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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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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옥타비오 빠스 <태양의 돌> [스크랩] 댓글:  조회:1222  추천:0  2018-07-22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거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그 글은 아무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은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시인의 숙명   말은?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나를 말들 속에 사라지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뉘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휴식   새 몇 마리가 찾아온다. 그리고 검은 생각 하나. 나무들이 수런댄다. 기차소리, 자동차 소리. 이 순간은 가는 걸까? 오는걸까?   태양의 침묵은 웃음과 신음소리를 지나 돌들 사이 돌의 절규를 떠뜨릴 때까지 깊이 창을 꽂는다.   태양 심장, 맥박 뛰는 돌, 과일로 익어가는 피가 도는 돌; 상처는 터지지만 아프지는 않다, 나의 삶이 삶의 참모습으로 흐를 때.   행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세바스또 대로를 가고 있었지, 이 일 저 일 생각하며, 빨간 불이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어. 위를 쳐다 보았지:                     위에는 잿빛 지붕 위에는, 검으잡잡한 새들 사이에 끼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생선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어.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고 길을 건너면서 그는 문득 뭘 생각하고 있었지 하고 혼자 물었지    너의 눈동자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씌어진 말   첫마디 써놓은 말(결코 생각한 일이 없는 다른 말-이 말 즉 말도 않고 딴 소리를 하는 즉 말은 않지만 말을 하고 있는) 첫마디 써놓은 말(하나, 둘, 셋- 위에는 태양, 너의 얼굴 우물 한가운데 멍청한 태양처럼 박혀 있는 네 얼굴) 첫마다 써놓은 말(넷, 다섯- 조약돌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며 네 얼굴을 본다, 떨어지며 추락의 수직선을 헤아린다) 첫마디 써놓은 말 (다른 말이 없다. 밑에는, 떨어지고 있는 말이 아니라 얼굴과 태양의 시간을 떠받고 있는 지옥 위에 간신히 떠받고 있는 말 추락 전, 사고 전의 말) 첫마디 써놓은 말(둘, 셋, 넷- 부서진 네 얼굴을 보라, 흩어지는 태양을 보라, 부서진 물속에 돌을 보라, 똑같은 얼굴, 똑같은 태양을 보라, 똑같은 물 위에 새겨진 첫마디 써놓은 말(을 계속한다, 생각이 있는 말밖에는 말이 없다)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위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고드름 글로 쓴 기둥 하나씩 하나씩 글자 글자마다,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정확한 말의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의 자궁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말하지 않는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일지도 몰라   외침 한 마디 사위어간 통감 속- 다른 천체에서는 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은 한다. 마음은 마음 아프고 미친 마음 때면에 묘지는 묘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이야기를 하려면 말 안 하는 것을 배우라   우정   기라리라던 시간 책상 위에 끝없이 떨어지는 램프의 머리칼 밤은 창문만 키워놓고 아무도 없다 이름없는 실체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육체를 보며   마침내 어둠이 열리고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너의 머리칼, 짙은 가을, 태양빛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너의 입과 그 식인종 치아의 하얀 군대는 불길 속에 잡혀 있다. 갓익은 노란 빵 색깔의 너의 살결과 불에 태운 설탕 빛 너의 눈, 거기에서 시간은 흐름을 멈춘다. 오직 나의 입술만 아는 언덕이여, 가슴을 거슬러 너의 목까지 오르는 달의 행로, 목덜미의 굳어진 분수 폭포, 너의 배의 높은 고원, 너의 옆구리의 끝없는 해변   너의 눈동자는 응시하는 호랑이의 눈이다가 일 분이 지나면 물기 젖은 강아지 눈이 된다.   너의 머리칼에는 항상 벌이 있다   너의 잔등은 조용하게 나의 눈 밑을 흘러간다 불길 밑에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의 잔등처럼.   잠든 물결이 밤 낮 진실로 된 너의 허리를 두들긴다 달 빛 아래 모래벌 같은 크막한 너의 바닷가에서   바람은 내 입으로 불려나오고, 그 긴 신음소리는 이 육체와 육체의 밤을 잿빛 날개로 감싼다, 사막의 고적을 덮고 가는 독수리 그림자처럼. 너의 발가락의 발톱들은 한여름 유리로 만들어져 있다. 너의 다리 사이에는 물이 잠든 우물이 있다. 밤 바다가 고요해지고 물거품의 검은 말이 머무는 항만, 보물을 감춘 산 자락의 동굴, 성스러운 빵을 빗는 화덕의, 반쯤 열린 사나운 입술의 미소, 빛과 그림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혼 (거기 육은 스스로의 부활과 영원한 삶의 날을 기다린다.)   피의 조국, 유일하게 내가 알고 있는 나를 아는 고향, 내가 믿는 유일한 조국, 영원으로 행해 열려진 유일한 문 하나.   새벽   차갑고 날쌘 손길이 하나씩 하나씩 어둠의 껍질을 벗긴다. 눈을 뜬다          아직 난 살아 있다          한가운데 아직 생생한 상처의 한가운데   되풀이   심장과 그 성난 고동소리 피 속의 검은 말 눈먼 망아지 고삐 풀린 망아지 밤의 축제 행진 공포의 수레바퀴 벽을 향한 절규와 빨간 불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날을 곧두세운 사념과 육박전 날마다 심문을 해도 대답없는 아픔 이름도 부피도 없는 아픔 핀 하나가 뚫고 나간 동공 고생 많았던 날의 동공 때묻은 시간 침 뱉는 사랑 미친 웃음과 지독한 거짓말 고독과 세상 걸어온 길은          걷지 않은 길 피와 괭이와 휘파람 소리의 광장 상처 위에 햇빛 죽은 물 위에 털보 하늘 분노와 온몸이 뒤틀리는 쓴 입맛 녹슬어가는 사고 병든 글씨 괴로운 새벽 잎에 자갈을 물고선 하루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밤 갉아먹는 밤의 뼈 항상 새로운 항상 되풀이되는 공포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물 한 컵 약 한 알 양철판 같은 혓바닥 한 밤 꿈 속에 개미굴 피 속의 검은 폭포 밤 속의 돌의 폭포 허무의 총 무게 커다란 도시에 차의 모터소리 나의 귀 주위에 멀리 가까이 멀리 눈이 나타나고 벽이 몸짓을 하고 절름발이 지하철이 나타나고 부서진 다리와 물에 빠져죽은 사람 걸어온 길은 걷지 않는 길 뱅글뱅글 도는 사념 가족 분위기 내가 뭘 했는가 넌 뭘 했는가 우리는 무얼했는가> 죄없는 죄의 미궁 이의를 제기하는 거울과 상처를 내는 침묵 불모의 날과 불모의 밤 불모의 고통 잡동사니 고독한 사람이 없는 세계 이젠 아무도 없는 대기실 그 길이 그 길이고 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가버리고 없다.   소녀   아직 사라지지 않는 하오의 빛과 쌓여 있는 밤 사이 한 소녀의 시선이 있다   노트와 글씨 쓰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모든 존재는 앞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뿐. 벽에는 빛이 사라진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종말인가? 시초인가? 그녀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하리라. 영원한 투명한 것.   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모르리라.     마지막 여명   지평선에 누운 채 너의 머리칼은 숲으로 사라진다 너의 발이 내 발을 만진다. 자고 있으면 너는 밤보다 더욱 크고 그러나 너의 꿈은 이 방에 찬다. 그렇게도 작으면서 그렇게도 큰 우리! 밖에는 택시 하나가 지나간다 도깨비들을 한 짐 가득 싣고 흘러가는 강물             항상 돌아오고 있는 강물.   내일은 진정 다른 날이 올까?             움직이는 것   네가 호박빛 암말이라면        나는 피의 길 네가 첫눈이라면        나는 첫새벽의 화롯불에 불 붙이는 사람 네가 밤의 첨탑이라면        나는 너의 이마에 박힌 불붙은 못 네가 새아침의 밀물이라면       나는 거기 첫새의 외마디 울음 네가 오렌지 바구니라면       나는 태양의 칼 네가 돌의 제단이라면      나는 성배를 하는 손 네가 가로누운 땅이라면      나는 푸른 갈대 네가 뛰어오르는 바람이라면        나는 땅 속에 묻힌 불더미 네가 물의 입이라면       나는 이끼의 입 네가 구름의 숲이라면       나는 구름을 가르는 도끼 네가 속세의 도시라면       나는 성스러운 비 네가 노란 산이라면       나는 리켄으로 된 빨간 품 네가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나는 피의 길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인 것 ; 광휘이면서 칼인 것, 사랑스러운 살아 있는 칼, 이젠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드라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의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거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허나 나의 말, 내 죽은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 맛, 얼어붙은 금광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한, 자유로운,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인 것.     날   시간의 물결 속에 떨어진, 아 놀라운, 어느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나그넨가, 이 고요한 사람아. 너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익어간다. 어느 크막한 순간에 투명해진다: 공중에 뜬 화살 하나, 표적을 잃은 마침내 화살의 기억을 잃은 공간 하나. 시간과 허공으로 이루어진 날들이여, 너는 나를 비우고, 내 이름을 지우고, 나의 실체를 없애고 대신, 너로 나를 채운다, 빛이며 허무뿐인 너로   그리고 나는 뜬다, 마침내 나를 잃고, 순연한 존재만으로.   수사학   1 새가 노래한다, 노래한다 무엇을 노래하는지 모르면서;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울대뿐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이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일 뿐.   3 투명한 수정의 맑음은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신비   대기가 반짝인다, 반짝인다 정오가 빛난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다.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투명함 속에 빠져 길을 잃고 나는 빛에서 현란한 빛 속으로 간다. 하지만 내 눈에 해는 안 보인다.   그리고 해는 빛 속에 벌거숭이가 되어 빛살마다 묻는다 하지만 해도 해를 보지 못한다.   말들   뒤집어 엎어라, 꽁지를 잡아라(악을 쓰라고 그래, 똥갈보 년들), 집어 패라, 채찍에 묻혀 입에다 설탕을 먹여라, 풍선처럼 불어대, 그리고 터뜨려, 피고 골수고 빨아 마셔라, 말려라, 공알을 까버려라 짖이겨라, 멋진 수탉처럼, 울대를 비틀어라, 요리사처럼, 털을 벗기고 창자를 꺼내고, 투우처럼 숫소처럼, 짓이겨 놓아라, 새 말을 만들어라, 시인아 말은 제가 한 말을 혼자 다 들어 마시게 하라.    시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손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짝수와 홀수   무게가 없는 한 마디 말 새 날에 인사를 보내는 돛 달고 날아가는 말 한 마디         아! ----------------   잠 못자서 네 눈자위에 생긴 커다란 쌍꺼풀 네 얼굴은 아직 밤.   ----------------------------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엮은 목걸이가 너의 목구멍에 달려 있다.    -----------------------------------   신문이 떨어지는 동안 너는 새들에게 휩싸인다 -------------   나의 품 속에  y 너의 다리 속에 우리가 있다. 물 속에 물처럼 비밀을 간직한 물처럼   ---------------------   내 손에 너의 두 가슴 다시 계곡을 내려오는 물 ----------------------   한 발코니에서 (부채가) 다른 발코니로 (펼펴진다) 태양이 뛰어나간다 (그리고 닫힌다)   상호보조   나의 몸에서 너는 산을 찾는다 숲 속에 묻힌 산의 태양, 너의 몸에서 나는 배를 찾는다 갈 곳을 잃은 밤의 한 중간에서   발사   생각보다 앞서 말 하나가 튀어나온다 소리보다 앞서 말이 말처럼 뛴다 바람보다 앞서 유황빛 송아지처럼 밤보다 앞서 두개골 속 거리로 사라진다 곳곳에 맹수의 발자취 나무의 얼굴엔 진홍빛 문신 첨탑의 이마에는 얼음 문신 교회의 음부에는 전기 문신 너의 목에도 맹수의 발톱 너의 배에도 맹수의 발 오랑캐빛 상흔 하얗게 될 때까지 돌아가는 해바라기꽃 비명이 터질 때까지, 이제 그만! 할 때까지 해바라기 꽃이 돌아간다 껍질이 벗겨진 비명처럼 너의 피부를 타고 줄줄이 새겨진 이름없는 도장 곳곳마다 눈을 멀게 하는 절규 생각을 덮고 마는 검은 물줄기 나의 이마에서 두들기는 성난 종소리 나의 가슴에 번지는 피의 종소리 탑 맨 꼭대기에서 웃는 영상 하나 말들을 터뜨리는 말 하나 모든 다리를 불지르는 하나의 영상 포옹의 순간 사라져버린 여인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거지 할멈 멍충이 거짓말장이 근친상간을 일삼는 쫓기는 암노루 점장이 거지할멈 삶의 한 가운데서 나를 일깨우는 나를 일깨우는 소녀 하나   너의 이름   너의 이름은 내게서 태어난다, 나의 그림자에서 나의 피부로 오르며 동이 튼다, 조으르는 듯한 빛의 예명.   사나운 비둘기 너의 이름은 나의 어깨 위에서 마냥 부끄럽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들의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의 음절들,   붉으레한 너의 긴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루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 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눈 앞에 다가온 봄   투명한 보석의 잘 닦여진 광채, 기억을 잃은 석상의 훤칠한 이마: 겨울 하늘, 더욱 깊고 더욱 텅빈 어느 하늘에 되비친 공간.   바다는 거이 숨을 멈춘다, 거이 빛을 감춘다. 빛은 나무들 사이에서 눈을 감는다. 잠든 병사들.그들을 깨우는 것은 짙푸른 깃발을 들고 온 바람.   봄은 바다에서 태어난다, 언덕을 휘덮는다, 육체도 없는 물결은 노란 유칼토스 나무 숲에 가서 부딪기도 하고, 이내 메아리가 되어 평원으로 쏟아진다.   대낮이 눈을 뜨고 철 이른 봄 속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내 손에 닿은 것은 모두가 날개를 단다. 세상이 온통 날으는 새뿐이다.   새   투명한 고요 속에 한낮이 머물고 있었다; 투명한 공간은 투명한 고요이기도 했다. 하늘의 단단한 빛이 풀잎의 자람을 고요히 잠재우고 있었다. 땅의 벌레들도, 돌들 사이에선 빛이 같아서, 그냥 돌멩이들이었다. 시간은 1분 속에서도 배가 불렀다. 고요한 침묵 속에 한낮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 때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가느다란 화살 하나. 상처난 은빛 가슴이 하늘을 뒤흔들었다 잎사귀들이 움직였다. 풀잎들이 잠을 깼다......... 그 때 나는 죽음이 누가 쏜지 모르는 하나의 화살인 줄 알았다, 눈을 뜨자마자 우리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침묵   음악의 맨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듯이 하나의 음계가 솟아올라 떨리는 동안 커지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다른 음악이 오르면 그 음계는 입을 다물고 침묵의 맨 밑바닥에서 또다른 침묵이 솟아오른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탑이거나 칼 같은 것이 오르다, 커져가다, 머문다. 오르는 동안 또 떨어지는 것은 추억과 희망과, 우리의 크고 작은 거짓말들. 소리치려해도 목구멍 끝에서 외침은 사라지고 우리는 수많은 침묵이 입다무는 그곳으로 또 다른 침묵이 되어 튀어나간다   새로운 얼굴   밤은 네 얼굴 위에 수많은 밤을 지운다. 메마른 너의 동공 위에 기름을 붓고 너의 이마 위에 생각을 불태운다. 생각 저편에는 추억만 남는다.   수많은 어둠들이 너를 없애고 또 다른 얼굴을 떠올린다 내 옆에 잠든 네 얼굴을 보며 나는 문득 여기 잠든 건 네가 아니라 지나간 어떤 여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그 여인은 단지 네가 잠드는 이유가 다시 돌아와 또 다시 나를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믿었지.   연인들   풀밭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밀감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파도와 파도가 거품을 나누듯이.   해변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레몬을 먹는다, 입술을 나눈다 구름과 구름이 거품을 나누듯이.   땅 밑에 누워서 처녀 하나, 총각 하나 말이 없다, 입맞춤이 없다 침묵과 침묵을 나눈다.   두 개의 몸뚱아리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파도 같다. 밤은 크낙한 바다.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두 개의 돌멩이 같다. 밤은 그땐 사막.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뿌리같다, 밤에 꽁꽁 얽어맨.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때로는 칼 같다. 밤은 번개.   두 개의 몸뚱아리가 마주 보면 두 개의 별똥별 빈 하늘에 떨어지고 있다.   잠깐 본 세상   바다의 밤 속에 물고기, 아니면 번개, 숲의 밤 속에 새, 아니면 번개.   육체의 밤 속에 뼈는 번개. 오 세상이여, 모든 것은 밤이다 삶은 번개.   흩어진 돌멩이들   1 꽃 외침, 부리, 이빨, 으르렁거리는 소리들, 살기등등한 허무와 그 혼잡도 이 소박한 꽃 앞에선 자취를 감춘다.   2 여인 밤마다 우물로 내려가곤 아침이면 다시 얼굴을 내민다, 품에는 새로운 뱀을 안고,   3 자서전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랬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랬던 것들은 이미 죽은 것들이다.   4 밤중에 듣는 종소리 그림자의 물결, 눈먼 파도가 불 타는 이마 위에 밀려온다; 내 사념을 적셔다오, 그리고 아주 불을 꺼버려!   5 문 앞에서 사람들, 말들, 사람들, 잠시 멈칫했지: 문은 위에 있다, 홀로 떠 있는 달 하나.   6 보이는 것   눈을 감자 내가 보였다; 공감, 공간 내가 있고 내가 없는 이곳.   7 풍경 저토록 바쁜 벌레들, 태양빛 말들, 구름빛 당나귀들, 구름은 무게를 잃은 커다란 바위, 산은 내려앉은 하늘, 나무들이 무리져 내려와 골짜기 물을 마신다. 모두들 있다. 행복하게, 저기, 스스로의 분수만큼 행복하게, 우리 앞에, 그런데 우리는 없다 분노와 증오와 사랑에, 마침내 죽음에 송두리채 먹혀버린 우리는 없다.   8 무식장이 하늘을 쳐다보았지. 하늘은 비문이 닳아진 커다란 바위돌, 별들도 한 마디 내게 읽어주질 못했어.   불면의 기록노트   1   시계가 갉아먹는다. 내 심장을, 독수리가 아니다. 쥐다.   2   한 순간의 정점에서 나는 홀로 부르짖었다. 하나 그 순간은 떨어지고 있었다 또다른 순간 속에, 시간도 없는 심연 속에.   3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4 향수  똑같은 푸르름 속에 똑같은 샛별이 반짝이지만 우리는 몰라본다. ......하지만 수탉마다 제 헛간을 노래하는 것을.   그 많은 날들의 하나   태양의 홍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두 보인다 무게 없는 육체들 두께 없는 땅 우리는 올라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   너의 육체는 금강석 하나 너는 어디 있는가? 너는 너의 육체 속에 묻혔다   이 시간은 조용한 번개. 발톱도 없다 결국 우린 모두 형제들 오늘 우리는 안녕하세요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멕시코인까지 행복해도 좋다 물론 다른 이방인까지도   자동차들은 풀잎이 그립다 집 꼭대기들이 걸어다닌다.                 시간은 멈췄다 두 서너 눈동자가 나를 못잊게 한다 석회빛 남녘의 반짝이는 해변같이 분노빛 바위 사이의 바다같이 분노한 유월, 그 벌떼의 이불같이   태양은 바다의 사자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아                  나를 보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우상이여                    우리를 보라 하늘은 돌며 바뀌어도 항상 똑같다 너는 어디에 있는가? 태양과 사람들을 마주하고 나는 홀로 있다 너는 육체였다 너는 빛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날 나는 너를 다른 태양에서 발견했다   하오가 내려온다          산들이 자라난다 오늘은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발을 반쯤 벌리고 앉아 아가씨들이 커피를 마시며 지껄인다 내 책상을 연다           파란 날개로 가득하다 노란 엘레뜨르 꽃으로 가득하다 타자기가 혼자 간다 쉴 새 없이 똑같은 불타는 음절을 써간다 밤은 마천루 뒤에 숨어 있다. 식인종의 포옹의 시간이다 긴 손톱의 밤 기억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분노! 떠나기 전 태양은 모든 보이는 것을 불태운다   시간 자체   바람이 아니다 물이 아니다, 몽유병자 같은 물의 발걸음이 아니다 돌이 된 집들과 나무들 사이를 스쳐가는 붉으스레한 밤을 따라 흐르는 바다가 아니다, 층계를 밟고 올라가는 모든 것은 고요하다                     자연계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건 도시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휩싸여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항상 찾고 있는 스스로의 광대한 어둠 속에 묻혀 한번도 찾지 못한 스스로를 찾고 있는                   한번도 스스로를 헤쳐나오지도 못한 도시. 나는 눈을 감는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다 불이 켜졌다가 켜졌다가 켜졌다가  이내 꺼져간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더 이상 아는 게 있는가? 벤치에서 노인 한 사람이 혼자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혼자서 말을 할 때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걸까? 과거는 잊었다              미래는 만져보지도 못할 것이다. 누군지 모른다 밤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일 뿐                          자기 말소리를 혼자 듣고 있다 담장 근처에선 남녀 한 쌍이 포옹을 하고 있다 여자가 웃는다, 뭔가 물어본다 그 물음은 떠올라 높은 곳에서 펼쳐진다 이때 하늘은 주름살 하나 없다 한 나무에서 이파리 세 개가 떨어진다 누군가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다. 맞은편 집 창문 하나에 불이 켜진다 살아 있다는 감각ㅇ느 참 이상하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걸어간다는 것 살아 있다는 비밀을 소리쳐 입증이라도 하듯이   소깔로에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이 오간다 다만 미치광이 같은 우리의 열정과                                 전철들 따꾸바 따꾸바야 소치밀꼬 산 앙헬 꼬요야깐   밤보다 넓은 광장에 이들 정거장만이 불을 켜고            어딘가 우리를 데려갈 차비를 하고 시간은 있는 대로 넓게 잡고                이 세상의 마지막 끝까지 데려갈 차비를 하고 검은 선들 전차의 우뚝 솟은 가공선 접촉 촉수들만이                      돌 같은 하늘을 찌른다 불똥 튀기는 상투 끝, 불의 혓바닥 밤을 뚫는 화염                 새 새가 날아간다. 물푸레 나무의 칩칩한 그림자 사이로 산 뻬드로에서 미스꼬악까지 두 줄로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비비거리며 나르는 새 푸르뎅뎅한 하늘                젖은 침묵의 두께가 불타는 우리 머리 위를 누르고 있다 우리는 뒤늦게 다가오는 전차를 타고 무너져 내린 탑이 우글대는 빈민촌을 지나간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다 돌 자잘, 밭길, 바로 그 길을 웅덩이를 넘고 진흙탕길을 누비며 유월에서 구월까지의 긴 포도를 현관을 지나고 높은 담장, 잠든 꽃밭을 지난다 지금 여기 눈 떠 있는 것은 오직                             하양 파랑 하양 꽃향기      손에 잡히지 않는 꽃가지들 어둠 속에       살아 있는 듯한 가로등 하나 죽은 담장에 기대어 서 있다     개 한 마리가 짖는다 밤을 향한 물음표            아무도 없다 바람이 나무숲에 스며들었을 뿐 구름 구름 일어나고 무너지는 구름 구름 무너진 사원 새로운 왕조들 하늘에 떠 있는 암초와 재난들                     위에 뜬 바다는 고원의 구름, 다른 바다는 어디?   눈을 가르치는        구름은 침묵의 건축가 그리고 문득 다짜고짜 금방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눈조각같은 어디서 나타난지도 모르는 가느른 투명함 너는 말했다       내 그말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야 겠어 음절의 성곽을 말이야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하얀 눈송이 같은        꽃도 없고 향기도 없는 피도 없고 물기도 없는 석고 어디선가 잘려나온 하얀색 그것          목구멍 오직 목구멍만 남은 밑도 끝도 없는 노래  나는 오늘 살아 있다, 별다른 향수도 없이 밤은 흐르고       도시도 흐르고 흐르는 종이 위에 낱 글을 쓴다 흘러가는 말을 타고 나도 흐른다 세상이 나와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나와 함께 죽을 것도 아니다                          나는 생명의 맥박의 강 속의 하나의 맥박 이십 년 전에 바스꼰셀로스가 내게 그러더구먼 그리고 오르떼가 이 가셑은                    로다노 위에 있는 바에서 하더구먼.   나는 사실 시간이나 죽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려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간이 나를 통해 살도록, 되살아나도록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 오후는 다리 위에서 강물 속으로 태양이 들어간느 것을 보았다 모든 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상들도 불타고 집들도 문짝들도 불타올랐다 정원에는 여성스러운 포도송이들이 열렸다 물빛 햇살의 토막들 태양빛 물그릇들의 신선함 포플러 나무 숲은 무성한 빛살의 축제 하늘 아래, 불붙은 세계 속에 물은 수평선처럼 꼼짝않고 서있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고정된 눈동자 그 크막한 아름다움의 무게는 열려진 동공마다 반짝였다 시간의 줄기 끝에                머물고 있는 현실 아름다움은 무게가 없다               시간과 아름다움은 고요한 반영일 뿐 모두가 한가지다                 빛도 물도   아름다움을 받들고 있는 눈길 눈길 속에 황홀한 시간 무게를 잃은 세계               사람이 무게가 있다면 아름다움의 무게 이외 더 있는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남는 것뿐이다.                       충분한 게 아니다 무지는 아름다움처럼 어렵다 언젠가 내 조금 더 모르게 되는 날 나는 눈을 뜨리라 어쩌면 시간은 무겁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거운 건 시간의 영상이다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현제가 돌아온다 이 삶에는 또다른 삶이 없다 저 무화과 나무도 오늘 밤 다시 오리라 오늘 밤 또 다른 밤들도 돌아오리라   글을 쓰면서 나는 강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이 강이 아니라          저 강이 바로 이 강이다 순간과 영상이 맞부딪는 곳 앵무새 하나 잿빛 돌 위에 있다 삼월 어느 청명한 날                   까망은 맑음의 한 가운데 있다 올 것 같은 황홀의 순간이 아니다                                  지금 느끼는 현실 더없는 현재           더 없이 가득하고 충일한 것 기억이 아니다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원하지 않았던 것 똑같은 시간이 아니다          다른 시간 항상 다른 시간이면서 같은 시간이 들어와서 우리를 우리로부터 몰아낸다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은 눈이 보지 못한다 시간 속에 또 다른 시간이 있다 시간도 무게도 그림자도 없는                             고요한 시간 과거나 미래도 없는                        살아 있기만 하는 벤치에 앉은 노인처럼 하나가 된 똑같은 영원한 시간 우리는 결코 볼 수는 없다               투명할 뿐        마이투나   나의 눈이 너를 벗긴다 벌거숭이로        그리고 이내 너를 덮는다 뜨거운 빗줄기 눈길 세례   소리가 갇힌 새장이                열린다   찬연한 아침         새하얗게 너의 허벅지보다 새하얗게         한밤중에 너의 웃음 아니, 차라리 너의 짙푸른 잎사귀 너의 달빛 속옷이           침대에서 펄럭일 때 곱게 쏟아지는 달빛           노래하는 소용돌이가 흰 실 꾸러미를 감는다            산골짜기에 심은 풍차의 날개              너의 밤 속       나의 대낮이 폭발한다       너의 탄성이 파편이 되어 튄다               밤이 너의 몸을 풀어 흩뜨린다  썰물 너의 흩어진 몸뚱아리들이 되모아진다  다시 너의 몸이 탄생한다   수직의 시간         가뭄이 거울 달린 바퀴를 돌린다 칼들이 피어난 정원               협잡의 축제 그 번뜩이는 눈길 사이로                너는 상처 하나 없이   들어선다         내 손의 강물로   신열보다 빠르게 너는 어둠 속에서 헤엄친다                     너의 그림자가 더욱 밝아온다 애무 속에서         너의 몸뚱아리는 더욱 검다 예측할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네가 뛰어넘는다 어떻게 언제 그게 그런 거야   자료 2 태양의 돌                             옥타비오 파스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 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 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299    동시를 잡아라 / 글쓴이 / 동시를 잡아라 [스크랩] 댓글:  조회:1947  추천:0  2018-07-11
동시를 잡아라 글쓴이 동시를 잡아라  풀잎에 파란 색이 있듯이/ 풀에는/ 풀로 된 시가 숨었다.//  도랑물에 졸졸졸/ 소리나듯/ 물 속에는/ 물로 된 시가 숨었다.//  꽃 속에/ 향기론 냄새가 있듯/ 꽃에는/ 꽃으로 된 시가 숨었다.//  아이들아/ 너희 눈으로/ 풀잎의 시를 찾아내어라.//  너희 귀로/ 물속의 시를 소리 들어라.// 꽃 속의 시를/ 냄새 맡아라.//  아이들아/ 들판을 달리며 나비를 잡듯/ 시를 잡아라.  -신현득 「시를 잡아라」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이 설레요.//  내가 어릴 때도 그랬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예요./  쉰 살, 예순 살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을 거예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하루하루가/ 자연 속에서 늘 함께 있고 싶어요.  -윌리엄 워즈워드 「무지개」  1. 가까운 것들부터 관심을 갖자  나를 처음 본 게 정확히 목요일이었는지 금요일이었는지, 그때 귀걸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전화 걸 때 처음에 여보세요 하는지 죄송합니다만 그러는지,  같이 걷던 한강 인도교의 철조 아치가 여섯 개인지 일곱 개인지, 그때 우리를 조용히 따르던 하늘의 달은 초승달인지 보름달인지,  우리 동네 목욕탕 정기 휴일이 첫째 셋째 수요일인지 아니면 둘째 넷째 수요일인지,  지난겨울에 내가 즐겨 끼던 장갑은 보라색인지 분홍색인지, 그게 벙어리장갑인지 손가락장갑인지,  내 새끼손가락엔 매니큐어를 칠했는지 봉숭아물을 들였는지,  커피는 설탕 두 스푼에 프림 한 스푼인지 설탕 하나에 프림 둘인지,  동화 보물섬 해적 선장 애꾸눈 잭은 안대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만화 주인공 영심이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고깃집에서 내가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는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르는지…….  -노영심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  선생님이 시를 지어보라고/ 글 제목으로/ ‘정거장, 개구리……’를 냈다.//  기차 정거장은 무슨 역,/ 자동차 정거장은 무슨 터미널․정류소/ 배 정거장은 무슨 항구 등/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일 것이고,//  개구리는 으레껏 개골개골/ 이렇게 쓰리라고/ 선생님은 생각했지만,//  제비 정거장은 전깃줄이고/ 갈매기 정거장은 고깃배라 쓰고,/ 해질녘에 개구리는/ 숙제해서/ 엄마의 칭찬 받으러/ 제 집으로 간다고 썼다.//  선생님은 아이들보다/ 생각이 모자라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김상문 「시 공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그 꽃」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 그 사람이/ 그 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 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이 할 때/ 보물을 감춰 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 거야.  -허영자 「행복」  2. 보거나 들은 것, 한 일을 그대로 써 보자  우리 아버지는/ 신문 볼 때/ “신문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담배 피울 때/ “담배, 혼자서/ 걸어와”/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가지러 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우리 아버지」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봇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박두진 「돌아오는 길」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불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고재종 「파안」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숙제는 했니?//  당근도 안 먹어요./ 일기부터 써라.  -김미혜 「말이 안 통해」  사과 껍질/ 벗기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는/ 조금 나지만/ 겁은/ 더 난다.//  울까/ 말까/ 피가 괸다// 울까/ 말까/ 울까/ 새빨간 핏방울!//  그런데 그런데―// 울래도/ 집에는/ 아무도 없다.//  ―이종택 「울까 말까」  그렇게 만날/ 친구랑 싸움이나 하고/ 약속도 안 지키는 너,/ 거기다 목소리는 커서/ 시끄럽기만 너,/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걱정 마세요 엄마/ 저, 국회의원 될래요.  -박혜선 「장래 희망」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아,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할머니는 무슨 재주일까?//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 저녁 할머니는 무엇을 하고 계실까?/ 머리털이 허이언/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보내 주신 감자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고/ 간장에 조려/ 두고두고 밥반찬으로 하기도 했다.  -장만영 「감자」  참새는/ 혼자서 놀지 않는다/ 모여서 논다//  전깃줄에도/ 여럿이/ 날아가 앉고/ 풀숲으로도/ 떼를 지어/ 몰려간다//  누가 쫓아도/ 참새는/ 혼자서 피하지 않는다//  친구들하고/ 같이/ 날아간다  -안도현 「참새들」  대구 대구 대구/ 아이구 시원테이.// 전주 저언주/ 거그 거그/ 어이 시원혀.//  서어울 서울/ 그래그래/ 아이 시원해.//  부산 부산 부산/ 거어 쫌 글거바라./ 부산은 옆구리니까/ 할아버지가 긁어요.  -김하늘 「할아버지 등 긁기」  아버지께서 집에 오시자/ 맨 처음 하시는 일이/ 양말을 벗어/ 목욕탕에 던지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일찍 집에 오신 아버지는/ 양말도 안 벗으시고/ 낮잠을 주무신다.//  스르르 감으셨다 뜨셨다 하는/ 아버지의/ 힘없는 눈빛!//  참/ 피곤하신 모습이다./ 이때, 파리 한 마리/ 아버지의 얼굴 위를 맴돈다.//  나는 몇 번 손으로 쫓다가/ 살며시 방문을 열고/ 그 파리를 데리고/ 청마루로 나간다.//  ―이종택 「파리 한 마리」  줄은/ 기러기 줄./ 아이들이 갑니다./ 저수지 말라버린 하얀 바닥을/ 콩 콩/ 새 길을 내며 갑니다.//  ―하마 오리는 가차와졌제?/ ―앙이다. 십리는 가차와졌다.//  내도 마르고/ 들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오늘 넷째 시간 국어 공부는/ 을 배웠습니다./ 책을 펴 놓고,/ 책을 펴 놓고,/ 한 사람도 읽지는 못 했습니다.//  ―돌이야, 와 손 안들었노?/ ―순이 너는 와 안들었노?//  / 선생님도 예까지 읽으시고는/ 말없이 그냥 나가셨습니다.//  ―우리 선생님 와 나가셨노?/ ―선생님도 목이 맨기라.//  들도 마르고/ 내도 마르고/ 저수지 스무길도 말랐습니다.//  ―작두만한 잉어도 살았다는데/ ―멍석만한 자라도 살았다는데.//  -이문석 「가뭄」  어머니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면/ 어머니가 다시 그것을 주워드신다/ 내가 부주의하게 떨어뜨린 수저의 개수만큼/ 허리를 굽히시는 어머니  -이선영 「수저와 어머니」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 「반성 100」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掌篇)」  강아지가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물고 간다./ 쏠 쏠 쏠/ 물고 간다.  -이상교 「남긴 밥」  벼룩을 눌러 죽이며/ 입으로는 말하네/ ‘나무아미타불!’  -이싸 하이쿠  방금/ 손수레가/ 지나간 자리// 바퀴에 밟힌 들풀이/ 푸득푸득/ 구겨진 잎을 편다.  -권영상 「들풀」  엄만 옛날에/ 무엇이 되고 싶었나요?//  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엄만, 지금이/ 너무 좋단다.//  우리 예쁜/ 연이 엄마 됐으니까.  -이혜영 「엄마의 대답」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하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임길택 「흔들리는 마음」  콩 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김용택 「콩, 너는 죽었다」  감꽃 피면 감꽃 냄새/ 밤꽃 피면 밤꽃 냄새/ 누가 누가 방귀 뀌었냐/ 방귀 냄새  -김용택 「우리 교실」  엄마는 아침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방 청소하고 빨래해서 걸어두고/  마당에다가 고추 널고 또 고추 따러 간다/  얼굴이 발갛게 땀을 흘리며/ 하루 종일 고추를 딴다/  해 지면 집에 와서 고추 담고/ 저녁밥 해먹고 설거지하고/  고추를 방에다 부어놓고/ 고추를 가린다/  빨갛게 익은 고추를 가리며/ 꾸벅꾸벅 존다/ 우리 엄마는 진짜 애쓴다  -김용택 「엄마는 진짜 애쓴다」  아버지 밥상 펴시면/ 어머니 밥 푸시고/ 아버지 밥상 치우면/ 어머니 설거지 하시고/  아버지 괭이 들고 나가시면/ 어머니 호미 들고 나가시고/ 아버지가 산밭에 옥수수 심자 하면/ 옥수수 심고//  어머니가 골짝밭에 감자 심자 하면/ 감자 심고/  고무신 두 짝처럼/ 나란히 나가셨다가/ 나란히 들어오시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서정홍 「고무신 두 짝처럼」  어머니는/ 연속극 보다가도 울고/ 뉴스를 듣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가끔 말 안 듣고/ 속을 태우는/ 형과 나 때문에 울고//  자주 술 마시고/ 큰소리치는/ 아버지 때문에 울고//  어머니는/ 어머니 때문에 울지 않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웁니다.  -서정홍 「어머니」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니나니/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윤석중 「넉 점 반」  내 생일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어요./ 내 동생에게 비밀이 하나 있었던 거예요./  동생은 그 비밀을 며칠이고 계속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비밀에 대해 물으면 자그맣게 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피울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 비가 왔어요./ 잠에서 깨어나 보니 동생이 울고 있는 거예요./  동생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누나, 정원에 내가 설탕 두 덩어리를 심어 놓았거든./ 누나가 설탕을 끔찍이 좋아하니까./  누나 생일이 되면 설탕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모두 녹아 없어졌을 거야.”/  아이 참, 예쁜 내 동생!  -캐서린 맨스필드 「동생의 비밀」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다./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뒷담에 기대섰더니/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얘,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얘, 어떤놈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온다.  -사이조 야소 「먼지」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영감님을 만났네./  “어른 앞에서 뒷짐을 지다니/ 허, 그놈 버릇없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뒷집 애를 만났네./  “얘, 먹을 거냐/ 나 좀 다우.”//  흙 묻힌 손/ 뒤에 감추고 오다가/ 삽살이를 만났네./  “뒤에 든 게 돌멩이지./ 달아나자 달아나.”  -윤석중 「흙손」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들판으로 나가던 언니가 보고/  “얘, 너 선생님께/ 걱정 들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동네 샘 앞에서 누나가 보고/  “얘, 너 동무하고/ 쌈했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삽작문 밖에서 아버지가 보고/  “얘, 너 어디가/ 아픈가 보구나.”//  다 저녁 때 배고파서/ 고개 숙이고 오니까,/ 붴에서 밥 짓던 어머니가 보고/  “얘, 너 몹시도/ 시장한가 보구나.”  -권태응 「고개 숙이고 오니까」  추운 날/ 대문 앞에 서 있으면요,//  지나가던 아저씨가/ ―엄마를 기다리니? 발 시리겠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원 저런, 감기 걸리겠다. 집에 들어가거라.//  지나가던 강아지가/ ―야단맞고 쫓겨났군, 안 됐다, 컹컹//  대문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내 마음/ 알지도 못하고…….//  코를 잡고 뱅, 뱅 돌고 싶은 팽이가/ 내 주머니 속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이준관 「추운 날」  3. 보거나 듣거나 한 일에 생각을 더해 보자  덕수궁 뒷담 벽에/ 몇 개의 낙서 그림이 있다/ 아이와 손 두 개/ 나무 한 그루 또 아이 얼굴 하나/ 고궁의 담벽에 낙서하는 건/ 나쁜 일인 줄 알 텐데/ 얼마나 심심한 아이가/ 제 모습을 그리다 갔을까/ 이 봄이 오고 벌써 두 번째/ 이곳을 찾아온 내 맘속에 그려져 있다/ 일요일 덕수궁 뒤뜰에 혼자서/ 난 자꾸 그 아이와 친하고 싶다.  -유경환 「일요일에 만나고 싶은 아이」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떡볶이,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팥빵, 참 맛있겠다!’//   앞을 지나면서/ 침이 꿀꺽!/ ‘통만두, 참 맛있겠다!’//  학원 갔다 돌아오는 늦은 저녁 길/ 침이나 꿀꺽꿀꺽./ 이러다 내 인생,/ 다 끝나겠다!  -이상교 「내 인생」  바삭바삭/ 붕어빵// 매일/ 학교 담벼락 옆/ 붕어빵을 굽던 아저씨//  감기라도 걸린 걸까?// 친구 옆에서/ 덤으로 얻어먹던 붕어빵//  오늘은 꼭 하나/ 사 먹으려 했는데…….  -최윤정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졌어.// 책가방 속에 따라온/ 너의 지우개.  =최윤정 「짝」  “한라산 한 갑 주세요.”//  귀찮은 마음을/ 아버지 좋아하는 한라산으로/ 꾹꾹 누르며/ 집 앞에 도착하는 잠깐 사이/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제일 높은 산 이름/ 우리의 제일 오랜 산 이름/ 백두산,/ 왜 백두산 담배는 없을까?//  이제 다섯 살/ 내 동생 새롬이/ 내게서 담배 심부름/ 물려받을 때쯤이면/ 서울에서/ 평양에서/ 이런 소리 들려올까?//  “백두산 한 갑 주세요.”/ “통일 한 갑 주세요.”  -남호섭 「담배 심부름」  소가 혀를 내밀었다./ 아주 길었다./ 사람한테/ 소 같은 혀가 있다면/ 급식 먹을 때도/ 우스워서 우스워서/ 견딜 수 없을 게다.//  -초등학교 1학년생 작품 「소의 혀」  날씨가 좋아 뜰에 나가니/ 개미가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볼록렌즈를 꺼내어/ 개미한테 빛을 쬐었다./ 개미는 어디까지나 달아났다./ 왜 그럴까?/ 빛에다 손을 대니 뜨거웠다./ 미안 미안/ 난 몰랐단다.//  ―초등학교 3학년생 작품 「개미야, 미안하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3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와! 이제야/ 숙제 다 했네/ 일기 다 썼네/ 이젠 편안히/ 꿈나라로 갈 시간//  오늘도 내 곁에서/ 힘들게 굴던/ + - × ÷ 수학책/ a b c d 영어책,//  컴퓨터 게임 그만 해라/ 공부 좀 해라 하시던/ 아빠 엄마 말씀,/ 이젠 안녕!//  더 이상 날 따라오지 마세요/ 꿈나라에서만은 싫어요/ 아셨죠!/ 그럼, 안녕!  -권오삼 「이곳만은 안 돼요」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가/ 6kg이나 불었다./ 일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랄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잔디 사이 씀바귀를/ 잡초라 하면/ 씀바귀는 잔디를 잡초라 하지/ 잔디도 풀이고 씀바귀도 풀인데/ 잔디는 밟지 말라 하고/ 씀바귀는 뽑아라 하시니/ 선생님도 참.//  가을 햇살이/ 자박자박 밟고 다니게/ 바람도 심심하면/ 몰고 다니게/ 이른 새벽 안개비에  낙엽이 곱게곱게 내렸는데/ 날마다 주워서 태우라고 하시니/ 선생님도 참.//  교실에 뽑혀 온/ 들찔레 열매/ 산새랑 들풀이랑/ 친구가 그리워/ 밤마다 빨간 볼에 눈물짓는데/ 산자락에 가만 놔두지/ 선생님도 참.//  -이정숙 「선생님도 참」  엄마가 시장에 간 사이/ 동생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울리지 말고/ 잘 데리고 놀랬는데//  이 말썽꾸러기/ 찾기만 해봐 가만 놔두나//  어디로 갔는지/ 손바닥에 침을 뱉어 / 점을 쳐 보았다//  침이/ 사방으로 튀는 걸 보니/ 온 동네 다 돌아다니나 보다.  -신천희 「점치기」  아직,/ 신호등은/ 빨간 불인데//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그냥/ 길을 건넌다.//  “안 돼, 건너지 마!”/ 얘기해 줄/ 엄마도 없나 보다.  -최윤정 「그 강아지는」  유리접시의 물속에서/ 플라나리아 한 마리가 허리를 잘립니다./ 유유히 헤엄치다가/ 날카로운 면도날에 둘로 잘리니/ 바닥에 붙어 꼼짝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죽을 거라고 하고/ 머리가 있는 쪽만 살 거라고도 하고/ 둘 다 살 거라고도 했지만/ 나는 다시 붙을 거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과학실에 가보니/ 그놈들은 두 마리가 되어 꼬무락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놈들은 본디 한몸인 줄 모르는지/ 제각기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력이냐고/ 선생님은 감탄하셨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도/ 잃어버린 반쪽을 찾을 생각도 않는/ 바보 같은 벌레라/ 개울 바닥 돌 밑에서/ 햇빛을 피해 살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과/ 서로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서 따로따로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고흥수 「플라나리아」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 주실 때마다/ 할머니도/ 아―/ 아―/ 입을 크게 벌리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릴 때마다/ 할머니도/ 내 동생을 따라/ 입을 우물우물하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윤동재 「할머니 입」  아이들은 나를/ ‘은영 세탁소’라고 부른다.//  이젠 괜찮지만/ 그래 괜찮지만// 내 이름을 간판에 걸고/ 일해 오신 아버지처럼//  나도 정말 남들을/ 깨끗하게 빨아 주고// 남들의 구겨진 곳/ 곧게 펴 주고 싶다.//  아버지의 주름살을 제일 먼저/ 펴 드리고 싶다.  -남호섭 「은영 세탁소」  방문을 열면/ 닭들이 나란히 서서/ 나를 지켜본다.//  울타리로 다가가면/ 쪼루루루 몰려나와서/ 고개를 갸웃거려//  혹시 모이 줄까 하고//  그런데 모이 안 주고/ 달걀만 꺼낼 올 땐/ 정말 미안하다.  -김은영 「닭들에게 미안해」  저기/ 포크레인 덜컹거리는/ 숲에는/  소쩍새 부엉이 비둘기 꿩 지빠귀 꾀꼬리 솔새 휘파람새 까치 까마귀 할미새 다람쥐 산토끼 들고양이 청설모 너구리 오소리 고라니 꽃뱀 구렁이 족제비 멧돼지 산나리 원추리 둥글레 고사리 취 으아리 두릅 잔대 더덕 머루 다래 칡 잣 솔방울 두메부추 소나무 잣나무 옻나무 참나무 밤나무 엄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영지버섯 국수버섯 싸리버섯 밤나무버섯 독버섯 진달래 철쭉꽃 찔레꽃 제비꽃 할미꽃 조팝꽃 싸리꽃 산나리 물봉숭아 엉겅퀴 패랭이꽃 산도라지 달맞이꽃 솔이끼 돌멩이 바위 개미떼 벌 나비 개구리 옹달샘 골짜기 바람소리 물소리 가을단풍 겨울눈꽃 오솔길  숲 하나에는/ 내가 아는 것만도 이렇게 많은데/ 너도 아는 것 동그라미 쳐가며 읽어보고/  내가 모르는 것도 써 주렴//  숲 하나/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마는데/ 숲 하나에 있던 모든 것들/ 다만 이름이라도 남겨 놓아야 하지 않겠니.  -김은영 「숲 하나」  소설가 박범신 선배 말에 따르면/ 중국 연변 땅에 가면/ ‘첫날 이불’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혼수품 가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집의 분홍이불 한 채 같이 덮고 자면/ 누구나 착한 짐승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찬란한 날이 올 때까지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이 눈비 오듯 해야겠지요  -안도현 「첫날 이불」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 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함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이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복효근 「쟁반탑」  체격 검사를 했다./ 내 몸무게/ 6kg이나 불었다./ 일 년 사이에./ 땅덩이 무게도/ 6kg 더 늘어났겠다.//  새들이 알을 까서/ 식구들이 불어날 때/ 씨앗이 싹이 터서/ 큰 나무로 자라날 때//  땅덩이도 그만큼/ 무게가 더해지겠지.//  오늘은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고/ 마을 앞 저수지도/ 가득히 채워졌다//  땅덩이 무게도/ 참 많이 늘어났겠다.  -김종상 「땅덩이 무게」  엄마가 사 온/ 굴비 한 두름// 몸은 꽁꽁 묶여 있어도/ 입은 쩍쩍 벌리고 있다//  고만고만한 게/ 분명 친구들이다// 그물에 걸린 그 때/ 바다 학교/ 음악 시간이었을까?//  아니 그런데/ 넌 뭐야?/ 입 꼭 다물고 있는/ 너!//  아, 친구들 다함께 노래 부를 때/ 넌 창 밖 내다보며/ 딴생각 하고 있었구나!//  그러다 덜컥/ 그물에 걸렸구나!  -한상순 「굴비」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띠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문인수 「쉬!」  4. 사물의 모습(전, 지금, 미래)과 본질을 보자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감자꽃」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타다토모 하이쿠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최계락 「꽃씨」  알 여섯 알/ 앵무새 둥지 속에/ 이마를 맞대고//  여섯 알 새알에 귀 기울이면/ 꿈꾸는 즐거움으로 소란하다/ 늪과 고원을 높이 날, 뒷날.//  그 꿈은 노래/ 소란스런 합창/ 알 속에 담긴 것.  -칼 샌드버어그 「앵무새 알 여섯 개」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 너도 젊었을 때는/ 무척 떫었다는 걸  -소세키 하이쿠  노랑나비가 되어/ 꽃밭을 가로질러도/ 날,/ 징그럽다고 할까//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옮겨 주어/ 풍작이 들어도/ 날, 배추 몇 잎 갉아먹는다고/ 죽일까?  -김원석 「배추벌레」  연필은/ 산 그릴 때/ 쓱쓱 잘 그려요.// 연필은/ 새 그릴 때/ 쓱쓱 신이 나요.//  연필은/ 나무가 엄마거든요./ 숲이 고향이거든요.  -손동연 「연필이 신날 때」  5. 나만의 별명을 붙여 주자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  -장 콕도 「귀」  바다로 나가려고/ 몸살하는/ 바구니에 담아 놓은 꽃게들.  -이정석 「어린이」  봄비 오는/ 하늘은/ 물뿌리개지.// 땅 속의/ 씨앗만큼/ 꼭 그 수만큼,//  갖가지/ 씨앗만큼/ 꼭 그 크기만큼,// 뚫린 물구멍./ 고른 물구멍.//  ―김용섭 「물뿌리개 하늘」  바람은 물살/ 나뭇잎은 물고기//  물살이 일자/ 물고기들이 파들파들/  엄마 나무에 매달려 파들파들/ 엄마한테서 떨어져 나가게 될까 봐, 파들파들  -이상교 「바람 부는 날」  한겨울/ 잎 다 떨어진 아기나무에/ 참새 여덟 마리가 앉았다.//  한 마리가 뚝 떨어지더니/ 윗가지에 가 붙었다.//  두 마리가/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한 마리는 땅에 떨어지고/ 한 마리는 꼭대기에 가 붙었다.//  우르르/ 다 떨어지더니/ 나무 한 바퀴 돌아/ 아까보다 더 예쁘게 달렸다.  -이복자 「참새 나무」  으르렁 드르렁/ 드르르르 푸우―//  아버지 콧속에서/ 사자 한 마리/ 울부짖고 있다.//  생쥐처럼 살금살금/ 양말을 벗겨 드렸다.  -김은영 「잠자는 사자」  광릉 숲에 들어서면/ 푸른 갑옷을 두르고/ 팔도강산에서 모여든/ 어기찬 아저씨들을 만난다.//  임꺽정의 팔뚝 같은 나무,/ 김정호의 다리 같은 나무,/ 활대 잡은 충무공처럼 훤칠한 나무.//  임진왜란의 의병들이 튀어나오고/ 동학의 장정들이 걸어 나오고/ 솔잎 수염이 따끔따끔 침을 찌르던/ 청산리 싸움의 독립군들을 만난다.//  바람을 맞으면 더 푸른 나무,/ 눈보라 휘몰아치면 더 곧게 서서/ 파리 부는 나무.//  광릉 숲에 들어서면/ 웃자란 내 몸도/ 한 그루 옹이 박힌 나무가 된다.  -서재환 「광릉 숲에서」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오빠 대신/ 무거워 주고 싶다.//  시집 간 언니 집에서/ 물동이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그 무게는 무게대로/ 바람이 된다./ 동생이 골목에서 울고 와도/ 그것이 엄마에겐/ 바람이 된다.//  뼈마디를 에는 섣달 어느 밤/ 엄마는 오빠 대신 추워 주고 싶다.//  그런 맘은 모두/ 폭풍이 된다.//  엄마라는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신현득 「엄마라는 나무」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줄을 선 글자들은/ 싱싱한 보리숲,/ 땀 젖은 흙 냄새/ 엄마 목소리.  -김종상 「어머니」  별을 보았다.// 깊은 밤/ 혼자/ 바라보는 별 하나.//  저 별은/ 하늘 아이들이/ 사는 집의/ 쬐그만/ 초인종.// 문득/ 가만히/ 누르고 싶었다.  - 이준관 「별 하나」  들길 위에 혼자 앉은/ 민들레./ 그 옆에 또 혼자 앉은/ 제비꽃.// 그것은/ 디딤돌.//  나비 혼자/ 딛/ 고/ 가/ 는// 봄의/ 디딤돌.  -이준관 「나비」  봄이/ 찍어 낸/ 우표랍니다.// 꽃에게만/ 붙이는/ 우표랍니다.  -손동연 「나비」  내 얼굴은/ 답안지// 엄마가 읽는/ 답안지//  엄마!/ 오늘은 읽지 마세요// 터질지도 몰라요/ 내 울음보//  읽었더라도/ 모른 척해 주세요.  -유희윤 「시험 본 날」  “금방 가야 할 걸/ 뭐 하러 내려왔니?”// 우리 엄마는//  시골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의 봄눈입니다.// 눈물 글썽한 봄눈입니다.  -유희윤 「봄눈」  흰구름 건져 먹고/ 별 건져 먹고/ 새하얀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갈대숲에도 한 송이/ 조으는 듯 동동/ 바위그늘에도 한 송이/ 꿈꾸는 듯 동동//  흰구름 건져 먹고/ 달 건져 먹고/ 떠다니는 꽃이 된다./ 연꽃이 된다.  -이동운 「고니」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 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신형건 「봄날」  마침표/ 아름다운 시작이다.//  시든 꽃이 떨군/ 마침표/ 까만 씨앗/ 꽃이 태어난다.//  돋보기로 모은/ 해님의 마침표/ 까만 점에서/ 다시 해님이 뜬다.  -김숙분 「마침표」  나무는/ 청진기// 새들이/ 귀에/ 꽂고/ 기관지가/ 나쁜// 지구의 숨결을 듣는다.  -정운모 「나무」  소말리아 아이들 다리는/ 겨울나무 가지./ 우리 반 친구 진철이, 용만이 다리는/ 여름나무 가지.//  소말리아 아이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지만/ 우리 반 친구들/ 핫도그, 만두, 떡볶이 보이는 대로/ 다 사 먹고는/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군것질 꾹 참고 돌아온 나도/ 덩달아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많이 먹고 오리처럼 뒤뚱거리는/ 내 친구 닮을까봐/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서정홍 「윗몸일으키기」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가가/ 의자 몇 개 내놓은 거여  -이정록 「의자」  6. 재미있는 특징(모습, 행동, 소리 등)을 발견하자  가갸 거겨/ 거겨고교/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 라.  -한하운 「개구리」  저런,/ 등에/ 혹이/ 두 개씩이나?// 사막을 터벅터벅/ 무겁겠다, 얘//  아니야,/ 이건/ 내/ 도시락인걸!// 타박타박 사막이/ 즐겁단다, 얘//  ―손동연 「낙타」  코끼리야 코끼리야/ 네 그림을 그리는데/ 코가 어찌나 긴지/ 금방 도화지 밖으로/ 달아나 버리지 뭐니//  얼른/ 도르르 말아 줘//  ―손동연 「코끼리」  코끼리는 무엇이든지 귀찮다./ 커다란 몸뚱이를 하고서/ 먹을 것을 가지러 가는 것이/ 귀찮아서/ 저리 긴 코로 잡는다.//  ―초등학교 2학년생 작품 「코끼리」  소가/ 아기염소에게 그랬대요./ “쬐그만 게/ 건방지게 수염은?/ 또 그 뿔은 뭐람?”//  그러자/ 아기염소가 뭐랬게요?/ “쳇,/ 아저씬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 덩치에 아직도 ‘엄마 엄마’하게?”//  ―손동연 「소와 염소」  기린은/ 하루에/ 한 끼씩만 먹어도 될 거야//  목/ 이/ 길/ 어/ 서//  뱃속까지/ 가는 데도/ 하루가 다 걸릴 테니까//  ―손동연 「기린」  7. 새로운 관계를 맺어 주자  나무에서 물방울이/ 내 얼굴에 떨어졌다/ 나무가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지나간다//  말을 거는 것들을 수없이/ 지나쳤지만/ 물방울― 말은 처음이다/ 내 미소― 물방울도 처음이다  -정현종 「물방울- 말」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 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여요.  -서정주 「춘향유문」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별은/ 별자리/ 제자리를 지켜요.// 하루 내내,/ 한 달 내내,/ 일 년 내내…….//  심심할 거예요./ 그러니 가끔씩/ 자리를 바꿔 주세요./ 우리 선생님처럼요.//  그래야 별들도/ 새 친구를 만날 수 있잖아요./ 사귈 수 있잖아요./ 네, 하느님.  -손동연「별도 가끔 자리를 바꾸면 얼마나 신날까」  꽃게야, 꽃게야// 튼튼한 네 집게/ 잠깐만 빌려 줄래?//  동전만 집어삼키는/ 인형뽑기통에서// 내 맘에 쏙 드는 인형 좀 뽑아 보게……  -이봉직 「꽃게야, 꽃게야」  길을 가다 문득/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다가가 그 곁에 가만히 서 보고 싶다.//  잎들이 다 지고 하늘이 하나/ 빈 가지 끝에 걸려 떨고 있는/ 그런 가을날.//  혼자 놀고 있는 아기새를 만나면/ 내 어깨와/ 아기새의 그 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디든 걸어 보고 싶다./ 걸어 보고 싶다.  - 이준관 「길을 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에게/ 아이가 먹을 것을 한 주먹 쥐고/  어서 먹어, 어서 먹어, 하고/ 먹을 것을 준다.//  아직 머리에 뿔도 나지 않은 송아지가/ 아이의 손바닥에 있는 것을 다 먹고 나서/  아이의 손바닥을 귀여운 혀로 간질이며/ 간지럽니?/ 이 간지럼밖에는 네게 줄 게 없구나./  그래도 괜찮니?  -이준관 「그래도 괜찮니?」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이준관 「내가 채송화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산은/ 숲은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둥지를 품고// 둥지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노래로/ 온 산을 품고.  -김용섭 「산」  물이/ 산을 안고 돈다/ 산은 나무를 안고/ 나무는 새들을 안고//  아빠 엄마는/ 나를 안고 간다/ 나는 풀꽃을 안고/ 풀꽃은 개미를 안고//  우리는 모두가 서로서로 안고 산다.  -이성자 「우리는 서로 안고 산다」  8. ‘왜?’라는 의문에 ‘아하!’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자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提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수하시진(大同江水何時盡)/ 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긴 언덕에는 풀빛이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서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대동강 물은 언제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 것을.  -정지상 「송인(送人)」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에 났다니  -성삼문(成三問)  주려 죽으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었거니  헌마 고사리를 먹으려 캐었으랴  물성(物性)이 굽은 줄 미워 펴보려고 캠이라  -주의식(朱義植)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동안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성선설」  지난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반칠환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윤석중 「먼 길」  종일 헤매어/ 지친 애버러지/ 떨어져 시든 꽃잎 위에 엎드리니/  내일 떨어질 꽃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저녁답.  -유안진 「자비로움」  옆집 아이가/ 화경으로/ 개미를 쪼이고 있다.// ( ).  -김영일 「( )」  키가 너무 높으면/ 까마귀 떼 날아와 따먹을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키가 너무 높으면/ 아기들 올라가다 떨어질까 봐/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  -권태응 「땅감나무」  비가/ 그렇게 내리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또, 강물이/ 그렇게 흘러 들어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건//  //  -박병엽 「바다」  넘어가는 해/ 잠깐 붙잡고,/ 노을이/ 아랫마을을/ 내려다본다.//  새들/ 둥우리에 들었는지,/ 들짐승/ 제 집에 돌아갔는지,/ 잠자리/ 쉴 곳을 찾았는지,//  산밭에서 수수가/ 머리를 끄덕여 줄 때까지/ 노을은/ 산마을에 머무르고 있다.//  -황베드로 「노을」  내가 복도에서 뛰는 건/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가벼운 걸음이/ 잰걸음이 되고/ 잰걸음으로 걷다 보면/ 복도 끝이 백 미터 결승선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뛰다가도/ 멈추지 않는 건/ 차도처럼 반듯한 보도에/  좌측통행만 있고/ 신호등이 없기 때문이다  -김은영 「복도에서 뛰는 이유」  조그만 몸에/ 노오란 털옷을 입은 게/ 참 귀엽다.//  병아리 엄마는/ 아기들 옷을/ 잘도 지어 입혔네.//  파란 풀밭에 나가 놀 때/ 엄마 눈에 잘 띄라고/ 노란 옷을 지어 입혔나 봐.//  길에 나서도/ 옷이 촌스럴까 봐// 그 귀여운 것들을/ 멀리서/ 꼬꼬꼬꼬/ 달음질시켜 본다.  -엄기원 「병아리」  비는 아프다./ 맨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아프다.//  그렇다./ 맨땅에 풀이 돋는 것은/ 떨/ 어/ 지/ 는/ 비를/ 사뿐히 받아 주기 위해서다.//  아픔에 떠는 / 비의 등을 가만히/ 받혀 주기 위해서다.//  -이준관 「비」  봄 하늘 구름은/ 빨리/ 봄비가 되고 싶다.//  땅 속/ 촉촉이 젖어들고 싶다./ 바위 틈/ 촉촉이 스며들고 싶다.//  흙 속/ 여기저기 묻힌/ 바윗돌 이 틈 저 틈 끼인/  지금 막 눈 뜰/ 이름 모르는/ 풀씨를 위해.//  -이창건 「풀씨를 위해」  꽃이/ 예쁘지 않는 일은 없다./ 열매가/ 소중하지 않는 일도 없다.//  하나의 열매를 위하여/ 열 개의 꽃잎이 힘을 모으고/ 스무 개의 잎사귀들은/ 응원을 보내고//  그런 다음에야/ 가을은 / 우리 눈에 보이면서/ 여물어 간다.//  가을이/ 몸조심하는 것은/ 열매 때문이다./ 소중한 씨앗을 품었기 때문이다.//  -정두리 「가을은」  쌀을 뿌려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 )  -이싸 하이쿠  아이들아,/ 벼룩을 죽이지 마라./ 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  -이싸 하이쿠  하얀 페인트로 담벼락을 새로 칠했어./ 큼직하게 써놓은 ‘석이는 바보’를 지우고/  ‘오줌싸개 승호’ 위에도 쓱쓱 문지르고/ 지저분한 낙서들을 신나게, 신나게 지우다가/  멈칫 멈추고 말았어./  담벼락 한 귀퉁이, 그 많은 낙서들 틈에/ 이런 낙서가 끼어 있었거든./  -신형건 「낙서」  어제 저녁에 난/ 늦잠 자는/ 게으름뱅이 별들을/ 찾아다녔어.//  고롱고롱 코고는/ 고 녀석들 몰래/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떼어 왔지.//  그랬더니 글쎄,/ 한밤중에야/ 부시시 깨어나던 녀석들이/ 오늘은/ 초저녁부터 반짝 눈을 뜨지 않겠어?//  그리곤/ 자꾸 내 창가를/ 기웃거리지 뭐야!// 어떡할까?/ 돌려줄까? 말까?  -신형건 「기웃거리는 까닭」  엄마가 아기 손등을/ 잘근잘근 물었습니다/ “엄마, 내 손등을 왜 물어?”/ “응, 그건 엄마가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야.”//  아기도 엄마 손등을’ 꽈-악 깨물었습니다/ “아야야! 아프게 물면 어떡하니?”/ “응, 그건 내가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야.”  - 김소운 「손등 물기」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정호승 「소년 부처」  겨울 산사에/ 자작나무라면 몰라도/ 작살나무라니/ 작살 모양으로/ 누구 도륙 낼 일 있나/ 비아냥거리다가/ 나무 이름 아래/ 뭐라 적힌 글씨를 읽고는/ 눈이 번쩍 떠졌다//  열매는 둥글며/ 새에게 좋은 먹이가 됩니다/ 새가 먹기 좋은/ 둥근 열매가 되려고/ 바람결에 제 살을 다듬었을까?/ 산을 내려오다 말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안준철 「작살나무의 보시」  9. 모든 사물은 살아있다고 생각하자. 의인화를 시키자  ― 통일이 됐다./ 나누어져 있기 싫어/ 통일이 됐다./  교실 귀퉁이에서/ 지구본이 돌면서 떠들어댄다.//  그 소식을 듣고부터/ 필통 안 컴퍼스가/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뒷벽 그림 속의 꼬마들도/ 그 바람에/ 모두 튀어나와/ 떠들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도무지 / 그림 속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나라 지도를 다 그리고/ 신의주 가는 찻길을 그려 놓고,/  백두산까지 달리는 바람이/ 구름 밀고 가는 걸/ 내다보았다.//  교실은/ 책상들까지/ 덜컹거리는 것이었다.//  연필도/ 제가 필통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 이제부터 더 열심히/ 조약돌은 조약돌 노릇을 하고/ 소나무는 열심히/  산에 서서 푸르고/ 그럼 컴퍼스도/ 그만 필통 안 네 자리에/ 들어가거라.  -신현득 「통일이 되는 날의 교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이 옷을 뒤집고/ 가려운 곳을 긁어 달라고/ 등을 굽힌다.  -김은영 「바람과 나무」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어둠이/ 커다란 어둠이// 꽃들을 재웠다고/ 큰소리치지만//  꽃들은/ 자는 척/ 향기로 이야기 나누는 걸// 어둠은/ 고건 모르지요.  -이화주 「고건 모르지요」  목장에 갔더니/ 송아지가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마신 우리 엄마 젖이 몇 컵인 줄 아니?”/  송아지처럼 풀밭을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과수원에 갔더니/ 사과나무가 내게 물었단다./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먹은 내 열매가 몇 바구니인 줄 아니?”/  사과 향기 폴폴 나는 뺨을 내밀며/ 내가 말했지./ “맞춰 봐. 네가 맞춰 봐.”  -이화주 「맞춰 봐」  안경을 써야 할 거야./ 까마득한 옛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눈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아이들을 바라보다/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아이가 어른이 되고/ 새끼가 어미가 되고/ 새싹이 나무가 되고/ 시내가 강물이 되는 걸/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바라보다가/ 아마 눈이 어두워졌을 거야.//  이어폰을 꽂아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귀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우주의 소리만 듣다/ 귀가 어두워졌을 거야./ 재깔거리는 공장의 기계 소리/ 딱총 소리/ 천둥소리/ 태풍 부는 소리/ 기차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비행기 소리……/ 핵폭탄 터지는 소리에/ 귀가 멀었을 거야.//  목발을 짚어야 할 거야./ 까마득한 갓날부터/ 너무 오랫동안/ 발만 쓰고 계시니까 말야.//  해종일 아이의 꿈만 쫓다/ 발이 아플 거야./ 아닌 밤중에 담 넘는 도둑을 쫓다/ 핏빛 전쟁터를 걷다/ 검은 밤을 쫓다/ 혼자 여럿을 쫓다/ 아마 발이 부러졌을 거야.//  우스워도 할 수 없지 뭐./ 온갖 보이는 거로부터/ 들리는 거로부터/ 느끼는 거로부터/ 하나밖에 없는/ 해님을 보호해야지.  -김흥수 「해님」  한낮,/ 해님이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입김 훅―// 살짝 바람이 딛는 순간,//  오롱조롱 매달려 있던/ 봉숭아 꽃씨 형제들/ 톡/ 토독//  나는 장독대/ 너는 우물가……// 누가 더 멀리 뛰나/ 내기한 거야.//  지금은 모르지/ 내년 이맘때/ 꽃피면/ 알지.  -한상순 「꽃씨들의 멀리뛰기」  낡은 구두는/ 젖은 발이 안쓰럽습니다.// 젖은 발은/ 새는 구두가 안쓰럽습니다.  -유희윤 「비 오는 날」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신발은/ 미안했어요,/ 흙이 묻어서.//  “괜찮아./ 주인을 위해 일했잖아.”/ 신발주머니는 신발을/ 꼭 안아 주었어요.//  둘이는 똑같이/ 흙투성이가 되었어요.  -이혜영 「둘이는 똑같이」  참새가 수수 모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아이고 무거워/ 내 고개 부러지겠다 참새야/  몇 알 따먹고/ 얼른 날아가거라  -김용택 「참새와 수수 모가지」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뿌리들이 일하는/ 방에 가 보면//  꽃나무가 가진/ 쬐그만/ 펌프./ 작아서/ 너무 작아서/ 얄미운 펌프.//  꽃 속에 있는/ 층층계를 딛고/ 꽃씨들이 잠들고 있는/ 방에 가 보면//  꽃씨들의/ 쬐그만 밥그릇./ 아, 꽃씨보다/ 작아서/ 작아서/ 간지러운 밥그릇.  -오규원 「방」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 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겨울이 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도록//  몇 송이 코스모스를/ 계속 피게 하는 일이다.//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만/ 마중 가는 일이다.  -오규원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사다리가 전봇대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하나밖에 없네.”/  전봇대도 사다리를 보고 놀렸어요./ “넌 다리가 두 갠데도 혼자 못 서지?”//  사다리가 말을 바꿨어요./ “넌 대단해!/ 다리가 하난데도 혼자 서잖아.”/  전봇대도 고쳐 말했어요.?네가 더 대단해!/ 사람들을 높은 데로 이끌어 주잖아!“  -오은영 「고쳐 말했더니」  오늘 새벽/ 장닭보다 먼저 일어나 들판을 걸었어//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났겠지/ 마음을 솔솔 부풀리고 있었지//  아, 그 순간/ ―난 밤새 잠 한 숨도 안 잤다/ 돌돌돌 도랑물이 말을 걸며 지나가는 거야//  그런데 그 도랑물을/ 들판이 벌컥벌컥 마시고 있잖아/  우리가 잠든 사이 도랑물이 들판에게/ 그런 착한 일 몰래 하고 있었다니…….  -정갑숙 「도랑물이」  해님은 날마다/ 출석을 그림자로 확인한다.//  온 세상 모두가/ 일 학년 교실처럼 대답하다가는/ 지구의 귀가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까.//  키 큰 가로수는 길게/ 세 살배기 우리 아가는 짧게/ 육 학년 언니는 조금 길게/ 모두모두 그림자로 대답을 한다.  -윤이현 「그림자로 대답하기」  우리 할머니가/ 산 속 마을/ 작은 무덤집으로 이사 간다//  산에 사는 짐승들/ 풀꽃들은 참 좋을 거다/ 할머니랑 함께 살 수 있어서/ 날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재미난 이야기 먹으며/ 무럭무럭 자리고/ 할머니의 자장가 들으며/ 토실토실 살찌고//  정말로 좋을 거다/ 오늘부터/ 우리 할머니의 손자, 손녀가 될 수 있어서  -이성자 「참 좋을 거다」  여름 가뭄 때/ 물 한 통이라도 준 일 있니? 아―니요.//  비바람 몰아칠 때/ 한 번이라도 지켜 준 일 있니?/ 아―니요.//  그래도 가을 되니/ 가져가라고/ 예쁜 열매 아낌없이 떨어뜨리는//  밤나무 대추나무 도토리나무…….  -권오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상수리나무 밑에서/ 상수리알 줍다가/ 꿀밤 많이 먹었다.//  톡!/ (목마를 때 물 한 모금 안 준 것들이!)//  톡!/ (벌레 물려 아플 때 약 한번 안 발라준 것들이!)//  톡! 톡!/ (줍기나 하지 쿵! 쿵! 발길질까지 하다니!)//  아빠랑 상수리알 줍다가/ 상수리나무에게/ 나 많이 혼났다.  -서재환 「상수리알 줍다가」  10.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보자  조그만 파리 눈에는/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크게 보일까?//  장미 꽃봉오리는 비단 침상만해 보이겠지.// 뾰족한 가시는 창만해 보이겠지.//  이슬 방울은 경대만하고/ 머리카락은 금빛 철사만하고/ 작고 작은 겨자씨는 불붙은 숯덩이만해 보이겠지.// 빵덩이는 높은 산으로,/ 꿀벌은 무서운 표범으로 보일까?/ 조금 집어 든 흰 소금은/ 목동들이 지켜 주는 흰 양떼처럼/ 환해 보이겠지.//  -월테 데 라 메어 「파리」  11. ‘~만약에’ 라는 가정을 해 보자  내가 만일 사과라면/ 그리고 가지에 달려 있다면/ 나처럼 얌전하고 착한 아이 앞에/ 뚝 한 개 떨어져 주지.//  착한 아이를 기쁘게 해 주지 않고/ 왜 맨날 가지에 달려 있나?//  착한 아이가 오기만 하면/ “자, 어서 맛있게 먹어봐.”/ 하고 그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가 주지.  -베이야드 테라 「내가 사과라면」  만약에/ 빗방울이/ 세모나 네모여 봐// 새싹이랑/ 풀잎이/ 얼마나 아프겠니?  -손동연 「빗방울은 둥글다」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강아지라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으려 할 때/“저리 비켜! 요놈의 강아지.”/ 하고 야단을 치고 내쫓으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집을 나가 버리겠어요./ 아무리 불러 보세요, 돌아오나.//  만일에 제가/ 어머니의 귀여운 아들이 아니고/ 앵무새라면,/ 날아가지 못하게 쇠사슬로 묶어 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치시면서/ “요놈의 새는 밤낮 쇠사슬만 물어뜯네.”/ 하고 흉을 보시겠어요?/ 그러시겠다면/ 저는 지금 당장 날아가 버리겠어요./ 숲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뭐./ 어머니 손에 다시는 안 잡힐 걸.  -타고르 「동정」  12. 호기심과 엉뚱한 생각, 상상한 것 등을 써 보자  바다가 한데 모여/ 한 바다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가 되겠지.//  나무가 한데 모여/ 한 나무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가 되겠지.//  도끼가 한데 모여/ 한 도끼가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끼가 되겠지.//  사람이 한데 모여/ 한 사람이 된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 되겠지.//  큰 사람이 큰 도끼로 큰 나무를 베어서/ 큰 바다로 쓰러뜨린다면,/ 어마어마하게/ 큰 물결이 출렁거리겠지.  - 영국 「마더구스」에서  서로 등을 돌린 채 보이지 않은 곳까지 달려갔다. 들꽃이 한들거리며 말을 걸어도 둘 다 말이 없었다.  뿌앙― 기차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달려갔다. 기적소리 멀어질 때쯤 귓불을 스쳐가며 바람이 말했다. 어디 깊숙한 터널 속에서, 아니면 산모롱이 돌아갈 때쯤에 둘이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을 거라고. 그러고는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넸을 거라고.  은빛 등을 반짝이며 나란히 나란히 철길 두 줄 달려갔다. 향긋한 들꽃의 웃음과 함께.  -신형건 「철길 두 줄」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작아진 키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흙담이 되고/ 아른아른/ 흙담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되었을 거여요.//  풀잎이 되고/ 꽃잎이 되고/ 팔랑팔랑/ 노랑나비가 되어/ 날아갔을 거여요.//  장독대에 돋은/ 몇 오라기/ 머리카락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닻을 내린/ 통통배가 되고.//  그래요./ 또/ 무지개가 되고…….//  키가 작아진/ 내 동생/ 크레파스.// 몽당/ 크레파스.//  -손광세 「크레파스」  내가/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히히덕거리며 친구들과/ 학교로 가는 아침/ 8시에는//  이 세상 골목길마다/ 학교로 가는 어린이들로/ 꽉/ 차 있겠지.//  태백산/ 작은 소릿길에도/ 제주도 한라산/ 풀밭길에도/  나와 같은 나의 친구들/ 형과 같은 형의 친구들.//  몇 명이나 될까,/ 헤아릴 순 없지만/ 학교로 가는 우리 친구들.//  8시 반에는/ 학교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마다/ 들어오신다.//  “차렷, 경례”/ 아아,/ 이 세상 어린이는 일제히 일어서서/ 선생님께/ 경례를 드릴 테지.  -박목월 「아침 8시 반」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싹이 트니?// 사슴아, 사슴아,/ 네 뿔엔 언제 꽃이 피니?  ―강소천 「뿔」  아기돼지가/ 엄마에게 물었답니다.//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 병아리는//  소/ 말/ 개/ 닭의/ 아기 이름인데// 왜/ 나는 없어?//  ―손동연 「돼지」  라디오 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소리들이/ 우르르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고.//  수도꼭지를 틀면/ 갇혀 있던 물방울들이/ 쏴아 쏴르르/ 쏟아져 나오고.//  바람의 꼭지는/ 누가 틀어 놓았기에/ 온종일 풀려/ 돌아다니는 걸까?//  누가 열어 놓고/ 잠그지 않은 꼭지에서/ 비는 쉬지 않고/ 쏟아지는 걸까?//  가볍고 상큼한 것 말고/ 지나쳐 넘치는/ 모든 것에/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필요할 때마다/ 열고 닫을 수 있는/ 조그만 꼭지를/ 달아 주고 싶다.  -민현숙 「꼭지」  산 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이문구 「산 너머 저쪽」  새소리보다/ 고운 소릴 내는/ 악기가 되고 싶었어요./ 지팡이가 된 나무.//  폭풍우에 조금씩 뒤틀리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번개가 스치고 갔을 땐/ 정신을 잃었지요./‘이젠 악기가 될 수 없구나.’//  그래도 나무는/ 꿈을 버리지 못했어요./ ‘한 사람을 위한 소리라도 낼 거야.’//  -똑 똑 똑/ 높낮이는 없지만/ 보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온몸으로 소리내는/ 지팡이가 됐어요.//  -똑 똑 똑/ 고운 소리는 아니지만/ 나무는/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이 되었어요.  -이혜영 「악기가 되고 싶었던 나무」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따스함’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물 것 같다./  그 따스한 몸무게 아래엔/ 잠자는 풀벌레 풀벌레 풀벌레 ……/ 꿈꾸는 풀씨 풀씨 풀씨……/  제 몸을 갉아먹던 벌레까지도/ 포근히 감싸주는/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물에 달면/ 이번엔/  ‘너그러움’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신형건 「가랑잎의 몸무게」  우리 집에서 제일 야위신/ 우리 엄마./ 그러나/ 저울 위에 올라서면/ 바늘이 빙그르르/ 아빠의 눈금보다/ 더 돌아갈 거예요.//  엄마의 마음 속엔/ 걱정의 무게가 있고/ 안타까움의 무게/ 너그러움의 무게/ 참고 견딤의 무게/ 그 잔잔한/ 사랑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눈금이 모자랄지도 몰라요.  -윤이현 「엄마의 몸무게」  유리병 속의 사마귀가/ 어젯밤에/ 메뚜기의 배를 먹어 버렸다.//  먹을 때 사마귀는 뭐라고 말했을까?/ “네 배를 한 입만 먹어야겠다./ 정말 미안하다.”/ 하고 사마귀말로 사과했을까?//  메뚜기는 뭐라고 말했을까?/ “죽기는 싫어./ 내 배를 너에게 줄 수 없어.”/ 하고 메뚜기말로 말했을까?//  -초등학교 5학년생 작품 「사마귀와 메뚜기  」  얄미운 생쥐가/ 하늘에도 사나 봐요.// 낮에는 숨었다가/ 밤만 되면 야금야금//  둥근 달/ 다 갉아먹고/ 손톱만큼 남았어요.  -서재환 「초승달」  13. 고정관념에 똥침을 주자  내가 얼룩말에게 물었다/ 너는 검정 바탕에 흰 줄무늬니?/ 흰 바탕에 검정 무늬니?/  얼룩말이 대답했다/ 너는 나쁜 버릇의 좋은 애니?/ 좋은 버릇도 있는 나쁜 애니?  - 쉘 실버스타인「얼룩말의 줄무늬」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추위에 웅크리던 나뭇잎이/ 팔랑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그리고 모여든다./  “다치지 않게.”/ 저마다 손을 벌려/ 나뭇잎의 등을 받쳐 준다./ 그리고는/ 조심조심/ 내려서서//  땅 위에 뉘인다.  -권영상 「바람」  ‘훠어이!’/ 아기 참새/ 쫓는 척만 하고.// ‘네끼놈!’/ 아기 참새/ 겁준 척만 하고.//  정말은……//  //  두/ 팔/ 벌렸다.  -박정식 「허수아비」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땅에서 뿌리뽑혀/ 마구 쪼개지고/  으깨어져 생명을 잃고/ 윤전기에서 돌고 있다//  그토록 많은 삼림의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 종이 펄프를 만드느라고/  숲과 삼림의 벌목의 위험에 관한 이야기로 해마다 독자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수천 수만의 신문에 쓰이는 종이를 만드느라고  -쟈크 프레베르 「그토록 많은 나무들이…」  사람들은 참 웃겨/ 다리 하나 잡고/ 한 쪽 다리로만 싸우며/ 닭싸움이래/ 닭은 다리가 두 갠데/ 차라리 허수아비 싸움이라 하지//  사람들은 참 웃겨/ ‘윷놀이’라 이름 붙이고/ ‘윷’ 나오는 거보다/ ‘모’ 나오면 좋아해/ 윷이 주인공인데/ 차라리 ‘모놀이’라 하지//  너도 참 웃겨/ 오리싸움이면 어떻고/ 닭싸움이면 어때?/ ‘윷놀이’면 어떻고/ ‘모놀이’면 어때?/ 괜히 트집 잡고/ 너도 정말 웃겨  -김미희 「참 웃겨」  아무렇게나 버려진/ 밭 모퉁이에서도/ 쑥쑥 크는 가시나무.//  그 가시나무/ 조그마한 그림자 속에 들어가면/ 땡볕을 막고 선/ 시원한 바람이 있다.//  아무 짝에도 쓰잘 데 없는/ 가시나무가/ 뜨거운 햇볕을/ 가로막고 선다는 걸//  가시나무 그림자 속에/ 들어가기 전엔/ 나는 몰랐다.//  ―권영상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당신이 새라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요.  -쉘 실버스타인 「일찍 일어나는 새」  감이 열면 감나무/ 밤이 열면 밤나무// 다래 열면 다래나무/ 머루 열면 머루나무//  고욤 열면 고욤나무/ 개암 열면 개암나무// 오디 열면 오디나무/ 아니, 방귀 뽕나무.  -김은영 「뽕나무」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 가를/ 어째서 自由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푸른 하늘을」  바다를 와서야 비로소 이제껏 헛돌았다는 것을 안다// 튜브 속에 거북한 바람을 품지 않고/ 고무 타는 냄새 없이도/ 질주할 수 있다니// 목선 양 겨드랑이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폐타이어,/ 지상에서 밀려난 게 외려 다행스럽다// 하지만 여럿을 다치게 했던 기억을 뿌리치지 못하고/ 파도 속을 자맥질한다// 소금기에 절고 삭아서 어느 새 둥그래진 상처,/ 닳고닳은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제 몸 깊이 충격을 받아들인다  -손택수 「바다를 질주하는 폐타이어」  까치 주려고 따지 않은 감 하나 있다?//  혼자 남아 지나치게 익어가는 저 감을 까치를 우해 사람이/  남겨 놓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지 땅이 제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감나무가 웃을 일 제 돈으로 사 심었으니 감나무가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가 웃을 일 그저 작대기가 닿지 않아 못 땄을 뿐 그렇지 않은데도 저 감을 사람이 차마 딸 수 없었다면 그것은 감나무에게 미안해서겠지 그러니까 저 감은 도둑이 주인에게 남긴 것이지//  미안해서 차마 따지 못한 감 하나 있다!  -이희중 「까치밥」  미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러시아에도 없고/ 프랑스에도 없는,/  그런 밭이/ 우리 나라에 있대요./ 뭔지 아세요?//  감자밭? 고구마밭? 옥수수밭?/ 참깨, 들깨, 보리, 밀, 고추, 담배밭?/  아니면 콩, 배추, 무, 포도밭?/ 아이구, 모르겠다. 뭐꼬?//  휴전선 155마일 비무장 지대에 있다는,/ 세계에서 제일 간다는/ 2억9천7백6십만 평짜리/  지뢰밭이래요.  -권오삼 「수수께끼」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천양희 「뒤편」  눈 덮인 새벽/ 관음사 올라가는 길/ 얼음 녹은 여울물 속에/ 송사리 떼 분주한 몸짓/ 햇살 퍼지는 산골짝에 오늘은/ 꼬끼요오 수탉의 목청이 빠졌다/ 민박집 뒤뜰의 토종닭/ 모조리 백숙으로 고아먹고/ 부처님 앞에 지그시 합장하는/ 관광호텔 손님들.  -김광규 「토종닭」  제단에 돼지머리를 받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반칠환 「어떤 기구(祈求)」  친구야,/ 이름 때문에/ 놀림 당한 적 많았지?//  아무리 고운 빛을 내도/ 개똥 개똥/ 개똥벌레.//  말똥 쇠똥/ 뎅글뎅글 말아/ 아기 밥 주는 게 뭐가 나빠?/ 말똥구리, 쇠똥구리/ 웃기부터 하잖아.//  사람이 먹을 음식 들쑤시는/ 집파리 보단/ 몇 배 착한 똥파리.//  그래 그래/ 지저분한 이름 때문에/ 속상한 벌레들아/ 여기 모여라./ 똥방개 너도 왔구나.//  그런데 문 밖에서/ 살랑살랑 꼬리 흔드는/ 넌……?!/ 벌레도 아닌 네가/ 얼마나 속상했으면.  -박혜선 「‘똥’자 들어간 벌레들아」  ‘엄마’의 반대말은/ ‘아빠’래요./ 아녜요 아냐./ 아빤 엄마의/ 참 좋은 짝인걸요.//  ‘남’의 반대말은/ ‘북’이래요./ 아녜요 아냐./ 북은 남의/ 참 좋은 짝인걸요.//  ‘하늘’의 반대말은/ ‘땅’이래요./ 아녜요 아냐./ 땅은 하늘의/ 참 좋은 짝인걸요.//  -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우리 별 지구……/ 자꾸자꾸 불어나는/ 참 좋은 짝인걸요.  -손동연 「짝ㆍ1」  모자야, 모자야/ 슬픈 모자야/ 군인 아저씨가 쓰면/ 그리 용감해 보이더니/  지하도 입구 계단에/ 뒤집어놓은 모자야/ 딸랑, 동전이 담기는/ 슬픈 모자야  -안도현 「모자」  새로 들어온 1학년 동생들을/ 힘 약하다고 얕잡아 봐선 안 돼요.//  1년만/ 기다려 봐요.//  언니들을 한 계단씩 위로/ 쑥 밀어 올리게 힘이 자랄 테니까요.//  그땐 힘이 넘쳐서/ 맨 위에 있는 6학년 언니들/ 아마 학교 밖까지 떠밀려 나갈 걸요.//  1학년 1년 동안은/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크거든요.  -박정식 「힘이 열 배로 스무 배로」  갈매기 한 떼가/ 어거적어기적/ 선창 바닥에 돌아다닌다.//  미끈한 몸매 어디다 두고/ 피둥피둥한 날개/ 접지도 못할까!//  나른한 햇살 받으며/ 무거운 몸 뒤뚱뒤뚱/ 쓰레기통 뒤지는 뚱보들//  빵 쪼가리/ 과자 부스러기/ 달콤한 과일 맛에 푹 빠져서//  사람들 속에서/ 사람인 양/ 똑같이 먹고 산다.  -김기리 「사람 갈매기」  별자리들을 보았어요.//  독수리, 까마귀, 사자, 큰곰, 전갈, 토끼, 돌고래, 백조, 물고기……//  한자리에 살아요/ 날짐승/ 들짐승/ 바다짐승까지//  삼팔선 같은/ 은하수 띠 두르고 있어도/ 곰이 물괴를 잡아먹지 않고/ 독수리와 토끼가 함께 뛰고 놀아요.//  밤하늘의/ 동물 친구들은.  -이봉희 「밤하늘」  14. 매혹적인 제목을 붙이자  ○ 고건 모르지요 ○ 바다는 한 숟갈씩 ○ 무릎 학교  ○ 쿵 쿵 쿵 쿵 ○ 신발 속에 사는 악어 ○ 콩, 너는 죽었다  ○ 처음 안 일 ○ 우리 집 콩쥐 ○ 붕어빵 아저씨 결석하다  ○ 지구는 코가 없다 ○ 텔레비전으 무죄 ○ 별, 돌려줘요!    1. 시심과 동심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되, 착상은 아이들의 눈높이로 맞추자. 그러나 아이들에게 영합하려 말자.  2. 주제와 교훈은 내 몸의 흉터처럼 숨겨라. 아이들은 설교를 싫어한다.  3. 시각적 구상 표현을 하자. 아이들은 리얼리틱한 걸 좋아한다.  4. 쉽게 쓰되 평범하지 않게, 재미있게 쓰되 비속하지 않게 쓰자.  5. 상상력을 친구로 삼고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자.  6.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에는 낡음이 된다. 계속 새로움을 추구하라.  7. 불량품 방지를 위해 내일도 다듬고 모레도 다듬고 글피도 다듬어라.  8. 말에도 아이엠에프가 적용된다. 동시의 언어도 마찬가지. 긴축!  9. 생산품에도 실명제가 있다. 내 작품도 그와 같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  10. 특색(개성) 있는 작품을 생산하자.  11. 깨끗한 우리말로 쓰자.(이건 특별 준칙!)  詩作을 위한 열 가지 방법/ 테드 휴즈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 곤충류, 어패류, 동물들의 이름. 가령 종달새, 굴뚝새, 파리, 물거미, 소라고둥,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 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 폭풍, 빗소리, 구름, 4계절의 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닌다고 표현한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비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유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 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 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 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 으며 뚫려 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 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는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 려 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 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마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터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 번을 되풀이해 자유자 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 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298    [스크랩]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댓글:  조회:2740  추천:0  2018-06-25
 이상(李箱) 시 58편 해설-360 쪽  全  ​   저자 신영삼 1958년 부여 출생     ​ 머리말   이상의 시가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도 했다. 의학 박사님들은 이상의 두개골과 가슴을 절개하고 병인을 찾았다. 두개골에서는 뚜렷한 병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가슴에서는 폐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처방을 내리고, 입원 시키고, 치료하고, 퇴원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함은 계속되었다. ​ 그러자 저마다 한 가닥 한다는 박사님들이 나름대로 진단하고 치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신의 의술을 과시하기 위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 더러는 먹고 살기 위한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두개골과 가슴에만 머물렀다. 두개골과 가슴은 수없이 절개되고 봉합되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자들의 두통과 가슴 답답한 증세는 악화되었다. ​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한 어떤 박사님 중에는, 이상 시가 외계인의 말로 되었기 때문에, 지구인들은 해독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상의 정신병적 병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초현실주의라는 전염병에 감염되었다고 하는 박사님들도 있었다. 그들의 진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 이제는 말도 안 되는 시골 돌팔이까지 타났다. 자기도 한 번 사람들의 두통과 답답증을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접근 방식은 지극히 형이하학적이었고, 말은 어눌했으며, 주로 민간요법에 의존했다. 호기심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2012. 1. 20 보령에서 신영삼 ​ ▣ 차례 ▣   엮으면서 12 1. 異常한 可逆反應 異常한可逆反應 14 破片의景致 22 ▽의遊戱 29 수염―― 36 BOITEUX · BOITEUSE 45 空腹 ―― 51   2. 烏感圖 (1) 二人…… 1 …… 60 二人…… 2 …… 63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66 運動 72 興行物天使 76 ​ 3. 三次角 設計圖 線에關한覺書 1 88 線에關한覺書 2 97 線에關한覺書 3 105 線에關한覺書 4 109 線에關한覺書 5 112 線에關한覺書 6 115 線에關한覺書 7 124 ​ 4. 建築 無限 六角體 AU MAGASIN NOUVEAUTES 136 出版法 149 且8氏의出發 161 대낮 170 ​ 5. 烏感圖 (2) 烏瞰圖 詩第一號 178 烏瞰圖 詩第二號 183 烏瞰圖 詩第三號 186 烏瞰圖 詩第四號 188 烏瞰圖 詩第五號 192 烏瞰圖 詩第六號  196 烏瞰圖 詩第七號 203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211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221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224 烏瞰圖 詩第十一號  228 烏瞰圖 詩第十二號 231 烏瞰圖 詩第十三號 234 烏瞰圖 詩第十四號 238 烏瞰圖 詩第十五號 244 ​ 6. 易斷 火爐 254 아침 260 家庭 263 易斷 271 ​ 7. 危篤 禁制 282 絶壁 285 白書 288 買春 292 生涯 295 自像 299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306 꽃나무  309 이런詩 312 普通記念 315 거울 322 紙碑 328 明鏡 331 ​ 9. 遺稿 肉親의章 338 最後 344 悔恨의章 346   1. 異常한 可逆反應 ​ ​ ▣ 異常한可逆反應 任意의半徑의圓 (過去分詞의 時勢)   圓內의一點과圓外의一點을結付한直線 二種類의存在의時間的影向性 (우리들은이것에관하여무관심하다)   直線은圓을殺害하였는가   顯微鏡 그밑에있어서는人工도自然과다름없이現象되었다.   ☓    같은날의午後 勿論太陽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에存在하여있었을뿐만아니라그렇게하지아니하면아니될步調를美化하는일까지도하지아니하고있었다.   發達하지도아니하고發展하지도아니하고 이것은憤怒이다.    鐵柵밖의白大理石建築物이雄壯하게서있던 眞眞5"의角바아의羅列에서 肉體에對한處分法을센티멘탈리즘하였다. 目的이있지아니하였더니만큼冷靜하였다.   太陽이땀에젖은잔등을내려쬐었을때 그림자는잔등前方에있었다.   사람은말하였다. 「저便秘症患者는富者집으로食鹽을얻으려들어가고자希望하고있는것이다」 라고 ............ ​ ― 1931. 7 ―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의 제목으로는 낯설다. ‘이상한 가역반응’은 원래 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가역반응이란 정반응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의 역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다. 따라서 가역반응이란 어떤 동일한 현상을 놓고 정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시에서는 이상하게도 동일한 현상을 놓고 서로 다르게 보는 반응이다. ​ 이 시의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생각하면 대체적인 시적 상황의 윤곽이 잡힌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는 시로 보인다. 이상 시인의 몇 편의 다른 시들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 시들을 읽어본 것을 바탕으로 소설(fiction)을 쓰겠다.   『소년인 화자는 어느 과부의 집에 가끔 놀러 갔다. 우연히 과부를 통해 여자를 알게 되었던 소년은, 이후로도 가끔 과부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과부와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과부도 좋아했고, 소년도 좋았다. 사흘 전에도 과부의 집에 갔었다. 어제 밤, 어떤 놈이 몰래 담을 넘어서 과부를 겁탈하고, 과부의 금반지며 목걸이까지 훔쳐서 달아났다. 과부는 경찰서에 신고 했다. 곧 수사관이 왔다. 과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지문도 채취했다. ​ 오늘 정오, 소년은 강간범으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하고 있다.』   任意의 半徑의 圓 (過去分詞의 時勢) ​ 화자가 경찰서에 잡혀갔다. 조사관이 임의의 반경의 원을 볼펜으로 그렸다. 임의의 반경을 가진 원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을 그린 것이다. 아니다. 과부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 분사의 시세다. 이미 어떤 사건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 圓內의 一點과 圓外의 一點 을結付한 直線 ​ 원 내의 일점과 원외의 일점을 결부시키는 직선이 그려진다. 화자가 과부의 집에 침입하여 과부를 겁탈하고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느냐고 심문하는 것이다.   二種類의 存在의 時間的 影向性 / (우리들은 이것에 관하여 무관심하다) 두 종류의 존재의 시간적 영향성 즉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갔던 시간과 어떤 놈이 과부의 집을 침입한 시간이, 화자가 범인인가 아닌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들’이라는 말로 봐서 화자와 조사관 모두 이 시간성에 무관심한 채 심문하고, 심문을 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문 과정은 이랬을 것이다. 조사관 : 너, ○○집에 침입하서 강간하고 강도질 했지? 화자 : 아닙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조사관 : 증거가 있는데……. 바른 대로 불어. 화자 : 절대로 강간하고 강도질 한 적 없습니다. 위 대화에는 범인이 그 집에 침입한 시간과 화자가 그 집에 간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 대화다. 시간적 영향성이 결여되어 있다.  直線은 圓을 殺害하였는가. / 顯微鏡 / 그 밑에 있어서는 人工도 自然과 다름없이 現象되었다.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화자가 어제 밤 과부를 겁탈했는가? 조사관은 화자가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화자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사관은 증거로 지문을 제시하는 것 같다. 현미경 아래에서는 인공도 자연과 다름없이 현상되었다. 현미경에는 세포 관찰을 할 때처럼, 지문도 자세히 나타났다. 꼼짝없이 강간범으로 몰린 것이다. 같은 날의 午後 / 勿論 太陽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處所에 存在하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步調를 美化하는 일까지도 하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물론 태양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인 중천에 존재하였고, 태양은 아주 느리게 서쪽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화자는 아주 지루하게 오후 내내 취조를 받았다. 發達하지도 아니하고 發展하지도 아니하고 / 이것은 憤怒이다. 조사 방법이 발달하지도 아니하고 발전하지도 아니한 것에 화자는 분노를 느꼈다. (순전히 자백과 고문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수사 방법이다.) 鐵柵 밖의 白大理石 建築物이 雄壯하게 서 있던 / 眞眞 5"의 角바아의 羅列에서 / 肉體에 對한 處分法을 센티멘탈리즘하였다. 대리석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도회의 어느 철책 안,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진진5"’는 ‘진~진~하는 오 초’라고 읽자. 취조실에 있는 전기 고문기의 스위치를 올리면, 5초 동안 ‘진~~~진~~~’하고 소리가 난다. 전기 고문기와 각목이 늘어서 있는 취조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고민하였다. 고문을 당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고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 자백을 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目的이 있지 아니하였더니 만큼 冷靜하였다. ‘부자의 집’ 즉 과부의 집에 갔던 것은 사실이나, 과부를 겁탈할 목적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인 만큼 냉정하였다. 거짓 자백을 하지 않기로 했다. 太陽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쬐었을 때 / 그림자는 잔등 前方에 있었다 ‘태양이 땀에 젖은 잔등을 내려 쬐었을 때 그림자는 잔등 전방에 있었다.’는 말과, 앞에 나왔던 ‘태양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처소에 존재하였다’는 구절과 연관시켜 보자. 그러면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태양이 질 때까지 오후 내내, 아주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취조를 받았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사람은 말하였다. / 「저 便秘症患者는 富者 집으로 食鹽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希望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 ............ ‘사람’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과부다. 과부가 경찰서 취조실로 찾아왔다. 범인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범인이라는 자가 바로 자기가 잘 아는 총각이 아닌가! 과부는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사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석방 됐다. 그러면 과부가 “저 총각은 나를 만날 일이 있을 때는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총각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과부는 왜 “저 변비증 환자는 부잣집으로 식염을 얻으러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는가? 화자가 과부의 집에 가는 것은 식염을 얻으러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식염은 정액을 비유한 것이다. 암염을 절구에 넣고 절구 공이로 찧으면 소금가루를 얻을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의 음부에 남근을 절구질하면 소금가루와 같은 하얀 정액이 나온다. (의 ‘血紅으로 染色된 巖鹽의 粉碎’라는 구절은 이와 유사한 상황의 비유다.) ‘변비증 환자’는 똥을 누고 싶어도 누지 못하는 자다. 성적 욕구가 생겨도 해결할 대상이 없는 화자도 변비증환자다. 변비증 환자가 소금을 먹으면 효험이 있듯이,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대상이 없는 화자는 과부를 찾아가, 과부의 음부에 절구질을 하고, 그리고 하얀 소금가루와 같은 정액을 내보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부가 “저 총각은 성적 욕구를 해결할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식염을 얻으려 들어가고자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에서 ‘있는’이라는 말의 시제에 유의하면, ‘화자는 식염을 얻으려고 부자의 집에 들어가고자 늘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과부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는 의미다.  그러면 왜 과부의 집이 ‘부자의 집’일까? 그 집에는 소금이 많아서 부자의 집이다. 과부의 음부에는 과부를 겁탈했던 어떤 놈의 소금도 있을 것이고, 가끔 찾아가 암염을 절구질하는 화자의 소금도 있을 것이니, 과부는 참으로 부자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부자의 집은 과부의 집이다. 아니 과부의 음부인지도 모른다.       ▣  破片의景致  △은나의AMOUREUSE이다 ​ 나는하는수없이울었다   電燈이담배를피웠다 ▽은 I/W이다        × ▽이여! 나는괴롭다   나는遊戱한다 ▽의슬리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떻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 쓸쓸한들판을생각하고 쓸쓸한눈나리는날을생각하고 나의皮膚를생각하지아니한다   記憶에對하여나는剛體이다   정말로 「같이노래부르세요」 하면서나의무릎을때렸을터인일에對하여 ▽은나의꿈이다 스티크! 자네는쓸쓸하며有名하다   어찌할것인가         × 마침내▽을埋葬한雪景이었다 ― 1931. 7 ―      破片의 景致 /  △은나의AMOUREUSE이다 ​ 제목 '파편의 경치'라는 말에서부터 무슨 말인지 읽기 어렵다. 이 시를 끝까지 읽어보아도 파편의 경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파편의 경치, 조각난 경치, 조각나서 완전하지 않은 경치, 전체가 아닌 조각난 몇 개의 경치, 그 경치를 가지고, 그 조각난 경치를 맞추어서 완전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각난 몇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겠다. ​ 이 시에는 × 표를 중심으로 네 개의 경치가 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경치를 맞추어서 하나의 완전한 경치를 만들어야 한다. 조각난 네 개의 경치를 가지고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로 조합을 해야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된다. ​ 부제 '△은나의AMOUREUSE이다'는 프랑스 말로 ‘△은 나의 연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화자는 △을 좋아할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은 나오지 않는다. ▽만 나온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면 ▽은 화자에게 괴로운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 △과 대비되는 ▽은 싫어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부호나 기호로 표현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의 방식이다. 이상은 서양 학문 특히 수학과 과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 학문에서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는 그 발상을 활용하고 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화자는 하는 수 없이 울었다. 왜 울었으며, 왜 하는 수 없이 울었으며, 우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뒤에 나오는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라는 말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화자는 아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화자가 살아오면서 갖은 아픔들이다. 이를테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대를 잇기 위해서 돈을 받고 양자로 간 것 등은 이상의 삶에서 가장 큰 아픔들이다. 그래서 집을 나와서 여급들과 동거도 하고, 금홍이도 만나게 된다. 물론 폐병도 이상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었을 것이다. 화자에게는 그동안 삶에서 고통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스러울 때 왜 울까? 그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이 시에서 우는 행위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라는 것은 이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 우는 행위는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고통을 울음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잊는 행위다. 무엇인가 아픔을 표현하는 행위는 바로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電燈이 담배를 피웠다 / ▽은 I/W이다 아픔이 많았던 화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그런데 전등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면, 담배 연기 때문에 방 안의 공기가 뿌옇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등이 뿌옇게 켜졌으니까 전등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은 I/W이다. ‘I/W’에서 ‘I’는 전류를 나타내는 기호다. ‘W’는 전력을 나타내는 기호다. 보통 V=I/W라는 공식이 있다. 전압은 전류를 전력으로 나눈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은V 즉 전압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는 ‘전등을 켜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화자가 싫어하는 ▽은 ‘전등을 켜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등을 켜는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기호화하여 표현하는 서양의 수학이나 과학의 발상이다.   ▽이여! 나는 괴롭다 ▽ 곧 전등을 켜는 것이여! 나는 괴롭다. 화자는 아픔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등을 켜는 것이 괴롭다. 밤에 편안히 잠도 못자고 일어나 전등을 켜고 있는 것이 괴롭다.   나는 遊戱한다 / ▽의 슬리퍼어는 菓子와 같지 아니하다 /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화자는 유희를 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즐거운 놀이를 한다. ▽의 슬리퍼어, 밤에 고통 때문에 전등을 켜고, 슬리퍼를 신고, 남들이 다 잠자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고, 또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과자와 같지 않다. 과자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떻게 나는 울어야 할 것인가. 나는 나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지금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고통스러울 때 우는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한 행위다. 따라서 어떻게 울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고통을 잊을까, 무엇으로 고통을 잊을 것인가, 무엇을 하면서 고통을 잊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쓸쓸한 들판을 생각하고 / 쓸쓸한 눈 나리는 날을 생각하고 / 나의 皮膚를 생각하지 아니한다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들판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들판에 혼자 놓여 있었던 것과 같이 외로웠던 지난날을 생각한다. 그리고 전등을 켜고 그것을 글로 쓴다. 글로 쓰는 행위는 우는 행위와 같다. 고통을 글로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하는 행위다. ​ 화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쓸쓸한 눈이 내리는 날을 생각한다. 화자는 쓸쓸한 눈이 내리던 지난 시절,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폐결핵을 인해서 창백해진 현재의 자신의 피부를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폐결핵의 고통보다는 화자의 기억 속에 있는 고통이 더 크기에, 폐결핵으로 망가져가는 몸도 잊고 밤에 글을 쓴다.   記憶에 對하여 나는 剛體이다 기억에 대해서는 화자는 강한 육체를 가졌다. 화자는 과거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매우 강하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쓰는 데는 소질이 있다.   정말로 / 「같이 노래부르세요」/ 하면서 나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에 對하여 / ▽은 나의 꿈이다 / 스티크! 자네는 쓸쓸하며 有名하다 정말로, ‘같이 노래 부르세요’ 하면서 화자의 무릎을 때렸을 터인 일,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무릎을 툭 치면서, 자꾸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만 하지 말고 ‘같이 노래 부르세요. 즐겁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함직한 일이다. 결국 그 일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 ▽ 곧 전등을 켜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전등을 켜고 그 슬픔과 고통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화자가 가지고 있는 꿈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 떠올린 것을 글로 적는 것은 화자의 꿈이다. 그래서 그것을 전등을 켜고 글로 쓴다. 그러면 고통을 잊을 수 있다. ​ 스티크는 필기도구다. 이를테면 만년필이다. 만년필은 쓸쓸하며 유명하다. 만년필은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려서 그것을 밤에 홀로 전등을 켜 놓고 외롭게 기록하는 도구다. 그래서 스티크는 쓸쓸하다. 사실은 화자가 스티크를 가지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무엇인가 기록하면서 쓸쓸해 한다. 또 만년필은 유명하다. 화자가 과거의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 만년필은 마치 유명한 의사와 같은 존재다.   어찌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쓸까? 시로 쓸까? 소설로 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자는 만년필로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을 埋葬한 雪景이었다 ​ 마침내 ▽ 곧 전등을 켠 것을 매장한 설경이었다. 전등을 켠 것을 매장했다는 것은, 전등을 켠 것이 생명을 다 해서 땅에 묻었다는 것인데, 이는 전등을 껐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등을 매장한 설경은 눈이 하얗게 내리듯이 밖이 하얗게 밝은 아침이 되었다는 의미다. 과거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과거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을 떠올렸고,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기록하는 가운에 밤이 지나갔다. ​ 결국 화자는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지나온 삶, 슬프고도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들을 시나 소설 혹은 수필로 썼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 작품들이 모두 이상의 과거의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 ​ ▣ ▽의遊戱――    ▽은 나의 AMOUREUSE이다.   종이로만든배암을종이로만든배암이라고하면 ▽은배암이다.   ▽은춤을추었다.   ▽의웃음을웃는것은破格이어서우스웠다.   슬립퍼어가땅에서떨어지지아니하는것은너무나소름끼치는일이다. ▽의눈은冬眠이다. ▽은電燈을三等太陽인줄안다.          ×  ▽은어디로갔느냐. 여기는굴뚝꼭대기다.   나의呼吸은平常的이다. 그러한데탕그스텐은무엇이냐. (그무엇도아니다.)   屈曲한直線 그것은白金과反射係數가相互同等하다. ▽은테이블밑에숨었느냐.         × 1 2 3 3은公倍數의征伐로向하였다. 電報는아직오지아니하였다. ― 1931. 7 ―     ▽의 遊戱―― 시인은 지금 ▽를 가지고 유희를 하고 있다.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다. 우매한 독자를 향하여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이, 이러한 시를 써 놓고 시인은 즐기고 있다. 사실 이상의 시를 아직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이 저승에서도 즐거워할 일인지도 모른다. ‘――’으로 봐서 아마 즐거운 유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이상의 시에서 ‘――’이 있는 경우는 항상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은 나의 AMOUREUSE이다. 부제에 나오는 ‘AMOUREUSE’는 프랑스어로 사랑하는 사람, 연인이라는 의미다. 화자는 ▽을 자신이 연인처럼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추리해 보아야 한다.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하면, ▽은 배암이다. 종이로 만든 배암은 비록 가짜 배암이지만, 이것을 종이로 만든 ‘배암’이라고 가정한다면, ▽은 배암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을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했으니 이제부터 ▽은 실제로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 그 자체는 아니지만, ▽은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은 배암과 같은 것이고, 화자가 사랑하는 어떤 것이다. ​ 이렇게 ‘▽은 배암이다’처럼 ‘무엇을 무엇이라고 하자’ 하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발상은 서양식 학문에서 비롯한다. 서양학문에서는 어떤 것을 기호화하거나 부호화하여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한 학문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에서 기차가 시속 120km로 2시간 동안 달릴 때, 그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또 기차가 시속 150km로 3시간 동안 달릴 경우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인가? 하는 것들을 서양 학문에서는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합니다. 즉 ‘기차가 이동한 거리는 기차의 속도에 시간을 곱하면 됩니다.’ 이것을 서양 학문에서는 s를 거리라고 하고, v를 속도라고 하고, h를 시간이라고 하면, ‘s = vh’라고 간단히 부호화합니다. 여기서 다시 속도는 어떻게 구하는가 하는 것을 v = s/h 라고 간단히 공식화한다. 이러한 방식이 서양 학문의 부호화, 기호화 방식이다. 이상 시인도 이러한 서양식 부호화, 기호화 방식을 이용하여 ▽을 배암이라고 한 것이다. 물론 ‘배암’은 다시 무엇인가의 비유한 것인데, 여기서 ‘배암’은 화자를 비유한 것이다. ▽은 춤을 추었다. ​ ▽은 춤을 추었다. ▽은 배암이니까, 배암이 똬리를 튼 상태에서 대가리를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은 배암과 같은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똬리를 틀고 머리를 들고 춤을 추는 배암과 같은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이 시를 읽는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화자가 밤에 일어나 앉아서 기침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기침을 할 때는 상체가 앞뒤로 몹시 흔들린다. 이 시는 1931년에 지은 시인데, 이때부터 이상은 폐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이상이 밤에 일어나서 기침을 하는 모습이다. 똬리를 틀고 앉아서 머리를 들고 춤추는 배암이 화자다.   ▽의 웃음을 웃는 것은 破格이어서 우스웠다. ​ ▽의 웃음을 웃는 것 즉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웃는 것은 아주 파격(破格)이어서, 도리어 우스웠다. 화자가 배암과 같은 자세로 기침을 하고 있는 장면은 결코 우스운 장면이 아니다. 우스운 장면이 아닌데 이를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아주 파격이고, 그것이 도리어 우습다는 것이다. 화자가 폐병으로 똬리를 틀고 고개를 들고 있는 뱀이 춤을 추듯이, 앉아서 상체를 앞뒤로 심하게 움직이면서 기침을 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슬립퍼어가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 하는 것은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화자는 기침으로 인해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을 못 자는 화자는 슬리퍼를 신고 이를테면 화장실도 가고, 물도 먹고 해야 할 것이다. 식구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밤에 홀로 일어나 돌아다니려면 조용조용 다닐 수밖에 없다. 슬리퍼를 조용히 끌면서 다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슬리퍼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밤에 홀로 조용히 다니는 것이며, 밤에 기침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일어나서 다녀야 하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다. ​ ▽의 눈은 冬眠이다. ▽의 눈은 동면(冬眠)이다. 화자는 눈을 배암이 동면하듯이 감았다. 그러나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눈만 감고 누워 있다.  ▽은 電燈을 三等太陽인 줄 안다. ▽은 전등을 삼등 태양인 줄 안다. 배암인 화자는 전등을 세 번째 등급의 태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밤에 전등을 켜 놓고 일어나서 잠을 자지 않고 있다. 태양이 있는 낮에는 우리는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전등을 삼등 태양으로 아는 화자는 밤에 일어나서 활동을 한다. ▽은 어디로 갔느냐. /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은 즉 배암인 화자는 어디로 갔느냐. 여기는 굴뚝 꼭대기다. 화자가 간 곳은 굴뚝꼭대기다. 굴뚝 꼭대기는 연기가 난다. 연기가 나는 곳에서는 기침을 할 수밖에 없다. 화자가 기침을 아주 심하게 한다는 뜻이다. 나의 呼吸은 平常的이다. / 그러한데 탕그스텐은 무엇이냐. / (그 무엇도 아니다.) 화자의 호흡은 평상적이다. 평상시와 같이 숨을 쉬고 있다. 죽은 것은 아니다. 호흡이 평상시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텅스텐은 무엇이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괄호를 치고 그 안에 그 무엇도 아니라고 했다.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은 텅스텐이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형상을 가진 어떤 물체가 아닌 것 중에서, 호흡과 관련시켜 상상해 보면, 호흡에서 마치 텅스텐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가 난다 뜻이다. 따라서 아직 살아 있으나 호흡은 매우 가쁘며, 텅스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屈曲한 直線 / 그것은 白金과 反射係數가 相互 同等하다. ​ 굴곡한 직선. 화자가 배암이다. 배암은 원래 긴 직선이다. 그 직선의 배암이 굴곡 상태로 있다. 길게 펼쳐져 있어야 할 화자가 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기침이 멈추고 화자는 몸을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 있는 것 같다. 몸을 옆으로 뉘어 웅크리고 잠을 자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원래 직선이 굴곡한 모습이다. ​ 또 그것은 백금과 반사계수가 상호 동등하다. 백금은 하얗다. 굴곡한 직선 즉 화자가 광선을 반사하는 계수가 백금과 상호 동등하다는 것은, 화자가 백금처럼 하얗다는 뜻이다. 화자의 창백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폐병을 앓는 사람의 창백한 모습이다. ​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은 테이블 밑에 숨었느냐. 배암이, 화자가 마치 테이블 밑에 숨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다. 시끄럽던 것이 조용하면 어디에 숨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기침이 가라앉았다. 1 / 2 / 3 / 3은 公倍數의 征伐로 向하였다. 기침을 한 번 한다. 조용해졌던 기침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기침을 두 번 한다. 기침이 조금 잦아졌다. 기침을 세 번 한다. 기침이 조금 더 잦아진 것 같다. 3은 공배수의 정벌로 향하였다. 잦아진 기침이 마치 3의 공배수를 정벌하려는 듯이 삼의 공배수 쪽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가고 있다. 3, 6, 9, 12~~~ 이런 식으로,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콜록, ~~~ 이런 식으로 기침이 자주 나고 있다. 기침이 점점 잦아진다. 電報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아직 오지 아니하였다. 전보는 누가 죽었을 때 멀리 있는 사람에게 급히 알리기 위한 통신 수단이다. 편지는 여러 날이 걸린다. 그래서 전보를 보낸다. 전보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것은 결국 매우 위독한 상태라는 것이다. 화자는 매우 위독한 상태다. ​ ​ ​   ▣  수염―― ​  (鬚 · 髭 · 그밖에수염일수있는것들 · 모두를이름)               1   눈이存在하여있지아니하면아니될處所는森林인웃음이存在하여있었다             2   홍당무             3   아메리카의幽靈은水族館이지만大端히流麗하다 그것은陰鬱하기도하다            4   溪流에서―― 乾燥한植物性이다 가을            5   一小隊의軍人이東西의方向으로前進하였다고하는것은 無意味한일이아니면아니된다 運動場이破裂하고龜裂할따름이니까            6   三心圓            7   조(粟)를그득넣은「밀가루」布袋 簡單한須臾의夜月이었다           8   언제나도둑질할것만을計劃하고있었다 그렇지는아니하였다고한다면적어도乞人이기는하였다           9   疎한것은密한것의相對이며또한 平凡한것은非凡한것의相對이었다 나의神經은娼女보다도더욱貞肅한處女를願하고있었다             10   말(馬)―― 땀(汗)――              X     余, 事務로  써散步하라하여도無防하다   余, 하늘의푸르름에지쳤노라이같이閉鎖主義로다 ― 1931. 7 ―     1931년 6월 21세의 젊은 혈기의 이상, 어느 날 아메리카의 젊은 남녀의 벌거벗은 사진을 보았나 보다. 젊은 여자의 나체 사진, 그리고 젊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수염―― /  (鬚 · 髭 ·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 모두를 이름) 제목 '수염――'은 차마 여자의 음모를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수염이라고 말하면서 한참 생각하는 것 같다. 독자가 못 알아차릴까 봐서 괄호를 하고, 그 안에 상상할 수 있도록 썼다. 수―턱수염, 자―콧수염, 그밖에 수염일 수 있는 것들, 모두를 말하는 것이라고. 따라서 여기서는 수염은 여자와 남자의 성기 주변에 난 음모라고 상상하는 것이 좋다.   눈이 存在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處所는 森林인 웃음이 存在하여 있었다 눈이 존재하여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곳은, 눈이 원래 있어야 한 곳이다. 눈에는 삼림처럼 음침한 웃음이 존재하였다. 화자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나체의 남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는 화자의 눈동자는 보이지 않고 속눈썹만 삼림처럼 보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속으로 음침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홍당무 화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화자의 성기가 벌겋게 발기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좋다.   아메리카의 幽靈은 水族館이지만 大端히 流麗하다 / 그것은 陰鬱하기도 하다 아메리카의 유령 곧 여자의 나체 사진은 비록 수족관이지만 대단히 유려했다. 유령은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다. 여자도 형상은 사진 속에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는 지금 화자 앞에 없다. 그래서 유령이다. 수족관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은 볼 수는 있으나, 유리가 가로막아 그 물고기를 만질 수는 없다. 사진 속의 여자 또한 그 형상은 있으나 그 여자의 실체를 만질 수가 없다. 수족관이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여자는 대단히 유려하다. 미끈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음울하기도 하였다. 음울(陰鬱)은 그늘지고 울창하다는 뜻이다. 사진 속의 여자의 음모가 매우 많아서 숲으로 말하면 짙은 그늘이 질 만큼 울창했다.   溪流에서―― / 乾燥한 植物性이다 / 가을 여자의 사타구니를 보고 있다. ‘――’으로 봐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한 마디 한다. “건조한 식물성이다”라고. 음모는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즉 여자의 음부의 갈라진 양옆에서, 건조한 식물성이다. 건조한 식물성은 계곡의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계곡에서 애액이 흐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가을이다. 여자의 음모가 단풍이 들었는가 보다. 아니 음모의 색갈이 단풍의 색처럼 붉다. 금발의 백인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一小隊의 軍人이 東西의 方向으로 前進하였다고 하는 것은 / 無意味한 일이 아니면 아니 된다 / 運動場이 破裂하고 龜裂할 따름이니까 ​ 일개 소대의 군인은 많은 숫자의 군인이다. 군인은 남근이다. 군인은 머리에 철모를 썼다. 철모를 쓴 군인은 남근의 모습이다. 일개 소대의 군인이 계곡에서 동서 방향으로 전진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동쪽으로 전진했다가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였으면 제자리다. 전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성행위 장면을 연상해 보자. 열심히 전진하고 후퇴를 거듭한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제자리에 있는 셈이다. 그것은 전진한 것이 아니라 운동장 즉 여자의 음부가 파열하고 균열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음부가 갈라져 열리고, 제자리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였다는 말이다. 성교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여자의 음모가 난 계곡을 보면서, 많은 남자들의 남근이 여자의 성기 속에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행위를 하였을 것이라고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三心圓 이제는 남자의 나체 사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삼심원은 세 개의 중심이 있는 세 개의 원이다. 남근과 고환 두 쪽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삼심원이다. 정면으로, 발기된 남근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사진 속의 아메리카 남자를 보고 중얼거리는 말이다.   조(粟)를 그득 넣은「밀가루」布袋 / 簡單한 須臾의 夜月이었다 이제는 고환을 바라보고 있다. 고환은 조를 그득 넣은 밀가루 포대다. 고환 속에는 정액이 있고, 정액 속에는 정자가 들어 있다. 정액과 정액 속의 정자는 고환이라는 포대 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조는 정자, 밀가루는 흰색의 정액, 그리고 포대는 그것이 담겨 있는 고환이다. 사진 속의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상상한다. 남근은 간단(簡單)한 수유(須臾)의 야월(夜月)이었다. 성교는 잠깐 동안 쾌감에 젖는, 간단한 정액의 사정일 뿐이었다. 야월? 밤에 뜨는 달은 초승달, 보름달, 하현달처럼 커졌다가 작아진다. 그리고 커졌다가 작아지는 남근에서 방출되는 정액은 달처럼 뿌옇다. 언제나 도둑질할 것만을 計劃하고 있었다 /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乞人이기는 하였다 남근은 도둑질할 것만 계획하고 있었다. 도둑질은 몰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근은 아내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피울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는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걸인이기는 하였다. 걸인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애걸하는 사람이다. 남근은 여자를 보면 한 번 잠자리를 함께 하기를 애걸하는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疎한 것은 密한 것의 相對이며 또한 / 平凡한 것은 非凡한 것의 相對이었다. 성기다고 하는 것은 빽빽하다는 것의 상대이며, 평범하다고 하는 것은 비범하다는 것의 상대였다. 화자는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 그리고 자신의 음모와 남근의 크기를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사진 속의 남자의 음모는 빽빽하고 무성하고 자신의 음모는 거기에 비하면 성기게 났는가 보다. 사진 속의 남자의 성기는 대단히 커서 비범하며, 자신의 성기는 작아서 평범한가 보다. 나의 神經은 娼女보다도 더욱 貞肅한 處女를 願하고 있었다. 화자의 신경은 창녀보다도 더욱 정숙(貞肅)한 처녀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의 흥분된 신경은 창녀를 원하기 보다는 즉 흥분된 성적 욕망을 창녀에게 가서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정숙한 처녀를 원하고 있습니다. 정숙한 처녀처럼 창녀가 있는 곳에 가지 않고 정조(貞操)를 지키면서, 조용하고 엄숙하게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화자는 남녀 나체 사진을 보고 자위를 하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말(馬)―― / 땀(汗)―― 그래서 오랫동안 말을 달리듯이 자위를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말을 달렸다는 것은 자위를 했다는 것이다. 