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200 ]

280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댓글:  조회:4200  추천:0  2018-04-02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1)  / 라이너 마리아 릴케   파리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보내주신 편지는 수일 전에야 받았습니다. 편지에 담겨진 관대하고 친절하신 신뢰감에 우선 감사 드립니다. 그 이상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어떤 피평적인 견해라도 중요하게 여겨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으로는 도저히 예술 작품에 근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든 비평에는 다소간에 우스꽝스런 오해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사물은 우리들이 믿고 싶은 이상으로 이해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모든 사건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나며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은 이러쿵 저러쿵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생명과는 달라서 영속되는 것이며 신비에 찬 존재입니다.  이런 서두 말을 드리면서 저는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당신의 시들은 개성(個性)에 도달하려는 은밀하게 숨겨진 씨앗은 보이나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일 마지막의 라는 시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무언가 독자적인 것이 언어와 운율로 나타나려고는 합니다. 라는 아름다운 시 속에도 그 위대했고 고독했던 분과는 친근감이 자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취할 게 없으며 독자적인 게 없습니다. 마지막 시나 레오빨디에게 붙이는 헌시(獻詩)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동봉해 주신 편지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무언가 막연한 것을 설명해 주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게 말입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물으셨을  것입니다 잡지사에 보내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와 비교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편집자가 당신의 작품을 되돌리면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충고를 드려도 좋으시다고 하셨으므로 감히 말씀드리는데 제발 그런 일은 그만 두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라도 충고를 해 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沈潛)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께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어 보십시오. 그리고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리를 뻗어 나오고 있는지를 알아 보시고, 만일에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런 의문을 우선 조용한 밤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쓰지 않으면 안될까? 그리고는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만일에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쓰지 않고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라고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명확하고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세우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비록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좋거나 쓸데없는 순간일도 그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연(自然)에 근접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사랑의 시는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선 흔히 있는 일상적인 형태는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힘든 것입니다. 비록 얼마되지는 않지만 훌륭하고 빛나는  전통으로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숱하게 많은 판에 독자적인 것을 나타내자면 보다 힘차고 완숙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즐겨 택하는 보편적인 주제는 피하고 당신 자신의 일상(日常)이 주는 주제(主題)를 택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그리고 열망을, 무엇이든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믿음을 묘사하십시오. 그것들을 내심에서 훌려 오도록 은근하고 겸손하게 묘사하도록 하십시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 당신의 꿈의 영상(映像), 추억의 대상들을 인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걸 탓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탓하십이오. 그리고 훌륭한 시인이 못되어 그 일상의 풍요(豊饒)를 불러낼 수 없음을 스스로 책하십시오. 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으며 그냥 지나쳐도 좋을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당신이 감옥에 갇혀서 외계의 소음조차 당신의 의식에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값비싸고 풍성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주위를 돌리십시오. 아득하게 지나간 과거의 가라 앉아버린 감동을 다시 캐어내 보려고 애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굳어지고 고독은 넓어져서 어둑어둑한 방(房)이 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음은 멀리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의 전환(轉換)에서, 자기 세계 속으로 침잠에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가 좋으냐고 누구에게 물 볼 염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또한 잡지사에 보낸 그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하려고 애도 쓰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자기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런 재화(財貨)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片鱗),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적필연성(內的必然性)에서 이루어진 예술작품은 훌륭한 것입니다. 