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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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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데리다[스크랩] 댓글:  조회:1066  추천:0  2018-10-21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데리다   ◈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  대표적인 탈구조주의자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 입장은 오늘날 탈구조주의로 통칭되는 새로운 사조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그의 이론은 일부 구조주의적인 측면과 일치하지만 궁극적으로 구조 개념까지 해체함으로써 탈구조주의를 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의 이론 가운데에는 그가 만든 신조어 ‘차연’의 개념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 ‘차연’의 개념을 중심으로 자크 데리다의 탈구조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존 구조주의자(소쉬르)가 말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  탈구조주의자들은 기표(시니피앙-‘표시하는 것’)와 기의(시니피에-‘표시되는 것’)의 임의적인 관계에 주목한다. 소쉬르(언어활동에 있어서의 언어와 말을 구별한 구조주의의 선구자)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임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탈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면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의미의 형성은 아주 순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자크 데리다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 차연  ▶ 소쉬르의 견해에 반(反)하는 기호의 의미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는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신조어 ‘차연’의 생성  그는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차이와 지연의 첫 글자를 따서 ‘차연(差延, la differance)’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고안했다. ‘차연’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차연’의 세 가지 의미  (1)「다르다」- 본성이나 질, 형태에 있어서 같지 않거나 닮지 않는다. (2) 「흩뜨리다」- 흩뿌리다, 퍼뜨리다. (3) 「연기하다」- 늦추다, 미루다.  처음 두 의미는 공간적 구분임에 비해 세 번째 의미는 시간에 있어서의 차이를 가리킨다. 프랑스 어로는 차연(differance)의 「a」가 들리지 않으므로 이 단어는 difference(차이)로 기록된다. 이 간파되지 않는 차이는 오직 글쓰기에서만 나타난다.  데리다는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탈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여린 지평으로 개방하였다.  ▶논문 속 ‘차연’의 개념 인용  - 차연은 생산적이고 원초적인 구성적 인과율, 즉 절단과 분할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차연의 차이지음(differing)과 차이는 구성된 산물 또는 효과가 될 것이다.  - 우리가 이것을 아무리 뛰어나고 독특하며 중요하고 또는 초월적인 것으로 만들더라도 이것은 현존재가 아니다.  - 이것이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단지 특정 순간에 현존하며 나타날 수 있는 것, 즉 그 자체의 진리, 현존재의 진리 또는 현존재의 현존 속에서 현존하는 것으로서 보여지고 제시될 수 있는 것만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3. ‘차연’의 의의  ‘차연’의 의의는 ‘차이화하다’(differ)와 ‘연기하다’(defer)에 해당하는 두 프랑스 어 동사 사이에 매달려 있다. 두 동사는 ‘차연’의 텍스트적인 힘에 기여는 하고 있지만, 둘 다 그 의미를 충분히 파악할 수는 없다. 언어는, ‘차이’에 의존한다. 소쉬르가 딱 잘라서 보여 준 바와 같이, 언어란 그 기본적인 구성을 만들어내는 변별적 대립항으로 이루어진 구조이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장을 연 것은 ‘차이하다’가 ‘연기하다’로 차차 변화해 가는 데서이다. 여기서는 의미는 의미 작용의 놀이 때문에 항시 연기되어서, 아마 끝없는 보족 대리성[보유상태(補遺狀態)]를 낳는다고 하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차연은 단지 이 테마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불안정한 의미를 통해서, 그 ‘차연’의 과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문자에 의해서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4. 자크 데리다의 약력  1930년 프랑스령 알제리 엘리아르 출생  1952년 고등사범학교시절 알튀세르를 만나 20년 동안 동료가 됨  1956년 논문 로 교수자격시험 합격  1957년∼59년 알제리 독립전쟁 중 군 복무  1960년∼64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 강의  1980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국가박사학위 취득  1981년 체코 지식인을 돕기 위해 얀 후스 협회 창설, 부회장이 됨  1983년 국제철학학교 창설, 초대 교장으로 취임  1990년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모스크바 대학에서 세미나 개최  현재 미국 예일대학 문학교수들과 접촉, 신비평을 해체비평으로 급회전시키는 영향력 발휘 중  ◈참고◈  권택영(1993) 「해체비평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지은이:빈센트 B. 라이치)  이기우(1996) 「해체비평」, 한국문화사  이상우, 이기한, 김순식(2002) 「문학 비평의 이론과 실제」, 집문당  네이버(www.naver.com): 검색어(자크 데리다)  http://www.libro.co.kr/books/author_file_1.asp?mcode=인문사회과학&scode=국외&aname=자크+데리다   
339    <현대비평의 이해> 롤랑 바르트 댓글:  조회:926  추천:0  2018-10-21
롤랑 바르트     문학 비평가-롤랑 바르트  일생  소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들에 대한 '읽기'를 시도하며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문학과 이론의 전위적 움직임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 바르트(1915∼1980)는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 그가 한살 때 사망한 아버지의 몫까지 맡았던 어머니는 프랑스와 독일이 번갈아 차지했던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고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남부 바욘은 프랑스와 스페인, 바스크 문화가 혼재된 곳이었다.  청년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바르트는 소르본느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한 후 젊은 시절 루마니아와 이집트의 대학에서 프랑스어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프랑스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현대의 신화'에서 이미 바르트는 프로레슬링, 그레타 가르보, 포도주와 우유 등을 통해 현대사회 대중문화 속에 내포된 기호를 분석했다. 문학비평에서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작은 1970년에 발간 된 '텍스트의 즐거움'. 이 책에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70년대 그의 관심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외국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데까지 뻗어 '기호의 제국'(1970)에서 스모, 파친코, 가부키, 사시미 등의 이미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는 텍스트와 그 독서 위를 마치 얼굴에 띤 홍조처럼 스쳐간다"('텍스트의 즐거움' 중)는 식의 현란하고 독특한 문체는 난해하고 무거운 주제를 풀어주며 그에게 대중적 인기도 안겨줬다. 영화, 만화, 사진, 패션 등 현대 부르주아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문학과 언어의 관계  바르트의 문학작품 연구는 언어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고 언어학적 개념은 그것을 설명하는 수단이며, 그에 대한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분석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문학의 특수한 위상은 언어로 만들어진다는데 있다. 그러나 문학어 체계는 자신의 것이 아닌 질서 즉 자연어 체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문학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시스템 속으로, 하지만 자신과 동일한 목적 즉 의사소통이라는 목적으로 기능한다.  그 결과 어떻게 보면 언어와 문학 사이의 분쟁이 문학의 실재 그 자체를 형성한다. 작가들이란 인위적인 언어체계를 설립하는 ‘논리 창시자들’이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기 위해 텍스트는 자기 외의 다른 어디에도 규칙을 빌려와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더니즘의 독창성과 자율성의 개념이 바르트에게서 문학 형식과 언어에 대해 혁명적인 요구를 하고 있음을 본다. 미학의 규칙을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규율을 강요하는 장르의 개념을 제거해야 하고, 또 이미 알려진 언어 구조들을 부숴야한다.  ‘하나의 코드, 문법, 규범에 대한 빗나감들은 항상 글쓰기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규칙이 위반되는 곳, 그곳에서 글쓰기는 과도함으로 나타난다. 그 아유는 글쓰기란 예견되지 않았던 한 언어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들은 한편으로는 상징주의와 아방가르드의 전통에 대한 경의 표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르트를, 글자 그대로의 문학에 머무르고자 하는 누보 로망의 작가들과 언어의 환기적이고 주술적인 본래의 위상을 되찾고자 하는 현대 작가들의 대변자로 만드는 것이다.  랑그(langue), 문체(style), 글쓰기(e'criture)  일정한 가시적 기호를 사용하여 인간이 의사소통하는 체계로서 언어학적 글쓰기의 개념을 문학언어 연구에 전용하여 그 용어를 부각시킨 것이 바르트이다.  바르트의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하연 논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글쓰기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을 작가에 의해서 이루워지는 행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바르트가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즉 쓰는- 경우 그는 무엇보다 우리의 고종관념을 깨뜨리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작가란 사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는 작가란 자신의 사상이나 정열 또는 상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설파하기도하고 구조주의 전성기에 모든 사람이 내용 즉 의미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질 때, 그는 구조주의가 탐구해야할 새로운 인간형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글쓰기를 랑그와 문체간의 대비관계를 통하여 설명한다. 그는 소쒸르의 랑그 개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시대와 사회에 공통적인 의사소통과 표현의 틀이라고 보고, 문체를 작가의 비밀스런 개인적 신화속에 빠져드는 자족적 언어행위라고 정의한다. 아울러 문채란‘빠롤의 하위체’로서 ‘수신자가 제외된 형식’. ‘충동의 산물’이고 문학에 대한 선택이나 성찰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부연한다. 그에 비하여 ‘총체적 기호’, ‘인간적 행동양태의 선택’, ‘어떤 선의 단언’에 비유한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막연하고 문체를 ‘수신자가 없는 형식’이라고 한다든지, 성찰의 산물이 아니다라고 단정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결국 바르트는 글쓰기란 개인의 언어, 즉 빠롤을 역사와 단순히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연대성을 보여주는 행위로서, 그것은 사회라고 하는 수신자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변모되는 문학 언어이며 창조와 사회와의 관계이고 기능이라고 하고 있다. 즉 바르트가 포착한 것을 정리해 보자면, 랑그는 사화와 시대가 제공하는 언어의 틀이고 문체는 개인적인 취향과 재주가 만들어내는 글의 형태론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에 비하여 글쓰기는 독자와 사회에 대하여 작가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랑그와 문체는 글쓰는 과정에서부터 나타나서 글을 끝내는 순간 구체적으로 표출되지만 글쓰기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취하는 심적인 자세라고 하겠다. 바르트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글의 내용 즉 기표의 집합으로부터 작가가 지니고 있는 생각과 사상을 조합하는 것 속에 그러한 심적인 자세나 문제도 포함하게 된다. 이 경우 구체적인 지표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글을 읽고나서 머리에 남는 인상을 바탕으로 종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막연하고 주관적인 평가에 그치기 쉽다. 보다 구체적인 글쓰기의 구성요소로서 예를 드는 것은 어조, 말하는 투, 목적, 도덕관, 언사의 자유로움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적용할 때 바르트 자신은 구체적인 문장 분석을 통하여 글쓰기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문학사적 차원으로 가져가서 설명한다. 가령 메리메와 페늘롱은 150여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차이와 양자의 문체론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지향성이, 참조대상으로 삼고 있는 형식와 내용에 대한 개념이 그들이 준수하는 규약의 성격이 동일하다는 이유 때문에 같은 성격의 글쓰기를 실천한다고 보고 있다. 그 반면 동시대에 사용하는 랑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글쓰기에 대한 일반적인 사실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시대가 달라도 유사성을 보여주는 작가가 있고 그런가 하면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을 쓰는 작가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338    (현대비평의 이해) 미셀푸코 - 20010314 정문경 댓글:  조회:846  추천:0  2018-10-21
(현대비평의 이해) 미셀푸코 - 20010314 정문경   *미셸 푸코  1926년에 푸아티에의 중상층 가문에서 태어난 푸코는 의사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카톨릭 학교에 진학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젊은 푸코는 파리 앙리 4세 고등학교의 기숙사 학생에 되었고, 프랑스의 명문교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했다. 23세살 되던해에 푸코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해 철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1년에 탈당을 했다. 그 후 1년에 못되어 철학에 불만은 느낀 푸코는 심리학 교육을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정신병리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954년, 이 분야의 연구서인 『정신병과 심리학』을 자신의 첫 저서로 써냈다. 1960년 푸코는 오베르뉴에 있는 클레르몽-페랑 대학의 철학과 주임이 되어, 이 곳에 머무르는 동안 구조주의 전성기의 고전적 작품 『말과 사물』을 출판했다. 그는 좌파주간지인 『리베라시옹』을 편집했고, "교도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모임"을 통해 형법 개정을 추진했다. 또 동성애 허용 운동에도 앞장서서 가담했다. 그는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것이라고 종종 말했다. 근대 문화의 일부 중요한 실천들을 지탱하는 개념적 밑바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 밑바탕을 역사적 원근법 속에다 위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걸쳐 집필한 대부분의 저작에서 노렸던 목적이었다.  *원형감옥설  어떤 도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경우 취할 조치에 대한 17세기 말의 규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공간을 엄격히 분할하여 이탈하면 사형에 처하고 떠돌아다니는 동물들은 사살되었다. 또한 도시를 세분화하여 각 길거리는 1인의 담당자가 관리했는데 지정된 날에는 감금되어 외출이 금지되었고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다. 담당자는 집의 자물쇠를 밖에서 잠가 열쇠를 담당지구의 행정관에게 인계했고 행정관은 검역의 40일이 지날 때까지 열쇠를 보관했다. 사람들은 필수품을 사두어야 했고 집을 떠나는 경우에도 타인과 일체 교통할 수 없었다. 도시 성문지구에는 순찰대가 감시했으며 각 길거리의 담당자는 매일 길거리를 순회하며 창문 밖에서 가족의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내밀게 하여 전원의 상태를 조사했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사망자나 병자를 숨긴 것이 발각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감시를 뒷받침하는 장부기입의 구조도 발달했는데 담당자가 행정관에게 이는 다시 시장이나 시 간부에게 보고되는데 명부에는 성명, 나이, 신분과 더불어 방문시의 관찰사항-사망자, 병의 상태, 불만, 부정행위-등이 기록되어 있다. 보고서를 받은 행정관과 사법관은 의료면 또한 완전히 통제해 책임의사 외에는 아무도 처방을 내릴 수 없으며 고해성사 신부도 병자를 위문할 수 없었다. 40일의 검역 기간이 지나면 5, 6일째에 각 집의 정화가 시작되는데 거주자를 퇴거시키고 각 방을 향료를 태워 소독시킨다. 이때, 신체검사도 행해진다. 폐쇄되고, 세분화된 감시체제의 이러한 공간에서 각 개인은 고정된 장소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규제된 채, 모든 사항이 기록된다. 이는 감시적인 장치의 축약이며 이를 통해 권력은 계층 질서적이며 연속된 형태로 행사된다. 이처럼 현실적이기도 하고 상상적이기도 한 무질서 형태로서의 페스트는 의료면과 정치면의 야합으로 모세관처럼 권력의 운용을 확보하는 완전한 계층질서를 매개로한 규칙의 침투로서 감시체제 아래의 사람들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체계이다. 교화, 낙인을 위해 오늘날 배치되는 모든 권력기구를 뒷받침하는 기술과 제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벤덤의 은 이러한 -권력과 기술 제도간- 조합의 건축학적인 형상이다. 이는 주위에는 원형의 건물, 중심에는 탑을 배치하고 탑에는 원주에 그것을 둘러싼 건물의 배부에 면한 커다란 창을 몇 개 붙여 탑에서 주위의 건물 내부를 감시하는 방식이다. 주위의 건물은 독방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독방에는 탑을 향한 내부측과 건물 외부를 향해 창이 2개 있어 빛이 통하게 되어 있다. 이로써 중앙탑 속에 배치한 감시인은 독방 내의 광인, 병자, 수형자, 노동자, 생도 등 각 1인씩 유폐된 자들을 역광선의 효과를 통해 그림자 속에서 떠오르는 자세를 파악, 감시하게끔 되어 있다. 원형감시의 이러한 구조는 중단없이 상대를 볼 수 있고 즉석에서 판별할 수 있는 공간상의 단위를 계획 배치하고 있는데 충분한 빛과 감시자의 시선으로(가시성의 올가미로) 토굴감옥의 어두움보다도 훌륭하게 상대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고야가 그리고, 하워드가 저술한 유폐장소 속에서 다수인이 밀집하여 폭동을 일으키는 상태를 회피할 수 있었다. 즉 감시자에게만 보여지고 각 방은 접촉할 수 없는 채로 보여지기는 해도 볼 수 없는 상태는 정보의 차단을 의미했다. 이는 밀집된 다수, 다종 다양한 교환의 장이 해체되고, 대신 구분된 개인의 집합이라는 새로운 시설의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한편 실험실의 측면에서 은 실험을 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개개인을 훈육하고 재훈련하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즉 이는 처벌 중 가장 유효한 것, 의학의 효능, 교육적인 실험, 감정상의 변이 등 인간을 대상으로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무엇을 발견할 기회를 실험하는 공간이 된다. 즉 이는 인간에 대한 실험 작업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변화를 분석하기 위한 특권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한 이는 권력 실험실로 작용한다. 즉 관찰기구를 통해 인간의 행동에 개입하는 능력과 효력면의 성과는 다시 지식의 어떤 종류의 확대가 권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의 하단부터 권력이 행사되는 모든 표면까지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객체의 성격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처럼 이는 일상 생활과 권력의 여러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벤덤은 이 시설을 그 자체로 지극히 폐쇄적인 특정의 제도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의 잔혹함과 교묘함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에 적용이 가능하다. 이는 기능 속에서 권력의 여러 관련을, 권력의 여러 관련에 의해 어떤 기능을 작용시키는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교묘한 장치는 과거에는 감시해야 할 구조가 어두운 방이었으나 이제는 그곳이 권력의 행사가 사회 전체에 의해 규제 가능한 투명한 건물로 변했다. 원형 감시 방식의 이러한 성격으로 그 도식은 사라지지 않고 사회 전체의 속으로 확대, 일반화되어 여러 가지 힘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즉 이는 제도의 그물망으로 권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는 얼굴 없는 시선인 것이다. 이처럼 감시는 권력의 물리학, 해부학, 기술론이다. 감시는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질서화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로 경비가 들지 않으면서 최대한의 강렬함에 도달하고, 실패도 없이 가능한 멀리까지 확산되어 권력이 행사되는 장치(교육, 군대, 산업, 의료 등등)의 성과와 결부되어 순종, 효용을 증가시킨다. 자본주의 경제의 증대는 감시적인 권력이라는 양식을 추구, 이의 정치해부학은 정치 및 다양한 장치 제도를 통해 작용되어 왔다. 이는 감시가 법률형식의 실제적이고 제도화된 내용으로 변화는 점에서 경악할 만한 것으로 의 무한히 긴밀한 그물조직망의 확대가 바로 법의 보편의식을 대체해 버린다. 문제는 이것이 추상적이어서 사람들의 대다수가 이러한 형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 4장 몽상가의 ‘코기토’ (1)   **너 자신을 위해 붉은 밀과 연기의 꿈이 되어라 (...) 너는 결코 늙지 않으리라. -장 루슬로,   **항상 손안에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삶은 견딜 수 없다. -모리스 바레스    **밤의 꿈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산이 아니다. 밤들은 이야기가 없다. 그것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감성은 우리가 밤의 심연으로 접근하는 것을 도와준다. “마치 밤에 꿈들이 자리에 없는 자를 착각이라도 한 것처럼 어떤 다른 잠자는 자에 의해 형성되는 꿈들이 있다고 믿는다. 자리를 비우는 존재에게서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달아남이고, 존재가 지닌 모든 힘들의 포기이며,우리 존재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흩뿌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절대적인 꿈 속에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존재의 그런 재앙으로부터 무엇을 되찾을 수 있는가? 밤의 생활에는 우리가 묻혀버리고 우리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의향이 없는 그런 심층이 존재한다. 그런 심층에서 내밀하게 우리는 무(무 ne’ant) 우리의 무를 스쳐간다. 밤에 일어나는 모든 소멸은 우리 존재의 이와 같은 무로 수렴한다. 극단적인 경우, 절대적인 꿈은 우리를 무(Rien) 세계에 잠기게 한다. -무 (Rein): 네앙, 여명의 상태, 니힐(허무, 텅빔)이지만 생물학적인 면, -무 (ne’ant) -無 (철학적 없음)   **우리는 이 무(Rien)가 물로 가득 찰 때 생명을 다시 얻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론적 드라마에서 구원되어 보다 잘 자게 된다. 깊은 잠의 물속에 잠길 때, 우리는 평화 속에서 한 세계와 균형있게 존재한다.   무(Rien)나 물속에는 이야기 없는 꿈들, 절멸의 관점에서만 밝혀질 수 있을 꿈들이 존재한다. **나는 꿈을 꾼다. 그러므로 나는 꿈꾸는 실체이다. “그때 꿈은 꿈꾸는 실체 속에 더없이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될 터이다.” 우리는 사유를 반박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없앨 수 있다. 그러나 꿈은? 꿈꾸는 실체의 꿈은? -이와 같은 꿈꾸는 실체에서 나는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그렇다. 모든 것은 밤의 형이상학의 문턱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그처럼 멀리 나아가기 전에, 아마 밤의 정신이 꾸는 꿈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영역에 있는 보다 덜한 미흡 존재 속에 잠기는 현상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밤의 꿈의 코기토가 아니라 몽상의 코기토를 다루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인간 정신 현상의 시적인 힘 —단순한 몽상의 특수성을 분명히 도출하려고 시도하면서 우리의 연구를 단순한 몽상에 집중시키는 것. 밤의 꿈과 몽상의 근본적 차이, 즉, 밤에 꿈을 꾸는 자가 자신의 자아를 상실한 그림자인 반면에, 몽상하는 몽상가는 그가 다소라도 철학자라면 몽상하는 자아의 중심에서 하나의 코기토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상은 의식의 섬광이 존속하는 몽환적 활동이다.   **몽상이 태어나게 되는 것은 긴장 없는 자각 속에서이고, 즐거움을 주는 이미지 —이 이미지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어떠한 책임도 벗어나 몽상의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그것을 방금 창조했기 때문이다. --를 맞이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수월한 코기토 속에서이다.   **몽상하는 자의 존재는 그가 자극하는 이미지들에 의해 구성된다. 이미지는 우리를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우리의 깨어남은 하나의 코기토로 알려진다. 또 한 번의 가치 부여를 하면 우리는 긍정적인 몽상 앞에 있게 되며, 이 몽상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무언가 산출을 하며 시적인 몽상이라 명명될 수 있다. 몽상은 몽상가 주변에 존재를 결집시킨다. 그것은 그에게 그가 현재의 존재 모습 그 이상이라는 환상을 준다. 몽상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우리를 존재론의 뉘앙스로 초대한다. 이러한 존재론은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락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몽상이 없이는 안락도 없다. 안락이 없이는 몽상도 없다. (존재는 하나의 가치!)   **생각하는 코기토는 방황하고, 기다리며 선택할 수 있다 —몽상의 코기토는 곧바로 그것의 대상,그것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위대한 몽상가는 반짝이는 의식의 대가들이다. 일종의 다원적인 코기토가 한 편의 시의 닫혀진 세계 속에서 소생한다. 아마 이 시의 총체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의식적인 힘이 필요할 것이다. (텍스트 195쪽까지)   **코기토적 몽상에 대한 의미부여:     **내 시적 가치는 어떤 코기토를 지향하는가?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몽상과 우주(1)   **“영혼이 있는 인간은 우주에만 복종한다.” —가브리엘 제르맹   **“나는 매우 방대한 금언 속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우주가 필요했다.” -로베르 사바티에   **몽상을 하는 자가 일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관심사들’을 물리쳤을 때, 그가 타자의 근심으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났을 때,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 갑자기 그런 몽상가는 세계의 몽상가가 된다. 그는 자신을 세계로 개방시키고 세계는 그에게 자기를 개방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을 몽상하지 않았다면, 세계를 결코 잘 보지 못한 것이다. .....시간은 정지된다. 시간은 더 이상 어제도 내일도 없다. 시간은 몽상가와 세계의 이중적 깊이 속에 매몰된다.   **이성적 인간은 아마 도취라는 낱말을 추상적인 낱말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도취가 진실하도록 시인은 세계의 잔에도 마신다. 그에게 은유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필요하다. 예컨대 확대된 잔의 우주적 이미지는 이렇다.   “수평선이 가장자리를 이루는 내 잔에도 나는 한 잔 가득히 창백하고 얼음장 같은 태양빛을 단숨에 꿀꺽 마신다.“ -피에르 샤퓌   **피에르 샤퓌의 매력은 용어들의 이례적인 결합과 은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미지가 확대되는 변화 정도를 따라가는 독자에게 모든 것은 위대함 속에 결합된다. 시인은 방금 세계의 잔에다 구체적으로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고독한 몽상 안에서 우주적 몽상을 하는 자는 '관조하다'라는 동사의 진정한 주체이고, 관조가 지닌 힘을 첫 번째로 증언한다. 몽상하면서 응시하는 것은 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해한다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지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몽상하는 눈은 보는 게 아니거나 최소한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본다. 우주적인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지각 이전이라고 지칭해야 할 상태에서 살도록 해준다. 몽상가와 그의 세계 사이의 소통은 고독한 몽상 속에서 아주 가까우며 ‘거리’가 없다. 지각된 세계, 지각에 의해 파편화된 세계를 나타내는 그 거리 말이다.   ** -하나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사상가들이 기나긴 반성의 길을 그리는 반면에 우주적 이미지는 즉각적이다. 그것은 부분보다 먼저 전체를 우리에게 준다. 그것은 그것의 기호들 가운데 하나로 우주를 붙들고 있다. 단 하나의 이미지가 전 우주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묶어둔다. --과일은 그것만으로도 세계의 약속이고, 세계에 존재하도록 권유하는 초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적 상상력이 이와같은 근본적 이미지에 작용할 때, 거대한 과일은 세계 자체이다. 달과 대지는 과일 맛이 나는 별들이다.   “오 대지처럼 둥근 침묵 말없는 별의 움직임 점토질 핵을 중심으로 한 과일의 인력.” --장 케이론   --이처럼 세계는 둥근 모습으로, 과일 같이 둥근 모습으로 몽상된다. 그때 행복은 세계로부터 과일로 역류한다.   **시인이 하나의 특수한 이미지에 위대함의 운명을 부여하자마자 하나의 특수한 우주가 이 이미지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시인은 현실적 대상에 자신의 상상적인 분신, 자신의 이상화된 분신을 부여한다. 이 이상화된 분신은 곧바로 이상화 작용을 하며, 그렇게 하여 확대되는 이미지로부터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다.   **몽상과 이미지 –4원소   **확실히 이미지는 우주적 생성에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몽상의 통일적 단위가 된다. 몽상가가 자신의 몽상 속에서 ‘사물의 심층’으로 내려갈 때, 몽상이 우주와 실체가 결합하며 모든 것은 위대하고 동시에 안정적이다. 인간이 세계의 통일적 단위를 주장하기 위해 예로부터 끊임없이 상상해 왔던 ‘4원소’라는 물질의 상상력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매우 자주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주적인 이미지들의 작용에 대해 몽상했다. 우리가 우리의 불 앞에서 몽상에 잠기면, 상상력은 이 불이 한 세계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우리가 샘 앞에서 몽상을 하면, 상상력은 물이 대지의 피이고, 대지는 살아있는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부드럽고 향기 나는 반죽을 손가락에 느끼면 세계의 실체를 반죽하기 시작한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우주적 물질에 의해 실체화된 세계들에 대한 분명한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꿈이었다. 몽상을 몽상하고,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보다도 더 과감한 몽상: 우주생성론은 사유를 조직화하지 않았다는 것, 과감한 몽상이며 신화의 환상태로 몽상했다는 것, 그 중 “물은 원소들 가운데 가장 신화적인 것”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이미지의 우주성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에 거주케 한다. 그것은 몽상가에게 상상된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상상된 세계는 확장되는 자신의 집, 방 안에서 느끼는 자신의 집과는 반대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몽상하면서 끊임없이 떠나고, 다른 곳 -언제나 안락한 다른 곳-에 거주한다. 몽상된 세계를 잘 지칭하기 위해선 그 세계를 행복을 통해 나타내야 한다.   **우주적 이미지는 구체적인 휴식을 우리에게 준다. 이러한 휴식은 어떤 욕구, 어떤 식욕에 부응한다. “세계는 나의 재현이다”라는 철학자의 일반적 표현을 ‘세계는 나의 식욕이다’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어뜯는다’는 행복 이외에 다른 ‘염려’ 없이 세계를 물어뜯는 것, 이것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어뜯기는 세계에 대한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인가.   “부드러운 살, 강한 이빨, 총체적 존재의 얼마나 대단한 조화이고, 얼마나 대단한 통일성인가!” -장 발(철학자)   “물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능한 유일한 증거, 가장 설득력 있고 가장 내밀하게 진실한 증거---그것은 목마름이다.” -프란츠 폰 바아더   **각각의 식욕마다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때 몽상가는 세계의 실체들 가운데 하나에서 영양을 취하면서 세계에 참여한다. 이 실체는 그의 상상력의 기질에 따라 밀도가 높거나 낮고, 따뜻하거나 부드러우며, 투명하거나 어스레한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이 세계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갱신하면서 몽상가를 도와주러 올 때, 몽상가는 우주적 건강에 다다른다.   ##나에게 찾아온 우주 맞이하기 – 내가 창조한 우주적 이미지를 시적 언어로 표현하기:   ##이민숙 : 바람 연작시, 하화도 연작시,  
