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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최동일 신작

단편소설 * 흑장미
2013년 03월 27일 10시 06분  조회:1891  추천:1  작성자: 동녘해



1

흑장미였다. 하얀 봉투에 검은색 펜으로 한 잎 한 잎 정성들여 그려진 흑장미는 시리게도 정우의 눈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면서 주먹을 들어 질끔질끔 눈확을 찍었다. 차가운 웃음을 짓는 듯한 흑장미가 다시 부옇해진 정우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언제 넣었지? 이 봉투를. 분명 그 애가 넣은 것일 텐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지?
해볕 좋은 여름날, 개울가에서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한줄기의 강한 호기심이 머리에 솟아올랐지만 정우는 선듯 그 봉투를 찢을 수 없었다. 두려웠다. 봉투안의 비밀이 백일하에 들어나는 순간, 그 충격을 받아 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우는 봉투를 손에 든 채 두 눈을 감으면서 쏘파에 엉뎅이를 가져다댔다.
"잘했어요."
속삭이는 듯한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가 정우의 귀전에서 울리는 듯싶었다. 정우는 봉투를 가져다 가슴에 꼭 붙였다. 후둑후둑 가슴이 널뛰기를 시작했다. 정우는 봉투를 쥔 왼손 우에 오른손을 포갰다. 마구 높뛰던 가슴이 차츰 안정을 찾으면서 온몸으로 말 못 할 흥분이 찌릉찌릉 퍼져나갔다. 아래다리가 뻣뻣해왔다.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던 정우의 남성이 버럭 성깔을 부리며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오래 동안 얘를 방치해두었던가 봐요. 이렇게 성나하는 것을 보니… 풀어주세요. 걔가 하고 싶다는 대로 활 풀어버리세요. 걔도 가끔씩은 들말처럼 날칠 권리가 있다구요."
그녀는 검붉게 달아오르며 벌떡벌떡 솟구쳐대는 그놈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도란도란 목소리를 이어갔다. 정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살살 녹아내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감로수였다. 감로수로 되여 사흘 굶은 고양이처럼 머리를 다리사이에 꿍쳐 박고 누워있던 정우의 남성을 깨우고 있었다. 깨여난 남성은 더 이상 사흘 굶은 고양이가 아니라 포획물을 앞에 둔 늑대였다. 정우는 와락 그녀의 몸에 덮쳤다.
"흐윽!"
그녀는 길게 들숨을 당기며 침대에 무너지더니 두 팔을 들어 정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우는 거칠게 숨을 톺으며 그녀의 팔에서 몸을 빼고 상체를 세우며 오므리고 있는 그녀의 두 다리를 와락 열어 제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으윽 숨을 톺으며 바들바들 두 다리를 떨었다. 그 바람에 그녀 다리 사이에 숨어있던 꽃잎이 하늘거렸다. 정우는 상체를 숙이며 그녀의 꽃잎에 들떠있는 남성을 쏘았다.
"천천히, 천천히요…"
정우는 천길나락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의식하면서 불끈대는 남성을 오른손으로 잡아 그녀의 꽃잎에 박아 넣었다.
시간이 멈춘 듯싶었다.
세상에 오직 자기만 남아있는 듯싶었다.
"으윽- 아악- 어허억!"
그녀가 뾰족하게 손톱을 기른 손가락으로 정우의 가슴을 박박 긁어댔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가슴에 붉은 고랑이 패졌다. 붉은 고랑위로 뜨거운 땀이 흥건히 배여 올랐다. 그녀가 흑흑 느끼며 속삭였다.
"다 먹어요. 아귀아귀 다 먹어버려요. 와와, 와늘 늑대 같아요."
"아-우-"
정우는 진짜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처럼 단말마적으로 괴성을 뽑아 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녀의 가슴에 상체를 던졌다.
"까닥까닥…"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서 늑대가 뼈다귀를 씹는 듯한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청승스럽게 귀속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자기가 그 초침소리에 끌려 어디 론가를 향해 허이허이 기여 가고 있다고 생각 되였다.
"힘드시죠?"
약간 맥이 빠진 듯한 바스음이었다. 정우는 흠칫 놀라면서 어! 하고 중심 없이 소리를 뽑았다.
"잘했어요."
약간 맥이 들어간 목소리에는 야유 비슷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며 정우는 어디로부터 치고 들어오는지도 모를 은은한 아픔을 느꼈다. 정우는 입술을 감빨면서 이마살을 찡그렸다. 그녀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정우의 이마를 오른손식지로 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한국에 갔죠?"
"응."
"꽤 댔죠"
"몇 살이야?"
"스물하나."
"스스, 스물하나?"
"왜? 너무 늙었나요? 설마… 열여덟 살 짜리를 찾는 건 아니죠?"
"재밌네."
"몇 년 됐냐구요?"
"뭐가?"
"아저씨 부인 말이죠."
"아저씨 부인이 뭐가 몇 년 됐냐구?"
"한국에 가신지."
"누가 아저씨 부인이 한국 갔댔어?"
"방금 응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어?"
"어마나, 이 아저씨 보셔…"
그녀가 말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러자 눈꼬리마저 살짝 우로 쳐들렸다. 정우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뜨며 그녀 앞으로 한 뽐 다가앉아 뚫어져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왜요?" 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우는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디서 보았던가?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야…
정우는 차탁 우에 던져져있는 팬티를 주어다 다리에 걸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잘했어요." 하던 그 목소리가 다시 귀전에 스쳤다. 아! 정우는 신음 비슷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왜 그러세요? 불편하세요?"
그녀가 겁에 질린 듯 다가앉았다.
"아니."
"놀랐잖아요. 무슨 생각을 했어요?"
"너무 닮았어."
"누구하구요?"
"그런 사람 있어."
"첫사랑하구요? 남자들은 참, 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정우는 "잘했어요." 하고 말하던 한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22년이야. 22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은가봐. 아니라면 어떻게 그 얼굴이 이처럼 또렷이 보여 질 수 있어?
바로 이 안마원이였다. 22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22년 전에도 바로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안마원이였다.
텔레비전방송국 기자로 뛰던 시절이었다. 정우가 살던 도시에도 안마원이라는 이름의 유흥업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금방 지역 텔레비전프로그램이 흥기하기 시작하던 때라 텔레비전방송국 기자는 어디가나 대우를 받았다. 하기에 취재가 끝난 후, 식사접대는 두말할 것도 없고 노래방에 이어 안마원 접대는 필수적인 코스였다.
그날, 잘 나가는 한 민영기업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끝낸 후 노래방에 이어 보스가 끌고 온 곳이 바로 송림각이었다. 그때 정우는 금방 결혼한 몸이었다. 집에서 기다릴 아내를 생각해서 일찍 귀가하려고 했지만 보스는 기어코 정우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날 안마하러 들어온 여자가 바로 "잘했어요." 하고 말하던 장미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들어온 안마도구들을 조용히 침대 밑에 내려놓은 후 공손히 일어서서 아미를 살짝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미라 불러주세요. 흑장미라 해도 되구요."
"뭐, 흑장미? 그 이름을 들으니 접선하러 들어온 지하당원이 생각나네."
"호호호… 손님, 참 농담도 잘하시네요. 원체 여기 오는 분들은 다 지하당원이 아닌가요?"