시의 원천에 따라서만 이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 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 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 원천에서부터 반드시 창작을 해야할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 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사실에 밝혀질 겁니다. 그러거든 그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하시고 외부로부터 오게 될 보상(報償)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말고 그 무겁고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될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 당신의 고독 속으로 파고들고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어야만 될지도 모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시인의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말씀 드리는  바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자기로의 복귀(復歸)는 전혀 무위(無爲)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활이 어떻게 되든  거기서부터 독자적인 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양양한 대로가 되기를,  저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이상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론 할 말은 다 한듯 싶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당신께 충고할 것이 있다면 조용하고 진지하게 당신의 발전을 통해서 성장해 가도록 하십시오.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의 내심의 느낌을 통해서만이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의문에 대해서 밖을 향하거나 외부로부터 그 해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편지 속에서 호라체크 교수님의 존함을 읽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고매하신 그 학자님에 대해 경외의 마음과 해를 두고도 변함없는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충정을 제발 그분께 사뢰어 주십시오. 그분께서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고 계신 점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믿고 보내 주신 당신의 시들을 다시 회송합니다. 거듭 당신이 저를 믿어 주신 관대함과 솔직한 마음씨에 대해 감사 드리면서 낯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제가 아는 바대로 믿어 주신 점에 대해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충정과 변함없는 관심을 갖고---                       1903년 3월 17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탈리아의 피사 근교 비아렛지요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우선 저를 용서해 주셔야겠습니다. 2월 24일자의 댁의 편지에 오늘에야 비로서 감사를 드려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계속 몸이 불편했습니다. 별다른 병은 아니었으나 인플렌자에 걸린 것처럼 나른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봐야 별다른 차도가 없기에 결국 이곳 남쪽 바닷가로 떠나왔습니다. 전에더 이곳에서 한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도 아직 완쾌되지가 않아서 글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몇 줄 되지 않는 편지지만 많은 것으로 혜량하여 주십시오.  우선 당신이 주시는 편지마다 언제나 저를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회답에 대해서만은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기대에 어긋나게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근본적으로 따져 본다면 우리들은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사물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고독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충고를 하거나 도움을 주자면 많은 일이 벌어져야만 합니다. 많은 일이 이룩되어 비록 단 한 번의 운좋은 결말을 맺기 위해서도 사물과의 완전한 상호관계가 이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특히 창조력이 빈약한 순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순수하게 사용하면 아이러니도 또한 순수합니다. 그걸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과 너무나 친숙해지는 것 같거나 아이러니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게 두렵거든 보다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들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런 대상들에 비하면 아이러니야말로 보잘 것 없이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사물의 밑바닥을 추구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아이러니가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의 언저리를 즉시 살펴 보십시오. 보다 진지한 사물의 영향을 받게 되면 아이러니가 우연한 것일 경우에 당신으로부터 떨어지게 될 것이며,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것이라면 진지한 도구(道具)로 강화(强化)되어 당신의 예술을 이루는데 쓰이는 한 가지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두 번째 것은 이런 것입니다.  