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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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인류가 우리를 미워하고 또 총애하는 이중성격에 대하여 댓글:  조회:7515  추천:0  2013-11-21
                       인류가 우리를 미워하고 또 총애하는 이중성격에 대하여                                                        ㅡ 개의 웅변 ㅡ       열변을 토하기전에 먼저 우리 개씨네 가보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이것은 웅변에 군더더기가 아니라 론제를 더 충실하게 론증하기 위한 전제로 될것이다. 인류의 모든 력사와 더불어 동보해 온 전후 사연을 알아야 인간의 이중성격에 대해 론거가 충분하게 통책할수 있을게 아니겠는가?     태초에 노아의 방주에 올라 재난을 면하고 오늘날까지 목숨을 이어오며 번성한 만국의 잡다한 동물들이 이 자리에 모였지만 인류의 력사에서 우리네 개씨네들만큼 친근한 동물은 아마 없을것이다. 신석기시대 이후로부터 인간의 필요에 의해 우리 개들을 인위적으로 개량되여 도움이 될만한 많은 견종이 생겨났고 인간가족의 일원 으로 진화된 우리들이다.     이는 곧 인류가 후세에 전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현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중 인간을 제외한 최강의 동물인 개는 원시늑대로부터 진화됐다는 설도 있고 원시늑대와 전혀 다른 물종에서 기원했을거라는 설도 있는데 초기의 진화는 인간과 접촉이 시작되면서 개로서의 특징들이 나타났을것이다.     현재 개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개의 관계는 15,000년전에 시작되였을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12,000년 전까지 3,000년 동안 늑대에서 개라고 불리는 동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이때 진화된 원시개는 늑대와 다른 특징들을 나타냈다. 그 특징은 늑대보다 체대가 작고 머리는 둥그스름하며 이발도 작고 이발간격이 좁아지고 내장의 길이도 길어진것이다.     그때부터 진화된 개들은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른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견종들이 있었고 인위적으로 개량되는 견종들이 있었다. 인간과 개의 관계도 지역과 문화전통에 의해서 다르게 나타났다. 고대아시아사람들은 우리 개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반대로 이슬람제국에서는 개로 인해서 질병이 생긴다며 깨끗하지 못한 동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였다.     그러나 오래동안 지속된 인간과 개의 관계는 이제는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가 되였다. 원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습성을 가졌던 우리 개들은 인간에게 순종하게 됐고 무언가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짖음" 이라는 버릇이 생겨났으며 여러가지 힘든 일을 인간대신 할수 있는 지력상수 개발도 이루어졌다.     예로부터 집지킴이로, 사냥꾼으로 인간의 충실한 조력자였던 우리네 개는 인류의 문명개화발전과 더불어 아주 총명한 물종으로 부상되였는바 최근엔 맹인 안내견, 보청견· 인명구조견까지 되여 그 활동령역을 넓어졌다. 아따, 현대영화에 도 충성스럽고 용맹하고 총명한 개의 형상들로 등장하지 않던가?     호랑이님이 개회사에서 우리 개족속들이 신세를 고치여 사회적위상이 높아졌다는 말을 했는데 아닌게아니라 우리 족속들속에 번신한 류종들이 있다. 주인마담의 총애를 받아 무랍없는 사이로 되여서 침대생활을 하거나 옛날 가난한집 아이들은 꿈도 꾸지못하였던 벼라별 고급음식을 먹으며 금의옥식에 현대적문화 생활을 하는 복받은 귀족파들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앙증스러운 발바리들로서 애완견이라는 미칭을 달고 다녀도 개세계에서는 말등공민이라 할것이다.     물론 집지키개들도 마당한구석에 묶여있던 신세에서 벗어나 잘 먹으며 은빛사슬을 목에 걸고 주인과 산책하는 신세가 되였다. 지금 농촌태생의 개들도 더는 똥개라는 루명을 듣지 않고 자유자재로 살게 된것은 사실이다. 불행하다면 결국 보신탕으로 될 숙명은 면치못하였지만 말이다.     그만큼 주인가족성원들과 동격으로 취급받으며 그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우리 개씨네가 가진 문화적, 상징적의미는 날이갈수록 부연되고있다. 하긴 우리 개들의 위상이 어제 오늘 갑자기 높아진것은 아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는 우리 개들이 잡귀신, 병마, 요귀 등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어왔다. 특히 흰개는 이같은 능력외에 집안에 좋은일이 있게 한다는 길상물이 되였며 재난을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왔다. 흰개는 또 무속신화, 저승설화속에서 환생하기 위해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는 사람들의 길을 안내하는줄로 알고있다. 귀신을 쫓는 개라는 삽살개는 그 명성답게 저승사자를 막아낸다. 이와 함께 소위 집터가 세다는 곳의 땅기운을 눌러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신봉해왔다.    개도 닷새가 되면 주인을 안다는 속담은 우리네 총명과 의리심을 두고 만들어진줄로 안다. 충성과 일러주는 의로운 개들의 이야기도 있고 고대에 조선전라북도 임실군이라는 사람의“오수개”는 들불을 꺼서 잠자던 주인을 구해내여서 의견비(义犬碑)까지 세워졌으며 강원도 원성군 설화에는 호랑이를 물리쳐 주인을 구했다는 개가 등장한다. 최부자네 개무덤 이야기에선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집의  아이를 젖을 먹여서 살렸다는 어미개도 나온다.     한편 사람들은 개와 관련시켜가장 속되고 모독적인 속담들을 많이도 만들어냈다. 례하면 못난 애비에미에게서 못난 자식이 나와도 “개가 개를 낳지”하고 비아냥거리고 어리석고 못난자를 두고“개가 콩엿사먹고 버드나무에 올라가게”로 비유하고 나쁜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경계해도“개를 친하면 벼룩이 옮는다” 는 말로 훈계하고 저들속에 격이 맞지 않는 꼴을 두고도 “개귀에 방울” 이라 비웃어대고 멋없이 우줄렁대는 민충이를 두고 “개잡은 포수”라고 욕하고 행실이 더러운 사람과 다투지 말고 피하는게 상책이라는것을“개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라고 문자를 쓴다.     이런 모독적인 속담을 들자면 점심때까지 들어도 끝이 없을것이다. 그리고 나쁜말에는 꼭 개를 접두사로 붙여서 말하는데 개소리, 개살구, 개방귀같은 소리, 개×같은소리, “개×같은 새끼”“개망나니”,등등이 있고 돈이 행세하는 비틀어진 세상을 개탄해도“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 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입버릇처럼“개같은 놈”“개보다 못한놈” 적의 앞잡이도 충성스러운 우리네 다리에 빗대여“개다리”라고 욕한다.     이렇듯 전후가 다르게 우리 개를 대하는데서 고급령장동물이라는 인간들의 야비한 이중적성격이 적라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단말인가? 그렇게 가장 몹쓸 물종 으로 치부하다가도 여러가지로 몸에 좋다고 하니까 잡아서 탕을 만들어먹으며“보신탕”이라고 간지러운 칭호를 달아주거나 가살스럽게 개고기라 하지 않고 뭐 “단고기”라 이름짓고 오리오리 찢어서 아귀아귀 먹어댄다.     그래 우리 개들이 이런 대접을 받는것이 억울하지 않으며 불쌍하지 않단말인가? 나는 오늘 이 연단에서 모든 개들을 대표하여 항의를 제기하는바이다. 아마 이 지구촌에서 가장 리기적이고 량면파적이며 간능한 무리는 인간이라 일컫는 사람들일것이다. 배은망덕은 누가 밥먹듯 하는데 우리 충성스러운 개들을 빗대고 욕하니 너무 야비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래 그렇지 않단말인가?     말이야 바른대로 우리 개씨네들이 동물중에서는 가장 사랑받이동물이 되여야 할것이다. 우리 개들은 주인이 가난하다 해서 배반하는 법이 없고 주인이 무정하게 먼곳에 버려도 기어이 주인집을 찾아 천리를 달려오는 덕성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에겐 미담이 많은만큼 덕담만 하자해도 다하지 못할것이다. 욕하겠으면 그저 욕할일이지 정녕 개에 비유하겠으면 개보다 못한 무엇무엇이라고 해야 사리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 금세의 인간세상에는 우리네 개보다 못한 인간들이 기지부수이다. 남편이 돈을 잘벌지 못한다하여 외국령감쟁이 품에 안겨 복을 누리는 바람개비녀자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자기를 금이야 옥이야 하고 길러준 량친부모를 모실대신 박대하고 내쫓아 천고불효를 저지르는 개보다 못한 즘생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제옆차기에는 루만금을 쑤셔넣고는 고생고생하는 민공들의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내주기 싫어서 차일피일하거나 아예 주자를 놓는 놈팽이들이나 빈곤현이라는 부끄러운 모자를 쓰고도 최고급호화차에 앉아 재세를 부리는 어르신들, 절은 페해도 방장은 살찐다고 기업은 억망이 되여도 제노릇 단단히 하고 주색잡기에 흥탕거리는 선택된자들, 무재무덕하고 아무능력도 없이 권력방망이만 멋지게 휘두르며 일세영달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네 개들에 비할리유도 없이 더 패덕한 자들이다.     이런 인간들은 우리 개들에게 부끄러워 할줄 알아야 한다. 기시와 천대와 미움과 저주의 대명사로 우리 개들을 천거한 인간들은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콩죽은 내가 먹었는데 네가 왜 배를 앓는가 하는 속담이 이런데 가당한지 모르지만 온갖 추행은 인간이 저지르면서 무고한 개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냐 말이다.     항간에는 개는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개들도 현대사회에서는 식성을 고쳐서 별로 똥을 먹지않고도 연명해 간다. 하다면 악습이 고질로 된 사회패류들이나 탐욕병을 앓고있는 탐관오리들의 본성은 고쳐질수 없단말인가? 물론 이건 인간들이 서로 알아서 해결할 일이긴하다. 내 웅변은 이로써 마감하려 한다.                                                              2007 년 10 월 21 일          
279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댓글:  조회:7356  추천:0  2013-11-21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ㅡ양의 공소ㅡ       여러분, 내 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저 유명한 쉐익스피어의《가련한자여, 너의 이름은 녀자다.》라는 말을 흉내내여《양이여, 너의 이름은 선량이다!》라고 락인을 찍고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기회에 공소하지 않고 그냥 죽어지내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이 시각, 가승속에 서리고 서린 만고의 원한과 분노를 터뜨리렵니다. 모두 짐작하겠지만 불공대천의 승냥이들과의 악연을 말하려는것입니다.     어느 날, 승냥이가 어린 양을 잡아먹을 구실을 대느라고 생트집을 걸어왔습니다. 어린양이 자기가 마실물을 흐려놓았다는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린 양은 아래쪽에 있었거든요. 그야말로 언어도단이였습니다. 아니 강도론리였습니다. 할말이 없게 된 승냥이는 다른 트집을 걸었습니다. 《아, 이제 생각나누나. 2년전에 내 여기를 지나갈 때 네가 여기서 무례한 말을 하였다. 이놈아, 난 잊을수 없다!》하고 억지를 쓰면서 백번죽어도 마땅하다는것이였습니다.     어린양이 2년전에 세상에 나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자 승냥이는《오, 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형님이다.》《대왕님, 저에겐 형님이 없습니다.》《그렇지, 그럼 틀림없이 너의 친구, 아니면 너의 친척들이다. 아무튼 너희들 양들과 너희들의 사냥개, 그리고 너희들의 방목인들은 모두 나를 해치려하고 언제나 나를 죽이려 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너에게 그 원한을 풀겠다. 》어린양이《그런데 나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하고 따지고 들자《닥쳐!넌 하루종일 종알거렸다. 나에겐 너의 그 죄상을 따질겨를이 없다. 너의 죄상은 바로 내가 너를 잡아먹으련다는 그것이다. 》라고 하면서 무작정 어린양을 깊은산속으로 끌고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은 내가 직접 목격한것인데 로씨야의 유명한 우화자가 끄릴로브선생이 어데서 얻어듣고 그 유명한《승냥이와 어린양》이라는 우화를 써냈던것이지요. 지금도 소학교교과서에서 읽을수 있을것입니다. 약자는 강자앞에서 언제나 죄인으로 된다 는 비정한 인간사회라는것, 이러한 실례는 력사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속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것을 까밝히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력사를 적은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엮어내였습니다. 그러나 끄릴로브선생은 우화로써 인간을 깨우치고있습니다     나의 주인도 어릴때 선생님의 해석을 듣고 무도한 승냥이에게 의분을 토하느라 침을 튕기고 정의감이 북받쳐 작은 주먹을  내흔들었답니다. 하긴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과서의 거의 모든 동화들에서 현실이 외곡되여 있습니다. 작은 흰토끼가 저기 사자님의 조부를 우물에 처넣은 이야기, 재빛승냥이를 지혜로 이긴 이야기 등, 권선징악, 인과보응의 동화들에서 지금도 아이들은 약자는 선량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관념을 굳혀가고있습니다. 선량한 약자는 언제건 강자의 악을 전승한다는 불변의 진리를 주입하려는것입니다.     인간은 정의와 진리는 언제나 선량한 약자의켠에 서있다는 리념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반성할때가 언녕되였습니다. 이런 전통적계몽교육속에서 자신에게 정의의 홰불이 쥐여져있기에 능히 강자를 타승한다는 신념을 잔혹한 현실은 비웃는데도 그냥 기치선명합니다. 동방식의 이런 오도로 하여 인간사회에는 많은 력사비극들이 빚어지지 않았던가요?.     토끼가 풀을 뜯어먹고 승냥이가 토끼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인간세상에서 통합니다.《정의》의 승리는 약자의 환각일뿐이요 희망사항입니다. 중국의 동화교육과 미묘한 대조를 이루는것은 미국의 동화입니다. 중국아이들의 넋을 사로잡았 던《사자왕》에서 사자왕이 한번 포효하면 작은 흰토끼는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는습니다. 이 동화는 동물세계의 잔혹한 진실을 곧이곧대로 반영하고 있지요.     사자왕의 적라라하고 후안무치한 강권변호가 미국의 이미지이며 미국인들의  사유방식이고 인생태도입니다. 세계와 대화할 때 도탄과 핵폭탄을 휘두르며 오직 힘, 자체가 리론의거이며 엄연한 진리로 되고있어 자기네만 세계질서와 자유와 민주, 평화를 지키고 순종하지 않는 나라는 작은나라라도 위협도발이며 세계질서를 파괴한다고 강변합니다.     오직 승냥이만이 승냥이의 승인을 받고 사자만이 사자와 공존할수 있는 이 세계 입니다. 토끼는 승냥이앞에서, 양은 사자앞에서 아무발언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히《흰토끼》를 흔상하며 최후승리를 믿어마지 않는 민족이라면 사자왕을 숭배하는 대서양건너쪽에 코가 큰 민족앞에서 감히《아니!》라는 말을 감히 번지지도 못할것입니다.     인류의 력사는 인간의 지혜와 예지를 앞세워 벌린 일이 아니라 힘과 힘의 대결로 밀고밀리며 기록한 승패의 력사가 아니던가요? 어떻게 시비하든 자연의 생존법칙인 양육강식, 우승렬패, 이것이 절대지배의 권리로 되여진 인간세계이고 동물왕국이기도 합니다. 국제사회도 법과 도덕, 인도주의, 리성은 단변주의를 내흔드는 강권앞에서는 너무나 창백합니다. 하긴 인간도 역시 역어빠진 동물일뿐이니까요.     오직 힘센자만이《진리》의 외투를 입고 구세주의 월계관을 쓸수 있을뿐이요 정의란 약자의 막연한 기대치이고 언제 부러질지 모를 정신지팽이였을뿐입니다. 인류는 문명을 부르짖었지만 피는 피대로 흘렀습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도 아프카니스탄점령도 이스라엘의 레바논침공도 다 강도론리의 체현이지만 어느 나라도 아니라고 거부하지 못하니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총명한 모략은 문맹자의 손에 있는 핵무기보다 못한법입니다. 지식과 모략이 더는 긴요하지 않으며 정의와 도의가 납함할 자리가 없게 되였습니다. 강자의 론리는 곧“힘의 숭배”입니다. 어느 국가, 어느 민족군체이든 강대해지는 길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다른 말입니다. 엎드려 말하는것은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가슴을 펴고 서서 대방을 정시하며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강대한 문명이 없으면 자유로운 인생이 있을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무차별폭격에도 감히 큰소리 한번 쳐보지 못한 레바논정권이 이를 너무도 잘 보여주 었습니다. 소위《힘》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억제할수 있는 힘이 되고있습니다. 지혜가 정의와 손잡으면 창조를 낳지만 악과 손잡으면 비극을 낳을수밖에 없지요.     눈감고 아웅하는식으로 평화요 민주요하는 미사려구를 흘리며 지구촌 촌민들을 롱락하고있는 미국의 강도론리가 곧 진리입니다. 강자에게는 시행착오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장차도 양육강식의 법칙은 의연히 무수힌 양들앞에 군림할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지혜와 승리를 자랑하지만 철두철미한 악의 실천자로서 웃으면서 살륙하고 파괴하고있으며 기아와 질병을 초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고있습니다.     인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 자연생산법칙을 문화법칙으로 만들어 그 규범대로 인간답게 살아갈 날이 있을가요? 오직 강자가 되는것만이 생존법보가 된 현실세계에서 사자가 살찌는것은 별로 구애될것이 없지만 만약 돼지나 양이 살찌는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말한 로신선생의 말은 도처에서 실증되고있다. 나는 양이지만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을 향해 웨치고 싶습니다.《인간들아, 맑은 정신으로 돌아가라.》                                                       2005년 5월 20일
278    소의 웅변고 댓글:  조회:8424  추천:0  2013-11-21
                                                      소의 웅변고                                                    ㅡ 너무 충직하지 말라 ㅡ        우리 소족속에는 여러종류가 있다. 중국소, 서반아소, 인도소, 조선소 등. 소는 매개 나라에서 부동한 지위를 가지고있으며 부동한 생존상태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 인류에 마주하여서도 우리는 부동한 신분을 가지며 생존상태가 부동함에 따라 서 우리의 숙명속에 결정된 결과에로 나가면서 이 세계를 떠난다.     기실 부동한 소들은 부동한 인류의 생존생태를 대표하고있다. 인류와 동물들은 많은 공동성을 가지고있지만 인류가 특유한 성질을 스스로 결정한것에 불과하다. 스페인소는 용사이며 역시 용사와 대결하는 적수이기도하다. 이 각투장에서 각투사와의 박투속에서 결과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결과라해도 싸워야 하는것이 소의 운명이다. 무수한 박투속에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 다시 아물어가는 과정에서 소들은 자기들에게 속한 빛나는 생명의 종점에로 나가서 머리를 건뜻 쳐들고 이 세계를 도고하게 떠나간다. 혹시 이것이 용사들의 생존생태일수 있다.     각투장에는 구경군들이 있기마련이다. 그들은 용사들이 죽기내기로 분투하는것도 아랑곳없이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만난듯이 히히닥거리며 생명대 생명의 박투를 흔상한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관심밖인듯싶다. 이런 구경심리는 아마도 중국사람들이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로신선생은 몇십년전에 중국인들의 렬근성인 구경심리를 질타하였다.     인도의 소들은 신의 신분으로 인도사람들의 심목속에 존재한다. 인도인들은 동물숭배심리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에게 부복하면서 저마다 준비한 풍성한 례물을 신우에게 바치면서 영원히 함께 하면서 자기들을 보살펴달라고 빈다. 그들은 언제 어디 서나 신우를 경건한 마음으로 례절스럽게 대한다. 이런 생존환경에서 인도소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며 큰 거리라도 제멋대로 굼닐고 잠을 자면서 달콤한 꿈을 꾼다. 인도주민들은 감히 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중국에서의 우리 소들은 어떠한 생존상태에서 서식하고있는가? 젖을 공헌하는 젖소나 살을 공헌하는 고기소들이나 밭에서 힘겨운 고역을 치르는 부림소들이나 모도 일종 노예신분으로 존재할뿐이다.     일컬어 대가를 지불하면 되돌려 받는다고 하지만 우리 소들은 자기 힘에부친 수많은 대가를 지불하지만 얻는것은 오히려 잔인한 학대와 시달림뿐이고 마지막엔 고기를 먹히우고 골수까지 빨리우고만다. 중국의 소로 태여나면 우리의 운명은 이렇 게밖에 더 될수 없는것인가?     전통적인 민속습관에 의해 더 부려먹을수 없을정도로 로쇠해진 소들은 도살장의 소백정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여있다. 중국농민들은 자기들이 애지중지 하던 소의 후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금도 모르고있다. 물론 그들을 탓할바는 아니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우둔한 사람을 우리에게 비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실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우리는 늙으면 자기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으며 백정의 손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 농촌에서 소와 함께 동무해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모를것이다. 우리는 자기 형제자매가 도살된 자리를 지나게 되면 울부짖고 앞발로 땅을 허비며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도끼에 머리를 강타당할 때 자기 생명이 끝난다는것을 알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한소리 길게 영각하여 주인과 고별한다. 그리고 최후의 눈물을 땅에 남기고 간다.     중국소들의 정신에 당신들은 감동되지 않는단말인가? 몇천년을 내려오며 숙명을 개변하지 않으며 운명을 거절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반항하지도 않았고 순순히 자기 운명에 순종한다. 그렇게 인류의 죄악에 종용한다. 모든 동물들이 오늘같은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되고 물종의 쾌속절멸이 이런 종용의 결과일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행각은 인류의 극도로 치달은 리기와 포학성을 드러내는것만은 사실이다. 언젠가 인류가 훼멸된다면 자기들이 도살한 수많은 동물들의 최후를 련상할것인가?     큰길에 한대의 자동차가 서있었다. 수소는 소더러 빨리 도망치라고 영각한다. 그러나 암소는 오히려 수소더러 빨리 도망가라고 음머!한다. 《저 사람들은 너의 그 힘센 좆을 빼먹으려 왔단말이다. 이 바보야, 그들이 나를 보는건 근근히 젖을 두어근 짜서 먹을 궁리를 하는거다. 빨리 도망쳐,》     알다싶이 우리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때문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죽기전날까지 근로하고 성실하게 해낸다. 이런 황소정신은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있다. 농경사회에서 우리 소들의 작용은 모두 공인하는바이다. 봉건사회에서도 소도적은 중형으로 처벌했다. 소는 농민들의 목숨줄이였기때문이다. 로신선생이 먹는것은 풀이지만 짜내는것은 젖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 대한 최고의 칭송이다.     후기공업사회에 진입해서 우리들의 지위는 내려가고 운명은 참혹하게 되였다. 우리의 영광의 력사는 이미 력사의 한페지로 넘어갔다. 지금의 아이들, 특히는 성시의 아이들은 밭을 가는 소의 모습을 드믈게 본다. 다만 우리의 젖을 마시고 우리의 고기를 먹고 갈비뼈를 먹고 소가죽구두를 신으면 좋다는것만 알고있다.     