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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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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발레리 시학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964  추천:0  2018-10-19
자료 1   발레리의 시학      발레리의 문학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에도 봉사치 않는 자유로운 창조적 지성의 훈련이고, 따라서 시적 영감·감상·정열·안일을 거부하고, 형이상학적 테마에 규약·정형·통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싸늘한 순수지성의 미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고난 관능적인 감각에서 오는 풍부한 이미지와 절묘한 음악적 운율의 구사로 하여 그의 미학을 넘은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 시론을 담고 있는 에는 먼저 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말은 "복합적 실체로서, 실제로는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기능상 '독립'적인 고유성들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 연구가 음성학, 의미론, 통사론,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운율학, 어원학 등에 의하여 차례차레 검토되어야 하듯이, 시인도 소리와 의미에 대해 차례로 사색하여야 하며 인습적인 규칙들 외에도 화성과 악절 그리고 논리성, 문법, 시의 주제, 문채 및 온갖 부류의 장식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바로 여기서 문학예술의 불확실하고 치밀한 '조작'들이 시작되는데, 발레리는 그것을 다시 '산문'과 '운문'이라는 두 양식으로 나누고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다.   산문을 보행에 비유하고 시를 무용에 비유했다 ...      위의 비유는 단순한 외면상의 유사성 이상의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빌리면 시와 산문은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기능의 순간적인 특정규칙 혹은 관습의 차이"데 의해 구별되기 때문이다. 산문을 다루듯 시를 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그의 비유를 좀 더 들어보자.      산문처럼 보행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하는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입니다. ... 보행의 모든 특징들이 언제나 그때그때 특이하게 구성되는 이 즉각적인 조건들로부터 연역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이동에는 단 두 개의 동일한 이동도 존재할 수 없고, 매번 즉각 폐기되어 성취된 행위 속에 통합되어 버리는 각각의 특수한 창조가 있을 뿐입니다.    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가 분명합니다. ... 그러나, 공리적인 운동과 아무리 다르다 해도, 무용은 보행 자체와 동일한 사지, 동일한 신체기관과 뼈대, 근육, 신경들을 사용한다는 이 극히 단순하면서 중요한 주석에 유의해 주십시오.      위의 인용에서 보행은 "어떤 목적을 지향한 행위"이고 무용은 "그 자체에 자신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는 행위체계"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무리 "동일한 사지, 신체기관 등을 사용한다"손치더라도 그 나타난 결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언어의 기능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면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선 산문이라는 언어의 실제적이거나 추상적인 사용에 있어서, 형식은 보존되지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 존속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명확성 속에 해소되어 영향을 미치고, 이해하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사라져버린다. 이와는 달리 시는 사용된 후에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발레리는 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시는 자신의 형식 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영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도록 부추긴다, ... 산업기술에서 빌린 용어를 써서 표현하면, 시적 형식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회복시킨다.      윗글은 시의 특징적인 고유성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형태와 내용 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 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는 일종의 왕복운동이, 대칭이, 가치의 균등성과 힘의 균등성이 뚜렷이 나타나는데, 발레리에 의하면 인상과 표현 사이의 이 조화로운 교환작용은 시적 역학, 즉 언어에 의한 시적 창조의 주요원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본업은 언어의 이 특이한 형식들을 행운에 의해 발견하고 직업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발레리는 이번에는 '소설독자'와 '시의 독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독자가 일종의 '정신착란'과 '경신의 발작'에 사로잡혀 "그의 본성을 분열시키고 순전히 허구적인 거짓 삶에 대한 환상을 부여함으로써"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시의 독자는 "영혼의 순종"과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함을 아래와 같이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리듬에 의해 그의 근육조직을 자극하고, 자신이 그 총체적 활동을 촉진시키는 언어기능을 해방 혹은 폭발시키며, 그를 심층적으로 조직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총동원하는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나타나는 자아의 통일성과 조화, 놀라운 통일성을 환기시키거나 재창조하려는 까닭입니다.        요컨대, 시의 작용과 평범한 이야기의 작용간의 차이는 생리학적 目의 차이이다. 특히 후자가 "환각에 사로잡힌 꿈과 기능의 주체로 변모"되어버리는데 반해서 전자는 "완전한 행위에 보다 가까운 적극적 참여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다시 초점을 시인의 조작 자체와 구성과 제작의 문제로 옮겨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시인의 작업을 세상에서 가장 불확실하고 고된 것으로 만드는 무한한 고뇌와 결코 끝날 수 없는 논쟁들, 시련, 수수께끼, 근심거리 심지어 절망까지 존재한다. 발레리는 시작이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시의 창조가 우연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거나 혹은 "초자연적 교섭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인데 이것들은 시인을 수동적인 역할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걸작들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이나 황홀경의 녹음기의 특성으로 환원되기엔 지나치게 다양한 특성들을 요구하는, 지성과 줄기찬 작업의 기념비들이요 의도와 분석의 산물입니다. ...      윗글에서처럼 발레리는 시인에게 특별한 자질, 즉 고유한 개인적 에너지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시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만 가치 있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그대로의 경이들이 그 안에서 해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이들도 그에 의하면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열광과 섬광 속에서 번쩍거리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발레리는 자신이 해방시키는 자연발생적인 표현력에 의해 성격지워지는 감정이 시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문학사상 가장 지성적이었던 그의 시는 아름다운 이미지와 정제된 어휘와 고양된 정신이 방사하는 광채로 가득 차있다. 바로 그러한 그의 시정신은 아래의 글 속에 잘 요약되어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며 그의 시론의 요약을 마치기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시인이 자기 예술의 최상을 겨냥하고 있다면, 그의 욕망은 그의 조화된 삶의 숭고한 지속, 모든 형식의 구성, 측정되며 그의 온갖 감각적, 운율적 잠재력의 반응들이 교환되는 지속으로 낯선 영혼을 안내해 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 2   폴 발레리의 시학 (1)      젊은 파르크(1917) 및 매혹(1922)과 함께 시로 돌아온 폴 발레리는, 자기 자신과 남에 비추어, 시 창조의 메카니즘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시를 쓰는 나를 관찰하면서 시를 써 왔다" 한 시인의 수첩, 이러한 체험, 이러한 성찰이, 콜레드 즈 프랑스에 시의 강의와, 바리에떼와 땡 껠에서 서술된 하나의 시학을 낳았다. 그의 시들에 대한 연구에의 정상적인 길잡이는 그러니, 시의 본질과 문학 창조의 조건들에 관한 그의 생각들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발레리 자신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시란 무엇인가 ?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 이어 발레리도 산문에 딸린 불순한 요소를 시에서 몰아내려고 든다 ; 그래서 시의 우주의 개념을 구해냄으로써 순수시가 나타낸 이상을 밝혀낸다.       1. 언어 속의 한 언어 시는 "특수한 한 악곡"과 합쳐진 "하나의 산문 이야기"가 되고 말 수는 없다 ; 시란 하나의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되기는커녕, "감각있는 존재 모두를 끌어넣는 하나의 시적 상태의 전달"인 것이다 ; 시는 죽지 않고서는 다른 표현들로 옮겨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산문에서는 내용만이 요구되는 데 반해, 시에서는 형식만이 정리하고 살아 남는다,       일정한 뜻 하나로 소비된다는 낱말들의 특성을 희생시켜 가며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음이고, 바로 리듬이고, 바로 낱말들의 물리적인 접근이고, 낱말들의 귀납 효과 또는       상호 영향인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에서는 뜻이 형식을 능가해 깨뜨려 버릴 수가       없어야 한다 ; 반대로 그것은, 형식이 독자에게 방금 발생시킨 상태나 생각, 시의 힘의       원동력인 상태나 생각의 재현이자 보존된 형식이며, 더 정확히는 필요한  유일한 표현       으로써 재현된 형식인 것이다. 한 줄의 아름다운 싯귀는 제 잿더미에서 무한정 되     살아나, 또다시 --- 마치 제 결과의 결과인양 --- 저 자신의 조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매혹의 주석)   시란 그러니 "언어 속의 하나의 언어"인 것이다.           2. 시의 우주 이러한 언어의 특성은, "마치 소리들 중이 한 순수음이 넋더러 하나의 음악의 우주를 고스란히 느끼게 하듯이, 넋을 시의 우주로 끌어넣는 하나의 공명"을 일깨우는 데 있다.           1. 어떤 다른 삶을 살기 일련의 파고든 분석들을 통해 발레리는 우리를, 진짜 시의 텍스트 하나가 우리 속에서 창조하는 이러한 "우주의 감동"을 안내한다 ; "그 텍스트는 우리 더러 어떤 다른 삶을 살며 그 제 2의 삶에 따라 호흡하도록 작용하며, 하나의 상태나 세계를 가정한다. 그 속에서는 저기 있는 대상들과 존재들이, 아니 그보다도 그것들이 이미지들이 실지 세계의 그것과는 다른 자유들과 관계들을 갖는 그런 상태나 세계를 말이다, (---)   이 모두가 하나의 홀린 본성을, 마치 어떤 마술에 걸린 듯 변덕과 현혹과 언어의 힘들에 굴복한 본성을  짐작케 해준다"  (영적인 찬가)         2. 말과 정신의 밀접한 결합 이러한 마력은 인위적인 리듬을 붙임으로써 얻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이 별난 말은 저를 지탱해 주는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이 말의 발생과 하도 밀접하게, 아니 하도 신비롭게조차 매어지게 마련이어서, 음과 뜻이 서로 갈라질 수도 없이 기억 속에서 무한정 서로 어울릴 정도인 리듬과 하머니들을 통해 제 이름을 대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말라르메의 작품이 이러한 시이 마력의 더없이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교묘하게 부딪히거나 녹아들어, 하나의 광채로, 하나의 충만으로, 하나의 놀라운 공명으로 싯귀들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의미들과, 울려퍼짐들과, 심지어는 표정들과도 맞먹는 그런 가치들을 시는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놀라운 성과들을 통해 입증했다.  한편으로는 각운과 두운들이, 또 한편으로는 상징과 비유와 은유들이 여기서는, 이야기의 없어도 되는 디테일이나 장식들은 이미 아니고 ; 작품들의 실질적인 특성들인 것이다 ; "내용"은 이미 형식의 원인이 아니다 ; 그 결과들의 하나인 것이다."(말라르메)    그러니 시는 낭독되는 순간에만 제 가치를 다 발휘하게 될 것이다. 즉 "작자의 창조 행위에 생명과 힘찬 현존을 주기 위해, 우리의 목소리와 지능 그리고 우리의 감성의 원동력들 모두가 합쳐지도록, 우리 자신이 그 쓰여진 것의 악기가 될 때에만 말이다", 그래서 "시작품의 연주가 바로 시작품인 것이다."   폴 발레리의 시학 (2)   (이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 ; 순수시       폴 발레리는 1920년에 어느 시집의 머리말을 쓰다가 "순수시"라는 표현을 함부로 써 버린 적이 있다. 이 용어가 곧 빚어내게 될 말썽은, 특히 브레몽 신부의 글을 통해 빚어내게 될 말썽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시와 기도의 유사성에 언급하던 이 신부는 드디어 발레리를 두고, 지적, 또는 감성적인 요소와는 상관 없는 시에 대한 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시, 1926년 ; 라시느와 발레리.1930) 순수시에 관한 논쟁이 그래서 벌어지고, 발레리는 자기가 시의 우주의 감동에다 밀접하게 결합시키던 그 개념을 합리적인 한계들로 되돌려보낼 생각을 하게 된다.   감각 없는 것이라고 내가 부른 언어의 요소들과는 그토록 판이하게 뚜렷한 이 요소들에 힘입어 하나의 작품 전체를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 ---따라서, 운문으로 씌여진 또는 그렇지 않은 하나의 작품에 힘입어,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념들과 이미지들,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표현수단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의 완전한 조직, -- 넋의 민감한 상태 창조에 특히 부합되는 조직의 인상을 줄 수 있느냐는 것, 순수시의 문제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물리학자가 순수한 물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뜻에서 나는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적이 아닌 요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작품 하나를 구성해낼 수 있는냐의 여부를 아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거야말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시란 언제나 이 순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고, 또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의 시작품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실지로, 한 이야기의 자료 속에 끼워 넣어진 순수시 조각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썩 아름다운 싯귀 하나는 시의 썩 순수한 요소의 하나인 것이다. 아름다운 싯귀를 흔히 금강석에다 비교한다는 사실이, 순수함의 이러한 특질에 대한 깨달음이 모든 사람 정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순수시 라는 용어의 단점은,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도 않는 어떤 정신적인 순수함을 생각케 한다는 데 있다. 순수시의 관념이 내게는 반대로 하나의 주로 분석적인 관념인데 말이다.  요컨대 순수시란 일반적인 사작품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어 준다, 언어와 언어가 사람들에게 내는 효과와의 갖가지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그토록 어렵고도 중요한 연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관찰에서 연역된 하나의 픽션인 것이다. 어쩌면 오히려 순수시라는 말 대신 절대적인 시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며 그 때는 이 말을, 낱말들의 관계들에서, 아니 그보다도 낱말들 서로 사이의 공명들의 관계들에서 말미암는 효과들의 탐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요컨대 언어가 다스리는 이 감성의 영역 모두의 탐험을 암시하는 뜻으로 말이다. 이 텀험은 더듬어서 행해질 수가 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실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조직적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역설적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만 있다면, 말하자면, 산문에 딸린 것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되고 말 그런 작품들을, 음악적인 영속성이 말 그대로 중단되지 않고, 의미들의 관계들 자체가 화성의 관계들을 늘 닮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생각들 서로 사이의 변모가 생각 모두보다도 더 중요해 보이고, 말의 겉모습들의 활동이 주제의 알맹이를 지니게 될 그런 시작품들을, 시인이 구성해내는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 때 우리는 마치 실존하는 사물에대해 그러듯이 순수시에 대해 말할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데 사정을 그렇지가 못하니,--- 순수시의 개념은, 가 닿지 못할 어떤 전형의 개념이고, 시인의 욕망들과 노력들과 능력들에 가해진 하나의 이상적인 한계의 개념인 것이다,(한 시인의 수첩, 순수시)   폴 발레리의 시학 (3)   (이어서)   영감과 작업  시인 발레리가 영감에는 등을 돌렸다고들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설사 그가 "흥분(영감)은 작가의 넋의 상태는 아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은 다만 "흥분만에 의해" 글을 쓰는 것을 그가 못난 짓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시인 특유의 개인적인 일종의 정신력(에너지) 이, "보다 나은 정신력 ; 말하자면 다른 모든 인간 에너지들이 꾸미거나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1. 영감받은 시인의 신화 "꿈에 보물을 보는 것이, 깨어나 자기 침대 밑에 반짝이는 보물을 되찿기에 족하지는 않듯이", "영감받은" 것만으로는 딱하게도 시인 되기에 족하지는 않은 것이다. 시인의 구실이 "시적인 상태"를 느끼는 일이 아니고, 그 상태를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창조해내는 일. 독자를 "영감받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체험으로 자신이 생긴 발레리는, 영감받는 시인이라는 신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길이의 한편의 아름다운 시 앞에서 우리가 곧잘 깨닫는 것은, 끊임없는 밑천들과 한결같은 조화및 늘 잘된 생각들을 지녀 유달리 자신만만한 이야기 하나를, 우연한 사고도 약함이나 무능력의 흔적도, 황홀을 깨뜨려 시의 우주를 망가뜨릴 그 딱한 말썽들도 없어 호리기를 그만두지 않는 그런 이야기 하나를, 한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쓰거나 진술하는 고생 말고는 다른 고생도 없이 그 자리서 곧장 꾸며낼 수 있기에는 아주 작은 찬스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감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 다만 영감은 "짧고 우연한 표시들에 의해서"만 작용하며, 그래서 변덕스럽고 고르지가 못한 것이다 ; "이 한없이 값진 순간들, 제가 낳는 관계들과 직감들에 일종이 보편적인 품위를 주는 이 찰나들은, 허망하거나 전달되지 못할 가치들이 덜 많은 것이 아니다.--- 흥분의 고비에서는,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닌 것이다. (시에 관한 프로포)     2. 의식적으로 창조하기 "마음 설레임에서 용솟음치는" 이 표현들은 이따금씩밖엔 순수하지 않으므로, 발레리는 "늘 영감없이 얻어지는 원리"라는 것을 시인할 줄은 모른다 ; 시란 하나의 선택의, 하나의 의식적인 노고의 열매일 것이다.       a 작업의 필요성 "백개의 거룩한 순간도 한 편의 시를 구성하진 않는다. 성장의 한 지속이자 시간 속의 하나의 형상과도 같은 시를 말이다 ; 그래서 자연적인 시 현상이란,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음들의 혼란 속에서의 하나의 예외적인 만남에 지나지 않다. 그러니 이 예술에서 시는우리가 운수좋게만 이어진 일련의 시도 끝에만 나타날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면, 숱한 인내와 끈덕짐과 솜씨가 필요하다 ; 또한 우리의 시작품이, 심사숙고라는 문제들에 맞서 응수하는 것 못지않게 리듬과 음향과 이미지들의 마력으로 뜻들을 사로잡기를 우리가 바란다면, 우리는 이제 더없이 엉뚱한 내기들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나는 가끔 스테파느 말라르메에게 말했었다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첫 싯귀를 우리에게 거저 준다 ; 그러나 그것과 화음을 이루어 초자연적인 재 형과 어울리지 않아서는 안 될 둘 째 싯귀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을 하나의 선물이던 첫 싯귀와 견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과 정신의 밑천들을 다해도 지나치지는 않는 것이다." (아도니스에 대해)   b 의식적인 창조의 고귀함 발레리는 영감받은 시인을, 제가 신비롭게 받아쓰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통 없는 그 "순간적인 영매"를 비웃는다, 매혹의 작자는 반대로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 정신적인 우연이 (10만 번의 시시한 시도 중에) 우리에게 엄겨 주는 흥미롭거나 쓸모있는  성과들과도 비슷한 어던 성과들을 의식적인 의지로 되찾아 보려고 애쓰기"가 그 공식이 될 그런 자발적인 창조의 고귀함을 말이다. 그는 이렇게 언명하는 수조차 있었다 ; "나는 어떤 최면상태 덕분에 흥분해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들 중의 하나를 낳기보다는 철저히 의식하고 온전히 맑은 정신으로 엉성한 그 무엇을 쓰는 편이 사뭇 더 낫겠다."고 (말라르메에 관한 편지). 그리고는 이런 모욕적인 말에 화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번갯불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번갯불은 나 자신에 감탄할 건덕지밖엔 내게 갖다주지 않는다, 아주 작은 불티를 내 마음대로 만들어낼 줄 아는 데에 나는 사뭇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폴 발레리이 시학 (4)  (이어서)   시의 솜씨  그러니 시의 솜씨 없이는 시도 없다. 발레레의 고찰들이 여기서는, 자신의 내적인 체험에 의지하고 있는 만큼 우리에게는 더욱 값지다 ; 이 솜씨란, 영감이 우리에게 "이따금씩"주는 불가사의들을 분간해 이용할 줄 아는 데 있고, 그래서 못나지도 않은 명석한 자발적 창조를 통해 그 불가사의들을 보충하는 데 있는 것이다,        1. 기능중인 시인은 하나의 기다림이다 첫 특성은 참을성이다. 시작품을 낳아 줄 "씨눈"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이 인간 속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떤 뜻하지 않은 사건, 밖이나 안에서 생기는 어떤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다 ; 즉 한 그루의 나무, 하나의 얼굴, 하나의 "테마" ,  하나의 감동, 하나의 낱말에 의해서인 것이다. 또 때로는, 내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표현 의지. 즉 자기가 느끼는 바를 나타내려는 욕구이다 ; 그러나 때로는 반대로, 하나의 형식 요소, 즉 제 원인을 찾는, 내 넋의 공간에 저를 위해 하나의 뜻을 찾는 그런 표현의 초안이기도 하다 --- 그 무엇이 자기 표현을 바라다가는, 어떤 수단이 쓸모있는 그 무엇을 바라기도 하는, 내기 시작이 가능한 이 2원성을 잘 관찰하도록 하라." (시의 추상적 사고) 이 문제에서는, 젊은 파르크, 아폴로 신전의 무녀, 바다의 묘지에 관한 발레리 자신의 속내 이야기들보다 더 교훈적인 것은 없다. 또한 매혹을 빚어낼 낱말들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뜻하지 않은 낱말을,  ----- 예측될 수는 없어도 기다려질 수 있는 낱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맨 먼저 그 낱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한 시인의 수첩)       2. 능력의 바램과 대담 기다림, 명석한 선택, 자발적인 거부, 쉬운 것에 대한 저항, 의식적인 창조의 의사 표시들, " 어떤 사람의 능력과 바램과의 사정없는 대담, "시작품의 건축가"는 주로 표현 문재들과 드잡이한다 ; "사람들의 싯귀들을 만드는 것은 관념들을 가지고가 아니고, 낱말들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 라고, 이미 말라르메가 말했었다. 그러니 시인이란 무엇보다도, 깊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언어의 밑천들을, "음과 뜻의 일치들"을, " 낱말들과 낱말들의 표정들의 집단들이 빚어내는 물리적 효과들"을 알아보는 사람인 것이다. --- 시인은 말하고 있다. "나는 여성형이고, 2음절로 된  P나 F를 포함한, 무음글자로 끝나는, 틈이나 분열의 동의어이고, 현학적이기도 드물지도 않은, 그런 낱말 하나를 찾고 있다. 7가지 조건  - 적어도 !" (나침판의 다른 각거리들), 끝없이 꼼꼼하고 복잡한 탐구 ! 그리고 이러한 뉘앙스들로 고생하는 예술가는 그러나, 자기 작 품이 그 속에서 느껴질 판이한 조건들도 고려해야 한다 ; "심지어는 아주 짧은 시 한 편의 제작 기간이 여러 해를 삼킬 수가 있는데도, 그 시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작용은 몇 분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몇 분만에 그 독자는, 탐구와 기다림과 참을성과 조바심의 몇 달 동안에 쌓이고 쌓인 발견들과 비교 대조들과 표현의 섬광들의 쇼크를 받게 될 것이다" (시와 추상적 사고)       3. 희한한 답답함들 의식적인 노고를 치러 흥분의 단계, 또는 낭만풍의 심정토로 단계를 넘어서기. 이게 바로 위대한 시인들의 비결이다. 그래서 발레리는 자기가 낭만주의 엉성함과 대응시키는 그 고전 예술의 완벽에 대해 자신의 감탄을 숨기지 않는다 ; "제 솜씨를 배운 낭만주의자는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또는, "낭만주의는 다 앞선 하나의 낭만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는 단일성들이나 고정된 형식들, 운율법적 규칙들, 어휘의 제한들에 항의하기는 커녕, 이러한 속박들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시의 걸작들의 근원 자체를 본다. 그것은 이 모든 "희한한 답답함들"이 영감의 충동적이고 무정부적인 비약을 억누름으로써, 시작품의 제작을 명석하게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 "고전주의자란, 자기자신 속에 하나의 비평가를 지니고 있어, 마음 속으로 그 비평가를 자기 작업들에 가담시키는 그런 작가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처지)      4.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작품은 다 "거의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 다. 발레리에게는 하나의 "완성된 소네트"란 실지로, 노고에 의해 여전히 뜯어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버려 둔 소네트"인 것이다. ; "하나의 작품은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거기서 끌어낸  능력이나 날쌤이 그것을 개선할 재능 등등을 바로 그에게 태워 주는 것이니까 --- 그는 거기서 그것을 지워 다시 만들 건덕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 (한 시인의 수첩), 발레리는 가능한 것들이 이러한 양성을 시 창조 중에 스스로 체험했다 ; 그는 익살스럽게 말하고 있다. "나는 같은 시의 다른 텍스트들을 발표하는 수도 있었다 ; 심지어는 서로 어긋나는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로 영락없이 나를 비판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고쳐쓰기를 내가 삼갔어야 할 까닭을 내게 말해 주지는 않았다." ( 한 시작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이러한 객관적 고찰에들에서 우리는 발레리 - 텍스트를 알아보게 된다. 그는 드디어 시 창조를 하나의 "내기"로, 하나의 순수한 훈련으로, 그 가장 중요한 산물도 작품이 아니고 그 작자의 지능의 성장인 그런 훈련으로, 정신의 메카니즘에 대한 하나의 보다 깊은 인식으로,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이어서 마지막 회)   시의 난해성 마치 말라르메의 연금술 비밀에 대해 말하듯이 발레리의 난해성에 대해 말들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젊은 파르크에 대해, 자신의 난해성은 말라르메의 그것처럼 고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언명한 적이 있다.      1. 젊은 파르크의 모험 1913년에 예시 앨범 수록 작품들을 손질하다가 발레리는, 40행 가량의 시 한 편을, 이를테면 "그 청년기의 장난들에 대한 작별 인사와도 같은 것"을 거기에 덧붙이고 싶어졌다. 이게 바로 "그가 시인한 것보다는 백 배나 더 읽기 어려운"  412행의 시, 젊은 파르크의 시초였다. 이 별난 현상은, 4년(1913~1917)이나 끈 노고 동안의 "한 송이 조화의 자연적인 성장"으로 설명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자기가 운문 예술을 이미 잊고만 것으로 알고 있던 발레리는, 시작품을 하나의 "훈련"으로 우선 생각했던 것이다. (앙드레 지드에의 헌시). 이어 전쟁이 왔고, 훈련은 불안 속에서 또 반은 불안과 맞서 가며" 계속되었다 ; 동원될 수 없었던 시인은, 겉보기에는 잔잔하면서도, 더없이 엄격한 운율법에 짐짓 굴복한 작품 하나에 자기 모두를 바침으로써 자신의 괴로움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위협받고 있는 프랑스어에다, "가장 순수한 낱말들과 그 가장 고상한 형태들로 된" 이 작품을 불러주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 여기게 되었다. 그것이 점점 더 벗어나 마지막의 크기로 부풀어나고 말았다고, 그는 1917년에 쓰고 있다. 이 512행의 싯귀를 위해 그는 100도 더 되는 초고들을, 옮겨 베끼면서 600페이지나 될 초고들을 작성했던 것이다 !      2.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나는 결코 난해해지고 싶지 않으며, 그러나 내가 난해하다면 - 내 말은 : 교양 있고 피상적이 아닌 어느 독자에게 내가 난해하다면, - 난해하지 않을 능력이 없어 나는 난해한 것이다" (에메 라퐁에게, 1922). 이러한 난해성은 오래 전부터 자기 머리를 차지해 오던 관념적인 우리 말투가, 한 살아 있는 존재의 넋의 복잡한 상태들을 우리가 정확히 표현하려들 때는 극도로 빈약하며, 더구나 우리말을 구성하는 낱말들의 태반이 시의 음조와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것을 빈약하게 만들도록 강요 당하기도 한다. 어려움은 아닌게 아니라 시인에게 과해지는 조건들 때문에 갑절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 " 시인이 조화를, 이 조화의 연장을, 조형적인 효과들의 계속을, 생각 자체의 계속을, 구문의 멋과 유연성을, 충족시키려 들면, 그래서 고전적인 운율법의 뼈대 속에 전체가 포함되기를 바라면, 그의 노력의 복잡함이, 그가 스스로에게 과한 조건들의 독립성이 그를, 자기 문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위험에, 자기 작품의 소재를 너무 빽빽하게 만드는 위험에, 독자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요약과 생략을 이용하는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수가 있고, 또 그렇게 되게 마련이다" (프레데릭 르페르에게, 1917). 젊은 파르크의 난해성 은, 그 푸짐한 밑천들, 그 뉘앙스들, "하나의 시 텍스트 이의 너무 오래 끈 작업의 축적" 덕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3. 고된 예술의 이론 이러한 설명들은, 매혹 속의 어떤 작품들의 일부러 그런 것만 같아 보이는 연금술 비빌 (난해성)을 정당화 시켜 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 한 시작품의 난해성은, 읽혀지는 사물과 읽는 존재라는 두 요인의 산물이다." 라고 발레리는 언명하고 있다. 여느 사람에게는 데카르트나 몽테스큐도 난해하다. 매혹의 작가는 엘리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고, 말라르메의 제자인 그는, 깨우침 받은 사람의 주의력을 부추기고, 그를 "적극적이게" 만들어 그의 시적인 감흥을 북돋우는 것이 능사인 고된 예술의 아론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때 시작품은, 독자의 넋과  정신이 연주하는 하나의 "악보"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충분하지가 않다 ; 하나의 텍스트의 진짜 뜻이란 없다. 작자의 권위란 없는 것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건, 그는 자기가 쓴 것만을 썼다. 하나의 텍스트란 한 번 발표되고 나면 저마다가 자기 방법에 따라 제멋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와도 같은 것이다 ; 제작자가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사용한다는 말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다." (바다의 묘지에 관해서).   끝.  
319    수사법 모음 댓글:  조회:1489  추천:0  2018-10-19
수사법 표현방법에 따라 강조법(强調法)·변화법(變化法)·비유법(比喩法) 등 크게 3가지로 나뉜다.  강조법은 표현하려는 내용을 뚜렷하게 나타내어 읽는 이에게 뚜렷한 인상이 느껴지게 하는 표현법이다. 과장법(誇張法)·반복법(反復法)·점층법(漸層法) 등이 여기 속한다. 변화법은 단조로움을 없이 하여 문장에 생기 있는 변화를 주기 위한 표현법이다. 설의법(設疑法)·돈호법(頓呼法)·대구법(對句法) 등이 여기 속한다. 비유법은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직유법(直喩法)·은유법(隱喩法)·환유법(換喩法)·제유법(提喩法)·대유법(代喩法) 등이 여기 해당한다. 과장법이란 어떤 사물을 실제보다 훨씬 더하게, 또는 훨씬 덜하게 나타내는 방법으로, '눈물의 홍수' '쥐꼬리만한 월급' 등이 그 예이다. 반복법은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되풀이하여 문장의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방법으로,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등이 이에 속한다. 점층법은 같거나 비슷한 어구를 겹쳐 써서 문장의 뜻이 점점 강조되고, 커지고, 높아지게 하여 독자의 감흥을 고조시켜 절정으로 이끄는 표현법이다. "날자, 날자, 날자꾸나" 하는 따위이다. 설의법은 대답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학적 효과만을 노리는 질문의 형식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은 '온다', 혹은 '안 온다'와 같은 독자들의 대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돈호법은 어떤 추상적 특성이나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마치 현재 존재하는 듯이 부르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오! 그대 신이여, 이들을 굽어보소서" 같은 표현을 들 수 있다. 대구법은 어조가 비슷한 문구를 나란히 벌여 문장에 변화를 주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따위이다. 직유법이란 상사성이나 유사성을 토대로 두 사물을 비교하는 표현법을 의미한다. 예컨대 '전봇대처럼 키가 큰오빠'에서 '오빠'를 '전봇대'에 비교하는 것은 키가 크다는 점에서 두 사물이 유사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은유법이란 직유법과는 달리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를 의미한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됨을 뜻한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에서 '마음'과 '호수'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한 '마음'이 '호수'로 전이됨으로서 의미론적 전이가 나타난다. 환유법은 접촉성에 토대를 두고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표현법으로, 이때 접촉성은 공간적 접촉과 논리적 접촉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왕관'으로 '왕'을 대신하는 것은 전자에 속하며, '이광수'가 '이광수의 소설'을 대신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제유법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두 사물을 치환하는 표현법이다. 예컨대, "바다에 돛이 떠 있다."에서 '돛'은 '배'를 의미하는데, 이는 '배'라는 전체를 '돛'이라는 부분으로 치환한 경우이다. 대유법은 사물의 일부나 그 속성을 들어서 그 전체나 자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이다. '백의의 천사'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표현 등이 이것에 속한다.      1. alliteration 頭韻(法). ·한 어군의 둘 이상의 낱말을 같은 문자나 음으로 시작하기 ; the sad sight of the sea. 구(句)의 첫머리에 같은 음을 갖는 글자를 되풀이해서 쓰는 수사법. 각운(脚韻)에 대응한다. 고대 영어나 중세 영어의 시(詩)에서 보듯이 같은 1행에 중요한 몇 개의 말의 강세가 있는 개개의 음절이 동일한 자음 또는 다른 모음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고대 영어의 시에서는 휴지(休止;caesura) 다음의 강음절을 보면 그 시행의 두성(頭聲)을 알 수 있는데, 고대 영어·중세 영어·올드색슨(Old Saxon)·아이슬란드어 등 게르만어 시에서는 공통적인 특징이며, 각운은 로만스어의 영향으로 고대 영어에서 중세 영어로 옮겨가면서 사용되었다. 두성은 각운의 발달과 함께 차차 시구 구성에서의 구실을 잃고, 마침내 단순한 장식적 요소로 변했다. 최후 대작은 W. 랭글란드의 《농부 피어스의 환상(The Vision concerning Piers the Plowman)》이며, 한편 각운을 보급시킨 힘이 된 것은 G.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이다. 두성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의 중요한 장식적 요소로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 의미에서 같은 글자 또는 같은 음으로 시작하는 2개 이상의 말이 연속적으로 쓰인 것을 말한다. 그런 두성은 운문·산문에서도 많이 쓰이며, 속담, 일상의 관용구를 비롯하여 표어·표제어·광고문 등에서 사용되는 예를 많이 보게 된다. the repetition of initial consonant sounds in a line or succeeding lines of verse. Example: Shakespeare, Romeo and Juliet: "Gallop apace, you fiery-footed steeds/ Towards Phoebus' lodging!"  The weary, wayworn wanderer bore (Poe)     2. assonance 類韻, 腰韻, 母音韻 단어의 마지막 모음이 다음에 이어지는 낱말 가운데 강세를 받는 모음과 반복되는 현상.  시(詩)를 지을 때 많이 쓰는 기교이다. 유럽에서 중세시대 초기 《롤랑의 노래》를 비롯한 프랑스 시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free as a breeze처럼 한 절 안에서 긴 모음이 겹치도록 시를 짓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작가 G.홉킨스, W.오언의 시에서도 보이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발라드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the repetition of similar vowel sounds within a line or succeeding lines of verse. Example: the short i and e sounds in Shakespeare, Antony and Cleopatra: "then is it sin/ To rush into the secret house of death/ Ere death dare come to us?"      3. metaphor 隱喩, 暗喩 ·비유의 하나로 simile과 달리 like, as 등의 단어를 쓰지 않음. ·the curtain of night 밤의 장막. ·Life is a journey. 인생은 여행이다. cf. MIXED METAPHOR, SIMILE 1. 직유법과 대조되며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원관념은 숨기고 보조관념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묘사하는 표현법이다. 원관념과 비유되는 보조관념을 같은 것으로 보므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 나타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김동명 《내 마음》)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김동명 《파초》) 고독은 나의 광장(조병화 《고독》)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깃발》)   은유의 종류에는 ‘암시적 은유(implicit metaphor)’과 ‘혼합 은유(mixed metaphor)’, ‘죽은 은유(dead metaphor)’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죽은 은유란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울한 상황, 새벽은 희망적인 상황)’에서처럼 듣는 사람이 곧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일상화하여 신선함이나 생명력을 잃어버린 은유를 말한다.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양쪽에서 어쩌면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말의 비유(figure of speech)일 은유는 행동, 개념, 물체가 지닌 특성을 밝히되, 보통 그것 이외의 어떤 것, 흔히는 그것과 아주 다른 것을 표시하는 데에 쓰이는 말로 밝히는 것이다. 은유는 묘사되고 있는 사물과 그것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 사물 사이의 비교를 암암리에 포함하지만 명확히 비교로서 제시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랑은 위험한 게임이다”라는 어구는 사랑이라는 활동과 판돈이 많이 드는 경쟁 사이의 비교를 넌지시 비추지만 그 비교는 암시적인 것에 머문다. 이와 대조적으로 직유(SIMILE)는 어떤 것을 그와 다른 어떤 것의 용어로 묘사하는 은유적 관행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명시적인 비교 표현에도 의존한다. 그래서 로버트 번즈가 “나의 사랑은 한 송이 붉은, 붉은 장미와 같다”고 쓸 때, 그는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에 이르지 못하고 대신에 부분적 유사성(similarity)이나 비슷함(resemblance)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은유(dead metaphor)란 ‘법의 힘(the long arm of the law; 경찰력)’처럼 그 자체에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하고 일상언어로 넘어간 은유이다. 뒤섞인 은유(mixed metaphor)란 비교를 이룬 조합이 비논리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은유이다. 예를 들어 “저 족제비들에게 발밑을 채였다`those weasels pulled the rug out from under us”고 말하면, 신용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당한 배신을 표현하는 것이 요점이었겠으나 약간 풍자만화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I. A. 리처즈에서 시작하는 현대의 은유 분석은 은유의 주의(主意; tenor)와 매체(媒體; vehicle)를 구별함으로써 은유 분석을 도식화했다. 주의는 원래의 문자 그대로의 말을 가리키고, 매체는 그것에 응용된 비유적인 말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은유 “사랑은 위험한 게임이다”의 경우, 주의는 ‘사랑’이고 매체는 ‘게임’이다. CATACHRESIS, METONYMY도 참조.     4. simile 直喩 비유법 중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형식으로, 2개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비교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내포된 비유를 사용하는 은유법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비유이므로 묘사가 정확하고 논리적·설명적인 것이 특징이다.  즉 하나의 사물을 나타내기 위해 다른 사물의 비슷한 속성을 직접 끌어내어 비교하므로, 공식적인 비교표현 매체를 사용하여 유사성을 명백히 지적한다. 이 때 비유되는 사물과 비유하는 사물은 '마치 ∼같다' '∼인 양' '∼같은' '∼처럼' '∼듯이'의 형식으로 연결한다. 이를테면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꽃처럼 예쁜 우리 아기' '차기가 마치 얼음 같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등이 직유법을 사용한 대표적인 문장이다. 수사법 중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현대언어의 중요한 재원이기도 하다.      5. hyperbole 誇張 어떤 사물을 실제보다 훨씬 더하게 또는 훨씬 덜하게 나타내는 수사법.  강조법의 한 가지로서, 사실을 불려 선명한 인상을 주기 위하여 사용된다. 한문체에서 많이 쓰며, 은유법과 함께 쓰기도 하나 주로 직유법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사물을 실제보다 크게 표현하는 강조법을 과대진술, 작게 표현하는 것은 과소진술 또는 격하(格下)라고도 한다.  과대진술의 예로는 백발 삼천장(白髮 三千丈)/산더미 같은 파도/천년을 하루같이/어머니 은혜는 산같이 높다/찌는 듯한 더위/배가 남산만하다 등이 있고, 과소진술의 예로는 간이 콩알만하다/문짝이 바늘구멍만 하다/월급이 쥐꼬리만하다 등이 있다     6. personification 擬人法 사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간인 것처럼 표현하는 수사적 방법.  미개인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을 인간이나 인간의 행위와 동일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연적인 작용이었으나 문명인이 예술창작에 의식적으로 이용할 때는 의인법이 된다. 즉,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무생물,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인간 또는 인간의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솝이야기》의 에서 까마귀나 여우는 모두 의인화된 경우라 하겠으며 조형미술의 예를 들면, 티치아노의 《성애(聖愛)와 속애(俗愛)》에서 성장한 여인과 나체의 여인으로 각각 나타낸 그림도 의인화의 한 예이다. 고려 중기 이후에 성행한 한국의 가전체(假傳體) 문학도 여기에 포함되며, 신라 때 설총(薛聰)이 지었다는 《화왕계(花王戒)》도 이 범주에 드는 작품이다.      7. allusion 引喩, 引用法 남의 말이나 글 또는 고사·격언 등에서 필요한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글의 뜻을 더욱 분명히 하는 표현방법.  인유법(引喩法)이라고도 한다. 남의 말이나 글을 인용해 글의 신뢰도를 높이거나 내용을 충실히 하고, 자기 이론의 정확성을 꾀하며, 문장에 변화를 주는 표현방법이다. 인용법에는 남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직접인용법과 남의 말을 고쳐서 옮겨놓는 간접인용법이 있다.  직접인용법에서는 다른 사람의 말과 그것을 옮겨다 쓰는 사람의 말을 분명히 구별하기 위하여 따다 쓴 말 앞뒤에 따옴표를 찍는다. 간접인용법에서는 대명사 ·공대법 ·날짜 등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바뀌고, 따옴표를 찍지 않는다.  an indirect or oblique reference within a text to another text or work. Hence a subtle artistic quotation or homage. For example, the opening sentence of Cat's Cradle--"Call me Jonah"--alludes to both an Old Testament prophet and the opening line of Melville's Moby Dick.      8. synecdoche 提喩 사물의 명칭을 직접 쓰지 않고 사물의 일부나 특징을 들어서 그 자체나 전체를 나타내는 비유법으로, 환유법(換喩法)과 제유법(提喩法)이 있다.  환유법은 나타내고자 하는 관념이나 사물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예를 들어 '요람에서 무덤까지'에서 '요람'은 '탄생'을, '무덤'은 '죽음'을 의미한다거나, '한 잔 마셨다'에서 '잔'이 '음료수'나 '술'을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또 원인으로써 결과를, 또는 결과로써 원인을 대신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독약을 마시면 죽는다'라는 인과관계에 근거하여 '독약을 마셨다' 대신 '죽음을 마셨다'라고 표현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제유법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예를 들어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에서 '빵'은 식량의 일부로 '식량' 전체를 의미하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은 국토의 일부로 '국토' 전체를 의미한다.      9. metonymy 換喩 환유는 표현하려는 대상과 경험상 밀접하게 연상되는 다른 사물이나 속성을 대신 들어 나타내는 표현방법이다. 즉 접촉성에 토대를 두고 한 사물을 다른 사물로 치환하는 표현법으로, 이때 접촉성은 공간적 접촉과 논리적 접촉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면 ‘왕관’이나 ‘왕홀’로 ‘왕’을 대신하는 것은 전자에 속하며, ‘나는 밀턴을 모두 읽었다.’에서 ‘밀턴’이 ‘밀턴의 저작물’을 대신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 은유(METAPHOR)와의 상반관계 속에서 흔히 논의되는 환유는 한 사물의 이름을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사물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말의 비유이다. 가령 “오늘 워싱턴이 지난 4/4분기의 무역수지 수치를 발표했다”고 말한다면 워싱턴이라는 말은 미국 정부를 대신하는 것이다. 다른 예에는 왕정을 대신하는 ‘관’, 권투시합을 대신하는 ‘링’, 찰즈 디킨즈의 저작을 대신하는 ‘디킨즈’, 운동선수를 대신하는 ‘조크(jock 탈장(脫腸)을 방지하는 지지물.)'등이 있다. 특수하지만 종종 쓰이는 환유의 한 유형은 제유(synecdoche)이다. 제유에서는 한 부분의 이름이 전체를 대신하거나(예컨대, 배를 대신하는 ‘돛’, 소나 말을 대신하는 ‘머리’) 빈도가 낮기는 하지만 전체가 부분을 대신한다. 근래에 문학비평은 환유의 범위를 넓혀서 환유가 이해되고 산출되는 방식도 지시한다. 이 넓은 의미에서의 환유는 두 사물 사이에 유사성(similarity)의 관계를 정립하는 은유와 달리 인접성(contiguity)의 관계에 의존한다. 예를 들면 1840년대에 사회개혁자들은 흔히 노동자계급이 주거지역과 점점 ‘하나가 되고 있다(of a piece)’고 썼다. 그 집들 중의 다수는 파손되고 통풍이 나쁘고 몹시 더러웠다. 따라서 빈민들이 그들의 주거지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과 집 사이에 인접성에 기초한 연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은유와 환유의 구별은 종종 패러다임(계열체; PARADIGM)과 신탐(통합체; SYNTAGM)의 대비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10. conceit 奇想 상식적으로는 결부시킬 수 없는 2개 이상의 관계로부터 공통성을 발견하여 억지로 결부시키는 것으로 규모가 큰 비유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16∼17세기의 영국문학, 특히 형이상시(形而上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J.던의 시 《벼룩》에서, 말하는 사람과 그의 연인의 피를 빨아먹은 벼룩이, 두 사람이 하나가 된 혼인의 잠자리에 비유된 것은 그 일례이다.      11. paradox 逆說 패러독스는 자기 모순인 것처럼 혹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진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진술이다. 패러독스의 좋은 예는 패러독스를 중심으로 많은 시를 지은 17세기 작가 존 단의 시에 풍부하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을 때려부수세요……」라는 소네트에서 그는 신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를 당신에게 데려가 감옥에 가둬주세요     12. symbol 象徵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화(具體化)하는 것, 또는 그와 같이 나타내어지는 것. 표상(表象)·기호(記號)라고도 한다. 왕관이 군주정치를, 신부의 흰 웨딩드레스가 순결을 나타내듯이 어떤 사물(事物)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것을 상징이라 하는데 이 경우 왕관이나 흰 웨딩드레스는 상징이며 군주정치·순결이라는 의미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사물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간단한 예로 빨강·노랑·파랑인 교통신호의 색이 뜻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운전이 불가능하며 안전하게 걸을 수도 없다. 사회에는 교통신호의 색처럼 거의 세계 공통인 것도 있으나 사물의 의미는 사회에 따라 다른 것이 많다. 따라서 다른 사회의 사물이나 사람들의 행동의 의미를 알아야만 그곳에서 비로소 생존해 갈 수가 있다. 상징에 대하여 자주 쓰이는 정의를 몇 가지 알아보면, C.개츠는 상징을 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의 은덴부족(族)의 연구로 유명한 V.터너는 상징을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의거하여 으로 정의하고 있다. 터너에 따르면 란 같은 문화권 속의 사람들에 의한 동의이며 나 도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 속에 한정된 것이다. 상징은 의미하는 것으로서 매개수단 또는 매체(媒體), 의미내용으로 구분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상징과 기호(sign)를 구별한다. 터너는 일정한 문화에서 매체와 의미내용 사이에 무언가 유사성이 있는 것을 상징이라 하고 이 둘 사이에 그와 같은 유사성이 없는 자의적(恣意的)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라 하였다. 터너에 따르면 상징에서의 매체는 의미내용과 은유적 또는 환유적인 관계에 있다. 터너는 상징이 은유적인 것과 환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고 했으나, E.리치는 기호인 경우의 의미내용과의 관계는 인접적·환유적이라 하고 상징에서 의미내용과의 관계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적인 것이라 하였다. 대수방정식의 χ, 汝, 濾는 상징이고, 대수식의 蒔, -, 詩 처럼 고정되어 언제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관습적 표기를 기호로 본다. 리치에 따르면 왕관은 왕권을 나타낼 때 환유에 바탕을 둔 기호이다. 사과는 특정 과일을 표시하는 기호이지만 라고 할 때의 고유명사는 상징이다. R.니덤은 상징과 기호를 구별하지 않고 군주정치를 나타내는 왕관도, 미국을 표시하는 독수리도 상징으로 보았으며 상징을 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독수리를 새의 일종으로 보는 분류와 함께 독수리나 그 밖의 동물을 국가나 씨족 또는 무엇인가의 집단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파악하는 관습을 볼 수 있다. 사회와 자연, 우주가 상징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전통사회가 있고, 이와 같은 상징적 분류의 하나로 상징적 이원론(象徵的二元論)이 있다. an object, sign, or image that is used to stand for something else, as a flag may be used to symbolize a nation. Whitman uses the hermit-thrush as a symbol of American poetry; Henry Adams uses the dynamo as a symbol of vast, inhuman power.      13. antithesis 對句, 對照法 상반(相反)되거나 대립되는 사물(事物)을 함께 내세워, 양자의 대조적인 상태를 강조하는 수식법(修飾法).  문학적 수법으로서는 특히 고전주의(古典主義) 시인이 즐겨 인용하여 풍자적인 기지(機智)를 발휘하는 수단이 되었다. 예컨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묘사할 때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반대되는 것, 또는 그 주위의 것을 묘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묘사대상을 돋보이게 하는 문체상(文體上)의 기법을 가리킨다.      14. allegory 諷喩, 寓意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 다른 이야기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문학형식이다. 의인화하는 경우가 많다. 중세의 도덕우의극(道德寓意劇)이나 《장미설화》, 스펜서의 《페어리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등이 대표적이다. 지나치게 유형적이며 교훈적이라고 하여 현대 작가들은 사용을 꺼리나 정치나 종교를 문제로 할 때에는 유효한 형식이며 현대 문학에서도 넓은 의미에서 ‘알레고리컬’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a universal symbol or personified abstraction. Example: Death portrayed as a cloaked "grim reaper" with scythe and hourglass, or Justice depicted as a blindfolded figure with a sword and balances. Also a literary work or genre (e.g., John Bunyan's Pilgrim's Progress) that makes widespread use of such devices.  가장 통상적인 용법에서 알레고리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이 중 하나는 가시적이거나 축자적인 의미에 부분적으로 감춰져 있다―를 갖고 있는 이야기나 이미지를 가리킨다. 흔히 알레고리는 추상물을 인간 내지 인간적 성질을 가진 존재로 그린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여신상, 정의의 상이나 승리의 상은 알레고리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면, 알레고리는 교리나 사상 체계 속에 있는 추상물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그것을 장소나 인물이나 사건으로 제시한다. 영국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알레고리의 하나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 Progress』에서 세재씨(世才氏), 충실씨(忠實氏), 희망씨(希望氏)는 주인공 기독교도를 따라 파멸시(市)에서 천상시까지 여행한다. 이 이야기의 인물과 장소는 청교도 교리의 특수한 개념들을 표상한다. 그리고 주인공 기독교도의 순례는 그 자체로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면서 또한 모든 기독교도의 구원을 향한 인생 역정을 그린, 보다 일반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알레고리는 물론 종교적 저작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조너선 스위프트와 조지 오웰 같은 작가들은 정치 문제에 관한 작품에서 알레고리를 효과적으로 구사했다.   알레고리는 중세 기독교의 어떤 종류의 성서 주석(注釋; EXEGESIS)에서 영혼 세계와 물질 세계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에서 조응을 찾아내는 방법으로서 중요했다.(TYPOLOGY 참조) 낭만주의 시대에 비평가들은 그때까지 거의 호환적으로 사용되어온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낭만파 시인이자 비평가이자 성직자였던 새무얼 테일러 코울리지는 상징이란 “실제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표상하는 전체의 일부”라고 논했다. 반면에 알레고리는 자의적이고 따라서 상징만큼 ‘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구별은 지금까지 남아 있긴 하지만 그간 몇몇 유력한 비평가들에 의해 거부되곤 했다. 예컨대, 발터 벤야민은 알레고리가 텍스트나 회화에 신화적이고 역사화된 배경을 설정하기 때문에 상징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에게 상징은 알레고리와 대조적으로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폴 드 만도 알레고리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상징은 이미지와 실체를 결합하여 어떤 초월적 지식이나 진리를 암시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드 만이 보기에 그런 지식이나 진리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알레고리는 상징과 대조적으로 더욱 유용하고 ‘정직’하다. 그것은 그 자체의 기원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데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알레고리는 인간의 인식과 실존의 우연성 너머에 불변의 초월적 진리가 성립한다는 듯이 굴지 않는다. DECONSTRUCTION도 참조.   자료 2   수사법(修辭法)    글쓴이의 사상과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표현의 기교로 보아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유법 : 표현하려는 대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과 비겨서 표현.  강조법 : 문장에 힘을 주어 강조함으로써 짙은 인상을 주는 방법.  변화법 :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피하려고 변화를 적절히 주는 방법.      1. 비유법(比喩法)  직유법(直喩法), 은유법(隱喩法), 의인법(擬人法), 활유법(活喩法), 의성법(擬聲法), 의태법(擬態法), 풍유법(諷喩法), 대유법(代喩法), 중의법(重義法), 상징법(象徵法), 우화법(寓話法)    (1) 직유법 : 원관념을 보조 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이다. 이를 '명유(明喩)'라고도 하는데 '찢긴 깃발처럼 허공을 향한 도시의 하늘'과 같이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등의 연결어를 사용하는 기교이다.    (예)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    *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 .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은유법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같은 성질로써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두 관념의 밀도는 직유보다 강하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 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를 사은유(deadmetaphor)라고 한다.    (예)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3) 의인법 :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예)  *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  베에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4) 활유법 :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활유법'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의인법'이다.    (예)  *청산이 깃을 친다.  *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5) 의성법 : 어떤 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예)  *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 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6) 의태법 :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낸 기교로서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예)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 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7) 풍유법 :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 등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도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 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예)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  *간밤의 부던  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 라.  ?蕩?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糖?오.      (8) 대유법 :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분으로써 혹은 그 살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대한민국)    위의 두 글에서 ㉠은 제유법이고, ㉡은 환유법이다. ㉠의 '들'은 국토의 일부로서 '국토'를 나타내었고, ㉡의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의 특징으로서 '우리 나라'를 나타내었다.    (9) 중의법 : 하나의 말을 가지고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예)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10) 상징법 : 원관념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 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이 나타나 있지 않아도 그 표현만으로써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예)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11) 우화법 :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 강조법(强調法)  과장법(誇張法), 반복법(反復法), 열거법(列擧法), 점층법(漸層法), 점강법(漸降法), 비교법(比較法), 대조법(對照法), 억양법(抑揚法), 예증법(例證法), 미화법(美化法), 연쇄법(連鎖法), 영탄법(泳嘆法), 현재법(現在法)    (1)과장법 :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리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예)  *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2) 반복법 : 같은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이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예)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3) 열거법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 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예)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 대체로 셋 이상을 늘어 놓을 때만 열거법으로 본다.  같은 어구가 늘어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고 반복법이다.    (4) 점층법 :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올리는 표현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하여 감동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다.    (예)  *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유교의 목적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5) 점강법 : 점층법과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않게 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명예를 잃은 것은 모두를 잃은 것이요  용기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은것은 아무 것도 안 잃는 것이다.    ※ 점층,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점층법과 점강법을 아울러서 점층법이라고 한다.    (6) 비교법 :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흔히 '∼만큼', '∼보다', '∼처럼', '∼같이' 등의 비교격 조사를 사용한다.    (예)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푸른  그 마음 흘러라.      ※ 직유와 비교의 차이 :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 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7) 대조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① 단어의 대조  (예)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예)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    ③ 색상의 대조  (예)  *  미   니 새 더욱  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예)  *들을 제  우레러니 보니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8) 억양법 :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던지 하는 표현 방법    (예)  *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9) 예증법 :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예)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10) 미화법 :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  *집 없는 천사(천사→거지)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우리는 그 백의의 천사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간호원→백의의 천사)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11) 연쇄법 :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어키게 하는 데에 있다.    (예)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        (12) 영탄법 :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1920년대 우리 시에서 많이 썼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13) 현재법 :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3. 변화법(變化法)  도치법(倒置法), 대구법(對句法), 설의법(設疑法), 인용법(引用法), 반어법(反語法), 역설법(逆說法),생략법(省略法), 문답법(問答法), 명령법(命令法), 경구법(警句法), 돈호법(頓呼法)    (1) 도치법 :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예)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쇠할 벽력을.    (2) 대구법 :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歌辭)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예)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3) 설의법 :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 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표현 형식이다. 내용상으?灌? 의문이 아니며,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독자의 판단에 맡겨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표현하는 기교이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예)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4) 인용법 :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로서 '인용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에 따옴표가 드러나 있는 명인(明引)과 따옴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 암인(暗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5) 반어법 :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면서 칭찬하는 방법으로서'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예)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자녀를 버린다.)  *후기(後期)ㄴ지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6) 역설법(Paradox, 모순 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안 맞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예)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도치법,반어법)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7) 생략법 : 글의 간결성,압축성,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기교이다. 그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예)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8) 문답법 : 글 속의 어느 일부의 문장을 문답 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 자답(自問自答) 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  옌가 ?搭遺?.  *그렇다면 그 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9) 명령법 : 평범한 서술로 해도 무방할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또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예)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 보라:문어체(文語體), 보아라:구어체(口語體)    (10) 경구법 :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헌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예)  *시간은 금이다.  *웅변은 은(銀)이고 침묵은 금이다.(은유법, 대구법)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다.    (11) 돈호법 :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편짓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예)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318    문학용어 모음 댓글:  조회:1047  추천:0  2018-10-19