저의 장서 중에서 무엇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불과 몇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중에 두 가지는 어디를 가든 언제나 지니고다니는 게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저의 좌우에 놓여 있습니다. 그것들은 성서(聖書)와 덴마크의 위대한 시인 덴 페터 야콥센(1847~1885)의 저작들입니다. 당신께서도 그의 작품들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들은 구하기는 쉬울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일부가 게크람판 세계문고로 훌륭하게 번역이 되어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콥센의 이 수록된 책과 그의 장편 를 구해서 첫째 권의 첫 소설 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하십시오. 한 세계가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과 부(富), 세계가 지닌 불가해한 것이 찾아들 것입니다. 잠시 동안 그 책들 속에서 살아가시며 당신이 읽을 가치가 있어 보이는 그곳에서 배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 책들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사랑이 어떻게 되든 이런 사랑은 수천배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 저는 그 점을 확신합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생성(生成)의 피륙을 뚫으며 당신의 경험, 환멸, 환희의 모든 올 속에서 가장 중요한 가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창조의 본질에 대해 그 깊이나 영원에 대해 제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배웠다고 한다면 제가 알고 있는 두 분의 이름을 들어야겠습니다. 한 분은 위대한 시인 야콥센이며, 또 한 분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예술가 중에서 비견할 수도 없는 조각가 오거스트 로댕입니다.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면서.                         1903년 4월 5일 마리아 라이너 릴케   이탈리아의 피사 근교 비아렛지요에서(2)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부활절에 보내주신 편지로 해서 저는 여러 가지로 즐거웠습니다. 그 편지를 통해서 당신의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을 듣게 되었으며 당신이 야콥센의 위대하고 훌륭한 예술에 대해 말씀하신 태도로 미루어 보아서 제가 당신의 삶과 그 삶이 가지는 많은 문제들을 충만한 곳으로 이끌어 갔을 때, 제가 과히 잘못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 그 호화롭고 찬란하며 깊이를 가진 책의 세계가 당신께 전개될 것입니다. 그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의 은밀한 향기로부터 삶의 묵직한 열매의 풍요하고도 위대한 맛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그 속에 어울려저 있는 듯합니다. 거기에는 이해되지 않았거나 파악되지 않은 것, 경험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늘거리는 추억의 여운 속에서 인식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체험이라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아무리 적은 사건이라도 운명처럼 전개되었습니다. 그 운명도 신비에 차고 크나큰 피륙 같아서, 그 속에서 한 올 한 올이 섬세한 손에 의해서 짜여졌으며 한 올 곁에다른 실오라기가 포개지고 수 백의 다른 실올에 의해 다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책을 처음으로 읽는다는 크나큰 행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낯설은 꿈 속에서처럼 그 책이 주는 무한한 경이 속을 헤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께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뒷날에 가서도 당신은 여전히 변함없이 놀라운 마음으로 이 책들을 탐독하게 될 것이며 삶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는 보다 심화될 것이며 인생에 있어서는 보다 복되고 위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마리구릅뻬의 운명과 동경을 그린 그 놀랄만한 책을 읽어야 하며 야콥센의 서간문과 인기단편들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비록 번역은 시원치 않지만 무한한 격조 속에서 울려퍼지는 그의 시도 읽으셔야 합니다. 그럴 경우에 저는 전부가 수록된 야콥센의 멋진 전집을 사도록 권합니다. 이 전집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번역도 훌륭하며 라이프치히의 오히겐 디트리히 서점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권당 5마르크 내지 6마르크면 살 것입니다.   라는 시(이 작품은 섬세한 점과 형식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작품입니다)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오히려 서문을 쓴 사람에 비해서 나무랄 데 없이 옳습니다. 여기서 한 말씀 드려도 좋다면, 될 수 있는데로 미학적이고 비평적인 글은 읽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편파적인 견해로서 굳어졌으나 생명력이 없는 고화상태(固化狀態)에서 무의미하게 되었거나, 노회(老獪)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이란 오늘은 이 견해가 이기는가 하면 내일은 다시 뒤집혀지기가 일수입니다. 예술작품이야 말로 끝없는 고독에서 나오는 것이며 비평으로는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그것을 파악할 수도 지닐 수도 있으며 그것에 대해 불편부당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 당신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이 옳은 것으로 알고 거기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모든 시비나 비평이나 해설서들은 무시하도록 하십시오. 설사 당신이 틀렸다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내적인 삶이 지닌 자연스런 성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으로 하여금 독자걱이고도 은밀하며 아무 것에도 구해받지 않고 스스로 발전을 하도록 두어 두십시오. 