자위 할 때의 동작은 말을 타고 달릴 때의 동작과 흡사하다. 기수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말 등을 중심으로 사람이 앞으로 몸이 쏠렸다가 뒤로 쏠렸다가 하는 동작을 한다. 손으로 성기를 잡고 자위를 하는 장면이 이와 유사하다. 땀은 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땀처럼 조금 비쳤다.   余, 事務로써 散步하라 하여도 無防하다. 나는 이제 사무로써 산보하라 하여도 무방하다. 사무(事務)는 ‘볼일’이다. 소변을 보는 것을 ‘볼일’ 본다고도 한다. 자위를 마친 화자, 이제는 소변을 보기 위해서 천천히 걸어가라 하여도 괜찮다. 조금 전까지는 남근이 발기하였기 때문에 소변을 보려고 해도 남들이 볼까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위가 끝났고, 발기된 성기가 작아졌다.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가라고 하여도 괜찮다. 余, 하늘의 푸르름에 지쳤노라 이 같이 閉鎖主義로다 화자는 하늘의 푸름에 지쳤다. 우리의 사회는 이같이 폐쇄주의다. 푸른 하늘은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맑은 우리 사회다. 아메리카에 비해서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 맑고 깨끗한 것만을 강요한다. 화자는 이러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지쳤다. ​ ​ ​ ▣   BOITEUX · BOITEUSE ​ 긴것   짧은것   열十字       ×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묻어있었다   墜落   不得已한平行   物理的으로아팠었다     (以上平面幾何學)        ×   오렌지   大砲   葡萄        ×   萬若자네가重傷을입었다할지라도피를흘리었다고한다면참멋적은일이다   오―― 沈默을 打撲하여주면좋겠다 沈默을如何이打撲하여나는洪水와같이騷亂할것인가 沈默은沈默이냐   매쓰를갖지아니하였다하여醫師일수없는것일까 天體를잡아찢는다면소리쯤은나겠지   나의步調는繼續된다 언제까지도나는屍體이고자하면서屍體이지아니할것인가 ― 1931. 7 ―   ​ BOITEUX · BOITEUSE 절름발이 남성명사, 절름발이 여성명사. 절름발이는 길이가 하나가 길고 하나는 짧은 것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두 막대기도 길이가 다른 절름발이다. 보통 남자와 여자도 길이가 다르다. 절름발이다.   긴것 / 짧은것 / 열十字 긴 것, 짧은 것, 크로스 된 열십자. 기독의 상징 십자가.   그러나 CROSS 에는기름이 묻어 있었다 / 墜落 / 不得已한 平行 / 物理的으로 아팠었다 / (以上 平面幾何學) 그러나 십자가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십자가의 추락. 기독의 타락. 긴 것과 짧은 것이 부득이하게 평행을 이뤘다. 남녀가 십자가 아래에서 평행을 이루어 서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다. 물리적으로 아팠었다. 사물의 이치로 당연히 괴로워했었다. 과거완료형 시제다. 과거에 그랬다. 화자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했던 듯하다. 평면기하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복잡한 사람의 삶을 마치 평면기하학에서 간단한 도형을 그려 설명하듯 설명을 했다. 화자의 경험을 말한 것이다. ​ 아마 화자가 과거에 과부와 십자가가 매달려 있는 어느 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 , , , 가 모두 같은 상황이다. 화자는 과부의 집 십자가가 걸린 방에서, 과부와 관계했다.   오렌지 / 大砲 / 葡萄 오렌지처럼 표면이 오톨도톨한 고환, 대포처럼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 정액 속의 포도알과 같은 정자들.   萬若 자네가 重傷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리었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만약 자네가 중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상을 입은 기독의 모습을 보고 피를 흘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멋쩍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만족을 하기도 전에 사정을 하여 남근이 힘없이 늘어져, 마치 중상을 입은 기독처럼 되었다 할지라도, 이를 사정을 하였다고 한다면 참 멋쩍은 일이다. 화자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성급하게 사정을 했고, 그래서 참 멋쩍었다.   오―― / 沈默을 打撲하여 주면 좋겠다 / 沈默을 如何이 打撲하여 나는 洪水와 같이 騷亂할 것인가 / 沈默은 沈默이냐 ​ 오―― 그래서~~ 화자는~~ 침묵을 타박하여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지 않도록 두드려 주면 좋겠다. 여기서 침묵은 바로 상대 여자가 흥분하지 않아 교성을 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신의 남근을 가지고 여성의 음부를 힘차게 타박한다. 힘차게 두드린다. 침묵을 어떻게든지 두드려서 홍수와 같이 소란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정하여 홍수처럼 넘쳐나는 정액과 함께 여자를 소란하게 만들 것인가를 생각한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냐? 아니다. 침묵은 그냥 침묵이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음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嬌聲)이 나지 않는 것이다.   매쓰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醫師일 수 없는 것일까 / 天體를 잡아 찢는다면 소리쯤은 나겠지 매스를 갖지 아니하였다 하여 의사일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사가 아니어도, 매스가 없어도 천체(天體)를 잡아서 찢는다면 소리쯤은 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사가 아니겠는가.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다. ​ 남녀가 성교를 할 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여성을 치료하는 의사는, 여성의 천체 즉 머리 부분, 그 중에서도 입을 잡아 찢어야 교성이 난다. 여성의 음부에 남근이 들어가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곧 여성의 입이 열리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곧 천체를 잡아 찢는 행위다. 그러면 자연히 천체 즉 머리 부분에 있는 입이 열리고, 교성을 낼 것이다. 그러면 화자는 비록 메스가 없어도 침묵을 치료하는 의사인 셈이다.   나의 步調는 繼續된다 / 언제까지도 나는 屍體이고자 하면서 屍體이지 아니할 것인가 ​ 나의 걸음걸이의 속도는 일정하게 계속된다. 나의 성교의 보조는 언제까지 일정하게 계속된다. 성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도 나는 시체이고자 하면서 즉 남성이 사정을 마치고 축 늘어진 시체를 갈망하면서도, 시체이지 아니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남근이 발기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성행위가 오래 지속되어야, 상대가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에서 교성이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사정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 ▣   空腹 ―― 바른손에菓子封紙가없다고해서 왼손에쥐어져있는菓子封紙를찾으려只今막온길을五里나되돌아갔다         × 이손은化石하였다   이손은이제는이미아무것도所有하고싶지도않다所有된물건의所有됨을느끼기조차하지아니한다 只今떨어지고있는것이눈(雪)이라고한다면只今떨어진내눈물은눈(雪)이어야할것이다 나의內面과外面과   이件의系統인모든中間들은지독히춥다   左右 이兩側의손들이相對方의義理를저바리고두번다시握手하는일은없이 困難한勞働만이가로놓여있는이整頓하여가지아니하면아니될길에있어서獨立을固執하는것이기는하나   추우리로다 추우리로다          × 누구는나를가리켜孤獨하다고하느냐 이群雄割居를보라 이戰爭을보라          ×   나는그들의軋轢의發熱의한복판에서昏睡한다 심심한歲月이흐르고나는눈을떠본즉 屍體도蒸發한다음의고요한月夜를나는想像한다   天眞한村落의畜犬들아 짖지말게나 내體溫은適當스럽거니와 내希望은甘美로웁다 ― 1931. 7 ―     空腹 ―― ‘공복(空腹)’을 보통 빈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腹’은 ‘가운데’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비어있는 가운데’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腹’은 ‘앞, 전면(前面)’을 의미하기도 한다. ‘등(背)’이 ‘뒤, 후면(後面)’을 의미한다면, ‘배(腹)’는 ‘앞, 전면(全面)’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복(空腹)은 ‘텅 빈 앞, 즉 텅 비어 있는 미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상의 시 중에 제목 옆에 ‘――’처럼 표시되어 있는 시들이 몇 편 있다. 이를테면 , , , 등의 시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에 시인은 ‘――’ 혹은 ‘……’을 심심해서 붙여놓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목 ‘空腹’은 단순히 ‘비어 있는 배’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1930년대 초반, 이른바 조선 땅에는 실용적인 서양의 학문을 하여야 한다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양적 학문이 바른 학문이라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논쟁을 하던 시기였던가 보다. 물론 필자가 조사해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공복(空腹)’을 읽고, 그렇게 생각해 본 것이다.  이상 시인이 생각하기에는 서양적 학문은 실용적이기는 해도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적 학문만이 전부 바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이상의 시에서 많은 부분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비판한 시들이 있지만, 이 시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바른손에 菓子封紙가 없다고 해서 / 왼손에 쥐어져 있는 菓子封紙를 찾으려 只今 막 온 길을 五里나 되돌아갔다 단순히 문장을 읽기도 어렵다. 화자는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른손에는 과자봉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봉지를 찾으려 막 온 길을 오 리나 되돌아갔다. 결국 지금 화자의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따라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과자봉지가 쥐어져 있다. 좌우 양손에 모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과자봉지다. 화자가 바른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동양의 학문이다. 동양의 학문에는 과자봉지에 담긴 과자처럼 당장 먹기에 달콤한 것이 없다.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 있는 과자봉지는 서양의 학문이다. 지금 화자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과자봉지 속에는 당장 먹기에 달콤한 과자 즉 서양의 실용적 학문들이 담겨 있다. 서양의 학문은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 용이한 학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지금 바른손에는 동양적 학문, 왼손에는 서양적 학문을 모두 쥐고 있다. 사실 이상은 처음에는 동양적 학문인 한학을 했고, 다음에 서양 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부모님 혹은 주변의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서 서양의 학문도 공부한 사람인 것 같다. 결국 이상은 동서양의 학문을 모두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이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비판하는 많은 시를 쓴 것을 보면, 서양 학문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옳은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동양의 학문이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더욱 소중한 학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적절히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손은 化石하였다 화자의 두 손은 굳어서 돌이 되었다. 바른손에는 동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고, 왼손에는 서양의 학문이 쥐어져 있는데도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차차 나온다. 미리 설명하면, 세상에는 서양적 학문이 실용적이어서 바르다(옳다, 좋다)는 사람과 동양적 학문이 바르다는 사람 이렇게 둘로 갈라져서, 서로 열을 내면서 싸우고 있다. 이상과 같이 동양적 학문도 하고, 서양적 학문도 함으로써, 두 학문의 장점과 문제점을 고루 알아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던가 보다. 세상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화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손은 이제는 이미 아무것도 所有하고 싶지도 않다 所有된 물건의 所有됨을 느끼기조차 하지 아니 한다 그래서 이 화자의 손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다. 소유된 물건의 소유됨을 느끼지도 못한다. 동양적 학문이 옳다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화자는 무엇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적 학문이건 서양적 학문이건 아무것도 소유하고 싶지도 않고,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이 모두 소유되었음에도,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느끼기조차 아니하고 있다. 여기서 ‘아니 한다’는 것은 화자의 의지의 부정이다. 능력의 부정이 아니라, 의지의 부정이다.   只今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只今 떨어진 내 눈물은 눈(雪)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눈(雪)이라고 한다면, 지금 화자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淚)은 눈(雪)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雪)이나 화자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淚)나 결국 같은 것이다. 모두 H2O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서양식 사고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가 떨어뜨린 눈물은 그 성분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을 수 있으나, 정신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흘린 눈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고는 다양한 현상을 종합하여 개념화 추상화 일반화는 데는 뛰어나지만, 인간이 가진 다양한 정신과 문화와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학문이다. 따라서 동양적 학문과 서양적 학문의 적절한 조화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나의 內面과 外面과 이 件의 系統인 모든 中間들은 지독히 춥다 화자는 내면적으로는 동양적 학문을 중시한다. 외면적으로는 서양적 학문을 했다. 서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과 동양적인 학문만이 옳다는 사람만 있는 세상에서, 두 가지의 적절한 보완과 종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외롭다. 左右 / 이 兩側의 손들이 相對方의 義理를 저바리고 두 번 다시 握手하는 일은 없이 /  困難한 勞働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整頓하여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길에 있어서 獨立을 固執하는 것이기는 하나 좌우, 즉 서양적 학문과 동양적 학문, 이 양측의 주장들이 상대방의 의리 즉 상대방의 학문이 서로에게 기여하는 바른 이치를 저버리고, 두 번 다시 서로 악수 즉 화해하는 일이 없이, 곤란한 근심스러운 일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정돈하여 가야할 길에, 화자는 또 화자대로 자신의 독립을 고집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보면, 화자는, 동양적 학문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서양적 학문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세상에서 홀로 두 학문이 상호 보완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우리로다 / 추우리로다 화자는 생각한다. 동양적 학문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서양적 학문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는 지금의 현실로 볼 때, 우리의 미래는 추울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제목 ‘空腹(공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의 미래는 텅 비어 있다. 배가 고플 것이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孤獨하다고 하느냐 /  이 群雄割居를 보라 /  이 戰爭을 보라 누구는 화자를 가리켜 고독하다고 하느냐?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에, 고독할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였나 보다. 그러나 화자는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과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는 사람들이 제각각 군웅할거 식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것을 구경하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화자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    나는 그들의 軋轢의 發熱의 한복판에서 昏睡한다 / 심심한 歲月이 흐르고 나는 눈을 떠 본 즉 / 屍體도 蒸發한 다음의 고요한 月夜를 나는 想像한다 화자는 그들의 ‘알력의 발열’ 즉 서로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열나게 싸우는 한복판에서 혼수한다. 여기서 혼수한다는 것은 정신없이 잠을 잔다는 말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상태다.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죽고, 시체도 썩어서 증발한 다음의 고요한 달밤을 상상한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동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서양적 학문을 하는 것이 바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모두 고요한 달밤처럼 조용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고, 서양적 학문만이 바른 것도 아니라는, 화자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그러한 미래를 상상한다.   天眞한 村落의 畜犬들아 짖지 말게나 /  내 體溫은 適當스럽거니와 /  내 希望은 甘美로웁다 천진하고 순진하리만큼 어리석은, 시골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개와 같이 미련한 놈들아, 짖지 말게나. 떠들지 말게나. 엉터리 주장 하지 말게나.  내 체온은 적당스럽다. 서양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동양에 치우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내 희망은 감미롭다. 미래에 분명히 내 말이 맞을 것이라는 달콤한 희망을 갖고 있다. ​ ​ ​ ▣  2. 烏瞰圖 (一) 二人…… 1 …… ​ 基督은襤褸한行色하고說敎를시작했다. 아아ㄹ· 카아보네는橄欖山을山채로拉撮했다        x 一九三○年以後의일――. 네온사인으로裝飾된어느敎會의門깐에서는뚱보카아보네가볼의傷痕을伸縮시켜가면서入場券을팔고있었다. ― 1931. 8 ―     二人…… 1 …… 제목 에서 은 ‘二人’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냥 ‘二人’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인데, ‘二人’이라고 써 놓고 그 옆에 ‘……’ 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시에는 이런 식의 표시가 되어 있는 시들이 있다. 이를테면 , 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그냥 단순히 ‘수염’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단순히 ‘공복 즉 비어 있는 배’라고 해석할 수 없다. 이상 시인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표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이중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기독(基督)’과 ‘아아ㄹ 카보네’는 동일 인물이다. 基督은 襤褸한 行色하고 說敎를 시작했다. / 아아ㄹ· 카아보네는 橄欖山을 山채로 拉撮했다. 기독(基督)과 같은 사람은 마치 기독처럼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여기서 ‘기독’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기독인 듯이 생각하는, 어느 교회의 목사’다. 남루한 행색을 하고 설교를 했다는 것은, 이를테면 사욕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면서 설교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돈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남루한 행색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그러한 목사를 기독이라고 칭송한다. 그런데 그 목사는 사실은 ‘아아ㄹ 카보네’다. 그리고 그 아아ㄹ 카보네는 감람산을 山(산)채로 납촬해 왔다. 알(Al)은 흔히 서양에서 남자의 이름에 붙는다. 그리고 ‘카보네(carvone)’는 ‘카본’(carvon)의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우리말로는 탄소라고 한다. 연탄이나 흑연을 구성하는 물질이다. 연탄이나 흑연은 검을 색을 띠고 있다. 따라서 ‘아아ㄹ 카보네’는 마음이 시커먼 교회의 목사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어느 교회의 목사가 처음에는 기독과 같은 남루한 행색으로 설교했으나, 사실은 마음이 시커먼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목사가 이제는 감란산을 통째로 교로 가져왔다. 기독의 감람산 연설을 듣기 위해서 많이 모여 있던 군중들을 교회로 데려 온 것이다. 기독과 같은 훌륭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一九三○年 以後의 일――. / 네온사인으로 裝飾된 어느 敎會의 門깐에서는 뚱보 카아보네가 볼의 傷痕을 伸縮시켜가면서 入場券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교회의 목사는 남루한 행색을 하던 기독이 아니었다. 달라졌다.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어느 교회의 문간에서는 잘 먹어서 뚱보인, 마음이 시커먼 목사가 열변을 토한다. 기독의 볼에는 피를 흘리는 상처가 있는데, 이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볼에는, 잘 먹어 살이 쪄서 생긴 주름살이 있다. 그 주름살을 씰룩거리면서 열변을 토하면서, 천국 입장권을 팔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야 천국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해야 천국에 간다고, 기독 팔아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난 목사는 사기꾼이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기독인 것처럼 행동을 하고,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이제는 기독을 팔아서 사욕을 채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목 ‘二人 ……’은 이중성을 가진 어느 목사다. ​ ​ ​   ▣   二人…… 2 …… ​ 아아ㄹ · 카아보네의貨幣는참으로光이나고메달로하여도좋을만하나基督의貨幣는보기숭할지경으로貧弱하고해서아무튼돈이라는資格에서는一步도벗어나지못하고 있다.    카아보네가프렛상이래서보내어준프록코오트를基督은最後까지拒絶하고말았다는것은有名한이야기거니와宜當한일이아니겠는가. ― 1931. 8 ―      아아ㄹ · 카아보네의 貨幣는 참으로 光이 나고 메달로 하여도 좋을만 하나 基督의 貨幣는 보기 숭할 지경으로 貧弱하고 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資格에서는 一步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 헌금이라는 것을 한다. 십일조를 바치기도 한다. 교회에 들어온 돈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살림을 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독의 뜻대로,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이 검은 아아ㄹ 카아보네 목사에게 들어오는 돈은 빛이 난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그 이름은 영광된 것이다.  그래서 아아ㄹ 카보네의 교회에 들어온 헌금은 메달(medal)로 하여도 좋다. 메달은 목에 건다. 메달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영광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면 그 사람의 이름과 그가 낸 돈의 액수를 기입하여 메달처럼 게시한다. 그래프로 그려서 헌금의 실적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를 보고 더욱 더 많은 헌금을 한다.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은 자랑스럽다. 더 많이 하고 싶다. 헌금을 적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보기가 민망하여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시커먼 목사의 돈벌이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온 헌금 중에서,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기독의 뜻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기독의 화폐’는 보기 흉할 정도로 빈약해서 아무튼 돈이라는 자격에서는 일보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아보네가 프렛상이래서 보내어 준 프록코오트를 基督은 最後까지 拒絶하고 말았다는 것은 有名한 이야기거니와 宜當한 일이 아니겠는가. 카아보네가, 기독이 프렛상(flatちん)이라고 해서 즉 십자가의 기독이 마치 가난해서 잘 먹지 못하여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빈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듯이, 그리스도에게 프록코오트를 보내 주자, 기독은 최후까지 거절하고 말았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아아ㄹ 카보네의 자선을 거절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옷을 벗은 채, 겨우 아랫도리만 가리고 있다. 기독은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거절하여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 고개를 모로 돌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러한 기독의 모습을, 화자는 마치 아아ㄹ 카보네 목사가 보내준 프록코트를 기독이 거절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기독이 사기꾼 아아ㄹ 카보네 목사를 외면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당한 일이다.   ​ ​ ▣   神經質的으로肥滿한三角形    ――△은나의AMOUREUSE이다 ​ ▽이여  씨름에서이겨본經驗은몇번이나되느냐. ▽이여  보아하니외투속에파묻힌등덜미밖엔없고나. ▽이여  나는그呼吸에부서진樂器로다.     나에게如何한孤獨은찾아올지라도나는xx하지아니할것이다.     오직그러함으로써만나의生涯는原色과같이하여豊富하도다.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그런데나는캐라반이라고. ― 1931. 8 ―      神經質的으로 肥滿한 三角形 / ――△은 나의 AMOUREU -SE이다 제목은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다. 부제는 ‘――△은 나의 AMOUREUSE이다’이다. 부제를 보면, ‘――’이 있다. 혹시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 있다. ‘――’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뭔가 약간 수상하다. △은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과 같은 그 어떤 것을 지칭한다. 그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기호화하여 말하는 방식은 서양 학문 즉 현대 수학이나 과학에서 일반화된 표현 방식이다.  이를테면 반지름과 원주의 길이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서양의 학문에서는, 반지름을 r이라고 하고,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하고,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면, π=ℓ/2r= 3.14 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반지름을 r 이라고 한다, 원주의 길이를 ℓ이라고 한다, 원주율을 π라고 한다’는 것은, 바로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는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제목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에서 ‘삼각형’은 화자가 연인처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기호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형이 비만하다. 따라서 삼각형(△)으로 기호화된, 그 무엇을 화자는 연인처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신경질적으로’라는 제목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삼각형(△)은 ‘신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비만하여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어떤 대상임을 추리할 수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經驗은 몇 번이나 되느냐. △을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 놓고, 이 시에는 △은 나오지 않고, ▽만 나온다. 그렇다면 ▽은 무엇일까? △과 ▽을 나란히 놓고 곰곰 생각해 보면, ▽은 화자가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이라는 제목과 관련시켜 보면,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화자가 신경질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그 어떤 대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화자는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여, 씨름에서 이겨본 경험은 몇 번이나 되는냐”하고. 아마 ▽은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그래서 화자는 ▽을 아주 싫어할 것이다. 그러면 씨름에서 별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는 것과 관련시켜 ▽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 보자.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잡고, 힘을 쓰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호흡이 가빠오면서, 이기려고 하는 경기다. 그러나 화자는 그러한 씨름과 같은 어떤 행위에서 이겨본 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2행과 제3행의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 ▽이여,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와 관련하여 곰곰이 상상해 보면, ▽은 신경질적으로 지나치게 잘 발기되지 않는, 힘이 빠진 화자의 남근임을 추리할 수 있다. 화자는 힘이 빠져서 늘어진 남근으로 여자와의 씨름 즉 성교에서 이겨본 적이 없는가 보다. 여자를 제대로 만족시켜 준 적이 별로 없었는가 보다. 그렇다면 △은 잘 발기된 화자의 남근을 의미한다 할 것이며, 그러한 남근을 화자는 아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처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자는 잘 발기된 남근으로 여성과 성교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이여  보아하니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엔 없고나. ▽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남근을 사람의 형상에 비유한다면, 귀두 부분을 머리, 그 아래 잘록한 부분을 목, 그리고 그 아래 부분을 등 아래쪽의 몸의 형상과 유사하다. 따라서 ‘외투 속에 파묻힌, 등덜미 밖에 없는 ▽은 힘이 빠진 남근의 모습이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목덜미에 해당하는 부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힘이 빠진 남근은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귀두를 감싸서 잘 보이지 않다. 외투가 감싸고 있는 등덜미만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여  나는 그 呼吸에 부서진 樂器로다. / 나에게 如何한 孤獨은 찾아올지라도 나는 xx하지 아니할 것이다. / 오직 그러함으로써만 나의 生涯는 原色과 같이하여 豊富하도다. 화자가 힘이 빠져 늘어져 있는 자신의 남근을 보면서 “나는 그 호흡에 부서진 악기로다”하고 독백하듯이, 탄식하듯이 말하고 있다. 호흡은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화자의 가쁜 호흡이다. 성적으로 흥분했을 경우의 가쁜 호흡 때문에 화자는 자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 행에 있다. 부서진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악기는 소리를 내는 도구다. 부서지지 않은 악기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듯이, 잘 발기된 남근은 여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자위로 인해서 힘이 빠진 남근은 부서진 악기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여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교성을 내도록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약간 행을 들여쓴 것은 화자가 속으로 생각함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화자에게 여하한 고독은 찾아올지라도 xx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기서 고독은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홀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도 xx하지 않겠다 즉 자위를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평소에 흥분이 되어 이를 해결할 수 없어서 오는 고독이 찾아올지라도, 자위를 하지 않고 힘을 비축해 두어야, 다음에 여자와 성교를 할 때, 여자라는 악기를 교성이 나도록 잘 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오직 홀로 있을 때 자위를 하지 않음으로서 나의 생애는 원색과 같이 즉 남근이 본래의 붉은 색으로 잘 발기되어 화자의 삶이 풍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은 아주 잘 발기된 남근의 기호화다. 신경질적으로 ▽은 신경질 적으로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의 기호화다.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그런데 나는 캐라반이라고” 화자가 독백하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이 두 번 반복되었다. 이것을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내가 캐러반이라고 하느냐’라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말함으로써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캐러반은 대상(隊商)이다. 무거운 짐을 낙타나 말에 싣고 여기저기 장사를 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캐러반인가? 맞다. 화자는 △만 있다면, △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혼자 자위도 하고 여자와 성교하기도 좋아하는 캐러반이다. 또 이 여자와 저 여자와 성교하기를 좋아하는 캐러반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화자는 캐러반이 아니다. 화자는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이 있을 뿐이다. ▽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제대로 자위는 할 것이며, 여자와 제대로 성교는 할 수 있겠는가. 또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어떻게 이 여자 저 여자와 성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화자는 결코 캐러반이 아니다.   ​ ​ ▣   運動 ​ 一層우에있는二層우에있는三層우에있는屋上庭園에올라서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北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屋上庭園밑에있는三層밑에있는二層밑에있는一層으로내려간즉東쪽에서솟아오른太陽이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東쪽에서솟아올라西쪽에떨어지고東쪽에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時計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時間은맞는것이지만時計는나보담도젊지않느냐하는것보담은나는時計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은필시그럴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時計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 1931. 8 ―      運動 '운동(運動)'이 제목이다. 무슨 뜻일까? 보통은 사람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을 운동이라 한다. 그런데 '물체의 운동'이라고 말할 때의 '운동'도 있다. 이때의 운동은 이동(移動)과 같은 의미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운동 혹은 이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난해하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겠다. 一層 우에 있는 二層 우에 있는 三層 우에 있는 屋上 庭園에 올라서 일층 위에 이층, 이층 위에 삼층, 삼층 위에 옥상, 그리고 그 옥상에는 정원(庭園)이 있다. 우리는 보통 아내를 ‘집’이라고 한다. 내 아내는 우리 집사람이다. 따라서 집에서 운동하는 것 혹은 이동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의 순서 혹은 단계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부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때는, 먼저 입을 맞추면서 서로의 사람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입을 맞추면서 서로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일층이다. 첫 번째 단계다. 그 다음 남자는 아내의 유방을 애무한다. 그러면서 서로 서서히 흥분이 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감정을 고조시켜 나간다. 따라서 입이 일층이라면, 유방은 이층이다. 두 번째 단계다. 다음으로 아내의 음부를 애무한다. 육체적 사랑을 위한 준비는 최고조에 이른다. 삼층이다. 세 번째 단계다. 이처럼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는 성교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자의 음부를 향한다. 음부가 옥상이다. 옥상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꽃과 풀과 나무가 있다. 초목이 자라는 정원은 음모가 나 있는 음부와 유사하다. 옥상 정원에 올랐다는 것은 아내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北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해서 屋上庭園 밑에 있는 三層 밑에 있는 二層 밑에 있는 一層으로 내려간 즉 東쪽에서 솟아오른 太陽이 西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서 쪽에 떨어지고 東쪽에서 솟아올라 西쪽에 떨어지고 그런데 한참 열심히 하다가 남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북쪽을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남쪽은 따뜻한 곳이다. 뜨거운 곳이다. 아내와 화자 모두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북쪽은 차가운 곳이다. 추운 곳이다. 그런데 북쪽에도 아무것도 없다. 아내와 화자 모두 차갑게 식은 것도 아니다. 아마 한참 서로 육체적 사랑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서 미지근한 상태다. 아내도 제대로 달아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음부 애무 아래 단계인, 유방 아래 단계인, 입으로 갔다. 화자는 입맞춤에서부터 유방 애무, 그리고 음부 애무, 그리고 삽입의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입에서부터 솟아올라 유방을 거쳐 음부에 이르렀을 때 뜨겁던 태양이, 한참 하다 보면 서쪽으로 떨어진다. 열기가 식어버린다.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이동하면서 열기를 고조시키고, 하다 보면 또 떨어지고, 그래서 다시 입에서 유방을 거쳐 음부로 그리고 옥상에 올라보면 또 식어버리고~~. 열심히 운동한다. 이동한다. 東쪽에 솟아올라 하늘 한복판에 와 있기 때문에 時計를 꺼내 본 즉 서기는 했으나 時間은 맞는 것이지만 時計는 나 보담도 젊지 않느냐 하는 것보담은 나는 時計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 고로 나는 時計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동쪽에서 뜬 태양이 한복판에 와 있어서, 즉 사랑의 열기가 다시 가장 뜨겁게 고조된 상태가 되었기에, 시계를 꺼내서 보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동하면서 운동했는가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시계를 꺼내 본 것이다. 그랬더니 시계는 서기는 하였으나 맞는다. 그런데 시계는 나보담 젊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는, 나는 시계보다는 늙지 아니하였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믿어지는 것은 필시 그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서 시계는 화자보다 젊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시계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오래도록 멈춰 있다. 그러나 화자의 남근은 커졌다가는 이내 줄어들었다.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했다. 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멈춰선 시계는, 발기된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지 못한 화자보다 젊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는 발기된 남근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하였다고 말해도 그것이 믿어진다. 멈춰선 시계는 운동하지 않았으나, 화자는 여러 번 운동을 하였다. 입에서 유방으로 다시 음부로 그리고 삽입하여 노력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열심히 운동을 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고 잘 못하는 사람이 늙은이라면, 화자는 멈춰선 시계보다 운동을 많이 했으니까, 화자가 시계보다 늙지 아니 하였다고 하는 것도 또한 믿어진다. 그래서 화자는 시계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았다. 시계보다 늙지 않은 화자, 다시 입에서 유방으로 유방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삽입으로, 일층에서 삼층 위 옥상까지 열심히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다.   ​ ​ ▣   興行物天使   ――어떤後日譚으로―― 整形外科는여자의눈을찢어버리고形便없이늙어빠진曲藝象의눈으로만들고만것이다. 여자는실컷웃어도또한웃지아니하여도웃는것이다. 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 北極은초겨울이다. 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여자의눈은바닷개(海狗)잔등과같이얼음판위에미끄러져떨어지고만것이다. 世界의寒流를낳는바람이여자의눈을불었다. 여자의눈은거칠어졌지만여자의눈은무서운氷山에쌓여있어서波濤를일으키는것은不可能하다. 여자는大膽하게NU가되었다. 汗孔은汗孔만큼荊刺되었다. 여자는노래부른다는것이찢어지는소리로울었다. 北極은鐘소리에戰慄하였던것이다.        ◇ 거리의音樂師는따스한봄을마구뿌린乞人과같은天使. 天使는참새와같이瘦瘠한天使를데리고다닌다. 天使의배암과같은회초리로天使를때린다. 天使는웃은다. 天使는고무風船과같이부풀어진다. 天使의興行은사람들의눈을끈다. 사람들은天使의貞操의모습을지닌다고하는原色寫眞版그림엽서를산다. 天使는신발을떨어뜨리고逃亡한다. 天使는한꺼번에열個以上의덫을내어던진다.        ◇ 日曆은쵸콜레이트를늘인(增)다. 여자는쵸콜레이트로化粧하는것이다. 여자는트렁크속에흙탕투성이가된즈로오스와함께엎드러져운다. 여자는트렁크를運搬한다. 여자의트렁크는蓄音機다. 蓄音機는喇叭과같이紅도깨비靑도깨비를불러들였다. 紅도깨비靑도깨비는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입지않은펜긴은水腫이다. 여자는코끼리의눈과頭蓋骨크기만한水晶눈을縱橫으로굴리어秋波를濫發하였다. 여자는滿月을잘게잘게썰어서饗宴을베푼다. 사람들은그것을먹고돼지같이肥滿하는쵸콜레이트냄새를放散하는것이다. - 1931. 8 -   興行物 天使 / ――어떤 後日譚으로―― ‘흥행물 천사’는 축음기 레코드 판 속에서 노래하는 여자 가수다. 레코드판은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다. 천사는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다. 축음기의 레코드판도 실제 가수의 목소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다. 부제 ‘――어떤後日譚으로――’는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썼다는 의미로도 보이고, 축음기로 레코드판의 노래를 듣고 난 뒤, 그 후에 벌어질 경과에 대하여 덧붙이는 이야기로 썼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整形外科는 여자의 눈을 찢어버리고 形便없이 늙어빠진 曲藝象의 눈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자는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정형외과는 여자 가수의 눈을 찢어버리고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하는 코끼리의 눈처럼 커다란 레코드판을 만들고 만 것이다. 레코드판은 커다란 코끼리의 검은 눈동자와 같다. 검은 눈동자에는 그 안에 검은 동공이 있는데, 이는 레코드판 전체가 커다란 코끼리의 눈과 같다면, 동공은 음악이 기록되지 않은 안쪽 부분이다. 코끼리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홈이 주름처럼 새겨져 있다. 그래서 형편없이 늙어빠진 곡예상의 눈이다. 그래서 코끼리의 눈은 실컷 웃어도 또한 웃지 아니하여도 웃는 것이다. 주름 모양의 홈이 있으니 웃거나 웃지 않거나 웃는 모습처럼 보인다.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 北極은 초겨울이다. 여자 가수의 눈인 레코드판은 레코드 바늘과 위쪽에서 만났다. 위쪽이 북쪽이다. 북극은 초겨울이다. 레코드판 위에 처음 레코드를 재생하기 위해서 레코드 바늘을 올려놓으면 마치 북극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잡음이 들린다. 그 잡음 소리가 마치 초겨울에 부는 바람 소리 같다. 여자의 눈에는 白夜가 나타났다. 여자의 눈은 바닷개(海狗) 잔등과 같이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만 것이다.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에는 백야가 나타났다. 북극의 얼음판 위에 백야가 나타나면 햇빛이 얼음판에 반사되어 빛난다. 마찬가지로 레코드판에는 홈에 햇빛이 반사되어 마치 지평선 위에서 해가 비친 것처럼 햇빛이 반사된다.  마치 바닷개의 잔등과 같은, 눈의 흰자위에서 얼음판 위에 미끄러져 떨어진 눈동자처럼, 레코드판의 표면이 빛에 반사되어 빛난다. 世界의 寒流를 낳는 바람이 여자의 눈을 불었다. 여자의 눈은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은 무서운 氷山에 쌓여 있어서 波濤를 일으키는 것은 不可能하다. 세계에 한류를 불러오는 북극의 바람과 같은 잡음이 레코드판에서 일었다. 그래서 여자 가수의 눈과 같은 레코드판은 주름이 있어 거칠어졌지만, 여자의 눈인 레코드판은 빙산과 같이 딱딱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는 大膽하게 NU가 되었다. 汗孔은 汗孔만큼 荊刺되었다. 여자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北極은 鐘소리에 戰慄하였던 것이다. 여자 가수는 대담하게 NU가 되었다. 여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수가 된 것이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여자 가수의 땀구멍은 땀구멍 수만큼 레코드 바늘로 찔렸다. 레코드 바늘이 찌르는 대로 레코드판 속의 가수는, 땀을 흘리는 듯이, 있는 힘을 다해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노래 부른다는 것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었다. 북극은 종소리에 전율하였던 것이다. 종소리의 파문처럼 나 있는 홈에, 레코드바늘이 얹히고, 홈의 요철을 따라 레코드 바늘이 지나가자, 마치 찢어지는 듯 절규하는 목소리로, 전율하는 듯 소리를 냈다. 거리의 音樂師는 따스한 봄을 마구뿌린 乞人과 같은 天使. 天使는 참새와 같이 瘦瘠한 天使를 데리고 다닌다. 거리의 음악사는 따스한 봄을 마구 뿌린 걸인과 같은 천사다. 따스한 봄은 쵸콜레이트가 잘 녹는 계절이고, 쵸콜레이트처럼 녹은 레코드판의 원료로 레코드판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코드판을 거리에 마구 뿌리고, 그 뿌린 레코드판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마치 걸인과 같이 돈을 요구하면서 음악을 전해주는 천사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축음기 속의 가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요구하면서, 돈을 요구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걸인과 같다. 축음기 속에서 노래 부르는 실제 가수는, 참새와 같이 수척한 천사, 참새와 같이 자그만 레코드판 속의 노래 부르는 가수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 가수를 흥행시켜서 돈을 벌고자 한다. 天使의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天使를 때린다. / 天使는 웃은다. 天使는 고무風船과 같이 부풀어진다. 천사의 똬리를 틀고 있는 배암과 같은 회초리로 천사를 때린다. 가수는 똬리와 같은 홈이 있는 레코드판을 찍어낸다. 천사는 돈이 많이 들어오니까 좋아한다. 천사는 부풀어진 고무풍선처럼 많은 돈을 번다. 天使의 興行은 사람들의 눈을 끈다. / 사람들은 天使의 貞操의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原色 寫眞版 그림엽서를 산다. 거리에 울려 퍼지는 천사의 노래는 사람들의 주위를 끈다. 사람들은 천사의 정조한 모습, 실제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닌다고 하는, 그 원색 사진판 그림엽서 즉 원래 가수의 목소리를 그대로 찍어 놓은 레코드판을 산다. 天使는 신발을 떨어뜨리고 逃亡한다. 여자 가수는 자신의 자취만을 레코드판 속에 남겨 놓은 채 사라진다. 레코드판 속에 실제 여자 가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자취만 남겨진다. 신발을 떨어뜨리고 간 것은 자취만 남기고 간 것이다. 天使는 한꺼번에 열 個 以上의 덫을 내어 던진다.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 하나에 열 개 이상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노래를 판 속에 실어 놓는다. 日曆은 쵸콜레이트를 늘인(增)다. / 여자는 쵸콜레이트로 化粧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레코드판을 많이 낸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판을 새롭게 고쳐서 단장하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속에 흙탕투성이가 된 즈로오스와 함께 엎드러져 운다. 여자는 트렁크를 運搬한다. 여자 가수는 여자가 들어가는 큰 가방과 같은 축음기 속에서, 흙탕투성이가 된 속바지와 함께 엎드려서 운다. 축음기 속에는 많은 가수들의 레코드판이 들어가 재생된다. 따라서 그 축음기 속은 많은 가수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므로 흙이 많다. 그리고 축음기 속의 여자 가수는 레코드 바늘이 땀구멍을 찌를 때마다 땀을 흘리면서 마치 아파서 우는 것처럼 열심히 부른다. 그러니 흙과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흙탕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여자들은 마치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속옷과 같은 팬티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축음기 위에 납작하게 놓여 재생된다. 엎드러져 우는 것이다. 여자는 트렁크 즉 축음기를 운반한다. 레코드판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축음기가 있어야 한다. 축음기를 운반해야 한다. 축음기를 사게 하는 것이다. 여자의 트렁크는 蓄音機다. / 蓄音機는 喇叭과 같이 紅도깨비 靑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여자를 담는 큰 가방은 축음기다. 축음기는 소리를 크게 들리게 하는 나팔과 함께 홍도깨비와 청도깨비를 불러 들였다. 도깨비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심술궂은 짓을 많이 한다. 이렇게 축음기와 레코드판이 보급되자,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모여들었다. 紅도깨비 靑도깨비는 펜긴이다. 사루마다밖에 입지 않은 펜긴은 水腫이다. / 여자는 코끼리의 눈과 頭蓋骨 크기만 한 水晶 눈을 縱橫으로 굴리어 秋波를 濫發하였다. 사람을 홀리는 가수는 펭귄과 같은, 하얀 와이셔츠에 턱시도를 입고 노래 부른다. 사루마다 즉 팬티밖에 입지 않고 노래 부르는 가수는 몸이 붓는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납작한 레코드판에 들어갈 수가 없고, 노래 대신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노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살 수 없으니까 몸으로 사람을 홀리는 가수다. 여자 가수는 코끼리의 눈과 두개골 크기만 한, 수정처럼 딱딱한 레코드판을 종횡으로 굴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서 가로로, 그리고 밖에서 안쪽으로 세로로 눈을 굴리면서 사람들에게 추파를 남발하였다. 레코드판 속의 노래는 주로 이성을 유혹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滿月을 잘게잘게 썰어서 饗宴을 베푼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돼지같이 肥滿하는 쵸콜레이트 냄새를 放散하는 것이다. 레코드판 속의 여자 가수는 보름달과 같은 레코드판을 홈을 따라서 잘게 썰어서 노래로 사람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잔치를 베푼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여자가 주는 노래를 먹고, 돼지 같이 돈을 버는 레코드판 냄새를 방산하는 노래를 부른다. 레코드판 속의 가수가 주는 노래에 가수는 돈을 벌고, 대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3. 三次角 設計圖 ​ ▣   線에關한覺書 1       1  2  3  4  5  6  7  8  9  0 1 ⦁ ⦁ ⦁ ⦁ ⦁ ⦁ ⦁ ⦁ ⦁ ⦁  2 ⦁ ⦁ ⦁ ⦁ ⦁ ⦁ ⦁ ⦁ ⦁ ⦁  3 ⦁ ⦁ ⦁ ⦁ ⦁ ⦁ ⦁ ⦁ ⦁ ⦁  4 ⦁ ⦁ ⦁ ⦁ ⦁ ⦁ ⦁ ⦁ ⦁ ⦁  5 ⦁ ⦁ ⦁ ⦁ ⦁ ⦁ ⦁ ⦁ ⦁ ⦁  6 ⦁ ⦁ ⦁ ⦁ ⦁ ⦁ ⦁ ⦁ ⦁ ⦁  7 ⦁ ⦁ ⦁ ⦁ ⦁ ⦁ ⦁ ⦁ ⦁ ⦁  8 ⦁ ⦁ ⦁ ⦁ ⦁ ⦁ ⦁ ⦁ ⦁ ⦁  9 ⦁ ⦁ ⦁ ⦁ ⦁ ⦁ ⦁ ⦁ ⦁ ⦁  0 ⦁ ⦁ ⦁ ⦁ ⦁ ⦁ ⦁ ⦁ ⦁ ⦁     (宇宙는冪에依하는冪에依한다)  (사람은數字를버려라)  (고요하게나를電子의陽子로하여라) 스펙톨   軸 X 軸 Y  軸 Z   速度 etc의 統制例컨대光線은每秒當三○○○○○킬로미터달아나는것이確實하다면사람의發明은每秒當六○○○○○킬로미터달아날수없다는法은勿論없다. 그것을幾千倍幾萬倍幾億倍幾兆倍하면사람은數十年數百年數千年數萬年數億年數兆年의太古의事實이보여질것이아닌가. 그것을또끊임없이崩壞하는것이라고하는가. 原子는原子이고原子이고原子이다. 生理作用은變移하는것인가. 原子는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다. 放射는崩壞인가. 사람은永劫인永劫을살수있는것은生命은生도아니고命도아니고光線인것이라는것이다.   臭覺의味覺과味覺의臭覺      (立體에의絶望에依한誕生)    (運動에의絶望에依한誕生)    (地球는빈집일境遇封建時代는눈물이나리만큼그리워진다) ― 1931. 10 ―     이 시는 무한히 팽창하며 펼쳐진 우주,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 광선과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원자 물리학 등을 공부한 이상이, 광선을 중심으로 현대 서양의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제목 에서 ‘선’은 광선이다.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첫 번째 시로 적었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한다. 이상한 그림 맨 처음에 나오는 숫자와 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그림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를 나타낸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숫자들이 씌어 있고, 계속해서 그 숫자들이 증가하면서 무한히 펼쳐지는 우주를 형상한다.  (宇宙는 冪에 依하는 冪에 依한다) 이상 시인은 이 이상한 그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친절하게도 아래에 괄호를 하고, 그 안에 몇 자 적어 놓았다. 서양의 과학에 의하면, 우주는 제곱에 의하는 제곱에 의한다고 했다. 제곱이 거듭 제곱되는 것에 의해서 무한히 펼쳐진다. 이러한 문제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數字를 버려라)  사람은 숫자를 버리라고 했다. 서양 과학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30만 킬로미터로 우주를 향해 달아나고, 그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우리는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인간은 몇 살까지 산다는 숫자를 버려도 된다. 서양 학문에서는 숫자를 버리라고 한다. 또 서양의 과학인 양자역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중심부에 양자가 있고, 양자의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얼마간, 이를테면 80세, 90세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양자와 전자로 구성되어 있다면, 사람은 죽어서도 그 물질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양자와 전자가 다른 형태로 우주의 어디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과연 옳은지를 지금 이상 시인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여라)  고요하게 나를 전자의 양자로 하라고 하였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양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인간도 결국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화자는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옳은지 생각에 잠겨 있다. 스펙톨 스펙톨. 분광(分光). 물체에서 반사된 광선이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달아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광선이 사람의 몸에 닿으면 그 광선은 반사되어 우주로 날아간다. 그 날아가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수없이 많은 광선으로 분광되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 나누어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는 것이 된다.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우주에서 수없이 많은 같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과연 서양의 과학의 이론대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지금 화자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軸 X 軸 Y  軸 Z X축과 Y축과 Z축으로 이루어진, 삼차원의 입체 공간을 표현한 것이다. 우주는 삼차원의 입체 공간이다.   速度 etc의 統制 例컨대 光線은 每秒當 三○○○○○킬로미터 달아나는 것이 確實하다면 사람의 發明은 每秒當 六○○○○○킬로미터 달아날 수 없다는 法은 勿論 없다 속도 기타의 통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속도와 기타 이를 통제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예컨대, 광선은 매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람의 발명 즉 사람이 발명한 타임머신과 같은 것은 매초당 육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법을 논하지 말라는 것은 없다.  화자는 광선이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면, 인간이 만든 물건 즉 타임머신 같은 것이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간다는 모형을 설정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은 초당 육십만 킬로미터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勿論(물론)’이라는 글자 위에 강조점이 있다. 이것은 ‘논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것을 幾千倍 幾萬倍 幾億倍 幾兆倍하면 사람은 數十年 數百年 數千年 數萬年 數億年 數兆年의 太古의 事實이 보여질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발명품의 속도를 몇 천 배, 몇 만 배, 몇 억 배, 몇 조 배 높여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따라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 수조 년의 아득한 옛날의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을 따라가면 아득한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것을 또 끊임없이 崩壞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原子는 原子이고 原子이고 原子이다.  태고로 가서, 또 거꾸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죽고, 죽고, 죽고 하는 것을, 끊임없는 원자가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그렇다면 원자는 다시 원자(붕괴의 근본이 되는 것)가 되고, 다시 원자가 원자가 되어야 한다. 즉 사람이 죽어서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 붕괴한 원자가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하여 원자가 되고, 다시 그것이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수없이 반복하여야 한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데 그것이 어찌 다시 붕괴의 근원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어찌 죽음을 끊임없이 붕괴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生理作用은 變移하는 것인가. 原子는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고 原子가 아니다. 그러면 생리작용은 변하여 이동하는 것인가? 태고로부터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할 때, 그 태어나고 죽는 사람마다 생리작용이 다른데, 그러면 그 생리작용은 변이하는 것인가? 변이한다면 원자 붕괴의 근본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원자 붕괴의 근원이 되는 사람은 원자가 아니고, 또 다시 붕괴의 근원이 되는 그 사람은 원자로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는 모든 종류의 물질에서 동일한 성질을 띠는 것이기 때문이다.   放射는 崩壞인가 인간의 몸에서 출발하여 우주로 날아가는 광선을 쫓아가면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도 있고, 다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광선이 사방을 반사되어 달아나는 것이 곧 물질이 붕괴하여 원자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인가. 광선이 우주를 향해 달아나는 것이 곧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永劫을 살 수 있는 것은 生命은 生도 아니고 命도 아니고 光線인 것이라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사는 것도 아니고, 목숨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광선이라고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빨리 우주로 나아가면 태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인간이 영겁을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광선에 있는 것인가.   臭覺의 味覺과 味覺의 臭覺 인간이 단순히 원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관점에서 존재를 설명한다면, 취각이 미각이 될 수도 있고, 미각이 취각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후각도 물질로 이루어졌고, 후각을 구성하는 물질이 흩어졌다가 다시 미각으로 결합하면 후각이 미각이 된다. 그게 과연 그러한가. 현대 물리학적 이론에 대해서 이상 시인은 상당한 회의를 품은 채 생각하고 있다.   (立體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運動에의 絶望에 依한 誕生)  동양에서는 인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산다. 훌륭한 시를 쓴 사람은 그가 죽어서도 시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업적을 남긴 사람은 그가 죽은 후에도 역사 속에서 그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을 원자의 구성체로 보는 서양 과학의 사고는, 서양 사람들이 인간을 죽어서도 살 수 있는 존재로 볼 수 없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절망에서 인간을 쪼개서 원자로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살아서의 삶이 죽어서의 삶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절망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죽어서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자, 서양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도 그 사람에게서 방사된 광선은 계속하여 우주로 날아가고, 그 광선을 따라가면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地球는 빈집일 境遇 封建時代는 눈물이 나리만큼 그리워진다)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지구는 빈집이다. 서양의 현대 물리학에 따라서 인간을 본다면, 지구에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원자의 집합체, 물질의 집합체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는 빈집이다. 그렇다면 봉건시대 즉 현대 물리학이 없던 시대인 봉건시대, 인간을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로 생각했던 봉건시대는 눈물이 날만큼 그리워진다. ​ ​   ▣   線에關한覺書 2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A + B + C = A A + B + C = B A + B + C = C   이선의교점 A 삼선의교점 B 수선의교점 C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太陽光線은, 凸렌즈때문에收斂光線이되어一點에있어서爀爀히빛나고爀爀히불탔다. 太初의僥倖은무엇보다도大氣의層과層이이루는層으로하여금凸렌즈되게하지아니하였던것에있다는것을생각하니樂이된다. 幾何學은凸렌즈와같은불장난은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死亡해버린오늘유크리트의焦點은到處에있어서人文의腦髓를마른풀과같이燒却하는收斂作用을羅列하는것에依하여最大의收斂作用을재촉하는危險을재촉한다. 사람은絶望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誕生하라. 사람은絶望하라.) ― 1931. 10 ―       이 시는 볼록렌즈와 볼록렌즈를 통과하여 한 점에 수렴하는 光線(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의 문명,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수학 등이, 인류의 다양한 사고를 말살시키고 결국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다. 이 시의 제목 는 선 즉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광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광선은 서양 과학 문명의 상징이다.   1 + 3 3 + 1 3 + 1   1 + 3 1 + 3   3 + 1 1 + 3   1 + 3 3 + 1   3 + 1 3 + 1 1 + 3 위 숫자들로 이루어진 이상한 것은 전체적으로 볼록렌즈 모습을 하고 있다. 예전에 세로쓰기 할 때의, 이상의 시집에 나타난 모습하고는 방향이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는 가로쓰기를 한다. 그래서 위 숫자들, 그리고 숫자들로 이루어지는 그림을 가로쓰기 방식으로 적었기 때문에 원래 이상의 시집에 나오는 모습하고는 다소 다르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돌리면 윗면이 평평하고 아래고 볼록한 볼록렌즈가 되는데 원래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있건 시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불편을 주지 않아서 이렇게 썼다. 괜찮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이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은 한 점으로 수렴된다.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3+1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1+3 지점을 통과한 광선이나 모두 한 점에 수렴된다. 볼록렌즈의 초점에 모두 수렴된다. 그러면 이상 시인은 광선이 통과하는 볼록렌즈의 각 지점을 왜 ‘1+3’의 형태로 표현하였을까? 다른 숫자도 많은데 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을까? 1+3은 4가 되고 4=死(사)이다.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것을 태워 죽인다. 모든 것을 말살한다. 그래서 1과 3의 숫자로 표기했다. 서양문명으로 상징되는 볼록렌즈를 통과해서 한 점에 수렴되는 광선은 모든 인문적 정신을 말살하는 서양 학문의 상징이다.   線上의一點 A / 線上의一點 B / 線上의一點 C // A + B + C = A / A + B + C = B / A + B + C = C  // 이선의교점 A / 삼선의교점 B / 수선의교점 C 임의의 광선 하나가 볼록렌즈를 통과한다. 그 임의의 한 선상의 어느 한 점을 A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한 점을 B라고 하자. 또 다른 광선의 선상의 임의의 점을 C라고 하자.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A점을 통과한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한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광선을 합해도 결국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같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A, B, C 세 점을 통과하는 각각의 광선을 합해도 결국 C점을 통과하는 광선 하나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A, B, C 세 점을 각각 통과하는 광선은 볼록렌즈를 통과하면서 결국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두 광선의 교점을 A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두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A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세 광선의 교점을 B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세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B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볼록렌즈를 통과하는 여러 광선의 교점을 C점이라고 해도 된다. 왜냐하면 여러 광선의 교점을 통과한 광선은 C점을 통과하는 광선과 함께 한 점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3 + 1 1 + 3 1 + 3   3 + 1 3 + 1   1 + 3 3 + 1   3 + 1 1 + 3   1 + 3 1 + 3 3 + 1 여기의 볼록렌즈는 처음의 볼록렌즈와 유사하다. 그러나 숫자가 조금 다르다. 숫자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3+1을 통과한 광선이나, 1+3을 통과한 광선이나 어떤 숫자를 통과한 광선도 결국 한 점에 수렴된다. 그것이 볼록렌즈를 만든 서양 문명인 것이고, 그것이 서양 학문의 근본적 사고다.    (太陽光線은, 凸렌즈 때문에 收斂光線이 되어 一點에 있어서 爀爀히 빛나고 爀爀히 불탔다. 太初의 僥倖은 무엇보다도 大氣의 層과 層이 이루는 層으로 하여금 凸렌즈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樂이 된다) 독자들을 위해서 친절하게도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을 했다. 볼록렌즈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 한 점으로 수렴되는 서양 문명이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삭막한 문명인지를 독자들이 잘 알아들으라고 괄호를 하고 자세히 설명했다. 태양광선은, 볼록렌즈 때문에 수렴광선이 되어, 한 점에서 혁혁히 빛난다. 아주 밝게 빛난다. 그리고 혁혁히 불탄다. 아주 거세게 불타버린다. 태초의 요행 즉 이 지구가 처음 생겨날 때의 요행은 무엇보다도 대기의 층과 층, 이를테면 대기권 성층권 등이 이루는 층으로 하여 볼록렌즈가 되게 하지 아니하였던 것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즐거움이 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광선을 대기의 각 층들이 한 점으로 수렴하도록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것이 볼록렌즈처럼 태양 광선을 한 점으로 모았다면 지구는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서 인류는 지구에서 살게 되었고, 다양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인문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정신적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幾何學은 凸렌즈와 같은 불장난은 아닐른지. 유우크리트는 死亡해 버린 오늘 유크리트의 焦點은 到處에 있어서 人文의 腦髓를 마른 풀과 같이 燒却하는 收斂作用을 羅列하는 것에 依하여 最大의 收斂作用을 재촉하는 危險을 재촉한다 기하학은 볼록렌즈와 같은 불장난을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양의 기하학은 모든 현상을 기하학적 사고로 해결한다. 인류의 모든 삶을 기하학에 수렴되고 그것으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 한다. 볼록렌즈를 통과한 광선이 한 점에 수렴되면 그 곳에서 혁혁히 불타듯이, 인류의 다양한 삶을 기하학에 수렴시켜 해석하려는 서양문명은 다양한 문명을 태워 없애지 않을지 염려한다. 유클리드는 사망해 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유클리드의 초점은 도처에 있다. 원과 초점 이야기가 나오는 기하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도처에 남아 있다.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은 유클리드 사망 후에도 남아서 도처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따라서 인문의 뇌수로 이룩한 인문학의 정수들을 마른 풀과 같이 태우는 수렴 작용을 나열하는 것에 의해, 즉 모든 인문학을 유클리드 기하학 하나로 수렴하여 해결하는 것들에 의해, 더욱 더 수렴 작용을 재촉하는 위험을 점점 더 재촉하고 있다.   사람은 絶望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誕生하라. 사람은 絶望하라 따라서 화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볼록렌즈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대변되는 서양 문명에 대한 희망을 버려라. 그리고 새롭게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탄생하라. 동양의 학문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하라. 동양 학문을 간절히 그리워하라. ​ ​ ​ ▣   線에關한覺書 3 3   2    1    •    •    •    1 •    •    •    2 •    •    •    3 ​ 1   2    3    •    •    •    3 •    •    •    2 •    •    •    1   ∴ nPn = n (n-1) (n-2) …… (n-n+1) (腦髓는부채와같이圓까지展開되었다. 그리고完全히回轉하였다) ― 1931. 10 ―     제목 는 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선은 광선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말하는 광선을 말하는 것으로 봐도 된다. 이 시는 서양의 현대 학문의 상징인 기하학, 기하학 중에서도 원을 통하여, 서양의 현대문명이 인간이 이룩한 다양한 가치, 문화, 종교, 인문 등을 어떻게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따라서 이 시는 문명비판적인 시, 혹은 서구문명의 한계를 지적한 시라 할 것이다. 3   2    1    •    •    •    1 •    •    •    2 •    •    •    3 이 숫자와 점들을 기하학적으로 바라보면 부채꼴이다. 원의 중심을 기준으로 가로와 세로로 잘랐을 경우, 이 그림은 원의 오른쪽 위 부분에 해당하는 부채꼴이다. 다만 부채꼴에는 위에서 아래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 순서로 1, 2, 3 이라는 숫자가 있다. 그러한 부채꼴이다. 1   2    3    •    •    •    3 •    •    •    2 •    •    •    1 이 그림도 앞의 그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앞의 부채꼴과는 다른 부채꼴이다. 이 부채꼴은 앞의 부채꼴에 비해서 숫자가 다르다. 가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고,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3, 2, 1 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따라서 두 부채꼴은 서로 다르다.  만약 이것을 단순히 부채꼴로 보지 않고 인류의 다양한 사고, 문화, 역사, 삶, 인문 등으로 해석한다면 두 개의 부채꼴은 서로 다른 사고요, 문화요, 역사요, 삶이요, 인문이다. ∴ nPn = n (n-1) (n-2) …… (n-n+1) 위 그림 외에 또 다른 부채꼴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위에 있는 두 개의 부채꼴 외에도 다양한 부채꼴이 이 세상에는 더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부채꼴이 존재한다. 만약 부채꼴을 우리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로 본다면, 이 세상에는 (∴) nPn = n (n-1) (n-2) …… (n-n+1)   개만큼의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수학에 약한 분을 위해서 복잡한 수식을 설명하겠다. (사실 필자도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한테 물었다. 아들이 설명해 주어서 이해했다.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다.) 부채꼴의 호에 있는 숫자들을 보자. 만약 숫자가 n개 있다고 하면 부채꼴의 종류는 nPn 만큼 있는 것이다.  nPn은 n 개의 숫자에서 n 개만큼 뽑아서 이를 나열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다. n! 만큼 다양한 부채꼴이 존재할 수 있다.  n! 은  n (n-1) (n-2) …… (n-n+1)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부채꼴이 존재하며, 거의 무한에 가까운 서로 다른 사고와 문화와 역사와 삶과 인문 등이 존재한다.   (腦髓는 부채와 같이 圓까지 展開되었다. 그리고 完全히 回轉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을 생각해 낸 그들의 뇌수 즉 사고는 부채와 같이 펼쳐져서, 원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회전하였다. 서로 다른 숫자가 적힌 다양한 부채꼴을 회전시켜 보라. 그러면 다양한 숫자가 적힌 부채꼴은 각각의 다른 부채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으로 존재한다. 동일한 모양의 원이 된다. 부채꼴 호에 아무리 다양한 숫자가 적혀도 이를 회전하면 부채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원만 남는다. 이처럼 다양한 것을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설명하려 드는 서양의 학문이나 과학은 인류의 다양한 가치, 사고, 역사, 문화, 인문 등을 모두 말살하고, 이를 하나의 원으로 단순화시킨다. 이것이 서양 학문의 특성이다. 이러한 서양 문명은 결국 인류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서양 과학의 핵심은 귀납추리에 의한 일반화, 추상화에 있다. 다양한 사례를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이 서양의 학문이요 문명이다. 이러한 사고는 일견 위대해 보이지만, 개별적인 것들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정신을 낳을 우려가 있다. 시인은 서양적 학문과 문명의 이러한 점을 우려하여 이와 같은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는 서구문명 혹은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라 할 것이다. ​ ​   ▣   線에關한覺書 4            (未定稿)     彈丸이一圓壔를疾走했다 (彈丸이一直線으로疾走했다에있어서의誤謬等의修正)   正六雪糖 (角雪糖을稱함)   瀑筒의海綿質塡充 (瀑布의文學的表現) ― 1931. 10 ―                                                          제목 는 광선에 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광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의 상징이다. 이 시는 서양의 학문과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가치들을 말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다. 제목 밑에 미정고(未定稿)라고 적혀 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원고라는 의미로 보인다. 아니면 원래는 미정고로서 확정되지 않은 원고인데,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미정고라는 말을 지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미정고라는 말은 중요하지 않다.   彈丸이 一圓壔를 疾走했다 (彈丸이 一直線으로 疾走했다에 있어서의 誤謬等의 修正) 만약 우리가 서서, 전방을 향하여 총을 한 방 쏘았다고 하자. 우리는 보통 그것을 탄환이 일직선으로 빠르게 달려갔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을 서양의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탄환이 일직선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고, 탄환이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빠르게 달려갔다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까 탄환도 자연히 둥근 지구의 언덕을 따라서 날아갔다는 것이다.   正六雪糖 (角雪糖을 稱함) 지금 화자는 앞에 각설탕, 정육면체의 각설탕을 놓고 생각에 잠긴다. 이 각설탕을 맑은 물이 든 유리컵에 넣었다고 상상해 보자. 컵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각설탕은 뽀글뽀글 하얀 공기를 뿜어내면서 가라앉게 되고, 마침내 녹아서 설탕물이 된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서양의 과학으로는, 각설탕의 입자 사이의 공극에 물이 침투하게 되고, 그 결과 공극에 있던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오고, 설탕이 녹은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이것이 설탕이 녹는 현상을 설명하는 서양 과학의 발상이다.   瀑筒의 海綿質 塡充 (瀑布의 文學的 表現) 그렇다면, 마치 각설탕이 물이 든 컵의 바닥으로 떨어질 때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면서 녹는 것처럼, 하얀 물거품을 내면서 떨어지는 저 폭포는, 해면질로 된 지구의 공극을 메우기 위해서 저렇게 하얀 물거품을 뿜으면서 떨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폭포를 보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서양의 과학적 설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장엄함과 그리고 거센 기세와 자신을 투신하는 헌신 등의 다양한 문학적 상상, 인문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문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각설탕이 컵에서 녹는 방식으로만 설명한다. 따라서 서양의 과학적 사고는 결국 우리의 다양한 인문적 사고를 말살시키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5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光線을보는가. 사람은光線을 본다. 年齡의眞空에있어서두번결혼한다. 세번結婚하는가. 사람은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라. 未來로달아나서過去를본다. 過去로달아나서未來를보는가. 未來로달아나는것은過去로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未來로달아나는것이過去로달아나는것이다. 擴大하는宇宙를憂慮하는자여, 過去에살으라. 光線보다도빠르게未來로달아나라. 사람은다시한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보다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세번나를맞이한다. 사람은젊은나에게적어도相逢한다. 사람은適宜하게기다리라. 그리고파우스트를즐기거라. 메퓌스트는나에게있는것도아니고나이다. 速度를調節하는사람은나를모은다. 無數한나는말(譚)하지아니한다. 無數한過擧를傾聽하는現在를過擧로하는것은不遠間이다. 자꾸反復되는過去. 無數한過去를傾聽하는無數한過去. 現在는오직過去만을印刷하고過去는現在와一致하는것은그것들의複數의境遇에있어서도區別될수없는것이다. 聯想은處女로하라. 過去를現在로알라. 사람은옛것을새것으로아는도다. 健忘이여. 永遠한忘却은忘却을求한다. 到來할나는그때문에無意識中에사람에一致하고사람보다도빠르게나는달아난다. 새로운未來는새로웁게있다. 사람은빠르게달아난다. 사람은光線을드디어先行하고未來에있어서過去를待期한다. 于先사람은하나의나를맞이하라. 사람은全等形에있어서나를죽이라. 사람은全等形의體操의技術을習得하라. 不然이라면사람은過去의나의破片을如何히할것인가. 思考의破片을反芻하라. 不然이라면새로운것은不完全이다.聯想을죽이라. 하나를아는者는셋을아는것을하나를아는것의다음으로하는것을그만두어라. 하나를아는것의다음은하나의것을아는것을하는것을있게하라.  사람은한꺼번에한번을달아나라. 最大限달아나라. 사람은두번分娩되기前에xx되기전에祖上의祖上의祖上의星雲의星雲의星雲의太初를未來에있어서보는두려움으로하여사람은빠르게달아나는것을留保한다. 사람은달아난다. 빠르게달아나서永遠에살고過去를愛撫하고過去로부터다시그過去에산다. 童心이여. 童心이여. 充足될수야없는永遠의童心이여. ― 1931. 10 ―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정하고 이 시를 읽어 보자. 나의 몸에서 반사되어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그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간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무수한 나를 만날 수 있다. 조금 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어제의 나도 만날 수 있고, 작년의 나도 만날 수 있고, 10년 전의 나도 만날 수 있다. 10년 전의 나로부터 반사된 광선은 지금도 우주의 어딘가를 초당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아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전제로 해서 이 시를 읽어 보자. 그러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처음 한 연만 읽어 보겠다.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면 사람은 光線을 보는가. 사람은 光線을 본다. 年齡의 眞空에 있어서 두 번 결혼한다. 세 번 結婚하는가. 사람은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라.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쫓아서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따라가면 사람은 그 광선을 보는가. 사람은 광선을 본다. 달아나는 광선보다 빨리 따라가면 볼 수 있다. 연령의 진공에 있어서 즉 나이를 먹지 않는, 따라가서 본 광선에서 우리는 두 번 결혼한다. 한 번은 현실에서 결혼하고, 한 번은 그 광선에서 결혼하는 것을 본다. 세 번 결혼하는가? 현실에서 한 번 결혼하고, 광선에서 한 번 결혼하던 것을 보고, 아니 그 이전의 광선을 본다면, 그 광선이 시간이 지나면서 또 결혼을 할 것이고, 그렇다면 세 번 결혼을 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서양 학문에 의하면 광선을 따라가면 과거의 자신과 만날 수 있고, 또 과거로 돌아가서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읽어 보라.) ​ ​ ​ ▣  線에關한覺書 6 數字의方位學      數字의力學   時間性(通俗思考에依한歷史性)   速度와座表와速度   +   +   +   +   etc   사람은靜力學의現像하지아니하는것과同一하는것의永遠한假說이다. 사람은사람의客觀을버리라.   主觀의體系의收斂과收斂에依한凹렌즈    第四歲    一千九百三十一年九月十二日生    陽子核으로서의陽子와陽子와의聯想과選擇   原子構造로서의一切의運算의硏究   方位와構造式과質量으로서의數字의性態性質에依한解答과解答의分類   數字를代數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的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서數字를數字인것으로하는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疾患의究明과詩的인情緖의棄却處)   (數字의 一體의性態  數字의一切의性質  이것들에依한數字의語尾의活用에依한數字의消滅)   數式은光線과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나는사람에依하여運算될것.   사람은별 ―― 天體 ―― 별때문에犧牲을아끼는것은無意味하다. 별과별과의引力圈과引力圈과의相殺에依한加速度函數의變化의調査를爲先作成할 것 ​ ― 1931. 10 ― ​ ​ 제목 는 광선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은 것이다. 여기서 광선은 서양의 과학 문명을 상징이다.   數字의 方位學 / 여기에 사용된 ‘’는 일단 방위를 나타내는 기호다. ‘’는 위쪽의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왼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는 오른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이며 ‘’은 아래쪽을 지시하는 방위 기호다.   數字의 力學  이제 ‘’는 숫자를 나타낸다. 따라서 ‘’는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도 4라는 숫자와 관련된다. 時間性(通俗思考에 依한 歷史性) 이제 ‘’은 시간성과도 관련이 있다. 시간의 흐름, 통속적으로 우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 기호다.  速度와 座表와 速度 / +/+/+/+/ etc 이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의 관계 속에서 아래 기호들을 생각해 보자. 화자는 서양의 과학 혹은 수학과 관련된 속도와 좌표와 그리고 속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즉 우리가 통속적으로 역사성이라고 말하는 그 시간성이 포함된다. ‘+’은 평면 좌표에서 오른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갔다(시간성)가, 다시 왼쪽(방위의 역학)으로 4(숫자의 역학)만큼 간(시간성) 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러한 경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결국 아무 방향으로도, 또 얼마만큼도 움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자리에 있었던 것과 같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돌아온 것은, 원래 제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래서 4+(-)=0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이러한 경우 분명히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있었고,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서양 학문에서는 좌표 평면에서, 4+(-4)=0이라고 하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4만큼 간 행위를 처음부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행위와 동일시한다. 이것이 서양 학문이 우리 인간의 삶에 적용되었을 때의 잘못된 점이다. 나머지 +,+,+도 마찬가지다.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갔다는 ‘+’, 위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아래로 4만큼 간 ‘+’, 아래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위로 4만큼 간 ‘+’은 모두 처음의 제자리에 돌아오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제자리에 돌아왔어도 각각 왼쪽으로 4만큼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4만큼 간 행위가 일어났고, 나머지도 각각 마찬가지다. 심지어 서양의 학문에서는 ‘+’과 ‘+’과 ‘+’과 ‘+’을 모두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원래의 위치에서 모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etc 즉 기타 다른 것도 방위의 역학, 숫자의 역학, 그리고 시간성 속에서 서양의 학문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타임머신을 타고 광선보다 빠른 속도로 가면 과거의 나의 모습은 볼 수 있고 젊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타임머신을 타고 나로부터 출발한 광선을 쫓아간다고 해서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靜力學의 現像하지 아니하는 것과 同一하는 것의 永遠한 假說이다. 사람은 사람의 客觀을 버리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4보를 걸어간 다음 뒤로 돌아서서 다시 4보를 걸었다고 하자. 이것을 서양의 학문 방식으로 수식화하면 4+(-4)=0이 된다. 그렇다면 서양식 학문에서는 제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처럼 서양 학문은, 제자리에 다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움직이지 않은 것과 동일시하는 영원한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사람에 대한 객관을 버려야 한다. 사람 즉 인간의 행위는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이다. 앞으로 4보 갔다가 뒤로 돌아서 4보를 간 행위를 객관화하여 서양학문에서는 4+(-4)=0 이니까 결국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과 동일하다고 객관화하여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객관화가 타당하지 않다. 사람에 있어서는 서양 학문식의 객관을 버려야 한다. 主觀의 體系의 收斂과 收斂에 依한 凹렌즈 /第四歲 /  一千九百 十一年 九月 十二日生 / 陽子核으로서의 陽子와 陽子와의 聯想과 選擇  주관의 체계의 수렴과 그리고 수렴에 의한 오목렌즈. 주관의 체계는 같은 것을 놓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각자의 주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사고는 하나의 현상을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보고, 또 각각이 본 것을 수용한다는 의미에서 오목렌즈와 같다. 오목렌즈는 다양한 광선을 받아들여 수렴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광선을 받아들이되 이를 수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광선에 따라 발산시킨다. 예를 들어 4라는 수자를 생각해 보자. 개인의 주관적 사고로 4를 바라보면 그것은 나이가 4살 이라는 의미로도 파악된다. 또 4는 일천구백삼십일 년 구월 십이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날짜에 탄생한 넷째 동생을 떠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4는 양자 핵으로서의 양자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양자의 관계로도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4라는 것은 개인의 주관에 의해서 선택되어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있다.   原子構造로서의 一切의 運算의 硏究 / 方位와 構造式과 質量으로서의 數字의 性態 性質에 依한 解答과 解答의 分類 서양 학문에서는, 일체를 원자 구조로서의 운산으로 연구한다. 모든 것을 원자의 집합체로 보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 방위와 그것을 구조식으로 나타내는 것을 연구한다. 질량으로서의 본성의 모습과 본성의 바탕에 대해서 숫자로 그 해답과 해답을 분류한다. 그것이 서양의 현대적 학문이다.   數字를 代數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的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서 數字를 數字인 것으로 하는 것에 (1 2 3 4 5 6 7 8 9 0 의 疾患의 究明과 詩的인 情緖의 棄却處) 서양의 학문은 숫자를 대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즉 숫자를 어떤 것을 대신하여 표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 연구한다. 즉 숫자를 숫자적인 것 자체로 연구하고 표시하고 사용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또 숫자를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숫자적인 것으로만 파악한다. 그것은 어떠한 서양 학문 이를테면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 어디에서건 마찬가지다. 따라서 왜 서양 사람들은 1,2,3,4,5,6,7,8,9,0의 숫자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하는지 그 질환의 규명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서양 학문은 시적인 정서의 소각처가 된 것이다.   (數字의 一體의 性態  數字의 一切의 性質  이것들에 依한 數字의 語尾의 活用에 依한 數字의 消滅) 모든 것을 태도를 숫자로 파악하는 성향, 모든 성질의 바탕을 숫자로 파악하려 하는 것들에 의해서 숫자의 어미 즉 모든 것에 숫자가 꼬리처럼 달리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은 숫자로 수렴되어 소멸되고 만다.   數式은 光線과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는 사람에 依하여 運算될 것  사람의 몸에서 반사된 광선은 초당 삼십만 킬로미터로 나아가고, 만약 사람이 이 광속보다 더 빠른 기계, 이른바 타임머신을 타고 가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시간도 되돌려서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수식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아나는 광선과 그 광선보다 빠르게 타임머신을 타고 쫓아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 의해서 연산되어야 한다. 이제부는 숫자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행되고 계산되어야 한다.   사람은 별 ―― 天體 ―― 별 때문에 犧牲을 아끼는 것은 無意味하다. 별과 별과의 引力圈과 引力圈과의 相殺에 依한 加速度 函數의 變化의 調査를 爲先 作成할 것 사람이 별 즉 천체 때문에 희생을 아끼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양 과학자들이 별 곧 천체는 무한히 펼쳐진 진공 상태의 우주의 공간에 떠 있는 물질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대고 돼지 소 등을 잡고 이를 제물로 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천체를 주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서양의 과학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별―― 천체 ――별’을 잘 관찰해 보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서양 사람이 별에 대해서 어떻다는 확신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에 소나 돼지를 잡고 제사지내는 것을 미신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의 사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희생을 아끼는 주체’가 우리가 될 수도 있고, 서양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과 ‘――’을 이상 시인이 그냥 심심해서 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 바라본 별과, 동양적 사고에 의해서 바라본 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그 가치를 상쇄시키는지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숫자로 파악한 서양 학문에서 바라본 별과, 인문학적으로 바라본 동양의 별이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인간의 삶을 말살하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동양의 인문학적 사고가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서로의 가치를 얼마나 상쇄시키는지를 우선 조사하여야 한다. 결국 시인은 서양의 과학이 인간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   線에關한覺書 7 空氣構造의速度―音波에依한―速度처럼三百三十미터를模倣한다 (光線에比할때참너무도劣等하구나) 光線을즐기거라. 光線을슬퍼하거라. 光線을웃거라. 光線을울거라. 光線이사람이라면사람은거울이다. 光線을가지라. ―― 視覺의이름을가지는것은計劃의嚆矢이다. 視覺의이름을發表하라. □ 나의이름 △ 나의안해의이름 (이미오래된過去에있어서나의 AMOU ―REUSE는 이와같이聰明하도다.) 視覺의이름의通路는설치하라. 그리고그것에다最大의速度를附與하라. ―― 하늘은視覺의이름에對하여서만存在를明白히한다 (代表인나는代表인一例를들것)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갑갑한地方色이나아닐는지) 하늘은視覺의이름을發表했다. 視覺의이름은사람과같이永遠히살아야하는數字的인어떤一點이다. 視覺의이름은運動하지아니하면서運動의코오스를가질뿐이다. ―― 視覺의이름은光線을가지는光線을아니가진다. 사람은視覺의이름으로하여光線보다도빠르게달아날필요는없다. 視覺의이름을健忘하라. 視覺의이름을節約하라. 사람은光線보다빠르게달아나는速度를調節하고때때로過去를未來에있어서淘汰하라. ― 1931. 10 ― ​ ​ 空氣構造의 速度 ― 音波에 依한 ― 速度처럼 三百三十미터를 模倣한다 (光線에 比할 때 참 너무도 劣等하구나) 인간의 주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동양의 학문은 각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그것은 마치 대기 속에서 전파되는 음파처럼 대상을 파악하는 속도가 느리다. 반면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는 서양의 학문에서는 어떤 대상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파악하고 표시한다. 따라서 서양 학문은 마치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광선처럼 대상을 빠르게 인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홍길동이가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장길산이도 한 달에 10만원식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도 한 달에 10만원씩 5년 동안 저금을 하였다. 홍길동이는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고, 장길산이는 자기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그리고 성춘향이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저금을 하였다.  이 경우 동양적 사고에서는 홍길동이의 저금과 장길산이의 저금과 성춘향이의 저금을 각각 다르게 본다.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과 자식을 가르치기 위한 저축을 서로 다른 가치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금의 의미가 사람마다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자 한다. 홍길동이를 A라고 하고, 장길산이를 B라고 하고, 성춘향이를 C라고 한다면, 이들이 저금한 것을 각각 이렇게 파악한다. A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B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C가 저축한 금액은 10 x 12 x 5 = 600만원. 따라서 홍길동이 저축한 것이나 장길산이 저축한 것이나 성춘향이가 저축한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아니 서양 학문의 관심은 저축한 금액이 같다는 것에만 주로 주목한다. 이처럼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은 그 주목의 대상이 다르다. 따라서 ‘공기 구조의 속도’는 동양적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일견 서양식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디고 느린 것으로 보인다. 마치 소리가 공기 속에서 초당 340미터 전파되듯이 느리게 파악된다.  이에 비해서 서양 학문에서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하고, 기호화하여 파악하려고 하고, 하나의 원리나 법칙으로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저축은 '매달 저축액 x 일 년 중의 달의 수 x 저축한 햇수'로 파악한다. 그래서 10만 x 12달 x 5년 = 600만원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은 마치 빠른 광선처럼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에 적용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빠르다. 동양적 학문은 어쩌면 서양 학문에 비해서 너무 열등하고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光線을 즐기거라. 光線을 슬퍼하거라. 光線을 웃거라. 光線을 울거라. 서양 학문이 편리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선을 즐겨라. 그러나 그 서양 학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서양적 사고에 대해서 슬퍼해야 한다. 광선으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양 학문을 접하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서양 학문을 제대로 알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다양성을 말살하는지를 알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참으로 서양 학문을 슬퍼해야 할지 모른다. 光線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거울이다. // 光線을 가지라. // ―― 서양 과학에서는, 우주로 달아나는 광선을 타임머신을 타고 따라가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우리가 젊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 광선이 진짜 사람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거울에 불과하다. 거울에 비친 허상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을 도식화, 기호화, 추상화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서양 학문에서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의 삶은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 서양 학문이 좋은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광선과 같은 허상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라. ―― 과연 그 광선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가. 서양 학문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 視覺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計劃의 嚆矢이다. 視覺의 이름을 發表하라. // □ 나의 이름 // △ 나의 안해의 이름 (이미 오래된 過去에 있어서 나의 AMOUREUSE는 이와 같이 聰明하도다.) ‘시각의 이름’을 가지는 것 어떤 것을 계획하는 맨 처음이다. 서양 학문은 어떤 것을 계획할 때, 그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 따르면 먼저 시각의 이름을 발표해야 한다. 자, 지금부터 시각의 이름을 갖자. □은 나의 이름이라 하자. △은 나의 아내의 이름이라 하자. 이미 오래 된 과거에 화자는 이처럼 총명하게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었다. 이를테면 , 라는 시에서 이미 시각의 이름을 발표한 적이 있다. 視覺의 이름의 通路는 설치하라. 그리고 그것에다 最大의 速度를 附與하라. // ―― 시각의 이름으로 기호화한 것이 두루 미칠 수 있는 길은 마련해 놓아라. 그리고 그것에다 최대의 속도를 부여하라. 가장 간단히 하라는 말이다. 간단한 것은 가장 빠르게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러나 과연 이러한 서양식 학문이 대상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늘은 視覺의 이름에 對하여서만 存在를 明白히 한다 (代表인 나는 代表인 一例를 들 것) // 蒼空, 秋天, 蒼天, 靑天, 長天, 一天, 蒼穹 (大端히 갑갑한 地方色이나 아닐는지) 하늘은 視覺의 이름을 發表했다. 서양 학문에 따르면, 하늘은 시각의 이름에 대해서만 존재를 명백히 한다. 여기서 ‘시각의 이름’은 모든 구체적인 것들을 대표하는, 가장 간단한 기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사전을 찾아보면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다’라고 나온다. 서양식 학문에서는 이것만이 가장 객관적으로 하늘의 존재를 명백히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하늘’은 모든 하늘을 대표하는 하늘이다. 그래서 화자도 모든 자신을 대표하는 화자가 하나의 예를 들고자 한다. 하늘 하면, ‘蒼空(창공)’도 있고, 秋天(추천)도 있고, 蒼天(창천)도 있고, 靑天(청천)도 있고, 長天(장천)도 있고, 一天(일천)도 있고, 蒼穹(창궁)도 있다. 이렇게 하늘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학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단히 갑갑한 촌스러운 것이나 아닐는지 모른다. 그래서 드디어 하늘에 대한 시각의 이름을 발표했다.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이라고. (여기서 보면 서양 학문은 바로 하나의 현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주관적 인식을 배제한다. 따라서 인간의 대상에 대한 주관적으로 인식해온 것들을 말살하는 역할을 한다.) 視覺의 이름은 사람과 같이 永遠히 살아야 하는 數字的인 어떤 一點이다. 視覺의 이름은 運動하지 아니하면서 運動의 코오스를 가질 뿐이다. // ―― 시각의 이름은,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수자적인 일점이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살아야 하므로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다. 또 숫자적인 어떤 하나의 점과 같이 간단히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시각의 이름은 운동 즉 이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의미가 변하지 않고,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그 자체는 이동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의 속성을 가진다. 그 자체의 의미는 움직이지 않으나, 그것은 다른 구체적인 것들에 두루 이동하면서 적용되어야 하는 속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넓이를 S라 하고, 밑변의 길이를 a라고 하고, 높이를 h라고 한다면, ‘S=ah/2’이다. 이 공식이 바로 시각의 이름이다. 어떤 것을 간단히 기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숫자적 일점과 같이 간단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면서 이것은 다른 구체적인 삼각형들에도 두루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동의 코스를 가진다.  ‘――’ 화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視覺의 이름은 光線을 가지는 光線을 아니 가진다. 사람은 視覺의 이름으로 하여 光線보다도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을 가지는 그 광선을 갖지 아니한다. 광선은 구체적인 사물만이 갖는다. 따라서 시각의 이름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각의 이름은 광선이 없는 허구적인 것이기에, 사람은 시각의 이름으로 하여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그 허구적인 서구 이론으로 인하여 거기에 매달려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視覺의 이름을 健忘하라. // 視覺의 이름을 節約하라. // 사람은 光線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速度를 調節하고 때때로 過去를 未來에 있어서 淘汰하라.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어라. 시각의 이름을 절약하라. 사람은 광선보다 빠르게 달아나는 속도를 조절하고, 때때로 과거를 미래에 있어서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라. 여기서 시각의 이름을 과감하게 잊고, 절약하고 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시각의 이름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가변적인 것으로 본다. 따라서 불변의 영원한 진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기 속에서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별을 보면서 꿈을 꾸기도 하고, 달을 보면서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별’은 빛을 관측할 수 있는 천체 가운데 성운처럼 퍼지는 모양을 가진 천체를 제외한 모든 천체를 의미할 뿐이고, ‘달’은 지구의 위성으로서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내고, 표면에 많은 분화구가 있으며 대기는 없는, 공전 주기는 27.32일, 반지름은 1,738km인 것을 가리킬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별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달을 보면서 멀리 있는 임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서양식의 별과 달의 개념을 잊거나, 절약하거나, 혹은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기에서 우리 삶을 적용시켜서 바라볼 때, 인간의 다양한 정신, 감정, 문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서양적 학문이 만능은 아닌 것이다.       4. 建築 無限 六角面體   ▣   AU MAGASIN DE NOUVEAUTES ​ 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의內部의四角形 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運動의四角이난圓. 비누가通過하는血管의비눗내를透視하는사람. 地球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儀를模型으로만들어진地球. 去勢洋襪. (그女人의이름은워어즈였다.) 貧血緬絲. 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平行四邊形對角線方向을推進하는莫大한重量. 마르세이유의봄을解纜한코티의香水의마지한東洋의가을快晴의空中에鵬遊하는Z伯號. 蛔蟲良藥이라고씌어있다. 屋上庭園. 猿猴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무아젤. 彎曲된直線을直線으로疾走하는落體公式. 時計文字盤에Ⅻ에내리워진一個의浸水된黃昏. 도아―의內部의도아―의內部의鳥籠의內部의카나리야의內部의嵌殺門戶의內部의인사. 食堂의門깐에方今到達한雌雄과같은朋友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角雪糖이三輪車에積荷된다. 名啣을짓밟는軍用長靴. 街衢를疾驅하는造花金蓮.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下半은저남자의上半에恰似하다. (나는哀憐한邂逅에哀憐하는나) 四角이난케―스가걷기始作이다. (소름끼치는일이다.) 라지에―타의近傍에서昇天하는굿빠이. 바깥은雨中. 發光魚類의群集移動. - 1932. 7 -     AU MAGASIN DE NOUVEAUTES ‘MAGASIN’은 프랑스어로 상점이다. ‘NOUVEAUTES’는 새롭다, 참신하다, 신기하다는 의미다. ‘AU MAGASIN DE NOUVEAUTES’는 신기한 상점 혹은 새로운 상점이라는 정도의 의미다. 화자는 서양 영화를 본 것 같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내용이 서사적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화자는 서양의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그것을 시로 쓴 것 같다. 구체적으로 서양의 어느 영화인지는 필자로서 확인할 길이 없다. 서양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시인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창녀를 사고자 한다면 창녀가 있는 사창가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창녀가 자동차를 타고 손님이 부르는 곳으로 가는가 보다. 이것을 시인은 ‘AU MAGASIN DE NOUVEAUTES’ 즉 신기한 상점이라 말하고 있다.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의 內部의 四角形 창녀는 사각형 건물의 내부에 있는, 사각형으로 된 출입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이층으로 올라 간 다음, 사각형으로 된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거실에서 다시 사각형으로 된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 방 안에는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가 들어간 집은 연립주택 형태의 이층일 것으로 보인다. 커다란 사각형의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도어 안으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다시 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그 집을 들어가서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사각형의 도어가 있고, 방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침대가 있다. 창녀는 어느 남자의 주문을 받고 그 사람이 사는 집의 방으로 들어갔고, 그 방안에는 최종적으로 침대가 있는 것이다.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運動의 四角이 난 圓 사각형의 침대 위에는 남자가 있다.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은 발기되어 끄덕거리는 남자의 남근이다. 발기된 남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둥근 원의 모양이다. 그런데 남근은 원이면서도 사각이 나서, 움직이고자 하지만 굴러가지 못한다. 끄덕끄덕 하는 것은 마치 둥근 원 모양의 남근이 굴러가고자 하지만, 사각이라서 굴러가지 못하고, 들썩거리기만 하는 모습이다. 비누가 通過하는 血管의 비눗내를 透視하는 사람. 이 사람은 창녀를 보자,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에 적당한 매력적인 여자인지, 그녀의 몸을 투시한다. 옷 속에 감춰진 그녀의 몸을 투시하여, 성욕을 해결하기에 알맞은 여자인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성욕의 때를 씻고자 하는 욕망의 움직임이다. 옷을 오래 입으면 때가 끼듯이, 성욕도 오래 참으면 때가 낀다. 때가 낀 옷을 빨아서 입으면 기분이 상쾌하듯이, 오래 묵은 성욕도 해결하면 상쾌하다. 따라서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의 비누 냄새를 투시하는 사람은, 창녀를 보면서 자신의 몸속에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의 때를 잘 씻어줄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남자다. 이 사람은 성욕의 묵은 때를 씻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地球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儀를 模型으로 만들어진 地球 옷 속에 감춰진, 남자에 의해서 투시된, 여자의 엉덩이는 잘 발달되어 있다. 이 남자의 성욕의 때를 잘 씻어 줄 것으로 보인다.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의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는 여자의 엉덩이다. 발기된 남근은 마치 지구와 같은 둥근 여자의 엉덩이,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마치 지구라도 뚫을 듯이 힘차게 남근을 넣고 절구질하고 싶은 것이다. 음부가 있는 엉덩이와 음부에 삽입된 남근은 마치 북극과 남극을 축으로 돌아가는 지구의와 유사하다. 따라서 남자는 여자의 엉덩이를 보면서 그 엉덩이에 있는 음부에 남근을 넣고, 성교하기에 적당한지 상상하고 있다. 창녀의 엉덩이는 지구처럼 둥글게 잘 발달되어 있다. 去勢洋襪. (그 女人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창녀는 양말을 벗어 던진다. 서양식 버선인 양말은 스타킹이라고 해도 좋다. 벗어서 던져놓은 스타킹은 원래 신었을 때의 형상이 거세된 채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놓인다. 그리고 그 여인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워어즈’는 영어로 ‘Wars’다. ‘전쟁(戰爭)’이다. ‘전쟁’은 싸우고 다투는 것이다. 따라서 워어즈는 창녀다. 창녀는 마치 남자와 싸우고 다투듯이, 서로 끓어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씩씩거리는 여자다. 이러한 발상은 에도 나온다. 도 결국 남녀의 성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시다. 貧血緬絲. 당신의 얼굴 빛깔도 참새다리 같습네다. 여자가 옷을 모두 벗었다. 알몸이 된 창녀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핏기 없는 가는 실처럼 하늘거리는 하얀 몸매. 창녀의 얼굴 빛깔도 핏기가 없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다. 백인 여자다. ‘조족지혈(鳥足之血)’이라는 말이 있다. 새 발의 피라는 말이다. 조그만 새 발에서 피가 나와야 얼마나 나오겠느냐는 말인데, 새 발의 피처럼 창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곧 그 창녀는 백인 여자다. 平行四邊形 對角線 方向을 推進하는 莫大한 重量. 창녀가 침대로 올라와 나란히 눕자 남자가 거대한 중량으로 달려들어 애무한다.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은 아직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애무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직선을 직선으로 질주하는 것’이 창녀의 음부에 남근을 삽입하고 격렬하게 성교를 하는 것이라면, 평행사변형의 대각선 방향을 추진하는 것은 남자가 창녀의 몸을 애무하는 것이다. 애무를 통해서 다음에 이어질 성교를 예비한다. 마르세이유의 봄을 解纜한 코티의 香水의 마지한 東洋의 가을 快晴의 空中에 鵬遊하는 Z伯號. 蛔蟲良藥이라고 씌어 있다.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자, 여자는 마치 ‘제발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하는 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마치 청춘의 배가 닻을 풀고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쾌감에 젖는다. 그녀가 쾌락에 젖어들자, 남자는 마치 코티 향수를 맞이한 것 같은, 동양의 가을 하늘처럼 쾌청한 기분으로, 공중에 붕새처럼 붕 뜬 기분으로, Z기처럼 힘차게 창녀의 음부를 향해 질주할 최고의 남자가 된다. 남자가 창녀를 향해서 성교를 할 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녀에게는 회충양약이라 씌어 있다. 회충양약은 회충을 구제하기에 좋은 약이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남자에게 좋은 약이다. 회충과 같이 하얗고 기다랗게, 정액이 잘 뿜어져 나오게 하는 여자다. 이 창녀는 남자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데는 아주 좋은 재주를 가진 여자다. 屋上 庭園. 猿猴를 흉내내이고 있는 마드무아젤. 옥상 정원은 창녀의 음모가 나 있는 음부다.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에도 나온다. 여자와 입을 맞추는 애무의 첫 단계가 일층이라면, 다음으로 유방을 애무하는 단계가 이층이다. 그리고 다음 음부를 애무하는 단계가 삼층이며, 그 삼층 위에는 옥상이 있다. 옥상은 바로 여자의 음부다. 그 음부에는 마치 옥상의 정원에 자라는 풀처럼 음모가 자라고 있다. 지금 남자가 창녀의 음부를 애무하고 있다. 그러자 창녀는 원숭이 흉내를 내고 있다. 원숭이는 상대의 털을 골라주는 습성이 있다. 창녀가 쾌감에 못 이겨 남자의 머리를 잡고, 좌우로 자신의 몸을 흔들면서 쾌감에 빠져 있는 것을, 마치 원숭이가 상대의 머리털을 고르거나 이를 잡아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彎曲된 直線을 直線으로 疾走하는 落體 公式. 만곡된 직선은 쾌감에 젖어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고 있는 창녀다. 원래 사람은 직선 모양이다. 그래서 직선이다. 그런데 쾌감에 젖어서 몸을 뒤로 활처럼 젖혔으니, 그 창녀는 만곡된 직선이다. 그 창녀를 직선으로 곧 곧바로 질주하는 낙체 공식이다. 여기서 ‘질주한다’는 말은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질주하는 행위와 성행위는 유사하다. 숨이 가쁘고, 땀이 나고, 격렬한 행위다. 따라서 질주하는 행위는 힘차게 성행위를 하는 행위다. 낙체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몸을 떨어뜨리는 행위 곧 성교 행위다. 공식은 틀에 박힌 형식이나 방식을 말한다. 이제 창녀의 몸에 남근을 삽입하고 성행위를 하는 것은 뻔하다. 時計 文字盤에 Ⅻ에 내리워진 一個의 浸水된 黃昏. 성교가 끝나고 축 늘어진 남근을 표현한 것이다. 시계 문자반에서 12에서 아래로 바늘이 일직선으로 내리워지면, 그것은 6시를 의미하고, 오후 6시는 황혼이다. 성교가 끝나고 남근이 아래로 늘어진 모습은, 마치 시계 문자반에서 바늘이 아래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다. 창녀의 음부에 빠졌다가 결국 죽어서 늘어진 남근은, 한 개의 물에 빠진, 그래서 황혼을 맞이한 남근이다. 도아―의 內部의 도아―의 內部의 鳥籠의 內部의 카나리야의 內部의 嵌殺門戶의 內部의 인사. 남자의 요구에 의해서 성적 욕구를 해결해 준 창녀가 떠나려고 인사를 한다. 그 인사는 ‘도아―의 내부의 도아―의 내부의 조롱의 내부의 카나리야의 내부의 감살문호의 내부의 인사’다.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창녀를 부른 남자에게, 창녀는 도아를 열고 들어와서, 또 도와를 열고 남자의 집으로 들어와서, 조롱과 같은 방 안에 있는 남자에게, 카나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교성으로, 계곡처럼 움푹 패인 음부로, 남근을 죽여 준, 그 음부의 내부의 인사인 것이다. 즉 성욕을 해결해 준 대가, 화대를 달라는 것이다. 食堂의 門깐에 方今 到達한 雌雄과 같은 朋友가 헤어진다. 서양의 주택 구조는 거실 한편에 식당이 있다. 지금 남자와 창녀는 거실에서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이다. 식당의 문간에는, 방금 도달한, 자웅과 같은, 붕우가 헤어진다. 남자와 여자는 자웅이지만, 그러나 성교를 마친 창녀와 남자는 이제 암컷과 수컷에서, 친구로 돌아와 헤어지고 있다. 방금까지 자웅으로 성교를 했으나, 이제는 친구처럼 헤어지는 것이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와 성욕의 해결을 돕기 위해서 온 창녀가 이제는 일이 끝났음으로, 그저 친구들이 헤어지듯이 남녀의 감정을 모두 버리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화대를 놓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파랑 잉크가 엎질러진 角雪糖이 三輪車에 積荷된다. 파란 잉크가 엎질러진 것처럼 색깔이 파란 달러가, 창녀가 좋아하는, 각설탕과 같이 달콤한 네모진 돈이, 삼륜차인 남자에게 부과되면서 서로 다툰다. 성욕을 해결한 남자는 덜 주려고 한다.  창녀는 많이 받으려고 한다. 서로 돈의 액수를 놓고, 자웅이 아닌 붕우처럼 옥신각신한다. 적하(積荷)는 돈이 포개지고 또 책망한다는 의미다. 남자가 달러를 얼마간 얹어 주자, 여자가 더 달라고 책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남자는 삼륜차다. 남자의 발기된 남근과 그리고 두 쪽의 고환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 개의 원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에 ‘삼심원(三心圓)’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남자는 그 남근과 고환으로 창녀에게 성교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삼륜차’는 성교를 한 남자다. 名啣을 짓밟는 軍用長靴. 街衢를 疾驅하는 造花金蓮. 헤어지면서 남자는 창녀의 이름을 물었을 것이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교가 좋은, 매력적인 그녀를 다음에 또 찾고 싶은 마음에서다. 군용장화와 같은 긴 부츠에 이름이 재갈 물려서 짓밟혔다. 창녀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마치 “쳇~ 짠돌이~~” 라고 말하듯이 입을 삐죽 내밀며 굳게 다문 채, 부츠를 신은 발로는 땅을 한 번 “탁” 차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명함이 군용장화에 짓밟힌 것이다. 그 여자는 온 거리를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듯이 질주하는 가짜 꽃이다. 그러나 걸음걸이가 예쁜 미인이다. 여기서 조화는 진짜 누구를 사랑해서 그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가 아니다. 금련(金蓮)은 걸음걸이가 예쁜 여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면서 바쁜 듯이 급히 나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가고,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간 사람은,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시인이,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가 누군인지 잘 구분하지 못할까 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여자의 몸 위에서, 내려오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올라가고 한 사람, 즉 위에서 열심히 성교한 사람 즉 남자는, 이층의 계단 밑에서 집으로 올라오고 그리고 일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간 사람인 창녀가 아니고, 또 밑에서 올라가지 아니한 즉 처음부터 위에 있던 사람이고, 위에서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 즉 일이 끝나고도 계단을 내려오지 아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집 안에 있던 사람은 남자이고, 그 창녀가 남자의 집에 다녀간 것이다. 여자는 이른바 서양의 콜걸(call girl)인 것이다. 저 여자의 下半은 저 남자의 上半에 恰似하다. (나는 哀憐한 邂逅에 哀憐하는 나) 四角이 난 케―스가 걷기 始作이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저 남자의 상반신과 흡사하다. 저 여자의 하반신은 엉덩이가 잘 발달한 육감적인 여자라면, 저 남자는 상반신의 근육이 잘 발달된 매력적인 남성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슬프고 가련한 잠시의 만남에, 도리어 화자 자신이 슬프고 가련하다. 화자도 그런 엉덩이가 잘 발달한 여자와 한 번 해후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가련하게 생각한다. 사각이 난 케이스 즉 상자가 걷기 시작한다. 여자가 자동차를 타고 떠나려고 한다. 자동차는 남자가 사는 이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사람을 담는 케이스와 같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일이다. 자동차가, 사람이 소름을 끼칠 때 몸을 부르르 떨듯이, 자동차는 시동을 걸자 부르릉 하고 진동한다. 라지에―타의 近傍에서 昇天하는 굿빠이. / 바깥은 雨中. 發光魚類의 群集移動. 창녀가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손으로 입을 가져갔다가 다시 하늘을 향해서 뻗으면서, 굿바이라고 인사하면서 떠난다. 