*가나다 순*    ■ 가면극(假面劇) :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 정교한 형식을 지닌 궁정 오락으로서 시극 음악 무용 화려한 의상 무대 장관으로 구성.  ■ 가전(假傳) :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체로 서술한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로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다.  ■ 가전체 문학(假傳體文學) :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 일명 의인 전기체.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켜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가전 혹은 의인 전기로 불림.  ■ 갈래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장르.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 가정 소설(家庭小說) : 구소설의 내용적 분류의 하나 소재는 가정 생활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그린 소설  ■ 각색(脚色) : 연극 용어 소설이나 논픽션 등 어떤 원작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대본으로 바꿔 쓰는 것을 말함  ■ 갈등(葛藤) :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 의지적인 두 성격의 대립 관계를 뜻한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외적 갈등이라 하고 한 인물 내부의 대립적 욕구로 인한 갈등을 내적 갈등이라고 한다.  ■ 감상주의(感傷主義) : 어떤 원칙을 주장하는 뜻에서 주의가 아니고 감정 과정의 의미에서 주의이다. 슬픔이나 기쁨 등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러한 정서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데서 생긴다.  ■ 감정이입(感情移入) :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집어넣어 대신 나타내는 표현 기법 상의 하나,.시에서 많이 쓰인다.  ■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을 이르는 말. 엘리어트가 처음 말함.  ■ 경향 문학(傾向文學) : 순수 문학이 아닌 의식적으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계급적인 것을 취급하여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자는 목적 아래 쓰이는 작품 교훈시나 프로 문학이 속함  ■ 계급주의(階級主義)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곧 카프(KARF)가 주창 실천하려 했던 문학 사상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에 의한 계급 혁명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주의 이념  ■ 계몽주의(啓蒙主義) :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다. 계몽주의 문학은 작가가 교사 선각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합리성에 호소하여 가르치려 하는 일종의 교훈주의 문학이다.  ■ 고전주의(古典主義) :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미를 전범으로 하여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경향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면 일반 미를 지향한다.  ■ 구비문학(口碑文學) : 문자로 정착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문학이다 말로 되었고 구연되며 공동작이며 민중적 민족적인 것이 특징이다.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 교술시(敎述時)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 설명, 하여 알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  ■ 구조(構造) : 내부 요소들이 짜임 또는 그러한 짜임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작품의 전체  ■ 구조주의(構造主義) : 문학 작품을 작품 속의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로서 조직된 구조로 보는 연구 방법론 이 사상은 프랑스의 언어 학 이론에서 나왔다.  ■ 기록 문학(記錄 文學) : 보고 문학이라고도 함 현실에 일어나 사건의 진전이나 사물의 상태를 충실히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문학 작품  ■ 기지(機智) : 지적인 것이며 언어적 표현에 의존한다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압축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  ■ 기호학(記號學) : 문학 작품을 하나의 기호 체계로 보고 이를 분석하는 문학 연구의 한 방법 작품의 언어 분석을 통한 문화 요서의 분석 문체론적 접근 의미론에 따른 분석 등을 행한다.  ■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 고려 가요에서 남녀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를 조선 시대 한학자들이 업신여겨 일컫던 말  ■ 낭만주의(浪漫主義)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유행한 문예사조의 하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것으로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풍만해 감정 표출을 특징으로 한다.  ■ 내재율(內在律) : 자유시나 산문시에서처럼 문장 안에 미묘한 음악적 요소로 잠재되어 있는 운율 외형률과 대조가 된다.  ■ 내적 독백(內的獨白) : 20세기 심리 소설의 한 서술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 적 독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외적 사건을 그리는 기교  ■ 내포(內包) : 사전적 의미가 작품 구조 내에서 새롭게 이루어 내는 의미 함축적 의미  ■ 농민 소설(農民小說) :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의 문제점을 파헤친 소설  ■ 다다이즘 : 1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전위적 예술 운동에 대해 시인 트리스탄 짜라가 붙인 이름 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 문명을 부정하여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 뒤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 다의성(多義性) :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 언어의 한 특성.  ■ 다큐멘터리 : 허구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전개에 따라 구성된 기록 문학에서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 대단원(大團圓) : 연극에서 갈등이 해소되어 결말을 짓는 마지막 장면 결말 파국  ■ 대본(臺本) : 연극이나 영화의 기본이 되는 각본  ■ 대유법(代喩法) : 어떤 유사성을 가진 사물을 통하여 그와 관련되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도록 하는 비유법 제유법과 환유법으로 나눈다.  ■ 대중 소설(大衆小說) : 일반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흥미 위주의 소설 연애 소설 과학소설 추리 소설 등이 있음  ■ 대하 소설(大河小說) :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변모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하는 소설 장구한 기간에 걸친 집단과 개인의 갈등과 대결을 막대한 분량으로 전개시키는 소설  ■ 데카당스 : 퇴폐주의  19세기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에서 유럽 각 국에 퍼져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예술 경향으로 뒤에 상징주의로 발전하였다.  ■ 독백(獨白) : 일인극 단독 대사. 배우가 마음속의 생각을 관객에게 알리려고 상대자 없이 혼자 말함. 모놀로그  ■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 :  러시아 혁명 후 혁명의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심정적으로 는 동조하는 작가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카프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에 동조한 유진오, 이효석, 채만식 등을 말한다.  ■ 로망스 :  원래는 로마 말의 방언으로 쓴 하찮은 글이란 뜻 그후 환상적 무용담 연애담 또는 무용 연애 담을 뜻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말이 유럽 대륙에서 소설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 리얼리즘 : 사실주의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응하는 유파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에 대하여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묘사하려고 하는 예술 상의 한 경향  ■ 매너리즘 : 예술 창작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가 생기와 신선미를 잃는 일  ■ 멜로드라마 : 연애를 주제로 하며 우연에 따른 변화와 호화스러움이 있고 그 내용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흥미 중심의 대중극  ■ 모더니즘 : 철학 미술 문학 등에서 전통주의에 대립하여 주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바였나 주관적이 예술 경향의 총칭 시에 있어서는 1910년이래 영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함께 말한다.  ■ 모티프 : 일정한 소재가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를 말한다. 이것은 한 작가 한 시대 나아가 한 갈래에 반복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 몽타주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서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영화나 사진 편집의 한 수법  ■ 묘사(描寫) : 어떤 대상을 객관적 구체적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일  ■ 문체(文體) : 작자의 독특한 사상이나 개성이 문자의 어구에 나타나 이루어 내는 전체의 특색  ■ 문학 사회학(文學 社會學) : 미를 이해하는 감각과 경험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산출하는 정신 태도에 작용하는 의식  ■ 미학(美學) : 예술에 있어서의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  ■ 민담(民譚) : 말로 전승되는 길지 않는 동화 야담 일화 우화 전설 신화 등을 총칭하는 말  ■ 민속극(民俗劇) : 민간 전승의 연극 가장한 배우가 집약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사건을 대화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극, 가면극, 인형극이 있다.  ■ 민요(民謠) :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민중의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반영시킨 노래  ■ 반어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나타내는 수사학의 일종  ■ 방백(傍白) : 연극에서 관객에게는 들리나 무대 위의 상대방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을 약속하고 말하는 대사  ■ 배경(背景) : 작품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되거나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구체적 풍경 분위기 시대성 등의 요소  ■ 번안(飜案) 외국 작품에서 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등을 자기 나라에 맞게 바꾸어 고침  ■ 보조 관념(補助觀念) : 어떤 다른 생각을 나타내는 매개로 쓰이는 사물이나 생각. '비둘기'가 '평화'를 나타낼 때 '비둘기'는 보조 관념, '평화'는 원관념  ■ 부조리(不條理) :  문학 베케트나 카뮈의 작품이 그것으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의 불가능함. 인간 의지의 전적인 무력함 인간의 근본적인 야수성, 물질성, 비생명성. 요컨대 인간의 부조리를 아이러니컬하게 나타내는 문학을 말한다. 특히 부조리극은 내용만이 아니라 극 구성 자체가 부조리하다.  ■ 비극(悲劇) : 희곡의 한 종류 결말이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꾸밈 희극과 대립된다.  ■ 비교문학 : 다른 나라끼리의 문학을 비교하여 상호간의 영향 관계를 과학적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전체적인 문학의 특징을 밝히는 학문  ■ 비유(比喩) : 하나의 사상이나 사건을 설명할 때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직유, 은유, 풍유, 의인, 대유 등이 있음  ■ 비평(批評) : 예술 자체에 대한 또는 개개의 작품에 대해서 꾀한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치평가  ■ 사실주의(寫實主義) :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립하여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의 경향 또는 인간의 본질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보는 세계관  ■ 산문시(散文詩) : 일정한 운율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로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 산문 정신 운문의 외형적 규범 및 낭만주의적인 시적 감각을 배제하고 사회적 현실주의에 의하여 파악된 현실을 순전한 사문으로써 표현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  ■ 삼일치 법칙(三一致法則) : 17세기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이 주창한 연극 이론으로 시간 장소 행동의 세 가지가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  ■ 상징(象徵) : 한 사물 자체로서 다른 관념을 나타내는 일 즉 보조 관념만으로 원관념을 나타내는 일  ■ 상징주의(象徵主義) :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 상의 경향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를 상징으로써 암시하려고 했다.  ■ 서사시(敍事詩) : 민족적이거나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 또는 전설과 영웅의 사적 등을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 놓은 시 ■ 서사체(敍事體) : 어떤 사건이나 사실 전달을 위주로 서술해 나가는 문체  ■ 서술자(敍述者) :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  ■ 서정시(敍情詩) : 서사시 극시와 달리 주관적이며 관조적인 수법으로 자기 감정을 운율로서 나타내는 시의 한 갈래  ■ 서정적 자아(抒情的自我) :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보통 시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이 시적 표현 효과를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시적 자아라고도 한다,  ■ 서정주의(抒情主義) : 시 소설 등에서 작자의 주관적 체험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 경향. 주로 사람, 죽음, 자연 등을 제재로 내적 감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리리시즘  ■ 소재(素材) : 예술 창작 상의 요소가 되는 재료 곧 자연물 환경 인물의 행동 감정 같은 것  ■ 수사학(修辭學) : 역사 전설 도덕 철학 등의 산문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적 기능만을 활용하여 짓는 시  ■ 스토리 : 소설, 희곡, 영화 등의 내용상의 줄거리. 이야기  ■ 시점(視點) : 소설에서 서술자가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 시각 4가지로 나뉘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다  ■ 시튜에이션 : 상황 어떤 인물이 처한 정세를 가리킨 것으로 연극 소설 영화 등에서 결정적 장면을 말함  ■ 시학(詩學) : 시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이론으로 시의 본질과 분류, 형식과 기교, 효용, 그 밖에 다른 예술과의 관계, 시의 기원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엽까지의 유럽 문학 사조를 가리킨다, 신고전주의는 사람의 불완전성을 강조하고 고전 문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보편성, 조화, 균형, 합리성을 더욱 철저히 방법적으로 따르기를 주장하였다.  ■ 신비평(新批評) : 1930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문예비평으로 작품을 독립된 자율적 산물로 보고 작품의 언어 기능을 세세히 분석 설명하고자 하는 비평 태도  ■ 신파극(新派劇) : 신파 연극의 준말 재래의 전통적인 창극의 테두리를 벗어나 현대의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 등을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 개화기로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  ■ 신화(神話) : 구전되는 신들의 이야기. 한 집단이나 민족의 기원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 민족이 살아 남기 위한 투쟁, 지도 이념, 삶과 죽음, 인간의 미래 등 한 민족 내지 인류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것  ■ 실존주의(實存主義) : 실제로 존재하는 체험적 개인의 상황 자체가 중요하며 개인의 실존은 비합리적이라는 입장 실존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를 그 근원적 부조리성에서 추구하는 것.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앙가주망도 여기에서 나왔다.  ■ 실험 소설(實驗小說) : 작자의 상상적 행위를 떠나서 작자 자신이 관찰 실험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구성하는 소설 자연주의 작가인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주장하였다.  ■ 심리 소설(心理小說) : 인간의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소설 평면적인 심리뿐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 파고 드는 초현실주의 작품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 심리주의 비평(心理主義批評) : 비평 양식이 한 갈래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의 심리를 재구성하든가 정신 분석학의 원리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든가 하는 비평  ■ 심볼 : 상징 인간이나 사물 추상적인 사고를 그 연상에 의해 표현하는 것  ■ 심상(心像) : 이미지  ■ 아이러니 : 반어법, 수사학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의 표면상 의미 뒤에 숨어 그와의 반대의 뜻을 대조적으로 비치는 표현 형식  ■ 악한 소설(惡漢小說) : 악한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16세기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로 악한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 알레고리 : 흔히 풍유 또는 우유라고도 함 표면적으로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합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  ■ 앙가주망 : 사회 참여, 현실 참여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주창하였다.  ■ 애매성(曖昧性) : 신비평의 용어 함축적 의미의 언어가 사용되는 시에서 상식적인 의미 이외에 풍부한 암시성을 수반하거나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융통성 복합적 의미 풍부한 의미라는 뜻으로서 난해성과는 구별된다.  ■ 액자(額子) 구성 : ㉠외부 이야기(外話)속에 내부 이야기(內話)가 들어 있는 구성 방식. ㉡외부 이야기가 액자의 역할을 하고 내부 이야기가 핵심 이야기가 된다. ㉢액자는 내부 이야기를 도입하고 또 그것을 객관화하여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예) 김동인의 '배따라기', 김동리의 '무녀도' 등  ■ 어조(語調)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물과 독자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말의 가락  ■ 에피소드 : 이야기나 소설 등의 본 줄거리에 딸려 부분적으로 끼어 넣는 이야기 삽화  ■ 에필로그 : 시, 소설, 연극 등의 종결부 프롤로그와 대립  ■ 역사 소설(歷史小說) : 역사상의 사실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 대개 교훈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 역사주의(歷史主義) :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과 사상과 문학적 전통과 관습 등의 포괄적인 문맥 속의 적절한 자리에 되돌려 놓여져야만 그 의미와 본질이 밝혀진다는 이론적 주장  ■ 역사주의 비평(歷史主義批評) : 비평 양식의 한 갈래 작가가 처해 있던 역사적 환경을 근거로 실증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 역설(逆說) :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 표현이나 사실은 그 속에 진리를 품은 말. 패러독스  ■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은 오직 미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주장으로 유미주의자들이 내세운 구호에서 비롯되었으며 미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함  ■ 오버랩 : 영화에서 어떤 화면 위에 다른 화면이 겹쳐지는 것으로 시간 경과에 대한 생략의 의미로 쓰인다.  ■ 용명(溶明) : 화면이 차차 밝아 옴. 한 장면이 시작할 때 쓴다.  ■ 용암(溶暗) : 화면이 차차 어두어짐. 한 장면이 끝날 때 쓴다.  ■ 외연(外延) : 한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 지시적 의미라고도 하며 내포와 대립된다  ■ 우화(寓話) : 인간의 정화를 인간 이외의 동물, 신 또는 사물들 사이에 생기는 일로 꾸며서 말하는 짧은 이야기로서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  ■ 우화 소설(寓話小說) :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 운율(韻律) : 시의 음악적 요서 같은 소리의 반복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운이라 하고 말의 고저 장단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율이라고 한다.  ■ 원관념(元觀念) : 어떤 말을 통하여 달리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 생각 보조 관념과 대립  ■ 원형(原形) : 근본적인 형식으로 그것으로부터 많은 실제적 개체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류학과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문학 비평에 이 방법이 원용되어졌다. 인간의 원초적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되어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유전되며 그것이 문학에서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입장  ■ 위트 : 기지 사물을 신속하고 지적인 예지로 인식하여 다른 사람이 기쁘게 즐길 수 있도록 교묘하고 기발하게 표현하는 능력  ■ 유미주의(唯美主義) : 탐미주의라고도 함 미를 최고의 것으로 보고 여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로서 문학 예술의 목적을 도덕이나 실용성에서 분리시켜 미 자체를 추구하는 것  ■ 율격(律格) :  율, 즉 말의 고저 장단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적 격식 은유처럼 같이 등 연결어가 없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결합시켜 나타내는 비유법의 하나. 'A는 B이다', 'A의B'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 음보(音步) : 시의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어절로서의 최소 단위  ■ 음성 상징(音聲象徵) : 시적 표현에서 음성 자체가 감각적으로 떠올리는 표현 가치를 이른다.  ■ 의미 작용 : 문학 작품의 내적 구조 관계를 통해 자율적으로 의미를 산출해 내는 일  ■ 의식(意識)의 흐름 : 인간의 잠재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하는 문학상의 수법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이 기법으로 쓰여진 유명한 작품이며 이상의 날개도 이런 유의 작품에 속한다.  ■ 이미지 : 오관을 통한 육체적 지각 작용에 의해 마음속에 재생된 여러 감각적 현상 심상 영상  ■ 이미지즘 : 일차 대전 말기 영미의 시인들이 사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써 명확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창도한 문학 운동으로 이미지의 색채와 율동을 중시하고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고 했음  ■ 인본주의(人本主義)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다름으로 휴머니즘의 내포적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 인상주의(印象主義) : 회화나 조각에 있어 자연에 대한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중시하고 여러 가지 기교로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주의와 그 작가들을 말함  ■ 자기화(自己化) : 문학 작품 통해 얻어지는 여러 가치를 자기 변화의 동기로 삼는 일  ■ 자연주의(自然主義) :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문예사조로 진화론 물질의 기계적 결정론 실증주의 등의 사상을 배경으로 일어났으며 생물학적, 사회 환경적 지배하에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연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 관찰하고 검토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자유시(自由詩) : 전통적인 정형적 리듬을 벗어나 자유로운 리듬의 가락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현대시  ■ 자율성(自律性) : 문학 작품이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는 특성  ■ 장르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갈래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 전기(傳記) : 괴이한 내용으로 엮은 문학 작품  ■ 전기 문학(傳記文學) : 개인 생애의 행적 을 주제로 한 문학  ■ 전설(傳說) : 실재하는 장소 시대 인물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는 설화로서 지방의 구체물에 결부되어 토착성, 고정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 전원 문학(田園文學) : 전원을 무대로 한 문학 궁정이나 문명 사회의 유폐를 통탄하는 심정에서 목자의 생활을 찬미하여 노래한 시  ■ 정화 작용(淨化作用)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울적한 공포에 질린 감정을 해소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카타르시스  ■ 주지주의(主知主義) : 종래의 주정주의에 대립하여 감각과 정서보다 지성을 중시하는 창작 태도와 경향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성했다.  ■ 지문(地文) : 희곡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등을 지시하여 서술한 글  ■ 지시적 의미(指示的意味) : 사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의미  ■ 직관(直觀) : 판단 추리 등의 사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 직유 : '처럼', '같이' 등을 사용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해 주는 말에 의해 나타내는 비유법  ■ 참여 문학(參與文學) :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경향의 문학.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후 제기됨  ■ 창극(唱劇) : 민속 악극의 하나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창하는 극  ■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 쉬르리얼리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1920년대에 다다이즘에 이어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없이 내적 생활의 충동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 초점(焦點) : 주의에 상상적인 작품의 제재가 집중된 중심 초점은 한 작품 속에서 순간 순간 이동될 수도 있고 지속적으로 고정될 수도 있음  ■ 추체험(追體驗) : 작품을 읽으며 자신을 작품 속의 인물과 같은 입장에서 그 작품 세계를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  ■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공포와 연민을 통해 감정을 해방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 캐릭터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혹은 인물의 성격  ■ 커팅 :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을 잘라 다음 장면으로 변환 접속하는 것으로 각 장면의 전환을 뜻한다.  ■ 콩트 : 장편소설(掌篇小說) 혹은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도 함 프랑스에서 발달함 200자 원고지 20-30매 이내의 미니 소설로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경쾌하고 교묘함)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임  ■ 클라이맥스 : 전개 부분이 확대 또는 상승되는 부분 정점 소설에서의 갈등이 가장 심화되는 부분을 말함  ■ 테마 :  작품 속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며 작품 속에 구현되어진 의미여 제재에 대한 해석이다. 창작 과정으로 보아서는 동기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음 주제  ■ 텍스트 :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에 대한 본문 원문 원전을 말한다.  ■ 패관 문학(稗官文學) : 설화 문학 패관이 채집한 가설 항담에 패관의 창의와 윤색이 가미되어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된 문학  ■ 패러디 : 어느 작가나 시인의 내용 문체 운율 등을 모방하여 풍자적으로 꾸민 작품  ■ 폭풍 노도(暴風怒濤) : 1770-1780년 무렵에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적 문학 운동 합리적인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격렬한 감정과 개성을 존중했다.  ■ 표현주의(表現主義) :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연극 분야에서 성행했다. 작가 개인의 강력한 주관적 표현을 내세운다.  ■ 풍유법(諷諭法) : 본래의 뜻을 감추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상의 깊은 내용이나 뜻을 짐작하게 하며 흔히 교훈적인 수사법. 알레고리  ■ 풍자(諷刺) :  인간의 약점 사회의 부조리 비논리 같은 것을 조소적으로 표현하는 수법  ■ 프로 문학 : 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을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반영하는 문학 맑스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문학. 우리 나라에서는 1925년 결성된 카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플롯 : 소설, 희곡, 각본 등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을 하나로 얽어 짜는 일과 그 수법  ■ 피카레스크 소설 : 악한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소설로 악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의 '악한(picaro)'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 함축적 의미(含蓄的意味) : 문학 작품에 있어서 내부 구조를 통해 드러내는 의미 지시적 의미의 반대되는 뜻으로 쓰인다.  ■ 해학(諧謔) :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며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인간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이나 실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극복하게 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다.  ■ 허구 소설(虛構小說) : 희곡 등에서와 같이 실제로는 없으나 있을 법한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으로 꾸며내는 일 소설 작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픽션  ■ 형식주의(形式主義) :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 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를 분석 평가하는 문학론. 구체적으로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지칭하며 신비평은 여기서 나왔다.  ■ 휴머니즘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심적 태도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띤다. 인도주의  ■ 희극(喜劇) : 연극의 한 갈래로 웃음을 자아내며 행복한 종말을 낳게 하는 형태로서 개인의 교양과 속해 있는 사회 습관 전통에 따라 다양한 면을 갖고 있음  
317    서양 문예사조의 흐름 댓글:  조회:711  추천:0  2018-10-19
서양 문예사조의 흐름     1. 서양 문예사조의 바탕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1) 헬레니즘(Hellenism) : 고대 그리스의 예술, 철학, 정치 등 여러 분야에 나타난 문화적 이상(理想)을 뜻한다.            현세적(現世的), 사실적(事實的), 물질적 경향을 띤다.   (2) 헤브라이즘(Hebraism) : 헬레니즘에 대립하는 사조로 고대의 유태교적 종교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내세적           (來世的), 이상적(理想的), 정신적, 금욕적이며 신의 의지(意志)를 인정하고 이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2.서양 문예사조의 주류적(主流的) 계보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고전주의 → 낭만주의 (17,8세기)                          ↓                       사실주의 → 자연주의 → 유미주의 → 상징주의 (19세기)                                                               ↓                           행동주의 ← 주지주의 ← 초현실주의                              ↓ (20세기)                           실존주의     [보충설명]          ■ 헬레니즘-'고전주의→사실주의→자연주의'로 전개          ■ 헤브라이즘-'낭만주의→유미주의→상징주의'로 전개    3. 서양의 근대 문예사조     (1) 고전주의(古典主義;classicism) : 헬레니즘을 직접 계승한 사조. 16,7세기 문예 부흥기에 유럽 예술 전반에            나타났던 경향. 인생에 대하여 이지(理智)와 감정(感情),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얻는 것에 미(美)의 주안점을           두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예술을 모방하려 했다. 고전주의의 특징은 조화(調和)와 완성, 통제와 형식미에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코르네유, 몰리에르) 영국(셰익스피어, 드라이든) 독일(괴테, 레싱) 등     (2) 낭만주의(浪漫主義;romanticism) : 통제와 형식의 사조인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조.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 초에 유럽 전체를 지배했던 경향. 개성을 존중하여 자유 분방을 구가하고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해             형식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감정의 해방, 미지의 세계 동경, 끝없는 공상, 미묘한 정서, 자연에 대한 열애            등의 특징을 갖는다.           ▶ 대표작가 - 독일(실레겔, 노발리스) 프랑스(샤토브리앙, 위고) 영국(바이런, 셸리, 키츠) 등     (3)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 : 19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인간의 상상력에 주안점을 둔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            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한 문예운동. 현실을 과장하거나, 주관적으로 파악하여, 그 사물과 현실의            개성적인 면을 묘사하며, 추악한 현실이라 하더라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특징이 있다.             사실주의가 문예운동으로 나타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로 기계 문명이 발달하고,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유행한 콩트 류의 실증 철학(實證哲學) 등이 그 바탕이 되어 사실주의의 개화를 보게 되었다.           ▶ 대표작가 - 프랑스(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영국(디킨스) 러시아(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등     (4) 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 : 사실주의가 극단적으로 흐른 결과에서 나온 사조. 모든 것을 논리와 실험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실증주의적 사고 방식을 배경으로 출발, 인간과 세계를 자연 과학의 이론과 방법으로             분석하려는 문학 운동. 인간을 하나의 자연물로 보고, 작자의 주관이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인간의 행동             이나 생각을 자연 과학적 법칙에 따라 서술하는 특징이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졸라, 모파상) 영국(무어, 기싱, 코난 도일) 독일(하우프트만) 노르웨이(입센) 등    4. 서양의 현대 문예사조     (1) 유미주의(唯美主義;aestheticism) : 미의 창조를 언어 예술의 지상 목표로 삼는 경향. 탐미주의(耽美主義),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사실주의 내지 자연             주의와 상반된 하나의 흐름이다. 그 특징으로, 첫째 인공(人工)을 중시하고, 둘째 인간적 의의와 내용보다             예술적 형식이나 기교를 중시하며, 셋째 참신(斬新)과 신기(新奇)를 중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대표작가 - 프랑스(플로베르, 고티에) 영국(페이터, 와일드)     (2) 상징주의(象徵主義;symbolism)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주로 프랑스 시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사조.            유미주의처럼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이며 유미주의의 일면을 계승, 심화시킨 것이다. 자연주의나 사실            주의는 객관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데 불과하나, 이것은 하나의 문헌이나 사진이지 예술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지성화된 감성으로 내면 세계를 통해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하였다.           ▶ 대표작가 - 프랑스(말라르메, 랭보, 베를렌, 발레리) 독일(게오르게, 릴케) 아일랜드(예이츠)                                오스트리아(호프만슈탈) 등     (3)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 : 1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사조. 합리주의나 논리적            사고를 부정하고 오로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논쟁으로 발생하는 생각이나 느낌, 곧 잠재             의식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잠재 의식이야말로 순수한 상태의 인간 정신이며 인간을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게 해 준다는 신념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에서는 시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논리적 순서 없이 그대로 배열하는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을 사용하는데 소설에서는 이를 '의식의 흐름'            이라고 한다.           ▶ 대표작가 - 프랑스(부르통, 푸르스트) 영국(조이스, 울프) 등     (4) 주지주의(主知主義;modernism) : 1차 대전 후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시적 경향. 원래는 20세기 초에 나타난           예술상의 여러 사조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지적(知的) 언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영.미의 경향(imagism)만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윤곽이 선명한 시, 명확한 이미지의 창조, 음악성의           배격 등의 특징을 보여 준다.           ▶ 대표작가 - 영국(흄, 파운드) 미국(엘리어트) 등     (5) 행동주의(行動主義;behaviourism) : 1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조. 세기말 사상이나 초현실           주의에 내재하는 허무적 경향을 배격하고 인간의 객관적 행동을 주로 다루는 경향이다.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을 인간의 내면 의식 탐구가 아니라 사회적 행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해결하려는 운동이다.            따라서, 문학의 소재도 스포츠, 여행, 연애, 혁명, 전쟁 등 행동적 세계에서 취하였으며, 2차 대전 후에는 더욱           적극적인 행동성을 보여 실존주의(實存主義)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 대표작가 - 프랑스(말로, 지드, 생텍쥐베리) 미국(헤밍웨이) 등     (6) 실존주의(實存主義;existentialism) : 2차 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철학적 경향. 인간의 내면적 본질           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을 중시하여, 현대인이 처한 고뇌와 허무 등의 상황 속에서 적극적 의미를 찾으려 했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 철학은 인간성 일반에서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였으나 실존주의는 인간 개개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존재[실존(實存)]로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한 것이다. 이 실존의 개념을 문학에 적용한 것이           실존주의 문학이다. 이 문학은 2차 대전 후 유럽을 뒤엎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태동한 것이니,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고뇌, 허무성을 들추어 냄으로써 어떤 적극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수법을 썼다.            ▶ 대표작가 - 프랑스(사르트르, 카뮈) 오스트리아(카프카) 등    [보충 설명]  ▣고전주의 - 형식미를 존중하고, 이성(理性)을 중시. 유형적, 보편적 미의 추구. 연극에서 삼일치(三一致) 중시.            시에서의 정형성 중시  ▣ 낭만주의 - 격렬한 생명감을 표현하려는 문학 운동에서 출발. 음악적, 주관적 양식이며 미의 다양성을 지향하고           개성을 중시함. 무한의 이념을 추구함  ▣ '문예사조'의 뜻 - 특정한 시기의 특정 사회에서, 하나의 공통적 흐름으로 나타나는 문학상의 경향  ▣ 작가와 '문예사조' - 한 작가나 작품을 특정한 문예사조 속에 고정시켜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 사실주의 - 산업혁명 이후 제재의 범위가 넓어지고 인간의 일상적 실재성(實在性)이 크게 문제된 데 따른 현실의            기록적 태도가 바탕이 된 사조  ▣ 자연주의 - 생물학적 인간관. 실험, 관찰에 의한 분석 중시. 인간의 추악성 폭로  ▣ 유미주의 - 세기말(世紀末) 사조의 주축을 이루며 그 한 가닥은 상징주의에 계승되었다.  ▣ 세기말 사상 - 19세기 말 유럽에 나타난 퇴폐적 경향. 도덕이나 예술에서 일체의 전통을 부정하고 찰나적, 관능적,            향략적 풍조로 나타남  ▣ 상징주의 - 현대시의 가장 대표적 사조. 표현 방법에 있어서 언어의 음성 현상에 의한 미묘한 음악성을 중시하는            한편 명징(明澄)한 표현보다는 모호한 표현을 하였다.  ▣ 초현실주의 - 합리주의적, 논리적 질서를 배격하고 순수한 정신 세계의 조화와 질서를 추구. 어휘의 사전적 의미            보다 연상적 의미, 즉 환기 작용을 중시하고, 따라서 의미의 연결보다 이미지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 주지주의 - 감정보다는 지성을 존중하며 시에서의 회화성(시각적 심상)을 중시하며 탐미적, 관능적, 몽환적인             경향에 반대하였다.  ▣ 행동주의 문학 - 작가가 사는 방법으로서 서재형(書齋型)과 반대로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점에 이 문학의 의의가            있으며 사르트르 이전의 참여 문학이기도 하다.  ▣ 실존주의 문학 - 현대의 위기적 상태에서 믿을 것은 자기 존재 이외에 없다는 극한적 개인주의 문학이다.  ▣ 상황론 -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한계 상황. 인생은 순간마다 단절하며 이것을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에 의해 행동            함으로써 연속시켜 나갈 때 삶의 한계가 드러난다는 주장.   --- 출처: http://mskorean.com.ne.kr/midkor/mast/munyea2.htm  
316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댓글:  조회:1363  추천:0  2018-10-19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현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315    [공유] 문심조룡 창작론 요약 댓글:  조회:1866  추천:0  2018-10-14