그런 발전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깊이 내심에서 나와야 하며 강요되거나 채찍질이 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만삭이 될 때까지 잉태되었다가 배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상과 감정의 싹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서, 어둠 속에서, 무의식 속이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사의 속에서 완성되도록 하시고, 겸허한 마음과 끈기로서 명료함이 새로이 분만될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그게 바로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직접 창작을 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시간을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횟수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10년이란 세월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바로 계산하지도 연수를 세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수목처럼 무성하도록 하십시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내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봄의 폭풍 속에서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혹시나 그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불안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여름은 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원이 그들의 눈에 앞에 있듯, 근심 걱정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거기에 서 있는 참을성 있는 자들에게만 여름은 찾아옵니다. 저는 그걸 매일 익히고 있으며 그것도 괴로움을 찾아가며 배우고 있고, 또 그 괴로움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끈기만이 전부입니다.  리하르트 데멜(1863~1920 독일의 시인)의 책들에 대해서 말씀 드리자면,(덧붙이자면 그에 대해서는 저도 거의 모릅니다) 그의 책 속에서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발견했는가 싶으면 금세 다른 페이지를 펴기가 두렵습니다. 모든 게 다시 엉망으로 만들어져서 훌륭한 것을 보잘 것 없이 뒤바꿔 놓지나 않았나 하고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279    [권오삼] <좋은 시를 쓰려면> 댓글:  조회:1815  추천:0  2018-04-02
[권오삼]  1. 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문맥의 흐름을 다듬는다. 2. 일상어보다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사용한다. 3. 독자의 몫을 배려한다. 4. 이미지 중복을 피한다. 5. 수식어는 극약이다. 수식어 대신 비유법으로 정리함이 필요. 6. 감춤과 드러냄이 절묘하게 짜여져야 한다.  -사랑의 내용은 드러내 적지만 사랑이란 말은 감춘다. 7. 글의 말미를 확정, 단정하는 식으로 끝내지 마라. 의문으로 끝내는 것이 효과가 있다. 8. 호흡을 너무 길게 잡지 않도록 소리 내어 읽어보고 단락이 너무 길어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는 2 - 3행 어딘가에서 끊어줘야 한다. 9. 비유를 앞세우지 마라. 내용이 중요하다. 먼저 현실을 묘사하고 다음으로 비유법을 사용해서 부연한다. 10. 주격 문제  ~은 : 따로따로인 느낌  ~이 : 곁에서 함께 하는 연관성 있는 표현 11. 말은 아끼되 조사 사용은 정확하게 한다. 12. 시작, 전환, 상승, 결구로 시를 전개한다. 13. 단락의 종결 어미를 모두 명사형으로 하면 변화의 맛이 없다. 14. 시 쓰기에서 ‘정형(틀)’에 너무 치우치면 깊이가 없고 변화가 없어 단조롭게 느껴진다. 15. 되도록 작가 자신, 즉 ‘나’는 감추어야한다. 16. 추상적으로 쓰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할 것. 17. 상황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 누구를 만나면 만난 그 상황을 묘사해야지 추상적으로 나타내지 말 것. 18. 순간의 느낌을 포착해서 쓰기. 19. 친숙해 보이던 것이 낯설게 보일 때 시가 된다. 20. 시를 아름답게 쓰려하지 말 것. 21. 추상은 구상, 구체화해서 이미지화해야 한다. 22. 시를 쓸 때 의미를 찾지 말라. 시란 존재하는 것이다. 23. 시는 사물에 대한 말걸기이다. 24. 막연한 시어는 금물.  -표정을 얼굴, 눈빛으로 구체화시키기 25. 대화를 나타낼 때는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지 알 수 있게 표현. 26. 좋은 시어 메모해 두기. 27. 시 속에 인물을 등장시키려면 구체적인 묘사가 요구됨. 28. 제목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단순하게 명사형으로 하는 것 피하기. 29. 직접 체험에 의한 시 쓰기.  -가상으로 쓴 것은 내용 또한 허구, 추상에 가까울 수 있다. 30. 강조, 감추기 등을 위해서 순리에 맞지 않는 내용을 적을 때는 반드시 이유, 상황이 이해될 수 있도록 풀어서 써야 한다. 31. 메시지 전달보다 이미지화하기. 32. 묘사에 치중하기. 이미지가 좋으면 독자가 따라온다. 33. 사물의 형태보다는 행동 묘사. 34. 섣불리, 아는 지식은 시에 인용하지 말기.  -사전 찾기, 직접 보기 35. 상상으로만 쓴 시는 공감을 주지 못한다. 36. 시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37. 시에선 밑그림이 선명해야 한다. 38. 시점을 현재로 하는 게 효과적. 39. 내가 왜 이 시를 쓰려는지, 무엇을 쓰려는지, 어떻게 쓸 것인지 목적이 분명할 때 창작하면 시의 주제가 선명해진다. 40. 내 시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기. 문제점을 알게 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41. 백석 -이야기시. 풍경 묘사 속에 이야기가 있다.  정지용 -묘사시  유치환 -관념적인 묘사시  묘사의 효과는 시인이 대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묘사하느냐에 달려 있다.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중요하지만 시적 진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중요하다. 42. 시가 너무 속이 다 보이면 매력이 없다. 43. 시는 의미 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미지 전달, 마음과 정의 전달도 있다. 44. 첫 문장이 흡족해야한다. 45. 감각적으로 쓰기.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시인은 감각으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으로 시와 교감한다. 가각의 극단이 시이다. 즉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 감각의 제왕은 시각이다. 시 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 보기(觀)이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동원하기.  
