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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문학自敍傳 (2)
2013년 01월 15일 10시 06분  조회:2057  추천:13  작성자: 김혁


. 문학자서전  2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등 단
 

양부가 세상 뜬 5년 만에 의붓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가 일곱 살 적에 우리 집에서는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또 3살짜리 여자애를 수양했다. 이로서 우리 집은 한 가정에 성씨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든 특수한 가정으로 어우러졌다.

특수한 가정이라 남보다 더 잘 보듬어야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런 도량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어떤 작은 잡화점을 경영한적 있다고 자신을 경리님이라 불러야 흡족해 하는, 나의 양모가 네 번째 여자였던 의붓아버지의 출현은 외려 온가족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일 년 사철 하는 일이란 어중이떠중이들을 불러 술 마시는 짓거리, 입만 열면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튕겨 나오고 이제 백만 원 잡아온다, 천만 원 잡아온다 하며 허풍을 쳐댔지만 결국 어머니의 퇴직비나 말아먹는 용모마저 추악했던 의붓아버지였다. 의붓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내내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원가정의 청고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의붓아버지로 인해 돌변하는  상스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했다. 따라서 의붓아버지의 눈에 나는 속곳에 든 가시였다. 나는   침묵으로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나중에 모순이 극화되어 꼬박 3년 동안 아버지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야 나는 자기가 입양아라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역작용에 또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엄청난 비밀에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꼬부라들기 시작했다.
  한 가슴 가득 찬 실의를 이기지 못해 나는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 새에 문제아로 변해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외 쪽에 집을 잡고 나가버렸고 어린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어머니가 때때로 와서 쌀 사주고 밥 지어주고 갔지만 그 짙고 쓴 외로움과 고독감은 내 소년기에 큰 응달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고독감을 달래준 것이 또 책이었다. 이때는 온 나라가 동란의 부진을 씻고 좌적인 철쇄에서 벗어난 시기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고 금서로 치부되었던 세계명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이 시기에 읽었다. 어머니가 명심해 주문하는 <<인민화보>>, <<연변문예>> 외에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 과  <<아리랑>> , 민족출판사에서 나오는 <<진달래>> 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였다. 그 잡지와 총서들을 통해 나는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대량 접촉하게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화약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로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손 크루소>> ,엑또르 말로의  <<집 없는 소년>>, 로신의  <<벼린 검>>과 구소련작가 라 쁠레예브의  <<마흔한 번째>>, 중국 작가 량효성의  <<여기는 신비한 땅덩어리>>, 진국개의  <<난 어쩌면 좋아요?>> 와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과 호시가라 싱이치의 꽁트들, 그리고 연변작가들의 작품인 김성휘의  <<떡갈나무 아래에서>>와 림원춘의  <<몽당치마>>였다.

  그리고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일본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중국영화 <<고뇌하는 사람의 웃음>>,브라질의 TV드라마  <<여자노예>> , 중국통속가수 등려군, 정림의 노래와 프랑스영화  <<텍사스의 파리>> 중의 여배우 나타샤 킨 스키와 중국영화배우 장유와 통기타와 디스코음악과 나팔바지와 원숭이해의 원숭이 우표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음식 탐을 하는 허기진 애 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내 작은 두뇌의 빈 동공(洞空)속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는 줄곧 어문과대표를 맡고 있었고 작문 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다. 내가 쓴 작문이면 죄다 범문으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후 전국적으로 처음 있게 되는 제1회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도교원도 없이 나절로 써서 투고한 작문이 우수상을 수상하여 라디오와 상패를 수상하는 잊지 못할 벅찬 나날이 있었다,
 
 나의 앳된 영혼을 들쑤셔주는 벅찬 문화적인 감수에 못 이겨 나는 필을 들었고 작문에만 그치지 않는  본격적 인 창작을 언감 시도했다.