출처 문심조룡 창작론 요약 by 은목서 창작론 제26장 신사(神事) 신사란 ꡔ장자ꡕ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의 의미는 ‘몸은 비록 초야에 묻혀 있지만 마음은 벼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유협은 神事를 ‘창작구상에 있어서의 상상활동’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상상력을 통해 정신은 외부의 사물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며 사람의 의지와 성격은 마음속에 거주하는 정신의 활동작용을 다스린다. 문학적 표현을 얻기 위한 문학적 사색은 虛心과 고요함에서 비롯되는데, 시인은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신묘한 영감에 위탁함으로써 聲律에 조화되는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또한 경험과 결합한 이 직관적 통찰력을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독특한 장인적 기술에 조화시킴으로써 한 편의 글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을 통해 정신은 외부의 사물들과 접촉할 수 있으며 정신의 활동을 통해 현상세계는 분명해지고 그럼으로써 다양한 정서적 상황에 감응하게 된다. 따라서 상상력은 강렬한 감정 활동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문학적 표현을 얻기 위해서 작가는 학식을 축적하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통찰하며 철저한 관찰과 탁월한 언어운용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유협의 창작론은 이론에 기초하고 있지만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있어서는 다분히 정신의 작용을 강조하는 유심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27장 체성(體性) 이 장은 창작개성과 작품의 풍격 관계를 논하고 있는 부분이다. 體性의 體는 문학작품의 모양새를, 性은 작가의 재능이나 개성을 가리킨다. 감정의 움직임으로 언어가 형성되고 이성이 발동함으로 문장이 구현된다. 이 모든 것들은 性情으로부터 조성되고 관습과 풍습에 의해 도야되는 것이기에 문학작품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작가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게 된다. 모든 문학작품들의 귀결점[風格]을 여덟 가지 유형으로 개괄할 수 있다. ①고전적인 우아함: 경서의 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유가들의 정신적 지향과 일치하는 것 ②깊고 은밀함: 문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문장에 법도가 있는 것으로 도가의 학설에 바탕한 것 ③간결함: 자구를 절약하고 분석을 치밀하게 한 것 ④밝고 분명함: 문장의 의미가 명확하여 의미가 잘 통하는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 ⑤복잡하고 화려함: 비유가 많고 문채가 풍부한 것 ⑥壯麗함: 작품의 규모가 웅대하며 문채가 특출난 것 ⑦새롭고 기발함: 혁신적인 새로움을 추구하되 위험하고도 괴이한 길로 빠지기 쉬운 것 ⑧시류적인 가벼움: 문장은 화려하나 유약하여 힘을 결여한 것으로 시류에 영합한 것. 풍격은 학식과 재능에 달려 있는데 처음에 기질로부터 조성되는 것으로서 기질은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충실하게 하고, 사상과 감정은 언어와 문장을 확립하게 한다. 이 여덟 가지의 풍격은 서로 다르지만 일정한 원칙 아래 통합할 수 있고 각자의 성격과 기질에 맞추어, 모방을 통한 훈련에 의해 그 변화의 법칙을 철저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서로 보완하여 일을 잘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8장 풍골(風骨)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기세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이 풍을 형성하는 뼈대가 골이다. 풍이 문장의 생기를 말한다면 골은 내용의 건실함을 의미한다. 문채와 풍과 골을 새에 비유한다면, 그것들은 각각 깃털, 골력, 기세에 해당한다. 문장에서 풍과 골은 날아가는 새의 양 날개에 비유할 수 있다. 제29장 통변(通變) 문장의 體裁(명칭이나 창작규범 등)는 일정하지만 문장의 변화는 무궁하다. 통변의 개념은 ꡔ주역ꡕ의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유통하고, 유통하면 영구히 계속된다”는 구절에서 연유한 것으로, 通은 문학전통의 계승을 말하고 變은 문학창작의 혁신과 창조를 가리킨다. 문학적 향취가 약화되거나 문학이 경박함․기괴함에 빠지는 것은 고대의 모범들, 즉 문학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변화란 반드시 通과 變이 섞여있는 것으로, 어떤 것이 계승되고 어떤 것이 변화되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전통과 새로움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유협은 고금의 문학발전의 규율을 완전히 알아야 문학창조의 혁신과 창조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 문학의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경전이 문학적 모범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제30장 정세(定勢) 문장의 體制(시문의 양식)란 사상과 감정에 의해 확정되는 것으로 체제에 의해 형성된 것을 가리켜 문장의 기세라고 한다. 문장에 능통한 사람은 각종 문장의 체세들의 효과를 파악하고 그것을 종합하는 데 능숙하다. 이 장에서 22종의 문체가 지니는 풍격의 특징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협은 정세를 문체의 풍격과 유사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27장 「체성」편에서는 풍격의 주관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작가의 개성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적인 풍격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이 장에서는 풍격의 객관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문체 풍격을 중심으로 논술하고 있는 것이 그 차이라고 하겠다. 제31장 정채(情采) 情은 사상과 감정 등 情理를 가리키고, 采는 문장의 아름다움[文采]을 말한다. 문채를 구성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다섯 가지의 색채와 음률과 성정이 그 구성 요소이다. 유창한 문장은 정리가 확정된 뒤에라야 가능한 것으로 문장은 진지한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에 도리에 맞는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문채가 내용을 덮어 버리거나 방대한 사례들이 감정을 가려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진지한 감정을 도리에 맞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소박하지 않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문채에 정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32장 용재(鎔裁) 鎔은 금속을 제련한다는 뜻으로 문장 내용의 정련을, 裁는 의복을 재단한다는 뜻으로 문장의 언어를 고쳐 다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용재란 문장의 내용과 사용된 말을 다듬는 것을 말한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 단계에 걸친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첫째는 情理에 근거해서 체제를 결정하는 일, 둘째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관련된 사례들을 선별하는 일, 셋째는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강력한 언어의 형식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런 다음에 언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산만하고 복잡한 언어표현으로는 훌륭한 문장을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제33장 성률(聲律) 성률의 기원은 사람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람의 목소리는 오음과 부합하며 그 근원을  혈액의 순환에 둔다. 따라서 문학 언어의 성률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작가의 정리에 조화롭게 배합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의 적절한 운용은 매우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성률을 고를 때에는 맑고 분명하게, 즉 자연스럽게 운용해야 하며 음운은 계획적으로 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34장 장구(章句) 사상과 감정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일을 章을 나눈다고 하고 언어를 안배하는 일을 가리켜 句를 만든다고 한다. 章은 나타내고자 하는 바를 총괄하여 그것을 채택된 표현양식 안에서 함축하는 것을 말하고, 句란 글자를 엮어서 서로 구별되는 의미의 단위를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단어가 모여 구가 되고 구가 모여 장이 되고 장이 쌓여 편을 이루는 것으로 각 요소의 구성이 명백하고 긴밀하여 일관성이 있을 때 글은 광채를 발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장구의 안배는 문장의 사상과 감정을 배합하는 것이기에 그 내용을 표현하는 데 적절해야 하며 사고와 문장의 질서가 분명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서 章句를 운용하고 조사나 음운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 기능을 절실하게 사용함으로써 문장의 글귀를 더욱 엄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제35장 여사(麗辭) 여사는 對偶를 말한다. 대우란 중국 문학의 전통적인 표현수법으로 표현을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내용의 깊이를 더해 주고 문장을 간결하게 구성하는 데 편리한 방법으로 객관적 사물의 대응관계와 모순관계의 자연적인 반영이다. 대우에는 言對, 事對, 反對, 正對 등 네 종류가 있다. 언대란 두 개의 구를 병렬하되 사례를 인용하지 않는 것이고, 사대란 人事와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며, 반대란 이치가 서로 상반되는 주제를 동일한 취지로 결합한 것이고, 정대란 사실 그 자체는 동일하지 않으나 거기에 담긴 내용은 동일한 것을 함께 결합한 것을 말한다.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대우의 형식으로 엮기만 하면 되니까 언대란 비교적 손쉬운 것이고, 한 인간의 학문을 드러내야 하니까 사대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이며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안에 감추어진 것이 같지 않은 사례들을 통하여 동일한 내용을 전달해야 하니까 반대는 그 수준이 높은 것이고, 두 개의 구절 모두에 전달하려는 동일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정대란 그 질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36장 비흥(比興) 比란 자신의 의도를 명백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적절한 형상을 빌려 비유하는 것을 말하고 興이란 모종의 숨겨진 의미를 사물에 의탁하여 어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지칭한다. 비와 흥은 모두 托物寓情이라는 성격을 지니며 외물의 형상[이미지]을 차용하여 내면 세계의 예술적 사유과정과 성률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인은 비흥을 운용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사물의 용모를 모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를 취함으로써 사물과 자기의 사상 감정을 원활하게 융합하고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이다. 제37장 과식(夸飾) 신묘한 도리[道]는 묘사하기가 어려운 것이라서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극진한 부분까지는 설명할 수 없다. 구체적인 사물[器]은 묘사하기 쉬운 것이어서 활력 있는 표현을 사용하면 능히 그것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이는 道와 器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에 소리나 형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과 글로써 표현하고자 할 경우 언제나 과장의 수법이 사용돼 왔다.  만일 문장의 수식을 강화[夸飾]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면 강렬한 심정의 울림을 줄 수 있겠지만 사물의 이치에 위배되는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언어와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허위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담고자 하는 의미를 확대하되 지나치지 않고 과장된 표현을 쓰되 결점이 없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협은 사물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과식이 요구되고 이것이 예술적 감응력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한편 과식을 운용할 때에는 절제가 필수적이며 사물의 본질을 제시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과식의 운용 원칙을 기술하고 있다. 제38장 사류(事類) 이 장은 작품 창작에 있어 典故 문제를 논술하고 있다. 사류란 숨겨진 뜻을 증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것들로서, 일반적인 원리들을 명백히하기 위하여 옛 격언을 인용하고, 어떤 의미를 증명하기 위하여 관련된 사례들을 인용하는 것이다. 사례를 인용하는 것은 어떤 요점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례들이 비록 그 자체로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큰 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따라서 이들을 적절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재능과 박학한 학식이 필수적인 것이다. 제39장 연자(練字) 연자는 문자 창작시의 문자 선택을 뜻한다. 문자는 形과 音과 義의 세 관점에서 선택할 수 있다. 연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끝까지 내용에 중점을 두고 기발한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피해야 할 경우는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괴이한 글자는 피할 것, 둘째 같은 변의 글자를 되도록 적게 쓸 것, 셋째 같은 글자가 거듭 나오지 않게 주의할 것, 넷째 글자 모양이 단조로운 것과 복잡한 것을 적당하게 조절할 것 등이다. 제40장 은수(隱秀) 隱이란 글의 이면에 함축돼 있는 것으로서 표면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말하며, 秀란 작품 안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을 말한다. 隱은 문면에 드러난 의미와 드러나지 않은 의미의 복잡미묘함을 통해 그 섬세함을 획득하고, 秀는 한 작품 안에서 여타 다른 부분들과 비교되는 특출함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隱의 특질은 문장의 이면에 잠재된 의미에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마치 신비한 소리가 옆에서 전해 오는 것 같고 숨겨진 문채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隱은 함축으로서 독자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다. 대체로 하나의 문집 안에서 우수한 작품은 전체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으며, 한 작품 안에서 아주 두드러진 부분은 백분의 이도 되지 않는다. 秀는 사상과 감정과 언어상의 표현이 결합되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지 힘들인 노력만으로 추구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모호한 생각만으로 심오함을 드러내려 하는 경우는 심오[어려운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그 내용이 지나치게 깊은 것]할 수 있는 있어도 함축[맛을 보면 볼수록 맛이 나는 것]적일 수는 없다. 언어를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작품은 아름답다고 할 수는 있어도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41장 지하(指瑕) 瑕란 옥에 붙어 있는 붉은 반점으로서 결점을 비유한 말이다. 이 장은 작가 지망생들이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적한 장이다. 본받지 말아야 할 것으로 유협은 다음의 여섯 가지 항목을 들고 있다. 첫째, 말의 사용이나 용법이 부당하거나 유교적 도리에 어긋나는 결함, 둘째 비교의 대상이 온당치 못한 결함, 셋째 말이 애매한 결함, 넷째 음률상의 금기를 범하는 결함, 다섯째 남의 글귀를 표절하는 결함, 여섯째 주석을 잘못 다는 결함 등이 그것이다. 제42장 양기(養氣) 양기는 사람의 정신력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은 마음속의 답답함과 괴로움을 풀어버리기 위한 것이니 마땅히 여유 속에서 서두르지 않는 가운데 감정에 순응해야 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학적 사색이란 날카로울 때도 있고 둔할 때도 있고 열릴 때도 있고 막힐 때도 있기 때문에 마음을 여유롭게 하여 자신의 재능이 예리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지체함이 없이 정력적으로 써야 한다. 제43장 부회(附會) 부회란 한 편의 문학작품이 지니는 언어와 사고의 두 측면에 관한 총괄적인 견해를 뜻한다. 작품의 모든 요소들을 통일시키기 위해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마련하고, 포함시켜야 할 것과 제외시켜야 할 것을 결정함에 있어서 그 조건을 명확히하여 작품의 서로 이질적인 여러 부분들을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부회다. 다시 말해 부회란 내적 요소와 외적 요소를 일관성 있게 조직하는 기술이다.  유협은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부회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주제를 중심으로 글의 여러 부분을 긴밀하게 구성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제44장 총술(總術) 「총술」편은 창작론의 서언에 해당되는 장으로서 문학창작 방법에 관한 총론이다. 문학에는 文과 筆이 있는데 운율이 있는 것을 文이라 하고 없는 것을 筆이라 한다. 문과 필에는 모두 文采가 있는데 문채란 언어를 풍부하게 사용한 것이다. 유협은 六經이 내용이 정확하고 심원하다는 이유에서 불멸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문장을 짓기 위해서는 경전을 학습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글을 짓는 것은 창작의 기교와 열정, 그리고 시기가 합할 때 하나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훌륭한 문장을 짓기 위해서는 창작 방법에 대한 전면적인 파악과 치밀한 작업 과정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문학평론  제45장 시서(時序) 문학의 변천은 세상사의 추이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그것의 성쇠는 시대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유협은 정치적 정황, 학술적인 풍토, 문학작품의 계승과 발전, 군주, 시대 풍속, 뛰어난 천재 등을 문학의 변화와 발전의 주요 요인으로 파악하였다. 제46장 물색(物色) 물색이란 만물의 색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간의 감정은 경물에 따라 변화하고, 그러한 감정에서 유래되어 문장이 생겨난다. 정과 경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경물의 정황을 적절하고도 생생하게 묘사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경물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이는 정과 경이 하나로 일체화된 것을 말한다. 만물에 대한 언어 표현을 보는 것은 경물의 면모 그 자체를 보는 것과 같기에, 우리는 그러한 언어들을 통해서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계의 변화는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그러나 시인의 창작 욕구를 유발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한가로움과 고요함이다. 자연의 경물은 지극히 복잡한 것이지만 언어 사용에서 중요한 것은 간결함이다.  제47장 재략(才略) 이 장은 작가론이다. 유협의 작가론에서 특기할 점은 文氣라는 관점에서 개별 작가들을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氣라는 관점에서 작품을 접근하는 것은 유협의 새로운 제창으로 氣를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작품의 정서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정서가 격앙되었을 때 기세가 나타나고 기세는 情理에 닿아있다는 점에서 사상과 감정을 창작 방법의 준거로 보고 있는 유협의 시각이 재삼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48장 지음(知音) 한 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며, 그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만나는 것은 千載一遇라 할 만하다. 작품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많이, 그리고 반복해서 보는 것이다. 그런 이후에 다음의 여섯 가지 사항을 검토한다면 작품의 우열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작품의 전체적인 체제의 안배를 볼 것, 둘째 문장이나 말의 배치를 볼 것, 셋째 작품에서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변화의 추구를 볼 것, 넷째 표현 수법상의 정아함과 기이함을 살필 것, 다섯째 事類의 운용-작품의 내용이 풍부하고 충실한가에 대해 살필 것, 여섯째 聲律을 살필 것.   제49장 정기(程器) 程은 작가의 인품을 말하고 器는 才幹을 말한다. 여기서의 재간이란 도덕적인 품질과 정치적 식견 등의 내적인 수양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정기는 문학창작의 내적인 토대가 되는 작가의 전면적인 수양의 정도를 가리킨다. 군자는 재주와 덕망을 길러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충실히 하고 문채를 드러내어 외면의 아름다움을 과시해야 한다. 이 장에서 주목할 것은 정치적 능력과 문학적 재능이 결합되는 것을 유협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요약  제50장 서지(序志) 은 작품에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文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마음의 아름다움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은 나무에 용의 문양을 새긴다는 뜻으로 문장의 자연스러운 수식을 강조한 것이다. ꡔ문심조룡ꡕ의 저술 목적은 첫째, 덕을 세우고 말을 확립하여 그 명성을 금석처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성인의 사상을 부연․찬미하고 그 근본을 바로잡고 분명히하여 형식주의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이며, 셋째 선철의 가르침을 기술하고 후생들에게 유익함을 주기 위해서이다.  자료 2 문심조룡(文心雕龍) 1~7   1) 미(美)를 추구하는 본능과 문학예술의 탄생   문채(文采, 감지가 가능한 사물의 형상, 소리, 빛깔 등)의 효용은 대단하다. 그것이 천지와더불어 생겨난 것은 어째서인가? 하늘의 검은 빛과 땅의 누런 빛이 섞여 있고 땅은 모지고하늘은 둥글게 형체가 나뉘어 있다. 해와 달은 고리모양의 옥을 겹쳐 놓은 듯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산과 내는 그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땅의 모습을 널리 장식하고 있으니 이것이 본래적으로 형성된 천지자연의 문채인 것이다. 위로는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아래로는 산천이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음을 살필 수 있으니 이에 따라 높고 낮은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우주를 통솔하는두 가지 요소가(혹은 天地) 생기게 된 것이다. 단지 사람만이 여기에 천지와 나란히 참여하여 마음과 정신을 모았으니 이 셋을 삼재(三才)라고 부른다. 사람은 천지만물의 정화이며 천지의 핵심이다. 마음에 느낌이 생기면 언어로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널리 만물을 살펴보면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다. 용과 봉황은 그림 같은 아름다운 무늬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범이나 표범도 아름다운 문채로 자태를 이루고 있다. 구름과 놀의 오묘한 빛깔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능란한 색상을 뛰어넘고꽃으로 장식된 풀과 나무는 비단 짜는 사람의 솜씨를 기다릴 것이 없다.(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러한 것들이 어찌 외부에서 가한 장식이겠는가.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숲속의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면 조화롭기가 피리와 거문고의 곡조 같고 냇물이 바윗돌에부딪쳐 이루어지는 울림은 옥경쇠와 종고(중국 고대의 악기) 소리와 같은 화음을 이룬다. 즉 형체가 확립되면 형체에 따른 아름다운 무늬가 이루어지고 소리가 나면 조화로운 음이이루어진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사물도 풍부한 외적인 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심정을 지닌 인간이 어찌 문채가 없겠는가. -원도(原道)편-   사람은 본래 일곱 가지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외계의 사물에 감응이 발생하게 되는데 감응이 있게 되면 그 마음의 뜻을 읊조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명시(明詩)편-     2) 문예의 창조적인 변화와 발전의 규율   문예의 규율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그 성과를 날로 새롭게 한다.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지속되고 전통을 지속함으로써 결핍을 면하게 된다. 시기를 맞이하면 반드시과감해야 하고 기회를 탔을 때는 겁내지 말아야 한다. 당대를 바라보아 특이한 표현들을창작해내고 이전 것을 참조하여 문예활동의 법칙을 정한다.   문장을 이루는 문학양식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나 표현의 기교에는 정해진 규율이 없다. 어떻게 이 같은 사실을 밝힐 수 있는가. 대체로 시(詩), 부(賦), 서(書), 기(紀) 등의 문학양식은 각 개념에 따르는 창작규율이 일정한데, 이것이 곧 문학에는 일정한 양식이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언어표현과 문장의 기세에 이르러서는 일정한 법칙에 따르면서도 변화를구해야 오래 전해질 수 있으니 이것이 곧 표현기교에는 뚜렷한 규칙이 없다는 말이다. 문학양식의 개념과 창작규율은 일정하니 문학의 체계는 반드시 선례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 문예에 있어 변화를 추구하는 데는 일정한 법식이 없으므로 그 방법은 반드시 작가 자신의 새로운 착상을 참작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문학의 무궁한 길을 달리고 마르지 않는샘의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레박의 줄이 짧으면 갈증을 느끼게 되고 발이 피곤하면 갈 길을 포기하게 된다. 이는 문예창작의 이치가 다했기 때문이 아니고 창조적인변화를 이루는 통변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을 논하는 본보기로 초목에 비유하자면 뿌리와 줄기가 흙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그 향기나 맛 등은 태양을 쪼이는 데 따라 각기 달라 각각 다른품종을 이루는 것이다. -통변(通變)편-     3) 문예창작을 위한 방법을 강조함   문예의 깊이를 분석해보기 전에는 창작의 재능에 통달했는지 분별할 수가 없다. 창작의재능에 통달하려면 반드시 방법을 아는 것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문예의 각 영역을 두루살피어 각각의 법식과 예증을 판별하지 않고서야 어찌 감정의 근원을 알아내어 문예의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4) 작품의 진실한 내용만이 감동을 줄 수 있음   진지한 작가는 심정의 표현을 위해 언어문자를 사용하지만 경박한 작가는 화려한 언어표현을 위해 감정을 조작한다. -장표(章表)편-   슬픔을 애도하는 표현의 기본적인 체제는 감정은 아픈 심정을 위주로 하고 언어문자의 표현은 애석함을 다한다. 가엾어 하는 마음이 있어 이를 언어문자로 표현하면 감정과 표현이 서로 합당하나 언어문자의 표현을 위해 마음을 조절하려 한다면 그 체제는 과장되게 된다. 과장된 체제로 언어문자의 표현이 이루어지면 비록 글이 화려해도 슬픔을 자아내지 못하게 된다. 반드시 감정이 슬픔으로 향하고 언어문자의 표현은 눈물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애조(哀弔)편-     5) 지나친 수식이 실질을 가리는 것을 경계함   체제를 제대로 운용하는 데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붓을 움직여 문사를 경박한 태도로 구사하여, 산만하게 언어문자를 엮어 놓고 억지로 뜻을 짜맞추어 교묘함을 이루고자 헛되이언어문자의 화려한 표현을 구사한다면 이는 사실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며 설사 이치에 맞은 것이 있다 해도 경박한 언어표현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옛날 진(秦)나라의 공녀가 진(晉)나라로 시집을 갈 때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딸려 보냈더니 진나라 사람은 시녀를 귀히 여기고 공녀를 천대했다. 또 초나라 상인들이 정나라 사람에게 구슬을 파는데 향기 짙은 계수나무 곽에 넣었더니 정나라 사람은 곽만을 사고 구슬을 돌려보냈다. 만일 지나치게 화려한 언어문자의 수식이 이치를 넘어서고 말단이 본질을 능가한다면 이는 진나라 공녀나 초나라 구슬의 비유가 여기에도 다시금 적용될 것이다. -의대(議對)편-     6) 수식을 구사하는 이상적인 방법   체제를 설정하여 그 체제에 합당한 이치를 정하고 수식의 근본을 살펴 마음을 표현한다. 표현하려는 심정이 결정된 후에 음률을 결합시키고 체제에 합당한 이치가 정해진 후에 수식을 가하여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함으로써, 아름다운 수식이 표현하려는 내용의 본질을없애지 않고 번다함이 표현하려는 마음을 매몰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붉은 색 남색의 정색을 빛내고 빨간색 자주색 등의 간색을 버려야(즉 본질을 잃지 않는 수사를 구사해야) 비로소 문장의 수식을 잘하여 ‘문질을 겸비한 군자’(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작품)라 할 수 있다. -정채(情采)-     7) 작품의 내용은 하나의 통일체   반드시 감정과 뜻으로 정신을 삼고 사건이나 전고 등의 실질적인 뜻으로 뼈대를 삼으며아름다운 수사를 피부로 하고 미적인 음률로 소리의 기세를 삼는다. -부회(附會)편-   문심조룡(文心雕龍) 8~14   8) 미적 체험을 위한 최적의 마음 상태   문학적 구상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는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신사(神思)편-     9) 자연경물에 대한 감동이 창작충동을 일으킴   계절의 순환과 흐리고 맑은 날씨의 변화에 따라 마음에 근심이 서리기도 하고 기분이 편안해지기도 하니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동요되는 것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따뜻한 기운이 싹트면 개미가 활동을 시작하고 가을이 되면 개똥벌레가 먹이를 모은다. 하찮은 벌레도 기후의 변화를 느끼니, 사계절의 변화가 만물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깊다. 지혜로운 심령은 아름다운 옥보다 빼어나고 맑은 기질은 꽃의 열매보다 뛰어난 사람이 자연현상과 만나 감정에 동요를 느끼면 누군들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새해가 되어 봄이 시작되면 기쁘고 즐거운 감정이 넘치고, 더욱 기운 가득한 여름이 되면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은 가을이 되면 어둡고 가라앉은 심정이 깊어만 지고, 진눈깨비 끝없이 흩날리는 겨울이 오면 엄숙한 사념에 깊이빠진다.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경이 있고 그 풍경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모습들을 지닌다. 감정은 풍경에 따라 변화하고 언어문자 표현은 감정의 흐름에 따라 드러난다. 낙엽 하나에도 마음속에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풀벌레 소리만으로도 마음을 끌기에 족하다. 하물며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떠 있는 아름다운 밤과 맑은 날 볼 수 있는 새벽녘의 정취를 맞는다면 과연 어떠하겠는가? -물색(物色)편-     10) 인간사의 다양한 일들이 창작충동을 일으킴   태강(太康)이 덕을 잃었을 때 다섯 형제가 모두 원망하는 노래를 불렀다. 초나라에 이르면시가 풍자와 원망을 담게 되었으니 는 풍자하는 작품이다. -명시(明詩)편-   한나라의 무제가 태산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낼 때 시종인 곽선이 급사하여 무제는 그의죽음을 슬퍼하여 시를 지었다. 가의는 폄적당하는 신세가 되어 상수가를 떠돌다가 분한마음이 생겨 를 지었다. -애조(哀弔)편-   옛날에 공자는 제왕의 도가 사라짐을 슬퍼하고 문화가 실추됨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조용히 기거할 때는 봉황이 나타나지 않음을 한탄하고 길거리를 다닐 때에는 기린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이에 악관(樂官)에게 나아가 의 아송(雅頌) 음악을 바로잡고 노나라 역사로서 를 편찬했다. -사전(史傳)편-   경통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치(文治)가잘 이루어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생애를 직접 저술한 는 고통을 겪은 조개가 진주를 뱉어놓은 것에 비유될 수있다. -재략(才略)편-     11) 상상력과 문예구상   옛 사람이 이르기를 “몸은 강이나 바닷가에 있어도 마음은 높은 궁전에 있다”고 했다. 상상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문예구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범위는 참으로 요원하다. 그러므로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천년의 세월도 접할 수 있고 천천히 얼굴을 움직이면 만 리를 내다볼 수도 있다. 글을 읊조리는 가운데 주옥같은 소리가 나오며 생각을 모으는 가운데 눈앞에는 바람과 구름의 변화많은 모습이 펼쳐진다. 이는 모두 상상사유의 이치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산에 오르면 감정은 산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고, 바다를 바라보면 생각이 바다에 대한 것으로 넘쳐흐른다. -신사(神思)편-   이런 까닭으로 의 시인들은 자연에 감동하면 끝없이 연상을 펼치곤 하였다. 그들은모든 현상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보고들은 것들을 깊이 음미하고 즐겼던 것이다. -물색(物色)-     12) 작가 내면의 문예형상과 창조를 위한 문예구상의 과정   그러므로 문예구상의 이치는 오묘하여 정신과 외적인 사물이 서로 만나 노닐게 한다. 정신이 살고 있는 마음의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의지와 기질이며 외적인 사물이 눈과귀를 통해 정신과 접촉될 때 언어는 그것을 표현하는 기구가 되는 것이다. 표현기구가 잘소통되면 사물의 모습은 숨김없이 나타날 것이며 의지와 기질의 관건이 막히면 정신은 마음속에 숨게 된다.   상상활동이 시작되면 수많은 생각들이 다투어 생겨나게 되므로 제대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구상에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직 형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형식에 언어문자 표현을 조각해 간다.   상상력의 움직임은 자기 재능 역량의 정도에 달려 있으므로 마치 바람과 구름과 함께 달리듯이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붓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할 때의 기세는 막상 글을 쓸 때보다 배가 넘게 충전한다. 그러나 문장이 완성된 후에는 처음 쓰려고 했던 내용의 반도 표현되지 않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구상은 상상에 의지하므로 쉽게 독특하고 신기해지지만 언어표현은 구체적인 사고에서생겨나고 언어는 구상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이 세 가지가 긴밀하게 접촉되면 서로의 관계는 틈이 없게 되지만 소활한 곳이 있으면 세 가지의 사이에는 천 리의 간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떤 이치는 마음속에 있는데 그것을 바깥에서 구하기도 하고, 또 어떤 뜻은 눈앞에 있는데 산과 내로 갈라져 있는 듯 멀리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신사(神思)편-     13) 예측불허인 영감의 출현   사물에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으나 사고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다. 때로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깊은 표현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깊게 생각할수록 하고자 하는 표현과 더욱멀어지기만 할 때도 있다. -물색(物色)편-   부여받은 재기가 같지 않으므로 생각의 실마리도 각기 다르다. -부회(附會)편-   여덟 가지 풍격의 기본유형이 변천을 거듭하여 온 것에 대해 살펴보자면, 훌륭한 창작의성과는 학문을 쌓음으로써 이루어지고 내면에 잠재해 있는 재능은 선천적인 기질에서 말미암는다. 기질이 사고의 열매를 맺게 하고 사고는 언어표현을 결정하므로 아름다운 문예작품을 창작함에 있어서 자각의 개성과 감정을 반영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체성(體性)편-   구상이 민첩한 작가는 마음속에 창작의 요점을 잡고 있어서, 예민한 감각이 구상을 앞질러 글을 쓸 기회를 만나면 곧 바로 결단을 내린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여러 생각들이 들어차서 의심되는 것을 거듭 살피고 깊게 사고한 후에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기회포착에 민감하므로 순식간에 작품을 완성하고, 구상하면서 고려하는 것이 많아 장시간을 소비해야 작품을 이룬다. 어렵고 쉬운 차이는 있어도 모두 넓은 학식과 오랜 수련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학식은 천박한데 공연히 시간을 늦추기만 하거나 재능도 없으면서 속도만 내는 것, 이렇게 하여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는 것은 아직 들어본 일이 없다. -신사(神思)편-     14) 작가 수양론   이런 까닭에 문학적인 구상을 연마하는데 있어서는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 -虛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학문을 쌓아서 지식의 보물을 모으고 이치를 헤아려서 재기를 풍부하게 하고, 이전 것들을 연구하여 환히알도록 힘쓰고, 생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좇아 말을 질서 있게 배열한다. 그런 다음에 오묘한 도리를 깨닫는 주체인 마음으로 하여금 성률(리듬감)에 따라 문자를 선택하게 하고독특한 견해를 지닌 구상 속의 형상인 의상(意象)을 따라 창작을 진행시킨다. 이것이 문학적인 구상을 다루는 으뜸가는 방법이며 작품 기획의 중요한 단서라 하겠다. -신사(神思)편-   마음의 생각과 언어는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뜻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면이치가 명백해지고 감정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정신이 피곤해지고 기운이 쇠해지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타고난 감정의 법칙인 것이다.   젊은이는 식견이 짧지만 사고의 활동이 왕성하며, 나이 든 사람들은 분별력은 강하지만기운이 쇠약하다. 사고의 활동이 왕성한 사람의 생각은 민첩하고 재치가 있어 피로를 느끼지 않으나, 기운이 쇠약한 삶은 주도면밀하게 생각하면 정신이 손상된다. 이는 일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자질을 가지고 나이의 많고 적음에 비추어 본 대략적인 상황이다.   만약 정열을 지나치게 소모한다면 자연스런 기운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아 원고를 들고 목숨을 재촉하게 되며 붓을 들고 본성을 해치게 된다. 이것이 어찌 성현이 본래 바라는 것이겠으며 문학 창작의 바른 도리겠는가.   육체적으로 부여받은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지혜의 활용(사고의 작용)에는 끝이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능이 오리의 다리처럼 짧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다리가 긴 학처럼 재능이 풍부한 자를 흠모하여 애써 문학적인 표현력을 연마하고 생각을 짜낸다. 그 결과 내적으로는 정력과 기운이 마치 바닷물이 바다 밑에서 새는 것과 같이 소진되고, 외적으로는 우산(牛山)의 초목이 모두 잘리고 짓밟힌 것과 같이 정신과 사고에 손상을 입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근심과 두려움이 겹쳐서 질병을 자초하게 되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문학적인 구상을 전개하는 사고의 속도에는 빠름과 더딤이 있고, 사고의 흐름에도 흐름이자연스럽게 통하는 시기가 있고 막히는 시기가 있다. 머리 감을 때조차 몸을 구부리면 심장의 위치가 바뀌어 정상적인 감정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 정신이 혼미할때 계속 생각에 몰두하면 더욱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구상을 전개할때는 정신의 조절에 힘써야 한다. 마음을 맑고 평화롭게 유지해야 하며 기운이 조화롭고막힘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마음이 어수선하면 즉시 생각을 멈추어 마음이 답답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문장의 구상이 무르익으면 붓을 들어 감정을 풀어내지만, 구상의 흐름이순조롭지 못할 때는 붓을 내려놓고 마음을 쉬어야 한다. -양기(養氣)편-   마음을 잡고서 창작의 방법을 단련하고자 할 때에는 지나친 고심은 불필요하며, 창작의규칙을 장악하는 데에 굳이 마음을 수고롭게 할 것은 없는 것이다. -신사(神思)편-   학문적인 성과는 근면에 달려 있으므로 게으르지 않아야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송곳을 가지고 자신이 넓적다리를 찌르며 자신을 독려하는 사람도 있었고 곰의 쓸개를 맛보면서 힘든 노력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창작에 마음을 두는 것은 마음에 맺혀있는 것을 풀어 써내려 하는 것이므로 차분하게 마음의 움직임을 따르면서 침착한 가운데영감이 모아지는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여유로운 산책은 피로를 푸는 좋은 방법이며 담소는 권태를 치유하는 특효약이다. 항상유유자적한 가운데서 예리한 재능을 단련해내고 창작을 할 때에도 항상 남아 있는 기력이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학 창작을 위한 구상이 새로 간 칼날처럼 예리하여 소를잡을 때 뼈에서 발라낸 고기의 결에 한 점 머뭇거림이 없듯이 사고의 흐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비록 도교에서 말하는 효과 만능의 호흡법과 같은 온전한 기술은 아니라 할지라도 기력을 유지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양기(養氣)편-   문학창작은 학식에 의해서 지탱되고 창작의 능력은 천부적인 것이다. 재능은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나고 학식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완성된다. 작가 가운데는 넘칠 정도로 학식은 갖추고 있으면서도 재능이 결핍된 사람이 있고, 재능은 풍부하면서도 학식이 빈약한사람도 있다. 학식이 빈약한 사람은 묘사할 사실을 찾는 것이 힘들고, 재능이 결핍된 사람은 타당한 감정표현을 하는데 힘겨워한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문학적인 구상이 언어문자로 표현될 때 재능은 주역이 되고 학식은 보좌역이 된다. 주역과 보좌역이 호흡을 같이할때는 수식의 아름다움이 성공적으로 드러나지만 재능과 학식이 편협하게 되면 비록 형식표현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성공작은 못되는 것이다. -사류(事類)편-   감정이 움직여 말로 형상화되고 이성이 발로되어 문장으로 표현되니, 이는 은밀한 것을따라 명료한 것에 이르고, 안에 있는 것에서 말미암아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작가의 재능에는 평범함과 우수함이 있고 기질에는 강건함과 유약함이 있으며, 학문에는천박함과 심오함이 있고 습관에는 고상함과 비속함이 있다. 이는 모두 작가의 선천적인본성과 감정에 의해 용해되고, 후천적인 학습에 의해 응고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단의 세계는 구름처럼 변화하고 문학의 정원은 물결처럼 다채롭다. 그러므로 언어표현과 논리의 평범함과 우수함은 작가의 재능을 뒤집을 수 없으며, 기풍과취향의 강건함과 유약함이 어찌 작가의 기질과 다를 수 있겠는가. 작품에 인용된 자료들의 내용이 천박하거나 심오한 것이 작가의 학문과 동떨어진 예는 들어본 적이 없으며, 체제와 격식의 고상함과 비속함은 작가의 창작 습관과 반대되는 경우가 드물다. 각자 자신의 개성을 따르게 되니, 그 차이는 서로의 얼굴이 다르듯이 다양하다. -체성(體性)편-   창작의 구성단계에는 반드시 두 가지 근심거리가 있게 된다. 생각의 이치가 막혀 있는 사람은 내용의 빈약함을 고민하고, 언어표현이 넘쳐나는 사람은 표현이 번잡해지는 것을 근심한다. 식견을 넓히는 것이 작품의 빈약한 내용을 보충하는 양식이 되고 논리의 일관성이 표현의 번잡함을 방지하는 약이 된다. 식견이 넓으면서도 논리에 일관성이 있으면 창작의 구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신사(神思)편-   문심조룡(文心雕龍) 15~16   15) 작품 전체의 구조적인 질서   부회(附會)란 무엇인가? 문장의 이치를 총괄하고, 시작과 끝을 통일시키며, 어떤 것을 쓰고 말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고, 문장의 각 부분을 통합시키고 작품 전체를 종합하여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마치 건물을 지을 때 기초와 구조에 주의해야 하고 옷을 마름질한 후에 바느질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재능 있는 아동이 문장을 배울 때는 반드시 문장의 체제를 바르게 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나타내려는 사상과 감정으로 정신을 삼고, 글에 인용될 내용들을 골격으로 삼으며,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피부로 삼고, 성률을 소리로 삼는다. 그런 연후에 채색을 베풀 듯 문장의 수사를 다듬고, 조화로운 운율의 아름다움을 도모하여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체제의 균형을 잡는다. 이것이 문학적인 구상의 원칙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장에는 종류도 많고 갈래도 많다. 지류를 정리하려면 본류에 근거해야 하고지엽적인 것을 정돈하려면 근간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를 배치하고 뜻을 안배하는데 있어서는 작품 전체의 원칙으로 이들을 총괄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무수한 길을 달리다가도 결국은 모두 같은 길로 돌아오게 하고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결론으로 정리하게 해준다. 다양한 문장의 논리가 번잡하다 해도 본말이 전도되는 모순이없도록 해주며 비록 다양한 언어표현이 넘쳐나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준다. 나무들이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명확하게도 하고, 해가 지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함축적이게도 하여, 수미가 긴밀한 연계로 일관되게 하면서도 표리가 일체화되도록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회의 방법이다.   화가가 인물의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느라 얼굴 전체적인 모습을 바꿔버린다거나, 사수가작은 부분만을 겨냥하다가 벽마저도 못 쏘게 되는 것처럼, 지엽적인 부분을 정교하게 다듬다보면 전체적인 통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일척(一尺)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촌(一寸)에 구애되지 말아야 하고, 일심(一尋, 八尺)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일척에 구애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전체적인 미적효과를 위해 부분적으로 잘된 부분은 희생시킬 줄 아는 것이 바로 창작상의 기본원리인 것이다.   문학표현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는 정해진 법칙이 없고 작가의 생각 역시 복잡다단하다. 너무 간략히 하면 의미가 고립되고, 지나치게 번잡하면 말에 조리가 없어진다. 급하게 쓴것은 오류가 많게 되고, 지나치게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써도 문장에 해가 미친다. 또한사람마다 부여받은 재기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 또한 같지 않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씩 모아서 단편적인 것을 쌓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단번에 써내려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단편적인 것들을 쌓아가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문장을 통괄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면 언어문자 표현의 맛도 반드시 혼란스럽게되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으면 문학의 체제도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다.   문장 전체의 구조적인 원리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어야 문장의 각 부분들을 조화롭고도자연스럽게 결집시킬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의 아교질이나 돌에 붙어 있는 옥처럼 자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네 필의 말은 각기 힘이 다르지만 여섯 줄의 고삐는 거문고의 줄처럼 가지런해서 나란히 달릴 때면 수레바퀴의 살들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문장을 짓는 방법도 이와 같다. 가고 멈추는 것은 마음에 달렸으며 느리고 빠른 것은손에 달려 있으므로 한결같은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삐를 조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을 잘 가져다 붙이는(附辭) 사람은 뜻이 전혀 다른데도 간담(肝膽)처럼 밀접한관계를 가진 것으로 만들고, 뜻을 모으는(會意)데 졸렬한 사람은 긴밀히 연결된 것도 남북처럼 멀게 느껴지게 만들어 버린다. 한 장(章)을 고치는 것이 새로 한 편을 짓는 것보다 어렵고, 글자를 바꾸는 일이 구절을 바꾸는 것보다 힘드니, 이것은 이미 증명되었던 것이다. 옛날 장탕이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작성했을 때 재차 거부되었고, 우송이 기초한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도 몇 번이고 반환되었다. 이는 모두 이치와 내용이 분명하지 않고 문자표현과 주제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관이 원고를 고치고 종회가 글자를 바꾸었을 때, 한나라 문제가 특이한 글이라고 감탄하고 진나라 경제가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한 것은 곧 이치가 통하고 내용이 분명하며, 사고가 민첩하고 언어문자 표현이 타당했기때문이다. 이것을 통해 볼 때, ‘부회’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게 된다.   붓을 놓고 문장을 매듭짓는 것은 예컨대 배를 타고 노를 짓는 것과 같고, 언어문자를 안배하여 맥락이 통하게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고삐를 잡고 채찍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기세로 일관될 수 있으면 기탁한 뜻이 깊어져 여운의 미가 오래도록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시작은 뛰어난데 그 뒤의 구절이 초라해져 버리면 결말의 기세가 막힐 것이고 여운의 미도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에서 “볼기에 살이 없으면 그 행보가 힘들어진다.”라고 한 뜻이다. 수미가 서로 상관되도록 하는 것만이 부회의본질적인 작용이다. 이렇게 되기만 하면 부회의 작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게 된다.   정리하여 보자.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는 작품에 계통을 세우는 어려움은 감정의 변화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지와 잎이 잘 정돈되게 하여야 한다. 작품의 이치와 작품의 묘미가 서로 부합하면 서로 동떨어진 갈래들도 자연스럽게 연계된다. 음악의 조화로움 같이 마음의 소리인 문장도 능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부회(附會)편-     16) ‘용재(鎔裁)’의 방법으로 작품 내용과 형식의 알맞은 조화를 도모하기   작품의 전체적인 구상이 이루어지면 그 가운데 수사도 더불어 진행된다. 작가의 기질에따라 강건함이나 유연함으로 기본적인 구상을 설립하고 전통과 창작성을 살려서 시기에적절하게 대응해가는 것이다. 기본적인 체제가 정해지고 나면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또 시기에 따르는 것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므로 언어문자 표현이 번잡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작품의 내용을 정제하는 ‘용법(鎔法)’과 표현의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재법(裁法)’에 있다. 즉 작품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작품의 표현을 적절하게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장의 구상을 바르게 정리하는 것을 ‘용법’이라 하고 군더더기의 말을 제거하는 것을 ‘재법’이라 한다. ‘제법’에 의해서 잡초처럼 우거진 불필요한 표현들을 제거하고 ‘용법’에 의해서 으뜸 되는 큰 줄기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비유하자면 대목에는 먹줄로 가름새를 치고 도끼로 쓸데없는 부분을 쪼개내는 것과 같다. 쌍 엄지발가락이나 육손이는 천성적으로 불필요한 여분이 생겨난 것이며, 혹이나 사마귀도 신체 형태에 있어서 불필요한 여분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논지가 중복된다면 그것은 쌍 엄지발가락과 같은 내용상의 기형이며 동일한 표현이 중복된다면 혹처럼 표현상의 군더더기가 될 것이다.   문예구상을 막 전개해 갈 때는 언어문자 표현이 번잡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저울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의 안배에 있어서 균형을 잃기가 쉽다. 그러므로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먼저 다음의 세 가지 규칙을 세워야 한다. 먼저 표현하고자 하는 심정에 입각해서 체제를 정해야 한다. 다음은 내용에 합당한 사례들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요점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문자 표현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한 다음에 구체적인 서술로 살을 붙이고 언어문자 표현을 다듬어가는 것이다. 먹줄로 줄을 놓고 불필요한 부분은 깎아버리기 때문에 수미가 원만하게 합쳐지고 일관된 조리를 지니게 되며 전체적인 질서에 계통이 서게 된다. 만약 작가가 이러한 규칙을 지키지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언어문자 표현을 해나간다면 불필요한 부분들이 생겨나서 군더더기가 많아지게 마련이다.   세 가지 기준이 정해지면 다음에는 자구(字句)를 검토해야 한다. 자구에 깎아내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에 결점이 있다는 증거며, 한 자도 깎아낼 것이 없게 될 때 작품은정밀한 표현을 이룬 것이 된다. 작품에는 세밀한 논리와 요긴한 표현만으로 극히 간략하게 압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유로운 심정을 유창한 표현에 담아낸 풍부한 표현의 글도있다. 그러나 간략한 표현이냐 풍부한 표현이냐 하는 것은 작가의 개성에 달린 것이다. 길게 하자면 두 개의 구절도 하나의 작품으로 늘일 수 있고 줄이자면 하나의 작품도 두 개의 구절로 축약할 수 있다. 생각이 풍부한 사람은 부연을 잘하고 논리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은 축약을 잘한다. 축약을 잘하는 사람의 언어문자 표현은 글자를 간단히 줄인다 해도 의미가줄어들지 않으며, 부연을 잘하는 사람의 언어문자 표현은 다양한 언어문자 표현을 구사해도 의미가 잘 드러난다. 자구를 깎아내면 의미도 사라지는 경우는 문장력이 부족한 것이지 요점을 파악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언어문자 표현을 구사한다고 하면서 표현이 중복되는 것은 쓸모없는 표현들이 잡초처럼 무성한 것이지 풍부하고 다양한 언어문자 표현을 이룬 것이 아니다. -용재(鎔裁)-  
314    야콥슨 시학[ 공유] 댓글:  조회:1564  추천:0  2018-10-08
 문화센타여의제 | 지유  http://jijiu00.blog.me/140012169585   야콥슨의 시학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그의 유명한 논문 에서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The poe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into the axis of combination.)'고 설명한다.   한 문장의 배열 방식은 '선택(selection)'과 '결합(combination)'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자고 있다'라는 문장을 배열하는 방식은 주어인 '아이' 대신에 '소년' '꼬마' '어린이'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서술어인 '자고 있다' 대신에 '졸고 있다' 혹은 '꾸벅꾸벅하고 있다' 등 어느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의 축에 있는 언어들은 등가성이나 유사성의 규제 하에 놓인다. 한편 선택된 언어들의 결합(주어+서술어, 혹은 수식어+피수식어 등)은 인접성의 지배를 받는다. 즉 '나무가 자고 있다' 라든지 '검은 나뭇잎' 같은 연결은 단어와 단어간의 인접성의 결여로 결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말하자면 하나의 문장을 배열하는 데 있어서 단어를 선택하는 문제는 등가성의 원리가 지배하고, 단어를 결합하는 문제는 인접성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문장과는 달리 詩인 경우는 '등가의 원리'가 단어를 연결하는 '결합의 축'에서도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야콥슨의 견해다.   야콥슨은 시와 일반 문장의 변별성을 그렇게 언어학적 입장에서 설명하려 했다. 언어학자다운 발상으로 생각된다. 그는 이라는 논문의 7할에 해당하는 나머지 부분을 자신의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예로 활용하고 있다.   시에서 한 음절은 같은 배열의 다른 어떤 음절과도 등가의 관계를 이룬다. 하나의 어강세는 다른 어강세와, 무강세는 다른 무강세와 등가로 된다. 작시법상의 모든 장음은 장음끼리, 단음은 단음끼리, 어경계는 어경계끼리, 그리고 어경계의 부재는 또한 그 부재끼리 등가이다. 통사적 휴지는 통사적 휴지끼리, 휴지의 부재 역시 그들끼리 등가를 이룬다. ―로만 야콥슨『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 지성사) pp.61-2   시를 율격 구조로 파악할 때 하나의 동일한 율격 단위(강약, 고저 혹은 장단이 만들어 낸)의 반복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율격 단위들은 서로 등가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7•5조의 자수율인 경우는 7•5가 하나의 율격 단위가 되어 되풀이되는 것이므로 앞뒤의 7•5들은 서로 대응 등가의 관계에 놓인다.    또한 야콥슨은 '압운은 시에 있어서 보다 일반적이고 근본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문제, 곧 병행성의 특수하고도 집약적인 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홉킨즈의 논문(Journals and Papers, p.85)을 인용하고 있다.   시의 구조라는 것은 히브리 시에 나타나는 기술적인 소위 대구법이나 교회 음악의 응답 송가에서부터 복잡한 희랍, 이탈리아, 영국의 운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속적인 병행성의 구조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병행성에도 그 대립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와 전이적이거나 변색적인 것, 이렇게 두 종류가 필히 존재한다. 분명한 대립을 보이는 첫번째의 병행성만이 운문의 구조와 관련이 있으니, 음절의 일정한 배열의 반복인 리듬에서, 리듬의 일정한 배열의 반복인 운율에서, 두운에서, 모음운에서 그리고 각운에서 그러하다. ―위의 책, p.75   홉킨즈가 시 구조의 특징으로 제시한 '병행성'을 야콥슨은 그의 '등가성'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율격에서와 마찬가지로 압운(두운, 모음운, 각운 등) 역시 등가의 구조로 보는 것이다. 압운이란 동일한 소리의 반복에서 빚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야콥슨이 등가의 예로 제시한 것들은 율격과 압운 그리고 활음조(euphony)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시의 주도적 기능을 운율로 보고 그 운율 구조를 문장 구조의 입장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운율만이 어찌 시적 기능이라고 하겠는가. 더욱이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현대시에 있어서는 운율이 시의 주도적 기능의 자리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시적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정의는 국부적인 것으로 현대시 일반에 대한 설명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현대시의 기능은 운율보다는 오히려 역설이나 고도의 비유에 의해 주도된다고 할 수 있다.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진술이다. 예를 들어 '죽는 자는 살고 사는 자는 죽으리라'(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요, 자신의 목숨만을 도모하는 자는 나라와 함께 망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표면 진술만으로 본다면 어불성설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상극의 정황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역설이다.   한편 시에서 즐겨 사용하는 비유는 은유와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직유에서와는 달리 공유소가 생략된 비유이므로 논리적 모순을 담게 된다. 즉 '그는 하마처럼 뚱뚱하다'의 직유와는 달리 '그는 하마다'의 은유는 의사진술(擬似陳述)―거짓말이 된다. 의인법 또한 비인물을 인물처럼 대우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니까 이 역시 의사진술이 아닐 수 없다.    역설이나 은유, 의인법들은 이처럼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불림(과장성)의 기법들이다. 이들은 '결합의 축'을 지배하고 있는 '인접성'을 거부한다. 앞에서 인접성의 결여로 일상적 문장에서는 결합의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지적한 바 있는 예문 '나무가 자고 있다'와 '검은 나뭇잎'도 詩文인 경우는 달라진다. 이들 문장도 의인법과 은유로 시 속에서는 훌륭히 구사될 수 있다. 따라서 시적인 문장이란 야콥슨의 규정과는 달리 '결합의 축에서 인접성의 파괴를 도모하는 글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시가 그러한 문장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시인들이란 기존의 어법에 만족할 수 없는 상상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313    [공유] 후기구조주의 시각으로 詩 바라보기 댓글:  조회:1594  추천:0  2018-10-02
퍼온 자료임 후기구조주의 시각으로 詩 바라보기 - 문학이론 입문의 후기 구조주의       언어는 소쉬르의 생각처럼 닫힌 체계를 구성한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모든 기호들은 다른 기호들과 구별되기 위해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공부하기로 한다. 소쉬르의 랑그는 한계 지어진 의미구조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언어의 어느 곳에 경계선을 정할 것인가? 소쉬르의 논점을 보면 기호는 분리, 즉 분절[分節]의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니피앙 과 스스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계속해서 시니피에로 변형되며 그 역(逆)도 마찬가지이다. 구조주의가 기호를 지시대상(referent)으로부터 분리되었다면 후기구조주의로 알려진 이런류의 사고방식은 더 나아가 시니피앙을 시니피에로 분리한다. 기존 구조주의는 '의미가 기호안에 직접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의미는 쉽게 고정될 수 없으며 하나의 기호 안에서만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현존과 부제가 함께 끊임없이 명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목걸이의 구슬을 세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명멸과정을 추적하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다. 이것은 언어가 시간에 따라 문장은 유보되며 지체되거나 변해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에 넘겨주고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전달된다. 읽어 내려간 텍스트는 앞서 올 텍스트에 영향을 주고 지난 텍스트는 앞서올 텍스트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개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완전히 순수하거나 완전히 독립적인 기호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소설이나 시에서 독자에게 말하려는 전달의미가 완전하게 드러날 수 없다는 말이다. 작자의 의미는 항상 분산 분리되며 처음의 의도와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의 허구가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 에 대해, 왜곡과 굴절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하물며, 내가 쓴 글에도 나의 의식과 생각이 동일하지 않을 수가 있는데 나 외에 다른 독자나 일반이 나의 글을 읽을 때 정확한 의미전달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냥 어렴풋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2차적인 소통양식이며 삭막하고 기계적인 육성기록으로 나의 의식으로부터 한 단계 떨어진 이유로 플라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서양철학의 전통은 생명력이 없고 소외된 표현방식이라고 비방하기 까지 했다. 그들이 육성에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육성 또한 글쓰기의 한 형식일 수밖에 없다. 언어의 실제 과정 속에서 언어의 왕복운동, 좌우운동, 현전과 부제, 사이의 운동을 놓치고 있다. 후기구조주의가 "텍스트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거미줄 같은 복잡성에 기인한다. 사람도 각기 자체의 정체성이 확립되려면 그에 비견되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처럼 언어도 절대적으로 경계를 구분하고 확립하려하는 고전적 해체주의가 등장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특유의 사유방식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허용 하는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자아와 비 자아, 참과 거짓 , 이성과 광기, 주변과 중심 표면과 심층사이에 확실하게 엄격한 경계를 좋아했다. 이렇듯 해체비평의 전술은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어떻게 혼란시키게 되었는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해체주의는 텍스트가 곤경에 처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징후적인' 특징들에 혹은 아포리아(aporia) 즉, 의미의 막다른 골목에 집착하므로 써 이를 잘 보여준다.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에로 발전 모습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 K.마르크스, M.하이데거, S.프로이트 등의 견해에 대립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이 형성된 사상적 조류이다. 그러나 실존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춘 사상적 경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류학자, 사회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철학자 M.푸코, 리시안 세바크, L.알튀세르, 정신분석학자 J.라캉 등이 구조주의를 주창한 주요 멤버이다. 그중에서 1960년대 발표한 "이야기의 구조적 분석 입문"이란 중요한 시론은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방식을 따르며 이야기 구조를 별개의 단위, 기능, 지표(인물의 심리 분위기, 등등...을 지시하는 것)들로 나뉜다. 이야기는 시간에 다라 전개되지만 비평가들은 비시간적인 설명틀속으로 흡수시킨다. 바르트에 있어서 '건강한 기호는 자신의 자의성에 기를 기울이는 것' 즉,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려하지 않고 의미를 전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의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위치같은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스트의 '이중적' 기호--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물질적 존재를 몸짓으로 나타내는 기호--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체코 구조주의자들의 '낯설게 된'언어의 그리고 명료한 언어적 존재를 과시하는 야콥슨의 연결자이다. 낯설게 하기는 쉬클로프스키와 야콥슨의 좀 더 명확하게 이어졌다. "비평선집'에서 바르트는 "가능한 한 완전하게 자신의 언어로써 텍스트를 감싸는 것" 이 비평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서 비평담론은 "작품의 1차언어 위를 떠도는 2차언어'라고 했다. 후기구조주의적인 용어로 문학 언어 자체를 규정한다. 문학 언어는 '밑창 없는" 언어이며 "텅 빈 의미"에 지탱하는 '순수한 애매모호함'같은 것이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이 글이나 텍스트성을 논할 때 바르트 자신이 말했듯이 후기구조주의로의 이전은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시나 소설의 명확한 의미를 갖춘 닫힌 실제물(entity)로 보고 그 의미를 판독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 했다. 이렇듯 텍스트는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화 과정'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미래파 구조주의자들이 단어를 낯설게 하고 새롭게 하는것, 소외된 언어에게 그것이 빼앗긴 풍성함을 부여하는 것에 몰두했던 것은 러시아정치적인 문제와 직결되어있다. 그 시대엔 괄호 안에 넣고 지시대상을 유보하고 내향적으로 빠져들어 갔다. 하지만 그것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사회적 죄의식에 의해 고통 받거나 그늘져있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정기때 윤동주가 그 대표적인 한 흐름이다 생각할 수 있겠다. 그의 시에 나오는 참회록이나 자화상에서 이미, 후기 구조주의의 한 일면이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윤동주시인은 그렇다고 볼 수 없지만,)침묵의 순수함을 향해 글쓰기의 영도를 추구했지만, 또 다른 문학 양식일 뿐이었다. 폴드망의 비평은 본질 자체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비유와 문체에 의해 움직이는 철저히 은유적이다 라고 했다. 어떤 언어라도 정말로(literally)글자 그대로의 것을 믿는 것은 큰 실수라고 했다. 철학이나 법 또한 시처럼 은유에 의해 움직이고 똑같이 허구이라고 했다. 은유는 본디, 근거 없는 것이고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이런 한 애매모호함의 가장 극명한 영역인데 그 안에서 독자는 글자 그대로 의 의미와 문체적 의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독자는 텍스트에 의해 끝없이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예일 학파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의 애매함은 문학비평에서의 아이러니하고 거북스런 일이 되며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 관계등을 낱낱이 밝혀주는 텍스트의 내적 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 된다- 라고 했다. 뉴크리티시즘에서는 문학은 모든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그리곤, 결정 불가능한 가물거리는 거미줄로 보았다. 후기 구조주의에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쾌락주의 또는 무책임한 무정부주의 등, 후기 구조주의에서 빈번하였으나, 다원성 구별 성적분리 등 급진적 페미니즘형태들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를 지나가면서 언어와 텍스트에 대하여 가학적이며, 획기적인 새로운 흐름이 일어날 것이라 여겨진다. 첨단 산업화의 발전으로 통신의 발달과 심화되는 개개인의 단절, 그리고 환경의 피폐함이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자목 궁금하다. 그것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기도 하다.    
