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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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사대주의 장송곡 댓글:  조회:9547  추천:0  2013-03-16
                                사대주의 장송곡                                       최 균 선   사대주의(事大主义) 란 작고 약한 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를 섬기고 그에 의지하 여 자기 나라의 존립을 유지하려는 립장이나 태도를 말한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침 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식민주의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조선사를 외세의존의 력사로  외곡한 개념이라고 해석하고있다. 일제학자들은 침략초기부터 만선사관(滿鮮史观),반도적성격론(半島的性格论) 일선동조론(日鮮同祖论) 등 궤변으로 조선력사의 주체적발전을 부정하고 타률성과 정체성을 기본원리로 내세워 민족독립의식을 말살하려 기도했다. 1912년 식민사관의 제창자인 하야시[林泰輔]는 지리적조건 및 숙명론을 내세우고 "조선반도는 지리적으 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항상 그들의 압력에 시달릴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조선의 력사 는 타률적력사로서 중국의 전례주의(典礼主义),주지주의(主知主义) 지배와 만몽(滿蒙)의 정복주의(征服主义),주의주의(主意主义) 지배, 일본의 포옹주의(抱擁主义) 와 주정주의적(主情主义) 지배를 받아온것이 숙명"이라고 당나발불면서 제놈들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합리화려고 지랄발광했다. 이런 사대주의론은 일제의 관변연구기관에 종사하거나 식민주의학자들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인사학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어 마치 학문적객관성이 있는것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대주의 개념은 많은 조선인들이 자기력사의 어두운 면, 숙명적이고 체념적인것, 수치심, 자포자기만 발견하고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당연시하 게 여기는 부정적력사인식의 뿌리깊은 원인이 되였던것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정치, 종교, 풍속, 학술 등 각 방면에서 사대주의 노예성이 우심화되였다. 단재 신채호는 일제어용학자들과 정반대의 립장에서 유교사상을 곧 사 대주의사상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립하는 랑가사상(郎家思想)을 독립사상으로 인식 했다. 신채호의 사대주의인식은 민족사상과 외래사상을 대비시켜 민족의 주체성을 확 립하고 민족운동의 근거로 하고자 하였다. 단재는 민족의 흥망성쇠는 민족의 사상이 어디를 지향하느냐에 달렸다고 역설하였다. 그런 긍정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관념 적이여서 민족내부의 사회에 대한 리해가 결여된 한계를 보였다. 중국에서의 해석은 사대주의란 (조선어)단어라는 전제를 달고 일종 유교적외교 리념과 정책이라고 한다. 특히 리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지칭되는 정변으로 강대한 고려왕실을 찬탈하고 중국 명조의 윤허하에 국호를“조선”이라 지칭한후1392년부터 1895년까지 명조와 청조에 신하로 자칭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적극적으로 모방, 답습 하는 정책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기실 사대(事大)란 단어는 《맹자.량혜왕》하편에 “以小事大”에 나온것으로서 후에 중국이 분렬된 시기 (5대10국시기)에 약소국가(남당, 오월)가 비교적 강대한 나라 (후주, 북송)에 대한 외교문서에 늘 나타났다. 후에 조선에 인입되였는데 리조시기에 대화(对华)정책의 대명사로 되여졌다. 하여 근대리조에서 문호를 개방한후 청왕조에 충성하자고 주장한 관료집단을 일컬어 “사대당(事大党)”이라 칭하였고 리조가 청조에 올리는 문서중에 경상적으로 “사대”란 단어가 쓰이였다. 그먼저 사대주의가 가장 일찍 운용된것은《주례. 하관. 사마(周礼,夏官,司马)》에 서였는데 “比小事大,以和邦国”라는 말이 있었다. 리조의 세종때 최만리 등은 상주할 때“我朝自祖宗以来,至诚事大,一遵华制”라고 하면서 대가리를 조아렸다. 1896년에 와 서야 리조는 청조의 소위 “天使”를 영접하는 “영은문(迎恩门)”을 빠리의 개선문식의 “독립문”으로 고쳐짓고 청조의 예속에서 벗어난것을 경축하였다. 그때로부터 조선반 도는 정식으로 굴욕적인 “사대주의”와 결렬하기 시작하였다고 볼수 있다. 당대의 부분적 한국학자들은 사대주의가 리씨왕조의 말기, 조선근대화를 방애한 원인의 하나라고 말하고있다. 조선에서는 사대주의가 비판받았으며 력사교과서에서는 “리조가 시행한 사대투항주의”라고 락인찍었다. 하여 일체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자주 독립의 사상을 내세웠다. 하여 징글맞은 “친미사대주의”라는 말도 나오게 되였다. 현실은 리론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사대주의가 일관된 국책으로서 굳어져있다. 미국이 현세계의 최강이라고 확신하고 맹종하기때문일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은 패권국이지만 미래세계가 어떻게 개편될지 아무도 알수가 없는 현재 시점에서 한우물만 파려는 사대주의자들은 가련한 존재들이다. 언녕 장례지내야 할 봉건사대주의가 당대의 배달민족속에 뿌리깊다는것은 민족적비애가 아닐수 없다. 리승만을 위수로 친미사대주의 정권은 한사코 미국과 서방중심외교에 목매달았다. 이는 한국 대부분 지성인들이 바라는바가 아닐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그래 도 다변하는 국제형세에 초점을 맞추고 화해협력적인 자주외교를 실행했지만 새 집권 자의 손에서 요절하였다. 사대매국세력들은 급공근리 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마비된 것이다. 그냥 코꿰여 다니면서도 떡고물 좀 던져주면 “아이구, 우리 미국할배님” 이 라며 맹종에 굴종을 자랑처럼 내세우면서 거센체 한다.    수백만 조선백성을 학살하고 노예로 혹사하고 대포밥으로 몰고갔고 성노예로 끌고 다닌 불구대천의 일본군국주의 숙적들과도 팔을 겯고 동족상잔의 칼을 벼리는것은 김춘추, 김유신같은 용자들의 행세로서 바로 현대사대주의자들의 기량이다. 뱀을 품 어주었다가 해를 당한 어리석은 농부의 그것과도 차원이 다른 얘기이다.     조선전쟁당시 수백명의 백성들을 노근리 쌍굴다리밑에서 학살하고 곡계굴과 산성 리마을 등 태백산맥을 따라 강원도와 경상도의 마을이란 마을은 죄다 불사르고 움직 이는 모든 생명들을 네팜탄, 캘리버50 기관총, 로켓탄으로 무차별하게 학살한 자들 이 미국놈들이다, 그것도 모자라 세균무기를 반도의 곳곳에 뿌려 지금까지 전염병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핵폭탄을 투하하는 훈련까지 진행하는 아메리카이리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굽실거리고 있는 자들이 가증스러운 친미사대세력들이다.     늑대와 승냥이들과 손잡고 동족을 소멸할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자들이 조선반도 에 사대주의자들이다. 일본이 그냥 독도침탈을 공공연히 고아대는데도 기껏 한다는 말이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유감”이다. 유감이란 못마땅하고 섭섭한 마음이다. 제 살점을 베여내는데도 “섭섭”한 마음에 사무쳐 동맹까지 맺고 동족에게는 기세흉흉한 아큐보다 못한 판단력소유자들이 21세기사대주의자들이다. 승냥이 입에 물려가는 가축과 별반 차이없다. 민족의 자주성에서는 동물의 자주독립성보다 못하기때문이다.    단군족의 자주의 기상은 구중천에 날려보내고 동포를 잡지못해 으르렁거린다. 당 조에 대한 사대주의로 치욕의 력사를 기록한 신라의 전철을 밟고있다. 얼빠진 “학자” 나부랭이들은 조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현재의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다고, 근대문명을 일본이 조선에 들여왔기때문이라는 백주의 잠꼬대는 현재도 합병상태에서 노예로 살기를 원한다는 등심뼈가 없는 썩어문드러진 사대주의자들의 발상이다.     이런 의식은 주인의 강건함과 안정이 바로 나의 만복이라는 노예근성과 일치한다. 주인과 노예라는 예속하에서 주인의 뜻이 곧 나의 뜻이라며 자주성이라곤 찾아볼수 없는 추태이다. 이 시점에서 사대주의=노예근성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피는 물보다 진한데 민족성은 리념보다 약한가? 그래도 단군족이라는 처지에서 민족성을 좀 생각 하면서 살자. 령혼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산송장일뿐, 그래서 장송곡이 울리고있다.   2013년 2월25일
179    사랑의 미학 댓글:  조회:8112  추천:2  2013-03-08
                                    사랑의 미학                                       진언ㅡ 최 균 선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성씨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건만 사람들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라는 아름다운 말로 개괄한다. 사랑이 예술의 주제로 되는것은 생명발로의 아름다운 형태인 예술에 앞서 인생의 영원한 주제로 되였기때문이리라.     사랑을 딱히 이름지을수는 없으되 사랑과 인생을 동의어라고 말할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비밀은 인생의 비밀이 되는것이요 인생길에서 엮은 사랑의 편장은 곧 그의 인생의 편장이 되는것이다. 젊은 시절엔 무지개같은 꿈을 주고 늙어서는 인생의 저문 언덕에 추억으로 되새겨지는 사랑에 대한 자성은 자기 인생에 대한 자성이 된다.     녀인들에 대한 남자들의 인식은 심각할수 있으나 녀자에게 취하는 행동은 영원히 천박할수밖에 없다. 로신선생은 중국의 남자들은 모두 성인이 될수 있었는데 녀자들이 망쳐놓았다고 하였지만 기실 이 세상의 모든 녀자들은 원래 괜찮다고 할수 있다. 문제는 어떤 남자를 파견하여 그 녀자를 정복하는가에 달렸다.      녀자들은 몽롱시, 가장 난해한 몽롱시라고도 한다. 기실 녀자는 한권의 책이다. 난해하기도 하고 통속적이기도 하다. 녀자라는 이 아름다운 책을 남자는 시종 서투르게 해석하여 왔고 지금도 그렇다. 항간에서 흔히 남녀사이에 전기가 통하니 안통하니 하는 말이 있는데 확실히 사랑은 음전기, 양전기두극의 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조작에 근신하여 전기에 붙거나 선이 끊기지 않게 해야 한다.      대저 사랑의 감정은 호감으로부터 발효하기에 그것을 단술로 빚는가 고배로 빚는가는 자신에게 달린일이다. 사랑은 한차례 남몰래 한 비밀투고인데 사랑책에 녀편집의 편집방향과 의도를 잘 알아낸후 투고하되 알맞게 서정을 토로하면서 중점을 또렷하게 내세워야 한다. 아니면 퇴고당하기 십상인바 재투고의 성공률은 낮다       모종 경우 애정행위는 한차례 모험적인 투자로서 크게《벌수》도 있고 본전도 찾지 못할수 있다. 감상주의적으로 표현한다면 사랑은 아름다운 이중주로서 조화로워야 감동적인 악장을 연주할수 있다. 아니면 주선률이 외곡되고 소음으로 될것이다. 인생을 려로라면 사랑도 인생행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선으로 되여 당신을 떠나기 아쉽게 할도 있고 역증나고 피로해져서 영영 떠나게 할수도 있다. 처음 사랑의 꽃마차를 달릴때 거리보존법칙과 급정거경우를 념두에 두고 초속으로 달리지 말아야 한다. 우정선과 애정선을 잘 분별하면서 전후좌우를 잘 살피며 제때에 정지, 통과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사랑을 아름다운 선률에 비유할 때 풋사랑은 경음악, 열렬한 사랑은 재즈곡이고 결혼은 통속음악인데 리혼이 류행곡이 된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면 비상한 사랑이 되고 사랑에서 사랑을 덜면 사랑의 기점이 되며 사랑에 사랑을 곱하면 무한한 사랑이 되며 사랑에 사랑을 나누면 유일한 사랑이 된다.        정이 고기와 물처럼 되는것은 모든 부부들의 최고의 추구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쉽게 하나의 잘못을 범하고있다. 바로 자기는 늘 물이고 대방은 고기라고 생각하는것이다. 사랑은 모호성과 림기응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공식이 없지만도 기술은 수요된다. 사랑을 얻기전의 기다림은 곧 사랑의 대명사이고 사랑을 얻은후의 연분이 곧 결론이다. 확실히 그대앞에 서있고 또 그대가 심장이 뛰는 리유를 말할수 없을 때 곧 사랑의 꽃대문이 열리는 때이므로 나름껏 사랑을 하라. 그러나 신근한 육종가의 자태로 사랑의 꽃나무를 가꾸어가시라.     사랑을 한권의 책이라 한다. 랑만으로 넘친 활발한 애정은 재미있는 련환화이고 장중하고 자중하는 애정은 두터운 정장본이며 파란곡절속에서 동고동락한 사랑은 심혈로 쓴 초사본이지만 글줄 곳곳에서 옥처럼 밝은 빛이 반짝인다. 헤여졌다가 다시 맺은 사랑은 수정보충한 재판본이고 생사불변의 애정은 절판서이며 총서처럼 엮어진 애정은 틀림없이 “도판서”이다.     사랑책은 한생을 진실된 심장으로 엮는 소중한 인생편장으로서 아무도 대신해 쓸수 없다. 정장본이든 초사본이든 그리고 수정재판 본이든 옹근 인격이 인생의 화랑에 전시되는것으로서 련습이 없이 쓰는 초고이자 완성고가 되기에 실패작이 많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미완성작으로 남기마련이다.     젊은이들의 사랑책은 랑만파의 시집으로서 작열하는 격정으로 충만되여있으며 아름다운 상상과 우아한 묘사, 능란한 수사법으로 차있다. 중년의 사랑은 한부의 황당파의 희극으로서 극속에 인물관계는 애매하며 복잡한 모순충돌은 언제나 당사자도 망연자실과 곤혹에 빠지게 한다. 로년인의 애정은 한부의 담담하고 평온한 산문집으로서 가을하늘처럼 맑고 쓸쓸하고 고요하다. 때때로 멀고 분방한 회포가 쪼각구름 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사랑책은 알뜰하게 간직하고 애호할 필요가 있는 소중한 책이기에 읽을 때이든 아니 읽을 때이든 아름다운 뚜껑을 씌워두어야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둔 사랑은 망망대해속에 빙산과 같고 창망한 하늘에 비를 머금은 비구름과 같으며 깊은 산속에 묻힌 백만년전 광맥과 같고 깊은 우물속에 고요한 물과 같기도 하다. 이런 말없이 집착하는 사랑은 소홀히 번질수 없는 밀서와 같아서 평생 유일한 해독자를 기다려야 한다. 애정학에는 스승이 따로 없이 죽을때까지 자습해야 하게 “3호학생”이 많지 않다. 인생이 미완성작이듯이 애정서도 미완성작이다.                               2007년 8월 10일   ㅡ    2013년 연변일보 3월 8일 
178    문학예술의 몽롱미 댓글:  조회:8424  추천:0  2013-03-05
                                  문학예술의 몽롱미                                              최 균 선   1. 몽롱미리론의 기원   소위 몽롱이란 사물이 모호하여 똑똑하지 않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여 사이 비하고 이렇기도 한것같고 저렇기도 한것같은 현상 즉 명료성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몽롱성은 미감을 순수화하고 풍부하게 하며 인차 사라지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 몽롱미란 곧 형상의 모호, 개념의 불확정성, 터득할수는 있으나 말로 전달하기 는 어려운 몽롱하고 함축된 미를 지칭한다. 몽롱미는 보일듯 말듯하고 그 뜻을 밝히기 어려운 미로서 모호미라 지칭하는 미감의 일종이다. 옛글에 “말우에서 용사를 가려내고 달아래에서 미인을 본다.”고 하였다. 미는 일정한 거리감에서도 오지만 몽롱성에서도 온다. 장강 3협의 선녀봉은 일년내내 구름에 덮혀 험준한 절경이 태반이나 가리워진다. 그리하여 “선경절반, 인간세상 절반” 이라는 경구가 나왔다. 일정한 조건하에서 몽롱미는 완전히 로출된것보다 더욱 매력이 있을수 있다. 만약 구름이 걷힌 날 가까이서 본다면 “신선세계”의 절반은 사라지고 들쑹날쑹한 면면한 산봉에 기암괴석만이 보일것이다. 구름속에 달, 교교한 월색, 운무속에 황산, 자오록한 비발속에 잠긴 계림의 산수, 동정호의 묘망한 돛배그림자…등등은 다 몽롱 미의 극치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몽롱성은 일부 모종 사물의 허물을 덮어감추고 일종의 특이한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활짝 드러낸 상태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적인 미적향수를 느낄수 없을것이다. 마치 확대경속에는 비단결처럼 보드랍고 아름다운 피부가 없는것과 같은 도리이다. 이와같이 몽롱성은 모종 사물의 진면모를 투철하게 꿰뚫어볼수 없게 함으로써 심미심리에 미지의 공간을 남겨 그냥 흥미를 보유하게 한다. 몽롱은 선명함에 상대되는 개념이지만 대천세계에 허다한 객관사물 지간의 계선 은 몽롱하고 모호하다. 달빛도 몽롱하고 안개도 몽롱하고 산도 몽롱하고 물도 몽롱 하고…안개속에 다소곳한 꽃을 흔상할 때, 물속에서 비낀 달에 홀릴 때, 눈앞에 아물 아물하는 아지랑이 등은 몽롱한 느낌을 준다. 몽롱미는 자연경물중에 고유한 일종의 풍경선이 아닐수 없다 사람들의 전통관념과 관습속에는 몽롱성이 나쁜의미로 락인찍혀있는데 이는 심미 표준의 시대적변천과정에서 생긴 심미심리장애라고 할수 있다. 기실 문학작품에서의 모호이미지, 회화에서 몰롱성 등은 다 미적표상이다. 몽롱미는 일종 미일뿐만아니라 일종 예술풍격미이기도 하다. 몽롱미의 특징은 몽롱하고 모호하며 함축된 형식으로 다의성내용을 표현하여 흔상자로 하여금 알아맞추고 상상해 보고 곰곰이 음미해야 비로소 심미향수를 만끽 하게 하는것이다. 자기의 시로써 세상과 대화는 하려하면서도 열독을 방애하는 회삽 (晦涩)이야말로 병태이며 내용상의 빈혈이다. 미국계통론학자 쟈드는 20세기 60년대 사물의 모호성문제를 제기하여 과학 리론으로 연구되였다. 1975년 모호학은 하나의 학과로 세계적범위에서 중시받았다. 20세기 80년대 중국의 첫전문서인《모호학인론》나왔고 70년대 몽롱시에 대한 대 론쟁을 거친후 문예계에서 모호리론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기에 모호이미지와 몽롱한 미적표상은 더는 생소하지 않게 되었다. 칸트는 “모호개념은 선명한 개념보다 더 표현력이 있다. 미란 응당 말로 전달 할수 없는것이 되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들이 생각하는것을 언어로 충분 히 표현할수 없다.”고 쓰고있다. 현대 중외의 작가들이 창작에서 모호성, 추상성을 추구하는것은 몽롱미의 효과에 이르려는 시도이다. 예술작품속에 몽롱미는 내용속에 숨겨둔 모호성, 다의성, 추상성, 적라라하지 않은 함축된 내함으로 표현되며 비흥(比兴), 상징,은유, 말속에 말 등으로 체현된다. 사물의 모양과 색채와 소리가 융화되여 불확정적이고 일상을 초월하도록 변형시켜 직관과 상식적인 도리로는 리해하기 어려워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측하고 추단해야 그것의 진실한 함의와 내재미를 파악할수 있다.   2. 몽롱성의 미학공능   사람은 금방 접촉한 사물에서 미적향수의 수요가 왕성하지만 일차성적으로 완전 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접근성 미감”이 산생된다. 이때가 바로 미감수요가 가장 강렬할 때이다. “행위과학”의 시점에서 볼 때 인간행위의 발동기 라고 할수 있는 욕망(심리수요)이 일단 만족되면 곧 소실되고 새 욕망이 새 행위를 발동한다. 몽롱성의 미학공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적대상에 흥미도도하여 련련한 정을 보류하는 그 미감의 지속성, 접근성 미감에 있다. 몽롱미는 특정한 의경(意境)을 창조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며 탐구욕에 불을 지펴 알듯하면서도 묘망한 느낌속에 특수한 심미감수를 얻게 한다. 심미적대상에 대한 이런 고유한 심미심리 혹은 그런 기대심리를 예술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운용한다. 이를테면 “뜻은 명철하나 말은 에두른다.”는 수법으로 글에 함축미가 있게 여지를 남겨두거나 서정토로도 곧이 곧대로가 아니라 몽롱성속에 숨김으로써 예술미 를 창조한다. 몽롱미에서 펼쳐지는 경지는 깊은 사색을 불러일으키며 미적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문학예술창조활동에서도 창조적사유의 일종인 련상의 공간을 제공하는 몽롱성은 중요하다. 객관적사물의 몽롱성은 결코 희미한것이 아니고 알쏭 달쏭함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시창작에서 몽롱성원리를 리용하여 몽롱미를 창조하 더라도 흔상자들에게 파악불능이 되게 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새 시기 현대시의 영향을 받아 젊은 일대들이 몽롱성이 짙은 시들을 많이 창작 하였다. 례하면 “어두운 밤은 나에게 검은 눈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눈으로 광명을 찾았다.”, “광풍은 꿈속에 재부를 빼앗아갔지만/도리어 나에게 사고의 유산을 남겨주었다.” 등에서처럼 몽롱성을 리용하고 몽롱미를 창조한것은 흔상자들에게 끝까지 파악불능의 수수께끼를 내는것이 아니다. 물론 충만된 격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것이 아니라 한폭한폭의 구체적도화(图画)로써 시인의 사상감정을 은근히 암시하고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하는 새로운 시형식이 독자들앞에 돌연 나타났을 때 일반사람들의 흔상심리지각상 필연코 습관되지 않아 입에 잘 오르지 않는다거나 개운하지 않다거나 알수 없다거나 하면서 심지어 노해서 외면하기도 한다. 례하여 이런 시가 있다. 비둘기마저 성숙한 울음을 운다. 지나간 비바람 모질던 그 여름을. 이 시는 얼핏 보면 대자연속에 가을을 쓴것 같다. 그러나 다시금 음미해보면 “10년동란시기”의 그 “비바람 모질던 여름”을 읊고있고 오늘의 조국을 그려내고있다. 시는 리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작자는 직설적으로 자기 감정파동을 토로 하지 않고 시속에 한층의 상징적의미를 깔아놓고있는데 이 역시 미적창조의 새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다.   3. 몽롱미의 필수성   문예는 몽롱성을 수요하며 문예는 몽롱성을 떠날수 없다. 문예의 몽롱은 일종의 미를 현시한다. 그러나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고 색다른것을 표방하기 위한것이 아 니다. 문예작품은 인류생활정보의 일종 귀환으로서 작가들이 모호세계에서 취한 정보 와 소재가 또 인간의 관측할길 없는 “흑상(黑箱)”속에서 가공되므로 충분히 몽롱성을 띠게 된다. 작가가 가공해낸 작품은 몽롱세계에 대한 투시 혹은 굴절반사의 형상일뿐이다. 례하면 화면에 나타나는 장백산이나 계림산수는 비록 부분적모습만이라도 장백산은 장백산이고 계림산수는 계림산수이다. 한것은 량자는 부동한 개념으로서 장백산, 계림의 완정한 형식과 내용을 포괄하기때문이다. 허적인 각도에서 보아도 선명하다. 화면에 나타난것이 각자의 특징을 구별해주기때문이다. 다음 문학형상은 모두 모호개념 집합으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을진대 작가는 상상, 허구로 형상을 창조한다. 즉 실체적대상을 떠난 정황하에서 원래 저축하였던 흩어지고 모호한 인상으로 개조하여 다시 결구를 짜는바 모호수거의 결합체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자연물에 대한 형상묘사는 더구나 모호언어를 위주로 한다. 미국의 현대    시인 로닐의 시 ≪조우≫를 보자.   단풍잎에 이슬은 붉게붉게 빛나는데 련꽃잎에 이슬은 눈물처럼 투명하네.   이 시에서 단풍잎, 이슬, 련꽃잎, 눈물방울은 모두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딱히 알수 없다. 황차 세상에 똑같은 사물이란 없음에랴, 사물의 상대론각도에서 볼 때 모 인물, 모사물도 순간마다 그것일수도 있고 또 그것이 아닐수도 있다. 모두어 말해서 사물의 무궁한 변화, 형상의 천차만별로 하여 종잡을수 없기에 사물의 특수성과 몽롱성이 충만되여있게 된다. 문예는 오직 사물의 이런 특수성과 몽롱성을 형상적 으로 드러낼 때에야만이 풍부하고 다채롭고 정취가 그윽한 매력과 미감을 선물할수 있다. 무형속에 형상이 현연되여야 볼 때는 없는듯하지만 사색속에서는 실재를 느낀 다. 이것은 전통적예술추구로서 일종 몽롱미에 대한 야릇하고 불가항력적인 추구 이다. 표현방면에서 본다면 시가, 소설, 산문에서의 생략 혹은 비약이며 회화에서의 공백이고 영사막, 무대에서의 공간 모두가 기실 일종의 몽롱미이다. 례하면 영화 ≪붉은수수≫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나의 할머니”가 만나는 장면에서 우리앞에 펼쳐진것은 설레이는 일망무제한 붉은수수밭이다. 그들은 인적기가 없고 장려한 대자연속에서 하늘을 이불로 삼고 대지를 침상으로 삼고 그렇게 미칠듯이 야하게 그러면서도 순결하고 자연스럽게 정욕을 불태운다. 그 광활한 대자연은 “실재적”인 붉은수수밭이 아니라 “허적인 예술공간”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로이 나래칠수 있는 황야이고 정감의 심연이며 사랑의 바다의 상징이다. 거기서 자유의 불길, 사랑의 불길, 생명의 불길이 활활 타번진것이다. 정직 하고 강인하며 랑만적이고 호현한가하면 온순하고 순박한 다종기질의 사나이가 거기서 원시적인간성이 빛을 발산한다. 바로 그 붉은수수가 우매무지하던 시대의 인간성복귀의 상징이다. “한뙈기 붉은수수는 한사발의 붉은수수술을 고아낼수 있고 또 붉은 선혈로 변 하여 나중엔 붉게 타오르는 민족정신으로 승화하였다.”고 상상해보라. 넓고 거칠고 야한 록색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얼마나 모호하고 몽롱한가? 립체감도 있고 류동감도 있어 실로 끝이 보이지 않고 사색이 끝없는 공령(空灵)의 경지에 이르게 할수 있다. “사람은 아름답기에 사랑스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기에 아름다운것이다.”(레브 똘쓰또이) 이 명제에 근거하여 우리는 문예의 몽롱미를 련인의 눈속의 “서시”에 비유할수 있다. 서시가 그토록 아름다운것은 “서시”를 심미적눈길로 바라보고 “서시”를 죽도록 사랑하고 추구하는 련인의 모호하고 몽롱한 심령즉 아름다운 기대심리에 도취되여있끼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얼마의 련인이 있으면 얼마의 “서시”가 있게 된다. 문예의 몽롱미는 이처럼 현묘하고 알쏭달쏭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사람이 몽롱하면 사실도 몽롱해 지고 몽롱한 붓끝아래 대중도 따르기 어렵게 된다.     