  당시 일본추리영화와 무협영화가 처음 나와 우리 또래는 그에 열광했다. 하여 나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썼고 학교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수학시간에도 썼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각각 3만 여자에 달하는 무협소설<<소사연의(小寺演義)>>, 추리소설 <<경각사에 비낀 음영>>을 써냈다. <<소사연의>>는 무협영화의 고루한 형태의 본을 내여 절을 배반하고 나간 무림계의 흑세력을 동자중들이 성장하여 타승 하는 내용을 <<수호전>>처럼 장회체로 썼고, <<경각사에 비낀 음영>>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일본영화 <<추격>>과 문화혁명 때 수사본으로 유행되었던 반 간첩 소설 <<꽃신>>을 한데 버무려놓은 모방작들이었다. 그중에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이 보인다면 주인공이 나처럼 남의 집 양자로 자랐다가 아버지를 찾고 보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흑세력의 두목이었다는 그런 나만의 정감을 부여한 점이었다.

  나의 이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영화대본이라 해야 할지 작문이라 해야 할지 장르를 획분 할 수 없는 글들은 당시 학생들 중에서 <<베스트셀러>>로 대인기를 누렸다. 반급 애들이 다투어 돌려보고는 휴식시간이면 작중인물들의 무림초식(招式)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신변에 선 작달만한 애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감감 잊은 채 어떤 명작이나 영화를 담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눈을 슴벅이며 득의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했다. (지금도 82년 고중시절에 수학공책 뒷장에 쓴 이 글들을 나는 고이 보존해두고 있다. 일전 서가를 정리하다 다시 오점투성이인 그 글을 보면서도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교정 문만 나서면, 썰렁한 집에만 들어서면 다른 아이로 변하군 했다. 무리싸움에 이은 무리싸움, 그것이 방과 후면 하는 가장 큰 짓거리였다.
  결국 고중2학년에 나는 룡정 말발굽 산에서 있은 어느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라는  죄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애를 이제 완전 망쳤나보다고 어머니는 낙루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배짱이 있었다. 내가 가장 숭배했던 쏘련작가 고리끼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유명작가가 될 거라고 나의 퇴학소식을 접하고 걱정스레 모여온 친지들 앞에서 호기에 넘쳐 선언했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내가 쓴 작문이 또 중학생작문 콩클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나 시상식날 수상자는 퇴학당하고 없었다. 학교교무처의 선생들과 반주임이 상품인 반도체라디오와 상장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장끼가 있는 학생인지라 다시 학교에서 받아들일 의향을 말했다. 허나 성숙치 못한 치기에 넘쳤던 나는 호의로 찾아온 선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색안경 끼고 나를 사회 불량배 대하듯 하는 학교는 싫다, 광활하고 할일 많은 사회대학을 나와 이제 고리끼처럼 명작가로 될거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었던 나는 스스로 다가오는 어떤 기회를 잘라 던졌고 그 기회를 잃고 그 후로 내내 큰 대가와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
대성중학으로 불렷던 학교는 시성 윤동주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때의 용어를 빈다면 나는 취업대기청년이 되어버렸다. 직업은 없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샌들장사에 나섰다. 연길로 와서 그때까지도 시공 중인 서시장의 골목길에서 대련에서 넘겨온 샌들을 팔았다. 허나 장사에 재미를 붙일 무렵, 불량배들에게 샌들을 빼앗겼고 그 것을 지키려다가 늘씬히 얻어맞고 장사도 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룡정 과수농장에서 꾸리는 주물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자전거로 오가는 출근길만 해도 반시간 푼히 걸려야하는 자그만 민영공장에 서 기능공들이 단숨에 100여차 휘두르는 메를 10여차도 못 휘두르고 헐떡이었고 지글지글 끓는 쇳물 바가지를 어떻게 주체할길 없어 그 앞에서 쩔쩔매었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 번중한 로동이 힘에 버거워 속눈물을 떨 군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허나 처음 당착해보는 직장생활은 나에게 불꽃 튀는 영감을 주었고 그 주물공자의 생활을 모태로 하여 무협이나 추리가 아닌 순수소설이라 생각하고 작품 한편을 썼다.