312    [공유] 문학비평의 방법 댓글:  조회:1971  추천:0  2018-10-02
퍼온 자료임    문학비평의 방법  (from 이상섭 저, 『문학연구의 방법』)   * 역사주의 비평의 방법  한 작품을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데에서 문학 연구의 역사적 방법은 시작된다. 모든 작품은 확실히 반복될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른바 역사적 일회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에 의해서 사람에 관하여 사람을 위하여 의지적으로 조성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를 논하면서 비극과 희극의 기원을 전통적 관습에다 둔 것은 문학의 역사적 접근을 최초로 시도한 예가 될 것이다. 문학의 기원, 특히 한 장르의 발생, 변천에 대한 관심은 역사주의 비평가의 최대 관심사에 속한다. 근대적 역사주의 비평은 19세기에 확정되었다. 쌩뜨 뵈브와 이뿔릿 테느는 역사적 방법의 이론적 체계와 실제응용을 눈부시게 보여준 선구자들이다. * 형식주의 비평의 방법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 비평은 결국 전체와 부분의 특수한 조직적 관계를 문학에서 찾는 다는 것이다.  이 전체는 그것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필연적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독자적인 것으로 보아야 비로소 으미있는 전체가 된다. 전체라는 개념은 그 구성 부분들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 성립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인 형식주의자들은 부분들의 독특한 조직으로서의 단일한 전체적 형상을 문학연구의 가장 중심적 대상으로 보고, 그 형상의 근원, 생성과정, 호용 등은 제이차적 내지 비문학적 주제가 된다고 믿는다. 전체를 구성한 부분들을 세밀히 알고자함에서 형식주의 비평가는 자연히 분석적이 된다. 작품이라는 전체는 대단히 복잡한 조직체임을 믿는 가닭에 분석은 매우 다기하며 무궁무진할 수 있다. 분석과 더불어 유사한 부분들의 비교와 대조 역시 무한한 문제를 낳는다. 형식주의가 분석적임은 타고난 운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코울리지의 넓은 의미의 형식주의 문학관은 현대에 이르러 리쳐즈, 엘리어트, 파운드 등의 이론과 실제비평에서 계승되었고, 그 후 주로 미국에서 뉴크리티시즘의 급진적 형식주의를 낳았다.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개념은 텍스트를 여러 가지 기교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형식주의 비평의 선언이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일었던 신비평의 뿌리는 러시아 형식주의이고, 엘리어트(T.S. Eliot)와 브룩스(Cleanth Brooks) 등이 주도적 인물이었으며, 전세계의 문학비평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비평가들은 작품 속의 구성, 언어, 상징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형식주의 비평은 서정시를 분석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서사적 쟝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사회.윤리주의 비평의 방법    문학은 개인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정의 못지 않게 문학은 사회의 표현이라는 정의 역시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 정의는 드 보날드의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이쁠릿 테느 이래 널리 보급되어온 생각이다. 테느는 역사주의 비평가였으나, 사회.윤리적 비평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사실은 역사주의 비평과 사회.윤리적 비평 사이의 거리가 가까움을 잘 시사한다.  문학을 독립된 완성품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점, 문학을 시대상이라는 콘텟스트 속에 놓고 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보는 점에서 역사주의와 사회.윤리주의의 관점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윤리적 비평은 역사주의 비평에서 그렇게도 중요시하고 있는 소위 문학의 근원적 요소들, 즉 작품의 제작 연대, 작가의 전기, 언어의 변천, 전달의 방식 등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안가진다. 그밖에 문학의 장르, 관습, 전통에 대해서도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 현실 생활과의 관계야말로 사회.윤리비평의 주관심사이다. 제일차적으로는 문학과 사회, 정치, 경제 등과의 관계에 유의하지만, 윤리, 문화와의 관계를 또한 빼놓지 않고 유의한다.  문학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킬만한 중요한 사상적인 힘을 갖고 있어야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동안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사회 비평은 이념적이며 상호적이다. 사회비평의 주도적인 비평가는 루카치(George Lukac)이다.   * 심리주의비평    우리가 문학을 논의할 때 자주 사용하는 문학정신, 문학적 감동, 시상, 영감, 정서, 성격, 동기 등의 용ㅇ어는 모두 사람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들을 다시 세분할 때, 문학정신 시상, 영감 등은 문학을 창작할 때의 상태이고, 정서, 감동 등은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상태이며, 성격, 동기 등은 문학작품 내부의 요소라 할 수 있다. 문학의 연구에서 작가의 창작, 독자의 수용, 작품으ㅢ 내용을 인간 심성의 면에서 고찰하는 일은 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왔다. 심리학을 문학연구에 응용하는 일은 비평의 여러 부요 유파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역사주의 비평에서는 특히 작가 연구에 크게 이용하고 있고, 작품을 작가의 전기를 구성키위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특히 정신분석학에서 빌어오고 있다.   * 신화비평의 방법  현대 형식주의 비평의 방법에 못지 않게 야심만만한 것은 소위 신화비평의 방법이다. 문학연구의 여러 방법을 다 포함하면서도 문학을 단일한 근원으로 환원시키는 일을 해내겠다고 나선 것이 신화비평인 것이다. 신화비평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한 인류학파의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에서 자극받아 일어났다. 대표적 인물은 의 저자로 유명한 제임스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는 세계 각처의 신화, 설화, 전설들을 집대성하여 신화가 단지 허망된 이야기라는 통념을 뒤엎고, 신화를 구성하는 힘이 동서고금의 인간의 공통된 기능이라는 생각과 초개인적 사회와 우주와의 의미있는 대화를 위한 형식적 행위, 즉 제식이 말의 형태를 취한 것이 곧 신화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발견은 세계의 주요 신화들이 단순히 우연이라고 보아넘길 수 없을 만큼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 일파의 인류학 이외에, 프로이드의 심리학, 특히 에서보여준 민속신앙의 기원에 관한 그의 연구도 현대 신화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시 융의 분석심리학, 특히 그의 archetypal unconscious의 이론은 여타 신화학자들의 이론을 크게 보완하고 뒷받침하였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인 에른스트 카씨러(Cassirer)는 사람의 언어생활의 상징성에 최대 절대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사람의 신화 창조의 능력을 강조하였다. 즉 외부 세계를 인식함에 있어 언어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신화를 창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노스롭 프라이는 신화비평이 진정한 비평일 뿐아니라, 문학비평을 하나의 지식의 체계, 즉 인문과학으로 승격시켜 놓았다고 주장한다.   * 구조주의 비평의 방법 (from Selden, Raman. Contemporary Literary Theory)  문학에 대한 구조주의적 접근은 일반 독자들의 평소의 신념을 흔들어 놓았다. 통념상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작 생활의 산물이며 작가의 근본적인 자아의 표현이다. 또한 텍스트는 독자가 그 속에 들어가서 작가의 사상 및 감정과 정신적 또는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은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적 언술에는 진실이라는 기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롤랑 바르트는 구조주의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작가들이란 이미 씌어진 문장들을 뒤섞어 재결합하거나 재배치시키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구조주의는 근본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소쉬르는 '랑그 langue'와 '파롤 parole'  즉 실제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언어체계와 개인의 발화를 구별한다.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양상으로 우리가 화자로서 이끌어내는 공유 체계이며 파롤은 실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체계를 개인적으로 구체화시키는 현상이다. 언어학 연구의 주된 목적은 개인의 발화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특정한 표현 행위의 근간을 이루는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어떤 특정한 시나 신화나 경제행위를 분석할 때 어떤 규칙 체계가 사용되고 있는가를 발견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쉬르는 언어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구별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본다. 즉, 신호등의 빨강색은 '초록색이 아님'이고 '정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모든 기호는 이렇듯 기의(정지)와 기표(빨강)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철두철미하게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구조주의는 인간이 이룩해놓은 다양한 체계를 최소단위의 분석을 통해 설명해 내고자 한다.  바르트는 인간의 제반행위 이면에는 상이한 요소가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존의 체계가 있다는 전제를 사실상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습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제관습을 언어의 모델 위에서 작동하는 기호 체계로 해석한다.  구조주의는 예민한 문학의 영역 속에 활력과 객관성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문학비평가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파롤을 랑그에 종속시킴으로써 구조주의자들은 실제 텍스트들의 특수성을 무시한채 마치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금속 줄밥의 패턴인 양 다룬다. 그들은 실제 연구의 대상-체계-을 따로 분리해 내기 위해 실제 작품과 작가를 괄호로 묶어 버리기 때문에 텍스트는 물론 작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구조주의 주창자들은 일정한 관계 세트가 특정 행위의 기저에 존재하고 있으며 자연의 모양이 지하의 지층구조에 의해 형성되듯 개인의 행동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체의 과정은 구조주의의 바로 한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소위 후기 구조주의의 중심이론인 것이다.   [출처] [공유] 문학비평의 방법 |작성자 옥토끼    
311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 댓글:  조회:2610  추천:0  2018-09-06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이은봉 정리           1. 머리말      유럽의 문예사조에서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예술사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문학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고,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행해지고 있는 듯하다.      아방가르드가 발전하는 데는 특히 라틴 문화권 사람들의 감수성이 옥토의 역할을 했다. 영미문학에서는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별하려는 의도도 별로 환영받고 있지 못할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를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 두고자 하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아방가르드는 상대적으로 라틴계 문학에서 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레나토 포기올리의 지적대로라면 아방가르드는 모더니즘보다 훨씬 더 유희적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는 우상 파괴적인 특성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주로 아방가르드가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이 유럽과 스페인 중남미에서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유럽의 아방가르드는 주로 프랑스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는 아방가르드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에서는 아방가르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위라는 뜻.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는 말로써 특히 남보다 앞서 미지의 세계를 타개해 가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던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 즉 이탈리아의 미래파, 러시아의 구성주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을 지칭해서 쓰인다. 예술 혁신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는 이 명칭이 쓰이지 않으나, 예술 영역에 따라서 전위미술, 전위음악 등으로 쓰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어떠한 몇몇 동일한 특성으로 쉽사리 정의내릴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서로 동질성을 찾기가 어려운 수많은 표현 방식과 문학 형태가 아방가르드의 이름 아래 모여 그것을 대표하며 그것의 의미를 분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自意나 他意에 의해 아방가르드에 포함되는 예술 사조는 40여개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아방가르드적 특성이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지극히 보편적인 문학현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다. 아방가르드의 보편적인 특성인 ‘실험적인 예술의 전통과 관습’, ‘인습을 뛰어넘는 예술정신’은 문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학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시대에 앞서고자 하는 창조적인 반항과 몸부림 등의 경우 문학작품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를 이러한 특징으로만 파악하면 그러한 오해는 일면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가치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 및 삶의 이해방식을 문학 일반이 지니고 있는 현상의 과도한 표현이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느 특정한 예술 사조나 전통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 이상의 여러 예술 현상을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미래파, 표현주의는 아방가르드 중에서도 가장 드러난 예술운동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론 입체파나 표현주의, 소용돌이파나 구성주의도 아방가르드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은 그 전 시대의 모더니즘과의 관계가 다른 예술운동만큼 급진적인 단절을 이루고 있지는 않고 예술적 성과도 별로 크지 않아 아방가르드의 중심 현상으로 파악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아방가르드는 단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서구에서 일어났던 문학적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방가르드는 사회적이면서도 심리적인 특성까지도 포함하는 주요한 사상의 흐름이었는데, 이는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작가들이 정치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차 대전이 비참하게 終戰한 후에는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난 수많은 정치사상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대중들의 마음을 잡았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분출하기 시작한 이 무렵 이들 정치사상은 비판적 지식인들의 의식을 거칠게 사로잡으며 역사에 온갖 사건을 연출한 바 있다.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다소 무궤도한 정신차원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회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아방가르드의 경우 처음부터 문학운동이나 예술운동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는 아니었다.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본래 군대의 용어로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특공대의 선봉, 곧 전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정치사상이나 사회혁명과 관련된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이처럼 정치개혁나 사회개혁과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보편화되게 되었는데, 좀더 분명하게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미학용어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 것은 마르크스나 니체 등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대강 1845년 무렵에 와서이다.      사회의 표현인 예술은 드높게 비상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인 사회적 경향을 표현한다. 예술은 개척자이며 폭로자이다. 그런데 예술이 선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혹은 예술가가 그야말로 아방가르드에 속해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류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뜻을 갖는 아방가르드가 맨 처음 문학의 용어로 사용된 것은 빅토르 위고에 의해서다. 그러면서 샤를르 보들레르도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용어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70년도에 들어서면서 전위적인 작가들과 예술인들의 혁명적인 정신경향을 총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조금씩 의미가 확대되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내포를 갖게 되고, 차츰 자신의 몸체를 형성해 온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들 기본적인 개념을 끌어안은 채 다양한 분야에서 당시의 세계관이나 삶의 방식들을 함유하고 규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형성해온 것이 아방가르드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는 사상 및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갈등이 미만해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과거의 인습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구가 예술과 만나면서 나타난 일련의 반항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의 인습 및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우면서도 진정한 예술을 찾기 위해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삶과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와 해방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문예운동이 다름 아닌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3. 아방가르드의 성격      1) 아방가르드는 개척정신과 선구자적인 자세를 지향한다.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앞장서 문화적 전선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치 군대의 특공대처럼, 전위병처럼 말이다. 아방가르드의 실험은 단순한 이론의 제시에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표현으로 새로운 정신을 발굴하려고 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다. 이러한 면에 대한 군중들의 호기심과 비난이 아방가르드의 열정과 생명력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용기와 진취적인 기상으로 적군에 대항하는 특공대처럼 자신의 운명과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하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전포고는 끊임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결국 저 자신에게까지도 공격을 해야만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성격상 다른 아방가르드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방가르드의 생명력은 불완전한 데에서 솟아 나와 미지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새로운 형태와 내용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여기서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필연적인 모순과 시간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2) 아방가르드는 공격적 성향을 지니고 자신을 펼쳐 나간다.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Russel은 사회적 반목으로 보고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사회적 반목이란 아방가르드 작가가 현대문화의 지배적인 심미적, 윤리적, 정신적 가치로부터 자의식적으로 소외되어 있으며 그러한 가치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를 공격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고 했다. 미래파의 선언문에는 용기, 공격, 투쟁의 美 등이 언급되어 있고, 표현주의의 선언문에는 행동, 폭풍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공격성은 텍스트를 통해서는 물론 작가의 행동이나 언어, 즉 욕설이나 빈정거림 등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3) 아방가르드는 전통을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것과도 타협을 거부한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출발은 지금까지의 예술적 전통을 거부하는데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과거의 추억이 간직되기를 원치 않았다. 인상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발 현상의 하나로 태어난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르네상스 이후 어떤 예술도 자연을 충실히 반영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견해에 대해 반발하지 못했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입장에 대한 반발은 모더니즘 혹은 그 이후의 예술에서나, 특히 아방가르드 예술에 와서야 가능했다.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원칙하에 400년 이상이나 계속되어온 예술의 흐름,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는 예술의 흐름을 인상주의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그 이후 예술은 더 이상 자신의 특징을 자연의 재현에서 찾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그때까지는 예술적 흐름의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과거 예술과의 단절을 촉진시켜왔던 셈이다. 결국 전통과 인습을 매장시키면서 동시에 예술적 근원을 추구해온 것이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방가르드는 현대적 의식의 일차적인 모습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를 거부한다.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인 무소속, 고립, 계급 탈락, 방랑 등과도 과감히 단절을 강화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그렇다. 아방가르드는 그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단절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이는 기존의 모든 문학적 전통들과 사고방식을 조소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영원한 단절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인 것이다.      하지만 단절을 통한 자기 고립이 아방가르드의 목적은 아니다. 예술의 원형을 복구하려 했기 때문에 아방가르드의 단절은 흔히 진보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절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논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방가르드였던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단절의 논리가 실질적으로 가져온 것은 허무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허무의 정신은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도덕적 파괴를 감행하도록 했고, 결국은 분노로 삶을 바라보도록 하는 태도를 형성하도록 했다. 아방가르드가 삶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이해 한 것도 실제로는 여기서 기인한다. 아방가르드의 끊임없는 반항이 급기야는 도덕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들 미학은 결국 아방가르드로 하여금 허무주의로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데, 이는 아방가르드의 운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 아방가르드는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정치 참여는 실패로 끝나지만 도덕적 반항을 바탕으로 하는 허무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지속된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의 의미가 상실되기 시작하면서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온 부정의 행위는 더욱 과격하게 바뀌어 가는데, 그에 비례해 파괴의 양상도 더욱 심해진다. 결국 부정의 행위와, 그에 따른 파괴의 양상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허무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이러한 과정에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모든 계급 및 가치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잿더미만을 남겨놓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완전한 파괴, 그것은 완전한 절망의 소산이다. 다다이즘에 따르면 善, 惡, 美의 기준은 상대적 가치이거나 단순한 언어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느끼는 허무주의는 이내 절대적인 예술의 구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 예술, 곧 역사와 사회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예술, 바로 그러한 예술의 자유를 그리려고 한 것인데,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유토피아를 추구한 예술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 아방가르드가 원하고 있는 자유는 이미 상당 부분 실현되어 있는 것 아니냐며 되물은 바도 있다. 결국 예술의 자유라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 아방가르드는 이미 열려 있는 문을 부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이렇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 자체를 다시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을 생명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이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이미 열린 문을 부수고 있다는 비판은 아방가르드가 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기막힌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오히려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詩와 관련해 시를 위해 존재한다. 아방가르드의 허무주의에는 지속적으로 진실되게 詩를 재생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본질적으로 시의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순수와 서정에 대한 향수는 과거의 시가 지니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순수와 서정, 곧 상상력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는 사실 아방가르드에게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이다.      아방가르드는 근본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방가르드는 원형적인 것과 영원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깊이 있게 그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원상(原象)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역사의 인습과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의 모델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술의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세계에서 심미적 절정을 이루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는 현실에 대해서는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비관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소간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방가르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아방가르드에는 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미를 향한 강렬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5) 아방가르드는 미래 지향성을 갖는다.      아방가르드가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주지하다시피 미래라는 말은 아방가르드의 선언문이나 작가들의 말에 매우 자주 등장한다.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아방가르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 때문에 때로 폭동을 정당성하게 여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현재성, 곧 미래성 때문에 아방가르드는 아직도 온갖 모욕과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아방가르드의 핵심 예술경향의 하나가 미래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의 성공은 먼 훗날에나 알 수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작가는 아예 자신의 성공 여부조차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아방가르드 작가는 영원히 산다고 하더라도 저 자신의 아방가르드가 만드는 성공을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방가르드의 내적 논리에 의해 작가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는 창조적 반항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더라도 말이다.      4. 유럽의 아방가르드      1918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지성인들은 과거의 시대가 멀어져 갈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지적 유산과 전통이 전쟁으로 파멸버렸다는 것을통감한다. 이른바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는 감지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다양한 작업에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던 것이 당대의 지성인들이다. 때마침 불거져 나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키면서 당시의 예술사상 일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인 모럴은 물론 기독교도적 가치도 비판의 화살을 피하기 어려운 지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      문학에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소재와 형식을 버리고 현대에 알맞는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이룩하려고 하는 모더니즘의 도전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모더니즘은 19세기 보들레르에서 출발하는데, 아폴리네르에 이르러 형식과 내용면에서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고 실험의 대상이 된다. 또한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글에서 “진실은 숭고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내재해 있으며, 驚異야말로 모든 예술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해 그 이후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후에는 프랑스 미래파의 거장인 그 자신도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깊이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모든 예술계가 적극적으로 부응하는데, 1909년에는 마침내 이탈리아의 마리네티가 파리의 지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구자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파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미래파 운동은 문학과 예술 전반에 걸쳐 기계문명의 도래를 예고했는데, 이는 후에 새로운 시어 개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미래파는 인류의 미래와, 예술에 나타날 새로운 관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과거의 우상을 파괴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박물관과 도서관을 부수자는 말조차 서슴지 않았으며, 갇혀 있던 예술을 일상적인 삶의 위치로 끌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미래파 시인들의 첫 시집의 이름이 『언어에게 자유를』이란 점도 그들의 이런 노력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미래파 시인 중에서는 러시아 혁명에 앞장섰던 마야코프스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야 말로 이 시기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다다는 1916년 츄리히의 카바레 에 모인 젊은이들에 의해 출발되었다. 그런 뒤 초현실주의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1922년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해체를 선언하는 6년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크게 풍미했던 예술운동이었다. 다다의 의미는 매우 우연적이다. 다다라는 용어가 받아들여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다의 작가들은 다다의 무의미성이 정신의 소멸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의 붕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다다는 무엇보다도 전쟁과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념과 논리에 대해 반발했다. 국가를 위한다는 논리로, 신을 위한다는 논리로 이루어진 전쟁의 비극과 파괴를 경험한 그들은 언어 및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문학과 예술은 물질세계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나타낼 뿐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도덕성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회의를 부르짖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8년에 이루어진 다다이즘의 선언에서는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다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우연과 직관에 의해서만 올바른 현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이성과 필연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다다이스트들이다. 따라서 관습과 습속, 속박은 언제나 그들의 저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다다이즘의 주도자인 차라의 말이다.      나는 모든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가장 받아들일 만한 체제는 원칙적으로 말해 아무 체계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다다가 기존 예술의 역할을 혐오한 것은 그것이 제도화되어 있다고 믿었고 형식화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제도와 형식이 인간의 생생한 경험을 끊임없이 왜곡시킨다고 믿었다. 따라서 다다이즘 운동은 표현의 직접성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다다이즘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함유할 수밖에 없다. 낡아빠진 기존의 표현방식에 대해 완전한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 다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쟝 뽈랑은 언어로부터 이처럼 범속하고 인습적인 형식 및 상투구를 완전히 제거하고,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함정을 피해 순수하고 신선하고 시원적인 영감에 호소하고 있는 이들 다다이스트, 즉 언어파괴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까지 부르기까지 했다. 따라서 이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에서의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는 그 표현에서 언어의 연상 작용을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이나 언어의 구문도 거부한다. 미래파의 영향을 받아 부사나 형용사를 되도록 쓰지 않으며, 구두점을 찍지 않고, 단어의 의미보다는 소리나 억양, 리듬 등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아폴리네르는 상형시 즉, 글자를 어떤 의미를 띤 형태로 배열하는 그림처럼 된 시(구체시)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시를 읽는 동시시(영대시)를 주창하기도 했다.      다다가 인정하는 가치는 개인의 자발성에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것으로 인해 예술도 진정한 창조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발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해 각양각색의 예술적 실험을 했지만 따로 자신들 내부에서 이론적인 통일성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면이나 기교의 면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고유한 원칙도 없었다. 이러한 측면으로 하여 다다는 예술론과 창작활동 사이에서 모순점을 안고 있었으며, 떠들썩한 활동에 비해 창작의 면에서는 별다른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다다는 모든 아방가르드 운동 중에서도 20세기의 예술의 진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게 해주었다는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다다이즘이 미래파에서 비롯되었다면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다다이즘을 주도했던 브르통이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다는 사실에도 잘 나타난다. 다다이즘의 자기부정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문명의 속박 속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이성의 횡포에 의해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을 석방시키고자 한 예술운동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추구하고 있는 예술운동이 초현실주의인 셈이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11월, 앙드레 브르통이 을 발표하면서 개막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적인 경험과 무의식 속의 경험을 일치시켜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일상 합리적인 세계와 일치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러한 예술관은 무엇보다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강조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낭만주의나 상징주의는 예술의 목적의식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무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자동기술이다. 자동기술은 무의식 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순식간에 그대로 받아쓰는 것을 가리킨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을 재빨리 받아쓰는 것이 자동기술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자동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동기술은 말이다. ‘욕망’이 되는 말이다.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욕망에 몸을 맡기는 말이다.”      자동기술은 작가가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작가의 미학적 기준이 발동하게 된다는 점과, 의식을 잠재우게 되는 과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자동기술에는 인위적인 면이 강하다.      자동기술법은 최면술과의 혼동으로 인한 오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절대적인 자동기술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 무의식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그것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 또한 객관적이고 외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과연 인간의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ㄷ면 진정한 표현은 침묵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예술에서 침묵과 같은 지적인 자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초현실주의에서의 자동기술은 이처럼 모순적이다.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도 구체적인 창작으로 이어지는 데는 실패했다고 해야 옳다. 따라서 다다이즘과 더불어 초현실주의는 운동의 산물인 작품이 직접적인 예술적 성과와 가치를 획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운동 말기에 이르면서 문학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점과, 삶으로부터 단절되면서 문학이 갖게 되는 不毛性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초현실주의도 일정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스페인의 아방가르드      스페인의 아방가르드는 루벤 다리오(Ruben Dario)에 의해 모더니시모(modernismo)가 수입되면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풍미한다. 그러한 과정에 스페인에서는 다시 새로운 문학 운동에 대한 열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게 된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방가르드의 물결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유럽을 강타하고 있었는데, 이 물결이 스페인라고 그냥 지나갈 리는 없었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이 있고 나서 스페인에도 아방가르드가 소개되었고, 그 이후 스페인식 아방가르드 운동인 울트라이스모가 모더니즘 운동의 뒤를 이어 중요한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울트라이스모는 모더니즘의 호화스러운 수사법과 이야기 스타일, 감상주의, 음악성 등을 과감히 버리고 미래주의의 테마와 같은 현대문명의 산물들을 소재로 하여 비유와 이미지에 의거하는 시적 표현 방식을 추구한다.      초기에 아방가르드의 물결을 수용하고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구이레르모 데 토레)(Guillermo de Torre), 고메즈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와 게라르도 디에고(Gerardo Diego)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근대 문명 속에서 테마를 추구하고, 은유적 곡예(acrobacia metaforica)를 위해 감정적, 일화적 요소를 배재한다.      이들 중에서 특히 고메스 데 라 세르나(Gomez de la Serna)는 초기 서반아 아방가르드의 개척자적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간단한 형태의 유모적인 은유가 눈에 띄는 ‘그레게리아’라는 형태의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라면 “사물이 스스로 외치는 소리”이다. 그의 시작법은 사물이 가끔씩 보여주는 숨겨진 의미나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그의 ‘그레게리아’는 심각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단순함과 현실의 파괴를 기반으로 한 장난스러운 문학이었다.      울트라이즘이 시들고 나서 Vicente Huidobro(빈센트 후이도브로)의 창조주의(Creacionismo)를 표방한 Gerardo Diego(게라르도 디에고)는 뒷날 과거 공고라의 시풍은 물론 초현실주의의 시풍까지 받아들여 자신의 시를 현대적으로 승화시켰다. 디에고의 창조주의에 따르면 시는 자연이나 현실의 모방이 아니라 언어의 창조이다. 그의 기발한 이미지는 아방가르드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는 27세대의 복고주의의 시어 개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의 창조주의는 지금까지 시에서는 절대적인 법칙처럼 여겨져 오던 자연이나 인간의 모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방은 가장 인간적인 본능이며 쾌락이다. 당시까지 모든 예술은 이 모방에서 자신의 시작점을 찾고 있었다. 창조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을 탈피하려고 했다. 이제 디에고(Diego)부터는 말이 시를 쓰는 시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창조주의의 원조인 칠레의 비센떼 우이도브로의 시학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디에고(Diego)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창조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표현방법일 뿐이다. 창조의 방법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낸다거나 혹은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디에고는 창조주의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시에도 능숙하기 때문에 전통시와 아방가르드를 적절히 조화해 극도의 상징적 미를 창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방가르드와 그 자신의 경험을 합쳐 독특한 詩世界를 구축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름으로 독립된 채 스페인에 들어오지는 못했다. 초현실주의의 경우 독자적으로 스페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방가르드라는 분위기 전체에 묻혀 들어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스페인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도 없다.      아방가르드(특히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은 로르카(Lorca)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그 반발로서 순수시(Poesia pura) 운동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의 하이꾸에 대한 모방을 포함한 아방가르드의 표현기법은 스페인의 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져 시어의 혁명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이는 나아가 극단적인 비논리, 비이성의 시학을 개발하는 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5.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논할 때 첫 번째 주인공으로 거론해야 할 시인은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이다. 그는 창조주의(Creacionismo)의 선구자이며, 그의 창조주의는 전 스페인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창조이며, 따라서 시인은 반드시 모방론적인 시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시인이여, 어찌하여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 장미를 꽃 피우라.      이보다 더 빈센트 후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 시론을 나타내는 말은 찾아 보기는 어렵다. 창조주의 시론에 따르면 시인은 자연을 흉내 내지 않고 작은 신이 되어 시 속에서 창조하는 자유를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시는 자연을 노래해서는 안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자연과는 상관이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야 창조주의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적 감흥의 재료가 자연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도 결국 주관적인 재창조의 결과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창조되어진 것이거니와, 시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창조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창조주의 시학은 다다와 같은 완전한 파괴주의 문학경향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학의 재건에 더 치중한 것이 그의 창조주의 시학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노 브룰은 아방가르드의 가장 극단적인 개혁의 하나인 글자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글자시는 의미체계의 최소단위인 단어를 파괴해 시인의 독자적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그 고유의 언어로 이루어진 시를 말한다. 한 나라의 국어는 시인의 영감을 표현하는데 언제나 최후의 장벽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글자시다. 이것이 마리아노 브룰에게 수용되어 당시 아방가르드의 한 줄기를 이어갔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이후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초현실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띈다. 네루다의『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 절망의 노래』는 중남미 초현실주의의 최고봉을 이룬 시집이다. 그의 시 쓰기는 먼저 생각나는 대로 쓴 다음에 후에 수정해나가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유럽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자동기술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의식적으로 시작에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므로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무의식에는 불연속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네루다(Neruda) 이후 중남미의 초현실주의는 옥따비오 빠스에게로 넘어가는데, 옥따비오 빠스는 네루다와는 달리 프랑스 초현실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아 시에 새로운 현실을 담아낸다.   6. 맺는말      아방가르드가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준 영향은 그렇게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어권 내에도 아방가르드가 수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에 수입된 아방가르드는 각기 독특한 형태로 각색되면서 시인과 문화권에 따라 크게 변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의 아방가르드 작가는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방가르드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정신은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실제로는 스페인어권 작가들이 자신의 시적 욕구를 분출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것에 불과한 듯싶기도 하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스페인이나 중남미 작가들은 기존의 유럽의 반항아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일반, 그리고 유럽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성격과 표현방법을 중심으로 자세히 설명을 한 바 있다. 하지만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기술을 하지 못했다. 전체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각각의 詩人에 대한 기술이, 특히 스페인과 중남미의 아방가르드 시인에 대한 기술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도 여기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이 가장 첨단적으로 실험되었던 것이 아방가르드 시대이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시의 표현방법과 표현기법에 대한 공부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것이 오늘 여기서 아방가르드에 대해 탐구하는 가장 주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현암사, 1992), pp.131- 180. 민용태, 『서중남미 명시 사냥』, 《현대시학》 5-10월호 (1993). 민용태, 『서중남미 문학론- 제 3의 문학의 현장에서』(전예원, 1989), pp.291-325. 박 철, 『스페인 文學史』(삼영서관, 1989), pp.239-306. 신현숙, 『초현실주의』(동아출판사, 1992), pp.15-18, pp.61-66, pp.75-107.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ㆍ염무웅 共譯,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 現代篇』(創作과批評社, 1992), pp.227-240. 아드리안 마리노, 「아방가르드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외국문학》 제1호(1984., 장선영, 『西班牙 라틴아메리카 文學史’』(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87), pp.165-170. [출처]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 이은봉|작성자 옥토끼
310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댓글:  조회:2077  추천:0  2018-09-06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                                     민 용 태(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고려대 명예교수)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로   상징주의에서 초현실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는 초현실주의 시에 드리워진 말라르메나 렝보, 르뜨레아몽의 영향을 이야기하면 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자동 필기법(Automatism)”이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주의 시인들의 갈고 닦아진 시어를 증오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은 분명히 빈상징주의자들이다. 초현실주의의 신은 절대 자유였다. 앙드레 브르똥은 말한다: “자유라는 어휘만이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전부이다. 이 어휘만이 안류의 낡은 영광주의를 무한히 유지하는 데 적합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어휘만이 나의 유일하고 절당한 갈증에 답변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그 숱한 불명예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신의 자유’가 또한 우리에게 상속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의 자유를 지독하게 악용해서는 안 될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상상력을 노예 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소위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조잡하게 불리는 명칭과 관계될 때 조차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최고의 정당성을 죄다 도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고, 상상력이 그 가공할 금기 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으며, 그리고 기만당할 두려움 없이 내 자신을 방임할 수 있는 곳 역시 이 상상력 속이다(더 이상 기만당할 수도 없겠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의 잘대적 정신의 자유에 대한 집념은 마침내 문학까지도 거부하게 만든다. 제1 선언에 이어, “1925년 1월 7일의 선언”은 더욱 단호하다. “첫째, 우리는 문학과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에 따리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이용할 수는 있다. 둘째, 초현실주의는 새롭고 편리한 표현 수단도 아니며 시의 형이상학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수단이다.(이하 생략)” 즉 초현실주의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자유를 최대로 확장시켜, 프로이트의 잠재의식의 세계, 꿈의 세계까지를 해방시키려는 운동이었다. 따라서 쉬르레알리즘은 문학 뿐만 아니라 회화, 기타 모든 시각 예술을 비롯 모든 인간 해방 운동에 혁명의 기치를 든다. 그들의 해방운동적 성향은 마침내 엘뤼아르, 아라공,브르똥 등이 연 이어 공산당에 가입하는 정치적 색체까지 띠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실천이라는 변증법적 진실에 직접 참여했다기보다는 그들의 자유 해방 정신의 확장 과정에서 비롯된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리라. 초현실주의 이런 혁명적 성향은 일체의 전통과의 단절을 부르짖었던 “전위문학(1916-1923)”고도 일맥 상통한다. 쉬르레알리즘이 트리스탄 자라의 “다아이즘”에서 나왔다는 이론도 그래서 타당성이 있는 것. 아방 가르드 예술은 많은 경우 재래의 모습 예술 형식과 사상을 일체 거부하는, 매우 낙천적인 파괴주의였다. 이들은 일체의 형식의 파괴를 앞세웠던만큼 장난끼와 유모어로 가득찬 예술운동으로 일관했으며, 결국 별다른 시학도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전위예술의 해방 정신을 “자동필기법”이라는 시학으로 대치한 것이 초현실주의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는 그러나 전위예술만큼 낙천적이지는 못 했다.억압된 본능의 해방을 위해 쓰여지던 “자동필기법”은 구겨지고 문드러진 잠재의식의 혼란스러운 표출이었던만큼 때로는 지극히 어둡고 염세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든 초현실주의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창작의 산실로 초대하면서, 혼란과 우연을 그의 텍스트 속에 필연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브르똥과 수뽀가 함 께 펴낸 “자기장(Les Champs magnétiques”에서 그들은 최초로 자동 필기법을 실험하는데, “꿈과 불면의 중간 상태에서 시적인 메시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번 백지 위에 우연히 떨어진 말은 그대로 필연이 된다. 그것은 마치 “유리창에 부딪힌 말”처럼 더러는 투명하고 더러는 흩어져 사라진다. 이들 불가사의한 낱말들, 쇠붙이들이 서로 끌고 당기며 이룩하는 연상의 자장(磁場)이 바로 시라는 것.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의식의 눈에는, 우선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프로이트 같은 의사나 상상력이 자유로운 독자의 눈에는 또 의미가 보여지고, 때로는 황홀한 꿈의 체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말라르메나 상징주의 시인들의 시법을 거부한 것은 힘들여 연상을 다듬고 짜 맞추는 그 인위적 과정이 위선이라는 것. 그것은 시작 과정에서 시인 자신들조차 자유롭지 못한 억압이니 행위라는 데 있다. 이미 말했듯, 초현실주의는 좋은 시 좋은 문학 만들기보다는 일종의 해탈을 위한 정신 수양에 있었만큼, 그 작업 행위 자체까지 정신 해방 연습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시적 영감이란 천재적 재능이 있는 자에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내면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가장 자유롭게 끌어낼 수 있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어떤 시인의 천재성이나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을 표출하는 건강한 집단시(集團詩)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구체적인 예가 “맛있는 시체 놀이(Exquisite 이다. 여러 가지인데, 첫번째 사람이 명사 하나를 쓰고 그 종이를 접는다. 다음 사람이 형용사, 또 다음 사람이 형용사...이런 식으로 앞 사람의 말을 모르고 써 나가면 하나의 부조리하고 신선한 시구나 정의(?)가 태어난다는 것. 또 다른 방법은 한 시인이 시 한 연을 쓰고 덮고, 다음 시인이 그 끝줄이나 맨 앞줄을 보고 다시 한 연을 쓰고....이런 식으로 여럿이 한 시를 만들어가는 놀이. 말하자면 하나의 시인이 작위적으로 뜻이나 연상이 통하는 이미지들을 엮어가는 것보다는, 놀이에 참여한 각 시인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우연히 떠오르는 말들을 적어감으로서, 이들 무작위한 시어들이 만들어가는 의미의 무늬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즐기자는 것. 이런 놀이는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포석정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연작 시 놀이를 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까. 여기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래도 더러 신선한 태어나는 기적을 맛보았다는 점. 그래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맛있는 시체가 새로운 와인을 마시리!” 하고 놀이를 즐겼다 한다. 물론 쉬르레알리즘의 이런 자동필기법은 실제로 상투적 시어와 참신하지 못한 시상으로 일관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들이 의식적으로 시 만들기에 쏟는 억압적 노력과 상황에서 해방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린슨은 일본의 렝가(連歌)를 모방하여, 1971년 빠리 어느 호텔에서, 또 다시 “맛있는 시체 놀이”와 같은 연작시를 시도한다. 각각 스페인어, 이딸이아어, 불어, 영어로 씌여진 시는 우리 동양시가 기대한 만큼 기(氣)의 통일성이나 현묘성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시창작의 개인적 작위성을 누그려Em렸다는 점에서는 기억할만한 사건이었다. 이제 우리는 초현실주의 전개 역사나 인간정신 해방 운동의 성패(成敗)에 대해서보다는 쉬르레알리즘 시학의 수사학적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 예술 운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현대시에 엄청난 시어의 개혁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서반아의 시인이며 평론가인 카를로스 보우쇼뇨는 그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라는 책에서 초현실주의가 시표현의 새로운 상징의 문을 열었음을 상세히 파헤치고 있다. 형식주의 문학론이나 구조주의 시학은 시대적으로 아방가르드 문학의 봉기와 초현실주의 시기와 때를 같이 한다.형식주의 발아 시기가 볼쉐비키 혁명 전후 1916년경이고, 그 때가 또한 구조주의의 원조 페르디난드 소쉬의 “일반 언어학 강론”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창작문학이나 언어 이론, 문학 이론의 일치점은 현상학적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언어가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인식이다. 형식주의가 문학은 사상이나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그 문학성이 달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나,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해방은 그가 쓰는 언어의 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언어의 중요성의 인식에서 일치한다. 이미 언급한 쟝 꼬앙의 “시어 구조”론이나 보우소뇨의 “슈퍼리얼리즘과 상징화” 등의 이론은 형식주의와 함께 구조주의적 시어 분석이 뛰어나다. 구조주의 시학의 공헌은 문학어, 시어가 일반 산문어와는 다른 “반산문” 혹은 “일탈(desviación)” 현상이며, 그 저항 이유는 뜻하지 아니한 연상을 통한 숨겨진 일치점을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데 있다. 말을 바꾸면, 마야코프스키를 비롯한 미래주의 시에 관심을 둔 형식주의의 발견처럼, 문학어는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일상어에 대하여 일부러 “낯설게 하기(singularization)” 언어인 것이 밝혀진다. 구조주의는 그 “낯설게 하기”가 다의미(polisemia) 산출의 방편이었던 것을 지적한다.즉 정서적, 영상적, 관념적 다의미를 지향하는 문학어는 일상어의 관습성, 논리성을 파괴하는 것을 항상 전제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카를로스 보우쇼뇨의 이론에 따르면 초현실주의 시는 시어의 사용에 있어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상징주의의 시에 비해 엄청난 시어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전래의 시어나 상징주의 시가 구문이나 언어의 관습성에 있어서 “까만 하늘”같은 표현처럼 맞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자동차의 코”같은 표현처럼 상당하지 않는 부분에 “코”를 갖다 붙이는 이상한 표현을 일삼았다면, 초현실주의 시어는 “관계없음(inconexión)”, “구문 상으로는 일치하나 내용상 관계 없음”, “제멋대로의 표현(autonomía)”이 성행한다고 말한다. 초현실주의 시의 이런 반언어적 시어 구조는 그러나 연상 의미에 있어서 “선험적 일치점(ecuaciones preconscientes)”을 야기시키거나,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상상을 자극한다는 것. 초현실주의로부터 시어는 일상어의 이해와는 달리, 우연하게 떨어진 시어라할지라도 그 당위성을 가지며, 독자는 그 당위성의 바탕 위에서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상의 필연성을 요구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잘 번지는 창호지 위에 떨어진 붓 자국처럼, 그 점이 무슨 점, 무슨 강, 무슨 호랑이의 모습으로 번져갈 줄은 모르지만, 일단 떨어진 붓 자국의 무늬는 절대이며, 그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자유라는 것. 보우쇼뇨는 몇 번이고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시인 비센떼 알레익산드레의 다음 두 구절을 예로 든다. 1. “나의 목 휘감지 말아요, 밤이 온다고 생각할지 몰라요.” 2. “너의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거야, 폭풍이 퍼렇게 멍이 드는 동안” 1의 경우는 그래도 연상이 가능하다. 목을 휘감으면 눈이 가려질게고, 그러면 나는 밤미아라고 생각할지 모르니까. 논리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가린다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여기서의 알레익산드레의 독특한 사랑관, 사랑은 파괴요 죽음이라는 엄청난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 것. 2의 경우는 정말 부조리 그것이다. 이 시인의 시를 이해하려면, 우주의 현상이 시인의 내적 갈등에 지배된다는 새로운 기상 원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폭풍”은 원칙 없이 “너의 심장”의 어떤 고뇌스러운 현장이 되어야 한다. 심장이 어떻게 “입으로 튀어”나올 수 있느냐는 다음 문제이다. 이쯤 되면 시어사용은 그야말로 자유자제다. 나는 문득 이 태백의 “...나 술 취했으니 잘라네./ 생각나면 내일 거문고 들고 다시 오게나”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초현실주의 시법은 표면상 이처럼 무책임하면서 자유롭다. 예술혼이 도학(道學)의 경지처럼 극도의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통하는 언어이다. 역사상 초현실주의는 “사랑과 시와 자유가 동시에 추구되는” 현실적 혁명을 시도했다. 그것은 역사상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초현실주의는 동양 철학의 바탕 위에서 여물어졌다고 본다. 그것은 옥따비오 빠스의 일본 시나 당시에 대한 심취, 그리고 특히 탄트리즘과 노장사상, 역경에의 탐익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장자의 “소요유”의 경지에서처럼 의식이 우주적으로 자유로워질 때 초현실주의는 또다른 차원의 커다란 자유를 느낀다.       현대 문예 사조에 있어서 동서양의 교류     동양의 20 세기 문예 사조는 서양의 영향 하에서 생겨난다. 일본의 근대 문학이 그렇고 중국의 “백화문학”이 그렇다. 또한 우리의 “신체시(新體詩)”도 서구의 낭만주의 상징주의의 영향 하에서 싹튼다. 실제로 동양의 오늘 문학은 서양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재수용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문학이라는 것이 형식적으로 각각의 언어적 속성에 크게 지배 받는 것인만큼, 동양이 서양 문학 형식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국의 언어나 전통에 의하여 재각색된 형태들이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 동양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나 소설, 연극의 원형들은 동양 전통의 계승 측면보다는 서양의 그것의 모방성이 두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오늘 시를 쓴다면 누구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소설을 쓴다면 사실주의적 기법을 생각하는 것도 모두 서양에서 온 사고들이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는 하이꾸(俳句)가 쓰여 지고 우리 문학에도 시조가 살아있다. 또한 문학 내용의 측면으로 살펴보아도 노장(老莊)이나 불교적 관조가 두드러진 것이 동양 문학들이다. 더구나 동양인적 섬세한 감수성과 심미주의에서 잉태된 많은 시나 소설들이 반드시 서양 문학 영향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문학의 대상이나 소재도 모두 각 나라의 정서나 문화 환경에서 잉태된 독창성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문학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사고 자체가 다분히 서양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가 “동서 문예 사조”를 이야기하면서 서양 문예 사조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은 비로 이 때문이다. 즉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에 대한 통념이나 작법들이 대부분 서양 전통에 말미암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학에 대한 사고가 그 본거지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지고 태어났는가를 정확히 살피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우리 동양에 이와 비슷한 전통의 뿌리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떤 형태로 구체화되었던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했던 것. 이제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현대 문학 사조를 대별하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현대 문학이 바로 이것들을 모방하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 문학을 모르고 오늘 동양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양 현대시의 일반적 형식인 자유시는 서양의 “상징주의”의 산물이며, 그 또한 시적 언어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형시에서처럼 시행을 음성적 법칙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자를 때와 자유시에서처럼 자유롭게 자르고 붙일 때의 차이는 크다. 자유시에서의 시행 바꾸기는 왜 꼭 거기에서 시행을 옮기는가에 대한 이유와 의미가 또 필요하다. 한국시가 서양의 자유시 형식을 본따고 자라오면서 잊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양의 상징주의가 만든 자유 시 형식의 그 엄청난 혁명성이다. 그 때까지 서양시는 시(versus)라고 하면 곧 정형시를 일컬었다. “versus”의 어원 자체가 “되돌아온다”는 리듬의 뜻에서 발생된 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징주의는 시어나 시행의 모호성과 다의미 산출을 욕심냈다. 서양 시에서 종래의 시행(정형시행)은 소리 단위의 제약을 받은 의미 단위였다. 예를 들어 11 음절이면 무조건 10음절에 리듬의 축(axis rítmico)을 둔 각운(脚韻,rima,)을 필요로 했다. 10 음절부터 11,12 음절 안에 시행(verso,verse)은 끝난다. 그러다 보니, 소리의 제약에 따라 이따금 문장이 한 시행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다른 시행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런 “넘어가기”를 수사법적 용어로 “뛰어넘기(encabalgamiento)”라고 하며, 이런 경우 시행을 뛰어넘은 한 문장으로서의 의미와 주어진 시행 그대로의 단독 의미라는 두 의미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뛰어넘기” 수사법은 정형시에서는 흔히 음절 맞추기적 필요성에서 생긴 결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음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시에 와서는 시행 바꾸기가 그 때 그때마다 “왜?”라는 의미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자유시는 시행이 산문의 문장(oración,sentence)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장은 시행과 달리 하나의 소리 단위, 하나의 의미 단위이다. 자유시가 산문의 문장의 법칙을 시행의 법칙으로 받아들이면서, 말하자면 시인의 마음대로 시행을 바꿀 수 있게 만들면서, 이제는 “왜 여기에서 시행을 바꾸는가?”라는 질문에 시시각각 대답해야 하는 의미 요구를 받게 되었던 것. 따라서 많은 의미 산출을 욕심내던 상징주의가 자유시를 도입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시행 바꾸기 형식조차도 정형시의 의미 외적인 외재율보다는 또다른 의미 산출의 강력한 도구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한 문장은 한 소리 단위면서 동시에 한 의미 단위이다. 이제 시는 이런 산문의 문장적 성격을 시구 나누기에 도입함으로서, 자유시의 한 시구는 이제 반드시 하나의 의미 단위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 받게 된 것. 자유시 형식이 우리 시에서도 혁명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한시나 시조가 모두 정형시였으니까. 그러나 우리 신체시는 중국의 백화문학처럼 우선 문학의 문어체, 한문시, 한문체에 대한 구어체로 쓰기에 더욱 열중했다. 김안서나 소월의 경우에서 보듯, 그들은 구어체로 신시를 쓰면서 그 율격의 문제를 민요에서 따오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차차 자유시체로 우리 시가 정착해간다. 말하자면, 시 리듬 자체의 벽혁의 혁명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새로운 시형식, 말하듯이 놀해하듯이 자유롭게 쓰기라는 이상한 “신체시”가 생긴 것. 여기에서 우리 시는 민요조로 쓰느냐, 아무렇게 자유시로 쓰느냐에 대한 고민의 순간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왜 꼭 이 시를 자유시로 써야 하느냐 하는 고민조차도 우리 시인들에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는 상징주의의 다양한 의미 산출의 장치인 시형식의 묘(妙)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음(音) 상징의 묘(妙) 또한 우리 시에는 그다지 오묘한 것들이 드믈다. 그 이유인 즉, 우리는 서구 상징주의의 다의미 창출의 고뇌와 형이상학적 깊이보다는, 이와 너무 다르게 우리 시의 시표현이 흔히 안이한 감정주의적 서정성에 머문 이유가 여기 있다. 사실상 서양의 상징주의는 동양의 예술이나 시를 많이 모방하려 애썼다. 내가 “서양 문학 속의 동양”에서 자세히 연구하고 있듯이, 호꾸사이 그림의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이나 동양시의 여운(餘韻), 하이꾸의 의미성 등은 서구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학자에 따라서는 자유시가 동양시 형식의 모방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그것은 라프까디오 헌이나 로띠 같은 동양을 서구에 소개한 작가들이 쓴 동양시의 자유로운 번역이나 서정적 글들이 새로운 시표현의 가능성을 여는데 기여했다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유 약우의 “중국의 문학 이론”은 동서가 비슷한 문학 이론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늘 이야기한다. 그는 중국의 심미주의 이론을 열거하고,“...서구에도 비슷한 것이 많다”는 식으로 개관한다. 그는 특히 에즈라 파운드의 “시각시(Phaopoea)”, “음악시(Melopoeia)”, “언어시(Logopoeia)”가 유협(劉勰)의 세 가지 무늬들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과 비슷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서구 학자들이 추상적으로 미(美)를 논의하거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오스카 와일드의 심미주의처럼 부도덕성까지 아름다움으로 간주한 경우는 중국 문학에 없었다고 못 박는다. 나는 동양시의 서정성이 다분히 서양의 후기 낭만주의적 감성하고 일치한다고 본다. 감정의 내적 성찰이나 암시성이 동양시에는 거의 일반화되어 있는 성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동양시가 더욱 탁월한 것은 상징주의 시가 개척한 동감각(synaesthesia)의 시적 활용이다. 이미 에즈라 파운드가 중국시의 이미지즘을 격찬했듯이, 실제로 동양시, 특히 당시(唐詩))에는 뛰어난 이미지의 활용이 보인다. 정 상홍은 “중국의 시론과 화론 1--산수시와 산수화”라는 글에서 왕유의 시에 대한 소식(蘇軾)의 평을 인용한다. “왕유의 시를 맛보면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즉 저 유명한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전통은 왕유뿐만 아니라 모든 동양시에 뿌리가 된다. 같은 글이 인용한 왕유의 “산중(山中)”이란 시를 보자.   “형계엔 흰 돌이 드러나 있고 날씨 차거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   위 시에는 엄청난 공감각이 높은 시취를 자아낸다. 먼저 “날씨 차가우니 붉은 단풍잎도 드물다”는 붉은 색,즉 따뜻한 색과 차가운 날씨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촉각적 “차가움”과 시각적 “붉은 단풍”이 공감각(촉각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멋진 공감각 활용은 “파란 산기운이 옷을 적신다(空翠濕人衣)”이라는 절구다. 파란 색깔이 어찌 옷을 적시랴. 이를 강조하기 위해 “산길엔 애당초 비도 오지 않았건만”이라는 시구까지 달고 있다. 이런 표현이야 말로 공감각을 사용한 훌륭한 인상주의 그림이 아닌가. 우리는 상징주의와 인상주의가 상당히 혼동된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말을 바꾸면, 동양시의 이런 인상주의 전통은 서구 상징주의가 그토록 탐내던 자연 속의 사물 사이의 교감을 이루어내는 장치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영향 받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은 바로 동양 예술의 이런 영상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심취했던 것. 나는 동양시의 영상미가 서구의 상징주의처럼 심오한 형이상학적 시취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안다. 그것은 동양시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경배, 거기에 직감(直感)을 존중하는 진솔성이 서양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동양시는 시도(詩道)를 추구하는 반면에, 서양시는 끝까지 상징적 의미 추구의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동양 시인의 자연의 오묘성에 심취하여 삶의 향기를 이루어내려는 풍류정신이 앞서는 반면에, 서양은 신과 우주의 궁극적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열념이 시작에 있어서까지 앞서고 있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있어 모호성이란 결국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감의 확대이지, 천인(天人)합일이나 자연 속의 무아(無我)지경, 혹은 깨달음을 향한 열망은 아니었다. 동양 시인이 끝까지 시어나 말에 크게 무게를 주기보다는, 오하려 마음의 기(氣)나 풍경과의 합일에 마음을 쏟았다면, 서양 시인들은 마지막까지 말의 탐구, 시어의 표현 가능성의 확대에 더욱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의 잠재의식의 해방까지 꿈꾸었던 초현실주의 또한 자연 중심, 풍경중심적 시학아라기보다는 인간중심의 해탈운동이었다. 자기를 버리고 자연과 하나 되는 불교나 노장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반(反)이성적 이성운동이었을 뿐이다. 동양이 서양에 배울 것이 있다면 시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보다 투철한 개척 정신이다. 서양은 17 세기 바로크 문학에서부터 “인공적인 것이 아름답다(공고라)”는 것을 발견하고 문학하기에 있어서 말과 수사학을 최대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어쩌면 해체주의의 주장처럼 어차피 진리나 자연을 원 모습, 원가(原價) 그대로 표현할 언어는 없다는 확신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말을 바꾸면,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처럼 자연을 모방한다는 가능성을 벌써부터 포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말의 놀이 속에서 빛과 아름다움의 무늬를 산출하는 재미를 맛보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서양은 동양에서 언행일치(言行一致),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적 이상에 대한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행동과 삶을 그대로 구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거기에 중용(中庸)에서 주장하는 성(誠)이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라.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자연에 대한 성실한 사랑으로 언어를 빚을 때, 시인의 성실성에 흠이 없을 때, 인간은 성인스러운 절묘한 언어의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것이 최소한도 동양 시인의 믿음이다. [출처] 초현실주의와 동서 문학의 교류/민용태 |작성자 옥토끼
