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버크는 말한다. 자기기 살고있는 시대에 불평부리고 현재의 권력자들에 대해 수군거리고 과거를 탄식하며 미래에 터무니없는 기대를 걸어보는것 등은 거의 모든 인류가 가지는 공통한 성질이라고. 불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나 모를리 없겠지 만 문제는 불평의 진정한 저의에 대해 어떻게 리성사고를 하는가이다.
버크의 말처럼 불평은 인류사회에 줄곧 존재해온 일종 심리현상으로서 인간의 수요가 만족될수 없듯이 두절될수 없다. 가까운 근심이 사라지면 먼 근심이 생기듯 저급적불평이 해소되면 고급적불평이 생겨나고 고급적불평이 해결되면 초고급의 불평 이 봄싹처럼 돋아나기 마련이다.
불평을 격정이라 할수 있다. 만약 생활속에 격정이 없다면 세계는 한가을 락엽이 지는 수림과 같아서 우울과 싸늘한 기운만 사람을 오싹하게 할것이며 해빛은 더는 따스하지 않고 나비는 더는 고운 날개짓에 신명나지 않을것이다.
세상사는 산수식처럼 쉽게 풀리는것이 아니다. 내가 금방 따뜻이 입고 배부르게 먹는 문제를 해결했는데 어떤 사람은 등허리와 배꼽을 내놓고 다니고 음식의 량보다 질과 환경을 강구하고 있어 불평이고 벼르고 별러서 양복한벌을 갖추었는데 거리엔 편할대로 입는 간편한 옷차림이 류행되고있어 불평이고 저녁에 무엇을 해먹을가 몰라서 불평이고 자가용을 몰고 나갔는데 길이 막혀 불평이고…그 모든 잡다한 개인불평은 주정뱅이의 손에 술병과 같고 도박군의 손에 패쪽과 같은것이다.
재위시기엔 다른 사람의 불평불만을 온역처럼 여기던 이들이 일단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면 불평전업호가 되여진다. 물러나도 해당 대우를 받는데 만족해야 하련만 벼슬하고나서 남에없는 큰 손해나 본듯이 불평만만(不平滿滿)이다. 이런 심태는 일종 심리질병이다. 관본위사상이 골수에 스며들었기에 관직의 관성에 의해 심리평형을 잡지 못하는것이다. 한마디로 상실한 자기 권력에 대한 애도의 방식일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평 일반을 협애한 심리발설이라느니 이루지 못한 자기 욕망에 대한 개탄이나 질투심이라고 아니꼽게 보기도 한다. 미안함, 불평에는 그 가치함량과 대소와 유형무형의 구별이 있음. 모든 웃음이 기쁨의 표현이고 모든 눈물이 꼭 고통과 비애의 표달이고 모든 박수가 환영을 표달이라고 말할수 없듯이 모든 불평이 결코 자사자리에서 분출하는것이 아니다.
하찮은 불평 한두마디때문에 어마어마한 사회불만죄로 몰리여 곤욕을 치러야했던 살벌한 시대가 있었다. 속에서 불평이 부글거렸지만 쏟아내지 못하고 마음을 깨끗이 가진체 욕망을 절제하며 안빈락도를 표방한것은 봉페된 환경때문이고 정치기후가 용납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세상은 마침내 밝아졌다. 개혁개방의 화월춘풍과 더불어 국민의 생활이 꽃펴나고 정치, 생활면에서 고층차, 다양화에로 나가면서 전례없었던 높은 차원의 참여의식과 주체의식을 가지게 되였다. 사회언론환경이 느슨해지면서 특정된 범위내에서는 못할 말이 없게 되였다. 감히 불평을 토할수 있는 사회가 되였다는것은 국민들의 행복이 아닐수 없는바 그것은 자기 인격가치에 대한 긍정과 추구의 결과이며 민주정치가 한걸음 진보한 결과이다.
민생살리기에서 왜 조화로운 사회건설이 으뜸가는 국책이 되였을가? 불평은 비공식적이지만 일종 사교활동이다. 불평에는 이중성이 있다. 한 방면으로 사회에 대한 대다수 군중의 사상, 의지, 건의, 견해 등이 반영되여있고 한 방면으로 순수 개인의 리해득실에서 출발하여 상하좌우에 침방울을 튕기며 터치는 불평으로서 후자는 일종 심리질병이기에 숫제 론할 가치가 없다.
