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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2012년 12월 01일 09시 42분  조회:4956  추천:13  작성자: 김혁
 
 . 력사문화 시리즈 .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2)
 
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 영화 “소금”

 
 

 영화 “소금”의 포스터


제작: 조선
개봉: 1985년
감독: 신상옥
출연: 최은희, 정의겸, 오영환

 
일제강점기의 간도지역, 주인공 봉염 어머니는 일제의 핍박과 지주의 착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큰 아들 봉식은 장거리에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다가 일본령사관에 잡힌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풀려나지만 봉식은 또 한번 가출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찾기 위해 막내 딸 봉염이와 함께 여러 곳을 전전 긍긍하게 된다. 그 와중에 중국인 지주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게 되나 지주에게 도리여 겁탈을 당하게 된다. 어머니가 겁탈을 당하는것을 목격한 봉염이가 저지하려다가 실수로 지주를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 모녀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불운하게도 겁탈을 당한 어머니는 지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결국은 만삭이 되여 석방이 된다. 태여난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고도 했으나 결국은 그러지도 못하고 모진 삶을 이어나간다. 오직 아들 봉식을 만날 꿈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어머니앞에 계속 시련이 닥친다. 봉염이와 갓난아이가 전염병으로 죽게 된것이다.
  가난과 질병, 지주의 착취에 부대끼던 어머니가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길은 다름아닌 소금밀수이다.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려정으로 어머니는 고통을 참아가며 오른다.
소금밀매를 하던 중도에 밀수군들은 일본군의 추적을 받게되는데 이때 항일유격대가 나타나 어머니 일행을 구해 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들에게서 아들이 유격대원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사건들을 통해서 어머니는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비로서 과거를 벗고 진정한 소금맛을 하는 삶을 각오한다.  밀수꾼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항일무장대를 향해 결연히 일어선다.
  영화는 비교적 사실적인 구성과 묘사로한 가난과 모진 운명을 견디여 내는 한 녀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
 

  영화에서 신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봉염 어머니” 역을 맡은 이가 바로 남과 북에 존재했던 두 개의 “신필름”을 대표하는 스타 최은희이며 영화의 감독은 바로 그의 남편 신상옥이다. 신상옥은 조선에 머물러 있는동안 조선의 예술기조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따르면서”소금”을 비롯한 7편의 영화를 제작, 보다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로 완성해 내였다.

  영화에서 함경도 사투리로 담담히 연기해 나간 최은희의 연기력은 지금도 영화계의 호평을 잇고있다.
최은희는 한국의 영화배우로서 1928년 한국 경기도 광주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최경순. 경성기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단에 입단하여 무대연기를 배우고 연극을 수업했다.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한후 한국의 대표적인 주연 녀배우로 활약했다. 그녀는 신상옥 감독의 거의 전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혼, 감독과 연기자로서 완미한 결합을 보았다.
“무영탑”,”자유결혼”••”성춘향”, ”•”벙어리 삼룡”,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에 출연했으며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연기자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1978년 부터 신상옥과 함께 조선에서 영화활동을 했다. 신상옥이 감독한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소금” 등에 출연했다.
  최은희는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녀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조선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녀우주연상을 차지한 한국의 강수연보다 2년 더 빠른 상이다.
 


홀리우드 최고의 배우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최은희

 
남북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신상옥(2006년 타계)과 최은희의 전기적인 영화인생을 두고 최근 할리우드에서 그들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기로 했다.
영화 제작은 중국의 말대황제 부의의 전반생을 영화화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 중국관객에도 익숙한 베르톨루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이념보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제작사는 이미 최은희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과 판권 계약을 맺고 영화화에 대한 협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녀자 주인공 최은희 역에는 중국의 톱스타 공리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신상옥 감독 역은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다.
 
영화 ”소금”은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여 처음 한국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2010년 한국 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신상옥 감독 특별전을 통해 신 감독의 또 다른 조선영화 “탈출기”와 함께 관객들과 만났다.
한국관객들은 이 영화를 볼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개무량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91년, 한국의 모 대학 캠퍼스에 영화 “소금”의 상영회를 연다는 공고가 붙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조선영화를 볼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였다. 조선영화는 지금도 제한적으로 상영되지만 당시엔 아예 금지사항으로 묶여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상영회를 강행하려 하자 전경 부대가 최루탄과 쇠파이프를 앞세우고 교내로 들어왔다. 첫 장면이 나오는것과 동시에 모두 대피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여 상영회는 결국 무산되엿다.