309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 현중문 댓글:  조회:1999  추천:0  2018-09-03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시 작품을 중심으로 번역·소개하려고 한다.  이른바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는 고려하지 않았다.  중남미 현대시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통의 부정과  혁신의 연속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인들이 "영향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한결 풍성한 시 작품으로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려는 지난한 시도라고  평가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먼저 중남미 현대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데르니스모(Modernismo)의 시는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고루해진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시 형식을 탈피하려는 중남미 최초의 시운동으로,  세기말적 감수성과 중남미 크리오요(criollo)의 비전을  담아내려고 했다.  ☞ 루벤 다리오:「백조」  백조  다리오 / 현중문 옮김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의 시학을 잘 표현한 작품  시 제목에서 '고니' 대신에 '백조'라는 말을 선택한 까닭은  희고 청순한 하얀색의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고육책  원제는 El cisne. 출전은 『불경한 산문시』(Prosas profanas y otros poemas, 1896)  원문과 상세한 주석은 한글문서에 있습니다.  그때는 인류에게 신성한 시절이니  백조는 죽기전에 단한번 노래했다.  바그너 백조노래 멀리서 들려올땐  여명이 한창이고 재탄생 순간이니.  인간세 바다에서 춤추는 폭풍우 위  백조의 노래소리 끊임없이 들린다.  게르만 늙은신 토르의 망치소리와  아르간튀르의 칼 찬미가 잠재우며.  신성한 새 백조여! 백옥미녀 헬레네  레다의 청란(靑卵)에서 우아하게 태어난  절세미모의 공주, 불후불멸의 공주.  네 하얀 날개 아래 새로운 시는 빛과  조화의 영광으로 순수한 헬레네를,  영원한 이상의 헬레네를 생각한다.  Corregio(1490-1534)  Leda with the Swan(1531-32)  Oil on canvas, 152 x 19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이어 전위 운동(Avant-garde)의 시작과 더불어  기존의 시 형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려는 시학이  1910년대 칠레의 시인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가  주창한 창조주의이다.  우이도브로에 따르면, 시적 대상이란 언어 내부에만,  좀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언어로서만 존재한다.  ☞ 우이도브로:「시학」  시학  우이도브로 / 박병규 옮김  비센테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는  칠레 출신의 아방가르드 시인.  1916년부터 프랑스에서 르베르디(Reverdy)와 함께  활동하면서 창조주의 시학을 주창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시집 『높은 매』(Altazor, 1931)  시가 열쇠가 되기를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라,  그리하여 듣는 이의 영혼이 감흥에 떨도록.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언어를 조심하라.  생명 없는 형용사를 죽여라.  우리들은 신경 조직이다.  근육은 옛 유물이니  박물관에나 진열하라.  그렇다고 힘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활력은  머리 속에 있다.  시인들이여! 왜 장미를 노래하는가.  시 속에서 장미가 피게 하라.  우리들이 보기에 만물은  오로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시인은 작은 하느님이다.  『물거울』(1916) 중에서  이러한 일련의 아방가르드적 시 개혁 운동 정점에  위치한 시인을 들라면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초기 네루다(Pablo Neruda)를 꼽겠다.  이 때의 네루다 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편린처럼 튀어나와  이내 명멸하는 덧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 네루다: 시학 (Arte poética)  ☞ 네루다: 시  시학  네루다 / 조민현 옮김  어둠과 공간 사이에서, 성장(盛裝)과 처녀 사이에서  유별난 심장과 불길한 꿈을 안고,  때 이르게 창백한 안색, 시들어버린 이마  하루하루 삶을 여윈 분노로 상복을 입고,  아, 꿈결처럼 마시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과  전율하며 받아들이는 모든 소리 앞에서  나는 언제나 갈증 없는 목마름과 차가운 열병을 앓는다.  마치 도둑이나 유령이 나타나듯이,  불현듯 돋아나는 청각(聽覺), 종잡을 수 없는 고뇌.  그리고 두껍고 단단하게 펼쳐진 겉껍질,  망신당한 웨이터 같고, 약간 목쉰 종소리 같고  낡은 거울 같고, 외딴집의 냄새 같은  그곳에 밤이 되면 만취한 손님들이 들어온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옷 냄새, 꽃도 없는데,  ― 이렇게 얘기하면 훨씬 덜 우울하겠지 ―  그러나, 사실, 내 가슴을 후려치는 바람과  침실에 굴러 떨어진 밑도 끝도 없는 밤들과  희생으로 불타는 하루의 소음은  우울하게, 내 안에 있는 예언의 목소리를 요구하는데,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을 듣지 못한 사물들의 주먹질과  휴전 없는 동요와 혼미한 이름 하나 있으니.  『지상의 거처 I』(1933)에서  시 (詩)  네루다 / 김현균 옮김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후기 네루다는 이러한 단련의 과정을 거쳐  누구나 읽어도 수긍할 수 있는 일반적인 비유와 이지미와  시상을 노래하는데, 보르헤스 또한 이와 유사한 도정을 걸어갔다.  보르헤스는 전위운동(극단주의, Ultraísmo)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시작 활동을 시작했으나  만년에는 "유치하다"고 초기 시작품을 부정적으로 평했으며,  일부 작품은 재출판을 극구 반대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시학」은 만년의 작품인데,  우리는 시와 산문을 포함하여 보르헤스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브를 접할 수 있다.  ☞ 보르헤스:「시학」  시학  보르헤스 / 현중문 옮김  보르헤스 후기 시에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이 시에서도 물, 세월, 강물, 거울 같은 평범한 이미지를  중첩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리((琉璃))라는  미학적 응결물을 창출해내고 있다. 원제는 Arte poética  물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강을 보고  시간이란 또 다른 강임을 기억하라.  우리들은 강처럼 사라지고  우리 얼굴은 물처럼 흘러감을 알라.  깨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꿈이며  우리 육신이 두려워하는 죽음이란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 꿈이라 생각하라.  나날의 일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유구한 세월의 상징을 보고,  세월의 전횡을 음악과  속삭임과 상징으로 바꾸어라.  죽음에서 찾아낸 꿈, 석양에서 찾아낸  서글픈 황금, 이것이 시일지니,  가난하고도 불멸하는 시일지니,  여명과 석양처럼 번갈아드는 시일지니.  오후가 되면 종종 거울 깊은 곳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얼굴 하나 있으니  예술은 그 같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가사의한 일에 신물이 난 율리시즈는  눈물이 났단다, 먼발치로 보이는 이타카  푸르고 소박한 고향, 예술은 그런 이타카  영원히 푸르지만 불가사의는 없는 이타카.  예술은 또한 흐르면서도 제자리에 머무르는  끊임없는 강물이며, 그 끊임없는 강물처럼  자신이면서 다른 사람으로 유전하는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유리(琉璃)이다.  『제작자』(1960)중에서  20세기에 시를 쓰는 작업,  특히 네루다의 매끄러운 시와 시낭송 열풍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침묵으로 변한 이후에 시를 창작하는 작업은  성냥개비 하나로 대낮처럼 밝은 네온사인의 거리를 밝히보려는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일임을 모두들 자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인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기보다는  "시란 무엇인가", 나아가서는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천착한다.  다시 말해서, 시 창작을 다룬 시, 메타시의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메타시의 첫 운을 뗀 시인은, 내가 보기에,  멕시코 시인 파스(Octavio Paz)이다.  파스의 시세계는 매우 복잡하여 한마디로 축약하기 곤란하나,  이제는 시인의 의도를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의미의 주변이나 어슬렁거리는  시어(詩語)를 붙잡고 대판 씨름을 벌인 것은 분명하다.  ☞ 파스:「시인」 (업로드 예정)  이어 우리는 파라(Nicanor Parra)의 반시(反詩)를 만난다.  파라는 모데르니모에서 보여준 시어의 조탁을 거부하고  일상어를 도입하며, 네루다가 보여준 부드러운 리듬과 서정성에  반기를 들어 일상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시를 시답게 만든다고 여겨온 대부분의 자질들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흙먼지 이는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 파라:「선언문」  선언문  파라 / 박병규 옮김  반시(反詩) 선언문으로  니카노르 파라(Nicanor Parra, 1914-)가 거부하는  시의 전통과 옹호하는 글쓰기를 잘 드러낸 작품  원제는 Manifiesto(Manifiesto, 1963)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것이 저희들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보기에  시란 사치품이었습니다만  우리들에게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정중하게 말씀드려  우리는 선조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시인은 연금술사가 아니라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성벽을 쌓는 미장공이고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꾼입니다.  우리들은  일상 언어로 이야기를 나눌 뿐  언어의 연금술을 믿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시인이 저기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무는 올곧게 자란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들은 창조주 같은 시인  싸구려 시인  백면서생 같은 시인을 고발합니다.  공손하게 말씀 드려  이분들은 모두  피고소인으로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허공에 성채를 지으려고 한 죄  시간과 공간을 허비한 죄입니다.  달에 바치는 소네트를 만들면서  파리의 최신 유행을 따라  단어들을 우연하게 결합한 죄입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상(思想)은 입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태어납니다.  우리들은  짙은 선글라스의 시  영풍 농월의 시  챙 넓은 모자의 시를 배격합니다.  그 대신  안경을 벗은 눈의 시  진솔한 가슴의 시  모자를 벗은 사람의 시를 옹호합니다.  우리들은 요정이나 신화를 믿지 않습니다.  시란 이런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삭으로 치창한 여자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이제 정치적인 차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는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굴절하고 산란했습니다.  몇 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공산주의자였는지 알 수가 없으나  우리들은 그렇게 추정합니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민중 시인이 아니었습니다.  존경받는 부르주아 시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몇 분들만이 민중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이 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과 행동으로  지배적인 시를 비판하고  현재의 시를 비판하고  플로레타리아의 시를 비판했습니다.  우리들이 인정하는 공산주의자들,  그러나 시는 볼품이 없었고  초현실주의 아류였으며  삼류 퇴폐주의였으며  물 건너 온 낡은 도식이었습니다.  형용사의 시  후각과 미각의 시  자의적인 시  책을 베낀 시  그리고  언어 혁명에 기초한 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기초한 시  관념 혁명에 기초한 시였습니다.  극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악순환의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호를 그으며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시를 썼을까.  쁘띠 부르주아를 놀라게 하려고?  한심하게도 시간만 낭비했으니!  쁘띠 부르주아는 먹거리가 아니면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로 놀라게 하려고 들다니!  지금 사정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황혼의 시  밤의 시를 썼다면  우리들은  새벽의 시를 옹호합니다.  이것이 우리들 메시지입니다.  시의 광채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시는 누구나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료 여러분, 이것 뿐입니다.  젊잖게 얘기하면  우리들은  작은 하느님의 시  신성한 소의 시  분노한 투우의 시를 비판합니다.  구름의 시에 반대하는  우리들은  지상의 시를 주장합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들은 지상에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카페의 시에 반대하여  자연의 시를 주장하며,  살롱의 시에 반대하여  광장의 시  저항의 시를 주장합니다.  시인들은 올림푸스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선언문』(1963) 중에서  더 이상 내려딛을 곳이 없는 일상의 평면에서  시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테면,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의 작품에서 보듯이,  상호텍스트성으로서의 시 개념이 등장하고,  독자의 위상은 공동 창작자로 격상된다.  ☞ 파체코:「익명의 옹호」  ☞ 파체코:「동조운에 관한 고찰」  익명의 옹호 (인터뷰를 거절하기 위해 조지 무어에게 보내는 편지)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é Emilio Pacheco, 1939-)는  멕시코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원제는 Una defensa del anonimato  친애하는 조지 씨, 나는 우리가 왜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써 놓은 것을 후에 출판하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메시지가 담긴 병들과 쓰레기로  가득 찬 바다에 병 한 개를 던지는 것입니다.  조류를 타고 누구에게로, 어디로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십중팔구 깊은 바다의 풍랑에 휩쓸려,  바다 밑바닥, 죽음의 모래에 처박힐 테지요.  하지만  조난자의 찡그린 얼굴이 영 부질없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일요일  콜로라도의 에스테스 파크에서 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니까요.  당신은 병 속에 들어있던 것들을 읽었으며  (바다를 통해 우리의 두 언어가 만났습니다.)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내가 단 한번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또 나의 꿈은 읽히는 것이지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텍스트일 뿐 텍스트의 저자는 중요치 않고,  내가 문학 곡마단을 혐오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 후에 장문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걸 보내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습니까.)  나는 회신을 보낼 수도 그렇다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시행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이건 시가 아니죠.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의 특권을 꿈꾸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오늘날 산문으로 말하는 모든 것들  (이야기, 서간문, 드라마, 역사, 농사교본)의  도구로 운문을 사용할 뿐입니다.  당신의 전보에 답하지 않기 위해 말하겠습니다.  나의 시 안에 있는 것 말고는 덧붙일 게 전혀  없습니다.  나는 시를 논평하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역사 속에서의 자리"  (혹 나의 자리가 있다해도)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머지 않아 우리들 모두에게 조난이  닥칠 테니까요.)  나는 시를 쓰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나는 시의 절반만을  씁니다.  시는 백지 위에 그려진 검은 부호가 아닙니다.  나는 타인의 경험과 교유하는 만남의  광장을 시라고 부릅니다. 독자들이  내가 스케치한 시를 완성할(혹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읽습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내 거울에 비쳐보인다는 건  기적과 같습니다.  여기에 가치가 있다면 ―뻬소아가 말했습니다―  그건 시의 몫이지 시의 저자의 몫이 아닙니다.  어쩌다 위대한 시인이라 해도  숱한 좌절과 허섭쓰레기 틈에서  너덧 편의 빼어난 시를 남길 뿐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들은  정말이지 별로 관심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 세상은 참 이상하기도 합니다. 시인들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 가는데,  시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드니 말입니다.  시인은 이미 종족의 목소리이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인은 또 하나의 연예인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의 술주정, 간음, 병력(病歷),  그리고 곡마단의 다른 광대들이나 곡예사, 혹은  코끼리 조련사와의 야합과 분쟁은  이미 시를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을  폭넓은 관객으로 확보했습니다.  나는 시란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시는 두 사람, 거의 영영 알지 못할  두 사람 사이의 밀약(密約) 속에  오직 침묵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형식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반세기 전에 환 라몬 히메네스가  한 잡지를 발간하려고 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잡지에 《익명》이라는 제목을 붙인 다음  서명이 아니라 텍스트를 발표하고,  시인이 아니라 시로 잡지를 꾸미려 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의 대가처럼  시가 익명이기를 바랍니다. 시는 집단적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나의 시와 나의 번역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도 내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내 시를 읽었지만 나를 알지 못합니다.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친구입니다.  내 시가 당신 맘에 드셨다면  내 것이든 / 타인의 것이든 /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든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읽은 시는 진정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시를 읽을 때 그것을 창작하는 저자입니다.  『바다의 일』(Los trabajos del mar, 1983) 중에서  동조운(同調韻)에 대한 고찰  파체코 / 김현균 옮김  호세 에밀리오 파체코(Jose Emilo Pacheco)는  멕시코 태생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문학평론가.  이 시의 원제는 Disertación sobre la consonancia  (동조운(同調韻)이란,  정형시의 율격 가운데 하나로  운(韻)을 구성하는 모음뿐만 아니라  이에 뒤따르는 자음까지도 동일한 형태를 일컫는다.)  때때로 스페인어의 소리 울림 때문에 여전히  시가 운율을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운율에서 나와 운율을 지니며 운율을 생성한다고 해도,  최근 반세기 동안 씌어진 가장 좋은 시들은  과거의 학자들이나 규범가들이 얘기하던  〈시〉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시의 한계를 확장할 새로운 정의가  상정되어야 한다(만일 아직도 한계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가령 고전주의자들이 불굴의 도전으로도 발굴해내지  못했던 어떤 단어.  ―지당하게도― 한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이건 이미 시가 아니다" 라고 내뱉는  사람들의 놀라움과 노여움을 피할 수 있는  (암시가 용인되는) 하나의 명칭, 그 어떤 용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내게 묻지마』(1969) 중에서  이와 더불어 창작에 대한 자의식 또한 고개를 들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시가 바로  엔리케 린(Enrique Lihn)의 메타시(metapoesía)이다.  ☞ 린:「시를 올바르게 쓰려면」(업로드 예정)  이 글처럼 각 시인의 시학에 해당하는 작품을 통해서  중남미 현대시사를 조망하려는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이라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시도는 필연적으로 몇몇 대가를 누락시키는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일종의 보유로서  서인도 제도와 브라질의 독특한 흑인 혼혈 문화,  즉 물라토(mulato) 문화를 노래한 쿠바 태생의 시인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의  ☞ 작품 「성벽」을 소개한다.  성벽(城壁)  기옌 / 현중문 옮김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은 쿠바 시인  원제는 La muralla  - 크리스티나 루스 아고스티에게-  성벽을 세우려니  일손을 빌려주게,  흑인은 검은 손을  백인은 하얀 손을.  아,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 쿵쿵  - 누구야?  - 장미와 카네이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대령의 칼...  - 성문을 닫아라  - 쿵쿵  - 누구야?  - 비둘기와 월계수...  - 성문을 열어라  - 쿵쿵  - 누구야?  - 전갈과 지네...  - 성문을 닫아라  우리편 가슴을 향해  성문을 열어라.  독약과 비수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도금양과 박하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뱀의 이빨에게는  성문을 닫아라.  꽃에 앉은 나이팅게일에게는  성문을 열어라.  모두들 합세하여  성벽을 세워보세,  흑인은 검은 손으로  백인은 하얀 손으로.  저기 지평선 위에  성벽이 드러날거야,  해변에서 산까지  산에서 해변까지.  『비상하는 민중의 비둘기』(1958) 중에서 [출처] "시학"으로 가늠하는 중남미 현대시/ 현중문|작성자 옥토끼  
308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간단정리[공유] 댓글:  조회:1852  추천:0  2018-09-02
◎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1885~1972 ) 시론   "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 (= 작은 작품에 집중하고 오랫동안 고쳐 써라.)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최초로 만들어 냈다. 이미지를 현대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끌어올렸다.     파운드의 시론= "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이미지" 가장 핵심에 있던 것은 이미지즘. 보들레르가 현대시의 시조라면 에즈라 파운드는 현대시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시에 에즈라 파운드가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  이미지즘은 당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가 지배하던 영국시의 침체된 전통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 시도된 '혁신적 모험'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철학자이자 시인인 흄을 만나게 된다.  파운드는 번역시집을 내면서 그 부록에 흄의 등 시 5편을 수록하고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란 말을 최초로 사용했다. 이때 사용한 '이미지스트'와 '이미지즘'이란 용어는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미지즘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 아래서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파운드가 내세운 이미지즘 이론은 흄의 반 낭만주의 사상과 중세 문학 및 동양 시에서 추출한 고전주의 시론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은 프랑스 상징주의를 계승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단시 그리고 중국의 한시와 일본의 하이쿠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당시 영시가 지닌 감상주의와 느슨하고 장신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미지즘 운동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로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목표로 했다. 시인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켜선 안 되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낭만주의란 감정을 최대한으로 폭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반 낭만주의 = 감정 거부, 이성의 뜻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감정이 함께 하는 시를 말한다.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rsy)'을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흄이 주장한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군말의 폐지'와 비슷한 입장이다.     1. 사물을 보듯이 그려내라 (= 회화적 기법, 보듯이 그려내는 것) 2. 미적(美的)이어야 한다. 3.교훈적 경향에서 탈피하라. (= 20c까지만 해도 고전주의적, 계몽주의적 이론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금 현대시는 탈피 했다. ) 4. 다른 시를 더 좋게 또는 더 간단하게 반복해도 좋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 엘리아르의 와 김지하의 사이의 유사성과 같은 말을 하는 듯하다.)         파운드는 이와 같은 '시작법원칙'을 발전시켜 1912년 리처드 알딩톤, 힐다두리틀과 함께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사물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관념을 배제하고 너의 개념을 만들어 내야한다.)     2.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장식적인 말 사용 X )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보다 음악적 구절의 연속성을 따라갈 것. (외재율이 아닌 내재율로서의 리듬 형성을 말하고 있음)         파운드는 이를 보완하여 1913년 월간 에 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발표했다. 이는 공식적으로 그리고 서구 문단 최초로 이미지의 중요성을 논의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미지의 개념 : " 이미지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이성적이라고 바꿔말해도 무방하다.)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      이미지의 효과 : " 그러한 '복합체'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러운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 이미지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우리는 갑작스런 인지,인식하게 된다.)  -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어렴풋한 평화의 땅'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 시킨다. (= 평화/ 땅 중 무엇을 수식하는지 애매함. 의미 또한 불명확! ) -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 하려 하지 말라. - 자신의 마음을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우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 '그럴 듯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사람들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구구절절 무언가를 표현X) -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휴지(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이는 '시어'와 '운율' 그리고 '표현방법'에 대한 논의였다.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의 수식을 피해야 한다는 말은 '추상화'를 그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추상화'는 표현의 간결성과 정확성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모호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일체의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을 직접 다룰 것을 주문했는데, 그러면서 시의 음악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기계적인 운율 대신 시어의 리듬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유시형(free verse)'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갈이의 리듬까지 고려해야 된다는 게 파운드의 주장이다. 게다가 파운드는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했다. 흔히 이미지라면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요즘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데, 파운드는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시의 리듬'을 더욱 중시했다. 이 점이 바로 T.E 흄의 이미지 이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 즉 파운드는 이미지즘 창조, 이미지스트로서의 시를 창조했으나 음악성을 중요시 했다는 것!★ ) ​파운드는 좋은 예술은 참된 증언을 하는 정확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시 표현의 정확성을 강조한 셈이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 그리고 저 좋은 예술은 아무리 '비도덕적'이라고 하여도 전적으로 훌륭한 것이다.결코 좋은 예술은 비도덕적일 수 없다. (※ 근데 여기서 논의 할 점. 예를 들어 작품 '로리타'도 훌륭..?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 나는 좋은 예술을 가지고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막연한 것을 나타내는 데도 아주 정확할 수 있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 "예술의 최고의 기능은 고귀하리만치 풍부한 소리와 이미지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며, "시에는 음악을 지향하는 시와 조각이나 그림을 지향하는 시,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 첫째, 발화 되는 소리에 의해 충전되는 청각적 언어인 '음악시', 둘째는 시각적 상상력에 의해 이미지가 투영되는 시각적 언어인 '회화시', 셋째는 직접적인 의미와 문맥에 기초를 둔 '언어시'라는 것이다. 파운드는 이 세 종류의 시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시에 모두 나타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모든 글은 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고 여겼기 때문이다. (= 시에서는 음악성과 회화성, 언어성(의미성)이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 나온 시가 좋은 시라고 보았다.) ​ 이와 같은 파운드의 시론은 당시 시인들의 산발적이고 혼돈된 시작 활동의 좌표가 되었고, 보다 새로운 시 쓰기의 지향점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파운드는, 흄이 을 이미지즘 시의 전형으로 써 보인 것 처럼, 자신또한 1913년 월간 를 통해 저 유명한 를 발표했다.       파운드의 시 에 드러나는 '감정의 객관화'는 후일 T.S 엘리엇에 의해 한층 발전 되어 '객관적 상관물'을 낳게 했다. 이것은 외부 대상과 창작자의 지성이 결합된 시적 감수성의 결정체이다.     ※ 여기서 알아 둘 것은, * '정서적 등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일치 * '객관적 상관물' = 대상의 정서와 화자의 정서가 꼭 일치될 필요X, 그렇지만 이를 통해 화자의 정서가 드러나는 것.         파운드가 말하는 시의 요체 =  간결한 언어, 객관적인 표현, 구어체     (특히 파운드는 형용사를 격렬히 싫어했다.)  시는 산문처럼 잘 쓰여져야 합니다.(=일물일어설을 주장했던 소설가들을 염두하는 말, 일물일어설을 주장하고 정확한 문장구사를 주장한 산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임.)  시의 언어는 훌륭한 언어이어야 합니다. 고양된 강렬성(즉 단순성)에 의한 경우를 빼면 구어체에서 결코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책의 언어도, 에두르는 표현도, 도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시는 모파성의 산문과 스탕달의 산문처럼 간결해야합니다. (=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대상을 접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각으로.)       감탄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어떠한 말도 허공을 향하여 날아가서는 안 됩니다. (=  1. 필요 없는 수사어구 X 정확한 문장 필요 2. 구체적으로 표현. 추상성 X) … 객관성, 그리고 다시 객관성, 그리고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앞뒤가 바뀌는 것도,("썩은 이끼 낀 각진 모서리"와 같이)양다리 걸친 형용사도, 테니슨이 사용하는 것 같은 말도, 어떤 환경, 어떤 감정의 압박 상태에 있어서, 실제로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은 어떠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논의한 '구어체'는 '시의 음악성'과 결부되는 요소인데 '입말'이 '리듬'을 저절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 = 음악적인 시들은 외재율이 아니라 내재율. 각편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 리듬을 중요시. 외형을 가진 정형시 X)            이미지즘 운동이 정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 창출에만 매달리는 '인상주의'로 흐르게 되자 에즈라 파운드는 사물이 아닌 인간의 의식세계를 탐구 하기 시작했다. … 그는 사물의 존재보다 인식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당시 첨단 전위 예술이었던 '소용돌이 주의(Vorticism)'에 몰입했다.   그가 떠났어도 이미지즘 운동은 계속 되었다. < 몇 명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시집에서는 이들이 합의 한 '이미지즘 6원칙'이 실려 있다.  1. 일상적인 언어를 쓰되 유사하거나 장식적인 단어는 결코 사용하지 말고 정확한 단어만을 사용한다.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도록 한다. 우리는 자유시를 유일한 시작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유의 원칙을 위해 싸우듯이 자유시를 위해 싸운다. (중략) 시에서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 시조가 근대로 들어와 사상을 담기엔 역부족 (민족주의적 사상입장에서 시조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 3. 시 제재 선택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 세상 모든게 시가 될 수가 있다. +과거 ,현재 모두 좋은시가 될 수 있다.) 4.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시각적인 것에 기울여져있음)  5. 흐릿하거나 확실치 않는 것은 완전히 배제하고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쓴다. 6. 끝으로, 우리 대부분은 압축이 바로 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정확한 단어' = 정확히 모사 X 시인의 마음에 나타난 대상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라는 뜻. "새로운 운율은 곧 새로운 생각을 뜻한다"= ex) 80년대는 왜 해체시인가? 기존의 시적 문법으로는 변화된 80년대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것을 담아내려면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  이 무렵 파운드는 이미 '소용돌이주의'로 발걸음을 옮겨가 있었다. …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는 '소용돌이주의'를 통해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 삼아 대하 서사시 를 집필해 나갔다. 이 작품에는 그가 영향 받은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도 개입되어 있는데, 이들 사조를 보다 새로운 시학을 추구하는 동인(動因)으로 삼았다.          는 이미지즘, 소용돌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을 거치면서 점점 확장되어 집필되었다.     흄 :  언어란 의사소통의 도구, 언어란 개념이 정확하지X 언어는 우리의 개념을  추상화 시킨다. → 정확한 이미지즘을 창출하려 했음. 정확한 표현,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세계 But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는 강렬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고 파운드는 소용돌이 이론(시= 집중된 표상) 으로 발걸음을 옮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307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공유] 댓글:  조회:1439  추천:0  2018-09-02
♧ 현대시 창작 시론을 읽었다.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열었던 14명의 시인들,  이름만 들어도 면면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들의 '창작시론' 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시의 모습을 한 정리하여  논평한 책으로, 현대시의 금자탑을 세운 시인들의 세계관과 현대시의 변증법의 전개과정을 탐구할수 있는 일목요연한 편찬이 시를 쓰거나 시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금자탑으로 다가올 것 같다.     ------------------------------------------------------------------------------------- [차례]   책머리에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시를 쓸수록 시는 오리무중이다.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시는 거대한 관념의 추상체이다. 시를 쓰기 위한 번민과 고독, 실패의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시는 형이상학적 추상성과 현실적인 구체성이 서로 만나 충돌과 삼투를 거듭하다가 하나의 언어로 육화되는 공간이다. 정말 그런 것인가? 시는 무엇인가? 여기, 시인들이 육성(肉聲)으로 토해낸 시론(詩論)이 있다. 지금껏 시를 쓰고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필자는 국내의 여러 시론집을 접해왔던 바, 뚜렷한 변별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국 현대시가 서구에서 유입되었기 때문일까, 서구의 시론을 번역하여 정리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시론집은 대체로 ‘시어’ ‘이미지’ ‘비유’ ‘상징’ ‘리듬’ ‘화자’를 중심으로 시를 논했다. 서구 문예 이론가들의 논리를 시의 구성 요소별로 분류해서 체계화한 것인데, 여기엔 시인의 육성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껏 대학에서 시를 강의하면서, 줄곧 머릿속의 의문 하나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시인들이 생각하는 시의 모습이었다. 시인들은 과연 시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시란 무엇인가?’였다. 시인들의 직접 토로한 ‘경험적 시론’, 나아가 ‘창작시론’은 어떤 것일까? 탁월한 시인에게는 탁월한 시론이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필자는 이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모인 14명의 시인들, 이름만 봐도 그 면면을 알 수 있는 당대의 대표적 시인들이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시를 쓰면서 시를 논했고,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 결과, 종래의 시의 개념이 요즘처럼 바뀌게 되었고, 이름하여 ‘현대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됐다. 시에 대한 논의의 역사는 유구하다. 플라톤이 그의 『국가론』을 통해 ‘시인 추방’을 명령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율어(律語)에 의한 모방(模倣)’이라고 정의하면서 시의 리듬과 비유 그리고 시의 기능을 논했다. 그가 말한 모방(imitation)이란 사물이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모사(mimesis)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여기엔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럴듯하게 담아내는 ‘창작의 개연성’이 개입되어 있었고, ‘당위적 진실’을 지향하는 ‘표현(expression)’과 ‘이상화(idealization)’라는 지향점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이미 ‘유비적 상상력’에 의한 비유의 필요성이 논해졌던 셈이다. 이러한 ‘모방론’은 17세기 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시문학 이론의 핵심이 되어왔다. 이 ‘모방론’은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세계관에 따른 것인데, 18세기 낭만주의가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진다. 시가 더 이상 대상을 모방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적 대상보다도 시인 자신의 개성을 중시하는 ‘표현론’이 나타난 것인데, 이때부터 시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꾀하였다. 다시 말해 시적 주체와 객체가 혼융된 ‘동일성의 시학’을 지향하면서 이를 ‘서정시’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말 상징주의에 이르러 또다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비로소 ‘현대시’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던 것이다. 시적 정서는 물론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배격하고, 낭만주의와도 구분되는 새로운 시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상징주의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샤를 보들레르가 바로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프랑스·독일·영국·러시아·스페인 등 유럽을 비롯해 미국을 거쳐 멕시코·칠레 등 중남미에 이르기까지 현대시의 개념과 성격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20세기 중반까지 벌어진 이 논쟁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그 어느 세기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문학 논쟁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때의 시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당대의 시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변증법적 투쟁의 궤도를 달려왔다. 각 시인의 시론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보완됐고, 정반합(正反合)을 거듭하면서 또 다른 시의 시야를 열어젖혔다. 바야흐로 현대시의 새로운 미학이 창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의 시론은 이단(異端)의 언어였고 자신은 물론 이 세계와의 험난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이들에게 있어서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성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불과 50여 년의 논쟁이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의 영역이 최대치로 확장되어 오늘날의 현대시가 이토록 다변화됐다. 현대시의 개념과 특징 그리고 시의 구성 요소에 관한 치열한 논쟁 끝에 오늘날의 시론이 정립됐던 것이다. 아쉽게도 논쟁은 더 이상 이어지질 않았다. 시문학 논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시인들이 직접 시를 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시인들은 다만 시를 썼고, 시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이나 시론을 피력해왔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14명의 시인은 자신의 시론을 거침없이 토로했고, 이론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시 창작의 미학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필자는 그 자료를 찾기 위해 지난 5년간 이들이 남긴 일기를 비롯해 창작 노트, 편지글, 문학상 심사평, 신문·잡지 기고문, 저서 그리고 〈노벨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 수상 소감을 뒤졌다. 여기엔 당대의 정치 상황과 이데올로기,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 통찰력을 살피는 동안 필자는 시인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뜨겁고 생생한 시론, 시의 육성(肉聲)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이들의 시론이 그러했듯이, 시는 ‘움직이는 언어’이다. 리듬이 그러하고 의미가 그러하다. 시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을 숨긴다. 그 목소리와 얼굴을 종잡을 수 없다. 그렇게 불투명하고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시의 생명력이 지속되는 게 아닐까? 시는 독자들에 의해 거듭거듭 육화되는 존재이다. 시가 그러하듯 이들의 창작시론 역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화두이자 질문이며 시적 잠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현대시 논쟁의 전개 과정에 따라 시인들을 배열했다. 각 시인의 삶을 요약하면서 스스로 밝힌 시론을 실었고, 이에 대한 비평가의 논평을 덧붙였다. 인용한 문장은 각주를 달아 이를 밝혔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각주를 따로 붙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시를 쓰거나 시론을 공부하는 이들이 현대시의 금자탑을 세운 시인들의 시적 세계관을 살펴보는 한편 현대시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탐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샤를 보들레르(1821~1867)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저는 제가 유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오로지 악에 대한 공포와 혐오만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냈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보들레르는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행위를 '현대성'이라 보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서 "현대 예술의 새로운 징후를 파악했다. 이러한 현대성엔 보들레르가 창조해낸 미의 새념이 개입되어 있는데 " 모든 미는 , 모든 일어날 수 있는 현상들처럼, 영원한 어떤 것돠 순간적인 어떤 것"을, "절대적인 것과 독특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히 존속하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 변하는 부분을 예술의 육체로 생각하라" 순순한 것과 기괴한 것, 경악스러움과 익살스러움, 상상력은 예술가의 첫번째 자질, '아날로지의 그물을 과감하게 찢어버리는 아이러니. 죽음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기괴하고 촌스럽고 독특한 아이러니와 자연만불과 상응하는 아날로지를 시에 흡수하고 표현하려고 했다     스테판 말라르베(1842~1898)          순수관념으로서의 시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화자로서의 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시인은 낱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한다. 낱말들은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원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 상호간의 반영으로 점화된다   개인적 감성을 배제시킨 사물과 현상의 '순수관념'   아르튀르 랭보(1854~1891)                       견자(見者)의 시 나는 감히 견자이어야 하며 의식적으로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견자란,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자, 투시자, 깨달은 자, 초자연의 본질적 세계를 파악한자,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감각의 착란....시인은 나를 버리고 타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생각되어진다의 코키토   폴 발레리(1871~1945)              순수시—시의 음악성 ​ 신들은 고맙게도 어떤 시의 첫 구절은 공짜로 준다. 그것과 화음을 이룰 둘째 구절을 불러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렇게 하나의 단어로 시작되는 시는 ‘아직 말을 더듬거리기 때문에’ 우발적인 단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는데, 그 단어들은 ‘놀라우리만큼 정확하게’ 또 다른 단어를 불러온다.   리듬에서 시작하여 의미와 이미지를 찾아내는 시작법, "단어가 단어를 불러온다"   고트프리트 벤(1886~1956)                   절대시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   언어를운용하고 배열하고 짜맞추는 '공작성'을 시창작의 제1명제로 삼았다. 시에는 우연의 요소가 들어 잇어서는 안된다. "서정시인은 밀려드는 우연에 대항해서 자기 시를 밀폐시켜야 한다" 이 때의 우연이란 외부세계로부터 촉발되는 시적안 감흥을 의미하는데 , 이를 차단시킬 때 '절대시'가 탄생된다는 것이다. 절대시, 믿음이 없는 시, 희망이 없는 시,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시, 당신들이 매혹적으로 짜맞추는 말로 된 시, "시상이 아니라 언어가 시를 쓰게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시의 효용   시를 통해서는 개인들이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개인들이 속한 계급도 표현된다. 또한 여러 시대의 모습이 시 속에 표현되는가 하면 인간의 격한 감정 역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결국 표현되는 것은 ‘인간 그 자체’다.    '사회적 자아'와 일치되는 '시적 자아' .. 상징주의 이분법을 극복시킨 시적주체. 화법상의 모든 장식적이고 감상적인 액서서리를 벗어던짐 언어세척,, 새로운 내용만이 새로운 형식을 지탱할 수 있다.   에즈라 파운드(1885~1972)                   시와 이미지 ​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시작법원칙 1, 사물을 보듯이 그려내야 한다 2, 미적이어야 한다 3, 교훈적 경향에서 탈피하라 4,다른 시를 더 좋게 또는 더 간단하게 반복하라.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 좋은 글의 3원칙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룰 것 2, 표현에 도움이 안되는 말은절대 사용하디 말 것 3, 리듬은 메트로놈의 규칙에 따르기 보다 음작적 구절의연속성을 따라할 것   시의 세가지 언어   청각적 언어인 음악시 시각적 언어인 회화시 직적접인 의미와 문맥에 기초를 둔 언어시  이 세가지는 한편의 시에 모두 나타나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키는 동시성의 기법   T. S. 엘리엇(1888~1965)            시의 화자—탈(脫)개성의 시   예술가의 과정은 계속적인 자기희생의 과정, 즉 계속적인 개성 소멸의 과정이다.     '경험적 자아를 희생시킨 페르소나 를 활용하여 시의 다중인격을 창출, 이들의 극적인 독백이 현대시의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앙드레 브르통(1892~1966)                초현실의 시—무의식의 메시지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미와 추,진실과 허위, 선과 악" 등의 관념을 초월한 자리에 초현실주의가 있다. 감각적 체험의 재생이 아닌, 생소하고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이미지라고 보았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시 자유연합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미래주의—투쟁의 시   왜 어째서 문학은 한쪽 구석으로 몰려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신문에, 매일같이 모든 페이지마다 실려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디저트 정도로만 내놓는 문학 따위라면 죽어버려야 한다.   이념으로서의 문학, 도구로서의 문학,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내용을 창조한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 시와 영감(靈感)   "예술 작품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기법 뿐 아니라 영감이라는거대하고도 신비로운 불꽃이 필요하다.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파울 첼란(1920~1970)   시와 현실   "시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며. 움직임이며, 또한 유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 질문은 시계의 시침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시는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물론 시는 무한성에 대한 요청이 있지만 시대를 관통합니다 시대를 관통하지만 그것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의 푸가 고통받는 언어 불구의 언어, 기존의 어법과 신조어를 동시에 사용, 언어해체   옥타비오 파스(1914~1998) 무의식의 시—타자의 언어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갖는다. 마치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말들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 시는 계시이지 설명이 아니다. 일상의 언어를 붕괴시킴으로써, 새로운 시가 탄생한다. 언어는 은유이며 마법적 도구,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시인은 언어의 주술사, 영매와 다름없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고 보상이고 응집,     파블로 네루다(1903~1974) 광장의 언어—해방의 언어   대낮에 광장에서 읽는 시가 되어야 한다. 책이란 숱한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이 지은 시를 소중하게 낭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야생의 자연, 시의 원적지, 거리에서 주워온 말로 시를 쓴다. 누구나 똑 같이 나눠가질 수 있는 빵과도 같은 시... 만인의 시, 나는 나의 시들에게서는 더 단순해지려고 했다. 매일같이 더 단순해지려고.. 사물의 내부를 파헤치려는 전위적 실험을 거쳐 라틴아메리카위 역사를 노래하다      [저자 소개]   오정국 시인 1956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문학박사).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문학평론집 『시의 탄생, 설화의 재생』 『비극적 서사의 서정적 풍경』을 펴냈다.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서대 인문사회학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06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댓글:  조회:1546  추천:0  2018-08-25
영감靈感편 /옥타비오파스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2) 『신생Vita nuova』, XII.(원주) 3) 단테는 아홉 살 때, 처음으로 사랑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났다고 했다. 다시 구년 뒤, 정확히 아홉시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환상은 오전이나 오후 아홉시에 일어났다. 베아트리체는 13세기의 90년에 죽었다. 즉 성스러운 숫자인 10이 아홉 번 겹친 해였던 것이다. 또한 네르발은 그의 작품 『아우렐리아』의 곳곳에서 자기 생에서 7이란 숫자가 가졌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주) 223     네르발은 흠칫 놀라며 매혹되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았고, 그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의 꿈을 직시하여 그 비밀을 밝혀내고자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길, 어쨌든 나의 감정들을 찾아내는 대신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내 모든 의지로 무장한 채 이 비밀의 문을 열어제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매혹적이고 두려운 환상을 이겨내는 것, 우리들의 이성을 조롱하는 정령들에게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가?"    단테에게 영감은, 시인이 겸양과 겸손과 경배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초자연적인 신비였다. 네르발에게 그것은 우리에게 싸움을 걸고 도전해오는 재난이며 신비였고, 밝혀내야할 그것이었다. '해독해야 할 신비'와 '풀어야 할 숙제' 사이의 왕래는 쉽게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이 점은 네르발의 계승자들이 풀어야 할 과제였다.  
305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546  추천:0  2018-08-22
시와 세기말 / 옥타비오 파스      1. 소수와 다수    ‘시를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누가 시를 읽는가?’라는 비슷한 질문에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자신의 어느 시집에서 “거대한 소수에게 바침”이라는 헌사로 대답했다. ‘소수’라는 명사는 독자의 수를 스탕달의“행복한 소수”로 환원하지만, ‘거대한’이라는 형용사는 ‘소수’라는 명사를 별안간 ‘소수가 곧 다수’라는 뜻으로 확장시킨다. 히메네스는 헤아릴 수 있는 다수라는 상대적 개념에 반하여 비교 불가능한 소수라는 절대적 개념을 내세웠다.  시를 읽는 독자는, 아무리 그 수가 늘어나도 사회적으로 한상 소수에 속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거대한 무엇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소수이면서 다수인 시의 독자는 불가공약적인 현실로 들어가고, 그 언어의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무한성을 발견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를 초개인적인 공간, 즉 말 그대로 거대한 공간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기술과 사회적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속될 것이다. 사회적 쟁점들과 영웅들은 간 곳 없지만, 시와 그림과 교향곡은 의구하다. 물론 과학과 철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소수의 작업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인가 다수인가 하는 수치상의 문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가지려면 두 가지 문제가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공간적인 분리로서 대중과 관람자의 다양성의 문제다. 둘째는 시간적인 지속성으로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독자와 청중의 연속성이다. 다양성과 지속성모두 단순한 숫자상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은 늘 주의가 산만한 상태로 살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의 일상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비밀스럽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산만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하찮고 무분별한 소란스러움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의 산만함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올바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독서는 정찰이다. 광고와 의미 없는 의사소통이 난무하는 시대에 몇 사람이나 그런 독서를 할 수 있을까?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라, 그 소수의 독자들에게 우리의 문명의 지속성이 달려 있다.    근대가 시작될 때부터 시는 근대성과 이중의 관계를 맺어왔다. 시와 근대성 사이의 갈등은 19 세기 말에 두드러졌고, 20세기 초반 전위주의에 이르러 갈등은 불화로 변했다. 시는 정통족인 도덕적, 미학적 가치를 무시했고 종종 비웃기까지 했다. 시는 언어의 지반을 붕괴 시켰고 기화와 그 의미를 변형시켰다. 또한 시는 매혹적인 언어의 과물이 거주하는 세계를 건설하기도 했고, 의식을 빨아들이는 투명한 누속임의 연못을 만들기도 했다. 시에 대한 대중적 무관심은 시인들이 매혹되었고 동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던 근대성을 실현시킨 부르주아 계급이 시에 보인 반응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먼저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상징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 전위주의자들에 의해서 불신되고 무시되었다. 근대 예술에 대한 반감을 정당화하고 부추긴 것은 적의에 찬 강단 비평과 악의적인 무지한 언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화는 파국으로 치달을 만큼 총체적이진ㄴ 않았고, 근대성과 시 사이의 불화는 필연적이었다.    근대시는 그것이 ‘근대적’이기 떼문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 시를 읽는 독자들도 동일한 과정으로 인해 자신이 근대인이란 것을 느낀다. 근대성은 탄생과 더불어 스스로와 끊임없이 투쟁해 왔다. 여기에 근대의 이중성이 있고, 지속적인 변화와 변모의 비밀이 숨어 있다.    2.양적기준과 가치    시는 다른 영역, 특히 에로티시즘, 우정, 쾌락, 신에 대한 경건함과 불운한 이웃에 대한 동정심(프리아모스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감정), 고독, 우울함에서 오는 쓰디쓴 쾌락, 허약한 기억 같은 친밀한 삶의 영역에도 깊숙이 영향을 미쳤다. 시인들은 우리에게 선망, 관능성, 잔인함, 위선, 콤플렉스 같은 인간의 정념을 가르쳐주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주었다.  시적 전통은 공간 축과 시간 축이 교차한 결과이다. 공간 축은 끊임없이 상호 의사 소통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시간 축은 세대를 이어가는 시인과 독자의 연속성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한 지역의 독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의사 소통은 신선한 젊음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시적 전통을 풍요롭게 한다.  근대적 출판체제에서는 모든 장소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조차도, ‘여기’에 있다. 여기는 바로 ‘지금’이다. 공간축은 시간축이 된다. 시장의 작용은 시적 전통을 형성하는 시간 축도 부식시킨다. 지금이 특권을 갖게 됨으로써 우리를 과거와 연결시키는 매듭을 끊어버린다. 18세기부터 서양문명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순례를 인도하는 안내자는 진보라는 개념의 북극성이다. 몇 년 전부터 그 별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현재가 그 영광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부동할 뿐 상승하지 못하며, 움직일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무게없는 현재이다.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재이다. 목표가 증발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수단이 증가한다. 현대인의 현재는 동쪽도 없고 북쪽도 없는, 그야말로 방향을 상실한 현재다. 문학적 전통 내에서 현재의 확장은 순간적인 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추세로 나타난다. 이제 완전함의 속성은 지속이라기 보다는 재빠른 소비이다. 과거는 실종되고 미래는 희미하다. 현재 또한 순간을 향하여 날을 세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증발한다. 순간은 폭발음과 함께 사라진다.  시인 한사람 한사람은 전통이라는 강의 한 맥박이며 언어의 한 순간이다. 때때로 시인들이 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전통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주기적이며 근대에 들어와 더 두드러진다. 낭만주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운동은 자신의 전통을 만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시인들의 명단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패러디였으며 대학의 졸업 시험에 대한 패러디였다. 시인은 자신의 쇠사슬의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즉 어제와 내일을 잇는 다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갑자기 그 다리가 두 개의 까마득한 심연-멀어져가는 과거라는 심연과 붕괴되는 미래라는 심연- 사이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했다. 시인은 시간 속에 길을 잃었음을 느낀다.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시적 형식인데, 형식은 죽음과 세월의 마모에 저항하는 인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형식은 지속을 위한 것이다. 형식은 때로는 도전이며, 때로는 요새이고, 또 때로는 기념비 이지만, 언제나 오래도록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새롭게 응축되고 변형된 시간은 현실적 시간에 맞서 불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건축물이 되고자 한다.    3. 균형과 예측    시 운동의 부재는 우리 시대가 경험하고 있는 커다란 변화 중의 하나를 반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절의 전통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성이 끝나고 있거나 혹은 달라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중의 하나다.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다른 시대가 시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대는 근대의 변형인가? 새로운 시작이건 근대의 변형이건 간에 세기말의 표식은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불확실성의 시대도 시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에서는 늘 풍성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시의 건강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상황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에 수익의 기준이 도입됨으로써 예술을 타락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생산을 자극한다. 어쨌든 시는 지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또한 시에 대한 긍정적인 표시들을 보면, 분산되어 있지만 광업위한 독자들이 있고 그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시인들이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사회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중남미와 다른 곳에서는 시인이 여전히 대중적인 인물들이다. 러시아와 중국, 중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시인들이 공산주의 관료제도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왔다.  부정과 긍정, 단절과 유대의 이중적인 운동은 모든 문학의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이며 특히 근대문학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문학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운동이 보이지 않은 것이 불안한 징조이다. 근대에서 소우의 행동은 문학적 전통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왔다. 잡지와 작은 출판사 같은 소수집단의 활동이 가설적인 전원 합의를 위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문학이라는 생명체를 불구로 만들고 혹은 죽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의 몬든 영역에서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현대문학에 무엇인가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아니다NO’라는 말이 아니며, ‘아니다’는 그 다음에 올 대긍정을 예비하는 알람이다.  시가 노래하는 것은 지금 지나쳐가는 것들이다. 시의 기능은 일상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가시화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가장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임무라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신곡이나 실낙원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역사와 혼재되어 있는 시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사랑이나 결투, 고독이나 집단적 환희를 표현하는 노래와 로망스가 만들어졌다.    *보들레르의「젊은 시인들에게 주는 충고」의 몇 구절을 보면 “나는 열심히 시를 쓰는 재능있는 젊은 시인들에게 결코 시를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시는 결실이 풍요로운 예술이다. 시는 고양된 결실을 거두기 위한 일종의 투자지만 수확을 거두는 일은 매우 더디다.”    근대 과학 기술과 시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대립을 제시해보면, 첫 번째 대립은 세계의 이미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 즉 세계를 바꾸려는 행동, 어떤 면에서는 세계를 추방시키려는 행동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대립은 언제나 세계의 비전에 관한 것이다. 시가 이미 새로운 의사소통의 방법들을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시인들에게 말한다. 대중 앞에서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는 시의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째 카세트의 보급률이 늘어나면서 시청률의 횡포에서 벗어나 대중을 향한 길이 열리고 있다. 둘째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커다란 두 갈래의 시 전통, 즉 구어체의 전통과 문어체의 전통이 합류된다. 이런 방업은 책과 인쇄술만큼이나 심원한 방법으로 시의 발표와 수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시각과 청각, 이미지와 말이라는 인간이 갖는 두 가지의 특권적인 감각 사이에 결합이 이우러질 것이다. 그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미학적 쾌락과 시적 경험, 즉 축제와 관조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축제는 참여와 교감의 예술이며, 관조는 우주와 나누는 침묵의 대화이다.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미래의 시에서는 두 가지의 경험이 결합될 것이다. 축제와 관조: 화면이라는 살아 있는 페이지 위에 색깔과 움직임을 갖는 기호들, 선들, 이미지들이 솟아올라 인쇄될 것이다. 목소리들은 울림과 반향의 기호학, 소리와 의미가 결합된 공기의 천을 수놓을 것이다.    4. 타자의 목소리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시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열과 계시의 소리이고,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 지금의 소리이며 동시에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시는 이단적이고 이교도적이며, 순수하면서 퇴폐적이고, 깨끗하면서도 진흙투성이이고, 하늘에 떠 있으면서 땅속에 숨어있고, 고요한 암자의 것이면서 동시에 거리 한 모퉁이의 카페의 것이고,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저 멀리 비껴 있는 존재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거나, 반복적이건 일회적이건 간에 그들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시인들은 다른 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타인의 것이고, 누구의 것이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다. 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타인이 되는 그 드문 순간에 그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근대 시인의 특성은 그의 행동이나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성에서 온다. 차라리 그 음성이 깃들여 있는 어조에서 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의 할 수도, 혼동될 수도 없는 어조여서 필연적으로 그 소리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원죄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다름의 표시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갈라지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눈물과 데모크리토스의 웃음사이에서 동요된 우리 시의 반근대적인 근대성은 진정한 위반을 뜻한다. 그러나 그 위반은 거의 항상 무의식적으로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나타난다. 위반은 앞서 말했듯이 근원적인 차이에서 싹튼다. 그것은 근대에서 시가 부속품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는 그 주제, 언어,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근대적일 수 있지만 그 깊은 본성은 반근대적인 음성일 수밖에 없다. 시는 근대성과는 동떨어진 현실, 가장 오래되고 역사의 변화와 무관한 내부적인 심층세계를 표현한다.    시는 비록 그 땅의 현실과 역사에 매여 있으나 실제로 표현되는 각각의 시는 항상 저 너머의 초역사적인 것을 향하여 열려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저 너머의 종교적인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대한 지각을 뜻하는 것이다.    시는 이미지화한 ‘기억’이고 또 음성으로 변한 이미지다. 다른 목소리는 저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각자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인간의 소리다.  시적인 사고가 작용하는 방식은 상상력이며 이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세계들을 관계지어주는 능력에 기초한다. 모든 형태의 시와 언어의 모든 형상은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상이한 사물들간에 감추어진 유사성을 찾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반대적인 것들까지도 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시의 작용은 언어를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두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살아있는 우주로 인식한다. 언어 내에서는 천체와 세포 간의, 입자와 인간간의 투쟁과 사랑 그리고 뭉침과 흩어짐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 주제, 형식, 그리고 사상이 어떻든 간에 각각의 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살아 있는 소우주다.    *시는 기술과 시장에 대한 해독제다. 바로 이것이 우리시대와 다가오는 시대에서의 시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특히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특수한 능력에서 나왔기 때문에 만일 상상력이 죽거나 썩게 되면 시도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시를 잊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혼돈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 '흙의 자식들' 中 '시의 세기말'    
304    <언어>편/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482  추천:0  2018-08-22
편(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 활과 리라 , 1998.)        1. 언어에 대한 인간의 태도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맨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35쪽)      갑자기 단어의 효능에 대한 믿음이 상시되자, 시인(아르튀르 랭보)은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말일까?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말없이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36쪽)      모든 철학의 모호성은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36쪽)      말은 인간 자신이다.(37쪽)      인간이 미지의 실재에 부딪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 즉 세례하는 일이다.(37쪽)        2.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것과 다른 점      (1) 인간의 일상어가 비할 데 없이 복합적이다.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하다.      (3) 마샬 어번이 설명하는 말의 세 가지 기능(39쪽)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이다.      -말은 감탄사와 의성어의 경우처럼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말은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어떤 외침에는 지시를 나타내는 미약한 징후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상징적이거나 혹은 표상적 기능이 있다고는 증명되지 않았다.(40쪽)        3. 언어의 발생과 전개      언어의 발생과 전개를,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점차적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예를 들어, 감탄사, 외침 혹은 의성어로부터 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가설들 역시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잡성을 과시한다.(40~41쪽)      일상 언어의 기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전문가들은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듯싶다 .(41쪽)      “시초부터 언어와 신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 언어와 신화의 기본적인 특성은 상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상징적 기능의 내부에 있는 철저한 은유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것이다.”(42쪽)        4. 인간과 언어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42쪽)        5. 언어와 시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상어는 시를 이루는 물질 혹은 자양분이지만 시는 아니다. 시와 시적 표현들—어제 발명되었거나 혹은 전통적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민중들이 오래 전부터 반복해온—의 차이점은, 시는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43쪽)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혹은 결합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시는 계속해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심원하고 원초적인 것을 만나러 가기 위한 많지 않은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45쪽)        6. 시적 창조와 언어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47쪽)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고 민중들은 음송을 통하여 시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이다. 순환적이라고 말해도 그다지 틀리지 않는 방법으로, 시인과 독자는 번갈아가면서 시라는 불꽃을 일으킨다 .(47~48쪽)      유머는 시가 사용하는 주된 무기 중의 하나이다.(49쪽)        7. 현대사회와 시      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근대의 특징은 시인이 주변부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사회에서 시는 부르주아 계급이 소화할 수 없는 양식이다. 계속해서 시를 길들이려고 시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군의 시인들이나 어느 시 운동이 이러한 시도에 굴복하여 사회적 질서에 복귀하자마자, 새로운 비판과 물의를 야기하는 또 다른 창조가 솟아나게 마련인데, 이것은 때로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49쪽)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50쪽)      근대의 정치적 당파들은 시인을 전도사로 만들어 타락시킨다.(51쪽)      우리 시대의 시는 사회와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고독과 반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 시인의 행위는 단지 개인과 소집단에만 행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성이 역으로 이 시대에 현대시가 가질 수 있는 유효성과 미래에 풍요롭게 꽃필 수 있는 토대가 된다.(53쪽)      한 사회의 피폐가 반드시 예술의 사멸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며 시인의 침묵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즉, 고독한 시인과 작품의 출현을 유발하는 것이다.(55쪽)      시가 만드는 말의 우주는 사전의 단어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단어들로 만들어져 있다. 시인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巨富)다.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를 뜻한다. 비의적 시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시인의 사명을 “부족의 말에 가장 순수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57쪽)      시인은 말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인가?(57쪽)      어디선가 발레리는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긴장이 곧 시라는 사실이다. 양자 중의 하나가 사라지면, 시는 기계적인 감탄사로 복귀하거나 혹은 장황한 부연, 묘사 혹은 정리로 변한다.(58쪽)      시는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이다.(58쪽)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가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언어를 순화하는 것은 시인의 과제이며, 이것은 언어에게 원래의 본성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말은 본래 다의적이다. 만일 시를 통하여 말이 자신의 본성, 다시 말해 동시에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사물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한다면, 시는 언어의 본질 자체인 의미화 작용 혹은 의미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쓸모없으며 동시에 기괴한 작업—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자산인 언어를 박탈하고 그 대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의 울림을 되돌려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시의 말들과 구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60쪽)     
303    활과 라라 / 옥타비오파스 [스크랩] 댓글:  조회:2114  추천:0  2018-08-11