시 ≪가자!≫(북도)를 음미해 보자.   가자!락엽은 골짜기에 날려들고 노래는 오히려 갈곳이 없다. 가자!얼음위에 달빛이 강바닥에 넘쳐흐른다. 가자!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눈은 한곳 하늘을 보라. 마음은 황혼빛 북을 친다. 가자! 우리는 기억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자. 가자!길이여, 길이여, 붉은 양귀비 흩날린다.   ≪가자≫는 인생도로의 험난함이 주제로 된 서정시이다. 시에는 감상적인 기분이 짙게 흐른다. 그러나 “생명의 호수”를 찾는것은 잊지 않고있다. 인생의 가을에 “갈곳이 없고” 황혼빛 창망한데 일체 희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여버려 마음속에서 북소리 울린다. 현실속에 인생의 길, 갈래갈래에 붉은 마취제인 아편꽃 흩날린다. 어디가서 생명의 호수를 찾는단말인가?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안된다. 가자! 가자! 가자! 한걸음 한걸음 가는데까지다. 이것이 북도의 마음의 절규이다. ≪가자≫는 얼핏 보고는 알둥말둥하다. 마치 지옥에 오래 갇혀있다가 도망쳐나온 도주범의 번뇌와 갈망이 숨겨져있는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한창 청춘시절을 잃어버린 처녀가 아무리해도 되찾을길 없는 그 아픈 마음 과 쓰라림을 호소하고있는듯도 하고 방불히 실총당하여 버림받은 적자가 다시 총애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만 이미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을 한탄하며 돌아와도 들어갈 문이없어 처절한 신음을 토해내는것같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을 쏟아지는 울분대로 직설하지 않고 시적대상물에 정감을 이입 시키는 수법으로 보일듯 말듯 정감의 베일속에 감추고 은근히 토로한다. 독자는 바로 그 숨겨진 심령심처의 구석구석에 더 호기심이 끌리고 보이지 않는 그 말을 더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곳을 엿보고 싶어하고 밟아보고 싶어진다. 시인은 이렇듯 수수께끼로가 아니라 몽롱미로 자기의 절절한 감수를 장식함으로써 시에 더 없는 매력을 싣고있다.   4. 몽롱의식의 영구성   인류가 생활하고있는 환경으로 말하면 어느 사람에게나 하나의 모호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인간의 정신령역과 정감세계는 오색잡다하고 변화무상하여 조종할 방법이 없는 미형컴퓨터나 열수 없고 또 내부상태를 직접관찰할수 없는“흑상(黑箱)”같다고 할수 있다. 객관세계와 주관세계 자체의 정지상태에서나 변화각도에서 보아도 완전히 다 알수 없고 다 꿰뚫어볼수 없는 몽롱성이 존재하므로 인식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몽롱의식이 산생된다. 인간의 현실에 대한 개조, 사람지간의 투쟁 및 사물자체의 발전변화는 사물을 시종 운동상태에 처하게 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인 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만약 인간이 정지적안광으로 변동속의 사물을 투시한다면 필연적으로 의혹과 모호의식이 산생된다. 이런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부단히 소실되고 부단히 산생된다. 그런데 이런 소실은 국부적이고 잠시적이다. 인간의 인식과 운동하는 세계사이에는 시공간적차이가 있기에 주관의식의 몽롱성은 불가피면적이다. 세계상의 어떠한 언어이든지 물질세계와 복잡다단한 심령세계의 기술하고 묘사 함에서 의도적인 다의성보류, 추상성, 편파성, 파생성 등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핍진하지 못한 표현의 곤혹을 철저히 극복할수는 없다. 예술언어도 주관의식을 표현 할 때 스스로 막무가내한 모호성과 몽롱성을 의식하게 된다. 이는 인류언어의 빈곤 증을 의미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문학리론》발취                             2012년 10기 《동방문학》  
177    소금련가 댓글:  조회:8185  추천:0  2013-03-01
                                     소금련가                                      진언ㅡ최 균 선      노을빛이 창파를 건너는 바다가에 서면 죽음과 소멸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는것만 같다. 실려오고 밀려가고 높뛰고 번지고 가라앉고 솟구치는 파도의 술렁임속에서 흰눈같이 하얗게 증발하는 소금물. 깊은 바다속 깊은 곳에서 그냥 돌고있다는 전설의 소금매돌이 갈아내는 소금을 련상해보게 된다.     토밥도 밥이요 손톱눈도 눈이라는 말장난처럼 황금도 금이요 소금도 금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옥출곤강(玉出昆岗)이요 금생려수 (金生丽水)라지만 인간의 생사존재에 이어지는 실용가치로는 소금이 황금보다 더귀중하다. 호마는 소금을 신성한 물질 이라 했고 플라톤은 신들이 소금을 특히 귀하게 여긴다고 말했다.소금이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있다.     어느 왕국에 세공주가 있었다.어느 날 왕은 세공주에게 자기가 무엇보다 더 소중한가 물었다. 맏공주는 아버지는 황금보다도 소중한 분이라했고 둘째공주는 아버지는 보석보다도 소중한 분이라고 하였다. 막내공주는 아버지는 소금보다도 더 소중한 분이시라고 여쭈었다. 왕은 화가나서 막내공주를 내쫓았다. 궁에서 쫓겨난 막내공주는 정처없이 걷다가 어느 오두막집에서 한 할머니와 만나게 되였다. 그 할머니는 공주에게 녀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성과 재간을 가르쳐주었다.     어느 날 궁중에 소금이 다 떨어져 싱거운 음식을 먹을수밖에 없은 왕은 식욕이 떨어졌고 마침내 몸져눕게 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막내공주는 할머니가 내주는 소금을 가지고 입궁했다. 왕은 다시 입맛을 찾고 병도 나았다. 더없이 기뻐난 왕은 막내공주에게 보좌를 물려주었다. 새 녀왕은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렇게 없지 못할 소금은 사람들은 한낱 조미료로 수요될 때에만 찾는다. 우리가 먹는 유일한 돌인 소금이 처음부터 인류의 문명을 형성해 왔다. 서아프리카의 금생산지에서는 황금 한무더기를 내놓으면 소금상인들은 소금 한무더기를 내놓았고 량편은 계약이 성립될 때까지 각자의 무더기를 조절하군했는데 소금을 하얀금이라고도 하였다. 소금의 력사는 인류의 력사에 눈부신 페지들을 적어왔다.     인간은 박절히 수요될때에만 잃어진것이 소중한것이였다는것을 절감하게 되고 소금은 바다를 떠난후에야 자기 가치를 알게 된다. 앤서니 드 멜로의《바다로 간 소금인형 (나는 지금 어디만큼 가고있는가)》라는 책에서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한 존재로, “자신을 찾기 위한 존재”로 등장하는데 바다에 뛰여들어 자신의 몸이 녹는것을 보고서야 비로소《아!! 이제 나는 무엇인지 알게 되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무모하게 뛰여든 존재라고 할수 있겠다. 또 다른 의미로 보면 무지의 존재로서 “바다”라고 하는 미지의 세계를 알고자하는 도전과 모험의 의미를 가질수도 있겠다.     어느 시인은 소금은 바다물이 아픔이 굳어진 상처라고 읊는다. 인간의 식탁위 그 모든 료리그릇에 흰눈처럼 소금이 떨어져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기에 이 세상 모든 료리들이 제맛을 낸다는것은 눈물젖은 생명의 유모아가 아닐수 없다. 소금이 바다의 상처이고 아픔이며 눈물이라는 발견은 단순히 바다물의 순환을 시사하는것이 아니다. 바다물의 딸인 소금이 지상에 남는다. 소금만이 승천하지 못하는것이다. 바다물에게 소금은 상처, 아픔, 눈물이 아닐수 없다. 바다가 된 “소금인형”에서 인형만이 증발하여 순환과 변전을 거듭하고 소금만 남은것이다.    조물주는 어찌하여 인간을 소금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동물로 만들었는지 모르나 소금이 자신을 녹여버리는 희생을 함으로써 인간의 입을 즐겁게 해준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수요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소금은 인간의 삶의 마당에서 여러가지 재주를 부린다. 어떤 때는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하고 치를 떨게도 하고……    소금의 기본적인 특성은 그저 짠것이지만 이 짠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여 그 본질적사명을 다하고있다. 그런데 인간은 소금과 함께 살고 소금을 먹고 살면서도 소금의 귀중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싱거운 사람들로 가득찼다 조물주는 인간더러 소금과 함께 살도록 명하셨다 그래서 성서를 통하여 “너희속에 소금을 두라” 고 명하셨단다     인간의 생존경쟁과 생존투쟁이 치렬한 현실에서 요구되는것은 무엇보다 맛의 대결이다. 소금이 없으면 이 맛을 낼수  없다. 현대의 만연된 악행도 저마다 소금에 절어지지 못한데서 곧 썩기시작하는 현상인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진정 소금이 있어서 부화되지 않도록 절어들고 저마다의 삶에 걸맞는 좋은 맛을 낸다면 이 사회는 화목하고 밝을것이며 조화의 분위기 아지랑이처럼 피여오를것이다     노을이 흐르는 바다가에 서면 희생과 자멸을 견뎌내는 법을 터득할것같다. 특히 염전에 가둬지고 증발하고 갈아앉고 굳어지고 실려가는 소금의 탄생과정에서 하얗게 덮힌 흰눈같이, 아니, 깊은 바다의 령혼같이, 온갖 사랑이 밀려왔다 밀려간 소금같이 나는 누구엔가 필수적인 소금만치나 값을 낼수 있는지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다.     파도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바다물을 바라보면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깨달음이 깨달음을 마중한다. 생각은 인생의 소금이라는 카드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할것이다. 육체적게으름이 만성자살이라면 생각의 게으름이야말로 처절한 자살행위이다. 생각없는 사람은 먹은 나이가 곧 생각인줄로 알것이다.     선각자란 나이보다 앞질러 달리는 생각으로 세상을 탐사하는 사람이다. 파도는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 과연 자신의 형태에 만족할가? 방울방울 부서져도 온몸으로 바다의 깊이에 참여하며 다시 바다와 하나로 될 때 물방울이 바로 바다이고 바다가 바로 수많은 물방울들의 응집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왜지밭으로 간것일가…?                                                                 2008년 7 월 22 일  (황도에서)                                          2013년 2월 24일 연변일보
176    잡기 A,B,C 댓글:  조회:8377  추천:1  2013-02-27
                                         잡기 A,B,C                                 D. 현대판 아Q정신승리법        알다싶이“아Q”는 달갑게 굴종하고 스스로를 기편하고 자기를 가볍게 보며 자비하고 자조(自嘲)하며 마음속으로 삭이고 약한자는 릉멸하고 강한자앞에서는 썰썰 기면서도 과대망상, 자아도취에 잘 빠졌다. 바꾸어 말한다면 실패와 굴욕앞에서 현실 을 감히 정시하지 못하며 가설적인 승리감으로 정신상에서 자아를 위안하고 자아마취를 하거나 혹은 곧 망각해버리는것이다. 일컬어 격세유전의 “아Q 정신”이다.     로신선생은 이런 “아Q 정신승리법” 의 종종의 표현을 가지고 “중국사람들의 령혼”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병태가 어떻게 국민정신을 마비시키는가 하는 문제를 적라라하게 질타하였다. 아Q 의 비극성은 바지한벌밖에 없다거나 토지묘에서 자는 등 물질생활에서 온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비틀어져 누구나 다 기시해도 본성으로 굳어진듯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비된 령혼이라는데 있다.     아Q처럼 불의에 직접 대항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나약한 국민성은 과거 중국인들의 특허만은 아니다. 수치의 력사를 거듭 쓴 리조통치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늘 얻어터지고 수많은 동족녀인들이 포로로 끌려갔건만 승리자들을 그냥 왜놈, 오랑캐로 호칭하면서 얕잡아보고 경멸하였다. 총한방 쏘지도 못하고 일본에 먹히워 망국노로 전락하고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자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사유로는 자성과 비판이 나올리가 없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리왕조의 문패를 내려야 했다. 그러나 부패무능한 리조왕실과 사대부들은 비록 힘이 없어 패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지지않았다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야말로 종로애서 뺨맞고 한강서 눈을 흘기는격으로 돌아서서는 공연히 이른바의 량반기침을 해댔으니 얼마나 가소롭고 가증한 일인가.     일찍 극심한 피해를 입은 임진왜란에서조차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 리조의 사대부계층이 임진왜란이후 뼈저린 반성을 하였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국난과 국치를 중복하지는 않았을것이다. 이미 당한 참패사를 원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성찰이 수반된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 대한 랭정한 승인과 비판에 대한 수용, 그리고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알지 못하는 민족은 의연히 희망이 없는 민족으로 타민족의 기시와 침탈을 기다리게 될것이다.     진리에는 국계가 없다더니 “아Q 정신승리법”이 대양건너 월가에도 정착한듯싶다. 이를테면 “특정국”이라해서 속으로는 뻔하면서 아는 주정을 하듯 무조건 아니라면서도 비리한 호들갑을 떠는데 그 적의가 타민족이니까 당연하겠지만 동족으로서 한술 더 뜨며 무작정 눈을 딱감고 부인하거나 축소하고 내리깎는 상투수법으로 두려움을 보듬으려는 그런 자기위안은 현대판 아Q 정신승리법이라 해야 할것이다.     기실 누구나 절대적인 강자가 아닌이상 다다소소 아Q정신인소가 고유하며 그의 정신승리법을 나름대로 리용하고있다. 약육강식, 우승렬패의 정글법칙이 적용되는 인간사회에서 아Q정신은 버들의 속성이라고 하면 더욱 자아위안이 되는건가? “네가 내눈에서 눈물을 보아내지 못하는것은 내가 물속에 있기때문이다.”라고 한 고기의 말과는 별개로 그 억지가 짐작되여 더구나 개탄스럽다.    피해의식에서 오는 아Q의 막무가내한 정신자위와 과대망상, 얻어맞고도 상대방을 경멸하고 얕잡아봄으로써 정신적으로는 승리했다는 허위의식에 빠지는 처세술은 눈물겨운것이요 아무리 인격장애자라 하여도 그런 정신이 령혼에 슴배여 생존의 의거로 된다는것은 자타를 비롯하여 인류 모두의 근원적인 비애가 아닐수 없다.                                        E.  실언, 망언, 망발       어학사전의 해석에서 실언이란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실수로 잘못 말함. 또는 그 말이고 한어에서는 실언 (失言,失辞,失口 ) 으로 표기한다. 일본어는 한자의 변종이니까 발음은 왕청이여도 역시 실언 (失言) 이다. 세가지 언어부호라로 표기되지만 엎어놓으나 뒤집어놓으나 그 뜻은 한가지로 귀결된다.     망언 (妄言) 은 리치에 맞지 않고 허황하고 거짓된 말로서 일어에서는 (妄言, 暴言)이다. 한어에서는 미친소리(疯话)로 표현되고있다. 망발(妄發)은 망령이나 실수따위로 분별없는 말이나 행동을 함, 자신이나 조상에게 욕되는 말, 행동함을 이르는 말로서 한어에 (胡说)에 해당하며 일어에서는 (妄發, 妄言, 暴言ㅡ でまかせ)이다.     사람은 누구나 크게 세가지 말을 한다. 첫째는 공중앞에서 하는 말이요 둘째로 사담(私谈)이요, 셋째로 마음속에 말인데 이런 말에 어떤것은 관속에 들어갈때까지도 배속에 넣고 토해내지 않을수도 있다. 말이란 존재의 집이요 사상의 옷이지만 같은 입에서도 때론 실언이 되고 때론 망언이 되며 때로는 망발이 되기도 한다. 말하노라면 무의식간에 실언이 나가기 십상이지만 작정하고 하는 말이 어불성설이면 망언이 되고 청자를 무시하고 되는대로 지껄이면 곧 망발이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는 사상표현문제이고 어떻게 말하는가는 화술문제로서 설득력을 전제로 삼으며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는 자기 언행에 분촌을 가리는 처세술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현자는 생각해 본다음 말하거나 말하지 않기도 하며 말한다음 성찰하기도 한다. 우자는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말할라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말한다음 후회하고는 금방 또 망언을 쏟아낸다. 망언, 망발을 밥먹듯 일삼는자는 구제불능이다.     말은 말이로되 화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했느냐가 중요하기보다 누가 말했는가가 더 중요하기도 하다. 명인이 말하면 마디마디 명언, 명구가 되고 왕이 말하면 어명이 되고 무릇 지도자가 말하면 모두 강화(讲话)가 되고 한마디가 천만마디를 담당한 다던 황당시대의 절대권위의 말은 마디마다 “최고지시”가 되고 경축하기도 하였다.    초민백성들이 식후한담하다가 실언이 나가면 말에 반찬쯤으로 여기면 되는데 리치에 맞지 않고 거짓을 꾸며서 말할 심산인 망언은 대화의 분위기를 흐리고 소통에 장애를 설치하게 되며 망발은 흔히 악의적이여서 대방을 속상하게 한다. 속담에 말이 아니면 듣지 말라하였더라만 들으라고 벌쭉하게 내붙인 귀에 걸리느니 망언, 망발이라 말하는 자는 죄없고 듣는자는 삼가하라해도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발목을 접질렀다면 실족이라 하여 발목에 국한되지만 실언은 화를 불러올수도 있다. 한 나라의 정상으로서 막판이라고 그랬는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와 같은 말을 내뱉아 분장했던 그 속창을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그리하여 앞에서 한 수 많은 말들은 실언이 아닌 망언이 되고 망발이 된다.     하긴 장마다 망둥이 나오랴, 위정자라해서 마디마디 금언이 나올수는 없으되 비유컨대 장부일언중천금이라면 일국 정상으로서는 더구나 일언중만금쯤은 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농촌에서는 망발이란 말보다 허겁뜬 소리라는 말을 잘썼는데 한어에 “疯话”에 더 접근될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대방만 듣는것이 아니다. 나도 듣고있다. 보통백성도 말하고 싶은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는 말은 꼭 사상과 같아야 한다. 도덕적장애인의 병태적우월감에서 나오는 헛소리로 허위적만족을 취하는 심리는 아큐의 특허이다. 생각은 머리속에 있고 말은 입속에 있다. 입을 닫히면 생각이 절로 뛰여나오는 법이 없다. 이리하면 실언을 적게 하게 되고 적어도 망발을 삼가하게 될것이다.                                                           F. 역지사지 (易地思之)를…       자기중심주의시대, 자사자리관념이 골수에 사무친 자들은 역지사지의 상식적인 대인관계를 집어던지고 곧잘 독선주의자로 된다. 세계의 제반현상이 전반적으로 호상의존하는 인과관계로 형성되여있다. 칸트나 흄, 마하같은 관념론자들은 사물의 인과 관계를 무슨 선천적범주로 보면서 다만 관습의 결과, 감각 및 지각의 관습적련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유심론과 유물론의 대결에서 승부가 나지 않고있지만 변증법적유물론이 머리에 깊이 박힌 우리는 시종 사물들속에 내재한 인과관계의 호상제약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는 호상작용가운데 있으므로 원인이 곧 결과를 낳는것이다. 그 결과는 수동적이 아니라 원인에 반작용한다. 이는 압박이 있는 곳에 반항이 있다는 전통적인 “투쟁진리”와 부합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수 없는 연약한 동물이다. 별로 심오하게 말할것없이 순박해 빠졌던 어린시절 아이들의 관계에서도 이 점을 설명할수 있다. 세상엔 홀로의 똑똑이가 없다. 독불장군이라 하던가? 원래 어리숙하지 않았는데 여럿이 작정하고 “외목”내면 그 아이는 볼장을 다본다.     헤헤…하고 웃으면 바보스럽게 웃는다고 놀리고 뚜벅뚜벅 걸으면 소같다고 하고 나무에랑 잘 바라오르면 잰내비를 닮았다고 생트집걸고 뚝심이나 쓰면 딱곰같이 힘만 세면 왕질할것이냐며 시까스르고 숨은 밸이 터질라치면 똥밸은 더럽게 살아있다 하고 잘 순종하지 않으면 똥고집부린다고 모두매를 안기고 앙심을 품지않고 허허 웃으며 그냥 어울리려 하면 밸때기도 없는 무골충이라 하고 시키는대로 하면 등뼈가 없는 새끼라고 없신보고…아무튼 그렇게 몰아주면 아닌머저리도 머저리처럼 보이고 오래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막 몰고가면 그 자신도 스스로를 착각하게 할수 있다.      그래서 정말 “멕줄거리”가 되였지만 아이는 열두번 변한다고 하더니 그가 훌쩍 커서 천성의 잠력이 발휘되여 정신적, 육체적으로 하도 드세게 나오니 미꾸라지가 용을 쓴다고 뒤에서 비웃으면서도 십분 두려워하는 상대가 되였다. 이렇듯 한 사람을 잡자고 작정하면 아무리 강단이 있어도 기죽을수 있다. 시비도리가 없이 감각에 따라 놀던 애들의 작태가 오늘 국제유희에서도 역설적으로 보이고있다.     항간에는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올리막이 있다는 말로 변화속에 래일을 기대하고 굳세게 살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맞다, 이 세상에 절대의 진리가 있다면 모든것이 변한다는것이다. 잘 살다가 일조에 못살게 될수 있고 못살던 사람이 흥보처럼 잘살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농촌에서도 흔히 보는 현상이였다.     개구리 올챙이때 생각을 못한다는 속담의 뜻을 잊은 사람이 있다면 기억력문제가 아니라 천박함이다. 우리도 몇십년전에는 째지게 가난하였고 허리띠구멍을 자꾸 안으로 들이뚫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 배부르게 먹고 좀 번듯하게 입고다니니 지지리 고생만 파먹던 수난사는 옛말처럼 뒤넘기고 기고만장하며 남을 두고 손짓발짓한다면 어리광대이다. 마차를 타니 금시 소수레앉아서도 좋다고 짝짝꿍을 치던것을 잊는격이랄가,     사물, 사회발전에는 원인으로서의 기점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원인이 낳은 결과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를 볼줄밖에 모른다. 이런것을 사유의 불완정성이라 하면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만 식자가 좀있으면 다 아는 역지사 지를 한번쯤 떠올려보면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가를 알게 될것이다.     례를 들어 한 깡패가 나부랭이들까지 휘동해서 손발을 잡아매고 목까지 조르는데 숨을 크게 쉴수 있으며 생존을 활개칠수 있을가? 나갈듯싶으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돌아서면 뒤에서 잡아당기고…그저 힝힝 거릴줄 아는 “능력”자들이 한번 위치를 바꿔놓고 생각해보라, 잠간만이라도, 그만 면괴해지고 그보다 더 처참하게 될수도 있음을 알게되고 실어증이 생길것이다.     대저, 크든 사소한것이든 문제를 인식하고 대방을 리해하는데 지름길은 한갈래ㅡ 역지사지뿐이다. 그러면 아무리 몰리해하고 몰각한 사람이라도 쉬이 깨득이 갈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깡통을 주어먹던 옛날의 궁상은 구중천에 날려보내고 잘 살게 된 오늘부터 인생이 시작되고 원인도 없고 과정도 없이 결과만 있는듯 생각하면서 그냥 내노라하는 많은 복된사람들의 머리는 단순해도 보통 단순한게 아니다.     력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내리막에 절로 구르고 앞으로 굴러가지 뒤로 구르는 법이 없다. 한굽이 돌아드니 버들숲 저너머 또 새 마을이 나타닐지 누가 안단말인가? 마냥 공리공담에 신이난 소위 전문가제씨들도 알수 없는 일일게다. 지구에 앉아 하루에도 팔만리를 가거늘 세상에 살아있는 생물치고 정지상태가 있을것인가?     지구촌엔 유토피아가 없다. 천당과 지옥이 병존하고 부자와 가난뱅이가 함께 부대끼는 현실세계만 있을뿐이다. 오늘 잘 산다고해서 부자의 눈길로 자국내의 구석구석에 처참한 경상은 외면하고 남의 흉허물만 파내려는것은 시각문제가 아니라 지력 문제이고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문제이며 내가 곧 우주라는 관념론자들의 황당한 꿈을 신봉하는 어리석은 사유모식자들이다. 그래서 가소로운것이다.                                2013년  2 월 14일      
175    만필 A ,B,C, 댓글:  조회:7987  추천:1  2013-02-25
