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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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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신기덕:출제인생(수필) 댓글:  조회:452  추천:0  2019-07-12
출제인생 신기덕   출제인생 세월은 류수라더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1997년도에 처음 대학입시출제활동에 참가해서부터 어언 20년이 넘어흘렀다. 그 때로부터 기본상 한해도 빠뜨리지 않고 대학입시, 고중입시, 자격시험, 학업시험 등의 명제활동에 참가했고 이외에도 길림성교육청, 길림성인사청, 길림성교육학원, 장춘시교육국, 장춘시교육학원 등 단위에서 주관하는 여러가지 시험의 출제에 참가했으니 나의 출제시간은 참으로 길었으며 그냥 나도 모르게 출제는 내 인생의 한부분으로 되여버렸다.  한해에 시험명제로 ‘감옥 아닌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많을 때엔 다섯번이나 되였으니 나의 친구들이 나를 ‘시험전문호’로 부르는 데에도 너무 일리가 없지는 않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나는 출제하러 ‘감옥 아닌 감옥’에 들어와있다. 이곳도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곳이 되였다. 나이가 이미 60이 되였으니 이제 곧 나의 출제인생에도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여온다. 하여 출제하러 다니면서 있었던 일들 가운데서 인상 깊은 몇가지를 골라 미니수필 형식으로 적어보려 한다.    무릉도원 중국 고대의 저명한 작가 도연명이 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가 시험출제하러 들어오는 이곳도 무릉도원에 못지 않다. 하루 세끼 식사를 안배해주고 경찰들이 보위를 서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니 더없이 안전한 곳이며 휴대폰도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기에 외계의 간섭도 받지 않으니 더없이 조용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라 할 수가 있겠다. 하여 나도 《도라지》잡지에 라는 제목으로 이곳의 생활을 적어 발표한 적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었고 특히 출제와 관련이 된 사람들은 많이 읽었었다. 무릉도원이나 무풍지대로 불리우리 만치 고요하고 안전하고 행복해보이는 이곳에서는 사실 나라의 극비에 속하는 출제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표정이 안온해보이는 출제자들은 모든 말초신경까지 동원하여 이 중대한 임무의 완성을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출제기간에는 그야말로 밤낮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시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출제의 간고성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모든 시험문제가 출제자들의 열번 이상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이 된다. 하기에 무릉도원이나 무풍지대가 사실은 고강도의 뇌력활동이 진행되는 긴장한 로동장소인 것이다.   걷기운동 나는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다. 배구나 탁구와 같은 구류운동과 장기나 바둑과 같은 기류棋类운동을 아주 즐기는 편이였다. 하지만 출제활동에 참가하면서부터는 걷기운동의 매력에 푹 빠져 지금까지 그냥 걷고 있다. 출제장소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걷기운동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첫시작이다. 걸으면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하기에 걷다 보니 시간을 넘겨 70분간을 걸어 350메터 코스를 20고패 훨씬 넘긴 적도 적지 않다. 지금은 의사의 부탁 대로 30분간만 걷는다. 그저 즐겁게 걷고 있는 나를 보고 ‘궁리 없이 걷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걷기운동을 운동의 왕이라고 한다. 다른 특수한 시설도 필요 없이 그저 자기의 두 다리로 걷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걷기운동에도 자기의 표준자세가 있다.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자세만 잘 장악하고 그대로 걸으면 된다. 여기서 관건은 견지이다. 사실 집에 있을 때에는 여러가지 일에 밀리고 또 술을 마셨을 경우에는 걷지 못한다. 하지만 출제장소에 와서는 견지하기가 비교적 쉽다. 이젠 걷기운동에도 웬간히 미립이 터서 속도가 비교적 빠르다. 집에 있을 때 승리공원에 가서 걷다 보면 천여명 중에 나를 초월하는 사람이 극상해야 한두명 뿐이다.   사전가치 우리 력사의 한시기에 사전词典을 아주 중시했었다. 그 때 어느 학자의 집에 사전이 많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지식의 상징이고 부유의 상징이였다. 하기에 나도 천여원이라는 돈을 들여 6권사전을 갖춰놓았었고 그외에도 또 많은 사전을 갖춰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많은 사전이 하나의 부담으로 되였다. 버리자니 아깝고 둬두자니 가치가 적다. 지금은 컴에 모든 사전이 들어있어 사용하기가 특히 편리하다. 하여 나의 책장의 가장 눈에 뜨이는 위치에 배렬되였던 사전들이 아예 책장 우 ‘옥상’으로 쫓겨 올라가는 신세로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꿔온 보리자루 신세라고나 할가? 하지만 컴퓨터의 사전을 사용할 수 없는 이 출제장소에서만은 사전의 몸값이 대단하다. 조선어사정위원회에서 진행한 규범에 따라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사전은 그 규범에 따라 쉽게 편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이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찬한 《조선말사전》을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학과의 번역도 컴의 번역사전을 사용할 수가 없기에 책으로 된 《중한사전》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력사의 흐름에서 밀려났는가 싶은 물건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자기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깊은 인상을 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명태사건 명태와 출제생활이 무슨 련계가 있을가? 어찌 보면 련계가 없어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련계가 아주 크다고 해야겠다. 명태와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가 련계되기에 우리 민족과 관련된 출제생활에도 명태가 등장하게 되고 잊지 못할 인상을 남길 수가 있는 것이다. 명태는 동태국을 해먹어도 맛있고 말린 명태로 반찬을 해먹어도 맛있다. 그리고 마른 명태를 그대로 쭉쭉 찢어서 맥주안주를 해도 제격이다. 하기에 마른 명태는 우리 생활중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려행시에 마른 명태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되였다. 출제장소에 오면서 명태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많았다. 몇년 전 출제에 참가했던 세명이 명태사건을 일으켜 우리 모두에게 웃음 한바구니를 안겨준 적이 있다. 출제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명태가 적어져서 이젠 명태대가리도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로 명태가 귀중해졌다. 그 때 한칸에 류숙하던 두 선생이 다른 칸에 류숙하는 선생이 자기들 칸으로 놀러 온 기회를 리용하여 명태대가리를 상 우에 올려놓은 것이 사건의 발단으로 되였다. 한 선생은 명태를 내놓으라 재촉하고 두 선생은 명태가 없다고 시치미를 떼는 신경전이 며칠 동안 지속되였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서 나는 그 재미나는 이야기를 적어 《청년생활》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고기잡이 여기 출제기지에는 비교적 큰 양어장이 두개 있는데 출제가 끝나 휴식단계에 들어서면 많은 아마츄어 어옹들이 즐기는 곳이다. 고기들도 잘 잡혀나오는데 자그마한 붕어가 특히 많이 잡혀나왔다. 나도 고기잡이를 무척 즐긴다. 하지만 낚시가 아니라 반두나 채발로 잡기를 즐기며 혹간 투망으로 잡기도 한다. 이 세상에는 고기잡이방식이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산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곳은 보지 못했었다. 이 세상의 기상천외한 일이라고나 할가? 바로 아무런 마술재능도 갖추지 못한 내가 우산으로 고기를 잡아봤다. 그것도 한두마리가 아닌 수십마리를.  어느 해 출제가 끝나고 휴식단계에 들어선 어느 날이였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마치고 양어장 주위를 돌고 있는데 그 때 바로 담장 밖의 물도랑에서 큰 호스管子로 양어장에 물을 더 넣어주고 있었다. 호스가 양어장에 신선한 물을 넣어주니 고기들이 산소가 많아 기뻤는지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나오는 곳으로 푸드득푸드득 뛰여오르는 것이였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쓰고 있던 우산을 가져다 거꾸로 댔더니 거퍼 몇분 사이에 수십마리의 붕어가 저절로 그 곳에 날아들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장면을 구경하였다. 물론 고기는 다시 놓아주었고.   돼지료법 고강도의 뇌력로동을 진행하자면 뇌건강과 더불어 강한 체력이 뒤받침해주어야 한다. 밤늦도록 일하고 나면 이튿날 오후에는 한잠을 푹 자게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불을 덮고 잔다. 대낮에 그렇게 자다나니 보기엔 게으름뱅이가 잠 자는 모습이다. 하여 나는 나름 대로 ‘돼지료법’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였다. 이 이름이 물론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생동감과 형상성이 뚜렷한 이름임에는 틀림이 없다. 긴장하던 며칠 동안의 출제임무가 완성되면 우리 출제인원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것이 바로 이 돼지료법이다. 해탈감에서 느끼는 돼지료법의 그 느긋하고 미묘한 감각은 참으로 일품이다. 글을 쓰다 보니 《모택동전》에서 보았던 내용이 떠오른다. 모택동동지는 밤에 사업하기를 즐겼다. 그리고 독서도 밤이 가고 새벽이 올 때까지 하기가 일쑤였는데 이런 생활이 습관이 되다 보니 그에게는 오전시간이 바로 취침시간이 되여버렸다. 위인에게 감히 돼지료법이란 말을 붙이기에는 안됐지만 살다 보면 이렇게 대낮에도 이불을 덮고 푹 잘 때가 있게 된다. 내가 이미 발표한 글에 이 돼지료법에 대해 쓴 적이 있는데 나의 한 친구는 그 돼지료법이 자기는 제일 부럽다고 했다. 자기는 신경이 쇠약해져 밤에도 잘 자지 못하는데 낮에 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란다. 소화기능 먹은 음식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화불량이 오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소화시키지 못해도 소화불량이 온다. 무릇 소화가 안되면 언제나 몸이 뜨직하고 따라서 기분도 말째여서 생활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데 출제하는 이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장소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시간으로 인한 소화불량이다. 출제나 번역하러 이곳에 오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경험이 없기에 출제가 끝난 후 차례지는 10일 남짓한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몰라 어쩔 줄 모른다. 운동도 하고 오락도 하지만 이 시간으로 인한 소화불량은 쉽게 낫지를 않는다. 나도 이런 소화불량이 온 적이 한두번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시간적인 여유가 그리워진다. 사실 나의 80여편의 론문 중의 절반은 아마 출제장소에서 씌여졌을 것이다. 그리고 허다한 문학작품도 여기서 만들어지고. 나는 출제하러 올 때 시험에 수요되는 자료를 200여편 가져오는 외 일거리를 알뜰히 차려온다. 론문과 문학작품을 쓰다 보면 시간이 언제 흐르는지도 모르게 흘러가버리고 어떤 때에는 시간이 모자라기도 한다. 여기서 일하면 그 로동효률이 아주 높다. 문득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소설이나 썼으면 하는 생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여기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개척정신 살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개척정신을 발휘할 때가 있었다.  2017년 학업시험출제차로 길림교육인쇄공장으로 가게 되였는데 우리는 고중입시와 맞띠우지 않으려고 4호별장을 사용하게 되였다. 30여명의 출제인원이 별장에 꽉 들어찼으니 식당도 없어 탁구실을 운동실 겸 식사실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보다도 걷기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겐 걸을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것이 큰 문제였다. 넓이가 3메터, 길이가 40여메터 남짓한 콩크리트길이 우리가 활동하는 유일한 장소였는데 거기서 바드민턴도 치고 태극권도 하며 줄뛰기도 해야 하니 우리 걷기운동은 하기가 힘들었다.  하여 나는 이튿날 새벽에 나절로 겁도 없이 나만의 걷기운동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별장의 북쪽 화원에 장방형의 오솔길을 냈다. 이것은 개척이 아니라 파괴였다. 돈을 들여 만든 화원에 오솔길을 낸다는 자체가 사실 파괴에 가까웠다. 그 날 저녁 나는 아예 우리 조선족 몇명과 함께 남쪽 화원에도 오솔길을 만들었다. 별장의 둘레를 따라 오솔길을 만드니 그 길이가 200메터 좀 넘는 걷기운동길이 완성된 셈이다. 그 후 인쇄공장의 공장장을 보고 그 길을 따라 좁은 콩크리트길을 만들라는 요구도 제기했었다. 공장장은 사람좋게 웃으면서 꼭 만들겠다고 대답했다. 이런 것이 개척인가?   음주문화 내가 출제장소에 와서 쓴 많은 문학작품 가운데서 아마 제일 환영을 많이 받은 작품이 술군의 이야기를 적은 일 것이다. 그 외 도 이곳에서 만들어진 해학적인 글이다. 이곳은 여러 민족이 함께 모이는 사회의 한 축소판이다. 하기에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다다소소 여기서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음주문화는 민족의 특색이 잘 반영되는 문화이다. 우리 조선족과 몽골족은 술을 비교적 즐기는 편이다. 하여 어느 해엔가는 한족 세명과 몽골족 두명, 조선족 두명이 함께 한상에 앉게 되였는데 그 상에 앉을 수 있는 유일 기준은 바로 반근 이상이 되는 주량이였다.  몇년 전만 해도 출제장소로 오면 조선족을 위해서는 개를 잡고 몽골족을 위해서는 양을 잡았다. 평소에는 술을 제한하다가도 그 날에는 술을 마신다. 한족 지도자들도 그 날만은 밥상을 돌아다니면서 술을 권하는데 참으로 열정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술문화가 몰라보게 많이 변했다. 식당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지만 시간을 정해놓아 오래 마시지 못한다. 하지만 침실에 돌아와서 마시는 것은 량과 시간을 제한하지 않는다. 아예 랭장고도 갖춰놓고 안주도 보관하게 한다. 이런다고 하여 자기의 주량도 모르고 마구 퍼마시는 경우는 기본상 없다. 오히려 더 자제하면서 신사적으로 마신다.    출제생애 1997년부터 출제에 참가하여 지금까지 출제에 바친 시간도 꽤나 된다. 1997년부터 시작된 전국고중입시 시험개혁에 호흡을 맞춰 우리 조선족은 1998년부터 개혁을 시작하여 4년 후인 2002년에 결속하게 되였다. 그 때 알게 된 우리 학원의 장익건张翼健선생을 통하여 실로 많은 걸 배우게 되였다. 사실 처음으로 시험개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그 때 알게 되였으며 이 경험은 금후 진행된 대학입시의 개혁에서도 귀감으로 되여 빛을 뿌리게 되였다. 그 때 먼저 고중입시 출제에 참가하여 임무를 완성하고 경찰차에 ‘압송’되여 대학입시문제를 출제하러 가던 기억이 어제런듯 새롭다. 소학교 교원들이 대학전과 학력을 얻는 시험을 대부분 내가 내게 되였고 그 채점도 맡게 되였다. 이렇게 시험출제로 ‘감옥 아닌 감옥’에 가서 보낸 시간도 일년에 평균 두달은 된다. 그 시간을 합하면 40개월이 되니 해수로 계산하면 3년도 넘는 셈이다. 그 외에 시험을 위해 기울인 학습시간과 연구시간을 가첨한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수자가 될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시간 때문에 후회해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시각 제일 많이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 민족과 이 시대가 나에게 부여란 이 출제라는 과업을 나는 훌륭하게 완성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70점 이상이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출제미래 2018년부터 대학입시와 고중입시가 개혁의 세찬 물결을 이루며 진행이 되고 있다. 이 세찬 물결 속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전에 장익건선생님께서 알려주던 방법 대로 한족들의 개혁보다 한발작 떨어져 한족들의 경험을 살리면서 개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한족들의 시험개혁과 우리 조선어문의 특점을 잘 결부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리고 작년에 길림성시험원吉林省考试院의 요구에 따라 시간을 들여 난생처음으로 길림성조선어문대학입시 시험요강을 만들어보았는데 아주 인상이 깊었다. 고중입시 조선어문 시험요강도 누군가 만들어야 할텐데… 지금 미래학교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른다. 지금의 현실에서 엄격하게 말하면 미래학교는 학술술어라고 하기보다는 시대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교육화제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학교가 던져준 도전과 미래학교의 발전추세를 잘 알아보면서 거기에 따르는 시험개혁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도 중시를 돌려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근심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미래의 출제임무를 떠메고 나갈 젊은 세대들이 어련히 잘할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꼭 잘해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어문의 출제미래가 더욱 밝기를 기원한다. 출처:2018 제3호
49    리미: 수세미앓이(수필) 댓글:  조회:401  추천:0  2019-07-12
수세미앓이 리미   우리의 만남 야물딱지게 잘하는 청소는 아니지만 야금야금 피여오르는 봄의 기운은 정서적으로 행동적으로 나를 가만히 있게 하지 못했다. 진공청소기의 존재로 쉽게 먼지청소를 할 수 있는 거실과 안방과는 달리 주방은 녀성의 구역이 아니랄가봐 손이 좀더 많이 가는 곳이였다. 류통기한이 지난 각종 야채와 이미 물러터질 대로 터져버린 과일들을 모조리 치우고 조금씩 흘러버린 조미료들을 말끔히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쉰내가 진동하는 이미 맛이 가버린 밑반찬통은 고스란히 설겆이거리로 전락되였다. 하나 둘 나의 일거리를 많이 만들기에는 그들은 참 협조적이였다. 싱크대에는 어느 순간 설겆이거리들이 가득 쌓여버렸다. 란장판이 되여버린 주방은 흡사 전쟁터에 나와있는 느낌이였다. 기름과 조미료 범범이 되여버린 싱크대는 또 어떠하리. 군인에게 총이 있다면 주방에서 주무기는 고무장갑과 수세미다. 하지만 그 날에는 어찌된 일인지 고무장갑은 보이지 않고 수세미도 옛날식 배배 꼬인, 철사수세미만 덩그러니 있었다. 할 수 없이 몽실몽실한 수세미에 세척제를 몇방울 떨구고 비누거품 놀이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바닥을 보일 때 쯤 철사수세미의 한가락은 고집스럽게 나의 손가락을 훑고 지나갔고 날렵한 그의 속도감에 내 손가락에서는 빨간 피가 샘솟아났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이 상황에 부합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가끔 날카롭고 작은 것에 더 베이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뜬금이 없는 얘기지만 회사에서 금방 인쇄해나온 복사지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만큼 홀시하기 좋은 작은 것들은 언제나 작지만은 않은 또 다른 무언가를 안겨준다. 싱크대에 서있으면서 찰나에 베임과 함께 많은 작은 것에 대한 회억을 한번 해보았다. 그러면서 엄마에게는 이러한 작은 무언가에 쓰라렸던 적이 얼마나 많을가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였다. 가느다란 철사수세미 한가락에 마구 내뿜는 선홍색을 그녀들은 아마도 아무렇지 않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처럼 피야, 피를 웨치면서 호들갑을 떨 새도 없이 말이다.   기억의 습작 녀자의 가슴처럼 봉긋한 수세미는 처음에는 우아한 자세를 머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에 묻히기 전, 기름때가 잔뜩 묻혀진 접시와 어쩔 수 없는 상봉을 하기 전까지 흐트러짐이 없는 꼿꼿한 아가씨 같은 자세를 유지했었을 수도, 도도하게 코대를 치켜세우며 손에 물 한방울, 기름 한방울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이미지로 말이다. 아무런 화장품의 도움이 없이도 촉촉한 피부를 자랑하고 청바지에 티 하나 입어도 그냥 젊음이 뿜어져나오는 그녀들의 소시적은 이미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였다. 설겆이는 남의 나라 일일뿐더러 부드러운 손가지를 만들려 수시로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줬을 터이다. 과거에는 핸드크림으로 손을 촉촉히 적셨다면 지금은 설겆이용 세척제나 빨래비누로 손을 거칠게 적시고 계신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엄마의 가녀린 손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선물해드린 핸드크림은 줄어들건만 그녀들의 손은 반대로 더 거칠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제때에 핸드크림을 바르쇼.” 안타까운 마음을 난 오히려 짜증을 머금은 말투로 툭 내쏘았다.  “바르면 설겆이할 때 미끌미끌해서 싫다.” 새침떼기 아가씨는 이젠 그냥 낡은 사진첩의 그녀의 과거일 뿐인가보다. 투박한 손이 곱디고운 아가씨의 손이 되였을 소시적에는 아마 그녀도 가녀린 존재임이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도깨비도 때려잡을 것 같은 무적의 아줌마 파워를 보여주는 그녀지만 불쑥불쑥 튀여나오는 옛날옛적 이야기에서는 혼자 밤거리를 누빌 때 무서웠던 얘기, 아빠가 출장을 가있는 동안에 혼자서 갓난애기인 나를 돌보며 안절부절 못했다는 얘기, 맥주로 머리를 감으면 노랗게 염색이 된다는 말에 맥주에 머리를 감았다는 얘기 등등 그저 마냥 귀여운 소녀이거나 여전히 가녀린 그녀의 이야기가 기억을 헤매고 있었다.   아름다운 앓이 얼기설기 배배 꼬여진 수세미의 가락들 사이로 덕지덕지 기름때가 너저분하게 붙어있다. 봉긋하던 수세미는 펑퍼짐하게 변형되여가고 있고 원래의 이쁘장하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날카로운 심경을 수세미는 가끔 가다가 날카로운 한가닥의 스침으로 주인에게 피를 보이게도 하고 있다. 그녀들의 말 못할 앓이는 마치 수세미앓이처럼 묘하게 아픔을 전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많은 앓이들이 존재한다. 철부지였던 일곱살 때 앓았던 이앓이, 갸우뚱거리며 앓았던 사랑앓이, 어떠한 아픔은 말 그대로 아픔이지만 수세미앓이는 아픔을 동반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설겆이거리를 빛나게 해주는 데 일등 공신인 수세미처럼 그녀들은 자신의 안위보단 집안일의 일등공신임이 틀림이 없다. 이쁘게 한 네일아트도 금방 떨어지고 곱디고운 손은 늦가을의 물기 없는 단풍잎처럼 말라져가고 엄마라는 존재는 늘 녀자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 속에는 그냥 많은 걸 내려놓아야만 하는 엄마일 뿐이다. 어릴 적에는 초불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무언가를 빛나게 해준다. 아파도 참고 어쩐다 하는 밥 먹듯 제시하는 주제에 관한 작문주제는 따분하고 무언가를 많이 보태여서 형용을 해야만 그의 희생성이 더 부각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평생 대부분을 수세미앓이 같은 작지만 작지 않은 인내, 고통을 감내한 엄마라는 존재는 구태여 과장된 형용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로만 빛나고 있다.   언젠가 엄마는 한때 소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늘 맥심커피만 마시던 엄마를 모시고 커피숍을 방문했을 때에 딸기와플을 음미하시고는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구나 하시던 그 소녀 같은 모습에 나는 반대로 마음이 저미여왔던 적이 있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던 그녀는 엄마이기 전에 역시나 녀자였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덕지덕지 기름때가 묻어있는 싱크대를, 찰나의 부주의로 뿜어져나오는 피를, 그녀도 어쩌면 마주하기 싫을 수도, 아파할 수도 있는 엄마라는 또 다른 이름-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것에 슬퍼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는 걸 나는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은 나한테로는 작은, 그녀한테는 큰 비수를 꽂기도 한다. 세상의 그 많은 자녀들은 어째서 일관되게  타인에게는 온화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짜증세례만 퍼붓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작디작은 가녀린 수세미에 손을 훅 베였듯이 엄마라고 불리우는 그녀들의 마음 또한 작지만 작지 않은 인내와 상처를 동반하고 있을 것이다. 고요한 수면 우가 더 아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 소리없이 잔잔하지만 그 잔잔함 속에는 말 못할 아픔이 몸부림쳐있어보이기 때문이다. 이십대 처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은 수세미앓이에서 시작되는 작디작은 구석진 곳에서부터 령감을 받아 그녀를 보듬어주고 싶었던 것처럼 그녀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구석지고 잔잔한 무언가를 동반했을 것인가를 우리는 깊게 늘 마음속에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마치 언제 훅 우리를 스칠 줄 모르는 수세미앓이처럼 말이다… 출처:2018 제3호
48    곽미란: 목련꽃 피는 계절이면(수필) 댓글:  조회:470  추천:0  2019-07-12
목련꽃 피는 계절이면 곽미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한 노랑빛으로 망울져있던 창밖의 목련꽃이 터질듯 활짝 피여나 은은한 향기를 뿜어올리고 있었다. 목련꽃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몰래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2년 전 이맘때였다. 엄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친구들과 상해 민항체육공원에 가서 꽃구경을 하셨다. 하느적거리는 수양버들과 눈이 시도록 하얀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남기셨다.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 엄마는 련속 며칠 동안 머리가 지속적으로 아프다고 하셔서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는 가혹했다. 간암 말기였다.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 일년 동안 엄마는 자연치료법과 기도와 명상으로 치료를 했다. 락천적인 엄마는 신념으로 병마를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고 가족들과 엄마의 친구들도 모두 엄마에게 많은 신심을 주었다. 하지만 엄마의 병은 전혀 차도가 없고 정직하리만치 차곡차곡 간암 말기에 나타나는 모든 증세의 단계를 밟아왔다. 겨울 환절기에도 용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이겨낸 엄마는 이제 봄이 오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갖가지 반찬을 만들어서 공원놀이하러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인지 뼈만 남아 앙상궂게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희미하게 어리는 걸 여러번 봤다. 하지만 청명절 날 위험은 예고 없이 엄마를 덮쳤다.    주말이였고 나는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구급차 불러. 위급하다.” 나는 엄마의 방으로 뛰여들어갔다. 롱구공처럼 빵빵하게 부은 엄마의 하얀 배가 제일 먼저 눈에 띄였다. 투명한 배가죽을 뚫고 울퉁불퉁하게 솟은 혈관은 당장이라도 배가죽을 뚫고 밖으로 튀여나올 것만 같았다. 엄마가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얼굴은 무섭게 이그러졌고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복수가 찬 거였다. 간암 말기로 고생하는 엄마에게 수시로 찾아올 수 있는 위험신호였다. 나는 부리나케 다시 거실로 달려나가 120 에 전화를 걸어 앰뷸런스 요청을 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엄마는 배를 부여잡고 계속 신음을 토했고 링겔을 꽂았지만 고통은 전혀 해결이 되지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일련의 검사절차를 거치고 나서 엄마에게 진통제를 투여하기까지 한시간 반이 걸렸다. 엄마의 진통은 도저히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 날부터 엄마가 주관하던 우리 집안의 평화로움은 리듬이 깨졌고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자잘한 마찰은 수시로 타닥타닥 불꽃을 튕겼다. 거기에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수시로 우리의 삶에 접근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졌다. 엄마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될가 하는 생각이 언뜻 미치는 순간 나는 심하게 머리를 내저었다. 응급실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입원실로 옮겨간 이튿날 오전, 나와 동생은 수차례 담당의사한테 불리워갔다. 매 한차례 검사결과가 나올 때마다 의사는 위급통보를 전했다. 결국 그 날 나와 동생이 들은 최종의 통보는 삼일을 넘기지 못할 것 같으니 스물네시간 꼼짝 말고 환자 곁을 지키라는 것이였다. 엄마는 통증이 조금 가시자 자신의 병세를 의식했는지 우리를 불렀다. 엄마는 보고 싶은 사람들을 찾았다. 이튿날 엄마의 제일 친한 친구인 민성이 할머니가 병원에 오자 엄마는 가까이 불렀다. “민성이 할매, 이젠 나를 놔주게.” 눈물을 비오듯 흘리는 민성이 할머니에게 엄마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알아, 이제 마지막 길인 것 같으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마지막 길에 한복 입고 가고 싶으니 우리 집에 가서 한복 좀 찾아놓게. 두벌이 있는데 노란 저고리 있는 걸로.” 그 한복은 3년 전 환갑을 맞으면서 새로 지은 거다. 그 전에 막내동생이 결혼할 때 엄마도 한복을 한벌 맞춘 게 있어서 그걸 입으면 되겠다 싶었는데 환갑이라고 새 한복을 지었길래 나와 동생들은 못내 아니꼬와하고 있었다. 한복은 평소에 별로 입을 일도 없고 나와 동생들도 다 결혼을 했으니 기껏해야 엄마가 한복을 입을 일이라고야 교회에서 명절에 성가 부를 때나 한번 입을가말가 하기 때문이다. 류달리 한복에 집착하는 엄마가 살짝 밉기까지 했다. 딸들한테 미안하지 않을세라 엄마는 한복을 입을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 그래 봤자 네댓번이나 입었을가. 내 인상 속의 엄마는 날씬한 몸매를 지녔던 적이 한번도 없다. 언젠가 앨범에 끼워져있는 엄마의 처녀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엄마는 날씬한 몸매에 기다란 외태머리를 땋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태여나서부터 본 엄마의 모습은 늘 파마머리에 남정네들 못지 않은 일솜씨를 자랑하는 굵은 팔뚝이였다. 엄마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일솜씨가 잽쌌다. 엄마는 펑퍼짐한 엉덩이에 굵은 팔뚝, 통통한 다리를 가진 전형적인 조선족 농촌 아줌마의 체형이였다. 그런 엄마에게 한족들이 명절 때나 행사 때 입는 치포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에겐 곡선미를 강조하는 치포우보다는 몸매의 단점을 커버해주는 통 너른 한복저고리와 치마가 훨씬 잘 어울렸다. 하지만 시골에선 치포우든 예쁜 한복이든 입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의 모습은 때가 절은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쓱쓱 문지르며 주방에서 음식을 장만하거나 땀냄새가 배인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흙이 묻은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며 밭고랑을 타거나 빨래를 하는 모습이다. 한복을 입은 엄마의 모습은 평소의 억척스러운 모습과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인정하기 싫지만 엄마가 한복을 입은 모습은 참 아름답다.    엄마의 한복을 찾아놓고 광목천으로 이불과 요를 만들며 민성이 할머니는 계속 눈굽을 찍는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만 삶은 늘 우리의 생각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았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몇번 안되는 엄마의 한복 입은 모습을 떠올렸다. 막내동생이 결혼할 때 하얀 저고리에 핑크 치마 한복을 차려입고 새색시처럼 수줍게 미소를 짓고 있던 엄마의 모습, 평소엔 웃음소리도 크고 성격도 괄괄한 편인 어머니가 한복을 입으면 마치 딴 사람으로 변한듯 싶다. 그리고 교회에서 크리스마스날 한복을 차려입고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던 엄마의 모습은 더없이 평화롭고 온화한 모습이였다.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는 벚꽃나무 아래 한복을 입고 서서 찍은 엄마의 사진은 분명 행복에 겨운 모습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들이 함께 사는 가정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늘 넉넉함과 드넓은 아량으로 집안의 평화를 지켰던 엄마의 성품은 풍성한 한복의 치마자락과 닮아있다. 그러고 보면 한복은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였다. 나는 너무나 늦게야 알았다. 살아생전에 몇번 못 입어본 한복을 그 곳에 가서는 원 없이 입어보게 하고 싶었다.      나는 한복을 곱게 싼 보자기를 들고 집문을 나섰다. 고통과 질병과 전쟁이 없는 그 곳에서 엄마는 매일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엄마의 부드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전통복장 한복을 입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엄마는 갔다. 목련꽃 피는 계절에 고운 한복을 입으시고 평화로운 얼굴로 갔다.  며칠만 지나면 만개했던 목련꽃은 이 봄에도 속절없이 벌써 지겠지. 흩날리는 목련꽃잎이 왠지 엄마의 치마자락 같아 나는 눈앞이 흐릿해진다.  출처:2018 제3호