시 →이중적 성격 앎 구원 힘 포기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은 양식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 들숨과 날숨 근육 운동 공을 향한 기원 무의 대화 시의 양식 : 권태 고뇌 절망 기도 탄원 현현 현존 악마를 쫓는 주문 맹세 마법 무의식의 승화 보상 응집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 경험 느낌 감정 직관 방향성이 없는 사유 우연의 소산 계산된 결과물 세련된 형식을 사용하여 말하는 기술이자 원시적 언어 규칙에 복종하며 동시에 다른 규칙들을 창조 선대를 흉내내는 것 실제의 모방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 광기 황홀경 로고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성교 낙원과 지옥, 연옥에 대한 향수 놀이 노동 금욕적 행위 고백 본래적 경험 비전 음악 상징 아날로지 교육 도덕 계시 춤 대화 독백 시의 기능 :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시적 행위 : 혁명적인 것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게 된다. 시편 →시의 표면 세상의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 시편의 운율과 각운 :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 울림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를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시적 경험이 개념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시적경험, 시편을 살펴보아야 한다. 시가 우연의 응축으로 주어질 때나 혹은 시인의 창조적 의지와는 다른 힘과 여건의 결정체로 주어질 때 우리는 시적인 것과 만나게 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 시를 표방하는 형식은 다양하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문은 시편을 하나의 장르로 환원시키려고 애쓰는데, 여기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1. 만일 시를 일단의 형식들, 즉 서사시, 서정시 극시로 환원한다면 많은 예외가 발생한다. 2. 분류가 가지는 표면적인 것에 대해서 한계가 드러난다. (이는 문체론에서부터 정신 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문학 비평이 이용하는 타문학적 방법론들에도 적용된다.)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 (부분이 곧 총체) 각각의 시문은 유일하며 환원 및 반복 불가능 다양성 역사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나 동일한 다양성이 존재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 그러나 같은 시인의 글일지라도 하나하나의 작품은 저마다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 모든 작품은 스스로의 생명을 가지며 때로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부정하기도 한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까지도 드러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인간의 생산품, 작품 하나하나의 시편은 창조의 순간에 소멸하는 ‘기술’에 의해서 창조되는 유일한 대상 스타일 일군의 예술가나 한 시대에 적용되는 공통된 방법 상속이며 변화, 집단적 방법이라는 면에서 기술과 유사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 모든 예술가는 역사적인 공동의 스타일을 뛰어넘으려 한다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 시인은 그 시대의 공통된 자산, 그 시대의 스타일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모방하지만 그러한 모든 자료들을 변화시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스타일 없이는 시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태어나고 자라서 죽지만 시편들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 시편 : 색깔이고 소리이면서 의미이기도 한 말로 이루어지는 애매한 존재 조형 예술, 조음 예술 : ‘의미하지 않음’에서 출발 양가적 유기체인 시편 : 의미를 품은 존재인 말에서 출발 의미와 작용이 결핍된 그 자체로의 색깔과 소리는 없다. 인간의 손에 닿음으로써 성질이 바뀌고 작품의 세계로 진입 - 모든 작품은 의미화 작용에 닻을 내림. 인간의 손길이 스치면 지향성에 물들게 되어 어딘가를 향하게 되는 것 (인간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 애매성, 모순, 광기 혹은 분규 따위는 허용하지만 의미의 결핍은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언어 말하여지거나 씌어진 언어와 조형적이거나 음악적인 언어 사이의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언어, 즉 의미를 나타내고 의사 소통할 수 있는 표현의 체계라는 사실은 공통된다.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 모든 작품들은 ‘~를 위한 것’ 그리고 ‘~를 향해 가는 것’이며 이것들은 필연적인 역사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에 닻을 내린다. (한 시대의 생산물들은 역사, 즉 스타일에 용해되어 있다.)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운문으로 씌어진 논문/ 그림- 교육적 삽화/ 가구- 조각 을 분리시키는 차이점, 차별적 요소는 시.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 : 시 -하나 : 산문 -다수 : 시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 시적기능 ↔ 기술적 조작 도구로 전락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졌던 재료는 예술 작품 속에서 본래의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이미지 그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초월하고 뛰어넘는 어떤 것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일차적인 가치, 원래의 무게를 잃지 않는 채, 피안에 닿는 다리가 되며 일상의 단순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기의들의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문이 된다. 다의적인 존재, 시적인 말은 온전히 있음이며 동시에 다른 사물, 즉 이미지 이다. 이미지는 듣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이미지의 성좌를 유발시키는 이상한 힘으로서 모든 예술을 시적으로 만든다.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 시는 의미와 의미의 전달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   가능성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그러나 시편에 대한 경험-독서나 음송을 통한 재창조- 역시 혼란스러운 다양성과 이질성을 보여준다. (독서는 거의 언제나 본래적 의미의 시와는 다른 것을 드러낸다.) 모든 독자들은 시편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을 통하여 찰나적으로 멈추어 있는 시의 번갯불을 본다. 그 순간은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흐름을 멈추지 않고 시간은 정지하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다. 시편은 개인의 성질이나 기질 그리고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모든 시편의 공통점 : 참여 독자가 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 넘는 것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 시편의 경험도 역사 속에서 주어지며, 역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부정한다. 이미지를 소생시키고 직선적 시간 개념을 부정하고 시간을 역전시킨다. 시편 : 중재 역할 ~ 태초의 시간 - 순간 속에 육화 ~ 직선적 시간 - 순수한 현재로 변화 (쉬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하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 시편을 읽는 것 ≒ 시적 창조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   시편이란 것이 고유하게 존재하는가? 시편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 언어들은 어떻게 의사 소통하는가?   시편 :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 시 :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편   기호 ≠ 대상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 사이의 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위기의 시대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일치한다. “난 내 무릎 위에 상처난 아름다움을 길게 뉘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말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 사물도 똑같이 피를 흘린다.   모든 철학의 모호성 → 철학이 언어에 치명적으로 예속되어 있기 때문 인간은 말로 된 존재 그리고 말도 인간처럼 태어나고 죽기 때문에 말을 이용하는 모든 철학은 역사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한 쪽에는 말이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단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다. 말은 우리의 유일한 실재이거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실재를 표현하는 유일한 증거이다. 언어 없이 사유는 존재할 수 없으며 앎의 대상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인간 실존의 조건인 것이지,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대상도, 체계도, 유기체도 아니다. 언어에 대한 연구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학문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언어의 기원 ○동물의 의미화 작용이 발전하여 사람의 언어가 되었다는 주장 이의 제기 : 1. 인간의 일상어는 복합적 2. 동물의 언어에는 추상적 사유가 부재 →이런 유의점은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   마샬 어번 : 말의 세가지 기능 1. 말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이름 2.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자극에 본능적,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감탄사 의성어) 3. 표상으로서의 기호이며 상징 →의미화 작용 : 지시적, 감정적, 표상적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해서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러한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 언어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단순한 것(감탄사, 외침 의성어) → 지시적, 상징적인 표현 원시 언어들도 대단한 복합성을 지님. 거의 모든 고대 언어들에는 구나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는 말이 존재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이행은 자연 과학에서는 확실하지만 문화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언어에 대한 동물적 기원의 가설~ “언어를 표현적인 운동의 장”에 포함시킨다는 면에서 독창성을 지님 제스처와 동작은 의미화 작용(지시, 감정, 표상)을 가진다.   언어와 신화 : 은유 “모든 말들과 언어의 형태들이 일차적으로 신화적 성격을 갖는다.” 언어와 신화는 실재에 대한 광범위한 은유 언어의 본질 : 상징적인 것 ~ 실재의 한 가지 요소를 다른 것으로 표상하기 때문 인간은 말 덕분에, 즉 인간을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자연의 세계에서 분리시켜주는 원초적 은유 덕분에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창조할 때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은유가 된다.   이미지와 운율을 띤 언어적 형상의 계속적인 산출은 일상어의 상징적 특성, 시적 성격을 증거한다. 언어는 자발적으로 은유로 구체화되려는 경향이 있다. 언어 한복판의 내전 : 모든 것은 하나를 향하여 투쟁하고 하나는 모든 것을 향해 투쟁한다.   시와 시적 표현(일상어)의 차이 시 :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도 시적 표현 : 일상어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며 인구에 회자되는 언어들의 왕복 운동의 결과   말과 대상사이의 거리 말이 지시하는 것의 은유로 변화할 때, 어쩔 수 없이 말에 강요되는 거리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자마자 자연 세계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의 내부에서 타자가 되었다. 말이 지시하는 실재와 말이 동일하지 않은 것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 그리고 더욱 심층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의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은 다리이며 이 다리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을 외부 세계와 분리시키는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는 인간 본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거리 소멸 1. 인간됨을 포기하고 자연 세계로 돌아감 2. 인간됨의 한계를 초월 모든 역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거리 소멸의 시도는 근대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나타남 현대시 1. 마법적 가치에 대한 철저한 긍정 2. 혁명적 소명 양극으로의 운동 : 인간 자신의 조건에 대한 인간의 반역   세계와 인간 사이에 원초적인 단일성이 회복된다면, 소외가 사라지면 언어도 사라질 것이다.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은 그보다 먼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계와 화해하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의지 창조적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시가 존재할 수 없다. 말이 갖는 창조적 힘은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에게 있다. 언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 : 인간 모든 것은 의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신은 불가분의 총체   무심(無心)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위반 시적 창조는 언어에 대한 위반으로 시작한다. 1. 말들은 지탱하고 있는 뿌리를 뒤흔드는 일 시인은 일상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들과 맺고 있는 연관 관계에서 말들을 뿌리째 뽑아내어 일상적 언어의 획일적인 세계와 결별시킨다. 이때 단어들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 된다. 2. 말을 원초적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 시는 소통의 대상으로 변한다.   시의 두 가지 적대적인 힘 -언어로부터 말을 뿌리째 뽑아내는 상승 혹은 적출의 힘 -말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중력의 힘 시는 독창적이며 유일한 것이지만 독서와 음송을 통한 소통이기도 하다. 시인과 독자는 동일한 실재의 두 순간일 뿐   공용어 결별과 복귀의 두 작용은 시가 공용어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 도시, 국가, 계급, 동아리 혹은 분파가 뜻하는 집단의 언어   유럽 민족들의 언어가 창조될 때, 전설과 서사시들은 그 민족 자체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심층적인 의미에서는, 그 민족들에게 그들 자신에 대한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민족 수립의 토대를 세웠다. →시로 인하여 각 민족의 공용어는 원형의 가치를 지닌 신화적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근대시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추방당하고 탈퇴한 사람들의 양식으로 변했다. 반역의 시가 가능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언어로 시가 쓰인다.   ‘시인이 속한 집단이 무엇이든지 간에, 시인의 언어는 집단의 언어이다.’ 시인 - 연통관(통과의례, 공범관계) - 집단 현재, 분열의 과정   근대가 각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공허의 장벽을 제거하기를 원하는 많은 현대 시인들은 잃어버린 청중을 찾으려고 민중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제 민중은 없고 조직된 대중이 있을 뿐이다. 시인이 관리로 변했다.   이데올로기들과 관념 그리고 여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의식의 가장 바깥 표피층을 구성하는 반면에, 시는 존재의 가장 심층에 거주한다. 시는 공동체의 생생한 언어, 신화, 꿈 그리고 열정들, 다시 말해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성향들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시는 민중의 토대를 세우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시원의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다. 사회는 시에서 자신의 존재의 토대, 즉 자신의 맨 처음 말과 마주선다. 그 본래적 말을 하면서 인간은 성장해왔다.   시인이 자신의 추방 -진정한 반역의 유일한 가능성- 을 포기한다면, 시도 포기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추방이 합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이중의 오류 전도 시인 : 민중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믿음 민중: 시의 언어를 듣고 있다고 믿는 것   모호함 시적 창조는 언제나 수평적 완만함의 저항을 받기 마련 모든 작품이 갖는 어려움은 그것의 혁신성에 기인 습관적인 쓰임에서 떨어져 나와 대화와 담론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편입된 말들은 자극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창조는 모호성을 야기 시적 즐거움은 창조의 어려움과 유사한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주어지는 것   모든 신성한 말은 비밀스러운 것 그리고 모든 비밀스러운 말들은 신성함과 닿아 있다. 비의적 시편의 시의 위대함과 역사의 빈곤함을 선언한다.   특정한 사회의 가치에 반대하는 위대한 비의적 시인 혹은 반역적인 시 운동이 나타날 때마다,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시가 아니라 사회라는 사실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원인 1. 공통적 언어의 부재 2. 고독한 노래 앞에 사회가 귀를 막고 있다 시인이 고독하다는 것은 사회가 하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창조는 언제나 일정한 높이에서 역사적 수준의 하강을 고발한다. 가끔씩 난해한 시인들이 더욱 높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관점의 오류이다. 그들이 높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영역을 떠나 시의 말이 될 때. 시인은 자신의 말을 선택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과 같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에게 속하는 말과 거리에서 배운 다른 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한다. 시인은 그의 말을 발견할 때 그 말이 이미 자기 자신 속에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릭 그도 이미 그 말 속에 있었다. 시인 = 시인의 말 창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 의식에 떠오른다. 다른 말이 아니라 꼭 그 말인 것이다.   시의 말들은 모두 유일. 동의어가 없다. 유일하고 움직일 수 없는 것이어서, 단어 하나에 상처를 입히면 시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된다.   시인의 말도 역시 공동체의 말 시인은 살아 있는 목소리의 거부 개인적 언어는 시인에 의해서 드러나거나 혹은 변형된 공통의 언어   시가 말을 순화한다 “시는 감정적 외침이 발전된 것이다.” 발전과 감정적 외침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존재한다. 긴장 = 시 발전의 주체 : 감정적 외침이 시사하는 총체적이고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그러한 실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창조해가는 언어 시 : 감정적 외침이 말하지 못한 것을 듣는 귀   시인은 말에게 봉사하는 자이다 말에 봉사함으로써, 말에게 말의 충만한 본성을 되돌려주며, 말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게 한다. 시 덕분에 언어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일반적으로 사유에 의해서 손상된 조형적이고 음성적인 사치를 회복하게 되며, 이어서 정감적인 가치를, 마지막으로 의미를 나타내는 가치를 회복한다.    리듬 구 고립된 단어는 의미 단위를 구성할 수 없다. 토막난 단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가 아니다. 우연에 맡겨진 낱말들의 연속도 언어가 아니다.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기호들과 소리들이 의미를 암시하고 전달하도록 조합되어야 한다. 일상어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구성하는 것 : 구 혹은 문   각각의 시는 언어와 언어의 세포인 구와 같이 복합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성격을 갖는다. 모든 시는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는 총체성이다. 시의 세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핵 : 구 운문적 구를 구성하며 언어를 만드는 단위 : 리듬   시인과 리듬 단어가 갖는 마법적인 힘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어떤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든 단어들은 상응 일상어는 별과 식물을 다스리는 것과 비슷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집합   사유, 구 역시 리듬, 부름, 울림 사유한다는 것은 적절한 음률을 타는 것 노여움, 열광, 분노 그리고 우리를 우리 밖으로 팽개치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우리는 해방시키는 힘을 갖는다. 대화 : 함의 이상의 어떤 것. 화음   언어는 인간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 처음에 말들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서 서로 결합 어떤 질서가 말들 사이의 친밀성과 거부감을 다스린다. →모든 언어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 시인이 모델로 삼는 것은 모든 언어를 움직이는 리듬 (리듬 = 자석) 시적 창조는 유혹의 동인으로서 리듬의 자연적 흐름을 이용한다   시인은 언어가 무엇인지 혹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목적 그 자체를 위하여 그것들을 이용할 뿐이다. 시인의 언어는 자신 안에 있으며 오직 그에게만 드러난다. 시적 계시는 내면적 탐색을 포함한다. 이미지의 출현에 적절한 수동성을 야기할 수 있는 정신적 활동   예 : 말라르메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의 긴장은 그 자신에게서만 수행된다. 그의 선명성은 자신을 태워버림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법적 복제 - 조화로운 우주로 인식되는 단 하나의 작품- 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시도와 특히 그러한 언어를 연극의 장으로, 인간과의 대화로 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하나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이렇게 지배적인 리듬의 기능은 시를 다른 모든 문학적 형태들로부터 구별한다. 시는 리듬 위에 세워진 언어적 질서, 즉 구들의 집합이다.   리듬 타격과 휴지의 연속은 어떠한 지향성, 즉 방향과 같은 어떤 것을 드러낸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램을 떠받치고 있다. 리듬은 우리 안에 어떤 감정의 상태를 유발시키는데, 그 감정은 ‘어떤 것’이 돌출될 때에만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다. 리듬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그 어떤 것이 무언인지 모를지라도, 우리는 리듬이 어떤 것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느낀다. 리듬 : 방향성, 느낌, 원초적 시간   리듬이 우리 앞에 전개될 때, 시간과 더불어 우리가 지나간다. ‘……를 향하여 가는 것’ 그곳은 우리가 무엇인지 드러날 때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리듬에 우리를 부어넣고 ‘어떤 것’을 향하여 우리는 발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리듬은 의미이며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의 단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러한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이 이미 말하고 있다. 제의와 신화적 이야기는 리듬과 의미를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듬 -어떤 힘들을 매혹시켜 사로잡고, 다른 힘들을 쫓아내는 즉각적인 목표를 갖는 마법적 방법 -기념하기 위한 것, 신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것 -우주적 운율의 닮은 꼴, 인간이 원했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힘 -제의   운문에는 이미 구와 구의 가능한 의미화 작용이 잠재태로 있다. 장중한 리듬이 있는가 하면 경쾌한 리듬도 있고, 춤추는 리듬이 있는가하면 장엄한 리듬도 있고, 희열에 찬 리듬이 있는가 하면 슬픔에 찬 리듬도 있는 것. 인간과 리듬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리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리듬은 인간의 모든 창조의 뿌리이다. 역사 자체가 리듬이다. 각각의 문명의 원초적 리듬의 발전으로 환원될 수 있다. 예) 중국인- 음과 양 / 아즈텍인 - 사박자 리듬 / 히브리인 - 이원적 리듬 / 그리스인 -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 / 서구의 근대 문명 - 삼박자 리듬   리듬은 우주의 생생한 이미지이며 우주의 법칙이 현시적으로 드러난 것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리듬은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결정적 사실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지속적이며 단순한 표명   리듬을 동질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순수한 측량으로 환원시키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리듬을 추상화하고 합리적인 도식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각각의 리듬은 세계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다. 이미지이고 의미인 리듬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표현하는 우리 자신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세계의 이미지   리듬의 기능 리듬의 반복에 의하여 신화는 되돌아온다 “시간의 신화적 표상은 본질적으로 리듬 같은 것이다. 종교와 마법에서 달력의 역할은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리듬화하는 것이다”(원초적인 시간을돌아오게 하는 것) 시에서 내용이 없는 동질적 연속성의 시간이 리듬으로 변화한다 비극, 서사시, 노래 등의 시는 반복하여 순간을 재창조하는데, 그 순간은 원형적 사건 혹은 그 사건들의 집합이다.   이야기 속의 시간은 연속성을 단념한다. 지금 되고 있는, 지금 생성되고 있는 시간 재상되는, 재현되는 과거   시간의 재현 방법 1. 시적 창조의 순간 2. 독자가 그 순간을 새로이 소환하여 시인의 이미지를 소생시켜 재창조 할 때 시편은 어떤 입술이 리듬이 깃들인 구들은 반복하자마자 현실화되는 원형적 시간이다. 이러한 구들이 우리가 운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의 기능은 시간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모방적 재생산이라는 말을 시인이 원형을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진실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시가 그런 의미에서 모방적 창조일 때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는 서정시인조차도 미래에 다가올 과거를 소환한다   시적 리듬은 미래이며 현재인 그러한 과거, 즉 우리 자신을 현재화하는 것 시구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시간 : 리듬, 근원적 시간, 영원히 재창조 되는 것,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죽고 또 다시 새로 태어나는 것     운문과 산문      산문과 시를 구분하는 방법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리듬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적어도 모든 리듬은 언어를 암시하거나 예시한다. 모든 언어적 표현은 리듬   리듬은 모든 언어적 형태에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가장 충만되게 나타나는 것은 시 리듬이 없이는 시가 될 수 없으며, 리듬만으로는 산문이 될 수 없다. 리듬은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인 반면, 산문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산문 작가는 일관성과 개념적 명료성을 추구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로 명시되고자 하는 운율의 숙명적인 흐름에 저항   시 : 인간 표현의 자연스러운 형태 산문 : 비판과 분석의 도구. 점진적인 성숙을 요구, 일상어를 길들이고자 하는 일련의 기나긴 노력 뒤에 생겨나는 것   산문의 진척도는 사유가 말을 정복한 정도로 가늠된다.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에 대항한 영원한 싸움을 통해 성장 산문의 가장 완벽한 형태 : 담론, 예증   시는 닫혀진 질서, 산문은 열리고 직선적인 건축물 산문 : 사열, 개념들과 사건들에 대한 사실적 이론, 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산문의 원형- 담론과 이야기, 사색과 역사 시 : 원형 혹은 구형으로 존재, 자기 자신에게 닫혀있는 어떤 것, 자족적인 우주, 그 안에서 종말은 되돌아오고 반복되고 재창조된다. 끊임없는 반복과 재창조=리듬   운율vs리듬 운율과 리듬은 동일하지 않다 리듬 : 구와 떼어놓을 수 없다. 이미지이며 의미, 리듬 이미지 그리고 의미는 분리 불가분의 조밀한 단위들인 시구와 시행에 동시에 주어져 있다, 독자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질이고 구체적인 내용 운율 : 이미지와는 별개로 추상적인 음격, 각각의 시행에 필요한 음절과 강세, 의미가 빠진 음격   운율과 리듬의 구별은 바르게 운을 맞춘 많은 수의 작품들을 시라고 부를 수 없게 한다. 문학 안내서는 타성에 젖어 운율이 맞는 작품만을 시로 취급한다. 구는 개념적 질서 혹은 이야기에 복종하여 전개되지 않고, 이미지와 리듬의 법칙에 이끌린다. 거기에는 시의 확실한 표징인 이미지와 강세, 그리고 리듬의 간만이 있다. 자유시는 리듬의 통일성이다.   리듬이 언어 자체와 혼동되는 반면, 운율은 역사적이다. 근대 언어에서 운율은 음수율, 즉 강세와 휴지에 의해서 끊어졌다 이어지는 지속으로 이루어진다. 음수율적 음격은 추상성의 원리, 수사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반성을 암시한다.   서구 근대 언어들에서 언어의 자연스러운 경향성과 추상적 사유의 강제성 사이의 투쟁은 운율의 이중성을 통하여 표현된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예) 프랑스와 영국의 근대시의 발전 예) 스페인 스페인어권 근대시는 산문과 운문, 리듬과 운율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리듬과 이미지는 분리 불가능하다. 시행, 즉 리듬을 갖는 구가 또한 의미를 갖는 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단지 이미지만이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정의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 모든 언어적 형태, 시인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 각각의 이미지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 이미지는 인간 조건의 표식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학적 법칙과 시의 차이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미지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을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지 ‘~이 될 수 있다’가 아니다   이미지를 이해하는 틀 시를 읽는 해석의 틀1 변증법 시를 읽는 해석의 틀2 뤼파스코 : 상보적 모순의 원리 But. 이는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는 대립되는 것들의 역동적이고 필연적인 공존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최종적인 동일성도 선언한다 각각의 용어가 갖는 특성을 환원시키는 것도 아니고 변형시키는 것도 아닌 이러한 화해는 아직껏 서양의 사유가 뛰어넘지도, 뚫고 나가지도 못하는 벽이다   찬도가야 우파니샤드 : “네가 바로 저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대립은 상대적이며 동시에 필연적이만, 베타적으로 보이는 용어들 사이에 적의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 과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 우리의 모든 활동 :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의미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언어로 되어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때문이다. 장자 :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언어와 이미지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은 거두어 고양시킨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이미지의 의미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 창조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미지들이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언인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시와 이미지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심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   이미지의 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 어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러낸다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 →동일한 과정이 목격 ~실재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그 다양성이 최종적인 통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지에서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름과 이름붙여진 것은 같은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것은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그 자체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 않고 현실을, 문자 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 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하는 것)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며 타자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 시는 ‘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1부 시편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적계시   피안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 - 원초적인 순간의 재창조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의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 부재에 대한 증거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   피할 수 없는 두가지 문제 1.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 2.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인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 종교와의 교전 :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   ‘신성한 것’에 대한 연구사 의식, 제의의 주체 → 원시인, 정신병자(우리와 다른 사람) ->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 → 사회제도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 제의, 신화, 축제, 전설 - ‘물질화’ 대상화 사물화 ->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신성함 :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   신적인 것의 경험 :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포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   치명적 도약 성 -터부- 속 성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 속의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서 →그 세계로 직접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치명적 도약’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하는 것 피안에 이름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으로 가지고 있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것 예) 스페인 희곡 티르소 데 몰리나, 본성의 급격한 변화, 순간적인 전의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 폐기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 이중적 감정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 공간은 더 이상 연장이 아니라 질 어제는 오늘,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초자연적인 것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다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 - 연극 공연 중의 배우,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역시 재연 - 산은 용왕의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이중적 성격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낯설음 :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 일상 속의 자신,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 - 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 - 은 평범한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타자성의 느낌 루돌프 오토, 타자의 출현은 -타자성의 느낌까지도- 일종의 ‘가공스러운 신비, 우리를 전율케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 가공스러움 1. 성스러운 공포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 2. 현존 혹은 출현의 위험 : ‘무시무시한 위엄’ 3. 빛나는 에너지 :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 2,3은 종교적 신성의 속성,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 ‘신비’는 바로 다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 망연자실 - 무서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 현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   무서움을 근접할 수 없는 충만한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삶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모든 것은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이다”는 말과 동격이다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 번째 움직임의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는 사실 이 물러섬에 이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타자’는 나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엣 정점에 달한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사랑 : 우리는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신성의 경험 같은 연원에서 흘러 나온 현상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일 뿐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은 이룬다.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시적 계시       종교와 시 종교와 시 :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 본성을 바꾸는 것/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 종교적 언어-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 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신성 신성을 초자연적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신성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 오토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 신성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함이 다른 모든 영역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인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간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 경험들을 서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경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 신성한 공포 -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 자아의 왜소화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 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 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을 뿐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우리들의 부족함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듦. 죽음을 죽임으로써, 종교는 삶도 죽이게 된다.   시 종교처럼 인간의 원초적 상황,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   영감은 불모의 상태 다음에 온다 시적인 말은 가뭄의 시기를 거쳐 움튼다 시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든지 간에 시 언어는 이 땅 위의 삶을 긍정한다. 시편 개개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시적 행위, 시를 쓰는 일, 시인의 언표는 어떤 해석이 아니라 본래부터 인간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적 언어는 리듬이며 끊임없이 솟아나고 소생하는 시간성 리듬이면서 또한 대립되는 것들을, 삶과 죽음을 한마디로 껴안는 이미지 실존 그 자체처럼, 한껏 고양된 순간에조차도 그 안에 죽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삶처럼, 시간의 흐름인 시 언어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긍정한다.   솟구쳐오르는 리듬과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우리 자신 시의 단어가 갖는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 (시적 행위의 의미) 시가 원초적인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시를 쓴다는 것이 인간의 결핍 혹은 근원적인 결함에 대한 판단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결핍은 인간의 근원적 조건. 인간은 본래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 시를 쓴다는 것이 진실로 인간의 원초적이고 영원한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 생명을 가진 것은 죽는 것처럼, 죽음이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삶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인간 삶의 결핍이 아니라, 반대로 삶을 완성시키니다. 산다는 것은 앞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 낯선 것을 향해 전진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진은 우리 자신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것을 만나는 것은 긍정적이다.   삶과 죽음, 존재 혹은 무는 별개의 실체나 사물이 아니라. 부정과 긍정, 결핍과 충만은 우리 안에 공존한다. 아니 바로 우리다. 존재는 비존재를 암시한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를 암시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조하자마자, 자신이 의미 없는 사물들과 대상들의 총체 속에 들어 잇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을, 인간은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지만 그 의미란 바로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됨으로써 비롯된다. 우리 자신이 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세게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는 존재의 빛으로 반짝일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것은 삶 속의 죽음을 끼워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음 죽음과 삶을 재통합할 수 있다. 우리는 존재를 통해서 무로 다가갈 수 있으며, 무를 통하여 존재로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근거’이면서, 또한 그러한 부정의 초월이기도 하다.   인간의 하찮음의 드러남은 존재의 드러남으로 변한다. 죽음과 삶, 우리는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산다.   사랑~ 사랑 혹은 사랑의 기쁨은 존재의 드러냄이다. 사랑은 존재와 무의 동시적 드러냄이다. 우리가 참여하는 어떤 것이며 우리가 우리를 만들어가는 어떤 것이다. 사랑은 존재의 창조다. 그때 창조되어지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창조할 때 우리를 소멸시키며, 소멸시킬 때 창조한다   우리를 존재의 창조로 이끌어가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다. 무에 던져진 인간은 무에 맞서서 자신을 창조한다   시적 경험 : 우리의 근원적인 조건의 드러냄 : 우리 자신의 창조로 귀결 시인은 존재를 창조한다 (존재 : 만들어지는 것) 인간의 원초적인 조건은 가능성 인간의 자유 : 가능성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 -시인이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창조해가는 인간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   결론 시의 말과 종교의 말은 역사를 통해 혼동되어왔다 종교적 계시(그것이 말인 한에 있어서) : 원초적 행동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 시 : 인간 조건의 계시. 이미지에 의한 인간의 창조. 시적 언어는 인간의 역설적인 조건 (타자성)을 드러내며, 그럼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실현시킨다. 인간에게 존립 근거를 주는 것은 종교의 경전이 아니라 시적 언어다.   영감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 :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됨   시는 어떻게 씌여지는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 : 악마, 뮤즈, 영, 정령 :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   시인은 그저 영매로서 성, 일기,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개념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 경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 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현대시의 역사 :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 그는 듣는 귀,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 시인의 꿈은 좀 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   말 :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함 시 쓰기 : 말로써 창조하는 것, 시를 창작하는 것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 시는 하나의 가능성.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 -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치 않았던 것-를 창조하는 것   시가 씌여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그것-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 - 근대의 산물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 시인들의 불쾌함 -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에서 그 순간을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초현실주의 : 주체와 현상(객체)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 객체에 대해 공격했지만 객체를 녹였던 그 산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도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상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됨.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 시인의 사명 -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됨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하였다 단호한 의자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바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 영감 → 상상 → 주체와 객체 해체. 우리 자신 해체, 모순 제거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 → 세계관의 파괴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임을 고발하기 때문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았다   인간과 영감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말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 - 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 - 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영감 :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 사실 영감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인간은 세상을 자화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재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서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2부 시적 계시 (요약)|작성자 옥토끼   시의 력사   순간의 성화       시편이란 다른 경험으로 환원 불가능한 시적 행위가 어떻게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지   시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과 다른 어떤 것, 즉 그것 없이는 시편으로 구체화될 수 없는 어떤 것에 의지한다 시편 = 시 + α α = 시편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순수 시편 : 시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만을 의미하기 위해서, 말이 특정한 의미를 갖거나 이것 혹은 저것에 대한 지시체이기를 포기하는 것. 말의 소멸을 요구. →말로 씌여질 수도 없고, 사실상 말해질 수도 없는 것   시편 :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시인의 말 : 말이라는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의 것이며 타인의 것 : 역사적, 민중에 속하는 것이며 그 민중이 말을 사용하는 특정 시기에 속하는 것 : 역사적 시점의 말이자 모든 역사적 시점 이전의 말, 태초의 말   시편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언어 : 역사 역사는 시적인 말이 육화하는 장소   시편은 원초적 경험과 그 뒤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의 중재 시편은 특별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선을 긋는다 순간은 시에 의해서 성화되어 있다 - 시간은 살아 있고,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으로 가득 찬 순간. 동시에 다른 순간에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자신의 빛으로 새로운 순간들, 새로운 경험들을 비추는 것   역사가 없이는 시편은 태어나거나 육화될 수 없다. 그리고 시편이 없다면 역사 또한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기원도 시작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적 1. 사회적 생산물로서 2. 역사적인 것을 뛰어넘는 창조물로서 ~ 시편이 다시 역사 속에서 육화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반복될 필요가 있다 ~ 잠재적이며 영원히 현재인 시간, 한정된 바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현재화됨으로써만 실현되는 시간 ~ 원형적 시간   시편의 이중성 시편이 갖는 다의성은 시편의 이원적 본성의 결화 갈등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의 내부에 존재 시적 작용의 이중 운동에 기인 시편은 역사적 시간을 원형적 시간으로 변화시키며, 그러한 원형을 다시 특정한 역사적 현재로 육화 이중적 운동 : 본래적이고 역설적인 시의 존재 방법 시가 취하는 역사적 방식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자신이 부정하는 시간과 연속성을 다시 긍정하기 때문   이미지는 결코 ‘이것 혹은 저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을 말한다. 심지어 ‘이것이 저것’이라고 말한다.   시와 인간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순간을 순간으로 만들며, 시간을 시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유일하며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순간, 그 시간과 하나가 되는 인간   자신의 시간적 조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 속에 더 완벽하게 함몰 유일하며 한 번 뿐인 순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역사에 기원을 제공 인간의 조건은 인간을 타자가 되도록 이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시적 경험은 인간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 - 인간의 본질 시적 기능을 특징짓는 것 : 언표 - 모든 언표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 무언가 -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   시인이 성화시키는 것 : 언제나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도,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으며 혹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경험도 될 수 있다 모든 사건들, 느낌들, 경험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서 말할 때, 시인은 우리에게 다른 것, 즉 만들어가고 있는 것, 우리 앞과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에게 창조하고 이름 부르는 행위인 시 자체에 대해 말한다. 독자로 하여금 시를 반복하고 재창조하도록 한다. 그가 이름 부른 것을 다시 이름 부르게 하여 그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한다 시인은 시로부터 시를 만들어낸다   시인이 쓴 시와 독자가 읽는 시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조의 행위 자체는 동일하다. 독자는 순간을 재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시는 새로운 독자와의 만남으로 늘 완전해지려고 하는, 언제나 미완성의 작품이다.   시적 계시 - 시인이 드러내는 것 - 본래의 우리로 복귀하는 것 -결코 추상적 형태를 취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 의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행위 -인간 조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 드러나거나 혹은 밝혀지는 경험   시적 경험 - 자유 그 자체, 무언가에 다다르기 위해 펼쳐지며, 그렇게 순간적으로 인간을 실현시킨다 영웅적 세계       그리스 서사시 그리스 영웅들을 다른 영웅들과 구별짓는 것 - 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 호메로스의 주제 : 영웅들의 운명 ~신들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고, 우주의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종교적 주제가된다 그리스 서사시의 또 다른 특징 : 종교성 (도그마화된 종교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두 가지 종교 1. 신들에 대한 종교 - 자연신 숭배, 태양신 제우스 2. 조상들에 대한 종교 -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뛰어난 인물 숭배, 아가멤논   에게 해 문명 분열 영웅들은 이제 무덤 속에 있는 사자들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로 변함 신화는 종교적 찬양과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영웅들을 신화적 대상으로 다루게 됨으로써, 서사시의 자양분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덤 속의 영혼과 인간을 이어주던 신성한 끈이 끊어지면서, 영웅-신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화는 올림푸스의 신들도 감염시켜 그들 역시 인간화했다.   호메로스 : 끝이며 시작 끝-올림푸스 신들을 섬기는 종교의 승리와 조상 숭배의 패배로 완결된 기나긴 종교적 진화의 끝 시작-호메로스의 시들이 종교와 삶의 이상과 윤리의 바탕을 제공한 귀족적이고 기사도적인 새로운 사회의 시작   영웅 : 두 개의 세계-자연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세계-가 합류하며 투쟁하는 장소 : 탄생에서부터 영웅은 독립적인 두 개의 힘이 결합하는 연결 고리의 이미지 영웅의 본질은 두 세계의 투쟁이다. 모든 비극은 영웅의 서사적 개념 속에 고동치고 있다.   영웅이 행동하는 세계에 대한 관념 형성 제거 “그리스 이전에는 몰랐고, 그리스에 와서 그들의 정신적 특징이 알아낸 것은사물의 내재적 합법성에 대한 의식이다.” 우주적 법칙, 충동, 리듬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역동적 총체의 개념 인간을 그러한 총체성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부분으로 보는 관념 ~인간이 갖는 책임 관념 모순적 이러한 모순 내에서 영웅적인 것의 뿌리와 나아가 비극적인 것에 대한 의식이 발견   그리스 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반적인 운행 속에 삽입시키며, 여기에서 영웅됨의 갈등과 모범적인 가치가 비롯됨   영웅들과 신들의 세계는 인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우주. 살아있는 총체, 그것의 운동은 정의, 질서, 운명이라 불림 탄생과 죽음은 이러한 생생한 조호의 협주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극단적 음표이며, 위태로운 인간의 모습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나타남 삶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가 합류하는 장소가 인간이기 때문   이러한 개념으로 총체적 자연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건강도 우주의 건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영웅의 광기나 병약함은 우주 전체로 전염되며, 하늘과 땅을 위태롭게 한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 존재를 생성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우주적 투쟁이 전개되는 장소로 여긴다.   그리스 비극 비극과 희극은 그리스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이며, 자신을 세운 토대와 나누는 대화   아이스킬로스 :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 의지가 참여하는 초인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인식 : 고통, 불행, 재난의 본래적 의미는 절제를 초과하려는, 다시 말해서 각자가 위치하는 영역의 극한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 너머로 감으로써 신이 되거나 악마가 되려고 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형벌 : “모두에게 똑같이 태양을 비추어주는 하늘이여! 그대는 내가 이토록 부당하게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구나.” : 아무도 그를 고통에서 끌어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고통은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 : 비극적 행위가 운명이 갖는 우월한 힘뿐만 아니라 우주적 정의를 완수함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적 참여 또한 내포하고 있다. : 비극이 가르치는 것은 무의식적인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일이다. : 인간이란 신의 손아귀에 든 ‘도구’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거듭 확신했다.   운명과 자유라는 모순되면서 상보적인 두 개의 단어 덕분에, 인간은 인간일 수 있고 세계는 세계일 수 있다. 비극성은 이가적 대립물을 동등하게 보며 절대적으로 긍정하는데서 연유한다. 가혹한 운명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우리에게 만유적 질서의 빛을 던져주는 유일한 것은 운명에 대한 의식이다. 사유와 운명은 서로 대립되며 상보적인 단어이다. 그것의 신비는 사물의 본성 그 자체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 우주적 합법성의 신성함과 정의로움에 관해 감히 터놓고 질문한 첫 번째 사람 : 존재의 영역을 버리고 도덕적 비판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 과오 - 주관적, 심리적인 개념   운명의 정의로움을 부정하자마자, 고통은 정당성을 상실하고 혼란이 찾아온다. 운명의 침입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자신 안으로 숨거나 혹은 이상적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 개인적 신비주의, 정치적 유토피아 - 객관적 적법성을 상실한 세계가 나갈 수 있는 출구   우리는 벌을 받고 속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백하면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인간의 가장 뛰어난 시적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갈등에서 충만되고 심오하게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기본적인 인간 조건의 드러남-이다. 비극의 위대성 : 그러한 개념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이가적 대립물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모순을 육화시켰다 비극적 영웅들은 의식을 버리지 않으며 그의 존재를 조건짓는 궁긍적인 이유에 대해 끊없이 질문한다 그리스 비극은 존재의 근거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운명은 신성한가? 인간은 죄인인가? 정의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 사회를 지탱하는 가설 자체에 대한 것. 폴리스를 세운 모든 가치 체계를 의문시하는 것   모든 행위의 앞면과 뒷면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주기 위해서, 비극 시인들은 가장 성스러운 행동과 가장 지독한 신성모독까지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비극은 신선모독에 대한 광범위한 사색이며 애매한 가치 - 구원하고 벌하며, 벌하고 구원하는-에 대한 검토이다.   운명이 스스로를 완수하기 위하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요구한다 자유는 운명이 갖는 여러 얼굴 중의 하나이기 때문 비극은 우주와 인간의 이미지이다. 모든 비극적 행동, 모든 갈등은 한 가지로 환원 : 자유 ~필연성의 조건 그리스인에게 삶은 자유와 운명이 얽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엮어내는 무훈 매듭 : 인간 -인간 안에는 인간의 규칙, 신의 규칙 그리고 양자를 다스리는 불문율이 서로 얽혀 있다   유한하며, 늙고, 병들고, 터무니없는 열정과 심정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피조물인 인간은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이며 운명에 의해 선택된 주체이다. 그러한 선택은 인간의 수락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의 범죄는 우주를 진동시키며, 그의 행위는 삶의 과정을 회복시킨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스페인 연극 서사적 전통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1. 로망스 시와 중세 전설의 보물 2.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인 기독교적 서사시 중세 스페인의 정치적 개념 : 만인지상 모든 사람은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며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 이중의 충성 양자에 대한 충성이 병립될 수 없을 때, 드라마가 생겨난다. →그리스 영웅들처럼 인간 조건의 신비와 운명에 대해 질문하는 용기가 빠져 있다 스페인 극작가들은 인간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이미 만들어진 대답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희극 사건의 얽힘이거나 혹은 관습에 대한 비판일 뿐 진정한 희극은 일종의 발레 시 -인위적 유희로서 연극을 빛나게 하는 것 : 속도감 있는 행동, 상황의 얽힘, 우아한 대화 인간의 자유와 신의 은총이라는 중심 주제를 독창적이고 보편적으로 다루는 작품 국민 연극의 개념과 자유 의지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의 옹호와 계몽을 융합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진실로 어울리는 유일한 서양 연극 중요한 주제 : 영혼의 운명 문제에 대한 해답 - 스페인 극작가들은 정정을 허용하지 않는 기독교 교리를 이용 스페인의 위대한 작가들에게 자유는 신의 은총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가적 대비극 사이에서 움직인다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유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를 신에게 복속시키면서 실현된다 스페인 영웅들의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운명을 긍정하는 것은 인간이 비극적 존재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 : 신과 악마라는 두 사람의 배우가 등장하는 무대 숙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 - 신학적 미로, 미로의 입구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은 무이거나 존재 신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인생은 꿈이고 인간은 그 꿈에 나타나는 환영일 뿐이다.   영국 연극 스페인 연극에서 신과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자리를, 그리스 연극에서는 자유와 운명이 차지하며, 영국 연극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차지한다. 그 본성의 신성한 성질은 오래된 권위에 대항하여 반역을 저지르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시인 : 이제 막 인간을 발견 열정의 조수는 무대에서 신을 쫓아낸다. 인간의 본성은 이중적인 신성이다.   셰익스피어와 웹스터의 영웅들은 근본적으로 홀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늘에는 더 이상 신과 운명이 살지 않는다. 신들이 사라져버리자 우주는 일관성을 상실하고 우연이 급습한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는 우연이 필연을 대신한다. 동시에 결백과 죄는 무가치한 말로 변한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연극의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유치함이 존재한다. 유치하고 야만적인. 잔인하건 부드럽건, 순결하건 부정하건, 용감하건 비겁하건 간에, 그들은 한 사발의 피와 한 줌의 해골이며, 신들린 본성의 갈망을 순간적으로 달래야하는 처지에 처한 신경질적인 존재들이다. 기운이 잦아진 호랑이(영웅)은 연극에서 퇴장하고, 무대 위에는 피투성이의 인간들만 남았다.   셰익스피어의 세계에서 우리는 혼돈의 복귀를 목격한다. 사물과 존재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고, 범죄가 덕이 될 수 있으며, 결백은 죄가 될 수 있다. 적법성의 상실은 세계를 동요하게 만든다. 현실은 꿈이며 악몽이다. 우리는 또다시 환영 사이를 걷는다.   유럽이 영국의 시인들에게 전해준 철학은 총괄적인 교리로서의 철학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의 철학이었다 유동적인 것, 이본, 정정,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해결책을 받아들인 것   프랑스 연극 프랑스 연극은 그리스 비극을 미학적 모델로 선택 라신의 인간 - 일종의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모습 - 인간을 더 순수하고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꾸어서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상위와 하위의 세계들과 관계를 맺는 인간의 신비로운 차원도 제거해버렸다. 라신의 연극 :성격과 상황의 연극 라신의 등장 인물들은, 우주와 신성의 개념이 사라져버리고 구체적인 개별성조차 사라져버린 텅 비고 순수한 정확 속에서 움직인다. 라신은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투명한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 투명함은 애매하고 어두운 영역, 진정한 어둠의 입-그곳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과 합일하는 저 너머로 들어가는 문-을 녹여버린다.   독일 연극 괴테의 위대한 파우스트적 신화는 자신의 창조물에 끊임없이 자신을 비쳐보는 서양 정신-모든 것은 거울이다-의 끝없는 독백 괴테는 평생 동안 그러한 주관주의에 대항해 싸웠으며, 그가 보여준 ‘어머니들’에 대한 숭배-고대 신비의 반향-는 총체적 자연의 신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 괴테 이후의 극작가들은 주관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간다.   셰익스피어도, 라신도, 칼데론도 세계를 의문시하지는 못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를 처단하고 그들의 연극은 세계에 대한 고소장이다. 시인과 역사의 관계는 급격하게 변화한다.   근대 연극 모든 근대 연극은 세계를 부정하며 거울의 장난으로 세계를 지워버린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고, 셰익스피어는 연극 속에서 연극에 대한 비판을 행하며,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데,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은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자신의 얼굴이다.   근대의 영웅들은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모호하다.   근대에 출현한 유머는 겉모습을 해체시키고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다. 과거의 시는 프로메테우스 혹은 세히스문도, 안드로마케 혹은 로미오라고 칭하는 영웅들을 신성화했다. 근대 소설은 그 영웅들을 시험대에 올리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만큼 그들을 부정한다. 소설의 모호성       근대 근대 : 인간이라는 가치 위에 세계를 세우고자 했던 것 -근대적 우주를 떠받치는 초석은 인간의 의식 예 1. 맑스 역사란 소외된 인간이 역사의 최종적 단계에서 자기 자신, 즉 자기 의식의 주인이 되는 기나긴 과정 의식이 사회적 실존을 결정 예 2. 근대희 과학 개념 자연은 자극과 반응의 고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망 사실의 조각들을 선택해서 토막내고, 단지 관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었을 때만 실험 객관적 현실은 의식의 영상(이미지)이며 또한 의식의 가장 완벽한 생산물   우주와 자기 자신 앞에서 취하는 근대인의 태도는 과거의 인간들이 취했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인간은 자시의 지상의 거주지를 재구성한다는 조건으로 권좌에서 축출되어 고아로남게 되었다. -생을 정당화하고 역사에 근거를 제공해왔던 개념들의 소멸 -신성함, 신성 혹은 초월 등으로 알려진 복합적인 믿음의 체계가 붕괴 역사적인 변화, 혁명적인 변화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치 체계가 다른 가치 체계로 대체되는 것   모든 혁명은 세속화 작업인 동시에 신성화 작업 혁명은 과거의 이미지들을 파괴하기 때문에 세속화 운동이다. 하지만 이 몰락은 항상 그때까지 세속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왔던 것의 신성화를 동반한다.   근대의 혁명을 특징짓는 차별성은 자신이 서 있는 토대로서의 원리를 신성시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불경에 뒤이어 새로운 원리의 신성화가 뒤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의 진공 상태가 발생했다. 진공 상태 : 재가 정신, 중립성 “저기 신들이 죽은 곳에서, 유령들이 탄생한다.” 근대의 유령은 추상적이고 무자비하다. -국가 -기계에 대한 숭배 기술테크닉은 근대인들에게 아무런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근대인이 자연과 혹은 다른 인간들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오히려 닫아버린다.   부르주아지 혁명 인간의 권리 - 사유 재산과 자유 무역 자유 - 재화의 종속물 민중의 통치권과 인간의 평등 - 제국주의적 침략   근대의 혁명을 과거의 혁명과 구분짓는 것은 딱히 근대 혁명에서 원천적인 이상이 부패하고 자유의 원칙들이 새로운 억압의 기구로 변질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인간’을사회의 기초로 성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이성적 회의.   부르주아지가 사회를 통치하는 슬로건은 분명치 않다. 그 동안의 것들은 마치 요술사처럼 손을 재빨리 바꿔온 결과에 불과하다. 군주 체제와 귀족 사회를 몰락시킬 때 사용한 비판을 이제는 자신의 몫을 차지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왕위 찬탈자일 뿐이다. 그 어느것에 의해서도 아물지 않는 비밀스런 상처처럼, 근대 사회는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건설하고 그리하여 그 건설을 지속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다시 부정하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칙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 비판은 근대 사회의 양식이며 동시에 독이다.   근대 사회의 서사시 시의 역사적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시급한 사명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순간을 원형으로 승화하거나 변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적 언어는 한 민족의 기초가 된다. 부르크하르트 “소설이야말로 근대 사회의 서사시”   소설의 독특한 성격 언어 : 소설은 산문인가? 소설가는 논증하거나 서술하는 게 아니라 한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순간 혹은 일련의 순간들을 되살려서 한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 그는 언어의 리듬이 갖는 힘과 이미지의 형상력에 의지 그의 작품 전체 = 하나의 이미지 시와 역사에, 이미지와 지라학에, 신화에 심리학에 동시에 이웃하고 있다 리듬이면서 의식의 실험이며, 비판이면서 이미지 →이중적 산문과 시, 개념과 신화 사이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에서 기인 →근원적인 비순수성   돈 키호테의 이성과 광기, 라스티냐크의 허영과 사랑, 베니그나의 탐욕과 관대는 모두 하나의 천을 짜고 있다.   근대 소설의 많은 인물들은 염세주의자이고, 다른 인물들은 차라리 반항아이고 반사회적 인간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세계와 공개적이거나 비밀리에 투쟁하고 있다. 그 소설들은, 자기 자신과 투쟁하고 잇는 사회의 서사시이다.   소설 속의 영웅이 자신에 대한 품는 의심은 그대로 그를 떠받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의심으로 연결된다. 소설의 사회주의는 현실의 비판이며, 현실은 돈 키호테의 꿈과 환상처럼 비현실적인 것으로 의심해보기도 한다. 영웅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그 인물들처럼 그렇게 모호하기만 하다.   유머 덕분에, 세르반테스는 근대 사회의 호메로스가 되었다. 헤겔은 아이러니가 (비판적)주관성을 객관성의 체계에 삽입시킬 때 발생한다고 보았다. 세르반테스의 가장 엉뚱한 인물조차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 →비판 비판 의식 앞에서 현실은, 비록 모든 것을 양도하지는 않지만, 주저한다. 유머는 그것이 가서 닿는 것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실과 그 가치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이며, 그것들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일종의 임시적인 휴지이다.   아이러니와 유머는 근대 정신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비극적 갈등에 견줄 만한 것이다. 아이러니적 결합은 실질적인 결말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잠정적인 통합니다. 소설의 갈등은 비극의 예술을 탄생시킬 수 없다.   비판 위에 건설된 사회의 서사시인 소설은 그 사회 자체에 대한 암묵적인 심판이다. 현실이 현실에 대해 던진 질문이다. 문제 제기 자체에서 모든 해답을 미리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는 그 질문은 모든 사회 질서를 부식시키는 염산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에게 거슬러 돌아와 자신을 삼중으로 부정하는 서사시이다. 1. 산문에 의해 부식된 시적 언어 2. 유머와 심리 분석으로 영웅과 세계를 모호하게 창조 3. 소설의 언어가 성화하고 고양하려는 것이 분석과 비난의 대상으로 변하는 노래   프랑스 - 소설의 요람 불어는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분석적인 언어, 근대 정신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에서 최고의 적확성과 명료성의 꽃을 피웠다. 그 어떤 나라와 언어도 라클로에서 프루스트에 이르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끊임없이 계승해온 프랑스 소설의 역사에 견줄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는 그 일련의 창작물들을 통해 일면 스스로를 성화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검증했다. 스스로를 노래하면서, 스스로를 심판하고 형벌을 내렸다.   근대 사회의 위기 :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원칙의 위기 소설 속에서 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나타남 세르반테스에 의해 시작된 운동은 지금은 역방향으로 조이스, 프루스트, 카프카에게서 반복된다. 20세기 초반부터 소설은 다시 시로 돌아가고자 한다. 프루스트 : 느린 리듬, 마치 시적 영감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기억에 의해 유발된 이미지 조이스 : 논설적 사상의 맥락을 끊기 위하여 단어로 하여금 본래의 독자성을 회복 리듬의 밀물이 넘침 영웅적 성향의 재정복이 시도   근대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내재되어왔던 산문과 시 사이의, 성화와 분석 사이의, 노래와 비판 사이의 투쟁은 시의 승리로 귀결지어져가고 있다.   이 시대의 연극과 소설은 한 경향의 탄생이 아니라 그 장례식을 노래한다. 즉, 이 시대의 종말과, 이 시대를 낳은 형식들의 종말을 노래한다. 시- 인간 조건의 계시.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의 성화 소설과 근대 연극 - 그 시대를 부정할 때조차도, 그 시대에 의지한다. 과거의 신성들은 죽고 객관적 현실은 의식에 의해 부정되었을 때, 시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제외하고는 노래를 불러줄 아무런 대상도 가질 수 없었다. 시는 이제 말을 통해 육화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 속에서 육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적 언어는 역사를 성화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되고 삶이 될 것이다. 육화되지 못하는 언어       혁명과 종교 사이의 시 소설, 연극 : 비판적 정신과 시적 정신 사이에 상호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 서정시 : 분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비적이고 낭비적인 열정과 경험들. 사랑에 대한 찬양 - 선동을 유발, 근대적 세계에 대한 도전 사랑이란 분석할 수도, 분류할 수도 없는 예외적인 것   ‘저주받은 시인들’ 동화되지 않는 것들을 추방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부르주아지는 의사, 변호사, 성직자, 시인 그리고 과학자를 보수를 받는 봉사자로 변화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시인들에게 금고 문을 닫아버렸다. 시인은 하인이나 어릿광대가 아니라, 천민 계급이고 허깨비이며 부랑자이다.   시의 글을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인간 자신의 계시 근대시 = 시에 대한 이론 콜리지 : 시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시편이 진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문하기 위하여 시적 창조에 몰입한 맨 처음 시인 상상력을 인간의 가장 높은 재능으로 여김 상상력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인간 의식의 가장 본래적 기능” “상상력은 존재의 형상이거나, 진실로 지금-여기의 유일한 지식이며, 다른 모든 과학은 상상력의 상징적 표현일 때만 실제적이다.” 원래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었던 상상력과 이성은 상징적 표상, 즉 신화를 통하지 않고는 표현될 수 없는 자명함 속에서 하나가 된다. 상상력 - 원초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기능 - 모든 지각의 필수 조건 - 신화와 상징을 통하여 최상의 지식을 표현하는 기능   시와 철학은 신화로 완결된다. “종교는 인류의 시이다.” 시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나타나는 제의와 역사로 변화된 형태가 종교 시 - 스스로를 비판 정신의 경쟁적 원리라고, 또한 과거의 신성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고 선언 -종교의 진리가, 억압적인 강요와 가면적 은폐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으로 드러나서 숨쉴 수 있는 태초의 원리   노발리스 “종교는 실천적 시 바로 그것이다.” 원초적 언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시인의 임무는 교회와 국가라는 도그마가 성립되기 이전의 원초적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 “시 정신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다. 모든 민족의 종교는 시 정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에서 유래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는 본래 시 정신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감옥을 만들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 즉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본래적인 인식 기관은 감각도 아니고 추론도 아니다. 양자는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최종적 본질인 끝없는 욕망에 대립된다. “그 무엇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인간은 상상력이며 욕망이다. 상상력의 작용으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채우며, 그 자신이 무한한 존재로 변한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 인간의 진정한 역사는 이미지의 역사, 신화   독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 시는 진보적 보편 철학인데 그것의 목표는 모든 종류의 시를 집합시켜서 시와 철학 그리고 수사학 사이에 의사 소통을 확립하는 데 있다. 또한 그것은 시와 산문, 영감과 비판, 자연적인 시와 인위적인 시를 혼융시켜야 하고, 시를 생기 있게 하고 사회화해야 하며, 삶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정신을 시화하며, 예술적 형태들을 본래의 다양한 본질로 충만하게 가득 채우고 아이러니를 통하여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근대시는 탄생에서부터 흐름에 거스르는 독자적인 과업이었다. 비판과 조약을 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의지할 수도 없었다.   시는 가장 혁명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가장 보수적인 계시인데, 그 이유는 원초적인 말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시와 종교가 갈라지게 된 근원은 시적 정신이 합리적 정신과 출동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그 결과는 유사하다. 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교회도 시인들을 추방했다.   혁명과 종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던 지난 세기의 시적 운동이 보여주는 들쭉날쭉하고 은밀한 흐름의 일화 -매번 찬동은 단절로 끝났으며, 매번의 개종은 추문으로 끝났다.   근대시는 역사의 정면에서가 아니라 지하나 후면에서 은밀한 신비와 비밀스러운 제의로서 육화되었다.   근대 시인 역사의 하층부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근대 시인은 고독하다. 어떤 법도 근대 시인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도록 강요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추방된 자이다. 근대 개인이 사회 속에서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은 그가 사실상 ‘가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시는 상업적 재화의 교환 체계게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아니라면, 현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진정한 실존을 갖지 못한다. 시의 기화 현상 시인이 말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상품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적이 아니다) 시적 창조는 직업이나 노동 혹은 일정한 생산 활동이 아니다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근대시가 ‘실제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은, 태초부터 시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한 부분을 말소시켜버리기로 근대 사회에서 사전에 결정되어졌기 때문이다. 브르통 “환상적인 것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환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라는 사실이다.”   근대 예술의 모든 과업은 그 잃어버린 절반과의 대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중적 시의 유행, 꿈과 섬망 상태에 의지하는 일, 우주의 열쇠로 아날로지를 채택하는 일, 원초적 언어를 회복하려는 시도, 신화로의 복귀, 밤으로의 하강, 원시 예술에 대한 애정 ~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편력   자기 자신과 인간으로부터 추방당한 시인은 고독의 극단까지 가서야 형벌이 멈추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최후의 변방에서만 ‘타자’가 출현하며 ‘전인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던져져, 모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린 채 빈손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고독한 인간이 바로 원초적 인간이며, 실제적 인간이고, 잃어버린 반쪽이다. 원초적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다.   시를 공동의 자산으로 만들어내려는 가장 절망적이고 총체적인 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에서 발생 →초현실주의 시화를 위한 첫걸음인 객관적 현실의 파괴는 객체에 주체를 삽입하는 것으로 달성 낭만주의의 ‘아이러니’와 초현실주의의 ‘유머’의 결합 중심 : 사랑과 여성   낭만주의 vs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독일철학 :역사를 부정했고, 꿈으로 도피 :과거의 봉건주의와 과격 혁명 세력의 자코뱅주의 정신의 공통된 무능을 고발     초현실주의 :아폴리네르의 시, 현대 예술, 프로이트, 맑스의 분위기 :역사 의식 명확 :당이 언어를 행동의 필연성으로 종속시킬 경우에조차도 당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허무주의와 관료주 . 의적 볼셰비키즘을 고발   ~ 양자는 기하학적 정신이 보여주는 정신적 불모에 대항한 항의이며, 당대에서 혁명을 겪었지만 그 혁명이 결국 무단적이거나 관료주의적인 독재로 변화되는 것을목격하고 말았으며, 마지막으로 둘 다 이성과 종교를 초월하여 새로운 신성을 성립시키려는 시도였다.   영감 : 무의식의 표명 시편을 집단적으로 창조하려는 시도 - 시적 창조의 사회화를 암시 영감은 공동의 자산이다. 이미지가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 것으로 충분하다 “시적 천재성에서 모든 사람은 엇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시를 쓸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시가 될 수 있다. 시 속에 산다는 것은 시 작품이 되는 것이며,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영감의 사회화는 시 작품을 삶 속에 용해되어 사라지게 한다. 초현실주의가 의도하는 것은 시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을 살아 있는 시작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과 시, 시 작품과 독자, 너와 나라는 이율 배반을 해소시키기 위한 수단 : 자동 기술법 나는 너이고, 이것은 저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은 인식이 멈추는 상태인데, 왜냐하면 인식하는 사람과 인식되는 대상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분수이다. 어려움 1. 현대 세계에서 유효한 모든 개념들과 반대 방향으로 실현되는 행위-노력의 가치를 공격 2. 시적 자동 기술법이 요구하는 수동성은 과격한 결단을 암시- 개입하지 않으려는의지 →언제나 사회성을 띨 수 밖에 없는 언어와 개체적 인간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사물, 인간 그리고 언어 사이에 완전한 일치의 상태를 이루는 방법 그러한 상태에 도달한다면, 사물과 언어, 언어와 인간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것. 언어를 발생시키는 것은 바로 그 거리이다. 자동 기술법이 희망하는 상태는 언어가 아니라 침묵   역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느낌과 이미지들-특히 자유, 사랑, 시가 결합한 백열하는 삼각형-은 대부분 초현실주의의 창조이며 또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시인들의 창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초현실주의는 유래 없는 정신적 위기와 전쟁을 겪은 뒤, 20세기 중반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조 그것이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와 그것의 이념들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상관없이, 자명한 것은 현대시의 지배적인 특징이 여전히 고독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는 역사 속에 육화되지 않았고, 시적 경험은 예외적 상태이며, 시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시들, 그림들 그리고 소설들을 창조해내는 오래된 길뿐이다. 미래의 시가 진정으로 시가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낭만주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3부 시의 역사 (요약)|작성자 옥토끼   에필로그   회전하는 기호들       이 책의 주제는 시에 대한 사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시에 대한 성찰의 시작과 끝에서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표가 아닐까?   시는 사회적 삶을 시화하려 하고, 사회는 시어를 사회화하려 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후엔, 우리의 위대한 시인들은 시의 부정을 통해 최상급의 시를 창조해왔다. 그들의 시는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이며, 언어와 의미에 대한 비판이며, 시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시적 언어는 언어의 부정을 먹고 자란다. 이렇게 원은 닫히고 만다.   시적 전통이 맑시즘 못지않게 비판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구체적인 현실과 일반적인 움직임에 근거하여 사회를 아우르며 변화시키는 지식이다. 그것은 능동적 이성이다.   새로운 시인들이 직면할 상황들의 몇몇 모습 - 세계의 이미지를 상실하는 것 - 기술이라는 능동적 기호로 이루어진 보편적 어휘의 등장 - 의미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세계 속에 외롭게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적 상상력은 현존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언어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현존을 부여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란 타인들을 찾는 것이며, 타자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기술은 자기 자신을 상상력과 부딪치고, 세계의 이미지의 부재에 직면해서 상상력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형상을 갖도록 한다. 그 형상이 시이다. 기술의 기호들처럼 미정형의 것 위에 세워져서, 그들처럼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의미를 찾아 헤매는 시는 급박함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다. 그것은 아직 현존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미를 찾아 편력하고, 그러한 편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기호의 다발이다.   우리들의 시대는, 상상할 수 있거나 예상할 수 있는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라는 것이 종말을 맞이한 시대이다. 더욱더 좁아지는 현재 속에 갇혀 우리는 자문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제로는,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아야 옳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물음에 확실히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일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의 가속화와 지구를 동질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기술의 보편화는, 마침내 어느 곳이든 똑같은 장소에서 광란하는 부동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시는 여기- 지금의 탐색이다. “우리는 신을 위해서는 너무 늦게 도착했고, 존재를 위해서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우리의 최초의 시는 존재이다.” 시는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위로해주지 않고, 오히려 삶과 죽음이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구체적인 삶을 회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짝을 재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너를 재정복하며, 그렇게 해서 분산되어 있는 파편들 속에서 세계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주사위 놀이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못하리』 ‘관념론적’ 시에 대한 처단 『지옥에서 보낸 한 철』‘유물론적’ 시에 대한 처단   창조의 중심을 이동시켜서 언어의 본래적 기능을 언어에게 되돌려주는 것 인간은 말에 봉사하게 되고, 시인은 언어의 봉사자가 되었다. 우리들의 세기는, 의심해보지 않았던 길을 통해, 르네상스 이후 부정되었거나 혹은 최소한 무시당해왔던 힘인 옛 영감으로 돌아가는 회귀의 시대이다.   조이스. 아담(모든 인간), 영어(모든 언어) 그리고 책 자체와 작가는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인 말’이라는 순환적인 담론을 통해 흐르는 단지 하나의 목소리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창조적 행위가 채택하는 비판적 경향을 표현 관심사 1. 학문적인 차원에서 창작과정은 무엇에 근거하는지, 시의 구절, 리듬, 이미지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조사해보는 것 2. 시적 차원. 개인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곳까지 창작의 마당이 넓어졌다   시는 음악도 회화도 아니다. 시의 음악은 언어의 음악이다. 시의 이미지들은 선이나 색채가 아니라, 말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영상들이다. 공간도 글씨로 변한다. 여백은 기호들이 말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글씨는 하나의 전체를 투사하지만, 어떤 결핍에 의지한다. 그것은 음악도 침묵도 아니지만, 양자 모두에게서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모든 예술에 참여하지만 그러한 모든 예술적 동반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때만 생명을 갖는 것이 시의 이중성이다.   변화하는 공간 위의 글, 공중이나 백지 위의 단어 그리고 축제인 시는 하나의 의미를 찾는 기호들의 총체, 자기 자신을 맴돌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상형 문자이다. 의미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현실은 있지만 이미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어느 부재 주위를 돌고 있고 그 부재 앞에서 우리의 모든 의미는 무효화된다. 순환의 궤도에서 시는 깜박거리는 빛을 발한다. 그 깜박임이 뜻하는 바는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너와 나의 순간적인 결합니다. 시는 너를 탐색하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침묵의 목소리, 즉 자신을 육화할 단어를 찾는 죽얼거림을 감지한다. 시인은 시간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종이 위에 몇 개의 단어들이 모이거나 흩어진다. 그 형상은 하나의 예시, 금방이라도 드러나고자 하는 현현의 급박함이다.   리라는 인간을 성화해서 우주 속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홀은 인간을 그 자신 너머로 쏘아 보낸다. 모든 시적 창조는 역사성을 띠지만, 반면 모든 시는 (역사의) 직선성을 부정하고 영속하는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이다.   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여기와 저기의, 너와 나와 그와 우리들의 순간적인 화해이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시는 현존이 될 것이다 [출처] 옥타비오 빠스 _ 활과 리라 : 에필로그 (요약)|작성자 옥토끼