누가 력사가 롱담을 할줄 알았으랴!사람들은 갈수록 우리를 잊어버리고 우리에 대해 랭담한 시대가 도래했다. 당신들은 소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수 있는가? 혹간씩 교외의 강가에서나 풀을 뜯을때도 늘 머리를 수그리고 그 순진해빠진 커다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람들은 명리의 싱싱한 풀을 보면 대뜸 눈에 피발이 서서 네죽고 내살고한다. 우리 소들에 비하면 얼마나 포용력이 결핍한가? 우리는 미식을 다투지 않는바 이는 인간들이 미치지 못할바이다. 우리 소들은 수천년을 온순한 동물로 번식해왔다. 우리 는 우둔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사람들에게 지혜의 게발을 주기도 한다. 옛글에《늙은 소는 날이 저믄것을 알거니 채찍으로 때리지 않아도 걸음을 다그친다》는 말이 공연히 만들어진것이 아니다. 우리의 총명에 대한 미담은 많고많다.     우리 소들의 선조들속에서 류전되는 이야기가 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이 그치지않고 그냥 펑펑 쏟아지는 어느 날, 화룡의 신흥동에서 류동이라는 마을로 벼짚을 사려갔던 한 농부가 잔뜩 취해서 발구에 가득실은 벼짚우에 곯아떨어졌다. 그 소는 제오던 길로 고스란히 걷고있었다. 그런데 내리막길에서 주인이 그만 소궁둥이와 발구채사이에 떨어졌다.     그것을 감촉한 소는 걸음을 딱 멈추고나서 뒤발로 주인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앞에 놓고 앞발로 슬슬 밀면서 그 먼길을 걸어왔다. 집대문가에 와서 소는 음머!하고 영각을 하여 안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였다. 남편이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아 근심 하고 앉아있던 안주인이 소의 영각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내달았다.     그런데 짚을 가득실은 발구앞에 소만 눈이 둥그래서 서있을뿐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에 마음이 황황하던 안주인은 그제야 소앞에 눈사람이 누워있는것을 발견했다. 후에 안일이지만 소가 곤죽이된 주인을 앞발로 밀고왔던것이다. 소가 주인을 그냥 깔고넘어가지 않은것은 인성과 통하는 본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소들이 죽을 때 눈물을 흘리는것도 인성과 통하는 표현이지만 그것을 류의한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신은 소의 그 맑은 눈물을 본적이 있는가?     우리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본사람은 언제나 촉촉히 젖어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우리는 평생 눈물을 흘리며 사는지 모른다. 바람따라 끝없이 떠다니는 구름도 우리의 속상한 마음을 씻어준적이 없다. 뜨개질하기 좋아하는 찬구들을 내놓고는 절대 대부분의 우리의 눈빛은 성실하다. 아마 이 생명계에서 우리의 눈만이 가장 악의가 없는 눈일것이다. 누군가 소의 눈은 아름다운 눈이라고 감탄했다. 암소이든 수소이든 늙은소이든 햇송아지이든 다 쌍겹눈을 하고 길고 멋진 속눈섭을 껌벅거린다. 세상에는 추녀와 추남은 있어도 추우는 없다. 우리의 정기는 천생 크고 검은 눈동자속에 담겨있다.     우리의 처세철학의 정수는 끝까지 참고 견뎌내는 인내성이다. 이런 고매한 품질 을 인간들은 마구 악용해먹으며 학대하고 지쳐서 쓰러질때까지 부려먹는다. 느러진것은 우리 소들의 타고난 성격이다. 주인이 아무리 급해해도 그냥 그 절주로서 느러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조급함의 의미를 모른다. 우리는 죽는 최후의 시각까지 당당한 모습을 흐트러 뜨리지 않고 뒤걸음치는 실태를 범하지 않는다.     그것을 두고 소들은 이미 마비되였다고 여긴다. 가죽이 두터워서 그렇게 굴뱀이 지도록 아프게 맞아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무반응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은 그저 그렇게 자주맞아서 습관된것도 있지만 맞아도 당연한 동물 이라고 여기는 인간이 우리보다 못한 동물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다.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연약하면 얻어맞고 잡혀죽는것은 동물세계의 영원한 생존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특히 가축으로 길들인 인류의 걸작일뿐이다. 산야에서 자유자재로 사는 들소형제를 감히 깔보고 학대할 용사는 아마 없을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들속에서 배제된 특유의 존재로 생각하면서 다른 동물들을 기탄없이 학대하고 희롱질하며 나중에 잔인하게 잡아먹어버린다.     우리의 순결무후함에서 연약하면 얻어맞는다는 인간사회의 도리를 끌어내려는것은 무모한 짓이고 유치한 사유방식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황소정신을 민족정신의 모범으로 삼는것은 백해무익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의 뼈속에 유전된 연약성이 동물 중에 강자로 될수 없도록 결정하였을것이다. 무릇 초식동물은 선량하고 연약하며 육식동물은 포악하고 흉맹스럽다는것을 말해서 알겠는가?     세계 다른 나라 민족들은 범이나. 사자, 표범의 정신을 민족정신으로 표방하고있다. 사자나 표범은 동물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이다. 하다면 그것들 처럼 민족지림에서 제일 강자로 된다음 할일이 무엇인가?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기 의지대로 지휘하고 략탈하는 일밖에 더 할일이 있는가? 코끼리는 호랑이나 늑대나 악어처럼 전문 다른 동물을 침해하지 않고도 위엄있게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는가?     전하는데 의하면 우리 선조는 원래 천상에 하나의 별로서 옥황대제의 신변의 한 장군이였다고 한다. 반고의 천지개벽이후 대지는 황막하여 아무것도 없었다. 옥황상 제는 소를 파견하여 동서남북방에 각기 한포기의 풀을 심으라고 명령하였다. 우장군 은 풀을 네포기만 심으면 너무 적은것같아서 몇그루 더 심었다. 그런데 풀이 그렇게 빨리 무성해질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우장군이 하늘에 올라가 복명할 때에는 온 천지에 풀로 휘덮혔다. 대노한 옥황대제는 우장군더러 하계에 내려가 무성한 풀을 다 뜯어먹고야 하늘에 올라와 복직할수 있다고 엄명하였다.     왕모랑랑이 그를 불쌍하게 여기여 많은 만두를 아래에 내려뜨려 풀잎에 이슬이 되게 하였다. 소가 아침이면 이슬이 맺힌 신선한 풀을 뜯어먹고 살이 찌라고 돌보아 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소가 앞에 풀을 다 뜯어먹으면 뒤에 풀이 뒤미처 자라나서 영원히 다 먹어치울수 없었다. 후에 한 농부가 풀을 없애자면 아예 뿌리를 뽑아야 후환이 없다고 알려주면서 앞에서 쟁기를 끌어 땅을 갈아엎으면 풀이 절대 다시 자라지 못할것이니 합작하자고 제의했다. 그것도 상책이라고 생각한 우장군은 흔연히 응낙했다. 그렇게 소는 인간세상에 하강하여 인류의 충실한 벗으로 되였다.     그러나 인류의 고도로 발전한 물질문명이 우리 소족속들에게 가져다준것은 무엇이였던가? 살륙과 탐식이다. 우리의 자랑찬 모습은 저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속에서만 볼수 있다. 사람들은 무슨일을 하기싫어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같다고 비아냥거린다. 묻노니 사형장에 끌려나가는 죄인들이 기꺼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는가?     밤낮 지줄대는 실개천에서 얼룩배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을음 우는것을 보면 산촌의 평화를 표징한다고 감상적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저기 연집강기슭의 도살장에 한번 와보라. 거기서 터지는 우리 형제동포들의 울음은 영각이 아니라 최후의 시각을 예감하고 하늘 우러러 호소하는 아비규환이다. 참으로 사이비한 동물이 그래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아, 여기까지 설토하고나니 눈물이 앞을 가리워 더 말을 이어갈수 없다. 다정다감한 제군들이여, 체대값을 못하고 훌쩍거린다고 비웃지야 않겠지? 죽음처럼 강하다는 인간언어가 만들어졌지만 그말을 만든 사람에게 고역과 죽음을 선물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연극이 벌어질줄 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수천년 인류의 칭송을 받으며 살아온것은 결코 허영심때문이 아니였다는것을 선언한면서 이만 연단을 내리려 한다.                                             2007 년 9 월 5 일   
277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그 정신내함 댓글:  조회:7897  추천:1  2013-11-21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그 정신내함                                                                                 ㅡ 버마재비의 웅변 ㅡ                우리네 버마재비를를 사마귀라고도 하는데 실팍한것은 록엽이나 붉은 꽃같고 날씬한것은 참대잎 같기도 해서 자고로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아왔다. 그래서 익충의 대우를 받지만 본성이 워낙 흉맹스러워 동족상잔이 비일비재여서 큰것이 작은것을 잡아먹을뿐만아니라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기도 한다.     천하기문이 아니다. 사실 자웅이 교배할 때 암컷은 머리를 돌려 수컷의 대가리를 물어뜯기 시작하여 나중에 옹근 몸체를 다 먹어버린다. 그러나 수컷은 최후순간까지 아무저항도 하지않고 암컷이 하는대로 자기를 내맡긴다. 보기엔 아주 잔인한것 같지만 기실 암컷은 교배가 끝나서 배속에 란충이 형성되기 위해서 대량저인 영양을 보충할 수요가 강렬하기때문이다. 수컷은 미래에 태여날 자기 자녀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헌신하는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숫버마재비를 정많은 남편이라고 칭송해 왔던것이다.     인간사회에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으려하니 가당할소냐? 라는 말이 류전되고 있는데원래는《장자ㅡ인간세(壯子ㅡ人間世)》에《怒其臂以当车辙,不知其胜任也》라는 구절에서 기원된것이다. 뜻인즉 버마재비가 앞발을 들어 수레와 맞서려하다이다. 후에 이 말은 개미가 홰나무를 흔들려한다. 달걀로 바위를 치려한다는 말과 같이 자기의 힘으로 안되는 일을 하려한다면 반드시 실패하만다는 뜻으로 쓰이였다.     버마재비가 매미를 잡으려는데 새가 뒤에 서있다 (螳螂 捕蝉,黄雀在后)는 말도 생겼는데 눈앞에것만 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처사를 형용하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수레를 막는것을 더없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양거리지만 문제를 더 심각하게 사고한다면 버마재기가 수레를 막아나서는 그 용기와 그속에 숨긴 정신적내함에 대해서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싶다.     여러동물님들도 혹시 들은바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신주대지에 흑백이 전도되던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 그때 사람들속에서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는 우둔한 짓을 하는것처럼 《우직한》영웅들이 더러 있었다. 노새선생의 웅변에서 제기되였던 우라극을 비롯해서 고준, 리구련, 림소, 왕신유, 장지신 등 선지선각자들의 장거는 얼핏 보기엔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으니 가당할소냐?와 비슷한것 같지만 그 정신적 내함은 오늘도 인간사회에 슬픈 사색을 던져주고있다.     시간상관계로 장지신이라는 녀선구자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많이도 흘렀지만 지성인들은 지금도 장지신을 칭송하며 기리고있다. 사실 장지신은 사상해방의 선구자이고 진리를 추구한 용사이며 현시대 순도자이며 중화의 딸들의 교오이다. 그의 견해와 주장이 정확하였다는것이 실천에 의해 증명되였다.    …1975년 4월 4일 처절한 비명소리가 중국을 찢었다. 한 미쳐난 녀인, 감옥관리인들이 강다짐으로 땅바닥에 엎어놓고 한자루의 보통칼로 병든녀자의 후두를 찔렀다. 그의 단말마적비명이 울리기전에 그녀는 참을수 없는 아픔에 자기 혀를 깨물어 끊어버렸다. 칼에 찔려 쩍 벌어진 살속으로 3촌나마 되는 불수강관을 무지막지하게 꽂고 실로 마구 꿰맸다.     그 자리에 있던 한 녀간수가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만행과 차마 귀로 들을수 없는 처절한 비명에 그만 까무러치고 그후 마침내 미쳐버렸다. 녀병자의 입안에서 뿜겨나온 선지피가 살인자의 손에 가득 묻었고 그 육중한 벽돌뭉치에 20세기 참극의 세절을 력력히 새겨두었다. 이른 봄 4월, 휘몰아치는 바람속에서 살기가 하늘에 넘치고 생명도 정지되고 시간도 정지되였다. 그날 그 시각을 동북은 심양을 기억하였고 세계도 심양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바깥세상은 아무일도 발생하지 않은듯이 그렇게 평온하였다. 마치 공기가 흐르는 소리마저 들릴것 같았으리라. 졸도한 녀간수를 끌어내고 다른 회자수들은 죽음을 초개같이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의 눈을 읽었을뿐이다. 이것은 노예제도하에 도살장도 아니였고 일본파시스트의 감옥도 아니였으며 히틀러의 집중영도 아니였다. 곳곳에서 제비가 춤추고 꾀꼬리 노래하는 아주 좋은 형세하의 신주대지에서였다.     이미 정신이 실성된 한 나약한 녀자의 후두를 칼로 짜른 초인성적인 살인마들은 그야말로 세기적인 장거를 하고 그날 배불리 먹은후 그 피가 랑자했던 악착한 손으로  자기 마누라의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지며 인륜지락에 비린 웃음을 웃었을것이다. 그렇게 잔혹하게 학살당한 녀자의 죄명은 림표를 반대하고“4인무리”를 반대한것이였으며 영원히 지지않는 붉은태양에도 흑점이 있다는것을 보아내고 본대로 말한 죄였다. 그리고 20세기 신화의 비리를 꼬집었기때문이였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자기가 진리를 버릴수 없다고 완고하게 나온것이 죄였고 폭압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진리를 웨친것이 백번죽어 마땅한 죄였다.     그렇게 죽어간 장지신, 악형과 시달림에 미쳐난 장지신, 야만적으로 후두를 잘린 장지신, 그렇게 강포속에서 시달린 장지신이 마침내 억울한 루명을 벗고 사상해방의 선구자로, 진리를 고수한 용사로 거듭나는 날이 마침내 왔다. 야심이 량심을 대체하 고 권력이 법률을 총살하고 폭압이 자유를 교살한 시대에는 그들은 천추에 용납못할 이단자들로 락인되였지만 검은 구름은 영원히 밝은 해를 덮어감추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이 밝아지고 시비가 바르게 잡히게 되자 량심적인 수많은 지성인들의 원성속에서 장지신의 고귀한 넋이 해방받는 날이 경축되였고 눈물로 쓴 한수 또 한수의 격정적인 시들이 신주대지 곳곳에서 용솟음쳐 나왔다.                                                              무게                              그녀의 피묻은 머리를                              생명의 천평우에 놓으라                              하여 구차스럽게 살아온                              그 모든 사람들이 무게를 잃게 하라 ㅡ한한(韩瀚)        그렇다. 《력사》속에서는 흔히 대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국계민생에 관계된다고 맹종하지만《소인물》들의 신사상은 홀시되거나 압살당하기가 십상이다. 비천한 농부에게 진리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압도된 실패한 영웅들의 몸에서 선구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상이 빛발칠수도 있다는것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장지신형의《버마재비》들은 비장한 영웅인물들이며 력사의 어두운 밤에 미약한 빛을 발산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빛이였을뿐만아니라 시대의 진상을 밝혀준 빛이였다.     광란의 년대가 지나서 맑게 개인 새 시기에 태여난 젊은 세대들은 당시의“버마재비들”에 대해 아는것이 별로 없고 또 별로 흥취를 가지지 않는게 보통이다. 허나 그것은 시대의 변천을 말해주는것이 아니라 새 일대의 정신적빈곤을 말해준다. 정신 적빈곤이란 주요하게 력사감의 상실을 의미한다.     력사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간단한 공능은 마땅히 기억이여야 할것이다. 즉 망각을 거절하는것이다. 그러나 력사의 유익한 교훈은 모든 잡물질을 휩쓸어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있다. 수십년전에 발생했던 사건들과 흘렀던 피와 눈물이 색바래지 고있다는것이 이 나라 국민들의 비애일가, 지혜일가? 젊은이들에게는 그 시기의 사사건건이 모두 요순우시대의 신화로만 인식될수 있다.     고준, 우라극, 장지신 등 순직한 시대선각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속에 일원이였고 흉중에 륙도삼략을 품고 민생을 위한 웅심을 품은것도 아니고 그것을 위한 대서특필의 격문을 날린것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참사람이 할수 있는 생각을 하였고 참사람이 할수 있는 참말을 하였을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학살되였다.     아직 건재해 있을수도 있는 가해자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참회해야 한다. 회억이 없는 참회란 있을수 없다. 그러기에 먼저 회억이라도 해야 한다. 오직 회억할줄 알아야 비로소 력사가 있게 된다. 력사를 망각한다면 력사의 비극은 다른 일종 방식 으로 재연될수 있다는것을 알고있을것이다. 그 시대는 전제시대여서 그렇다면 지금은 민간사상이 발굴되여야 하고 제때에 건져올려져야 한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진리의 영원한 생명력에 의하여 드디어 세상에 밝혀진 영웅들의 빛나는 사상은 우리들의 견실한 사상의 기점이 되여야 한다. 너무 많은 력사의 징벌을 받았다는것은 슬픈 일이다. 잊혀진 력사는 침중한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버마재비 수레를 막아나서는 그 주제넘는 작동을 그저 망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속에 담긴 용기만은 긍정해야 하며 인간사회에서 압살되여버린 그 많은《버마재비들》의 불의와 감히 맞서 진리를 신장하고 진리를 견지한 고결한 정신적 내함에 대해 사색하고 자신을 반성해본다는것은 역시 일종 삶의 지혜를 얻는것이요 국민적인 일대 각성이고 진보의 커다란 발걸음이라 할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 모든《우직한 버마재비》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기리고 또 기리고싶다.                                                         2007년 10 월 20 일   
276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댓글:  조회:7321  추천:1  2013-11-21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ㅡ 노새의 자탄 ㅡ     여러분, 보다싶이 우리도 말과에 딸린 동물로서 말과 엇비슷하지요? 노새는 어깨높이, 모피색의 균일성 및 목과 엉덩이의 형태에 있어서 말과 닮았습니다. 짧고 두꺼운 머리, 긴 귀, 날씬한 다리, 작은 발굽과 짧은 갈기에 우는소리는 나귀를 닮았지요. 우리들중에서 덩치가 크게 생긴 친구들은 어깨높이가 160~175㎝에 체중이 550~700㎏이고 썩 작게 생긴 친구들은 120~160㎝의 어깨높이에 272~612㎏의 체중을 가지고있답니다.     부끄러운대로 신분을 밝힌다면 우리는 나귀아버지와 말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난 변종이지요. 그러나 나귀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답니다. 우선 우리는 당나귀에 비해 몸집이 훨씬 큰만큼 힘이 무척 세고 성격도 제멋대로입니다. 보편적으로 성질이 온순한 편이지만 꾀도 있어서 불만이 있으면 마구굴어대는 사람들에게 가끔 달려들기도 한답니다. 또한 식성이 좋아서 아무거나 잘 먹고 피부가 워낙 튼튼해서 갑자기 변하는 기후에도 잘 견뎌내며 웬만한 비바람이나 따가운 해볕에도 끄떡없지요. 더운 지역이나 고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작업에 어김없이 우리 노새족속들이 등장하는것도 이런 특성때문입니다.    한편 아버지당나귀의 장점은 튼튼하고 몸은 비록 노새보다 작지만 오랜 시간 물을 마시지 않고도 먼 거리를 걸을수 있고 거친 먹이를 먹어도 여간해서 병에 걸리지 않는것이지요. 다만 우리 노새에 비해 민첩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당나귀는 번식능력아 강하지만 노새네의 가장 치명적이고 선천적결함은 정자가 성숙하지 못하여 후대를 번식하지 못한다는것입니다. 이는 정말 속상한 유전인자입니다. 인간들은 아예 우리를 만들어낼 못된 궁리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물론 우리네와 처지가 비슷한 버새들이 있어서 우리만 홀로 수치스러운 물종은 아닙니다. 버새를 모른다구요? 버새는 우리 정반대로 애비는 말이고 에미는 암당나귀 (한국에서는 별스레 암탕나귀라고 부르더군요)사이에서 난 변종들인데 보다 귀한 잡종들입니다. 우리 노새들보다 체대가  작고 외모는 우리 우리아버지네와 거의 닮은 꼴이랍니다. 체질은 우리처럼 튼튼하나 체격과 참을성에서 우리 노새네보다 떨어지고 숫컷은 전혀 번식력이 없으며 암컷은 혹간 수태하나 새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골충들을 낳기가 십상입니다.     인간들은 머스카니 잡교우세라는 말들을 잘하지만도 버새들은 례외인가봅니다. 그러게 저희들이 만들어낸 잡종으로 인간들속에 부실한 자들을 비유해 버새라고 몰아세우지 않습니까? 결국 인간심리도 변태적이라 할것입니다. 아차, 말이 왕청같이 번져지는군요. 우린 원래 이렇게 물덤벙술덤벙한다니까요,     오늘 내가 이 연단에서 말하려는것은 노새나 버새에 대한 동물학강의를 하려는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잡종, 아니 변종으로 태여났기에 출신타령이 자연히 많아지고 있습니다요. 왜 안그렇겠습니까? 천리를 질풍같이 달리는 건장하고 날쌔고 총명하고 성깔스러운 말도 아니고 꾀돌이 나귀도 아니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나 말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는 그 비운입니다. 게다가 인간들은 자식을 못낳는 돌계집들을 곧잘 노새라고 폄하하지 않습니까?     한국에 한 시인은 영광스럽게도 우리네 노새를 가송하였습니다. 뭐? 어떻게 가송하는가를 듣고싶다구요. 아따, 그럼 내가 주인의 컴퓨터에서 퍼온 그 시를 한번 읊어 드릴가요? 괜찮게 쓴것같더라구요. 제목이《노새의 길》입니다. 서시만 읊어드리겠습니다. 에헴!                                                  노새야.                                                   새끼도 낳지 못하는                                                노새야.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똥 한번                                                제대로 누지 못하는                                                    노새야.                                                털빠진 가죽                                                    등허리로                                                힝힝 우는                                                    노새야.     어떻습니까? 곁에서 듣기만해도 우리네를 동정하게 되지 않습니까? 사실상 그렇습니다. 식물학적으로 본다면 농사군들이 콩심은데 콩이 나고 팥심은데 팥이 난다는것은 속일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거시기 싸리긁에서 싸리난다고들 말합디다. 참 답답한 령장동물들이지요.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는것은 섭리가 아닙니까? 그래 싸리긁에서 싸리가 나지 참나무가 나겠습니까? 그런데 왜 버새는 말긁인데 말이 나지 않고 버새가 생겨났습니까? 우리 노새는 나귀긁인데 변종이 되였습니까? 하하하!     이런 말은 하나마나 한 말입니다. 결국 애비가 영웅이면 아들도 호한이고 애비가 반동파이면 아들도 개자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정치목적에 리용하였지만 말입니다. 우리같은 미물들도 출신때문에 기가 질리고 주눅이 들어서 살아가는데 계급사회라는 인간사회에서야 더 말이 있겠습니까? 하긴 우리와 별로 관계가 없는 까다로운 인간들이 놀탓이지만 나의 늙은 주인량반도 정말 우리네《노새신세》가 되다보니 그 뛰여난 머리를 가지고도 대학문에 못들어가고 지구수리공을 하고있는데 정말 안스럽다는 얘기입니다요.       