47    연서: 올가미(단편소설) 댓글:  조회:459  추천:0  2019-07-12
올가미 연서   분명히 올가미였다는 것이 뚜렷이 실감나게 바로 무덤을 만들고 나서 며칠이 지난 어느 고요한 밤이였다. 낮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 밤은 유난히 깊고 길었었다.  천근 무게라도 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길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머리 속은 온갖 생각들이 의지와 상관 없이 활개를 치며 멈출 줄을 모른다. 한치한치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듯한 한기 때문에 한여름철에도 련속 몸서리를 치게 했다. 그 날로부터 랭독은 지속적으로 세포를 탐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예고도 없이 불시에 엄습해올 때면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밖으로 나간 고양이는 잘 지내고 있을가. 갑자기 키우던 고양이 보리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 이 마당에 고양이가 과연 중요할가? 모든 게 부질없는 존재다. 나의 존재도 지금 어둠 속에서 소외되여 점차 희미한 점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나의 느낌과 감수는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가? 누군가와 함께 기상하고 식사하고 대화하고 영화 보고 취침하고… 모든 일상이 살아숨쉬며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미묘한 세상이 한없이 갈망된다.  홀로 남은 삶! 너덜너덜한 나의 삶을 감내하기가 벅차다.    어둑어둑한 골목을 빠져나와 옷깃을 여미고 달빛 속에서 한산한 거리를 계속 걸었다.  오른쪽 모퉁이로 굽으면 바로 도착하는 강가, 오늘도 강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다만 일관된 류속을 유지하며 흘러가고만 있다.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서 던져보았다. 풍덩 울림 뿐이였다.  문득 명희가 한 말이 귀전을 맴돌았다.  -너는 너무 감정적인 게 문제야. 그러다 다치면 또 고슴도치처럼 숨어버리고. 론리적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해야지 말이야.  그리고 그녀 특유의 예리한 말투로 내게 령활성이라고는 도무지 한군데도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것이 어느 정도 중요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모양이다.  령활성, 그 울림이 주는 거대한 충격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가여운 인간들… 그런 것들을 맞추고 재고 하느라 진땀을 빼며 그 와중에 질식해죽은 정감… 그런 감정들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보면 먼 허공에서 누군가가 돌연 질문을 던져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가요?  -혼자 남는 법은 어떤 건가요? 답이 있을 법하면서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 령적인 질문이다.    어느새 슈퍼에 도착했다. 슈퍼 랭장고 문을 열고 캔맥주 두개와 흰술 한병을 꺼내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이 하나하나 체크하며 계산대에서 밀어냈다. 데구루루 병이 계산대 끝으로 굴러가며 소리를 냈다.  머리도 복잡하고 속도 터질 것만 같아 부지런히 입안으로 부어넣었다. 정적이 배제된 꽤나 번잡한 중심거리에서 순간 주변으로부터 격리된 착각이 스며온다. 머리가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주위의 거리며 가게들이며 모든 환경이 생소해보이기도 했다.   가까운 지척에서 끼리끼리 무리 지은 사람들이 눈에 안겨왔다. 왼쪽에는 람루한 옷차림을 한, 현장일군으로 짐작돼보이는 남자들이 얼굴에 피곤기가 력력한 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열예닐곱 쯤 돼보이는 고중생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가랑잎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 나이대였다.  길 건너편에서 내가 있는 쪽을 카메라 영상에 담는다면 그들 사이에 홀로 끼인 내가 꽤나 이상케 여겨질지도 모른다. 마치 외딴섬에 류배된 외계인처럼 말이다.  그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어. 어른들은 왜서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가? 사실 간단한 게 진리인데 말이야.  곁에 녀자애는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안되면 말고 애당초 결론짓고 말지. 다투고 또 다투고 결국 해결보는 게 하나 없잖아. 중요한 게 뭔지 알기나 할가. -너는 너무 어른인 척하는 게 문제야. 너무 빨리 셈이 든 척한단 말이야. 말하는 어조로 봐서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닌 같았다.  -괜히 분위기 잡지 마. 딱 보면 알리잖아. 어른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 리익만 추구하는 것 같애. 뭐 큰 거라도 얻게 될 거라 착각하지? 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 않아? 그저 마음만 비우면 되는 건데… -그만해, 제발 일절만 하자. -우리 얘기만 하자, 어른들 말고 우리 관심얘기 말이야. … …   그들이 무슨 화제를 둘러싸고 얘기를 나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때론 진지하게 때론 깔깔대며 주절주절 주고받는 대화를 곁에서 듣다 보니 꺽 하고 가슴이 막혀왔다. 이 아이들이 공유하는 대화내용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새로운 각본이 생겨난 것인지 진부한 옛이야기들이 조소 속에서 함몰된 것인지, 하여튼 나는 완전히 이방인으로 소외된 사람이였다.  순간 무덤 속 존재가 서서히 떠올라 소녀들의 얼굴과 합치되였다. 십여년 후이면 아름답게 필 한송이 꽃…    -애송이들아, 니들이 뭘 알겠냐만… 아직은 코흘리개들이지. 람루한 차림의 아저씨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잘은 모르면서… 그중 한 녀자애가 말끝을 흐렸다.  -이제 너희들도 크면 다 알게 될 거다… 에고… 일단 쏘다니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거라. -앞으로 시간이 얼마 흐르면 알게 될가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가요? 어느 순간 확 알아버리는 그런 느낌인가요? 그렇죠? 맞죠? … 그리고 한치 앞도 모르는 래일 알아서 뭐 해요? 그러니 오늘이 중요하지 않을가요?  아저씨의 말에 녀자애는 자기 생각을 당차게 발설했다.  -맞아. 어제와 오늘의 온도가 너무 다르잖아. 옆에 있던 다른 한 아이가 공감하는듯 친구를 동조해나섰다.  -실리를 따지는 어른들은 따분한 벌레일지도 몰라. 야금야금 꿈을 좀먹게 할지도 몰라. 그거야말로 지루한 거야. 존재하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 아닐 수도 있는데 머리보단 가슴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데…  녀자애는 아저씨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다소 날카로운 어투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들에게 자기 하던 말을 계속했다.  -쯧쯧… 요즘 애들은 너무 조숙됐다니까. 그게 문제지…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찼다. -본능에 충실하면 돼. 애당초 본능에서부터 시작되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영원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느낌 그대로. -어우. 시인이 납시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영원, 그건 언어마법사의 진한 롱담이질도… 불현듯 취기가 괴여오르는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감이 들었다. 캔맥주를 입에 대고 련속 들이켰다.  지루한 사람들, 가여운 사람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빙글빙글 어지럽다. 이후 필을 들 때마다 심연에 빠진듯 혼자말로 되뇌이는 그 녀자애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 때 아닌가 싶다. 머리 속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으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워났다.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힘이 나질 않는다. 심경은 심란하면서 삭막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있자니 무덤을 만들던 날 밤이 자꾸만 끔찍하게 떠올랐다. 심한 하혈이 시작되고 하혈과 섞여진 피덩이 하나…  나는 그 날 무언가에 끌리운듯 앞마당으로 향했다. 무언가 억울해서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하고 처절한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낯선 인간과 낯선 곳에서 하루종일 이야기만 하다가 죽고 싶네요. 내 안의 다른 한 내가 말하고 있다.  -얼마나 낯설면 되지?  -나조차 못 알아볼 정도로 딱 그만큼만. 순간 나는 전률을 느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따지 않은 소주 한병을 들고 앞마당을 찾아갔다. 조그마한 언덕 같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생명의 꽃을 피워보지 못한 령혼이 허공 속을 회유하고 있었다.  나는 동그란 동산 같은 그 곳에 소주병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떤 아이였을가? 나는 그 무덤가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열병처럼 뜨거웠다. 애처로운 오열… 가능하다면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니 대신해서 땅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손을 내리고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는 것 뿐이였다. 온몸의 중력이 아래로 내리꼰지고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였지? 스스로 자책하며 또다시 엄습해오는 상실감에 휩싸여 가슴이 미여지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무기력하게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앞마당에 올 때마다 있는 일이다. 마음 속 갑갑하고 불안한 정서가 이곳과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며 간신히 과거를 깊숙이 삼켜버렸다. 마귀의 손에서 탈출하여 요행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들이 새롭게 고개를 들고 부활한다면 이제는 참지 않고 스스로 숨을 끊을 것 같았다.  무덤 속으로 사라진 령혼과 별개로 숨쉬며 살아간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예전과 똑같이 먹고 자고 웃고 울고 꾸준히 살아간다. 그게 견디는 방법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견디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지만 엄마는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앞마당을 떠나 네온사인이 가득한 사거리를 빠져나오자 구불구불한 골목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팔딱이고 있는 내 심장과는 무관하게 골목길은 고요한 정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고향집에 머문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며 이곳이 나의 귀속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누구도 없는 이곳에서 나는 완벽한 자신이자 주인공이였다. 취기가 부족했다. 서서히 바닥 나는 통장 잔고, 누구와 신세한탄을 하면서 외로움을 토해내며 함께 마시는 것도 이젠 사치로 남았다. 그렇다면 이 몸 뉘울 곳은 가로등 밑 길다랗게 놓여진 벤치, 순간 그 곳에 누군가 와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주해오는 모든 우연과 필연을 스쳐지나 철저한 소외 속에서 눈 감으려 했던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리고 삶을 서둘러 흘러보내려고 한 것도 아니였다.  반대편 그리고 골목의 입구 옆 자택에서는 밝은 불빛이 새여나왔다. 그 앞으로는 순시경찰차 한대가 덩그러니 세워져있다. 내 옆으로 심플해보이는 청년이 휘파람을 휙 불며 지나갔다. 그 남자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휘청거리는 밤이다. 나는 골목길에서 십메터쯤 떨어져있는 벤치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가로등만이 어두커니 긴 밤을 지켜주고 있었다.  -어이, 거기… 아니나 다를가 중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뒤를 돌아보니 중년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혼자인 것 같은데 우리 얘기 좀 나누지 않겠소? 남자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면서 물어왔다.  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무서워 말게. 키가 큰 편이였다. 짙은 갈색 모자를 눌러쓰고 짧은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옷깃을 세워 꽁꽁 앞을 가렸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나는 그에게 무덤덤히 하루밤 얼마 줄 건가고 묻자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자기는 실은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마침 내가 그런 상대로 적절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지금 작업 거는 겁니까? -거 적당히 하소. 그런 게 아니라… 마누라가 암으로 돌아가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방향으로 따라오라고 내게 고개짓했다.  지끈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골목 사이로 그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아주 조용한 건물이 보였다. 일층의 슈퍼는 이미 문을 닫았고 2층은 간판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는 무심히 걷고 있는 나의 팔소매를 붙잡고 2층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적한 공간이였다.  -마누라가 작년 암으로 돌아갔소, 딸네미 하나 있는 건 한국으로 시집갔고… 이제 살 만하니… 이리 보톨 신세 면치 못했소! 나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장례식을 치르고 대략 일년간 벽과 마주하고 있었소. 어찌 이리 대화할 사람조차 곁에 없는지… 그의 어두운 얼굴에는 처량함이 어려있었다.  -그냥 이렇게 내 말만 들어주면 되오. 다른 뜻 없소. -그래요? 그럼 얘기 계속하세요.  나의 말에는 궁금증, 안타까움 같은 그 어떤 감정도 개입되지 않아있었다.  남자는 모자를 벗고 후- 한숨을 내쉬였다.  나는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였다. 의자등받이의 차거운 촉감, 밀페된 공간에 가득한 그의 숨소리, 이것이 내가 잠시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오? 아 근데 처자는 왜 아까 그러고 혼자 있었소? -저도 잘 모르겠는 걸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갔다.  -처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다시 못 볼 사이인데 다 터놓소. 말 못할 고충들을 쭉 얘기하오. -이 세상에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비아냥인지 부정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어투였다.  -그런가? 혼자 남는다는 게 얼마나 혹독한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소. 젊었을 때 허구헌 날 술에 취해 마누라 속 적잖게 썩였댔소. 지금 후회해도 곁에 없으니 무슨 소용 있소, 에휴… 여기까지 말한 남자는 담배 한대를 집어물었다. 그러면서 내게 권하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내가 고개를 저으니 이내 손을 거두어들였다. -아주아주 미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가요? 남자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짧은 탄식을 하더니 담배를 한모금 들이켰다.  새파란 나이에 비해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듯한 서두여서 남자가 멍한 표정을 지었는지 나는 그의 의사 같은 건 전혀 개의치 않고 중이 경을 읊듯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 있죠. 녀자에게는 꽃이 만발할 때가 구경 몇번 있을가요. -그래 녀자들은 거 뭐 있겠소, 그냥 적당한 시기에 좋은 남자 만나 시집 가는 게 좋은 직장 얻는 것보다 백배 잘된 거지. 우리 딸네미도 딱 한창 그 나이인데… -아는 녀자가 있었어요. 그 녀자는 한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한 녀자가 그들과 같이 사는 느낌이 드는 거 있죠.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이 가장 단단한 구조라고 했는데 인간관계에서는 삼각관계가 가장 불안정한 관계인가 봐요. 그 집 남편은요, 두 녀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어느 쪽하고도 정리하지 않았어요.  -남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기 령역 안에 두어야 안심이 되는 안해는 남편에게 더더욱 집착할 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남편을 보고 안해는 차차 환멸을 느꼈어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긴 여백이 흘렀다.  -이미 그녀와 헤여질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 깊이 사귄 것을 의식한 안해는 이를 악물고 그냥 받아들이려고 자신을 설득했어요. 숨을 죽이고 조용히 살아가는 게 모두에게 편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뜻밖에 안해의 배속에 새 생명이 잉태되였어요. 남편의 태도는 예전보다 어느 정도 살틀해지기도 했어요. 안해는 임신을 빌미로 그녀와의 관계정리를 요구했죠. 물론 남편은 안해의 말을 귀등으로 흘려버리고 행동이 불편한 임신 기간에 제 하고 싶은 대로 했죠.  남자는 나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뽀얀 담배연기가 눈앞에서 하얗게 피여올랐다.  -있잖아요, 이 세상에는 겉은 멀쩡하게 생겼어도 속은 음흉한 생각들로 가득찬 인간들이 얼마나 수두룩해요. 자신이 한 남자의 안해라는 정체성을 잃어가는 분노와 불안에 시달리던 안해는 약간의 하혈이 시작되였는데 그 녀자의 과거를 들먹이며 예전에 류산한 적 있지 않냐며 야멸차게 굴더래요. 안해가 할 수 있는 것은 목놓아 우는 것 뿐이였겠죠.  남자는 상념에 빠진듯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  -그 집 남정네는 머 하고 있었다오. 남자는 중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쩌면 중재자가 십분 필요했었겠죠. 량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갈등을 중지시키고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역할 담장자.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는듯 아주 잠간 눈을 감았다 떴다. -새우 등 터질가봐 상황을 다 알면서도 회피했죠. 조정자로서의 역할이란 것이 공정한 태도와 분명한 자기 주장을 갖고 있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건데 모든 남편들에게 이런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죠. 나는 남자의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그러니까 얼마 안 지나 안해는 하혈이 점점 심해지더니 안타깝게도 배속 아이를 결국 잃고 말았어요. 그러자 이번에 그 녀자가 내 남자를 빼앗은 대가라며 욕지거리를 해왔어요. 뭐 내 남자를 빼앗은 대가? 너무 무자비하지 않아요? 생각할수록 너무 악에 받치는 거예요.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 있나 싶을 정도니깐요. 안해가 미쳐버린 건 아마 그 때가 처음일 거예요. 벽을 얼마나 긁어댔는지 몰라요. 집안의 물건은 죄다 집어던지고 친정엄마가 와서 막 말리고… 근데 남편이 진짜 더 미친 놈이지요. 안해를 위로할 대신 혼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그 녀자랑 갑자기 나가버리는 거예요. 완전 미쳤죠! 남자의 미간은 순간 찌프러졌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것들이 옮는 것 같은 표정이였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웃긴 건 말이예요. 그러고 나서 후에 누군가 그러는데 새로운 아빠트에서 남편이 그 녀자랑 함께 사는 걸 목격했대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리혼서류는 택배로 보내왔는데 택배를 뜯어보는 순간 쓰러져버렸어요.  나는 표독스럽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차거운 공기는 각막마저 딱딱하게 만들었다. -혼미에서 깨여나 보니 뱀의 혀가 보였다. 오롯이 자신에게 필요한 욕망, 자신만을 위한 술수에 뱀은 혀가 두개 필요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두개의 태양이 뜬다면 인간은 죽음보다도 무서운 고갈을 맛보게 될 것이라. 두개의 혀를 가진 뱀, 죽음보다 무서운 뱀의 사악함… 뱀을 죽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차례는 안해였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남자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였소? 끔찍한 일이라도 발생했단 말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였다.  나는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내가 무덤을 만들어봐서 알죠. 그는 담배를 올리던 손을 멈췄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사람은 안 묻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아주 속이 개운한 감이 들었다.  그는 궁금해하는 한편 념려되는 눈치였다.  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다만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다시 봄이 올가요? 그녀에게… -어험, 그러챈쿠, 그렇구말구… 남자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지금 당신 눈앞에서 죽으면 어떨 것 같아요? 남자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소. 한창 좋을 때요,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는데 나 같은 홀애비도 외로움 이겨내며 살고 있는데… 무슨 험한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다만 인생 망쳤다 생각 말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잘살아가야 하오… 죽으려는 생각은 하지도 마오.   그렇게 단호한 목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은 같았다. 나는 새파란 롱담이라고 얼버무리고서는 그에게서 담배 한가치 받아 피웠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내가 걱정된다는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씌여져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하나의 작은 파문이 되였음을 명백히 알아보았다. 더우기 그것도 가족이 아닌 타인한테서… 내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남자도 따라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시 삼십오분을 넘기고 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오백원을 꺼내 테이블 우에 올려놓고는 문을 떼고 나가더니 사라져버렸다.    나는 건물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돌아가는 길에 나섰다. 아까 머물렀던 골목길의 벤치에 이르렀다. 이상하게도 여태 나를 괴롭혔던 초조와 불안의 정서가 가뭇없이 사라렸다. 벤치에는 대학생들로 짐작되는 청년들이 앉아서 왁작지껄 떠들고 있었다. 지나가는 나를 의식했는지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자 나는 조금 불편함을 느끼고 옆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고개 들어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 이 유난히도 가슴 따뜻하게 느껴졌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후련했다.   마지막으로 그 무덤을 찾아가기로 작심하고 앞마당으로 향했다.  한 아이가 내게로 다가와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산 시체들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올가미의 올가미였다. 출처:2018년 제3호
46    박명옥: 엄마의 살구나무(단편소설) 댓글:  조회:622  추천:0  2019-07-12
엄마의 살구나무 박명옥   “어머! 살구네.” 윤은 불어오는 바람에 젖은 머리를 손빗질하며 걷다가 동네 과일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빠트 커뮤니티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였다. 과일가게는 이제 막 문을 열고 통로를 향한 창가 쪽에 과일을 예쁘게 진렬하고 있었다. 사과와 배는 물론 복숭아와 멜론, 수박과 같은 제철 과일이 바구니나 나무박스에 수북수북 담겨있었다. 살구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구석 쪽 작은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있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소박한 비주얼이였다.  윤은 살구가 담긴 바구니 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살구를 한알 집어들었다. 주황과 빨강으로 적당히 물든 살구는 입에서 군침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윤이 관심을 보이자 과일가게 사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요즘 살구 맛있어요. 싸게 드릴게 한봉지 담아가셔요.” 평소 같으면 무슨 과일이 이리 비싸냐고 타박을 했을 윤이지만 아무 소리 안하고 과일가게 사장이 담아주는 대로 살구 봉지를 받아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엘레베터를 기다리면서 윤은 봉지를 살짝 열고 코끝에 갖다 댔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향이 풍겨왔다. 윤의 마음은 어느덧 35년 전 작은 시골마을 뒤마당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는 풍경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형체도 없지만 윤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 마당에도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령이 꽤 됨직한 살구나무는 해마다 4~5월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7~8월 되면 노랗게 익은 살구를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윤이네 살구는 보기 드문 참살구였는데 알이 굵고 겉모습은 허여멀쑥하지만 진한 맛이 덜한 백살구나 비주얼 만큼은 화려해 맛있어 보이지만 정작 먹어보면 시큼털털한 개살구와는 달리 진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였다. 잘 익은 살구를 힘줘서 누르면 반으로 톡 쪼개지면서 살구씨가 톡 튀여나온다. 살구씨는 따로 모아두었다가 말려서 한약으로 쓰기도 했다.  마을 맨 뒤편에 자리잡고 있던 터라 다른 집에 비해 유난히 마당이 컸던 윤의 고향집에는 앵두, 배,  자두 등 여러가지 과일나무가 있었지만 그중 으뜸은 단연 살구나무였다. 나무가 어찌나 큰지 거짓말 안 보태고 장정 둘이 마주서서 힘껏 팔을 벌려야 간신히 껴안을 정도였다. 나무가 크니 살구가 많이 열릴 때는 앞집, 옆집, 뒤집에서 빌려온 고무 다라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 때는 과일이 많이 열려도 팔 생각은 못하고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살구가 빨갛게, 노랗게 익다 못해 바닥에 한두개씩 떨어지면 엄마는 가족들을 불러모았다. 엄마, 오빠, 윤과 녀동생이 나무 밑에서 큰 비닐을 한 귀퉁이씩 잡고 서있으면 아버지는 긴 나무막대기로 살구나무 가지를 툭툭 건드렸다. 살구가 후두둑 비닐 우로 떨어질 때마다 윤과 녀동생은 살구가 머리 우로 떨어질가봐 “아악~” 비명을 질렀고 오빠는 그 때마다 “호들갑 좀 떨지 마.” 하면서 눈을 부라렸다. 비닐 우로 떨어진 살구들은 고무 다라에 모았다가 다시 크고 작은 대야와 바가지에 가득가득 담겨졌다. 윤과 녀동생은 바가지를 들고 앞집으로 옆집으로 뒤집으로 심부름을 갔다. “엄마가 갖다 드리래요~” 하면 동네사람들은 “아이구 맛나겠다. 엄마한테 잘 먹겠다고 전해~” 하면서 빈 그릇을 그대로 돌려주는 법이 없이 뭐라도 채워서 윤의 손에 들려줬다. 시골에 살기는 하지만 농사를 짓지 않았던 엄마는 그녀가 받아온, 밭에서 방금 따온 배추며 무우, 상추, 쌀독에서 퍼온 쌀과 잡곡, 하다못해 집에서 먹다가 덜어준 반찬을 보고 빙그레 웃으며 “살구 덕을 톡톡히 보네.” 하고 뿌듯해했다.  살구 덕을 보기는 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잘난 척하고 까칠하게 굴던 친구들도 살구가 익을 때가 되면 괜히 그녀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친한 척을 했다. 어떤 아이는 아끼는 공책이나 연필 지우개를 통 크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에게 살구를 한줌씩 주고 “넌 좋겠다. 이렇게 맛있는 살구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서…” 부러움을 한눈에 받을 때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한철이긴 했지만 윤은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수 있었고 한때나마 아이들에게 떠받들려 지내던 기억은 오래도록 윤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어느 해엔가 살구나무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살구가 많이 열려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주고도 남게 되였다. 엄마는 “썩여버리느니 한번 팔아나 보자.” 하며 고무 다라를 이고 마침 동네서 열리던 체육대회로 향했다. 그 때 일년에 한번 열리는 체육대회는 향乡에 소속된 근처 마을 사람들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내려놓고 배구, 축구와 같은 경기를 하며 먹고 즐기는 동네 잔치 한마당이였다. 윤이네 살구는 체육대회에서도 단연 인기를 차지해 담배 한대 필 새에 살구 한다라는 매진되였다. 엄마는 생각보다 큰 돈을 손에 들고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해에도 엄마는 살구 다라를 이고 체육대회로 향했다. 한다라를 금방 팔고 들어와 또 한다라를 이고 갔다. 엄마의 살구 장사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고 몇년 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벽돌집으로 이사한 뒤 엄마는 집 앞에 딸린 작은 방에 길가로 향한 출입문을 따로 내고 작은 식료품가게를 오픈했다. 수년간의 살구 장사 경험이 엄마가 가게를 오픈하는 데 큰 도움이 되였을 거라고 윤은 생각했다.  사실 엄마의 장사 경험은 살구가 처음이 아니였다. 윤이 어릴 때 아버지는 농구창(농기구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엄마를 비롯한 공장 식구들은 여름 한철 공장측에서 마련해준 얼음과자 기계로 얼음과자를 만들어 판매했다. 사탕 과자가 귀했던 시절이라 달콤한 얼음과자는 더운 여름에 아이들에게 특히 인기였다. 비록 물에 사카린을 대충 타서 틀에 얼린 이름 뿐인 얼음과자였지만 아이들은 다 먹은 나무막대기까지 쪽쪽 빨아먹을 정도로 얼음과자를 사랑했다. 밖에서 뛰놀다가 땀을 흠뻑 흘린 상태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얼음과자를 한입 베여물 때의 그 기분이란.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일하는 얼음과자 공장에 들리면 그 맛있는 얼음과자를 량껏 먹을 수 있었다. 윤의 어린 시절 또 다른 행복한 추억이였다.  얼음과자 공장은 많이 팔든 적게 팔든 월급만 받으면 그 뿐이였지만 엄마는 다른 돈벌이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이 끝난 늦은 저녁이나 주말이면 엄마는 얼음과자가 든 아이스 박스를 경운기에 싣고 몇십리 떨어진 근처 마을로 장사를 다녀왔다. 근처 마을은 윤이 사는 소재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있어서 어른들은 가끔 소재지 마을로 볼일을 보러 왔다가 집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 얼음과자를 사주고 싶어도 가는 길에 다 녹을가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개당 5전 하는 얼음과자에 조금씩 마진을 붙여 팔아도 너무 고맙다고 좋아했다. 공장측에 재료비 떼주고 경운기 기사 수고비 챙기고 남은 돈은 오롯이 엄마 몫이였다. 엄마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아이들의 학용품을 사주었고 철마다 옷과 신발도 바꿔주었다. 새옷과 신발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였지만 윤은 엄마가 무거운 얼음과자 상자를 내리다가 발등에 찍힌 상처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늘 일에 쫓기던 엄마는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그 상처들은 오래도록 엄마를 괴롭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엄마는 묵은 상처에서 오는 통증 때문에 힘들어했다.