방긋 웃는 얼굴이 그렇게 예쁜 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일"에 열중하는 스타일이었다. 금방 결혼해서 아내의 손에만 길들어져가던 정우로서는 장미의 "기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의 슬하에서 곧은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정우로서는 남여 간의 일을 두고 그렇게 많은 생각을 굴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한 정우에게 장미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번 장미가 리드하는 대로 체위를 바꿔가면서 그 일을 치르노라면 정우는 마치도 천당을 유람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끝나면 장미는 소학교선생님이 받아쓰기를 잘한 학생을 칭찬하듯 "잘했어요." 하고 한 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우는 "잘했어요." 하는 그 칭찬에 인이 박혀갔고 장미의 손길에 길들여져 갔다. 아내 몰래 그녀한테로 가는 스릴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 걸 알고 있어?"
장미가 이 말을 던진 것은 "잘했어요." 하고 칭찬을 한 후 2분쯤 지나서였다.
"뭘?"
정우는 여느 때처럼 팬티를 주어 입으며 건성으로 되물었다.
"당신, 참 잘 생겼다는 거. 미남이잖아? 체격두 쭉 빠지구."
장미도 앉은 채로 주섬주섬 옷을 주어 입으면서 말했다.
"허허허…"
정우는 장미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웃고는 입을 열었다.
"실없는 소리는."
"사실이래두. 당신, 쉬원챵( 许文强)같아."
"쉬원챵, 좋아해?"
"당신, 쉬원챵 보다 더 멋져."
정우는 그 무렵 인기리에 방송되던 텔레비전드라마 "상해탄"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웃음을 터쳐 올렸다.
"그럼 내가 주윤발보다 더 멋지다는 거야?"
"그럼, 쉬원챵배우… 그래, 그 사람. 주윤발보다 당신 더 멋져."
"웃기지마."
"당신…"
장미는 네발로 엉금엉금 정우를 향해 기여 가더니 정우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있잖아…"
"말해."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뭐야?"
기절할 듯 놀란 정우가 장미를 밀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저쪽으로 나가 벌렁 넘어졌던 장미가 기어 일어나며 깔깔깔 웃어 제꼈다.
"이런, 이런 샌님이라구야. 하하하…"
"농담이라두 그러는 건 아니지."
"당신, 참 귀여워. 돈, 안 받겠어. 오늘은 내가 당신을 놀았다고 생각할거야. 그랬어. 오늘은 내가 당신을 논거야. 즐거웠어. 하지만 다신 날 찾지 마."
말을 마친 장미가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했다. 너무도 뜻밖에 일어나는 장면에 정우는 아연해 있다가 호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두 장을 뽑아 그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왜 이래? 오늘은. 답지 않게."
"순화라 불러, 박순화."
말을 마친 그녀는 쫓기듯 문밖으로 사라졌다…
22년이 흘렀다.
순화, 내가 장미라고 불렀던 박순화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내가 송림각으로 다닌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뭐라고 말 할까?
8년 후, 정우는 아내와 감정이 맞지 않아 이혼을 했고 가끔 그 일이 생각날 때면 송림각을 찾았다. 환경이 더 우아한 안마원이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정우는 송림각만을 고집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우는 8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자기가 순화를 아니, 순화와의 그 아릿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닮아있었다. 감쪽같이 자기의 가방에 흑장미가 그려져 있는 흰 봉투를 넣어준 스물한 살에 나는 그 애가 너무도 순화를 닮아있었다. 그녀를 만난 것이 어쩌면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정우는 그만 허구픈 웃음을 터쳤다. 여자의 치마 밑을 들추러 다니면서도 마치나 그 어떤 거사를 치르듯 운명마저 거론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흰 봉투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져주지 않았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왜 소리 없이 이것을 가방에 넣었을까?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우는 봉투를 들어 한동안 눈가늠을 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잠간이었다. 봉투는 쩍 하니 입을 벌리고 정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봉투 안에 오른손식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악!"
정우는 순간 괴성을 지어 올렸다.
손가락에 집혀 나온 것은 걸찍한 액체가 흐물대는 콘돔이었다.

2

"불쌍하잖아요? 걔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 터지게 슬펐어요. 걔들이 너무 슬퍼서 머리가 뻥 뚫리게 미쳐버릴 것 같았다구요."
그녀의 목소리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듯싶었다. 담담한 그 목소리가 정녕 그녀의 입에서 흐르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정우는 그녀 쪽에 한 뽐 다가앉아 나불대는 빨간 입술에 눈길을 박았다. 그녀가 정우를 할깃 훔쳐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거든요. 살다보면 그렇게 미쳐버릴 것 같을 때가 많아요. 아니, 미쳐버릴 때가 있다구요."
"야!"
정우의 입에서 가시 돋친 함성이 튕겨나갔다. 두 볼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너너, 너 어쩌면…"
결이 나서 부들부들 떠는 정우와 달리 그녀가 사뭇 여유롭게 말했다.
"왜 이러세요? 아저씨. 야라니요? 지금, 숙녀한테."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그러건 말건 정우는 정우대로 가쁜 숨을 톺아 올리며 소리쳤다.
"숙녀 좋아 하구 있네. 네깟 것이."
"프로답지 않아요, 지금 아저씨가. 장미예요. 장미라 불러주세요. 흑장미라 불러두 되구요…"
"뭐? 장장, 장미? 흑흑, 흑장미?"
"네, 도고하고 거무스름한 빛을 띤 흑장미요."
장미는 말을 마치고 입가에 아지랑이 같이 새물새물 웃음을 피워 올렸다. 정우는 일순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뚫어져라 장미를 바라보았다.
장미라구? 왜 얘가 장미야? 얘얘, 얘는 구경 어느 장미라는 거야?
정우는 사색을 굴리면서 고통스럽게 두 눈을 꼭 감았다.

장미였다.
정우가 너무 놀라 손에서 떨어뜨린 콘돔을 장미가 답삭 입에 물고 꼬리를 하늘거리며 주방 쪽으로 뛰어갔다. 거의 본능적이었다. 정우는 장미를 따라 주방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내내, 냉큼 뱉지 못해? 뱉으라구."
장미는 냉큼 뱉을 대신 되려 엉뎅이까지 흔들며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어디로부터 어떻게 되여 터지는 활화산인지 정우로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노하고 분할 따름이었다. 정우는 히스테리 적으로 고래고래 목청을 뽑았다.
"밟아죽일 년, 단매에 쳐 죽일 년, 집어먹다 체해서 뒤져버릴 년. 이 개새끼야."
장미라고 부르는 그 "개새끼"는 벌써 콘돔을 구멍내버렸고 콘돔 안에 들어있던 걸찍한 액체는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뿌옇한 그 액체를 보면서 정우는 가슴이 터지는 듯 아팠고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뱉으라구. 이 개새끼야!"
정우는 소리 지르며 장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아악!"
정우가 단말마적으로 괴성을 뽑아 올리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발은 식탁에 맞았고 몸은 평형을 잃었던 것이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텅 하고 둔중한 소리를 냈다. 순간 눈앞에서 무수한 오각별들이 노오란 빛을 뿌리면서 반짝반짝 춤추었다. 정우는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헤치면서 지끈지끈 덮쳐오는 아픔을 느꼈다.
"콩콩콩…"
뜻밖의 사태에 당황했던지 장미가 짖어댔다. 온몸으로 덮쳐오는 아픔을 감지하면서도 정우는 장미의 짖음 소리가 참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픔에 잘 배합된 배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미야, 장-미-야-"
웬 일인지 정우의 입을 벗어나온 그 목소리에 야릇한 곡조가 묻어있었다.