302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댓글:  조회:1960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은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 은유, 말의 유희, 유사어,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 가령, 안티고네라는 인물은 선험적 가치인  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 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 하나의 구에 농축 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 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돌은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고, 불투명하고, 태양처럼 누렇거나, 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 무거운 돌이다. 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 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 중에서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 이미지(1)|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 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 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 혹은 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 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 요약하면, 변증볍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 수 없다)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보인다. 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 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 원리가 지배한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 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 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 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논리적 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즉, A는 B와의  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출처] 활과 리라/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달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아는 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정중동이며 만중허,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 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 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  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 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 면,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살펴봐야 한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3) (4)|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 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지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 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  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혹은 달리 말한다면,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 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 즉,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 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성질들, 감각들, 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 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근거이다. 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 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 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 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 묘사, 과학적 공식, 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 형태, 재료 따위를 지각한다. 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 감지는 그것의 의미, 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맨 먼저, 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 처음에 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 가 된다. 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 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 지각의 순간에서처럼, 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 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 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 되살려내고, 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 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현시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 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었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 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 번째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 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 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 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 이와 반대로,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자를 볼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 즉, 치아., 말, 얼음, 입술, 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 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석도, 지시체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 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출처]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5/6)|작성자 몽당연필   [옥타비오 파스]이미지 (7)        언어의 중요한 성질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 속성이 단어를 특징짓 는다. 첫째는 가변성 혹은 상호 교환 가능성이며, 둘째는 이러한 가 변성에 힘입어 한 단어는 다른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 리는 가장 간단한 관념도 여러 가지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혹은 의미를 심하게 손상시키기않고 텍스트나 구의 단어를 바꿀 수 있 다. 혹은 하나의 구문을 다른 구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 이 이미지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산문에서는 동일한 사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지만, 시에서는 단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발가벗은 채 빛나는 별"이 의미하는 바는 "별은 빛난다. 왜냐하면 발가벗고 있기 떄문이다"와는 다르다. 후자의 표현에서 의미는 약 화되었다. 직관은 천박한 설명으로 바뀌었다. 시적 흐름의 긴장이 약해졌다. 이미지는 단어의 가변성과 상호 교환 가능성을 잃어버리 게 한다. 낱말들은 교체 불가능하며, 수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낱 말들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더 이상 유용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지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원초의 본성으로 언어가 복귀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과격한 작 용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 된다. 시심詩心이 언어를 건드리면 언어는 별안간 언어이기를 그친다. 달리말하면 가변적이며 의미를 갖는 기호들의 집합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초월한다. 이제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 시는 산문이나 의사 소통에서 훼손된 언어 이전의 언어이지만, 또한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은 단지 언어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이다. 말에서 태어난 시는 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된다.       시적 경험은 말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이다. 이미지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 시키지만, 이러한 화해는 언어이기를 그만둔 이미지의 언어를 제외 하고는 설명될 수 없다. 이렇게 이미지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과 우리 자신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우 리에게 밀어닥치는 침묵에 맞서기 위한 절망스러운 수단이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 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이미지의이편에는 낱말, 설명, 역사의 세계가 있으며, 이미지의 저편에는 실재의 문이 열린다. 의미화 와 무의미화는 등가치의 용어가 된다. 이미지의 최종적 의미는 이 미지 그 자체이다.       물론 모든 이미지들에서 상반되는 것들이 파괴되지 않은 채 화 해하는것은 아니다. 어떤 이미지들은 현실을 구성하는 용어들이나 요소들 사이의 유사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비교라고 정의 했다--을 발견한다. 르베르티가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들은 "상반되는 현실"에 접근하여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 미지들은 세계, 언어 혹은 인간의 부조리한 성격을 폭로하는 극복 할 수 없는 모순이나 절대적인 무의미를 유발한다(유머의 구사와, 시의 경계 밖에서 이루어지는 재담들이 이러한 종류에 속한다) 어 떤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실재적인 것의 복합성과 상호 의존성을 드 러낸다. 마지막으로, 언어학적으로그리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 이는 것, 즉 상반되는 것들의 결합을 실현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이 러한 모든 이미지들-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어렵고 완전히 이해되 기도 어려운-에서 동일한 과정이 목격된다. 실재의 다양성을 구 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본질적인 개성을 잃어버리지않은 채, 그 다 양성이 최종적인 동일성으로 드러나거나 표현되는 것이다. 깃털은 깃털이면서 돌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언어는 그 특성상 언어 로 포착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된다. 시어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 한다.       장자가 말에 가했던 비판은 이미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지는 언어적 기능이아니기 떄문이다. 결 국,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의미는 사물과 이름 사이의 연결이다. 이렇게 의미는 이름과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 사이의 거 리를 암시한다. 우리가 "전화는 먹는 것이다", "마리아는 삼각형이 다"등의명제를 말할 때는 무의미가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말과 사물, 기호와 대상 사이의 거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즉 다리(의미)가 부서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에 갇혀 홀로 남는다. 그리고 현실은 언어없이 남겨지게 되는데, 왜냐 하면 뱉어내는 말들은 이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 기 때문이다. 이미지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말과 사물 사이의 거리는 넓혀지는 대신에 좁혀지거나 혹은 완전히 사라 진다.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은 이제 같은 것이다. 다리 구실을 하는 의미 역시 사라진다. 이제 포착해야 할 것도 없고, 지시해야 할 것 도 없다. 그러나 이떄 만들어진 것은 무의미나 반의미가 아니라,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것 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신이다. 언어는 이 것과 저것의 상대적인 의미를 넘어, 말할 수 없는 것-돌은 깃털이 다, 이것은 저것이다-을 말한다. 언어를 가리키며 표상한다. 시는 설명하지도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이따 금씩 성취한다.고로, 시는 현실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것, 현실에 거주하는 것, 혹은 현실 자체이다.       시의 진리는 시적 경험에 의지하는데, 이러한 시적 경험은 동양 사상과 일부 서양 사상에 의해서 지적된 것처럼, 인간이 '현실의 현실'과 일치하는 경험과본질적으로 다르지않다.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이러한 경험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의사 소통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혼란스러운 속성 -그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미지의 의사 소통 방법은 개념의 전달이 아니다-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는 좀더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설명하지않고 현실 을, 문자그대로, 재생시킨다. 시인의말은 시적 교감으로 육화된 다. 이미지는 인간을 변화시켜, 그를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 융합되 는 공간, 즉 이미지로 만든다. 이미지로 될 때, 타자가 될 때, 태어 나면서부터  찢겨진 인간은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 시는 변신이며, 변화이며, 연금술적 작용이다. 그래서 시는'이 사람'과 '저 사람' 을 변화시켜 자기자신인 '타자'로 만들기 위해 마법, 종교, 그리 고 그 밖의 체제들과접해왔다. 우주는 더 이상 이질적인 사물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가 아니다. 항성, 신발, 눈물,전차, 수양버 들, 여자, 사전, 이런 모든 것들은 광대한 가족이며, 서로 의사 소통 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든 형태에는 똑같은 피가 흐르고, 인간 은 마침내 그의욕망- 그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동시에 원초적 존재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자기 자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미지이다. 즉 그 자신이며 타자이다. 리듬이고 이미지인 구句를 통하여 인간, 끊임없이 자신이 되고자 하는 자는 존재한다. 시는'존재로 들어가기'이다. [출처]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작성자 옥토끼  
301    옥타비오 빠스 _ 시적계시 댓글:  조회:1370  추천:0  2018-07-25
옥타비오 파스   "활의 시위나 리라의 현처럼, 우주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있다" 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미지가 이 책의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란 대목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기에 혹시 다른 분들께도 그러한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옮긴이들이 먼저 읽으라고 권해주신 "우리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2부를 올려드립니다.  시에 앞서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을 때의 당혹과 두려움, 고뇌와도 같은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원초적인 정서 체험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인용들이 넘칩니다. 「랭보는 말하기를, 시의 혁신성은 "사상이나 형식에 있지 않고 감춰진 오의奧義를 보편적 영혼들이 감지할 수 있도록 잡아내는 능력에 있다"라고 한다.」 334 옮긴이의 글 『활과 리라』는 파스가 가장 애착을 느꼈던 책이다. 젊은 시절 고민하던 '존재의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풀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내용이 진지하다. 이 책은 1부 시란 무엇인가? 2부 시적 경험이란 무엇인가? 3부 시와 사회의 관계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명증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는 그 중에서 2부를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동양 사상을 인용하면서 시적 경험에 대해 써 내려간 그의 글이 우리에게 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옮긴 우리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책이다. 오늘의 우리를 키워준 책. 평생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란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현대가 어떤 시대인지…… 『활과 리라』는 파스를 격동의 대륙 중남미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하고, 그 결과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책이다. 단순한 시론서詩論書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안목을 열어주는 고전 같은 책이다. 또한 20세기에 스페인어로 씌어진 대표적인 산문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책의 문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의 글은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매우 시적이어서 존재의 내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흐름에 취해 현기증이 일 때가 많다. 백척간두에 선 듯한 아찔한 현기증. 때때로 책갈피 뒤에 숨어 있던 존재의 이면이 홀연히 드러나고, 그때 시간과 공간은 역류逆流하기도 한다.  활과 리라  제1판 서문  글을 쓴다는 것은, 아마도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더 적절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책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책들이란 꼭 필요한 책들을 의미하는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심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책들이다.  이 책에 씌어진 나의 대답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부응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이 일반적인 동의를 얻을 것인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글에서 표현된 내 대답의 깊이와 유효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필연성에 충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쓴다는 것이 진정 가치가 있는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는 시적 창조를 통해 글로 씌어지지 않고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를 통한 보편적인 영적 교감은 가능할까?  1942년에 호세 베르가민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탄생 사백 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에 나를 초대했다. 이 강연회는 내게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질문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다듬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 글은 잡지『탕자El Hijo Prodigo』5호에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ia de soledade y poesia de comunion」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책은 그때의 글이 성숙되고 발전된 것이며 어떤 점에서는 바로잡은 것이다.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이름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진 빚이 엄청난 것이어서 책 속에서 어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애썼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폰소 레예스*에게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Alfonsd Reyes(1889~1959). 멕시코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멕시코에서 가장 풍요로운 결과를 낳았던 지식인 운동 가운데 하나인 '1910년 세대'에 속했다. 희랍의 고전과 유럽, 스페인 그리고 중남미의 문학, 사회학, 지리학, 문화, 철학 등 전 분야에 걸친 박학함으로 중남미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그가 보여준 우정과 모범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 책의 주제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그가 썼던 책들 『문학적 경험La experiencia literaria』, 『경계 설정El deslinde』그리고 다른 작품들 속에 산발적으로 실려 있는 많은 귀중한 에세이들이 내게 모호했던 것을 명료하게 밝혀주었고 불투명했던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으며 복잡하게 얽힌 것을 쉽고 가지런히 바로잡아주었다. 한마디로 나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멕시코, 1955년 8월 옥타비오 파스 2부 시적 계시La revelacion poetica 피안彼岸  인간은 그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인 리듬에 자신을 담으며, 리듬은 스스로를 이미지로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의)입술이 가늘게 열리며 시를 낭송하자마자, 그 이미지는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창조적 반복인 리듬의 작용으로, 설명되기를 거부하는 의미들의 다발인 이미지는 참여로 통하는 문을 연다.  시 낭송은 축제요 교감交感1)이다. 이러한 교감을 통해 분배되면서 재창조되는 성체는 바로 이미지이다. 시는 참여를 통하여 존재하게 되는데, 그 참여란 다름 아닌 원초적 순간의 재창조이다. 이렇게 해서, 시에 대한 분석은 자연스럽게 '시적 체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시의 리듬은 끊임없이 신화적 시간과 유사해지고, 이미지는 신비주의의 용어와 섞이며, 그리고 시적 참여는 마법적 연금술과 종교적 영성체 의식에 가까워진다. 이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시적 작용이란 신성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케 만든다.  하지만, 원시적 의식 구조에서부터 유행, 정치적 광신, 심지어 범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성한 형태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정신분석학이나 역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남용된 '신성한'이란 개념이 지니는 의미의 다양함은 우리를 최악의 혼란 상태로 몰고갈 수 있다. 때문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신성의 개념으로 시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경계를 설정하고, 시란 단지 스스로에 의해서, 그 자체로만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것으로는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영접 교섭 혹은 가톨릭의 의식인 성찬식을 뜻하는 단어인 comunion을 교감이라고 번역한 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진의를 살려 되도록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서 파스 자신이 언급하듯, 현대시의 과업은 종교와 공유하고 있는 원초적 신성함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를 낭송하며 공감하는 것은 미사에서 예수의 몸인 성체聖體를 신도들이 나누어먹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현대인이 발견한 사유와 느낌의 방식들은 우리가 흔히 인간 존재의 어두운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성이나 윤리 혹은 현대적 관습이 감추거나 폄하하는 모든 것은, 그 옛날 소위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실재實在 앞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태도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애써 무시해도 자기 무의식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인류학은,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나 신경 쇠약에 빠지지 않고도 꿈과 상상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성의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마음속에는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저 너머에 대한 짙은 향수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주술적, 종교적 제도와 신화에 대한 연구가 유행하는 것은, 원시 예술이나 무의식의 심리학 혹은 신비주의 전통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들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부재不在에 대한 증거들이며, 그 부재에 대해 느끼는 지적 향수의 편린들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시와 종교는 같은 연원에서 솟아나온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시 본래의 의도로부터 시를 떼어놓는다면, 시는 하나의 무기력한 문학 형태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시의 프로메테우스적 과업은 종교와 맞서 싸우는 것인데, 이러한 종교와의 교전交戰은 이 시대의 교회들이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신성함에 대항하여 '새로운' 신성함을 창조하기 위한 현대시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류학자들이 호주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사회 제도를 연구하거나 혹은 고대 부족의 민속과 신화를 분석할 때, 마치 원대인의 눈에는 이성의 도전으로 보이는 특이한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현상을 굳이 설명해보려는 의욕으로, 몇몇 인류학자들은 인과론을 잘못 적용한 때문이 아닌가 하고 해석했다.  프레이저Frazer는, 마법이란 '인간이 현실에 대해 취하는 가장 오래된 행동 양식'이며, 그로부터 과학과 종교 그리고 시가 파생되어 나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사 과학이었던 마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 레비-브롤Levy-Brujl은 마법을 참여에 근거한, 전前논리적인 개념으로 해석했다. "원시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사물들을 논리적, 인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것들을 인과의 사실로도 보지 않고,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들로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사물들을, 하나가 움직이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무엇을 만지면, 물론 그 옆에 있는 사물도 변하고 또한 인간 자신도 변화된다고 믿은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관점을 원시 사회 제도 연구에 적용시켜 보려했지만,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융은 집단 무의식과 보편적 신화 원형론에 근거하여, 고대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심리적 설명을 시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인간이 자연에 던진 첫번째 거역(NO)인 근친상간에 대해 연구했다.  뒤메질Dumezil은 아리안족 신화를 연구하여 그들의 봄 축제(혹은 그의 책에서 시적으로 명명한 "불멸의 향연")에서 인도유럽어족들의 신화와 시의 원형을 발견했다. 카시러는 신화, 마법, 예슬 그리고 종교를 인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간주했다. 말리노 보스키는 또한…… 하지만 계속해서 열거하자면 끝이 없고, 이 글은 새로운 관점이나 발견이 이루어질 때마다 수시로 변하는 그 넓은 세계를 다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현상과 그에 대한 가설에 대해 논할 때, 제일 먼저 자문해보아야 할 것은 소위 '원시 사회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라칸돈 부족은 지금도 실제로 고대의 생활 조건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던 가장 복잡하고 풍요로웠던 마야문명의 직계후손들이다. 라칸돈족의 사회 제도는 문화의 발생기에 속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 잔재에 해당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전前논리적도 아니고, 그들의 마법 의식儀式 또한 전前종교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라칸돈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일 뿐, 더 진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문화가 어떻게 탄생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다.  토인비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에스키모 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문명이 그대로 화석화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그 어떤 사회도(그것이 쇠락하는 것이든, 화석화된 것이든 간에) 진정으로 원시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53-156 이제는 극복되어진 오래 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시적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은 직선적 역사관이 낳은 개념 중 하나이다. 그런 개념은 '진보'라는 개념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원시적 사고방식과 진보라는 개념은 양적 시간 개념의 산물이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레비-브롤은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원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의사 전달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논리적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확실히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깊은 차원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신경증의 발생과 신화의 발생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정신 분열증은 마법적 사고와 유사함을 보여준다.  심리학자 피아제에 의하면, 어린이들의 현실 세계는 우리들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어린이들은 현상에 대한 이성적 설명과 환상적 설명 중에서 거의 틀림없이 후자를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또한 현대인들 속에 지속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마법적 믿음에 대해 지적했다. 여기서 더 이상 예증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논리적 합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참여 행위로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비단 시인, 광인狂人, 원시인, 어린이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꿈을 꾸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직업적, 사회적,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때, 우리 대부분은 카시러가 말한 마법적 믿음의 연원을 구성하는 광범위한 '생명계society of life'에 참여하고, 그 일부분을 구성한다. 여기에는 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원시적 사고방식'은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성에 의해 은폐되어 있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거나 간에, 이 모든 현상들에게 '원시적'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고대인이나 어린이들만의 것 혹은 정신 이상 증세가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에게도 공통된 내재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153-157 어떤 사람들은, 의식儀式이나 제의의 주체가 원시인이나 정신병자처럼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는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사회제도라고 본다. 여러 사회 제도가 모여서 구성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제의, 신화, 축제, 전설 등 '물질화'되었다고 적절히 표현된 그런 것들은 저기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어 있다. 위베르와 모스는, 신앙을 가진 자가 신성함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감격은 개인적인 특수한 범주의 경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며, 사랑, 미움, 외경, 두려움, 배고픔, 목마름 등 인간의 본질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변하는 것은 오직 사회 제도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견이 현실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제도 및 대상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신성함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 제도가 진정 폐쇄되고 유일한 무엇을 구축한다면, 축제나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그곳에 참석하기 몇 시간 전 숲 속에서 사냥하거나 차를 운전하던 그때의 자기와는 무언가 다른 사람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할 수 없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주는, 인간만의 존재 방식은 '변화'에 있다.  오르테가 이 가셋식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실체가 결여된, 비실체적인 존재이다. 확실히, 종교적 경험의 가장 특정적인 사실은 갑작스런 도약, 본성의 돌발적인 변화이다. 따라서 우리가 동물원에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은 신격화된 호랑이를 볼 때의 감정과는 다르다. 또한 춘화春花를 볼 때의 감정과 티벳의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접상을 볼 때의 감정과 역시 서로 다르다. 158 사회 제도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며, 또한 '원시적 사고 방식'이나 신경증이 신성한 것도 아니다. 양쪽 다 그것만으로는 신성한 것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양극단에서 벗어나 우리는 신성함을, 우리들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현상으로 포용하여야 할 것이다.  신성함의 세계는 인간을 배제한 사회 제도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요, 제도와 절연된 인간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신적인 것의 경험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는 것도 역시 불충분하다. 그 경험은 우리를 전체의 일부로 표함하며, 그 세계에 대한 묘사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묘사가 될 것이다.2) 2) 이 글이 씌어지고 난 후 10년 뒤, 『야생의 사고』(1962)가 출판되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중요한 저서에서 '원시적 사고 방식'이 현대인의 사고 방식 못지 않게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몇몇 사회학자들은 그들의 논의를, 성聖의 세계와 속俗의 세계로 이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터부는 그 두 세계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계에 금지된 일들이 다른 세계에선 가능하다. 순결이라든지 혹은 불경不敬이라는 개념은 이 구분으로 인해 생겨난다. 단지, 위에서, 우리 자신을 배제한 단순한 사실은 표피적인 자료만 양산할 뿐이다. 또한 모든 사회는 여러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각각의 영역에는 다른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는 독특한 규칙과 금기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  상속세법의 운영 체계는 형법에 적용되지 않으며(비록 그 옛날에는 적용되었겠지만), 사회 관습에 따라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만일 공무원 사회에서 행해진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국가 사이의 외교 규범은 가정 내에선 적용되기 어렵고, 반면 가족끼리의 규범은 국제 통상 세계엔 적용되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 내에서 인간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규범에 따라 처리된다. 따라서 성(聖)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속에서 성스러움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선, 그 세계로 직접 들어가보는 수밖에 없다. 만일 신성함이 별개의 세계라면, 우리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볼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부른 '도약'이나, 스페인어식으로 말하자면 '치명적 도약salto motal'을 통해서일 것이다. 7세기의 중국 선사(禪師) 혜능(慧能)은 불교의 핵심적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는 인도 산스크리트 용어인데, 중국어로 옮기자면 큰ㅡ지혜ㅡ피안ㅡ도달의 뜻이다…… 마하란 무엇인가? 크다는 뜻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지혜라는 뜻이다…… 바라밀다는 무엇인가? 피안에 이르다(到彼岸)의 뜻이다. 차안(此岸)이라고 불리는 대상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바다의 파도처럼 부침(浮沈)하는 생과 사의 윤회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를 버리면, 흐르는 물과 같이 변화무쌍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바라밀다ㅡ'피안에 이름'이다.  많은 바라밀다 계열 경전들의 끝부분에는 여행 혹은 도약의 개념이 감동적으로 표현된다. "오, 가버린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버린 이여(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비록 영세, 영성체, 각종 성사 혹은 통과 의례들이 모두 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도약'의 경험을 체험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모든 의례들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타자(他者)'로 만드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의례들은 흔히 우리가 막 탄생했거나 혹은 중생(重生)했다고 하며,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새 이름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초적으로 경험했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태아로서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인간 탄생의 신비적 체험을 재현하는 것이 각종 제의들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행위는 다름 아닌, 새 생명이 태아로서는 죽고 이 세상에는 살아서 탄생하는 그 일을 반복하는 것일는지 모른다.  '피안'의 경험인 '치명적 도약'은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로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안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바람에 자신이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그 힘은 우리를 우리 밖으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우리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람의 비유는 모든 문화권의 종교 경전 속에서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인간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뽑혀서 저 너머 피안으로, 자신과의 만남으로 떠밀려간다. 여기서 또 다른 특이함이 드러난다. 즉, 자신의 의지는 거의 개입되지 않거나, 아니면 매우 역설적으로 개입된다. 만일 거대한 바람에 한번 떠밀리면,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없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의례에 정성껏 참여하더라도, 외부의 힘이 개입되지 않으면 '도약의 경험'은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시 창작의 순간과 똑같이, 자아의 의지는 어떤 다른 힘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것이다. 자유와 숙명은 인간 속에서 만난다. 스페인 희곡은 이 갈등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161 티르소 데 몰리나는 그의 작품 『믿음이 없는 죄인』에서, 구원을 찾아 10년 간 동굴에서 고행을 실천하는 수도자 파울로를 등장시킨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죽어 신 앞에 출두하여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심판 내용을 알게 된다. 잠에서 깬 그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악마가 천사로 변장하여 그의 앞에 나타나, 신이 그에게 나폴리로 떠나라는 명령을 했다고 알린다. 그곳에 가서 엔리코란 사람을 만나면, 그를 통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를 만나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운명을 당신도 똑같이 겪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엔리코는 효자이며 믿음이 두터운 사람이란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었다. 엔리코라는 모델을 보자 파울로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쳤다. 잠시 후, 뚜렷한 이유 없이, 그를 따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울로가 본 모습은 단지 그의 외면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악한이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망설임 없이 신의 품에 자신을 맡길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작품의 말미에서 엔리코는 속죄하고 즉시 스스로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바친다. 그는 치명적 도약을 하고, 구원받는다. 고집이 센 파울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치명적 도약, 즉 지옥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내부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심이 그의 내부를 공허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파울로의 죄는 무엇인가? 신학자인 작가 티르소에 의하면, 불신과 의심이 죄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만이 그의 죄였다. 그는 결코 신에게 자신을 내주지 않았다. 신성에 대한 그의 불신은 자신에 대한 과신으로, 즉 악마로 변한 것이다. 파울로는 귀담아들을 줄 모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침묵으로 말하는 자는 신뿐이며, 악마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자신을 신에게 온전히 맡긴 엔리코는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었으나, 자기 자신을 믿은 파울로는 파멸했다. 자유는 하나의 신비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신의 은총이며, 인간은 신의 의지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62 『믿음이 없는 죄인』이 내포하는 신학적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주인공들이 겪는 본성의 급격한 변화와 순간적인 전이가 주목할 만하다. 엔리코는 금수(禽獸)였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서 참회 속에 죽는다. 파울로 역시 갑자기 수도사에서 방탕한 자로 탈바꿈한다.  미라 데 메스쿠아4)의 『악마의 노예』에서도 심리적 변화가 급격하고도 전면적으로 일어난다. 희곡의 앞부분에서 돈독한 신앙을 가진 선교사 돈 힐은, 우연히 어느 청년과 마주치는데, 그는 애인 리사르다의 발코니로 올라가려는 중이었다. 성직자는 그 젊은이를 설득하여 물러가게 한다.  혼자 남게 된 성직자는 자신의 선업에 대한 교만에 들떠, 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번개 같은 독백을 통해 돈 힐은 치명적 도약을 한다. 기쁨에서 교만으로, 그리고 교만에서 호색(好色)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젊은이가 오르던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어둠과 욕망에 신분을 감추고, 애인을 기다리던 아가씨와 동참한다.  다음날 아침 리사르다 아가씨는 그 남자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의 순간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넘어가는데, 그 긍정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젊은이의 사랑이 그녀를 외면해서, 악을 껴안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기증이 둘을 삼켜버렸다. 그날 이후 그들의 행위는, 문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두 사람은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훔치고, 죽이고 마침내 리사르다의 부모까지 죽였다.  4) Mira de Mescua(1574~1644). 로페 데 베가 학파의 스페인 극작가로 종교극을 많이 썼다. 163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파울로와 엔리코의 경우처럼, 심리적인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 어두운 열정을 설명한 마땅한 이유는 없다. 자유롭게 동시에 무엇엔가 떠밀려 그들은 한 순간에 그들을 유혹하는 심연으로 전락한 것이다. 비록 그들의 행위는 스스로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적 결정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어떤 다른, 엉뚱한 힘에 이끌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무엇엔가 홀려,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타인'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가능하다. 그들 역시 엔리코와 파울로처럼 도약을 했다. 그것은 우리를 떠미는 힘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를 이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행위이다.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첫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 우리가 신적인 것 앞에 섰을 때도 유사한 이중적 감정이 생긴다. 우리가 신이나 신의 형상과 마주쳤을 때, 동시에 끌림과 두려움, 사랑과 공포, 매혹과 혐오를 느낀다.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찾아 헤매던 것으로부터 도망한다. 또한 순교자들이 말하듯이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낀다. 성 후안 크리솔로고san Juan Crisologo의 말 "정신이 고양될수록, 더욱 뜨거워진다Plus drdebat, quam urebat"을 제사(題詞)로 따온 소네트에서 케베도는 순교자의 열락(悅樂)을 이렇게 묘사했다.  로렌초는 석쇠 위에서 불타며 즐긴다.  황색 불길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순교자의 항구적인 가치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폭군은 로렌초를 통해 불타며 고통 겪는다. 숯불은 황홀하게 번져 나가고 석탄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순교자의 갈비짝은 요리가 되어 사형 집행인에게 바쳐진다.  적에게 자신을 먹이로 내준 그리스도의 지고한 노력을 닮은 성사(聖事)의 불타는 재현. 하늘이 인간을 영원케 하는 것을 보라. 패배가 영광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타락한 군주는 타들어가고 있다. 165 로렌초는 불타면서 자신의 순교를 블긴다. 폭군은 괴로워하며 적 속에서 스스로를 태운다. 이런 영광스런 순교와 비속한 고문 사이의 간극을 밝히기 위해선, 사드 백작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세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희생양은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방탕자의 고독은 깨어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쾌락은 순수하고, 외로운 것이다. 그것은 쾌락이라기보다, 차가운 분노에 가깝다. 사드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무한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세계는 의사불통의 세계다. 각자는 자신의 지옥에 외롭게 갇혀 있다.  케베도는 그의 소네트에서 교감comunion의 이중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석쇠는 고문과 요리의 도구이며, 로렌초는 요리와 태양으로 이중적으로 변한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이중성은 반복된다. 폭군의 승리는 패배가 되고, 로렌초의 패배는 승리가 된다. 어디서 고통이 끝나고, 어디서 쾌락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뒤섞일 뿐 아니라, 로렌초는 교감의 힘에 의해 폭군의 가해자가 되며 폭군은 그의 희생양이 된다.  신적인 것은, 우리 사고의 기반이며 한계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성(聖)의 체험은 여기가 저기라고 믿게 한다. 몸은 편재한다. 공간은 더 이상 연장(延長)이 아니라 질(質)이다. 어제는 오늘이다. 과거는 돌아오고, 미래는 이미 일어났다. 시간과 사물들의 그 특이한 존재 방식을 들여다보면, 밀고 당기고, 고양시키고 추락시키며, 움직이고 멎게 하는 어느 중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성한 시간은, 육체를 결합시키거나 분리시키고, 감정을 교란시키며,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며, 선을 악으로 바꾸는 그 리듬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리듬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우주는 자장(磁場)으로 변한다. 어떤 리듬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감정과 사고를, 판단과 행위를 각각 씨줄과 날줄로 삼아 하나의 천을 짠다. 166 어제와 오늘, 여기와 저기, 구토와 감미(甘味)로 엮인 천을 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오늘이다. 모두가 현존한다. 모두가 존재하고, 모두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다른 곳, 다른 때에 있다. 자기 밖에서, 자기 충만 속에서, 요행으로 믿었던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어떤 힘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치명적 도약은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과 맞닥뜨리게 한다. 초자연적인 것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은 모든 종교적 경험의 출발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먼저 근원적인 낯설음의 느낌으로 나타난다. 그 낯설음은, 가장 일상적이며 명백한 표현으로 현실과 존재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대상들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로렌초는 태양으로 변하지만, 동시에 타버린 잔혹한 고깃덩어리로 변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종교적 제의들은 이 이중성을 강조한다.  나는 어느 날 오후, 힌두교 성지인 무트라Mutra의 줌마 강가에서 거행되는 작은 의식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 의식은 매우 간단했다. 석양녁에 한 사제가 조그마한 사원 모양의 나무 더미에다 성화를 붙이고, 강가의 거북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종을 치고 노래하며 향을 사르는 동안, 그 사제는 송가를 읊조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크리슈나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는데, 그날 그 의식에는 크리슈나를 믿는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사제가 불을 당겼을 때(우리 앞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거대한 밤의 장막 앞에 그 불빛은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던가!) 신자들은 노래하고, 고함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어지러운 동작과 고함소리는 나에게 역겨움과 고통을 주었다. 167 그 무절제한 열광은 너무나 엄숙하면서도 너무나 소박한 것이었다. 불쌍한 고함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 몇몇 벌거숭이 애들은 깔깔거리며 뛰놀고 있었고, 어떤 이는 무심히 낚시를 하거나 또 다른 이는 헤엄치고 있었다. 어느 촌부는 꼼짝 않고 서서 흐린 물에다 오줌을 누고 있었다.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그대로 지나가고 있었고, 유일하게 신이 난 것은 목을 길게 빼고 먹이를 쫓는 거북이뿐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침묵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거지들은 시장으로 돌아가고, 순례자는 여관으로, 그리고 거북이들은 강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크리슈나에 대한 경배의 전부인가? 모든 제의는 하나의 공연representacion이다. 제의에 참여한 사람은 마치 연극 공연 중의 배우와 같다. 그는 동시에 극중 인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제의 장소 역시 재현된다. 저 산은 용왕은 궁전이며, 무심히 흐르는 강은 신성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 산과 강은 그렇다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각각은 모두 자기이며 동시에 자기가 아니다. 그 크리슈나의 경배자들도 재연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어느 종교극의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가지는 이중적 성격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평상시대로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 삶이 너무나도 통속적이라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은 성유(聖油)에 젖어 있다.  믿음의 순간, 그는 이 세계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다. 이 세계는 실재이면서 실재가 아니다. 때때로 그 이중성은 유머스럽게 표현되기도 한다. 어느 스님이 운문(雲門)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선사는 "똥막대기"라 대답했다. 선(禪)수련자는 엉뚱하고 자칫 무의미한 대화로 보일 수 있는 그런 간화(看話) 수련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갑작스런 깨달음[頓悟]에 이른다. 168 반야바라밀다 계통의 어느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리를 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어느 제자가 물었다. "줄이 없는 거문고를 쳐서 소리를 내실 수 있습니까?" 스승은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아뇨, 못 들었습니다." 이 말에 스승이 응답했다. "이번에는 좀더 세게 쳐달라고 청해보지 그러냐?" 낯설음이란, 일상적 현실이 갑자기 처음 보는 듯한 것으로 뒤바뀌는 현상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가 느끼는 어리둥절함은 소위 '명백함의 땅'이 우리 눈앞에서 두 쪽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래, 나는 에이다가 아니야. 그 앤 머리가 곱슬곱슬한데, 내 머린 생머리거든. 난 확실히 메이블도 될 수 없지…… 어쨌든 그 애는 그 애고, 나는 나야. 맙소사, 이 모든 게 얼마나 희한한지!" 앨리스의 의심은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의심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처럼 앨리스도 스스로 놀라움을 느낀다.  하지만 대체 무엇 앞에서 놀라워하는가? 바로 자기 자신 앞에서, 스스로의 적나라한 실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그 무엇 앞에서 놀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자연―나무, 산, 석상과 목상, 나를 지켜보는 나 자신―은 평범한 현존(現存)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Otro의 거주지이다. 초자연적인 것의 체험은 곧 타자의 체험이다. 169 루돌프 오토는, 타자의 출현은-그리고 타자성의 느낌까지도―일종의 가공스러운tremendum 신비,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의 형태로 다가온다고 했다.6) 이 독일 사상가는 가공스러움의 내용을 분석하여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첫째는 성스러운 공포이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험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섬뜩함이다.  두번째 요소는 현존 혹은 출현(出現)의 위엄이다. 이다. 즉 '무시무시한 위엄'이다. 마지막으로, 그 위엄 있는 힘에 '빛나는 에너지'의 개념이 합쳐진다. 이렇게 살아 있고, 활동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세번째 요소로 등장한다. 한편 세 요소 중 나중의 두 개는 종교적 신성의 속성이며, 가공스러움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경험의 부차적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을 배제하고 논의를 '우리를 전율케 하는 신비'로 집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신비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순간, 우리는 미지의 것 앞에서 느끼는 것이 늘상 공포와 두려움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쁨과 매혹 등 그 반대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타자성'을 경험할 때의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형태는 낯설음, 망연자실, 숨이 멈출 듯한 놀라움이다. 그 독일 철학자가 '신비mystetium'라는 용어를 그 체험의 '핵심적 개념'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도 그것을 인식하는 것 같다.  신비―'절대적인 접근 불가능'―는 바로 '타자성', 우리와는 무관하거나 낯선 무엇으로 나타나는 타자의 경험이다. 타자란 우리와는 달리,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존재이기도 한 무엇이다. 그의 출현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첫번째 감정은 망연자실이다. 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막막함은, 공포나 두려움 혹은 기쁨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기보다는, 두려움으로 느껴진다.  6)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70 무서움 안에는, 뒷걸음 쳐지는 공포와 현존과 합치되고자 하는 매혹이 포함되어 있다. 무서움은 우리를 마비시킨다. 그것은 현현한 것이 그 자체로 위협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 현현에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무섭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 있는 모든 내면이 드러나는 얼굴이며, 존재의 안과 밖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잔혹미와 불규칙미에 대한 길이 남을 작품을 썼다. 그 미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세례를 받은, 타자의 육화encarnacion이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혹은 아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 매혹에 빠지기 전에, 먼저 마비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몸이 굳어진다는 테마는 신화나 전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공포는 우리의 숨을 멎게 하고, 피를 얼어붙게 하며, 몸을 돌처럼 굳게 만든다. 기묘한 현현 앞에서 마비되는 현상은 무엇보다도 숨이 멎는 것같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흐름인 호흡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존재에 물음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공중에 띄운다. 우리는 무(無)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무다. 우주는 심연으로 변하고, 우리 앞에는 움직이지 않는 현현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입을 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거기 있기만 한다. 현전하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바가바드 기타』의 핵심 장면은 크리슈나 신의 현현(顯現)이다. 크리슈나는 영웅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로 변신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 대화한다. 영웅은 망설인다. 그는 겁이 나서가 아니라, 애정 때문에 망설인다. 171  적장들이 이복형제, 스승, 사촌들이기 때문에, 전쟁에서의 승리는 같이 피를 나눈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아르주나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상당수를 죽이는 것은 '카스트 제도의 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세계의 기저와 전 우주도 파괴될 것이다.  아르주나의 논리에 대해 크리슈나는 먼저 세속적인 논지로 맞섰다. 즉, 전사(戰士)에겐 전투가 그에게 주어진 '법dhama'이라는 것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자기 운명에 대한 배신이며, 자신이 전사라는 사실에 대한 배반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살인은 죄라고 믿는 아르주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살인은 끝없는 업業[karma]을 낳는 속죄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이 논리 못지 않게 강력한 논리를 세운다. 싸움에서 물러서는 것은 그의 판두족(族)을 패배와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군의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주나가 처한 입장은 안티고네의 입장과 유사하지만, 그 긴박함은 아르주나의 경우가 훨씬 더하다. 안티고네는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국사범을 매장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만, 오빠를 땅에 묻어주지 않는 것은 인의(仁義)에 어긋난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법이나 인의에 근거해서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어느것도 아르주나의 갈등을 풀지 못한다. 마침내 모든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리슈나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신이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정한 현현이 일어나면, 존재의 감춰진 모든 형태가 시각적으로 확연하고도 생생히 드러난다. 신의 출현 앞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아르주나는 자기가 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172 수많은 입과 눈, 오 억센 팔을 가진 자여, 수많은 팔과 넓적다리와 발, 수많은 배와 수많은 끔찍한 송곳니를 지닌 당신의 위대한 형상을 보면서 세계는 전율하나이다. 그리고 저도 또한. 갖가지 색깔로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며 딱 벌어진 입과 작열하고 있는 거대한 눈을 지닌 당신을 보고서 저의 내적 자아는 전율하며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하나이다. 오 비쉬누시여!7) 비쉬누는 '우주의 집'이며, 그가 출현할 땐 삶과 죽음의 모습 등 모든 형태가 뒤범벅되어 나타나기에 무서워보이는 것이다. 무서움은, 근접할 수 없는 전체 앞에 섰다는 놀라움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이 현현 앞에서, 선과 악은 더 이상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때 우리들의 몸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아니, 다른 측정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크리슈나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는 나의 도구이다." 아르주나는 신의 손에 쥐어진 연장에 자나지 않는 것이다. 도끼는 자기를 부리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모른다.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행위―신적인 행위가 드러난 것이다. 아즈텍 문명의 조각상에서도 신성은 꽉 채워지고 충만한 모습으로 조각된다. 하지만 무서움은 단순히 형상과 상징이 많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 순간 한 모습 속에 존재의 두 면이 한꺼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무서운 광경은 존재의 내부를 보여준다. 코아틀리쿠에Coatlicue[神像]는 이삭과 해골 그리고 꽃과 발톱으로 꾸며져 있다.  7) 이 부분의 번역은 『바가바드 기타』 제11장(길희승 옮김, 현음사, 175쪽)에서 인용함. 173 그의 존재는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마침내 생의 내장이 눈앞에 드러난다. 하지만 생의 내장은 바로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이다. 소화 기관은 동시에 파괴 기관이기도 하다. 크리슈나의 입으로 창조의 강이 흐른다. 그의 입으로 우주는 자신의 폐허를 향해 줄달음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 "모든 것이 현존한다"는 말은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말과 동격이다. 실제로, 무서움은 총체적 출현의 형태로 나타날 뿐 아니라 부재(不在)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촛불이 꺼지고, 형상이 붕괴되며, 우주가 피를 흘린다. 모든 것이 공을 향해 뛰어든다. 벌어진 입, 구멍, 보들레르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실감했다.  파스칼에게는 거동을 함께하는 심연이 있었다.  ―아! 모두 심연이다―행동, 바람, 꿈, 말도 역시! 쭈뼛 솟아오른 머리털 위로 '공포'의 바람이 수없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  저 높은 곳에나, 낮은 곳, 어디에나, 깊은 수렁, 모래톱,  침묵, 그리고 무서웁고도 매료되는 공간……  내 밤의 바닥에 신은 그 날렵한 손가락으로 갖가지 형태의 악몽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큰 구멍을 두려워하듯, 어디론지 모르게 나를 몰아가는 막연한 공포로 가득 찬 잠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리고 창마다 보이고 비치는 건 오직 무한뿐 늘 혼미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은 허무도 시샘하는 감각의 무덤,  ―아! 절대로 수(數)와 존재를 벗어나지 못할 나여!8) 8) 인용된 시는 「심연Le gouffre」이다. 여기선 김기봉 교수의 번역을 인용한다. 현존한다. 『보들레르의 명시』, 세계출판사, 1944, 118쪽 174 놀라움, 망연자실, 기쁨 등 '타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의 공통점은, 마음의 첫번째 방향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란 사실이다. '타자'는 우리의 머리칼을 쭈뼛쭈뼛 서게 만든다. 심연, 뱀, 환희, 아름다우면서도 끔찍한 괴물. 그리고 이 물러섬에 의해 반대의 동작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현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단애의 저 깊은 바닥을 향하여 몸을 숙인다. 거부와 매혹, 그리고 현기증. 몸을 던져, '자아'를 벗고 '타자'와 하나가 된다. 비우는 것, 무(無)가 되는 것, 전체가 되는 것, 존재하는 것, 죽음의 중력, 자아의 망각, 포기 그리고 동시에 그 이상한 현현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다.  나의 털을 곤두세우는 것이 나를 잡아끈다. 그 '타자'는 나다. 만일 '타자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가, 그 뿌리에서는, 이상하고 낯선 그것과 우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느낌에 이어져 있지 않다면, 두려움과 동시에 그것에 매혹을 느낀다는 감정은 설명될 길이 없을 것이다.  부동 속에서 전락하고, 전락하면서 상승한다. 나타남은 사라짐이고, 두려움은 저항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다. '타자'의 경험은 '일치'의 경험에서 정점에 달한다. 반대되는 두 운동은 합쳐진다. 뒷걸음질 속에는 이미 앞으로의 도약이 깃들여 있다. '타자'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떨어져 나온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중성이 그치고 우리는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 도약을 하였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화해한 것이다. 175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 없이, 혹은 흔히 쓰는 표현대로 '그냥',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볼 때가 있다. 그땐, 마치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세계는 우리에게 자신의 주름살과 심연을 보여준다. 무심한 흐름 속에 일상이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나름대로 일종의 현신(顯身)이나 출현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똑같은 거리와 정원을 지난다. 우리는 매일 오후 도시적 삶에 찌든 저 벽돌담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아무 때나, 거리는 별세계가 되고, 정원은 막 창조되고, 피곤에 찌든 벽은 기호로 뒤덮인다.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던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너무나, 정말 압도적으로, 생생하다. 선명해진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게 진짜인지, 과거의 것이 진짜인지 의심하게 한다. 처음 본 것 같은 이것은 과거에도 분명히 여기 있었다. 우리가 이제야 처음 들어가본 그 세계에는 거리와 정원과 담벽이 들어가 있었다.  낯설음에 이어 그리움이 뒤따른다. 사물들이, 태초에서 오면서도 이제 방금 태어난 것 같은 빛에 세례받고, 모든 것이 변함없는 그곳을 우리는 기억해내고 돌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들도 그곳에서 왔다. 한 줄기 바람이 우리의 이마를 때린다. 우리는 마법에 걸려, 시간이 멈춘 오후 한가운데서 허공 중에 떠 있다. 우리는 저 너머에서 왔다는 것을 느낀다. 그곳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전생(前生)―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76 '타자'에 대해 낯설어하면서도 친숙하고, 거부하면서도 매혹되고, 도망가면서도 안기고 싶은 마음은 우리 자신에 대해 느끼는 고독과 교감의 상태이다. 진실로 자신과 함께 홀로 있는 사람, 자신의 고독 속에 칩거하는 사람은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 고독이란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둘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둘이기 때문에, 모두 외로운 것이다. 낯선 자, 타자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붙잡으려 하고, 그들은 자꾸 도망간다.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 있다. 매일 밤, 몇 시간 동안, 우리와 살며시 합친다. 매일 아침 우리는 헤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부재이며, 빈틈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인가? 하지만 그들을 배가시키는 것은 거울이 아니라, 시간이다.  그들을 잊기 위해, 일상으로 도망치거나, 업무에 몰두하거나, 혹은 쾌락에 정신을 잃는 것은 소용없다. 타자는 언제나 부재한다. 부재하면서도 편재(偏在)한다. 우리 발밑에는 빈틈과 구멍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인 타자를 찾아, 넋을 잃고 고뇌하며 헤매인다. 하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없인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수 없다. 치명적 도약은 사랑, 이미지, 현현이다.  현현 앞에서, 그것이 진짜 현현이라면, 우리는 나아갈지 물러설지 망설인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모순된 성격은 우리를 얼어붙게 한다. 그 몸과 눈과 목소리는 우리를 위협하면서도 매혹시킨다. 우리는 이전에 결코 그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먼 옛날과 혼동하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낯설면서도, 너무도 친밀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몸을 만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굳건한 대지를 밟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먼 남[他人]도, 더 가까운 자신도 없다.  사랑은 우리를 정지시키고, 자아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며, 우리를 타인의 육체, 타인의 눈동자, 타인의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에서만, 너무나 타인인 그 사람의 인생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이제 타인이란 없다.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순간에, 가장 완벽하게 자기 존재를 회복할 수 있다. 이때 모든 것이 현존하며, 우리는 존재의 어둡고 숨겨진 이면을 본다. 다시 한번 존재는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다. 177 사랑과 신성의 경험 사이의 유사성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같은 연원에서 흘러나온 현상들이다. 단지 각 존재의 상이한 층위에서 도약을 시도하여 피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손쉬운 예를 들어보면,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신자의 본성을 바꾸는 작용을 한다. 성스러운 음식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본성이나 원초적 조건을 '회복하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인은 지고한 육체적 먹거리다"라고. 성적 식인canivalismo erotico에 의하여 인간은 변화되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종교의 행위와 모든 신화, 그리고 유토피아 사상에서까지 등장하는 회귀의 개념은 사랑의 인력(引力)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인은 우리를 고양하여 우리 밖으로 나오게 하고, 동시에 원래의 우리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떨어지는 것은 존재로 돌아가는 것,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에 대한 허기는 죽음에 대한 허기이다. 에너지의 약동, 분출, 존재의 팽창은 곧 게으름, 우주적 무기력, 무한으로의 전락이다. '타자' 앞에서의 낯설음은 자신으로의 회귀이다. 존재와의 궁극적 일치와 동일화의 경험이다.  사랑과 종교와 시가 공통된 연원(淵源)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일 먼저 지적한 사람은 시인들이었다. 근대 사상은 이 발견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차압하였다. 근대 염세주의는 시와 종교를 섹슈얼리티의 한 형태로 전락시켰다. 종교는 정신 착란이며, 시는 승화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다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와 시를 다시 다른 분야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는 경제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연구들을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도 없으리라. 여러 번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모든 가설들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연구 방식인 개체 분석법의 제국주의적 폐해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사랑과 시에서와 같이 초자연적인 경험에서 인간은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단절의 느낌에 이어, 낯설게 보였으나 이제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분리 불가능한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따라 온다. 이 모든 경험들이, 섹슈얼리티나 경제적, 사회적 기구 혹은 그 어떤 다른 조직보다도 오래된 무엇을 공통적인 핵심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근대 사상가들과는 달리―우리는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신성은 섹슈얼리티와 그것을 구체화시킨 사회 제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에로티시즘이지만, 성적 충동을 초월하는 무엇이며 또한 사회 현상이지만, 그와는 다른 무엇이기도 하다. 신성은 우리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의 근원이 원초적인 것이며 우리 자신의 존재와 뒤섞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 세 가지 경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외부로 드러나는 현상들이다. 그 경험들에는 이전의 상태에 대한 향수가 깃들여 있다. 우리가 떨어져 나왔으며, 매순간 떨어져 나오고 있는 그 근원적인 통일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하는 원초적인 존재 조건을 이룬다.  존재의 심연 저 깊은 곳에서 대체 무엇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낯설음과 친숙함, 상승과 하강, 외경과 경배, 거부와 매혹 등 그것이 표현되는 상반적인 운동과 그 화해를 엿보고, 우리는 그 운동들이 통일성으로 용해되려고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일까? 진정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미래의 나를 앞당긴다. 태초의 삶에 대한 향수는 미래의 삶에 대한 예감이다. 하지만 그 과거와 미래의 삶은 지금 여기이며, 번개 같은 순간 속에 녹아든다. 그 향수와 예감은 시, 신화, 사회학적 유토피아 혹은 영웅의 과업 등 모든 위대한 인간 업적의 본질을 이룬다.  어쩌면 인간의 진정한 이름, 인간 존재의 표식은 '욕망'인지 모른다. 하이데거가 말한 시간성이나, 마차도가 말한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은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지향하는 그것이 바로 욕망이 아니겠는가? 만일 인간이란, '그저 있는'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는 욕망의 존재이며, 존재의 욕망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만남, 시의 이미지, 그리고 신의 현현에는 갈증과 충족감이 뒤섞인다. 우리는 불가분한 결합 속에서 과일이며 동시에 입인 것이다. 근대인들은,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간적인 존재는 긴장을 이완시키기를 원하고, 갈증을 해소시키기를 원하며,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기를 원한다. 시간적인 존재는 자기 충족을 위하여 샘처럼 솟아난다. 인간은 스스로를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하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가? 180 시적 계시   우리는 종교와 시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고자 노력하며 또한 스스로의 고유한 모습을 실현하는 가능성을 성취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종교와 시는, 마차도가 '존재의 본질적인 타자성'이라고 부른, 그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시도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그때 우리 자신인 그 '타자'가 나타난다.  시와 종교는 계시이다. 하지만 시 언어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선다. 이미지는 이성적 증명이나 초자연적인 힘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게만 의지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때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이다. 반면 종교적 언어는, 정의 그대로,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신비를 보여주고자 시도한다.  이 상이성은 종교와 시 사이의 유사성을 혼란스럽게 한다. 