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집과 멀찍이 떨어진 마당에 나무토막으로 대충 우리를 만들고 돼지 두세마리씩 키웠다. 봄에 아기돼지를 사다가 여름 내내 열심히 키워 가을에 팔면 꽤 쏠쏠한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 엄마는 마당에 낡은 솥을 따로 걸어놓고 아침마다 돼지한테 먹일 죽을 한솥 끓여놓고 일하러 가면서 윤에게 학교 다녀오면 돼지죽을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윤은 대답은 시원스레 했지만 학교 끝나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다 보면 늘 엄마의 부탁을 까먹기 일쑤였다. 그 때는 벼농사와 함께 담배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담배를 건조시키기 위해 만든 흙집이 빙 둘러서있는 가운데 자연스레 공터가 생겨 아이들이 뛰놀기에 딱 좋았다. 책가방을 한켠에 집어던지고 신나게 술래잡기도 하고 고무줄 놀이도 하다가 퍼뜩 엄마 부탁이 생각나서 헐레벌떡 뛰여가면 엄마는 벌써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땀 범벅이 된 윤의 몰골을 보고 짐작이 된다는듯 혀를 끌끌 차며 “또 돼지죽 주는 거 까먹었지? 엄마가 뭐라고 그랬어? 놀더라도 돼지죽 먼저 주고 놀라고 안했어?” 야단을 쳤다.  엄마는 닭도 여러마리 키웠다. 덕분에 윤이 형제는 매일매일 신선한 닭알을 먹을 수 있었다. 여름이면 닭 배설물 냄새 때문에 좀 불편하긴 했지만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가 금방 낳은 신선한 닭알을 꺼내올 때면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매번 닭장 앞에서 어린 윤은 제발 닭이 알을 많이많이 낳았기를 기도했다. 엄마는 늘 아버지와 오빠를 먼저 챙겼기 때문에 한두알 뿐이라면 윤의 몫은 없었기 때문이였다. 특히 병약한 오빠는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여서 엄마는 아침마다 찹쌀가루에 닭알 한알을 톡 깨서 넣고 뜨거운 물에 개서 주곤 했는데 윤은 그것이 너무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오빠만 편애한다고 여기고 나중에 크면 찹쌀가루 반죽을 원 없이 먹어야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식료품가게를 차리고 난 후 엄마는 그나마 자질구레한 부업에서 해방되였다. 적어도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할 필요가 없었고 그 자리에서 돈을 받고 물건만 건네주면 다였다. 대신 자유가 없었다. 일년 365일 쉬는 날 없이 문을 열어야 했고 문에 매단 종이 딸랑 울리면 밥을 먹다가도 뛰여나갔고 화장실도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해서 그런지 엄마는 점점 무릎이 아프다고 했고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신음을 하곤 했다.  가게를 차린 뒤에도 엄마의 넉넉한 인심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는 지나가는 아이들을 불러들여 사탕 몇알씩 쥐여주었고 무게로 파는 술이나 사탕 과자도 저울추가 쑥 올라갈 정도로 넉넉히 담았다. 덕분에 윤이네 가게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이 되여갔다. 사람들은 딱히 살 것도 없으면서 “윤이 엄마 있소?” 하면서 들어와 한참을 수다를 떨다 돌아갔고 은행이나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도 꼭 들렸다 가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까운 상점을 놔두고 굳이 윤이네 가게에서 물건을 사기도 했다.  윤이 현성에 있는 고중을 마치고 대도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그리고 결혼할 때까지 엄마는 작은 식료품가게를 계속했다. 말단 공무원이였던 아버지의 월급만으로 다섯 식구 먹고 살기 힘들던 때 엄마의 식료품가게는 생계에 큰 보탬이 되였다. 윤은 그 후로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살구가 가득 담긴 커다란 고무 다라를 이고 가던 엄마의 뒤모습과 식료품가게 출입문에 매단 종소리를 듣고 에구구 무릎을 짚으며 일어나던 엄마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곤 했다.  “별일 없냐? 왜 전화도 안하고… 하도 전화가 없어서 무슨 일이 있나 근심했다.”  전화기에서 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주에 한번, 늦어도 2주를 넘기지 않으려고 하지만 전화할 때마다 아버지는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정년퇴직을 하고 아버지는 별다른 소일거리 없이 집에서만 지냈다. 오전 오후 30분씩 산책하는 것 말고는 TV를 보거나 담요를 펴놓고 카드놀이를 했다. 친구들 만나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늘 아팠다.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는 타박과 여기저기 아프다는 하소연이 아버지가 무한 반복하는 레퍼토리였다. 다리도 아프고 가슴도 답답하고 심지어 치아가 안 좋아 잘 씹을 수 없다고 했다. 그마저도 아프지 않을 때는 화장실 가기 힘들다고 했다. 변비약을 매일 먹는데도 화장실 가기 힘들다며 어쩌겠냐, 나이를 먹었으면 죽어야지 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아버지 자꾸 아프다고 그러는데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오히려 건강념려증에 걸린 것 같아.”  녀동생은 아버지의 증세를 그렇게 단정지었다.  “어디 조금만 불편해도 바로 병원부터 뛰여가는데 뭐. 저번에도 변비 심하다고 대장내시경 하러 갔더니 의사가 그만 오라고 했대. 대장내시경도 너무 자주 하면 안 좋다고. 아마 아버지도 할머니처럼 오래오래 사실 거야.” 처음에는 윤도 녀동생처럼 아버지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온갖 약이며 건강보조제품을 바리바리 사서 보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대신하고 싶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아버지마저 떠나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도 있었으리라. 지금은 레퍼토리의 후유증 때문인지 아버지가 아프다고 해도 덤덤하게 래일 병원 다녀오세요 하고 만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윤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한창 나이에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망하게 세상을 뜬 엄마를 생각하면 그 모든 게 아버지 탓인 것 같아서 리유 없이 막 밉다가도 또 엄마가 없는 십수년의 세월을 마음 붙일 데 없이 여기저기 떠돌며 눈칫밥 먹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짠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 모순된 마음으로 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다가 머뭇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몇년에 한번 볼가말가한 물리적인 거리, 눈에 띄게 로쇠해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여든을 바라보는 년세를 새삼스레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있을 때 잘해야지 하다가도 아버지가 한번씩 엄마 얘기를 하며 윤의 속을 긁을 때면 한동안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곤 했다.  윤이 기억하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의 모습은 늘 엄격하고 딱딱했다. 잘 웃지도 않았고 늘 뭔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말투도 윽박지르듯했고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벌컥벌컥 냈다. 집안 분위기는 늘 가라앉아있었고 식구들은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지금 아버지의 늙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아버지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아버지는 관공서에 볼일을 보러 가는 것도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늙고 병든 로인네 취급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할 수 없지 뭐. 다 늙은 로인네를 누가 대우해주겠냐.”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후 내쉬였다. 윤은 가끔 아버지가 마흔을 훌쩍 넘긴 자식의 건강을 걱정한다거나 손주들과 함께 있을 때 껄껄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늙긴 늙었구나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아버지는 5남매의 장남이였다. 할머니는 자식을 9명이나 낳았지만 5남매만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밑에 동생들과 나이 차이도 꽤 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군대 가있을 때 할머니가 막내삼촌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았다는 얘기를 하며 “그 때는 시어머니랑 며느리랑 같이 출산하는 일이 많았지 뭐.” 하고 혀를 끌끌 찼다. 할머니가 그 때까지 생산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당시 중학생이였던 윤은 적잖이 충격이였다. 실제로 막내삼촌은 윤의 오빠와 6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시집왔더니 막내삼촌이 얼굴에 때국물이 꾀죄죄한 채 엉덩이를 드러낸 내복을 입고 누룽지를 먹고 있더라.” 라는 얘기는 윤이 자라면서 엄마에게서 수십번도 더 들은 얘기였다.  6살 짜리 막내시동생이 있는 집으로 시집온 엄마, 시작부터 험난한 시집살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시동생 거기다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살았다. 열명도 넘는 대식구가 전부 엄마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시 마흔 후반 밖에 되지 않았던 할머니는 며느리를 보자마자 부엌일에서 손을 떼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식구의 삼시세끼와 청소, 빨래는 아무 것도 아니였다. 엄마는 대부분 시간을 밭에서 보냈다. 군대에서 10년 가까이 복무한 경력으로 정부기관에서 말단 공무원 직을 맡고 있던 윤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지 않아 월급으로 쌀을 사먹어야 했다. 쥐꼬리 만한 월급은 대식구가 먹을 쌀과 부식품을 구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엄마는 동네를 지나다가 손바닥 만한 자투리 땅만 보여도 호미로 밭을 일구고 가지, 고추, 오이 등 닥치는 대로 심었다. 엄마는 쉼 없이, 매일매일 투쟁하듯 일만 했다.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갔다가 밤 늦게 달을 이고 돌아왔다. 다람쥐 채바퀴 돌듯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해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누이, 시동생들이 시집 장가갈 나이가 되여 없는 살림에 넷이나 되는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숟가락 몇개 남지 않았다. 식구는 줄었지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했다. 엄마는 쉴 수 없었다. 엄마가 하루라도 쉬면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 때 얘기를 하자면 “아마 책을 몇권 써도 모자랄 거야.” 하며 엄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에야 그렇게 살라고 하면 싫다고 하겠지만 그 때는 왜 바보 같이 그리 살았나 모르겠다.” 동생들을 시집 장가 보내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실질적으로 동생들의 부모역할을 했던 아버지는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동생들을 챙겼다. 엄마가 뼈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은 거의 동생들 뒤바라지에 들어갔다. 마냥 순둥이 같던 엄마도 끔찍할 정도로 내 부모형제만 챙기는 아버지가 얄미웠는지 한번씩 대들기도 했지만 아버지를 이기지는 못했다.  “넌 나중에 절대 장남 만나지 말아.”  윤이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말이였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너희들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말아.”  운명의 장난인지 윤과 녀동생 모두 장남을 만났지만 엄마의 기도가 통했던 건지 엄마가 걱정했던 만큼 시집살이가 힘들지는 않았다.  윤은 엄마가 오랜 세월 짊어졌을 삶의 무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지금의 윤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였다. 그 무게를 버티느라 정작 엄마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엄마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과정이였다. 모든 걸 내려놓고 오롯이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과정. 하지만 지금 어느 누가 엄마의 그런 헌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삼촌과 숙모들, 심지어 엄마가 업어키운 사촌동생들마저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도 애틋해하지 않았다. 가끔 명절에 한자리에 모이거나 결혼식 같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 윤은 그들이 빈말이라도 엄마를 찾으며 “형(수)님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과 같은 인사를 해주지 않을가 기대했지만 번번이 실망했다. 너무나 빨리 가족들에게 잊혀진 엄마, 그것이 엄마가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대가였다.    뒤마당에 살구나무가 있던 허름한 초가집에서 마을 한복판에 있는 으리으리한 벽돌집으로 이사를 하고 작은 식료품가게를 경영하면서 아버지의 월급 외에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자 엄마의 살림에도 윤기가 돌았다. 먹을 것이 귀해서 고기나 사탕 과자 같은 귀한 음식이 생기면 서로 눈치 보며 양보하던 일도 옛말이 되여버렸다. 엄마의 가게는 윤이 형제들에게 천당 그 자체였다. 엄마가 팔다 남은 사탕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윤은 너무 행복했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사탕 한알씩 나눠주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 옛날 살구를 나눠먹을 때처럼 아이들은 또다시 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엄마는 저녁이면 가게 문을 닫고 시내 장마당에서 산 금고를 열고 하루치 판매수입을 정산했다. 습관적으로 손에 침을 뱉고 하나 둘, 지페를 세던 엄마의 모습, 그 순간 엄마의 얼굴에 피여오르는 뿌듯함과 환희를 지켜보는 일이 윤에게는 또 다른 행복이였다.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시절이였다. 윤은 그 행복이 오래오래 가기를, 그래서 엄마가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그 시절이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만 더 오래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가. 하늘은 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제 앞가림도 간신히 하던 오빠도 장가를 가 색시를 맞이하고 윤도 대도시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착한 신랑을 만나 결혼하고 녀동생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취직하고 이제 자식들 효도 받으며 복을 누릴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엄마는 거짓말처럼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은 아직도 엄마가 떠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라도 금방 내릴 것처럼 잔뜩 흐린 수요일,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와 며칠 전 Y시 병원에 입원한 엄마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저편에는 엄마 대신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삼촌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젖은 목소리로 조금 전에 엄마가 떠났음을 윤에게 알렸다. 윤은 누군가 망치로 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뗑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화기에서 외삼촌의 말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12층 회사 사무실이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푹 가라앉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풍덩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을 보고 지나가던 직장 상사가 놀라서 윤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회사 건물 로비 귀퉁이에 기대서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윤은 엄마가 아픈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이 아픈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윤에게 그 사실을 속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되면 나중에 사돈들 볼 면목이 없지 않겠느냐가 아버지가 윤에게 사실 대로 알리지 않은 리유였다. 윤은 그 때 임신 8개월이였다. 윤의 출산에 맞춰 엄마는 윤의 산후조리 해주러 온다고 배내저고리부터 포대기, 천기저귀까지 다 준비해놓고 기차에 오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인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윤은 엄마와 통화를 했었고 엄마는 “수술만 하면 금방 나을 거야.” 하며 윤을 안심시켰다.  “엄마 가실 때 눈도 감지 못하고 가셨어. 얼마나 억울했으면…” 엄마의 림종을 지켰던 녀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흐느껴 울었고 윤도 녀동생을 붙잡고 같이 울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병세를 윤에게 뿐만 아니라 엄마 본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갈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으므로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였을 때 윤의 이모가 엄마를 붙잡고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쩌다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려가지고 하는 바람에 대충 짐작을 했는지 엄마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고 하면서 녀동생은 또 통곡을 했다.  가벼운 염증인 줄 알고 입원한 엄마가 다시 병원에서 나올 때는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하루 반나절 걸릴 거라던 수술은 한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미 다른 부위로 전이가 많이 되여 더 이상 손쓸 수 없다는 게 병원 측의 설명이였다. 아버지는 객지에서 운명할 수 없다며 기어이 의식이 없는 엄마를 구급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갔다. 구급차가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릴 때마다 엄마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많이 힘들어했다. 당시 동행한 녀동생은 구급차가 출발하기 전 의사에게서 건네받은 모르핀주사는 까맣게 잊은 채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 엄마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녀동생은 지금까지 후회로 가슴을 치고 있었다. 왜 주사가 있다는 걸 몰랐을가. 그랬으면 엄마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아버지는 왜 엄마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겼는지 윤은 리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티다가 한순간에 무너진 엄마의 기대, 그 순간 절망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윤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질듯 아팠다.  윤은 지금까지도 그 때문에 아버지한테 서운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버지 때문에 엄마의 림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윤에게 한이 되였다. 적어도 사실 대로 얘기해주었으면 엄마의 림종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엄마와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엄마도 가족 친척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윤은 결국 엄마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윤보다 윤의 아이를 걱정한 아버지와 친척들이 비행기를 타겠다는 윤을 극구 말렸고 윤 대신 장례식에 다녀오겠다던 남편도 혼자 남을 윤이 걱정되여 결국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몇날 며칠을 밥도 못 먹고 울다가 어느 날 배속의 아이가 먹을 걸 달라고 발로 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편의 손에 이끌려간 집 앞 식당에서 남편이 구워주는 고기를 꾸역꾸역 삼키며 윤은 또 통곡을 했다. 엄마가 떠났는 데도,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데도 나는 이렇게 밥을 먹고 사는구나… 생각을 하자 먹은 음식을 다 토해내고 싶도록 후회스러웠다. 엄마에게 너무 큰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오래동안, 배속의 아이가 성장하여 고중생이 될 때까지 윤은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한동안은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윤이 부르기만 하면 엄마가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엄마와 관련된 대목이 나올 때마다 윤은 눈물을 한바가지씩 쏟았다. 예쁜 옷이나 화장품, 맛있는 음식을 보면 엄마 생각부터 났고 동네 아줌마들이 친정엄마 어쩌고 얘기할 때마다 부러워 미칠 지경이였다. 지금이라면 엄마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엄마는 옆에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컸다. 아이 둘을 다른 사람 손 하나 빌리지 않고 오롯이 혼자 키우면서 윤은 엄마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엄마는 늘 일에 쫓기면서 아이 셋을 어떻게 키웠을가. 새댁 시절 국이나 반찬이 생각했던 만큼 맛이 안 날 때도 엄마에게 전화해서 양념 비법을 물어보고 싶었다. 둘째를 낳고 이름 지으러 간 철학관에서 엄마, 아빠의 사주도 필요하다며 윤의 태여난 일시를 물었을 때 윤은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음력 생일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정확한 시간까지는 몰랐다. 엄마가 계실 적에 얼핏 저녁 7~8시 사이로 들은 것 같아 아버지에게 확인했지만 아버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작고 소소한 일부터 크고 중요한 일까지 엄마가 필요한 곳은 많았지만 엄마는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후회는 늘 뾰족한 칼날이 되여 가슴을 찔렀다. 엄마를 좀더 아껴줄걸. 좀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줄걸. 아프다고 할 때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좀더 새겨들을걸.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엄마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걸.  돌아가시기 전해 엄마는 윤이 사는 도시로 려행을 다녀갔다. 엄마의 고질병인 관심병과 관절염이 마음에 걸렸던 윤은 엄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 검진을 받았다. 엄마가 다른 데가 아플 수도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던 윤은 부분 엑스레이만 간신히 찍고 검진을 마쳤다. 엄마가 돌아간 뒤에야 윤은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그 때 제대로 된 검진을 받았더라면 엄마는 좀더 우리 곁에 있었을 텐데… 아버지를 탓하고 싶은 건 결국 그런 죄책감에서 피면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아프게 한 건 아버지였고 엄마를 지키지 못한 건 윤이였다. 엄마가 평생 이루어놓은 질서는 엄마의 부재와 함께 한순간에 무너졌고 남은 가족은 우왕좌왕 헤매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각자의 슬픔에 빠져 상대방의 상처를 외면했고 엄마의 부재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물으며 서로를 탓하고 질책했다. 원래부터 사이가 버성겼던 아버지와 오빠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져갔다. 몇년 후 녀동생마저 결혼과 함께 타지로 떠나자 고향에는 아버지와 오빠만 남겨졌다. 처음 몇년은 오빠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으나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돌아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오빠는 틈만 나면 아버지를 향해 으르렁댔고 그 때까지 서슬이 퍼런 성격을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아버지와 오빠의 피 튀기는 싸움을 목격하는 것도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 되였다. 엄마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 동네 사람들이 주선하는 대로 이웃 마을에서 혼자 된 아주머니를 데려와 살림을 합쳤다. 뾰족한 하관과 옴폭 들어간 눈 때문에 까칠한 인상의 아주머니는 들어온 지 한달도 안돼 오빠의 호칭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의 옆구리를 찔렀고 아버지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오빠를 혼냈다. 오빠는 어떻게 처음 보는 아주머니한테 엄마 대접할 수 있냐며 언성을 높였고 화가 난 아버지는 작은 집을 하나 얻어 오빠네를 분가시켰다. 가뜩이나 과묵한 오빠는 점점 말이 없었고 가끔 술에 취해 엄마 무덤 앞에 쓰러져있다 오곤 했다. 명절에 한자리에 모일 때도 오빠는 아주머니가 만든 음식을 거부하고 깡술만 마셨고 아버지 또한 그런 오빠를 가만두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명절 마무리는 항상 아버지와 오빠의 잦은 다툼으로 끝났다.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 거리 만큼이나 멀어진 마음의 거리, 엄마가 남기고 간 가장 큰 숙제였다.  오빠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윤도 아버지가 서둘러 살림을 합친 것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내가 달래 로친네를 얻었겠냐. 며느리 손에서 밥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다 늙어서 쭈그리고 앉아 혼자 속옷 빨아입는 것도 그렇고. 니네는 모를 거다. 내 심정이 어떤지. 어떤 때는 죽지 못해 산다.” 할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와 오래 갈 줄 알고 그 자식들 생일까지 챙기며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아주머니는 2년이 채 안된 어느 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무척 락망했다. 하지만 공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닥친 끼니와 빨래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서둘러 다른 사람을 만났고 곧바로 새로운 만남과 헤여짐을 반복했다. 몇년에 한번씩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아버지 옆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윤은 남편 보기가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미웠지만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처음 만난 아주머니가 집을 나간 후 윤은 아버지가 만나는 아주머니들한테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잘 챙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옷과 화장품을 바리바리 선물했다. 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지 괜히 심통이 나기도 했다.  “어쩌겠냐. 그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다 늙은 령감 시중을 들어주겠냐. 다 돈 보고 하는 짓이지.”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만남과 헤여짐의 리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공무원이였던 아버지의 퇴직금은 적지 않았지만 리해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보기 싫어하는 아버지의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평생을 힘들게 살아온 만큼 아버지는 돈에 린색했다. 경제권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고 필요할 때마다 고양이 오줌 누듯 찔끔찔끔 생활비를 타쓰던 아주머니들은 진저리를 치며 집을 나갔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신세 한탄을 했다.  “부모 복도 자식 복도 없는 놈이 무슨 처복이 있겠냐.” 아버지의 이상한 론리에 따르면 아버지 불행의 모든 원인은 결국 엄마에게 있었다. 엄마와 결혼으로 불행이 시작되였고 엄마가 일찍 떠남으로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불행해졌다는 것이다. 처음 아버지에게서 그 말도 안되는 론리를 들었을 때 윤은 파르르 몸을 떨며 분노했다. 엄마와 결혼이 잘못된 거라면 우리가 태여난 것도 잘못된 거네? 그게 지금 자식 앉혀놓고 할 소리냐고 바락바락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돌아가서도 아버지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엄마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련민이 깡그리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리기적일 수 있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윤은 엄마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의 윤과 비슷한 나이대의 엄마, 엄마는 그 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가. 엄마는 늘 소화제를 달고 살았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엄마 주변에는 엄마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세월 엄마가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아무도 들여다봐주지 않았다. 엄마 혼자 힘으로는 풀기 어려웠던 그 상처들은 좀벌레처럼 엄마의 몸을 조금씩 해치고 있었다.  윤은 자라면서 한번도 아버지가 엄마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어쩌다 화장품이라도 바를라 치면 쭈그렁 호박탱이에 그런 걸 바른다고 누가 쳐다보기나 하냐고 비아냥 댔고 아이들이 남긴 밥 한주먹이 아까워 먹고 있으면 배살이 남산만해가지고 뭘 또 먹느냐고 타박을 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 트러블이 있을 때도 무턱대고 엄마부터 나무랐다.  윤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엄마는 웃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고 할머니는 미닫이문 옆에 다리를 가슴에 붙인 채 쪼그리고 앉아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해오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며불며 하소연을 했고 아버지는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며 엄마를 윽박질렀다. 엄마는 처음에는 뭐라고 항변을 했지만 곧 그것이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아예 엄마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편들어주는 아들을 믿고 기고만장해진 할머니가 입에 거품을 물고 “거짓말하지 마오.” 소리를 지르던 모습. 그 앞에서 엄마는 너무 힘 없고 약해보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트집을 잡는 또 다른 리유는 오빠 때문이였다. 아버지는 오빠가 병약한 걸 모두 엄마 탓으로 돌렸다. 외가에서 유전되였다는 말도 안되는 리유를 대면서. 오빠는 물론 태여날 때부터 병약한 건 아니였다. 돌을 갓 넘기고 한번은 고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데 그 때 집안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돈을 주지 않아서 병원도 못 가고 동네 돌팔이의사를 찾아가 뜸만 죽어라고 떴다고 한다. 아이는 고열로 축 처져있는데 거기다가 뜨거운 뜸을 계속 떴으니. 엄마에게 두고두고 한이 되여버린 그 일을 아버지는 어떻게 엄마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 늙은이가 이제 앉으면 얼마나 오래 앉겠다고 그걸 하나 제대로 모시지 못하냐고 엄마를 나무라던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할머니는 엄마가 돌아가고도 십오륙년을 건재하다가 몇년 전에 95세로 타계하셨다. 