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울었을가?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흘러나올 눈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칠 대로 지친 준이는 한결 편해져버린 마음으로 어제 저녁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자신감, 노력, 겁쟁이… 처음 상해에 왔을 때만 해도 이러한 단어는 자신의 사전에는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위해 미친듯이 뛰였던 추진력과 실수는 단지 경험일 뿐이라는 패기는 준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엔진과도 같았다. 준이는 멈출 줄 몰랐고 반복되는 야근에 야식으로 인해 뚱뚱해져가는 몸매와 떨어져가는 체력을 위하여 평소에는 시도조차 안했었던 산책을 시작했고 스스로 자신을 가꾸려는 시도도 했었다. 그 때의 자신은 그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지금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은 명백한 루저였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그녀의 리별통보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어쩌면 그녀는 일찍부터 조금씩 조금씩 준이와의 리별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전화를 하면 예전처럼 따듯하게 대화를 이어나간 것이 아니라 일이 바쁘다든지 아니면 졸리다든지 하면서 서둘러 대화를 끝냈고 만나자고 하면 몸이 안 좋다든지 친구가 놀러 왔다면서 만남을 피해왔었다. 몇 안되는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 둘 챙겨가거나 실수라는 리유로 준이가 주었던 집의 열쇠를 두고 가기도 했다. 번호를 바꾼다는 리유로 준이와의 커플료금제 서비스를 끊었을 때 이미 깨달았어야 했다. 아니, 준이가 사준 옷과 액세서리가 보이지 않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리고 늘 바르던 향수가 바뀌였을 때, 무언가 결단을 할 때면 늘 횡액을 당해야만 했던 긴 생머리가 짧아졌을 때, 어머니가 늘 건강하시라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너희들 무슨 일이 있냐고 자신을 다그치던 그 모든 순간 알았어야 했다. 그녀는 이미 님이라고 부르기에는 점 하나가 더 붙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대가 치고는 너무나도 컸다. 그 날 밤 준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꼭 어울리는 그 작은 창문가에 서서 고요히 잠들어버린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찾고 또 찾았다.        아무리 슬프고 아파도 시간은 알아서 흘러갔다. 너무나도 비참하고 슬퍼 9층의 단칸 방 그 작은 창을 통해 확 뛰여내릴가 하는 생각을 했던 시간도, 밥은 잘 먹고 있냐는 어머니의 따듯한 말 한마디에 통화를 끝내고 눈물을 흘렸던 시간도, 집을 사라는 부동산의 광고전화에 처음으로 욕설을 퍼붓고는 바보 같이 가슴 졸였던 조마조마했던 시간도 어느덧 모두 흘러간 시간이 되여버렸다. 준이는 매일매일 잠자는 시간과 먹고 싸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미친 사람처럼 번역일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마감일 2주 전에 일을 마무리하는 결과를 낳았다. 준이는 오랜만에 보람을 느꼈다. 지난번 통역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주 주중에 또다시 통역을 나가게 된 것도 조금의 여유를 만들어주었다. 친구의 공주님 돌잔치에 내여놓을 축의금 500원에 똥줄이 바짝바짝 탔던 시간은 어느덧 희미해져갔다.    준이는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했다. 돌잔치에서 만났던 또 다른 친구의 권유로 바드민톤을 하러 가려는 것이다. 일도 마무리했고 준이도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오늘의 약속을 펑크낼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물론 다음 주와 다다음 주에 들어오게 될 돈들이 준이의 망설임을 깨끗이 없애준 것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친구와 함께 들어간 바드민톤 구장은 동네 중학교의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준이는 구장에서 확 뿜어져나오는 열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합성과 함께 흘러나오는 투지도 있었겠지만 문자 그대로 구장은 엄청나게 더웠다. 한여름이라 밖의 날씨도 무더웠는데 구장은 그보다 더했다. 준이는 순간 저번에 갔던 사우나가 떠올랐다. 이것이 정녕 사람한테서 뿜어져나오는 열량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에 놀라웠고 이렇게 더운 곳에서 저렇게 즐겁게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바드민톤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고향에 있을 때 길가에서 친구들이랑 가끔 해봤을 때는 몰랐는데 정작 해보니 잘 맞추지도 못했고 멀리까지 콕을 날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였다. 결국 준이는 15분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했다. 숨은 턱끝까지 차올랐고 요동치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여나올 것 같았다.    “어때? 생각보다 쉽지 않지? 이거 은근 운동 된다니까. ”   맨땅에 축 늘어져있는 준이에게로 다가와 큭큭거리면서 웃는 친구에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지경으로 숨을 헐떡이던 준이는 그만 가보라는 손시늉을 하고는 열심히 반복 동작을 련습하는 사람들을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이렇게도 나약한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한참을 쉬고 난 준이는 코트가 비자 다시 도전을 했다. 몇번이고 쉬고 재도전하기를 반복한 준이는 활동이 끝날 즈음에는 완전 녹초가 되여버렸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동공은 풀려버렸다.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 속으로는 이걸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까지 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을 듬뿍 쏟아내서 그런지 가슴만은 후련했다.        