336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3장)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댓글:  조회:1149  추천:0  2018-10-20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4) : (텍스트 138쪽~ )   **지극히 먼 추억을 추구하는 시인은 자기 이야기의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추억보다 더 큰 근본적인 가치, 어떤 의지처를 원한다.   “내가 추억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내가 다만 원했던 것은 약간의 소금이고 나를 알아보고 다시 떠나는 것이네.“   **감각이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어린 시절’ 안에서 세계와 결부시키는 이 광물적 꿈, ‘원소들’의 그 꿈을 감성적인 것의 고고학에서 되찾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나이는 광물적 꿈이 아닐까? (의미 생각해 보기: )   **시인이 기억할 줄 모르는 영역은 어떤 저편인가? 근본적인 삶은 영원의 시도가 아닌가?   **우리가 삶의 시작에 대해 명상할 때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기억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몽상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기원에 대해 몽상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망각이 우리를 죌 때, 과거를 돌파하기 위해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다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는 우리에게 ‘기억의 과감성’을 가르쳐 준다.   “꾸며내라, 기억을ㅡ 깊은 곳에 소멸된 축제는 없다.”   (생각해 보기) : 기억 속의 추억을 향하여 시적인 문장 하나: @ @   **어린 시절은 인간적 물이고, 어둠에서 나오는 물이다. 안개와 섬광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어린 시절, 완만한 모호한 영역 속에 있는 그 삶은 우리에게 탄생들의 어떤 두께를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시작했던가! 그러나 흘러가 사라져 버린 원천은 얼마나 많은가! 몽상은 상상력의 기억술이다.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운명이 사용할 줄 몰랐던 가능성들과 접촉한다.   **어린 시절은 존재의 우물: 그리하여 하나의 원형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몽상할 때면, 나는 내가 또 다른 원형에 사로잡히고 있음을 잘 안다. 우물은 하나의 원형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영혼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이다. -후안 라몬 히메네즈- “우물! 그 얼마나 깊고 ,청록색이며,신선하고 잘 울리는 낱말인가1 돌면서 어두운 땅을 파 신선한 물에까지 이르는 게 이 낱말 자체인 것 같지 않은가”   **순수한 추억, 무용한 어린 시절의 그 무용한 추억은 얼마나 자주 몽상의 양식처럼, 우리가 잠시 삶의 여백에서 살도록 도와주는 비(非)삶의 혜택처럼 되돌아오는가. 휴식과 행동, 몽상과 사유의 변증법적 철학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은 무용한 것의 무용성을 꽤 명료하게 말해준다.   **시인이 체험하는 ‘미소 짓는 그리움’ 속에서 우리는 그리움과 위안의 이상한 종합을 실현하는 것 같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우리로 하여금 매우 오래된 슬픔을 용서하게 해준다. 그 어떤 옛날의 분위기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억을 탈사회화해야 한다. 또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초창기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 가르쳐 준 그 모든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 언급되고 이야기된 추억들을 넘어서, 우리는 어린아이의 영혼이라는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총합인 미지의 존재를 되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아이 전체가 놀라운 존재이고, 존재의 놀라움을 실현하는 존재인 때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달력의 톱니바퀴로부터 해방된 부동의 어린 시절, 변전이 없는 어린 시절을 우리 내부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삶을 부코의 이름을 통해서만 나타내면서 일상의 시간을 매일 배급하는 존재인 성인들의 시간도 인간들의 시간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위대한 네 신(神)인 사계절이다. 순수한 추억은 날짜가 없다. 그것은 계절이 있다. 그 계절은 추억의 근본적인 흔적이라는 계절이다. 잊기 어려운 그날 태양은 어떠했고, 바람은 어떠했던가? 이것이 무의지적인 기억의 어김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이다. 그렇게 하여 추억은 커다란 이미지, 확대되고 확장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것은 어떤 계절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 이 계절은 속이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완벽의 부동성 속에서 휴식하는 총체적 계절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총체적 계절인 이유는 그것의 모든 이미지들이 동일한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를 통해 그것의 본질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겨울, 가을, 태양, 여름의 강은 총체적인 계절의 뿌리들이다. 그것들은 시선을 통한 광경들일 뿐 아니라 영혼의 가치들이며, 직접적이고 파괴할 수 없는 부동의 심리적 가치들이다. 기억 속에서 체험될 때, 그것들은 언제나 호의적이다. 추억의 계절은 미화한다.-우리가 몽상하면서 어린 시절의 계절이 지닌 단순함의 깊이로, 그것의 가치의 중심 자체로 내려 할 때, 그것은 시인의 계절이 된다.   **모든 어린아이는 신화적이고 당연히 신화적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은 어른들처럼 화석화된 이야기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우화들로 살아간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 자신의 몽상 속에서 자신의 우화들, 그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그런 우화들을 발견한다. 그래서 우화는 삶 자체이다.   “나는 내가 나의 우화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살았다.”   **우화는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매혹시킨다. 우리는 매혹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꿈을 말하려는 데 성숙한 나이의 속에서 애를 태우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꿈은 그것의 언어를 배울 수 있기도 전에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 -데이비드 소로-     (빗살의 시간과 몽상)     -우리의 우화를 복원하는 시간, 우리의 어린 시절 우화의 가장 선명한 장면은?       -우화는 현실적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드러내고 싶은 몽상적 사건: 그 사건에 의미부여하기.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5) : (텍스트 153쪽~ )     **시적 실존주의 → (상상력×기억의 융합) :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념적 특권을 강제하는 역사가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억의 장소들에 충분히 머물지 않은 채 날짜들에 따라 달려가는 기억은 살아있는 기억이 아니다.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발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는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로 비(非) 실존주의를 체험한다. 추억하면서 상상하는 몽상 속에서 우리의 과거는 실체를 되찾는다. 인간 영혼과 세계의 관계는 그림 같은 것을 넘어서 강력하다. 그때 우리의 내부에서는 이야기의 기억이 아니라 우주의 기억이 살고 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들이 되돌아온다.   “권태는 지방이 주는 가장 큰 행복이다. 나는 격렬함을 통해 우리의 내부에서 몽상을 끌어내는 그 심층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권태의 소리를 듣는다.” --그런 시간들은 되찾은 상상력 속에서 영속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고요의 세계 속에, 몽상의 세계 속에 있었다. 삶을 지배하는 어떤 삶 속에서, 지속하지 않는 어떤 지속 속에서 산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복원시켜 줄 줄 아는 매력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기억은 매우 생생한 상상력, 다시 말해 감동을 주기 쉽고, 따라서 과거의 장면들을 삶의 매혹처럼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을 매 감각에 의지해 환기시킬 수 있는 상상력 속에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들레르   **몽상은 폭넓은 촬영이 되도록 충분한 빛으로 현실을 둘러싼다. (추억의 촬영, 일종의 본능) -수완 있는 사진작가는 자신의 스냅사진에 어떤 지속, 아주 정확히 말해 몽상의 지속을 부여할 줄 안다.시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시적인 것의 실존주의에 따라 우리의 기억에 맡기는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 속하며 우리 자신이다.   **“나는 내가 나 지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인정했던 온전한 어린 시절을 상상적 기억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아마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이미 열망했던 금지된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고요하고 친근한 집에서 놀이 동무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때때로 그런 동무들을 갖고자 열망했던 것처럼 말이다.” -앙리 보스코, 『히아신스』   **어린 시절은 심층심리학의 바로 그 양식으로 진정한 원형처럼 나타난다. 확실히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하나의 이미지이며, 행복한 이미지들을 끌어당기고 불행의 경험들을 물리치는 이미지들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 원리상 전적으로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단순한 추억보다 더 심층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   **원형들의 시적 합일: 우리는 시가 인간 존재를 위한 종합의 힘임을 입증할 수 있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원형들은 우리가 세계를 믿고 세계를 사랑하며 우리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도와주는 영감의 보고들이다. 각각의 원형은 세계로의 개방이고, 세계로의 초대이다. 각각의 개방으로부터 비상의 몽상이 솟아오른다.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를 근본적 몽상의 효력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린아이의 물, 어린아이의 불, 어린아이의 나무, 어린아이의 봄꽃......세계의 분석을 위한 얼마나 많은 진정한 원리들인가!   **원형은 강력한 이미지의 기원으로 언제나 남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부성적인 힘, 모성적인 힘....모든 위대한 원형들)--그것들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은 콤플렉스가 없다. 몽상 속에서 어린아이는 시적 통일성을 실현한다.     &&질문: 내가 실현하고 싶은 시적 통일성은??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 찾아가서 몽상하기: 세계로의 초대 세계로의 개방을 실현하는 시 쓰기               **어린 시절이 몽상되고 명상될 때, 고독한 몽상의 그 내밀함 속에서 명상될 때, 그것은 철학적인 시의 색조를 띤다. ‘철학적 반성’ 속에서 몽상에 어떤 위치를 부여하는 철학자는 명상된 어린 시절을 통해 하나의 코기토를 경험한다. 이 코기토는 어둠으로부터 나오며, 어둠의 가장자리를 간직하고 있고, 아마 어떤 ‘어둠/그림자’의 코기토라 할 것이다. -삶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몽상하지 않는 삶 속에서인가 몽상하는 삶 속에서인가? 그 처음은 어디였는가?   **코기토 에르고 슘(Cogito Ergo Sum) -코기토의 진정한 의미: 인식론의 시초-단순한 ‘생각’이 아닌 ‘이성’-복합적 정신 기능—방법적 회의의 의미. 신으로부터의 독립. **인간 존재의 무의미들의 총체인 어린 시절은 고유한 현상학적 의미, 순수한 현상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탄의 기호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시인 덕분에 우리는 경탄하다는 동사의 순수하고 단순한 주체가 된다.   **지붕에서 올라가는 연기....! 그것은 마을과 하늘을 연결하는 선이다......추억 속에서 그것은 언제나 푸르고, 완만하며 가볍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보는 것, 어른들이 보여준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인들의 보여줌은 이미 자신들의 잃어버린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본다’고 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몽상하는 어린아이는 얼마나 대단한 우주적 존재인가!   **모든 몽상이 태어나게 하는 가벼운 우울과 많이 몽상을 한 어린아이의 아득한 우울 사이의 일치는 심원하다. 몽상하는 어린아이의 우울을 통해서 모든 몽상의 우울은 과거를 지닌다. 존재의 연속성, 그러니까 몽상하는 존재의 실존주의의 연속성은 이러한 일치 속에서 형성된다.   **정신분석학은 사건의 삶을 연구한다. 그러나 시인은 사건 없는 삶,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삶과 맞물리지 않는 삶을 경험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사건들을 가져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다. 모든 사건들은 몽상 속에서만 우리의 내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아니마, 즉 여성적 존재의 자연스러운 평화를 동요시키는 ‘외상’이고 남성적인 난폭함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시적 질료면에서 어떤 것인가?? (개념 이해하기) : 몽상의 시학은 몽상을 고요함의 의식 속에 유지하는, 몽상의 유익한 점들을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그것은 충실성에 대한 향수이다!   **상태의 추억과 마주하는 일: 색깔도 없고 사건도 없는 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상태들을 알아본다. 왜냐하면 더없이 소란스럽고 지극히 즐거운 어린 시절에도 ‘북쪽’의 시간들은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시계 없는 그 시간들 또한 우리 안에 있다.몽상은 호의적이고 진정시키는 그 시간들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그것들은 단순하게 그러나 고귀하게 인간적이다.   **우리에게 그런 존재의 가치들을 드러내주기 위해선 아마 시인이 필요할 것이다.....우리의 내부에서 여전히 우리의 내부에서, 언제나 우리의 내부에서 어린 시절은 영혼의 상태이다.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 (6) : (텍스트 168쪽~ ) ** –선함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은 우리의 몽상들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것인 바, 우리에게 평화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가 인간의 스승이 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형이상학적으로 위대할 것인지 이해했다. “누가 나에게 어린아이의 선한 마음을 가르칠 것인가! 상상적 혹은 현실적인 욕구가 근심이나 낙담에 빠뜨리고, 침울하게 만들거나 의기소침하게 만들 때, 우리는 어린아이의 친절한 영향을 느끼고 싶고, 그에게서 배우고 싶으며, 영혼이 평온해지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우리 자신의 스승으로 부르고 싶어한다.”-키에르 케고르   ** – 신화 속의 어린아이는 신화소(神話素)의 분명한 사례이다. 이 신화소,다시 말해 존재가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그 진입의 가치와 작용을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전기의 흐름을 멈추어야 하고, 어린 시절의 상태가 삶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삶의 불사신이 될 수 있을 만큼 어린아이에게 뚜렷한 위상을 부여해야 한다. -에르베 루소   **인간의 가족에서는 고아이지만 신들의 가족에서는 사랑받는다는 것, 이것이 신화소의 두 극점이다. 우리가 이 두 극점의 모든 몽환을 인간적 차원에서 되살리기 위해선 대단히 긴장된 몽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소간 고아였고 우리의 희망을 이상화된 존재들, 즉 희망의 신들 자체로 향하게 했던 그런 몽상이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몽상으로 보면, 우리가 신격화된 어린 시절의 신화소에 민감하게 되는 것은 본원적인 우주에 밀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린아이 신(神)은 세계의 아들이다. 그리고 세계는 연속적인 탄생을 표상하는 이 어린아이 앞에서 젊다. 달리 말하면 젊은 우주는 고양된 어린 시절이다.   **신격화된 그 모든 어린 시절은 인간 영혼의 심층에 살고 있는 한 원형의 활동을 증거한다. 모든 몽상가 내부에는 어린아이, 몽상이 찬양하고 안정시키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몽상은 어린아이를 내력 이야기에서 떼어내고, 그를 시간에서 벗어나게 하며, 시간에 낯설게 한다. 또 하나의 몽상으로서 찬양받는 항구적인 이 어린아이 그가 바로 신이다.   **-어린 시절의 식물적 힘을 전설에 의해 자양을 얻어 인생 내내 우리의 내부에 존속한다. 우리의 심층적 식물적 태도가 지닌 비밀은 거기에 있다. “어린 시절은 우리 안에서 죽어가고 주기를 마치자마자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보물 가운데 가장 살아 있는 것이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지속적으로 풍요롭게 해준다.....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줄 모르고, 자신의 육체 안의 육체처럼, 낡은 피 속의 새로운 피처럼 자신 안에서 어린 시절을 다시 포착할 줄 모르는 자는 불행할 지어다. 그는 어린 시절이 그를 떠나자마자 죽어버린 것이다.” -프란스 엘렝스   **시인을 따라갈 때, 우리가 어린 시절을 향한 몽상을 심화시키면 우리는 우리 운명의 나무를 보다 깊이 뿌리박게 하는 것 같다. 인간 운명의 진정한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나는 대단히 안도를 느낀다. 나는 긴 여행에서 돌아오고 다음과 같은 확신을 얻었다. 즉 인간의 어린 시절을 그의 삶 전체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성숙한 나이의 소관이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지니고 30년을 걸었지만 그것에 어떤 사상을 주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내가 길을 나섰을 때 모든 게 이미 언급되었다는 것을 안다.” -프란스 엘렝스   ** - 냄새! 그것은 세계와 우리의 융합을 나타내는 최초의 증거이다. 옛날의 냄새에 대한 그 추억을 우리는 두 눈을 감을 때 되찾는다. 현재에서처럼 과거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냄새는 내밀성의 중심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냄새의 다발이다. -Louis Chadoume   “달아난 날들의 막연한 매력을 환기시킨다. 숨을 쉬는 게 기억일 때는 모든 냄새가 좋다. 위대한 몽상가는 그렇게 과거를 호흡할 줄 안다.” 사라진 집들의 방들, 복도, 지하실, 다락방은 변함없는 냄새의 거처인데, 이 냄새는 몽상가가 알고 있듯이 그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빌로드의 향기를 영원하게 만든다. -Yves Cosson   **하나의 계절, 개인적인 계절이 그 특이한 냄새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가을 너에 의해/ 축축하게 젖은 가련한 두건 냄새/   /--새싹의 씁쓰름하고 끈적끈적한 향기 속에 [담긴]/ --포플러의 끈적이는 새싹을 손가락으로 으깨어 보고,그 미끈거리는 씁쓰름한 반죽을 맛보가. 그러면 그대들은 온 생애 동안 추억을 지니게 될 것이다./ -알랭 보스케   /박하로 둘러쳐진/오솔길의 향기가/내 어린 시절 속에서 춤춘다./ -C.A.Bozombres   **이미지들 가운데 가장 번역 불가능하고 가장 미묘한 냄새적 이미지-장 드 구르몽   **어린 시절의 눈에 대해-‘장미와 소금의 냄새’-앙리 보스코-를 맡았다. 그것은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차가움의 냄새 자체이다.   **씁쓰름한 회양목과 사향 냄새 나는 카네이션의 조화 –마리 도게   **“내 고장의 냄새는 한 개의 사과였다.” -뤼시 들라뤼 마르드뤼스   **“나는 땅, 밀, 새 포도주의 냄새 속에서 자랐다. 내가 그 냄새에 대해 생각할 때면, 기쁨과 젊음의 생생한 향기가 나에게 되살아난다.” -앙리 보스코 (추억은 과거 속에 보관된 향이다.)   **행복한 날들에 세계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향연을 준비했던 대단한 냄새들이 기억 속에 떠오를 때,보들레르를 좋아했던 나는 ‘추억들을 먹는’ 것 같다. 갑자기 나는 모든 더운 빵을 시인들에게서 수집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재시작되는 축제의 대단한 냄새, 우리가 최초의 행복에 대해 단호하게 표명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그런 삶의 대단한 냄새를 내가 추억에 부여하도록 그들이 도와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냄새에 대한 추억, 추억에 냄새의 이미지 부여해서 스케치해 보기.   -나는 그에게서 (                                     )냄새를 맡았다.   -내 고향에서는 (                                                )냄새가 났다.   -내 추억의 가장 강렬한 냄새는??
335    몽상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제 2장 -아니무스, 아니마 댓글:  조회:1010  추천:0  2018-10-20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1.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   **“과거의 근원이 결합되어 있는 심연보다 더 깊은 심원한 여인이여. 왜 그대는 나하고만 함께 있지 않은가?   내가 그대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그대는 전생의 존재들의 골짜기로 소멸하는구나“ –이반 골, [다양한 모습의 여자]   “내 영혼은 목신의 영혼이자 쳐녀의 영혼이다.” -프랑시스 잠, [토끼 소설]   **꿈과 몽상의 대립 속에서—말로 하는 사랑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부재하는 연인에게 하게 될 말을 준비하는 몽상에서 낱말들, 아름다운 낱말들은 충만한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또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낱말들이 몽상의 언어에 속하느냐, 명료한 삶의 언어에 속하느냐 (휴식의 언어에 속하느냐, 감시받는 언어에 속하느냐) 자연스러운 시의 언어에 속하느냐, 권위적인 운율법에 단련된 언어에 속하느냐에 따라 정신적 ‘무게’가 다르다는 점이다. 밤의 꿈은 검열에 대한 격렬한 혹은 교활한 투쟁일 수 있다.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겸열 없는 언어를 알게 해준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진정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료한 의식을 아직은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성과 여성으로 동시에 경험한다고 해서 놀랄 게 아무것도 없다. 어떤 정념의 미래를 체험하는 몽상은 자신의 정념의 대상을 이상화한다. 이상적인 여성적 존재는 정념에 사로잡힌 몽상가에 귀를 기울인다. 몽상은 이상화된 남자의 고백을 야기한다.   **우리 자신을 현실적 존재와 이상화하는 존재로 이중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몽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몽상이 ‘심층심리학’의 가장 좋은 학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심층심리학으로부터 배웠던 모든 가르침을 우리는 몽상의 실존주의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적용할 것이다. 인간 정신 현상의 그 어떠한 요소에도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완전한 심리학 같으면 가장 극단적인 이상화, 즉 우리가 앞서 출간한 한 책에서 절대적인 승화라고 지칭했던 지대에 도달하는 이상화를 통합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완전한 심리학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인간에 결부시켜야 하고, 몽상의 시학을 삶의 단조로움과 결합시켜야 한다.   **사실 우리가 볼 때 분명한 것은 말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심충에서 움직이는 지극히 멀고 지극히 모호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의식은 중얼거리며 우리는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진실을 듣는다. 자유로운 몽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서로에게 고백하기 위해. 잘 화합된 고요한 이중적 본성 속에서 교감하기 위해 이야기한다.   **현대 정신분석학의 모든 학파 가운데, 인간 정신 현상이 그 원초성에서 양성적이라는 점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것은 C.G.융의 학파이다. 융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된 추억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성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자기 무의식의 심층을 이중의 안테나를 갖고 가볍게 건드린다.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현재의 심리학이 될 정도로 흥미롭다. 예컨대 왜 니체는 “엠페도클레스가 자신이 사내와 계집이었음을 (...) 기억했다”고 이야기하는가? 니체의 여성성읜 보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심원하다.   **우리의 검토를 몽상의 세계로 한정하는 우리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경우에도 조화로운 양성성은 마음을 평온케 하는 작용 속에 몽상을 유지시켜 주는 그 나름의 역할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 원초적인 양성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나타나는 그것들 사이의 경쟁을 표시한다. 양성성은 자신의 거처 —심층적 몽상의 거처 같은 곳—를 떠나자마자,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흔들림에 빠진다. 심리학자가 비정상 상태라고 표시하면서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흔들림이다. 그러나 몽상이 깊어지면 이런 흔들림은 잦아들고, 정신 현상은 성의 평화, 즉 말의 몽상가가 경험하는 그 평화를 되찾는다.   **심리학자 뵈이텐디예크는 [여자]라는 아름다운 책에서 정상적 남자는 남성성이 51퍼센트이고 정상적 여자는 여성성이 51퍼센트라는 점을 참조하고 있다. .....완전한 남성성과 완전한 여성이라는 두 평행적인 단일주의에 대한 조용한 확신을 깨트리는 것, 그러나 시간은 모든 균형에 영향을 미친다. 낮과 밤, 계절과 나이는 우리의 균형 잡힌 양성성을 고요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각각의 인간 존재 안에서 남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와 여성적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는 수치와 측정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여성의 시계는 조용하게 흐르는 지속 속에서 연속적으로 나아간다. 남성의 시계는 급격한 움직임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몽상과 인식노력을 솔직하게 변증법적으로 대비시켜 보겠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점을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   **남성과 여성의 변증법은 심층의 리듬을 따라 전개된다. 그것은 보다 덜 깊은 것, 언제나 덜 깊은 것(남성)으로부터 언제나 깊은 것, 언제나 더 깊은 것(여성)으로 간다. 단순한 고요함의 휴식 속에서 포괄적으로 펼쳐지는 여성성을 우리가 만나는 곳은 몽상 속에서이고, 앙리 보스코가 언급하듯이 ‘잠재적 삶의 무궁한 저장고’에서이다. 정염의 삶에서조차 남자와 여자는 각기 자신의 이중적인 힘을 이용할 줄 안다. 따라서 두 파트너의 각자 안에 그들이 지닌 이중적 성의 조화를 가져오거나 유지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 어려운 문제가 된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6.28.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성격학적 분류를 결정하기 위해 열거하는 여성성의 징후들은 정상적인 아니마, 다시 말해 정상적인 모든 인간 존재 안에서 살아가는 아니마와의 진정한 접촉을 제시하지 못 한다. 그건 심리학자의 방식이며 동요된 아니마, 그러니까 ‘문제’로 괴롭힘을 당하는 아니마의 거품만을 주목한다. 