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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이오장 시론 외 1편 [한국] 댓글:  조회:1226  추천:0  2017-10-02
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차 한 잔의 향기가 난다 귀 가까이 은박지를 밟고 와 똑똑똑 여보세요 아침 하얀 풋잠을 깨운다 울타리의 장미가 새순을 뻗고 기어가 바람 일렁이는 꽃불을 켜고 있는 가슴 신록을 꼭 누르면 깜박 깜박 디지털 숫자가 찍히고 싱그러운 손전화 푸른 벨소리가 난다 감전되는 떨림으로 여보세요 신록의 첫 목소리가 울려온다 울타리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도록또록 눈망울을 굴린다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손톱만한 몸뚱이. 반짝이는 갑옷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쇠똥더미에 올라 곰상곰상 쇠똥을 굴려 금방 구워낸 똥경단 핑크 냄새나는 달덩이 빵 달은 없고 고공 철탑농성 2백일 비정규직 B씨의 눈에는 별없는 칠흑 밤하늘이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한 더 큰 빵만 하였다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말랑한 똥경단 밟고 오른 무대에서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아 깨끼춤을 춘다 하늘을 조아 은하수 등불을 찾는다 은하사다리가 감마선 광목을 펼쳐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똥경단을 탈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달덩이 방을 빼앗기지 않기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은하 젖줄에 더 가까이 가려고 양 어깨를 들썩인다 똥 굴려 똥경단 먹고 똥경단 틈새에 새끼 낳고 똥 구워서 쇠똥찜 한다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하이퍼시클럽 2집에서 예시를 본다면 "물계자의 노래“ 1연 첫 행부터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등 무려3번의 직유가 있고 그 밖의 시에서도 많은 직유가 유행처럼 보인다. 하이퍼시를 쓴다면 직접적인 비유가 하이퍼시의 최고 지향점인 사물의 객관화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매일 본 사람이라면 멀리 있을 때도 소나무의 크기를 원래의 크기대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것을 배제하고 현재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하이퍼시가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물의 크기나 모양을 주위의 환경과 움직임에 맞춰 이미지의 상상력을 확대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본질보다는 허상과 허구의 상태를 그려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항등성 곧 관념의 배제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해부학 교실. 환각제 복용. 생존 본능. 노란 불꽃. 인연론. 냉동된 자유. 삶과 죽음의 시편. 희고 붉은 시. 환상여행. 미궁. 원앙생가, 돋아나는 서녘. 사이에 대한 소고. 나의 고독은. 겨울 여행. 세한도. 등 제목만 보면 하이퍼시라 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 이는 사물이나 형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잊고 하이퍼시를 쓴다. 또한 제목이나 내용에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 또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5.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 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판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손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어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김기덕 시인 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가기 위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창작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이퍼적인 기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우선은 서사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을 나는 제시한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수학자 폴리아(G.polya)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a지점에서 출발하여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인 a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실험이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문제는 곰의 색깔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키로 동쪽으로 1키로 북쪽으로 1킬로미터로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말하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시는 무조건 어렵고 외우기가 불편하다는 선입감을 더 느끼고 시를 대한다. 더구나 하이퍼시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으며 시인들조차 하이퍼시가 무슨 시인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문제는 이야기 즉 서사에 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이야기를 이미지에 맞춰 풀어간다면 하이퍼시의 성공은 분명하다고 본다. 폴리아의 문제처럼 시선을 끌어들여야 하이퍼의 공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발표 이후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하이퍼시는 시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이론과 맞게 발표된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제목부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국적 모를 외래어의 남발, 이어가지 못하는 이미지의 확장을 위한 과도한 직유, 상상 보다 허구의 조합이 많고, 과도한 낯설기작법 등,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충분한 요소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 이성혁은 "시문학" 8월호에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란 시론에서 이상의 시 "광녀의 고백"을 들어 현란한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하이퍼하게 결합하고 벌거숭이인 채로 달리고 있는 푸른 불꽃 탄환은 모순적인 색채이미지가 결합하고 있어 진정한 하이퍼적 요소를 갖춘 시라고 극찬하며 현재의 하이퍼시를 일부 폄하하는 듯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또한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된 어떤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면 하이퍼텍스트는 테크롤리지에서 시를 예속시키려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고 비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이퍼시가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이퍼 시이론에 맞게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자신의 시창작에 한계를 느껴 유행을 따르듯 하이퍼시에 동참하고 시의 낯설게 하기가 낱말의 낯설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낯설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오장 시담론   시인은 물가의 등불이다   빛은 물속에 들어가지만 등불은 물속에 들어가지 못하듯 빛은 어디든 훤하게 밝혀주고 자신은 밖에서 자신의 그림을 방관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느낌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느낌에 기반을 둔 모든 생각은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주관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어떠한 대상을 만났을 때 느낌만 갖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은 마음의 두 가지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첫째는 인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둘째는 인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인데 첫째 능력에 의하여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둘째 능력에 의하여 주어진 대상과 인상을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은 인식의 모든 요소이며 개념이 없다면 직관도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감성 즉 오감을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감동을 지식과 연관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시를 쓰게 된다. 그러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감성이 무분별하게 수용한 정보를 지성이 판단하고 추론하여 범주에 맞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모두 다르다. 사물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성향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상을 포함하여 배경까지 전체를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대상이나 배경의 세부 사항에 초점을 맞춰 느낌을 그린다. 여기서 사람마다 능력이 구분되고 표현의 느낌이 다르게 된다. 즉 개개인의 능력이다. 어떤 시인이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하여 그것을 모방하여 시를 쓴다면 외면당하는 것이다. 물가의 등불이 물속을 아름답게 비추지만, 물속에는 들어가지 못하듯 시인은 대상을 꾸며주는 빛으로 밖에서 안을 비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모양과 크기만을 그리지 말고 사물의 내부 사항과 배경을 찾아내는 자기만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시인정신에 의한 체험적 창조     사람의 정신은 과학적인 해석이 불가하다. 정신으로 발생한 모든 결과는 체험에서 이뤄지고 정신적인 체험은 주관적이어서 내면의 신비를 밝히는데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생생한 의식의 흐름, 생각에서 얻어지는 생각과 충동. 기분. 감각과 기억. 몽상이 쉬지 않고 흘러간다.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이의 마음에 이미지를 전달하고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곧 시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존 브로더스 왓슨(John Broadus Watson)은 ‘인간의 학습 방식은 고전적 조건화’라고 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이 시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환경에 존재하는 유발인자가 학습으로 인하여 자동적인 신체적 반응이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체험과 거기에서 얻은 지식만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938년대의 스키너(B.F Skinner)의 조작적 조건화라는 학습에 대한 연구발표로 모든 학습은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것을 배우는 것이라 했다. 어떠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사고방식은 긍정적 강화와 부정적 강화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표현으로 일반인과는 다른 유형을 가졌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세계와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받아드린다. 감각수용체 세포는 물리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시인은 한발 더 나아가서 오감을 통해 얻은 정보를 더 큰 폭으로 확대하여 상상을 결부하여 거기서 발생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이 시인이 창조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창조행위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문학의 본질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에게 모방행위가 불가능했다면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미메시스론의 핵심이다. 어떤 대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자신의 경험처럼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모방행위가 없다면 새로운 창조가 없다는 것이다. 남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초로 여기는 공감능력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에서 유래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미학적 체험을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감정이입이란 그 전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라는 말은 영어권에서는 공감이라고 표현되었고 현재는 일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의 정서표현을 그대로 모방했을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러한 정서의 모방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발달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모방이 창조적 능력으로 진화하는 것은 지연모방(Aufgeschobene Nachahmung)이 가능하면서부터다. 사람이 두 살 무렵부터 며칠 전 본 것을 기억하여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행위를 머릿속에 상징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 지연모방과 같은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가 창조성의 원천이다. 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인간의 두뇌는 창조적으로 치달아 여러 가지 상상력으로 문학이나 과학 또는 생활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 모방행위는 기초적인 것으로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에서 발견된 사물의 변화를 읽게 되는 것이 문학 즉, 시 창작의 기본이다. 그러나 모방이 아니라 표절이 된다면 창조적인 예술이 아니라 감정이나 사상이 전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를 쓰면서 가장 기초적인 기술은 자연과 사물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경치나 새로운 사물을 대했을 때 거기서 얻은 영감이나 정적인 감동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연관된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비유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모은다. 그것이 시인 개개인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많은 독자가 자신과 같은 감동을 하게 되는지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시를 쓰는 순간에 자신의 감동을 그리게 되지만 시의 완성이 이뤄졌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갖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그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 100m 높이에서 바라보는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뜻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원리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항등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나무가 작은 묘목으로 보인다면 허상이다. 대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면 큰 나무가 묘목으로 보일 리가 없다.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를 다르게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인간의 생활이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모르고 감동만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만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에서 사물과의 연결이 끊어져 읽는 이의 감정을 훼손시킬 뿐이다. 한 편의 시가 혐오스럽고 감정을 격하게 한다면 이미 시의 근본 목적을 잃는 것이다. 여려가지 학설과 실험에 의하면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에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 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계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물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른다. 이것이 시가 독자를 잃은 이유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찾기다. 항등성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해도 사물에서 파생된 감정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느껴야 시를 쓸 수 있다. 카메라가 잡는 객관적 정확성만을 가진다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카메라 눈을 버리고 두 개의 눈을 넘어 세 번째의 눈인 본능적 감성에 충실하여 사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시는 창조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상상(이미지)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어 시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이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문제는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않을 때다.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사물의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시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면 화자만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독자들도 이해를 못 하고 시를 외면하게 된다. 시에 전경과 배경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고정된 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같은 단어를 고집하고 누구나 보는 것만을 본다면 창조적인 작품이 되지 못해 제자리에 머물고 말 것이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을 봐야 한다. 즉 자신이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이는 모습을 자신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한다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찾는 것이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세상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현상을 바라보기가 시의 시작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라는 천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설로 통했다. 이와는 달리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을 도는 위성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이 확실하게 굳어진 것은 과학적인 실험과 그것을 확인한 여러 가지 작업으로 우리는 모두 지동설을 믿는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험을 통하여 사실을 믿게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확실한 근거에 의한 불변의 현상이라 하여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도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주관적인 주장도 가능한 것이다. 한 시대에 사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한 이유로 과학자들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 시대에 풀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면 그것을 풀기 위한 새로운 눈이 등장한다. 천동설로 이해하지 못한 현상을 지동설로 명쾌하게 설명한 것 같이 언제나 시대에 맞는 학설은 대두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새로운 사실을 대부분 사람이 받아들이는 현상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그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을 과학의 혁명이라고 한다. 시문학에서도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러다임은 형성되었고 그 패러다임은 시대에 맞추어 문학의 혁명을 이뤄냈다. 시는 과학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패러다임 현상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과학보다 먼저 앞서게 한다. 시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이나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현상을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인간 개개인의 영혼을 무한대의 상상으로 몰입하게 하여 진정한 인간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맞게 사물을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차와 도구는 필요 없다. 오직 바른 정신과 사물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이 사물의 현상과 자신이 체험한 직관적인 사실만을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된다. 순간적으로 다가온 사물과의 만남에서 얻은 자신의 심적 변화를 크게 확대하여 대중에게 노출하려는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예술작품은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위한 예술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가졌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인정받게 되는 것이   시는 세상의 기운을 읽는다   문학은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찾기 위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활로를 찾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고 자연을 뛰어넘었다 해도 내면의 슬픔이나 외면의 아픔을 감내하지 못한다. 육체가 강할수록 내면의 갈등은 더욱 커지고 무엇인가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희로애락을 극복하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하여 문학은 탄생했다. 소설은 설명으로 채워주고 희곡은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이 지니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느끼게 한다. 이와 반면 시는 의문을 깨어나게 하여 스스로 채워주게 하는 역할로 인간의 숨겨진 감각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시는 답을 주는 게 아니고 답을 찾아내는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학을 떠나 인간의 최대 목표는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삶의 만족도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다. 그렇다면 완성은 과연 무엇인가.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인간이 완성을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꽃을 피우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 전에는 완성이라 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나 일단은 꽃을 피워낼 수 있다면 그것이 완성이다. 그러나 문학 중에 시는 완성이 없다. 수많은 봉오리를 만들어 활짝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영원히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 시를 완성했다고 하는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의 완성을 봤다고 하는 시인이 있다면 당장 성인이라고 추대 받아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시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완성이 없는 시를 왜 쓰는가. 그것은 완성을 이룰 때까지 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끝을 보기 위하여 전력으로 매진하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완성을 보지 못한다고 아무렇게나 시를 쓴다면 시인의 자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시는 오감과 체험을 통하여 얻게 된 물상의 움직임과 내부에서 발생한 고뇌와 이념이 상충작용으로 부딪쳐 발생한 감정으로 쓰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감각기관에서 청각이 가장 중요하다. 감각에서 청각의 깊이가 깊기 때문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다. 귀를 틀어막아도 희미하게 들리는 기관이 청각이다. 완전히 막았다 해도 울림으로 들린다. 시인의 기능은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 있다. 활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삶의 기운과 죽음의 기운을 감지하는 역할은 시인의 몫이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시인이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기능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시인이 전하는 희로애락의 전달이 또렷할수록 생명의 기운도 뚜렷하다. 이것이 시의 역할이다. 이러한 시의 역할을 시인이 외면한다면 시를 쓰기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시인은 착각하지 않는다. 생명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다. 여기에 착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옳은 것일까. 여기에서 시의 고민이 시작된다. 전달은 하되 변형이 있어야 한다. 큰 느낌을 작게 한다거나 어떠한 장치를 가미해서 다르게 느끼도록 변형을 주는 것이 좋은 시의 출발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물이나 감동의 변형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형을 그만두지 못하는 게 시다. 한마디로 현대시는 이미지의 변형이다. 시인이 쓰고 읽는 이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귀에 들리는 울림을 이미지는 놓치지 않고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높은 것을 낮게 또는 더 높이는 것이 시의 기본 틀이다. 객관적 이미지와 주관적 이미지     모든 사물에는 겉과 속이 있다. 그러나 겉과 속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는 명백한 규정이 없다. 나무의 껍질을 겉이라 하고 껍질 속에서부터 속이라 규정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고 껍질부터 겉이고 보이지 않는 껍질 안쪽부터 속이라 하는 것도 객관적이지는 않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얼마든지 겉과 속이 나뉘어 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인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규정의 잣대로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가 겉이고 어디가 속이냐고 확정지으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지의 변형이다. 자신의 주장대로 이미지를 규정했다하더라도 독자는 얼마든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꽃의 이미지는 변형이 없다. 누구나 알고 있고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갖는 언어가 관념이다. 현대시에 있어서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찾아내어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새로운 이미지를 구상하였다고 자기 뜻을 관철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이미지가 되어 독자에게 혼란만 주게 된다. 이것을 피하고자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게 되는데 하나의 창조적인 언어가 탄생하여 모두에게 공감이 되는 이미지로 규정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사물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 관념이 된다. 새롭게 탄생한 물질도 모두가 부르는 이름을 갖게 되면 고정된 물체로써 관념이 되는 것이다. 시에서도 새로운 언어를 찾아 썼다 해도 모두가 공감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면 굳어버린 관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쓰기가 쉽지 않고 언어로 만들어내는 이미지 찾기는 쉽지 않다. 시는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용광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아내는 이미지가 객관적인 새로운 언어가 되는가. 그것은 감각에서 찾아야 한다.감각은 느끼고 깨달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외부적으로 받는 자극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거기에 반응하는 자극으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감각은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나 어느 한 가지도 빼놓는다면 시 쓰기의 자극은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한다 해도 한정된 주관적인 이미지만 갖게 된다. 미각. 촉각. 후각. 시각 등 모든 감각 기능은 항상 열려 있어야하고 모든 감각이 하나의 연결체로 뇌파에 전달되어 넓혀진 상상이 하나의 언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상징,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징     단단하고 올곧은 나무를 고른다. ‘껍질을 천천히 벗겨/칼질할 곳을 그린다/꽃 모양을 떠올려/한 꺼풀 한 꺼풀 떠내려가다가/망가지기도 한다/곡선을 파내려다 직선이/직선을 긋다 칼 놓칠 때도 있다/한 잎 두 잎 꽃잎 모양 보일 때면/모란 인지 작약 인지 분간 못 하고/색칠부터 하려 물감 찾는다/무지개 색깔 칠하다 먹칠이 되고/머릿속 지우개는 색을 잃어버려/장미로 해당화로 국화가 되었다가/회양목 울타리에 꽂아두면/꽃잎 숫자가 적고/색깔이 부족하단 말 듣는다/귀를 막는다/새김칼을 놓고 텅 빈 마당에 던진다/누구는 꽃이라 말하고 누구는 막대라 하지만/어떻게 깎았던/머릿속에 들었던 그림은 꽃이 된다’ 위의 시는 “시 부수기”라는 제목의 연재시 중 ‘시 깎기’다. 시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꽃이라는 가정 아래 쓴 일종의 시론 시로써 어떻게 깎든 꽃이 된다는 의미로 쓴 시작법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다. 사물과 사물의 혼합에도, 색깔이나 모양 그리고 변형의 이미지 등 모든 것에는 답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발원되는 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사물에서 발견된 것이나 내면에 잠재했던 것이나 상상으로 이뤄지는 인위적인 언어에는 제약이 없으며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시의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오답을 찾는가에 있다. 무지개와 비교해본다면 이해가 된다. 무지개는 분명히 원형이다. 태양의 모양대로 빛을 받아 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개의 반쪽만 볼 수 있다. 지구의 반쪽이 태양빛을 가린 이유로 항상 반쪽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은 무지개의 원형을 찾지 않는다. 그냥 보이는 대로만 그린다. 시는 그런 무지개의 원리를 일부 갖고 있다. 하지만 무지개는 우주선 위에서 본다면 원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는 무지개와는 다르다. 완전하게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쓰던 각자의 모양을 찾아 시의 틀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만의 꽃을 깎아 꽂는다면 시가 되는 것이다. 시는 자신의 체험과 정신이 부딪쳐 일어나는 감동의 꽃그림이다. 그러나 혼자서 가진 감동이라면 시가 아니고 혼자만의 독백일 뿐이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발생한 감동이 화자와 통했을 때 시의 시작인 것이다. 시의 정답이 없다고 해도 시인은 시의 답을 찾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한다.그래서 시인이면 어떻게 해야 독자와 통하는 시가 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말한다면 상징성이다. 상징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속에 느껴지는 형이상적 형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만든 상상을 깃발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가 있는 그대로의 상징을 세워 참된 가치를 떨어트리고 있어 문제다. 비둘기는 평화, 소나무는 절개, 태풍은 포악성, 구름은 어둠 등 상징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어 함축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상징은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평범한 일상용어에 불과하다, 시 속의 상징은 의식을 초월한 어떤 내용에 대한 이미지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면과 더불어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이 공존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에른스튼 카시러(Cassirer, 1874-1945)는 사람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의 지식 자체 즉 인간의 사고와 문화의 다양한 영역 속에 있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인간 외의 동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용계통을 사람은 의외의 상징계통이라는 제3의 연결물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상징은 시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요소다. 시인은 사람 속의 또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용어로만 자신의 감동을 그린다면 평범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체험에서 얻은 심덕을 사물에 옮겨 새로운 기호와 신호로 상징을 만들어 낸다는 건 쉽지 않다. 어떻게 깎든 꽃이라 부르면 꽃이겠지만 독자의 손으로 옮겨진 꽃이 화자가 만든 상징을 피워 냈을 때 또 하나의 답이 찾아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 쓰기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비유, 좁은 의미의 비유   언어는 소리의 값과 의미의 대상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한정되어 있는데 나타내고 표현하며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사물)은 한계가 없어 전부를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물에서부터 왔지만, 사물의 한계는 무궁무진하여 각각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언어는 사물에서 왔으나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것을 언어의 가동성 즉 시라고 한다. 시는 언어의 유한적 한계를 극복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비유나 상징이 발생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동시에 시가 창조되는 발상도 언어의 가동성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유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넓은 의미의 비유와 좁은 의미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문체와 수사의 뜻으로 쓰고 있으며 읽는 이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문장의 변화와 정체를 더하기위한 수사형식을 말한다. 좁은 의미의 비유는 구상적 회화적 표현 특히 은유와 같은 뜻으로 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이나 의미에 유추하여 표현하는 직유, 은유, 환유 등을 포함한다. 시를 쓰는 화자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본래의 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사물이나 의미. 즉 관념을 끌어들여 자신이 느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을 비유라 하며 이것을 비유의 성립조건에서는 본래의 것을 원관념,동원된 것을 보조관념이라 하는데 원관념을 본의, 보조관념을 유의라고 말한다. 비유는 두 개의 사물과 두 가지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흔하게 장미꽃은 허공에 수놓아져 있고,포도송이는 가을과 함께 익어간다, 등 장미와 허공 포도송이와 가을 두 개의 사물이 동원되었을 때 장미와 포도송이는 원관념 허공과 가을은 보조관념인 유의가 된다. 이러한 비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가 이질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며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은 유사성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시의 본질이 훼손되기 시작하여 문제가 된다.   비유에는 크게 직유, 은유, 환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직유는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관념을 직접 비유하는 것이고 은유는 암유라고도하며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조사를 넣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하게 보는 비유로 메타포 즉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사물이나 관념의 대체를 외연하는 비유라 한다. 이는 초월 및 벗어난다는 뜻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관념,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란 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 전이는 속에서 종으로 종에서 속으로 혹은 종으로 또는 유추를 토대로 이뤄진다고 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환유는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 체험을 통하여 그것과 관련된 것에 사용되는 비유법으로 명칭의 변경을 의미한다. 즉 근접성을 말한다. 이처럼 시창작에서 비유는 절대적인 것으로 비유가 없는 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시인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언어의 가동성에 의한 비유를 하며 시창작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직유의 남발에 있다. 우리는 시인 2만명 시대에 살고 있고 인터넷이나 그 밖의 매체에서 수많은 시를 대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길이길이 남아 있을 명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히 아니다. 일반적으로 발표되는 시 중에 그나마 읽히는 시는 품격이 갖춰진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것조차 명시에 속하기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직유의 남발이 가장 큰 이유다.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     시인이나 기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분야에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를 기대하며 글을 쓴다.그러나 좋은 평가를 받고 영원히 남길 작품을 쓰기란 쉽지않다.그렇지만 그러한 바램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쓸수 있다.시를 쓰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무엇일까.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고민이다.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어떠한 시상이 떠올랐다 하여도 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없다면 한행도 써내려가지 못하는게 시다.우리는 흔히 무슨일이든 막힘없이 실행하고 남보다 빠른 결과를 내놓는 사람을 아이큐가 높다고 말한다.하지만 그 아이큐는 지식이 없다면 측정하지 못한다.천부적인 머리를 갖고있다는 사실은 교육으로 인한 지식의 습득으로 알수 있는 것이다.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여 시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그 광경에 적합한 지식을 갖고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눈으로 들어온 정보와 안에서 발현하는 지식이 합쳐지지 못한 시는 그냥 하나의 정경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감탄사 일 뿐이다.그렇다고 지식만으로 시를 쓴다면 하나의 교과서에 불과하다.시는 남에게 자신의 지식을 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감동을 지식과 합친 추상적인 그림으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시는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이 중요하다.그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관찰력이다.시인은 남보다 먼저 관찰하는 사람이고 관찰의 결과를 감정으로 순화시켜 함께 감동하는 독자를 찾는 사람이다.관찰의 대상은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끝을 모르는 우주,그리고 한계가 없는 상상까지 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관찰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고 자신이 쌓은 지식과 응용력이 발현 되었을 때 비로소 시를 쓸 수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력은 무엇인가.말 그대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을 만나고 그때 마다 움직임과 부딛침에서 느낌을 얻는다.나무가지에서 바람을 보고 바람의 흐름에서 방향을 알게되고 자신이 처한 심적동요에서 상상을 얻게된다.그런데 어떤 사물을 대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자신도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 고정체가 되어버려 상상의 나래를 펴지 못하고 언어의 꼬리를 따라가지 못한다.산봉우리를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그냥 지나치고 달밤에 우는 개구리의 울음에도 듣기만 한다면 시 쓰기의 기초는 없다.평상시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관찰력만이 시상의 첫문이다.그러나 무엇인가를 깊이있게 봤다고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있어야 새로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산 위의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슨 이유로 흘러가게 되는지.또는 달밤에 개구리가 우는 자연의 생태를 알아야 사물과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또한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시상이 언어의 길로 바로 들어서지는 않는다.자신의 내면과 표면에서 파생된 어떤 감정이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상상과 합쳐지는 응용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응용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지만 이는 개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써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수많은 작품을 써보고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시의 목표에 도달하게된다. 작품의 평가는 독자 몫이다   예술의 모든 작품은 평가를 받는다.시와 소설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창조적인 작품의 결과는 받아드리는 대상 즉 독자들로 부터 평가를 받고 그 수준 여하를 판가름한다.그것이 형식에 맞지 않고 의외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잘됐던 못됐던 혹은 그자리에서 사장 되던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예술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오는 결과다.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감동과 의지로 창조되지만 시각과 청각 느낌으로 독자를 가지게 된다.작가 혼자만의 감동으로 결과물을 만들고 혼자서 가지려고 창조를 했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자연속 이름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작품.즉 창조는 독자를 대상으로 발현되고 독자의 판단으로 살아남는 것이다.특히 문학은 언어로 시작되기 때문에 독자의 관심과 평가는 냉혹하다.그 중 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비판을 받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시가 언어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그렇게 때문에 한 편의 시를 쓰는데 있어 심혈을 기울려야 하고 신중하게 발표해야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2만 명의 시인 시대를 맞고있다.단체에 등록 되지않는 시인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는게 중론이다.그 많은 시인 중에 과연 독자들로부터 시인이라고 인정 받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제외하고 순수문학을 이해하는 독자들로 부터 그나마 인정받는 시인은 2만명의 10%도 안된다고 단정한다.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을까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이유는 독자를 무시하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혼자만의 감동으로 만족하여 아무런 여과없이 발표하고 자기의 만족도에 따라 저절로 독자가 형성될것이라는 만용 때문에 빚은 결과다. 매월 수많은 문학지에서 발표되는 시 작품은 통계조차 내기 힘들만큼 많다.그 많은 작품 중에 독자들의 안목에서 살아남는 작품은 0.1%에도 못 미친다.이러한 결과는 작가 혼자만의 만족으로 독자의 주목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화자와 독자는 떨어져있는 관계가 아니다.호홉을 함께하고 작품 속의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관계다.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현상이나 상상 등 모든 것을 망라하여 작품을 창조했다 하여도 그 평가는 독자 몫이다.화자는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그 두려움이 없다면 한 편의 작품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모든 작품은 화자의 만족이 없다면 창조되지 않는다.먼저 자신의 만족으로 작품이 써진다.이것이 과하여 자신의 만족을 독자의 만족으로 오판하여 그것을 믿고 마구잡이로 발표하게 되어 외면을 받게되고 곧바로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그렇다면 어덯게 해야 제대로 자신의 작품을 판단 할 수있는가.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대부분 일치한다.자신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사람도 같게되도 느끼는 감동도 공유한다.그것을 인지 해야만 독자에게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그럴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특히 인정받는 작품을 먼저 알아야한다.수많은 독서와 체험만이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되고 독자와의 호홉이 일치하는 것이다.쓰는데 서두르지 않고 발표하는데 망설이고 자신의작품을 남의 작품과 비교할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시단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 분들도 순간적인 감흥으로 발표하여 미흡한 부분이 많다.시는 대중적인 지지도가 필요하지만 대중가요는 아니다.한 소절의 직감적인 감동으로 발표한다면 대중가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이같은 상황은 모두 칭찬에서 온다고 본다.익히 아는 얼굴에 또는 가르치는 관계나 친분으로 여과 없이 좋다고 칭찬하는 것은 발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인사치례다.그것이 익숙해진다면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것이 분명하다.바르게 익히고 바르게 정리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의무다   분석 된 이미지에 의한 객관적인 시     문학은 인간의 행동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를 아우르고 사물이 가진 특성을 새롭게 이미지화하는 창조행위다.1913년 심리학자 존 왓슨은 의식적인 경험은 과학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이말은 오직 예술의 창조성에서만 인간을 이해 할 수있다는 것으로 문학을 알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으로 분석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자기가 아닌 타인 즉 사물이나 그 밖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인간이다.삶 속에는 이러한 관심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하여 물질이 아닌 정신적 창조행위 곧 문학이 계승된 것이다.문학의 여러가지 장르 중에 시를 쓰는 시인은 인간과 사물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영향을 예측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시를 쓰는 이유도 자신이 아닌 타인 마음을 이해하려고  창작에 열중한다.시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우리가 사물과 타인에 대해 알고있는 여러가지 상식은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 정신적인 상상이 필요하다.인간은 왜 사는가.인간은 왜 사랑 하는가.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등 등,인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일에 부딛쳐 고민한다.인간의 삶에서 이같이 기본적인 의문에 누구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인간의 이같은 직관적인 심리는 문학을 탄생 시켰고 그 문학중 처음으로 발생한 장르가 시다.한마디로 시는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해도 정신적으로 일부를 해결할 수있는 정신적 양식이다.따라서 시를 쓰는 시인의 책임도 그만큼 클수 밖에 없다.그러한 이유로 시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시를 쓸수가 없는 것이문제다.주관이 없다면 일단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시다.시인이 처음 시를 대하는 순간은 발광이라 할수 있다.사물이나 인간의 어떤 행동에서 발견된 시의 발현은 사소한 것이라도 빛이나고 감동하게 된다.그때는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어 그대로 시속에 빠져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시란 모두가 객관적이며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 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시 쓰기의 문제가 발생한다.쓸 때는 주관적인데 발표후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모순에 빠져 그만큼 시 쓰기 어렵다.그렇다면 좋은 시,다시말해 누구나 공감하고 소중하게 품을 수 있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장 쉬운 방법이 선명한 이미지다.사물이나 정신적 형태의 사상의 이미지를 누구나 알 수있는 상상으로 펼친다면 우선 쓰기가 어렵지 않고 그만큼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든다.어떤 사물이든 이름을 얻기 전에는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처음 발견하였거나 발견후의 논의에서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맞는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자기만이 아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고 혼자만의 상상을 펼친다면 독자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는 데 남보다 앞서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되 거기에 합당해야 한다.현시대는 과학이 정신보다 앞서가는 같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인간의 정신세계는 따라가지 못한다.그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시문학이 과학보다 뒤쳐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우선은 이미지의 분석이 필요하고 분석된 이미지를 활용하면 말 그대로 화자와 독자간의 공감은 이뤄질수 있다고 본다.아무리 쉬운 언어를 동원하여 시를 쓴다해도 그것이 자신만의 의도대로 썼다면 이미지의 분석이 되지 않는다.과학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분석이 필요한데 정신적인 분석은 개개인의 능력이고 시인 또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겪게되는 고민이고 풀어야 할 숙제다   무엇을 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요점이다   현대시에 있어 사물을 배제한다면 시의 요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한다.이미지는 사물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전달도 사물로 하는 것이 시적 역량을 넓히기 때문이다.사물의 발견이 곧 시의 시작이다.그러나 화자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이 새로운 사물과 만나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다.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시적 발현은 곧 잊혀지고 그것을 기억하여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시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일상이다.새로운 사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닌 기질을 받아드린다는 것이다.사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늘 마주치는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정신이 받아드린 순간의 착상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정확히 받아드리느냐에 따라서 성취도는 달라진다.모든 사물은 제 각기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항상 마주치는 출입문도 모양과 재질 여닫는 방법 등이 모두 다르고 빼놓지 않고 찾아먹는 밥도 재질과 그릇에 따라 영양과 형상이 다르다.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에 따라 달리보인다.사람은 똑 같아도 그때의 상황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게 된다.그러한 사물의 특성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의구심과 고민 또는 고난의 연민이 새롭게 부딛친 사물의 특성과 마주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시다.그러한 과정은 얼마나 많은 상상과 노력을 해야되는 지는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한다.그렇다고 오랜동안 고민하고 상상 했다고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가.그것은 아니다.사물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숙달이 필요하다.언제나 받아드리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를 쓰겠다는 구도자적 자세를 한시라도 허물어트리면 되지 않는 게 시다.물론 억지로 쓸수는 있겠으나 그 작품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수 밖에 없다.십중 팔구는 도태되고 만다.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한마디로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지말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사물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또한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사물도 이에 속한다.시는 이러한 사물에서 발현하여 내형과 외형을 갖춰 새로운 이미지로 형성되는데 사물의 모양만을 그린다면 반 쪽 짜리 시가 되는 것이다.비행기를 보고 날아가는 모습과 화자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감흥만 그린다면 시의 가치가 떨어진다.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뿐 아니라 날아가는 이유, 날아가는 힘과 기체를 이루는 형질 등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심경변화와 조합을 이룬다면 사물을 이용한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이러한 시도는 목월의 시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사물의 이름만 가지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있는 서정시를 남겼다.필자의 어머니 아버지를 그린 사물시를 예를 들어보자.잿간 오줌 구멍/노을 물들어 지게 위에 얹힌 산/독새풀 돋은 쟁깃밥/미농지에 말린 쌈지 담배/새벽 깨우는 헛기침/내 이마에 얹힌 뜨거운 손/모악산 아버지[시 부수기 키우기 전문]스무동이 물항아리/두말 반 가마솥에 쌀밥/무명베 행주치마/열두고랑 콩밭 앉은 자리/호롱불 아래 바느질 그림자/정안수에 담긴 나의 길/지평선 어머니[시부수기 넓히기 전문] 이같이 사물만을 그려 아버지 어머니의 크기와 넓이를 그려내어 독자들이 읽을 때도 공감 할 수있게 할수 있는 것이다.사물은 언제나 변한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라 할지라도 잎이 돋고 지는 등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그런 사물에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끊임없는 관찰과 놓치지 않으려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한다.대체로 무엇인가를 쓰려는 노력은 하지만 사물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한 편의 시를 쓰는데도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두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는 인간의 거울로 자신의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우리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려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많아 맑은 물이나 번쩍거리는 쇠붙이 판에 비춰봤다. 다른 사람을 바라봤을 때의 호감도를 자신의 얼굴로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비춰본 것이다.언어 이전의 시대에도 원시인들은 물가에 앉아 자신을 비춰보며 상대방과 비교하였다. 소리가 의미를 더하여 언어가 되었을 때 거울의 역할은 더 커졌다. 언어를 건네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바라보고 기대한 대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언어는 소통이다. 그러나 약속에 의한 소통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학습이 필요하고 서로의 믿음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이유로 지역에 따라 언어는 다르게 생성되고 유통되었다. 그런 언어가 확장되어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었을 때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희·노·애·락을 표시하게 되고 더욱 아름답게 가꿔 노래, 즉 시가 탄생하였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여 언어 너머의 언어로 비약적인 확대가 이뤄졌고 현대시를 쓰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 시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비춰준다. 그것은 나를 나로 보여주는 거울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거울이다. 시가 거울이라고 표현될 때 소유격인 "인간의"는 목적어임과 동시에 주어이다. 시에 비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의미에서는 목적어이지만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자신의 거울이란 점에서는 시가 인간의 거울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시는 주어 적이다. 그 어떤 경우에든 시는 인간이 자기 이해를 밝혀내는 도구이므로 인간 존재의 얼굴인 것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의 얼굴을 비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장한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때로는 허무의 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실존에 가슴 떨려하는 흔들림을 비추기도 하며 자신을 자기도취에 빠트리는 욕망의 늪일 때도 있다. 또한 성찰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거나 자신을 이해하는 모습이 시를 통하여 드러나기도 한다. 시는 한마디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시는 자신의 마음을 비치는 얼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왜곡되어 보이기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이고 자신을 비추는 성찰의 도구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같이 시가 가진 의미는 매우 커 인간의 범주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발생은 어디에서부터였을까. 하는 문제는 언어의 발생 이전과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문제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에 비친 나의 모습과 나의 이해, 나 자신이 본 나의 얼굴임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한계와 욕망 무지의 어둠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를 깨치기도 하여 오히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 쓰는 작업은 인간 본연의 자세로 임하여야 하고 언어의 확장, 해석, 높이와 넓이, 소멸로부터 찾아내기 등 다방면의 방법을 찾아야 하고 시 속에 비친 얼굴들을 새롭게 꾸민 이미지로 나타내야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모든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시인들이 가장 크다. 그래서 봄의 문턱에서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이번호의 특징은 계절의 영향으로 봄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작년의 작품이 그대로 다시 게재 된 듯 느낌을 준다. 시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 쓰기의 걸음걸이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발등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시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밝게 비춰주는 거울   시를 써 오면서 흔하게 듣는 말이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왜 쓰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시는 정말 돈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그렇다.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만약 시가 돈이 되어 생활비를 충당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생필품이 아닌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최고의 정점이고 최후의 보루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영원히 남아 전해지는 것이 정신이며 그 정신이 시다. 그래서 시는 돈이 되지 않지만 돈을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 땅에는 많은 시인이 활동하지만 생활을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극히 적은 수의 시인이 전업 작가로 활동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를 넘어 생필품이 된 보편적 예술인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야 하는 대중가수가 된 것이다. 시는 정신이다.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 편에서 철저히 비춰주는 가장 밝은 거울이다. 인간이 당면하여 고민하는 것을 풀어주고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예술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행위와 거기에 따르는 고민과 의구심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인간이 가진 성찰적 작업 전부를 풀어내는 것은 예술 전부를 통틀어 시밖에 없다. 화가 소설가 작곡가 무용가 등 모든 예술인은 일가를 이뤘다는 ‘가’자를 붙이지만 시인에게는 영원히 ‘가’자가 붙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경탄하기도 한다.이러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묻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무엇이며 왜 두려워하는 존재인가. 예술은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일상의 삶에서 놀라움이 사라지고 아무런 느낌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 묻지 않는다. 오직 의문과 고민을 한 사람만이 묻고 예술인이 된다. 화가는 자연 그대로를 그린다. 무용가는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한다. 작곡가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옮긴다. 시인은 자연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여 거울을 보듯 이해와 해석을 통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예술 중에 가장 중심적인 것이 시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결코 돈이 될 수 없고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을 제외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보면서 그런 변화는 인간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억측에 불과 한다는 인식을 하지만 시인은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생각, 그 생각하는 능력인 인간의 이성만이 참되다는 인식을 한다. 변화의 환상에 잠겨 들고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찾아 모든 감각과 이성을 동원한다. 인도 철학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환상이나 불교에서 보는 모든 것은 공하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같은 면에서 사유하는 반야심경과 같은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이 추구하는 의식은 생필품이 아닌 오직 정신적 해탈이나 무너지는 삶에 대한 기둥 역할이 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데 있어 자기만의 확고부동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시는 인간이 가진 지성에 따라 사실과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의 과정이자 그 결실이다. 인간이 접하는 여러 사건과 현상은 물론 내면적 상태와 삶과 관계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의 해명과 해답이다. 그래서 자기만이 가진 이해와 해명이 있어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과거의 유명 싯귀를 모방하여 유행적인 결과를 낳는 시를 중점적으로 한다면 자신의 정신이 깃든 작품은 단 한 편도 쓸 수 없다. 모든 예술 중에서 시인은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는 존재다. 그만큼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만큼의 수준의 시를 써야 누구나 우러러보는 예술인, 시인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과 원인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쓰는가의 문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민이다. 시의 본질이 다른 예술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자연의 모방과 상상의 언어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을 벗어나서는 시가 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창조일 뿐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구상의 언어는 많은 수가 사라지고 그만큼의 새로운 언어가 발생한다. 거기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시인들도 얼마든지 창조는 가능하다. 하지만 언어의 활용과 변화유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로서의 언어창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의 감각은 살아가는 시대의 사물의 움직임과 그것에 맞춰 펼쳐지는 상상에 집중된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 즉 이름은 물질의 발견에 따라 나타난다. 발명이나 발견한 사물에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 활용도에 맞춰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대의 대변자라 불리는 이유는 이렇게 탄생한 언어의 활용도를 널리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본래의 모습인 이데아 즉 관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림자에 불과한 그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야 하고 그 관념에서 다시 떨어져야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언제나 고정된 관념을 이탈하여 언어의 창의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원형적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감각의 끈에 묶여 그 사실을 잊고 지낸다. 시는 원형의 기억 찾기이다. 따라서 시인은 잠시의 틈이 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보면, 첫째 낚시로 잡는 방법 둘째 그물로 잡는 방법 셋째 물을 막고 퍼내는 방법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어떠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던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잡는 물고기의 상태는 모두 다르다. 낚시는 깨끗하지만 양이 적고 그물은 많이 잡을 수 있으나 고기가 상하기 쉽다. 물을 막아 퍼내고 잡는 것은 양과 질이 좋으나 힘들고 번거롭다. 시를 쓰는데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를 시에 비교한다면 낚시는 명상으로 얻어지지만 상상의 한계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그물은 여기저기 설치하는 관계로 시행착오가 많다. 물 퍼내기는 체험의 육체노동이 수반되지만 확실하다. 어느 방법으로 쓰든지 장단점이 있다. 그중 물을 퍼내어 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어떻게 퍼내어야 할까. 시 쓰기의 물 퍼내기는 체험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험이 없이 쓴 시는 독자의 감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과 질료,목적과 운동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원인과 형상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정의 아래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체험밖에 없다.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천체학, 기상학과 자연과학은 물론 정치학, 시학, 논리학, 윤리학 등 시대에 맞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로 언어의 끝을 바라볼 수 있다. 요즘 발표되는 작품 대부분은 체험에서 얻은 원인과 형상으로 이미지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릇이 크기보다 너무 작다. 그것은 체험은 있으나 거기에서 얻은 상상의 한계가 좁기 때문이다. 체험은 하되 하나에 극한 시키지 말고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이뤄내야 한다. 더 높게, 더 넓게 시야를 넓히는 훈련을 해야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시라고 모두 시가 아니고 시인이라고 모두 시인이 아니다   시는 체득하는 방법, 탐구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상과 체험에 따라 그 형식을 달리한다. 남에게서 얻은 지식이나 이념이 아닌, 자신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인격, 취미, 감정 등을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나타나 읽는 이와 함께 공유하는 감동이야말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좋은 시다. 어떤 시도 자연과 동떨어져 분리된다거나 기본적인 감정을 외면할 수 없다.   시는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속의 인간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라고 모두 시는 아니고 시인이라고 다 시인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과 감동으로 시가 되지 않고 시에도 구성의 품격과 감동의 절제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고 자연 속에서 또는 생활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언어의 음률적 조형을 문자로 형상화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나가 시인이 될 수 있으나 모두가 시인이 아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체험과 상상은 기본적인 요소다. 오감을 동원한 직접적인 체험이나 책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얻은 간접적인 체험 등 시를 쓰는 동기는 모두가 체험을 통해 나오고 체험을 기초로 한 상상에서 시의 감정은 살아난다.   체험을 겪은 후 상상을 결부시켜 쓴 시는 체험으로 얻은 언어의 공간이 무한대로 펼쳐져 무궁무진한 감동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반대로 상상을 먼저 하고 체험을 통해 얻은 시는 체험과 상상의 상충한 벽을 넘지 못해 감동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체험으로 얻은 감동이 상상의 날개를 달아 연이어 펼쳐갈 수 있지만 상상으로는 직접적인 경험을 얻지 못해 그것이 체험을 통해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는 체험과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과 독서량 또는 인간사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이 시를 쓰게 된다.  
