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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서
2010년 03월 17일 19시 01분  조회:1794  추천:0  작성자: 동녘해

가을 들녘에서

내 오두막에 가을걷이도 이미 끝났다. 가을걷이래야 고추 따고 그 잎을 훑어내고 감자와 고구마를 캐고 호박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옥수수는 다람쥐들이 벌써 추수를 해버렸고 해바라기도 나는 꽃만 보고 씨는 다람쥐들의 차지가 되었다.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서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도 서릿바람에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빈 가지가 늘어나면 겨울철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 여름에 실어다놓은 통장작을 패는 일에 요즘 나는 재미를 붙이고 있다. 나무의 결을 찾아 도끼를 한두번 내려치면 쩍쩍 갈라진다. 질긴 소나무와는 달리 참나무는 그 성질이 곧아서 정통으로 맞으면 시원스럽게 빠개진다. 일에 재미가 붙으면 쉴 줄도 모르고 지칠 때까지 매달리는 성미라, 일손을 멈추고 며칠동안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 이삭 줍는 부푼 農心


들녘에서는 요즘 벼베기가 한창이다. 제천 백운면 평동마을 박달재 아래 장환이네도 내가 가던 날 벼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논에 엎드려 낫으로 한 포기씩 베느라고 허리가 휘고 눈알이 빠지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콤바인이 탈곡해서 부대에 담아주기까지 한다. 1천3백평 논에서 거두어들이는 데 한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인 장환이네 아버지와 논두렁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그 집 농사짓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전혀 쓰지 않고 퇴비만을 주는데 처음 몇해는 소출이 시원치 않았지만 지력이 점점 회복되면서 나아져 갔단다. 금년에는 시험삼아 무논에 우렁이를 길렀더니 우렁이가 잡초를 제거해주어 김맬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올 농사가 가장 실하게 됐다면서 더 겪어보고 이웃에도 널리 권할 생각이라고 했다. 화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살기 편해졌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우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인물들도 많은데 어째서 날이 갈수록 세상은 나빠져가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 날 논두렁에서 나눈 이 말이 생각의 실마리를 풀리게 했다. 세상은 우리들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기(氣)는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인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 마음에서 나온다. 신념에서 나온 그 기운이 우리 몸과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진동수를 지닌 파동이며 에너지가 있는 물질입자라고 현대물리학에서는 말한다.


우리들이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을 지니면 그 파동이 이웃에 밝은 진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쁜 생각을 하면 어두운 진동을 일으키며 둘레를 나쁘게 만든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업(業)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의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다. 그런데 이기적인 생각에 갇혀 생명의 신비인 그 「마음」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우주에 가득찬 그 에너지가 흐르지 않고 막혀 있어 세상은 병들어가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세상은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돌이키려 하지 않고 밖으로만 찾아 헤매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나빠져 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들은 절제하고 자제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불행하다.


절의 객실에 묵으면서 지난 주말 TV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았다. 역시 좋은 영화다.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통감하게 한다. 미국에서 최고 가는 대학진학예비학교의 교훈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 네가지 교훈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두려움을 지니게 하는지 소름이 끼친다. 개인의 취향과 창의력을 무시한 획일적인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지혜와 사랑과 덕성이 길러질 것인가.


▼ 세상은 왜 나빠져 가는지


교육이 할 일은 배우는 사람들이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개인이 지닌 특성이 마음껏 꽃을 피워 세상에 향기로운 파동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진짜 시를 가르쳐 보인 「존 키팅」같은 교사가 우리에게는 아쉽다.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은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배우기보다는, 남을 짓밟고라도 앞서도록 하는 경쟁심만을 잔뜩 부추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교육이다. 요즘 정치꾼들의 비열하고 추악한 행태도 이런 그릇된 사고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묵묵한 대지에, 말없는 민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막혀 있는 기운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꾼들의 「말잔치」에 귀가 아프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가을 들녘에 서면, 이 땅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열린 귀로 그 한숨소리를 들어보라.

 

*법정스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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