윤의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는 아버지가 만나는 녀자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초반에 만난 녀자들과 헤여질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경제적인 리유 외에 할머니도 한몫 하고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풀도 나지 않는다는 최씨네 녀자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할머니는 많이 차겁고 정에 린색한 사람이였다. 어릴 적 윤의 형제들이 안아달라고 엉금엉금 기여가면 나는 팔이 아파서 하며 슬며시 밀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윤은 할머니에게 안기거나 업힌 기억이 전혀 없었다.  “독한 년이 글쎄 집을 나갈 거면 곱게 나갈 것이지. 감자 깎는 칼까지 싹 챙겨서 나가지 않았겠니. 괘씸한 것, 길 가다가 다리나 확 부러져라.”  아버지가 맨처음 만난 아주머니랑 헤여졌을 때 할머니는 입술을 앙다물고 악담을 했다. 아버지만 모시면 되는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림을 합쳤던 녀자들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고 질겁해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녀자 복이 없어도 너무 없다며 한숨만 쉴 뿐 할머니를 탓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결국 양로원에서 돌아갔다. 엄마 말고도 며느리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아무도 모시려 하지 않았다. 숙모들은 하나 같이 할머니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도리머리를 저었다. 젊었을 때 할머니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다. 엄마라면 그래도 서운한 감정을 꽁꽁 숨기고 할머니를 모시지 않았을가. 윤은 할머니가 마지막 순간 적막한 양로원에서 한번이라도 엄마 생각을 하지 않았을가 궁금했다.  엄마에게 고마웠다, 미안했다고 얘기해야 할 사람은 또 있었다. 윤은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먼저 떠난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좋아하는 음식을 해준다거나 매일같이 예쁜 꽃을 놓아준다거나 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고집스런 얼굴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평생을 자기애로 똘똘 뭉친 아버지, 아버지는 언제 쯤 아버지 인생에서 본인 말고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가. 언제 쯤 엄마를 일찍 놓친 것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가.  아버지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가.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을가.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련민의 정도 없었을가. 엄마가 없는 세월 동안 대여섯번의 만남과 헤여짐을 반복하며 떠돌이 인생을 사는 아버지와 한창 나이에 미처 손쓸 새도 없이 허망하게 눈을 감은 엄마 중에 누가 더 불쌍한지 윤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둘은 상대방을 만나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중학생 딸아이가 신발을 벗고 현관에 들어섬과 동시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의 가슴에 달려와 팍 안긴다. 밖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있었다. 윤은 딸아이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긋한 땀 냄새를 킁킁 들이마셨다.  “엄마 품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 정말 좋아. 히히…” 딸아이가 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은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건 어째 엄마가 뚱뚱하다는 얘기 같은데?” 딸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윤은 딸아이의 천진란만한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요즘 아이들답게 키는 벌써 윤을 훌쩍 넘기게 성장했지만 하는 짓을 보면 영낙없는 어린 아이다. 나에게도 저만한 시절이 있었던가. 윤은 아득한 기억 저편 동네 병원 벤치에 누워있던 풍경이 떠올랐다. 첫 생리를 시작하고 심한 생리통 때문에 데굴데굴 구을 만큼 힘들어하자 엄마는 윤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통제를 맞고 병원 마당 벤치에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기억, 그 때 윤에게 쏟아지던 따뜻한 봄 해살 그리고 윤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엄마의 손길. 가끔 손바닥으로 부채를 만들어 윤의 눈을 부시게 하는 해빛을 막아주던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윤은 어느새 소르르 달콤한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왜 엄마가 계시는 동안 그런 소중한 추억을 더 많이 만들지 못했는지. 윤이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였다.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그 몇 안되는 추억을 꺼내여 곱씹고 곱씹으면 내가 정말 엄마에게 해준 게 없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왜 엄마가 언제까지나 옆에 있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가. 세상 두려울 것 없고 못할 것도 없는 엄마도 사실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고 외롭고 힘들 때는 혼자서 울기도 한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가.  언젠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가장 하고 싶은지,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윤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고 행복했다.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엄마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해주고 미처 못했던 말들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해주고 싶었다.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엄마 왜 그래요?” 딸아이가 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윤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응. 엄마 잠간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했어.” 윤의 눈앞에는 커다란 살구 다라를 이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엄마의 뒤모습이 떠올랐다. 엄마, 윤은 목놓아 불러보고 싶었다. 엄마가 한번이라도 뒤돌아봐주기를 바라면서. 엄마의 모습은 가물가물 아지랑이 속에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윤은 또다시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엄마가 사라진 길에서 엄마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듯했다. “윤아, 울지 마, 이제 그만 울어도 돼.”   하늘나라에 가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으로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여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정채봉 출처:2018 제3호
45    우도: 개구리(시, 외5수) 댓글:  조회:423  추천:0  2019-07-12
개구리(외5수) 우도   혀가 길어 해를 감아삼키는 종이여 매머드의 오한을 잠재우고 이제 너는 동토의 뚜껑을  열어젖혀도 된다   주머니가 커 뻥이 화려한 종이여 춘몽을 여는 너의 열창은 아직은 빈 들을 꽈악꽈악 애드리브로 채워버려도 된다   목이 없어  정이 깊은 종이여 명낭에 풀어논 목걸이 구슬은 마른 풀 적시는 사랑의 세레나데로 깨여나는 새싹의 고막을 간지럽혀도 된다   고무줄이 싫어 팬티마저 벗어버린 종이여 불가항력의 떡판 지조 높은 너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불시착한 그 자리에 이부자리를 펴도 된다   첫사랑              로포수에게서 일곱가지 참새 사냥법을 전수받은 소년은 그 해 겨울 슬그머니 그중 착한 방법  하나를 뽑아들었다 랭동 빼갈백반 먹이기였다 절반의 성공이였다 재잘거리며 맛있다던 공 들인 첫사랑은  그렇게 남 집 부뚜막으로  제풀에 취하여 날아가고 말았다    수상한 부부                                        바람 난 울 아부지 돼지 팔러 가신 날 맞바람 선포하고  집 나가신 울 어무이   아아 어이하여 그 시절 사냥을 접어야만 했던 고양이들의 부언랑설은 가난을 릉가하여 인심을 수런수런 설레게 했던가여   하늘은 또 어이하여 우리 집에 열두마리의 소를 내려주시고 어무이 파마기술은 어이하여 시골 아낙네들을 줄 서게 했던가여   아아 이제는  천千의 바람이 되여 티없이 해맑은 우리 어무이 빠알간 머플러만 만지작이시는   대책 없는 령감탱이와 그 부름소리에 속아넘어가려는 못난 할망탕구를 고발합니다 수상합니다 사랑 때문인가 봅니다                                                소 85년 가을 그 해도 물을 뗀 강바닥에는 기름진 풀들이 봄날처럼 솟아올라있었고 그 날은 소년이 고삐로 마구 소를 때리고 운 날이였다 벼 한이삭 훔쳐먹은 리유로… 오늘도 나는  땅에 엎드려 새김질하며  먼산만 바라보던 그 날의 소를 불러내 화해중이다 그 날 산너머 하늘은 그렇게 푸르렀다   락엽                  락엽 지는데 비와 눈물도  섞여내리는 날이면 그 속에서 나와 같은 얼굴의 잎새를 찾아낼 일이다 한치 오차 없이 술량도 같고  황소 고집도 닮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나 대신 많은 비와 바람을 맞아주어 고마웠다고… 계절이 실어오는 메시지는 엽편에 저장하고 내 마음도 지그시  흙 속으로 자맥질할 일이다 다시 봄이 오기 전에  나의 색갈은 좀더 진한 원색으로  화알화알 불타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폰생폰사                    폰도 자고  바람도 엎드린 밤은  호젓한 방 어둠이 깃든 내 마음에 작은 호롱불 하나 밝힐 일이다 백년 후를 마실 나가 오십년 전을 되돌아볼 일이다   내가 도착한 천국에는  선택받은 인체기관들이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었는데 면목 있는 그 목사님은 예상 대로 입만 오고 몸은 오지 못한듯했다 찰나에 나는 저만치서  솟구쳐오르는 뱀장어가 나의 몫임을  감으로 찰지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십색찬연한 자궁을 비롯한  기타 부위들이 의기양양  열을 내며 모여들고 있었다 사무치게 인간이 그리웠나보다 남녀합일의 인간으로 합쳐본다나 뭐라나   그 다음은 나도 모를 일이다 거품 찬란한 새벽 쉬 타임 애써 상쾌한 척 빠꼼히 깨여보니 불감의 휴대폰은 랭증에 울고 있고 그래도 그만하면 쓸 만한 아침이였다 일어나자 오줌도 싸고 물도 먹고 마실도 겸해 충전기도 찾아와야겠다 출처:2018 제3호
44    조영욱: 과잉된 기억(시평) 댓글:  조회:308  추천:0  2019-07-12
과잉된 기억 조영욱   우도시인의 여섯수의 시를 접하고 나서 총체적으로 든 생각은 문학에서 말하는 기억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여러 문학연구자들과 철학자들의 관점에 의하면 기억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추억으로서의 상’이고 또 하나는 ‘조작적인 것으로서의 상’이다. 이 두가지 기억은 모두다 문학으로 승화할 수 있다.  는 이 여섯수의 시 중에서 제일 앞에 위치해있다. 4련으로 구성된 이 시는 각 련 마지막 행에서 ‘…된다’로 압운 혹은 라임rhyme을 맞춘 데서 시인이 아주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대표작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여섯수의 시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시 중에는 이른바 ‘뻥’이라고 한 점과 ‘정이 깊다’고 한 것은 엄마 말을 잘 듣지 않는 개구리 설화를 념두에 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물론 개구리와 관련이 있지만 ‘목걸이 구슬, 고무줄, 팬티, 불가항력의 떡판, 지조, 이부자리’와 같은 것은 개구리와 어떤 론리적인 관련은 없어보인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현재의 지각대상에 많은 과거를 집중시키면 그 대상의 물질적 제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현재 지각대상에 속하는 개구리에 ‘목걸이 구슬, 고무줄, 팬티, 불가항력의 떡판, 지조, 이부자리’와 같은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개구리는 한층 더 연장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래서 1, 2, 3련은 총체적으로 봄을 여는 개구리의 역할을 그리다가 4련에 와서는 봄이나 개구리와는 상관이 없는 묘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장된 의미는 어설프기는 하지만 4련에서 개구리와 ‘상봉’함으로써 이 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은 말 그대로 시적 화자의 첫사랑 얘기를 하고 있다. ‘로포수’는 련애경험이 아주 풍부한 ‘소년’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그 선배로부터 소년은 어떤 수단(일곱가지 참새 사냥법)을 전수받았다. 그중에서 한가지 방법을 사모하고 있는 이성(참새)에게 써먹었다. 그러나 그 참새(첫사랑)는 지금 다른 사람과 결혼(남집 부뚜막으로 날아가다)해있다.  참으로 가슴 시린 첫사랑, 조금은 유치한 첫사랑이다. 흔히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 들어맞는듯하다. 는 시어가 아주 명백한 데 비하여 이 여섯수 중에서 가장 난해한 시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론리에 맞지 않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총제적으로는 부부싸움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1련은 그나마 난해하지 않고 론리에도 맞다. ‘울아부지’와 ‘울어무이’가 ‘맞바람’을 하고 있다. 3련은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2련은 당연히 아버지 얘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데 확실치 않다. ‘사냥’, ‘고양이’ 등등 2련에 출현하는 단어들은 론리적으로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러나 2련을 아버지에 관한 얘기라고 가정한다면 이 아버지는 아주 잘생겼거나 금전적으로 좀 여유가 있었나 보다. 그래서 ‘인심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3련에서 보듯이 어머니 역시 ‘파마기술’이 있어 돈을 좀 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바람을 피는 바람에 어머니도 ‘맞바람을 선포’하고 집을 나간다.  이 충돌에 대해서 시적 화자는 어머니 편인듯 싶다. 그래서 4련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천의 바람이 되여’라고 한 2행에서 ‘천千’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 몇가지 추측은 있지만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지 불명확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천’이 무언가 중요한 기억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인은 특별히 괄호 안에 한자까지 써넣으면서 표기한 것 같다. 정녕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시인만이 알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5련은 4련의 마지막 행의 련속인듯하다. 어찌됐든 이 부부는 싸움 끝에 화해를 한듯하다.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과 같은 부부싸움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화해를 마지막 행 ‘수상합니다 사랑 때문인가 봅니다’로 표현한다.  는 전형적으로 시인의 동년의 기억을 그린 시다. 시인은 이른바 70후70后다. 시에서는 85년이라고 했으니 시인이나 ‘소년’은 10대일 때이다. ‘벼 한이삭 훔쳐먹은 리유로’ ‘소년’은 소를 울면서 때렸다. 지금은 이를 후회하며 ‘화해’를 하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벼 한이삭’이다. 소가 그 작디작은 ‘벼 한이삭’을 훔쳐먹은 것 때문에 ‘소년’과 충돌이 생긴 것이다. 이는 아마 먹을 것이 풍족하지 못하던 70, 80년대 시인의 어떤 기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소’로 표현되는 상대가 꼭 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는 어느 인간일 수도 있다. 그 인간과 먹을 것 때문에 생겼던 어떤 충돌을 오늘날에 와서는 후회하고 그것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날 산너머 하늘은 그렇게 푸르렀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절을 산 인간이라면 비슷한 경험들이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다. 은 시인이 아마 기본적으로 어떤 동일성identity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인 ‘나’는 세계(락엽)에서 동일한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그 ‘나’는 ‘나’처럼 ‘한치 오차 없’어야 한다. 그런 끝에 ‘나’를 재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색갈은 좀더 진한 원색으로 화알화알 불타올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에는 또한 시인의 도플갱어적 시각도 보이고 있다.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 리론처럼 우주 어딘가에는 지구와 똑같은 혹은 비슷한 행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하는 데 의하면 괴테가 도플갱어를 경험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이를 경험하고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자의식 혹은 기억의 과잉이 이러한 현상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는 이 여섯수의 시 중에서 제일 맨 마지막에 위치해있다. 여섯수의 시 모두다 심혈을 기울였겠지만 이 마지막 한수는 특별히 신경을 쓴듯하다.  제목에 휴대폰을 뜻하는 폰이라는 글자가 있어 휴대폰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라는 90년대 류행가 제목을 빌어 라고 이름 하였다. 이 시는 두가지 경우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겪는 일이다. ‘폰도 자고 바람도 엎드린 밤’에 이것저것 잡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다. 꿈에 아마 휴대폰 내부를 상징하는 얼키설키 뒤엉킨 전기선은 ‘선택받은 인체기관들’로 나타난다. 이는 또한 ‘십색찬연十色灿然’이라는 독특한 낱말로도 표현되고 있다. 아무튼 이는 꿈속에서 본 내용이다. 인간은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는가? 꿈을 꾸었는데 아주 생뚱맞아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을 때. 어찌됐든 꿈에서 깨여나 보니 꿈에 내부를 보았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됐다.  둘째는 시적 화자인 ‘내’가 밤에 잠을 못 이루고 21세기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는 여느 인간이 그러듯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1련의 ‘작은 호롱불’은 ‘내 마음에 밝힌 불’인 동시에 휴대폰 액정화면의 불빛인듯하다. 휴대폰으로 여러 정보를 접하는 것이 바로 2련이다. ‘내’가 접한 정보들은 별의별 게 다 있다. ‘천국, 목사님’과 같은 종교적인 것도 있고 남성을 상징하는 ‘뱀장어’와 녀성을 상징하는 ‘자궁’처럼 섹슈얼리티한 것도 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사실 무의미하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스마트폰 시대의 다량의 정보는 사실 정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온밤 휴대폰을 가지고 놀다 보니 새벽이 되였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돼 ‘랭증에 울고 있’다. 인간의 급한 생리현상도 해결할 겸 충전기도 찾아온단다.  그야말로 요즘 ‘스마트 시대’ 혹은 ‘스마트폰 시대’에 살고 있는 시인 본인의 자화상이면서도 우리의 자화상이다. 말이 스마트폰이지 전화기가 스마트한지는 몰라도 그것을 쓰고 있는 우리는 꼭 스마트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1련과 2련에서는 신비한 무엇을 만들고 있다가 3련에서는 자조 섞인 어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직업과 관련이 있는듯하다. 과학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딸리아를 대표하는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동시에 과학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상상에서 출발하여 상대성 리론을 고안해냈고 얼마 전에 타계한 스티브 호킹도 상상에서 출발하여 블랙홀을 발견하였다. 시인도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 있기에 일도 할 수 있고 이러한 예술행위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억은 추억으로서의 기억보다는 연장된, 과잉된 기억이 리얼리티를 가진다. 예술이란 바로 이런 과잉된 기억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출처:2018 제3호
43    천상규: 자잘하다 평범하다 맛있다 멋있다(수필평) 댓글:  조회:406  추천:0  2019-07-12
자잘하다 평범하다 맛있다 멋있다 천상규   수필은 자잘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들려주어도 괜찮다는 말이다. 수필은 평범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상을 수필의 소재로 삼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자잘하고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작가의 메시지를 도출해내고 문학적 가공을 거쳐 예술적 승화를 시킨다면 훨씬 강한 설득력을 획득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조원의 수필 는 바로 아무라도 겪을 법한 범상한 일상으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스한 인정을 견인해내고 다소 이색적인 기술법으로 펼쳐지면서 독자들을 글 속에 깊숙이 끌어들여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것은 그냥 일상의 어떤 순간 포착이고 그 순간 포착으로 인생포인트를 잡아내서 수필의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범람하고 있는 신변잡사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변잡사도 이렇게 재미있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마저 느낄 정도로 이색적이고 재미있는 시작이 인상적이다. 말로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작품 속으로 들어가보기로 하자.   수필 는 사랑의 순애보를 떠올리고 있다. ‘나’는 련휴를 맞아 이것저것 짓거리를 펼치다가 결국 책을 펼쳐든다. 그리고 그 책에서 심쿵스런 문자를 발견하고 만다. ‘1991. 9. 27. / 용인 동아서점에서. / 남편이 사줬음. / -최’라는. 그래서 호기심 많은 ‘나’는 그것으로부터 추리(상상)를 해나간다. 우선 친구의 손때가 묻었지만 친구의 지인의 책은 아니며 그래서 친구가 중고에서 구입한 책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얻은 단서는 이 책을 소유했던 아무도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는 추정. 그래서 ‘나’는 ‘최씨 녀자에게로 걸어들어간다’. 잠시 책에 대한 추리는 여기서 한단락 짓고 《세렌디피티》라는 제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이 책의 내용을 반추해보자. 뉴욕의 한 남자와 한 녀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반한다. 남자는 녀자에게 다시 만날 수 있는 련락주소와 전화번호를 묻는다. 녀자는 거절한다. 그러나 녀자는 자기의 책 첫 페지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름을 적어서 헌 책방에 넘긴다. 인연이 닿으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면서. 7년이란 시간이 지난다. 남자가 녀자에게 건네려고 했지만 바람에 날려간, 전화번호가 적힌 5딸라짜리 지페는 사람들 손에서 떠돌고 남자와 녀자는 서로를 찾아떠난다… 그리고 ‘나’는 련휴에 고른 다른 책 이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린다. 인연과 운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경험하는 모습이다. 모든 문학쟝르에서 사랑은 영원한 주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수필 가 우리에게 시사하고저 하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고 사랑의 순애보이며 사랑을 통한 생명의 찬가인 것이다. 인연이고 운명이고 숙명이라는 명제를 떠나서 인간은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 될 것인가. 수필 역시 일상의 사소하고 자잘한 이야기가 모티브이다. 살면서 리유 없이 그냥 좋아지는 낱말들을 떠올려본다. ‘어스름’, ‘다만’, ‘창’, ‘순간’, ‘사이’ 등. 특히 이 ‘사이’라는 낱말은 홀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우리 사는 세상을 집약시키고 있다. 누군가 ‘인생’이라는 시를 ‘망网’이라는 단 한글자로 쓴 적이 있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결국 인간人间세상이 아니던가. 작가는 수많은 사이들을 렬거하면서 누군가에게 던져주었던 손가락말을 떠올린다. ‘내 손가락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을, 메시지를 전한다. 따스한 마음이 보는 이들의 눈망울마저 따스하게 어루만져준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타인을 보다 다정하게 대해야겠다는 다짐과, 인간 사이가 보다 부드럽고 따스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들이 두루 녹아있어서 이 수필은 이 봄에 더욱 와닿는다. 수필 는 ‘내 출퇴근길의 코스’로 시작된다. 역시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일상이다. 그 출퇴근길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이들이 있다. 대개는 코를 싸쥐고 피해다니는 고물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함 그 자체이다. 자칫 쓰레기 취급을 당할지도 모르는 고물상인데 질서정연, 안성맞춤, 다양한 모습 등 따스한 언어들과 주인들의 취향과 마음마저 읽을 수 있다는 필놀림이 례사롭지 않다. 그러다가 마침내 ‘뛰여들어 촬영’을 감히 해대고 주인장한테 ‘쫓겨’나오는 모습들을 려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골목길을 다시 찾는 ‘나’, 뒤바뀐 풍경이 펼쳐진다. 고물상 할아버지를 설치예술가로 둔갑시킨 작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누군가의 기억의 손때 묻은 것들이 모여있는, 버려져서 쓸모 없게 된 것들이 대화하는, 버려져서 버려지지 않은 것들을 구원하는 곳인 고물상네 울안’이라는 문구가 충격적으로 안겨온다. 하기야 이 세상 무엇인들, 누구인들 쓰레기로 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사뭇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줄 때 쓰레기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고 인간세상을 향해 마지막 아름다움, 마지막 철학적 메시지를 던져주는 일말의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다. ‘고물상네 할아버지의 설치예술은 일년 중에서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가장 짧은 하지날의 밤을 기다리면서’라는 결말구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목이 1차적인 것에서 벗어나 2차, 3차적으로 변화하고 그런 변화과정에서 인간들의 아름다운 심성이 더욱 커다란 아름다움으로 화해주었으면 하는 작가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상 3편의 짧은 수필 묶음을 헤쳐보았다. 주지하다 싶이 소설가 조원씨는 사뭇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인간세상을 바라보면서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이 세상이 차고넘치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사람 사이에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시키고 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서 받았던 사랑의 감정은 그대로 씨앗이 되여 가슴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마침내 커다란 사랑나무가 되여 사랑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맛본 사람들 역시 사랑에 전염되여 또 다른 사랑나무들을 키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점차 사랑의 물결로 출렁이게 되리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참으로 따스하게 다가오는 수필 묶음이다. 자잘한 일상에서 따스한 사랑을 발굴해내고 그것을 인간세상의 씨앗으로 삼아 보다 큰 사랑을 키워가고저 하는 작가 조원씨의 애정 어린 심성은 그래서 이 봄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출처:2018 제3호
42    김혁: 늦봄, 계단을 오르다(만필,련재1) 댓글:  조회:332  추천:0  2019-07-12