239    평생교육원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 한국 ] 댓글:  조회:1510  추천:0  2017-09-26
평생교육원 <동시심화과정> 수업자료 / 권영세   제2강 시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시는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도 인류에게 역사가 있었고, 이때의 역사는 대체로 종족이 살아온 내력, 혹은 종족이 이동해 온 흔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는 훌륭한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된다. 그런 점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에 의해 전승되었다. 그러나 후대로 올수록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후대에 전하기 위해 단순히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을 필요로 했고, 이런 필요 때문에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리듬을 부여하여 같은 낱말이나 문장을 반복하게 된다. 시는 이렇게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기술과 함께 발전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형시의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각운과 어구 반복은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시가 최초로 태어난 곳, 말하자면 시가 온 곳은 이야기이고, 각운과 반복은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차츰 이런 수단과 함께 긴 이야기는 짧게 축소되거나 압축되기 시작한다. 결국 시는 간단히 정의 한다면 응축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고대 시가인「공후인箜篌引」혹은 「공후도하가公無渡河歌」로 불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님이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 님은 마침내 물속으로 들어가셨네 (公竟渡河) 물속에 빠져 죽은 님 (墮河而死) 아아 저 님을 어찌 다시 만날까 (將奈公何)   위의 노래는 슬픈 이야기를 미적으로 승화시키고, 따라서 이 시가를 읽을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비록 슬픈 이야기를 동기로 하지만 정형률과 낱말의 반복이 주는 즐거움, 각운이 주는 즐거움이고, 이것이 시 읽기 나아가 시 쓰기가 우리에 즐거움을 주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감동이고 기쁨이고 가난한 영혼을 채워주는 정신의 양식이다. 많은 이론가나 시인들이 시를 ‘여과된 삶’ 혹은 ‘순수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가 거대한 삶의 이야기들을 걸러 그 핵심을 보여주고, 이때 여과된 것, 곧 최초의 이야기보다 강력한 호소력을 띠기 때문이다. 시는 고대부터 존재했고, 그것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 이런 고대 시가의 특성은 시를 처음 쓰려는 사람들에게 암시하는 게 많다. 예컨대 처음부터 시를 쓰지 말고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산문으로 적고, 이 산문을 줄이고, 정형률에 맞게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옥이 부른 ‘공후인’의 경우도 남편이 전한 이야기를 토대로 하지 않았는가? 또한 이야기는 정서를 동반해야 한다. 물론 시는 역사적으로 각 시대에 맞는 시의 유형을 소유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록 각 시대가 그 시대에 고유한 시를 생산하지만 모든 시가 크게 보면 동일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모든 시인이 말하는 것은 ‘내가 혹은 우리가 경험한 것은 이렇다’로 요약된다. ‘이렇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본다는 뜻이고, 따라서 시를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우고 체험하게 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5-17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김마리아   여러분, 오늘은 거짓말에 대한 수업을 합니다 잘, 생각해 보고 손 드세요 솔직하게   지금까지 거짓말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는 고개를 돌리며 옆을 봤다 친구들도 두리번거렸다   조용했다   손을 든 사람 아무도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무도 거짓말 안 했다 그 시간에는     내가 더 좋다 권영세   식사 때마다 조심조심 앉으려 해도 쿵쾅 쿵쾅 소리 내는 우리 집 식탁 의자   엄마가 시장에 가서 예쁜 꽃이 달린 의자 양말 사 오셨다   그제야 발이 편한지 소리 없이 살짝 내딛는 양말 신은 식탁 의자   이제는 아파트 마당에서 아래층 호랑이 할머니 만나도 눈치 보지 않아서 참 좋다   고운 양말 신은 식탁 의자보다 내가 더 좋다               제3강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에는 고대 시가가 그렇듯이 사회적‧현실적 효용성이 있다. 고대 시가는 이야기를 쉽게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었다. 고대의 시인들은 종교나 정치의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키는데 기여했다. 좀 더 나은 수확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시인들은 노래하고, 이 노래가 사회를 끌고 나가며, 시인들은 또한 전쟁의 역사를 노래하고, 권력을 비판하고, 그 무상함을 노래하고 신들을 찬양했다. 그렇기 때문에 포악한 왕은 시인들을 죽였고, 반대로 훌륭한 왕은 시인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시의 이런 기능은 현대라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표현 형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 시인들은 이런 권력이나 실제적‧현실적 효용성보다는 근대 미학의 특성인 이른바 순수 예술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현실적 효용성보다는 시 자체의 아름다움,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혹은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현실과 거리를 두고 시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가 현실과 다른 시의 공간을 낳고, 이런 공간은 일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아니라 상상력을 낳는다. 예컨대 주요한은 가 아닌 상상의 공간을 노래한다.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 주요한,「빗소리」부분   이 시는 봄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노래한다. 일상인들의 시각에서 빗소리는 빗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소리’로 상상한다. 뿐만 아니라 밤은 어미닭처럼 깃을 벌리고, 비는 어미닭 품에서 지껄이는 병아리가 된다. 요컨대 ‘뜰 위에 내리는 비’가 이 시에선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처럼 속삭인다. 봄밤에 내리는 비는 이렇게 다정하고 기쁘고 따뜻하다. 시는 이렇게 상상력의 세계를 강조하고 상상력의 세계는 과학적 진리도 아니고 종교적 진리도 아닌 이른바 미적 진리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의 기능은 상상력에 의한 미적 공간을 창조함에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 미학이 심화되면서 시인들은 이렇게 현실과 다른 시적 공간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 자체에 관심을 두게 된다. 시인들은 부패한 일상적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시키는 일도 하지만 일상적 언어의 가치나 기능과는 다른 시적 언어의 가치와 기능을 추구하고, 심하면 일상적 언어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파괴가 노리는 것은 일상적 언어를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언어이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이 추구하는 게 그렇다. 앞에서 보기로 든 ‘빗소리’는 일상어를 순화한, 그런 점에서 때 묻지 않은 언어이다. 그런가 하면이 시의 언어, 곧 시적 어법은 일상적 어법과 다른 시적 어법을 보여준다. ‘밤’을 어미닭에 비유하고, ‘빗소리’를 병아리 소리에 비유하는 게 그렇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 시적 어법을 뜻한다. ‘병아리’라는 낱말은 일상인도 사용하고 시인도 사용한다. 그러나 사용하는 방법이 다르다. 일상인의 경우 ‘밤’은 그대로 ‘밤’이지만 시인의 경우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린다’ 그러니까 말하는 방법, 어법이 다르다. 비유는 시적 어법의 출발이고, 이런 비유가 발전하면 상징, 아이러니, 역설 등 여러 가지 어법이 드러난다.이 문제는 뒤에 다시 살필 예정이다. 결국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자각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시적 언어의 특성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이런 언어의 가치와 기능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 17-19.   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동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그림자에도 빛깔이 있네 하청호   봄날이네 벚꽃나무 밑에 아기가 곤히 자고 있네 그림자가 이불처럼 아기를 덮고 있네   이불 위로 벚꽃송이 떨어지네 수놓듯 수놓듯 그림자에 분홍 꽃 곱네   그림자에도 아름다운 빛깔이 있네.       철없는 개나리꽃 엄마 권영세   기다리던 새봄과 늘 함께 와서 정말 반가웠는데   생뚱맞게 겨울 나뭇가지에 노란 꽃송이 몇 개를 피워 놓을 게 뭐람.   저 어린 것들을 찬바람 쌩쌩 부는 바깥에 내 보내 입술 파르르 떨게 하는   요즘 개나리꽃 엄마는 참 철이 없어.   제4강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인을 보는 사람, 견자見者, 광기에 홀린 사람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본다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영감이 시인 자신을 초월해서 자신도 모르는 어떤 초월적인 것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사물을 보고 세계를 보기 때문에 시인은 광기에 홀린 자가 되고, 신비한 영감에 지배받는 자가 되고, 이른 바 견자가 된다. 따라서 시인은 일상인보다 크고 높고 귀중한 힘이 부여된 자로 인식된다.   시인에 대한 이런 인식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실 시인은 일상인과는 다르게 세계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특이한 감각, 정서, 사유, 상상은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에게 조금씩 있게 마련이고 시인은 이런 이상한 능력을 일상인들 보다 더 신뢰하고 믿고 개발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그 후 낭만주의 시대에는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에는 무의식이나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아직도 시인의 기본 조건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에 대한 인식 역시 시대마다 다르고 이 시대적 차이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문학 초기만 하더라도 이광수가 말한 것처럼 시인 혹은 문인의 조건은 대학을 중퇴할 것, 연애에 실패할 것, 폐결핵을 앓을 것,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것, 장발이고 얼굴이 창백할 것, 가난할 것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조건들은 일종의 세기말 퇴폐주의를 반영하고 당시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병든 청춘들의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시인들은 이와는 다르지 않은가? 1960년대를 살던 시인들이 다르고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시인들이 다르다. 사실 오늘 이 시대의 시인들은 누가 시인이고 누가 은행원이고 대기업 사원인지 모를 정도로 구별이 안 된다. 지금 시인들의 외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외면은 내면을 반영하고, 얼굴은 마음을 반영하고, 스타일은 영혼을 반영한다. 요컨대 시인을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과 문화에 의해 정의된다.   이 시대 시인들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살 수도 있고,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다. 넥타이를 맬 수도 있고 매지 않을 수도 있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전혀 못 마실 수도 있다.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 있고, 금연을 단행한 시인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엔 시인의 상투형, 그러니까 시인 하면 떠오르는 개성이 사라지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엔 시인과 일상인이 같아진 것인가? 그리고 모두가 시인이란 말인가? 사실 이 시대엔 시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운문으로 혹은 시적 표현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일 뿐이다.   최소한 시인은 일상인들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사물들을 낱말로 연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시대엔 시만 쓴다고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신춘문예, 문학잡지라는 제도를 통과해야 하고, 아니면 시집을 내야 시인 행세를 한다. 이건 근대 문학이 가진 근대 제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황진이는 신춘문예에 당선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사회 제도와 관계없이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상상력은 훈련에 의해 개발되고, 시 쓰기도 훈련에 의해 개발된다.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1-22.    다음 시를 읽고 감상해 보자. 편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공룡이 되고 싶은 날 노원호   너무 심심해서일까 오늘은 괜히 공룡이 되고 싶다.   날개가 달려 하늘은 나는 공룡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어 횡단보도를 뚜벅뚜벅 걷다가 달려오는 자동차를 멈추어 보고 지팡이를 짚고 오는 할머니를 보면 훌쩍 안아서 횡단보도고 건너 주고 할머니가 고맙다고 과자라도 주면 야금야금 맛있게 먹어도 보고 그래도 심심하면 어기적어기적 뒷동산으로 올라가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그러다 푸른 하늘이라도 활짝 열리면 나는 드디어 공룡이 되었다고 크게 한 번 외치고 싶다.     제5강 왜, 시 읽기와 시 쓰기인가?   시인이 되기 위해 혹은 시인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를 많이 읽는 일이다. 그것도 잘 읽는 일이다. 잘 읽는다는 것은 시를 시로서 읽어야 함을 의미한다. 시집은 신문이나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신문을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말하자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정보이고, 과학 교과서를 읽을 때 관심을 두는 것은 과학적 진리나 법칙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시집에 실린 시를 읽는 것은 이런 읽기와는 다른 것인데,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각자 한 번 생각해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자.    나는 시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발 권오삼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 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 선생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풀잎 박성룡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 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바람이 부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몸을 흔들까요. 소나기가 오는 날의 풀잎들은 왜 저리 또 몸을 통통거릴까요.   그러나,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풀잎’하고 자꾸 부르면, 우리의 몸과 맘이 어느덧 푸른 풀잎이 돼 버리거든요.             제6강 시 쓰기엔 재주가 있어야 하는가?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재주는 개발하기 나름이다. 천재가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역사상 위대한 천재들은 재주에 앞서 일상인보다 더 노력한 사람들이고 고독한 사람들이고 근면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재는 만들어진다. 영국 속담에 ‘천재는 일종의 정신병’이란 말도 있다. 이런 말이 암시하는 것은 천재는 일상인과 다르게 사물을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이런 상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재는 자기의 능력을 특별한 렌즈로 초점을 맞추는 자이고, 재주를 낭비하지 않고 언제나 집중하는 자이고, 남들이 볼 때 다소 이상한 자이다. 사실 상상력이란 일종의 정신병, 곧 일상적 사유에서 이탈하고 이성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을 수용하고 종합하는 이상한 정신능력이다. 그리고 이런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자들은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독하다. 그러면 상상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어딘가 소리 있는 곳으로 귀 기울이는 예쁘디예쁜 열린 창이여   꽃이슬 젖은 새벽길 위에 서서 그 많은 소녀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까   단 한 번인 목숨 누구를 위하여도 죽을 수 없는 그 자라가는 소녀들의 열린 창이여 - 김춘수,「곤충의 눈」             김춘수의「곤충의 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대상은 ‘곤충의 눈’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이상하게도, 말하자면 일상인들과는 다르게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에 비유한다. 시인은 ‘곤충의 눈’을 보면서 ‘열린 창’을 상상하고, 2연에서 이런 상상은 ‘새벽길 위의 소녀’들로 발전하고, 마침내 3연에 오면 ‘곤충의 눈’은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 된다. 물론 이때 ‘창’은 ‘눈’을 암시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어떻게 ‘곤충의 눈’이 ‘열린 창’이고 ‘자라고 있는 소녀들의 창’이란 말인가? ‘빗소리’에서 ‘병아리’를 연상하는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상상은 시인의 고독과 남다른 직관과 사유의 소산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 성찰로 매개한다. 요컨대 시의 천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쓰기를 좋아하고, 꾸준히 시 쓰기에 노력하고, 언제나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에 고독한 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시 쓰기에는 어느 정도 시에 대한 재능, 재주도 요구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상상력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주는 살아가면서 대부분 낭비되기 때문에 재주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이다. 따라서 재주라는 말보다 경향, 혹은 취향, 재미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사실 시는, 그리고 모든 예술은 고독한 놀이이고, 시인은 이런 놀이를 좋아하는 자이다. 축구 선수가 축구가 좋아서 볼을 차고, 과학자는 실험이 좋아서 밤늦도록 실험실에서 실험을 한다. 어디 운동선수와 과학자뿐인가? 사업가는 돈 버는 게 좋아서 사업을 하고, 학자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공부를 한다. 돈을 벌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이름을 내려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시도 좋아서 쓴다. 좋지도 않고 취미도 없다면 돈도 안 생기고 괴로운 이 작업을 왜 하는가? 시인 혹은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은 재주보다 시 쓰기에 취미가 있어야 하고, 재미를 느껴야 하고, 취향이 그래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기호나 취미는 다르다. 시인은 시에 취미가 있는 자이고, 이 취미는 단순한 취미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의 세계를 지향한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남들과 다르게 보고 이 사물들을 언어로 남들과 다르게 연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이유나 동기는 시인마다 다를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시 쓰기에 소비하는 것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23-25.      다음 시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감상해 보자. 꽃을 보려고 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고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고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립니다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엄마를 만나려고 내가 먼저 들에 나가 봄이 됩니다 새들처럼 이옥근   파란 하늘이 자꾸만 높아지던 어느 날   느티나무 단풍 든 잎새들이 - 우리도 새들처럼 날아 보자   바람 타고 함성 지르며 새가 되어 날았습니다   제7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이미지의 유형   시는 관념이 아니라 감각을 강조한다. 관념을 전달하는 경우에도 직접 진술하기보다는 감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미지는 지각, 기억, 환상, 공상, 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하지만 모든 이미지는 감각에 호소한다는 특성을 공유한다. 인간만 해도 그렇다.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런 문제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인간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탄생 과정도 중요하고, 탄생한 존재들이 공유하는 특성도 중요하다. 인간은 물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인간은 안방에서 태어나고, 병원에서 태어나고, 새벽에 태어나고, 아침에 태어나고, 저녁에 태어나고, 깊은 밤에도 태어난다. 순산인 경우도 있고, 난산인 경우도 있다. 태어나는 과정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과정을 겪으며 태어났지만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혹은 이런 성적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감성적으로 사물을 지각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이성, 양심, 감성을 공유한다. 이 세 가지 특성가운데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성적 인간, 도덕적 인간, 감성적 인간이 나타난다. 이런 분류는 시각이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미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미지도 지각에 의해 태어나고, 기억에 의해 태어나고, 환상에 의해 태어나고, 공상‧연상에 의해 태어난다. 그런 점에서 그 탄생의 과정은 복잡하고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감각적 실체 혹은 감각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이미지는 같다. 이 감각의 세계를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여러 유형의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피부 등 다섯 가지이다. 이 다섯 기관을 이른바 5관官이라고 부른다.그러므로 이미지에는 시각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 후각적 이미지, 미각적 이미지, 촉각적 이미지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운동적(기관적)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 등이 추가된다. 이런 이미지들은 감각적 경험 자체를 전달한다. 이렇게 감각적 경험만을 목표로 하는 이미지를 시론詩論에서는 이른바 정신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을 전달하거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 이미지가 상징이 되는 경우는 상징적 이미지 혹은 상징이라고 부른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   첫째로 시각적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사물들의 사물성, 말하자면 사물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시는 음악보다 회화의 특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많은 현대 시인들은 회화성, 곧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하고 나아가 이런 이미지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하기도 한다. 다음은 시각적 이미지로 한 편의 동시가 구성된 보기이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 떴다 드넓은 호수에도 붉은 노을   누구일까!   하늘과 호수에 똑같이 찍어낸 저 엄청난 그림   데칼코마니. - 하청호,「데칼코마니」전문   둘째로 청각적 이미지는 귀에 들리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각적 이미지처럼 이미지 자체만으로 한 편의 시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설명적 기능을 하는 비유적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다음은 청각적 이미지로 구성된 동시이다.   늦은 밤 부엌에서 보글보글, 보글보글…….   그게 무슨 소린지 넌 알겠니?   일 나간 우리 아빠 돌아오셨다고 찌개냄새가 좋아서 노래하는 소리야. - 문삼석,「보글보글」전문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8강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냄새, 맛, 촉각의 이미지   셋째로 후각적 이미지는 코에 닿는 감각을 강조한다. 시인이 후각적 이미지, 특히 향기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그러니까 향기의 상상력에 의해 한 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각적 이미지나 상상력으로 한 편의 시를 짓는 일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다음 하청호 시인의「아버지의 등」을 읽고 후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한 편의 동시로 구성되었는지 살펴보자.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 하청호,「아버지의 등」전문   이 동시는 후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기 보다는 이런 이미지, 특히 냄새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편의 시로 구성하였다. 즉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 즉 땀 냄새라는 후각적 이미지라는 말보다는 후각적 상상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시인은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땀 냄새를 중심으로 상상력을 전개한다. 따라서 시인은 아버지가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겉으로 소리 내어 울지 않고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이고, 그 땀 냄새가 바로 속울음이라고 상상했다. 넷째로 미각적 이미지는 혀에 닿는 감각의 전달을 목표로 한다. 이런 감각 역시 여간 세련되지 않고는 단순한 설명의 차원에 머무는 수가 많다. 다음은 김영기 시인이 쓴「단비와 쓴비」이다. 미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가뭄에 목마를 때/ 찾아온 비는 단비/“야, 그 비 참 달다.”/ 물꼬 내러 가는 아빠// 달다고/ 말은 못해도/ 춤을 추는 나뭇잎.// 태풍을 등에 업고/ 오는 비는 몹쓸 비/“야, 그 비 참 쓰다.”/ 과수밭을 보신 아빠// 쓰다고/ 말은 못해도/ 눈물 맺은 이파리.// 김영기,「단비와 쓴비」전문   이 동시는 ‘달다’, ‘쓰다’라는 맛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써서 가뭄의 단비와 태풍과 함께 오는 비를 중심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비가 ‘달다’, ‘쓰다’라는 표현은 식물의 입장이 아닌 단지 시인의 상상일 따름이다.즉 가뭄에 와서 식물에 고마우니까 ‘단비’이고 세찬 비바람을 몰고 와서 식물에 해로우니까 ‘쓴비’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촉각적 이미지는 신체, 주로 신체 표면에 닿는 감각을 전달한다. 부드럽다, 딱딱하다, 물렁하다,단단하다, 꺼칠하다 등으로 표현되는 이미지이다. 다음은 권영세 시인의 동시「손때」이다. 이 동시에 촉각적 이미지가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자.   시골집 농기구 광 속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 연모들이/ 가지런히 벽에 걸려있다.// 지금은/ 일손 없어 쉬고 있는/ 겹겹 손때 묻은/ 괭이, 삽, 가래, 호미……// 이제는/ 그 날의 주인도 떠나고 없는/ 괭이로 텃밭을 고른다.// 이마에는 어느 새 땀방울이 맺히고/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잠시 일손 멈추고/ 얼굴은 모르지만/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 권영세,「손때」전문   이 동시에는 어느 곳에도 촉각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다만 ‘문득 손바닥으로 전해 오는/ 어느 할아버님의 손길인가.’ 와 ‘손잡이에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껴 본다.’에서 밑줄 친 ‘손길’과 ‘정’이라는 말에서 촉각적 이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시인은 앞의 ‘손길’과 ‘정’이라는 두 말을 중심으로 시의 메시지를 설정하고 있다. 이 말 외의 시적 표현들은 결국 ‘시골집 농기구 광속에 있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적부터 겹겹 손때가 묻은 농기구’를 통해 조상의 손길과 따스한 정을 시에 담고자 하는 상황 전개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51-21.   제9강 우리는 비유 속에서 산다   시인은 감각이 예민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 쓰기는 감각적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수용이 시인의 잠재적 능력이라면 이런 능력을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 따라서 시인에게는 특수하게 말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 쓰기는 일상인들과 다르게 말하기, 다르게 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시인은 말을 잘못 사용하는 자이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자이다. 일상인들은 ‘장미가 피었어’라고 말하지만 시인은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고 말한다. 흔히 이런 말하기를 비유라고 한다. ‘장미는 타오르는 램프야’라는 표현에서 ‘장미’는 ‘램프’에 비유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일상인의 시각에서는 말이 되지 않고,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일상적 어법에서 이탈하고 벗어나는 이상한 말하기가 된다. 그러나 이런 말하기를 통해 우리는 ‘장미’에 대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된다. 또한 답답한 세상을 신선하게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시인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교육에 의한 사유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지 말고 스스로 경험하라는 것, 그것도 사물을 새롭게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비유적 표현은 시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은 비유 속에서 비유에 의해 비유와 함께 수행된다. 비유는 우리 주위를 감싸고 우리는 비유와 함께 삶을 영위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물들의 이름을 생각할 수 있다.         ▪ 괭이갈매기         ▪ 물총새          ▪ 딱따구리       ▪ 칼새                  ▪ 집게발톱        ▪ 강아지풀       ▪ 비단풀               ▪ 애기풀           ▪ 할미꽃   위에 보기로 든 본래의 각 사물들은 모두 다른 사물에 의해 비유되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우리는 각 사물들의 특성을 좀 더 명료하고 신선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괭이 곧 고양이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갈매기 울음소리가 고양이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총새’의 경우엔 물새가 총알에 비유되고, 그것은 이 새가 물가의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공중의 한 자리에 떠서 물을 살피다가 총알처럼 날쌔게 물속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아먹기 때문이며, ‘딱따구리’의 경우엔 이 새가 딱딱한 부리로‘딱딱’ 소리를 내며 나무에 구멍을 내어 그 속의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표현은 비유가 아니라 소리 상징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딱딱’ 소리를 그대로 새의 이름으로 한 점에서 이 새는 소리를 비유한다고 할 수도 있고 상징 역시, 비유의 한 유형이기 때문이다. ‘칼새’는 새가 칼에 비유되고, ‘집게발톱’은 발톱이 집게에 비유되며, ‘강아지풀’은 풀이 강아지에 비유된다. 그것은 이 풀이 여름에 강아지 꼬리 같은 이삭이 나오기 때문이다. ‘비단풀’은 바다 속에 자라는 풀로 비단에 비유되고, ‘애기풀’은 풀이 애기에 비유되고, ‘할미꽃’은 꽃이 할미에 비유된다. 요컨대 이런 이름들은 비유적 특성을 보여주고, 이런 비유적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각 사물의 특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이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 표현은 결코 시인만이 독점하는 독과점적 표현 형식이 아니다. 일반인도 이런 표현, 곧 비유 속에서 산다. 이렇게 비유 속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름들, 이런 사물들, 갈매기, 물고기, 풀, 새들은 얼마나 많은 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는가? 그런 점에서 이런 사물들은 바로 시이고 혹은 시가 아니다. 아무튼 이런 사물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세계에 대한, 삶에 대한 생생한 감동이다.    다음 시를 읽고 비유적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빨래집게 한상순   난 입이 있어도 누굴 흉보지 않아   누가 뭐래도빨래 줄에 빨래가 널리면   그때 내 입은 번쩍 열리게 돼   그리고 덥석 문 빨래 함부로 뱉지 않지             내가 가지고 싶은 생각 조기호   내 생각은 동그랬으면 좋겠다. 굴렁쇠처럼 동네방네 맘껏 구르다가 누구라도 어깨동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빵빵했으면 좋겠다. 공처럼 통통 튀어 오르다가 높다랗게 둥지 하나 틀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은 단순했으면 좋겠다. 한곳 깊은 땅속을 흐르다가 맑은 샘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0강 직유도 직유 나름이다   비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바 우리는 그것을 취의와 매재라고 부른다. ‘괭이갈매기’의 경우 ‘갈매기’는 취의이고, ‘괭이’는 매재이다. 취의란 비유의 주체, 말하자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뜻하고 매재는 비유되는 사물을 뜻한다. 취의란 본래 말하려는 것을 의미하고 매재는 이 본래의 사물을 말하기 위한 수단, 즉 수레라는 의미이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우리의 삶이 비유로 이루어지고 비유 속에서 영위 되고 비유를 통해 전개된다. 하나 이미 우리가 알고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경우, 그런 비유를 상투적 비유 혹은 죽은 비유라고 한다. 한편, 상투형에 속하는 비유의 경우에도 관점에 따라서는 신선한 비유가 될 수도 있다. 직유는 말 그대로 두 사물을 유사성을 토대로 비교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직유는 흔히 취의와 매재 사이에‘-처럼’, ‘같은’, ‘-듯’ 등의 낱말들을 사용해서 비교되는 두 사물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직유는 은유와는 다른 시적 효과, 이를 테면 사물에 대한 설명적‧해설적 기능이 강하다. 그러나 처음 시를 쓰는 초심자들은, 상상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시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직유적 표현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직유도 나름이다. 직유라고 해서 모두 사물에 대한 설명(‘우리 아내의 손은 솥뚜껑 같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내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이 없니!// - 오일도,「오월의 화단」부분   불 피어오르듯 하는 술/ 한숨에 키어도 아아 배고파라.// 수 접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 정지용,「저녁 햇살」부분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우리는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폭발했다// - 이승훈,「사랑 1977」전문   위의 보기는 사물이나 관념에 대한 산문적 설명의 차원을 극복하고 뛰어넘고 또한 같은 직유라 해도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오일도의 경우, ‘하루의 정열’(취의)이 ‘파김치’(매재)에 비유되고, 이런 비유는 나른한 5월의 정서를 매개로 한다. 특히 5월의 화단, 바람도 불지 않고 해만 하염없이 내리는, 노곤한 그런 5월의 화단을 보면서 시인이 느끼는 정열은 정열이 아니라 정열의 소멸이고 정열이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매개로 ‘파김치’가 선택된다. ‘파김치가 되었다’는 말은 기운이 몹시 지쳐 나른하게 되었음을 비유한다. 이 시에서는 취의가 정서나 관념으로 되어 있고 매재가 사물 혹은 이미지로 되어 있지만, 정지용의 경우에는 취의가 사물(술)이고 매재도 사물(불)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취의와 매재의 관계는 (1) 사물/사물 (2) 사물/관념 (3) 관념/사물 (4)관념/관념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고, 시 쓰기의 초심자들은 (1)부터 단계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사물을 사물에 비유하기는 사실 쉬운 것 같지만(‘우리 오빠는 전봇대처럼 키가 크다’) 정지용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다. 쉬운 것은 대체로 설명의 차원에 머물고 쉽지 않은 것은 사물에 대한 신비한 의미를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의 경우에는 은유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이 시에서 말하려는 것은, 취의는 ‘술’이라 했지만 다시 읽어 보면 표제 ‘저녁 햇살’을 전제로 할 때 취의는 이고, 따라서 시인은 ‘저녁 햇살’(취의)을 ‘술’(매재)에 비유한다. 그리고 이 ‘술’은 다시 ‘불’에 비유되기 때문에 결국 저녁 햇살(취의)/술(매재), 술(취의)/불(매재)이라는 이중적 직유 형식이 나타난다. 요컨대 저녁 햇살을 보면서 술을 생각하고, 이 술이 불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그것이 붉게 타고 있는 저녁 햇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모두 ‘갈증’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런 술, 저녁 햇살, 피어오르는 불을 한숨에 마셔도 시인을 배가 고프다. 갈증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밥을 먹어야 하나? 다음 이승훈의 시에 나오는 직유는 앞의 두 시인과는 다르다. 이 다름의 차이도 중요하다. 두 얼굴(취의)이 폭탄(매재)에 비유된 것은 ‘벌거벗다’는 낱말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폭탄처럼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은 난해하다. 그것은 이 시를 쓸 즈음 시인은 초현실주의 미학에 빠져 이성과 의식보다 무의식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시를 그림에 비유하면 바다에 떠 있는 두 얼굴이 서로 맞대고 있고, 이 얼굴에 폭탄이 오버랩되거나 병치되는 이미지이다. 문제는 ‘폭탄’이다. 폭탄은 폭발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사랑의 아름다움, 따뜻한이 아니라 ‘불안과 죄의 바다’를 건너 폭발하고 만 사랑을 노래한다. 한편 ‘벌거벗은’은 ‘폭탄’과 ‘얼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이른바 양행 걸림 기법이다. 한편 여기서의 ‘벌거벗은’은 어떤 가식, 장식, 속임, 꾸밈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직유는 두 사물의 결합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기법에 속하고 초현실주의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억압된 무의식, 욕망을 노래한다.    다음 동시를 읽고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봅시다. 뜻밖에 권영세   길을 가다가 뜻밖에 너를 만났지.   생각지도 않았는데 너무너무 반가웠어.       늘 만나는 그들과도 뜻밖에 너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웠으면 정말정말 좋겠어.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67-69.   제14강 리듬은 시의 숨결이다   시 쓰기는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만 한편 그의 이탈 행위, 곧 시 쓰기는 반복되고 시의 내용과 형식 역시 반복된다. 시의 주제나 소재 가운데 새로운 것은 별로 없고 옛날이나 오늘이나 비슷한 주제이고 시라는 형식 역시 크게 보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점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시 쓰기에서의 반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1. 낱말을 반복하라 반복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 연설 등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이런 사용에 의해 미적 효과, 시적 효과, 주제 전달의 효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경우 반복이 주는 미적 효과 및 시적 효과는 무엇이고 어떤 유형으로 나타나는가?   나비 나비 노랑나비   꽃잎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소뿔에서 한 잠 자고, 나비 나비 노랑나비   길손 따라 훨훨 갔네. - 김영일,「노랑나비」전문   이 동시는 전체가 여섯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지만 의미구조로 보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나비/ 나비/노랑나비’를 각 부분의 앞에 두고 그 뒤에 ‘꽃잎에서/ 한 잠 자고’ 와 ‘소뿔에서/ 한 잠 자고’, 그리고 ‘길손 따라/ 훨훨 갔네’라는 짜임이다. 동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자연스레 운율이 살아나는 것은 ‘나비/ 나비/ 노랑나비’의 반복과 그 뒤의 글자 수를 같게 한 때문이다.   2. 구와 절을 반복하라 낱말이 아니라 구와 절이 반복되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고, 시로서의 통일성과 리듬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구와 절은 시에서 주제를 암시하거나 계속 반복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끈다. 구는 둘 이상의 낱말로 구성되지만 주어와 동사의 형식을 띠지 못하고 다만 절이나 문장을 수식하는 문장의 한 요소로 드러난다. 명사구, 동사구, 형용사구, 부사구 등이 있다. 한편 절은 주어와 동사의 형식, 곧 문장의 형식을 띠지만 완전한 문장이 되지 못하는 경우, 예컨대 주절, 종속절, 대등절 등이 있다. 먼저 구가 반복되는 경우,   밭을 갈아 콩을 심고 밭을 갈아 콩을 심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백양 잘라 집을 지어 초가삼간 집을 지어 꾸륵꾸륵 비둘기야   대를 심어 바람 막고 대를 쪄서 퉁소 뚫고 꾸륵꾸륵 비둘기야 -박목월,「밭을 갈아」일부   시의 전반부이다. ‘밭을 갈아 콩을 심고’는 대등절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다음 절이 생략된 형식이고 그러나 이런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명사구 ‘꾸륵꾸륵 비둘기야’가 각 시행마다 반복된다. 이런 반복을 흔히 후렴구라고 하는 바 이 시의 미적 효과는 절의 반복과 구의 반복, 특히 후렴구가 성취한다. 다음과 같은 명사구가 반복되지만 형식을 같고 내용은 일부가 변주되는 경우,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등판 위에 올라간 그 다음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몸통에 몸을 기댄 세 번째 자라. - 박찬일,「웃기는 자라」부분   시의 앞부분이다. 네 개의 시행으로 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이 시는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라는 명사구가 세 번 반복되면서 변주된다. 단순한 반복이 반복과 반복 사이를 강조한다면 이렇게 변주되는 반복은 변주 자체가 시적 의미를 암시한다. 시의 후반 역시 크게 보면 이런 형식의 변주로 구성된다. 다음 명사구의 반복의 경우,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그래 어디로 가버렸나 내가 사랑했던 그이 내게 기쁨을 주고 내게 꿈을 주고 날 춤추게 해주던 그이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맞아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 나는 당신들을 짐승으로 만든다 기분 내킬 때마다 당신들의 사랑은 우스운 것 …(중략)…     날 만든 것은 사랑 날 부순 것도 날 버린 것도 사랑 내가 사랑했던 그이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가버렸나 어디로 나버렸나 - 프레베르,「날 만든 것은 사랑」 (김종호 역) 부분   시의 2,3,4연이다. 1연만 빼면 이 시는 명사구 ‘날 만든 것은 사랑’이 각 연마다 반복되고, ‘날 맞아 준 사랑’, ‘날 요정으로 만들어준 사랑’은 2회 반복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명사구의 반복이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시에 통일성을 주고 리듬을 준다. 1연에서는 태어남과 삶에 대해 말 하는 바 ‘나’는 발가벗고 태어났고 태어난 대로 산다는 것. 다음은 절의 반복,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눈」전문 박용래의「저녁눈」이다. 이 시에서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은 이른바 주절에 해당하고, 이 절이 각 시행마다 반복되고, 또한 서술어 ‘붐비다’로 각 시행이 완성된다. 한편 이 시는 같은 문장 형식이 반복되는 보기도 된다. 절의 반복 역시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 조병화,「초상」전문   시의 전문이다. 각 연마다 종속절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이 반복된다. 그러나 일반 문장에서는 이런 절이 종속적 기능으로 끝나지만 시의 경우 특히 이렇게 반복됨으로써 그대를 보는 순간이 강조되고 시에 통일성이 주어진다. 이 시에서는 ‘그대를 보는 때’가 순차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적 순서로, 통시적으로 반복되지만 공시적으로는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 동안 살아 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 이승훈, 「너를 본 순간」부분     이 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같은 표현의 반복이지만 앞의 시와 이 시가 다르다는 점이다. 앞의 시는 시간적 순서를 따르고 이 시는 그런 순서가 아니라 공시성, 혹은 동시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너를 본 순간’에 나를 찾아오는 복잡한 정서, 상상, 관념을 노래한다.   3. 문장과 연을 반복하라 이상에서 한 편의 시가 낱말, 구, 절의 반복에 의해 통일성을 획득하고 미학을 획득하고 리듬을 획득한다는 것, 따라서 시에서 반복의 기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끝으로 문장과 연의 반복,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작은 아씨여 갓 꺾은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처녀여 시들을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고운 여인이여 떨어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늙은 여자여 죽어가는 꽃을 들고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 프레베르,「꽃다발」(김화영 역) 전문   시의 전문이다. 1연에서는 시인 혹은 화자가 여인에게 묻고 2연에서는 여인이, 혹은 여인들이 대답한다. 시에는 한 여인이 아니라 여자의 일생을 압축하는 네 여자, ‘작은 아씨’, ‘처녀’, ‘여인’, ‘늙은 여자’가 나오고 네 여자가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사랑스럽다.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는 반복되고 ‘작은 소녀여’는 변주된다. 그러나 문장이 변주되지 않고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봄이었어 나, 그 나무에 기대앉아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지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여름이었어 나, 그 나무 아래 누워 강물 소리를 멀리 들었지 - 김용택,「나무」부분   시의 1,2연이다. ‘강가에 키 큰 미루나무 서 있었지’라는 문장은 5연까지 각 연의 첫 행에서 반복되고 이런 반복이 이 시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가을에는 기대서서 멀리 흐르는 강물을 보고, 겨울에는 강물에 눈이 오고, 다시 봄이 오면 그냥 기대 앉아 있었다는 것. 이상은 문자의 반복이고 다음은 연이 반복되는 경우,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쯤 가리고 달이 가네 - 박목월,「달」전문   이 시는 불국사 터를 잡은 언저리를 배경으로 달이 가는 풍경을 노래하지만 같은 연의 반복이 문제이다. 1연에서는 달이 강조된다면 3연에서는 불국사 터를 배경으로 가는 달이 강조된다. 따라서 같은 달이지만 1연에서는 달이 전경에 드러나고 3연에서는 달이 배경으로 드러난다.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이런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시간은 변하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따라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정서나 관념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름다운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이승훈,『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북인, 2011) pp.85-103.  
238    심보르스카 시모음 (2) 댓글:  조회:4009  추천:1  2017-09-15
심보르스카 시 (2)   동굴 / 쉼보르스카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습기만 흐를 뿐. 이곳은 어둡고, 춥다.   불이 꺼지고 나니 더욱 어둡고, 춥다. 아무것도 없었다-황토에 그려진 들소가 사라지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들소는 머리를 구부린 채 오랫동안 저항했지만 일말의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문장은 밑줄을 쳐서 강조할 만하다, 일반적인 의미의 '무(無)'를 신봉하는 이단(異端). 그들은 결코 회개할 줄 모른다. 다르다는 것을 자랑스레 여기므로.   아무것도 없었다-우리들이 떠나고 난 뒤에는. 우리들은 이곳에 왔었고, 자신의 심장을 먹어 치웠고, 스스로의 피를 마셨다.   아무것도 없었다. 미처 다 끝마치지 못한 우리들의 춤 말고는. 화염 속에서 불타오르던 너의 첫벗째 허벅지, 팔과 목, 그리고 얼굴. 미세한 파스칼*로 진동하는 생명을 잉태했던 나의 첫번째 복근(腹筋).   적막-하지만 소리보다 한발 늦었다. 소리는 적막보다 부지런한 천성을 지녔으므로. 적막-언젠가 네 목구멍 속에 걸려 있던 피리 소리와 북소리. 야생 동물의 비명 소리, 웃음소리와 더불어 동굴은 이곳에 적막을 단단히 아로새겨놓았다.   적막-하지만 감겨진 눈꺼풀처럼 암흑에 휩싸인 어둠이 먼저다. 어둠-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살과 뼈가 먼저다. 싸늘함 하지만 죽음이 먼저다.   땅에서, 아니면 하늘에서? 어쩌면 일곱번째 하늘*에서? 너는 이 공허한 폐허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으리라. 여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자못 궁금해 하면서.   *파스칼; 압력의 단위. 1 파스칼은 1 제곱미터의 넓이에 1뉴 턴의 힘이 가해질 때의 압력을 의미하며. 기호는 pa를 쓴다. *일곱번째 하늘; 유대교에서는 하늘을 일곱으로 나누고, 일곱번째 하늘을 신과 천사들이 사는 가장 높은 하늘이라 믿는다.   애물단지 / 쉼보르스카   그는 행복을 원했었다. 그는 진실을 원했었다. 그는 영원을 원했었다. 자, 그를 봐라!   현실과 꿈을 간신히 구별해낸다. 자신이 누구인지 가까스로 깨닫는다. 어류의 지느러미 같은 손으로 부싯돌을 부딪쳐 힙겹게 봉화(烽火)를 피워 올린다. 쉽사리 증오에 휩싸이는 존재.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기에도 미욱한 존재. 눈으론 그저 보기만 하고, 귀로는 그저 듣기만 한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어투는 조건문, 이성을 사용해서 이성을 비난해보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둔감한 살집 외에도 그의 머릿속은 자유와 박식함. 그리고 존재로 가득 차 있으니 자, 그를 봐라!   눈에 보이는 엄연한 실체이기에 변방의 별빛 가운데 하나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나름대로 생기 있고 꽤나 능동적인 그는 쓸모없는 수정(水晶)이 무력하게 퇴화하는 걸 지켜보며 짐짓 놀란다. 떼를 지어 다녀야만 했던 그 옛날,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이제 그는 진정으로 독립적인 개체. 자, 그를 봐라!   지금 이 순간이 비록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이대로 지속되기를. 깜빡이는 저 작은 은하수 아래서 끊임없이 빛을 발하기를! 미약하나마 이미 세상에 존재하기에 앞으로 무엇으로 탈바꿈할는지 희미한 윤곽이나마 드러낼 수 있기를. 그는 고집이 무척 세다. 코걸이를 걸고 있는, 토가*를 걸친 스웨터를 입고 있는 그가 고집불통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쨋건 그는 애물단지. 측은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 실재(實在)하는 인간.   *토가; 고대 로마에서 시민이 입던 겉옷, 남자가 14세가 되면 성년의 표시로 착용했다.   만일의 경우 / 쉼보르스카   일어날 수도 있었어. 일어났어야만 했어. 일어났었어.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너무 가까이, 아니면 너무 멀리서. 일어났었어. 너에게, 혹은 너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게.   너는 살아남았지. 맨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는 살아남았지. 제일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갔기 때문에. 비가 왔기 때문에. 그늘이 드리웠기 때문에.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거기 숲이 있었어. 운 좋게도 거기 나무가 없었어. 운 좋게도 철로, 갈고리, 대들보, 브레이크, 문설주, 갈림길, 일 밀리미터, 일 초가 있었어. 운 좋게도 지푸라기*가 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렇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손발을 움직여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 수도 있었어. 우연의 일치에 좌우되는 불과 한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 안에서, 일촉즉발의 오차 내에서.   그래서 넌 지금 여기에 있는 거니? 가까스로 열린 찰나의 순간에? 그물에 뚫린 단 하나의 구멍, 그리로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렸니? 난 놀랄 수도, 침묵할 수도 없어. 자, 귀 기울여봐. 네 심장이 내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두근거리는지.   *지푸라기; 원문에는 '면도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 폴란드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은 면도날이라도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 쉼보르스카   마침내 마법이 풀린다. 비록 강력한 힘이 작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해도. 8월의 밤,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별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예정된 섭리인지, 아닌지. 너는 알지 못하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을 보며 소원을 빌어야 할지, 운명을 점쳐야 할지. 운명을 점친다고? 제대로 의사소통도 안 되는 별똥 별 따위로? 지금이 21세기가 아니라 고리타분한 선사 시대란 말인가? 저 수많은 섬광 중에 과연 어떤 빗줄기가 호언장담할 수 있으려나: 불꽃이라고, 나는 불꽃이라고, 별똥별의 꼬리에서 생성된, 진짜 불꽃이라고. 왔다가 순순히 사라지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불꽃 그 자체라고. 내일자 신문을 향해 곤두박질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엔진이 고장 난, 바로 내 옆의 다른 불꽃이라고.   실수 / 쉼보르스카   미술관에 전화벨이 울린다. 밤 열두 시, 텅 빈 전시장 안에 벨 소리가 요란하다. 만약 누군가가 깜빡 잠들어 있었다면, 놀라서 곧바로 깨어났을 것이다. 이곳엔 불면증에 시달리는 예언자들과 달빛에 안색이 창백해진 고색창연한 왕들뿐. 그들은 조용히 숨죽인 채 만물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겉으로만 부지런한 척하는 고리대금업자의 아내는 벽난로 위에 놓인 전화기가 쩌렁쩌렁 울려대는데도 손에 든 부채를 내려놓을 생각조차 않는다. 다른 이들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반응에 익숙해져버렸기에. 토가를 걸치거나 혹은 알몸인 그들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 오만한 태도로 한밤중의 경적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만다. 맹세컨대 이것은 왕실의 가령(家令)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액자에서 뚜벅뚜벅 걸어 내려오는 것보다 더 우습고 황당한 일이다. (하긴 그의 귀를 두드리는 건 고요한 적막뿐인데 무얼 기대할 수 있으랴.) 더 황당한 건 도시의 저편, 어딘가에 자신이 잘못된 번호를 돌렸는지도 모르는 채 꽤나 오랫동안 수화기를 관자놀이에 갖다 대고 있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살아 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양로원에서 / 쉼보르스카   그녀의 이름은 야브윈스카, 누구를 말하는지 아마 다들 아실 거예요. 우리들 사이에서 거의 여왕 폐하로 통하는 거만한 그녀. 목에는 항상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를 곱슬곱슬 말아 올린 그녀. 아들 셋을 먼저 천국에 보냈고, 거기서 그들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녀 말입니다.   "그 애들이 전쟁에 나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거야. 겨울엔 큰 아들과 살고 여름은 둘째와 보냈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확신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우리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죽음을 당하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우리의 아이들에 관해 꼬치꼬치 묻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셋째 아들이 자신을 집으로 초대했으리라는 사실을 말이죠 "막내는 분명 새하얀 백조나 비둘기가 끄는 눈부신 황금마차를 타고 나를 찾아왔을 게야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모두가 잊지 못하도록"   우리의 야브윈스카 여사가 해묵은 신세타령을 시작하면 그녀를 돌보는 간호원, 마니아*는 가끔씩 무기력한 미소로 응수하곤 합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임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이야기죠.   토요일, 일요일과 여름휴가 때는 우리에게도 쉴 권리가 있으니까요.   *마니아Mania는 폴랜드에서 다소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다소 구식의 여자 이름이다. 오늘날에는 아기에게 '마니아'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폴랜드 사람들은 하녀 혹은 유모의 전형적인 이름으로 생각한다.   광고 / 쉼보르스카   나는 진정제입니다. 주로 집에서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무실에서도 효력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거나 재판에서 증언할 때도 힘이 됩니다. 깨진 컵 조각을 조심스럽게 붙이는 것을 돕기도 합니다. 단지 나를 입에 넣고 혓바닥 아래서 살살 녹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나를 꿀꺽 삼키기만 하면 됩니다. 오직 물과 함께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압니다, 불행을 요리하는 방법. 나쁜 소식을 견뎌내는 방법. 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 미망인 얼굴에 잘 어울리는 장례식용 모자를 고르는 방법까지도. 무엇을 망설이고 있나요? 화학 약품의 자비로운 효능을 한번 믿어보시라니까요.   당신들은 아직 젊습니다. 삶을 새롭게 가꾸고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참고 견디는 거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당신들의 나락(奈落)을 주저 없이 내게 맡겨주십시오. 네 번이나 추락에서 건져 올려지고 나면 당신들은 틀림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나에게 영혼을 파십시오. 다른 장사치들은 오지 않을 테니.   다른 악마는 더 이상 없습니다.   발견 / 쉼보르스카   나는 위대한 발견을 믿는다. 그 발견을 이루어낼 사람을 믿는다. 그 발견을 이루어낼 사람의 두려움을 믿는다.   그의 얼굴에 깃든 창백한 기운과 거친 호흡, 입술 위에 맺힌 식은땀을 믿는다.   기록을 태우는 것,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 것,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남김없이 활활 태우는 것을 믿는다.   숫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그것들이 유감없이 산산조각 분해될 것을 믿는다.   서두르기 좋아하는 인간의 성향과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움직일 줄 아는 치밀함과, 그들의 강요되지 않은 자유 의지를 믿는다.   석판이 부서지고, 액체가 쏟아지고, 광신이 꺼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단언컨대, 반드시 성공하리라. 결단코 늦지 않으리라. 증인들이 배석하지 않아도 사건은 전개되리라.   확신컨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아내도, 벽도, 심지어 밀고하기 좋아하는 저 수다스러운 새들조차도.   불미스러운 일에 개입하지 않은 깨끗한 손을 믿는다. 엉망진창이 된 경력을 믿는다. 어러 해 동안 소진한 각고의 노력을 믿는다.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을 믿는다.   이 말들은 모두 규범의 영역 저 너머를 배회하고 있으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근거를 바라지 않는다. 내 믿음은 강하고, 맹목적이며, 원칙을 초월한 것이기에.   귀환 / 쉼보르스카   그가 돌아왔다. 아무 말도 없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옷을 입은 채 잠자리에 든다. 담뇨 아래로 머리를 파묻고, 무릎을 끌어당긴다. 나이는 마흔 살 가량,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일곱 겹의 살갗 너머 어머니 뱃속, 어둠의 안식처에서 지금 이 순간, 그는 존재한다. 내일은 은하계 전체를 비행하는 데 필요한 인체의 항상성*에 대해 강의할 예정.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항상성; 외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내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   공룡의 뼈 / 쉼보르스카   사랑하는 형제여, 우리는 여기서 균형이 맞지 않는 잘못된 비례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차곡차곡 쌓인 이 공룡의 뼈에서.   그리운 벗이여, 왼쪽에는 무한대를 향해 뻗은 꼬리가 있고, 오른쪽에는 반대편을 향하는 목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회원 여러분, 자연은 결코 오류를 범하거나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농담을 즐길 뿐. 이 우스꽝스러운 작은 머리통에 주목해주십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이런 조그만 머리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석하게도 이 머리통의 주인은 멸종하고 만 것이죠.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보잘것없는 뇌의 사이즈에 비해, 식욕은 지나치게 왕성하군요. 이런 작은 뇌 속에는 현명한 판단력보다는 어리석은 몽상이 으레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법. 오직 하나뿐인 태양처럼.   탁월하신 위원회여, 이 얼마나 솜씨 좋은 손인가요. 이 얼마나 언변이 풍부한 입인가요. 이 얼마나 명석한 두뇌인가요.   위대하신 판관이여, 지금은 퇴화되어버린 꼬리가 자라던 바로 그 자리에 너무 많아 버거운 의무감만 남아 있군요.   추적 / 쉼보르스카   적막이 나를 맞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끌벅적한 소동도, 팡파르도, 박수갈채도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혹시라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정적도, 아니 비상사태 자체도 없으리란 걸 나는 안다.   마른 잎사귀조차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은빛 궁전과 아름다운 정원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마라. 존경스러운 연장자와 정의로운 법률, 유리구슬에 비친 예언자의 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혹시라도?   내가 달빛 속을 이렇게 헤매고 다니는 건 잃어버린 반지와 리본 따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언제나 그들이 한발 앞서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증거가 될 만한 건 아무거도 남기지 않았으니. 죽음도, 나무토막도, 과일 껍질도, 아스파라거스도, 찌꺼기도, 대패질하고 남은 부스러기도, 깨진 유리 파켠도, 먹다 남은 고깃덩이도, 쓰레기 조각도.   내가 몸을 숙이는 건 단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을 줍기 위해서일 뿐. 하지만 그 돌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내게 신호나 단서를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흔적을 지우는 기술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적절한 타이밍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그들의 놀라운 재능에 대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들이 뿌리나 꼬리, 하늘로 날아오르느나 잔뜩 부푼 드레스 자락은 인간의 손에는 절대로 잡히지 않는 신성한 것임을. 그들의 머리카락은 단 한번도 머리에서 이탈하여 내 손아귀에 들어온 적이 없다.   내 궁리를 보란 듯이 비웃는 교활하고 영리한 생각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늘 꼭 한 발자국씩 내가 미처 쫓아가지 못할 만큼만 앞서 간다. 선명하게 찍힌 그 흔적들은 원시적인 본능이 얼마 어리석은 지 조롱하듯 보여준다.   그들은 현존하지 않으며, 과거에도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는 스스로에게 열심히 그 사실을 반복해서 주입시켜야만 한다. 그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 어리석은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러면 발아래에서 느닷없이 풀쩍 솟구쳐 오르는 건 과연 뭐지? 금세 내 발에 밟혀버렸기에 미처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도망치려 버둥거리는 것. 스스로를 침묵의 연장이라 여기는 것. 그것은 비로 그림자-어느 틈에 목표물에 가까이 다가섰다고 착각할 만큼 터무니없이 커져버린 나 자신.   분실물 보관소에서의 연설 / 쉼보르스카   나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에 몇몇 여신을 잃어버렸다. 또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에 많은 신들을 놓쳐버렸다. 나의 별 몇개가 영원히 꺼져버렸다. 하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의 섬이 하나 둘,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심지어 어디에 발톱을 놓아두었는지도 통 모르겠다. 누가 내 거죽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지, 내 껍데기 안에서 살아 숨쉬는 건 무엇인지. 내가 육지로 기어 나왔을 때, 형제들은 다 죽었고. 단지 내 뼈 가운데 일부만 내 안에서 기념일을 맞고 있다. 나는 허물을 벗고 세상에 나와 부질없이 척추와 다리를 혹사하고 말았다. 그러곤 여러 차례 감각을 상실했다. 오래전에 이 모든 것에 대해 세번째 눈을 감았고, 지느러미를 움직였고,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사라지고, 소멸되고, 바람결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내가 이렇게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는 한없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다. 어제 전차 안에서 우산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의 형체는 그저 잠시 동안 빌려온 허물에 불과할 뿐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혹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어제도 아니고, 백 년 전도 아닌 바로 지금 왜 하필 옆 자리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도 아닌 바로 이곳에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   작은 별 아래서 /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명명한 데 대해 사과하노라. 필연이여,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혼동했다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그대를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여도, 너무 노여워 말라. 고인들이여, 내 기억 속에 당신들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진데도,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 시간이여, 매 순간,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데 대해 뉘우치노라. 지나간 옛사랑이여, 새로운 사랑을 첫사랑으로 착각한 점 뉘우치노라.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여, 태연하게 집으로 꽃을 사 들고 가는 나를 부디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으로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제발 용서하라. 지옥의 변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들이여, 이렇게 한가하게 미뉴에트 CD나 듣고 있어 정말 미안하구나. 기차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여, 새벽 다섯 시에 곤히 잠들어 있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막다른 골목까지 추격당한 희망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때때로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사막이여, 제발 눈감아다오, 한 방울의 물을 얻기 위해 수고스럽게 달려가지 않는 나를. 그리고 그대, 아주 오래전부터 똑같은 새장에 갇혀 있는 한 마리 독수리여, 언제나 미동도 없이, 한결같이 한곳만 바라보고 있으니, 비록 그대가 박제로 만든 새라 해도 내 죄를 사하여주오. 미안하구나, 잘려진 나무여, 탁자의 네 귀퉁이를 받들고 있는 다리에 대해. 미안하구나, 위대한 질문이여, 초라한 답변에 대해.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 달라.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영혼이여, 내 안에 자주 깃들지 못한다고 나를 질타하지 마라.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각각의 모든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내가 살아 있는 한, 그 무엇도 나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왜냐하면 내가 갈 길을 나 스스로가 가로막고 서 있기에. 언어여, 제발 내 의도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다오. 한껏 심각하고 난해한 단어들을 빌려와서는 가볍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써가며 열심히 짜 맞추고 있는 나를.   거대한 숫자 / 쉼보르스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억의 사람들. 내 상상력은 늘 그랬듯이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거대한 숫자는 감당하지 못하고, 사소하고, 개별적인 것에 감동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얼굴들만 닥치는 대로 비추곤 한다. 그럴 때 뒷줄에 있는 나머지 얼굴들은 모조리 생략되고 만다. 기억 속에서도, 회한 속에서도 그들은 영원 속으로 도태되고 만다. 저 위대한 단테조차도 그들의 소멸을 멈출 순 없다. 모든 뮤즈*가 함께 어울려 내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는다 해도 존재를 상실한 그들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Non omnis moriar* -시기상조에 불과한 근심 걱정. 정녕 내가 온전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으로 충분한지 단 한순간도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지금은 더욱더 그러한데. 뽀족한 수가 없기에 끊임없이 버리면서 선택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버렸으니 그만큼 복잡하고, 그만큼 성가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읗 상실한 대가는 고작 시 한 구절과 한숨뿐. 천둥과 같은 우렁찬 부름에 나는 꺼져가는 속삭임으로 간신히 대답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침묵 속에서 견뎌야만 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으리라. 고향 산기슭에서 찍찍대는 생쥐 한 마리, 인생이란 결국 그 생쥐가 모래 위에 발톱으로 끼적거린 몇 개의 희미한 흔적과도 같은 것.   나의 꿈들-꿈속의 인구 밀도는 생각보다 낮은 편이다. 사람들의 무리나 시끌벅적한 소동보다는 텅 빈 고독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아주 가끔씩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 들를 때도 있다. 그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린다. 메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빈집에 울려 퍼지고, 현관을 넘어 계곡으로 흩어져간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닌 듯 아주 조용하고 또 은밀하게.   무엇 때문에 이 공간이 내 안에까지 비집고 들어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뮤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음악의 정령. *Non omnis moriar: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레이스(B.C. 65~8)의 발라드에서 인용한 구절로                           "내 전부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   롯의 부인*/ 쉼보르스카   아마도 호기심 때문에 뒤를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호기심 말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은그릇에 미련이 남아서. 샌들의 가죽 끈을 고쳐 매다가 나도 몰래 그만. 내 남편, 롯의 완고한 뒤통수를 더 이상 쳐다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죽는다 해도 남편은 절대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는 감격스러운 확신 때문에. 과격하지 않은 가벼운 반항심이 솟구쳐 올라. 추격자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적막 속에서 문득 신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샘솟았기에. 우리의 두 딸이 언덕 꼭대기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문득 스스로 늙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방랑의 덧없음과 쏟아지는 졸음 탓에. 대지 위에 꾸러미를 내려놓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걷고 있는 오솔길에 갑자기 뱀이 나타났기에. 거미와 들쥐와 어린 독수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기에. 유익하지도, 해롭지도 않은 그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거대한 패닉 상태에 빠져 꿈틀대고, 튀어 오르는 걸 바라보면서. 갑작스러운 외로움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몰래 도망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소리치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혹은 돌풍이 불어와 내 머리를 헝클고, 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던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소돔의 성벽에서 우리를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청천벽력처럼 요란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았기에. 아마도 분노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을지도. 어쩌면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안겨주기 위해서. 아무튼 위에서 열거한 구구한 모든 이유 때문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단지 내 발밑에서 나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성난 돌멩이 하나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내 눈앞에서 돌연히 끊겨버린 오솔길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성벽의 가장자리에서 뒷발을 세우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한 마리 햄스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살금살금 기어갔다. 폴쩍 날아올랐다. 어둠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돌덩이들과 죽은 새들이 무참히 추락하기 전까지. 숨을 쉴 수 없었기에. 나는 빙글빙글 돌고, 또 돌았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봤다면 아마도 내가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아마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엇을지도. 어쩌면 내 얼굴은 도시를 향하고 있었을지도.   *롯의 부인: 이 시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죄악에 물든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로 한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에게 이 사실을 예고하면서, 도망쳐서 생명을 보존하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일렀으나, 롯의 아내는 그만 뒤를 돌아봐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햄스터: 비단결쥣과의 하나. 의학 실험용으로 많이 쓰인다.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 쉼보르스카   시골 길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세 쌍의 다리를 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채. 죽음의 혼란 대신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광경이 내포하는 위험도는 지극히 적당한 수준. 갯보리와 박하 사이의 지정된 구역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다. 슬픔이 끼어들 여지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우리의 평화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들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숨을 거둔다. 우리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린 채. 우리들이 짐작한 대로, 저승보다는 덜 비극적인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그들의 온순한 영혼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다. 그들은 배려가 뭔지를 안다.   여기 길 위에 죽은 딱정벌레 한마리가 있다. 그 누구도 애도하지 않는 가운데, 태양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저 한번 쳐다봐주는 것도 딱정벌레에겐 커다란 추모일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지극히 태평스러워 보인다.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모조리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삶은 오로지 우리들의 것이며, 언제나 당연한 듯 선행권(先行權)을 요구하는 죽음 또한 오로지 우리들의 전유물이다.   실험 / 쉼보르스카   우리를 울리고, 웃기기 위해서 배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한 본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특별 보너스로 머리를 이용한 흥미로운 실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고착되어 있던 머리가 지금은 완벽하게 절단되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본체에서 깨끗하게 분리되었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목의 뒷부순에 주렁주렁 매달린 튜브는 기계에 연결되어 체내의 혈액 순환을 유지시켜줍니다. 네, 머리는 잘 지내는 중입니다.   고통의 징후도, 충격의 흔적도 없습니다. 다만 손전등의 불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불안한 듯 눈으로 쫓고 있을 뿐,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를 쫑긋 세웁니다.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코는 돼지 비계 냄새와 비실재(非實在)의 무취(無臭)를 예민하게 구분해냅니다. 입은 생리 현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침을 흘립니다.   강아지의 충성스러운 머리, 강아지의 상냥한 머리는 부드럽게 쓰다듣어주기라도 하면 아직도 제가 몸에 귀속된 신체의 일부인 양 착각하면서 바보처럼 눈을 찡긋거립니다. 등뼈를 살짝 어루만져주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머리를 조아리던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만약 이런 게 인생이라면, 머리는 그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테니까요.   미소 / 쉼보르스카   세상은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거물급 정치인들은 늘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어야만 한다. 미소는 사기가 꺾이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이므로. 혹 사업이 꼬이고, 골치 아픈 시합과 불확실한 결과 탓에 속이 상할지라도 하얗고 가지런한 그들의 치아를 바라보노라면 언제나 위안이 된다.   회담장에 들어설 때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설 때 그들은 항상 찡그리지 않고 온화한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활기 넘치 자태와 명랑한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누군가를 환영하고, 또 누군가와 작별하며 구경꾼들과 카메라 렌즈를 위해 늘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어야 한다.   치과 의술은 외교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빛나는 미래를 보장해준다. 매력적인 송곳니와 조화로운 앞니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일상적인 슬픔을 얼굴에 맘 놓고 드러낼 수 있을 만큼 이 시대가 편아하고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몽상가들은 말한다. "인류의 형제애가 지구를 웃음의 천국으로 바꾸어놓는다"고. 하지만 난 회의적이다. 제발 부탁이다. 더 이상 거물급 정치인들이 억지로 미소 지을 필요가 없도록 그들을 가만히 좀 내버려주자.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봄 또는 여름이 와서 진정 기쁠 때 그저 가끔씩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을 수 있도록. 그러나 인간은 본래 천성적으로 슬픈 존재. 나는 그 존재를 기다리며 벌써부터 기쁨에 젖는다.   여인의 초상 / 쉼보르스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게 스스로 변해야 한다. 이것은 쉽고, 불가능하고, 어렵고, 그래서 더더욱 해볼 만한 일이다. 필요하다면 그녀의 눈동자는 때로는 짙푸르게, 때로는 잿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리라. 검은빛을 띠다가도 때로는 명랑하게,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을 머금으리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단 한 사람, 혹은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가 되어 그와 함께 곤히 잠자리에 들리라. 그를 위해 네 명이거나, 한 명도 아니거나, 아니면 단 한 명의 아이를 낳아주리라. 순진무구하지만, 가장 적절한 충고를 하게 되리라. 연약하기 짝이 없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리라. 목 위에 머리가 없지만,* 곧 갖게 되리라. 야스퍼스*와 여성지를 동시에 읽게 되리라. 나사를 어디에 조여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근사한 다리를 만들어 세우리라. 항상 그래왔듯 젊은 모습으로, 갈수로 더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 양손에는 날개가 부러진 참새와, 길고도 머나먼 여행을 위한 약간의 여비와, 고기를 토막 내는 식칼과, 붕대와, 한 잔의 보드카를 들고, 어디를 향해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는지, 피곤하지도 않은지, 많이 고단하건, 조금 고단하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에 대한 사랑 때문이건, 아니면 아집 때문이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혹은 신의 가호 덕분이건.   *목 위에 머리가 없지만; 폴란드 속담에 "남자는 집안의 머리이고 여자는 목이다"라는 말이 있다. 목이 움직여야 머리도 움직일 수 있듯이 집안의 우두머리이자 가장은 남자지만 그 가장을 좌지우지하는 건 여자라는 뜻에서 비롯된 속담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사회철학자로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등의 영향을 받아 실존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서 을 썼다. 그는 실증주의 철학을 내세우는 과학에 대한 과신(過信)을 경고하고, 근원적인 불안에 노출된 인간의 비합리성을 포착하여 본래적인 인간 존재으 양태를 전개하는 실존 철학을 시대 구원의 한 방법으로 제시했다.   쓰지 않은 시에 대한 검열 / 쉼보르스카   시의 첫머리에서 이 여류 시인은 지구가 작다고 성급하게 단정 짓는 반면, 하늘은 극단적으로 거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잠시 인용해보자: "하늘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별들이 있다."   하늘에 관한 표현에서 우리는 시인의 무력감이 발견된다. 저자는 저 끔찍한 무한대의 공간에서 길을 잃었다. 수많은 행성들이 무기력한 휴면 상태로 그녀에게 충돌한다. 머지않아 그녀의 지성, 부연 설명하자면 '그다지 견고하지 못한' 지성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기 시작하리라: 태양 아래서, 햇살이 비치는 이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결국 혼자가 아닐까?   이것은 확률의 법칙을 철저히 무시하는 발상, 오늘날 보편적으로 공인 받은 가설을 완전히 뒤집는 행위. 언제든 인간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는 명확한 증거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아, 도대체 시라는 건 왜 이 모양인지. 