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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贖罪) 반세기
2014년 02월 24일 08시 13분  조회:2131  추천:12  작성자: 김혁

칼 럼
 
속죄 (贖罪) 반세기
 
김 혁


  
1,
나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시기 “57간부학교”에서 모진 질곡의 나날을 보냈다.
이른바 “5.7간부학교”란 주자파, 반혁명분자, 수정주의 분자들이 로동교육을 받는 기관으로서 사실은 변상적인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였다.
그때의 고생이 빌미로 되여 줄곧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문혁이 끝나자 몇해 못되여 40대의 젊은 나이에 한많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당신을 혹독하게 고문하던 가해자의 이름이며  설명절에도 범인들에게는 깡마른 옥수수밥을 먹이면서도 집지기 개에게는 고기소 만두를 먹이던 일이며, 간수의 눈을 피해 냄새나는 널변소에 가만히 숨어들어 누룽지를 목메게 씹어 먹던 일이며를 얘기해 주었다.
소학생인 나에게 조차 그 끔찍했던 기억을 토파할 정도로 아픔과 한은 깊었던 모양이다.

나의 초동머리적 인상에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는 내내 병원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때의 아픈 인상이 내 여린 심성에 골수 깊숙히 각인되여 내 생애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다름 아닌 문혁제재의 작품이였다.
 

 

나의 문혁제재의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문학에 심취되여 룡정에서 연길로 상경해 문단활동에 열성을 보이던중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혹독하게 대했던 그 당사자를 문단에서 만나게 되였다.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함자를 대였다. 한창 흥감스럽게 떠벌리던 그는 금세 함구를 했다.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후로 그분은 공석에서 나만 보면 몸둘바를 몰라했고 바삐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문학권이라 싫어도 자주 마주쳐야 했고 어느 한번은 시상대에 올라 함께 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다.
 어느 날, 어린 후배앞에서 외려 쭈뼛거리며 그분은 자신의 신간작품집을 굳이 내게 선물했다.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과분하게 호칭한 싸인을 담은 책을 넘겨주면서 그분은 “그저 성의와 미안함을 담아 드리는것이나 책을 던져버려도 할말이 없소”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몇해 못되여 그분 역시 병으로 타계했다.
그때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나마 내게 사과(반성 혹은 속죄?)를 한것일가?
지금도 나의 서가에는 그분의 작품집이 여전히 꽂혀 있다.
 
 
2
전대미문의 동란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의 선두주자였던 녀맹장이 일전 뒤늦게 반성과 사과의 눈물을 쏟았다.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귀국한 송빈빈은 문혁 당시 모교의 학교의 변중운(卞仲耘) 부교장이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을 막지 못하고 교사들을 비판한것을 참회했다.
송빈빈은 1500자 분량의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범죄집단과 투쟁하기를 반대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 자신들의 교장을 구타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고 참회하면서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문화대혁명시기 북경사범대 부속녀중학교에서 홍위병을 이끌었던 송빈빈이다. 송은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모주석은 송의 이름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뜻의 ‘빈(彬)’자가 들어간것을 보고 “무(武)자가 필요(要)하군”하고 말했다. 그뒤 송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대신  ‘요무(要武)’라고 불리웠고 그 이름으로 서명한 ‘나는 모주석에게 붉은 완장을 채워 드렸다’라는 글이 전국의 온갖 잡지들에 게재되였다.
 


사과하고있는 송빈빈


 
지난세기 60년대 전 중국 전역을 토네이도처럼 휩쓴 문화대혁명은 극좌정치로선이 빚어낸 인간비극이였다. 문화대혁명은 시작된 1966년 부터 10년간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수십만 명은 넘는것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와 도덕적 붕괴 등 극심한 혼란을 낳았다.
 
조선족들이 운집한 연변에만 해도 집계된 피해자가 무려 3만 1,532명에 달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태여난 필자와 같은 4,50대들의 김혁, 문혁, 안혁, 위동, 위병등 이름자에서도 알수 있듯이 우리의 세대의 생활과 창작의 모태로 되는 기억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문혁(文革)의 10년이 있다.

문혁시기 홍위병 맹장으로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길길이 뛰였던 송빈빈외과 같은 이들에게도 심적 부책감의 골짜기는 깊었나 보다.
반세기를 숨죽여 살아온 송은 “문혁의 피해자와 력사에 대해 반성해 왔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호소한 그녀의 글 곳곳에는 깊은 회한과 절절한 참회가 담겼다.
그처럼 적지않은 가해자들이 근년래 서면을 보내고 잡지에 인터뷰를 게재하고 개인 블로그등을 통해 사과의 뜻을 보이고있다.