278    시의 언어 - 에즈라 파운드[스크랩] 댓글:  조회:1447  추천:0  2018-04-02
시의 언어 - 에즈라 파운드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것. 과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추상과 구체를 섞은 꼴이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이 언제나 적절한 상징이라는 것을 작가가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하려 하지 말라. 당신의 詩作을 행의 길이로 쪼갬으로써 당신이 훌륭한 산문의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기술의 모든 난점들을 피하려 할 때 지각있는 독자들이 속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전문가가 싫증내는 것을 내일 대중이 싫증낼 것이다.  시 예술이 음악 예술보다 조금이라도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피아노 선생이 음악 예술에 쏟는 정도의 노력을 운문 예술에 쏟음 없이 전문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그러나 그 빛을 공공연히 시인하거나 아니면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할 정도의 예의는 보일 것.  이라는 말을 당신이 어쩌다 존경하게 된 어떤 한 둣 시인의 특정한 장식적 어휘를 훔쳐 써 먹는 것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한 터어키 종군기자가 최근 언덕, 아니면 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의 특파 기사에 그런 식의 글을 써갈기는 것을 최근 직접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  발췌 : '이미지즘', , 민음사, 1991  
277    문학 창작 이론 / 이 관 희[한국] 댓글:  조회:1710  추천:0  2018-03-29
문학 창작 이론 / 이 관 희   2. ‘창작’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뜻   1) 문학은 본질상 허구다   창작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시(poet · poetry)’를 의미한다. ‘시인’ 즉 ‘poet’라는 말은 그리스어 포이에인(poiein)에서 온 말인데 그 원의는 ‘만들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 즉 포에트라는 말은 ‘만드는 사람’ 즉 작가(作家)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인을 만들어 내는 사람, 꾸며내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으로 보았던 모양이다.”([문학이론의 역사적 전재] 이상섭 135쪽)   시인이라는 말의 본래 뜻이 꾸며내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꾸며서 만들어 낸다는 그것은 어떤 것인가? 책상이나 의자 같은 현실적 용도의 어떤 물건인가? 말 할 것도 없이 문학창작이란 실용도구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의 [poetica]를 日人들이 [詩學]이라 번역한 이래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도 [詩學]으로 통해있다. - 그러나 [poetica]의 원의나 내용은 ‘詩歌學’이나 ‘詩賦學’이 아니라 ‘創作學’ 또는 ‘創作論’으로 번역해야 할 성질의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김동리 상동)   문학이라는 말의 광의적인 뜻은 문자로 기록된 모든 저작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학인들이 말하는 문학이라는 용어의 뜻은 창작물을 의미한다.([문학개론] 조연연 정음사 30쪽) 문학예술이란 창작론에 의한, 창작을 위한, 창작의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작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사실이 아닌 개연성(蓋然性), 즉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은 특수한 사실을 모방 또는 묘사하는 역사와는 달리 개연성을 모방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 개연성이 문학의 허구성을 정당화한다고 하였다.”( 이상섭 34쪽)   문학이론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부터 본질상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방법론에 관한 학문적 체계라는 뜻이다. 문학에 관한 이 같은 인식과 개념이 서 있지 않을 때는 문학에 관한 일체의 일이나 말들이 모두 무용한 것이 되거나 심각한 오류가 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영역(領域)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않거나 왜곡(歪曲) 되었을 때는 문학적 기법에 의한 문학 본연의 미적 정신세계를 이해하거나, 연구를 할 수 없으며, 역사 · 철학이나 신화 등 문학의 외적 주변이나, 다른 예술과의 상오침투나 수용현상을 직시 할 수 없게 되어, 문학의 고유한 영역에서 이탈해서 문학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쉽다.” ([문학개론] 구인환 구창환 공저 삼영사 14쪽)   예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상상적ㆍ허구적 창작을 의미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상적ㆍ허구적 창작론에 근거하지 않은 음악론이나 회화론이 있을 수 없듯이 문학론 또한 창작론에 근거하지 않은 문학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게 된 몽태뉴의 (비창작)에세이 문학도 창작론에 근거하여 비교한 결과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 같은 창작론에 근거한 현대적 수필문학의 개념이 다름 아닌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론과 관계가 없는 문학이론이란 성립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도 아니고, 이지도 않은 글은 문학인들이 말하는 문학 권 밖의 광의적 의미의 문학에 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학권 밖의, 즉 창작론적 비평대상이 되지 않는 광의적 문학의 대표적인 양식 가운데 하나가  물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도 창작문학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1백 년 동안이나 문학 이론적 혼란과 혼돈에 허덕여 온 수필문학의 숨통을 마저 조이는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사태야 말로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이 문학적 가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다.   2) 창작 개념은 본질상 신적 창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흔히 자연에 대한 모방이라고 이해한다. 사람 혹은 자연이란 무엇인가?