마침내 우리의 여류 시인은 지구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지구는 "목격자 없이도 열심히 돌아가는 행성"이며, "우주가 탄생시킨 공상 과학 소설"이다. '안드로메다'나 '카시오피아' 행성도 파스칼(1623~1662)의 절망에는 대적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인간의 배타적이고 고독한 본질은 점점 악화되어, 일종의 허무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리석은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타 등등---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공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길을 밝혀주소서---"   시인은 인생이 마치 고갈되지 않은 재고품이라도 되는 듯 함부로 낭비되는 것에 대해 일종의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고집스러운 견해에 따르면 항상 양쪽 모두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전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타인들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도덕적인 성향이 작품 속에서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도들은 조금난 덜 노련한 펜으로 씌여졌다면, 아마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리라.   애석하긴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시인은 "태양 아래서, 햇살 비치는 이 세상 곳곳에서, 우리는 과연 혼자일까, 아닐까?"와 같은 본질적으로 설득력이 결여된 명제를 고상한 미사여구와 일상적인 언어가 뒤섞여버린 자신의 무심하고 태평한 문체 속에 억지로 쑤셔 넣어버렸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작품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확신컨대 이 작품을 납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정답이다.   경고 / 쉼보르스카   우주 공간에 갈 때는 어릿광대를 데려가지 말 것, 이것이 내 충고다.   열네 개의 죽은 혹성들과 몇 개의 별, 그리고 두 개의 혜성을 지나 마침내 세번째 행성을 향해 길을 떠날 때쯤이면 어릿광대들은 유머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우주는 말 그대로 우주다. 다시 말해 '완전하다'는 뜻. 어릿광대들은 바로 그 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 무엇도 어릿광대들을 기쁘게 하지는 못하리라. 시간으로도-너무나 아득하니까. 아름다움으로도-일말의 빈틈도 없으므로. 위엄으로도-유쾌한 분위기로 되돌리면서 너무나 힘이 들기에. 모두가 경탄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하품을 할 것이다.   네번째 행성으로 향하는 길은 더욱더 끔찍하리라. 경직된 미소,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잠, 망가진 균형, 쓸데없는 잡담, 까마귀는 부리에 치즈를 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에는 파리가 앉았다. 원숭이는 사우나를 하고 있다--- -그래, 인생이란 다 이런 거지, 뭐   그들은 속박과 구속을 원한다. 무한한 시간보다는 목요일을 선택한다. 그들은 원시적이다. 광활한 음악의 세계보다는 조율 안 된 음 하나를 선택한다. 그들은 이론과 실제의 틈바구니, 원인과 결과의 사이에 존재할 때 가장 행복하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결합된 우주 공간.   서른번째 행성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 허허벌판 황무지라는 건 안 봐도 뻔하다는 생각에) 그들은 조종석에서 내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요" "손가락을 다쳤어요" 기타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아, 얼마나 수치스럽고, 난처한 일인가. 우주 공간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비용을 탕진하고 말았다.   양파 / 쉼보르스카   양파는 뭔가 다르다. 양파에겐 '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양파다움에 가장 충실한,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완전한 양파 그 자체이다. 껍질에서부터 뿌리 구석구석까지 속속들이 순수하게 양파스럽다. 그러므로 양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스스로의 내면을 용감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피부 속 어딘가에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야생 구역을 감추고 있다. 우리의 내부,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옥, 저주받은 해부의 공간을. 하지만 양파 안에는 오직 양파만 있을 뿐 비비꼬인 내장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양파는 언제나 한결같다. 안으로 들어가도 늘 그대로다.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는 존재, 성공적인 피조물이다. 한 꺼풀, 또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좀더 작아진 똑같은 얼굴이 나타날 뿐, 세번째도 양파, 네번째도 양파. 차례차례 허물을 벗어도 일관성은 유지된다. 중심을 향해 전개되는 구심성(求心性)의 아름다운 푸가. 메아리는 화성(和聲) 안에서 절묘하게 포개어졌다.   내가 아는 양파는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둥근 배. 영광스런 후광을 제 스스로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건 지방과 정맥과 신경과 점액과, 그리고 은밀한 속성뿐이다. 양파가 가진 저 완전무결한 우둔함과 무지함은 우리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자살한 사람의 방 / 쉼보르스카   당신들은 틀림없이 그 방이 비어 있었으리라 단정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등받이가 튼튼한 의자 세 개. 어둠을 밝히기에 딱 알맞은 전등 하나. 지갑과 신문이 놓인 책상이 있었습니다. 근심 걱정 없는 자애로운 부처, 고뇌와 비탄에 잠긴 예수. 행운의 상징인 일곱 마리 코끼리, 그리고 설합 속에 수첩 한 개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거기에 우리들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까?   책과 그림과 음반들이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거기엔 검은 손이 연주하는 위로의 트럼펫 선율이 있었습니다. 진심 어린 꽃송이를 들고 서 있는 사스키아*가 있었습니다. 신성의 불꽃이 뿜어내는 환희가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제 5장에서 힘겨운 고난을 마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책장 안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고, 아름답게 무두질한 표지 위에는 금박으로 새겨진 도덕군자들의 이름이 자랑스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정치가들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문이 있으니 출입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창문이 있으니 내부의 정경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 방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듯 텅 비어 있었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한 안경이 창턱에 놓여 있고, 아직까지 살아 있는 파리 한 마리가 윙윙대며 그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편지가 적어도 뭔가를 밝혀줄 거라 기대하고 있군요. 하지만 감히 한마디 하리다. 애초에 편지 따위는 없었습니다. 한때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우리들은 유리컵에 기대어 세워놓은 텅 빈 봉투 속으로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요.   *사스키아Saskia ;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아내. 렘브란트는 자신의 아내를 소재로 한 몇편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시의 소재가 된 '화장대의 사스키아'(1641)이다. 사스키아가 손에 꽃을 들고 있는 이 그림은 독일 드레스덴의 알테 마이스터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오디세우스Odysseus;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군의 대장이었다. 라틴어로는 '율리시스'라고 불림.   자아비판에 대한 찬사 / 쉼보르스카   대머리 독수리에게는 스스로를 비판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검은 표범에게는 양심의 가책이란 말이 낯설기만 하다. 피라니아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데 일말의 의혹도 품지 않는다. 방울뱀은 무조건 자기를 추겨세운다.   스스로를 냉철하게 평가할 줄 아는 자칼*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뚜기, 악어, 선모충 그리고 쇠파리도 마찬가지. 생긴 대로 살아가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범고래의 심장은 수백 근의 무게를 자랑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볍기 짝이 없다.   태양계의 세번째 행성에 있는 순수한 양심보다 더 동물적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쟈칼;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육식 동물로 유럽 동남부,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 등지에 서식하는 갯과의 들짐승   인생이란------기다림 / 쉼보르스카   인생이란------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思考)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긴장 탓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보지만, 그럴수록 더 큰 모멸감이 되돌아 올뿐. 정상 참작을 위한 증거들이 내게는 오히려 잔인하게만 느껴진다.   한번 내뱉은 말과 행동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 밤하늘의 별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도 못했다. 서두르고 덤벙대다가 잘못 잠근 외투의 단추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우연이 빚어낸 안타까운 결과.   어느 수요일 하루만이라도 미리 연습할 수 있다면, 어느 목요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 있다면! 하지만 금요일 되면 벌써 새로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어김없이 나를 찾는다. 그러곤 묻는다-자, 모든 게 이상 없죠? (잔뜩 쉬어터진 거친 목소리로 막 뒤에서 헛기침으로 미리 귀띔을 해주는 일조차 없이.)   지금 이 상황을 임시로 마련된 무대 위의 간단한 오디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정교한 무대 장치 아래 서서 모든 사물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배치되었는지르 똑똑히 보고 있다. 구석구석 놓여 있는 소품들이 정확성과 견고함은 가히 충격적이다. 무대를 회전시키는 장치는 벌써 오래전부터 작동 중이다. 저 멀리서 성운(星雲)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개막 공연이다. 이 순간 내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저지른 나의 행동, 나의 말, 나의 동작으로 영원히 굳어져버린다   스틱스 강변에서 / 쉼보르스카   자, 개별적인 영혼들이여, 여기는 스틱스 강*이다. 그래 맞다, 여기는 스틱스 강이다. 뭣 때문에 그렇게들 놀라서 쩔쩔 매느냐? 머지않아 확성기를 통해 카론*의 굵은 저움이 들려오면, 속세의 숲에서 놀라 달아았던 님프의 보이지 않은 손이 너희를 안식처로 데려갈 것이다. (대부분의 님프들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정식 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일하는 중이다.) 강력한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견고한 방파제 너머로 켸케묵은 썩은 나룻배 대신 모터가 장착된 수백 개의 보트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인류의 과잉 번식으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친애하는 영혼이여,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는지. 쓰레기 더미처럼 빽빽하게 솟은 고층 빌딩은 강변의 아름다운 정경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승객들에게 효율적인 운행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숙박 시설과 창고, 각종 사무실과 여행사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중. 친애하는 영혼이여, 여기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인 헤르메스*가 있다. 그는 최소한 몇 년 앞서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운다. 어느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어느 지역에서 독재가 시작될지 철저하게 예측해서 배에 오를 승객들의 자리를 미리미리 배정한다. 스틱스 강을 건너는 운임은 무료, 단지 고풍스러운 고대 문명에 대한 감상적인 향수 때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는 요금함이 형식적으로 놓여 있을 뿐; "이곳에 주화 또는 동전을 넣지 마시오." 자, 거기 있는 영혼이여. 시그마* 16구역에 정박한 타우 30에 승선하라. 비록 배가 만원이어서 숨 막히게 더울지라도 당신을 위한 공간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으리라. 필연이 요구하는 대로 컴퓨터가 당신의 자리를 정확히 마련해놓았을 테니. 타르타로스*에서도 마찬가지. 넘쳐나는 예약 탓에 몸을 펴기 힘들 정도로 비좁고 갑갑하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옷자락은 형편없이 구겨지리라. 내 작은 유리병 안에는 레테의 강에서 퍼온 마지막 반 방울의 물이 담겨있다. 영혼이여, 명심하라. 저승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고 확인을 해야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가질 수 있는 법이니라.   *스틱스 강; 그리스 신화에서 레테,  아케론과 함께 저승으로 흐르는 세 개의 강 중 하나이다.              사자(死者)는 사공인 카론의 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 황천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카론Caron; 저승으로 가는 스틱스 강의 나룻배를 젓는 사공 *헤르메스Herme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 신들의 사자(死者)이며 상업, 웅변, 발명, 도둑 따위의 수호신 *시그마: 그리스 문자의 열여덟 번째 자모, 영어의 s에 해당한다. *타르타로스; 그리스 문자의 열아홉 번째 자모, 영어의 t에 해당한다.   유토피아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는 섬.   이곳에서는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덤불은 정답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곧고 탄탄한 '이해의 나무'가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그 안쪽으로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드넓게 펼쳐진 푸른 숲이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른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 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심오한 깨달음'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수면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언덕에 오르면 꼭대기에서 '사물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해변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발견될 뿐. 그것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바다에 몸을 던져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 것뿐이라는 듯.   삶이란 워낙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니.   무대 공포증 / 쉼보르카     시인, 그리고 작가. 흔히들 말한다. 시인은 작가가 아니라고, 그러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시인은 '시'를 작가는 '산문'을 쓴다?   산문 속에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으며, 그 속에는 물론 '시'도 포함된다. 하지만 '시'는 단지 '시'여야만 한다.   '시'의 탄생을 널리 알리는 플랭카드에는 화려한 아르 누보풍으로 장식된 'ㅅ'자가 날개를 단 고풍스러운 라이어* 줄에 보란 듯이 멋지게 매달려 있다. 자, 나는 무대에 들어설 때 평범하게 뚜벅뚜벅 걷기보다는 사뿐사뿐 날아서 입장해야 마땅하리라.   어설프게 천사의 자태를 흉내내려면 밑바닥에 무거운 가죽 밑창을 댄 낡은 장화를 신고 쿵쾅대며 뒤뚱뒤뚱 걷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벼운 맨발이 나으리라.   드레스 자락을 좀더 늘어뜨릴 걸 그랬나. 가방이 아니라 기다란 소맷자락에서 시를 꺼내는 건 어떨까. 성대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흥겨운 퍼레이드를 앞세우고, 웅장한 종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건 어떨가. 뎅-그-렁. 뎅-그-렁.   저기, 무대 위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다리를 가진 매우 정적인 탁자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작은 탁자 위에는 조용히 연기를 내뿜는 조그만 촛대 하나.   무대에 마련된 광경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촛불 아래서 '시'를 낭독해야만 할 듯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전깃불 아래서 탁, 탁, 탁 자판을 두드리며 게계적으로 써내려간 '시'를.   이것이 과연 '시'일까, 아닐까, 만약 '시'라면 세부적인 장르는 무엇일까. 괜스리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과연 '시' 속에 '산문'이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아닐까. 산문 속에서 나의 '시'는 어떤 평가를 받으려나.   그러나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보라색 술이 달린 진홍빛 커튼을 드리운 이 어두컴컴한 무대에서만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음에야.   *라이어; 고대 그리스의 악기로 일곱 줄로 된 수금.   과잉 / 쉼보르스카     새로운 별이 발견됐다. 그렇다고 하늘이 더 밝아졌다거나 부족했던 뭔가가 채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대하지만 동시에 까마득히 멀리 있는 별. 우리 육안에는 조그만 점으로 보일 만큼 멀고도 먼, 때로는 저보다 훨씬 작은 다른 별들보다 더 조그맣게 보이는 별. 만일 우리에게 놀라움을 음미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란 걸 깨닫게 되련만,   별의 나이, 별의 무게, 별의 위치, 이 모든 사실이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도 남을 만큼 위대하고 심오한 것이라 해도, 하늘과 가깝게 지내는 동료들이 모두 모여 축배의 포도주 한 잔 들이켜기에 충분할 만큼 중대하고 획기적인 가치를 지녔다 해도, 지금 이 순간 천문학자와 그의 아내, 친척들과 친구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저 '별'일 뿐. 그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주로 지구와 관련된 잡담을 나누며 지구에서 생산된 땅콩을 으적으적 씹어 먹을 따름이다.   별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까이 있는 우리의 여인들을 위해 축배를 들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별은 언제나 좌충우돌, 계획성도 일관성도 없다. 날씨와 유행, 경기의 결과, 정책의 변화나 가계의 소득, 가치의 위기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선동적인 과업이나 중공업 발전에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회담용 탁자의 번쩍이는 광택 속에 투영되는 일도 없다. 별은 우리가 열심히 헤아리는 인생의 무수한 날들보다 더 많고, 아득하다.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사람들이 태어나는지, 찰나와도 같은 짧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얼마나 많은 별들 아래서 사람들이 죽어가는지, 대체 이런 질문들이 다 무슨 소용이람.   새로운 별들이 출현했다. -그 별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줘. -저 멀리 회색빛 구름이 보이지? 뭉게구름의 들쭉날쭉한 가장자리와 그보다 왼쪽에 있는 아카시아 가지, 그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아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나.   고고학 / 쉼보르스카   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여. 내 분야에서 진보는 이미 이루워졌다. 네가 나를 '고고학'이라 불르기 시작한 지 벌써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내게는 더 이상 화석의 신들이 필요치 않다. 판독하기 쉬운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 폐허도 마찬가지.   네가 가진 것 중 아무거나 좋으니 내게 보여다오. 그러면 네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아맞히리라. 무언가의 안쪽, 깊숙한 바닥도 좋고, 아니면 꼭대기, 맨 윗부분도 좋다. 엔진의 파편, 브라운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전선의 부스러기, 산산조각 난 손가락뼈. 그보다 더 작은 일부분, 아니 더욱 더 미세한 단서여도 상관없다.   네가 살던 시대에는 미처 개발되지 않았던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요소와 성분들 속에서 곤히 잠자고 있던 기억의 자취를 모두 일깨우리라. 핏자국은 영원히 남는 법. 거짓은 명백하게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 번호는 사방에 메아리 치고 있다. 모든 의혹과 의도들은 공개적으로 밝혀지리라.   너는 아마 믿을 수 없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침묵 속에 닫혀버린 네 목구멍 속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음을. 먼 옛날 네가 바라보았던 풍경을 네 안구에서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네가 인생에서 죽음 말고 또 무엇을 기다려왔는지 시시콜콜 파헤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네게 남겨진 것 중에 아무것도 아닌 '무(無)'를 내게 보여다오. 나는 그 '무'를 가지고 숲과, 도로와, 비행장을 만들고, 비열함과 다정함을 되살리고, 무너진 집을 다시 복구할 테니까.   나에게 너의 시를 보여다오. 그러면 네게 말해주리라. 어째서 더 일찍도, 더 늦게도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너의 시가 탄생했는지를.   저런, 아니야, 너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문자들이 잔뜩 써 있는 이 우스운 종이 쪼가리를 어서 치우렴. 내게 필요한 건 땅 위에 쌓아 올려진 네 둥그런 흙무덤과 옛날,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공기 속을 유영하던 뭔가를 태우는 냄새, 오직 그것뿐.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 / 쉼보르스카   우리는 그것을 모래알갱이라 알고 있지만 그 자신에게는 알갱이도 모래도 아니다. 모래 알갱이는 보편적이건, 개별적이건,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그릇된 것이건, 적절한 것이건, 이름 없이 지내는 익명의 상태에 익숙하다.   우리가 쳐다보고, 손을 대도 아무렇지 않다. 시선이나 감촉을 느끼지 못하기에. 창틀 위로 떨어졌다 함은 우리들의 문제일 뿐, 모래 알갱이에겐 전혀 특별한 모험이 아니다. 어디로 떨어지건 마찬가지. 별써 착륙했는지, 하강 중인지 분간조차 못하기에.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숫가 풍경, 그러나 풍경은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서 풍경은 아무런 색깔도, 형태도, 소리도, 향기도, 고통도 감지하지 못한다.   호수 바닥에는 바닥이 없고, 호수 기슭에는 기슭이 없다. 호수에 고인 물은 축축하지도, 건조하지도 않다. 자신이 물결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파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위를 향해 한 번도, 여러 번도 아닌 게 그렇게 휘몰아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하늘 아닌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 하늘에서 태양은 지지 않고, 다만 스러질 뿐. 무심하게 흐르는 구름 뒤로 태양이 숨지 않고, 몸을 가리면 그저 바람이라는 이유로 공기 속을 유영하는 바람이 구름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닐 뿐.   일 초가 지나고, 두번째 일 초, 세번째 일 초,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만 삼 초일 뿐.   급한 전갈을 지닌 사자(使者)처럼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비유일 뿐. 상상이 빚어낸 가공의 인물이 급한 듯 서두른다. 인간의 것이 아닌 어떤 소식을 전하기 위해.   과장 없이 죽음에 관하여 / 쉼보르스카   죽음은 농담을 모른다. 별이나 다리에 대해서도. 직조 기술, 채광, 곡식의 경작법이나 조선술, 빵 굽는 비법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내일을 설계하는 우리의 대화 속에 화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느닷없이 끼어넣는다.   자신의 본업과 직결된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무덤을 파는 일도, 관을 짜는 것도, 모든 작업에 으레 수반되는 뒷정리조차도.   오로지 '죽이는 순간'에만 열중한 나머지 매사를 서투르게 처리하고 만다. 체계적인 계획이나 훈련도 없이, 이제 막 뭔가를 습득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처럼.   대개는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지만, 실패 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헛된 발길질과 또다시 반복되는 시도!   때로는 공중의  파리를 잡기에도 힘이 부치고, 몇 마리의 애벌레들과 기어가지 시합에서 패배하는 경우도 있다.   구근(球根)과 꼬투리, 더듬이, 지느러미, 호흡기, 짝짓기를 위한 깃털, 겨울나기에 필요한 털가죽, 죽음이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죽음에 업무가 잔뜩 밀렸음을 경고하고 있다.   적개심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전쟁이나 테러를 동원한 우리의 지원 사격도 아직까진 턱없이 부족하다.   심장은 알 속에서 힘차게 고동친다. 갓난아기의 골격은 나날이 성장한다.   씨앗은 두개의 떡잎으로 싹을 틔우고, 때로는 지평선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로 무럭무럭 자라난다.   스스로가 전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전혀 전능하지 않다는 살아 있는 증거.   어차피 삶에서는 단 한순간의 불멸도 기대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뒤늦게 찾아드는 법.   보이지 않는 문의 손잡이를 움켜잡고 헛되이 흔든다. 정해진 시간 안에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려 발버둥 쳐도 피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법이련만.   우리 조상들의 짧은 생애 / 쉼보르스카   서른 살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노년기는 단지 돌이나 나무의 특권일 뿐. 유년기는 새끼 늑대가 무럭무럭 자라듯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삶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최대한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첫눈이 내리기 전에.   열세 살에 자식을 낳은 엄마들, 갈대숲에서 새 둥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가는 열네 살의 사냥꾼들. 어부들을 휘하에 거느린 스무 살의 우두머리들. 그들은 막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벌써 사라졌버렸다. 불멸은 종말 속에 너무도 빨리 융화되었으니, 마녀들은 몇 개 안 남은 쓸만한 이빨을 갈면서 저주 섞인 가래침을 내뱉었다. 아버지의 눈앞에서 아들은 남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텅 빈 동공 속에서 손자가 태어났다.   애초부터 나이 따위를 헤아릴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그물과 냄비와 헛간과 도끼의 숫자를 세었을 뿐. 밤하늘의 보잘것없는 별들에겐 그처럼 관대하기만 하던 세월이 그들에겐 빈손을 불쑥 내밀었다가는 그것마저 아깝다는 듯 금세 거둬들이고 말았다. 한 발자국 가까이, 두 발자국 가까이 어둠 속에서 샘솟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빛나는 강물을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미뤄진 질문도, 때늦은 계시도 없었다. 단지 타이밍을 정확히 맞춘 생의 체험만이 있었을 뿐. 지혜는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만 했다. 모든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에 똑똑히 들어야만 했다.   선과 악- 그들은 아는 게 별로 없었지만, 실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악이 승리하면, 선은 자취를 감춘다는 걸, 선이 모습을 드러내면, 악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는 걸. 그러므로 기쁨 곁에는 언제나 공포가 따르고, 절망에는 고요한 희망의 그림자가 깃들기 마련이란 걸. 인생이란 아무리 긴 듯해도, 언제나 짧은 법. 거기에 뭔가를 덧붙이기엔 너무나도 짧은 법.   2 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 / 쉼보르스카   우리의 20세기는 이전의 다른 세기들보다 훨씬 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증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모든 연도에 일련번호가 매겨졌다. 흔들리는 걸음걸이, 숨가쁜 호흡.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이미 너무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기대했던 수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20세기는 행복을 향해서, 따뜻한 봄을 향해서 전진할 예정이었다.   공포는 골짜기 너머, 산 너머, 멀리멀리 내동댕이칠 예정이었다. 진실은 거짓보다 한발 앞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몇 가지 비극이 우리를 엄습했다. 전쟁과 굶주림. 그와 유사한 다른 재앙들----   무방비 상태의 무력한 사람들을 존중할 예정이었다. 혹은 그에 준하는 다른 가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생을 즐기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결코 실현되지 못할 임무를 떠맡은 것과 매한가지.   어리석다는 건 결코 우스운 일이 아니다. 지혜롭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희망, 그것은 더 이상 저 풋풋한 어린 소녀도, 그와 비슷한 그 무엇도 아니리니, 애석하기 짝이 없구나. 바야흐로 신은 인간이 선하면서,  동시에 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수긍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선한 인간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인간은 선하지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다른 이들에게 묻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내내 말했듯이,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시대의 아이들 / 쉼보르스카     우리들은 시대의 아이들, 바야흐로 시대는 정치적.   너와, 우리와, 너희의 모든 일들, 낮과 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이 모든 것이 정치적.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의 유전자에는 정치적인 과거가, 우리의 피부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우리의 눈동자에는 정치적인 양상이 담겨 있다.   무엇에 대해 말하건, 늘 반론이 돌아오고, 무엇에 대해 침묵하건, 늘 웅변으로 돌변하며, 마지막엔 걸국 정치적인 내용으로 귀결되어진다.   원초적인 밀림을 지날 때도 우리는 정치적인 토대 위에서 정치적인 발걸음을 옮긴다.   비정치적인 시 역시 사실은 정적일 따름이니 하늘 저편에는 휘영청 달이 밝건만, 그 아래 사물들은 달빛에 물들지 않았다. 여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 이 물음은 과연 무슨 뜻일까? 어디 한번 대답해봐요, 내 사랑. 결국 여기에도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다.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더라도 모든 사물은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다. '석유'나 '단백질 식품' 또는 '가공 원료'로 존재할지언정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정치적이다.   아니면 '회담 탁자'여도 무방하리라. 몇 달씩 모여 탁자 모양에 대해 다투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한 협상을 나누는 둥그렇거나 혹은 네모난 '회담 탁자'   그동안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동물들은 죽었고, 집들은 불탔고, 들판은 폐허가 되었다. 좀처럼 정치적이지 않았던 아득한 태고의 그 어떤 시대처럼.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 쉼보르스카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조그만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라 밝은 대낮 한 개의 커다란 불빛 아래서, 어두운 밤, 수억만 개의 불빛 아래서.   어쩌면 우리들은 실험용으로 제작된 특별한 세대인지도 몰라. 유리병 속에서 또 다른 유리병으로 옮겨지고. 삼각 플라스크에 담겨져 이리저리 뒤섞이고, 눈보다 더 정교한 그 무엇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그러다가 결국엔 각각 핀셋으로 접혀서 들어 올려질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영 딴판일지도 몰라. 아무런 간섭도, 훼방도 없을지 몰라. 모든 변화는 정해진 계획에 따라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움직일 지도 몰라. 그래프의 눈금은 미리 예측한 지그재그의 윤곽을 천천히, 정확하게 아로새겨 나갈지도 몰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우리에겐 흥미로운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감시용 모니터를 작동시키는 일은 좀처럼 없을지도 몰라. 단지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그것도 큰 규모일 경우에만, 혹은 지구의 동토(凍土) 위로 미확인 비행 물체가 출현했을 때만, 아니면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대규모의 민족 이동이 발견된 상황에만.   어떠면 정반대일지도 몰라. 그것에선 사람들이 자질구레한 사건들에 관심을 보일지도 몰라. 자, 보라구! 거대한 화면 속에서 어린 소녀가 소매에 단추를 달기 위해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잖아. 마침내 경보가 울리면 직원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겠지. 박동하는 조그만 심장을 가냘픈 몸 속에 품고 있는 저 사랑스러운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손에 들고서도 얼마나 의연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누군가가 기쁨에 넘쳐서 소리칠 거야. "자, 어서 가서 보스에게 전하시오. 와서 직접 보시라고!"   공짜는 없다 / 쉼보르스카   공짜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빌려온 것이다. 내 목소리는 내 귀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자. 여기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 심장은 반납 예정이고, 간도 돌려주기로 되어 있다. 물론 개별적인 손가락과 발가락도 마찬가지.   계약서를 찢어버리기엔 이미 늦었다. 내가 진 빚들은 전부 깨끗이 청산될 예정. 내 털을 깍고, 내 가죽을 벗겨서라도.   나는 채무자들로 북적대는 세상 속을 조용히 걸어 다닌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날개에 대한 부채를 갚으라는 압박에 시달리는 중. 또 다른 이들은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나뭇잎 하나하나마다 셈을 치르는 중.   우리 안의 세포 조직은 송두리채 채권자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솜털 하나, 줄기 하나도 영원히 간직할 순 없는 법.   명부의 기록은 모두 다 정확하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빈털터리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남겨질 예정이다.   나는 기억할 수 없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이 복잡한 청구서를 스스로 펼쳐 보게 되었는지.   이 거래에 반대한 지금 거절 증서를 우리는 '영혼'이라 부른다. 이것은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항목이기도 하다.   슬랩스틱 코미디 / 쉼보르스카   만일 천사가 있다면, 절망으로 끝난 희망에 대한 우리의 소설을 그들이 과연 읽고 싶어 할는지 의심스럽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시를 외면할 것 같아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연극 속에 등장하는 비명과 경련은-짐작컨대- 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리라.   천사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비번을 맞은 천사들,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그 존재들은 우리를 보면서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떠올리리라.   옷깃을 갈기갈기 쥐어뜯고, 고통으로 이를 갈며, 탄식하고 울부짖는 자들보다는 -적어도 내 생각으론-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 대신 가발을 움켜잡거나 배고파서 자신의 구두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저 불쌍한 사내를 훨씬 선호하리라.   허리에서 위쪽으로는 뜨거운 가슴과 열정, 하지만 그 아래 바짓가랑이 속에는 겁먹은 생쥐 한 마리. 오, 그래, 그들은 틀림없이 손뼉 치며 환호하리라.   끊임없이 계속되던 무모한 추적은 도망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탈주로 뒤바뀐다. 터널의 끝에서 기다리는 한 줄기 빛은 호랑이의 눈동자임이 밝혀진다. 백 가지 재앙은 백 가지 자기 심연 위를 구르는 백 가지 익살스러운 재주넘기로 탈바꿈한다.   만일 천사가 존재한다면 -부디 바라건대-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하리라. 공포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완벽한 적막 속에 자행되기에 차마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 아슬아슬한 쾌락의 본질을.   용기 내어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그들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신나게 박수를 치리라.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절대로 슬퍼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사건들에 관한 해석 제1안 / 쉼보르스카     만일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아마도 오랫동안 망설였으리라.   우리에게 제공된 육체는 어딘가 불편하고, 제대로 맞지 않아 그만 흉하게 망가져버렸다.   허기를 달래라고 제공된 음식들은 도리어 우리를 메스껍게 했다. 수동적으로 세습된 각종 성향들과 분비샘의 횡포는 우리를 질리게 만들었다.   우리를 에워싸기로 한 세상은 끊임없이 썩어 들어갔다. 그 속에서 원인에 대한 결과가 격노하여 함성을 질렀다.   우리에겐 개개인의 운명을 감시하라는 사명이 주워졌지만 무한한 슬픔과 공포 때문에 다수가 거부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야기되었다. 죽은 아기를 낳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감내할 필요가 있을까, 만일 결코 뭍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뱃사람이 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들은 죽음에 동의했다. 그러나 모든 유형에 다 찬성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그러나 모든 사랑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사랑만 그렇다.   바다가 시시각각 변하듯 예술 또한 유한한 것이라고 음악의 신 뮤즈는 우리에게 조심스레 경고했다.   모두가 이웃 나라의 간섭이 없는 조국을 원하며 전쟁과 전쟁 사이 휴전 기간 동안에 태어나기를 갈망했다. 우리 중 아무도 권력을 장악하거나 혹은 그것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다. 자신 혹은 타인의 헛된 환상으로 인해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행렬이나 군중 속으로, 아니 한술 더 떠,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부족들 속으로 뛰어들기를 원하는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역사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순 없었으리라.   바로 그때 너무 일찍 빛을 발한 몇 개의 별들이 느닷없이 소멸되고, 식어버렸다. 결정을 내리기엔 최적이 시간이다.   수많은 불길한 징조 속에서 마침내 후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은 탐험가 또는 의사가 되려 했고, 몇몇은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한 철학자를 원했다. 이름 없는 정원사를 꿈꾸는 사람도, 예술가나 음악가 지망생도 있었다. -더 이상 다른 신청자는 없었지만 아무튼 모두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금방 되돌아와야 하고, 또 반드시 돌아와야 할 짧은 여행을 제안 받았다.   영원성이 철저히 제거된. 유한한 세월 속으로의 여행, 단조롭고 한결같은, 동시에 시간의 순환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곳으로의 여행, 어쩌면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문득 우리는 의구심을 느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해서, 과연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한발 앞서 내리는 결정을 과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망각 속에 던져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만일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저 아래, 저곳에서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는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모한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연약한 갑초가 바위틈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도 결코 자신을 바위에서 떼어놓지 못할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서,   조그만 동물 하나가 굴속에서 열심히 구멍을 파고 있었다.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활기와 희망을 품고서.   순간 우리 스스로가 소심하고, 보잘것없고, 우습기 짝이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저 세상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참을성이 부족한 이들이 제일 먼저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첫번째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래, 그것은 틀림없는 생생한 불꽃이었다.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현실의 강기슭에서 활활 불을 피웠다.   그들 중 몇몇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귀향길에 올랐다. 그러나 끝내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과연 그들의 손에는 저 세상에서 쟁취한 뭔가가 들려 있었을까? 정말로 그랬을까?   이것은 커다란 행운 / 쉼보르스카   이것은 커다란 행운 우리 스스로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눈군가가 아주 긴 세월 동안, 적어도 이 세상보다는 더 오래된 까마득한 옛날의 그 시점으로 돌아가 항구히 존재해야만 하리.   한계투성이에다 말썽을 일으키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육신 따위는 훌쩍 벗어던질 수 있어야 하리.   연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보다 선명한 영상을 위해셔, 결정적인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재촉하고, 옭아매는 시간의 한계쯤은 당당히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하리.   자,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세부적인 사랑이나 자질구레한 시간들과는 영원히 작별의 인사를 나누시오,   요일을 계산하고 따져보는 것쯤은 얼마든지 무의미한 행동으로 치부할 수 있어야 하리.   우체통에 편지를 던져 넣는 일 정도는 젊은 날의 어리석은 객기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하리.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표지판 따위는 정신 나간 소리쯤으로 무시할 수 있어야 하리.   순간 / 쉼보르스카   초록빛으로 물든 언덕길을 오른다. 출발, 그 풀밭 위 작은 꽃들, 그림책 삽화에서 본 듯한 풍경, 안개 낀 하늘엔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감돌고 저 멀리 또 다른 봉우리가 적막 속에 펼쳐진다.   고생계(古生界)도 중생계(中生界)도 애초에 없었던 듯 스스로를 향해 포효하는 바위도, 심연의 융기도 없었던 듯, 번쩍이는 섬광 속엔 낮의 숨결을 찾을 길 없다.   뜨거운 열병 속에서도 얼음장 같은 오한 속에서도 아직 평원은 여기까지 떠밀려오지 않은 듯,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해안선이 산산조각 나는 것도 오로지 딴 세상에서나 벌어지는, 낯선 일인 듯.   현지 시각 9시 30분, 모든 것은 약속대로 정중하게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골짜기의 시냇물은 시냇물의 모습으로 한결같이. 오솔길은 오솔길의 모양으로 언제나 그렇게. 숲은 숲의 형상을 갖추고 영원히 그 자리에. 언덕 위를 나는 새들은 언덕 위를 나는 새의 역할에 충실하게.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긴 찰나의 순간. 지속되기를 모두가 그토록 염원했던 지상의 무수한 시간 중 하나.   무리 속에서 / 쉼보르스카   나는 바로 이러이러한 사람. 그것은 모든 우연이 그러하듯 이해할 수 없는 우연.   다른 이들이 내 조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둥지에서 날아올랐을 수도. 다른 그루터기에서 다른 껍데기를 쓰고 기어 나왔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연의 옷장에는 꽤나 많은 옷들이 걸려 있다. 거미, 갈매기, 들뒤의 의상. 모든 것이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닳아서 해질 때 까지 각자 주어진 의상을 열심히 입는다.   나 역시 스스로 선택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덜 개별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에. 물고기 떼나 개미집, 윙윙대는 벌 떼의 일부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속의 한 조각으로.   지금보다는 훨씬 덜 행복한 존재가 될 수도 있었기에. 누군가의 모피를 위해, 혹은 명절 음식용으로 사육될 수도 있었기에. 유리 상자 속에 갇혀 그 안에서 헤엄쳐 다니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었기에.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길 속에 속수무책 대지에 뿌리박은 한 그루의 나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휩쓸려 무자비하게 짓밟혀진 풀잎.   누군가에게는 찬란하게 보일 수도 있는 어두운 별빛 속을 돌아다니는 수상쩍은 사람이 될 수도 있었기에.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단지 공포의 대상이거나 혐오감. 혹은 동정심이나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면?   지금 내가 속한 종족이 아닌 전혀 다른 종족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앞길이 막막하게 막혀버렸다면?   지금껏 운명은 내게 자애로웠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꾸만 뭔가가 견주고 싶어 하는 내 열망이 거세당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이것은 내가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름 / 쉼보르스카   구름을 묘사하려면 급히 서둘러야만 하지. 순식간에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형상으로 변하기에.   구름의 속성이란 모양, 색조, 자세, 배열을 한순간도 되풀이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기억할 의무가 없기에 사뿐히 현실을 지나치고,   아무것도 증언한 필요 없기에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네.   구름과 비교해보면 인생이란 그래도 확고하고 안정적인 것. 상당히 지속적이고, 꽤 영원하네.   구름 곁에서는 바윗덩이조차도 의지할 수 있는 형제처럼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네. 그에 비하면 구름은 마치 변덕스러운 먼 사촌 누이 같네.   인류여, 원한다면 계속해서 존재하라. 그 다음엔 차례차례 죽는 일만 남았으니. 구름에겐 이 모든 것이 조금도 낯설거나 이상스럽지 않다네.   너의 전 생애와 아직은 못다한 나의 생애 너머에서, 구름은 예전처럼 우아하게 행진을 계속하네.   구름에겐 우리와 함께 사라질 의무가 없다네. 흘러가는 동안 눈에 띄어야 할 필요도 없다네.   /최성은 역.   수화기 / 쉼보르스카   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꾼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기에.   죽은이가 내게 전화한다고 굳게 믿는 꿈을 꾼다.   수화기를 들기 위해 손을 내미는 꿈을 꾼다.   그런데 늘 사용하던 그 수화기가 아니다. 갑자기 무거워졌다. 마치 어떤 것에 꽉 매여 있거나 어딘가에 깊숙이 파묻혔거나 무언가가 뿌리를 꽁꽁 묶어놓은 것처럼. 수화기를 들어 올리려면 지구 전체를 끌어당겨야만 하리라.   쓸데없는 일에 힘을 쓰며 쩔쩔매는 꿈을 꾼다.   적막이 찾아오는 꿈을 꾼다. 전화벨 소리가 잠잠해졌기에   스르르 잠들었다가 또다시 벌떡 깨는 꿈을 꾼다.   가장 이상한 세 단어 /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식물들의 침묵 / 쉼보르스카   나와 너희들 사이의 일방적인 낮익힘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구나.   나는 잎이 뭔지, 꽃잎과 이삭, 솔방울 줄기가 어떤 모양인지. 사월이나 십이월에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잘 알고 있어.   너희는 내 관심따위엔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나는 부러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너희들 중 몇몇을 정성껏 들여다보곤 하지.   단풍, 우엉, 우산이끼. 겨우살이, 히스, 향나무, 물망초, 너희는 나한데 이름으로 불리지만, 너희에게 나는 아무 이름도 없어.   우리는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거란다. 동승한 사람들끼리는 의례 이야기를 나누는 법. 최소한 날씨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거나 스쳐 지나가는 역들에 대해서 떠들곤 하지.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화제가 부족하진 않을 거야.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같은 별이고, 같은 법칙에 따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까. 자신만의 방법으로 뭔가를 이해하려 한다는 점. 우리가 모르는 것들조차도 서로 많이 닮았으니까.   뭐든 물어봐도 좋아. 최대한 열심히 설명해줄께. 내 두 눈으로 무얼 보고 있는지. 어째서 내 심장이 고동치는지. 왜 내 육신은 대지에 뿌리박혀 있지 않은지.   그러나 하지도 않은 질문엔 대답할 도리가 없잖니. 게다가 너희에게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의미라면 더더욱 그렇지.   덤불, 관목, 잔디, 골풀- 내가 너희를 향해 속삭이는 건 전부 혼잣말이구나. 너희는 좀처럼 귀 기울이려 하지 않으니.   꼭 필요한 줄 알면서도 불가능한 게 바로 너희들과의 대화. 황망한 삶에서 시급한 줄 알면서도 기약 없이 미루다 끝내 실현되지 못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식탁보를 잡아당긴다 / 쉼보르스카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 지 일 년 남짓 되었다. 모든 것이 미리 조정되고, 통제되어질 수 없는 이 세상에.   오늘 시도하는 실험은 제 스스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물들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이 밀고, 당기고, 들어 올리고, 자리를 옮기는 일을 도와주어야만 한다.   물론 모든 사물이 현재 위치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장롱과 찬장, 단단한 벽과 탁자는 꿈쩍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고집 센 탁자 위에 깔린 식탁보는 -만일 끝 자락이 제대로만 손에 잡힌다면- 여행을 떠나려는 의지를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다.   식탁보 위에는 유리잔, 접시들, 우유병, 숟가락, 사발이 이리저리 놓여 있어 흔들고픈 욕망을 일렁이게 만든다.   그것들이 가장자리에서 위태롭게 비틀거릴 때 과연 어떤 움직임을 택할지 너무나 궁금하다. 천장에서 정처 없이 헤매 다닐까? 등잔 근처를 빙글빙글 비행할까? 창턱을 껑충 뛰어넘어 나무를 향해 날아갈지도?   위대한 과학자 뉴턴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봐요, 뉴턴 선생님,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손이나 흔들어주시죠.   이 실험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꼭 그렇게 되리라.   추억 한토막 / 쉼보르스카   한창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우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말았네.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소녀, 아, 무척이나 아름다웠네. 그녀의 자태가 눈부시게 황홀했기에 우리는 무심히 휴가를 즐길 수만은 없었다네.   바시아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는 반사적으로 남편의 손을 꼭 잡았네. 순간 나는 생각했지: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하리라. -당분간 여기 오지마 며칠 동안 내내 비가 올 거래.   과부인 아그네슈카만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그 사랑스러운 소녀를 반겼다네.   웅덩이 / 쉼보르스카   어린 시절 두려움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나 웅덩이를 피해 가곤 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 새로 생긴 것일수록 더욱 조심했다.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비슷하지만 개중에는 한없이 깊은 것도 있으니까.   한 걸음 내닫는 순간 몸 전체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도약하는 순간,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좀더 깊숙이 밑바닥으로 수면에 비추어진 구름 저편까지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시간이 지나면 웅덩이는 마르고,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덫에 걸려버렸다. 공간 속으로 끄집어내지 못한 비명 소리와 더불어.   먼 훗날에야 깨달았다. 세상의 법칙 속에는 항상 운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슬아슬 불운이 덮쳐올 듯해도 꼭 실제로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첫사랑 / 쉼보르스카   사람들은 말한다. 첫사랑이 가장 소중하다고. 매우 낭만적이긴 하지만 내 경우는 아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가 없어지고, 어떤 일이 일어났다 사라져버렸지만.   자질구례한 추억의 물건들을 만져보거나 리본도 아닌 노끈으로 아무렇게나 묶인 편지 뭉치를 열어볼 때도, 내 손은 결코 떨리지 않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단 한번의 만남 차가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나눈 몇 마디 의례적인 대화.   다른 사랑들은 지금껏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다. 그러나 내 첫 사랑은 호흡이 가빠 숨을 내쉴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내 첫사랑. 감히 다른 사랑이 못하는 걸 할 수 있으니- 기억조차 나지 않고, 꿈에도 깃들지 않는 그 사랑은 나를 죽음에 익숙하게 만들어버린다.   영혼에 관한 몇 마디 / 쉼보르스카   우리는 아주 가끔씩만 영혼을 소유하게 된다. 끊임없이, 영원히 그것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일 년 그리고 또 일 년, 영혼이 없이도 시간은 그렇게 잘만 흘러간다.   어린 시절 이따금씩 찾아드는 공포나 환희의 순간에 영혼은 우리의 몸속에 둥지를 틀고 꽤 오랫동안 깃들곤 했다. 때때로 우리가 늙었다는 섬뜩한 자각이 들 때도 그러하다.   가구를 움직이거나 커다란 짐을 운반할 때 신발 끈을 꽉 동여매고 먼 거리를 걷거나 기타 등등 힘든 일을 할 때는 절대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설문지에 답을 적거나 고기를 썰 때도 대개는 상관하지 않는다.   수천 가지 우리의 대화 속에 겨우 한 번쯤 참견할까 말까, 그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원체 과묵하고 점잖으니까.   우리의 육신이 쑤시고 아파오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근무를 교대해버린다.   어찌나 까다롭고 유별난지 우리가 군중 속에 섞여 있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찮은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거는 우리들의 암투와 떠들썩한 음모는 영혼을 메스껍게 한다.   기쁨과 슬픔 영혼에게 이 둘은 결코 상반된 감정이 아니다. 둘이 온전히 결합하는 일치의 순간에만 우리 곁에 머무른다.   우리가 그 무엇에도 확신을 느끼지 못할 때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순간에만 영혼의 현존을 기대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물 가운데 추가 달린 벽시계와 거울을 선호한다.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임무를 수행하므로.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갈 건지 아무 말도 않으면서 누군가가 물어봐주기를 학수고대한다.   보아하니 영혼이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우리 또한 영혼에게 꼭 필요한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이른 시간 / 쉼보르스카   나 아직 잠들어 있다. 그동안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창문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어둠은 회색빛으로 바랜다. 방이 흐릿한 공간 너머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창백하고 불안정한 광선들이 저편을 요청한다.   모든 일들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한다. 이것은 엄연한 의식이므로. 천장과 벽 사이의 평명에 빛이 스며들면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이, 오른 쪽으로부터 왼쪽으로, 형상의 선명한 분리가 시작된다.   사물과 사물 사이 비좁은 간격에서 먼동이 터오고, 유리컵과 문고리에서 첫번째 섬광이 반짝 빛난다. 모두가 단지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명확히 존재하는 것들이다. 어제 어디론가 밀려났던 그것,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그것이 지금은 확고한 틀 안에 담겨져 있다. 아직 세부적인 항목들만 시각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뿐.   그러나 주의, 또 주의! 여러 가지 징후에 따르면 색깔은 반드시 되돌아오는 법. 심지어 가장 사소한 존재들조차 자신의 고유한 빛깔과 그림자의 음영을 회복하는 법.   드물지만 이따금 날 놀라게 하는 그것은 꼭 필요한 일. 일상적으로 나는 '때늦은 증인'의 역할을 연기하며 늦은 잠에서 깨어난다. 이미 기적이 일어나고 난 뒤에. 이미 일과가 확정되고 난 뒤에. 새벽이 아침으로 멋지게 탈바꿈하고 난 뒤에.   통계에 관한 기고문 / 쉼보르스타   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모든 것을 아주 잘 하는 사람 -쉰둘   매 순간 확신이 없는 사람 -나머지 전부 다   비록 오래가진 못할지라도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 -최대한 많이 잡아 마흔아홉   달리 행동하는 법을 몰라 늘 착하기만 한 사람 -넷, 아니, 어쩌면 다섯   시기심 없이 순수하게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사람 -열여덟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일흔 일곱   진심으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사람 -최대한 스물 하고 몇 명   혼자 있을 땐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군중 속에서는 사나워지는 사람 -틀림없이 절반 이상   주변의 강압에 의해 잔인하게 돌변한 사람 -이 경우는 근사치조차 모르는 편이 나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치는 사람보다 단지 몇 명 더 많을 뿐   인생에서 몇 가지 물건들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사람 -마흔 (내가 틀렸길 간절히 바라지만)   불빛도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여든 셋 (지금이건, 나중이건)   연민을 느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흔아홉   죽게 마련인 사람 -백 명 중에 백 명 모두 이 수치는 지금껏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음.   9월 11일자 사진 / 쉼보르스카   그들은 불타는 계단에서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몇 명에서 조금 더 많거나 아니면 적거나.   사진은 그들을 어떤 생에서 멈춰 세웠다. 대지를 향하고 있는 미지의 상공에서 그들의 현재를 온전히 포착했다.   현재로선 모든 것이 무사하다. 각자의 얼굴도 그대로고, 몸속에서 빙글빙글 순환 중인 피도 그대로다.   머리카락이 엉클어지고, 주머니에서 열쇠와 동전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기까지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제 막 열린 어떤 공간의 가장자리. 공기가 유영하고 있는 한정된 구역 내에서.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두 가지뿐. 그들의 수직 비행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거나,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보태지 않고 과감히 끝을 맺는 것.   목록 / 쉼보르스카   질문 목록을 만들어보았다. 솔직히 답변을 기대하진 않았다. 대답을 듣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거나, 아니면 그 대답을 이해할 여력이 내게는 부족하므로.   질문 목록은 매우 길며, 중요한 사안과 덜 중요한 사안을 포함하고 있다. 당신들을 따분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에 몇 가지만 발표하겠다.   무엇이 진실이었는가. 행성, 혹은 행성의 대체 공간에 마련된 이 공연장에서, 입장권과 퇴장권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내 비록 생생하게 현존하는 다른 세상들과 비교할 수 있을 때를 놓쳐버렸지만 아무튼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 현실 속의 이세상은 어떠한가.   내일자 신문에는 무엇이 씌어 있을까.   전쟁은 언제 끝나며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까.   네게서 훔쳐간-내가 잃어버렸던 소중한 반지는 누구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을까.   존재하면서 동시에 동시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위한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이 열 명의 사람들은 또 어떤가- 우리는 정말로 아는 사이였을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M이 내게 애써 말하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옳은 것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옳지 않은 것을 선택했을까. 더 이상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내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잠들기 직전에 끼적였던 몇몇 질문들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때로 나는 의심을 품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타당한 기호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질문들 또한 언젠가는 나를 버리고 홀연히 사라지리라.   모든 것 / 쉼보르스카   "모든 것"- 이것은 뻔뻔스럽고 주제넘기 짝이 없는 낱말이다. 따옴표 안에 집어넣고,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마치 빼먹은 건 하나도 없다는 듯, 집중하고, 아우르고, 수용하고 포함하는 척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고 있다. 그저 순간적인 폭풍의 끝자락에 불과할 뿐이면서.   부재 / 쉼보르스카   내 어머니가 즈둔스카 볼라 출신의 B모 씨와 결혼할 가능성은 절대로 희박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면-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그 애는 사람 이름이나 얼굴, 혹은 처음 듣는 멜로디를 외우는데 나보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척 보기만 해도 새의 품종을 알아맞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어 점수는 형편없지만 물리나 화학에서 뛰어난 점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 작품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시를 남몰래 끼적거릴지도 모른다.   같은 시각, 내 아버지가 자코파네 출신의 R 모 씨와 결혼할 가능성은 절대로 희박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딸이 태어났다면-그건 내가 아닐 것이다. 그 애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일에 훨씬 고집스러울지도 모른다. 두려움 없이 깊은 물에 첨벙 뛰어들지도 모른다. 여론의 동요에 쉽게 흔들릴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적은 거의 없고, 주로 마당이나 운동장에서 사내아이들과 공을 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두 아이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짝 친구는 절대로 아닐 테고, 혈연관계도 아닐 테니, 단체 사진에서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리라.   "이봐요, 여학생들, 이쪽에 서보세요." -사진사가 외친다- "저기 작은 학생은 앞으로, 거기 키 큰 학생은 뒷줄로. 내가 신호를 하면 다들 예쁘게 웃으세요. 자, 마지막으로 인원수를 점검해보죠. 모두 다 있는 거죠?"   "네 아저씨, 모두 다 있어요."   ABC / 쉼보르스카   이제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 나에 대해서 A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B는 결국 나를 용서했는지. 어찌하여 C는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했는지. D의 침묵에 E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 F가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는지. (혹시라도 기대를 했었다면) 모든 걸 잘 알면서도 G는 왜 모른 척했는지. H는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I가 덧붙이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의미라도 남겼는지. J와 K, 그리고 나머지 알파벳에게.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쉼보르스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사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돌풍이 불어와 천둥 번개가 칠 수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노교수 / 쉼보르스카   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 대해서. 순진하고, 성급하고 어리석고,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우리들이 아직 젊은이었던 시절.   그 시절에서 남은 게 조금은 있죠, 젊음만 빼고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여전히 알고 있냐고. 인류에게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 그건 아마 착각중에서도 가장 큰 착각일걸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미래에 대해서, 여전히 앞날이 훤히 보이느냐고.   그러기엔 역사책을 너무 많이 읽었네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사진에 관해서. 액자 속에 있는, 책상 위에 있는.   예전엔 있었지만, 다들 떠나버렸어요. 남동생, 사촌, 제수씨, 아내, 아내의 무릎 위에 앉은 딸, 딸의 품에 안긴 고양이. 막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벚나무. 그 벚나무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때로는 행복하냐고.   아직도 일을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벗에 대해서. 아직 친구가 있느냐고.   자기들도 벌써 전(前) 조교를 갖게 된 과거에 내 전 조교였던 몇몇 친구들. 살림을 맡아주는 루드밀라 부인, 아주 가까운 친구 하나는 멀리 해외에 나가 있고, 도서관에 근무하는 두 명의 연인들, 미소가 아름답죠. 우리 집 맞은편에 사는 어린 그제쉬,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기분은 어떤지, 건강은 괜찮은지.   커피와 보드카 담배를 삼가고, 상념이든 물건이든, 무거운 건 절대 짊어지고 다니지 말라더군요. 그럴 때면 못 들은 척할 수밖에요. -그가 대답했다.   그에게 물었다. 정원에 대해서. 그 정원에 놓인 벤치에 대해서.   날씨가 화창한 저녁이면 하늘을 보곤 해요. 얼마나 볼거리가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니까요. -그가 대답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121~180):로마 제국의제 16대 황제. 로마의 5명의 현명한 황제 중 마지막 황제였으며, '철인황제(哲人皇帝)라고 불렸다. 후기 스토아파의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저서로는 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은 데다가 페스트까지 성행하는 바람에 쇠퇴하게 된다.   관망(觀望) / 쉼보르스카   타인처럼 스쳐갔다. 어떤 말도, 몸짓도 없이, 그녀는 가게로 향하고, 그는 자동차로 걸어갔다.   어쩌면 당황해서, 어쩌면 경황이 없어서, 아니면 짧은 시간, 서로를 영원토록 사랑했음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하긴 그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보장도 없다. 멀리서는 그랬지만, 가까이서는 전혀 아닐 수도.   나는 창가에서 그들을 봤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틀릴 확률은 매우 높다.   그녀는 유리문 안쪽으로 사라졌고, 그는 운전석에 올라 서둘러 출발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설사 일어났다 한들 또 어떠리.   내가 본 장면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단지 한순간뿐이었으니 지금 나는 덧없는 시구 속에서 독자 여러분을 설득하려 애쓰고 있는 중. 그것은 슬픈 일이었노라고.   사건에 휘말린 어느 개의 독백 / 쉼보르스카   개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선택된 개였다. 혈관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고, 그럴듯한 족보도 있었다. 자연의 향기를 듬뿍 마시며, 고산 지대에서 살았다. 햇빛이 쨍쨍할 땐 풀밭에서, 비가 오면 전나무 숲에서, 눈이 내릴 땐 동토(凍土)에서 지냈다.   번듯한 집도 있고, 시중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게 먹이를 공급하고. 씻기고. 빗질하고, 우아하게 산책을 시켜 주었다. 그것은 친밀감의 차원이 아닌 존경의 표시였다. 내가 누구의 개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몸에 이가 들끓는 하찮은 잡종들도 주인을 가질 순 있다. 하지만 주의하시라-함부로 비교해서는 안 되는 법. 내 주인은 정말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하려한 무리들이 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두려움과 찬탄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는 다들 질투 섞인 비웃음만 보냈다. 왜냐면 풀쩍 뛰어올라 주인을 맞이할 권리는 나한테만 주어졌기에. 바짓부리를 이빨로 잡아끌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그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는 것도 내게만 허락된 일이었기에. 그가 쓰다듬거나 귀를 잡아당기는 대상은 오직 나뿐이었기에. 단지 나만이 그의 곁에 앉아 자는 척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를 향해 몸을 숙인 채 뭔가를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 혼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므로.   주인은 다른 이들에게는 종종 화를 내고 사납게 굴었다. 그들과 다투고, 소리를 지르고, 초초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오직 나만 좋아한다고, 절대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내게 주어진 의무 조항도 있었다. 기다리기, 그리고 믿음을 가지기. 주인은 잠깐 나타났다가 오랫동안 사라지기 일쑤였으므로. 골짜기 너머에서 무엇이 그를 붙잡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일 때문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고양이나 기타 쓸데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과 티격태격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 내 것 또한 갑자기 변했다. 어느 날 봄이 찾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야단법석이 온 집안을 휩쓸었다. 상자와 트렁크, 궤짝이 자동차에 실렸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도 잠시. 모퉁이 저편에서 잠잠해졌다.   발코니에서 부서진 가구와 넝마 조각들이 불태워졌다. 노란 상의와 검은 마크가 내겨진 완장들. 무수히 많은 낡은 상자들과 그 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온 깃발들도 함께.   난장판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에 털끝이 쭈뼛 섰다. 마치 내가 주인 없는 개라도 되는 듯. 문간에서 당장 빗자루를 들고 쫓아버려야 할 귀찮은 떠돌이라도 되는 듯.   은도금을 한 내 목걸이를 누군가가 낚아채갔다. 며칠 전부터 텅 비어 있던 내 밥그릇을 누군가가 걷어찼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행 중 하나가 길 떠나기 직전 운전석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심지어 과녁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내가 꽤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간 걸 보면. 버릇없는 파리가 귓가에서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나, 내 주인의 충성스런 개는.   시인의 끔찍한 악몽 / 쉼보르스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겉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곳과 똑같아 보이네요. 발밑의 토양, 물과 불, 공기, 수평과 수직, 삼각형과 원, 왼쪽과 오른쪽, 견딜 만한 날씨, 그럴싸한 풍경 그리고 언어를 부여받은 몇몇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의 그것과는 다르네요.   문장을 지배하는 건 비조건문. 명칭들은 사물들과 매우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어 함부로 덧붙이거나, 생략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위치를 바꿀 순 없어요.   시간은 시계 속의 개념대로 기능하는 것. 과거형과 현재형은 모두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회상에는 지나버린 일 초가 할당되고, 예측에는 이제 막 시작될 이초가 배당됩니다.   단어는 꼭 필요한 만큼만, 한 마디도 넘치는 법이 없으니, 다시 말해 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없다는 뜻 이곳에는 그런 종류의 유희는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사색을 필요로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네요.   뭔가를 찾는다면, 그건 분명 옆에 있는 것. 뭔가를 묻는다면, 그건 분명 해답이 명확한 것.   놀라움의 근거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늘낄 줄만 안다면, 그들은 분명 매우 놀랄 텐데요.   '불안'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겐 사뭇 외설적으로 느껴지기에 사전을 뒤적일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군요.   아무리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도 세상은 밝게만 표현되는군요. 모든게 헐값에 나누어졌지만, 계산대 앞에서 거스름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감정 가운데 남은 건 오로지 만족감뿐. 괄호 속 부연 설명은 전혀 없네요. 마침표가 늘 따라붙는 인생. 그리고 은하수의 부르릉, 엔진 소리.   인정하세요, 시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서둘러 잠에서 깨어난다 해도 조금도 나아지는 건 없네요.   그리스 조각상 / 쉼보르스카   인간들과 다른 원소들의 도움으로 시간은 비교적 원활하게 조각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해나갔다. 먼저 코를 도려내고, 나중에는 은밀한 부위를, 계속해서 손가락과 발가락을 삭제해나갔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깨를 차례로 없애더니, 오른쪽 허벅지와 왼쪽 허벅지, 등과 허리, 머리와 엉덩이를 제거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은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돌멩이가 되고,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됐다.   만약 살아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죽어간다면 매번 일격을 가할 때마다 많은 피를 흘렸으리라.   하지만 대리석 조각상들은 하얗게 무너져 내린다. 게다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경우는 드물다.   앞서 언급한 그 조각상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건 토르소뿐이다. 몸뚱이는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애써 숨을 참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머지 부위들이 잃어버린 모든 매력과 권위를 자신에게로 되돌려놓아야 하기에.   토르소는 성공했다. 마침내 성공했다. 성공을 거두며, 황홀경에 빠진다. 황홀경에 빠지며, 존재를 지속한다-   이 시점에서 시간은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일찌감치 하던 일을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나중으로 미루었기에.   사실상 모든 시에는 / 쉼보르스카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1)   한 구절이면 충분하나니 그것이 현재형이든 과거형, 혹은 미래형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 마디면 충분하나니 누군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혹은 뭔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2)   고양이를 가진 알라에 관해서 혹은 고양이를 가지지 못한 알라에 관해서 3)   혹은 또 다른 알라들에 관해서 또 다른 고양이들과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해서 바람결에 책장이 넘겨진 또 다른 초등학교 교과서들에 관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작가에 의해 시선이 도달하는 반경 내에 일시적인 산과 가변적인 골짜기가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4)   마침 기회가 주어졌기에 겉으로만 영원하고 안정적인 하늘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 5)   한창 펜을 움직이고 있는 손끝에서 누군가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6)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추측이나 어림짐작으로 그랬건, 아님 중요한 이유든, 하찮은 이유든 간에, 흰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물음표가 적혀 있다면, 그리고 대답으로- 달랑 이렇게 적혀 있다면, 콜론 :     1) '순간'은 쉼보르스카가 2002년에 발표한 열번 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그동안 자신이 썼던 시의 여러 대목을 빌어다가 패러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2) 1872년에 발표한 시집 에는 "무(無)의 의미는"으로 시작하는 제목이 없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나는 지금 네 옆에 서 있게 되었다. / 이렇게 되기까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음을 / 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이 부분을 응용하여 재구성하였다. 3) 폴란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바로 "알라는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이다 즉 폴란드인이 국어 책에서 제일 먼저 배우고, 제일 먼저 기억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4)2002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표제작 '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의 순간" 이 구절을 응용하여 재구성한 대목이다. 5) 1993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하늘'이라는 시에서 쉼보르스카는 하늘이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 / 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응용하여 쓴 것이다. 6) 1967년에 발표한 에 수록된 "쓰는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쓴 구절이다. / 번역 최성은   쉼보르스카의 시편들 중 국내에 번역 출간된 시들은 거의 망라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구할 수 있는 번역 시선집은 과 두권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한 쉼보르스카 그녀의 흔적을 보기위해 폴란드의 유서 깊은 고도(古都)인 '크라쿠프'와 그녀가 자주 은거했던 휴양지 '자고파네'를 여행했으나 일정도 빡빡했고 폴란드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필자로서는 잘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혹시 내 생에 또 한번의 기회가 오길 기대한다,  끝.  / 김민홍
237    심보르스카 시모음 (1) 댓글:  조회:4497  추천:0  2017-09-15