나의 로주인님의 청년시절 문화혁명인지 광란인지 하던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던데 초기에 담력부란자가 류경이라는 자와 련합하여《애비가 영웅이면 아들도 호한이고 애비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자식이다》라는 구호를 내붙이고 반드시 계급로선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떠벌려서 갑자가 명인이 되였다고 합니다. 담력부란자는 1966년 8월 20일 그 유명한 연설에서“뭐 평등, 박애같은 쓰레기를 가지고 말하려면 변소간에 가서 말하는것이 좋을것이다”라고 나발불었답니다.      그로부터 중국의 광활대지에 가정출신을 따지는 악풍이 불어쳤답니다. 그리하여 혁명간부, 혁명렬사, 혁명군인, 로동자와 농민가정 출신의 소위《붉은 오류 (红五 类)》와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분자와 우파분자 및 그 자녀들을 일컬어《검은오류(黑五类)》로 나누게 되였답니다.     검은분자의 자녀들은 숫제“개종자”로 치부되여 모택동마크도 달지 못하게 하였고 모택동어록도 외우지 못하게 하였으며 홍위병에는 더구나 참가할수 없었다고 합디다. 전국각지에서《검은오류》의 집을 수색하는 행동이 전개되였습니다. 1966년 8월 북경의 홍위병들은 3만호나 작살냈고 상해에서는 10만호를 수색하여 아수라장을 만들어놓았고 일부 지방에서는 “검은 오류”분자들과 그 자녀들을 때려죽이기까지 하였답니다.     례하면 북경의 대흥현에서1966년 8월 27일부터 9월1일 사이에 맞아죽은 사람들가운데 최고년령자는 80세이고 최소년소자는 근근히 태여난지 38일밖에 안된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중 스믈두호는 온식구가 몰살당했답니다. 광서에서는 20일 사이에 3천여명이 도살되였고 호남성의 도현에서는 두달사이에 4천여명이 죽고 핍박에 의해 자살한 자가 300여명이였다.    그러나 그후 간신 진백달이 담력부의《반혈통론》에 대해 질책하고 최고어른도 직접 나서서 유일성분론을 제창하지 않는다고 지시했답니다. 그때 북경의 로동자였던 우라극(遇罗克) 이라는 청년이《출신론》이란 문장을 써내여 담력부란자가 일으킨 력사적풍파인 가정출신이 전도와 운명을 결정하는 기시적인 작동에 대해 무자비하게 비판하였답니다.     그는 글에서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도 개자식이 되여 한대한대 내려간다면 인류는 영원히 해방받을수 없고 공산주의는 영원히 성공할수 없다고 제출했답니다. 그는 중앙문화혁명령도소조에서도 지지하는것이니 자기의 견해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였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순진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초기에 개잡은 포수로 우쭐렁거리던 척본우가 우라극의 문장을 반당적인 대독초라고 선포하자 사상적선구자 우라극은 체포되였습니다. 당시 담력부란자도 투옥되였으나 통수의 지시에 의해 석방되여 주총리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총리는 락심하지 말고 계속혁명하라는 고무격려까지 해주었답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결과인가요?     1970년 3월 5 일 우라극은 총살당하였습니다. 담력부는 문화대혁명이 끝나서 청운의 길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답니다. 1979년 중앙에서는 우라극을 무죄로 선포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었지만 그저 그뿐이였지요. 우라극은《초시대적인 리상과 환상》의 대가로 순직하였습니다.     후에《능히 교육해낼수 있는 자녀》라는 복음이 류행되였지만 약탕관을 바꾸었을뿐 약은 실제상 그약이였고 그냥 재탕이였습니다. 겉보기엔 검은 오류분자들의 자녀들에게 출로를 열어준것 같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원죄를 시인한것이였습니다. 곳곳에서 정치적으로 기시정책이 실시되였습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아니고는 리해할수도 없었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출신은 소외당한 그런 부류의 청년들을 질식시킬만큼 무겁게 짓누른 태산이였답니다.     평등사상이란 기실 중앙의 계급로선과 어긋나는 주장이였습니다. 그러나 고관들의 자녀들은 부모가 번신하게 되면 뒤따라 운명의 신이 미소지었습니다. 그야말로 봉건세습제와 한사람이 죄를 지으면 9족이 련루되는 봉건적악습이 지속되였습니다. 절대 계급투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최고지시가 집행되는 한 출신이 나쁘면 출세는 망상일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우라극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거니와 지금은 더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시대의 영웅은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우라극이였고 진정한 맑스주의자였으며 선구자였습니다. 비록 이단자로 혹형을 당하였으나 죽을때까지 굴하지 않고 자기의 리상과 신념을 견지하면서 가장  보귀한 청춘의 생명으로 비장한 주체가치를 실현하였던것입니다.     지금 영웅의 선혈은 언녕 말라버렸고 흥겨운 노래와 춤속에서 숫제 망각되였습니다.《출신론》을 비판했거나 그것의 고무를 받은 사람들은 지금 나이가 50 대 중반이나 60대들이겠지요. 10년의 광란시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었거나 비판대회의 선봉이 되였거나 닥달당하고 비판투쟁당했던 사람들이 거개 살아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단락의 국민적비극은 잊혀진지 오래되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은 잊는것이 약이라던가요? 그러나 미쳐나는 약을 잘못먹고 발작을 하였지만 약효가 업성지니 일체가 태평영월이 되는 인심이니 무엇을 더 말할수 있겠습니까? 예? 아, 예에ㅡ제목은 자탄이라고 번듯이 달아놓고 몹쓸 령장동물들의 얘기는 웬 뚱딴지냐고요? 중간에 질문할만도 합니다. 리해됩니다. 하지만 우리네 동물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게 누구입니까? 특히 우리같은 노새족속들을 장난삼아 만들어놓고 노새니 버새니 하는 알량한 인간들을 성토하지 않고 누구를 성토한단 말입니까? 사실 오늘 나는 주인의 대변인이 된셈입니다. 속담에 칼도마우에 고기는 베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인이 시키는 일이니 할수 없이 나선것도 있지만 늙은 바깥주인이 노상 아들에게 옛말삼아 하는 얘기를 귀동냥하다 보면 자연히 의분이 생기면서 동병상린이 된것입니다.     인젠 쓰잘것없는 얘기를 그만두라고요? 예예,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튼 노새의 자탄이니 누가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2007년 10 월 17 일    
275    나비의 질문 댓글:  조회:7467  추천:0  2013-11-21
                                                           나비의 질문                                  ㅡ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가. 꽃이 나비를 꼬시는가?ㅡ                      녀자를 제일 먼저 꽃에 비유한 천재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남자를 나비에 비유한 사람도 그와 대등한 영재라고 할수 있겠다. 나비가 꽃을 찾아왔나? 꽃이 나비를 불러왔나? 라는 노래도 있듯이 꽃이 천생 곱고 향기가 진동하여 나비와 꿀벌이 찾아들게 된것을 꽃의 유혹이라 말할수 있겠지만 그것은 꽃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화간에 제멋에 겨워 넘노며 흥청거리는 나비로 말하면 이꽃 저꽃을 찾아 날아예기에 방탕하다고 비난을 받을만도 하지만 꽃이 아름답지 아니하고 향기로 끌지 않는다면 봉접이 날아들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나비가 먼저냐 꽃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마치 달걀이 먼저 생겼냐? 닭이 먼저 생겼냐? 아니면 수탉이 먼저 생겼냐? 암탉이 먼저 생겼냐? 하는 재미있는 문제가 제기되기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가? 꽃이 나비를 꼬시는가? 하는 영원한 화제거리가 있게 된다.     생물학상 나비는 아름다우면서도 연약한 생화보다 더 연약하다. 나비는 천성적으로 아름답고 자유를 동경하기에 자유자재로 날아예기를 즐기기에 화사한 봄날 일만백꽃을 찾아다니며 화간에서 노닌다. 나비의 생명은 분방하지만 그 꽃다운 생명은 속절없이 짧디짧다. 꽃바람에 취생몽사 한계절이랄가?     호접몽(蝶梦)이라는 전고가 있는데 꿈속에서 나비가 되여 훨훨 날아다니다가 꿈을 깨고보니 여전히 사람이더라는 장자의《제물론 (齊物论)》에서 온말이다. 장자의 호접이란 무엇인가? 장자의 호접은 가볍고 허무한 꿈이였다. 꿈은 어디까지나 깨기마련이다. 특히 단꿈은. 깨고나면 꿈은 꿈이다. 현실과는 넘어설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일컬어 장자의 호접은 그의 일종 정신기탁과 아름다운 념원에 불과한것이다.     나비는 류동하는 꽃이라고 비유하면 틀리는 말일가? 나비는 진실한 꽃떨기보다 더 다채롭다. 꽃나비는 일종 고통스러운 경력을 가지고있는바 육체와 정신적인 승화 과정이라 할수 있다. 여기서 잠시 나비의 공과 죄를 론하지 말자. 층층의 속박속에서 몸부림쳐서 나온 나비는 번데기로부터 진화된것으로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서 나중에 날아예게 된 꿈날개이다.     사람들은 흔히 나비가 꽃을 탐한다고 하는데 나비가 꽃을 탐하지 않으면 꽃은 무엇에 련련한 정을 쏟게 될것인가? 기실 웅성모기도 꽃을 탐하는데 그것들이 꽃을 탐하는 목적은 빨아내는것인데 왕왕 훼멸을 대가로 지불한다고 한다. 달디단 즙을 빨아먹고 기운을 챙긴 숫모기는 그래도 용기부족이여서 수백마리씩 떼를 지어 한마리의 암모기를 맹공격한다. 그 교배욕의 란무속에서 교미하는 놈은 한놈이뿐다.     솔직히 말하면 나비는 자기 생존의 비결이 있는바 추악한 일면을  아름다운 날개 밑에 감추고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근히 나비의 아름다운 외표만 보고 미혹된다. 나비는 농민들이 구슬땀으로 지어놓은 농작물과 록색을 씹어먹는다. 우리 나비네들은 기실 양가죽을 얻어쓴 승냥이보다 더 고명한 기편술을 가지고있는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비네들의 소총명때문에 자기를 망치는바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게 된다. 우리 나비들은 아름답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잡히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며 표본을 만들기 좋아하는 생물학가들이나 소학생들의 손에 잡혀 채갈피속에서 질식해죽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것이다. 혹은 아이들의 손바닥에서 희롱당하며 치욕속에서 죽어버리는 숙명을 타고난 생령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나비는 바람에 말리워져서 청태같은(미이라)가 된 나비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의 교훈은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기쁨을 취하지 말고 내재적 품질을 소중히 여기는것이연만 천생 미물인 나비네는 영원히 이 교훈을 모르고 산다. 어쨋거나 나비는 나비일뿐으로서 천생의 아름다움과 가벼움과 꽃다운 날개짓으로 천지간에 생존하면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것으로 생명을 장식하고있다.     여기서 나비로서의 진실된 고백이라면 우리 나비들에 담겨진 함의는 여러가지로서 녀자애가 나비같다고 말하는것은 칭찬이고 꽃나비같다고 말하는것은 거개 폄하하는것이다. 나비는 너무 많은 희망을 엷은 날개에 싣고있다면 사람들은 너무 무거운 리상을 걸머지고있다. 량산백과 축영대가 나비로 변하고 나비가 샘물가의 나비로 된것은 나비가 이미 일종 정신으로 환각화된것을 의미하는것으로서 천만년의 기탁이다.     우리 나비들이란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재간이란 날줄 아는것으로서 아름다운 벌레일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 심목속에서는 이점이 중요하다. 재래로 탐화봉접이란 말이 있는데 꽃을 탐하는 꽃과 벌이라는 뜻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나비를 허랑하다고 락인찍고 녀색을 좋아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나비는 남자를 상징한다. 그러나 현실속에 실태를 본다면 진정 재능이 뛰여난 남자는 수수한 나비이고 화려한 꽃나비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버는 남자는 자기 집을 잘 돌보지 않으며 가정에 집념하는 남자는 전도가 없는 나비로 락인된다. 전도를 개척하려면 랑만을 잊어야 하고 랑만적이 되여지면 믿을수 없는 남자로 변하고 믿을수 있는 남자는 무능하다는 평판을 면치못한다.     녀인의 대명사가 아름다운 꽃이라 할 때 개탄할 일이 많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녀인은 화식칸에 들어서기 싫어하고 화식칸에 들어섰다면 부드럽지 아니하며 온순한 녀자는 주견머리가 없는 녀자로 되고 주견이 선 녀자로 되면 녀자의 맛이 없어진다. 녀자의 맛이 있으면 돈을 가랑잎처럼 날리고 돈을 아끼면 류행에 뒤처진 촌아낙네가 되여진다. 류행(패션)에 마음을 놓을수 없다면 마음을 놓게 된후엔 차마 볼수 없는 녀자로 전락하고만다.       지금 한다하는 남자들이 녀자를 텔레비와 핸드폰에 비유하는게 류행이다. 안해는 드팀이 없는 텔레비이고 정부(애인?)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핸드폰이라 한다. 집에 있을때는 텔레비를 보고 문을 나서면 핸드폰부터 챙긴다. 파산하면 텔레비를 팔고 갑부가 되면 무시로 핸드폰을 바꾼다고 한다. 텔레비는 가끔씩 보게 되지만 핸드폰은 손에 받쳐들고 싫증을 낼세라 가지고 논다. 텔레비는 평생 료금을 받지 않지만 핸드폰은 료금이 떨어지면 곧 정지된다.     남자들은 돈이 많아지면 나쁘게 변한다. 지금 항간에서는 이십대 남자는 나쁜것을 배우려고 대기하면서 웃세대들을 바라보며 사랑을 갈망하고있으며 삼십대 남자들은 한창 나쁜것을 배우는중으로서 동세대들을 안고 같은 사랑을 흥얼댄다. 사십대 남자들은 이미 나빠질대로 나빠졌는데 아래 세대들을 안고 지각한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의 절름발이라고 하는 오십대의 남자들은 확실하 제일 나쁘게 변해서 제삼대를 안고 몽유병자가 잠꼬대하듯이 얼빤한 사랑을 뇌까린다.     꽃으로 되여진 녀자들에게 충고할 여섯가지 계률이 있다. 나비들이 불어대는 침발린 말을 견뎌내야 하며 부연(敷衍)을 받아당해야 하며 기편을 참아낼수 있어야 하고 낙언을 잊어버릴줄 알아야 한다. 나비들의 낙언은 즉흥시같은것이고 산을 옮기고 바다를 기울일듯한 맹세는 기실 마음의 모래우에 쓰는것이기때문이다.     녀자들이 일단 나쁘게 변하면 돈이 많아진다. 지금은 가난은 비웃어도 창녀는 비웃지 않는다는 시대이다. 사람들의 가치척도도 비틀어지고 도덕도 금전의 강대한 압력하에 변질되여 상실되였다는것은 더는 론쟁거리가 아니다.     녀자들은 도시의 아빠트창턱에서 시드는 꽃이 될지언정 청산속에 청순한 생화가 되려하지 않으며 자가용속에 인형이 될지언정 자전거뒤의 랑만을 바리지 않는다. 인성이 더없이 추악화 된 시대이며 물질욕과 자극욕에 근시안이 된 이 시대이다.       사람들의 심미관으로는 도저히 접수할수 없는것들이 맹목적인 환호속에 인기를 끌며 이 시대의 주류로 되였다. 현처량모형의 녀자는 촌닭으로 전락되고 심미가치의 렬변에 따라 녀자의 매력은 로출증의 광도와 심도에서 과시되고있다.       물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재래의 내면세계의 아름다움과 전통미를 추구하는 의식은 근근히 수구파의의 념원에 불과하다. 모든 나비와 꽃들이 그런 미적가치 기준을 코웃음치고있다. 녀인들의 순정은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현대녀인들의 순결과 정조관은 먼저 뒤골목의 로류장화들로부터 시작되였고 그것을 더러운 지페로 권장하 면서 시작이자 끝나는 정사에 열불내는 부나비들로부터 가심화되였다.     사람들은 탕녀들이 그렇게 된것은 사회의 핍박이라고 인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기꺼이 타락했는가를 모른다. 이런 사회비극의 의의는 사람들의 동경심을 격발시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심각한 반성을 하게 하는데 있다. 질서가 무너진 현실이 타락의 리유로 될수 없다. 그것은 자기 기만이고 구차한 변명이다.      육체적욕망이 일단 방종하게 되면 절제하기 어렵다는것은 모두 알고있다. 순간의 쾌락과 금전욕은 사람들을 그 깊이를 알수 없는 타락의 심연에로 밀어넣는다. 선량한 민중들이여, 당신은 이런 시대에 응당 신중하게 자기의 행위준칙을 잘 세워야 한다. 기분이 가정을 말아먹는다는 말이 있다. 정욕의 방종은 다만 현세상에 대한 감각을 극대화시킬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인격마저 매몰해버릴것이다.     현자가 아닌 보통인간의 량지는 자발적인것이 아니라 피동적이다. 우리의 고달픈 인생살이가 곳곳에서 시시로 깨우쳐주지 않던가? 현실을 정시하지 않는다면 이 혼탁한 세계에서 미로에 오를수 없다. 도시의 유혹성과 자극성은 저도 모르게 도덕의 방파제를  허물수도 있다. 량지는 우선 생존이 확보된 다음에야 고려되는 문제이지만 감각에 따라도는 현실에서는 선행되여야 한다. 그러니…     할말은 끝난듯 싶은데 마지막으로 시한수를 읊어드리는것로 사의를 표시하려 한다.                                                              꽃과 나비                                             새 꽃을 찾아 넘노는 나비를                         탓해서는 무삼하리오                   꽃은 그래서                         그 자리에서 다소곳이 웃고                       꽃이 피고 지는 사연을                          알아서는 무삼하리오                   나비는 그래서                          오고감이 스스럽다/                       하건만 멋모르는 철새들은                          시들어진 꽃을 두고                   락화의 사연을                          나비에게 묻는다             꽃은 나비를 허랑하다 원망하고              나비는 꽃마다 뭇나비를 꼬신다고 하니         꽃이 방자하냐? 나비가 허랑하냐?              누가 누구를 탓해야 하릿고                                                  2007 년 10 월 10 일            
274    룡토템문화의 력사연원과 가치원소 댓글:  조회:7532  추천:1  2013-11-21
                                   룡토템문화의 력사연원과 가치원소                                    ㅡ만국동물웅변대회에서 한 룡의 웅변ㅡ      예, 말하자면 토템이란 주지하다싶이 미개사회에서 부족, 씨족 또는 씨족적집단의 성원과 특별한 혈연관계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종류의 동식물이지요. 그러니까 토템숭배란 원시사회조기의 종교형식의 일종으로서 현대시각에서는 별로 가치원소가 없는 원시문화현상입니다.     내가 수천년을 내리 중국사람들의 정신숭배물로 부상된것에 더없는 자부심을 가지지만 기실 토템문화는 력사현상으로서 지구촌이 하나로 된 현시대에 와서는 이미 볼일이 끝난것입니다. 별볼일이 없지만 상상적인 토템ㅡ나 룡에 대해 열중하는 현대국민인들의 시각을 바로 잡아주려는데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스스로 내가 번식한 후대라고 자호하는데 작가 진희는 백사에 룡을 내세우는것은 너무 민족정서에 사로잡힌 정신현상으로서 상상력이 없다는 표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본상징물을 개변시킬 필요는 없지만 토템은 필요없는바 룡을 토템으로 삼는 관념은 약한 민족의 자존심에서 생성된것으로서 가소로운 자비정서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관념은 대단한 애국인것 같지만 나라를 해칠수 있습니다.     사실 나를 토템으로 하는것은 민족성격의 완미화의 상징으로서 일정한 정도로 국민들의 암흑면에 대한 의식을 저애하고 자기발견과 자기의 부족점에 대해 정시하지 못하게 할뿐입니다. 나를 완미한 상징으로 삼고 어떤 비하도 할수 없다는 그런 사유 자체가 두려운것입니다. 학술관점에서 가히 쟁론할수는 있지만 도덕모자를 씌울필요는 없으며 더우기 무한히 끌어올려서는 안될 일이라 사료됩니다.     나는 력대제왕들의 전용부호, 위엄으로 되였는데 살상대권을 가지고있어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가 황제를 대표한다거나 내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할수 있는가? 기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욕심으로 황제의 표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나를 숭배하는것은 왕권숭배와 순복공구사상의 표현입니다. 이런 왕권미학은 제한성을 가지고있는바 농업시대 민중자신이 자기위안의 령혼이 되였지만 현대 도시생활에서 내가 망각의 언덕에 묻힐 운명을 면치못했습니다.     다만 명절때마다 나의 형상이 현시되지만 국민들의 실생활에서는 곧 퇴출하고있는 형국입니다. 그뿐이지요. 사실 나는 고대인들의 상상에서 나온 허무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실재물인것처럼 믿고있는데 민족형상의 상징물로 될뿐입니다. 문화층차에서는 나, 룡이 여러가지 함의를 가지게 되였습니다.     나는 서방세계에서는 일종 사악한 짐승으로 각인되여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나를 토템으로 삼는것에 대해 오해를 사고있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되였습니다. 중국은 력사상에서 휘황하였던 시기도 있고 치욕의 시기도 있었는데 기실 이 룡이 좌우지한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기치는 코끼리와 나귀이지요. 코끼리는 륙지상에서 최대거물이고 나귀는 굴강한 동물이기때문 입니다. 왜 미국사람들은 나귀가 중국사람들의 오해를 살가 근심하지 않는가? 나를 토템으로 하는것을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관점은 협애한 민족정서입니다.     지금 절대대분의 국민정서가 나를 토템으로하는 문화현상은 영원히 존속되여야 한다는데 기울어지고 있지만 중국에서 말하는 룡이란 허다한 동물의 다원적인 융합에서 산생된것으로서 서방의(룡, 드래곤-Dragon)은 주요하게 악을 대표하고있는바 패기와 공격성으로 충만되여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내가 선량을 대표하여 공격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화해와 희열의 일면도 있다고 긍정하고있는것입다.     룡에 대한 중,서방의 인식이 부동하게 된것은 주요하게 번역에서 인기된것입니다. (Dragon)은 서방어경에서, 이를테면 성경에서는 모가지가 매우 길고 날 개가 있으며 몹시 흉맹하고 무서운 동물로 묘사되여 제거해버려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중국문화어경에서는 나는 몸이 가늘고 길며 위엄도 있는 길상동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제일 처음(dragon)로 번역한 사람은(dragon)가 영어문화권에서의 함의에 대해 리해가 깊지 못하였기에 나를 중국의 룡으로 번역하여 놓았는데 습관상에서 오늘의 정황이 굳어진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의론이 분분합니다요.    중국에서 나의 형상을 정확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단방면적으로 너무 과대하면 교제효률과 실제효과 등 문제에 영향이 있습니다. 나에 대한 중외의 인식이 다르게 된것은 문화결구, 인지결구와 력사침적과도 관련되며 동시에 세계에서 중국의 영향력 문제와도 관련되여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흔쾌히 접수되려면 더깊은 연구와 표현기교가 수요됩니다. 외국인들의 심목속에서 내가 흉악한 형상으로 새겨져있는것을 교육과 선전을 통해 개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내용이 나의 본고의 골자로 되여 심오하게 전개될것이다. 본고의 결말은《이 람색의 지구덩이가 억만겁을 공전하여 일체가 먼지로 변해버렸네. 흰 구름아래 한 소년이 해빛처럼 찬란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남해의 바람 따스하게 불어 오고 동해의 파도 자장가 불러주네. 북방의 삼림과 서녘땅의 격상화(格桑花)는 한 하늘을 우러러 너를 축복하여라.》라는 노래로 맺으려고 합니다.     중국어에“엽공호룡(叶公好龙)”이라는 성구가 있지요. 여기서 엽공이란 누구인가? 엽공은 춘추시기 초나라의 저명한 정치가이고 군사가이지요. 이름은 심제량이고 자는 자고로서 초나라 소왕이 엽읍윤을 하사한데로부터 성이 엽가로 되였다고 합니다. 엽공의 증조부는 춘추 5패의 하나였던 초나라초장왕이였습니다.    어떤 사학가는 류향의《신서. 권5. 잡사》에서 엮어낸《엽공호룡》의 이야기를  다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룡이란 신화적동물로서 엽공의 집에 내려올수 없다는것이 론거입니다.《엽공호룡》을 조선말로 풀어말하면“엽공이 룡을 좋아 하다”이지요. 엽공이 어찌나 룡을 좋아하였던지 가구와 실내장식에 전부 룡의도안을 채용했습니다. 심지어 갈구리나 목수도구인 끌같은것도 룡모양으로 만들어썼고 문이나 창틀에도 각종의 룡을 새겨놓았습니다.     내가 이 소문을 얻어듣고《엽공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니 한번 답례방문을 해야 하지.》하고 지상에 내려와 엽공의 집창문에 머리를 쑥 디밀고 《엽공이 있는가?》하고 알은체하였습니다. 평시에 그렇게 나를 숭경하며 좋아하던 엽공은 진짜 내가 래림하자 혼비백산하여《아이구, 괴물이야,》하고 아비규환을 불렀습니다. 내가 어쩌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내가 서운하여《어찌 괴물이라고 놀라는가? 당신이 좋아하는 룡이란 말이오.》《어어…내, 내가 좋아한건 가짜룡이지 진짜 룡이 아니오.》하고 말도 마치지 못하고 36계 줄행랑을 놓는게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이 이야기는 나를 두고 엮은 풍자의미가 짙은 우화이지요. 엽공은 력사상 실재 인물이지만 이야기정절은 허구해낸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성구로 굳어진것이 바로 입니다. 우화는 아주 생동하게 엽공식의 인물들을 풍자하고있는바 말은 번지르 르해도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는 나쁜 관념과 작풍을 발가놓고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장이 로애공이 현자를 존중하고 아낀다는 소문을 듣고 배알하러 갔으나 로애공이 례로 대하지 않자 직언하였습니다.《신은 군왕께서 명사를 례로 대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왔나이다. 백사불구하고 찬서리, 눈바람과 먼지를 무릅쓰고 백사불구 늦을세라 허위단심 찾아왔는데 이레동안이나 만나주지 않으니 임금님의 명사를 좋아한다는것은 엽공이 룡을 좋아한것과 다를바 없나이다.》라고 하소했답니다.     그후 자장은 스승 공자앞에서 로애공을 엽공같은 군왕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실 력사상 엽공이나 로애공같은 인물이 지천으로 널려있습니다. 이 성구는 입으로는 무 엇을 좋아한다고 요란하게 떠들어치지만 실제상에서는 좋아하지 않는 인물들을 비유 한것으로 널리 쓰이고있습니다.       연단에서는 얼굴한번 붉힘이 없이 렴결봉공, 부패척결을 요란하게 고아대지만 연단을 내리면 속이 굴뚝같은 자들이야말로 엽공식의 인물들입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엽공이 룡을 좋아한것과 탐관들이 렴결을 부르짖는 현상은 그 추향이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알수 있죠. 이 관점이 본론문의 골자입네다.                                                                                        2007. 10。 5  