마치 여성적인 휴식의 안전을 경험하는 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리적인 성적 구분의 두 기호로 인간은 너무 급격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부드러움, 이중적 부드러움, 아니무스의 부드러움과 아니마의 부드러움을 다루는 심리학이 가동될 수가 없다. 새로운 낱말들을 가지고 오래된 언어를 말한다는 건 나름의 모순에 빠질 수가 있다는 뜻.   **일상 속의 남자와 여자는 드레스와 바지로 이해되듯이 두 개의 반대 개념으로 규정된다. 아니무스는 정신적 성장 속에서 밝혀지고 지배하는 반면, 아니마는 존재의 지하실을 향해 심화되고 그 속에서 지배한다는 것이다. 몽상적 차원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다르다. 그것은 몽상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마라는 점이다. 아니마는 고독이다. 몽상은 모든 아니마의 자유로운 확장이다. 시인이 아니무스적인 관념들에 노래의 구조, 노래의 힘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자기 아니마의 몽상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아니마의 몽상이 없다면, 시인이 아니마의 몽상으로 쓴 것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은 몽상을 하면서만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통상적인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아니마 아니무스가 아니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직무에서는 권위적인 사람들, 빳빳한 군모를 쓴 어떤 군인이, 저녁이면 부인이나 노모의 권위에 움츠린 채 매우 겸손해진다. --이러한 성격상의 모순들이 소설적 진실 속에 깃든 심리적 정확성이다.   **심층적 인간, 곧 고독 속에 있는 인간을 다루는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명백한 결정이 정교한 존재론의 연구를 멈추게 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비스마르크의 눈물(융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눈물에서 돌연한 실체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무스의 그와 같은 무너짐이 아니마의 긍정적 나타남을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아니마는 허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가사 상태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고유한 힘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 휴식의 내적 원리이다. ‘눈물’이 아니마의 기호는 아니다. 슬픔, 회한, 피로의 길 끝에서 오는 게 아니다. 심리학적 관찰은 서로 분리되는 시점이 아니라,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결합에 의해 관찰된다. 그것은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의해서만 관찰되지는 않는다.   **아니마는 우발적인 일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실체이고, 자신의 화합된 존재를 부드럽고 천천히 즐기고자 하는 화합된 실체이다. 우리는 몽상을 심화시킬 때, 몽상, 특히 잔잔한 물의 대단한 휴식 속에서 물의 몽상을 사랑할 때 보다 확실하게 아니마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 이상화하는 몽상 속에서 아니마의 순수성을 새롭게 해 주는 죄 없는 물이여! 휴식 상태에 있는 물에 의해 이처럼 단순화된 세계 앞에서 몽상하는 영혼의 자각은 단순하다. 단순하고 순수한 몽상의 현상학은 우리를 우발사(遇發事) 없는 정신 현상으로, 휴식의 정신 현상을 향해 인도하는 길을 열어준다. 잔잔한 물 앞에서의 몽상은 우리로 하여금 아니마의 선(善)인 항구적인 정신적 일관성을 경험하게 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고요함의 가르침이로, 우리의 본성이 지닌 고요함, 우리의 아니마가 지닌 실체적인 고요함을 자각하라는 간청이다. 우리의 휴식의 원리인 아니마는 우리 안에 있는 본성, 스스로 자족하는 본성이고, 고요한 여성성이다. 우리의 심층적 몽상의 원리인 아니마는 진정 우리 안에 있는 잔잔한 물의 존재이다.   **연금술사의 애니미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찬가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를 실험하고 수많은 실험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것의 애니미즘이다. 연금술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몽상을 실험한다. 이때부터 연금술의 언어는 몽상의 언어이고, 우주적 몽상의 모어이다. 이 언어는 몽상되었던 바대로 고독 속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연금술의 책을 읽을 때 가장 혼자가 된다. 우리는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바로 우리는 세계를 몽상하며 태초의 언어를 말한다. 그런 몽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런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 언어의 용어들을 주의 깊게 탈사회화(脫社會化)해야 한다. 그러니까 은유에 완전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전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낱말의 몽상가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인가!   **이때 은유는 기원, 다시 말해 직접적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이미지의 기원이다. 연금술사의 몽상에서 왕과 왕비가 어떤 실체를 만드는 데 참석하러 온다며 그들은 요소들의 결합을 주재하기 위해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작품의 위대함의 상징인 것만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들은 우주적 창조를 위해 작업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위엄을 나타낸다. 단번에 우리는 분화된 애니미즘의 정점으로 이동해 있다. 살아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위대한 활동 속에서 왕과 왕비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분리시킨다면 현실이 없는 결합된 두 힘이다. 연금술사의 왕과 왕비는 세계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이며, 이것들은 몽상하는 연금술사의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확대된 모습들이다. 이 원리들은 우리 내부에서 가까이 있듯이 세상에서도 아주 가까이 있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5.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3)     **연금술사의 언어는 정열적인 언어이고, 몽상가의 영혼 속에 결합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대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언어이다.   ##연금술은 왜 서로 통합된 언어를 필요로 하는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대화에서 어떤 보석으로 제련시킬 것인가? 연금술사의 사유를 펼쳐보자.   **아니무스와 아니마는 그 나름의 어휘를 지니고 있고, 그 어휘를 따라갈 때 모든 것은 이 두 어휘의 결합으로부터 태어난다. 사물, 물질, 별....그것들의 이름이 지닌 위엄에 복종해야 한다.   **이 이름들은 찬양이나 멸시를 나타내지만, 거의 언제나 찬양을 나타낸다. 어쨌거나 저주의 어휘는 보다 간단하다. 저주는 몽상을 깬다. 연금술에서 그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물질의 힘을 일깨워야 할 때 찬양은 절대적이다. 찬양은 마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찬양과 찬탄의 언어, 몽상적 연금술로 연습하기) 예; 1.찔레꽃 그대는 ***이다! 2.고양이 너는 ***하다! 3.돌멩이는 ***을 위하여 **한다! 4.바다는 ***하다! 5.( )은 나의 ( )처럼 아름답다. 6.나의 ( )을 위하여 오늘 지금 ( ) 할 것이다.   “그처럼 찬양에 뒤덮이자 인드라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뒤메질’-   **반죽의 아니마—우리가 작업을 할 때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몽상은 손으로부터 사물로 이어지며 몽상적 상태를 체험한다. 영혼과 사물에게 신비는 내부에 있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몽상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열린다. 우리는 관념과 몽상의 복합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실체에 대한 몽상, 말로 표현된 몽상은 물질이 탄생, 생명, 정신성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문학은 여기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문학이 없다면 모든 것은 소멸하고, 현상들은 가치의 광채를 상실하고 만다.   **투사: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의 교감에 관한 심리학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변증법은 ‘심리적인 투사’의 현상처럼 나타난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자신의 아니마에서 자기가 경배하는 모든 가치를 이 여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자는 자신의 아니무스가 정복하고자 하는 모든 가치를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투사한다. ---이 두 교차된 투사가 균형이 잘 잡혀 있을 때, 그것들은 강력하게 결합한다. 이 ‘투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현실에 실망을 한다면 실패한 삶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러나 몽상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우리를 삶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몽상의 진정한 본능은 우리의 아니마 속에서 활동적이며 정신에 연속적인 휴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실패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비현실적인 기능이 지닌 구체적인 용도는 매우 정연한 이상화(理想化) 속에 있다. 여자의 아니무스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남자와 남자의 아니마가 투사하는 이상적인 여자는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결합적인 힘들이다.   **고독한 몽상의 비밀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암영들이 아니라 사랑의 새벽을 밝히는 미광들이다. (아니무스의 잠재성과 아니마의 잠재성을 포함하는 두 개의 정신 현상 사이에 4극적인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상화와 현실 그 어느 쪽도 망각하지 않는 것! (교재 97페이지 도표 참조)   **어떤 책들의 등장인물들 속에서 발견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형태들은 독서의 시기들 그때마다 동일한 풍요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위대한 책은 특히 심리적으로 살아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고 또 읽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예를 들어)   **연금술에서 우리는 지적인 인내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 의식의 불순물들을 뒤지는 심적 인내의 작용 자체 속에 있다. 연금술사는 물질을 가르치는 자이다. 지상의 모든 실체에게 그것의 젊은 활력을 다시 주겠다는 꿈은 근본적인 덕성이 얼마나 대단한 꿈인가! 그 덕성의 기나긴 작업을 한 후 자웅 양성 속에 결합된 원리들은 성스러운 결혼이라 마땅할 정도로 ‘순화’된다. 양성에서 성혼(聖婚)으로까지 이것이 연금술의 명상이 가는 심리적 거리이다.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힘에 의지한 복잡한 확신을 통해 연금술사는 세계의 영혼을 포착하고 이 영혼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연금술은 세계에서 인간으로 가는(물질로부터 언어적 몽상으로 투사되는) 영혼의 문제가 된다.   **고독한 몽상 속에서 사랑받으며 미덕으로 치장된 존재의 모든 이상화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또 삶을 몽상하면서 표명된 이상적인 것들에 심리적인 현실을 부여하는 그 모든 치환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자가 만나는 전이와는 전혀 다른 중요성을 지닌 복잡한 전이를 생각해야 한다. ‘전이’(몽상적인 의미)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주적인 상황을 연결시키기 위해 일상적인 세부적 관계를 넘어서며. 사회적 상황을 넘어선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그가 세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세계를 가공하는 그의 이상화 충동을 따라서 이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것은 자웅양성적 특성인데, 그 특성의 이중적 고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자웅양성적 특성은 생명의 모호한 기원에, 어떤 불분명한 동물성 속에 묻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정점(頂點)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부터 오면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고양을 보여준다. 그것은 초(超)남성성과 초(超)여성성이 결합된 몽상을 준비한다.     ------------------------------------------------------------ ------------------------------------------------------------     ##몽상적 아니마와 결합적 자웅양성과 정점의 변증법을 위하여! 창작의 언어를 어떻게 변주할 것인가. 그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투사와 복잡한 전이의 다양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할 것이다. 빗살의 눈빛들이여 몸과 영혼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총체적 시간들이여 함께 가자 이상화의 세계를 향해! 현실의 몽상적 길을 밟으며....한 발 한 발, 매순간 아름다운 시어를 만나보자!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7.12.목.   『몽상의 시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몽상에 대한 몽상 –아니무스, 아니마-(4)     **몽상은 몽상가를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음으로써 몽상가를 그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다른 존재는 여전히 그 자신이고, 그 자신의 복제 분신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를 반영하는 존재인가?” 철학자라면 그것들을 회의(懷疑) 속에서 강화할 것이다. 사실 몽상은 존재를 보다 부드럽게, 보다 자연스럽게 양분한다. 그것도 참으로 대단한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내가 나보다 덜한 존재가 되는 몽상이 있다. 그때 그림자는 풍부한 존재이다. 그것은 일상 생활의 심리학자보다 더 예리한 심리학자이다. 우리 존재의 분신인 그림자는 우리의 몽상 안에서 ‘심층심리학’을 경험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무스와 아니마로 이중적이듯이 이중적 분신인 그림자를 통해, 역설들의 핵심에 다다른다. ‘분신은 이중적 존재의 분신이다.’     **지극히 고독한 몽상 속에서, 우리가 죽은 존재를 불러올 때, 우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이상화시킬 때, 독서 속에서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자유로울 때, 우리는 삶 전체가 이중화되는 현상을 느끼고 세계가 우리의 공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통합함을 느낀다. 공상의 심리학이 없다면 진짜 심리학도 없으며, 완전한 심리학도 없다. 자신의 몽상 속에서 인간은 절대권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몽상을 하는 고독한 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심리적인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명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혼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넷이다. 고독한 몽상가는 4극(책 97쪽, 표 참조)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우리는 한 여자 옆에 우리의 영혼을 부분부분 놓아둠으로써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양분하고 예전에 우리에게 중성적이었고 무심했던 사랑받는 여자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의 옷을 입기 시작하고 이중적이 된다.” /스트린드 버그/   **몽상은 창조하는 심리의 작품인 것이다. 이상화된 존재는 이상화하는 존재와 말하기 시작한다.....자신의 이중적 분신에게 말하면서 이중적이 되는 존재에게 이원적인 언어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이원적인 두 배, 즉 ‘사중(四重)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여기서 사유와 몽상, 현실의 정신적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의 매개적 유희가 인간 상상력의 그 심리적인 경이로움을 생산하기 위해 증대되고 교차한다. 인간은 상상해야 할 존재이다. 왜냐하면 결국 비현실의 기능은 우주 앞에서처럼 인간 앞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을 창안하는 소설가와 인간적인 것의 매력적인 멋을 계속해서 창안하는 시인들을 읽을 때 우리는 참으로 심리학적 세련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없는 몽상 속에서 감히 말하지 않고 체험하는 것은 그 모든 자기 초월이다.   “누이야, 나와 함께 기도하러 가자, 식물의 영속성을 되찾기 위해.” -에드몬드 반데르캄멘-   ‘식물의 영속성,’ --아니마를 나타내는 진실, 몽상에 어울리는 세계, 영혼의 휴식을 위한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가치의 개입은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를 철저하게 변화시킨다. 철학과 종교는 자웅양성적 특성을 하나의 인류학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 협력할 수 있다. 수많은 감정적 실패를 통해 이 러시아 철학자(솔로바예프)는 내세의 자웅양성적 삶을 준비하는 순수한 사랑의 그 영웅적 태도를 유지했다. **두 진정한 연인 사이의 상호적 이상화의 심리학을 위한 명구:   “너의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 너의 사랑을 더 크게 하라.” -바레트 브라우닝-   **작품의 예; 발자크의 에세이  -제1장; 세라피투스 , 제2장; 세라피타, 제3장; 세라피타-세라피투스, (Seraphita –양성적 인간을 이르는 발자크의 소설 및 에세이에서 쓰인 용어) (--인간의 총체인 완전한 인간은 남성적 요소의 능동적 미덕들로, 그리고 여성적 요소에 의한 보존하는 힘들로 계속적으로 제시되며, 마침내는 그것들의 종합이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전적인 결속처럼 이루어진다.) 발자크의 소설에서 자웅양성적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고, 분신 존재를 사랑하려는 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세라피투스, 세라피타만이 모든 몽상을 유인하는 이중의 자기(磁氣)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우리는 네 개의 극을 지닌 몽상 앞에 있다. 두 정념을 이상화된 삶으로 상승시키고자 할 때, 아니무스가 아니마로, 아니마가 아니무스로 가는 얼마나 많은 ‘투사’가 이루어지는가!   **이상화하는 몽상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나 보다 잘 몽상하는 자는 아무것도 억압할 게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극단적인 이상화의 몽상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되어 있다.그것은 날아오르는 상태에서 ‘정신분석학자의 벽을 넘어선’ 것이다.   **아무튼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은 여자를 훌륭하게 이상화하려면 남자가 되어야 하며, 아니마의 의식에서 원기가 풍부한 몽상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테의 철학—베아트리체; 지극히 위대한 이상화들의 종합 —여자, 교회, 신학—그것은 인간적 가치들의 몽상가에게는 현학적인 대문자 아니마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을 통해 빛을 발한다.....을 참조할 것.   ------------------------------------------------------------------- -------------------------------------------------------------------     **빗살과 아니마를 위한 질문 및 시어 탐사     ## 내 안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총화는 현실 속에서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시어( 詩語)로 표현해보자.   **나는 ----------------------------------------------------!!   **나는 ----------------------------------------------------!!   ## 가장 나다운 아니마는 어떤 아니무스를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기억이 있는가? (둘의 결합이 보여준 결과와 그 과정에 대하여)       ## 요즘의 자연 현상에서 느낀 아니마의 진실을 시어로 표현해보자. ‘식물의 영속성’을 대입해서.
334    대지 그리고 휴식의몽상 - 바슐라르 [스크랩] 댓글:  조회:1046  추천:0  2018-10-20
바슐라르 -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과학철학 및 과학사 교수, 문학 비평가, 시인. 독창적인 사고와 기발한 문체, 새로운 철학적 화법으로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자리매김했으며, '시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철학자, 철학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 일컬어진다. 상파뉴 지방의 바르 쉬르 오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교사, 우체국 직원 등으로 일하다, 마흔 무렵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1927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디종 대학을 거쳐 1940년 소르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 흙의 시학  나는 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흙은 다른 원소보다 훨씬 불활성이며 고정되기 쉽고 포착하기 쉽다. 흙은 확실하고 선명하게 우리 앞에 물질적 대상으로 주어진다. 흙은 손에 쥘 수도 있으며 뭉칠 수도 있고 불로 반죽할 수도 있다. 흙은 주물러 형태를 만들기도 쉽고 우리의 일상적 지각방식을 쉽게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아주 구체적이고 아주 감각적이다. 물은 손아귀를 벗어나 미끄러지고 불은 만질 수 없으며 공기 역시 손에 잡히지 않지만 흙은 다르다. 흙은 만져지고 쥐어지고 잡힌다. 흙은 우리 앞에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분명한 존재감, 분명한 실재감은 우리로 하여금 흙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려는 욕망을 불러낸다. 우리는 흙을 다루고 흙에 대항하며 그렇게 해서 흙으로 작업한다. 말하자면 흙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흙을 다루고자 할 때 흙에 대한 외향적 상상력이 작동한다.    흙의 물체성, 고정성, 단단함이 우리로 하여금 흙을 다루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낸다. 그러나 흙은 우리의 욕망이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흙은 흙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욕망에 대립하는 흙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를 불러낸다. 우리는 흙의 의지와 대립하여 싸우고 분노하며 달래고 설득한다. 흙의 세계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흙을 때리며 부수고 깨트린다. 망치와 끌, 칼 등 도구가 이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흙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이 남성적 흙의 세계이다.    흙과 돌, 바위, 산 등 단단함을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흙의 세계. 이 세계 앞에 선 인간은 이 세계와 대항하고 싸우고 길들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다. 그런데 이 양자 간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흙의 세계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은 의지 대 의지의 싸움이다. 여기서 망치로 두드리는 바위나 쇠는 대장장이의 힘을 거부하면서 허용한다. 망치의 두둘김은 대장장이 편에서의 힘과 쇠의 편에서의 힘이 서로 맞붙어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이 싸움 속에서 바위나 쇠의 힘은 대장장이에게 전이되고 대장장이의 힘 역시 그가 두드리는 대상에게 전이된다. 이 두 존재 사이에서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어떤 리듬이 탄생하는 것이다.    2. 진흙 덩어리  우리는 진흙을 빚어 세계를 창조해왔다.   돌과 바위와 같은 단단한 사물이 우리에게 불러내는 상상이 도발과 저항, 의지의 실현과 관계되어 있고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를 지닌다면 물과 섞인 진흙은 이와는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흙 덩어리, 밀가루반죽, 밀랍덩어리 등 반죽으로 된 부드러운 사물들은 우리 내면의 부드러운 의지, 완화된 의지를 불러낸다. 이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는 손으로 이 세계와 만난다.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주물럭대면서 우리는 이 세계에 우리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계에 부여하는 우리의 꿈은 이 세계에서 우리를 향해 주어지는 힘과 만나면서 변형된다. 반죽의 세계는 한편으로 끌어당기면서 한편으로 밀어낸다. 우리는 손으로 이 반죽의 세계와 만나 우리 역시 이렇게 하면서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반죽은 생명체의 이미지를 낳는다. 반죽으로 작업하는 조각가는 미리 설계된 관념을 일방적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성형이다. 반죽의 꿈은 반죽과의 교감이며 이 교감을 통한 활동의 과정을 통해 현실화된다.    반죽하는 코기토의 창조성은 어린아이를 출산하는 창조성이다. 그의 작품은 새로 태어나는 생명이다. 반죽하는 코기토에게 세계는 관조적 대상도 아니며 기하학적 세계도 아니다. 이 세계는 끈적이는 세계이며 주무르는 세계, 내 손의 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내 힘을 수용하는 세계다.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그는 이때 산파가 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다시 꿈과 몽상은 무의식으로부터, 그리고 집단무의식 너머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이미지가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꾸는 인간, 몽상하는 인간은 우주적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이다.    3. 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투쟁한다.   땅 속에서는 금속과 보석들이 자란다. 땅 속의 보석들은 완성된 대지의 태아다. 이들은 모두 씨앗이며, 별이며, 생명이다. 보석들은 불변의 아름다움으로, 단단함으로, 투명함으로, 빛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땅이 잉태하고 키운 것이므로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다른 생명체들 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훨씬 완성된 생명체의 이미지를 갖는다. 연금술의 몽상은 이 오래된 생명의 과정을 연금의 용기 속에서 단 기간에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탄생한다. 황금은 영원하며 빛나며 오래되었고 생명력으로 가득찬 지하세계의 태양왕의 이미지이다. 연금술의 몽상에서 식물, 동물, 광물은 모두 같은 생장법칙을 공유한다. 광물 역시 식물처럼 씨를 뿌리며 동물처럼 아이를 낳는다. 그러므로 황금이라는 아이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땅의 자식들인 여러 가지 금속들에게 인간의 삶의 조건들을 강요한다. 금속들은 땅이라는 생명의 자궁의 대리물인 연금술사의 그릇 속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싸우며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이 드라마는 금속들의 드라마인 동시에 우주적 드라마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천체계를 넘나들며 가면을 바꿔 쓴다.    연금술의 몽상은 아타노르 위에 놓인 그릇 속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서사를 실현하는 것이다. 비천한 금속들은 내부에 적의를 지니고 있다. 금속들은 차겁고 무겁고 모가 나 있으며, 상처를 입힌다. 그러므로 연금술사들은 금속들의 적의에 맞서 이들 속에 숨겨진 생명의 불을 끄집어내어 이들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연금술사는 먼저 이들의 때를 벗겨내야 한다. 부패의 단계를 거친 금속은 다시 끓여진다.    금속의 드라마는 연금술사의 몽상 속에서 태어나 연금술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그의 삶을 변형시킨다. 연금술은 황금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기술이 아니다. 연금술은 꿈의 기술, 영혼의 기술이다. 연금술의 몽상 속에서 연금술사와 물질은 서로 연결되어 얽히며, 연금술사의 의지와 금속의 의지가 싸운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일종의 사랑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 서평  바슐라르의 몽상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저는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프랑스 철학자의, 집에 대한 명상 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책 ‘공간의 시학’과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의 집에 관한 부분을 보십시오. 저는 이 사람의 책 이 부분만을 조금씩 다시 읽곤 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끄떡없는, 숲 속이나 벌판의 오두막집에서 안전하게 머무르는 몽상을 그 사람 파리 한복판의 아파트 안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해 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5. 7. 31)      우리는 대지 위에 살며 대지에 저항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대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살 수 없으며 또 땅을 일구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이렇게 대지와 인류는 서로 불가분의,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여 있다.    대지의 흙은 우리와 가장 친숙하기도 하다. 우리는 흙을 반죽해 집도 짓고 그릇도 만들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흙의 세계는 우리의 촉각적 욕망을 건드리는 세계이며 우리의 의지를 충동질한다. 우리는 흙을 빚어 이 세계를 만들어 내고 지배해왔던 것이다. 우리 인간의 창조성은 흙을 반죽하면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는 나의 욕망, 나의 꿈, 나의 의지를 저항하면서 받아들인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반죽을 상대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반죽 속에 숨은 생명을 태어나게 한다. 이 반죽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우주적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사유와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상상과 이미지가 생기며 이것은 다시 꿈과 몽상으로부터 비롯된다.   