자동차의 앞좌석은 라지에타 근처에 있다. 서양식 인사법이다. 키스 대신에 손을 입으로 가져가서, 그 손에 입맞춤 한 다음, 그 손을 이층에 있는 화자에게 날려 보내는 인사를 하고 있다. 손이 승천한 것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헤드라이트에서 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떼를 지어 달리고 있다. 아니, 물고기처럼 싱싱한 창녀들이, 비가 내리는 도시를,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몸을 파는 창녀의 모습. 신기한 상점이다. ‘AU MAGASIN DE NOUVEAUTES’다. ​ ​ ​   ▣   出版法 ​      Ⅰ 虛僞告發이라는罪名이나에게死刑을言渡하였다. 자취를隱匿한蒸氣속에몸을記入하고서나는아스팔트가마를睥睨하였다.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其父攘羊 其子直之 나는아아는것을아알며있었던典故로하여아알지못하고그만둔나에게의執行의中間에서더욱새로운것을아알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는雪白으로曝露된骨片을주워모으기始作하였다. 「筋肉은이따가라도附着할것이니라」 剝落된膏血에對해서나는斷念하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     Ⅱ 어느警察探偵의秘密訊問室에있어서 嫌疑者로서檢擧된사나이는地圖의印刷된糞尿를排泄하고다시그것을嚥下한것에對하여警察探偵은아아는바의하나를아니가진다. 發覺當하는일은없는級數性消化作用. 사람들은이것이야말로卽妖術이라말할것이다. 「勿論너는鑛夫이니라」 參考男子의筋肉의斷面은黑曜石과같이光彩나고있다한다.      Ⅲ 號  外  磁器收縮을開始 原因極히下明하나對內經濟破綻에因한脫獄事件에關聯되는바濃厚하다고보임. 斯界의要人鳩首를모아秘密裡에硏究調査中. 開放된試驗管의열쇠는나의손바닥에全等形의運河를掘鑿하고있다. 未久에濾過된膏血과같은河水가汪洋하게흘러들어왔다.       Ⅳ 落葉이窓戶를滲透하여나의禮服의자개단추를掩護한다. 暗殺 地形明細作業의至今도完了가되지아니한이窮僻의地에不可思議한郵遞交通은벌써施行되었있다. 나는不安을絶望하였다. 日曆의反逆的으로나는方向을紛失하였다. 나의眼睛은冷却된液體를散散으로切斷하고落葉의奔忙을熱心으로幇助하고있지아니하면아니되었다. (나의猿猴類에의進化) - 1932. 7 -   出版法 ‘출판법(出版法)’이란 무슨 의미일까? 참으로 어렵다. 이상 시인은 하나의 용어에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 사용하기에, 어느 하나의 의미만으로 제목이나 시어의 의미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적 사고의 습성은 끊임없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의미만을 찾는데 열중한다. 그래서 의미의 혼란이 온다. 이상의 시어들은 많은 경우 다양한 의미와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낸다. 따라서 ‘출판법’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 ‘출판법’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는 법이며, 그것은 출판된 족보에서 화자가 나오는 법이며,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의 뚜껑이라는 판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방법이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단어가 ‘출판법(出版法)’이다. 이상이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자로 간 줄을 모르고 자라다가,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갈등했던 이상은, 족보를 새롭게 출판하기 위해서, 아니 이미 출판된 족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그 족보를 하수구에 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족보가 하수구를 치우던 어떤 사람에게 발견되고, 중요한 문서라 경찰에 신고를 한 모양이다. 이 때 족보에 적혀 있는 대로 큰아버지가 경찰서로 불려오고, 이상은 경찰서에 따라갔다가, 혹시 자신이 버린 족보를 발견한 것이 아닌가 해서 다시 하수구 속으로 들어갔다가, 하수구 뚜껑을 인부들이 닫는 바람에 갇혀서 죽을 뻔한 일을 기억하고, 그 사건을 시로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의 내용은 서사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4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虛僞告發이라는 罪名이 나에게 死刑을 言渡하였다. 자취를 隱匿한 蒸氣 속에 몸을 記入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睥睨하였다. 이 문장은 이 시 전체적인 맥락에서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허위고발’의 주체는 누구일까? 화자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일까? 일차적으로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큰아버지인 것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양자로 데려왔다는 것에 대해서 허위로 화자에게 알렸다. 화자를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한 죄명으로 인하여 화자가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자신을 족보에서 지우기로 한 것이다.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은 곧 자신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출생의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한 것이다. 자취를 은닉한 증기는, 증기처럼 감쪽같이 자신의 태어난 자취를 감춘 족보다. 그 족보 속에 어렴풋한 기록되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서 아스팔트 가마 즉 ‘아스팔트의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았다.’ 하수구에 그 족보를 넣어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출판법이다. 출판된 족보라는 판에서 나오는 방법이다. 또 이 나중에 이 족보는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고, 큰아버지가 경찰서에 불려간 뒤에도 화자는 모르는 체한다. 따라서 ‘허위고발’의 주체는 화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버렸던 족보가 궁금하여 하수구에 들어가게 되고, 하수구에 갇혀서 죽을 뻔하게 되는데, 결국 경찰서에서의 허위고발이 자신을 죽게 할 뻔한 사건을 두고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라는 문장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또 족보의 자취를 감춘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갇히게 된 화자는 하수구를 나오기 위해서 하수구 속에서 하수구 뚜껑을 흘겨보게 된다. 따라서 ‘자취를 은닉한 증기 속에 몸을 기입하고서 나는 아스팔트 가마를 비예하였다.’라는 문장도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 | 直에 關한 典古一則 | / 其父攘羊 其子直之 우선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된다. ‘일직에 관한 전고 일 즉 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어야 할지 애매하다. 세로쓰기에서 양쪽의 ‘|’을 한일자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괄호로 읽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렵다. 한일자(一)와, 괄호 개념의 한일자(―) 형태가, 고딕체 글씨에서는 구분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앞뒤의 맥락과 의미로 봐서는 괄호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따라서 ‘직에 관한 전고 일 즉’으로 읽겠다. ‘직’에 관한, 책보다 오래된 하나는 곧 ‘기부양양(其父攘羊) 기자직지(其子直之)’다.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아들이 이를 바로잡았다. 큰아버지가 화자를 화자 몰래 양자로 삼자, 이를 화자가 몰래 바로잡는다. 그래서 화자는 족보를 큰아버지 몰래 하수구에 넣었다. 나는 아아는 것을 아알며 있었던 典故로 하여 아알지 못하고 그만 둔 나에게의 執行의 中間에서 더욱 새로운 것을 아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사온 양자라는 것을 알며, 논어에 그 아비가 무엇을 잘못하였더라도 그 아들이 숨겨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르는 체해 온 화자에게, 이번에 족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집행하는 중간에, 더욱 새로운 사실을 알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여기서 화자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흥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을 더듬고 있다.) 나는 雪白으로 曝露된 骨片을 주워모으기 始作하였다. /「筋肉은 이따가라도 附着할 것이니라」/ 剝落된 膏血에 對해서 나는 斷念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화자는 흰 눈처럼 환하게 드러난 조상의 계보의 줄기를 주워 모으기 시작하였다. 골격에 붙는 살은 이따가라도 붙여볼 것이다. 족보에서 벗겨져 떨어진, 대신 돈을 받고 살이 찐 핏줄에 대해서는 화자는 단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의 핏줄에는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Ⅱ 어느 警察 探偵의 秘密 訊問室에 있어서 화자가 하수구에 버린 족보가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경찰서에 신고했다. 그 족보가 하수구에 버려진 것과 관련하여 경찰관이 조사한다. 嫌疑者로서 檢擧된 사나이는 地圖의 印刷된 糞尿를 排泄하고 다시 그것을 嚥下한 것에 對하여 警察探偵은 아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 發覺當하는 일은 없는 級數性 消化 作用.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卽妖術이라 말할 것이다. 족보를 유기한 것으로 의심되어 경찰서로 불려온 큰아버지는, 족보의 인쇄된 친아버지의 아들로서의 화자를 씻어내고, 다시 그것을 삼켜서 자기의 아들로 만든 것에 대해서, 경찰 조사관은 아는 바의 하나를 아니 가진다. 경찰 조사관은 버려진 족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단 하나 화자가 혐의자의 양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족보에는 화자가 혐의자의 아들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것은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다. ‘아아는’은 말을 더듬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가 경찰서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조사가 진행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찰 조사관이 화자가 양자로 들어온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화자가 큰아버지의 아래 층계에 기록됨으로써 족보를 유기한 범인으로 발각당하는 일이 없는, 일종의 급수성 소화 작용이다.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즉요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勿論 너는 鑛夫이니라」/ 參考 男子의 筋肉의 斷面은 黑曜石과 같이 光彩나고 있다 한다. 화자는  ‘물론 너는 광부이니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수구에서 족보를 발견한 인부를 두고 이르는 말 같다. 참고 남자 즉 족보를 발견한 남자의 근육의 단면 즉 근육을 자른 면 한쪽이 마치 흑요석처럼 검게 광채가 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 남자의 근육에서 하수구의 흙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마치 무엇으로 자른 듯이 보이고, 흙이 묻은 부분이 검게 빛났다는 말이다. 화자가 하수구에 아무도 모르게 유기한 족보를 인부가 발견한 것을 두고, 그 인부를 마치 지하에 있는 흑요석을 캐낸 광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수구의 흙은 흑요석처럼 검고, 물기가 있는 하수구의 흙이 발이나 손에 묻으면 그 묻은 부분이 번들번들하게 광채가 난다. ​ Ⅲ 號外 / 磁器 收縮을 開始 ‘호외(號外)’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임시로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유기된 족보 사건으로 인해서 경찰서에 ‘불려온 사람 이외의 사람’이라는 의미다. 어린 화자는 불려온 자가 아니다. 혐의자로 불려온 것은 큰아버지요, 참고인은 유기된 족보를 발견한 하수구를 청소하던 인부다. 따라서 불려온 사람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화자다. 화자가 바로 ‘호외(號外)’다. 자기 수축을 개시했다. 종이 위에 철가루가 있고 종이 아래에 자석을 가져다 댔을 경우, 철가루들이 자석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모이듯이, 여러 조사관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시작했다. 原因 極히 下明하나 對內 經濟 破綻에 因한 脫獄事件에 關聯되는 바 濃厚하다고 보임. 斯界의 要人 鳩首를 모아 秘密裡에 硏究 調査中. 족보를 유기한 원인은 극히 밝힐 수 없으나, 가문의 경제를 파탄내고 이로 인해서 족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건과 관련이 깊다고 보임. 이 분야의 요인들이 모여, 비둘기가 머리를 맞대고 모이를 쪼듯, 머리를 맞대고 비밀리에 연구 조사중임. 開放된 試驗管의 열쇠는 나의 손바닥에 全等形의 運河를 掘鑿하고 있다. 未久에 濾過된 膏血과 같은 河水가 汪洋하게 흘러 들어왔다. 경찰서의 조사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조사에 몰두하는 사이, 화자는 개방된 시험관 즉 시험관처럼 생긴 수직의 하수구 뚜껑 열쇠가 개방되어 있어서, 화자는 손바닥을 짚고 전등형 운하를 굴착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하수구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유기한 족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머지않아 여과된 기름과 피와 같은 물이 강물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Ⅳ 落葉이 窓戶를 滲透하여 나의 禮服의 자개단추를 掩護한다. 낙엽이 하수구의 창호처럼 구멍이 뚫린 곳에 빨려 들어와 화자의 예복의 자개단추를 가린다. 그래서 인부들은 그 안에 화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하수구 뚜껑을 닫는다. 하수구 안이 깜깜해진다. 暗殺 깜깜한 하수구 안에 갇힌 화자, 어두운 곳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시의 맨 앞에 나오는 ‘허위고발이라는 죄명이 드디어 화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다.’ 地形 明細 作業의 至今도 完了가 되지 아니한 이 窮僻의 地에 不可思議한 郵遞交通은 벌써 施行 되었있다. 나는 不安을 絶望하였다. 공사가 끝나고 지형을 자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끝나지 않은 지금, 화자는 궁벽한 하수구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누구와 논의할 사람조차 없는 가운데, 하수도 뚜껑을 두드려 자신의 의사를 알리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불안을 절망하고 말았다.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하수구 밖으로 나가려던 희망을 포기했다. 日曆의 反逆的으로 나는 方向을 紛失하였다. 나의 眼睛은 冷却된 液體를 散散으로 切斷하고 落葉의 奔忙을 熱心으로 幇助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나의 猿猴類에의 進化) 일력을 돌이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화자는 방향을 분실하였다. 하수구에 들어와서 며칠이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화자의 눈동자는 냉각된 액체를 이리저리 흩으면서 단절하였다. 하수구 구멍에서 화자의 눈동자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에 눈을 껌벅거렸다. 낙엽이 바쁘게 달아나는 것을, 화자도 낙엽의 패거리가 되어, 열심히 돕지 아나하면 아니 되었다. 하수구 뚜껑을 가로막는 낙엽을 열심히 치우면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화자는 하수구라는 우리에 갇혀서, 마치 우리를 탈출하고자 하는 원숭이 종류로 진화한 것이다. ​ ​ ​ ▣   且8氏의出發 ​ 龜裂이生긴莊稼泥濘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以上꽂는것과盛하는것과의圓滿한融合을가리킴. 沙漠에盛한한대의珊瑚나무곁에서돛과같은사람이산葬을當하는일을當하는일은없고 심심하게산葬하는것에依하여自殺한다. 滿月은飛行機보다新鮮하게空氣속을推進하는것의新鮮이란珊瑚나무의陰鬱한性質을더以上으로增大하는것의以前의것이다.   輪不輾地  展開된地球儀를앞에두고서의設問一題.   棍棒은사람에게地面을떠나는아크로바티를가리키는데사람은解得하는것은不可能인가.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生理作用이가져오는常識을抛棄하라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고 또 熱心으로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疾走하는 일들을停止한다. 沙漠보다도靜謐한絶望은사람을불러세우는無表情한表情의無智한한대의珊瑚나무의사람의脖頸의背方인前方에相對하는自發的인恐懼로부터이지만사람의絶望은靜謐한것을維持하는性格이다.   地球를掘鑿하라    同時에   사람의宿命的發狂은棍棒을내어미는것이어라.   *事實且8氏는自發的으로發狂하였다. 그리하여어느덧且8氏의溫室에는隱花植物이꽃을피워가지고있었다. 눈물에젖은感光紙가太陽에마주쳐서는희스무레하게光을내었다. ― 1932. 7 ―   且8氏의 出發 부부가 아이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고상하지만, 그 아이를 낳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은 결코 고상한 것이 아니다. 부부가 성교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아이를 갖겠다는 고상한 뜻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부부가 서로 성적 쾌감을 즐기다 보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을 이룬 부부가 낳는 아이는 남근과 고환의 씨앗인 ‘且8氏’가 되는 것이다. 龜裂이 生긴 莊稼泥濘의 地에 한대의 棍棒을 꽂음. / 한대는 한 대대로 커짐. / 樹木이 盛함. / 以上 꽂는 것과 盛하는 것과의 圓滿한 融合을 가리킴. ‘균열이 생긴 장가니녕의 지’는 찢어진, 씩씩하게 심는, 진창이라는 의미다. 여성의 음부를 묘사한 것이다. 여성의 음부에는 발기되어 딱딱해진 한대와 같고, 곤봉과 같은 남근을 꽂는다. 그리고 남근은 남근대로 커진다. 남근이 음부에 담긴다. 이상 꽂는 것과 담긴다는 것과의 원만한 융합을 가리킨다. 즉 남근과 여성의 음부가 원만하게 하나가 된다. 沙漠에 盛한 한대의 珊瑚나무 곁에서 돛과 같은 사람이 산葬을 當하는 일을 當하는 일은 없고 심심하게 산葬하는 것에 依하여 自殺한다. 사막은 물이 없다. 사막은 식물이 자라지 않고 따라서 꽃도 피지 않는 공간이다. 아직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의 음부에는 물이 없고, 임신하지 않은 상태의 여성은 꽃이 자라지 않는 사막과 같다. 한대는 남성의 발기된 남근이다. 산호나무는 발기되어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남근이다. 돛은 배의 중심에 돛대가 꽂혀 있고, 돛대에는 커다란 돛이 달려 있다. 따라서 여성이 배라면 남근은 돛대에 해당하며, 남성의 몸은 돛에 해당한다. 남근이 산채로 매장을 당하는 일을 당하는 일은 없다. 남근이 음부에 살아있어 발기된 채로 죽은 듯이 있는 일은 없다. 발기된 남근을 음부 깊숙이 넣고 그리고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가하게 즐기다 보면, 남근은 사정을 하고 죽는 것이다. 滿月은 飛行機보다 新鮮하게 空氣 속을 推進하는 것의 新鮮이란 珊瑚나무의 陰鬱한 性質을 더 以上으로 增大하는 것의 以前의 것이다. 만월(滿月)은 보름달이다. 여성이 임신을 하여 배가 둥그렇게 부른 상태를 암유한다. 아이를 갖겠다고 남근을 여성의 음부에 담으면, 그 다음부터는 만월 즉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비행기보다 신선하게 공기 속을 추진한다. 임신에 대한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은, 산호나무 즉 남근의 음울한 성질 즉 남근의 줄어드는 성질을 더 이상으로 증대하는 것 이전의 것이다. 여성에 삽입하고 나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근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성적 욕망만 남는다. 輪不輾地  展開된 地球儀를 앞에 두고서의 設問一題. 바퀴는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 여기서 바퀴는 둥그런 수레바퀴와 같은 여성의 엉덩이를 암유한다. ‘땅에서’ 오른쪽으로 구르지 않는다는 것은, 땅에서 떨어져서 오른쪽으로 구른다는 의미다. 즉 여성이 엉덩이를 들고 있고, 남성이 이를 향한 모습이다. 뒤에서 성교하는 자세다.  ‘윤부전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서 화자는 다음에 설명하고 있다. ‘윤부전지’라는 말은 화자의 눈앞에 펼쳐진 지구의를 앞에 두고서 설문하여 정한 하나의 제목이다. 지구의는 여성의 둥근 엉덩이와, 그 엉덩이의 중심에 남근이 꽂힌 모습과 같다. 여성의 뒤쪽에서 남성이 성교하는 자세다. 棍棒은 사람에게 地面을 떠나는 아크로바티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解得하는 것은 不可能인가. 화자의 남근은 사람에게, 지면을 떠나는 아크로바티 즉 지면에서 떨어져 허공에 있는, 그래서 곡예처럼 삽입하여야 하는 음부를 가리키는데,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사람은 해득하는 것은 불가능인가’라는 말은 스스로 깨우쳐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잘 삽입이 되지 않는 상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生理作用이 가져오는 常識을 抛棄하라 지구에 구멍을 뚫어라. 지구는 지구의를 닮은 여성의 둥그런 엉덩이를 의미하며, 굴착하는 행위는 힘차게 남근을 여성의 음부를 향하여, 마치 지구를 뚫듯이 힘차게 내리 꽂는 행위다. 동시에 생리 작용이 가져오는 상식을 포기해야 한다. 남녀가 교접을 하면 반드시 사정을 해야 한다는 상식을 포기하라는 말이다. 사정하지 말고 참으라는 말이다. 사정을 억제하고 참을 때 여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고 또 熱心으로 疾走하는 사람은 熱心으로 疾走하는 일들을 停止한다. 열심히 질주하여 열심히 성교에 몰두한다. 질주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나다. 성교를 열심히 하면 숨이 차고 땀이 난다. 그래서 성교는 질주하는 것과 같다. 열심히 질주하고,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고 또 열심히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질주하는 것을 정지한다. 열심히 성교를 하면서 사정하는 것을 멈춘다. 사정을 억제할수록 그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사정을 향하여 질주하는 사람은 열심히 성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沙漠보다도 靜謐한 絶望은 사람을 불러세우는 無表情한 表情의 無智한 한대의 珊瑚나무의 사람의 脖頸의 背方인 前方에 相對하는 自發的인 恐懼로부터이지만 사람의 絶望은 靜謐한 것을 維持하는 性格이다. 사막은 물이 없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가 만족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보다도 정밀한 절망 즉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데서 오는 절망은, 사람을 불러 세우는 무표정한 표정이다. 사람을 불러 세운다는 것은 질주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여자가 교성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망이 사그라지는 것이다. 남근이 줄어드는 것은 첫째, 무지한 한대 즉 성적 기교에서 지혜롭지 못한 남근에서 기인하고  둘째, 산호처럼 붉은 남근을 가진 남자가 등 쪽에서 전방을 향하여 상대하는 자발적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지만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성적 교감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그대로 지켜가는 아내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地球를 掘鑿하라 // 同時에 // 사람의 宿命的 發狂은 棍棒을 내어미는 것이어라. 지구를 뚫어라. 지구의와 같은 엉덩이를 마치 지구를 굴착하듯이 힘차게 뚫어라. 동시에 사람의 숙명적 발광 즉 성적으로 흥분되어 숙명적으로 미쳐서 날뛰는 것은 곤봉 즉 발기된 딱딱한 남근을 여성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내어 미는 데에 있다. 마지막 힘차게 남근을 내어 밀었을 때, 아무리 아내가 고요함을 유지하는 성격이라 하더라도 숙명적으로 발광하게 되어 있다. * 事實 且8氏는 自發的으로 發狂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且8氏의 溫室에는 隱花植物이 꽃을 피워 가지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感光紙가 太陽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光을 내었다. 사실 남근과 고환은 스스로 발광하였다. 아이를 만들어 자손을 번식한다는 무슨 고상한 뜻에 의해서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욕망에 의해서 스스로 발광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덧 남근의 온실 즉 남근의 씨앗을 키우는  따뜻한 여성의 음부에는, 마치 포자로 번식하는 은화식물처럼 정자로 번식하는 생명이, 꽃을 피워가지고 있었다. 즉 어린 생명이 잉태하여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가 태양에 마주쳐서는 희스무레하게 빛을 내었다. 감광지는 사진의 감광지다. 빛을 받으면 사진 속의 형상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햇빛 속에서 아이의 잉태를 알게 해주는, 불러오는 여인의 배가 감광지다. 배가 점점 불러옴에 따라서 임신 여부를 알 수 있다. ‘눈물에 젖은 감광지’는 쾌락으로 땀에 젖은 여인의 배라는 의미로 쓰였다. 성적 쾌락으로 땀에 젖어 아이를 잉태한 여인의 불러오는 배가, 햇빛이 비추면 약간 뿌옇게 빛을 내며, 희미하게 아이가 잉태하였음을 알게 해 준다. ​ ​ ​ ▣   대낮    ―― 어느 ESQUISSE ―― ​ ELEVATER FOR AMERICA          ○ 세마리의닭은蛇紋石의層階이다. 룸펜과毛布          ○ 삘딩이吐해내는新聞配達夫의무리. 都市計劃의暗示          ○ 둘쨋번의正午싸이렌          ○ 비누거품에씻기어가지고있는닭. 개아미집에모여서콩크리―트를먹고 있다.          ○ 男子를搬揶하는石頭          ○ 男子는石頭를白丁을싫어하드키싫어한다.          ○ 얼룩고양이와같은꼴을하고서 太陽群의틈사구니를쏘다니는詩人. 꼭끼오――. 瞬間 磁器와같은太陽이다시또한個솟아올랐다. ​ ― 1932. 7 ― ​ 이 시는 1930년대 초반, 조선의 젊은이 이상이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간단히 스케치한 내용이다. 이상 시인이 아메리카에 간 것 같지는 않다. 서양식 교육을 받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던 적이 있는 이상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영화 혹은 잡지 등을 통하여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자. 1930년대 초반의 조선의 젊은이가 아메리카인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농경 사회였다. 농경 사회에서 사람들은 정착하여 살아간다. 아침에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 새벽부터 그렇게 바쁠 것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봄에 곡식의 씨앗을 땅에 뿌리면 가을에 가서 수확하는 것이 농경 사회의 생활이니, 그렇게 바쁠 것이 없다. 한가하다. 그런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산업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에 사는 이상 시인으로서는 제법 신기했을 것이다. 그들은 에디슨이 전등을 발명한 이래, 꼭두새벽부터 전등불을 켜놓고 바쁘게 살아간다. 새벽부터 신문이 배달되고, 자명종이 울리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차를 타고 회사에 출근한다. 출근하는 동안에도 그날 할 일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메모를 한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해는 떠오른다.  대낮 /  ―― 어느 ESQUISSE ―― 제목 ‘대낮’은 전등불로 인하여 환하게 밝은, 그래서 사람들이 바쁘게 활동을 하는, 아직 날이 새지 않은 새벽이다. 전등불이 인공 태양이라면, 깜깜한 새벽은 인공 태양으로 인하여 어둠이 밀려가고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된다. 아메리카인은 깜깜한 새벽부터 돌아다닌다. 부제는 ‘어느 ESQUISSE’는 어느 스케치라는 말이다. 아메리카인의 일상 중에서 어느 한 때의 풍경을, 마치 스케치하듯이 시로 표현했다. 시의 본문에는 ‘○’을 중심으로 입곱 개로 나뉘어 있는데, 아메리카인의 생활 중에서 어느 장면, 장면들을 간단히 그린 것이다. ELEVATER FOR AMERICA 아메리카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다. 엘리베이터는 높은 건물을 올라가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높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이외에 계단이라는 것도 있다. 계단으로도 건물을 올라갈 수 있는데, 산업화된 사회 아메리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엘리베이터를 고안했을까? 빨리 올라가기 위해서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는 바쁜 아메리카인을 위한 것이다. 세 마리의 닭은 蛇紋石의 層階이다. 룸펜과 毛布 세 마리의 닭은 무엇일까? 닭은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새다. 그렇다면 날이 밝았음을 알리는, 닭과 같은 세 가지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이 시 전체를 읽어봐야 추리가 가능하다. 미리 말하면, 실제의 닭과, 자명종 시계와, 그리고 새벽부터 움직이는 산업화된 사회 속의 사람들이다.  닭이 울면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샐 때 닭은 운다. 닭이 울면 우리는 날이 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이 샜으니 일어나라고 알리는 것에는 자명종도 있다. 그런데 닭도 없고, 자명종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날이 샌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를 듣거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잠을 자고 있는데 밖에서 많은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두런두런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잠자리에서도 날이 샜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 마리의 닭은 ‘사문석의 층계’와 같다. 층계는 똬리를 튼 뱀처럼 되어 있다. 밑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 층계를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 세 마리의 닭이다. 우리가 층계를 통하여 한 층 한 층 올라가듯이, 날이 새는 것도 세 마리의 닭이 차례로 울어야 한다. 신문배달부가 움직이고 ―> 자명종이 울리고 ―> (그리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 마지막으로 실제 닭이 울어야 날이 새고 태양이 떠오른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는 세 마리의 닭이 울어야 날이 샌다. 아니 날이 새기도 전에 아메리카인들은 벌써 바삐 활동한다. 룸펜과 毛布 룸펜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랑자다. 부랑자는 거지와 유사하다. 그래서 그들은 모포를 덮고 잔다. 조선인 이상은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잔다면, 부랑자와 같은 아메리카인은 거지처럼 담요를 깔고 덮고 잔다. 산업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아메리카인의 생활은 농경 사회 조선에서 살았던 이상이 보기에 이상했을 것이다. 여기저기 도시를 떠돌면서 먹이를 찾아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조선에서는 거지들이 애용하는 모포를 일상으로 깔고 덮고 자는 것도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기야 원래 유목민의 후예인 아메리카인은 본질적으로 떠돌이, 마치 거지처럼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아가는 부랑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동하면서 덮고 자기에 편리한 모포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농경 사회 조선 사람들은 먼 조상 때부터 농토를 중심으로 정착 생활을 해 왔다. 그래서 솜을 둔 이불과 요가 침구다. 솜을 둔 이불과 요를 들고 떠돌 수는 없다. 삘딩이 吐해 내는 新聞配達夫의 무리. 都市計劃의 暗示 날이 새기도 전부터 아메리카인은 마치 날이 샌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맨 처음에는 신문배달부의 무리들이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다. 각 가정에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세 마리의 닭 중에서 날이 샜음을 알리는 첫 번째 닭이다. 이들이 배달해 주는 신문은 도시 계획을 암시한다. 신문을 보면서 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다. 기업가는 앞으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인가도 생각한다. 주가가 오를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도 신문을 통하여 짐작한다. 신문은 바로 도시 계획의 암시다. 둘쨋 번의 正午 싸이렌 다음으로 새벽 6시를 알리는 사이렌 아니 자명종이 울린다. 여기서 첫째 번의 정오는 열두시다. 시계의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둘째 번의 정오는 6시다. 큰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작은 바늘은 큰 바늘과 일직선으로 된다. 일직선으로 있는 두 개의 바늘이 12라는 숫자를 가리킨다. 12시 이후에 두 번째로 12라는 숫자를 가리켰기에 둘째 번의 정오다. 비누 거품에 씻기어 가지고 있는 닭. 개아미 집에 모여서 콩크리―트를 먹고 있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린다는 의미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아메리카인은 닭이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아메리카인은 몸에 비누를 바르고 샤워를 하는가 보다. 그들은 개미집과 같은 연립주택 형태의 집단 거주지에서 산다. 그리고 우리가 밥과 국을 중심으로 아침밥을 먹는다면, 아메리카인은 빵이나 고기를 칼로 썰어서 먹는다. 마치 딱딱한 콩크리―트를 먹는 것과 같다. 男子를 搬揶하는 石頭 남자를 나가라고 희롱하는 돌머리는 괘종시계다. 돌로 된 머리로 종을 들이 받아 소리를 내면서, 남자에게 “이제 그만 출근해라. 출근해라. 어서 출근해야지~~”하면서 마치 희롱하는 듯이 놀리면서, 어서 밖으로 나가라고, 출근하라고 놀린다. 男子는 石頭를 白丁을 싫어하드키 싫어한다. 남자는 이 출근을 강요하는 시계를 마치 백정을 싫어하는 닭처럼 싫어한다. 이른 새벽 거리에 나감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닭인 아메리카인은, 괘종시계가 시각을 알리면서 밖으로 나가라, 출근하라 놀리면서 재촉하는 것을, 닭이 자신을 죽이려는 백정을 싫어하여 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한다. 마치 자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처럼 여겨서, 괘종시계를 싫어한다. 얼룩고양이와 같은 꼴을 하고서 太陽群의 틈사구니를 쏘다니는 詩人. / 꼭끼오――. / 瞬間 磁器와 같은 太陽이 다시 또 한 個 솟아올랐다. 날이 새기도 전에 출근하는 아메리카인은 각종 불빛에 반사되어 희끗희끗 보이는 것이 마치 얼룩고양이다. 그러한 꼴을 하고서, 태양군 즉 전등불빛 사이를 쏘다니는 시인이다.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면서도, 마치 시인이 시상을 떠올리며 중얼거리듯이 중얼거리기도 하고. 시상이 떠올랐을 때 그것을 메모하듯이 무엇인가 적기도 한다. 그들은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 생각난 중요한 일은 수첩에 적기도 하는 것이다. 꼭끼오―― 하고 진짜 닭이 울자, 순간 그 소리에 자석처럼 끌려 올라오듯이, 사기그릇처럼 둥글고 환한 태양이 다시 또 한 개 솟아올랐다. ​ ​ ​ 5. 烏瞰圖 (二) ▣   烏瞰圖 詩第一號 ​ 十三人의兒孩가도로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1934. 7. 24 ―     ‘오감도(烏瞰圖)’는 제목부터 난해하다. 흔히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까마귀가 조감한 세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타당하다. 현대인의 온갖 추한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鳥瞰)한다는 말로 보인다.  '아해(兒孩)'라는 말이 우선 눈에 띈다. 아이라고 하지 않고 왜 아해라고 했는가. 한자 지식이 풍부했던 이상은 ‘아해(兒孩)’의 파자를 생각하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해는 兒+(子+亥)의 파자다. ‘아해’는 아이를 만드는, 돼지와 같은 축생의 씨앗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말이다. 따라서 ‘아해’는 축생과 같은 더럽고 추악한 인간의 성적 욕망과 관련이 있는, 정액 속의 정자를 의미한다. ‘십삼 인의 아해’에서 13이라는 숫자는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로 사용된다. 서양적 학문과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이상으로서는 당연히 이러한 서양적 사고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十三人의 兒孩가 도로를 疾走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고 해 놓고서, 사람들이 그 도로가 무엇인지 모를까 봐 괄호를 해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그 도로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막다른 골목은 더 이상 앞으로 질주 할 수 없는 골목이다. 일정한 거리만큼 가다가는 막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골목이다. 상상해 보면, 여성의 음문에서부터 자궁에 이르는 질(膣)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第一의 兒孩가 무섭다고 그리오. ∼ 第十三의 兒孩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일의 아해로부터 제십삼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 무수한 아해들이 도를 질주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질에 사정한 정액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정자들이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무섭다고 그런다. 수많은 정자들의 여성의 질을 따라서 질주하지만 대부분 난자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게 되고, 한 개 혹은 두 개의 정자만이 난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는 정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 (다른 事情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런데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둘 뿐이라고 한다. 질주하여 난자에 먼저 도달한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우리가 흔히 무슨 일을 목숨을 걸듯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무서운 사람’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정자들을 물리치고 난자에 도달한 그 하나 혹은 두 개의 정자는 참으로 무서운 아해다. 그리고 나머지 정자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나머지 정자들은 난자를 향하여 질주하면서도 죽음을 무서워한다. 다른 사정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 두 가지 결과밖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二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 그 中에 一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그런데 이제는 그 중에서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하고 해도 좋다.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고, 그 중에서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고 해도 좋다. 이제는 성을 생식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쾌락을 목적으로 한다. 무서운 아해거나 무서워하는 아해거나 구별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정자는 난자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를 疾走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길은 뚫린 길이라도 적당하다. 13인의 아해가 도로 즉 여성의 질을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남성이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뚫린 길은 성기를 잡고 자위하는 손이다. 이제는 성을 이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위를 통해서 즐기기도 한다. 십삼 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어차피 자위를 통해서 배출된 정자는 모두 질주를 하지 않으며, 그대로 죽는다. 따라서 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현대인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표현한 시다. 과연 이러한 시를 두고 음란한 내용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현대인의 우울한 삶의 모습을 까마귀가 조감한 시로 볼 것인가? 독자들이 판단할 문제다. ​ ​ ​ ▣  烏瞰圖 詩第二號 ​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 1934. 7. 25 ―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야 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냐. 이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는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아버지가 조을 적에,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상의 연보를 보면, 이상은 1910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아버지 강릉김씨 演昌(연창)과 어머니 박세창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해경(金海卿)이다. 아버지 김연창은 차남이었고, 큰아버지 김연필은 구한말 총독부 기술직에 종사한 전형적인 서울의 중인층이었다. 김연필은 소생이 없는 때여서, 이상의 탄생은 집안의 경사였다고 한다. 세 살 때 큰아버지가 이상 김해경을 양자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상의 연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는 집안의 장자로서의 대를 이어야 하는 이상의 장자의식(長子意識)이 반영된 시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조을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이제는 자손을 번식할 기력이 없고 늙었다는 말이다. 조는 상태는 활발히 활동하지 않고 무기력한 상태다. 아버지가 늙어서 이제 더 이상 자손을 번식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아들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아야 한다. 만약 큰아버지처럼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면 것은 조상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생각이 달랐는지 혹은 기타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개인이 자신의 삶보다는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아버지가 옆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된다. 나의 아버지처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가야 한다.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이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일 뿐이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즉 아버지를 껑충 뛰어넘어서 드디어 먼 조상의 대를 잇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화자는 답답하다. ​ ​ ▣   烏瞰圖 詩第三號 ​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 1934. 7. 25 ―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싸움한다'의 이미를 이해해야 한다. ‘싸움한다’는 두 가지 의미로 쓰였다. 하나는 남녀가 마치 싸움하듯이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쓴다.’는 의미다. 싸움하는 것과 성교를 하는 것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로 껴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을 몰아쉬면서, 격렬하게 행동한다. 또 ‘싸움하는 사람’은 아내와 성교를 하는 화자, 화자의 성교 상대인 아내, 그리고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아 아내를 잘 만족시키지 못하여 애쓰는 화자, 이렇게 셋이다. 그러면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또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기력이 달려서 아내와 자주 성교를 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싸움하지 않는 형태, 즉 자위와 같은 방식으로 성욕을 해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금홍이와 사는 이상의 생활을 상상해 보자. 금홍이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금홍이와 자주 잠자리를 할 수 없던 이상이, 낮에 자위로써 혼자 성욕을 해결하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금홍이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낮에 자위를 한 사람이 그날 밤에 또 아내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또 성교를 할 경우 잘 되겠는가. ‘싸움하지 않는 사람’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동음 이의어를 사용하고, 띄어쓰기도 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설명을 해도 그말이 그말이라 하나도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싸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성교를 하는 것이며, 발기가 잘 되지 않는 화자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행위다. 기본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각자 의미를 적용하여 읽어 보라.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 하였으면 그만이다   ​ ​ ▣   烏瞰圖 詩第四號  患者의容態에關한問題.  診斷 0.1   26. 10. 1931     以上   責任醫師 李   箱  ― 1934. 7. 28 ―     오늘날 서양의 발달한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수학과 과학에서는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파악하고 기술한다. 그래서 서양 학문에서는 수학적 원리, 과학적 법칙 등을 숫자로 간명하게 기호로 표시한다.  그러나 간단한 기호로 표시하는 수학과 과학이 인간의 다양한 정신적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아니 도리어 인간의 다양한 인문 정신을 말살한다. 이런 내용을 다룬 대표적인 시로는 , 등이 있다. 이 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患者의 容態에 關한 問題. 이상한 숫자들 위에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숫자는 서양의 문명을 낳은 수학과 과학의 상징이다. 거꾸로 쓴 이 이상한 숫자들은 서양 학문의 용태와 관련된 숫자들이다. 그리고 책임 의사 이상이 진단했다. 서양 학문의 문제점을 진단한 것이다. 이상한 그림 숫자들은 거꾸로 씌어 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겉모습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거울을 본다. 몸 안에 있는 질병의 상태는 엑스레이 촬영을 통하여 본다. 이상이 살았던 1930년대 초반에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여 병을 진단하였던 것 같다. 를 보면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은 환자의 몸 안에 있는 병의 상태를 보여 준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엑스레이를 찍는다. 그래서 숫자들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이 좌우가 바뀌어 있다. 인체의 내부에 병이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을 보면서 해부를 하고 치료한 다음, 다시 봉합한다. 서양 학문에 내재한 문제점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엑스레이 필름에 찍힌 영상을 보고 진단하고, 절개하여 병을 제거하고, 다시 봉합해야 한다. 거꾸로 된 숫자는 바로 엑스레이로 촬영한 서양 학문이다. 이 숫자들을 조망해 볼 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안 하얀 줄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해부한 자국이다. 그리고 가운데 점들은 그것을 다시 봉합한 바늘 자국이다. 봉합하고 나니, 숫자들이 어긋나 있다. 꿰맨 자국을 따라서 아래 부분의 숫자들이 왼쪽으로 한 칸씩 밀렸습니다. 이는 숫자로 상징되는 서양 학문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치료하나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독자를 위해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서양 과학에 의하면 광선은 삼십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날아간다. 만약 인간이 광선보다 빠른 타임머신을 타고 그 광선을 쫓아간다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은 젊어질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실제 인간의 삶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겠는가. 이상 시인이 보기에 서양의 과학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診斷 0.1 / 26. 10. 1931 / 以上 責任醫師 李 箱 그래서 이상 시인은 모든 것을 어떤 숫자로 도식화해서 표현하는 서양의 학문에 대해서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 그림 아래에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로 결과를 0.1이라고 진단했다. 1이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면 서양의 학문은 0.1에 불과하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들의 방식대로 그 아래에 날짜를 적었다. 년, 월, 일 순서가 아닌 일, 월, 년 순서로 적었다. 그리고 책임의사 이상이 진단을 했다고 서명했다. ​ ​ ▣  烏瞰圖 詩第五號 前後左右를除하는唯一의 痕跡에있어서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神의眼前에我前落傷한故事를有함           臟腑 라는것은 侵水된畜舍와區別될수있을것인가 ​  ― 1934. 7. 28 ―    前後左右를 除하는 唯一의 痕跡에 있어서  ‘전후좌우를 제거하는 유일의 흔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모습이다. 기독(基督)이 인류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전후좌우의 복잡한 말보다,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기독의 삶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해 준다. 翼殷不逝 目不大覩 胖矮小形의 神의 眼前에 그런데 그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게 보지 못한다. 원래 ‘翼殷不逝 目不大覩’는 의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말이다. 산목편에는 ‘翼殷不逝 目不大覩’ 라고 나오지 않고 ‘翼殷不逝 目大不覩’라고 나온다. 에서 말하는 '翼殷不逝 目大不覩'는 날개는 크지만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지만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을 해치려는 자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大’자와 ‘不’자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날개는 크지만 날지 못하고, 눈은 멀리 보지 못한다'는 의미다. 장자에 나오는 구절을 변형하여 활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것을 날개가 크다고 했다. 그러나 멀리 보지 못한다. 지금 십자가 아래에서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데, 그 민망한 꼴을 보고서도, 십자가에서 큰 날개를 펼친 듯 양팔을 벌리고 있는 기독은, 높이 날아서 피하지도 못한다. 눈은 멀리 바라보아 외면하지 못하고, 고래를 아래로 숙여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십자가의 기독은 그 고난을 상징하듯 갈빗대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모습이다. 따라서 '胖矮小形의神(반왜소형의 신)'은 갈빗살이 빈약한 기독이다. 따라서 화자는 그리스도의 상이 새겨진 십자가 앞에서~~ 我前落傷한 故事를 有함 자신이 앞으로 넘어졌던 고사가 있다. 앞으로 넘어진 것은 여자와 성교를 하였다는 말이다. 여자가 뒤로 넘어져 밑에 있고, 남자가 그 위를 앞으로 넘어지면 남녀가 성교하는 모습이다.           臟腑라는 것은 侵水된 畜舍와 區別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위의 그림이 나온다. 그 그림 아래에 ‘장부라는 것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다. 아니 인간의 내장은 물이 침투한 축사와 구별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그림은 물이 침투한 축사의 모습이다. 물이 침투한 축사는 가축의 배설물과 물이 뒤범벅이 되어 매우 지저분하다. 또한 위 그림은 인간의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으로 가득 찬 더러운 공간을 연상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여성의 음부의 내부를 그린 것이다. 입구처럼 보이는 곳이 남성의 성기가 들어가는 곳이며, 그 안의 넓은 공간은 성적 욕망의 배설물인 정액이 들어와, 마치 축사와 같이 지저분하게 된 곳이다.  따라서 위 그림은 여자의 음부의 내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고, 화자는 십자가가 달린 방에서 어떤 여자와 성교를 한 것이다. 이 시는 , , 등과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 화자는 어느 과부와 성교한다. 과부와 성교하는 과부의 집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 ​ ▣   烏瞰圖 詩第六號      鸚鵡  ※ 二匹           二匹        ※ 鸚鵡는哺乳類에屬하느니라. 내가二匹을아아는것은내가二匹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勿論나는希望할것이니라. 鸚鵡   二匹 『이小姐는紳士李箱의夫人이냐』 『그렇다』 나는거기서鸚鵡가怒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붓그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鸚鵡   二匹        二匹 勿論나는追放당하였느니라. 追放당할것까지도없이自退하얏느니라. 나의體軀는中軸을喪失하고또상당히蹌踉하여그랫든지나는微微하게涕泣하얏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獸類처럼逃亡하얏느니라. 勿論그것을아아는사람은或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果然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1934. 7. 31 ― ​ 이상은 여러 명의 여자와 동거했다. 주로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들과 동거했다. 서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젊은 남녀의 짧은 동거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도 그런 여인 중의 하나다.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으나, 그래도 여급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여급들과 동거하면서 한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이상의 생각에 그때그때 함께 사는 것이 남편이요 부인이라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부처럼 한평생을 같이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 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화자가 앵무새처럼 생긴 어떤 여급과 살고 있던 중에, 또 전에 살던 다른 앵무새처럼 생긴 여급이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싸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상은 그 두 여자에 대해서 각각 함께 살 때는 각각을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鸚鵡  ※ 二匹 / 二匹 / ※ 鸚鵡는 哺乳類에 屬하느니라. 앵무새 두 필이 있다.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 ‘匹(필)’은 말이나 소 등의 가축을 세는 단위다. 그리고 앵무새는 포유류에 속한다는 말로 봐서,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유류에 속하는, 앵무새와 유사한 두 여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앵무새는 겉모습이 아름답다. 외양이 화려하다. 카페나 술집에 나가는 여급은 보통 여염집 여자보다 외양이 화려하다. 따라서 앵무새 두 필은 이상이 잠시 함께 살았던, 여급 생활을 하던 여자들인 것으로 보인다. 한 앵무새는 지금 살고 있는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앵무새는 지금 여자와 살고 있는 곳에 찾아온, 전에 이상과 함께 살았던 여자로 보인다. ‘앵무새 두 필, 두 필’하고 반복하는 것은 ‘왜 두 여자가 여기에 함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 같다. 내가 二匹을 아 아는 것은 내가 二匹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니라. 勿論 나는 希望할 것이니라. 화자가 여급 생활을 하는 한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예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가 찾아와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자가 앵무새 두 필을 아 아는 것은 사실은 화자가 두 필을 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두 여자 앞에서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있다. 당연히 당황하였을 것이다.) 화자가 두 여자를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다. 알고 있다. 한 여자는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다.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여자가 왜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두 여자를 아는 것은 결국 두 여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두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왜 함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두 여자가 함께 있는 이유를 알기를 희망한다. 鸚鵡 二匹 / 二匹 앵무새 두 필, 앵무새 두 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왜 두 여자가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지 화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되뇌고 있다. 『이 小姐는 紳士 李箱의 夫人이냐』 『그렇다』/ 나는 거기서 鸚鵡가 怒한 것을 보았느니라. 나는 붓그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겠느니라. “이 소저는 신사 이상의 부인이냐?”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전에 살았던 여자를 가리키면서, 화자에게 말한다. 화자는 “그렇다”고 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여자를 찾아와서 이상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이 들어오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여자가 물은 것이다. 그러자 화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부인이 아니지만 전에 함께 살고 있을 때는 그 여자도 부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화자는 거기서 앵무새가 노한 것을 보았다. 지금 함께 사는 여자가 노한 것이다. 화자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화자는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붉어졌었겠느니라’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보통 붉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것이나,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화자의 부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이상은 얼굴이 붉어질 이유가 없다. 鸚鵡 二匹 / 二匹 / 勿論 나는 追放 당하였느니라. 追放 당할 것까지도 없이 自退하얏느니라. 나의 體軀는 中軸을 喪失하고 또 상당히 蹌踉하여 그랫든지 나는 微微하게 涕泣하얏느니라. 앵무새 두 필, 두 필. 화자는 그 여자 둘이 왜 서로 자신을 놓고 서로 부인인지를 따지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전에 살던 여자는 그때의 부인이고, 지금 사는 여자는 지금의 부인인데 그것을 왜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화자는 거기서 추방당하였다. 지금 살고 있는 여자가 화자를 추방하였을 것이다. 아니 추방당할 것까지도 없이 스스로 물러나왔다.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하는 두 여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물러나온 것이다. 화자의 몸은 중심축을 잃어버리고 또 상당히 비틀거려서 그랬던지 미미하게 흐느껴 울었다. 당황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눈물도 났다. 왜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하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가 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저기가 저기지' 그래 두 여자가 모두 여급이지. 나는 신식교육을 받은 신사 이상. 나의 아내가 여급? 너와 나는 부부가 될 수 없다? 나는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화자는 지금 비로소 자신이 아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두 여자와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달았다. 두 여자는 앵무새와 같은 여급이고, 두 여자의 대화에서 나왔듯이 나는 신사다. 자신을 신사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사람들은 여급들과 산다는 것을 스캔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sCANDAL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화자는 스캔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캔들에서 s자는 소문자로 작고 CANDAL은 대문자로 크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다. 스캔들은 ‘섹스에 대한 캔들’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촛불 마주하여 앉은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환하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촛불에서 멀리 있는 사람은 촛불이 비추는 자신의 주위를 어둡게 생각하듯이, 여급과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사 이상이 여급과 사는 것을 SEX SCANDAL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너』『너구나』/『너지』『너다』『아니다 너로구나』나는 함뿍 젖어서 그래서 獸類처럼 逃亡하얏느니라. 勿論 그것을 아 아는 사람은 或은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러나 果然 그럴는지 그것조차 그럴는지. 너. 너구나. 너지. 너다. 너는 아니다. 너로구나. 화자는 지금 자신이 함께 살았던 여급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사실 이상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상 시인은 4~5명의 여급들과 살았다고 한다. 이상 시인의 가까운 주변 사람들은 이상 시인과 여급들과 산 것을 두고, ‘가벼운 동거’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정식 결혼으로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여튼, 화자는 함뿍 생각에 젖어서, 짐승의 무리처럼 도망하였다. 짐승처럼 섹스 스캔들이 될 만한 생각들을 더듬어 본 것이다. ‘獸類(수류)’는 성적 욕망만을 추구했다는 짐승과 같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와, 빠르다는 의미를 동시에 비유하는 말이다. ‘도망하였다’는 말은 현재의 화자의 위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과거로 생각을 되짚어 본 것이 도망하는 것이다. 물론 화자가 과거의 함께 살았던 여급들의 생각을 되짚어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 혹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과연 그 여급들과 살았던 것도 그렇게 생각할는지~~~, 그것조차 사람들은 그렇게 즉 스캔들로 생각할는지~~~ 생각하고 있다. ​ ​   ▣    烏瞰圖 詩第七號 ​ 久遠謫居의地의一枝·一枝에피는顯花·特異한四月의花草·三十輪·三十輪에前後되는兩側의明鏡·萌芽와같이戱戱하는地平을向하여금시금시落魄하는滿月·淸澗의氣가운데滿身瘡痍의滿月이劓刑當하여渾淪하는·謫居의地를貫流하는一封家信·나는僅僅히遮戴하였더라·濛濛한月芽·靜謐을蓋掩하는大氣圈의遙遠·巨大한困憊가운데의一年四月의空洞·槃散顚倒하는星座와星座의千裂된死胡洞을跑逃하는巨大한風雪·降薶·血紅으로染色된岩鹽의粉碎나의腦를避雷針삼아沈下搬過되는光彩·淋漓한亡骸·나는塔配하는毒蛇와같이地平에植樹되어다시는起動할수없었더라·天亮이올때까지.  ― 1934. 8. 1 ―     이상은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한다. 그러나 1933년 23세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된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이와 동거에 들어간다. 화자가 지금 떠올리는 ‘구원한 적지’는 ‘일봉가신’을 받은 시점에서 회상하고 있는, 과거에 요양차 갔던 백천온천이다. 일봉가신을 받은 것은 시를 쓰는 시점인 현재보다 과거다. 따라서 시를 쓰는 시점보다 앞서서 일봉가신을 받았고, 일봉가신으로 인하여 화자가 회상했던, 금홍이와의 만남은 더 앞선 과거다. 대체로 문장이 명사형으로 끝난다. 무엇인가 회상하거나 상상하는 대목 같다. 서술어가 제대로 표현된 것은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와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두 군데 뿐이다. 그것도 회상 시제 선어말어미 ‘―더―’가 사용되었다.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일봉가신을 받았던 시점의 상태를 회상하면서 썼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 시에는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과연 ‘적거의 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이 어느 상황에서 화자에게 왔는가. 그 내용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을 잘 설정해야 시의 전체적 의미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다음과 같이 추리해 보겠다. 화자가 서울에서 금홍이와 함께 살던 시절에, 집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온다. 지금 화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는 과거에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 사는 것을 반대하거나 질책하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 편지를 받고 처음 금홍이를 만났을 당시를 회상하였고, 지금 시를 쓰는 시점에 그 편지를 받을 당시를 회상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복잡한 비유를 사용하고 있기에, 이 시는 그 의미를 쉽게 알기 어렵다. 久遠謫居의 地의 一枝. 一枝에 피는 顯花 시간적으로도 오래 되었고 공간적으로 먼 유배지 백천온천지. 그리고 그 유배지에 심겨진 한 그루의 나무처럼 외롭게 심겨진 화자. 그 나뭇가지와 같은 화자의 머리에 피어나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 그 달과 같은,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명의 여자. 금홍이. 여기서 화자는 집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과거의 유배지에서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꼼짝 않고 앉아서 생각하고 있는 화자는 나뭇가지다. 나뭇가지에는 한 떨기의 꽃과 같은 달이 떠오르고 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초저녁, 머릿속에 떠오르는 달과 같은 모습의 여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달과 같은 그 여자는 금홍이다. 금홍이를 떠올리게 된 것은, 화자가 금홍이를 만났던 백천온천지를 관류하는, 일봉가신 때문이다. 特異한 四月의 花草 / 三十輪 / 三十輪에 前後되는 兩側의 明鏡 화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떨기 꽃, 즉 금홍이는 사월에 피어나는 화초와 같이 특이한 화초다. 삼십일에 한 번씩 찼다가는 기우는 보름달. 보름달에 전후되는 양측의 명경과 같은, 보름달보다는 다소 갸름한, 화초였다. 여기서 금홍이를 화초로 비유한 것은 금홍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금홍이는 보름달보다는 약간 갸름한, 손거울과 같은, 아름답고도 특이한, 화초와 같은 여자였다. 萌芽와 같이 戱戱하는 地平을 向하여 금시금시 落魄하는 滿月 돋아나는 어린 싹과 같이 희희하는 지평은 곧 금홍이와 처음 만나서 즐거움이 싹트던 백천온천지다. 그 백천온천을 향하여 지금 바로 빛을 보내고 있는 보름달과 같은 금홍이를 떠올리고 있다. 淸澗의 氣 가운데 滿身瘡痍의 滿月이 劓刑當하여 渾淪하는 / 謫居의 地를 貫流하는 一封家信 / 나는 僅僅히 遮戴하였더라. 맑은 산골물의 기운 가운데에 있는 백천온천지. 만신창이의 만월처럼 기생으로서 혹은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은 동그란 얼굴의 금홍이. 비형을 당한 사람이 고통으로 소리치듯이 콧소리로 교성을 지르고 있는 혼돈의 땅, 화자가 유배와 사는 백천온천지를 꿰뚤어 보는 듯한 일봉가신. 이로하여 화자는 간신히 금홍이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청간의 기운 가운데’은 맑은 산골물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다. 이는 백천온천지다. 만신창이의 만월이 비형을 당하여 혼륜하는 적거의 지는, 기생으로서 창녀로서 온몸에 상처를 입고, 밤마다 코를 베인 형벌을 받는 듯이, 콧소리를 내면서 교성을 지르는 혼돈의 땅이면서, 화자가 유배를 갔던 땅 백천온천지다. 화자는 일봉가신을 받고 그때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근근히 저대하였다’는 말은 ‘근근이 이것을 머리에 이었다.’는 말인데, 간신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는 의미다. 濛濛한 月芽 / 靜謐을 蓋掩하는 大氣圈의 遙遠 / 巨大한 困憊 가운데의 一年四月의 空洞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금홍이와의 생활의 시작, 금홍이와의 생활의 고요함의 뚜껑을 덮었던 대기권의 멀고 아득함(백천온천에서의 금홍이와의 생활이 화자가 살던 서울과 멀어서, 그 소문이 서울에 있는 가족에까지 나지 않았음을 의미함). 거대한 어려움 속에서 보낸 1년 4개월의 텅 빈 골짜기의 생활.   槃散顚倒하는 星座와 星座의 千裂된 死胡洞을 / 跑逃하는 巨大한 風雪 / 降薶 / 血紅으로 染色된 岩鹽의 粉碎 남녀가 만나서는 서로 즐기다가 헤어지며 또 다른 계집의 몸 위에 넘어지는, 뭇사람들이 서로 만났다가는 헤어지는, 죽음이 드리운 골짜기. 그 골짜기를 따라 죄를 짓고 도망치듯 달아나는 거대한 눈바람 즉 교성. 남근으로 내리쳐서 구멍 즉 음부를 메우는 소리. 피처럼 붉게 염색된 발기된 남근으로 암염(巖鹽)을 분쇄하기 위해 절구질 하듯이, 음부를 내리치며 정액을 쏟아내는 곳. 환락가로서의 백천온천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의 腦를 避雷針삼아 沈下搬過되는 光彩/ 淋漓한 亡骸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밑으로 투과되어 지하로 스며들어가고 있는, 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홍이의 기억들. 여기서 화자는 기억(뇌)을 통해서 달로 비유된 금홍이에 대한 기억(광채)이 뇌리를 스쳐가는 모습을, 마치 달빛이 화자의 뇌를 피뢰침 삼아서 내려온 다음 화자의 뇌를 통과하여 지하로 스며드는 달빛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흠뻑 젖어보는, 잊었던 금홍이 모습. ‘임리’는 흠뻑 젖는다는 말이다. ‘망해’는 까마득히 잊었던 금홍이 모습을 의미한. 따라서 오랜만에 금홍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금홍이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추억에 흠뻑 젖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塔配하는 毒蛇와 같이 地平에 植樹되어 / 다시는 起動할 수 없었더라 / 天亮이 올 때까지 화자는 탑과 짝을 이루는 독사와 같이 평지에 나무로 심겨져, 다시는 일어나 움직일 수 없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서 화자는 움직일 줄 모르는 탑의 짝인,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처럼 앉아서, 금홍이와 만났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치 평지에 심겨진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이 올 때까지. ​ ​   ▣    烏瞰圖 詩第八號  解剖 第一部試驗   手術臺             一              水銀塗抹平面鏡     一              氣壓               二倍의平均氣壓              溫度               皆無    爲先痲醉된正面으로부터立體와立體를爲한立體가具備된全部를平面鏡에映像시킴. 平面鏡에水銀을現在와反對側面에塗沫移轉함. (光線侵入防止에注意하여)徐徐히痲醉를解毒함.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支給함.(試驗擔任人은被試驗人과抱擁함을絶對忌避할것) 順次手術室로부터被試驗人을解放함.翌日.平面鏡의縱軸을通過하여平面鏡을二片에切斷함. 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滿足한結果를收得치못하였음.   第二部試驗  直立한平面鏡       一             助手               數名 野外의眞空을選擇함. 爲先痲醉된上肢의尖端을鏡面에附着시킴. 平面鏡의水銀을剝落함. 平面鏡을後退시킴. (이때映像된上肢는반드시硝子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假說함) 上肢의終端까지. 다음水銀塗抹. (在來面에) 이瞬間公轉과自轉으로부터그眞空을降車시킴. 完全히二個의上肢를接受하기까지. 翌日. 硝子를前進시킴. 連하여水銀柱를在來面에塗抹함. (上肢의處分)(惑은滅形)其他. 水銀塗抹面의變更과前進後退의重複等. ETC 以下未詳  ― 1934. 8. 2 ―   시인이 아팠는가 보다. 병원에 갔는가 보다.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였는가 보다. ‘제일부시험’은 엑스레이 촬영하는 내용이다. ‘제이부시험’에서는 엑스레이 사진을 바탕으로 수술을 받는 장면이다. 시인이 직접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詩第八號  解剖 소제목 '해부'는 이른바 이상이 몸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 장면을 바탕으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第一部 試驗 ‘제일부시험, 제이부시험’에서 '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화자가 서양식 치료 방식에 대한 신뢰를 보내지 않는 상태에서, 과연 그들이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해 본다는 의식 즉 의사의 치료행위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또 전체적으로 시험을 보는 장면을 연상하도록 한다.   手術臺 : 一, 水銀塗抹 平面鏡 : 一, 氣壓 : 二倍의 平均氣壓, 溫度 : 皆無  제일부 시험을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수술대 한 개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수술대는 엑스레이를 찍는 기계를 의미한다. 수은도말평면경이 한 개 필요하다. 여기서 수은도말경은 수은을 바른 거울이라는 뜻인데, 엑스레이 필름이다. 보통 엑스레이 찍는 기계에 넣는 필름으로서, 필름통 속에 들어 있다. 수은을 입힌 거울은 보통 거울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엑스레이 필름을 거울이라고 표현한 것은 거울에 사람의 형상이 그대로 비추듯이 엑스레이 필름에도 사람의 내부에 있는 병의 형상이 그대로 비춘다는 의미에서 거울로 표현했다. 기압은 두 배의 평균 기압을 준비한다.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있으면 숨이 막혀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엑스레이를 찍을 때 숨을 멈추는 것을 상상한다면 왜 두 배의 평균 기압이 준비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찍을 때 답답한 채로 숨을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온도는 개무하다. 전혀 없다. 웃옷을 벗고, 차가운 기계에 몸을 부착하여 찍는 것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차가운 것은 온도가 없는 것이다. ‘溫’은 따뜻할 온 자다. 따뜻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 온도인데, 차가운 것 밖에 없다는 발상이다.   爲先 痲醉된 正面으로부터 立體와 立體를 爲한 立體가 具備된 全部를 平面鏡에 映像시킴 마취된 정면이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마치 마취 된 듯이 정면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입체와 입체를 위한 입체’에서 앞의 두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몸체, 마지막 ‘입체’는 엑스레이 기계다.  사람의 몸체와 엑스레이 기계 전부를 평면경에 영상 시킨다. 방사선은 어디에선가 나와서 사람의 몸을 통과하여, 사람이 서 있는 기계 속의 필름으로 들어가서 사람의 형상을 필름에 나타나게 한다. 따라서 사람과 기계를 모두 영상 시키는 것이다.   平面鏡에 水銀을 現在와 反對 側面에 塗沫移轉함 거울에서는 바라보고 있는 유리의 뒷면에 수은을 도말함으로써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엑스레이 촬영에서도 사람의 형상이 필름에 나타나도록 하자면, 현재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필름의 반대 측면에 수은을 도말해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표현이다.   (光線 侵入 防止에 注意하여)徐徐히 痲醉를 解毒함 엑스레이 필름은 광선이 침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광선침투에 유의하면서 서서히 마취를 해독한다. 마취가 엑스레이 기계 앞에서 꼼짝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마취를 해독하는 행위는 꼼짝 않던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다. 촬영을 마치고 기계 앞에서 물러난다.   一軸鐵筆과 一張白紙를 支給함.(試驗 擔任人은 被試驗人과 抱擁함을 絶對 忌避할 것) ‘일축철필’은 쇠로 된 지팡이이다. ‘일축’은 그것을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 ‘철필(鐵筆)’은 쇠로 된 붓과 같은 것, 즉 쇠로 지팡이다. 환자들이 짚는 것이다. ‘일부시험’과 연결하여 지팡이를 철필로 표현했다. 일장백지는 한 장의 백지다. 원래는 진료기록 서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병이 심각한 환자의 입장에서 진료기록 서류의 글이 전혀 보이지 않고, 또 시험 볼 때 백지를 지급하는 것과 연결하여 표현한 것이다.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진료 기록을 받아서 촬영실을 나오는 장면이다. 시험을 담당한 의사는 환자와 포옹함을 절대 꺼리고 피한다. 환자로부터 병이 옮을까봐서 부축하기를 기피한다.   順次手術室로부터 被試驗人을 解放함 순차수술실은 엑스레이 촬영실과 수술실이다. 여기서는 엑스레이 촬영실이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엑스레이 촬영실에서 촬영을 하고, 다음으로 수술실에서 수술을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 피시험인은 환자다. 환자가 촬영실에서 나온다. 힘겹게 촬영을 마치고 촬영실을 나오는 것은 해방이다.   翌日. 平面鏡의 縱軸을 通過하여 平面鏡을 二片에 切斷함 다음 날, 평면경 즉 엑스레이 사진의 세로축을 통과해서 평면경 즉 엑스레이 필름 통을 두 조각으로 절단한다. 필름 통에서 필름을 꺼내는 장면이다.   水銀塗抹 二回 엑스레이 필름을 현상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수은을 도말한 거울에는 사람의 형상이 나타난다. 엑스레이 필름에는 환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수은도말을 2회 했다는 것은 엑스레이 필름에서 다시 형상이 드러나도록, 약품을 처리하여 현상한 것으로 보인다.   ETC 아직 그 滿足한 結果를 收得치 못 하였음 기타, 아직 그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화자는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엑스레이만 찍는다고 병이 낫지 않는다. 이부 시험을 볼 수밖에 없다. 이부시험은 수술이다.   第二部 試驗,  直立한 平面鏡 一, 助手 數名  제이부 시험 즉 수술을 하기 위한 준비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직립한 평면경 한 개가 준비된다. 직립한 평면경은 세로로 세운 에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병원에 가면 벽면에 있는, 불빛이 있는 판 위에 엑스레이 필름을 걸어 놓고, 그것을 보면서 수술을 한다. 직립한 평면거울은 걸어 놓은 엑스레이 필름을 말한다. 조수 수명이 준비된다. 조수는 간호원이다. 간호원은 의사가 환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준비한 조수다. 여러 명이 필요하다.   野外의 眞空을 選擇함 시험 즉 수술을 야외의 진공을 선택해 그곳에서 한다. 야외는 자신의 온 몸이 드러난 공간이다. 수술을 할 때 온 몸을 벗은 채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이다. 진공의 공간에서 시험 즉 수술을 한다. 진공에서는 숨을 쉴 수 없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마취 상태와 유사하다. 옷을 벗고, 마취를 했다는 뜻이다.   爲先 痲醉된 上肢의 尖端을 鏡面에 附着시킴 우선 마취된 상지 즉 팔의 첨단 즉 뾰죽한 것을 거울면에 부착시킨다. 마취된 상지의 첨단은 수술 도구를 잡고 있는 의사의 손끝에 달린 수술 도구다. 의사의 팔을 마취된 상지로 표현한 것은 의사가 수술할 때 경직된 자세로 수술을 함을 표현한 것이다. 경직된 모습이 마치 마취된 모습과 흡사하다. 첨단을 경면에 부착시킨다는 것은 수술 도구를 엑스레이 필름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수술 도구의 뽀족한 끝을 환자의 몸에 부착시키지 않고, 필름에 부착시키는 것인지는 다음에 나온다.   平面鏡의 水銀을 剝落함 (수술 도구로) 평면경 즉 필름의 수은을 벗겨 낸다. 환자의 환부가 필름에 나타났고, 그 필름이 거울과 같다면, 거울 뒷면의 도말된 수은을 벗겨낸다면 환부가 거울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수술을 통하여 환부를 제거하는 것을 거울의 뒷면에 있는 수은을 벗겨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平面鏡을 後退시킴. (이때 映像된 上肢는 반드시 硝子를 無事通過하겠다는 것으로 假說함) 上肢의 終端까지 평면경 즉 필름을 환자의 몸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 때 필름이라는 평면경에 영상된 상지 즉 의사의 팔은 반드시 초자 즉 유리를 무사히 통과하겠다는 것을 가설한다. 필름 즉 거울에 영상된 의사의 팔이 거울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의사의 팔은 필름에 찍힐 것이고 결국 환자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의사의 팔이 필름 즉 거울에 비쳐서 형상으로 남아 있지 않고 무사히 통과하여야 환자의 실제 몸에 의사의 팔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난해한 부분이다. 팔의 종단 곧 잡고 있는 수술 도구까지 거울을 무사히 통과하여야 한다.   다음 水銀塗抹. (在來面에) 이 瞬間 公轉과 自轉으로부터 그 眞空을 降車시킴. 完全히 二個의 上肢를 接受하기까지 다음으로 박락한 필름 즉 벗겨낸 거울에 수은을 다시 입힌다. 앞에서 거울의 수은을 벗겨 냄으로써 환부를 도려낸다고 하였는데, 수은이 벗겨진 부분을 그냥 두면, 그 부분은 환자의 영상이 투과해 버린다. 그러면 환자는 구멍이 뻥 뚫린 상태의 사람이 되고 만다. 따라서 수술 후에 다시 거울 면에 수은을 도말하여야 환부를 치료한 부분이 다시 필름에 촬영되고, 결국 환자의 몸이 정상이 되기 때문이다. 재래면은 본래부터 있었던 화자의 몸이다.  이 순간 공전과 자전으로부터 그 진공을 해방시킨다. 공전과 자전은 화자가 마취된 상태다. 마취가 되면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데, 이를 공전과 자전이라고 표현했다. ‘진공을 강차시킨다’는 것은 마취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차를 타면 어지럽고 멀미를 한다. 마취도 이와 유사하다. 차에서 내리면 멀미가 사라진다. 두 팔을 환자가 완전히 접수할 때까지 마취를 해독한다. 상지를 접수하는 것은, 환자가 마취가 되었을 때는 두 팔을 양쪽으로 늘어뜨리는데, 마취에서 깨어나면 늘어뜨렸던 팔을 거두는 모습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翌日. 硝子를 前進시킴. 連하여 水銀柱를 在來面에 塗抹함. (上肢의 處分)(惑은 滅形) 다음날, 유리를 전진시킨다. 환자의 몸 쪽으로 유리를 전진시키면 그 거울 혹은 필름과 달리 환자의 환부가 유리에 남지 않고 투과된다. 따라서 환자는 환부의 흔적이 거울 혹은 필름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환부가 보이지 않는 환자의 몸은 정상적인 상태가 된다. 환자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계속해서 체온계를 재래면 즉 환재의 본래부터 있었던 몸에 도말한다. 여기서 도말한다는 것은 환자의 몸에 부착시킨다는 의미다. 체온을 재는 장면이다. 체온을 재는 것은 팔의 처분과 혹은 팔의 사라지는 형상과 관련이 있다. 체온을 잴 때의 팔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길게 뻗은 팔을 오므려 짧게 몸에 부착하는 모습이다.   其他. 水銀塗抹面의 變更과 前進後退의 重複 等 기타. 수술 후의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수술 후 다시 촬영을 했고, 필름에 다른 모습이 촬영되었다. 전진과 후퇴를 중복했다. 수술 후 여러 번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기타 여러 가지 조처가 있었다.   ETC 以下 未詳 기타 이하는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 ​ ​ ▣  烏瞰圖 詩第九號   銃口 ​ 每日같이烈風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 恍惚한指紋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내消化器管에묵직한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銃口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앝었더냐. ​  ― 1934. 8. 3 ―     銃口 이 시는 남자끼리의 동성애 경험을 표현한 시다. 두 남자가 서로를 상대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사정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제목 ‘총구’는 정액을 쏘아 방출하는 남근을 비유한 것이다. 총알을 발사하는 총구, 정액을 총알처럼 쏘는 남근, 제목의 의미를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每日같이 烈風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매일같이 거센 바람이 불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았다. 여기서 ‘열풍(烈風)’은 ‘열풍(熱風)’과 다르다. 열풍(烈風)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상대 쪽에서 화자 쪽으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다. 누군가가 화자에게 매일같이 동성애의 유혹을 보낸 것 같다. 그러더니 드디어 화자의 허리에 큼직한 손이 닿는다. 누군가가 화자를 성적 대상으로 느꼈는가 보다. 화자보다 큰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화자보다 큼직한 손, 그리고 화자의 허리를 감싸는 손, 그 손의 주인공은 화자를 마치 남자가 여자의 허리를 감싸듯이 다정히 감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남성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동성애자다. 恍惚한 指紋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땀내가 스며들었다. 화자가 상대의 남근을 잡고 열심히 애무했다. 땀이 손에 날 만큼 애무했다. 그러자 화자도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 “사정하라. 나도 사정할 것이다.”라고 상대가 말했다. 나는 내 消化器管에 묵직한 銃身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銃口를 느낀다. 화자는 자신의 소화기관 즉 입에, 묵직한 총신(銃身) 즉 곧 사정하려는 남근을 느끼고, 자신의 다문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 즉 상대의 사정하여 정액으로 매끈매끈해진 남근을 느낀다. 그리더니 나는 銃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 방 銃彈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배앝었더냐. 그러더니 화자는 총을 쏘듯이 눈을 감고, 한 방 총탄 대신에 입으로 무엇을 뱉었다. 화자는 사정을 하지 못한 것 같다. 화자가 눈을 감은 것은 상대의 정액이 입에 들어오자 불결한 생각에 눈을 감은 것 같다. “쏘아라, 쏘으리로다”라고 말한 상대방은 화자에게 총탄 대신에 무엇을 쏘았고, 화자는 그 쏘은 것을 뱉은 것이다. 그것은 상대가 쏜 정액이다. ​ ​ ​ ▣   烏瞰圖 詩第十號  나비 ​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아가리라. 이런말이決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 ― 1934. 8. 3 ―   ​ 찢어진 壁紙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상상해 본다. 죽어가는 나비는 기독이다. 기독은 팔을 벌리고 있다. 나비의 모습이다. 기독은 갈빗대가 드러났다. 연약한 모습이다. 기독은 피를 흘리고 있다. 죽어가는 모습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느 집의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의 상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가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을까. 1930년대, 찢어진 벽지를 바르고 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많이 다녔을 것이다.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헌금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다녀야 그래도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 아닐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을 사랑한다. 가난한 이웃을 더욱 생각하는 종교가 기독교다. 가난한 사람은 기독 앞에서 심리적으로 평등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은 이승에서는 가난하지만 저승에서라도 천당에 태어나서 고통이 덜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기독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참고 견디게 하는 힘을 나누어 주는 존재다.  하여튼 찢어진 벽지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가난한 어느 사람의 집에 걸려 있는 십자가다. , , 에 나오는, 어느 젊은 과부의 집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幽界에 絡繹되는 秘密한 通話口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저승 세계에 왕래할 수 있는 비밀한 통화구다.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은, 그에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미밀스런 통화구다. 따라서 ‘그것은’ 십자가의 기독이다.   어느날 거울 가운데의 鬚髥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어느 날 화자는,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보고 있다. 거울은 실제는 아니되, 실제와 닮은 상을 보여주는 도구다. 따라서 거울에 비친 수염은 기독의 수염과 유사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가운데의 수염이다. 기독의 수염은 얼굴에 났고, 거울에 비친 기독의 수염을 닮은 수염은 가운데에 났다. 그렇다면 수염은 여자의 음모다.  그 음모에 붙어서 죽어가는 나비는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과 닮은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기독이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은 나비의 모습과 유사하다. 나비는 화자의 힘없이 늘어진 남근이다. 고환이 양쪽에 있고, 그 고환 사이에 축 늘어진 남근은 십자가에 매달려 힘없이 늘어진 기독이다. 죽어가는 나비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날개가 축 처진 나비 곧 남근은,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나비가 이슬만 먹고 살듯이, 화자의 남근은 가운데 수염 즉 음모가 수염처럼 난 여성의 성기의 입구에 어리는 체액을 먹는다. 그런데 그 체액이 가난한 이슬이다. 힘이 없어 축 처진 화자의 남근은 여성에게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다. 여성의 음부에서는 체액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이슬만 먹는다.   通話口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아가리라 벽지가 찢어진 집에 사는 사람이, 십자가를 손바닥으로 꼭 쥐면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가 죽으면~~천당에 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듯이, 화자도 자신의 힘없는 남근을 정액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꼭 잡고 자위를 하면, 마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가 끝나면 일어서듯이, 화자의 늘어진 남근도 일어설 것이다. 제대로 발기될 것이다.  에 보면 여성에 대한 이상의 의식의 근원을 엿볼 수 있다. 여성도 끊임없이 성적으로 만족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은 여자와의 관계는 성적으로 얼마나 잘 만족시켜 줄 수 있는가가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믿는다. 이런 이상으로서 잘 발기되지 않는 자신의 남근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상은 자신의 남근이 잘 발기가 되지 않고 힘이 없는 것은 자주 정액을 분출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힘찬 남근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자위를 할 때나 혹은 여자와 관계할 때, 정액을 분출하지 않고 한다면, 그 정액이 밖으로 나가지 않음으로써 늘 힘찬 남근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름대로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이런 말이 決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 한다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을 남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 ​ ▣   烏瞰圖 詩第十一號  ​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딪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직였든들洪水를막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 1934. 8. 4 ―     이상의 언어 구사는 상식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의 시는 난해하다는 것은 늘 타당한 명제였다. 난해하다는 것은 풀이가 어렵다는 말이다. 난해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난해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상을 천재 시인이라고 말한다. 타당한 명제다. 그러나 왜 천재 시인인지는 잘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상태를 천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이 천재의 진정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이제는 이상의 천재성은 언어 구사의 천재성, 수사적 천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상은 시에서 수사의 천재다. 그러면 이상의 수사적 문제를 이해하면 이상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기컵은 내 骸骨과 흡사하다 사기컵은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내 해골도 무엇인가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각각 비유된 사기컵과 내 해골은 또 그 어떤 유사한 속성을 공유한다. 이 정도만 문장을 분석할 능력이 있어도 이 구절의 의미를 상상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기컵의 속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어떤 속성을 가진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고 했다. 먼저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 해골,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내 해골은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이상의 시를 두루 읽어본 사람, 그리고 그 두루 읽어본 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만이 ‘내 해골’이 무엇을 비유했는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내 해골은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의 해골 즉 화자의 모습과 화자의 남근은 형태상 유사하다. 머리통 모양의 귀두, 목처럼 잘록한 귀두 아래, 그리고 몸통과 같은 이하 부분은 마치 사람의 상체 형상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기의 화자의 남근은 성적 민감성으로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졌다. 깨진다는 것은 여자를 보면 쉽게 흥분하고, 또 여자와 접하여 쉽게 사정을 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동정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기컵으로 비유된 대상은 어떤 처녀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처녀는 사기컵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처녀성은 깨지기 쉬운 것이다. 결국 사기컵은 화자의 해골과 비슷하다. 처녀는 화자와 생김새도 비슷하며, 처녀는 화자의 남근처럼 깨지기 쉬운 속성도 지녔다. 이제부터 사기컵은 어느 처녀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接木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쩍들어 마룻바닥에 메여 부딪는다 화자가 그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을 때, 팔에서는 난데없이 팔 하나가 마치 접목하듯이 돋아났고, 그 팔에 달린 손이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메어 부딪게 했다.  화자가 처녀를 손으로 꼭 쥐었다. 조그만 사기컵을 손으로 꼭 쥐는 모습은, 커다란 처녀를 포옹하는 모습이다. 그러자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팔이 돋아나서 그 처녀를 번쩍 들어서 마룻바닥에 쿵 하고 눕혔다.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가 처녀를 포옹하는 순간,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녀를 범하려는 순간이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死守하고 있으니 散散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흡사한 내 骸骨이다 화자의 팔은 그 처녀를 사수하고 있으니, 화자는 처녀를 눕혀 놓은 채 꼭 껴안기만 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처녀가 아니다. 그것은 처녀와 속성이 흡사한 화자의 남근이다. 화자는 처녀를 범하지 않은 채 사정했다. 화자만 깨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동정이 깨진 것이다. ​ ​ ▣   烏瞰圖 詩第十二號 ​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戰爭이끝나고平和가왔다는宣傳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不潔한戰爭이始作된다.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 1934. 8. 4 ― ​ ​   과거에, 군인들만 살아가는 병영은 남성들만의 공간이다. 젊은 군인들이 병영에서 풀려났을 때,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인 것 같다. 병영에서 성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었던 젊은 군인들은 휴가를 나온다던가 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창녀촌이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空中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때 묻은 빨래조각이 한 뭉텅이 공중으로 날아 떨어진다. 창녀촌을 찾아 성적 욕망을 해결하고자 하는 젊은 군인이 옷을 벗어서 공중에 급히 내던지며 서두르는 모습이다. 그것은 흰 비둘기 떼다. 속옷의 흰 색깔과 비둘기의 흰 색깔은 유사하다. 전시에는 군인이 병영 밖으로 나올 수 없으나 평화 시에는 병영 밖으로 휴가를 나올 수 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그래서 공중으로 날았다가 떨어지는, 급히 벗어 던지는 때 묻은 빨래조각을 흰 비둘기 떼라고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욕을 해결하지 못한 군인들은 ‘때 묻은 빨래조각’을 벗어던지는 것일까. 이 시에는 성욕을 해결하는 것을 방망이질하여 때를 씻는 행위로 나타내고 있는데, 왜 그런 발상을 한 것일까. 참으로 궁금했고, 고민했던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은 늘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때가 묻은 옷은 그것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묵었던 성욕을 해결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 때가 묻은 옷을 벗어 세탁을 해서 입으면 상쾌해진다. 따라서 오랫동안 묵은 성욕을 해결하는 것은 마치 빨래를 하는 것과 같다.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도 빨래 방망이질을 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다.  그래서 창녀촌에 찾아온 군인들은 급히 때가 묻은 옷을 벗어버리고, 묵은 성욕을 해결한다. 그러나 성욕은 한 번 해결한다고 해서 영원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쌓인다. 빨래도 한 번 빨아 입는다고 해서 영원히 깨끗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때가 낀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에 戰爭이 끝나고 平和가 왔다는 宣傳이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하늘 저편은, 손바닥만한 창녀촌 저편을 가리킨다. 병영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면 군인들은 병영에 나와 창녀촌을 찾는다. 창녀촌에 군인들이 몰려올 때는 병영에 평화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죽이는 不潔한 戰爭이 始作된다. 일군의 군인들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성욕의 때를 씻어내고 있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은 창녀촌이다. 창녀촌의 방들은 좁다. 창녀촌에서는 방망이로 흰 비둘기 떼를 때려죽이는 불결한 전쟁, 오래 묵은 성욕의 때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방망이는 남근의 암유다. 방망이와 같은 남근으로 묵은 성적 욕망의 때를 씻는 불결한 전쟁, 마치 때가 묻은 빨래를 하는 듯한, 요란한 전쟁이 시작된다. 마침내 창녀촌은 방망이질하는 군인들과 창녀들의 교성으로 전쟁터처럼 시끄러워 진다. 아니 서로 전쟁하듯이, 싸움하듯이 끌어안고 씩씩거린다. 空氣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는 것은 공기가 깜깜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군인들이 또 한 번 이 손바닥만한 창녀촌을 떠나서 병영으로 들어간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봐서, 병영이 평화로울 때마다 일군의 군인들이 창녀촌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 ​ ​ ▣   烏瞰圖 詩第十三號 ​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 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 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燭臺세움으로내방안에裝飾하여놓았다. 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怯을내이는것만같다. 나는이러한얇다란禮儀를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 1934. 8. 7 ―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이 시에는 두 개의 팔이 나온다. 과연 이 시에 등장하는 두 개의 ‘팔’은 무엇인가? 고민스럽다. 들여다봐도 들여다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골칫거리다.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팔은 몸에서 돋아난 것이다. 화자의 두 개의 팔은 화자의 몸에서 돋아난, 팔과 같은 것 두 개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는 팔이고, 하나는 남근이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을 든 재로 끊어져 떨어졌다. 여기서 면도칼은 두 개의 팔 중의 하나인 남근이다. 남근이 왜 면도칼이 될까. 면도칼은 무엇을 예리하게 베어서 벤 자국에 틈이 벌어지게 하며, 살을 베고 그 끝에는 피가 묻어 있다. 화자의 발기된 남근은 여체의 어느 한 부분을 예리하게 베어서 찢고 싶은 욕망, 즉 여자의 몸속에 사정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끝에 정액이 묻어 있다. 화자의 팔이 면도칼인 남근을 손에 든 채로 떨어졌다. 한참 자위를 하던 화자가 사정 후, 갑자기 팔의 동작이 멈추고, 정액이 끝에 조금 묻어 있는 남근을 손으로 잡은 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정 후에 갑자기 멈추는 팔의 동작, 그리고 갑자기 줄어드는 남근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또 자위를 한 후에 낙담하여 물끄러미 남근을 바라보는 장면이라고 해도 좋다. 왜 낙담을 하여 물끄러미 바라볼까. 남근에서 정액이 마치 칼끝에 묻은 핏방울처럼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威脅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자세히 보면, 사정을 한 남근은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 것처럼 새파랗다.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새파랗게 질려서 몸을 움츠린다. 붉은 남근이 색이 힘을 잃으면서 작아졌다. 아니 정액이 끝에 조금 나와 있는 남근을 보면서,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몹시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남근이 위협당한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燭臺세움으로 내 방안에 裝飾하여 놓았다.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화자의 두 개 팔, 떨어진 두 개의 팔을 화자는 촉대세움으로 화자의 방 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마치 나란히 장식해 놓은 두 개의 촉대를 감상하듯이, 자위를 한 후, 조금밖에 정액을 쏟아내지 못한 남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식물은 오래도록 바라보며 감상하기 위한 것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怯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러한 얇다란 禮儀를 花草盆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화자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내이다’는 ‘내게 하다’의 의미, 사동의 의미다. 팔이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한다는 뜻이다. 자위한 주체는 팔이다. 팔이 자위를 함으로서 면도칼로 비유된 화자의 남근은 사정을 했고, 남근의 끝에는 핏방울과 같은 정액이 조금 묻어 있다. 자위를 한 팔은, 자위 후에 남근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에게 겁을 내게 하려는 듯이, 피와 같은 정액을 조금 묻도록 한 것이다. 마치 이제는 자위를 하지 말라는 듯이 정액을 남근 끝에 조금 남겨놓은 것이다. 나는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 사랑스럽게 여깁니다. ‘팔의 이러한 얇다란 예의’는 자위를 하여 사정을 한 후 남근의 끝에 정액을 조금 묻게 해 놓음으로써 화자에게 겁을 먹게 하는 예의다. 자위를 자주 하지 말라고 젊잖게 일러주는 예의다. 화자는 그것을 ‘화초를 키우는 화분과 같이, 안에 생명을 키우는 여자보다 더 사랑스럽게 여긴다. 왜 화자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자위 후 남근에서 정액이 조금 나온 것은, 자위를 자주 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다. 따라서 자위를 한 주체인 팔은 예의가 있는 놈이다. 그런데, 화초분 즉 여자는 그렇지 않다. 상대가 끊임없이 자신을 만족시켜주기를 바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의식 속에서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을 시켜줘야 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상의 내면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시로는, 가 대표적이며, 그 이외에도 , 등에도 나타난다.   ​ ​ ▣   烏瞰圖 詩第十四號 ​ 古城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帽子를벗어놓았다. 城위에서나는내記憶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距離껏팔매질쳤다. 抛物線을逆行하는歷史의슬픈울음소리. 문득城밑내帽子곁에한사람의乞人이장승과같이서있는것을나려다보았다. 乞人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 或은綜合된歷史의亡靈인가. 空中을向하야놓인내帽子의깊이는切迫한하늘을부른다. 별안간乞人은慓慓한風彩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帽子속에치뜨려넣는다. 나는벌써氣絶하였다. 심장이頭蓋骨속으로옮겨가는地圖가보인다. 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 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烙印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 1934. 8. 7 ―     古城 앞에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帽子를 벗어 놓았다. 이 시는 화자가 어느 과부와 성교를 한 것을 회상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성은 오래되고 낡은 옛 성이다. 그 성에는 원래 누군가가 살았었다. 그러나 그 후로 주인이 없는 성, 오랫동안 비워서 낡은 성, 이는 곧 주인이 없는 과부의 음부를 표현한 것이다. 고성 앞에는 풀밭이 있었다. 풀밭은 과부 음부에 난 음모다. 그 풀밭 위에 모자를 벗어 놓았다. 발기가 되어 귀두가 드러난 남근은 마치 모자를 벗은 사람의 머리 형상이다. 城 위에서 나는 내 記憶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距離껏 팔매질 쳤다. 화자는 자신이 기억하기에 꽤 무거운 돌을 매달아서, 성 위에서, 힘과 거리껏 팔매질을 쳤다. 과부의 성기에 자신의 남근을 힘차게 내리 쳤다는 말이다. 꽤 무거운 돌은 아래로 무겁게 떨어진다. 팔매질 치는 행위는 힘차게 내던지는 행위이며, 무거운 돌은 아무리 팔매질 쳐도 곧바로 아래로 무겁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힘차게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남근을 내리 던지듯이 꽂았다는 뜻이다. 抛物線을 逆行하는 歷史의 슬픈 울음소리.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과부의 음부를 향해서 힘차게 남근을 내리 꽂자, 과부는 마치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며 교성을 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포물선처럼 몸을 뒤로 젖히는 행위는 화자로부터 과부가 멀어지는 동작이다. 마치 화자가 싫어서 몸을 피하는 동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포물선을 역행하여 들려오는 역사의 슬픈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그 젖힌 과부의 몸을 역행하여 도리어 포물선을 타고 여자의 교성이 화자 쪽으로 들려온 것이다. 여기서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남자를 접하지 못한 여자의 슬픈 울음과도 같은 환희의 교성이라 할 것이다. 문득 城 밑 내 帽子 곁에 한 사람의 乞人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나려다보았다. 乞人은 성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문득, 여자의 음부 밑, 화자의 발기되어 귀두가 벗겨진 남근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화자가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걸인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과 과부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기독은 마치 제대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한 걸인처럼 갈빗대를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또한 걸인이다.  그런데 그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다.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장승처럼 서 있다’라는 말은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장승처럼 서 있는 걸인은 과부와 관계하는 방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기독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화자의 몸 위에 있는 과부를 의미한다. 기독과 과부의 음부 밑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눈에는 오히려 그들이 화자의 위에 있다. 과부가 여성 상위 체위로 위에서 있고, 화자가 아래에 있으며, 아래에 있는 화자가 바라보기에 십자가의 기독은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당시 여자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여자의 경험이 없는 화자를 상대하는 과부는 자신이 직접 화자의 몸에 올라서 능동적으로 성행위를 했을 것이다. 或은 綜合된 歷史의 亡靈인가. 空中을 向하야 놓인 내 帽子의 깊이는 切迫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乞人은 慓慓한 風彩를 허리굽혀 한 개의 돌을 내 帽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氣絶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내놓인 화자의 모자의 깊이 즉 화자의 남근도 과부의 음부의 깊은 곳에서 절박한 하늘을 부르고 있었다. 화자의 남근도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여 사정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절박한 하늘’을 부르는 것’은 몹시 급하게 절정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높은 것이고, 높은 것은 절정이다. ‘절정(絶頂)’은 가장 높은 꼭대기를 의미한다. 또 하늘은 하나님이다.  화자는 어느 순간 과부에게 ‘사정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성교 상항을 상상해 보자. 화자가 볼 수 있는 대상은 십자가에 매달린 기독이다. 그러나 화자가 ‘사정하고 싶다’라고 말한 실제의 대상은 과부다. 그러자 별안간 화자의 기도를 기독의 하나님이 들어주듯이, 걸인인 기독은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내려다보고, 과부는 또 표표한 풍채를 굽혀서 즉 공중에서 가볍게 나부끼듯이 몸체를 굽혀서, 한 개의 돌을 화자의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여자가 위에서 힘차게 남근을 향하여 엉덩이를 내리쳤다. 화자는 벌써 기절하였다. 화자는 이미 사정을 하고 화자의 남근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화자는 이것을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하고 생각한다. 남편이 없는 과부의 욕망, 성욕을 해결할 상대가 없는 화자의 욕망, 그리고 이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는 기독의 하나님, 타락한 종교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이다. 심장이 頭蓋骨 속으로 옮겨가는 地圖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烙印되어 언제까지 지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감정은 심장에 있다. 이성은 두개골 속에 있다. 성적 충동의 감정으로 과부와 관계를 맺었던 화자는 이제 점점 이성적으로 이를 생각하게 된다. 화자의 생각이 옮겨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지도다. 싸늘한 손이 화자의 이마에 닿는다. 성교가 끝나고 화자는 냉정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생각한다. 화자의 이마에는 싸늘한 손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화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고, 그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마치 낙인된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기독이 있는 곳에서, 과부와의 관계 후에,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이 오랫동안 화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는지 나와 있지 않다. 추리해 보자. 사람에게 있어서 성적 욕망과 이것의 충족은 종교적 믿음보다 앞선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성에 굶주린 과부, 성적인 욕망은 있으되 이를 충족할 방법이 없었던 화자, 성적인 욕망은 종교적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에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과부와의 첫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등장한다. ​ ​ ​ ▣   烏瞰圖 詩第十五號 ​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謨를하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 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 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傳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4 내가缺席한나의꿈. 내僞造가登場하지않는내거울. 無能이라도좋은나의孤獨의渴望者다. 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自殺을勸誘하기로決心하였다. 나는그에게視野도없는窓을가리키었다. 그窓은自殺만을爲한들窓이다. 그러나내가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 거울속의나는不死鳥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心臟의位置를防彈金屬으로掩蔽하고 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券銃을發射하였다. 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貫通하였으나그의心臟은바른편에있다.        6 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 내가遲刻한내꿈에서나는極形을받았다. 내꿈을支配하는者는내가아니다. 握手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封鎖한巨大한罪가있다.  ― 1934. 8. 8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몇 편의 시가 나온다. 이 있고, 이 있다. 거기에서 거울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 대강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은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6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7세 때다. 그 동안 이상은 자란다. 자라면서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타의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 시를 읽어 보자. 과연 이 시에서 ‘거울’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한 단어로 바꾸기 어렵다. 거울 속의 나는 거울을 보고 있는 나와 닮았다. 그러나 좌우가 바뀌어 반대로 되었다. 기억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현재의 화자와 닮았다. 그러나 그 삶에 있어서는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거울은 무엇을 비추면, 무엇과 무엇이 비춘 것은 닮았으면서도 반대다. 따라서 거울은 일단 무엇을 보는 도구다. 하여튼 그런 것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이 시에서도 때에 따라서 거울의 속성을 빌어 다양하게 사용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의미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각 연 앞에 번호가 붙어 있다. 그것은 각 연이 독립된 어떤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호가 없이 연이 이어질 경우에는 전체 연이 하나의 장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의미를 구성한다. 그러나 번호를 붙였을 경우는 각 번호에 따라 장면은 각각 다르다. 시를 이해하기 전에 알아두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1 / 나는 거울 없는 室內에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역시 外出中이다. / 나는 至今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謨를 하는 中일까.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자신이 자란 큰아버지 집이 아닌, 어딘가의 실내에 있다. 화자가 집을 나온 것이다. 과거의 삶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거울이 없는 실내에 있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집을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어느 공간에 있다.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지금 외출중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그 어느 공간에 있는 나에게,  과거의 기억이 따라 온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이 무서워서 화자는 지금 떨고 있다. 아마 이렇게 끈질기게 과거의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봐서, 그 과거의 기억은 어디선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2 / 罪를 품고 식은 寢床에서 잤다. / 確實한 내 꿈에 나는 缺席하였고 /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았다. 죄를 품고 차디찬 침상에서 잤다. 잠 속에서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는 꿈을 꾸었다. 과거 어린 시절, 나는 확실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살았다. 그런데 그 꿈에 나는 없었다. 나의 꿈은 큰아버지의 꿈, 이를테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큰아버지의 꿈만 거기에 있었다. 의족을 담은 군용장화 곧 진짜 아버지가 아닌, 군용장화를 신고 다니던 큰아버지가 화자를 양자로 들임으로써 화자의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큰아버지가 나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의 꿈은 추하고 더럽게 생각되었다. 3 / 나는 거울 속에 있는 室內로 몰래 들어간다. / 나를 거울에서 解放하려고. /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沈鬱한 얼굴로 同時에 꼭 들어온다. / 거울 속의 나는 내게 未安한 뜻을 傳한다. / 내가 그 때문에 囹圄되어 있드키 그도 나 때문에 囹圄되어 떨고 있다. 나는 거울 속에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과거에 나는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어느 ‘실내’로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그것은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온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큰아버지 집을 나와서 아무도 모르는 어느 실내로 들어간 적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기억들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동시에 꼭 그 실내에 들어왔다.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고, 새로운 삶도 시작할 수 없었다. 과거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치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그 과거의 내가, 지금 또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하려는 지금의 나에게 편안하지 않은 뜻을 전한다. 지금의 나도 결국 큰아버지의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안한 뜻을 전한다. 과거의 내가 미안한 뜻을 전하는 것은, 내가 큰아버지 집에서의 삶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도했던 과거의 나에게 갇혀 있듯이, 그도 지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나에게 갇혀서 떨고 있다. 결국 화자는 과거의 경험으로 봐서 새로운 삶을 위한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 내가 缺席한 나의 꿈. / 내 僞造가 登場하지 않는 내 거울. / 無能이라도 좋은 나의 孤獨의 渴望者다. /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自殺을 勸誘하기로 決心하였다. / 나는 그에게 視野도 없는 窓을 가리키었다. / 그 窓은 自殺만을 爲한 들窓이다. / 그러나 내가 自殺하지 아니하면 그가 自殺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 거울 속의 나는 不死鳥에 가깝다.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내가 결석한 나의 과거의 삶. 나는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삶을 살아야 한다. 미래에 가서 거울로 비춰보듯이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위조된 삶이 사라지고 나만의 의지로 이룩한 나의 미래를 떠올려 본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는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기억 속의 과거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창을 가리키었다. 그 창은 오직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한 들창이었다. 과거를 잊기 위해 무엇인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문학에 몰두하는 것 등이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나에게 가르친다. 그 과거를 잊기 위한 들창에도 과거 기억 속의 자신이 등장하는 의미다. 이를테면 과거를 잊기 위한 문학 속에도 결국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는 불사조에 가깝다. 5 / 내 왼편 가슴 心臟의 位置를 防彈 金屬으로 掩蔽하고 /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券銃을 發射하였다. / 彈丸은 그의 왼편 가슴을 貫通하였으나 그의 心臟은 바른 편에 있다. 그래서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를 살해하기로 하였다.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덮어서 가리고, 나는 과거 기억 속의 나의 왼편 가슴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 편에 있다. 기억이라는 거울 속에 있는 나는 현재의 나와 반대이기 때문에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를 살해할 수도 없었다.   6 / 模型心臟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 내가 遲刻한 내 꿈에서 나는 極形을 받았다. / 내 꿈을 支配하는 者는 내가 아니다. / 握手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封鎖한 巨大한 罪가 있다. 실제 심장이 아닌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미래의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화자는 죽음을 꿈꿔 본 것이다. 모형 심장은 실제의 심장이 아니다. 붉은 잉크는 실제의 피가 아니다. 붉은 잉크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이름을 호적에서 지울 때 사용한다. 따라서 화자는 미래에 자신이 자살할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실제의 내가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나의 꿈 즉 죽음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미래의 죽음조차 이를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내가 극형을 받는 것은, 죽어서도 나와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죄다. 나를 낳아준 생부의 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에게 좀 더 부유한 가정에서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생부의 꿈을 봉쇄한 죄가 있다. 또 나를 통하여 대를 잇기를 바랐던 큰아버지의 소망을 봉쇄한 죄가 있다.   ​ ​   6. 易斷 ▣   火爐 ​ 房거죽에極寒이와닿았다. 極寒이房속을넘본다. 房안은견딘다. 나는讀書의뜻과함께힘이든다. 火爐를꽉쥐고집의集中을잡아땡기면유리窓이움푹해지면서極寒이혹처럼房을누른다. 참다못하여火爐는식고차겁기때문에나는適當스러운房안에서쩔쩔맨다. 어느바다에潮水가미나보다. 잘다져진房바닥에서어머니가生기고어머니는내아픈데에서火爐를떼어가지고부엌으로나가신다. 나는겨우暴動을記憶하는데내게서는억지로가지가돋는다. 두팔을벌리고유리窓을가로막으면빨래방망이가내등의더러운衣裳을뚜들긴다. 極寒을걸커미는어머니――奇跡이다. 기침藥처럼따끈따끈한火爐를한아름담아가지고내體溫위에올라서면讀書는겁이나서곤두박질을친다. ― 1936. 2 ―    ​ 이상은 1936년 2월호에 ‘易斷(역단)’이라는 큰 제목 하에 5편의 시를 발표한다. , , , , 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왜 큰 제목을 ‘역단’이라고 했을까? ‘역단’이란 ‘바꾸어서 끊는다’, ‘바꾸어도 단절된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시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서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시의 의미에 접근하는 것을 단절시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읽어야 올바로 읽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시 는 단순히 ‘화로’로 읽어서는 안 된다. 