273    동물왕국 “계급분석”초고 댓글:  조회:7254  추천:0  2013-11-21
                                               동물왕국 “계급분석”초고                                             ㅡ 매화록녀사의 웅변고 발취록 ㅡ                                        정글법칙에 따라 본능으로 사는 동물계에 계급이 존재한다고 하면 되우 웃기는 얘기가 되는데 조금 비틀어보고 비유적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상징적“계급”이 존재하 고있음은 사실임을 알수 있을것이다. 그로부터 인류의 립장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벗인가 하는 금이 그어진다. 누구네 말마따나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     인류사회에 지고무상의 통치자가 황제와 황후였듯이 동물계에 룡과 봉황이 이에 맞먹는다. 맞먹는게 아니라 룡과 봉황으로 중국봉건사회의 최고권위자를 비유하였다. 다 알다싶이 력대 중국황제들은 룡포를 입었고 황후는 봉관( 风冠)을 썼는데 이는 룡과 봉황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미신하였기때문이다.     하여 황제의 얼굴을 룡안이라 하고 황제의 풍도를 룡장(龙章)이라 하고 황제의 보좌를 룡기(龙椅)라 하였으며 황제의 자손들을 룡손(龙孙)이라 하였고 황제가 죽으면 룡어빈천(龙御宾天)이라 하였다. 황제가 있으면 그 아래 재상이 있기마련이다. 동 물왕국에서 코끼리(大象)는 재상(宰相)급이다. 중국장기로 실증할수 있는데 검은장기쪽은 상(象)이라 하고 붉은쪽은 상(相)으로서 권력이 상등하고 급별이 같지 않는가?    코끼리가 재상은 재상이로되 문관이다. 무관은 호랑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군대속에서 용맹한 장수를 일러 호장(虎将)이라 하지만 구장(狗将), 묘장(猫将)이라 하지 않는 도리가 이에 있다. 이것은 륙군에 해당되는 말이다. 수군(水军)에서 게(螃蟹)가 장군급이고 새우(虾)는 병졸이다. 그래서 한어에서 새우병사 게장군(虾兵螃将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것이다. 이들은 다 통치계급진영에 속한것들로서 인류사회에 비유하여 말하면 제국주의자들에 해당되기에 극단적인 “반동파, 계급의 적”들이다.    소와 말은 인류사회로 말하면 빈하중농계급에 속하는 로동계급으로서 인간사회에 서는 혁명의 주력군이지만 동물세계에서는 룡과 봉황, 코끼리와 호랑이를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킨적이 없다. 소와 말로 진화하면서부터 수천년을 고역에 시달리다가 잡혀먹히는 운명을 면치못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중국의 구사회에서 빈하중농은 우마보다못한 생활을 하였다고 소고대회에서 성토하군했다.     말은 몸값이 소보다 고귀해서 흔히 자연사로 일생을 마치는지 모르나 인간세계에 우공(牛公)의 운명은 인간사회의 고도의 물질문명과 농업기계화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걸어다니는 료리감으로 전락되여 무시로 도살의 위험에 처하게 되였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는 역축을 제멋대로 잡아먹으면 “역축도살죄”로 옥살이를 하였으나 지금은 농우로가 아니라 고기소로 전락되여 수천년 영광의 력사는 다시 돌아올수 없게 되였다.     제천대성 손오공의 후손들인 잰내비(원숭이)들의 경제지위나 혁명에 대한 태도로부터 분석한다면 “류망무산자”에 근사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각지에 자기들의 비밀조직이 있는데 례하면 “화과산”은 유서깊은 아지트에 해당한다. 그들은 산을 차지하고 왕으로 자칭하고 있기에 동물세계에서 문제거리 군체이다. 그러나 천균봉을 휘두르며 옥황전을 들부시던 로선조인 손오공같은 반란정신은 유전되지 못했다.     개미는 무슨 계급에 속하는가? 개미는 한어서 말하는 의민(蚁民)으로서 인간사회에 민초들에 해당한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군중”이라 할수 있는데 동물세계에서는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하였다. 천리방둑도 개미구멍으로부터 무너진다. 개미가 태산을 옮긴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전설에 불과하고 동물세계에서“정치체제”를 개혁할 사명이 있지만 자질이 차하다. 동물세계에서 말하면 대부분 “문맹”들이다.     꿀벌의 계급성분은 비교적 복잡한데 계급분화가 엄중하다. 절대다수 로동벌들은 진종일 꿀을 빚느라 백리길도 마다하고 일하는데 왕벌을 비롯한 극소수의 벌들은 세화변질되여 놀면서도 왕장만 먹으며 성유희로 일생을 즐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로동벌들이 한 여름 빚어놓은 꿀을 인간들이 자꾸자꾸 짜내다보니 벌들은 사탕물이나 먹으며 연명해야 한다. 비록 인간들이 근로의 대명사로 꿀벌을 내세웠지만 그게 다 눈가림을 하는 미사려구일뿐이다.     동물세계의 계급분석에서 쟁의가 가장 큰 동물은 개이다. 인간사회와 밀접한 련대성을 가지고 있는 개들에 대한 평가는 중외가 불일치한데다가 현대에 와서는 평가기준이 더구나 모호해졌기때문이다. 중국은 물론 동양에서 개(때론 견공이라 존칭하지만도) 전통적관념상에서 좋은 물건으로 간주되지 못하였다. 한어에 “狗东西”,“狗崽子”라고 하듯이 우리 조선말에도 개종자, 개물건짝, 개는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 등등의 지극히 광채롭지 못한 표현들로 개들을 폄훼하는것이 관습으로 되였다.     듣자니 서방의 선진국들에 개들은 언녕 똥먹는 버릇을 비롯하여 개성(狗性)을 고쳐서 애완동물로 둔갑하였다. 하여 전문 특식(통졸임 등 특제개식품)을 하고 나들이나 하면 비단조끼를 입고 번쩍거리는 개사슬에 매여 꼬리를 흔들며 거들먹거릴수 있다. 그러다보니 기기괴괴한 잡종일수록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미련사“(美联社)”의 2013년 6월의 전자신문에 의하면 “뉴욕의 개들은 그들의 주인과 동등하게 복리를 향수 할수 있다”고 한다.     사람과 같이 고급승용차에 턱하니 앉아 시내돌이를 할수 있고 전직변호사를 부릴수 있으며 전담의사를 둘수 있고 형상설계를 할수 있기에 미용미발은 물론 발톱미용도 할수 있다고 한다. 류행감기를 내놓고 류행이라면 죽기내기로 따르는 풍조로 말미암아 여기 중국에서도 이면에서는 크게 후진국으로 만족하지 않고있는 실정이다. 우습지도 않게 서양의 개들은 구권(狗权)만 수호할뿐만아니라 인권도 누리고 있단다. 물론 동양의 여러나라들에서 따라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각국의 국정, 인문환경에 따라 똑같을수는 없다. 아무튼 현대개들은 환골탈태는 못했지만 신세는 고쳤다.     동물세계에서 양의 계급지위는 비참하다. 양은 약세군체의 대명사로서 인간사회 에서도 마찬가지 대우를 받으니 가나오나 불쌍한 동물이다. 인간이 조작해낸 이른바 띠풀이책에는“나는 자연의 총아, 나는 신뢰하고 신뢰로써 보답받는다. 운명은 나의 용모에 미소짓고 나의 온화한 사랑속에서 만물은 피여난다. 나는 내가 보는 모든것속 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그럴듯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양띠생들을 위로하는데는 그럴듯한지 모르나 양들의 운명에는 아무런 도움도 없다. 여북하면 죄없이 죽어야 하는 사람을 두고“희생양”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겠는가?     돼지는 선조들이 인간들에게 속히워 산을 내린후 렬악한 환경속에서 안빈락도를 즐긴 모순의 집합체와 같은 동물로서 환영은 받되 사회지위는 말째이다. 여북하면 이런 우화가 엮어졌겠는가? 에미돼지가 곧 사람들에게 팔려갈 새끼돼지를 놓고 전통교육을 하였다. “귀여운 내 새끼야. 우리는 이름도 혁혁한 저팔계라는 선조를 두었지만 그게 다 소용없고 차례진 운명은 아무때건 사람들에게 잡혀 료리가 되는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생활을 즐길줄 알아야 하느니라. 비록 칼도마위에서 걸어다니는 료리이나 짧디짧은 목숨대신 잘먹고 늘어지게 자면서 편안한 일생을 보낼수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라. 자신이 숙명을 개변하려 한다는것은 망상이다. 알겠느냐?” 에미돼지는 무식하지만 생명철학의 정수를 장악하고있었다. 참으로 애재애재로다.     시간상 관계로 수백천종의 동물들의 계급성분을 일일히 분석할수는 없으나 동물세계에서 룡과 봉황처럼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다 허상에 불과한것이고 기타 맹수를 비롯하여 인간들의 말처럼 산짐승으로 통칭되는 우리 동물들은 인류와 함께 진화되였지만 결국 인간의 도살대상, 놀이대상이 되였으니 슬프지 않은가?
272    신세기 만국동물웅변고 목록 댓글:  조회:7206  추천:0  2013-11-21
                                    신세기만국동물웅변고 목록                                                          야 조     ※ 소의 유촉: 너무 충직하지 말라 “황소들이 인류의 찬미를 받으며 살게 된것은 허영심때문이였는가?” ※ 호랑나비:   “우리가 꽃을 희롱하는가? 아니면 꽃이 우리를 꼬시는가?” ※ 양의 공소     “승냥이의 강도론리의 실용성” “개고기를 파는데 양대가리를 거는 작법의 현실성을 론함” ※  노새의 자탄: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  버마재비: “감히 수레를 막아서는 용기와 정신내함에 대하여” ※ 개:  “우리도 똥먹는 습관을 고쳤는데 탐관오리들은 본성을 왜 못고치는가?” ※ 원숭이:  “인류가 자기의 선조를 잡아죽이는 잔혹성과 비애를 해부한다.” ※ 참새,    “절개를 론함” ※ 모기: “피를 빨아먹는것은 우리의 생존권리이다.” ※ 돼지: “탐욕스러운것은 우리들뿐인가?” ※ 사슴: “말과 사슴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치는 서한” ※ 비둘기: “우리는 평화를 상징하지만 전쟁광들에게는 속수무책이다.” ※ 꿀벌: “우리가 빚은 꿀이 략탈당하고 있다.”   ※ 백조: “당신의 젓가락을 놓으라”ㅡ 위기에 처한 일체 동물들의 납함 ㅡ ※ 닭: “원숭이를 혼내우려고 우리를 내거는데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수탉이 액외선전을 하는것은 반대한다.” ※ 개미: “우리는 미물이지만 인류가 우리의 덕을 따를만한가?” ※ 여우: “여우의 교활성과 탐관의 분식” ※ 까마귀: “우리가 골탕을 먹게 된것은 어디까지나 실말을 한탓이다.” ※  승냥이와 이리의 합저 “우리의 생존론리와 면양의 약점”   ※ 숫사자: 훈사, 나를 내놓고 또 누가 왕이 될수 있는가?     “왜 체대가 비슷한 각마(角馬)마가 우리에게 당하기만 하는가?” ※ 코끼리: “인류의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략탈하는 행위를 통책하노라” ※ 커룽양(克隆羊) “만물의 령장들이여, 탐관오리들을 재조하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 게: “세상에서 우리만 똑바로 걷게 할수 없단말인가?” ※ 뱀: 1 편 “굴절운동의 철리성을 론함” ※ 박쥐: “우리가 동물도 못되고 조류도 못된 연원에 대한 력사적사고”   ※ 족제비:   “족제비에게 닭을 맡긴다는 속담의 내함과 인민이 준 권력문제” ※ 바퀴: “국고에 좀벌레는 많고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가 기름방울을 훔치는것에 신경을 살리는가?” ※ 두꺼비: “지금은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면 우리 족속들도 고니고기를 먹을수 있다” ※ 늙은 쥐: “국고에 큰 쥐는 기실 우리가 아니다.” ※ 거미 : “그믈을 짜는것은 우리들의 생존수단이지 생존목적이 아니다.” ※   “나귀의 철학 석마를 끝까지 찧지 말라.” ※ 노새:       “그래도 출신이 중요하다.” ※ 물고기:  “사람들이 지렁이를 미끼로 우리를 꼬시는 얄팍한 행위를 규탄한다.” ※ 백호왕: “면양이여, 너의 이름은 선량이다” ※ 토끼: “굴앞에 풀을 먹지 않는것의 합리성을 론증한다.” ※ 우물안의 개구리: “우리가 우물밑에 숨는 합리성을 론증함” ※ 고양이: “나의 라태성은 누가 키웠는가?” ㅡ 겸하여 인간사회에서 해당 직능기구의 실직행위를 론함 ㅡ ※ 앵무새: “관원이 비서가 쓴 원고를 읽기와 내가 말을 배우는것의 동일성을 론한다.” ※ 쉬파리:   1. “우리는 세멘트바닥에 쉬쓿는법이 없다.” ㅡ 부패의 온상을 생각함 ㅡ ※ 씨수퇘지: “나를 무책임하게 씨를 뿌린다고 비난하는데 인간들속에는 없는가?” ※ 오리:“각자 걷는방식이 다른 법이다. 모델들은 왜 우리를 흉내내는가?” ※ 까치: “까치둥이를 점령하는 비둘기와 제3자의 가증스러움을 론함” ※ 원과 앙의 합저:     “사회진보는 필연적으로 혼인위기를 자초하는가?” ※ 금실제비:“우리의 보금자리를 략탈하는 인류에 항의한다” ※ 들닭 “탕녀들의 더러운 명성을 왜 우리에게 덮씌우는가?” ※ 매화사슴     “동물왕국계급분석”을 론함 ※ 도마뱀: “우리는 왜 꼬리를 잡히면 재빨리 끊어버리는가?”  ※ 자라:      “ 인간이 자라탕을 마신후 사발을 내려놓고 욕질하는 변태심리를 평함.” ※ 잠자리   “일부 공복들이 하향하는것과 우리가 꼬리로 물을 차는것의 동일한 추향성” ※  고슴도치 “사람들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사람을 찌른다.” ※ 곰  “곰사양장의 비극을 까밝힌다.” ※ 승냥이“우리가 사는 기술은 양가죽을 쓰고 행세하는것이다.”   
271    만국동물웅변대회 개막사 댓글:  조회:6857  추천:0  2013-11-21
                                              만국동물웅변대회 개막사                                                           사회자 청룡         새 세기 세계환경의 날“삼림광장”에서 새 세기만국동물 웅변대회가 열리였다. 주최자인 청룡이 개회를 했다.        《여러분,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 착석합시다. 오지 않은 분들은 손을 들어봅시다. 좋습니다. 손을 든 분이 없습니다. 여러 형제자매들, 오늘은 6월 5일, 새천년의 첫세계환경의 날입니다. 목전 사회발전과 과학기술의 비등에 힘을 입어 우리 동물들의 생존환경은 날로 악화되고있습니다. 우리 동물권내에서 절멸되는 물종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류와의 화해로움도 날따라 못해지고있습니다.     이번 웅변대회의 취지는 사람과 사람지간, 사람과 동물지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동물을 보호하고 생태환경을 보호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것입니다. 아래에 백호대왕께서 본기 웅변대회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열렬한 박수로 환영합시다.》    백호대왕이 연단에 나서서 개막사를 읽기 시작했다.   《근간에 인간사회에서 동원이란말이 류행되지 않습니까? 무슨 환영동원대회, 휴식일동원대회, 아름다운 총동원대회 등등, 오늘 나도 한차례 대동원을 하려합니다. 먼저 론문평심위원들의 명단을 선포하겠습니다. 백호님, 청룡님, 코끼리선생, 개동지, 우선생, 이렇게 다섯으로 선정되였습니다.     예, 원래는 군중들속에서 추천한 심사위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만 다음같은 분들에게 비교적 집중되였습니다. 우선 꿀벌입니다. 꿀벌은 력래로 근로치부의 전형으로서 군중형상이 비교적 훌륭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꿀벌중에 왕벌은 만인지상으로 군림하여 날개짓 한번 하지 않고 좋은것을 먹으며 권세를 부리는 가증스러운 독재자입니다. 그래서 민원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만약 꿀벌족들에게 위원지표를 하나주면 자연히 왕벌이 차지할게 아닙니까? 그러면 영향이 좋지않습니다. 그래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뭐 이렇게 한데 대해 별다른 의견이 없을줄 압니다.     원숭이가 당선되여야 한다는 의견도 비교적 많았습니다. 만물의 령장이라는 인류의 선조라는 시점에서는 우선 고려해야 했습니다. 손대성이 천균봉을 휘둘러 옥황전을 들부시지 않았습니까? 반란의 년대에 진두에서 골간작용을 논것은 사실이지요. 허지만 지금은 경제건설시기에 진입하였는데 원숭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올리뛰고 내리곤두박질하면서 제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다. 그러구서야 어찌 차분한 정서로 론문들을 심열할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양이 차하고 입을 단속할줄 몰라서 토론가운데서 나온 부동한 의견들을 곧이곧대로 당자에게 불어대면 안정단결을 파괴하는것으로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구? 원숭이동생. 의견이 있다구? 이미 결정한것이니 그 의견을 보류해두겠소.     본래 위원들중에 기층대표를 고려해야 했습니다. 추천명단에서 개미가 비교적 조건이 합당했습니다. 우선 개미네족속들은 류종이 다양하고 인구가 많은것입니다. 둘 째로 개미들의 단결합작정신은 입둔이마다 칭송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매우 부지런한 물종들이지요. 그러나 온종일 들랄날락 동분서주하는 개미들은 천생 책을 읽지 않는 성미가 아닙니까?     국내외의 형세에 감감이지만 자신의 문화자질을 제고하려하지 않는데 그중에서 비교적 뛰여난 자를 뽑았대야 웅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어찌 평의할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고려밖이였습니다. 당연한게 아닙니까? 후선인명단에 봉황아가씨가 있는데 봉황부부는 일평생 서로 화목하게 백년해로 한다는 미담이 고금에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황부부는 미만한 혼인의 상징물이지요.     하지만 듣는바에 의하면 봉황아가씨가 늙은 부옹에게 시집갔는데 첩을 두셋씩이나 두고도 다른 색을 탐하다보니 봉황아가씨가 요즘은 리혼한다, 자살한다 하면서 동네가 부산스러울 지경이랍니다. 봉황아가씨가 밤낮 눈물로 세수를 하고있는데 무슨 경황에 사회활동에 참여한단말입니까?     다음 오리가 제기되였는데 괜찮다고 할수 있지요. 오리무리속에서 대명인들이 배출된것은 모두 알고있지 않습니까? 텔레비명인인 그 유명한 탕로야(唐老鸭)씨가 바로 그 명인이지요. 뭐라구? 쥐동생 거기서 뭐라고 씨부렁거리는가? 오, 그래 맞다. 늬들 서가네족속에도 명인이 나왔지, 깜박잊었군, 그 미로수(米老鼠)를 말하지?      그건 그렇다치고, 오리형이 최근 피를 화험했는데 현대부귀병에 걸리여 혈지가 대단히 높다는 진단이 나왔다던군. 뭐 피검사까지 할것없다고 봅니다. 저 장군배만 보아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걸을때 뒤우뚱거리는 모양은 정말 못보아주지요. 에헴, 뭐라구? 그에겐 중풍징조가 보인다고 하던데 웅변을 면제시킵시다. 뭐? 그래도 기어이 하겠다구? 그래, 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나 론점이 또렷하고 론거가 확실해야 하며 론술이 잘 째야야 하네. 알겠는가?      그다음 쟁론이 있은 인물은 개입니다. 개의 공공형상은 재래로 광채롭지 못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왜 입만 벌리면 개판이니 개종자라니 개가 주인등을 업고 행세한다느니 하는 욕이 쏟아져나오겠습니까? 하긴 발전적관념으로 문제를 보아야 하겠지요. 이 근년에 개신세도 활짝 펴이게 되였습니다. 애완견이 되여진후 그 몸값이 엄청나지 않습니까? 개팔자가 늘어지게 되였습니다.     천하디 천하던 개들이 상류사회에 진입하였고 특히 갑부들의 집에서는 고귀한 주인과 함께 먹고 함께 앉으며 현대화고급문명의 향수를 누리니 말입니다. 모두들 거리에서 못보았습니까? 개류행복장점이라든가 개미용원이라든가 개진료소라든가 개병원이라든가 개형상설계쎈터라든가 개변호사라든가 아무튼 개에게 복이 넝쿨째 떨어졌지요. 총적으로 당전 개의 사회지위를 누가 홀시할수 있겠습니까?       더욱 중요한것은 이번 웅변대회경비는 참가자의 머리수에 따라 분담한외에 사회상에서 협찬한 의연금이 대부분인데 개의 공로가 크다는것을 밝히는 바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개도 통이 크게 제주머니를 풀어서 협찬하였는데 자신의 작은 금고를 헤쳤다고 합니다. 경제지위가 정치지위를 결정한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개에게 한자리 안기는것이 사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예, 당연 하다구요, 되우 감사합니다.     예, 그리고 말이 난김에 하는 말이지만 바퀴벌레 얘긴데요 이전에 중국에서는 “두유랑(偷油郎)”이라고 하면서“사해(四害)”명단에 올렸지요. 그런데 향항에서 거시기 뭐라하는 련속드라마를 돌린후 향항지구에서 기르는 총애물이 되였다더군요. 이번에 바퀴벌레도 협찬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희사입니다. 이에 특히 표양하는바입니다. 뭐라구? 박쥐도 총애물이 되였다구? 그거 참 해괴한 뉴스구만, 난 듣지 못했습니다만.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의 총애물이 된다는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젠장, 여러분은 이런 뉴스를 본적이 없는지? 한집에서 고양이를 길렀는데 그 고양이아씨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정신이 황홀해서 사처로 쏘다니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주인은 부인의 동의를 거쳐 고양이혼인광고를 냈는데 조건이 무척 각박했습니다. 우선 같은해 같은 날에 난것이야 하고 체형이 단아해야 하는데 더욱 중요한것은 응모자는 반드시 총각고양이라야 한다는것입니다. 아니, 날 좀 보지, 말하다 말하다가 그냥 버릇처럼 주제를 떠나서 왜지밭에 갔네그려, 으하하하!     본화제로 돌아옵시다. 앞에 다섯 평심위원가운데서 나는 산중대왕이라 일컬어온터이고 이번 활동의 발기지이자 조직자여서 주임자리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길래 이렇게 한자리 차지했구요, 청룡님으로 말하면 중화민족의 상징이고 토템이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호소력과 영향력이 막강하기에 응당 부주임이 된겁니다.     코끼리어른으로 말하면 거물급이지만 선전과 조직사업을 맡게 되였습니다. 코끼리는 체대에 걸맞게 일처리에서 온당하고 군중위신도 돈독하지요. 이 직위에 적격이라 할것입니다. 우형은 본성이 근면하기에 베끼고 쓰는 등 후근사업을 맡게 되였습니다요. 게다가 어느새 컴퓨터까지 다 배웠다고 하는군요. 꼭 잘할겁니다.     재무과장이야 당연히 개씨가 맡아야 하지요. 뭐라구? 개씨가 웅변을 모른다구? 거야 관계없지, 언제는 내항이 내항을 령도합디까? 개형은 그저 사무실에 버티고 앉아서 전화나 받고 표나 예약하고 돈을 잘 간수하면 되는겁니다. 걱정할것 없다는데두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절대 탐오할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가지고 있는 돈만해도 평생 다 쓰지 못할지경이랍니다.     이 말은 이만하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초심에 참가할 웅변자는 제한되여있지 않지만 5분을 초과해서는 안된다는것입니다. 장려는 세등급으로 하는데 일등상에 한명으로서 웅변자에게 타이에 열흘 유람을 할수 있게 합니다. 물론 왕복 비행기를 타게되지요. 2등에 2명인데 계림을 닷새동안 유람할수 있습니다. 3등에 3명인데 해남도를 사흘간 유람하는것입니다. 갈때는 공기조절기가 있는 최고급호화뻐스를 타고갈수 있습니다.     부대적으로 설명할것은 어떤 상을 탓던간에 왕복교통비, 주숙비는 대회측에서 전부 도맡는다는것입니다. 그러나 타이에 가서 녀요정을 눈요귀한다거나 안아본다거나 독칸에서 즐기는 비용은 자부담해야 합니다. 웅변에 참가한 모든 웅변고는 한데 묶어서 론문집을 내는데 제목은《신세기동물론문집》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군중의 반영에 의하면 이번 활동이 시작되기전에 벌써 경비를 탐오하는 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해구말구요. 회의전 주비위원회에서 엄숙하게 토론한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 빈입을 다시며 하는 회의가 있던가요? 빈배엔 애국자가 없다지 않습니까? 배부른 뒤에는 노래한곡조 부르지 않고서야 배겨내겠습니까? 아따, 노래가 있으면 자연히 어깨가 으쓱거리지 않습니까?     엉덩이춤에 취하고보면 독방을 청하지 않을수 없을거구요? 독방도 그렇지요, 베게를 안고 잘 멋이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연 아가씨의 배동이 있게 되지요. 배동아씨를 그저 안고만 있겠습니까? 자연히 격렬한 동작이 따르게 마련이 아닙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하하하…롱담입니다. 에헴,      자, 지금부터 웅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모실분은 청룡님입니다.                                     2007. 10. 4  