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서구 정신문명을 헬레니즘 시각에서 보든 헤브라이즘 시각에서 보든 그 배후에는 신(神) 사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헤브라이즘의 뿌리가 되는 성경은 명확하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적고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1절)   이렇게 볼 때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이 실은 존재론적 입장에서 전개한 창작론적 모방론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학작품을 존재론적으로 처음 체계 있게 논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이상섭 상동 165쪽)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훗날 다른 문학학자들에 의해서 신적 창조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새로운 해석을 낳게 된다.   “시인은 창조자라는 생각이 가장 명쾌하게 전개된 글은 필립 시드니의 이다. 그는 시, 즉 포에시스(poesis)의 원의인 ‘만들다’는 말을 기독교적 창조의 의미로 굳힌다.” (이상섭 상동 135쪽)김동리 선생이 ‘우리에게 창작이란 고유한 개념이 없었다’라고 할 때의 그 창작개념이란 바로 신적 창조개념에 근거한 창작개념이 없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창작’이라는 단어의 신적 창조 개념에서 몰톤(R.G. Moulton 1848~1924)의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창조적인 문학”이라는 개념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개론] 조연현 정음사 46쪽) 그렇다면 문학적 창작개념은 분명해 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신적인 창조를 할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창조는 오직 상상력에 의한 상상(허구)적 창조뿐이다. 그렇다면 문학창작이란 ‘상상적 존재’, 즉 실체가 아닌 ‘형상적 존재’를 만들어 내는 예술작업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재현(representing), 꾸며냄(counterfeiting), 형상화(figuring forth)다.”라고 하였다. (이상섭 상동 42쪽) 무엇을 어떻게 재현하고 꾸며서 형상화한단 말인가? “시는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능가하는 상상적 및 이상적 세계의 모방이다.”라는 것이다.(동상) 즉 문학창작이란 상상적 대상ㆍ사물ㆍ존재를 만들어 내는 예술작업이라는 뜻이다.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서구 문학이론의 시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부터 상상력의 형상적 존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 작업을 의미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학작품은 그 자체가 유기체적 구조를 갖춘 존재론적 구조물이어야 하고, 또한 그 작품 안에는 작가가 만들어낸 존재론적 사물ㆍ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비로소 창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구체적으로 형상이다.” (문학개론] 백철 신국문화사 61쪽)   “형상화란 모양을 지니지 못한 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가리킨다. 일정한 테두리를 이루고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이름이 허용되지 않는다.” ([현대시 원론] 김용직 한연사 46쪽)   ‘일정한 테두리를 이루고 형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에 대해서 예술작품의 이름이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말은 수필처럼 ‘이미 있는 것’을 소재로 삼아 토의적 양식의 진술ㆍ서술을 하는 문학을 놓고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몰톤이 문학에는 특질을 달리한 두 개의 직능의 것이 있다고 지적하고, 하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詩)의 문학(창작문학-필자주)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한 것을 토의하는 산문문학이라고 설명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견해이다.” ([문학개론] 조연현 정음사 98쪽)   기존한 것, 즉 이미 있는 것에 관하여 토의하는 양식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수필(에세이)이다. (조연현 상동 100)   3. 창작 방법론   창작방법론에 관해서는 세 가지 대표적인 방법론을 생각 해 보고자 한다. 그 첫째는 구성론이고, 두 번째는 상상론, 세 번째는 문장창작론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문학창작 현장에서 각기 떨어져서 다른 기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성론이란 곧 상상론이자 문장창작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구성이라는 것은 자동차 조립 같은 기계적인 부품조립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은 각기 다른 공장에서 만들어낸 각기 다른 부품들을 제 자리에 맞추어 조립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창작의 구성작업이란 상상적 구성작업을 의미 하는 것이고, 상상적 구성이 유기체적 구조를 갖춘 작품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필히 “문장으로 창조된” (조연현 상동 46쪽)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 항에서는 창작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세 가지 창작 방법론을 따로 항목을 나누어서 논하고자 한다.   창작 방법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것은 ‘문장 구성론’과 ‘창작 구성론’은 전혀 다른 개념의 말이라는 사실이다. 문장 구성론이란 문장에 관한 학문, 즉 문장론에서 말하는 문장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창작 구성론은 문장법에 맞는 문장 만들기가 아니다. 사실의 소재를 가지고 사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문장 세계를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서의 문예창작법인 것이다. 