집으로 돌아와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달래며 샤워를 마친 준이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준이가 깬 것은 밝음보다는 아직 어둠이 좀더 많은 새벽이였다. 몸 구석구석이 쑤셔났지만 준이는 씨익 웃을 수 있었다.    준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아침산책을 나왔다. 어제 무리한 운동을 했으니 자기 전에 찜질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를 못했으니 이렇게라도 근육을 풀어주면  근육통이 줄어들 것이라는 걸 준이도 잘 알고 있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준이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운동을 했다는 희열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것이 준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신입이라고 준이에게 이것저것 얘기해주던 동호회 회원들과의 만남도 너무나 신선했다. 준이는 그 때 자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대화들을 다시 떠올렸다.    “바드민톤은 처음이라고 하시던데 생각보다 빨리 배우시네요.”   “네. 맞아요. 배운 걸 금방 금방 소화하시고. 혹시 다른 데서 하다 오신 것 아니예요?”   여기저기에서 듣기 좋은 얘기들이 들려왔다.    “처음 맞아요. 사실 저도 왕년에는 운동 좀 했는데 보다 싶이 지금 요 모양 요 꼴이라 너무 힘드네요.”   준이는 머쓱하게 웃어버렸다. 누군가의 칭찬도 오랜만이라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하다 보면 살은 빠지게 돼있어요. 이거 운동량 생각보다 많거든요.”   “네. 여기 다이어트 성공하신 분들 꽤 돼요. 그리고 힘도 좋으시니 금방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성이 보여요.”   준이는 자신의 비대한 몸을 가리키면서 이 거대한 몸뚱아리를 지탱해나가는데 그 정도 힘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힘을 얻은 대신 민첩함과 지구력을 잃었다는 말 한마디로 주위 사람들을 온통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저들의 웃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준이는 좋았다. 가능성이 보여요라니, 이 얼마 만에 듣는 희망찬 단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준이의 입에서 저도 몰래 웃음이 터져나왔다. 산책하는 와중에 팔을 주무르고 어깨를 휘휘 돌리던 준이는 내친 김에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빠트단지 둘레에 나있는 길을 반도 뛰지 못하고 준이는 다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뛰기에는 아직 무리인듯 싶었다.   그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던 준이의 일상에 바드민톤이라는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였다. 준이는 여전히 찾아주는 통,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회만 되면 이곳저곳 리력서를 넣었고 면접을 보고 퇴짜를 맞았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와중에도 준이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산책과 함께 간단한 조깅을 곁들였고 한주일에 두번 있는 바드민톤 동호회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준이가 처음으로 동호회 회식에 참여한 것은 찌는듯한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늦가을이였다. 술잔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준이는 아늑함을 느꼈다. 자신과 함께 어울리며 웃어주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이 회식은 비용이 얼마가 나오든 무조건 더치페이라는 말에도 이 자리에 당당히 나올 수 있는 리유이기도 했다. 그동안 작은 방에서 홀로 외로움을 삭혔던 시간들이 오히려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왜 그 작은 방을 진작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지 후회가 되기까지 했다.   준이도 이제는 초보티를 완전히 벗어나 어느덧 다른 회원들과 경기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실력도 조금 붙었고 말이다. 무르익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준이는 동호회 회장에게 어떻게 하면 바드민톤을 잘 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 준이에게는 망설여지는 일이였다. 경쟁이 치렬한 회사생활에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잠재적인 경쟁자를 만든다는 인식이 짙게 배여있던 준이에게는 무언가 하는 방법을 묻는다는 그 간단한 행위마저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였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시원하게 답이 흘러나왔다.    “간단해요.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고 나면 반복적으로 련습하고 그러다 보면 잘 치게 돼있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바닥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 걸어야 정상 가까이라도 가는 거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르면 물어보고 틀리면 고쳐야 한다는 것이예요. 안 그랬다가는 누구처럼 맨날 제자리 걸음만 한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해요.”   회장의 눈길은 친구녀석에게로 향했고 모두가 맞는 말이라면서 왁자지껄 웃어댔다. 지적을 당한 친구녀석은 머쓱한지 앞으로는 정말 잘하겠습니다를 웨치며 건배를 제안했고 다들 그에게 호응해줬다. 준이는 조금 놀랐다. 자신이 보기에도 친구 녀석은 꽤나 실력이 있어보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였던듯 싶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온 준이는 동호회 회장이 했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동안 준이는 잘 묻지도 않았고 어떻게든 스스로 방법을 찾으려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을 신념이라고 믿었으며 언젠가는 저들보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겨우 그것이 어쩌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숨 좀 돌리는 중. 