270    궤변술의 함정 댓글:  조회:8641  추천:1  2013-11-18
                                                 궤변술의 함정                                                        진 언       혹자는 궤변술자체가 일종 방법론이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일종 론증방법임은 사실이나 그것의 근본적특점은 일종 외곡된 론증이다. 궤변술은 무단 (武断)과 다르고 또한 요언과도 다르다. 무단적인것은 근본상에서 리유가 없으며 요언은 무중생유로서 듣기만해도 역겨워진다. 한편 궤변이 론증에서 모종 도리가 있을때 언제나 한무더기의“근거”를 들이대는바 표면상 적지않은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궤변술의 특징은 첫째, 겉보건대는 짐짓 정확한 추리수단을 리용하는듯 하지만 실제상에서는 론리규률에 어긋난것으로서 사이비한 추론을 이끌어낸다. 둘째, 무리하고 교활한 궤변론철학의 근원은 상대주의로서 상대주의는 일종 반변증법적인 철학학설이다. 맑스주의의 철학은 상대성속에 절대성이 포함되여있는바 절대는 되돌아와 상대성속에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말하자면 상대성과 절대성은 변증통일관계이다.     궤변론자들이 궤변을 부리는 목적, 방법은 어리둥절할만큼 다종다양하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 할 때 진리를 외곡하고 부정하는 형식은 몇십가지, 몇백가지 심지어는 수천종이라 할수 있다. 연막탄을 뿌리고 슬쩍 숨거나 물을 흐리워놓고 고기를 잡는 수단과 같은 궤변술에 홀리우지 않으려면 궤변수법의 본질부터 투시해야 할것이다.     궤변술의 상투적수법은 일반적으로 모호개념을 쓰는것이다. 즉 론증과정에 궤변론자는 론제의 명확한 원칙을 고의적으로 위반하고 론점을 애매모호하여 알쏭달쏭하고 사이비하게 조작하여 부동한 정황에 따라 부동한 해석을 늘여놓음로써 대방을 미궁에로 끌어들이여 주제를 가리워놓고 모종의 목적을 변호하기에 이른다.     다음 개념을 슬그머니 바꿔버리여 대방의 주의력을 분산시킨다. 즉 론제를 슬쩍 바꿔놓는 수법은 궤변론자들이 가장 잘 쓰는 일종 음모술수이다. 이들이 개념을 슬쩍 바꿔놓는 수법으로선 첫째, 한개 개념의 내함과 외연을 슬그머니 바꾸어놓음으로써 다른 개념이 되게 만드는것이다. 둘째, 다의어를 부동한 개념과 뒤섞어버리는것이다.     셋째, 개념지간의 모종 련계성과 표명되는 상사점을 틀어쥐고 부동한 개념지간의 근본적인 구별을 말살하려 시도한다. 례하면 “해결”과“치유”라는 말을 가지고 크게 문장을 지으려면 이런 음흉한 수법을 쓸수 있다. 넷째, 집합개념과 비집합개념을 뒤섞어놓는 수법을 쓴다. 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류의 사물의 정체적속성이고 비집합개념이 반영하는것은 한 사물을 조성하는 매개 분자의 속성이다.     다섯째, 론제를 슬쩍 바꿔버리는 수법이다. 궤변론자들은 론증과정에서 고의적으로 론제가 명확해야 하고 동일한 규칙이여야 한다는 잠규칙을 위반하고 슬그머니 론제를 전이시킨다. 론제를 바꾸어놓는 수법이나 개념을 바꾸어놓는 수법은 하나로 련계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론제를 바꾸는 수법은 론제중에서 어느 중요한 개념을 바꾸어놓는데서 잘 표현된다. 궤변론자들이 이런 론리규칙이나 구별점을 몰라서 궤변 부리는것이 아니기에 더 가증스럽다고 하는것이다.     허위적론거를 라렬한다. 즉 고의적으로 론거가 진실해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하며 조작한 례증과 착오적인 원리를 론거로 내세워서 착오적인 론제를 론증하려 시도한다. 우리는 요즘 다른 국토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결말이 우습게도 모호해진 시시비비에 실소를 금할수 없게 된다. 궤변론자들은 이처럼 총명하면서도 간능한 자들이다. 순환론증도 그렇다. 론제의 진실성은 론거에 의해 론증에 의하여 증명되는바 론거의 진실성은 또한 론제에 진실성에 의해 증명된것이여야 한다. 즉 순환론증이다.     사람을 가지고 론거로 삼는수법은 한사람의 품질을 평가함으로써 그 사람이 제출한 론단을 평가해버리는 작법이다. 바꾸어말하면 대방의 품질평가로 론제의 론증을 어물넙쩍 대체해버리는 기량이다. 다음 권위로서 론증하려 하는것인데 어떤 권위의 편단적인 말을 꺼내들고 사람을 놀래우고 기편하려든다. 환언하면 어떤 권위인사의 개별적인 언론으로 론제의 론리적론증을 대체해버리는 술수이다. 권위로서 론증하는것은 사람을 론거로 삼는 수법의 일종 특수한 표현이라 할수 있다.     인신공격법은 론쟁상대를 있는 사실, 없는 사실로 마구 욕질하는것으로 구체적인 론제의 론증을 대체해버린다. 심각하고 공공적인 문제일 때는 어용문인, 어용매체를 리용하는데 우리 여기서는 건국후 문단쟁론에서 이런 악질기량들이 잘 발휘되여 무고한 작가들을 매몰시켜버렸다. 과거도 그렇거니와 자국만이 아니라 어떤 주변국에서 지금 한창인 국사론쟁에 이 수법이 동원되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이는 론쟁에서 가장 악렬한 작풍이고 지략이 아닌 모략이다.     기계적류비도 곧잘 운용하는데 성질이 근본적으로 부동하거나 혹은 표면상에서 모종 면이 같거나 상사한 두개의 대상을 류비하는데 그로부터 그 중에 어느 한개의 대상에 고유한 성질로부터 다른 한 대상에 고유한 모종성질을 추출하여 론증하려는 수법이다. 이런 기계적류비에 의해 도출된 결론은 보편적으로 믿을수 없다.     편면적인것으로 전부를 덮으려는 알량한 수법도 있다. 즉 불충분한 조건으로 전면인양 우겨댄다. 마치 나무의 어느 가지가 병들어 말라죽은것을 보고 옹근 나무가 죽는다고 고아대는격과 같다. 원래 론쟁의 시발점이 되였던 론점을 증명할수 없을 때 슬그머니 순환론증하면서 론점을 바꾸어 가지를 쳐놓고 그게 간파되면 다른 론점을 끌어내고 그렇게 부단히 론증이라는 나무에 고의적으로 곁가지를 무성하게 뻗치면서 원줄기ㅡ원쟁론의 시점이 묻히게 한다. 궤변론자들은 단매에 쳐죽이고 싶을만큼 그렇게 교활하고 악랄하고 악착스럽다.     총체상에서 말하면 궤변술에는 늘 착오적판단이 포함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착오적판단이 궤변이라고 말할수는 없다. 하나의 고립적이고 론리적모순을 가지지 않은  착오적판단은 객관실제에 부합되지 못할지라도 궤변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의 착오적판단을 론제로 내세우고 정확하다고 론증하려 기도하거나 혹은 그것을 론거로 삼으려할 때 기타 판단이 정확하더라도 궤변으로 된다. 이런 철학이야기가 있다.     “ 너는 무엇을 배우려느냐?”      어떤 청년이 천산만수를 넘어 대서양의 버무다군도의 삼각해역중에 한 작은섬에 이르러 거기에 은거하고있는 철학가에게서 심오한 지식을 배우려 하였다. 청년이 철학가에게 자기가 온 목적을 얘기하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들었다. 이 철학가는 원래 궤변술대사였는데 몇마디 안짝에 청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다.     철학가: 너 지식을 배우고싶다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그러면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들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아니요. 나는 이미 알고있는것은 배우고 싶지않습니다.     철학가: 음,그러면 너는 네가 알지못하는것을 배우고싶다는거지?     청년: 그렇습니다요.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것을 배우려합니다.     철학가: 만약 네가 말이 있다는것을 전혀 모른다면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할것이냐?     청년: 아니요. 말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을수 없습니다. 철학가님, 나는 말이 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세상엔 확실히 말이라는 동물이 존재하니까요     철학가: 잠간, 내가 무엇을 물으면 무엇을 대답하라, 화제를 딴데로 돌리지말구 내가 다시 묻도록 하라. 만약 네가 버무다삼각해역에 하나의 신비한 작은섬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그 섬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냐?     청년: 나는 내가 근본 모르는 작은 섬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없습니다.     철학가: 만약 태양계의 작은 별에 한 외계인이  “외계인이 만든 소행성”을 가지고있는데 이 소행성은 네가 당연히 모를것이다. 너는 이 작은 소행성에 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느냐?     청년: 아니요. 나는 그것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을 가질리없습니다.     철학가: 그렇다면 네가 알지 못하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란 말인가?     청년: 그렇습니다.     철학가: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은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 사물은 어디까지나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 혹은 네가 모르는것도 례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    청년: 예? 정말 그렇단말입니까?       철학가: 만약 배울것이 없다면 여기까지 찾아와서 뭘한단말인고?       철학가의 궤변술에 미혹된 청년은 구경 무엇을 하려왔는지 알둥말둥해졌다.    이 철학가야말로 개념을 슬쩍 바꾸어놓는 마술사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하다면 이 철학가는 무슨 “마술”로 먼곳에서 온 청년을 함정에서 헤여나올수 없게 하였는가? 기실 철학가가 화두에서 제출한 세번 물음과 청년의 세번 대답에서 가히 엿볼수 있다. 그들의 처음 토론문제는 “너는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인데 이 문제에는 실제상 두개의 작은 문제가 포함되여있다.” ① 네가 이미 알고있는 사물은 존재하는데 너는 이미 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장악하고있기에 배우고싶은가? 생각이 없는가이다. ② 너는 모종 사물이 존재한다는것을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너는 그 사물에 대한 지식을 아직 장악하지 못하고있는데 배우고싶은가? 아니배우고 싶은가이다.     첫번째 물음에 청년은 부정하였고 두번째 물음에는 긍정정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대담에서 두사람이 사용한 “것”이 표달하는것은 모두 “지식”의 개념이다. 그것을 알고있는 철학가는 뒤미처 세개의 가정구(假设句)형식으로 “너는 네가 아직 알지못하나 존재하고있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배울생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원래의 토론문제를 슬쩍 바꾸어버린것이다.     이에 청년은 부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철학가는 다시 “이제 금방 네가 이미 알고있는것이 네가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너는 또 네가 알지 못하는것도 배우고싶지 않은것이라 하였지?,”라고 옥죄였다. 이역시 개념을 바꾸어 버린것이다. 본래“것”이란 단어가 앞에서 표달한것은 “지식”인데 여기서 철학가 그것을“사물”로 표달되는 개념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이 술수를 보아내지 못하였다. 표면상에서 보면 세개의 질문구가 뒤섞였는데도 결과적으로 속히워서 긍정적인 대답을 해버렸던것이다.     철학가는“것”이라는 이 불완전명사속에 “지식”과 “사물”이라는 두개의 개념을 들이밀어“고로 그 무엇도 네가 배울것이 없니라.”라는 결론을 내렸고 청년은 철학가의 롱간질에 머리가 어리벙벙해지였다. 서방철학사상에서 헤겔이야말로 궤변론에 대하여 계통적으로 비판한 철학가라 할수 있다. 그는 일찍“궤변은 흔히 임의의 방식으로 허적인 근거를 빌어오거나 혹은 진짜 도리를 부정하면서 동요를 기도하거나 혹은 허위적도리로 비상히 듣기좋게 작간질하기에 마치 정말인것처럼 여기게 한다.” 《哲学史讲演录》,第2 卷,第7 页》。     헤겔의 이 한단락의 론단은 궤변론이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뒤섞는 특점을 에누리없이 까밝힌것이다. 일상적인 쟁론은 그럭저럭 헛소리나 어거지로 치부해버리고 사실로 밝히게 되여있지만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는 대방의 궤변술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각성을 높여야지 어덩덩해서 대방의 물음을 제기하는대로“옳소, 아니오”하고 끝없이 끌려다니다보면 자신이 제기한 원론도 흐지부지하게 되고 대방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만들것이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그 한일념에 매달려 사유가 “단순”해질수 있으나 진실을 덮어버리려고 작정한 궤변론자들은 대방의 순진성을 롱락하면서 문제를 왕청같은데로 끌어가버리고 나중에 원문제가 뒤로 밀리도록 넓은마당에 알짜와 쭉정이를 마구 널어놓는식으로 론쟁을 유도한다. 그리하여 무슨 말을 했냐 안했냐로부터 시작된 문제를 이리저리 비틀다가 하나하나 밝혀지니까 말문이 막혀버렸지만 되돌아가서 지엽적인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여론을 호도한다. 뭘 한다는 사람들은 음모술수를 잘 부리는 궤변론자들의 궤변술을 역으로 읽어야 하련만...                             2013년 11월 15일  
269    네편, 내편 그리고... 댓글:  조회:8544  추천:2  2013-11-15
                                                       네편, 내편 그리고…                                                                     진 언       원초적으로 인류는 공생공존하는 우주법계(宇宙法系)생명공동체였다. 류인원들이 날로 똑똑해지면서 철학에서의 2분법을 모르면서도 제일 먼저 터득한것이 네편,내편이였다. 리익분배와 소득물을 수호하기 위한 분쟁과 피비린 무리싸움이 그래서 시작된것이요 네편,내편이라는 의식이 골수에 깊이 아로새겨졌다고 하리라.     소위 편이란 무엇인가? 편짜기의 기본은 자기의 부족함을 타자로부터 빌려와 채우면서 자기가 속한 공간을 확보하려는 속성이다. 너를 지지한다!이 한마디에 힘을 얻는것은 그가 내편이란 믿음에서 얻어지는 액외의 힘이다. 내편이란 무조건 내가 무슨일을 하건 나를 받쳐주고 밀어주어야 한다.     각기 혼자의 분투로 살아가는 동물들은 내편이 없어 비참하다는것을 모른다. 동족에 대한 기시나 기편이나 음모술수를 모르니까. 비참함이란 동류를 예속시키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게만 발생하는 심리현상이다. 그 정도로 자신의 힘과 능력을 불신하고 드러내놓고 남을 릉멸할수 있는것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고급령장동물이런가?     더불어사는 인생이라하지만 인생마당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편짜기를 하여 티각태각 다투고 눌러버리고 잡아치우는 실상이다. 항간에서 사람은 곁에 사람이 없는것이 제일 큰 불행이라고 말하는데 곧 내편을 들어줄 사람을 말한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부대끼고 찡내며 살아야 하는 삶살이에서 내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것은 마음의 기둥이되여 속이 든든해짐은 사실이다.     아이때 내편이란 내가 누구와 싸운다고 할때 잘잘못을 따지기전에 일단은 내편이 되여 상대를 함께 패줘야 한다. 이런 기초적개념이 없는편은 내편이 아니다. 아이들속에서 내편이란 곧 동고동락의 친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스운것은 강짜이다. 례하면 “이새끼야,너 웃마을에 ××가 공부도 잘하고 힘도 쎄다구 칭찬했다메? 나쁜새끼, 그래문 왜 그애편에서 놀게지 우리 무리에서 얼쩡거리니?” “내마음이고 내입으로 말하는데 뭔상관인데?”,“이새끼 안되겠다. 우리편에 오지마?…” 코흘리개들의 대결이라도 상식적인 단합이란 원시적덕목도 못가춘 어거지라고 해야 할것이다.     편가르기란 얼만 무서운 편향인가? “누구는 누구와 인제 친하지 않는대,” 하면서 쾌재를 부르는 얄팍한 심통의 아이들도 있었는데 심지바른 애들의 빈축을 샀다. 오히려 대바른 우두머리에게도 조롱당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인가? 편이란 그렇게 좋았지만 한편속에도 똘마니가 있고 발바리도 있었다.     편가르기에서 절친한 친구사이에 신임은 일종 미덕으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 친구라야 동고동락할수 있는 환난지우가 될수 있다. 또는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더 큰 일을 도모하면서 조직전체의 힘을 활용하는것! 위로도 받을수 있고 앞으로 나아 갈수도 있는 타력이 내편의 힘이다. 내편이 없는 아이는 그야말로 무리잃은 못생긴 새끼오리가 되기마련이였다. 그러나 애매한 욕이지만 빈충맞은“개다리”가 되기보다는 낫다고 할가,     공생공존하며 공동히 번영발전을 도모하는 그런 편짜기는 종래로 없었다. 궁극적으로 편짜기란 어느 사회에서건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 편짜기가 남에게 해를 주는것을 전제로 한다.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을 가진, 타방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로 편짜기를 할수 없다. 그래서 개체간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이든, 국가이든 천방백계를 다해 편짜기에 몰두하였다. 동맹,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동물세계에서 승냥이 늑대, 이리를 같은 물종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물형상구별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모두 개과에 속한다. 그런데 재미있는것은 개와 노는건 늑대이고 개와 안노는건 승냥이라고 단정하는것이다. 늑대중의 일부는 짝을 못구할 경우 개와도 짝을 짓는데 대부분의 경우 암늑대가 그러하단다. 개는 왜 승냥이와 불공대천이 되였는지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개가 있는곳에는 승냥이가 마을입침이 불가능했다. 류류상종도 아닌 이런 현상은 인간사회의 어떤 현상들과 비슷한가?     류혈이 랑자한 인류의 력사는 따지고보면 “편싸움”이였다. 두차례의“세계대전” 처럼말이다. 집단,국가적인 편가르기 시점에서“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수 없다. 어떤 리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는 말을 누가했든 사리에 딱맞는 말인데도 내편이 아니라는 그 한가지 리유로 진실조차 아예 부정해버린다. 그게 지극히 리기적인 편짜기의식이다.     편가르기엔 시비가 없다. 조고의 론리대로 내편이 되려면 사슴도 말이라 해야 한다. 이것은 악랄한 음모이지만 내편의것이면 똥도 된장이 되고 적편의것이면 된장도 똥이 되는판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런걸 이중잣대라고 하던가? 옛날 악명높은 진회(秦桧)처럼 “莫须有”를 내들기도 한다. 나를 따르면 흥하고 나를 거역하면 반드시 망한다고 공공연히 고아대는 귀감으로는 대서양건너 아메리카 양코배기아자씨들이라 해야 할것이다. 그들의 내편, 네편기준은 코흘리개들보다 더 엉터리다.     엄연히 존재해있는 대상물을 가랑잎으로 똥을 가리듯하면서 이데올로기, 편가르기, 조롱하기, 대방에 대한 윽박지르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기때문에 하나의 체제로서, 합리적행위자로서의 대방에 대한 분석과 시비기준을 늘 배배꼬는것이다. 이런 식견은 동족끼리의 공존, 단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수밖에 없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런 보편적인“인지적오유”를 범하기쉽다. 편가르기의 사람들이 쉽게 당하는 편향오유는 바로 네편,내편을 가려서 내편의 잘잘못은 어물넙쩍 외면하고 상대방의 잘못만을 가지고 공격하며 네가 잘못한것이 인정되면 내가 잘한것으로 으쓱거리는 심태에서 범해진다. 대방이 밉더라도 있는 사실만을 가지고 잘잘못을 가리고 잘못된것은 비판하고 반성하고 잘한것은 치하하는 아량을 가지는것이 세인을 웃기지 않는 민족의 기본자세인것이다.     편을 가를수밖에 없는 이 정글세계에서 편가르기를 두절할수는 없지만 편을 잘 잡아야 한다. 뭐, 줄을 잘서야 한다던가? 물론 동물의 대전에서 왔다리갔다리 하다가 조류도 아니고 쥐도 아닌 박쥐처럼 된다면 행운일수 없다. 물고기가 익사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는가? 그러나 편가르기를 잘하는 인간들은 네편내편이라는“탁류”에서 익사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만 “토사구팽”이라는 재수없는 경우같은것이다.     개체가 아닌 집단적이라면 리념으로 네편내편 가르더라도 멀리 풍물을 내다보고 누구와 친해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영존할수 있다. 하나의  진영리념의 충복이면 그 진영을 위하여 극단의 말이나 행동을 하는 꽉막힌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갈등이 마치 임진왜란전의 리조때 동인ㅡ서인의 대립행태가 생각난다. 지금도 당쟁의 흙탕물속에서 음모궤계가 자맥질하고 소위 학자, 혹은 론객들이 편가르기를 부추기느라 신나하면서 대립파에게“莫须有”를 들씌우는 작태들이 멀리서도 가관이다.      돌고돌아서 동족끼리 서로 대결하며 이불안에서 활개치는격이다. 이제는 민족의 화합을 해치는 웃기지도 않는 작태를 그만두고 편을 잘 짜야한다.   비록 리념으로 네편내편으로 갈라졌지만 혈관속에서 흐르는 동족의 피를 속이지 못하고 5천년을 뻗어내린 혈통이 단절될수 없다. 이는 도리가 아니라 진실이요 섭리이다. 분렬은 인위적이였지만 단합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착오적시간에 착오적인 분렬이였고 타자의 착오적롱간질의 악과이기때문이다.  장차 누가 진정한 내편이 될거이고?                                                                  2012년 8월 20일
268    렬근성도 가지가지 댓글:  조회:7933  추천:2  2013-11-10