화로! 화로는 뜨거운 것이다. 안에 뜨거운 불씨를 담고 있다. ‘화로’는 그 안에 뜨거운 불씨 즉 성적 뜨거움을 담고 있는 아내를 암유한다.   房 거죽에 極寒이 와 닿았다 방 거죽 즉 아내의 성기의 표면에 극한이 와 닿았다. 방은 아내의 몸의 내부를 의미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야 하고, 그 문이 바로 아내의 음문이다. 그 음문 안에는 뜨거운 화로와 같은 성적 욕망의 불씨가 있다. 극한은 지극히 추운 것을 의미하는데, 마치 추위에 오그라든 것과 같은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다. 극한인 왜소한 남근은 뜨거움의 씨앗을 속에 간직하고 있는 화로를 그리워하는 법이다. 추워서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뜨거운 곳에 들어가면 줄어들었던 남근이 커지기도 한다. 따라서 아내의 음문의 표면에 뜨거운 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화자의 왜소하게 오그라든 남근이 닿았다는 뜻이다.   極寒이 房속을 넘본다. 房 안은 견딘다. 극한이 방 속을 넘본다. 몹시 차가워져서 왜소해진 화자의 남근이, 따뜻한 곳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방 안은 견딘다. 뜨거운 욕망을 가진 아내의 방 안은 열리지 않는다. 뜨거운 방 안에 화자의 발기되지 않은 왜소한 남근이 들어갈 수 없다.   나는 讀書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화자는 독서의 뜻과 함께 힘이 든다. 독서는 상체를 앞뒤로 움직이면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은 위아래로 끄덕이는 뜻 즉 왕성하게 발기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지 못하여 힘이 든다.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제대로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火爐를 꽉 쥐고 집의 集中을 잡아 땡기면 유리窓이 움푹해지면서 極寒이 혹처럼 房을 누른다. 뜨거운 불씨를 간직하고 있는 화로 즉 아내의 몸뚱이를  꽉 잡고, 집의 집중 즉 아내의 뜨거움이 모여 있는 가운데를 잡아당기면 즉 아내의 음문과 밀착시키면, 유리창 즉 투명하게 열려 있어 쉽게 들어갈 것 같던 음문이, 실제로 들어가려니까 유리가 가로막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움푹해지면서 극한인 화자의 왜소한 남근이 혹처럼 조금 방을 누를 뿐이다. 아마 제대로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내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열려 있으나, 화자는 그 가로막는 유리를 발기되지 않은 남근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참다못하여 火爐는 식고 차겁기 때문에 나는 適當스러운 房 안에서 쩔쩔맨다. 어느 바다에 潮水가 미나 보다.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차가움에 참다못하여 성적 열기가 식는다. 그러면 방 안 즉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남근은 또 화로인 아내가 달아오르지 않고 화자와 똑같이 식어버린 아내의 몸속에서, 아내가 뜨거워지기를 바라며 쩔쩔맨다. 열심히 노력을 한다. 곧 아내는 조수가 밀듯이 화자의 남근을 음부에서 밀어내고, 화자는 어느 바닷가에 놓인 것처럼 홀로 남는다.   잘 다져진 房바닥에서 어머니가 生기고 어머니는 내 아픈 데에서 火爐를 떼어 가지고 부엌으로 나가신다. 잘 다져진 방바닥에서 어미가 생긴다. 굳건한 남근으로 아내의 음부의 내부를 잘 다질 때, 거기에서 아이도 태어나고 아내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아내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픈 화자에게서, 화로를 떼어가지고 즉 자신의 몸을 화자로부터 떼어가지고 부엌으로 나간다. 부엌에서 다시 뜨거운 불씨를 화로에 담기 위해서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불씨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겨우 暴動을 記憶하는데 내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을 기억한다. 화자는 이제야 겨우 폭동과 같은 격렬한 부부관계를 해야 한다고 머릿속에 떠올린다. 화자에게서는 억지로 가지가 돋는다. 화자에게는 억지로 가지 즉 왜소한 남근이 조금 살아난다.   두 팔을 벌리고 유리窓을 가로막으면 빨래방망이가 내 등의 더러운 衣裳을 뚜들긴다. 그래서 두 개의 고환이 양쪽에 있는 남근을 가지고, 아내의 몸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유리창이 막는 듯이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면, 빨래방망이가 화자의 등의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 아내가 손으로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새롭게 시작해 보라고 위로한다.  여기서 아내가 화자의 등을 두드리면서 위로하는 것을 빨래방망이가 더러운 의상을 두들긴다고 말한 것은 더러운 의상을 방망이로 두드려 빨면 깨끗한 옷이 되어 다시 새 옷처럼 입을 수 있듯이, 자꾸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 보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 같다.   極寒을 걸커미는 어머니―― 奇跡이다 아내의 몸속에 들어간 화자의 오그라들어 왜소한 남근을 빗장을 걸어서 미는 어머니 즉 아내. 여기서 ‘걸커민다’는 말은 빗장을 걸고 화자를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내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왜소한 남근을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빗장을 걸듯이 꼭 잡고 음부를 화자 쪽을 향하여 민다는 의미다. 아마 아내가 몸속에 들어온 왜소해진 남근을 꼭 죄어 잡고 남편 쪽으로 음부를 밀면서 노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다. 기적이다. 비로소 왜소하던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커졌는가 보다.   기침藥처럼 따끈따끈한 火爐를 한아름 담아가지고 내 體溫 위에 올라서면 讀書는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화자는 따끈따끈해진 화로 즉 달아오른 아내를 한 아름 담아가지고 자신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따끈따끈해진 아내를 한 아름 담았다. 아내의 노력에 의해서 화자도 달아올랐다. 그리고 달아오른 화자의 체온 위에 올라섰다. 화자의 달아오른 남근으로 아내의 뜨거운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독서 즉 앞뒤로 끄덕이는 화자의 남근은 겁이 나서 곤두박질을 친다. 뜨거운 것이 겁이 나서 마치 그것을 식히려는 듯이 아내의 몸속으로 곤두박질친다. 힘차게 방을 다진다. 그러고 나면 감기 걸려 열이 날 때 먹는 기침약처럼, 뜨거운 아내는 화자의 남근의 열기를 이내 식혀 준다. 사정을 한 후 남근은 열이 내린다. 줄어든다. ​ ​ ​ ▣   아침 ​ 캄캄한空氣를마시면肺에害롭다. 肺壁에끌음이앉는다. 밤새도록나는몸살을앓는다. 밤은참많기도하더라. 실어내가기도하고실어들여오기도하고하다가잊어버리고새벽이된다. 肺에도아침이켜진다. 밤사이에무엇이없어졌나살펴본다. 習慣이도로와있다. 다만내侈奢한책이여러장찢겼다. 憔悴한結論위에아침햇살이仔細히적힌다. 永遠히그코없는밤은오지않을듯이. ​ ― 1936. 2 ―     이 시는 ‘역단’이라는 큰 제목 아래 발표된 5편의 시 가운데 하나다. 예사로 읽으면 이상의 의도에 말려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조심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다. 보통은 이렇게 읽을 것이다. 이상 시인이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폐결핵 환자는 밤이 되면 더욱 기침이 심해지고,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가 보다. 이 시도 그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는 벌써 이상이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큰 제목이 역단이다. 바꾸어 끊는다. 다른 이야기처럼 바꾸어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접근을 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 캄캄한 空氣를 마시면 肺에 害롭다. 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깜깜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화자의 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의 텅빈 기운을 읽으면, 화자의 참된 마음에 해롭다. 엉터리 비평가들의 글이 화자가 참된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 해가 된다는 말이다. 엉터리 비평가를 의식하면, 자신의 참된 마음을 기록하는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진실된 마음을 단절하는 그을음이 앉아서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깜깜한 밤과 같은 비평가들은 참으로 많았다. 밤에 쓴 글을 공기(空氣) 즉 온 힘을 다해 쓴 글이 텅빈 기운으로 가득찬 비평가들에게 실어 내가기도 하고, 비평가들이 화자의 시에 대해서 쓴, 내실이 없는 근거로 화자를 비평하는 글을 들여와서 읽기도 하다가, 밤인지도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참된 마음에도 비로소 아침이 켜진다. 비평가들이 왜 자신의 글을 그렇게 비평하고 있는지의 참된 마음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화자의 시를 이해할 수 없어서 화자를 혹평하는 것이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憔悴한 結論 위에 아침 햇살이 仔細히 적힌다. 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화자는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화자는 습관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또 썼고, 비평가들은 화자의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습관적으로 혹평하기만 하는 되풀이하는 버릇이 와 있다. 다만 화자의,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비평가들에게는 분수에 넘칠 만큼 좋은 책이 여러 장 찢겼다. 비평가들의 혹평에 의해서 화자의 책 몇 장이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비평가들이 화자의 글에 대해서 애태우고 근심하면서 맺은 결론만이, 아침 햇살처럼 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상세하게 적혀 있다. 영원히 그 역겨운 냄새가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 ​ ▣   家庭 ​ 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 나는우리집내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減해간다. 食口야封한窓戶에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鍼처럼月光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壽命을헐어서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어달렸다門을열려고안열리는門을열려고. ― 1936. 2 ―     이 시의 제목은 '家庭(가정)'이다. 가정이란 무엇인가부터 잘 생각하여야 할 것 같다. 가정에 대해서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이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 시인은 당대 지식인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가정에 대해서 늘 고뇌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생각을 이 시에 대응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이상 시인은 사람들이 시를 읽고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다양한 비유적 표현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시어들을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시어를 시 전체의 맥락에서 순리적으로 잘 연결하면서 생각해 보면, 시어의 의미는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만 시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발상에서 시어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이상의 다른 시들과도 연계시켜서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시인의 생각은 여러 시에서 유사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발상에서 사용된 시어들이 다른 시에서도 유사한 발상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의 시도, 이상 시인의 시 전체를 개괄하여 읽어 본 다음, 다시 한 작품 한 작품 읽어 볼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필자는 ‘가정’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보겠다. 가정이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대를 이어가는 곳이다. 부부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은 아니다.  몇 명의 여자들과 동거하기도 했던 이상 시인은 아이가 없었고, 그리고 그 여자들과는 헤어지고 만다. 물론 이상이 상대한 여성들은 창녀나 다름이 없는, 카페나 다방의 여급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이 그러한 여자들과 가정을 이루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자들 중에서 이상 시인과 그래도 비교적 오래 살았던 여자는 금홍이다. 백천온천에서 만나서, 서울에 와서 다방 의 마담으로 있던 금홍이와는 약 3년 정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고, 결국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 이상의 에는 금홍이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상 시인으로서는 금홍이를 어느 정도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 등에는 금홍이로 추정해도 좋을 만한 여자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금홍이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면 금홍이가 떠나갔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1930년대 사람들의 관념으로서는 자식이 부부를 매개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자식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물론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아이를 잉태하겠다는 고상한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이상 시인은 가졌던 것 같다. 부부가 성을 즐기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생각을 가졌다. 에 그러한 이상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문(門)을 암만 잡아다녀도 안 열리는 것은 안에 생활(生活)이 모자라는 까닭이다 문은 나의 가정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가정을 이룬 가장은 문을 통하여 가정으로 들어간다. 원만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을 통과하여야 하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은 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문이 열린다'라는 문장에서 문은 입을 의미한다. 입이 열리고 그 열린 문을 통하여 말이 나왔을 때 우리는 말문이 열렸다고 한다.  문을 잡아당기면서 열려고 하는 것은 지금 화자가 아내와 성교를 하면서 아내를 만족시키려는 행위다. 아내가 성적으로 만족한다면 아내는 입이 열리고 성교의 쾌감을 토해 낼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내는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문은 또 하나 있다. 아래에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하문(下門)이라 한다. 음문(陰門)이라고도 한다. 문을 잡아당기는 행위는 음문을 자신 쪽으로 당기는 행위다. 그것은 곧 자신을 그 음문 쪽으로 밀착시키는 행위와 동일한 행위다. 화자가 가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 위해서 즉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하문에 몸을 강하게 밀착시킨다. 그러나 아내의 문 즉 입은 열리지 않는다. 아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안에 생활이 모자란 까닭이다. 안은 아내의 음문의 안쪽이다. ‘생활(生活)’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아내의 음문 안쪽으로 들어간 화자의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대로 발기되지 못하면 아내가 만족할 수 없다. 따라서 제대로 발기되지 않은 남근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의 입이 열리지 않고, 만족하는 교성이 나오지 않는다. 원만한 부부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정을 이루기가 어렵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나를 졸른다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밤이 되면, 자식이 없어서 제대로 된 가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내가, 화자와 닮은 자식을 만들어 내는 틀인 아내가, 사나운 꾸지람으로 화자를 조른다. 아내가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아내가 잉태를 위해서 사정하기를 사납게 조를수록 화자의 남근은 마치 사나운 꾸지람을 들은 아이가 몸을 움츠리고 위축되듯이 줄어든다.   나는 우리 집 내 문패(門牌)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화자는 우리 집 문패 즉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 앞에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위축되어 줄어든 남근으로 자식을 잉태하고자 하나 사정이 잘 되지 않고, 그런 속에서 사정을 하려고 하니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내 앞에서 매우 성가시다.  나의 문패가 달린 집은 내 집이다. 내 가정이기도 하고 내 아내이기도 하다. 화자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의 음문 앞에서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아서 괴롭다는 뜻이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감(減)해 간다 식구(食口)야 봉(封)한 창호(窓戶)에 어데라도 한 구석 터 놓아 다고 내가 수입(收入)되어 들어가야 하지 않나 화자는 밤, 자식을 잉태하기를 바르는 아내의 몸속에 들어서서 열심히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발기되었던 남근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생명력을 잃고 자꾸만 줄어든다. 사정을 하여 자식을 잉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화자의 남근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식구야, 봉한 창호에 어디라도 한 구석 터놓아 다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수입되어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봉한 창호는 아내의 굳게 닫힌 입(口)이다. 또한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교성이 나오는 입이다. 입을 문(門)이라 하지 않고 창호(窓戶)라고 하면서, 봉한 창호에 어데 한 구석일도 터놓아 달라고 말하는 것은, 입을 열어서 조그만 소리의 교성이라도 제발 내 달라는 간청이다. 그것은 화자의 사정을 북돋우는 것이 된다. 아내가 교성을 내면, 아내의 음부에 있던 화자의 남근은 아내의 교성에 의해 더욱 흥분하게 되며, 남근에서 사정을 할 수가 있다.  ‘수입되어 들어간다.’는 말은 피동적인 표현이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의 교성에 의해서 발기가 되고, 그러면 자연 쉽게 더욱 흥분되어 원만하게 사정할 수가 있다.   지붕에 서리가 내리고 뽀족한 데는 침(鍼)처럼 월광(月光)이 묻었다 우리 집이 앓나 보다 그러고 누가 힘에 겨운 도장을 찍나 보다 수명(壽命)을 헐어서 전당(典當) 잡히나 보다. 지붕에는 서리가 내린다. 사정하기 위해서 화자는 오랫동안 노력을 하였는가 보다. 아내가 집이라면 아내의 몸을 덮고 있는 화자는 지붕이다. 지붕에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화자의 몸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다. 서리는 하얀 색이다. 열심히 노력한 화자의 등에는 땀이 흥건하도록 났고, 그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로는 것 같다. 피어오르는 김은 흰 색이다. 마치 지붕에 서리가 내리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지붕의 뾰죽한 데는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 지붕이 화자라면 화자의 뾰죽한 곳은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이다. 그리고 화자의 남근의 끝부분에 ‘침처럼 월광이 묻었다’는 것은 화자가 겨우 조금 사정을 했다는 것이다. 침은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끝이 뾰죽한 것이다. 화자가 겨우 아내의 몸 깊이 침처럼 조금, 월광과 같은 희미한 정액을 사정했다. 그러함으로써 밤, 아내의 몸속이 조금 밝아진 것이다. 달빛은 희미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밝다. 우리집 즉 아내가 앓는가 보다. 아내가 낮게 교성을 내는 것 같다. 앓을 때는 낮은 소리로 ‘앓는 소리’를 낸다. 아내가 마치 앓는 사람처럼 교성을 조금 냈다.  누가 힘겨운 도장을 찍는가 보다고 화자는 생각하고 있다. 누구는 화자다. 화자는 지금까지 힘겨운 도장을 찍는 행위를 한 것이다. 도장을 찍는 행위는 남근이 아내의 음부를 향해서 내리찧는 행위와 유사하다. 또 도장을 찍는 행위는 무슨 일을 마무리하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가정을 이루는 행위를 끝낸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행위를 ‘수명을 헐어서 전당잡히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사정하여 자식을 잉태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는가 보다. 이러다가는 힘이 들어 얼마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수명의 일부를 헐어서 전당잡히고 가정을 이룬다는 말이다. 수명을 담보로 자식을 잉태하기 위한 사정을 하였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문고리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어달렸다 문을 열려고 안 열리는 문을 열려고 ‘매달렸다’는 말에는 과거 시제다. 이 시에는 과거 시제는 여기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부분은 지금까지 했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지금까지 가정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고리,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도구인 남근에 쇠사슬 늘어지듯 매달린 것이다. 쇠사슬처럼 무겁게 늘어진, 잘 발기되지 않는 남근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그것은 문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안 열리는 문을 열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아이를 잉태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을, 잘 이룩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 한 것이다. ​ ​   ▣   易斷 ​ 그이는白紙위에다鉛筆로한사람의運命을흐릿하게草를잡아놓았다. 이렇게홀홀한가. 돈과過去를거기다가놓아두고雜沓속으로몸을記入하여본다. 그러나거기는他人과約束된握手가있을뿐, 多幸히空欄을입어보면長廣도맞지않고안드린다. 어떤빈터전을찾아가서실컷잠자코있어본다. 배가아파들어온다. 苦로운發音을다삼켜버린까닭이다. 奸邪한文書를때려주고또멱살을잡고끌고와보면그이도돈도없어지고疲困한過去가멀거니앉아있다. 여기다座席을두어서는안된다고그사람은이로位置를파헤쳐놓는다. 비켜서는惡息에虛妄과復讐를느낀다. 그이는앉은자리에서그사람이 平生을살아보는것을보고살짝달아나버린다. ― 1936. 2 ―    이상이 4세 때 큰아버지 집에 양자로 간 것은 잘 알 것이다. 큰아버지 입장에서는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친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난했기 때문에 이상이 잘 사는 큰아버지의 양자가 된다면, 이상이 자라는데 부족함이 없이 잘 자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아버지가 양자를 조건으로 얼마간의 돈을 주었던 것 같다. 돈을 주면서 만약 양자를 물리면 그 돈을 도로 내놓아야 한다는 계약서까지 쓰지 않았는가, 이 시를 통하여 추정해 본다. 이상이 양자로 간 후, 큰아버지는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인 것 같다. 그러자 큰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첩에게서 아들을 낳는다. 물론 어려서부터 이상이 아주 총명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아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새로 태어난 어린 동생과 젊은 어머니 속에서, 큰아버지는 이상에게 따뜻하게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알게 되고, 큰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상은 친아버지의 집을 찾아간 것 같다. 그러나 친아버지 역시 큰아버지와의 계약 때문에 이상을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여튼 어린 이상은 큰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아버지를 바꾸어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바꾸어 보려고 친아버지에게로 같으나, 친아버지 역시 반기지 않는다. 양자로 감으로써 아버지가 바뀌어, 큰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상은, 다시 아버지를 바꾸어 보고자 하지만, 역시 친아버지도 반기지 않아, 누구와도 단절되어 있다. 이것이 이 시의 제목 ‘역단’이다. 친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바꾸어도 단절되어 있는 이상의 외로움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는 ‘그이’와 ‘그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데려단 큰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고, 한 사람은 자신을 양자로 넘긴 친아버지다. 그런데 ‘그이’는 누구이고, ‘그 사람’은 누구인가? 이 시는 참으로 표현과 구성이 절묘하여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도 되고, 다시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라고 읽어도 된다. 바꾸어 읽어도 마찬가지다. 바꾸어 읽어도 어느 아버지도 화자를 반갑게 맞지 않는다. 화자는 두 아버지에게 단절되어 있다. 바꾸어 읽어도 단절되어 있다. 역단(易斷)이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쓴 이야말로, 이상이 왜 천재 시인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이상은 표현에서 특별한 천재 시인이다. 먼저 ‘그이’를 큰아버지, ‘그 사람’을 친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그이’는 화자를 양자로 데려온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대를 잇기 위해서 친아버지와 백지 위에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다. 이를테면, 부자였으나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는, 가난했던 화자의 친아버지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화자를 양자로 삼는다, 다시 화자를 데려갈 경우, 주었던 돈을 도로 반환하다는 정도의 내용을 계약서로 작성한 다음, 화자를 양자로 데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백지’는 계약의 내용을 기록하는 종이다. 그 계약서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놓았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대수롭지 아니한가. 큰아버지는 화자의 운명을 돌려서 양자로 들였으면서도 화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지 화자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큰아버지의 돈과 과거 즉 양자로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거기 즉 큰아버지 집에 놓아두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 이들과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친아버지 집으로 몸을 기억하여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친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친아버지는 큰아버지의 돈을 받고 계약을 했기에 쉽게 화자를 반기지 않는다. 친아버지와 포개지기를 바라서, 친아버지의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신이 양자로 가서 자신의 자리가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친아버지를 입어보면, 친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친아버지와 화자는 길이과 넓이도 맞지 않고, 또 친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친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친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화자는 그것을 친아버지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아버지는 화자를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친아버지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 것은 느낀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심정을 말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친아버지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없어지고, 돈도 다시 물어 주어야 하니 없어지고, 힘들게 살아가던 가난한 과거가 남아서 멀거니 앉아 있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드디어 큰아버지가 찾아왔다. 큰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큰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큰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허망함을 느낀다. 지금까지 돈을 들여서 키운 것에 대한 허망함을 느낀다. 그리고 복수의 마음을 느꼈는지 화자를 때리면서 가자고 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친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큰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큰아버지가 평생 화자가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때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도로 갚고 데려올 처지도 못 되기 때문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이제는 ‘그이’를 친아버지, ‘그 사람’을 큰아버지로 읽어보자. 그이는 白紙 위에다 鉛筆로 한 사람의 運命을 흐릿하게 草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홀홀한가. 친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말할 것을 적은 종이 위에다, 큰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따라 씀으로써 한 사람의 운명의 초안을 흐릿하게 작성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결정할 수 있는가.  친아버지는 부자인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낸다. 아이의 장래의 운명을 위해서다. 물론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는 것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가난한 자신의 집에서 자라는 것 보다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화자를 양자로 보냈다. 물론 그 대가로 주는 적지 않은 돈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친아버지에게는 앞으로 생계를 이어갈 소중한 돈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갑작스럽고 경솔했다는 생각을 화자는 하고 있는 것이다. 돈과 過去를 거기다가 놓아두고 雜沓 속으로 몸을 記入하여 본다. 그러나 거기는 他人과 約束된 握手가 있을 뿐, 多幸히 空欄을 입어 보면 長廣도 맞지 않고 안 드린다. 그래서 화자는 친아버지가 받은 돈과 태어나서부터 양자 가기 전까지의 과거의 삶을 거기 즉 친아버지의 집에 놓아두고, 잡다하게 섞이고 합하는 속 즉 큰아버지 집으로 몸을 문서의 기록대로 들어가 본다. 그러나 거기 큰아버지는 타인과 약속된 악수만 있을 뿐이다. 큰아버지는 조상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조상들과의 약속만이 있을 뿐, 화자를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큰아버지와 합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비어 있는 울타리, 즉 자식이 없어서 허전한 큰아버지의 품을, 마치 옷을 입듯이 입어 보면, 큰아버지와 화자는 길이도 넓이도 맞지 않고, 또 큰아버지가 안 들인다. 화자는 큰아버지가 뒤에서 화자를 꼭 안아주기를 바랐으나, 큰아버지는 화자를 꼭 껴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으로 들이지도 않는다. 큰아버지는 자신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는다. 어떤 빈 터전을 찾아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苦로운 發音을 다 삼켜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화자는 어떤 빈 터전 즉 자신을 양자로 보내서 자리가 비어 있는 친아버지 집으로 가서 실컷 잠자코 있어 본다. 배가 아파 들어온다. 배가 고픈 것이다. 그것은 화자가 괴로운 자신의 발음 즉 말을 친아버지에게 하지 않고 삼켜버린 까닭이다. 친아버지도 화자를 쉽게 들일 수 없다. 화자를 다시 데려오면 계약서에 의해서 돈을 다시 물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奸邪한 文書를 때려주고 또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보면 그이도 돈도 없어지고 疲困한 過去가 멀거니 앉아 있다. 양자를 요구한 문서, 어긋난 것을 요구한 문서를 때려주고, 또 그 문서를 멱살을 잡고 친아버지 집에 끌고 와 보면, 즉 양자를 요구한, 어긋난 문서를 멱살을 잡고 끌고 오듯이, 화자가 양자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큰아버지도 없어지고, 친아버지가 받은 돈도 없어져서, 화자에게는 피곤하게 지나가는 미래의 삶만 물끄러미 보인다. 여기다 座席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 사람은 이로 位置를 파헤쳐 놓는다. 비켜서는 惡息에 虛妄과 復讐를 느낀다. 친아버지가 화자에게 말을 한다.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이 말로써 친아버지는 화자의 위치를 파헤쳐 놓는다. 즉 큰아버지가 “여기가 네 집이 아니다.”라는 말 대신에, “여기를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을 받고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양자를 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한다. 이로써 친아버지는 자신이 친아버지라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그리고 화자를 일으킨다. 이를 거부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즉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돈을 물어줘야 하는, 불길한 자식에게 자신이 모자랐고 망령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받은 돈을 돌려보내서 갚아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이는 앉은 자리에서 그 사람이 平生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이를 앉아서 지켜보던 큰아버지는 앉은 자리에서 친아버지가 평생을 살아보는 것을 보고 살짝 달아나 버린다. 친아버지가 아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친아버지는 계약서대로 돈을 돌려줘야 하고, 그러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이다. 그렇다면 친아버지는 어떻게든 아이를 잘 달래서 반드시 보내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큰아버지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뜬다. 어차피 친아버지가 잘 알아서 보낼 것이니까.       7. 危篤 ▣   禁制 ​ 내가치던개(狗)는튼튼하대서모조리실험동물로공양되고그中에서비타민E를지닌개(狗)는學究의未及과生物다운嫉妬로해서博士에게흠씬얻어맏는다. 하고싶은말을개짖듯배앝아놓던世月은숨었다. 醫科大學허전한마당에우뚝서서나는必死로禁制를앓는(患)다. 論文에出席한억울한髑髏에는千古에氏名도없는法이다. ― 1936. 10. 4 ~ 10. 9 ―       禁制 ‘禁制(금제)’는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린다는 의미다. 내가 치던 개(狗)는 튼튼하대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고 화자가 기르던 개는 튼튼하다고 해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여기서 '개'가 무엇일까? 시어를 두 번 이상 비틀어서 사용하는 이상 시인의 시어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필자는 개를 이상 시인의 문학 작품 혹은 시로 보겠다. 왜 갑자기 개가 시가 되느냐 하면, 이상 시인의 시를 당시 사람들 특히 평론가들이 개 짖는 소리처럼 알아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자가 기르던 개 즉 이상 시인이 쓴 시는 튼튼하다. 튼튼하여 쉽게 쪼개지지 않는다. 즉 분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조리 실험동물로 공양되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실험적인 시라고 일언지하에 말해버린 것이다. 소위 문학을 전공한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으니 실험적인 시라고 모조리 공양해 버린 것이다. 싸잡아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그 中에서 비타민E를 지닌 개(狗)는 學究의 未及과 生物다운 嫉妬로 해서 博士에게 흠씬 얻어맏는다. 화자가 기르던 개, 이상 시인이 쓴 시 중에서 비타민E를 몸속에 가지고 있는 개, 즉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들로서는 학문적 연구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생물다운 질투 즉 박사들도 사람인지라 열등감을 느껴서, 박사님들에게 흠씬 얻어맞다. 이상의 시가 평론가들에 의해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하고 싶은 말을 개 짖듯 배앝아 놓던 世月은 숨었다. 醫科大學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나는 必死로 禁制를 앓는(患)다. 화자도 하고 싶은 말을 시로 개 짖듯이 뱉어 놓았던 세월은 이제 숨어버렸다. 개 짓듯이 시를 쓰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상 폐병을 앓게 되면서부터 글을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자는 의과대학 허전한 마당에 우뚝 서서 필사로 금제를 앓는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제발 내 시를 두들겨 패지 말라고 근심하고 있다.  論文에 出席한 억울한 髑髏에는 千古에 氏名도 없는 法이다. 왜냐하면, 박사들의 논문에 출석한 억울한 촉루 즉 박사들의 논문에 등장하여 억울하게 두들겨 맞아 죽은 시들의 뼈다귀는 천고에 씨명도 없는 법이다. 예로부터 성과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간다는 말이다. 박사들의 논문에 의해서 자신의 시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에 대해서 화자는 근심하고 있다. 이상 시인의 시를 읽으려면 두 번 꼬아 놓은 의미를 두 번 풀어야 한다. 그것은 서정주 시인의 시와 유사하다. 왜 이상 시인과 서정주 시인이 말을 두 번 꼬았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시가 당시의 보편적 관념으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게 시어를 꼬아서 표현하는 것을 연구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서정주 시인의 를 박사님들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상 시인의 시들을 대부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읽히기를 거부하는, 교묘하게 꼬아 놓은 시어들의 나열, 그래서 우리는 서정주, 이상 시인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 표현의 천재다! ​ ​ ​ ▣   絶壁 ​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香氣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穴을판다. 墓穴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가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香氣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墓穴을판다. 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香氣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1936. 10. 4 ~ 10. 9 ―      絶壁 절벽! 뛰어내리면 죽을 것이다. 따라서 절벽(絶壁)은 죽음과 관련이 있다. 또 절벽은 벽처럼 무엇과 무엇을 단절하는 역할을 한다. 절벽은 단절의 의미가 있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香氣롭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거기 墓穴을 판다. 보이지 않는 墓穴 속에 나는 들어가 앉는다. 나는 눕는다. 이상 시인의 라는 시를 보면, 꽃이 사진 속에 있는 나체 여자를 의미하고, 화자는 그 사진을 보면서 자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을 읽으면서 가 연상되었다. 지금 화자는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상황은 와 유사하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화자의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속에는 사진만 있고 실제 여자는 없다. 그러나 그 꽃이 향기롭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향기롭게 피어난다. 화자에게 성적 충동이 일어서 실제의 그 여자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다. 꽃이 만개한다. 실제 그 여자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져서 참을 수가 없다. 화자는 거기에 있는 묘혈을 한다.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에 삽입하여 성교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여기서 묘혈을 판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묘혈을 파듯이 여자의 음부를 판다, 묘혈을 파는 것처럼 음부를 파고 그 안에 발기된 남근이 들어간 다음 죽는다, 자위를 통하여 거기 사진 속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죽이고 단절시킨다는 등의 의미를 갖는다. 지금 화자가 보고 있는 사진의 실제 여자의 음부 속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그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에 상상으로 들어가서 앉는다.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후 사정을 한 것이다. 앉는다는 말은 선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다. 발기된 남근이 선 남근이라면, 사정 후에 줄어든 남근은 앉아 있는 남근이다. 그리고 화자는 눕는다. 남근에 힘이 빠지고 늘어진다. 또 꽃이 香氣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香氣가 滿開한다. 나는 잊어버리고 再처 거기 墓穴을 판다. 墓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墓穴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사진의 실제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이 또 일어난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 여자는 화자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실제 여자와 성교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어난다. 화자는 방금 전에 그 여자의 사진을 보면서 자위를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또 사진 속의 실제 여자와의 성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다. 실제 여자의 음부, 화자의 발기된 남근이 들어갈 구덩이는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실제 여자의 음부 속으로, 그 여자는 아까 그 여자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인 것으로 착각하여 들어간다. 사정 후, 이제는 정말로 남근의 기운이 완전히 빠졌다. 아아, 꽃이 또 香氣롭다. 보이지도 않는 꽃이――보이지도 않는 꽃이.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또 사진의 실제 여자와 성교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난다. 보이지도 않는 꽃,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 보이지도 않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가~~여자가~~여자가, 자꾸 자위를 하게 한다. 그 여자 생각을 잊기 위해서, 그 여자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단절하기 하기 위해서 자위를 했는데도 자꾸 하고 싶다. 이러다가 화자가 죽을 것 같다. ​ ​ ​ ▣   白書 ​ 내두루마기깃에달린貞操뺏지를내어보였더니들어가도좋다고그런다. 들어가도좋다던女人이바로제게좀鮮明한貞操가있으니어떠냔다. 나더러世上에서얼마짜리貨幣노릇을하는세음이냐는뜻이다. 나는일부러다홍헝겊을흔들었더니窈窕하다던貞操가성을낸다. 그리고는七面鳥처럼쩔쩔맨다.  ― 1936. 10. 4 ~ 9 ―     白書 백서(白書)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는 보고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화자가 고백하고자 하는 비밀은 어린 시절, 어느 과부와 처음 성교를 한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내 두루마기 깃에 달린 貞操뺏지를 내어보였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그런다. 짧은 소설 한 편 쓰겠다. 어린 나이의 화자가 어느 날, 인근에 사는, 화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 과부와 함께, 과부의 집 방에 있었다. 그런데 여자와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아직은 성적 감수성이 예민한 화자는 그 과부와 있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성적 욕망이 생겨서 남근이 슬그머니 발기되었고, 그것이 바지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이를 본 과부는 ‘어, 얘좀 보게. 벌써 다 컸나? 에이, 아직은 어린데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 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었다.  정조뺏지는 아직 여자를 접한 경험이 없어서, 여자와 함께 그들만의 공간에 있을 때, 성적 욕망으로 인해 쉽게 발기된 남근이다. 쉽게 발기되는 남근은 여자의 경험이 없다는 정조를 상징하는 정조뺏지다. 화자는 두루마기 깃에 달린 정조뺏지를 내어 보였다. 발기된 남근을 바지 위로 조금 도드라지게 하여 보였다. 평소에 남근은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어 마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다. 귀두가 사람의 머리, 귀두 아래의 잘록한 부분이 사람의 목, 그리고 그 이하가 사람의 몸통과 유사하다. 따라서 귀두를 감싸고 있는 표피는 두루마기가 된다. 아직 발기되지 않은 남근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두루마기 깃 사이로 정조뺏지를 내어보였다는 것은 표피에 둘러싸여 있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크게 발기되어 남근의 귀두가 드러났다는 의미다. 따라서 화자의 남근이 발기된 것이다. 이상 시인의 시에서 남근의 표피가 귀두를 감싸고 있는 것을, 마치 옷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하여 표현한 시로는 이 있다. ‘에이, 아직은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겠어?’라고 생각한 듯이 깔깔깔 웃는 과부의 웃음은, 화자에게는 표피를 비집고 나와 발기된 남근이 다시 표피 속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들어가도 좋다던 女人이 바로 제게 좀 鮮明한 貞操가 있으니 어떠냔다. 나더러 世上에서 얼마짜리 貨幣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는 뜻이다. 들어가도 좋다던 여인 즉 깔깔깔 웃던 여인이, 바로 정색을 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좀 선명한 정조가 있으니 어떠냐? 하고 말하듯이, “너 여자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을 것이다. 여인은 과부였고, 과부가 재가를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선명한 정조를 가진 것이다. 그러한 여자가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고 말했다는 것은 화자에게는 ‘너 나와 할 수 있겠니?’ 라고 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어떠냐’는 말을 화자는 ‘할 수 있겠니?’로 들었을 것이다. 결국 “너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라는 말을 화자는 ‘세상에서 얼마짜리 화폐 노릇을 하는 세음이냐’라는 말로 들린 것이다. 화폐는 물건 등을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이다. ‘다른 여자와 해 본 경험이 있니?’ 라는 말은, 세상에서 남자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한 경험을 묻는 것이다. 나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더니 窈窕하다던 貞操가 성을 낸다. 그리고는 七面鳥처럼 쩔쩔맨다. 화자는 일부러 다홍 헝겊을 흔들었다. 화자는 발기되어 붉게 물든 남근을 조금 보여주었다. ‘충분히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다, 남자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귀두를 둘러싸고 있는 표피가 두루마기라면, 다홍 헝겊은 발기된 남근의 일부에 해당한다. 피륙의 조각을 ‘헝겊’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자는 발기된 남근을 조금 꺼내어 보여준 것이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요조하던 정조 즉 조용하던, 남편을 사별하고도 재가를 하지 않은 과부가 성을 내다. 마치 성이 나서 그런 거처럼, 갑자기 화자를 잡아 넘어뜨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씩씩거리면서, 마치 화자를 두들겨 주는 것처럼, 여성 상위의 성교를 격렬하게 한다. 그리고는 칠면조처럼 얼굴색이 다양하게 변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여자가 화자를 통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성욕을 풀고 있다.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개 여자의 경험이 없는 남자와 남자의 경험이 있는 여자가 성교를 할 때는 남자가 능동적이지 못한가 보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남자의 위에서 주도적으로 하는가 보다.  이 시는 와도 상황이 유사하다. ​ ​ ​ ▣   買春 ​ 記憶을맡아보는器官이炎天아래생선처럼傷해들어가기始作이다. 朝三暮四의싸이폰作用. 感情의忙殺. 나를넘어뜨릴疲勞는오는족족避해야겠지만이런때는大膽하게나서서혼자서도넉넉히雌雄보다別한것이어야겠다. 脫身. 신발을벗어버린발이虛天에서失足한다. ​ ― 1936. 10. 4 ~ 9 ―     買春 ‘매춘(賣春)’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매춘(買春)’은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맞나? 이상 시인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존재다. 뻔한 것을 뻔하게 쓰는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이 돈을 주고 몸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독자는 너무나 쉽게 시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된다. 시가 재미없을 것이다. 이 시의 제목 ‘매춘(買春)’은 젊음을 산다는 의미다. ‘춘(春)’은 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자가 몹시 아픈가 보다. 이상 시인이 병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가 보다. 를 보면 이상 시인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이 시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아픈 화자가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몹시 아파서 곧 죽을 수도 있는 젊은 환자가, 병원에 가서 돈을 주고 수술을 한 다음, 다시 건강을 회복하려고 할 때, 병원에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 행위는 젊음을 사는 행위다. 매춘(買春)이다. 記憶을 맡아보는 器官이 炎天 아래 생선처럼 傷해 들어가기 始作이다. 朝三暮四의 싸이폰作用. 感情의 忙殺. 수술을 하기 전에 마취를 하는 장면 같다. 기억을 맡아 보는 기관 즉 뇌가 뜨거운 햇볕 아래 생선처럼 상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뇌가 상해 들어간다는 말은 기억이 점점 가물가물해 진다는 말이다. 마취를 할 때 의식을 점점 잃어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취는 조삼모사의 사이펀 작용이다. 하나의 사물이 세 개로 보였다가 네 개로 보였다가 하면서, 의식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마취는 감정 즉 느낌을 빠삐 죽이는 것이다. 나를 넘어뜨릴 疲勞는 오는 족족 避해야겠지만 이런 때는 大膽하게 나서서 혼자서도 넉넉히 雌雄보다 別한 것이어야겠다. 나를 넘어뜨릴 피로는 오는 족족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마취는 피로가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대담하게 나서서 넘어져야 한다. 승부를 가르는 경기에서는 둘이 겨루다가 내가 피곤하면 그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마취는 혼자서도 넉넉히 넘어지는 것이다. 마취할 때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암수가 성교 후에 몰려오는 피곤이 나를 넘어뜨리는 것과는 이상스럽게 다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은 남녀가 성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脫身.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虛天에서 失足한다. 탈신(脫身). 관계하던 일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여기서 관계하는 것은 의식이고, 그 의식에서 몸이 빠져 나온다. 즉 의식을 잃고 자유로운 몸이 된다. 이것은 마취다. 신발을 벗어버린 발이 텅 빈 하늘에서 실족하여 떨어진다. 사람이 높은 다리 위나 절벽에서 자살을 할 때는 신발을 벗어놓고 뛰어내린다고 한다. 그러나 마취는 스스로 죽음과 같은 상태로 뛰어드는 것이다.   ​   ▣   生涯 ​ 내頭痛위에新婦의장갑이定礎되면서내려앉는다. 싸늘한무게때문에내頭痛이비켜설氣力도없다. 나는견디면서女王蜂처럼受動的인맵시를꾸며보인다. 나는已往이주춧돌밑에서平生이怨恨이거니와新婦의生涯를浸蝕하는내陰森한손찌거미를불개미와함께잊어버리지않는다. 그래서新婦는그날그날까무러치거나雄蜂처럼죽고죽고한다. 頭痛은永遠히비켜서는수가없다. ― 1936. 10. 4 ~ 10. 9 ―     生涯 생애(生涯)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한평생, 혹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생애(生涯)라는 말이 무엇을 암유한다고 본다면, 살아있는 물가, 솟아나는 물가 즉 체액이 솟아나는 신부의 음부를 암유한다. 여자는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던 이상은 신부에게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못 시켜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내 頭痛 위에 新婦의 장갑이 定礎되면서 내려앉는다. 두통(頭痛)은 머리가 아픈 증상이다. 그렇다면 이상 시인에게 있어서, 신부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두통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이상의 시 , , 등을 참고할 때, 남녀가 함께 사는 가정에서는 아내도 늘 성적으로 만족을 할 수 있어야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화자의 두통이다. 화자의 두통 위에 신부의 장갑이 정초되면서 내려앉는다.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고민하는, 화자의 남근 위로, 신부의 손이 주춧돌처럼 내려앉았다. 잘 발기가 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을 신부가 손으로 애무를 하는 것 같다. 힘이 빠진 남근은 신부가 손으로 애무해도 신부의 손을 제대로 느껴 발기되지 않는다. 마치 장갑을 끼고 애무하는 것처럼 느낀다. 왜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을 두고 정초(定礎)되었다고 했을까? 주춧돌을 놓는 것은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함이다. 신부가 화자의 남근을 애무하는 것은 화자의 남근을 자신의 손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신부의 손이 주춧돌이 된다. 싸늘한 무게 때문에 내 頭痛이 비켜설 氣力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싸늘한 주춧돌의 무게 즉 기둥처럼 남근 세우는 원동력이 되는 성적 에너지(정력, 기력)가 싸늘하게 식어 가라앉았기 때문에 화자의 두통이 비켜설 기력도 없다. 화자의 두통인 남근이 제대로 발기되지 않는 것을 피할 기력도 없는 것이다. 나는 견디면서 女王蜂처럼 受動的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화자는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남근을 신부가 열심히 애무하는 것을 견디면서, 여왕벌처럼 수동적인 맵시를 꾸며 보인다. 마치 여왕벌처럼 아내의 애무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수동적인 맵시를 꾸미는 것은 신부가 애무를 잘 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다는 의미다. 꾸미는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已往 이 주춧돌 밑에서 平生이 怨恨이거니와 新婦의 生涯를 浸蝕하는 내 陰森한 손찌거미를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화자는 이왕 이 주춧돌 밑에서 평생이 원한이다. 주춧돌 밑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게 하는 성적 에너지다. 따라서 화자는 늘 남근을 세울 수 있는 기력이 달리는 것이 원한이다.  그래서 신부의 생애 즉 신부의 체액이 솟아나는 음부를 침식하는 내 쓸쓸한 손찌검을 불개미와 함께 잊어버리지 않는다. 신부의 생애를 침식한다는 것은 신부의 음부를 손으로 파고 들어간다는 의미다. 불개미는 단것을 좋아하여 단물이 있는 곳에 모여들어 그것을 먹는다. 화자도 불개미처럼 신부의 체액이 나오는 달콤한 음부를 손으로 파고들면서 애무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화자가 아내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애무하여 아내를 만족시키는 장면이다. 그래서 新婦는 그날그날 까무러치거나 雄蜂처럼 죽고죽고 한다. 頭痛은 永遠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그래서 신부는 그날그날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수펄처럼 죽고 또 죽고 한다. 수펄은 여왕벌과 교미를 마치면 죽는다고 한다. 신부는 화자의 애무에 의해서 성적으로 만족하여 까무러치거나 만족 후에 마치 죽는 것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화자의 두통은 영원히 비켜서는 수가 없다. 화자의 두통거리인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은 영원히 피할 수가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아내를 손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골칫거리도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 ​ ▣   ​自像 ​ 여기는어느나라의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盜賊을맞았다는소문도있다. 풀이北極에서破瓜하지않던이수염은絶望을알아차리고生殖하지않는다. 千古로蒼天이허방에빠져있는陷穽에遺言이石碑처럼은근히沈沒되어있다. 그러면이곁을生疎한손짓발짓의信號가지나가면서無事히스스로와한다. 점잖던內容이이래저래구구기시작한다. ― 1936. 10. 4 ~ 10. 9 ―    ​ 自像 이 시의 제목 ‘自像(자상)’은 ‘自畵像(자화상)’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상이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쓴 시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이상 시인의 시를 읽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은 천하에 비일비재한 일이다. 여기서 자상은 자신을 본뜬 형상이라는 의미다. 이상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몰라서 자상이라고 했겠는가. 물론 이상 시인은 자상을 자화상으로 읽을 어리석은 사람들을 예상하면서 썼을 것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또 하나의 재미다. 서정주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시를 거꾸로 읽는 것은, 우리 한국문학의 상식이요 비극이다. 언제 기회가 다면 서정주 시인의 시들도 읽어보고 싶다. 각설하고,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고, 자상 자신의 형상이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그 어떤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자식이라 하겠다. 또 이것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남근이라 하겠다. 자식은 아비의 형상을 닮게 되는 것이고, 자식을 낳을 화자의 남근 또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상 시인이 남근을 사람의 형상으로 묘사한 시는 여러 편이 있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 등이 있다. 그냥 이상 시를 읽은 독자로서 추정해 본다. 이 시는 1936년에 쓴 시다. 1936년 유월을 전후하여 시인은 슬그머니 변동림과 결혼하게 된다. 둘이만 어디엔가 가서 결혼식을 했던 것 같고, 간단한 살림살이만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홍이와는 다른 면에서 변동림은 이상 시인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였던 것 같다. 결혼을 하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되고, 가정이 이루어졌으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그러나 이상 시인과 변동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였던 것 같다. 자식이 있었더라면 하는 가정도 해 본다. 필자는 더 이상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알기 위하여 이런저런 책을 읽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읽어볼 마음도 별로 없다. 이것저것 안다는 것이 반드시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데드마스크는 盜賊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여기 즉 화자의 남근은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다. 발기된 남근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귀두가 얼굴의 형상이요, 귀두 밑 잘록한 부분이 사람으로 치면 목에 해당하고, 그리고 그 아래가 바로 몸통의 형상이다. 그런데 발기되지 않는 화자의 남근은, 사람의 얼굴 형상이라고 하기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분간이 안 되고, 죽은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같고, 제대로 사람의 형상도 갖추지 못한 것도 같다. 어느 나라의 데드마스크와 같다. 그 데드마사크는 도적을 맞았다는 소문도 있다. 화자의 남근이 기력을 회복했다는 말이다. 이상 시인과 변동림의 결혼은 친구들도 몰랐던가 보다. 어느 날 이상의 집에 갔더니, 거기에 변동림이 있었고, 나중에 사람들은 이상 시인이 변동림과 결혼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상 시인이 결혼하였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결혼을 하였으면 제대로 남편 구실을 할 것이고, 그러면 남근이 제 구실을 할 것이라는 발상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풀이 北極에서 破瓜하지 않던 이 수염은 絶望을 알아차리고 生殖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적 열기가 올라오지 않고 차갑게 식어서 발기하지 못한 남편이 아내와 성교를 한다면, 남근이 아내의 음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편의 음모와 아내의 음모만 서로 부딪힌다. 따라서 아내의 처녀막을 뚫을 수 없다. 처녀막이 터지지 않던 수염 즉 아내의 음부는 절망을 알아차리고 생식하지 않는다. 자손을 낳고자 하는 노력, 즉 성교를 포기한다. 千古로 蒼天이 허방에 빠져 있는 陷穽에 遺言이 石碑처럼 은근히 沈沒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푸른 하늘이 움푹 파인 곳에 빠져 있는 구덩이에, 유언이 돌비석처럼 은근하게 침몰되어 있다. 참으로 말이 어렵다. 아득한 옛날부터 아내는 아래에 눕고, 남편은 아내의 몸 위에 올라서 자손을 잉태하여 생식하는 상식이다. 따라서 푸른 하늘이 움푹 들어간 곳에 빠져 있는 함정은, 푸른 하늘을 향하여 누워 있는 아내의 음부다. 여기에다가~~ 자식을 낳으면, 아비는 그 자식에게 유언을 하고 죽는 것이다. 자식은 유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은 자신을 낳아 길러 준 아비가 죽으면 석비를 세우는 것이다. 유언을 남기고 석비를 세워 줄 자식을 낳고자 하는 화자, 남근이 석비처럼 은근하게 아내의 음부에 가라앉았다. 남근이 드디어 발기되어 석비처럼 굳게 딱딱하게 되고, 아내의 음부를 향하여 은근하게 쑥욱 들어가 잠긴다. 석비는 딱딱하게 발기된 남근을 암유한다. 그러면 이 곁을 生疎한 손짓발짓의 信號가 지나가면서 無事히 스스로와 한다 그러면 이 곁을 즉 아내의 함정에 침몰한 화자의 석비 곁을 생소한, 전에는 없었던 손짓발짓의 신호가 지나간다. 모처럼 성적 쾌감에 젖은 아내가 손과 발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만족한다. 그러면서 아내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수줍고 부끄러워한다. 성교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조용해지면서, 너무 손짓발짓을 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흥분하여 발광을 한 것에 대해서,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한다. 점잖던 內容이 이래저래 구구기 시작한다 ‘內容(내용)’은 안 내, 얼굴 용, 해서 아내의 함정 안에 있던 얼굴이다.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 형상을 갖추었던 화자의 자랑스런 남근이다. 그러나 아내와의 성교가 끝나고 아내가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면, 화자의 점잖던 내용 즉 발기되어 제대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던 남근은, 이래저래 구기기 시작한다. 남근은 힘이 빠지고 줄어들면서 이래저래 좌우로 힘없이 흔들리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있던 귀두가 구겨저 줄어들기 시작한다. 도로 데드마스크가 되고 만다.   ▣   8. 無題 一九三三. 六. 一 ​ 天秤위에서 三十年동안이나 살아온사람(어떤科學者) 三十萬個나넘는 별을 다헤어놓고만 사람(亦是) 人間七十 아니二十四年동안이나 뻔뻔히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自敍傳에 自筆의訃告를 揷入하였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 ― 1933. 7 ―   1933년 6월 1일, 이상 시인이 무슨 중대한 선언을 하는 것 같다. 무엇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를 잘 읽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시만 읽어서는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시는 애매하다. 애매한 시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연보라도 참고해야 할지 모른다. 天秤 위에서 三十年 동안이나 살아온 사람(어떤 科學者) 三十萬 個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고 만 사람(亦是) 천칭(天秤)은 저울의 한 종류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해 물체의 질량을 측정하는 장치다. 또 처녀자리와 전갈자리 사이에 있는 별자리를 천칭자리라고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천칭 위에서 살아온 사람과 마찬가지로, 30만 개나 넘는 별을 다 헤어 놓은 어떤 과학자. 그도 역시 대다한 과학자다. 일생동안 천칭자리 하나만을 관찰하고 연구한 과학자다. 평생 동안 한 우물을 판 사람이다. 人間七十 아니 二十四 年 동안이나 뻔뻔히 살아온 사람 (나) 나는 그날 나의 自敍傳에 自筆의 訃告를 揷入하였다.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있다. 인간 칠십(人間七十)은 한 사람의 한평생이다. 한평생 동안, 아니 이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나이는 24세였으니, 24년 동안, 나름대로 한평생 동안, 화자는 뻔뻔히 살아온 사람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화자의 삶은 앞의 과학자의 삶과 대조된다. 과학자가 한평생 하나의 일에 몰두하여 살아온 사람이라면, 시인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뻔뻔히 살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인은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화자는 그날, 자신의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한다. 자서전? 아마 일기일 것이다. 일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다. 자서전이다. 자서전에 부고를 삽입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죽은 삶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以後나의肉身은 그런故鄕에있지않았다 나는 自身나의詩가 差押當하는꼴을 目睹하기는차마 어려웠기 때문에. 이후 화자의 육신은 그런 고향에 있지 않았다. 육신이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고향에 있지 않겠다. 지금까지 이것저것 하면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말로 보인다. 실제로 이상은 1933년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두고, 취직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시가 차압당하는 꼴을 차마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압당하는 것은 강제로 빼앗기는 것이다. 남들이 자신의 시를 너무 쉽게 읽어버리는 꼴을 보기 싫다는 말이다. 시라는 것은 그 의미를 쉽게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시를 본다. 그러나 의미가 쉽게 드러나는 시는, 한 번 본 다음에는 다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는 앞으로는 시를 쓰는 것에만 전념하여,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시를 더욱 어렵게 쓰겠다는 말로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상의 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된다. 아직도 이상의 시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아직도 이상의 시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필자의 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차압당하지 않았다.   ​ ​ ▣   꽃나무  ​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 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爲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 1933. 7 ―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라는 문장을 여러 번 되뇌어 보자. 그러면 어느새 벌판 한 복판에 있는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게 된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 벌판 한 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는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화자는 지금 그 꽃나무 하나를 상상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상의 시 이 떠올랐다. 은 아메리카 여자와 남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자위(自慰)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시의 마지막에서 ‘우리의 하늘은 너무 푸르다. 폐쇄주의적이다’라고 말한다. 성(性)에 대해서 지나치게 폐쇄주의적인 우리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화자는 지금 요염한 여자 나체 사진을 보고 있다.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요염한 자세의 여자 사진이다. 흔히 꽃은 여자에 비유된다. 여자에 몰려드는 남자는 벌과 나비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벌판 한 복판에 여자가 하나가 있다. 여자의 나체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는 것이다. 어디에 사는 여자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다.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듯이, 벌판 한복판에 있는 여자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여자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누구나 상대할 수 있는 창녀나 그와 유사한 부류의 여자는 벌판 한복판에 있는 꽃이다. 近處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 사진 속에는 한 명의 여자만 있다. 화자는 어디에 사는지 모르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한다. 그래서 근처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오직 사진 속의 실제 여자 하나만을 상상하면서 그 여자에만 몰두하고 있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熱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熱心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사진 속의 여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여자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요염한 자세를 하고 있다. 사진의 실제 여자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자를 유혹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요염한 자세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화자는 생각한다.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사진 속의 실제 여자는, 마치 자신이 가장 요염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듯이 보인다.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요염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참으로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는 막 달아났소. 그래서 화자는 막 달아났다. 막 달아나는 행위는 대상으로부터 급히 멀어지는 행위다. 그리고 막  달아날 때는 손을 앞뒤로 마구 흔들어 댄다. 숨이 찬다. 화자는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그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남자를 간절히 원하면서 유혹하고 있는 여자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손을 마구 흔들면서, 숨을 몰아쉰다. 자위를 한 것이다. 자위를 하고 사정을 하면 여자 생각에서 멀어진다. 자위를 하면 여자로 인해 일어난 욕망이 달아난다. 그래서 막 자위하는 것이 그 여자로부터 막 달아나는 것이다. 한 꽃나무를 爲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한 여자,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애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화자는 참 이상스러운 흉내를 낸 것이다. 그 여자의 욕망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서, 참 이상스러운 흉내만 낸 것이다. 화자는 여자 나체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 속의  실제 여자를 상상하면서 자위를 한 것이다. ​ ​ ​ ​ ▣   이런 詩 ​ 역사를하느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가보니 危險하기짝이없는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凄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作文을하였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럼히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詩는 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 1933. 7 ―   이 시는 소설 에도 등장하는 금홍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1933년 시인이 스물 세 살이었을 때, 폐병으로 인한 각혈로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요양을 간다. 거기에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게 되고, 이후 상경하여 라는 다방을 개업한다. 금홍이를 마담으로 앉히고, 약 3년간 동거한다. 를 보면 금홍이는 이상의 정식 부인이라기보다는 동거하면서 몸을 팔기도 하는 여자가 아닌가 싶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역사를 하느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서인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가 보니 危險하기 짝이 없는 큰 길가더라.  역사는 토목건축이나 공사 따위의 커다란 일이다. 여기서는 이상이 백천온천에 폐병을 고치기 위해서 갔던 일, 혹은 요양 갔다가 기생 금홍이와 관계를 맺은 일을 암유한 것으로 보인다. 땅을 파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면 기생인 금홍이와 성적 관계를 맺는 행위를 암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역사를 하다가 큰 돌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그 돌은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이 익은 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여자였다. 보통 어딘지 마음에 드는 사람은 꼭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돌을 목도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에 버렸다. 그 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사람들이 그 돌을 몰래 가져가기 좋은 곳이다. 이상이 금홍이를 데리고 서울에 와서 다방 의 마담으로 앉힌 것을 두고 하는 말로 보인다. 다방이라는 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사람들이 금홍이에게 눈독을 들이기 쉬운 곳이다. 금홍이도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쉽게 바뀌기 좋은 곳이다. 따라서 다방은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큰길가와 다름이 없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으니 必是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變怪로다 간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凄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作文을 하였다. 그날 밤에 한 소나기 하였다. 소나기는 퍼붓는 것이다. 화자는 금홍이에게 퍼붓었다. 금홍이가 다른 남자와 계속 관계하는 것을 두고 금홍이와 다툰 것이다. 그렇게 퍼부었으면 반드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가보니, 이상했다. 금홍이가 간데 온데 없었다. 금홍이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화자는 처량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하였다. 아래와 같은 마음을 담아서 시를 썼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平生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럼히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그대 금홍이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나의 차례가 되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금홍이를 데려간 어떤 사람이 읽고,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볼 것 같아서, 그만 찢어버리고 싶었다. 괜히 자신을 비웃을 것 같았다. 아니면 미친 놈 취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 ​ ​ ▣   普通記念 市街에 戰火가일어나기前 亦是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無智하였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피가묻은것처럼자그마하다. 계집을 信用치않는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들지 않는다 나의말이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影響되는일이없었다. 계집은 늘내말을 눈으로들었다 내말한마디가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적이없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나를버렸던까닭이었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끼인 손톱은길었다 無爲한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일 저런일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종이로 만든 푸른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만든흰鶴同體한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火爐가햇볕같이 밝은데는 熱帶의 봄처럼부드럽다. 그한구석에서 나는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줄을 다알았더라. ― 1934. 6 ―   普通 記念 보통 기념!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무엇을 기념할 때, 보통은 특별한 것을 기념한다. 특별한 누구의 생일을 기념하고, 특별한 결혼 몇 주기를 기념하고, 특별한 죽음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보통 기념’이란다. 보통의 것을 기념한다는 말인지, 보통이 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인지, 기념 자체가 보통이었다는 말인지, 하여튼 보통 기념은 보통 기념이 아닌 것 같다. 특별한 기념인 것도 같다.  언어유희를 하고 있는 이상의 시 앞에서 옥편을 펴 놓고 읽지 않는 한, 어떠한 지성도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이상이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되었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지 알게 되었다. 여자를 공전 일주함으로써 여자에 대해서 지혜를 갖게 되었다. 市街에 戰火가 일어나기 前 / 亦是 나는 뉴―톤이 가리키는 物理學에는 퍽 無智하였다. 사창가에 가서 창녀와 뜨겁게 하나가 되기 전, 역시 옳다. 화자는 뉴턴이 말하는 물리학 즉 만유인력 즉 생면부지의 남녀가 그렇게 뜨겁게 하나가 될 수 있는 원리, 남녀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화자는 사창가에 가서 몸소 체험함으로써 남녀 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체험 후에 그 깨달음을 ‘역시 옳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거리를 걸었고 店頭에 苹果山을 보며는 每日같이 物理學에 落第하는 腦髓에 피가 묻은 것처럼 자그마하다. 화자는 거리를 걸었고, 여관 앞에 창녀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매일같이 아내와의 성교에 소질이 없는 남근이, 마치 사정을 하되 피를 흘리듯이 조금 하고 난 뒤 줄어들었다. 계집을 信用치 않는 나를 계집은 絶對로 信用하려 들지 않는다 나의 말이 계집에게 落體運動으로 影響되는 일이 없었다. 성적으로 아내를 분명하게 다스릴 줄 모르는 화자에게, 아내는 절대로 믿고 베풀려고 들지 않는다. 화자의 남근이 아내에게 성교로 이어져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계집은 늘 내 말을 눈으로 들었다. 내 말 한 마디가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늘 화자의 남근을 눈으로 들었다. 화자의 남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화자의 남근 한 마디, 한 마디만한 작은 남근을 계집의 눈자위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아내가 화자의 남근에 똑바로 보고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期於코 市街에는 戰火가 일어났다 나는 오래 계집을 잊었었다 내가 나를 버렸던 까닭이었다. 기어코 화자가 창녀와 샀다. 화자는 오래 아내를 잊었다. 아내의 성감대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화자가 화자를 버렸던 까닭이다. 화자는 아내가 어떻게 해야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제도 더러웠다 때 끼인 손톱은 길었다 / 無爲한 日月을 避難所에서 이런 일 저런 일 / 우라끼에시(裏返) 裁縫에 골몰하였느니라. 사창가에서 창녀를 만나기 전, 화자는 주제꼴도 더러웠다. 때가 낀 손톱도 더러웠다. 하는 일 없는 낮과 밤을, 아내와의 어려움을 피하면서, 이런 일 저런 일, 아내의 속마음을 돌이킬 방법과, 어떻게 하면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가에만 골몰하였다. 성적으로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鶴同體 한 개가 서있다. 쓸쓸하다. 종이로 만든 푸른 솔잎가지에 또한 종이로 만든 흰 학과 같은 고상한 몸뚱이 한 개가 서 있다. 쓸쓸하다. 화자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아내에 대해서 마치 고상한 한 마리 학처럼, 고상한 것에서 그 이유와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결국 아내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화자는 쓸쓸했다. 火爐가 햇볕같이 밝은 데는 熱帶의 봄처럼 부드럽다. 그 한 구석에서 나는 地球의 公轉一週를 紀念할 줄을 다 알았더라. 화로처럼 뜨거움을 간직한 창녀가, 햇볕같이 밝은 데 즉 뜨거움이 모여 있는 곳인 음부는, 열대의 봄처럼 뜨거우면서도 부드럽다. 그 음부의 한 구석에서, 화자는 지구의 공전일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을 알았다. 화자는 창녀를 대상으로 여자에 대해서 탐구한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지구에는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화자는 여자를 성적 단계에 따라서 다루어야 함을 터득한 것이다. 처음에는 봄처럼 부드럽게 애무를 하고, 그리하여 여자의 몸이 점점 여름처럼 뜨거워지면 그 때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행위로 절정에 도달하게 한다. 그리고 절정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여자는 서서히 식어간다. 이때에도 역시 애무를 통하여 여자의 쾌감의 나머지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는 겨울처럼 식어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지구의 공전일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자는 창녀와의 관계 속에서 여자의 뜨거워짐과 식어감의 실마리를 생각할 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의 관계가 보통 사람들의 부부 관계처럼 돌아왔던 것이다. ‘普通紀念(보통기념)’은 한 여자로부터의 경험이 널리 통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의미다. 창녀로부터 여자 다루는 법을 터득한 화자, 이를 아내에게 적용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 ​ ▣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1933. 10 ― ​ ​ 거울은 거울인가? 이상의 시에는 거울과 관련된 제목을 가진 몇 편의 시가 나온다. 과 가 대표적이다. 이상의 시는 기본적으로 제목들에서부터 상식적 접근을 거부한다. 은 수염이 아니고 음모다. 은 여자를 사는 것이 아니고, 젊음을 사는 것이다. 는 총구가 아니고 정액을 발사하는 남근이다. 은 거울이 아니고 사진이다. 는 정부에서 발표하는 글이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글이다. 은 자화상이 아니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남근이다. 은 대낮이 아니라, 대낮과 같이 밝은, 전등불이 켜 있는 깜깜한 새벽이다. 은 빈 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미래’의 의미로도 쓰였다. 이상의 시는 제목에서부터 상식적 읽기를 거부하고 의심할 때, 그 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거울은 거울이라는 상식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거울은 거울이 아니다. 거울은 사진이다. 화자는 지금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필자는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대충 아는 대로 이야기하면, 우리 나이 셈법으로 네 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간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는 이상을 양자로 맞은 것이다. 에 보면 가난했던 생부는 총독부에 기술직으로 있어서 비교적 잘 살던 큰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고, 또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맏아들인 이상을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보낸다. 큰아버지는 그 후 어느 젊은 여자를 첩으로 맞아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이상은 어려서부터 똑똑하여 큰아버지는 이상을 미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어린 시절 이상은 점점 자라면서 자신이 큰아버지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한다. 은 점점 자라면서 큰아버지가 자신을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갈등하는 것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시다. 이상은 1910년생이다. 이 시는 1933년에 썼다. 이상의 나이 24세 때다.  이상은 자랐다. 자신을 양자로 보낸 생부에 대한 반감, 큰아버지 집에서 대를 이어가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대한 거부감 등이 항상 이상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에 이런 의식이 엿보인다. 그리고 총독부 기수직이라는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 폐병으로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 것도 이 시절이다. 고독했던 이상은 백천온천에서 금홍이를 만나고, 금홍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금홍이는 이상이 매우 좋아했던 여자인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서 화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큰아버지가 양부라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내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고 있다고 상황을 설정해 보자. 이 시의 제목 거울은 사진이다. 거울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하는 도구다. 어린 시절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도 역시 사진이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사진 속에는 소리가 없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현재의 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사진 속에도 나에게도 귀다 있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나의 귀는 현재의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다. 여기서 보면 현재의 화자와 어린 시절의 화자는 단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의 어린 화자는 그 때의 생각에서 말을 하고 살았다. 그리고 현재의 화자는 그 때 생각하고 말하던 화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화자는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를 하고 싶다. 그러나 그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화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나는 귀가 두 개나 있으면서도, 지금 나의 충고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당연하다. 현재의 내가 어찌 과거의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화자는 현재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무엇인가 충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에 대한 부정이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사진 속의 나는 왼손잡이다. 지금의 나와 반대로 된 존재다. 따라서 상반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의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다.  여기서 악수는 평소에 잘 아는 대상을 만났을 때, 반가워서 나누는 인사다. 지금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의 삶은 서로 다른 삶을 살기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도 반갑지 않은 것이다. ‘――’은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의미에 대해서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에게 ‘악수를 받을 줄 모른다.’는 말이 통상적인 악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현재의 나와 어린 시절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의미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 거울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지금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진이기 때문에 화자는 어린 시절의 실제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이 아니었다면 화자가 어찌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나보기라도 했겠는가. 사진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다. 사진을 통하여 실제 과거의 자신을 만져볼 수 없다. 지금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신에게, 만지면서, 연민이라도 보내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화자는 지금 사진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보고 있는 사진 속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생각을 보여주는 사진은 없다. 그러나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늘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다. 오래 되어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사진 속의 나는 아마 바르지 않고, 뒤바뀌게 된 삶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화자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삶이 뒤바뀐 것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 때의 입장에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어떻게 학교를 가고,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을 안 화자는 자신의 운명에 갈등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운명을 뒤바꾼 자들이 바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뒤바뀐 삶을 자신이 살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외로 된 사업’은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 사진 속의 어린 시절의 삶, 자신의 운명이 바뀐 것도 모른 채 무엇인가 골몰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참된 나와는 반대다. 사진 속의 과거의 나의 삶은 지금 참되고 올바른 지금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나 또 외양은 꽤 닮았다. 그런데 나는 사진 속의 과거의 나를 근심하여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나 네 삶이 잘못되었다고 진찰할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삶을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퍽 섭섭하다. 과거 자신의 삶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   紙碑 ​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작아서다리는짧고바른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어가면아아이夫婦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舞事한世上이病院이고꼭治療를기다리는無病이끝끝내있다. ― 1935. 9. 15 ―     1933년 이상 시인이 23세일 때, 3월 달에 이상 시인은 각혈을 한다. 폐병이 깊어진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백천온천에 요양을 간다. 거기서 기생 금홍이와 사귀게 되고, 상경하여 서울 통인동 집을 처분하여 금홍이와 함께 라는 다방을 개업하고 동거한다.  이 시의 제목 는 다방 를 의미한다. 다방 를 경영하던 아내 금홍이을 가리킨다. 또 지비(紙碑)는 종이로 만든 비석이다. 비석은 죽은 자에 대한 기록이다. 가문 대대로 그 죽은 자를 기억하게 해 준다. 그러나 종이비석은 오래 가지 못한다. 금홍이도 죽어서, 이상의 가문에 대대로 남아 기억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또 ‘집’은 아내다. 아내를 ‘집의 사람’이라 한다. 보통 발음할 때, ‘지비사람’이 아내다. 따라서 금홍이는 이상의 아내이기도 하고 아내가 아니기도 하다. 하여튼 금홍이가 지비(紙碑)다. 내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 아프고 안해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다리가 아프니 화자의 키는 커서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고 아내의 키는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단순히 키가 크고 키가 작은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많이 배워서 지식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 그래서 키가 크다. 그러다보니 다리는 길고 왼다리가 아프다. 무엇인가 부족한 화자는 남들이 우러러보지만 절룩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상은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지식이다. 지식은 많으나 현실적으로 살아갈 능력이 부족하다. 아내는 키가 작아서 다리는 짧고 바른 다리가 아프다. 아내는 배운 것이 없다. 기생 혹은 창녀 신분이다. 사람들이 낮추어 본다. 윤리적으로 내려다본다. 그래서 아내는 키가 작다. 그러다 보니 생활력은 있으나 윤리인 면이 부족하다. 오른 다리가 아프다. 화자는 바르게 세상을 살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러나 반대쪽이 부족하다. 왼다리가 아프다. 금홍이는 그릇된 길로 들어섰다. 바르게 살고자 하나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족하다. 바른다리가 아프다. 내 바른다리와 안해 왼다리와 성한 다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가면 아아 이 夫婦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화자의 바른다리 즉 지식이 성한 다리와 아내의 왼다리 즉 생활력 성한 다리가 끼리끼리 한 사람처럼 걸어간다면, 아아, 이 부부는 부축할 수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버립니다. 비록 화자와 아내는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각각 절름발이 인생이다. 외형적으로 정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남들이 부축할 필요가 없다.  舞事한 世上이 病院이고 꼭 治療를 기다리는 無病이 끝끝내 있다. 춤에 전념하는 세상이 병원이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마치 춤추듯이 잘 걸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곳이 병원이다. 화자 부부에게는 치료해야 할 것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병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끝끝내 있다. 화자의 부부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그 삶 속에는 무엇인가 아픔이 존재한다. 일상으로서는 병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무엇인가 치료를 기다리는 병이 있다. 그 치료를 기다리는 부분은 화자의 입장에서는 생활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일 것이고, 아내의 입장에서는 윤리적인 면이 아니겠는가. ​ ​ ​ ▣   明鏡 ​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잊은 季節에서는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薔薇처럼 착착 접힌 귀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만적 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右편으로 옮겨앉은 心臟일망정 없으란 법 없으니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여기 있는 한 페이지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 1936. 5 ―    제목 은 맑은 거울이다. 아니 은 사진이다. 유리 액자 속에 든 사진은 사랑하던 그녀의 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녀의 얼굴은 마치 거울 속에 그녀가 비쳐 있는 것처럼, 밝고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거울 속의 그녀는 우리가 직접 만지고, 감정을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없듯이, 사진 속의 떠나간 그녀도 또한 만질 수도 없고, 대화할 수도 없고, 감정을 나눌 수도 없기에, 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여기 한 페이지 거울이 있으니 / 잊은 季節에서는 / 얹은머리가 瀑布처럼 내리우고 여기 한 페이지의 거울과 같은 시진이 있다. 한 페이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진, 거울과 같이 마주보고 바라볼 수 있는 사진, 유리 액자 속에 있는 사진, 사랑했던 그녀의 사진을 화자는 보고 있다. 잊은 계절은 화자가 잊었던, 사진속의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시절이다.  그 뒤로는 얹은머리였지만 사진 속에서는 머리가 폭포처럼 내리우고 있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기생이었던 금홍이를 만났을 때 혹은 서울에 같이 올라와서 바로 찍은 사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물론 그 뒤 금홍이는 이상과 같이 살면서 얹은머리를 하였을 것이다. 울어도 젖지 않고 /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 薔薇처럼 착착 접힌 / 귀 / 들여다 보아도 들여다 보아도 / 조용한 世上이 맑기만 하고 / 코로는 疲勞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울어도 젖지 않는다. 화자가 울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슬픔에 젖지 않는다. 화자가 맞대고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휘지 않는다. 화자가 웃어도 사진 속의 그녀는 그대로 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깔깔깔 웃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를 하고 있다. 장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착착 접혀 있기에 화자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조용하며 맑은 세상이다. 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녀의 체취가 나지 않는다. 실제의 그녀는 향기로운 체취로 인하여 껴안고 성교를 하고 싶은 향기를 지님으로써, 성교 후에 화자를 피로하게 하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피로한 향기가 나지 않는다. 만적만적하는 대로 愁心이 平行하는 / 부러 그러는 것 같은 拒絶 / 右편으로 옮겨 앉은 心臟일망정 / 없으란 법 없으니 만지작만지작하는 대로 수심이 나란히 따른다. 일부러 거절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진 속의 그녀를 만져도 그녀가 만져지지 않는다. 비록 사진이지만, 심장이 없으란 법은 없으니, 아마 사진 속의 여자는 마치 화자가 자신을 만지는 것을 거절하는 것 같다. 설마 그러랴? 어디 觸診……하고 손이 갈 때 指紋이 指紋을 가로 막으며 / 섬뜩하는 遮斷 뿐이다 설마 사진 속의 여자가 실제로 만지는 것을 거절하겠느냐? 해서 화자는 ‘어디 촉각으로 진찰해 보자.’ 하면서 손이 여자의 얼굴로 갈 때,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으며, 섬뜩한 차단뿐이다.  지문이 지문을 가로막는 것은 손가락 유리가 가로막으며 화자의 손이 여자를 만지는 것을 차단한다는 의미다. 유리의 차갑고 섬뜩한 감촉은, 화자에게 마치 사진 속의 여자를 만지는 것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五月이면 하루 한 번이고 / 열 번이고 外出하고 싶어 하더니 /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수도 있는 법 떠나간 그녀는,  오월이면 하루 한 번이고 열 번이고 외출하고 싶어 했다. 기생으로 생활하던 금홍이는 자주 가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더니 나갔던 길에 안 돌아오는 법도 있는 법. 이제는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는구나. 거울이 책장 같으면 한 장 넘겨서 / 맞섰던 季節을 만나련만 / 여기 있는 한 페이지 / 거울은 페이지의 그냥 表紙―― 사진이 만약 두꺼운 책장 같으면 한 장 한 장 넘겨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련만, 여기 있는 한 장의 사진은 그냥 추억의 한 표지일 뿐, 그래서 떠나간 그녀와의 추억들조차 모두 떠올릴 수는 없다. ​ ​ ​   ▣   9. 遺稿 ​ ▣   肉親의章   나는 24歲. 어머니는바로이낫새에나를낳은것이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아름다운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木像을닮은막내누이 ․ 어머니는우리들三人에게孕胎分娩의苦樂을말해주었다. 나는三人을代表하여――드디어―― 어머니 우린 좀더형제가있었음싶었답니다. ――드디어어머니는동생버금으로 孕胎하자六個月로서流産한顚末을告했다. 그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19 (어머니의한숨) 三人은서로들알지못하는兄弟의幻影을그려보았다. 이만큼이나컸지――하고形容하는어머니의팔목과주먹은瘦瘠하였다. 두번씩이나咯血을한내가冷淸을極하고있는家族을爲하여빨리안해를맞아야겠다고焦燥하는마음이었다. 나는24歲.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 ​ ― 1956 ― ​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상이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갔는가 보다. 물론 이상은 4살 때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갔지만, 그 후 어찌어찌하여 양자를 간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보다. 친어머니는 이상이 양자 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두 동생들은 이상이 자신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화를 했을 것이다. 지금 이상은 24세다. 폐병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가 보다. 자신이 괴로울 때 떠올리는 것은 바로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상도 자신을 낳아 주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19세 때 찾아갔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24세 현재의 입장에서 19세 때 갔던 일을 떠올리며 그것을 시로 적고 있다. 제목 ‘육친(肉親)의 장(章)’은 바로 자신을 낳아주신 친어머니에게 보내는 글이다. 여기에는 현재 폐병으로 인한 괴로움, 그 괴로움 속에서 자신을 낳아주신 육친(肉親)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나 있다. 과 함께, 이상 시에서 가장 서정적인 시 중의 하나다.  나는 24歲. 어머니는 바로 이 낫새에 나를 낳은 것이다. 나는 지금 24세다. 친어머니는 바로 이 나이에 나를 낳으신 것이다. 여기서 화자는 친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물론 그 그리움의 강한 동기는 화자의 각혈부터 비롯된다. 각혈하는 화자는 자연히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낳게 된다. 고통스러운 화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친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고 또 안 해야 되는 현실 속에서, 그리움은 애절한 아픔으로 화자에게 밀려온다. 또 화자가 19세 때 친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친어머니는 자신이 육친인 것을 억지로 감추고 있으나, 화자가 두 번이나 각혈하자, 빨리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할 것이라고 초조해 하는 친어머니를 떠올린다. 聖쎄바스티앙과같이 아름다운 동생 ․ 로오자룩셈불크의 木像을 닮은 막내누이 ․ 어머니는 우리들 三人에게 孕胎分娩의 苦樂을 말해 주었다. 지금은 19세 때 친어머니를 찾아가서 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의 상황이다. 화자는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고, 친어머니도 아들을 앞에 두고 내 아들이라고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화자는, 자신이 친형이요 친오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동생들을 애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세바스티앙과 같이 아름다운 남동생을 본다. 자신의 동생, 그러나 동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동생들이 어찌 예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로오자룩셈불크의 목상을 닮은 막내누이. 참으로 예쁜 여동생이다. 어머니는 우리들 삼인에게, 자신이 낳은 혈육들에게 잉태하고 분만하는 어려움과 즐거움을 말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 잉태 분만의 고락을 말할 때, 어찌 앞에 있는 아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있는 화자 역시 그 말 속에는 자신을 낳을 때의 어려움 그리고 자신을 낳았을 때의 즐거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나는 三人을 代表하여 ――드디어―― /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식으로서 세 사람을 대표하여, ―― 드디어 ――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독자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을 표시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화자가 어떤 상황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읽으라는 뜻이다.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음 싶었답니다.” 라고 말했다. 시에서 이 부분이 굵은 글씨체로 되어 있는 것은 그저 심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강조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제발 이 굵은 부분의 의미를 제대로 읽으라는 표시다. 일부러 자신이 양자로 간 것을 모르는 듯이 이야기하는 화자는, 드디어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겉으로야 사촌으로서 남동생과 여동생 둘밖에 없으니, 형제가 더 있었으면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내면에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이제 화자를 양자로 보내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밖에 없으니, 아들을 낳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어머니를 걱정하여 하는 말이다. ――드디어 어머니는 동생 버금으로 孕胎하자 六個月로서 流産한 顚末을 告했다.// 그 녀석은 사내댔는데 올해는 19 (어머니의 한숨) 어머니는 두 여동생 다음으로 자식을 잉태하자, 육개월만에 유산하였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큰아들을 즉 화자를 양자로 보내서 아들이 없는 어머니는, 그후 두 동생을 낳았다. 이제는 두 동생 다음으로 아들을 하나 더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두 동생 이후로 생산을 못했다. 낳아야 할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듯이, 그러나 실제로는 두 동생 앞서 났던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두 여동생 앞서서 아이를 잉태했는데, 잉태한 지 육개월만에 유산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앞에 두고 차마 네가 내가 난 아들이라고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유산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드디어 어머니는 두 동생 다음으로 잉태를 했었다. 그러나 육개월만에 그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 하다가 얼른 말을 마치고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머니는 유산한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자로 보낸 큰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19라고 말하는 순간 ‘아차’ 하고 말을 맺는다. 그리고 큰아들을 양자로 보낸 회한에 젖는 듯이 한숨이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녀석은 사내였었는데 올해는 19’하고 말끝을 흐리며, 어머니의 한숨이 이어진다. 화자의 나이 열아홉이다. 자식을 앞에 놓고도 그 자식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 자신을 낳아 준 친어머니를 앞에 두고도 어머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화자의 그 애절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찡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三人은 서로들 알지 못하는 兄弟의 幻影을 그려 보았다. 이만큼이나 컸지――하고 形容하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瘦瘠하였다. 두 번씩이나 咯血을 한 내가 冷淸을 極하고 있는 家族을 爲하여 빨리 안해를 맞아야겠다고 焦燥하는 마음이었다. 두 동생과 화자는 서로들 알지 못하는 형제의 환영을 그려 보았다. 두 동생은 태어나지도 못한 오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고, 화자는 자신이 바로 그 유산되었다고 말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두 동생은 화자가 바로 그 유산했다는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두 동생은 바로 화자가 그들의 형이요 오빠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만큼 컸지’하고 자란 키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어머니의 팔목과 주먹은 수척하였다. ‘이만큼 컸지’하고 모습을 가리켜 보이는 손은, 두 번씩이나 각혈을 한 화자가, 자식이 없는 것을, 냉정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겨나가고 있는 가족을 위하여,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고, 초조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가 겉으로는 냉정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지만, 화자에게는 그 손동작 속에는 빨리 아내를 맞아 대를 이으라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24歲.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으시드키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19세 때의 일을 떠올리는 나는 지금 24세다. 내가 19세 때, 어머니의 수척한 손을 보면서,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았듯이,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그래서 어머니의 대를 이음으로써 어머니에게 무엇인가 보답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 ​ ▣   最後 ​ 능금한알이墜落하였다 地球는부서질程度만큼傷했다 最後 이미如何한精神도發芽하지아니한다 ― 1956. 7 ―     능금 한 알이 추락하였다. 사실 능금 한 알이 추락한 것을 두고 사람마다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신의 섭리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연의 이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인생의 비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입장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만 설명한다.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이 힘에 의하여 지구와 능금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여 두 사물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문학의 다양한 사고는 뉴턴의 역학에 의해서 부서졌다. 그래서 지구는 부서질 정도만큼 상했다. 지구 위에서 능금이 추락하는 순간, 그것을 오직 만유인력으로만 파악함으로 지구의 다양한 사고와 가치들은 그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모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류의 삶을 온통 파괴하고 있다. 인류의 삶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서양적 사고, 현대 과학적 사고 하에서는 이미 여하한 ‘정신(精神)’도 발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서양의 과학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한, 서양의 과학적 사고가 인문 정신을 말살하는 것을 비판한, 일종의 문명 비판적 시라 할 것이다. 필자가 ‘왜 이 시를 이렇게 설명하는가.’ 하고 의문이 드는 자들은 를 읽어 보라. 그 시들을 읽으면 이상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다.   ​ ​ ▣   悔恨의 章 가장無力한男子가되기위해서나는痘㾗이었다. 世上의한사람의女性조차가나를돌아보는일은없다. 나의怠惰는安心이다. 두팔을끊어버리고나의職務를避했다. 이젠나에게事務를命令하는사람은없다. 나의恐怖하는支配는어디에도發見되지아니한다. 歷史는重荷이다. 世上에對한나의辭表의書式은더욱重荷이다. 圖書館에서의召喚狀이벌써나에게는解讀되지않는다. 나는이미世上에맞지아니하는衣服이다. 封墳보다도나의義務는僅少하다. 나에게는그무엇을理解하는苦痛은完全히없어졌다. 나는아아무것도보지는아니한다. 그럼으로써만나는아아무것으로부터도보이지는아니할것이다. 비로소나는完全한卑怯者가되는일에成功한세음이었다. ― 통권139호. 1966 ― ​ ​ ​ 이상의 시 에 보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박사님들이, 이상의 시를 개 짖는 소리라고 하면서, 잡아먹고, 비타민E를 지닌 영양가 있는 시들은 박사님들의 생물학적 질투로 인하여, 박사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화자는 그들에게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상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비평가들조차도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이상시가 어떻다고 해괴하게 말함으로써 이상은 이제 천연두에 걸리거나 눈병을 앓는 사람이 되었다. 아니 이상은 비평가들을 비판하고만 있지는 않다. 이상을 해괴하게 말하는 비평가들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상 자신은 너무나 어려운 시를 썼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시를 썼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시는 언어유희의 극치다. 언어유희를 잘 분류하고 정리하여 전체를 일관되게 읽을 수 없다면, 이 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다. 悔恨의 章 제목 ‘회한의 장’은 회한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다. 보통 ‘회한’하면 뉘우치고 한탄한다는 말이다. 그 회한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이다. 지난날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후회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보통 회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서의 회한(悔恨)은 우선 ‘유감스럽게도 원망한다.’는 의미도 있다. 화자는 자신의 시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어떻고, 자신의 시가 어떻다고 떠드는 자들에 대해서 참으로 유감스러워하고 그들을 원망한다. 따라서 회한의 대상 곧 유감스럽게 원망하는 대상은 바로 이상의 시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상을 미친 자 취급한 사람들, 정신병자 취급한 사람들, 이상 시를 매도한 사람들이다. 사실 이상이 살았을 때, 이 땅에는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평론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없었다. 물론 비평가들이 그렇게 이상을 매도하게 된 원인은 어쩌면 이상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비평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시를 쓴 것이 근본 원인이라면, 이상 자신이 원인 제공자다. 그렇다면 또 ‘회한’의 대상은 다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은 1966년에 현대문학 통권139호에 발표된 시다. 유고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시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없고, 이 시를 읽고 깨달아서, 이 시 말고도 많은 이상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어야 할 텐데,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없다.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로 이상을 신비화하거나 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상 시인은 저승에서도 그러한 사람에 대한 참으로 유감스럽고 원망하는 마음, 회한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無力한 男子가 되기 위해서 나는 痘㾗이었다. / 世上의 한 사람의 女性조차가 나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 나의 怠惰는 安心이다. 이상의 시를 읽은 사람들이, 이상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이상을 미친 놈 취급한다. 정신병자 취급한다. 비평가들은 글을 통하여 이상을 신나게 두들겨 팬다. 그래서 화자는 가장 무력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 두양(痘㾗)이었다. 전염성이 강한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글을 쓰지도 않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쓴 글을 세상을 향하여 발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자, 무기력한 남자, 힘이 없는 남자가 되었다. 아니, 화자는 가장 무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두양(痘瘍)이었다. 천연두를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글을 썼으며, 눈병을 앓는 사람처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의 한 사람의 여성, 화자와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는 일은 없다. 화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하자, 같이 사는 아내조차 화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론가들이 화자를 업신여기고,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는 것은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평론가들이 화자의 작품을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들의 지적 수준이 딸린다는 것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함이다. 아니다. 화자가 게을러서 평론가들이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자가 게을러서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시가 어떠한 시인지를 미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화자의 게으름은 이제 결국 화자가 글을 쓰는 데에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되었다. 아내가 화자를 소홀히 하지 않고 간섭을 한다면, 화자가 도리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아내는 화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모르는 체한다. 두 팔을 끊어버리고 나의 職務를 避했다. / 이젠 나에게 事務를 命令하는 사람은 없다. / 나의 恐怖하는 支配는 어디에도 發見되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두 팔을 끊어버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힘쓰는 것을 피했다. 맡은 일을 힘써 하는 것을 피했다. 이제 화자에게 자신의 일에 힘쓰라고 명령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내는 이제 글을 쓰라고 말하지 않다. 명(命)하지 않는다. 화자가 잡지사에 투고를 하면 이제는 좋아하지도 않는다. 령(令)하지 않는다. 화자에게는 누가 화자를 협박하고 그 협박에 화자가 두려워하는, 그래서 가르고 짝지어주는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이를테면,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을 하고 언제까지 원고를 제출하라고 조르고(恐), 그 청탁에 맞추어 화자는 빨리 써야지 하면서 두려워하는 (怖), 그래서 조르는 출판사와 이에 맞추는 화자를 가르고(支), 출판사의 청탁에 맞추어 화자가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또 아내가 화자에게 글을 쓰라고 하고(恐), 그 쓰라고 하는 것에 떨면서 마지못해 글을 쓰는(怖), 시키는 자와 따르는 자를 가르고(支), 시키는 것에 맞추어 응하는(配) 것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歷史는 重荷이다. / 世上에 對한 나의 辭表의 書式은 더욱 重荷이다. / 圖書館에서의 召喚狀이 벌써 나에게는 解讀되지 않는다. 역사는 무거운 책망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상의 시를 미친 소리라고 오랫동안 글로 적어온 것이, 오래 계속되면 그것이 이상에게는 무거운 책망이 된다. 화자가 평론가들이 알아먹을 수 없는 글을 오랫동안 써 온 것도 또한 화자에게 무거운 책망이 된다. 또 세상에 대한 화자의 사표의 형식 즉 말을 드러내는 글의 형식은 화자에게 더욱 무거운 책망이다. 화자는 보통 시인들과 다른, 자신의 말을 표현하는 방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책망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니 평론가들이 엉뚱한 소리를 할 때, 글로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어야 하는데,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나의 말을 표하는 방식에도 결국은 화자에게 책망이 되어 돌아온다. 도서관에서의 소환장(召喚狀)이 해독되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화자가 글을 쓰면, 그 글을 비평가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화자가 도서관에서 어떤 글을 쓰면, 그 글이 비평가들을 통하여 화자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데, 화자는 그 글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미리 읽어내지 못한다. 아니 출판사에서 화자에게 원고 청탁이 오면 그 청탁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이미 世上에 맞지 아니하는 衣服이다. / 封墳보다도 나의 義務는 僅少하다. / 나에게는 그 무엇을 理解하는 苦痛은 完全히 없어졌다. 나는 이미 세상에 맞지 아니하는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맞지 않는 옷을 그들은 입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자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자에게 글 쓰는 일은 봉분보다도 간신히 적다. 글쓰기는 거의 죽었다.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기 위해서 화자가 그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고통도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아,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 그럼으로써만 나는 아, 아무것으로부터도 보이지는 아니할 것이다. / 비로소 나는 完全한 卑怯者가 되는 일에 成功한 세음이었다. 화자는 아, 마치 천연두에 걸린 사람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눈병에 걸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는 아니한다. 비평가들의 자신을 뭐라고 말하건 그러한 글을 보지 아니한다. 그래서 화자는 그러한 글에 대한 반박의 글도 쓰지 아니한다. 화자는 그럼으로써만 아무것으로부터도 즉 비평가들로부터도 글에 있는 화자의 생각이 보이지 아니할 것이다.  이제 비로소 화자는, 자신에 대한 세상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맞서지 못하고 피하는 비겁자가 된 셈이다. 아니다. 화자는 비로소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297    [스크랩]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댓글:  조회:1565  추천:0  2018-06-23