그러는 넌?”   “난 화장실 잠간. 야, 담배 좀 줘봐.”   “여기.”   “근데 너 생각보다 인기 있더라?”   담배를 받으면서 친구 녀석이 툭 던진 한마디에 준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냐?”   “누구 너 녀자친구 있냐고 은근슬쩍 떠보길래 있다고 그랬거든.”   “누가 그랬는데?”   “녀자친구도 있는 녀석이 별거 다 궁금해한다. 얼른 들어와. 너 신고식 해야 한다고 다들 난리다.”   가게로 들어가는 친구녀석의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준이는 자신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다는 것, 대학교 때를 제외하면 참으로 오래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준이는 가게 유리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잔뜩 부풀었던 몸은 어느새 많이 줄어있었고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찾기 힘들었던 목 우에는 턱선이라고 불리는 그 무엇이 은근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듯했다. 이제는 거울을 외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녀자친구라… 준이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번호를 눌렀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련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폰에서 지워버린 번호지만 마음에서까지 지워진 건 아니였나 보다. 한번도 잡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놓아버린 것도 아니였나 보다. 이 번호 너머에 그리운 그녀의 목소리가 있을 테지만 준이는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니였다.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였다. 지금도 그 작은 방에 적막이 찾아올 때면 그리고 혼자라는 것을 의식할 때면 늘 그녀가 먼저 떠올랐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지만 않았어도 전화를 했었을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매달렸었을가?   헤여진 녀자친구를 떠올리던 준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기까지 준이는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한테 필요했던 시간 만큼 그녀 역시 리별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저런 리유로 자신과의 만남을 피하고 열쇠를 돌려주고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오는 만큼 자신을 밀어낸듯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준이 자신만의 상상이고 핑게였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배신했다는, 자신이 그녀에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패배자의 자격지심이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이는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자리에 멈춰서있던 것은 자신 뿐이였으니까.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떠안아야 할 인과응보였으니까. 그것들을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결국 준이는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였다. 다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를 바랐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색다른 느낌보다 더.   몸을 돌리니 가게 유리창으로 아직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얘기가 오고가는 것인지 친구 녀석이 자리에 선 채 손짓발짓을 하고 있었고 그 녀석한테 눈길을 주고 있던 사람들은 손벽을 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역시나 재주가 좋은 녀석이였다. 저들한테 완전히 녹아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으니까. 아직 신고식이 남았다고 했나? 저도 몰래 입가에 미소가 걸린 준이는 힘차게 가게 문을 열어젖혔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준이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다. 이 작은 방에서 준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준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면접소식이 와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 만에 받아본 면접소식인지 준이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는 아니였다. 그가 8개월 정도 일하면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업종의 면접통지였고 준이는 가능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업종의 면접통지를 받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지나간 시간들이 충분히 인지시켜주고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게 업무 내용은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준이는 그동안 했던 면접들을 떠올리며 예상질문과 표준답안들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적어나갔다. 왠지 느낌이 좋은 밤이였다.   준이는 참으로 오랜만에 일찍 깨여났다.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든 것도 있겠지만 그동안 알람 작용만 열심히 해왔던 폰이 드디여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 것도 리유라면 리유였다. 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두텁게 감싸고 있던 카텐을 열어젖혔다. 아직 이른 시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창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준이는 오라지 않아 자신도 저들 사이의 한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깊게 심호흡을 한 준이는 어제저녁 잠들기 전 머리 속으로 떠올렸던 사항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가다듬어나갔다.   