퍼온 자료 불꽃의 수직성              높은 곳에서... 빛은 그의 옷을 벗는다. - 옥타비오 빠스.   1. 우리들을 가볍게 하는 몽상 가운데서도 아주 유효하며 단순한 것은 높이의 몽상이다. 모든 직립되어 있는 사물들은 천정을 가 리키고 있다. 직립된 형태는 솟아오르고, 우리들을 그 수직성에 실어 데려간다. 현실의 정상을 정복한다는 것은 스포츠적인 장 한 일에 그치는 것이다. 꿈은 더욱 높이 올라가며, 수직성의 피안에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 똑바르고 수직인 존재를 앞에 한 수직성의 결합에서 많은 비상의 꿈이 태어난다. 높이의 몽상은 우리들의 수직성의 본능, 공동생활과 평평하게 수평적인 생 활의 의무에 의해 억눌려진 본능을 양육한다.   인간을 수직화시키는 몽상은 여러 몽상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간을 해방시키는 몽상이다. 다른 곳을 꿈꾸는 것만큼 잘 꿈꾸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다른 곳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위쪽에 있는 다른 곳이 아닐까? 위쪽이 아래쪽을 잊 어버리고 제거해 버린 꿈. 직립해 있는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을 쌓음으로써, 우리들은 존재의 하나의  초월을 알 게 된 것이다. 수직성의 이마주는 우리들을 가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한다. 상상력을 통하여 직립해 있는 사물의 수직성과 일 체가 된다는 것. 그것은 상승력의 은혜에 힘입은 것이며, 또한 그것은 아름다운 형태, 스스로의 수직성을 보증하는 형태에 사는  숨어 있는 불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줄저 의 한 장에서 이와 같은 수직성의 주제를 상세하게 논한 바 있다. 그 장을 참조해 본다면, 불꽃 의 수직성에 대해 당면한 몽상의 배경을 모두 보게 될 것이다.   2.   대상이 단순하면 할수록 몽상은 커진다. 고독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촛불의 불꽃은 수직성에 대한 모든 몽상을 준비한다. 불꽃 은 꿋꿋하고 약한 수직이다. 한번으 입김이 불꽃을 흐트러지게 하지만 그것은 다시 곧바로 선다. 일종의 상승력이 그의 마력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촛불은 고고하게 타며, 그 주홍빛은 불끈 일어선다. - 독일 사화집 제 2 권   이렇게 트라클의 한 시구가 말하고 있다. 불꽃은 생명이 깃들어 있는 수직성이다.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불꽃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수직성을  예민한 반사 작용으로 지킨다. 연소에 지장을 가져와 천정에의 비약이 방해되면 불꽃은 바로 반사 작용을 일으킨다. 불꽃 앞에 서 교훈을 얻게 된 수직화의 의지와 몽상가는 그 자신도 다시 곧바로 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게 타며 온 힘을 다하여 열정의 꼭대기까지 가고자 하는 의욕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이 잘 타고 있는 시간은 얼마나 커다란 시간,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길게 뻗치고, 끝이 뾰족해진 불꽃 속의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의 미묘함! 삶과 꿈의 가치가 그때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한 줄기의 불! 사람들은 과연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  에드몽 자베.   이렇게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 불꽃의 줄기는 아주 곧바르고 연약해서 그것은 꽃과도 같다. 그리하여 이마주와 사물은 서로 그들의 미덕을 교환한다. 불꽃의 몽상가의 방 전체가 수직성의 분위기를 띤다. 부드러운, 그러 나 확고한 역동성이 몽상을 정점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심지를 둘러싸고 있는 내적 선풍에 매우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불 꽃의 복부에서 어둠과 빛이 싸우고 있는 소용돌이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불꽃의 몽상가는 그의 꿈을 정점 쪽으로 끌어올 린다. 불이 빛이 되는 것은 바로 그곳이다. 빌리에 드 릴라당은 그의 라는 작품 제 1 장의 제사로서 다음과 같은 아 라비아 속담을 채용하고 있다. 즉 '관솔불은 자기 밑을 비추지 않는다.'라는 말을.   가장 큰 꿈이 있는 곳은 꼭대기이다. 존재의 몽상가에게 있어서 불꽃은 피안의 저편, 에텔적인 비존재 쪽으로 몸을 뻗깇고 있는 것처럼 보일 만큼 본질적으로 수직 읻. '불꽃'이라는 제목을 붙인 어떤 시 작품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함이여    -  로제 아슬리노   무(無)로써, 불꽃으로써, 아아 단순히 상상된 불꽃으로써, 존재와 비존재를 연주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게시받은 형이상학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러나 모든 심오한 혼은 그 개인의 피안을 가지고 있다. 불꽃은 모든 초월을 깨닫게 한다. 꽃 앞에서 클로델은 이렇게 자문한다. '어디서 이 소재는 성스러운 범주 안으로 가기 위한 비상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만약 우리들이 예전적(禮典的)인 주제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불꽃의 상징주의에 관한 자료를 발견하기란 아주 쉬운 일일 것이 다. 그때 우리들은 지식을 마주 대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상징주의의 윤곽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작은 책의 기도를 넘 어서게 될 것이다. 불의 표징 밑에 놓여있는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칼 마르틴 에즈만의 대작 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3.   서장에서 우리들은 지식에 대한 모든 배려, 불꽃의 현상에 대한 모든 과학적 내지는 의사과학적 실험을 멀리했다. 우리들은 상 상하는 몽상, 고독한 몽상가의 것인 몽상의 동질성 속에 머무르도록 최선을 다했다. 불꽃을 깊이 꿈꿀 때, 한 사람이 동시에 두 사람일 수는 없다. 괴테와 에케르만이라는 선생과 제자에 의해 공동으로 이룩된 저 천진난만한 관찰은 어떤 사상을 마련해 주 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알맞는 진지한 개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은 독일 낭만주의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친 우주 철학에의 통로를 우리들에게 열어 주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   노발리스와 함께 사람들이 가치의 물리학의 지배 아래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실의 물리학의 지배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빨리 증명해 두기 위해, 미노르판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금언 '빛이 불을 붙인다'는 말에 주석을 달아 두기로 한다. 독일어로 표기하 면 3음절로 된 이 문장은 극히 훌륭한 것으로서 그것은 보통의 감각이 그 찢긴 상처를 곧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른 사상의 화살이다. 모든 일상 생활은 우리들에게 이 말을 거꾸로 읽도록 가르치고 있다. 보통의 생활에서 빛을 내기 위해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가치의 우주론에 동의할 때야 바로소 이러한 도전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Licht macht Feuer'라는 세 음절의 문장은 불꽃의 현상상의 관념론적 혁명, 제 1막이다. 이것은 몽상가가 자기의 신념을 굳히기 위해 반복 하는 중추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다. 몇 시간이라도 계속하여 시인의 입술 위에서 이 세 개의 음절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상상하 며 듣는다.   관념론적 증거는 그것이 틀린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노발리스에게 있어서 빛의 관념성이 불의 물질적 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노발리스의 단장(斷章)은 더욱 계속된다. '빛은 불의 과정의 수호신이다.' 이것은 물질적 여러 요소의 시학에 있어서 매우 중대 한 선언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위성이 불에서 그의 절대적 주체로서의 권한을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은 이미 거 기에서 빛이 되는 하나의 과정의 종국에서만 참다운 존재가 될 수 있으며 더욱이 그러한 때에는 불꽃의 고뇌 속에서 불은 그의 모든 물질성을 박탈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 의 필자는 '불'의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밝고 생기 있는 불꽃은 벌겋게 달은 숯불보다 더 많은 열을 낸다.]   만약 불꽃에서 이와 같은 인과관계의 전도를 읽는다면 그 작용을 저장하고 있는 것은 첨단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첨단에서 정화된 빛은 심지 전체 위에 내려앉는다. 그때 빛은 불꽃의 상승하는 존재를 결정하는 참다운 동력이 된다. 그 행위 자체에 있 어서 사실을 뛰어넘고 스스로의 상승하는 존재를 발견하는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노발리스의 관념화하는 우주 론의 원리 자체다. 모든 관념론자들은 불꽃에 대해 명상하면서 동일한 상승적 허위를 발견한다. 클로드 드 생-마르탱은 이렇게 쓰고 있다.'정신의 운동은 불의 그것과 같으며, 스스로를 상승시킨다'라고   4.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을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촛불의 불꽃 속에서는 모든 자연의 힘이 활동하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불꽃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 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 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는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 을 수 있다.   '나무는 꽃 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은 말하는 불꽃, 동물은 떠돌아다니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    나지 않는다. 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 / 미완성의 것으로,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동화된다.'   폴 클로델은  
332    불의 시학의 단편들/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1048  추천:0  2018-10-20
내 가슴에는  정열의 가시가 박혀 있었다  어느 날 내가 그것을 빼냈다  이제 더 이상 내 가슴을 느낄 수 없다    시의 끝부분은 이렇다    내 노래가 다시 불평을 한다  “날카로운 금 가시여,  나 그대을 느끼고 싶구나  내 가슴속에 박힌 그대를.“  -안토니오 마차도-    날개 돋친 불꽃과 재, 죽고 다시 태어나는 불새에게 끌리는 매력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晩年)에 불사조적 몽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피닉스.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종합’, 자웅동체의 새, 최후의 원대한 꿈 속에서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중개자.  “나의 불사조적 꿈들’, 부제는 ‘명암과 잿빛 삶’이 될 것이다. 나는, 내 존재의 책상 앞에 있기보다는, 나의 무(無)를 쓰다듬으면서 내 비존재의 책상 앞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씌어 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사람을 늙게 한다. 언젠가는 결론을 맺고 끝내야 한다.  나는 이렇게 제한된 문학 이미지들의 문제는 그 어떤 철학적 도구의 도움없이 아주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고를 연구해오던 방식처럼 될 수 있는대로 객관적으로 이미지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견치 않던 것을 언어에까지 부여하는 상상력의 비약을 ‘객관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지 나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예들을 추가하다보면 어떤 법칙을 찾아내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독서량을 늘린다면 글쓰기의 의지로 부각된 언어, 즉 시적 언어의 인문과학적 조감도가 그려지리라 기대했다.    내가 산책하고 있는 식물학자이며, 나의 독서가 이끄는 대로 ‘시적 꽃들’을 모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우주론의 상상력에 관한 기초 철학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4원소, 즉 불, 물, 공기, 대지는 우주론의 백과사전을 위한 책 제목으로 서두가 장식되었다. 많은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4원소 중 하나의 기호 아래 세계를 ‘사고’했으므로, 우리는 시인들의 이미지가 우주론의 소박함을 되살리면서 매우 오래된 학설들을 다시 빛내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별 문제 없이 독서에 내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을 세웠다. 네 개의 자료. 네 개의 곳간이라니, 추수한 곡식과 수확한 포도를 저장하기에 얼마나 안전한 곳인가. 끊임없이 작업하기 이한 얼마나 멋진 상상 속의 시설인가!    시는, 그 자체로-시적 이미지 그 자체- 내게는 특별한 연구대상이 될 만한 심리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상상력의 현상으로 간주된 시는 교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상상하는 독자는 상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서 상상력의 충동을 받아들인다.    고전 심리학에서 상상력보다 더 막연하게 정의된 정신적 힘은 없다. 극도로 혼동하는 경우에는 상상력을 사라져버린 과거의 지각에 종속시키면서 ‘재생적 상상’과 혼합할 뿐 아니라,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이 상상력을 모든 정신의 창조적 활동에 연결시키고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기발함에 결합시킨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학자에게, 정치가에게 부여한다.    사고 영역에서 창안하는 것과 이미지들을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정신적 행위이다. 게다가 사고 영역에서 작업할 때는 이미지들을 쫒아내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고를 창안하지 못한다. 수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진정한 사고를 끌어내리라 기대해볼 수 있다. 원초적인 진리란 없고, 단지 원초적인 오류들만 있을 뿐이다. 과학적 사고는 오류로 점철된 기나긴 과거를 가지고 있다. 시적 상상력, 그것에는 과거가 없다. 그것은 준비된 모든 것을 위반한다. 시적 이미지란 진정 말 paroled 의 한 순간으로, 베르그송적 의식의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 상에 위치를 설정하려 할 때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순간이다. 시적 언어의 기습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화경적인 의식에 내맡겨야 한다.    시적 이미지가 있으면 우리는 언어가 씌어지기를 원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글쓰기의 행복을 알 때는 거기에 몸과 마음, 손과 작품을 바쳐야 한다. 조르주 상드는 그점을 알고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글쓰기란, 이를테면 말 위로 불쑥 솟아오른 차원이다. 문학 이미지는 말해진 언어, 즉 의미에 종속된 언어 위로 올라온 진정한 돌출부이다. 돌출부라고? 지적 가치는 판타지의 분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견고해지는 것을 체험하고, 유희적이었던 문학 이미지가 시적 이미지화할 때, 우리는 시란 언어의 세계라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존재의 철학가들은 세상을 말하고, 유일하고 동일한 언어로 그들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항상 존재, 한존재, 여러 존재들은 말의 보증서이다. 말의 존재는 존재의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말은 절대로 자율성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나아봤자 그것은 외침의 문명이다. 말의 존재 안에는 항상 말의 존재 이전의 존재가 있는것이며 말은 ‘표현한다’. 그 표현의 존재는 단지 위임받은 한 존재, 즉 말하는 존재의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에서 드러나는 초인간성의 분출이 위대한 서정적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 조화롭게 맞춰지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살펴 볼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상은 이미지를 능가하길 원한다. 불은 그 유용성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지성주의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중요한 이미지들은 시초의 지배력을 잃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인간이, 초인간이, 반신이, 제우스의 아들이 태양 원반 속으로 불을 찾으러 갔다가 그것을 훔칠 수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를 보여주지만, 급히 만들어진 이 분명한 한 문장이 이 해괴한 이야기를 요약해준다. 특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쳤다는 것이다. 이미지들을 꿈꾸고 자신의 몽상 한가운데에 중심 이비지를 놓는, 이미지에 의한 분석만이 허황된 이야기의 모난 부분을 둥글게 할 수 있다. 그 어두운 구멍이 작은 태양, 태양 원반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주형에 뾰족한 도구를 돌리면서 많이 꿈꿔야 한다. 그러면 붗으로 넘치는 도가니에서 불을 훔치게 된다.    불 또는 빛, 작업 또는 지식, 이 양극 사이에서 프로메테우스주의의 광대한 영역이 돈개된다. 이 범위는 대단히 넓어 프로메테우스의 시학에서는 그 단일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허무에는 이미지들이 없다. 허무란 관념에 불과하다. 오로지 이미지들, 시적 이미지들만이 파괴적인 순간을 불멸화시킬 수 있다. 소멸의 미학은 엠페도클레스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시적 이미지를 발견한다. 즉 그것은 미(美) 안에서의, 미를 위한 소멸인 것이다.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라는 부제 아래 씌어진 이 세장이 바로 아니무스로 씌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지배하는 존재들이다. 절대적인 아니무스의 이상형 속에서, 아니마의 온화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무스의 힘의 의지에 몰두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순수하고 강인한 아니무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경험하고 자신 안에서 체험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안다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체험의 의식을 이렇게 결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단 하나의 단어로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험’이란 단어는 다른 모든 경험이 그렇듯 끊임없이 분석으로 정제되어야 하는 경험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    ‘체험’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체험’을 다루지 않고 쉬운 추상 놀이에 만족하는 자들이라고 우리가 조금은 성급하게 판단해버리는 철학자들에 대립하여 씌어졌다.    사실 스쳐 지나가는 사건 속에서, 특별한 정신적 선택에 따라 느끼는 상대적인 강렬한 속에서, 사람들이 모든 삶을, 깊이 있는 모든 삶을 소중히 여긴다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체험은 그것이 재체험될 수 없다면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지닌다. 그리고 규율이 없는 것 중에 으뜸인 상상된 체험을 어떻게 체험과 융합하지 않겠는가? 인간적 체험, 인간 존재의 현실은 상상적인 것을 만드는 요인이다.    게다가, 누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며 누가 본래의 삶의 풍부함과 다양함 속에서 그 삶을 살고 있는가? 본래의 삶은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체험된다. 우리가 그 삶을 잘 산다면, 그와는 반대로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을 너무 능숙하게 표현한다면, 그 삶을 더 이상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기 한 존재로 결정될 수 있는 존재의 단위가 아니다. 인간 존재란 존재들이 밀집해 있는 벌집이다. 존재의 꿀을 만들고 시적 삶의 본질을 만드는 것은 아련히 먼 생각들이며 광적인 이미지들이다. 한 사람의 삶에는 중심이 없다. 삶은 어느 주변에서 생동하는가? 그런데 삶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면서 생동하는 것이니, 존재는 과연 어떤 이미지 부근에서, 어떤 시들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 넘치는 생명을 찾아내는 것일까? 인간 존재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이 그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시간에, 또 스스로 자신이 살고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시간에 살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절대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파도에서 흘러나와 모든 존재를 존재의 일반적인 생성으로 데려가는 물줄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아니 거의 항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지나간 정체된 존재들이다. 우리 안에서 삶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베르그송은 체험의 경험 속에서 시간 측정기란 쓸모없거나 혹은 속아넘기는 도구라는 걸 별 어려움 없이 보여 주었다. 시간 측정기, 그것은 다른 이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체험시간, 즉 지속을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시간대’의 시간이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은 잘 묶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시간들의 다발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들’은 우리의 체험 시간(지속)을 조절할 박자를 찾지 못한 채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이다. 우리 존재의 역동성, 우리 존재의 다양한 역동력을 강한 필치로 나타내줄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미지들만 바꾸면 된다. 불의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존재로 형성된 불덩어리이다. 우리에게 에너지와 생명을 주는 우리의 불 속에 중심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내일의 불을 따뜻하게 지탱해주는 재의 시간인가?    불새가 탄생하는 그 결합에 의해 더 큰 가치가 부여된 두 단어의 매듭에서 다양한 현실이 연합한다. 즉 날아다니는 불길,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룻밤에 검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의 날개, 알록달록한 몇 마리 새들이 여름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 불새들이 불의 특성들이다.   내가 불새를 처음으로 본 것은 불새가 나의 강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유년기에 더욱 커 보이는 강, 하늘처럼 고요하고 아주 푸르른 강, 그 강의 이름이 바로 오브였다. 창공으로 쏘아올린 화살처럼 불새가 솟아오른다. 날카로운 외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다. 새는, 아주 빨리, 수면을 흔들며, 아마 그의 유일한 노획물이었을 물방울을 뿌리면서 하늘을 향해 다시 떠났다. 불로 달궈진 쇠처럼 푸른 물총새였다. 새는 사라졌고 꿈이 시작된다. 그 새는 나무들 저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온 것이다! 이 불새는 태양 속에, 유월의 태양 속에 자기 둥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토록 평화로운 물에 대한 얼마나 큰 침해이며 죄인가! 자연에서는 빨리 가버리는 모든 것이 범죄이다. 하늘에서 내려운 이 불길은 어째서 거울 같은 물에 살며시 자신을 비춰보러 오지 않는 것인가? 이렇게 멋진 존재가 어떻게 그토록 탐욕스러울 수 있는가? 물총새와 은빛 잉어의 결합이라니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이런 푸르름의 잔혹함이 한 어린아이의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을까?    한 어린아이의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은 그 어린아이의 세계의 사건이 아닌가. 그러니 곧 이 세계의 사건이 아니던가. 이러한 추억은 그것이 단일하다는 점에서 우주극cosmodrame이다. 하나의 추억이 이렇게 우주극으로 상승할 수 있을때는 그것이 역사의 한 점인지 아니면 하나의 전설의 출발점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나의 물총새는 내 회상의 나라에서는 한 마리 피닉스이다.    신기한 일이 허무해져버렸을 때 경이로움은 우수로 바뀌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시절 나는 다시 한번 같은 강에서 그 물총새를 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름날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날 우리 둘이 있었다! 나는 책에서 읽은 전설들과 연결시키면서 이미지들을 늘리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전설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며, 우리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응시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섬광을 발하는 새는 피닉스의 근본 이미지이다.    그후로 피닉스-물총새는 내 생애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사는 동안 중요한 것은 거의 못 본다. 망태기 속에 노획물을 집어 넣는 사냥꾼이 여름날의 하늘이나 서늘한 강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그가 어떻게 그 지극한 영광 속에서 죽음을 맞는 새를 생각하고 또 꿈꿀 수 있겠는가? 찬란함에서 유용함으로 넘어가면서 사냥꾼은 ‘멋진 깃털은 맛없는 고깃살을 감추고 있다’는 식도락가들의 격언을 떠올리기나 할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멀리서 꿈꾸는 것을 금지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몽상가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멋진 대상이 있을 만한 세상을 보는 비율 속에서 본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화살, 불새, 타는 듯한 이미지는 한 세계의 중심이다.    T.S 엘리엇은 이 이미지를 빛의 순간으로 적고 있다.    물총새의 날개가 빛에 빛으로 화답하고 나서  ......빛은 고요하다.  시인은 이 능동적인 빛의 순간을 진정한 시간의 부조relief 여 temps로 느낀다. 엘리엇은 다음 두 행으로 시를 끝맺는다.    우스꽝스럽구나 슬프고 헛된 시간이여  이전과 이후로 펼쳐지니.    우리는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서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라는 프로메테우스적 정신의 근본 이미지를 주시할 것이다. 이 시적 이미지가 시적 몽상들의 어떤 통합에서 정당하게 인정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시적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를 인간의 미학에 초대한다.  -태양 원반에서 프로메테우스이 불까지  -찔린 눈과 시선의 불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몽상이 솟아오르는가!  키플로페스 이마 한 가운데 외눈이라. 키클로페스의 눈이 회오리치는 불을 내던지지는 않는가? 눈의 둥근 윤곽을 따라 완전히 돌려가면서 그 눈을 후벼파야한다. 많이 돌려 후벼팔수록 많이 복수하는 것이다. 단검으로 잘라 다듬은 올리브 나뭇가지 끝이 투창처럼 뾰족해진다해도 충분치 않으리라. 오디세우스는 나무를 불태워 단단하게 만든다. 초록빛 나무가 검은 나무로 변한다. 나무는 뜨거운 쇠와 같은 것이리라. 키클로페스 눈 속에서 깊은 불이 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반(反)불이 있어야 한다. 이 흉기는 그의 불구멍 속에서 뾰족한 도구가 된다. 불을 끄려는 몽상이 불을 탄생시키는 몽상과 합류한다. 이 시선의 불을 끄기를 원할 때, 그 깊숙한 온상까지 불을 끄기를 원하면, 뽀족한 도구로 불을 창조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불의 탄생과 불의 죽음이 같은 인미지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언급하면서 가장 자주 덧붙이는 것이 불복종의 표시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콤플렉스의 시사성을 느낀다. 신화에서 사람들은 오로지 불복종의 매혹만 생각한다.    영웅 프로메테우스는 건설적인 불복종의 상징이다. 아버지보다 더 잘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불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기 위해서 불복종하는 것은 창조자의 신념이다. 불복종은 벌을 피할 만큼 미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매한 죄의식, 혼미한 죄의식이 남는다. 모든 지식에 활력을 주는 불복종의 역동성을 연구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불을 준비하는 것이 ‘더할 나위없는’의식의 행위이며, 불은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어두운 상태를 없앤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의 가족으로 제우스가 그들에게 가한 박해에 관련이 되었다. 그는 카프카스 산이 있는 스키티아에 은거해야 했고, 제우스가 통치하는 동안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다. 황량한 고장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비애는 그의 간을 갉아먹는 독수리이다. 아니면 이 독수리가 한 철학자의 깊고 비통한 명상의 생생한 이미지는 아닐까? 스키티아 주민들은 극도로 야만스러웠으며 법도 관습도 없이 살고 있었다. 공손하고 학식있는 이 왕자는 그들에게 좀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쳤다. 어떠면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미네르바의 도움을 얻어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이 불은 그가 스키티아에 세운 대장간들이다. 아마도 프로메테우스는 그 고장에서 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며칠공안 불을 보존하기에 알맞은 식물인 큰 회향풀 줄기속에 불을 넣어 그곳에 가져왔을 것이다. 마침내 프로메테우스는 스키티아의 쓸쓸한 생활에 지루해져서 최후의 날을 맞으러 그리스로 온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에세 신들의 영예, 적어도 영웅의 영예를 되찾아 주었다. -이 항목은 Jaucourt가 작성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산꼭대기에서 불을 훔치고 카프카스 산 정상에서 신들의 복수를 감내한다. 프로메테우스는 한 새에게 고통받는다.  불, 새, 대담한 사람은 정상의 존재다.    에트나 화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불의 시학을 격상시킨다.    엠페도클레스는 소멸의 시학을 보여주는 가장 중대한 이미지들 중 하나다.    불에 헌신하는 것, 그것은 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불에 헌신한다는 것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닌가? 불길의 장엄함에서 무의 장엄함으로 가는 중요한 이행passage. 또는 이 중대한 불, 이 완전한 불은 총체적인 정화의 근거가 아닌가? 그런데, 정화된다는 것은 재탄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닌가? 피닉스에 대한 몇 가닥 희망이 철학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석의 장은 열려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다음과 같이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분명 탄생과 죽음은 두 가지 모두 순간의 영광이다. 그렇지만 탄생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전설에는 날짜가 없다. 전설은 머무는 것이며, 어떤 시인이 전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이미지들을 발견하면 그 즉시 전설은 새로운 삶을 되찾기 때문이다. 정상의 전설들은 변하지 않는다. 카프카스 이에 못박힌 프로메테우스, 에트나 산의 불이 사방에 뿌리는 엠페도클레스, 이러한 전설에서 정상은 하나의 인물이다.    신세계의 주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같은 시인은 자신의 우주성에 대한 몽상들에 고 사고의 고귀함을 부여하기 위해 지중해를 필요로 한다. 포는 그의 『유레카』를 선포하기 ㅇ위해 불의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 정상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동과 서, 남과 북, 뜨고 지는 모든 것을 같은 시선 속에 , 원래의 시선 속에 통합시키기 위해 사방에서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에트나의 정상에서 한가로이 자기 주변을 두루 살펴보는 자는 무엇보다도 경관의 광활함과 다양함에 감동한다. 그는 발꿈치를 축으로 한 바퀴 재빨리 돌아야만 그 숭고한 단일성 속에서 파노라마를 포착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우주(나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일하게 합법적인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구상을 철회시키는 단 하나의 조약도 모른다. 그러니 에트나의 관념성은 영원히 찬양받지 않는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은 분명히 굴광성의 피해자이다. 이것이 동물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가 즉각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그렇지만 몽상가에게는 어떠한가? 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시인에게는 어떠한가?  “나는 어느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나는 라마 모양의 거대한 동물을 점토로 빚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동물은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불길이 그 괴물을 관통하며 그에게 조금씩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그리하여 수천 개의 자줏빛 망이 파고 들어간 그 괴물은 동맥과 정맥을 형성하면서, 그리고 털 뭉치와 지느러미의 섬유질 부속체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식물의 모습을 띠고 있던, 말하자면 자동력이 없는 물질을 번식력이 있게 만들면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이 걸작품을 감상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뜻하지 않게 신의 창조의 비밀을 간파한 것 같았다.    질료에 활력을 넣어주는 프로메테우스적 행위를 꿈꾸자마자 그는 곧 금은 세공사들이 지상에 알려지지 않은 철강을 가지고 일하는 또다른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진사와 흡사한 붉은 철과 쪽빛 철. 장식들은 망치로 두드려져 단련되지도 않았고 끌로 조각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형태가 잡히고 착색되었으며 마치 어떤 화학적 혼합이 만들어내는 철제식물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이것은 프로메테우스적 행위의 서곡이 아니겠는가? 네르발이 한 직공에게 묻는다. “인간은 만들지 않나요?” 내가 한 직공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창조할 수 있겠소?”  “우리 모두 지니고 있는 인간의 공동 운명은 지적 기능의 발달과정이 더 조숙하고 폭넓은 자들에게 더욱 무거운 것이리라...... 결국, 인간은 항상 자신을 성찰하도록 강요당한다. 나는 어린시절부터, 사람들은 가장 힘든 순간에 ‘의사여, 너 자신을 치료해라’ 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얼마나 여러 번 고통스러운 한숨을 지으며 ‘나는 혼자서 압착기를 압착한다’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 했던가. 나의 독립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생각할 때면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가진 풍요로운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오래된 신화적 형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신들에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아틀리에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온 세계를 채워 넣는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였다. 나는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고는 주목할 만한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큰 성공을 거둔 내 작품들은 고독의 산물이었다. 내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래도, 나에게는 힘도 창작적 열정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지만 작품 완성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산문이나 시에서 내 고유의 문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도움을 차단하고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던 나는 프로메테우스를 본받아 신과 나를 분리했다. 왜냐하면 내 성격과 지적 습관에서는 늘 하나의 생각이 다른 것들을 매몰시키고 내쫒아버리기 때문이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내 안에서 활기를 띠었다. 나는 내 크기에 맞춰 티탄의 낡은 옷을 제작했다. 통치하고 있던 신들은 티탄과 인간 사이에 불법으로 개입한 존재로 간주될 수 있었으니 불평할 자격이 있었다. -괴테-    일신교에서 악마가 그렇듯이, 다신교에서는 티탄들이 이를테면 그림에서의 어둠과 같은 것이다.    불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유혹은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주 작은 화상 앞에서 벌써 망설인다. 애초부터 너무 뜨거운 것은 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적 방어현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엠페도클레스적인 유혹을 즐길 수 있다. 결국 엠페도쿨레스는 한 번도 희생자를 만들지 않은 아주 희귀한 이미지들이다.    때로는,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은 육체 안에서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장작더미이다. 사람들은 불태워질 수 있다. “사람과 대등한 불에 의해 산 채로 불태워질 수 있다”고 시는 말한다.  명상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나에게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보여주는 자는 밝히지 않는다. 증명하는 자는 보여주기를 싫어한다.”  이미지가 빛날수록 그 모호성은 더욱 당혹스럽다. 그것은 깊이의 애매함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은 이미지가 피상적이고 덧없기를 바란다. 움직이지 않는 모래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물, 그 흐름에 아득한 하늘을 반사하는 물…… 그러나 하늘과 대지는 모두 이미지에 수직성을 부여한다. 상승하는 모든 것은 깊이의 힘을 감추고 있다.   