"자앙미야- 자아앙-미-야-"
정우는 누워서 염불하는 게으른 스님처럼 자꾸 장미만 불러댔다. 콘돔을 씹던 장미가 다가와 푸들대는 정우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정우의 눈귀를 타고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굴러 내렸다.
왜 장미였을까? 왜 딱 장미여야 했을까?
아내와 이혼해서 8년이 되던 그해 정우는 친구들의 소개로 딸애 하나가 달린 한 여인을 사귄 적이 있었다. 소학교교원으로 사업한다는 여인은 총명했고 마음씨도 여렸다. 먼저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수없이 스트레스를 받았던 정우였지만 그 여인이라면 무난하게 가정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생겼다.
정우는 그해 늦은 가을에 여인과 그녀의 딸을 집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녀 간의 재결합이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 사이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둥글어갔지만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딸애와는 도무지 둥글어질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합해서 아홉 달이 되던 어느 날, 그녀는 끝내 딸애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가슴 터지게 아프고 하늘이 무너질 듯 기막힌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상처는 깊었다. 정우는 이생에서 다시는 여자를 집에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그 후의 어느 날 오후, 정우는 갑갑한 마음을 달래려고 시장에 갔다가 장미를 만나게 되었다. 금방 젖을 뗐다고 했다. 거무스름한 털을 가진 보동보동 살찐 강아지였다.
"암컷이꾸마. 귀엽습지?"
강아지를 파는 뚱뚱한 몸매의 한족아줌마가 담배진이 더덕더덕 들어붙은 이발을 버젓이 들어내며 정우를 보고 벙긋 웃었다.
"네네, 귀엽네요."
"150원씩 하는 건데 아저씨가 딱 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100원만 받겠습꾸마. 하나두 안 비싸꾸마."
한족아줌마가 큰 선심이나 쓰듯이 말했다. 정우는 아줌마의 거무스레한 이발에 눈길을 주었다가 돌리면서 말했다.
"필요 없어요. 150원 들일게요. 데려가면 내 식구가 되는데요."
"어마나. 세상에, 세상에… 오늘 귀인을 만났네. 감사합꾸마. 감사하다이. 너 가서 아빠께 잘해야 한다."
아줌마는 강아지대가리를 톡톡 치며 너스레를 떨다가 정우에게 물었다.
"이름은 뭐라 하겠슴둥? 얘를."
"이름이요? 장미라 하죠. 흑장미요."
왜 장미였을까? 왜 딱 장미였을까? 그때 왜 흑장미가 생각났을까?
"왜 장미냐구? 왜왜?"
"네?"
장미가 웬 일이냐는 듯 두 눈을 올롱하게 치뜨고 정우를 쳐다보았다.
"어?"
"참, 장미고 싶어서 장미라 했죠. 왜요? 제가 장미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
"아… 아니."
"놀랐잖아요."
장미가 정우의 어깨를 톡 치며 까르르 웃더니 입을 열었다.
"기다렸어요. 찾아올 줄 알았다구요."
"왜? 왜 날 기다려?"
정우가 장미 쪽에 얼굴을 돌리며 바투 들이댔다. 장미가 픽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잖아요."
"뭐가?"
"그런 선물을 받고 궁금해 하지 않으면 그게 되려 이상한 게 아닌가요?
"그러니 그걸 왜 내 가방에 넣었는가구?"
"말했잖아요."
"언제?"
"불쌍해서라구요."
"누가 불쌍한데? 내가?"
"아니요. 걔들이요."
"걔들이라니?"
"어제 밤, 아저씨가 세상에 내보낸 1억도 넘을 그 애들이 불쌍하지 않아요?
"뭐뭐? 어쩌면… 어쩌면 그런 생각을…"
정우는 대가리 아홉 개를 기웃거리며 엉금엉금 다가오는 괴물을 바라보듯 막연한 눈길로 장미라고 부르는 스물한 살의 애숭이 여자애를 지켜보며 벅벅 말을 더듬었다.
"그 일을 하고 싶어서 여기 왔어요."
"그그, 그 일이라면?"
"그래요. 아저씨들이 세상에 내보낸 그 애들께 아빠를 찾아주는 일, 흐흐흐…"
정우는 온몸에 으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송골송골 식은땀이 이마에서 빠직빠직 돋아났다. 정우는 헉헉 모두숨을 쉬면서 주먹을 들어 툭툭 이마를 두르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세세,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너."
"저도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거든요."
"뭐라구?"
"얼마였을까요?"
"뭐가?"
대중없이 물어오는 정우를 향해 방긋 웃고 난 장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아저씨… 아니 누군지 모르는 저의 아빠가 20대후반이였으니 제일 정력이 왕성할 때라고 봐야겠죠? 그러니 한 2억 마리 정도가 됐으려나? 단번에 최고로 3억 마리까지는 가능하다고 책에서 봤으니까요. 흐흐흐… 2억 마리라고 해두죠. 전 그 2억 마리에서 살아남은 여자라구요."
청산유수같이 쏟아 붓는 장미의 목소리에 승자의 희열 같은 것이 묻어있다고 정우는 생각했다. 다시 꺽 하고 가슴이 막혀왔다.
2억 마리, 2억 마리라니? 내가 왜 그 2억 마리를 생각해야해? 그럼 내 몸에서 지금껏 얼마나 되는 놈들이 빠져나갔을까?
"여기서 장미로 통했대요, 제 엄마가."
장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있었다. 낮은 그 목소리가 되려 천둥번개로 되여 정우의 뇌리를 쳤다.
"뭐? 장미로?"
정우가 다잡아 물었다.
"그래요. 한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어요. 어릴 때는 참 행복했어요. 엄마가 곁에 계셨으니까요. 그때, 마을의 많은 엄마들이 돈 벌러 집을 떠났었거든요.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상점에 가서 먹거리들을 가득 사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애들이 얼마나 부러워 했다구요.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제가 일곱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예요. 외할머니는 늘 앓음 자랑만 했어요. 엄마가 마을식당에서 일해 버는 돈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웠나 봐요.
어느 날, 엄마는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을 탄다고 떠났어요. 저를 외할머니한테 팽개쳐둔 채.
석달 쯤 지나서부터 엄마한테서 돈이 왔어요. 외삼촌이 외할머니에게 그 돈을 가져다드렸어요. 전 그 돈으로 학비를 물고 옷을 사고 군것질을 했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전 풀어놓은 들말로 돼버렸어요. 공부보다 노는 것이 훨씬 더 재미났거든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애들과 어울려 놀다가 그 애들이 아빠들 손에 잡혀 엉뎅이를 맞으며 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끔 나에겐 왜 아버지가 없을까 하고 생각을 했더랬어요. 누구도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말해준적이 없었거든요.
초중을 중퇴하구 사회에서 한 1년 구을다가 열여덟 살 되던 해에 무작정 북경으로 들어갔어요. 열여덟 살 되는 여자애가 북경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먼저 북경에 간 마을언니의 소개로 ‘천상궁전’이라는 룸싸롱에 들어갔어요. 저의 직업생애가 그렇게 시작된 거죠.
한달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갔어요. 촌장이 외할머니의 핸드폰에 수록된 저의 핸드폰번호를 찾아서 알렸어요. 그래서 돌아온 거죠. 그새 미국에 간 외삼촌은 올수 없는 처지였죠. 엄마도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나가 불법체류자로 있기에 돌아올 수 없었죠. 외할머니가 살던 집을 정리하다가 목책 한권을 뒤져냈어요.
