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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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진언씨 수상록 (6) 인간의 모습 댓글:  조회:7143  추천:0  2014-01-02
                                                         인간의 모습                                                              최 균 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과 대립되는 존재로서 스스로 인간, 사람이라 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자체가 판단의 기준이라고 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물의 한 종류이다. 다만 동물과 다르다는것은 생각할줄 알고 도구를 만들줄 아는것이고 심리적으로 부끄러워할줄 알고 웃을줄 안다는것이며 동물들이 기적적으로 진화한다해도 도저히 미칠수 없는 인간애와 정의감이다.     미닐리우스는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하느님을 닮았다하였지만 플라우루스는 인간,  사람이 아니라 늑대라고 악평하였고 HA.조운즈는 모든 아니꼬운 문명동물무리 가운데서 내가 미워하고 경멸하는 짐승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물정에 밝은 세속적인 인간이  라했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고 정채로운 론단은《아담도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한마디가 모든것을 해명한다. 그는 사과, 그 자체를 원한것이 아니라 그것이 금지된  것이기때문에 원한것이다.》라고 한 마크 트웬의 금언이다.       인류는 문명인로 잘 진화되였지만 동물성은 영원히 진화되지 못할것이다. 인류는 노아의 방주에서 겨우 살아남았지만 교훈을 잊고 비극을 재현하고있다. 인류가 그냥 이대로 자기 가원을 략탈하고 파괴한다면 가능하게 지구촌주인으로 남아있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을것이다. 인류는 이미 수요이상으로 너무 많은것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 자멸의 길로 곤두박질치고 있기때문이다.    초창기의 인류가 먹거리를 얻고 번식하려 한 수단과 열정은 너무나 유치하였고 원시적였지만 적어도 불공평은 창출되지 않아 목가적이였다. 그런데 진화가 가속화된 인류가 이미 고도의 문명을 이룩함으로써 조화세계는 철저히 망가져버렸다. 문명은 운명이였다. 힘은 악으로 되였지만 인류는 인류라는 문명한 이름을 지어내여 자기의 포악성을 덮어감추었다.     물론 문명이 없는 곳은 인간사회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자호감일뿐이다. 만물의 통치자로 된 인간은 만물지중에 최귀(最貴)라지만 가장 유일하게 잔악한 물종이다. 스스로 우주의 척도라고 자처함으로써 지구에 대한 수탈을 정당화하지만 인간의 문명은 도둑놈의 시대를 불러왔다고 개탄한 지자도 있고 문명의 시대를 파괴의 시대, 턱도없는 오만과 무지무지한 탐욕의 시대라는 문명론도 제기되고있다.     문명은 사실 인간의 광기로 번져졌다. 인간은 변화무상한 욕망의 화신, 형체를 알길없는 리기의 뭉치이다. 인간이 가령 수중동물로 되였다면 아마 바다생물도 언녕 씨를 말렸을것이다. 인간은 이제까지 욕심만 채우며 저질러 온 문명이 없이는 살수 없게 되였다. 살갗이나 오장육부나 뼈다귀로는 짐승으로 돌아갈수 없이 너무나 멀리 떠내려와 있다. 인류는 가장 리기적이고 악착하며 아니꼬운 동물로 되였다. 인류가 가장 아니꼬운 동물이라는것은 뭇동물들이 말할 때면 증명될것이다.     인간은 도덕과 정의를 등진후 가장 나쁜 동물로 변했다. 갈수록 문명에의 절망으로 사이비문명을 더욱 창궐하게 낳을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완전완미함에 도달할수 없음에도 의연히 욕심을 부리고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도 자기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 머믄다. 인류의 비극은 인류의 자기 과신과 무절제한 교만에서 기인된것이다.     인간은 가장 완미할 때는 동물중에서 가장 뛰여난 무리로 되지만 법률과 정의를 거절한후에는 동물중에서 가장 나쁜동물로 변한다. 인간이 인성을 내세우지만 그 인성이 바로 야성보다 더 극악무도한 품성이다. 인간은 야수성이 있음으로써 오해려 인간의 매력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절반은 짐승이요 절반은 마귀가 되였다는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일수 없다. 인성중에 악성과 맹수들의 야성이 결코 같은것이 아니다. 가령 인류가 수천년을 맹수처럼만 살았더라도 많은 물종이 절멸되지는 않았을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비유하였는데 리해득실에 따르는 취약성을 말한것인가? 인간은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할수 없게 된데서 방종이란 단어를 만들 어냈다. 인간은 의식이 병들었다면 비루먹은 당나귀에 비해 별로 나을것이 없다. 선량하면서도 악행을 거듭 자행하는 모순된 인간이 있을지 모르나 인간은 선행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악행으로 살아간다.     콜른은 인간은 역설의 화신이요 모순의 뭉치이라고했다. 인간은 문명의 첫걸음부터 진실성을 앞세우지 않았기에 진실에는 물이요 허위에는 불이다. 인간의 진실한 모습은 어데서 체현되는가? 무엇보다 량심을 쓰는 정도에서 현연된다. 인간의 일상의 행실이 바로 각이한 인간상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극장의 경영자이다. 극종이 다양한가 빈약한가 하는것은 그 자신에게 달렸다. 사람은 어떤 제복을 입으면 그 제복에 맞는 사람으로 행세하려 한다는 나뽈레옹의 말은 명언이다. 사람은 마치 아무액체나 부어넣을수 있는 빈병 이라할가? 기실 아무나 영웅이 될수는 없다. 비록 영웅이 될수 없어도 한평생 사람으로 남아도 행복한 일이다. 혹시 강자가 아무렇게나 주물러 만들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를 압제하지도 누구에게 압제당하지도 않을 때 이 사회에 평화가 영주한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식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배고프지 않아도 먹기 위해 먹고 목이 갈하지 않아도 마시기 위해 마시며 놀음처럼 발설하기 위해 섹스하는 향락의 기계로 전락되였고 웃으면서 살생할수 있는 기특한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욕망으로 살아가지만 허영심으로 포장한 빛좋은 피조물이며 운명에 끌려 다니는 미이라에 불과며 우주공간에 티끌에 불과하여 그림자로써만 빛난다.     F.칠즈는 인간은 신의 걸작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일생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그렇게 선량하지도 않은 나날의 련속이다. 인간의 판단력에는 랭철함보다는 감성 적인 즉흥시가 더 많이 끼여있다. 그러나 사람은 흐르는 물결따라 돌아가는 물레 방아가 된다면 싹수가 없다. 인류는 모두 같은 배에 탓다. 인간은 자연에서 배워낸 반항정신을 퇴화시키지 말고 끝까지 신장시켜야 한다.     인간은 두눈이 꼭뒤에 배기지 않았지만 올려다보는데 더 습관되였다. 한 개체 생명에게서도 가장 나쁜상태는 자아파악이 없을 때이다. 가령 한 인간이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이 없다면 비인간이라는 혹평에도 노여움을 잠재우고 있을것이다. 그렇지 만 한사람이 우연히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지 않으나 평생 사람이 아니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장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하는 수련이다.     인간은 결코 얼마나 가졌는가를 가치척도로 삼을수 없다. 가장 가련한 사람은 꿈마저 금으로 도금하는 사람이다.《돌이 되려거든 자석이 되고 사람이 되려거든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라.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따뜻하게 만물 을 기르는듯하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살아나고 마음이 모질고 각박한 사람은 차가운 눈이 만물을 얼게 하는듯하여 이런 사람을 만나면 죽느니라.(채근담》     따스한 가슴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남을 양으로 음으로 해치면서까지 제리속을 채우는 늑대같은 인간으로 남지말자. 죽어갈 때 참회하며 선량한 유언을 남기는것으로 한생의 유감을 미봉할수는 없는 일이다.                                                       2008년 3 월 14 일
299    진언씨 수상록 (5) 생명의 순간(수정고) 댓글:  조회:6508  추천:0  2014-01-02
                                                           생명의 순간                                                                    진 언         시간이란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시각과 시각과의 사이이며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무한히 류전되여 련속되는 물질존재의 기본형식이다. 공간 외에 존재가 황당하듯이 시간외의 존재란 역시 황당하다. 시간은 우주의 혼이고 공간은 우주의 몸집이다. 시간이란 때의 경과를 나타내는 량이나 자연현상의 독립변수로 사용되는 량으로 표시되는것만이 아니라 생명의 가는 사슬에 매 한고리이다.     시간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무정한 종신반려이다. 아주 어릴때의 시간은 땅에 나무꼬챙이를 꽂아놓고 그림자가가 도는것을 보고 점심때를 아는《가늠하는》시간이 였고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벽에 붙인 과정표에 따라 울리는 종소리로 시간을 헤아린《듣는》시간이 된다. 어른이 다 되여서는 탁상일력을 한장한장 번져지는 시간속에서 인생의 려정을 재여간다. 늙어진 다음에는 손꼽아 헤아려보는 시간이 된다. 아무리 옴니암니 따져도 남은 시간은 많지 않고 그나마 확실하지 않은 시간들이다. 주기적현상의 연장속에서 그것의 경과를 체험함으로써 느껴지는 시간엔 모두 민감하지만 그것이 곧 생명의 소모라는 시점에서는 덤덤한것이 우리들이다. 시간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인생은 육체로 구성된것이라기보다 시간으로 구성되였다고 말하는게 더 알맞을 같다. 생명이란 바로 시간이 한 사람의 존재의 체현이 아니며 생활이란 바로 시간의 흐름과 소화의 과정이 아닌가? 인생의 첫아침에는 세월령감이 울리는 퇴각의 북소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력사이래 시간에 관한 명언들도 많고 저서들도 많았다. 한마디로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자고, 군사가에게는 시간이 곧 승리이고 상인에 게는 시간이 곧 돈이며 의사에게는 시간이 곧 생명이며 농부에게는 시간이 풍작이며  학자에게는 지식이라는 등의  금언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서 금언이지 실생활 에서는 명기되지 않는다. 시간이 돈일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가치는 금으로 환산되 지 않는다. 돈은 없다가도 생길수 있고 잃고 또 얻을수 있다. 돈을 잃고 배를 앓는 사람은 많지만 시간을 스스로 흘리고 다니면서 조바심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간은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지만 사람은 시간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소털같은 날이라면 시간은 소털보다 더많다. 그러나 생명의 연장선우에서는 시간을 그렇게 계산할수 없다. 시간은 대부금이 아니다. 무리식장기대부금은 더구나 아니다. 시간은 세월이 인간에게만 나누어주는 트럼프장, 세여보라. 매양 스믈넉장이다. 더 쪼개면 매개인에게 매일 차례지는 시간은 86400초이다. 어느 누가 독점할수는 없지만 매개인이 시간에 대한 태도와 씀씀이는 현저하게 다르다.     시간은 인간이 연출하고있는 희비극의 길이를 재이는 눈금자이다. 시간은 세기적인 모든 기적의 일람표이다. 시간자체에는 완급이 없지만 심령의 시계에는 확실히 완급이 뒤바뀌기도 한다. 행복한 련인들에게는 시간이 잊혀지고있지만 자기 걸음을 늦춘적이 없다. 시계는 재난속에 모대기는 사람에겐 긴장을 조이는 잔혹한 올가미이 다. 불심지가 각일각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폭파약꾸레미를 높이 추켜들고 총탄속에 쓰러지는 전우들을 내다보는 영웅 동존서의 마음의 시계는 어떻게 달렸을가?    시간의 충고는 팔목에 찬 시계에서 읽을것이 아니라 마음의 시계에서 읽으라. 금으로 만들었든 은으로 만들었든 시계는 스믈네시간을 알릴뿐이다. 시간은 모든 번쩍이는것들에 녹이라는 랭소를 던진다. 시간은 잊지 않고 기억을 돌려놓는다. 시간이 날카롭게 벼리는것이란 없다. 시간의 흐름은 무형의 세척제로서 시간속에서 색바 래지 않는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가장 버리기 어려운 복수심조차 서서히 지워버린다. 그만큼 시간은 모든 심리고통을 치유하는 특수기능을 가지고있다.     신이 6일동안 세상만물을 만들어놓고 하루 휴식한것은 절대 시간이 넉넉해서가 아니였다. 의무도 사명도 없는 시간이란 없고 아무의미도 없이 지내보낸 시간도 없다. 시간랑비가 곧 생명랑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요없이 늘어진 기지개도 켜지 않 을것이다. 반대로 게으름뱅이는 시간을 할인판다해도 사고싶지 않을것이다. 밤새도록 향락에 빠진 탕자들은 벽시계를 내리여 둘러메치고 싶을거이요 취생몽사로 사는자에게는 시계가 거추장스러울것이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던가? 새로운 시간속에서 낡은 경을 읽지말라. 저마다 도적놈이 도적질을 할때처럼 분초를 다투며 시간의 촉박감을 느낀다면 짧은 인생을 두배로 살것이다. 가장 큰 희생이 희생된 시간임을 자각할 때 시간도 그 사람에게 너그럽게 아량을 보일것이다. 미래. 현재, 과거ㅡ시간의 세가지 발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절대 코노래를 부르며 걷지 않는다.      그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사람들이 끈덕지게 살아가게 하는 명줄은 미래이다. 그러나. 윌리엄 포크너는 말한다. 래일이란 오늘의 다른 이름일뿐이라고. 미래란 다른 문을 통해 돌아오는 과거일뿐이라고, 롱펠로는 쓰고있다.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 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소포클레스는 말한다.“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다. ”일상에 짬을 리용할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짬이 없을것이다. “오늘 가장 좋게 웃는자는 역시 최후에도 웃을것이다. –니체” 래일 소리높이 웃기 위해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할것이다. 시간은 인생길에서 기회를 안고간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는 버나드쇼의 묘비명은 많은것을 시사하고 많은 사색을 안겨준다. 한 사람의 인생길은 온갖 불행으로 점철되여 있지만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이 그저 생물이 아니라 인간이면서 인간의 할 일을 모르는것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한 소년이 길을 걷다가 동전한잎을 주었다. 고생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고 자랑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그뒤로 소년은 땅바닥만 훑어보며 걷게 되였고 평생 총 13달러 26센트를 주웠다. 세월이 지나 죽음을 앞두고 공돈을 보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그는 땅바닥만 훑는 긴긴세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인생의 귀중한것들을 모두 잃고 살았다. 눈부신 태양, 아름다운 꽃들, 가을서리에 붉게물든 나뭇잎과 무지개, 사시절의 풍경들, 사람들의 미소…공돈을 좋아한 소년이 순간의 감각을 좇아 허송한 시간을 무엇으로 결산할것인가?     저축해둘수도 없고 돌려놓을수도 없으며 시간의 근원지를 찾을수도 없고 복제할수도 없으며 예산분배할수도 없이 순간적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것이 시간의 특성이다. 그러나 시간은 엄연히 가장 보귀한 자원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가장 개발하기 어려운 희귀자원이고 또 가장 무심하게 랑비할수도 있는 무료재부이기도 하다. 비록 보이지도 않고 만져볼수도 없으며 냄새를 맡을수도 없고 무성무형이며 또 간곳없는 무정한 존재이다. 부디 라태와 용속함으로 시간을 기록하지 말라. 돈을 목숨으로 여기는 자는 수전노이지만 시간을 목숨으로 여기는 사람은 창조자이다.     시간은 일체 의혹과 오해의 해설자이다. 시간은 가장 현명하고 공정한 재판관이라 한다. 시간속에 감춰진 그 모든 음험하고 악착한 짓거리들이 세월속에서 다시 드러나게 되여있다. 시간이야말로 잠시 법망에서 새여나가 멋대로 소요하던 일체 력사의 죄인을 재판하는 엄정한 법관이다. 시간이 력사의 죄인들을 재판하기를 고대하는 기다림은 가장 가치로운 기다림이며 가장 비장한 시간소모이다. 이런 시간만세!!                                        2008 년 3 월 9일                                                 
298    진언씨 수상록 (4) 살아가는 자세 댓글:  조회:6039  추천:0  2014-01-02
                                                             살아가는 자세                                                                   최 균 선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듯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인생자세일지 누구나 묘망하리라. 고서에《인정세태 숙홀만단 불선인득태진 (人情世太倏忽万端 不宣认得太真)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인정세태가 변화무상하므로 너무 진짜로 알지 말라는 뜻으로 리해된다. 아닌게 아니라 반칙이 다반사인 인생유희인데 매사에 너무 정색해 림하면 제근심, 남의 근심을 다 끌어안기가 십상이니 백번도 지당한 말이다.     늘 이렇게만 문제를 본다면 번뇌와 잡념을 풀수 있다는 고인의 훈계를 명심하지만 인의는 기죽어 한숨쉬고 리욕만 얼씨구, 북장단치는 시대에 의로운 일은 가물에 콩싹나듯 하고 비정은 우후죽순인 세상을 그저 긍정적으로만 보려한다면 자기 속임이 되지 아니할가? 걱정이다. 내가 눈이 비뚤어서인가?     송조때 소옹(邵雍)이란 유생이《석일소운아 금조각시; 부지금일아,유속후래수 (昔日 所云我, 今朝却是伊;不知今日我又属后来谁?)》라고 개탄했는데《어제의 내가 오늘 남이 되였으니 오늘의 내가 래일 또 누구에게 속할지 어이알랴》라는 뜻인듯 싶다. 어두운 방에 알몸으로 홀로누웠을 때를 내놓고는 자기 본연을 살짝 감추고 돌아가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맞게 제2의, 혹은 제3의 인격을 내세워야 하니 자기 자신조차 알길없는데 남이야 더구나 알수 있겠는가?    변덕많은 4월의 날씨처럼 가늠할수 없는 인정세태를 용케 맞추어가며 말썽없이 살아가려면 자기의 본연은 아예 접어두고 내가 아닌 나를 내세우는게 현명할듯 싶다. 돈이 웅변하는 시대, 진리는 입다물고 인정은 점점 더 사막화되고 세속은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덕행은 시무룩해서 한켠에 비켜서있고 비행은 쌕스폰이랑 불며 내노라 행진한다. 해로운 짓을 하면 칭찬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위험하고 우둔한 소행으로 간주되는 속세에서 산다고 길이 개탄헸던 쉐익스피어가 그때 벌써 오늘까지 내다보 았다는 원견에 탄복이 앞설뿐이다.     내 본시 아둔해서 인생을 거의 살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답을 못찾았다. 일생을 무난하게 살다가 고종명하는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이겠지만 시끌벅적한 인생현장에서 무풍지대가 어디에 있으며 바람새 세찬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과연 있을것인가? 조금 사는듯싶게 살자니 국외인으로 살수 없고 더구나 진공상태에서 살수는 없으니 부딪치고 넘어지고 피터지고 상처속에 고름을 짜내며 인생의 비탈길을 아득바득 톺아오르게 생겨먹은게다.     등산길은 신명이 나기에 앞서 숨찬 생명운동이라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잘 닦아놓은 길로 가마에 앉거나 자동차에 앉아 오르고도 남들과 같이 환성을 내지를수 있지만 두발로 허위단심 올라야 산에 오르는 진정한 멋과 맛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골짜기에서부터 오른자가 제일 높이 오른 자라는 도리도 잘 먹히지 않는다.    산에 오를 때 정상에만 눈을 팔지말고 발밑을 살피고 정상이 아득할수록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것이 요긴하다. 성급함이 결코 걸음을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내닫지도 말고 쉬지도 말라. 일등에 몸이 달면 잠시 앞설수는 있지만 뒤따르는 사람보다 안전 도는 훨씬 낮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밑바닥 인생길도 나름대로의 고봉에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랑만적일가?     생명은 촉박하고 세월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나 참고 견딜줄 알라. 인내야말로 운명을 좌우지한다. 인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빨리 걸으면서도 말이없는 나귀의 미덕이지만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기도 하다. 인내심도 모든 고난의 적설을 녹일수 있다. 진정 강한자는 끈질기고 초조함으로 기다림을 달랠줄 아는자이다. 참는다는것과 견뎌낸다는것은 의미의 차이만이 아니라 태도의 차원문제이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희망이 깨지면 인내를 지속시키라. 만약 당신이 꽃지는 현실에 참을수 없다면 결실의 미래도 잃을것이다. 허리아픈 김매기를 참아 내지 못하면 가슴이 뻐근한 풍년가을을 맞지 못할것이다. 자기가 갈수 있는 길, 자신 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 굳건히 내처 걷는다면 꽃피는 새 마을에 이를것이다.     인생은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 배우며 가는 길이다. 속담에 무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아는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말은 퇴색하지 않았다. 평생을 따스한 마음으로 책을 읽되 찬눈길로 세상을 투시하는것도 중요하다. 성거리는 의혹이 우유부단을 낳을수 있지만 데카르트는 영원히 선각자이다. 의심할줄도 알라. 의혹이 만사통은 아 지만 적어도 투시경에 초점이 될수 있다. 무지는 맹종을 낳고 맹종은 자기상실을 의미한다. 화복이 무상하다고 하는것은 세상만사에 호불호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성실이 손해의 대명사로 되고 성실한 사람이 바보취급을 받는 현실이지만 자기 인생서마저 허구할수는 없다. 거짓된 세상에 살더라도 자신에게는 성실해야 한다. 자기 약점이 드러날 때처럼 속상한 일은 없지만 자기 결함에마저 성실함으로써 오히려 강해질수 있다. 자기에게 충실해야만 남을 사기치지 않을수 있다. 자기마저 잘 기만하는자들만이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것을 락으로 삼는다.     성실의 뒤면은 선량이다. 자초에 인간은 착하디 착했을것이다. 인류는 진화하면서 선량함을 뒤로 밀어내고 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량함은 인격력량에 기본핵이다. 죄악적행각으로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선량을 잃는다면 인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다. 성실과 착함으로 웃음속에 칼을 갈고있는 자의 내심까지 읽을수는 없지만도그러나 필요없이 너무 많은 내막을 알려하지 말라. 그러면 누구나 꺼리는 사람이 될것이다. 세상도는 형편에 눈이 어두워도 안되지만 알지도 못하는 새 노래에 손벽을 치는 싱거운 짓도 삼가해야 한다.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느니 차라리 입은 닫아두고 마뜩치 않은 눈길을 나름대로 배배 꼬아보는것이 지각있는 사람의 본심이 아닐가싶다. 물론 처사에 진중하지 않을 수 없으나 너무 각박해서도 안되며 때와 장소를 참작해서 좋도록 처리해야 스스로 딱한 궁지에 빠지지 않는다는 중용철학도 있거니와 투시불명의 인정이요 미궁같은 인생현장을 헤쳐가려면 리해와 관용을 앞세우는만큼 량책이 없겠지만 일신에 절실한 실리앞에서 누가 번번이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있을소냐?     인생에는 유모아도 있어야 한다. 유모아가 없는 생활은 사막과 같고 물이없는 저수지와 같다. 유모아를 모르는 남자는 련애에는 맹꽁이 될것이다 유모아가 없는 생활은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다. 유모아는 지혜의 명함장이요 사상의 불꽃이다. 유모아는 여유로운 마음이 없으면 지어내지 못한다. 유모아감은 지성인들의 일종 풍도이다. 유모아는 웃기는것이 아니라 웃음속에서 찔림이 있게 하는것이다. 눈물머금은 유모아야말로 유모아의 수석대표이다.    헤겔은 말한다. 나비에게는 나비의 세계가 있고 까마귀에게는 까마귀의 세계가 있듯이 삶도 각자 믿는바에서 정신의 기둥이 될 세계를 가지고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마음과 상관없는 곳에서 헤매고 있다면 자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내가 살아가면서 혹 실수와 실패에 처할지라도 너무 자책하거나 좌절하지 않는것도 일종 지혜이고 슬기이기도 하다. 락심인즉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인생자세가 된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살아있고 살아가야 한다면 열심히 살자는 말이다.                                                       2008년 3 월 19 일  