331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댓글:  조회:1240  추천:0  2018-10-20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우리의 정신이 갖는 상상적힘은 매우 다른 두개의 축위에서 전개된다. 그 하나는 새로움앞에서 비약을 찾는, 즉 회화적인것이나 다양함, 예기치 않은 사건을 즐기는것이다. … 또 하나의 상상적힘은 존재의 근원에 파고 들어가 원초적인것과 영원적인것을 동시에 존재속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8   작품의 언어의 다양성과 변화하는 빛의 생명을 지니기 위해서는 감상적 요인이나 심정적요인이 형식적요인으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질의 이미지가 형식, 즉 소멸하기 쉬운 형식,공허한 이미지, 변화하는 표면에서 멀어짐에 따라, 사람들은 본질과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을 꾼다. 그것은 무게를 가지며 핵심을 갖게 되는것이다.9   우선 파괴적인 철학자들만이 미에서 모든 접미사를 떼여내고, 나타나있는 이미지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를 찾아내기위해 전력을 다하며, 상상하는 기능의 뿌리 자체에이르는 이 막중한 일에 손을 댈수 있는것이다. 물질의 근원에는 어두운 하나의 식물이 자라고 있어, 물질의 밤에는 검은 꽃들이 피여있다. 꽃들은 이미 벨벳의 꽃잎과향기의 방식을 갖고있다.10   시적이미지는 하나의 물질을 갖는것이다.12   우리는 상상력의 령역에 있어서 불,공기, 물, 흙의 어느것에 결부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질적상상력을 분류하는 , 4원소의 법칙을 규정하는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2   담즙질 인간의 몽상은 불과 화재와 전쟁과 교살이며, 우울 질인간의 몽상은 매장과분묘와 유령과 도망과 무덤, 즉 음산한 모든것들이며, 점액질인간의 몽상은 호수와강물의 범람과 난파이며, 다혈질인간의 몽상은 새의 비상과 경쟁과 향연과 음악회,그리고 사람이 차마 이름 붙이기를 꺼리는것과 같은 사물들이다.13-14   꿈의 우주론에서 물질적원소는 근본적원소 그대로이다.14   몽환적인 풍격은 여러인상으로 가득 차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오르는 하나의 물질인것이다. 15   존재란 무엇보다 먼저 각성이며, 더욱이 이상한 인상의 의식 속에서 눈을 뜨기때문이다.20   고향이라는것은 공간의 넓이라기보다는 물질이다. 즉 화강암 이나 흙, 바람이나 건조함, 물이나 빛인것이다.21   심리적대립감정의 기회를 갖지 못한 물질은 끊임없이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분신을 찾을수 없다. 28   에드거포의 말 ‘만일 가능한 론리와 과학을 비주체화 해야 한다면,  반대로 어휘와 통사론을 비객체화하는것도 그에 못지 않게 불가결 한것이다.’라고 말하고있다. 대상의 이러한 비객체화가 없다면, 또 대상밑에 우리가 물질을 볼수있게 하는 형식의 변형이 없다면, 잡다한 사물들로 움직이지 않고 생기없는 고체나 우리들 자신들과 무관한것으로 , 세계는 흩어져버릴 것이다.29   실체가 없는 작품은 생명력이 없다35   상상력은 그 어원이 암시하는바와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 아니고 ,현실을 넘어서 현실을 노래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초인간성 능력이다…. 상상력은 사물과 드라마이상으로 창조하는것이며, 새로운 생명과 정신을 창조하고 , 여러가지 새로운 타입을 지니는 비전의 눈을 뜨게 하는것이다. 36   참다운 포에지(시, 시작법, 시학…)라고 하는것은 눈을 뜨게 하는 기능을 말한다37   상상할수 있는 세계의 지도(그림)는 꿈속에서밖에는 그릴수 없다. 감각할수 있는 세계는 무한히 적다! 몽상과 꿈은 어떤 혼(사람)에게는 미의 재료가 되는것이다. 38   신이나서 그린 환상은 행동하기를 멈추는 환상이다. 여러가지 물질원소에는 힘을 지니고있는 환상이 호응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물질에 충실한 한도내에서이며, 또한거의 같은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원초적꿈에 충실한 한도에서이다39   콤플렉스는라는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이러한 변형을 계속한다…만약 승화작용이 개념에 관한 단순한 일이라면, 이미지가 개념론적 도식속에 갇히게 되자마자 곧 그작용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색갈은 넘쳐흐르고 , 물질은 부풀어오르고 , 이미지는 스스로를 교화한다. 40   한편의 시를 낳는 꿈의 이러한 항구성을 갖기 위해서는 현실적이미지이상의것을 눈앞에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속에서 태어나 우리의 꿈속에서 사는 이 이미지, 물질적 상상력을 위해 무궁무진한 양식인 풍부하고 농밀한 꿈의 물질로 가득찬이 이미지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42   피상적인 포에지와 같은 포에지를 구별하는 이러한 밀도를 사람들은 ‘감성적가치’에서 ‘감각적가치’로 이행시킴으로써 맛보게 될것이다. ‘감각적가치’와의 관계에서 바르게 분류할수 있을 때에만 상상력의 교의가 밝혀지리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단지감각적가치만이 ‘만물조응’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성적 가치는 번역밖에는 주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적이란 의미는 감각과 지각의 수용가능한 상태를 가리키는것이고, 감각적이라 함은 지각하고 감각하는 능력을 가리키는것이라 할수있다. 주해에서.)46   인생은 자라나고, 존재를 변형시키고 순결함을 취하여 꽃을 피게 하며 상상력은 가장 먼 은유로 열려 갖가지 꽃의 삶에 참가하는것이다. 51   백조는 문학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대용물이다.73   무의식에서 움직이는 모든 이미지와 같이, 백조의 이미지는 남녀양성인것이다. 백조는 빛나는 물의 응시에 있어서는 여성이며 , 행동에 있어서는 남성이다. 무의식에 있어서 활동은 행위이다. 무의식에 있어서는 ‘어떤 현실적행위’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떤 행위를 암시하는 이미지는, 무의식계에 있어 여성에서 남성에로 발전하는것이다. 76   석양의 수평선 깊숙이 붉은 백조는 변함없이 영원한 도전을 펼치고 있다. … 그는 공간의 왕이며 , 빛나는 왕관의 발밑에 있는 노예처럼 바다는 창백해있다. 87   역동적인 포에지에 있어서 사물은 그것이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생성하는것이다. 사물은 이미지에 있어서 우리의 몽상, 끝없는 몽상속에 생성하는것이다. 물을 응시한다는것, 그것은 흘러간 다는것, 분해한다는것, 죽어간다는것이다. 95   몽상은 때때로 무한한 반영과 수정을 닮은 음악으로 소리를 내는 맑은 물앞에서 시작된다.95   만약 독자가 시인의 모든 이미지를 현실로 인정하고 자신의 리얼리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그는 여행에의 유혹을 겪게 될것이며, 이윽고 그 자신도 ‘이상함의미묘한 감정에 감싸일’것이다. “자연의 관념은 아직 존재하고있으나 이미 변질되여,그 성격에 있어 흥미깊은 수정을 받고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의 신비하고 장엄한 균형이며, 감동적인 균일성, 마법적인 정정인것이다. ” …환영이 현실을정정 하는것이다. 환영은 현실로부터 이음매나 비참함을 떨쳐버  리는것이다.98-99   물질화하는 몽상-물질을 꿈꾸는 저 몽상- 은 형식의 저쪽에 있는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말하면 물질은 형식의 무의식 의이라는것이 이해될것이다. 그것은 덩어리속의물 그자체이다. … 다만 물질만이 복잡한 인상과 감정의 무게를 받아들일수 있는것이다. 물질은 감정의 재산이다. 101   물의 요정, 즉 환영의 수호자는, 하늘의 모든 새들을 자기손으로 붙잡고있는것이다.물웅덩이는 우주를 내포하고 있다. 꿈의 한순간은 홈 전체를 내포하고 있는것이다.101   물은 일종의 우주적 고향이 되여, 하늘에 고기를 번식시 키는것이다. 고생하는 이미지가 깊은 물에 새를, 그리고 하늘에 물고기를 주는것이다. 별-섬이라는 무력하고 양의적인 개념으로 나타낸 도치가 여기서는 새-물고기라는 살아있는 양의적 개념으로표현되여있다. 이러한 양의적개념을 상상력속에서 구성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이렇게 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이미지가 갑자기 얻게 되는 매혹적인 애매성을 맛보게될것이다.103   죽어가는 어머니의 추억은 에드거포의 작품에서는 독창적으로 두드러진것이다. 그는 동화의 힘과 괴상한 표현의 힘을 지니고있다. 그러나 그토록 다양한 이미지가 어떤 무의식의 추억에 강하게 덧붙혀있는것은 이미 그 이미지들이 미래의 긴밀함을 서로들 사이에 지니고있기 때문인것이다. 아무튼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체이다. 물론이러한 긴밀성은 논리적인것이 아니다. 또 직접적으로 현실적이지도 않다. 현실속에서 나무그늘이 물결에 빨아들여지는것을 보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상상력은이미지와 몽상의 이러한 긴밀성을 정당화 하는것이다…. 이미지의 측면 그자체, 표현수단의 단계 그자체에 따라 발전시키는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거듭 되풀이되여 말하지만 , 우리의 현재의 연구가 바쳐지는것은 , 이미지이에 대한 보다 표면적인 삼리학에 대해서인것이다.112   새로운 분석방법에 따라서 책을 읽게 되자마자 멀리 떨어져있는 이미지를 받아들여,다양한 길로 상상력을 자유로이 비약시키는, 매우 변화 많은 승화작용에 참가하게 되는것이다. 고전적인 문학비평은 이러한 다양한 비약을 구속한다.114   끊임없이 다시 상상하고 있을 때만이 시적기능이 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새로운형식을 부여하는것임을 비평은 쉽사리 잊어버리고있는것이다.114   몽사가는 이제 더 이상 이미지를 꿈꾸지 않고, 물질을 꿈꾼다.124   우리는 상상력이 그 창조적형식에 있어서 , 창조하는 모두에 생성을 강요하고 있음을 믿고(있다)130   참으로 강력한 리익이란 공상적인것이다. 즉 그것은 꿈꾸는 리익이지 계산하는 리익이 아니다. 가공적리익인것이다. 바다의 영웅은 죽음의 영웅이다. 최초의 수부는 사자(死者)와 마찬가지로 영감했던 최초의 생자를 말하는것이다. 141   죽음은 여행이며 여행은 죽음인것이다 142   나는 그대가 출발한 오솔길을 보았다! 잠과 죽음은 우리를 더 오랫동안 때어놓지 않으리라… 들어보라! 환영같은 급류가 와글거림을 멀리서 음악으로 가득찬 숲의 속삭이는 미풍에 뒤섞고있다. (셸리의 시)145   이미지의 자연스런 싹, 물질적원소의 힘에 의해서 길러진 싹에 의해서만 이미지는번식되고 모아지는것이다. 161   아침의 조용한 물소리 장미처럼, 내일물의 사자는 거슬러 오리라. 은빛종소리는 헤염치리라, 얼마나 상냥한 바다인가… 아! 내방의 갈대는 얼마나 울부짖고 있는것일가(정채로운 이미지)165   시의 기능을 지니는 모든 위대한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오필리아의콤플렉스도 우주적 단계에까지 올라갈수가 있다. 그때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는 달과 물결의 일치를상징화 한다.165   이미지가 갖는 특징이 전혀 현실주의적인 기원을 갖지 않는다느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을가? 그것들의 특징은 꿈꾸는 존재의 투영에 의해서 생기는것이다. 물에 비친달속에서 다시 오필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기에는 강한 시적교양이 필요한것이다. 167   다양한 이미지를 동일한 주제아래 모을수는 없는것이다 169   닫힌 물속을 흘러가는 배와 같아 죽은자처럼 단 하나의 원소를 지니고있었을뿐173   형식이란 상상력에는 ‘구성’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물질적 상상력은 ‘결합’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 176   몽상의 이미지는 일원적이거나 아니면 이원적이다. 그런 이미지들은 실체의 단조로움속에서 꿈꿀수 있다. 만약 그런 이미지들이 결합을 원한다면, 그것은 두 원소의 결합인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의 지배속에서 모든 결합은 결혼이며, 삼자사이의 결혼이란 존재하지않는것이다.181   돌발적인 은유, 놀라운 대담성, 전격적인 아름다움이 독창적인 이미지의 힘을 증명할수 있다…. ‘물은 불타는 물체이다’ ‘물은 젖은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노발리스의수수께끼같은 완벽한 말도 똑같은 말이다. 183-184   본질적인 몽상은 , 그야말로 반대물들의 결혼인것이다.185   상상력은 작은것을 커다란것에, 그리고 커다란것을 작은것에 번갈아 투영하는것이다. 만약 태양이 바다의 영광스러운 남편이라면, 리바송의 차원에서 물은 불에 몸을바치는것이 필요하며 , 불은 물을 지니는것이 필요하리라. 불은 자신의 어머니를 낳는것이지만 , 이것이 바로 연금술사들이 리그베다를 모르는채 싫증날만큼 사용하는공식인것이다. 이것은 물질적 몽상의 근원적인 이미지이다.187   ‘구리빛’의 독특한 똑같은 구름이 나타난다.192   상상할수 있는것을 뛰여넘어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족할만큼 강력한  현실을 갖게 되리라. 193   밤의 꿀은 천천히 소모된다. 태양의 냄새는 너무나 강해서 햇볕을 쬔 물은 자신의 향기를 우리에게 줄수가 없다.밤이 너무나 고요하여 내게는 그것이 짜디짜게  생각될 정도이다. 밤은 때때로 가까이에서부터 우리를 감싸며 입술을 차갑게 하려고 다가오는 아주 가벼운 물과 같다.우리는 자신속에 있는 수분에 의해서 밤을 빨아들이는것이다. 196   반죽의 꿈(흙과 물의 어울림)에 속하는 이와 같은 꿈은, 창조하고 , 형성하고, 변형하고, 반죽하기위한 투쟁 또는 패배의 교차인것이다.200   열손가락은 양조통속에서 준마를 내갈기고있다.204   눈물은 너의 비참한 뇌수를 물에 빠지게 했던것이다. 소금기 없는 언어는 너의 입위로 미지근한 물처럼 흐르고 있다.211   물질적몽상은 조각하는것이다. 조각하는것은 언제나 몽상 이다.213   형식은 완성된다. 그러나 물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물질 이란 끝없는 몽상의 도식인것이다.213   사랑과 공감의 감정이 은유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근원적 감정속에서 힘을 길어올리러 갈 필요가 점점 더 많아 질것이다.218   마음을 다 바쳐 어떤 현실을 사랑하자마자 그것은 벌써 혼이 되고 추억이 되는것이다. 219   상상력의 령역에서 사람들이 흰색에 대해 기분을 맞추기는 어렵지 않을것이다. 달의 금빛 어린 빛이 내물위에 덧붙혀질 때… 227   우리의 모든 문학교육은, 형식에 관한 상상력과 명확한 상상력을 기르는데 만족하고있다. 244   모든 이미지는 부재이며, 하늘은 텅 비여있으나, 운동은 생생하고 원만하게 , 또 리듬을 지닌채 거기에 있다.247   물질적상상력만이 끊임없이 전통적이미지를 활기차게 하며, 몇몇 오래된 신화적형식을 부단히 소생시키는것이다. 물질적상상력은 형식을 변형시킴으로써 형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형식이 변형하는것은 스스로의 존재양식에 반대되는것이다. 254   순수성을 몽상할수 없이는 순수성을 알수 없는것이다. 255   사라져버린 문명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특별히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이러한 ‘몽상’인것이다. 단지 사실의 무게를 잴뿐만 아니라 꿈의 무게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왜내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라 할지라도 모든것은 보여지기전에 꿈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56   물질적상상력은 근원적법칙의 한 례가 있다. 즉 물질적 상상력에 있어서 가치부여된 실체는, 미소한 량이라도 , 다른 실체를 매우 큰 덩어리에 작용학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힘의 몽상의 법칙 그자체. 즉 손바닥속의 작은 량으로 우주적지배의 수단을 지니는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형태로서는 열쇠가 되는 말이나 조그만  말이 아주 깊숙이 숨겨진 비밀도 드러나게  할수있다는 리상이기도 하다… 순수한 한방울의 물은 태양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불순한 한방울의 물은 우주를 오염시키기에 충분한것이다. 모든것은 물질적상상력으로 선택된 행동의 윤리적의미에 달린것으로서, 만약 그것이 악을 꿈꾼다면, 불순성을 전파하여 악마적싹을 개화시킬것이고 만약 선을 꿈꾼다면 순수한 실체의 한방울을 신뢰하여 자비로운 순수성을 빛나게 할것이다. 실체의 행동은 스스로의 내면성에서  원했던 실체적생성으로서 꿈꾸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인격의 생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동은 모든 상황을 뒤엎고 모든 장해를 뛰여넘으며, 모든 경계를 부숴버릴수 있는것이다. 사악한 물은 음흉하나 , 순수한 물은 예민하다. 두가지 의미에서 물은 의지가 된다. 모든 일상적성질이나 표면적가치는 부차적특성의 한단게로 옮겨진다. 명령하는것이 바로 내면인것이다. 실체적 행동이 빛을 발하는것은 , 중심적인 점이나 응집된 의지로부터인것이다.270   물질적상상력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됐을 때, 스스로의 원소적 힘속에서 꿈꾸어진 물질은 정신이나 의지가 되기까지 앙양 되는것이다. 273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의미사이에 ‘교감’이 있다고 할 때,그러한 비유의 심리학은 만들어진것이 아니고-속임수로 감추어진것이다. 그때의 교감은 련상일 뿐이리라. 사실 교감은 감성적인 여러 인상의 살아있는 통합인것이다. 참으로 물질적인 상상력의 진전을 사는生 자에게 비유적의미는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비유적의미는 감성의 일정한 무게, 즉 일정한 감성적물질을 유지하고 있는것이다. 모든것은 이러한 영속적인 감성적 물질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273   ?상상력의… 직접적인 행동이 명백하게 되는것은 , 문체의 신선함이 가장 어려운 성질에 속하는 문학적상상력을 물로 할 때이다. 그것은 작가에 달린것이지 취급된 주제에 달린것은 아니다183   물질적상상력은 세계를 깊이에서 연극화한다. 물질적상상력은 인간의 내면적삶의 모든 상징을 여러 실체들의 깊이속에서 찾아내는것이다.280   선천적으로 위대한 시인은, 깊은 삶속에 자신의 자연스런 자리를 갖고있는 여러가치를 상상하는것이다. 281   바람을 일으키는 영웅은 “나는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는 갈대의 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다리는것, 힘앞에서 자신을 구부리는것을 권하는 ‘수동적인 금언’에 다름 아니기때문이다. 그것은 걷는 사람의 능동적 금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굴’의 보행자는 바람을 마주하고, 또 바람에 대항해서, ‘전진하면서’ 스스로를 굽히기 때문이다. 그의 지팡이는 폭풍을 똟고 대지에 구명을 내며,질풍을 검으로 자른다. 역동적관점에서 본다면, 바람속의 보행자는 갈대의 반대인것이다.303   폭풍속에 둘러싸인 보행자는 얼마나 쉽게 사모트라케의 승리를 상징하고있는가! 그는 곧 작은 깃발이고, 국기이며, 군기인 것이다. 그는 용기의 표시이고 , 힘의 증거이며, 토지의 점령인것이다. 폭풍에 펄럭이는 외투는 그러므로 바람의 영웅에 내재하는 일종의 깃발, 빼앗을수 없는 깃발인것이다.304   특수화된 콤플렉스는 원초적콤플렉스의 산물이기는 하나 , 회화적특징으로 스스로를 덮고, 객관적 아름다움속에서 스스로 를 나타내면서 우주적 경험속에서 스스로를 특징화할 때에만 미적기능을 갖기에 이르는것이다. 315   상상된 사실은 ‘현실적사실’보다 더 중요한것이다. 330   현실적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심리학적으로 광기어린 은유는, 그러나 시적진실인것이다. 그것은 은유가 시적인 혼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의 현상이며,우주적자연위에 던져진 인간적지연의 투영이기도 한것이다. 343   눈을 깜박거리는것의 행위는 현실적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다른 행위는 그것이 수반하는 소리에 의해서 그 말의 뿌리역할을 하는 음향을 아주 잘 상기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듣기 위해서  ‘생산하며’ ‘투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일종의 대표적의성어, 즉 떨어지는 눈꺼플에 소리를 주는 일종의 추상적의성어가 존재하는것이다. 폭풍이 지나간위에 나뭇잎에서 떨어지면서 이상에서 말한바와 같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과 물의 거울을 떨게 하는 물방울이 있다. 그것을 ‘바라볼’ 때, 떠는것이 ‘들리는’것이다.353   ㅁ 물은 가장 충실한  ‘목소리의 거울’ ㅁ싸락눈은 타닥타닥 튀고 ㅁ바다는 번쩍이는 등뼈, 벌겋게 달군 쇠로 낙인을 찍히는 얼빠진 암소와 같다. ㅁ 나는 흐름을 바이올린처럼 지닌다 ㅁ물에 대한 말라르메의 노래   오! 거울이여   권태로 인해 너의 테두리속에 얼어붙은 차디찬 물 몇번인가 , 그리고 몇시간 동안인가, 가지가지의 꿈으로 비탄에 잠기며 깊은 구덩이의 네 얼음밑에 나뭇잎같은 내추억을 찾아 헤매며, 아득한 그림자처럼 나는 네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두렵구나! 저녁이면 네 엄숙한 샘물속에 어수선한 내 꿈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는 알았다49   2015.2.9.  
330    천개고원 / 들뢰즈 댓글:  조회:912  추천:0  2018-10-20
용량 많아 퍼올릴수없어 사이트주소를 복제해 올려놓습니다. 사이트주소들을  클릭하면 해당페지로 이동합니다 ^^ 들뢰즈 천개의 고원 (1) http://cafe.daum.net/ko.art./am0K/841   들뢰즈 천개의 고원 (2) http://cafe.daum.net/ko.art./am0K/843   들뢰즈 천개의 고원 (3) http://cafe.daum.net/ko.art./am0K/844   들뢰즈 천개의 고원 (4) http://cafe.daum.net/ko.art./am0K/845   들뢰즈 천개의 고원 (5) http://cafe.daum.net/ko.art./am0K/846   들뢰즈 천개의 고원 (6) - 요약1 http://cafe.daum.net/ko.art./am0K/847   들뢰즈 천개의 고원 (7) - 요약2 http://cafe.daum.net/ko.art./am0K/848   들뢰즈 천개의 고원 (8) - 비인간주의 존재론 1 http://cafe.daum.net/ko.art./am0K/849   들뢰즈 천개의 고원 (9) - 비인간주의 존재론 2  http://cafe.daum.net/ko.art./am0K/85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0) http://cafe.daum.net/ko.art./am0K/85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1) - 대담 http://cafe.daum.net/ko.art./am0K/85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2) http://cafe.daum.net/ko.art./am0K/856   들뢰즈 천개의 고원 (13) - 내재의 평면 . 다양체 http://cafe.daum.net/ko.art./am0K/857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시네마 http://cafe.daum.net/ko.art./am0K/860   들뢰즈 천개의 고원 (14) – 예술 http://cafe.daum.net/ko.art./am0K/861   들뢰즈 천개의 고원 (15) http://cafe.daum.net/ko.art./am0K/863   들뢰즈 천개의 고원 (16) http://cafe.daum.net/ko.art./am0K/865   들뢰즈 천개의 고원 (17) http://cafe.daum.net/ko.art./am0K/869    
329    [스크랩] 배워두면 유용한 주제별 고사성어 댓글:  조회:912  추천:0  2018-10-20
효(孝), 우정(友情),  학문(學問),  부부(夫婦), 교우(交友), 세태(世態),  속담(俗談), 형세(形勢), 미인(美人), 거리(距離) , 희생(犧牲), 향수(鄕愁), 독서( 讀書), 전쟁(戰爭), 소문(所聞), 애정(愛情). 기쁨/슬픔, 무례(無禮),  인재(人才).           1. 事親以孝(사친이효) :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함. 세속오계의 하나 2. 父子有親(부자유친) : 아버지와 아들의 道는 친애에 있음. 五倫의 하나 3. 父爲子綱(부위자강) :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지킬 떳떳한 도리. 삼강의 하나. 4. 昏定晨省(혼정신성) :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핌 5. 反哺之孝(반포지효) :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 6. 反哺報恩(반포보은) : 자식이 부모가 길러 준 은혜를 갚음   7. 風樹之嘆(풍수지탄) : 효도하고자 할 때에 이미 부모는 돌아가셔서, 효행을 다하지    못하는 슬픔 8. 出必告反必面(출필곡반필면) : 밖에 나갈 때 가는 곳을 반드시 아뢰고, 되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여 드린다.     ☞ 出告反面   9. 昊天罔極(호천망극) : 끝없는 하늘과 같이 부모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말함   10.望雲之情(망운지정) : 객지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11.白雲孤飛(백운고비) : 멀리 떠나는 자식이 어버이를 그리워 함 12.冬溫夏 (동온하청) : 부모에 효도함. 겨울은 따뜻하게 여름은 시원하게 해드림.   13.伯兪之孝(백유지효) : 韓伯兪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로부터 종아리를 맞아도     아프지 않다하여 어머니의 노쇠함을 탄식함.           1. 管鮑之交(관포지교) : 썩 친밀한 교제.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사귐    2. 水魚之交(수어지교) :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뗄 수 없는 사이 3.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부터의 친한 벗 4. 莫逆之友(막역지우) : 아주 허물 없는 벗                5. 金石之交(금석지교) : 쇠와 돌처럼 굳은 사귐                       6. 肝膽相照(간담상조) : 간과 쓸개가 가까이 서로 잘보여 주듯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귐   7. 膠漆之交(교칠지교) : 매우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귐                  8. 刎頸之交(문경지교) : 죽고 살기를 같이 할 만한 친한 사이나 벗 9. 金蘭之交(금란지교) : 쇠처럼 날카롭고 난초처럼 향기나는 친구 사이. 10.芝蘭之交(지란지교) : 영지와 난초의 향기로운 향기 같은 벗 사이의 교제 11.斷金之交(단금지교) : 매우 정의가 두터운 사이의 교제             12.交友以信(교우이신) : 친구를 믿음으로써 사귐. 世俗五戒의 하나 13.朋友有信(붕우유신) : 친구사이의 도리는 신의에 있음.五倫의 하나 14.布衣之交(포의지교) : 곤경한 상황에서 사귄 친구 15.知音知己(지음지기) : 소리를 듣고 나를 인정해 주는 친구         1. 溫故知新(온고지신) : 옛 것을 익혀서 그것으로 미루어 새 것을 깨달음.     ☞ 法古創新(법고창신) 2. 稽古(계고) : 옛일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는 것을 일컬음. 3. 螢雪之功(형설지공) : 고생을 하면서도 꾸준히 학문을 닦은 보람. 4.日就月將(일취월장) : 학문이 날로 달로 나아감.  ☞刮目相對괄목상대 5. 盈科後進(영과후진) : 구덩이에 물이 찬 후에 밖으로 흐르듯 학문도 단계에 맞게    진행해야 한다는 뜻. 6. 敎學相長(교학상장) :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의 학업을 증진시킨다는 뜻. 7. 讀書三到(독서삼도) : 독서하는 데는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깨우쳐야 함.     ☞ 手不釋卷, 讀書三昧, 讀書尙友, 三餘(수불석권, 독서삼매, 독서상우, 삼여) 8. 亡羊之歎(망양지탄) :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탄식한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도     여러 갈래여서 진리를 찾기 어렵다는 말.     ☞ 多岐亡羊(다기망양) 9. 不恥下問(불치하문) : 자기보다 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음. 10.靑出於藍(청출어람) :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낫다는 말. 11.後生可畏(후생가외) : 후배들이 선배들보다 훌륭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 12.孟母三遷(맹모삼천)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의 준말.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처음에 공동묘지 가까이 살다가, 맹자가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서,     시전 가까이 옮겼더니 이번에는 물건파는 흉내를 내므로,     다시 글방 있는 곳으로 옮겨 공부시켰다 함. 13.曲學阿世(곡학아세) : 올바른 학문을 굽혀, 속된 세상에 아부함 14.換骨奪胎(환골탈태) : 뼈를 바꾸고 태를 빼앗았다는 뜻으로,     옛사람이나 타인의 글에서 그 뜻을 취하거나 모방하여 자기의 작품인 것처럼 꾸미는 일 15. 自强不息(자강불식) : 스스로 힘써 행하여쉬지 않음 16. 發憤忘食(발분망식) : 발분(분발)하여 끼니를 잊고 노력함 17.手不釋卷(수불석권) : 손에서 책을 놓을 사이 없이 열심히 공부함 18.螢窓雪案(형창설안) : 반딧불이 비치는 창과 눈(雪)이 비치는 책상이라는 뜻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문에 힘씀을 비유한 말.     참고:  螢窓雪案의 고사의 주인공은 '차윤'과 '손강'이다. 19.切磋啄磨(절차탁마) : 옥돌을 쪼고 갈아서 빛을 냄. 곧 학문이나 인격을 수련, 연마함 20.走馬加鞭(주마가편) :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한다.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노력함.         ㅇ 금슬지락 (琴瑟之樂 ) : 거문고와 비파. 금슬 좋은 부부간의 애정.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합주를 만들어 내듯이     아내와 남편이 서로 양보하며 서로를 존중하면, 가정이 화목하고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ㅇ 부창부수 (夫唱婦隨 ) : 부부의 화합을 뜻하는 말로 예로부터 남편이 부르면 부인이     따른다는 말. ㅇ 賢婦令夫貴和六親(현부영부귀화육친) : 현명한 부인은 남편을 귀하게 하고, 또한      일가 친척을 화목하게 함. ㅇ 백년가약(百年佳約) :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아름다운     언약(言約)이란 뜻.           1. 知音(지음) :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사이의 고사로부터 (거문고) 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뜻에서 유래.       ※ 보충) 伯牙絶鉉(백아절현)은 '친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 2. 水魚之交(수어지교) : 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떨어질 수 없는 특별한 친분 3. 莫逆之友(막역지우) : 서로 거역하지 아니하는 친구 4. 金蘭之契(금란지계) : 금이나 난초와 같이 귀하고 향기로움을 풍기는 친구의 사이의    맺음(사귐) 5. 管鮑之交(관포지교) : 관중과 포숙의 사귐과 같은 친구 사이의 허물없는 교재 6.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 대나무말을 타고 놀며 같이 자란 친구 7. 刎頸之交(문경지교) : 대신 목을 내주어도 좋을 정도로 친한 친구의 사귐         1. 桑田碧海(상전벽해) :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됨 2. 天旋地轉(천선지전) : 세상일이 크게 변함 3. 吳越同舟(오월동주) : 서로 원수의 사이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탐    (참고) 吳越同舟는     ①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② 세상 일이 크게 변한다.     ③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서로 돕지 않을 수 없다의     세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1. 得朧望蜀(득롱망촉) : 말타면 경마(말의 고삐) 잡히고 싶다.     농땅을 얻고 또 촉나라를 탐낸다는 뜻으로 인간의 욕심이 무한정함을 나타냄. 2. 磨斧爲針(마부위침)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도끼를 갈면 바늘이 된다"    는 뜻으로  아무리 어렵고 험난한 일도 계속 정진하면 꼭 이룰 수가 있다는 말. 3. 登高自卑(등고자비)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일을 하는 데는 반드시 차례를 밟아야    한다는 말. 4. 狐假虎威(호가호위) : 원님 덕에 나팔 분다. 다른 사람의 권세를 빌어서 위세를 부림. 5. 金枝玉葉(금지옥엽) :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아주 귀한 집안의 소중한 자식. 6. 同族相殘(동족상잔) : 갈치가 갈치 꼬리 문다. 동족끼리 서로 헐뜯고 싸움. 7. 螳螂拒轍(당랑거철) :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사마귀가 수레에 항거한다 "    는 뜻으로  자기 힘을 생각하지 않고 강적 앞에서 분수없이 날뛰는 것을 비유한 말. 8. 烏飛梨落(오비이락)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데 우연히 때가 같음으로 인하여 무슨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의심을 받게 되는 것. 9. 咸興差使(함흥차사) : 강원도 포수.     일을 보러 밖에 나간 사람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 하는 말. 10. 走馬加鞭(주마가편) : 닫는 말에 채찍질 하랬다.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잘되어 가도록 부추기거나 몰아침. 11.走馬看山(주마간산) : 수박 겉 핥기.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수를 본다는 뜻으로     바쁘게 대충 보며 지나감을 일컫는 말. 12.矯角殺牛(교각살우) :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  곧 조그마한 일을 하려다 큰 일을 그르친다는 뜻. 13.牝鷄司晨(빈계사신)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집안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활달하여 아팎 일을 간섭하면 집안 일이 잘 안된다는 말.         1. 風前燈火(풍전등화) :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사물이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음을 비유하는 말. 2. 焦眉之急(초미지급) : 눈썹이 타면 끄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매우 다급한 일을 일컬음. 3. 危機一髮(위기일발) : 위급함이 매우 절박한 순간.(거의 여유가 없는 위급한 순간) 4. 累卵之勢(누란지세) : 새알을 쌓아놓은 듯한 위태로운 형세. 5. 百尺竿頭(백척간두) : 백척 높이의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     몹시 위태롭고 어려운 지경에 빠짐. 6. 如履薄氷(여리박빙) :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다는 뜻으로, 몹시 위험하여 조심함을     이르는 말. 7. 四面楚歌(사면초가) : 사방에서 적군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옴.     사면이 모두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 8. 一觸卽發(일촉즉발) : 조금만 닿아도 곧 폭발할 것 같은 모양. 막 일이 일어날 듯하여     위험한 지경. 9. 進退兩難(진퇴양란) :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고 뒤로 물러나기도 어려움 10. 進退維谷(진퇴유곡) : 앞으로 나아가도 뒤로 물러나도 골짜기만 있음.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빠진 상태 11. 鷄肋(계륵) : '닭갈비'라는 뜻으로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움                 1. 傾國之色(경국지색) : 임금이 혹하여 국정을 게을리함으로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게     할 미인이라는 뜻. 2. 傾城之美(경성지미) : 한 성(城)을 기울어뜨릴 만한 미색(美色). 3. 花容月態(화용월태) : 꽃같은 용모에 달같은 몸매.   4. 丹脣皓齒(단순호치) : 붉은 입술에 흰 이를 가진 여자.           1. 咫尺之地(지척지지) : 매우 가까운 곳. 2. 咫尺之間(지척지간) : 매우 가까운 거리. 3. 指呼之間(지호지간) : 손짓하여 부를만한 가까운 거리. 4.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 피차의 사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에 나온 말임)             1. 先公後私(선공후사) : 공적인 것을 앞세우고 사적인 것은 뒤로 함. 2. 大義滅親(대의멸친) : 대의를 위해서 사사로움을 버림. 3. 見危致命(견위치명) :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버림. 4. 滅私奉公(멸사봉공) :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해 희생함.         1. 首邱初心(수구초심) :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저 살던 굴 쪽으로 향한다는 뜻,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2. 看雲步月(간운보월) : 낮에는 구름을 바라버고 밤에는 달빛 아래 거닌다는 뜻,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1. 韋編三絶(위편삼절) : 옛날에 공자가 주역을 즐겨 열심히 읽은 나머지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책을 정독(精讀)함을 일컬음. 2. 男兒須讀五車書(남아수독오거서) : 당(唐)의 두보(杜甫)가 한 말로 남자라면 다섯    수레 정도의 책은 읽어야 한다는 뜻으로  책을 다독(多讀)할 것을 일컬음. 3 晝耕夜讀(주경야독) :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음. 4. 三餘之功(삼여지공) : 독서하기에 가장 좋은 '겨울, 밤, 음우(陰雨)'를 일컬음. 5. 汗牛充棟(한우충동) : '짐으로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들보에 가득 찬다'는    뜻으로 썩 많은 장서(臧書)를 이르는 말. 6. 博而不精(박이부정) :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아나 정통하지는 못함.     즉, '숲은 보되 나무는 보지 못함' 7. 博而精(박이정) : 여러 방면으로 널리 알 뿐만 아니라 깊게도 앎. 즉, '나무도 보고    숲도 봄'   ※ 참고 : 博而不精은 多讀과 연관된 말이며 博而精은 가장 바람직한 독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1. 背水之陣(배수지진) : "적과 싸울 때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친 진"이란 말로,     한신이 초나라의 군대와 싸울 때 시용한 진법에서 유래하여 목숨을 걸고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2. 乾坤一擲(건곤일척) :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나 승패를 겨룸. 3. 捲土重來(권토중래) : 한 번 실패하였다가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쳐들어옴. 4. 臥薪嘗膽(와신상담) : 원수를 갚으려고 괴롭고 어려운 일을 참으고 겪음.     옛날 오왕 부차가 섶 위에서 잠을 자면서 월왕 구천에게 패한 설움을 설욕하였고,     구천 역시 쓴 쓸개의 맛을 보면서 부차에게 다시 복수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성어.         1. 流言蜚語(유언비어) :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풍설. 떠돌아다니는 말. 2. 道聽途說(도청도설) :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뜬 소문. 3. 街談巷語(가담항어) : 거리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1. 戀慕之情(연모지정) : 사랑하여 그리워하는 정. 2. 相思病(상사병) : 남녀가 서로 몹시 그리워하여 생기는 병. 3. 相思不忘(상사불망) : 서로 그리워하여 잊지 못함. 4. 同病相憐(동병상련) : 같은 병의 환자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동정함.         1. 抱腹絶倒(포복절도) : 배를 끌어안고 넘어질 정도로 몹시 웃음. 2. 弄璋之慶(농장지경) 또는 弄璋之喜(농장지희) : '장(璋)'은 사내 아이의 장난감인    '구슬'이라는 뜻으로,  아들을 낳은 기쁨. 또는 아들을 낳은 일을 이르는 말. 3. 弄瓦之慶(농와지경) 또는 弄瓦之喜(농와지희) : '와(瓦)'는 계집 아이의 장난감인      '실패'라는 뜻으로,     딸을 낳은 기쁨을 이르는 말. 4. 錦上添花(금상첨화) : 비단 위에 꽃을 놓는다는 뜻으로, 좋은 일이 겹침을 비유. 5. 多多益善(다다익선) : 많을수록 더욱 좋음. 6. 拍掌大笑(박장대소) :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           1. 哀而不悲(애이불비) :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함.     김소월 '진달래꽃'의 사상. 2. 哀而不傷(애이불상) : 슬퍼하되 도를 넘지 아니함. 3. 天人共怒(천인공노) : 하늘과 땅이 함께 분노한다는 뜻으로, 같은 무리의 불행을    슬퍼한다. 4. 含憤蓄怨(함분축원) :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음. 5. 悲憤慷慨(비분강개) : 슬프고 분한 느낌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음. 6. 切齒腐心(절치부심) :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 속을 썩임.               1. 雪上加霜(설상가상) :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불행한 일이 거듭하여 겹침을    비유. 2. 七顚八倒(칠전팔도) :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진다는 말로,     실패를 거듭하거나 몹시 고생함을 이르는 말. 3. 鷄卵有骨(계란유골) : 달걀에도 뼈가 있다는 뜻으로,     운수가 나쁜 사람은 좋은 기회를 만나도 역시 일이 잘 안됨을 이르는 말. 4. 前途有望(전도유망) : 앞으로 잘 될 희망이 있음. 장래가 유망함. 5. 風雲兒(풍운아) : 좋은 기회를 타고 활약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 6. 遠禍召福(원화소복) : 재앙을 물리쳐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임.             1. 傍若無人(방약무인) : 곁에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뜻.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함. 2. 眼下無人(안하무인) : 방자하고 교만하여 사람을 모두 얕잡아 보는 것. 3. 回賓作主(회빈작주) : 주장하는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함. 4. 厚顔無恥(후안무치) :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름. 5. 破廉恥漢(파렴치한) : 염치를 모르는 뻔뻔한 사람. 6. 天方地軸(천방지축) : 함부로 날뛰는 모양.           1. 群鷄一鶴(군계일학) : 닭의 무리 가운데서 한 마리의 학이란 뜻.     여럿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사람. 2. 棟梁之材(동량지재) : 한 집안이나 한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훌륭한 인재.   3. 鐵中錚錚(철중쟁쟁) : 평범한 사람 가운데서 특별히 뛰어난 사람. 4. 囊中之錐(낭중지추) :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 5. 泰斗(태두) : 남에게 존경받는 뛰어난 존재. 泰山北斗의 준말. 6. 綺羅星(기라성) :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     즉, 실력자들이 늘어선 것을 비유하는 말.  