그 책에서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였어요. 나의 엄마가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 장미로 한때를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였구요. 너무도 놀라왔어요. 엄마도 장미로 살았다는 사실이…
그 목책을 가방에 넣어들고 저는 이 도시를 누볐어요. 아직까지 송림각이 존재하려나 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미친 듯이 골목들을 참빗질한 거죠. 송림각, 나, 나의 종자가 뿌려지고 자라던 송림각이 이렇게 오늘까지 존재해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그래서 결심했죠. 여기서 건사를 못하고 사는 아저씨 같은 사람들을 위해 제가 건사해주자구요. 재밌죠? 아저씨."
"그래!"
"영화 같죠?"
"그렇지."
"아저씨!"
"그, 그 목책 지지, 지금 어디 있니?"
"네?"
장미가 정우를 찍어보며 동공을 키우다가 소리쳤다.
"아저씨가 왜 그 목책을 찾아요?"

3

"너무 일찍 오셨네요."
"네?"
정우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돌렸다. 50대의 한 여인이 넌지시 정우를 살피며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길에는 어딘가 모르게 경계의 빛이 어려 있었다.
"아, 네…"
정우는 여인의 눈길을 피하며 말을 더듬었다.
"애 데리러 왔나 봐요? 전 이 유치원 부원장이예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름철엔 5시가 돼야 애들을 내보내요."
"네…"
"두 시간도 더 남았는데 어디 가서 일을 보시다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먼저 데려갈라치면 애들이 습관이 돼서 유치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거든요."
"그… 그렇겠죠."
"수고하세요."
여인은 정우를 향해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철문오른쪽에 붙은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우는 두 눈을 퀭하니 뜬 채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뒤 모습을 막연하게 바라보았다. 체조를 하는 애들 쪽으로 다가가던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정우의 눈길도 체조를 하는 애들에게 고정 되였다. 여인이 동작이 서툴러 보이는 한 여자애의 팔을 잡더니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정우도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정우가 갑자기 픽 하고 코방귀를 터쳤다.
"프프프… 하하하…"
정우는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싸쥐고 몸을 돌렸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정우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종종걸음을 놓았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뒤 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노래 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왔다.
뒤 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내가 왜 여기로 왔을까?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개구리로 된 올챙이는 어떤 모습일까?
엉뚱한 생각이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걸음을 멈추고 본능적으로 노래 소리가 울리는 마당을 바라보았다. 아까 철문으로 들여다볼 때 체조를 하던 꼬마들이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두 팔을 펴들고 왼다리, 오른다리를 쭉쭉 펴면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노란색 통일복장을 입은 애들은 오구구 모여서 볕쪼임을 하는 병아리들 같아 보였다. 귀엽다고 생각 되였다. 달려가서 한 놈을 확 나꿔채 가지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앙큼하게도 머리속에 자리를 쳤다. 정우는 으스스 몸을 떨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불쌍하잖아요? 걔들이 너무 불쌍해서 가슴 터지게 슬펐어요. 걔들이 너무 슬퍼서 머리가 뻥 뚫리게 미쳐버릴 것 같았다구요."
장미의 목소리가 가슴을 찢고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다. 정우는 주먹을 들어 쿵쿵 소리 나게 가슴을 쥐여 박았다. 얼얼해났지만 가슴을 꽉 막은 체증은 종시 내려가지 않았다. 정우는 잠간 숨을 모았다가 후-후-후- 거칠게 내쉬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해나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어지러운 사색의 검불 속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으으으…"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구!"
"순화라 불러, 박순화."
필름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때 순화는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사실을 알고 나의 의중을 떠보느라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정녕 그랬다면 순화는 왜 다시 나를 찾지 않고 소문 없이 그곳을 떠났을까? 아니야, 아닐 거야,
정우는 더 이상 그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어 철 담장 밑판에 엉뎅이를 붙였다.
꼬물꼬물 꼬물꼬물
꼬물꼬물 올챙이가
뒤 다리가 쑥-앞다리가 쑥-
애들은 여전히 신나게 왼다리, 오른다리를 퍼덕거리고 있었다. 개구리가 되기 위해 신나게 버둥거리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일듯 아물거리는 눈앞으로 거대한 무리가 덮쳐들고 있었다. 올챙이 같았다. 올챙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다시 눈길을 주니 올챙이가 아니었다. 올챙이보다도 휠씬 더 작은 미물들이 꼬리를 하느작이며 어디론가를 향해 덮쳐가고 있었다.
"전 그 2억 마리에서 살아남은 여자라구요."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장미가 눈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 걔가 온 하루 굶고 있겠구나.
아침에 기분 잡치게 하던 그 사건을 치르느라 장미에게 사료를 주는 일까지 깜빡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미가 아침이며 점심이며를 모두 굶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안 되지, 걔가 그렇게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되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걔가 지금 얼마나 애타고 서러울까? 이럴 때가 아니야, 이렇게 여기서 청승을 떨 때가 아니라구…
정우는 급히 길가에 나가 달려오는 택시를 잡았다.
두 때나 굶었지만 장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콩콩 짖으며 꼬리를 하늘거리고 있었다.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되는대로 신을 벗어내치고는 덥석 장미를 품에 안았다.
"어디 갔다가 오세요? 보고 싶었어요." 장미의 눈망울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우는 장미를 가슴에 꼭 가져다 댔다.
"정신 나갔었나봐, 내가. 아니, 내가 돌았었어. 너에게 밥 주는 것까지 까먹다니…"
정우는 급히 사료를 꺼내 사발에 쏟았다.
"까닥까닥…"
걸탐스레 사료를 먹을 때 나는 소리였다. 아프게 귀를 찌르고 들어온 그 소리는 차츰 정우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정우는 갑갑하던 가슴이 서서히 뚫리는 것 같았다.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던 엄마의 말씀이 귀전을 스쳤다.
"장미야."
장미가 머리를 돌렸다.
"장미야, 장미야…"
정우는 술에 취한 나그네처럼 두 눈을 퀭하니 뜨고 대중없이 장미만 불러댔다.
"…그 책에서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였어요. 나의 엄마가 송림각이라고 부르는 이 곳에서 장미로 한때를 살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장미야, 정녕 너는 누구냐? 누구란 말이냐? 22년이라는 세월을 장미야, 아니, 순화야, 너는 어떻게 살아온 거냐?
장미였다.
장미는 배부르게 먹었는지 정우의 무릎에 기어올랐다. 정우는 장미를 안아 가슴에 대며 부질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장미야, 다 먹었니?"
장미는 정우의 가슴을 파고들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잠이 올 때 터지는 버릇이었다. 정우는 장미의 배를 살살 만져주며 입을 열었다.
"배부르게 먹었으니 곤하다 이거지? 허허허…"
웃음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목구멍이 먹먹해지며 코등이 시큰해났다. 정우는 장미를 으스러지게 가슴에 끌어안았다가 활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콩콩콩…"
웬 일이냐는 듯 장미가 짖어댔다. 정우는 장미의 짖음 소리를 등에 달고 문을 나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알았지. 알았다니까. 내 오늘 신시(申时)에 신수 멀끔한 놈 하나가 찾아올 줄 알았다니까."