나의 두 여자, 은유와 환유 / 이빈섬  우린 늘 언어와 문자에 골몰하면서도 그걸 쉽게 경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말 잘하는 놈을 보면 밸이 틀린다. 뭔가 번지르르한 말결 속에 교묘히 허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나 수필을 쓰면서도 은유와 환유가 풍겨내는 지분냄새같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기름끼 다 빼고 정말 언어의 견결한 골조만 남은 시, 수필을 쓰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이 가능할까? 문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들어올린 공간을 모두 제거해버리는 일이? 물론 그건 번답과 화려가 본질을 가리고 진의를 에두른 적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이어트의 희원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그건 은유와 환유가 좀더 평상어에 가까운 방식으로 슬림해지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한 무차별의 삼제가 될 수는 없다.  문학의 심연은 어쨌든 문자가 들어올린 그 여지의 활기와 비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환을 위한 통상의 문자들만을 줄세워 문학을 할 수는 없다. 그건 문학의 순정성의 증표가 아니라, 문학을 압살하고 경멸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어의 눈으로 시와 산문을 재단하려는 모든 기도를 나는 반대한다. 복잡한 문장, 섬세한 뉘앙스에 대한 가차없는 경멸. 여기엔 정말 심각한 무지와 오해가 있지 않나 싶다. 우선 우리나라 국어교육과 언어사회학의 죄악이다. 논리를 즐길 줄 아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논리가 돼야 수사학이 된다. 무슨 뜻인지 파악하는 눈과 귀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즐거울 수가 있으랴? 또 많은 달변가들과 문자쟁이들이 사람을 현혹시키고 본질을 어지럽히는데 그 재능을 써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지레짐작 말 잘하는 놈은 의심부터 하고 볼 일인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이 중요하지, 그것을 표현하는 재능은 별 거 아니다. 기본적인 말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닌가. 이런 통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면서 그것과 대립되는 능력인 화술과 언어재능과 시적감각들이 세상살이에 별로 소용없는 물건으로 치부되게 되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게 옳은 생각인가. 누군가에게서 몇 마디 날카로운 지적을 받으면 그것을 논리적으로 풀기 전에 얼굴부터 벌개져서 입이 꽉 닫히는 일. 아주 치열한 논리적 공방을 바라보면 그 풍경에서 시정잡배의 멱살잡이 만을 떠올리며 그걸 뜯어말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 몇번씩 뒤틀어 표현한 복잡하고 섬세한 문장들에 대해서 아예 손사래부터 치며 왜 해골을 복잡하게 하느냐고 화내는 일. 이런 언어습관이 유통되는 사회에서 시가 존재하기란, 혹은 문학이 당위를 인정받는 일이란 얼마나 간고한 일인가. 문학이란, 혹은 시란, 평상어로부터의 고의적인 일탈이다. 좋게 말해서 일탈이지 솔직히 말하면 멀쩡한 언어판을 뒤흔들어 개판으로 만들어놓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화폐와 같이 정직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평상어는, 인간의 언어욕망 모두를 채워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허전한 뭔가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시, 혹은 문학을 기웃거린다. 평상어들이 득세하여 문학적 언어들을 핍박하고 경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인문적 지형도다. 인문학의 위기, 인문주의의 위기라는 표현 또한 실용이라는 담론에 경도되어 오래된 인류의 낙원을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있는 이 시대의 경박에 대한 경고다. 은유란 뜻밖에도 발이 넓다. 어쩌면 문학 전부가 은유란 그릇 안으로 들어와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은유에 대한 성찰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찾아올라가야 할 만큼 묵은 내력을 지닌다. 인류는 일찌감치 언어의 별세계를 찾아냈다. 저 그리스 아저씨의 을 잠시 훔쳐보자. "은유란 유에서 종으로, 또는 종에서 유로, 또는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하는 것이다." 유니 종이니 하는 말 때문에 지레 따분해질 필요는 없다. 일본사람과 게다신발을 생각하면 된다. 이때 게다는 종이며 일본사람은 유이다. 일본사람을 그냥 게다짝이라고 멸칭하기도 하고, 그것을 신은 모양새를 데려와 쪽발이라고 욕질하기도 한다. 이것도 고전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은유이다.(실은 환유이지만.) 앵두같은 입술이라 할 때 앵두와 입술은 붉음이란 특징을 매개로 한 유추의 관계다.(이건 은유 중에서도 직유라고 불린다.)그러니 은유가 가능한 경우를 아저씨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귀담아 두면 좋을 것은,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시켜 적용한다는 표현이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시켜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 행위. 이같은 은유론은 많은 학자들의 성찰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다듬어져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지금까지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시하고 있다. 은유는 너무 평범하고 진부해서도 안되며 지나치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되어서도 안된다. 은유가 평범하고 진부한 표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즉 개똥이는 개똥이가 아니라 말똥이라고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즐거움, 즉 우회해서 말하는데서 생겨나는 수사적 즐거움-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또 수수께끼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은유를 통한 언어의 우회적 움직임이 그 출발점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게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아저씨가 은유를 너무 멀리서 이끌어내서는 안된다고 여러번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은유의 유추적 즐거움이 언어의 수사적 기능, 말하자면 담론을 통해 타인을 설득시키는 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서 살피자면 은유는 낱말과 낱말 사이의 거리이다. 유사성의 거리라고 할까. 너무 가까우면 재미없고 너무 멀면 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 알맞은 거리의 긴장과 탄력이, 좋은 은유를 만들어낸다. 쓰다보니 문자 사이의 건조함이 목구멍을 칼칼하게 한다. 은유에 관한 날렵한 성찰들을 살핌으로써 물기를 뿌려보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은 나를 사로잡았다.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 요컨대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수술가위를 몸 속에 놔둔 채 꿰매는 멍청한 외과의사로 신을 조롱한 죄가 가볍지 않아 보이지만 은유에 대한 예찬을 이 정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리쾨르의 얘기도 들을 만하다. "은유는 낱말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서 발생한다. 즉 술부에서 발생한다. 의미혁신은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낱말이 사전적 의미를 어느 정도 이탈하면서 발생한다. 은유는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말이다. 한번 꼬여서 간접으로 무엇을 겨냥한다. 여기서 언어혁신이 일어난다. 언어에 들어있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새로 만들어내는 뜻이다. 말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은유는 이라 할 만하다."  라캉도 거든다. 그는 프로이드를 데려오면서 인간의 무의식의 지형은 은유와 환유의 기법이 차용되어 있다고 말한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무엇들의 변용이 아니던가.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텍스트에서 첫 출발하는 주체는, 에고의 가장자리에서 기호계의 검은 물결이 흘러넘치는 절벽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채 그것에 교란받는 주체이다,라고. 데리다는 은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성중심주의를 희석시키는,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가는 한없는 이방의 여행이다." 제 생각이 없으면 이렇게 글에 귀신들이 들끓는다. 남의 생각에 의지하여 앵무새같은 개념들을 늘어놓는 일이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매만지는 일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그런 비난들이 더 커지기 전에 내 얘기들을 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은유의 서양말인 메타포 (metaphor)는 그 말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메타페레인이란 그리스어를 만나게 된다. 메타는 "위로" 혹은 "너머로"라는 뜻이고 페레인은 "옮기다" 혹은 "나르다"의 뜻이다. 은유란 말이 처음 쓰일 때의 생각은 "한 말에서 다른 말로 그 뜻을 실어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어떤 소년이 말한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맞지 않지만 조금씩 발을 맞춰가듯 맞춰가는 게 인생이 아니냐고, 소년은 짐짓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버지는 되묻는다. 그래? 그럼 인생은 장갑과도 같은 것이군. 그것도 맞춰야 하잖아? 아냐 인생은 모자와도 같은 것이야. 아니 내복과 같은 게 아닐까? 아버지의 조크는 소년의 은유가 지닌 약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생동감을 얻기 위해서는 두 사물의 유사성이 참신하고도 설득력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소년은 그의 은유를 충분하게 잘 설명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인생은 구두와 같다. 참신한 비유가 아닌가? 이런 비유를 만났을 때, 우린 인생과 구두가 지닌 유사점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은유의 힘은, 구두라는 매개개념을 데려와, 인생이란 의미를 좀더 풍요롭게 파악해가는데 있다.  개미같은 허리라고 하면 우린 아예 개미를 떠올리지 않고도 가는 허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은유가 오랜, 잦은 사용으로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우초밥같이 생긴 여자라고 말한다면 우린 한참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쉽게 답이 안나온다. 이 수수께끼가 의미의 미로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그건 일단 성공적인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새우초밥 여자가 들어있는 문장의 맥락에서 그가 가슴에 겨자빛 반점을 지닌, 불그죽죽한 새우무늬의 숄을 걸치기 좋아하는 여자라면 그건 설득력있는 은유일 수 있다. 이렇게 문맥 속에서 살아움직이는 두 개념 간의 피돌기가 자아내는 효과, 이것이 은유의 힘이 아닐까 싶다. 새우초밥같은 여자라고 말했을 때, 그 여자는 새우초밥에서 건너오긴 했지만 새우초밥을 넘어서있는 뉘앙스이다.  내가 아까 불러온 귀신들의 말로부터 받았던 인상들을 종합하자면, 은유란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무엇이라는 놀라움이다. 수사학은 출발과 끝이 은유에 싸인 하나의 거대한 봉지사탕인지 모른다. 문학이란 은유 욕망들의 다채로운 결과물이기도 하다. 통상적인 언어에서 빠져나온, 바람난 언어들의 춤이다. 시는 평상적 언어에서 새나가는 뉘앙스들을 수배하러 나선 또다른 언어들의 그물망이다. 언어를 올라탄 언어, 문자와 문자의 교미, 낯익어서 이미 긴장이 풀려버린 언어들의 나사를 풀어 낯선 다른 언어를 끼워넣음으로써 새롭게 하는 작업들. 은유란 일렬로 선 낱말들을 교란시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본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다. 신은 인간에게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선물했을 테지만, 인간은 그것을 즐기는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유희의 한 지류가 문학이며 레토릭이며 또, 은유행위다. 두루뭉수리하게 통상 언어의 일탈 모두를 은유라고 부르던 아리스토텔레스식 분류법이 은유와 환유라는 보다 섬세한 일별법으로 진화하게 된 것은 언어학자 야콥슨의 공로다. 야콥슨에 이르면서 은유와 환유는 치열한 대립쌍으로 거듭나게 된다.물론 그 전에도 은유와 환유는 구별지어지는 개념이었다. 라틴수사학의 한 경전인 1세기경의 이란 책에서는 환유를 " 그 자신의 이름에 의해 지칭되지 않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을 근접한 요소로부터 빌어오는 문채(文彩)"로 설명하고 있다. 환유를 뜻하는 미토니미(metonymy)는 그리스어 미토니미아를 어원으로 가지는 말이다. 그 뜻은 이름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유를 아예 전의(轉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콥슨은 은유가 유사성에 기댄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은유가 초현실주의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와 손을 잡는다면 환유는 고전주의나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다고도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요즘 황지우를 읽고 있다, 고 말할 때, 나는 황지우의 시를 읽고 있다는 뜻이다. 라는 인물의 한 부분인 그의 시작품을 가리키는데에 황지우 모두를 데려와버린다. 반대도 가능하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을 외팔이라고 부른다. 돌아온 외팔이란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외팔이란 팔이 없다는 특징 만으로 어떤 사람을 특칭한다. 환유와 제유라는 분류로 더 섬세하게 구분도 하지만 이 모두를 환유라 하자. 환유는 언어를 사용하는 효용성과 크게 관련지어져 있다. 군대시절 고참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을 때, 신병인 나는 서울에 산다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서울이 모두 네 집이냐며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런 썰렁한 유머는 군대에서 하나의 관습을 이루는 것들인데, 여기에도 환유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숨어있다. 우린 서울에 산다고 말하지, 서울시 중구 순화동 7번지 우리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대표지명으로 구체적인 지명을 환유하는 것이다.  한 글벗은 한때 환유법을 능란하게 활용하는 문장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어떤 모임의 후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독특한 호칭으로 불러 문장의 윤기를 낸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낭군이 된 글빛하늘이라면 그중의 한 낱말인 으로 표현하고, 산돌이 아이디를 가진 사람은 으로 표현하고는, 산이 빛의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는 식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악수 장면이 새로운 기의를 발하면서 놀라운 참신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유는 비슷한 성질을 이용한 낱말의 연결인 반면, 환유는 어떤 사물과 인접한 무엇을 데려와 그 사물을 대치하는 기법이다. 김동인의 붉은 산은 황량하지만 버릴 수 없는 이 나라에 대한 감동적인 대치물이다. 블루칼라는 노동자들이 입는 옷으로 그 노동자 집단 전체를 의미한다. 어떤 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근접한 무엇으로 표현하여 어떤 쾌감을 얻는 언어행위이다.  은유는 유추과정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환유는 특정한 맥락에서 생겨나는 연상을 기초로 잇는다. 비약적 마술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은유와는 달리, 환유는 오랜 시간을 두고 생겨난 연관관계나 관습에 따른 연상에 기댄다. 지극한 효녀를 심청이라 부르는 것,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만 하는 사람을 맹꽁이라 부르는 것, 제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강요받는 경우를 억지춘향이라 부르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예라 할 만하다. 은유는 시적인 표현에서 많이 등장하고 환유는 산문적인 문장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은유의 초현실주의적 생리와 환유의 리얼리스틱한 생리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유가 가부장 담론의 특성이라면 환유는 페미니스트 담론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성은 아이를 자기 몸 안에 아홉달 동안 담고 있고 낳은 후에도 곁에 두고 기르기에 모자관계는 환유적이며 부자관계는 은유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라캉의 말이다.  은유는 남자의 문자현상을 특징짓는 기법이라면 환유는 여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글쓰기는 만져지는 무엇을 비롯한 근접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환유적 욕망이 승한 특징을 보이기 쉽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너무 도식적인 분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면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은유란 무엇인가를 보다 생생하고 풍성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식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된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다른 말을 데려와 함께 서있지만 환유는 다른 말을 데려온 뒤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 숨어있음의 쾌감이 환유의 특징이며, 은유는 두개의 말이 나란히 서서 비교됨으로써 합성되고 증폭되는 쾌감이 특징이다.  환유는 또한 보다 현대적인 서술방식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은유는 지난 시대의 낭만주의와 결부된 낡았지만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기법이다. 최근의 비평가들은 당대 시인들과 작가들의 환유성을 찾아내고 그것의 얼개를 파악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는 형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황지우의 많은 참신함은 그의 환유에 힘입고 있다.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는 진술에서 뚱뚱한 가죽부대는 내 몸의 구조와 형질을 경멸적인 사물적 특징으로 치환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수은등 아래 벚꽃)이라 했을 때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는 건 "죄"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지만 거기 느닷없이 "죄"라는 추상어를 데려옴으로써 삶의 심각한 본질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시 벚꽃의 만개와 겹치면서 아름다움과 죄악을 현란하게 교직한다. 그의 환유는 이 시의 중심시축이다. 은유와 환유는 시나 문학의 주민등록증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시나 문학을 몹쓸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딱지이기도 하다. 마구 뒤섞어놓은 은유들의 실끄트머리를 찾아내어 상상력으로 끊어진 다른 지점과 조심스럽게 이어야 하는, 비유 해독의 고단함은 난해라는 두건을 뒤집어쓴 작품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 원흉이기도 했다. 뿐만인가. 꼭 집어 그냥 말하면 좋을 얘기를 굳이 에둘러 말해버리는 저 환유의 내숭과 음흉함은 문자속 전부를 내숭과 음흉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은 문학의 즐거움은 바로 그 묻힌 의미들을 발굴하는 쾌감이며, 낯선 의미들이 충돌하여 피흘리는데서 돋아나는 생기이며, 매복한 개념들이 낮은 포복으로 언어의 습지를 기어가는 장면을 영화처럼 감상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은유와 환유는 글쓰기라는 욕망의 가장 핵심이기도 하지만,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간 속에서 즐길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쾌감의 지평이다.  문학은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두 여자, 내 딸들에게 붙여주어도 좋았을 이름, 은유와 환유라는 두 여자와 사귀러가는 은밀한 아지트가 아닐까 싶다./빈섬. (Binsom Lee/ 시인, 작가, 스토리텔러)    
296    [공유]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 함영준 댓글:  조회:2263  추천:0  2018-06-21
 綠 | 청하  http://blog.naver.com/cyan666/120036136959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   단국대학교 교수 함영준   (1)   줄에 묶여 매 네 걸음마다 한번씩 다리를 절며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쌀뜨이꼬 프-쉐드린의 아주 유명한 이 경구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시의 정형화된 구조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정된 관습과 습관화된 시의 리듬에 중독 된 사람을 제외하고 예술을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는 자명한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우리의 예술에 대한 관점은 보다 자주 고정되고 자동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균형 속에 파격을 줌으로서 예술의 존재가치를 보다 새롭게 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20 세기초 문학성에 대한 관심으로 새로운 학파를 탄생시키는 쉬끌롭스끼(후기 형식주의의 대표자:프라하 학파)의 선언적 논문"기법으로서 예술"의 가장 중심적인 개념중의 하나인 "낯설게 하기"는 형식주의 미학의 기본 도구로서 사용되어 왔다. 특히 형식주의 연구의 집대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독일의 러시아 문학자 한씬 뢰베는 형식주의가 "낯설게 하기 원칙에서 발전"한 것으로서 이 학파의 총체적인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패러독스한 운명을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의 최초 의미론인 '자동화'된 사물에 대한 '탈 자동화'로의 시각 교정이 오늘날 문학이론에서 거의 여과 없이 "낯설게 하기"라는 자동화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적 그리고 발전적 고찰보다는 존재하는 기법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의 목적은 형식주의적 방법론에 묻혀버린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을 다시 한번 낯설게 하여 탈 자동화 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쉬끌롭스끼가 고안해 놓은 이 용어의 특징을 살펴 볼 것이다. 그 동안 형식주의를 언급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던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예술이라는 것은 삶의 느낌을 주고, 사물을 느끼기 위해 다시 말해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술의 목적이란 '사물에 대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 하는)기법이며 형식을 어렵게 하는 기법인 것이다. 당연히 이 기법은 지각을 어렵고도 오랫동안 확장시키게 되는데 왜냐하면 예술에서는 지각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며 이는 오래 지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방법이고 이미 만들어 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볼 때 쉬끌롭스끼의 논점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술의 존재 이유에 관한 것이고(대상을 대상답게 느끼기 위함) 둘째는 예술의 목적에 대한 것(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보는 것으로의 전달)이며 셋째는 이러한 기반에서 예술의 기법은 무엇인가(낯설게 하기와 형식을 어렵게 하기)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보던 대상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탈 자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낯설음"이라는 것이 쉬끌롭스끼의 고유한 이론이 아니며 새로운 것 또한 아니었다. 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방식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이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시적 언어란 낯설고 놀라게 하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사실상 이러한 기법들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바로크, 낭만주의자 노발리스, 그리고 철학에서는 칸트와 헤겔의 그리고 마르크스 철학에서도 그 맹아적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역사적 고찰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쉬끌롭스끼와 뽀쩨브냐와의 관계 또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이 기법의 보다 본질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의 지평 확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이 문학 용어로서의 창조라는 큰 역할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예술에서 자동화되는 대상을 어떻게 이탈시켜 낯설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와 그리고 이러한 기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또한 덧 부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지평확대 가능성은 없는 가도 논의의 핵심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는 이러한 여러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진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돌을 돌답게 하기 위해" 형식주의자들의 문학관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예술은 예술로서 존재양식이며 여타의 사회적, 역사적 관심은 배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 하라는 주문 즉 "낯선 시각" 또는 "처음 본 것처럼" 볼 것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문학을 보는 것인가 ? 아니면 알아차리는 것인가 ?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미학적인 측면의 사용이 "낯설게 하기"의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의 문제도 정작 쉬끌롭스끼 자신은 무관심한 체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기법의 사용은 단순히 화석화된 문학 연구의 용어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미지가 잇는 곳에는 어디에나 낯설게 하기가 존재"한다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은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모든 대상을 원하는 대로 처리하고도 정작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과 같은 상황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먼저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여러 연구가들의 견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쉬끌롭스끼에게 가장 기본적인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또 다른 형식주의자인 또마쉡스끼에게 "개인적인 특수한 경우"로 또한 쥐르문스끼에게 이 "낯설게 하기" 기법은 예술 발전의 가장 큰 동인이 되는 요소가 아니라 부차적인 특징일 뿐이다. 그는 "낯설게 하기, 어렵게 하기라는 기법이 미적 체험이 이루어지기 전의 것이며 평범치 않은 미적 대상을 상상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체험을 하고 나면 이 감각은 사라져 단순성과 평범함을 느끼는 것으로 바뀐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바흐찐)도 역시 쥐르문스끼의 견해에 공감을 표하면서 이 기법이 "심리적인 주관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소이에서 비롯되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메드베제프는 쉬끌롭스끼가 "감지되는 것을 문학의 목표"로 삼은 것에 대해 비판하며 이러한 감지되는 것이란 실체가 없는" 소박한 심리주의의 모습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보이곳스끼 또한 "예술에서 지각되는 과정이 목적"이라는 쉬끌롭스끼에게 반대한다. 이것이 형식주의자들의 심리학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내용과는 관계없이 사물의 지각 자체를 아름다운 것이라는 "초보적 쾌락주의"공식으로 퇴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도 쉬끌롭스끼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스위프트의 비인간성, 혐오성과 사르트르의 부르주아 사회의 비판의 힘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모든 것이 쉬끌롭스끼에게는 모두 새롭게 하기 위한 구실로서 우선 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제임슨은 낯설게 하기가 지각과정 자체인지 아니면 그 지각의 양식 제시 쪽인지 애매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이 낯설게 하기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쉬끌롭스끼의 글은 낯설게 되는 것이 내용인지 형식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연구가들이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였음에도 대부분은 쉬끌롭스끼의 기법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뭔가 보충적인 선에서 비평하고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기법에 대한 비평들의 대부분은 "낯설게 하기"라는 본질적 문제 보다는 이것의 출현 배경이나 혹은 다른 형식주의 이론들과의 연계성 속에서 혹은 다른 논의 구조 층위 속에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에도 불구하고 쉬끌롭스끼의 이 기법의 중요성은 형식주의 이론과 실제 뿐 아니라 향후 문학이론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문학연구에서 아직도 이 기법은 유용하며 또한 흥미로운 것으로 남아있다. 이제 앞에서 제시한 우리 논문의 중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쉬끌롭스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2)   쉬끌롭스끼가 지적하였듯이 무엇보다 먼저 "낯설게 하기"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관습적인 시각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보는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종종 어떤 사물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그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지 않고 단지 그 특성을 나열하는 문체적 특성을 보여준다. 언젠가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물론 자작나무인 것이다. 톨스토이는 마치 이 나무의 이름을 모르고 그 특이함에 놀란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 기법의 사용에서 사용되는 것은 그 대상의 새로운 시각(혹은 마치 처음 본 듯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쉬끌롭스끼는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이 기법의 생성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낯설게 하기 위한 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름을(또는 명칭) 모른다는 전제는 흥미로운 기호적 성격을 획득한다. 철학자 로세프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이름이란 총체적인 유기체로서" 그 이름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가던 것을 이름을 수렴시키고 환원시켜서 그것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낯설게 하기란 결국 대상의 이름(명칭)을 모르는 체하면서 그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내부 인자들의 특징을 해체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자작나무"(명칭)를 모른다는 전제는 이 나무의 구성 인자의 특징인 "밝고 흰 줄기와 가지를 지닌 키가 크고 구부정한 나무"라는 표현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름의 기표가 숨겨진 채 기의를 통한 표현 기법이 낯설게 하기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다음으로 쉬끌롭스끼에 따르면 이 기법은 '에로틱한 예술'에서 자주 보이며, 수수께끼와 민속에서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통찰력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수수께끼의 구조적 고찰을 통한 낯설게 하기의 생성원리를 추적할 수가 있다.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수수께끼는 "기호(수수께끼의 텍스트)의 본뜻(해답)에 대한 관계"를 규정하는 텍스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수께끼는 "현실의 예술적 변환 원칙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고 아주 단순한 예를 통해 그러한 변환을 조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수께끼로 제시된 대상은 무언가 부족하고(또는) 변형이나 은유를 통해 왜곡된 묘사로 나타나게 된다. 쉬끌롭스끼 자신 또한 이것이 지니는 기호적 속성이 낯설게 하기 기법과 많은 부분 상관성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미지와 수수께끼"라는 논문에서 쉬끌롭스끼는 수수께끼와 그 해결 과정에 주목하면서 "수수께끼의 해결은 제시된 대상의 특징들의 치환을 통해 의미를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수수께끼에 관한 것을 고찰해 보면 분명히 "하나의 시작되는 상황에서 변환되는 상황으로" 전달해 간다. 만일 우리가 맞추어야할 문제를 X라고 가정하면 X를 암시하는 몇몇의 대항을 지정해 주게 된다 . 이때 지정된 대상들은 맞추어야할 X의 특징, 상황, 부분 등의 조건이어야 한다. 그러나 X를 맞추기 위해서 X에 대한 기능을 제시 해 주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가위(X)를 수수께끼의 문제라고 가정 할 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두 개의 날카로운 끝(2A)을 가지고 두 개의 고리(2B)에 못이(C)박혀 있는 것이다.(이것을 공식화 하면 X=nA+nB+nC...로 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제시된 그 과정은 어떤 경우라도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위의 기능인'자르다'는 표현이 나타나면 그 대상은 너무 쉽게 자동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낯설게 하기"기법의 원리가 도출 될 수 있다. 이는 어떠한 방법으로 낯설게 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답이 된다 (쉬끌롭스끼는 그 방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즉 그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인 것이다. 이는 단지 쉬끌롭스끼가 말하는 새로운 시각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 과정의 애매성을 제거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쉬끌롭스끼가 주로 인용한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통해 보도록 하자.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글에 대입시켜 보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톨스토이는 "법을 어긴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쳐서 마루에 넘어뜨리고 눕히고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으로써 대상을 낯설게 한다. 그 낯설어진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형이다. 태형의 본래 기능인 벌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짐짓 무심한 척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의 오페라나 의 결혼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기능이 제거됨으로 마치 처음 보는 듯한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낯설게 하기 기법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많은 비평가들은 이 기법의 유용성(문학 연구 방법론적 측면에서)을 인정하면서도 쉬끌롭스끼의 독단적인 규정에 반기를 들고 있음을 보았다. 그 반기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이 기법이 도덕적, 심리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문학적, 미학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에서 보여지는 쉬끌롭스끼의 관심이 이념적 의미가 아니라 "상투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도전"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에서 미학적 기법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들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단지 낯설어 지는 대상의 기능이 제거된다는 것만으로 톨스토이의 이 기법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 쉬끌롭스끼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다른데 있다. 그것이 낯설게 하기의 목적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기능을 할 수 있다.   쉬끌롭스끼는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해 논하는 중에 태형에 대한 낯선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형식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쉬끌롭스끼는 이 이외에도 에서 전투장면과 살롱과 극장. 에서 도시나 재판 광경. 에서 결혼 장면. 그리고 에서 조차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보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쉬끌롭스끼에겐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 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형식주의적 문학 이론이 "문학성"을 찾기 위한 내재적 분석 방법이 경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잇다. 특히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쉬끌롭스끼는 이 기법이 드러내 주는 "지각 과정 차체가 목적"이 며 이것이 톨스토이 특유의 시회 비평 수단의 폭로적 기능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다. 낯설게 하기 기법을 단순히 예술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단지 낯설게 되는 대상을 더욱 예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인가? 우리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에서 언급한 태형의 낯설게 하기는 이러한 신체적 징벌을 더욱 징벌답게 묘사하기 위해서 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태형의 불합리한 점을 폭로하기 위함인 것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태형은 인간에게 단지 육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세의 고통을"주는 것으로 비평하고 있는 것이다. 쉬끌롭스끼가 에서 살롱 및 극장의 낯설게 하기에 인용하고 있는 것도 실상은 단순히 오페라에 대한 예술적 미학적 목적이 아니라 이는 오히려 "시골적이고 자연적인 나타샤가 오페라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사교계의 필수적인 이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도덕적인 목적"에 있다. 실제로 곧 나타샤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오페라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점점 오랫동안 체험해 보지 못했던 도취 상태로 빠져 들고""이제 이 상황이 전혀 낯설지 않게 되어 만족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타샤는 "자신이 지금 있는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어""시골 생활이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인지 모를 이 불가사의한 광기의 세계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빠져버린 것을 느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에서 결혼의 낯설게 하기 기법이나 에서 재판관경 묘사와 같은, 이러한 모든 기법의 내용상 기능은(쉬끌롭스끼가 무시한 기능은) 비평적이며 폭로적인 파토스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톨스토이가 사용하고 있는 이 기법의 사용이 "돌을 돌답게"만들어 주기 위한 예술적 기법이며 "낯설게 하기가 단지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사물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적용되어지는 기법은 아니다" 라는 쉬끌롭스끼의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대가로서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삭제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부정적인 사회 현상의 폭로를 목적으로 하고 있음은 비록 그의 모든 기법상의 특징은 아닐지라도 절대적인 의미론을 획득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스위프트의 에서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 제도에 대한 풍자적인 해명을 위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 사람은 같은 형식주의자중 한 사람인 또마쉡스끼였다. 쉬끌롭스끼 자신도 1970년대에 들어와 "톨스토이의 낯설게 하기 기능이 양심"이라는 입장으로 후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물론 낯설게 하기 기능이 폭로적(비평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쉬끌롭스끼의 지적처럼 많은 이 기능의 많은 부분이 미학적, 예술적 원칙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로서 체홉의 를 들 수 있다 . 이 작품에서 눈물은 '비오는 날 창문에 어리는 반짝이는 방울들"로 보여 지고 코끼리는 "코 대신 꼬리가 달리고 입 언저리에 살점이 다 뜯긴 두개의 긴뼈를 지닌 뚱뚱하고 거대한 상판때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에 등장하는 레빈 아이의 탄생 장면에서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비판적인 기능은 없다. "리자베따 빼뜨로브나(산파-필자)는 이 꿈틀거리는 새빨간 것을 침대에 놓고는 한 손으로 아이를 들어 올리며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풀었다 간 무언가로 덮으면서 다시 감았다" 당연히 여기서는 폭로적인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선 철저히 쉬끌롭스끼 적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 기법의 사용에서 우리가 구분해야할 것은 어떠한 때에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며 언제 미학적 기능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또 하나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우리가 예를 든 것을 조건적으로 보았을 때 낯설어지는 대상이 문화와 연관되었을 때와 자연적 현상과 관련되었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낯설어 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태형과 재판, 극장(오페라), 전투 등과 같이 문학적인 현상이 낯설어질 때 비평적이고 폭로적 의미론을 획득하고 눈물, 코끼리, 자작나무,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인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미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예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원칙이 들어맞지만 문화적인 현상의 낯설게 하기가 모두 비평적(폭로적)이란 우리의 제안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푸쉬킨의 에 등장하는 "결투"에 대한 생각 속의 낯설게 하기 기법은 뭔가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결투에서 부상당한 그리뇨프에게 하인 싸벨리치는 말한다 ; "모두가 그 빌어먹을 무슈놈의 잘못입니다. 그놈이 쇠꼬챙이로 찌르는 법과 발 구르는 법을 가르쳤으니까요" 물론 여기서 칼쓰는 법에 대한 늙은 하인 사벨리치의 말은 결투라는 사회적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모습을 띠는 것으로 불수는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유머의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유머의 느낌은 마치 수수께끼나 에로틱한 예술에서와 같이 미학적인 의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낯설게 하기 대상의 자연적 현상과 문화적 현상을 분리해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쉬끌롭스끼가 바라본 단 한가지의 목적과는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앞에서 본 여러 원리들을 중심으로 실제적인 낯설게 하기의 사용의 예를 기호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위해 쉬끌롭스끼가 자신의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를 모델로 볼 것이다. 제일 먼저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이 작품은 말의 관점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는 당연히 인간이 정해놓은 "이름"(명칭)을 새롭게 불 수 밖에 없는 조건을 부여해 준다. 이 경우 시점은 말에게 주어지고 말에 의해 낯설어진 효과는 더욱 강한 가극을 준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동물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당연히 낯설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낯설게 하기는 처음엔 주로 폭로라기보다 종종 묘사적 타입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대개의 경우 작품의 전개 속에서 작가적 시점과 관점이 작용하면서 내용상의 폭로적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이러한 시점의 불일치는 일반적으로 아이러니한 작품의 예에서 자주 등장한다. 쉬끌롭스끼는 에서 주도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사적 소유에 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본 언어로 하자면 문화적 대상으로서 '사적 소유'의 문제와 자연적 대상으로서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이 작품의 소유에 대한 고전적인 인용을 살펴보자. 무엇보다 먼저 에서 가장 명확한 낯설게 하기는 말의 눈을 통한 '소유'의 문제일 것이다. 여기서도 내용상 기능은 사적 소유에 대한 비평과 폭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소유의 "낯설게 하기"를 기표와 기의라는 기호학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것, 자기 말이라는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는 그 당시엔 정말 몰랐지,...이것이 어떤 관계를 뜻하는지 당시 난 전혀 알 수가 없었어...그 당시로서는 인간의 소유물로서 나를 자기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살아 숨쉬는 말인 나를 향해 붙여진 나의 말이라는 단어가 내겐 마치 나의 땅, 나의 공기, 나의 물이라는 단어들처럼 이상하고 어색했던 거지..."   홀스또메르의 눈에 비추어진 '소유'는 (1)먼저 단어적 수준에서 드러난다. '내 것, 나의 것""자기 것"이라는 단어는 실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말에게 이는 단지 소리로서만 존재 할 뿐 어떤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 또한 "나의 땅","나의 공기" 그리고 "나의 물"은 부조리한 단어 결합이며 역시 무의미하고 그 단어의 기능은 없다. 따라서 말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든 단어들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 조건적 언어이다. 다시 말해 "무엇 때문에 그럴는지 모르는" 단어들은 그 기능이 제거된(감춰진)기표상의 낯설게 하기인 셈이다.   "...그 단어의 의미는 이런 거야. 인간들의 삶은 일이 아니라 지껄여 대는 말에 의해 좌우된다는 거지... 나의 것, 나의 물건, 나의 소유라는 것이지... 무었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던 그렇게 되어 있어. 난 한동안 이런 것이 인간들에게 어떤 직접적인 이익이 되는 것인지 이해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어.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예를 들어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어.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지"   기의적 측면에서 '소유'는 (2)인간에게 어떠한 '이익을 의미한다."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나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어" 여기서 소유라는 기능의 목적은 아마도 그 말을 타고 다님으로서 다시 말해 말을 이용함으로서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날 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고 보면 소유의 기능은 제거되고 부정된다. 또한 "내게 먹이를 준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소유자(주인)의 기능은 당연히 말에게 먹이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주인은 이 기능을 거부한다. 비록 말 지기를 고용하여 봉급을 줌으로서 이 기능을 간접적으로 수행은 하지만 이 기능은 여기서 부정적으로 폭로된다.   "네게 선을 베푼 사람들도 나를 자기 말이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이 아니라 마부나 수의사난 아니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해 본 결과 나의 것이라는 개념은 우리 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낮고 저급한 본능인 소위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지. 인간들은 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거기에 살지 않고 단지 집의 건물 자체와 그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상인들은 , 하고 말하지만 자신의 가게에 있는 고급 양복지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인간들은 땅을 다신의 것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땅에 가본적도, 그 땅위를 걸어 다녀본 적도 없단 말이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인간들도 전혀 그들을 만나 본적도 없으니 말이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손해를 입히는 일 뿐이지. 혹은 여자들을 보고 나의 여자니 마누라니 하고 부르는 데도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살기도 해. 결국 인간들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위한 거야 바로 이점이 인간과 우리말을 구별하는 본질적인 차이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홀스또메르의 관점에서 '소유'는 (3)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주인의 필수적인 기능은 아니다. 주인은 선을 행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잇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의 기능은 슬쩍 다른 것으로 변화된다. 홀스또메르는 "선을 베푼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사람"임을 말한다. 이것은 말에 대한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기능은 바꿔치기 된다. 소유라는 대상의 낯설게 하기는 여기서 '이익'이라는 소유의 기능이 제거되는 게 아니라 '선'이라는 다른 기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자연스럽게 소유는 선이라는 가치 기능으로 넘어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비평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잇을 것이다. 우리는 에서 '소유'가 "인간의 저급한 본능인 감정이나 사적 권리"라는 기능 대신에 경제적인 기능으로 바꿔치기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자기 집에 살지 않고"."자가 땅에 가보지도 않음으로", 집이라는 살아가는 공간과 자신이 경작해야하는 땅은 돈과 소유라는 경제적 이익으로서 바꿔치기 된다. 그리고 상인이 "자기 집의 천으로 옷을 해 입지 않는'것도 마찬가지로 옷감의 본래 기능인 옷을 해 입는 것에서 판매라는 소유의 이익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을 자기 사람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들을 본적이 없는 것은 기능의 제거이며 뒤이어 "다른 사람들에게 맺고 있는 관계는 단지 악을 행하는 것"은 바꿔치기 기능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바꿔치기 기능을 통해 낯설게 하기의 폭로적 기능이 강화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에서 소유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보았다. 다음으로 자연적 대상인 죽음이 어떻게 낯설게 되는지 보자. 소유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낯설게 하기 기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세상을 방황하며 먹고 마셔댄 세르뿌홉스꼬이의 죽은 육신이 한참 후 땅에 묻혔다...새 관을 다른 납으로 된 곳에 집어넣고 모스끄바로 운구하여 거기서 옛사람들의 뼈를 파헤치고 새 제복과 깨끗한 구두로 감춰진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썩어 가는 육신을 흙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여기서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육신이 먹고 마시고 돌아다닐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육신의 기능은 인간을 정신과 영혼과 더불어 지탱해 주는 것이다. 육신의 기능은 낯설어지면서 그 기능이 제거된다. 죽음에 대한 미학적 진행효과는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낯설게 하기는 그로테스크로 발전해 간다. 물론 죽음의 모습이 주는 대비는 말의 관점이 아닌 작가의 관점이다. 여기서 단지 죽음의 대비 속에 드러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비판적 기능)낯설게 하기 기법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지고 제거되는 것은 순수한 의미의 낯설게 하기 기법 즉, 쉬끌롭스끼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시각'을 위한 기법인 것이며 톨스토이에게서 주도적으로 보여 지는 기능의 바꿔치기는 어쩌면 비평적 성격을 위한 이 기법의 확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쉬끌롭스끼는 대단히 중요한(그러나 유일한 문학 기법은 아닌)것을 착안해 냈고 낯설게 하기의 필수적 조건이 '새롭게 보기"를 끌어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생각을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우리가 위에서 본 것처럼 다양한 기능들을 자주 수반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쉬끌롭스끼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예술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할 기능으로서 새로운 대상을 창조하여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낯설게 하기가 그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기법의 사용이 과연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이다. 쉬끌롭스끼는 "이미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낯설게 하기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예로서 에로틱 예술에서 이 기법의 사용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의 사용 용례를 밝힐 뿐 왜 그 기능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비록 그가 완곡어법에 대해 말하긴 했어도 아마도 에로틱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의 사용은 "타부(금기)"에 대한 것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쉬끌롭스끼는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는 .심리적 병치법'(유사성 속의 불일치)에서의 낯설게 하기와 방언사용에 의한(난해하고 애매한)낯설게 하기를 지적하고 있다. 이 밖에도 낯설게 하기의 기능과 목적은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브이곳스끼가 제기한 것처럼 감정의 전활을 일으키는 카타르시스, 사회 비평적이고 폭로적인 기능의 풍자, 무섭게 만드는 기능(스릴러), 흥미를 유발시키는 기능(추리소설), 마술적 상황(혹은 질병을 낫게 하는 주술), 성례적, 신비적 기능(주로 이어성에 의해)(성스러움은 불가사의한 비밀일 수 있다)등 보다 다양한 기능성들을 언급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광고의 기능도 낯설게 하기에 사용된다. 특히 짧은 시간에 주어진 관심을 최대한 증폭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지각을 오랫동안 확장시키기"위해서도 광고는 기존의 자동화된 시선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광고에 많이 사용되는 유행이란 무엇인가를 보자.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유행의 의미란 의복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지고 그것이 또 감춰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성들이란 의상에 의해 새로워지기 위해 옷을 새롭게 입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화되어 여자는 사라지고 여성의(실체)는 구현되지 못 한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쉬끌롭스끼에세서 발견된다, " 자동화가 사물과 의상, 가구, 아내, 전쟁의 공포를 먹어치워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광고에서 보여지는 유행의 새로움은 낯설게 하기의 가장 잘 어울리는 영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기법의 모든 기능과 적용을 살펴 볼 수는 없다. 단지 우리의 관심은 쉬끌롭스끼의 이론이 지니는 논쟁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낯설게 하기" 기법의 적용으로 다른 지평확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감지되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에만(쉬끌롭스끼에게선 주로 문학)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구조의 통일 속에서 확대되고 구체화 된다. 쉬끌롭스끼의 주장인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라는 주문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방법상의 문제와 더불어 이 기법의 목적이 "지각을 어렵게 하여 오래 지속시키도록"하는 것이 문학이외의 예술 장르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선 그의 말대로라면 문학은 알아차리는 것으로가 아니라 보는 것으로 전달된다. 물론 쉬끌롭스끼 자신이 시각을 통한 지각의 확장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문자 그대로 본다면 "시각"을 통한 전달이라는 것이 문학보다는 오히려 공연 예술 분야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쉬끌롭스끼가 문학에서 보고자 했던 "시각"이 사실 연극(공연예슬)에서 1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극예술이 이루어지는 극장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어인 "볼거리"와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 연극은 관객들이 모두 그 내용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따라서 관객의 관심은 공연되는 연극의 인물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내용)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이미 알려진 그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꾸미느냐(형식)에 집중되어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이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공연을 가는 것은 어떠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작품이 꾸며졌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연극의 본질적인 의미론인 볼거리를 새롭게 시도한 사람이 20세기 독일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브레히트이다. 흥미롭게도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가 1930년대 브레히트에게서 "소외"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스파니슬랍스끼 연극론과 더불어 20세기 가장 중요한 연극적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제로 문학적인 측면에서 쉬끌롭스끼의 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연극적인 측면에서 브레히트의 "소외" 효과에 대칭된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소외 개념과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 사이의 상관관계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1959 년 존 윌릿은 에서 이 용어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였는데 그는 "브레히트가 1935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체류한 이래 그의 작품에 소외라는 표어와 이론이 등장함은 시사적이라는 것이다. 로널드 그레이 ㅣ역시 브레히트의 이 용어가 러시아의 "낯설게 하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브레히트의 러시아여행은 이미 1932년에도 한 번 있었고 그가 형식주의자들과 교유했다는 증거도 없었으며 실제로 브레히트가 1930년대 러시아를 방문하여 이 형식주의자들의 저작을 알았다 하더라도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개념이지 사회적인 요인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연극관에 대해서는 다음의 주제로 남겨 놓더라도 그의 연극적 낯설게 하기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연극 미학의 한 틀을 만들고 있음은 우리의 주제에 대단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영향과 수용관계가 논란이 있다 할지라도 쉬끌롭스끼 기법의 연극적 지평확장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열린 가능성으로   우리가 보고자 한 "낯설게 하기"에 대한 것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쉬끌롭스끼의 기법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 그 발전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의 문학적 기법에 대한 관심이 문화사적인 의미를 획들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 기법은 단순히 논란의 대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박제된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확장되고 변환되고 적용될 수 있는 기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그 대상의 이름을 모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낯설게 하기 기법의 원칙은 낯설어지는 대상의 기능이 감춰진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폭로적(비평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낯설어지는 것이 자연적 대상일 경우에는 쉬끌롭스끼적(미학적) 타당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문화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 낯설게 하기는 그 기능의 바꿔치기에 의해 강조된다.   우리가 제시한 이 기법의 보충 설명들은 단지 조건적일 뿐이다. 이것은 아마 낯설게 하기의 새로운 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본래 낯설게 하기가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대상을 새롭게 보는 것처럼 우리의 이러한 시도 역시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물론 개별 작가들의 더 많은 예문들을 통해 보게 되면 아마도 우리가 본 논문에서 본 것보다도 다양한 다른 방법들과 목적들이 더 많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도한 우리가 잠시 보았던 문학 이외의 다른 공간에서 이 기법의 적용은 어쩌면 오늘날 필수적인 연구주제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것이 자동화 되어지는 세상 속에 끊이없이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결국 대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쉬끌롭스끼의 주장에서 찾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식주의 미학 원칙의 주도적 의미를 주었던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 기법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조건적인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본 논문은 애초 쉬끌롭스끼의 "낯설게 하기'기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구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가 도달한 것은 그의 진술 속에서 한두 걸음 앞으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쉬끌롭스끼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닌 단지 그의 입장에서 중요치 않았거나 무관심한 부분에 대한 보충으로 끝이 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동화된 인상을 인생이라고 말하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학의 한 기법으로서 낯설게 하기를 탈자동화 시켜보려는 시도는 그것으로 의미를 부여했다는 자족을 하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 이론의 존재가 갑작스런 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딘 진화에 의해서 발전함을 생각할 때 앞으로 더 많은 비판과 보충, 그리고 진정한 안티테제(만일 필요하다면)를 향한 정지작업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출처] [공유​] "낯설게 하기" 기법의 낯설게 하기/함영준 |작성자 옥토끼    
295    [공유]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스크랩] 댓글:  조회:2299  추천:0  2018-06-21
[공유]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     창작강의 및 감상평(1)     ☞ 시를 쉽게 쓰는 요령은 상상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초보자들이 시를 쓸 때 제일먼저 봉착하는 것이 어떻게 시를 써야하며, 또한 어떻게 쓰는 게 시적 표현이 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필자도 초보자 시절 이러한 문제에 부딪혀 이를 극복하는 데에 거의 10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거죠.   필자가 이와 같이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이유는 시란 ' 자기가 경험했고, 보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게 시다' 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재미있게 쓰는 데에는 이게 바로 함정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거죠. 경험과 느낌은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상상은 천차만별이죠.   하여, 시를 힘들이지 않고, 개성적으로 잘 쓰려면 상상으로 써야 합니다. 상상으로 써야 발전이 빠르고 좋은 시를 계속 양산할 수 있습니다. 즉 시란 자기가 쓰고자 하는 소재를 두 눈 딱 감고 상상해서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는. 보고, 느낀 걸 쓰는 게 시다라는 고정관념에 빠지니깐 시를 한 줄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겁니다. 즉 보고 느낀 것이 다 떨어지면 그때부터 허둥대기 시작하는 거죠. 기껏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자기 주변 친구, 부모,  어린 시절 이야기 등을 둘러대는 정도. 그리곤 스스로 훌륭한 시를 썼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가 되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만 99%가 그렇고 그런 이야기, 누구나 다 보고 느끼는 형편없는 넋두리, 서사, 풍경 나열이 되기가 일쑤죠.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시를 써왔다면 이 순간부터 기존 쓰는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필자가 안내한 대로 석 달만 같이 공부해 보도록 합시다. 글이 달라지는 걸 본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상상하는 것부터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우선 상상할 소재, 즉 상상할 대상을 구체적인 것 하나를 고르세요. 자신이 있는 곳이 지금 사무실이라고 하면 주변에 있는 꽃병, 벽, 창, 하늘, 노을 등이 있을 겁니다. 이중 어느 하나를 골라 봅시다.   필자가 먼저 어떻게 상상하는지 그 방법의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로 한번 해볼까요? 기존 방식대로 이란 소재로 시를 한번 시를 써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노을을 쳐다보며 < 피 빛 노을이 아름답구나/ 나는 저 노을 아래로 걸어간다/ 친구와 함께...> 대다수가 아마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았겠나 여깁니다. 그러나 이건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한 게 아닙니다.   상상을 이렇게 해보는 겁니다. 만약 자신이 현재 애로틱한 감정상태에 있다면 을 바라보며, 또는 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눈부신 상상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 여자가 옷을 벗고 있다/ 그녀가 옷을 벗으니까 눈부셔 눈물이 날 지경이다/ 나도 저렇게 발가벗고 그 곁으로 가고 싶다/ 아니다, 그녀를 데리고 여관으로 가고 싶다/ 가서 같이 포도주 한 잔을 건넨 다음 껴안고 뒹굴고 싶다........> 이렇게 노을을 발가벗고 있어서 눈부신 여자로 여기고 계속 상상해 가는 겁니다. 이땐 순서를 생각하지 말고 앞 상상의 핵심어를 가지고 다음 상상을 유치하든 품위 있든 따지지 말고 계속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걸 나중에 논리적으로 순서를 다시 잡아 정리, 수정해 가면서 다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제목을 로 붙여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근사한 한 편의 시가 탄생할 것 같잖아요?   이번에는 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한다면 빨간 노을을 머리 속에 담고서 이렇게 상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이들이 모닥불을 피고 있다/ 그 모닥불은 연기가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저 불에 나는/ 고구마를 구어 먹고 싶다/ 제일 잘 익은 것을 꺼내/ 이웃 동네 창수에게 건네주고 싶다/....난 저 모닥불에 오줌을 갈겨 피식 소리가 나게 끄고 싶다....> 이렇게 을 로 여기고 모닥불과 관련된 온갖 경험, 추억, 익살스런 행동, 우수꽝스런 생각, 이야기들을 계속 꺼내가면서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을 로 치환했으면 을 멀리 떠나서 상상을 하면 안됩니다. 모닥불과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상상을 펼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난해해 지게 됩니다   다른 소재들로 상상하는 것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 다듬는 법, 순서를 잡는 법, 제목을 붙이는 법....등등은 그때그때 하나씩 계속 예를 들기로 하고 오늘은 상상하는 요령만 익혀두기로 합시다. 시를 쉽게 쓰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    방승일 님의 라는 시를 먼저 감상해 봅시다. 필자가 위에서 말한 내용을 새기면서 이 시를 읽으면 방승일 님의 시가 왜 시가 될 수 없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말을 무수히 하였는데도 하나도 우리의 눈길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상상을 하지 않고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느낌이라도 참신한 느낌을 쓰면 한 두 줄 시로 성립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찾아볼 수 없군요. 본인이 섭섭해 할까봐 구체적으로 한번 지적해 볼까요?   첫줄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서른 즈음에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는데...이게 내용적으로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른 나이에 아직도 사람이 되지 못하고 서른 나이에서야 사람이 되겠다는 게 남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선언해 놓고서 두 번째 줄에서 왜 갑자기 이야기가 나무로 변했습니까? 두 번째 줄의 내용이 성립하려면 첫줄의 표현이 라고 표현했어야 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남에게 공감을 주거나 눈길을 잡으려면 의미 있는 말,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서른 즈음에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말을 거꾸로 '서른 즈음에 황소가 되고 싶다' 라고 말해 보세요. 이게 독자의 눈을 훨씬 더 끌지 않을까요. 우선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왜 이 작자가 사람도 아닌, 황소가 되려할까 궁금해하지 않겠어요?   하여, 방승일 님은 첫줄을 , 또는 라고 선언해 놓고 나무의 좋은 점, 이로운 점(그늘,목재,땔감,기둥... 등등)과 황소의 어진 점, 부지런한 점, 묵묵한 성격..등등을 위에서 설명한 상상의 요령에 따라 시를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처음에는 시적 표현을 한 줄 얻어도 큰 소득이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본기를 착실히 다져놓으면 시 쓰는 건 금방입니다. 제시한 과제로 시를 다시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윤주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윤주 님은 방승일 님보다 더 쉽게 상상으로 빠질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뵙니다. 그러나 느낌과 생각을 중구난방 해서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게 없습니다. 라는 소재를 어떤 것 하나로 비유해 놓고 그 하나의 속성, 내용, 사상 등을 집중해서 파고들기 바랍니다. 그래야 글에 초점이 생기고 내용이 깊이를 갖고 설득력도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끝내기가 아쉬우니깐 윤주 님의 시 첫줄 하나만 봅시다. 첫줄에서 비가 라고 했습니다. 추측컨데 가랑비가 부드럽게 내리는 걸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근데 표현이 어설퍼요. 의 이미지는 통상 달콤한 이미지입니다. 근데 부드러움을 표현하는데 둘러댔어요. 그래서 이 비유가 어설프고 미숙한 겁니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있는 건 통상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천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 비단 천? 그렇다면 부드럽게 내리는 비를 표현하려면 이렇게 하면 되죠. < 지금 내리는 비에는 비단 천이 들어 있다 >라고 말이죠. 그리고 나서 비단 천으로 묘사했으니깐 그 비단 천하나로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집중해서 상상을 펼쳐보는 겁니다.   그리고 비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소낙비, 우박비, 여우비, 보슬비, 봄비, 가을비 등등.. 그래서 표현하고자 하는 비도 이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서 시로 쓰려고 해야지 모든 비를 아울러서 시로 표현하려고 하면 1급 시인도 쓰기 힘듭니다. 따라서 윤주 님도 봄비나 보슬비 하나를 골라 위에 제시한 표현을 첫줄로 놓고 시를 다시 쓰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두 달, 아니 반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해서 쓰기 바랍니다. 깊고 넓게 고민하는 자만이 크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땐 뭐든지 막막합니다. 그래서 참고가 될만한 시를 첨부하오니 , , 이란 낱말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상상력을 발휘하였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          밑에 관하여       나는 위보다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큰 나무, 밑이 큰 그릇, 밑이 큰 여자....  그 탄탄한 밑동을 사랑한다.   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밑동도 다 넓은 것은 아니지만 참나무처럼 튼튼한 사람, 그 사람 밑을 내려가보면 넓은 뿌리가 바닥을 악착같이 끌어안고 있다.   밑을 잘 다지고 가꾸는 사람들.... 우리도 밑을 논밭처럼 잘 일궈야 똑바로 설 수 있다. 가로수처럼 확실한 밑을 믿고 대로를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에서 명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밑이 구린 것들, 밑이 썩은 것들은 내일로 얼굴을 내밀 수 없고 옆 사람에게도 가지를 칠 수 없다.   나는 밑을 사랑한다. 밑이 넓은 말, 밑이 넓은 행동, 밑이 넓은 일...  그 근본을 사랑한다. 근본이 없어도 근본을 이루려는 아랫도리를 사랑한다.     ***********************************************************************      아름다운 모퉁이에 관하여       모퉁이가 아름다운 건물을 보면 사람도 모름지기 모퉁이가 아름다워야 아름다운   입체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향기로운 내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퉁이가 둥근 말, 모퉁이가 귀여운 사랑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모난 부분을 둥그렇게 구부린 흔적이 바라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옆구리를 한번 돌아가보면서 모퉁이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될 건물의 중요한 한 분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부까지 품위 있게 해주는 의식의 요긴한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들... 경제학적으로 검토하면 비효율적 투자이겠지만 모두가 모퉁이를 가꾸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어디를 돌아가보고 살아야 하나? 향기로운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입체물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                               벽       가려보고 드러내봐도 내 앞뒤 골목은 온통 벽이로구나. 한 발로 뻥 찼을 땐 여지없이 되튕기며 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벽.   야, 벽에도 이단 옆차기가 있고, 돌려차기가 있구나. 속이 훤히 드러난 유리벽이 있고, 보초를 세워야 하는 철조망 벽이 있구나. 그러면 벽에도 나이가 있고 학벌이 있고 지위가 있다는 것인데, 맘에 안 든 벽을 마구 감옥에 잡아넣는다면 누가 경쟁을 하나? 벽 없이도 세상을 이룰 수 있나? 우리들 마지막 버팀목이 벽이라면 벽 없이도 희망은 존재할까? 벽을 쌓으려면 스폰지를 넣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조립형으로 설계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하더라도 잦은 발길질과 교묘한 철거 전략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벽은 융통성 있게 존재해야 하리라.    지금 나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한 사나이가 망치를 들고 힘차게 걸어가고 있다.   ***********************************************************************       창작강의 및 감상평(2)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하기에 좋은 소재들을 골라 상상하도록 합시다.   초보자 시절에 일단 상상하는 요령을 알게 되면 어떤 소재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상상력이 일정 수준에 달한 사람은 어떤 소재를 갖다놓더라도 즉각 상상력을 기발하게 발휘할 수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막막하기 이를 데 없죠. 그래서 초기에는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긴 소재, 언어들을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고르는 게 상상하기 쉽습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소재들은 수준급의 상상력 소유자가 아니면 상상의 단서를 잡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 미움, 과거, 미래, 종이... 등 이런 소재들로 시를 쓴다고 해봅시다. 그냥 숨이 콱 막힐 겁니다. 그러나 공간이 있는 것들 문, 벽, 창, 천장, 집....등 이걸로 상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상이 한결 쉬울 겁니다. 이건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이미지, 즉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고 그 그림은 공간이 있는 것이 평면적인 것보다 훨씬 그리기 쉽고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을 가지고 상상한다면 현실의 문(사립문,철문,미닫이문,파란문,빨간문...), 추억의 문, 사랑의 문, 지식의 문...등 상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가령 그 추억의 문 하나로만 상상을 해보더라도 그 추억의 문에 문고리를 달아보고, 자물통도 달아보고, 발로 한 번 뻥 차보고, 파란 페인트, 아니 빨간 페인트도 칠해보고 온갖 상상을 다 해볼 수 있잖아요?   또 이란 소재로 한번 해 볼까요? 처럼 의미적 공간 말고, 이번에는 실제적 공간으로 , 즉 어느 초가집을 한번 그려본다고 해 봅시다. 두 눈 딱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초가집 하나를 머리 속에 담고 < 그 집에 들어가려면 싸립문을 밀어야 하고/ 문 왼쪽에는 나팔꽃 화단/오른 쪽에는 토끼장이 딸린 닭장/ 거기에는 줄을 잡고 변을 보는 화장실이 있다/.....뒤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마당에는 삽살개 한 마리/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면/ 펜티 차림의 한 어린이가/ 만화책을 보고 있다>  이렇게 묘사해 놓고 제목을 으로 붙인다고 해 보세요. 정말 김영남의 어린 시절 집을 그린 훌륭한 시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초가집을 그리는데 자기가 실제적으로 본 초가집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요. 상상이 당장 막혀요. 상상은 기본적으로 허구이고 가공입니다. 즉 그 초가집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와 한번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겁니다. 즉 상상 속에서 초가집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죠. 이게 바로 참신한 그림이요, 참신한 이미지요, 참신한 시가 되는 겁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공간이 존재하는 소재들을 골라 상상을 해 시를 써보도록 하고, 상상은 체험, 허구, 가공까지 드나들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시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 가공까지 동원해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걸 유념하고 게시판에 올라온 공기욱 님의 를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   공기욱 님의 란 시는 발상, 즉 상상의 단서는 참 좋습니다. 비가 오는 것을 편지가 오는 걸로 상상하는 것은 훌륭한 시로 탄생할 여지가 매우 높습니다. 일단 상상이 참신하니깐요. 그러나 현재로써는 시로 여물지 못했어요. 단지 시로 건질 수 있는 표현은 네 번째 연 이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비오는 걸 편지 오는 걸로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구절들이에요. 한 시에서 초점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면 그런 표현들은 버려야지요.   하여, 공기욱 님은 나머지 연은 다 버리고 네쩨연을 첫연으로 내걸고 거기서부터 다시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소한 표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상상을 어떻게 펼치는가가 앞으로의 장래를 보장하니깐 의 요령을 참고하시어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당분간 상상을 참신하게 하는 데에 중점 지도를 할 것입니다.   공기욱 님에게 위 시에서 상상을 펼치는데 참고가 될만한 이야기를 하자면 첫 연에서 비가 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지가 오는 걸로 생각했으니깐 둘째 연에서부터는 나한테 오는 편지로 끌어와야 이야기를 전개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그리고 나선 슬픈 편지, 기쁜 편지, 빨간 편지 파란 편지, 애인 편지, 친구 편지, 문안편지, 위로편지 등등....쓸 내용이 많아질 겁니다. 상상하는 데 참고해 보세요.(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3)   초보자 시절에는 시 창작 방법을 아무리 들어도 시작하려면 정작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좀 더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추천할까 합니다.   첫째로 왕 초보 시절에는 기성 시인의 작품중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작품을 갖다놓고 그 작품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즉 그 시를 한번 모방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 했습니다. 사실 어느 시인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좋게 말해서 영향이지, 액면 그대로 표현하면 그 사람을 모방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가능한 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술학도 지망생에게 제일먼저 시키는 것이 석고데생, 즉 모사연습이고 외국어를 습득하는데 어떤 이론, 문법공부보다도 말을 실제로 따라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음미해보면 금세 이해가 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이렇게 급속도로 선진대열에 올라 설 수 있었다는 것도 외국, 특히 인접 일본의 앞선 기술, 문화, 제도 등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의 색깔과 독자성이 문제이지만...   하여, 왕초보 시절에는 구조적으로(기,승,전,결) 잘 짜여진 작품이나, 독특한 표현이 많이 들어있는 작품을 갖다놓고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내용과 감각을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전개방법과 표현기술을 따라서 해보라는 뜻입니다. 이걸 능수능란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자기도 모르게 표현을 뒤틀어보고 싶고 독특하게 펼치고 싶어져 자기 색깔이 선명하게 나오는 걸 보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감각은 있는데 될만한 시의 소재를 못 찾아 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람은 잡지를 많이 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지, 패선 잡지, 디자인 잡지, 건축잡지, 미술잡지 등 사진과 그림이 많이 담긴 잡지를. 시란 기본적으로 심상, 이미지 즉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림이 많은 잡지를 넘기다보면 언뜻 시로 표현하고 싶은 소재가 스치게 됩니다. 잡지를 깊게 읽지 말고 눈요기식으로 넘기고 광고 카피도 눈여겨 보기 바랍니다. 문득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고쟁이들도 시를 많이 읽고 쓴다는 걸 참고해 가면서 말입니다. 이때 얻은 힌트를 가지고 감상평(1),(2)를 참고해서 상상을 펼쳐보기 바랍니다.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제목에 신경을 쓰지 말고 문득 얻은 힌트, 그 소재를 가지고 상상을 해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상상을 자꾸 새롭게 하고 고치다가 보면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의 시가 탄생하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맨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   이상을 참고해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이미지 즉 글로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걸 잘하다 보면 나중에 의미있는 말, 표현, 자기철학 등도 요령있게 양념치듯 넣는 기술을 알게 됩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거창한 자기의 말, 주장을 하려하지 말고 힘을 완전히 뺀 상태에서 감각과 상상으로 접근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많이 해보기 바랍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들을 한번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소빈 님의 시 은 거의 시의 근처에 와 있습니다. 즉 시적 사고가 이제 시작의 단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이 시로 성립하기에는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몇 군데 눈에 띄는 구절이 있지만 이란 이미지가 전혀 그려지지 않았어요. 단지 유리의 속성(이건 좋은 표현)과 유리를 끼우는 사람만 있지 유리의 관이란 이미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선 유리의 관이란 소재가 낮설고 독자의 상상을 자극할만한 매력적인 물건도 아니거든요. 차라리 유리 벽, 유리 등, 유리 인형 등이 더 상상력을 펼치기 쉽고 독자들의 상상도 매력적으로 자극할 물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 이 시를 유리의 속성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다시 쓰면 좋은 시가 탄생할 것 같습니다 이소빈 님은 기본적으로 소재를 어떻게 상상하는 지를 알고 있는 것 같거든요. 우선 첫줄을 라고 두 번째 줄의 내용을 변용해 놓고 이소빈 님이 발견해 낸 유리의 속성들, 즉 광채, 맑은 영혼 등을 가지고 다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을 전개하는데 참고가 될 지 모르겠지만 올 연초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를 한번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유리의 속성들을 발견하는 데에는 이기철의 문학과 지성사간 시집을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기욱 님은 아직도 제가 설명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면 발전이 더디니까 당분간 제가 과제를 내 준대로 시를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따라간다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다음에 시를 올릴 때 공기욱 님의 애인 방을 시로 그려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애인이 없다면 임의로 하나 만들어서라도, 그거마저 없다면 친구의 방이라도 시로 멋지게 그려서 올리기 바랍니다. 필자가 공기욱 님의 시만 읽고서도 애인의 방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기 바랍니다.   이섭 님의 시도 시로 건질 수 있는 표현은 맨 마지막 두 줄 뿐입니다. 나머지 표현은 설명과 느낌을 적은 것이고 상상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필자의 감상평(1),(2)를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하여 이섭 님도 공기욱 님처럼 애인의 방을 한번 멋지게 시로 그려서 올려보기 바랍니다. 이섭님은 위 시를 가지고 이렇게 시작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고 나서 애인의 방을 꾸며서라도 멋들어지게 그려내 보기 바랍니다.   참고 시를 하나 소개 합니다. ********************************************************************                       방     그 방은 창을 통해 안이 훤히 드러난다. 연둣빛 레이스 커튼을 드리웠고 널린 브래지어가 한결같이 희망표이다. 고개를 들면 갤럭시 손목시계, 악어가죽 핸드백이 한눈에 확 들어온다. 바닥은 아담하고 천장은 유난히 높고 알록달록한 박달나무 숲속 같은 분위기가 달려오는 방. 저렇게 꾸미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까. 그 방에 닿으려면 창동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날아가는 화살표를 두 번 따라가야 하고 909국 다이얼을 돌려야 한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만큼 그 방 밖도 늘 매혹적이고 불안하다.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꺼져 있으면 그 방 밖은 가을이고 수상하다. 그리고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불면 그 방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은 흔들릴 때가 아름답다. 흔들릴 때마다 굳게 잠긴 자물통이 침묵의 장식처럼 중심을 잡아주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돌아다보면 그 방은 다시 불이 켜진다.   참으로 이상한 방. 한번 쓱 들어가 맘껏 뒹굴어보고 싶은 방. 브래지어가 창인 그녀.      *******************************************************************            창작강의 및 감상평(4)     ☞ 시의 길이는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는 게 좋습니다.   초보자 시절에 시의 퇴고와 관련하여 자주 고민하는 것이 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시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에 따라 전개하는 형식에 따라 각각 다르겠지만 행갈이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할 때 시의 길이는 대체적으로 20행 정도를 목표로 하고, 시의 연은 의미가 달라지는 부분에서 연을 구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통상적으로 20행이 넘어 시가 길어지면 우선 시각적으로도 질리게 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시를 읽고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게 됩니다. 시가 길어질 땐 길어지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그 시가 아주 재미있다든지, 아니면 호흡이 길어도 독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하는 특별한 기교와 내용이 있든지 해야 합니다. 이젠 독자들도 영악해서 별로 의미 없고 특별한 내용도 없으면서 작자만의 생각으로 길게 쓴 시는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시가 문학의 어느 분야보다도 언어의 함축성과 경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요즘 시 잡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다르다는 걸 느낄 겁니다. 좋은 시란 적당한 길이에 음악성과 함축성을 겸비하고 이미지가 선명한 시가 좋은 시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은 끝없이 해놓고 나중에 작품을 다듬어 퇴고할 때 이 정도의 길이로 지향하는 게 바람직할 겁니다.   연을 나눌 때에는 대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질 때 나누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상의 내용이 건너 뛸 때. 변칙도 있습니다만 초보자 시절에는 여하튼 기본에 충실하는 게 발전이 빠릅니다. 그리고 1, 2, 3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이 거의 연작시 수준이거나, 연을 구분하기에는 보폭이 너무 클 때 통상 사용하는 것으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공기욱 님의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를 쓴 공기욱은 제게 한 번 지적을 받고 시가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는 걸 이 게시판 독자들은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시란 바로 이렇게 쓰는 겁니다. 시 쓰는 방법을 제대로 알면 시 쓰는 게 이렇게 쉽습니다. 벌써 한 편의 시를 쉽게 건진 공기욱 님! 축하합니다.   좀 수정할 부분을 지적하겠습니다. 우선 연을 에서 연을 나누고 쉼표를 없애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 속에 란 단어를 모두 빼기 바랍니다. 비오는 걸 편지 오는 걸로 상상하는 것은 이미 마음 속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니깐 란 단어가 들어가면 안되겠지요?   두 번째 구절의 에서 을 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첫째 연 마지막 를 로 바꾸기 바랍니다. 마지막 연의 를 로 바꾸어 문장 속으로 집어넣기 바라고, 에서 누구의 편지인지 불분명하죠? 그래서 앞에 란 말과 편지 다음에 란 말도 집어넣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맨 앞에 집어넣어 시 서두의 의미를 리플레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서두의 구절을 한번 리플레이 해 주면 상상의 초점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독자가 시의 처음을 다시 되새기면서 감상을 마치게 됩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마지막 연이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제목을 로 바꾸기 바랍니다. 이 시의 내용에 가을비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의 지적을 반영해 시를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겠습니다. ********************************************************************                             가을비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방안에 불을 켜둔다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문도 열어둔다 먼데서 오는 그 편지 나의 집을 수월히 찾아오도록   밤새 멎지 않는 무수한 발자국자국소리에 잠 못 이룬 나는 길눈 밤눈 다 어둔 내어머니, 혹 딴 번지를 헤매시나 한참을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귓속으로 한 발짝 두 발짝 파고드는, 어머니의 동여맨 사랑을 풀다보니 풀다보니 그 사랑 금새 문지방을 넘어 바닥 깊숙이 흘러가서 금새 빛 바랜 편지함마저 흥건하게 잠긴다 어머니, 나를 매만지는 손길에 잠이 든다.   이렇게 편지가 오는 날은 어머니 생전에 드리지 못한 안부, 내 편지 한 통도 하늘로 급히 부쳐야 하리.   ************************************************************************            창작강의 및 감상평(5)       ☞ 시를 쉽게 잘 쓰려면 2중 구조에 대해 먼저 눈을 뜹시다.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촵미래촵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런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시를 가장 선명하게 제일먼저 제시한 시인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상 시인은 주로 거울을 매개체로 해서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를 잘 조응했었습니다. 사실 이중구조 이치만 잘 이해하고 소화한 사람이면 이런 유형의 시가 쓰기도 쉽고 참 재미있다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은 난해하고 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로직은 의외로 쉽지 않나 생각합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온갖 장난과 행동을 다 해보는 겁니다.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로 예를 들면  < 내가 눈빛을 시퍼렇게 뽑으니까/ 거울 속의 녀석도 눈빛을 시퍼렇게 뽑는다./ 내가 쫓아가니까 그 녀석은 도망간다. 화장실로 숨는다/ 내가 다시 돌아서니깐 녀석은 다시 기어 나온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와 행동을 이 둘에만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나가면 시적 공간이 나와 거울 속의 나로 한정되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아주 선명하게 되고 이야기도 풀어나가기가 한결 쉽게 됩니다. 제 시집 '정동진역'에 실려있는 라는 시도 참고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시작도 이런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고정관념을 벗어나 사고의 자유로움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데에부터 시작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이상, 김기림, 김수영, 오규원 등 이런 시인들의 시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시가 참 재미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예를 든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때 시를 끌어내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셋째로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그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나는 엉덩이에 찌그러진 상호를 붙였지만/ 발로 차면 크게 소리를 지른다/ 밟으면 시커먼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잘 돌봐주면 난 그대 책상을 꾸미는 꽃병이 될 수도....>이런 식으로 내가 깡통이 되어 깡통의 속성을 가지고 계속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깡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깡통'이란 말이 들어가면 깡통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깡통이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이것만 잘 소화해도 현상문예 예선을 거뜬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가 감각적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거꾸로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 이 깡통은 목소리가 크고/ 속에 든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루종일 거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그리하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깡통/ 가끔 앞집 아저씨의 발에 채여/ 아프다고 소리치는 깡통.....> 이렇게 깡통이 내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한 다음에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또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세 번째 방법은 지면상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첫 번째 방법에 충실한 시 한편을 소개하고 게시판 시 감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방법만 잘 활용해도 눈에 확 나는 좋은 시를 금세 쓸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수박                           윤문자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  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언제나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들을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소빈 님의 시는 몇 군데만 고치면 상상력이 풍부한 아주 좋은 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번 지적을 받고 금세 상상력을 이렇게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님이 똑똑한 건지, 필자의 강의가 훌륭한지 모르겠습니만 여하튼 필자의 의도를 쉽게 알고 따라오는 것이 대견스럽습니다. 이소빈 님은 제가 위에서 설명한 소재의 이중구조를 잘 읽어보면 이 시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 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즉 이 시는 소재의 이중구조 첫번째 경우이지만 "유리와 나"의 이중구조가 아니라 "유리와 그"와의 이중구조로 파악해야 이 시의 내용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본문 속에 나오는 라는 말을 전부 로 바꾸어 보세요. 훌륭한 시가 되죠? 하여 필자가 바꾸어 고치면 다음과 같은 훌륭한 시가 탄생하겠습니다. 그 이유를 이 게시판에서 설명하려면 또 길어지니, 듣고 싶으면 일요일날 밤 10시 초고작을 프린트해 놓고  817-6119로 전화하시기 바랍니다. *****************************************       유리   날카로운 모서리를 반짝이는 그는 살아 있다 빛나는 피부는 분명 날카로움이 응집된 광채이다 갈대처럼 휘어질 줄 모르는 성질을 가진 그는 어디를 두드려도 물방울 떨어지듯 맑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주고 긁혀 다쳐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속을 꿰뚫어 보는 섬뜩하게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몸을 날려 날카롭게 변신할 수 있는 그는 틀에 갇혀 살아 간다 오랜시간 단단하게 버티고 있어야 하는 고행도 견딘다 한낮 몸통을 흔들어 대는 바람의 유혹에도 쉽게 제 몸을 부수어 자유를 갈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돌팔매질에는 단번에 날카로움을 드러낼 그는 반짝이는 모서리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   공기욱 님도 시를 잘 썼군요. 그러나 ,를 빼세요.  를 로 바꾸어 보세요. 그 이유는 이소빈 님처럼 전화를 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반영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공기욱 님은 시의 방향을 이제 제대로 잡은 것 같으니 더 고심해서 시를 써 당분간 시를 올리지 말고 다른 독자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비축해 두시기 바랍니다.   ********************************************            봄비   누군가 호미질 하는 소리에 눈이 떠져요 톡톡톡 소리 나는, 이른 아침 밭으로 나가요 누군가 호미질 하고 있어요 밭이랑마다 깊이로 넓이로 골고루 씨앗을 뿌리고 있어요 바람에 날려가지 않게 흙으로 덮어주며 다독거리며  누군가 이렇게 부지런한 손놀림을 하고 있어요   내 이마 위에 맺힌 새말간 땀방울을 좀 보세요 밭고랑 씨앗들도 파도처럼 나에게로 퍼져와요 나도 누군가에게로 씨앗들을 퍼트리고 싶어요   *******************************************   chr486님은 올린 글의 내용으로 보아 시를 잘 쓸 수 있는 감각과 사고의 소유자로 여겨집니다. 제대로 배우면 폭발적으로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익히시길 바랍니다. 기성 시인들의 시중 구조가 잘 짜여있고 감각적인 시를 많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자의 감상평1,2,3,4도 반드시 여러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6)     ☞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데에도 요령이 있습니다.   시의 제목을 제대로 붙일 줄 알려면 그 기법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립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또 독자들이 이 시를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바로 이 제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이 문제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연구해 그동안 시 창작에 응용한 사람이 의외로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여 이 문제에 관한 한 필자가 문단에서 맨 처음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같은 제목을 붙이더라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제목이 되고, 보다 생산적인 제목이 될 수 있을까? 필자가 그 방법을 개발해서 그동안 작품에 실제로 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제목을 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는 이걸 제대로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의 역기능으로 작용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많은 시들이 제목을 로 해놓고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쓰거나, 해놓고 서울역에 관하여 온갖 수사와 기교를 동원해 시를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화장실과 서울역에 대한 정보를 이미 많이 갖고 있어서(어쩌면 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 그 시를 쓴 사람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의 화장실과 서울역에 관한 시는 읽으려 하지 않고 쉽게 외면하지 않나 싶습니다. 작자는 정말 열심히 최고로 좋은 시를 썼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작자 혼자 만의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시로 성공한 작품들을 한번 예로 몇 들어볼까요? 김춘수의 , 김수영의 . 곽재구의 등을 한번 봅시다. 내가 불러줄 때 내게로 와 핀 꽃을 본적이 있습니까?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평역이란 시를 보기 전에 사평역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사평역을 목포역이라고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때도 이 시의 감동이 사평역만큼 올까요?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위와 같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때 효과적인 제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즐겨 사용했던 방법으로 필자의 시집 정동진역을 읽어보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 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걸 시에 한번 적용해봤더니 제대로 맞아떨어지더군요. 이때 붙이는 제목의 형식은 서술형이 되기 쉽고, 내용은 시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전혀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은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글을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서 그럴싸하게 묘사 해놓고 제목을 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쭉 묘사해 놓고 제목을 로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이 글이 아름다운 여자를 설명하고 묘사한 글이지 어떻게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목을 이라고 붙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로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목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시가 되고 안 되고 까지 하게 됩니다. 이 방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시를 하나 소개하고 지면상 한계로 인해 강의를 마칠까 합니다. 소개하는 시는 98년(?) 현대문학 신인작품상 당선작이고 아주 하찮은 여울을 하나 묘사해 놓고 제목을 엉뚱하게 붙여 성공한 시입니다. 만약 이 시 제목을 < XXX 여울>.로 붙였을 경우 시가 될 수 있는지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사춘기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박현 님의 라는 시를 읽으면 이제까지 강의한 내용중 어디에 걸려 시로 성공할 수 없는지를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나름대로 제목에도 멋을 부렸는데 위에서 제가 설명한 내용을 참고하면 제목을 어떻게 붙여야 하는지를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돌탑도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소재 아닙니까? 독자들이 이 시를 읽고 뭔가 얻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라는 느낌을 주려면 돌탑에 관하여 가공으로 만들어서라도 새로운 이야기, 정보를 제공해야죠. 그러지 않으면 시간도 돈이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읽어봤는데 그렇고 그런 이야기라 판단되면 독자는 다시 그 사람 시를 읽지 않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현재 님의 시중에서 필자에게 어필할만한 구절과 감각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군요.   박현 님은 필자의 창작강의1,2,3,4,5를 읽어보고, 또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들 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유심히 살핀 다음, 다른 소재로 시를 한번 써서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생각하고 차근차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바라자면 그 동안 써왔던 방식을 잠시 접어두고 제가 창작강의(1)에서부터 설명한 방식으로 시를 한번 새롭게 써 보시기 바랍니다. 뭔가 달라지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일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유연한 사고를 갖는 자가 빨리 성공할 수 있습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7)     ☞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 상세 강좌   이전 창작강의 및 감상평(6)과 관련하여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법중 세 번째인 "엉뚱하게 붙이는 방법"에 관하여 여러 군데에서 전화가 와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 보충합니다.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가끔 시 전문잡지에도 본문과 관련지어 전혀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제목의 시를 종종 볼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경우에 이에 해당할 겁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참신한 은유관계가 형성될 때 그 시는 그만큼 참신한 시로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두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놓은 다음, 나중에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이중 첫 번째는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가 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난 강좌 때 이 방법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번 예로 든 시를 다시 읽고 난 다음에 설명하겠습니다. ************************************************************************                              사춘기                                                        강순   여울에는   밀어,꼬치동자개,버들매치,버들치,배가사리,감돌고기,가는돌고기,점몰개,참마자,송사리,갈문망둑,눈동자개,연준모치,버들개,모래주사,새미,누치,흰수마자,납자루,열목어,꺽저기,수수미구리지,금강모치,돌상어,왜매치,꺽지,쌀미구리,점줄종개,돌마자,둑중개,왕종개,버들가지,꾸구리,모샘치,어름치,돌고기,부안종개,자가시리 등이 살았다.   나는 가끔 물살이 빠른 그곳에 발을 담근다.   ************************************************************************   위시는 제목과 본문이 은유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 라는 훌륭한 메타포가 들어있는 시인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을 설명한다면 첫 번째 방법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사춘기는 물살 빠른 여울이다"라는 메타포가 눈에 번쩍 띄는 문장을 발견하고 이걸 갖다놓고 제목을 로 올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에 관한 내용만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즉 사춘기를 특징 지을 수 있는 물살 빠른 여울만 구체적으로 창조하는 것이죠. 하여 이 방법은 상상력으로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야 하니까 테크닉과 능력이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여간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눈에 번쩍 띄는 물살 빠른 여울을 묘사해 놓은 다음, 그 내용에 메타포가 잘 조응되는 제목을 찾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위시의 작자는 아마 자신의 기억 속에서 인상깊은 여울을 먼저 상상으로 묘사한 다음에 그에 잘 조응하는 제목인 '사춘기'를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위 시는 제목을 굳이 '사춘기'로 하지 않더라도 물살 빠른 여울에 조응하는 제목이면 다 성립합니다. 즉 제목을 '나의 대학시절' '80년대' '고교시절' '어린 시절' '신혼기' 등 과도기적 상황의 제목이면 다 잘 어울려 시로 훌륭하게 성립합니다.   하여,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방법 중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좋은 시를 더 쉽게 많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퇴고 과정 중에 버리기 아까운 대목을 다로 떼어내어 보강한 다음 이 방법을 한번 활용해 보세요. 의외로 좋은 시를 아주 쉽게 건질 수 있을 겁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배용진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배용진 님은 소나기 오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만약 이게 시가 될 수 있다면 사진이 제일 훌륭한 시가 되는 거죠. 이는 무얼 뜻하느냐 하면 대상을 포착하되 자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들어가려면 이 강좌 맨 처음부터 줄기차게 강조한 상상으로 대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소나기가 오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고 상상을 한 것이 아니죠. 즉 상상은 소나기 오는 모습이 내게 무얼 떠오르게 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상을 하는 지는 이 창작강의 처음에서 님이 배용진 님처럼 시를 썼다가 제게 지적을 받고 비오는 모습을 편지오는 모습으로, 또 씨뿌리는 모습으로 상상을 한 것을 보면 금세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하여, 공기욱 님의 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번 참고해 배용진 님도 상상으로 다시 써 보세요.   기성 시인중 소나기 오는 모습을 인상깊은 상상으로 포착한 예를 들면 조정권 시인은 소나기 오는 모습을 '대못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포착했고, 또 이대흠 시인은 하늘과 땅이 섹스하는 모습, 즉 '땅이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는 모습으로 포착하지 않았습니까?   배용진 님이 올린 시를 가지고 상상한 시로 필자가 고치자면 를 로만 바꾸면 금세 시가 되요. 즉 소나기가 오는 모습을 내 추억 속의 여자들이 오는 모습으로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다 같이 필자가 고친 시로 한번 확인해 봅시다 시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     소나기     여자들이 온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리고 여섯......   모두를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   박미라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이 시는 시를 많이 써 본 사람의 시이거나, 아니면 기성 시인의 시로 여겨지는군요. 그러나 이 창작교실에 올렸다는 것은 제게 무언가 얻을 정보가 있다고 여겨 올렸다고 믿기 때문에 제가 의도한 목표에 빗나간 시는 그 시 작자가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지적할 것임을 밝힙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제가 설정한 것이고, 또 제가 지적한 내용에 수긍할 수 없으면 제 지적에 따르지 않고 자기식대로 계속 시를 쓰면 되니깐요.   우선 필자가  박미라 님의 시를 읽고 난 느낌은 이렇습니다. 시가 너무나 뻔한 내용으로 필요없이 길다. 다 읽고 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눈길을 끄는 표현과 감감도 보이지 않는다. 하여, 우선 독자에게 이런 느낌을 주었다면 그 시는 실패했다고 봐야지요. 필자를 포함하여 이 지상 모든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지 못했다면 독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았은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기본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작가와 독자들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거죠.   시학의 시작인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빠지지 않고 시문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용이 상상력과 텐스, 즉 긴장입니다. 상상력은 시의 내용을 좌우하고, 텐스는 시의 표현력, 구성력, 형상력 등 시의 외형을 좌우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가 이 강좌 맨 처음부터 상상력, 상상력 했던 게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여 이 시는 바로 이 두 가지 것중 상상력에서부터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독도를 어떻게 상상력으로 접근할 것인가를 먼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 되지 않을 때는 우선 상상을 펼치기 쉬운 소재부터 갖다놓고 시를 쓰는 한번 습관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필자의 창작강의도 (1)에서부터 쭉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 소재를 상상으로 접근을 하지 않으니까 자꾸 자기 주장과 진부한 자기 넋두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 넋두리, 즉 자기 서사가 들어가 효과를 보려면 특별한 이야기이거나 조금 들어가든지, 아니면 아주 뛰어난 테크닉으로 접근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시가 형편없이 늘어지거나 진부한 넋두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서사적인 내용으로 성공한 시, 백석 시를 한번 잘 관찰해 보세요. 시의 뒤에 괭장한 기교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서사가 들어가도 시가 진부하지 않고 긴장도 훌륭하게 살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여 서사가 많이 들어가는 시를 쓸려면 시의 테크닉을 충분히 읽힌 다음 쓰고 초보자 시절에는 상상력 위주의 시를 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더라도 상상력으로 시를 쓴 사람은 젊은 사람 뺨치게 잘 쓰는 걸 필자는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   이소빈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님은 금천장날의 한 풍경을 그냥 그리는데에 끝났군요. 많은 말을 했는데도 내용적으로는 큰 진척이 없이 시를 쓰다 만 기분이에요. 여기에서 더 깊이 상상력으로 들어가야지요. 정경 묘사는 1연 수준으로 충분합니다. 2연부터는 더 깊게 들어가 상상력을 발휘해야지요. 일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봉숭아를 다시 한번 잘 읽어보세요. 풍경에 어떻게 상상력을 덧붙이는 가를....   하여 이소빈님은 2연에서 할머니들 얼굴에서 나팔꽃을 발견했으니깐 그 나팔꽃 이야기로 전개해야하지 않나요? 1연과 2연을 합쳐서 더 간결하게 추려 금천장날 할머니들 정경 묘사를 하고 2연부터 할머니들 얼굴에서 발견한 나팔꽃 이야기로 더 상상력을 펼치기 바랍니다. 망해도 좋으니 맘놓고 상상을 해 보세요. 이소빈님은 이제 사고가 자유롭게 활발하게 터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그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때는 정말 망해도 좋다는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갖기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8)       필자의 강의를 중간부터 듣는 사람은 필자의 강의 (1)부터 반드시 읽어볼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래야 빠른 시간에 효과적으로 시창작법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 효과적이고 매력적인 시적 표현 얻는 방식 두 가지   초보자 시절은 시 쓰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설사 알겠다 여겨지더라도 쓰려고 하면 또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되든지 않되든지간에 상관하지 말고 바로 무조건 끄적거려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여, 바로 끄적거려도 남보다 몇 곱절 빠르게 시적 표현을 얻는 방법 두 가지만 공개할까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이 두 가지만이라도 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을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이걸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면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이걸 또 설명하려면 한 학기 내내 설명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에서 필자의 개발한 용어로 그 방법을 설명할까 합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입니다. 시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 방향이 주로 한쪽으로 쏠려있습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시고 행동하고 또 사물을 보고 느끼고 감탄하고 슬퍼하는 방식이 대동소이하고, 우리의 인식구조도 주로 그 쪽으로 익숙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쪽에서 새로운 표현을 구하려면 지금까지의 방식보다 몇 곱절 노력과 탐구로 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코 효과적으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때는 거꾸로 접근해 보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고스톱도 여지껏 쳐왔던 방식으로 쳐 잘 안 풀릴 땐 거꾸로 치면 의외로 잘 풀리는 이치와 같은 전략이지요.