297    진언씨 수상록 (3) 세태풍속화 댓글:  조회:6825  추천:0  2014-01-02
                                                                 세태풍속화                                                                       최 균 선       얻고 잃고 빼앗고 빼앗기는 끝없는 쟁투가 인생주제곡인가? 못가진자의 몸부림은 수요이지만 부자의 욕심은 자족감의 결핍증이다. 그래서 못가진자와 가진자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것이다. 부지런함이 만능은 아닌터, 황소의 숙명에서 그것을 잘 읽을수 있니라. 황소가 우직하다고해도 자기가 끄는 짐의 무게를 잘 알고있다. 그러나 종시 투정질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아빠진 문명인들은 오히려 둥글이의 이런 정신을 우직하다고 평판한다. 순종하면 굴종을 강요하는것이 강자의 고질이고 온순하면 온순할 수록 릉멸이 기탄없이 발길질하는것이 고태의연한 인습이다.       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다른 사람의 행운이고 이웃의 어리석음은 거울이기전에 먼저 웃음거리로 흥미진진해진다. 그 어떤 불상사이든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난것이면 식후한담거리가 된다. 남의 불행으로 자기의 슬픔을 보듬는것은 거의 모든 인간들이 쓰는 량책으로 되였다. 우리에겐 재미있는 계률이 매우 많다. 례컨대 모두가 잘못일 때는 모두가 옳다는것이다. 공동의 실패는 누구도 책임져야 할 일이 없어서 안심이 되니까말이다. 야비하기는해도 그 지당함에 더 할말이 있으랴,     남의 흉을 볼 때 근본을 잃는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이를테면 절름발이도 남의 우스운 걸음새를 보아내는데 결코 짝지지 않는다. 수수방관의 차원을 넘어서 랭혹무정이 인간상정이 된셈이다. 이렇듯 인간은 저마다 제목숨을 살지만 종래로 남의 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매개인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입으로 엮은 수술대우에 누워있게 만들어진 인생현장인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식으로 사는것이 모두의 인생궤적이다. 그만큼 뭇눈길은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읽는 투시기로 되여있지만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철면피가 가장 수요되는 오늘의 문명시대이다.     영원한 친구가 없고 영원한 적이 없다는 말이 현대창조어인지 모르겠으나 옛날 옛적부터 현재까지 주욱 내려온 인습의 하나이다. 이 시점에서《산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가 삶아지고 새를 다잡으면 좋은 활썩네. 적국을 이기면 장수가 죽을 차례.》라는 전고(典古)는 영원히 색바래지 않을 절대진리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이 력사규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또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력사가 이를 너무나 알기쉽게 설명한다. 권력욕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혈전만리를 헤쳐온 전우도 가벼운 한숨을 한번 내쉬고 숙청한다. 왕후장상에 씨종자가 따로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진승왕도 함께 김매던 가난뱅이친구를 꺼림으로써 제혀를 깨물었던것이다. 그것을 옛날식으로는 배은망덕이라고 질타했지만 권력을 위한 불의와 가혹성은 한 통치자의 과단성으로 부각된다. 재래로 그랬다.     예나제나 권력한자락 잡았을 때 음으로 양으로 해먹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세태인심속에서 막무가내함과 마비와 종용이 태평하게 살고있다. 그가 넥타이를 매고 빙글의자에 앉은 위군자이든 야차같은 강도이든 죄악은 수요의 별명이 아니라 인성에 뿌리박은 질병인것이다. 산에 범이 있는줄 알면서도 기어이 산행을 하는것은 만용이 아니라 욕심때문이다. 탐욕의 저쪽은 분명히도 천길낭떠러지인데 한사코 강행군하는 자들의 만용은 과욕이 코를 꿰여들고 앞에서 잡아끌기에 아무도 구할수 없다.     아무나 절실한 체험을 하는것은 아니지만 겉보건대도 권세란 좋은것이다. 오래전 석탄도 공급제를 하던 그 시절, 먼저 실어달라고 급한 사정을 하는 아낙네들앞에서 갖잖게 위세를 부리던 석탄부의 밀차군들의 인간상을 보며 돼지임자보다 돼지몰이군이 더 우쭐한다는 저차원의 권세욕을 다시 씁쓸하게 웃은적이 있다. 죽은범의 등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는 그런 용기만큼 싱겁고 너절한 용기는 없으리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원리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우리가 더우면 몰켜들고 추우면 헤여지는 양들의 습성을 악습이라고 비양거릴수 있을가?가장 숭고한 일이 가장 리해불능의 일이 된다. 자신이 육박전에 나가지 않는 전제하에서 누구나 용사로 자처할수 있다. 그래서 아군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처절한 영화장면도 해바리기씨를 까며 구김없이 웃으며 볼수 있는게 인간심통이다.     인정세태에서 시기와 질투심이 아마도 제일 악습이리라. 낮은곳에 서있는 사람은 벼랑을 근심할 필요도 없지만 높이 서있으면 먼저 세찬 바람을 맞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빼여나면 뭇눈길들이 좋게 봐주지 못한다. 하긴 갈가마귀도 제일 크고 단 사과배를 쫏아먹음에랴, 사람들도 열매가 달린 나무에만 돌을 던지는 법이다. 남이 잘되면 공연히 심술나고 남이 슬퍼하면 일종 안위를 느끼는 인간심사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나는 모른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아파한다는 속담을 거들면 명랑한 해답이 되는걸가? 아무튼 질투는 인간심사의 종양임에는 틀림없으리라.     주는 인심은 가지려는 인심앞에서 다 그랑데가 된다. 먹은죄는 종지굽에 담는다지만 진수성찬이 흑백을 전도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그 사람의 륭숭한 대접을 받았으므로 좋은 사람이 되고 인정으로 시시비비를 덮어주고 악한도 친구로 둔갑하기 일쑤이다. 충언이 쓴 보약과 같다고 권장하는 사람의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 자고로 충언에 귀를 열고 웃으면서 충언을 받아들인 황제가 극히 적었거늘, 결국 그런 사람들이 더구나 입발린 말을 좋아한다는것이 실증된다.     민감한 금구에서 멀찍이 물러나와 초로인생의 세태풍속화나 다시 읽어보자.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는 우리 고유의 속담이 있다. 반대로 생선과 손님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난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의 소박한 뜻은 부자들도 자인하는것이지만 쌀독 인심의 차원이 아니라 만세불변의 인습이다. 가는 손님 뒤꼭지가 예쁘다는 속담에는 가난한 사람의 막무가내한 걱정만 담긴것이 아니다. 루만금을 가진 부옹들에게 도 가난한 친척은 불편한 보따리로 락인되여왔다. 이것도 역시 자손만대로 물려받을 인정세태이다. 린색은 절약과 통하기도 하지만 되돌아와서 후덕과 박덕의 여하이다.     인심은 시끌벅적한 대도시에서만 메말라가는것이 아니다. 우물가에 드레박을 놓아두던 미풍량속은 기억의 한페지로 되였다. 우물을 긷던 시대가 존속되여야 할 리유가 없기에 우물과 드레박, 물동이는 향촌의 잊혀질수밖에 없는 서정시라지만도 그때도 사람들은 박우물을 떠마시면서 누군가의 후덕한 손길을 생각하지 않은게 례사 였다. 우물이 마르기까지는 물의 가치를 모르는게 보편적인 심사이다. 소금이 바다를 떠나고나서야 자기 가치를 알았다는것은 주체성감오로서 별개의 문제이다.    모든것이 자아의 리익과 편리를 기준하는 이 시대이다. 이를테면 내가 하는것은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론리가 당당하게 성립된다. 허랑한 나비가 꽃이 자기에게 반드시 감사드려야 한다고 믿는 심사처럼 비틀려있다.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 심연을 갖고있는 법이던가? 우리는 자기가 미처 몰랐던것을 알고나면 기쁨과 함께 지각한 아쉬움도 맛보게 된다. 자기가 아는것을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하는것이다.     아아, 참으로 인정세태란 요지경속같으니 어느것이 콩알이고 어느것이 팥알인지 누가 일일이 헤아려 볼수 있을손가? 눈에 보이는 인정세태를 대강 읽고나서 나오는 소리가 자가당착의 말세타령이니 스스로 자소(自诉)에 주저앉을수밖에 없겠구나.                                                  2008년 3 월 19 일  
296    진언씨 수상록 (2) 인성의 뉴앙스 댓글:  조회:7118  추천:0  2014-01-02
                                                            인성의 뉴앙스                                                                  최 균 선       사물에 대한 인간의 자아중심주의적인 품평은 인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나를 좋게 대하면 벗이고 나에게 해로우면 원쑤로 되는 등의 심리모식이다. 원균이나 을사오적들과 친한 사람들이 있었고 리순신장군이나 안중근 지사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오리가 오리무리를 따르고 사람들은  류류상종으로 패당이 무어지는것이다.     인성은 이미 내려진 정의를 가리킨다기보다 인간의 자재성, 현존하는 본성을 가리키는것일진대 마땅히 인애와 흉포와 잔악성, 호상배려와 호상쟁투, 성실과 음모 궤계 등 인간성의 두극단을 포함해야 할것이다. 다른 동물처럼 자연에서 걸어나온 인류이기에 누구나 다 마음속에 야수성을 보류하게 된것이다. 인간은 약속력이 없으 면 짐승보다 더 잔악해질수 있듯이 력래의 인성악은 모든 동물의 소행을 합친것보다 더 악착하여 스스로 진저리쳐질것이다.     인류는 문명하고 동물은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하는게 인간의 평판이다. 인류가 얼마나 잔혹하게 동물을 대하는가는 불문하고 인간은 동류에 대해서 승냥이보다 더 잔혹하다는것을 자인하지 않고있다. 승냥이들은 동족을 대함에서 선의적이든 적의를 가지고 있든 조금도 감추지 않지만 인간은 지극히 허위적이다. 속으로는 절치부심하 면서도 웃음속에서 칼을 간다. 승냥이들은 적수와 선혈이 림리하게 할퀴고 물어뜯  으며 싸우다가 지게 되면 패자임을 승인하고 순순히 물러난다.     그러나 인간은 동류와 투쟁할 때는 명목이 많다, 칼로 베고 찍고 불태우고 물에 처넣고 총으로 쏴죽이고 폭격하고 독가스를 쓰고 원자탄을 쓴다. 고대중국에서 감행 한 주리틀기, 대못을 박기 등 혹형과 요참, 릉지처참, 차렬형 등 죽이는 방법을 동물 들이 억만년 진화해도 흉내내지 못할것이다. 승냥이들도 막부득이한 경우 동족의 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생존위기에 처했을 때는 로약병자들부터 먹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중심주의이다. 조물주가 인간을 빚을 때 악을 심어준것은 실수였을가? 아니. 조물주는 인간을 피냄새를 맡는 사냥개로 만들려하지 않았다. 하건만 인간의 진화는 살생의 진화였고 인간의 력사는 피의 력사였다. 진실한것도 인성이지만 그만큼 황당한것도 없으리라.     사람들은 매번 한마리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를 흉악하다고 질타한다. 그러나 인간무리의 서로의 횡포와 살륙의 현장을 살펴보라. 양을 잡아먹는 승냥이나 각마를 잡아먹는 사자를 비난할 리유를 잃고말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 유일하 게 확신할수 있는것은 변덕을 부린다는것이다. 례하여 길을 가다가 누가 넘어지면 웃 음거리이기에 아무도 넘어지지 않으면 싱겁게 생각하는게 우리네 인성이다.     순자의《성악》론이나 맹자의《성선론》이나 고자의《중용론》을 두고 아직 의론이 분분하나 시비의 진가는 잠시 제쳐놓고 인류력사를 돌이켜보라. 전 세계는 말고라도 조선조의 궁정비사가 인성의 잔악함을 여지없이 말해준다. 권력의 보좌를 위해서는 육친불인이고 골육상잔을 술마시듯 하였다. 악랄한 인성은 원래 탈권자의 성품이 되여질 리유가 없다. 하지만 권력욕에 혈안이 되면 혈육도 마상의 환난지우도 불길한 잡귀신으로 보였을게다. 그래서 권좌에는 성인이 따로 없다고 하는것이다.     자기를 해친자를 용서하는것은 관용이지만 인간성의 원리는 아니다. 누군가 자기의 악착한 인성을 발견하고 상심할 대신 너털웃음을 웃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한 개체생명으로 말하면 자기 원죄에는 인성의 상실과 자포자기도 들어있다.     포송령의《료재지이》에《견간(犬奸)》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줄거리를 간추려 말한다면 한 고장에 장사군이 있었는데 일년치고 많은 날을 외지로 떠돌아다 니다보니 그 안해가 늘 독수공방하였다. 규방의 적막을 이기지 못한 녀자는 욕정을 달랠 방법을 찾아냈다. 집에서 기르고있던 흰개를 훈련시켜《군사내》로 만들어서 매일처럼 흰둥이와 운우지정을 나누며 즐기였다.     어느 날 사내가 돌아와 안해와 동침하게 되였다. 그런데 질투심이 치민 흰개가 공공연히 방안에 뛰여들어 자기의《정적》을 물어죽였다. 인명사고는 즉시 관아에 고해졌다. 자세히 캐여묻지 않고도 사태를 짐작한 현령이 간부와 개를 사형수감옥에 가뒀다. 여기서 얘기가 거의 끝난것 같지만 더 경악할 일은 뒤에 벌어졌다. 두옥졸이 개와 녀자를 뜨락에 풀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다가 개가 어떻게 녀자와 교합하는가를 구경시키고 돈을 받았는데 구경군이 백여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조금 황당한 옛얘기지만 두 옥졸과 백여명의 관람객들의 심리에서 인성속에 숨은 야수성의 경향을 엿볼수 있지 않을가? 물론 이야기가 보편성을 띠지 않는것도 사실 이고 그러한 인성의 표현으로 인성일반을 폄하해서는 안되지만 인류는 기나긴 세월 속에 야수성을 조금씩 극복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완성된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려운것은 문명개화의 와중에 “이화”된 야성들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들이다. 아이를 납치해다가 불구로 만들어 거리에서 구걸하게 하거나 내달리는 자동차와 부딪치게 하고 배상금을 받아내는 놈팽이들이 있는가 하면 친딸을 해치는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들도 멸종되지 않고 륙속 까나고있다.     세계문명국이라는 미국의 병사들이 이라크의 감옥에서 포로들에게 감행한 성적 학대들도 인성속에 잠재한 수욕의 발작으로서 현대문명인의 수치스러운 행각들이 아닌가? 애정과 성애방면에서 드러나는 본성이 가장 적라라하다지만 그것은 인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도저히 용납될수 없는 야성도 아닌 인간악인것이다.     썩박돌도 돌이다. 인성이 훼멸된 인간도 인간이다. 그러나 다만 인피를 쓴 동물이라는 전제가 붙어야 할것이다. 현대문명의 세척제로 인성속에서 발작하는 가지가지 야수성을 조금이라도 씻어내려는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선량한 동기이다. 절대세계란 없다. 오직 상대세계만이 있다. 선속에도 악이 있고 악속에도 선이 있다. 그것이 선하다는것은 그 속에 이미 악이 포함되여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결과만 보고 원인은 따지지 않는다. 원인이 더욱 중요한데도 말이다. 자연은 간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는게 자연을 보호하는게다. 자연에는 쓰레기도 없다. 완전순환이다. 오염이란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령 욕망을 버리고 또 버리면 마음에 괴로움도 미움도 없을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다. 물론 내는 철학가가 아니여서 이러한 상황을 바르게 리해할수도 평가할수도 없다.     졸문을 마무리하면서 자문해 본다. 당신이 인간성을 옹호한다고 말할 때 인간성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것이 아닌가? 당신이 인간성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엔 당신은 스스로에게 만족한것이라는 명언이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이로써도 부족하다면 《우리가 인간성에 대해 정말로 유일하게 아는것은 변한다는것이다. 우리가 말할수 있는 인간성의 유일한 속성은 변화이다.》라는 와일드의 말을 첨부해둔다.     하긴 속심을 털어놓으면 오히려 조소를 살수 있는것이 오늘의 인정세태라 얼마나 공감이 생길지 모를 일이지만 자기가 살고있는 시대에 불평부리고 탄식하며 인류에게 가망이 없는 기대를 걸어보는것도 일종 인성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2008년 3 월 17 일
295    진언씨 수상록 (1) 인생만담 (수정고) 댓글:  조회:6779  추천:0  2014-01-02
                                                           인생만담                                                                진 언       만화속 세상에 만화같은 인생의 내함은 다양하고 풍부하여 수십억 창생이 해석하는 한 풀이도 각양각색일수밖에 없다. 투기는 인생이란 틈만 있으면 새여드는 바람이라고, 야심가는 인생이란 어마어마한 권좌라고, 허영은 인생이란 알락달락 눈부신 외투라하고, 염세는 인생이란 언제가는 처참하게 깨여져가는 뭇배라고…     흔히 인생려정이라 한다. 그러나 준비도 없고 련습도 없이 세월따라 걸으면서 시골아낙이 부랴부랴 보리방아찧어 저녁밥짓듯이 그때그때 채비하는 숨가쁜 길이다. 초행길이라 우왕좌왕하기 마련인데 산다는것이 무엇인지를 걸으면서 배우고 가끔 꽃 도 꺾는 여유로움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뒤짐지고 슬슬 걸어도 되는 산책길은 아니다. 거부기 걸음을 할수도 없고 토끼처럼 단숨에 내달리고 한잠 느러지게 잘수도 없다. 인생길엔 선택이라는 갈림길 에서 고생길따라 행복산에 오르는 비탈길이기도 하다. 허위단심 가고가서 이르는곳 인즉 북망산이지만 내처 가야만하는 인생길, 추겨든 생명의 횃불이 어느 굽이에서 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마다 감수능력에 따라 방향이 정해지고 가치취향에 따라 걸음새가 다르게 된다.     인생을 한권의 소설에 비유한다. 인생소설은 길수도 짧을수도 있지만 고난의 려정이 가장 매력적이다. 누구의 인생이나 대하소설이 될수 있지만 어떤사람들이 쓸것이 없다고 여길뿐이다. 회억록은 대필할수 있지만 생활경력은 대신 엮을수 없다. 인 생의 전 40년은 텍스트로 엮어지고 30년은 주석을 해석하는데 바쳐진다. 한부의 완전완미한 인생이 없는것처럼 영원히 미완성작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인생의 아침엔 도취되고 한낮은 권태롭고 황혼녘엔 후회가 깃들게 된다. 20대엔 열정으로. 30대엔 의지로 살아도 40대엔 권태가 갈마든다. 인생길에도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소모하는 4계절의 운행법칙이 있다. 돌아보면 구슬땀 흘린 자국은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걸어온 길이라 소중한것이다.     생각하는 인생은 희극이요 느끼는 인생은 비극이다. 확실히 인생마당은 희비극이 벌어지는 극장이라고 할수 있다. 극정은7정6욕으로 엮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내면의 무의식속에서 표출된다. 인생은 장막극일수도 있고 단막극일수도 있지만 막간극에 광대만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생극에는 련습이 없다. 많이 련습할수만 있다면 자기 형상을 멋지게 부각할것이다. 인생극은 연출하면서도 운명적사명이기도 하다.     혹자는 인생현장을 경기장이라고도 하지만 나름대로 종점에 이르기만 하면 모두 우승자로 칠수 있다. 이미 달려온 인생길이 꿈길이였다면 이제 걸어갈 길도 꿈속처럼 걸어갈것이다. 인생은 무지개라는 노래도 있던데 인생길은 때로는 소소세우가, 때로 는 궂은비 쏟아지는 광야의 오솔길이라 할수 있다.     인생을 학교라고도 한다. 인생학교에는 우수생이 적다. 지정된 계몽스승도 없고“박사도사”도 따로 없기때문이다. 인생학교에서 더하기식만 배웠으면 좋겠지만 인격력량은 덜기식에서 배워야 한다. 인생학교에는 행복을 강의하는 선생보다 불행을 해석하는 선생이 더 훌륭하다. 행복이란 불행속에서 그 의미가 잘 해석되기때문이다.     인생은 유희이라고 하지만 결코 심심풀이가 아니다. 분망하면 유희가 짧을것이고 심드렁하면 지리멸렬할것이다. 다행히 인생유희에 가능성이란게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지레 락심할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꼭 이루어질것같은 소망을 안고사는 인생은 의미로울것이요 성가실만큼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의 인생은 하품이 나올것이다.     생명은 연소에 있다. 때때로 만취하고 밸이 탈리도록 웃어대고 가슴이 터지도록 소리쳐보지 못하는 인생은 사해와 같다. 휴식없는 욕망과 허영과 정욕으로 삶을 꾸며가지만 인생의 필수품은 지향이며 끈끈한 추구와 사랑이다. 가령 인생이 꿀떡같다면 한입에 삼킬것인가? 좋아도 싫어도 야금야금 먹어야 하는 겨자떡같은 인생이다. 그 과정에 눈물머금은 인생유모아가 엮어지기도 한다.     인생은 그림그리기와 같다고 할수 있지만 그림같은 인생화가 되기엔 인생무상이라 종잡을수 없다. 인생은 처음 백지로 펼쳐진다. 거기에 무엇을 그리는가는 각자 나름이다. 그러나 능란한 인생화가란 력래로 없었다. 생명은 초로같지만 생명의 순환으로 천만년 인류사를 엮었고 지금도 불가절멸의 인간사회를 가꾸고있다.     인생을 일장춘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열심만이 꿈을 불러온다. 같은 꿈이라도 누구는 꿈을 현실로 수놓고 누구는 현실을 꿈처럼 엮으려 할것이다. 이미 걸어온 길이 꿈길같았다면 남은길도 꿈길같을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자만이 꿈꿀수 있다. 미래는 설계도에 불과하지만 실현할수 있다는 생각이 인생을 의미롭게 한다.     누구나 단술을 마시려 하지만 고배를 더 들게되는 인생현장이다. 평범한 일생은 안일하지만 파란만장한 인생이야말로 산냄새가 짙을것이다. 인생이 호수같다면 너무 단조로울것이다. 생활은 매일 반복되지만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것이 아니다. 인생 에 번뇌를 느끼고 고통에 모대긴다는것은 삶에 자각했다는 표징이다. 남이 못하는 일을 해내고 먹지 못할것을 먹어봐야 인생의 진미를 맛볼수 있다.     인생길은 첫걸음부터 불안과 유감으로 시작된다.생활은 원래 무정하지만 정을 가지고 살기에 아름답다고 찬미하는것이다. 인간고는 자기의 충실한 삶을 영위하는데 쓰디쓴 보약이 될수도 있다. 비록 빛나게 살지는 못했어도 제나름의 주석을 달수 있는 일생이라면 보람있게 살아왔다고 할수 있다.     인생을 하나의 빈병이라 할수도 있다. 어떤 술을 담는가는 그 자신에게 달리였다. 그러나 그냥 부어넣어도 되는 병이 아니다. 인생의 진미는 넘치는 부유가 아니라 빈 자리를 메워가는 그 과정으로서 스스로 창조하는것이지 누가 부여하는것이 아니다. 과욕은 인생을 속박하는 검질긴 오라줄이건만 기꺼이 묶이하니 인생이 고해가 된다.     인생길에 고생이 장고생이요 락이 장락이라는 잠규칙이 없다. 인생길은 본래부터 쌍곡선이여서 행복과 불행이 나란히 달리게 만들어졌다. 일생에서 즐거운 날과 괴로운 날은 적고 평범한 나날이 대부분이다. 때때로 취하고 웃어대고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인생은 심지없는 등잔과 같다. 누구나 휴식없는 욕망과 허영과 정욕으로 인생 을 꾸며가고있다. 하지만 인생의 필수품은 지향이며 성공이 아니라 끈끈한 추구이다.     인생은 물이 새는 한척의 쪽배같기도 해서 부지런히 노를 젓지않으면 자칫 격랑 에 침몰될수도 있다. 게다가 욕망은 넘치게 실었지만 부리우는것은 늘 보잘것 없는게 인생의 쪽배이다. 인간은 뭐든 자기 뜻대로 할수 없게 된데서 방종이란 단어를 만들 어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욕구라면 방종은 제이 천성이다. 그래서 인생은 후회와 유감의 연속이요 순환이라고 한다.     인생이 워낙 희비극으로 엮어질 수밖에 없는것은 인간의 원시정감이 너무 개화된 탓이다. 만화속같은 세상에서 만화같은 인생이여도 열심히 그려야 하는 인생만화이다. 현자들은 우리더러 범부속자로 살지언정 용렬한“귀인”은 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인생은 류성처럼 명멸하다가 곧 스러지는 섬광이기에 촌음이 귀중한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벗겨놓으면 인차 거매지고 곧 썩기시작하는 빠나나같이 여리다. 그런 인생이 괴롭고 욕망도 시들해지면 세상은《가라》하고 무덤은《오라》한다. 누구의 인생극이나 어김없이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원한 해탈이기도 하다.                                   2008년 9 월 20                             