요즘 항간에 즉흥적묘어, 민요, 회색유모아가 널리 와전되고있는데 사회안정과 리성사유에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있다. 본질상에서 말하면 그것은 사회불평으로서 대중리익의 일종 표현방식이며 합리한 추구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군체의 불평에 불문곡직하고 눈을 흘기지 말아야 한다.
불평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 개혁개방의 심화와 민주정치건설, 인민대중의 문화소질이 제고됨에 따라 불평은 갈수록 건설적이 되고있다. 비는 지붕에서 새지만 방안에서 안다. 개혁개방의 성과에 환호하지만 사회상에 문제가 많아지면서 자연적으로 불평이 무성하게 되였다.
인민이 준 권리로 사리를 도모하는 관리들의 비리, 부정부패, 집법의 불공정, 강도, 도둑의 성행, 가짜저질상품, 부녀아동을 매매하는 귀축같은 만행, 도박과 매음, 마약판매, 악세력의 횡행과 등에 대한 불평은 배고픈 아이가 젖달라고 울어대는것처럼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불평은 절대 두절시킬수 없다. 강물은 막을수 있어도 백성의 입은 막기 어렵다는 교훈적이 전고가 있지 아니한가? 불평을 야기시키는 사회상의 일체 비정함을 먼저 다스리면 백성의 불평불만은 먼산에 적설이 봄볕에 녹듯이 슬며시 사그라질것이다.
불평 모두가 한몽둥에 때려치울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정서의 발로가 아니므로 덮어놓고 반감을 가질 필요까지 없다. 리성분석을 해야 한다. 대중적불평의 산생에는 필연적인소와 우연적인소가 있다.
현재 날로 심화, 개선되는 민주정치가 대중이 불평을 토로하는것을 묵인하고있다. 곤두박질하는 사회공덕, 직업도덕, 인륜도덕, 사회변혁에 뒤따른 실업, 취업난, 환경오염, 황당하리만치 치솟는 주택가격 등에 실망한 민심들에서 불평불만이 무시로 터져나오게 된것은 가을이 오면 락엽이 흩날리는 섭리와 같다.
관료주의,형식주의가 사회불평을 조장한다. 령도의 사업작풍과 착오적결책, 권력의 부문화, 부문의 리익화, 리익의 규격화 등등에 대한 불평 등이 이에 속한다. 불평에는 이런저런 사적인 페단도 있지만 공익도 있다. 사회기제의 시점에서 본다면 불평은 충돌을 해결하는《안전피스톤》의 역할을 한다. 령도의 각도에서 군중의 불평정서가 보귀한 일종《경보기》라고 생각해야 명지할것이다.
불평은 밑바닥인생을 사는《약세력군체》들속에서 많이 나오기에 자연적으로 일정한 규모화효응을 가지고있다. 그들은 국민들중에서 쉽게 모욕당하고 손해보는 피해의식을 가진 군체이다. 사회불평은 이런 자아피해의식에서 기원된 그들의 격동된 정서의 분출이며 막무내한 곤혹과 신음의 농축이다.
자기 일신상에 관한 불평이 아니라 공익적인 시각에서 그 모든 비리를 두고 자기 견해를 말하는 페부지언은 자기 울타리안에서의 게두덜거림보다 영향력이 크다. 그것이 자아위안이든 상징적이든 남에게 알릴수 없는 악의가 아닐진대 지각이 있는 사회성원들의 우국우민정신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가?
물론 불평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가가 중요하다.《긴 한숨에 눈물훔치노니 백성의 간난질고를 슬퍼하노라》,《하늘이 무상함이니 백성들이 무슨 죄련고?》라고 내쏟은 굴원의 불평은 천고절창이 되였고 류아자선생에게《불평에 너무 애를 끊이지 말고 눈들어 멀리 풍물을 보시라.》라고 화답한 모택동의 칠언절구는 력사기록이다.