                                                렬근성도 가지가지                                                              야 조       우리 민족의 렬근성계렬에 남을 헐뜯기라는 몹쓸 근성이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흠을 들추어내여 말하는 헐뜯기란 사람이 집이나 쌓은 물건을 헐어서 내려앉게 한다는“헐다” 와 결합된 합 성어인듯싶다. 어찌되였거나 헐뜯는 목적은 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한것으로서 비방, 중상, 류언비어, 날조, 비난, 모독 등 단어들의 어두운 의미를 곁들어 가지고있다.     인간의 본연 혹은 본성으로부터 본다면 헐뜯기와 깎아내리기란 말은 전혀 새로 울것이 없으나 시대와 인문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진다. 얽혀서 돌아가는 지구마당에서 살아가노라면 남을 헐뜯고 저도 헐뜯기울때가 있고 남을 깎아내리기도하고 자신도 남에게 깎이우기도하는 인생이여서 일종 관습으로까지 되여진 상태다.     예로부터 조선사람의 렬근성을 “독속의 게꼴”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오지독속에 많은 게를 잡아넣어두면 제각기 독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려 한다. 그러나 다른 게가 기어오르는 게를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진다. 독속에서 제각기 기어오르고 붙들고 떨어지고 하는 반복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어느 한마리도 기어나오지 못한다.     현대인의 집단생활에서“독속의 게”현상은 너무나 보편적이여서 일종 인간성으로 되였다. 어려워지거나 불행해지면 입으로나마 위로지만 누군가가 돈을 잘벌거나 벼락 출세하거나 하면 뒤에서 아무튼 흥흥거리며 흉을 본다. 그런 비평균적인 사람을 헐뜯으면 속으로 시원해지는 사이비한 자극마저도 선호하는 이률배반적인 심성이다.      모가 나지않고 둥글둥글 평균치를 이룬 인간으로 공존해야 하는 판에 누군가 그 평형을 깨려할 때 뒤다리를 잡아당겨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사가 시기질투라면 그에서 비롯되여 극에로 나아가서 헐뜯기로, 깎아내리기로 전환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고무상의 황제나 권세가들은 헐뜯을 계제가 못되듯이 생면부지의 사람은 헐뜯을 일이 없거니와 그럴 기회도 없다. 그래서 내주위에서 늘 코를 맞대고 있는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헐뜯기시장이 있게 된다. 그런데 손익관계에 있는 사람에 게만 행해지는것만은 아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픈 심리가 이러한 평형인간층의 뾰족함에 심리장애와 거부감을 느끼는것은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의 체질때문만일가 ?     현대도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류별나게 재능이 있거나, 류별나게 고매하거나, 류별나게 잘되거나, 류별나게 완강하거나, 류별나게 린색하거나, 류별나게 사치하거나, 류별나게 타산적이거나, 류별나게 시비가 분명하거나 등등 평형을 깨뜨린 사람을 거부하고 배척한다. 그래서 자고로 모난돌이 정맞는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고 평균을 벗어나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 그런 인간을 지향하고 교육도 줄곧 이 비평형을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였던것이다.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과 직관되여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욕을 먼저 내세우는 개체들 사이에 비일비재한 헐뜯기는 일종 삶의방식, 삶의양태 로 리해하면 되지만 흔히 말하듯 세상에 사람값에 못가는 달인들이 따로 있어 우리의 삶은 껄끄러워진다. 그들은 자기과시 혹은 자위(自慰)로 헐뜯기, 깎아내리기, 비아냥, 조소, 고자질, 리간질 등 못하는 수작질이 없고 아니하는 악담이 없다.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인생현장이니 산사람끼리 헐뜯고 헐뜯기우는것은 례상사라 하겠으되 죽은 사람들마저 놓아주지 못하고 헐뜯고 모욕주고 깎아내리는 언동은 헐뜯기 기술에서도 최악이다. 죽은 범은 겁많은 산토끼도 올리타고 내리타며 제멋에 겨워할수 있고 풀숲에 새앙쥐도 찍찍거리며 갉아먹을수도 있다. 인간사회에서 소위“개관정론”에 시시비비가 많아도 죽은자는 말이없기에 기탄없는것이다.     널리 와전되여 비유어로 잘쓰이는 오자서의“부관참시(剖棺斬屍)”가 제시하는바 는 심오하다. 오자서의 사무친 원한으로 자행된 거동을 보고 신포서가 사람을 띄워 너무 지나치지지 않는가고 질책하였을 때 오자서는 심부름군에게“신포서에게 이렇게 전해라. 갈길은 먼데 해가 저물어서 하는수없이 역행하면서 막된짓을 했다고해라” 라고하였다. 후에 “일모도원 (日暮途遠)”은 몸은 늙고 쇠약한데 아직 해야 할일은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지만 더 깊은 의미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진실한 인간상이 어떠하든 이미 고인이 자기네 사람을 개똥녀부르듯 찍어  헐뜯는데 자조(自嘲)도 유만부동이다. 민초들마저 체질화되여 국풍(国风)급의 어경 (语境)으로 되였다는것은 그들을 위해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다. 쇠덩이는 녹쓸기를 자청하지는 않지만 일단 녹이 쓸면 녹이 녹을 청하여 덧얹히고 자기를 갉아먹는 비참한 결과를 빚는다.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현상도 녹이 쓰는것과 같은 도리를 가지고있다. 아무리 반대해도 사실이 그렇고 그렇다.     말그대로 니전투구는 개들이 물고뜯는것을 의미하지만 사람들은 말과 글로 콩이 야팥이야 한다. 거두절미식 인용표로 말꼬리를 잡고 짜드래기나 캐고캐며 사사건건 부정하고 헐뜯는 언론, “아니면 말고”식의, “ㅡ카더라”식의 추측성보도, 사이비한 억측으로 의혹만 제기하고 결국 빈대포에 불과하면 “나는 몰라라”하는 민중을 우롱하기, 그래도 언론인이라고 자아감각은 좋아있겠지만 결국은 하잘것없는 기량일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적대감을 가지고있더라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공정해야 하련만 잘하고 좋은것에는 함구하다가도 무슨 헐뜯을 일이 생기면 꼬쟁이에 뀌들고 닭알에서 뼈를 찾으려하며 없는것은 있고 있는것은 없다는식으로 헐뜯지못해 안달한다. 마치 “넌 힘도 능력도 없어, 공연히…”,“그런데 왜 경계하는데”,“그래도 넌 나에게 위협이 되니까…”라는 억지를 쓴다면 얼마나 기특한가? 대방을 옳게 까밝히려면 좋은것은 좋은대로, 잘한것은 잘한대로, 나쁜것은 나쁜대로 말해야 설득력이 있는데 그저 덮어놓고 폄훼하니“여기 은전삼십냥이 없소”가 되고  스스로 미아임을 폭로할뿐이다,     배우려면 적에게서 배우라는 외국명언이 있던지…적대방이라고 불문곡직 부정하고 비난을 일삼는다면 미래와 그에 수반되는 공영은 없다. 따지고보면 무조건적인 헐뜯기, 내리깎기는 렬등감(콤플렉스라던가)에서 기인된것이다. 단순하게 폄훼해버리 는것이 스스로의 스트레스해소에는 좋을지 몰라도 진실의 료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렬등의식, 피해의식이 헐뜯기괴질이 된것은 결코 자랑할만한 민족성이 못된다. 죽은 풀어져도 가마안에 있지만 모래는 삶고 쪄내도 그냥 모래알이다.     우리 말 사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올라있다. 례컨대 실정이 어찌되여있든 피를 나눈 동족임에도 평민들마저 한피줄의 평민까지 싸잡아서 조롱과 업신여김, 비아냥과 헐뜯기와 깎아내리기를 하느라 침을 튕긴다면 결국 자기 자신속에 그런 몹쓸 기운을 채워가는 과정으로서 민족대동세계를 열어가는 주체력량이 되기에는 싹수가 글렀다. 남을 헐뜯지 않으면 못사는 민족이 이 지구촌에 더있을란가?      눈딱감고 헐뜯는 리유는 너무 얄팍하다. 대방을 인정해주면 힘을 실어줄것이라는 타산때문이다. 그래서 진실도 아전인수식으로 외곡하고 거짓말하고 터무니없이 깔보는것이다. 언필칭“그러나, 그런데, 하지만…그게 될라나? ”등등의 토를 달면서 잘못되기에만 신경쓰면서 감정분렬을 극대화한다. 그것이 필수적생존수단인가?       지구가 둥근것은 길을 잃은자를 원점으로 돌아올수 있게 하기 위해서일가? 어떤 사람들은 평행선이 가장 두렵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가장 두려운것이 교차선이라고 생각된다. 부딪침에 자신이 없기때문일가? 속이 궁글어서 헐뜯기에 열중하는건 아닌가? 지구촌을 웃기는 일이 맞는가? 우문에 현답은 있는가 ?                                                   2013년 10월 17일
267    (교육칼럼)듣던중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댓글:  조회:7571  추천:0  2013-11-07
                                             듣던중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최 균 선     최근 교육부에서 소학생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열가지군규(十项军规)”를 내놓고 사회적으로 의견청취를 하고있는데 열가지 규정에서 네번째 규정인즉 소학생의 서면숙제를 전면 취소하는것이다. 그리고 서면숙제대신 체험식숙제를 낼것을 제 창하였다. 다섯번째 규정인즉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어떠한 형식의 통일시험을 치지 못하며 4학년부터 어문, 수학, 외국어는 매학기에 한차례 전교통 시험외 기타 다른 통일시험을 안배해서는 안되며 매과목의 측험은 매학기에 2차를 초과하지 못한다는 것 이다. 여섯번째 규정은 등급평가제를 실시하는바“등급+평어”의 평가방식을 운용 하되“우수, 량호, 합격,대기합격”등 등급으로 평가해 한다고 규정하고 백점제를 전면 취소함으로써 점수를 가지고 옴니암니 따지는것을 피면하도록 하는것이다.     상술한 규정에 대하여 적지않은 학부모들이 현실적이 못된다고 왈가왈부하고 어떤 전문가들은 단칼에 베듯 숙제를 전혀내지 않아서는 안되는바 새규정이 듣건대는 아름답지만 실제 실행하려면 조작이 어렵다고 시야비야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질교육의 일대 진보로서 실험해볼 만하다고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전면취소하는것은 너무 리상적으로서 합리하게 숙제를 내는게 좋다고 한다. 아무튼 현재 전국적으로 2억이 넘는 중소학생들의 학부모들은 천층만층이므로 중구난방이다.      근간,《신문완고봉(新闻晚高峰)》의 보도에 의하면 북경, 강소,상해,산동 등 성시들에서 일전 대학시험을 개혁방안을 무르익히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있다. 각성시 에서 밝힌 방안중에는 모두 영어시험제도를 개혁의 중점으로 삼고있다고 한다. 즉 “영어시험을 도대체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하는것이다.     산동성에서는 새해부터 영어듣기능력시험을 취소하려 한다하고 강소성에서는 영어시험을 대학시험에서 아예 “퇴출”시키려한다고 전하고있다. 북경에서는 영어점수를 낮추려 한다고 한다. 이런 풍문이 현실로 된다면 영어학원이 충격받을것이고 아이들은 차차 영어복습반이라는 우리에서 벗어나게 될가? 하고 혼자궁리를 굴려본다.     지금 아이들은 지식의 초원에서 방목하는 양무리도 아니고 그저 이 울타리 저 울타리에 옮겨 갇아두는 양무리에 흡사하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장난질에서 원시적창조정신을 키운다는 교육원리가 나온지 오래지만 그것을 진정 믿는 부모들은 많지 않 다. 아이들의 천성적인 본성, 본능을《촌스럽다》고 일축해 버린다. 비오는 날 물레방아 걸어놓고 짝짝꿍치던 향촌의 개구쟁이들속에서 수많은 영재들이 나왔다는것은 결코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소리가 아니다.     물론 한창 배워야 할 때 게으름 피웠다면 동경의 미래도 없다는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망아지처럼 뛰놀고싶어하는 아이들에게는 배움이 들놀이처럼 신나는 일이 아니다. 배움을 공부(工夫)라고 이름한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었다. 준마도 채찍이 발굽을 들뛰게 하듯이 독촉은 어디까지나 필요하지만 독촉이 곧 교육성과로 될수는 없다. 자기민족어보다 영어가 더 중요시되는 사이비한 교육현상에 재빨리 습관되여온 오늘 날 갑자기 영어시험성적이 대학입시에서 뒤로 밀리면 어떤 현상이 생길가?비유컨대 빈절간에 향불피울 사람이 없듯이 만약 무슨무슨 학원이란게 없다면 갈일도 없고 올일도 없게 될것이 아닌가? 달리 가고올데 없으면 아이들은 그냥 학교라는 정규적인“우리”에서 싫든궂든 제공부를 할수밖에 없고 교원들도 미루고 피룰데가 없이 본직업에 더욱 분발하게 될것은 당연하다.     전통적으로 교원을 원예사요 초불이요 인류령혼의 기사라고 하는데 멋진 비유이지만 나름대로 선생이란 망망한 지식의 바다에서 대안을 향해 돛대를 높이달고 원항을 하고있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선장"같다고 하고싶다. 생활의 대해에서 풍랑과 파 도를 경험해보지 못한 철부지에게 폭풍과 격랑의 무서움으로 겁주며 선각자연 위세를 피우는 위치에 그치지않고 엄마가 아이를 젖먹여 키우듯이 바람을 견딜힘 뿐만아니라 폭풍에 맞서 풍랑을 헤치고 나가는 용기뿐만아니라 풍향과 바다길과 물길, 폭풍의 씨줄과 날줄을 세세히 헤아리는 지식과 바람을 비켜타고 풍랑을 올라타는 지혜도 갖추도록 붙잡아주고 이끌어주는 일이다.     이런 일을 게으름없이 일심불란으로 해나가는 선생님이 진짜 선생이고 스승이고 도사이다. 참되고 책임성있는 진짜선생은 학생을 타박하지 않는다. 모르니까 배우러 온 학생들이기때문이다. 배우러 온 학생은 당연히 모른다는것을 전제하고 학생의 인 지정도에서 나올수 있는 언어로 학생이 리해하도록 설파하며 한걸음 한걸음 지식의 고봉에로 손잡고 올라가는 선생이 훌륭한 선생님이다. 깨우침이 늦다고 타박하는것은 진도가 중요하고 시간이 급한 지식장사군에 다름아니다.     이런 훌륭한 선생님들이 정규교육의 전연에서 알심들이고 있는데 무슨 빈틈이 있기에 사교육이 비집고 들어서게 되였을가? 사교육이 갓류행될때는 무슨무슨 써클이라 하였는데 차차 과외보도반, 복습반으로 번졌다가 지금은 정규중소학교를 초월 하는 “학원”으로 격이 높아졌다. 아이들마따나 학교교원이 더 쎈가? 학원선생이 더 쎈가? 물론 전국적으로 합법적으로 경영되고있고 선전하여 가로사대 과외시간의 과정 보도를 해주기 위해 성립된 일종 교육기구라 하며 보도반 과정안은 중소학교에 과정안과 똑같으며 형식이 다양하다고 한다.     하다면 정규학교수업이 주류인가? 비정규직의 학원수업이 주류인가? 이런 물음은 얼핏 듣건대는 우문이지만 실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학습성적제고에서 주도작용은 학원선생님들의 몫이 되고있다. 그만큼 학원교육이 주류가 된듯한 착각을 주는것 도 사실이다. 학부모들은 물론 아이들도 내심의 경쟁심에서 열정을 내고 단맛을 보는 경우도 있거니와 남이 다하니까 락오자로 되기는 싫고해서 울며겨자먹기식인 경우도 없지못해 있는 형편이다. 이런 경쟁환경은 반가운 일인가? 당연지사인가?     한국식으로 이런 사교육에 대해 의론도 많지만 아무도 왈가왈부라고 확언할수 없는 오늘의 우리 교육실태이다. 이런 사이비교육실태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으로 합법화된 수업의 변종으로 자리잡게 된 원인이 승학위주의 현교육시스템이 운행에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은 이제 너무 진부하고 정답도 없는 물음이지만 공교육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더 탁하게 말하면 제구실을 잘하지 못하고있다는 실증은 아닌가? 이렇게 말하면 해당된 사람들은 아주 심기가 불편해질것이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더 높은 점수를 맞으려고, 성적이 차한 아이들은 높은 점수를 맞는 아이들을 따라가려고 학원에 다니다보니 층차가 각이한 아이들이 한데 몰려앉아 앞당겨 배우거나 보충수업을 받는데 한마디로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좀더 나은것을 찾기위해 비싼 사교육비(학원비)도 아랑곳없이 개근생이 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이러저러하게 료해하여 보니 학원에서의 진도앞당기기, 복습하기, 올림픽수학으로 지력틔우기 등이 만능은 아니였다. 수학골이 뛰여나지 못한 나의 손자놈의 경우 많이 개발이 된듯싶기는 해도 성적이 온당하지 못한것은 그냥 그 본새이고 어떤 아이들은 전혀 진전이 없어 가지않겠다고 떼질쓰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결국 학습부담이 과중하다는 실증이 된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학습흥취가 관건이라는것은 기성도리이다. “공부기계”로 된 아이들에게 무슨 흥취가 생기겠는가? 아이들이 과외독서를 하지 않는것도 있겠지만 눈을 떠야 별을 보지, 하는 속담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 어찌해야 하는가? 이런 조류에 말려든 자신도 자가당착에 빠졌기에 질의하는바이다.                                               2013년 10월 25일
266    고맙습니다. 지각한 동장군님이시여! 댓글:  조회:8617  추천:2  2013-11-04
                                         고맙습니다. 지각한 동장군님이시여                                                                  진 언                                                           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 얼고                                                                   만리에 눈날리네         이 시구에서처럼 내가 사는 여기 북국땅, 장백산아래 인촌의 겨울은 엄혹한 동장군의 일언지하에 만물이 꽁꽁 얼어붙는게 정상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올해는 유달리 동장군의 왕림이 늦는지? 이젠 황하이남처럼 가을과 겨울의 계선이 모호해지는 가? 11월 7일이 립동이고 22일이면 소설인데 전혀 겨울맛이 나지않으니 이래저래 곤혹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현대문명에 계절의 순환마저 흐지부지해는가?     썰렁한 초겨울같지 않게 한낮이면 해볕이 마치 늦가을해처럼 자비를 베풀어 주어서 드러내기로 멋을 내는 류행아가씨들은 신이날지 몰라도 실용적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일면 즐기면서도 일종 불안을 보듬고있다. 전국적으로 겨울이 늦어진다고 의론 들이 분분하는차 여기 북방마저 올해들어 동장군이 유별나게 늑장부리니…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보면 하늘은 의연히 만리벽공이고 오싹한 랭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미구에 해살이 쭉 퍼지면 따스해지고 한낮이면 껴입은 옷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듯거리는 양광이 다정한 어머니의 손길처럼 얼굴을 쓰다듬어준다. 길옆, 강기슭에 백양나무들은 마침내 락엽귀근을 마쳤는데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에는 아직도 록색이 아니놓지를 못하겠다고 여름철에 련련하고있다. 지각하는 동장군은 언제 위풍을 떨치려 하는지 겨울이 아니와도 이상기후라 불안이다.     엄동설한에 파리가 얼어죽는것은 이상할것 없는데 악착한 모기네는 검질기게 살아서 낮이면 남쪽유리창문에 매달려있다가 날쌘놈은 어느결에 집안에 들어와 구석에 숨었다가 밤이면 피를 빨아대니 모기마저 지각한 동장군의 은혜에 감지덕지하지 않겠는가? 겨울은 만물이 잠속에 곯아떨어진듯 재생의 꿈을 보듬는 계절이라 혹독한 설한풍의 세례가 없어도 정상은 아니다.     지각하는 동장군님, 당신의 엄엄한 위풍은 언제 떨치려 하나이까? 철따라 따스함과 서늘함을 좋아하는 도시민들이래도 겨울이면 등뜨신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선 관심사가 난방설비 점검과 집안 온도계의 오르내림이 되는것은 당연지사이다. 눅거리 겨울서정따위는 집어치고, 직언하고싶은 화제는 원래부터 말썽많은 취난문제에 꼴똑 담긴 걱정거리이다. 그러께 해에는 집안이 령상 15도 좌우여서 밤에 솜바지저고리를 입고 자도 꿈마저 꼬브라들었더랬다.     그래서 마을에 할머니들을 휘동하여 가도정부도 찾아다녔고 시정부에도 찾아다니며 말썽을 일구었더랬다. 하여 해당부문에서 일정한 조치를 취해서 조금 나아지긴 하였고 온도미달로 1300여원을 운좋게 되찾았지만 그래도 옹송그린 마음으로 간신히 넘긴 그해 겨울은 참으로 돈주고도 겪어야만 했던 고난의 겨울이였다.     이듬해인 작년에는 시열공급공사에서“원동천열공급공사”를 대신하여 열공급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최고 령상23도까지 오를 때가 있어서 더는 솜바지저고리를 입고 등걸잠을 자지않아도 되였다. 참으로 행복해서“谢天谢地”였다. 그러면서도 앞일을 두고 근심을 싹 털어버리지는 못하였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것인가? 간판이“东晨”으로부터“荣德”으로 바뀌여 희출망외였는데 약탕관은 바꾸고 약은 바꾸지 않은격인가?     말은 번듯하게11월15일부터 보냈다는 열공급이 내가 사는 삼화가 민화사회구역 강녕골목에 낡은 아빠트들에는 오는 길이 멀어서인지 열공님이 한번도 오시는 기미가 없었다. 민심이 화해로울수 없고 골목이름처럼 강녕할수 없으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아침저녁으로 스팀을 만져보지만 그야말로(冷冰冰)이였다. 스팀안에 공기를 빼야한다기에 몇번이고 틀었다 닫았다 하였지만 그냥 랭수만 새여나올뿐이다. 그야말로 열공급소가 아니라 랭수공급소라 해야 걸맞을게다.     꿈에 색시를 얻듯이 한두어번 차가운 기운이 없기에 오는갑다하고 은근히 기뻐해도 잠시잠간이였다. 농촌말로 금방 맞아죽은 사람의 볼기짝의 온기만도 못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래도 국가규정일이 20일이니 차분히 기다렸는데 이날 이때까지도 감감무속이다. 누구마따나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다던가?     목마른 놈이 우물파기라 할가, 아니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놈 펄쩍 뛴다고할가? 할수없이 또 사회구역사무실에 찾아가 해결해달라고 징징거렸다. 책임자가 그러지않아도 주민들이 의견이 많고해서“궈루팡”에 문의하면 궈루가 고장나서 수리중이라고 하더란다. 이 몇해 그냥 내뱉는 듣기만해도 역증이 나는 구실이다. 그냥 이런 정도로 주민을 우습게 보면 정부기관에 몰려갈수도 있다고 했더니 새로온 로반인지하는 사람과 통화하는듯 싶었다. 그리고 즉시 해결하도록 답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해결이 되는가싶어서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웬걸, 사투리로 그 도래미 그 도래미이다.       마을에 한 주민이 12319에 전화하면 전문 취난상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여서 헛일삼아 전화해보았더니 아주 성근하게 정황을 료해하며 해경방도를 찾겠다고 하였다. 그러고 또 몇며칠이 지났다. 물론 천덕꾸러기 낡은아빠트구역이니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두루 알아보니 도시화원이라는 아빠트구역에서도 띠띠부레하게 온다는 말을 듣고 나혼자 풀풀거리는게 아니라고 자위했다. 참으로 남들도 고생하니 내 고생이 덜어지는듯 여기는 고약한 심보라고나 할가,     문제는 시내 다른데서는 너무 더워서 문을 열고지낸다는데 “太不像话인지 太不公平”라 해야 하는지 한어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튼 이놈의 열공급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간판도 바꾸고나서도 그나물에 그밥인가 하는것이다. 전국적 으로 석탄값은 내렸다는데 취난비는 껑충 오르고 취난비수금은 성화같이 하면서 열공급에는 노량이니 참으로 뚫린입을 가지고도 실어증이 생긴다.     지금은 열(热)이 향수품이 아니라 상품이 되였다. 취난비를 냈으니 상품권이 있는것이다. 돈은 받고 상품(그게 저질이라도)을 내주지 않으면 사기도 하닌 협잡이요 불법이다. 초겨울날씨가 하도 잘해주어서 밤에 집안 온도계가(정확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20도 쯤은 가리키고있으니 어디가 무슨 말을 할수 있을것인가?     그러나 이런 온도는 낮에 태양님이 넓은 류리창으로 볕을 들이밀어준덕이지 결코 열공급소의 자비심때문이 아니다 내가 사는 아빠트에 24 호집에서 빈집이 많고 농촌말로 로약호가 많고해서 속에 불만이 끓어도 어디가서 볼부은 소리를 할 사람도 별로 없고 지금 세월에 누구나 혼자나서서 인심잃을 말을 하려하지 않으니 더구나 참고견디며 지각한 동장군님께 고마움을 가지는것밖에 더 할일이 있으랴!     열불이 나는대로 하면 불때는 온돌집에라도 이사가고 싶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그래서 매일아침 일어나면 혼자하는 말이 “오늘 날씨가 따스하겠군,”이다. 그러면서 공정한 태양님께 더 “마니마니” 볕을 줍사하고 빌고 늑장부리는 동장군님이 못내 고마워서 길가에 황들었거나 아직도 푸른빛을 잃지않은 버드나무 가지들을 쳐다보며 은근히 기뻐한다. 힘이 없는 초민백성이야 지각한 동장군을 붙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절로 “아멘!” 이 나온다. 잔혹한 동장군님, 지각한바에 그냥 거기서 얼어붙어 계시고 새 봄만 날래날래 혼져 옵셔예!!!                                                                                                                  2013년 11월 3일   
265    드라마에서 인물처리 댓글:  조회:7653  추천:0  2013-11-02