감사 / 쉼보르스카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 선한 양의 무리 속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면 평화롭고, 그들과 함께하면 자유롭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첫 만남부터 편지를 주고받을 때까지 영원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단지 며칠이나 몇 주일만 기다리면 된다.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음악회에 가도 끝까지 집중할 수 있고, 대성당을 구경할 때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다. 주위의 모든 풍경도 또렷하게 잘 보인다.   일곱 개의 산과 일곱 개의 강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지도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산과 강일 뿐,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만일 내가 삼차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서정적이지도 수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지평선, 실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그들의 덕택이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맨주먹 안에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지.   "난 그들에게 아무런 빚도 없어." 아마도 사랑은 이렇게 말할 게다, 이 공개된 질문에 대해서.   시집 『끝과 시작』 문학과 지성사.   나에게 던진 질문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을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 시집『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2007)   단어를 찾아서 / 쉼보르스카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의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네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문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대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 없다.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히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아주 기쁘다고 말한다.   우리의 호랑이들은 우유를 마신다. 우리의 매들은 걸어다닌다. 우리의 상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우리의 늑대들은 훤히 열려진 철책 앞에서 하품을 한다.   우리의 독뱀들은 번개를 맞아도 전율하고, 원숭이는 영감(靈感)때문에, 공작새는 깃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떤다. 박쥐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버린 건 또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던가.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밤 / 쉼보르스카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거기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도대체 이사악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신부님께 교리 문답이라도 청해야겠다. 공을 차서 이웃집 유리창이라도 깨뜨렸나? 울타리를 넘다가 새 바지에 구멍이라도 냈나? 연필을 훔쳤나? 암탉을 놀라게 했나? 시험칠 때 친구에게 답을 슬쩍 가르쳐주었나?     어른들이여, 바보 같은 꿈이나 꾸며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들어라. 나 아침까지 뜬눈으로 이 밤을 지새우리니, 고요한 암흑이 내게 맞서 팽팽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브라함의 고뇌처럼 어두운 이 밤.   성서에 나오는 신의 눈동자가 먼 옛날 이사악을 주목했듯이 지금 이 순간 뜷어져라 나를 응시하고 있다. 과연 어디에 이 몸을 숨길 수 있을까? 신이 마음만 먹으면 죽은 사람도 소생시킨다는 건 이미 해묵은 옛날이야기 이 공포의 극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는 것뿐.   머지않아 창가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방 안 곳곳에서 새처럼, 바람처럼 퍼드덕대리라. 하지만 현실 속에는 그처럼 커다란 날개짓을 하는 새도, 그처럼 기나긴 여운을 남기는 바람도, 존재하지 않는 법.   신은 정말 우연히 나를 선택한 것인 양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결국엔 비밀스러운 작당을 위해 아버지를 부엌으로 슬그머니 데려가 귓가에 대고 거대한 뿔 나팔을 불어대겠지.   내일 먼동이 틀 무렵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 나는 떠나리라. 나는 떠나리라. 내 증오는 더욱더 깊어만 가리니 이제 나는 인간의 선함도, 그들의 사랑도 믿지 않으리라. 나는 11월의 낙엽보다 더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 결코 믿음을 주지 말 것. 믿음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니. 함부로 사랑하지 말 것. 기계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그저 가슴속에 품고 다닐 것.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오래전에 이미 그리되기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니. 무슨 일이 일어난대도 나를 뒤흔드는 건 심장이 아니라 말라틀어진 화석에 불과할 테니.   구름 위 발코니에서 신은 유유히 기다리고 있다. 가련한 번제물을 태우게 될 장작이 보기 좋게 골고루 잘 타고 있는지 편안하게 지켜보면서 나는 반드시 죽으리라. 나를 구원하도록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견디기 힘든 악몽이 나를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견디기 힘든 고독이 날 괴롭히던 그날 밤부터 신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의 확실한 의미'에서  '애매모호한 비유'를 향해.   가장 이상한 세 단어 / 쉼보르스카   내가 "미래"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의 첫째 음절은 이미 과거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고요"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나는 이미 정적을 깨고 있다.   내가 "아무것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무언가를 창조하게 된다. 결코 무(無)에 귀속될 수 없는 실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박물관 /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빰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 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 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연극에서 받은 감상 / 쉼보르스카         내게 있어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6막,       연극의 제일 마지막 장면,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대목.       그들은 구겨진 가발과 의상을 다시 펴서 매무새를 고치고,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아내고,       목을 졸라맨 올가미를 벗어던지고,       살아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가지런히 정렬한 뒤,       청중을 향해 미소 띤 얼굴을 돌린다.         혼자, 혹은 무리를 이뤄 절을 한다.       창백한 손을 상처 입은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무릎을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는 자살한 여인들.       정중하게 절을 하는 잘려나간 머리들.         둘이 함께 절을 한다:       분노는 화해를 향해 부드럽게 손 내밀고,       희생자는 고문관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모반을 꿈꾸는 반역자는 폭군의 곁을 너그럽게 지나친다.         영원은 황금빛 구두 굽 아래서 무참히 짓밟히고,       교훈은 차양 넓은 모자를 휘두르는 바람에 여기저기 흩어져버리고 만다.       시간 관계상 미처 복구하지 못한 다른 사항들은 어느 틈에 내일 새롭게 시작할 채비를 한다.         자, 이제는 초반에 일찌감치 죽은 자들이 일렬종대로 입장할 차례.       그들은 3막과4막, 그리고 장면의 중간 중간에 이미 숨을 거두었다.       흔적도 없이 죽음을 당했던 이들의 기적적인 생환,         의상도 벗지 않고,       립스틱도 지우지 않은 채.       무대 뒤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을 그들을 생각하니       비극의 기나긴 사설(辭說)보다 저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내려왔던 막이 다시 올라가기 직전,       바닥과 막 사이의 좁은 틈 사이로 보이는 기묘한 광경:       여기 서둘러 꽃다발을 집어 올리는 손과       떨어진 칼을 부지런히 줍는 나머지 다른 손이 있다.       이제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눈에 띄지 않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       진정 내 목을 메게 하는 건 바로 그 사람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 쉽보르스카       시골 길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     세 쌍의 다리를 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은 채,     죽음의 혼란 대신 청결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이 광경이 내포하는 위험도는 지극히 적당한 수준,     갯보리와 박하 사이의 지정된 구역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다.     슬픔이 끼어들 여지는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다.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       우리의 평화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동물들은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만 숨을 거둔다.     우리들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감각이나 이승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버린 채,     우리들이 짐작한 대로, 저승보다는 덜 비극적인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그들의 온순한 영혼은 절대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겁주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를 유지할 줄 안다.     그들은 배려가 뭔지를 안다.       여기 길 위에 죽은 딱정벌레 한 마리가 있다.     그저 한 번 쳐다봐주는 것도 딱정벌레에겐 커다란 추모일 수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지극히 태평스러워 보인다.     중요하고 심각한 일은 모조리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삶은 오로지 우리들의 것이며,     언제나 당연한 듯 선행권(先行權)을 요구하는 죽음 또한 오로지 우리들만의 전유물이다.        히틀러의 첫번째 사진 / 쉼보르스카         앙증맞은 유아복을 입은 요 갓난아이는 과연 누구?       히틀러 부부의 아들, 꼬맹이 아돌프.       법학 박사가 될까나, 아니면 비엔나 오페라의 테너 가수가 될까나?       요건 누구의 고사리 손? 요 귀와 눈, 코의 임자는 누구?       우유를 먹여 빵빵해진 이 조그만 배는 또 누구 거지? 아직은 알 수 없네.       인쇄공인지, 의사인지, 점원인지, 신부님인지.       요 우스꽝스러운 조그만 발이 결국엔 어디로 향할까나, 과연 어느 곳으로?       정원으로, 학교로, 사무실로.       아니면 시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가려나?       아기 천사, 금지옥엽, 재롱둥이, 애물단지,       일 년 전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하늘과 땅에는 온갖 징조 가득했지.       봄의 햇살, 창틀에 핀 제라늄.       뜰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소리,       분홍빛 종이로 포장된 행운의 점괘,       태어나기 직전 어머니가 꾸었던 운명적인 태몽까지,       꿈속에서 비둘기를 보는 건 즐거운 소식,       그 비둘기를 잡는 건 오랫동안 기다리던 손님이 온다는 반가운 기별,       똑똑---- 누구세요? 아돌프의 조그만 심장이 우리들의 귓가를 두드리는군요.         장난감 젖꼭지, 기저귀, 턱받이, 딸랑이,       건장한 사내아이, 신에게 기도하자, 부정 타지 말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부모를 닮았고, 바구니 속 졸린 눈을 가진 새끼 고양이를 닮았고,       가족 앨범 속의 모든 다른 애들과 꼭 닮은 귀여운 아가,       쉿 아가야, 지금은 울면 안 돼,       사진사 아저씨가 검은 천 아래서 찰칵 하고 사진을 찍을 거야.         클리게르 사진관, 그라벤 거리, 브라우나우.       부라우나우는 작지만 멋진 도시.       건실한 회사들과 선량한 이웃들이 있고,       효모로 반죽한 맛있는 케이크와 회색빛 빨래 비누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         개의 불길한 울음소리도, 운명의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이곳에서 역사 선생님은 옷깃을 느슨히 풀고       공책을 쌓아놓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번역; 최성은                                          한국 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및 같은 대학원 동유럽어문학과 졸업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 폴란드 문학박사 학위 받음                                        바르샤바 대학교 한국문학과 교수 역임. 현재 한국외국어대 폴란드어과 교수.                                        2012년 폴란드 정부가 수여하는 십자 기사 훈장 받음                                        저서; 외 다수.                                        번역; , 등 다수                                               황선미의 김영하의 를 비롯,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 3인 시선집을 폴란드어로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했다.   참수(斬首) / 쉼보르스카       '데콜타쥬 decolletage'의 어원은  '데콜로 decollo'.     라틴어로 '데콜로'는 '목을 자른다'는 뜻     스크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사형 집행에 딱 맞는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단두대에 올랐다.     목 부분이 길게 파인 그 슈미즈는     목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선명한 붉은 색.       바로 그 순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튜더는     자신의 한적하고 호화로운 방에서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창가에 서 있었다.     턱 바로 아래까지 의기양양하게 단추를 채우고서.     빳빳하게 풀을 먹은 깃 가장자리엔 화려한 주름 장식.       두 여자는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신이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정의가 언제나 내 편에 머물기를----"     "산다는 것은 결국 난관에 부딪히는 것."     "어떤 곳에서는 제빵사의 딸을 '부엉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이것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벌써 다 끝났다."     "아무 것도 없는 이곳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드레스의 차이점-그렇다, 그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자.     나머지 세부적인 항목들은     절대로 동요되지 않는 법이니.   바벨탑에서 / 쉼보르스카   "지금 몇 시야?" "그래요, 난 행복해요. 단지 목에 걸 수 있는 조그만 종이 필요할 뿐예요. 당신이 곤히 잠든 사이 당신의 머리 위에서 딸랑딸랑 울릴 수 있게." "그러니까 천둥소리를 못 들었단 말이지? 바람이 온통 벽을 뒤흔들고, 탑은 대문의 경첩을 삐걱대면서 커다란 사자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구."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그때 나는 어깨에 단추가 달린 평범한 회색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걸요." "그 순간 수많은 폭발과 함께 하늘이 갈라져버렸어." "나는 분명 그곳에 들어갔었다구요. 기억 안 나요? 당신은 분명 혼자가 아니었잖아요." "그때 난 갑자기 내 시력보다도 더 오래된 듯한 색깔들을 봤어." "당신이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다니 정말 유감이네요."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건 아마 꿈이었을 거야." "당신 왜 자구 거짓말하는 거예요? 왜 날 보면서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아직도 그 여자를 사랑하나요?" "오, 그래. 난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후회는 없어요. 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직도 그 남자를 생각하나?" "그렇지만 난 울고 있지 않다구요." "하고 싶은 말 . 이게 다야?"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야." "적어도 당신은 솔직하군." "걱정하지 말아요. 이 도시를 곧 떠날 테니까." "염려 마, 내가 여기서 떠날게."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손을 가졌군요." "그건 이미 아주 오래된 옛일이야." "걱정 말아요, 달링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세요." "지금이 몇 신지 모르겠군. 하긴 시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사실상 모든 시에는 / 쉼보르스카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1)   한 구절이면 충분하나니 그것이 현재형이든. 과거형, 혹은 미래형이든.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한 마디면 충분하나니 누군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 혹은 뭔가의 옆에 있는 누군가에 관해서.2)   고양이를 가진 알라에 관해서. 혹은 고양이를 가지지 못한 알라에 관해서.3) 혹은 또 다른 알라들에 관해서 또 다른 고양이들과 고양이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해서 바람결에 책장이 넘겨진 또 다른 초등학교 교과서들에 관해서;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작가에 의해 시선이 도달하는 반경 내에 일시적인 산과 가변적인 골짜기가 거리매김할 수 있다면.4)   마침 기회가 주어졌기에 겉으로만 영원하고 안정적인 하늘에 대해서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다면:5)   한창 펜을 움직이고 있는 손끝에서 누군가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면:6)   그것으로 충분하나니 추측이나 어림짐작으로 그랬건. 아님 중요한 이유든. 하찮은 이유든 간에. 흰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물음표가 적혀 있다면. 그리고 대답으로- 달랑 이렇게 적혀 있다면 콜론:   1) '순간'은 쉼보르스카가 2002년에 발표한 열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그동안  자신이 썼던 시의 여러 대목을 빌어다가 패러디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2) 1972년 발표한 시집 에는 "무(無)의 의미는"으로 시작되는 제목이 없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는 지금 네 옆에 서 있게 되었다./이렇게 되기까지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었음을/뼈저리게 느끼는 바이다." 이부분을 재구성하였다. 3)폴란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바로 "알라는 고양이를 가지고 있다."이다. 즉, 폴란드인이 제일 먼저 배우고, 제일 먼저 기억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4)2002년에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표제작 '순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 이 구절을 응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5)1993년 발표한 시집 에 수록된 '하늘'이라는 시에서 쉼보르스카는 하늘이 "부서지기 쉽고, 유동적이며, 바위처럼 단단한,/휘발성으로 변했다가, 또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는"것이라고 썼다. 이 구절을 응용하여 쓴 것이다. 6)1967 년에 발표한 에 수록된 '쓰는 즐거움'이라는 시에서 모디프를 가져와 쓴 구절이다   이력서 쓰기 / 쉼보르스카   무엇이 필요한가? 신청서를 쓰고, 이력서를 첨부해야지.   살아온 세월에 상관없이 이력서는 짧아야 하는 법.   간결함과 적절한 경력 발췌는 이력서의 의무 조항, 풍경은 주소로 대체하고, 불완전한 기억은 확고한 날짜로 탈바꿈시킬 것.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만 사랑으로 취급하고 그 안에서 태어난 아이만 자식으로 인정할 것.   네가 누구를 아느냐보다, 누가 널 아느냐가 더 중요한 법. 여행은 오직 해외여행만 기입할 것. 가입 동기는 생략하고, 무슨 협회 소속인지만 적을 것. 업적은 제외하고, 표창 받은 사실만 기록할 것.   이렇게 쓰는 거야. 마치 자기 자신과 단 한번도 대화한 적 없고, 언제나 한 발자국 떨여져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해왔던 것처럼.   개와 고양이, 새, 추억의 기념품들, 친구. 그리고 꿈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가치보다는 가격이, 내용보다는 제목이 더 중요하고, 내가 행세한 '너'라는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네 신발의 치수가 더 중요한 법이야. 게다가 한쪽 귀가 잘 보이도록 찍은 선명한 증명사진은 필수. 그 귀에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보다는 귀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더 중요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 이런, 서류 분쇄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잖아.   죽은 자들과의 모의 / 쉼보르스카   당신이 어떤 환경에 처했을 때 주로 죽은 사람들이 꿈에 나타납니까? 잠들기전에 종종 그들을 생각하나요? 누구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르죠? 매번 같은 사람인가요? 이름은? 성은? 묘지명은? 사망 날짜는?   그들은 주로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까? 오래된 우정? 혈연관계? 아니면 조국에 대해서? 그들이 어디서 왔다고 밝히던가요? 그들 배후에 누가 있는지. 당신 말고 또 누구의 꿈에 모습을 드러내는지 말하던가요?   그들의 얼굴은 사진과 똑같았습니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들도 늙었습니까? 그들은 건강해 보였나요, 아니면 안색이 창백했나요? 살해당한 자들은 예전의 치명적인 상처를 깨끗이 회복했나요? 누가 자기들을 죽였는지 여전히 기억하던가요?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었습니까? 그 물건들을 쭉 적어보세요. 그것들은 썩었나요? 녹슬었나요? 불에 탔나요? 부서졌나요? 어떤 기색이 눈빛에 담겨 있었나요? 애원, 아니면 위협? 구체적으로 적어보세요. 당신은 그들과 단지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 했습니까? 그들이 난처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신중하게 입을 다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은근슬쩍 꿈의 주제를 바꾼다든지 때맞춰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건 어떤가요?   고문 / 쉼보르스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육신은 고통을 느낀다. 먹고, 숨쉬고, 잠을 자야 한다. 육신은 얇은 살가죽을 가졌고, 바로 그 아래로 찰랑찰랑 피가 흐른다. 꽤 많은 이빨과 손톱. 뼈는 부서지기 쉽고, 관절은 잘 늘어난다. 고문을 하려면 이 모든 것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로마 건국 이전이나 이후, 예수 탄생 이전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또한 마찬가지. 고문은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땅덩이만 줄었을 뿐,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마치 벽 하나 사이에 둔 듯 가까이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인구만 증가했을 뿐 해묵은 규칙 위반이 발생하면, 현실적이면서 타성에 젖은, 일시적이며서 대수롭지 않은, 새로운 과오가 다시금 되풀이된다. 그에 대한 책임으로 육신은 비명을 지른다. 이 무고한 비명 소리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음역과 음계를 준수하며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재하리라.   예식과 절차, 춤의 포즈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머리를 감싸 쥐는 손동작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육신은 몸부림치고, 뒤틀리고, 찢겨져 나간다. 기진맥진 쓰러져, 무릎을 웅크리고, 멍들고, 붓고, 침 흘리고, 피를 쏟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강물의 흐름과 숲의 형태, 해변, 사막과 빙하를 제외하고는. 낯익은 풍경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작은 영혼이 배회한다. 사라졌다 되돌아오고, 다가왔다 멀어진다. 스스로에게 낯설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존재. 스스로 알다가도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 육신이 존재하는 한, 존재하고 또 존재하는 한, 영혼이 머무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시인의 끔찍한 악몽 / 쉼보르스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겉으로는 우리가 사는 이곳과 똑같아 보이네요. 발밑의 토양, 물과 불, 공기, 수평과 수직, 삼각형과 원, 왼쪽과 오른쪽. 견딜 만한 날씨, 그러싸한 풍경 그리고 언어를 부여받은 몇몇의 존재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지구상의 그것과 다르네요.   문장을 지배하는 건 비조건문. 명칭들은 사물들과 매우 정교하게 밀착되어 있어 함부로 덧붙이거나, 생략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위치를 바꿀 순 없어요.   시간은 시계 속의 개념대로 기능하는 것. 과거형과 현재형은 모두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죠. 회상에는 지나버린 일 초가 할당되고, 예측에는 이제 막 시작될 이 초가 배당됩니다.   단어는 꼭 필요한 만큼만, 한 마디도 넘치는 법이 없으니, 다시 말해 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없다는 뜻. 이곳에선 그런 종류의 유희는 허용되지 않으니까요.   사색을 필요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네요.   뭔가를 찾는다면, 그건 분명 옆에 있는 것. 뭔가를 묻는다면, 그건 분명 대답이 명확한 것.   놀라움의 근거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줄만 안다면, 그들은 분명 매우 놀랄 텐데요.   '불안'이란 단어가 그들에겐 사뭇 외설적으로 느껴지기에 사전을 뒤적일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군요.   아무리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도 세상은 밝게만 표현되는군요. 모두에게 헐값에 나누어졌지만, 계산대 앞에서 거스름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감정 가운데 남은 건 오로지 만족감뿐, 괄호 속 부연 설명은 전혀 없네요. 마침표가 늘 따라붙는 인생, 그리고 은하수의 부르릉, 엔진 소리.   인정하세요, 시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서둘러 잠에서 깨어난다 해도 조금도 나아지는 건 없네요.   맹인들의 호의 / 쉼보르스카   시인이 맹인들 앞에서 시를 낭독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목소리가 떨린다. 손도 떨린다.   여기서는 문장 하나하나가 어둠 속의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처럼 느껴진다. 빛이나 색조의 도움 없이 홀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의 시에서 별빛은 위험한 모험이다. 먼동, 무지개, 구름, 네온사인, 달빛. 여태껏 수면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던 물고기와 높은 창공을 소리 없이 날던 매도 마찬가지.   계속해서 읽는다-그만 두기엔 너무 늦었기에- 초록빛 풀밭 위를 달려가는 노란 점퍼의 사내아이. 눈으로 개수를 헤아릴 수 있는 골짜기의 붉은 지붕들. 운동선수의 유니폼에서 꿈틀거리는 등번호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벌거벗은 낯선 여인에 대해서.   침묵하고 싶다-이미 불가능한 일이지만- 교회 지붕 꼭대기에 올라앉은 모든 성인(聖人)들, 열차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작별의 몸짓, 현미경의 렌즈와 반지의 광채, 화면과 거울, 그리고 여러 얼굴들이 담겨진 사진첩에 대해서. 하지만 맹인들의 호의는 정말로 대단하다. 그들은 한없는 이해심과 포옹력을 가졌다. 귀 기울이고, 미소 짓고, 박수를 보낸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군가가 다가와서는 거꾸로 든 책을 불쑥 내밀며 자신에겐 보이지도 않는 저자의 서명을 요청한다.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쉼보르스카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한 돌풍이 불어와 천둥 번개가 칠 수도 있겠습니다.   한밤중에는 전국에 걸쳐 화창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만, 남동부 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 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어릿광대 / 쉼보르스카   먼저 우리의 사랑이 저물고 나면 백 년, 이백 년, 세월이 흐르고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함께하리라.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한 몸에 받는 남녀 희극 배우가 극장에서 너와 나의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중간 중간 간주를 곁들인 소규모 광대극, 가벼운 춤과 폭소가 어우러진 적당히 드라마틱한 내용, 이어지는 박수갈채.   이 장면에서 너는 어쩔 수 없이 조롱거리가 되리라. 우스꽝스러운 넥타이를 매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쩔쩔매는 네꼴을 보면서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겠지.   웃음거리가 된, 내 머리통, 그리고 내 심장과 왕관, 터져버린 어리석은 심장과 바닥에 떨어진 왕관.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리라. 공연장엔 환호성과 웃음이 가득, 일곱 개의 강과 일곱 개의 산을 사이에 둔 채 끊임없이 서로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리니.   마치 현실의 고통이나 불행 따윈 우리에게 거의 없었다는 듯 말로써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안기리니.   마침내 둘이 정중하게 머리 숙여 절하고 나면 광대극은 막을 내리리라. 눈물이 맺히도록, 배꼽이 빠지도록 웃던 관객들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은 또다시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리라.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에 길들여가면서. 사나운 호랑이조차 고분고분 꼬리를 내리고, 그들의 손 위에 놓인 음식을 얌전히 핥아먹으리니.   우리는 영원히 이러이러한 존재. 작은 종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대 모자를 쓰고, 그 종소리의 원초적인 울림에 열심히 귀를 기울리는.   사소한 공지 사항 / 쉼보르스카   어디에 가면 연민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 비록 그것이 심장의 헛된 상상이 빚어낸 인공적인 감상에 불과할지라도 일단 출처를 알고 계신 분은 누구든지 알려주세요! 제발 좀 알려주세요! 온 힘을 다해 노래 부르며 이성을 잃은 듯 덩실덩실 춤을 추십시오,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여윈 자작나무 아래서 왁자지껄, 힘겨게 놀아보는 거예요.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드립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다 가능합니다. 별이 총총 수놓인 하늘과 북경 사람의 각진 아래턱과 메꾸기의 뜀박질과 갓난아이의 손톱과 플랑크톤과 눈송이를 골똘히 응시할 수 있는 비법을 특별한 훈련을 통해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되돌려드립니다. 자, 조심조심! 기회가 왔어요! 풀잎이 목덜미를 간지럼 태우던 일 년 전의 바로 그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어 가만히 기다리세요. 바람이 춤을 춥니다. (작년 이맘때 그대들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던 바로 그 장본인이죠) 자, 아직도 꿈에 흠뻑 도취된 다양한 매물들이 여기 있습니다.   양로원애서 숨진 노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애도해줄 사람을 구합니다 신청서를 작석하거나 증명서을 제출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 제출된 서류는 전부 파기될 예정이고, 수령 확인증은 발급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남편이 남발한 헛된 약속에 나는 아무런 책임도 없음을 밝힙니다. 내 남편은 사기꾼, 사람들이 득실대는 이 세상의 온갖 빛깔과 떠들썩한 소음. 창가의 노래 한 곡조, 벽 너머 짖어대는 강아지 한 마리로 당신들을 참 잘도 속여 넘겼죠, "어둠 속에서도, 적막 가운데서도 결코 당신들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게는 그 서약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낮'의 미망인인 '밤'으로부터.   루드비카 바드쥔스카* 부인을 애도하는 일 분간의 묵념 / 쉼보르스카   당신은 떠났습니다.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가 자욱한 그곳으로! "그곳에 네 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가서 그 애들을 데려올께요!"   어떻게 그처럼 과감하게 모든 걸 떨쳐낼 수 있었을까요? 스스로에 대한 집착과 낮과 밤의 질서와 내년에 내릴 눈과 사과의 붉은 빛깔과 아무리 곱씹어도 늘 부족하기만 한 사랑에 대한 끈끈한 미련을.   작별 인사 따위는 하지도, 받지도 않고 모르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달려갔으니, 다들 보세요, 무릎까지 넘실대는 불꽃, 미친 듯이 이글거리는 붉은 기운을 헤치고서 아이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답니다.   그녀는 차표를 끊고, 잠시 여행을 다녀오려 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도 쓰려 했고,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 창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시거나, 숲 속의 오솔길도 타박타박 걸어보려 했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호수의 물결이 넘실대는 광경도 바라보고 싶어했습니다.   때로는 죽은 이를 위한 일 분간의 묵념이 늦은 밤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구름과 새들의 비상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산 증인입니다. 귓가에는 잔디가 무럭무럭 자라는 소리가 생생히 들립니다. 종이에 인쇄된 수백만 개의 글자들을 열심히 읽었고, 망원경으로 저 신비로운 별들을 관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누군가가 그렇게 간절히 구조를 요청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진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나뭇잎과 드레스와 시에 대한 구구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타인들에 의해 평가되고 검증된, 꼭 그만큼뿐. 스스로도 사뭇 낯설기만 한 심장이 명하는 대로 나는 이 사실을 당신들에게 꼭 말하고 싶습니다.   *루드비카 바브쥔스카(Ludwika Wawrzynska. 1908~1955) 폴란드의 초등학교 교사. 1955년 2월 8일 바르샤바의 한 초등학교 목조 건물에서 불이 났는데, 어린이들이 그 안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 네 명의 어린이들을 구해냈다. 심한 화상을 입은 바브쥔스카는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며칠 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명예 회복 / 쉽보르스카   상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인간의 가장 오랜 권리에 의거, 내 생애 처음으로 죽은자들을 불러본다. 그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들의 발걸음에 열심히 귀 기울인다. 누가 죽었는지, 죽은 게 확실한지,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지금은 두 손에 자신의 두개골을 들고, 이렇게 말해야 할 시간. "가여운 요릭* 네 천진함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네 맹목적인 믿음과 순진무구함, 어떻게든 되리라는 낙천적인 기대감, 검증된 사실과 그렇지 못한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던 평정심은 어디에?"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이름 따윈 아무런 값어치도 없음을. 무성한 잡풀과 목메어 울어대는 까마귀, 휘날리는 눈보라만이 익명의 무덤에서 떠나간 이들을 비웃고 조롱하게 되리라는 걸. "요릭이여, 그들은 위선적인 증인에 불과했다."   죽은 자의 불멸은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유효한 법. 결국엔 순간적이고, 유한한 가치일 뿐이다. 누군가가 스스로의 불멸을 상실하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오늘 나는 불멸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은 내어줄 수도 빼앗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름과 함께 스러져갈 운명이라면 감히 '배신자'란 호칭을 누구에게 붙일 수 있겠는가.   죽은 자 위에 군림하는 우리의 권리는 흔들리지 않는 엄정한 중립을 요구한다. 캄캄한 밤에 판결이 이루어지는 일이 없도록. 판사가 제복을 벗어던진 채 알몸이 되지 않도록.   대지가 꿈틀댄다-이제 그들은 대지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한 줌의 흙이 되어, 한 웅큼의 흙더미가 되어 조용히 무덤에서 일어선다. 은폐한 암흑을 헤집고 나와 옛 이름을 되찾고, 민족의 기억 속으로, 그 옛날 영광의 월계관과 환호 속으로 당당히 복귀한다.   단어를 마음껏 호령하던 내 절대 권력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눈물의 골짜기로 추락해버린 낱말들 따위는 죽은 자의 부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산화된 마그네슘만이 광채 되어 번득이는 빛바랜 사진처럼 공허하고 부질없는 묘사만 남았을 뿐. 나, 시시포스는 일찌감치 '시(詩)의 지옥'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날카롭게 날이 선 채로, 전리품을 늘어놓은 유리 진열장과 아늑한 보금자리에 난 창문들과 분홍빛 색안경과 유리로 만든 뇌와 심장에 무참하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서.   *요릭 ; 섹스피어의 희곡 5막 1장에서 햄릿이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파고 있는 두 명의 어릿광대와 대화를 나누다가, 임금의 어릿광대였던 재담꾼 요릭의 두개골을 보고 비탄에 잠겨 심복인 호레이쇼에게 말하는 대목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아틀란티스* / 쉼보르스카   그들은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섬에서 혹은 섬이 아닌 곳에서. 대양 혹은 대양이 아닌 것이 그들을 집어삼켰거나 혹은 집어삼키지 않았거나.   누군가를 사랑한 누군가가 있었던가? 누군가와 싸우던 누군가가 있었던가? 모든 일이 일어났거나 혹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났거나. 거기에서 혹은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곱 개의 도시가 있었다는데 정말로 확실한가? 영원히 존재하길 바랐다는데 증거는 어디 있는가?   그들은 화약을 발명하지 않았다. 그래, 아니다. 그들은 화약을 발명했었다. 그래, 그렇다.   있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 불확실한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공기나 불이나 물이나 흙에서는 전혀 추출되지 않은 사람들.   물속에서도 빗방울 속에서도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   사뭇 심각한 척 훈계나 늘어놓는 가식적인 포즈 따윈 취할 수 없었던 사람들.   유성이 떨어졌다. 아니, 유성이 아니었다. 화산이 폭팔했다. 아니, 화산이 아니었다. 누군가 뭔가를 애타게 불렀다. 아니, 누구도 그 무엇도 부르지 않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틀란티스에서.   원숭이 / 쉼보르스카   인류가 아직 천국에서 추방되기 전 마지막으로 에덴동산 구석구석을 훑어보던 원숭이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천사들조차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예기치 못한 슬픔에 허덕였다네. 결국 원숭이는 다소곳이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이 지구상에 자신의 위대한 종족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네. 때론 생기발랄, 때론 진지하며, 동그랗게 말린 꼬리를 뽐내는 우리의 원숭이. 원숭이는 신생대 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라치아Gracya'*를 쓸 때, 꼭 'y'자를 고집한다네. 오래전, 존엄한 은빛 광채를 지닌 풍성한 갈기로 인해 이집트에서 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숭배를 받을 때 원숭이는 슬픔에 잠겨 근엄하게 침묵을 지키며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열심히 귀 기울렸다네: 흠, 영생을 원하는군--- 원숭이는 붉으스름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멀리멀리 떠나갔다네. 권고도 금지도 아니라는 그런 의미로.   유럽에서 그들의 영혼은 거세되었네. 하지만 두 팔은 무심결에 남겨두었지. 어느 수도사가 거룩한 성인(聖人)의 팔에다 홀쭉하고 가느다란 원숭이의 손을 그려넣었네. 거룩한 성인은 마치 도토리를 움켜쥐려는 듯 양손을 내밀어 자비를 구걸하고 있네.   전함은 왕궁으로 원숭이를 데려왔다네. 잣난아기처럼 따뜻한 체온을 지닌 채, 늙은이처럼 온몸을 벌벌 떠는 원숭이는 황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네. 고관대작들이 입는 앵무새처럼 알록달록 맵시 좋은 연미복을 입고서, 카산드라*, 대체 무엇이 우습단 말이지? 중국에서 원숭이는 식용으로 사용된다네. 접시에 담겨진 원숭이는 구워진 표정 또는 삶겨진 표정을 짓고 있다네. 모조품 장신구에다 억지로 끼워 맞춘 진짜 다이아몬드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원숭이의 뇌는 미묘한 맛을 내겠지. 비록 그들의 뇌가 화약을 발명하지 못했기에 뭔가 부족한 듯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동화 속에서는 늘 외롭고 우유부단한 원숭이. 거울의 내부를 찡그린 얼굴로 채웠던 원숭이가 스스로를 조롱하며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네. 비록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에 관해서라면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난한 친척 여동생처럼.   *폴란드어로 '그라치아Gracja'는 '우아함, 고상함, 매력'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 영어로는 'grace'이다. 중세 폴란드어에서는 이 단어를 쓸 때 'j' 대신 'y'를 썼다.   *카산드라Kassandr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라이모스와 헤카베의 딸이다. 트로이 전쟁을 미리 예견하였으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트로이에서의 한순간 / 쉼보르스카   어린 계집애들, 비쩍 마른 데다가 언젠가는 두 뺨의 주근깨가 말끔히 사라진다는 걸 도무지 믿지 못하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의 눈꺼풀 위를 사뿐사뿐 돌아다니는.   깜짝 놀랄 만큼 엄마 혹은 아빠를 쏙 빼닮은 그 아이들이   식사를 하다가 책을 읽다가 혹은 거울 앞에서 트로이로 납치되어 간다.   어린 계집애들은 커다란 탈의실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아름다운 헬레나로 탈바꿈한다.   드레스 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온갖 탄성을 뒤로 한 채 왕실의 계단을 사뿐사뿐 오른다.   스스로가 공기처럼 가볍다고 느낀다. 안다, 아름다움이 곧 안식이며, 말투가 입술의 효용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영감을 받은 무심함 속에서 몸짓들은 스스로의 외양을 조각한다는 것을.   사절단을 거부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그들의 아리따운 얼굴이 포위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새하얀 목덜미 위로 자랑스레 우뚝 솟아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은 머리의 남자들, 친구의 오빠들, 미술 선생님, 모두가 이 전쟁에서 전사하리라.   어린 계집애들은 웃음의 탑 꼭대기에서 끔찍한 대참사를 태연히 내려다본다.   어린 계집애들은 위선적이 감정에 도취되어 두 손을 꼭 움켜쥔다.   어린 계집애들은 한창 유행하는 탄식의 귀걸이를 주렁주렁 달고서, 작은 왕관을 쓴 채 불타는 도시의 폐허를 배경으로 무심히 서 있다.   창백한 얼굴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으며, 승리에 한껏 도취한 자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실컷 즐기고 있다. 그들이 슬퍼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 이제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트로이의 어린 계집애들.   그림자 / 쉼보르스카   내 그림자는 여왕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어릿광대와 같다. 여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 어릿광대는 벽을 향해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바보처럼 천장에 머리를 쿵 부딪친다.   이차원의 세상에서는 무엇으로도 그림자에게 고통을 가할 수 없다. 어쩌면 어릿광대에겐 내 왕궁이 불편할지도. 그래서 다른 역할을 원할 수도 있으리라.   여왕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면 어릿광대는 곧장 바닥을 향해 뛰어내린다. 모든 동작과 역할을 여왕과 분담했지만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진 못했다.   저 단순무지한 숙맥은 스스로의 의지로 광장된 몸짓과 허풍, 뻔뻔함을 택했다. 왕관과 지팡이, 왕실의 가운, 내게는 이 모든것들을 지탱할 힘이 없으니.   아, 앞으론 어깨를 움직일 때도 한결 가뿐하겠구나. 아, 앞으론 고개를 돌릴 때도 한결 홀가분하겠구나. 왕이여, 우리가 작별 인사를 나눌 때도, 왕이여, 우리가 기차역에 서 있을 때도.   왕이여, 언제나 이 시간이 되면 우리의 어릿광대는 철로 위에 길게 드러눕는다.   방랑의 엘레지 /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수 없다.   가까스로 기억을 떠올린들 불확실한 뿐. 머리를 잘못 맞춘 여신의 조각상처럼.   사모코브*에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모른다.   파리의 정경은 루브르에서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까지 가물가물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생마르텡*의 가로수 길. 그곳의 계단은 갈수록 페이드 아웃*   내 기억 속에서 '다리의 도시' 상트테르부르크는 고작 다리 한 개와 반쯤 남은 또 다른 다리의 영상. 가여운 움살라*에는 무너진 대성당의 잔해.   소피아*에는 얼굴 없이 몸통만 남은 가여운 무희가 있다.   눈동자 없는 그의 얼굴 따로, 동공 없는 그의 눈동자도 따로, 고양이 동공도 따로.   새롭게 재건된 협곡 위에서 카프카스*의 독수리가 날고 있다. 태양의 황금빛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바위는 엉터리 모조품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내 소유는 아니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내 것이지만, 기억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헤아릴 수도, 저장할 수도 없는 풍경들 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 물방울의 개별적인 세밀함은 더한 법.   나는 나뭇잎의 뚜렷한 윤곽 하나 뇌리에 새기지 못한다.   한 번의 눈짓에 담긴 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   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한 한 번의 고갯짓.   *사모코브;불가리아에 있는 도시 *생마르텡;파리 시내에 있는 운하 *페이드 아웃(fade out);영화나 T.V.에서 화면이 차차 어두워져서 캄캄해지는 것. 방송이나 녹음에서는 소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뜻함.                             *움살라;스페인 스톡홀름 북쪽에 있는 도시 *소피아;불가리아 수도 *카프카스;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지역. 영어로는 코카서스caucasus라고 불린다.   무제 / 쉼보르스카   그들은 철저하게 홀로 남겨졌다. 한마디 말도 없이 철저한 사랑의 부제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적뿐. 드높은 구름 위에서 바야흐로 천둥이 울리고,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놀라운 기적뿐. 이백만 종의 그리스 신화가 출판되었지만, 그와 그녀를 위한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제발 문가에라도 서 있어줬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저 잠시라도 나타나줬으면, 기쁜 소식도 좋고, 나쁜 소식도 좋으니, 어디에서 왔건, 어디로 가건 아무 상관 없으니, 미소를 남겨주건, 공포를 불러일으키건 개의치 않을 테니.   하지만 예상을 뒤엎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스스로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에 대한 기대는 일찌감치 버렸다. 부르주아의 연극에서처럼 이별은 아마도 끝까지 지속되겠지. 멀쩡한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기적은 절대로 없으리라.   만질 수 없는 벽을 뒤로 한 채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영상 외에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다.   두 사람의 모습 말고는 아무 것도 투영되지 않는다. 질료(質料)*는 항상 경계를 풀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넓고도, 깊고도, 높기에 땅 위에서, 하늘에서, 사방 구석에서 타고난 운명을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갑자기 방 안으로 뛰어든 노루 한 마리가 단숨에 우니베르숨*을 무너뜨릴 수도 있기에.   *질료; 형식 또는 형태를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사물을 이루는 소재(素材). 예를 들어 건축물의 경우 구조는 형태,  제목은 질료에 해당한다. *우니베르숨Universum; 라틴어로 '온세상'이란 의미   금혼식 / 쉼보르스카   언젠가 그들은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고, 물과 불처럼 확연하게 구별됐었다. 서로의 다른 점을 맹렬히 공격하고픈 열망을 간직한 채 뺏기고 빼앗기를 반복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서, 내 것이 네 것이 되고, 네것이 내 것이 되었다. 한때 찬란히 작렬하던 번개가 자취를 감추고 난 후 서로의 품 안에서 투명한 공기가 될 때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해답이 주어졌다. 어느 고요한 밤,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성별의 구분 따위는 점차 희미해지고, 비밀은 전부 불에 타버렸다. 흰 바탕 위에서 모든 빛깔이 자유롭게 섞이듯 공통된 성향 안에서 상반되는 기질들이 어우러졌다.   둘 중에 누가 두 배가 되고, 누가 사라져버렸는가? 두 사람의 몫의 미소로 웃음 짓는 것은 누구인가? 누구의 목소리가 두 개의 음성으로 갈라졌는가? 둘 중에 누가 동의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는 건 누구의 의지인가?   누가 누구의 살가죽을 벗겼는가?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었는가? 서로의 손금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누구의 손인가?   오랜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쌍둥이가 태어난다. 서로를 향한 친밀감, 그것은 가장 위대한 어머니. 둘 중 누구도 자신의 쌍둥이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누구 누구인지 가까스로 기억해낸다   금혼식 날에, 이 기쁜 날에.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창가에 앉은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다.   야스오*의 강제 기아 수용소 / 쉼보르스카   어서 써. 써보란 말이야. 평범한 용지 위에 보통 잉크로: 그들에겐 식량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모두 굶어 죽었다고. 모두라고?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초원이잖아. 한 사람당 얼마나 많은 풀잎과 잔디를 먹어 치웠을까? 어디 이렇게 써봐: 난 아무 것도 모른다고. 역사는 유골을 어떻게든 제로(0)의 상태로 결산하려 애쓰고 있다. 천 명에다 한 명이 더 죽어도, 여전히 천 명이라고 말한다. 그 한 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어딘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상상으로 임신한 태아, 텅 빈 요람. 한번도 펼쳐진 적 없는 철자법 교본. 저 혼자 웃다가, 소리 지르다가, 팽창하는 공기. 공허의 늪을 향해 내달리는 계단. 가지런히 정렬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미지의 공간.   우리는 육체가 되어버린 초원 위에 서 있다. 초원은 마치 매수당한 증인처럼 침묵을 고수한다. 태양 아래서 눈부시게 선명한 푸른 빛깔로. 숲 저편에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서 꿀꺽꿀꺽 들이킬 수 있는 수액이 뚝뚝 떨어진다. 눈이 멀지만 않는다면 일상의 풍경들은 매일매일 어김없이 배급되리라. 저 산 너머 영양 만점 도톰한 날개를 가진 새의 그림자가 비친다. 새들은 텅 빈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다. 낫처럼 생긴 초승달이 밤하늘에 슬며시 나타나 꿈속에 등장한 호밀빵을 쓱싹쓱싹 베어낸다. 이콘*에 등장하는 성인(聖人)의 검은 두 팔은 텅 빈 잔을 손에 든 채 허공을 휘젓고 있다. 가시 돋친 철조망의 날카로운 꼬챙이 위에는 인간의 육신이 꼬치 요리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들은 대지와 함게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 어떻게 그들의 심장을 꿰뚫었는지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자. 어디 한번 써보시지. 이곳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지. 그래, 알았어.   *야스오jasto: 폴란드 남부 카르파티 산맥 근처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Getto가 있었으나 전쟁 막바지에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콘: 동방 정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성인들을 그린 초상화. 폴란드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이콘을 허용했으며, 특히 제일의 카톨릭 성지인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마리아상'이 유명하다.   우화 / 쉼보르스카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병에는 종이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 주세요. 나 여기 있을께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병이 얼 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녔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 지 통 알 수 없잖아."   두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보편적인 진실이란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발라드 / 쉼보르스카   이 노래는 살해당했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어떤 여인에 관한 발라드.   건전한 의도로 씌어졌고, 한 자 한 자 종이 위에 정성껏 기록되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창가에서, 혹은 희미한 등불 아래서, 그 일은 벌어졌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문이 굳게 닫히고, 살인자가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가는 순간, 그녀는 뜬금없이 적막에 놀라 깨어난 생명체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마치 반지에서 빠져나온 보석처럼 견고하고, 단단한 시선으로 천천히 구석구석을 살핀다.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마룻바닥 위를 삐걱대는 판자 위를, 침착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다.   범행 후에 남겨진 모든 흔적들을 아궁이에 넣고 활활 태운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서랍 밑바닥에 들어 있던 구두끈까지 모조리.   그녀는 목을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총에 맞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이 그녀를 잠시 엄습했을 뿐.   그녀는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사소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심지어는 쥐를 보고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를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모방하고 가장할 수 있는, 우습고도 하찮은 일들은 이렇게나 많다.   다들 일어나기에 그녀도 일어난 것이다.   다를 걸어다니기에 그녀도 걷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는 머리카락을 빗질하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포도주를 마시며 / 쉼보르스카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러곤 내게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나는 그 아름다움이 마치 내 것인 양 당연히 받아들인다. 별을 꿀꺽 삼켰으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그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잔영에서 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나는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느닷없는 날개짓에 온몸을 전율하면서.   탁자는 탁자, 포도주는 포도주다. 술잔은---- 술잔은 뭐더라? 술잔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는--- 몽상적인 환영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이고, 뼛속까지 비현실적이다.   하고 싶은 말을 그에에 전부 털어놓는다. 수과(瘦果)*의 별자리를 타고나서 사랑에 목숨을 거는 개미들에 관해서. 맹세하노니, 붉은 포도주가 흩뿌려진 새하얀 장미가 노래를 부른다.   웃음을 터뜨리며 조심스레 머리를 숙인다. 위대한 발명품을 재차 확인하고 점검하듯이. 나는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내 외양을 벗어내고, 내 존재를 풀어준 피부 거죽이 경악할 정도로 아름답게.   갈비뼈로 빚어낸 이브, 거품으로 만들어진 비너스, 주피터의 머리에서 나온 미네르바가 나보다 오히려 더 사실적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틈을 타 나는 벽에 비친 내 그림자를 찾아 헤맨다.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건, 그림을 떼어낸 자리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쇠못 한 개.   *수과(瘦果) ; 민들레나 메밀 들 건조과 식물의 열매로, 겉으로는 씨처럼 보이지만 속에 또 하나의씨를 갖고 있다.   루벤스의 여인들 / 쉼보르스카   힘이 아주 센 여자 거인들, 암컷 무리. 덜컹대며 굴러가는 커다란 술통처럼 온전히 벌거벗은 여인들. 그 여인들이 무참히 짓밟힌 침대 위에 보금자리를 틀고, 먼동이 틀 때까지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다. 동공은 근육 저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 누액(漏腋)이 샘솟는 분비샘을 통해 누룩이 서서히 스며들어간다. 온몸의 혈관 속으로.   바로크의 딸들, 케이크 반죽이 반죽 통 안에서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욕조에선 수증기가 솟아오르고, 와인은 붉게 빛난다. 뭉게구름이 만들어낸 살진 새끼 돼지가 하늘 위를 질주한다. 관능의 신호를 알리는 트럼펫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오, 코끼리처럼 풍만하고 거대한 여인들이여. 알몸이 되었을 때 오히려 두 배로 팽창한 여인들이여. 격렬한 체위에서 오히려 세 배로 부픈 여인들이여. 오, 기름진 사랑의 양식이여!   그 여인들에겐 말라비틀어진 여동생들이 있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그 애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화폭에서 비쩍 마른 소녀들이 거위처럼 가지런히 열을 지어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을.   전형적인 추방자의 모습. 밖으로 튀어나온 갈비뼈, 왜소한 참새를 쏙 빼닮은 손과 발. 소녀들은 견갑골을 움직여 낼갯짓을 해보려 애쓴다.   13세기라면 그 애들에게 황금빛 후광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슬프도다, 17세기는 말라깽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태양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없이 비대해져간다. 하늘을 온통 점령해버린 건 오동통한 천사들과 포동포동 살이 오른 신들. 턱수염을 기른 포이보스,* 그가 땀에 젖은 준마들 타고, 뜨겁게 타오르는 침실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다.   *포이보스;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을 부르는 이름.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 쉼보르스카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낚는다. 물고기가 날카로운 물고기로 물고기의 내장을 도려낸다. 물고기가 물고기를 만들어내고, 물고기가 물고기 안에서 산다. 물고기가 무리 지어 다니는 물고기 떼를 피해 도망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사랑한다. 너의 눈동자는 이른바 천상의 물고기처럼 황홀하게 빛난다. 나는 너와 함께 공동의 해협을 유유히 헤엄치고 싶다. 물고기 떼 가운데 가장아름다운 한 쌍의 물고기가 되어!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상상하고, 물고기가 물고기를 창조한다. 물고기가 물고기에게 좀더 천천히 헤엄을 치자고 부탁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에서는 나는 최소한 나무 물고기, 바위 물고기와는 구별되는 개별적인 물고기, 독립적인 물고기이다. 매 순간 나는 은빛 비늘을 가진 아주 작은 물고기들에 대해 기록한다. 어쩌면 그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어둠일 수도 있다. 눈을 깜빡하는 바로 그 찰나에 번쩍하고, 빛을 발하는 순간의 암흑.   *헤라클레이토스 Heracloeitos ;기원전 6세기경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사람은 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몸을 담글 수는 없다. 두번째 강물은 이미 전혀 다른 물이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쉼보르스카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명언에서 착안하여 이 시를 썼다.   쓰는 즐거움 / 쉼보르스카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숲을 가로질러 이미 종이 위에 씌어진 노루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자신의 입술을 고스란히 투영하는 투사지 위에 씌어진 옹달샘, 그곳에서 이미 씌어진 물을 마시러? 왜 노루는 갑자기 머리를 쳐들었을까? 무슨 소리라도 들렸나? 현실에서 빌려온 네 다리를 딛고서 내 손끝 아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고요"-이 단어가 종이 위에서 버스럭대면서 "숲"이라는 낱말에서 뻗어나온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는다.   하얀 종이 위에서 도약을 위해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혹시라도 잘못 연결될 수도 있고, 나중에는 구제 불능이 될 수도 있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문장들.   잉크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꽤 많은 여분의 사냥꾼들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숨어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가파른 만년필을 따라 종이 위로 뛰어 내려가 사슴을 포위하고, 방아쇠를 당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사냥꾼들은 이것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걸 잊은 듯하다. 여기에선 흑백이 분명한, 전혀 다른 법체계가 지배하고 있다. 눈 깜빡할 순간이 내가 원하는 만큼 길게 지속될 수도 있고, 총알이 유영하는 찰나적 순간이 미소한 영겁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명령만 내리면 이곳에선 영원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내 허락 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함부로 떨어지지 않을 테고, 말발굽 아래 풀잎이 짓이겨지는 일도 없으리라.   그렇다, 이곳은 바로 그런 세상. 내 자유 의지가 운명을 지배하는 곳. 신호의 연결 고리를 동여매어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내고, 내 명령에 따라 존재가 무한히 지속되기도 하는 곳.   쓰는 즐거움. 지속의 가능성.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풍경 / 쉼보르스카   이것은 나이 지긋한 거장이 만들어낸 풍경. 나무는 유화 물감 아래 굳건히 뿌리를 내렸고. 오솔길은 목적지까지 정확히 뻗어 있다. 잎사귀가 위풍당당 서명을 대신한다. 지금은 틀림없는 오후 다섯 시. 오월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억류되었다. 그러므로 나 또한 망설이며,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내 그리운 이여, 나는 물푸레나무 아래 서 있는 순박한 시골 처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널 두고 얼마나 멀리까지 떠나왔는지 봐라. 내가 걸친 새하얀 모자와 노란색 치마를 들여다보고, 그림 밖으로 뛰쳐나기지 못하게 얼마나 단단히 바구니를 움켜잡고 있는지도 살펴봐라. 낯선 운명을 어떻게 꿋꿋이 견디어 냈는지. 삶의 비밀들로부터 어떻게 벗어났는지 샅샅이 감상하라.   설사 네가 부른다 해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으리니. 만약 들었다 해도 몸을 돌려 되돌아가진 않으리니. 정녕 있을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될 그 행위를 저질렀다 해도 이제 네 얼굴은 내게 한없이 낯설게만 여겨지리라.   나는 10킬로미터의 반경 내에서 세상을 알고 있다. 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약초와 주문을 알고 있다. 신神은 여전히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변함없이 기도를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맞지 않게 해달라고. 전쟁은 형벌이고, 평화는 포상이다. 수치스러운 꿈은 사탄에게서 비롯되었다. 자두 속에 씨가 박혀 있듯 내 안에는 당연히 영혼이 깃들어 있다.   나는 심장의 유희를 알지 못한다. 내 아이의 아버지, 그 사람의 나체를 알지 못한다. 구약 성서의 위대한 시편을 읽으며, 그 뒤에 잉크 자국으로 얼룩진 무수한 습작 노트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 의심따윈 단 한번도 품어본 적 없다. 내가 하고픈 말들은 늘 문장 속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내 사전엔 절망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건 내 몫이 아니니까. 내게 맡겨진 임무는 오로지 '스스로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일뿐'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을 네가 가로막는다 해도, 네 두 눈을 네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해도, 절망의 가장자리를 따라 아슬아슬 너를 지나치리라.   우리 집은 오른 쪽에 있고, 나는 근처 지리를 구석구석 꿰뚫고 있다. 집으로 향하는 층층다리와 안으로 통하는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안다. 그 안에는 미처 화폭에 담기지 못한 또 다른 삶이 펼쳐지고 있다. 안락의자 위로 뛰어 오르는 고양이. 주석으로 만든 주전자에 빛을 드리우는 태양. 테이블 너머, 뼈만 앙상히 남은 한 남자가 앉아 시계를 고치는 중.   사진첩 / 심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굴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트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야전 병원의 들것 위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무도회가 끝난 뒤 피로로 눈자위가 거무스레해진 저 황홀한 올림머리의 여인조차도 네가 아닌 댄스 파트너를 쫓아서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런 미련 없이. 이 *은판 사진이 탄생하기 전, 아주 오래 살았던 그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만틸라; 스페인이나 멕시코 등지에서 머리와 어깨를 덮는 여성용 대형 스카프. *보스; 히로나뮈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 네델란드 출신의 대표적인 플랑드르 화가. 20세기 초현실주의의 선구로 평가받는 보스의 작품들은 '광기와 부조리로 가득 찬 지옥도'라 일컬어지고 있다. 다양하게 변모되고 합성된 기괴한 동물들과 식물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그의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어두운 해학은 당신의 종교적 배경과 관련된 상징 체계와 연관을 맺고 있다. 대표작으로 등이 있다. *은판 사진; 은판銀板에 찍는 초창기 사진술을 말함.    웃음 / 쉼보르스카   언젠가 바로 나였던 그 소녀. 나는 물론 그 애를 안다. 소녀의 짧은 생애를 담고 있는 몇 장의 사진을 나는 갖고 있다. 몇 줄의 시구를 쓸 수 있을 만큼 유쾌한 연민도 느끼고 있다. 몇몇 사건들 또한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이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꼭 끌어안을 수 있게, 오로지 한 가지 추억만 회상하련다. 작고 못생긴 소녀의 어린 시절 풋사랑을.   이야기를 들려주마. 소녀가 어떻게 그 대학생을 사랑했는지. 소녀는 그가 자신을 쳐다봐주기를 원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를 만나기 위해 어떻게 달려갔는지. 멀쩡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오, 무슨 일이야. 한마디라도 물어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조그만 계집아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만일 팔자가 좋아 오래오래 살 수만 있다면 결국엔 절망조차 득이 된다는 사실을.   소녀에게 과자라도 사 먹으라며 돈 몇 푼 쥐어줄 수 있었을 텐데. 소녀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라며 돈 몇 푼 쥐어줄 수 있었을 텐데. 얼른 물러가지 못하겠니, 내겐 시간이 없다구.   이미 불은 모두 꺼져버렷다는 걸 너도 알잖아. 아마 넌 이해하겠지, 벌써 오래전에 문은 닫혀버렸다는걸. 문고리를 잡아당기지 마. 웃음을 터뜨리던 그 남자. 나를 끌어안던 그 남자. 그는 먼 옛날, 너의 그 대학생이 아냐.   네가 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제일 좋을걸. 난 네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구.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인걸. 언제쯤 타인의 비밀을 누설하면 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렇게 우리를 쳐다보지 말라구. 마치 죽은 자의 눈처럼 비정상적으로 크게 부릅뜬 그런 눈으로.   기차역 / 쉼보르스카   내가 N시(市)에 가지 않은 그 일은 정확히 시간 맞춰 일어났다.   발송되지 않은 편지가 내게 미리 예고를 해주었고,   예정된 시각에 너는 가까스로 역에 오지 않을 수 있었다.   기차가 3번 플래홈으로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나의 부재(不在)는 인파 속에 섞여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황망함 속에서 별빛 여인들이 서둘러 나를 대신했다.   그중 한 여인을 향해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달려갔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것도 당장에.   내 것이 아닌 트렁크가 분실되었을 때, 두 사람은 우리의 입맞춤이 아닌 낯선 입맞춤을 서로 나누었다.   N시의 기차역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라'는 시험에 훌륭하게 통과했다.   전체는 있어야 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세부적인 사항들은 지정된 철로를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미처 약속되지 못한 만남조차 정확한 타이밍에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철저하게 우리의 현존이 미치는 범위 밖에서. 있음 직한 개연성을 상실한 파라다이스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이 낱말 조각들이 실은 얼마나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있는지.   살아 있는 자 / 쉼보르스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를 포옹하는 것, 감싸 안는 것.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심장의 박동뿐. 우리의 모계 혈통을 이어받은 거미들이 그를 보자마자 혐오감에 줄행랑을 쳤기에 게걸스러운 거미들에게 통째로 잡아먹히는 일은 없으리라.   그의 머리가 집행 유예를 받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는 특권을 허락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천 가지도 넘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의 숨소리에 열심히 귀 기울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중세의 기적극*은 야유와 조롱 속에 막을 내렸다. 범죄는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여성들의 전유물인 공포에 대한 상속권은 박탈당했다.   오로지 손톱들만 살아남아 반짝이다가, 점점 닳아 소멸될 뿐.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 손톱이 막대한 재산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겨진 은화 한 닢이란 사실을.   우리를 보면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조차 그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목덜미 위에 돋아난 천 개의 눈을 부릅뜬 공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미처 알지 못한다.   그 모습은 가까스로 이 세상을 향해 두발을 내디딘 듯 힘겹게만 보인다. 우리 모두가 그랬듯. 우리의 모습 그대로.   뺨 위에는 속눈썹이 애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쇄골 사이에는 회한에 젖은 땀방울이 시냇물처럼 고여 있다.   지금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그는 조용히 잠들어 있다. 시효가 만료된 죽음과의 포옹 속에서 그는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기적극; 예수나 성도에 의한 기적을 소재로 한 중세의 종교극.   태어난 자 / 심보르스카   그러니까 이 여인이 그의 어머니다. 작은 키의 여인. 회색빛 눈동자를 지닌 생명의 근원,   몇 년 전 그를 태우고 물가로 떠내려온 조각배.   그는 그 조각배에서 탈출했다. 세상으로, 영원이 아닌 이곳으로.   나와 함께 불꽃을 뛰어넘은 그 남자를 출산한 여인.   그녀는 완제품이 아닌 미완성의 그를 선택한 유일한 여인이다.   내겐 이미 친숙한 그의 살갗을 가져다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뼈대에다 동여맨 장본인이다. 철저하게 혼자의 힘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짙은 회색빛 눈동자를 그녀는 스스로 고안하고, 만들어냈다.   그 여자, 그 남자의 알파. 그는 왜 내게 그녀를 보여주었을까.   그 남자은 그렇게 태어났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언젠가는 죽게 될 나와 마찬가지로.   진짜 여인의 아들. 육신의 깊은곳에서 막 허물을 벗고 나온 신참내기. 오메가를 향한 방랑자.   매 순간 사방에서 자신의 부재(不在)를 위협당하는 존재.   그의 머리 그것은 시간에 순응하는 벽을 향해 사정없이 부딪쳤다.   그의 행동 그것은 보편적인 평판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였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이미 그 길의 절반을 지나왔다는 걸.   그러나 그는 내게 그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분이 내 어머니야" 오직 이 한마디만 했을 뿐.   인구조사 / 쉼보르스카   언젠가 트로이 대제국이 우뚝 서 있던 그 언덕에서 일곱 개의 도시가 발굴되었다. 한 편의 서사시를 노래하려면 도시 하나면 충분치 않을까. 나머지 여섯 개는 필요치 않다. 그것들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육보격의 시는 완전히 붕괴되어버렸다. 갈라진 틈바구니에서 허구가 아닌 논픽션의 벽돌이 삐죽 튀어나온다. 무성 영화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와르르 벽이 무너져내린다. 대들보가 붕괴되고, 솨시슬이 끊어진다. 마지막 한 방울의 수분까지 남김 없이 말라버린 녹슨 주전자.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부적, 과수원의 씨앗들.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가져온 화석처럼 직접 손으로 만져야만 확인 가능한 두개골들.   태고의 흔적들이 퇴적물처럼 우리 옆에 빼곡히 쌓여간다. 공급 과잉으로 넘쳐날 지경. 무지막지한 지역 주민들이 원주민의 역사 속으로 난폭하게 쳐들어왔다. 고기 자르는 기다란 칼을 양손에 든 유목민들. 헥토르의 용맹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무명용사들. 수천 명의 개별적인 얼굴들. 매 순간 처음이고 마지막인 그 얼굴들. 제각기 범상치 않은 한 쌍의 눈을 가진 얼굴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동안은 한결 편했다. 공간도 훨씬 넓었고, 추모의 감정도 훨씬 풍부했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인구 밀도가 유달리 낮았던 어떤 시대를 골라 거기에 전부 파묻어줄까? 아니면 그들의 금세공 기술을 인정하고 한껏 칭찬해줄까? 최후의 심판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우리, 삼백만 명의 판사들 앞에는 각자 해결해야 할 사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에. 말주변이라곤 전혀 없는 군중들과 무수한 가차역들, 야외 경기장의 특별관람석, 다양한 행진과 시위들. 이국땅의 수많은 거리들, 계단과 벽들. 무수한 기차역들, 야회경기장의 특별관람석, 다양한 행진과 시위들. 이국땅의 수많은 거리들, 계단과 벽들. 우리들은 백화점에서 새로운 물 주전자를 구입하면서 그렇게 영원히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호메로스*는 현재 통계청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퇴근 후 집에 가서 그가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메로스Homeros : 고대 그리스의 시인으로 영웅 서사시인 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품의 탄생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나 대체로 기원전 9~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서 문학의 고전이라 불리고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중세와 근세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피에타* / 쉼보르스카   영웅이 탄생한 작은 마을에서 동상을 바라보며, 그 커다란 규모에 찬사를 보내라. 텅 빈 박물관 문간에서 훠이훠이 암탉 두 마리를 쫓아내라.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라. 문을 두드려라. 삐걱대는 대문을 밀어젖혀라. 어머니늘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말끔히 벗어 넘긴 머리에, 밝은 시선을 던지리라. 폴란드에서 왔노라고 당당히 말하라. 어머니께 인사하라, 분명하게, 큰소리로 안부를 물어라. 그렇다, 그녀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 그렇다, 그는 늘 그대로였다. 그렇다, 그날 그녀는 감옥을 둘러싼 담벼락 옆에 서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총격 소리를 들었다. 녹음기와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라. 그렇다, 그녀는 언젠가 그 기계들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의 마지막 편지를 읽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오래된 자장가를 불렀다. 한번은 영화를 찍다가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렇다,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감동시킨다. 그렇다, 그녀는 약간의 피로를 느낀다. 그렇다, 하지만 곧 사라질 것이다. 일어나라,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 작별하라.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그곳을 떠나라.   *피에타 Pieta: 예수의 유해를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 또는 상(像)   1960년대의 영화 / 심보르스카 저기 서 있는 성인(成人) 남자, 땅을 딛고 선 인간. 10만 개의 신경 세포. 300그램의 십장과 그 안에 담겨진 5리터 가량의 혈액. 무려 3백만 년 동안 끊임없이 생성되어져온 개체.   초기에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은 아주머니 무릎 위에 머리를 포겠다. 그 어린 소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릎은 또 어디로 사라졌을까. 어린 소년은 이미 너무 커버렸다. 아, 그는 더 이상 어린 소년이 아니다. 이 거울들은 잔인한 데다가, 아스팔트처럼 매끄럽기까지 하다. 어제 그는 고양이를 차로 치어 죽였다. 그래, 그건 꽤 괞찮은 아이디어였어. 이 시대의 끔삑한 지옥으로부터 고양이를 해방시켰으니 자동차에 타고 있던 소녀가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본다. 이건 아니야, 그녀는 그가 원하던 무릎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바란 건 모래사장에 길게 누워 마음껏 숨을 쉬는 것. 그는 세상과 아무런 연관성도 갖지 못했다. 자신이 손잡이가 부서진 주전자 같다고 여겼다. 귀퉁이가 깨진 것도 모른 채 여전히 물을 길어 나르는 가엾은 주전자--- 이것은 사뭇 경이로운 일이다. 고난을 무릅쓰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누군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집은 이제 다 지어졌다. 문고리엔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졌고, 나무에는 어린 가지가 접목되었다. 이제 곧 서커스단이 공연을 시작하리라. 이 '완벽한 전체'는 현재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싶다. '조각'과 '부분'이 결합되어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음은 까맣게 잊은 듯. sunt lacrimae renum(이것은 존재가 흘린 눈물)* 마치 접착제처럼 끈적끈절하고, 견고한 액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부수적인 배경일 뿐, 언제나 본질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다. 그의 내면에는 극심한 어둠이 있고, 어둠의 한가운데에 예의 그 어린 소년이 있다.   무엇이든 그에게 해주소서, 유머의 신이여. 어떻게든 그에게 웃음을 주소서, 유머의 신이여.   *sunt lacrimae renum(이것은 존재가 흘린 눈물); 기원전 1세기에 활약했던 고대 로마의 서정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남긴 위대한 서사시에 나오는 "사물 또한 눈물을 흘린다"는 구절을 인용한 것. 베르기리우스는 애국적인 정서와 종교적 경건함, 풍부한 교양, 완벽한 시적 기교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특히 단테가 에서 그를 안내자로 삼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병원에서 작성한 보고서 / 쉼보르스카   누가 그를 만나러 갈까. 우리는 성냥개비로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내가 당첨됐네요. 나는 식탁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병원의 면회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문안 인사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는 오히려 제 손을 뒤로 뺐습니다. 뼈다귀를 감추고, 절대로 내놓지 않으려는 굶주린 강아지처럼.   그는 죽는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에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합성 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의 시선은 스치고, 엇갈렸습니다.   그는 그만 가달라고도, 곁에 있어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식탁에 함께 앉았던 사람들 중 그 누구의 안부도 묻지 않았습니다. 볼레크, 너에 대해서도 톨레크, 너에 대해서도, 롤레크, 너에 대해서도*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네요. 죽는 자는 누구이고, 애도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나는 유리컵에 꽂힌 세 송이의 제비꽃에 관해, 현대 의약품의 놀라운 효력에 관해 찬사를 늘어 놓았습니다. 태양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다가 불을 껐습니다.   아래로 뛰어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와락 열어젖힐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아직도 너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또 얼마나 기쁜 일인지.   병원 냄새는 내게 구토를 불러일으킵니다.   *볼레크Bolek, 톨레크Tolek, 롤레크Lolek는 우리나라의 철수, 민수, 영수처럼 폴랜드에서 흔한 남자 이름이다.   철새들의 귀환 / 쉼보르스카   그해 봄, 철새들은 또다시 너무 일찍 돌아왔다. 이성(理性)이여 기뻐하라, 본능 또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에. 본능이 꾸벅꾸벅 졸며 방심하는 사이, 철새들은 눈 속에 추락하여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다. 정교한 인후(咽喉)와 예술적인 발톱, 건실한 연골과 진지한 물갈퀴, 심장의 배수구와 창자의 미로, 갈비뼈 사이의 가지런한 통로와 열을 지어 곧게 뻗은 근사한 척추, 공예품 박물관에나 어울릴 듯 멋들어진 깃털, 참을성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부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지극히 황당한 죽음을 맞는다.   이것은 애도의 노래가 아니라, 단지 분노의 표현일 뿐. 눈부시게 깨끗한 순백의 천사, 구약 성서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땀구멍을 지닌 나는 연(鳶), 공중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개별적이어서 우리 손에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무한한 존재,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극처럼 근육과 근육의 시간과 장소의 일치속에 긴밀하게 이어져 있고, 힘찬 날갯짓으로 환호를 보내는 경이로운 생물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그러곤 자신만의 고풍스럽고, 소박한 태로로 미수(未遂)로 그치고 만 무기력한 시도를 바라보듯, 아무렇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로 비둘기의 최후를 응시한다.   안경원숭이* / 쉼보르스카   나는 안경원숭이, 안경원숭이의 아들. 안경원숭이의 손자이며, 안경원숭이의 증손자. 두 개의 커다란 동공과 그 밖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 결합된 조그만 피조물. 계속되는 진화와 끊임없는 변형으로부터 나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죠. 내 고기가 기막힌 맛을 내는 것도 아니고, 내 모피 가지고는 털목돌리 한 개를 만들기도 부족하니까요. 내 침샘이 다른 동물들처럼 행운의 부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내 창자로 음악회에 사용할 현악기의 줄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나는 안경원숭이, 인간의 손가락 위에 산 채로 덩그러니 앉아 있습니다.   친애하는 주인님, 안녕하세요.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갈 필요가 없으니 그 대가로 무엇을 주실 건가요? 주인님의 너그러운 아량으로 어떤 보상을 베푸실 건가요? 나는 돈으로 살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 당신의 미소를 똑같이 흉내 낸 대가로 얼마나 많은 상금을 하사하실 건가요? 관대하신 주인님, 너그러우신 주인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가치 없는 죽음은 없다는 사실을 과연 누가 증언해줄까요? 행여 당신들이 해줄 건가요?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이 모든 사실들은 별이 총총한 이 밤이 지나면 금세 잊혀져버릴 것을.   가죽이 통째로 벗겨진다든지, 뼈가 뽑히거나 깃털이 갈기갈기 찢기는 끔찍한 불행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던 우리들 중 몇몇 원숭이만이 가시와 비늘과 송곳니와 뿔을 감히 동경할 수 있었답니다. 단백질의 착상으로 만들어진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소망할 수 있었답니다. 친애하는 주인님, 우리는 당신의 꿈입니다. 일시적이나마 당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백일몽입니다.   나는 안경원숭이,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다 안경원숭이. 다른 짐승들의 절반밖에 안 되는 조그만 몸집을 가진 피조물.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무엇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완벽한 존재. 먼 옛날 나는 너무나 가벼워서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를 사뿐히 뛰어오를 수도 있었고, 하늘 위로 튕겨져 감상적인 돌멩이 때문에 한 번, 또 한 번, 자꾸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안경원숭이.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답니다. 안경원숭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본질적인 당위성에 대해서.   *안경원숭이; 동인도 제도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진 원숭이류의 동물. 안경을 쓴 것처럼 동그랗고 큰 눈이 특징이다.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 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내 모든 수축과 이완은 바다 한가운데로 조각배를 밀어내듯 세상의 주위를 맴돌고 있구나.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주어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끄집어내주어서.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바로 아래쪽에선 휴일을 코앞에 둔 분주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곡예사 / 쉼보르스카   공중그네에서 공중그네로. 묵소리가 멈춘 뒤 갑자기 찾아든 죽음과도 같은 적막 속에서, 느닷없이 놀란 공기를 헤집고 관통하면서, 또다시 추락의 타이밍을 비껴난 육신의 무게보다 한 템포 더 빠르게.   그는 솔로였다. 아니 솔로보다 더 작고, 부족한 존재였다. 절름발이였기에, 날개를 잃어버렸기에. 이 모든 결핍은 더욱더 크나큰 장애가 되어 마침내 그는 깃털 하나 없이 적나라한 시선 속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풀쩍,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힘겹지만 가볍게, 끈질긴 민첩함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영감 속에서, 너는 아느냐, 비행의 순간을 낚아채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숨죽이고 기다려야 했는지. 너는 아느냐, 자신이 지닌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마나 치밀한 전략을 세워야만 했는지. 너는 아느냐,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느냐. 그가 얼마나 절묘하게 자신의 체형을 짜 맞추고 조립했는지를 흔들리는 세상을 손아귀에 포착하기 위해 그는 계획에 맞춰 새로이 제작된 양팔을 앞으로 곧게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벌써 화살처럼 저만치 달아나버린 그 짧은 찰나에 그의 두 팔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고 위대했다.   다산을 기원하는 구석기 시대의  페티시즘* / 쉼보르스카   위대한 어머니는 얼굴이 없다. 무엇 때문에 위대한 어머니에게 얼굴이 필요하겠는가. 얼굴은 충실하고, 정숙하게 몸의 일부로 머무르질 못한다. 얼굴은 몸에게 훼방을 일삼는 신성치 못한 존재다. 육신의 장엄한 일치와 조화를 방해할 뿐. 위대한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얼굴은 한가운데 눈먼 배꼽이 새겨진 볼록한 배와 다름 아니다.   위대한 어머니는 발이 없다. 위대한 어머니에게 무엇 때문에 발이 필요하겠는가. 대체 어디를 헤매고 다닌단 말인가. 세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느닷없이 끼어들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위대한 어머니는 이미 자신이 원하던 그곳으로 떠났다. 거기서 살갗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열심히 보초를 서고 있다.   그래, 저기 저 너머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는가? 뭐, 아무래도 좋다. 그곳은 풍요와 축복의 땅인가? 그렇다면 더욱 좋다. 아이들이 어딘가를 향해 분주히 달려가고 있다. 고개 들어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가? 훌륭하다! 그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한다. 터무니없을 만큼 온전하게,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들이 등을 돌려도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한다 세상으로선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는 간신히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가슴 위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두 개의 가느다란 손. 이 손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生)을 축복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이유로 넘치게 축복 받은 자들에게 또다시 은총을 베풀어야 한단 말인가. 이 손이 맡은 역할은 오직 하나.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무슨 일이 생겨도, 설사 아무런 재난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자신에게 허락된 본분을 지키며, 지그재그로 엇갈린 본연의 자세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자태에 마지막 미소를 보태는 것.   *페티시즘 ; 일종의 물신 숭배로 나무나 돌 따위에 마력이 있다고 믿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원시 종교의 한 형태.