294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 댓글:  조회:6875  추천:5  2013-12-30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                                                             진 언       새시기,우리의 문단에 돌풍처럼 불어친 현대파열풍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바람이라 개괄할수 있다. 요란하고 심오한 리론을 잠시 접어두고 통속적으로 말하면 모더니즘은 개혁이나 혁명을 가능하게 해준 서구계몽주의사상 내지는 철학을 가리킨 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19세기 후반, 20세기초에 흥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창의된 문예사조인것이다.     19세기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이였다면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개인의 목소리를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지만 그 명확한 개념이나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치나“선각자”들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되여졌다.     모더니즘의 리론가들은“창작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실주의적인 예술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이기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의 예술가들은 언어나 형식의 유희속에서 스스로 예술발전의 첨단을 걷는다고 착각하면서 예술이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 복무해서는 안된다는 순수예술리론을 답습했다. 그런데 형식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작 가들이 과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과 무관할것인가?     묻건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어떤 점에서 모더니즘을 벗어나려 하는가? 그리고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과연 새롭게 생산적으로 철학적사유를 전개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긍정적인 답변을 얻지못할 경우 한낱 지적인 허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 울것이다. 구체적으로 우리 조선민족의 현실과 련관하여 이들이 수행하려는 역할을 추적해 보자. 우리 조선민족은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력사적, 지정학적인 삼각지대에서 력사적, 정치적으로 특수환경에 처한 민족이다.     그런데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는 대중의 미학을 자아실현수단으로 자족한다면 너무 무책임하다. 예술의 형식성이나 현대성, 형식을 추구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면 작가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이요 텍스트가 어떠하오 말하 기전에 문학의 화원에 침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량면성을 투철히 리해하고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파악하여 우리 연변의 인문환경, 정치, 경제, 문화생활실정 에 맞는 패러다임(시스템)으로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고 생각해 본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명확한 차이점을 파악하기엔 모호한 점이 많은데 그저 맹종하면 실천적으로 우를 범하지 않을수 없다. 정작 그것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기존의 관념들을 해체하고 요란하게 분해, 조립하느라 시도하지만 실상 을 알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하게 하고있다. 완성단계가 아니여서인가 ?     니체에게서 의식은 언어적파악, 언어적사고와 동일시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의 기원과 기능을 밝혀주는 단서는 바로 의사전달 기호로서의 언어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사고를 따르는 의식은 개별자로서의 인간 각자의 본래의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일반적이며 군중적인 속성에 속하게 하고 자의식이란것도 역시 인간의 개별적자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옳바른 리해의 길은 못된다고 보았다.      인간관계에서 투쟁과 갈등이 불가피하게 생기고 그런 사회적갈등과 압력을 해결하기 위한 보편적법칙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사회적인간관계과 “언어유희”와“문자놀이”가 표출되고 이는 시시각각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각각의 문자놀이는 쉽게 다른 사람의것과 일치되지 않는 각자의 특유어법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이 사회적공공언어전달에서 얼마만큼의 실효성을 발휘하는가가 문제시되는것이다.     롤랑 바르트는“언어의 상대성과 불명료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진리관을 비판하게 된다. 언어자체가 확실한것임을 전제로 하는 일련의 노력들 은 사실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나 자각이외의것을 보여줄수는 없다. 언어는 그 자체로써는 무기력한것에 불과하나 그러한 언어를 통해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리얼리티에 도달한다는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해명했는데 오히려 설상가상으로 인위적인 모호언어를 조합하니 무슨 진리성 오감같은것이 생길수 있겠는가?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의도, 사유, 심리를 보여주는것이지 그것과 유리된 진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것은 아니다. 사용자에 의해 발견되고 창조되는 진리란 이미 절대성을 손짓하기보다는 상대성을 드러내게 된다. 언어가 환기시키는 느낌은 일종의 현혹을 일으켜 구원, 초월, 절대, 중심따위의 말을 사용하는 사용자의 주관과 그 주관의 상대성과 허구성을 은폐시킴으로써 더구나 오리무중이 되게 한다.     프레데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제국적자본주의가 다국적자본주의 형태로 세계시장에 파고드는것을 도와주는 후기자본주의 론리라고 비판하고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특징을“미학적대중주의, 문화생산물의 깊이가 없음, 력사성의 빈곤, 의미의 해체, 비판적거리의 말소, 재현이데올로기의 약화 등을 례로 들고있다. 그의 말처럼 해체리론은 모든것을 텍스트로 축소시킴으로써 사회정치적, 력사적 탐색을 소홀히 하는 태생적이고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는 결코 새로운 발뎐이 아니다. 또한 해체리론은 텍스트만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반응을 철저히 무시하거 나 간과하고있다. 그리고 해체리론은 창작과 비평을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비평이 창작을 압도하는 소위 비평만능시대를 자초하였다. 특히 해체리론은 사변적리론으로 인 해 원의도와 달리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그 스스로 유리화를 꾀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며 전통과 진리를 해체한후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가 또 하나의 전통과 진리가 되여진듯 표방하는 사이비도 엿보인다. 그러나 보인다해서 다 터득되는것은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스스로“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자처하던 류형의 문학,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시작되여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전성기를 이루던 류형의 문학은 사망하였다. 조선반도문학에서 모더니즘은 1930년경 프로문학의 퇴장과 일제군국주의의 대두를 계기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또 반세기가 지나서 중국의 한구석 연변문학에 인입되였으니 이젠 현실이 아니라 력사에 속해 있는것으로서 우리로 말하면 왕창 지각한“신사조”일진대 결코 선지선각도 아닌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다양해진 세계상은 또한 그만큼 피해를 입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해체를 통해 리성적우상들은 해체되였을지라도 해체라는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리성적인 론리(로고스)는 해체되지 않았을것이다. 새로운 리성중심의 론리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또한 다양성의 기치를 추켜든 포스트모더니즘문화가 상품화된 지배문화에 종속되여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허물고있다는 점이나 자아감각을 역설하며 해석자를 필수로 등장시키는 문학은 이를 리해하는 일부의 엘리트 해석자들에게만 호소력을 지닌채 스스로를 대중에게서 격리시킴으로써 결국 자신의 모순된 론리로부터 자승자박이 되였다.     감각으로 도피하든 개념으로 도피하든 이들은 모두 력사와 현실을 벗어나 민중들의 건전한 사고를 마비시키면서 직간접적으로 인류의 진보적력사발전을 방해하는 역할을 수행하고있다. 이들은 색정적(에로틱한)인 예술이나 신의 계시를 암시하는 애 매모호한 예술을 지향하면서 시대의 고민을 인식하고 그것을 척결하기 위한 투쟁에 동참해야 하는 작가의 임무를 포기하는것이다. 그 포기끝에 무엇이 마중올가 ??                                                                        2010년 11월 30일   
293    느낌에 생각이 따라서 (100수) (85) 장하다, 冬草야 ! 댓글:  조회:7036  추천:3  2013-12-27
                                            장하다, 冬草야 !                                                     야 조                          북국의 동토대 꽁꽁 언땅에도                                  끈지여 뿌리만은 살아있느냐                                          마른채 서있는 처절한 네모습                                                  죽어서 재생을 다지니 장하다                             기한에 허덕이는 사람들처럼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인채                                           그 모진 칼바람도 인내하느냐                                                    그 시절 푸른꿈이 향기롭구나                             오로지 생명혼의 믿음하나로                                   기어이 오고야말 봄날을 위해                                           한철을 숨고르며 용케도 버텨                                                   묵묵히 희망을 움틔우는 동초                            생명의 지평에 만물은 평등해                                   청청한 소나무도 멋에 겹다만                                           겨울풀 너도야 살권리가 있어                                                   죽어도 생명찬가 엮어가라                                                          2013년 12월 20 일                                                                
292    몸서리쳐지는 책을 소개함 댓글:  조회:7332  추천:1  2013-12-24
                                몸서리쳐지는 책을 소개함                                        펌 글        기사입력: 2011/05/14 [01:14]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이창기 기자)         지난해 2010년 11월‘당대’ 출판사에서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라는 부제가 붙은“그들이 온 이후”란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는‘워드 처칠’이라는 아메리카 토착 인디언 출신 학자이다.(황건 번역)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유럽의 나라들이 어떻게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을 학살하여 절멸시켰는지 매우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들어 낱낱이 증명하면서 미국에서는 지금도 얼마 남지 않은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땅까지 모조리 강탈하기 위해 미국정부가 어떤 모략을 꾸미고 압박해가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유럽 백인침략자들이 남북 아메리카와 그 중간 카리브해의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집단학살하였으며, 특히 이름도 가지가 지의 전염병 병원에서 나온 이불과 목도리까지 선물하여 거의 멸종수준에 이를 정도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카리브해에서 1500여만 명, 북아메리카에서 1500여만 명 등 300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근거자료에 의한 주장이고 실제로는 1억 명 이상의 아메리카 인디언을 유럽인들이 학살하여 거의 절멸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실제 알려진 것과 달리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농업기술과 토목건축 기술, 의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 일리노이아주인 당시 카호키아의 경우 인구 4만 명 규모의 발전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저자 워드 처칠은 이 책에서 옥수수, 토마토, 호박, 감자 등 지금 인류가 이 용하고 있는 작물 절반이 인디언들이 재배하던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매우 높은 수준의 의학치료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적어도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쟁 기록도 인디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땅도 공동 소유하는 등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넓은 영토, 풍부한 먹을거리, 높은 의학수준과 다툼 없는 평등하고 화목한 생활에 산하제한까지 없었다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숫자는 기록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 자명하다. 이 많은 인디언들을 유럽인들은 동물처럼 학살하여 절멸시킨 것 이다. 문제는 지금 남은 얼마 안되는 인디언들의 보호구역 안에서 우라늄 등 귀한 자원이 발견되자 이를 강탈하기 위해 온갖 법개정 놀음을 벌이고 인디언들 경제활동 에 장애를 조성하고 마약과 술에 찌들게 하여 완전히 멸종 해체시키려는 시도를 지금도 미국 지배세력들이 자행하고 있다면서 책의 저자 워드 처칠은 인디언들이 각성 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활동을 꾸준히 해온 워드 처칠도 현재 미국의 유태인들로부터 협박과 압력을 계속 받고 있지만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울 의지를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유럽인들의 인디언 학살사가 얼마나 잔악한 것인지 독자들에게 좀도 생동하게 전달 하기 위해 총 13장과 부록으로 구성된 내용 중에서 이 책의 개관에 해당하는 1, 2장의 주요 대목들을 뽑아서 아래에 소개한다. (중략) ................................. 아래 .............................. ◐ 원조 나치는 콜럼버스 [세일(Kirkpatrick Sale)은 그의 저서 ‘파라다이스의 정복(The Conquest of paradaise)’ 에서 이렇게 말했다.(155쪽)     총독(콜럼버스)이 1495년에 도입한 공물제도는 스페인 사람들의 노동혐오를 인정하면서도 황금욕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단순하고도 잔인한 방법이었다. 14세 이상의 모든 타이노족 사람들은 지배자들에게 석달마다 금으로 만든 매부리(금이 없는 지역에서는 면사 25파운드)를 바쳐야만 했다. 공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그 증거로 토큰을 주어 목에 두르도록 했다. 공물을 바치지 못한 사람은 페르난도(콜럼버스 동생)가 조심스럽게 말한대로‘처벌’받았는데, 그것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 (사제) 의 말대로 두 손을 잘라 피 흘려 죽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콜럼버스 총독 재임기간 동안 에스파뇰라 섬에서만 이런 식으로 1만 명 넘게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히달고)들이 타이노족을 집단으로 목매 달아 죽이고, 쇠꼬챙이에 꽂아 굽거나 화형에 처해 죽이고(종종 한 번에 수십 명씩), 어린이들을 잘게 썰어 개의 먹이로 주는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이 모두가 원주 민들에게 스페인‘상전’ 들에 대한 ‘올바른 존경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나치 친위대들도 이보다 더 사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런 짓거리는 끊임없이 대규모 학살극으로 이어졌다.“어떤 스페인 사람이 …갑자기 칼을 뽑았다. 그러자 100명 전체가 일제히 칼을 뽑아, 겁에 질려 앉아있던 일단의 타이노족 남녀노소의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잘라 죽이기 시작했다. …얼마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큰 집에 들어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여 수많은 소가 도살당한 것처럼 피가 냇물처럼 흘러나왔다.”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번에 최대의 포악행위와 학살극이 자행되어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했다. 인디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자기들의 왕국과 땅, 자유, 목숨, 아내 그리고 집을 유린당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스페인 사람들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로 죽어가고, 말 발굽에 뭉개지고, 칼로 동강나고, 개에게 먹혀 찢기고, 산채로 묻혀 죽고, 온갖 고문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서 굶어죽었다. ”      -라스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 중에서”     이런 학살극은 도륙할 타이노족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런 학살은)스페인 사람들이 인디언을 열등인간,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생각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라스카사스와의 논쟁에서 귀족인 프란시스코 데 세풀베다는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을 대변하여 아프리카 흑인이나 그밖의‘하급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영혼’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과 어디서 조우하건 그들을 노예로 삼고 죽이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지닌 신성한 책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도 바로 이런 골수 인종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 그들이 온 이후’ 19-21쪽 ◐ 전염병 유포로 인디언 대량학살    [물론 ‘콜럼버스의 만남’은 약탈적인 유럽의‘신세계’ 정복, 5세기에 걸친 대량 학살 및 식민지화 사이클의 길을 터놓았으며, 이 과정은 토착 아메리카의 면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꿔놓았다. 사실 콜럼버스가 총독으로 있었던 스페인의 카리 브해역 주둔 첫 10년 동안, 그 후에 이어진 모든 사태의 틀이 만들어졌다.     콜럼버스가 실행한 노예제도와 방자한 살육정책은‘구세계’의 병원균의 도입과 결합되어 1496년에는 에스파뇰라 섬(지금의 도미니카공화국과 아이티)의 토착 타이노족 인디언 수를 800만에서 300만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년 후에는 타이노족의 수가 10만 미만으로 감소했고, 1542년에는 스페인의 인구조사에서 불과 200명 남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 에스파뇰라 섬의 ‘인디언’들은 한 세기 전만 하 더라도 1400만에 달했던 카리브해역의 다른 토착민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도 1513년 폰세 데 레온 탐험대의 플로리다 진입 때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 결과 천연두 전염병이 온 대륙에 퍼져 1524년에는 리오그란데 강 북쪽 지방의 전체 토착민 중 약 3/4이 절멸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520년부터 1890년까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 속에 무려 41차례나 천연두 전염병 및 풍토병이 전파되었다. 이에 더해 홍역, 백일해, 결핵, 선(線)페스트,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콜레라, 디프테리아, 성홍열, 늑막염, 유행성 이하선염, 성병 그리고 일반 감기 등 수십 가지 치명적인 질병이 퍼졌다.     이런 질병에 의한 토착민 감소는 흔히 비극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면서도 전적 으로 유럽인과 토착민의 접촉에 따른 우연하고도 고의가 아닌 부산물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전연 다르다. 왐파노아그족과 나라간세트족이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과 벌인 1675~76년의 이른바‘필립 왕의 전쟁’은 인디언들이 천연두를 유럽인들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고 믿은 데서 촉발되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영국군의 전술과 의도에 관한 그 같은 인식이 결코 억지가 아니라는 점은 제프리 암허스트경이 1763년에 휘하 헨리 부케트 대령에게 내린 명령서로 충분히 입증된다. 