여인은 손에 들었던 부채를 상우에 탕 내려놓으며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정우는 그 서슬에 놀라 흠칫하다가 허리를 꺾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할 수 있는 겨? 잡놈들이 자꾸 찾아드는데. 이런, 이런 잡것을 봤능 겨?"
여인이 소리치며 얼굴을 홱 돌렸다. 그 바람에 정우가 흠칫 뒤로 비껴 앉으며 물었다.
"저… 저 말입니까?"
"그럼, 네놈이지 그래. 여기 누가 또 있능 겨?"
여인이 정우 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게 어디라구 덜렁 들어앉는 겨? 들어앉긴."
"네? 방금…"
정우는 뭐라고 더 변명하려다가 여인의 쏘는 듯한 눈빛에 질려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숙였다. 가시 박힌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우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이런, 이런 잡것하구. 이게 어느 안전이라구 그까짓 개방귀 한번 뀌구 들어앉으려는 겨?"
"아, 네."
정우는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 급히 호주머니를 뒤져 1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놈아!"
여인이 좀 전보다도 더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정우가 한 뽐 또 뒤로 비껴 앉으며 입을 떡 벌렸다. 여인이 손가락으로 정우의 코등을 삿대질하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게 어느 안전이라구 망칙하게 노는 겨? 이 잡것이…"
"제… 제가 어어, 어떻게 해야…"
"네놈은 그래 내 말이 돈 내놓으라는 소리로 들리는 겨? 냉큼 저것을 걷어 들이구 파란 색으루 한 장 곱게 펴서 올려."
"네네."
정우는 몸을 돌리고 급히 돈지갑을 열어보았지만 안에는 50원짜리 돈이 없었다.
"어어, 없는데요."
"이런, 이런…"
"그냥 100원을…"
"동동할배, 동동할배- 나 어쩌라는 겨? 이 잡것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이소…"
여인은 100원짜리 돈을 활 집어가더니 상 밑에서 빨간색 돈지갑을 주어 들었다. 여인은 100원짜리 돈을 지갑에 넣고는 대신 50원짜리 돈 두 장을 꺼내어 정우 앞에 훌 던지며 소리쳤다.
"천한 것이, 네놈 눈에는 그게 돈으로 보여? 이건 돈이 아니라 우리 지엄하신 동동할배 뵈러 가는 차표란 말인 겨, 차표라능 겨."
"네, 차표요?"
"그라이. 차표지, 차표. 차표를 샀으니께 어서 말해 봐봐."
"네,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라이. 알고 싶겠지, 당연히 알고 싶을 테지. 기어이 알고 싶을 겨."
여인이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상을 내리쳤다. 탕 하고 상이 울리며 위에 있던 딸랑이북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우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선생님 앞에 선 소학생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숨을 죽였다.
"말하라니께."
"네?"
"사주팔자를 올려야 할 것 아니여?"
"네, 네?"
"사주팔자두 모르는 겨? 생신날을 이르라는 겨. 생일 말이여."
"네? 네. 1965년 7월 7일입니다."
"한 여름에 나온 독하디 독한 독종이네그려. 쯧쯧쯧…"
"네?"
"한 여름에도 사람 간담 서늘케 하는 놈들이지."
여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뭐라 한참 중얼거리더니 소리쳤다.
"뭘 알고 싶은 겨?"
"그그, 그해… 그녀가 진짜 내 애를 뱄을까요?"
"이런 멍청한 놈 봤나? 그래 제 새끼가 자라는지 마는지도 모르구 살았던 겨?"
"……"
"낳았어. 낳았다구."
"네? 제 애를 낳았다구요?"
"그래, 팡팡 잘 자라구 있잖어?"
"남자앤가요? 여자앤가요?"
정우는 금시 숨이 넘어갈세라 다잡아 물었다.
"사내놈인가?!"
"네? 남자애라구요?"
"……"
여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또 한참이나 손가락을 폈다 굽혔다를 반복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미를 꼭 닮았네 무슨."
"그렇죠. 여자애죠?"
"그렇지. 어미를 닮았으니 당연히 계집애지."
"그 애를 찾을 수 있을까요?"
"거사 하늘의 뜻이지.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볼 수 있으니께. 암, 하늘의 뜻이구 말구."
"네? 하늘의 뜻이라구요?"
여인이 두 눈을 스르르 감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왔느냐 왔을 손가 가느냐 떠날 손가
왔다가도 가는 이
떠나는 길 머이 급해
후여- 후여- 후르륵 후여-
여인이 허공을 향해 두 손을 너울거렸다. 두려웠다. 후여- 하는 그 소리에 모든 것이 구중천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듯싶었다. 정우는 올방자를 틀고 앉았던 그 맵시로 급급히 땅을 짚으며 두 뽐쯤 뒤로 물러났다가 머리를 숙이고 엉뎅이를 쳐들며 간신히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전 이만…"
"이런, 이런… 여직 이러구 있어? 신수 멀쑥한 놈이."
여인이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
"네? 네."
여인이 상 위에 놓여져 있는 사기그릇에서 뭔가를 집어 정우에게 뿌리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빨랑 가보라니께, 큰 일이 터지려구 하는구만…"

4

"어머, 어머- 대단하시다."
문에 들어서는 정우를 보고 마담이 쫑드르르 달려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간드러지게 목청을 뽑았다.
장미, 장미 얘가…
그 생각만 하면서 문에 들어서던 정우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맞은 듯 흠칫 몸을 떨면서 머리를 들었다. 벌써 몇 년 째 송림각에 드나들 때마다 얼굴을 보는 마담이었지만 언제나 그 열정은 식을 줄도 모르고 팔팔 끓어 번졌다. 아까 점심에 장미를 찾아왔을 때 마담의 대사는 "어머, 어머… 이 아저씨, 뿅 갔구나. 장미 그 애 죽이죠?"였었다. 마담은 신을 벗고 올라서는 정우의 손을 잡아끌고 쏘파에 다가가며 연신 입을 놀렸다.
"어쩌나, 근데 이걸 어쩌나?"
"왜요?"
정우가 짧게 물었다. 마담이 잠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 와늘 섭섭하시겠다."
"이 아줌마가… 뭐라구 궁시렁거리는 거요? 웬 일인가구 묻지 않소?"
"그 애, 그 애 일 들어갔는데."
"일?"
"네. 아님, 다른 애를? 어리고 이쁘장한 애들이 많은데…"
"필요 없어요."
"인츰 나오기는 할 건데. 들어 간지 두 시간이 거의 되어 오니까…"
마담이 카운터 뒤 벽에 걸어놓은 벽시계를 힐끔 훔쳐보면서 말끝을 흐렸다. 정우도 그 소리에 눈길을 벽시계에 돌렸다. 시침이 5분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장미가 세시에 일을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미친놈들."
"네?"
마담의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마담의 반응에 괜히 무엇해난 정우는 서서히 차탁으로 눈길을 돌리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도 없어요? 아님 커피나…"
"아니, 아니. 너, 쑈표(小朴), 뭐하고 섰냐?"
마담의 눈길이 카운터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곱살하게 생긴 사내애 몸에 박혔다.
"네, 인차 올릴게요."
사내애가 주방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참 멋지다니까요."
마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뭐가요?"
"이 아저씨 봐라. 알면서…"
"허참, 이 아줌마가…"
"아저씨가 참말로 멋지다구요.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구요."
"내가요?"