                                   만필 A ,B,C,                                        진 언                                   A.  공리공담자       연변농촌에서는 실속없이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말이 반찬이면 상다리 부러지겠다.”고 비꼬고 무슨 일은 잘 할줄 모르면서 혼자 다 아는체하면 “젠장, 말이사 천상이골이지”하고 타매하며 말이 다사한 동네아낙을 “말새단지”라고 심히 꺼리였다. 우리 말에는 빈말 즉 공리공담을 경계하는 속담이 여러가지이다.     대강 례를 든다면 “말(이) 단집에 장(이) 단법 없다. 말(이 ) 단 집에 장이 곤다. 말로 온동리를 다 겪는다. 말 많은것은 과부집 종년, 말이 많으면 실언이 많다. 말이 많으면 쓸말이 적다. 말이 앞서지 일이 앞서는 사람을 본일 없다. 말하는 남생이 등등. 공리공담, 탁상공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지상담병(紙上談兵) 이란 성구도 있는데 그 주인공 조괄이란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것이다.     지상담병에 능한 조괄이 우쭐해서 진나라를 총공격하다가 계략에 말려들어 40만 대군이 일조일석에 전멸하고 자신도 포위를 헤치려다가 빗발치는 화살에 맞아 처절한“고슴도치”가 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염파의 풍부한 경륜보다 조괄의 화끈함을 좋아한다. 문제는 늘 이 지점에서 생긴다. 탁상공론에는 자연히 공리공담이 많기마련이다. 맹자씨는 말한다. “편파적인 말에서는 마음을 가리고 있음을 알수 있고 늘여 놓는 말에서는 함정이 있음을 알수 있고 간사한 말에서는 리간질한다는것을 알수 있고 변명에서는 궁지에 몰려있음을 알수 있느니라.”라고.     흔히 무슨무슨 “전문가”들은 예측하기 좋아하는데 흔히 공담에서 공리로 그치고만다. 미래의 예측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 욕망이라는 관념의 습성을 바탕으로 하며 이것을 전문가의 광환을 두르고 횡설수설한다. 전문가들 역시 과거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는데 그 방법도 별다를것 없고 결과 역시 일반인의 사유파장과 특이한것이 없다. 전문가들의 예측이라는것이 그닥 신뢰성이 높지 못했다는 반증을 통해 예측이라는것들은 참고는 되지만 최종결정을 내가 내리고 내가 책임지겠다는 전제가 없다. 그래도 전문가들은 뭔가 있을줄 기대하지만 아무것도 없을때가 더 많다.     아무리 “특정국가”의 일이라도 매사에 추측에 억측을 덧씌우고 주관욕망까지 양념처럼 버무려봐야 존재의 리유가 변형될것이 없다. 정서는 문제에 대한 반응이지 문제해결책은 못된다. 부정하고 외곡하고 축소하고 폄훼해도 객관존재의 자멸이 있을수 없다. 그리고 실체에 대한 체감적인 연구없이는 탁상우에 올려놓고 아무리 찧고 까불어도 쭉정이만 날린다. 결국 조괄의 요란한 지상담병이 되고 누구의 말마따나 얻을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공리에서 공담에 그치고 만다.                                                          B. 지록위마(指鹿为马)자      《사기. 진시황본기(史记.秦始皇本纪)》에 있는 “지록위마”하면 세인들이 다아는 성구인데 현대세계의 시비표준을 다시 가늠해보는것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조고의 “지록위마”이후로 웃사람을 롱락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것을 비유할 때 흔히 이 고사가 인용되였다. 요즘에 와서는 그 뜻이 확대되여 자기 리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시비를 전도하여 대중을 기편하려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현대사회에 항간에나 국제사회에나 눈감고 “야옹”하는 광대들이 비일비재하는데 과시 조고의 “지록위마”의 음흉한 내속과 술법을 잘 학습하고 활용하는 표현이라 하겠다. 례컨대 세상이 다아는 기정된 사실을 두고 중구난방으로 제가끔 제리익, 자기 자존심, 자기 정치목적을 위해 멋대로 이름지어 부르는 현상이다.     그렇게 외곡하고 조작한다해서 무지한 시골할미네는 곧이 들을지 모르나 판단력이 있는 세인들은 조작에 넘어가지 않으며 가장 현명한 재판관인 시간이 판단하기를 기다리고있다. 이것은 명지한 사고방식이다. 제손금도 다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어찌 앉아서 남의 일을 꿰뚫어본듯이 콩이야 팥이야 공론할수 있단말인가.     얼핏 들으면 국제사회여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개념혼동의 기법으로 두루뭉실, 애매모호하게 자기들의 저의를 덮어감추려 한다. 가랑잎으로 똥을 가릴수는 있어도 종이로 불을 살수는 없다.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억지를 쓰는 자신도 속으로는 웃음이 나오는것을 참을것이다. 내가 아니라 해서 작은것이 커지고 큰것이 작아지고 사물이 다르게 인식될것이라는 사유는 코흘리는 아이들의 생떼질이다.     마당은 울퉁불퉁해도 북은 바로놓고 쳐야 하고 입은 비뚤어도 주라는 바로 불라고했다. “지록위마”라해서 사슴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조고는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천추의 웃음거리로 저주의 기둥에 매달려있는것이다. 독수리를 참새라고 부르라고 하듯 날개가 있는것으로 말하면 파리도 새가 되는지, 기자들에게 외곡할것을 강요하는 집단의 작법이 조고의 위록지마와 다를게 뭔가?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그런 궤변은 이미 우려서 엎어놓은 김치독처럼 시군내만 날뿐이다. 음식을 먹거나 중얼거리다가 제혀를 씹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도 누워서 남에게 침을 뱉노라면 제얼굴에 먼저 떨어질뿐이다. 검은것도 검고 흰것도 검다고 하는것은 사유이기는할세 궤변밖에 더 될게 없다.                                    C. 쟁개비근성이…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민족적특징이 있다. 스페인의 한 사상가는 “영국사람은 걸으면서 생각하고 프랑스사람은 생각한 뒤에 뛰고 스페인사람은 뛰고나서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사유와 행위방식에서의 특성을 개괄한것이다. 민족성에는 장단점이 있다. 한국인의 장점이라면 우선 생활력이 강하고 도덕성을 강구하고 교육열이 높으며 가족중심적이고 개방적이며 직설적이고 충동적인 용기…등등이다.     이에 대비해 단점은 세계적인 시각보다는 정저와(井底蛙)시각이고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상향지향이 도를 넘을 때가 많다보니 시기와 암투도 많다. 등급관념에 푹 절어서 약자앞에서 위세부리고 그만큼 약자보호정신이 부재한다. 가치관이 획일적이 여서 지극히 리기적이며 표리부동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치명의 결함도 있다.     가장 두드러진 단점은 냄비근성이다. “조선민족”의 “쟁개비근성”이란 일본놈들이 명명한 한가지 “렬근성”의 표징인데 어찌보면 그런 근성이 없지는 않다. 세계적으로 배달민족은 가장 력동적이고, 변화다단하다는 정평도 나있다. 그것이 쟁개비근성으로 진화했는지 근대식민지로 된후 패배의식에서 형성된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분법으로 냄비근성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라고 곱게 생각하면 사유가 민첩하고 문제해결에 직감력이 뛰여나며 기질상 공통된 잠재력, 력동성에서 폭발력은 쟁개비에 비교되고 잠재력은 뚝배기에 비유되기도 한다. 흔히 뚝배기근성은 "한번 가진 소신과 신념"은 외부온도와 관계없이 잘 바꾸지 않는 뚝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쟁개비의 특성이 민족성에 비유되는것은 원초적인 비애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이 명제를 숙명인듯 수용하여 고유민족성인듯 자인하고있다.     게다가 한국사람들의 무슨 콤플렉스가 그리 많은지 남의 일에 잘 간섭하다보니 자기와 직접적인 리해관계가 없는데 시야비야, 왈가왈부하고 자기보다 조금만 나은 사람을 보면 깎아내리려 안간힘을 쓴다. 녀자들은 길거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의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괴이하면 이렇쿵 저렇쿵 씹어대는 근성이 난당이라고 자인한다.     연변에서는 냄비를 습관상 쟁개비라 하는데 도대체 꾸준한 멋이란 없이 보르르 끓는듯 하다가도 곧 흐지부지해지는 사람을 두고 “쟁개비열정” 이라고 힐난하였다. 철학가는 자기가 책에서 쓴 글처럼 살고 가수들은 노래처럼 살고 무용쟁이는 춤추는 인생을 산다고 할수는 없지만 사람은 제 심신에 굳어진 근성대로 살게 된다.     례컨대 한국의 기자들이 그렇다. “무슨 문제가 터지면 일회성의 쟁개비성 언론이 란무하다가 곧 안개가시듯 하고 그런 언론에 휘둘리다가 어리둥절해지던 국민들은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채알지도 못한채 잊어버리고 잠잠해진다. 그러다가 다시 똑 같은 사고가 재발하고…한동안 부글부글하다가 거품은 다른 이슈에 잠겨버리는 등이다.” 움직이는 세계, 부단히 생성되는 이슈…그냥 쟁개비에 끓이다가 말것인가?     이런 사이비현상은 한국언론이 선정적,단발적인 “특종”을 쟁탈하려는 심리에서 기인되기에 지속적이여야 할 여론기능도 그만큼 단명할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기서껀 끌려고 턱없이 허구도 하고 가미하고, 과장하고…이런 현상이 일본놈들이 “조선사람”들은 “쟁개비”라고 비꼬게 된 빌미의 하나로 된것이 아닐가싶다. 습관은 제 2천성이라는데 “냄비근성”이 정말로 고유의 민족성이 되였다면 참으로 막연한 일이다.                                                                                          2013년  2 월 14일
174    (잡문)분노분석학 댓글:  조회:9998  추천:5  2013-02-21
                                             분노분석학                                                   최 균 선        분노란 분개하여 크게 화를 냄을 이르는 말이다. 분노에는 돌발성분노, 잠재적 분노, 생존성분노, 체념성분노, 수치심에서 비롯된 분노, 배신 등에서 비롯된 분노 등 이 있다. 돌발성분노보다 잠재성적분노가 더 무섭다. 활화산같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 며 일단 폭발하면 그 파괴성이 어마어마하기때문이다.     건강학자들은 설득한다. “노여움은 분함에서 오고 그것이 분노를 낳는다. 쓸데 없는 노여움은 명줄을 끊는 칼이 되고 격한 분노는 결국 되돌아오는 부메랑이다. 그것들이 내안에 암의 씨앗을 뿌리며 마음에 노여움을 품어 그것이 쌓여지면 스스로 명줄을 끊는것이 된다. 그러니 분함을 참고 노여움을 푸는것이 제 명을 제대로 사는 지름길이다. 한마디로 잦은 노여움은 수명을 단축한다. 노여움은 버려야 마땅하다. 분토처럼 버려라. 그러면 그 자리에 새 생명이 움트리라.”등등, 맞는 말이다.     분노통제에 관한 명언들도 많다. 영국의 력사가 G. M. 트리벨리언은 “분노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간것이기에 분노를 통제하지 않으면 분노가 여러분을 통제한 다”고 했다. 분노통제에 실패하면 스스로를 해친다는 말인듯싶다. 영국시인 알렉산 더 포프는 “화를 내는것은 남의 잘못에 대한 보복을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것 이다”라고 말했고 프랭클린은 “분노로 시작한것은 부끄러움으로 끝나기마련이다”     이처럼 영,미권문화는 분노에 대해 부정적이다. 화를 낸다는것은 지는것, 인품에 뭔가 모자란것이라는 관념이다.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필드는“옹졸하고 악의가 있는 마음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해 원수를 용서하는 기쁨을 느낄능력이 없다” 고 했고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도 “증오는 약자의 분노다”라고 하였으며 “힘이 받 쳐주지 않는 분노는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독일속담도 있다.     그러나 이와 상반대되는 관념들도 수두룩하다. 기원전 1세기 씨리아 노예출신의 라틴어작가인 푸블리우스 시루스는 “분노는 회상만해도 점화된다.”고 했다. 분노는 강하다는것을 역설한것이다. 미국의 현대파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좋은 분노는 어떤 사람의 모든 능력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미국심리학회는 “분노는 전적으로 정상적이며 보통의 경우에는 건강한 인간감정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영국 도미니코수도회 비드 자렛이란 신부는 “세상에는 분노가 필요하다. 세상이 계속 악을 빈번하게 허용하는 리유는 세상이 충분히 분노하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라고 설교했다. 분노는 에너지다. 분노를 동원하면 세상을 개선할수 있으므로 사회의 분노총량이 적당히 많은게 좋으며 개인, 국가발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말도 있다.     프랑스의 작가 스테판 에셀은《분노하라》에서 이렇게 쓰고있다.“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그때 우리는 힘있는 투사, 참여하는 투사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것이다.” (15쪽)     개체정서적인 분노와 리성적인 분노는 구별된다. 에셀이 호소하는 분노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보다는“참여의 의지”를 가리키는것이다.“내앞가림이나 할수 밖에” 하 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으로서“분노할수 있는 힘”과 인간의 존엄, 나아가서 생존의 권리마저 침탈당할것이다.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설교한다.“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쓰고있다. (39쪽)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수 있고, 자신이 서있는 곳을 지킬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수있다. 또 같이,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55쪽) “화의 뿌리가 사적인것이 아니라 공적인것일 때는 그 공적인 원인 을 해결할 때에만 화는 사라진다. 사실 세상의 진보는 불의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지 않았 던 가.”“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령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71, 79쪽)   그런데 일컬어“자기애적 분노”는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애적 분노란 미국의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의《자기심리학》리론에 나오는 용어다. 코헛에 따르면 자기애 적 분노는 자신의 위대함과 전능함에 대한 자기애적 욕구가 외부로부터 공감받지 못해 생기는 구조적 결핍에서 기인한다. 자기애적 상처로 인해 표출되는 공격성 안에 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구,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욕구, 그리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상처받은것을 원상태로 되돌리려는 욕구가 잠재돼 있다고 한다. 이런 분노는 자기중심주의에서 기인된다.     분노는 강자의 특허이다. 하기에 분노할 때는 행동을 전제로 한다, 약자도 분노 할수는 있다. 그러나 약자의 분노는 삼키기 용이다. 그래서 증오하게 되는데 증오 한다는것은 이미 약자의 입장에 선것이요 그에 앞서 약자의 운명에 순종하는것이다. “약자는 분노를 경계하고 강자는 교만을 경계해야 한다. 분노는 삭이는것이 명지하 다” 는것이 삶의 지혜로 인지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노하라!” 는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구호로서 마뜩지 않게 들릴수 있다.     그러나 참는것이 능사가 아니다. 진정한 심리평형을 찾으려면 분노할것에 분노 해야 한다. 그래도 참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면 더구나 관계하지 말라고? 그런 무관심이 비리의 횡행을 윤허한다. 얽히고 얽힌 인간관계, 나비효과라는것이 단순 학술용어가 아니라 정말로 일어나는것이 현대사회의 실정이다. 성향차별, 학벌차별, 빈부격차, 략탈적인 탐욕 등이 눈에 띠지 않을수 있으며 분개하지 않을수 있을가?     력사는 항상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을 정당화하였다. 인디아인에 대한 학살은 앵글로 색슨족의 원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죄인가? 힘, 무력으로 약하고 락후한 인디언인들의 땅과 가원을 강탈하고 불모지에 몰아넣고 그도 성차지않아 도살하고 억압하며 괴롭힌것은 과연 정글법칙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일제가 조선땅을 강점하여 살륙하고 자원을 략탈한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넘어가야 하는가?     동물세계나 인간세계나 약자는 슬프다. 죽이지 못하면 죽어야 되는 생존경쟁의 각투장이다. 나보다 약하고 락후하다해서 강자들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러 왔는가?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식민지…수많은 비극속에서 참을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던 약소민족, 제땅이나 잘 가꾸고 지킬 일이지 왜 남의 작은 땅덩어리조차 욕심내 남을 망국에로 몰아넣었는가? 이런 물음은 현답이 없는 우문이 될것이다.     약자가 강력한 힘을 갖추면 세상은 위험해진다는 궤변에 따르면 약자는 항상 분노하지만 속절없이 당해야 한다. 강자에게 약하고 악자에게 강한, 그리고 약자를 임의대로 괴롭히고 소외시키고 죽음에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약자가 분노하면 무모 한가? 마침내 강한 힘을 갖추었을 때 분노를 터뜨리면 대역부도한 일인가? 진실은 언제나 약자의 분노속에서 표출된다. 약자의 분노인가? 리념의 갈등인가?    약자없이 강자가 없듯이 리해 없는 조화가 없고 조화가 없이는 발전이 없다. 령양떼를 호시탐탐,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포효는 절대 친선적일수 없으며 더구나 평화공처를 암시하는 미소일수 없다. 거대한 강압에 항거하는 약자의 분노를 가볍게 볼 일만은 아니다. 토끼가 사자를 이긴것은 동화이지만 모든 선량한 사람들의 념원인 것이다. 그런데 생존의 권리를 지키려는 약자의 분노는 념원으로 체현된다.     가끔씩 약자에게 지어보일수 있는 강자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라 랭소이다. 높은 산정에서 산하를 내려다보는 미소, 거기에는 정복의 긍지감과 자호감이 담길수 밖에 없다. 당신이 약세군체에 속하고 있을 때 대수롭지 않을수 있는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아따가라”소리도 칠 생각이 없다면 감각이 도끼등인가?사유가 정지 상태인가? 가진자는 극도로 리기적인데 중용으로 아큐정신승리법을 고양할것인가? 중용은 때와 정도 등 분촌을 가리는것이지 무위무능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적당함에 만족하면 적당히 살게 될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소신껏 살라는것이지 중용지도가 아니다. 개가 짖는다고 해서 따라짖지는 않는다는 귀족적성향체계 (아비 투스)는 비릿하다. 약자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그저 가당치않다고 할 권리를 누가 주 었는가? 거짓에 대한 분노는 영원하다. 강압에 대한 분노는 자발적이다. 분노속에서 과거를 잘 정리하지 못하면 미래를 향한 비전도 없을지도 모른다.     분노를 약자의 콤플렉스라고 생각하는것 그 저의가 아이러니이다. 분노란 약자의 콤플렉스라고 말하는 자들은 언제나 위세부리는 기득권자들이고 강권을 펴는 자들이 다. 강자가 되려면 약자의 분노를 떨쳐야 한다. 분노하지 않아서 발전하는 경우도 있 지만 격정이 없으면 분노가 없고 분노가 없으면 발전이 없다.     약자가 분노할 때 세상은 뒤바뀐다. 2천여년의 인류력사에서 민중의 분노는 여러차례 봉건왕조들을 뒤엎었다. 일제에 맞선 열혈투사들의 피어린 항쟁이 있었기에 배달민족의 자주독립이 있게 된것이 아닌가? 굴종이야말로 생존경쟁에서 최악의 자세이다. 분노는 아무나 하는것이 아니다. 분노는 아무때나 폭발하는것이 아니다.     횡포무도에 저항하려는 담찬 자에게서만 분노가 폭발된다. 바람부는 방향으로만 가서는 결코 내가 가고싶은 곳으로 갈수 없음을, 역풍을 헤치며 나아가야 함을 모를 사람이 없을것이다.   분노도 선택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함을 분노해야 “분노”가 사라진다. “분노하라! ”강권에 대한 분노는 어느 한 약소국의 항쟁에만 그칠일이 아니다.                                                    2013년 2월 16일      
173    호시탐탐과 어부지리 댓글:  조회:8551  추천:5  2013-02-18
                               호시탐탐과 어부지리                                       최 균 선       호시탐탐 (虎視眈眈)이란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서 남의것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형세를 살피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일본어에도 호시탐탐 (虎視眈眈) (おもに副詞的に用いられてㅡ虎視眈眈)이다. 한어에서는 호시탐탐 (虎视眈眈) =(鹰瞵鹗视) 이라 한다.     이 성구를 보노라면 력사의 장하를 거슬러 저먼 기슭에 일본이 떠오른다. 일본이 조선땅을 호시탐탐하였던것은 근대의 일만이 아니다. 일찍 당조때 라당군의 왜구와의 첫해전이 기원 663년의 백강구해전(白江口海战) 이였는데 왜구가 대패함으로써조선반도를 일거에 점거하려던 야심이 꺾어지고 근 천년을 두고 호시탐탐해야 하였다.     조선반도의 인민들은 원래 선량하고 례의바른 사람들로서 줄곧 농경문명을 발전시켰지만 력래로930 여차의 외래침략과 략탈을 당하며 루루천년 수난민족으로 살다가 마침내 일제에 의해36년간 망국노가 되였고 그런 민족의 치욕과 원한을 채가 시기전에 렬강들의 작간으로 3천리강산의 분단비극이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배달민족은 그처럼 착하고 온순한 민족이였지만 많은 경우 반상적이기도 하였는바 줄곧 들이닥친 외세의 강압에 불요불굴의 항쟁을 벌려왔다. 분단후 조선인민들은 굴강한 민족전통이 색바리지 않고 근대의 외세의 강압에도 목숨을 내걸고 강토를 지켜냈다. 실례로 미제가 사촉하여 야합된 20여 개국 UN군을 쳐물리치는 싸움에서 천만의 남녀로소가 한결같이 떨쳐나 싸움으로써 선량한 세계인민들을 탄복시켰다.       물론 지원군의 마멸할수 없는 희생적투쟁이 있었기때문이지만 이라크인들처럼 두손을 번쩍들고 침략자를 환영하듯 조선인민들이 연약무력하였다면 최후승리를 쟁취할수 없었을것은 자명하다. 그때의 참패를 잊지 않은 미국은 오늘도 의연히 조선반도를 자기네의 아세아제패의 발판으로 삼으려 호시탐탐하며 온갖 음모궤계와 술수를 쓰며 강도의 궤변으로 선량하고 근로한 조선민족을 굴복시키려 광분한다.     물론 당나라군을 끌여들어 강대한 고구려를 멸망시키던 그런 신라의 형국이 지금 다시 조선반도에서 재연되고 있고 대동아공영권을 뇌까리던 일본제국주의의 야망이 개꿈이 되였지만 현대일본국도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지금도 잔꾀를 굴리며 호시탐하고 있다는것은 삼척동자도 다아는 국제상식이다.     황새와 조개가 다투는 틈을 타서 어부가 둘다 잡아갔다는 고사도 의미롭거니와 그 고사를 리용하여 국난을 타개한 력사 이야기는 더구나 심오한 의미를 가진다. 전국시대, 제나라에 많은 군사를 파병한 연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웃에 조나라혜문왕은 기다렸다는듯이 침공을 서둘렀다. 진퇴량난에 처한 연나라소왕(昭王)은 그간 연나라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해 온 소대(蘇代)를 파견하여 혜문왕을 설득하도록 부탁했다. 조(趙)나라의 혜문왕을 찾아간 소대는 거두절미하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하, 제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아주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재미난 광경인가?" 조나라왕은 호기심이 동했다.     "제가 이곳에 오는 도중에 역수를 건너게 되였는데 강변에서 조개가 입을 벌리고 햇빛을 쪼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날아온 황새가 조개의 살을 쪼았습니다. 그러자 조개가 본능적으로 입을 꽉 다물어 버렸지요. 그바람에 황새의 부리가 조개껍데기 사이에 끼였고 황새는 물린 부리를 빼려고 죽을 힘을 다했고 조개는 황새를 놓치지 않으려 한사코 버티였습니다. 그렇게 서로 실랭이질하다가 둘다 지쳐버렸는데 그때 어부가 와서 황새와 조개를 다 잡아가버렸습니다. 바로 어부지리지(漁夫之利)요"     “허, 그거 아주 공교로운 일이군요, 재미두 있구…”      "대왕이 벌리려고 하는 전쟁도 이와같습니다. 지금은 연나라가 조금 약해보여도 죽기살기로 싸운다면 조나라도 힘이 빠질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려왔던 진(秦)나라에게 두나라가 다 먹히우고 말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나라들까지 그들에게 항복하게 될것이고 진(秦)나라 천하를 다 차지하게 될것입니다. 지금 연나라를 들이친다면 진나라는 어부지리(漁夫之利)하게 되는것이지요”     소대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판단한 조나라 혜문왕은 연나라를 침공하려던 야망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2천여년전의 이야기지만 현시대에 와서도 의미는 진리로 생생하다. 력사는 결코 중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력사적현상은 시국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때에 재연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임진년)인 1592년 4월에 일본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처음 침공하였고 4년후인 1956에 재침공하였다. 당시 명나라군이 나가서 함께 물리쳤지만 전화는 도합 7년이나 지속되였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고 신라때 당군처럼 미군이 왔고 영웅적중국지원군이 나가고 일본은 물이 흐린김에 고기를 잡듯 군수업으로 배를 채우고…황새와 조개는 미물이여서 그렇게 물고물리여 옥석구분이 되였다지만 그것들의 최후에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게 되는가? 비록 기이하게 형성된 민족의 삼각지대에 서서 바라보지만 현시대에도 미국, 일본이 호시탐탐하고있다는것을 전세계가 보고있다.     독일은 히틀러가 저지른 죄악을 후세의 지도자들이 피해국가들에 진심으로 사과하고 경제배상을 했지만 일본은 력사를 외곡하면서까지 조선인민들에게 자행한 천추에 용서못할 반인류죄를 사죄커녕 눈을 깜짝거리며 다시 호시탐탐하고있다. 승냥이가 으르렁거리는것은 결코 살찐 양한마리를 잡아먹지 못해서가 아니다. 승냥이의 탐욕이 얼마인지는 오직 승냥이밖에 알길 없다. 승냥이는 아메리카 이리와 지금 합창을 하고있다. 본질적으로 동상이몽이고 아전인수하지만 배가 잘 맞아 돌아가고있다.     력사를 뒤돌아보라. 신라와 백제가 황새와 조개같았고 신라와 고구려가 조개와 황새같이 당나라에 어부지리를 제공하지 않았던가? 김춘추나 김유신의 자승자박의 수치스러운 행각은 언젠가 력사가 심판하겠지만 뭉쳐도 존재의 권리를 확보가 어떨가 하는데 허리가 동강나서도 서로 반목하여 티각태각할 떄 “어부”가 너털웃음을 웃고있고 한두마리가 아닌 하이에나들이 동족상잔의 페허위에서 어슬렁거리려고 호시탐탐하고있다. 이것은 결코 력사의 롱담이 아니다.                                           2013년 2월 10일