암허스트는 이 명령서에서‘천연두 병균에 오염된 담요 등-이들 형편없는 종족을 절멸시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폰티액의 인디언연맹군 대원들을 감염시키라고 지시했다. 며칠 후 암허스트는 ‘천연두 병원에서 나온 담요 두 장과 목도리 한 장을 그들에게 주었다. 바람직한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성과가 있었다. 암허스트의 생물학전에 의한 전염병으로 최소한 10만 명의 인디언이 죽었다. 1836년에 일어나 비슷한 사례에서 미국군은 미주리 강 만단족에게 고의로 천연두 병균으로 오염된 담요를 배급했으며, 그 결과 전염병이 퍼져 토착민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7세기 초 플리머스와 버지니아에 영국 식민지가 설치되고 네덜란드가 뉴암 스테르담에 거점을 마련하면서, 북아메리카 토착민 말살정책은 훨씬 더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1637년 5월 26일에 고전적인 사례가 발생했다. 이날 영국군이 미스틱 (코네티컷주)의 피쿼트 마을을 포위, 북을 지르고 나서 도망가는 남녀노소 약 800명 을 학살하고 도끼와 칼로 난도질했다.     18세기 거의 내내 이 같은‘사고’는 더 한층 빈발했다. 이 기간에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프랑스-인디언전쟁(인디언을 총알받이로 앞세운 전쟁이라는 말인 듯)을 벌였고 이때 토착민들은 어느 한편에서 죽기 살기로 싸우도록 강요되었으며, 그 결과 토착민의 인구감소는 한층 더 가속화했다.-‘그들이 온 이후’] 34-36쪽 ◐미국의 절멸적 학살     [그(마셜)에 따르면‘야만인’들이 자기들의 영토를 빼앗는 데‘저항’하는 것은‘전쟁행위’가 되어 이론적으로 미국의 무력을 수반한‘대응’을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토 착민들의 물리적 저항능력이 완전히 분쇄된 1903년에 와서는 마셜 독트린이 더한층 발전하여, 대법원은 연방정부가‘고유하게’ 영역내의 모든 인디언들에 대해‘전권’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 여러 조약을 통해 획득한 토지소유권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미국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조약상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연방법원은 또한 정부가 원주민들의 나머지 재산에 대해서도‘당연’하고도 영구적인‘신탁’ 특권을 갖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편 1840년대에 동부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나아가 멕시코의 북쪽 절반에 대한 권리도 무력으로 강탈한 미국은 스스로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진출할‘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백인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대륙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는 뜻-옮긴이)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이 개념에서는 기본적으로 인디언에게 돌아갈 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연방정부 정책결정자들과 일반여론은 서둘러 인디언 절멸논리를 노골적으로 펴나갔다.     이런 정서는 어김없이 수많은 대규모 인디언 학살로 이어졌으니 그중 대표적인 사건만 보더라도 블루리버(에브래스카, 1654), 베어리버(아이다호, 1863), 샌드크리크 (콜로라도, 1864년), 와시타리버(오클라호마, 1868), 캠프 로빈슨(네브래스카, 1878), 둥디드니(사우스타코타, 1890) 등을 들 수 있다. 1894년에 미국연방센서스국은 미국이 한 세기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에 원주민을 상대로 ‘40차례 이상’ 전쟁을 벌여 이 과정에서 자체의 추정치 3만 명보다‘훨씬 많은’ 사망자를 냈다고 밝혔다.     센서스국은 또한 이 기간 동안 ‘민간인’에 의한 토착민 학살도‘매우 많았다’고 시인했다. 캘리포니아에서만도‘주로 광산업자와 초기 정착민들이 저지른 잔혹행위와 대규모 학살로 인해’ 1800년 30만에 이르던 토착인디언 수가 1890년에는 2만 명 미만으로 격감했음에 비추어볼 때, 민간인에 의한 사망자 수는 군대에 의한 사망자 수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텍사스에서는 인디언 의 머릿가죽을 관공서에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현상금을 내주었다. ‘대체로 인디언을 개만큼도 여기지 않는…유로아메리카 사람들에 의해 텍사스인디언들은 대부분 절멸되거나 멸종지경에 이르렀다.’ 서부지역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토착민들이 살해되면서 그들이 살던 땅에 백인 정착민들이 대신 들어앉았다.     1890년에는 미국 내에 살아남은 인디언 수가 25만 명에도 못 미치고 사망률이 95%를 웃돌았다. 생존자들은 조그만 ‘보호구역’에 갇혀 살았는데, 그나마 이른바 ‘일반토지할당법’에 따라 해체의 길을 걸었다. 1887년에 제정된 이 법령에 따라, 공식우생법이 제정되어 미국의‘기준’으로 해서 누가 인디언인지(그리고 누가 인디언이 아닌지)를 결정했다. 자신이 ‘1.5등친 이상의 인디언 혈통’임을 납득할 만큼 입증하고 그 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아들인 사람은 대체로 160에이커 미만의 개인 토지증서를 받았다. 충분한‘혈통량’을 가진 개인이 토지를 할당받고 나면, 보호구역의 나머지 땅은‘잔여’토지로 선포되어 비인디언이 입주하거나 기업이 취득하거나 또는 국립공원 용지로 전용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930년까지 토착민 보호구역 중 가장 좋은 땅 1억 에이커를 빼앗겨, 인디언들은 원래 보유지의 2.5%에 해당하는 5천만 에이커의 불모지에 더욱더 집중되기에 이르렀다. 이 모델은 나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답습하여 원주민에게 영토를 할당하는 ‘인종자 치구’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이 온 이후’ 38-40쪽     ◐ 총 몇 명의 인디언을 학살했을까?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의 한 해변에 표류하여 처음 상륙하던 날 북아메리카는 오래전부터 풍부하고 매우 복잡한 여러 문명들을 물려받고 있었다. 적어도 5만 년 동안 줄곧 이 대륙을 차지해온 토착원주민들은 총인구 약 1500만에 달했고, 인구 4만의 카호키아(오늘의 일리노이주 소재)의 도심지 같은 대도시들, 고도로 성장한 건축, 토목개념, 현대 생태과학에 맞먹는 지식이 구현된 영 적 전통, 약물학과 전인의학에 관한 높은 지식 그리고 매우 정교한 정치, 교역 및 외교 체제 등을 실현했었다.     대륙의 전통경제는 일차적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는 식물성 식료의 절반이 훨씬 넘는 작물(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고추 등-옮긴이)을 만들어낸 친환경적 영농절차에 바탕을 둔 농업이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룩한 토착민 사회는 매우 평등하게 조직되어 부동산은 집단소유였고 모계중심 사회가 기본이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식 전쟁이라는 의미에서의 전쟁은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온 이후’ 34쪽     [콜럼버스의 프로그램으로 타이노족의 수는 그의 지배체제 초기에 800만에서 1496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총독이 떠날 즈음에는 약 10만 명가량 남 았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계속되어 스페인이 1514년 인구조사에는 이 섬에 살아남은 인디언 인구가 고작 2만 2천 명인 것으로 나와 있다. 1542년에는 겨우 2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 전역의 인디언들과 함께 멸종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온 이후’ 18쪽■                                           2013년 12월 24 일 옮김
291    이른바 사회량심 댓글:  조회:7936  추천:0  2013-12-24
                                                    이른바 사회량심                                                             진 언       량심이란 현실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자신도 인정하는 행위규범과 가치 표준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량심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적절한 때 에 인간에게 명령하는 리성의 자률적판단이기도 하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흔히 “량심이란게 몇푼어치가 되는냐?”라는 말을 잘하는데 량심의 위치에 대한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평가라할수 있겠으나 아이러니하게 사용빈도는 매우 높은 단어로 되였다.     갑골문에서 량(良)자는 형태상 마치 상하에 두가닥의 물도관이 있고 중간에 하나로 직결된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마디마다 구멍을 뚫어 통하게 한 참대를 말하고 심(心)자는 기혈(器皿)을 가리켰다. 여기서 거꾸로 생각해보면“량심”은 고대인들의 생활세절로서 참대로 물을 그릇에 이르게 하는것에 대한 묘술이다. 역으로 생각하면“량심”이 없으면 곧 물이 없고 물이 없으면 당연히 살아갈수 없고 생명도 없다는 뜻으로 된다. 전자체(篆体)에서“良”은 “工”与“曰”자가 거꾸로 된형태이고“心” 은 사람의 심장모양이란다. 즉 전자체에서“良心”은 한사람의 마음이다. 그 사람은 권세가 일수 있고 부자일수 있으며 가난뱅일수도 있으나 심장이 없을수는 없다.    “량심(良心)”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가장 일찌기 선을 보인것은《맹자. 고자(孟子•告子)》라고 전해지고있다.“虽存乎人者,岂无仁义之心哉?其所以放其良心者,亦犹斧斤之於木也。” 朱熹集注:“良心者,本然之善心。即所谓仁义之心也。”여기에서 인의지심에는 련민, 수치, 공경 등 여러가지 정감이 포괄되고있다.     하여 량심에 대한 위인들의 명언이 많이도 류전되였다. 이를테면 제2차대전시기 영국의 원수인 몽고마리 (詹. 蒙哥马利)는 량심은 죄인의 지옥이라 하였고 발자끄는 겸허는 신체의 량심이라 하였으며 구쏘련의 교육가 쑤호무린쓰끼는 량심은 신념의 정감초병이라 하였다. 또한 량심은 인생의 근본이라 하고 량심의 법칙은 영원히 휴정(休庭)할줄 모른다고 하며 오늘의 량심은 행복에 대한 요구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사회량심이라 할 때 사회는 모든 사람들의것이고 량심은 자신의것이다. 량심이 있으면 사회에 유조하고 량심이 없으면 사회의 해충에 불과한 고급동물이다. 현실이야 여하튼간에 리론적으로 량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사회의 들보이고 동력이 된다고 말하는것이다. 인간의 사회적량심이라면 우리는“구라파의 량심”이라는 볼떼르를 떠올리게 된다. 기실 그는 구라파의 량심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량심이 였다고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하다면 현대사회에서 사회량심은 누구일가?     우리는 보통 기자들을 이 시대 사회민중의 눈과 귀요 “사회량심”이라고 일컫는다. 정체적으로 말할 때 신문사업일군들은 시대와 사회에서 가장 량심적인 군체의 하나이다. 당전 중국신문계에서는“잡문보”를 창시한 저서경(储瑞耕)을 첫손에 꼽는데 《사회량심-저서경평전》이란 책도 출판되였다. 그의 필촉아래 무려 5000만자의 문장이 엮어졌는데 신문계, 평론계에서 굴지의 문필가로 공인하고 있고 당대중국신문 사업가들의 응유의 사회량심을 체현한 수재라는 칭송소리가 높다.     문필에 흥취있는 사람은 미국정치가이고 발명가인 프랭클린의“만약 당신이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면 가치있는 글을 써내여 사람들이 읽도록하라. 혹은 어떤 의의가 있는 일들을 후세사람들이 쓰게끔하라.”라는 명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삼림속에 딱따구리가 없으면 안되듯이 저서경기자야말로 신문계라는 이 “문화삼림”속에 “딱따구리”였기에 중국신문계만의 귀감으로 되였다.        주지하다싶이 이미 발생한 사실을 진실하게 보도하는것이 신문의 생명이고 핵심이다. 골목소식도 소식이라지만 떡은 떼고 말은 보태라는 속담처럼 잡다한 풍문들은 대부분 류언비어이다. 그것을 언론화한다면 헛소문을 류포하는것이 된다. 실체도 경 계도 애매모호하고 시정에 떠도는 헛소문일수도 있는데 추적이 어렵고 책임회피도 무난하여 사이비여론의 수단으로는 적격이다. 통념에 가깝고 근거도 출처도 불분명 하기에 정보속성상 지상에 나도는 그 순간에 벌써 가치가 거꾸로 서는 운명이다.     거개 “-ㄹ것으로 보인다.-ㄹ것으로 관측된다. –ㄹ것으 로 추정된다. -가능성이 커 보인다(작아보인다.),-ㄹ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보에 의하면, -소식통에 의하 면…” 등 문구가 기본모식이 된 기사는 출처인 “누구?”를 숨기고 의혹의 증폭을 조장하기에 사회적으로 아무도움이 안되고 사실무근의 폭로와 곤혹외에 아무것도 남는것이 없다. 그럴듯 포장해서 매체화하는 사기성언기사들을 두고 한국의 지성인들 은 무책임한“ㅡ카더라"식, 련재소설식기사는 “썩은 언론이라고, 한국언론계가 병들었다고, 망국적난상제조기 언론매체에 대한 대대적청소가 필요하다”고 질타하고있다.     그렇게 비판받는 리유는 바로 “바른말을 론란거리로 만들고 거짓말을 확산시키는 풍토가 형성되였기때문”이라며 “한국언론은 사회량심커녕 사회를 거짓과 분렬과 혼란의 세상으로 만드는데 선봉장노릇을 하고있는것이다.”라고 타매하고있다. 게다가 추측성에 아전인수하거나 사기성을 침투시켜 호도하기에 중구난방,오리무중이 된다. 기사는 수필이 아니다. 쏜살을 되돌릴수 없듯 호들갑떨며“낭설”에 매달리기전에 사실과 결과가 사개맞도록 투철히 파악하고 운필해야 언론다운 언론이 된다.     무슨 꼬투리를 잡지 못해 마구다지로, 함부로 써갈기면“곤란”하다. 마치 로신선생이“짧은소매적삼을 보면 하얀 어깨를 떠올리고 곧 전 라체를 떠올리고 생식기를 떠올리고 성교를 련상하며 뒤이여 잡교를 떠올리고 사생아를 떠올린다”고 한 말처럼 상상력비리를 저지르기를 꺼리지 않는데 이런 사기성뉴스를 흘렸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한국언론은 마구 흘리기만할뿐 책임은 질줄 모른다. 어떤 기사를 쓰는가 어떻게 엮어대는가가 그리 요긴한게 아니다. 확실성이 우선이다. 도무지 알수도 없는 타국의 사실도 마치 제눈으로 보고 제귀로 들은듯 엮어대면 인간성이 문제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인데도 독자의 말초적감각을 자극하는 선정적기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피의사실에 대한 보도 자체보다 보도과정과 방식이 지나치게 감정적인것도 문제인데 작자의 급공근리적인 허영심마저 개입하니 말이다. 그러나 언론자유라는 궤변이 나온다. 언론자유도 인권이지만 절제없는 언론자유란 곧 무질서, 사회결약의 파괴, 독자에 대한 우롱이 아닐가? 처녀면 다 확실한가?     범죄심리학에는“마사진 창문효응(破窗效应)”이라는 명제가 있다. 례하여 어느 층집에 유리창이 깨졌을 때 제때에 수리하지 않으면 뭇돌팔매질에 하나둘 마사지다가 폭격맞은 집같이 된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담장이나 바람벽에 락서질한것을 제때에 지우지 않으면 락서장이 되고 말끔한 곳에 누군가 쓰레기를 던지면 인차 쓰레기장이 되고마는 현상이다. 여론의 역할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가?     다산 정약용은 일찍 현대언론인과 맞먹는 언관(言官)의 역할을 두고“날마다 적절하고 바른 의론을 올려서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이 널리 알려지게 하며 잘못된 짓을 하는 관리들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고했다. 언론의 역할은 자고로 만고불변으로서 영향력이 그처럼 막대한것이다.     정다산은“언관은 모름지기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언관의 직책을 행사하여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음탕하며 사치하는 일에는 당연히 손을 써서 조치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의리를 인용해서는 안되고 자기편만 편들고 다른편을 공격해서 엉뚱하게 남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글은 정다산이 1810년에 쓴것이지만도 비정한 언론인들에게는 금과옥조가 아닐수 없다.                                           2013년12월 5일
290    무엇을 쓸가? 댓글:  조회:7419  추천:2  2013-12-21
                                                              무엇을 쓸가?                                                                     진 언       문장에 숙달하여 달필이 된 작가들은 어떻게 쓸가? 하는 문제에 먼저 집념할지 모르지만 거개 무엇을 쓸가? 하는 문제에 우선 고민을 짜내게 된다. 어떻게 쓸가? 하는 고민은 서사화의 기법 혹은 기교에 속하는 형식문제이고 무엇을 쓸가는 선재와 주제확정에 관한 내용문제이다. 재간있는 색시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짓지 못하나 쌀이 있으면 곧 밥이 되는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여건이 다 구비되여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땔나무도 있어야 하거니와 우선 가마가 있어야 한다. 가마란 그안에 넣고 끓이는 내용에 따라 다르다. 전통가마의 경우, 같은 하나의 가마라도 밥을 앉히면 밥가마요 죽을 끓이면 죽가마요 국을 끓이면 국마가요 엿을 달이면 엿가마요 메주를 삶으면 메주가마, 돼지죽을 삶으면 돼지죽가마 등 내포가 달라진다. 그러나 가마의 형태와 속성이 달라지는것은 아니다. 이처럼 글을 지음에도 어떤내용을 담고 익혀야 하는 그릇이 필수적조건부로 수요된다.     글을 지음에서“무엇을 쓸가?”는 결국 자기가 쓰는 글의 사회적효용에 직결된 가장 급선무로 나서는 문제이다. 글을 지음에서 여러가지로 많이 고민해본 사람들은 다 체험했겠지만 무엇무엇을 쓰고싶지만 써서는 안되고 쓰지말아야 한다는 잠규칙이 있음에 속을 앓게된다. 이렇게 쓰지 못할것과 쓰지 말아야 할것들이야말로 문인들게 무형울타리가 되겠고 작가의 원초적인 비애가 되는 근원이다. 무엇무엇은 써볼 욕심이 나는데 전혀 익숙하지 못한 제재이고 절실한 체험이 없으므로 첫운필에서부터 빈붓방아를 찧게 된다. 이는 매개 작가의 종합적인 국한성이기도 한것이다.     무엇무엇은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것이여서 쓸 흥심이 발발하지 않고 무엇무엇은 써낼 엄두를 못낸다. 이를테면 신문기사는 어느 문체보다 제약성이 많다. 이는 결코 기사문자체의 제약성문제도 아니고 기자의 안광, 투시력 혹은 문장능력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에 립각하여 방향성, 선전목적성 등을 전제로 글을 써야 하는 기자의 고충은 그 누구보다 심각하다. 집필에서 잠규칙, 제약성때문에 마음이 다르고 써낸 글이 다르게 된다. 이는 특히 무형의 큰손아래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숙명적고충이다.     창작소설은 허구가 허용되므로 상대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이 많이 주어지지만도 선재범위나 언어표현상 무한대한 창작자유가 보장되는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작가에게도 무형의 울타리가 있다는 설명이 된다. 이처럼 실용문이든 잡문이든 운필의 폭이 욕망대로 확장될수 없는것이 문인들의 원초적비애로 되였고 문자옥같은 문화비극이 재연되는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누구더러 무엇무엇을 쓰라고 권장하지 못한다. 제가 춤추고싶으니 시누이를 권하는격과도 또 다른 문제이다.     한편의 글이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는가 못하느냐는 재치있는 표현기교보다 작자의 사유의 심도에 달려있다. 작자의 심층사유는 독자들에게 오래 사색하도록 충격을 주고 사색의 창신성이 없이 겉충도는 문자유희는 독자들에게 초를 씹는맛을 줄것이다. 골기가 있고 량지가 있는 작가라면 비정하고 타락한 시대, 집체무의식속에 침체된 민중을 깨우쳐 인문신념을 다시 건립하도록 인도할것이다. 그러한 창작정신은 바로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를 수행하려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로신이 말한것처럼 무궁한 머나먼 곳과 무수한 사람들이 모두 나와 련관되여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만이 보편적으로 공리화되고 세속화된 작금의 어경속에서도 엄숙한 창작관념을 수립할수 있다. 연후에 무엇을 쓸것인가 명확해진다. 희망사항에 속하지만 한 작가의 바람직한 경지는 우선 적자(赤子)가 되여 시대의 임무를 발견하고 공동체ㅡ민초들의 조우와 운명에 대하여 관심을 쏟는 창작사상이라 할것이다. 생명의 정의감은(正义感) 그 어떤 리익보다 높으며 인간의 가치는 그 어떤 권위보다 고귀하다는 신념을 고양하는 작가야말로 참된 작가라 하겠지만 쉬운일이 아니다.     인간의 사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상은 진리를 신장시키려는 사상이다. 이 시점에서 작가군을 크게 두개 부류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부류는 자기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작가들로서 기실 넓은 의미에서는 개인경력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한부류는 사상령역에 대한 개척자들이다. 제1차세계대전전야 프랑스를 들썩하게 한“드레푸스사건”을 두고 “나는 고발한다”라고 납합한 졸라와같은 작가들이다.    이 부류의 위대한 작가들은 정신문명의 좌표뿐만이 아니라 작가적량심의 귀감으로서 호한한 문자세계에 찬란한 항성들로 빛나게 된것이다. 이와달리 소박하게 표현한다면 그들은 암흑속을 비추는 꺼질줄모르는 등불이다. 그들의 머리위에서 빛나는 등불은 인류의 심령세계를 밝히는 자명등이기도하다. 작가적리상주의가 거의나 붕괴된 이 시대, 참된작가의 정신가원을 수호하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리욕의 망령만이 어슬렁거리는 허무주의사막에서 미와 량심, 진리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나 가는 그런 작가들이야말로 무엇을 쓸것인가를 잘 알고있는 명실상부한 작가이다.     례를 들어 수필이 아무리 자기를 벗어보이는“라체”의 글이라도 남부끄러운 은사는 아무도 곧이곧대로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는다. 더러운 빨래는 집안에서 하라는 나뽈레옹의 명언이 있듯이 혼자만 주물럭거릴수 있는 은사나 궁리여서 체념하지 않을수 없다. 풀어서 말하면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 있듯이 글로 쓸게 있고 못쓸게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누가 나무릴 리유가 없는 작가의 합목적인 사심이다.     무슨무슨, 어떤어떤 내용범위가 주어진 원고청탁을 받고 요구한 제재 혹은 주제가 자기소관과 무관할때는 막무가내로 긁적거린다해도 치약을 짜내는격이 된다. 무엇무엇을 쓸가해서 생각을 굴리다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암탉을 잡아 알을 꺼내는 작동 같은 운필은 스스로도 무모하다는 느낌을 줄것이다. 억지로 문자조합을 하여도 결과적으로 억지춘향을 만들려던 변학도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이것저것 피해가며 정작 발굴, 제련하려면 열어젖힌 아리바바의 동굴에서처럼 보 물들이 쏟아져나오지 않는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한 파란많은 인생일지라도 자기 신변잡사ㅡ자신, 가족, 친구들의 사연 등등을 쓰고쓰다가 바닥이 아니날수 없다. 그리 고나서는 어쩔것인가? 유한한 작가의 생명권내에서 무한정으로 글이 엮어질수 없듯이 한 사람의 인생경험이나 체험 혹 감수도 국한성이 있기마련이다.     대체로 무엇을 쓸가? 하고 생각하는것은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글을 쓸수 없다. 문제의식에는 참여의식이 그림자처럼 슬며시 붙어서게 된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사람은 사유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연경물을 싸고돈다. 자아표현에 너 무 집착하면 뛸데없이 자신의 신변잡사만 눈앞에서 새로운 경지인듯 펼쳐질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자아감각이지 사회적효응의 거도는 못된다.     결국 인생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확대, 발전되면 인간의 문제로 객관화되고 문제의식으로 살아움직이게 된다. 