328    [스크랩]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정경원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8-10-19
중남미 시와 옥따비오 빠스  정경원         시인의 운명   단어들? 그래, 바람의 단어들, 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렸구나. 나를 단어들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소서, 나를 입술 사이의 바람되게 해주소서, 윤곽없이 헤매는 단 한번의 입김 바람을 잠재운다.   빛 또한 제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Condici`on de nube, 1944)   야수(夜水)   밤이면 떨어대는 두 눈을 가진 말이 있는 밤이, 잠든 들녘에 물의 눈을 가진 밤이, 떠는 말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고, 비밀스런 물의 눈을 가진 네 눈에 있다.   어두운 물의 눈, 연못 물의 눈, 꿈결 물의 눈,   침묵과 고독, 달에 인도되는 어린 두 마리 짐승, 그 눈에서 마시고, 그 물에서 마신다.   네가 눈을 뜨면,  밤은 이끼낀 문들로 열리고, 밤의 복판에서는 물로 비밀스런 왕국이 열린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달콤하고 잔잔한 강의 흐름은 안으로 너를 빠뜨리며 어둡게 한다: 밤은 네 영혼의 해변을 적신다.  (El girasol, 1943-1948)     다리(橋)   지금과 지금 사이에, 지금의 나와 지금의 너 사이에, 다리라는 두 글자.   네가 글자로 들어갈 때, 너는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의 반지되어 세상은 닫힌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언제나 몸은 펼쳐지고, 하나의 무지개된다.   나 그 아치 아래에서 잠을 청하리라.  (Salamandra, 1958-1961)     내 안의 나무   내 이마에 자란 한 그루 나무, 내 안으로 자랐다. 뿌리는 혈관, 신경은 가지, 어수선한 나뭇잎은 사유.   너의 시선은 나무를 불 붙이고 어둠의 열매는  피의 오렌지 불씨의 석류.   동이 튼다 몸둥아리의 밤으로부터. 먼 저 속에서, 나의 이마에서, 나무가 말한다. 가까이 오너라, 들리느냐?  (Arbol adentro, 1976-1988)   Ⅰ. 중남미 시   1. 원주민 문학   정복 이전 아메리카 원주민 문학은 문학사적 발전과 의미가 미미했다. 이렇게 문학이 침체했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언어적 통일과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같은 완벽한 언어 체계를 가진 문자가 없었다.1) 둘째, 상이한 문화가 동일한 지역에서 공존하며 발전했다. 셋째 문자 문학에 대한 구전 문학의 우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다수의 작가들이 무기명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시, 이야기, 희곡 등이 익명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오늘날 알려진 시인으로는 잉까 빠차꾸떽(Inca Pachacutec)과 네싸우알꼬요뜰 데 떽스꼬꼬(Netzahualcoyotl de Texcoco)왕이다. 그러나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도 문학 작품들이 서정시, 서사시, 희곡 등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정시는 노래와 음악이 곁들어졌다. 서사시에서는 한 제국의 창시자를 기리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신화나 전설이 소개되었으며2) 희곡은 신에게 바치는 제식 행사에서 유래되었다. 대표적인 희곡 작품으로는 마야-끼체어로 된 『라비날-아치』Rabinal-Achi)와 께추아어로 된 『오얀따이』(Ollantay)가 있다.    1) 서정시 신비한 사상은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었다. 은유와 상징을 통해 상류층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 신비의 시대, 종교의 시대, 정복 이전 역사의 시대 등의 개념이 혼재되어 우주에 대한 개념이 설명되었다. 멕시코에서 고고학적으로 3천 년 전부터 인류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당시의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무력했으며 신비한 힘에 사로잡힌 채 소규모의 농경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축복을 기원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는데 이 때 사용한 언어는 제식의 성격이 농후하며 즉흥적이고 계시적이었다.  후에 이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는 비장한 나우아틀어로 씌어진 시의 형태로 정복자의 손에 의해 원주민의 문화가 말살되는 현장의 산 증거가 된다.     (1)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서정시 나우아뜰어로 ‘시’를 ‘꾸이까뜰’(Cuicatl)이라고 한다. 또 그림으로 표현될 때는 꽃으로 장식된 소용돌이 무늬가 되며 ‘꽃이 만발한 단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인은 ‘꾸이까삑끼’(Cuicapicqui)로서 ‘꽃이 만발한 단어들’을 노래하거나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떽스꼬꼬(Texcoco)와 떼노치띠뜰란(Tenochtitlan)의 예배장에서는 춤과 노래의 집들(Casas de Danza y Canto)이 있어 가수, 무용수, 음악가들이 황실의 후견 아래 그 곳에 거주했다. 아스떼까인들의 서정시는 ‘꽃들의 노래’(Xochicnicatl), ‘슬픔의 노래’(Ecnocuicatl), ‘사색의 노래’ 등 세 가지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그 중 ‘사색의 노래’ 시는 짤막해서 일본의 하이꾸와 대단히 유사하다. 주로 다루어지는 시의 주제로는 이별, 인생무상 등이다. 『멕시코의 노래』(Cantares mexicanos) 중의 시 한 수를 보기로 하자.   우리는 두 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진대 치치메까 왕자들이여 즐기세! 우리의 꽃들을 무덤으로 가지고 갈 셈인가? 단지 우리는 꽃들을 빌렸을 뿐이다.3)   (2)안데스 지역의 서정시 이 지역에서는 주로 현인들과 대중 시인들에 의해서 지어졌다. 시의 각 행은 3음절에서 8음절 내로 다양하며 수확과 축제를 주로 노래했다. 가끔 시인과 합창단 사이에 대화가 시 중에 등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아이모라이’(aymoray)는 농부들의 축제를 다룬 시이고, ‘아이예’(haylle)는 시골과 영웅심이 주된 주제이고 ‘아라위스’(harawis) 또는 ‘하라비’(jaravi)는 감정적인 주제로 슬픔을 그렸으며 ‘우르삐’(urpi)와 ‘와이노’(waino)는 다음의 시 같이 따뜻한 사랑 노래를 담고 있다.    네가 입고 있는 꽃 뜨개질된 외투 황금실로  꿰매어져 있고 섬세한 장식은  나의 순진함에 연결되어 있네.4)   (3)아마존 지역의 서정시 아메리카인들의 또 다른 시 언어의 보고는 아마존 셀바 지역과 큰 강들이 있는 지역이다. 구아라니인들과 뚜삐족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우주의 기원, 교육, 예식, 가정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음브야(mbya)족의 자장가 속에 나타난 순박함이 다음 시에 엿보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리냐 아들아; 자거라 어서 오너라 잘자라 아가야, 아빠가 네 애완동물로 점박이 사슴 한 마리와  네 목걸이로 토끼 귀 하나와 네 장난감으로 점박이가 있는  가시나무 열매를 가지고 오신단다.5) 2. 정복 시기의 문학   끄리스또발 꼴론(콜럼부스)의 항해 일기로부터 정복 시기의 문학이 시작된다. 그의 일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과 인간이 처음 소개된다. 다시말해서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연대기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연대기 작가들은 유럽의 독자들을 신세계의 경이로운 자연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놀라게 했다. 이 연대기에서 우화와 먼 옛날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연대기 작가들이 현실과 환상을 혼재하여 묘사하였기 때문에 15세기에 역사적 사실과 허구 문학 사이 또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벽이 없었다. 그래서 신화적 인물들인 아마존 전사, 식인종, 거인족들이 거주하던 지명이 실제 지도에 나타나곤 했다. 꼴론은 그의 일기에서 인어를 보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베르날 디아스 델 까스띠요는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를 기사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의 세계와 비유하기도 했다. 원래 아메리카 대륙으로 온 정복자들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금, 영광, 복음이 그것이다. 이렇게해서 정복 시기의 문학은 연대기 작가들의 글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럽 문화의 이식, 인디오 문화의 말살, 두 문화의 혼합으로 특징지워지는 식민지 시대의 출현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앞에서 언급한 현실과 환상 그리고 역사와 상상의 융합은 많은 역사가들과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흥미심을 야기시켰다. 20세기 중남미 문학에 나타나는 ‘환상적 현실’은 바로 연대기 문학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다. 이 연대기 문학과 20세기 중남미 문학에도 기사 문학의 그림자가 깃들여 있음을 알 수있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베르날 디아스같은 평범한 군인 또는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같은 교육받은 성직자 그리고 곤살로 훼르난데스 데 오비에도와 같이 르네상스 문학에 조예가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Bernardino de Sahagun)은 『누에바 에스빠냐 일반사』(Historia general de las cosas de la Nueva Espana)에서 인디오들의 습관과 문화를 최초로 소개했다. 또 아메리카에서 태어나 그들 자신의 연대기를 작성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황실주해』(Comentarios reales)를 남긴 꾸스꼬 왕가의 자손인 잉까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Inca Garsilaso de la Vega)이다. 일반적으로 연대기는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일반 연대기, 둘째, 한 통치 기간의 연대기, 셋째, 특별한 일의 연대기 등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관한 연대기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 끄리스또발 꼴론이 항해 내용을 그의 후견인인 왕에게 보낸 편지와 같이 많은 연대기 작가들의 연대기들이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자 공명심 많은 독자들은 정복에 관한 사실을 인지하며 나름대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더우기나 현실과 상상이 교묘하게 섞인 채로 언급되어 있는 연대기 정보를 근거로 당시 스페인에 반기를 들고 있던 유럽의 궁정들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들로 인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가톨릭교 복음 전파라는 명분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을 옹호하는 이론과 인디오의 권리를 찬탈하려는 목적으로 정복을 자행하는 스페인의 무력을 비난하는 이론간의 논쟁이 비롯되었다. 휄리페 2세는 왕실의 권위 유지를 위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에 관한 글을 집대성해서 『인디아스 대연대기』(Cr -onica Mayor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1571년에는 스페인 수석 연대기 작성자로 지리학자 로뻬스 데 벨라스꼬(Lopez de Velasco)가 임명되어 『인디아스 전도』(Geografia Universal de las Indias)를 작성했다. 같은 해에 뻬루의 부왕인 후란시스꼬 똘레도는 연대기 작가 뻬드로 사르미엔또 데 감보아(Pedro Sarmiento de Gamboa)에게 잉까의 공식적인 역사를 저술하는 임부를 부여했다. 또 후란시스꼬 쎄르반떼스 살라사르(Francisco Cervantes de Salazar)도 멕시코에서 누에바 에스빠냐의 연대기 재편집자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연대기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대조적인 시각이 있었다. 다시말해 인디오 문화와 유럽 문화의 관점에서 정복을 기술할 때 서로의 관점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유럽 대륙의 연대기 작가들은 르네상스시대의 정신이 번영과 과학의 발전을 가져올 것임을 암시하며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반면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은 불길한 역사의 흐름을 예견하는 등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주었다.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인간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의미가 있었으며 반면에 인디오 연대기 작가들에게 아메리카대륙의 발견은 파국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3. 식민지시대 문학   15세기와 16세기 동안에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이 참여했던 정복 사업의 업적을 소개하거나 그들이 본 신세계를 묘사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정복과 식민지 과정에 근거했다. 17세기부터 이러한 문학의 성격은 부왕 제도로 사회의 안정이 도모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는 16세기 말 경부터 초기 스페인 정복자들의 후예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미 인디오의 피를 받은 혼혈인이었다. 경제적 번영, 사치스러운 도시 귀족의 출현, 대학과 수도원의 소수 지식인층 등은 아메리카 대륙에 머지 않아 훌륭한 문인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끄리오요(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백인)작가들은 스페인적 요소와 인디오적 요소를 혼합한 아메리카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 문학으로 유럽의 문학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문필 활동을 했다.  한 예로 후안 데 에스삐노사 메드라노(Juan de Espinosa Medrano, 1640-1688)는 인디오의 후예로 뻬루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나 공부를 시작해 후에 꾸스꼬 대학에 입학했다. 스페인어와 께추아어를 구사했던 그는 연설가, 신학교수, 극작가, 수필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1) 식민지 시대 초기 문학(16, 17세기) 정복시기에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연대기의 역사적 형식에서 궁중 교육을 반영하는 바로끄 형식의 문학으로 바뀐다. 둘째, 유럽 문화, 스콜라 철학, 과학 지식을 습득한 끄리오요 작가들이 유럽의 작가들과 견줄만한 작품 활동을 한다. 셋째, 인디오 언어들과 스페인어의 혼용 과정에서 새로운 아메리카 정신이 형성된다. 이 시기에 문화적 발전은 스페인 문학의 형식과 문체의 이식에서 기인한다. 많은 작가들이 스페인의 문학을 모델로 삼고 기존의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문체의 문학 작품을 생산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 활동이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럽보다 아메리카의 문학은 항상 시기적으로 뒤졌다.    (1)서정시 아메리카 시는 서정적인 요소와 서사적인 요소를 같이 담고 있다. 알론소 데 에르시야(Alonso de Ercilla)의 『라 아라우까나』(La Araucana)의 뒤를 이어 종교시를 남긴 레오노르 데 오반도(Leonor de Ovando)와 멕시코의 서정시인 후란시스꼬 데 떼라사스(Francisco de Terrazas)가 등장한다. 후란시스꼬는 16세기 중남미 최고 시인으로 사랑의 감정이 배어 있는 그의 시는 구띠에레 데 쎄띠나(Gutierre de Cetina)와 가르실라소(Garcilaso)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소네트는 지방색보다는 섬세하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이태리식 표현을 선호했다. 쎄르반떼스는 그의 작품 『라 갈라떼아』(La Galatea)에서 후란시스꼬를 ‘새로운 아폴로’(nuevo Apolo)라고 격찬했다.   (2)풍자시 이 당시 아메리카 문학을 특징짓는 문학 양식 중의 하나로 풍자시를 꼽을 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과 끄리오요들을 비방하는 시들이 발표되었지만 이 중에는 익명으로 발표된 시도 있었다. 세비야 출신인 마떼오 로사스 데 오껜도(Mateo Rosas de Oquendo)는 리마에 거주하면서 『1598년 뻬루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풍자』(Satira a las cosas que pasan en el Peru, ano de 1598)를 남겼다.   (3)연대기 현실이 환상과 교차하며 운율을 수반하며 시적으로 전개된다. 1589년 후안 데 까스떼야노스(Juan de Csatellanos)의 기념비적 작품인 「인디아스의 저명한 남성들에 대한 애가」(Elegias de varones ilustres de Indias)가 발표된다.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인 마르띤 델 바르꼬 쎈떼네라(Martin del Barco Centenera)는 1602년 그의 연대기시 『라 아르헨띠나』(La Argentina)를 세상에 내놓는다.   2) 바로끄 시대(17, 18세기)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성숙된 창작력은 예술 가치의 기본적인 잣대가 되었다. 이러한 면이 새로운 문학 양식 또는 불후의 아메리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래 ‘바로꼬’라는 단어는 라틴어 ‘verruca’라는 단어에서 기인된 말로 그 의미는 비정상적인 진주를 뜻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처음 이 용어가 쓰인 예는 르네상스 후기의 장식이 많은 건축 양식을 지칭한 것이다. 바로끄 문학은 열려진 형식의 문학이다. 한 편의 시에 있어서 바로끄 시대와 같이 한 개의 중심축이 해체가 되어 여러 개의 하위 중심축들이 조화를 이룬다.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끄루스(Sor Juana Ines de la Cruz)의 「첫 꿈」(Primero sueno)이 대표적인 예로서 시의 형식적인 면에서 역동적인 요소가 두드러져 주제가 복잡하며 복합적 의미를 추구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요소는 문체, 반어, 대조, 과장 그리고 은유와 같은 수사법의 빈도 높은 사용을 통해 알 수 있다.   (1)서사시 스페인에서의 서사시는 휄리뻬 2세때 전성기를 맞았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하게 발전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베르나르도 데 발부에나(Bernardo de Balbuena)의 『까르삐오의 베르나르도 혹은 론세스바예스의 승리』(El Beernardo del Carpio o la Victoria de Roncesvalles)같은 작품이 나타났다. 또 다른 서사시의 양식은 종교적 서사시이다. 디에고 데 오헤다(Diego de Hojeda, 1571-1615)는 리마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바로끄 시 「라 끄리스띠아다」(La Cristiada)를 발표한다.    (2)서정시 또는 신비주의 과식주의 또는 공고리즘은 하나의 형식으로 굳어졌으며 세속적인 사랑을 성스러운 사랑으로 대치시켰다. 소르 후란시스까 호세파 델 까스띠요 이 게바라(sor Francisca Josefa del Castillo y Guevara)는 ‘라 마드레 까스띠요’(la Madre Castillo)로 더 잘 알려졌는데 작품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추구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신비적인 싯귀를 『영적인 호감 또는 감정』(Afectos o sentimientos espirituales)에서 선보였다. 또한 그녀의 산문은 소르 후아나 이네스와 함께 바로끄 문학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서의 자리를 확실하게 했다.   (3) 풍자시 식민지 시대의 풍자시는 께베도의 영향을 받아 서민적인 영감으로 종전보다 과격하고 공격적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후안 델 바예 까비에데스(Juan del valle Caviedes, 1652-1697)의 『빠르나소의 이』(Diente del Parnaso)가 있다.   4. 독립 시대 문학   중남미 문학에서 1800년에서 1830년까지는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문예사조는 유럽의 불란서와 서반아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신고전주의 문학적 특징은 바로끄 시대와는 달리 균형을 이룬 이성, 과거의 전통과 보편성 추구, 예술의 제 원칙 준수, 예술을 도덕적 측면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주의 문학 작품은 위에 언급된 일반적인 특징 외에도 다음과 같은 독특한 면들이 있었다. 첫째, 독립을 위해 문학을 정치적인 도구로도 사용했다. 둘째, 끄리오요 출신 작가들이 고전적 규칙을 고려하기 이전에 아메리카 사회를 반영하는데 더 충실했다. 셋째,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가치를 재고했다. 넷째,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을 인간이 개발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1) 신고전주의 시 바로끄주의에 반발하면서 나타난 개념으로 국가를 찬양하는 서정시와 혁명을 고취하는 경향이 짙다. 일반적인 분위기는 서정적인 면 보다는 국가를 찬미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목가시 호세 마누엘 마르띠네스 데 나바레떼(Joe Manuel Martinez de Navarrete, 1768-1809)수사의 『시적 유희』(Entretenimientos po-eticos)와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Juan Bautista Aguirre)의 연가에서 볼 수 있듯이 친밀한 시적 감흥을 노래했다. 예수회 신부인 후안 바우띠스따 아기레는 바로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과도기적 인물로 『이그나시오 성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영웅시』(Poema heroico sore las acciones y vida de San Ignacio)를 남겼다. 1937년에는 뒤늦게 『서반아 운문, 청춘기 작품들, 잡기들』(Versos castellanos, obras juveniles, miscelaneas)라는 이름으로 그의 서정시들이 출판되었다. 그의 서정시는 불란서의 영향을 받아 바로끄의 흔적이 없으며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과식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간집에 있는 『구야야낄과 끼또시에 대한 간단한 도안』(Breve diseno de las ciudades de Guayaquil y Quito)이라는 시에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2)영웅시 또는 애국시 대부분의 영웅시와 애국시들이 서반아 시인들인 마누엘 호세 데 낀따나(Manuel Jose de Quintana), 후안 니까시오 가예고스(Juan Nicasio Gallegos), 알바레스 씨엔후에고스(Alvarez Cienfuegos) 그리고 훼르난도 데 에레라(Fernando de Herrera)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영웅시와 애국시는 독립심을 고취시켰고 장엄하고 서사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애국가도 그 한 형태였다.   (3)아메리카 자연을 노래한 시 이 분야의 시에서는 단연 안드레스 베요(Andres Bello)의 『실바스 아메리카스』(Silvas Americanas)가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지엽적인 주제를 지양한 채 교육적인 의도를 가지고 아메리카의 자연을 묘사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시인들로는 마누엘 호세 데 라바르덴(Manuel Jos de Lavarden), 마누엘 데 세께이라 이 아랑고(Manuel de Zequeira y Arango),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Jose Maria de Heredia) 등이다. 구아테말라 출신의 라파엘 란디바르(Rafael Landivar) 신부는 『루스띠까띠오 메히까나』(Rusticatio Mexicana)에서 자기 고향의 땅을 노래했다.    (4)대중시(poesia plpular) 가우쵸 시(la poes`ia gauchesca)의 형식은 리오 데 라 쁠라따(Rio de la Plata)지역에서 바르똘로메 이달고(Bartolome Hidalgo)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화의 형태로 인위적으로 창작된 동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정치 현실과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한다. 우화 작가로는 호세 누뇨스 까세레스(Jose Nunez Caceres), 도밍고 데 아스꾸에나가(Domingo de Azcuenaga), 마띠아스 데 꼬르도바 수사(fray Matias de Cordoba), 라파엘 가르시아 고예나(Rafael Garcia Goyena) 등이 있다.   5. 낭만주의 문학   중남미의 낭만주의 문학은 대략 1830년에서 1860년까지를 포함한다. 이 기간은 사회적 불안, 내란, 전제주의로 특징지워진다. 또한 지역의 족장들이 국가 권력의 공백을 대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힘있는 자들이 출현해 정적들과 역경을 이겨내며 통치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Juan Manuel de Rosas)는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며 1829년에서 1852년까지 아르헨띠나를 통치했다. 에꾸아도르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ia Moreno)가 1854년에서 1861년까지 신정 정치를 유지했다. 베네스엘라에서는 안또니오 구스만 블랑꼬(Antonio Guzman Blanco)가 1870에서 1887년까지 독재 정치를 자행했으며 빠라구와이에서는 후란시아(el doctor Francia)가 1840년 사망할 때까지 권력을 잡았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군주제로 복귀하는 현상이 있었다. 이뚜르비데(Iturbide)와 합스부르가의 막시밀리아노의 군주제가 있었으나 막시밀리아노는 1876년 베니또 후아레스(Benito Juarez)에 의해 제거되었다. 폭력으로 대변되는 내란의 시대가 지나고 정치적인 안정의 시대가 도래해 국가권력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낭만주의 특징으로는 자기 중심적, 이국적 요소, 독창성, 개인주의, 상상력,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것 등이 있다.    1)시  낭만주의자를 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거의 절대적이다. 인간의 가장 고양된 정신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슬픈 심적 상태를 표현할 욕구를 느낄 때에는 고통을 토로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랜다. 따라서 주정적인 한 편의 시가 사회에 주는 영향은 점점 커진다. 주요 작품으로는 에스떼반 에체베리아(Esteban Echeverri -a)의 『포로』(La Cautiva), 『도살장』(El matadero), 호세 안또니오 마이띤(Jos Antonio Maitin)의 『시집』,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띤(Juan Zorrilla de San Martin)의 『따바레』(Tabare), 가우쵸 문학6)으로 호세 에르난데스(Jos Hernandez)의 『마르띤 휘에로』(Martin Fierro)가 있다.   6. 사실주의, 자연주의 문학   중남미대륙의 19세기는 역사적 정치적으로 3시기로 나누어 진다. 첫째 독립기(100-1830), 둘째, 지방 호족의 시대 또는 무정부 시대(1830-1860), 셋째, 국가 확립기(1860-1890) 등이다. 첫째 시기가 신고전주의 시대에 해당되었고 낭만주의가 둘째 시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셋째 시기에 각각 해당된다. 낭만주의는 국가적 특징을 추구하였고 후에 국민의 생활상과 습관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시기가 바로 초기 산업주의의 개혁과 이민의 물결이 있었던 때이다. 또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과도기에 후기 낭만주의 작품이 나타난다. 소리야 산 마르띤의 『따바레』가 그 한 예이다. 이렇게 신대륙에서는 새로운 문학 조류가 뒤 늦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문학 사조가 유행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사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의 결여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시대에는 소설이 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결과 상대적으로 시가 매우 위축되었다.   7. 모더니즘   모더니즘 문체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상징주의(simbolismo)와 고답주의(parnasianismo)에서 영향을 받은 혁신과 새로운 언어의 추구이었다. 원래 고답주의는 사회적 측면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면서 언어적 측면에서는 형식의 잔잔함을 옹호하였다. 그리스 고전 신화에서 작품의 주제를 삼아 시를 통해 정적이고 대리석같은 미를 표현하였다. 불란서의 T. 고띠에르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한편 상징주의는 불란서에서 1870년에서 1880년까지 고답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문예 운동이다. 음악적으로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순수한 언어를 찾는다. 언어는 더이상 이성의 언어가 아니고 상징으로 짜여진 환상의 언어이다. 한 담론의 논리적 구문적 연결은 서정적 음악적 연결로 대치된다. 운율, 리듬, 유성 현상, 첩운법 등이 상징주의자들의 시에서는 관능적인 이메지의 부각을 위해 무시된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폴 발레리 등이 문학에서 음악성을 추구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모더니즘 문체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면은 루벤 다리오가 언급했듯이 시에다 ‘언어의 조화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율감이 있는 세련된 시어들을 사용하여 시의 형식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베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고답주의에서 회화적인 면으로 중요시 되었던 시어들과 상징주의자들 사이에서 음악적으로 가치를 부여 받았던 시어들이 모더니즘의 시인들과 산문가들에 의해 새로운 운율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단순한 언어적 표현과 귀족적인 시각에서 요구되어온 교훈적 내용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의 구사를 지향했다. 모더니즘 시인들은 상아탑의 주인임을 자각한다. 그 상아탑은 일상적인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루벤 다리오(Ruben Dario)는 ‘나의 시에서 공주, 왕, 황실의 일, 먼 나라와 상상적인 나라들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삶과 내가 태어난 시간을 나는 혐오한다…’라고 말했다. 속세에서 격리된 시인의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예술이외의 다른 목적에는 무관심한 예술, 다시 말해서 소수를 위한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모더니즘 초창기에 등장한 무관심의 예술, 이름지어 ‘세련주의예술’(preciosista)은 사실주의와 실증적 물질주의에 반발하여 나타난 예술 운동이다. 세게적인 예술가의 의지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는 길목을 준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 운동도 그들에게 남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답주의의 변화없는 형식과 상징주의자들이 추구한 시에 내재하는 음악성을 그들 나름대로 수용해서 모더니즘을 완성시켰다. 이밖에도 예술가를 일반인과 차별하여 예술가의 낭만적인 정신을 고양하여 고독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의 탑이여! 시인이여! 하늘의 피뢰침이여! (루벤 다리오)   모더니즘주의자들은 사실주의를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아름다움의 순수한 형태를 형상화할 수 있는 먼 도시, 신화, 상징, 이국적인 이름 등을 찾아나섰다. ‘모데르노(moderno)’라는 용어도 불란서의 상징주의에서 택했고 복잡하고 모순적인 하나의 광범위한 지적, 예술적 운동을 이루었다. 