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시인이 로 표현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걸 거꾸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 또는 이렇게 되는 거죠. 를 거꾸로 표현하면 . 는 , 는 가 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떤 게 우리에게 더 참신하게 다가옵니까? 후자이지요. 전자가 설명이라면, 후자는 묘사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할 점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전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현 문단에서 이걸 잘 구사하는 시인이 바로 오규원 시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을 쓴 김수영 시인도 이 기법을 즐겨 구사했구요.   두 번째 방법은 입니다. 이 방법은 필자가 깊이 탐구해 작품에 실제 많이 응용했고 현재도 아주 즐겨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렸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 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가령 어떤 사람이 형광등, 침대, 커튼, 그림 등이 있는 방에 갇혀 한 여자를 그리워하며 책상에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방 속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 이미지와 초점이 선명하게 되고 할 이야기도 금세 많아지게 됩니다. 대부분이 이걸 잘 모르고 방밖을 벗어나 거창한 소재와 이야기를 자꾸 끌어오려 하다보니깐 시가 초점이 흐려지고 난해해 지게 되는 거죠. 이것만 잘 해도 시가 아주 유창해 집니다.   실제로 이 기법 하나만으로도 신춘문예 당선한 필자의 시 한 편을 그 예로 살펴보고 이번 강좌를 마치겠습니다. *****************************************   정동진驛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넣고 끓이는 라면집과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잔을 주고받기 좋은 소주집이 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외로운 방들 위에 영롱한 불빛을 다는 아름다운 천정도 볼 수 있다.   강릉에서 20분, 7번국도를 따라가면 바닷바람에 철로쪽으로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른 깃발로 열차를 세우는 驛舍, 같은 그녀를 만날 수 있다. ************************************   필자는 정동진역 풍경을 그리는데 모두 정동진역 근처에 있는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실제로 정동진역에 다 있던 것들입니다. 억새꽃, 벤치, 모래사장, 라면집, 소주집, 소나무 등등... 그래서 열차가 들어오는 역이니까 겨울이 오는 것도 으로 생각했고, 역도 으로 표현했고, 라면집도 삼양라면을 끓이는 라면집이 아니라 이고, 소주집도 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라면집을 묘사해야 하겠는데 구불구불한 주변 소재를 찾으니까 산 능선, 도로, 해안선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중에서 가장 주변 소재에 어울리는 게 바로 해안선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차용한 겁니다. 또한 마주보고 술잔을 나누는 소주집도 묘사해야겠는데 쓸만한 주변 소재들을 밖을 내다보며 살펴봤더니 배, 수평선, 갈매기, 파도 등이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이 소재들이 다 어울리지만 이중에서 파도가 가장 운치 있는 소재로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변 소재로 둘러댔더니 읽는 사람마다 다 반하더군요. 만약 이걸 라고 표현했다고 해 봅시다. 얼마나 평범하고 싱겁겠어요?   위시는 시의 템포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마지막 구절을 제외하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동진역을 벗어나지 않고 철저하게 정동진역 주변 소재로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도 신춘문예에까지 당선되고 성공한 시로 여기잖아요?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영이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영이 님의 시를 읽으니 양파를 가지고 나름대로 상상을 펼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느껴지는군요. 아주 장래가 기대되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몸부림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시 창작법을 습득하게 됩니다. 아주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렇게 되는 상상이든 안 되는 상상이든 천방지축 날뛰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되고 이런 몸부림치는 과정이 치열할수록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여지도 많게 됩니다.   이영이 님은 쌩상의 음악을 틀어놓고 양파를 벗기며 단순히 느낀 소감을 적었군요. 그래서 이 시는 내용이 쌩상의 음악이 흐르고 있고, 양파 껍질을 벗기다 보니 매워 눈물나는 모습 두 가지 밖에 없군요.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앞의 내용과 조응하지 못하는 동떨어진 시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시는 내용적으로 아직 여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초보자가 이렇게 몸부림치는 모습은 크게 인정해 줄만 하고 아주 좋은 징조로 여겨집니다.   우선 이영이 님은 이 시를 그대로 놔 두고 이렇게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소재를 양파에 한정하고 이렇게 첫줄을 써 놓고 쌩상의 음악을 양파의 속성과 우리에게 이용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빗대어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도 물론 상상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맨 마지막에 가서 로 서두의 구절에 의미를 첨해 한번 더 리플레이 하면서 시를 마무리 지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그때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요령'을 참고해 제목을 한번 붙여보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필자의 창작강의 및 감상평 (5)에 예로 든 윤문자의 을 로 바꾼 다음 수박의 속성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부 양파로 바꾸어 시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금세 훌륭한 시로 탄생함을 절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렇게 앞서간 사람들의 시 창작 방법을 모방하면서 자신의 시 창작법을 습득하게 되는 겁니다. 절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써서 다음에 다시 한번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효과적인 시창작법을 이 게시판 독자들이 함께 공유해야 하니깐요. ************************************************************************   눈아수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눈아수 님도 나름대로 몸부림 쳤습니다만 문제가 많군요. 우선 시 내용의 시점이 첫 연에서는 아침이었다가 두 번째 연부터 갑자기 저녁으로 변했어요. 작품에서 이러면 안 되지요. 시점이 갑자기 바뀌고 장소가 바뀌면 독자들이 못 따라와요. 그려면 시가 갑자기 산만해지고 난해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작자 혼자 내킨대로 쓴 형국이 되는 겁니다. 시간이 바뀌고 장소가 갑자기 바뀌면 독자들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해요. 이것까지 고려하면서 시를 쓴다니... 시 쓰기가 갑자기 어려워지죠? 그래서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한 장소와 한 시점으로 통일해 시를 써야 하는 겁니다. 독자들이 따라올 정도로 배려를 해 시를 쓸려면 테크닉이 충분히 붙은 다음에라야 가능해요.   하여, 눈아수 님의 시는 시점이 첫 연과 맞지 않고 내용도 참신한 내용이 아닌 진부한 서사이오니 더 참신한 내용으로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에 구애받지 말고 필자의 창작강의 (1)부터 꼼꼼히 읽은 다음 상상하기 쉬운 소재를 하나를 갖다놓고 시를 한번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이때는 시 한편을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는지를 체득하는 게 눈아수 님에게 더 중요합니다. 더불어 연을 전개할 땐 앞 연의 핵심어, 또는 핵심 의미를 가지고 뒷 연을 전개해야 시의 논리성과 전달력을 갖게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이 시 첫연을 로 고쳐 쓴 다음 '열리는 꿈' 이야기로 두 번째 연부터 상상을 한번 펼쳐 시를 완성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 창작이란 체험과 경험을 직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재를 통해 체험과 경험, 가공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작인 것입니다 (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9)       ☞ 시어 선택 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필자는 요즘 문단에서 가끔 문학의 위기니, 시의 위기니 하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시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고, 그 해결방안은 어디에 있는 지 떠드는 내용을 보면..... 더욱이 그 원인을 독자층에 돌리고 그 해결방안도 독자층에서 찾을 땐. 그러나 필자는 그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한 생각은 이와 정 반대입니다. 그 원인은 시를 생산해 제공하는 시인에게서 왔고, 그 해결방안도 시인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를 포함해 이 땅의 모든 시인들은 대중들, 특히 문학 수요자의 환경변화를 하루 빨리 깊게 인식해야 합니다. 예전에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는 문학이 중심 매체이었고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대체할만한 마땅한 대체매체도 없어 늘 대중들의 수요에 공급이 모자랐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는 공급만 하면 수요는 절로 보장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즉 시라는 제품의 효용성, 편리성, 유익성 등을 크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시라는 제품에 언제나 충분한 수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치달으면서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할만한 대체매체가 많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한 대중들의 욕구도 다양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흥미가 없고 독자들을 유인할만한 내용이 아니면 독자들이 절로 찾아오리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겁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방식대로는 이젠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다수 시인들이 이런 환경변화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기존 사고에 갇혀 시의 위기를 수요자인 독자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건 번지수를 잘 못 짚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공급자인 시인 스스로가 빨리 변해 독자의 환경변화에 적응해야지요. 지금 정치도, 경제도, 행정도, 교육도, TV도, 영화도, 체육도.. 모든 것이 공급자 위주에서 수요자, 즉 독자 위주로 바뀐 지 오래인데 오직 시만큼은 권위주의 귀족주의 전통주의에 너무 깊게 빠져 독자를 고려하면 마치 3류 시인인양 취급하고 전문가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시를 해설서를 곁에 놓고 감상하라는 식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달라진 독자들의 욕구환경을 고려해 시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감상하기 쉽고, 재미있고, 음악성 있고, 유익해서 독자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을만한 시를 만들어 제공해야죠. 그렇다고 품질이 형편없는 싸구려 제품을 만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싸구려 제품과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그 동안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시 쓰는 방식은 수요자 위주로 하루빨리 변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특별한 내용도, 흥미도 없으면서 작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한 장도 아닌 두 장 세 장으로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일반 독자들이 읽어 주리라는 걸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시를 생각하는 방식, 시를 만드는 방식이 종전과 하루 빨리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의 위기라는 말이 사라지죠.   하여, 초보자들이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기본적으로 유의할 점 두 가지만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초보자 시절에는 老티 나는 시어를 쓰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 등 혼자 술취해 영탄하는 듯한 용어는 절대 쓰지 말기 바랍니다. 이런 용어들을 보면 독자들이 바쁘고 바쁜 세상에 혼자 술취해 영탄하고 돌아다니는 소리로 여겨 그런 시는 그냥 넘겨버리게 됩니다. 즉 독자들은 이런 용어를 보면 할 일없고 배부른 소리로 생각해 기분 나빠하기 쉽다는 거죠. 그리고 , 식의 명령투도 지양하시기 바랍니다. 독자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불행한 이야기, 슬픈 이야기, 즐겁게 하는 이야기, 유익한 이야기 등에 관심이 있고 또 이걸 읽으면서 스스로를 위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잘난 체하는 이야기, 친구 가족 등 주변 자랑 이야기, 명령투의 이야기 등을 들을 땐 아주 기분 나빠하게 됩니다. 실제로 필자는 아주 젊은 시인들 중에도 이런 노티 나는 용어와 명령투의 시를 자주 쓰는 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창작강의를 듣는 사람은 이런 노티 나는 용어대신 가능한 한 확신에 차 있고 박력 있고 싱싱한 용어를 구사하기 바라고, 명령투 대신 청유형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고어(古語), 사어(死語), 상투어 등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도 그 시대의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용언어와 무관하지 않죠. 그런데 이 첨단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화랑, 신라의 달밤, 정읍사의 노래, 달구지, 신작로, 물레방아, 수틀, 바느질, 낮달, 이승, 저승 등등  그 옛날 시절의 풍경과 풍물, 남들이 지겨울 정도로 써먹는 낡은 시어를 들먹이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에 특별한 관심이 있거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대다수 독자들은 이런 용어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시속에 나타나는 시간, 장소, 풍물들의 거리도 독자들에게는 현실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깝게 느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막연하게 먼 시간 속으로 끌고 가는 건 귀찮아해 합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늘에 UFO가 날아다니는 세상인데 아직도 낮달 운운하는 걸 보면 독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더군다나 남이 자주 쓰는 시어를 보면 '이 사람 노력도 하지 않고 맨 날 남이 쓴 시어나 갖다 쓰는 참 게으른 시인이구나!' 하고 독자들이 판단하지 않겠어요?   하여, 이 게시판 독자들 중 이런 것에 그 동안 관심이 있었다면 잠시 이를 접어두고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시를 쓰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가능한 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울고 웃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명심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사투리를 쓰더라도 옛것보다는 현재의 것을 쓰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공급자 위주가 아닌 수요자, 즉 독자를 고려한 전략적 시 쓰기 방법의 한 예입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를 쓴 서담 님은 언어를 다루는 것을 보니 기성 시인이 아닌가 싶군요. 제 추측이 맞는다면 이렇게 찾아주신 데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크게 잘난 것도 없지만 제가 이 교실을 담당하기 때문에 만났고, 그 인연으로 필자의 창작 경험을 듣게 된다고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서담 님이 풍자시, 위트시, 드라마틱 시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는 생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시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가 되면 시의 테크닉은 정점에 달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 이유는 이런 시는 기본적으로 소설적인 기법인 극적구조, 즉 기승전결 구조를 요하고 이걸 효과적으로 구축하려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면서 독자들을 꽉 휘어잡고 몰고 다니는 능력과 반전상황을 상상력으로 창조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소설도 역동적인 반전상황을 창조하기 힘든데 더군다나 시에서 독자들을 몰고 다니며 효과적으로 반전상황을 창조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서담 님의 를 읽고 나니 서담 님이 어떤 풍자시를 쓰고자 하는지 그 의도는 충분히 알겠는데 서담 님이 의도한만큼 풍자가 되지 않았어요. 우선 라는 소재 자체부터 충분하게 풍자성 있는 소재가 아닙니다. 풍자시로 성공하려면 먼저 소재 자체가 충분하게 풍자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낯설어요. 그렇게 되면 가 어떤 것이다라는 의미를 서두에서 창조한 다음 시를 전개해야 하니깐 그만큼 풍자성이 풍부한 소재보다 전략적으로 긴장이 뒤떨어지게 되는 거죠. 만약 같은 프로이지만 로 소재를 선택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이건 웃기는 프로다라고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의미를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잖아요. 왜 이게 중요하냐면 처음부터 독자의 의식을 한쪽으로 확실하게 굳혀놓아야 독자를 쉽게 끌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배경과 무대를 가능한 한 한군데로 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두 군데를 하더라도 반전부에서 반드시 이를 모아야 해요. 그 이상을 벗어나면 긴장과 집중도가 떨어지게 되어 반전도 용이지 않을뿐더러 반전을 시도하더라도 김이 다 빠진 상태가 되는 거죠. 예컨데 술좌석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정말 웃기는 이야기라고 말하는데 자꾸 여기저기를 이야기하다보니 초점이 흐려지고 내용이 산만해져 웃음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경우와 똑같은 이치이죠. 하여 서담 님의 시에는 고시촌, 골프장, 시창작반으로 세군데로 장소가 흩어져 있어서 독자들이 갈수록 긴장하기보다는 장소를 따라다니기에 바빠요. 그래서 이미 김이 다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셋째로는 반전부에서는 기본적인 형식이 이제까지의 내용을 뒤집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내용이 이었으면 반전부에서는 가 되는 거죠. 그리고 접속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그러나, 그런데, 하여 등등이 되는 거죠. 그리고 나서 결론부분에 가서는 서두의 의미를 한번 더 리플레이 한다는 생각을 갖고 전개와 반전으로 벌어진 의미를 모아주고 자기 생각이나 새로운 의미를 첨가하면서 끝내는 겁니다. 그런데 서담 님의 시는 반전부의 형식과 내용이 크게 역동적이지 못하고 결론부분도 없이 끝냈어요. 그래서 풍자도 흥미도 의도했던 것만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근간으로 해서 필자가 서담 님의 시를 바로 고쳐 쓴다면 이런 형식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       닭장프로                        서 담   골프연습장에는 닭장프로가 있다네. 아직까지 날지 못하는 자에게 유용한 프로.   그 프로에 의하면 실내에선 되지 않는 게 없다네. 늙다리 할아버지도 옆집 아줌마도 힘을 빼고 부드러운 자세로 기본기에 충실하면 신문 인터뷰 난에 크게 날 수 있다네. 서로 연인도 될 수 있다네. 그러나, 야외 연습장으로 나가면 이 모든 게 아무짝 쓸모 없네. 모든 것이 내 의지를 거역하기 일쑤이고   샷도, 공도, 여자도 제 멋대로이네. 내 팔도 내 것이 아니네.   골프연습장에는 닭장 프로가 있네. 난 그 닭장프로를 인터넷 시 창작 반에서 또 보네. ********************************   어떻습니까, 서담 님? 정말 근사한 풍자시 한 편이 탄생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여, 서담 님은 이쪽에 관심이 있고 더 참신한 풍자시, 위트시, 드라마틱 시 소재를 얻으려면 우화집이나, 그림 동화집, 유우머집, 여성지 광고 카피 등을 많이 뒤적거려 보세요. 그러면 기발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조정호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조정호님은 제가 잠 못 자고 힘들여 쓴 창작강의를 읽어보지 않고 시를 올렸군요. 더군다나 한 사람이 일주일에 한편 올린다는 운영방침도 어기고..... 하여, 처음에 올린 한편에 대해서만 감상평을 쓰겠습니다. 제 강좌의 내용에 더 많이 접근해 있는 시가 또한 처음에 올린 시이기도 해서요. 이런 글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지 창작강의(7) 배용진님이 올린 시 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 지를 실제로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 앞전 강의에서도 여러번 강의했구요.   일전에 강의 때 제목을 이라 붙이고 형광등에 관하여 시를 쓰면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이게 시가 되려면 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형광등을 창조해야 시가 되는 겁니다. 즉 걸어다니는 형광등, 말하는 형광등, 화장을 하는 형광등... 이런 식의 형광등을 창조해야죠. 그렇잖으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형광등을 천장에 붙어서 우는 친구로, 또는 여자 친구로 여기고 상상을 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면 금세 시가 되잖아요? 제목과 내용을 연관지어보면 '형광등'은 '내 친구이다', 또는 '형광등'은 '내 여자 친구이다' 라는 메타포가 형성되어 시가 된다는 겁니다.   하여, 이 시를 본문에 나오는 형광등이란 낱말과 의미를 전부 내 친구로 바꾸면 금세 시가 됩니다. 현재로는 시가 될 수 없어요. 이 내용을 필자가 반영해 약간 수정하면 이런 시가 되겠습니다. *******************************     형광등     낡은 천장 한 가운데 붙어 우는 나의 친구   그는 오래 전에 하늘로 올라가   스스로 울지 못하고 내 손이 가야만, 내 손이 가야만 비로소 우는 처량한 족속.....   그 처량한 울음아래 내가, 내가 묵묵히 앉아 있다.   ******************************   어떻습니까 조정호님. 이렇게 쓰는 게 바로 시에요. 위 시를 나의 친구가 아닌, 나의 추억, 나의 옛날, 나의 할아버지 등등 어떤 걸로 치환해도 다 시로 성립함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해가 되나요?   ************************************************************************   김은철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런 시를 만나면 필자는 우선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우선 필자가 줄기차게 강조한 시를 상상력으로 써라 하는 관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지적해 주기가 한결 쉽습니다. 이런 분은 조금만 더 공부하면 금세 수준 급으로 올라갈 여지가 많아요. 일단 시 소재를 대하는 기본방식은 필자가 바라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보완하고 수정해야할 부분이 많군요. 그 부분을 지적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목 붙이는 것이 서투릅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정공법으로 접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가능한 한 심플하고 구미가 당기게 붙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부제가 붙고 복잡하면 우선 독자들이 이 시에 호감을 갖게 하는 데에 처음부터 실패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독자들이 시를 대하는데 복잡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면 음식을 즐기는데 그 음식 첫 인상이 복잡하고 지저분해 먹기 싫어지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하여 이점 고려하시고 필자의 "창작강의"중 효과적인 제목 붙이는 요령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실제로 '어느 황혼'을 보고 이 시를 썼다 하더라도 내용과 멋지게 부합하지 않으면 과감하게 다른 제목으로 바꿀 줄 아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시 내용상으로는 시 첫줄에서는 동녘 해돋이였다가 두 번째 연에서 갑자기 서녘 황혼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시의 초점이 흐려지고 산만해지고 난해해 집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하나의 소재를 잡아 한 시점, 한 장소에 고정시켜놓고 집중해서 파고들어야 처리하기 쉽고 또한 시가 선명해 집니다. 하여 이 시는 서녘 황혼이 주 내용이니깐 서녘으로 모든 시점을 통일해야 시가 선명해지지 않나 싶습니다. 자꾸 여기저기 들먹거리면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이 주위가 혼란스러워집니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아도 독자의 편의와 감상을 고려해 지나친 부분은 스스로 참아야지요. 이게 기교고 숙련이에요. 하여 첫 번째 연부터 동녘에 해당하는 내용을 모두 서녘으로 바꾸면 두 번째 연이 첫 번째 연과 중첩이 되어 필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시에 라는 말이 너무 많아요. 한 시에 동일한 단어가 두 번 이상 나오면 지루하고 따분해요.   그리고 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나를 미워해서 떠난 사람으로 전달됩니다. 이는 로 고쳐야 작자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도 구체적이지 못하고 막연해요. 이는 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제목도 좀 더 멋들어지게  쯤으로 다르게 붙여 놓고 그 황혼을 보며 내 곁을 떠나간 사람을 상상한 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시로 탄생하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가 지적한 사항을 곰곰이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    제부도 황혼     서녘을 보니 빨갛게 충혈된 너의 눈이 슬프다.   항상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나를 그리도 따사롭게 감싸던 네가   무엇이 그리워서 눈물에 젖어 사느냐.   서럽게 떠난 너의 빈 자리엔 싸늘한 밤이 남았지만   나를 보러와 줄 것을 기다리며 숨을 놓지 않는다.   가슴 차가운 어둠을 뚫고 여전히 슬프게 충혈된 너의 눈이 다시 또 나를 보러 와주리라 기대하므로......   ***********************************************************************   박용석 님의 라는 시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박용석 님은 짧은 시를 썼지만 상상력이 폭발적이군요. 검은 구름의 이미지에서 살이 오른 누에를 발견한 것이. 초보자 시절에는 이런 싯구를 하나 발견한 것도 대단한 수확입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상상해야 시가 금방 늘어요. 여하튼 좋습니다.   다만 미숙하고 어설픈 표현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시선이 하늘에 있다가 갑자기 로 옮겼습니다. 이러면 시가 난해해 진다고 했지요. 비유를 하더라도 그 주변 소재로 해야지 이렇게 하늘에서 갑자기 보이지도 않는 발가락 사이로 시선을 옮기면 누가 수긍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라고 했는데.... 비명? 소리를 지르는 누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건 아니죠. 이런 게 미숙한 표현이에요. 정도로 해야지요. 그리고 '끝에 숨었다'라고 했는데 그 이 어딘지 너무 막연하지 않나요?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했는데 창시? 즉 창자들이 개떼처럼 달리는 걸 본 적 있습니까? 창자들이 어떻게 개떼처럼 달릴 수 있나요? 말도 되지 않지요. 이게 시적 표현이다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시의 논리도 상식 수준 범위 내에 있습니다. 단지 그 상식을 어떻게 새로운 방향에서 보아 냈느냐가 문제인 거죠. 하여 이 부분은 전체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표현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의 지적한 내용을 반영해 시를 조금 수정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탄생하겠습니다. 지적한 내용과 수정한 부분을 잘 음미해보고, 또한 필자의 창작강의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박용석 님은 상당히 감각적인 시를 잘 쓰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   신호등이 붉게 깜박이고 있다     문득 바라 본 하늘에 붉게 깜박이는 신호등을 안고 먹장 구름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검지 손가락으로 거길 문질렀다. 살이 오른 누에들이 꿈틀댔다. 난 화들짝 놀라 건물 뒤에 숨었다. 거리엔 차들이 달리고 내 속엔 아름다운 추억들이 달리고.....   *********************************   어떼요 박용석님? 이렇게 수정하니깐 근사한 시가 되잖아요? 여하튼 필자의 강의를 듣고 열심히 상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0)       ☞ 효과적인 표현력, 문장력 기르는 법   시를 쓰던지 소설을 쓰던지 간에 가장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언어로 표출할 수 있는 표현력과 자기 글이든 남의 글이든 간에 이걸 응용할 줄 아는 문장력을 기르는 게 급선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도 정확히 표현할 줄 모르는데 글을 응용할 줄 알리 만무하고, 또한 천재가 아닌 이상 글을 응용할 줄 모르는데 좋은 글, 좋은 시 쓸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문장가 영국의 서머셋 모옴은 그의 책 에서 훌륭한 글의 조건으로 첫째 명쾌한 글, 둘째 정확한 글, 셋째 간결한 글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한 문장이 애매모호하고 난해한 것은 그 글을 쓴 작자가 자기가 무엇을 쓰려는지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거나, 설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쓰려고 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소화한 상태에서 글을 쓰면 절대 그런 글이 나올 수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하여, 이 상을 참고해 명쾌한 글, 정확한 글, 간결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고 남보다 빠른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소설을 읽든, 시를 읽든지 간에 반드시 곁에 대학 노트를 펼쳐놓고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멋진 표현, 아름다운 표현, 특이한 표현, 기발한 표현 등이 나오면 바로 대학노트 왠쪽에 쭉 베껴 놓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 때나 틈이 날 때 이걸 꺼내놓고 다시 한번 쭉 읽으면서 훌륭한 표현은 대학노트 오른쪽 면에다가 자기 생각으로 한번 바꾸어 표현해 보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원문이 "열려라 참깨, 아라비아 마법의 주문을 빌어서라도 그들을 한꺼번에 열어 젖히고 싶었다" 이런 글을 베껴놓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바로 그 줄 오른쪽 노트에다 "열려라 커튼, 아메리카 마법의 주문을 빌어서라도 난 그녀의 치마를 한번 열어젖히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작자의 원문을 그 구조에 맞추어 자기 생각을 끼워보는 겁니다. 또 더 참신하게 다르게 끼워볼 수 있으면 가능한 데까지 계속 하고요. 이 예문은 필자가 김신의 이란 소설을 읽으면서 베껴놓은 원문을 실제로 바꾸어 표현한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학노트 한 열 권 정도만 연습하면 우리 나라 1급 글쟁이들도 결코 부럽지 않아 질 겁니다.   왜 이게 효과적인가 하면 통상적인 방식으로 책을 읽으면 멋진 표현이 나오더라도 그 순간 아, 멋진 표현이구나 하고 눈으로만 읽게 되고 또한 읽고 난 지 얼마후면 그 표현들도 금세 까맣게 잊어버리기 쉽상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식을 취하게 되면 첫째로 원문을 베끼는 과정에서 그 표현을 몸으로 느끼게 되고, 둘째로 다시 꺼내 읽을 때 또 한번 그 표현을 음미하게 되고, 셋째로 그 표현을 나의 식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표현이 내 피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더불어 한가지 더 유익한 게 있다면 보통은 한번 책을 읽고 나면 얼마 후 그 책 내용을 거의 까맣게 잊어먹게 되는 데 이런 식을 거치면 다시 한번 그 책 핵심내용을 훑은 게 되어 그 책 전체내용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 부수 효과도 얻게 됩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비디오를 보든, 영화를 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멋진 표현을 만나면 언제라도 항상 채집해 그걸 자기 식으로 바꾸어 표현해 보는 게 표현력과 문장력을 기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장이론 책 백 번 읽는 것보다 이걸 한번 연습해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는 게 필자의 경험입니다. 참신하고 기발한 시의 감각훈련도 이런 식으로 하면 금세이고요.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송희야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그동안 필자의 창작강의에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강조한 게 시 소재를 접근할 땐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습니다. 그렇잖으면 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풍물과 풍경을 새롭고 놀랍게 창조하던지.... 이 두 가지로 접근하지 않으면 십중팔구가 자기 서사 넋두리로 전락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염두해 두고 다시 이 시를 읽으면 어떻습니까, 송희야님? 상상을 펼친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구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정신병원 풍경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지요? 서사도 특별한 것이 아닌 너무나 평범한 내용이지요? 그러면 안 돼요. 그래서 필자가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시를 상상으로 써라' 라고 줄기차게 강조한 것입니다.   소재를 통해서 상상으로 접근하면 그만큼 자기 서사, 넋두리가 사라지게 되고, 실제로 서사,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소재를 거쳐서 진술하게 되면 묘사로 변하게 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라는 표현은 직술입니다. 이걸 '단풍잎'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말하게 되면 가 되겠죠? 어떻습니까 너무나 멋진 시적 표현이 아닌가요? 이와 같이 똑같은 글이지만 소재를 통해서 말하게 되면 금세 시적 표현인 묘사로 둔갑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여, 송희야 님은 필자의 창작강의 1,2,3를 읽어보고 나서 상상하기 좋은 다른 소재를 갖다놓고 시를 다시 한번 써 올리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강의 목적은 한편의 시를 건진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쓰는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서 혼자서도 시를 잘 쓰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남들은 5년 아니 10년이 걸렸다는 걸 참고해 차근차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현재 송희야 님의 시중에 시적 표현을 고르자면 이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왜 이 한 구절만 시적 표현인지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서담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서담님의 발상은 참 놀랍습니다. 필자도 부러울 정도의 발상력을 갖고 있군요.파란 유리병을 바라보면서 라고 상상한 이 시 첫 구절은 김기림의 라는 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훌륭해요. 그런데 그 좋은 발상력을 바로 다음 구절부터 전혀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어요. 더불어 첫 번째 연은 바다에 띄우는 배를 이야기 했다가 두 번째 연에서부터는 먹는 배 이야기를 해서 그 수준이 아주 저급으로 전락했어요.   이런 것보다 말장난이라고 해요. 말장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장난을 해야지 이런 식의 시를 접하면 독자들이 기본적으로 아주 기분 나빠해 합니다. 독자들은 작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게 되요. 신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독자를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진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그냥 말 바꾸기 식으로 대한다고 생각하게 되요. 생각해 보세요, 단지 김영남이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그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여기며 말한다면 이를 누가 수긍하겠어요? 안그런가요, 서담님? 김영남이란 사람 한명이 빨간 옷을 입거나, 파란 옷을 입거나, 팬티 차림이거나 아니면 알몸이거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이거나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면 또 몰라도.....   하여, 서담님은 이 첫 구절 하나만 살려놓고 여기서부터 시를 다시 쓰기 바랍니다. 이렇게 훌륭한 상상을 해놓고 왜 그 다음을 못 이어요? 바다에 띄운 배에 사랑도 실어보고, 미움도, 추억도, 보석 반지도, 아니면 돛도 한번 달아보고, 배 수리도 한번 해보고....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서담님은 기본적으로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전에 들어가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에서는 게시판 특성상 한계도 있고 하니, 더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문학아카데미 창작실기과정에 등록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의 말에 수긍한다면 창작실기과정에 등록을 해서 승부를 한번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문의는 월간 으로 해서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   김은철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김은철님은 전번주에 칭찬을 한번 해 주었더니 금세 왕창 망한 시를 써서 올리는군요. 그래서 훌륭한 선생은 초보자 시절에 절대 칭찬을 잘 안 하나 봅니다. 지난번 시와 지금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 다시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란 기본적으로 언어로 보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 즉 심상이라고 했지요. 지난번 시 이란 시를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한 사람이 제부도 황혼을 쳐다보면서 떠나간 여자를 상상한 시로 머리속에 그림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 시는 읽고나서 그림이 그려집니까? 어떻습니까 .   제목처럼 이란 현상을 시로 표현하려 했다면 소재를 통해서 이야기 해야죠. 그리고 앞전 창작강의에서 제목도 이런 식으로 붙이지 않는다고 여러번 강조했지요? 제법 멋을 부리려고 했는데 멋도 제대로 알고 부려야지.....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 한 정공법을 구사하시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놓고 한 시점 한 장소에 고정시킨 다음 상상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시를 써서 올리시기 바랍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필자는 개성적이고 효과적인 시 창작법 습득을 이 창작교실 운영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김은철 님이 유의해야 할 점은 자기가 쓴 시에 대해 절대 남에게 설명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자기 시를 읽는 사람마다 다 쫓아다니며 모두 설명을 해야 김은철님의 시를 제대로 감상한 격이 되요. 또한 자기 시 변명을 듣고 감상평을 이야기 한다면 필자의 존재 이유도 전혀 없구요. 하여 김은철님은 늘 '나는 이런 내용으로 시를 썼는데 왜 상대방에는 이처럼 다르게 전달되었을까'를 항상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   김송 님의 을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김송님은 그저 밋밋한 시 한편을 건졌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이것만으로도 괭장한 수확입니다. 일단 자기가 설정한 소재를 나름대로의 방식에 따라 그리는데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초보자 시절에는 두 눈 딱 감고 자기가 설정한 대상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 제가 지향하는 시 창작 방법입니다. 다만 얼마만큼 개성적인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김송님의 시중에서 어설픈 표현들을 지적하자면 셋째연 는 다소 과장되고 막연한 표현으로 생각되고 또한 바로 앞줄에 '사방연속 무늬' 라는 말이 나와 '비연속 무늬' 라는 단어가 크게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걸 정도로 표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넷째 연에서 라고 표현했는데....이런 표현도 미숙해요. 이 시 전체 분위기가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이잖습니까. 그러면 여기에 구사하는 단어들도 이 분위기와 색깔, 의미, 어조, 뉘앙스가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 해요. 그러면 표현은 바꾸어야 하지요. 어떻게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해죽 웃을 수 있나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미친 사람이나 다름 없죠. 하여 이 부분은 로 바꾸어야 시 전체 분위기와 맞고 표현도 더 적절하지 않나 싶어요.   이렇게 고치고 나면 을 그린 담담한 시는 되겠는데 뭔가 좀 부족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는 이 너무나 특색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시의 제목을 한번 다듬어보거나, 아니면 시의 맨 마지막을 보강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시가 한 차원 높게 상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여, 란 제목에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해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이죠. 라고. 어떻습니까, 김송님? 그녀의 방이었지만 남편도 오래전에 떠나버려서 이젠 그녀도 떠나버린 방으로 내용이 한결 더 선명해지고 깊어졌지요? 그렇잖으면 라는 제목을 맨 마지막으로 내려놓고 원래 제목인 을 제목으로 삼아도 마찬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필자가 수정한 시를 감상하면서 필자의 말이 맞나 안 맞나를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없다                              김 송                     문고리를 잡고 창호지문을 미는 순간 쾌쾌한 내가 코를 찌른다.   들뜬 베니어 장판은 세월만큼 켜켜이 땟국에 절여 있다.   사방연속 무늬 벽면을 따라 파리가 새겨놓은 사연들.....   방구석 그녀가 쓴 경대는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슬퍼한다.   짧디 짧은 파마 머리 그녀는 천장 아래 사진틀 속에서 까까머리 장남을 안고 웃는다.   그 옆에 35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은 근엄하게 장남을 바라보고 있다.   흙벽을 갉다말고 새앙쥐 한 마리가 사진 속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 간다.   ************************************        그녀의 방                           김 송                     문고리를 잡고 창호지문을 미는 순간 쾌쾌한 내가 코를 찌른다.   들뜬 베니어 장판은 세월만큼 켜켜이 땟국에 절여 있다.   사방연속 무늬 벽면을 따라 파리가 새겨놓은 사연들.....   방구석 그녀가 쓴 경대는 부러진 다리를 껴안고 슬퍼한다.   짧디 짧은 파마 머리 그녀는 천장 아래 사진틀 속에서 까까머리 장남을 안고 웃는다.   그 옆에 35년 전에 죽은 그녀의 남편은 근엄하게 장남을 바라보고 있다.   흙벽을 갉다말고 새앙쥐 한 마리가 사진 속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 간다.   그녀의 방에는 그녀가 없다.   ************************************************************************   이영이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이영이 님은 소재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제가 바라는 방식의 입구에까지 왔습니다. 일단 시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접근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접근하는 방식에는 성공했는데 상상을 풀어가는 방식이 아직 서투르군요. 일전에 필자가 이영이님 한테 참고시로 소개한 윤문자의 이란 시를 유심히 살펴보세요. 맨 처음에 을 로 비겨놓고 나의 모든 양태, 즉 나의 행동, 취미, 성질, 얼굴, 가슴, 다리 등 나의 모든 모습중에서 오직 이란 특성 하나를 골라 이것 하나로 상상을 전개하고 끝마쳤잖습니까? 하여 처음에는 가능한 한 한가지 특징이나 특징을 골라 집중으로 상상을 펼치는게 내용을 전개하기가 쉽고 시도 선명해지고 깊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시는 맨 처음에 어떤 특징을 잡아 선언하느냐가 중요하게 됩니다. 이걸 잘 못 택하면 상상을 펼치기가 아주 어려워 결국 시 쓰는 것도 중도에서 포기하게 됩니다.   이영이 님의 양파 시 맨 처음을 보면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선 처음부터 표현과 풀어가는 방식이 어설퍼요. 이라고 했는데 무채색이란 말은 있어도 무백색이란 말이 있나요? 백색이란 단어 자체가 이미 색깔이 없는 색이 아닙니까? 그러면 의 는 의미없는 말이죠. 그리고 양파를 나로 비겨놓았으면 윤문자 시 수박의 첫줄처럼 나의 모습중 어떤 것 하나를 골라서 시의 첫줄을 시작해야죠. 아마  이영이 님이 의도했던 바는 양파의 겉은 붉지만 속은 하얀 걸 끌어내려 했던 것 같군요. 그러면 처음에 나의 양태중 하나를 골라 이렇게 선언하고 시작해야지요. 라고 말이죠. 그리고 나선 두 번째 연부터 하나에 한정해서 상상을 계속 펼쳐야지요.   이영이님이 쓴 시를 참고해 필자가 위와같은 방식으로 시를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되겠습니다. 어떻게 상상을 풀어가는 지를 유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양파                     이영이   나의 겉 얼굴은 붉지만 내 속 얼굴은 항상 백색이다. 내가 외출을 해 손님을 만날 땐 늘 이 겉 얼굴을 가지고 만나지만 나의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으려면 속 얼굴이 필요하다. 몇 겹을 벗겨도 한결같은 백색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 핏기 없는 속 얼굴이지만 함부로 대하는 자에게는 결코 가만히 놔두지 않는 못 된 성깔도 가졌다 내 백색 얼굴을 건드리면 여지없이 그대 코를 비틀어서 눈물까지 흘리게 한다.   나의 겉 얼굴이 붉고 속 얼굴은 백색이지만 난 이 두 얼굴을 가지고 끝까지 인생을 뜨겁게 살 수 없다는 게 나의 가장 큰 불만이다.   ************************************** 어떼요, 이영이님? 상상을 이런 식으로 풀어가는 겁니다. 윤문자의 이란 시와 이영이 님의 시를 고친 시와 유사점, 다른 점, 풀어가는 방식 등을 잘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영이님에게 한번 더 권고할 것은, 대상을 표현할 때 [나]를 중심으로 잡으라는 겁니다. 지금은 [남]이 [나]를 보는 식이지요. 그러지 말고, [내]가 화자가 되어 [남]을 묘사하는 겁니다. ************************************************************************   황미숙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황미숙 님은 일전 서담 님처럼 위트 시, 드라마틱 시, 풍자시를 겨냥하고 시를 썼군요. 이런 종류의 시를 쓰는 방법과 이론은 이 앞전 창작강의 서담 님 감상평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다만 이 시를 읽고난 느낌을 쓰자면, 화자가 보고자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시가 끝날 때까지 뭔지를 모르겠군요. 그러다보니 이 작자가 무얼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긴 이야기를 썼나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이러면 안 되지요. 우선 화자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이다라고 독자들이 알 수 있게 큼 처음부터 확실하게 굳혀야 해요. 그래서 반전부에 이르렀을 땐 독자들이 이것 외에는 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한 다음, 그 내용을 역동적으로 뒤집는 겁니다. 그래야 읽는 사람이 충격을 받지요.   하여, 황미숙 님은 이 시를 그대로 묵혀 두세요.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다시 꺼내 필자가 지적한 내용을 염두해 두고 읽어보세요. 그러면 미흡한 부분이 보이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시를 처음 쓸 땐 오래도록 묵히면서 시를 계속해서 다듬는 습관을 가지세요. 이게 일정 괘도에 이르면 퇴고과정이 아주 짧아짐을 절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현재 님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상당히 있어 뵈니 계속 그 방향에 관심을 한번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군요. 문학판도 하나의 세계이어서 문학판에서 나름대로 개성을 확보하려면 자기 특화(特化)를 생각하면서 시를 쓰는 자세가 절대 필요하다고 필자는 여깁니다. 그렇고 그런 시를 쓰면 또 그렇고 그런 시인밖에 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도 생각하구요. 하여 서양 소피스트 철학과 노자, 장자 책을 꼭 한번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런 책을 읽다가보면 딱딱한 사고가 자신도 모르게 유연해짐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겁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1)     ☞ 시인이 되고자 하는 데에도 전략수립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들은 일을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일에 대한 사례를 충분히 연구, 검토하여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많은 시간과 정열을 낭비한 다음에야 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충분히 대비한 사람들보다 그만큼 뒤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영학에서도 성공적으로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사례연구는 전략수립의 핵심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언어를 경영해 성공적인 시인이 되려는 데에도 이 내용은 매우 적합한 이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들의 사례를 분석해 이를 활용하면 활용하지 않은 사람보다 그만큼 빨리 앞서 나갈 수 있지 않나 여깁니다. 그러면 어떤 사례를 분석할까요?   필자가 등단 전에 조사하기로는 한 해 동안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이름 있는 잡지까지 포함해 등단한 시인들을 헤아려보니 대충 50여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 2, 3년 후까지 계속 살아남은 시인은 불과 몇 명이 되지 않았고 대다수가 겨우 등단 작품 정도 남겨두고 기억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개성적인 작품으로 처음에 주목받았던 시인들도 시집 한 권 정도 내고 나면 또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었구요. 인정받고 있는 시인들도 등단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등단 시 충분한 역량을 갖추지 않는 상태에 있었거나, 자신의 개성을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충분히 갖고있지 않는 상태에서 등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그 원인을 분석해 차근차근 대비한 사람은 다시 도약할 수 있었지만 상당수가 끼리끼리 모여 서로의 시를 위로하면서 현재에 안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상 예를 살펴보면 이 창작교실 독자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고 능률적으로 詩業을 달성할 수 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거라 여깁니다. 등단 전에 충분한 기량을 닦아놓고 또한 시집 한 권 정도의 시를 갖고 투고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야 프로 세계에 훌륭하게 데뷔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등단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충분한 역량과 개성적인 시도 많이 확보할 수 있을까요? 필자가 생각으로는 유료 창작지도실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시를 혼자 집에서 생각나면 쓰면 되지 뭐가 또 공부냐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집에서 혼자 쓰게 되면 남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자기 개성이 뭔지도 파악하기 어렵고, 또한 자기 도취에 휩싸임과 동시에 게을러지기 쉽상입니다. 그리고 유료이어야 돈의 아까움을 알게 되어 억지로라도 시를 계속 쓰게 됩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 하면 시의 테크닉과 감각훈련은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해야 몸에 스며들고 자기 개성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더욱이 미술, 음악분야를 전공하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얼마나 미미한 수준입니까?   그러면, 등단을 위해서는 어떤 창작지도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이론보다는 실기를 바탕으로 하고, 다양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 가장 훌륭한 창작지도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한 연고도 없는데 시인들을 많이 배출할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는 외진 음식점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북적거리고, 어느 교회에는 신도들이 아주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와 바글거리는 이치를 따져보면 금세 이해가 가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어울리기를 즐기는 창작지도실도 있다는 걸 유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 이 창작교실 독자들이 남보다 성공적으로 시업을 달성하려면 앞선 시인들의 사례를 거울삼아 미리 전략을 수립해서 하루빨리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또한 시인이 되는 지름길이지 아닌가 생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먼저 유은선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유은선 님은 겨울나무를 추운 겨울을 견디며 새로운 꿈을 준비하는 나, 또는 우리로 상상을 했군요. 우선 라는 필자의 방침에 일단 부합했습니다. 그 상상의 폭이 아직 미흡하지만 이 정도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큰 진척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상상도 자꾸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날 상상의 폭과 깊이가 늘어나는 걸 체험하게 될 겁니다.   이 시에서 미숙한 부분을 지적하겠습니다. 둘째 연의 이라고 했는데 이건 어떤 바람을 표현했는지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미숙하군요. 추측컨대 몹시 춥고 매서운 바람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은데...그렇다면 정도로 하든지, 아니면 이 시 전체에 구사한 어휘를 보아 그냥 정도로 하는 게 어떤가 싶습니다.   그리고 셋째 연 첫줄에서도 도 이란 표현이 설득력이 없고 왜 쓰러져 가는 지가 막연해요. 이것도 전체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표현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마지막 연의 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이미지를 다시 끌어온 것 같아 상상의 폭을 확장하는데 장애 요소로 작용해 갑자기 답답해집니다. 그래서 이 두 줄을 빼고 이 연의 맨 마지막 줄에 < 우리의 봄을 장만하고 있는 거야> 정도로 보강한 다음 마무리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되겠습니다. 유은선 님은 고친 부분을 잘 한번 살펴보고 내용도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음미해 보기  바랍니다.    겨울 나무                   유은선    죽은 게 아냐 견디고 있는 거야   맵고 찬 바람 남은 잔가지 툭툭 부러뜨리고 가는 밤   함께 어깨동무한 이 거리에서 우는 게 아냐 숨죽여 노래하고 있는 거야   누우면 안 돼 잠들면 안 돼 서로를 흔들어 깨우며   다시 꿈 꿀 수 있도록 우리의 봄을 장만하고 있는 거야.   **************************************************************************   스핑크스 님의 을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스핑크스 님은 어떤 소재를 구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시 소재를 이렇게 막연하고 추상적인 소재를 택하면 1급 시인도 그 단서를 풀어나가기가 어렵다고 그랬지요? 그리고 이란 뜻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한 사전을 찾아보면 정확하고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은가요? 그러면 이 시의 내용이 우리들이 갖고있는 상식과 사전에 들어있는 내용보다 더 새롭고 재미나는 정보, 표현이 있는가요? 스핑크스 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이란 익히 알려진 제목으로 시가 성립하려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던지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야지요. 그래야 독자들이 이 시를 읽어줄 가치가 발생한다는 거죠. 현재로선 시적 표현도 새로운 의미창조도 전혀 없어 아쉽군요. 같은 동면이지만 기왕이면 이란 구체적인 소재를 갖다놓고 너구리가 동면하는 모습을 실제 있는 모습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말고 아주 우수꽝스럽게 상상으로 한번 그려보세요. 시를 풀어가기가 한결 쉬어질 겁니다. 현재 스핑크스님이 참고해야될 내용이 필자의 창작강의(1-10)에 이미 다 들어있으니 이를 참고해 시를 다시 한번 써 보기 바랍니다.   **************************************************************************   유은선 님의 도 바로 앞 스핑크스 님의 과 감상과 지적내용이 정확히 똑 같습니다. 유은선 님은 를 쓸 때는 그러지 않았는 데 이 시를 쓸 땐 왜 이렇게 다른가요?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서 시를 쓰기 바랍니다.   *************************************************************************   이영이 님의 를 보도록 합시다. 이영이 님은 가을의 전경과 심상을 예전보다 상당히 깊게 천착했군요. 1연은 나름대로 잘 뽑았습니다. 다만 제목에 이란 단어가 들어가니깐 1연에 나오는 이란 단어를 모두 빼세요. 이 단어가 들어가면 시가 답답해져요. 독자들은 제목에서 이미 가을이라는 계절감각을 인지하고 이 시를 읽어가는데 또 다시 이 단어를 보니깐 갑갑해지는 거죠. 그리고 과 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구체적인 단어를 바꾸세요. 예를 들면 과 같이.... 그리고 두 번째 연은 이에 맞추어 상상을 더 전개하세요. 현재 내용은 버리고요. 제목은 맨 나중에 다시 고친다 생각하고 이에 상관하지 말고 상상을 맘껏 펼치세요.   *************************************************************************   를 쓴 나리 님은 시를 많이 만져보았군요. 그러나 이 시를 읽고나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군요. 감흥이 없다는 건 시에 문제가 있다는 거죠. 시가 싱겁다는 건 양념, 즉 감각적인 표현이 없거나, 시의 건덕지, 즉 의미있는 내용이 없다는 거죠. 이 시의 내용을 한번 잘 살펴보세요.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친 한 장면의 내용 밖에 어디 있나요? 이 시 전체 내용은 한 줄의 시 내용 밖에 되지 않아요. 작자가 그냥 길게 늘어놓았을 뿐이지. 시가 어느 분야보다 함축성과 경제성을 요구하는 글이다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하여, 나리 님은 하찮은 행동과 단어 하나에서 의미를 뽑아내고 건덕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먼저 익히라고 권장하고 싶군요. 하나의 단어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방법은 한용운 시집을 읽으면 도움이 될 거고, 하찮은 행동에서 이야기 거리를 뽑아내는 방법은 을 쓴 김수영과 오규원 시집을 읽으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   최유경 님은 많은 시를 올렸는데 시로 보아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최유경 님이 현재 읽고있는 시가 추측컨대 이정하, 원태연 류의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누구나 다 겪게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를 쓰려면 이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이걸 시 읽기 젓떼기 단계라고 합니다. 이 시절에는 이런 류의 시가 최고의 시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게 결코 시의 정신을 성숙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 얼음과자를 떠올리면 쮸쭈바가 제일 맛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과점에 가보니깐 친구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있는 거 있죠. 그래서 한번 얻어먹어 봤더니 참 맛있더라구요. 하여, 얼음과자도 이렇게 맛있고 고급 스러운 것이 있구나 하고 느끼는 거와 마찬가지인 거죠. 쮸쭈바도 품질을 고급화 시키면 또 몰라도 색깔만 자꾸 빨갛고 노랗게 바꾸어 어린 아이들에게 파는 게 어디 건강에 좋다고 생각할 수 있나요? 이걸 또 시적 표현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란 말을 이런 류로 표현하면 , < 난 널 정말 미치도록 사랑해> 하는 경우이고, 이를 시적으로 표현하면 , 하는 거와 마찬가지이죠. 어느 것이 낭만이 있고 운치가 있나요, 최유경님? 하여, 최유경 님은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수준 있는 시를 골라 읽은 것이 우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   송덕희 님의 라는 시를 감상해 봅시다. 송덕희 님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상상, 묘사, 설명을 넘나들면서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군요. 좋습니다. 이렇게 시가 되든 안되든 몸부림치면서 발전해 가는 겁니다. 한 풍경을 가지고 나름대로 상황을 꾸며보고 창조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니 계속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를 곁에 놓고 필자의 지적을 곰곰히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 꺼내놓고 다시 써 보던지요.   1.에서 지금 화자가 눈으로 보고 있는데 시의 내용은 입으로 맛보는 내용으로 표현하여 어색하고요, 2.도 무슨 내용을 표현하려는지 짐작이 가나 표현이 너무 과장되어 있고또한 추상적인 표현이고요, 3.도  밑줄친 부분이 추상적이고 표현도 미숙합니다. 특히 실핏줄이 파닥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실핏줄이 팔딱인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고, 4. 에서 누가 차렷 열중쉬엇하고 쇠몽둥이를 내리치는지 모호하고 또한 왜 그렇게 하는지도. 그리고 금속음이 그를 가위 누른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 이 시를 다시 쓴다면 라고 첫줄을 놓고 이야기로 시를 전개해 보기 바랍니다. 첫줄에 이렇게 표현해 놓으면 송덕희 님이 이 앞에서 그렇게 열심히 묘사해 놓았던 내용이 이미 이 안에 다 함축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는 이 한 줄로도 시의 주인공이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걸 파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어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자꾸 덧붙이고 싶은 건 님의 혼자 생각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체득해 가는 겁니다.  어떼요, 송덕희 님? 첫줄을 이렇게 표현하면 위에서 지적받았던 내용이 모두 사족에 불과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죠?(김영남)   창작강의 및 감상평(12)   ☞ 작품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누가 필자에게 시창작 과정중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요소 두 가지만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아마 상상력과 퇴고력을 들지 않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시의 내용을 상상력이 좌우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퇴고력이 좌우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퇴고를 잘 하면 그 시는 크게 흠이 드러나지 않고, 또한 퇴고가 좀 어설프더라도 상상력이 특출하면 이 시 또한 큰 문제점이 노출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소에 문제가 있을 땐 정말 작품이 형편없이 추락하게 되죠. 하여, 가장 바람직한 것은 상상력과 퇴고력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능력을 겸비하면 작품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퇴고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이 또한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 강좌를 대신할까 합니다.   상상을 할 때 마음의 자세는 기본적으로 뜨겁고 깊게 해야 하지만, 퇴고를 할 때 마음의 자세는 이와 정반대 자세인 냉정하고 넓게 해야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이 작품을 쓸 때와 작품을 고칠 때에는 정 반대의 심성이 필요한 이유는 작품을 바로 써서  완성시키면 흥분된 감정상태에 있기 때문에 시도 흥분되어서 좋은 시 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보자 시절에는 시를 써서 곧바로 완성시키고 누구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게 초보자 시절에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힘들여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더디고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퇴고기간은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필자의 경험을 말하자면 퇴고는 오래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아무리 짧은 시라도 곧바로 써 바로 완성한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현재도 시 한 편을 구상해서 남에게 보여줄 정도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보름 이상의 퇴고기간을 갖습니다. 그러니깐 필자의 경우 상상은 한 두시간에 깊고 뜨겁게 해서 서랍에 두었다가 2-3일이 지난 다음에 다시 꺼내 이 시에 새로운 상상을 조금씩 덧붙이고 삭제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래야 내용이 흥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시에 침착성과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퇴고와 관련해 시를 효과적으로 다듬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필자는 퇴고를 위해 정신이 가장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아주 자주 가졌습니다. 정신이 맑은 상태를 잠시잠시 자주 가진 이유는 아무리 맑은 정신상태라 하더라도 그 분위기에 또 오랫동안 잠기게 되면 이 또한 마음이 흥분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여 필자는 아침에 맨 처음 가는 화장실을 시 퇴고 장소로 아주 잘 이용하였습니다. 2-3일전에 쓴 시 초고를 갖고 네모난 밀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읽으면 정말 시의 어수룩한 부분, 미흡한 부분, 참신하지 못한 부분 등이 눈에 잘 띄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지적된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고치고 그랬습니다. 하여 게시판 독자들도 이번 기회에 자신의 정신이 가장 맑고 평온한 상태가 어느 순간인지를 확인해 퇴고를 할 때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울러 이건 등단 후에 크게 신경을 써야할 내용으로 여기지만 필자가 작품 퇴고 마지막 단계로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한가지를 더 소개할까 합니다. 필자는 퇴고 마지막 단계로 작품의 보편성 확보를 위해 문학적으로 평균치 수준에 있는 주변 사람들, 특히 사무실 사람들에게 작품을 꼭 한번 읽혀보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읽힌 다음 바로 즉시 "읽은 시가 무슨 내용인지 알겠느냐?" "읽고 나서 머리 속에 무슨 그림이 그려지느냐?" 이 두 가지를 꼭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작품은 과감하게 고치고 버리곤 그랬습니다. 이때 내 작품에 대해 설명을 하지말고 작품을 읽혀 첫 소감을 묻는데 그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기 작품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엄격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초보자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사항이고 다만 마지막 퇴고와 관련해 이와 같은 정신, 즉 작품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이의 지적을 빨리 받아들일 줄 알며, 아끼는 작품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마음 자세의 확보가 중요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특히 초보자 시절에 자기 동료들의 작품평과 훈수를 귀담아들으면 망하는 길로 가는데 첩경이라는 걸 명심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여줄 땐 가능한 한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시를 쓴 경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시를 잘 쓸 줄 모른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시를 볼 줄 아는 안목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게시판 독자들은 많은 퇴고는 곧 시 창작력의 향상이다라는 것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라고, 이 게시판에 시를 올릴 때에도 정말 최선을 다한 작품을 올리시기 바랍니다. 많은 퇴고를 해보지 않으면 그만큼 발전이 느리게 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하겠습니다.   최민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지금 최민 님은 무슨 내용의 시를 썼나요? 우선 읽는 사람에게 무슨 내용의 시를 썼는지 전달이 되지 않았다면 그 시는 문제가 있는거죠. 필자에게 전혀 전달이 되지 않고 본문 중에 눈에 띄는 표현도 없어서 아쉽군요. 우선 최민 님은 감각적이고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시를 찾아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군요. 그런 시를 찾아 읽다가 보면 어느 날 자기도 그런 멋진 표현을 해보고싶고 자신도 그런 상상을 한번 멋지게 펼쳐보고 싶어질 겁니다. 그때까지 시를 읽는데 더 치중하라고 권장하고 싶군요. 이때는 신춘문예 등 현상문예 당선작과 심사평도 꼭 찾아 읽어보면서 심사위원들이 어떤 표현들을 주목하고 있는지도 익혀두길 바랍니다.   *************************************************************************   송덕희 님의 을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송덕희 님도 시를 접근하는 방법을 아직까지 잘 체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그동안 필자가 거의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 강좌 때마다 강조한 내용이 "매력적이고 구체적인 소재를 찾아 그걸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시의 성패가 거의 여기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남보다 뛰어난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여 송덕희 님도 남보다 매력적인 눈을 가져야 매력적인 상상, 매력적인 시를 쉽게 뽑아낼 수 있지 않는가요? 그리고 그 소재는 가능한 한 장소를 크게 벗어나지 말고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상상으로 천착하라고 그랬지요?   송덕희 님이 올린 시를 한번 살펴볼까요? 이 송덕희 님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소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막연합니까. 우선 시간적으로 초저녁인지, 한 밤중인지,새벽인지도 막연하고 장소도 도시 농촌지역인지, 해변가 농촌인지, 깡촌 시골인지 우선 막연하지 않나요? 왜 이게 중요하냐고 하면 막연한 소재는 우선 구체적인 소재보다 기본적으로 언급해야할 게 많아 수준급이 아니면 상상을 깊이 있게 추구하지 못한다는 거죠. 따라서 초보자는 대부분 설명으로 일관하기 쉽고 또 설명하다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면 그냥 그렇고 그런 시시한 가족이야기, 친구 이야기 둘러대다 끝내기 쉽다고 그랬죠?   하여, 송덕희 님의 시 소재를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잡는다고 해보세요. 예를들면 , , 등등...이런 식으로 소재를 잡는다고 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매력적이 되지 않는가요? 일단 그렇게 소재를 잡으면 그에 어울리게 이야기 거리를 현실, 추억, 경험 등을 넘나들며 거짓으로라도 상상으로 만들어내라고 그랬지요? 가공으로라도 만들어내니깐 창작인 겁니다. 시를 보고 느낀 걸 정직하게 기술하는 게 시다 라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니깐 발전이 더딘 겁니다.   하여, 송덕희 님은 이 시를 더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걸어놓고 지난주처럼 몸부림 쳐보세요. 필자는 한 두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보다 개성적이고 효과적인 시를 잘 쓸 수 있을 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시에도 캄캄한 밤인데 들녘이 다 보는 것처럼 내용을 썼습니다. 이런 것들도 설득력이 없는 겁니다.   **************************************************************************   99퍼센트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못처럼 만에 필자가 바라는 유형이 한명이 나타났군요. 그래요 반갑군요. 초보자 시절에 이렇게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온갖 행동과 상상을 다 해보는 겁니다. 예측컨대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하면서 습작과정을 탄탄히 거치면 조만간에 우리 문단을 꼭 한번 흔들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현재 님은 소재를 대하고 궁글리는 방식은 제대로 길을 잡았습니다. 다만 세련되고 효과적인 표현, 효율적인 구성 등에는 문제가 있으나 당분간은 조금 더 상상력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시집을 소개하자면 함기석의 , 류수안의 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현재의 시는 버리지 말고 그대로 보관해 두었다가 나중에 효율적인 구성법을 터득한 다음에 그때 다시 다듬으세요. 그리고 님은 더 이상 게시판에 시를 올리지 말고  바로 창작실기과정에 등록해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창작훈련과정을 거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추천합니다.   *************************************************************************   나리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나리 님은 지난주보다 한결 나아졌습니다만 아직도 미숙해요. 앞에서 송덕희 님에게 했던 이야기가 정확히 적용됩니다. 송덕희 님의 감상평을 참고해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시의 처음을 라고 쓰고 나답지 못한 이야기로 상상력을 한번 다시 발휘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는가는 위의 99퍼센트 님의 를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김영남) 필자가 두 달간 쉬고 다시 이 원고를 쓰려하니깐 머리 속에서 글이 잘 나오려하지 않군요. 그래서 매사에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계속적인 훈련이 필요하나 봅니다. 여하튼 필자는 한 달여 이 창작교실을 찾는 독자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생각이오니 운영방침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창작강의 및 감상평(13)   지난 주에는 퇴고요령의 외형적인 측면을 강의하였고, 이번 주에는 퇴고의 구체적인 방법을 강의하려 했는데 필자의 사정으로 원고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널리 양해를 구하고 이번주에는 감상평만 올립니다.   ***************************************************************************   먼저 스핑크스 님의 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시를 쓰는 목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 생각을 시적 언어로 표현해 다른 사람들과 그 생각을 공유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깐 시란 기본적으로 자기 표현과 의사소통이라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표현을 시적 언어로 해야 하니깐 그 기술습득이 필요하고,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깐 의미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느낌과 생각을 자기 혼자만 즐기는데 있다면 굳이 쓰기 어려운 시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죠. 즉 혼자만이 알아보는 언어로 맘껏 즐길 수 있는 일기형태가 최고이지요.   하여, 작자의 생각을 남과 함께 공유한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써야할 시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약관화합니다. 남들에게 의미있는 내용, 미쳐 몰랐던 내용, 재미있는 이야기, 남들이 신기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 등등 여하튼 그저그렇고 그런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이야기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한 의미가 없더라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창조해야죠. 그러니까 시창작인 거죠. 우리가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에도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면 정말 짜증이 나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핑크스님?   시의 이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필자가 그동안 줄기차게 강조해온 내용이 '매력적인 소재를 찾아 상상으로 접근하라'이었습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소재에서 의미있는 내용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기 버거우니깐 누구나 알 수 있는 평법한 느낌과 풍경, 자가 주변 아야기를 늘어놓기 십상이다라고 그랬죠? 그래서 상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상상은 어떤 소재가 내게 무엇을 생각하도록 했느냐를 말하는 것으로 느낌은 대동소이 하지만 상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라고 그랬죠? 따라서 상상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남에게 들려줄 사유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게는 평범한 내용의 상상일지라도 남에게는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스핑크스 님의 시를 읽으면 어떻습니까? 이 시에 특별한 풍경, 의미있는 이야기, 의미있는 행동, 남들이 주목할 만한 표현들이 있나요? 하여 스핑크스님은 필자의 창작강의를 다시 한번(특히 처음부분을) 정독하면서 상상하는 요령을 먼저 익히고 시를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초보자 시절에 이런 여행시, 이야기 시를 쓰기 시작하면 시가 형편없이 늘어지게 되어 좋은 시를 건지기가 힘듭니다. 초보자 시절에는 가능한한 상상력, 감각훈련을 아주 탄탄하게 익힌 다음 나중에 이런 시를 써야 긴장감 있고 매력적인 시를 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님은 소재 하나를 놓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 그 소재의 속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요령, 즉 상상의 요령을 먼저 터득하기 바랍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진다는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거듭 밝히지만 필자는 한 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시를 혼자서도 효과적으로 잘 쓸 수 있을까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나리 님의 을 봅시다. 나리 님은 어렴풋이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만 님은 수업의 어떤 것이 이런 내용의 시를 쓰게 했나요? 필자에게 쉽게 느낌이 다가오지 않군요. 그리고 소재(제목 포함)를 이렇게 추상적인 것으로 잡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여 이 시는 제목을 바꾸면 금세 한 편의 시로 성립합니다. 즉 이라고 붙이면 미술시간에 떠오른 한 아이를 상상한 시로 내용이 맞아떨어집니다. 아니면 , , 등 꽃 이름을 제목으로 올려도 한 편의 시로 성립합니다. 즉 꽃을 바라보며 그 꽃 속에 한 아이가 들어있는 것으로 상상한 시로 성립합니다. 나리 님은 현재의 제목으로는 시가 될 수 없지만 이렇게 제목을 바꾸면 왜 시가 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송덕희 님의 을 봅시다. 송덕희 님에게도 스핑크스 님에게 했던 이야기가 똑 같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일전에 어느 시 한 편은 그런 흔적이 보이더니 이건 또 다르네요? 제 강의를 듣고 도움을 받으려면 기존에 써놓았던 시를 올리지 말고 창피해도 좋다는 자세로 제가 지도하는 방식으로 새로 써 올리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와 관련해 이야기 하자면 이렇게 소재를 설명하고 해석해 내려하면 안돼요. 시 쓰기가 얼마나 뻑뻑하고 어려워집니까? 이걸 제가 침이 마르도록 말하는 요령으로 상상을 한번 펼쳐볼까요?   우선 나팔꽃씨를 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고 하면 이렇게 상상을 펼쳐가는 겁니다. ( 나팔꽃씨에는 내 어린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교복이 까맣고, 모자가 까맣고 그리고 얼굴이 시커멓다/ 시커먼 얼굴을 뒤져보면/ 철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순희가 분홍치마를 입고 나온다......) 이런 식으로 첫 상상을 다음 상상으로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이때 조심할 것은 어린 시절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내에서 줄곧 상상을 하는 겁니다. 이걸 나중에 내용적, 논리적 등등 순서를 고려해 자르고 다듬어 시를 만드는 겁니다.   또한 송덕희 님처럼 꽃씨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을 느꼈다면 ( 나팔꽃씨를 건드리니 살아있다/ 그 속에서 여린 숨소리가 들린다/ 귀를 갖다대니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빨간 입술로 환하게 웃는 웃음 소리도 들린다/ 웃음소리를 따라가 보면 / 골목이 나오고 싸리울과 장독대를 만난다/ 순희의 집이다/ 와, 깡패같은 오빠가 있는 순희집.....) 이런 식으로....   또한 나팔꽃 속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상상을 펼친다면 ( 나는 무엇이나 붙드는 성질을 가졌다/ 나는 담벼락을 좋아하고/ 빗자루도 좋아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나무 울타리이다/ 나에게는 올라타는 재주가 있고/ 장기는 허공을 달리기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을 펼치면 얼마나 쉬어지는가요? 송덕희 님 어떼요?   **************************************************************************   유은선 님의 을 봅시다. 제가 자주 이야기 했지만 이라 제목을 붙이고 노량진 성당을 내용으로 쓰면 시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이렇게 제목을 붙이고 시로 성립하려면 노량진 성당에 특별한 내용이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새로운 성당을 창조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현재로선 시가 되지 않아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면 시가 될까요.   이건 제목만 바꾸면 시가 되요. 내용은 노량진 성당이지만 제목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붙이면 되요. 예를 들면 , , 등등... 그러면 시가 되지요. 즉 백합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이 오는 것 같이 착각이 드는 노량진 성당으로 상상한 내용이깐요. 즉 이라는 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성당을 창조한 것이니깐 시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첫 연과 마지막연은 제목에 부합하도록 약간 조정을 해야합니다.   *************************************************************************   이성희 님의 를 봅시다. 이성희 님은 필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시를 썼군요. 즉 길은 제대로 잡았다는 뜻입니다. 계속 이성희 님은 소재 하나를 잡고 이런 식으로 상상을 더 깊이 다양하게 하길 바라고, 그 소재 속성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요령도 익히시길 바랍니다. 사고를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숙련시키길 바랍니다.   다만 이 시는 정물화를 쓴 초고작이라 생각하고 필자의 지적을 참고해 계속 보완하고 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우선 내용을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내용을 많이 집어넣길 바라고, 둘째로는 어설프고 미숙한 표현들을 더 다듬어서 다시 올려보길 바랍니다.   미숙하고 어설픈 부분을 지적하자면 첫연의 부분과 셋째연의 는 내용이 중첩이고, 시가 나아갈수록 새롭고 긴장이 되어야 하는데 앞에서 묘사한 내용이 다시 나와 긴장이 떨어집니다. 앞 부분의 묘사는 너무 튀고 당돌하니 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셋째연의 을 보자면 자기감정 과잉 노출이고, 의미의 중첩이고, 미숙한 표현들입니다. 처자기 잠자는 모습을 자기가 성격을 규명해 설명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건 논리 모순이고, 라는 단어도 단어와 의미 중첩이고 또한 잠자는 사람의 모습을 말하는데 적합한 단어가 아닙니다. 하여 이 부분은 전체적인 시 분위기와 내용으로 보아 정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고,   그 다음줄에서  표현도 이미 앞에서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정물들은 내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정물들이 깨어난다는게 이상하고요, 도 국민학교인지 중학교인지가 불분명해서 정도로 함이 좋을 듯하고요, 마지막연 첫줄에서 < 내가 잠에서 깨어날 즈음에...>은 내가 앞에서 이미 잠에서 깨어났는데 또 깨어난다고 해서 도대체 내가 잠에서 몇번을 깨어나는지 헛갈릴 정도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도 로 고치시길 바랍니다. 이상의 지적을 참고해 이 시를 더 재미나게 내용을 보완해 다듬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성희 님은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본격적인 시쓰기에 몰두해 좋은 작품을 건져보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이성희 님의 시는 위와같이 웹 창작교실에서 지도받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고 비생산적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됩니다. 아무튼 필자의 의견을 참고해보기 바랍니다.   **************************************************************************   전정가위 님의 를 봅시다. 전정가위 님에게 감상평을 해줄 말을 앞에서 다 한 것 같군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소재를 어떻게 접근해 효과적으로 시를 뽑아낼 것인가는 기 실시 창작강의 및 감상평(5)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중구조 문제, 예로 든 시 등을 잘 한번 읽어보시고 다시 써 보기 바랍니다. 이런 시는 요령만 알면 정말로 감각적으로 눈에 확 띄는 아주 좋은 시를 금세 건질 수 있습니다. 현재 님은 언어를 부리는 걸로 보아 시를 많이 써 본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기법만 제대로 터득하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김영남)   ********************************************************************************      창작강의 및 감상평(14)     이번 주에 퇴고의 구체적인 요령을 강의하려 하였으나 이건 초보자들에게는 너무 버겁지 않나 여겨지고 또 너무 소상히 이야기하면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는데 역기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어 뒤로 미룹니다. 대신에 초보자들에게 더 시급한 사안으로 여겨지는 내용을 강의할까 합니다. 그동안 이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들의 시를 쭉 살펴보니 자질은 충분히 보이는데 감각에 쉽게 눈을 뜨지 못한 경우가 상당히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여 자기 개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 읽는 법을 알려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필자는 이번 강의로 담당 월 강의를 마치고 두 달 후에 다시 나오겠습니다. ***************************************************************************   ☞ 어떤 책을 골라서 어떻게 읽어야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일까요?   학창시절에 우리가 문장기술 지침으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내용이 '많이 읽어라, 많이 사색해라, 많이 써 봐라' 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읽을까요? 하면 무조건 '고전을 많이 읽어라' 이었습니다. 그러면 고전은 어떤 것이 있나요? 하면 단테의 신곡, 일리아드, 오딧세이, 황무지.....하고 거의 전국 학교 교실에서 동일하게 복창을 해왔던 게 우리나라 독서교육의 실상이 아니었던가 필자는 생각합니다.   필자는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소수 엘리트 학자들의 지적 과시욕 또는 지적 귀족주의 입장에서 피력한 도서목록이 고전 목록으로 전국 학교에 동일하게 유포되고 강요하다보니 개성개발과 상상력 개발에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장과정과 생활여건과 식습관이 다른 전국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일부 특수층에서 즐겨먹던 햄버거를 우리 국민들 최고의 음식이다라고 강요하는 식의 독서교육이 얼마나 유효하겠어요? 필자는 불행하게도 위에서 든 목록의 책을 수번 읽어보려 노렸했는데도 재미가 없고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아직까지 완독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필자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요?   필자가 소중하게 읽었던 책은 중학교 시절에는 만화책, 고등학교 시절에는 김우종, 유안진 에세이, 정목일 수필집, 대학시절에는 신석정 시집, 이문열, 세익스피어, 섬머셋 모옴, 쇼펜하우어, 노장사상, 실존주의 철학 등이었습니다. 이중에서 고전 목록에 든 작품은 세익스피어 하나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어린이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영화를 아주 즐겨 봅니다. 이건 무얼 의미할까요? 고전은 누구에게나 다 고전이 될 수 없고, 명작도 누구에게나 다 명작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고전이고 명작일까요?   필자의 견해로는 그 사람의 감각과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책이 그 사람의 고전이고,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아무리 고전이고 명작이라고 떠들어도 자기의 감각과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건 결코 자신에게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각과 취향도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자꾸 바뀌게 되고 그에 따라 책 선택 방향도 세련되어 가면서 자기 상상력과 개성개발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자기 감각과 취향에 맞는 책을 어떤 방법으로 쉽게 고를 수 있나요?   필자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걸 대신할까 합니다. 우선 필자는 소설책 등 산문책을 고를 때에는 그 책을 다 읽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처음 두서너 페이지를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두 서너 페이지에서 내 눈길을 잡지 못하고 특별한 표현과 내용도 없으면 그 책을 절대 고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처음부터 내게 싱겁게 다가오는데 그 책이 끝까지 날 감동시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은 외국 소설을 고를 때 아주 효과적입니다. 즉 외국 책은 그 책 번역자가 그 책의 모든 면을 절반이상 좌우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여 아무리 유명한 책도 번역자의 자질이 없으면 그 책의 문학적 수준이 형편없이 추락하기 때문에 우리는 책 몇 장을 읽고서 이를 빨리 간파해 소중한 시간을 절약해야 하는 거죠.   둘째로는 시집을 고를 때는 꼭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를 맨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 두 번째 페이지 시를 읽어보면 그 시집 전체를 다 읽어보지 않아도 그 수준과 취향을 대충 파악할 수 있지 않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시인들이 시집을 낼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표제작과 첫 페이지에 실릴 시를 제일 신경 쓰기 때문에 필자가 평소 잘 알고 있는 시인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 시집을 고를 때 표제작과 첫 페이지 시를 읽어보아 내 감각과 취향,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시집은 절대 고르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성개발을 위해 읽어 내야할 시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런 시집을 골라 친절을 베풀어 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거죠.   그러면 이런 책, 이런 시집을 골랐다고 할 때 어떻게 읽는 자가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일까요? 소설을 읽던지 시집을 읽던지 간에 책을 읽을 땐 초보자 시절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그 책의 내용에 관심이 많아 그 책의 흥미위주로 책을 읽는 경우이고요, 두 번째는 그 책의 문장표현 들, 즉 '어쩌면 저렇게 아름답고 기막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미적 표현들에 매료되어 읽어 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유형 중 후자의 유형으로 읽는 사람이 자기 개성개발에 쉽게 눈뜨고 글쟁이로 빨리 성장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미적 표현에 매료되면 더 자극적이고 더 기발한 표현들에 자꾸 관심이 가 그런 책들을 즐겨 찾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방향으로 마약처럼 깊숙이 빠져들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자기 개성개발에 효과적인 독서법은 자기의 감각과 취향에 맞는 책을 골라 미적 표현에 늘 더 관심을 두고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합니다. ***************************************************************************   게시판에 올라온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유은선 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유은선 님이 곁에 있다면 뽀뽀라도 해주고 싶군요. 몇 번 지적을 받고 초보자 수준에서 이렇게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따라오는 님이 정말 귀엽습니다. 이럴 때 가르치는 사람도 정말 보람을 느끼지요. 유은선 님 예전에 비해 월등하게 잘 썼고, 벌써 감각과 상상력의 깊이까지 겸비했군요.   유은선 님은 첫사랑의 속성을 구체적인 소재, 사과 하나에 빗대어 아주 잘 뽑아냈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빗대어 쓴 시는 비유에 그치면 예쁜 시 정도에 그치지요. 하여, 시의 마지막에 이 시와 관련하여 자기 생각을 한 줄 정도 언급하고 시를 마쳐야  시가 한 단계 상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줄을 이렇게 고쳐 보강하는 것이 좋을 듯싶군요. 쯤으로요. 그리고 제목이 너무 판에 박은 듯 하고 촌스러워서 쯤으로 약간 멋을 부리는 겁니다. 이상을 반영해 다같이 이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정말 한 달만에 이렇게 새로운 시를 쓴 유은선 님! 축하해요. *****************************************************   첫사랑에 관하여                     유은선   사르륵사르륵 사과 깎는 소리 어릴 적 들었던 옛날 이야기 술술 풀려 나오는 소리 벗겨지는 껍질 속에서 나는 듣네. 하얗고 탄력 있는 속살의 비밀 둥글둥글 웃음으로 앳된 마음 감추고 섬유질마다 고인 수분 눈물처럼 쏟아 놓는데 한 움큼 베어 문 사과 한 입 노랗게 꿀이 박혔네. 난 오래 전 숨겨둔 이야기 하나 음미하며 이 가을을 또 아름답게 나겠네.   *************************************************************************   윤주 님의 를 감상해 봅시다. 윤주 님은 열심히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제 방향을 잡고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필자가 늘 '구체적이고 매력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 상상으로 접근하라, 이었는데 윤주 님은 '하늘 아래 나무....'를 골랐습니다. 하늘 아래 나무들이 얼마나 많고, 하늘아래 나무들이 존재하는 모습들도  또 얼마나 다양하나요? 이렇게 소재를 광범위한 걸로 잡으니까 시 쓰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하여, 윤주 님은 구체적인 소재 하나를 골라 그 소재를 해석하고 설명하려하지 말고 그 소재의 속성으로 상상, 즉 생각하고 행동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감상한 유은선 님의 경우를 잘 한번 살펴보세요. 첫사랑이란 이렇게 추상적인 내용을 사과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하나 골라 어떻게 상상을 펼쳤는지를.....윤주 님은 제가 두 달 후에 다시 나타날 테니 그때까지 필자가 내준 소재로 시를 한번 써서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윤주 님은 현재 시 소재를 어떻게 접근하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알면 시 쓰기가  정말 쉬워짐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겁니다. 윤주 님은 현재 윤주 님이 사는 방과 애인의 얼굴을 시로 그려서 각 한편씩 올리시기 바랍니다. 요점은 필자가 윤주 님의 시만 읽고도 그 모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시기 바랍니다. 없으면 가공으로 만들어서라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   S.Y님의 을 한번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님의 시를 읽고 나니 시를 쓰는 근본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고 싶어지는군요. 필자는 시란 기본적으로 감성의 공유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공유라고 생각한다면 독자가 있게 마련이고, 글을 쓴 사람의 품격도 생각해야겠지요. 만약 혼자만의 유희라고 한다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시도 그 시절 문화를 즐기는 하나의 매체이어서 그 매체가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인격과 소양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점을 고려하면 님의 시는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런 비속어, 쌍소리가 허용되는 것은 풍자시를 쓸 때이고 그것도 그 시절과 환경이 그 시와 충분한 알레고리가 성립할 때입니다. 그것도 시문학사에 기념비적으로 한 두 편이면 족합니다. 현재 우리 문단에 한 두 사람이 이런 비속어, 쌍소리, 저질 언어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며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데 이 경우는 다른 사람들 모두는 우리 일상 용어로 대화를 나누며 울고 웃으며 살고 있는데 유독 그 사람만 쌍소리를 해대며 돌아다니는 사람과 똑같은 이치이지요.   하여, S.Y 님은 더욱이 초보자가 아닙니까? 어떤 것이 시의 정도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심재문 님의 시 시를 감상해 보도록 합시다. 님은 아마 이 창작교실에  처음 방문하지 않나 싶군요. 현재 님에게 해줄 말이 "기 실시 창작강의 (1-10)" 아주 소상히 설명되어 있으니 이걸 프린트해서 처음부터 꼭 읽어본 다음 시를 다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똑 같은 이란 내용으로 시를 썼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유은선 님의 이란 시와 님의 시가 어떻게 다른 지를 곰곰이 한번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그 차이가 필자의 창작강의에 이미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시 어투와 관련하여서는 창작강의 및 감상평(9)에 그 문제점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걸 참고해 시를 새롭게 써 제 담당 월에 올리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한 편의 시를 건지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개성적인 시를 혼자서도 잘 쓸 수 있을까를 이 강좌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김영남).   *************************************************************************** [출처] [본문스크랩] 김영남 시인 인터넷 창작강의 자료 모음|작성자 청하  
294    조향(趙鄕)의 시작노트 데뻬이즈망의 미학[스크랩] 댓글:  조회:1355  추천:0  2018-06-19
이글은 (신구문화사 1961년11월)의 '시작노트'에 실려 있는 초현실주의 시인 조 향의 시작노트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글이다. 한국 현대시 이해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글이라고 생각 된다.  조향(趙鄕)의 시작노트 데뻬이즈망의 미학  1  요 몇 해 동안 글을 쓰지 않는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발달된 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손해가 아니냐고 날보고 말하는 사람이 흔히 있다. 그러나 손해니 이익이니 하는 그런 실리적인 사고방식 보다도 나는 나대로의 계산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첫째로, 나는 스무 장, 열 장.......씩의 나부랭이 글을 쓰기 위하 여 정력 소모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둘째는, 이상한 걸작의식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늘 나의 머 릿속에 도사리고 앉아서, 냉큼 펜을 들지 못하게 한다. 일년에 시 너댓 편 정도 밖엔 쓰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해서 그 너댓 편이 모조리 걸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할 수 없이 내어 놓는 수가 많다. 어떻게 했 으면 “Ulysses"와 겨룰 수 있는 소설을 한 번 쓸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만 하면서, 이론으로만 꼭꼭 메꾸어져 있 는 강의실을 드나드는 것이 나의 일과다.  그러한 나에게 장만영(張萬榮) 형이 사신(私信)까지 붙여서 청탁을 해 왔다. 나의 시법의 비방을 원고지 스무 장에 다가 통조림을 해서 공개해 달라는 것이다. 모처럼의 청탁을 아무런 뾰족한 이유도 없이 저버릴 수도 없고 해서 쓰 기로는 하는데, 사실인즉 자기 자신의 작품을 뇌까려서 다룬다는 것은 약간 쑥스러운 일의 하나에 속한다. 무슨 허 세를 부리고 뻐기는 것 같아서 나는 강의 시간에서도 나 자신의 작품을 교재로 하는 일은 별반 없다. 그저 현대시, 현대예술 전반에 걸친 이론을 꾸준히 강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내 작품에 관한 질문이 있을 때엔, 공석에서나 사석 에서나 간에 열심히 이야기해주는 친절을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2  낡은 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것은 나의 「바다의 층계」라는 시다. 시에 있어서 말이라는 것을, 아직도 의미를 구성하고 전달하는 단순한 연 모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 나의 시는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할 것이다. 의 구성에 의하여 특수한 음향(운 율이 아니다) 이라든가, 예기하지 않았던 , 혹은 활자 배치에서 오는 시각적인 효과 등, 로서 의 기능의 면에다가 중점을 두는, 이른바 . 이것에 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위의 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 이 셋째 에 모여 있는 들을 두고 한 번 생각 해 보기로 하자. 거기엔 아무런 현실적인,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끼리가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이와 같이 사물의 존재의 현실적인,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버리고,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주는 것을 데빼이즈망 (depaysement)이라고 한다.  그 움직씨 데빼이제 (depayser)는 (혹은 환경, 습관)를 바꾼다는 뜻이다. 국적을 갈아버린다는 뜻이다. 초 현실주의 (앞으로는 ‘sur.’라고 생략해 쓰기로 한다.) 에서는 전위(轉位)라고 한다. sur.의 화가들은 데빼이제 하는 방법으로서 빠삐에. 꼬레 (papier colle 서로 관계없는 것 끼리를 한데다 갖다 붙이는 것), 이것의 발전된 것으로서 꼴라아주 (collage) 그리고 프로따쥬 (frottage) 혹은 Salvador Dali의 유명한 편집광적 기법 (methode paranoiaqure) 등을 쓴다. sur.의 선구자로서 봐지고 있는 Lautre'amont (본명은 Isidor Dur-casse) 의 의 미학이며, Dali의 라고 한 말 들을 참조해 보면 석연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들에 의해서 데빼이제 된 하나하나의 사물을 sur.에서는 오브제(oobjet)라 부른다. 오브제란 라틴 말 “...의 앞에 내던져 있는 물건”에서 온 말로서 사전에서의 뜻은 , , , 등이지만 sur.의 용어 로서는 일상적인,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시켜버린 특수한 객체를 의미한다. 주로 sur. 계통의 미술용어로 쓰이지 만, 시에서도 물론 쓸 수 있는 말이다. term(논리학 용어로서 ‘명사’라고 번역 된다. 개념을 말로써 표현한 것)의 기 묘한 결합, 합성에 의하여 어떤 특수한 , 돌발적인 이마쥬를 내려고 할 때, 거기에 쓰인 term의 하나하나는 훌륭히 오브제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를 비롯한 여러 작품은 뽀엠.오브제(poeme objet) 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레뗄이 붙은 통조림통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는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 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입체파 운동의 영도자 브라끄 (Bracque)의 이 말은 오브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브제는 서양의 모더니스트 들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주워다 놓은 괴석 (怪石), 일본 사람들의 이께바나(生花)의 원리, 동양 사람들이 즐기는 골동품 등은 모두 오브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의미의 세계를 포기한 현대시, 19세기적인 유동(流動)하는 시에 있어서의 시간성이 산산이 끊어져 버리 고, 돌발적인 신기한 이마쥬들이 단층을 이루고 있는 현대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의미도 음 악도 아니고, 순수한 이마쥬만 읽으면 그만이다. 사람에게 순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카타르시스다. “이마쥬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다.”(Reverdy) “이마쥬의 값어치는 얻어진 섬광(閃光)의 아름다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그것은 두 개의 전도체(電導體)사이의 단위차(單位差)의 함수(函數)다. ”(Adntre' Breton) 시인에 있어서 이마쥬는 절대와 본질로 통하는 유일의 통로요, 탈출구다. '절대 현실'은 곧 초현실(超現實)이다. 이렇게 따져 봤을 때, 나의 는 순수시다.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후예 발레리의 ‘순수시’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순수시’요 ‘절대시’다. 쟌 . 루스로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말라르메가 의 식론(意識論)에다 구한 것을 마술(魔術)에다 구하긴 했으나 그 덕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공통된 갈망을 갖고 있었 다. 곧 ‘순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의 갈망을”이라고.  상징주의자들이 갈망한 순수는 음악적(시간적)인 것이었고, 초현실주의자들이 갈망하는 것은 조형예술적(造形藝 術) 곧 공간적인 순수 그것이다. 두 가지의 순수가 다 현실이나 일상생활에서 떠난 동결(凍結)된 세계임에는 다름 이 없다.  나는 순수시만 쓰지는 않는다. 꼭 같은 방법으로서 현대의 사회나 세계의 상황을 그린다. 곧 나의 (어느 날의 지구의 밤) 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상황악(狀況惡)이란 곧 을 말한다. 4 자유연상(自由聯想)은 예술가나 과학자의 마음이 창조를 할 때의 자연의 과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잊어버려지고 있다. 자유연상은 정신의 본도(本道), 간도(間道)를 통하여, 의식의 제한에 방해 당하는 법 없이 사고(思考)와 인상 (印象)을 모아서, 그것을 가지가지로 결합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관계나 형(型) 이 생겨나도록까지, 심리과정을 자유스럽게 헤메도록하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서나, 예술에 있어서나, 자유연상은 창조적 탐구의 과정에 없지 못 할 수단이며, 이렇게 해서 얻어진 새로운 형은 거기에 잇닿은 논리를 찾아내는 것에 의하여, 필요한 제2의 과정인 검사(檢査) 또는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자유연상은 환자가 하고, 논리를 찾아내는 것은 분석기(分析機)가 하는 것이다.  -Lawrence S. Kubie: Practical and Theoretical Aspects of psychoanalysis-  정신분석의 임상의(臨床醫)인 큐비의 이 글에서도 밝히 알 수 있다시피, 자유연상이란 예술가에겐 없지 못할 것으 로 되어 있다. 자유연상 상태란 곧 자아(ego)초자아(super ego)의 간섭이 없거나 극히 약해서 상상의 자유가 보 장되어 있는 일종의 방심상태(放心狀態)를 말한다. 벨그송 (Bergson)의 ‘순수지속(純粹持續)’의 상태와 흡사하다. 이런 방심상태에서는 무의식(無意識) 혹은 전의식(前意識)의 세계, 곧 심층심리면(深層心理面)에 잠겨 있던 것들 이 순서도 없이 곡두(환영幻影)처럼 의식면에 떠올랐다간 가뭇없이 스러지고 스러져버리곤 한다. 그런 현상을 옛 날 사람들은 영감(靈感)이라고 불렀다. 나의 시채첩(詩債帖)에는 이러한 순간적인 이마쥬의 파편들이 얼마든지 속 기(速記)되어 있다. 나의 에스키스 (esquisse)다. 그것을, 적당한 시기에 바리아송(variation, 變奏)을 주어 가면서 몽따쥬(montage)를 하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한다. 나는 시를 이렇게 쓴다. 시인으로서의 재간은 이 몽따쥬하는 솜 씨에 결정적인 것이 있다. 현대의 영상미학의 근본이 되어 있는 몽따쥬 수법은 현대시의 수법에서 빌려간 것이다.  5  다시 나의 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낡은 의 서투른 연주가 끝났다. 막이 열린다. 고요가 있다. 어디선지 “여보세요?” 소녀의 부르는 소리. 그것은 먼 기억의 주름주름 사이에서 잠자고 있던 청각인지도 모른다. 다시 고요가 돌아와서 도사린다. 앞에서 말 한 오브제의 모꼬지. 그 가운데서도 메커닉 하고 거창한 과 연약하고 서정적인 의 결합은 엑 센트가 꽤 세다. 이렇게 거리가 서로 먼 것끼리일수록 이마쥬의 효과는 크다.  새삼스럽게 어디선지 아까번의 소녀의 부르는 소리에 응하는 소리가 있다. “왜 그러십니까?” 음향의 몽따쥬로서 바리아송을 주기 위한 수법이다. 다시 고요가 도사리고 앉는다.  다음엔 제2의 의 심포지움. 장소는 하얀 모래밭. 메커닉하고 딱딱한 와 휴먼(human)한, 보드랍고 오동통한 와 그로데스크한 의 대비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뽀에 지! 새로운 시적 공간 구성. 그리고 여기에선 하나하나의 오브제에다 위치적인 바리아송을 추가하기 위하여 포르 마리슴 (formalisme)을 시험해 봤다. 포르마리슴은 언제나 언어단편(言語斷片) 아니면 단어문(單語文)으로 구성 되기 마련이다. 명사 종지법이 많이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엔 와 와 와 . 이 시 가운데서 가장 서정적이고 로망이 풍기는 스 탄자다. 이 스탄자 때문에 이 작품 전체에 서정적인 색깔이 유독 더 짙어 뵌다. 나는 항상 시에다가 이러한 바운딩 (bounding) 곧 ‘넘실거림’을 끼워 두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로 하고 있다. 나의 밑창에 로만티스트(romanticist) 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맨 끝 스탄자에서는 연약한, 서정적인 와 육중하고 메커닉한 가 가 지는 원거리로서 효과를 내보려고 했다. 로서 맺으면서 서정적인 여운을 남겨 놓았 다. 혜안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에서도 포르마티슴이 시도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리인의 구성을 층계처럼, 원근법에 의하여 층을 지어 놓았다. 이와 같이 현대시는 여러모로 퀴즈다운 데가 많다. (단기 4291년 10월호 신문 예新文藝)  참고: 여태까지의 시란 ‘진보(進步)’만 해왔으나 20세기의 시는 ‘조화(造化)’를 했다. ‘진보’는 ‘수정(修正)’이고 ‘조 화’는 ‘혁명’이다. 진보만 알고 있던 시인이나 속중 (俗衆)들은 이 조화를 보곤 꽤들 당황했다. 특히 한국의 풍토에선 지금도 한창 당황하고 있는 중이다. 시가 조화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뇌가 발달해 나간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벽창호 씨(壁窓戶氏)가 아니면 혼돈씨(混沌氏)다. 인간 자체가 조화의 첨단에 놓여 있지 않은가!   출처 :시의 꽃이 피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비밀의 숲    
시어와 일상어 : 세계를 창조하는 시적 요소   정연수                                                사내는 숨 하나를 들이마신다 뱃가죽이 부풀고 심장이 쉼 없이 세웠다 허무는 산들이 심전도에는 그려지고 있다 푸르륵 푸르륵 늙은 노새가 되어 그 산을 오르는 심장과 오랫동안 살을 끌고 이동해왔던 뼈 속에는 바람이 들어와 누웠다 -김유자,「코마」부분   내가 달콤하게 받아먹던, 소화되지 못한 당신이 고약한 냄새를 풍겨요 -오명선,「거짓말을 수확하다」부분   평생 시 읽는 행복으로 살겠다고 작정한 것은 신선하게 살아 펄떡이는 감각적 언어와 감동적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독자처럼 시와 시집을 못 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시적 언어가 던지는 맛에 매료되면서 부터이다. 시적 어휘는 요리의 맛을 내게 하는 조미료다. 표현을 생생하게 만드는 수사, 섬세한 감각의 촉수들,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시는 맛, 멋, 재미, 그리고 감동까지 전한다.   우리는 한 줄의 시구에서, 심지어는 산문에서, 때로는 일상적 삶에서 조차 ‘시적’인 것을 발견한다. ‘시적’이라는 표현은 ‘미적 가치’에 대한 ‘시적 표현’일 테다. 나도향은 「그믐달」이란 수필에서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라고 표현했다. 산문이지만 ‘시적’이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일상어와 일상적 이야기로 시화된 작품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시적인 표현은 여전히 우리를 압도한다. 어휘만을 놓고 볼 때 시어와 일상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개별 단어가 인접 단어와 만나서 시구를 이루는 순간 시어와 일상어의 구분은 선명해진다. 예컨대 다음의 두 문장에서 ‘노래’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자.   ①나는 여기서 노래를 부른다. ②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①에서 의미하는 노래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인 일상어이다. 이에 비해 이육사의「광야」에 등장하는 ②의 문장에서 노래란 앞부분의 ‘가난’과 뒷부분의 ‘씨’와 결합하면서 사전적 의미를 벗어난다. 가난에 대한 극복의지이거나, 힘든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의지일 것이다. 혹은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선언적 의지이거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초인정신, 또는 미래에는 현실의 암울한 상황을 넘어설 예언이기도 하다.   일상어가 보편적 정서를 지니고 있다면, 시어는 다의성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일상어가 소통을 위한 정보 전달에 중심을 둔다면, 시어는 감정과 상상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 일상어와 시어의 경계는 휴전선 철조망만큼 뚜렷하다. 이 글에서는 계간『시향』 2010년 겨울호를 주목했다. 『시향』에서는 다른 문예지에 발표된 시를 재수록 한 ‘현대시 펼쳐보기 50선’과 신작의 ‘젊은 시 펼쳐보기 10선’이란 코너를 마련했는데, 작품마다 ‘시적’ 요소가 풍부해서이다.   햇살이 종일 하늘에 산탄 구멍을 내더니 저녁이 왔구요 행성의 비늘에 테가 하나 늘었습니다 이 시간 고슴도치 같은 표정으로 걸어 나와 털게의 춤으로 알을 낳습니다 눈꺼풀을 닮은 바람이 물고기를 타고 자맥질을 합니다 -전형철,「거북이알의 시간」부분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다 혹은 눈 내린 산을 내려와 늙은 술집에 앉아 있으면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우대식,「목소리」부분   은유가 풍부한 시들은 독자의 사유 세계뿐만 아니라 몸의 움직임까지 바쁘게 만든다. ‘고슴도치 같은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읽던 시를 멈추고 상상의 날개를 편다. 또 ‘눈꺼풀을 닮은 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겨울 내내 꽁꽁 닫쳐 있던 아파트 베란다를 활짝 열어놓고 그 바람을 느껴보기도 한다.   “늙은 술집”은 어떤 술집일까? 늙은이들이 모인 술집일까? 낡은 술집, 아니면 유서가 깊은 술집일까? 혹은 술 속에 더불어 살아가며 지혜로워진 노인들의 삶을 받아주는 공간일까? ‘늙은’과 ‘술집’의 이질적 요소가 충돌하면서 의미는 미끄러지고, ‘늙은’의 시니피앙이 불러낸 ‘낡은’의 어휘 사이에서 의미는 또 다시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의 행간 사이에서 사유의 누룩은 점점 부풀어간다.   아저씨야, 깡통이 울었어. 맥주 거품 보리깜부기 피리 불며, 포경의 휴전선 녹슨 철조망 가시로 울었어. 대나무 숲이 내 얼굴 바닥 가득하니 기어 나와 울었어. -신세훈,「울더군, 울더군」부분   고인돌 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의 애벌레들이 꿈꾸고 있다 초승달 같은 낫을 들고 애벌레의 꿈을 들여다본다 -김영석,「바람의 애벌레」부분   가발을 뒤집어쓴 장미처럼 담배를 피우며 웃는 목각인형 인드라 1백만분의 1로 축소된 등에선 핏줄 등고선들이 포도넝쿨로 자라고 대패가 뱉는다 -함기석,「인드라 주행코스」부분   ‘휴전선 녹슨 철조망 가시로 운다’는 것은 어떻게 우는 것일까? ‘고인돌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바람의 애벌레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또 ‘가발을 뒤집어쓴 장미’는 꽃일까, 가발일까? “욕지거리 같은 가발”(노춘기,「15분」)을 읽고는 가발과 장미 그리고 욕지거리가 함께 뒤엉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알 수 없는 시의 세계란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의 난해함과는 달리 신비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때로 안 풀리면 어떠랴, 도무지 시가 뭘 말하는지 모르면 어떠랴. 깊은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먼 우주로 솟구치는 그 비상의 쾌감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한데 말이다. 또 “젖소 젖꼭지처럼 늘어난 주유기가/빵빵거리는 차들에게 젖을 물린다”(지영,「현수막」)는 대목에서는 깔깔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끝을 보려는 호기심은 계속 이어진다.   떡깔나뭇잎 거울에서 햇살에 활활 타는 단하소불(丹霞燒佛) 홀딱 벗고 홀딱 벗고 홀딱새가 쑤군거리자 거울이 홀랑 뒤집어엎는다 -송시월,「초록거울」부분   거울 속 하늘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빛났다 검고 큰 뿔, 자이언트 장수하늘소 한 마리 첼로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이수정,「시계악기벌레심장」부분   발라진 생선가시 같은 소리의 흔적이 쇄골을 드러내고 사라질 때 나의 삶은 더 이상 추적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진 소리는 득음을 마친 묵음이다 -이수종,「사라진 소리」부분   “홀딱 벗고 홀딱새가 쑤군”이 전달하는 언어유희라든가 이어지는 상상력의 전개가 즐겁다. ‘첼로에서 빠져 나오는 자이언트 장수하늘소’는 독자의 눈에 음악 소리까지 넣어준다. 귀가 아닌 눈으로 듣는 소리는 그 자체로 명상 그림이다. “발라진 생선가시 같은 소리의 흔적이 쇄골을 드러내고 사라질 때”라는 순간을 포착한 경지는 득도의 일갈이다. 소리가 사라지고 난 침묵의 상태는 득도한 성자가 입적한 직후, 그 달관의 세계를 이끈다.   백반 쟁반 두 판 거머쥐고 발발발, 배달 가는 동현 엄마는 장수하늘소다 팔뚝은 뿔, 다리는 갈쿠리다 토란국생선찜누릉지, 파문 한 점 일지 않는 수평선이라니 저 수평이 장수하늘소를 호수 뒷골목까지 끌고 왔다   스크린 골프장, 카센터 밥그릇 쓸어 모아 뿅뿅뿅, 달려가는 상주댁은 소금쟁이다 축지법으로 단박에 물 건너간다 그 속도가 아니면 익사라도 할듯하다 부랴부랴 소금쟁이 좇아가면 호수는 청둥오리숲이다 꾸룩꾸룩, 꾹꾸 -이강산,「호수 가정식백반」부분   식당 배달 아주머니가 장수하늘소, 소금쟁이로 이름을 얻는 순간. 고단한 노동이 경쾌해진다. 우울하고 꼬질꼬질한 서민적 삶이 상큼하게 승화한다. 그래, 질질 짜면서 세상을 살지 말자. 세상을 덧없거나 구질구질한 눈으로도 보지 말자. 고달플수록, 마음의 상처가 깊을수록 정갈한 호흡이 필요하다. 하여, 서러워도 시적인 세상에선 살맛이 나는 게다.   “아침 햇살에 부풀은 바하의 미뉴엣이 이파리마다 내려앉는다. 오르간으로 야채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양원홍,「음악 농사」)   “설핏한 잠의 틈새로/모래가 켜놓은 시간의 톱밥”(이정원,「모래시간 속에 갇히다」)   “물비늘 출렁이는 노을 속으로”(최재영,「백년」)   “바람이 불면 푸른 잎의 환상통에 시달리는//내 몸 깊숙이/마른 숲”(이용임,「측백나무」)   “전등불 아래서 풀무치가 제 울음을 꺼내 손질하고 있다./둥근 종소리가 앉았다 간 식탁 위에/달그림자가 앉는다.”(한석호,「박제된 노래」)   이처럼 도발적 상상력은 작품 곳곳에 발목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읽는 재미를 빵빵 터트렸다. 어디 그뿐이랴, “너와 나의 침대 사이에서 자란 매화”(박강우,「34번가의 랙」)도 그렇고, “손가락 끝에서 꽃이 피어났다”(이재훈,「잡초론」)는 시구도 그렇다. 소파에서 잠자는 경험을 시화한 “나를 분해해 아삭 아삭 씹어 먹고 살이 발린 뼈를 추슬러”(이화영,「소파」)라는 기괴한 기운을 만난 뒤부턴, 달콤한 소파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또 “윤달 같은 골방”(조연희,「사각 뒤주의 추억」)에서는 윤달과 골방의 이질적 요소를 두고 한참 긴장을 했다. 윤달에 행해지던 전통적 관습과 골방의 추억, 그리고 윤달에 특별히 골방이 더 분주해지고 물건이 이리저리 옮겨지던 까마득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테이트나 리차즈는 시에 쓰인 언어와 말이 지시하는 대상물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tension)에 주목한 바 있다.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하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에 대한 감각을 알려져 있는 태도가 아니라 지각되는 대로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기법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며, 지각을 힘들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한다. 왜냐하면 지각의 과정은 그 자체가 미학적 목적이고, 따라서 되도록 연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한 대상의 예술성을 경험하는 방법이며, 그 대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러시아 형식주의 문학이론』)   시적 언어와 대상 사물의 연결 고리가 멀어지면서 낯설어지고, 독자는 시를 읽는 긴장의 즐거움을 얻는다. 긴장하면서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가 시인의 의도에 근접하는 순간 과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간다. 무릎을 치며 소리 내는 아하!, 가슴을 저미는 울림, 감동의 전율, 잊었던 기억이 몰아치는 폭풍, 끝없는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사유들을 맛보는 순간이다. 그 감동을 전한 시인의 다음 작품을 설레며 기다리게 하는 영접의 순간이다.   몇 년 전에는 ‘벼락 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를 모아 특집으로 실은 문예지도 있었다. ‘최고의 시구’라는 말은 ‘시적’이라는 맥락에 닿아있는 셈이다. 시적 요소야말로 시의 멋과 맛을 만들 뿐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을 한층 고무시키고 의식을 발전시킨다. 모든 생명체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는 들숨과 날숨이듯, 시를 살아있게 하는 요소는 ‘시적’인 힘이다. 이 힘은 무생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모든 만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사유의 힘에서 나온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까지 존재의 대상으로 만드는 창조의 힘에서 나온다. 하여, 우리는 그 사유와 창조를 지닌 시작품 앞에 경의를 보낸다.   단언컨대, 시인은 세계의 창조자이다. 작품을 쓰기 위한 언어의 세계 안에서 시인은 절대 권좌를 누린다. “영감이 오는 순간에 당신은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번득이는 첫 생각과 만나는 순간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큰 존재로 변화한다. 우주의 무한한 생명력과 연결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진술이 과장이 아님을 알겠다. 시적인 요소에서 신적인 에너지의 요소를 보았으니, 시인들이여 거듭 세상을 창조하라.        