당시 뚜렷한 적용의 기준도 없이 무자비하게 시대가 휘둘러 대는 폭력 앞에서 선택은 단 두가지이였다. 동참이냐 아니면 타도(打倒)를 당하느냐이다. 제3의 선택으로서, 의심이란 있어 볼 수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였다. 의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허락되지는 않는 반항으로서 곧 타도를 맞는 쪽으로 선택함과 다름 없었고 한번쯤 의심을 가지기에는 시대의 풍조에 골몰되여 지나치게 뜨거웠던 머리속에서 상황에 대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릴수 있는 제대로 된 “지적사유”를 하기가 힘들었던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가해자이자 역시 시대의 피해자 역할로도 충당된 사과자들은 “문혁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하는것은 개개인이 자유지만 헌법을 위반하고 인권을 침해한 비인도적 행위는 다시 재발되여서는 안된다”며 당시의 상황이나 환경을 핑계로 삼아 개인적 잘못을 덮지 않겠다는 자세를 뒤늦게나마 보이고있다.
 
 


모택동주석에게 완장을 채워드리는 송빈빈
 
3
문혁이 지난지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경험자들은 신심의 “트라우마”를 안고 시종 력사의 망각 그리고 침묵과 줄다리기를 벌리고 있다.
문혁 연구가들은 “이는 정치 과잉의 그 시대 사람들이 모두다 갖고있는 통병이자 상처”라고 말한다. 문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성 기억이 존재하는데 만약 한 시기의 기억이 고통과 수치로 점철되였다면 흔히 심리성 망각증세를 보인다”고 진맥했다.
문혁의 광란이 인성에 대한 말살과 그로서 생긴 후유증에 대한 우려는 지성인들의 공동의 관심사이다. 문제는 상처가 아물자 아픔을 잊은것 처럼 문혁의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 버리고 있다는것이다.
이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버린 것은 상처투성이의 과거와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새 시대의 도래사이, 간극이 너무 짧았던것과 련관시켜 볼수있다. 물신화가 급격히 추진되면서 경제 과잉, 물질적 풍요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이야기하는건 또 다시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는 흥감질이 아니다.

 


력사는 이미 참극으로 랑자한 피자국을 닦고 그 페지를 번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흘러가는 시간속에 력사의 잘못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 더우기 피해자들에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시시때때 육신을 괴롭히는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아름다운것에 대한 파괴와 인성의 왜곡과 전민중에 대한 집단적 최면은 지울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때문에 그런 아픈 기억들을 반추해 력사의 거울로 삼자는 이사위감(以史爲鑑) 정신의 실천은 아직도 필요하며 앞으로도 내내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당사자들의 반성과 성찰을 감안한 진정한 반성을 모두는 바라왔었다. 가해자들의 광분했던 행위를 “문혁”이라는 당시의 큰 환경에 원인을 돌릴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당시의 동란은 정당화될수 없으며 개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력사의 기억은 지워질수는 없다. 이는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 력사에 대한 전 사회적인 명의의 승낙이라고 볼수 있다.
때문에 후회라는 진실과 마주하지않으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기억은 더 또렷해지고 그 부책감도 더 무거워 질것이다.

문혁에 대한 력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갑론을박의 그 귀결점은 모두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인권유린의 참극이였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끔찍한 자연재해와는 달리 문혁은 인재(人災)였다. 이는 인류가 두고 두고 반성해야 할 력사다. 문혁은 우리의 력사에 우리들의 신상에 흉물스러운 종양처럼 틀고 앉았다. 그 독소를 없애는것은 문혁이라는 악몽을 피부로 경험했던 일대뿐이 아니라 새로운 일대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 경력자들뿐이 아니라 후세들도 명심할 대목이다.
일찍 문화대혁명박물관을 세우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파금선생은 “가면을 벗고 량심을 끄집어내고 똑똑히 기억해두어야 력사가 다시 점철을 밟는것을 막을수 있다고 말했다.
상처를 받아 안은 피해자들에게는 사죄와 반성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않고, 또 그 반성이 화해로 이어가지 못하더라고 가해자들이 오랜 세월뒤에라도 이미 그런 자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반성과 속죄는 그 의의가 있다.
가해자들은 속죄의 말미에 “다시는 이 같은 동란과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지만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이 없이는 문혁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량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령혼의 정화, 사회의 진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과거를 털어내는 심각한 반성의 소리는 필요하다. 이는 국가와 민중들이 함께 짐져 나가야할 책임인것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장차 나아갈 길이 분명히 흔들리지 않을것이며 더 큰 꿈을 위해 더 크게 더 빨리 도약할수 있는 자세가 생길것이다.
새로운 력사의 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때 열린다.
 
 
2014년 2월 20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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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김훈
날자:2014-02-24 17:53:32
혁이 자주 자네 글을 보고 있네만
이 글을 보니 내가 당한 처지와 꼭 같네그려.
문혁시 총 메고 와서 나의 아버님을 잡아간 "그 분"이
내가 창작실 주임시절 나의 단위에 배치받아 왔더군.
내가 누구 아들이라고 했더니 "그 분"이 입만 딱 벌리고 있더니
며칠 후 제발 다른 단위로 전근시켜 달라고 하더군 허허허
그냥 편하게 있으라고 했더니 그냥 자기 고향으로 가더군.
관용은 내 몫이지만 그 관용마저 받아주지 못하더군 허허허
좋은 글 또 기대하네. 건강 유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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