중남미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문학운동을 넘어 19세기와 20세기의 과도기로서의 ‘한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이 매우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1) 시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은 독립국가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들 사이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 문학도 월터 휘트만과 에드가 알렌 포우의 시와 함께 더 이상 영국 문학의 아류가 아님을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제국들의 작가들도 모더니즘의 첫 세대들로서 불란서의 고답주의와 상징주의를 소화해내며 중남미 문학이 스페인 문학의 음지가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벤 다리오의 『푸름』(Azul)으로부터 이러한 문학적 독립은 중남미 대륙에서 커다란 물결을 이루며 진행되었다.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호세 아순시온 실바(Jose Asuncion Silva)의 『야곡 III』(Nocturno III), 호세 마르띠(Jos -e Marti)의 『이스마엘리요』(Ismaelillo), 『자유시』(Versos libres), 『유배지의 꽃들』『Flores del destierro), 『황금시기의 시』(Versos de la edad de oro), 마누엘 구띠에레스 나헤라(Manuel Gutierrez Najera)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La serenata de Schubert), 『그 때를 위하여』(Para entonces), 『공작부인 욥』『La duquesa Job), 루벤 다리오(Ruben Dario)의 『푸름』(Azul), 『불경스런 산문들』(Prosas profanas), 『삶과 희망의 노래들』(Cantos de vida y esperanza), 아마도 네루보(Amado Nervo)의 『흑진주』(Perlas negras), 『작은 목소리로』(En voz baja), 『고즈넉함』(Serenidad),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Julio Herrera y Reissig)의 『시간의 빠스꾸아』(Las pascuas del tiempo), 『밤의 근행』(Los maitines de la noche), 레오뽈도 루곤네스(Leopoldo Lugones)의 『황금산』(Las montanas del oro),『가축과 과일 예찬』(Oda a los ganados y las mieses), 『마른 강의 로만세』(Romances del Rio Seco) 등이 있다.   8. 현대시   중남미 현대시는 20세기 예술이 경험했던 모든 혁신적인 면들이 그대로 반영했다. 모더니즘의 정신을 최초로 그려낸 루벤 다리오를 선두로 전위시를 선 보인 바예호(Vallejo), 네루다(Neruda), 우이도브로(Huidobro), 보르헤스(Borges), 히론도(Girondo) 등의 낯설지 않은 시인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새로운 감수성’을 소개한 위에 언급된 시인들의 노력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안목이 젊은 세대의 시인들 사이에 심어졌다. 시기적으로 볼 때 중남미 시의 발전 단계는 후기 모더니즘(Posmodernismo), 전위주의(Vanguardismo), 후기 전위주의(Posvanguardismo)로 나뉘어진다.     1) 후기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과 전위주의 사이의 세대를 일컫는다. 구체적인 시기는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해당된다. 후기모더니즘의 문체적 특징은 간결함이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인 표현형식과 내용을 순화하는 것이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발도메로 훼르난데스 모레노(Baldomero Fernandez Moren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이며, 의사이면서 시인이었다. 두 직업 사이에서 시를 선택하기까지의 고뇌를 노래한 『한 의사의 삶과 사라짐』을 1957년에 발표한 데 이어 『꽃 한송이 없는 70개의 발코니』를 선보인다. 몬떼비데오 태생인 델미라 아구스띠니(Delmira Agustini)는 『흰 책』(El libro blanco, 1907), 『아침의 노래』(Cantos de la manana, 1910), 『빈 성잔들』(Los calices vacios, 1903) 등이 있다. 『아침의 노래』의 시집은 인간 내면의 세계, 꿈의 비젼, 힘의 원동력으로서의 삶, 감정을 담은 어둠의 세계를 주제 면에서 다루고 있다. 라몬 로뻬스 벨라르데(Ramon Lopez Velarde)는 멕시코풍의 시를 남긴 시인으로 중남미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심오한 시적 형상으로 옮기는 빼어난 면이 돋보였다.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현란한 장식을 피하면서 구어체 표현법을 견지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숭고한 피』(La sangre devota, 1919), 『비탄』(Zosobra) 등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남긴 예술가의 십계명을 보기로 하자. 첫째, 우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으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리울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 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리움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포도주이다. 네가 남자나 여자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이상 예술가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황폐』(Desolacion)가 있는데 이 시집은 「예술가의 십계명」을 비롯해 불후의 명작인 「시골 선생님」(La maestra rural), 「바램」(El ruego) 「죽음의 소네트」(Sonetos de la muerte) 등의 시를 담고 있다.   2) 전위주의(El vanguardismo) 일 이차 세계대전(1914-1918, 1939-1945)기간 동안의 전 세계적 위기상황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혁신적인 예술 경향을 일컫는 용어가 바로 전위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며 회화, 음악, 문학 분야에서 다양한 예술 운동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표현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전위주의는 시기적으로 1920년과 1940년 사이에 유행한 예술 운동으로 공통적인 미적 특징은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포기,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의 옹호 등이다. 중남미에서 일어난 전위주의 시 운동으로는 칠레에서 비센떼 우이도브로(Vicente Huidobro)의 창조주의(Creacionismo),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과격주의(Ultraismo), 뿌에르또 리꼬에서 루이스 요렌스 또레스(Luis Llorens Torres)의 빤깔리스모(Pancalismo), 도미니까에서 도밍고 모레노 히메네스(Domingo Moreno Jimenez)의 뽀스뚜미스모(Postumismo), 꼴롬비아의 레온 데 그레이프(Leon de Greiff)가 주도한 ‘로스 누에보스’(Los Nuevos)그룹, 꾸바에서 마리아노 브불(Mariano Brull)의 순수시, 뻬루에서 알베르또 이달고(Alberto Hidalgo)의 단순주의(Simplismo), 멕시코에서 마누엘 마쁠레스 아르쎄(Manuel Maples Arce)의 에스뜨리덴띠스모(Estridentismo) 등이 있다.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비센떼 우이도브로는 1931년 『알따소르』(Altazor)를 발표한다. 그의 창조주의는 형식의 자유로운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의 일관성을 무시한 면에서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 순수한 은유로써 경이롭고 환상적인 그의 시세계를 창조했다.   내가 한 개의 명멸하는 별 또는 반딧불이라면. 가슴엔 나비들이 머물고 상승하는 노래를 타고 한 줄기의 빛은 사막을 식민지로 삼고 이 눈빛 종달새는 나로부터 사라져만 간다.7)   뻬루의 세사르 바예호(Cesar Vallejo)는 젊은 시절에 혁명적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시적 안목을 다졌다. 1918년에 『검은 전령들』(Los heraldos negros)을 발표하고 뒤이어 1922년 『뜨릴세』(Trilce)를 발표했다. 『뜨릴세』는 표현법, 그림, 심상, 구어체 언어, 연금술적 언어기법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고어, 교양어, 속어, 기교, 토착어 등을 사용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언어의 기교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조각내어 조망함으로써 각 시행마다 끊임없이 사상이 파편화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나 지금에야 점심을 먹었고 가진 게 없네 어머니, 소원, 음식을 권하는 말, 물, 혼혈인이 달변으로 봉헌기도할 때,  심상의 늦음과 소리의 커다란 이음매 단추들에 관해 질문하실 아버지조차도 없네8)   빠블로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20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 1924), 『땅에서의 거주』(Residencia en la tierra), 『총 가요집』(Canto general), 유고집인 『내가 살았음을 고백한다』(Confieso que he vivido)가 있다. 『땅에서의 거주』는 초현실주의 영향을 받은 시집으로 이성을 배제하고 소위 ‘자동기술법’을 도입했다. 세계를 해체해서 보는 시각을 견지했으며 외부적인 현실을 답습하는 전통적인 규범을 파괴했다. 자유시는 연금술의 언어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비교법, 심상, 수사법, 그림자와 공간 사이에 위치한 ‘하나의 심장’의 시각에서 사물을 투영하는 몽상적인 상징법은 이해될 만하다. 20세기 예술의 새로운 경향은 원초적인 문화의 재평가이었다. 유럽의 예술가들은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아폴리네르는 그들의 시를 ‘검은 시’(poesia negra)라 명명했다. 중남미에서 검은시는 스페인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결합되어 독특한 형태의 시를 낳았다. 1930년경 꾸바, 뿌에르또 리꼬, 도미니까는 흑인들의 검은 혼을 그들의 리듬, 춤, 음악, 역사, 미신을 통해 표출하는 중심 무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검은시가 출현하였다. 대표적인 시인과 작품으로는 루이스 빨레스 마또스(Luis Pales Matos)의 『검은 춤』(La danza negra), 꾸바의 민속적인 요소들을 시에 담은 니꼴라스 기옌(Nicolas Guillen)의 『군인들을 위한 노래와 관광객을 위한 소리』(Cantos para soldados y sones para turistas, 1937), 『송고로 꼬송고와 다른 시들』(Songoro cosongo y otros poemas, 1942), 『전체의 소리』(El son entero, 1947), 흑인적인 요소와 정치적요소 그리고 사회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대중의 몸짓으로 날으는 비enf기』(La paloma de vuelo popular, 1958)가 있다.    3) 후기전위주의(El posvanguardismo)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시는 전위주의 추구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구어체와 일상적인 언어를 선호하지만 단지 사실묘사나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서사적 담론의 형태로 현실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증언한다. 중남미 후기전위주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시의 구조가 열려져 있다. 한 편의 시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독자들이 자기나름대로 시를 해석할 수 있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열려진 시를 ‘움직이는 시’라고 했다. 둘째, 시어가 이미지와 은유법의 사용이 아니라 다양한 글자의 혼합인 ‘꼴라쥬’ 라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셋째, 주제의 선택은 현실에서부터 시작한다. 후기전위주의자의 주요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는 오늘날 중남미의 시와 비평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간의 뿌리』(Raiz del hombre, 1937), 『단어속에 자유』(Libertad bajo palabra, 1949), 산문으로는 『고독속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 1950), 『활과 칠현금』(El arco y la lira) 등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있다. 니까노르 빠라(Nicanor Parra)는 칠레에서 ‘반시’(antipoesia)를 주창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는 현실을 증언하는 시각과 초현실주의의 시각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태동되기 시작해 신중한 산문시가 되거나 놀람과 유머가 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와 반시』(Poemas y antipoemas, 1954), 『러시아의 노래들』(Canciones rusas, 1967)이 있다.  문학아카데미에서  
327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 댓글:  조회:841  추천:0  2018-10-19
 flower/ing | 혜령  http://iamflowering.blog.me/220300492890 / 잡초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 우리가 식물, 짐승, 별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 중에서 잡초가 가장 만족스런 삶을 영위해 간다. 그렇다, 잡초는 백합도 전함도 산상수훈도 낳지 않는다. (...) 결국 잡초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 잡초는 일구지 않은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 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 백합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먹을거리이고,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다. (...) 이것이 교훈이다." _헨리 밀러, Hamlet, New York : Carrefour, 1939, 105-106쪽 / 비트족, 언더그라운드, 지하의 것들, 밴드와 갱들, 바깥과 직접 연결접속되어 있는 측면의 잇다나 돌출들. 미국이 아무리 나무를 추구하려 해도 미국 책과 유럽 책은 다르다. "풀잎." (...) 나무 형태의 추구와 구세계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곳은 동부이다. 하지만 서부는 리좀적이다. 거기에는 선조 없는 인디언들, 끊임없이 달아나는 한계, 이동하고 교차되는 경계선이 있는 것이다. 서부에는 미국식 "지도"가 있는데, 거기서는 나무조차 리좀을 형성한다. 미국은 방위를 뒤집었다. 마치 지구가 바로 미국에서 둥글어졌다는 듯이. (...) 미국의 서부는 동부의 가장자리이다. 미국의 여가수 패티 스미스는 미국인 치과의사의 바이블을 노래한다. 뿌리를 찾지 마세요, 수로를 따라가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_자본주의와 분열증2, 43-44쪽 / 프랑스 왕들은 백합을 선호했다. 백합은 비탈에 매달려 있을 만큼 깊은 뿌리를 가진 식물이기 때문이다.  / 어떤 것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비정확한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히 그것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근사치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비정확함은 결코 하나의 근사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어나는 일이 지나가는 정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 낼 방법이 필요하다. 솜씨 좋은 인쇄술도, 합성어나 신조어 같은 기민한 어휘 구사도, 대담한 문장 성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사실 이것들은 대개 이미지-책을 생산하려는 속임수, 다른 차원 속에 담겨 유지되고 있는 통일성을 산종하거나 해체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임수일 뿐이다. 테크노나르시즘. 창조적 인쇄술, 어휘, 구문이 제 값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이 숨어 있는 통일성의 표현의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체의 한 차원이 되는 때뿐이다. 이런 식으로 성공한 사례는 드물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합한 방식을 알지 못했다. /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장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는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목론이 빠져있다. / 안드르제예브스키의 책 은 마침표없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_p.53-54 n에서, n-1을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꺽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 행운선, 허리선, 도주선.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짧은 관념을 가져라!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독일 낭만주의 운동)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문학은, 그리고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p.920 이미 오래 전에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 바다를 향해 떠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여행을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도시 한가운데서도 낯선 여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리에서의 여행도 있다고.  [출처] [공유] 들뢰즈 천 개의 고원 _리좀, 매끄러운 공간|작성자 옥토끼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은 와 의 후속작에 해당한다. 이 책은 총 1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장’이 아니라 날짜가 붙어 있는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결론을 제외한 나머지 고원은 순서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 번째 고원, ‘리좀’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뿌리, 수염뿌리, 리좀 - 책의 문제 - 와 - 나무와 리좀 - 지리적 방향들, 동양, 서양, 미국 - 나무의 폐해 - 고원이란 무엇인가?”     * 신승철 샘의 멘션   - 천 개의 고원은 가타리의 저작 중 가장 읽기 쉬운 책입니다. (여기저기서 비명 섞인 탄식이 터져나왔다.)   - 들뢰즈: '차이의 철학'을 역설하던 들뢰즈가 가타리를 만나면서 '욕망과 접속'하게 되지요. "욕망하는 기계"   - 푸코: 푸코는 가타리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도, 또 배려해주는 관계였다고. 특히 권력의 미시적인 움직임에 집중.   - 리좀은 풀뿌리에서 나오는, 관계 속에서 나오는 (녹색당의 어휘) '생태적 지혜', 나무에서 나오는 추상적인 진리, 분리된 진리는 아카데미의 방법론. (모든 의미화된 것에 의문을 가지세요!)   - 'n-1'은 유일 대신 다양성을 만드는 방법이다. 'n+1'은 초월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음.   - '고른판'은 모두가 다른 소리를 하지만 그러면서 결정을 내리는, 차이 속에서 공감을 하여 자발적인 의사수렴이 가능한 형태의 의사소통.   - 합일의 두 가지 층위 : 공통성과 보편성. 공통성은 우리 관계 속에서 찾아낸 합일점, 반면 보편성은 모든 상황에 적용가능한 진리 같은 합일점. 리좀의 사유로 얻어낸 합일점이 공통성에 기반한다면, 나무-아카데미 형태의 합일점은 보편성을 주장(또는 강제)한다.     * 참가자들의 멘션, 리좀 등에 대해   - 리좀은 구근, 덩이줄기, 땅밑줄기. 농사를 지어보니 알겠어요. 고구마가 바로 리좀이에요! // 담쟁이 넝쿨도 리좀.   - 기업 조직도는 전통적으로 수직적인 계층구조로 형상화되었지만, 구글 등 혁신적인 기업의 조직도는 네트워크 조직도의 형태, 방사형으로 뻗어나갑니다. 나무형태의 조직도와 리좀 조직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 신쌤 코멘트, 가타리 曰, 생태계가 네트워크.   - IT쪽 용어로 텍소노미와 폭소노미 개념을 비교해보면 나무와 리좀 같습니다. 데이터가 개발자에 의해 카테고리화된 분류방식이 텍소노미, 수평적으로 검색어가 중복되는 분류방식이 폭소노미(클라우드 태그 같은 형태로),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면서 폭소노미 방식이 효율적임.   -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무는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를 땅으로 전달하는 역할,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땅으로 내려와 전달하듯이. 그러나 리좀은 수직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도, 법, 영으로 거듭나는 것, "네가 나고, 나는 너다."   - 또 IT쪽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다양체의 원리'는 '객체지향언어' 개념과 같음. (명쾌한 프로그래머의 설명을 들으며 한쪽에서 가타리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 새누리당이 리좀 형태로 움직이고 있는가?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들의 점조직은 뿌리줄기 스타일 정도? 의사결정의 중추에는 여왕님-나무와 이권집단이 결탁해 있다고 본다.       --- 아래는 읽는 데 집중이 하도 안 돼서 본문을 필사하며 메모한 흔적입니다. (제가 임의로 첨부한 메모는 #표시로 파란색 표시해두었어요.)   1. 서론 : 리좀, 본문 발췌독   (전략) 더 이상 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빨려들어갔고 다양화되었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은 질료들과 매우 다양한 날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지질학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한 신을 꾸며낸다. 다른 모든 것들처럼 책에도 분절선, 분할선, 지층, 영토성 등이 있다. 하지만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f: agencement, e: assemblage)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들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f: multiplicité)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la multiple)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實辭 #명사나 용언의 어간처럼 실질적인 뜻을 나타내는 형태소#)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f: signification)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corps sans organes: CsO)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 없는 몸체는 끊임 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환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의 기관 없는 몸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다. 고려되고 있는 선(線)들의 본성에 따라, 선들의 농도나 고유밀도에 따라, 선들을 선별해내는 “고른 판(plan de consistance)”에 선들이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여러 기관 없는 몸체들이 있다.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이다. 글을 양화하라. #양화란 量化를 의미하나?# 책이 얘기하는 바와 책이 만들어지는 방식 차이에는 차이가 없다. 하물며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표든 기의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접속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를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원용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글을 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문학 기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다른 기계와 이어질 수 있고 또 이어져야 하는지를 아는 일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 기계(#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von Kleist를 의미하는 듯, 괴테와 카프카를 연결하는 작가라는 평, 작품 찾아볼 것#),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주의 기계 ...... (그리고 설사 우리가 문학을 통해서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분명 문학적인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가?) #이 괄호 속의 문장은 무슨 소리인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물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도 없다. 이데올로기는 있지도 않고 있어본 적도 없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단위들, 수렴의 CsO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signifier)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앞서 나온 ‘글을 양화하라.’는 지시문과 같은 맥락의 비유인 듯. 여기서 ‘미래의 나라들’이란 표현은 아직 그와 같은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 책의 세 가지 유형   (p.14.) 책의 첫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중략)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중략) (p.16.)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겉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중략)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택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쪼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 (중략) (pp.17~18.)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알듯말듯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말이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 뭐가 좋고 뭐가 나쁘지?#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다. #갑자기 개밀이 왕바랭이가 됐다. 둘 다 외떡잎식물이며 벼과에 속하는 잡초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 하다. #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미궁에 빠져든다. 원예기술과 생물학과 정신분석과 언어학이 뒤섞인다. 리좀의 특성을 알려준대도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 리좀의 특성 원리 1~6 (그러나 굳이 숫자로 분류해 설명한 이 원리들은 분절되지 않는 내용인 것 같다.)   (pp.19~20. :리좀의 특성)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계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고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초헤계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定言 #단정하여 말하기)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자으이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화행론: 1960년대 영국 언어학자들이 창시한 언어학 이론. 언어란 무엇인가보다 언어는 무엇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언어학의 한 유파. 언어의 의미를 ‘언어 행위 실천’에서 찾으려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실 언어 행위의 의미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명령어/질서어로 본다. 기존의 언어학과 언어철학이 가장 급진적으로 나아간 형태이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소쉬르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보편적이고 고정적인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바인라이히,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군대가 지지하는 사투리가 표준어가 된다.”라고 하는 오병헌씨의 인용문이 생각났다.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됨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pp.20~21. :리좀의 특성)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 다양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주체나 객체, 자연적 실재나 정신적 실재, 이미지와 세계로서의 와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게 된다. 리좀 모양의 다양체들은 나무 모양을 한 가짜 다양체들의 정체를 폭로한다.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 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양체의 본성이 변할 때에만 증가할 수 있다(따라서 조합의 법칙들은 다양체와 함께 증가한다). (중략, pp.22~23.)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고른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비록 이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접속들의 수에 따라 판의 차원 수가 커지기는 할 테지만. 디양체들은 , 즉 추상적인 선, 도주선(ligne de fuie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격자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그리고 나서 도주선의 특징들을 설명한다. 얽히고 섥힌 나무의 가는 뿌리들을 상상하다가 갑자기 고른 판 위에 선이 뻗어가는 모양을 상상하려니 과부하로 죽을 것 같아서 넘어가기로 한다.#   (p.24. :리좀의 특성)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 이것들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개미떼를 죽여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놈들이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복구될 수 있는 동물 리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나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과 이라는 조악한 형식으로도 말이다. 우리는 끊어도 보고 도주선도 그려 본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 선 위에서 전체를 다시 지층화하는 조직들, 기표에 권력을 다시 부여하는 대형들, 주제를 다시 구성하는 귀속 작용들, 즉 오이디푸스의 부활에서 파시스트적인 응고물에 이르키까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에 직면할 집단들과 개인들은, 단지 결정화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 개밀 역시도 리좀이다. 과 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중략) # 그리고 탈영토화 운동과 재영토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서양란과 말벌이 인용되고, 비비와 고양이의 유전정보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고, 악어와 카멜레온이 주변을 복제하지 않으며, 핑크팬더는 분홍 위에 분홍으로 자기 색깔로 세상을 그리는데 이것이 핑크 팬더의 세계-되기라는 미친 신들린 것 같은 설명이 나오고, 나는 눈물이 났다. 핑크팬더라니 핑크팬더라니 도대체 어쩌라고!#      (p.29~30. :리좀의 특성)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제도)과 전사의 원리 :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주축뿌리이건 수염뿌리이건)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예컨대 촘스키의 “나무”는 기저 시퀀스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항 논리에 따라 그것의 발생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정신분성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結晶)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도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 나무와 반대되는 리좀, 나무가 뿌리 중심에서 뻗어나가 위계적 질서인 반면, 리좀은...? #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 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리좀이 지형이 아니라 지도라는 설명은 납득할 수 있다. 어렴풋이 맥락이 좀 잡힌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제기가 나와버린다. #     (pp.31~33.)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하나의 지도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사본들인 잉여 현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놓아야 한다. (중략) # 그리고 사본의 위험함을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예로 드는데, 프로이트의 꼬마 한스와 멜라니 클라인의 꼬마 리처드 연구에 대한 살벌한 비판이 이어진 뒤 단호하게 경고한다. # 리좀이 차단되어 나무처럼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고 이제 욕망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중략)     (pp.35~37.) 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부당하게도 “수상돌기(化石樹 #화석수라니, 수상돌기의 다른 말인가, 아님 어떤 은유일까?#)”라 불리는 것은 뉴런들을 연속적인 조직 내에서 서로 연결접속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중략)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 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 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 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긴 기억(가족, 인종, 사회, 또는 문명)은 복사하고 번역한다. 하지만 긴 기억이 번역하는 것은 자기 안에서, 거리를 두고, 뜻하지 않게, “비시대적으로” 그러나 결코 동시적이지는 않게 계속해서 작용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뿌리-가지들의 집합을 고려한다면, 나무의 몸통은 밑에서 위까지 걸쳐있는 부분 집합들 중 하나에 대해 대립 절편의 역할을 한다. (중략) # 나무 모양과 뿌리 모양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뒤어어 나오는 세부적인 설명은, 아..... 몰라. 서양의 사고체계가 나무 같지만 동양은 아니라는 서술은, 정말로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동양이 이미 서구화되어버린 또는 서구지향적인 동양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오리엔탈리즘 또는 서양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동양문명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까? #     (pp.46~48.)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하지만 리좀의 특질들 각각이 반드시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가진 특질들과 연결접속되는 것은 아니다.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체계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로도 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도 아니다. 리좀은 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여럿도 아니고 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 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 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 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고 차원인 도주선 또는 탈영토화의 선도 있다. 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이 선을 따라가며 본성이 변하면서 변신한다. 우리는 그런 선들이나 윤곽선들을 나무 유형의 계통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나무 유형의 계통들은 연결된다 해도 단지 점들과 위치들 사이에서만 자리가 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 대상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고, 나무-구조로서의 내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anti-)계보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문자 표기법, 데셍, 사진과는 달리, 또한 사본과도 달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지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본이지, 역으로 지도를 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다. 