예로부터 문인은 언어의 거장이고 행동의 난쟁이라고 하지만《부자집에 술과 고기가 썩어나고 길가엔 얼어죽은 시체가 딩구네》라고 개탄한 두보의 시는 사회암흑에 대한 문인식의 불평이였다. 이렇듯 우아하고 교육가치가 있는 불평은 대시인이나 대문호들만이 할수 있는바 로신의 투창,비수도 기실 불평불만속에서 벼려진것이다.
만사대길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불평에 아니꼬운 눈길을 던지면서 무료하고 소용없는 말썽꾼질이라고 무시할수도 있다. 제 배부르니 종더러 저녁밥을 짓지말라는 속담의 의미를 알지 못해서일가? 아무튼 만포식자의 입에서 주리고 종된자의 노래가 절대 흘러나올수 없음은 분명하다.
불평소리 없는 진공상태속의 사회가 있을수 없다. 정녕 그렇게 되여진다면 로신선생의 대성질호처럼《침묵속에 폭발하지 않으면 침묵속에서 멸망하리라》는 경지에 이를것이다. 사람들이 불평을 참지 못하는것은 사회와 개인 사이에 불조화적인 병태가 존재하고있기때문이다. 불평은 그 자체가 사회병근을 개변하려는 원동력이다.
불평을 부릴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사상이 있는 사람으로서 불문곡직하고 대방이 듣지도 않는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다. 인쇄된 바다지도에 불만족한 콜롬부스가 없었 다면 대양저쪽의 대륙이 발견될수 없었을것이며 신성한《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불만이 없었다면 우주의 기관(奇观)과 비밀이 밝혀지지 못했을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 플라톤에 불만이 없었다면 청출어람이 되지 못했을것이다.
현실에 불만을 가지기에 불평분자의 창신정신이 격발된것이다. 과학은 불만족속에서 금구를 깨뜨렸고 사상은 불만속에서 혜안을 뜨게 된다. 새 세계를 개척하려는 불평과 불만이 있었기에 선구자들이 있게 된것이고 불만과 불평을 품은 무산자들을 동원하여 쳘혈의 대오를 묶어세울수 있은것이 아니랴!
불평은 인간의 정감을 동반한다. 불평이 불만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불만이 곧 용납할수 없는 이단사상이고 대역부도한 배반이라고 누가 단정할수 있는가? 만약 한 사람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든지 못본체하며 자기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불평이 없을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생활의 격정도 포기한것이 된다.
한알의 씨앗이 만약 어둡고 침침한 땅속을 꺼린다면 어찌 광명을 바라고 땅우로 용솟을수 있겠는가? 산간의 벽계수가 협착한 골짜기를 나무린다면 어찌 창해의 넓은 품에 안길수 있겟는가? 지성인들의 적지 않은 불평은 합리성을 가진다. 지구촌의 온실효응으로부터 자원의 고갈, 인구의 팽창으로부터 생태환경의 파괴와 오염 등등에 이르기까지 불만이 없을수 없다.
물론 불평의 대가가 얼마나 침중했던가를 우리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골방에 잠자고있던 번민과 울적함이 일단 불평으로 터져나오면 막아낼길이 없다. 시내물이 모여 대하가 되듯 사회,민심의 동향으로 굽이치게 된다. 조선민족의 장거였던《3.1운동》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시골의 골목길에서 한 촌부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되였다. 일본경찰: 누가 시켜서 만세를 불렀는가? 농부: 아무도 시킨사람이 없소. 일볼경찰: 시킨사람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만세를 불렀어? 농부: 닭이 새벽에 홰치며 우는것도 그럼 누가 시켜서 운답니까? …
일본경찰은 말문이 막혔다. 밭이나 갈고 김매는 일개 농부도 닭에게도 웨침이 있다면서 떳떳이 자기 웨침을 정당화하였다. 얼핏 들으면 황당한 얘기같지만 사회상에서 리성사고를 한다는 문화인들이 심사숙고할 일이 아니겠는가?
바라건대는 당신에게 사상이 있다면 불평을 토로하라. 빙산속에 서느러움이 있고 그속에 한송이 설련화가 기다릴수도 있다. 사막은 황막하다, 우리가 한마리 견실한 사막의 배ㅡ락타가 되여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을 태워줄수는 없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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