172    허구와 생활의 론리 ㅡ《사랑했나봐》로부터 ㅡ(수정보충) 댓글:  조회:9040  추천:2  2013-02-12
                                  허구와 생활의 론리                               ㅡ《사랑했나봐》로부터 ㅡ                                                                                              真 言 최 균 선       무릇 드라마는 다른 쟝르처럼 생활속에서 엮어지지만 시청자들은 드라마속에서 생활을 본다. 드라마가 100% 생활의 재현은 아니라도  생활의 본질, 인성의 내막, 사회의 모종 현상을 조명하게 되여있다. 드라마가 생활보다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것은 생활을 보다 집중시키고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조하였기때문이다.   《사랑했나봐》는 2012년 10월 15일부터 MBC에서 월요일~금요일 오전 7시 50분에 방송되는 아침드라마이다. 소개에 의하면 이 드라마의 기획의도는 “뒤엉킨 운명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와 아이와 사랑을 찾아가는 한 여자의 악전고투기를 그린 드라마”라고 한다.     그러나《사랑했나봐》는 마치 “내 마음이 그랬던가?”하는격의 불확정인 심리바탕에 그야말로 “자기도 모르는” 생명활동의 미확정성을 예시하고 시작되였다. 기획의도는 닥쳐오는 불운앞에도 물러서지 않고 한 아이의 엄마이자 사회에서는 편집자로 “우뚝”서는 한윤진을 그린다고 했지만 결국 “선천적인 약자”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악녀 선정이가 전반 극정을 틀어쥐고 나가는 예상외의 주인공으로 부상되였다. 혹시 최선정이가 작가의 내심의 리상형인물이고 작가의 인생궤적이 이럴가 의혹이 간다.     그런 전형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반면인물ㅡ윤진의 모든것을 빼앗고 지키기 위해 온갖 음모궤계(범죄)가 진행형인데도 녀성으로서는 있을법도 한 량심상의 갈등따위는 아예 배제되고 잠시잠간의 불안감만 가지고 악행의 대도행진, 녀자로서는 심리소질이 기특할 정도로 “좋다.” 그러기에 종횡무진하며 거침없이 자기“행복”을 가꾸는데 오히려 그가 사악의 전형으로서의 주인공이 되고말았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반대가 아닌가? 아니면 원창작계획인가? 자가당착인가?     전형환경은 모두 바보, 지력저능아, 한녀자의 손에서 놀아대는 무뇌자들을 만들었기에 악녀로서는 너무 “완미 ”하게 부각되고있다. 특이한 총명과 실천력으로 경찰들도 헛개비되고, 병원도 의도대로 주물러대여 한국병원에 의사나 호사는 무원칙한백치들만 있는 모양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따져보면 80여집이 거의 선정이가 새록새록 악행을 저지르고 아무 거침없이 성사하는 내용이다. 원래 별로 대단치 않은 녀자로서 가담가담 애로도 있을법한데 완전완미한 “녀강자”로서 악행의 극치를 이룬다. 똥싼놈이 와달랑한다는 말은 있지만 그것도 유만부동이다. 참으로 선정이 같은 악녀가 가지가지 악행을 저질러도 돈만 쑤셔넣어주고 거짓말 하면 곧장 그대로 동작하는데 아무리 무질서한 사회라해도 그건 아니다. 규진이는 상등바보로 부각되는데 한국에는 선정이같은 악녀만 사는가? 그게 작가가 파악한 현실인가? 그게 작가의 예술취향인가?     이는 작가의 사유모식으로서 허황한 상상력이 아닐수 없다. 소개에는 인생의 결정적전환점에서 윤진과 선정사이에 서게 되는 주현도(형상화된 바보), 거짓과 배신의 상처를 딛고 사랑을 이루는 백재헌의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 하였지만 구멍이 숭숭하다 못해 진실의 벽이 통채로 무너지고 황당과 허무만 남아있다. 이쯤되면 이야기전개는 불가능해진다.     진행상황으로 보면 현실과 탈절되여 별내용도 없고 드라마고유의 수법인 비약된 스토리의 진행도 전혀 안되여 질질 끌면서 허수아비 형상들을 조합하고있다는 직감을 줄뿐이다. 드라마도 밀도가 강구된다. 내용과 내용, 장면과 장면들의 이음이 어수선하고 지리멸렬하고 “사랑했나봐”를 지양하는 주제에 혼선을 빚는다. 알심은 넣었겠지만 캐릭터들도 색채가 선명하지 못하다. 현대 한국사회에 선정이처럼 막무가내한 악녀가 보편성을 지닌것이 사회적본질인지 어떤지 곤혹만 남겨준다.  그럴 수는 없지만 가령 그게 보편적인 사회현상이라면 정말 앞날이 암담하지 않을수 없다.     오해일지는 모르되 한윤진은 그저 예나뿐인 본능적인 이기주의자로 각인되고 현도는 순진한지 태생바보인지 핫바지저고리로 선정이의 악행을 조장하는 장치적인 인물이다. 백실장도 군에까지 갔다와서 패기와 랭철한 판단력이 있는 강하고 똑똑한 남자로 부각하려 한것같은데 드라마의 진행중에서는 선정이와는 상대도 안되는 헛똑똑이다. (사실 쉽게 넘뜨릴 녀자가 아니기에 유진이더라 모든것을 포기하라고 권고하는데 결국 연약무력한 인물로 락인찍힌다.) 이것은 작자가 소기한바가 아닐것이다.     유아독존이고 안하무인이며 독선주의자인 최선정은 어디에서나 무불통지하고 무소불위한듯 횡포무도하게 노는데 그외 등장인물들은 극정의 발전에 별로 요긴치 않은 존재들이다. 특히 사장은 그 모든 음모와 술수와 비리가 드러난후 결재자가 될듯 싶은데 너무 바보스럽게 꾸며놓았다. 시청자의 의견들을 두루 읽어보면 김흥동감독은 “짜증이 나지 않는 드라마로 만들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한다.      드라마작가도“모든 사람이 드라마 같은 삶을 살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이 무엇인지, 센 코드를 지녔는지에 기준을 두기보다는 마음을 따라가는 것에 중점을 뒀다. 드라마가 끝날 때는 인물들이 얼마나 성장하고 얻는지, 어떤 사랑을 찾아갈지 끝까지 시청자들과 함께 하고 싶다”라며 포부를 밝힌바 있다고 하는데 무릇 소설이든 영화이든 일단 부각된 인물형상은 작자의 의도에 따라 죽고사는게 아니라 생활의 론리. 객관적발전론리에 따라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수 있다.     그 근거로 세계문학대가들의 창작경우를 들수 있다. 례브 똘쓰또이의 “안나 까레니나”의 인물설정과 성격적인 변화는 작가가 사전에 변경시켜 긍정적인 인물로 부각했지만 소설의 결말에서 까레니나가 기차에 뛰여들어 자살하는 결과는 결코 자기의 창작의도가 아니였다고 말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뿌쉬낀의 유명한 운문서사시인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따지야나의 결혼을 시인 자신도 개탄하였다는것은 작가도 자기가 이미 세상에 내놓은 인물의 운명을 주재하지 못한다는 실증이 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작가의 발상은 좋다할수 있되 스토리전개는 장면마다 거의 비현실적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거기서 거기니까 얼마든지 류추할수 있는데 우선 돈을 사랑해서 리기의 극도에서 별대책도 없이 아이를 빠꿔치기한것으로 설정되는데 상식적으로 이런 설정은 처음부터 억지이다. 문학ㅡ드라마는 인간의 생활표상을 재료로 하므로 이런 재료들이 예술정체로 얽혀질 때  반드시 상호조합되는 자체의 규정성에 부합되여야 한다. 드라마를 쓸정도의 작가라면 알아야 할 상식이다.     딸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는 도덕적, 량심적인 구실이 선행되지만 모성애보다 더 소중한게 돈이라는 론리는 아무리 돈이 만능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전통미덕이 소실된 현대녀성이라도 녀자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없지못해 있다 고 할세 그런 형상이 사회민중의 삶과 인생태도에 보태주는게 과연 무엇인가? 시청자 모두가 멍청이가 아닌이상 설득력을 잃을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악의 형상이 역으로 시사하는 미적가치의 추구도 제로가 되고만다.     이런 스토리, 그런 악녀의 형상으로 인류의 감정에서 가장 숭고한 감정인 모성애, 사랑 등 고귀한 단어를 오염시키지 않는게 작가적인 안목이고 판단이라 생각한다. 만약 이 드라마가 외국(해외 동포사회는 제외)에 나간다면 한국녀성들의 인간성에 대해 오해를 살 소지가 너무 많으며 한국사회를 이상하게 비틀어놓는 반작용밖에 놀게 없다고 본다. “아기 바꿔치기”,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공통된 수법인 “뺑소니조작”, 사건의 시말, 전후관계 등 사건조사에서도 상식적인 그 과정은 생략되여있다.     그저 선정이가 조작한대로 규진이를 집어넣고 합의하는것이 능사인듯 처리하는 경찰들의 행각에서 한국경찰들은 법률상식도 없는 등신들인듯싶다. 작가의 주관의도가 현실과 너무 탈절되여서 싱거운 느낌이 앞선다. “두 올케의 남자를 좋아하는 시누이”의 형상에 서 한국에서는 불륜적인 애정관도 선양되는가? 곤혹을 안겨준다. 드라마가 83회까지 전개된 이 시점에서 과연《사랑했나봐》가 처음부터 방향미실이 아니였는가? 그렇더라도 굽이돌이를 돌아서 차차 가다보니 방향을 잡을수도 있겠다싶어도 시종 초점을 잃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인제는 너무 멀리 왔기에 돌아서도 방황미실이다    최선정이가 본질적으로 모성애가 뭔지 모르는 녀자, 돈에 미쳐 량심, 도덕, 사랑도 때묻은 지페에 돌돌 말아서 내던질 패덕녀, 그가 저지르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리고 매번 멋지게 성사되는 나쁜짓도 상상을 초월하는게 아니고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그런 일이여야 하는데 드라마 고유의 현념도 아니게 비현실적으로 자꾸 배배꼬아가며 분량을 늘인다는 평판에서 자유롭지 못할것이다. 그보다 문제는 아무도 지어 사회를 리드하는 공권력도, 사회결약도 선정이앞에서는 무맥하며 오직 선정이만이 필승불패의 녀왕으로 옹근 사회결구우에 군림하여 호령질하며 그 호령질은 잘도 먹혀들어간다.     두서너집을 건너뛰여도 앞뒤를 대강 이어서 련상할수 있을정도로 거의 한달째 그냥 제자리에서 맴돌고있는 스토리전개력 등을 질타할 시청자들이 많을것것 같다. 작가가 시종 긴장감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고무줄도 탄성의 한도를 넘게 잡아당기면 끊어지고 말듯이 한없이 늘어지는 전개에서 “박시은이가 언제까지 바보처럼 시련만 받게 하려는지…”동정보다 역증을 불러오게 되면 이런 설정은 실패를 의미할뿐이다. 사실 늘어지는 전개로 시청자들이 원성을 사고있다고 한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윤진이 공장에서 시련을 겪는 부분은 아주 류사성 패턴으로 진행되여 군더더기로 되고있다. 사회를 상대로 하려는 이야기에 핵심이 없기때문이 아닐가? 매일매일 집필하고 촬영하는것이라면  “그냥 연장할 계획인가?”의심할 정도이고 사건이 종심에로 접근하는듯 싶다가도 엉뚱한, 잡다한 장면으로 번져지여 시간끌기가 되여 혹평을 면치못할것이다.     스토리의 론리적발전 시점에서 윤진의 복수가 언녕 시작되여야 하지만 지금껏 말로, 시늉만 할뿐이여서 아무래도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한다고 오도하는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만 가지게 된다. 진실감을 상실하고 등장한 규진이가 교도소에 수감된 일주일 동안 진전된 사건은 없다. 선정이는 초인이기나 한듯 두렵다는 윤진이, 머리나쁜건  그렇다치고 본능적인 악마저 거세해버린 주인공 윤진이의 형상부각은 작가의 상상력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런데도 그냥 전개하려하니 억지가 되였다.     허구적인 인물이라도 현실적바탕이 없는 인물인 최선정은 실감이 없지만 직감상에서 각인되는 그 존재자체가 세상과 사람들을 괴롭히는 있을법한 인성악이라 거론할 가치가 없이 그저 불량한 심리음영만 던져줄수 있다. 마감에 윤진이를 돌변적으 로 정의의 수호자로 내세세우겠지만 의도적이 되고만다. 모든 사물의 발전은 인과관계로 맞물려야 하니까.     작가는 그것을 시청자의 조급함으로 탓할 리유가 없이 과유불급으로 진행되고있다. 순진무구한 귀여움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별 뚜렷한 목적, 방향성도, 실천력도 없이 그저 옹고집쟁이로 시사되면서 작자가 소기한 창작목적을 등지고 말았다. 한국 식으로 말하면 “증말 짜증나…”가 공통심리일게다.     그런 억지설정에도 차질이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심혈을 랑비한듯싶다. 작자가 이런 인물을 부각해서 무엇을 계발하고 인도하자는건가? 그저 떠오른 감각을 조합해서 재미나 느끼라는건가? 제아이를 버린 아이엄마도 인간이길 포기했지만 최선정처럼 앞뒤 분간없이 자기딸하고만 잘먹고 잘살겠다는 생각 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엄마는 인간도 아닌데…그리고 아이아버지는 차던지고 그의 씨는 한정없이 곱다는 모성애는 공통된 녀성감정상 비론리적이다.     최선정이는 리기주의가 낳을수 있는 그런 변태적인 품성의 소유자만 아니라 범죄의 달인이다. 2월 12일, 아침에는 유진이를 살해하는 지시까지 내리는듯, 등신 도진이는 반대하는듯 하다가 결국 집행하여 “절정”을 도모하는듯 하는데 결국 또 질질 끌기위한 다른 계기로 될듯싶다. 선정이는 “너희들은 끝장났어”하고 히스테리적으로 소리치며 눈을 반짝인다. 그런데 후에 보면 유진이는 가질것 다가진 선정이가 왜 자기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바보를 만들면서 무슨 재미를 보는것같다. 그리고 선정이가 백재헌에게 왜 나에게 이러는가고? 후회하게 될거라고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이다. 여기서 작가의 인생관, 가치관이 어떤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죄를 짓고도 피해자와 협의하면 풀어주는 그런 법이 있다는 우스운 관념을 가지게 되고 사장인지 하는 사람은 빈통이여서 매사 두드리면 빈소리가 나오게 하였는데 사건진행을 결재할 인물을 바보로 만들고 나중에 인물처리, 사건처리가 바쁘니 일부 기억력상실(신경중추에서 기억구는 칸칸이 나누어져있는가? 충격의 성질에 따라 어느 한칸의 기억만 잃는다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다. 작가는 사회, 독자에게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사명감이 지워져있는데 작자는 작정하고 청중을 가지고 놀고있다.    모든 유리한것을 선정에게 집중시켰지만 결국 과유불급이 되였다. 아무리 감각을 따르는 시대라도 “마음을 따라가는것에 중점을 뒀다.”고 한 그“전형수법에” 경악하게 된다. 악인도 예술형상이지만 선정이 같은 악형상으로 선에의 지향성이 달성불가능이면 바람직하지 않다. 인물형상들이 생활의 진실의 토대에서 부각되지 못하고 진실한 전형환경이 아니기에 드라마는 길어도 정서적감흥은 제로일것이다.     생활의 론리는 추상사유의 론리와 다르다는것은 작가가 아니여도 알아야 하는 삶의 도리이다. 생활의 론리는 생활내용 자체의 호상련계와 호상제약속에서 체현되여야 한다. 드라마는 생활의 론리를 분식하는것이 아니며 마음대로 뜯어고치는것이 아니다. 예술상상이 생활을 초월한다는것은 능동적으로 창조한 생활 즉  “제2의 자연”,혹은 “제2의 생활”을 가리킨다.   드라마창작에서 표상의 분해와 재조합은 자유이지만 시종 생활의 제약을 벗어날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벗어나도 엄청나게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기에 무리수를 둘수밖에 없다. 작가의 조작된 생활의 론리에 따라 움직이여야 하는 배우들마저 연기가 억지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배우들의 잘못은 아니다.  잘못이라면 엉망이 된 예술질서에 자기 진실한 감정을 융합시키려 애쓴 예술활동의 참여이다. 배우들은 왜 고달프고 억지가 될수밖에 없는가?     예술상상은 인물의 성격규정에 부합되여야 하는데 선정이란 인물은 만인지상의 인물로, 사회결약도 이겨내지 못할 필승불패의 초인으로 설정되였다. 어떻게 설정되든 적어도 부동한 성격들은 생활의 규정성에 부합되여야 한다. 그러나 선정이만은 례외로 되였다. 선정이의 형상이 작자의 우상인지? 아니면 작자의 가치척도, 가치기준, 가치취향인듯싶다. 어떠한 성격이든 그의 발현과 발전의 생활적, 감정적 원인이 있게 되는데 선정이는 오직 자기 딸을 부자집계승자로 만들기 위한 그 하나의 목적으로 녀자에게 있을법한 사랑도 인간성도 륜리도덕의 계선도 헌양말로 되여진다. 선정이가 지고무상의 존재로 호령질하고 모두가 속히우고 온 사회결구가 그녀가 짜나가는대로 짜지는 어처구니없는 구상은 독자들을 선의적인 분노에로 이끈다.      미의 본질은 참된것과 착한것의 통일이고 감성과 리성의 통일로서 거짓된것, 악질적인것으로부터 참된것을 지양하도록 충 동하는것이다. 미적체험의 심도로 말할 때 순수한 쾌감으로 충만된 표현보다는 반대로 악의 형상이 주는 감수는 더 강렬하 다. 부정인물들의 그 야비하고 잔악한 품성들에 대해 분개하고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진, 선, 미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심미기능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력동적인 효능이다.     생활속의 추악한것들이 어떻게 예술미의 일부분으로 바뀌는가? 작가가 이런 추악한것들을 “마술사의 지팽이”로 한번치면미적인것으로 변하는데 이것을 예술가의“련금술”이라 한다. 그러나 최선정이같은 인물형상은 그게 아니다. 이렇듯 심미의식은 단순한 정관적인 관조의식이 아니라 동시에 평가의식으로서 그에는 인류본성의 보편성경향이 전제로 된다. 바로 그래서 매일 아침 방영되는《사랑했나봐》에 대한 시청의견들이  분노와 증오, 질타로 도배질되고있는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량하고 정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정감의 분출인것이다.  누구의 말마따나 이 드라마의 제목은《미쳤나봐》가 제격일듯싶다. 작자가 윤진이라는 인물형상을 설정할 때 미적인 속성을 지닌 인물들이 겪는 운명적고통을 표현하여 비장미, 거기서 드러나는 거짓된 사회현실, 비틀어진 인성, 억압속에서의 모지름, 부당한 지배에 항거하는 리념가치를 긍정하려 했는지는 몰라도 구성된 드라마에서는 그것의 사돈에 팔촌쯤 되는것도 시사하지 못하고있다.     모든 인물을 선정이의 악행을 조장하고 기고만장하게 기탄없게 만들기위 위한 움직이는 장치로 설정한 작자의 스토리구성이 아무래도 비정상인것같다. 왜냐하면 부동한 성격의 인물지간에 필연적으로 생활규정성의 상호관계가 체현되여야 하는데 최선정=작가의 관념에서는 배제되여있다.  생활의 총체적인 발전추향에 스토리, 성격변화가 순서점진적으로 전개되여야 하는데 작자는 임의대로 헝클어놓고 어깨와 허벅지를 붙여놓고 팔과 발가락을 붙여놓고 귀와 입을 한데 집어매는 식으로 사건을 전개시키고있다. 원래 평론할 건덕지도 없는 한국시청자들의 표현대로라면 막장드라마인데 작가는 생활의 론리를 마구 짓밟으며 멋대로 나갈 권리도 없거니와 그냥 그렇게 가다가는 돌아설길 없이 낭떠러지에 추락하고 말것이다. 말하자면 실패작으로 무효로동임을 선고하게 되였다는 말이다. 역시 또 하나의 한계를 보여주는것이라 할가?
171    돌아서기의 지혜 댓글:  조회:8648  추천:0  2013-02-11
                               되돌아서기의 지혜                                        최 균 선       말이 아니면 듣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공성인이 말했던가, 그러나 자연과 감성에 약한 생각하는 갈대인 우리 인간들은 말이 아닌 말에도 곧잘 귀가 솔깃해지고 길이 아닌 길에도 자칫 들어서길 잘한다.     명지하기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 묵자님도 한때 인생의 기로에 들어섰다가 울면서 돌아섰다하고 저 유명한 《죽림칠현》중의 한시인이였던 원적선생도 궁지에 빠졌다가 한바탕 통곡하고 되돌아선후 폭음하고 광기를 부리면서 세상의 이목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같은 록록지배들이야 어찌 되돌아서기의 지혜를 미리 깨칠수 있으랴!     대저 보행으로 먼 길을 따날 때에도 행선지가 예정되고 그날의 일정이 미리 그려져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저 길을 조이려는 욕심에서 해가 서산에 지는데도 종종 걸음을 치다가 《아차!》늦었다 싶으면 벌써 너무 늦어진 때이다. 주막은 뒤에 있다. 그래도 되돌아설념을 않고 객기를 부려 그냥 걷는다면 그게 명지할가?     인생도 장거리려행과 같다고들 한다. 허위단심 걷고 걷다가 지친듯싶을 때면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 어디쯤에 와있는가? 해는 지지 않았는지? 내가 가는 길이 기로나 아닌지? 궁지에 빠져 후회막급 가슴을 쥐여뜯기전에 자신을 안으로부터 차분히 정리해야 지혜로운 인생자세라 하겠다.     이미 만족의 현관을 지나 행복의 방에 들어섰다면 다시 불만족의 뒤문을 열고 남에게 알릴수 없는 어두운 밤길을 재우칠 필요가 있을가?     이런 재미있는 외국우화가 있다.     추장이 땅을 떼여준다는 소문을 듣고 욕심쟁이지주가 선참 달려가 땅을 많이 떼줄것을 청구했다. 이에 추장은 지주에게 여기서 서쪽으로 곧추 걸어가서 해지긴전 에 돌아올수 있는곳까지 계선으로 다 주겠노라고 응낙했다.     신바람이 난 그 지주는 죽을판살판 걸음을 날리였다. 탐욕이 탐욕을 채찍질했던것이다. 가고 또 가고…결국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되여버렸다. 하지만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그냥 욕망의 지평선을 향해 걷고있는지 하늘이나 알일이다.     혹자는 엉터리얘기라고 코웃음쳐버릴수도 있겠으나 우리 주변에도 이런 돌아올줄 모르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는것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인간심사중에서 욕망은 가장 다사분주하고 지칠줄 모르며 퇴직을 모르는 종신감정이다. 돌아오지 못한 그 사람은 죽기전에 돌아갈수 있는지를 생각이나 했는지? 모르긴 해도 그는 참회하지 않았을것이다. 이 세상 모든 탐욕자는 만족과 인연이 없듯이 《참회》ㅡ 두 글자와도 인연이 없기때문이다. 또 그네들에게는 량지도, 리성도 너무 보잘것 없는것들이기도 할것이다.     그러기 오직 자신의 리익을 챙기는 그것에 삶의 전부의 목적, 의의가 있듯이 리득의 무한대한 확장을 위해서는 눈물겨울만큼 비장한 자태로 용왕매진한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라이 이어서는 그런 《혁명적투지》를 과시하는데 실로 유취만년의 기념비라도 세워주고싶을 정도이다.     물론 세상에는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현자대신 자신의 노예로 되여 있는 사람이 절대대분이다. 그만큼 완전완미한 인간은 흰까마귀만큼 찾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완전완미함은 하느님의 척도이고 완전완미함에 도달하려는것은 우리 인간들의 척도이다. 이브가 뱀의 유혹에 못이겨 금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먹인후부터 인류앞에 펼쳐진것은 무변광대한 욕망의 바다였고 희망은 의연히 판도라의 신비한 상자속에 있었다. 그러나 탐욕의 파도는 세월이 갈수록 흉용팽배해졌고 감성을 꼬드겨 량지도, 판단력도, 의지도 마비시키는 《시렌님프》들이 바다우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허나 현대인들은 자기를 묶고 귀를 틀어막은 오듀쎄우스만큼 강인하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마당이 경기장이기도 하고 격진적인 시점에서는 싸움터라고 할수 있겠다. 생활의 경기에서 앞선자는 우승자이다. 싸움터에서 많이 얻은자는 강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유고가 말한것처럼 성공이야말로 바야흐로 썩어무너지는것으로부터 떨어지는 한방울의 교훈이다.     진짜 전장에서 되돌아선다는것은 도주를 의미하며 뒤잔등에 창을 맞았다면 영원히 치욕의 기둥에 매달려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전장에서 때론 멋진 후퇴는 대담한 공격만큼이나 가치가 있다고 할수 있다. 자신을 제어할수 없는 자에게는 자유란 있을수 없다고 한말은 얼마나 잘한 말인가?     생활은 무슨 마라손경기도 아니고 그 무슨 《략탈전쟁》도 아니다. 이런 구절을 읽은 생각이 난다. 승리했을 때 행운으로부터 서슴없이 떠나라. 행운은 갑작스레 오는만큼 오래 머물지 않는다. 중단된 행운은 틀림없이 안전할것이며 달콤하기도 하다고…  행운은 그 은총이 너무 높아지면 짧게 지속됨으로써 균형을 이루는 법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구는 한쪽으로 기울어졌을것이고 인간세상엔 불행만 남아돌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리득을 얻기 위한 경기에 악바리 쓰고 있고 그러는만큼 수없이 많은 황당극을 연출해내고있다.     추구와 정복의 견지에서 인생은 힘겨운 등산이라고 할수도 있다. 절승경개는 험한 봉에 있거거니…그래도 산은 높아도 낮아도 등산자의 발밑에 있다. 정상에 치달아 오른 그 희열이야 이루다 말할수 있으랴!그러나 산에 오르는 그 자세가 더 멋지다고 하리라. 그리고 정상에 오른 만족감뒤에 이어지는것은 돌아서는 길ㅡ산을 내리기이다. 여유롭게 산을 내리는 그 마음가짐은 퇴각의 치욕이 아니라 되돌아서는 지혜이며 자기 인생길에 찍는 감탄표이기도 하다.     갈래갈래 갈린 길은 모두 로마에로 통한다는 구라파 격언이 있다. 하다면 인생에 갈래갈래 갈린 길은 모두 희망의 바다에로 뻗은것이 아니랴! 세상에 갈림길이 너무 많아서 기로에 빠졌다고 탓하는것을 다 바보들이라고 말할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알고 서도 돌아설줄 모르는것이 더 멍청이들이라 할수 있으리라.     탐욕때문에 더 많은것을 얻으려다가 이미 차지한것마저 잃고 나중에 자신마저 훼멸시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본다. 인생은 환득환실이라는 엄연한 법칙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래 당신은 동시에 불면서 삼킬수 있는가? 탐욕의 금마차우에 높이 앉으면 제어의 고삐를 제때에 당기기엔 너무도 무력한 인간의 리성이요 육체는 무작정 나가기만 하려하니 이 얼마나 슬픈 인생극장이냐?     마음의 골방에도 커다란 저택에도 가득 채워놓고서도 더 채우지 못해 몸살하는 이들이여, 바라건대 자기의 욕망에 소망의 빈자리를 남겨두라. 이제 조금 남은 소망마저 고무풍선처럼 잔뜩 타산을 채워넣고 목에 걸고다니면 언젠가는 터지고 말것이다. 우유도 너무 욕심사납게, 잔인할만큼 짜내면 우유가 아니라 피가 나올뿐이다.     《홍루몽》에서 조설근선생은 아주 재미있는 글귀를 만들어놓았다. 저 세상만사가 좋을 때면 마는 날이고 마는 날이면 좋은 때이고 말지 않을 때면 좋지 않을 때이며 좋게 되자면 말아야 하느니라. 이 말은 행불행도 종이장을 사이둔 이웃으로서 극한의 낭떠러지에 이르러 진퇴량난이 되지 말라는 금언이 아닐수 없다.     우리 선조할배들도 좋은 시조를 남겨주었다. 《절정에 오르다 하고 낮은 데를 웃지 마라/ 뢰정 된 바람에 실족키 괴이한가/ 우리는 평지에 앉았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역시 돌아서기 지혜를 암시하는게 아닌지…                2003년 5월6일  