늦봄, 계단을 오르다 -2017 《민족문학》 시상식 수감록 김혁   중경을 다녀왔다. 2017 《민족문학》 문학상 시상식 참가차 아름다운 산간도시를 다녀온 것이다.   행차를 앞두고 도춘한倒春寒이런듯 연변에는 아닌 폭설이 내려 비행기가 지연되는 등 소동을 빚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달은 3월의 중경에는 봄이 먼저 와있었다. 청도를 경유, 무려 6시간의 긴 비행 끝에 중경에 다달았다. 려객기 탑승용 계단을 내리기 바쁘게 더위가 확 덮쳐왔다.  떠날 때 뉴스에 귀를 기울이니 올해 중경에는 30여일 앞당겨 봄이 찾아왔다고 했다. 올해 중경은 63년 이래 지속시간이 두번째로 짧은 겨울이였다고 한다. 그 봄도 이제는 막 가려 하고 있었다. 늦봄의 중경이였다. 날씨는 거의 초여름 날씨에 가까웠다.  무려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의 차이 때문에 공항 터미널에서 입고 갔던 무거운 털세타를 벗어야 했다. 칙칙한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준비해갔던 봄옷으로 일습을 개비하고 나니 걸음들이 날듯이 가벼웠다.  연도에서 본 벤자멘나무에도 진하게 봄물이 들어있었다.    달빛 어린 삼협의 물을 차지하고  구름 밖의 봄을 가만히 훔치네 清占月中三峡水,丽偷云外十洲春       당나라 재상 심빈沈彬의 시 한구절을 련상케 하는 풍경이 려로에 지친 마음들에 스며들었다.  그야말로 추운 변강의 오지에서 온 흥감스러운 나그네가 봄 한자락을 훔쳐가진듯한 향그러운 마음이였다.    ‘나루터’의 축제 시상식은 3월 2일, 중경시 강진호텔에서 열렸다. 강진구는 중경시의 맨 서남쪽에 위치해있었는데 옛날부터 장강 웃쪽의 나루터로 이름이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장강의 가장 중요한 항운구역과 물류의 집산지일뿐더러 곡창과 어미지향鱼米之乡으로도 널리 알려진 천혜의 땅이였다.  민족문학잡지사, 중경시 강진江津구 인민정부, 중경시작가협회의 공동 주최로 된 시상식에 중국작가협회 명예부주석 단증, 중국소수민족 작가학회 상무부회장 엽매, 《민족문학》 주필 석일녕, 중경시작가협회 당조서기 신화 등 귀빈들과 수상작가들, 매체 기자 등 도합 80여명이 참가했다.  조선족 작가들로는 수상자들인 나와 조광명, 리홍규, 강정숙 그리고 연변작가협회 상무부주석 정봉숙이 참석했다.  1981년에 창간된 《민족문학》은 56개 민족을 위한 순수 문학지로서 현재 한어, 몽골어, 장어, 위글어, 까자흐어, 조선어 등 6개의 민족 언어로 꾸려지고 있다. 그 와중에 《민족문학》 문학상이 2010년에 발족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으며 올해로 제8회를 맞았다.  19명 심사위원들의 진지한 심사를 거쳐 23명의 작가들이 창작상과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 가운데 조선족 작품으로는 김혁의 단편소설 〈피에 누아르의 춤〉, 조광명의 수필 〈상처 입은 단풍잎과 길게 키스하리라〉 그리고 리홍규, 강정숙의 번역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몽골족, 장족, 까자흐족, 조선족 작가들이 차례로 시상대에 올라 수상했다. 소수민족 작가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민족복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쪽 어깨를 드러낸 장포를 벗지 않았고 머리에 두른 히잡을 벗지 않고 있었다. 그 이색적인 민족복장 차림이 시상식에 풍경을 돋구어주었다. 나는 불과 얼마 전 일껏 맞추어놓은 우리의 민족복장을 입고 오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되기도 했다.  조선족 작가들을 대표하여 내가 〈빛나는 비단결 같은 우리의 문학灿烂如锦的民族文学〉이라는 제목의 수상소감을 발표했다.  천애지각에서 모여온 여러 민족, 여러 어종의 소수민족 수상자들과 더불어 시상대에 올라 어눌한 중국어로 감수를 토파하며 나는 저으기 감개에 빠져들었다.  “한 민족의 문학은 그 민족의 구성원들이 오랜 시간 동안의 탐색과 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로써 그 문학은 민족의 휘황한 성과 중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한 민족이 생존하고 존속해나가는 데서의 령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과 불의 세례를 거친 조선족 문학은 독특한 지연地缘과 문화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한국, 조선 그리고 기타 소수민족 문학과는 동질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판다른 자기만의 특성을 갖추었으며 중화문화의 토양 속에 참신한 봉오리를 맺었고 개화기를 맞고 있습니다.  글로벌 일체화의 현대화된 언어환경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조류, 새로운 사유에 적응해야 하며 우리 민족의 근로함과 견인불발의 정신을 그 속에 투영시켜야 합니다. 하여야만 중화민족 대가정 속의 우수한 일원으로 그리고 나아가 중국문단, 세계문단에서 일석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존재를 빛낼 수 있을 것입니다.”    수상소감에서 나는 고향의 성산-장백산을 떠올렸고 우리의 꽃-진달래를 떠올렸고 우리의 강-두만강을 떠올렸다. 또한 그 산자락 강기슭의 흰옷 입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을 향해 우리의 ‘시성’ 윤동주를 알렸고 우리 문단의 거목 김학철을 알렸고 65성상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문학지 《연변문학》을 알렸다.  과경해온 백의의 족속으로서 척박한 땅의 개척과 일제와의 항쟁 속에 점차 생성된 우리 문학의 ‘원류源流’에 대해 소개했다.    수상소식을 듣고 나는 수상작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다운해놓았고 서재에서, 비행기 우에서, 터미널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읽어보았다.  역시 우리 조선족 작가들처럼 민족과 문학의 생존을 위해 고전하고 있는 여러 소수민족 형제작가들의 호흡과 맥박을 작품들에서 더듬어보았다.    84세 고령의 몽골족 작가 나·세시아라투의 수상 평론 〈자치구 설립 초기의 문학사업 회억록〉은 그의 구리빛 피부 만큼이나 중후한 빛을 발하는 작품이였다. 작품은 지난해 자치구 설립 70주년을 맞아 내몽골자치구 문학인들의 문학려정을 총결한 기록문학이였다.  사료적 가치로 가득한 작품은 역시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5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커다란 동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은 견증자로서 본인이 피부로 겪은 사실들을 통해 개체의 기억과 문학사의 상호 인증을 도출해냈으며 소수민족 문학의 발전려정에 대해 나름의 정감으로 다듬어내여 묘술하였다.    장족 녀류시인 완머춰의 〈둥근 광환〉은 시의 격률과 생기 있는 절주감 사이의 장력张力으로  미학적 함의를 둥글게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완머춰는 장족 가운데 몇명 안되는 녀류시인 중에서 뛰여난 한 시인이라고 한다.    번역작 〈초원에 부는 바람〉으로 수상한 나이만 싸판은 까자흐족의 유명한 번역가, 언어학가라고 했다. 그는 《까자흐어 한어대사전》의 편역에도 참가했고 중외 문학명작도 까자흐어로 여러권 번역해냈다고 한다. 그는 “창조적인 언어 그리고 적절한 언어로 원작의 예술풍모를 살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조선족 작가 김혁의 단편소설 〈피에 누아르의 춤〉은 그가 다년래 현실 속에 살아있는 ‘민족적 기억’의 재현에 주력하고 있는 작품 중의 한편이다. 그는 출국, 리산가족에 관한 계렬소설을 잇달아 발표, 글로벌화, 도시화의 진척과정에서 엇갈린 삶과 운명을 화려한 문체, 강한 울림으로 보여주었다.  금번 수상작은 이 계렬 중의 한부로서 독특한 시각과 철학적인 사고로 이채로운 수작을 펼쳐보이고 있다.   조광명의 수상 수필 〈상처 입은 단풍잎과 길게 키스하리라〉는 감각적인 체험과 정감체험에 머물지 않고 이를 심미체험으로 승화시켜 수필을 ‘정감과 상처’를 다룬 일반적인 미문에서 탈바꿈시켰고 신선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소수민족 작가들이 이채롭고 다원화된 서술시각으로 약속이나 한듯이 력사와 시대의 소용돌이 속 소수민족의 운명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작품 속에 아우르고 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또한 변혁기 속에 맞닥뜨린 가지가지 현실의 시련들을 헤쳐나가는 현시대 소수민족 인물들의 독특한 형상들을 부각해내고 있었다.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의 수작을 읽으면서 한낱 자신감에도 불과하고 날로 부박함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우리의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여타 소수민족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그들이 착복한 복장 만큼이나 자신만의 특색을 오롯이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말젖냄새, 쑤유차酥油茶냄새를 강렬하게 체취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 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 수 있어야 하며 그로써 자가自家의 독특한 경지를 새로 개척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말 작품 번역의 진부함에 관해 감히 말해보고저 한다.  글로벌화 시대, 번역의 중요성은 더 운운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다. 우리 문학이 “중국 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자”고 호소를 거듭한 지도 수십년째 잘된다. ‘쌍수리개 전략’이요 하고 거창한 이름을 달고 진척해보았지만 그 효과는 미비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훌륭한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전면적으로, 체계적으로 번역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해째 번역이 몇몇 같은 사람에만 국한적으로 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어 우리 문학의 최고봉인 윤동주나 김학철 같은 별과 거목들의 보귀한 유산인 주옥 같은 작품들에 대한 번역조차 빈약하다. 타민족은 이들이 누군지조차 잘 모른다.    번역인재는 타지로 대도시로 빠지고 있고 번역의 후배양성도 미흡하다.  번역가들은 생계 때문에 한국의 작품 그리고 상업성에 치우친 작품을 번역하는 데 많은 필봉을 바친다.  조선족 번역가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가서 타민족의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대형 프로젝트의 기획자로 활약하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적 있다.  또 《민족문학》과 같은 소수민족 작가들을 전문 소개하는 권위 문학지를 받아들고 목록을 펼치면 조선족 작가가 가장 적고 때론 지어 작품 한편도 수록돼있지 않을 때면 그야말로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작가들 중에 한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 안된다.  근년래 우리 문학사에서는 한어로 전문 창작하고 있는 김인순, 전용선, 김창국 등을 문학사에 보충해넣음으로써 이 면에서의 공백의 유감을 무마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문단에서는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지만 이들의 작품 중 민족제재는 거의 비여있으며 설령 한두편 써낸 작품이라도 우리 민족의 호흡과 결이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번역에 대한 중시도를 다시금 더 강도 있게 호소하고 관련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본다. 소수민족 문학 치고는 비교적 많은 문학상을 갖고 있는 우리의 허다한 작품상 중에 번역상은 없다. 우리의 문학지들은 더불어 코너를 신설하여 조선족  번역작품도 중국어로, 외래어로 싣고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을 선정, 기획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상급과 기업가들의 호응과 찬조를 얻어내야 한다. 이 면에서 연변의 가무와 축구는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작가는 “번역은 나를 국경 밖으로 데리고 가는 우방과도 같다”고 했다. 번역이 없다면 한 어종의 문학이 다른 어종의 나라로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은 좋은 번역가를 만나고 그에 따른 마케팅법을 기획하는 것이다. 일전 FTA, 즉 자유무역협정에서는 “수출입 장벽을 낮춰 경제령토를 넓힌다”는 것을 슬로건처럼 내걸었다.   이 슬로건처럼 외국과 타민족과의 문학이 우리에게 많이 소개될뿐더러 우리의 좋은 작품이 더 많이 더 수준 높게 번역되여 널리 읽힐수록 우리 작가들에게는 높기만 한 언어 간의 장벽이 낮아지며 문학, 문화의 령토가 더욱더 넓어질 것이다. 시상식 기간 그리고 외성의 문학행사들에서 시종 느끼는 바이지만 여러 소수민족 작가들의 한어 구사수준이 조선족 작가들보다는 거개가 월등했다.  우리는 중국의 최변방에서 일제식민지의 지배와 민족분단의 경험을 지닌 과경민족으로서 소수언어 사용자라는 사실을 랭정하게 의식하지 않고서는 주류문단과의 접목과 세계문학에로의 진출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민족적 독자성을 지니면서 주류문단과 세계문학이라는 지평으로 시야를 확장해야만 우리 문학의 살길이 있다. 거대한 주류문단의 중심과 질서를 정시하고 그 중심부에 우리의 문학을 진입시키는 노력을 가하면서 중심부와 주변부 간의 격차와 차별을 극복하는 노력을 장기적으로 기울여야 우리 문학이 진정 구태를 벗고 더 넓은 세상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 어눌하게나마 한어로 여러 작가들과 소통을 가지며 나는 좁은 울타리에서의 일탈을 꾀하며 주류문단과의 접목과 개화를 꿈꾸는 우리 작가와 번역가들의 선전善战을 빌어보았다.   돌에 새긴 사랑의 판타지 시상식이 끝난 뒤의 여가에 여러 작가들은 강진구의 풍경구들을 찾아떠났다.  천년의 오래된 산간마을 중산진中山镇으로 간다고 했다. 그 곳으로 가면 ‘타이타닉호’ 이야기 같은 것은 울고 갈 사랑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곳이 있다고 짙은 사천억양으로 구사하는 가이드 아가씨가 알려주었다.  강진구에서 뻐스를 타고 남으로 30여리 가량 달리고 나니 험준한 산세의 산이 나타났다. 반백파半百破, 해발 1500메터 되는 산이라고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산중턱의 암바위를 깎아만든 표지석이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바위에는 ‘사랑의 하늘계단’이라고 새겨져있었다. 산자락에 걸린 구름다리를 건들건들 건느니 강기슭에 세워진 사람 키 높이의 동상이 맨먼저 맞아준다.  안존한 얼굴의 늙은 량주가 머리에 땀수건을 두르고 죽장竹杖을 짚고 어깨 겯고 서있는 오목빛 동상이였다.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유람객들 앞에 막상 나타난 가이드는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석쉼한 소리를 뿜는 50대의 장년이였다. 가이드 아저씨가 동상을 가리키며 그들이 바로 이곳을 세상에 알린 전설 같은 사랑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동상의 뒤편으로 산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뻗어있었다.  이끼 돋은 돌계단 아래로 그야말로 말간 시내물이 도란도란 흐르고 있었다. 물 속에 잠긴 돌이며 풀, 그 사이를 누비는 물방개까지 오목렌즈처럼 환히 보이는 시내물은 문자 그대로 청정함 그 자체였다. 약수병을 지니고 왔음에도 모두들은 손으로 옴켜서 청정의 물을 마셨다. 물에 손을 담그니 물이 뼈속을 적셨다.  과즙같이 청량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에 들뜬 마음들을 식히며 가이드의 뒤를 따라 산길로 올랐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 아저씨의 석쉼한 목소리로 자아올리는 사랑이야기에 간간히 귀를 기울이며 허위단심 돌계단을 올랐다.    아저씨의 이야기는 2001년으로 거슬러올라갔다.  그 해의 늦은 여름 중경의 유백구俞白区의 등산탐험가들이 이 일대의 원시산림으로 탐험을 떠났다.  산첩첩 물겹겹의 심심산곡이라 이틀 낮 이틀 밤을 강행군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탐험대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먼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한숨을 쉬며 고민하고 있는데 문뜩 기적과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험준한 산의 내리막길 한켠으로 돌계단이 놓여져있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그것은 인공의 흔적이 보이는 돌계단이였다.  돌계단은 일매지게 뻗어있었다.  한계단 한계단 산정상까지 이어져있었다.  계단을 타고 산정상까지 오른 탐험대는 인적을 발견했다. 놀라웁게도 산정상에는 초옥이 있었고 그 초옥에 늙은 량주가 살고 있었다. 전문 탐험대조차 오르기 힘들어하는 이 산꼭대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탐험대가 량주의 사진을 찍으려 하자 할머니는 깜짝 놀라하며 얼른 할아버지 뒤로 가서 숨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표정을 보아 아마 카메라를 처음 보는듯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탐험대 대원에게 물었다.  “모주석께서는 옥체건강하신지요? ” 수십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된 모택동주석의 안부를 묻다니? 탐험대 대원들은 서로 마주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이 이 산꼭대기에서 숨어산 지가 벌써 50여년이 넘는다고 했다. 할아버지 이름은 류국강刘国江이며 70여세이고 할머니 이름은 서조청徐朝清80세라고 했다. 부부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보다 10년이나 년상이다.    지난 1956년, 중산진 고탄촌高滩村에 살던 20살 청년 류국강은 짝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10살 년상에 아이가 넷이나 딸린 과부 서조청에게 말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류국강이 여섯살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섯살 꼬마 류국강의 앞이가 빠진 게 그들 만남의 첫 계기였다. 시골에는 새색시가 이 빠진 자리를 만져주면 새 치아가 잘 나온다는 풍속이 있었다.  서조청이 이 마을로 시집오던 날, 어린 류국강은 큰엄마의 손에 딸려 신부를 처음 보았다.  새색시의 꽃가마가 류국강네 집 앞을 지날 때였다.  큰엄마는 류국강의 손을 잡고 꽃가마를 가로막으며 새색시 서조청더러 아이의 이 빠진 이몸을 한번 쓰다듬어달라고 청을 들었다.  새댁이 이발 빠진 곳에 손가락을 넣는 순간 류국강은 놀라서 서조청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새색시도 깜짝 놀라했고 사람들은 재미나게 지켜보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렇게 꼬마는 처음 아름다운 새댁 서조청을 알게 되였다.  그 후로 류국강은 서조청을 고모라 불렀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남편은 괴질로 세상을 떠나고 서조청은 홀로 네명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는 과부가 되였다.  동시에 류국강은 어엿한 청년이 되였고 청상과부가 되여 평소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고모를 때때로 돌봐주었다. 그러는 사이 류국강은 자신보다 10살 많은 과부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류국강은 4년 동안 줄곧 그녀네 집 땔나무를 해주고 물을 길어주는 등 가사일을 도우며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고 서조청도 결국 그의 마음에 감복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의 통념으로는 두 사람의 사랑은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용인될 수도 허락받을 수도 없었다. 구습과 보수가 뼈골까지 스민 이 작은 마을에서 류국강이 고모와 사랑을 한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갖은 비난을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마음먹었다.  드디여 1956년 8월, 20살 류국강刘国江과 30살 서조청은 야밤도주를 하였다. 이후로 중산진 사람들은 더는 두 사람의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마을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와 따가운 시선을 피해 두 사람은 마을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았다.  부부가 네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정착한 곳은 마을에서 산길로 다섯시간 여를 걸어들어간 심산오지였다. 인적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한낮에도 산짐승이 돌아다니는 그런 곳이였다. 처음에는 동굴에 들었고 산과 들 이곳저곳에서 산나물들을 캐여 끓여먹었다. 이제 그들의 사랑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상대로 해야 했고 스스로 선택한 시련을 극복해야만 했다.  야반도주를 할 때, 서조청이 농사를 지을 각종 알곡과 채소 씨앗을 챙겨나왔다. 류국강부부는 조악한 농기구로 땅을 일궈 먹을거리를 마련했다.  기거할 집도 지었는데 다 짓기까지는 2년이란 품이 들었다. 또 화전을 일구었고 오리와 돼지 그리고 개도 키웠다. 그리고 양봉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산으로 올 때는 서조청의 아이들 4명을 데려와 모두 6명이였지만 산에 오고난 뒤 또 류국강의 아이 넷을 낳았다. 그중 아이 하나가 요절했지만 자식이 7명이 되였다.  이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두 사람은 손톱이 벗겨지고 등골이 휘여지게 밤낮으로 일했다.  그러던 류국강에게는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길 아닌 산길이 늘 걱정이였다.  안해와 아이들이 이동할 때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산정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고된 농사일의 짬을 내여 류씨는 수직에 가까운 바위 절벽에다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석을 짐져 날라서는 손에 물집이 지고 손톱이 닳아떨어지게 망치질을 했다. 계단 옆에 작은 구멍까지 따로 내여 손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아이들은 어렸고 서조청도 밭일 하고 밥 짓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시간을 낼 수 없어 계단을 쌓는 작업은 류국강 혼자 할 수 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의 젊은이가 백발의 로인이 될 때까지… 그 무슨 신자가 사원을 짓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한계단 한계단 쌓아올렸다. 그동안 20여개의 정, 40여개의 망치가 마모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50년간 오로지 망치와 정 그리고 곡괭이로 그가 쌓아올린 돌계단이 무려 6000계단이 되였다. 가히 천국의 계단이라 할 만하였다. 가난 뿐인 두 사람에게는 반짝거리는 결혼반지도, 화려한 결혼식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 류씨는 사랑하는 녀인을 위해 ‘사랑의 징표’를 만들어 보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의 하늘계단爱情天梯’을 쌓아올렸다.  그는 장장 50년에 걸쳐 6000개의 돌계단에 돋을새김으로 새겨 사랑의 힘이란 뭔지를 증명했다.   이들 부부의 사연은 당시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해일과도 같은 큰 여운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2007년 중경을 감동시킨 인물’에 선정되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싱가포르의 국영방송에 의해 《사랑의 하늘계단》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였다.      나이가 들면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길 바랐다. 남아있는 사람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은 오랜 시간을 가지고 자신들의 사후에 대해 의논했다.  둘 중의 하나가 먼저 세상을 뜨면 그를 돌계단 옆에 묻어주고 남은 사람은 하산하여 자식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그마저 세상을 뜨면 다시 돌계단 옆에 둘을 합장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작성했다.  그러다 지난 2007년 류국강이 로환으로 애정 어린 세상을 먼저 떠나고 말았다.   류국강은 궤짝 우에 고히 얹어두었던 그림 한폭을 가슴에 꼭 그러안고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 그림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감동된 나머지 일본에서 한 유명 화가가 이 산곡에까지 찾아와 그려준 두 사람의 젊은 모습의 초상이였다. 결혼식도 못 치르고 사진도 못 남겼던 그들 부부는 젊은 모습이 재현된 이 그림을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장례날을 정하고 출빈을 앞두고 서조청은 꼬박 6일간을 남편의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드디여 출빈하던 날, 서조청은 관을 어루쓸며 혼자말처럼 되뇌였다. “이보시게 ‘총각’.” ‘총각’은 서조청이 자신보다 열살이나 손아래였던 남편에 대한 애칭이였다.  “당신은 일 밖에 몰랐지요. ‘총각’, 낮에는 돌층계를 만들었고 밤이면 원숭이가 헛간의 쌀을 도적질할가 잠을 못 잤지요. 어느 한번 독수리가 닭알을 물어가자 당신은 그렇게 화를 냈지요. 당신은 그 닭알로 내게 맛있는 찬을 만들어주려 했던 거죠 ‘총각’.”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수백명이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고 사랑의 계단을 찾아 절절히 애도를 표했다.  출빈이 시작되였다. 상복을 차려입은 아들딸들이 곡을 하며 앞섰고 상여군들이 관을 지고 뒤따랐고 그 뒤를 악대가 슬픈 주악을 하며 6000개의 돌계단을 내렸다.  고령 때문에 산을 내릴 수 없었던 서조청은 산꼭대기에 홀로 서서 한걸음 한걸음 멀어져가는 상빈대오를 굽어보며 바랬다. 그러던 서조청이 목메인 소리로 웨쳤다. “잘 가시게 ‘총각’.” 본인의 유언 대로 류국강은 산자락 돌계단 옆의 수림 속에 안장되였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자신의 발밑에서 사랑을 느껴왔을 서조청도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2012년 11월 4일, ‘천국의 계단’에 올랐다. 돌계단 곁에, 남편 류국강의 묘지 곁에 묻혔다. 두 로인의 작고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은 “너무 슬프다”, “저세상에서도 행복하길 바란다”, “당신 덕분에 세상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였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줘 고맙다”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랑의 주인공들은 갔지만 이 ‘세기의 사랑’이 주는 감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장장 반세기라는 년륜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각인된 이곳은 지금 진강구의 중요한 유람경관으로 되였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련인들은 50여년 전의 러브 스토리에 흠뻑 젖어들고 있다.  지금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량산백과 축영대’에 비견될 만한 ‘중국 10대 사랑 이야기’의 하나로도 불린다.   고금으로부터 해내외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가 되여왔다.  그렇게 많은 문인, 명사名士들이 필봉으로 사랑이란 불멸의 탑을 쌓아올렸음에도 우리의 제재 령역에서 사랑의 탑은 무너질 줄 모르고 그냥 솟아오르고 있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담고 있다. 이렇게 인류 공동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사랑은 한편의 아름다운 판타지에 다름 아니다.  사랑의 계단을 쌓아올린 류국강, 서조청 두 사람의 사랑도 마치 아름다운 고전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가 아니인가!   하지만 어쩌구려 요즘 세월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판타지마저 물질에 둔화되여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전락되거나 상업주의에 기대인 흔하디 흔한 싸구려투성이로 되여버렸다. 사랑이 금전으로 쉽게 환산되고 있는 요즘, 또 일회용 속찬 같이 흔해빠진 사랑이 더는 향기가 아니라 쉬쉬한 냄새를 풍기는 요즘, ‘사랑의 하늘계단’ 이 이야기가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성찰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을듯하다.   어떻게 그 높은 계단을 오르고 내렸던지 나는 몰랐다. 산길에서 들춤질하는 뻐스에서 나는 주먹 만한 갱엿이라도 삼킨듯 목구멍 가득한 감동을 애써 삭이고 있었다. 가실 줄 모르는 여운에 떠밀려 나는 차창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존한 두 얼굴의 동상은 정오의 빛 아래 더더욱 빛나오르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이고 은애의 미소를 머금은 두 사람의 머리 우로 빛은 성수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 돌계단이 전설마냥 멀리 뻗어있었다.  (계속 이음) 출처:2018 제3호
41    <장백산> 2018.2 루계218 댓글:  조회:681  추천:0  2019-07-11
장백산 총218호 2018년2호   권두칼럼 서영빈     남을 위한 글    기획조명-작가와 작품 살춘각     참 고운 발(단편소설) 살춘각     일하면서 글쓰기(작가노트) 권혁률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작품평) 장학규     나보다도 못난 친구(작가평)   문학대담:작가를 말하다-우광훈편 하영       숙명처럼 찾아든 문학    소설광장 구호준     태양의 동쪽(중편소설) 김홍월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소설평)   박초란소설코너 박초란     무화과나무(단편소설)   계렬수필 심명주     ‘집시’가 되어(수필) 심명주     육담이 필요한 날(수필) 심명주     내가 만난 개들(수필) 독고혁     ‘집시’,육두문자를 날리다(수필평)       시인시전 김정권     혼길(시 외6수) 우상렬     김정권의 시맛으로 좀 느끼해진 설명절 맛을 바꾸자(시평)   기획련재 김혁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 련재8)   창작마당 량춘식     삼원나루(단편소설) 김광영     파란 전화기(수필) 김명숙     산이 아프다(수필) 곽미란     첫사랑(시 외1수) 성해동     립춘(시 외2수)   8090문학코너  김미옥     명태(수필) 신조       하얀 봉투(단편소설) 박지아     애절함(시) 라나       모래성(시)   문학과 비평 최삼룡     석문주의 시에서 고향(평론)   중국문학       저복금      바둑술어 ‘사석’(단편소설/김재국 옮김)   장편소설련재 림원춘      산귀신(장편소설 련재끝) 김혁        무성시대(장편소설 련재2) 구용기      해볕이 춥다(장편소설 련재끝) 
40    저복금: 바둑술어‘사석’(단편소설) 댓글:  조회:357  추천:0  2019-07-11
바둑술어 ‘사석’ 저복금     사석선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모두 자기의 장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양최득의 장점은 일단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과감히 바둑돌을 버리는 것이다. 바둑을 두다가 간혹 몇개의 바둑돌이 어느 한 귀에서 서로 맞물려 진흙탕 싸움을 벌일 때면 그는 돌연 바둑돌을 버리고 다른 한 외각에서 포위전을 벌여 보다 많은 집을 차지한다.    “바둑돌 하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선점을 잃으면 안되지!”  양최득은 평소 별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바둑을 둘 때만은 지긋이 손으로 입을 움켜쥐고 있다가 이런 말 한마디씩 불쑥 내뱉군 한다.  “넌 지指를 버리는 대가로 도시를 얻으려 했지!”  양최득과 맞장구를 친 사람은 ‘면도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식이다. 이 자식은 말할 때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아픈 곳만을 찔러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방금 말한 손가락 ‘지指’는 바둑돌을 가리키는 ‘자子’와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양최득은 못 들은 척 머리를 들지 않고 바둑판만 응시했다. 바둑돌을 잡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환히 로출된 그의 손은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그 자리에는 매듭을 방불케 하는 종기가 흉하게 부풀어있다.  양최득의 세대는 과거 중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가야 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나서자란 농촌애들과는 달리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농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도시의 버림을 받고 농촌에 처박힌 ‘삽자插子’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내려간 강북 농촌의 공수(工分=로동 점수)는 형편 없이 낮았다. 한공에 겨우 일이십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루종일 강바닥에서 진흙을 퍼올려도 1.5공 밖에 벌지 못했다. 현찰로 환산하면 겨우 이십전이 되는 셈이다. 삽으로 진흙을 퍼올리다가 간혹 삽자루가 부러지면서 유기유리로 만든 옷단추라도 떨어뜨리면 그 날 하루의 일은 거의 헛탕을 친 거나 다름 없다. 공수가 하도 낮아서 농한계절만 되면 지식청년들은 너도나도 뿔뿔이 도시로 돌아가버리군 했다. 농한기에 하는 일들은 공수가 적은 데다가 집에 있어보았자 추운 고생만 하기 때문이였다. 대개 그맘 때면 지식청년들이 합숙하는 숙소에는 양최득 한사람만 외롭게 남아서 들락거릴 뿐이였다. 년말에 공량을 바치고 나서 생산대에서는 1년 농사 수익을 계산하게 되는데 그 때면 사원들에게 공수를 돈으로 환산해주기도 하고 쌀과 채소 같은 것들을 고루 나누어주기도 했다. 지식청년들은 수입이 없기에 모두 집에서 부쳐온 돈으로 쌀과 채소를 사서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유독 양최득만은 쌀과 채소를 나누어가진 외에도 얼마간 돈을 타기도 했다. 그는 어느덧 농사일을 전부 몸에 익혀 당지에서 내노라 하는 농군과도 어깨를 겨루었다. 동료들은 양최득이 탄 돈이라 해봤자 겨우 집으로 갔다올 차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며 픽픽거렸다. 매번 집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오면 지식청년들은 모두 기차표를 사지 않고 집으로 갔다온 자기의 경험을 소개하느라 소근댔다. 이렇게 농촌에서 몇년 지내고 나면 금방 농촌에 내려올 때의 격정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란 허탈 밖에 없다. 적지 않은 지식청년들은 한번 집으로 가면 도시에 숨어서 돌아오지 않았다. 농촌에 남아있는 지식청년들도 날마다 빽을 써서 도시로 돌아갈 방법만 연구했다. 그 해 양력설이 지난 뒤 농민들마저도 설 쇨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설치고 있었으나 유독 양최득만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홀로 마을에 남아 말없이 대장이 시키는 여러가지 잡일들을 수걱수걱 했다.  양최득은 혼자 일하면 조용해서 오히려 더 좋다고 외로운 자신을 위로했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양최득의 집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가고 수근거렸다. 그들은 지금까지 양최득이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었다면 고작 양최득이 자기가 이제는 나이도 많고 어른이여서 더는 어머니 돈을 쓸 수 없다는 말 뿐이였다. 설을 며칠 앞두고 변강농장에서 상춘생이라는 지식청년이 어느 날 문득 나타나서 양최득을 찾았다. 그 때의 장거리 기차표는 유효기간이 4일이였기에 상춘생은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내려 양최득이 사는 숙소를 찾은 것이다. 그는 양최득과 련속 이틀간이나 바둑을 두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면 석유등까지 켜놓고 겨루기를 반복했다. 둘은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겨우 밖으로 나와 도랑길을 따라 걸었다. 그 날 마을 사람들은 어쩌다가 양최득의 얼굴에 어려있는 득의양양한 빛을 보았다.  상춘생은 양최득이 시내 바둑판에서 사귄 바둑친구였다. 상춘생이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큰소리를 잘 치는 것이였다. 그는 입만 벙긋하면 나폴레옹이 어쩌고 저쩌고 소크라테스가 어쩌고 저쩌고 했다. 평소 문학서적 읽기를 좋아하는 양최득은 몇번 상춘생과 접촉해보고 나서 상춘생이 여러가지 책들을 많이 읽어서 지식면이 넓고 깊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쩍하면 상춘생을 찾아가 세상을 론하고 인생을 론했다. 말할 때 간혹 양최득이 자기 관점이라도 내놓으면 상춘생이 고금중외 명작이나 경구들까지 인용하면서 반박해와서 뭐가뭔지 모를 정도로 오리무중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바둑을 둘 때 바둑돌 하나를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양최득은 별로 변론하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열변을 토하는 상춘생의 얼굴만 빤히 쳐다볼 뿐이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자기 관점을 바꾸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농촌에 내려간 뒤에도 서로 자주 련락했다. 상춘생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양최득은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다가 그를 반갑게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다 날려버렸다. 둘이 산책할 때 양최득은 상춘생에게 강북마을의 논밭과 농사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이제는 농촌사람들 못지 않게 일을 잘한다는 자랑을 했다. 상춘생은 두손을 팔소매에 찔러넣고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남의 기운은 바로 그래서 아름다운 거야. 수천년 력사의 지혜와 아름다움이 루적된 곳이니까” 그 해는 립춘이 빨리 찾아와서 설 무렵에 내린 가랑비에 공기가 때이르게 축축했다. 양최득이 재미 있다는듯 상춘생의 말을 받았다. “아니, 수천년의 땀과 눈물이 루적되여있는 곳이지.” “너에게 약간 문학인이 갖고 있는 비감한 정서가 있구나!” 상춘생이 얼굴을 돌리며 양최득에게 물었다. “넌 농사를 짓는 데 대체 어느 정도의 기술이 필요된다고 생각하니?” 상춘생이 이어 또 물었다. “너 이런 일들을 좋아하니?” 