292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 이문재 댓글:  조회:1743  추천:0  2018-06-06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이문재  | 2003-02-01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글쓴이 소개 이문재 - 시인. 『시사저널』편집위원. 1928년 시운동으로 등단.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 줄 때』『산책시편』『마음의 오지』등이 있다.      
291    김욱동 <은유와 환유> 댓글:  조회:2599  추천:0  2018-06-01
김욱동 민음사, 2004.    예전에 김혜순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이젠 은유의 시대는 갔고, 환유의 시대다, 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기억하고 있을런지 몰라도) 친구들을 붙잡고 환유가 뭐냐고 물어도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때때로 문학비평 용어사전이나 이론서에서 환유를 만나기는 했으나, 읽어도 어렴풋했다.  이 책을 사서 읽은 것은 그 미심쩍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김욱동이란 저자를 이래저래 만나게 된다.대학시절 논문을 쓰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 관련서를 읽다가 이 분을 만났다. 참 바지런한 분같다. 외국의 이론을 무작정 수입하는 오퍼상이 문제라고 하지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겠다.  여하튼, 훌훌 잘 읽힌 책이다. 일단 이분이 선생님이라 그런지 되도록 예를 많이 들어주고,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은유와 환유의 정체를 목격하지는 못 했어도 하반신 정도는 본 것 같다.  지금 내 머릿속에 대강 그려진 상에 의하면 은유는 A는 B라 하는 것이고 환유는 A는 A' A''A'''A''''라는 것이다. 뭐야! 해도 일단 이 정도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은유와 환유를 세계관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은유를 쓰는 사람의 세계관, 환유를 쓰는 사람의 관점은 다르다. 수사법을 가지고 세계관까지 짐작해본다는 점에서 여타의 수사학 책과는 다르다 할 수 있다.     이 책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1. 비유란 무엇인가?  2. 은유란 무엇인가?  3 환유란 무엇인가?  4 은유의 정치학, 환유의 정치학.    참으로 차분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1장, 비유란 무엇인가? 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웅변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냈단다. 그들에게는 말 잘 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사학'이 발달했다. 수사학이란 본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로서 생각을 좀더 뚜렷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런 능력은 타고 난 것이기도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진다.   키케로는 수사 담론이 제대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1)창안2)배열3) 양식4)기억5)전달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창안이란 논거와 증명을 찾아내는 것, 배열이란 찾아낸 논거나 증명을 짜맞추는 것, 양식이란 짜맞춘 자료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낱말과 언어 패턴, 리듬 따위를 고르는 것이다. 키케로는 수사학의 양식을 1)웅장한 양식 2) 중간 양식 3) 소박한 양식으로 나누고, 이 세 양식 모두에 두루 적용되는 기준을 1)정합성(언어를 용법과 관습에 맞게 올바로 사용하는 것)  2) 명확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하는 법)3) 적절성(말하는 상황이나 맥락에 어긋나지 않게 언어를 구사하는 법) 4) 장식성. 이 중 장식성인 수사적 장치로 꼽혔다. 장식성은 처음에는 웅변 양식의 한 특징이었으나 차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사학인가? 철학인가?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팽팽했다. 미국의 수사이론가 리처드 랜햄의 이론을 보자면, 인간은 크게 ,의 두 갈래로 나뉜다. 진지한 인간은 중심적 자아와 확고한 동일성을 가진 반면, 수사적 인간은 배우같고, 그의 행동은 연극적인 데가 적잖다. "진지한 인간의 편에서 보면 모든 수사적 언어는 의심스럽고, 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투명한 언어는 이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하며 거짓말을 한다."    이 두 전통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엎치락뒤치락 우열을 다퉈왔다.    수사에 맨처음 의혹의 눈길을 보낸 것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수사를 "무식한 사람의 눈에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득하는 방법"이라 했다.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 파에드로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도 수사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사학에 대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기적 통일성을 중시한 플라톤은 에서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루어져 있다."했다. 언어가 생물체라면 언어의 논리성 못지 않게 수사성도 중요하다. 이런 태도는 수사적 언어와 논리적 언어, 시어와 일상어를 굳이 구별하지 않으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진리란 문어체의 시어보다 오히려 구어체로 된 일상 대화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유기적 언어관은 훗날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수사학 자체에 잘못이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잘못 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잘만 사용하면, 수사는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숨기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는데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는 은유 구사력을 천재의 징표라 주장한다. "훌륭한 은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에서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구심을 버리지는 못하였는데 은유란 고기맛을 나게 하는 양념이며 지나치게 쓰면 곤란하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유란 어디까지나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더 효과적으로 자연을 모방하는 방법 중에 비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내세웠는데, 그들에게 진리는 개별적인 데다가 일시적인 것이어서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느 누구에게나 진리는 남을 확신시키거나 남한테 설득당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의 키케로, 호라티우스, 퀼틸리아누스도 수사학에 관심을 보였다. 키케로는 인간이 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수사학 덕이라 했고, 사상과 언어, 과 은 영혼과 육체처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호라티우스는 문학의 당의정 이론을 주장하며 문학이란 쾌락적 기능,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동시에 가졌다 했다. 키케로는 수사학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심장처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했다. 그는 수사학을 옷에 견주는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든 것처럼 언어의 부족함과 결핍 때문에 수사학이 필요하가 주장했다.  언어를 에 처음으로 견준 사람은 퀸틸리아누스다. 몸에 안 맞는 옷이 볼품 없듯이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중세에 들어 소상상태를 맞는다. 이 무렵 수사학은 문법학과 논리학과 더불어 의 한 과목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과 합리성이 대접받는 근대에 들어 수사학은 움추려든다. 수사학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17세기 합리주의 철학자, 경험주의 철학자에게 뚜렷이 나타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사람들이 진지한 주제와 건전한 논의보다는 오히려 미사여구에 현혹된다 개탄했고, 로크는 수사학을 기만이나 사기 행위로 간주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 역시 사물을 담아내는 그릇인 언어보다는 그 그릇 안에 담겨 있는 사물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이 철학적 입장에서 수사학을 반대했다면 청교도들은 종교적 이유로 그것을 업신여겼다. 밀턴을 비롯한 청교들에 의하면 교회의 색유리창이 빛을 차단하는 것처럼, 현란한 수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수사학은 19세기 낭만주의자에게 큰 조명을 받았다. 독일 관념론자들과 장-자크 루소의 세례를 받은 영국 낭만주의자들은 수사학의 가치를 인정했다. 가령 루소와 마찬가지로 셸리는 언어란 본질적으로 은유적인 것이라 주장하고, 시인이 맡아야 할 임무는 바로 새로운 은유를 창조하여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다. 수사학이란 궁극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결합하여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었다.  이 무렵 수사학에 무게를 실어준 사람은 니체다. 그에게 진리란 기껏해야 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란 그것이 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는 절대적인 것을 믿는 모든 행동이야말로 병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수사학과 논리학의 다툼은 20세기까지 지속된다. 크로체는 수사학이 내용과 형식, 주제와 표현을 엄격히 나누려고 한다는 점을 들어 이라 지적했고, 비엔나 실증주의자들도 비유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버마스는 수사성에 물들지 않는 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수사학은 20세기 중엽 개화기를 맞았는데, 이에 대해 I.A 리처즈의 공헌이 크다. 에서 그는 "한 낱말이 실제 사용과 추상적으로 적절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그는 미신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언어의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 비유는 언어에 입히는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언어와 사상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라는 것이다. 또한 애매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애매성이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요 의사소통의 필수적인 방법이다. 특히 문학과 종교처럼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객관성과 논리성에 회의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도 이런 흐름과 연관 있다.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선보인 비평이론들이 흔히 이라 낙인 찍히는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자들은 수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그와 오스틴이 언어의 수사성을 두고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스피치 행위이론을 처음 세운 오스틴은 언어행위를 술정적 행위와 수행적 행위로 나누고, 모든 언어 행위는 결국 수행적이라 결론지었다. (술정적 행위: 사실이나 정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 수행적: 질문, 약속, 경고, 명령을 하는 것 달리 말해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달성하려는 것 (김욱동 에서) 그러면서도 오스틴은 문학어가 일상어에 대하여 '파생적'이고 '기생적'이라고 말한다.  이에 맞서 데리다는 문학어는 물론이고 일상어조차도 수사성에 짙게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며 수사성을 피해 아무리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 속에 숨으려한들 부질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분적이고 당파적이며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이상 수사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학 텍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란 궁극적으로 텍스트 안에 숨겨져 있는 수사성을 드러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폴 드 만 역시 수사학에 깊이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 문학과 철학의 공통점이라 했다.   수사학은 철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에서도 중요한 몫을 한다. 도널드 맥클로스키는 에서 경제학의 방법론이 언뜻 객관적인 것 같지만 따져보면 "형이상학과 도덕과 개인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법학도 마찬가지다. 로버트 고든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신념 구조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라 말했다. 과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 토머스 쿤은 에서 과학을 움직이는 동력은 참과 거짓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신이나 설득이라 말한다. 만약 과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릴 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수사학이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문학을 도를 싣는 그릇으로 보려는 '문이재도'가 크게 힘을 떨쳤지만, 못지 않게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도 무게를 실었다. 에서는 시육의 또는 육시로 일컫는 시적 장치가 기술되어 있다. 시육의란 부, 비, 흥, 풍, 아, 송 등 여섯 가지 방법을 말한다. 이 가운데 부와 비와 흥은 오늘날의 수사법에 속하고, 나머지 풍과 아와 송은 장르 이론에 속한다. 이렇게 세가지씩 두 쪽으로 나우어지는 것을 두고, 삼경삼위설이라 한다.  삼경에서 부가 한 짝이 되고, 비와 흥이 다른 한 짝이 된다. 와 , 의 풀이에 따르면 부는 다른 것에 빗대지 않고 사물을 직접 진술하는 직서법이나 포진법이다. 비와 흥은 간접적으로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방법이다. 비는 오늘날의 상징법에, 흥은 오늘날의 연상법에 가깝다.  우리나에서도 문학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 있다. 김종직과 성현이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가다. 김종직은 그런데 문장보다 경술을 강조하는 김종직의 글에는 비유가 무성하다.  성현은 에서 김종직의 주장에 반박한다. 김종직은 뿌리(경술)이 튼튼하지 않고서는 가지와 잎사귀(수사나 비유)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고 했으나 성현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랄 때 비로서 뿌리가 제대로 뻗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수사학과 비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유를 뜻하는 말인 영어 트로우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어 '트로페(구부러짐, 뒤틀림)'와 만난다. 똑바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 완곡하게 말하는 방법을 뜻한다. 트로우프와 함께 쓰이는 '피겨'라는 영어도 형상이나 모습을 뜻하는 라틴어 에서 나왔다. 이 말에서 비유가 흔히 가지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비유는 통상 둘로 나눈다. , 가 그것이다. 전자는 축어적 의미와 다른 어떤 의미를 얻기 위하여 낱말이나 구를 구사(은유, 직유, 환유, 반어. 제유, 역설, 상징, 우화, 과장, 의인)하는 반면, 후자에서는 낱말의 의미보다는 낱말의 통사론적 순서나 패턴에 의지(병치, 도치, 대조, 점층)한다.    비유는 생성하고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 죽은 비유, 죽어가고 있는 비유, 살아 있는 비유, 다시 되살아난 비유로 나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상어는 죽은 비유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비유를 비롯한 시어를 일상 표준어에 대한 일탈이나 전경화로 본다. 가령 체코 언어학자 앤 무카조프스키는  -비유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맡기도 한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보태는 식으로 어휘를 생성한다. -비유는 웃음과 해학을 자아낸다.   -부정적인 면은 고루하고 인습적인 생각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내자','안사람' 여성을 집안에서만 가두려는 속셈.   마루 하 -비유는 진실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감추거나 숨기는 기능을 맡기도 한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를 빼놓아야 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작가가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작품 속에 남겨놓은 빈공간이나 침묵에 눈길을 돌리려는 정신분석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빌 클린턴 성추문 사건 "부적절한 관계" "친근한 성접촉"/ "잠자리는 같이 하였지만 속살은 섞지 않았다."   비유와 세계관    인식론적 관점에서 비유를 처음 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인간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고 했다. 폴 리쾨르는 철학적 관점에서 비유를 인식 작용과 연관시키고, 존 설은 스피치 행위이론의 관점에서 그것을 발전시킨다. 폴 드 만은
290    [공유]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 작성자 HUE 댓글:  조회:2267  추천:0  2018-05-29
글은 영미 현대시의 새로운 조류로 등장하는 실험시에 대한 특징 및 경향을 기술한 것이며, 시전문 계간지  2001년 겨울호에 게재된 기사다. 간단하나마 현대 영미시단의 실험시적 특징과 경향을 연작 시리즈로 게재하는 일회분이다.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영미 실험시 배경과 경향         1. 글을 들어가며     어는 고드름은 시간과 함께 남모르게 더욱 굵어지며 자란다. 녹는 고드름은 뜨거움과 함께 더욱 가늘어지며 사라진다. 동굴의 석순(石筍)은 세월과 함께 어둠 속에서 말없이 자란다. 석순을 형성하는 동굴 속 물 흐름은 보이지 않아도, 시야에 드러나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나름대로의 멋진 아방궁을 퇴적시킨다. 어느 날 먼지 빛으로 공개되는 동굴 궁전은 너무 신비로워 그리스 강장제에 도취된 눈동자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실험시는 결빙되는 고드름처럼 속으로 얼고, 초봄에 전통시가 녹아 내리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둠의 궁전에서 석순으로 자라며, 우연한 조명으로 세상의 눈길 받기를 기다린다. 실험시는 고드름처럼 머리 위에서 찌르며 자라고, 석순의 뿌리처럼 어둠에서 단단히 생장한다. 하나의 물방울로 시작된 결집(結集)이 더욱 성장하며 화려한 새로운 시 세계를 이룬다. 더 이상 숨으며 팽창될 시공간이 부족할 때, 실험시의 고드름이나 석순은 깨어지고 세상에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 쓰기다. 밑으로만 늘어지는 고드름의 흔적이 싫어서 옆으로 위로 성장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결정체다. 새로운 형상과 무늬로 퍼지기를 욕망하는 새로 형성되는 석순의 속살 아픔이다. 한 시대의 퇴적된 정신 층을 쓸어버리려는 바람(慾, 風)의 모임이다. 그 작은 모임은 홀로 서는 외로운 학 다리가 두려워 새로운 실험성을 공유하는 집단의 나눔이 되려한다. 나눔의 장(場)이 모여서 새로운 물줄기를 모아내고, 노란 사막에 한밤의 비내림으로 새로운 빗자욱을 남긴다.   20C를 갓 넘긴 새 천년 시대에도 실험시가 생장하는 시 동굴에 지난밤부터 내린 새로운 빗자욱이 엿보인다. 겉으로 바로 드러나지 않고,아직 수로를 형성하여 도도히 흐르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물줄기의 자욱이 드러난다. 20C를 투영하는 지하수가 모래 속의 거울이 되어 분명한 잔상(殘像)으로 반영하는 한 세기의 흔적이 있다. 20세기말의 정신적 흐느낌과 새로운 시 쓰기의 물줄기가 실험시의 수맥을 찾는 대나무 가지에 살풋이 느껴진다.   흔히들 20 세기말의 새로운 시대의 감성과 몸짓을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는 용어로 대변한다. 어두운 세기말적인 정감과 새로운 기대에 대한 상반된 감성을 표현 투영하는 모든 급진적 정신 활동을 실험적(Experimental)이라고 한다. 이러한 새로움의 모색과 무한한 가변성의 세계를 쫓는 새로운 형태/내용의 시를 실험시라고 정의한다. 실험시는 영어로 “experimental poetry, " "avant garde poetry," "innovative poetry" 등으로 불리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새로움을 향한 강렬한 정신적 발돋음, 실험성이 된다. 시 쓰기의 새로운 방향성 추구, 새로운 표현과 의미의 모색이 실험시의 목적이며 생명이다.   모든 시(어)에는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는 과거가 스러지고 새로움이 들어서는 교체의 시기가 있다. 너무 익숙한 편안함이 싫어서 새로운 낯설음을 찾아 나서는 정신적 여정이 있다. 낯설음에 매료되는 탐험성이 실험을 추구하게 한다. 실험시는 이렇게 상실되는 시어의 의미, 놓친 조각을 새롭게 되살리는 작업이다. 기존에 포착된 지점을 재구성하기보다는 상실된 부분을 더욱 탐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움의 탐구가 모든 실험시의 맥박이며 핏줄이다. 실험시는 전통을 버리려 하면서도, 고아로서 떨어지지 않는 지혜가 있다. 멀리 떠나려는 설레임을 항상 새로 각색하는 용기와 의지를 드러낸다.   특히 미국 실험시는 유럽의 시 경향과 비평이론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새로워 지려한다. 유럽의 모태를 벗어나 신세계의 자유와 자본주의의 팽배를 더욱 즐기며 새로운 실험시를 시도한다. 현대의 모든 문화의 집산지로서 최고의 실험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미국 실험 시인들은 학제간 상호 교류를 통한 문화적 융합접을 더욱 천착한다. 시와 영적 감각성이 높은 서구 화단의 영향도 수용한다. 특히 유럽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화풍을 통한 시적 감수성을 더욱 새롭게 개발한다. 특히 큐비스트(cubist)나 다다이스트(dadaist)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실험적 영감을 얻고 있다. 또한 언어학적 비평이론과 해체이론, 프랑스 철학 비평이론 등의 영향으로 미국 대학 내의 비평문학이 새롭게 발전되면서, 시에서도 새로운 성향이 발전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따른 마르크스(Marx) 이론이나 사회주의 및 자본주의 이론 등도 실험시의 노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미국의 정치적 패권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가 더욱 왕성해지면서, 실험성 높은 시적 경향이 자연스레 강화된다. 평안과 풍요의 정신성 속에서 정신세계와 지적 만족을 위한 새로운 시 경향을 추구하는 것은 가히 본능적이라 하겠다. 현대 문화의 다양성만큼 시 경향도 다양하게 추구하게 된다. 시의 실험성은 자연, 풍토, 문화적 환경, 인간적 기질 등의 제반 요소에 따라서 급변하고 요구되는 것이므로, 문화제국으로서 군림하는 미국의 실험시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을 표출하고 있다. 전 지구적인 위기와 변화의 물결을 대변하는 정신성을 프론티어(frontier) 정신으로 맞서나간다. 그들의 전방위(前方位)를 겨냥하는 총구는 대열을 이루어 정확히 발사되고 있다.   이러한 영미 시단에 나타나는 실험시 경향을 4회에 걸쳐 탐방해본다. 우선 미국 실험시의 성장 배경과 일반 특성을 먼저 접근해본다. 다음에는 구체적으로 각 시인과 실험시 집단별로 구체적 시를 감상하면서 변화와 실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영미 시단의 실험시 추세와 내용을 이해함으로서 토착적 국내시에 새로운 시적 감성과 실험시 추구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앙망한다.               2. 실험시의 형성 과정         i) 새로운 유행   최근 10-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지성인 사회(특히 대학 사회)나 대중사회에서 시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각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시 창작 워크샵, 일반 시 낭송회에서 새로운 시 발표가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시 형식, 내용, 틀을 벗어난 자유를 향유한다. 신선한 표현 매체와 실험시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어찌 보면 쓸데없는 짓거리처럼 느껴지는 시내용이 진지하게 논의되며, 새로운 매체를 통한 새로운 창작법이 진지하게 모색된다. 모더니스트 시인(W. C. Williams, Gertrude Stein 등)을 비롯해서 비트 세대 시인(Allen Ginsberg, Lawrence Ferlinghetti 등), 뉴욕 시인(Ashbery 등), 고백시인(Sylvia Plath, Robert Lowell, Anne Sexton등), 구체주의자(E. E. Cummings 등), 이미지스트(Robert Bly, James Wright 등), 더 나아가서 이러한 2차세계대전 전후 세대들의 시를 전통시라고 반발하는 새로운 실험주의자들의 낯선 이름이 광고문구처럼 논의된다. 90년대의 실험시 연구자들은 현 시대의 사회 정치 현상과 문화성에 대해 더욱 심각한 탐구를 시도한다. 이들이 연구하는 실험시적 내용은 너무나 다양하여서 쉽게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이러한 실험시 연구 자체가 신조류의 문학형태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처럼 미국사회, 특히 대학사회에서는 각종 실험시가 출현 연구되고 있다. 이 현상은 새로운 시의 문예부흥 시대의 다가옴을 예고하는 듯하다. 시문학사에는 항상 이중적 대립성이 편재한다. 전통적 소네트, 서사시, 하이꾸 등의 전통시를 새롭게 도입하려는 성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전통을 거부하는 듯한 실험시가 강하게 대비된다. 전통시의 새로운 모색이든, 이탈된 실험시의 추구이든지 간에, 모든 실험시 경향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정치성과 다양한 포스트모던 성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복잡한 개성과 색다른 삶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일례로 시 낭송과 토론이 왕성한 대학 구내의 커피샵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영상시, 시인지 음악인지 구분이 어려운 소리시, 연극인지 시인지 경계가 모호한 행위시 등이 망설임 없이 발표된다.   이러한 현대의 실험시 경향은 과거의 시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다. 새로움이란 과거의 궤적(軌跡) 위에서 새롭게 비트는 표현 작업이다.이러한 새로움의 변화를 간단히 더듬어 본다.   우선 실험시는 1950-60 연대의 비트 세대의 시 현상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비트세대(Beat Generation) 시인들은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성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 경향을 시도하였다. 그 후 베트남 전쟁 여파로 퇴폐적이고 반동적인 사회현상이 새로운 히피 문화로 반영되었다. 그 후 히피 문화성이 쇠퇴하면서 시도 전체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특히 전통시, 운율과 각운을 맞춘 정형시나 자유시 등이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듯했다. 대학의 시 교육에서도 시보다는 다른 장르 문학이 선호되는 듯했다. 무용이나 대중 예술, 행위예술에 비교해서, 언어 예술인 시가 급진적인 사회변화에 만족스럽지 못한 표현수단이나 예술행위로 인식되기도 했다. 시는 단순히 상아탑 속의 학자들의 얘기이며, 아직 정신적 세례를 받지 못한 대중들과는 요원한 고상한 취미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시란 마치 깊은 내적 고민을 토로하는 정신적 표현물, 지적 산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다가 80년대부터 탈냉전 사태를 통해 미국적 패권주의가 더욱 강화되면서, 새로운 사회 정치적 요구, 지적 변화에 부응하여 새로운 시 쓰기 경향이 나타난다. 각 대학의 문창과에서 대학교수보다는 현장 시인들이 직접 참여하면서, 기존의 전통적 시 쓰기에 대한 담론보다는 실험성이 강한 시 쓰기가 시도되었다. 시는 더 이상 상아탑 속의 죽은 대상이 아니라, 현대 사회 속에서 동참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되었다. 현시대에 맞는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간결하고 강렬한 시가 새로 조명 받게 된다. 전통 시적 표준을 거부하고 새로이 변화하는 시대성에 발맞추려는 시도가 진행된다. 잘 포장된 상품 같은 획일적인 현대 사회성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감성과 사유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시를 선호하게 된다. 시는 산문과 달리 자유로운 감성과 미래성을 보장하는 듯한 표현력을 갖는다. 새로운 감성, 흥미로운 생각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가 지성인과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된다. 모든 형태의 시가 수용 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통시의 찬반(贊反), 사유시의 강조, 무의미 시 선호, 정치적 성향 시, 일반 대중적 세속시, 등의 다양한 취미와 내용이 시로 표출되었다.   이처럼 시는 복잡한 현대 생활에서 새로운 일탈(逸脫) 방법으로 점점 선호되었다. 단순한 오락으로 자리매김 하기보다는 지적 쾌감이나 여유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를 선택하였다. 대중은 산문과 달리 간단하고 짧은 공간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시적 특질에 매료되었다. 시가 여가거리로 격상되었다. 문화 생활의 충족조건으로 시가 필요되었다. 특히 젊은 층에게는 전통적 진부한 시 표현이나 정치적 슬로건, 광고 문구 등에 식상하고, 일상적 언어 표현이 너무 진부하고 재미가 없어서,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 시적 감성과 통찰력, 재치, 폐부에 와닿는 표현 등을 모색하게 된다. 그 새로운 모색의 결과가 언어 장난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삼행시나 광고문구를 넘어서는 시적 표현으로 발전하게 된다. 시는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의미나 감성 전달이 확 달라지는 표현수단이므로, 새로움 선호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시가 자연히 새로운 감성 표현수단으로 선호되었다.   이 결과로 1990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세기말적인 현상에 맞는 새로운 표현력을 시에서 발견하게 된다. 보다 영적(靈的)이고 감성 표현적이며 현실 반동적이고, 폭팔적 표현수단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세기말적 현상은 어느 시대에서나 발견되나, 21C의 새로운 천년(millenium)을 앞둔 시대에서는 그 느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례로 선(善)을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시를 찾기보다는 인간적 악(惡)의 내면성을 보기 위해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선호하기도 한다. 시는 다른 어떤 문학적 표현수단보다도 즉각적이며 표현 강도가 높다. 현 시대의 사회적 악, 세기말 사상을 표출하는 시적 감성은 자연스레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구원과 깨달음의 방편으로 새로운 유형의 시는 새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새로움의 추구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실험적 표현 양식이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서구 정신사를 대변하는 전통적 사상시(Dante, Louise, Keats, Milton, Christina, Urure등)를 새롭게 읽는 노력이 나타난다. 전통 속의 실험적 시를 통한 명상 작업을 시도하고, 새로운 미학으로 현세상을 읽기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시도한다. 이러한 전통의 새로 읽기는 다양한 비평 조류에서 정전(正典)을 다시 읽기 현상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비평의 일상화에 의해서 일반 시민들도 시인이 세상을 보듯이 일상적 사물에서 새로운 의미와 깊은 생의 통찰력을 발견하게 된다. 종래에는 기존 시인들만이 향유하던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생의 음미법을 일반 대중들도 같이 공유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시의 저변 확대가 더욱 강화되고, 시의 대중화에 따른 새로운 변화가 더욱 가속화된다. 실험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자연히 형성된다.         ii) 비트 세대(Beat Generation)의 전통         실험시의 전통은 멀리 정원 끝의 조망으로 보면 모더니즘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가까운 조망으로는 비트세대의 시인에서부터 연관을 짓는다. 이 시인 집단은 1955-60년대 사이에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던 서정시 시인들로서, 탈정치적, 반지성적, 낭만적 염세주의 시 성향을 보여주는 시인들이다. “짓밟힌,” “얻어터진,” “축복에 겨운(beatific)”처럼 모순적인 극단의 반대 의미를 가진 비트(Beat) 의미에서 이들의 사회적 태도와 시적 성향을 암시 받는다. 이들은 스타일이나 주제, 형식적 표현의 통일성 요소보다는 새로운 표현법을 추구한다. 이러한 시인으로는 휘트만(Whitman)적인 강렬한 자유를 구가하는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b),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자동 암시적으로 시를 쓰는 잭 케루악(Jack Kerouac), 신중하면서도 다다이스트(Dadaist)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시의 대장장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 등이 있다.   이들은 모더니스트와 유럽 시 경향을 총망라하여서 사실주의, 마르크스주의 성향, 감성 및 초감각적 엑스타시(황홀경), 언어의 실험 성향 등을 도입하였다. 그 결과로 이들의 시는 재즈처럼 자유분방하고 영감적이며, 황홀 상태에서 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은 종교적 감정과 감수성을 보이는 신비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신비주의 성향이 미국적 풍토와 문화성과 어울려서 새로운 시적 감성을 잉태하게 한다. 이러한 비트 시인들의 일반 성향은 미국이 더욱 강대해지면서 새로운 실험시의 표본으로 자리잡게된다.   일례로, 실험시의 전통은 언어의 청각성(aurality)에서 추적할 수 있다. 미국시단에서는 1930년대와 1950년대에 두 차례 좌파 성향이 나타나는데, 전자를 구 좌파시인이라 하고 후자를 신좌파 시인이라고 한다. 이 때 “new left"라는 칭호는 당시의 정치 성향이외에도 새로운 시적 특질을 암시해준다. 이 새로운 시 경향은 바로 시의 음악성, 청각성이다. 비트 세대에서는 노래나 주문(chant) 같은 반전시(反戰詩)를 행위예술 하듯이 낭송하였다. 대표적으로 Ginsberg는 노래부르는 가수처럼 시를 표현하였다. Ginsberg 시 "Kaddish"는 미친 공산주의자 Naomi 어미를 위한 유대교의 망가(death-epic)다. 비트 세대 시인인 Kerouac 시는 jazz 처럼 들린다.         (삽화 시)   Kaddish의 마지막 5절은 공동묘지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처럼 울려나온다.         주여 주여 하늘의 울림소리 남루한 나뭇잎 사이로 바람 기억의 함성 까악까악 일생 나의   탄생 꿈 까악 까악 뉴욕 버스 깨어진 구두 거대한 고등학교 까악 까악 모든 주님의 환상들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주여 주여 까악 까악 까악 주여         여기서부터 과거와 달리 시가 대중가요처럼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구어체 사용을 통해 대중에게 읽히고 노래처럼 부르는 시를 쓰게 된다. Wilbur 의 “두꺼비" 같은 시 성향이 쉽게 대중에게 접근되어 간다. 최근의 이러한 구어체 시 운동은 MTV 출연으로 유명한 Maggie Estep을 통해서 시가 대중시, 상업시로 근접하는 계기를 맞게된다. 또 Edwin Torres는 구어체 시 운동에서 보다 심각하게 시를 표출하고 있다. 최근 시인의 구어체 시어법은 비트 세태의 전통을 계승하고, 모더니즘, 더 거슬러 올라가서 Whitman의 시 전통을 계승하면서, 시를 대중주의(popularism)로 발전시키고 있다.   시의 대중성은 자연히 정치적 참여성으로 발전한다. 1차 세계대전후 세대인 1930년대 좌파 시인들(Edwin Rolfe, Ruth Lechlitner 등)이나 2차 세계대전후 비트 세대는 모두 동일하게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된다. 국회의원이 단순히 소방전 같다는 시 표현에서 세태의 풍자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정치적 급진주의(political radicalism)성향은 시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정치성은 실험시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현대인은 오락산업화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실험시는 정치적 요소를 많이 표출한다.   물론 비트 세대 시는 전 세대(모더니스트)와 30여년의 세월의 차이에 의해서 30년대의 시 성향과는 사뭇 다른 시 형태를 보여준다. 비트 세대는 심각하고 전통적 가치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연스럽고 캐쥬얼한 시를 선택한다. 벽난로에 앞에 앉아서 편안히 졸고 있는 강아지처럼 자기 사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일상적 사물(슈퍼마켓, 거리, 경찰, 거리의 물웅덩이 등)을 노래한다. 당시의 메카시 선풍에 휩쓸리지 않고, 좌익사상에 실망한 상태로 자기 나름대로 미국 가치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본연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시인으로서 자유로운 형식과 언어, 정신을 구가하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시 대상에 조율하듯이 명상해나간다.자기 스스로 새로운 도구가 되어서 새로운 표현매체를 창조한다. 스스로 자기 인식의 관찰자가 되는 동시에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시적 리듬은 생체리듬과 닮아 있다. 이러한 자연스런 호흡이 바로 자연스런 시쓰기를 의도한다. 가장 자연스런 마음이나 표현은 곧 자연스런 파괴가 가능한 새로운 시 쓰기를 강요한다.   이러한 감성의 자연 발생적인 성격(spontaneity)이 새로운 시 사조로 자리잡게 된다. 실험시는 땀 흘리며 애쓰는 작업을 거부한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편안한 표현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발레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기술을 자연스레 땀 흘리지 않고 연기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시적 상황이나 사상도 자연스레 토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추는 춤은 예술이라 하지 않고 중노동이라 한다. 의도적이고 애간장을 태우는 시 쓰기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고생이 된다. 실험시는 지적 노동이나 의도적 고생이 아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새로운 성향이 되어야 한다.   자연스러움은 수많은 훈련과 반복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스런 실험시 쓰기는 원숙한 기존의 시 쓰기를 전제한다. 기존의 시 쓰기의 틀을 완성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실험시가 탄생 가능하다. 자연스러움은 완전한 통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인의 새로운 시적 감성은 다양한 경험과 대체 감성 표현이 가능할 때 자연스럽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기존의 완성미를 대변한다. 자연스러운 발레 동작이 완전한 균형과 고난도의 기술을 마스터 할 때 가능하듯이, 시의 자연스러움 즉 새로운 시 쓰기도 기존의 시를 완성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시에서의 자연스러움은 시 쓰기의 기본 3 과정인 착상, 시작(詩作), 대중 전달에서 나타난다. 독특한 시상(詩想), 비의도적이고 검열하지 않는 듯한 시 쓰기, 자연스런 전달력 등에서 자연스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실험시는 이렇게 자연스런 시 쓰기에 의해 자연스레 태어난다. 시를 새롭게 쓰려는 의도와 생각, 표현법, 전달 과정에서 새롭고도 자연스런 실험시가 탄생한다.   이런 자연스런 시쓰기는 의도적으로 반복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시 쓰기가 곧 퍼포먼스처럼 일회성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기 쉽다. 영감처럼 일어나고 스러지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즉각성(immediacy)이나 즉흥성(improvisation)은 이미 고도의 절제와 완성,훈련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아무리 순간적으로 변화를 주더라도, 그 근본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실험시는 이러한 수준의 완결도를 기본으로 하여 형성된다. 실험시의 자연스러움은 고도의 건축적 완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비트 세대 시인의 전통은 90년대에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자연스런 언어의 흐름대로 시를 표현하고, 감성과 황홀경을 신비하게 표현하고, 현시대적 감수성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고, 표현 도구로서 소리와 행위를 동원하고, 현실 염세적인 비판적 시성을 보여주는 실험시는 이미 비트세대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다. 이들의 뿌리 위에서 사유시, 소리시, 행위시, 전자시, 무의미시, 매체시 등의 다양한 실험적 시가 탄생된다.         3. 실험시란 무엇인가?     i) 실험시의 일반 특성   실험시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시다. 현시대에 맞는 시적 의사소통 방법의 결과로 나타나는 시가 실험시다. 현대 인간의 의식 속에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되는 것이 안 되는 것이고,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으로 헛갈릴 때가 많다. 이러한 의식 현상이 시에서는 모순과 조화의 수사법으로 나타난다. 동질성과 비동질성의 병치법(juxtapositions of association and dissociation)이 된다. 최근까지도 현대인간은 꿩 잡는 자가 대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삶이 보다 풍요해질수록 결과보다는 삶의 질,살아가는 과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시에서도 시대성이 그대로 반영된다. 포스트모던 실험 시인들은 시 쓰기 과정을 중시하지, 시어가 의미하는 직접적인 내용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형식과 내용보다는 시를 쓰는 그 과정 자체를 더욱 중시한다. 시를 쓰는 그 자체로 만족한다. 그들의 목적은 시와 시어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기존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 추구에서 쾌감을 맛본다. 이렇게 시는 시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정신활동이다.   이러한 시대성과 실험성의 상관관계에서 시는 현실을 주도하려는 욕망을 가진 시인들에 의해 창조되어진다. 따라서 실험시는 새로움의 변화 추구에서 일단 전위성을 갖게 된다. 전위성은 독특함(uniqueness), 미완성, 이탈, 비타협성, 초월성 등을 의미한다. 실험시의 전위성은 우선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새로운 시도로 인식된다. 목표를 향한 과정성의 중시, 변화 자체를 향유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실험시는 기존시의 틀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려 한다. 새로운 의미를 증명하기보다는 무의미성이라도 일단 행하고(쓰고) 보는 진취력이 있다. 실험시는 새로운 시도의 성공 여부를 개의치 않는다. 실험적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시적 생명력을 탐구하는 데에 스스로 만족한다. 실험시는 항상 굴러가는 돌이기를 원하지, 일정한 구멍에 안주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시와 실험시는 안주와 거부의 차이일 뿐이다. 실험시가 안주하면 다시 기존시가 되며, 기존시가 안정을 거부할 때 실험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감성적, 형식적, 언어적, 의식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현대 실험시는 시 의미가 너무 깊어서 무질서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시 주제가 너무 일상적이라서 약간 평범한 기분을 줄 수 있다. 그렇잖으면 일상적 시제나 내용을 벗어나서 너무 특이한 시를 쓰려고 한다. 현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한계치를 시로 표현하려고 한다. 개성을 강조하는 최고 끝자락을 표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난해성 속에서도, 시 자체로는 그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시가 낯설고 괴상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지만, 톡톡 튀는 지적 자극을 준다. 현대 실험시는 지루한 표현을 용납하지 않으며, 신선한 자극(지적 및 감성적 자극)을 중시한다.   이러한 일반 특성 이외에 주요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미국 예일대 교수인 Elizabeth Alexander는 "훌륭한 시는 적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의미는 적확한 언어 구사, 특정 시 상황에 맞는 정확한 시적 감성의 표현을 의미한다. 이것은 자연히 감성의 분출보다는 냉철한 지적인 시적 표현을 중시한다. 감성적으로 엄격하고 정확하게 구사되는 시 표현을 말한다. 실험시는 전통적 서정시의 감성 표현을 거부하고 기계적, 금속적, 객관적 감수성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적인 풀어짐보다는 어찌 보면 고전주의적인 차가운 이성, 절제된 감성, 단아한 형식, 풀어지면서도 가볍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내면이 무거운 듯한 표현을 선호한다. 실험시는 언어 구사의 적확성을 가장 강조한다.   실험시에는 언어시적인 요소가 많다. 문장간의 연결성이 별로 없는 듯한 파편적인 문장(“new sentence," Ron Silliman이 그의 산문시”Albany"에서 사용한 용어)을 많이 사용한다. 시행 길이는 기능적으로 자유롭게 결정한다. 파편적 언어의 의미는 전체 맥락에서 구성력을 갖는다. 개별적 문장이나 어휘는 즉각적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험시의 언어적 요소는 접속사 없이 단어/구/절을 자유롭게 연결하는 구문(parataxis)을 사용하고, 의도적으로 시어의 위치를 변경하고, 의도적으로 시어를 생략하고, 언어장난하듯이 사념을 표현하고, 고정된 그림을 거역하듯이 이미지를 그려나가고, 의도적으로 소리 유희하듯이 시어를 선택하고, 화자 및 주어를 감추면서 전통적 표현법을 회피한다.   실험시는 시적 표현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가 많다. 이것이 실험시의 미결정성, 과정성이다.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고 항상 열려있다. 무한한 지시성은 구체적 상징이나 지시어로 존재하지 않고 은유나 환유로 무한히 열려있다. 이해하는 사람에 따라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시의 무한성은 시 의미와 비유의 무한성으로 연결된다. 실험시는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실험시는 불명확성 속에서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이러한 사실주의적인 불명확성 속에서 실험시의 변화로운 시공간이 형성된다. 부분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시 의미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도록 수수께끼처럼 그대로 남겨두고 시가 진행된다. 실험시는 신비적 요소와 일상적 요소를 동시에 담는다. 난해한 신비성이 불명확한 은유와 비유를 제공하고, 일상적 편안함이 읽기 쉽고 재미있는 재치를 제공한다. 실험시에는 시를 위한 시처럼 시작법(詩作法)을 위한 메타포이트리(metapoetry) 요소가 있다. 시 쓰는 방법론이 곧 인생의 방법론처럼 인식되는 시가 많다. 실험시는 대개 작가의 개성이 간섭하듯이 드러나는 작가적 지배력을 거부한다. 시를 독자에게 열어놓는다. 시인은 독자가 읽고 싶은 대로 시를 던져놓는다. 시인은 상호 모순되는 듯한 언어, 소리, 언어 구조(색채)를 상호 교차하듯이 정교하게 써놓는다.   이러한 실험시의 특성을 보여주는 시인을 가볍게 언급해본다.   미국의 저명한 실험시 작가인 Fanny Howe는 의미의 아이러니를 더욱 밀고 나아가서 미국시의 기교의 경계선을 허물정도로 새로운 시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시의 질료인 언어 자체에 대해 회의한다. 언어성에 회의하면서도 그는 새로운 시적 의미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현대 사회의 인간성, 정치성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심각하거나 우울한 색감보다는 민감한 유머를 즐겨 사용한다. 대체적으로 그의 시는 소리를 중시하고, 전체적인 시 의미나 시적 무드를 선호한다. 그의 시는 실험적 탐구성을 강조하기 위해 연작시(sequence)를 많이 쓴다.   Carol Snow 같은 시인은 “어휘 문장”(Vocabulary Sentences)이라는 연작시에서 언어시적 요소를 많이 추구한다. 가벼운 듯하나 내면적으로 울림소리가 커다란 시를 즐겨 쓴다. 언어시적 예를 들어보면, “Are" 제목의 시에서 ”누구는 구제 받고/ 누구는 빠진다,“ "During"에서는 ”그 동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는 것,“ "만족”에서는 ”25년간의 결혼 후에야, 그녀의 호기심이 만족되었다.“ 이처럼 그는 간결한 경귀 같은 실험시를 많이 쓰고 있다.   실험시 시인의 공통적 특징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탐구성이다. 그들에게는 언어가 곧 사물이며, 사상이 된다. 이러한 언어가 곧 사상이라는 견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회자되어 있다. 미국 모더니스트 시에서는 이러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테니스 코트 맹세”(The Tennis Court Oath, 1962) 작가인 비트 세대 시인 Ginsberg는 “언어가 사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시어는 의미 구분과 단락 설정이 어려운 상태를 보여준다. 머잇 속의 생각처럼 언어가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수많은 의존심”이라는 시는“나는 의존한다 의존하고 있다 나를 보라 깊은 어둔 밤 속으로 의존하는 그 의존에서부터 나는 아침에 의존하며 나타난다 노래하는 나는 의존한다 노래는 의존하는 나에게 의존한다.” 이것은 내면의 마음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고 경쾌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자아의식이 흐르는 대로 마음이 팽창하는 느낌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 의식은 세잔느(Cezanne)의 화법(畵法)과 별 다름이 없다. 동양의 호흡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더니스트들의 숨쉬고 확장하는 과정이 새로운 형식주의자(New Formalists)들을 자연히 탄생시킨다.   이러한 실험시의 기본은 이미 비트 세대 시인에서부터 발견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면 실험시의 산실 역할을 한 비트 시인들의 시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로렌스 펠링게티(Lawrence Ferlinghetti)의 시 “개(Dog)"를 살펴본다. 그의 시 의식은 생각(비교, 의식)과 경험이 일치되는 듯한 시 경험을 제공해준다. 그는 직접 개의 실존을 경험하듯이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감성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의 지성으로 고도의 인간 마음과 강아지의 정신세계를 혼연일체 시키고 있다.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생각이 추상적 세계(abstraction)가 되고,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시적 의구심과 마음이 근본적인 사상과 존재의 문제를 의문하고 있다.   그 시의 일부분을 번역해본다.         강아지가 거리에서 자유롭게 뛰어간다   그는 강아지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생각할   스스로 사유할   모든 것을 만지고 냄새맡고 실험하며   모든 걸 조사한다   위증죄의 은혜도 없이   진정한 사실주의   진정으로 말할 이야기가 있는   진정으로 같이 말할 꼬리가 있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컹컹 짖는   민주적인 강아지   진정으로 자유로운   기상(氣像)에 종사하는   존재론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실재에 대해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그걸 어떻게 보는지   그걸 어떻게 듣는지   머리를 갸우뚱 옆으로 틀고서   거리 한 모퉁이에서   마치 승자의 레코드판   겉 사진   마악 찍으려는 듯이   주인의 목소리   들으면서   바라보면서   살아있는 의문부호처럼   거대한 축음기   속으로   혼란스런 존재의   경이로운 텅 빈 뿔을 가진   항상 모든 것에   승리의 해답을   마악 토해내려는 듯이   보이는               ii) 실험시의 기본 원리 및 개념         실험시를 이해하기 위해 기본 원리나 개념을 먼저 정리해본다.   우선 실험시는 시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한다. 시 쓰기는 결국 서로 표절하고 상호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독립된 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는 본래부터 타인이나 전통에서 새롭게 각색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새로운 시 쓰기는 전통이나 타인에서 새로 빌려오는 것뿐이다. 모든 시는 상호 영향성을 준다. 이러한 언어의 근본성, 시어의 차용성이 실험시의 근본 출발점이다. 타인의 시를 새로 각색하고 패러디하고, 변형하여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나 실험시란 근본적으로 표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실험시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한 베르나데트 메이어(Bernadette Mayer)의 실험시 쓰기 연습법을 살펴본다. 실험시 쓰기 연습에서 실험시의 속성을 암시 받는다.   첫째, 쓰여지지 않은 것을 써야 한다. 실험시는 지수나 디지털로 될 수 있다.   둘째, 가장 어울리지 않는 주제, 마음상태, 내용을 시로 써야한다.   셋째, 빈 종이에 쓰지 말고, 이미 적혀있는 종이에다가 시를 써본다. 기존의 활자와 어울려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   넷째, 졸작의 시를 찾아서, 잘 연구한 뒤에 그에 어울리는 졸작을 써보도록 한다. 졸작을 쓰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섯째, 거울 속의 자아상을 바라보면서 “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시를 써본다. 자아가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자아를 부정하는 시를 쓸 때에 새로운 시 쓰기가 가능하다.   여섯째, 산문을 시로 개작(改作)하는 작업을 해본다. 일례로 산문의 첫 단어와 끝 단어만을 발췌하여 시 형식으로 다시 써보면, 색다른 시를 발견하게 된다.   일례로, 애국가를 가지고 개작해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민국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것을 이렇게 새로운 시 형태로 개작할 수 있다.   동해물 닳도록   하느님 만세   무궁화 강산   대한민국 보전하세   일곱째, 언어를 의도적으로 체계적으로 변형시켜본다. 일례로 각 품사별로만 시를 써본다. 동사면 동사, 명사면 명사로만 시를 써본다.   여덟째,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여러 개의 시를 써본다.   이렇듯, 실험시는 문창과의 워크샵 시 쓰기 연습 시간에 시도되는 실험성처럼 느껴진다. 대개는 시의 고유한 표현력을 유지하면서도, 시적 형식이나 표현 방법을 새롭게 변화하는 방법론을 실험성이라고 한다. 언어의 변화성을 일차적으로 실험시의 가치로 본다. 현대 실험시의 특징은 시어의 기본 단위를 문장(sentence)보다는 시행(line)이라고 한다. 완전한 문장을 통한 의미 전달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새로운 탈격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수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형식과 의미 단위의 변화는 W. C. 윌리암스의 모더니즘 성향에서부터 비롯되어서Robert Creeley가 적극 주장하는 시형식의 파괴성에서부터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성향이 현대 아방가르드 시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표현 단위의 변화는 자연히 구두점(punctuation) 사라짐, 완전한 문장 부정, 단어 및 단어의 연결, 등과 같은 실험적 변화성으로 나타난다. 완전히 통일된 (어느 면에서는 고정된) 의미 전달보다는 항상 열려진 의미 해석, 보다 풍부한 의미의 개방을 위하여 시행의 변화를 추구한다.   또 실험시는 시각(視覺)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거울 앞에 서서 자아상을 바라보는 일차적 평면성보다는 거울 뒤에 나타나는 자아상을 보려한다. 자아를 입체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보려한다. 시인이 스스로 시에 드러나면서 실체를 보이려 하지 않고, 시인 스스로가 다른 시각으로 꺽어진 곳에 숨어있는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시야를 표현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변화성뿐만 아니라, 시를 보는 의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실험시는 시의 초점, 의식의 주체, 시각의 각도가 어디에서부터 쏘아지는지 분명하지 않다. 잉크제트에서 분출되는 간헐천의 용솟음처럼 예기치 못한 의식의 구멍에서 시가 튀어나온다. 이러한 시각의 사각지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 실험시는 마냥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언어적 변화성과 시각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실험시는 이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예술이론에서 근원이 발견된다. 그는 조각가, 화가, 시인으로서 새로운 시론을 강조한다. 시인의 창조행위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된다고 한다. 시인은 단순한 중간자(mediumistic being)로서 예술적 계수(係數)로만 작용할 뿐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시인이 표현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표현이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시라고 한다. 이러한 포스모던한 예술이론에서 현대 실험시의 경향이 예측된다. 시인은 체스플레이어, 창문 닦는 사람,치즈 나르는 사람, 숨쉬는 사람에 불과하기에, 우연히 발견되는 언어에 우연히 미쳐서 환호하는 예술가일 뿐이다. 실험시는 우연히 발견되는 치즈 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언어적 우연성, 예술적 행위성, 영화 같은 극성(劇性), 그림 같은 회화성에서 실험시는 항상 새롭게 변화를 추구한다.   이 외에도 실험시는 항상 전통시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발전한다. 모더니스트 중에서 실험적 성향을 보인 거르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실험적 언어 시, 윌리암스(W. C. Williams)의 이미지 시(Kora in Hell, 1918), 애쉬베리(Ashbery)의 “테니스 코트의 맹세”(1962) 등을 기초로 해서 발전한다. 이러한 모더니즘의 시에서 언어의 리듬과 변화를 통해 소리시(sound poetry)가 탄생된다. 이외에도 실험시의 보편 성향인 사유시(Meditation poetry), 행위시(Action poetry), 언어시(Language poetry), 전자시(Electric poetry)등으로 변모한다.   현대 미국 실험시의 대표 시인으로는 론 실리만(Ron Silliman), 찰스 번스타인(Charles Bernstein), 앨런 대이비스(Alan Davies), 린 헤지니안(Lyn Hejinian), 수전 하우(Susan Howe),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 훼니호우(Fanny Howe), 마크 레빈(Mark Levine), 캐롤 스노우(Carol Snow) 등이 있다.         4. 실험시의 구체적 공통성         실험시의 본능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 발전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기본 공통적 성향을 안고있다. 그 기본 특성을 몇 가지만 추려본다.     1) 사실주의 성향         현대 실험시는 다양한 형태 속에서도, 대개는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준다. 낭만주의의 감성이나 눈물, 서정보다는 현실의 실재적 사실(facts)을 구성적으로 표현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실험적인 포스트모던한 시를 병행하고 있다. 사실적 측면과 실험적 측면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듯한데도, 현실 사회의 현실성을 실험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서, 현대 실험시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시 표현 기법은 “사실 그대로"인데, 이 말은 사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표현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낯선 실험적 기교라도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대로 표현한다. 5개 단어의 미완성 문장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 그냥 자연스레 흘러나오듯이 시를 쓴다. 인간의 보편 감성(죽음, 사랑, 등)에 대해서도 감성적으로 토로하듯이, 추상적 지식을 장식하듯이 표현하지 않고, 모든 감성을 억제하고 사실 그대로 싸늘하게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실험시는 기계적 차가움, 지성적 냉혹함, 노년의 달관성 비슷한 감성의 형태를 보인다. 이것이 실험시의 특징인 객관적 태도, 탈자아적 성향, 원거리 시야 등을 암시한다.   이러한 현대판 사실주의 성향은 자극적이거나, 인상주의적 감흥이나, 수사학적 화려함을 배제한다. 즉 비현실적인 것(irreality)을 배제한다. 시인이 직접 경험하고 상상할 수 있으며, 시인의 표현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언어적 기교를 이용하여 새롭게 시를 쓰면서도 현실적 문제를 사실 그대로 표현한다. 추상적, 형이상학적, 관념론적인 표현을 싫어한다. 시는 살아있는 현실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시인의 개인적 경험과 상상력을 직접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면에서 전통적 사실주의와 별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실험시의 사실주의 성향은 기존 사실주의와는 시 형태나 표현성에서 다른 점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실험시적 사실주의는 사실성을 다섯 개 시어(詩語) 정도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기존 사실주의처럼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어휘를 동원하지 않고, 일정한 어휘 내에서 사실주의 성향을 표현한다. 즉 각 시행이나 일부 문장이 사실주의 성향을 보여주지, 전체 문장이나 시 전체적으로 사실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실험시는 현재성, 현실적 긴박감, 강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실주의 성향을 도입할 뿐이지, 전체적으로 사실주의를 목표로 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다만 도구로서 이용할 뿐이지 목표로 차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실험적 사실주의는 기존 사실주의와 성질상으로 차이가 난다. 여기서 성질적, 기질적 차이점은 언어의 변화성, 의도적인 언어의 비틀어쓰기 성향을 말한다. 실험시는 시 자료(내용)의 사실적 표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언어를 의도적으로 색다르게 표현하려 한다. 전치사로만 시를 쓰던가, 시 구문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려 한다. 내용의 사실적 표현과는 달리 언어적, 구문적 실험 행위가 돋보인다. 실험적 사실주의는 외부 사물을 사실적 묘사보다는 인식과정의 사실적 표현을 말한다. 즉 주제가 되는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수단으로서의 사실주의가 된다.               II. 언어적 요소   사실주의 성향과 동시에 실험시는 언어의 새로운 특성을 추구하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실험성은 모더니스트 시에서부터 뿌리가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언어적 형식 면에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거투르드 스타인(Gertrude Stein), 윌리암스(William Carlos Williams), 루이스 주코프스키(Louis Zukofsky), 존 애쉬베리(John Ashbery)의 맥락을 유지해나간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이 강한 시를 언어시라고 부른다.         a) 언어시   대개 멋진 시적 형식과 내용을 갖춘 시보다는 언어적 변형을 시도하는 실험시를 언어시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시는 시적 문맥(context)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면에서 언어라는 한계성에 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언어의 변형은 시사(詩史)에서 끊임없이 추구해온 노력이다. 모든 시는 언어구조물이다. 언어 구조적 건설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표출하려는 노력은 항상 존재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언어시는 대개 정치에 대한 표현을 많이 한다. 정치가 갖는 인간 지배력을 생각하면, 언어시가 풍자적으로 해체하는 대상이 자연히 정치가 된다. 언어시는 결국 언어로서 현시대의 상황적 의미와 내용을 표출하는 정신작업이 된다. 다만 그 표현 양식이 새로운 언어로 언어학적 변형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감성을 드러내는 형태를 취할 뿐이다.   이렇게 세상사에 목소리를 내는 시는 결국 “목소리 시(voice poem)로 발전한다. 이 유형의 시는 독자와 시인의 쌍방간의 의사전달을 중시하는 시다. 자아 주체적인 시인이 또 다른 자아로서의 독자에게 독특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이 강한 시다. 즉 양자 간의 도전적인 의사통신을 목적으로 중간 색의 언어와 투명하면서도 자연스런 언어를 이용하여서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 시를 말한다. 이 때 시인은 자신의 경험이나 감성을 자신의 메시지로 전달하려고 한다.   언어시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주로 1940-1950 연대에 태어난 시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Toothpick, Lisbon & the Orcas Islands (1973); Alcheringa (1975); Open Letter (1977); Hills (1980); Ironwood (1982); Paris Review (1982); The L=A=N=G=U=A=G=E Book (1984); Change (1985); Writing/Talks (1985); boundary 2 (1986); In the American Tree (1986); "Language" Poetries (1987) 같은 시 전문지에서 시를 발표하였다. 언어시 계통의 시인들은 아직 다양하게 분산된 상태로 각자 시작 발표를 하고 있지만, 현대시 잡지, 비평서 등에서 언급되는 시인은 80 여명 정도가 된다. 최근에는 This, Tottel's, Roof Hills, Miam, Qu, L=A=N=G=U=A=G=E, The Difficulties, A Hundred Posters, Sulfur, Temblor, Sink, and Tramen 같은 시지에서 언어시가 자주 발표된다. 그 중에서 대표적 시인들을 일부 기술해본다. Bruce Andrews, Rae Armantrout, Steve Benson, Charles Bernstein, David Bromige, Clark Coolidge, Alan Davies, Ray DiPalma, Robert Grenier, Carla Harryman, Lyn Hejinian, Susan Howe, Steve McCaffery, Michael Palmer, Bob Perelman, Kit Robinson, Peter Seaton, James Sherry, Ron Silliman, Diane Ward, Barrett Watten, Hannah Weiner 등이 중요시되는 시인들이다. 이들은 후에 언급될 실험시에도 중복되어 활동한다.   이들은 1970년대 이후로 소규모의 언론 및 대담 활동을 통해서 전통적 학문적 비평과는 약간 다른 사회적 홍보 활동, 시 표현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화활동의 과정으로서 시를 전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왕성하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듯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실험시 작가들의 통합된 활동은 1933년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활동하던 실험시인 모임인 흑산파(Black Mountain school) 시인들(Charles Olson, Robert Duncan, Denise Levertov, Jonathan Williams, Robert Creeley) 이래로 가장 정교한 시학파를 형성하는 듯하다. 이러한 활동이 현대 실험시를 급속히 새로운 유형의 시로 정착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스타인(G. Stein)의 영향으로 세상은 정의하기보다는 규정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냥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에서 명사와 같은 고정된 운명론, 결정론대로 시를 쓰지 않고, 인생의 연(緣)의 한 과정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과정론으로 애쉬베리의 시 "나무들(Some Trees)"을 즐겨 인용한다. 이 시를 평하면서, 시인 부루스 앤드류(Bruce Andrew)는 언어와 의미를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내면에 숨어있는 인위적이고 필요한 선택을 자의식적으로 인식해내는 시 쓰기를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전통 언어를 해체하기 위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성향에서 윌리암스의 시성을 답습하고 있다. 언어시를 통해 시는 구체적인 이데올로기의 투쟁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언어시 시인들은 어느 실험 시인보다도 언어에 대한 실험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모든 실험시 특성을 가장 먼저 시도한 시인 그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들의 언어적 시 표현의 특성, 불명확성, 난해성, 혁신성 등은 기타 실험시 작가 군에게 공통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영향성이 언어시를 대표적 정치 표현시로 규정하는 듯하다. 어느 시대이든지 시대성에 반대하는 정치 성향의 시가 존재하는데, 현대에는 언어시가 그러한 정치비판성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해 언어시는 여권운동, 동성애 운동 시처럼 정치 지향적 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언어시의 사회성을 너무 일방적으로 정치성향 시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일례로 번스타인의 시 "쟁기보습판을 들여올려라"를 자본주의 사회의 비판시로 규정할 수 있을까?         간단히 긁기 위해, 생략하라,   노(시간)를 치워라.   흉악한 침수가 모든 최상의   배를 공격한다. 손, 심장은   미끄러지지 않는다, 견고하게   (애처롭게) 떠나간다.         이러한 언어시는 자본주의 정시성에 대한 비평보다는 시인과 독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이해하면 보다 쉽다. 언어시라고 할 때, 대개는 언어에 대한 특별한 태도를 의미한다. 스티브 맥캐퍼리(Steve McCaffery)는 1976년에 “주제의 죽음”이라는 에세이에서 언어시는 특별한 스타일이나 관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중시하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은 언어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시 쓰기를 총칭한다. 이러한 언어적 관심에서 언어시인들은 시인마다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몇 가지 정리해본다.   첫째, 언어적 무의미를 통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새로운 언어적 의미 조건을 개발하는 실험성이 있다.   둘째, 언어적 의미는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과 객관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속내용이라고 인식한다.   셋째,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 이론을 도입하여 언어 특성을 시에 적용해본다.   넷째, 시어의 고정된 의미에 묶이지 않고, 항상 언어의 상관관계를 새로 적용하려 한다.   다섯째, 언어의 물질적 측면(소리, 리듬, 구문 등)을 강조한다. 인식과정에서 형식적 유관성, 의식의 투명한 장소에서 퍼져나오는 의미와 인식력을 표출하려 한다.         그러면 1회분을 마감하면서 언어시를 몇 개 읽어본다. 실험시의 특성처럼 마감되지 않은 새로운 글쓰기의 여운을 다음 호로 넘겨버리면서 새로운 기대와 쾌감을 남겨놓는다.         서론(序論)에서 멀지 않는         엄격한 아름다움 --   개혁 그리고 말살   양자(兩者)를 위한 공간   동시에 하진 않지만   낡음 밑에 지어 논 새로움(Kenning 詩誌, 3권, 1호 발췌)           사례 모음집         1 1 1   2 2 2   3 2 1         분류학의 발명과   제시 -- 좌에서 우로   읽기, 그 순서를 강요하며   남는 것으로 부터               얘기하는 것으로는 시를 얻지 못한다         로저, 네 차례야. 세상은 바보가 아냐!   너가 네 눈을 얻자 광대함은   끈적이는 담요의 벽돌 밑으로 사라진다,   바보들만이 회계과를 감히 쳐들어가지   못한다. 생명보험 계리사의 기와 무늬   (권고하는 비애감)처럼 동작을 취하고,   풍선 같이 부푸는 전구처럼. ... (찰스 번스타인) [출처] (21세기 영미 실험시 산책) |작성자 HUE
289    [공유]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 댓글:  조회:1704  추천:0  2018-05-27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http://blog.naver.com/blackhole68/220975822989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   1. 은유의 개념   은유를 지칭하는 메타포(metaphor)는 일반적으로 희랍어 ‘metapherei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을 살펴볼 때, 은유란 ‘meta’의 ‘초월해서’(over․beyond)란 뜻과, ‘pherein’의 ‘옮김’(carrying)의 합성어로서 ‘의미론적 전환’을 뜻한다. 표현의 측면에서 직유가 외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직접적 비교라면, 은유는 내적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비교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은유는 합리적이고 산문적인 비교를 벗어나 질적인 도약을 통해 두 가지 대상을 동일시하거나 차별화하는 기법이다. 나아가 그 두 가지 특성의 교집합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관계망을 구축한다. 따라서 다수의 비평가들은 은유가 논리를 넘어서는, 혹은 우회하는 사고체계라고 정의한다. 야콥슨(R. Jakobson)은 회화를 예로 들어 아주 명쾌한 주장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3차원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이기에 인위적 방법을 채택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림의 박진감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관습적 방식이 반복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자어와 같은 ‘표의문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일그러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은유에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지각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논지로 요약된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에 대한 정의는 러시아 비평가 쉬클로프스키(Shklovsky)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의 주장은 시가 ‘자동화’를 깨뜨려 버리면서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논리다. 이 두 학자의 변별점이 있다면, 쉬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를 궁구한다. 즉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고 부정하며 무시하고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자동화․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참신한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의도의 산물이다. 어느 한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선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비교조사의 유무에 따른 ‘직유’와 ‘은유’의 구별은 오늘날 크게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극복 방법을 내세운 이는 필립 휠라이트(P. Wheelwright)이다. 그는 자신의 역저인 『은유와 실재』에서 비유가 이미 알려진 것과 체험한 것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제시하는 방편으로 서술의 형식을 지향한다고 단언한다. 즉 A를 이용하여 B를 제시하는 형식은 결국 ‘A는 B다’라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단순한 서술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논리적 제약에 집착하다 보면 시가 지닌 비논리적 특성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볼 때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논리적 관계에 치중하는 비유를 치환(置換, epiphor)이라고 하고, 비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비논리적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병치(竝置, diaphor)라 하여 구별한다. 은유는 본의(tenor)와 매재(vehicle)의 관계가 외면적으로는 결합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성 내지 이화성의 형식으로 드러나며 시의 가장 주된 요소를 차지하는 시적 화법 중의 하나이다.   1) 1:1 치환의 방식   은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하다. 차라리 은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 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가 발견된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은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은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로 치환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하나의 본의에 두 개 이상의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관념이나 대상(본의)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댈 대상(매재)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명백히 가시화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하여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의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형태상으로 보면, 치환이란 용어에서도 드러나듯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치환의 방식으로 구성되는 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본의, 내 마음)을 이미 잘 알려진 정황이나 사물(매재, 호수)로 대체하여 의미론적 전이를 일으키는 은유의 대표적인 전범이다. 야콥슨의 논리에 의하면 ‘옮겨 놓기’란 등가성의 원리에 입각한 계열의 축으로 구성된다. 또한 직유에서와 같이 비교조사가 직접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인 표현에서도 꿰맨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적 표현의 문리가 트이면 트일수록 널리 활용하는 표현 기교에 속한다.   (1) 유사은유   앞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은유는 본의와 매재를 결합하는 구조적 특질을 지닌다. 그런데 습작생들의 시에서는 본의 따로 매재 따로 노는 경우와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이라는 용어에서 ‘결합’이란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합이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어적 관점에서는 어떤 사물에 적합한 이름이 다른 사물로 전이된 형식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와 어떤 유사성도 없다. 따라서 이런 표현은 비상사성 속에서 상사성을 인식하는 정신 행위이며, 또 ‘내 마음’이 ‘호수’로 변환되면서 의미론적 전이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문학 비평가는 물론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도 관심의 초점을 모아온 수사적 기법 중의 하나이다. 두 가지 대상을 하나로 버무려 새로운 영역을 유추적으로 재현해 내는 독특한 세계 인식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은유는 직설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돌려 말하기’인데,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효율적으로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다. ‘유사은유’(類似隱喩)란 본의(T)와 매재(V)가 1:1 유사성을 축으로 결합하면서 공분모를 드러내는 양식으로서 기존의 ‘치환은유’를 좀더 세분화하기 위해 새롭게 명명한 용어이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꽃, 꽃은 열매 속에도 있다   단단한 씨앗들 뜨거움을 벗어버리려고 속을 밖으로 뒤집어쓰고 있다   내 마음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 창문 깨고 투신하듯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 때 꽃이다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속을 뒤집었다, 밖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꽃은 견딜 수 없는 구토(嘔吐)다   나는 꽃을 집어먹었다 ― 유종인, 「팝콘」 전문     상기 인용시에서 유사성의 축은 “팝콘―꽃/내 마음 진창―속/창문 깨고 투신―밖/내 속을 까뒤집은 것―꽃, 구토” 등으로 추출해볼 수 있다. 화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진창이라 캄캄했을 때”(T, 본의)이다. 이것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마음의 상태이지만, “팝콘”(V, 매재)의 특성을 통해 명쾌하게 구상화된다. 화자는 “뜨거움을 감출 수 없는 곳”에서 화자는 자신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새로운 내적 도약을 예비한다. 화자는 “창문 깨고 투신하”듯이 현재 화자는 힘든 상황을 “내 맘을 네 속으로 까뒤집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 같은 표현을 통해 하얀 속살을 내밀며 팝콘으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화자가 말한 ‘꽃’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이 시에서 ‘꽃’은 표면적으로 ‘팝콘’을 나타낸다. 팝콘은 옥수수 씨앗이 뜨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변혁을 이룩해낸 무의식의 표지이다. 나아가 ‘팝콘’은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진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이러한 ‘꽃’을 “견딜 수 없는 구토”라고 표현한다. 즉 밖이/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안은/밖으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화자도 내적인 고통의 분화구가 터져 제 속을 밖으로 꺼내 몸을 뒤집어 쓴 형국이다. 뜨거워 견딜 수 없는 마음은 밖으로 나오고 단단한 몸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고통의 몸부림과 뒤틀림이 꽃이란 몸의 형상으로 동일화되어 새롭게 탄생하는 도약의 순간이다.   쾌락으로 가는 길목에 털이 있다. 궁창이 열리고 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 가장 나중에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털이다. 당신이 떠나고 세상에서 가장 싼값으로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낡은 침대나 주전자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털. 윤기가 잘잘 흐르는 털. 궁창이 열리고 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건 아무래도 풀이다. 땅의 털인 풀. 욕망이 없다면 땅이 풀을 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겠지. 아, 시원해 물 먹고 주전자 옆에 야구르트 먹고 아, 개운해. 날이 저물고 바람이 불면 빼빼마른 창녀들이 잠자리처럼 날아다니겠지. 궁창이 열리고 땅의 혼돈이 시작되겠지. ― 원구식, 「털」 전문   앞서의 시와는 다르게 이 시는 ‘털’(본의)이 ‘풀’(매재)이라는 전이적 은유 구조로 변용되어 있는 수작이다. 털과 풀은 외형상의 조건은 유사하지만, 내용상의 의미는 이질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질성을 축으로 하는 확실한 두 대상의 결합은 ‘욕망=생명’이라는 모호한 주제를 구체화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털은 화자에 의하면 “궁창이 열리고/땅이 혼돈을 멈추었을 때,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인간을/가장 나중에 완성”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털은 “쾌락으로 가는 길목”이나 “인생을 구겨버리고 싶”을 때 “꼼지락거리”는 욕망의 이름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반해 ‘풀’은 “궁창이 열리고/혼돈이 멈춘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완성”시킨 존재로 긍정화된다. 만약 “욕망이 없다면/땅이 풀을/풀이 땅을 간지럽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전자 옆”에 있는 ‘털’과 ‘야구르트’는 “개운해”로 동일화되어 새로운 차원으로 결합된다. 창녀로 야기된 털(음모, 욕망)과 천지 창조(사랑, 탄생)라는 쾌락과 생명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환기하는 특성으로 재조합된다. 동양적 사유와 맞물려 있는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일여적 관점으로 정관한다는 것은 시인의 확장된 의식이 있었을 때만이 가능한 사유 방식이다. 이와 같이 ‘유사은유’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본의가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매재로 전이하거나, 구체적인 대상이 다른 이질적인 대상과 결합하기도 한다. 전자에 속하는 유종인의 시가 불확실한 관념을 새롭게 재생하는 효과를 거둔다면, 후자에 속하는 원구식의 시는 두 대상의 차이를 동일화하여 아이러니한 삶의 국면을 보여준다. 본의와 매재의 결합은 동일성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며,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측면이 중시된다. 이처럼 치환의 방식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사성의 축이 시적 인식과 의미망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2) 이접은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은유를 ‘천재의 상징’으로 보았다. 전혀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공통점이나 비슷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화감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분명 천재들에게만 주어진 신의 특별한 선물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상이한 사물들이 각도에 따라 유사하게 보인다면, 아마 그 유사성은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게 인지되는 공분모의 발견과 다르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들, 예를 들면 ‘노 젓기’와 역에서 바라보는 ‘지나가는 기차’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다양한 영감을 병렬하여 물리학의 수많은 추상적 이론을 완성했다. 또한 그 어려운 이론을 일상적인 은유를 통해 대중에게 쉽고 친근하게 설명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은유는 비유할 의도를 숨기면서, 표면에 직접 그 형상만을 꺼내 보여주는 특질을 지닌다. 시인은 독자가 상상적 유추를 동원하여 그 본질적인 상사성(想事性)을 해석할 수 있는 함축적인 구조를 마련한다. 이러한 은유는 시인의 언어에 관한 인식과 대상에 대한 태도 및 표현에 대한 정신의 긴박감 등이 문제가 된다. 은유가 만일 안이하게 사용되면 이미지가 아니라 혼란만 야기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를 은유의 결정체라고 했을 때, 시작 기술에서 본의(T)와 매재(V)가 1:1 동일성을 축으로 하여 결합하는 동시에 다시 상반된 이미지나 의미로 분리되는 특별한 방식이 바로 ‘이접은유’(異接隱喩)이다. 이 기법은 자연스럽게 ‘낯설게 하기’의 효과도 거두면서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장점이 있어 현대 시인들이 즐겨 구사하는 양식 중의 하나이다.   염소를 매어놓은 줄을 보다가 땅의 이면에 음메에 소리로 박혀 있는 재봉선을 따라가면 염소 매어놓은 자리처럼 허름한 시절 작업복 교련복 누비며 연습하던 가사실습이 꾸리 속에서 들들들 나오고 있네 비에 젖어 뜯어지던 옷처럼, 산과 들 그 허문 곳을 풀과 꽃들이 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상처 하나 없는 예쁜 염소 한 마리 말뚝에 매여 있었네, 검은 색 재봉틀 아래 깡총거리며 뛰놀던 새끼 염소가, 한 조각 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네 구멍난 속주머니 꺼내 보이던 언덕길 너머 보리 이랑을 따라 흔드는 아지랑이 너머 예쁜 허리 잡고 돌리던 봄날이었네 쑥내음처럼 머뭇머뭇 언니들은 거친 들판을 바라보던 어미를 두고 브라더미싱을 돌리고 있었네, 밤이 늦도록 염소 한 마리 공장 뒤에 숨어 울고 있었네 부르르 떨리는 염소 소리로, 가슴도 시치며 희망의 땅에, 가느다란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이 이제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기염소 뛰어노는 여기저기 소매깃에 숨어 있다 돋아나는 봄날 언니의 속눈썹 같은 실밥을 나는 뜯고 있었네 ― 구봉완, 「재봉질하는 봄」 전문   상기 인용시는 70년대의 검은색 몸통의 “브라더미싱”(본의)을 “염소”(매재)로 변용하여 은유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염소”가 봄날 상처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예쁜 염소”(화자)와 응달진 공장의 뒤편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언니)로 양분되면서 화자의 유년시절을 재생해 내고 있다. 인용시의 은유 체계를 세분화해 보면, 유사성의 축은 ① ‘검은 염소―브라더 미싱’/ ② ‘염소의 음메에 소리―재봉질 소리’/ ③ ‘염소의 발자국―재봉선’/ ④ ‘황폐한 거친 들판―공장 뒤’ 등이다. 이에 반해 이화성의 축은 ① ‘해지고 허문 곳―희망의 땅’/ ② ‘상처 하나 없이 깡총거리는 새끼 염소―공장 뒤에서 부르르 떨리는 염소’/ ③ ‘비에 젖어 뜯어지던 산과 들―색실로 곱게 꿰매는 봄날’/ ④ ‘구멍난 속주머니―햇살로 박은 옷’ 등이다. 이 시의 시적 구획은 생계를 책임진 언니의 희생(공장의 미싱)과 그 혜택을 받아 가사실습(학교의 미싱)에 임한 화자의 상반된 삶의 양면이 한 꾸리로써 병치되어 있다. 언니의 ‘고통스런 현실’과 화자의 ‘내면적 상처’가 염소의 울음이라는 ‘재봉질 소리’에 의해 극복된다. 이와 같은 은유는 봄날의 생명력 있는 이미지와 공장의 신산한 현실이 접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화자는 우리 근대사의 음영을 상호 화사하고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한다. 시 속의 언니에게는 암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화자가 “한 조각 천”으로 “해진 곳을 들어 미싱 속으로 봄을 박음질하”고 있는 정황이다. 삶의 간극과 환부를 아름답게 봉합하는 이 은유적 상상력은 낯선 의미 충돌을 유발하는 동시에 “햇살로 박아 놓은 옷”을 상상 공간에서 마름질하며 아름답게 완성된다.   ÷의 달이 호수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되물었다. 구름이 서행하다 몸의 스크럼을 푼 곳은 문자 이전일까, 이후일까? 그녀는 나와 괜히 결혼했다고 트집을 일삼으며 웃었다. 통통 튀던 %들조차 널 중심으로 나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 삐딱한 관점에서 너는 위장 이혼을 종용했다. 그들이 거주한 몸은 빗장뼈를 뽑았기 때문에 헐거웠다. 시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솔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忄에 고착된 그들은 양쪽 도어록을 잡고 울었다. 서로 힘껏 잡아당겨서 열리지 않았다. 예수의 발 뒤꿈치도 뒤집어 볼 수 없었다. 파경을 각오한 호수의 달빛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댔다. 기도로써 뽑아든 평등의 벽을 보았다 ― 강희안 「÷%忄」 전문   인용시는 자아와 대상, 기표와 기의가 긴밀하게 동일화되어 의미를 명징하게 만드는 서정의 순기능이 거세되어 있다.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자아와 대상과의 파열을 겪는 서정의 역기능에 시선이 고정된다. 시인은, 은유를 통해 기호 표현의 양면성에 관심을 모으면서 기존의 세계가 고착화한 관념의 폭력성에 집중한다. 인용한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세계와 불화를 겪는 시적 정황을 초점화하고 있다. 제목은 ‘÷’(이성)라는 수식이 각도의 형태를 달리하면서 ‘%’(기대지평)로 미끄러지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평등이 벽이 되는 ‘忄’(감성)의 형태를 지향한다. ‘수식’이라는 가장 확실한 이성적 세계에서부터 ‘확률’이라는 모호한 가능성의 세계를 거쳐 ‘마음’이라는 가장 불확실한 심리적 세계까지를 함축한다. 인용시에서는 수식을 대표하는 ‘÷’(T)가 유사성을 축으로 하여 ‘호수의 표면에 비친 달’(V)의 형상으로, 확률을 대표하는 ‘%’(T)가 널뛰기의 ‘널’(V)의 형상(혹은 삐딱한 관점)으로, 마음을 대표하는 ‘忄’(T)은 문과 문고리가 되어 서로 “양쪽 도어록을 잡”고 있는 형상(V)으로 은유화된다. 이와는 역으로 이화성의 축에서 볼 때, “÷의 달”(주체)은 호수(객체)에게 “왜 나를 비추느냐를 묻자 그는 나를 비춘 적이 없다”고 진술하는가 하면, “%들”까지도 “널(타자) 중심으로 나(자아)를 취했으나, 한쪽으로 기울었다”는 불화에 봉착한다. 나아가 시인은 “忄에 고착된 그들”(소통)은 “서로 힘껏 잡아당”긴 결과 자아와 기호의 관계가 “평등의 벽”(절연)이 된 심각한 국면을 포착한다. 결국 인용시의 골격은 “결혼했다고 트집” 잡혀 “위장 이혼을 종용”당하고, 결국 “파경”을 염두에 둔 형태로 분리되는 형국이다. 이상과 같은 ‘이접은유’는 동화와 이화의 두 축이 서로 넘나들며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이다. 구봉완의 시가 상반된 삶의 음영이 화해로운 재봉질로 갈무리되는 동일성의 측면을 강조한다면, 강희안의 시는 기호 표현의 양면성을 통해 자아와 대상의 불화감에 주목한다. 유사성과 이화성의 기능적인 측면을 볼 때, 동화의 축은 시적 인식을 새로운 관계망으로 응집하여 시적 골격을 만들어 낸다. 이에 비해 이화의 축은 아이러니한 삶의 보편적 진실이라는 결구를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한다는 특징이 있다. 즉, ‘유사은유’가 단순하지만 감각적이고 명료한 직접적인 이미지라고 한다면, ‘이접은유’는 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유기적이고 긴밀한 다중적이고도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이 다르다. [출처] [공유​] 언어를 창조하는 은유 / 강희안|작성자 옥토끼
    채수영의 시세계    ―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        이선 ​     채수영은 4,000여 편의 방대한 시를 쓴 다작의 시인이다. 2018년 봄에 34편째 시집을 받았다. 한국에서 시집해설을 가장 많이 했다는 평판을 듣는 것도 채수영이 글쓰기를 사랑하며 작가로서 치열하게 저작활동을 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필자는 작년에 채수영의 「장자론으로 본 채수영의 시 세계」 평론을 쓴 후, 이번에 두 번째 시평을 쓰게 되었다. 젊은날부터 여든이 가깝도록 수십 년 동안 쓴 방대한 시를 몇 편으로 한정하여 논평함이 유감이다. 필자는 채수영의 시의 특징을 몇 개의 음으로 나누어 화음을 넣는 반주기법으로 분석하였다.그리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의 환타지를 노래한 아르페지오 기법의 시」로 분류하였다. 비발디의 사계처럼 각각 다른 계절의 조화로운 화음을 펼쳐서 노래하는 채수영 시의 구조를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음악은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화음을 넣을 때 관객의 청각을 아름답게 자극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단일구조보다 복합구조를 가지고 복합 이미지로 구조화했을 때 감각적 미의식이 증폭된다. 아래에 예시된 시를 통하여 그 기법을 논의하여 보자. 아래 시는 채수영의 2017~2018년에 발간된 신간 시집 6권 중에서 13편의 시를 조명하였음을 밝혀둔다.       1. 봄의 환타지, 아르페지오 기법      채수영 시의 매력은 하나의 음색을 내지 않고 다변적이며 다각적인 화음을 낸다. 구조상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시어와 비유는 직선구조가 아닌, 곡선구조와 겹쳐그리기 기법의 복합구성을 하고 있다. 아래 시를 읽고 상세히 논의해 보자.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   옮겨 딛는 발길   하늘을 가린들 그게   슬픔으로 보이던가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   ― 「초록으로 오는 세상을 위하여」 전문     위의 시는 제목부터 봄의 이미지를 노래하고 있다. 1-10행의 간결한 시어들이 한 편의 시에서 러너처럼 연속성을 갖고 수식된다. 행마다 일상적 결어를 거부하고, 다음 행과 배열을 어긋나게 잇는다. 시의 낯설게하기를 실현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새로이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위의 시의 1행 ‘꽃잎에 빗물이 닿으면 뭐가 되는가’는 의문형이다. 그런데 2행의 ‘그렇게 벚꽃이 지는 길을 걸었다’는 1행의 물음에 대한 대답 행이 아니다. 되받는 문장은 전혀 순치적이지 않다. 역행의 문장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 심미적 미의식을 준다. 필자는 이 문장들의 구성과 연결을 ‘아르페지오’ 기법으로 명명하였는데 여러 이질적인 음들이 내는 화음으로 분류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는 다른 시인들이 낱말과 낱말의 언어충돌을 시도하는 것과 달리, 문장과 문장의 이미지 충돌을 시도하여 ‘놀람 교향곡’처럼 음악적 화음을 펼치며 정서를 환기시킨다.   21세기 시와 음악, 미술은 통합적 예술의 형태로 합성되고 있다. 채수영의 시는 미술의 색채요소와 음악요소를 통합하고 있다. 뒤에서 음악적 요소는 또 상세히 언급하기로 하자. 채수영의 시는 화음을 넣어 여러 악상들이 모여 세련된 연주를 한다.   3행-8행을 살펴보자. 행마다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행과 엇박자로 연결된다. 3행 ‘젖어 흐르는 봄날의 나그네가 되어’는 4행 ‘무게가 가라앉는 나무들’과 연결된다. 그런데 4행은 명사형의 결어 부분이 아니다. 다시 5행의 ‘윤나는 푸른 표정 앞에’와 문장이 연결된다. 이와 같이 ‘옮겨 딛는 발길(6행)/ 하늘을 가린들 (7행)/ 슬픔으로 보이던가(8행)’까지 연속성을 가진 문장들이 의문형으로 끝난다. 채수영의 시는 짧은 시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상투어가 없다. 어긋나게 연결된 행들이 아름답다. 필자는 이러한 채수영의 시 창작기법을 곡선구조와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분류한다. 여러 방향의 화음을 넣은 음악처럼 감각적이다.   8행과 9행을 살펴보자. ‘예약을 손짓하면서 다가오는(8행)/ 희망은 그렇게 언덕에 있었다(9행)’의 두 행도 낯설게하기를 하여 어긋난 문장은 비대칭이다. 채수영은 언어를 노련하고 완숙하게 절대 미학을 살려 표현하고 있다.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용트림하여 비비꼬며 다시 살려내어 연결시킨다. 그리고 다음 행과 묘하게 어긋난 문장으로 만나게 한다. 이러한 기법을 필자는 겹쳐그리기 기법이라고 명명한다. 채수영 시의 문장과 낱말들의 비틀림과 낯설게하기는 노래와 연주의 화음처럼 2중구조, 3중구조, 다중구조로 결합되어 화음을 넣고 있다. 짧은 문장들의 행진 속에서 아르페지오 기법의 도드라진 매력을 지닌다. 아래 시를 읽고 다시 논의를 계속해 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   땅을 비집는 아우성이 혁명을   부르짖는 소란 속에서도   사람들의 놀란 표정에도 여백을   채우는 산천은 손놀림이 분주한데   바람은 다시 소식을   전하려 이름을 呼名하는   바쁜 일 사월을 점령하는 오직   푸른 이데올로기일 뿐이네     ― 「4월이면」 전문     위의 시는 봄과 꽃의 이미지를 로 점층적 구조로 표현하고 있다. 확산적 사고의 파고가 높다. 혼합된 이미지들의 합창은 화음이 증폭되어 툭툭, 치받고 올라간다. 임산부와 4•19 혁명의 이미지에서 발상의 전환의 극점을 본다.   1-4행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너무 무겁다. 푸른 잎을 토해내는/ 중량. 임부姙婦의 먼 예약처럼 희망을/ 꽃으로 단장하고 길은 다시 수채화일 때’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임산부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녹색의 배설을 폭발적 이미지로 그렸다. 꽃이 피고, 잎이 난다는 단순한 자연현상을 희망예약으로 표현한 점이 압권이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약속하니 틀림없는 희망예약이다.   ‘신은 실수인지 연신/ 푸른 물을 엎지르느라 정신이 없고’(4-5행) 부분을 살펴보자. 앞다투어 피어나는 잎들의 전쟁, 꽃들의 전쟁을 왁자지껄 보여주는 이미지다. 빠른 템포의 행진곡 같다. 녹음예찬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기 발랄한 이미지가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화음의 극치를 이룬다. 아르페지오 음악기법 시창작의 극점을 본다. 6  -13행의 중심어를 살펴보자.