                                      드라마에서 인물처리                                                            ㅡ “오로라공주”를 둘러싸고 ㅡ                                                   야 조         드라마에서 인물처리란 인물의 필연적인 등장계기와 사건전개와 결말에 따른 각 인물들의 운명적인 귀속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작품의 구성문제이면서도 궁극적으로 인물형상 내지는 인물군상의 창조적인 기교문제이다. 만약 한부의 드라마에서 스토리와 별로 요긴치 않은 인물들을 마구 등장시킨다면 뒤처리가 난감할것이다.     한 작가가 편폭이 길지않은 자기소설에 인물들을 마구 등장시켰다. 이야기는 끝나가는데 인물들의 운명적귀속을 어떻게 처리할줄 몰라서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처리하고싶은 인물들을 일거에 제거해버리는것이였다. 즉 때에 마침 전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는데 퇴장시키고싶은 인물들이 하나하나 죽어버렸다. 이런 처리는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인물처리예술에서 반면적인 귀감이 되였는 모른다.      드라마도 례외가 아니다. 무작정 인물을 등장시켜놓고 뒤처리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 드라마의 진실한 귀속이 결정된다. 례를 들어 요즘 방영하는“오로라 공주”에서 인물처리가 분분한 의론을 자초하고있다. 이 드라마는 분명 애정문제를 둘 러싸고 스토리가 전개되는 거의 도식화된 드라마이다. 그러나 드라마작가가 원래 가지고있다는 “이단작가”라는 명칭에 부합되게 하느라 그랬는지 이단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다. 이상하다못해 기괴한것은 이쯤해서 인물성격의 변화라든가 결과가 있음직도 한데 그냥 단념하지 못하고 이어가면서 도무지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것이다.     황마마의 누이들은 남동생에 대한 변태적집착에서 벗어나 오로라의 관대한 용서를 받으며 정상인으로 거듭나야 마땅했다. 그리고 이쯤해서 설설희는 녀주인공에 대한 미련을 사나이답게 씻어버리고 새로운 애정극을 엮어야 남자의 감정론리에 접 근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설설희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심지어 깨를 볶아주어 야 할 오로라의 어머니조차 이따금 설설희를 떠올리며 아쉬워하고 있으니 도대체 주인공들의 감정의 교차선에서 벗어나 어디까지 평행선을 그어나갈 작정인지…?       그리고 황마마의 두누이들의 성격발전도 비론리적이라 느껴진다. 어리지도 않은 남동생을 련인이나 소유물로 생각하는 모양새다. 나이먹은 미혼의 누나 둘이서 결혼 한 남동생의 처를 그토록 시기하며 저주를 퍼붓는 광경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며 도달점은 어디이며 관객들에게 무엇을 시사하려는것인가? 한국녀인들속에는 불가사의하리만큼 녕악한 두얼굴의. 할일없어 동생의 녀자를 헐뜯는일로 인생을 경영하는 녀자들이 많다는것을 폭로하려는것인가? 오로라와 같은 아픔을 겪은 조카가 수모를 당하자 쫓아가 싸워줬던 그런 녀자들의 이중성격이 리해되지만 이건 아니다.     여전히 오로라외의 운명을 찾지 못한 설설희. 그리고 아직도 황마마를 온전히 갖지 못한 오로라. 마치 비극의 신호탄처럼 같은날 두사람이 나누어진 고통이도 무지 감동적이지 않고 드라마틱하지도 않다. 작가의 인연을 향한 집착과 운명에 대한 소원은 너무 지대한것이라서 어쩌면 이제껏 껄끄럽기만 한 시집살이와 설설희의 방 황은 모두가 서로의 인연을 찾지 못한데서 오는 징벌이라는것을 시사하려는것인가? 어찌보면 오로라의 시집살이는 천생의 인연을 내팽개치고 돌아선 인과보응식의 자업 자득이긴 하지만도 무엇이나 너무 비틀어짜면 변형되거나 끊어진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스토리의 전개, 다 큰 남동생을 눕힌 침대를 세 누이가 둘러싸고 밤새도록 기도를 외우는것이 정상적인 인간상정인가? 물론 작가가 생각한 녀주인공의 진짜 인연이 황마마라면, 역으로 서로를 잊지못한 두 사람에게 전하는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일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넘겨짚을수 있으나 오로라의 진짜 인연은 황마마일가, 아니면 설설희일가? 긴가민가 하는 어떤 궁금증도 억지감으로 해서 밀려나고만다. 역시 인물성격부각, 인물처리의 합리적이고 합목적인 처리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거 빤히 들여다보인다.     각설하고, 드라마의 진행에 따라 처리되여야 할 인물들의 귀속문제이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이 부단히 “하차ㅡ퇴장”하는 처리절차이다. 드라마가 애초의 기획방향과 달리 불가피면적으로 오로라의 세 오빠와 황마마의 세 누나간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진지하게 시사하려다가 엉뚱하게 중겹사돈으로 흘러가자 극의 전개에 방향감을 잃은것인가? “오로라공주”’에서 극의 중심이 오로라와 황마마, 설설희의 삼각관계로 그 축이 옮겨지자 이들이 각색하는 인물의 존재리유가 궁해진것인가?     이에 대한 온갖 론평대로 120부작으로 된 대형드라마라 제작비부담을 고려해서 사건전개를 중단시키고 인물들을 중도하차시키는것이라면 여기서 드라마의 조작성이 완전히 드러나는것이다. 인물들 중도하차가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말도 하더라만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창작스타일이다. 다른 론평에 의하면 본작가(임성한?)의 다른 작품들“하늘이시여”’와 “보석비빔밥”,“보석비빔밥”“신기생뎐”에서도 미리 짜놓은듯이 등장인물들이 교통사고나 심장미비 등의 돌연사로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보통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의 죽음이나 사고는 또 다른 스토리를 예고하는 중요한 관건어인데 본작가의 드라마에선 특별한 련결고리나 개연성을 찾기힘든 예측불가의 처리방법이 강행된다고들 말한다. 본 드라마에서 설설희의 병원에서의 정밀검사도 “일괄하차”방법의 예고인가? “오로라공주”는 첫방송이후 지금까지 모두9명의 등장인물이 하차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변희봉, 숱한 루머를 남긴채 돌연 종적을 감춰버린 박영규 손창민 오대규, 동성련인과 리별에 힘들어하다 떠나버리는 송원근 등(한국사회에서 동성련이 괴상하기 그지없었지만도)이 그것이다.     임작가의 전작들에도 돌연 사망해버리는 인물들의 수는 타드라마보다 월등히 많다고 한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너무 웃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숙(하늘이시여), 딸결혼식장에서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병기(아현동마님) 등이 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리 파리목숨같다고 하지만 드라마에서 작가가 임의대로 죽이는것은 좀 그렇다. 말하자면 인물처리기교의 부재라고나 할가? 기괴한 인물퇴장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하는바엔 드라마에 줄거리가 없거나 인물의 실종이 잦은 기괴한 상황에서도 시청률은 치솟고있다니 시청률의 위주의 드라마짜기인가? 오로라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지못하자 갑자기 감행된 황마마의“출가”도 시청자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나타 샤의 불분명한 각색, 그리고 퇴장, 재등장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작가가 작품속에 인물을 등장시킨후에는 작가가 살생권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있는 객관존재로 되고있다는것은 문학리론에서 상식문제이다.     작가나름의 수의적인물처리에서 극정이 비틀어지는것은 둘째치고 그 역을 맡은 실재인물 배우들이 캐릭터를 잡고 드라마에 몰입해야 하는데 언제 퇴장령이 내릴지 모르는 판이라 캐릭터를 도저히 종잡을수 없어 황당해 할 일이 야단이다. 기괴한것은 이러한 무상한 캐릭터변화가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치지만 오히려 신선감은커녕 지리멸렬하기만하다. 시청률이 오른다해도 그것은 현상일뿐 작품질의 상승은 아니다.     본작가의 드라마구상에 핵심요소는 정해진 스토리가 없다는것이라던가? 하기사 작가의 자유적구상이지만 발더듬이로 강을 건너듯하는 림기응변적인 드라마구상에서 성공작이 나오기는 근저로부터 불가능을 깔고나선것이라 사료된다. “오로라공주”에서 초반부터 중요한 사건에 련관된 인물들이 네다섯이나 특별한 리유없이 줄줄이 중도하차한다는것은 어떤 드라마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초유의 쾌거라는 평가이다.     중요 캐릭터가 빠졌는데도 드라마가 잘만 굴러가는것이 성공의 표징인지 모르나 스토리의 변경에 따라 수시로 다른 인물을 투입하면 되고 정 이야기할게 없으면 상상신이나 노래방신, 꿈을 꾸는신 등을 지리멸렬 늘여놓으면 될수는 있겠다. 소설, 드라마들에서의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가치관의 대변자이다. 등장인물들을 죽이고 살 리는 변화다단에서 작가의 가치관도 종잡을수 없는것이라고 하면 비론리적이겠지만도 결코 있음직한 창작기법은 아니다.     작가와 작품속의 인물은 종속관계가 아니다. 이점을 대가들의 걸작들에서 잘 증명하고있다. 례하면 뿌쉬낀은 자기의《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따찌야나가 늙은귀족에게 시집을 갈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의 객관적인 존재성을 승인하였고 레브 똘쓰또이도 유명한《안나까레니나》에서 안나가 종당에는 기차에 뛰여들어 자살하게 된 운명적인 귀속을 두고 억지로 살려낸것이 아니라 주인공 안나의 귀속을 울면서 썼다고 한다. 이 모든것이 무엇을 설명하는가?   “오로라공주”의 작가만이 아니라 모든 드라마작가들은 등장인물설정과 그들의 후사에 대해 사전에 예상하고 생활의 론리에 맞게. 인간의 감정발전의 규률과 론리에 맞게 구사해야 한다는것은 작가 자신을 위해서, 흔상자들을 위해서 유익한 작업이 될것임은 자명하다. 가담가담 눈썰미로 보는 드라마이지만 감수되는것이 있어서 끄적거려보았다. 천명의 관객들속에 천명의 햄리트가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2013년 10월 30일
264    드라마에서 대사의 매력 댓글:  조회:9534  추천:1  2013-10-29
                                               드라마에서 대사의 매력                                                             최 균 선       흔히 드라마의 스토리는 별로인데 인물들의 대화ㅡ대사가 귀에 쏙 들어올 때가 많다. 바꾸어말하면 장면의 흐름은 지리멸렬한데 가담가담 대사가 재미있고 의미가 있어 그 드라마의 존재리유를 조금 보충해보게도 된다는 설명이 되겠다.    주지하다싶이 대사는 드라마에서 주요한 표현수단이다. 우선 주제와 내용을 확실히 알수 있도록 해주고 스토리의 진행을 이끌어주고 련결하며 인물의 성격을 구체적이고 형상적으로 드러나도록 하고 사건전후의 상황들을 자세히 교대해준다. 그리고 그 드라마의 시대적인 배경과 여러가지 정보들을 제공하며 해당 드라마의 고유특색과 드라마속에 융화되여있는 작가의 사상감정과 배경을 흔상자가 알수 있도록 확실하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인다. 대사란 원래 설명인것이다. 하지만 설명하는것으로 끝내 지말고 어떻게 설명다운 설명을 할수 있을것인가에 예술적탐구문제가 있다. 즉 피가 통하는 대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도의 예술작업이 되기때문이다.     이처럼 드라마의 대사는 작가가 알심을 들이여 자연스러우면서도 명확하고 가장 경제적으로 재치있게 짜놓은 입말이다. 대사의 경제성이란 작품의 흐름, 등장인물의 특징과 배경, 그 밖의것들을 짜임새있게 제시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사는 그 자체가 문학성과 예술성,오락성, 스토리를 특별히 갖추게 된 입말이자 예술언어로 된것이다.     그러나 대사의 작용은 근근히 관중들에게 교대하는데서 그치는것이 아니라 이야기 서술수단이기도 하다. 관중이 보려는것은 “극”이기때문이다. 하기에 드라마작자는 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수 있는 희극성대사를 조직해야 한다. 여기서 “희극성”적인 대화가 되여야 한다는것은 오직 동작성의 기초상에서 주고받는 대화로 되여야만 희극성적인 매너가 있는 대화가 된다는 말이다.     대화의 동작성이란 바로 인물들의 대화속에서 각자의 성격특징, 품성, 정감과 해당사건에 대한 관점, 견해 등의 표현으로서 호상영향주는 촉매제로 된다. 인물성격과 인물관계를 둘러싸고 조직되는 풍부한 동작성적인 언어는 정절의 발전에 복무해야지 한집의 분량을 채우기 위한 얄팍한 기량이 되여서는 아니 될일이다. 특히 실내드라마에서 주고받는 일상적대화의 련속은 자칫 이런 우를 범할수 있다.     사실상 한국의 많은 가정드라마들에서 지리멸렬한 대화의 련속으로 별다른 사건이 없이 흐지부지해지는것들이 많다. 만약 인물들이 관중을 대하여 완연하고 듣그러운 말로 이야기의 진전을 이끌어가지만 극중의 인물과 관중사이에 내재적정감교류가 잘 안된다면 대사의 희극성이란 론할나위가 없어진다. 대사는 동작의 동기 혹은 진행과정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그치는 일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대사자체가 동작이며 아울러 인물의 형체와 동작의 융합이 바로 그속에 있는것이다.       영상예술인 드라마에서 대사를 등장인물들의 심리나 감정의 흐름,의식의 흐름을 묘사하는 수단이기도한바 시간과 공간을 비약시키는 비약적대사도 있고 독특한 예술형식에 걸맞는 사실적인 대사가 있으며 일상회화가 아닌 정화된 대사로 나누어 볼수 있다. 그러나 무릇 대사조직에는 불가피면적인 조건부가 붙는다. 즉 이야기정절을 한방향으로 줄기차제 끌고가면서 현실적인 살아움직이는 인간의 말이여야 하며 간단명료하면서도 매력적이여야 한다. 대사의 일종으로서 독백, 방백도 마찬가지다.     통칭하여 드라마는 감정극으로서 감정이 맥맥히 흐르는 대사로 엮어져야 함은 두말할것없는바“인간은 감정동물이란 말이야”,“하늘이 활짝 개인 상쾌한 아침이군”, “그렇게 말하면 내 감정이 상하지않아?”와같은 대화에서 구태어 말하지 않아도 그런 기분을 지니고있음은 자명한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기분을 독백이나 방백으로 말해버려서는 아무런 맛도, 재미도 없다. 리듬과 템포가 있는 신축자재의 대사, 춤과같은 아름다운 동작이 만들어내는 정서가 다분한 대사조직에 뇌즙을 짜야 한다.     례컨대 “밥먹었니?” ㅡ“안먹었어”ㅡ“왜 안먹었는데?”ㅡ“맛이 없어”ㅡ“그래서 왜 맛이 없다는건데…”ㅡ“맛없으니 맛없는거지”ㅡ“그래도 먹어야 쓸거아냐?”ㅡ“그러게 맛있게 하란말야…”이런 끝간데없는 일상대화는 간추릴수도 있다. 좋은 대사란 그 드라마에서 구체장면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가장 정확한 대사여야 한다. 스케치할 때 가장 알맞는 선은 하나밖에 없다고하듯 그 상황에 맞는 대사는 하나밖에 없기때문이다.     상식적이기는 하지만 드라마가 현실자체는 아니므로 대사도 현실의 대화와는 달라져야 한다. 드라마는 현실의 생활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실생활과는 아무래도 다르기때문이다. 대사는 등장인물지간의 대화지이지만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한것으로서 관객이 이미 알고있는것이라면 다시 말해줄 필요가 없다.     한국드라마들에서“내 이름은 김삼순”, “굳세여라 금순아”,“사랑이 무엇이길래”, “장미빛인생”등 시청자들과 호흡하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많기는 하지만 반면에 정절발전과 무관한듯싶은 지리멸렬한 일상의 대사로 연장되는 드라마들도 많고많다. “배추머리 금순이” 에서 한혜진은 “나 잘업는데, 아저씨가 키가 조금만 작으면 내가 업어줄수 있었을텐데”라는 금순이식 사랑표현으로 잘생긴 총각의사를 남편으로 맞게 되는 스토리와 긴밀히 련계된 대사가 인상적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현실적인 대사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웃음을 줬다면 슬퍼서 아름답기까지도 한“장밋및 인생”은 현실적인 대사로 시청자들에게 많은 눈물을 선물했다. 즉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속 명대사는 아름다운 미사려구 가 아닌 드라마와 시청자들의 공감대가 만들어낸것이다. 드라마의 표현중에서 80- 90%는 대사가 차지하므로 재미있는 드라마는 곧 대사의 재미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한다. 드라마도 재미있고 재치있게 표현된 대사들로 이루어진것이 있는가하면 그저 대사이기에 대사로서 말을 하는것처럼 보이는 드라마가 있다.     작가가 일상에서 말을 잘하든 못하든 문제되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분명 잘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물의 성격화랑이 미리 잘 그려져있어야 하고 생활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선행되여야 한다. 례하면 역설적인 대사를 쓸수 있는데 가령 "나는 네가 좋아"라고 하기보다 어떤 때는 "너같은거 정말 싫어해!"라고 하는것이 좋아한다는 표현으로서는 더 자극적이고 감동적이 될지도 모른다.     직설보다 우회적인 이른바 숨기는 대사가 있다. 례를 들어 현재는 무일푼이지만 20일이 월급날인 남편이 있다.     남편 " 여보, 당신은 얼마나 가지고있어?"     안해 " 월급전인데 무슨 돈이 있어요?"     남편 " 아, 아직도 닷새나 남았는데..."     이것은 매너가 없는 너무 일반적인 대사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숨기는 대사로 표현을 한다면 아마 아래와 같을것이다.    안해 "우리가 연극을 보기로 했었죠? 아니면 영화.. "    남편 "여보, 지금 돈 가진거 있어?"    안해 "누가 지금 당장이래요? (손가락 꼽으며) 오늘이 17일, 내일은 18일...."    이것은 “종이풍선”이라는 드라마에서의 대사로서 직방배기로 모든것을 말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다가올 월급날을 이야기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상황을 나타내면서 단순히 알려주는 대사에서 느끼는바가 있게 하는 대사로 승화시킨것이다. 대사는 비약시키는 대사, 력점을 찍는 강조적인 대사, 대립성이 강하게 풍기는 대사 등이 있다      아무튼 무릇 드라마의 대사에는 감정이 쭉 깔려있어야 하거니와 정서성이 짙게 엮어져야 함은 주지하는바이다. 대사에 감정이 있어야 된다고 하지만 이 말은 언제나 우습게만 들린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드라마들에서 감정이 결여하거나 없는 대사를 아주 흔히 만날수 있다. 감정이 없는 대사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자꾸 그런대로 도배질 되는걸까? 요즈음 방영되는 “오로라공주”가 매우 인상적인 귀감이 될것이다.     그 원인을 나름대로 찾아보면 첫째는 주제와 스토리에 집착하기때문일수 있고 둘째의 원인으로는 추상적으로 말하는 버릇때문일수도 있다. 그것은 사물을 생각할 때 관념만으로 발표하는 버릇이 있기때문에 살아숨쉬는 인물들의 감정교류에도 추상 성이 선행되기때문이다. 사랑이니 희망이니 하는 추상에 우리는 얼마나 습관되여 있는가? 기실 복잡다단한 현실을 보면 설명이나 추상의 말을 할 때에도 감정은 움직이고있다. 그저 원고에 쓰고마는 당연한 대사가 아닌 살아있는 인물의 가슴에서 나오는 대사가 절실하게 필요하고 실천으로 체현되여야만 점입가경으로 한계를 드러내고있는 한국드라마들이 또 다른 돌파구를 찾을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013년 10월 10일
263    불후의 악명 댓글:  조회:8585  추천:1  2013-10-26
                                                     불후의 악명                                                             진 언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지만 미명도 있고 악명도 있다. 악명도 미명처럼 만세불후할수 있다. 악명으로 말하면 근대조선 사람들 속에서 매국역적이라 각인된 리완용에 미칠자가 별로 없을것이다. 자신의 일세영달을 위해 반만년의 조선을 팔아먹은 만고의 죄인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부터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 야지.- 1926년 동아일보)     조선의 문신이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친청, 친미, 친로, 친일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둔갑해 한일병합조약체결을 주도한 매국노의 끝판왕이자 희대의 간신. 을사오적의 두목으로 앞장서서“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최악, 최 고의 매국매족의 죄인이 리완용이다. 게다가 대세에 대한 감각은 뛰여나서 죽기전에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는 “불세출의 명언” 을 남겼다고한다.     리완용이란 자는 어이하여 치욕의 기둥에 매달려 량지가 있는 모든 배달민족의 영원한 저주를 받게되였은가? 그는 제8대조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기시작한 몰락량반의 가정에서 태여나서 리호준의 양자로 성장하면서 출세욕이 강해졌다. 리조의 순종과 사제관계를 맺어 출세의 길에 올랐고 그후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외교관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로부터 친미파관료로 변신했다.     그후 미국정권에 달라붙기 어려워지자 진로파로 변신하였다. 하지만 친로파내에서도 활동이 어려워졌고 “독립협회”위원장,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나름대로는 친일이전의 경력으로는 전형적인 엘리트라고 할수 있는데…이후의 추악한 행적으로 말짱 부질없는 략력이 되고말았다. 제국주의의 집잃은 여윈 주구로 된셈이다.     그런데도 리완용을 옹호하는 야비한 자들은 그가 초창기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던중 돌아가는 국제형세에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매국노의 길을 걷기시작했다고 말한다. 특히 매국노로 전락된것은 초반의 애국 개화 사상가로서 배신감을 느껴서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인생말년에 천하의 매국노가 된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그이전 활동이야 여하튼 결국 그는 자신의 리익과 영달을 위해 임금을 기만한 간신이자 맥국역적이다.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성격이였기때문에 로일전쟁을 계기로 친미주의 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 역시 최강의 매국노답게, 일본군을 등에업고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하여 을사오적의 두목으로 부상된다. 그런데 웃기는것은 "나라를 위해서 이 조약을 체결한다"였다고 나발분것이다. 철면피의 극치이다. 당시 애국인사들은 리완용을 처벌할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리완용은 오히려“시국은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의 개소리만 람발했다. 을사조약에서 보인 적극성으로 이또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고 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 참정대신이 되였다.     그리고 변변치못한 조선군대마저 해산시키였고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의병토벌을 주창했고 거기서“조선인 현병보조원제도”를 계획하는데 크게 일조했으며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였을 때 순종에게 엄벌할것을 상소한것도 리완용이였다. 이 시기, 총리대신을 해먹으면서 형 리윤용을 궁내부대신으로, 사돈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리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자책봉문제에도 참여하여 콩고물을 챙겼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앞에서 당시 현역군인이였던 리재명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저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못하고 체포된다. 리재명렬사는 합병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리완용이 물러난후 고종은 "신은 죽는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자는 바로 리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말인가!"라고 통곡했다. 그리고 8월 22일, 리완용은 최후의 내각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그때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나라를 팔아먹었다. 강제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 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자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1919년사이의 헌병 경찰제도제도는 사실상 이자가 만든것이였다. “3.1 운동”직후엔 "어리석은 조선인들" 이란 내용으로 시작되는 경고문을 세번이나 발표했다. 내용도 가관인데 1차는 4월 5일 "황당한 유언에 속지마라."였고, 4월 7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라."라는 협박 성글을 다시썼다. 5월 29일, 3.1 운동이 가라앉자 조선은 일본의 통치아래 복지가 증가했으며,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최종글을 썼다.      당연하게도 다시 집이 불탔다. 이글의 발표로 다음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팔아먹을 나라도, 국민도 없어지자 조용히 살다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페염으로 죄많은 목숨을 마쳤다. 최후의 왕인 순종이 죽기 4개월전이었다. 인간의 오복에 하나가 고종명인데 다른 친일파와는 다르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죽었다. 다만 리재명의사가 찌른 칼날이 평생 그의 더러운 심령을 옥죄였을것이다.     