문제의식은 인간의 근원적인 과제와 련결되며 나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문제가 되고 인류공통의 문제로까지 확대될수 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무엇을 쓸가? 하는 난제의 해답범위가 될런지 모르겠다. 유감이지만 필자의 궁리계선이 여기에서 그칠뿐이니,     일상생활의 자질구레한 에피소드를 감명스럽게 표현하여 살아있음에 대한 표징으로 자족한다면 자기안계에 짙은 색안경을 걸어주는격이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의 발굴은 경험세계, 체험의 소울타리속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무엇을 써서 자신이 존재하고있음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것인가? 특히 수필창작에서 제기되는 이 문제에서 내용의 선택성과 가치함량은 꼭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체현되는것이 아니다.     글을 어떻게 썼는가는 심미향수를 줄수 있지만 글이 특별한데가 없어도 쿡 찌르는 충격이 있는것은 주로 무엇을 썼는가에서 비롯된다. 은은한 감동을 주는 수필이라면 자아실현의 주체척도가 되고 개인의 심미표준이 되면서도 나아가서 인간공유의 정감을 건드린것이여야 신변잡기식의 전통적수필에서의 탈피가 아닐가 생각한다. 수필에서 자아감정에 도취되는것은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격이다.  보건대는 흥겨운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싱거운 일이 아닐수 없다.    예술에서 반복은 죽음이라는 말은 창작의 독특성을 권장하는 말이지만 소재의 중복성을 경계하는데도 적용될수 있다. 부단한 창작인만큼 노루친막대 삼년을 우려먹기가 되여서는 안된다. 열달잉태도 힘들고 난산일수밖에 없다. 그것이 곤혹이다. 수필에서 자아표현의 도취나 발설이 꼭 독자들의 구미에도 맞으라는 법은 없다. 한편의 수필에 무엇을 담을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시종 난제로 제기될것이다. 자기 자신의 심령세계를 파헤칠 때 생명의 본질이 파악되지만 무엇으로“료리”해야 독자들이 잘“잡수실가”는 벌써 다른 문제이다.     주제는 작가의 인생관이나 사상에서 이루어지지만 작가의 인생관 그 자체가 꼭 주제가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쓸가?”에 대한 물음에 해답은 대관절 무엇인가? 내용이 교훈적인것, 비평적인것여도 그 전달에서 독자가 느끼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동화효응은 어떻게 쓰느냐에도 달렸지만 사색적이고 저돌적이기도 한 현대독자들에게는 무엇을 썼느냐가 더욱 요긴한 관심사이다. 소재는 자기감동여하를 기준으로 선택하지만 주제전달은 독자의 접수로서만 완성된다는것을 망각한다면 패필로 될수밖에 없다.     무엇을 쓸가?는 정서의 지성화문제이다. 정서의 지성화란 정서를 객관화, 보편화함으로써 자기감정의 순화와 독자공명에 이르는것이다. 지성화가 부재하면 자아도취에 빠지면서 감상일변도의 정서를 과장하여 글을 허공에 뜨게 한다. 그렇게 되면 어 떻게 쓰느냐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생은 짧으나 체험은 많다. 그러나 쓸거리가 많다는 의미와는 등호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구나 골머리가 아프다.     저저의 인생에는 사연도 많고 정한도 많지만 다같은 콩알이라도 알알이 골라서 심듯이 선재ㅡ무엇을? 심을가에 고심참담하게 된다. 글짓기를 뼈를 깎는일이라것은 무엇을 쓸가보다 어떻게 쓸가를 두고한 말이지만 어떻게 쓸가하는 고민은 “미사려구” 에 매인 문제라 할수 있고 무엇을 쓸가는 사상, 주의문제로서 민감성에 직결되는 문제이자 벙어리 랭가슴앓듯 하게 되는 창작의 전제이다.           사유의 각도에서 지혜는 속박받지 않는 사상이다. 사상(思想)에서“사”는 사유능력을 가리키며 일정한 실천성이 전제로 된다. “상”은 루적한 지식과 경험, 관념 등 회억과 선택을 가리킨다. 지혜로운자는 사상에서“상”의 상태에 있는것이 아니라 “사”의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을 틀어쥐고 쓰느냐가 선행되는것이다.     공자가 가라사대 “인자불우, 지자불혹, 용자불구(仁者不忧,智者不惑,勇者不惧)” 라 하였다. 인자도 많고 지자도 많으나 유독 용자가 희귀한 현실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실패할지언정 당신이 싫어하는 일에서 성공하지 말라는 말이 있거니와 명지한 사람은 원래 물덤벙 불덤벙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무엇이나 다 쓰는“용자” 가 되여 불구(不惧)할것인가? 물음을 제기하는 필자도 답이 꽉 막힌다.                                                 2013년 6월 8일
289    돈이야!돈!! 돈봐라!!! 댓글:  조회:7438  추천:1  2013-12-16
                                               돈이야!돈!! 돈봐라!!!                                                                                         최 균 선      세상에 허구많은 타령중에서도 “돈타령”이 천하사람들의 귀맛을 제일 당기리라. 돈타령도 가지가지인데 그중에 한가지만 흥얼거려보자.                            돈아 돈아 돈아 너는 어디에 있니 동쪽에 있니 서쪽에 있니                            담봇짐을 질끈 매고서 돈벌러 가지만 벌고싶다해서 벌어지지 않더라                            고생길이더라. 돈 돈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너는 어디에 있니 남쪽에 있니 북쪽에 있니                           호미자루 짊어지고서 돈캐러 가지만 갖고싶다해서 가져지지 않더라                           고생 길이더라. 돈 돈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발가락이 보인다 꼭꼭 숨어라. 돈아 돈아 돈아 돈아 돈아     자고로 사람들이 돈을 목숨처럼 여기며 “공방(孔方)”라 공경하였다. 인생의 영원한 주제가 사랑이라지만 돈이라는 주제속에 소주제일뿐다. 돈문화는 기나긴 인류의 력사무대에서 수많은 희비극을 연출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 돈에 웃고 돈에 울고 지금도 돈, 돈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심지어 한목숨 죽여가고있는가?     그리하여 속담들이 많이도 만들어졌다. “돈떨어지자 입맛난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 돈만 있으면 처녀불알도 산다, 돈에 침뱉는놈 없다, 돈이 많으면 두억신을 부린다.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라, 돈이 장사라, 돈이 제갈량, 돈한푼 쥐면 손에 땀난다, 돈이 있으면 귀신을 석마를 돌리게 한다. 빈천하면 도적질할 마음이 생긴다. 소경도 돈을 보면 눈을 뜬다. 돈소리하면 배속에 아이도 손을 내민다”는 등등 아무튼 돈을 마다할 사람이 아직까지 세상에 나지 않았다는것을 잘 알수 있을것같다.     돈에 대한 명언도 많다. 베이컨의 “돈은 최선의 종이요 최악의 주인이다”, 프랭클린의 “돈은 그것을 종으로 부려먹을 때는 최선의것이지만, 돈에 의해서 조종당할 때는 그 돈은 최악의 주인이 되여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돈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거든, 나가서 남에게 돈을 꾸어달라고 요청해보라. 적에게 돈을 꿔주면 그를 이기게 되고, 친구에게 꿔주면 그를 잃게 된다”, 존 레이언의 “돈은 현악기와 같다.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줄 모르는 사람은 불협화음을 듣게 된다” 지브란의 “돈은 사랑과 같다. 이것을 잘 베풀려하지 않는 이들을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인다. 반면에, 타인에게 이것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생명을 준다.” 등등.     당조의 명재상 장설(张说)의《전본초(钱本草)》라는 글은 200자도 채안되지만 돈의 성질,용도, 리페, 모으고 헤치는 도리를 생동하고 구체적으로 해석한 천하기문이다. 돈이 실체로 될 때 하늘도 있고 땅도 있게 되여 쌓아놓으면 마치 산같고 흐르면 강물같다. 돈은 귀가 없지만 사람들을 부린다. 인간이 조물주에 의해 만들어지였다면 현시대 인간을 완성시키는것은 돈이다.     인격이야말로 최고의 학위라지만 작금에는 돈이야말로 최고의 “인격”이 아닌가? 세상에 돈이 존재하는 한 량지도 자제력도 신빙성을 잃는다. 돈이라는 단어는 이제 수요에의 만족이 아니라 탐욕의 미궁이다. 인생현장에 오색잡다한 유혹들이 기다린듯 우리들의 코를 꿰여가지고 자멸의 함정에로 이끌어간다.    권력이란 한 사람의 인격품성의 시금석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돈은 량심의 무게를 떠보는 천평이요 돈은 진정한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돈, 돈은 결과적으로 소유욕의 최상의 표징이다. 죽어지면 한오리 연기로, 한줌의 하얀재로만 남을 인생인데 왜 그리들 과욕인가? 론어《(论语)》의 에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중용(中庸)의 핵심어이기도 하다. 글을 좀 읽고 제노라하는 사람들 모를리없는 철리이지만 실천과는 별개인가?     묻거니와 사람을 죽였다살구는 돈바람속에 군자가 누구이냐? 그가 누구이든 뭐하는 사람이든 돈에 눈멀면 소인중에 소인이다. 돈앞에서는 위인, 군자가 따로 없는 현시대이다. 볼바엔 번듯하고 군자연해도“돈벌레”가 되여 좋아하다가 수갑을 차고 랑패상을 짓는 몰골을 수도없이 본다. 그래서 농촌에는 남자는 세끝ㅡ혀끝, 손끝, ×끝을 주의하라는 인생철학이 류행되였다.    욕망과의 거리를 뉘라서 임의대로 조절할수 있을가? 물위에 떠서 가만히 있으면 물결따라 흐른다. 욕망에 리지를 잃고 돈에 코를 꿰우고 색을 따라 도는것은 매 사람에게 난당의 유혹력이다. 호수의 푸른물결이 그렇듯 매혹적이여도 그냥 걸어들어 갈수는 없다. 시내물은 웅덩이에 머물지 않고 늪가의 안정에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바다의 꿈을 안고 주야로 흐를수 있다. 인간의 심사는 욕망의 대해로 흐르는가?    조화는 조화로되 절대 만능은 아니다. 례컨대 돈으로 학위증은 사도 박학은 살수 없고 돈으로 권세를 살수 있지만 덕재는 살수 없고 돈으로 허명을 살수 있으나 실속은 살수 없고 돈으로 소인의 마음을 살수는 있어도 군자지심은 살수 없다. 옳거 니!그러나“고기와 웅장을 다 얻을수 있는가?”누가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다 볼수 있을고? 돈때문에 죽고살든 그의 자유에 맡기고 흥보의 돈타령이나 외워보자.     …박홍보가 매품을 팔기로 하고 선대받은 돈닷냥을 받아들고 좋아라고 질청밖으로 썩 나서니 에라 돈타령이 절로난다.                                 얼씨구나 좋구나 돈 봐라 돈 돈봐라 돈 돈 돈 돈 돈 돈봐라                                 돈이 돈을 눈에 대고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이고 조금 있다                                 나는 지화를 손에 다 쥐고보면 삼강오륜이 끊어져도 보이난건 돈밖에 또 있느냐                                 돈 돈 돈 돈보라 돈, 떡국집으로 들어를 가서 떡국 한푼어치를 사서 먹고                                 막걸리집으로 들어를 가서 막걸리 두푼어치를 사서 먹고 어깨를 드리우고                                 죽통을 빼뜨리고 대장부 한걸음에 엽전 서른닷냥이 들어를 온다                        얼씨구나 돈봐라 제집으로 들어가며 "여보게 마누라 집안어른이 어딜갔다가 집안이라고서 들어오면 우루루루루루 쫓아나와서 영접하는게 도리에 옳제 계집이 사람아 당돌히 앉아서 좌이부동이 웬말인가 에라, 이 사람 몹쓸사람"                     [중중모리]                                     흥보마누라 나온다 흥보마누라 나온다                                 "어디 돈 어디 돈, 돈 봅시다 돈봐 "                                 "놓아두어라 이 사람아 이 돈 근본을 자네 아나                                  잘난 사람도 못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맹상군의 수레바퀴처럼 둥글둥글 생긴돈                                  생살지권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절씨구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봐라"        흥보는 볼기돈이니 눈물겨운데 돈욕심에 탐욕을 덧쌓으며 주색에 빠져 흥청거리다가 꼬리길면 밟히는줄 모르고, 아무리 달콤한 미몽도 깨는 때가 있는줄 모르고, 좋을 때 그만두는게 좋은것인줄도 모르고 가질수록 냠냠거리니 참으로 우서웁다. 이에 한마디 더 보태면“에라만수!에라, 래일은 삼수갑산 가더라도 돈놓고 히히하하 웃다가 흑흑 흐느끼며 목이나 매고 나락길에 버둥거려보세…                                               2012년 5월 15일  
288    “입방정을 떨다”를 방정떨다 댓글:  조회:10028  추천:3  2013-12-11
                                           “입방정을 떨다”를 방정떨다                                                                                                       최 균 선       입방정이란 사전해석에 의하면 버릇없이 수다스럽게 지껄이면서 경망스럽게 하는 말을 뜻한다. 어른들이 입방정 떨다가 일을 그르친다고 하시거나 말이 씨가 된다고 훈계하군 하였다. 사실 말로 운이 왔다갔다 하는수도 있다.     자고로“남자는 입이 무거워야,”라는 고훈이 있다. 속담에 호사다마라고 녀자들이 입방정을 떨어서 될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많지만 입방정은 녀자들의 특허만은 아니다. 녀자들이 말단것은 생리적특성이라할세 남자로서 입이 가벼우면“콩새”라고 힐난하며 사람들이 은근히 경계하였다.     세상엔 장부일언 중천금이란 말과는 어긋나게 입이 가벼워 입방정을 잘떠는 남자들도 많다. 입이 가볍다는것은 경박한 성격의 표현이라는것은 물론 생각이 깊지 못하고 궁리가 단순하다는 표징이다. 입방정이 자초한 입덕을 거론하는 본인도 구설수에 잘올라 평생 입덕을 톡톡히 입어왔다. 그중에도 가장 심각한 교훈이 한가지있다.     20세기 60년대초 거국적인 “농촌사회주의교육”부터 시작해서 비상시국 10 년 동안 무심히 한말도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거리가 되는판이라 입단속 한번 잘해야하지“멸문지화”를 당하기가 여반장이였다. 그런데“천안문사건”때에 있은 일이다. 1976년 4월5일 인심이 구시렁거리던 때, 저녁을 먹고 집뒤 옛우물가에 나앉아 마라초를 태우는데 전선대에 달아놓은 확성기에서“반동시”를 읊으며 여론전을 펼지고있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덩덩 달타령이나 부르던 농군으로서는 그저 감각에 좇았을뿐이였는데 그 감각도 이만저만한 재난을 몰고올줄이야, 방송에서 읊어가라사대가 너무 진한 감동을 삼키게 하고 그대로 곧 토해내게 하였다.                                                    나는 슬퍼하는데 요귀는 좋아하고                                  나는 통곡하는데 승냥이들은 웃는구나                                      눈물을 뿌리며 영웅을 추모하고                                          분노하여 검을 빼드노라       워낙 시와 시랑송이라면 혹하던때라 사위가 캄캄하고 곁에 사람도 없고해서 제딴에 격동적으로 흉내를 내여보았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듣고 밤말은 쥐가 듣고 담장에도 귀가 있다더니 누군가 내 작태를 당시 반란단두목으로 마을에서“일인자”였던 장 ××에게 고자질해서 그가 “계급투쟁의 새 동향”에 크게 문장을 짓는바람에 단단히 혼나게되였다…다행히 1978년12月, 중앙에서“천안문사건”은 완전히 “혁명적행동” 이였다고 선포했으니 망정이지 그 후유증이 평생 나를 괴롭혔을것이다.     입방정을 떨다가 말실수ㅡ실언쯤으로 리해될수도 있지만 실언을 잘하는것은 결국 기질, 성격문제이자 그 사람됨됨이가 부족함을 꼬집는 말이 되기도 한다. 농촌에서도 입방정을 잘떠는“팔삭둥이”를 두고 “에그, 저 주둥이를 그저 목침으로 막막아 쳐놓으라니?”하고 된욕을 퍼붓군하였더랬다. 항간에는 혼사말에는 흥소리도 방간이라는 말도있다. 입방정은 깨방정, 토끼방정과 같은 의미로서 언행으로는 저질적이다.     대저 잘되여가는 남의 일을 시기하여 훼방놓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서 되는 호박에 손가락질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왜“북한어”라고 딱지를 붙여놓는지 모르겠으되 얼마나 생동하고 형상적인 표현인가? 우리 연변농촌은 물론 도시사람들속에도“되는 호박에 손가락질”을 잘하는 괴짜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 시기질투는 다있겠으나 타고난 달인들이 따로 있는법이다.     “사촌이 기와집 짓는다해도 배아파한다”는 속담처럼 남이 잘되면 축하는 못할망정 어이 배배꼬인 시기심부터 앞세울가? 그런 심리가 배달민족의 민족적렬근성으로 굳어져있다는것은 참으로 면괴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시샘은 녀자들의 본성적특징이라 하지만 남자들속에도 시기질투로 배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 민족의 공통한 약점으로 되여진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빚어진 사람들이 보통 입방정을 잘떨고 또 일종 병태적인 품성으로 되여 뼈속까지 슴배여있다. 그런 심사는 그저 심사가 아니라 심통 혹은 심보라하는것이 보다 접근적일것이다. 자고로 심통ㅡ하면 천하에 고약한 귀태인 놀부를 떠올리게 되고 비뚤어져서 구제불능으로 된 그의 심통머리가 묻어나온다.     입방정을 잘떠는 사람은 왕왕 입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지난7월 7일 아아니항 공기추락사고 때 한국에서의 종편방송의 하나인 채널A 뉴스진행 앵커분이 소식을 전하던중 "사망자 2명이 모두 중국인으로 확인됐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다"라는 발 언을 하여 중국누리꾼은 물론 자국인들내에도 벌둥지터진듯 시끌벅적하는 와중에 비판의 물매가 쏟아졌고 그 후과가 상상외로 엄중해졌다.     단순히 실언인가? 당위성문제인가? 민족본위사상의 로출인가? 그 모두일수 있으나 결국 입방정을 떤것이다. 말은 속심의 로출이다. 평시 그의 관념속에 타민족인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경향은 없었는가? 질의를 던져볼 건덕지가 많다. 공공언론인으로서는 자격미달을 시사하는 입방정이 아닐수 없고 그로써 온 나라가 입덕을 톡톡이 보게된것이다.  대표자의 사과가 무슨소용인가? 엎지른 물인데…     언론인들만이 아니다. 특정국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사사건건 전망분석이나 참새 방아간 지나는격의“전략”이나 생각나는대로 욕질해대는 다음의 댓글이나 백해무익한 입방정인데는 정말 곤혹이 곤두선다. 그저 미우니 분개해서인가? 계제가 어찌되였든간에“분개한 사람만큼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니체”      입방정을 잘떠는 사람들은 흔히 요언을 잘 퍼나른다. 뱀은 발이 없어도 잘 기여다니고 매미는 입이 없어도 잘 울어대고 요언은 날개는 없어도 누리떼와같다. 그러나 빨리퍼지는 소문이라해서 모두 진실인것은 아니다. 아무리 어두운 낮이라도 밤보다는 환하다. 진실을 말하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진실을 사랑하면 천국에서는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보답을 받는다하지 않던가?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처럼 아량과 포용은 내부를 단결시키고 공영을 도모하지만 티를 잡고 멸시하려고만 들면서 알륵을 조장한다면 대방에 대한 파괴와 증오를 드러내는것으로서 리념의 산물인 반목, 대결로는 아무것도 성사하지 못한다. 대방의 재난에 대한 악의적인 심리에서 출발한 온갖 입방정은 대방의 폭발적인 역반심리를 야기시키고 극에 대립하여 극으로 나가게 하면 자타에 안겨질것은 재난뿐이다.      니체는 말한다. “문화국가라는것은 근대적관념에 불과하다. 이편은 저편을 먹고 살며 저편은 이편을 희생시켜 번영한다. 문화상의 모든 위대한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몰락의 시기이다.”, 공존하고 단합하여 공동히 번영하는 길에 자기중심주의, 극단의 리기는 걸림돌이다. 사람은 자기의 관점, 주장을 표현하거나 이런저런 한담을 주고 받을수 있지만 입방정만큼은 떨지말아야 한다.     …할진대, 민족화해의 한길로 나가야 할 때 생각의 곬이 깊지 못하여 입방정이나 떨어대며 대방의 속창을 뒤집어놓으면 과연 얻어질게 무엇일가? 똘똘뭉쳐도 세계민족 지림에서 존망이 어떨가 하는판이 아니던가? 소는 생각머리없이 본능으로 반추하지만 우리는 소처럼 늘 자기 자신부터 먼저 반추할줄도 알아야 할것이다.                                                                         2013년 7월 10일
287    진언련시조 (7) 댓글:  조회:8466  추천:3  2013-12-08
                                                 진언련시조 ( 7 )                                                                      풍운                                          1.  더우면 짜증이요 추우면 타발이네                                                     춘추가 륜환인데 봄볕만 머무를가                                                             인간은 불평불만이 고질병이 되였나                                          2.  청풍은 불고가도 자취 곧 없거니와                                                     오고감이 스스로워 거칠것 없으매로                                                            공수래 공수거인줄 바람에서 알괘라                                          3.  바람이 돛을따라 건듯불줄 있으리오                                                     풍향따라 돛을달면 순풍이 되리로다                                                             순응자 흥할것이요 역행자는 패하리                                          4.  번개가 구름찢는 굉음이 천둥인가                                                      헌사토 헌사할샤 빈우뢰 비는없네                                                              연설서 공리공담도 저같다고 하리라                                          5.  떠도는 쪼각구름 태양을 가리운들                                                     구중천 광명이야 네감히 덮을소냐                                                             진실도 이와같거늘 백일하에 알괘라                                           6.  운해에 묻히면 절승도 무색해라                                                      구름이 시샘하야 그양자 뒤덮거늘                                                              두어라, 려산진면모 가리운들 변할고                                           7.  내리는 눈송이는 펄펄 나는 나비런가                                                      소복소복 쌓이노니 은세계 이렇든가                                                             두어라 북국의 풍광 설경밖에 있으랴                                                                          세월                                           8.  세월은 若流波요 불귀라 못오는데                                                        도르래 돌던듯이 사계절은 잘만도네                                                                인생도 사계절인양 가고오면 좋으련                                              9.  태여난 생명에는 세월이 축복이요                                                         늙은이 마음에는 황혼빛 짙어가니                                                                 일력장 넘기는소리 시든몸을 저미네                                            10. 