준이에게 아침이 온다는 것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자박자박하는 발걸음 소리, 아마도 조금만 지나면 하얀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는 또다시 그 눈부신 동체를 자랑하며 샤워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동거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파수군이라도 된듯 함께 화장실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에 온갖 체취를 남긴 채 솔로인 자신과 앞방 남자를 홀릴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준이는 충분히 그 모든 것들을 미소로 화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다시 자신의 작은 방을 가득 메우는 샤워기의 물 뿌려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준이는 카텐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창문으로 창턱을 종내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뜨거운 해살이 지저분한 준이의 작은 방에 물밀듯이 밀려들면서 두텁게 깔려있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이는 얼마 만인지 모를 아침해를 온몸으로 느꼈다. 눈부셨다. 따스했다. 그리고 달콤했다. 작은 방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해살과 함께 이른 아침의 열정이 함께 밀려들었다. 준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화장실이 비워지기만을 기다렸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여 화장실의 문이 닫혔다. 그리고 자박자박하는 발걸음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준이는 앞방 남자에 앞서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직 그녀들의 체취가 짙게 묻어있는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안하고 머리를 감았다. 여기저기 흥건히 젖어있는 물기와 그녀들이 떨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준이에게 묘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화장실 바닥에 빈틈없이 배여있는 물기로 넘어질 번한 순간까지 말이다.   화장실 문을 나선 준이는 앞방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등뒤로 그녀들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준이는 처음으로 앞방 남자한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그 남자의 인사를 받지도 않은 채 몸을 돌려 막 집문을 나서는 그녀들의 뒤모습을 맞이했다. 뒤모습까지 아름답다는 생각에 준이는 씁쓸함을 느꼈지만 준이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저기요. 두분, 저 잠간 보실가요?”   느닷없는 준이의 부름에 막 집문을 나서려던 두 녀자는 몸을 돌려 준이이게 눈길을 주었다. 대답 하나 없이 오로지 혐오로 가득한 그녀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준이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기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입니다. 아침에 샤워를 하더라도 최소한 물기 정도는 제거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청소하는 아줌마가 올 건데요.”   “네. 그렇겠죠. 어지러이 널려있는 머리카락은 치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쪽 분들 뒤에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물기 정도는 치워주는 것이 례의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준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조차 않는 그녀들에게 향했던 눈길을 돌려 앞방 남자한테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럼…”   신기한듯한 눈빛을 보내는 앞방 남자와 그녀들을 뒤로 하고 준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막 닫히려는 문틈 사이로 의외라는듯한 앞방 남자의 눈빛과 재수없다는 말을 꺼리낌없이 하는 그녀들의 소리가 함께 새여들어왔다. 그래도 준이는 기분이 좋기만 했다. 준이가 들어선 방은 더 이상 그 어두컴컴한 작은 방이 아니였다. 그 방은 따스한 아침해살이 가득찬 밝고 활기찬 방이였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준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 좁아터진 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준이는 오랜만에 몸에 착 달라붙는 셔츠의 그 부드러운 감촉이 좋았다. 그리고  숨통을 조여오는 넥타이의 꽈악 조여오는 압박감도 좋았다. 작은 방을 빈틈없이 메워오는 샴푸의 그 익숙한 향도 달라보였다. 구석에서 먼지만 먹어가다 오랜만에 준이와 함께 뾰샤시한 모습으로 나타난 구두도 반가웠다.    준이는 가방을 둘러메고 방을 나섰다. 닫히는 방문 뒤로 앞으로도 한동안은 준이와 함께해야 할 오래된 노트북과 간이옷장이 준이를 배웅하며 작은 방을 꽈악 채운 해빛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출처:2019 제1호  
11    리명희: 산에 살고 싶소(시, 외1수) 댓글:  조회:405  추천:0  2019-07-08
산에 살고 싶소(외1수)   리명희       외로움을 함초롬히   머금고 피여       고독이 아닌   기다림을 즐기고 있다       어둠 속이라 외로운   슬픔이 아니라       홀로 즐기는    외로움을 쌓고 있다.       별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풀벌레 울음소리   가슴에 담은    고독을 쌓으며       하얗게 미소 짓는   너의 향긋한 숨결       그리움   보글보글 프림들이   나무잎을 그린다   하트를 그린다   그리고 그리운 너의   웃는 얼굴도 그린다       너무너무 예뻐서   퐁당 뛰여들려다가   너의 얼굴 사라질가봐   한모금 마셨다   그리움을 마셨다   내 마음에도 반짝   별이 뜹니다   내 앞길 밝혀주는    밝은 새별이 출처:2019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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