170    색바래진 광환 댓글:  조회:8829  추천:0  2013-02-08
                                             색바래진 광환                                                    최 균 선       넓다란 교실을 촘촘히 메우고 바로 코앞까지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탐구욕에 타는 눈동자들. 그런데 졸업날이 다가올수록 그 눈빛이 학생마다 다른것을 느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눈동자의 심연이 깊어보였다. 미래에 대한 암울한 걱정이 서려있는것인가? 내 추측이 틀리지 않을것이다. 혹 한국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흥취로부터, 혹은 한국어를 배운 우세로 취업경쟁에서 한몫 볼가하는 목적에서 학생들은 열심히 한국어를 배운다. 그것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곤혹을 떨쳐버릴수 없다.     대학공부는 왜 하는가? 대학을 다니기 위해 다니는 학생은 거의 없을것이다. 대학공부는 “도금”이나 “문화투기”가 아니라 자아완성과 자아실현의 현시대의 최적의 방식으로 되여있다. 그런데 현시대에 대학생의 광환은 더는 눈부시지 않다. 국립 대학의 졸업생도 무직자의 고배를 마시다못해 구두를 닦고 때밀이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취업난은 흑색7월의 시작으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대학생들이 겪는 가장 본격적인 인생고가 되고있다.     물론 대학졸업생의 취업난은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도 아니고 어느 누가 모르지 않는 사회적대화의 주제이지만 무대는 그냥 그 무대이고 사회는 역시 그 사회인데 왜 이렇게 되여졌는가? 지금 대학생들은 외국어도 장악했고 컴퓨터도 잘한다. 옛날 대학생들은 이 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하지만 그때 대학졸업생들은 금싸리기였고 그 광환은 천리를 비추었더랬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아래 간곳마다 대학생이고 부딪치느니 석사요 박사이다. 전국적으로 석사연구생이 무려 5만도 넘었다는것은 이미 지나간 사실이다. 뒤이어 박사들도 대량 쏟아져나오고있다. 돈찍는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빨깍거리는 지페들이 쏟아져나오듯 연구생들이 온하늘에서 날아옌다.     인재거품은 인재의 가치저하를 낳을수밖에 없다. 엄격한 의미에서 학위증서의 거품은 학위를 싸구려로 만들어버린다고 해야 할것이다. 한마디로 정체성은 아니더라도 내재적질량문제가 아닌가싶다. 번쩍거리는것이해서 다 금은 아니다. 금과 황동은 다 금빛이다. 그러나 황동은 필경 금이 아닌것이다. 금자탑에서 나온 대학생들이 황동시대에 들어섰다. 아직도 겉면의 빛갈을 보고 금덩이거니 하는 진부한 관념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페단이 만연되였다.     취업성공률은 대학졸업생들에게 에누리없는 시금석이 되였다. 한국 김우중이라는 기업가가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고 했지만 중국은 땅이 넓은만큼 인구도 많은데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졸업생들이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할것인가? 일컬어 최고의 학당에서 비적격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인과의 철칙 대로 교육체계의 운행에서 악성순환이 현시되고있다고 말하면 편견일가?     부동산거품처럼 교육거품은 도처에서 부글거린다. 공업, 상업마당에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괴이한 현상이 오늘 지식계에서도 만연되고있다. 호남 모대학의 박사생 한개반에 80여명 학생이 있었다. 급기야는 관원, 기업가 박사들까지 용솟음쳐 나오다보니 어느것이 진짜 금덩이인지, 동인지 혼동하기조차 어렵게 되였다.     운명은 매개 사람들을 앞으로 떠밀지만 결과가 영원히 과정보다 더 중요시되는 한 이런 문화반차현상은 피할수 없다고 말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지금은 3류 사립대학들에서도 석사나 박사가 아니면 아예 문전사절이다. 그러니 본과생은 더구나 명함장을 내밀 곳이 없게 되였다.    교육은 자고로 신성하였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교환법칙하에 그 가치실현을 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등교육의 내용체계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지성인들은 다 개탄한지 오래다. 4년을 능력형의 인재가 아니라 구태의연하게 공부기계를 만들어 내고있다. 그러니 졸업생들이 교문을 나서고 싶어하면서도 무서워도 하는것은 그들의 잘못만이 아니다.     물론 대학생들의 취업난은 선진국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선진국의 경우 대체로 급격한 경제성장이 없어 젊은 사람을 받아들일수 있는 흡수력이 부족하기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비슷한 국정은 아니지만 취업문제에서는 상황이 비슷하다. 대학생들의    취업난을 시대발전의 필연적 결과라고 가볍게 말해버릴수 있는가? 속담에 손바닥이 따르고 손등이 다르다고 했다.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면서 대도리를 풀라면 아무나 할수 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들을 보고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수 없다. 이전엔 동등한 조건하에서도 학력이 높을수록 환영받았지만 학벌시대이면서도 학벌이 찬밥신세로 되고있는 근본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학습을 일종 생산 흐름선으로 비유할 때 지식이 만약 상업가치로 전화되지 못한다면 지식은 한낱 재고 품에 지나지 않는다. 재고품은 리윤을 내지 못하는데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자금 류통을 가로막는 원흉이 되고만다.     현시대 취업난은 산업구조의 부조화에도 있다고 할수 있다. 그가 누구이든 업주는 렴가로동력을 가지고 더 많은 리윤을 얻어내는것이 최종목적이지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려는 사회적책임감을 앞세우지 않는다. 눅거리 양말을 생산해내거나 겉모양 만 그럴듯한 아이들 놀음감을 만들어내는데는 설계사도 별로 필요없다. 남의 기성산품을 모방하면 되는것이다.     렴가로동력으로 고리윤을 짜내면 만사대길인데 요구높고 로임이 높고 자태가 높은 대학생이 어디에 설자리가 있을것인가? 기업주들이 대학생들을 채용하지 않는 비뚤어진 심리태세도 문제거니와 채용한다 해도 박사를 석사졸업생으로 쓰고 석사를 본과졸업생으로 쓰며 본과생을 전과생으로 쓰는게 상례로 되였다.     그런데도 이화된 현시대 젊은세대들의 일의 가치와 보람을 알려하지 않고 로임을 주는만큼 일한다는 약삭빠른 타산, 자기중심주의의 팽배. 직업관 인생관 가치관은 기성세대와 차이가 많다. 대학은 나왔으나 바람직하게 성숙되지 못한것은 사실이나 학벌로 사람을 선발하는것은 능사가 아니다. 지식과 능력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고 량쪽의 수레바퀴와 같지만 별개의 문제로서 졸업증과 학벌은 백프로 필연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 창조정신을 비롯한 인격 력량이 꼭 학습성적에서 체현되는것만은 아니기때문이다.     객관현실 탓도 있지만 대학졸업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내재적에너지의 여하를, 자신의 취업심리자세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물이 얼면 얼음이지 그냥 물은 아니다. 어떤 대학을 나왔던간에 모두 대학생이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도금제품보다 속속들이 녹쓸지 않는 불수강이 되는게 더 실용적이고 항국적이라는것을,    감각의 량면은 모두 필요하지만 영원히 하나로 합쳐질수 없다. 사회의 많은 현상은 리론이나, 정신이나, 경제학원리나, 철학으로 해석할수 없다. 이 땅에 류류별별의 “별”은 지천이지만 진정한 별들은 저멀리서 반짝거린다. 자기의 별자리를 잘 찾으 라! 꿈속에서는 사시장철 꽃이 필수 있고 파초잎에 떨어지는 비방울소리 정겨울수 있으나 현실은 준엄하기 그지없다는것을 교문을 나서면 곧 알게 될것이다.                                           2010. 12. 8
169    <<실락자>>의 생명송가 댓글:  조회:7574  추천:0  2013-02-06
                                       《실락자》의 생명송가                                                       최 균 선       문학이란 본질상에서 인간의 사회, 인성에 대한 인식과 재건이며 아울러 형상의 구성속에 침투된 작가의 자아의식으로서 작가의 내재적요소의 외향적투영의 결과이다. 인간의 생명본체는 평화로운 환경에서 자기 삶을 복되게 영위하려는 원초적욕망을 고유하고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러한 심령에로의 자유적도달과정중에 인간의 생명존재의 력사에 모식화된 생존방식가운데에는 흔히 사회적조절이 있기마련인데 이런 조절의 극단적표현이 곧 전쟁이며 말그대로 파괴와 살륙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단순한 본능적내구력에 좇아 살려한다. 이는 사회력사의지와 개체생명간의 모순충돌을 생성한다. 소설《인생숲》의 작자는 바로 전쟁과 전쟁이 가져오는 죽음(특히는 혈육상잔, 동족상잔)으로 인한 고통, 비애와 환멸, 허무 등등 인간의 심리심층을 파고들어 인간의 평화로운 생존과 건강한 발전을 촉구, 도모하는 반성의식을 제시하고있다. 여기서 소설인물의 운명적인식이 주제로 설정되고《인생숲》에 깔린 심층적의의가 흘러나온다.     재능있는 청년소설가 류연산은《인생숲》에서 사실주의소설과는 다른 예술별미를 보여주고 있는바 초연한 태도로 객관현실을 관찰하고 핍진하게 묘사한것이 아니라 한《실락자》의 심층세계에서 태치는《생명송가》를 체현시킴에서 교차적묘사수법, 특이한 서술자의 인입(비리성적인 동물의 인성화)서술방위, 각도의 부단한 변화 등으로 독특한 구성을 시도하였다.     작자는 소설에서 비관정서로 생활을 감수하고 객관현실을 내재화하는 과정에 농후한 주관적색채를 짙게 비껴놓았다. 이러한 사상관념층차와 함께 구성된 작품의 예술세계에서의 심층결구는 자연히 예술적정감결구를 이루게 된다. 이런 정감결구는 작품의 예술스찔, 심미특성에 직접 영향을 주게 되며 작가의 심미리상이 작품속에 시종 맥맥히 흐르게 한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인물성격발전의 내재적론리성과 성격형성의 력사과정에 주의를 돌리지 않고 작자의 정감태도의 복잡성이 우세하고 있는것이 특징적이다.     말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작자의 내심감수에 공명하도록 의도적인 구성수법을 펼쳐나감으로써 일정한 탐색과 예술기교를 보여주고있다. 소설은 재래식의 굴곡적인 슈제트 발전전개를 포기하고 의식공간의 립체결구방식을 취하여 작자의 정감경험, 환상을 예술적으로 체현시키고있다. 문제결구상 이런 산문화는 서사적예술재현의 성분을 감소시키고있는데 또 하나의 혁신적시도가 있다고 할수 있다. 총적으로 이 소설은 인본주의에 립각한 작가의 내재적심령세계와 현실적존재, 및 옹근 사회생활 에서의 비리와 선악, 력사적착오에 대한 감수 및 비판에서 작가적립장을 세우고 전쟁일반을 질책, 반대한 선량한 념원의 허구성정감소설이라 할수 있다.     문학은 결코 정치, 경제에 제공하는 감성재료가 아니다. 따라서 생산관계, 계급 관계의 제약속에서만 인간정신세계의 풍부성과 복잡성을 인식하는것은 예술적인식 방법이 아니다. 문학은 반드시 력사학적, 인류학적, 철학적, 특히는 심리학(정서심리, 인격심리)적으로 인간일반을 인식해야 하며 문학의 내용도 이런 각도에서 소급되여야 한다. 이것이 곧 이 소설창작의 기점이며 소설의 내시각점이다.     인간의 계급성, 생산관계 이외의 세계에서의 인생을 선험적으로 경화시키고 절대 부정하면서 생경하게도 계급관계, 생산관계의 척도로 인간을 표준하려는 용속사회학의 기형아인 페단문학의 규정모식을 벗어나서 비생산관계, 비계급관계에서의 인간의 사상감정, 행위, 감각정서를 파악하고 현시하려한데 일정한 돌파성이 있고 또 이러한 시도는 자체의 정당성을 충분히 보류한다.  《인간은 일체 사회관계의 총화이다》아울러 인간의 심리체험은 복잡한 사회관계와 사회모순충돌이 인간내심에서 필연적으로 굴절된 반사이다. 따라서 소설이라는 이 성실한 한쪼각 거울속에서도 인간의 고유한 복잡성과 인간의 정신적인 광채, 혹은 음영이 비쳐지기 마련이다.     력사전진운동중의 하나의 환절로 되는 전쟁은 그 어떤 개인의 선량한 념원일지라도 무시하고 거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면서 자기의 력사행정을 완수한다. 그런데 사회현실과 인간은 쌍향(双向)적관계에 처해있다. 현실적인간은 모두 가치관념과 리성의 지배하에 현실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게 되며 개조하고 초월하려 한다.(이런 초월은 근근히 사유령역에만 국한된다) 여기서 이  소설의  창작합목적성과 주제의 적극성이 확인되는것이며 소설인물의 존재의 권리와 심미가치가 예견된것이다.     사회적인간으로서의 산포수의 내심세계에 찍혀진 사회적락인은 심각하며 령혼,자아의 박투, 2률배반의 심리현상은 우리에게 비장한 사색을 안겨준다. 궂은비 내리는 숲속같이 침침한 정서세계, 침중한 정신부담, 심리상처, 그속에 활화산같이 내뿜는 혈육의정… 어떠한 력사거변이든지 불가피적으로 인간의 심령을 충격하여 흔들리게 하며 그로부터 인기된 심리평형의 파괴, 곤혹 등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또 이러한 심리심태가 해당시대 일부 사람들속에 산생되는것은 객관적필연성이 되기도 한다.    력사적현실에 대한 부정과 인성긍정의 충돌은 인류적비애이다.《실락자》심태로 생활을 관조한 결론은 절망이다.《…그는 개의 눈에서 비로소 하찮고 보잘것없는 자기의 존재를 깨달았다. 마술처럼 착잡하게 뒤엉킨 거대한 동란의 세계에서 한민족, 한혈육이 어렵지 않게 산산쪼각이 나고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작자는 력사가 준 상처, 동란하는 인간세계에서 침몰된 인간의 생존상태를 선량한 리념을 안은 형상사유로 보여주면서《인간 스스로 빚은 화》에 대해 타매하고 영원한 평화를 촉구하고있다. 그러나 한《실락자》의 생명송가—영원의 인성도 엄혹한 현실, 불가항력의 력사거류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비참하다.     여기서 소설인물의 2중성을 씀에 있어서의 진실성문제가 제기된다. 인물성격 복잡화 역시 예술표현의 방법문제이지만 중요한것은 사회, 인성에 대한 작가적인식의 현실성, 과학성의 광도와 심도이다. 즉 인성의 복잡함과 그것이 예속된 사회력사범주 의 가치판단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납득되도록 쓰는가 하는 문제이다.     작자는 소설에서 원거리, 근거리 묘사수법, 간접서술과 직접서술(혹은 묘사수법)의 빈번한 교차, 서술자와 서술대상, 서술자와 피서술자, 제1서술자와 제2서술자의 무시로 되는 교체, 시간과 공간관계의 임의의 확정과 배치, 인물행동의 로출과 은페 등 면에서 현대파적소설구성으로 예술기교를 보이고있다. 가령 일반독자들이 전통 적심미심리로 흔상한다면 눈에 설어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알뚱말뚱하다고 할것이다. 확실히 소설은 소설화한 산문감이 선견되고있다.     탐구적각도에서 흔상한다 하더라도 소설인물(비록 자기 생명인격과 심미리상에 충성하고 있지만도)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며 너무도 막연한 인류의 원죄를 더듬게 한다. 평화적자유생존의식이 생명가치의 다른 한 중요한 요소임은 주지하는바이다. 전 인류적력사, 혹은 응집된 력사순간에도 인간생활의 천태만상이 드러날수 있고 또 매 종류의 생활이 다가 원천을 가지고있는것이 아니라 할 때 혹자는 철학적반영론의 원리로부터 과학성과 진리성으로 작품내용의 진실성정도를 흥량해서는 안된다고 반기를 들수도 있을것이다.     나는 결코 소설을 사실주의각도에서 표상기억을 동원하여 력사적현실을 고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파작품의 환상, 혹은 변형된 형체—등으로 생활을 반영했다고 심미사유를 달려보는 경우에도 우리의 정서기억, 부호기억, 의의기억 등 면에서 공명된 감각적표상과 정서체험을 얻기 힘든것은 무엇때문일가?     우선《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본질과 같은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연성 역시 자연적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회고하게 된다. 사실상 한 인간은 사회적존재속에서 자기를 고립시켜 나올방법이 없으며 독립된 개체로 자재적이고 자위적으로 생존할 능력도 없는것이다. 반드시 자기와 타인 나아가서는 사회군체와의 협조적인 진행속에서만 가능한 우리 인생이 아닌가? 개체는 반드시 일부 사회행위 조절기의 작용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으며 사회에 대해 져야할 일부 책임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알면서도 범해둘수는 도저히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될수 있을것인가?     한 인간으로서 개체로 되려는 과정에 시종 모순의 2중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라는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적평화원칙으로써 사회발전의 파동을 온정시킬수 있으며 인류의 평화일반을 보장할수 있을것인가? 이 역시 곤혹이다. 인간의 일계렬의 존재의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사회, 문화, 력사의 제약성과 영향력은 인간의 원초적욕망을 압박한다.(이는 인간의 영원한 비애이다)     반면에 이러한 원초적욕망으로 하여금 리성의 력량으로 승화되게 하고 인류력사의 지속성을 보장하는것도 그것이다. 이러한 인간세계에서 숲속의 홀로선《봇나무》처럼 자기 생명의 상록수 내지는 한 민족의 생명인격을 도고히 지켜갈수 있을것인가? 이에서 오는 곤혹과 비애가 소설에서 노린 핵인지 모르겠지만도…그러나 진통하는 악의 력사의 작용은 력사운동중의 중간역일뿐 절대 종점이 아니라는것, 최종적으로 말하면 국부적인 일정한 정도의 그런 악의 강림은 오직 전방위적이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착한것에로의 길을 닦아주는것이라고 하는것이 변증법칙에 맞으며 인류의 영원한 비애와 고통, 환멸에서 해탈되는《령약》이 아니겠는가? 또 이런 인간이라야만 현실적이며 진실한 인간이다.     또 인류의 계급적행위도 특정된 력사시기에서의 인성의 일종 형식으로서 개인의 계급성도 인성내용의 한개 부분일진대《동족상잔, 혈육상잔의 비극, 그는 누가 옳고 그른지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인간보다 개성의 비교적 높은 층차에로의 발전 역시 개인을 희생하는 력사과정을 대가로 한다고 인식하는 인간이 더 사회적인간의 본질을 구비한 인간, 고통과 절망에서 해탈하는 현실적인간일것이다.   《그는 개의 눈에서 비로소 하찮고 보잘것없는 자기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세기말적인 정신상태를 가진 인간을 민족의 실체화한, 또는 개체화만 민족적인간으로 용납할것인가?소설인물의 고통과 적막, 비애가 실존한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절해고도의《한적한 우환감》으로만 느껴지는가?작가는 비계급적인성의 충분한 표현의 권리를 가진다. 이면에서 쏘련의 소설《마흔한번째 포로》가 전범이다.     소설에서 포로된 중위와 녀홍군전사의 계급관계가 희석되였을 때 그들의 비계급적인성은 충분한 표현을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결국 중위는 마침내 자기계급에로 돌아서고 녀전사의 계급성도 당연히 인성의 주도방향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며 아름다운 인성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예술부호로 표현되는 작가 개인의 정감을 승화된 민족적(인류적?)정감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정감을 산생시킨 사건을 단순히 복술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은 다 아는 명제이다. 그러나 소설의 인물이 엄혹한 현실앞에서 하나의 참조물로 삼고있는《동화의 세계》,《잔디밭에 속잎나고 노고지리 우짖는 꽃동네》《머루, 다래를 뜯고》 피리불며 소를 몰고 물장구치던 그《못견디게》그리운《무릉도원》을 작가가 너무 리상화함으로써 현실적실감을 상실하고있다.     이 소설에서처럼《시체를 빌어 혼을 부르는》정감형식화의 수법을 쓸수는 있다. 그러나 자연적정감으로 하여금 보다 보편적의의를 띤 정감으로 승화시켜 표현함에 있어서 인간의 내심의 풍부성, 복잡성에 대하여 현실적파악이 더 공고했더면 좋았을 것이다.    군사제재가 아닌 반전쟁소설은 어데선가 제약성을 받고있다. 인성존재와 표현의 권리를 부인할수는 없다. 우에서 언급한바 이 소설은 어쨌든 선량한 념원의 허구성 정감소설로 음미의 가치를 다분히 가지고있다. 필자는 소설《인생숲》의 창작의도와 주제발굴에 적극 찬동하면서 보다 진실하고 현실적인 력작을 충분한 믿음으로 기대하며 천견을 마친다.                                    문학과 예술 1989년5월9-10일
168    가사에서의 정서의 진실성문제 댓글:  조회:9215  추천:2  2013-02-06
                           가사에서 정서의 진실성문제                                       최 균 선       시를 서정의 문학이라 한다. 시가“诗歌”라 할 때 가사도 서정의 문학이 아닐수 없다. 가사의 고유한 형태적특성은 서정성이다. 가사에서는 흔히 비흥법으로 시적대상물을 서정적으로 묘사한다. 례하여 “장백림해에 아침해 솟아오고”,“아름다운 무지개 강산에 비끼고”, “산마다 봉이마다 진달래 피여나고”등등이다.     그 어떤 경물묘사이든 서정적묘사방식으로서 시인이 생활에서 받은 감동과 자기가 체험한 사상감정을 정서적으로 토로하는 생활반영의 방식이다. 서정성은 가사(시) 문학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내용을 규정하는 근본요인으로 될뿐만아니라 형식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되는것으로 하여 시(가사)문학의 기본속성이 된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정서적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미학적견인력을 담보하는 요인으로도 된다.     그만큼 서정의 진실성문제는 슬픈 노래이든 흥겨운 노래이든 선률의 기원으로 될 가사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며 가사의 존재와 공감력에 따른 운명에 직결된 문제이다. 거듭하여 말하거니와 진실한 서정은 가사의 본질적특성을 살리는 문제이며 가사의 생명줄기이다. 슬프면서도 흥겨운 노래가 나올수 없고, 흥겨운데 눈물겨운 노래를 부를수 없지만 진실한 서정이 없이는 가사가 존재하고 불려질 리유가 없다.     서정에서 “서”는 뜻을 펴나간다이고 “정”은 명사적으로 쓰기에 “정서 혹은 정회” 로 리해되여 왔다. 이에 기초하여 서정을 “정을 펴나간다”,“정을 그려낸다”고 정의 할수도 있겠다. 칠정륙욕의 인간, 희로애락으로 얼크러진 인간의 정감인만큼 어떤 서정이든 다 토로할수 있고 펴나갈수 있다. 요는 그런 서정이 생활적이고 나아가서 현실적이며 모두의 가슴에서 굼실거리던 정서여야 공감의 벽을 울릴수 있다는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것인가를 먼저 가늠해야 하고 공성의 력량이 미비하면 그 서정을 접어버려야 한다. 사실 불리우게 하려고 알 심들인 노래가 불리우지 않으면 읊어지지 않는 시보다 더 애석하고 비참하다.     인간의 감정과 정서는 서정을 낳는 기제이지만 서정의 대상은 경물, 생활현상, 감정활동이다. 시적정서는 일반감정과 구별되는바 개성적이면서도 공공의 정서로 표현되여야 한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시인이 생활과의 관계속에서 구체적으로 보고 느낀 현실세계의 표현이여야 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정서는 감정에 비하여 보다 주관적인 제기에 의하여 표현되는데 보통의 인간의 내면세계, 정서의 파동을 토로하게 되여있으므로 언제나 구체적인 생활계기들 앞에서 특색있게 나타나야 할것은 자명하다. 감정, 정서는 사회적요인 즉 구체적인 대상의 본질을 떠나서는 생각할수도 없고 억지로 지어냈더라도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 가사에서 토로된 정서의 진실성은 현실, 경물에 대한 선구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상실하지 않는 시인의 시각과 인지, 태도에 달려있다.     가사에서의 서정의 진실성은 개별적사물,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계기들에서의 체험과정에서의 진실성이 전제되여야 하며 나타내려는 정감이 포섭하고있는 생활의 개별적대상에 대한 표현이 대중과 공감되여야 보람이 있다. 아니면 문자유희, 혹은 무효로동으로 남고만다. 가사에서의 서정적묘사는 남들이 다 보고있는 경물에 대한 재복사, 관념속의 경상에 대한 문자전달이 아니며 정감활동의 묘사도 추상도 아니다.     가사에서 서정적표현은 현실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활동을 반영해야 바람직하다. 례컨대 현실적으로 우리 조선족농촌, 특히 시골마을은 거개 황페해졌는데도 그냥 “산좋고 물이 맑고, 산새울고 뻐꾹새노래 구성지고 인심좋아 살기좋은 곳…”이라는 식이거나 해란강은 말라버렸는데 그냥 “해란강 출렁출렁 노을싣고 흐르고 유람선 달리네”라거나 두만강물이 흐려서 흐른지 수십년인데도 마냥 “두만강 푸른 물에  뗏목이 흐르고”라는 구태의연한 정서를 지어내서 서정적으로 묘사한다면 근저로부터 생활의 진실, 감정의 진실성을 잃고 엮어낸것이 된다. 