그다음 또 물었다. “너 정말 이곳에서 일만 잘하면 로동자로 뽑히거나 대학에 추천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상춘생은 떠나갔다. 양최득은 홀로 숙소에 남아 또 한해의 설을 쓸쓸하게 쇴다. 그는 집에 앉아 상춘생과 벌였던 바둑판을 다시 한번 눈앞에 떠올리며 한수한수 꼼꼼히 따져보았다. 그 한판의 사석선점! 사실 너무나 뻔한 일이여서 바둑판을 다시 앞에 펴놓고 생각해볼 필요마저 없었다. 그는 바둑돌을 하나씩 잡으며 천천히 비닐로 된 바둑판에 배렬해갔다. 그러다가도 웬 영문인지 이따금씩 바둑돌을 잡은 손가락을 지긋이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의 손가락은 원래 가늘고 길었다. 어렸을 때 누군가 그의 손가락을 보고 피아노를 치기 안성맞춤한 손가락이라며 치하한 적이 있었다. 그렇던 손가락들이 이제는 못이 박혀 보기 흉하게 굵어지고 두꺼워졌다. 하얗고 부드럽기만 했던 손가락 피부도 이제는 실농군의 손가락처럼 검게 타고 터슬터슬 거칠어졌다.  그 해 설 후에 집으로 돌아갔던 몇몇 지식청년은 도시에 눌러앉아 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두사람은 돌아왔다가 며칠도 안되여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로동자에 초빙되였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양최득은 자기가 누구보다 농촌에 온 시간이 길고 들뜨지 않고 착실하게 일해왔지만 로동자로 뽑혀 도시로 돌아갈 기회는 자기에게 쉽게 차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름철 수확 때 밭에 나가 밀가을을 할 때면 양최득은 솜씨가 빨라서 항상 밭고랑 제일 앞머리에 서군 했다. 혹시 정말 몸을 내번지고 일한다면 그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다 한가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앞을 다투며 힘들게 일하려 하지 않았다. 양최득이 밭고랑 끝에 막 이르렀을 때 뒤따르던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한창 밀을 베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갑자기 짧고 급촉한 신음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그 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뢰소리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신음소리가 울려온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밭두렁 우에 양최득이 우뚝 서있는 게 보였다. 웬 영문인지 밭두렁 우에 선 양최득이 그 날 따라 각별히 커보이고 돋보였다. 두손을 번쩍 쳐든 양최득이 한손으로 다른 한손을 누르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에 웬 손가락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 손가락은 마치 다른 한손에서 뽑아온 손가락 같았다. 쳐들린 손가락 아래로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예리한 낫이 보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예리하게 빛나는 낫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번쩍번쩍 은빛을 발하는 낫날 아래로 빨간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최득은 즉시 공사 위생소에 호송됐다가 다시 현병원에 옮겨졌고 나중에는 그의 부모들이 사는 남성南城에 옮겨졌다. 이 기간이 다만 며칠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이전처럼 여전히 침착했고 태연했다. 그는 병원에 갈 때 요나 이불 같은 침구를 가지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간 뒤 더는 그의 소식이 없었다. 나중에야 마을 사람들은 양최득이 불구라는 리유로 도시로 돌아가게 되였다는 것과 이제부터 더는 농촌에 붙박힌 지식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양최득이 병으로 도시로 돌아간 뒤 얼마 안되여 지식청년에 대한 정책이 새롭게 나와 모든 지식청년들이 다 도시로 되돌아가게 되였다. 도시에 남게 된 양최득은 지식청년 직장배치정책에 의해 어느 한 공예품공장에서 일하게 되였다. 이 공예품공장은 소집체기업에 속했다. 그 때 기업들은 모두 세가지로 나뉘였다. 즉 대집체기업, 소집체기업, 국영기업 등이였다. 같은 도시에서도 공장에 따라 대우가 달랐지만 너무 큰 차이는 없었다. 양최득은 전문 종이에 그림이나 글을 새기는 부서에 배치받았다. 이 부서는 가두에서 경영하는 작은 공장이였지만 취급하는 공예품의 품목만은 결코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목조木雕, 죽조竹雕, 옥조玉雕 등을 다 취급했다. 종이조각 품목은 공장을 참관하러 온 시장의 제의에 의해 하게 되였다. 시장이 지구에서 전근해왔기에 그 지구의 재래항목인 종이조각예술을 추천했던 것이다. 종이조각은 작은 항목이라 평소 전문가 한 사람이 학도 몇을 거느리고 일하는 정도였다. 양최득이 공장에 갓 들어왔을 때 종이조각은 전 공장에서 경제적인 효률이 가장 높은 부서였다. 그 때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유족하지 못한 때여서 한장에 몇전 밖에 하지 않는 종이조각을 사서 희사나 길일을 경축했다. 황경중이라는 스승은 이 종이조각공예품의 계승자였다. 종이조각예술은 그의 손에 의해 영향면이 크게 확대되였다. 그도 지구에서 전근해왔는데 웬 영문인지 그가 받는 학도마다 모두 녀자 뿐이였다. 남자인 양최득을 받은 것은 그가 원해서가 아니라 받지 않으면 안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목조, 죽조, 옥조 같은 일은 모두 섬세하고 치밀한 기술성을 요구했다. 공장 령도들이 양최득을 그의 수하에 억지로 안배한 것은 양최득이 불구이기에 직종을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되였기 때문이다. 종이조각공예는 전지剪纸예술에서 발전해왔다. 전지는 한번에 한장의 종이만을 오려야 하기에 각별히 손재주가 좋아야 한다. 그러나 종이조각은 도안에 따라 새기기에 한번에 여러장을 새길 수 있었다. 도안은 스승인 황경중이 그린 뒤 몇몇 학도들에게 넘겨주어 새기게 했다. 황경중은 50살이 넘었는데 아래턱에 항상 수염을 남기고 다녔다. 평소 그는 항간에서 류행되는 유머로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그 시대에는 자극적인 육담이나 걸직한 롱담을 하는 것이 크게 실례되는 일이 아니였다. 황경중스승의 특기는 평소 주고받는 모든 화제를 녀자에 관한 롱담으로 유도해가는 것이였다. 아마도 외설적인 화제에는 항상 욕망의 힘이 넘치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황경중스승이 그린 도안은 장군이든 재상이든 부처님이든 날아다니는 새든, 네발 가진 짐승이든 관계없이 언제나 속되고 거친 갈망으로 가득차있었다. 따라서 그의 도안은 언제나 신선하고 진실하고 활기로 넘쳤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하지만 황경중은 유독 양최득만은 스스로 알아서 종이에 그림을 새기게 했다. 녀자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몸 가까이 밀착해서 손까지 꼭 잡고 가르쳐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편애가 전혀 리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였다. 농촌에서 못이 박히게 일해서 거칠어진 투박한 손을 잡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양최득은 마치 종이를 새기는 조각칼 끝에 정말 무슨 큰 비결이라도 숨어있는 것처럼 항상 스승님, 스승님 하고 부르며 자주 황경중 집을 들락거리며 물도 길어주고 석탄도 날라주었다. 마치 스승에게서 정말 큰 비결이라도 배워낼 것처럼… 황경중스승이 그에게 얼마간 가르쳤다면 말로 되는대로 지시하는 것 뿐이였다. 그가 양최득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림은 마음속에 그려져있어야 한다”는 것 뿐이였다.  양최득의 마음속에는 항상 황경중이 그린 도안이 우렷이 떠올랐다. 그는 한칼한칼 그 도안에 따라 새겨갔다. 그렇게 반복해서 새기노라니 칼이 점차 자연스럽게 그의 뜻을 따라주었다. 양최득은 이만하면 스승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황경중은 그가 그린 도안을 보자 아래턱 수염을 쭈볏이 치켜세우며 한참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왜 죄다 우거지상이야.” 그 말을 듣고 양최득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꺼내 다시 자세히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비결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린 그림과 스승이 그린 그림을 펼쳐놓고 비교해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그린 도안이 스승이 그린 도안과 모양은 비슷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승이 그린 도안은 뱀 한마리를 그린 거나 쥐 한마리를 그린 거나 모두 살아숨쉬는듯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나 그가 그린 도안은 살진 돼지를 그린 거나 오동통한 아이를 그린 거나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모두 수심과 비애에 젖어있었다. 그는 엷은 종이를 스승이 그린 도안 우에 놓고 그대로 모방해 그리고는 그것을 다시 새겨놓고 섬세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몇번이나 반복하고 나자 그의 칼끝 아래에서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도안을 그릴 때 조금만 한쪽에 치우쳐도 스승이 말한 ‘우거지상’이 또다시 되살아나는 것이였다.  양최득은 그렇게 되는 것은 그의 칼솜씨가 아직도 제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벽구석에 놓인 탁자 가장자리에 앉아 숨 죽이고 조용히 그림을 새겼다. 그에게 있는 것이란 인내심 뿐이였다. 그는 듬직하게 자리에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래 앉아있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다 그가 바둑을 두면서 련마한 내공이였다. 마음이 갑갑할 때면 그는 이따금 일어서서 스승의 탁자 앞에 놓여있는 화책을 펼쳐보기도 했다. 그 때의 화책에 그려진 그림은 대부분 단순한 선전적인 표현들 뿐이였다. 그는 공휴일이 되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으로 찾아가서 그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때로는 어떤 명화가의 명작품 앞에 얼빠진 사람처럼 멈춰서서 뚫어지게 응시하는 때도 있었다. 농촌에 있을 때처럼 공예공장에서 양최득의 작업량은 조금씩 선두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갓 결혼한 몇몇 녀학도들은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쩍하면 자기들이 맡은 임무를 양최득에게 떠맡겼다. 양최득은 그러한 일을 별로 개의치 않게 생각했다. 조각칼은 가늘게 갈아놓으면 한번에 몇장은 족히 새길 수 있었다. 양최득은 그중 한장이라도 편차가 생기면 가차없이 구겨버리고 다시 새겼다. 조각칼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어느덧 능수능란한 경지에 이르러 곧게 새기려고 마음 먹으면 곧게 새겨지고 동그랗게 새기려고 마음 먹으면 동그랗게 새겨졌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형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우거지상’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황경중스승과는 비할 수 없었지만 다른 녀학도들과는 얼마든지 비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새긴 선은 아직도 비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인물형상의 표정들은 행복함과 경쾌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흠집들은 그림을 사가는 사람으로 말하면 별로 문제 될 것까지는 없었다. 그림을 살 때 누가 까짓 한장의 그림을 놓고 그렇게 오래 관찰하겠는가!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공예공장 밖의 다른 공장들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장들의 유혹에 빠져 이미 공예공장의 녀학도만 해도 둘이나 다른 곳으로 전근해갔다. 다른 한 녀학도도 이틀이 멀다 하게 병휴가서를 내밀었다. 황경중스승은 이미 퇴직 나이가 되였으나 공장에서는 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전에 비해 많이 자유로와졌다. 평소 그는 공장에 자주 나오지 않았다. 간혹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로 설계한 도안 한장을 들고 와서 양최득더러 새기게 했다. 때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으면 양최득을 불러 대신 구사하게 하고 그것을 종이조각 형식으로 다시 표현해보게 했다. 양최득은 시간이 많았다. 전에 비해 공장의 생산임무가 적어졌기 때문이였다. 사회의 발전추세가 돈벌이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서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종이조각 같은 것은 점점 외면당하고 있었다.  양최득은 결혼했다. 안해는 그의 바둑친구 류진취의 누이동생이였다. 양최득과 류진취는 같은 골목에서 살았었다. 양최득은 골목 어귀에서 살았고 류진취는 골목 끝 쪽에서 살았다. 농촌에 내려갔을 때 매년 설 쇠러 시내로 올 때마다 양최득은 류진취 집에 가서 바둑을 두군 했다. 류진취 집은 성분이 높았으나 양최득 같이 농촌에 내려간 ‘삽자插子’를 별로 꺼리지 않았다.  류이미는 다른 처녀들과는 달리 피부는 순수한 황인종이였지만 피부색은 검은 편이였고 두 눈은 작고 가늘었다. 약하고 메마른 몸매는 언제나 푸들 줄 몰라서 피부가 마치 뼈우에 가죽을 들씌워놓은 것 같았다. 처음 보면 못나게 생각되나 자주 보면 별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 얼굴이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돌아와 처음 류이미를 봤을 때 양최득은 그녀가 못생겼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같이 마주 서서 대화하면서 그녀가 상을 찡그리거나 웃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었다.  양최득이 도시로 돌아오던 해 그의 나이는 이미 30살에 가까웠다. 류이미 나이도 결코 적지 않았다. 인물 때문에 그녀에게는 그 때까지 남자친구가 없었다. 류이미가 양최득을 보고 이렇게 그를 치하했다. “오빠는 정말 들뜨지 않는군요. 요즘 세상에 오빠 만큼 듬직하고 침착한 남자는 드물지요!”  양최득과는 달리 그녀의 오빠인 류진취는 듬직하지 못했고 항상 마음이 들떠있었다. 양최득이 바둑을 두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갈 때마다 그는 어디로 갔는지 항상 집에 있지 않았다. 양최득은 집을 지키고 있는 그의 녀동생과 심심풀이로 한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말저말 나누는 사이에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이 통해 서로를 사랑하게 되였다.  류이미가 고중을 졸업할 때 오빠인 류진취는 이미 회북이라는 농촌에 재교육을 받으러 갔다. 부모의 신변에 자식 하나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정책이 있어서 류이미는 쉽게 도시에 남아 일할 수 있게 되였다. 나중에 그녀는 도시 환경청결을 담당하는 일을 하게 되였다. 류이미는 양최득과 같이 있을 때면 양최득의 이야기를 듣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양최득이 책의 내용들을 복사하듯 그대로 옮긴 것들이였다. 그로 인해 양최득은 더 많은 문학서적들을 읽어야 했다. 평소 별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양최득이였지만 류이미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만은 례외였다. 그 때면 그는 비단 말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청산류수처럼 술술 잘하기도 했다. 양최득이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할 때면 류이미는 옆에서 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며 흐느꼈다. 그 때면 양최득의 눈에 류이미가 각별히 예뻐보였다. 양최득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손을 내밀어 안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섬세하고 부드럽고 윤나는 그녀의 피부가 손끝에 닿을 때마다 그의 느낌이 그대로 투명한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짜릿하게 녹아들었다. 류이미는 양최득과 결혼한 뒤 더는 환경청결공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기청가를 맡고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류이미의 수입이 끊어지자 가정생활은 전부 양최득 한사람의 월급에만 매달려야 해서 생활은 언제나 빠듯했다. 양최득은 늘 류이미에게 과거 농촌생활에 비해 지금의 생활이 어디가 더 나아졌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류이미로서는 양최득의 이 말을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양최득이 한 말은 확실히 가식 하나 없는 진실이였다.  류이미는 몇년간 련속 대학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번마다 락방되였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였다. 대학입시에 락방한 대신 임신했기 때문이였다. 식구가 하나 더 불어나자 양최득은 가급적 밤작업을 늘여 상금을 받으려 했다. 그의 조각칼 아래에서 새겨지는 그림들은 환골탈태하여 과거와는 풍격이 많이 달라졌다. 양최득은 원래 황경중스승만이 할 수 있었던 기술적인 일들을 어느덧 전부 배워내고 익혔다. 필경 그는 적지 않은 책들을 읽은 사람이라 문화수양이 결코 낮지 않았다. 그의 종이조각 솜씨와 재능이 늘면서 도안은 보기 좋으면서도 통속적이였고 전통적인 유산의 틀 속에서도 새로운 기상과 빛을 발했다.  아이를 낳고서도 류이미는 전혀 몸에 살이 오르지 않았다. 피부는 여전히 팽팽했고 부드럽고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양최득은 비록 생활이 바빠졌지만 과거 농촌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어서 어떠한 가정 일이든 다 할 줄 알았다. 저녁이 되면 안해와 아이가 그의 품속에 함께 기대와서 그러한 나날이 그로서는 가장 만족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안해와 아이가 있는 데다가 그가 새긴 종이조각도 호평을 받고 있었고 판매량도 크게 늘고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간 데다가 대학입시에서 또 한번 락방돼서 류이미는 원래 출근하던 도시환경청결소에 다시 복직하려 했다. 그 몇년은 사회변화도 커서 출신을 문제 삼던 일은 어느덧 력사의 한페지로 넘겨져 해외친척관계 같은 것을 더는 문제삼지 않았다. 바로 그 때 해외에서 살던 류이미의 친척이 친척방문으로 와서 류이미에게 출국하여 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류학하기를 권했다. 귀국한 뒤에도 친척은 련락을 계속 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당숙이 되는 해외 친척이 그녀의 해외에서의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부담하겠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그 날 저녁, 류이미는 양최득의 품에 안겨 출국에 관한 화제를 꺼내면서 “해외에서 생활한다니 듣기만 해도 겁나 죽겠어요. 당신의 그늘이 없이 제가 어떻게 살아?!” 했다. 며칠 뒤 류이미는 도시환경청결소에 복직하는 일을 말하다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고 했고 이후에 기회를 만들어 양최득과 아이를 데리고 외국구경을 시켜주겠노라고도 했다. 그 뒤 류이미는 출국했고 양최득은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 그는 때로는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애엄마가 해외에 간 거나 그가 과거 농촌에 간 거나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자기는 시골에 내려가 단련을 받았고 안해는 해외에 가서 단련을 받고 있으니까. 그는 안해가 외국에 갔으니 꼭 많은 점에서 습관되지 않고 불편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때로는 아들을 품에 꼭 끌어안고 아들이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속으로 비애와 미묘한 예감이 엇갈려 찾아들었다.  안해가 외국에 나가있는 그 몇년 동안 양최득은 밖에 잘 나가지 않았고 바둑도 잘 두지 않았다. 설사 밖에 나간다 해도 아이를 안고 나왔고 마치 아이에게 바둑을 가르치기라도 할듯 언제나 손으로 바둑판을 가리켜보였다. 그는 바둑은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찍 가르치면 바둑에 대한 기초가 튼튼해져서 평생 가도 잊지 않으니까. 그래서 동자공童子功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아이는 두세살 때 몹시 여위고 약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혼자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가고 걱정했다. 그러나 양최득 자신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애엄마가 있을 때도 아이는 거의 그가 키웠기 때문이였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양최득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애에게 끝없이 말을 걸었다. “너 장차 뭘 할래?” “바둑 둘 거야!” “혼자 두면 재미없지.” “아빠두 혼자 두지 않아?” “너와 바둑 둘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나 혼자 둘래.” 몇년 전 바둑 두러 곧잘 찾아오던 북쪽 골목의 왕씨도 요즘 양최득을 별로 부르지 않았다. 양최득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불편한 몸이기에 찾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때면 그는 아이를 안고 류진취 집에 찾아가서 류진취와 한판 겨루기도 했다. 그런 때면 장모가 아이를 대신 봐주었다. 류진취의 원래의 바둑 실력은 그와 비슷했으나 요즘에 와서는 늘 그에게 지고 있었다. 류진취의 바둑판에서의 살상력은 눈에 띄게 무뎌지고 약해졌다. 양최득은 류진취와는 달리 자기의 바둑실력이 더 는 것 같았다. 그동안 혼자 장기를 두면서 바둑 두는 비결을 깨쳤기 때문일가?  양최득은 이미 아이를 돌보는 생활에 습관되였다. 아이가 소학교에 다니게 되자 안해가 전화를 걸어와 그들을 외국에 데려가는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다. 그러나 양최득은 선뜻 응하지 않았다. 안해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데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다. 자기는 불구이고 외국어마저 모르는데 어떻게 외국에서 사는가? 양최득으로서는 안해가 자기와 아이를 먹여살리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안해가 대학을 졸업할 때도 다되여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 안해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 때라는듯 류이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흥분된 어조로 자기가 그 곳에서 취직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가 기뻐하는지 괴로워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 뒤 안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더는 혼자 외국에서 살 수 없고 그렇다고 귀국할 수도 없다면서 만약 당신이 정 올 생각이 없으면 아이를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했다. 양최득은 금방 그녀의 뜻을 리해했다. 그녀가 그와 헤여지려는 것이였다. 뿐만 아니라 아이까지 외국에 데려가려 했다. 혹시 양최득은 진작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리혼문제를 협의하는 동안 류이미는 하루 건너 전화를 걸어왔다. 양최득은 그녀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명색 뿐이고 사실은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그녀는 클리트라고 하는 한 외국 남자가 그녀에게 반해 밤낮없이 쫓아다닌다고 실토했다. 그녀는 또 국내에 있을 때는 사람들로부터 줄곧 밉게 생겼다는 말만 들었는데 외국에 와서는 사람마다 자기를 동방미인이라고 찬미한다고도 했고 그녀와는 달리 그녀와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다른 한 중국 처녀 상염은 눈이 크고 피부색이 희여서 국내에 있을 때에는 미녀로 떠받들렸지만 외국에 와서는 남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도 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녀의 피부가 아무리 희여봤자 백인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기 같은 피부를 만들려고 해빛에 일부러 살을 검게 태운다고도 했다. 외국사람은 사람마다 다 눈이 크기에 희소가치라는 말처럼 자기 같이 작은 눈이 오히려 더 인기라고 했다. 그리고 클리트라는 남자가 그녀의 피부를 찬미하고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으면 중국의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고 한다고 했다.  양최득은 류이미와 리혼했다. 그는 아이를 그녀의 신변에 데려다줄 때 또 한번 아이 대신 비애를 느꼈다. 이번엔 아이가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였다. 양최득이 류이미에게 아이를 맡긴 원인은 그가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였다. 공예공장을 공장장 한 사람이 도맡게 되자 평소 리윤을 내지 못하던 종이조각부서부터 없애버렸다. 그는 클리트라는 외국 남자가 생활조건이 괜찮기에 류이미가 그와 같이 살면 자연히 잘살 것이라고 믿었다. 양최득은 아이로 말하면 어머니를 따르는 것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로서는 아이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아이에게 리롭게 하고 싶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었다. 양최득은 날마다 밖에 나가 바둑을 두었다. 지금까지 그는 마음이 이렇듯 홀가분한 적이 없었다. 그는 무엇도 관계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잊고 오직 바둑판에만 매달렸다. 홀로 사는 그의 생활은 마치 버림받은 바둑알과도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텅 빈 방안을 보고 있으면 웬 영문인지 마음이 흐리멍텅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정원에서 바둑을 두었다. 매판마다 그는 전투에 뛰여든 사람처럼 진지하고 엄숙했다. 누군가 그에게 왜 처자와 함께 외국에 나가지 않았는가고 물으면 양최득은 “왜 외국에 가지 않았는가구 ? 외국에 가면 한가하게 바둑을 둘 수 있는가?”고 반문했다. 그 때 그의 말을 누군가 이렇게 받았다.  “자넨 자식 하나를 잃는 대가로 공장장이 되려 했잖아!” 양최득은 머리를 들지 않고도 불청객처럼 불쑥 대화에 끼여든 사람이 다름아닌 면도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음이 덜컹 했으나 여전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리혼할 때 류이미는 확실히 그에게 목돈을 주었다. 그는 류이미의 마음이 리해되여 그녀가 내미는 돈을 받았다. 외국으로 놓고 말하면 그만한 돈이 아무 것도 아니겠으나 외화와의 환률 차이가 커서 외국에서는 반달 급여도 안되는 그 돈이 그를 일시에 ‘만원호’로 되게 했다. 그는 입을 하 벌리고 흐리멍텅하게 침대 우에 앉아있었다. 방금 둔 바둑이 현실이 아니라 환영 같았다. 면도칼은 언제나 집문 앞에 놓인 바둑판에만 있었고 정원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진실해보였고 면도칼다워보였다. 원래 양최득과 같이 한 공장에서 일했던 두 사람은 공장을 도맡은 공장장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간부였다. 그들은 해체된 공예공장을 다시 세우려 했다. 양최득에게 일정한 자금이 있는 것을 알고 그들은 집까지 찾아와서 양최득을 출자지분의 주주로 모시겠다며 설득했다. 이리하여 양최득은 그들과 동업자로 되였다. 양최득이 제기한 출자조건은 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종이조각항목을 보류하는 것이였다. 그는 자기에게 관리재능은 없고 오직 종이조각 솜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다년간 종이조각 업종에 종사하면서 그는 점점 종이 우에 한칼한칼 여러가지 도안을 새기는 일을 좋아하게 되였다. 새로운 공장이 끝내 개업되였다. 양최득은 여전히 매일 출근하면서 그만의 종이조각 일에만 몰입했다. 공장의 경영에 대해 그는 언제 한번 묻지 않았다. 지어 그에게 전달되는 자금손익명세표마저 보지 않았다. 사실 그런 수자거래는 봐도 잘 몰랐다.  주문이 있으면 그는 그림을 새겼고 주문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그림을 새겼다. 많이 하든 적게 하든 잘하든 못하든 그는 여전히 성심껏 일만 했다. 지각도 조퇴도 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공장의 판매창구의 항목이 하나 더 늘어나게 했다. 어쩌다가 공장장 사무실에라도 가면 공장장은 밖에서 온 손님들에게 그를 합자주주라고 소개했다. 손님들은 그를 양회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기가 그 무슨 사장이니 회장이니 하는 사람은 아니나 주식 초과배당금은 받으며 과거처럼 더는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 몇년간 사회변화는 갈수록 커졌고 그 기류를 타고 공장규모도 커져서 높고 으리으리한 공장건물까지 보라는듯이 일어섰다. 공장장들은 떼돈을 벌어 자가용차도 몰고 다니고 큰 주택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나 양최득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고 낡고 낮은 집에서 그림만을 새겼다.  비록 양최득이 가장 일찍 출자한 합자자이지만 그의 출자금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의 투자금은 이미 다른 투자자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미소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미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받는 초과배당금도 그만큼 미소했기 때문이다. 혼자 공장을 들락거려도 누구도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낡은 공장건물의 한 구석에서 소리없이 자기 일만 했다. 마치 버림받은 바둑돌처럼… 그는 출퇴근하면서 간혹 한가할 때면 바둑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승부를 다투지 않았고 높고 낮음을 비하지도 않았다. 기회 있으면 업무를 련계했고 업무를 련계하지 못하면 자기가 새기려고 했던 도안을 계속 그려갔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자유스러웠다. 이미 새긴 도안은 스스로 가져다가 앞에 있는 판매부의 창고에 넣어두었고 그것이 팔리든 팔리지 않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로서는 그것들이 필경 아직도 멋져보였기 때문이였다.  중년 이후의 인생은 참으로 빨리 흘러갔다. 언뜰하는 사이에 몇년이 흘러갔고 뒤돌아보니 남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한판한판의 바둑판처럼 둘 때에는 매 걸음마다 다 뜻이 있고 함정이 있고 쟁탈이 있고 모략이 있고 허虚와 실实이 있었지만 손을 떼고 나앉으면 잡히는 것이란 공허 뿐인 것과 똑같았다. 외국에 간 아들은 어느덧 결혼하여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고 그동안 양최득에게만 해도 두번이나 왔다갔다. 그들은 서로 낯설음 때문에 어색해했다. 양최득에게 있어서 변하지 않은 것이란 매일 도안을 새기는 것 뿐이였다.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발전 추세에 순응하기 위해 공장에서는 종이조각예술품을 사회홍보용으로 포장했다. 양최득은 새긴 매 한장 한장의 그림을 투명한 종이 사이에 끼운 다음 접어서 박스 안에 넣었다. 한 간부가 공예공장을 참관 왔을 때 양최득은 현장에서 도안을 새기는 표현을 해보였다. 그 간부는 그의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종이조각공예가 아직도 사회에 홍보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홍보가 제대로 안됐다고 한 그 간부의 말은 그냥 례의적으로 해보는 인사치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갈 때 공장에서 홍보를 위해 종이조각품을 선물로 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선물로 박스에 넣는 것은 종이조각품이 아니라 옥조각품 같은 것들이였다. 다행히 학교에서 조직한 아동견학단원들만은 떠나갈 때 매 아이들마다 한장씩 사서 조심스럽게 손에 받쳐들고 갔다. 마치 바람이 불면 그림이 날려가기라도 하듯 아주 조심조심… 양최득은 긴 시간 할일이 없어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그림을 새기기에만 바빴다. 그는 그림을 구사할 때 매 장의 형상을 다 다르게 그리려고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는 이따금 공장구역의 아스라하게 높은 빌딩을 따라 낡고 허름한 옛 단층건물 안에 들어서면 해빛이 가리워진 건물 안이 너무나 음침해서 도안을 그릴 때 쓰는 탁자 하나, 의자 하나, 조각칼 한자루, 도안 한무더기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사실 그는 지난 몇년간 줄곧 이렇게 걸어온 것이다. 자기가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필요가 있는지 그는 스스로도 의심이 갈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단 앉아서 손에 조각칼을 잡으면 그의 잡념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오직 조각그림에 대한 집념만 남았다. 이 일을 하는 것은 그의 숙명이였다.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는 숙명이였다. 도안을 그리는 한자루의 조각칼은 잡기는 쉽지만 그것을 파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조각칼 끝에서 오려지는 하나하나의 직선과 곡선, 여러가지 형태의 선은 머리카락 만큼 가늘어서 오래동안 쌓아온 내공이 없이는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당년에 황경중스승이 한 “마음에 도안이 있어야 한다”던 말이 진리임을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머리를 돌려 황경중스승이 새긴 간단한 도형들을 살펴보니 그것들이 오늘따라 각별히 생동하고 활기 있게 느껴졌고 거칠고 속된 저변에 무성하게 깔려있는 정감과 환락, 행복 같은 것들이 크게 확대되여왔다. 그런데 이전에는 왜서 이 모든 것들을 느끼지 못하고 보아내지 못했는지 양최득은 스스로도 리해되지 않았다. 그는 일단 여러가지 느낌과 깨달음이 오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한 것들을 오래 삭혀둔다. 