같은 샘에서 탄생하고 또 같은 변증법에 지배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둘이, 어쩌면 그렇게 상호 화해 불가능한 상태로―한편에선 리듬과 이미지로, 또 다른 편에선 신의 현현(顯現)과 제식으로―구체화되어 갈라서게 되는 것일까? 시란 일종의 종교의 혹이거나 또는 신성의 어둡고 희미한 예시인가? 종교란 교리로 굳어진 시인가? 앞글에서의 기술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82   루돌프 오토는, 신성(神聖)이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 요소로 구성되는 선험적a prior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성적인 요소는 "어떠한 감각적인 지각에도 근거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필연적이고, 실체론적인 관념, 그리고 필연적이고 객관적 가치인 선(善)의 관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관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경험의 영역을 버리도록 강요하며,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순수 이성에 속하며 정신 그 자체의 원천적인 성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1)  고백하건대, 내 생각 속에 완벽이나 필연 혹은 선(善) 같은 그런 관념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이성의 원천적인 성향을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와 유사한 관념들이 의식을 구성하는 갈망 같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념들을 한 가지 윤리적 판단으로 구체화할 때마다, 그에 못지 않게 엄격하고 절대적으로 그와 관계된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하게 된다. 개개의 윤리적 판단은 다른 윤리적 판단들을 부정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선, 그 윤리적 판단 자체가 의지하는 선험적 관념이라는 것마저도 부정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자.  한편 만일 실제로 그런 관념들이 지각 이전의, 혹은 지각의 해석 이전의 영역을 구성한다면, 신성(神聖)의 범주가 정말 근원적인 요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신성은 초자연적인 경험에도 있지 않고, 수많은 종교적 개념에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합리적 선험성으로 여겨지는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자동적으로 신성(神性)의 개념에서만 성립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추정을 부정하는 것 같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패배하고 죄를 짓는 신(神)인 켓살코아틀을 숭배한다. 그리스나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동시에 선과 필연의 관념들은 전지전능이라는 보완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아즈텍인들의 종교는, 희생 제의에 대해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한다.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신들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세계를 움직이지만, 그 신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피다.  이런 예를 더 제시할 필요는 없다. 오토 스스로 자신의 말의 한계를 이미 설정했다. "이성적인 표현은 신성(神性)의 본질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신성은 통합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합리적 술어는 어떤 면에서는 발판이 되지만, 신성이 이를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속성을 지녔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거부하고 싶은 경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두려운 무엇으로 이끌리는 경험이다. 그것은 내재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며, 존재의 내장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신화에서, 악마적인 것은 대지의 중심에서 움터 나온다. 그것은 숨겨진 것의 발현이다. 동시에, 모든 드러남은 시간이나 공간의 단절을 수반한다. 그 상처나 틈새로 우리는 존재의 '이면'을 엿보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창조란 무의 심연에서 창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현기증이 우리를 엄습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려 하고, 원초적인 공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 할 때,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범주화를 시도하게 된다. 183  이런 작업에서 이원론과 더 나아가 소위 모든 이성적 분류의 원천이 연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경험의 몇몇 요소들은 시바 신의 파괴, 여호와의 진노, 켓살코아틀의 만취, 테스카틀리포카의 북면北面 등, 신의 어두운 혹은 난폭한 모습을 구성하는 속성으로 변한다. 다른 요소들은 신의 밝은 면을 표현하여 빛나는 얼굴이나 구원자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원론이 심화되어, 두 얼굴 혹은 두 모습을 지닌 신이라는 개념에서 빛의 왕자와 어둠의 왕자라는 독립된 신성神性으로 전이된다.  결국, 정화 혹은 순화를 통하여, 그 경험의 잔혹한 요소들은 신의 모습에서 유리되고 종교 윤리가 생성될 토양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종교적 계율의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계율이 신성神聖의 최종적 근거가 되지 못하고, 또한 순수한 윤리적 직관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것은 존재의 깊은 층을 들추는 원초적 경험의 합리화 내지 정화의 산물일 뿐이다.    오토는 다음과 같이 비이성적 요소의 우선성과 원초성을 확립했다. "신령함의 관념들과 그와 연관된 감정들은 이성적 관념들처럼 완전히 순수한 관념과 감정들이다. 그것들엔 칸트가 '순수' 개념과 감정에 내재한다고 지적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적용된다." 즉, 관념과 감정이 비록 경험 속에 주어지며, 경험에 의해서만 포착될 수 있지만, 경험에 우선한다는 말이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과 함께 오토는 "더 고양되거나 혹은 더 깊은 곳을 구성하는"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영역이 바로 신성神性이나 성스러움 혹은 신성神聖이며,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신성神聖은 인간 속에 내재한 신격화 성향의 발현이다. 우리는, 선험적 관념의 유현遊絃한 내용이 성장함에 따라 자기 자신과 대상물을 의식하려는 일종의 '종교적 본능'의 출현을 목적하게 된다. 184 그 근원적인 성향이 표상하는 내용은 그것이 기초하는 선험성처럼 비이성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이나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이성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신령한 대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너무나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미지나 역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불교의 니르바나(열반)나 기독교 신비주의의 무는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개념으로, '타자성을 밝히는 진정한 상형문자'이다. "역설의 가장 강렬한 표현인" 이율 배반은 당연히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공통된 신비주의 교리의 기본 요소를 형성한다.    오토의 정의는 노발리스의 금언을 상기시킨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종교가 탄생한다." 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에서는, 종교적 근본인 초월의 개념이 심각한 균열을 겪게 된다. 인간은 "신의 손끝에 매달린" 존재가 아니라, 신이야말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한 대상은 항상 내부에 있고, 모든 신비적 경험이 시작하는 텅 빔의 다른 얼굴, 즉 긍정적인 면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서 신이 드러난다는 생각과,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현현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 성향 때문에 우리가 신을 보게 된다는 생각은, 동시에 신성을 오히려 인간 주체성에 종속시키면서 그 존립 기반을 흔드는 것이 되지 않을까? 185   다른 한편, 종교적이거나 신격화 성향을 다른 성향들, 그 중에서도 시적 성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노발리스의 말을 변형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도 조금도 어색하거나 문제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외부의 현실적이며 개별적인 모든 대상에 놓여나서 스스로를 느낄 때, 이상적인 본연의 마음자리가 찾아온다. 바로 그때 시가 탄생한다."  오토 자신도, "숭고함sublime의 개념은 신령함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된다."고 인정하고, 시적 감정과 음악적 감정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단지 숭고한 감정의 출현은 신성한 감정의 출현보다 나중에 일어난다고 했다. 이렇게 神聖의 특이점은 그 우선성에 있다.    신성의 우선성은 역사적 순서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 인간이 처음 출현한 그 순간, 그들이 무엇을 먼저 느끼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은 지금도 알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오토가 주장하는 우선성은 다른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성스러움은 근원적인 감정이며, 이로부터 숭고함과 시적 감정이 유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신성의 모든 경험에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숭고한'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숭고함 속에는 언제나 측량할 길 없는 미지의 것이 출현할 때의 신적인 공포가 자아내는 두려움, 불편함, 마비, 숨막힘 등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 속에는 에로틱한 힘이 강력히 개입되기도 하고, 사랑의 경험 속에 신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랑은 자아의 기저를 뒤흔드는 지진이며 계시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언어는 신에 몸을 맡긴 신비주의자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시 창작의 순간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해석하고 분류할 때 일어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신성함이 다른 모든 경험보다 우선하면서 근원적이고 대체 불가능한 선험적 영역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추정하게 된다. 우리가 그 선험적 영역을 고집하려고 할 때마다, 신성의 경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른 경험 속에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놀라는 존재이다. 인간이 놀랄 때, 시를 쓰고 사랑하고, 신을 찬양한다. 사랑에는 놀라움과 시와 신성과 대상에 대한 숭배가 들어 있다.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이런 경험들 중 그 어느 것도 독자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경험에는 서로의 우선성을 따질 수 없는 동일한 요소들이 나타난다.    이런 경험들을 구분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을 이루는 요소들의 조합이 아니라 의미이다. 시인의 언어와 신비주의자들의 언어를 구별하는 특별한 색조는 그 말이 지향하는 대상에 달렸다. 신비주의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은 특별한 정신의 빛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개개 경험의 진정한 독자성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에 좌우된다. 하지만 이때도 역시 어려움이 끼여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대상이란 것도 결국은 "우리 내부에 잠재된 신격화의 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울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외적 대상들을 신성화의 목록 속에 기록하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저 희미한 내적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란 것도 앞에서 본 바대로 순수하지 않다. 결론짓자면, 신성의 영역을 다른 영역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지시체 이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이란 것도 경험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모든 길이 끊어졌다. 선험적이라는 관념이나 범주를 포기하고 신성神聖이 인간에게서 탄생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수밖에 없다. 188   신성한 공포는 근본적인 낯설음 속에서 싹튼다. 놀라움은 일종의 자아의 왜소화를 가져온다. 인간은 자신을 거대함 속에서 길 잃은 미약한 존재로 느끼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작다는 감정은 비참함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바로 '먼지와 재'에 다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macher는 이 상태를 '의존의 감정'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특징적인 차이가 이 '의존'을 다른 의존들과 구분짓는다. 상위의 존재와 상황에 대한 의존은 상대적이며, 그러한 요인이 사라지자마자 의존도 사라진다. 신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우리들의 탄생과 함께 태어나 죽음 뒤에 이르기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의존은 "스스로에 의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정신의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무엇이다. 신성은 이렇게 추론에 의해 획득되어진다. 스스로에 대한 감정과 무엇에 의지하고픈 마음에서 신성의 관념이 태어난다.  오토는 낭만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을 차용했지만, 그의 이성주의는 배격했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에겐 신성이나 신령함이 진정으로 모든 관념들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지의 무엇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결과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항상 현존하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그 무엇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토는 이 근원적 감정을 '피조물의 상태'라 부른다. 이제 중력의 중심이 바뀐다. 진정으로 특징적인 것은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 말은, 우리들의 근원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유한성과 왜소함의 어두운 의식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의 얼굴과 대면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를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렇게 근원적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요소이다.  슐라이어마허와는 반대로, 오토에게 피조물의 상태는 창조주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결과이다. 우리는 전체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작은 부분이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우리가 창조주를 희미하게나마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피조물로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많은 종교가나 신비주의자들의 글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즉, 부정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긍정의 상태보다 우선하고, 피조물의 상태가 창조자의 등장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는 자기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느끼지 않고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스로 뿌리뽑혀서 어느 낯선 세계에 던져졌다는 느낌뿐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고아의 감정은 모성과 부성에 대한 인식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오토는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한 논리를 단지 역으로 또 한 번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토는 의지의 감정에서 신의 개념을 추출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신성함을 피조물의 근원적 상태로 여겼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주어진 상황에 대한 해석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오토는 핵심을 포착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결정적인 상태인 '태어났다는 사실'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189 그리고 막 탄생한 그 상태는 우리의 생애 내내 지속된다. 매순간 우리는 보호받지 못하고 발가벗겨진 채로 태어나 세상에 던져진다. 낯선 미지의 것이 사방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오토가 말한 피조물의 상태란, 신학적인 의미를 탈색하면, 바로 하이데거가 부른 "그곳에 처해졌다는 섬뜩한 느낌"이다. 그리고 왈렁스Waelhens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에서 "근원적 상태의 느낌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고 말했다.2)  신성함의 영역은 피조물이라는, 태어났다는, 그리고 매순간 태어난다는 그런 근본적인 상태의 정서적 계시가 아니라 그 상태의 해석이다. '그곳에 처해졌다'는, 즉 우리는 언제나 유한하고 비보호의 상태로 낯선 곳에 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사건은, 전지전능한 의지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고 언젠가는 그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로 변한다.    하이데거의 분석에 의하면, 고뇌와 두려움은 우리들의 근원적 조건에 이르는 문을 열고 닫는 서로 대립되고 대칭적인 두 개의 통로이다. 스스로의 공동空洞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하는 신성함의 경험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 조건인 우연성과 유한성을 붙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계시는 잠시 후 인간 조건의 외부적인 요소인 창조주와 신성神性 등에 의거하여 인간 존재 조건을 해석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가려지게 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은 고뇌 속에서 발견되는 무를 잘 가려낸다. 하지만 곧 죄인의 왜소함을 신 앞에 고백하면서 이 계시의 의미를 왜곡하고 만다.  우리의 비참함은 죄의 사함과 구원에 힘입어 소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원히 구원되었다는 느낌으로 회복된 전망은 우리 존재의 가치를 재건하고 잠깐 동안 무를 극복하게 해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일어났던 것처럼, 고뇌의 진정한 의미는 다시 한 번 가면을 쓰게 된다."3) 2) 왈렁스 Alphonse de Waelhens,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tin Heidegger』, Lovania, 1948. 9(원주)  3) 왈렁스 Waelhens, 앞의 책. (원주) 190 우리는 여기에 미겔 데 우나무노와 특히 케베도라는(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의 시 「참회자의 눈물」과 「기독교인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또 다른 이름을 첨가할 수 있다. 신성의 경험은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계시의 의미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이제 결론내릴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그것을 알고 느낀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반동으로, 종교는 모든 인간에게 숙명적으로 주어진 유한성이라는 형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대안은, 조금만 움직여도 벗겨질 가면에 불과하다. 이 점은 원죄와 속죄라는 개념을 검토해보면 선명히 드러난다.    우리의 근원적인 비참함과 대조적으로, 신성은 자신의 성스러운 형태에 존재의 충만함을 담는다. 성스러운 것은 '장엄한 것'인데, 이것은 선과 도덕의 개념을 초월한다. "장엄한 것은 경외심을 유발하여" 숭배와 복종을 요구한다. "모든 도덕적 체계와 무관하게, 종교는 의식에 부여되는 내적인 의무이다…… "4)  원죄, 보상, 속죄 같은 개념들은 장엄한 것이 피조물에게 느끼게 하는 이 복종의 감정에서 싹터 나온다. 원죄 개념에서 구체적인 잘못이나 어떤 다른 도덕적 영향을 찾는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 전에 고아 의식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죄는 우리들의 잘못과 죄악보다 선행한다. 그것은 도덕보다 앞서는 것이다.  4) 1)오토Rodolfo Otto, 『성스러움Lo Santo』, Madrid, 1928(원주) 191 "도덕적 영역 내에선 구원이나 보상 혹은 속죄 개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토는 이어 말하길, "그것들은 신비주의 영역에서는 진실되고 필요한 것이지만, 윤리의 영역에서는 거짓이다." 속죄와 긴급한 구원의 필요성은 도덕적 의미에서의 '잘못'에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근원적인 '결핍'에서 싹터 나온다.  우리들은 부족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전체인 존재에 비해 작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불충분함이다. 원죄란 부족한 존재에서 비롯된다.    존재하기 위하여 인간은 신을 달래고, 신성神性을 받아들여야 한다.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신성한 것, 충만한 존재에 이른다. 이것이 성사聖事, 특히 영성체領聖體 의식의 의미이다. 이는 또한 희생의 궁극 목표이기도 하다. 즉, 신을 달래는 것이며 이것은 헌신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타인들의 희생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인 부족함으로 인해, "신성神聖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 희생을 통하여 신이 우리에게 존재의 가능성을 되돌려주는 구원과 우리를 정화하는 희생인 속죄는 이 근원적인 자격 미달의 감정에서 태어난다.  종교는 이렇게, '죄의식'과 '죽을 운명'이 같은 차원의 용어라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들은 죽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죄는 속죄를 요구하고, 죽음은 영원을 요구한다. 죄와 속죄, 죽음과 영원한 삶은, 특히 기독교에서, 상호 완성되는 하나의 짝을 형성한다. 하지만 동양의 종교들은, 우나무노를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으며 병적 성격으로까지 몰고간 문제인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192    엄격한 의미에서, '결핍'과 '부족한 존재'가 원죄와 동의어가 된다고 추론할 만한 근거는 없다. "빚을 진 것 때문에 죄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도 낮아졌다고도 증명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 교리와 차이점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과 자연 세계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따라서 부족한 인간 존재를 원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완벽한 존재인 신 앞에서, 천사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결점이 많다. '결점'은 바로 신이 아니라는 사실, 즉 우연한 존재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연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로서 주어진다. 존재로 상승하거나 무로 추락할 수 있는 힘에는 자유가 포함된다. 한편으로 우연은 자유를 생산하고, 다른 한편 자유는 우연 혹은 원초적 결함을 치료하고 순화시키는 가능성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추락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자체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을 가능성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은 굳이 가톨릭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생각이며, 스페인 희곡에서 크게 발전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원죄는 '부족한 존재'와 동의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결핍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서 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바로크 시대 멕시코의 수녀 시인 후아나 수녀가 유명한 편지에서 "부정적 호의"라고 표현했을 때도 포함해서, 은총이란 구원에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은총에 굴복한다.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는 진짜 부족하고, 작으며, 불충분하다. 이 사실은 은총이 자유를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확립한다는 것을 말한다.  "은총과 함께 우리가 은총의 힘을 능가하는 자유 의지를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가 은총에 의하여 그 힘과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6) 가톨릭 사상은 개신교 사상보다 더 풍부하고, 자유로우며,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와 원죄 사이에 형성된 이 인과론적인 연결 고리를 완전히 해체시키지는 못한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전에 어떻게 자유가 악을 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를 부정하고, 존재보다는 무를 선택한 이 자유는 대체 어떤 자유란 말인가?    인간이라는 '부족한 존재'를 신이라는 충만한 존재와 마주 세우면서, 종교는 영원한 삶을 상정했다. 이렇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지만, 지상의 삶을 긴 고통 속에서 근원적 결핍을 속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 속에 현존한다. 우리는 죽으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매순간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죽음을 빼앗으면서, 종교는 우리에게 삶도 빼앗는다.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종교는 이 삶의 죽음을 확인한다.  5) 하이데거Ma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El ser y el tiempo』, traduccion de Jose Gaos, 2a ed.  6) 질송Etienne Gilson, 『중세 철학의 정신L、esprit de la philosophie meddievale』, Paris, 1944 (원주) 194   우리의 조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드러냄(啓示)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어떤 경우엔 언어적인 형태를 띄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조차도, 현시하는 주체의 창조, 즉 인간의 창조는 수반된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존재 조건은, 본질적으로, 항상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무엇이다. 어쨌든, 계시가 시적 경험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취할 때, 행위와 표현은 불가분의 것이 된다. 시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나중에 낱말들로 옮겨지는 경험이 아니라, 낱말들 자체가 핵을 이루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이름 불려지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실존을 결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을 분석하는 것은 그 경험의 표현을 분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앞장에선 시적 계시의 의미를 규명했고 분석했다. 이젠,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시는 어떻게 씌어지는가? 207   우리들의 물음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어려움은 시 창작의 증언들이 보여주는 모호함이다. 시인들의 말을 믿는다면, 표현의 순간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결정적인 도움이 있다고 한다. 이 도움은 우리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갑작스러운 침입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의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 사고의 흐름에 뛰어들어, 나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말하도록 하는 그는 대체 누구이며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그를 악마, 뮤즈, 영靈(espiritu), 정령精靈(jenio)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노동, 우연, 무의식, 이성으로 부른다. 어떤 이들은 시는 외부로부터 온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시인 자신에게서 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예외는 번번이 일어나서, 단순히 예외라고만 부를 수는 없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작에 관한 이런 상반된 개념들을 이상적으로 반영하는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해보자.    책상 위에 엎드려, 골똘하지만 텅 빈 듯한 시선으로, 영감을-믿지-않는-시인은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의 첫 연을 이미 썼다.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았다. 각각의 각운과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른 엄격한 필연성 그리고 기하학적 놀이 같은 즐거움과 가벼움을 준수하며 썼다.  하지만, 11음절의 마지막 행을 끝내기 위한 한 단어가 필요했다. 시인은 생각나지 않는 각운을 찾아 사전을 뒤적인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담배를 피워 물고, 일어섰다 앉았다, 다시 일어선다. 무無, 공허와 불모. 그러다 갑자기 각운이 생각난다.  시를,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쩌면 초기의 계획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예상 못했던 다른 것―항상 다른 무엇―이다. 이 이상한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인이 착상을 자극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나타나게 했다고는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에서는 무에서만 나온다. 그 단어는 어디에 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 발생들은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208    반대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속삭임의 무진장한 흐름'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로 향한 눈을 지긋이 감고 시인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 간다. 처음엔 문장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지만, 점차 펜을 쥔 손의 리듬은 사고의 흐름과 일치한다. 이제 사고하기와 글쓰기 사이의 차이가 없어지고, 둘은 같은 리듬을 탄다.  시인은 그의 행위에 대한 의식마저도 잊어버렸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혹은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돌연히 길을 가로막는 단어 하나, 혹은 단어의 이면인 침묵이 나타나 흐름을 중단시킬 때까지 모든 것은 순탄하다. 시인은 줄기차게 장애물을 피하려고, 그것을 돌아 어떻게 해서든지 비껴 나아가려고 시도한다. 다 소용없다. 길들은 항상 동일한 벽 앞에 이른다. 샘은 흐르기를 멈춘다.  시인은 방금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고, 뒤얽혀 있는 듯한 그 글이 비밀스런 일관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한다.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음조와 리듬과 체온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다. 혹은 여전히 살아 있는 부분들은 아직도 빛을 내며, 전체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시의 통일성은 물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조, 체온, 리듬 그리고 이미지들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시가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모든 작품은,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변형시키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그 글을 쓰는 데에 이성적 의식이 거의 참여하지 못했던 텍스트엔 반복되는 단어들, 일정한 경향에 의해 계속 다른 것들을 생산해내는 이미지들, 잡을 수 없는 단어를 찾아 팔을 길게 뻗친 듯이 보이는 문장들이 있다. 시는 흐르고, 달린다. 이 흐름이 바로 시에게 통일성을 부여한다. 210 그런데, 흐름이란 단순한 움직임뿐 아니라 또한 무엇을 향해 간다는 것도 의미한다. 단어들을 존재하게 하고, 또한 앞으로 향하게 하는 긴장은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단어들은 자신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행진을 멈추게 할 단어를 찾는다. 시는 이 마지막 단어에 의해, 그리고 그 단어 앞에서야 환하게 밝아진다.  시편은 숨어 있는, 어쩌면 말해질 수 없는 그 단어를 향한 겨냥이다. 결국, 시의 통일성은, 다른 모든 작품들의 통일성과 마찬가지로, 그 방향과 의미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갈 지之자 모양의 시편의 흐름에 마지막 순간 의미를 부여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색적인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신비한 외부의 도움, 즉 예기치 못한 타인의 목소리의 출현과 만나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의 경우를 따라가면, 속삭임을 딱 들어맞는 말로 바꾸고, 희미한 예감을 현실화하는―앞의 경우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어떤 의지의 출현과 마주치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좀 부정확하지만 임시 방편으로 '타자의 의지 침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라고 불리는 현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쩌면 그것은 의지보다 훨씬 오래되고, 오히려 의지가 기대고 있는 그 무엇이다.  사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지란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정한 규범에 우리의 행위를 종속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말하는 의지란 사색, 계산, 혹은 예상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지적 작용보다 우선하며, 창조의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의지의 진정한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 우리 것인가? 210     시를 쓰는 행위는 상반되는 힘들의 얽힘, 즉 나의 목소리와 타자의 목소리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으로 주어진다. 경계는 희미해진다. 우리의 언표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가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너'나 '그'가 아닌,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다른 대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이 모호성에 영감의 신비가 자리한다.  신비인가, 난제인가? 둘 다이다. 영감이 고대인들에게 하나의 신비였다면, 우리들에겐 세계라는 개념과 우리의 심리적 개념 자체에 모순되는 난제이다. 이렇게 영감의 신비를 심리적인 문제로 왜곡하는 것은, 시적 창조가 무엇에 기초하는지를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처음부터 외부 세계의 실존을 의문시했던 인도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서구 사상은 오랫동안 외부 세계의 존재를 안심하고 믿어버려 우리 눈이 본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타자성'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개입하는 시적 행위는 언제나 어둡고 설명되지 않는 무엇으로 치부되어, 세계라는 개념을 위협하는 문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연스럽게 세계 속에 포함되고, 세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그것은 세계의 객관성, 사실성 그리고 역동성의 증거로까지 인정되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보았다. 시인의 몽환夢幻과 열정은 악마적 강신降神의 표지였다. 소크라테스는 『이온Ion』에서 말하길, "시인은 열정의 포로가 되어 자신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창조를 말할 수 없는 가볍고, 신성하며, 날개 달린 존재이다…… 시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신의 입이 그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이다"고 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창조를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211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자연이란 혼으로 가득한 것, 하나의 유기체 그리고 살아 있는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모방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해설에서 가르시아 바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개념은 다소간 신비적 물활론物活論에 의해 영靈이 깃들인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였다.  따라서 시적 '발생'은 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다. 시 자체가 자신의 주인이며 혼이 깃들인 자연과 시인의 영혼이 만나서 얻어지는 열매이다.    그리스의 물활론은 후에 기독교적인 초월로 변한다. 이러한 연계성으로 인해 외부 세계는 존속한다. 혼령의 터전이건 신에 의해 창조된 자연이건 간에,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외부 세계는 우리 앞에 필요한 지평으로서 존재한다.  천사, 돌, 동물, 악마, 식물 그리고 '타자'까지도 자기 스스로의 삶을 가지며, 때때로 우리를 포로로 잡아 우리 입을 통해 말한다. 외부 세계가 의심받지 않고 개념과 원형을 산출해내는 사회에서, 그것이 영감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타자' 즉 신이거나 귀신과 정령이 깃들인 자연이다. 영감은 신성한 힘의 현현이기 때문에 계시이다. 영감이 인간의 자리에서 대신 말을 한다. 신성하거나 세속적이거나 간에, 서사시이거나 서정시이거나 간에, 시는 외부에서 시인에게 내려지는 은총이다.  시적 창조는 신들이 인간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하지만 그 신비는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믿음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 속에서 육화되어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212   데카르트로부터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근대적 주관주의는 외부 세계의 존재를 단지 의식에 근거해서만 인정하였다. 초월적이 되기를 바라는 의식이 매번 부딪히는 것은 유아론이었다. 의식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세계를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이 자연은 우리에게 대상과 관계의 얽힘으로 변하고 말았다.  신은 우리의 생생한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대상, 본체, 인과의 개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의 영역에서와 같이, 관념론이 외부 현실을 파괴하지 않은 곳에서, 외부 현실은 하나의 대상, 하나의 '경험의 장'으로 변화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오래된 속성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은 살아 있고 혼이 깃들인 생명체, 즉 은밀하고 의도를 갖는 하나의 힘이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오래된 개념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감의 개념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자의 목소리'와 '낯선 의지'는 아직도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이렇게 영감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사이에는 하나의 벽이 세워진다.  영감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것의 존재는 우리의 가장 뿌리 깊은 지적 믿음을 부정한다. 따라서 19세기 내내, 신성한 그 옛 힘을 외부 현실에게 되돌려주고자 하는 골칫거리 운동들을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완화시키려는 시도가 증가되어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영감이 우리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 16세기부터는 영감을 하나의 수사학이나 문학적 비유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하는 주체는 시인의 의식뿐이었다. 당시의 대표적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았고, 부르는 대로 받아 적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자의식에 충만한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213 시적 창조를 진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사실은, 슬그머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 변화되었다. 한동안 영감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탈선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게으른, 부주의, 즉흥주의, 편의주의였다.  몽환과 영감은 광기와 질병의 동의어로 변했다. 시적 행위는 노동과 훈련이 되고, 글쓰기는 '흐름에 거슬러 싸우기'가 되었다. 이런 사고 방식 속에서, 여러 가지 부르조아지 도덕 개념들이 미학의 영역에 과도하게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초현실주의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이 장사꾼 미학의 도덕적 뿌리를 고발한 것이다. 사실 영감은 상과 벌이라는 개념을 숨기고 있는 편의성과 난해함, 게으름과 노동, 부주의와 테크닉 등의 천한 개념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들은 맑스가 지적한 대로, 부르조아지 사회가 오래된 인간 관계를 대체한 '엄격한 계약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 작품의 가치는 그것에 투자한 작가의 노동의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시적 창조는 우리의 일상적 관념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영감은 심연에서 싹튼다. 시인의 언표는 침묵과 불모, 가뭄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충만함과 일치에 도달하기 전의 결핍이고 목마름이다. 그 뒤, 결핍은 더욱더 커지는데, 왜냐하면 시는 시인의 손에서 벗어나 더 이상 시인의 소유가 아닌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시의 앞뒤 좌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 '우리', 그 '나' 역시 사라지고 침몰한다. 시인은 몸을 숙이고 스스로 백지 위로 굴러 떨어진다. 이렇게 시적 창조에는 이득과 손실, 노력과 대가와 같은 개념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시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이득이다. 모든 것이 손실이다.  하지만 부르조아지 도덕의 압력은 시인들에게 그 오래된 정령들의 '목소리' 앞에 귀를 막게끔 강요한다. 보들레르조차도 은근히 노동을 찬양했다. 불모의 황무지와 게으름의 천국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썼던 그 조차도! 하지만 비평가들과 작가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영감의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시의 목소리는 여전히 도전이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214   현대의 여러 특징 중의 하나는 추상적인 신들을 양산했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유대인들을 꾸짖었다. 현대인들에게는 정반대의 질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탈육체화에 정신이 없다. 현대의 우상들은 육체도 없고, 형태도 없다. 그것들은 관념, 개념, 권력 등이다.  신들과 악마들이 살았던 고대 자연과 그 뒤 기독교적 유일신이 차지했던 자리를 인종, 계급, (집단적 혹은 개인적) 무의식, 민족성, 유산 등 얼굴 없는 존재들이 차지했다. 이런 개념들에 의지하면 영감조차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영매靈媒로서 성性, 日記, 역사 혹은 고대 신들과 악마들의 대용품을 은밀히 표현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개념들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들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는 그들을 통틀어 거부하게 만드는 한계, 즉 부분으로서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배타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두에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사실을 붙잡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그 결정적인 힘이나 사실을 어떻게 언어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리비도, 인종, 계급 혹은 역사적 순간 등은 어떻게 언어와 리듬, 이미지로 변하는가? 정신분석가들은 시적 창조를 승화라고 본다. 그렇다면, 그 승화가 왜 어느 때는 시가 되고 어느 때는 시가 되지 못하는가?  프로이트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신비로운 '예술 능력'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감쪽같이 문제를 감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현실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16 시인의 언어와 노이로제 환자의 언어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구분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예술가들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인들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꿈이나 몽상같이 방향성을 결여한 생각 속에도 이미지와 언어의 흐름은 의미가 있다.  "목적이 없는 표상들의 흐름에 우리를 맡긴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멈출 때, 그 즉시 다른 알 수 없는 개념―부적절하지만 흔히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표상들의 행진들을 결정짓게 된다.  목적의 개념 없이는 하나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다…… "1) 여기서 프로이트는 핵심을 찌르고 있는데, 목적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의 흐름에서조차도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인간을 의식, 무의식 등 여러 층으로 나누고, 두 개의 상이한 목적을 인식할 뿐이다.  하나는 우리들의 의지가 참여하는 이성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무관한 '무의식' 혹은 순수하게 본능적인 것으로 인간에게 무시된 것이다. 사실 프로이트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리비도나 본능으로 옮겨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설명을 빠뜨렸다. 그 본능적인 목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의식적'인 목적이란 사실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욕구, 자연적인 작용이므로 대상과 의미를 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 게 아니다. 목적이라는 개념은, 비록 한없이 어둡지만, 도달하려는 것에 대한 인식과 앎을 내포한다. 목적의 개념은 의식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신분석학과 그 모든 분과 학문은 지금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만족스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제를 바르게 제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1) 프로이트S. Freud, 『꿈의 해석La interpretacion de lod suends』 (원주) 216   시인의 개념을 역사의 '대변자'나 '표현자'라고 보는 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역사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로 전환되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받아 적게' 하는가? 모든 역사적 삶이 가지는 상호 연관성에 대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人이며, 간間이다. 가장 신비주의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시인의 목소리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지만 정신 분석학에서와 같이, '역사'나 '경제의 흐름', 즉 '역사적 목표'가, 리비도의 '목적'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말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역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역사이며,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는 사회의 메아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 행위들처럼 사회를 만들고 또한 사회의 산물이다.  결국 우리에게 작용하는 힘이나 주체 혹은 단순한 외부 현실은 성性도 아니고, 무의식도 아니며, 또한 역사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 밖에 있지 않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안에 있지도 않다. 만일 영감이라는 것이 자신의 의식 안에서 듣는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영역을 건설하는 유일한 존재인 의식을 심문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217   지식인에게, 그리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영감은 하나의 문젯거리 혹은 미신 또는 현대 과학의 설명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마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듯 어깨를 움칠하고는 머리 속에서 그 문제를 지워버릴 수 있다. 반대로 시인들은 그것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혀서 투쟁해야 한다.  현대시의 역사는 시인이, 용인되지 않는 영감의 현존과 현대적 세계관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갈기갈기 찢겨져온 역사이다. 이 갈등을 제일 처음 겪었던 이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명철하고 충실하게 그것에 대처하였으며, 그 모순에 고통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초극하려 애쓴 유일한 사람들―초현실주의 이전까지―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다른 한편 질풍노도Strum und Drang 운동의 자식이기도 한 그들은 나폴레옹 제국의 칼날과 신성 동맹의 반동 사이에서, 구태여 표현하자면,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잃은 채 살았다. 그들의 내부는 대립물의 싸움터였다.    이런 시인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고집스럽게 유지되어온 영감은, 낭만주의가 전투적으로 포교하는 주관주의 관념론과 화해할 수 없었다. 결별이 야기한 폭력은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담하고 무모한 시도를 유발했다.  "모순의 법칙을 파괴하는 것은 아마도 최상의 논리가 지닌 가장 숭고한 책무이다"라고 노발리스가 선언한 것은, 아마도 현대인을 분열시키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영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려는 필요성을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제기한 것이 아닐까?  다만 모순의 법칙을 제거하는 것―예를 들어, '통일성에로의 회귀'를 통하여―은, 글을 쓰게 하는 힘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라는 이중적 요소로 구성된 영감을 파괴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따라서 노발리스는 단일성은 이루어지자마자 곧 깨져버린다고 확신했다.  상호간의 끝없는 생성 과정 속에서 모순은 동일성으로부터 탄생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기 자신과 합의하고 헤어졌다 다시 합치는 대화이며, 다의성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이며, 그 여러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이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는 손이기도 하다. 218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창조는 어디에 의지하는가? 노발리스는 말하기를, 시인은 "작作하지 않고 술述한다"고 했다. 섬광과도 같은 이 말은 시 쓰기의 현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술'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시인으로 하여금 '작'하도록 도와주는가?  노발리스는 이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때로 그 '작'하는 주체는 성령, 민중, 이념, 혹은 소위 대문자로 씌어지는 그 무엇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시인이라는 관점에 대해선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을 시적인 존재로 보았다. 보들레르가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본성 속에는 시적 창조를 가능케 하는 일종의 선천적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성스러움을 지각하게 하는 신격화 성향과 유사한 것이다.  시적 창조 능력은 선험적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의 신자에게 신성을 심기 위해서는 그의 내부에 있는 '의존의 감정'에 호소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 사상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주의 시인도 종교로부터 시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개종한 것은 종교를 시적으로 해석하고, 시를 종교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시는 야생 상태의 종교 같은 것이고, 종교는 실천시이거나 행위시라고 노발리스는 거듭 확언했다. 따라서 시적인 것의 범주는 신성神聖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19 시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둘 다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지만, 그 계시의 해석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시적 작용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 쓰기는 무엇보다도 이름부르기로 이루어진다. 말(言)이야말로 시 행위를 다른 것들과 구분짓게 한다. 시 쓰기는 말로써 창조하는 것, 즉 시를 창작한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또한 인간을 만드는 상호적인 것이다. 시는 하나의 가능성이지, 선험적 영역이나 선천적 능력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우리 스스로를 창조해내는 가능성이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사용하여 창조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부르는 그것 자체―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위협과 공허와 혼돈으로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를 창조하는 것이다.  시인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시가 부르고자 했던 것, 즉 이름 불려지기 전에는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의 형태로만 보여졌던 바로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는 것이다. 독자와 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를 창조할 때, 독자와 시인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 언어가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시적 상태라는 것도 따로 있지 않다. 시의 특성은 끊임없는 창조이며, 창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내동댕이치고 자신에게 벗어나게 하여 우리를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이다. 220   초조도, 사랑의 열정도, 기쁨도, 열광도 그 자체로는 시적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시적 요소란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자체의 극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를 쓰러뜨린다. 이때 우리에겐 죽어 있는 언어를 포함한 침묵이나 이미지만이 남는다.  그 무엇, 이름 없는 것을 이름짓고, 부를 수 없는 것을 부르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는 창조자의 희생을 통해 생겨난다. 일단 시가 씌어지고 나면, 시 이전에 존재했고, 시인을 창조로 몰고 갔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 ―사랑, 기쁨, 고뇌, 권태, 다른 것에 대한 향수, 고독, 분노 등―은 하나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것은 이름 불려져 시, 즉 투명한 언어가 된다. 창조 뒤에 시인은 홀로 남게 된다. 이제 그 시를 재창조하면서 자신을 창조해갈 이들은 바로 독자들이다. 창조의 경험은 단지 그 방향만 바뀌어 반복된다. 이미지는 독자에게 스스로를 열어, 자신의 불투명한 심연을 열어 보인다.  독자는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 심연으로 떨어질 때, 혹은 상승하거나, 이미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가 시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나 할 때 그때까지 모르거나 무시하던 '진짜 나'가 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시인처럼 독자도, 스스로를 투사하고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름붙일 수 없는 것과의 만남으로 나아가는 이미지로 변한다. 시인과 독자 양자의 경우, 시는 자기 밖에 있는 시 작품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기 안의 우리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고, 또한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노발리스의 금언을 이렇게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작하지 않고 술한다. 그리고 작자는 창조자로서의 인간이다. 시적인 것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시작詩作은 우리 내부에서, 마치 '누군가'가 우리 내부에 저장해놓았거나 혹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나는 '물건'처럼 시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시인의 의식은 숨겨진 보물처럼 시가 묻혀 있는 동굴이 아니다. 미래의 시 앞에서 시인은 어눌해져서 발가벗고 서 있다. 창조 이전엔 시인이란 존재치 않는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인인 이유는, 시 때문이다. 시는 시인의 창조물이지만, 시인 역시 시의 창조물이기도 하다. 221   갈등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어왔다. 갈등은 반복되면서 깊어지고, 동시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어 혼란스럽기도 했다. 모순은 더 첨예해졌고, 찢겨짐의 의식이 커갈수록, 그것에 정면으로 대항할 명증성과 그리고 해결해낼 용기는 작아졌다.  영감의 희생양이나 증거자 혹은 공조자인 19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그 누구도 노발리스처럼 투철한 의지를 지니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해결책 없는 모순 속에서 논쟁했을 뿐이다. 영감을 버리는 것은 시 자체를 버리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정당화해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인간관 및 세계관과는 양립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점 때문에, 종종 이 시인들은 세계를 거부하고 비난했다. 물론 도덕적 관점에서 보들레르의 공격과 말라르메의 멸시 그리고 포우의 비판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즉, 그들이 살게 된 그 세계는 구역질나는 세계였던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현대의 비할 바 없는 끔찍함의 원인을 제공한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무도 그가 속한 세계로부터 도망칠 수 없고, 그 부정과 비난은 이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사는 방법, 즉 소극적으로 견뎌내는 방법일 뿐이다. 보들레르나 콜리지 혹은 말라르메의 글 이상으로 시적 작용의 신비와 그것이 낳는 황무지와 천국에 대해 통찰적이고 명징하게 묘사한 것은 없다. 동시에, 영감의 개념과 현대적 세계관을 조화시켜보려는 그들의 설명과 가설처럼 선명한 것도 없다.  그들의 혼란스럽고 모순에 가득 찬 명증성과 맹목성을 살펴보기 위해선, 현대 시학의 중요한 텍스트(예를 들어, 포우의 『글쓰기 철학』 등) 중 그 어디라도 한번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그 이전 글들과의 대조는 너무나 선명하다. 초자연적인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과거의 시인들에게 영감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22   스스로의 확신으로 가득 찼던 단테는, 꿈에서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어 시를 받아 적게 했고, 초월적인 힘의 개입을 철저하게 확신시키는 상황 속에서 계시가 언제라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을 쉽고도 단순하게 얘기했다.  "말들을 마치자 그는 사라져버렸고, 잠이 몰려왔다. 그 뒤, 그 환상을 돌이켜보았을 때, 아침 9시에 그것을 체험했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내 집을 나서기도 전에 그 서정시를 끝냄으로써, 주(사랑의 신)께서 내린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2)  단테에게 9라는 숫자는 네르발에게 7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하다.3) 단테에게 숫자 9의 반복은 베아트리체가 가지는 구원의 의미와 그들 사랑의 특별한 성격을 순수한 빛으로 조명하기 위한, 비록 신비롭고도 성스럽지만, 다분히 명확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네르발에게 7이란 숫자는 모호하며, 때로는 불길하고 또 때로는 좋아서, 그 진정한 의미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 단테는 계시를 받아들여, 그것을 통해 천국과 지옥의 비경秘境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은, 그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로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한다. 그리고 시인들의 불쾌함은,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한다.  부서지지 않는 유일한 바위이며 세계의 기둥인 자아라는 의식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의식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상한 요소가 나타난 것이다.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詩史에서 그것은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224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주체와 현실이라는 형태로 불리는 객체 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 등장했다. 고대인들에게 세계와 의식은 모두 충만하게 존재했고, 그들의 관계 또한 뚜렷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살벌한 투쟁의 형태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세계는 증발하여 의식의 이미지로 변하고, 다른 한편 의식은 세계의 반영이 된다.  초현실주의의 시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다툼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업은 근대 세계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의 계승자인 초현실주의는, 노발리스가 '최상의 논리학'이라고 했던 그 과업을 완수하려고 했다. 즉, 우리를 찢는 '오래 묵은 이율배반'을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주체의 이름으로, 생으로 가득 찼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환각 껍질이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했다. 초현실주의 역시 객체에 대해 공격했다. 그러나 객체를 녹였던 그 산酸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고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산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되어버렸다.  '초현실주의의 대상물'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침대이고, 바다이며, 동굴이고, 쥐구멍이며, 거울이고, 칼리 신의 입이다. 주체 역시 사라진다. 시인은 두 개의 단어 혹은 두 실재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시로 변한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는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했다. 단호한 의지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비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된다. 영감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상상할 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고, 우리 자신도 해체하며, 모순도 함께 제거한다. 225   영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이전의 시인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무기로 삼고 칼처럼 휘둘렀다. 그렇게 하여 영감을 이념화하고, 또 이론화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시운동을 넘어 하나의 시학, 혹은 더욱 더 결정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표출된 계시인 영감은 주관주의의 미궁을 깨뜨린다. 그것은 의식이 잠들자마자 갑자기 우리를 엄습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경계警戒의 모든 문들이 닫힐 때만이 비로소 열리는 다른 문을 통하여 분출하는 그 무엇이다. 내면적 계시로서의 영감은 의식의 단일성과 동질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자아란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싸운다.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는 우리들의 세계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fantasma임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한다.  초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영감의 파괴적이며 재창조적인 활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초현실주의는 신이나 이성이 차지하고 있던 중심을 영감이 대신 차지하는 사회, 그런 시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영감은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나 공허한 미신 혹은 비정상적인 상태로 치부되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본 개념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 이것은 영감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26   초현실주의 이전의 모든 위대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은 영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몰두했지만―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시인들과 다른 점이었다―그 누구도 영감을 현대인의 세계관과 인간관과 합당하게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전시대의 찌꺼기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영감은 과거로 돌아가 중세인, 그리스인, 야만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낭만주의자들이 고딕주의, 근대시의 일반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망명자로 사는 시인의 초상 등이 영감을 순화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초현실주의는 신, 자연, 역사, 인종 등의 외부 요인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함으로써, 시인의 저항과 추방을 멈추게 만들었다.  영감은 인간 속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며, 인간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이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의 출발점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이, 아직도 간과되고 있지만,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이 가지는 독창성이다.    자동 기술법, 자기 최면, 의도적 꿈꾸기, 집단 창작 등의 운동을 벌였던 '초기 모색기'에서, 시인들은 영감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론 영감으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가장 용감한 시인들은 장애물을 부수고, 영감을 추적하여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초현실주의의 운동은 우리들의 개념이 보이는 결핍을 지적―특히, 인간의 모든 작품 속에서 어떤 '의지'의 개입을 읽어내는 것―하고, 위대한 발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종종 '방심', '우연', '부주의' 등이 끼여든다는 것을 밝혀냈다. 227 브르통은 명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에 매혹되어, 인간과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타자성'의 선택된 장으로서 '객관적 우연'이라 불리는 신비한 메카니즘을 규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찾거나 혹은 찾는 것을 멈출 때, 여인, 이미지, 수학이나 생물학 법칙 등의 그 모든 신대륙이 대양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이 교차하는 자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전부다.  우리는, 세심한 주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솟아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디서 오며,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다가 왜 또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 초현실주의의 고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브르통은 고백하기를, "여전히 우리는 목소리의 근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서, 다시 듣고, 기억해내는 것 같다. 타자성의 느닷없는 출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들어본 일이 있으며 또한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브르통의 고백이 나름대로 타당함에 주목해야 한다. 브르통은 영감을 단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내심 저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들의 영감에 대한 관념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8   낭만주의 이후로 시인의 자아는 시적 세계가 움츠러든 것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커져갔다. 공장주나 농부가 자신의 공장이나 땅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주인인 것처럼―양쪽 다 그 소유가 타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시인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시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했다.  전시대 시인들의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에 대응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모든 창작의 무의식적, 비의도적, 그리고 집단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영감과 자동기술법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가장 시적인 것은 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시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 요소라는 것이다.  시는 방향성이 없는 사유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부수기 위하여, 브르통은 프로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는 무의식의 계시이고, 따라서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노발리스가 살펴본 바와 같이, 브르통이 깨달은 그 문제는 거짓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도 의도적인 행위가 된다. 수동성이 가능하려면 능동성이 전제된다는 의미에서, 그 수동성은 능동성을 내포한다. 전前-숙고라는 말은, 그것이 성립되려면 전前-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별의미가 없는 말이다.  기계적이고 생각 없이 '유용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에 대해 하이데거가 행한 비판은―이것에 관련하여, 근원적으로 인간을 점거하고 있는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채로 인간의 모든 작업의 전제가 된다―그대로 초현실주의 영감 이론에 적용된다.  무의식의 계시들은 그 계시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자아ego의 검열이 검열될 대상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자유롭고도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그 계시들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욕망이나 충동을 억제할 때, 우리는 가면을 쓰고 변장하고 나타나는 의지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 의지를 '무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그 '무의식'이 자유롭게 되는 순간, 이번에는 역으로 그 작용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수동성이라는 가면에 숨은 채 의지가 다시 개입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이 개입한다.  229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을 무의식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간에, 하나의 결정이 따른다. 이 결정은 분석 능력, 의지 혹은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존재의 총체성 자체이다.  전-숙고는 창작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전-숙고 없이 영감이나 '타자성'의 계시란 없다.  하지만 전-숙고란 의지보다 선행하여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몰두와 욕망보다 앞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여준 바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이고 끊임없는 전前-존재인 인간의 존재 자체에 모든 소망과 욕망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심리학적인 설명이 항상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프로이트의 생각에 매우 동조했을 때조차 영감은 정신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그로 하여금 신비주의적인 가정을 모험해보도록 이끌었다.  한편 신비학은 그것이 신비학이 되기를 그만둘 때, 즉 그것이 계시가 되어 감추던 것이 드러날 때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영감이 하나의 신비라면, 신비학적인 설명은 그것을 두 배로 더 신비하게 만들 뿐이다. 신비학은, 영감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타자성'의 계시로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유사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영감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면, 그것이 신비학자들이 말하는 계시와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230 왜냐하면, 우리는 영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브르통이 신비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에 집착한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 집착은 심리학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자성'의 현상이 지속된다는 데 그가 점점 더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브르통에게 유효한 것은 영감의 개념이 아니라, 영감으로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현상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감추거나 단순한 심리적 메카니즘으로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타자성'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고 해도, 초현실주의 이론은 요약적이고 끝내 표면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인 단언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심리적 설명이 불충분하여 결국 문제의 핵심이 '타자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숙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타자성'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 모른다.    노발리스나 브르통 같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즉 어떤 본성은 가진 주체로 파악한 데 있다. 말하자면, 시적 창조란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말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의 가정에 의하면, 어떤 특수한 순간에 시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말들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마음 깊은 곳'이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 별과 뱀과 보석과 맹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부동의 경직된 존재는 더 더욱 아니다.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 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231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 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혹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232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 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 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233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시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투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말은 여전히 세상의 것이면서, 즉 말이기를 그치지 않은 채, 시의 정수 속에서 시인만의 독점적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어는 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순간적이기도―창조의 순간의 표식―한 것이다. 시가 순간적이고 개인적인 표식이기 때문에, 모든 시는 같은 것을 말한다.  모든 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 즉 인간과 인간의 언어와 세계를 쉬지 않고 파괴하고 창조하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끊임없는 '타자성'을 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사적이며 공동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무엇을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호메로스나 라신과 똑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말하고,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234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자유는 좀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 저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영감, '타자성', 자유 그리고 시간성은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 있다. 235   인간은 세상을 자화磁化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를 겨냥해야 하나?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이 되기 원하며, 그의 존재는 그를 항상 자신 너머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 헛발을 짚고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존재이기를 상상하지만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타자와 조우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이 남자였고 여자였으며, 바위였고 "바닷속에서는 벙어리 물고기였다고 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흥분하면, '몰라보게 달라 보이고', '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우리 이름 속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고, 그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그때, 도약의 절정에서, 인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작렬하는 순간, 그는 순간적인 충만과 충만한 존재로의 생성 속에서 동시에 이것과 저것,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 삶과 죽음이 된다.  인간은 이제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된다. 그는 돌, 여자, 새, 다른 사람,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시이며, 대립물들의 결합인 이미지가 된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 육화한 인간의 이미지가 된다.    시적 목소리, '다른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이다. 인간의 존재는 이제 그가 되고 싶어했던 타자를 포함한다. 마차도가 말하길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에로틱한 의미로서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우리들의 존재 속에 갈증과 '타자성'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다른 몸, 다른 존재―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신에게서 꺼내는 이상한 목소리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존재의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목소리는 존재 자신의 목소리이다.  나 밖의 저 멀리, 푸르고 빛나는 숲 속의 떨고 있는 가지 끝에서 미지의 누군가가 노래한다. 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낯선 이는 친밀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시의 목소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난 이미 그곳에 있어보았다. 고향의 바위는 아직도 내 발자국을 머금고 있다. 바다는 친숙하다. 저 별은 언젠가 내 오른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난 네 눈을, 네 머리칼의 감촉을, 네 뺨의 체온을, 네 침묵으로 인도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너의 생각은 투명하다. 네 생각 속에서 네 모습과 겹쳐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윽고 그 모습들이 천 번 만 번 겹쳐지다가 백열白熱에 이르는 것을 본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 자신인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명사들은,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끝이고 한계이며 모든 언어를 양육하는 비밀스럽고 언명 불가능한 다른 대명사의 변조變調이며 굴절어屈節語이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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