세월이 무정한데 우리만 울고웃네                                                         인생이 초로인걸 늙어서 깨달으니                                                                 백년도 못사는 인생 허무하기 짝없네                                             11. 세월은 류수같고 인생은 쪽배같네                                                          욕망을 만재해도 갈길은 망연해라                                                                  한사코 노를 저어라 아차실수 번질라                                              12. 현대판 호로승의 호로안 비일비재                                                           억울한 인명안이 하나둘 아니여니                                                                   세월이 기다린다면 원혼들이 없을가                                               13. 창천은 허망하고 세월은 야속한데                                                            인생이 순간이라 애가탄들 어이하리                                                                    여생의 이랑이랑에 후덕이나 심으세                                               14. 인명이 재천이라 생로병사 섭리로다                                                            한백년 사자는데 세월이 성화로세                                                                    身老에 心不老라니 열심히들 살자네                                                                                과거                                                15. 과거는 가라하고 미래는 기다리라                                                             현재는 쏜살같아 허황하기 짝없거늘                                                                     래일을 환상하느니 오늘이나 잘사세                                                16. 과거는 굳어지고 오늘은 흘러가고                                                            미래는 불확실해 기다림도 묘망해라                                                                    오늘을 영위해갈뿐 무엇을 더 하리요                                                17. 과거는 슬퍼도 추억으로 소중하고                                                             현재는 진행형이 버리질랑 못하는데                                                                     미래는 서성거리니 새희망이 마중가                                                               18. 과거에 련련함은 당년의 호기때문                                                                                    찬란함에 취하느니 오늘을 성찰하소                                                                   자아를 확인하는 일 오늘에만 있노라                                                 19. 과거를 기워간들 참회로 구멍나고                                                             희망을 재단하면 미래가 대길할고                                                                     현재를 비단옷으로 지어감이 좋으련                                                  20. 세월의 비바람에 과거는 락엽인듯                                                               망각의 이끼속에 고즈넉 굳어질뿐                                                                       썩을줄 모르는것을 잊으란들 잊으랴                                                  21. 래일도 오늘처럼 확실할지 뉘알리요                                                               인생은 한치앞도 내다보기 어렵거늘                                                                       꿈속에 천리길가서 깨여보니 침대라                                                      22. 과거란 원인속에 맺혀지는 결과여늘                                                                인생공부 요긴한것 현재수업 아니던가                                                                            세월은 무정하여도 현재만은 남기더라                                                    23. 죽어간 이들에겐 갈망의 래일인데                                                                무심히 소일하는 한량들 많고많네                                                                                                      목숨이 줄어드는줄 언제알려 하느니                                                    24. 동경에 아롱지던 머나먼 그 미래를                                                                 현재로 살고보니 허무가 가슴치네                                                                         생각도 오락가락해 갈곳몰라 하노라                                                    25. 지구촌 수백민족 반목이 무상해도                                                                우는소리 웃는소리 신통히 닮았거늘                                                                        남북은 어느 세월에 함께울고 웃을가                                                                                     미래                                                    26. 미래는 유혹해도 기약은 없으매로                                                                                 공상을 그리느니 오늘을 잘가꾸소                                                                        과거의 고개를 넘어 새아침이 밝으리                                                     27. 일체가 끝났다고 락심천만 하지마라                                                                  래일도 아침해가 동녘에서 솟으리니                                                                          실수는 병가상사라 절망하면 끝인즉                                                     28. 한알의 생닭알에 고운생명 꿈꾸나니                                                                  핫불싸 깨여지면 병아리의 죽음이라                                                                          미래는 불확실해도 동경만은 미쁘니라                                                      29. 오늘에 눈감기면 래일도 눈감기리                                                                   현실에 어두우면 미래도 어두우리                                                                           마음눈 어둡다면야 보았던들 어이리                                                      30. 미래란 다른 문을 열고갈 과거인가                                                                   현재가 마중하니 미래가 등쳐내네                                                                           예약은 하였다만은 믿지못할 미래라        
286    개인화창작을 두고 뇌까리다 댓글:  조회:8131  추천:3  2013-12-06
                                             개인화창작을 두고 뇌까리다                                                                   진 언       세인이 공인하다싶이 90년대 중국문학( 조선족문학도)은 다원적이지만 이미 색이 바래고 뒤엉킨 삼검불이 되였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가위로 썩둑 끊을수도 없고 한오리한오리 가려내여 잘 감아놓을수도 없게 되였다. 그렇게 된 주요원인은 창작자세와 방식이 각양각색이고 그에 대한 주장들이 중구난방이기때문이다. 그러면 서도 제재내용, 문체풍격, 서사방식, 서정토로방식 등 면에서 다양하게 론증하려 하지만 창작자세와 방식상에서는 기실 내재적으로 일치성을 가지고있다.     변화무상한 인간세상, 돌고도는 인생마당에는 새록새록 다양한 이야기가 자체로 엮어져서 무궁무진하지만 개체의 경력은 제한된 공간과 생명의 제약성으로 쓰고쓰다 보면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고만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말할수 있을것인가? 작가의 자아는 환원되여야 하지만 시대속의 자아이지 진공상태에 자아가 아닌것이다.     “개인화”창작을 편면적으로 리해해서도 안된다. 사실상 작가가 자아를 상실하지 않는한 어디까지나 시대의 일원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작가는 분명 자기립장과 시각마저 내버리지 못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창작태도와 방식은 거꾸로 문학의 특징속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고만다. 지난세기 80년대에 비하여 개인화창작에 그렇게 요란떨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내버린것은 아니다. 개인화창작은 마땅히 개인의 화어(话语)공간과 대중화어 공간사이에서 뉴대를 구축하지 못하면 대중의 열독활동에서 배제될수 밖에 없다.    “개인화”창작과 더불어 “사인화”창작이란 말이 류행되였는데 때론 녀성창작과 뒤섞어 말하기도 하였다. 두 명제는 어의상에서 뚜렷한 구별이 없는것으로 보이지만 사인화창작은 일종 자전체 혹은 반자전체성질의 작품창작 혹은 고의적으로 이런 련상을 가지게 하는 봉페성창작자세라고 한다. 사인적공간은 그의 유일한 창작공간과 화어공간(话语空间)으로서 성의식, 성생리 등에 대한 묘사가 텍스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필경 극단적창작자세와 방식이라는데서는 량자간 공통점이 생긴다.     문학의“사인화”란 언제부터 제기된 개념인지 명확히 밝힐수는 없으나“대중화”와 상반되는 일종 창작관념으로서 이런 관념과 경향은 문학을 일종 순수개체문화 행위라는 울타리안에 가두고말았다. 문학의“사인화”의 특징은 사회와의“공공대화” 를 거절하고 비의식형태화를 주장하며 문학은 그저 문학으로서 문학의 변연화는 불가피적인 정상상태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런 문학창작경향으로 하여 사회를 회피하고 개인의 주체가치를 내세우면서 문학을 독립적인 자족의 “우주”로 축소시키였다.     문학창작자체는 개인적작업이지만 문인으로는 자기울타리를 벗어나야 창작공간이 개척된다. 작가는 개체의 심리세계도 주목해야지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주류적인 사상과 정서, 가치기준을 외면할수 없다, 자기의“특색”보다 더불어 이루는 문학의 미학적실천에서 독자의 심미추구를 나몰라라 할수 없다는 설명이다.     작가의 창작관념은 굳어져서는 안되지만 토성우에 갈대처럼 흔들려서도 안될일 이다. 초현실주의 바람이 불면 초현실주에 경도되고 표현주의 하면 기괴한 표현을 하느라고 골머리를 짜노라니 민족의 언어특징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 문학의 특색은 뒤로 밀리고만다. 고전적인 세계명작이 명작으로 된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비판적사실주의가 작품에 관통되여있기때문이 아닐가싶다. 내가 보수적이여서인지 모르지만,     이를테면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인 디드로, 볼떼르, 루쏘와같은 걸출한 작가들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봉건사회의 잔재를 청산하고 자유와 평등을 기저로하는 합리적이고 리성적인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투쟁을 고무하였다. 17세기의 극작가인 몰리에르는 프랑스고전극의 완성자로서 고전주의미학의 리념을 빛나게 실현한 대문호였다.     몰리에르는 그의 희극 에서 인민을 몽매하게 만들어 순종밖에 모르는 노예로 삼으려는 지배계급의 정체를 폭로하였으며 그것을 도와주는 종교의 위선을 조소하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는 사회불평등과 기만을 날카롭게 비 판한것이다. 그때문에 공연이 금지되고 박해받았으나 그로써 불후의 명작이 되였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몰리에르는 희극《따르뜌프》에서 예수회회원인 따르뜌프의 악행과 위선을 폭로하였다. 예술이 사회모순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한다는 사실을 몰리에르는 희곡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와 비슷하게 디드로의 소설《수녀》에서도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의 감성을 질식시키는 사회적모순을 까밝혔다. 그런 인소가 발자끄나 유고의 작품에서도 관통되고있다. 세기를 넘어서도 명멸하는 그 사상의 빛발이 바로 세계명작이 된 론거이고 특징이고 사회적가치이다.     물론 금강산사도 식후경이라고 문학도 배부르고 등따스한 연후에 하는 생명활동이니 배가죽이 등에 붙게 굶주려서 밥을 빌어먹게 된 경우에는 문학이 흥미로울수가 없다. 경제건설의 중심시대, 일체를 휩쓸어버린 상품화시대에 문학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수 없고 근근히 보조역으로 등장할수밖에 없지만 문학이 변두리에까지 밀려난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다. 문학이 자고로 공리적인 사회에서“변연화”가 된것은 곡조가 틀린 독주때문인가?자업자득인가? 문학은 일종“도구”로 충당되여서는 안되지만도 되돌아와 사회와 아무런 련계가 있어서는 안되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문학이 아직도 사회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환경속에서의 비극적조우를 펼쳐보이지 않거나, 생존환경속에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의 박투, 인성속에 선과 악의 판가리겨룸을 파헤치면서 사회와 인간의 이화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으려 하면서, 근근히 자기생존의 울타리안에서 맴돌면서 자아감상, 자아도취에 빠져서 헤여나올줄 모른다면 그 제약성은 나처럼 국외인의 눈에도 문학의 저곡으로 보인다.     문학공간은 날이갈수록 좁아지고있고 문학평론도 바야흐로 위축되여가는 학과로 연명해가고있다. 작가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작가겸 학자형이 된다면 금상첨화이다. 하긴 문학과 문학연구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문학은 응당 사회적도의와 책임을 질머지여야 하며 그것이 가능한껏 창작에서 효률적으로 체현되여야 바람직하다.     문학의“말세지감”이 아무리 심각하여도 문학의 대하에 작은 물방울밖에 안되는줄도 안다. 문학이 자아를 상실한 대가로 경제효익을 얻는것은 바람직한가? 문학의 주체성을 고창한다해서 문학고유의 사회가치와 작가의 사회적책임 그에 따른 사회효응의 제특징, 작가적인 량지와 사명감을 구중천에 버릴수는 없다. 문학에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문학의 위기감을 느끼는것은 곤혹이면서도 문학의 비애가 아닐가?     문학은 슬프다. 날이 갈수록 인문정신이 소실되기때문이다. 무릇 글이란 어디까지나 사회효응을 첫자리에 놓지않는가? 과거에는 도구로서의 문학을 통탄하고서도 한극단에서 다른 한 극단에로 나아가서 한낱 경제도구로 둔갑하였다. 지금의 문학은 려행, 관광을 선전하는 문화, 술문화, 성문화 등의 선전품에 지나지 않게 되였다.          문학의 시장에서는 매력 혹은 흡인력, 혹은 재미, 자극이 팔릴뿐이니 진정 숭고한 문학작품이 고갈되고있는 상태에서 문학이 슬프지 않을수 있겠는가? 광대한 독자를 잃은 문학인데 적막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중국문학(조선족문학)의 비애는 시대의 비애이며 후대들에 대한 문학교육의 비애도 간과할수 없는 풍경이다. 지금의 초고중학생들은 옛날처럼 고전명작에 매료되는것이 아니라 만화책에 매달리고있다. 누가 그들에게 세계명작을 읽힐인가? 그래서 문학은 현재도 비애이지만 먼 장래에도 비애가 도사리고 있다고 뇌까리고 싶어진것이다.                                     1998년 8월 21일 ㅡ    2013년 10 월 18일
285    오동나무아래에서 댓글:  조회:8392  추천:0  2013-11-30
                                                    오동나무아래에서                                                                                          최 균 선         교문밖 오동나무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황들기 시작한 오동잎 하나가 내어깨에 살폿이 내려앉았다. 문득 백락천의 “장한가”에 있는 시구가 시멋없이 떠올랐다. “봄바람에 복숭아 자두꽃 피는 밤 /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 / 그 녀인을 생각한다네”오동나무라 하면 여지껏 “오동이 무성하면 봉황이 절로 날아드네”라는 말을 기억 하고 있는 정도였는데 황도에서는 너무 흔해서 흥미를 가지고 인터넷에서 두루 검색 해보니 그 자체가 귀한 나무이지만 상징성이 많음을 알고 못내 찬탄하게 되였다.    체형이 사뭇 우람지고 도고하면서도 지성미를 풍기기에 군계일학의 품위를 과시하는듯도 하다. 그러기에 한 여름이면 크고 넓은 잎으로 짙은 그늘을 지워주어 오가 는 길손들의 더위를 말리기에 적격이다. 이것이 오동나무의 일종의 특색이다. 옛말에 봉황은 남해에서 북해를 향해 날아갈 때 배가 고프면 대나무열매만 먹고 집은 오동나무에만 짓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리를 나는 동안 쉬고싶을 때는 어떤 경우라도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않았다는 봉황! 그만큼 오동의 자태는 고결한 령혼과 위용과 고귀한 품위로 미담을 지니고 나무로 살았고 그만큼 귀하게 여기던 나무였다.     계절에 대한 체감이 약한 오동나무, 그러나 안으로 자제력이 강해보인다. 그렇다고 락엽수 가운데서 뒤늦게 잎이지는 나무도 아니다. 九月이 지나 땅에 지는 오동잎 한장을 주어서 보면 곧 추석이 오는것을 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짧고 굵고 멋스 러운 양자, 가장 뒤늦게 왔다가 앞서 서둘러가는 오동잎은 많은 련상을 불러준다.    오동나무는 현삼과에 속한 락엽교목으로서 조선반도의 경기도이남과 평남에도 분포되였다. 키가 15m에 달하는데 원형 또는 5각형의 잎은 길이가 25㎝ 정도이며 뒷면에 별모양의 갈색털이 있고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자주색의 꽃은 5~6월 가지 끝에 원추형꽃이 차례로 달리는데 꽃잎과 꽃받침은 각각 5장이다.     오동류에는 오동나무, 참오동나무, 개오동나무, 꽃개오동나무, 벽오동(碧梧桐) 나무 등이 있는데 조선반도에는 오동나무와 참오동 두 종류가 있다고 하며 일본인들 은 참오동을 일본오동이라고 명명했다. 오동나무와 참오동 사이에는 잡종이 생기기도 한다. 중국, 대만에도 있는데 각기 중국오동나무, 대만오동나무라 부른다. 개오동나 무는 중국이 원산이고 꽃개오동은 아메리카의 원산으로서 꽃잎은 흰빛으로 꽃속에 자갈색무늬에 옅은 주황색점이 있어 아름답고 개오동꽃 보다 더 크다고 한다.        무릇 오동나무는 생장이 빠른 편이고 목재는 얇은 판으로 만들어도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는 장점이 있어서 자고로 거문고, 비파, 가야금 등 현악기를 만들었으며 책장, 경대, 장롱 등의 가구재로 쓰이였다.오동나무로 나막신을 만들면 가볍고 발이 편하고 땀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열매에서 짠 동유(桐油)는 한방에서 음창,오림, 구충(驱蟲), 두풍(頭風), 종창(腫脹) 등에 쓰인다. 그야말로 보배둥이라 하겠다.     그래서 오동나무만 봐도 춤을 춘다는 속담까지 만들어졌을가, 오동나무만 보면 오동나무로 만든 거문고나 가야금을 생각하고 춤을 춘다는 뜻으로서 조그만 동기나 몇단계를 거쳐야 련상될만한 어떤 사물을 보고서도 곧 목적의 사물을 본것처럼 미리 좋아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사유방식이나 품성은 심히 경박한 사람의 특질이다.      어쨋거나 옛날 우리 선조들은 딸을 낳으면 집주위에 오동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빨리 자라는 나무여서 시집갈때쯤 베여서 가구를 만들어줄수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이 오동나무가 반듯하게 자라고 무늬도 예쁘며 가공하기도 쉽다. 조선력사에서 “3대 악성(三代乐圣)”으로 칭송되는 우륵이란 사람이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으로 유명했다. 원래 가야국에 있다가 나라가 곧 망할듯싶어 약삭빠르게 신라의 품에 안기여 당시 진흥왕에게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되여있다. 비록 12현금을 만들고 12곡을 지어 가야금이라 이름하여 조선악곡계에서는 기리는 사람이라도 나라를 배반한 수치스러운 력사는 그의 미명에 치명의 오점으로 남을수밖에 없다.     곁길로 빠진 화제를 본제로 돌려오자. 오동나무를 심어놓고 줄기를 잘랐을 때 잘라진 줄기를 모동(母桐)이라 하고 원줄기에서 새로 돋는 줄기를 자동(子桐)이라 하는데 그러기를 되풀이하면 손동(孫桐)이 나온다. 나무의 질은 손동이 제일 좋다고 한다. 가구나 악기용으로 리용가치를 높이려면 첫가지가 갈라져 나오는 부분이 최대한 높아야 하기에 나무가 얼마간 자랐을 때 좀 잔인하지만 밑둥을 썩둑 베버린다고 한다. 그러면 그 밑동에 딱 한개의 가지가 나와 처음보다 훨씬 높고 곁가지 하나도 없이 훤칠하게 자란다. 이렇게 세번 잘리고 세번 재생하면 리용가치가 높다고 한다     바로 오동나무의 이런 굴강하게 재생하는 특성이 오동나무의 매력이고 그리하여 이 졸문의 핵으로 심어졌는지 모른다. 생각할수록 기특한 오동나무요 생명현상이다. 오동나무는 생각하며 사는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식물이니 사고력이 있을수야 없 지만 베일수록 높게 도고하게 자라나서 더욱 우질나무로 된다는, 여러번의 변이를 거친 오동나무라도 이런 세례를 겪은 오동나무가 더욱 생존능력이 강해져서 억차게도 살아남는다는것은 우러러 경이로운 일이 아닐수 없다.     내가 황도에서 본 오동나무들은 시련을 겪지 않아서인지 멋대로 자란것이 대부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동나무의 저항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너무 멋지다. 가시가 촘촘한 줄기를 뻗어 자기를 보호하는 아카시아나무에 대비해서도 더 멋있다. “탄압을 받을수록, 시련을 겪을수록 움츠려들지 않고 더욱 공세적으로 맞받아치는 그 기백이 참으로 돋보이지 않는가!” 조선의 오동나무는 단군족의 기백같지 않은가?     한국의 산림학박사 감홍은의 칼럼《오동나무(2)》에“오동나무를 보게 되면 시각(視覺)은 석양에 젖어있는 아름다운 보랏빛꽃에 취하게 되고 후각(嗅覺)은 그윽한 향기에 취하고 청각(聽覺)은 열두폭 치마폭이 일렁이는 가야금소리에 취하게 된다. 그리운 이를 못잊어 잠못이루고 뒤척이는 밤은 오동잎지는 소리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이보다 더 감상에 젖게 하는 나무가 어디 또 있을까” 라는 정서적인 구절이 있던데 그 정서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어 좋았다.     꽃핀오동나무를 바라보면 더구나 아기자기한 정서에 묻히게 된다. 하늘가득 솟아있는 연보랏빛 작은종들이 울리는듯싶고 그 소리가 마음에 울려오는듯싶다. 오동꽃들이 내는 소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할것이다. 다만 가슴에 넘칠듯 가득차는 서정을 동그랗게 동그리며 꽃핀 오동나무아래에서 발길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동나무의 생존력과 굴강한 속성에 매료되여 머리가 숙여지고 그저 나무로서만 대하게 되지 않는다. 흔히 사철푸른 소나무로 굳은 절개를 상징하고 대나무로 올곧은 지조를 비유하지만 오동도 송죽의 절개에 비해 손색이 가지않는 상징성이 짙은 나무요 수백천종의 수종들속에서 생존의 강자라고 할수 있으리라. 오동의 정신을 기리며 오동처럼 굴강한 기개로 오늘을 살아가리라.                                  2010년 9월 25일  (황도에서) 2013년 2월 6일 수정 (2013.11기 연변문학)