원작소설 “소금”의 저자 강경애
 
 
이렇게 사연많은 영화 “소금”은 30년대의 녀류소설가 강경애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여난 강경애는 31년도 남편과 함께 룡정으로 이주하여 작가생애의 대부분을 간도에서 보냈다. 당시 간도의 체류체험을 그대로 담아낸 그의 작품은 시대적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해 가난과 궁핍 속에 살아가는 민중을 그려 내고 있으며 인간의 고통을 극도에까지 몰고 간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수한 체험과 창작활동을 기리여 1999년 8월 8일, 룡정의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비석의 뒤면에는 략력 과 더불어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강경애의 “소금”은 “신가정” 1934년 10월호에 련재되였다.
“강경애의 소금”은 불행한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 당시 간도 조선족이주민의 실체를 생생히 문제삼고 있다…(중략)
한 이주농민가정의 몰락과정을 다룬 이 작품에서 작가는 봉염어머니를 통해 간도 류민의 삼중적 고통- 원주민, 일제, 마적등으로부터 피해를 받고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을 들러내려 했다. 그리고 한 녀자의 삶의 양태를 통하여 이주민들의 현실극복의식을 형상화 하려 했다.” (오양호 “일제강점기만주조선인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년)
영화는 원작의 이러한 의도를 비교적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 내였다.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를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招墾)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민실변정책이란 청정부가 변강지구의 국방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민을 끌어들여 변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제정한 정책이다.
이 기회에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벌때처럼 달려들어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다.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자금을 선대해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들을 “산을 점하고있는 사람들이라”하여 “점산호(占山號)”라 불렀다.
점산호들은 강과 산을 대충 경계를 삼아 온종일 말을 타고 한 바퀴 달린 후, 그 안을 자기 땅이라고 배포유하게 선포했고 조선인들은 그들이 금 그어 놓은 땅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춘궁기이자 영농자금이 필요한 봄에 빌려준 돈은 가을에 7할~8할의 높은 리자를 붙여 강제 상환시켰다.
  이주민들은 이른 새벽에 밭에 나가 땅거미가 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며 일했다. 그렇게 허리가 휘게 일하고도 점산호들이 원하는대로 소작료를 내야했고 복종하지 않는 이들은 소작권을 몰수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영화에서 나오다시피 당시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소금은 장작림 군벌의 전매상품으로 거기서 얻어지는 조세 수입이 대단하였고 가격 또한 비싸게 공급하였다. 당시의 이주민들은 소금 값이 너무 비싸서 쌀보다 소금을 더 절약 하였다고 한다.
장작림 군벌은 소금 수입 증대를 위하여 소금 매상 증명제도를 만들어 소금 판매점에서 소금 매입시 증명을 받도록하고 호구별 매상을 조사해서 소비량이 작으면 밀수를 하였다고 무고한 죄를 씌워 벌금을 징수하였다.
그때의 소금은 주로 중국내지에서 오는 “암염(岩盐)”이였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 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였으나 “암염”은 1원도 더 갔다.
이에 소금밀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 소두에 중국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금밀수를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지역에 “사염집사대(私盐辑士队)”라는 것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원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소금처럼 짠 눈물을 흘리며 소금밀수군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밀수군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타고 강을 건넜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도 처음부터 소금밀수장면이 나온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두만강 류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장편서사시는 만주나 간도로 이주하여 머슴이 로 되거나 소금밀수꾼으로 전락해버린 이주민들의 불안과 참담한 현실을 향토색 짙은 민요적 표현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이렇듯 소금 한톨에도 우리의 한많은 이주사가 깃들어 있다.

영화 “소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소금을 매개로 어느 녀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주민들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소금밀수라는 비화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있다.
 
(다음호에 계속)

"예술세계" 2012년 5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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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돌아오지 않은 강"
날자:2012-12-01 11:16:37
최은희와 마르린 몬로가 함께 찍은 사진이 다 있군요. 귀한 사진입니다. 이럴 때 마르린 몬로의 노래 "돌아오지 않은 강"이 배경 음악으로 올려지면 좀 무드가 있을 것 같읍니다.

일제시대 때 중국으로 국경 밀수를 하면서 자식들을 홀로 키웠다는 한국인 할머니를 오래 전에 미국에서 만나본 적이 있읍니다. 자식들이 미국에서 성공해 미국의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부자 동네에서 할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있더군요. 일제시대 때 이 할머니가 국경 밀수를 하며 고생을 할 때 이 할머니가 나중에 미국의 부자 동네에서 호강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읍니까.

그리고 추천한 영화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는 잘 봤읍니다. 상상을 넘어서는 대작이더군요. 마야문명 유적지와 유물들을 봤고 그 마야 후손들과도 대화를 해본 적이 있어서 영화가 더 생생하게 다가 왔읍니다. 내가 보았던 마야 역사의 현장들인 피라밋과 왕의 별장, 옛 광장 터, 왕의 두건 등등이 영화의 영상과 교차되면서 그야말로 쩌릿쩌릿하게 영화를 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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