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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자서전 1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동란의 문화대혁명이 일던 첫해의 어느 가을날, 고색 짙은 변강의 오지인 룡정현에서 시장부근의 한 교원가정은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봉당에는 보자기에 동여진 아기 하나가 그 무슨 물건처럼 내쳐져있었다. 태여 난지 이제 겨우 사흘이 되는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현에 있는 어느 처녀가 결혼 전에 아기를 뱄는데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항간의 눈이 무서워 룡정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낳고 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를 룡정 어느 소학교의 아이 낳이를 못하는 교원이 안아왔는데 아이가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지라 막 버리려던 참이었다.
이때 이웃집 영감이 여느 때와 같이 마실 돌이를 왔다. 봉당에 놓인 들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와 그 사연을 들은 영감은 자기가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나섰다. 중의경력이 있다지만 고주망태로 이름 있는 데데한 영감인지라 집 식구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영감이 부엌으로 씽-내려가더니 솥 가마를 뽑아들었다. 웬일이냐고 모두들 경악하는데 영감이 가마 밑굽에 앉은 흙 그을음을 긁어내더니 대접에 물을 담아 그 먼지를 삭혀냈다, 먼지를 삭혀낸 물을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목구멍에 꽉 막혔던 담이 내려갔고 아기가 급기야 미약하게나마 울음을 터뜨렸다.
민간토방법의 힘을 입어 가마 밑굽의 먼지를 삭힌 물을 먹고 살아난 아이,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을 버리지 않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동 년
옹근 동년을 나는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대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릴 적 내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가 되 박처럼 크고 눈이 알전구만한 가분수모양, 꼭 마치 할리우드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같은 형상이다. 나의 생모가 배속의 나를 떨어뜨리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결과였다.
신체가 약한 만큼 성정미도 여리였던 나는 종일 양모의 치마꼬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 간 휴학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심심풀이삼아 나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다섯 살에 나는 철자를 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학교에 붙던 날, 나는 등록하는 선생들 앞에서 고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주석의 <<로삼편>>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서사군도에서의 싸움>>이며를 줄줄 외워 모두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장 출입에 온 몸 어디라 없이 주사바늘을 꽂고 부어오른 곳을 뜨거운 물어 담근 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며 아파서 우는 나를 달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그림책을 사주는 것 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서 내내 그림책하고 벗해 지냈다. 어찌 보면 련환화(連環畵) 읽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48권으로 된 <<삼국연의>>며, 40권으로 된 <<수호전 >>이며, 22권으로 된 <<서유기>>며, 15권으로 된 <<악비전>>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적 3부작 <<동년>>, <<인간세상>> , <<나의 대학>>이며를 나는 맨 처음 모두 그림책으로 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한꺼번에 한 질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사이 두고 한 권 한 권씩 나오는 바람에 그 기다림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 이였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매일이고 서점에 붙박여 신간 련환화들이 나오면 모조리 사들였다.(지금도 룡정 신화서점의 퇴직일군들은 당년의 극성스런 꼬마단골이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신발장에 페인트를 칠해서 책장을 만들어주었고 나중에 더 넣을 자리가 없게 되자 또 찬장을 고쳐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신발장 책장에, 찬장 책장에 잃어질세라 서배에 번호를 단 련환화들을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이렇게 옹근 동년에 나는 천 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소장했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렸다.
그렇게 진중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내가 어느 한번 온 룡정을 놀래 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어쩌다가 방화범이 되여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불은 헛간을 다 태우고 번져 나와 곁에 붙여지은 변소와 이웃집 반 채를 태워버렸다. 온 동네가 불끄기에 떨쳐나섰고 소방차 두 대까지 동원되어서야 드디어 불을 끌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김치 움에 숨은 채 큰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웃 아낙에게 발견되어 어스름이 내릴 때에야 김치 움에서 끌려나왔다. 모두가 그 영문을 따져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가 저지른 동기를 말했다.<<화소야우(火燒野牛)>>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홍군의 덕택으로 소작농이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토비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홍군토벌음모를 꾸미는지라 토비들을 소멸하게 위해 소작농의 아들애가 소중한 자기 집에 불을 다는 그런 이야기의 그림책, 그 그림책을 읽고 나는 소작농의 아들의 본을 내여 그처럼 거사를 치르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후로 소학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불조심>>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들끓는 광산>> , <<안명호반>> , <<홍남투쟁사>> , <<백양정의 용사들>> , <<상앙의 이야기>> , <<공가점의 둘째주구 맹자>>... 지금처럼 어린이들의 심성에 맞는 아동도서가 많지 못했던 그 시절 죄다 어른들의 책을 읽었다. (많지 않은 아동도서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구 사회를 경유해온 이의 자서전적 소설<<고옥보>>였다)
그러다 비판용으로 앞머리에 모택동주석의 어록이 몇 폐지나 붙은 <<수호전>> 이 나왔는데 그 록림호걸들의 이야기는 나를 환혹시키기에 족했다. 수호전을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선생들이 아직도 철자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훈시하는 말의 한마디가 아무 반급의 혁이라는 애는 장편을 왕왕 내리읽는다던데 너희들은 이게 무슨 꼬라지냐?였다.) 반급 애들이 내게서 <<수호전>> 이야기를 들으러 방과 후면 우리 집에 가맣게 모여들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한 구들 모여 앉은 그 양말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는 방에서 재봉침우에 올라앉아 나는 중국 옛 찻집의 평서(評書) 이야기꾼처럼 장회체로 <<수호전>>을 내리엮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였지만 나에게 친아버지 못지않은 사랑을 몰 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화대혁명 때 나치스집중영 같은 <<5.7간부학교>>에서 치른 옥고를 빌미로 장기간 투병 끝에 한 많은 눈을 감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장례 날, 동료들이 많이도 모여왔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리였다. 모두들 비감에 물젖어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조총을 쏠때 튕겨 나온 탄알 깍지가 못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허겁지겁 탄알 깍지를 줏는데 어머니가 <<이 철없는 것아!>> 하고 오열하며 나의 뒤통수를 철썩 아프게도 때렸다.(나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중에 이러한 나의 동년의 모습이 가감 없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때 탄알 깍지나 탐내던 개구쟁이였던 나는 양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덧쌓여지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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