236    댓글:  조회:1768  추천:0  2017-08-29
별 / 강려   히야! 달님이 하얀 손끝으로 총총총 점자(盲文) 쓴다야   어머! 눈 어두운 귀뚜라미가 또르르 따르르 점자 읽는다야 2017년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해빛의 색갈” 발표작
235    첫눈 댓글:  조회:1847  추천:0  2017-08-29
첫눈 / 강려   바람은 팝콘을 한줌, 두줌 뿌립니다   땅벌레들이 냠냠 받아먹습니다   참새들은 짹짹거리며 냄새만 맡아봅니다   2017년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해빛의 색갈” 발표작
234    이슬 댓글:  조회:1623  추천:0  2017-08-29
이슬(1) / 강려   빨강 노랑 하얀 꽃잎 눈귀에 눈곱이 방울방울 매달렸네   솔바람이 슬슬 닦아준다 2017년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해빛의 색갈” 발표작
233    "이슬" 동시 / 문삼석 댓글:  조회:1989  추천:0  2017-08-26
이슬 1 / 문삼석 이슬은  밝음  한 알  이슬은  맑음  한 알    이슬 2 / 문삼석   밝음을  토해 내는  맑은  눈  맑음을  토해 내는  밝은  눈    이슬 3 / 문삼석     그 눈  앞에선  어둠도  쓰러지고  그 눈  앞에선  숨결도  가라않고   이슬 4 / 문삼석   풀잎 속에 숨는다고 누가 모르나?   맑은 눈 또랑또랑 뜨고 살면서....   이슬 5 / 문삼석   맑은 눈은 늘 고운 마음을 비춰 주고,   고운 마음은 늘 맑은 눈을 보여 주고.   이슬.6 / 문삼석   밤 새워 별빛과 도란거리다.   별빛되어 반짝이는 한 알 수정.   이슬 7 /  문삼석   보이는 건 그대로 티 없는 세상.   들리는 건 그대로 소리 없는 노래.   이슬.8 / 문삼석   굴 러 라. 융단 위를.....   울 려 라. 방울 소릴....   이슬.9 / 문삼석   아무리 닦아도 더 맑을 순 없을 거야.   아무리 굴려도 더 둥글진 못할 거야.   이슬.10 / 문삼석   달빛 속에 자라서 저리 고옵고,   별빛 보고 자라서 저리 말갛고.   이슬.11 / 문삼석   세상이 다 잠들어도 이슬아, 넌 언제나 깨어 있고   세상이 다 눈감아도 넌 언제나 뜨고 있고.   이슬.12 / 문삼석   누가 살까? 이슬 속 작은 마을엔....   누가 알까? 이슬 속 숨은 이야길....   이슬.13 / 문삼석   이슬은 눈 아기의 눈.   티 없이 연 초롱한 눈   이슬.14 / 문삼석   해님은 웬 일로 데려 가실까?   눈 젖어 애처로운 이슬 아기를....   이슬.15  / 문삼석   밤내 곱게 매달아 놓고,   차마 못 따고 두고 간 진주.   이슬.16 / 문삼석   해 맑은 눈빛으로 살고 싶은 이.   밤마다 몸 뒤채며 타고 남은 넋.   이슬.17 / 문삼석   새벽이랑 함께 떠 어둡지 않고,   풀잎이랑 함께 살아 외롭지 않고.   이슬.18 / 문삼석   이 슬 은 맑은 등,   아 침 을 켜는 등.   이슬.19 / 문삼석   훅 불면 또그로 구르겠다.   자칫 떨어지면 쨍그랑 깨지겠다   이슬.20 / 문삼석   하늘이 맑아서 너는 맑게 뜨고,   바람이 고와서 너는 곱게 뜨고.   이슬. 21 /문삼석   -다칠라..... 개미가 조심조심 꼿발로 비켜 가고,   -깨질라.... 바람도 가만가만 꼿발로 지나 가고.   이슬.22 / 문삼석   너늘 보면 나는 비인 풀밭이고 싶다,   너늘 보면 나는 이른 아침이고 싶다. 이슬.23 / 문삼석   이슬아.  넌 봤지 ?  어둠이 어떻게  잠 깨는지 ...... .  이슬아,  넌, 알지 ?  새벽이 어떻게  걸어오는지 ...... .   이슬.24 / 문삼석   맑은 모습 그대로 젖고 싶고,   순한 마음 그대로 닮고 싶고.   이슬.25 / 문삼석   순하고 둥근 마음 저리 고운 걸,   참으로 아는 인 진정 누굴까?   이슬.26 / 문삼석   이슬 속엔 몰래 하늘이 숨고,   하늘 속엔 몰래 이슬이 숨고.   이슬. 27 / 문삼석   참다 참다 더 참지 못해   보석처럼 맺히고 만 눈물 방울.   이슬. 29 / 문삼석   풀잎이 하도 고와 이슬은 더 맑고 싶고,   이슬이 하도 맑아 풀잎은 더 곱고 싶고.   이슬.30 / 문삼석   아무도 몰래 혼자 뜨고,   아무도 몰래 혼자 감고   이슬.31 / 문삼석   그늘 속에선 조용한 시.   그늘 밖에선 반짝이는 노래.   이슬.32 / 문삼석   서늘한 눈으로 열린 세상. 닮고파   또 보는 맑은 세상.   이슬.33 / 문삼석   새소리 맑게 걸러 더 맑아가고,   새벽빛 밝게 걸러 더 밝아 가고. .   이슬.34 문삼석   온통 이슬밭이게 늘 아침이었으면....   밴발로' 달리고픈 아침 이슬밭.   이슬.35 / 문삼석   아침 풀밭은 이슬이 사는 집,   동그란 마음들만 모여 사는 집.   이슬.36 / 문삼석   새벽 이슬은 작은 아이들,   티 없는 눈으로 사는 아이들,   이슬. 37 / 문삼석   어둡던 세상이 너로 하여 밝아지고   비었던 세상이 너로 하여 채워지고.   이슬. 38  / 문삼석   누가 울면서 온밤 보냈나?   저리 고운 눈물 뿌려 놓고서....   이슬.39 문삼석   혼자 있어도 너는 다구나.   따로 살아도 너는 하나구나.   이슬.40 / 문삼석   눈으로만 작게 웃고 싶고,   맘으로만 곱게 일하고 싶고.   이슬.41 / 문삼석   -세상은 하나다. 둥근 하나다.   이슬아ㅡ 네 눈은 그렇게 말하고,   -세상은 참이다. 맑은 참이다.   이슬아, 네 눈은 그렇게 보이고.   이슬.42 / 문삼석   마알간 옥구슬 받쳐 들고,   아침을 부르는 풀잎 손들.   이슬.43 / 문삼석   닫힌 마음도 하늘처럼 열어주는 이슬 눈.   비인 가슴도 바다처럼 채워주는 이슬 눈.   이슬.44 / 문삼석   풀잎 손 고운 손엔 이슬이 살고,   이슬 눈 맑은 눈엔 풀잎이 살고.   이슬.45 / 문삼석   어느 말보다 네 말은 참되고,   누구 말보다 네 말은 정답고.   이슬.46 / 문삼석   마알간 몸을 보면 눈부터 시려와요.   통째로 눈에다 담고 싶어요.   이슬.47 / 문삼석   한 알 네 눈짓으로   세상은 조용히 어둠을 벗는다. 이슬.48 / 문삼석   앉고 싶어라, 풀잎 위에....   살고 싶어라, 이슬 처럼.....   이슬.49 / 문삼석 어딜까? 네 눈빛만 초롱초롱 모여 사는 곳은?   언젤까? 네 숨소리만 세상 가득 차오를 날은?   이슬.50 / 문삼석   이 세상 가득 이슬로 채워   그렇게 맑고 밝게 살아 갔으면.....
232    황무지 / T.S. 엘리엇 (황동규[한국] 번역) 댓글:  조회:4868  추천:0  2017-08-24
황무지 / T.S. 엘리엇    (황동규 번역)   "한번은 쿠바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이 제사(題詞)는 1세기 로마 황제의 궁정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의 48장  에서 인용한 것으로, 술 취한 김에 주인 트리말키오가 신기한 이야기를 해서 술친구들을 압도하려고 하는 장이다. 희랍신화에서 무녀는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이다. 그녀는 아폴로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만큼(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수명을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은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 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 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보다 나은 예술가"는 단테가 (연옥편)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다니엘을 찬양한 문구. 혼란 상태에 있던 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약 절반의 길이로 고쳐 준데 대한 감사의 찬사.   1 죽은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르베르거 호(湖)***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죽은 자의 매장: 영국 정교의 매장 성사에서 나온 것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가사(假死) 상태를 오히려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 모든 것을 일깨우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일 수 밖에 없다. 시인 초서(1343~1400)의 에서는 4월에 주민들이 성지순례를 떠나지만 황무지의 주민들은 8~18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쾌락의 관광 여행을 떠난다. ***슈타른베르거 호: 뮌헨 근처에 있는 호수. 휴양지로 유명. *호프가르텐 공원: 뮌헨에 있는 공원.   어려서 사촌 태공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으로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내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 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 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마리 라마슈 백작부인의 가  8~18행의 기조를 이루고 있음은 밝혀진 사실이지만 여기서 마리를 특정인으로 볼 필요는 없다. 8~18행은 휴양지에서 상류사회 사람들이 하는 의미 없는 대화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구약 2장 1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엘리엇 원주. *** 6장 6절 "너의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참조  * 12장 5절 노년의 적막을 말하는 곳.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참조. 엘리엇 원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 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 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32장 2절 "'의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참조. 여기서 '의로운 왕'은 예수를 예언한 것으로 풀이됨. **이 시 앞의 제사(題詞)의 주 참조. *** 바그너의 오페라 1막 5~8절. 배사공의 아리아. 엘리엇의 원주 *히아신스꽃은 풍요제에서 부활한 신의 상징이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안 소소수트리스 부인은** 독감에 걸렸다. 하지만 영특한 카드*** 한 벌을 가지고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이것 보세요, 그네가 말했다. 여기 당신 패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로군요.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3막 24절 . 이졸데의 배가 오나 살펴보던 목동이 죽어가는 트리스탄에게 하는 말, 엘리엇 원주.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소설 27장에 가짜 점쟁이 마담 세소스트리스가 등장 이집트식 이름 '독감에 걸렸다'는 부분에 아이러니를 줌. ***점쟁이들이 사용하는 타로 카드는 모두 일흔여덟 장으로 되어 있으며 풍요제와 민화에 기원을 갖고 있다. 엘리엇의 원주에 의하면, 자신은 타로 카드의 정확한 구성을 잘 모르며 편의에 맞추어 변형시키기도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영특한 카드"에서 "요새는 조심해야죠"까지 나오는 상징들은 1)의식의 타락. 2)원형적 상징물 해석의 모호함. 3)정신 구조를 파헤치기 위한 열쇠가 되는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풍요신의 한 전형, 여름의 죽음을 상징하기 위해 매해 그를 본뜬 상을 바다에 던진다. **세익스피어의 1막 2장. 에서 인용. 익사한 자의 눈이 진주로 변했다고 함으로써 놀라운 바다의 변화력을 보여 주고 있다.   이건 벨라도나,* 암석의 여인 수상한 여인이예요. 이건 지팡이 셋 짚은 사나이** 이건 바퀴*** 이건 눈 하나밖에 없는 상인* 그리고 아무것도 안 그린 이 패는 그가 짊어지고 가는 무엇인데 내가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살당한 사내의 패**가 안 보이는군요. 몰에 빠져 죽는 걸 조심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군요. 또 오세요. 에퀴톤 부인을 만나시거든 천궁도를 직접 갖고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요새는 조심해야죠.   현실감 없는 도시,***   *이탈리어로 미인.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다빈치가 그린 암석의 마돈나를 생각하라)벨라도라라는 이름을 지닌 눈 화장품을 연상하기고 하다. 그리고 수상한 여인이 되어 3부의 여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타로 카드에 나오는 인물. 엘리엇은 그를 멋대로 어부왕과 연결시켰다고 원주에서 밝히고 있다. ***운명의 바퀴 *프로필이기 때문에 하나만 보인다. 3부의 상인 유제니데스와 연결. **타로 카드에 나오는 인물 T자형의 십자가에 한쪽 다리로 매달려 있음. 식물의 재생을 위해 살해당하는 신을 상징함. ***보들레르의 시 참조.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 밑으로 한 때의 사람들이 런던 교*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 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발치만 내려보면서 언덕을 넘어 킹 윌리엄 가***를 내려가 성(聖) 메리 올노스 성당이* 죽은 소리로 드디어 아홉 시를 알리는 곳으로 거기서 나는 낯익은 자를 만나 소리쳐서 그를 세웠다. "스테슨** 자네 밀라에 해전*** 때 나와 같은 배에 탔었지!   *템스 강에 놓인 다리. 런던 주택가에서 상업 중심지로 가려면 건너는 다리. **단테의 3장 55~57행 참조.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무리 보들레르를 논하는 자리에서 엘리엇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상태보다는 차라리 악한 것이 낫다도 말함. 다음 2행 역시 단테의 3장 55~57행 참조. *킹 윌리엄 가에 있는 성당 이름 건축가 렌이 설계한 성당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엘리엇은 원주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오전 9시는 런던 교를 건너는 군중들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아마도 흔한 사업가의 이름. ***1차 포에나 전쟁(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해전 1차 세계대전처럼 포에니 전쟁도 경제적 문제로 발생한 것이다.   작년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엔 꽃이 필까? 혹시 때아닌 서리가 묘상(錨床)을 망쳤나? 오 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고대 풍요제에서는 신의 형상들을 뜰에 묻었다. 그 풍요제가 정원 가꾸기로 바뀌었다. **엘리엇 원주에 의하면 존 웹스터(1580~1633)의 비극 5막 4장에서 코르넬리아의 조가(弔歌). 무덤 없는 자들의 비정한 시체들을 위한 노래. "하지만 인간의 적인 늑대들을 조심하시오. 발톱으로 다시 파헤치리니"에서 '늑대'를 '개'로 '인간의 적'을 '인간의 친구'로 바꿈. 이 이미지는 풍요제의 궁극적 속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즉 신이 뒤뜰에 묻혔다가 개가 파내는 물건들로까지 된 상태. *** 엘리엇의 원주. 보들레르의 서시 의 마지막 행. 보들레르처럼 엘리엇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뜻도 있고, 독자까지 공모자로 만드려는 뜻도 있다.   2 체스 놀이* / T.S. 엘리엇      그네가 앉아 있는 의자는 눈부신 옥좌처럼** 대리석 위에서 빛나고, 거울이 열매 연 포도 넝쿨 아로새긴 받침대 사이에 걸려 있다 넝쿨 뒤에서 금빛 큐피트가 몰래 내다 보았다 (큐피트 또 하나는 날개로 눈을 가리고) 거울은 가지 일곱 개인 촛대에서 타는 불길을 두 배로 반사해서 테이블 위로 쏟았고, 비단 갑들로부터 잔뜩 쏟아 놓은 그네의 보석들이 그 빛을 받았다 마개 뽑힌 상아병과 색 유리병에는 이상한 합성향료들이 연고(軟膏) 분 혹은 액체로 숨어서 감각을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익사시켰다 향내는 창에서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자극받아 위로 올라가 길게 늘어진 촛불들을 살찌게 하고   *이 제목은 토머스 미들턴(1570~1627)의 극 와 를 연상시킨다. 특히 후자 2막 2장에서의 체스 놀이는 며느리가 겁탈당하는 동안 보호자인 시어머니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이야기가 이 테마를 다시 강조해 준다. 이 마당에서 전개되는 두 개의 장면 모두 무의미한 성의 아야기임에 유의하자. **엘리엇의 원주. 섹스피어의 2막 2장 190행. "그네가 앉아 있는 거룻배는 눈부신 옥좌처럼 물 위에 빛났다."   연기를 우물반자(格天井)* 속으로 불어넣어 격자무늬를 설레게 했다. 동박(銅箔)을 뿌린 커다란 바다나무는 색 대리석에 둘러싸여 초록빛 주황색으로 타고 그 슬픈 불빛 속에서 조각된 돌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 고풍의 벽난로 위에는 마치 숲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처럼** 저 무지한 왕에게 그처럼 무참히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변신 그림이 걸려 있다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쩍 쩍"* 소리로 들릴 뿐,   *베르길리우스의 1권 726 참조.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아이네이스를 위해 잔치하는 장면 부정한 카르타고 이야기는 3부 끝머리에 나온다. **엘리엇의 원주. 밀턴의 4권 140행 사탄의 눈으로 보는 에덴동산 묘사 ***오비디우스(BC.43~AD.17)의 6권 참조. 엘리엇의 원주. 오비디우스는 희랍신화의 필로멜라가 형부 테레우스 왕에 의해 능욕당하고 혀가 잘려 결국 나이팅게일로 변한 것을 노래하고 있다.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성교를 암시하는 말로도 쓰임. 비극적 신화가 전한 이야기로 변화된 상황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음.   그 밖에 시간의 시든 꽁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고, 노려보는 초상들은 몸을 기울여 자기들이 에워싼  방을 숙연케 했다. 층계에 신발 끄는 소리, 난로 빛을 받아, 빗질한 그네의 머리는 불의 점들처럼 흩어져 달아올라 말(言)이 되려다간 무서울 만치 조용해지곤 했다.   "오늘밤 제 신경이 이상해요. 정말 그래요. 가지 말아요. 얘기를 들려주세요. 왜 안 하죠. 하세요. 뭘 생각하세요? 무슨 생각? 무슨?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 통 알 수 없어요. 생각해 봐요."   나는 죽은 자들이 자기 뼈를 잃은 쥐들의 골목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저게 무슨 소리죠?" 문 밑을 지나는 바람 소리.** "지금 저건 무슨 소리죠? 바람이 무얼 하고 있죠?"   *3장 193행 참조. 엘리엇 원주. **웹스터의 극 3막 2장 162행 참조. 죽은 사람으로 생각한 사람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은 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하는 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죠? 아무것도 보지 못하죠 아무것도 기억 못 하죠?"   나는 기억하지 그의 눈이 진주로 변한 것을* "당신 살았어요, 죽었어요?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나요?" 그러나 오오오오 저 세익스피이이어식 래그 재즈 -** 그것 참 우우아하고 그것 참 지(知)적이이야 "저는 지금 무얼 해야 할까요? 무얼 해야 할까요?" "지금 그대로 거리로 뛰쳐나가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거리를 헤매겠어요. 내일은 무얼 해야 할까요? 도대체 무얼 해야 할까요?" 열 시에 온수(溫水).   *세익스피어의 1막 2장. 에서 인용. 익사한 자의 눈이 진주로 변했다고 함으로써 놀라운 바다의 변화력을 보여 주고 있다. **'오오오오'는 세익스피어의 오델로나 리어왕의 부르짖음 표시로 'O'를 네 번씩 반복하였음. 래그 재즈는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유행한 것으로 싱커페이션(당긴음)이 툭색이다. 세익스피어의 스펠링이 변한 것은 이 싱커페이션 흉내이다. 만일 비가 오면, 네 시에 세단 차. 그러곤 체스나 한판 두지. 경계하는 눈을 하고 문에 노크나 기다리며.*   릴의 남편이 제대했을 때 내가 말했지 --** 노골적으로 말했단 말이야.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이제 앨버트가 돌아오니 몸치장 좀 해. 이 해 박으라고 준 돈 어떻게 했느냐고 물을 거야. 돈 줄 때 내가 거기 있었는 걸. 죄다 뽑고 참한 걸로 해 넣으라고, 릴. 하고 앨버트가 분명히 말했는걸, 차마 볼 수 없다고. 나도 차마 볼 수 없다고 했지. 가엾은 앨버트를 생각해 봐. 4년 동안이나 군대에 있었으니 하고 싶을 거야. 네가 재미를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들이 주겠지. 오오 그런 여자들이 있을까, 릴이 말했어. 그럴걸, 하고 대답해 줬지. 그렇다면 고맙다고 하며 노려볼 여자를 알게 되겠군, 하고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이야기가 이 테마를 다시 강조해 준다. 이 마당에서 전개되는 두 개의 장면 모두 무의미한 성의 아야기임에 유의하자 **여기서부터 둘째 마당 마지막까지는 술집에서 두 여자가 혹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하는 대화 내지는 말로 되어 있다. ***바텐더가 묻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말.   릴이 말했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게 싫다면 좋을 대로 해봐, 하고 말했지. 네가 못하면 다른 년들이 할 거야. 혹시 앨버트가 널 버리더라도 내가 귀띔 한 안 탓은 아냐. 그처럼 늙다리로 보이는 게 부끄럽지도 않니? 하고 말했지. (개는 아직 서른한 살인걸.) 할 수 없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릴이 말했어. 애를 떼기 위해 먹은 환약 때문인걸. (개는 벌써 애가 다섯, 마지막 조지를 낳을 땐 죽다 살았지.) 약제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론 전과 같지 않아. 넌 정말 바보야, 하고 쏘아 줬지. 그래 앨버트가 널 가만두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애를 원치 않는다면 결혼은 왜 했어?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앨버트가 돌아온 일요일 따뜻한 햄 요리를 하곤 나를 불러 제대로 맛보게 했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빌 안녕, 루 또 보자, 메이 안녕, 안녕. 탁탁, 안녕, 안녕,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오필리어가 물에 빠져 죽기 전에 하는 인사말. 4막 5장 참조.    3. 불의 설교* / T.S. 엘리엇     강의 천막이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쥐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 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낼 때까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꽁초도 그 밖의 다른 여름밤의 증거품 아무것도 없다. 님프들의 친구들, 빈둥거리는 중역 자제들도 떠나갔다, 주소를 남기지 않고.   *물이 정화시키는 힘과 익사시키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처럼 불도 정화시키는 힘과 태워 없애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다. 는 부처가 인간을 파괴하고 재생을 막는 정욕의 불에 대해 설교한 것이다. 현대적인 설교 장소는 탬스 강변, 즉 런던이다. **시각이 주는 이미지만을 생각한다면 천막처럼 위를 덮고 있던 나뭇잎이 가을에 졌다는 뜻임. 그러나 구약성경에 의하면 유목민인 유대인들이 천막을 성소로 사용했으므로 성소가 무너졌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일반적으로 여자의 순결이 깨졌음을 뜻할 수도 있다. ***에드먼드 스펜서(1552~1599)의 의 후렴, 결혼을 축하하는 장소도 템스 강임. 그러나 쓰레기가 널린 오늘날의 템스 강과는 다르다. 래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낼 때까지.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크게도 길게도 말하지 않으리니. 그러나 등 뒤의 일진냉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컹대는 소리와 입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는 소리를.   어느 겨울 저녁 가스 공장 뒤를 돌아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형왕의 난파*와 그에 앞서 죽은 부왕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쥐 한마리가 흙투성이 배를 끌면서 강둑 풀밭을 슬며시 기어갔다. *구약 137편 1절 "우리가 바빌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고 울었노라." 참조. 래먼 호는 제네바 호의 프랑스식 이름. 이곳에서 엘리엇은 의 많은 부분을 썼다. 한편 래먼이 첩이나 창녀라는 말로도 쓰이므로 욕정과의 관계도 있다. **마빌의 의 1절 "하나 등 뒤로 나는 항상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를." 엘리엇 원주. ***물고기를 잡는 것은 영원과 구원을 찾는 일임(어부왕 참조) 그러나 이 행위는 이제 속화되어 버렸음. *1막 2장. 페르디난도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장면, "둑 위에 앉아 부왕의 난파를 슬퍼했노라" 참조. 엘리엇 원주.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낮고 습기 찬 땅속에 뼈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에 버려져서 해마다 쥐의 발에만 차여 덜그덕거렸다. 하나 등 위에서 나는 때로 듣는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를, 그 소리는 스위니를 샘물 속에 있는 포터 부인에게 데려가리라.* 오 달빛이 포터 부인과 그네의 딸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소다수에 발을 씻는다.** 그리고 오 둥근 천장 속에서 합창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여!** *엘리엇 원주. 존데이(1574~1840)의 극 "갑자기 귀를 기울이면 들으리/나팔 소리와 사냥감 쫓는 소리/그것은 악타이온을 샘물 속에 있는 다이애나에게 데려가리라/거기서 모두를 그네의 벌거벗은 살을 보리라." 다이애나가 목욕하는 것을 본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변해 동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위의 희랍신화와는 달리 현대의 악타이온 스위니 씨는 다른 운명을 맞는다. **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레일리아의 병사들 간에 유행한 노래. 원주에서 엘리엇은 출처가 선명하지 않음을 술회하고 있다. ***엘리엇의 원주. 베를렌(1844~1896)의 시 의 마지막 행 부상당한 암포르타스(어부왕)에게 내린 저주를 기사 파르시팔이 벗겨 주기 전 발을 씻는 예식에서 소년들이 합창함. 바그너 작곡의 참조. 투윗 투윗 투윗 져 져 져 져 져 져 참 난폭하게 욕보았네 테류.*   현실감 없는 도시 겨울 낮의 갈색 안개 속에서 스미르나 상인** 유게니데스 씨는 수염도 깎지 않고 포겟엔 보험료 운임 포함 가격의 건포도 일람 증서를 가득 넣고 속된 불어로 나에게는 캐논 스트리트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주말을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자고 청했다.   보랏빛 시간, 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기관이 택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테류는 필로멜라를 능욕한 테레우스의 호격. **스미르나는 터키 서부에 있는 항구. 이곳 상인들은 고대의 신비한 의식을 퍼뜨렸다. 오늘날의 의식은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는 주말로 되었다. ***유럽 대륙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자주 가던 호텔 *영국 남안 브라이튼 시에 있는 호텔. "주말을 메트로폴에서"라는 말은 당시 성적인 낌새가 많은 말이었다. 비록 눈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는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아스*는 볼 수 있노라.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에 데려오는 시간** 차(茶)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놓는 것을. 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콤비네이션 속옷이 위태롭게 널려 있다. (밤엔 그네의 침대가 되는) 긴 의자 위엔 양말 짝들, 슬리퍼, 하의, 코르셋이 쌓여 있다. 시든 젖이 달린 늙은 남자 나 티레지아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머지는 예언했다 - *희랍신화에 나오는 남녀 양성의 인물, 헤라에 의해 눈이 멀었으나 제우스에 의해 예언하는 힘을 얻게 되었다. 엘리엇의 원주는 다음과 같다. "티레지아스는 단순한 방관자이고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타의 모든 인물들을 통합하고 있다. 마치 외눈박이 건포도 상인이 페니키아 수부로 융합되고 다시 그 수부가 나폴리 왕자 테르디난도와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여자는 한 여자이고 남여 양성은 티레지아스 속에서 만난다. 티레지아스가 '관찰하는 것'이 사실상 이 시의 내용이다." **희랍의 여류 시인 사포(B.C. 612?~?)의 시행과 꼭 같지는 않으나 나는 해 질 무렵에 돌아오는 '근해 어부' 또는 '평저 어선'의 어부를 생각했다. 엘리엇 원주. 나 또한 놀러 올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이 도착한다. 군소 가옥 중개소 사원, 당돌한 눈초리, 하류 출신이지만 브래드퍼드 백만장자의* 머리맡에 놓인 실크 모자처럼 뻔뻔스러움을 지닌 젊은이.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지루하고 노곤해 하니 호기라고 짐작하고 그는 그네를 애무하려 든다. 원치 않지만 내버려 둔다. 얼굴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두 손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다. 잘난 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네의 무관심을 환영으로 여긴다. (나 티레지아스는 바로 이 긴 의자 혹은 침대 위에서 행해진 모든 것을 이미 겪었노라. 나는 티베 시의 성벽** 밑에 앉기도 했고 가장 비천한 죽은 자들 사이를 걷기도 했느니라.) 그는 생색내는 마지막 키스를 해주고 더듬으며 층계를 내려간다. 불 꺼진 층계를--- *요크셔에 있는 모직 도시. 1차 세계대전 후 많은 갑부가 생겨났다. **고대 희랍 도시. 티레지아스는 이 도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살며 예언했다.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이 있었다. 그네는 돌아서서 잠시 거울을 들여다본다. 애인 떠난 것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어렴풋한 생각이 지나간다. '흥 이제 일을 다 치뤘으니 좋아,'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혼자서 방을 거닐 때는 무심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축음기에 판을 하나 건다.   "이 음악이 물결을 타고 내 곁으로 기어 와"** 스트랜드 가(街)의 술집 옆에서 달콤한 만돌린의 흐느끼는 소리와 생선 다루는 노동자들이 쉬며 안에서 *골드스미스(1730~1774)의 소설 중의 노래. 여주인공 올리비아는 과거에 유혹받은 장소에 와서 노래를 부른다.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므로 남자가 배반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을 때 어떤 마술이 그네의 슬픔을 덜어 주랴." 그리고 '죽는 길'이 있음을 노래한다. 현대의 올리비어는 축음기를 튼다. ** 1막 2장의 페르디난도의 말. "둑 위에 앉아 부왕의 난파를 슬퍼했노라" 다음에 이어지는 구. ***런던 교 부근에 있는 거리 이름. 떠들어 대며 지껄이는 소리를 그곳에는 마그누스 마르티르 성당의 벽이* 이오니아풍(風)의 흰빛 금빛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강은 땀 흘린다* 기름과 타르로 거룻배들은 썰물을 타고 흘러간다. 붉은 돛들이 활짝 육중한 돛대 위에서 바람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이 부분의 몇 행은 "달콤한 음악"과 일하고 쉬는 "생선 다루는 노동자" 그리고 성당 내부의 찬란함이 진정한 가치의 세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노동과 휴식이 모두 절실하고 종교적 의미와의 관련 아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 템스 강 처녀들의 노래는 여기서 시작된다. 192행, 즉 전차와 먼지 뒤짚어쓴 나무들"부터 "아무 기대도 없는"까지 그들은 교대로 이야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두 번 반복되는 "웨이얼랄라---" 바그너의 후렴에 의해 대조된다. 이 후렴은 바그너의 오페라 의 4부 3막 1장에서 라인 강의 처녀들이 부르는 것으로, 라인 강의 황금이 도난당한 후 라인강의 아름다움이 사라졌으나 곧 그것을 다시 찾을 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거룻배들은 떠 있는 통나무들을 헤치고 개 섬(島)*을 지나 그리니치 하구로 내려간다. 웨이얼랄라 레이어 윌랄라 레이얼랄라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역풍에 젓는 노 고물은 붉은빛 금빛 물들인 조개껍질 힘차게 치는 물결은 양편 기슭을 잔무늬로 꾸미고 남서풍은 하류로 가지고 갔다. 노래하는 종소리를. *개 섬(島)은 런던 중심가로부터 약간 하류에 있는 반도. 첫 마디의 '개'의 모티프를 상기시킨다. 그리니치는 개 섬 건너편의 강변. **엘리자베스 여왕(세익스피어 시대)과 레스터 백작은 서로 연애하는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드의 7권 349쪽 참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템스 강 뱃놀이를 즐겼으며, 그리니치 하구 근처에 있는 그리니치 저택에서 여왕이 레스터를 접견하기도 했다. 하얀 탑들을. 웨이얼랄라 레이어 윌랄라 레이얼랄라   "전차(電車)와 머지 뒤집어쓴 나무들 하이베리가 저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가 저를 망쳤어요* 리치몬드에서 저는 좁은 카누 바닥에 누어 두 무릎을 추겨올렸어요"   "저의 발은 무어게이트에,** 마음은 발밑에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습니다. 그는 '새 출발을 약속했으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요?"   "마게이트*** 모래밭. 저는 하찮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다녔어요. *엘리엇의 원주. 단테의 5장 33행 "저 라피아를 기억해 주세요/시에나가 저를 낳고 마렘마가 저를 망쳤어요>"에 대한 풍자적 개작. 하이베리는 런던 교외의 저택가. 리치몬드와 큐는 보트장과 호텔로 유명한 템스 강변의 지명. **동부 런던의 빈민가 ***템스 강 하구의 해변 휴양지. 더러운 두 손의 찢긴 손톱. 제 집안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아무 기대도 없는" 랄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엘리엇의 원주. 성 아우구스티누의 3부 1장.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한 가마의 사악한 사랑이 내 귓전에서 온통 끓어 대는 곳으로" **엘리엇 원주에 의하면 부처의 에 근거한 것이다. 는 그 중요성으로 볼 때 5장 7절에 나오는 예수의 산상 수훈에 맞먹는다. 헨릴 클라크 워런의 (하버드 도양 총서 1896)의 부분은, "모든 것은 불탄다. 형태도 타고눈으로 받은 인상에 의해서 생기며 그것 또한 탄다." ***에서 부처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즉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금욕주의자들을 이 마당의 극점으로 나란히 놓은 것은 의도적인 배려였음을 엘리엇은 원주에서 밝히고 있다   4 수사(水死)* / T.S. 엘리엇   페기키아 사람 플레바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뇌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으로 내다보는 자여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첫째 마디에서 소소트리스 부인이 예언한 페니키아 수부의 익사가 이루어진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다.    5. 천둥이 한 말*/ T.S. 엘리엇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햇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소리 옥(獄)과 궁궐(宮闕) 먼 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비를 기다리는 황무지에 비를 몰아오는 천둥의 소리이다. 이 마디의 첫 부분은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즉 2장 13~31절에 기록된 에마우스로 가는 여행(두 제자가 예수가 부활한 날 에마우스로 간다. 도중에 한 사람이 끼어들지만 저녁 식사 때까지 그가 부활한 예수임을 모른다)과 제시 웨스턴(1850~1928)의 저서에 나오는 위험 성당에의 접근, 그리고 현재 동부 유럽의 피폐상. 엘리엇 원주. ** 다음 몇 행은 예수의 체포와 재판,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에 대한 암시를 갖고 있으며, 예수가 처형당한 금요일부터 부활한 일요일. 즉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은 어부왕이 죽은 후 황무지에 내린 절망과 연결된다.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틈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 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속엔 정적마저 없다 금 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으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만일 바위가 있고 물도 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 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하지만 물이 없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도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물방을 듣는 소리 흉내를 잘 내는 새. **엘리엇의 원주. "다음 몇 행은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에 자극을 얻어 쓴 것이다. 어느 탐험인지는 잊었으나 아마 어니스트 헨리 세클턴의 탐험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탐험대원들이 극도로 피로했을 때 실제 그들의 수효보다 '한 사람이 더 있다'는 환상이 끊임없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 부분은 엠마우스로 가는 여행을 상기시켜 준다. 공중 높이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비탄 같은 흐느낌 소리 평평한 지평선에 마냥 둘러싸인 갈라진 땅 위를 비틀거리며 끝없는 벌판 위로 떼 지어 오는 저 두건 쓴 무리는 누구인가 저 산 너머 보랏빛 하늘 속에 깨어지고 다시 세워졌다가 또 터지는 저 도시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 없는   한 여인이 자기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팽팽히 당겨** 그 현(絃) 위에 가냘픈 곡조를 타고, *이 연은 헤르만 헤세의 참조. "유럽의 반 부분, 적어도 동구의 반이 혼돈으로 가는 중이다. 성스러운 망사에 취햐여 절벽 끝을 따라달리며 취해서 노래 부른다. 마치 찬송을 부르듯이 마치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도스토예프스키의 )가 노래한 것처럼. 이 노래를 듣고 기분 상한 부르주아들은 조소하지만, 성자와 예언자는 눈물을 흘리며 듣는다." 엘리엇 원주. **엘리엇에 의하면 이 연에 사용된 몇몇 세부 사항은 15세기 폴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슈(1450~1516)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성배 전설의 중세판들에 의하면 위험 성당은 기사의 용기를 시험하기 위하여 악귀의 영상들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어린애 얼굴을 한 박쥐들이 보랏빛 황혼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개 치며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시커먼 벽을 기어 내려갔다 공중엔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속의 이 황페한 골짜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단지 빈 성당이 있을 뿐, 단지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성당엔 창이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단지 지붕마루에 수탉 한 마리가 올라 꼬꾜 꼬꾜 꼬꾜 꼬꾜**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一陣)의 습풍(濕風).   갠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맥없는 잎들은 비를 기다렸다. 먹구름은                                                       *이 아무것도 없다는 환상은 기사에 대한 마지막 시험이다.                                                            **닭 울음소리는 유령과 악령들이 떠나감을 나타내 준다. 멀리 희말라야 산봉 너머 모였다. 밀림은 말없이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천둥이 말했다 다* 다타(주라):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의 약전에서도 자비스러운 거미가 덮은 죽은 자의 추억에서도** 혹은 텅 빈 방에서 바싹 마른 변호사가 개봉하는 유언장 속에도 찾을 수 없다. 다 *5의 1 에 실린 설화. 신들과 인간 그리고 악귀들이 차례로 자기들의 부친인 프라야파디에게 물었다. "저희에게 말하소서." 그들에게 프라야파티는 각각 한 음절의 '다'로 답했다. 각 무리들은 그것을 각기 다른 말로 해석했다. 즉 '다타(주라).'다야드밤(공감하라)'. '담야타(자제하라)'로. 설화는 "이것이 신의 소리인 천둥이 다다다 할 때 말하는 것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웹스터의 5막 4장. "그들은 재혼하리라. 벌레가 너의 수의를 좀슬기도 전에, 거미가 너의 비명에 얇은 그물을 치기도 전에." 엘리엇 원주. 다야드밤(공감하라):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다만 해 질 녘에는 영묘한 속삭임이 들려와 잠시 몰락한 코리올라누스**를 생각나게 한다. 다 담야타(자제하라):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33장 46행 우고리노는 아이들과 함게 탑에 갇혀 굶어죽은 일을 회상한다. "그때 그 아래서 그 무서운 탑의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었지요." 엘리엇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공감하라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엘리엇의 주는 F.H. 브래들리(1846~1924)의 346쪽에서 계속된다. "외부에서 받는 내 감각도 내 생각이나 감정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내 경험은 밖으로 닫힌 원, 나 자신으 원 안에 속한다. 그리고 모든 요소가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원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원에 대해 불투명하다. ---- 요컨대 영혼에 나타나는 하나의 존재로 간주될 때 전 세계는 각자에게 그 영혼에게만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참조. 의무보다도 자만심에 의해 행동한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의 감방에 갇힌 인간의 전형이다. 자부심을 상하게 했다고 해서 그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향해 적을 지휘했다.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 뒤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 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 - 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키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웨스턴의 에서 참조. **영국 민요의 후렴 ***26장 148핼 참조. 자진해서 고통 받는 프로방스 시인. 아르노 다니엘의 이야기에 붙인 단테의 표현, 재생을 찾는 사람에게 희망적인 단편의 하나. *작자 미상의 라틴어 시 로부터 인용. 그곳에서 시인은 자기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여 언제 봄이 와서 제비처럼 목소리를 줄 것인지 묻고 있다. 제비는 필로멜라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시인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의 소네트 로부터 인용. ***토머스 키드(1557~1595)의 극 은 부제가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이다. 아들이 암살되자 히에로니모는 미치게 된다. 극중에서 궁정의 오락을 위해 극을 쓰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대답한다. "분부대로 합죠" 그리곤 그 짧은 극 속에 아들을 암살한 자들이 죽도록 만든다. 그 극중극은 < 황무지>처럼 여러 나라 말로 되어 있다.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산티 산티 산티* *우파니샤드의 형식적인 결어로 쓰이는 산스크리트어 '이해를 초월한 평화'의 뜻.       작가 연보 188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다. 1906~09년   하버드 대학 프랑스 상징주의와 라포르그에 친숙해지다 1909~10년    하버드 대학 대학원 시작(詩作)을 시작하다. 착수. 1910~11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공부 완성. 1911~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유학이 중단됨, 옥스퍼드에 거주.                      풍자적 단시들 완성 출판.  1915년 7월    비비안 헤이우드와 결혼. 1915~16년     런던에서 교직 생활. 서평, 브래들리에 관한 논문 완성. 1917~20년     로이드은행에 취직. 평론 발표 1921~25년     런던 특파원(1921~22) 프랑스의 런던 특파원(1922~23) 편집장(192                   2년 10월) 츨판 및 다이얼상(1922) 수상. (1909~1925) 출판. 1926~27년     세네카에 대한 논문 1927~31년      영국 정교로 개종. 영국 시민권 획득(1927년) 1932년           출간                                          1932~34년      완성 1935년           출간 1939년           출간 1947년           아내의 죽음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1950년          출간 1957년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 1965년           별세.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탄생 / 황동규      1  개인의 기호에 관계없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시 한 편만을 고르라면 가 뽑힐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1922년 출판되자 곧 '새로운 시'의 보통명사가 되었고, 그 새로운 시에 '모더니즘'이라는 팻말이 붙은 후에는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리고 다른 모든 문화 현상과 마찬가지로 명성의 오르내림을 겪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한창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헤게모니를 상당히 빼앗긴 지금에 와서도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오히려 최초의 뛰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 평가하는 비평가들이 생길 정도인 것이다.  엘리엇을 이해하는 데는 모더니즘을 20세기 전반의 문학 조류의 하나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또 하나의 입장, 즉 서구 문학이 칸트 이래로 추구해 온 하나의 목표, 즉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정점에 가 있다는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생각의 흐름 속에 괴테를 비롯해 플로베르, 보들레르, 조이스, 토마스 만 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이 여기에 있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낭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징주의까지도 모더니즘을 만드는 초석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의 흐름을 큰 사이에서 보려는 사람은 모더니즘의 시작을 중세 말 프로방스 지바의 트루바두르(음유시인) 전통에까지 밟아 오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기독교적인 구원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대담한 삶의 태도는 모더니즘의 핵심 가운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모더니즘의 창시자라 부를 수도 있는 에즈라 파운드(1885~1972)가 트루바두르 시의 전문가였다는 사실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2  엘리엇은 처음부터 '모더니스트'였다. 하버드 대학을 다닐 때 교지에 발표한 '낭만주의적'인 시들을 빼고 그가 전문 잡지에 최초로 발표한 는 그 작품 발표를 주선했던 에즈라 파운드로부터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그 찬사는 지금에 와서도 유효하다. 이 작품은 영국이 19세기에 개발해서 고도의 경지에 오르게 한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독백을 듣고 있는 청자가 모호해서(여기에 등장하는 '너'를 내적 자아(inner self)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내적 독백'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요절한 프랑스 시인 라포르그(1860~1887)의 자조적인 내적 독백의 영향이 엿보이지만, 그 스케일이나 담고 있는 20세기 삶의 조명 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는 최초의 뚜렷한 '내적 고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한 중년 사내의 내적 독백을 통해 기력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이 그려진다. 그것은 종교와 공동체 의식이 제거된 삶의 실체이며 제사(題詞)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옥의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은 18세기의 유행한 의영웅시(擬英雄詩 mock-heroic)의 어조로 노래 되어서, 독백의 간절함과 의영웅시의 비꼼 사이의 긴장이 작품을 끝까지 이끌고 간다.  그리고 그 '지옥'의 삶은 또 얼마나 잘 그려져 있는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등을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주둥이를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에 혀를 넣고 핥다가 하수도에 고인 물웅덩이에서 머뭇대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등으로 받고, 테라스를 빠져나가, 별안간 한 번 살짝 뛰고는 때가 녹녹한 시월 밤임을 알고 한 번 집 둘레를 돌고, 잠이 들었다                   -에서    지금 그려지고 있는 것은 시월 저녁이다. 장소가 런던이든, 보스턴이든, 우리나라의 가을 저녁과는 달리 습기 많고 안개 많은 저녁이다. 우선 그런 저녁을 안개로 대표하는 환유의 수사법을 쓰고 있으며 안개는 또 고양이로 대치하는 은유 수사법을 쓰고 있다. 이처럼 두 수사법에 동시에 사용되어 효과를 얻는 경우는 그리 쉽지 않다. 물론 이런 수사법을 동원하여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무기력한 삶이고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처절한 모습이다.  그러나 자신을 게에 비유하는 중간의 환상적이고 자조적인 상상("차라리 나는 소리 없는 바다 바닥을 허둥대며 거너는---")이 마지막에 가서는 인어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이 낭만적인 상상으로 바뀌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독백을 통해 자신의 삶의 구조를 계속 추적한 끝에 얻은 자신의 실체가 결국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이 그런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엘리엇은 도시의 시인이다. 은 도시에 살고 있는 한없이 순하고 고통받는 인간들이 풍경이다. 이 시의 중심을 이루는 셋쩨 토막의 주된 배경은 프랑스 작가 샤를루이 필리프(1874~1909)의 의 착한 매춘부 여주인공의 삶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사실이 이 시의 이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하튼 감상에 빠지기를 언제나 거부하는 엘리엇은 마지막 토막에 가서 스토아적인 인내 혹은 자동적인 삶의 고집을 보여 주며 시를 끝낸다.  는 처음 읽을 때 역자를 사랑 노래로 착각하게 한 시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남녀의 헤어짐을 노래하고 있고, 그것을 보는 시인(여기서 '그'와 '나'는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이     그들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요! 단지 제스처 하나 포즈 하나 잃었을까요.                       -에서    라고 지극히 비낭만적으로 생각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물론 비낭만에도 아픔은 있어서 "때로 이런 상념들이 아직/심산한 밤이나 낮의 휴식을 숨막히게 해요."가 뒤를 잇기는 하지만.  위의 세 편은 를 읽기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시들이다. 도입에 '현대시'의 출발의 모습을 그 어느 시보다도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3  의 발표와 더불어 엘리엇은 좋든 나쁘든 세계의 '현대시'를 지배해 왔다. 시뿐 아니라 그의 평론은 신비평(New Criticism)을 생기게 했고, 1960년대 중반까지 그의 이론은 대학가의 문학론을 압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비낭만적이고 지성 일변도적인 자세는 시와 비평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그리고 예술의 거의 모든 영역의 평가에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그의 영향이 재평가되는 추세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시작품이 앞으로 생명력을 계속 지닐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대학 생활을 할 때 너무 지나치게 '비인간적인' 그의 예술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한 일이 있는 역자는 질문을 할 때마다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유혹을 받아 왔다. 그 유혹은 엘리엇의 새로운 자리매김이 진행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엘리엇은 계속 살아 있는 실체였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의 시는 그의 시론의 연습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와 그처럼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많이 갖고 있으며, 그가 아무리 객관적이기를 바랐지만 그의 시는 예술가적 주체의 고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이번에 들을 새로 손볼 때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엘리엇의 시에서 요구하는 것은 기지와 균형과 아이러니이다. 그것은 소위 자연 발생적인 감정과 관련이 적은 것이며 세련된 정신이 문화 속에서 빚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전통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전통이야말로 시의 소재가 되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작품은 그다음 시인의 전통이 되는 것이다. 전통이 중요한 과제가 될 때 그 전통의 정통성이 문제괸다. 엘리엇은 정통을 희랍, 라틴, 이탈리아 르네상스, 프랑스, 영국에 이어지는 서유럽 문화의 흐름에서 찾았다. 엘리엇의 비평은 그 '정통'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기록으로 보아야 하며, 설사 그 투쟁이 윌리엄 불레이크과 D.H. 로렌스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리게 했다 하더라도, 존 던과 제라드 홉킨스에 정당한 빛을 주었다는 사실로 회복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그가 시에 기여한 업적은 우선 과도한 감정을 배제할 때 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감동을 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T.E. 흄이나 에즈라 파운드의 견고한 이미지들을 프랑스 상징파들의 유연한 이미지와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프랑스 시인 쥘 라포르그의 회화체의 틀을 통해 이룩되지만 라포로그의 회화체 틀을 통해 이룩되지만 라포르그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다성성(多聲性)'이 가세된다.  다음으로 그가 새롭게 시에 도입한 것은 '콜라쥬' 수법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상(像)과 상의 연결을 위한 언어를 제거하고 그것들을 그대로 병치시키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의 시 읽기의 어려움은 대부분 여기서 나오지만 상과 상의 연결 부분에서 시인의 개인적 감정인자 약점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효과적인 수법인 것이다. 병치된 상들이 직접 독자에게 강렬한 힘을 발휘할 때 시인은 음험하게 숨어 그 힘의 모든 효과에 대하여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은 좀 더 복잡한 인간이다. 그는 스스로 제 작품에 주를 붙임으로써 위의 효과에 제한을 가하기도 했고, 1920년대 말의 일반적인 민주주의 조류와는 달리 자기는 "문학에 있어서 고전주의자. 정치에 있어서는 왕당파, 종교에 있어서는 영국 정교 내지 카톨릭"이라고 술회함으로써 인간적인 자신에에 제한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극도로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되 자기를 묶는 행위. 이것이야말로 서구의 지성이 이룩한 하나의 완성이며, 그것이 20세기의 심연 앞에서 행해졌을 때 20세기의 한 완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  에 대한 간단한 길잡이를 제시해 보자. 이 작품은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이다. 엘리엇 자신이 이 작품의 테마와 구조에 대해 원주(原註)에서 실마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제시 웨스턴이 지은 에서 제목과 구성과 많은 상징을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프레이저(1854~1941)의 가운데 식물 신화와 풍요 의식을 다루는 부분에서 많은 것을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웨스턴은 당시 인류학자들이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들 신화와 의식이 기독교, 특히 성배 전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궁했다. 그네는 어부왕 이야기에서 풍요 신화의 원형을 발견했다. 어부왕의 죽음, 병 혹은 성 불능이 그의 나라에 가뭄과 황폐를 가져오고 사람과 짐승에게는 생식력 불모를 가져온다. 이 상징적인 '황무지'는 순결한 기사가 그 땅의 한복판에 있는 위험 성당에 가서 여성 남성의 풍요 상징인 성배와 창에 대해 의식(儀式)적인 질문을 함으로써만 재생을 얻을 수 있다. 이 질문을 함으로써 왕을 낫게 하고 그 땅에 풍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원초적인 성배 신화와 풍요제(대체로 신이 죽었다가 재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와의 관계는 식물이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소생하는 계절의 순환적인 진행에 대한 인간의 공통적인 반응을 보여 준다. 기독교는 이 공통적인 반응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상당히 적극적으로 받으들인 흔적을 보여 준다. 원시 기독교도들이 물고기 상징으로 자신들을 나타낸 것은 어부왕과 관련이 있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자체도 풍요제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죽음을 통한 재생은 뿐 아니라 엘리엇의 여러 다른 시와 시극(詩劇)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에서는 그 모티프가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 내지는 종교적 자료를 사용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다채로운 즐거움도 주지만 동시에 이 작품을 어렵게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는 뒤에 숨어 있는 전거를 잘 모르더라도 섬세한 독자라면 전체를 '느낄 수'있을 만큼 적절하면서도 충격적인 다채로운 속도의 흐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작품을 하나의 긴 서정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 황무지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진정한 재생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휴양지에서 지껄이는 사람들은 진정한 새로운 삶을 원치 않는다. 재생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재생을 요구하므로 또한 잔인하다. 특히 이 부분은 콜라쥬 수법을 사용해서 효과를 보고 있다.  갑자기 구약성경의 에스겔적인 음성으로 문명의 메마름과 희망 없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는 낭만적인 정열과 실패한 사랑의 추억이 담긴 노랫소리로 바뀐다.  다음에 고대의 종교의식이 점치는 행위로 바뀐 황무지의 상황으로 바뀐다. 타로 카드의 원초적인 상징들이 속화되어 나타난다(시적으로는 이 속화된 상징들이 뒤에 가서 발견되는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현대 문명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상이 나타난다. 보들레르의 파리, 현대 런던, 단테의 지옥 및 연옥,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고 나서 화자는 저 위대한 부활 제식을 기괴한 정원 가꾸기로 바꾼다. 그러고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따다가 독자들도 같은 상황에 있음을, 공모자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 권태로운 유한부인이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실내 장식과 향수(香水)와 화려함이 감각을 마비시킨다. 다음에 이어지는 대화 혹은 독백(따옴표 부분은 여자의 말이고 나머지 부분은 그네의 남편 혹은 애인의 말 없는 대답이라고 보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과 세익스피어를 재즈로 바꾸기까지 이르는 패러디는 문화의 타락을 암시해 주고 삶의 무의미감을 고조시켜 준다.   이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노크'는 술집 바텐더가 문 닫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카운터에 치는 노크로 바뀐다. 그리고 등장인물은 앞서의 상류층 인물에서 하류층 인물로 바뀐다. 그들이 주고받는 생(生)과 성(性)이야말로 생식이 없는 황무지의 생과 성이다.  : 템스 강의 가을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문학의 유명한 작품의 부분들을 아이러니컬하게 인용하거나 왜곡함으로써, 그리고 과거의 고상한 제식 행위를 현대의 사소하고 음탕한 행위와 일치시킴으로써 괴기한 장면이 된다. 잠시 지중해에 풍요 의식을 퍼뜨린 스미르나 상인의 현대판을 보여 주고 나서 현대의 성(性)이 지닌 무서운 무의미의 사실적인 현장에 들어간다.  템스 강에서 유혹당한 이야기가 엘리자베스 여왕 때의 사랑과 비교되며 바그너, 세익스피어, 단테 들의 작품이 주는 메아리들과 함께 황무지의 성이 지닌 무의미와 저속함을 더 파고든다. 그리고 서양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동양의 부처의 정욕을 버리라는 호소로 끝맺는다.  : 자명한 것 같은 이 짧은 마디는 두 가지 상반되는 해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재생이 없는 수사(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현대적 상황)를 암시한다는 해석과, 재생에 앞선 희생적 죽음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있다. 두번째 설명을 따르는 비평가가 더 많지만, 이 마디에 나오는 죽음에는 이상한 고요함이 뒤따르고 있어 딱 결정하기 힘든 문제이다.  : 주에서 밝힌 세 가지 테마가 나타나고 예수가 죽임당한 풍요신과 관련이 맺어지나 아직 부활은 없다. 바위만 있는 풍경이 점점 열을 더해 가자 서양 문명이 낳은 위대한 도시들이 모두 악몽으로 바뀌는 비전에까지 이른다. 그러자 곧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위험 성당으로 장면이 바뀐다. 그 성당은 비어 있고 버림받는 것 같으며 지금까지 그곳을 찾아온 고행이 헛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닭이 울고 번개가 치며 풍요를 약속하는 비가 내린다. 천둥은 동양의 지혜의 틀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주라, 공감하라, 자제하라.' 그러나 우리는 적절히 주기에는 너무 신중하고 적절히 공감하기에는 너무 자신들에게 갇혀 있고 자제하기에는 자제를 당하도록 되어 있다. 구원은 아직 문제를 안고 있고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지탱해 보는' 상태를 보여 줄 뿐이다.    