  <<피그미의 후손들>>,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인종인 피그미라는 토착민들처럼 평균 키가 작은 주물공장의 몇몇 청년들의 사업과 사랑에 대해 쓴 1만 7천자짜리 단편소설이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였던 나는 그때 이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중국작가 장자룡의 공업소설 <<교공장장 부임기>>에 못지않을 대작이라고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시 젊은이들 층에서 인기 높은 종합지였던 <<청년생활>> 잡지에 투고했다.

  석달 후엔가 편집부에서 신씨 성을 가진 편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양모의 학교를 연계주소로 했기에 편집들은 나를 40대의 교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필명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애송이티를 가시지 못한 나를 본 편집이 헛 밟은듯 움찔했고 허구픈 실소를 머금었다. 편집부에 한번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고 두수 없는 행차를 한 듯 돌아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토끼를 품은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추리며 연길에 있는 <<청년생활>> 편집부를 찾아갔다. 편집선생들이 모조품을 보는듯한 웃는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얘기해주는 편집원들에게 나는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한편의 작품을 써 보이겠다고 배심 두둑이 여쭈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애초에 발표한 나의 작품들은 늘 표절이 아니면 번역 작품이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나의 글 수준을 고도로 인정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배포를 머금었다). 편집들은 마지못해 나의 하회를 기다렸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또 한편의 작품을 썼다. <<단꼬와 백설공주>>라는 제목으로 남을 위한 좋은 일만 해서 백치로 몰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의 밀월기간에 일어나난 사연을 소재로 단편을 만들었다. 여자 손목도 쥐여 못 본 애송이가 어떻게 밀월을 썼던지 모르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 편집원들이 내 어께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다.
  드디어 1985년 8월호 <<청년생활>>지에 나의 첫 소설  <<피그미의 후손>>이 실렸다.(그 이듬해에 나는 자매편  <<모함메드의 후손>>을  <<은하수>> 잡지에 발표하여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3부작으로 예정하고 <<나우루의 후손>> 을 창작, 아쉽게도 채용되지 못했다.) 편집들의 면려로 소설뒤끝에 짤막한 약력까지, 첨부되어 나갔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 값도 겨우 45전, 하지만 처녀작이 실린 그 잡지를 받아든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여섯 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등학교 반주임이며 룡정에 있는 리태수 김재권 등 작가분 몇몇이 우리 집에 모여와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정학처분을 받은 내가 유명잡지에 당당하게 처녀작을 냈고 선생들과 의붓아버지 앞에서 나의 호언을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빈축의 눈길은 여전하였다. 그 눈길이 싫어져 그 무렵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연길로 와서 동쪽 교외의 동광양계장에서 달걀을 깨우는 부란공일을 하게 되었다.
  장장 21일을 자지 못하고 열을 고루 받도록 부란기의 손잡이를 반시간에 한번 꼴로 돌려주며 <<캉베르>> 오리 알이며  <<288>> 종자달걀을 깨웠다. 그 부란기의 동음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부화실에서 군용침대에 엎디어 나는 쉴새없이 읽고 또 썼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19살 그해에 련이어 <<노아의 방주>>, <<맥주 두병>>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개간지>> 잡지에서 잡지 뒷면에 나의 작가사진을 실어주었고 작가협회 기관지 <<천지>>에서 조직한 문학 강습반에서는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어 중국의 대문호 로신의 반신상을 상패로 수상했다.

  그 석고상을 부란실의 창턱에 놓고 바라보며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가정에서의 소외감이며 번중한 로동의 고달픔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운명의 신은 나와 글쓰기라는 짓거리를 단단한 동아줄에 옭매듭으로 칭칭 얽동여놓았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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