이처럼 시, 가사창작에 “억지춘향”이 많이 등장한다면 어색하고 난감하다.     송가시대, 찬가의 시대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므로 가사에서 무슨 시대정신이니, 사상성이니를 론하는것은 그 자체가 맹랑한 일이다. 그러나 지구촌에 인간락원이 없듯이 우리의 현실생활에 절대적으로 웃음꽃이 만발하는 복지만이 존재하는것도 아니요 아무리 노래하고 춤추기 좋아하는 민족이라해도 우리의 정서도 마냥 “쾌지나 칭칭”이 나올 생활양상만도 아니다.     정과 한과 눈물과 실망과 저조에 찌들려있기도 한 현시대인들의 정서가 굽이치기도 하는것이다. 그래서 밝고 어둡고 명랑하고 움울하고 사실적이고 랑만적인 등등의 각양각색의 정서들이 반영되는 가사들이 창작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어떤 정서이든 현실에서 계발된것이여야지 작사자의 관념에서 나온것이면 싹이 글러먹게 된다. 말하자면 현대인의 생활의 진실과 정감의 기본지향을 전형화해서 반영하자는 것이다. 노래는 부르려고 짓지만 종국적으로 불려져야 한다.     가사창작에서 서정적묘사의 추상성, 지어낸 감정 혹은 분식된 감정은 금물이거니와 무가치한것이다. 그래서 글자를 맞추어 격식을 지킨 가사형식의 글이면 가사로 보일수도 있으나 가사의 본질적속성 즉 서정의 진실성 여부는 곧 독자, 가창자들의 심목속에서 저울질된다. 사실상 격식으로서의 가사는 쉬이 엮어질수 있으나 뭇가슴을 울리는 가사작품은 한수의 시를 짓기보다 더 어려운것이다.     가사에서의 서정은 진정 생활속에서 느끼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심된 토로, 심장으로 체득하지 않고서는 꾸며낼수도 없고 지어낼수도 없는 순정의 호소 혹은 메아리가 되여야 가사다운 가사가 되고 노래다운 노래가 될것이다. 례를 든다면 세월은 아득히 흘러가서 기억의 언덕너머에 “흘러간 옛노래”로 명명되고 있는 지난세기 20ㅡ30년대의 가사들은 곡을 모르고 그저 문자로만 읽어도 감명깊다.     그 시대, 가슴으로, 눈물로 불렀던 노래들의 가사는 결코 미사려구나 기묘한 서정적묘사로 되여있지 않고 절대대부분 일상적인, 생활적인 용어를 가사문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문학언어ㅡ예술부호로 거듭나게 한것뿐이다. 그 가사들에는 정서적색채가 당시 민중의 정서적색채와 일치하였고 지금도 회억적으로 일치되고있기에 마냥 애창되고 있는것이 아니랴 !     정서적색채는 두말할것없이 서정의 진실성에 의하여 규제되는 가사작품의 고유한 특성이며 되돌아와서 정서적색채에 의하여 가사의 서정의 진실성이 좌우지된다. 물론 가사의 정서는 시적대상의 표면에 직선적으로 비낀 하나의 정서적색채인것이 아니라 시적대상을 정서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과거와 현재, 미래에로 잇닿은 다양한 그리고 공성의 정서적색채로 채색된 감정의 표현이다. 한마디로 생활의, 인간의 본질적감정, 정수로 표현되고 노래로 불리울 때 그렇게 메아리쳐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인간의 감정체험에 분극이란게 수시로 생성하고있다. 이른바 감정체험의 분극이란 대립되는 정서적상태를 말한다. 인간은 행복한 감정을 체험할 때, 고통스럽던 때를 정서적으로 기억하게 되며 기쁜감정을 체험할 때, 슬프던 때를 정서적으로 기억 하는 등 모든 복합적인 감정체험에서 대립되는 정서상태가 엇바뀌여 나타나게 된다.    가사는 이런 구체적인 생활계기에서 발현되는 이런저런 복잡하고 변화다단한 정서상태를 현실상태에 맞고 분위기에 맞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깊이 파고들어 생활 론리와 서정적주인공의 감정론리에 맞게 조직함으로써 생활이, 민초들이 안고있는 감정의 본질을 문학으로, 선률로 반영해야 한다.     물론 문학ㅡ가사문학은 론리학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이 추상적일수 없듯이 가사에서 정서의 토로도 추리가 될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사상감정을 론리적으로 표현해서는 사람들의 정서세계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며 시의 서정으로 발현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사창작에서 사람들의 주도적인 사상감정, 정서의 률동을 서정적인 가락 으로 표현하여 함께 웃고울며 부르게 하려면 정서의 진실성을 밑바탕으로 깔아놓고 보편적인 감정의 호소를 도모해야 할것이다.     현샐생화의 본질,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상황과 시대상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복잡다단한 내면세계를 깊이있게 반영한 노래가사가 되여 들을수록, 부를수록 깊은 인상을 주는 가사들을 기대하면서 주관적인 사상감정이 진실한 생활의 정서로 진실하게 노래되여야 할것이라고 나름대로 가늠해 보았다. 훌륭한 가사ㅡ노래는 진실과 정서가 유기적으로 융합되여 이루어지는 서정의 진실성때문이다. 필자는 가사전문가도 아니고 가사창작경험이 돈독하지 못한 창작지망자이지만 가사작품들에서 서정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꾸준한 모색이 요청된다고 생각되는바이다.                                2012년 11월 12일   
167    수필, 잡문, 신변잡기 댓글:  조회:8165  추천:0  2013-02-06
                          수필, 잡문, 신변잡기                                      최 균 선     우리의 수필이 “신변잡기”차원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이것은 일가견도 아닌 묵은 과제이자 중복질의이다. 지금 수필창작에는 두가지 경향이 있다. 수필은 신변잡기가 되여서는 안되기에 문학성을 주장하는데 보수적이라는 모자를 쓰기 쉽다. 반면 곧이 곧대로의 신변잡기야말로 문학의 본연을 찾는 진보적문학관이며 작가적능력이 미달 이더라도 쓰자고 마음 먹으면 곧 써지는 글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생활을 소재로 하지 않은 문학작품이 없다. 하다면 “신변잡기”에서 무엇이 문제시되는가? 수필을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엣센스사전)’ 이라고 해석한다해서 바로 잡문이나 다를배 없다는 사람들이 있고 잡문을 일정한 형식이 없이 되는대로 쓰는 글이라는 해석을 맹종하여 잘못된 글이면 그저 잡문이라고 밀어부치는 사람도 있다. 수필의 소재,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것이면서 그것을 보편적인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점에서 수필다운 수필이 되지 못하는것이다. 수필은 한가정의 생활보도가 아니며 정보전달이 목적인 설명문도 아니다. “숲속에 자지러지던 풀벌레도 잠잠하고 산마다에 단풍이 불타니 완연한 가을이로다” 라는식의 서술은 남들이 다 보는 풍경 이지만 나만의 체험, 련상, 사색속에 무엇인가 전개될 소지가 있다. 정감의 표출인 수필의 맛은 사실자체가 아니라 성찰, 사색에서 오기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개체로서의 나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주체를 “우리”라는 객체속에 융화시킬수 있는 보편성을 도모하는것을 문학에서의 의미화라 한다. “나”의 주관성은 자기 울타리를 뛰여나오지 못하고 자기도취에 빠져 감탄표를 찍을것이 아니라 공감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여기서 신변 잡기와 수필의 색채가 달라진다. 그만큼 수필은 선택된 체험과 감수에 력점을 둔다. 수필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소재로 쓰는 글이라면 다른 쟝르보다 더 치렬하게 인간의 공성문제를 말하지 않을수 없다. 작가 자신의 삶의 체험이란 곧 더불어사는 삶의 현장도 포함되는것이지 단순히 내 가정에서의 내 삶의 체험만이 아니다. 인생잡사에서 선재하여 예술화하는것이 수필창작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다듬은 글이라도 그속에 정감적, 사상적, 철학적발견이 없다면 그것은 아기자기한 얘기로 서의 신변잡기에 머믈고 만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인것이 아니라 사회독자와의 정서적, 사상적대화이다. 대화에 공감성이 결여하면 대화가 흥미진진할수 없다. 자기 생활에서의 얼룩, 상처, 정과 한을 발효시켜 은근히 취하도록 정감미주를 만들어야 함께 마시려들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완벽한 삶이 불가능하다. 그 부족 한 부분을 사색으로 깨달으며 어려움, 아픔, 슬픔이 공유화되고 다른 이에게 흡수되 여 조금이라도 치유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수필을 쓰고 발표하는 취지가 아닐가? 수필 의 특징은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것보다 개체의 인격색채를 현연하는데 있다. 문예수필이란 인간,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인생, 시대를 두고 고민하며 함께 울고웃게 되는 정감을 발굴한것이다. 무엇이든지 수필의 소재가 될수 있다는 말은 문학이란 창조적인 작업이기때문이다. 즉 묵은밥이라도 식혜를 만들어 모두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경지의 수필을 쓰는것이 작자의 창작목적이리라. 날아 다니는 모든 새는 조류이지만 조류에 속한것이라해서 다 날아다니는 새가 아니다. 생활자체가 수필의 원천지이지만 곧 수필이 아니다. 수필에서 다양한 표현기법이나 개성적인 문체 등에 의해서 형성되는 심미적즐거 움이 허용되고 인위성을 배제할수는 없다. 그러나 간드러진 꾀꼬리소리가 곧 미묘한 선률인것은 아니며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산이 바로 풍경화인것은 아니다. 예술품이란 얻어진 소재를 가지고 작가가 자기의 정서, 그속에 녹아있는 제나름의 철학을 담아서 형상화하기때문이다. 문학화, 예술정감화는 형식에 유관된것이고 수필의 사회성, 보편적가치란 내용에 유관된것이다. 사회독자를 대상하면서 자기 모습만 들여다보는 자아봉페적인 수필이 나 자기 감상에 빠져있는 소녀적인 감상주의가 아닌 공감성의 안에서 함께 느끼고 사색하는 글이 보편가치가 있는 수필이 아닐가? 수필이 자기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글이므로 자기 정체성을 부각할수도 있다. 요는 내 이야기속에 나의 감수와 사색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공감시키는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아표현뿐이라면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드는(闭门造车,出门合辙)격이 될수 있다. 그렇게 만든 수레에 앉아 “장안” 으로 들어가보아야 합당한지 알수 있으나 실망이 마중할수도 있으리라. 창작가치가 작자의 만족도에 좌우될수도 있지만 보다 요긴한것은 인생과 자연애 대한 관조에서 반짝이는 지혜와 사색에서 얻은 감오이다. 어느 쟝르보다 개성적인 수필에는 마음의 흐름이 그대로 흐르기에 인생관, 지식, 취미, 감정, 체험 등의 표술 이 정신호흡이 되는것이다. 그만큼 사회성,사상성, 지식성 등 수필의 본질적특징이 체 현되여야 한다, 그래야 신변잡기의 차원에서 맴돌지 않을수 있다. 수필의 글감에는 한계가 없지만 선택성은 있다. 내집 강아지가 새끼를 열마리나 낳았다는 이야기부터 사회제방면의 체험, 감수, 사색이 다 글감이 될수는 있으나 어 떤 유익한 주제발굴이 될수 없는것도 있다. 누구나 겪었거나 겪고있는 일상에서도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작업이 간거하다. 자아도취로 하여 자아실현과 공유성 사이에 너무 큰 편차가 생긴다면 그 수필은 독자를 잃을수밖에 없다.  수필이 비평적인 문학이 될수 있다는것은 사물, 사회현상, 인성의 구석구석을 볼 때 그저 동조, 감탄만이 아닌 역향사유에 따른 비평성이 담긴다는 말이다. 남들도 다 체험하는 사실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비다듬어 내놓는다 해도 거기서 거기일 경우가 많음을 자각하고 자기도취를 절제해야 한다. 도리는 간단하다. 다른 집의 김치독에서 꺼낸 김치라도 그냥 김치맛이지 생선맛이 날수는 없기때문이다. 수필문체에 수기도 넣고있지만 수필은 작자의 인격색채가 현시되는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수필을 쓰려고 많은 체험에서 선택하게 된다. 선택된 체험이란 어떤 주제를 담을수 있는 제재이다. 주제를 발굴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독자들을 문학적경지에로 이끄는 사람이 “나”라는 출발점에서 흔히 곁길로 빠질수도 있다. 수필이 곧 잡문이 아닌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취사선택에서 잡문은 비평의 예봉이 돌려질 대상이 명확하며 작은것에서 큰것을 보아내지만 수필은 잡문보다 유연하고 담박하며 보통 3류제재를 다루며 작은것에서 큰것을 발굴한다. 문체풍격상에서도 잡문의 필봉은 예리하고 풍자적이며 신랄하나 수필은 한적한 마음으로 자아정감을 다루기에 부드럽고 글쓰는 자세도 가히 “신사적”이라고 할수 있다. 언어구사에서도 잡문은 풍자수법을 많이 쓰는데 반하여 수필은 유모아적이지만 포용범위는 협애하다. 잡문은 철학성이 짙고 랭정하나 수필은 서정적이고 열정적이며 자유색채가 짙다. 수필과 잡문은 자매간이지만 꼭 닮은 쌍둥이자매는 아니다. 잡문은  의론성이 중요시되고 개성과 공성의 융합, 취미성에서 수필과 차이성을 보인다. 잡문은 인생, 사회를 대하여 그것의 의미를 짓씹으며 철리적감오를 찾아 인성의 심층적발굴을 지향하고 지혜와 계발성을 구비하며 인간의 령혼을 정화시키는데 작용 한다. 수필은 정서적의미가 오묘하고 인성향기가 풍기기에 독자의 정서세계에 유익한 보탬을 준다. 이 시점에서 잡문은 딱딱한 글이고 수필은 유연한 글이라고 할수 있다. 사전에 의하면 신변잡기란 수필이고 수필이란 신변잡기라는것이다. 잡기는 글자 그대로 자질구레한 일을 질서없이 기록함. 또는 그런 기록. 잡록(杂录) 잡필(杂笔). (에센스국어사전)이라는 해석대로 수필, 잡기, 잡문의 뜻은 모두 같다는 사람도 있다.“생각나는 대로”와 “질서없이”와 “되는대로”라는 말로 세가지 뜻이 상통하고 있기때문이라고 오독하였기에 몰리해가 선행한것이다.     홍매의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바가 있으 면 앞뒤의 차례를 챙길것도 없이 바로 기록하여 놓은것이기때문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였다.) 는 말에서 수필이란 신변잡기의 “잡기”의 뜻이며 “잡문”의 뜻은 “생각 나는대로”,“질서없이” “되는대로”인것이라고, “수필은 다름 아닌 잡문을 일컫는 말이 고, 잡문이란 문학화가 안된 글을 말하는것이고 이것이 신변잡기의 본질적인 뜻이다”라고 단언하는것은 지극히 학문적이 못되는 생각이다. 신변잡기가 수필에 들어있다 할진대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나는대로, 질서없이 되는대로 쓰는 글이기때문인가? 단순한 창작리념문제가 아니다. 수필은 '붓가는대로 쓰는 글”이기에 신변잡기일수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신변잡기식 수필에 썩 공감되지 않는 리유를 사색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문학화가 안된것도 있고 특히 “반짝!”하는 사상의 불티가 없기때문이다. 흔히 신변잡기식이 되는데는 무엇보다 작자의 자아도취가 지배적이기때문이다. 사회인으로서 아무 고민도, 아무 다툼도, 아무 불만도 없는 사람이 없듯이 그것이 반영되지 않는 글이란 없다. 기실 생활은 글에서 서술한것보다 더 풍부하지만 책 에서처럼 미만하기만한것은 아니다. 이태백이 놀던 달을 묘사해보아야 광한궁에 옥토끼가 방아찧는다는 고루한 이야 기 이상 더 나올것이 없다. 이처럼 글이 새로운 성찰, 비평정신이 없이 단순하 사실 의 엮음이라면 신변잡기에 머무를것이며 재간좋은 문자유희일뿐이다. 그러나 유희는 잠시 재미있을지라도 곧 끝나고 말것이다.   2012년 3월 4일             
166    (교육단론)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는 ? 댓글:  조회:7662  추천:0  2013-02-06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는?                                   최균선      우리 조선족기초교육개혁에서 주되게 추진되고있는 이중언어교육문제는 지성인들은 물론 온 민족사회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초미의 문제로 제기되고있다.  우리 민족의 이중언어교육의 취지로부터 일괄해 볼때 지금 너무  급진적으로 조처가 출범하고 많은 학교들에서 적극적인 모색을 하고  있는데 한 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치닫고 있지나 않나? 우리 민 족의 기초교육이 혹시 곁길로 빠지지나 않나? 하는 우려를 가지지 않을수 없다.      일언이페지하고 이중언어교육문제는 민족교육행정에서 지극히 중요한 문제로서 그만큼 문제성이 복잡하고 해결책이 묘망해서 두부 모베듯 쉽게 결단나는 일이 아니다. 이 문제를 여하히 풀어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곧 민족교육의 존재와 발전에만 국한되는것이 아니라 민족군체의 생존에 비롯한 경제, 문화 등 제반 령역에서의 자주적인 발전에까지 소급되는 만년대계의 사활적문제인것이다.     기실 이중언어교육강화문제는 어제오늘에 제기된 문제가 아니며 더구나 어느 한두사람의 기발한 착상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된 문제가 아니다. 새중국의 건립이래 조선민족교육에서 이중언어교육문제는 지 성적인 교육자들이 시종 관심해 왔고 전반 교육계에서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나 일관하게 탐구해온 세기적인 난제였다.     그 어떤 견지에서의 탐구와 모색이든간에 이중언어교육강화의  대전제는 어디까지나 본민족언어의 도외시가 아니였으며 계속발전과 번영이였다. 그만큼 이는 공화국의 헌법과 당의 민족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조목으로 제정되였다.      민족교육행정에서 민족언어교육의 선차성과 역할 및 그 의의는 략해두고, 언어학각도에서 볼 때 모국어와 제2언어의 습득은  많은 구별점이 있다. 반세기를 내려오면서 누가 어떻게 개혁하려했든간에 이 과학규률을 떠날수 없었으며 또  위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족학생들로 말하면 한어는 어디까지나 제2언어로서 본민족어와 비해 그 습득과정이 다르게 되여있기때문이다.     재래의 한어교재도 이점을 감안해서 충분한 연구를 거치고  편찬 사용해온것이다. 우리의 교육사가 증명하다싶이 부단히 실천경험을 총화하면서 보다 완미한 한어문교재를 편찬하기에 일심전력하였기에 수십년래 이중언어를 훌륭하게 장악한 고급인재들이 얼마나 많이 속출했는지 모른다. 이점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학생의 인식규률과 인지능력발전에서 볼 때 본민족언어는 우리 민족의 후대들의 지력개발과 자질제고에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서 그 어떤 언어도 미치지 못하는 기본동력이다. 한것은 본민족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절대 다수의 어린이들에게는 더없이 친절하여 사 상감정상 깨뜨릴수 없는 공명대를 고유하고 있고 정신상 만족감을 느끼게 하며 학습흥취, 적극성이 보장되기때문이다.      선인들의 수십년의 줄기찬 연구와 탐색과정에서 도출된 통계수자가 이를 증명해냈다. 이를테면 소학교 1학 년때부터 자기 민족어가 아닌 한어로 공부한 아이들은 한족어린이들에 비해서 인식능력이 현저히 뒤처지고있음을 확증하였으며 기억력과 관찰력, 상상력과 사유면에서는 더구나 엄청난 차이를 나타 내고있다는것을 보여주 었다. 이렇듯 기초교육과정에서 본민족언어는 가장 좋은 인식수단이 고 기타 언어학습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기초일뿐만아니라 나아가서 본민족문화의 계승발전에도 불가결의 요건인것이다. 이점도 감히 부인할 사람이 없을줄 믿는다.     이중언어교육에서 한어교육에 대해 너무 편파적이고 심지어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사회심리를 해부하여 개괄한다면 한어에 대한 미신과 그에서 비롯된 자기 민족언어에 대한 허무주의와 비관정 서라고 할수 있다. 흔히 《한어가 조선어보다 더 쓸모가 많다.》거나 《한어를 모르면 중국에서 전도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무만 알고 수림은 보지 않으려는 사람과 다를배 없다.      세계화추세로 나가고 있는 현시대에 세계공민의 견지에서 장래를 구상할 때 2중언어로 만족할수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2중언어가 아 니라 다국어학습을 추광해야 할 시대이다. 한족학생들속에는 외국어 를  잘 장악하려고  자기 민족언어학습을 홀시하거나 포기하는 못난 이 학생이 없다. 유독 우리 조선족학생들가운데만 애시부터 한어를  잘 배운답시고 아예 민족어를 포기해버리는 근시안들이 많은데 그들의 조종자는 거개 부모들이다. 한어만 잘하면 만사대길이라고 생 각하는 부모들은 결과적으로 곰의 옥수수따기를 강요하는셈이다.     우리 조선족은 자고로 총명하고 구지욕이 강한 그만큼 부지런한  전통도 있기에 2중언어가 아니라 몇개 외국어도 능히 배워낼수 있는 선천적자질이 있다. 물론 라태자들이나 저능아들은 례외이지만… 말 하자면 2중언어에만 매달리지 말자는 말이다. 현시대엔 한어학습만 급선무인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어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조선어는 우리 조선족에게는 본민족어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하나의 엄연한 외국어로 되고있지 아니한가?국내 많은 대학들에서 륙속 조선어과를 설치하고 조선어학습을 전문으로 하는 사립학교들도   도처에 개설되고있다는 현황에 대해 사색해 보아야 하지 않을가?        언어는 교제의 도구이다. 언어는 교제도구로서 자기 가치를 확보 하고있다. 그러나 본민족언어를 근근히 교제도구로 인식한다면 한참 잘못된 인식이다. 자기 민족언어는 하나의 특수한 가치ㅡ민족상징 의《가치》와 의의를 가지고있다는것을 모르고 있기때문이다.      현재 조선족의 2중언어교육의 강화를 위해 정부차원에서 교육행 정부문에서 조처를 대고있는데 이는 전방위적으로 볼 때 환영 할바이다. 그러나 모든 훌륭한 동기가 꼭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 어떤 학교들에서 지정된 학과목의 수업시간에 꼭 한어와 조선어를 병용함으써 2 중언어교육강화를 시도하는데 실로 극단적이 아닐수 없다. 어떤 개념은 한어로 말하고 어떤 서술, 해석은 조선어로 말할 때 어린학생들의 인지규률에 맞겠는가?필자가 단언하건대 사유의 혼란만 조성하기 안성맞춤이다.      한어문교학도 한족교원을 초빙하여 교수하게 하는것을 시험하고 있는데 한족교원의 한어수준이 타민족한어교원보다 각방면에서 우월 할것은 불보듯 빤하다. 마치 아무리 고명한 영어교원이라 해도 순종 의 영국인이나 미국인교원을 따를수 없는 도리와 같다. 정녕 교수효 과만 추구하여 장차 한어문교수는 한족교원에게 전적으로 기탁할 타 산이라면 우리의 수많은 조선족한어교원이 할일은 무엇이고 연변대학 한어계, 기타 대학과 사범학교에서 배양되여 나올 한어교원들은 어디 로 가야 하는가?     누구의 말마따나 병구완이 급급하다고 아무 약이나 먹어서야 되겠는가?그리고 한어의 강화, 조선어의 정화를 제기하면서 조선어 교학시수를 줄이는데 감소가 곧 정화인가?홀시는 아닌가?한번 곰곰  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개혁은 교육자체의 특점, 민족 교육의 특점, 현실성과 실효성, 공효등 여러 방면에서 전문가들의 깊은 연구가 있고 실행해야지 마른나무 꺾듯해서는 그 결과가 바람직 할리 없다.      2중언어교육강화를 출발점으로 한 교재개혁이나 아예 한족학교 어문교재를 가져다 사용하는 문제도 심중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왜 냐하면 교육, 교학, 교재는 세개의 완전히 부동한 술어로서 교재의 변 화가 곧 교육개혁의 전부가 아니기때문이다. 교재는 일종의 교학재료  도구에 해당할뿐이다. 한어교재가 교육개혁의 만능열쇠인가는 오직 실천만이 증명할수 있다. 직언하면 교재개혁이  만사대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은 두다리로 걷기마련이다. 국내를 활동무대로 할 때 한어와  본민족어는 지식의 쌍날개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서 한어만 잘하고 조선말은 감감부지인 졸업생들이 무용지물이 된 사실은 누구 나 알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유치원때부터 한어를 배운 학생이라도 아무데에 가든 무슨 항업을 하든 언어문자구사에서 한족학생을 초과 할리 만무하다. 비유해 말하면 절름발이 인재가 되고만것이다.      만약 조,한 두가지 언어구사에  다른 외국어 한두가지 더 장악한 다면 금상첨화일것인데 왜들 하나만 먹고 두개 세개를 먹을 궁리는 포기하는지 안타깝다. 지금 한어교육의 편리를 도모해서 민족련합학교를 출범시키려는 조처도 연구해볼 일이다. 한어를 더 잘 배워내기 위해 언어환경을 마 련한다는 취지일것이다. 가령 영어를 보다 잘 배우기 위해 조건이 허락한다면 조,영련합학교도 꾸릴것인가를 상상해 본다.  우리에게는 이미 민족련합학교를 꾸렸다가 마침내 다시 갈라서 단일학교로 꾸린 경험교훈이 있다. 강청의《조선어무용론》을 높이 받들어서 그랬던지는 모르되 아무튼 민족교육에서 일축해 버릴수 없 었던 당위성을 비롯해서 미처 예상치못했던 운영상의 이런저런 페단 들이 퇴각을 핍박했을것이다. 이 시점에서 민족련합학교 제기법은 조금도 창조적이 못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의  퇴보가 아니라면 전철을 밟 는것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리유는 구구히 들지 않겠다.     사람은 고리를 맺을 때 언젠가는 자신이 풀어야 할 일도 념두에 두어야 한다. 교육, 교학은 엄밀한 과학사업이다. 과학사업은 어떤 행정수단이나 누구의 주관념원으로 발전하는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처나 정책시행은 후과에 대한 보완등을 충분히 예견하고 신중하게 판단, 제정해야 한다. 한때 많은 자금을 투자하여 교재개혁전문기구를  개설하여 교재개혁을 시도했지만 별로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이 나중 에 제풀에 흐지부지 해지고  말았는데 참조할 일이 아닌가 싶다.         진부한 민족관념도 발붙일 자리가 없지만 민족의 자주적발전에 대한 신념의 상실자도 당의 영명한 민족정책의 해살아래 설자리가 없다. 우리 민족의 후대들을 우리의  교육자들이 훌륭하게 배양해 낼 수 있다는 신심을 동력으로 한다면 2중언어교육의 무거운 수레를 우리가 소망하는 높은 산봉에 얼마든지 밀어올릴수 있을것이다.  어찌 하든간에2중언어교육의 취지는 자기 민족언어를 대전제로 한다는것을 잊지 말자!    