231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 / 강순아 [한국] 댓글:  조회:1089  추천:0  2017-08-23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 강 순 아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눈부신 봄날, 가슴 붉은 어린 딱새 한 마리가 느티나무에 앉아 봄날을 노래한다.   '짹짹, 짹짹……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   '노란 봄볕 사이로 어린 딱새의 노래가 흩어지자 아지랑이도 덩달아 날아오른다. 아른아른 날아오르던 아지랑이는 해님이 한눈 파는 사이 산수유 가지에 꽂혔다. 산수유 그늘을 피해 쏘옥! 얼굴을 내민 노란 꽃다지. 무더기로 피어 웃고 있다. 갑자기 어린 딱새가 노래를 멈추고 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언제부터 오고 있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무리지어 궁월터를 지나 이 곳 능으로 오고 있었다. 산수유 노란 빛에 취해 오던 할머니 한 분이 어느 사이 꽃다지를 발견하고는,   '이것 봐. 이 꽃, 꽃다지 아냐?'   할머니 손잡고 따라오던 손녀가 동요를 흥얼거린다.   달래 냉이 꽃다지 나물 캐 보자.   종달이도 봄이라 노래하잔다…….   '그래, 맞아. 이게 꽃다지야, 꽃다지…….'   그 때야 무리지어 반짝이는 풀 이름이 생각난 듯 할머니들께서 환하게 웃으신다. 할머니 웃음 속으로 새소리가 떨어진다.   '짹짹, 짹짹…… 지지윗지, 지지윗지,지지윗…….'   '어? 이거 무슨 소리고? 새소리네. 아! 가슴이 붉은 딱새야.'   이번엔 할아버지들이 손뼉을 치며 나무위를 쳐다본다. 붉은 가슴털을 가진 작고 예쁜 새 한 마리.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호르르…… 날아간다. 건너편 나뭇가지 위로.   '세상에! 이 큰 능 위에 저 나무 좀 봐. 느티나무지? 오랜 세월 거기에서 저렇게 자랐구나.'   '오랜 세월? 그렇지. 이 능이 적어도 천 년은 넘었을 테니 오랜 세월이지.'   '얼마나 깊으면, 얼마나 넓으면 한 그루도 아닌 나무들이 이리 크게 자랐을까?'   경이롭게 능 주위를 바라보던 노인들이 능원을 빠져 나가자 그 곳은 텅 비었다. 햇빛이 이제 막 부풀어오른 잔디 위로 쏟아졌다. 가슴 붉은 어린 딱새가 다시 돌아와 느티나무에 앉는다. 하느님의 손길은 무섭게 빨랐다. 그리고 눈부셨다. 잔디가 파릇파릇 돋는가 싶더니 멀리 능 마을의 이팝나무가 꽃들을 피워댔다. 그것은 마치 흰구름 같았다. 그 사이 햇빛은 스스로 열에 들떠 안압지의 연못 물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슴이 붉은 어린 딱새는 오늘도 느티나무에 앉아 무엇인가 찾고 있다. 생각에 잠겨 있다.   '딱새야, 딱새야.'   '네? 할아버지.'   '뭘 찾고 있느냐? 찾는 게 보이느냐?'   '아뇨. 보이지 않아요.'   '무얼 찾는데? 먹이도 찾지 않고 그리 오래 앉아 있느냐?'   '연못 물요. 연못 물이 매일 조금씩  조금씩 어디로 숨어 버려요. 어디로 숨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허허…… 연못 물이 어디로 숨는다? 어디로 숨는지 그걸 모르겠다, 궁금하다, 그 말이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딱새는 보이는 모든 게 다 신기했다. 능 마을의 이팝나무. 꽃처럼 피어오르는 흰구름. 하룻밤 새 분홍빛 세상이 되어 버린 벚꽃길.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딘 보람도 없이 며칠 새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으는 분홍 꽃잎들. 그리고 연못 속의 물들은 어디로 숨어 버렸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딱새를 다시 할아버지께서 부르신다.   '딱새야, 그래. 아직도 그게 궁금한 게냐? 그건 말이다. 숨은 게 아니고 하늘로 올라간 게다.'   '네? 하늘로요?'   '그래. 곧 그것들은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연못 속에도 나뭇잎에도 나무 뿌리로도, 그리고 땅 속에도 깊이 스며들지.'   '땅속 깊이요? 그럼 할아버지도 비에 젖어……?'   '나? 나는 흙이 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흙이 되어 이렇게 나무를 키우고 꽃과 열매를 맺게 하고 있지. 이건 내 힘만으론 되는 게 아니란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촉촉하게 나무들의 뿌리를 적셔줄 수 없지. 너 조금 전에 이런 생각하고 있었지? 꽃은 왜 질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나만큼 오래 살다보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게야. 이제 정리를 해 주지. 모든 꽃과 식물들은 물만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양분이 있어야 하지.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꽃들, 동물들의 죽은 몸은 다 거름이 되어 다시 탄생하는 것들을 키운단다. 나도 죽어서 몸은 오래 전에 흙이 되었고, 이제 영혼만 너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 그런가요? 물·구름·비·싹·꽃…… 진다. 양분, 다시 틔운다……. 그런데 할아버지…… 정리가 잘 안 돼요.'   '정리할 게 뭐 있노? 돌고 도는 거지. 물이 구름이 되고, 구름이 비가 되고, 나무가 되고, 다시 물이 되고…… 내가 너고 네가 나고…… 서로 돕고 도우며 산다는 것.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되는 게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돌고 도는 것. 비도, 구름도, 나무도, 새도, 사람도. 하나 되어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서로 도와 함께 사는 것. 내가 너고 네가 나고……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지지윗, 짹 짹 짹…….'   혼자 중얼대던 가슴 붉은 어린 딱새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능원에 선생님과 함께 소풍 나온 학생들이 가까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신라의 능들은 대부분 어느 왕의 능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요? 왜 그랬을까요? 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까요?'   '그건 수수께끼란다. 신라의 수수께끼지. 천마총 무덤 안에도 그 당시의 부장품들은 들어 있지만 어느 왕이란 이름도 흔적은 없었다 한다.'   어린 딱새는 궁금한 게 또 하나 생각났다.   '할아버지도 옛날 신라의 왕이셨죠? 그런데 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어요?'   '내가 왕이었을 때 말이다. 많은 신라의 백성들이 내 앞에서 벌벌 떨었지. 왕은 백성들에겐 너무나 위대한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왕이라 해서 천 년 만 년 살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소용이고? 이렇게 한 줌 흙이 되어 나무의 거름밖에 되지 못하거늘……. 흔적을 남긴들 무엇하겠느냐? 그래서…….'   '찍짹, 찍짹…… 지지윗지, 지지윗, 지지윗…….'   가슴 붉은 어린 딱새는 알 듯 말 듯 꽁지를 아래 위로 흔들기만 했다. 아른아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찍 짹, 짹 찍…… 지지윗지, 지지윗지, 지지윗 지지윗…….'   가슴이 붉은 어린 딱새,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눈부신 봄날을 갸웃거리며 꽁지를 흔들고 있다. 아직도 알 듯 말 듯 아래위로 꽁지만 흔들고 있었다. 산수유꽃 사이를 지나온 연두빛 바람이 아지랑이 속을 맴돌며 능원에 노란 향기를 하늘 가득히 뿌리고 있었다. (2005년 5월『월간문학』)      강순아가 ''왕릉과 가슴이 붉은 딱새'에서 시도한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는 동심의 한 특성인 물활론적 사고 영역에서 가능하다. 무생물인 왕릉과 자연물인 새의 대화를 알아듣는 이는 어린이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동화 문학의 독자인 어린이와 동심을 소유한 어른을 통칭한다. 작가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자연을 인간과 조화시킨다.  어린이들의 공간 구성력을 감안했으면 한다.   작가는 역사적 소재인 왕릉을 작품 공간으로 옮겨와 환상의 기법을 보인다. 산수유 노란빛에 취한 궁궐터와 왕릉에서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 장면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천 년이 넘은 왕릉을 보고 감탄하는 딱새로 오버랩되는 환상적인 장면이 사실성을 더한다.   작가의 의도가 과다하게 노출되지 않고 환상적 요소를 가미하여 동화의 본질에 닿아 있다. 자연 회귀가 인간성 회복을 위한 궁극적 해결책임을 담아 낸다. (최 용)  
230    할머니와 손수레 ㅡ 강민숙 [한국 ]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7-08-23
할머니와 손수레 강 민 숙     골목 어귀 가로등 아래에 손수레가 한 대 서 있습니다. 전봇대에 비스듬히 기대 세워져 있는 이 손수레는 민희네 아랫방에 세들어 사는 할머니 것입니다.   지난 봄에 이 방으로 이사온 할머니는 동네 골목골목을 돌며 헌 신문지나 고물을 주워 모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이 곳 세검정에서 벌써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들 같으면 며느리가 해다 주는 밥상을 받고 앉았을 칠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할머니는 하루도 안 빠지고 일을 나갑니다.   화계쇼핑 앞에서 빈 상자를 차곡차곡 접고 있는 할머니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할머니도 자식이 없나 봐."   "그러게 말이야,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일만 하다니……."   할머니는 하루 종일 주워 모은 빈 상자들을 나일론 끈으로 단단히 묶었습니다.   해질 무렵이면 할머니는 이것들을 신영상가 뒤에 있는 고물상에 갖다 줍니다.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펴 봅니다. 하루 종일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한 탓인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픕니다. 그렇지만 마냥 그러고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지러 골목으로 갔습니다. 할머니가 세들어 사는 골목은 리어카도 못 들어올 정도로 길이 좁습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겨우 다니는 길이지만 할머니는 그 골목이 좋았습니다. 피곤할 땐 눈을 감고도 걸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골목을 걸어 들어가자 전봇대에 얌전히 기대 서 있던 손수레가 활개를 치며 할머니를 맞아 줍니다.   손수레를 보자 할머니는 기운이 솟았습니다.   "아이구, 네가 효자다!"   할머니는 손수레가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손수레를 구하기 전에는 주워 모은 폐품들을 머리에다 이고 고물상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고물상에서 이 손수레를 구한 뒤부터는 할머니의 일이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이 손수레를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매일같이 닦아 주고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는 저녁에는 가로등 아래에 기대 세워 놓고 행여 누가 끌고 갈까 봐 쇠줄로 매어 자물쇠까지 채워 놓곤 합니다.   "가자, 오늘도 많이 주워 놓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손수레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열면서 할머니가 손수레에게 말했습니다. 손수레도 애타게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앞장서 달려갔습니다. 손수레는 리어카보다 몸집이 훨씬 작지만 짐은 꽤 많이 실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 골목 저 골목을 돌며 하루 종일 주워서 묶어 놓은 폐품들을 손수레에다 차곡차곡 실었습니다.   화계쇼핑 앞에 있는 빈 상자들을 싣고 나자 더 이상 짐을 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낑낑대며 손수레를 끌고 신호등 앞으로 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힐끗 할머니와 손수레를 훔쳐보았습니다.   신호가 바뀌자 할머니는 비트적거리며 손수레를 밀고 횡단 보도를 건넜습니다.   효동빌라 앞에도 할머니가 묶어 놓은 폐품 두 뭉치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실을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는 행여 누가 그것들을 갖고 갈까 봐 손수레를 길 한쪽에 세워 놓고 폐품 뭉치들을 동해횟집 간판 뒤에다 숨겨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손수레를 밀고 육교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제 육교 아래만 지나면 바로 신영상가입니다. 그러나 육교가 문제입니다. 전에는 이 신영삼거리에 육교 대신 횡단 보도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신호에 따라 건너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신영삼거리에 육교가 설치되었습니다. 육교가 생기자 동네 사람들은 좋아했지만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매일같이 손수레를 끌고 이 곳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육교 아래까지 내려간 할머니는 주위를 한번 살펴본 뒤 아슬아슬하게 찻길로 들어섰습니다.   퇴근길의 삼거리는 몹시 붐볐습니다. 차들이 밀려 있는 틈을 타서 할머니가 손수레를 밀고 삼거리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차들이 빵빵거렸습니다. 구기터널 쪽에서 오던 차들이 좌회전 신호를 받고 북악터널 방향으로 돌자 할머니는 얼른 그 틈을 이용해서 길을 건넜습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은 할머니뿐만이 아닙니다. 길 가다 멈춰 서서 바라보던 사람과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모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어차피 다 이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고물상까지 손수레를 밀고 가자 온몸에 힘이 쏘옥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운동 삼아 조금씩만 해 오세요."   고물상 주인 김씨 아저씨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면 뭐 하우? 일하는 데까진 해야지."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폐품들을 내려 준 김씨 아저시는 만 원짜리 한 장을 할머니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수고하셨어요. 조심해 가세요."   신영상가 앞으로 나온 할머니는 차들이 밀려있는 틈을 이용해서 빈 손수레를 끌고는 얼른 길을 건넜습니다.   골목 어귀로 들어서자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푹 쉬어라."   할머니는 가로등 아래 전봇대 기둥에다 손수레를 묶어 놓고는 걸레로 먼지를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할머니는 골목 쪽으로 나 있는 문을 열었습니다. 할머니가 거처하는 작은 방 한 칸이 나왔습니다.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방안에서도 손수레가 마주 보입니다.   손발과 얼굴을 씻고 난 할머니는 저녁을 대강 챙겨 먹고 일찍암치 자리에 누웠습니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 줄 알았는데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집니다. 시집간 딸과 두 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할머니는 또 콧등이 시큰해지고 가슴이 아려 옵니다. 자식들 생각을 하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어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안 해 본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이건만 장가가더니 한 달 내 가야 혼자 있는 어미에게 안부 전화 한 통 하는 놈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둘이나 있어도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이고 살 데가 없습니다. 큰아들네는 아들 며느리가 하루가 멀다고 티격태격 싸워대서 마음이 편칠 않고, 둘째는 둘째대로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대니 괜히 아들에게 짐만 되는 것 같아 같이 살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폐품을 주우며 혼자 살아갑니다. 몸이 고달파서 그렇지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습니다.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장가보내고 나면 다 남이야. 암, 그렇구말구…….'   할머니는 이렇게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 때였습니다. 한 떼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할머니 방문 앞을 지나갑니다.   "넌 엄마 선물 뭐 샀니?"   "스카프. 넌?"   "난 예쁜 손수건 샀어."   내일이 어버이날이라고 아이들이 선물을 사 들고 재잘거리며 골목을 지나갑니다. 그러자 할머니의 머릿속에 갑자기 작은아들이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작은아들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버이날 저희 형과 함께 찾아오겠다는 전화였습니다.   '그래도 못난 에미를 잊지 않고 찾아오겠다니……. 에이구, 부모자식 사이라는 게 다 뭔지…….'   초저녁이 되자 소쩍새가 옆집 고목나무에서 구슬프게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내일 아들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골목으로 나 있는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가로등이 환히 켜져 있는 골목에는 카네이션을 사 들고 달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할머니는 하얀 고무신을 찾아 신고 골목으로 내려섰습니다. 전봇대에 기대고 서 있던 손수레가 할머니를 보자 반갑게 맞아 줍니다.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만히 쓰다듬어 봅니다.   지난 삼 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를 도와주던 손수레였습니다. 손수레는 마치 '할머니, 뭘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네가 자식보다 낫구나.'   할머니는 손수레를 가만히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손수레를 보자 할머니는 갑자기 아까 줍다 만 빈 상자 생각이 났습니다.   '잠도 안 오고 한데, 아까 하다 만 일이나 계속해야지…….'   할머니는 미닫이문도 활짝 열어 놓은 채 손수레를 끌고는 바삐 골목을 빠져 나갔습니다.   손수레를 끌고 문방구 앞을 지나다가 안집 민희 엄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어두운데 어딜 가세요?"   "잠이 안 와서 아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려구……."   "할머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병나면 어쩌시려구요?"   "먼저 들어가. 내 금방 돌아올게."   민희 엄마와 헤어진 할머니는 화계쇼핑 앞으로 갔습니다.   빈 라면 상자와 과일 상자들이 길가에 널려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이것들을 하나하나 납작하게 펴서는 묶었습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손주 녀석도 데려올지 모르니까 함께 놀아야지요. 놀이 공원에라도 갈 작정입니다. 작년에는 그러지 못했었지만 올해는 꼭 그럴 생각입니다.   손수레에 빈 상자를 반쯤 실은 할머니는 아까 길 건너 동해횟집 간판 뒤에 숨겨 놓은 폐품들을 가지러 길을 건너려 했습니다.   길을 건너려면 소방서 앞 횡단 보도까지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일을 한 탓인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거기까지 걸어 올라가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화계쇼핑 앞에서 바로 길을 건너려 했습니다.   길은 차들로 만원이었습니다. 차 소리가 귀에 따갑고 차들이 늘어선 길은 온통 빨간 샐비어 꽃밭 같았습니다.   시내 쪽으로 나가는 차들이 밀려 있는 틈을 타서 할머니는 찻길로 내려 섰습니다. 그리고는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가 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끼이익―!'   그 날 밤, 소쩍새들은 더욱 애끓는 소리로 밤새 울었습니다.      할머니와 손수레   갖은 고생을 다하며 키웠건만 결혼해 나간 뒤에는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아들딸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우리의 그런 현실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고 그린 작품입니다.   자식의 부양 대신 손수레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할머니가 어버이날을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할 일입니다.      강민숙   1948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습니다.   1983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노천명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슬픈 눈의 코카》 《풀과 나무의 집 아이들》 등이 있습니다.    
229    워즈워드 시모음 댓글:  조회:4037  추천:0  2017-08-23
워즈워드 시모음   초원의 빛 / 워즈워드  한 때엔 그리도 찬란한 빛으로서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돌이킬 길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서러워하지 않으며  뒤에 남아서 굳세리라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이 가슴에 품어서  인간의 고뇌를  사색으로 달래어서  죽음도 안광에 철하고  명철한 믿음으로 세월 속에 남으리라    우리는 너무 세속에 묻혀있다 / 윌리엄 워즈워드  우리는 너무 세속에 묻혀 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벌고 쓰는일에 우리 힘을  헛되이 소모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 마저 저버렸으니  이 비열한 흥정이여!  달빛에 젖가슴을 드러낸 바다  늘 울부짖다  시들은 꽃포기 처럼 잠잠해지는 바람  이 모든 것과 우리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감동 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이여!  차라리 사라진 옛믿음으로 자라는  이교도나 되어  이 아름다운 풀밭에 서서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을 풍경을 바라보고  바다에서 솟아나는 프로테우스를 보고,  트라이튼의 뿔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수선화  ─윌리엄 위즈워드  골짜기와 언덕 위로 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이다가  나는 보았네  호숫가 나무 아래  미풍이 하늘거리는  한 무리의 황금빛 수선화를  은하수에서 빛나며  반짝거리는 별처럼  물가를 따라  끝없이 줄지어 피어 있는 수선화  수 많은 꽃송이가  즐겁게 춤추며 고개를 흔드는 것을  주위의 물결도 춤을 추었으나  기쁨의 춤은 수선화를 다르지 못 했으니!  이렇게 흥겨운 꽃밭을 벗하여  어찌 시인이 흥겹지 않으랴!  나는 지켜보고 또 지켜 보았지만  그 풍경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미처 몰랐으니  가끔 홀로 생각에 잠겨  내 자리에 누으면  고독의 축복인 마음에 눈에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추네   나는 구름처럼 외롭게 방황했네  ─윌리엄 워즈워드  계곡과 언덕 위로 높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외롭게 방황하다  문득 나는 한 무리를 보았네.  수많은 황금빛 수선화들  호숫가 나무 아래서 미풍에 나부끼며 춤추는 것을.  그들은 은하수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지고,  만의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는 선 속에 펼쳐져 있었네  나는 한 눈에 보았네. 수천 송이 수선화가  머리를 흔들며 흥겹게 춤추는 것을.  물결도 그들 옆에서 춤추었지만 꽃들은  환희 속에서 활기 넘친 몸짓을 했네  시인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네,  그토록 명랑한 무리속에서  나는 바라보고 -- 바라보았지만 -- 거의 생각할 수 없었네  그 광경이 얼마나 값진 것을 내게 가져다 주었는지를.  공허속에서 또는 우수에 젖은 심상속에서  종종 나의 긴 소파에 누워 있을 때면,  고독의 행복속에 있는 내부의 눈에  수선화들이 문득 떠오르곤 하네.  그러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고,  그 수선화들과 함께 춤추고 있네.    외로운 처녀  ─윌리엄 워즈워드  비둘기강 가 외진 곳에서  그녀는 살았습니다  칭찬해주는 사람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는 처녀였습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끼 낀 바위 틈에  피어난 오랑캐처럼  하늘에서 반짝이며  홀로 빛나는 샛별처럼  그렇게 아름다웠답니다  하지만 그녀 이름없이 살다 죽었을 때  그 일 아는 사람 몇몇 일 뿐  이제 그녀는 무덤 속에 누웠으니  아, 크나큰 내 이 허무함이여!    내 가슴 설레이고 /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설레이고  어릴 때에도  어른된 지금에도  늙어서도 그러하려니.  아니면 목숨은 죽은 것!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나의 여생, 자연의 경건(敬虔)속에  어울려 살고파.    3 월 / 윌리엄 워즈워드      -브러더즈-워터 기슭의 다리      위에서 쉬는 사이에     수탉이 꼬꼬댄다. 시내가 흐른다. 새들이 지저귀고 호수가 빛나고 푸른 들이 별 속에 잠들어 있다. 늙은이도 어린 것도 장정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마소가 풀을 뜯는다. 마흔 마리가 도무지 하나 같구나!   패배한 군사처럼 눈은 물러가고 산 꼭대기에서나 겨우 지탱을 한다 이따금 고함치는 소 모는 젊은이 산 속에는 기쁨 샘 속에는 생기 조각구름 떠가고 온통 푸른 하늘 비는 멀리 가버렸구나!   무지개 /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이느니, 나 어린 사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외진 곳에서 / 윌리엄 워즈워드   비둘기 江가의 외진 곳에서   그녀는 살았습니다. 지켜 주는 사람도   사랑해 주는  이도 없는 처녀였지요.   눈길이 안 닿는 이끼 낀 바위틈에   피어 있는 한떨기 오랑캐꽃! 샛별이 홀로 빛날 때처럼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웠지요.   이름없이 살다가 죽었을 때   그것을 안 사람은 있는 둥 마는 둥, 이제 그녀는 무덤 속에 누웠으니 아! 크나큰 이 내 허전함이여!   선 잠이 내 혼을 / 윌리엄 워즈워드     선잠이 내 혼을 봉해 놓았었다. 나는 삶의 두려움을 몰랐다. 그녀는 초연한 사람인 듯 싶었다. 이승이 세월의 손길에.   이제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가운도 없다. 듣도 보도 못한다. 바위와 돌멩이와 나무와 더불어 하루하루 땅덩이의 궤도를 돌고 있을 뿐. 그녀는 기쁨의 환영幻影 / 윌리엄 워즈워드     처음으로 내 눈에 비쳤을 때 그녀는 기쁨의 환영이었다. 순간을 치장하기 위해 온 귀여운 그림자였다. 눈은 초저녁 별처럼 아름다왔고 검은 머리채 또한 초저녁 같았다. 그러나 그 밖의 모든 것은 오월의 상쾌한 새벽에서 나온 것 출몰하고 놀래주고 매복하는 춤추는 몰골, 즐거운 모습.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니 선녀이면서 여인! 살림살이 거동이 거침없이 가볍고 구김살 없는 처녀의 발걸음 달콤한 추억과 달콤한 희망이 함께 어울린 얼굴, 사람됨의 나날의 양식인 덧없는 슬픔과 하찮은 농간 치켜줌과 꾸지람과 사랑과 입맞춤, 눈물과 미소에 알맞게 환하고 착한 여인이었다.   이제 나는 차분한 눈으로 그녀 몸매의 고통을 본다. 깊은 생각을 숨쉬는 존재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길손 단단한 이성理性, 온전한 의지意志 끈기와 빛나는 눈, 기운과 솜씨를 두르 갖춘 일러주고 달래주고 호령하는 빼어나게 태어난 흠없는 여인 일변 눈부신 천사의 빛을 두른 선녀였다.   낯 모르는 사람 속을 / 윌리엄 워즈워드     바다를 건너서 여러 나라   모르는 사람 속을 여행했었네 내 나라 영국이여!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는지 그때 비로소 그것을 알았네   그 우울한 꿈은 지나갔네   두 번 다시 그대 바닷가를 떠나지 않으려나   내 더욱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   그대의 산 속에서   사랑의 기쁨을 알았노라 내 그리던 여인도   그대의 화로 곁에서 물레를 돌렸느니.   아침이 보여 주고 밤이 숨겼던   루시가 놀던 집 루시가 둘러 본 마지막 푸른 들판   모든 것이 그대로 그대의 것이어니.   가을걷이 하는 처녀 / 윌리엄 워즈워드     보라!  들판에서 홀로 가을걷이하며 노래하는 저 고원의 처녀를. 일어서라, 아니면 슬며시 지나가라. 홀로 베고 다발로 묶으며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귀 기울려라!  깊은 골짜기엔 온통 노래소리가 있구나.   아라비아 사막에서 그늘진 오아시스를 찾아 쉬는 길손에게 어떤 나이팅게일도 이렇듯 반가운 노래른 들려 주지 못했으리. 아득히 먼 헤브리디이즈 섬들 사이 바다의 정적을 깨뜨리며 봄에 우는 뻐구기도 이렇듯 떨리는 목소리는 들려 주지 못했으리.   무엇을 노래하는지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으려나? 구성진 노래는 아마도 이득히 먼 서러운 옛일이나 옛싸움을 읊은 것이리. 아니면 한결 귀에 익은 오늘날의 이 일 저 일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피치 못할 슬픔과 이별과 아픔이리.   노랫말이 무엇이든 그 처녀는 끝이 없는 듯 노래했으니 나는 들었네, 허리 굽혀 낫질하는 그녀의 노래를 --- 꼼짝않고 잠잠히 귀 기울리다 내 등성이를 올라 갔으니 그 노래소리 이미 들리지 않았으나 내 가슴에 그것은 남아 있었느니.   노고지리에게 / 윌리엄 워즈워드     하늘의 떠돌이 시인!  하늘의 순례자여! 너는 시름 많은 대지를 업신여기느냐? 아니면 두 나래 솟아 오를 때도 가슴과 눈은 보금자리와 함께 이슬 젖은 땅 위에 있느냐? 떨리는 나래를 진정하고 저 노래 그친 채 멋대로 내려와 앉는 그 보금자리!   바라뵈는 끝까지, 그리고 그 너머로 솟아 오르라, 담보 큰 새야! 사랑이 부채질하는 노래는 -너와 네 어린 것 사이엔  끝 모르는 연줄이 있다- 평원의 가슴을 서서이 설레게 한다. 땅 위의 봄과는 상관없이 노래하니 자랑스런 특권이리.   그늘진 숲속일랑 나이팅게일에나 맡겨라. 네 몫은 눈부신 빛의 은밀한 구석 거기서 너는 세상에 내려 쏟는다. 보다 거룩한 본능으로 화성의 홍수를, 솟아 오르나 헤매지 않는 너는 지혜의 왕자 천국과 고향의 엇갈림일진저.   뻐꾸기에 부쳐 / 윌리엄 워즈워드     오, 유쾌한 새, 손님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라 부르랴, 헤매이는 소리랴 부르랴?   풀밭에 누워서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이산 저산 옮아 가는구나.   골짜기에겐 한갖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 테지만 너는 네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여! 상기도 너는 내게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학창시절에 귀 기울렸던 바로 그 소리 숲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를 찾으로 숲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린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 온다.   오, 축복받은 새여!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같은 선경처럼 보이는구나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가엾은 스잔의 낮꿈 / 윌리엄 워즈워드         웃드거리 모퉁이에서 햇볕이 들면 내걸린 찌빠귀가 목청높이 운다. 벌써 석삼년째, 가엾은 스잔이 이곳을 지나다 아침의 고요 속에 새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황홀한 가락, 그런데 어찌된 까닭일까? 불현듯 그녀는 본다. 솟구치는 산을 나무들의 모습을 로드베리를 흘러 가는 짙은 안개를 치입사이드 골짜기로 흐르는 강물을.   또한 그녀는 본다. 우유통을 들고 오갔던 골짜기 그 골짜기 한복판의 푸른 목장을, 그녀가 정 부쳤던 단 한 채 비둘기집 같은 외딴 채 오두막을.   지켜 보던 그녀 마음은 천국에라도 간 듯, 하지만 안개도 강물도 산도 그늘도 온통 사라진다. 강물은 흐르려 하지 않고 산도 솟구치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의 눈은 온통 생기를 잃어버렸다!   루시 그레이 / 윌리엄 워즈워드     루시 그레이 얘기는 가끔 들었다. 광야를 건너 가다가 우연히 동 틀 무렵 그 외로운 아이를 보게 되었다.   말벗도 배필도 아지 못한 채 그녀는 넓은 황무지에서 살았다. 人家의 문가에서 자라는 아름다운 꽃나무처럼.   아직도 볼 수가 있다. 뛰노는 새끼 사슴과 풀밭에서 뛰는 산토끼를 그러나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루시 그레이의 어여쁜 얼굴은.       이 말에 아버지는 낫을 들고 나뭇단의 새끼를 잘랐다. 그는 제 일에 열을 내었고 루시는 초롱불을 손에 들었다.   사슴보다도 더 신이 났다. 장난치는 그녀의 발걸음이 채이는 눈가루를 날려 연기처럼 오르게 했다.   불시에 눈보라가 불어 닥쳤다. 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그녀는 헤매었으나 읍에는 이르지 못했다.   처참해진 부모들은 밤새 고함치며 멀리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인도해 줄 소리도 뵈는 것도 없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서 있었다. 황야를 굽어 보는 등성이에 자기 집 대문 가까이에 나무 다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느껴 울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소리쳤다. 바로 그 때 어머니는 눈 속에 난 루시의 발자국을 보았다.   두 사람은 가파른 산마루를 작은 발자국 쫓아 내려 갔다. 흥이 난 산사나무 울타리를 지나 길고 긴 돌담을 따라.   이어 활짝 트인 들판을 가로 질렀다. 발자국은 여전하였다. 두 사람은 별일없이 따라 가서 나무 다리에 닿았다.   눈 덮인 둑에서부터 하나 하나 발자국을 따라 갔다. 다리의 널빤지 한 복판에서 자국은 이제 끊겨져 있었다!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지금껏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외진 광야에서 어여쁜 루시 그레이를 볼 수 있다고.   가파르건 순탄하건 가리지 않고 그녀는 길을 간다. 뒤도 돌아 보자 않고 일변 그녀의 노래소리는 바람 속에 한숨 지으며.   다리 위에서 / 윌리엄 워즈워드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이렇듯 뿌듯이 장엄한 정경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바보이리 런던은 지금 아침의 아름다움을 의상처럼 입고 있구나 말없이 벌거벗은 채 배도 탑신도 둥근 지붕도 극장도 사원도 들판과 하늘에 드러나 있고 온통 내없는 대기 속에 눈부시게 번쩍이는구나 태양도 이 보다 더 아름답게 골짜기와 바위와 등성이를 아침의 눈부심 속에 담근 적이 없으리. 내 이처럼 깊은 고요를 보도 느끼지도 못했으니 강은 유연히 제뜻대로 흐르고 집들도 잠들어 있는 듯 아 ! 크낙한 도시의 심장도 잠자코 누워 있구나.
228    프레베르 시모음 댓글:  조회:2878  추천:0  2017-08-20
프레베르 1900~1977 뇌이쉬르센 출생. 파리에서 자랐으며, 1930년까지는  초현실주의 작가 그룹에 속하는 시인으로서 활약하였는데,1925~29년에 초현실주의 작가 로베르 데스노스, 이브  탕기,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등과  활동을 같이  하  면서 오랜 전통의 구전시를 초현실주의 풍의 '노래시'라  는 형식으로 만들어서 매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그 관심을 영화로 돌려 《악마는 밤에 온다》 《말  석 관람객들》 등의 명작 시나리오를 썼다. 초기의 시에는 쉬르레알리슴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샹송풍의 후기 작  품에서는 무엇보다도 우열(愚劣)과 불안의 시대에 대항  하는 통렬한 풍자와 소박한 인간애가 평이하고 친근감 있는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파롤 Paroles》  (1948) 《스펙터클》  (1951)  등은 그와 같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대표작이다. J.  코스마가 작곡한 샹송 《낙  엽》의 작사자  이기도 하다.   주요저서:《파롤 Paroles》《스펙터클》   쟈크프레베르 시모음   고양이와 새 /쟈크프레베르  온 마을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상처 입은 새의 노래를 듣네  마을에 한 마리뿐인 새  마을에 한 마리 뿐인 고양이  고양이가 새를 반이나 먹어 치워 버렸다네  새는 노래를 그치고  고양이는 가르랑거리지도  콧등을 핥지도 않는다네  마을 사람들은 새에게  훌륭한 장례식을 치르고  고양이도 초대받아  지푸라기 작은 관 뒤를 따라가네  죽은 새가 누워 있는 관을 멘  작은 소녀는 눈물을 그칠 줄 모르네  고양이가 소녀에게 말했네  이런 일로 네가 그토록 가슴 아플 줄 알았다면  새를 통째로 다 먹어 치워 버릴 걸  그런 다음 얘기해 줄 걸  새가 훨훨 날아가는 걸 봤다고  세상 끝까지 훨훨 날아가더라고  너무도 먼 그곳으로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면 네 슬픔도 덜어줄 수 있었을 걸  그저 섭섭하고 아쉽기만 했을 걸  어떤 일이든 반쪽만 하다 그만두면 안된다니깐    나는 이런 사람 / 쟈크 프레베르  나는 이런 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웃고 싶으면  큰 소리로 웃고  날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매번 다르다 해도  그게 어디 내 탓인가  나는 이런 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하지만 넌 더 이상 무엇을 바라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태어났지  내 발뒤꿈치가 아주 높이 솟았다 해도  내 가슴이 너무도 거칠다 해도  내 두 눈이 이다지 퀭하다 해도  네가 그걸 어쩌겠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이런 사람  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좋은 걸  네가 그걸 어쩌겠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인데  그래 난 누군가를 사랑했었지  누군가 날 사랑했었지  어린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오직 사랑밖에는 할 줄 모르듯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듯이...  왜 내게 묻는 거지  난 너를 즐겁게 하려고  이렇게 있고  바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아름다운 계절 / 쟈크 프레베르     빈 속에 길 일고 얼어붙은 채 외롭게 무일푼의 열여섯 살 소녀가 꼼짝않고 서 있는 콩코르드 광장 정오 팔월 십오일   너를 위해 내사랑아 / 쟈크 프레베르   나는 새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새를 샀지 너를 위해 내 사랑아 나는 꽃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꽃을 샀지 너를 위해 내 사랑아 나는 고철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쇠사슬을 샀지 무거운 쇠사슬을 너를 위해 내 사랑아 그리고 나는 노예 시장에 가보았지 그래 나는 너를 찾아 헤맸지만 너를 찾지 못했지 내 사랑아   하느님 아버지 1) / 쟈크 프레베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다 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뉴욕의 신비도 있고 파리의 신비도 있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못지 아니하니 우르크2)의 작은 운하며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이며 모를레의 강이며 캉브레의 박하 사탕3)도 있고 태평양과 튈르리 공원의 두 분수도,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도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과 함께 여기 그냥 땅위에 널려 있어, 그토록 제가 신기한 존재란 점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옷 벗은 처녀가 감히 제 몸 못 보이듯 저의 그 신기함을 알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 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그득하고 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용병들과 더불어 그득하고4) 사철도 있고 해(年)도 있고 어어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습니다. 5)     1) 와 직역할 수 있는 이 라틴어 제목은 < 주기도문>을 뜻한다. 2) 우르크 운하 프랑스의 우르크  강은 마마른느 강와 합류하도록 되어 있으나      80Km에 달하는 아름다운 우르크 운하와 연결되어 센 강과도 만난다. 3) 프랑스의 강 이름인 모를레와 지명인 캉브레는 말운의 효과를 위하여 선택된 듯.     물론 시인이 사랑하는 가난한 고향 브르타뉴에 있는 모를레 강은 개인적인 애착과     무관하지 않다. 캉브레의 박하 사탕은 동시에 못난이의 바보짓이라는 뜻도 겸하고     있다. 4) 나으리maitres, 신부pretre, 배신자traitre 그리고 용병reitre은 다 같이 마지막 음절     이 같고, 실제로 프레베르에 있어서는 세상의 소박한 인간 본연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시인의 반기독교적인 태도, 즉 자연인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5) 반전주의자인 프레베르는 전쟁 무기의 차고 단단한 질감과, 자연물이며 부서지기 쉽고     인간적인 지푸라기(농사꾼, 가난한 사람들)의 감각을 대비시키고 있다.     센가 / 쟈크 프레베르     저녁 열시 반 센 가街 어느 길모퉁이에 한 남자가 비틀거린다---- 모자를 쓰고 바바리 코트를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어떤 여자가가 그를 흔든다---- 그녀가 그를 흔들며 그에게 말을 한다 그는 머리를 흔든다 그의 모자는 뒤집혀 씌어져 있고 여자의  모자는 뒤로 넘어지려 한다 그들은 둘 다 몹시 창백하다 남자는 분명 가버리고 싶어한다---- 사라져버리고---- 죽어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여자는 미치도록 살고 싶다 그의 목소리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안 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탄식---- 명령---- 절규---- 목소리는 그토록 욕망에 차고 또한 슬프고 또한 생명에 넘치니---- 겨울 묘지의 묘석 위에서 떨고 있는 병든 갓난아기---- 어느 생명의 외침 문틈에 끼인 손가락---- 하나의 노래 하나의 문절文節 쉬임없이 대답도 없이---- 되풀이되고---- 남자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눈이 돌아간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팔로 몸짓을 하고 말이 되살아나고 센 가 길모퉁이에서 여자는 계속한다 지칠 줄도 모르고---- 불안한 그의 질문을 계속한다 치료할 길 없는 상처 피에르 사실을 말해 봐---- 어리석고 거창한 질문 피에르는 무엇을 대답할지 모른다 그는 정신이 없다 피에르란 이름의 청년은---- 그는 웃음을 지으며 건네주고 싶다 그는 거듭 말한다 이것 봐 진정해 정신이 돌았어 그러나 제대로 말한 것 같지 않다 저의 입이 어찌하여 웃음으로 뒤틀렸는지 그는 보지 못한다 그는 알 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세상이 그의 위에 내려앉아 목을 조인다 그는 저의 맹서에 사로잡인 포로---- 빚을 갚으라고 조른다---- 그의 앞에는---- 계산하는 기계---- 연애 편지를 쓰는 기계 괴로워하는 기계가 그를 붙잡는다---- 그에게 매달린다---- 피에르 사실을 말해 봐.   열등생 / 쟈크 프레베르   그는 머리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게는 그렇다고 하고 그는 선생에게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선생이 질문을 한다 별의별 질문을 한다 문득 그는 폭소를 터트린다 그는 모두를 지워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함정도 교사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도 모른다는 듯 모든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흑판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귀향 / 쟈크 프레베르     어느 브르통1)이 온작 못된 짓을 다한 후 고향에 돌아왔다네 그는 두아른네 공장 앞을 거닐었지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 그는 몹시도 슬펐지. 크레프2)를 먹으러 크레프집에 들어갔지 그러나 먹을 수가 없었지 그 무언가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았지 그는 값을 내고 밖으로 나왔지 담배불을 붙였지 그러나 피울 수가 없었지.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 안 좋은 것이 그 무엇인가 머릿속에 들어 있어 점점 더 슬펐지 문득 생각이 떠올랐지. 어렸을 때 누군가 말했었지 그래서 여러 해 동안 그는 감히 어떤 일도 못해봤지 길도 못 건너고 바다로 떠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못했지. 그는 생각났지. 모든 예언을 한 것은 그레지야르 아저씨였지 누구에게나 재수 없던 그레지야르 아저씨 그 못된 치였지! 그래 브르통은 생각했지 보지라르 가街3)에서 일하는 여동생을, 전쟁에서 죽은 형을, 그가 본 모든 것을 생각했지 그가 한 모든 것을. 슬픔이 가슴을 조여 다시 한번 담뱃불을 붙여보려 했지 그러나 피우고 싶은 생각이 안 나 그래 그레지야르 아저씨에게 가 볼 결심. 그는 찾아가서 문을 열었지 아저씨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는 아저씨를 알아봤지 그래 그에게 말했지 그리곤 그의 목을 비틀었지 그래 그는 캥페르4)의 단두대에서 끝장을 보았지 두 다스의 크레프를 먹은 뒤에 담배 한 가치를 피우고 난 뒤에     1)브르통; 이 말은 프랑스의 브르타뉴 출신의사람을 칭하는 말. 16세기        이후에야 프랑스와 합병된 이 지방은 수도권에서 소외되어 가난하        고 풍토와 습속이 특이하다. 시인은 고향인 이 지방에 유별난 애착        을 갖는 것 같다. 이 시는 물론 신문의 일반 기사와 같은 특유한 분        위기를 담고 있다. 2)크레프; 밀가루와 달걀 노른자위를 섞어 부티는 일종의 전. 설탕, 치즈,        럼주 등을 치고 말아서 먹는 간식의 일종이다. 3)보지라르 가: 파리의 제6구에 있는 좁고 기나긴 거리 이름으로 시인이          소년 시절을 보낸 서민가 4)캥페르; 브르타뉴의 도시명 로 이름난 곳.   나의 집에 / 쟈크 프레베르   나의 집에 당신은 오시겠습니다 사실 이건 나의 집도 아니랍니다 누구의 집인지 나도 모릅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얀 벽에 붉은 고추들이 걸려 있을 뿐 나는 오랫동안 이집에 있었지만 아무도 찾는 이 없었지만 언제나 언제나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말해 이렇다 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침이면 때때로 짐승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당나귀처럼 짖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발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발이란 것은 참으로 영리한 것이어서 당신이 멀리멀리 가고 싶을 때에는 당신을 멀리멀리 데려다주고 당신이 나가고 싶지 않으실 때는 그 곁에 남아서 친구해 준답니다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춥니다 발 없이 춤추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이처럼 바보 같은 말을 하려면 때로는 사람들처럼 바보같이 되어야겠지요 그들의 발처럼 바보 같고 팽송처럼 명랑해야 되겠지요 팽송은 사실 명랑하지도 않답니다 제가 즐거울 때 팽송은 그냥 즐거워할 따름. 제가 슬플 때 팽송은 슬프고, 혹은 즐겁지도 슬프지도 아니하고 팽송이 도대체 뭘 알기나 한답니까 사실 그놈은 진짜 그런 이름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 새를 그렇게 불렀을 뿐 팽송 팽송 팽송 팽송   이름이란 그토록 이상한 것이지요 마르탱 위고 빅토르는 이름1)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이름 왜 저렇게가 아니고 이렇게 부르지요 한 때의 보나파르트가 사막을 지나갑니다 황제의 이름은 낙타라고 불립니다2) 그에겐 금고마金庫馬와 경마 서랍이 있답니다3) 저 멀리 세 개의 이름뿐인 한 남자 이름은 탱탕통일 뿐4) 거창한 존함 따윈 없습니다 조금 더 멀리는 또 그 누군가 아무거나. 훨씬 더 멀리는 아무거나 그런데 이 모두가 어쨌다는 것입니까   내 집에 너는 찾아오리라5) 나는 다른 생각도 하지만 그 생각뿐 그리고 네가 내 집에 들어올 땐 너는 옷을 모두 벗고 하얀 벽에 걸린 붉은 고추와 같은 네 붉은 입술로 다 벗고 가만히 서 있으리라 그리고 너는 누우리라 나는 네 곁에 누우리라 그렇지 내 집도 아닌 나의 집에 너는 오리라     1)유명한 이름 중의 하나로 선택해 본 프랑스의 대시인 빅토르 위고 거기다가   가장 흔한 이름 마르탱을 붙여본 것. 2)문맥 속에서 보통명사인 낙타떼를 대문자로 쓰고 고유명사인 보나파르트를   소문자로 써서 위치를 고의로 바꾸어놓았다. 3)복합명사인 경마용 말과 금고 겸용 서랍의 반씩을 교체시켜 뜻 없는 어휘를    고의로 만들어본 것. 4)탱탕통은 거창한 이름과 뜻 없는 소리를 대비시키기 위하여 지어낸 의성어류   의 말. 5)제 1연의 경칭 이 나의 집(문명이 비어버린 집)의 세례를 통하여 친숙한   로 변신한다. 모든 의례적 절차를 벗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꿈에 도달   한다.   느긋하고 푸짐한 아침 / 쟈크 프레베르   끔찍해 스테인리스 카운터에 삶은 달걀을 깨는1) 그 나직한 소리는 끔찍해 배고픈 사내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달걀 깨는 소리는 끔찍해 아침 여섯 시 백화점 유리창에 비쳐 보이는 배고픈 사내의 낯짝도 끔찍해 먼짓빛 그 낯짝도 끔찍해 포탱 상점2)의 진열장 유리 속에서 그가 바라보는 건 그러나 제 낯짝이 아니야 낯짝이야 아무렴 어때 그가 그리는 건 그가 상상하는 건 다른 낯짝 예컨데 송아지 낯짝 식초 소스로 양념한 송아지 낯짝 아니면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그 무슨 낯짝 그래서 그는 달콤하게 턱을 움직이지 달콤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이를 갈지 세상이 그의 머리를 삶아 먹어도 세상을 어쩔 수야 없으니까 그는  하나 둘 셋 손꼽아 보네 하나 둘 셋 못 먹고 굶은 지 사흘째 이럴 수가 없다고 사흘째 되뇌어도 소용이 없네 이럴 수가 있는 걸 사흘 낮 사흘 밤 굶고 지내걸 이럴 수가 있는걸 저 진열장 뒤에는 저 햄통들 저 술병들 저 통조림들 죽은 생선은 깡통이 보호하고 깡통들은 진열장이 보호하고 진열장은 순경이 보호하고 순경은 공포심을 보호하지 여섯 마리 불쌍한 정어리를 위해 바리케이트도 많아라 --- 좀 떨어진 곳에는 카페 크림 친 커피와 따뜻한 반달빵3) 사내는 비틀거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안개 끼는 이름들 안개 끼는 이름들 먹고 싶은 정어리 삶은 달걀 크림 친 커피 럼을 탄 커피 크림 친 커피 크림 친 커피 피를 탄 크림 친 커피!---- 동네에서 아주 존경받던 한 사내가 백주 대낮에  칼을 맞았네 뜨내기 살인자가 2프랑을 강도질했네 술은 탄 커피 한 잔에 칠십 상팀 버터 바른 빵 두 개 그리고 팁으로 이십오 상팀 끔찍해 스테인레스 카운터에 삶을 달걀을 깨는 그 나직한 소리는 끔찍해 배고픈 사내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그 소리는 끔찍해   1) 프랑스 서민들은 흔히 동네 카페의 스테인리스(사실은 주석) 카운터 앞에 서서     카페 주인이나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침 식사하기를 좋아한다. 아침     식사는 주로 버터 바른 빵과 크림 탄 커피, 그리고 삶은 달걀(그 달걀을 카운터     바닥에 대고 깬다)   2) 프랑스에서 한때 많이 볼 수 있었던 식료품 체인 스토어.   3) 아침 식사에 즐겨 먹는 빵인 크루아상.   가정적1)  / 쟈크 프레베르   어머니는 뜨게질을 한다 아들은 전쟁을 한다 어머니는 그게 아주 당연하다 여긴다 그럼 아버지는 무엇을 할까?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 그의 아내는 뜨게질을 한다 그의 아들은 전쟁을 한다 그는 사업을 한다 그는 그게 아주 당연하다 여긴다 아버지는 그런데 아들 그 아들은 그럴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아무렇게도 전혀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다 아들은, 그의 어머니는 뜨게질을, 그의 아버지는 사업을, 그는 전쟁을 한다 전쟁을 끝내면 제 아버지와 사업을 하겠지 전쟁은 계속하고 어머니는 뜨게질을 계속하고 아버지도 계속하여 사업을 한다 아들은 전사하여 이제 계속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덤으로 간다 그들은 이게 모두 당연하다 여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생을 뜨게질로 삶을 계속하고, 사업으로 전쟁을 전쟁으로 사업을 전쟁으로 뜨게질을 사업으로 사업과 사업을 무덤으로 삶을 계속한다.   1) 반전적인 시. 가정의 판에 박히고 무반성한 생활. 그 생활이 연장되어     사회 국가 단위에 이르면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휘한 것인지도  모르는     전쟁에 참여해 죽임을 당하고도 그것을 습관 속에 수용하는, 한편 참담     하면서 한편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라는 삶을 애정과 비판     의 눈으로 시인은 묘사한다.   이 사랑 / 쟈크 프레베르   이 사랑은 이토록 사납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한 이 사랑은 대낮같이 아름답고 날씨처럼 나쁜 사랑은, 날씨가 나쁠 때 이토록 진실한 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은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또 이토록 덧없어 어둠 속 어린애처럼 두려움에 떨지만 한밤에도 태연한 어른처럼 자신 있는 이 사랑은 다른 이들을 겁나게 하던 그들의 입을 열게 하던 그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은 우리가 그네들을 못 지키고 있었기에 염탐당한 이 사랑은 우리가 그를 추적하고 해(害)하고 짓밟고 죽이고 부정하고 잊어버렸기 때문에 쫒기고 상처받고 짓밟히고 살해되고 부정되고 잊혀진 이 사랑은 아직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볕에 쪼인 송두리째 이 사랑은 이것은 너의 것 이것은 나의 것 언제나 언제나 새로웠던 그것 한번도 변함없던 사랑 초록같이 진정하고 새처럼 애처롭고 여름처럼 따뜻하고 생명에 차 우리는 둘이 다 가고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잊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잠들 수 있고 잠 깨고 고통받고 늙을 수 있고 다시 잠들고 죽음을 꿈꾸고 정신 들며 미소 짓고 웃음 터뜨리고 다시 젊어질 수 있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 고스란히 멍텅구리처럼 고집 세고 욕망처럼 피 끓고 기억처럼 잔인하고 회한처럼 어리석고 회상처럼 부드럽고 대리석처럼 차디차고 대낮처럼 아름답고 어린애처럼 연약하며 웃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도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인다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외친다 나를 위해 외친다 네게 애원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서로 사랑하였던 모두를 위해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 거기 있거라 지금 있는 거기 있거라 옛날에 있던 그 자리에 거기 있거라 움직이지 마라 사랑받는 우리는 너를 잊어버렸지만 너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땅위에 오직 너 뿐 우리들 차디차게 변하도록 버리지 마라 항상 더욱 더 먼 곳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에게 생명의 기별을 다오 훨씬 더 훗날 어느 숲 기슭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문득 솟아나거라 우리에게 손 내밀고 우리를 구원하여라.   아침 식사 / 쟈크 프레베르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털이에 재를 털었지 내겐 아무 말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버렸지   위대한 사람 1)/ 쟈크 프레베르   내가 그를 만났던 돌 깎는  사람 집에서 그는 후세를 위하여 제 몸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   1) 앞의 이 담고 있는 단단한 것, 모가 난 것, 굳어버린 것의     이미지가 위대한 사람이 현재의 삶보다 후세의 유명에 더 관심 갖     는 끝에 생각하게 되는 동상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유연성이     사라진 자들에 대한 풍자.   멋진 가문 / 쟈크 프레베르   루이 1세 루이 2 세 루이 3세 루이 4세 루이 5세 루이 6세 루이 7세 루이 8세 루이 9세 루이 10세(세칭 고집쟁이) 루이 11세 루이 12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루이 17세 루이 18세 그리고는 끝----- 도대체 어찌된 사람들이 스물까지도 다 셀 줄 모르게 생겨먹었을까?   국립 미술 학교 1)/ 쟈크 프레베르   밀짚 바구니 속에서 아버지는 종이뭉치를 골라냈지 그리고는 궁금한 애들 앞에서 깔대기 속에 그걸 집어넣었지 그러나 오색의 커다란 일본꽃이 솟아나왔지 즉흥의 연꽃 신기하여 아이들은 입 다물고 말 없었네 그 아이들 추억 속엔 저희들을 위하여 문득 핀 이 꽃은 저희 앞에 그 순간에 피어난 이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겠네.   1) 예술 창조의 신비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종이뭉치와 동양적 신비의   꽃(일본꽃)의 탄생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하여 표현됨으로써 현실 속에 기   적과 같은 꿈을 창조한다.   깨어진 거울 / 쟈크 프레베르   항상 노래하던 키 작은 남자 내 머릿속에서 춤추던 키 작은 남자 청춘의 키 작은 남자가 구두 끈을 터뜨렸네 축제의 침묵 속에서 축제의 폐허 속에서 내 그대 행복한 목소리를 들었네 찢어지고 연악하고 순진하고 비통한 그대 목소리가 먼 곳에서 찾아와 날 부르는 소리를 내 가슴에 손을 얹으니 그대 별빛 어린 웃음의 일곱 조각 난 거울이 피에 젖어 흔들리네   자유 지역 / 쟈크 프레베르     군모를 새장에 벗어 담고   새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외출했더니   그래 이젠 경례도 안하긴가? 하고   지휘관이 물었다.   아뇨   경례는 이제 안 합니다 하고   새가 대답했다.   아 그래요?   미안합니다 경례를 하는 건 줄 았았는데   하고 지휘관이 말했다.   괜잖습니다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 있는 법이지요 하고   새가 말했다.   불어 작문 / 쟈크 프레베르   아주 젊었을 때 나폴레옹은 말라깽이 포병 장교였네 나중에 그는 황제가 되었네 그러자 그는 배가 나오고 많은 남의 나라를 삼켰네 그가 죽던 날 그는 아직 배가 나왔지만 그는 더 작아졌다네.   일식* / 쟈크 프레베르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는 구멍난 의자에 앉는 수가 많아 치세의 말기 어둡던 어느 날 밤 태양왕은 침상에서 일어나 당신의 의자에 가서 앉더니 사라져버렸다네   * 과 함께 독재 왕권 루이 왕조를 풍자한 시   태양 같은 왕이  몰락하는 말로와 의자 모양의 단두대로 비유된 처형의  비극을 야유한 희극적인 시이다.   옥지기의 노래 / 쟈크 프레베르   피 묻은 열쇠를 들고 멋쟁이 옥지기여 어디를 가나, 아직 시간이 남았다면 내 사랑하는 여자를 풀어주러 가지. 내 가장 은밀한 욕망 속에 내 가장 속 깊은 번민 속에. 미래의 거짓말 속에 맹세의 어리석음 속에 내가 가두어둔 그 여자를. 나는 풀어주겠네 그 여자가 자유를 얻도록, 나를 잊어버리는 자유일지라도, 떠나가 버릴 자유 되돌아올 자유 그래서 다시 나를 사랑하는 자유, 혹 다른 이가 마음에 들면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도록, 혹 나는 외로이 남고 그 여자 멀리 떠나가 버린들 나는 오직 간직하리 나는 항상 간직하리 내 생명이 다하도록 내 두 손 오목한 곳에 사랑이 지은 그의 두 젖가슴의 부드러움을.   첫날 / 쟈크 프레베르   장 속에 하얀 홑이불 침대 속에 붉은 홑이불 어머니 뱃속에 어린 아기 고통 속에 그의 어머니 복도에 아버지 집 속에 복도 마을 속에 집 어둠 속에 마을 외침 속에 죽음 그리고 삶 속에 어린 아기.   메시지 / 쟈크 프레베르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눈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꽃집에서 / 쟈크 프레베르   어느 남자가 꽃집에 들어가 꽃을 고른다 꽃집 처녀는 꽃을 싸고 남자는 돈을 찾으러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꽃값을 치를 돈을 동시에 그는 손을 가슴에 얹더니 쓰러진다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자 돈이 땅에 굴러가고 그 남자와 동시에 돈과 동시에 꽃들이 떨어진다 돈은 굴러가도 꽃들은 부서져도 남자는 죽어가도 꽃집 처녀는 거기 가만 서 있다 물론 이 모두는 매우 슬픈 일 그 여자는 무언가 해야 한다 꽃집 처녀는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할지 몰라 그 여자는 몰라 어디서부터 손을 쓸지를   남자는 죽어가지 꽃은 부서지지 그리고 돈은 돈은 굴러가지 끊임없이 굴러가지 해야 할 일이란 그토록 많아.   일요일 / 쟈크 프레베르   고블랭 가街 겹겹이 늘어선 가로수 사이 대리석상 하나가 내 길을 가리킨다 오늘은 일요일 극장은 만원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서 인간들을 바라본다 석상은 내게 입맞춤하지만 아무도 안 본다 우리에겐 손가락질하는 눈먼 아이뿐.   공원 / 쟈크 프레베르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속 어느 아침 네가 내게 입맞춘 내가 네게 입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수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꽃다발 / 쟈크 프레베르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작은 아씨여 갓 꺾은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처녀여 시든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고운 여인이여 떨어지는 꽃을 들고 거기서 무얼 하시나요, 늙은 여인이여 즉어가는 꽃을 들고   승리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바르바라 / 쟈크 프레베르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그날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지 너는 웃음 지으며 활짝 피고 유열에 차 빗속에 비에 젖어 걷고 있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브레스트에는 끝없이 비가 내리고 나는 너를 시암 가에서 마주쳤지 너는 웃고 있었지 나도 같이 웃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알지 못했던 너는 나를 알지 못했지만, 기억하는가 그날을 그러나 기억하는가 잊지 마라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한 남자를 그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 그래 너는 빗속으로 그에게 달려갔지 비에 젖어 유열에 차고 활짝 피어서, 그래 너는 그의 품에 안기었지,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내가 너에게 반말을 한다고 서운해 말아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그들을 오직 한 번 보았다 해도 나는 서로 사랑하는 모든 애인들을 너라고 부른다 내가 비록 그들을 알지 못한다 해도 기억하는가 바르바라 잊지 마라 그 얌전하고 행복했던 비를 너의 행복한 얼굴 위에. 행복한 그 도시 위에 내리던 비를 바다 위에 해군 기지 위에 웨상의 배 위에 내리던 비를 오 바르바라 전쟁은 얼마나 바보짓이냐 무쇠의 이 빗줄기 속에서 피의 강철의 불비 속에서 이제 너는 어찌되었느냐 두 팔로 너를 사랑스레 가슴에 껴안던 그 사람은, 그는 죽었느냐 사라졌느냐 아직 살아 있느냐, 오 바르바라 지금도 브레스트에는 옛날처럼 끝없이 비가 내리지만 그러나 이제는 옛 같지 않고 모두가 부서졌다 기막히고 참담한 죽음의 바다 피의 강철의 무쇠의 폭풍조차 아니로다 다만 개처럼 쓰러지는 구름일 뿐 브레스트의 빗줄기 따라 사라지는 개들 브레스트에서 멀리멀리 떠나가 죽어 썩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개떼들처럼.   바른 길 * / 쟈크 프레베르   발을 옮겨놓는 곳마다 해마다 이마가 좁은 늙은이들이 콘크리트의 몸짓으로 어린애들에게 길을 가리키고 있다.   * 반자유 교육을 풍자한  시. 자유와 삶이 저해하는 굳어버린  정신(똑바른 길, 즉 비인간적 규범의 길, 늙은이들, 콘크리트)  이 속박하는 여리고 때묻지 않은 정신.   난 본래 이런걸 뭐 / 쟈크 프레베르   난 본래 이런걸 뭐 난 본래 이렇게 생긴걸 뭐 웃고 싶을 땐 그럼 깔깔대며 웃지 나를 사랑하는 그이를 난 사랑해 그때마다 사랑하는 그이가 같은 이가 아닌 게 내 잘못인가 뭐 난 본래 이럴걸 뭐 난 본래 이렇게 생긴걸 뭐 그 이상 어떻게 해 날보고 어쩌라고   나만 보면 좋다는걸 그러니 바꿀 수도 없는 일 내 발굽은 너무 높고 내 허리는 너무 늘씬 젖가슴은 너무너무 단단하고 두 눈은 뚜렷해 아니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난 본래 이런걸 뭐 나만 보면 좋다는 걸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나에게 생긴 일 누군가 나를 사랑해 버린 거야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이 그냥 그렇게 사랑할 줄 알듯이 사랑할 줄 사랑할 줄 알듯이--- 왜 자꾸만 묻는 거야 나만 보면 좋다는걸 그러니 바꿀 수도 없는 일.   말馬 이야기 / 쟈크 프레베르   여보세요 벗님네들 내 하소연 들어보소 내 살아온 이야기 좀 귀담아 들어보소 부모 없는 고아가 하는 말이오 딱하고 시시한 넋두리라오 이러이러----1)                                                    1) 말을 앞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모는 소리 어떤 장군이 어느 날 아니 어느 밤이던가 하여튼 어떤 장군이 거느린 말 두 필이 죽었다오 그 말 두 필은 사실은 이러이러---- 삶이란 쓰디쓴 것 그 두 필은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리고 불쌍한 우리 어머니였는데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오 장군의 침대 밑에 남프랑스의 어느 작은 마을 후방에 숨어 있던 장군의. 장군은 말도 많아 밤이면 혼자서 말했다오 대개는 딱하고 시시한 넋두리를, 2)                          2) 넋두리라고 번역한(ennui)는 본래 권태. 따분함을 뜻함.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이러이러---- 어느 날 밤에 따분해서 죽었다오 내겐 가정 생활이 애저녁에 거덜나서 잠자리 탁자에서 뛰어나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오 모두가 다 빛나고 모두가 다 번쩍이는 대도시를 향하여 도망쳤다오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해 보니 사비 앙파로 미안해요 말의 말이거든요 어느 날 아침 나막신을 신고 파리에 도착                   동물의 왕이라는 사자를 좀 만나자고 면회 신청했다가 콧잔등에 몽둥이 세례 전쟁중이라 전쟁이 계속중이라 나는 눈가리개로 눈 가린 채 바야흐로 징집되고 말았다오 전쟁중이라 전쟁이 계속중이라 물가는 올랐고 먹을 것은 귀해졌고 귀하면 귀할수록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이빨을 지근지근 나를 피프테크라더군                                            난 그게 영언 줄 알았죠 이러이러----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날 쓰다듬는 모든 사람들은 내 죽기만 기다렸죠 날 잡아먹으려고. 어느 날 밤 마구간에서 자고 있던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오 나도 아는 목소리가 늙은 사령관과 더불어 유령처럼 돌아오는 늙은 장군의. 그들은 내가 자는 줄 알았던지 그들은 나직나직 말을 했는데. 맹물에 쌀 넣고 끓인 죽은 지긋지긋해 짐승 고기 좀 먹어봤으면 이놈 먹는 귀리 속에 축음기 바늘을 섞어 주면 될 터인데 그 말을 듣자 내 몸속 피는 목마가 돌듯 한바퀴 핑그르 돌아 나는 마구간을 뛰쳐나와 숲속으로 도망쳤소.   이제 전쟁은 끝났고 늙은 장군은 죽었네 제 침대 속에서 죽었네 그래도 나는 살았으니 그게 제일 중요해 그럼 안녕히 안녕히 주무시고 맛있게 드시죠 나의 장군님.       가을 /쟈크 프레베르   오솔길 한가운데 쓰러지는 말 한 마리 그 위에 떨어지는 잎새들 우리들의 사랑이 떤다 그리고 태양도.   시집 전재 끝    
227    쉴러 시모음 댓글:  조회:2565  추천:0  2017-08-20
쉴러 1869. 2. 11 독일 엘버펠트~1945. 1. 22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20세기초 독일의 시인·단편작가·극작가·소설가.   유대계로서 1894년 내과의사 베르톨트 라스커와 결혼(1903 이혼)한 후 베를린에 정착했다. 베를린에서 아방가르드 문학 서클에 자주 다녔으며 서정시와 단편소설들을 정기간행물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도적인 표현주의 잡지의 편집인이었던 헤르바르트 발텐과 2번째 결혼(1901~11)을 했다.   〈슈튁스 Styx〉(1902)라는 제목의 첫번째 시집에 이어 〈나의 기적 Meine Wunder〉(1911)·〈히브리 민요 Hebraische Balladen〉(1913)를 비롯한 여러 권의 서정시집을 발표했다. 그밖에 주요작품으로는 희곡 〈부퍼 Die Wupper〉(1909)와 자전적 소설 〈나의 마음 Mein Herz〉(1912), 단편소설집 〈테베의 왕자 Der Prinz von Theben〉(1914)와 〈바르셀로나의 놀라운 랍비 Der Wunderrabbiner von Barcelona〉(1921)가 있다.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후인 1933년 스위스로 이주하였고, 1940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다시 정착하였다. 언제나 상도를 벗어난 예측할 수 없는 생을 영위하였고 말년을 가난하게 지냈다. 그녀의 시들은 풍부한 환상의 특질과 상징성을 활용하였으며 부모, 낭만적 열정, 예술, 종교, 다른 주제 등과 어린시절의 개인적인 환기를 비애감과 황홀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써내려갔다. 많은 단편소설들은 아라비안나이트를 재해석한 것으로 시각적 이미지가 풍부한 현대적 감각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녀의 소설들은 분위기와 상징성은 풍부하지만 서사적 초점이 약하고 플롯이 거의 짜여져 있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커 쉴러는 20세기초 중요한 독일 서정시인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환희의 송가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다정한 날개가 깃들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르빔은 신 앞에 선다.     장대한 하늘의 궤도를 수많은 태양들이 즐겁게 날 듯이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형제여, 성좌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신이 계시는 곳이다. 엎드려 빌겠느냐, 억만의 사람들이여, 조물주를 믿겠느냐   세계의 만민이여, 성좌의 저편에 신을 찾아라, 별들이 지는 곳에 신이 계신다."         장갑   사자 우리 앞에서 격투 경기를 기다리며 프란츠 왕이 앉아 있다.   주위에는 귀족들이 둘러 앉아 있고 높은 발코니에는 귀부인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둘러 앉아있다.     왕이 손가락으로 신호하자, 사자우리의 문이 열리고   육중한 발걸음으로 사자 한 마리가 밖으로 나와,   주위를 천천히 둘러 보더니,   입을 크게 한 번 벌리고, 갈기 털을 부르르 떨더니만,   그 자리에 몸을 �혔다.     다시 왕이 신호를 하자 두 번째 우리의 문이 열리고   거기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사납게 뛰쳐 나오더니   사자가 앞에 있음을 보고 커다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꼬리를 흔들면서 둥그렇게 한바퀴 돌더니   불타는 혀를 드러내고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사자 주위를 빙빙 돌더니만, 으렁거리면서 사자옆에 몸을 �혔다.     왕이 또 신호를 내리자 우리문이 두 개가 열리고 표범 두 마리가 뛰쳐 나왔다.   살기찬 표범들은 호랑이에게 달겨들었다.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표범을 붙들자,   사자가 위엄있는 모습으로 일어나 울부짖었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맹수들은 살기를 품은 채 원을 그리더니 모두들 자리에 누웠다.     그 때 발코니 윗자리에서 장갑 한 짝이 아름다운 손에서 떠나   호랑이와 사자가 있는 한 가운데 떨어졌다.   쿠니쿤트 공주는 비웃는 듯이 기사 델로게스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기사님, 당신의 사랑이 열렬하고 늘 내게 맹세한 말씀이 참말이라면   저 장갑을 주워 올 수 있겠지요?"     그러자 기사는 즉시 일어나 힘찬 걸음으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맹수들 한가운데에서 겁 없이 장갑을 주워들었다.   놀람과 몸서림을 치면서 모든 기사와 귀부인들이 그걸 보았다.   태연히 장갑을 가져오는 그에게 모든 사람들은 칭송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참다운 행복을 기대하는 쿠니쿤트 공주는   부드러운 사랑의 눈동자로써 그를 맞이하였다. 기사는 공주의 얼굴에 장갑을 던지며,   "공주여, 나는 감사의 말을 바라지 않소." 기사는 그 자리에서 공주를 버렸다.       타향에서 온 소녀     해마다 새 봄이 오고 종달새가 첫노래를 부를 때가 되면   골짜기 가난한 목자들 곁에는 예쁘고 신비스런 소녀가 나타났었네,     그 소녀는 거기 출생이 아니었고 아무도 고향을 아는 이 없었기에   한 번 작별하고 가버리면 그의 행방 또한 알 수 없었네.     소녀가 있는 곳엔 기쁨이 뒤따랐고 사람들 또한 마음 너그러워졌지.   하지만, 소녀가 지닌 높은 위엄 때문에 아무도 희롱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네.     소녀는 아름다운 꽃을 가져왔고 단 맛이든 과일도 가져왔지.   그 과일은 이 곳과는 전혀 다른 곳 행복한 자연의 햇볕으로 익은 것이었지.     소녀는 아름다운 꽃과 익은 과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선물했고   젊은이나 지팡이 든 노인들이나 모두 선물을 들고 집에 갔네.     누구 하나 푸대접 받는 이 없었으나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이 찾아왔을 때   소녀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골라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건 예쁜 꽃이었네.     이상과 생명     옛날, 넘치는 정열로 기도하며, 피그말리온이 돌을 끌어안자   마침내 그 차갑게 빛나던 대리석이 감정의 빛을 나타낸 것처럼,     나도 온 정열로 빛나는 자연을 내 시인의 가슴으로 안았다.   그러자 마침내 숨결이, 따뜻함이, 생명의 움직임이 그 자연의 현상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모든 정열을 나누어 주었다. 이 무언의 상은 나타내어야 할 말을 생각하고   젊고 대담한 내 키스에도 따라주며, 높이 뛰는 내 가슴의 고동까지도 알아 주었다.     그때 빛나는 자연도 나를 위해 있었고, 은빛 시내물도 노래로 가득 차 흘렀으며   나무도, 장미도 서로가 느낌을 나누어 이야기 했다. 그것은 내 영원한 생명의 메아리였다.       쉴러는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을 인용하여 젊은 가슴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였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이별을 눈물로써 대신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길을 떠나는 순간,   사랑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져 간다 할지라도   그대 가슴속에 남겨진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순 례 자   인생의 봄에 벌써 나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청춘의 아름다운 춤들일랑 아버지의 집에 남겨둔 채로     유산과 소유의 모든 것을 줄겁게 믿으며 버려 버렸다.   가벼운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어린이의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길은 열려 있다. 방랑하라 언제나 상승을 추구하라는,   거대한 희망이 나를 휘몰고, 어두운 믿음의 말이 들린 때문에.     황금빛 대문에 이를 때까지, 그 문 속으로 들어가라고,   그곳에서는 현세적인 것이 거룩하고도 무상하지 않으리라.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와도, 나는 한 번도 멈춘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찾고 원하던 것은 나타난 일이 도무지 없다.     산들이 행로를 가로막았고 강들이 발걸음을 얽매었으나,   협곡 위에는 작은 길을 내고 거친 물살 위엔 다리을 놓았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어떤 강기슭으로 나는 왔다.   강의 길을 즐거이 믿으면서 나는 강의 품속에 몸을 맡겼다.     그 강의 유희하는 물결은 나를 큰 바다로 이끌어 갔다.   내 앞에 드 넓은 허공만 있고, 목적지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어떤 길도 그곳으론 가지를 않고, 나의 머리 위의 저 하늘도   땅과는 한 번도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은 결코 이곳일 수 없다  