"그럼요. 장미, 그 애 참 눈치 빠르구 총명하구 귀엽게만 노는 애라구요. 그런 애를 첫눈에 척 봐내시니 참, 아저씨의 눈썰미를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하기야 아저씨처럼 이 나이에 이렇게 샤프한 분도 많지는 않죠. 순정만화에 나오는 멋스러운 오빠들처럼 오직 한 마음으로 한 여자만을…"
마담의 눈에는 진짜 숭경의 빛까지 어리려고 했다.
"아줌마!"
정우가 소리치고는 입이 쓰거웠던지 쩝쩝 다셔댔다.
"설탕 몇 개를 넣을까요?"
사내애가 주방 쪽에서 나오며 정우네 쪽을 향해 물었다. 정우는 신경질적으로 사내애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블랙으로 내와. 커피를 팍 넣어서…"
"네, 쓰게 탈게요."
사내애가 대답하고 돌아서서 금방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갑자기 ㄱ자로 꺾어 들어가는 그쪽 방에서 웬 남자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미친년, 죽자고 작정했어?"
그 목소리는 천둥번개로 되여 크지 않은 송림각을 들깨우고 있었다. 정우의 눈길이 일시에 소리 나는 쪽에 쏠렸다. 마담이 몸을 홱 돌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카운터에 앉아 손톱눈을 물어뜯고 있던 여자애도 카운터 문을 제치고 나와 소리 나는 쪽으로 종종걸음을 했다. 커피 타러 들어갔던 사내애도 웬 구경거리냐는 듯 그쪽으로 달렸다.
"년들, 교육 어떻게 시키는 거야, 젠장…"
"손님, 손님. 용서해주세요. 무슨 불찰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장미야, 너 손님에게 어떻게 모셨길래…"
뭐, 장미?
마담의 말에 정우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장미라니? 장미, 그 애가 왜?
정우도 한달음에 소리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103이라는 패쪽이 붙어있는 안마실 문이 열려져있었고 손톱눈을 물어뜯던 여자애와 커피 타러 갔던 사내애와 몇몇 아가씨들이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주저 없이 103호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굴색이 검실검실한 40대의 남자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거친 숨을 헉헉 토하고 있었는데 마담이 그 옆에서 남자의 얼굴을 핼끔핼끔 살피며 손바닥을 뿌벼댔다. 장미가 침대머리에 걸터앉아 남자와 마담을 번갈아보며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왜 이렇게 흥분하세요? 그냥 장난 한번 쳤을 뿐인데."
"이년아, 네년은 이렇게 하구 노니? 미친년."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흰 봉투를 장미의 얼굴에 홱 뿌렸다.
흑장미였다. 흰 봉투에 검은색 펜으로 알심 들여 그린 한 송이의 장미가 정우의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또, 또 그 놀음이었구나.
정우는 가슴이 섬찍해났다. 누가 말치 않아도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우는 숨을 죽이고 장미와 남자를 살폈다.
"왜 이래요? 답지 않게…"
장미 쪽에서 되려 눈을 곱게 흘기며 남자를 힐난했다.
"뭐야? 이년이 진짜루 살기 싫었군."
남자기 갑자기 여린 토끼에게 덮치는 늑대마냥 장미의 머리채를 검어 쥐고 좌우로 흔들었다.
"놔요. 이 손을 놔요."
장미가 숨이 넘어가게 소리쳤다.
"이년아, 죽고 싶다며? 장난치구 싶다며."
남자가 주먹으로 장미의 얼굴을 들이쳤다.
"악!"
장미가 숨이 넘어가듯 비명을 질러 올렸다.
"그만!"
정우가 갑자기 괴성같이 소리 지르며 덮쳐들어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남자가 장미의 머리채를 잡았던 손을 풀고 정우의 팔을 틀어잡으며 머리를 돌렸다.
"웬 일이요?"
"그만하라구."
"이 나그네, 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요?"
남자는 말하면서 정우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탈았고 정우는 그럴수록 젖 먹던 힘까지 다했다. 남자가 갑자기 뒤로 머리를 날렸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우의 코등이 남자의 뒤통수에 맞았다.
"으윽-"
정우가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허리에서 손을 풀고 코등을 부여잡았다. 정우의 손가락사이로 검붉은 피가 새여 나왔다.
"피…피…"
마담이 피 흐르는 정우의 코등을 가리키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삽시에 장미의 얼굴에 손바닥을 날렸다.
"미쳤어? 네년이."
"쳤어? 날!"
장미도 날렵하게 달려들어 마담의 머리채를 틀어잡았다.
"에잇, 더러워서. 개똥을 밟았잖아."
남자가 툭툭 손을 털며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마담이 장미의 손에서 머리를 빼면서 급히 소리쳤다.
"손님, 돈을 내고 가야죠. 쑈표, 그 손님, 결산 안하셨다."
마담이 남자를 따라 문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아저씨, 너무 터프해요."
달콤한 바스음이었다. 정우는 흐르는 코피를 주먹으로 닦으며 소리 나는 쪽에 머리를 돌렸다.
장미가 침대머리에 서서 웃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고 내가 말했지?"
"저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고 했잖아요?"
장미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렸다.
"언제까지 하려니?"
"뭘요?"
"그 놀음을."
"글쎄요."
"제발 인젠 그만해라."
"제발? 아저씨, 방금 제발이라구 했어요?"
장미의 두 눈이 동그랗게 굳어졌다. 정우가 손으로 피 흐르는 코구멍을 꼭 막고 서서 약간 숨이 찬 듯 씩씩거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제발이라구 했다. 왜?"
"그 말에 내가 방금 감동 먹을 번 했잖아요? 제발이란 말은 가슴 아프게 속에다 담고 사는 사람에게만 쓰는 말이 아닌가요? 흐흐흐… 아저씨, 와늘 내게 꽂혔구나? 글쵸? 아저씨."
정우를 빤히 쳐다보는 장미의 눈확에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정우가 장미의 커다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널 보면 참 측은해져."
"네? 절 보면 측은해진다구요? 설마…"
"설마라니?"
"측은하다면서 그렇게 아귀아귀 늑대처럼 걸탐스레 나를 잡아 잡수셨어요? 어제 밤에."
"너…너…"
"학교는 강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학교를 강남학교라고 불렀죠. 비가 오면 강이 불면서 물살이 여간만 세지 않았어요. 그때 강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는데 쇠사슬 위에 놓여 진 널판자가 몇 군데 떨어졌더랬어요. 비 오는 날 쏴쏴 소리치며 흐르는 강물위로 출렁다리를 건너기란 그처럼 무서운 일이였어요.
비 오는 날이면 거의 집집마다 아버지들이 자식들 마중을 오군 했더랬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데다 엄마까지 마을식당에서 일을 보다나니 누구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나는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다리목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어요. 아는 사람들이 함께 다리를 건너자고 했지만 왜 그게 그렇게 싫던지…
아버지 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 부러움이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어요. 아버지가 뼈 속까지 미워지던 그런 날이면 나는 일부러 엄마나 할머니를 보고 아버지를 내라 떼질을 썼어요. 그때마다 엄마나 할머니는 그저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계신다고만 말했어요. 하늘나라에 계신다는 것은 세상 뜨셨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다시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었어요. 왜 세상을 뜨셨을까?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옆에 계시는 것 같은 환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참으로 측은하다고 생각했어요. 측은하다구요."
"……"
"아저씨, 아빠가 참으로 측은하다고 생각했었다구요."
"어, 응?"
"참, 저의 말을 듣고 있었어요?"
"그래, 들었지."