165    칼럼과 수필 댓글:  조회:9923  추천:0  2013-02-06
                           칼럼과 수필                                  최 균 선   위키 백과사전에서는(수필 또는 에세이는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산문문학이다. 주제에 따라 일상 생활처럼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경수필과 사회적문제 등의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중수필로 나뉜다. 특히 중수필에서 사회적이슈를 주제로 쓴것을 칼럼이라 한다.)라고 해석하고있다. 한편 신문, 잡지의 특별 기고. 또는 그 기고란. 주로 시사, 사회, 풍속 등에 관하여 짧게 평론하는것으로서 신문과 잡지들의 정해진 지면에 련재되거나 기고된 기사해설 등을 통털어 칼럼이라 부르고 그 필자를 칼럼니스트 또는 기고가라 하며 주로 론설위원이 쓰거나 사회의 저명인사가 쓰기도 한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학사전에서 칼럼니스트 [columnist]란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칼럼을 쓰는 사람이 라고 했는데 어감에 민감한 사람은“따위” 라는 단어에 까칠한 느낌을 받을것이다.       수필은 유일하게 사실을 근간으로 하는 문학으로서 외연이 크기에 칼럼이 수필의 범주에 드나들 소지가 고유한다.수필이 일상에서의 미적가치를 정감적으로 발굴하고 정서적으로 표현하므로 일상성이 원천이 되고 칼럼은 사회생활에서의 이런저런 현상 에 대하여 리치를 따져가며 론평하는만큼 사회적편달이 취지로 될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칼럼과 수필의 완전히 동질의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칼럼은 정해진 형식이 없고 소재가 제한되여있지 않으므로 수필같아 보이는 칼럼 도, 연설문에 근사한 격앙된 문체도 칼럼이라는 통칭속에 들어가고 있는데 기사와는 달리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는만큼 수필성도 고유하기때문일것이다. 칼럼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필자의 개성과 소신, 멋이 살아날수 있어 최근에는 점차 수필을 닮아가고있다. 칼럼은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숨긴채 다른 사람의 견해나 이야기를 통해 자신 의 목소리를 낼수 있다. 칼럼은 어떤 제약도 없어보이지만 고도의 형식미가 있으며 철학적사색을 바탕으로 해야 제격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과 칼럼이 혼동해 쓰이기도 하나 기실 꼭 같은것은 아니다.     첫째로, 칼럼, 특히 사회칼럼에는 수필의 바탕이 되는 진지하고 풍부한 정서가 개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서보다는 론리가 선행하게 되고 주관적감수보다는 객관 적론거에 치중하는것이 칼럼의 고유한 특징이기때문이다.     둘째로, 상징성과 구체성이다. 사회수필은 다루고자 하는 사회문제에 먼저 상징 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반면에 사회칼럼은 매우 구체적으로 또한 직설적 으로 설파한다. 사회수필에서 상징은 구체적인것을 오히려 추상화시킴으로써 주제의 전달에 큰 여운을 주게 되며 따라서 문예적인 효과도 제공하게 된다.     셋째로, 수필과 칼럼의 공통점은 문체와 표현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사회칼럼 의 문체는 강경하고 설명적이다.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표현도 직설적이 될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수필의 문체는 유연하다. 강한 주관의식도 부드러운 어경으로 감싸고 설득시키려는 조급성보다는 은밀하게 공감성을 유도해낸다. 넷째로, 미적가치와 론거에서 구별된다. 수필이 일상에서의 미적가치를 추구하고 전달하려는데 반해 칼럼은 사회생활현상에 대해 리치를 따져 론평하는 주장이 있는 평론인만큼 사회성이 기조가 되고 대중적이고 사회적이며 론리적이라면 수필은 개성 적인 자아표현으로서 서정성이 생명이 된다. 칼럼은 지식적이고 시사성을 띠며 문체는 강건체이고 기조는 리론적인 반면에 수필은 체험적이고 생활적이며 형상적인 표술로서 미적이다. 칼럼에는 수식이 별로 필요없지만 수필에서는 비유와 수사가 가능한껏 동원된다. 정감을 공감시키려는 수필에서는 정서속에 녹아있는 철리성이 내비쳐야 감동적이다. 이것이 사회수필과 사회칼럼의 문장이 같을수 없는 리유이다. 칼럼은 론리적이고 수필은 형상적이다. 칼럼은 사실적이고 보고성적이나 수필은 예술상상력이 수요된다. 칼럼에 리성적이고 론리적인 언어가 많이 사용된다면 수필에 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언어가 다양하고 사용된다. 수필은 정감의 용솟음으로 이루어지기에 가슴으로 쓰는 글이다. 칼럼은 리성분석으로부터 착수하여 머리로 쓰는 글이기에 정보전달, 사상의 교류가 임무이다. 이처럼 칼럼과 수필은 서로의 상관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성을 갖고있다. 수필이 아니면 곧 칼럼일수 없듯이 누구나 칼럼을 쓸수는 있지만 쓴것이 모두 칼럼은 아니다. 지적인독자와의 대화에 발견이 있고 깊은 성찰이 담기지 못하면 칼럼으로선 미달이며 주체적사유와 철리, 지도성이 결여하면 칼럼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칼럼은 작자의 진심을 토로하는 지면일수는 있고 주관적인 진실을 강변하는 그런 경계에 있을수도 있겠으나 칼럼니스트라해도 전지전능은 아니기에 우선 겸허하고 근신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 자기의 박식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전을 들추어 해석 하며 지식을 총동원한듯한 느낌을 주는 글은 진실성을 잃게 된다. 칼럼에서 인생에 대한 각성과 통찰은 공감성을 구비하여야 한다. 요란한 문자는 사람을 놀래울수 있어도 감명을 줄수는 없다. 말하자면 세상과 자기를 련계시는것이 칼럼의 사명이 아니라 언어표현속에 담긴 내용에 대한 독자의 공감이 중요하다. 사회상의 온갖 부조리와 인간의 추태, 악습을 살펴보고 인간의 바람직한 양상, 삶의 의미를 추출해내는 랭철함도 구비해야 한다. 수필은 사적감정에서 출발하지만 칼럼은 공리성을 앞세우고 길을 떠난다. 개체성을 재단할 때 자성의 거울에 비춰봐야 한다. 훌륭한 칼럼을 쓰자면 지식이 연박하여 정치, 경제만이 아니라 문학, 철학, 사상, 력사 등 광범위한 독서를 통한 지식의 축적과 인생경륜이 있어야 하고 랭철한 판단 력과 서술력이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다루는 문제에 대한 주견이 뚜렷해야 하지만 주관이 독자의 인지규률을 역행하는 리론을 삼가하고 철학적사색, 어눌하지 않게 서 술이 순통해야 한다. 문제시되는 사안에 대해 확실히 알고 전후맥락, 흐름, 현재상태, 대안 등에 대해 머리속에 충분한 준비없이는 횡설수설이 되기십상이다.      독특한 투시력을 안받침해주는 필력이 있어야 한다. 칼럼은 사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갖추어야 함을 물론, 필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비유적이고 정서적인 문장이 되여야 한다. 따라서 칼럼의 어느 부분이 일화이고 어느 부분이 작자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구분될수 있도록 기술하여야 한다.     여러가지 문체로 말할 때 두부모베듯이 가를수는 없으나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만필이나 현실생활과 사회현상에서 받은 각종 자질구레한 감수를 쓴 잡감을 다 칼럼에 넣어서는 안될줄 안다. 수필이 되다가만 글이 칼럼이 아니며 칼럼에 서정성을 가미한다해서 곧 수필글이 되는것도 아니다.     칼럼풍년시대, 번창하는만큼 보다 명실상부한 칼럼들을 많이 기대해 본다.                          2012년 1월 7 일 , (11월 25일 수정)
164    수필에 대한 잡감 댓글:  조회:7829  추천:0  2013-02-06
                                                 수필에 대한 잡감                                                             최 균 선       현대시점에서 수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수필의 개념과 성격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글자 그대로《붓가는대로 쓰는 글》《무형식의 글》이라고도 하고 비전문 적인 글, 자기 성찰의 글, 자기 고백의 글, 중년세대의 글…등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모두 지난세기 30년대의 기원된 정의들이라는 평판이 힘을 얻고있다.     한국에서는 에세이라고도 하고《논픽션》이라는 외래어로 명명하기도 한다. 또《여가의 문학》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여가로 수필을 쓰는 사람이 없다는 실정에서는 엉성한 제기법이다. 수필은 절대 붓가는대로 쓰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홍매로부 터 기원된 수필ㅡ붓가는대로 쓴다를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나는대로 쓰는것으로 해석해도 어페이다.     중년녀인의 글이라는 수필가도 있지만 수필창작자들의 년령구조, 성별이 그것을 부정하고있다. 한국의 명수필가 피천득선생은 수필을《청자연적》에 비유하였는데 효용성에서 최고경지에 피워올린 꽃으로 생각한 까닭이라고 한다.그러나 모든 수필이 청자연적일수 없다. 마음을 간지르는 수필이라면 그럴듯도 싶지만 개연성은 청자연에 만 머물라는 법이 없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한다. 수필도 마찬가지다. 수림속에 온갖새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수필도 각양각색 일수밖에 없다. 특히 생활체험속에 감수를 쓰는 글인만큼 영원히 개성적일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란다. 수필만이 삶의 문학인가? 모든 문학이 삶의 메아리이다. 수필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고 그냥 락서일수도 있다는데 자신과의 대화임은 사실일세 뇌까림이 아니라 방백이다. 수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과 의미부여에서 그치면 일기차원이다. 자기 인생을 의미화하는 궁극적 목적은 독자와의 담화가 아닌가? 강렬한 정서성을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글을 쓸것이다.     문학일반이 인생마당의 조명이라면 수필도 인생현장을 조명하고 탐구과제를 내주는 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의 전제로 보편적인 공감성을 내세운다. 물론 수필의 흡인력과 공감은 진실성에서 기원된다. 이 시점에서 비록 길지는 않은 글이지만 절대 여유로움을 가지고 쉽게, 가볍게 씌여질수 없다는 잠규칙이 세워진다. 수필창작을 하기전 인간수련을 하라는것도 수필은 그 사람의 인생비밀이 되기때문이다.     수필은 자기 생명의 향기를 피워올리거나 생명을 연소시키는것으로서 자기 자신 만큼의 글을 쓴다. 자기를 닮지 않은것을 낳는 동물이 없듯이 자기 고백의 글. 자기 성찰의 글이라는 수필에서는 자신을 그려내지 않을수 없다. 수필작자는 독자와 인격 적으로 만나서 생각하는바를 고백하는것이지 체험담을 늘여놓는것이 아니다.    수필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서정화하는 동시에 객관화해야 한다. 작가의 개인적 정서나 체험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확보해야 하기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을 주관적으로 하기보다 공유화해야 한다. 시가 주관정감으로 감동을 주는 문학이라면 수필은 개체 적정감을 객관화하여 감동을 시도하게 된다. 자기의 체험을 소개하기보다 분석하고 제시해야 한다. 수필은 이야기자체가 아니기에 분석적이고 해설적이야 한다.     수필글은 진실함에서 살아나고 분식에서 죽는다. 그만큼 수필글에 기발한 착상이란 있을수 없다. 수필을 무형식의 글이라지만 구성이 홀시되는것이 아니다. 정감의 론리성은 수필구조의 기본요구이다. 수필은 재치있는 글솜씨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 쌀로 밥짓는 솜씨가 아니라 향기로운 술을 빚어내는 작업에 해당한 글재간이다. 새로운 감각, 짙은 흥미성, 정서적 감염. 평화로운 기분, 유익한 지식성, 느끼하지 않은 교훈성. 삶에 대한 재인식, 생활에 대한 애착감, 교묘하게 심어주는 지혜의 불씨…등 가치발견과 의미부여로부터 받아안은 인생공부가 되는데서 산생된다.     한편의 수필에서 내가 미처 체험하지 못한 미지의 생활정경이 그려지면 호기심이 당긴다. 풍부한 상상력은 흡인하고 작자의 독특한 안목과 발견, 해석은 경탄을 불러 오고 유모아와 해학이 넘치는 수필에는 즐거움이 묻어나오며 선구적인 통찰력과 예리 한 비판성은 통쾌감을 선물한다.자기과시나 설교, 훈계가 아니라 그저 설복당하는 멋이 좋다. 이렇듯 수필의 효용성은 개인체험이지만 권유하지도 않고서도 공유화되고 사회적인식의 재확장이 되는데서 잘 체현된다.     일상의 체험이지만 나는 왜 못느꼈을가 개탄하게 되는 때에 감각의 새로움, 지적인 흥미, 정서적공감, 진선미를 무상으로 제공받으면서 좋은 수필이라고 값을 매기게 되는것이다. 하다면 좋은 수필의 구체적조건은 무엇인가? 수필은 체험의 과정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는데 흥미없다. 체험한 사실과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만의 느낌과 해석의 부여가 중요하다.     기록문은 기록이라는 의미에서는 가치있지만 수필은 문학인만큼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예술가치가 창출되여야 한다. 수필은 체험에서 인기된 인생의 의미를 비쳐주는 하나의 거울이다. 그것이 바로 수필이 노리는 형상화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 거울속에서 예술적향수를 느끼면서 자성하게 된다. 수필은 인생미학을 창출하는 문학이므로 수기와도 다르다. 비록 개체생명이지만 그런만큼 독자에게 중요한것은 작자의 생활경력이나 체험의 전말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와 발산되는 인격력량이다.     누구나 겪을수 있는 체험의 서술은 진부하다. 어떤 모양으로 빚든 그리고 비틀고 늘구든, 굽든 찌든 밀가루의 기본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태의 밀가루음식을 먹는것은 감각문제이지 무슨 발견의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체험이라도 그속에서 참신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롭게 해석해야만 좋은 수필로 될수 있다. 같은 모래를 일면서도 금싸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 따로 있듯이 수필도 그렇게 써야 한다.     체험한 그대로 느낀 그대로 토로하는 수필이여야지 무병신음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비롯한 다른 쟝르는 예술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수필은 인생경지에 이르게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것과 문학창작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것이다. 독일의 현대파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있다.《보이는것은 보이지 않는것에 접촉되여 있다. /들리는것은 들리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생각되는것은 생각되지 않는것에 접촉되여있다.》고.     본다는것은 단순한 목적일수 있지만 생각하는것은 무목적일수 없다. 본다는것은 촉동, 관찰, 발견, 사색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기이다. 작자는 체험의 내용 과 느낌을 전달하지만 독자들은 내용보다 느낌, 의미의 부여에 흥미롭다. 작자에게는 소중한 체험이여서 드러내고 싶겠지만 자기를 너무 의식하는 자기도취이기 십상이다.    수필은 자기를 의식하고 쓰기보다 독자를 의식하고 써야 한다. 독자는  작자의 신변잡사에는 별로 흥미없다. 그리하여 수필에서 가장 재치있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독자에게 고백해야 할것과 혼자 간직해야 할것을 분별하는것이다. 그냥 체험이 소중하게 느껴져 기록이나 수기단계에서 끝나면 독자는 별 볼일이 없게 된다.     무엇을 고백해야 독자들이 솔깃할것인가? 바로 주제 ㅡ사상인것이다. 자기 삶에 별다른 철학관념이 없는 사람은 돼지의 포식과 소크라테스의 고뇌에서 선택을 수요하지 않는다. 체험담에서 인생경험은 나올지 모르나 그에 그치면 인생철학이 나오지 못한다. 축적된 지식이 철학을 낳는것도 아니다. 체험은 부어넣은 주전자물처럼 바닥이 드러나지만 느낌과 사색은 샘물처럼 그냥 솟아나온다.     행동하기전에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행동이 끝난뒤에도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인생철리를 도출해 낼것이다. 그것은 원인에서 결과를 얻은 사색의 열매이다. 철학은 사색에서 얻어진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고란 무어냐 하는 사색의 저 끝에 철학이 묻어나올수 있다.     생활이 철학을 낳는다. 철학은 생활의 부산물이다. 부산물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근원과 근간과 뿌리가 되여서 인간의 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정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철학사상, 생각의 뿌리는 독자들의 생활의 옥토에서만 깊이 뻗어간다. 수필을 나무로 비유해 말할 때 표현의 꽃은 예술이요 사색의 뿌리는 철학이다.     주제란 무엇이냐? 흔히 작가가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이다. 그 의도는 대부분 철학적과제와 련결되여있다. 주제가 곧 철학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주제를 있게 하는 바탕에 철학이 있다. 그래서 어떤 철학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사색의 글인 수필의 주제에 한계가 그어진다. 어떤 주제 또는 철학을 형상으로 바꾸어놓는것이 수필창작이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씨앗이 없는 과일과 같다. 수필에도 사상이 있느냐? 철학이 곧 사상이 아니냐?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어디에서 왔는가? 동일한 사람의 많은 수필이 한결같이 동일한 문제로 엮어지는 리유는 내면의 사상테두리안에서 나오지 못하기때문이다. 보통 경수필보다는 중수필에 사상이 더 짙게 표현된다. 까닭은 중수필이 생활 주변의 감성적인 이야기보다 자연과 인생에 철학적이고 객관적인 과제에 몰두하기때문이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이 문학이다. 일단 사상이 생기면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려 한다. 동일한 어떤 사태에 부딪쳤을 때 철학 또는 사상을 가진 사람과 사상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에 대한 감수에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자신의 삶 자체만을 문제삼을 때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것을 인정할 수 없다. 생명운동과 그 표현 보다 더 심각한 주제가 있는가?     철학사상이라고 말하듯이 량자는 아들과 어머니 같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사상은 생명력을 가진다. 사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한것일 때 사상과 감정의 관계는 파도와 그 밑에 심해와도 같다. 파도는 끊임없이 흔들거린다. 그러나 그 파도는 심해에서 인기된것이다. 격랑이 일어날 때는 심해에도 동요가 온다. 사상은 만고불변이 될수 없다. 인생을 흔들만한 큰 사건에서 사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사상과 감정을 부침 (浮沈)의 차이에서 구별하지만 나타날 때는 마음이라는 하나가 된다.     중국의학계에서 쟁론되고있는 심주신명(心主神明)설과 신주심명(神主心明)설을 결합하여 말한다면 마음안에 사상도 있고 감정도 있다. 많이 움직이는 부분을 감정 이라 하고 적게 움직이는 부분을 철학 또는 사상이라 할뿐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 비교해보자.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있지만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은 가지와 잎에 있다. 이때 뿌리가 사상이라면 가지는 철학이 되고 잎은 감정이 될수도 있다.     제각기 다른 그날그날을 개체성이라 할수 있다. 개체성이란 그래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개체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개별성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동일한 것이 흐른다. 개체적생활은 나름대로의 원인, 과정, 결과에서 모두 다르게 엮어진다. 그러나 그 바닥에 공유되는것이 있다. 보편성은 어떤 인간, 어떤 사건에도 공유한다. 그리하여 개체성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저변에 보편성이라는 분모로 련결이 된다. 서양사람들의 에세이의 원뜻은 도전이다. 도전해야만 새로운것을 얻을수가 있고 거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찾을수 있다는것이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고 경험이나 체험을 사실대로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지만 실천에서는 그냥 그렇게 진행되고있다. 수필은 시대, 사회, 인생에 대한 도전이 되여야 한다.                                                        2008년 3 월 10 일
163    수필에서 문체의 변이 댓글:  조회:8694  추천:0  2013-02-06
                                    수필문체의 변이                                           최 균 선        90년대 문학의 본연에로의 회귀론이 고창되다가 사인화창작 경향이 성행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종 창작풍조로 되였고 우리 민족문단에도 만연되였다. 사인화창작경향을 제창하거나 실천하는 작자들은 모두 자아표현의 진실성을 중시하고 실천한다. 그러나 자아표현이란 일종 환각으로서 진정으로 표현되는것은 근근히 하나의 의식형태화한 “공공인(公公人)”에 불과하다. 자아본신은 이미 의식형태화된 모종 화어(話語)의 구성물로서 문학으로 말할 때 진실한 자아란 줄곧 거울속에 꽃이나 물속에 달과 같아서 볼수는 있어도 눈섭사이에 잡아둘수는 없다.     사인화창작결실은 소설이나 기타 쟝르에서도 과시되고 있지만 특히 자아고백 문학이라는 수필창작에서 돌출하게 나타나고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전 문단정경을 보면 개인수필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다. 그야말로 수필마당은 하나의 커다란 “련병장”을 련상시킨다. 천군만마가 모여든 이 “련병장”은 성세호대하며 바다를 건너는 여덟신선이 각자 신통력을 과시하듯 수필창작자마다 나름대로 특장을 충분히 발휘하고있다. 따라서 평론계의 눈길도 모아지면서 분분히 자기의 수필관점을 피력하고있는데 이는 문단 열점으로 되고있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기도 하지만 너무 떠들썩한 소음과 붐비는 창작자들속에서 문제도 로출되고있다. 가장 돌출한 문제는 수필이란  간단하며 나름대로 쓰면 된다는 리해와 그에서 비롯된 창작실태이다. 오늘 많은 수필들에는 음양 실조되여있고 정신을 황홀하게 하는것 같으면서도 따지고보면 수필문체에 고정주소가 없는 느낌이 든다.     사인화의 경향으로 나가고있는 수필창작에서 우선 제기되고있는 문제는 “자유”와  “약속력”간의 모순이다. 혹자는 수필의 핵은 “수의 (隨意)성”이라고 하며 심지어 “ 무엇이 생각나면 무엇을 쓰고 어떻게 쓰고싶으면 어떻게 쓴다.”는 정도에 이르렀다. “예술수필”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면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미문”을 내놓고 기타것은 진정한 산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주장대로 한다면 수필은 산만성을 불러오게 되고 허탈에 빠지게 되며 뼈대가 없게 되며 수필정신이 결여하게 된다. 후자의 관점대로 한다면 수필로 하여금 갈수록 자아봉페에로 나가게 되고 기개과 활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수필독자상실을 자초하게 된다. 기실 자유가 없는 수필은 멍에밑에 나귀와 같게 되고 칼도마우에 고기덩이와 다를배 없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는 수필의 자유를 쓰고싶은대로 쓴다는것으로 리해하는것이다. 가령 자유수필을 쓴다고해서 아무 문장구성법도 없이 일계렬의 감각을 라렬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철리성이라거나 의의, 주제사상을 외면하고 정서와 기분외에 다른것은 관계할것 없다고 한다면 수필정신은 지레 도망치고 말것이다.    가령 재래의 언어규범을 무시해버린 상관없는 단어들의 퇴적이 된다거나 현실생활을 반영한다는것이 단순히 자기의 심령의 진실을 토로하는것이 된다면 수필은 어떤 모양일가? 설사 어떤 계기를 틀어쥐고 자기의 감정을 조작해 내여 오묘한 정서 세계를 그리고있듯이 수식한다거나 남이 다 체험하고있고 알고있는 인생일사를 짐짓 감동적이기나 하듯이 지리멸렬하게 라렬한다거나 제자랑 비슷한 어떤 경력을 지지 콜콜하게 서술한다면 수필의 매력이 나올수 있을것인가?     수필창작에서 자유란 무엇을 쓰는가가 포괄될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어떻게 쓰는가하는것이다. 자유적수필이란 산간에 구름과 같고 계곡의 류수와 같으며 혹은 화간에 노니는 나비와 같고 창망한 하늘에 날아예는 수리개와 같다. 수필은 정치경제, 사상과 문화, 도덕 등 외재적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자신의 속박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의 자유는 결코 제멋대로 하는것이 아니다. 한것은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란 없기때문이다. 수필창작은 어디까지나 모종 면에서의 제약을 받을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제약이란 곧 상식이고 공덕 등 자연법칙들을 말한다. 수필에서의 상식이란 정신의 응결을 의미하며 공덕이란 진실함을 의미한다. 수필은 비록 자아를 쓰는것이라지만 허위적인 조작과 가식은 금물이다.     수필은 사람의 정감을 쓰고 사실을 쓰고 어떤 인생도리를 쓰는 등 삼라만상을 포섭하지만 천지간의 법칙을 벗어날수는 없다. 제약이 없는 수필의 자유창작은 필경 반면에로 나갈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어떤 문화수필은 자유에 대한 리해가 깊지 못하고 제약성을 모르고있기에 한갈래 혼탁한 흐름을 이루놓아 대뜸 싫증을 준다.     기실 산곡간에 구름이라든가 류수, 나비, 창공에 수리개의 자유도 필경 제약성을 고유하고있는것이다. 자유의 실중은 수필창작에서 실중(失重)의 근원이다. 수필문체의 대소에 대해 변증법적으로 리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수필”은 반드시 작은것을 보아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한낱 이불거죽이 되고 만다. “소수필”은 큰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물안의 개구리가 될것이다. 훌륭한 수필은 대해나 심산속에 묻힌 보물이나 한송이 꽃이 하나의 세계가 되거나 한알의 모래알이 팔소매속에 작은 세계가 되게 하여야 한다. .     다음은 수필에서의 진실성과 허구성문제가 나서고있다. 시, 소설, 희곡 등 문체에서는 허구가 자체의 특성이라고 할수 있다. 수필창작에서 진실성과 허구성은 쟁론이 많은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문학은 진실성을 전제로 하기에 진실한 생활, 진실한 감정이 표현 되여야 하며 인물도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진실하지 못한 수필은 수필이 아니라는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국면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것은 표면적인 현실생활이 다가 진실하다고 보증 할수 없으며 수필은 어디까지나 예술이므로 현실의 국한성을 초월하여 예술적처리를 할수 있으며 허구로 창조할수 있다는것이다.     시비야 어떻든간에 수필창작은 현실에 발붙여야 하고 현실과 민간속에 뿌리박고 민초인생의 고난과 불행을 반영하면서 그들의 심령의 대변인이 되여야 한다. 진, 선, 미는 수필마당에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 꽃이 되여야 한다. 만약 한편의 수필에 이런것들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여있다면 그 수필은 글장난에 머믈고말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진실성을 편면적으로, 천박하게 리해한다면 역시 수필의 생명을 끊어버리고 말것이다. 진실이란 틀에 박힌것도 아니고 불가침범의 법규도 아니기에 허구성의 참여가 불가피한것이다. 진실성과 허구성은 음과 양, 오른손과 왼손 과의 관계와 같으며 영원히 분리되여있으면서도 통일성을 이루는 차길과 같다. 이처럼 수필에서 허허실실은 용허범위내에 두개의 존재이다.     현재 가짜수필이 적지 않다. 제재도 허위적이고 인물도 가짜이며 표달방식과 언어도 가짜이다. 물론 어떤것은 진실한 인물을 쓰고있지만 심령의 감동이 없기에 독특한 개성과 견해가 부재하여 거짓된것이라는 혐의를 벗어날수 없다. 또 어떤 거짓된 수필은 깊은 사색이 없이 씌여졌기에 인생과 생명의 진실과 본질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보기에 그럴듯한 빈둥지로 되고말았다.     목각예술작품과 속사에서 “실”은 때로 “허”에 의거하게 되며 중국문인들의 그림에서 “무”는 곧 “유”의 일부분이다. 가령 퉁소가 나무막대로 되여있어 속이 비지 않고 규격적인 구멍이 없다면 퉁소라고 할수 없거니와 미묘한 선률을 뽑아내지 못할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진실한 실체속에 빈마음이 남아있기에 대해같은 흉금속에 희로애락이 넘쳐나는법이 없이 평형을 유지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래쪽에 있을수록 갈래갈래 내물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게 되는것이다. 수필창작에서도 반드시 진실과 허공이 용납되여야 한다. 이속에는 내용과 형식등 방면이 포섭된다.     