위계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며 미리 연결되어 있으며 중앙 집중화되어 있는 체계(설사 여러 중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와는 달리,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도 없고, 조직화하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이다. 리좀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성(性 #성별?#)과의 관계이며, 또한 동물, 식물, 세계, 정치, 책, 자연물 및 인공물과의 관계, 즉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 리좀은 나무 형태와 다르게,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너덜거리는 모양일 것 같다. 뒤이어서 고원에 대한 설명. #     (pp.48~50.) 고원은 중간에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중략)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적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예를 들어 장으로 이루어진 책은 정점과 종결지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뇌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가로질러 서로 소통하는 책,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는 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우리는 이 책이 순환적 형식을 갖도록 했지만 그것은 웃자고 그랬던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우리는 각자 어떤 고원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자문하고, 여기 다섯 줄, 저기 열 줄을 쓰곤 했다.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렴원들을 만들었다. 각각의 고원은 어느 지점부터든 읽을 수 있으며 다른 어떤 고원과도 관계 맺을 수 있다. 다양을 만들려면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방법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는 단지 몇 단어를 골랐고, 그 단어들이 나름대로 고원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리좀학=분열분석=지층분석=화행론=미시정치. 이 단어들은 개념들이다. 하지만 개념들은 선들, 즉 다양체들의 이런저런 차원(지층들, 분자적 사슬들, 도주선들이나 단절선들, 수렴원들 등)에 부착되어 있는 수 체계들이다. 우리는 결코 과학의 지위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과학성도 알지 못하며 다만 배치물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들이 있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기계적인 배치물들이 있을 뿐이다. 의미생성도 없고 주체화도 없다. (중략)     (p.51.) 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정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물론이 빠져 있다. #이런 한계를 넘어선 훌륭한 작품들의 예가 거론된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예시이기 때문에 넘어간다.#     (p.53.) 어쨌든 과학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과학은 완전히 미쳐버릴 것이다. 수학을 보라. 수학은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굉장한 은어이며 유목민적인 것이다. 이론적 영역에서조차, 아니 무엇보다도 이론적 영역에서, 아무리 암시적으로 화행론적인 발판일지라도 개념들의 복사나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 개념들의 절단과 진보보다는 낫다. 기표작용을 하는 절단이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단절을 행하라. 유목민들은 국가 장치에 대항해서 전쟁 기계를 발명했다. 역사가 유목민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pp.54~55.) 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혈통 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이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라는 동사를 뒤흔들고 뿌리뽑기에 충분한 힘이 있다.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백지 상태(tabula rasa)를 상정하는 것, 0에서 출발하거나 다시 시작하는 것, 시작이나 기초를 찾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여행 또는 운동에 대한 (방법적, 교육학적, 통과제의적, 상징적인......) 거짓 개념을 함축한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렌츠, 뷔히너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다른 방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운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시작과 끝을 상정하지 않고 중간을 통과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어떤 의미일까?# 나아가 미국 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 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sens)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영미문학은 화행론을 행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그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휩쓸어 가는 수직 방향, 횡단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고원지대, 기차에서 만났던 시안 사람 왕선생이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첫 마디로 시안은 ‘황토고원’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란저우도 간쑤성의 고원지대에 있으며, 쿤밍 역시 고원의 춘성이다. 중국영토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지는 망설여지지만 티벳고원도 빼놓을 수 없지. 독특한 문명이 꽃피었던 곳, 또는 한 나라의 수도가 있었던 도시들. 들뢰즈와 가타리가 중국의 지형을 생각했을 것 같진 않지만, 나에게는 이런 고원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개마고원과 백두고원이 있고, 남한에는 무주의 진안고원이 있지. 언젠가 마이산에 가보고 싶다.     # 기계의 비유, 하필이면 왜 기계일까? 뭔가 프랑스적인 감성이 있는 것 같다.   # forvo.com 프랑스어 발음이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보다 발견했다. 외국어가 녹음된 음원을 들을 수 있는 홈페이지. 각 지역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녹음해서 올린다. 일테면 프랑스어의 경우, 프랑스 북부, 남부, 벨기에, 캐나다 등지의 사용자의 발음을 비교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전문적인 성우가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자발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1. 서론 : 리좀 '을 읽고 나눈 이야기들 정리해보았어요. /이동현|작성자 옥토끼  
325    리좀 / 들뢰즈 댓글:  조회:878  추천:0  2018-10-19
리좀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 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 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 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 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 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 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 (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 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 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 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 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 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 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출처] 리좀 (1) - 텍스트와 층화 /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작성자 옥토끼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 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 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 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 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 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 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              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 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출처] 리좀 (2) - 기계, 배치, 디아그람|작성자 옥토끼   제5강 탈기관체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 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 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 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 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 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 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 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출처] 리좀 (3) - 탈기관체|작성자 옥토끼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 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 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 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 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 (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 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것이 중요하다. [출처] 리좀 (4) - 글쓰기의 양화|작성자 옥토끼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 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 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 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 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 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 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 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출처] 리좀 (5) - 혼효면, 혼화면, 기계 / 책의 두 가지 유형|작성자 옥토끼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 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 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 (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 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끝-   [출처] 리좀 (6) -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작성자 옥토끼    
324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 댓글:  조회:728  추천:0  2018-10-19
천개의 고원(새물결), 리좀, 4,5 문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떠한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구조화(형식화)된 틀 속에서의 지속적인 노출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조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다가 개인들은 다양한 개인들을 만나고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다양한 관점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토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면, 그것은 배가 고파서 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가 아파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면, 음식을 찾아 먹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픈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남과 동시에 배의 허기짐을 느끼게 되고, 식사를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상황등의 여러 이유들 때문이다.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우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꼬르륵 소리를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파악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P.16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제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 버로스의 잘라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예로 들은 것처럼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배고픔을 나타낸다는 것을 파악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조건들이 갖추어 져야만 한다. 만약 이 조건들을 모른다면 꼬르륵 소리는 다양한 이유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이 배가 고파서인지 배가 아파서인지 정확히 파악해낼 수 없다. 친구가 그 소리의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한.)      이러한 전제들을 토대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것을 리좀이라고 부른다. 리좀은 일반적으론 다양체의 형태로 존재를 하지만, 어떠한 조건들과 연결되었을 때, 하나의 의미를 나타낸다.     -P.17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리좀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를 말하기 전에 앞의 글,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다양하다는 것이 어떤 것에 귀속되기를 그친다는 것, 즉 독립적인 실사의 지위로 격상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꼬르륵 소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게 되지만, 전제가 존재해서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해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분명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잘 모르고 있다.              들뢰즈는 리좀을 쥐 굴, 감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표현의 이유를 살펴보자.      쥐굴의 경우, 쥐가 굴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다면 쥐 굴은 쥐의 식당으로 의미하며, 쥐가 굴에 들어가 잠을 잔다면 쥐 굴은 침실을 의미하고, 쥐가 천적을 피해 숨는다면 은신처를 의미한다. 즉 굴 하나가 쥐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활용도를 지닌 쥐 굴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리좀과 같은 방식이 되는 것이다.        감자의 경우, 감자는 다양한 뿌리들 중간이나 끝에 감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어떤 뿌리를 통해서든 말이다. 어떤 뿌리로든 간에 감자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감자는 다양한 뿌리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하나의 감자는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즉 감자는 다양한 뿌리에서 자라날 수 있지만, 반드시 하나의 뿌리에서 감자는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리좀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 . 2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출처]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리좀 해설|작성자 옥토끼  
『현대시 창작시론』 - 1. 샤를 보들레르, 예술의 현대성―추(醜)의 미학 발제: 김민지   1) 보들레르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상징주의의 문을 연 현대시인. -상징주의, 현대 도시시의 시초. 현대적 예술의 징후를 가장 먼저 포착한 예술가. -『악의 꽃』에는 생의 모순이 잘 드러나 있고, 시적 주체는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징후를 관찰하고 꿈꾸고 좌절하는 ‘현대성의 감내자’이다. 현대성의 필연적 산물인 불안, 무출구성, 유토피아 앞에서의 좌절 등 자신의 내면에 투영된 생의 모든 국면들에게로 진입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상징: 인간은 물질세계의 상징을 통과해야만 정신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세상 만물은 상형문자이며, 시인은 암호 해독자 또는 번역자가 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세계(상징적 외관)와 관념세계(정신적 실재)를 하나의 기호로 결합시키는 자이다. -상상력, 예술가의 첫 번째 자질. 모든 창조를 분해하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어떤 규칙에 따라 다시 수집하고 배열한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의 시에 등장하는 파리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닌, ‘의도적으로 구성한 상상적 도시’이다. 현실 모사가 아닌 현실 변형.   2) 추의 미학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시학. -단순한 ‘더러움의 미’가 아닌, ‘기괴함과 더러움의 공존하는 불협화의 미’. -보들레르는 ‘미’에도 악마가 뒤섞여 있다고 보았다. ‘악마성’과 ‘숭고함’, 선과 악, 하늘과 지옥, 순간과 영원. -『악의 꽃』 역시 ‘악’과 ‘꽃’의 대비처럼, 현대성의 불협화음을 담아낸 텍스트.   3) 현대성(Modernity)   -도시가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의 징후. ‘더러운 수도’와 ‘창녀’, ‘쾌락’ 등과 같은 ‘도시의 매력’ -보들레르가 평론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처음 사용 -『1846년의 살롱』에서 보들레르는 현대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관건이 되는 바는 유행으로부터 당대적인 것 안에 포함할 수 있는 시적인 것을 추출해내고, 변해가는 것에서 영원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대성은 예술의 절반을 구성하는 일시적이며 스쳐가는 우연적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화가에게도 각자의 현대성이 있었다.”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의복과 머리 모양, 동작과 시선 그리고 미소마저도(각 시대는 나름의 자세와 시선과 미소를 갖고 있다) 생명력이라는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시적이며 흘러가는 요소의 변화가 매우 빈번하다고 해서, 독자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도외시할 순 없다.” -한편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두고, “현대성이란 식기 세트 혹은 광학 기구에 붙어 있는 상표와 같다”며 “자기 작품에 상표를 찍는 것이 보들레르의 분명한 의도였다”고 언급한다. 이 상표는 영속성을 가지면서도 신속히 낡은 것이 되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예술의 이중성과 ‘미(美)’의 개념과 연결.. -‘미’는 모든 발생 가능한 현상들처럼, 영원하며 순간적이고, 절대적이며 독특한 이중성을 지닌다. -보들레르는 ‘미’를 범속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낯설게 하기’의 전략으로 ‘기괴한 것’, ‘경악스러운 것’의 ‘미’로써 도발한다. 이러한 시도로 그는 당시의 고답파와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추구하는 ‘미’는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조화롭고 평화로운 것과 구별되는 독특한 미의식을 보여주었다. (찰나의 아름다움 + 절대의 미 → 덧없음의 쾌락, 우울의 미학)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321    보들레르 시학 흐름 자료 두편[ 스크랩] 댓글:  조회:882  추천:0  2018-10-19
보들레르는 라바테르로부터, 특히 스웨덴보르그로부터 이끌어낸 ꡐ유추ꡑ라는 추상적 개념에다가 ꡐ상징ꡑ과 ꡐ상응ꡑ이라는 보다 직접적으로 시적인 이론을 결부시킨다. 그는 또한 이라는 글에서 스웨덴보르그와 라바테르를 직접 언급하면서 자연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다 뚜렷이 강조한다.      더구나 훨씬 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스웨덴보르그는 일찌기 하늘이 하나의 거대한 인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있다. 그리고 또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정신계에 있어서도 형태, 운동, 수, 색깔, 향기 등 모든 것이 의미 깊고 교호적이고, 상호 봉사적이고, 상응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바 있다. 사람의 얼굴에 우주적인 진실이 나타나고 있음을 국한시켜 살폈던 라바테르도 우리에게 윤곽, 형태, 차원의 정신적 의미를 밝혀준 바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긴밀히 보들레르의 상응 이념에 결부되는 사람으로는 푸리에와 죠셉 드 메스트르를 들 수 있다. ꡒ자연은 하나의 언어다ꡓ라고 말한 푸리에와, 에서 ꡒ감각적 법칙이면서 정신적 법칙을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적 법칙이란 정신적 법칙의 가시적 표현에 불과하다ꡓ고 말한 죠셉 드 메스트르의 주장은 보들레르로 하여금 시적 또는 미학적 ꡐ초자연주의ꡑ에 대한 확신을 보다 강하게 갖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보들레르는 이러한 초자연주의에다 카발라비법의 계시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념을 접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ꡐ무덤 저너머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환희에 찬 통찰력ꡑ을 보다 확고하게 믿게 만든 것은 의 저자인 에드가 포우이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 쓴 테오펄 고티에에 관한 유명한 글에서 자신의 시적 신념을 표명하기 위해 에드가 포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그대로 빌려 온다.       미를 향한 바로 이 경탄스럽고 영원불멸한 본능으로 해서 우리는 이 ꡐ대지ꡑ와 거기에 펼쳐지는 장엄한 광경을 마치 하나의 전체적인 포착, 혹은 ꡐ하늘ꡑ의 상응처럼 바라보게 된다. 저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 삶이 환기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갈망은 우리의 불멸성을 증명해 주는 가장 활기찬 증거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무덤 저너머에 있는 찬란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시에 의해서, 그리고 시를 통해서이고, 또 동시에 음악에 의해서, 그리고 음악을 통해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이들 신비사상가들이나 시인들로부터 ꡐ철학적으로ꡑ 영향을 받아 상징의 시학을 수립하게 된 것으로 쉽사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보들레르는 그의 시를 통해서 ‘상징ꡑ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에서 ꡐ상징ꡑ이라는 말이 직접 나오는 시는 , , 등 세 편에 불과하다. 그는 차라리 ꡐ상징ꡑ이라는 낱말보다는 ꡐ알레고리ꡑ나 ꡐ상응ꡑ이라는 낱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다. 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상징주의라는 말을 적용하고자 한다면, 알프레드 드 비니가 말하는 ꡐ상징적 전이ꡑ와 같은 의미 밖에는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보들레르에 있어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넘쳐 흐르는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직조물, 알레고리의 편물, 상응의 그물을 재료로 하여 ꡐ깊고 어두운 통일성ꡑ을 꿰뚫어 보는 일이다. 가장 빼어난 상징시학의 이론이며 동시에 선언이기도 한 저 유명한 소네트 을 읽어보면, 보들레르가 추구하고자 한 ꡐ상징의 숲ꡑ의 두 개의 기본적인 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은 수평적 상응과 수직적 상응이라는 기하학적 은유의 축이다. 가로좌표로서의 수평적 상응은 비교 및 은유와 같은 수사법을 통해 언뜻 보기에는 서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해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 의 중심부를 이루는 6행의 시귀는 전형적인 공감각 세계의 놀라운 변주를 보여주면서 지극히 조화로운 상호적 유추관계를 이룬다.     어둠처럼 빛처럼 광막한    깊고 어두운 통일성 속에서    아스라히 뒤섞이는 긴 메아리처럼    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    어린아이 살결처럼 싱그러운 향기, 오보에 소리처럼    부드러운 향기, 초원처럼 푸르른 향기가 있다.       세로좌표로서의 수직적 상응은 수평적 상응과는 달리 훨씬 더 절묘하고 본질적이다. 수직적 상응에 있어서는 감각적 현실의 흩어져 있는 요소들을 서로 접근시키고 화답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요소들이 지니는 의미가 천상적인 계시나 정신적인 신성함을 지닐 수 있게끔 어떤 지고한 합일의 상태, 즉 열광의 절정 상태에까지 고양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소네트의 마지막 4행의 시귀는 이같은 ꡐ확신ꡑ과 ꡐ열광적 전이ꡑ를 역동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또한 썩고, 풍부하고, 호기로운 향기    무한한 것들의 확산을 지니면서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정신과 감각의 열광을 노래하는 향기도 있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상응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그의 주목할 만한 자연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외계의 자연을 ꡐ아날로지의 거대한 저장고, 일종의 상상력의 자극제ꡑ로 간주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ꡒ가시적 세계는 시인의 상상력이 그것들에게 제각기 알맞는 자리와 가치를 부여하기를 기다리는 이미지와 기호들의 저장고일 뿐이며, 그것은 상상력이 먹어서 소화하여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주지 않으면 안될 일종의 목초지인 것이다.ꡓ    그러기 때문에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의 역할이다. 그는 1856년 1월 21일자 알퐁스 뚜스넬에게 보낸 편지에서 ꡒ상상력이 기능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것ꡓ으로, ꡒ이 기능의 여왕으로서의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 즉 참다운 시인만이 가시적인 것과 물질적인 대상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번역하고 해독할 수 있다ꡓ고 쓰고 있다. 우주만상이 상형문자이지만 그 뜻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시인)에게는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독력이란 지식의 영역이 아니고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한 ꡐ거의 초자연적인 어떤 영혼의 상태ꡑ에 도달한 시인의 투시력에 속한다. 그러한 영혼의 상태에서 시인은 ꡒ향기와 빛깔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는ꡓ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ꡐ어둡고 깊은 통일성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는 스웨덴보르그, 호프만, 라바테르, 네르발, 발자크 등에 의해 개발된 신비주의의 전통을 참조하여, 그렇지만 스스로의 상상력을 희생시킴이 없이 의 소네트를 씀으로써 상징주의의 시조가 된다. 이 유명한 상응의 시학은 보들레르의 자연관과 우주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1890년대의 상징파 시인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론의 복음이 되었을 뿐 아니라 20세기의 후계자들의 시창작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924년 라는 제목으로 행한 한 강연에시 발레리는 ꡒ베를렌느나 말라르메 그리고 랭보가 결정적인 시기에 을 읽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렸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ꡓ 라고 단언한 바 있다. 이는 보들레르가 상징주의 시의 제 2세대의 선구자들이라 할 수 있는 세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의 깊이를 말해 준다.    마르셀 레이몽이 에서 명쾌하게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발레리 역시 보들레르를 근원으로 해서 두 개의 줄기로 흘러 내려가는 계보를 그려 보여준다. ꡒ베를렌느와 랭보가 감성과 감각의 질서 속에서 보들레르를 이어 받았다면, 말라르메는 완벽성과 시적 순수성의 분야에서 보들레르를 신장시켰다.ꡓ 이 두 가닥의 계열은 다같이 로부터 영향을 받아, 한편에서는 ꡐ여행ꡑ의 시인인 보들레르가 그 입구에서 멈추어 선 ꡐ심연의 밑바닥ꡑ에까지 내려가보려는 모험을 감행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와 세계의 신비를 언어로 번역하고 암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베를렌느, 랭보, 로트레아몽, 초현실주의 시인 등의 ꡐ연금술사들ꡑ을 가리키며, 후자는 말라르메를 비롯한 상징파 시인들과 발레리 등의 ꡐ예술가들ꡑ을 가리킨다. http://cafe.daum.net/beautiful926/Cu9L/504?q= 상징주의/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 [상징주의]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    서구 상징주의 시학의 성립과 전개    ─ 보들레르 시학의 흐름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시의 주요 흐름을 특징짓는 상징주의가 무엇인가를 엄밀한 말로써 정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상징주의는 흔히 그것을 보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알카의 용에 비유되는 매우 종잡기 어려운 사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정의가 상징주의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데 비교적 가까이 다가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ꡒ상징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미적 태도는 음악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다시 찾아가겠다는 여러 집단의 시인들이(사실 그들 서로간의 의견대립 또한 대단하지만) 공통으로 지닌 의도라고 매우 간단하게 요약된다.ꡓ 그러나 이같은 발레리의 간단한 요약에도 불구하고, 문예사조로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의 성립 시기와 전개과정, 그리고 그 쇠퇴기를 명확히 구분하여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1936년 벨기에의 국영방송은 ꡐ상징주의 50주년ꡑ을 기념하는 소책자 《상징주의 1886~1936》의 간행을 기획하여, 당시 상징주의에 가장 정통한 시인으로 알려진 발레리에게 기고를 의뢰한 바 있다. 1936년이라는 해는 쟝 모레아스가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지에 이른바 을 발표한지 50년의 세월이 흘러간 해이다. 상징주의 선언문의 발표 5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벨기에 방송 측의 시사적 기획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기는 하나, 이른바 모레이스 등이 벌인"상징파" 시인들의 운동을 상징주의 성립의 기점으로 삼는 것은 편협한 관점이다.        '상징주의'를 "상징파"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쟝 모레아스를 비롯하여 르네 길, 스튜아트 매릴, 프랑시스 비엘레 그리팽, 귀스타브 칸 등 1880년 경에 활동한 군소 시인들에게 상당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느, 말라르메를 단순한 선구자로서만 취급해 버린다면 상징주의 이해에 혼선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 1885년을 전후하여 일어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의 운동을 하나의 문학 유파로 규정하여 그것을 "상징파"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주의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전개된 시적 이상주의의 방대한 흐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정토로의 낭만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합리적 이성과 과학정신을 표방하는 실증주의와 결정론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반동, 딱딱하고 고정되고 대리석같이 싸늘한 형식미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파로니스파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상징주의는 보들레르라는 한 혁신적인 ꡐ현대성ꡑ의 시인에 의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게 된다. 따라서 상징주의의 기본적 성격과 이론적 핵심을 어느 정도 체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상징주의 시의 원점에 놓여 있는 보들레르 시학의 골자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이다.        "삼라만상이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 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보들레르의 독특한 우주관은 1840년부터 그의 사상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나 신비주의 작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맨 먼저 언급해야 할 사람은 에른스트 호프만이다. 보들레르는 이 독일 낭만주의 작가에게서 소리와 향기가 서로 화답하는 공감각 체계를 발견한다. 그는 미술평론 에서 호프만의 작품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상응의 이념을 간접적으로 피력한다.        내가 색깔과 소리와 향기들 사이의 어떤 유추관계나 내적 결합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잠들기 전에 찾아오는 가벼운 혼미와 꿈 속에서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을 때, 즉 음악을 듣고 있을 때도 가능하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모든 것이 어떤 한 같은 광원(光源)에서 태어났던 것 같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어떤 한 협주곡 속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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