284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댓글:  조회:9635  추천:2  2013-11-28
                                                     낯설게 하기의 효용성                                                                 최 균 선       이 시대는 양식화된 창신을 고창하는 시대이다. 그 창신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는것이 현대시다.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란 까다롭게 리해할것도 없이 진부하지않고 비반복적인 생신한 표현수법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것이다. 말하자 면 직유를 은유로, 묘사를 상징으로, 재현을 이미지로…그러나 후세대들에게 낯설게 하기를 선양하는것은 현실생활, 인간의 심령을 리드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가?     다시점(多視点)에서,현상학적립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감수한것을 기초로 대상에 주체의 사상과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이미지로 구성하는 사물시(事物诗)가 지리멸렬하여 이제 시인들의 단순한 감정표출로는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인정하여 낯설게 하는 방법의 시쓰기가 나오게 된것이란다.     그것이 바로 모순어법, 낯설게 하기 또는 시적애매성이라는것으로서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 한다. 그동안 획일화, 관습화, 전통, 일상적언어로서는 신선함, 아름다움, 창의성 등을 발견할수 없다면서 극단에로 치달은것이다.“계속 아름다운것은 우리들을 질리게 한다.”는 말인가? 조금 낯선 시를 보자.     가는 비여 가는 비여/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미루나무 무심한 등치에도/가는 비여/스물도 전에 너는 이미 늙었고/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여윈 등지고 가는 비 가는 겨울 비/잡지도 못한다. 시들어 가는 비 ”     김사인이라는 시인의 “비” 전문이다. 낯선듯 싶으면서도 찬찬히 생각해보면 결코 생판 낯선것도 아니고 조금 애매모호한것 즉 몽롱미를 현시하고 있을뿐이다. 겨울비속을 걸어가는 수척한 사내의 쓸쓸함, 안쓰러움의 정서를 표현하고있는 시로서 “가다”의 “가는”에는 가는(行), 가는(細),가는(離別), 가는(야위여가다,) 즉 중의(重意)적으로 중첩되고 시상전개가 함축되고 절제된 언어표현이 시도되고있다.     그리고“비”라는 주도어를 반복함으로서“비" 그것도 ”겨울비“에 대한 정서를 시각적으로 미끄럽게 구사하고 있는데 이 시의 사상전개법은 “비 ”,“가는”의 호응관계로서 가버리는 혹은 리별한 사내의 등뒤에서 내리는 비(리별, 사랑)를 느낄수 있게 했다. 의도적 낯설게 하기의 전형이라지만 전통시의 가독성도 구비하고있는것이다.     모순된 어법으로 낯설게 하기가 난해시로 되게 하는것은 표현의 기법일세 사유, 정감의 모순성은 리해불능이 된다. 현실속에는 애매모호한 현상들이 많지만 그것을 보는 시인의 시각은 애매모호할수 없으며 더구나 사유활동이 어릴벙벙할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무작정 애매모호성이 현대의식의 한 형태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어떤 시인은 통속적인 시를 일반적으로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시라고 단정하던데 기실 상아탑속에 자아도취로서 아무도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현실에서는 이상한 눈길로 보며 응 대하지 않는다. 문학의“통속성”을 고상한 예술성이 결여된 즉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제기법은 너무 무단적이다. 작품의 다양성과 진실한 정신을 저애하는 존재로, “고상”한 독자에게는 비도덕적이고 질낮은 작품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이비도 아닌 얼토당토이다.     또한 통속적인 문학작품은 보편적으로 지적,정서적수준이 낮은 대중이 선호하는 감정 혹은 정서를 졸렬하게 반영한 렬악한 작품이라고 평가해야 한다는 설법은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대중은 무지몽매하다는 말이 아닌가? 선택된 사회정영들만을 위해 시쓰기를 한다면 선경에서 신선들과만 산다는 말과 같다. 어떤 시를 써내든 시인은 우주인이 아니며 적어도 진공상태에서 사는 특종생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은 가로사대, 통속성을 즐기는 대중은 예술적심미가치에 주목하지만 예술가들과 같은 심미안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며, 지적훈련을 받지못한 사람들이며, 그래서 대중은 세련된 교양이 결핍한 존재라고 할수 있으며, 그래서 예술이 알기쉬운 소재나 자극적인 소재로 형상화되였을 때에만 흥미를 느끼는“무리”라고 말을 하는 시인은 구름우에서“구름사탕”을 먹는 신선인가? 엉터리도 아닌 허황 그 자체이다.     문학장르중 대중들과 거리가 가장 먼 장르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시라고 할 때, 문학의 꽃이자 문학의 원형인 시가 왜 “대중”들의 시야밖으로 밀려난것일가? 여러가지 리유가 있겠지만 어렵기때문이라고만 간주한다면 대중 전체가 석두라는 말이 된다. 전문인 시인들조차 읽기가 어렵고 터득이 막연하다고 할 정도라면 그것이 숭고함이고 자랑인가? 어지간한 지적,정서적훈련으로는 현대시를 리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데“현대시독해학원”이라도 꾸려야 하지 않겠는가?     낯설게 하기=모르게 하기가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로씨야형식주의자들에게도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으로서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는것이지 금성철벽밖에 방치하는게 아니다. 독자가 아예 모르게 하기 위해 쓰는 시는 그 목적성부터 희망사항인“공명성”이 없어 글러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낯설게 하기는 시문학의 예술적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여있는 용어로 보는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여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속에 갇혀있다. 특히 일상적언어의 세계는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고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에 깜깜한“무지자”들과 도전하는식으로 나와서는 안된다. 물이 없이는 준치라도 곧 죽는다, 복합적독자군은 망망대해가 아닌가?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경험의 법칙이나 상식을 뒤엎는 일탈된 표현에도 진실성은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독자가 감동하고 시적진실을 깨닫게 하는것이 시의 목적이여야 한다. 낯설 게 하기는 일상적인 언어의 틀을 깨고 새롭게 표현하는 기법일뿐으로서 그 무슨 천국의 언어인양 신비화할것까지는 없다. 장막안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도 무슨 무당굿인지 전혀알수 없다면 그게 제멋에 겨운 헛푸닥거리가 아니겠는가?     1) 깃발이 펄럭인다. (사실적진술>)        깃발이 전진을 부르며 절규한다.     2) 사람이 술을 먹는다.        사람이 술잔속에 익사한다.     상술한 두가지 표현에서 후자의 기법에도 선택된 상상력이 필요없다. 이런 낯설게 하기라면 소통불능이 아니고 사회효응도 바람직할것이다. 하다면 정말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는 현대시를 짓기는커녕 리해하고 감상할수도 없어야 할가. 백명의 독자 에게 읽히는 작품보다 선발된 한명의 독자에게 백번을 읽히는 작품만이 예술이며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문학일가. 우문과 함께 소통의 가능성을 꿈꾸며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시인이 오히려 사랑받는 시인이 될것은 의심할바 없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 이라고 부르는 류근시인의 시이다. 이 시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인“외도”를 통해 웃지 못할 가족애를 그리고있다. 보편적으로 통속적인 시는 거짓위안과 환상을 제공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든다고 비판을 받는다.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상상적 해결을 꿈꾸기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시적화자는 대책없는 랑만 즉 련애를 꿈꾸고있지만 직면하거나 직시하고 있는것은 가족이다. 이것은 현대인의 감정정서이다. 무엇을 나무릴게 있는가? 그래서 외도가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시의 격을 떨어뜨렸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럽게 시적정취를 선물하고있지 않는가?     어떤 고명한 이들의 견해대로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이분법을 항거하는 의미에서, 스스로 저급예술이라는 전통시를 쓰는 사람은 절필해야 하는가? 전통시를 쓰면 시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던데 어처구니가 없는게 아니라 한심할뿐이다. 어떤 시인의 선언이 독자에게 감동을 선물하겠다는 용기와 오히려 통속적인것으로 인위적인 난해성을 지향하는 문학을 전복하고싶은 역설의 정신이 분발할듯싶다.     밀란 쿤데라가 “극소수의 귀족이 향유하던 예술은 숭고하다. 그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될 때 더욱 숭고해진다”고 말했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은 소통에 있으며 그 소통의 폭은 넓어져야 한다는 의미일것이다. 소통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어떠한 예술작품도 그 존재자체만으로 어떠한 의미도 지닐수 없다. 작품과 독자가 만났을 때 비로소 예술은 온전한 의미를 지닐수 있게 된다. 이것은 식은죽이 마시기 좋으면서 원맛은 잃지 않고있다는 말처럼 절대 진실이다. 아닌가?                                                         파도                                                      최 병 수      바다는 목에 걸린 세월을/울컥울컥/모래사장에 토해낸다/벌거벗고 누워있는 수줍은 모래톱/전력질주 짝짓기 시도하지만/대양(大洋)의 기세로도 오르지 못하고 /가시 걸린 세월만 내 뱉는다 (중략)     강자의 론리를 파도에 빗대어 쓴 시다. “‘파도’라는 사물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시적자아의 형이상학적의식을 잘 그려주고있다” 그러나“현대시의 핵심인‘낯설게 하기’가 완벽하면서도,시적진실의 리얼리이티가 있는 시이다. 이런 시는 시전문이 아닌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을것이다. ‘파도’는 바다를 배경으로 강자의 론리를 파도, 모래사장 등에 투영해 약자에 대해 노래했으며 약자와 강자의 론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에 가슴아픈것을 파도에 빗대고 시적대상을 향해 강렬한 심상을 표출하고 있는것이다. 이런 경우, 직설적인 시가 개탄하며 절로 물러갈것이다.     시나 산문이나 문학이나 비문학이나 언어조합이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시로 되는 리유는 일상적인 의미를 벗어나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2차적인 의미의 확대를 꾀하는 언어조합이기때문이라는것은 기성리론이다. 그런데 로씨야에서 일련의 학자들은 언어의 근본적인 형식인 운률과 구조를 연구하면서 문학의 문학스러움이나 시가 시다운 근본적특징이 바로 언어의 특이한 용법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들은 문학의 내용 즉 리념성을 강조하던 시기에 문학성을 언어형식에서 찾고자 했기때문에 형식주의라고 했지만 대표적리론가인 야꼽슨, 쉬끌로브쓰끼 등의 기본립장은 문학성의 발견에 있었으며 그 해결책은 전통적인 대답이나 림시변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학성의 본질과 소재에 대한 해명이여야 한다는 립장이였다.     이들은 현대시학에서 금과옥조로 여기고있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였다. 시의 경우에 있어 비유, 리듬, 독특한 구문, 어려운 낱말 등은 그러한 정신의 절약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정신노력을 더욱 강요할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어의 변별성, 즉 시를 시답게 하는 근본적인 어법은 일매지게 낯설게 만들기만인가? 전경화로 설명할수는 없는것인가? 낯익음과 낯설음은 아무래도 변증관계를 벗어나지 못할것이다.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의 구조에 있다고 하더라도 친숙한 의미의 이미지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이미지,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언어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는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어나 산문적인 언어들은 바로 낯선언어가 아니라 눈에 익은 언어이고 낯익음의 이미지였고 낯익음의 형식이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 고전주의나 랑만주의에서 시에 대한 인식이나 시어의 기능은 효과적인 전달이나 경제적인 표현이라는 목적에서 설명되고 있는것이다. 실용주의시대에 현대시도 실용적이야 할텐데…     포프는 시의 재치는 늘 생각하면서도 그처럼 잘 표현할수 없는것, 즉 어려운것을 적절히 표현하는것이라 하였고 워즈워즈는 낯선세계를 인간에게 친숙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친숙한 통념에 반작용하는 낯설은 현실을 제시하는것으로서 여러번 곱씹어 더 생각하도록 지각을 연장시키는 효과가 있지만 너무 심하게 “낯설어버리면” 상상력의 “부재자”나 언어표현에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이 남의 사돈이야 가건말건 지나칠 가능성이 다분하다는것을 제시한것이다.     시적대상을 습관적인 표상에서 굴절시키고 언어표현에서도 일상의 문맥을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들로 대체함으로써 시인은 대상들의 감각적인 결(结)을 고양된 상태에서 인식하도록 해야만 하는것이다. 따라서 시어는 낯선용법을 창조하여 지각의 신 선함을“회복”시키는것이지 불소통속에 매장시키는것이 아니다. 깊이 숨김으로써 그것이 현대시의 시적발견이 되고 해방된 새로운 시세계의 구축이 될수는 없다.     쏘쉬르의 근원주의 언어관은 말하는 화자의 관념이나 아이디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 존재하는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말하는 언어는 요소들간의 체계적인 관계들속에서 의미가 만들어진다는것이 핵심이다. 쏘쉬르는 인지체계내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와 밖에 존재하는 언어적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의미불통의 시가 시로서 존재할 리유가 나변에 있는가? 물론 확답을 기대할수 없는 우문이므로 혼자의 우답으로 남겨두자. 그래서 장문(长文)이지만 아쉬운 대로 결말이 없는 횡설수설이 되여도…                                              2013년 10월 30일
283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댓글:  조회:7470  추천:1  2013-11-25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야 조        력사가 인간들과 롱담할때도 있거니와 인간들도 드문히 력사를 두고 유모아를 엮을때가 있다. 례컨대 지난 20세기 50년대초 중국의 소학어문교과서에는 주덕의 간고소박한 정신을 가송하는“주덕의 멜대”라는 문장이 수록되였더랬다. 그런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유모아가 생길줄이야, 그로부터 10년후인 1967년 2월, 학생들이 겨울방학을 보내고 학교에 돌아와 새 교과서를 타고보니 같은 내용의 과문이“림표의 멜대”로 바뀌여있었다. 하여 무수한“홍소병”들은 림표의 간고소박한 정신을 열심히 따라배우게 되였다. 이것은 인간의 총명이 엮은 3류유모아이다.     그런데 불과 몇년이 지나지 않아 림표의 운두루한 사건이 발생하여서 과문은 다시“주덕의 멜대”로 환원되였다. 하나의 멜대가 정치풍운의 변환에 좇아 부단히 바뀌였으니 이는 상식에 대한 모독인가? 현실에 대한 풍자인가? 이 이야기는 중국어문교과서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력래로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을 금과옥조로 받아새기는 아이들이 어떻게 어른들이 조작하는 허구와 진실을 판별한단말인가?     자고로 교과서가 일반서적과 그저 다름에만 있지않다. 교과서의 내용은 일종 선험적인 상식과 지식의 모식을 고유하고있는바 일호의 의심도없이 받아들이는게 관례이다. 무릇 상식이란 우리들이 이 세계를 인식하는 기점이자 원점이다. 그러나 일단 상식적문제가 생기면 후속적발전과 지식은 론리상에서는 물론 결과상에서도 커다란 편차를 낳고만다. 그것을 후학들에 대한 오도라고 질타하고 있는것이다.     교과서의 편찬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강제성특징을 구비하는바 이는 교재편찬의 통칙이 되여져 지식전수를 보장함과 동시에 국가의 의지를 체현하기때문이다. 한편 교과서자체가 원래부터 막무가내한 가변성을 고유하고있지만 주덕의 멜대가 림표의 멜대로 둔갑한것같은 일은 황당무계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기억하고 싶은것만 서술하고 남기고 싶은것만 서술된다면 진정한 력사는 끝나는것이며 력사의 몸살이는 수도 없이 반복될것이다. 하다면 력사교원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것인가?     이 문제는 결코 일개력사교원에게 달린문제가 아니며 경은 바른데 입비뚤이중이 외우는격의 문제도 아니다. 리론상 력사란 객관적으로 존재한 사실로서 진상은 오직 하나이다. 하지만 력사연구는 왕왕 사학가 혹은 력사서편찬자들의 주관의식의 변화 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변화하게 되며 분식, 가미, 외곡의 인소를 피면할수 없다. 그렇게 되는데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사학가들의 기특한“창신정신”도 한몫 하기때문이다.     세계 모든 민족의 력사는 기실 기본여건이 간단하다. 첫째로 무릇 나라통일을 추동하는것은 진보이고 그와 반대이면 반동이다. 둘째, 무릇 외세에 항쟁하면 진보적이고 애국적이며 그에 반하면 반동이고 매국적이다. 셋째로 무릇 반란은 모두 혁명 적이다. 이것은 10년동란시대에 충분히 체현되였다. 넷째, 무릇 령토를 확장하는것은 진취적이고 애국적이며 그를 반대하면 국권을 상해하고 나라를 모욕주는것으로 되여있다. 이는 력사발전에 대한 기본의식이고 모식인지 모르겠다.     일언이페지하고, 력사교과서를 외곡하고 뜯어고치는 일에서 자고로 일본이 제일 말썽이 많았고 지금도 말썽을 일으키고있다. 일본통치자들은 제2차대전기간 아세아 각국에 대한 침략을 극구부인하고 성노예를 매춘부로 개념바꿔치기를 하여 진실을 오 도하는 등 줄창 정치방귀(거짓말)를 뀌고있다. 일본은 인간의 량지에 철판을 씌우고 극악한 전범자가 아니라 당당한 “해방자”로 분식하려 어거지를 쓰고있는것이다. 특히 아이러니도 아니게 웃기는 작태는 아베가 근간에 녀성인권이 어찌구저쩌구 한것이다.     일본만 즉살나게 욕할일도 아니다. 풍문에 요즘 한국에서도 교과서개편 즉 력사분식에 열중하고 이에 대한 지성인들의 의론이 분분하다고 한다. 먼 마을에서 삐칠 일은 아니지만 동족으로서 관심이 가는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소위 '근현대사 연구 교실'이라는데서 무엇을 어째서 분장하고 분식하려는것인가? 력사라는 소녀를 정형 수술하면 보기좋을가? 일반적으로 추녀일수록 분장에 골머리를 썩이듯이 못난력사, 추악한 력사일수록 미화하려드는 법이다. 아닌가? 일본의 경우처럼 말이다.     대저, 후학들이 력사를 배우는 목적은 력사사실을 통해 과거 선조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그중에 선택할것과 내버릴 부분이 무엇인가를 선별하고 새 력사를 창조하는 좌표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는데 있지않는가? 력사에 대한 분장사라해서 다 잘하는것은 아니다. 남에게 알리지 못할 어떤 저의가 있다면 오히려“자랑스러운 력사”를 못난력사로 만들어버릴수도 있다. 력사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료리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은 사학자들이 명기해야 할 잠규칙이다.     이면에서 독일은 귀감이다. 2005년은 제2차세계대전결속 60주년이였다. 독일에서는 그 한단락의 력사에 대한 반성하였는데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공통한 태도이다.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슈뢰더는 악명높은 독일집중영해방 60주년기념활동에서“나치 스즘과 그들이 발동한 전쟁, 종족도살 및 기타 폭행에 대한 기억은 이미 우리 민족 자신이 공동한 인식의 한개 조성부분이다. 이는 우리들의 도의적인 책임이다.”라고 침통하게 반성하였다. 과학적인 독일인들의 민족성격의 체현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후의 독일총리였던 메르켈도 나치스정권출범의 력사를 회고하고나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당시 나치스가 천추에 용서못할 죄를 지은데는 독일사회도 책임이 있다. 부분적 정예분자들이 나치스당에 가입하였고 더많은 사람들이 나치스폭행에 대해 침묵을 지켰기때문이다. 그는 다시 한번 독일은 력사의 죄에 영원한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에서는 소학생들에게 나치스사상이 싹트지않도록 주의를 돌리고있고 청년들을 집중영유지에 가서 교육받게 하며 기회와 력사학가와 생존자들이 대화하게 하며 유관과제를 선택하여 연구하게 하게 한단다.     력사외곡의 선두주자로 한국에 소문짜한 자는 아베이다. 자민당의“력사검토위원회”에서는“도쿄재판사관”을 청산하고“침략전쟁이 아니였다.”,“학살 등의 가해사실은 없었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억지를 쓰고있다. 이러한 비릿한 추태들을 세계인들은 꿰뚫어보고있다. 한국에 사유가 명철하고 량지가 있는 학자들은 요즘 소란피우는 력사교과서개편을 두고 일본극우분자들의 력사외곡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꼬집고있다. 방향이 일치하고 시작이 똑같다면 가는길도 비슷할수 있는것이다.     뉴스에 의하면 민주당의 한 대표는 "국사편찬위 검정심의를 통과한 뉴라이트 역사책은 교과서가 아니라 유해서적 수준"이라며 "식민사관, 독재사관을 부추기고 친일독재미화에 표절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일본이 강요한 규율로 한국의 근대의식을 일깨웠다는 주장은 나치가 포로들을 수용소에 가둔 이유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정신 나간 교학사 역사교과서" 라고 에누리없이 질타하였다. 일제“쌀수탈”을“쌀수출”이라 서술하니 말이다.     물론 력사교과서도 수많은 력사서들속에 일종이므로 금과옥조는 없다. 있다면 오직 력사교과서의 규범성이 있을뿐이다. 중국의 경우, 소위 “전업성”이 제기되는데 력사교과서에서 체현되는 력사학과지식체계의 전업성을 말한것이나 력사교과서를 현대화할수 있는가? 교과서의 학과지식의 체계상에서“중점지식”은 내키는대로 고칠수 없으며 더구나 전통모식을 타파할수 없다. 단어도 한글자 차이로 왕청같이 외곡되는것이 력사적서술이다.     가장 절실한 례를 든다면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탄해서 10년후인 1920년에 자국의 학자를 대거 조선으로 보냈고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놈들이 뭔데 남의 나라 력사를 마음대로 왜곡하려 든단말인가? 이런 물음은 어린아이들이나 물을수 있는 천진란만한 물음이나 간악한 일제놈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놈들의 조선사외곡은 대략 기원 660년 백제가 망한후 그들이“친정집'”과 같은 조선반도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였다. 그리고 단군민족의 력사를 저들의 식민지사로 변조하여“4세기후반 신공부를 설치하여 2백년동안 다스렸다”는 남선경영론을 주장하였다. 조선사편수회는 16년동안 사업비로 천문수자의 거금을 투자하여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식민주의 사관으로 저술한 여러가지 사서를 간행하였다. 그중에서 일제가 가장 력점을 두고 편찬한 책이 바로《조선사》이다.     일제놈들이 이른바《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단군과 관련 기록을 삭제하고 조선과 일본은 같은 조상을 뿌리로 한다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论) 으로서 조선인은 렬등하고 일본인은 우수하다는 인식을 고취했다.《조선사》간행은 조선민족정체성의 뿌리를 송두리채 뽑아버리고 일본왕의 충실한 신민으로 전락시키려는 지극히 악랄하고 간능한 술책의 일환이였던것이다.     조선민족사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는데 리용한 "석유환인(昔有桓因)"에 담긴 의미는 사이비하면서도 심각하다.《삼국유사》명백히 기록된 "석유환국(昔有桓国)"의“국(国) 자를 모양이 비슷한 “인(因)”자로 변조하였다. 이렇게 환국이란 나라를 없애버림으로써 일제는 환국을 계승한 배달과 고조선도 허구적인 나라로 만들버렸다. 이로써 단군민족의 7천년상고력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것이다.     이처럼 누구든 자기의 력사를 분식하려든다면 력사외곡의 능자들인 일본놈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력사외곡과 극우정치의 만남은 무서운것이다. 일본극우정치인들이 시도한 력사외곡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한다는것은 슬픈 일만이 아니다. 력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가르치려하는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권력을 찬양하도록 비틀어짜는 작동은 우직함도 형편없는 우직함이다.     력사교과서를 고치는것은 모종의 수단이지만 결코 바람직한 목적에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권력은 바뀌지만 력사는 이미 화석으로 굳어졌기때문에, 먹으로 지워지지 않기때문이다. 분식에는 진실이 없다. 덧칠하고 어루만져 다듬은 력사교과서가 아무리 화려해도 외곡된 력사를 자기 후대들에게 기억하게 하는것은 자가당착, 부메랑이 되리라. 기필코!!                                                                2013년 9월 25일