문학은 자기 본연에로 돌아와야 한다고 대성질호하면서부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수필은 응당 정치, 도덕 등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활화, 인성화된 내용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그로부터 수필은 그 자신의것으로 자족하면서 자아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시와 마찬가지로 수필은 “문학산책”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수필은 “로인문체”라고 한다. 이런 수필창작 관은 유모아, 한적함의 소요, 심령의 변연화상태를 보여주고있다. 반대로 현재 수필들은 갈수록 현시대를 탈리하여 무료와 자질구레한 일상에로 기울어지고있으며 화조월석이나 새나 벌레, 강아지와 고양이따위를 다루는데 그야말로 수필의 자살이라고 질타하고있다.     이런 수필들에는 시대의 숨결을 들을수 없을뿐만아니라 인간생명의 약동감도 느낄수 없다. 물론 수필이 시대의 주선률이 될수는 없는바 이는 문체자체의 특성으로부터 결정된것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을 “변연문체” 혹은 “업여문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만약 작가적자세로 수필을 일반 문장으로, 혹은 수필을 정론문이나 신문글로 쓰려한다면 기필코 좋은 수필을 써낼수 없다. 만약 수필이 너무 이른바의 중심에 너무 접근하거나 아예 하나로 융화되여진다면 수필의 본성을 잃고말것이다. 하기에 로련한 수필가라면 시대와 너무 거리를 두지 않고 변연인의 시점에서 변연의 신분으로 변연심리상태에서 수필을 쓰고있다.     그러므로 맹종하지 않으며 초조해해하지 않으며 공리에 구애되지 않고 류사성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청고한 심리상태에서 자연과 인생의 섭리를 터득하면서 인류 사회의 도리와 심령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런 창작심리상태는 결코 수필이 시대상에 등을 돌리고 자기의 상아탑속에서 문은 닫아걸고 수레를 만드는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처럼 무병신음하거나 제멋에겨워 뇌까리는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취가 있고 재치있는 수필은 직접 시대를 반영하지 않지만 시대의 밝고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으며 시대의 맥박을 무시하지 않는다. 진정 훌륭한 수필은 시대를 포용하면서 시대를 초월한다. 또 시대를 초월하려면 심령의 빛으로 생활적인 시대를 조명해야 한다. 이런 립장에서 말한다면 변연상태에 있기를 원하는 수필가는 반드시 시대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해야 하며 인류심령의 건전한 발전의 제고접에서 자연과 인생을 쓰면서 “자아”중심을 체현해야 한다. 옛날 장자의 산문은 그 시대의 변연에 처해있었지만 그 시대를 무시하지 않고 아울러 “자아”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강렬한 심령의 빛을 반사하였다. 그의 이런 심령의 빛은 일체 어두운면을 투시하 였으며 인생, 생명과 인성의 심처까지 조명해보였다.    한편 만약 수필이 시대의 메가폰으로 된다면 그 수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대의 버림을 받을것이다. 시대와 민중의 광대한 배경이 없다면 수필은 온실속에 꽃처럼 비바람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스러져버릴것이 자명하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시대라는 이 크낙한 환경속에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여야 하는바 시대의 파동과 민중의 숨결로 호흡하면서 세계를 바라보고 인생의 꽃이 피고지는 경상에 울고 웃어야 한다.     수필자체로 말하면 그는 정신의 섬광으로서 안광은 거대한 횃불이 되여 인생현장을, 심령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춰보일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망망한 우주 공간을 가득채우고도 지구촌을 비춰주는 하늘의 빛처럼 생활의 지구를 비춰보여야 한다. 태양은 우주의 변두리에 있지만 누리를 비추지 않는가?     수필창작에서의 변증원리는 찬연함과 담담함의 관계속에서도 체현된다. 한면으로는 변화무궁하여 마치 봄날처럼 꽃들이 아름다움을 다투고 다른 한면으로는 담담한 숲같고 무색무미의 맑은 물과 같다. 따라서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은 “비확정성”과 “창조성”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 어떤 모식으로 굳어져 버린다면 곧 메말라버리거나 죽어버릴것이다. 개인이거나 류파거나 조류라거나 할것없이 모두 같은 결과를 낳을것이다.     수필은 단일한 정태적생명현상이 아니며 또한 단일한 동태적생명현상만이 아니라 호상 전화하고 호상 보충해주는 변증적통일관계에 놓여있다. 더 부언한다면 수필은 물과 같아서 고정된 모양이 없는바 어떤 그릇에 담기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한다. 사발에 담긴물은 사발모형으로 존재하고 병에 담기면 병의 모양으로 있게 된다. 자유로이 흐르는 강물도 긴 흐름상태이지만 추우면 얼어붙고 따스해지면 녹아내려 흘러간다. 나중에 바다에 흘러들어 창해일속이 되여지면 바다의 모양을 같게 된다. 이렇듯 변화속에서만 생동할수 있는 수필이다.                                    2005 년 7 월  5 일                              
162    언어생활에서의 가치취향과 자아 댓글:  조회:7610  추천:0  2013-02-06
                          언어생활에서의 가치취향과 자아                                            최 균 선       인류의 일정한 사회적생활의 표현인 문화가 민족문화로서 창조되고 계승되여 발전해나갈진대 문화의 온갖 민족형식과 창조수단들가운데서 언어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언어와 언어행위는 사회적인것, 개인적인것, 본질적인것과 부차적 또는 우연적 인것으로 구분되는데 사회성이 특별히 강조되고있다. 왜냐하면 구조체계로서의 언어 와 언어행위의 현실적존재이며 그 실현으로서의 언어생활은 력사적으로 물려받아 내려오는 언어를 매개로 한 사유와 관념의 형성 및 그것의 교류과정과 결과의 총체로서 곧 사회적활동이 되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생활과정에 사람들의 언어의식, 언어관습이 형성되는데 매개 인의 심리기질이나 가치관념의 취향에 따라 언어수단의 리용상에서 불균등 현상도 생성된다. 이것이 보편화되고 일종의 체계로 굳어지면 곧 사회언어 사실로 실존한다.     따라서 사회언어현상의 생성에는 사회자체발전이 끼치는 영향, 의식과 사유의 변화발전이 끼치는 영향, 의식과 사유의 변화발전이 언어에 미치는 영향 등이 작용한다. 이리하여 특정된 언어환경속에서 살아야 하는 제민족들의 앞에는 민족어의 생존과 계승, 발전에 직접 관련되는 일련의 난제들 이 첨예하게 제기된다.     중국대지에 살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언어생활도 례외가 아니다. 어떤 정형은 사회상의 비정상적인 현상과 흡사한바 근거리적공리주의에서 자기 민족어를 도외시 하면서 백프로 한어화를 추구한다거나 한국풍의 외래어차용열 등 열점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상에 열점이 많다는것은 흥분점이 많아졌다는 설명이 되고 사유가 활약되고 창조의식이 발랄해졌다는 표징이 될지는 모르겠으되 민족어생활에서의 인격주체의 일종 상실이 아닐가 우려 하는바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도덕의미상에서의 인격이 아니라 생리, 체질 이외의 특징인 민족적인 자질, 그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민족어를 근근히 사회집단내 사람들사이의 접촉과 교제의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관점과 민족 어를 전방위적인 민족문화건설의 대물림보배로 간직하는가 하는 두 관점 사이에서 현연되는 민족인으로서의 주체적자아인격이다. 한것은 주체적 자아의 완성은 도덕, 가치관, 추구의 경향성, 교제기교, 지식결구, 수준으 로 구성되는 하나의 계통이기때문이다.     언어생활ㅡ하면 매우 광범위한 령역이 소급되므로 본 론문에서는 주로 외래어 차용에 대해 천박한 견해를 피력해보려 한다. 기술의 인입, 타문화의 인입은 사람들의 사유방식, 행위궤적, 정감 활동 등 방면에 심각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교제방식을 추구하게 되는것은 불가피적이다. 그러나 습관된 언어환경과 전통관념에서 오는 각종 제약성, 개성기질, 지구문화 심리 의 견제력 등 제반인소와 조건을 고려함이 없이 무엇을 보면 무엇을 본따보려 하는 본체상실의 그런 언어의식, 언어가치관, 언어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언어가 개체성 의 전달매개 물인것만은 기성사실이나 언어활동은 하나의 사회결약식의 부호계통 인만큼 개인이외의것인 일종 사회제도로 된다는 이 점이 곧 리론근거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우리의 서사어생활에 날로 외래어차용 경향이 농후해 지는데 언어생활에서의 새 발굴, 새 창조가 기도되고 또 그리함으로써 전부의 지혜가 발휘되여 일종의 승화가 약속된다기보다 우리 조선족문화의 개성특징, 자체의 건전한 발전에 유해무익하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례를 들어보자. 많이 팔리는 책을 《베스트셀리》로, 문단등장을 《데뷔》로, 이성친구와의 밀회를 《데이트》로, 옆얼굴을 《프로필》로, 려행사의 안내자를 《가이드》로, 물건사기, 장보기를 《쇼핑》으로, 검은 색, 흑색을 《블랙》으로, 복장설계사, 도안자를 《디자이너》로, 류행, 양식을 《패션》으로 쓰는 등등… 우리 말에 합당한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부득부득 생경한 외래어를 차용하는데는 아무리해도 납득이 안간다.     상술한바와 같이 임의의 차용어들은 일반 독자들은 놀래울지 알수 없으나 기실 《외래어사전》이나 한권 갖추고 면무식이나 한 사람이면 얼마든지 멋을 부려볼수 있다. 례는 얼마든지 들수 있다. 이를테면 백화 상점을《데파아트》로, 련애편지를 《러브레터》로, 마음, 기억력을 《마인드》로, 년장자, 선배를《시니어》로, 던지다를 《드로우하다》로 쓴다 하자. 그런들 어떻단 말인가? 영어단어를 많이 장악했단것인가? 개혁정신이 빼여났다는건가?…     인간의 언어적전달과 표현을 최고도로 수행하려는 의욕과 그것을 위한 심리적, 육체적노력을 최소한도로 한정해보려는 경제성의 결합 등 심리가 기대되는바이고 또 우리 말 표현속에 보다 적절한 말이 없을 때 외래어를 음차해쓴 선례가 많은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차용은 언어가 늘 자기 기능을 원만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보나 단어체계발전의 견지에서 보나 합목적이였고 허용범위내의 가치취향이였다.     이를테면 전문기술용어, 학술용어, 기계화학명사 등을 제외하고라도 외래어중에 필수적인 단어들을 꼭 수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대중언어를 통해 검증되고 파악된것 이여야 완전하고 생명력이 있다. 례하여 우리가 잘 알고있는《세멘트—영어》, 《브란 데— 영어》,《악센트—영어》,《론리—영어》《발레무—영어》,《슈제트—프랑스어》등 많고많지만 상기한 그런 한국 식의 외래어차용과는 구별되는것이다.    각이한 언어의식과 관습, 가치취향이 공존하는 이상 외래어차용에 각별한 열성 자들이 있을법도 하지만 신문이나 통속독물같은데서 생뚱같이 외래어를 섞어쓴다면 언어의 통신적기능장애만 조성할뿐이요 어찌보면 《흉내를 내는건가? 허장성세를 하는구나》하는 역심리가 앞선다. 혹자는 언어형식의 단순화발전, 내지는 수구적태도 역시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냐고 반기를 들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언어는 인류의 사유결구, 사유방식, 사유모식의 내재적제약성을 받는 다는것은 주지하는바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것은 관념으로서 우리들이 모종의 언어사용을 접수할 때 부지불식간에 그런 언어와 련계된 사유모식을 운용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명기할것이 있다. 즉 일종의 사유관념이 우리의 두뇌속에 충격해들어올 때 그것이 마치 접수된것처럼 되지만 만약 사유 모식이 상응한 변혁을 가져오지 못했다면 새로운 관념의 접수라는것은 결국 피상적이고 허위적인것이 될뿐이며 전통적사유모식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빌려온 관념을 질식시켜버리고 만다. 가령 시험성적인 개별적 외래어차용일지라도 이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언어의 내재형식은 어음과 개념의 매개물로서 민족에 따라 다른바 매 언어, 지어는 하찮은 방언 한마디에도 그 지방 인민의 개성이 나타나고 민족심리특징이 보여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쏘쉬르는 언어현상을 곧잘 서양장기에 비유하였 는데 나무로 만든 장기쪽이든 상아로 만든 장기쪽이든 그것은 경기자체 에는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만일 장기쪽의 수를 더하거나 덜어낸다면 그것은 즉시에 경기체계규칙—이 장기의 《문법체계》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여기서 알수 있는바 장기에서 중요한것은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재료나 모양인것이 아니라 경기규칙에 따른 매 장기쪽의 기능가치인것이다. 생경한 한국식 차용 어(영어단어)가 상아로 만든《장기쪽》이라 해도 이와 마찬가지 도리이다.     단어의 부단한 생성, 발전, 사멸과 인입의 과정에 그것들이 하나하나의 개별적인것으로부터 시작되여 점차적으로 전반 언어체계에 영향을 끼치자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것이고 한편 우리 말의 생명력, 견인성으로 말미암아, 특히는 언어자체의 특성, 나아가서는 인민대중에 의해 고유한 형태부들이 단어체계속에서 튼튼히 보존될것 이므로 공연한 로파심을 가질것도 없겠으나 우리 말의 순결성확보와 독자제군의 열독심리, 작품의 가시도(可视度)를 명랑하게 하려면 그래도 비실용적이고 비실혜 적인 언어유희식의 문풍을 배격하자는 주장이다.    사실 외래어빌려쓰기를 했거나 모조어를 씀으로써 우리 말의 어휘구성을 교란하고 외래어투성이 잡탕말을 생성시킨 한국의 언어실태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붉은등을 켜준것이지 결코 무슨 좌표계나 귀감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입말이든 글말이든 민족어생활권내에 사는 모든 민족인, 특히는 언어문자방면에서 모범을 보여줘야 할 여러 문필가들은 다음 세가지 원칙을 다시 한번 명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고유한 우리 말을 적극적으로 알차게 살려씀으로써 단어체계 의 민족적 특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자주적원칙이다.     둘째로, 단어체계의 발전은 현대사회발전추세에 맞게 부단히 추진시키되 지구문화권내의 대등성을 확보하는 현대성원칙이다.    셋째로, 자주적인 기개를 지니고 경제문화교류를 통해 들어오는 외래어를 녹여서 자기의 어휘분야를 풍부히 하는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수용원칙이다.    이 세개 원칙은 에누리없어야 한다. 언어인즉 겨레의 정서와 사유와 감정까지 제약하며 물질문화의 창조도 언어속에 실려있는 민족혼의 힘에 받들려오지 않는가!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옳바른 운용이야말로 우리 겨레들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품어주고 키워주는 문화의 영원한 록지가 아니며 세계 민족지림에 떳떳이 내세워줄 튼튼한 발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저마다 자기 민족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감을 안고 민족문화발전의 계주봉을 세세대대로 외착없이 물려주는 숭고한 력사적사명을 참답게 수행해야 한다.                                                         중국조선어문 1995년4월
161    문학언어의 공능풍격 댓글:  조회:7665  추천:1  2013-02-06
                          문학언어공능의 풍격문제                                                                                             최 균 선           무릇 어떠한 종류의 예술부호이든지 주요공능은 감정정보전달에 있는바 일컬어 예술부호—문학언어는 실제상 자체공능의 최적화된 변형체라 말할수 있다. 문학어는 사물에 대한 지시나 지식의 주입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관을 자극하여 무언가 깨우쳐주고 그리하여 보편적인 진실한 감동을 확대시켜주는 엄격히 선정된 언어들이다. 례하여 어감에 민감한 독자들은《밤》이라 하면 단순히 낮의 반대인 시각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며《전원》하면 그저 곡식이나 채소를 심는 밭으로만 터득하지 않는다.     그리고 《봄비》가 해당 언어환경속에서 봄날의 비물로만 되지 않듯이《신록》에서 희망과 대자연의 조화를 련상하게 되고《락엽》에서 자연의 무상함과 비애 등 감정을 갖게 된다. 이렇듯 문학어들은 그 실용성을 초월한 어떤 생활적풍경까지 련상시키는바 독자들의 언어접수도식에서 문화소양의 루적을 기초로 하여 건립되는 상대적으로 온정된 련계기제를 고유한다. 우리는 이것을 암시, 혹은 상징이라고 하는데 문학언어공능의 중요한 조성부분이다.     예술에서 반복은 죽음이라고 한다. 하여 재래로 문학가들은 일반적어휘조합으로 자기 작품을 구사하는것을 원치않고 가능한껏 창조성적으로 새조합을 시도하면서 고심참담하게 문학을 경영해왔다. 그렇다고 하여 수의적인 독립적언어체계의 건립이 가능한것은 아니다. 례로 문학작품에서《도끼》는 역시《도끼》였지《끼도》로 될수 는 없었으며《아버지》는《아부지》로 통하나《지아버》로 될수 없는것처럼 말이다.     작가들이 일정한 교제효익의 목적밑에 유의적으로 선택하는 상응한 언어수단 즉 참신한 표달방식의 계통질을 문학언어의 공능풍격이라 하는데 곧 문학작품의 문체풍격을 의미한다. 이는 작가개인이 언어의 구체응용상 그 개성특점에 따라 채용하는 방식, 수단의 응집과는 또 다른 동체이질의것이다. 문학언어공능풍격에는 언어흐름 마당에서 체현되는 모종의 어조, 어투와 언어의 뜻마당에서 산생되는 암시, 상징 등 네개 요소가 포괄된다. 먼저 어조, 어투에 대해 말해보자.     소설창작의 경우 표현전략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스토리나 인물형상륜곽이 정해진 다음에는 어조를 결정해야 한다. 문학적대화의 전략에서 어조의 기본은 작품에 관통될 작가의 정감기조로서 작가-화자를 개성적으로 만들어줄뿐만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과 정서와 욕망, 또는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학장치로도 되기때문 이다. 어조는 화자의 정서상태를 나타내는 기능만 지닌것은 아니다. 같은 제재를 이 야기해도 작가에 따라 각기 다른 어조로 말하고 그로 인해서 작품의 특질이 달라진다 는 점에서 작자의 개성을 체현하는 문학장치라고도 할수 있다.     그만큼 어조는 작가의 창작에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바 그 실질은 분위기조성, 내지는 자기정감표현형식으로서 짙은 주관성을 띠고있어 창작주체의 개성특질이 집중 적으로 표현된다. 위렌(R.Wiren)은 시의 어조를 (내적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서 (제재, 청중, 때로는 화자 자신에 대한 태도)라고 정의하고있다. 뚜르게네브도 이에 대해《중요한것은 생동하면서도 특수한 작가 개인소유의 음조이다. 이런 음조는 다른 사람의 후두에서는 절대 울려나올수 없다》라고 론술한바 있다.     물론 문학적대화에서 화자의 어조는 실제 작가의 어조가 그대로 반영되는것은 아니다. 실제적작가는 작품속에 화자로 현연되고 화제, 독자의 상호관계와 에 설정되는 부동한 상황 및 분위기에 따라 선택, 설정된다고 볼수 있다. 따라서 어조의 결정에서 화자와 관계되는 요소로는 우선 작가의 인생관 내지는 세계관이 앞서게 된다. 그러나 문학적대화는 인물의 내면세계를 직접 설명하기보다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점은 소월시를 살펴봐도 알수 있다. 그의 전체 시작품에서 느껴지는 어조는 다분히 수동적이고 체념적이다. 그리고 녀성화자보다 남성화자가 다소 저항적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수 있다. 소월시인의 전체 어조가 이처럼 체념적인것은 일제 의 강폭한 압제적현실에 저항해보았자 자아의 외곡을 초래한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가치관이 재현된 결과라고 할수 있다.     어투는 어조와 같이 문학언어공능풍격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어구들의 횡적련계로 구성되는 언어의 흐름마당에서의 다른 일종의 표현이다. 어조가 객체에 대한 창작 주체의 정감평가에서 기원되여 개체성이 생활소재에 대한 파악 내지 표현이라면 어투는 창작대상에 대한 형상적서술로서 흔히 생활소재자체가 창작주체에의 반작 용이라 할수 있다.     언어의 흐름마당에서 언어절주의 본질은 우리들 자신의 내심운동의 률동인바 일종 명확한 어투는 독특한 표현효과를 약속하고있다. 즉 언어의 흐름마당이든 언어  의 뜻마당이든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 생명요소로서의 언어에는 감정적특질이 고유되 여있다는것이다. 이로 보아 문학작품에서 언어가 공능변형을 통해 보통언어로부터 예술부호로 전환될뿐임을 알수 있다.     보통 풍격이라 하면 구체작가의 작품방면의 풍격이 거론되지만 문학언어일반의 공능풍격의 변이에 대해서 의론되지 않고있다. 문학창작에서 방법열, 기법열, 형식열 에 뒤이어 최근년간에 문학언어공능풍격의 변화가 어떤 징표를 보이고있는데 연구와 토론이 요청되고있다.     흔히 평론계에서 중국조선족문학어는 어딘가 메마르고 딱딱하다고들 말하는데 비교학각도에서 모종의 약점일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예술부호 그 자체에 선천적인 치명적약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언어구사의 창조성, 령활성, 조합기교 및 기능에 있다고 말해야 공정할것이다. 주지하다싶이 언어자체에는 개방성과 탄성이 고유되여있지만 그것은 일정한 언어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작가로서의 최서해의 창작적개성은 피끓는 열정이며 힘찬 기백이다. 열정과 기백을 돋구어낸데 바로 최서해의 독창적인 풍격이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혈기가 아니며 단순한 감정적인것이거나 육체적인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구자적인 사상적 지향과 정신세계에 의하여 격발된 열혈작가로서의 전투적기백이며 곧 그의 풍격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을 읽노라면 작품속에서 세차게 고동치는  힘찬 박동에 사로잡히게 되며 그의 정서에 휩싸이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의 작품세계에는 랭담과 관조가 없으며 무맥함과 완만성이 없다. 어느 작품에서나 힘과 열정이 있고 강한 박진력이 있다. 그의 대표작《탈출기》에서의 결말은 평온한 그속에 절절한 호소와 비애에 찬 부르짖음이 은은히 메아리치고있음을 누구나 절감했을것이다.     조명희의 단편소들을 다 읽고 마지막 페지를 덮으면서 받는 느낌은 후더운 정서이다. 진하고 강렬한 정서, 이것이 조명희의 창작개성이며 풍격의 주요한 면모이다. 그의 강렬한 정서는 그의 작가정신의 발현이자 문학언어구사에서 발현된 공능 풍격이다. 물론 소설에서 묘사자나 설화자로서의 작가의 면모가 어느 작가, 어느 작품에서나 나서는것은 사실이나 포석의 소설에는 작가의 얼굴이 특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소설《락동강》의 어조는 유유한것 같지만 기저에서 무겁고 비장한 감응이 고패치고있다.      라도향의 단편소설들을 재음미해보면 그 소박성속에 사실상 강하게 안겨지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섬세성이다. 그것은 소박하나 불쌍한 주인공들의 미세한 면모와 단순하며 정연한 구상과 상세한 심리묘사, 가는 언어문장 등의 풍격으로 하여 보장된 형상의 섬세성이다. 주로 평범한 세태생활속에서 소재를 선택하고있는것이 작가의 창작적개성, 풍격이나 보다 중요한것은 그 평범한 생활자료속에서 사회적, 시대적의 의를 탐색하고 그것을 자기식의 어조, 어투로 전달하는 문학언어공능풍격의 체현에서 작가의 특색이 고유하게 된것이다. 그의 대표작《벙어리 삼룡이》나《행랑자식》이나《지형근》에서 작가는 마치 세밀한 언어문체로 섬세한 형상적화폭을 창조한 풍격이 독특한 작가였다. 이렇듯 최서해소설의 언어공능풍격과 리기영소설의 언어공능 풍격이 다르며 조명희와 라도향의 소설언어공능풍격이 구별되는것도 무엇을 썼는가에 있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어떻게 언어구사를 하는가에서도 구별되고 있는것이다.      최근년간 우리 중국조선민족문학언어에서 한국문학언어풍격을 모방,답습하는 경향성이 짙어가다가 이미 하나의 풍조로까지 되였는데 기실 이것은 맹목성에서 온 자아상실의 표현이라 말하고싶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문학예술기호 자체에 개발과 창조의 공간이 없는것이 아니라 작가마다의 언어소양을 비롯한 언어구사의 령활한 창조성, 기교의 모색에 달렸으며 그로서 체현되는 창작개성에 달렸다. 반항의 작가인 최서해가 함북도방언으로《탈출기》같은 명작을 써내지 않았던가?     하기에 성숙한 작가라면 우리 말 표현수법들이 비유, 의인, 상징, 암시, 풍자, 해학, 등이 모두에게 공유된것이라도 자기식으로 다양하게 선택, 운용하여 새록새록 새로운 언어환경을 창조해냄으로써 그속에서 남과 구별되는 자기의 창작풍격을 형성 할수 있는것이다. 또 그로써 그 작가의 인격과 작가적가치가 자리매김하게 된다.     문학작품은 어디까지나 글을 보며 감수, 감탄하게 되지만 한개 민족문화경험은 점차적으로 침투될수 있을뿐 무더기로 옮겨다 이식시킬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사용하는 문학언어와 동질의 예술부호이지만 한국문학언어공능풍격이 조선의것과도 색다르듯이 우리의 문학언어공능풍격도 중국대륙에 사는 독립적인 중국조선족의 제반 특징이 나름대로 진실하게 체현되여야 우리 문학이노라고 떳떳이 말할수 있을것이다.        문학어조합기교, 정감성부여, 형상어의 탐색과 창출 등 면에서의 유익하고 합목적인것은 적극 배워서 자신의것으로 내화하면서 창조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것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으리라. 그러나 문학어에서 심각한것은 무엇보다 사유모식이다. 왜냐하면 이 사유모식뒤에는 인간의 관념이 서있기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특수한 력사적문화배경과 혈연적뉴대를 가지고 발육성장한 중국 조선족문학에서 조선, 한국과의 선천적공통성을 배제할수는 없지만 한편 부동한 지역, 문화환경이 부동한 문학현상을 창출하기 마련이므로 자기 특색이 주류가 되여야 하고 또 그 주체성을  영원히 확보해 나가야 할것은 두말할것 없다. 언어는 그속에 들어가는 일체 사람들의 주체적위치의 상징질서를 설정하며 이로써 언어는 그만큼 우리들이 생존하는 자신의 유일한 세계로 되여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문학창작을 진행함에서도 자기가 생활하는 주위세계에서 취재하게 되고 그것에 대한 파악의 기초우에서 예술적재현을 실현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부호계통으로서 개성적사유를 표달하는 창작과정에 문학어의 상규질서를 어떻게 파괴하고 어떻게 새로운 조합을 시도한다해도 결과적으로 사유모식의 사회적제약성을 벗어날수 없다. 우리는 다 같은 단군님의 후손이지만 이미 중국조선족으로 부상된 이상 우리의 사유모식이 형성되여 있다는 현실을 부정해버릴수 없다고 본다.     주지하다싶이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대지에 뿌리박고 개화결실한 자립적문학으로서 중국조선족인민들의 인생마당에서의 추구와 희f로애락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문학이다. 바로 그러기때문에 창작의 기본수단이 동질의것이라도 부동한 정치리념, 부동한 경제생활권, 부동한 지역적문화습관속에서 부동한 가치관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특정된 생활면모가 반영될수밖에 없는것이다. 여기서 조선, 한국 문학과 다른 우리 문학의 특성이 규명되기도 한다.     문학작품에서 세계본체에 대한 작가들 호상간의 사유모식의 차이성이 곧 창작개성이 되여지고 구성 등 면에서 창작풍격이 체현되는것도 사실이지만 주로는 예술내 용과 언어공능풍격에서 보다 돌출히 나타난다. 같은 한어로 창작되고 중국문학권에 들긴 하지만 중국대륙문학, 대만문학, 향항문학이라는 엄연히 구별되는 문학현상으로 고착되여있는것도 바로 이때문이 아니겠는가?     풍격은 곧 문풍을 의미한다. 문풍은 또 실제상 그 사람의 사상풍격과 그것의 작품에서의 표현으로서 특정된 사회환경, 시대의 산물이다. 즉 정치, 경제, 문화의 연혁이 문풍의 변화를 결정한다. 따라서 한 작가의 작품의 풍격, 지방특색의 형성은 환경기분과 취재문제만인것이 아니며 더구나 간단한 지리학상의 향토개념과의 등호를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언어의 공능풍격은 우선 특정된 인문환경속에서의 문화심리의 자연적표출로서 되돌아와 독자들을 감복시키는것을 그 심미가치척도로 삼는다.     언어를 존재의 뜰이라 비유한다. 이런 기점에서 범민족문화권이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형성되게 하였고 서로 침투하고 영향주는 물질적바탕이 있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민족이 일찍 월강민, 망향민으로 있을 때까지는 그 뿌리를 유구 한 조선문학에 두었고 그후 조선문학, 한국문학으로 갈래가 뻗을 때 우리 중국대륙에도 중국조선족문학이 새롭게 뿌리내리고 개화하여 전자들과 또 구별되고 그 독립성을 생명으로 한 문학권이 구축되였으며 그로부터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이 규정되 였다. 마치 영국문학, 미국문학이 동일한 영어문자로 창작됨에도 불구하고 별개로 구별되고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이 대륙적인 풍토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중국조선민족으로서 자기문학의 제반 특징이 꽃향기처럼 만방해야 우리 문학의 생존리유가 서게 된다. 문학언어의 생신한 조합기교, 정감표달방식, 형상성창조 등 면에서 유익한 섭취는 왈가왈부할것없이 필요하지만 자기를 잃으면서까지 닮아가려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의 문학이 자기나름의 모습으로 산처럼 문학지림에 우뚝 솟으려면 매개 작가들마다 자기가 처한 사회현실에 대한 인식활동중에서 그 내재적기질을 굳혀야 하며 주체성확립에 립각하여 자기 특색을 띤 창작궤도를 구축해야 중국조선민족의 문학이라고 내세울수있으며 문학의 망망대해속에서 생존권이 확보되고 그속에서 부끄럼없이 살아남을수 있다. 우리의 문학언어공능풍격이 한국문학언어공능풍격에 업히울수록 상대적으로 우리 민족문학의 독립성은 상실되고 중국조선족작가로서의 자기 개성을 스스로 잃고말뿐이라는것을 명기하자.                                                               2005 년 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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