287    [공유] 은유와 환유에 대한 정리 / 글쓴이 / 씨네필 댓글:  조회:3488  추천:0  2018-05-08
[공유] 은유와 환유에 대한 정리 / 글쓴이 / 씨네필    초보 cinephile 의 블로그 | 씨네필  http://blog.naver.com/caline/60033056869           * 학기 초라서 그런지 갑작 스럽게 이 포스팅이 자주 스크랩 되는 군요(보통 이맘때 소쉬르를 배우죠...웃음), 네이버는 클릭 한 두번으로 손쉽게 포스팅을 퍼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 아마 대다수는 가벼운 맘으로 퍼갔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별다른 노력없이 포스팅 할 수 있는 퍼온 글이나 음악파일 같은 포스트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고민과 공부를 통해 자생적으로 써낸 포스트를 많은 분들이 퍼가시니 고마움과 함께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최근에 다시금 소쉬르와 야콥슨 라캉등을 공부하면서 포스팅 속에 있는 몇몇 오류들(파롤과 기표를 동일시 하는거나 야콥슨 환유이론을 수평이 아닌 수직의 축으로  설명하는등)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 엉뚱한 이야기를 한건 아니지만(엉뚱한 부분이 있다면 야콥슨의 환유 개념 정도일까요? 라캉이나 레비스트로스는 완벽(?)함!) 그래도 분명 오류가 있는건 사실이고 이 포스팅이 갑작스럽게 자주 포스팅을 당하기에, 일단 오류가 있다는 점을 공개해야 할듯 해서 황급히 수정을 눌러 경고문구(?)를 작성했습니다.    이번 학기 '정신분석과 문화'의 기말 페이퍼로 소쉬르, 야콥슨, 라캉의 언어학 이론의 위상차에 대한 글을 작성할 예정이며 그 과정에서 은유, 환유 역시도 다시한번 꼼꼼히 다루어 이곳에 포스팅 할 생각이니 은유, 환유이나 소쉬르, 야콥슨, 라캉등의 학자의 언어학 이론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신 분들은 이 글을 무턱대고 퍼가기 보다는 6월 중순까지 좀 기다려 주시길....(웃음) 2007.04.20        지난 화요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발제를 하면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과는 달리,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순전히 상징적 차원에서 의미가 배제된 순수차이인 시니피앙의 은유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도중, 은유 그리고 그것과 종종 같이 언급되는 환유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이 은유, 환유 개념은 굳이 라캉이 아니더라도 구조주의, 아니 하다못해 문학에 약간의 관심만 있어도-라캉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해도- 종종 접하는 개념이라 굳이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는 기본개념(?)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은유와 환유를 썩 훌륭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비록 아무도 인정은 안하지만(웃음) 자칭 별명 김쉬르(?)에 매번 구조주의 빠돌이를 자청하던 주제에 그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은유, 환유조차도 설명하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매번 그러한 개념들을 ‘당연히 알고 있는 것’ 정도로 대충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에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러한 부끄러움에 고착되기 보다는 다시금 발전하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에서(이 무슨 포지티브 씽킹에나 나올법한 문장인가....) 소쉬르를 출발점으로 은유, 환유 개념을 미약하게나마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아시다시피 소쉬르는 다른 대다수의 학자들과 달리 후세에 남긴 저서나 텍스트는 빈약하기 그지없고, 특히나 그를 오늘날의 구조주의의 아버지의 위치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사후에 그의 제네바 대학에서 그가 담당했던 일반언어학 강의를 수강했던 제자들이 강의 노트를 모아 발간한 ‘일반 언어학 강의’라는 서적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론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소쉬르를 깊게 파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니 구조주의와 관련해서 소쉬르가 제창한 개념 중 중요한 4가지를 꼽자면(이거 원 라캉이 말한 정신 분석학의 4대 근본개념이 생각나는 건 왜지? -_-;) 우선 첫째 공시태와 통시태중 공시태에 우위를 두었다는 점(이것이 훗날 역사와 단절하고 역사를 도표화 해버린 구조주의의 전통과 이어진다.) 둘째 언어를 하나의 기호체계라 생각했고 하나의 기호가 시니피앙(기표)와 시니피에(기의)로 이루어져있듯 언어도 파롤(말로 발화된 단어)과 랑그(단어가 지칭하는 의미)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물론 한번 관계를 맺게 되면 동전의 양면처럼 고착된다.), 셋째는 그런 ‘자의적’인 기호가 의미작용을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기호의 내재한 본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 시점을 조금 바꾸자면 거대한 언어체계 내에서 차지하는 특정한 ‘위치’에 의해서 ‘소극적’으로 정의된다는 것 마지막 넷째가 바로 은유, 환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소쉬르는 그 ‘차이’를 단순히 불규칙하고 난삽합 그물망속의 위치로 바라보기 보단  이후 계열체와 통합체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아주 유명한 문장의 예를 들자면   “고양이가 매트에 앉아있다.”   란 문장이 있다고 하자, 이 문장에 있어서 ‘고양이’란 단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 첫째로 고양이를 대체할 수 있는 같은 계열의 여러 가지 단어 (ex>강아지, 소, 말, 닭, 경우에 따라선 죽은 고양이, 꼬리 잘린 고양이 등등)와의 ‘차이’와 둘째로 하나의 문장 내부에서 고양이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요소(가, 매트, 에, 앉아있다.)들과의 ‘차이’ 때문으로 소쉬르는 전자를 계열체 후자를 통합체로 정의했다. (그리고 전자를 수직의 축, 후자를 수평의 축으로 바라보았다.)    로만 야콥슨은 소쉬르의 계열체 통합체 개념을 자기조 은유, 환유의 개념을 정식화 하였는데(물론 그 전에도 은유, 환유의 개념은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은유의 경우는 어떤 한 사물이나 상황을 지칭함에 있어 그것과 실질적인 연관관계는 없지만 어떤 유사한 이미지를 공유한 어떤 단어로서 그것을 대체하고(ex> 내 마음은 호수요-> 호수라는 단어가 가진 특정한 이미지를 통하여 마음을 수식해야 할 잔잔함, 고요함 등의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동시에 그 단어는 결정적이지 않다.) 동시에 그를 통해 좀 더 다양한 의미작용의 틈을 열어주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환유는 특정한 사물의 부분이나 특징으로 전체를 설명하거나(ex> 한 잔 하자-> 진짜로 잔이라고 하는 물체를 먹자는 의미가 아니라, ‘한 잔’이라는 술을 따르는 용기로 술을 마시는 행위 전체를 설명), 반대로 전체로 부분을 설명하는 것(ex> 청와대는 오늘 xx 했습니다. -> 청와대라는 건물이 직접 말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청와대라는 기구에 속해있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부서의 발언을 청와대라는 상위의 개념을 끌어들여 설명)으로 정의된다. 일단 이렇게 설명해놓고 나니 딱히 그것이 계열체, 통합체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결국 은유든 환유든 특정한 단어가 다른 계열체적 단어로 ‘교환’(다만 둘은 심급이 다르다 전자(은유)가 부분적인 이미지를 매개로 한 ‘동등한 교환' 이라면, 후자(환유)는 부분과 전체의 ‘불평등한 교환’이다. 갑자기 생각난 좋은 예로 500원짜리 동전으로 같은 가격의 음료수나 공책을 사는 것이 은유라면, 500원 짜리를 같은 ‘화폐’라는 이유만으로 천원, 만원, 오십원으로 교환하는 것이 환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되었다는 점에서 계열체, 통합체와 은유, 환유는 분리 될 수 없는 관계이고 나아가서 야콥슨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입각하여 ‘언어의 시적’기능을 ‘이러한 언어의 수직의 축에 수평의 축을 투영하는 것’(이 반대였나....?.....정확하게 기억이...OTL)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리고 야콥슨에 의하여 소쉬르에 발을 들여놓게 된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러한 계열체의 메커니즘에 입각하여 오이디푸스 신화를 분석했는데 그저 연속적인 네러티브의 연속이라고만 받아들여졌던 오이디푸스 신화를 (1). ‘친족 관계의 과대평가’ (2). ‘친족관계의 과소평가’ (3). ‘괴물을 죽임(초인적인 신체)’ (4). ‘신체적 장애’라는 네 개의 축을 중심으로 그 아래로 각각의 네러티브에서 분절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인 신화소들을 계열체적으로 배치하고(ex>예를 들어 (1)의 하부로는 ‘카드모스가 제우스에게 겁탈당한 동생 에우로파를 찾는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어머니 이오카스테랑 결혼한다.’ ‘안티고네가 판결을 어기고 자신의 오빠인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한다.’가 배열되고 (셋은 모두 추상화 시키면 ‘혈연관계의 과대평가’에 수렴한다.) (2)의 하부로는 ‘용에 이빨을 심어서 탄생한 청년들이 서로를 죽인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 랍타코스를 죽인다.’ ‘에테오케네스가 형제인 폴리네이케스를 살해한다.’등이 배치된다.) (1)과 (2), 그리고 (3)과 (4) 각각 계열체적으로 이항대립 구도를 이룬다는 방식으로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를 분석했다. 물론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은 결코 이런 특정한 하나의 신화를 지엽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도데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없지만(사실 난 신화학을 작년 말에 읽었다. 그것도 4권중에 1권만 번역되어있음....ㅠㅠ 덕분에 그전까지 신화학이 그저 이런 식으로 분석만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아 쪽팔려.....OTL) 어찌됐건 계열체와 통합체란 모델은 이런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통해 단순히 ‘언어’의 차원을 넘어서서 신화의 네러티브로까지 확장되어 적용되었고, 나아가서 차후의 구조주의 문학비평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물론 완전히 심급이 다른 이론이 더 많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푸코, 레비-스트로스, 바르트와 함께) 흔히 프랑스 구조주의 4인방으로 알려져 있고 “여러분이 정신분석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소쉬르를 읽으십시오, 단언컨대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현대 언어학의 설립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알아야 합니다.”라는 충성어린 발언을 서슴치 않았던 라캉에게 있어 은유와 환유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프로이트의 꿈 이론에 대한 짧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꿈의 해석’이나 그러한 꿈 이론을 조금 더 간단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는 ‘정신 분석 강의’에서 프로이트는 ‘꿈의 작업(Traumarbeit)’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 대표적인 메커니즘으로 ‘압축(Verdichtung)’과 ‘전치(Verschiebung)’(어디선가는 응축과 전위(이동)라고도 변역하고 있더라...)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프로이트는 꿈을 깨어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의 표상이 전의식에 남아있고 그것이 잠을 자는 동안 수면을 방해하는 무의식적 표상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맥락에서 압축이란 특정한 하나의 표상이 여러 표상들의 연쇄의 교착점에 존재하는 것으로 꿈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이미지로 겹쳐 보인다던가, 꿈의 해석의 유명한 예로서 프로이트가 꿈에서 보았던 식물학 논문이 그와 유사한 다양한 이미지들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를 의미하고, 반대로 전치는 어떤 특정한 표상에 대한 악센트, 흥미, 강도(强度)등이 그 표상에서 분리되어 다른 표상에 달라붙는 것으로서, 꿈에 있어서 그다지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장면의 전환이나(실제로는 그러한 부분적인 개연성이 존재), 역시나 프로이트의 예를 따라 식물학 논문에 달라붙어있는 과거의 표상들의 잔재들이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의 경우 압축, 전치를 환유에 동일시와 상징을 은유에 비유했지만, 라캉은 압축을 은유에 전치를 환유에 비유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어떤 의미에선 ‘자의적인’ 언어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아시다 싶이 라캉은 기표/기의 모델에서 소쉬르가 주로 기의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기표의 우위를 두었고(그의 이론에서는 기표는 기위 위에 위치하며 기표는 대문자로, 기의는 소문자로 표기된다.) 나아가서 둘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관계를 방해하는 가로선을 그려 넣음으로서 철저하게 의미작용이 배제된 순수 차이로서의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한 언어이론을 구축했다.    그가 주장하는 은유, 환유의 개념 역시도 이와 무관하지 않는데, 라캉이 말하는 은유란 기본적으로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하나의 시니피앙을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의 2차 텍스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로서 프로이트가 제자인 융과 함께 처음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 갔을 때 배에서 내리면서 했다고 하는 ‘우리가 페스트를 가져온 줄 저들은 모르겠지?’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페스트’란 단어가 바로 라캉이 말하는 은유의 좋은 예인데 그것을 라캉이 좋아하는 공식으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페스트(S1)                                                                             ------------     페스트(S1)                      정신분석(S2)                    정신분석(S2) ---------------   =>     -----------------     =>     ------------ 페스트의 의미(s1)            정신분석의 의미(s2)                  의미(s2)      즉 페스트라는 단어가 가지는 이미지에 의해 페스트가 정신분석이라는 단어와 일종의 대체이자 포개짐의 방식으로 결합하고 그를 통해서 보다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게 되는 이 라캉이 의미하는 은유의 본질로서, 환유와는 달리 의미를 생산 할 수 있는 은유를 라캉은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라캉 왈“오로지 의미화라는 것은 은유적 차원에서만 나타난다.”)    반면 환유는 하나의 시니피앙이 인접성을 가지고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이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부분에서 전체나 원인에서 전체 혹은 그 역 방향으로의 시니피앙들의 이동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환유는 은유와는 달리 명확한 관련성 속에서 행해지는 기표들의 연결성으로서 은유와는 달리 의미가 발생하지 않으며, 라캉은 이 모델을 들어 최초의 결여(S1)를 다른 기표로 끊임없이 매우려 하는 인간의 욕망을 설명했다.(“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이다.”)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역시 이러한 은유의 모델로서 쉽게 설명 될 수 있는데 아이-남근-어머니의 3자 관계 속에서 어머니의 욕망(남근)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아이는(전자는 기표, 후자는 기의가 될 것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인식하는 어머니와의 관계 외에 좀 더 거대한 금지의 법, 즉 ‘아버지-의-이름(라캉 왈“아버지는 은유다.”)’이 존재하고 어머니의 욕망이 그것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이 경우 ‘아버지-의-이름’은 기표 후자는 기의이다.) 결국 그러한 상황에서 아이는 아버지-의-이름을 ‘어머니의 욕망’이라는 공통  부분을 매개로 받아들이고(그 과정에서 양측의 기의, 기표에 위치한 ‘어머니의 욕망’은 분수처럼 약분되어 사라진다.) 무의식을 가진, 시니피앙에 의해 관통된 주체로 탄생된다는 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의 주요 골자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대략적이나마 소쉬르를 출발점으로 라캉에 이르기까지 은유, 환유 개념을 나름대로 차분히 정리해서 설명해 보았다. 비록 라캉의 경우 웹 페이지 상에서는 그림을 그리기가 참 난감하다는 점 때문에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훨씬 더 쉽게 설명 할 수 있는 것을 괜히 더 어렵게 설명한 것 같지만(웃음) 아침에 학교 와서 노트북을 켜는 순간 갑자기 신내림(글빨)이 내려온 덕분에 4시간도 채 안되는 시간 만에 며칠 전 발제 때의 찜찜했던 기분을 충분히 해소 할 수 있을만한 글을 쓰게 된 것에는 100% 만족한다. 부디 우리 스터디 멤버들은 물론, 이글을 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이글을 통하여 은유, 환유의 개념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웃음)
286    {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댓글:  조회:1839  추천:0  2018-05-05
{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1. 들어가는 말  *( )는 전부 주(注)이므로, 참고할 것. 이글은 2002.7월호에 발표된 글임.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듯, 2차원의 세계는 곡률(曲率)이 없으나 3차원 공간엔 곡률이 존재한다. 그래서 세 각의 합은 180°가 아니라 그 보다 커진다. 여기서 결정론의 환상이 무너진다. 지구는 3차원 공간이며 우주는 다시 4차원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곳에 가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란 형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모든 게 휘어지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들은 지동설 시대에 교육을 받았으며,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라고 배워왔다. 그들은 무슨 무슨 법칙이나 원리를 암기하며 성장해 온 세대이다.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은 어떤가.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치유하고 극복할 대안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시인들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기성세대처럼 비본질적인 문학의 행태에 안주하지 말고, 끝없는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실험의식으로 무장하길 바란다. 기성의 안일에 오염되지 말고, 새로운 상상력의 집을 지어주기 바란다. 그들의 선배들이 실패한 혁명가로 전락했던 원인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혁신이 없는 전통주의에 물들거나 협소한 지방적 근성에 사로잡히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은 70년대에 출생하여, 현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그들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특히 기성세대와의 변별성을 찾기 위하여 쓰여진다. 특히 상상력의 구조를 주목할 것이며, 그들만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특징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작가 선정 및 작품 선정은 《문학과 창작》(2002. 7월호)에 의거했음을 밝힌다.  2.하이퍼 텍스트 세대의 사유  (하이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는 텍스트의 블록들(Roland Barthes는 이것을 렉시아〈lexia. 어휘소〉라고 불렀다)과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킨 전자적 연결점들로 구성된 텍스트를 나타낸다 : 조지 P 랜도우《하이퍼 텍스트 2.0》여국현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14.  하이퍼텍스트는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중심개념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매체와 장르를 초월한, 기존의 인쇄물 텍스트에서 한층 발전된 텍스트 형태이기 때문이다 : 류현주《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 2000. p32.)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으며, 시대의 인식소(episteme)가 변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동요인은 디지털화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때문이다. 이 시대는 중심과 주변, 위계질서, 그리고 선형성의 사상적 토대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그것들을 다선형성, 결절점(nodes)  (결절점(nodes), 結節(결절)이란 살갗 위로 내민 망울이란 뜻. (nod)는 점의 머리(点頭)의 뜻. 따라서 결절점은 그물망의 매듭이나 바둑돌의 점들을 생각하면 좋다. 컴퓨터 전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듭과 점들은 좌우, 상하로의 수평적 확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수직적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얽힌 무수한 관계의 매듭이 결절점이다.) , 링크(links), 네트워크와 같은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텍스트는 기표들의 은하군이지 더 이상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구조, 전복이 가능한 덩어리들, 어느 것이 중심이라고 명시할 수 없는 권위의 파괴를 주장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작가 중심적이거나 구어적, 권위적인 글쓰기의 시대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조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우주 탐사의 놀랄만한 성과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비약적인 발견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나 의 탐사 결과 태양은 태양계를 지키는 노쇠한 왕이었으며,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태양계 밖에는 다시 천만 개의 계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런 사고야말로 유치한 ‘지방적 근성’ (칼 세어건의《창백한 푸른 점》민음사. 1996 에 근거를 둔다. 우주의 비밀이 벗겨질수록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가 우주의 대표성을 지니는 것 또한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세계의 보편적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 독단에 빠져있거나, 세계의 중심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우매한 편견이 바로 지방적 근성이다. 동양의 고사에 요동지시(遼東之豕)란 말이 이런 상태와 흡사하다. (옛날 중국의 요동땅에 살던 농부가 돼지를 길러 새끼를 얻었는데 그중에 흰돼지 한 마리가 끼어있었다. 신기하여 황제에게 진상해야겠다고 황하를 건넜다. 그랬더니 황하 남쪽의 농가엔 흔해빠진 것이 흰돼지 아닌가) 이형기《존재하지 않는 나무》고려원. 2000. p154) 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가 정해진 전형을 요구하거나 권위나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계질서를 요구하는 횡포이며, 거기서 혁명적인 상상력의 신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거울 안에 우울한 표정의 鐵男이 서 있었다  모공에서는 강철털이 솟아올라  온몸이 고통의 전율로 떨고 있었다  차고 단단한 車體와 같은 살갗 위로  꿈꾸는 달빛이 불길한 무늬를 그렸고  강철로 된 손톱이 피부를 뚫고 나왔다  그는 벨벳 커튼으로 달빛을 가려 막고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까닭 없이 배가 고팠다 견딜 수가 없었다  시계를, 핸드폰을, 라디오를,  VTR을, 텔레비전을, 컴퓨터를 먹어치운 뒤  鐵男은 꽃병 속의 도청기와  천장 속에 감춰진 몰래 카메라도 삼켜버렸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군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안의  怪獸들처럼 보였다 패스트 모션으로 움직이는  半人半獸들이 지나쳐 갔다  세계는 鐵男이 움직일 때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곤 했다  골목 어디에선가 외투, 중절모, 가죽 장갑이  빠져나와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킬러들의 螢光 눈빛이 벌레 소리를 내며  대기 중으로 날아올라 그를 찾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무쇠뿔이 솟아 있었다  견갑골 쪽에서도 금속성의 통증이 밀려 왔다  어디선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달렸다 거리의 모든 것들을 쓰러뜨렸고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그의 망치 주먹에  부서졌다 네 바퀴 怪獸들의 연쇄 충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13명의 兒孩들,  부서진 소화전 위로 뿜어져 나오는 물기둥,  찢어진 자동차의 앞자리에서는 용암처럼  눅진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저지선이 설치되었다  앰뷸런스 소리, 경찰차 소리, 총 소리  人間 兵器는 자신의 벅찬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견갑골 위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장이지   장이지의 상상력은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를 실감나게 구현한다. 그래서 낯익은 풍경들마저 낯설다. 저건 기성에서 보아온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한 편의 디지털 영상이다. 그래서 한 컷 한 컷이 속도감 있게 흘러간다. 은 누구일까. 그건 장이지가 발굴해 낸 새로운 짜라투스트라다.  그렇다. 인류문화의 목표는 수평화된 행복에 있지 않다. 더 이상 이상국가란 부재한다. 오직 상황이 인간에게 부여한 고통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개성의 천재, 짜라투스트라만이 필요하다. 그는 시지프스적 존재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문제적 주인공’ (루카치의 용어이다.)  이기도 하다.  때로 파괴는 창조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모두들 파괴를 두려워한다. 그것이 타성과 관습을 낳는다. 전통적이란 미명의 멍에를 씌운다. 그래서 시인은 관습의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현대를 규정하는 담론이 폭력이라면, 더구나 파괴가 절실해진다. 그래서 은 이 시대의 홍길동이며 장길산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라 외로운 대중이다. 다수이면서도 동시에 혼자인 왜소한 인간이다. 현대의 공포와 저주에 맞선 불안한 인간, 그래서 그는 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다. 이 멋진 반전을 보라.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모르는 그는 소외된 현대인이며, ‘통증’을 느끼는 자다. 그는 누굴까. 무잡하고 황량한 시대의 시인, 그 슬픈 초상은 아닐까.  나는 걷는다, 명동의 벽돌로 된 육감적인  길을, 또각 소리를 내며, 그림자를  보며 걷는다, 내 침묵은 뒤뚱거린다,  “베벨 질베르토의 「탄토 템포(Tanto tempo) 있나요?”  묻고 나는 다시 침묵의 날갯죽지를 살핀다,  “만 칠천 원입니다.”, “고마워요.”  말 ‘하는’ 것보다 침묵 ‘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랜, 아주 오랜,  나의 시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독이 든,  나의 한국어는 모퉁이를 돈다, 나의  한국어는 외롭고 異國의 언어처럼  들리고 잿빛이고, 진짜 그렇다,  장이지 중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란 어휘의 작위성, (이 시대가 온갖 작위적인 것들의 결합이나 링크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 삽입된 억지스런 행위들이 그렇다.  내가 장이지의 시를 주목한 이유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그건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낯선 상상력의 힘이다. 좀 거칠면 어떤가. 새로운 세대란 이런 발랄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는 화상 위로 떠오르는 정보들, 문자들, 그리고 다시 소실되는 화면의 구성을 시각화하고 있다. 그쪽에도 일정한 템포가 있을까. 사유의 방황이 존재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템포란 시인의 자기투쟁을 암시한다. 자꾸만 단절되는 언어의 마디처럼 템포는 끊긴다. 끊겼다간 이어진다. 그것이 컴퓨터 화면의 속성이다. 그것은 배반의 언어에 대한 애정이며, 불구가 되어버린 모국어를 향한 연민이다. 그건 시인 내면의 ‘소리’이며 ‘그림자’다.  아니다. 그건 뒤뚱거리는 ‘침묵’이며, 사유하는 점들이다. 이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부호들의 결집은 그래서 시각적 잔상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잔상 효과란 무엇인가. 관습적 의미망의 해체와 중심 허물기가 그것이다.  그 겨울 내내 잠을 자도 羽化하지 못했다. 애벌레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병실 창문으로 간신히 스며들던 햇살을 흰 옷소매로 털어 냈다 어머니 창문 좀 닫아주세요 다알리아 화분을 입에 물고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왔다 약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 날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들었다, 슬금슬금 장미 이파리 위로 기어 다니는 벌레의 뒷다리, 꿈속에서, 신경 세포와 세포 사이로 추락하는 벌레의 신음 소리. 잠자지 않았는데 간호사가 아침 밥을 은쟁반에 담아왔다 자기들끼리 키들거리는 간호사들, 어머니 제발 집에 가서 주무세요  306호 병실 사람들은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들었다 간호사 누나, 잠자는 주사 한 대만 놔주세요 아무 데나 쏟아져 있는 커피의 흔적, 늦게 잠자고 일찍 일어나 병원 앞마당에서 보건 체조 했다 창문 틈으로 나뭇가지가 만져졌다 새벽 이슬에 몸 적시고 있는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옹이 박힌 다리로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나갈 수 없는 새벽, 철문으로 닫혀진 병동 끝에서 성장이 멈춘 나무가 되었다 곪아 가는 상처에 입을 대고 앉아 더 깊은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잠자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걸 보았다  박진성   는 한없이 가벼운 세계, 곧 일상화, 획일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나쁜 피’의 원인은 유전적 형질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책임의 한 끝에 전통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환유인 ‘어머니’가 서있다면, 또 다른 쪽엔 생명의 연장을 위해 복용되지만 결국은 피를 오염시키고 마는 ‘약’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근원적 갈등은 ‘어머니’와 ‘약’으로 수렴되는 현실, ‘병실’로 대치된 감금의 세계로부터 ‘羽化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세계상이란 그래서 환자의 모습이다. ‘약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이나 ‘신경세포 사이로 추락한 벌레’가 그걸 대신한다.  그래서 그 현실은 불구의 모습이며, 뒤틀리거나 어긋나버린 세계다. 잠을 자도 꿈속으로 날지 못하듯 잠자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세계인 것이다. 이 시대란 전광석화같은 스피드, 광고의 유혹과 소비의 충동, 그리고 편리와 안락을 향해 문이 열려있다. 그래서 모든 게 풍족하고 화려하게 빛난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비판적 성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사회라도, 생산된 재화와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과잉된 것은 신의 몫, 제물로 바치는 부분이 되거나 사치스런 지출, 잉여가치, 경제적 이윤 또는 위세과시용 예산이 될 수 있다. 어느 한 사회의 부와 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이처럼 미리 떼어낸 사치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항상 특권 있는 소수의 몫이며, 카스트나 계급특권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장보드리야르《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1. p59.)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것인가. 시인 박진성의 세계관이 미더운 이유를 나는 먼저 밝혀야겠다. 그는 획일화된 욕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 속에서 그가 발견한 건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든’ 현대인의 모습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보편적 세계관, 객관적 질서로부터 이반된 사람이다. 객관적 질서 속에 끼어있는 상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같은 빛깔로 물드는 ‘커피의 흔적’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병든 세계의 환부를 스스로 아파하며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다. 그러므로 그는 외로운 소외자이며, 문명의 은택으로부터 버려진 ‘성장이 멈춘 나무’다. 누가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을까. 어쩌면 그는 진심으로 이 시대를 연민하는 사람은 아닐까.  누가 젊은 세대의 사유를 가볍다고 속단하는가. 박진성은 다르다. 그는 기성세대의 문법에서 확실히 비켜선 채, 새로운 세대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티피컬한 매너리즘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시인과 오브제 사이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보라. 더구나 탄탄한 의미망의 결속력과 결구의 능력도 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진성의 빛나는 에스프리는 그 밖의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당신은 지금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공황장애 안내문 아래서  내 영혼의 인화지 같은 백지를  당신의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 넣고 있다  항우울제의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쓰고 있다  거리에는 신경안정제 같은 눈발 날리고  유성신경정신과 전문의 박동희 의사는 다음 환자  박진성을 찾고 있는데  당신은 계속 편지를 쓰고 있다  항불안제의 불안함과 항우울제의 우울함 속에서  당신은 무덤을 파듯 볼펜으로  종이 위의 내 영혼을 파고 있다  한 삽 더 파면 심장, 또 한 삽 더 파면  心根… 자꾸만 깊은 곳으로  당신의 펜대를 집어넣고 있다  들어오세요 당신의 자리입니다,  좁은 여백 위에 썼다가 지운 글씨를 더듬는다  당신은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푸른 촛불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박진성 〈알프라졸람을 먹기 6분전, 혹은 6년전〉  의 경우를 보자. 시인에게 이 시대란 ‘공황장애’와 ‘항우울제의 날들’로 환기되는 신경질환의 세계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 마침내 시인 자신도 환자가 된다. 문맥 속에 끼어든 시인의 돌연한 출현은 ‘유성신경정신과’란 구체적 공간을 통하여 긴장이 증폭된다.  그러나 시인의 질환이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애매하지만 그 질환이란 바로 시쓰기를 연상시키는 어떤 행위다. 그것이 세상과 변별성을 유지하는 시인의 진실인 셈이다. 심근경색(心筋梗塞)은 관상동맥의 통로가 막히는 병이다. 시인은 여기서 기발한 착상에 당도한다. 심근이 염통벽의 힘살이 아니라, 심근(心根), 곧 마음의 뿌리로 대치되는 것이다.  시인의 질환이란 마음의 뿌리에 이르는 통로가 막힐 때 신경정신과적 질병에 걸린다. 그러므로 그걸 치유하는 길은 ‘종이 위에 영혼을 파’거나 ‘펜대를 집어넣’는 일이며, 그곳이 환자(시인)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수술의 흔적은 결국 ‘썼다가 지운 글씨’인 것이다.  병원은 가스관이 묻힌 사거리를 품고 있다 포크레인은 가스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애완견을 가슴에 품은 미망인은 신호를 기다린다 인부들의 손짓이 기사에게 세밀한 부위를 알려준다 농협 건물의 옥상엔 버리기 쉽지 않은 건축 자재들이 쌓여 미망인은 애완견의 머리를 자식처럼 어루만진다 동네 어귀 그 흔한 소문으로 나는 그녀의 치부를 동정했다 화재는 1년 전 일이다 보도블록의 잡초처럼 발길 드물게 솟는 상처들 섣부른 치기였다 관을 통해 가볍고 충동적인 가스는 땅속을 흘러 다니다 돌발적이다 담을 타고 오르는 등나무 줄기들 집요하다 나는 어제 저 사거리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나의 자학은 막다른 자괴에 있다 인부들은 낮술을 먹고 미망인은 횡단보도의 선을 밟지 않으려 엉거주춤 걷는다 가스관 위로 포크레인은 흙 한줌씩 넣는다 수술 자국 위로 돋은 실밥을 당겨보면 달빛 촘촘히 올라온다 매설은 애증이거나 욕망이다  최승철   최승철의 작품도 새롭고 낯설다. 그의 시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본다. 이것은 최승철의 바로 앞세대 시인, 박정대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최승철은 박정대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과 암호를 몇 겹으로 매설하거나, 이야기를 집요하게 숨기는 은유적 전략이 그것이다. (박정대(1965~ )의 『단편들』(세계사. 1997) 속엔 〈거울 속에 빠진 양조위〉〈아비정전〉〈동사서독〉〈타락천사〉〈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등, 영화를 소재로 하거나 영화의 주변을 탐색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박정대가 기존의 영화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최승철의 이 작품은 시적 암시와 은유적 전략을 채용하여, 하나의 시나리오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시인은 왜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걸까. 그는 시적인 것의 마지노선, 시적인 상황과 비시적인 문법의 아슬한 경계를 안다. 아니다. 어쩌면 최승철은 시와 소설의 장벽을 허무는 시, 시와 영화의 틈새를 메꾸는 시, 그런 새로운 장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반드시 최승철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양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는 그만의 실험에 골몰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시적 실험이 특히 이 시대 시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누가 영상미학을 거부할 것이며,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한 영상을 간과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시와 영상은 상상력의 보완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시의 독특한 아름다움 또한 이런 영상 효과에 있다.  화소를 이루는 이 시의 구성방식도 특이하다.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거나 딴전을 피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거나 비약적인 연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게 하거나, 다양한 경로의 유추를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글을 쓰는 나 또한, 다양한 경로의 유추 가운데 한 경우를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먼저 ‘가스관’은 ‘가볍고 충동적인’ ‘욕망’의 집결 장소다. 그것은 ‘등나무 줄기’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이며 ‘집요하다’ 중심 인물인 ‘미망인’은 ‘선을 밟지 않으려’고 바장이지만 위태롭고 힘겨워 보인다. ‘선’은 물론 탈선을 암시한다. 그녀는 ‘흔한 소문’으로 시달린다. 그 소문의 은유가 1년전의 ‘화재’다. 화자에겐 그녀의 치부마저 ‘동정’의 대상이다.  이제 잘 꾸며진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서부터 시인의 상상력이 거침없이 빛을 발한다. ‘나’는 가스관이다. 아니 등나무 줄기다. 그래서 1년전 화재와 시적 화자는 깊은 관계를 지닌다. 그녀의 상처가 사실은 나의 ‘수술자국’이었으며, ‘포크레인’의 흔적이다. 소문의 잔해인 ‘화재’는 가스관이 묻혀있는 한 언제나 재발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화재는 ‘달빛 촘촘히 올라’오는 충동, 혹은 ‘애증’이거나 ‘욕망’인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뒤엉킨 매설의 경로란 이처럼 상징적 인서트들, 또는 은유적 회상 화면으로 강화된다.  보이지 않는 나리, 나리, 개나리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아 고마운,  다음 생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독한 悽然  마디마디마다 곧 떠나도 될 날들  황사 속으로, 선잠 속으로 하늘이 내려와 또아리 틀면  잔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열어  뭉게구름 같은 나비떼 만날 수 있으려니  나리, 나리, 개나리 속으로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  문득 다운 받은 봄 하늘에 봉분 쌓여  서러워진 자리, 나리, 나리, 개나리  최승철 〈개나리 입에 물고〉 중에서  이같은 최승철의 연상력은 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연상기법은 추억을 객관적 상관물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잔 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연다거나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에 에 이르면, 그의 투사능력이 얼마나 정밀한가를 눈치채게 된다. 새로운 시대의 시는 구문법이나 상상력 자체가 이처럼 새로워야 한다. 응당 최승철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1.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신작로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었다. 짚가마니 썩은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 아래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 검은 뒤통수에 대고 나는 물었다. 저기,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셨다. 아버지는 구멍, 숭숭 뚫린 메주통, 곰팡이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에서 달이 돋았다. 받아라 네 어미다,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여자를 엮어 내 목에 걸어주셨다, 어머니.  2. 첫사랑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최금진   최금진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품이다. 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달이 가리워지는 자연의 신비다. 은 많이 쓰여진 소재다. 그중에서도 김명수의 (1977)이 돋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금진의 은 그 시와도 다른 각도의 신화적 상상력을 지닌 시다. (김명수의 「월식」(1977)은 사나이인 지구가 곧 가해자이며, 여성인 달이 곧 피해자로 설정된 심리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침해를 받음으로써 비로서 완성된다는 에로티즘의 차용도 볼만하다. (이경교《즐거운 식사》두남. 2002. pp45~46을 참고할 것)  이에 비하여 최금진의 「월식」(2002)은 지구의 그림자와 달의 겹침을 남녀의 성교행위로 대담하게 대치한다. 이때 성교는 남성의 죽음으로 그려지며, 성교의 유사행위로 수음이 연상되는 등, 앞의 시보다 공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최금진은 신세대적 주술을 즐겨 쓴다. 그만큼 언어운용도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미 독자적이다. 신세대 시인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바로 이런 독자성의 구축이다.  에서 달은 어머니이며, 월식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독특한 기억이다. 어머니는 과연 죽었을까. 그러나 그건 불분명하다. 달이 여성의 상징인 것은 오래된 관념이다. 그래서 월식과 여자의 죽음을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럼 죽은 여자는 어머니였을까. 그것도 애매하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성이 또한 현대시의 특징이다.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란 질문은 고도의 메타포어다. 그것은 월식의 종료와 함께 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교 장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박상륭이 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성교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경교〈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위하여〉위의 책. pp268~277을 참고할 것)  이러한 징후는 문맥 속에 치밀하게 삽입되어 있다.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는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건 바로 여근 속에 흡입된 남근이미지다. 달에 의해 삼켜졌던 아버지가 뱉아지는 순간은 월식의 종료 시점이며, 그것은 죽었던 어머니의 부활 시점이다. ‘받아라 네 어미다’가 그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지구의 대치이며, 어머니는 달과 동일시 된다. 더구나 ‘썩은 냄새, 메주, 곰팡이’의 냄새가 환기하는 성적인 무드는 으로 계속 연장된다.  에서 월식은 화자의 성적 욕망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에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동일시다. 그것은 달밤에 이루어진 ‘수음’에 대한 연상이다. 그 연상이란 행위하고 싶은 욕구와 수음으로 끝나버린 체험 사이에 달처럼 떠있다. 수음 순간의 몰입을 ‘깜깜해졌다’고 말한 것은 달이 곧 여성이며, 여성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월식의 어둠이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성욕이란 일종의 살해의식인 셈이다. 그러나 달과 내가 한몸이 되는, 곧 배설의 순간, 내가 그런 것처럼 달 또한 제빛을 회복한다. ‘내 몸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석유냄새’와 ‘꽃물드는 밤’이란 배설의 기억이며, 월식에 대한 뜻밖의 해석이기도 하다.  드라마적 구성과 상징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이채롭거니와, 감각적인 해석은 그의 뛰어난 자질이다. 에서 ‘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이라거나 ‘비릿한 석양’이라고 말한 것도 모두 이런 자질의 산물이다.  3. 주변인들  (여기서 주변은 변두리(outskirts), 변방 등을 뜻하는 말로 중심(中心)과 반대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주변은 고정이 아니라, 유동적 태도이며 정신이다. 전근대적 사유의 출발이 중심 세우기에서 비롯된다면, 정보테크놀러지 사회의 특징은 중심의 해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출발은 로고스 중심주의를 무너뜨린 탈구조주의에서 그 전조를 찾을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이 유목민에서 출발하듯이 현대의 네티즌들이 웹써핑에 몰두하는 행위는 신유목민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이 바로 주변인적 특성이다. 역사와 문화를 순환의 과정으로 볼 때, 문화는 중심의 옹호가 아니라, 주변의 탐색에서 그 풍요로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시와 시의 생산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태도들이 그것들의 환경을 제공한 특정한 형식의 정보테크놀로지와 시적 기억의 테크놀로지에서 산출되었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그 시대 문화적 바탕에 기대어 읽고 쓰며 사유하는 주변인들인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 것은 상황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감지하였으며 주변인적 숙명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정보의 테크놀로지는 일깨운다. 현대 물리학의 한 정점에서 타자중심적 사고, 곧 혼돈이론과 만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시가 나가야할 방향도 여기서 찾아진다. 나를 앞세울 때 시는 이야기로 전락하며, 장황한 설명으로 퇴행한다. 따라서 말만 많아진다. 그래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허하거나 공소한 넋두리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결정론의 허울만 남게 되는 셈이다.  미래의 시는 선형성이 아니라 다선형성을 지향해야 한다. 진리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변을 주목해야 하며, 타자중심적 세계관을 배워야 한다. 더 이상 환상은 실재의 반개념이 아니라, 실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자각하자. 시적 상상력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우주, 지하핵이나 바다밑을 향하여 뻗어나가야 한다. 시의 형식과 내용도 다채로우며 자유분방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유형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독자나 평론가의 구미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 근거를 밝히면 이렇다. (강한시는 상식적 삶과의 관계나 요구로부터 분리된 영역 안에 존재한다.) Rorty : Beyond Postmodern Politics. Routledge. 1994. p48.)  (독자로서의 대중이나 독자로서의 평론가들은 작품의 1차 생산자가 아니다. 더구나 대중에겐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을 뿐 창조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경교. 앞의 책. pp298~299 참고할 것.)  가능하다면 과거와 전혀 다른 실험의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에게 이 점을 당부하고 싶다.  사랑이란 별 게 아니더라구요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라는 세 가지의 화학물질이 분비돼 형성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이죠 이 화학 물질이 분비된 뒤 2년 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화학 물질 생성이 느리다고 하지요 당신 남자의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는 지극히 이성적이지요 2년 뒤 당신 남자의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는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잖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 시간이 약이에요 2년 뒤에는 당신에게도 항체가 생성될 테니까요  박서진   박서진의 상상력은 분업화 시대, 인터넷 혁명의 시대 상상력이라 부를만 하다. 세밀한 분석, 하나의 관념을 집중적으로 분해하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개념이 정밀화, 속도화된 인터넷 정보의 산물이며 소프트 웨어 시대의 반증이다. (여기서 비트(bit)와 나노세크(nano sec) 비트(bit)는 컴퓨터의 데이터 통신상 최소단위. 인간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세포에 해당하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 원자와 흡사한 개념. 나노 세크(nano sec)에서 sec는 second, 즉 ‘초’의 약어. 나노는 그와 반대로 아주 짧은 찰나에 비견될 수 있다. )  로 상징되는 단위의 축소와 시간의 축소가 가능해진다.  이 시대란 통합이 불가능하며, 전인(全人)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감성적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대신, 과학적 정보방식으로 사랑을 대치한다. 느린 템포의 시적 진술은 정보를 유출하기 위해 시인이 차용한 전략인 셈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원거리에서 조망하던 과거와 달리, 그는 세포와 분비물에 대한 감응, 그리고 시간과 항체의 상관관계로 사랑을 해부한다. 가히 현미경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사실은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작품 에서 소리와 시간을 집요하게 추적한 태도도 바로 그것이다.  컴퓨팅의 특징이 모든 정보를 물질적 표면 위에 물질적 표시로 저장하기 보다 전자적 약호들로 저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박서진의 시에서 독자가 만나는 ‘사랑’의 경로는 여러개의 블록들과 연결점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텍스트성이다. 독자들은 그의 시와 연결된 가상적 링크 속에서 자극과 반응을 나타내면 될 뿐, 어떤 결정도 유보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연은 거슬린다. ‘슬퍼하지 말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에서 독자를 간섭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우리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형적인 설명이다.  열린 시의 가능성이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상상력이라 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디지털의 속성이라면, 그렇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는 앞의 시들과 달리, 너무나 구시대적 발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막이 오르자  한 남자가 칼을 갈고 있다  푸른 부싯돌에 달빛이 서리고  쭈그린 남자는 비장했다    남자는 아직도 칼을 가는데  수염이 허연 그의 사부가 무대에 나와  한수야, 네 원수는 이미 늙어서 죽었다  와하하하하!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는데  방청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폭폭한 얼굴로 대문을 열어주려  꼬부랑 꼬부랑 걸어 나온다  박수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적들은 구름 보다 빨리 늙고  나는 그 비운의 칼잡이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저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저것은 누구의, 칼자국인가  이지현   젊은 시인들의 감각은 역시 다르다는 느낌을 이지현의 시에서 본다. TV에서 본 프로그램도 시가 된다. 이지현의 문장력, 어휘구사력은 새롭다. 그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첫 번째 자질이다.  시인에게 한맺힌 원한이란 무엇이며, 원수는 또 누구인가. 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 전제가 주어진다. ‘원수’란 표적의 상실과 ‘박수’ 사이의 허탈감이야말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차연’을 떠오르게도 한다.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다니! ‘무사’와 시인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원수’의 자리에 대치된 ‘아버지’의 등장을 기억하자. ‘적들은 구름보다 빨리 늙’는다지 않는가.  저질 코메디는 어떻게 고상한 시가 되나? 여기서 시인의 재구성 능력, 소재를 버무리는 독특한 안목과 만난다. 제2연을 날렵하게 끼워넣어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도사린 트라우마를 부각시킨다.  이거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다.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며 에토스에 대한 전복적 반격이다. 이 시를 새로운 충격으로 흡수하게 하는 힘은 이러한 전복에서 우러나온다.  그것은 습성화된 관습을 빗나가게 만드는 시인의 분방한 상상력 때문이다. 이것이 젊음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로 환유된 기성에 대한 적의조차도 눈부시다. 권위와 폭력에 대한 그 저항은 아름답다. 의당 젊은 시인은 그래야 한다.  그러한 신세대적 감수성은 마침내 ‘신은 발이 네 개’란 잠언을 낳는다. 하지만 은 지난 시대로 갑자기 퇴행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형도식 우울과 감상으로 몸이 쏠린 탓이다. 시인의 모습이 갑자기 왜소해진다.  나뭇잎 아래로 여자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큼지막한 잎사귀를 젖히고 간다.  여자가 지나간다.  파란 열매가 송이송이 맺혔다.  여자는 잎사귀 아래로 지나간다.  바람은 불기도 하고  안 불기도 한다.  대신 여자의 소매 없는 원피스가 하얗게 나풀거린다.  여자가 지나간다.  달콤하고 물기 가득한 열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저 가고만 있다.  여자가 벌써 저만큼 가고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문지방을 밟고 선 그것처럼.  자꾸 저만큼 가는 여자는 조그맣기도 하다.  윤예영   윤예영의 작품에선 미로찾기, 혹은 수수께끼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생활양식이란 본질적으로 수수께끼의 영역이며, 삶이 미로찾기의 과정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풍경이란 우리 눈의 조리개를 거치는 동안 수용되거나 배제된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 자체가 이미 선택적 여과를 거친 정신적 현상이다. 이 시는 시인의 해석에 의해 새롭게 의미화된 내면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숨은 그림의 음화와 양화처럼, 의미는 담담하면서도 신비롭게 교차된다. 나뭇잎과 여자가 길 양편으로 펼쳐지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아니다. 길을 이루는 건 열매나 아지랑이다. 아니다. 길을 가는 건 여자다.  컴퓨터 화면 위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동영상처럼 시인은 일체의 관여를 자제한다. 시인의 판단은 유예되거나 정지된다. 이러한 에포케의 설정이란 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직결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긍정과 부정의 교란일까. 양가치적 심리의 착란일까. (희랍철학에서 유래된 판단중지(epoke)와 심리학에서 ‘망설임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양가치 심리(ambivalence), 그리고 혼돈(chaos) 이론의 중심개념인 비예측성 사이엔 놀라운 일치와 유사성이 엿보인다. 서로 다른 학문의 영역 안에서, 서로 이질적인 동기와 개념으로 만들어진 이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수렴하려는 의미는 인과론적 결정론과 확실성에 대한 부정이며, 실재와 법칙으로 규정되는 리얼리즘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걸까. 자연의 요소들, 모든 대상들, 이 시대를 구성하는 의미들,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확정할 수 없으며 예측불가능한 비예측성을 전제로 한다. 시인의 안목이 이런 배후를 지니고 있다면, 그의 사유는 신뢰할 만 하다.  를 보면, 나의 이런 예감은 어느 정도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양파를 ‘자기를 벗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대상으로 해석한 걸 보라. 이 시인이 차용한 미로와 수수께끼는 감각의 편리함을 떨쳐냄으로써, 얻어진 성찰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화적 발상이 장황한 설명과 뒤엉킨 건 이해할 수 없다. 지루하거나 공허하다는 건 깊은 고민만이 풀 수 있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소리 하나가 나의 뒤꼍을 슬그머니 지나간다. 발길 뜸한 영선암 처마 끝에 깃들이는 풍경 소리 같은 영혼이 마음의 목젖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깃을 턴다. 뒤돌아보니 블라인드 몇가닥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나부끼는 바람의 속살을 파고들고 있다. 할퀴어대는 손톱질이 격렬하다. 끌어안는 손아귀의 힘줄이 완강하다. 보지 않고 들을 때에 한없이 부드러웠던 가락, 영혼의 목젖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던 소리의 배후가 서울 한복판 빌딩의 9층 창턱에서 찢겨 너덜거리고 있다. 저 소리의 참혹한 장면을 맞바라보는 순간, 이로써 관계 하나가 시작되었다.  김지혜   존재란 관계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타자의식에 대한 주문이다. 물론 관계의 양상이란 복잡하고 미묘하다. 시인이 포착한 것은 뜻밖에도 ‘소리’와의 ‘관계’다. 그리고 그 소리의 배후에 ‘바람’이 있었다는 확인이다.  바람은 남성성으로 각인된 그리움이거나 상처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을 뒤흔드는 아니무스이거나 ‘격렬함’으로 환유된 체험이다. 김지혜는 느낌을 구상화하거나, 하찮은 장면을 전의식의 깊이로 확장하는 연상능력이 뛰어나다.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야말로 이 시대의 정서에 부합된다. 현대성의 두드러진 한 징후를 성(性)으로 간주할 때, 그 미세한 감각의 세부 속엔 에로티즘이 숨어있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미지의 행간에 이야기를 삽입하는 테크닉도 수준급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이런 부류의 시들을 우리는 80년대 중반이후 많이 읽어왔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자기만의 깊은 철학성이 길러진다면, 우리 시의 미래도 얼마나 빛날 것인가.  기쁨의 하늘로 뻗은 팔만큼 슬픔의 물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반짝이는 잎새와 흩날리는 가지를 가진 나는 이따금 물 속을 응시한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풍성한 물이끼를 헝클어 다슬기와 버들치를 감추어주고 부드러운 진흙을 풀어 바닥을 가려 준다 슬픔은 천천히 가라앉는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빛은 물을 거울로 만들지만 어둠은 물을 뚫어 보는 눈을 갖는다 나는 빛과 어둠 속에 뿌리내리고, 슬픔을 길어 올려 파릇파릇한 잎새를 피워 낸다  이수정   보들레르는 교감의 특징을 매음의 상태로 풀이한 일이 있다. 이 경우 그는 대상과 시인의 영혼이 한몸인 상태를 꿈꾸었을 것이다. (보들레르(Baudelaire)는 교감(correspon dance)의 1차적 특징을 매음(prostitution)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붕구. 보들레에르. 문학과 지성사. 1982. p117〉)  이때 매음의 상태란 성교의 순간처럼, 자신과 상대방의 경계를 잊는 무아지경을 뜻한다. 좋은 시 속에서의 교감운동은 이처럼 시인과 오브제가 한 몸을 이루어, 감정과 감각이 온전히 교환하는 것이며, 교류하는 걸 뜻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이 흘려야 하는 감각의 피는 어떻게 보상을 받을 것인가.  이수정의 시는 완벽한 교감을 보여준다. 시인과 나무는 이미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잎새의 꿈이 깰까 두렵다. 시인과 나무는 한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무다.  시인에게 향일성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감의 세례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자리가 그곳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상태 또한 쉽게 오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묻는 시인의 내면은 감상의 눈부신 절제에 다다른다.  그래서 어조는 나긋나긋하며, 정서는 따스하다. ‘슬픔은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독자인 나 또한 시인과 둘이 아니란 착각에 빠진다. ‘물을 뚫어보는 눈’을 통해 ‘우는 새의 슬픔이 하늘 끝으로 가서 묻힌다’ 는 걸 보았으리라. 터질듯한 정막의 힘, 독자의 감성을 뒤흔드는 힘, 그건 이수정의 무기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혹한 부탁이 있다. 이건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나의 애정이란 걸 헤아려주면 고맙겠다. 이글의 테마는 젊은 시인들에 대한 변별성 찾기다. 지금까지 그걸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젊지 않다. 전대와의 차별성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전통이란 명분에서 보면 이 시는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전통은 언제나 침전과 혁신의 상호작용이란 사실을 잊지말자.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나를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동그란 나의 방도 같이 매달아 주세요.  봄이 맴도는 가지 끝  맺힌 목련 봉오리 옆에 나란히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너무나 말개서 아무나 들여다 볼 수 있는 나의 방은  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를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높고 높은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햇볕이 나의 방을 동그랗게 데우면  가장자리부터 한 숨씩 한 숨씩 날아가고  나만 가지 끝에 매달려 있겠죠.  한때 내 방이었던 투명한 잔해들이  주위를 떠돌다가 소멸되는 걸 바라보며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飛) 연습을 할거예요.  완고하게 움츠린 목련이 피어나는 날, 함께  윤지영   윤지영의 감수성은 예쁘다.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시인의 열망은 혁명적이다. 어항을 거부하는 물고기를 통해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집이 물이라고 하는 등식 또한 하나의 상투적 관습이다. 그걸 새롭게 바라보면 물은 물고기의 생존공간이 아니라, 물고기를 억압하는 감옥이다. 노자에 ‘물고기는 물에서 죽는 놈이 더 많다’고 했던가. 젊은 세대의 시를 죽이는 것이 혹시 그릇된 전통주의는 아닐까. 전통주의란 더 이상 안온한 거처가 아니다. 그래서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죽이는 건 무얼까. 시인은 시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지만, 시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은 아닐까. 물고기가 물이라고 하는 약속의 땅을 떠날 때, 시인의 빛나는 투쟁은 새로운 상상력의 거처를 마련한다.  물고기가 나무를 그리워하거나, 목련처럼 꽃피고 싶을 때, 그건 바로 상투성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는 시인의 욕망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시는 어떤가. 지나치게 단조롭지 않은가. 그러한 단조로움이 마음의 평화를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 평화가 더 이상 변화의 시대를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거듭 밝히거니와 새로운 세대 시인들은 낯익은 정서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개성이란 바로 변화와 혁신을 의미하며, 그러한 혁신의 몸부림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시의 미래 또한 과거의 반복만 남는다.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이 유념해야 할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세계나 대상을 향한 포커스를 좁혀보자는 것이다. 광범위한 시야, 전인적인 태도, 느슨한 감상주의, 권위적 발상 등은 이 시대의 사유와도 크게 어긋난다.  사실은 포커스가 세부를 지향할 때만 개성적 표현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 광범위한 시선이란 보편적 테마란 말과 짝을 이루며, 축소되고 정밀한 발상은 개성적 인식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4. 주문들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관계없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몫은 역시 젊은 세대의 시인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혁명 이전의 세대를 추종할 명분이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요구해선 안된다. 이미 전 세기와 구별되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진행중인가.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건만 문학만은 언제나 유유자적이다. 하지만 전대의 사유에 머물기엔 한 세기가 너무 길다. 아니다. 일 년도 너무 길다. 여러분 스스로 새시대적 이념을 창조하라. 창조적 파괴란 빠를수록 좋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파괴다.  아직도 전시대의 문턱에 안주하거나, 그 시대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새로운 세대의 시인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핍박하거나 억누를 권리가 없는 것처럼 젊은 시인들 역시 그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할 이유가 없다.  시는 설명과 이해의 수순이 아니라, 수용과 감응의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상상력이 그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하더라도 기성세대여,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새롭지 못한 걸 나무래자. 우리에겐 신인을 제대로 알아보는 이 필요한지 모른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며 나는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형식적인 칭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 새 세대 시인들의 전향적 자각 여부에 우리 시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글은 명지대학교 이경진교수의 글입니다. [출처] 전환, 하이퍼, 파괴 |작성자 caea 키즈  
285    둥지 댓글:  조회:1854  추천:0  2018-05-04
둥지 / 강려     "이슬알 품은 제비꽃한테 초록잎이 둥지래" 솔바람 솔솔 귓속말 하네     "흰구름알 품은 물오리에겐 강물이 둥지래" 붕어 뻐금뻐금 동그란 입 벌리네     "새싹알 품은 나무가지에겐 봄나무가 둥지래" 참새 짹 짹 노란 부리 놀리네   2018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양배추와 애벌레”에 실린 발표작입니다.
284    꽃밭에서 . 2 댓글:  조회:1794  추천:0  2018-05-04
꽃밭에서 .2 / 강려     장미꽃이 붕붕 칭얼대는 꿀벌녀석 사알짝 업어줍니다     채송화가 팔랑팔랑 보채는 나비녀석 살폿이 안아줍니다     솔바람이 초록잎에 달랑이는 아기이슬 솔솔 다독입니다   2018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양배추와 애벌레”에 실린 발표작입니다.
283    오리 댓글:  조회:1702  추천:0  2018-05-04
오리 / 강려     어머 ! 익힌 조선어 귀기울려 들어보면 박 박 박     어머 ! 익힌 수자 련못에 쓴걸 보면 2  2  2      어머 ! 익힌 영어 강물에 쓴걸 보면 Z  Z  Z    2018년 연변인민출판사 아동문학작품집 “양배추와 애벌레”에 실린 발표작입니다.
“나무”의 사유와 “풀”의 사유로서의 시들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主幹)       - 김행숙「포옹」( 계간 『서시』 2008년 겨울호)   - 김  산 「월식」( 계간 『문학마당』2008년 겨울호)   - 서영처「숲새」( 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심보선「잎사-귀로 듣다」(계간 『문학·선』2008년 겨울호)   - 이영옥「 물방울의 역사」(계간 『시작』2008년 겨울호)   - 김연아「모래시계가 있는 방」(웹진 『시인광장』2008년 겨울호)   - 이성목「한지에 수묵」(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이재훈「대황하」(계간 『딩하돌하」2008년 겨울호)   - 이정란「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계간 『시로 여는 세상』2008년 겨울호)   - 김성규「수열」(계간 『시와 사상』2008년 겨울호)   - 박정대「슬라브식 연애」(격월간 『유심』2009년 1~2월호)   -----------------------------------------------------------------    작가로서 사유배경을 서양에 두느냐 동양에 두느냐의 입장은 기호와 공부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사상사를 과거에 주마간산으로 일독을 한 바는 있으나 나는 동양사상을 더 선호한다. 서양의 최신사유라는 것도 알고 보면 불경이나 노장에 이미 들어가 있는 개념인데 지금시대의 용어로 말만 바꾸어 심오한 척 하는 서양이론들이 싫어서 가급적 안 쳐다보기로 작정하고 있다. 주위 문인들이 인용하는 작가중 라깡은 좀 읽어보았으나 들뢰즈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나희덕 시인이 대전의 백북스 클럽에 초대되어 강연을 하면서 요즘 읽은 책으로 질.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디알로그』를 언급했다. 나 시인이 입문서로 괜찮다고 해서 “그래, 이 책을 읽어보고 괜찮으면 『천개의 고원』과 『차이/반복』도 읽어보자” 작정하고 주문해서 읽어보니 이 작가는 사유에 반골기질이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뢰즈는 헤겔 데카르트 마르크스 프로이드 같은 정치질서의 지배사유를 싫어하고 스피노자 흄 베르그송 니체의 사유를 지지한다. 들뢰즈는 삶/생명을 숭배와 생성을 위한 ‘유목민 사고’와 ‘풀의 사고’를 케이스로 들었는데 기존의 지배담론에 대한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하는 리좀(Rhizome)의 개념을 도입한 점은  그런대로 흥미로웠다.    어떤 이론도 현실을 떠난 모델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관점에서는 들뢰즈도 약점이 있다. 정착민이 아닌 유목민의 삶을 이상향으로 하고 있으나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법과 자본의 질서아래 중세의 농노를 연상케하는 정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땅이 없으면 존재기반이 무너지는 농노처럼 현대인은 자본이라는 토지의 부양이 없으면 삶의 유지가 불가능하다.    이상을 위해 현실세계의 벽을 넘어야 하는 작가들의 사유와 삶에는 ‘유목민’의 삶이 매력이겠으나 현실인에게는 다소 낯선 개념일수도 있다. 들뢰즈는 ‘지배질서’로서의 ‘나무’사유를 비판한다. 나에게는 차이를 위한 비판으로 들리며. 들뢰즈의 ‘풀’사유 못지않게 나에게는 ‘나무’의 아름다움이 어필한다. 인간의 지배사유 모델에 ‘나무’모델이 들어온 이유는 나무가 현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한 다윈의 이론이 맞다면 인간의 유전자에는 ‘나무’존재가 혈연과 피의 관계처럼 각인되어 있다. ‘풀’은 곤충이나 초식동물의 무의식에 더 어울린다. ‘나무’와 ‘풀’ 둘 다  세계를 해석모델이자만 내 해석으로는 ‘나무’가 인간에게 더 심미적인 모델을 제공한다. ‘풀’이 중요했으면 ‘에덴 신화’에서는 ‘생명나무’대신 ‘생명 풀’이 사머니즘에서는 ‘세계나무’대신 ‘세계 풀’이 등장했어야 맞다. 장황하게 인용했으나 계간비평을 위해 내가 고른 시들이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다가있는지 ‘나무’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1. 김행숙과 김산    포옹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김행숙(〈서시〉, 2008년 겨울호)    월식   촉촉하게 달뜬 그녀의 몸에 나를 대자 스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나의 첨단이 그녀의 둥근 틈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그녀가 열었는지 내가 밀고 들어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르르 눈앞이 캄캄해진 것을 보면 붙어먹는다는 거,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 다음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만, -김산(〈문학마당〉, 2008년 겨울호)     김행숙의 「포옹」과 김산의 「월식」은 연인들의 사랑을 주제로 썼다. 김행숙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合一이지만 ‘사이’를 내포한 불화의 감정을 말했고 김산은 合一이지만 제목「월식」처럼 곧 떨어질 미래시간의 슬픔까지 암시했다. 에로스/인간은 생명의 번식을 위해 연인/배우자와의 합일을 추구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온 모델처럼 신/합일의 완전존재가 될 수 없는 인간/분리의 불완전존재로서 살아간다. 에로스는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에 대한 갈망이며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다. 대대손손 작가들이 좋아하는 문학의 반복주제이다. 들뢰즈는 생성으로서의 ‘에로스’와 ‘증식’으로서의 욕망이 삶의 기본모습이며 “결핍‘으로서의 욕망과 ‘타나토스’의 개념을 비판한다. 김행숙의 「포옹」은 ‘욕망’으로서의 에로스와 ‘결핍’으로서의 에로스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내 판단으로는 ‘나무’와 ‘풀’의 사유가 동시에 혼합되었고  김산의「월식」은 ‘증식’으로서의 에로스에 더 비중을 두고 썼다.  들뢰즈의 ‘풀의 사유’에 해당하겠으나 「월식」을 합일의 쾌락으로만 보는 독자와 「월식」이후의 시간까지 유추하는 독자의 시선(내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적극적 재창조로서의 내 감상은 ‘풀’의 사유 뒤에 ‘나무’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해석한다(들뢰즈는 ‘해석’대신 느껴야 한다고 주장할 터지이만).  2. 서영처와 심보선    숲새    Ⅰ    새는 나무가 꾸는 꿈  새를 품은 나무는 지저귄다  수만 개 부리로 지저귄다    새는 나무의 영혼  나무는 새들이 잠드는 푸른 봉분  나무는 훨훨 날아오른다    흰 새들이 나무 위에 피어있다  새는 나무가 낳은 아이들  소란하게 떠들며 몰려다닌다    Ⅱ    새벽 숲에 들어서자 나무들  몸 깊숙이 부리를 묻고 외다리로 줄지어 서 있다  나무들은 진작 조류로 분류되어야 했다  다리 묶인 새  땅에 매인 새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  나무는 푸드덕거리며 깨어난다  쫑긋거리는 귀, 지저귀는 부리, 반짝거리는 눈  숲이 들썩거린다  소란한 고요와 섬광 같은 순간,   새들은 날아오른다  수천 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    -서 영 처 (시로여는세상, 2008년 겨울호>    잎사-귀로 듣다    매혹의 순간을 고대하며 앞으로 나아갔노라   사랑은 모든 계획에 치밀하였노라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에서  너는 내게 물었다  나무들은 잎사-귀가 너무 많아요  바람소리를 어떻게 견딜까요  너의 어리석음도  구름의 한계 안에서는 당당하여라  사랑은 삻을 과장하니 좋아라  너는 고풍스런 잠언이 배인 표정으로  잠이 들었고 어리석고  어리석었던 나는  불가피한 내일의 파국을 떠올렸고  내가 울기 전에   네가 먼저 운다는데  이별과 재회 중에 하나를 걸었노라  잠에서 깬 너는 말했다 꿈속에서  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  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 개의   잎사-귀로 들었지요  먼저 운 것은 결단코  나였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나리라   - 심 보 선 (문학선,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나무의 사유’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꼭대기를 이루는 구조라고 갈파했다. 가지는 중심(근원, 신)에서 펴져나간 사물/인간의 제도와 문화의 은유로 보았다. 그는 ‘위계적 시스템 혹은 명령의 전송’으로서의 제도권의 사유를 비판한다. 기존의 문화란 ‘과거와 미래, 온전한 역사, 진화, 발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작가란 “풀의 사유“로서 뿌리가 아닌 ‘리좀’(위에서 언급)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가란 사유의 숲에 종(種)과 속(屬)이 아닌 군(群)을 만들어서 ‘점이 아닌 선’으로서 사물들 가운데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작가가 그래야 하는가?. 문자이후 만년, 고등종교의 출현이후 약 오천년동안 이어져온 신화와 종교의 사유체계는 현대에서 무용지물인가?  경전(Canon)은 찢어버리고 박물관과 미술관과 고전작품들은 역사의 유물로 묻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서영처의 「숲새」와 심보선의 「잎사-귀로 듣다」를 읽어본다.     「숲새」는 나무와 새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정했다. 나무/몸과 새/영혼의 구조로 나무=새 인 존재의 기쁨을 노래했다. ”태양이 내부를 비추자/나무는 푸드득 거리며 깨어난다“는 표현으로 생태환경과의 조화와 우주내 생명의 발화를 얘기한다. 이 세계는 全一의 관계이며 ‘一卽多 多卽一’의 세계인데 “새들은 날아오른다/수천마리이며 한 마리인 새”의 결어가 이를 상징한다.   「잎사-귀로 듣다」는 나무/주체와 바람/타자의 관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세계를 ‘꿈’으로 보고 있으며 사랑에 빠진 주체/인간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꿈속에서/나는 나무였고 당신은 바람이었고/나는 당신의 노래를 백개의/잎사-귀로 들었지요”라는 언술로 사랑이란 존재에의 귀 기울임이며 관심임을 말한다. 이별 상황을 대조했으나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며 이별/사랑이란 “화해와 호감이 가득한 꿈속”의 사건이다. 결국 세계내 존재의 기쁨을 말한 詩 로 해석할 수 있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이 시들의 대상은 나무를 노래했으니  ‘原點과 씨앗 혹은 중심’사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까? 시의 구조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은 ‘나무-되기’ 에 시인의 감각이 집중되어 있다. “나무”와 “새” 사이, “나”와 “너”사이, “꿈”과 현실 사이로는 시인의 기쁨이 ‘증식’되어 ‘도주선’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시들의 사유는 ‘풀’인가 ‘나무’인가? 시에서는 사유방법이 아니라 작가의 表現의 아름다움이 더 문제가 아닐까?  3. 이영옥과 김연아    물방울의 역사    연잎에 떨군 물방울이 맑은 구슬로 또르륵 굴러가는 것은   연잎에 스며들지 않도록 제 몸 고요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  오직 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건들지 않고  그저 가볍게 스치기만 하려고 자신을 정갈하게 말아 쥔 까닭이다.   그러나 물방울의 투명한 잔등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포자들이 출렁거렸는지  수 만 갈래의 흩어지려는 물길을 달래며 눈물의 방을 궁굴려 왔는지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찍했는지    물 위에 닿는 순간 물방울은 잠시 흔들렸던 세상을 먼저 버리기 위해  옴 힘을 다해 부셔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는 가장 아픈 방법으로   -이영옥(시작, 2008년 겨울호)    모래시계가 있는 방    그가 오래 비워둔 방에 들어섰을 때   거울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맡의 모래시계는 천상의 시간을 비우고   지상에 무덤 하나 만들어 놓았다    그는 부러진 늑골로 누워 있었다   문병 온 사람들은 늘어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에게서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시선을 보았던가?   어디에도 가닿지 못하는 시선은   남은 불빛을 하나씩 꺼나갔다    모래시계에 갇힌 지평선은    검은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시간은 그의 입에 모래를 부어넣었다   모래 흐르는 소리 이명처럼 울리고   눈썹 위로 지평선이 올라가겠지    그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태양과 바다를 오가는 구름처럼,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자에게   죽음은 잠을 완성시킬 뿐이다    죽은 가지 끝에 눈을 틔우는 봄처럼   그는 이 지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몹시 더운 방 너머, 눈 덮인 저 길 너머로   시간은 오래 흐르고 흐르리라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   천상의 시간을 지상에 펼쳐놓는 사막에서의 밤처럼,   모래시계는 비어있는 시간에 다시 젖줄을 댈 것인가?      -김연아 (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겨울호)    이영옥의 「물방울의 역사」는 화자/물방울/존재의 일생을 말하고 있다. “물방울”과 “연잎”과의 ‘이항대립’에서 화자/물방울은 타자/“꽃 피울 생각에 골똘한 수련”을 가볍게 스치기만 하고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간다. ‘물방울은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간다’는 존재의 순환구도를 말한다. 삶/존재의 유한기쁨을 드러낸 화자/물방울과 타자/수련과의 에로스적 긴장이 처리된 은유는 너무 청교도적이다. 시인의 인생관이 반영되었겠지만 “깨끗하다는 말 속에 숨은 외로움은 왜 그리 끔직했는지”같은 표현이 아름다우면서도 독자의 마음을 끔직하게 몰아간다. “물방울”과 “수련”사이에 들뢰즈식의 ‘도주선’이 발생하였을까?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갔을까? 내 생각엔 ‘생성’이 아닌 ‘귀환’과 ‘퇴행’이 발생했다. 그러나 물/죽음/실재계로 돌아가는 큰 상징 때문에 시의 구조는 큰 스토리를 말하고 있다. 작은 ‘생성’보다는 큰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      김연아의「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소는 “모래 시계”가 있는 병실이다. 모래시계가 병실에 왜 비치되어 있는지 현실이유는 묻지 말고 작품의 상징성을 높이기 위해서 작가가 배치한 구도라 이해하자. 김연아는 “모래시계”의 시간이 인간시간의 은유임을 내세운다. 작가의 생각에 “시간”이란 “천상의 시간”에서 “지상의 무덤”을 향해 흐르는 강물/“구름”이다. 모래시계는 가운데 “검은 구멍”을 통해 저 세상의 시간과 지상의 시간을 교환/순환 하는 구조의 은유이다. 4차원시공간의 물리학적관점에서는 시간이란 실제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인간의 존재인식이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이 존재조건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운동이므로 동양에서는 運命으로 파악한다. “모래시계”에 갇힌 인간의 시간/존재태는 나고 병들고 죽는다. “모래시계”는 한 인간이 시간이 끝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환을 말했으나 화자는 “모래시계가 만든 무덤, 누가 뒤집어 놓을 것인가?”는 언술로 윤회의 암시와 인간의 불안을 동시에 드러낸다.  「물방울의 역사」와 「모래시계가 있는 방」도 나무 사유/구조에 뿌리를 둔 인간의 원형적인 세계인식를 드러낸 시로 보여진다. 「세계목」으로서의 나무시간은 천상과 지상의 시간을 매개하며 “모래시계”와 “수련”은 잠재태인 「세계목」의 다른 은유이다.     4. 이성목과 이재훈    한지에 수묵    봄비 슴슴한 날이다. 젖은 땅에 산그늘 번져들더라. 어느 여백에 들까 궁리도 끝나지 않은 사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렸으니 어쩌겠는가.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더라. 너무 멀리 번져가서 마음 희미해졌으니 어쩌겠는가.     날이 가니 색이 멀어지던가. 생살 붉은 저녁의 별리도, 아침이면 붓끝에 묻어나지 않는다. 색을 버리고도 못 버린 몸이, 몸에 겹쳐 파묵이 되고 다른 몸으로 번져 발묵이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날 기다려지더라. 한없이 늙고 늙은 끝, 당신의 여백으로 스며드는  나를 맞이하고 싶더라.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인 것을 어쩌겠는가.  -이 성 목 (〈시로 여는 세상〉, 2008년 겨울호 )     대황하 10     취하리라. 저 물에 취하리라. 자동차를 타고 계단을 오르고 집에 들어누으리라. 노을의 냇내를 풍기며 그대에게 안기리라. 늙은 사람과 만나 술 한 잔에 취하리라. 지혜의 말에 취하리라. 새로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리라. 푸른 초원을 달리리라. 소리를 지르리라. 그러나 그리워하리라. 그러나  웃으리라. 그대의 아들을 안고 웃으리라. 그대의 주검을 안고 웃으리라. 떡을 먹고 살리라.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그곳의 법을 버리리라.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 기도하고  울리라. 그물처럼 집 위에 눌러 앉은 햇살에 몸을 누이리라. 눈을 감으면 폭우가 내리리라. 빗물이 얼굴에 상채기를 내리라. 취하리라. 피가 흘러내리는 저 물에 취하리라. - 이 재 훈 (〈딩하돌하〉, 2008년 겨울호)   들뢰즈는 사물은 ‘「시작, 기원이 아닌」 중간’에서만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도그마가 추구하는 ‘제 1원리는 언제나 가면’이라고 비판하며 ‘사물들은 오직 제 2, 제3, 제4의 원리 수준’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유의 중심점을 지금 현재에 놓아야 한다는 강조로 들린다. 내 생각에 가면이지만 ‘제 1원리’의 절대성을 부정하고서는 ‘제 2, 제3, 제4의 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의 철학자들과 종교창시자들이 ‘제 1원리’에 수 천년동안 매달린 이유는 지금 현재의 사물들의 ‘시원과 근거’가 없이는 세계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과거문화의 세례와 지금 현재의 직관에 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어떤 작가들은 창작품을 세계의 재현으로 보며 작품의 창조란 世界態의 창조라 믿는 사람도 있다. 이성목의 『한지에 수묵』도 이런 창조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다. “한지”는 세계의 축약이고 붓으로 그리는 그림은 화자의 인생에 대한 은유이다. “눈물 한 방울”은 창조자/작가가 세상에 간섭한 행위이다.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점’으로서의 “눈물 한방울” 때문에 “묽은 밤이 오는 것이더라. 어둑한 마당에 흰 꽃잎 날고, 빛들이 고요히 눈물에 닿아 번져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창조자/작가는 세계내 존재이며 “있고 없는 것이, 들고 나는 것이 모두 세상의 한 폭”이라는 한계상황에 갇힌 자이다. ‘점’/화자와 ‘화폭’/세계의 긴장관계를 드러냈는데 역시 들뢰즈의 ‘나무 사고’에 해당한다.     이재훈의 『대황하』는 표현으로만 보면 들뢰즈의 ‘유목민’사고에 해당한다. ‘유목민’ 사고란 ‘영토’에 뿌리내리지 않으며 구조로서의 ‘나무’사이를 질러나가 증식하는 ‘풀’의 ‘도주선’을 의미한다. 상황에 영향을 주고 상황에 의해 생성되는 ‘이중포획’으로서의 삶 자체를 중요시한다. 지금여기의 희로애락이 삶이며 ‘시작과 끝’이 있는 구조/문화는 삶의 억압기제로 본다. 자유주의자의 생명사상처럼 들리기도 한다. 『대황하』는 삶의 자유란 흐르는 강이면서 항상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강물의 속도에 따라 화자의 감정도 상승/발산한다. “살기 위해 길 끝의 집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법을 버리”고 “새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리라”고 화자는 노래한다. 들뢰즈식의 ‘강-되기’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형식상으로는 들뢰즈의 논리가 반영된 시다.  ‘풀’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 ‘풀’이란 초원을 강물처럼 흘러 미지의 세계로 가는 존재이므로.  5. 이정란과 김성규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     애인아     두꺼운 전화번호부 두 권의 갈피갈피를 서로 맞물려 놓고 대형트럭이 양쪽에서 아무리 당겨도떨어지지 않는 걸 보았다. 쉽게 찢어질 낱장들의 허약함을 알지만,   애인아, 그 정도 자력은 있어야 사랑하지, 사랑이지   無名草     부두에서 잠 배를 놓치고 A4 종이못에서 낚시하고 있는데 퐁당 소리가 난다. 살펴보니 머리카락몇 가닥이 빠졌다. 저울에 올렸더니 바늘이 어느 결에 360도 돌고 나서 시치미 딱 떼고 O 가운데에 숨어 있다.    무명초가 이리도 무거워지는 새벽이란, 시간의 새 벽에 부딪쳐 느닷없이 안기는 오늘이라니.     수도적     꽉 잠겨 있던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리자 사방으로 물이 튄다. 너무 오래  많은  걸 머금고 있었다. 글을 쓰다 수동적을 수도적이라고 잘못 쳤다.    스스로 분출할 수 없으니 수도가 수동적인 건 명백한 일. 녹물은 핏물과 다르지 않지.     믿음     유리 파편이 박힌 것처럼 발뒤꿈치가 아팠다. 며칠 견디다 작정하고 돋보기를 들이댔다.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 1밀리미터쯤 될까.    불신 한 가닥이 믿음의 몸체를 찔러 파열시키는 순간처럼 놀랍다.     조각     아기 손바닥만 한 조각을 들고 고고학자가 흥분해서 소리친다. 새로운 빗살무늬토기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렴, 산산조각으로 깨졌어도 토기는 토기, 나는 나.    물방울은 강이 아니지.   -이정란 (「시로여는 세상」, 2008겨울호)   수열   1.나무-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 사람은 태어날 때 나무를 밟고 지상으로 내려오며 죽은 후 에는 다시 나무를 밟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한다. 죽은 혼을 부를 때 무당들은 나무 를 흔들어 영혼을 깨우기도 하며 나무에 직접 올라가 영혼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내려오기 도 한다.   2.하늘-무한한 침묵으로 열려있는 공간 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3.잠-죽음으로의 여행.   4.돼지-할머니가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과일.   5.옷-언젠가는 더렵혀질 물건,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빨거나 새로 만들려고 애쓴다. 그것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6.홍수-평소에 조용하던 아이가 화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성이나 한꺼번에 울음이 터지는 장 면.   7.배-화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언젠가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면 배를 타고 도망가거나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런 지혜를 누군가 수천 년 전에 일러주었고 나는 어릴 때 얼음으로 만든 배를 타고 자주 도망가는 연습을 했던 적이 있다.   8.고구마-달아나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말, 돌아오지 말았으면 싶은 말, 돌아왔으면 하는 말. 할머니가 날마다 잊어버렸으면 하던 노래.   9.창문-앉아있을 때의 날개는 검지만 날아오르는 순간  날개의  색깔이 파랗게  바뀌는 새의 이름. 자주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지만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는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집에서 창문이 날개를 펼칠 때까지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다. 당연히 그 새의 검은 날개밖에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내 눈앞에서 그 새가 푸른 깃털을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0.공-굴러다니기 위해 태어난 동물. 나무를 타고 내려왔는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음. 그러나 이 동물도 굴러다니다가 결국 하늘로 뛰어 올라간다.   1+2+3……9+10 할머니는 나무를 밟고 내려와 나무를 밟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무한한 침묵의 공간인 하늘 로 잠을 자러 간 것이다. 죽기 전에 돼지고기 한 근이라도 먹었으면 좋았을 걸, 더러운 옷을 입고 이 세상을 뒹굴다가 가신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동생은 자주 울었고 집 앞의 강이 화를 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배가 없었고 타고 날아갈 새 한 마리 없었다. 결국 어린 나는 공이나 차며 흙 묻은 옷을 입고 운동장을 뒹굴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공을 차며 놀고 내가 뛰어다니고 있는 운동장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 나 또한 할머니처럼 그렇게 세상을 뒹굴다가 나무를 밟고 그 뒤를 따라갈지 모르겠다. -김성규(「시와 사상」, 2008년 겨울호)     새로운 형식의 시는 일단 이해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눈에 익지 않으니 새로운 독법을 개발해야 한다. 은유가 재미있어서 두 시를 골라보았다.  작은 제목이나 번호를 붙인 글들이 전체화폭에서 어떤 구도와 풍경을 그리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표현주의 화가 샤갈의 그림처럼 그림안의 부분 이미지들은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이정란은 『너에게만 읽히는 블로그의 태그』라는 제목에서 작은 제목의 글은 본문의 꼬리말이며 태그(tag)가 생략한 본문을 읽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생략한 본문이 무엇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한다.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진 작은 글들은 빛나는 구절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가 생략한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인 ‘배치’로서 이 작품을 이해하자. 들뢰즈는 ‘배치’란 ‘동질적이 않은 집합의 요소들이 협동하게끔 만드는 것...공동-작동, 공감, 공생’이라고 정의했다. 임의의 문장이나 發話를 배치한다고 공감 공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질적인 이미지나 스토리를 배치하되 각 요소는 ‘몸체들의 노력이나 침투, 사랑 혹은 증오’로 공감을 이루어야 한다.    이정란은 일상적인 사물을 일상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잡아내고 독자로 하여금 지평선 너머 풍경(본문)을 보도록 요구한다. 사물에 작동하는 공감의 침투력은 시인의 암시력과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한다. ‘배치’로 낯선 풍경을 만들고 사물과 사물사이로 ‘도주선’을 만드는 들뢰즈의 글쓰기 전략에 형식적으로는 부합한다.     김성규는 1에서 10까지의 수열에 작은 스토리를 부여하고 마지막 연에서 수열의 조합인 전체스토리를 종합하고 있다. 각자의 이야기는 부분이 모여 종합을 이루는 형식이므로 ‘나무’사고에 해당한다. “할머니”의 일생을 소재로 하고 ‘사머니즘’의 ‘세계목“이 첫 연에서 등장한다. 시간이란 ’나무‘상징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드리워진 시간이며 인간은 하늘과 지상의 시간을 윤회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돼지“ “옷” “고구마”와 화자의 시간이 스민 “홍수” “배” “창문” “공”은 서로 얽히고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서 화자의 유년과 할머니의 시간이 스민 추억을  이미지로 그려냈다(샤갈의 〈나와 마을〉풍경을 보는 것 같다). 감정을 숨긴 채 드라이이한 이미지와 스토리로 그려내는 기법들은 테라야마 슈우시의 시들에서 선보인 바 있다. 요새 젊은 시인들이 이 수법에 암시받은 작품들을 쓰는 것을 가끔 본다.       6. 박정대와 조연호  슬라브식 연애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도 내륙 산간 지방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나는 연애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폭설에 의해 고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추워 서로의 체온이 간절해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체온만으로도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한바탕의 꿈이라 했으니, 그녀와 나는 끝끝내 꿈속에서 깨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함께 흑맥주를 마시며 캄캄하게 계속 따스해져야하는 것이다, 천일 밤낮을 폭설이 내리든 말든 그녀와 나는 계속 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스스로 태양을 피워 올릴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진정한 사랑의 방식을 터득할 때까지, 그녀와 내가 스스로 슬라브식 연애를 완성시킬 때까지     태양의 반대편으로 우리는 밤새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가 태양이 되는 것이다     -박정대(「유심」, 2009년도 1.2월호)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물결이 오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끝 약 200페이지 남짓한 지점이었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것은 죽은 것을 포란하는 어떤 성조(成鳥)에 관한 것이었다. 수많은 높임말이 쏟아져 나오는 책이 동물의 배태(胚胎) 같았기에 나는 그 책의 산도(産道)를 찾아 새가 날고 있다고 여겼다. 허무한 도서관이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자침(磁針)의 방향은 허공의 생에게로 향한다.     방충망 틈으로 잔잔한 환역(寰?)이 와도, 잔잔함의 부피는 방충망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흉상의 하체를 닮았고 허탈하게 내 귓전으로 다가올 두 다리를 쥐고 있었으니까. 시간 역시 발바닥을 들고 나를 기다렸다. 선천의 혹은 후천의 애인들에게 사람들은 감격했고, 토론했고, 비탄에 빠졌다.     죽은 동물의 머리 뼈 안에 꿀을 만드는 벌의 이야기다. 서쪽의 별자리는 소변을 모아두는 작은 두개골 같았다. 옥상이 구름을 열광하더라도 잘 찢어지는 종이공예품 같은 성감대는 탓하지는 말자, 사람은 안정과 확신에서 신비를 얻기도 하는 거니까. 밤은 신발처럼 뒤엉킨 우리들의 절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할머니 저 괴로운 별이 자기 발을 닦아달라고 울부짖고 있어요. 역연(逆緣)의 별에게 오래 물었던 구중청량제를 뱉는다.     또 다른 이야기 에서, 옆집 아저씨가 깨진 망원경에게 “서쪽 하늘에서 만나자”라고 말한 건 너무 슬펐다. 오케아노스의 일곱 자매는 반신(半神)들을 배고, 매일 밤 오줌 누기가 힘들었다. 내 베개는 종종 엄마의 발목 자국을 주먹만큼 자란 여동생처럼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더러 인간을 사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별도 있었다. 임신중독, 그것은 밤하늘을 무심한 것으로 상상한 자의 증상이기도 했다.   -조연호(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로맨티즘의 현대해석을 보여준다. ‘낭만주의’는 외부현실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슐레겔 형제가 《아테나움》지를, 영국의 워즈워드와 콜리지가 《서정민요집》을 발간하여 시작된 이 운동은 상상력에 의한 우주와의 영적 합일감을 중요시한다. 비 현실의 공간을 중요시한 이 상상운동은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운동까지 이어진다. 낭만주의 자아에 무의식의 영역을 도입하여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노래하는데 박정대와 조연호의 시는 이 계보의 시 정신에 닿아있다. 다만 표현수법에 있어서 박정대는 낭만주의에 조연호는 초현실주의 무의식적 표현에 더 기운 것으로 해석된다.   박정대는 폭설에 갇힌 강원도 민박집의 딸과의 연애를 상상한다. 그 연애는 현실공간이 아니고  “태양의 반대편으로” “밤새 걸어가” “우리가 태양이 되는” 공간이다. 태양은 내면의  빛나는 시간을 상징하고 완전시간은 남과 여(음과 양)의 합일에 의해 도달한다는 ‘유토피아’를 드러낸다. “인생은 한 바탕의 꿈”이라는 생각도 장자의 초월주의에 닿아있다. 박정대의 시정신은 문맥보다도 노래에 가까운 리듬과 운율에 있다. 많은 현대시들이 이미지 홍수의 시들을 쏟아내고 운율이 주는 무의식의 기쁨을 간과한다. 어떤 시들이 생명력이 길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조연호의 시는 이미지의 비약이 심하다. 그나마 이 시는 독자들이 신화와 과학의 배경지식이 있다면 상상력을 따라갈 수 있는 시이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는 언술은 잠언의 형태로도 들린다.   이 시 역시 들뢰즈의 ‘배치’와 쉬르리알리즘의 표현이 혼합되어 ‘진정한 본체란 개념이 아니라 사건이다’라는 들뢰즈의 사유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마다의 이미지와 스토리를 가진 이질적인 사건들이 있고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에 의해서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를 조연호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聖과 俗의 긴장이 있는 이야기들이 대립하고 이 사이로 기존의 관념을 무너뜨리는 들뢰즈의 ‘도주선’이 질주하는지는 역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7.들뢰즈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생각     시인들이 사물에 가 닿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은 들뢰즈로 시작했으니까 다시 들뢰즈로 돌아간다. 들뢰즈는 글쓰기에서는 사물사이 ‘도주선’의 절대속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운동이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층위사이에서 ‘잠재력’의 차이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현상을 풀어주거나 방출하는 것’은 강도의 차이라 설명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물리학에서 차용한 개념이었다. 모든 사물은 +전하와 -전하를 띄고 있고 두 개의 극성사이에 힘의 자장이 성립하며 운동이 발생한다. 동양이 陰陽관도 같은 개념인데 현상과 운동은 음양의 대위와 상보작용의 결과이다. 운동이란 주체의 운동이 아니라 세계구조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태양계가 은하계를 도는 행성의 운동주체는 행성이 아니다. 공간의 중력장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행성들은 중력장의 구조사이를 돌아다닌다는 관점이 최신물리학의 해석이다. 들뢰즈는 ‘구조’를 배척하고 운동하는 사유정신의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세계내 존재는 스스로의 운동이 아니다. 주체는 시공간의 환경구조에 의해(음양의 전위차이에 의해) 길을 간다. 동양에서는 運命이라고 부르는 이 운동은 모든 사물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 세계 내 부분존재(주체)는 자신의 의지대로 운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체의 관점이고 타자의 관점에서는 무위자연의 영구순환운동의 일부이다. 이야기가 비약했지만 들뢰즈의 절대속도는 동양의 運命에 해당하는 절대속도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동양식 사고의 깊이까지 섭렵한 것 같지는 않다는 의문이 든다). 그는 운동이란 ‘시작, 결말’의 목적지향적 해석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생성/되기’로 파악한다. 시공간의 표면에 파도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생성/소멸 운동은 보고 있으나(감각의 입장에서) 생성소멸이 일어나는 구조의 문제(사유체계)는 지나간다. 구조주의적 언어관도 비판한다. 구조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과거와 미래 역사도 없으며 심지어 현재도 없다’고 말한다. 지나가는 생성/운동 만이 있을 뿐. 언어는 감각적으로는 소리와 기호의 생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조측면으로 보면 인간이 사막에 세운 가장 오래된 책 피라미드와 형식이 비슷하다(B.C 만년전이라는 가설이 있으며 단어/벽돌은 책과 문명의 가장 쉬운 기초은유이다). 피라미드가 最古의 책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설계 때문인가? 아직도 무언가를 향해 생성중이기 때문인가? 들뢰즈는 어떻게 대답할까?  작가/인간이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 견고한 구조물서의 문화/문명/사유체계를 시간 속에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은 삶의 생성/소멸-부재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욕망이다. 여기 언급한 시들과 들뢰즈의 『디알로그』는 아마도 천년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만년 전의 책을 보면서 나는 아직까지 살아남은 고대인간의 정신을 감탄한다. 나는 내 시가 피라미드 같기를 기원한다. 순간에 사라지는 생성/소멸의 꽃과 같은 일회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   ■ 김백겸 시인 -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가 당선되어 등단 -  현재 ‘시힘’,‘화요문학’  동인 -  한국작가회의 대전.충남회장, 한국시인협회회원 -  웹진 『시인광장』主幹 -  한국원자력연구원 감사실장 [출처] “나무”의 사유와 “풀”의 사유로서의 시들/김백겸|작성자 옥토끼  
퍼온 글  [스크랩 ]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어린이와문학. 2016.8) / 글쓴이 /  이야기밥     최근 동시 논쟁을 읽고 -난해함을 주제로- 최근 동시단에서 벌어졌던 논쟁글들을 읽어보았다. 이 글들을 읽으며 든 생각을 몇 가지 글로 정리해 본다. 김제곤은 최근 10년간 나온 동시들이 난해함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런 난해함의 문제를 유발시킨 동시의 한 예로 이안의 뱀 연작시를 들고 있다. 김제곤이 예로 든 이안의 시를 우선 내 나름대로 감상을 해 보도록 하겠다. 참기름병에서나와콩기름병으로들어갔습니다.-  전문. 어떤날은마당에버려둔막대기가기어가기도합니다- 전문. 막대기를들고막대기를쫒아갑니다- 전문. 땅군아저씨, 그 많은 막대기 주워다 뭣에 쓰게요?- 전문 (고양이의 탄생. 문학동네. 2012) 이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 이 시를 한번 감상해보겠다. 위의 뱀 연작시는 은유의 비유법을 재미있게 활용하고 있다. 은유는 유사성에 의미를 두는 비유법의 하나이다. 저 위의 시를 보면 뱀은 길고, 막대기도 길다. 그러니까 길다라는 유사성에 감각을 집중하면 뱀은 곧 막대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당에서 막대기가 기어간다고 말을 한다. 일종의 말놀이의 하나이다. 참고로 환유라고 하는 비유법도 있는데, 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를 둔 비유법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서 왕과 왕관은 늘 인접해 있으니, 왕관하면 왕을 뜻하는 것이고, 글을 쓰는 작가는 늘 펜을 들고 있으니, 글쓰는 직업을 펜 하나로 산다로 표현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은유나 비유의 말놀이를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런 은유나 환유에 해당하는 말놀이를 자유롭게 즐기면서 살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저 위의 시는 일단 논리의 비약을 무릅쓰고 긍정적인 자리에서 본다면, 존재를 표현하는 다양한 관점의 하나인, 신화적인 언어 감각을 길러주는 구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각의 논리를 구사한다는 신화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은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언어의 마법사, 말놀이의 마법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신화에서 저런 은유와 환유의 말놀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한번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네시아 포소족의 짧은 신화 한 편을 소개한다. 태초에 인간은 신이 새끼줄에 묶어 하늘에서 내려준 바나나 열매를 먹으며 영원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나나 대신에 돌이 내려오자 먹을 수 없는 돌 같은 건 필요없다며 신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신은 돌을 끌어올려 버리고 다시 바나나를 내려보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돌을 받아두었다면 인간의 수명은 돌처럼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었을 텐데, 돌을 거부하고 바나나 열매만을 원했기 때문에 인간의 목숨은 앞으로 바나나 열매처럼 짧으며 썩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죽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나카자와신이치. 동아시아. 37쪽) 바나나는 말랑말랑하고 맛도 좋고, 부드럽긴 하지만, 오래두면 썩고 만다.돌은 딱딱하고 맛도 없지만,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바나나와 돌이 이항대립을 하고, 이런 속성에 유사성을 두고, 죽음과 영생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화 한편을 두고 감상을 할 때에도, 위의 시가 담고 있는 비유의 말놀이가 담고 있는 어떤 긍정적인 요소는 분명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단 이안의 뱀 연작시와 같은 작품이 담고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우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제곤은 저 뱀 연작시를 예로 들며 최근 10년간의 동시가 많은 성취가 있었지만, 난해함의 자리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제곤은 이안의 시에 대해 이런 비판을 하고 있다. “이안이 쓴 위 시에서 보듯 짧은 길이의 동시라도 문장과 행간, 시어 하나하나가 갖춘 함축은 웬만한 시를 능가한다. 난해함의 요소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이안 자신의 표현대로 이런 시들은 독해를 지연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를 오랫동안 골똘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독자란 대개 아이 독자이기보다는 이미 시를 골똘하게 읽은 경험이 있는 어른 독자들이 아닐까.”(. 어린이와 문학. 2015년. 10월. 15쪽) 저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전혀 난해한 시가 아니다. 그냥 직감으로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고 즐기면 되는 시이다. 저 시를 읽고, 이성의 합리적인 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왜 막대기가 기어가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성의 논리적인 생각보다 감각의 논리로 먼저 시를 느끼고 즐기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아이를 폄하하는 사람은 아마 적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아이의 감각을 보고 놀라는 사람 쪽이 더 많지 않을까. 뱀이 참기름병에서 나와 콩기름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 문장은 미끄럽다는 어떤 감각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해서 쓰였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워낙 다양해서 작가는 이런 미끄러짐 말고도, 또 다른 유사성을 발견하고, 저런 시를 썼을 것이다. 이안 시인 자신이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을 썼는데, 이 말은 의문이 간다. 독자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킨다는 말이 내게는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뱀 연작시는 감각의 논리로 볼 때는 독해를 지연시키는 작품이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이 감각이 그냥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는다면, 그냥 하나의 텅빈 기호나, 아니면 외면의 풍경으로만 남는다면, 시가 갖고 있는 감정의 깊이는 아무래도 덜 느껴질 것이다. 맑은 풍경이 주는 수채화같은 아름다움도 물론 있지만, 위에 인용한 시들이 그런 느낌을 주는 건 또 아니다. 아래 시를 한번 감상해 보자. 송찬호의 이란 시이다. 내가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열차에 뛰어올랐을 때,내 옆자리 창가에눈사람이 앉아 있었다찌는 듯한 한여름 밤인데도 눈사람은 더워 보이지 않았다겨울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땀도 흘리지 않았다눈사람의 모습은 뭐랄까,기나긴 겨울전쟁에서 패하고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는상이군인 같았다지난 겨울전쟁에서 우리가 선거에 패했던 것처럼,눈사람은 나를 향해 한 번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찌는 듯 더위도그의 흰 피가 흘러내려의자의 시트를 더럽히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 이상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열차는 한여름 밤자정을 향해 끝없이 달렸다그새 내가 깜빡 졸았던 것일까어느덧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그는 어디쯤에서 내렸을까털모자나 목도리 하나 남겨두지 않고 (. 송찬호. 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시를 이렇게도 감상해 본다. 시인은 이 시를 창작할 때 어디에서 힌트를 얻었을까. 아마도 실제 저 시에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날 헐레벌떡 시간에 쫒겨 열차에 뛰어 올랐을 때, 자기 옆 자리에 어떤 아저씨 한 사람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아저씨의 모습이 이 시인의 눈에는 영락없는 눈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감각의 논리를 작동하여, 유사성의 언어 감각인 은유의 언어 감각을 발휘하여, 아니 이런 은유니 유사성이니 할 것도 없이, 그냥 이 시인은 이렇게 한 사람의 존재가, 눈사람으로도 보이고, 장미로도 보이고, 호랑이로도 보이는, 그야말로 신화적인 사유 체계로 본다면, 일종의 모든 존재가 다양한 기호로 변환되고 전환되어 보이는 그런 언어 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저 눈사람이란 시의 맛은 일상의 한 존재를 눈사람으로 바꾸어내는 시인의 은유적인 언어 감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어 감각이 무언가 삶의 내부, 삶의 내적인 진실을 드러내고 있는 데 까지 나아가고 있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은유의 언어 감각이 존재 내면의 섬세한 감정의 울림까지, 삶의 애환까지 건드린다. 눈사람이란 시는 독자인 나로 하여금 독해를 지연시키지는 않는다. 저 은유의 언어가 무슨 의미인 거지, 하고 오래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직감으로 감각으로 느끼게 하면서, 또한 저 시는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한다. 무언가 울림이 있다. 그래서 저 시는 시인이 억지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슴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일반 시와 동시를 직접 비교하는 것이 위험하긴 한데, 논의를 위해서 일단 무리를 무릅쓰고 말해 본다면, 이안의 뱀 연작시는 무언가, 사물과 사물이 우발적으로 마주쳐서 반짝 하는 삶의 어떤 진실을 드러내는 은유 특유의 언어 감각이 돋보이기는 한데, 존재와 존재가 무언가 기계적으로 일대일로 단순 대응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은유의 신화적인 언어 감각이, 독자의 내면 우주를 한번 크게 흔들어 어떤 깊은 무의식의 감정까지 건드리는 점이 미약한 것이다. 은유의 언어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에너지는 절대 개량적으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렇게 단정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하여튼 나의 관점으로 볼 때는 무언가 뱀 연작시는 울림이 적다. 이안의 을 한번 더 감상해 보자. 모과나무에서 쿵! 달이 떨어졌어. 노오란, 바람에 긁힌 상처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 향 노오란, 재미있게 읽힌다. 모과나무에 달린 모과를 보고 둥그런 달에 비유하였다. 역시 둥그런 모양의 유사성을 보고 시인의 감각이 작동을 하여, 달이 쿵 하고 떨어졌다고 가정할 때 무언가 이 시가 갖고 있는 언어 감각이 보이고, 독자인 나의 마음 속에도 따뜻한 풍경이 그려진다. 그런데 모과나무에서 달이 쿵 하고 떨어진 그 울림, 바람에 긁힌 달의 향내가 내 마음 속 풍경에서 은은하고 깊이있게 오래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이 시 또한 일대일 대응 방식의 은유의 언어가 무언가 기계적인 느낌을 주어, 독해를 오히려 방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건 난해해서 독해가 방해받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감정선의 흐름이나 여운을 깊이있게 느끼고 싶은데, 그런 독해의 과정에 몰입하고 싶은데 감정선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안의 시는 이 정도로 하고, 이번에는 김제곤이 난해함의 또 한 예로 든 김륭의 시를 한번 보도록 하자.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 김륭) 이 시는 관념적으로 인과관계를 따지는 사람의 자리에서 볼 때, 도대체 이게 뭐야 할 수도 있겠다. 그저 난해하기만 한 말장난의 시가 아닐까, 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감각의 논리로 이 시를 본다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온갖 사물들을 일종의 기호로, 상징으로 가져와서 은유의 언어로 이 아이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질 것이다. 감각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신화적인 언어의 흐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코끼리가 된 아이가 길을 다 빨아들이고 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집으로 오는 차들을 다 빨아들이는 장면에 숨어 있는 아이의 내밀한 감정선의 변화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와 같은 시는 난해함의 관점보다는 이 시가 과연 다 읽고 났을 때, 어떤 절실한 감정선을 자극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위에 예로 든 이안의 시가 일대일 대응방식으로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면서 무언가 말놀이의 재치나 흥미를 느끼게 하는 데 비해, 김륭의 시에 동원된 은유의 언어들은 사물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로 기계적으로 연결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륭의 시에는 간절한 자기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의 감정선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의 언어들이 작동을 하고 있다. 이성의 논리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대일 대응 관계를 통해 이해가능한 언어 조합을 넘어 겉으로 보면 난해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간절한 주인공 아이의 내면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이러한 엉뚱한 존재들의 비유언어가 독자인 나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점도 있다. 아래 임길택의 이란 시를 한번 감상해보자. 공부를 않고 놀기만 한다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았다. 잠을 자려는데 아버지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으니 아버지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워서 말도 안 할려고 했는데 맘이 자꾸만 흔들렸다. 이 시에는 아무도 난해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에는 무슨 은유니 유사성이니 하는 말도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않았다 뿐이지, 시의 내면에는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그런 감정선이 교차하는 지점을 아주 잘 포착해 내고있다. 그 곳에서 어떤 유사성의 감정 에너지가 발생하고 있다. 와 을 같이 이어 읽어볼 때, 두 시 모두 어떤 간절한 내면을 가진 아이가 존재한다. 그 아이의 내면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있는데 그 표현 방법은 서로 다르다. 만약에 난해하다는 이유로 와 같은 작품이 동시단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면 과 같은 리얼한 삶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시들도 자기와 개성이 다르지만 내면은 비슷한 색다른 시를 잃고 슬퍼하지 않을까. 풍부한 동시의 세계를 이루어 가는데, 난해함이란 잣대로 본다면, 다양한 차이를 유발시키는 많은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가 있어서, 오히려 임길택의 이 더욱 소중해 보이고, 거꾸로 과 같은 시가 있어서, 는 색달라 보인다. 서로 다른 차이가 오히려 각각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동시 논쟁관련 글들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여기서 그치기로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지난  여름 연수(2015년)에서 김제곤의 란 글이 발표된 이후로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두고 좀 더 토론을 이어갈 계획이었으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토론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아동문학판이 점점 김이 빠지며 시들해져간다고 하는데, 동시단 만큼은 오히려 열기가 식지 않고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시를 바라보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하는 비평의 자리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이런 뜨거움은 작가들 자신의 친분이나 인맥관계의 내부적인 틀 내에 고착되어, 결국은 계모임으로 떨어져내릴 것이고, 독자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아동문학사를 아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아동문단의 중심이 동요 동시에 있었다는 걸 다 알 것이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100여 년 만에 동시의 시대가 아동문학판에 살아 돌아온 느낌이다. 1920~1930년대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당시의 동요 동시 논쟁은 정말 치열하였다. 이런 치열함이 한 시대의 열기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지금 모처럼 맞이한 동시의 열기가 인맥이나 자본의 권력으로 재편되는 계모임으로 전락하지 말고, 부디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오히려 자극하는, 그래서 더욱 풍요로운 총체의 모습을 간직한 동시 세계를 이루어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써 보았다. 동시를 둘러싼 치열한 토론 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그래서 지금의 동시단의 열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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