282    이보, “난치”가 온다이, 댓글:  조회:8166  추천:0  2013-11-22
                                               이보, “난치”가 온다이,                                                                                                 최 균 선     오늘 아침, 골목길에 나서는데 3층집 김선생이 창문을 열고 나를 불러세운다.    “여보, 어제저녁 난치가 왔다이, 그집도 난치가 옵데? 인젠 살았다이…”     올려다보니 80객이 되는 김선생이 만면춘풍이 되여 손짓을 하였다.    “좀 오는것같던데요. 허, 대가리를 삶았는데 귀때기가 아니익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우? 문학선생이 돼서 그런가?”    “글쎄요, 그저 그렇단 말입니다. 허허허…”     그렇다. 인제 진짜 겨울이 와도 될듯싶다. 적어도 나흘째 정황을 보면 어디선가 서성거리던 동장군님이 갑자기 군림하여 설한풍으로 대지를 휘초리질하며 호령질해도 무섭지 않을듯싶다. 아닌게 아니라 늦어진 봉창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진종일 폭설 을 퍼붓더니 지금도 그치지 않는다. 그 어디에선가 기한에 떠는 사람들에게는 설경조차 반갑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지랖이 아니 넓더라도 내 배부르니 종보고 저녁을 짓지 말라하는 격으로 세상을 볼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잡담제하고 내부터 등따스워 고마운 일이라 절로 손가락이 자판위를 달린다. 성나면 보리방아를 더 잘찧는다는격과 같은것인지, 더운듯해서  깡마른 열정이 달아오르는지…    사연은 이러하다. 13일날 오후, 여러가지로 속이 번거로워서 강둑에 나갔더니 몇몇 마을사람들이 모여서“난치”문제에 대하여 의론하였다. 물론 의견이 아니라 원성이였다. 그들의 말에 나도 풍을 치는데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리여 받아보니 민화 사회구역위원회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장금화주임이 그냥 “난치”가 안오는가고 문의하여왔다. 그냥 그 상태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6시쯤 시건설국, 시독찰국, 열공급공사, 관도수리공들과 함께 현장조사를 하러가겠으니 집에서 기다 리라고 하였다. 희출망외였다. 하회를 기다려보자고 재작년처럼 말썽피우지 않고 누구네 말마따나“례의주시”하고있는데 설중송탄이 아닐수 없다.     역시 우는 아이를 젖준다던가, 그런데 여섯시에 온다던 사람들이 여덟시가 되여서도 아니왔다. 루대에 바람소리만 요란하고 비는 아니오는갑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장주임이 그때까지도 사무실에서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며 오면 곧 가겠으니 아래에 내려와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반갑던차 손전등을 가지고 달려내려가니 미구에 자동차들이 들이닥치였다. 한데 모이니 한 20명가량 될듯싶었다. 결과야 어찌될지 모르나 내사 개선장군이 된듯 우줄거리며 그들을 안내하느라, 정황을 말하느라 나이답지 않게 설레발쳐대였다. 스스로 우스워났지만도,     그 와중에도 금상첨화인가, 소문에 시독찰국에서 사업한다던 옛날 도문5중에서 가르쳤던 나의 학생이 조사조성원으로 내려와 반갑게 인사하는 바람에 또 한번 희출망외였고 똑 마치 난파선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구조선이 득달한 격이라 하겠다.    “그런줄 모르고 왔는데 선생님네 집도 여깁니까?”    “그렇소, 욕심은 굴뚝같지만 손에 쥔게 있어야 훌 떨쳐버리고 이사가지?”    “이런 곤난이 있으면 언녕 해당부문에 반영하고 해결받아야지요?”   “고맙네. 원래 이눔의 곳은 여러가지로 말썽이 많은 곳이여서…”    사제간에 오고간 짧은 대화는 접어두고 아래층 두어집에 들어가 실제정황을 확인한후 6층 우리집에 올라왔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집이 춥지 않네” 하고 말했다. 옆에 다른 사람이“밖에 얼다가 들어와서 그런거지”하고 뒤를 달았다. 누군가 온도계 를 보더니 18.3도라고 하며 수첩에 적는것이였다. 18도면 열공급기준치에 도달한 셈이니 자칫 할말이 없게 된다. 인정은 가변이여도 수자란 이렇게도 딱딱한것이다.    못들은척 할가하다가 쐐기를 박았다. “물론 국가표준에 도달했지만 그게 온종일 해볕이 들어와 덥혀준덕이지 스팀덕이 아니지요. 이제 열시쯤 되면 그 온기마저 없어지고맙네다. 그리고 검사한다니까 오늘 보이라실에서 정성을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주착없는 늙은이처럼 횡설수설 말씀이 많았다.     대여섯되는 보이라공들이 윗층복도에 있는 스팀관도를 가지고 역사질하며 열성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생각은 별스레 비틀어졌다. (아무튼 위에서 검사오면 무서운 모양이군, 시끄러울정도로 전화질할 때는 힝힝 마이동풍이더니 된통에 들었나?…) 나는 마을에 주민들이 해당기관에 신소하려 갈참이였는데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다고 치사하는것을 잊지않았다. 그렇게 한창 벅구작을 피우는것을 보며 맥도모르고 침질하지 않나하는 의구심은 버릴수 없었다. 아니면 아궁이에 촛불을 켜두는격이던가…       독찰국에서 내려온 옛제자가 래일까지 기다려보다가 그냥 열공급이 잘 되지않으면 전화하라고 하기에 맥이없는“로우”가 비벼댈 언덕이 생긴셈이라고 저절로 입이 벙글써해졌다. 비록 스팀이 당장 뜨거워난것은 아니지만 마음부터 후더워졌다. 참으 로 사람의 마음이란 가지기에 달린것인가? 그동안 혼자 풀풀거리던 노여움도 춘삼월 봄볕에 잔설이 녹듯 스르르 녹았다.…     아닌게 아니라 검사조의 위력이 무정하던 보이라를 침질해놓았는지 차갑기만하던 스팀이 오늘 저녁에도 온기를 띠고있다. 온도계를 보니 20도여서 솜조끼를 벗어도 될만큼 감각이 좋았다. 오뉴월 화로불도 쬐다 물러나면 서운하다고 하였던가? 사람이 늙으면 콩밭쪾으로 한다고 혈기가 쇠잔하니 불(온기)이 더 사랑인것을 말릴수 없다. 마음이 따스하니 덩달아 “정치”도 절로 나오는 모양이다.     습근평동지는“우리의 일체사업의 성과를 검험하는것은 최종적으로 인민들이 진정 실혜를 얻는가, 인민생활이 진정 개선되였는가 하는것이다….우리는 당의 군중로선을 견지해야 하며 인민의 주체적지위를 견지하여 언제나 군중의 안전과 위험, 추위와 따스함을 마음에 새겨두고 제때에, 정확하게 군중들이 생각하고 바라는것, 근심하고 급해하는것 등 군중사업을 심도있고 세심하고 투철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求是》杂志2013年第1期,第6页)     이 말을 거역할 사람이 있을가? 만약 아래에서 이 리념대로 군중사업을 한다면야 무슨 시야비야 할게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중뿔나게“난방(暖房)정치”에 신경을 쓰는지 스스로도 싱겁고 부질없지만 그럴 사연이 없는것도 아니다. 자초에 우리 사범학교구역에“집중열공급”인지 시작하던 2008년 7월께였다. 하루는 정신없이 글을 끄적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복도층계에서 무엇을 뚫는 기계소리가 요란한지라 나가봤더니 계단구석쪽을 구멍을 세개씩 뚫고있었다. 내사 무슨 령도인것처럼 뭘하느냐고 물었더니 스팀관도를 새로 설치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건 개인소유의 건물인데 누구맘대로 이러느냐고, 이건 범법이라고 고아댔더니 개 방구뀌는 소리로 들었는지 그냥 멋대로였다.     그때만도 시비깨나 좀 하는 사람들이 살고있던지라 문제를 내놓고 의론해보니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어쩌냐고 남의 일처럼 말하였다. 그것이 “꼴찌새서ㅡ사투리”“그러면 슨상님들 앞으로 추운고생을 한번 해보이소”하고 쓴소리를 했다. 그동안 줄곧 사범학교에 보이라가 있어 추운고생을 해보지 못하였다. 좀 추울듯싶으면 보이라실에 가서 누구네 말투처럼“우리가 남이가?”하며 롱담도 할수 있어 좋았더랬다. 게다가 우리 집 맞은켠에 보이라실을 책임진 사람이 살고있어 취난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니 추울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집중열공급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무슨 선견지명은 없지만 선입견은 확실하게 서있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한 보이라전문가가 연길시로 볼 때 집중열공급하면 여러가지 여건으로 문제가 생긴다고 하던말에 혹해서였는지 모른다. 집중열공급을 실시하는것은 정부차원의 시책이지만 구체적으로 열공급을 하는것은 사인기업이다. 사인기업과 소비자는 무슨 복무, 피복무관계가 아니라 상품매매관계이다. 계획경제운행도 종국적으로 리윤이지만 공급차원에서 복무 혹은 복리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사인경제는 우선 리윤을 선행시킨다. 잘 모르긴 하지만 그 운행원리는 별로 심오할것이 없다.     집집의 현관에 내붙인 공시를 찬찬히 읽어보니 자원원칙하에서 하기에 주민의 60%이상 동의하지 않으면 하지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거부할 정책의거가 있었다. 그래서 앞뒤, 좌우의 주민들속에서 대표 몇몇을 선출해서 진달래광장 어디에 있다는 열공급반공실에 찾아가서 협상하였다. 그들은 현지에 내려가 주민들의 의견을 직접 청취한후 결정하자고 하였다. 이튿날 주민들을 불러내여 의견청취를 해보니 거지반 불동의하였다. 막무가내라고 인정하였든지 그들은“손을 들었다.”     그래놓고 나는 청도의 어느 사립대에 초빙받아갔다. 그런데 이듬해 소문을 들으니 관도를 새로 묻고 집중열공급을 시작했다는것이다. 이미 외지에 와있는 나로서는 어쩔수 없었다. 내집은 비여있어 관도를 이어놓지 못했지만 취난비는 그대로 내였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참새 방아간 지난격이요 절로 호박쓰고 돼지굴로 들어간 격이였다. 결국 사람의 소총명이란 아무쓰잘데 없는 총명이다, 3년 후인 2011년도에 고향에 돌아와서 부랴부랴 집안에 스팀관도를 새로 개조설치하였다.     그동안 추워서 죽을번했다는 이웃들의 말을 들으며 간대루야 그정도였을가 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혼자“잘코사니”를 씹었더니 웬걸, 열공급이 말이 아니였다. 우리 이 구역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지였다. 주민들속에서는 로반이 저질 석탄만 사들이는데 원인이 있다며 여러가지 설이 떠돌았다. 하루는 보이라실에 가보니 석탄이란게 거의다 돌탄이였고 돌탄이 아니여도 돌탄가루가 가득 섞여있었다. 듣는 말에 의하면 탄광에서도 옛날엔 가려내 던지던 돌탄을 분쇄하여 좋은 석탄에 섞어서 팔기에 자기네도 어쩔수 없단다.     회의때 주건설국장에게“동천열공급소”은 그야말로 검은기업이나 다름없다고 꼭“취디”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제기했더니 그러지 않아도 해당부문에서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좋은 석탄 500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니 많이 나아질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주민들의 원성에 ××시장이 직접 우리 구역에 와서 시찰하고 상황이 악렬하다는것을 확인하였다. 그런후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정황이 좀 나아졌는데 어느새 음력설을 지나 봄이 오고있었다…이듬해인 2012년에는 마침내 연길시열공급소에서 대리경영하게 되였는데 그런대로 과동할만 하였다….     그런데 올해 또 문제가 생긴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급시우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주민구역에 내려와서 실제조사를 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했기에 주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박절하게 해결이 요청되던 문제를 해결한것이니 못내 감사하다. 창가에 놓인 컴퓨터에 마주앉으면 솜바지를 입고 솜을 놓은 슬리퍼를 신고도 무릎이 시리고 발이 싸늘하던것이 인제 썰렁하지 않으니 만족해야 할것이다. 이 며칠 보기조차 싫던 스팀에 자주 손을 대보며 확인하군 한다. 이미 온이상 달아날수 없지만도 말이다.     알고보면 연길시내 곳곳에 난방문제로 시끌벅적하다. 열점문제가 아니면 12319 라는 열선전화를 설치하고 전문 난방문제상에서 제기되는 난제를 처리한다고 하겠는가? 새로 바꾸었다는“영덕열공급공사”에18243337572라는 열선전화를 설치하고 있지만 접수태도는 열정적이였으나 맥이 없는지 아니면“한편”인지 대답은 잘하면서도 실제해결은 묘연하다가 이번에 된통에 걸려서 스팀도 제법 열정을 내고있다.     전번에 지각한 동장군님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오늘은 지각한“설중송탄”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비록 다른 구역에 집들에서처럼 맨적삼바람은 너무 사치한 희망사항이고 온도가 20도에 매달려있지만 재작년처럼 솜바지를 입고 두꺼운 이불속에 옹송그리지 않게만 된다면야 어찌 감사에 린색하랴, 이 한달동안 한번도 오는 기별이 없던 열공님이 이붓아비 제사날 미루듯이 벼르고 별렀더라도 모쪼록 왕림하였으니 감지덕지하지 않을수 없고 내 심정인즉 이웃들의 마음이기도 하리라 믿는다.     스팀에서 “气”를 빼지않은 탓도 아니고 온돌난방을 한 집들에 관도에 무슨 깡치가 들어차서 온기조차 없은게 아니였다. 그동안 관도안에서 두세번 물이 와르륵와륵 소란을 피웠으니 열공님이 오셨다가 가실 길도 막힌것이 아니였다. “공권력”의 힘이란 이런데서 느끼지 않을수 없다. 사회구조속에서 누구나 지켜야 할 사회결약은 이래서 유용한것이다. 개체간의 약속이란것은 고무줄같아서 늘었다 줄었다할수 있으나 사회결약은 그럴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지금 공민들은 옛날공민들이 아니다. 돈을 벌더라도 얼렁뚱땅하가는 큰코 다칠것이니 사회결약이란 어길수 없음을 알야 한다.     아무튼 어느 부분에서 은을 냈는지 모르지만 닭알을 먹어보아서 감각이 좋으면 그만이지 기어이 어느 암탉이 낳은것인가를 알필요가 없듯이 우선 우리 민화사회구역에 사업일군들이 그동안 애쓴것을 알아주어야 할것이요 어디까지나 사회구조속에서 사는 공민으로서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정부밖에 믿을곳이 더 없음은 사실이겠다. 그 모두에 대한 내 고마움이 이 겨울내내 식지않기를 못내 바라는바이다. 졸문을 마치 고나서“난치팬”을 만져보니 정다웠다. 역시나 겨울엔 따스하고 볼판이다.                                           2013년 11월 17일    
281    카멜레온의 변호 댓글:  조회:7434  추천:1  2013-11-21
                                                             카멜레온의 변호                                             ㅡ 카멜레온의 보호색과 인간의 위장술ㅡ       우리를 중국에서는 변색룡(变色龙)피역(避役)이라고도 하는데 로씨아의 작가인 체호브의《카멜레온》에 나오는 주인공이 곧 우리 선조라고 인식하는것은 한참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 족속들은 공룡시대에 존재했는바 28만년의 서식력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북아프리카, 인도, 소아세아, 남유럽 등지에 널려있는 서식하며 그 종류가 80여종으로서 수자가 방대한 물종이다. 거개 깊은 밀림속에서 살기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는다.       체호브가 어느 종류을 념두에 두고 썼는지 모르나 우리의 몸빛이 광선과 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것은 인간들이 말하듯이 그런 량면파적기질을 가져서가 아니라 생존의 본능이다. 그러니 인간들이 폄하할만한 가증한 물종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런 동물학적인 분석을 통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바로잡고 그로써 인간들의 위장술 특히 탐관들의 고명한 위장술에 대해 발가놓음으로써 다시 평가받고 우리에게 가해진 모독적인 루명을 철저히 시정하려 한다.     기실 아흔일곱번이나 변하는 카멜레온도 있지만 인간들의 변신술에 비하면 큰 무당앞에 새끼무당이다. 위장술에 능한 인간들은 고기술로 현대화한 각종 위장설비를 고안해내여 미래전쟁마당에서의 생존공간을 쟁탈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리고있다. 현대생물위장기술을 생물공정이라 부르는바 생존수단이자 목적이 되고있다.     인간일반이 거개 이중인격을 가지고 살지만 그중에서도 탐관들은 더구나 고명한 위장술을 가지고있다. 그들이 양광아래 저지른 죄악적행각은 권력을 편취한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중 3분에 1은 자신을 한껏 분식하여 위신을 세우고 3분에 1은 관계망으로 수뢰하고 회뢰한 자들이며 3분에 1은 하류적인 풍류여서 술집아가씨들이“정대거(情大哥)”라 부르는 시대의 총아들이다.     그들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의 통속적의미도 모르기에 장기적으로 자기를 분식하여 국민을 우롱한다. 가짜제조술이 남달리 뛰여나서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게 관례이다. 가짜는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실용적인 경전철학으로 되여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위장대왕들이다. 그들은 눈부신 광환을 한몸에 두르고 조그마한 업적을 더없이 확대하고 각종 매체수단을 동원하여 형상수립을 한다.     그들의 위장술에 우리 족속들이 감탄할 정도이다. 변색속도, 변색수단, 변색밀방 등 면에서 수시로 변색하여 위장하는 우리들마저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다. 상급을 최대한으로 숭경하고 최대한으로 충성하며 최대한으로 헌신하며 최대한으로 찬미 하면서 상급의 혜안을 흐리게 한다. 상급의 안색이 청우계이고 벼슬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는 허가증이다. 그들에 비하면 오츄멜로브는 채진화되지 못한 가장 저급적인 카멜레온에 불과하다.     그들은 일장춘몽같은 부귀영화의 저 끝에 자기훼멸이 기다리는것을 알려하지 않는다. 하긴 광휘로운 형상만 선전되니까 추악한 리면이 스스로 무색해지는것이다. 그들의 위장술에 의해 바른것이 비틀어지고 추악이 아름답게 변하고 비합법적인것이 합법적인것으로 둔갑되며 비정상적인것을 정상적인것으로 포장하고 무리를 합리한것으로 돌려놓으며 진짜를 가짜로 뒤엎어놓고 사악을 정의로 만든다. 그 심리바탕은 탐욕심, 사악심리, 패권심리, 약육강식심리, 오만심리, 요행심리, 위선심리 등이다.        아무리 정인군자연 분장해도 거개 흉금이 좁고 량심이 멸절되여 남을 해치기 좋아한다. 그들의 추악한 몰골은 우리 족속들의 모습에 비해 더 나을것 없다. 날이 갈수록 부패척결의 천균봉이 휘둘러지자 급해맞은 탐관오리들의 위장술은 통용기량이 되여졌다. 그들의 기량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가소롭다. 그들은 렴결봉공을 입에 걸고다니는데 공중앞에서 입만 열면 렴결을 주문처럼 외우고 념주처럼 세며 다닌다.     그들은 렴결을 눅거리껌처럼 팔며 다닌다. 그들은 자기에게 무용지물인 수뢰품은 기률검사위원회에 바치여 청렴의 꽃감투를 얻어쓴다. 혹은 일부 금품과 현금을 바치고 더욱 높은 명성을 낚는것으로 구린 뒤를 덮어감춘다. 가짜렴결을 내세운다. 즉 질박한체 분장하는것이다. 뒤주머니는 불룩하지만 절대 사치를 부리지 않으며 늘 질박한 차림새로 공중형상을 수립한다.     남이 보는데서 산해진미를 먹지않으며 좋은 집에 들지않으며 전용차도 부리지 않기에 군중위신이 대단히 높다. 말하자면 착실한 고행승의 역을 멋지게 논다. 그러나 루추한 집안에서 곰팡이 낀 루만금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구멍이 난 양말을 신고 다니기도 한다。그러나 려산의 진면목은 안개가 가신뒤 드러나기 마련이다.     근 2천만원을 수뢰하고도 입으로는 최대의 념원이 운남의 160여만의 빈곤호문제를 5년내에 해결하는것이라고 솔직하게 분식한 성장어른도 있었다.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 1994년 《동방의 아들ㅡ성극걸》을 촬영할 때 그는 렌즈앞에서 우국우민의 모습으로 눈물을 머금고 수를 놓았다.《재해지구 인민들이 고생하는걸 보며 정말 견딜수 없었다. 그들도 엄마아버지가 낳은 사람들이다. 나도 엄마아버지가 낳은 사람이다. 나도 피와 살이 있다. 그들은 정말 고생한다. 나는 주석으로서 한잠도 잘수 없다》라고 강개하고 격앙된 목소리로《동방의 아들》노릇을 그럴듯하게 하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늘《인민이 우리에게 권력을 주었다. 권력은 쌍날검으로서 사업에 리용하는 무기이지만 잘못 쓰면 자기를 해치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훈계하곤 하였다.그러나 그가 챙긴 금액은 4000만원이였다. 얼마나 눈물젖은 유모아인가? 그때까지 광서성의 700만 인민이 가난모자를 벗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탐관들이 고행승을 잘 표방하는데는 우선 군중의 밝은 눈이 두려운것도 있거니와 도적의 목표물이 되여 실질적손해를 볼가봐서이기도 하다. 사실상 많은 청렴한 탐관들이 도적의 손에 의해 들통이 났다.     대탐관들은 위장술이 한계에 이르면 36계 줄행랑을 놓는다. 4000여명의 탐관들이 4천억원이라는 천문수자의 돈을 후무려가지고 잠적했으니 얼마나 위장술이 고명한가? 그 대표적인 인물을 례를 든다면4.2억원이나 해외에 전이시킨 진만웅부부, 4.83억원을 횡령해가지고 국외로 잠적한 여진동, 허국준, 1.8억원을 챙겼다가 총알 받이가 된 김감배 등 탐관오리들은 다 우리보다 그 위장술이 백배로 뛰여난 자들 이다.     그래 카멜레온족속들이 천성적인 본능때문에 더러운 루명을 써야 하는가? 이 문제는 반드시 해명되여야 한다. 그러자면 누구네 마따나 특검을 해야 할것이다. 인간은 자기네들의 가치척도로 모든 동물에 값을 매기고 나름대로 우롱한다. 카멜레온의 변색기능을 모방하여 고안해낸 위장술을 전쟁 마당에 운용하는것은 역시 생존의 수요에서 출발한것이기에 말려낼수 없지만 탐관 들이 탐욕심으로 하여 자기를 위장하는것은 용납할수 없다.     상술한 서술은 본고의 주요내용으로서 얼마든지 더 전개하여 장편대론으로 만들수도 있다. 한마디로 이 지구촌에 보호색을 가지고 생존하는 동물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래도 위장술에 가장 뛰여난 동물은 고급령장동물이라는 인간들이다. 이는 결코 억지가 아니다. 탐관들은 한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2007. 10. 5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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