놀라운 것은 그 속에서 그가 즐거움과 보람, 희열을 느꼈고 그러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새롭지도 낡지도 않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조금씩 그것에 더 중독되고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는 조각칼을 버릴 수 없다. 밀을 가을하면서 박혔던 그의 손가락 굳은살은 이 칼로 해서 더욱 두꺼워졌다. 손바닥에 난 장알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그와 여전히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 날은 찌뿌둥하게 음침한 데다가 질척질척 비까지 내려서 공예공장의 매대 앞은 살벌하게 휑뎅그렁했다. 양최득이 매대의 종이조각품을 바꾸러 가자 그 때까지 호젓이 서서 매대를 지키고 있던 아가씨가 반색했다. 그녀는 일시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양최득더러 잠간만 대신 매대를 봐달라 부탁하고는 자기 일 보러 몸을 사렸다. 매대에 선 양최득이 밖에서 쏟아져내리는 비를 보며 넋을 잃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뛰여들어왔다. 매대를 사이 두고 살펴보니 웬 양복 차림의 사나이였다. 사나이는 얼핏 보기에도 아주 위엄이 있어보였다. 양최득은 그가 공예품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찾아든 것이 아니라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렸을 것이라 생각하고 별로 알은체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오른쪽 벽 모서리 앞에 뚝 멈춰서더니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는 것이였다. 사나이가 바라보는 벽면에는 양최득이 그린 종규钟馗 형상의 조각그림이 걸려있었다. 이 조각그림은 원래 양최득이 마음 내키는 대로 가볍게 새긴 것이였는데 새기고 보니 마음에 들어서 액틀에 넣어 걸어놓았던 것이다. 종규그림은 도법이 간결했고 조각그림의 독특한 투각술透刻术로 생동하게 인물형상을 표현했다. 넉넉하고 여유로운 표정, 넓고 멀리 바라보는 눈, 바람에 날리는 수염, 보면 살아숨쉬는 실제 인물처럼 립체감이 있었다. 원 도안의 액틀 형식도 돌파해서 공백을 많이 두었고 오른쪽 아래의 귀만 남겨두고 무성한 숲과 바위와 이어지게 하여 마치 손으로 조각한 도장을 방불케 했다. 그 종규는 세상 밖의 비애와 처량함 속에 홀로 서있지만 세간과 련계하는 넓고 찬연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양최득 자신은 혹시 그 그림 속에 그가 지난 몇십년간 파란만장한 세월을 이겨오면서 겪어온 복잡한 심경이 투영되여 세상을 살피고 있는듯한 은유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줄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양최득이 사나이의 뒤로 걸어가자 그가 뒤로 얼굴을 돌렸다. 어딘가 퍽 눈에 익은 얼굴이였다. 양최득과 눈이 마주치자 사나이는 격동된 목소리로 양최득의 이름을 불렀다. 양최득은 그제야 그가 바로 옛날 시골에서 자기와 바둑을 두었던 상춘생임을 알아보았다.  “이 그림 말이야, 참 대단해!…” 상춘생은 손으로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입으로 연신 혀를 찼다. 둘은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상춘생은 자기는 지금 바둑을 적게 두지만 파고들 정도로 바둑에 인이 박혀서 완전히 끊지 못했다고 했다.  상춘생은 말하면서도 자주 머리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자네 보기에 이 그림이 좋아보이는가? 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살 수 있지. 얼마인가? 양최득은 벽에 걸린 그림을 내리우며 상춘생에게 그저 선물하겠노라고 했다. 상춘생은 그림 액틀을 받쳐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양최득을 보며 말했다. “이 그림이 자네의 걸작이 맞는가?” “보아하니 자네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자네만 마음에 든다면 선물할 만하지!” 상춘생은 한동안 그림에만 빠져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나 원래 이 그림을 사려고 했는데 이것이 자네의 작품이라니 사양하지 않고 받겠네. 기회 되면 어느 날 자네를 우리 집에 청해서 예술을 둘러싸고 진지하게 말해보고 싶네.” 환갑 나이 되여서인지 동지 추위를 만나자 양최득은 몸이 싸늘하게 얼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출근했다. 물가가 오르고 있는 시세를 외면하고 조각그림을 원 격 대로 파는 데도 판로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양최득은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조각칼을 잡았다. 그러자 마음속에 하나의 도안이 붕 떠올랐다. 손에 잡은 조각칼이 종이에 닿는 순간 양최득의 온 신경은 모두 칼끝에만 쏠렸다. 칼끝에서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그림이 그려져서야 그는 칼질을 멈추었다. 그제야 손이 시린 느낌이 들어 그는 팔소매에 손을 찔러넣고 조용히 금방 새긴 작품을 살펴보았다. 문득 전화벨이 울렸다. 그제야 그는 요즘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많이 적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송수화기를 집어들자 상춘생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상춘생은 그를 집으로 청했다. 그깟 한장의 그림이 뭐가 대단해서 집에 청하기까지 하는가! 양최득은 사양하려다가 상대가 바둑을 두자는 말에 생각을 바꾸었다. 혼자 사는 양최득에게는 다른 취미가 별로 없었다. 바둑을 두는 재미로 그는 매일을 버텼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 바둑친구와의 만남이 많이 적어졌다. 과거와는 달리 사람들은 친구를 집에 청해서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운영하는 바둑실에 가서 간식까지 먹어가면서 바둑을 두었다. 양최득은 이러한 사교적인 바둑판에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요즘 더 많은 바둑친구들은 인터넷에 올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바둑을 두면 언제든지 바둑을 놀아줄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양최득은 이렇게 두는 바둑에도 습관되지 않았다. 그는 바둑을 진지하게 두기를 원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올라 바둑을 두다 보면 상대가 억지를 부리거나 생떼를 쓰는 경우가 있게 된다. 양최득은 바둑 품위가 낮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이 바둑판을 더럽힌다고 격분해했다. 상춘생의 집은 도시에서 가까운 근교에 있었는데 거의 인기척이란 드문 편벽한 곳이였다. 상춘생이 알려준 집주소 대로 찾으니 눈앞에 파란 칠을 한 철란간에 둘러싸인 별장동네가 나타났다. 정문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불쑥 나타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다. 집 문어귀에 앉아있던 개가 양최득을 보자 사납게 짖어댔다. 여기는 호화주택구여서 오히려 시골풍의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인기척을 듣고 상춘생이 급히 밖으로 뛰쳐나오며 개를 제지시키고 양최득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북방의 습관 그대로 두손을 가운 스타일의 잠옷 소매에 찔러넣고 말했다. “루추한 우리 집을 찾아주어 고맙네.” “자네의 이 집을 루추하다고 하면 다른 집들은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루추한 집이라네. 이곳에 집을 산 사람들은 거의 모두 투자자들 뿐이고 진짜 눌러살고 있는 사람은 몇집이 안된다네. 그러니 집이 루추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듣자니 요즘 마을 뒤쪽에 높은 아빠트를 짓는다던데 장차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시끄러워지니까 그 때에 가서 이 집을 팔고 이사 갈 거네. 내가 이 집을 산 건 바로 아늑한 분위기가 좋아서였으니까.” 상춘생은 집을 팔고 사는 어마어마한 일을 아이들의 장난처럼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최득은 자기가 몇십년간 살아온 달팽이처럼 비좁은 지금의 집 공간을 좀 넓히는 일마저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마디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양최득은 상춘생이 수장품 대가라고 할 만한 큰 인물임을 알았다. 그는 수장품 업종에서 하나의 인기인물이 되여 수장품에 관한 텔레비죤강좌도 한 적이 있었다. 양최득은 평소 그러한 텔레비죤채널을 잘 보지 않기에 그런 일은 잘 모르고 있었다. “수집대가는 무슨 놈의 수집대가인가. 난 그냥 장사할 뿐이네. 그러나 수집을 생업으로 삼는 장사군들과는 좀 다르지. 난 그래도 력사를 알고 예술을 말하니까.” 상춘생은 양최득을 이끌고 그의 별장을 보여주었다. 수집대가는 확실히 다르기는 달랐다. 별장의 매 층마다 예술품들이 촘촘히 걸려있었고 계단을 올라가는 벽도 작고 귀여운 예술품들로 오밀조밀하게 꾸며져있었다. 아래층은 주방과 넓은 대청이였다. 양최득은 마치 고급가구점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였다. 유럽식 주방시설과 전자제품들을 죽 스쳐보던 그의 눈길이 예술품들에 미치자 놀란 빛을 띠며 정전된듯 뚝 멈추었다. 식당칸 바람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그림은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가가 그린 작품이였다. 양최득이 몸 담고 있는 공예공장의 어떤 직원들은 평소 요즘 잘 나가는 화가들을 곧잘 화제로 삼았다. 그래서 양최득도 일찍 이 화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그림은 화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화법이 대담하고 개방적이여서 녀자의 자태가 유난히 짙고 요염했다.  “이 그림은 그저 그렇네. 왜냐하면 화가는 내가 작심하고 띄워줘서 된 거니까. 그래서 평소 우리 집에 자주 찾아오기도 하지. 이 그림을 걸어놓지 않으면 그를 보기 미안해서 그냥 보기 좋으라구 걸어놓았을 뿐이네.”  상춘생은 잠간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여기 밑층에는 모두 일반적이고 수수한 그림들만 걸어놓았네. 이 그림들은 그냥 보기 좋게만 그린 그림들이지. 이 마을엔 경비가 있기는 하지만 편벽한 데다가 사람까지 적어서 도적이 들 위험이 많다네. 그래서 혹 예술에 대한 고상한 취미라도 있는 도적이 들어오면 보기 좋은 걸 갖고 가라고 여기에 부러 방편처럼 걸어놓았네. 그런 그림을 잃으면 마음이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2층 침실에 놓인 가구들은 간단하면서도 완비했다. 계획적으로 남긴 공간에는 예술적인 분위기로 꽉 차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은 거의 모두 국내외 명인들의 작품들이였다. 상춘생은 자기는 전문 국내 장사를 하기에 여기에 걸어놓은 작품들은 모두 그가 좋아하는 화가나 서예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양최득은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이 작품들이 그냥 조건도 없이 아무 모임에서나 쉽게 그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춘생은 그 작품들의 우점들을 말할 줄 알았고 부족한 점들도 지적할 줄 알았다. 작품의 예술표현을 론하는 그의 말은 조리정연했고 화가가 어느 년대에 그림을 그렸고 매 화가는 모두 그의 전성기와 쇠퇴기를 갖고 있기에 화가가 늙으면 늙을수록 값진 것만은 아니라는 섬세한 문제까지 론했다. 소장한 작품 속에 있는 한두폭 서화작품의 작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지만 상춘생은 그들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아직 젊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 모두가 큰 잠재력을 갖고 있어서 자기가 추천하고 띄워주면 꼭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3층은 서재였는데 안에 서화를 소장하는 칸이 별도로 설치되여있었다. 긴 탁자 우에는 융단천이 고급스럽게 덮여있었다. 상춘생은 자기도 여기에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기도 하나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서 모두 찢어버렸다고 했다. 모처럼 모셔온 서화가는 일반적으로 모두 묵보를 남기는데 그러한 서화는 모두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용으로 쓴다고 했다. 이 층에는 작품은 많지 않았으나 모두 명품들이였다.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외국의 유화 한폭이 걸려있었는데 관례 대로 그는 외국의 그림을 취급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외국 유화를 걸어놓은 것은 그가 그냥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였다. 양최득이 보기에도 그림이 좋아보였다. 그림 속의 시내물과 넓은 들이 너무나 깨끗하고 조용하고 우아하고 치밀해서 마치 인간세상 밖의 다른 한 세상 같은 불도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양최득은 그와 상춘생이 작품을 감상하고 흔상하는 눈 높이가 같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했다.  제일 웃층은 루각이였다. 상춘생은 양최득에게 이 루각은 그가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바둑실이라고 정중하게 소개했다. 양최득은 바둑실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울 것이라고 여겼으나 정작 상춘생을 따라 올라가 보니 생각과는 달리 하나의 명실상부한 루각이였다. 루각은 옛날 성안에 있었던 루각처럼 그다지 크지 않았고 꼭대기에 호랑이를 조각한 지붕창문 하나가 있었다. 그걸 보자 양최득은 일종 말할 수 없는 친근감을 느꼈다. 양최득은 어렸을 때부터 바로 이런 루각에서 살았었다. 지금의 새집들은 모두 비둘기장 같이 비좁은 아빠트들 뿐이여서 이런 루각은 거의 찾아불 수 없었다.  루각의 한가운데는 바둑탁자가 있었다. 탁자 우에는 박달나무로 만든 단단한 바둑판이 고풍스럽게 놓여있었다. 그 옆에 놓여있는 덮개 열린 두개의 바둑돌 통에는 마노바둑돌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루각 벽에는 세폭의 예술품이 정중하게 모셔져있었다. 한폭은 당대 초성草圣이라 불리는 인물의 서예작품이였는데 상춘생은 당대의 많은 서화작품들은 모두 시간의 고험과 검증을 거치지 않았으며 무릇 세간에서 인기를 끌고 주목받는 작품들은 모두 조작해서 계획적으로 띄워준 것들에 불과하다며 자기도 그런 조작자들 중의 일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초성의 서예작품은 정말 명작이였다. 이것은 초성과 문우들이 시를 담론하는 내용을 담은 한폭의 서예작품이였다. 초성은 시에 대해 각별히 관심이 있어서 시에 대한 그의 담론에는 그만의 독특한 견해가 담겨있었다. 이 자폭은 임의대로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지 특별히 서예작품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였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며 내심을 고백하고 발설하는 것이다. 그로써 문화의 수양과 예술의 견해가 하나로 융화되고 유착된다.  다른 한폭은 이국타향에서 사는 중국계 화가가 그린 그림이였는데 그림 속에는 중국인만이 갖고 있는 함축성과 절제된 필묵이 엿보였고 어떻게 해도 떨쳐버릴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는 향수乡愁가 처연하게 응축되여있었다. 또 다른 한장은 양최득이 새긴 종규钟馗 조각그림이였다. 상춘생은 이 공간은 자기가 줄곧 비워두고 좋은 그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었는데 양최득의 종이조각품을 얻은 뒤에야 그것으로 이 자리를 메우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여기에 걸어놓은 그림이야말로 진정으로 독특한 예술품이라고 했다.  “나 말이야, 자네의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온몸과 마음이 전률하는 느낌이였네. 나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예술작품들을 보아왔지만 이 그림 만큼 예술성이 독특한 그림은 별로 보지 못했네. 그 때 난 몽환의 세계를 헤매다가 갑자기 인간세상에로 내려온듯한 기분이였지. 결국 눈에 차지도 않는 그 자그마한 공예품 판매점 벽에 걸려있던 이 그림이 나의 눈을 틔워주었지.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난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젖어들게 된다네.” 상춘생은 옆에 선 양최득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은 구도로 보나 표현으로 보나 모두 일반에 머물지 않고 있네. 그림 속 형상의 기질은 슬퍼하면서도 쇠락하지 않고 분노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으며 도법은 또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하고 공백은 버림이 도달하고저 하는 경지를 돌파해버리고 또 버려야 비로소 이 그림이 보여주고저 하는 진정한 미를 발견할 수 있지. 천재적인 유전자가 없고 인생의 고통이 없고 참고 지켜보는 인내력이 없다면 이런 걸작을 완성할 수 없지.” 상춘생의 찬탄에 양최득은 머리를 흔들어보일 뿐이였다. “자넨 원래부터 자네 자신이 예술창작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상춘생이 손을 펼쳐보이며 말했다. “내가 저것을 제일 높은 곳에 놓은 것은 자네가 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네. 완전히 예술적인 각도에서 엄선한 것이네. 같은 조각그림을 놓고도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돌파하려 했다면 소가 소 같지 않고 말이 말 같지 않게 그릴 수도 있지. 현대 예술인들은 모두 창의성을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다만 모방에만 머물러있네. 말하자면 외국의 것을 모방한단 말일세. 그들은 어떻게 황당무계하게 그려도 외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폭의 공예품이니까 돈으로 가치를 계산한다면 근본적으로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을 수도 있지. 그러나 경매장에서 내가 소장한 작품이 몇백만 몇천만원에 팔려나간 적도 있다네. 물론 나에게도 나로서의 비애가 있다네. 나의 예술흔상과 작품을 소장하고 팔고 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생긴다네. 졸부들과 접촉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이란 오직 돈 밖에 없네. 경영과 경전은 언제나 한차원에 있지 않지. 그것들이 너무 어긋나서 난 두 얼굴을 가진 투페이스로 되는 때가 많네. 그러나 내가 더 큰 경제적인 리익을 얻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좋아하는 예술품을 소장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자네가 예술에 대해 이렇듯 깊은 리해와 표현력을 갖고 있으니 만약 진작부터 그림을 그렸더라면 긍적적으로 큰 실적을 쌓았을 거네. 지금 그림 한장이 걸핏하면 수만원을 호가하는데 거기에 내가 자네를 포장하고 띄워줘서 미술협회주석 자리라도 낚는다면 1년에 몇십만원을 벌기는 식은 죽 먹기지. 물론 지금 이 나이에 와서 업종을 바꾸기엔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종이조각예술과 비슷한 것이 바로 전각篆刻이지. 다 조각칼을 다루니까. 요즘 금석 업종이 아주 벌이가 잘되는 모양이더군. 방각仿刻을 갖춘 도장 하나가 몇만원에 팔린다네. 그런데 자네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겠지. 부류가 다르고 표현이 다르니까. 도장의 면이 너무 작아서 자네의 상상을 발휘할 수도 없지. 보아하니 자넨 여전히 자네의 종이조각 업종에 종사해야 하겠군. 이건 하나의 버림받은 예술의 패턴이기에 내가 자네를 도와 조작하고 띄우려고 해도 안되네. 지금 같은 상품화 시대에 표현이 독특한 예술을 견지하자면 자그마한 희생은 감내해야 하네. 혹시 자네의 돌파나 노력, 로고 같은 것들은 다만 한 사람의 표현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자네는 현시대 사람들과 같은 선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현시대 사람들이 접수할 만한 작품을 그려낼 수 없을 거네. 설사 자네 종이조각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진정으로 리해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나 한사람 뿐일 거네.” “난 자네 한사람만으로 족하네!” 양최득은 손에 잡고 있던 바둑알 하나를 바둑판 천원점 우에 힘있게 놓았다. 검은 마노바둑돌 하나가 바둑판 한가운데서 맑고 눈부신 초록색 빛을 외롭게 발했다. (김재국 옮김) 출처:2018 제2호
39    라나: 모래성(시) 댓글:  조회:362  추천:0  2019-07-11
모래성 라나   바다가에 쌓은 작은모래성 하나 백사장에 그려진 예쁜발자국 밀물에 밀려갈가 썰물에 씻겨갈가 보고 보고 또보고 있노라면 붉게 타오른 저녁 노을은 지고 두둥실 밝은 달 밤바다의 새악시 데려가는소리만 들리네 출처:2018 제2호
38    박지아: 애절함(시) 댓글:  조회:341  추천:0  2019-07-11
애절함 박지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이라는 말을 살아가면서 알았다     사소하면서도 숨 쉬듯이 평범하여 홀시하기 쉽고 당연한 것들  그 일상적인 것들이 애절하게 색바래졌다   밤은 깊어가지만  잠은 늘 부족하고 몸은 지쳐만 간다 책장에 책들은 쌓여만 가지만  몰입하는 독서시간은 줄어들기만 한다 그토록 사람이 그리워  만남을 기대하지만  마음의 여울을 열지도 못한 채 헤여진다 살아가면서 애틋하게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는지 돌이켜본다    아침마다 시원한 공기를 맘껏 들이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를, 아이와 우리말로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생각이나 했던가 아침식탁에 차려지는 김치와 장국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에  나는 오늘도 애가 탄다    하루 삼시 허둥대며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하고 그런 속절없는 일에 몸뚱아리를 지탱한다면  얼마나 속절없이 허무할 것인가 가장 자연스러워야 할 것들에  이 애절함은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 편지로 쓴 이 사무침은 또 어디로 띄워야 하나 아하, 지친 이 맘 보낼 곳이 없구나 출처:2018 제2호
37    김미옥: 명태(수필) 댓글:  조회:386  추천:0  2019-07-11
명태 김미옥   나는 어려서부터 생선을 유난히 좋아한다. 찜, 졸임, 구이, 회… 조리방식에 상관 없이 지금도 밥상에 생선이 오르면 그것 만큼 기쁠 때가 없다. 혼자서 조기구이 한마리 정도는 거뜬하게 해치우며 회집에 가면 혼자서도 ‘중’짜리 모듬회를 먹어치울 정도다. 샤브샤브 먹을 때도 소고기나 양고기는 없어도 괜찮지만 새우완자나 오징어완자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나의 생선사랑은 유별나다. 고기 없이는 살아도 생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입에 대지 않는 생선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명태다.  명태, 우리 민족의 명태사랑 역시 나의 생선사랑 못지 않은 것 같다. 황태, 동태, 짝태, 생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등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특히 연변지역 사람들은 명태를 유난히 좋아하여 조리방식 또한 다양하다. 게다가 명태살만 발라먹는 것이 아니고 명태 뼈나 껍질을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 간식으로 먹고 명태눈알까지도 아작아작 씹어먹는 것을 보면 명태는 버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선 중의 보배요,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의 일등 공신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명태를 아주 좋아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방망이로 명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내 숙제공부의 배경소음이 되고 푸근한 엄마냄새가 비릿한 명태냄새로 바뀌기 시작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해빛도 들지 않는 단층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나타난다.  3학년으로 올라가던 그 해 여름, 간암말기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아빠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고 아이들만 우는 줄 알았던 나는 그 때서야 어른들도 운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아까운 나이에 뭐가 그리 급해서 저 어린 걸 남겨두고…” 하며 우시던 친척 분들, 엄마는 내 곁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그 뒤로 문턱이 다슬도록 찾아오던 친척들은 점점 발길이 뜸해지다가 언제부턴가 끊어져버렸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우리 집,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이 바로 엄마의 방망이질이다.  나도 자식 키우는 립장이 되고 보니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혼자 딸 뒤바라지를 해 대학에까지 보낸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변변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외국으로 돈벌이 나간 것도 아니고 오직 뚝심 하나로 10년을 자식 옆에서 버텨온 엄마에게 “고생 많았어, 엄마.”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아빠가 세상뜬 후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나섰다. 봄에는 삯모하러 다녔고 가을이면 사과배 따러 다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시던 엄마,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방 한구석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가 엄마가 돌아오는 기척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면 엄마는 가방 속에서 아껴두었던 새참을 꺼내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준다. 그리고는 가마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대충 드신 다음 방 한구석에 고단히 주무셨다.  얼마 뒤 엄마는 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를 알게 되여 집에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을 하게 되였고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항상 엄마가 반겨주었다. 내가 숙제공부를 할 때면 엄마는 항상 말없이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었다. 겨우내 찬바람 속에서 단단하게 말라붙은 명태를 방망이로 꽝꽝 내리치고는 뾰족한 칼끝으로 배에서 꼬리부분까지 단번에 쭉 찢은 다음 뼈를 훑어내고 반듯하게 펴지라고 엉뎅이 밑에 깔고 앉는다.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펴진 명태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고는 그 우에 나무판자를 펴고 무거운 바위돌로 다시 한번 짓눌러놓아야 이튿날이면 납작하게 펴진 명태를 얻을 수 있다. 품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명태 한마리당 가공비가 3전 밖에 안되는지라 엄마는 하루종일 손에서 명태를 놓지 않으셨고 오줌 누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면 “에구구 허리야…” 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잘 준비를 하면 그 때서야 엄마는 손에서 명태를 놓군 했는데 옷소매와 바지가랭이에는 항상 명태뼈가 달라붙어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해보겠다고 나섰더니 엄마가 넌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했으나 내가 자꾸만 졸라대자 내 성화에 못이겨 그럼 한번 해보라고 허락했다. 내 팔목보다도 두배나 굵은 수제방망이, 명태가공을 위해 엄마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명태를 내리치는 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였다. 몇번 안하고 나는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고 이번에는 명태를 칼로 찢는 일을 해보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예리한 칼끝으로 단번에 꼬리까지 쭉 내리찢는 것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칼로 뼈를 훑어낼 때 요령이 부족하면 살까지 떨어져나갔다. 돈 한푼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고 그 때부터 방학이 되면 엄마 옆에서 일을 도와드렸다.        “엄마는 배운 게 없어서 이런 일을 하니까 넌 이담에 꼭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해라. ”  엄마는 늘 습관처럼 나에게 말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엄마의 몸에는 명태비린내가 진하게 배였고 두손에는 굳은살이 늘어갔다.   “이 정도 고생이면 한국에 나가서 돈 벌어도 힘든 걸 못 느끼겠는데 차라리 한국에나 가서 돈 벌지.”  명태 한마리에 가공비 3전씩 받으며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가 리해 안된다는듯 이웃 아줌마들이 엄마에게 권유했다.  “쟤를 공부 다 시키면 그 때 갈려구요.” 엄마는 정말로 내가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말없이 명태가공일을 하면서 내 곁을 지켜주었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집을 팔아버리고 돈 벌러 한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몇년간 얼굴을 못 보고 있다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것은 엄마가 외할머니가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매일마다 출근하는 나를 현관문앞까지 흐뭇한 얼굴로 바래준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하는 내가 부럽고 자랑스러운듯. 얼마 전 엄마랑 고향을 다녀왔다. 십여년 만에 돌아간 연길은 몰라보게 변해있었고 난 자신이 마치 낯선 도시에 온 관광객 같았다. 서시장 뒤골목을 걷고 있으니 떡, 젓갈, 고추장, 김치… 등 여러가지 음식을 파는 조선족아줌마들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연변말투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대롱대롱 매달린 명태, 납작하게 펴진 명태, 빨갛게 양념한 명태, 각종 명태들도 눈에 안겨왔다. 그 옛날의 우리 엄마처럼 어느 누군가도 지금 쯤 공부하는 딸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겠지? 자식 위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들어 우리 민족이 각별히 즐겨먹는 명태의 짭짤한 맛이 더해진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출처:2018 제2호
36    성해동: 립춘(시, 외2수) 댓글:  조회:427  추천:0  2019-07-11
립춘(외2수) 성해동   가슴 속에  겹겹이 닫힌 장지문 찢어진 창호지가 바람에 팔랑인다    칼칼한 목에서 가르랑거리는 미련에 아직도 기침은 멎지 않고  욕망으로 뒤틀린 창자는 살얼음판이겠다    방울방울  녹아내리는 고드름에 처마에 매달린 낡은 풍경이 한숨도 쉴 수가 없다   한파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가슴이 콩닥거려  부랴부랴 붙이는 립춘방이겠다   어둠이 있어 빛나는 저 별 겨울이 있어 반가운 이 봄     스치는 풍경   수많은 차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산과 강과 논과 밭을 스치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고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와 관계 맺고 꽃은 어떻게 피우고 풍파는 어떻게 견디는지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단지 공허한 웨침에 불과한  모든 걸 스쳐보내는 시속 230키로메터    얼마나 많은 다음을 기약하고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이 세상을 사는가?   나만 빠르게 달려 결국 혼자가 되여버린  멈추는 법을 잊어 넘어지는 일만 남은 나   기쁠 땐 누구와 공유하고 힘들 땐 누구에게 의지하지    소홀하거나  민망하거나  마음을 쓴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 꼬여버린 실타래  한올이라도 잘리면  그 순간 날카로운 가시가 되는  달빛의 위로가 필요한 나   애써 기억 속에 붙잡는다 바람과 나무 기차에서 내리면  잊어버릴 저 풍경이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나는야 양치기 소년    어릴 때부터 만들어  하나의 집착이 되여  이번엔 진짜 튼튼히 만들어  평생 함께 하리라 믿었는데    리유도 시기도 가물가물한 어느 날 당황하며 찾은 망치와 나무판자로 눈물을 훔치며 하는 망치질   처음으로 부서진  울타리 안에서 나는야  너를 부르는  양치기 소년   바람에 목적지가 없듯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함께 가야만 하는  양치기 소년 나는 너희가 되고  너희는 나 되는가    부서진 울타리 안에 홀로 남은 이 몸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을 간단히 부정할 수 있었던 오늘도  튼튼한 판자와 못을 찾아다니는 나는야 양치기 소년 출처:2018년 제2호
35    곽미란: 첫사랑(시, 외1수) 댓글:  조회:330  추천:0  2019-07-11
첫사랑(외1수) 곽미란   첫사랑이라고 제목을 써놓고  맥주 한모금 마신다 1664 프랑스 맥주 첨 마셔보는 맥주다    보리가 아닌 밀로 만들어진 맥주  거품이 풍성하고 부드러운 맥주 첫사랑처럼 달콤하고 첫사랑처럼 불투명한   사람들은 누구나  처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처음 마셔보는 맥주이든   처음이라는 건 그토록 설레이고 그토록 미묘하고 그토록 아름다운 것 나는 오늘 처음으로 쎄즈 스와쌍 꺄트르를 마시며  다시 한번 첫사랑에 빠진다  거품의 바다에     마라탕이 먹고 싶은 날   울고 싶은 날이거나 사람이 그리운 날이면 어김없이 마라탕이 생각난다   상하이 허촨루 길모퉁이의 마라탕집 뼈속까지 으슬으슬 떨리는 겨울에도 더워서 정신을 못 차리는 여름에도 마라탕집은 늘 앉을 자리가 없다   감자 연근 두부 당면 오징어 소시지 게맛살 표고버섯 쌀국수 누룽지 펄펄 끓는 육수 속에 푹 익어간다   남과 북 륙지와 바다 이곳과 저곳 이 세상 구석구석의 맛이 하나로 된다   다진 파와 마늘, 생강과 고추기름을 듬뿍 넣으면 뽀얀 김에 스트레스 날려가고 가슴엔 행복 한덩이 가라앉는다   멋쟁이 상하이 아줌마도 호들갑스런 한국 아줌마도 오구작작 떠드는 출근족들도 지하철역 구두수리공 아저씨도 자그마한 원형 의자에 간신히 엉덩이 붙이고 15원짜리 행복에 취한다 출처:2018년 제2호