"전 아저씨가 되려 측은해보여요. 오세요."
장미가 침대머리에 걸터앉으며 정우를 불렀다. 정우는 코구멍을 막았던 왼쪽손가락을 떼고 오른손으로 코구멍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어, 머… 멎었네."
"오세요."
장미는 물수건을 한 장 뽑아들고 정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닦아드릴게요. 멋졌어요."
"멋졌어요?"
"흑기사 같았다구요. 아까 와늘 아저씨께 꽂힐 번 했어요."
"장미야."
"네?"
"너너, 너…"
정우는 일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장미는 물수건으로 정우의 얼굴을 씻다말고 왜 그러세요 하는듯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았다.
"장미, 너 이년아.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냐구?"
급한 걸음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먼저 들려왔다. 장미는 천천히 정우의 코등에 묻은 피를 문지르며 입가에 넌지시 실웃음을 피워 올렸다.
"장미야, 우리 가자."
정우가 장미의 손을 밀치며 나직이 말했다.
"어디루요?"
장미가 바투 들이댔다.
"그 뒈질 놈이 기어코 돈을 안 내고 갔다. 장미야, 너 어떻게 할래? 로임에서 뗄 테다. 그런 줄 알어. 로임에서. 너 그 사람하구 무슨 장난을 친 거니? 설마 그게 사실이야? 그그, 그걸 봉투에 넣어 줬다는 게…"
마담이 입으로 침을 튕기며 연발탄을 쏘았다. 장미가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돌돌 말아 쥐고 흔들다가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떼세요. 떼라구요."
"너, 섭하다구 말아라."
"아니요. 섭하긴요. 아저씨, 아저씬 제가 그렇게 좋아요? 저도 아저씨가 좋은데."
"……"
"어머- 아저씨 수집어 하는 거 좀 봐. 가요 아저씨."
장미가 정우의 손을 잡았다. 뜻밖의 거동에 정우도 마담도 놀라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가자면서요. 아저씨 요구에 손을 들어준다니까요. 가요, 우리."
"그래, 우리 가자."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아라. 아저씨, 잠간. 저, 가방 가지러 가요."
말을 마친 장미가 어느새 문밖으로 사라졌다. 정우는 넋을 잃은 듯 잠간 멍해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장미를 따라 나갔다.
"세상에, 세상에… 요즘 세상이 아무리 험하다 험하다 해도 어쩌면 새파란 것이 그새 애비 같은 사람과 눈이 맞아서…"
마담의 푸념이 뒤에서 들려왔다.

5

"후회 안할 자신이 있어요?"
"후회라니?"
정우가 걸음을 멈추고 장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장미도 멈춰 서서 이윽토록 정우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가 지금 섶을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아세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정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장미의 얼굴에 가는 웃음이 스쳐 지났다.
"집에 가자면서요, 절 보구 아저씨네 집에 가자면서요."
"그런데?"
"제가 아저씨네 집에 가면 뭐가 될까요? 안마방에서 남자들의 몸을 주물거리던 제가 아저씨네 집에 들어서면 뭐가 될지 참 궁금해지네요. 아니에요? 아저씨."
"장미야. 잠간, 저기 오네."
정우가 말끝을 흐리면서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아저씨."
"왜?"
"저… 안 갈 거예요."
장미가 정우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안 가다니? 그새 마음이 변한거야?"
정우가 장미의 얼굴에 눈길을 박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장미의 눈빛이 타는 듯 집요했다.
"아니요. 원체 아저씨를 따라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그곳을 나오기 위한 방패였어요."
말을 마친 장미가 달려오는 택시와 반대방향으로 종종 걸음을 옮겼다. 정우는 택시를 잡다 말고 몸을 돌려 장미를 따라 잰걸음을 놓으며 소리쳤다.
"잠간, 장미야. 거기 서."
"아니요. 관계 말아요."
"서라는데, 거기."
정우가 뛰어 가 장미의 손에 들려있는 가방을 나꿔챘다. 장미가 급히 머리를 돌려 정우를 쏘아보았다. 정우가 장미의 눈길을 피하면서 말했다.
"너, 무작정 어디로 간다는 거니?"
"아저씨야 말로 무작정 웬 관심이 이렇게 많아요? 아저씨가 절 얼마나 알아요? 무슨 목적으로 이래요?"
"너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좋았어요? 하긴… 아귀아귀 잘도 드신다했더니."
장미가 입가에 찬웃음을 피워 올리며 흥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정우가 장미 옆으로 다가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암튼… 우리 먼저 집에 가자. 집에 가서 한숨 쉬면서 다음 일을 생각하자."
"다음 일이요?"
"그래… 다다, 다음 일을 생각하자구…"
정우가 장미의 손을 잡아끌었다.
"싫다구요, 절 내버려둬요."
장미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모양으로 선자라에 버티고 서서 몸을 탈았다.
"얘야, 말을 들어라. 아부지가 참 안타까와 하는 것 같은데…"
일여덟 살 쯤 되는 남자애의 손목을 잡고 골목을 나오던 웬 할머니가 정우와 장미를 지켜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네?"
정우와 장미가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할머니가 남자애의 어깨를 다독이며 끌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애들이 어찌자구 이러는지 쯧쯧쯧… 우리 이 도깨비도 제 맘이 내키지 않으면 입에서 범이 나오는지 구렝이가 나오는지 가리지 않는다오. 성깔머리는 또 얼마나 사나운지…"
"네, 할머니…"
"애비어미가 곁에 없다구 어랑어랑하구만 키워서 그런지 쯧쯧쯧… 처네, 아부지 말을 듣소. 다 잘 되라구 하는 것 같은데…"
"네? 할머니, 방금 아버지라 그랬나요?"
장미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미의 거동에 할머니가 흠칫 놀라는가싶더니 한풀 꺾인 목소리로 장미에게 물었다.
"양, 그럼 아부지가 아닌감?"
"흐흐흐…"
장미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애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섬뜩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장미는 주먹으로 눈확을 찔끔찔끔 누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옳아요. 아버지가. 아버지, 가요. 우리 집에 가요. 흐흐흐…"
장미가 길옆으로 다가가 달려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저었다.
"콩콩콩…"
구멍에 열쇠를 넣어 돌리는 소리가 나자 집안으로부터 강아지 짖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미가 얼굴에 가는 웃음을 피워 올리며 물었다.
"강아지를 키워요? 아저씨."
"그래… 몇 년 째 식구처럼 키우는 강아지야."
정우가 머리를 끄덕이며 열쇠를 뽑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문을 당겨 열었다. 장미가 퐁퐁 뛰며 정우의 발치에서 달려들었다.
"그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지. 내 새끼."
정우는 장미를 품에 안고 신을 벗으며 말했다.
"올라가자. 집에 왔으니."
정우는 장미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가방을 받아들고 침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가방은 먼저 침실에 들여다 놓자. 그리고 넌 거실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거라. 나 인차 커피를 끓일게."
"……"
"어려워 말아라. 제 집이라 생각하구."
"그리구 또 아버지라 생각할까요?"
"강아지를 키워요? 아저씨." 하던 순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 차서 잔뜩 비틀어진 듯한 어조였다.
역시 애들이야, 기분이 장백산날씨보다도 더 빨리 변하니…
정우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입가에 느슨한 웃음을 빼어 물었다.
"리모콘 다룰 줄 알지? 윗 쪽의 파란 단추를 눌러 텔레비전을 켜라."