226    에이츠 시모음 댓글:  조회:2131  추천:0  2017-08-19
에이츠 시모음 이니스프리 호수 섬  흰새들  죽음  오랜 침묵 후에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대 늙었을때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술노래  하늘의 융단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레다와 백조  쿠울호의 백조  둘째 트로이는 없다  유리 구슬  학생들 사이에서  내 딸을 위한 기도  1916년 부활절  육신과 영혼의 대화  비잔티움  벌벤산 아래  긴다리 소금쟁이  ~~~~~~~~~~~~~~~~~~~~~~~~~~~~~~~~~~~~~~~~~~~~~~~~~~~~~~~~~~  이니스프리 호수 섬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이니스프리로 갈거야,  조그마한 오두막을 거기에 지을거야, 진흙과 나뭇가지로.  콩을 아홉 이랑 심고, 꿀벌도 한 통 칠거야,  그리고 벌소리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거야.  나는 거기서 평화로울 거야, 왜냐면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장막을 뚫고 귀뚜리 우는 곳으로 천천히 오니까.  거기는 한 밤은 항상 빛나고, 정오는 자주빛을 불타고,  저녁은 홍방울새 소리 가득하니까.  나는 일어나 지금 갈거야, 왜냐면 항상 밤낮으로  호수물이 나지막이 찰싹이는 소리가 들리니까.  나는 차도 위나 회색 보도 위에 서 있는 동안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  ~~~~~~~~~~~~~~~~~~~~~~~~~~~~~~~~~~~~~~~~~~~~~~~~~~~~~~~~  흰새들  애인이여, 나는 바다 물거품 위를 나는 흰 새가 되고 싶구려!  사라져 없어지는 유성의 불길엔 싫증이 나고,  하늘까에 나직이 걸린 황혼의 푸른 별의 불길은,  애인이여, 꺼질 줄 모르는 슬픔을 우리의 마음에 일깨워 주었소.  이슬 맺힌 장미와 백합, 저 꿈과 같은 것들에게선 피로가 오오.  아 애인이여, 그것들, 사라지는 유성의 불길은 생각지 맙시다.  그리고 이슬질 무렵 나직이 걸려 머뭇거리는 푸른 별의 불길도,  왜냐하면, 나는 떠도는 물거품 위의 흰 새가 되었으면 하니, 그대와 나는!  나는 수많은 섬들, 그리고 많은 요정의 나라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오.  그곳에선 분명 시간이 우리를 잊을 것이고, 슬픔도 더 이상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며,  곧 장미와 백합, 그리고 불길의 초조함에서 벗어날 것이오.  애인이여, 우리 다만 저 바다의 물거품 위를 떠도는 흰 새나 된다면 오죽 좋겠소.  ~~~~~~~~~~~~~~~~~~~~~~~~~~~~~~~~~~~~~~~~~~~~~~~~~~~~~~  죽음  두려움도 바램도  죽어가는 동물에 임종하지 않지만,  인간은 모든 걸 두려워하고 바라며  최후를 기다린다.  그는 여러 차례 죽었고  여러 차례 다시 일어났다.  큰 인간은 긍지를 가지고  살의(殺意) 품은 자들을 대하고  호흡 정치 따위엔  조소(嘲笑)를 던진다.  그는 죽음을 뼈 속까지 알고 있다 -  인간이 죽음을 창조한 것을.  ~~~~~~~~~~~~~~~~~~~~~~~~~~~~~~~~~~~~~~~~~~~~~~~~~~~  오랜 침묵 후에  오랜 침묵 후에 하는 말 -  다른 연인들 모두 멀어지거나 죽었고  무심한 등불은 갓 아래 숨고  커튼도 무심한 밤을 가렸으니  우리 예술과 노래의 드높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함이 마땅하리.  육체의 노쇠는 지혜, 젊었을 땐  우리 서로 사랑했으나 무지했어라.  ~~~~~~~~~~~~~~~~~~~~~~~~~~~~~~~~~~~~~~~~~~~~~~~~~~~~~~~~~~~  버드나무 정원에서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녀와 나 만났었네.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나뭇가지에 잎이 자라듯 사랑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난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들으려 하지 않았네.  강가 들판에서 그녀와 나 서 있었네.  기대인 내 어깨 위에 눈처럼 흰 손을 얹으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젊고 어리석었던 나에겐  지금 눈물만 가득하네.  ~~~~~~~~~~~~~~~~~~~~~~~~~~~~~~~~~~~~~~~~~~~~~~~~~~~~~~~~~  그대 늙었을 때  그대 늙어 백발이 되어 졸음이 자꾸 오고  벽로 가에서 고개를 끄떡끄떡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옛날 지녔던  부드러운 눈동자와 그 깊은 그림자를 꿈꾸어라 ;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우아의 순간을 사랑했으며,  또 그대의 미를 참사랑 혹은 거짓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대의 편력하는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프게 중얼대어라, 어떻게 사랑이  산 위로 하늘 높이 도망치듯 달아나  그의 얼굴을 무수한 별들 사이에 감추었는가를.  ~~~~~~~~~~~~~~~~~~~~~~~~~~~~~~~~~~~~~~~~~~~~~~~~~~~~~~~~~~~~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  내 머리 속에 불이 붙어  개암나무 숲으로 갔었지.  개암나무 한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딸기 하나를 낚싯줄에 매달았지.  흰 나방들이 날고 (아마 이 구절인 듯)  나방 같은 별들이 깜빡일 때  나는 시냇물에 딸기를 담그고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를 낚았지.  나는 그것을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불을 피우러 갔었지.  그런데 마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리더니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지.  그것은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며 달아나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나 비록 골짜기와 언덕을  방황하며 이제 늙어 버렸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 내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고 손을 잡고서  얼룩진 긴 풀밭 속을 걸어 보리라.  그리고 시간이 다할 때까지 따보리라.  저 달의 은빛 사과를  저 해의 금빛 사과를...  ~~~~~~~~~~~~~~~~~~~~~~~~~~~~~~~~~~~~~~~~~~~~~~~~~~~~~  술노래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흘러든다.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  ~~~~~~~~~~~~~~~~~~~~~~~~~~~~~~~~~~~~~~~~~~~~~~~~~~~~  하늘의 융단  만일 나에게 하늘의 융단이 있다면  금빛과 은빛으로 짠,  낮과 밤과 어스름의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천으로 짠.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허나 가난한 나는 꿈밖에 없어  그대 발 밑에 꿈을 깔았습니다.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지혜는 시간과 더불어 온다  잎이 많아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내 청춘의 거짓 많던 시절에는  태양 아래서 잎과 꽃을 흔들었건만  이제는 나도 진실 속에 시들어 갑니다.  ~~~~~~~~~~~~~~~~~~~~~~~~~~~~~~~~~~~~~~~~~~~~~~~~~~~~~~~~  레다와 백조  별안간의 강한 휘몰아침. 커다란 날개들이 아직  비틀거리는 소녀 위에서 퍼덕이고, 그녀의 허벅지는  검은 물갈퀴로 애무되고, 목은 그의 부리에 잡혀 있을 때,  그는 그녀의 무력한 가슴을 자기 가슴에 껴안는다.  어떻게 놀라고 모호한 그 손가락들이 밀어내겠는가  그녀의 느슨해지는 허벅지에서 깃털달린 영광을?  어떻게 그 하얀 물풀 속에 눕혀진 육체가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 낯선 심장의 고동을?  허리의 떨림이 거기에 낳는다  파괴된 담, 불타는 지붕 그리고 탑과  아가멤논의 죽음을.  그렇게 잡혀서,  하늘의 그 야만적인 피에 지배되었을 때,  그녀는 그의 힘과 더불어 그의 지혜도 받았는가  그 무관심한 부리가 그녀를 놓아주기 전에?  ~~~~~~~~~~~~~~~~~~~~~~~~~~~~~~~~~~~~~~~~~~~~~~~~~~~~~~~~~  쿠울호의 백조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에 싸여 있고,  숲 속의 오솔길은 메말랐다,  시월의 황혼 아래 호수물은  잔잔한 하늘을 비춘다,  솔 사이로 넘치는 물 위에는  쉰아홉 마리의 백조가 있다.  열아홉 째 가을이 나에게 왔다  내가 처음 세기 시작한 이래.  나는 내가 잘 끝내기도 전에,  모두 갑자기 올라가  부서진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선회하며  요란한 날개소리로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빛나는 생물들을 보아왔고,  이제 내 마음을 쓰리다.  모든 것이 변했다, 내가, 황혼녘에,  이 호숫가에서 처음,  내 머리 위로 그들의 날개짓 소리 들으며  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이후로.  여전히 지치지 않고, 연인끼리,  그들은 사귈만한 찬물에서  노닥거리거나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정열과 정복심이, 그들이 어딜 가든,  여전히 그들에겐 있다.  지금 그들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다,  시비롭고, 아름답게.  어떤 물풀 속에 그들은 세울까,  어떤 호숫가나 연못가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까 내가 어느날 잠깨어  그들이 날아가버린 것을 발견할 때?  ~~~~~~~~~~~~~~~~~~~~~~~~~~~~~~~~~~~~~~~~~~~~~~~~~~~~~~~~  둘째 트로이는 없다  왜 내가 그녀를 책망해야 하나 그녀가 내 생애를  고통으로 채운 것을, 또는 그녀가 최근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가르친 것을,  또는 작은 거리들을 큰 거리로 내던진 것을,  만일 그들이 욕망에 상응하는 용기를 가졌다면?  무엇이 그녀를 평화롭게 할 수 있었을까,  고상함이 불처럼 단순케 한 마음과,  이런 시대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종류인,  팽팽히 당겨진 활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그녀를,  만일 그녀가 높고 외롭고 매우 엄격했다면?  아니, 무엇을 그녀가 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오늘날의 그녀였다면?  또 하나의 트로이가 있었단 말인가 그녀가 불태워 버릴 ?  ~~~~~~~~~~~~~~~~~~~~~~~~~~~~~~~~~~~~~~~~~~~~~~~~~~~~~~~~~  유리 구슬  나는 들었다 병적으로 흥분한 여인들이 말하는 것을  자기들은 팔레트와 바이올린 활과,  항상 명랑한 시인들에 넌더리가 난다고,  왜냐면 모든 이들은 알거나 알아야 하기에  만일 근본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비행기와 비행선이 나와서,  빌리 왕처럼 폭탄을 떨어뜨려  도시가 납작하게 두드려 맞을 것이기에.  모두가 자신의 비극을 연출한다,  저기 햄릿이 활보하고, 리어가 있고,  저건 오필리아, 저건 코델리아,  그러나 그들은, 만일 마지막 장면이 되어,  커다란 무대 장막이 내려지려 하더라도,  극 중의 그들의 뚜렷한 역할이 가치가 있다면,  울느라고 대사를 중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햄릿과 리어가 명랑하고,  명랑함이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변형시킨다는 것을.  모든이들이 목표했고, 발견했고 그리고 잃었다.  무대 소등. 머리 속으로 빛내며 들어오는 천국,  최대한도로 진행된 비극.  비록 햄릿이 천천히 거닐고 리어가 분노해도,  수십만 개의 무대 위에서  모든 무대 장막이 동시에 내려진다 해도,  그것은 한 인치도, 한 온스도 자랄 수 없다.  그들은 왔다, 그들 자신의 발로 걸어서, 배를 타고,  낙타를 타고, 말을 타고, 당나귀를 타고, 노새를 타고,  옛 문명들이 칼로 죽임을 당할 때.  그 후 그들과 그들의 지혜는 파괴되었다.  대리석을 청동처럼 다루었던,  바다 바람이 그 구석을 쓸어갈 때  올라가는 듯이 보이는 휘장을 만들었던,  칼리마커스의 수공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가냘픈 종려나무 줄기 같은 모양의  그의 긴 등갓은 단 하루만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세우는 자들은 명랑하다.  두 중국인이, 그들 뒤엔 또 한 사람이,  유리 구슬에 새겨져 있다,  그들 위로는 장수의 상징인,  다리 긴 새가 날아간다.  세번째 사람은, 분명히 하인인데,  악기를 가지고 간다.  돌의 모든 얼룩이,  우연히 생긴 틈이나 움푹한 곳이,  물줄기나 사태처럼 보인다,  아니면 아직도 눈내리는 높은 비탈처럼 보인다,  비록 분명히 오얏이나 벗나무인 가지가  그 중국인들이 올라가고 있는 곳의 중간 쯤에 있는 작은 집을 기분좋게 하지만,  그리고 나는 즐거이 상상한다, 그들이 거기에 앉아있는 것을,  거기에, 산과 하늘 위에,  그들이 바라보는 모든 비극적인 경치 위에.  한 사람이 구슬픈 곡조를 요청하자,  능숙한 손가락들이 연주하기 시작한다.  많은 주름 속의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랜, 빛나는 눈은, 즐겁다.  ~~~~~~~~~~~~~~~~~~~~~~~~~~~~~~~~~~~~~~~~~~~~~~~~~~~~~~~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질문하며 긴 교실을 걸어간다.  흰 두건을 쓴 친절한 노 수녀가 대답한다.  아이들은 배웁니다 셈하기와 노래하기,  독본과 역사를 공부하기,  재단하기와 재봉하기를, 모든 면에서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하기를--아이들의 눈이  순간적으로 놀라서 응시한다  육십세의 미소짓는 공직자를.  II  나는 꿈꾼다 꺼져가는 불 위에 웅크린  레다의 육체를, 그녀가 말한  어떤 어린 시절을 비극으로 변하게 한  거친 책망이나, 사소한 사건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자 우리의 두 본성은 섞이는 듯했다  젊은이 특유의 공감 때문에 한 구체로,  아니, 플라톤의 비유를 바꾸어 말하자면,  한 껍질 속의 노른자와 흰자로.  III  그리고 슬픔이나 분노의 그 발작을 생각하며  나는 거기 있는 이 아이 저 아이를 바라보고  궁금해한다 그녀도 그 나이에 저랬을까 하고--  왜냐면 백조의 딸들이라도 모든 물새들의 유산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뺨이나 머리에 저 색깔을 지녔었을까 하고,  그러자 내 마음은 미칠 듯했다.  그녀가 내 앞에 서 있다 실물과 같은 아이로.  IV  그녀의 현재의 영상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십오세기의 손가락들이 그것을 만들었나  마치 바람을 마시고 고기 대신  한 접시의 그림자를 먹은 듯 뺨이 훌쭉하게?  그리고 나는 결코 레다의 종류는 아니지만  한 때 예쁜 깃털을 가졌었다--그것이면 충분하다,  미소짓는 모든 이에게 미소짓고, 보여주는 게 나으리라  편안한 종류의 늙은 허수아비가 있음을.  V  어떤 젊은 어머니가, 생식의 꿀이 드러내어,  회상이나 그 약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잠자고, 고함치고 고망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형체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자신의 아들을, 만일 그녀가 그 머리 위에  육십이나 그 이상의 겨울을 얹은 그 형체를 보기만 한다면,  그의 출산의 고통이나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의  불확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할까?  VI  플라톤은 자연이 사물들의 희미한 모형 위에  떠도는 거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보다 견실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질을 했다  왕 중 왕의 궁둥이 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허벅지의 피타고라스는  바이올린 활대나 줄을 손가락으로 연주했다  별이 노래하고 무심한 시신들이 들은 것을.  새를 쫒아버리는 낡은 막대기 위의 낡은 옷들일 뿐이다.  VII  수녀들가 어머니들은 상들을 숭배한다,  촛불들이 밝히는 것들은  어머니의 환상을 활기차게 하는 것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대리석이나 청동의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들도 가슴을 찢는다--오  정열, 경건, 아니면 애정이 알고  천상의 모든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여--  오 인간의 일을 조롱하는 스스로 태어난 자여.  VIII  노동은 육체가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상처입지 않는 곳에서 꽃피거나 춤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의 절망에서 생기지 않고,  흐린 눈의 지혜는 한밤의 기름에서 생기지 않는다.  오 밤나무여, 크게-뿌리박은 꽃피우는 자여,  그대는 잎인가, 꽃인가, 아니면 줄기인가?  오 음악에 맞춰 흔들린 육체여, 오 반짝이는 시선이여,  어떻게 우리는 무용수와 춤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  내 딸을 위한 기도  폭풍우가 한 번 더 불고 있으나 이  요람 덮개와 이불 아래 반 쯤 덮혀  내 아이는 잠잔다. 그레고리의 숲과  헐벗은 동산 하나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거기에 대서양에서 생긴 바람이 머물 수 있다.  건초더미와 지붕을 납작하게 만드는 바람이,  한 시간 동안 나는 걸으며 기도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큰 어둠 때문에.  나느 한 시간을 걸으며 기도했다 이 어린 아이를 위해  그리고 바다바람이 탑 위에서, 다리의 아치 아래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이 불은 냇물 위의 느름나무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흥분된 환상 속에서  미래의 세월이 도래했다고 상상했고,  바다의 살인적인 순진에서 나온 격노한 북소리에 맞추어 춤추었다.  선택받은 헬렌은 삶이 단조롭고 무료함을 발견했고  후에 한 멍청이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물보라에서 태어난 그 위대한 여왕은,  아버지가 없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안짱다리 대장장이를 남편으로 골랐다.  멋진 여인이 그들의 고기와 함께  미치게 하는 샐러드를 먹는 것은 확실하다  그로 인하여 풍요의 뿔은 망쳐진다.  예절에 있어서는 그녀가 주로 배웠으면 한다,  마음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아름답지 만은 않은 사람들이 수고해 얻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 바보짓을 한  많은 사람들을 매력이 현명하게 했다,  헤매고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받는다고  생각한 많은 불쌍한 사람들은  즐거운 친절에서 자신의 눈길을 돌릴 수 없다.  그녀의 모든 생각이 홀방울새처럼 되도록  그녀가 꽃피는 숨은 나무가 되기를,  그 소리의 관대함을 나누어 주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은 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추격을 시작하지 않기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면 싸움을 시작하지 않기를.  오 그녀가 한 사랑스런 영속적인 장소에 뿌리박은  어떤 푸른 월계수처럼 살기를.  내 마음은, 내가 사랑했던 마음들 때문에,  내가 인정했던 종류의 아름다움 때문에,  조금밖에 번창하지 않고, 최근엔 메말라버렸다,  그러나 증오로 목 메이는 것이  모든 악운 중에서 최고라는 것을 안다.  마음에 증오가 없다면  바람의 습격과 공격이  홍방울새를 잎사귀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지적인 증오가 가장 나쁘다,  그러니 그녀로 하여금 의견은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케하라.  풍요의 뿔의 입에서 태어난  가장 사랑스런 여인이,  그녀의 완고한 정신 때문에  그 뿔과 조용한 본성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모든 선을 분노한 바람이 가득한 풀무와  맞바꾸는 것을 나는 보지 않았던가?  모든 증오가 여기에서 쫒겨나고,  영혼이 근본적인 순결을 회복하고  드디어 그것은 스스로 기쁘게 하고,  스스로 달래고, 스스로 위협한다는 것과,  그 자체의 감미로운 뜻이 하늘의 뜻이라는 알게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녀는, 비록 모든 얼굴들이 지푸리고  모든 바람부는 지역이 고함치거나  모든 풀무가 터져도, 여전히 행복하리라.  그녀의 신랑이 그녀에게 집을 가져오기를  그곳에선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고, 의식적인 그런 집을,  왜냐면 거만과 증오는 대로에서  사고파는 물건들이니.  어떻게 단지 관습과 의식에서만  순진과 아름다움이 태어나는가?  의식은 풍요의 뿔의 이름이고,  관습은 널리 퍼지는 월계수의 이름이다.  ~~~~~~~~~~~~~~~~~~~~~~~~~~~~~~~~~~~~~~~~~~~~~~~~~~~~~~~~~~~~~  1916년 부활절  나는 잿빛 십팔세기의 집들 가운데서  계산대나 책상으로부터  활기찬 얼굴로 다가오는  그들을 낮이 끝날 때 만났다  나는 지나갔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예의바른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잠시 머물러  별 뜻없는 말을 하거나 하곤,  그리고 생각했다  그들과 내가 광대옷을 입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클럽의 난로에 둘러 앉아 있는  친구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농담이나 조롱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고.  그 여인의 낮들은 보내졌다  무지한 선의 가운데,  그녀의 밤들은 토론 가운데 보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질 때까지.  그녀가 젊고 아름다울 때,  말타고 사냥개를 쫓을 때,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보다 감미로왔는가?  이 남자는 학교를 경영했고  우리의 날개달린 말을 탔다,  이 사람은 그의 조력자이자 친구로  한창 본령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국 명성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의 본성은 지극히 민감해 보였고,  그의 생각은 지극히 대담하고 감미로워 보였으므로.  이 사람은 내 생각에  술주정뱅이고, 허영심 강한 촌놈이었다.  그는 매우 심한 나쁜 짓을 했다  내 마음에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러나 나는 그를 노래 속에 넣어준다,  그도, 또한, 이 우연한 희극에서  자기 역할을 그만두었다,  그도, 또한, 자기 차례가 되어 변했다,  완전히 변형되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가지 목적만 가진 사람들은  매혹되어 돌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강물을 괴롭히기 위하여.  길에서 오는 말,  말탄 자, 구름에서 휘모는 구름으로  날아가는 새들,  순간순간 그들은 변한다,  냇물에 비친 구름 그림자는  순간순간 변한다,  말발굽이 물가에서 미끄러지고,  말은 그 속에서 텀벙거린다,  다리가 긴 붉은 뇌조들이 잠수하고,  암컷들은 수컷들을 부른다,  순간순간 그들은 살아가고.  그 돌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있다.  너무 오랜 희생은  마음을 돌로 만들 수 있다.  오 언제면 충분할까?  그건 하늘의 몫이다, 우리 몫은  마음대로 뛰놀던 사지에  마침내 잠이 닥쳐왔을 때,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부르듯이,  이름들이나 중얼거리는 것,  그것이 황혼이 아니고 무엇이오?  아니, 아니, 밤이 아니라 죽음이오.  그건 결국 필요없는 죽음이었나?  왜냐면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대해  영국은 신의를 지킬지도 모르니까.  우리는 그들의 꿈을 안다, 충분하다  그들이 꿈꾸었고 죽었다는 것만 알면,  긜고 과도한 사랑이 그들이 죽을 때가지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했으면 어떻소?  나는 그것을 시로 쓴다--  맥도너와 맥브라이드  그리고 코놀리와 퍼스는  지금과 장래에  녹색 옷이 입어지는 곳 어디서나,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  육신과 영혼의 대화  영혼: 나는 굽이도는 옛 계단으로 부른다,  너의 마음을 모두 가파른 오르막에,  부서지고 무너지는 성벽에,  호흡없는 별빛 비친 공기에,  숨은 극을 표시하는 별에 집중하라고.  헤매는 모든 생각을  모든 생각이 다해버린 그 지역에 고정하라고.  누가 어둠과 영혼을 구별할 수 있겠는가?  육신: 내 무릎 위의 그 신성한 칼은  사토의 옛 칼로 여전히 예전과 같다,  여전히 날리 예리하고, 여전히 거울같고  긴 세월에 의해 얼룩지지 않았다.  그 꽃무니, 비단의 옛 장식은, 어떤  궁정여인의 옷에서 찢어내어져  그 나무칼집을 묶어 싸고 있는데,  해어졌으나 여전히 보호할 수 있고, 빛바랬으나 장식할 수 있다.  영혼: 왜 인간의 상상은  전성기를 한창 지나서  사랑과 전쟁을 상징하는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밤을 생각하라,  다만 상상이 대지를 경멸하고  지성이 그것이 이것 저것으로  또 다른 것으로 헤맴을 경멸하기만 한다면,  죽음과 탄생의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그 밤을.  육신: 몬타시기, 그의 가족의 셋째가, 그것을 만들었다  오백년 적에, 그 주변에는  어떤 자수인지 나는 모르는--진홍빛의--  꽃들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밤을 상징하는 탑에 대한  낮의 상징으로 놓는다,  그리고 군인의 권리에 의한 것처럼  그 죄를 한 번 더 범할 특권을 요구한다.  영혼: 그 지역의 그러한 충만함은 넘쳐흘러  정신의 웅덩이에 떨어져  사람은 귀멀고 말못하고 눈이 먼다,  왜냐면 지성은 더 이상 구별하지 못하기에  존재와 당위를, 주체와 대상을--  다시 말하여, 하늘로 올라가기에,  단지 죽은 자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걸 생각할 때 내 혀는 돌이 된다.  II  육신: 산 사람은 눈멀어 자신의 배설물을 마신다.  도랑이 불결하면 어때?  내가 그 모든 것을 한 번 더 살면 어때?  자라는 노고를,  소년시절의 치욕을, 어른으로 바뀌는  소년시절의 슬픔을,  자신의 어색함을 직면하게 된  끝나지 않은 사람과 그의 고통을 참아내면 어때?  적들에게 둘러싸인 끝난 사람을 참아내면 어때?--  도대체 어떻게 그가  마침내 저 형상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도록  악의에 찬 눈들의 거울이  자신의 눈들 위에 던져준  저 더럽고 일그러진 형상을 피할 수 있는가?  명예가 그를 겨울의 강풍 속에서 발견할 때  도망이 무슨 소용있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하는데 만족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때리는  눈먼 사람의 시궁창의 개구리 알 속으로,  가장 비옥한 시궁창 속으로,  만일 사람이 자신의 영혼의 혈족이 아닌 오만한 여인에게  구애하면 그가 행하거나 겪어야만 하는 그 어리석음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삶이라 해도,  나는 또 다시 사는데 만족한다.  나는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의 모든 사건을  그 원천까지 추구하는 데, 운명을 헤아리는 데,  내 자신에게 그 운명을 허용하는 데 만족한다,  내가 이렇게 후회를 내버려서  매우 큰 감미로움이 가슴 속으로 흘러들 때  우리는 웃고 노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의해 축복받았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축복받았다.  ~~~~~~~~~~~~~~~~~~~~~~~~~~~~~~~~~~~~~~~~~~~~~~~~~~~~~~~~~~~~~~~~  비잔티움  낮의 정화되지 않은 상들이 물러난다.  황제의 술취한 병사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밤의 메아리도, 밤-보행자의 노래도  대 성당의 큰 종이 울린 후에는 물러난다.  별빛이나 달빛 비친 둥근 지붕은 경멸한다  인간인 모든 것을,  다만 복잡하기만 한 모든 것을,  인간 혈관의 격노와 오욕을.  내 앞에 상이 떠다닌다, 인간인지 허깨비인지,  인간이라기 보다는 허깨비이고, 허깨비라기 보다는 상인.  왜냐면 미이라의 옷에 감긴 하계의 실꾸리가  구불구불한 길을 풀어 놓을 지도 모르니,  습기도 없고 호흡도 없는 입을  호흡없는 입들이 소환할지도 모르니,  나는 환영한다 그 초인을,  나는 그것을 삶-속의-죽음과 죽음-속의-삶이라 부른다.  기적이, 새나 황금 세공품이,  새나 수공품이라기 보다는 기적이,  별빛 비친 황금 가지에 얹혀서,  하계의 수탉처럼 울 수 있거나,  달빛에 격분하여 큰 소리로 경멸할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금속을 찬양하여  보통의 새나 꽃잎을  그리고 오욕과 피의 모든 복잡한 것들을.  한밤에 황제의 포도 위에는 날아다닌다  나무도 공급하지 않고, 부싯돌도 부치지 않고,  폭풍우도 방해하지 않는 불꽃들이, 불꽃에서 나온 불꽃들이,  거기로 피에서 나온 영혼들이 오고  격노의 모든 복잡한 것들이 떠난다,  춤 속으로  황홀한 고뇌 속으로  소매도 그을릴 수 없는 불꽃의 고통 속으로 죽어간다.  돌고래의 오욕과 피에 걸터앉아 영혼이  줄지어 온다. 용광로들이 홍수를 부순다,  황제의 황금 용광로들이!  무도장 바닥의 대리석들이  복잡한 것의 격렬한 격분을 부순다,  여전히 새로운 상들을 낳는  그 상들을,  그 돌고래에 찢긴, 그 큰 종의 괴롭힘을 받은 바다를.  ~~~~~~~~~~~~~~~~~~~~~~~~~~~~~~~~~~~~~~~~~~~~~~~~~~~~~~~~~~~~~~  벌벤산 아래  아틀라스의 마녀가 알고 있었고,  말했고, 닭들을 울게 했던  마레오틱 호수 주변에서  성자들이 말한 것을 걸고 맹세하라.  안색과 모습이 초인임을 증명하는  그 말탄 자들, 그 여인들을 걸고 맹세하라,  그 창백하고 얼굴 긴 동료  불멸의 그 태도를  그들의 완전한 정열이 성취했음을.  이제 그들은 겨울 새벽을 타고 간다  벌벤 산이 경치를 보여주는 곳에서.  여기 그들이 뜻하는 바의 요점이 있다.  II  여러 번 사람은 살고 죽는다  종족의 그것과 영혼의 그것인,  그의 두 영원 사이에서,  옛 아일랜드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이 자기 침대에서 죽든  아니면 장총이 그를 죽게 하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이별은  사람이 두려워해야 하는 최악이다.  비록 무덤-파는 자들의 노고는 오래고,  그들의 삽이 날카롭고, 그들의 근육이 강하더라도,  그들은 다만 그들이 매장한 사람을  인간의 마음 속으로 다시 되밀어 넣을 뿐이다.  III  "우리 시대에 전쟁을 보내주소서, 오 주여!"라는  미첼의 기도를 들은 당신은  모든 말들이 말해지고,  한 사람이 미쳐서 싸울 때,  무언가가 오랫동안 멀었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편파적인 마음을 응시하고,  잠시 편안히 서서,  큰 소리로 웃는다, 그의 마음은 평온하다.  가장 현명한 사람조차도 긴장한다  어떤 종류의 격렬함으로  그가 운명을 완수하거나  자신의 일을 알거나, 짝을 고를 수 있기 전에는.  IV  시인과 조각가는, 일을 한다,  시류를 따르는 화가로 하여금  그의 위대한 선조들이 한 것을 피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영혼을 신에게로 가져가고,  그로 하여금 요람을 옳게 채우도록 한다.  도량법이 우리 이론을 일으켰다,  힘찬 이집트인이 생각한 형체들을,  보다 점잖은 피디어스가 만든 형체들을,  미켈란제로는 시스틴 성당 지붕에  증거를 남겼다,  거기선 단지 반쯤 잠깬 아담이  지구에 거니는 마담을 혼란케할 수 있다  그녀의 내장이 열받을 때까지,  은밀히 작용하는 마음 앞에 놓인  목적이 있다는 증거이다.  인류의 세속적 완성이다.  십오세기는 신이나 성자의 배경으로  영혼이 편안히 쉬고 있는 정원을  그림으로 그렸다,  거기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꽃과 풀과 구름없는 하늘이,  잠꾸러기들이 깨었으나 여전히 꿈꿀 때,  그리고 단지 침대와 침대틀만 거기 남아 있고,  그것이 사라졌으나  천국이 열렸다고 여전히 선언할 때,  존재하거나 보이는 형체들을 닮았다.  가이어들은 계속 회전한다,  보다 위대한 그 꿈이 사라졌을 때  칼버트와 윌슨, 블레이크와 클로드는,  신의 국민들을 위한 휴식을 준비했다,  팔머의 말로, 그러나 그 후  우리 생각에 혼돈이 일어났다.  V  아일랜드 시인들이여, 당신네의 일을 배우시오,  잔 만들어진 것은 무엇이든 노래하시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형체에서 나온 모든 것  지금 자라고 있는 종류의 것을 경멸하시오,  그들의 기억않는 가슴과 머리는  미천한 침대에서 미천하게 난 산물이오.  농부를 노래하시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렵게 말타는 시골 신사를,  수도승들의 성스러움을, 그리고 그 후엔  흑맥주 술꾼들의 요란한 웃음을 노래하시오,  일곱 영웅적인 세기 동안에  땅 속에 매장된  명랑한 귀족과 귀부인들을 노래하시오,  당신의 마음을 지난날에 던지시오  우리가 다가오는 시대에도 여전히  불굴의 아일랜드 인이 되도록.  VI  헐벗은 벌벤 산 정상 아래  드럼클리프 묘지에 예이츠가 누워 있다.  조상 한 분은 그곳의 목사였다  오래 전에, 교회가 가까이에 서 있다,  길 옆에 한 오래된 십자가.  대리석도, 전통적인 구절도 없다,  가까운 곳에서 채석된 석회암에  그의 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죽음에.  말탄 자여, 지나가거라!  ~~~~~~~~~~~~~~~~~~~~~~~~~~~~~~~~~~~~~~~~~~~~~~~~~~~~~~~~~  긴다리 소금쟁이  문명이 멸하지 않도록  큰 전투에 패하지 않도록  개를 조용하게 하고 나귀를  먼 기둥에 매어라.  우리 장군 시저는  지도가 펼쳐진 텐트 속에 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그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 움직인다.     드높은 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그 얼굴을 기억하도록  이 외로운 곳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아주 상냥하게 움직여라.  사분의 일 여자에 사분의 삼 아이인 그네  아무도 자길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네의 발은 거리에서 익힌  땜장이의 걸음을 흉내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네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사춘기 소녀들이 마음속에  최초의 아담을 발견할 수 있도록  법황청 성당의 문을 닫고  아이들을 들여보내지 마라.  성당 안에서 미켈란젤로는  비게 위에다 몸을 기댄다.  새앙쥐 움직이는 소리 정도로  그의 손은 이리저리 움직인다.  냇물 위에 떠 있는 긴 다리 소금쟁이처럼  그의 마음 정적 속에서 움직인다.  ~~~~~~~~~~~~~~~~~~~~~~~~~~~~~~~~~~~~~~~~~~~~~~~~~~~~~ 
225    바이런 시모음 댓글:  조회:1958  추천:0  2017-08-19
바이런 1788~1824 영국의 시인   런던에서 태어났다. 1798년 제5대 바이런 남작이 죽음으로써 제6대를  상속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 오는 노팅엄셔의 뉴스테드애비의 영주가 되었다. 1805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갔고, 시집 《게으른 나날》을 펴냈다.   그는 슬프고 애절한 서정성, 날카로운 풍자성이 있는 시들로 근대 유럽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낭만파 시인의 대표로 꼽힌다.《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이 예기치않은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때 “자고나니 유명해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등이  있다.     추 억   아아, 모든 것은 끝났도다!- 꿈이 보여준 그대로, 미래는 이제 희망에 빛나지 않고   나의 행복의 나날은 끝났노라.   불행의 찬 바람에 얼어   내 삶의 동트는 새벽은 구름에 가렸구나,   사랑, 희망 그리고 기쁨이여 안녕!   내 이제 또 하나 잊을 길이 없을까,   추억을!     아, 꽃처럼 저 버린 사람   오, 그 아름다움 한창 피어날 때 저버린 그대   잠든 그대 위엔 묘석일랑 놓지 못하게 하리라.   그대를 덮은 잔디 위엔 오직 장미를 심어   봄이면 새싹 트게 하고   야생 실백편나무 수심어려 휘청거리게 하리라.   때로는 또 저기 푸르게 흐르는 시냇가에   슬픔의 여신 찾아와 고개 숙이며   갖가지 꿈으로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고   혹은 머뭇거리고 혹은 사뿐히 걸음 옮기게 할지니   상냥한, 가엾은 그대여!   혹시나 그 발걸음이   고이 잠든 그대를 깨울까 하여이니라.     시용성      사슬 없는 마음의 영원한 정신! 자유여,   그대는 지하 감옥에서 가장 찬연히 빛난다.   그대 사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기에   그대를 묶어 놓는 것은 그댈 사랑하는 마음 뿐,   그대 아들들이 족쇄에 채워져 얽매일 때-   그리고 축축한 지하 감옥 햇빛 없는   어둠 속에 던져질 때,   그들의 조국은 그들의 순교로 승리를 얻고   자유의 명성은 그 날개를 널리 펼친다.   시용이여! 그대의 감옥은 오히려 성스러운 곳   그대의 슬픈 돌바닥은 제단이다.   보니바르가 한 때 그 차디찬 돌바닥이 잔디인 양   그의 발자국이 그 모두에 남을 때까지   그 돌바닥을 짓밟고 거닐었기에   아무도 그 발자국들을 지우지 말지어다!   그 발자국들이 폭정을 신에게 호소하는   증거가 되기에.     바벨론 강가에서 앉아서 우리는 울었도다.                       우리는 바벨의 물가에 앉아서 울었도다.   우리 원수들이 살육의 고함을 지르며   예루살렘의 지성소를 약탈하던 그 날을 생각하였도다.   그리고 오 예루살렘의 슬픈 딸들이여!   모두가 흩어져서 울면서 살았구나.     우리가 자유롭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때에   그들은 노래를 강요하였지만,   우리 승리하는 노래는 아니었도다.   우리의 오른 손, 영원히 말라버릴지어다!   원수를 위하여 우리의 고귀한 하프를 연주하기 전에     버드나무에 하프는 걸려있고   그 소리는 울리지 않는구나. 오 예루살렘아!   너의 영광이 끝나던 시간에   하지만 너는 징조를 남겼다.   나는 결코 그 부드러운 곡조를   약탈자의 노래에 맞추지 않겠노라고.     우리 둘 헤어질 때              말없이 눈물 흘리며     우리 둘 헤어질 때   여러 해 떨어질 생각에     가슴 찢어졌었지   그대 뺨 파랗게 식고     그대 키스 차가웠어   이 같은 슬픔     그때 벌써 마련돼 있었지     내 이마에 싸늘했던     그 날 아침 이슬   바로 지금 이 느낌을     경고한 조짐이었어   그대 맹세 다 깨지고     그대 평판 가벼워져   누가 그대 이름 말하면     나도 같이 부끄럽네     남들 내게 그대 이름 말하면     그 이름 조종처럼 들리고   온몸이 한 바탕 떨리는데     왜 그리 그대 사랑스러웠을까   내 그대 알았던 것 남들은 몰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걸   오래 오래 난 그댈 슬퍼하리     말로는 못할 만큼 너무나 깊이     남몰래 만났던 우리--     이제 난 말없이 슬퍼하네   잊기 잘하는 그대 마음     속이기 잘하는 그대 영혼을   오랜 세월 지난 뒤     그대 다시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말없이 눈물 흘리며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해럴드 공자의 편력' 중에서, 캔토 4, 시 178   길 없는 숲에 기쁨이 있다   외로운 바닷가에 황홀이 있다   아무도 침범치 않는 곳   깊은 바다 곁, 그 함성의 음악에 사귐이 있다.   난 사람을 덜 사랑하기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   이러한 우리의 만남을 통해   현재나 과거의 나로부터 물러나   우주와 뒤섞이며, 표현할 수는 없으나   온전히 숨길 수 없는 바를 느끼기에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                        아테네의 아가씨여 우리 헤어지기 전에   돌려주오, 오, 내 마음 돌려주오   아니 기왕에 내 마음 떠난 바엔   이젠 그걸 가지고 나머지도 가져가오   나 떠나기 전 내 언? 들어주오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에게해 바람마다 애무한   흘러내린 그대 머리칼에 맹세코   그대의 부드러우 뺨에 피어나는 홍조에 입마주는   까만 속눈썹이 술 장식한 그대 눈에 맹세코   어린 사슴처럼 순수한 그대 눈망울에 맹세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애타게 맛보고 싶은 그대 입술에 맹세코   저 허리띠 두른 날씬한 허리에 맹세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사연도   전해주는 온갖 꽃에 맹세코   교차되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에 맹세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아테네의 아가씨여! 나는 떠나가리라   님이여! 홀로 있을 땐 날 생각하오   몸은 비록 이스탄불로 달려갈지라도   내 마음과 여혼은 아테네에 있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천만에요!   "내 생명이여, 나 그대 사랑하오"         그녀는 아름답게 걷는다                        별이 총총한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처럼   그녀는 아름답게 걷는다.   어둠과 빛의 순수는 모두   그녀의 얼굴과 눈 속에서 만나고,   하늘이 찬연히 빛나는 낮에는 주지 않는   부드러운 빛으로 무르익는다.   그늘 한 점이 더하고 빛이 한 줄기만 덜했어도    새까만 머리칼마다 물결치고   혹은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밝혀 주는   형언할 바이 없는 그 우아함을 반은 해쳤으리라.   그녀의 얼굴에선 사념이 고요히 감미롭게 솟아나   그 보금자리, 그 얼굴이 얼마나 순결하고 사랑스런가를 말해 주노라.   저 뺨과 이마 위에서   상냥하고 침착하나 힘차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 환히 피어나는 얼굴빛은   말해 준다. 착하게 보낸 지난날을   이 땅의 모든 것과 화목한 마음,   순결한 사랑이 깃든 마음을.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이토록 늦은 한밤중에   지금도 사랑은 가슴 속에 깃들고   지금도 달빛은 훤하지만.   칼을 쓰면 칼집이 해어지고   정신을 쓰면 가슴이 헐고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도 때로는 쉬어야 하니.    밤은 사랑을 위해 있고   낮은 너무 빨리 돌아오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헤매지 말자.   아련히 흐르는 달빛 사이를......  
224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댓글:  조회:1409  추천:0  2017-08-18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섬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 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학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쓰기 (문광영문창6)[ 스크랩 ]     사람에게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있듯이 시(詩)의 구조(構造)에도 형식상의 구조와 내용상의 구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커피를 좋아하시지요?   저는 아침 커피로 시작하여 온종일 커피를 마시며 삽니다. 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느끼며, 바이올린 곡이나 첼로 한 곡 곁들여 틀어 놓고 커피 한두 모금 마시며 원고를 쓰거나 책을 봅니다.   커피를 마시려면 먼저 커피 잔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커피잔의 모양, 색깔에 아주 민감합니다. 집에서 마실 때에는 연한 챠콜색의 울퉁불퉁한 머그잔을 씁니다. 깡통 찌그러진 것처럼 아주 제멋대로 생긴 놈인데,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분망한 상상에 빠지도록 해줍니다. 문협 사무실에서는 프러시안 블루의 큰 커피잔을 사용합니다. 바다를 연상하며 커피를 마신답니다. 여기 커피 잔의 선택은 시의 형식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는  커피의 내용물을  조제하는 일입니다. ‘다비도프’라는 인스탄트 커피를 마실 것인가, 케냐AA 원두커피를 내려 마실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저는 프림이나 설탕을 넣어 마시지 않습니다. 우유를 섞어 넣은 라테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지요. 바로 시의 내용상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커피 맛을 내는 데는 원두의 분쇄도나 우유의 온도, 비율 등이 중요하듯, 좋은 시(詩)가 되기 위해서는 시(詩)의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쓸 때에 어떤 방식, 어떤 형태의 시들을 쓰시나요? 시 창작을 하려면 일정 방식의 틀을 놓고 이를 변형시켜 나가고 발전, 비약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초보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형태의 시 쓰기를 알아두고, 이를 응용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참, 순간의 착상, 상상력이 대단하지요?  시는 순간의 예술이란 걸 보여줍니다. 나아가 시가 꼭 길어야 될 필   요는 없는 것이지요. 짧아도 장치만  잘하면 얼마든지 형상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반부(4행)는 묘   사시로서 외면풍경의 ‘보여주기’로 이루어지지만, 후반부(3행)는 화자 내면풍경의  ‘진술’로 서로 다른 방식이   겹쳐서 이루어진 시입니다.      전 시간에는 경험시에 이어 묘사시, 사물시, 이미지시 중심의 시 쓰기를 공부했지요. 경험시는 시인이나 화자   가 시적 언술에 참여하여 특수한 인간경험의 극적인 세계와 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묘사시는 시인이   나 화자의 관념보다 대상의 구체성에 비중을 두는 유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시의 내용과 형식 가운데 형식상의 그릇, 시의 내용을 어떤 형태의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이어 설명시와 논증시라는 유형을 놓고 창작 논의를 펼쳐가려고 합니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 쓰기                                                                       1. 설명시 유형의 시 구성          1) ‘설명문’과 ‘설명시’ 의 차이   ○ ‘설명문’의 개념과 ‘설명시’ 형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설명문은 일반적 문장 형식으로, 정보(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력을 요구하는 글이라 한다면, 설명시는 내용상에서는 시적 상상이 들어가고 그 표현의 문장 형식, 곧 기술상의, 언술(utterance)상의 문맥적 형태를 말한다.   ○ ‘설명문’은 어떤 사건에 대해 발생 원인과 경과를, 어떤 기계의 구조와 원리, 성능이나 취급 방법 따위를, 사전적 개념이나 해설을, 자세히 해명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설명법(exposition)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이냐”, “어떤 뜻이냐” “어떤 성질이냐”에 대해 그 답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는 문장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설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기술 방식에는 정의법, 비교․대조법, 분류법, 분석법, 인용과 예시법이 있다.   설명의 기술방법에서 설명시와 연관되는 것이 '정의'의 형식이다. 정의는 'A(주어)는 B(서술어)이다'가 아닌가. 바로  피정의항과 정의항으로 이루어지는 바, 여기에서  피정의항이 주어가 되고, 정의항은 서술어가 되는 셈이다.                 2) 주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시의 예   ○ 맥로그린(MacLauglin)이, 말하듯이 말하는 이가 선택한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시적 관념을 서술하고자 할 때 이 방식을 쓴다. 이때 시적 설명은 ‘주어 +서술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소위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그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 이때 소재에는 특수한 것으로 ‘장소’, ‘사건’, ‘대상’, ‘인물’ 혹은 자신의 특성을 들 수 있고, 일반적인 것으로는 ‘관념’이나 ‘진리’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아래의 시는 ‘고드름’이란 소재가 채택된 시이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의 아끼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고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소리 *   결국엔 물이었다 한잔 먹지 않겠는가                                  전문(《시문학》2006년 4월호)       ○ 먼저, 시 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 1연은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 고드름은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 고드름은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 고드름은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 고드름은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         와 같이, 고드름에 대한 시인의 시적 관념, 곧 의미부여된 화자 자신의 내면적 상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드름’이 갖고 있는 속성, 성질, 모양 등에 몰입하여 ‘오기’, ‘휘초리’, ‘송곳’, ‘회한’, ‘절규’로 치환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2,3,4연부터는 현실 상황을 제시하는 부가적 묘사와 진술로서, 고드름의 지닌 물의 속성, 허무의 결구 처리를 보여준다.   ○ 그러니까, 박정원의 은 절간에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에 대해 남다른 사유를 시로 형상화한 것, ‘고드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보인다. 고드름에 대한 상상력, 고드름과 같은 하찮은 사물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존재 의미, 삶과의 비유 등 소재에 대한 다양한 시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어찌 보면 시는 삶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다. 이때 시의 힘은 의미부여의 상상력에서 온다. 곧 ‘고드름’이라는 외면풍경의 소재에 대해 ‘시안’에 의해 반응된 작가의 내면풍경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가 깊고, 통찰을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작품의 ‘상상력의 등가성’이란 자장(磁場) 속에서 의미를 탐색해 간다. 물론 이때 시인의 연이나 행간의 설정은 중요하며, 독자는 유능한 독자, 슈퍼 리더가 되어 경험을 되살려 의미를 확장해나가도록 장치해야 한다. 곧 위에서 보듯, 시인은 고드름에 대한 시적 설명에서 다 말하지 않는다. 행간의 빈자리를 독자로 하여금 읽어나가면서 ‘빈자리 메꾸기’를, 곧 의미 있게 채워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이 노련미이다.   ○ 위에서 독자들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의 고드름,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드름,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로서의 고드름,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의 고드름,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의 고드름,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에서 삶의 아우라를 읽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고드름은 물의 변신일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적은 것처럼, 절 마당 노스님이 아끼는 동백꽃잎처럼 ‘투욱’ 지고 나면 고드름은 낙숫물에 불과한 것이고, 그 거리라는 시․ 공간의 차이도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 밖에 안 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 대개 설명시에서는 소재, 곧 사물에 대한 정신의 해석적 의미로 깨달음이나 통찰,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 것들이 많다. ‘고드름’에서의 절규는 이승의 속세에 사는 우리들의 평상심이다. 타자를 향한 회초리나 송곳 같은 마음은 결국 복수의 화살로 자신에게 꽂히는 법, 문제는 우리의 삶이란 무명(無明)의 혼돈 속에서 내 탓임을 알고 물이 지닌 섭리대로 돌아가는 유연성이다. 갈증을 아는 고드름의 원천인 물, 그 낫숫물 소리가 떨어지는 수직적 삶의 깨달음이 감동을 주지 않는가.       3) 설명시 유형의 시 쓰기 방법                  (이승훈 , 시작법, 문학과 비평사, PP.70-74참조)       (1) 특수한 소재( 장소, 사건, 사물)를 시적 설명 : 유치환의   ○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 시인이나 시 속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법이다. 대체로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설명시와 논증시의 범주에 든다.   ○ 설명시는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논증시의 경우에 그러한 서술의 논리적 타당성이 드러난다. 설명시는 화자의 주장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설명시는 주어(S)+서술어(P.V)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때 주어에 해당되는 것이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한 설명시 유치환의 을 살펴보자.                     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깃발                                    깃발은   - 소리없는 아우성 (P.V1)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깃발                             깃발은  - 노스탈쟈의 손수건 (P.V2)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깃발                        깃발은   - 순정 ( P.V3)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깃발                             깃발은   - 애수 (P.V3)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깃발                           깃발은  -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P.V4)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다 아시다시피 이 시의 소재는 “깃발”이다. 언어적 형식으로는 “깃발”이 주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 “깃발”을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시의 언어적 형식이 계속 ‘주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내용이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 위의 시구조를 보면 “주어(S)는 서술어(p.v)” 형식이 반복되는 구성 양식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이며, 무엇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을 설명을 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깃발’이라는 대상을 일상적이거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 필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시를 써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다. 물론 사전에 설명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여학생은 완벽한 설명시 형태의 시를 써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                                         고유미   긴 밤 그 적막한 터널 속을 걸어와 늘어선 회색빛 빌딩 사이를 휘휘 도는 소리 없는 몸짓입니다.     하늘 위를 촉촉히 적셔놓고 창공 속에 피어 오른 꿈에 보았던 그 소녀의 미소입니다.     이내 깨어나지 않은 내 창에 내려앉은 해맑은 눈빛입니다.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가슴에 단 하얀 설레임입니다.       ○ 김소월의 , 이상의 , 는 모두 설명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어+서술어 형식은 설명 방식의 하나인 ‘정의’(definition)에 해당한다. 곧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같은 국어사전식의 정의에서, 피정의항은 '인간', 정의항은 '이성적 동물'로 나눠지는 바, 이 때 피정의항이 주어에 해당하고 정의항이 술어에 해당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유체계에서 ‘A는 B다’ 식으로 시인들이 매우 즐겨 쓰는 방식이어서 설명시적 언술은 확장과 응용, 변이의 형태로 다양하게 도출된다.   ○ 다음의 짧은 시도 설명시 형태가 확장, 발동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2) 일반적 관념이나 진리의 시적 설명 : 김현승의     ○ 일반적인 관념이나 진리를 소재로 하는 시를 보기로 하자.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견고한 고독은   - 흰 얼굴 (P.V1)     그늘에 빗지지 않고 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 또 하나의 손발                                                                견고한 고독은 -단하나의 손발 (P.V2)     거대한 신들의 정의 앞엔 이 가는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제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견고한  고독은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                                                                                             견고한 고독은  - 피와 살 (P.V3)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못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견고한 고독은 - 굳은 열매 (P.V4)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 은-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P.V5)                                      ○ 소재는 ‘견고한 고독’이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고독의 견고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어는 ‘견고한 고독’이며 주어에 대한 서술은 3연을 빼고 각 연을 형성한다. 서술어(p.v)를 형성하는 각 연의 중심낱말은 1연: 흰 얼굴. 2연: 단 하나의 손발. 4연: 피와 살. 5연: 굳은 열매. 6연 : 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등이다.   ○ 주어 +서술어 형식의 진술은 곧 'A는 B다‘의 형식이기에 하나의 비유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처럼,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의미론적 이동‘(sementic movement)을 하는 셈이다.    ○ 주어 +서술어의 결합방식에서 문득 피천득의 을 들 수 있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이 하나의 수필이란 ‘정의놀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3) 주어 + 서술어 시 형식에서의 구상과 추상의 문제     ○ 시의 제목(주어, 소재)이 추상일 때 본분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내용이 추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한 마디로 여기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 또 본분에서도 추상 일변도라든가, 구상 일변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곧 시(詩)의 내용상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로는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들 수 있는데, 이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시에서 어떻게 배합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시의 내용 구조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① 구상(具象) + 추상(抽象)           ☞ 산은 꿈이다. ② 추상(抽象) + 구상(具象)           ☞ 시(詩)는 꽃이다.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 물은 물이다.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 마음은 무(無)다.     ○ 이러한 시의 내용상의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시의 내용 전체에 걸쳐 사용되지만, 부분적으로는 시의 제목과 내용, 한 행, 한 연의 내부에서도 서로가 긴밀하게 작용하며 나타난다.   대개 환기력을 위하여 시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①과 ②의 내용 구조처럼 추상은 구상과 어울리고, 구상은 추상과 어울리게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니까 추상어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이나,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의 형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에서 다룬 시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구상어 + 추상어)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           (구상어 + 추상어)       견고한 고독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추상어 + 구상어)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추상어 + 구상어)         2. 논증시 유형의 시 구성       1) ‘논증’과 ‘논증시’ 의 차이   ○ ‘논증’(論證, argument)은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설득시키고 동조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명제(命題, proposition) 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판단을 서술한 문장을 뜻한다. 주어진 명제는 하나의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공감을 얻으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필요하게 된다. ○ 논증시에서의 화자는 전지적 시점이거나 보고자로서의 관찰자 시점이 된다.   ○ 명제의 유형으로는 사실명제, 가치명제, 당위명제가 있다. 사실명제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다’처럼 어떤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 가치명제는 ‘진달래는 아름답다’처럼 제도, 사물, 사상에 대해 판단한 것, 당위명제는 ‘세월호 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처럼 정책이나 어떤 시사적 대상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크게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유추적 방법이 있다.   ○ 따라서 논증은 명제로써 자신의 주장(사상, 판단)이나 관념을 드러내는 서술로, 그 서술상의 인과율과 같은 논리적 뒷받침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 논증이란 그런 점에서 설명과는 다른 서술양식이다. 설명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논증시에서는 서술방법이 어느 정도 논리적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니까 논증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인과율에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과율로 나타난다. 시적 인과율이란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면서 시적 공간을 빚는다. 형식의 측면에서는 원인→결과 혹은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 여기에서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그러한 논리를 말한다.     2) 사실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시적 인과율에 따라 구성된 논증시로 서정주의 를 보자.   연               원인                           결과   1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2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4         간 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       국화가 피었다           에겐 잠이 오지 않았다     ○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실명제이다. 원인이 되는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고, 천둥이 쳤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게는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에 국화가 피었다는 명제이다. 국화가 피었다는 상상적 사실에 대한 시인의 판단에 시 속에서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가치명제의 논증시 : 의 경우   ○ 가치명제를 노래하면서 유추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증시로 김춘수의 을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명명이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명명이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1,2연을 미루어 판단하는 유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꽃 : 이름 = 나 : 이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 : 이름 = 우리 : 이름       ○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가치 판단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국화가 핀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이 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치명제로 노래된다. 이 시의 논리에 따르면 ‘이름 부르는 것’, 곧 명명행위와 관계된다. 이 시가 암시하는 가치판단은 ‘언어에 대해 명명될 때 사물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꽃’은 이 시에서 사물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는 사물 존재라는 것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철학시로 보아야 깊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 이렇듯 논증시의 내용은 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드러나는데, 이때 명제는 일상적 합리적 차원을 벗어난 상상의 내용으로 일상적으로 수용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어 내는 시적 의미를 지닌다.       3)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의 논리에 의한 시   ○ 초등교과서의 시 이나 박용재의 도 하나의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에 의한 논증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박용재   사랑하지 않으면 산도 계곡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싱그런 가슴도 팽팽한 엉덩이도 애인들의 이빨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던 자동응답기도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죽음의 예감도 보이지 않는다       3박 4일간 시골에 간다던 사람 그렇게 지구의 하오를 산책하러 갔던 사람     그대의 자동응답기는 앵무새처럼 3박 4일만을 되풀이하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목소리도 쓴 웃음도 지리산의 몸도 눈물도 너의 우연한 죽음도 보이지 않는다.  