그의 무덤은 전라북도익산군(現익산시) 랑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이다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때는 그래도 량반이였고 광복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사건이 발생하여 1978년 에 리완용의 증손자 리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했단다.     처세엔 뛰여나고 령민것은 확실한것같다. 초기에는 그의 령민함을 감탄했던  당시 교사겸 의사인 알렌이란 사람이 "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같은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내렸다한다. 머리는 잘돌았으나 줏대는 없는 인간 즉 령혼이없는 벌레같은 인간이란 소리였다. 알렌은 또 "내가 구만리에 사천년력사를 봤지만 조선황제같은 인종은 처음보는 인종이였다."고 평가하였는데 역시 그나물에 그밥이랄가,     개체형상으로 보기에는 '매국노'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이다.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고 부정축재에는 애썼지만 첩하나 두지않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도덕성 등이 결코 그를 정당화할수 없었다. 사이비한것은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우(李家完用). 그냥 리씨가문의 완용인데 죽을때까지 일본말 한마디도 할줄 몰랐다는것이다. 이런자가 1906년 학부대신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도입을 추진하고 교수 시수가 가장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에서는 리완용이 아니면 할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바르고 나라를 자기목숨보다 중히여기는 정치가', '대한(大韓)의 몇째안가는 재상”, '황상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한 인물”이라고 칭송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칼한가? 신문도 썩었거니와 그당시 조선땅에 령혼을 팔아먹은 인간들이 얼마나 득시글거렸을가 짐작이 가지않는가?     매국노 리완용이 남긴 언론에 “명언”이 많다.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 1896년 7월, 이완용 중 발언, “해가 아직 바다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及到天中萬國明)”-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넣은글)    1905년 “을사늑약”당시 리완용은 “일시적으로 외교권을 일본에 잠시 맡긴것뿐이다. 나라의 힘을 키워 다시 찾아오면 되는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참으로 승냥이에게 양을 맡기고 족제비에게 닭을 맡기면 안심된다는 한심하기 짝이없는 무뇌가 아닌가? 한나라의 국권이 무슨 이웃집에 맡겨두었던 보리자루인가?1926년 숨질당시 “힘없는 다리를 부축해달라고 남에게 부탁한것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은 일이라고 매도당해야 하는가?” 라고 뇌까렸다고 한다. 이런 민족패류임에도 그를 위해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것은 참으로 배달족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2011년 5월 20일 리완용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김윤희의 )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참으로 알량한 리성이다 소위 '이성'라 할진대 근대적리성, 성찰이 결여된 도구적리성, 급공근리의 리성이라해야 해야 사개가 맞지않을가?     또 어떤 글에서 지껄이되 “…고매한 학식과 인품으로 조선과 일본정치인은 물론 일반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였다.…리완용은 알려진것과는 다르게 고독하게 애국의 길을 걸어왔던 인물이였다…”이게 머리를 하늘을 향하고 사는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법한 언설인가? 인자견인 지자견지(仁者見仁 智者見智) 라는 말이 있지만도 이건 아니다. 그저 가재는 게편이라 역시 한바지가달안에서 노는 얼간이들이라 할가?     소위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도 “가쓰라·태프트 밀약 혹은 협약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기존의 미국 입장을 담은 미·일 간 의견 교환의 대화일 뿐이다. 따라서 있지도 않은 밀약에 근거해 일제 식민지화· 분단. 한국 전쟁 발발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이처럼 친일매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판단은 늘 극과 극을 달리하니 무지인가? 아니면 천진란만인가?친일친미 사대주의가 삼백륙심사절골 마디마다에, 혈관속에 속속들이 슴배였는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났을 때 이 전쟁의 종결을 위한 평화조약 체결을 중재했던 당시 미국의 대통령 루주벨트는“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적에게 주먹한방 제대로 휘두를줄 모르는 국가”라고 하였는데 당시 조선으로 말하면 비하인것이 아니라 정통을 찌른 말이 아닐수 없다. 리완용같은 천인공노하는 매국노를 기리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데 그때야 여북했겠는가? 천고에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만세에 악명이라도 남기라는 말이 있지만도 리완용같이 추악한 악명만은 남기지 말아야 할것이다.     력사는 승리자가 쓴다지만 최종의 승리자는 현세의 승리자가 아니다. 력사는 진실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력사는 시간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력사의 진실이 드러나고만다. 개체로 말하면 인생은 길고 짧음이 있을뿐 사필귀정이요 인과보응이라 그가 생전에 선행이 아니였다면 한짓은 죽어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법이다. 이른바 력사에 남는다는것은 재래로 그러한것이다. 하긴 악명도 명성이니까 남겨져있는데 천추에 용납못받으니 어찌하리요.                                                         2012년 8월 15일
262    가변속에 불변 댓글:  조회:7775  추천:4  2013-10-21
                                                          가변속에 불변                                                                 야 조     모든것이 변한다는 론리는 범세계적철학이요  절대진리이다. 불가에서 설파하는 삼법인(三法印)에서 법(法)이란 확실하고 절대 변경할수 없다는 뜻의 진리를 주장한다. 삼법인의 첫번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현상계(現象界)에서 인간이 경험하는것 (자연,물질,마음)은 시간의 흐름속에 항상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이다.     흔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했는데 근세기에 모든것의 변화속도가 가속화되고있다. 우리는 그런 진실속에서 살아간다. 다윈은 모든 생물도 생존경쟁의 결과적자생존에 의하여 변한다고했다. 그속에 만물의 령장인 인간의 무형의 마음마저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인생무상이라 하는지 모른다. 변화다단한 이 세상의 개인, 가정, 사회,국가 나아가서 지구촌 전체가 유형무형의 변화속에서 운행되고있다.     영원한것, 보이지않고 변하는 힘은 불가항력적이다. 히말라야설산의 만년설과 북극해의 억년빙산마저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고…이 모든것이 변한다는 진리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립증이다. 그러나 변화를 원치않는 관념이 있다. 그런 관념을 가진 사람들을 보수라한다던가, 관념갱신이란 습관세력과 주관편견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제는 새롭게 해결방법을 구사하는것이라 개괄한다.     어떤 리념의 틀속에 있는 사상관념으로 하여금 구습관세력들의 금고(禁锢)와 속박을 타파하고 주관세계의 사유의식을 부단히 변화하는 객관실제에 걸맞게 결합시킴으로써 동탕하는 현실에 어긋나는“사유습관”과“주관편견”을 가차없이 버리고 발전변화하는 관점, 일컬어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개체의 삶이든 국가이든 경영해야 꽉 막혔던 앞길이 바람직하게 열릴것은 론증도 필요없는 정답이다.     경화된 관념에서의 해탈인즉 행동의 선도자이고 백사를 처리함에서 전제라고 한다. 동서남북, 사면팔방을 보아야 하거니와 세로도 보고 가로도 보면서 처사해야 사유가 사통팔달이 될것이 자명한데…돌고도는 세상에 적응하려면 관념갱신부터 앞세워야 한다는것은 기성도리인바 관념경화에 사유의 활약성은 운운할수 없기때문이다.     유명짜한 처칠이 말했던가?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고, 이 말은 지금 리념세계 여하를 불문하고 즐겨 인용하는 지구촌의 통용어로 되여있다. 지금은 실용주의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적으로부터 벗이 되고 벗으로부터 적이 되여지는데 지레대는 손익이다. 말하자면 리익앞에서는 적대감도 엿가락이 되고 상호리익충돌앞에서는 벗이고 우정이고“퉁퉁디(统统地)”네미덜머리가 되여지는 손익계산시대다.     몇십년, 몇백년 식민통치자로 군림했던 나라들과 벗이 되여지고 총칼을 마주하고 사투를 벌리던 나라들도 친하게 된다. 례하면 미영과 독일, 이딸리아, 미국과 월남, 미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 동유럽의 원사회주의권과 서구라파국가들…뒤를 받쳐주며 발바리질을 시키던자를“토사구팽”할수도 있는 리익천하인지라 누구와도 친할수 있고 누구와도 잠시 친한체 할수도 있다. 관념의 갱신인가? 리해득실로 야합된것인가?     그런데 나라를 빼앗고 3천만 조선인민을 도탄에 몰아넣었던 식민지배자와는 동맹을 맺을수는 있어도 리념이 다르다는 리유로 동족이라도“융합불가”라는 관념이라면 얼마나 허황한 고정관념인가? 이런 불변의 편견이 만연되고 고질이 되였다면 단군족의 불행이 아닐수 없다. 영원한 친구는 없어도 영원한 주적만은 있는가? 변화속에 불변이란 말인가? 우습게 비틀려진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선입견…그것이 핏줄이 같은 동족에게 무슨의미가 있을가? 이불안에 활개짓밖에 더 될것인가?     민족이란 하나의 단일한 생명군체이다. 민족은 저절로 나온 생명군체이며 누가 만든것이 아니다. 스스로 형성된 생명군체이기에 누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지시할수도 없고 강자의 용납이고 불용납이고가 없다. “나”는 “나”이기에!민족이란 스스로 만들어진 집단체이기에 스스로 생존한다. 이것이 한참된 민족의 자주의 길이다.     민족이 강성해지는 제1보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민족심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혼자이면 약하다. 약하기때문에 기시당하고 롱락당한다. 민족은 하나의 생명체인 동시에 또 하나의 인격체이다. 인격이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 보다높은 정신적생명체이다. 이 정신적생명력은 민족이 하나의 철옹성으로 솟아나게 하는 원동력이며 세기적숙망인 민족진흥, 민족강성의 탄탄한 담보이다.     한집안식구끼리 싸우려는것은 기실 일방적승리주의를 고집하는것으로서 그집은 패가망신한다. 한민족사이에 일방승리주의를 주장하면 그 민족은 반드시 자멸한다. 남북분단은 단순한“지리적분단”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는 정치리념대립이다. 민족분단 68년, 부끄럽고 분노에 가득찬 비극을 해결하는 방도에 공동대책은 묘망한데 날이갈수록 평백성들마저 불공대천의 적대감만 키우고있으니 슬픈일이 아닌가?!     바다의 밀물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통일의 광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한 길은 영영 막혔는가? 그러지 않아도 민족통일의 길은 멀고멀다. 한것은 미국을 위수로 한 주변강국들이 저애하기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세계의 저류는 민족융합이다. 하나가 되면 살고 흩어지면 자멸뿐이다. 민족을 살리는것은 그 누구가 아니라 옹근 배달민중이다. 제민족끼리 싸우면 민족정기를 상실하고 력사의 비운을 껴안을 일밖에 없다.     생각하면 단군의 후예들은 불쌍한 민족으로 거듭나고있다. 조선반도에 고조선이 생긴이후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근근히 생명줄을 이어왔지만 수난많은 민족이다. 삼국시대부터 오늘날 남북으로 나뉘기까지 한민족이지만 손바닥만한 땅덩이를 가지고 천년이 되도록 끊임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해왔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일방적으로 승리하려고 민족의 정체성을 말아먹은 민족이기도하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명명백백한 사실은 그 누구도 배달민족의 운명을 배달민족의 리익에서 념려해주지 않는다는것이다. 관련있든 없든, 대국이든 소국이든 자국의 리익을 중심으로 조선반도문제를 대한다. 그런데 자국의 리익은 내팽개치고 타국을 위하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들인가? 통일이란 선물은 하늘에서 뚝떨어지는 호떡이 아니듯이 아무도 팔을걷고 민족통일의 광장을 닦아주지 않는다.     아득한 옛날 신라가 당군을 업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의 왕족인 궁예가“내가 그 원쑤를 갚으리라”하고 선언하여 민심을 얻었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견훤도 이민족인 당나라의 힘을 빌어 백제를 명망시킨 원한을 갚겠다며 후백제를 세웠다. 그리하여 후삼국시대가 열리였다. 당시에 벌써 삼국에 끈끈한 동족의식이 있었다는 력사적고증이 아닌가? 이 점에서는 문명하다는 현대인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지금 단군의 후예들은 진정 한민족인가? 극과 극에서 장단점을 가진 조선반도, 진정 선진민족으로 거듭날수 있는 기질적우수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멸하려고 절치부심하는 민족, 작디작은 땅덩이를 둘로 나눠놓고 아웅다웅하는 양상이 세계인들의 눈에는 얼마나 웃음거리일가? 세월이 좀먹지 않고 모래가 싹트지 않지만 언필칭 변화속에 있다. 그래서 변화하는 대방의 립장에서 문제를 봐야 한다.     리념만 배배꼬는것은 현대사유방식이 아니다. 련합국에도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주권국을 제멋대로“반국가단체”라고 우기니 국가와 단체의 개념조차 모르는 답답한 사람들이 아닌가? 국가대 라 스스로 제혀씹기가 아닌가? 동족에 대한 적대감만은 불문률이라는 관념은 21세기 관념치고는 제로이다. 곰팡이낀 그런 관념을 고집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각축장같은 인간세상에서 일방적승리주의가 통할것인가? 오직 공생할수 있는 민족융합의 길로 나아가는 길외에 민족이 부흥하고 강성해질 길이 또 있는가?!   말하자면 자구지책말고 기댈곳이 나변에 있는가 하는 말이다.                                                                                         2013년 8월 20일
261    애정시조 (100수)-70-100 댓글:  조회:8475  추천:0  2013-10-18
                     1. 사랑의 신비함은 放电이 아니여늘                          열광아 태질한들 그뉘가 말릴소냐                          사랑이 비극이됨은 겪어봐야 알리니                        2. 황홀한 불행이란 사랑에 미치는것                          불행한 황홀이란 학문에 미치는것                          사랑에 감사한 마음 인생을 풍미해                        3. 참사랑 깊이로 진정을 숨겨두고                          욕정은 미친듯 허위를 불태우네                          사랑의 긴련속극은 결말을 봐야하리                      4. 가신님 무덤가에 묘비를 세워놓고                          묘지명 쓴다할제 내사랑 세글자라                          금방에 잊혀진다면 두번다시 죽인격이                        5. 미모의 작은 꿀벌 시간을 지워가고                          현숙한 마누라는 세월을 잊게 하네                          세상을 하직할 때에 어느뉘가 우실가                        6. 쾌락은 마취제라 육신이 깨여나면                          아픈건 마음이라 공허가 흐느끼리                          사랑이 전재산이면 심령세계 부자라                        7. 이른봄 꽃이피여 여름에 무성하고                          가을에 열매맺아 겨울에 향수하네                          사랑의 춘하추동을 알뜰살뜰 가꾸세                        8. 봄날에 꽃핀듯이 화사하게 만나더니                          여름날 재글재글 늦가을에 된서린가                          겨울엔 빙설세계에 얼음되니 변덕일다                        9. 밀월은 단꿈처럼 한달에 끝나지만                          인생은 그 한달에 끝나지 않으매로                          사랑의 깊은 뿌리를 미래에로 뻗거라                      10. 진실에 아름다운 모든것 스며있고                          사랑엔 진실함과 미쁨이 함께있네                          사랑꽃 만개하기에 인생마당 됴오타                       1. 수집은 첫키스는 랑만의 첫서정시                          사랑한 두령혼이 하나로 녹여붙어                          달콤한 입술로 맺는 성스러운 묵결이요                       2. 녀인의 눈물줄기 숨김없는 마음의 글                         감동된 마음만이 숨겨진뜻 읽으리라                         진실한 두마음에는 리별이란 없노라                       3. 사랑은 미묘하고 감동스런 선률이라                          풋사랑은 경음악, 불붙으면 쟈즈곡이                          결혼은 통속음악요 리혼이란 류행곡                                    4. 눈에서 생긴사랑 눈에서 스러지고                          입으로 하는사랑 침처럼 내밷으리                          시종이 일관하여야 사랑이라 할건듸                       5. 사랑의 여린나무 뭇손에 잘꺾이고                          그언제 꺾였냐며 새움도 잘트더라                          아서라 자주꺾이고 결실인들 이시랴                       6. 공방형 만들기전 사랑이 있었니라                          천금을 벌기전에 사랑을 잃었니라                          죽어서 가져갈것이 사랑밖에 없고녀                       7. 련민은 숭고하고 성결한 감정이라                         동정의 닭알에서 사랑의 암탉들이                         여러번 까나왔거니 녀인들의 미덕인가                                        8.  만나자 뼈물러도 만날수 없는것이                                    피하려 애를써도 피할수 없는것이                          얄밉다 사랑신이여 네없이는 못살아                            9. 태울듯 타올라도 심장은 고동치니                           애욕의 불길속에 타죽어도 좋다하네                           사랑이 죽음보다도 더 강하단 말인가                        10. 어쩌냐 죽자살자 지은맹세 곧잊으니                           분노한 가슴들에 저주가 태질하리                           사랑은 그렇게 죽고 산사람은 남는거여                          1. 거절에 우는사랑 손수건 찾아들고                           배반한 사랑에는 복수의 칼을갈리                           사랑의 인수분해엔 눈물만이 남느니                       2. 련애는 처녀총각 함께한 가속운동                         결혼은 애정속에 치렬한 화합반응                         눈뜨고 하던 애정극 한눈감고 보더라                       3. 배반의 부두가에 슬픔을 부리우고                         망각을 조개처럼 모래에 묻으렴아                         저보아 밀물을 따라 새출발선 떠오네                                   4. 사랑은 미몽이라 저저히 꾸더라만                         아무나 꾸는꿈이 아닌줄을 모르나냐                         애정의 실제용량은 네심령의 용량이여                       5. 제때에 도착하는 사랑의 급행렬차                         아무도 제시각에 타보지 못했다네                         아희야 네올랐다면 종착역을 묻지마                     6. 사랑의 만리성이 울어서 무너졌냐                        운다고 옛사랑을 불러올수 있으리요                        눈물의 골물터져도 익사자는 너희뿐                     7. 따스한 사랑이란 정으로 나눌때요                       아름다운 사랑이란 두령혼이 하나일때                       황홀한 사랑의 순간은 불타는 몸 다녹을때                                                            8. 사랑이 맹목이면 순수하다 하리라                               합리성 따져가면 무미건조 슴슴타                       사랑은 막무가내한 이률배반 그뿐임,                     9. 두눈을 감을때도 떠오르는 사람은                       못잊을 그리움을 남기고 간 님이요                       눈뜨고 생각는 사람 아픔을 준 미운이                        10. 사랑은 그대를 초라하게 만들더라                        사랑은 당신을 눈부시게 만들더라                        천사도 사랑에 빠져 천국을 잊더라                                                     1. 사랑은 감미로운 한잔의 술이여라                          리성과 비리성의 누룩으로 빚은밀주                          마시고 혼곤해지면 사랑의 시작이라                       2.  사랑을 하려거든 생활을 사랑하라                           생활을 사랑하면 로동을 열애하리                           애욕의 시정배들은 어느것도 못하리라                       3.  사랑이 풍경이면 절대경 아니리요                          자고로 문인들이 사랑가에 목쉬였ㄴ[                          두어라 결말없는 시 감탄표는 있더냐                       4.  사랑을 하노라면 바보가 되느니라                          사랑에 미쳐나고 현명할수 없는것을                           허무한 음유시인이 랑만을 읊을뿐                        5.  사랑은 성숙도를 재이는 눈금자여                          각자를 값매기는 저울추가 되더라만                             분별이 너무심하면 사랑이 도망가네                       6.  위인도 권력자도 미인앞에 웅성일뿐                          가인도 침대에서 녀자로만 남을뿐이                          세상에 공평한것이란 애욕뿐이 아니랴                                          7. 인간은 사랑에서 완성되여 가거늘                         남자가 녀자보다 지력으로 우월하면                         녀성은 희생으로써 웅성보다 위대해라                       8.  사랑의 절정위에 행복의 문이있네                          초련엔 랑만적인 서정을 읊조리고                          결혼은 끓는 여름과 가을정취 즐기라                       9. 인생이 억수로 퍼붓는 폭우라면                         운명은 구멍이 숭숭한 우산이요                         사랑은 알뜰살뜰히 그것을 깁니라                      10.  사랑은 흡인력을. 결혼은 약속력을                           전자는 정의 힘이요 후자는 리성의 힘                           아무도 이 인력에서 벗어날수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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