34    김명숙:산이 아프다(수필) 댓글:  조회:313  추천:0  2019-07-11
산이 아프다 김명숙   나는 홀로 걷고 있다. 어디까지 걸었는지 모른다. 얼마 동안 걸었는지도 모른다. 바람 따라 발길 따라 몸을 맡겨버렸다. 대화가 사무치게 그립고 어딘가에 잠간 몸을 기대고 싶다. 하지만 바람소리만 점점 기승을 부리고 눈앞이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이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강물과 대화를 걸었더니 쉴 새 없이 중얼거리던 모습도 어디론가 종적이 묘연해졌고 하늘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눈개비마저 보내주지 않는다. 정처없이 앞을 향해 무작정 걷고 걷는데 멀리서 희미한 륜곽이 내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온다. 눈을 비비고 다시 뚫어지게 그 곳을 응시했다. 확실하게 뭔가가 보인다. 순간 내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힘을 얻고 발걸음을 재우쳤다. 륜곽이 점점 뚜렷해지더니 우람진 체구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어느덧 내 발길도 그 곳에 닿았다. 하늘을 치받아 고개를 번쩍 쳐들고 병풍을 휘둘러 천하를 휘감은듯한 웅위로운 그 모습! 산! 산이다. 산만이 지치도록 몸부림치며 방황하는 나를 위로해줄듯 싶다. 그래서 내 정처없는 발길이 이곳까지 왔을가? 내 목적지가 여기였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 내가 산을 흠모한 적 있었던가? 그래서 여태 산을 찾아 이토록 애타게 헤매였을가? 대바른 사나이 같이 무게 있는 품위는 내 가슴에 맺힌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하소연들을 속속들이 들어줄 것 같았고 그 거대한 몸체는 가냘프고 무너질듯한 내 육체를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방패 같이 느껴졌다.  내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찬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뼈속까지 찌르던 추위를 어느덧 잠재워놓고 산은 따뜻한 기운으로 나를 맞아준다. 방대한 식솔들을 동원하여 푸른 바탕의 무대를 펼쳐놓고 그 우에 인간의 령혼을 싹 앗아갈듯 아름다운 대자연의 미인들을 풀어놓는다. 각양각색의 미녀들이 푸르른 무대 우에서 살랑대는 그 모습에 허공에 뜬 고무풍선마냥 방향 없이 허둥대던 내 마음이 소리없이 끌려든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누구도 반겨주지 않고 누구도 받아주지 않던 나를 산은 그토록 따뜻하게 그토록 열정껏 맞아준다. 내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하는데 대자연의 온갖 예리한 시선들이 산의 인기에 매혹되는 순간 질투로 약이 오른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토하며 지꿎게도 그의 몸체를 지져가기 시작한다. 산은 어쩔 수 없이 미인들을 퇴장시키고 용맹하게 불덩이 같은 열기를 내뿜는 태양의 기세에 맞서 몸속의 온갖 에네르기를 동원하여 신선한 산소를 뿜어가면서 무서운 폭염에 대처해나간다. 어느덧 그처럼 기세를 부리던 태양도 맥이 진했는지 뜨꺼운 열기를 슬며시 거둬들인다.  그 무섭고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고 공포에 젖어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더니 산은 어느덧 수다쟁이 녀인마냥 우람진 체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자기 몸을 울긋불긋 꽃무늬로 단장시킨다. 어데라 없이 빨갛게 노랗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같은 한폭의 수채화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주위의 분위기를 재치 있게 완화시키는 산의 그 실력은 또 한번 내 마음을 움켜잡았다. 산의 그 익살스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일이 마뜩잖아 여태 옹졸하게 닫겨있던 내 마음이 이젠 좀씩 풀리기 시작한다. 때를 같이 하여 산은 또 소중히 간직해오던 보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한다.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다. 귀중한 약재며 달콤한 열매 그리고 개암버섯들… 이처럼 보잘 것 없는 나에게까지 아낌없이 베풀어가는 산의 훌륭한 성품을 바라보노라니 어느덧 내 아픔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순간 부질없이 흘러보낸 소중한 시간들이 안타까와지면서 하루속히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친다.  떠나려는 나를 바래주려고 산은 어느새 꽃무늬옷을 벗어버리고 요술쟁이마냥 하얀 옷으로 몸을 감싸버린다. 자기를 그토록 흠모하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듯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선녀를 보는듯한 내 마음은 무난하기 그지 없다. 헌신과 베품을 천직으로 수없이 모습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다루는 그의 뛰여난 실력에 나는 스스로 고개가 숙어진다.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고 다시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백설 같이 아름다운 드레스 밑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간간한 신음소리를 들었다. 미약하던 신음소리는 점점 높아갔다. 갈길을 재촉하던 나는 우뚝 멈춰섰다. 내 발길이 그의 신변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신음소리가 울부짖음소리로 변한다. 산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심하게 휘청거린다. 살을 에여내는듯한 무서운 엄한이 사나운 광풍을 몰고 와 그의 식솔들을 괴롭히는 바람에 산은 그 많은 식솔들을 일일이 잡아주느라 천하가 떠나갈듯 고함을 치기도 하고 땅이 뒤집힐듯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의 가까이에 닿고서야 나는 세상을 독차지한듯 부럼 없는 산에게도 이처럼 큰 아픔이 있다는 걸 알았다.  산이 아프다! 산이 심하게 아픔을 겪고 있다. 산은 사시절 극심한 아픔을 겪는다. 봄이면 수많은 새 생명들이 고고성을 울리며 그의 몸을 꿰뚫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산은 산모로서의 무서운 아픔을 겪는다. 여름이면 심한 폭염에 견디느라 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사정 없는 홍수에 살점이 뜯기여나가고 식솔들이 쓰러져나가는 바람에 산은 피눈물을 흘린다. 가을이면 멋진 그의 모습에 반하여 찾아오는 고객들 그리고 보물에 눈독을 들여 자연의 재부마저도 무참히 짓밟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성화에 산은 심하게 지쳐가고 몸이 망가지기도 한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을계절도 산은 이처럼 말 못할 고통을 삼키며 또 힘든 겨울을 맞는다. 하지만 이처럼 모진 아픔에도 산은 용케 참고 버텨간다. 헌신과 베품을 천직으로 살아가는 산의 심한 아픔을 느끼는 순간 내 마음이 못견디게 아프다. 나는 지금 산의 신변에서 그의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심한 아픔으로 고통을 겪는 나날이 오니 그의 신변에 수없이 찍혀있던 발자국들은 하나 둘 사라진다. 미녀들에 반하여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이들도, 꽃무늬옷이 이쁘다고 엄지를 내들고 걸탐스레 보물들에 눈독을 들이던 이들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산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기색이란 조금도 없다. 하냥 그 자리에서 강의한 의력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자기 모습을 지켜간다. 심하게 아파하는 그의 곁을 매몰차게 떠나버린 발자국들을 바라보며 그가 아닌 내가 그들을 원망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보니 내 옹졸한 마음이 더더욱 부끄러워진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은 깊이 감춰버리고 타인을 위한 헌신과 베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가슴의 작디작은 아픔도 감추지 못하고 세상일을 마뜩잖아하면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던 자신이 참으로 수치스럽다. 나는 항상 내 보잘 것 없는 실력을 모르고 내 설자리가 없다고 상대를 원망하면서 작은 가슴에 불만만 쌓아갔다. 힘들고 가파로운 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돌멩이에 걸채여 넘어질 수도 있다. 넘어지면 피가 흐르고 상처가 생길 수도 있는데 나는 내 스스로 그 상처들을 치유할 대신 비겁하게 뒤걸음만 치면서 도전에는 담을 쌓고 허무한 나날들을 속절없이 보냈었다. 비록 내 모습이 작고 못났지만 목표 없이 허둥대는 마음부터 바르게 강하게 다스리고 날마다 내 볼품 없는 모습이라도 부지런히 열심히 가꿔간다면 부족한 틈서리들이 언젠가는 메워지지 않을가? 비록 산처럼 크고 멋진 인격은 갖추지 못했지만 작고 담찬 모습으로 현실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내 욕심과 욕망을 앞세우기 전에 타인의 아픔과 상처들을 먼저 헤아려주고 보듬어준다면 볼품 없는 나에게도 내가 다가가기 전에 산처럼 멋진 누군가가 다가올 수 있지 않을가? 나는 오늘 명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하냥 썰렁하게만 느껴지던 대지가 따뜻이 나를 포옹한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내 생애에 조미료를 듬뿍 뿌려준 고마움들을 떠올리니 텅 빈듯한 허허벌판이 어디론가 멀리 종적을 감춘다. 바람도 자고 대지도 그림 같이 아름답다. 도란도란 강물은 모습을 찾았고 하늘에는 하얀 꽃구름들이 수없이 흘러간다. 산과 작별을 고하고 오는 내 마음은 오직 하나의 걱정만으로 마음이 조여진다. 산! 산이 아픔을 겪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명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태고 적 전설들을 가슴 속 깊이 묻고 무수한 풍상风霜들을 온몸으로 삭이면서 웅지雄志를 한껏 펼치려 벽공碧空으로 치솟았나. 출처:2018 제2호
33    김광영: 파란 전화기(수필) 댓글:  조회:321  추천:0  2019-07-11
파란 전화기 김광영   5월 14일 어머니의 날이다. 이제 전화할 데가 없다. 물론 생전에도 휴대전화 한번 못 써봤던 엄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운던 시절의 이야기라 할가 내가 갓 입사했을 때는 90년대 초반이였으니까 고향에서 집에 전화가 있다는 건 사치였다. 우리 집 전화는 사무실 대선배님이 내가 평소에 엄마하고 자주 전화통화를 하라고 전화 가설비를 주어서부터 생겨났다. 그 때 돈으로 천원을 주면서 이번 설에 집에 가면 꼭 전화를 가설하라고 배려해주셨다. 그 때 나의 로임이 천원 미만이였으니 나에게는 많은 돈이였다. 나는 그 해 설에 집에 전화를 가설하게 되였다. 파란색 전화기였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빠트가 아니라 단층집 구역에 있어서 전화선이 들어와있지 않았다. 선을 따로 늘이려면 또 우정국의 사람을 통해야만 했다. 마침 고중 동창이 사람을 찾아줘서 빠른 시간 내에 전화를 개통하게 되였다. 정상적으로 비용을 내도 관계를 찾아야만 가능한 이른바 관계가 소개신보다 나았던 시기였다.  전화기가 있기 전에는 편지나 전보나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고 받았다. 지금은 편지를 요구해도 받아보기 힘든 시대지만 중요한 사교수단의 하나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편지는 담기는 내용에 따라 사연도 많았다. 최근에 고향에서 녀자 동창들과 만나고 나서 중학교 때 얼마나 많은 남학생들의 련애편지가  선생님들 손으로 들어갔는지를 알게 되였다. 그 때 녀학생들은 련애편지를 받으며 첫 반응이 겁부터 났다고 한다. 애가 왜 나한테 이러지? 다른 친구들이 알면 어쩌지? 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날 텐데… 대개 이런 심리에서 편지를 받는 족족 성생님께 바쳤다고 한다. 어떤 편지는 아예 무슨 내용인지 보지도 않고 바쳤단다. 물론 아예 관심이 없는 남학생의 편지니 그냥 뜯지도 않고 바쳤을 것이다. 마침 얼마간 호감이 갔던 남학생이였다면 무슨 내용인지는 훔쳐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와중에 련애편지 한번도 못 받아본 녀학생들은 또 얼마나 허무했을가? 한번도 못 줘본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편지를 건네보지는 못했지만 못 써본 건 아니다. 설레는 마음을 눅잦히고 알심들여 쓰고 지우고 고치고 완성한 편지를 결국 주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걸 어디에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안 난다. 부치지 못한 편지, 무슨 수필 제목에서나 볼 법한 사연을 내가 만든 것이다. 오히려 주기라도 하고 퇴짜를 맞는 게 나았을걸 그랬다. 후회는 항상 가장 아쉬운 부분에서 상처가 깊다. 그 뒤로 편지는 대학교에 와서 많이 써봤다. 그 사이 도와준 친척 친우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하는 것도 있겠지만 편지라는 것은 회신이 있어서 그 회답편지를 받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여기에 또 옹졸하게 회답편지를 유도한 작전이 한번 있었다. 중학교 때 호감이 갔던 녀학생 후배가 있었는데 각기 다른 도시로 학교를 가게 되였다. 타성의 벽을 넘어 편지가 오가며 지내던 중 어느 순간 저쪽에서 회답이 없어졌다. 회답편지가 기다려지기도 하고 받은 편지에 답장을 안하는 것이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답이 없냐고 편지를 써서 물을 법도 했건만 그냥 백지 몇장을 봉투에 넣어 부쳐보냈다. 뜻인즉 답장이 없는데 편지종이까지 받쳐줄 테니 답장은 하면서 살자는 대개 그런 뜻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금방 미안하다는 내용과 함께 답장이 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속 좁은 행동이였지만 그 때는 그러고 살았다. 학교 때 편지와 비슷한 또 하나의 재미는 년말에 친척친우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일이다. 누구에게 새해 엽서가 많이 오면 그것도 자랑이고 괜히 뿌듯해했다. 지금은 문자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 굳이 편지를 보내고 받을 일이 없지만 편지는 편지로서의 고유의 매력을 갖고 있고 소장의 가치도 있다. 특히 타이핑인 아닌 펜으로 직접 쓴 손편지는 지금 받아도 하나의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던 중 통신수단의 혁신적인 돌파로 호출기가 출시된다. 일명 삐삐기라도 했던 이 작은 물건은 교환수나 자동시스템을 통해 련락을 바라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띄워준다. 나중에는 한단계 발전해 직접 문자가 뜨는 데까지 발전한다. 호출기는 당시 고가의 통신제품이였던 만큼 애지중지 아껴서 어디 부딪치거나 긁히는 것을 막아주는 씌우개도 했다. 씌우개 중에는 투명하게 비닐로 된 것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멋으로 100딸라짜리 지페를 끼워넣고 다니기도 했다. 졸업 전 실습기간에 허리춤에 호출기를 차고 다니며 우연일지라도 바지 주머니에서 미국 딸라가 삐죽이 나와있는 현상을 목격한 회사에서 이 학생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학생들이 아니라고 판단해 아예 채용할 생각을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직 널리 보급된 상황은 아닌 시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호출기를 소지하고 다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 실습회사에도 호출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던 시기였으니까. 우리 시대에 우리 학교 조선족 학생들한테서만 볼 수 있었던 특수 현상이였다. 한달 생활비가 백원에서 백오십원였던 시절에 몇천원짜리 호출기가 정상적인 현상은 아니였다.  그 뒤로 휴대전화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휴대전화와 호출기가 병존했다. 주요 원인은 휴대전화 비용이 감당이 안돼서 호출기로 상대방의 전화를 받은 후 꼭 회답을 해야 할 전화만 휴대전화로 하고 급하지 않으면 유선전화를 리용했다. 이 때는 휴대전화를 들고 공공뻐스를 타면 그 수준에서 휴대전화는 왜 갖고 다니냐 하는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기다. 자전거를 타면서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총을 받았다. 그만큼 휴대전화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였다. 특히 초기 아날로그 휴대전화 시절에는 벽돌 반장 만한 크기의 휴대전화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거나 회식장소에서 테이블에 척 올려놓으면 그만한 위풍이 없다.   그러다가 전화기는 작아지고 액정화면은 커지는 추세로 발전했다. 가격도 옛날처럼 그렇게 고가도 아니고 부의 상징도 아닌 시대가 도래한다. 이 때는 휴대전화을 잃어버리는 고봉기다. 나는 일편단심 노키아를 선호했는데 아마 일년에 십여대는 잃어버린 것 같다. 넘어진 김에 쉬여간다고 잃어버린 기회에 다른 기종도 써보고 싶었지만 잃어버렸다는 걸 집에 들키지 않기 위해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일년 내내 똑같은 기종을 사야 했다. 안타까운 건 갱신이 빠른 휴대전화는 똑같은 기종을 바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기종을 사고 싶어도 파는 데가 없어서 결국은 전화기를 잃어버린 사실이 들통났다.  스마트폰 시대는 예고 없이 쑥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휴대전화에 매달려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휴대전화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아주 불편한 시대를 맞이한다. 옆에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더는 련인 사이 죽고 못사는 애틋한 장면이 아니다. 옆에 있어도 서로가 각자의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니 그만한 거리가 또 어디 있을가 싶다.  무관심 만큼 살상력이 강력한 무기는 없다. 휴대전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의뢰심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회의 중에 휴대전화를 뒤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회의 사회자에 대한 그 이상의 결례는 없다. 또 회식 장소에서 휴대전화를 끊임없이 들여다볼 거면 왜 그 자리에 나오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요즘 학생들은 기숙사 아래 침대에서 2층 침대 학생에게 위챗으로 통지를 전달한다고 한다.  편지-유선전화-호출기-휴대전화, 통신수단으로서의 이 네개 중 호출기만 사라졌다. 휴대전화가 호출기의 모든 기능을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건 그 자체의 특유의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쓴 편지, 글자마다에 새겨진 진심과 성의가 그의 매력이고 생명력이다. 그래서 나는 짧든 길든 나에게 손으로 적어준 편지들을 차곡차곡 보관해둔다. 창밖으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울적한 날에는 이런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아름다운 옛 추억들을 떠올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을 그리게 된다.  이제 휴대전화는 또 전화를 걸기보다는 음성메시지나 문자를 많이 활용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소통의 방식이 바뀌여가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은 역행할 수 없다. 이러한 소통방식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간에 적응해가야 한다.  하지만 통신수단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가든간에 우리 집의 첫 전화기, 파란색 전화기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엄마한테 전화를 하라고 가설해준 사무실 대선배님의 배려를 잊을 수 없고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전화기는 나도 대선배님이 했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하는 상징체이기도 하다. 하늘나라에서는 무슨 전화기를 쓰시는지 모르겠지만 번호도 모르는 전화기에 마냥 걸고 싶고 목소리를 단 한번만이라도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그 파란 전화기를 더 그립게 한다.    출처:2018 제2호
32    심명주:‘집시’가 되여(수필) 댓글:  조회:368  추천:0  2019-07-11
‘집시’가 되여 심명주   이사를 했으나 아직 많은 물건이 남은 낡은 집에는 정리할 물건들이 수두룩했다. 그래서 간만에 낡은 아빠트로 다시 갔다. 다시 마주한 아빠트는 못 본 사이에 늙어버린 사람 같았다.  겉이 멀쩡한 밑층 대문은 여전히 묵직했고 여닫음이 자유로왔다. 2층을 오르고 3, 4층을 지나 5층까지 도착하는데 갑자기 쓸쓸함 같은 것이 훅 파고 온다. 드디여 7층에 다달아 숙련된 솜씨로 집열쇠를 틀었다. 때묻은 집안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은 이사짐으로 뒤죽박죽이 된 풍경이다. 신을 벗고 먼지 앉은 바닥에서 다시 끌신을 찾아 주방까지 직진하여 익숙하게 랭장고문을 열었다.  연극이 끝난 무대인양 불 꺼지고 텅 빈 랭장고 안. 잠시 흐트러진 내 기억의 퍼즐에서 마음을 되찾아 객실로 나왔고 이리저리 널린 이사짐 사이에서 앉을 곳 없어 서성이다가 이번에는 내가 서버린 랭장고처럼 휑하니 비여있는다.  꼬박 11년을 내 둥지로 삼았던 집에서 곧 완전히 이사를 나오게 되였다. 푸르른 나무들로 빼곡한 바깥풍경이 훤하게 트인 데다가 조용하기까지 하여 그야말로 내 세상 같던 다락층 이 소가에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기를 얼마의 시간이였던가.  이사를 앞둔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류랑을 앞둔 ‘집시’이다. 낡은 곳을 털어 힘차게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하는데 마음은 웬 허전함과 막연함으로 에돈다. 이사짐 꾸미는 날 밖에서는 여름비가 내렸다. 이렇게 비가 온 날 저녁이면 방충망 내린 창문은 어김없이 저 아래 숲속에서 귀뚜라미 울음 한웅큼씩 건져 내 귀에 부어주군 했다. 그 때면 나는 귀뚤귀뚤 소리와 함께 창을 타고 밀려오는 청신한 밤공기를 어우러 낮동안 나른해진 몸을 추스르군 했었지. 헌데 이제 우리는 정말 리별해야 할 시간이다. 이사는 추억을 갈무리하는 한차례 들춤거림이다. 그리고 곧 내가 새롭게 자리잡을 또 다른 집. 집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내 몸을 맡길 믿음직한 지분 한쪼각 같은 것이라서 사람은 늘 그것에 의지하고 련련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지난 기억도 사람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단단한 지분 같은 것이리라. 수많은 그런 지분 중에 제일 오래고 낡은 것은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이다. 어찌하여 그 나날의 빛과 냄새와 슬픔의 온도까지 나는 아직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노란 전구가 빤히 드리운 밤, 초저녁에 이미 누워 잠든 엄마의 가슴을 헤치고 젖 먹으려고 입을 댔던 나는 갑자기 쓰디쓴 젖맛에 소스라치게 엄마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엄마가 젖먹이 나를 떼여내려고 유두에 개열을 바르고 잤던 것인데 어린 나는 예고 없이 찾아온 쓰디쓴 맛에 입이 타는듯 기겁을 했고 잇달아 차오르는 엄마에 대한 배신감과 서러움이 슬픔으로 퍼져 울어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를 얼마일가, 웃방에서 자던 대여섯살배기 오빠가 눈 비비며 깨여나더니 정주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잠도 못 깬 채 아무 말 없이 엄마젖을 힘차게 빨아서는 바닥에 가서 뱉어버리고 다시 빨아서는 또 달려가 버리기 시작했다. 드디여 쓴맛이 사라지자 우는 나를 보듬어 엄마 젖 물려주던 일…   노란 전구와 노란 구들과 초라한 가마목과 온 하루 일밭에서 헤맨, 습습한듯 익숙한 엄마 몸의 냄새와 목 쉰 나의 울음소리와 오빠의 달램과 곁에 아무도 없는듯 서럽던 슬픔과 배신과 무기력함들… 지금껏 내 기억에서 그것들이 퇴색할 줄 모른다. 락인처럼 박힌 기억은 누구에게나 신비한 비밀처럼 더욱 또렷하게 남아있는 법인듯하다. 기억에도 분명 생로병사가 있음직한데 사람들은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혹처럼 혹은 지병처럼 지독하게 깊숙이 넣고 다닌다. 지금처럼 그 기억이 툭하고 튀여나오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풍덩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 지워지지 않는 서럽던 엄마와의 그 기억 덕분에 로산으로 아들을 낳으면서 나는 31개월 동안 모유수유로 기꺼이 아들에게 내 가슴을 내여주었다. 또 지금 아들과의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 옛 생각처럼 곧 이사할 이 집에 고스란히 배여있고 나는 곧 다른 집을 터로 잡아 이사를 떠나야 한다.  떠난다는 말은 늘 알짝지근한 말이다. 사춘기를 막 맞아 우울하던 그 때에 아버지도 그렇게 내 곁을 훌쩍 떠났다.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기둥이 무너지던 소리는 집안 전체를 뒤흔드는 큰 울림 같은 것이였다. 생사의 예기치 못한 리별 만큼 아픈 것이 또 있을가. 아버지와의 리별은 우리 형제 모두를 단번에 훌쩍 커버리게 하였다.  아직도 푸른 청포 같이 펴기만 하면 내 마음에서 후드득 일어서는 이런저런 어린 시절의 추억무늬들이다. 다 커버린 지금 이사를 하노라니 괜히 지난 추억이 줄레줄레 따라나오는 시간들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나무가 마디로 이어지듯 인생 또한 한번 또 한번 리별과의 련속적인 만남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별이란 나쁜 의미만이 아니다. 리별이란 곧 하나의 마디맺음이며 역시 새 마디의 시작으로 희망을 품은 아픔이라서 리별을 잘할 줄 아는 사람은 마디를 딛고 올곧게 서서 건실하게 성장하는 대나무처럼 싱싱해지리라.  바로 집의 기억들과 추억들과 잘 리별해야 할 시간, 나는 집시인이 되여 다시 기꺼이 떠나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직 이 마음에 서린 저 소가에서 쌓은 놓지 못할 기억들과 그리움들은.  곧 몸은 다른 곳에 정착할 것이나 마음은 한동안 이사 중일 것이리니. 출처:2018 제2호
31    심명주: 육담이 필요한 날(수필) 댓글:  조회:344  추천:0  2019-07-11
육담이 필요한 날 심명주   육담肉谈은 언어 계보에서 지위가 천하다.  순 우리말로 풀면 ‘고기 이야기’라는 뜻이며 저속하고 품격이 낮은 말이거나 이야기로 흔히 음담패설로 통한다. 육두문자의 육담과 악담恶谈을 아울러 육악담이라는 말도 있다. 내가 아는 육담은 별로 많지가 않다. 기껏 발휘해봐야 몇마디 뿐이다. 그것은 내가 몇십년간 나름 흔들리며 지내온 생활 속에서 용케도 맑고 티없는 본질을 잃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냥 그동안 살아오면서 육담은 나에게 맞지 않는 스타일이 구별되는 옷 같은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것을 거리낌없이 훌쩍 내 몸에 걸치기를 꺼렸다.  그런 나의 마음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육담이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후자가 나 자신이라고 고집했을 뿐이다. 왜서 그런 마인드로 자신을 포장해왔을가. 그것도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냥 내 기억에서 최초로 부끄러운 충격을 받았던 상스러운 말투의 원조를 떠올리라고 하면 생각나는 사람 하나는 있다. 바로 아스름한 기억의 녀자이다. 약간은 모자란듯 거친 말투의 녀자였다.  내가 열두어살 되던 해 여름, 날씨가 무더운 어스름한 저녁녘이였다. 그맘 때 시절 남정들은 음식점 곁에서 삼삼오오 로천 술상을 벌리기를 즐겼다.  웃통을 벗어젖힌 남자들이 줄느런히 앉아 권커니 작커니 하는 어느 음식가게 앞을 내가 지나던 때였다. 스무살도 안되는 녀자애 하나가 술손님들이 앉은 이곳저곳을 누비며 발빠르게 음식을 나르는 것을 보았다. 서빙하는 녀자애였다. 머리가 짧은 숏컷이였고 얼굴은 희고 말쑥하나 녀자녀자함이 아니고 약간은 중성스러운 인상에 모습 전체에서 어딘가 거친 기운이 풍기였다.  다리보다 몸통이 더 앞으로 쏠리며 잽싸게 서빙하던 그 녀자애가 갑자기 발에 무엇이 탁 걸채여 앞으로 고꾸라질듯 비칠비칠 지름걸음을 했다. 그러다가 용하게 몸을 재빨리 가누며 입으로 어쩔 사이 없이 “개XX 초채炒菜~”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남정들의 억양을 본따서 내는 웅글고 저음진 소리에는 앳됨도 묻어있었으나 거기서 풍기는 상스러움은 남자 못지가 않았다. 걸채인 발이 참기 어렵게 아팠던 모양이다. 왁작 떠들던 술군들의 시선이 녀자애한데 집중되였고 나도 일순 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녀자 입으로 숙련되게 거친 말을 하는 모습에 영화 속 폭력장면처럼 충격이였던가.  녀자애는 상관없다는듯 통증이 가시지 않은 자기 발만 한손으로 꼭 쥐고 상을 찡그렸다가 이내 일어나서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야 금숙아, 녀자가, 어? 그런 말 해서 쓰겠나?”  듣기 거북하다는듯 어느 술상의 남자가 넌지시 뜨뜨미지근한 말을 던졌다. 이름 부르는 걸 보아 단골손님인 모양이였다. 남자들은 대개 상스러운 말이나 거친 말에 너그럽다. 금숙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금숙’이라 불리우던, 약간은 반푼스러워보이던 녀자애가 거리낌없이 뱉어내던 그 찰진 욕설이 그 날 나에게는 놀랍고 신선했다.  그 날에 본 ‘금숙’이는 그 뒤 내가 자라오면서 누구한테 자주 털어놓지 않은 허물 같은 것이였다. 훅 하고 생면부지의 내 기억에 꽂혀 살 속에 단단히 파고 들어온 ‘금숙’이는 내가 가끔 육두문자를 떠올리면 같이 따라 생각나던 녀자였다. 몇십년을 죽 그랬다. 잊을래야 잊어지지 않는 기억 속의 ‘금숙’이. 내 몸에 들어와 오래동안 나의 살을 자양으로 같이 커온 가시 같은 존재였던가? 함께 크는 동안 나는 그것이 가시이고 처음 그를 보던 그 날 나를 몹시 아프게 찔렀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그냥 잊었다. 아니, 가시라고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을 빌미로 잘 커온 그 가시는 더듬이 같은 속성을 나에게 배워주었고 때로는 내가 정말 ‘금숙’이로 되여 나에게 상스럽고 거친 말을 시키려고 들었다. 조금씩 그것을 인식하면서 나는 내 원초의 부끄러운 ‘금숙’이를 더 기억 속에 인식했고 또한 ‘금숙’이라는 이미지의 녀자가 나에게는 거칠고 부끄러운 가르침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숙’이는 나를 육담이라면 거부부터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후 세상살이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일상이 육담인 사람이 정상이 아니듯 육담이라 하면 거부부터 하는 나 또한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그런 발견은 나더러 생활에 조금 더 재미를 가미하려면 적당한 육담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선호하는 육담을 책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나름 나의 육담표준을 정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육담에 대한 나의 기준을 바꿔준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TV들에 자주 나오는 ‘욕쟁이할머니’이다.  보통 맛집 같은 것을 경영하는 이런 ‘욕쟁이할머니’들은 매일 스트레스와의 전쟁 중인 직장인들이 가게를 찾으면 따뜻하고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는 한편 포장이 없는 원색 언어로 거친 육담을 펴내며 귀와 뇌도 시원하게 해준다. 옛부터 그런 ‘욕쟁이할머니’들은 우리 주위에 푸술했지만 하필이면 요즘 들어 사회 속의 한 캐릭터로 각광을 받는다. 그런 현상에 대해 나는 시대적인 사색을 하기보다는 ‘욕쟁이할머니’는 그냥 내 눈에 세월을 인내하고 이미 성인으로 성장해온 ‘금숙’이 아니였을가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던 지난 어느 날, 나는 아홉살배기 아들과 나의 친구랑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내 옆에 리혼으로 우울했던 나의 친구가 나란히 앉았고 마침 우리 차는 어느 사거리에 다달았다. 길옆에 사면팔방 줄느런한 음식점 간판을 보며 소학교에서 금방 배운 우리글을 익히느라 간판쪽을 읽던 아들이 ‘연병만두국집’이라는 간판글을 보았고 그것을 잘못 읽어 그만 ‘염병만두국집’으로 읽었다.  ‘염병’이라는 말을 듣던 친구가 어둡던 얼굴을 확 밝히며 “옘병~”하고 과장하며 흉내냈다. 나도 되받아 “에라잇 옘병~”하고 외웠고 우리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큰소리로 웃었다. 가는 길 내내 속 후련히 “에라잇”, “옘병”을 련발하며 웃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도 감염된듯 함께 웃어댔다. 단어의 뉴앙스를 터득한 것이다.  그 날 꼭꼭 가두어졌던 내 친구의 속을 해장국처럼 확 풀어주던 ‘옘병’이라는 욕설이 분위기를 반전시켜준 구세주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묘미 때문에 사람들은 가끔 육담을 하나부다. 적절한 육담은 경우에 따라서 어떤 지략이고 유머이며 센스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는 동안 나도 가끔은 시원한 육두문자가 그리웠던 것 같다. 육두음들이 나의 후두를 적시고 목청을 매체로 세상에 터지는 것이 어려웠을 뿐 실제로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내뱉는 거친 말은 그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아름다운 글과 언어는 그것을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아우라 같은 날개를 달아준다. 하지만 비포장도로 같이 터덜터덜한 생활의 나날들을 경과하다 보면 시종 우아함을 보존하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세상은 때론 너무 슬프고 속상하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악담과 육담을 일상사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육악담은 맛만 들이면 돌이키기 어려운 중독을 부르는 쓰레기음식이며 저질인간의 악동짓이다. 매료되면 빠져나오기 어렵고 그 상스러운 외문猥文에 경도되면 사람은 성품을 잃는다.  출처:2018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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