정우는 주방으로 들어가 찬장 문을 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장미가 따라 들어오며 정우의 발치에서 설쳐댔다.
"넌 저기 가서 언니하구 놀아라. 아빠는 커피를 끓여야 하니까."
정우는 커피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장미는 여전히 정우의 바지자락을 물어 당기면서 끙끙 앓음 소리를 했다.
"저리 가라는데, 장미야. 가라니까."
정우는 장미에게 발길을 날리며 소리쳤다.
"깨갱- 깽"
장미가 저쪽에 채여 나갔다가 다시 정우의 발치에 다가들었다.
"가리니까, 장미야.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정우는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때 거실에서 장미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웬 일이예요?"
"뭘?"
정우가 커피잔을 들고 거실에 나오며 물었다.
"섭하네요. 아직 엉뎅이를 붙이지도 못했는데 가라니요?"
"뭐, 가라니? 누가?"
정우가 깜짝 놀라며 모르겠다는 듯 장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장미의 얼굴이 흐려지고 있었다.
"흥, 이런… 능청스럽긴. 방금 가라니까, 장미야 했잖아요?"
"방금? 아, 어!"
"네?"
"허허허…"
정우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장미는 그러는 정우의 입술을 날이 선 눈길로 찍어보았다.
"오해마라. 네가 아니라 쟤를 가라고 했어. 자꾸 발치에 와서 애먹이잖아?"
"쟤라니요?"
"쟤, 쟤를 그런다니까."
정우가 강아지를 가리켰다. 장미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다.
"쟤… 쟤를 그랬다구요?"
"그럼, 쟤 이름이 장미거든."
"쟤가 왜 장미예요?"
"참, 쟤가 왜 장밀 수 없니?"
"아니에요. 흐흐흐… 쟤가 장미라구요? 쟤가? 흐흐흐…"
웃음소리가 음침하게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정우는 못내 가슴이 침침해났다. 장미가 웃음을 거두고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주먹으로 닦으며 말했다.
"쟤가 장미라면 전 더 이상 장미로 안 살래요."
장미가 몸을 일으켜 강아지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다가 저쪽으로 활 팽개치며 뾰로통해서 말했다. 그러는 장미를 바라보며 정우가 익살스럽게 한마디 했다.
"개에게 이름을 양보하는 거니? 그럼 너는 뭐라구 할 건데?"
장미가 잠간 입술을 감빨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저야 제 진짜 이름을 써야죠."
그 말에 정우의 동공이 커졌다.
"너, 제 이름이 뭔데?"
"화요."
"화라구?"
"박화. 왜요? 제가 꽃 같지 않아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
"엄마는 제가 꽃이기를 바랐었나 봐요. 그래서 꽃 화자를 이름으로 주었겠죠. 하지만 비틀어질 내 팔자라구야… 개떡같이… 들꽃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서 북경에 있을 때 장미로 살았어요. 흑장미로."
"흑장미로?"
"네, 흑장미요. 흑장미의 꽃말이 무엇인지 알아요?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래요. 손님들 앞에 흑장미예요 하고 소개하면서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에요 하고 생각했더랬죠.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성껏 손님들을 위해 봉사했어요. 북경에서, 아니 천상궁전에서 저, 꽤 잘나가는 에이스였어요."
"그랬었구나."
정우는 도도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반응이 왜 그래요?"
장미, 아니 화의 목소리에 가시가 박혀있었다.
"응? 아니…"
정우가 머리를 흔들었다. 금세 화의 입가에 웃음이 찰랑거렸다.
"웃기죠? 아저씨."
"뭐가?"
"저, 영어를 자습하고 있어요."
"영어를?"
"네. 외국인이 많았어요. 코대가 높은 인간들을 상대하려면 일상용어는 영어로 구사할 수 있어야 했어요. 하니까 되더라구요. 인젠 제법 안에서의 대화는 영어로 답새길수 있어요."
화는 차탁 우에서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얘야."
정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화는 커피를 홀짝거리다가 정우 쪽에 눈길을 돌렸다. 정우는 일시 뭐라고 말끝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엉뚱하게 한마디 했다.
"너, 흑장미를 본 적 있니?"
화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정우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왜 그러세요?"
정우는 화의 빨간 입술을 이윽토록 응시하다가 속삭이듯 물었다.
"흑장미에도 가시가 있지?"
"물론… 있죠. 있어야죠. 것도 장미니까요."
말을 마친 장미가 하회를 기다리듯 정우의 입술에 눈길을 주었다. 정우가 두 눈을 멍하니 뜨고 천정을 하염없이 응시하다가 천천히 머리를 돌려 화에게 눈길을 주었다.
"20여년 전이였지. 그때도 나는 흑장미라고 부르는 한 여인을 알게 되였단다."
"저와 닮았다는…"
화가 다잡아 물었다.
"그래, 역시 송림각이었어."
"그랬군요."
화가 커피잔을 차탁 우에 탕 하고 올려놓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느 날, 그녀가 나에게 나, 당신 아기 가지고 싶다 하고 말하는 거야."
"그그, 그래서요?"
"박순화라 부른다 했어. 그녀 절로…"
"바바, 박순화라구요?"
"그녀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사람들에게 끌려 다시 송림각에 갔을 때 박순화라는 본명을 가진 흑장미는 그곳을 떠나고 없었어. 따져보니 그새 내가 근 반년이나 송림각에 가지 않았던 거야."
"가시에 찍힐까 두려웠던 거죠?"
화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있었다.
"후-"
정우가 길게 한숨을 토하고 아래 말을 이었다.
"그랬던가봐… 나는 장미와의 인연이 그렇게 끝나는 것으로 알았단다."
"그래, 끝났어요?"
"쟤를 장미라 부르고 싶었어. 흑장미라구."
"쟤를요? 모르겠어요. 건 왜서죠?"
화는 천천히 눈길을 돌려 장미를 찾았다. 자기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정우에게 실망했던지 장미는 쏘파 밑에 옹송그리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후-"
정우가 또 한번 한숨을 톺았다.
"장미야."
화가 일어나 장미 쪽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장미를 끌어안았다. 장미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고 화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는 말없이 장미의 등을 쓸어주다가 천천히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화, 박화야."
정우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화가 침실 문을 열다 말고 머리를 돌렸다.
"아저씨, 수수께끼 하나 내드릴까요?"
"뭐? 수수께끼?"
정우의 눈길이 화의 입술에가 박혔다. 화가 입가에 실웃음을 피워 올리며 천천히 쏘파에 다가와 앉았다.
"20여 년 전, 안마방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살던 한 여자가 있었대요. 어느 날, 그녀는 문득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대요. 안마방에서 날마다 남자들을 접대했던 그녀는 그 애가 누구의 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대요. J의 앤가 싶으면 K가 의심되고 또 Z도 빼놓을 수 없었거든요. 하루 밤에 세 명의 남자도 접대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아저씬 알 수 있어요? 그 애가 과연 누구의 애인지?"
화가 잠간 말을 멈추고 정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우가 고통스럽게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감겨진 정우의 윗 쪽 눈까풀이 무시로 팔딱팔딱 뛰었다. 화가 일그러져가는 정우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 잘래요. 푹 자야 내일 또 새 힘이 솟거든요…"
화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우는 움직이는 화의 뒤 모습에 눈길을 박았다. 화가 입은 하얀 T 셔츠 등에 찍혀진 흑장미 한 송이가 아프게도 정우의 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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