223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댓글:  조회:1883  추천:0  2017-08-10
海外 兒童文學/프랑스  프랑스 동시문학의 세계  ―어린이 동심견문록, 童心, 어른의 Micro-Cosmos 『색깔들couleurs―시로 엮는 어린 시절enfnace en poésie』(청소년 갈리마르 출판사 Gallimard Jeuness, 에르베 뛸래Hervé Tullet 그림, 강금희 옮김) 姜金希(총신대 강사) 제1부 11명 프랑스 대시인들의 童詩   색깔들Couleurs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난 말이야, 보라색을 좋아해, 7월달 색이거든.   월귤이 흰족제비에게 말한다. -난 말이야, 주황색을 더 좋아해, 게다가 난 절대 변하지 않아 오렌지가 자랑스럽게 대답한다.   -난 빨강색이야, 딸기가 말한다.   -난 말이야, 노랑색이야, 참외가 말한다.   사과는 몹시 으스대며,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 난 경우에 따라 달라.   연못은 파란색으로 옷 입고 벚꽃 나무는 하얀 꽃으로 옷 입고 초록 잎은 나무 가지들을 즐겁게 하고 금은 불에게 마술을 건다.   그리고 목넘이 마을에 폭풍우가 지나가 급작스런 우박에 놀라지만 예쁜 꽃 드레스를 입고 무지개 목도리를 하고 총천연색으로 웃고 있다   ―시집 『레네뜨사과Pomme de reinette』에서   지나가는 시간Le temps qui passé / 앙드레 이베르노Andree HYVERNAUD   회색 월요일 수국의 분홍색 화요일 파란색 수요일 : 너 다시 올 거지? 주중 다른 날들은?   나무 아래서 티티새와 놀이하는 초록색 목요일   치즈에서부터 생크림에 이르는 하얀색 금요일   그리고 당근의 빨간색 토요일 일요일 그는 두 팔 사이 줄기 위에 태양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시집 『투명성Transparences』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리고 세련된 사람을 위한 Pour les enfants et pour les raffinés / 막스 쟈콥Max JACOB   난 네 생일에 개암색 모자를 줄게. 네 손에 들고 다닐 사틴(반드러운 천)으로 만든 작은 가방이랑 손잡이에 술이 달린 하얀 비단 양산이랑 금빛 자락 달린 옷이랑 주황색 구두랑    그런데 목걸이 보석들은 일요일에만 해야 해! 티우! 근사할거야!   ―시집 『성-마토렐Saint-Matorel』   이 수수께끼 좀 풀어볼래Devine un peu la devinette / 끌로드 루와Claude ROY   쥐색인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다리 끝은 하얗다. 가만히 뻗고 있는 발톱을 감춘 벨벳 다리들 온통 잿빛 하늘에서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밤에 감추어진 수십만 잿빛 고양이들 천천히 눈이 내리고 있다   ―시집 『변덕스런 아이의 소설Nouvelles Enfantasques*』   *‘아이’라는 단어 ‘enfant’과 ‘변덕스러운’ 이란 형용사 ‘fantasque’의 합성어 파랑과 하양Bleu et Blanc / 모리스 카렘Maurice CAREME   하얀 물방울무늬 위의 파란 작은 고양이 하난 물방울무늬 위의 하얀 커다란 쥐 그들의 귀여운 꼬리들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코는 너무 너무 하얗다 하얀 쥐의 코는 너무 너무 파랗다. 그들의 뺨과 눈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 하지만 파란 고양이 눈썹은 아주 아주 하얗고 하얀 쥐의 눈썹은 아주 아주 파랗다   하양과 파랑의 이 조금 차이로 아주 적은 이 차이 때문에 그 둘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시집 『귀뚜라미 초롱La cage aux grillons』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La terre est bleue cpmme une orange / 폴 엘루아르Paul ELUARD   지구는 파랗다 오렌지처럼 이건 결코 잘못 아니다 단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단어들은 더 이상 당신에게 노래거리를 주지 않는다. 미친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통하는 입맞춤으로 지구는 약속의 입 모든 비밀들 모든 미소들   그리고 발가벗고 믿게 하는 면죄부의 어떤 옷 말벌들이 초록색 꽃을 피우고 새벽은 목둘레에 窓 목걸이를 걸어주고 날개들은 잎을 덮고 너는 모든 태양의 기쁨을 지녔다. 지구 위에 온 태양을 너의 아름다움의 길들 위에   ―시집 『사랑 詩L’amour la poési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nuit bleue sur terre noire / 모리스 퐁뵈르Maurice FOMBEURE   검은 땅 위의 푸른 밤 푸른 땅 위의 검은 밤 모든 말(馬)들이 마시러 간다 내 기억의 물속으로   ―시집 『작은 고양이에게』   바다La mer / 폴 포르Paul FORT   바다가 빛난다 조개처럼 그것을 잡고 싶다 바다는 초록색이다 바다는 회색이다 쪽빛의 바다 은빛과 레이스의 바다다   편애 없이Sans manie / 뮈리엘 베르스티쉘Muriel VERSTICHEL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하얀색에게다 최상의 하얀색에게 순결무구의 신비의 하얀색에게 새벽의 눈의 하얀색에게 하얀색에게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은 검은색에게다 불타고 있는 내 친구 피부의 검은색에게 수천 년 묵은 석탄의 검은색에게 검은색에게 그 가운데서 검정색과 하얀색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 색깔들이 춤추고 있다   ―시집 『미발표Inédit』   바다La mer / 알렝 보스케Alain Bosquet   바다는 파란 물고기를 쓰고 회색 물고기를 지운다 바다는 불붙은 순양함을 쓰고 잘못 쓴 순양함을 지운다   시인들보다 더 시인 음악가들 보다 더 음악가인 바다는 나의 통역자이다   옛 바다 미래의 바다는 꽃잎의 대리모 모피의 대리모인 바다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속에 자릴 잡는다   바다는 초록빛 태양을 쓰고 연보라 빛 태양을 지운다 바다는 황급히 도망가는 수 천 마리의 상어 위로 반쯤 입 벌린 태양을 쓴다   ―시집 『시,하나Poèmes, un』   노래Chanson / 마리 노엘Marie NOEL   히드가 무성한 땅을 가면서 -붉은 덤불, 하얀 덤불- 바람 가운데서 자라는 마지막 꽃을 꺾기 위해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참으아리 곁을 지나면서 -붉은 목 울새가 그 안에 있다-   나는 아이들을 숲으로 데려가는 유모를 만났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보다 예쁜 세 아이들은 뒤에 가고 보다 명랑한 세 아이들은 앞에 가고 그러나 맨 꼴찌 꼬마 여자에는 신발을 끌며 걸어가고 있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토기풀밭을 지나면서 -걔 오빠들은 들 저 멀리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다.   그녀는 울면서 발걸음을 멈춘다 붉은 덤불, 노란 덤불, 멀리서 덤불모양으로 자라는 덤불         ―시집 『가을의 노래와 시편Chants et psaumes d’automne』   내일은 일요일이다C’est demain dimanche / 필립 쑤포Philippe SOUPAULT   미소 짓는 법을 배우라고 날씨가 잿빛으로 흐릴 때라도 말야   왜 울어야 하는데 오늘 태양이 빛나고 있어   내일은 친구들의 생일 개구리들과 새들 버섯들과 달팽이들 곤충들도 잊지 말자 파리들과 무당벌레들도 그리고 조금 있으면 정오다 난 무지개를 기다릴 테야 보 남 파 초 노 주 빨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그리고 우린 돌차기-깨금집기 놀이를 할 거야   ―시집 『Julie의 새 화환La nouvelle Guirande de Julie』     2부. 해설 : 빛의 나라 색깔나라-색깔이야기 색은 혼자서 존재하지 않으며 빛이라는 존재와 함께 어울려야 한다. 색은 빛의 강도와 방향, 원근 등에 의해 확연하게 변신하는데 하지만 ‘색즉시공 공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처럼 태초에 형체(色)도 없어 형상은 일시적인 모습일 뿐 실체는 없고 모든 사물의 참모습은 공일뿐 실체가 아니라는 데 사실인가? 게다가 실제로는 세상에 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자연에는 색이라는 관념조차도 없다. 색은 인간의 뇌가 사물을 특정한 공식으로 인지하면서 나타나는 결과 중의 하나다. 우리가 오렌지라고 부르는 과일의 색도 인간의 되가 만들어내는 오렌지라는 사물에 대한 인식 방법일 뿐 실제의 과일 오렌지는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색맹(色盲)은 빨강과 초록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뇌가 그 색들에 대한 정보를 다르게 인식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색과 남이 보는 색도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결국 색은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다. 인간의 뇌는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마술사”가 아닐 수 없다고 화가 김이산은 『똑!똑!똑! 그림책/현암사』에서 정의하고 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있으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 한마디로 흑백 세계에서 드러난 칼라 세계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옮겨감을 의미하지만 아이가 캄캄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간 들어 있다가 거의 병실이지만 혹 방안 전구 불빛 아래 태어날 때 아이에겐 빛은 폭력에 가까운 카오스가 아닐까? 아이가 우는 첫 呱呱聲은 바로 어둠에 익숙해져 있다 갑작스런 빛에 노출되었을 때 확실한 건 잘 모르지만 일종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해도 틀렸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흔히 영화관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 환한 날빛에 맛보는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일시적이지만 앞 못 보는 시각장애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 후 색맹이 아니면 누구나 반짝반짝 빛의 나라 알록달록 색의 나라에 살게 되면서 우리 오감 중 시각은 자연 주위의 모든 빛깔과 색깔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조화로운 색채를 배우게 된다. 자연은 가장 지혜롭게 색을 가르쳐 주는 좋은 선생이며 우리 정서에도 균형과 안정감을 준다. 그리하여 무슨 색인지를 물을 때 프랑스어론 ‘De quelle couleur est-il?’, 영어처럼 ‘What color is it? 이것은 무슨 색깔 인가?’로 묻는 것이 아니고 ‘de’라는 전치사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색의 속성을 묻기 때문이다. 자연의 색에서 색을 구별했기에 이런 질문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늘색, 금색, 살색, 쥐색, 오렌지색 가지색 등등.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색은 無色을 빼고 온갖 색이 존재한다. 본색을 드러내지 않아도 원색에서 死色(사색)에 이르기까지 없는 색이 없다. 먼저 모든 빛깔을 재현할 수 있는 기본 적인 세 색깔로 물감의 三原色으론 빨강-노랑-파랑이 있고 빛의 삼원색으론 빨강-초록-파랑이 있다. 그 외 모색/사색/박색/정색/채색/주색/특색/희색 등등 색자(色字)가 들어간 상용 합성어들은 형형색색만큼이나 많다. 신현득은 「한 색깔만 없어도」안 된다고 한다.   크레용 스무 색깔에서 파랑 색 하나만 없어도 안돼/하늘 색깔을 칠할 수 없거든/무지개를 그려도 파랑, 한 색깔이 모자라지/노랑 색깔 하나만 빠져도 안돼/개나리 노랑 꽃도, 귀연 병아리도 못 그리지/우리 여럿 중에서 한 사람만 빠져도 골목 축구 뛰는 데서 편이 기울 듯.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白衣民族이라 무명실로 짠 무명베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1886년 6월 31일자 한성주보 22호에 일본 상인들의 광고 이후 염색법을 배운 후에는 달라졌다고 마정미는 『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에서 백의민족의 종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염색약 제조법 광고에는 ‘감색 비색 기타 각색 염액 제조 급 염양법 전수광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산기승차랑 이라는 사람이 염색법을 깊이 연구하여 가르쳐주고자 하는데 이를 배우면 생계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보라색 꽃 색 등 여러 가지 색 제조법을 배우려면 지화 2원을 보내야 하고 붉은 비단 색, 매화 색, 복숭아 색 등의 여러 가지 색을 배울 사람은 1원 50전을 보내면 그 자세한 제조법을 기록해서 보낼 줄 것이다. 만일 염색법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보낸 금액을 도로 환불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항과 더불어 백의민족의 흰옷을 물들이려는 염료들이 밀려들어온 후 1905년 10월 경무사 신태휴는 독특한 법령을 발포했다는데 흰옷 대신 검정색 등 짙은 색 옷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그리해 흰옷을 입은 사람의 등에다 ‘흑’ 혹은 ‘묵’ 자를 써서 짙은 색으로 물들이지 않으면 입고 다닐 수 없게 했다는데 위생을 위해서 신문명 시세에 따라야 한다는 요지였다지만 일본의 염료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다. 그 후 ‘흰옷은 더욱 희게’ 라는 슬로건으로 ‘청백분’ 이라는 표백제도 관심을 끌었다는데 명절이 돌아오면 형형색색 색동옷 때때옷을 입다가 평상복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동시에 이용한 일본사람들의 교활한 상술에 한국은 차츰차츰 알게 모르게 무색세상이 아닌 유색세상으로 바뀌어 간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 미인의 기준이 몸의 형태도 형태지만 색깔로 기준을 삼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三色이 기준인데 黑色으론 눈동자와 머리털과 눈썹이 검고 白色으론 치아와 손과 피부가 하얗고 紅色으론 입술과 뺨과 손톱이 붉어야 미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성형으로 몸이나 얼굴 형태는 바뀔지 몰라도 색으로 드러나는 건강상태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리라. 윤극영의 「설」에서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우리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저고리/아버지와 어머니 호사내시고’ 그리해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라는 동요는 바로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흑백영화, TV에서 1981년 4월 1일을 기해 총천연색 영화, 텔레비전 컬러화는 화려한 영상세계를 열어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을 한층 발전시켰다. 이미 미국에서는 1951년 CBS가 처음으로 컬러화면을 내보냈지만 그만큼 늦었어도 우리나라에선 컬러영상의 색 재현에서 질감의 문제를 극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표현의 차별화를 추구한 이래로 2000년 이후 디지털TV 시대에 이른 요즘 흑백사진 D.&P.가게가 폐점에 이르게 되고 영화에서도 흑백화면은 과거 기억용 화면으로 밖에는 삽입되지 않을 정도로 유색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부모님들이 보는 신문은 드라마와 사고들로 온통 흑백이지만 내가 보는 잡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동시들로 아주 명랑하고 유치찬란 아니 오색찬란하다’는 ‘신문과 잡지’. 게다가 목장에서 오래 갇혀 사는 동물마저도 총천연색 자연을 보고 싶어 할 정도로. 아름다운 초록색이 끝없이 펼쳐진 목장에서 암소마저도 목장 너머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날마다 초록 풀만을 먹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초록색이어서 싫증난 데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미셀 피크말의 글, 에릭 바뛰의 그림 책인 『물총새와 색깔나들이』(원제: 색깔 낚시꾼Pecheur de Couleurs), 여명미디어, 2000)의 주인공 당딘느가 친구 물총새 마르탱에게 예쁜 다른 색의 나라를 가보고 싶다고 부탁하게 된다. 물총새와 함께 떠난 첫 여행은 검정색의 밤의 나라였고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하얀 나라를 꿈꾸고 그 다음 나라는 목화송이보다 더 부드럽게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나라였고 그 다음엔 청록빛깔, 짙은 남빛, 보랏빛을 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나라, 그 수평선 위를 지나고 있는 배를 보고 다시 꿈을 꾼다. 그 후 노란 모래사막을 지났고 모래 언덕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의 나라로 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보는 무지개 나라에 도착한다. 마르탱 물총새가 당딘느 암소를 열기구에 태워 노랑 파랑 빨강 까망 초록 그리고 하양 온갖 꽃으로 울긋불긋한 바둑판을 이루고 있는 무지개 나라 꽃밭을 보여주었다. 모처럼 물총새 덕분에 너무 근사하고 멋진 색깔나들이를 했지만 암소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역시 초록이고 초록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데 그건 바로 내가 먹고 살고 있는 목장의 초록 풀 때문이라고 물총새에게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물총새 날개에 색깔나라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아름다운 색깔들이 다 들어 있어 문득 또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땐 다시는 건초 풀을 담아 애써 여행 가방을 꾸리지 않고도 물총새에게 와달라는 문자만 날리면 된다는 것도. 여기에 번역한 11명의 프랑스 대시인들의 어린이를 위한 아니 어른들의 어린시절 마이크로-코스모스인 동심으로 각인된 색깔에 관한 동시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색깔에 대해 깊이 너비로 통찰 할 수 있게 한다. 여기 처음으로 옮겨 본 열 한 명의 프랑스 동시들은 독자의 명도-채색-보색 감각능력에 따라 글로 그린 색채론에 감응하는 반응이 어떠한지를 실험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걸로 그치고 따로 개인적인 해설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색 모음집을 기회로 프랑스 어린이를 위해 주변 환경에서 관찰하면 보고 느끼면서 색깔에 관해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그림과 더불어 글로 시도한 꼬린느 알보Corinne Albaut의 『무지개 동시집Comptines Arc-En-Ciel』(악트 쉬드 주니어Actes Sud Junior출판사 1999)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기로 한다  ‘사계절의 색깔, 무지개처럼 명랑하고 목화 솜처럼 가벼운 동시들, 변덕쟁이 변색의 귀재카멜레온의 모자이크 동시들, 아주 미묘한 구석이 많은 수채화이거나 악동의 연필로 크로키한 동시들을 맛보기 위한 것이다.’는 취지의 이 동시집은 도미니크 티보Dominique Thibault의 파스텔 톤 그림으로 색깔의 나라로 초대된 독자와 총천연색 색깔 나들이를 해보자. 프랑스는 국기가 삼색기ldrapeau tricolore로 파랑-하양-빨강인데 이 삼색은 각각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의 3대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이 삼색-파랑bleu/하양blanc/빨강rouge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관용이라는 톨레랑스tolerance가 프랑스에서 만연하는 데는 십인십색이기에 ‘취향이나 색깔은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Des gouts et des couleurs on ne discute pas’는 속담에 기여한 건 아닐까? 예술의 나라 건축의 나라 프랑스에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옷이나 갖고 노는 장난감이나 사용하는 물건에 원색을 잘 사용하지 않는데다 색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으뜸인 많은 그림책과 색에 관한 동시를 통해 동시에 자연학습체험으로 아이들은 절로 색을 인지하게 된다.  네델란드 작가 리오니의 글/그림책 『파랑이와 노랑이』(물구나무, 2003)에선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관계를 주제로 다루면서 어린아이의 독립된 자아의식을 보여준다. 손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집안에 있던 《라이프》지의 종이를 찢어서 즉흥적으로 구성 시각적으로 명확하면서도 유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종이들은 의인화되어 인간 세계와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 움직인다. 사람을 상징하는 종이는 색다른 종잇조각과의 접촉으로 가족 친구 놀이 하교 등과의 핵심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개성 있는 회화적 표현 방식과 한 장한 장 페이지마다 돌아가며 연결되는 의미는 굉장한 동질성으로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야기의 완벽한 흐름은 새롭게 일어나는 사건을 전체적이며 단계적으로 완전하게 표현한다. 그림의 바탕색은 공간을 설정하여 색종이 조각을 포용하며 색종이 조각과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면서 각기 다른 색종이의 개별성을 잘 부각 시킨다. 텅 빈 하얀 배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만든다. 교실을 상징적으로 규정하는 검은 사각형에는 학생이 교실 책상에 얌전히 앉아 있듯이 여러 색의 종잇조각을 정렬해 놓았다. 무거운 느낌의 검정색은 어린이가 느끼는 지루함과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하는 딱딱한 부동자세 등 학교에서 느끼게 되는 억압을 잘 나타낸다. 파랑이가 친구 노랑이를 정신없이 찾는다. 온통 검정색으로 덮인 배경을 통해 당황한 파랑이의 심리를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 다음 장면은 갑자기 노랑이를 발견해서 기쁜 파랑이의 마음을 선명한 빨강색 바탕으로 표현한다. 색들은 무척 단순한 원색이고 간결하지만 색의 상호관계와 형태를 조화롭고 상징적으로 시각적으로 산뜻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어린이는 그림을 보면서 색과 형태를 통하여 사유하는 모험을 하면 시각의 조화를 배우게 된다. 먼저 활을 쏘는 과녁은 바깥 원주로부터 하양-까망-파랑-빨강-노랑으로 오방색인데 이 과녁 색으로 이미 고정되어 사용되는 합성어가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  하얀 거짓말, 흰구름, 백지, 백발, 백포도주, 백자/블랙 유머, 블랙 커피, 검은 고양이, 흑빵/파랑새, 청룡, 청마, 청기와, 푸른 수염, 청자/홍해, 적포도주, 적혈구, 붉은 군대, 홍삼/황인종, 누런 이빨, 황해, 황열, 노른자위처럼 여러 색은 그 단어를 구체적으로 상징 정의하는데 필수이다. 그리하여 코카 나뭇잎과 콜라 열매라는 이름으로 처음엔 소화제로 판매된 코카콜라가 음료수로 판매를 시도한 것은 사장 로버트 우드러프인데 , , , , 콜라가 세계의 대체음료로 장악하기까지는 초록과 빨강색의 힘이 작용한 셈이다. 콜라 병의 녹색은 ‘조지아 그린’이라 불리기도 하고 ‘코카콜라의 빨강’이라 불리는 색상도 상표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빨강이 왜 눈에 잘 띄는가 하면 색채심리학적으로 스펙트럼의 적색 쪽의 색깔들은 눈의 망막 조금 뒤에서 초점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적색은 보고 있는 동안 눈 쪽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고 청색은 눈의 망막 조금 앞에서 초점이 만들어져 멀어져 가는 듯이 나타난다. 적색은 정력과 흥분의 색이고 전세계 국기의 45%에 적색이 사용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에도 산타가 코크를 마시는 광고 덕분에 청량음료 콜라는 계절을 모르는 갈증처럼 불황을 모르는 전천후 아니 철부지 음료가 되고 만 것은 그만큼 색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온통 색이 지배하고 있다 : ‘반들반들 빛나는 토마토, 강렬한 초록색 상치, 하얗고 둥그런 버섯, 반으로 쪼개어 노른자에 마요네즈를 얹은 삶은 달걀, 검붉은 석류석 색의 무, 금빛 낟알의 옥수수, 양념의 구름과 파슬리의 살랑거림’이란 꼬린느의 「복합 샐러드」처럼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잿빛 연못 위로 무지개가 미소 짓는다 총천연색으로/하늘이 울고 있다 큰 소리를 내며 무지개가 전보다 심하게 소리 내 웃는다 수채화처럼 명랑하게’라는 「즐거운 무지개」만큼이나 김용택의 섬진강 아이도 오줌으로 「무지개다리」를 놓을 만큼 ‘아주 많이 마려웠던 오줌을 참고 해가 쨍쨍 비칠 때 쪽 싸면 작은 줄기는 밑으로 떨어져 보라색과 파남색을 만들고 굵은 오줌을 네 가지 색을 만들어 무지개 다리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까지도 색 투성이다. 일찍이 시인 랭보는 심지어 5가지 모음(아-에-이-오-우)을 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아’에 해당하는 모음 ‘A’는 검정, ‘에’에 해당하는 모음 ‘E’는 하양, ‘이’에 해당하는 모음 ‘I’는 빨강, ‘우’에 해당하는 모음 ‘U’는 초록, ‘오’에 해당하는 모음 ‘O’는 파랑이라 했다 A는 새벽이 등장하는 어둠의 세계 동쪽하늘을 의미하고 E는 아지랑이, 안개 즉 흰 새벽빛을 치환한 것이다. I는 적색 새벽빛의 주홍빛 피 분노를 상징 U는 녹색의 바다 부지런히 밀려드는 물결의 해면 그리고 O는 오메가, 새벽의 절정을 알리는 나팔의 팡파레인데 나팔은 놋쇠의 황금색과 함께 그 앞면의 형태 O의 끝 오메가로 빛의 색깔과 소리의 조화correspondance를 이룬다. 보들레르가 ‘향기, 색깔, 소리들은 서로 반응한다.’고 말한 것처럼……. 랭보 이후 많은 장래가 촉망된 프랑스 어린이poete en herbe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모음-색깔론을 피력하여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미리암이란 친구는 ‘I’ 는 풀잎의 초록이라 했다. I를 많이 그리면IIIIIIIII 혹은 iiiiiiiii처럼 풀처럼 보인다나 어쩐다나? 늘 푸르게 보이는 하늘만 해도 아침과 저녁 때 비가 올 때 와 눈이 내릴 때 달과 별이 빛나는 밤과 구름 낀 밤하늘 색이 다르다 : ‘아침 해가 떠오를 땐 빨간 하늘/소나기 비가 올 땐 검은 하늘/펄펄 눈 내릴 땐 하얀 하늘/해님 달님 없어질 땐 어두운 하늘/날마다 변해가는 요술 하늘’의 김신철의 「요술 하늘」과 ‘풀벌레 얘기하며 혼자 피는 하얀 들꽃처럼/내 마음 언제나 하얀색 될래요/별님과 얘기하며 몰래 피는 파란 산꽃처럼 내 마음 언제나 파란 색 될래요’의 김완기의「내 마음」처럼. 그리고 색의 착시현상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윤석중의 「꽃밭」을 들수 있다. ‘아기가 꽃밭에서/넘어졌습니다/정강이에 정강이에/새빨간 피/아기는 으아 울었습니다/한참 울다 자세 보니/그건 그건 피가 아니고/새빨간 새빨간 꽃잎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속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자연마저도 거의 다 바뀌어 가고 있어 누군가가 염려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이란 단어밖에 남지 않을 거라지만 아직 색은 우리가 살고 있는 주위에서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권태응의 「감자꽃」의 ‘자주꽃 핀 건/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하얀 감자/파 보나 마나/하얀 감자’는 꼬린느 알보의 「아주 하얀」의 ‘하얗다 눈송이처럼 양처럼 목화처럼/하얗다 무처럼 우유잔처럼 은방울꽃처럼/하얗다 하얀 빵을 뜯어 먹는 네 치아처럼’과 비교해보면 권태응은 눈에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불어로는 감자를 ‘땅의 사과pomme de terrre’라 일컬음) 땅 속에 감추고 있는 주먹, 감자 색이 일치함을 보여 주고 꼬린느 알보는 은유를 사용하여 하얀색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기윤의 「눈꽃새」의 ‘하얀 눈 하얀 눈 어째서 하얀가 마음이 맑으니 하얗지. 빨강 꽃 빨강 꽃 어째서 빨간가 마음이 예쁘니 빨갛지. 파랑새 파랑새 어째서 파란가 파란 콩 먹으니 파랗지’, 그리고 어효선의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에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처럼 우리의 정신에게까지 색의 연금술은 그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으로 박경종의 「초록 바다」의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초록빛 여울물에 두 발을 담그면 물결이 살랑 어루만져요 우리 순이 손처럼 간지럼 줘요’는 색과 혼연일체 가능함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파랑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투명한 유리잔은 절망한다. 빛이 자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우유를 부으면 금새 하얗게 된다. 놀랍다’는 「무색 유리잔」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속담으로 ‘옷은 중을 만들지 않는다L’habit ne fait pas le moine‘속담과는 반대로 유리잔은 내용물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이 가능함도……. 하지만 색이 섞여 또 다른 색이 되는 경우 꼬린느는 ‘노랑이 빨강과 춤을 춘다 서로 몸을 흔들며 움직인다 오렌지색에게로 돌아간다. 거참 이상하다!/파랑이 노랑과 수영한다. 론 강에서 그들은 온통 초록이 된다. 이게 무슨 일이람!/빨강이 파랑을 바라본다. 두 눈을 똑바로 그들은 보라가 된다. 그것 참 지독히 따분한 일이군!’이라며 「뉘앙스」에서 색상이 다른 두 빛깔이 합하여 다른 빛깔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검정에 하양을 섞으면 회색이 되는데 꼬린느는 검정과 회색」에서 ‘나는 검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회색을 좋아한다. 나는 저녁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밤을 좋아한다.’고 색깔과 현실을 동일시할 줄 안다. 그리고 「생쥐와 코끼리」에선 한 놈은 너무 작고 다른 놈은 너무 크고, 한 놈은 긴 코 다른 놈은 주둥일 가지고 있고, 한 놈은 큰소리로 울부짖고 다른 놈은 작은 소리로 찍찍대고, 생김새도 달라 차이가 많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두 놈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색깔이 회색으로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정과 하양이 함께 있으나 섞이지 않는 걸로 피아노 건반이 있다. 피아노는 하얀 건반 52개, 검은 건반 36개, 전부 88개의 건반을 갖고 있다. ‘도-레-미-파-솔 하얀 건반은 재미있게 웃지만 반음 올림표, 샤프#기호와 반음 내림표, 플랫♭기호인 검은 건반은 상복을 입고 솔-파-미-레-도 슬픔에 잠긴다.’는 검정과 하양, 그리고 「신호등의 빨간 불과 초록 불」에선 색깔의 상징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여 준다. ‘빨간 꼬맹이다 :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보행자들 기다려요 우리/초록 꼬맹이다 : 이번엔 정반대다. 보행자들, 건너요 우리!’ 그리고 총천연색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는 동시로 「공작새」와 「극락조」그리고 「불꽃놀이」가 있다. ‘이것 봐, 공작새, 우린 널 기다리고 있어! 네 꼬리의 깃털 속에 초록-파랑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제발 부탁인데 꼬리를 부채처럼 한번만 펴 우리에게 보여줘.’라는 「공작새」, 그리고 파라다이스의 새 ‘여기서 아주 먼 나라에 극락조가 살고 있다. 산불처럼 붉은 불 깃털이 파란 하늘에 타오르고 있다.’는 「극락조」또한 ‘색종이 조각 비처럼 조명탄 불꽃이 밤하늘을 번쩍이는 금속조각으로 콕콕 쪼아대면서 우릴 매혹시킨다. 두 눈엔 별들로 가득한 관중들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꽃불놀이 만세!’라는 「불꽃놀이」, 하지만 이 ‘불꽃놀이’로 태어난 시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쟈크 프레베르Jacques Préert이다. ‘엄마 뱃속 羊水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겨울 2월 어느 밤이었다. 여러 달 전 봄이 한창일 때 엄마 아빠 사이 불꽃놀이가 있었는데 그건 생명의 태양이었다. 그리해 그 안 에 들어 간 내 몸 속에 그들은 피를 부어주었다. 그건 지하 술 창고의 것이 아닌 생명의 샘 포도주였다. 그리해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떠나가리라.’는 「축제」에선 불꽃놀이는 밤하늘을 잠깐 동안 찬란하게 아름답게 수놓고 이내 추락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 아닌 생명의 꽃으로 환원된다. ‘밤이면 빛나고 반짝이는 저 빛의 정점은 무엇인가? 빛나는 이 작은 곤충은 바로 반딧불이’라는 「반딧불이」는 제 혼자서 조용히 소리 없이 요란스런 폭죽소리를 내지 않고 불꽃놀이를 한다. 캄캄한 밤에 불 밝힌 창호지문에 그림자로 드러나는 수놓은 여인의 침묵을 밤의 정적에 더해준다.  봄 여름 가고 가을 겨울을 지나노라면 사계절의 다양한 색들로 다채롭게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봄의 색깔들은 꽃들과 들판의 색들이다. 여름은 초록-파란색이다 바다 위 파도처럼. 가을의 색깔들은 바람에 바스락대며 떨고 있는 나뭇잎 색들이다. 겨울은 연못 위 얼음처럼 빛나는 하얀색이다’는 「계절의 색깔」처럼 사시사철 변하는 색을 알기 위해선 우린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새벽에 하얀 가벼운 베일이 들판, 시냇물들 길들 위로 펼쳐진다. 시골마을은 잠에서 태어난다. 색깔들을 되돌려 주려고. 나무들과 꽃들은 태양을 기다리고.’라는 「새벽에」처럼. 그런 다음 우리는 ‘난 제비 깃털로 온통 파스텔 톤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싶다. 거기에 바다를 춤추게 해 가볍게 파도가 일렁이도록 파랑 색과 초록색을 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위다 구름들을, 내 그림책들만큼 역시 가볍고 역시 얌전한, 구름들을 살짝 올려놓을 것이다.’는 「수채화」처럼 이젠 색을 가지고 놀면서 이 세상이 색처럼 다양하게 조화롭게 때론 세탁기 통 속, 옷처럼 섞이기도 하고 때론 그냥 옆에 있어줘서 그 색이 돋보이게 해주며 ‘마가레뜨의 정원은 화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모든 색을 짜 놓은 팔레트를 닮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가장하여 마가레뜨는 실제론 자기가 초대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줄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는 「마가레트의 꽃다발」처럼 서로 묶여 사는 법을 배울 일이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시에 세상을 살면서 믿고 얻는 행복을 표현하고 있다. 앙드레 이베르노(1910-2005) : 이란 동시처럼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시의 저자인 그녀는 그녀가 사랑했던 작가 죠르즈 이베르노가 죽고 난 후 그를 추억하며 그와의 변함 없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저녁이면 오는 것Qui mene au soir』와 『죽은 물가에서Au bord des eaux  mortes』. 막스 쟈콥(1876-1994) : 근대주의 시인, 초현실주의 선구자, 아폴리네르Apollinaire와 피카소Picasso와 친구인 그는 뷔르레스크(고상하고 웅장한 주제를 비속화함으로써 희극적 효과를 자아내는 장르)하고 현학적인 그리고 의미로 가득하지만 제멋대로인 작품을 남겼다. 끌로드 루와(1915-1997) :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 시인, 대 여행가이면서 현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아주 예민, 민감한 끌로드 루와는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맛깔스러운 시들을 썼다. 모리스 카렘((1899-1978) :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후에 그는 시에만 전념했고 널리 아이들에 의해 인용되는 수 많은 시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세상에서 얻은 행복을 시에 표현하고 하고 있다. 폴 엘루아르(1895-1952) : 초현실주의 시인, 참여시인, 자유를 위해 투쟁한 엘루아르는 항상 이길 원했다. 소박하고 맑고 정열적인 그의 시는 사랑을, 찾아온 봄처럼 거듭남을, 욕망을 노래한다. 모리스 퐁뵈르((1906-1981) : 문학 교수인 그는 초현실주의자 측에서 우회한 후에 진짜 사물에 대한 취미를 되찾았다. 토지에 대한 취미랑, 언어의 순수성과 익살 그리고 말놀이에 대한 그의 사랑을 그대로 다 간직한 채…    폴 포르(1872-1960) :  온갖 인간성과 건강한 부드러움에서 영감을 얻는 다작 시인인 그는 1896년에 프랑스 발라드『Ballades Françaises』즉 짧은 시형의 일종라는 첫 시집을 출판했다. 1912년에 시인들의 왕자로 선출. 연극에 심취한 그는 파리에 예술극장le Théâtre d’Art을 창설했는데 이것은 작품극장le Théâtre de l’Oeuvre이 되었다. 뮈리엘 베르스티쉘 : 프랑스 북부 릴르Lille에서 태어난 그녀는 글쓰기와 낭독-공연 아틀리에 진행자, 『황혼과 새벽 사이Entre le crépuscule et l’aube』와 『시의 대기실에 있는 체크무늬 표범나비Damier, dans l’antichambre du poème』는 시집 외에 열 권의 시집을 출판했다. *알렝 보스케(1919-1998) : 그의 시에선 사람과 우주, 물질, 언어, 사람과 그 자신 사이의 새 관계를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작가이면서 문학 비평가인 그는 역시 수많은 소설을 출판하였다. 마리 노엘(1883-1967) : 1966년에 파리 시 문학 대상을 받은 그녀는 매일매일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 신선함과 열정이 가득한 시들을 썼다. 가끔은 노래를 닮은 그런 시들 또한. 필립 쑤포(1897-1990) : 여행가, 기자, 라디오 진행자, 비평가인 그는 다다이즘 운동의 선전자 중 하나이고 후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를 창설하였다 특히 자동글쓰기(1920년『매혹적인 들Les champs magnetiques』를 통해서. 강금희  194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불문과 졸업. 프랑스 프로방스대학 불문학 박사 수료. 저서 『바이블팡세·불붙은 나무떨기』,번역서 『지나가는 슬픔』, 『다음 사랑』, 『영원의 계곡』외 다수. 현재 총신대 및 신학대학원에 출강.   
222    귄터 아이히 詩 모음 댓글:  조회:2218  추천:0  2017-08-09
비가 전하는 소식 귄터 아이히  슬레이트지붕에서 기와지붕으로, ... 빗방울이 북소리 같이 울리며, 전염병처럼 퍼져, 내게 전하는 소식,  가지고 싶지 않은 자에게 전달되는 밀수품- 벽의 바깥에 창문의 함석조각이 울리고, 자음과 모음들이 달그닥거리며 한데 합치면, 비는 말한다 나밖에는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언어로- 깜짝 놀라 나는 듣는다 절망의 소식을, 빈곤의 소식을, 그리고 비난의 소식을, 이 소식이 내게 전해져 불쾌하다,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나는 소리높여 외친다, 비도, 비의 고발도, 그리고 그것을 내게 보낸 자도 나는 두렵지 않다고, 적당한 시간에  밖으로 나가 그에게 대답하리라고     소지품 목록/ Guenter Eich 이것은 나의 모자, 이것은 나의 외투, 여기 아마포로 만든 주머니 속에는 나의 면도기. 통조림 깡통은 나의 접시, 나의 술잔, 나는 그 생철 그릇에다 이름을 새겼다. 모두들 갖고 싶어 해서 내가 숨겨두었던, 이 소중한 못을 가지고 여기에다 새긴 것이다. 빵주머니 속에는 면양말이 한 켤레 들어 있고. 또한 내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것들이 몇 개 들어 있다. 그래 이것을 밤이면 베개처럼 머리 맡에 베고 잔다. 여기 있는 이 마분지 판때기를 땅바닥에 깔고. 이 연필심을 나는 가장 아낀다. 밤에 생각한 몇 줄의 시를 낮에 이 연필심으로 쓰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공책, 이것은 나의 천막조각, 이것은 나의 세수수건, 이것은 나의 바느질 연장.       - 쓰레기 적치장/귄터 아이히     누구도 듣지 않고, 모두가 듣는 세계의 슬픔은 며느리밑씻개 위에서 시작된다. 바람은 매트레스의 스프링의 신축재를 건드린다. 꽃들과 포도송이들의 장식 속에서 잔에 쓰인 금자를 나는 어슴푸레 읽을 수 있었으니, 오 나는 얼마나 섬찟했던가. 사랑, 희망 그리고 믿음이란 말. 아 누가 너무나 쓰디쓴 고통에 대해 조각들을 이렇게 붙일 수 있나? 가슴을 지나듯 법랑을 지나 면리밑씻개의 불길은 커만 간다. 녹슨 철모에 남은 물찌꺼기는 스쳐가는 새들의 목욕을 위한 것. 망실되 영혼이여, 네가 누구를 떠나든간에, 누가 은총 속에서 너를 다시 맞출까?     - 변소/귄터 아이히   피와 오줌이 잔뜩 묻은 종이조각들, 악취가 진동하는 도랑 위에, 싯누런 똥파리들에 에워싸여, 나는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숲이 우거진 강가, 정원들과, 물가에 멎은 보트를 바라본다. 썩은 진흙구렁 속으로 돌덩이처럼 딱딱한 똥이 철썩 떨어진다. 엉뚱하게도 내 귀에는 휠덜린의 시가 울려온다. 눈처럼 하얀 구름이 오줌 속에 반사한다. 『이제 그만 가서 아름다운 가론느 江에게 인사하라-』 휘청거리는 발 아래서 구름이 헤엄쳐 도망간다.    기하학적 위치/ 귄터 아이히   우리는 우리들의 그림자를 팔아 버렸다, 그림자는 히로시마의 담벼락에 걸려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던 사업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자를 거둬들이고 있다. 한데,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의 위스키를 마시자꾸나. 그러나 양심의 증명서인 이름을 지닌 나의 술병이 있는 주막집을 나는 찾을 수가 없으리라. 예수의 탄생 때에 나는 동전 한 푼 은행에 맡긴 일이 없다. 그런데 인간에 대적해서 훈련받은 개들의 자손들을 나는 도나우 학파의 언덕 위에서 보았다. 그것들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나는, 히로시마의 주민들처럼, 화상 입은 피부는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마시고 노래하고 싶다, 위스키에 대해 나는 노래를 한다. 채석강이나 철조망 속에서 그의 조상들이 인간을 향해 뛰어오르던 그런 개들을 나는 쓰다듬고 싶다. 히로시마의 은행에 있는 그대, 나의 그림자여, 때때로 나는 모든 개들과 함께 너를 방문하며 우리들의 당좌예금의 안전을 위해 그대를 향해 잔들 들겠다. 박물관은 뜯겨 버리리라, 그 전에 나는 몰래 너에게 숨어들리라, 너의 난간 뒤로, 너의 웃음 뒤로, 우리들의 구원된 외침으로, 바로 그 순간 너와 나의 신발이, 우리들이 또다시 서로 어울리리라. - 비둘기/귄터 아이히   밭을 지나 저쪽으로 비둘기들이 날아간다, - 날개를 한 번 치는 것이 아름다움보다 더욱 빨라 아름다움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나의 마음 속에 불안으로 남는다. 비둘기집 앞에서, 녹색 페인트 칠을 한 그 조그만 새집 앞에서, 비둘기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날으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한 일일까, 땅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눈은 얼마나 날카로울까. 그들은 어떻게 모이를 쪼아 먹으며 또한 매가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릴까. 나는 비둘기들을 두려워하리라 마음먹는다. 나는 말하고 싶다. 네가 그들이 주인은 아니라고, 네가 모이를 뿌려주려고, 네가 그들의 깃털에 통신문을 매달고, 네가 그들을 예쁜 모습으로 치장해주긴 하지만, 새로운 색깔, 머리와 발목의 새로운 깃털. 너의 힘을 믿지 말라, 그러면 너는 놀라지 않으리라, 네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도, 너희들의 곁에 숨겨진 王國이 있어, 알아낼 수 없는, 소리없는 언어가 있고, 힘은 없어도, 건드릴 수 없는 다스림이 있고, 또한 비둘기가 날아갈 때 결단이 내려진다는 것을 알아도. - 꿈/귄터 아이히     깨어나라, 너희들은 악몽을 꾸고 있다! 잠들지 말라, 무서운 일이 서서히 닥쳐오고 있다. 네 비록 피 흘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너에게도 그것은 닥쳐오고 있다. 네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도 역시. 오늘 그것이 닥쳐오지 않으면, 내일 오리라. 그러나 틀림없는 일이다. 『아니타가 일주일 동안 수를 놓아서 크리스머스 선물로 준, 빨간 꽃무늬의 베개를 베고, 오, 쾌적한 잠, 기름진 불고기와 연한 채소를 먹고 난 다음의 오, 쾌적한 잠, 잠들면서 우리는 어제 저녁의 뉴스 영화를 생각한다. 유월절의 양들, 소생하는 자연, 바덴바덴의 도박장 개설, 케임브리지 팀이 옥스퍼드 팀을 2정신반 앞서 이겼다든가 하는- 잠들기 전의 상상으로는 이만하면 족하다. 오, 최고급 깃털로 만든 이 부드러운 베개! 이 베개를 베고 우리는 이 세계의 불쾌한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예컨대 낙태를 시켰다고 고발된 여인이 스스로의 변호를 했다는 소식을, 일곱 아이의 어머니인 그 여인이 젖먹이를 데리고 나에게 왔다. 아기의 기저귀가 없어 신문지로 기저귀를 채워가지고. 하지만 그거야 재판소에서 알아 할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팔자를 세게 타고난 걸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우리 손자들은 훌륭히 싸워 이길 테니까』 『아, 너는 벌써 자고 있느냐? 어서 깨어나라, 나의 친구여! 철조망에는 벌써 전류가 흐르고, 초병들이 늘어섰다』 이 세계의 주재자들이 분주한 동안은 안 된다. 자지 마라! 너희들을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고 그럴 듯하게 내세우는 그들의 권력을 믿지 마라! 너희들의 마음이 공허하게 될 것을 얘기하더라도 너희들의 마음이 텅 비지 않도록 주의하라! 유익하지 못한 일을 하라, 사람들이 너희들의 입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노래를 불러라! 불유쾌하게 살라, 이 세계라는 기계 속의 기름이 되지 말고, 모래가 되라!    
221    괴테 시모음 댓글:  조회:3817  추천:3  2017-08-09
괴테 시모음   신비의 합창  지나간 모든 것은  한갓 비유일 뿐,  이루기 어려운 것 여기 이루어졌으니.  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여기 이루어졌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라가게 한다.  ~~~~~~~~~~~~~~~~~~~~  첫 사 랑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저 첫사랑의 날을.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때를 돌려 줄 것이냐,  저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기르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한탄과 더불어  잃어 버린 행복을 슬퍼한다.  아 -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그 즐거운 때를.  ~~~~~~~~~~~~~~~~~~~~  그대 곁에서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태양의 미미한 빛살이  바다 위에서 일렁거리면  나 그대가 생각납니다.  달의 어렴풋한 빛이  우물 속 그림자로 출렁거리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먼 길에 먼지에 일게 되면  나 그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슥해진 좁은 길 위에서  나그네가 떨고 있으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요란한 소리로 높은 파도가 밀려 올때면  나 그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숨죽인 공원을 거닐 때면  나 그대 곁에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태양이 가라앉고  잠시 후 별이 빛날 것입니다.  아아, 그대가 저 하늘의 별일 수만 있다면.  ~~~~~~~~~~~~~~~~~~~~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달빛 휘영청 샘물에 번질 때  나 그대 생각 하노라.  저 멀리 길에서 뽀얀 먼지 일 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어두운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때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아득할 때  나 그대 소리 듣노라.  고요한 숲 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를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졌어도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나를 위해 곧 반짝여라  오오 그대 여기 있다면.  ~~~~~~~~~~~~~~~~~~~~  동경(憧憬)  내 마음을 이렇게도 끄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을 밖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방에서, 집에서  나를 마구 끌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저기 바위를 감돌며  구름이 흐르고 있다!  그곳으로 올라갔으면,  그곳으로 갔으면!  까마귀가 떼를 지어  하늘하늘 날아간다.  나도 그 속에 섞여  무리를 따라간다.  그리고 산과 성벽을 돌며  날개를 펄럭인다.  저 아래 그 사람이 있다.  나는 그쪽을 살펴본다.  저기 그 사람이 거닐어 온다.  나는 노래하는 새.  무성한 숲으로  급히 날아간다.  그 사람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여  혼자 미소 지으며 생각한다.  저렇게 귀엽게 노래하고 있다.  나를 향해서 노래하고 있다고,  지는 해가 산봉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건만,  아름다운 그 사람은 생각에 잠겨서  저녁놀을 보지도 않는다.  그 사람은 목장을 따라  개울 가를 거닐어 간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점점 어두어진다.  갑자기 나는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타난다.  저렇게 가깝고도 멀리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네가 놀라서  그 빛을 바라보면,  나는 너의 발 아래 엎드린다.  그 때의 나의 행복이여!  ~~~~~~~~~~~~~~~~~~~~  이 별  입으로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이별을  내 눈으로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견딜 수 없는 쓰라림이 넘치오  그래도 여느 때는 사나이였던 나였건만  상냥스러운 사랑의 표적조차  이제는 슬픔의 씨앗이 되었고  차갑기만 한 그대의 입술이여  쥐여 주는 그대의 힘 없는 손이여  여느 때라면 살며시 훔친 입맞춤에조차  나는 그 얼마나 황홀해질 수 있었던가  이른 봄 들판에서 꺾어 가지고 온  그 사랑스런 제비꽃을 닮았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대 위해 꽃다발을 엮거나  장미꽃을 셀 수조차 없이 되었으니  아아 지금은 정녕 봄이라는데 프란치스카여  내게만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가을이라오  ~~~~~~~~~~~~~~~~~~~~  슬픔의 환희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영원한 사랑의 눈물이여!  아아, 눈물 마른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란  얼마나 황량하며, 그 얼마나 죽은 것으로 보이랴!  마르지 말아라, 마르지 말아라  불행한 사랑의 눈물이여!  ~~~~~~~~~~~~~~~~~~~~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단 한번 그대 얼굴 보기만 해도,  단 한번 그대 눈동자 보기만 해도,  내 마음은 온갖 괴로움 벗어날 뿐,  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하느님이 알 뿐  내 그대를 사랑하는지 나는 모른다.  ~~~~~~~~~~~~~~~~~~~~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홀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등지고  머언  하늘을 바라봅니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 주던 사람은  지금 먼 곳에 있습니다.  눈은 어지럽고  가슴은 찢어집니다.  그리움을 아는 사람만이  내 가슴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껴요  산과 강, 도시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요?  그러나 우리가 비록 헤어져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느끼며  영혼이 가까이 있는 그 누군가가 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정원이 될 것입니다.  ~~~~~~~~~~~~~~~~~~~~  사랑의 독본  책 중에  가장 오묘한 책,  사랑의 책을  나는 차분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기쁨을 말하는 페이지는 적었고  한권을 읽는 동안  괴로움만 계속되었습니다.  이별은 특별히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재회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단문으로 말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고뇌는  전편에 걸쳐 매우 긴 설명이 붙어 있었고  끊임없이 이어져 갔습니다.  오오 시인이여,  마침내 그대는 정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었던  그 문제는 결국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  들 장 미  한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  그리도 싱그럽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보려고 재빨리 달려 가,  기쁨에 취하여 바라보았네.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소년은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장미야!'  장미는 말했네. '너를 찌를테야  끝내 잊지 못하도록.  꺾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짖궂은 아이는 꺾고 말았네  들에 핀 장미  장미는 힘을 다해 찔렀지만  비명도 장미를 돕지 못하니,  장미는 그저 꺾일 수 밖에.  장미, 장미, 빨간 장미  들에 핀 장미.  ~~~~~~~~~~~~~~~~~~~~  나그네의 밤노래  모든 산봉우리위에  안식이 있고  나뭇가지에도  바람소리 하나 없으니  새들도 숲속에 잠잔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대 또한 쉬리니.  ~~~~~~~~~~~~~~~~~~~~  5월의 노래  밀밭과 옥수수밭 사이로,  가시나무 울타리 사이로,  수풀 사이로,  나의 사랑은 어딜 가시나요?  말해줘요!  사랑하는 소녀  집에서 찾지 못해  그러면 밖에 나간 게 틀림없네  아름답고 사랑스런  꽃이 피는 오월에  사랑하는 소녀 마음 들 떠 있네  자유와 기쁨으로.  시냇가 바위 옆에서  그 소녀는 첫 키스를 하였네  풀밭 위에서 내게,  뭔가 보인다!  그 소녀일까?  ~~~~~~~~~~~~~~~~~~~~  거룩한 갈망  현자에게가 아니면 말하지 마라  세속 사람은 당장 조롱하고 말리니  나는 진정 사는가 싶이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그대를 낳고 그대가 낳았던  사랑을 나눈 밤들의 서늘한 물결 속에서  그대 말없이 타는 촛불을 보노라면  신비한 느낌 그대를 덮쳐 오리  그대 더 이상 어둠의 강박에 매이지 않고  더 높은 사랑의 욕망이 그대를 끌어올린다  먼길이 그대에겐 힘들지 않다  그대 마술처럼 날개 달고 와서  마침내 미친 듯 빛에 홀리어  나비처럼 불꽃 속에 사라진다  죽어서 성장함을 알지 못하는 한  그대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길손에 지나지 않으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로버트 블라이 번역  ~~~~~~~~~~~~~~~~~~~~  미뇽(Mignon)  당신은 아시나요, 저 레몬꽃 피는 나라?  그늘진 잎 속에선 금빛 오렌지 빛나고  푸른 하늘에선 부드러운 바람 불어 오고  감람나무는 고요히, 월계수는 드높이 서 있는  그 나라를 아시나요?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사랑이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집을? 둥근 기둥들이  지붕 떠받치고 있고, 홀은 휘황 찬란, 방은 빛나고,  대리석 입상(立像)들이 날 바라보면서,  "가엾은 아이야, 무슨 몹쓸 일을 당했느냐?"고 물어 주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가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오 내 보호자여 !  당신은 아시나요, 그 산, 그 구름다리를?  노새가 안개 속에서 제 갈 길을 찾고 있고  동굴 속에는 해묵은 용들 살고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바위 위로는 다시  폭포수 내려 쏟아지는 곳,  그 곳으로 ! 그 곳으로  우리의 갈 길 뻗쳐 있어요. 오 아버지, 우리 그리로 가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  가뉘메트  아침놀 가운데인 양  나를 에워싸 작열한다.  그대, 봄이여, 사랑하는 것이여!  수천의 사랑의 기쁨 더불어  그대의 영원한 열기  거룩한 마음  내 가슴으로 밀쳐든다.  끝없이 아름다운 것이여!  하야 내 그대를 끌어 안고자,  이 품안으로!  아, 애태우며  그대 가슴에 내 누우면,  그대의 꽃, 그대의 풀포기  내 가슴에 밀려든다.  사랑스런 아침 바람  내 가슴 속 불타는  갈증을 식혀주면,  바람결에 나이팅게일 사랑스럽게  안개낀 골짜기에서 나를 향해 우짖는다.  곧 가리라! 가리라!  그러나 어디로? 아, 어디로?  위를 향해, 위를 향해서이다.  구름은 아래로 떠오며, 구름은  그리운 사랑으로 내려 온다.  나에게로, 나에게로 오라!  너희들의 품에 안겨  위를 향해서  에워 싸고 에워 싸이어!  위를 향해  그대의 가슴에 안겨  자비로운 아버지여!  * 가뉘메트 ; 아폴로의 독수리를 따라 하늘로 올라간 미소년  ~~~~~~~~~~~~~~~~~~~~  마왕  이 늦은 밤 어둠 속, 바람 속에 말타고 가는 이 누군가?  그건 사랑하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다.  아들을 팔로 꼭 껴안고,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다.  "뭣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무서워 하느냐?"  "보세요, 아버지, 바로 옆에 마왕이 보이지 않으세요?  왕관을 쓰고 옷자락을 끄는 마왕이 안 보이세요?"  "아이야, 그건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란다."  "오, 귀여운 아이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거기서 아주 예쁜 장남감을 많이 갖고 나와 함께 놀자.  거기에는 예쁜 꽃이 많이 피어있고  우리 엄마한테는 황금 옷이 많단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지 않으세요?  마왕이 지금 제 귀에 말하고 있어요."  "조용히 해라 내 아가야, 너의 상상이란다.  그건 슬픈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란다."  "귀여운 아이야, 자, 나와 함께 가자꾸나.  나의 딸들이 널 예쁘게 돌봐주게 하겠다.  나의 달들은 밤마다 즐거운 잔치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너를 얼러서 잠들게 해줄거다."  "아버지, 아버지, 저기에 보이지 않으세요?  마왕의 딸들이 내 곁에 와 있어요."  "보이지, 아주 잘 보인단다.  오래된 회색 빛 버드나무가 그렇게 보이는 거다."  "귀여운 아이야 나는 네가 좋단다. 네 귀여운 모습이 좋단다.  네가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를 꼭꼭 묶어요!  마왕이 나를 잡아가요!"  이제 아버지는 무서움에 질려 황급하게 말을 몬다.  신음하고 있는 불쌍한 아이를 안고서.  가까스로 집마당에 도착했으나  팔 안의 아이는 움직이지 않고 죽어 있다.  ~~~~~~~~~~~~~~~~~~~~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자  슬픈 밤을 한 번이라도  침상에서 울며 지새운 적이 없는 자,  그는 당신을 알지 못하오니,  하늘의 권능이시여.  당신을 통하여 삶의 길을 우리는 얻었고  불쌍한 죽을 자들 타락케 하시어  고통 속에 버리셨으되,  그럼에도 저희는 죄값을 치르게 됩니다.  ~~~~~~~~~~~~~~~~~~~~  툴레의 임금님  옛날 예적 툴레에 한 임금님이 사셨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정성을 바쳐  사랑하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며  황금 술잔 하나를 남기고 가셨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어서  잔치 때마다 그 잔을 쓰시고  그걸로 술을 드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렸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 지자  다스리던 고을들과 온갖 것들을  세자에게 물려주셨지만  금 잔만은 그러지 않았지.  임금님은 왕궁 잔치를 열었는데  바닷가 높은 성 안에  선조들 대물려 온 넓은 연회장에  기사와 귀족들 모두 불렀지.  늙으신 임금님은 거기에 서신 다음  그 잔으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드시더니  그 성스러운 잔을 들어  바닷물로 힘껏 던지셨지.  임금님은 잔이 떨어지는 것과, 물이 들어가고  바다밑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신 다음  눈을 영원히 감으시고  다시는 마시지 않으셨네.  ~~~~~~~~~~~~~~~~~~~~  프로메테우스  제우스여, 그대의 하늘을  구름의 연기로 덮어라!  그리고 엉겅퀴의 목을 치는  어린이처럼  참나무나 산정들과 힘을 겨뤄라!  그러나 나의 대지는  손대지 말고 내버려둬야 한다  그대가 짓지 않은, 나의 작은 집과,  불길 때문에 그대가  나를 질투하는  나의 화덕도  나는 태양 아래에서  신들인 그대들보다 가엾은 자들을 알지 못한다.  그대들은 제물과  기도의 숨결로  간신히 먹고산다.  대단한 분들이여  그리고 만일 어린이들과 걸인들이  희망에 부푼 바보들이 아니었던들  그대들은 굶주렸을 것을.  나 역시 어린애여서,  들고 날 곳을 몰랐을 때,  나는 당황한 시선을  태양을 향해 돌렸다. 마치 저 하늘에,  나의 탄식을 들어 줄 귀가 있고,  압박받는 자를 불쌍히 여겨 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는 듯이.  그러나 누가 거인족의 오만에 대해서  나를 도왔으며,  누가 죽음과  노예상태에서 나를 구했던가?  거룩하게 불타는 나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젊고 선량한 마음은,  기만당하여, 구원에 감사하며  천상에서 잠든 자를 열애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존경하라고? 왜?  그대가 이전에 한 번이라도  짐을 진 자들의 고통을 덜어 준 적이 있는가?  그대는 이전에 한 번이라도  겁먹은 자들의 눈물을 달래 준 적이 있는가?  전능의 시간과  나의 주이며, 그대의 주인인  영원한 운명이  나를 사나이로 단련하지 않았던가?  꽃봉오리의 꿈이 모두  성숙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삶을 증오하고,  황야로 도주할 것이라고  그대는 착각하는가?  나는 여기에 앉아, 나의 모습에 따라,  인간들을 형성한다.  괴로워하고, 울며,  즐기고, 기뻐하는,  나와 같이  그대를 존경하지 않는  나를 닮은 족속을.  ~~~~~~~~~~~~~~~~~~~~  - 괴테 (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독일의 시인·작가. 고전파의 대표자이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출생. 부친에게서 엄한 기풍을,  모친에게서 명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가적 성격을 이어 받았고,  부유한 상류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뒷날의 천재적 대성(大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하였다.  괴테는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  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문학사의 거인중 한사람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이며,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쓴 방대한 저술과 다양성은 놀랄 만한 것으로,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른다.  서정적인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문학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인 경지의 예지를 터득하기도 했으나,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모든 존재를 내어 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할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 사랑, 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  마침내 그에게는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전에 완성한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 올린다"는  인간존재의 양극성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 말이다.  여성은 그에게 있어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미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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