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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력사기행.
꼭두각시들의 궁전
- 장춘 위만황궁을 찾아서
김혁
황금의 시월, 내가 창작, 련재중인 장편력사소설 “완용 황후”와 인물전기 “마지막 황후”의 집필을 위해 장춘 위만황궁(伪滿皇宮)을 찾았다.
몇해전 문학상시상식 참가차 다녀온후로 오랜만에 찾아보는 장춘이였다. 오늘날의 장춘은 길림성의 성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 “자동차, 삼림, 영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80년 전 장춘은 일제의 사주와 협박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수도였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자 이미 고리삭은 청나라는 물먹은 토담처럼 주저앉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는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채 퇴위하게 된다. 이어1924년 풍옥상 (冯鈺祥)의 부대에 의해 부의는 력대의 왕후장상들이 기거하고있던 황궁에서 가차없이 쫓겨났다.
1932년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천진에 기거하고있던 부의를 장춘으로 데려와 회유와 공갈로 이른바 만주국을 세운다. 이는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통해 중국의 동북땅을 침노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였다. 그때부터 동북 지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전락되였다.
위만황제 부의의 표준상
위만황궁을 찾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장춘 기차역에서 동북쪽으로 두 정거장 거리, 1.5km가량 떨어진 광복로(光复路)5호에 위치해 있었다.
위만황궁은1962년 위만황궁박물관으로 개조되였다. 부의가 위만주국의 괴뢰황제로 있을때 거주하던 궁전옛터우에 건립한 궁전옛터형박물관이였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우에 “국가AAAAA급관광명승구”라는 패쪽이 유표하게 걸려 있었다.
80원씩하는 입장권을 끊고 들어섰는데 명색이 황궁이지 그 규모가 작았다. 그 규모가 13만7,000㎡에 달한다고 했다. 비록 황색 기와를 사용해 황궁임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이미 존위를 상실한 꼭두각시 황제를 위한 공간이라 그런지 황궁이라는 느낌보다는 대저택이란 느낌을 줄뿐이였다.
일제는 소금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얼렁뚱땅 황궁으로 개조하고 부의를 들였다.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에 소금 보관창고가 그 일대에서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창고가 황궁으로 변신하는 이변을 겪게 된것이다.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수 밖에 없었다. 수인(囚人)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궁핍하게 지내며 1932부터 1945년까지 13년 4개월 동안 “조롱속의 새”로 머물렀다.
부의의 집무실 앞에서의 필자
위만황궁은 크게 부의가 공무를 보던 외정(外廷)과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内廷)으로 나뉘여 있었다. 외정은 부의가 정무를 처리하던 장소로 부의의 사무실이 있는 근민루(勤民楼)와 회원루(怀远楼), 가락전(嘉乐殿)이 외정에 속하며, 이 외에도 화원, 가산(假山), 양어지(养魚池), 수영장, 테니스코트, 골프장, 승마장, 창고 등 기타 부속장소가 속한다. 내정(内廷)은 부의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구역으로 그 중 집희루(辑熙楼)는 부의와 그의 황후 완용(婉容)의 처소였으며, 동덕전(同德殿)은 부의의 첩이였던 복귀인(福贵人)의 처소였다.
위만황궁내의 크고작은 10여채의 건물은 벽돌과 나무 구조로 된 중국의 전통적인4합원 건축과 유럽식의 층집, 동양식전각 풍격을 두루 보여주고있었는데 그 혼잡함이 엇갈린 모양은 위만주국의 식민지색채와 위만황제의 괴뢰성을 띠고있는듯 했다.
전시관에는 위만주국의 유물과 문서등 당시의 시대상을 알수 있는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여 있있다. 부의가 타던 자동차로부터 모자, 개화장,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쓰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여 있었다. 부의의 자서전, 부의에 대한 연구서적들 그리고 부의가 탔던 자동차 모형도 파는 등 기념물도 다양했다.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
집희루를 자세히 돌아보았다. 이곳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운명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 집희루는 19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길림-흑룡강 대외 교통국 건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집희루의 랑하에 완용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랑하에 걸린 사진속에서 보이는 완용은 무가내의 초췌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있었다.
완용의 일생은 가히 비극적이였다. 황후로 책봉된 그 날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였다. 이 위만주국 황궁에서 완용은 “꼭두각시 황후”, “괴뢰황후”로 력사의 정곡에 위배된 왜곡된 삶을 살았다. 괴뢰황제의 황후로서 완용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는 너무나 미약하고 난처한것이여서 생활에서의 불여의와 정신적 고통을 피할수 없었다.
결국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다 곁에 친지 한 사람없이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감옥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거두어 줄 사람조차 없은 그의 시신은 연길 모아산의 어느 산자락에 무주고혼으로 묻혔다.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 (밀랍인형)
일본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의 밀랍인형도 있었다. 당시 황제는 북경 자금성에서와 같은 위용을 이미 잃고있었다. 수족을 동아줄에 얽동이고 그 동아줄에 의해 움직여야하는 꼭두각시처럼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인들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매달 관동군 사령관을 찾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해야 했다. 그저 꼭두각시 역할밖에 할수없었던 부의의 궁상이 경직된 인형에 그대로 내비쳐 있었다.
황금련휴기간이라 황궁을 찾아 력사의 유적을 밟고 그 정체를 확인하려는 유람객들로 황궁의 랑하와 층계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비였다. 대만에서 까지 찾아온 유람대오도 있었다.
위만황궁을 나오니 바로 곁에 “9.18 만주사변 전람관”건물이 일떠서 있다. 이곳은 일본의 만주 침략사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이다.
위만황궁은 지금 북경의 자금성, 심양의 고궁과 함께 중국 3대 궁정 유적지로 지정, 일본의 중국 침략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변보되여 있다. 그리고 1981년에 길림성인민정부는 위만황궁을 길림성문물보호단위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위만황궁박물관은 이미 홍색관광, 문화레저, 관광비즈니스 봉사를 두루 갖춘 찾아볼만한 인문풍경구로 부상하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 야욕이 그대로 드러난 곳인 위만주황궁은 오늘날 여러 가지 내함과 독특한 가치로 하여 중국 근대식민지문화의 전형적인 기념지와 경고성적인 교육기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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