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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 윗마을의 매화
2010년 03월 14일 10시 58분  조회:1936  추천:0  작성자: 동녘해

섬진 윗마을의 매화

며칠 전 내린 비로, 봄비답지 않게 줄기차게 내린 비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골짜기의 얼음이 절반쯤 풀리었다. 다시 살아난 개울물 소리와 폭포소리로 밤으로는 잠을 설친다.

엊그제는 낮에 내리던 비가 밤동안 눈으로 바뀌어 아침에 문을 열자 온산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볼만했다. 말끔히 치워 두었던 난로에 다시 장작불을 지펴야 했다.

옛사람들이 건강비결로, 속옷은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고 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곧바로 두터운 속옷을 껴입으면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저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햇살이 좀 따뜻해졌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앞을 다투어 봄소식을 전하는 방송이나 신문에 속아 성급하게 봄옷으로 갈아입으면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감기에 걸리기 알맞다.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는 교훈은 우리 선인들이 몸소 겪으면서 익혀 온 생활의 지혜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앞서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급하고 조급한 요즘의 우리에게는, 속옷만이 아니라 삶의 이 구석 저 구석에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 대응하라는 지혜일 수도 있다.

속도에 쫓기는 현대인들은 일년에 한두 차례 있을까 말까 한 꽃구경을 가더라도 건성으로 돌아보고 이내 후닥닥 돌아서고 만다. 그야말로 달리는 말 위에서 산천을 구경하는 격이다.

한하운의 싯귀처럼 '무슨 길 바삐바삐 가는 나그네'인가.

이곳 두메 산골은 봄이 더디다. 남쪽에서는 벌써부터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이곳은 남쪽에서 꽃이 다 지고 나서야 봄이 느리게 올라온다.

예년 같으면 벌써 꽃구경하러 남쪽에 내려갔을텐데, 세월이 내 발길을 붙들고 있다. 많은 이웃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며 걱정 근심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같은 땅에서 차마 한가히 꽃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에 꽃구경하던 일들을 되새기는 것이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남도의 백운산 자락 광양군 다압면 섬진 윗마을에 가곤 했었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옥곡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861번 지방도를 타고 몇 구비를 돌아 북상하면 바른쪽에 섬진강이 흐른다. 군데군데 대숲이 있고 청청한 대숲머리에 하얗게 매화가 피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왼쪽이 백운산 자락인데 다압면(多鴨面)에 접어들면 동네마다 꽃 속에 묻혀 있어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둘레에 꽃이 있으면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일지라도 결코 궁핍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곳 매화의 절정은 단연 섬진 윗마을에 있는 '청매실농원' 언저리다. 요즘은 대형버스로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여 있지만 그전에는 겨우 경운기가 오르내릴 정도의 오솔길이었다.

골짜기와 언덕에 수천 그루의 매화가 핀 걸 보면, 아무리 물기가 없는 딱딱한 사람일지라도 매화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기품 있는 꽃과 그 향기의 감흥을 모른다면 노소를 물을 것 없이 그의 인생은 이미 막을 내린 거나 다름이 없다.
섬진강을 읊은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꽃이 피고….
눈을 감습니다. 아, 눈 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이 꽃잎들'에서)

강 건너 풍경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지리산 자락 하동과 구례이고, 남쪽은 백운산 자락 광양 땅이다. 다압쪽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 큰 바위 곁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집들이 신선이라도 사는 것처럼 사뭇 환상적이다.

또 화개에서 하동읍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다압쪽 섬진마을은 매화로 꽃구름 속에 묻힌 무릉도원이다. 이 길목에서는 배꽃이 필 무렵에도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다.

강 건너 풍경은 이렇듯 아름답다. 그러나 막상 강을 건너 그 지점에 가 보면, 찌든 삶의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렇듯 허상과 실상이 겹쳐 있다. 사물을 보되 어느 한쪽이나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꿈은 꿈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깨고 나면 허망하다. 그것이 꿈인줄 알면 거기에 더 얽매이지 않게 된다.
어느 해 봄이던가. 꽃 속에 묻힌 섬진 윗마을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터덕터덕 지나가다가, 산자락에 눈에 띄는 외딴 집이 있어 그 오두막에 올라가 보았다. 누가 살다 버리고 갔는지 빈집인데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다. 언덕에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동백이 몇 그루 꽃을 떨구고 있었는데, 허물어져 가는 벽 한쪽에 서툰 글씨로 이런 낙서가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돈을 벌어서 빨리 자전거를 사주세요? 약속'

'약속' 끝에다가 하트를 그려 놓았었다. 무심히 이 낙서를 읽고 나니 가슴이 찡 했다. 자기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는 걸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아이는 자기 아빠와 엄마한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그 집 아빠와 엄마는 이 다음에 돈 벌면 사주마고 달랬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하던 그 집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궁금하다. 아직도 자전거를 갖지 못했다면 그 집 아이에게 이 봄에 자전거를 사주고 싶다.

* 법정스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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