바로 그 같은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으로서의 구성법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 본 항의 목적이다.   1) 구성적 창작론   (1)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   플라톤을 흔히 서구 학문의 시조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문학 이론의 시조라는 뜻은 곧 문학 창작론이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연 현대문학 창작론의 시조라면 당연히 그의 창작론에서부터 창작론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른 공부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과 플라톤의 모방론은 반대 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예술은 단순히 자연을 흉내 내는, 즉 모사(copy)일 뿐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예술무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대상에 대한 단순한 모사가 아닌 ‘재현(representing)’을 넘어 ‘꾸며냄(counterfeiting)’이며, 꾸며냄이란 구체적 ‘형상화(figuring forth)’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은 창조적 모방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설명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고 이상섭 교수는 설명한다. (이상섭 상동 20쪽)   첫째, 창작이란 묘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리를 절름거리며 뛰어간다”는 식의 묘사는 창작이 아닌 묘사, 즉 copy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같은 묘사법이 창작 작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을 뿐 창작방법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묘사만으로는 창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수필문학교실이라는 곳에서 가장 많이,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거의 유일하게 하고 있는 강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문장에 관한 언급인 줄로 안다. 예를 들면 학생들이 써 온 작품을 놓고, 제일 많이 지적하고, 문제 삼고,그리고 토의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이 문장은 이런 점이 이렇고, 저 문장은 저런 점이 저러하니, 이점은 저렇게, 저 점은 이렇게 고쳐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문장법’이 수필문학 교실에서 하는 공부의 전부가 아닌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문장법’은 문학공부의 보조수단은 될 수 있지만 문예창작법의 본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이 잘 되었을 뿐 창작한 것도 없고, 창작적이지도 않은 글을 놓고 ‘창작’ 운운하는 것은 문학적 오류일 뿐인 것이다.   둘째, 창작이란 개념적ㆍ추상적 생각이나 사상의 진술ㆍ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개념적 서술은 오히려 창작에 전적으로 대립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는 개념적 서술은 현대적 개념에 의하면 다름 아닌 몽테뉴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으로서의 에세이문학 양식인 것이다. 곧 조연현 교수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로 “기존한 것을 토의하는 일반산문문학”인 것이다.   세 번째로, 창작이란 ‘하나의 독립된 전체적 형상’으로서의 구체적 형상 창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섭 상동 20, 169. 170쪽) 그렇다면 그 ‘구체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 무엇이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라고 대답한다. “유기체는 부분들의 특수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전체를 말한다. 그런데 이 전체는 부분들이 하나로 결합되게 하는 원리인 까닭에, 개체의 부분은 전체에 속하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이러한 상보적 관계에서 파악해야 된다. - 그러니까 플롯은 부분들로 하여금 전체를 이루게 하는 근본원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섭 상동 166쪽) 여기서 말하는 부분들이란 한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사건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플롯이란 다름 아닌 그 사건들의 창조적인 배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건들이란 ‘무질서한 인간행위’ 즉 소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건들의 배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배열은 어떤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기 위하여 부분들을 의미 있게 엮어 짜는 것을 뜻한다.” (이상섭 상동 21쪽) 소재의 부분들이 창조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려면 자연 사물로서의 유기적 관계가 아닌 문학작품으로서의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필연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이 같은 문학작품으로서의 필연적 구조를 갖춘 하나의 전체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플롯이 곧 창작 구성론이라는 것이다. 즉 창작 구성론은 문법상의 문장법과 다른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질서한 인간행위’, 즉 사실의 소재가 플롯에 의하여 새로운 세계로 탄생하게 되면 그 탄생한 작품세계와 사실의 소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 같은 의문이야 말로 특별히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대답을 ‘개연성(蓋然性 · probability)’에 두고 있다. 개연성이라는 낱말의 국어사전 뜻풀이는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이라고 되어 있다. 문학에서 그럴 것이라는 가능성의 이야기라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가? 허구적 상상력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문학작품이 개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거기에 허구(fiction)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개론] 정한모 김용직 23쪽-이상섭교수의 말을 인용) 따라서 플롯화란 곧 상상력화, 즉 허구화 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창작이란 사실의 소재를 가지고 사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 즉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예술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문학’이라는 말의 뜻은 수필은 허구는 아니지만 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실제 행위(사실의 소재-필자주)를 재료로 삼고, 그것을 플롯화 한다는 것은 곧 이 개연성을 성립시키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이상섭 상동)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와 시를 구분해서, 전자가 사실의 세계, 또는 오직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들을 기술하는 데 반해서 시는 있을 수 있는 세계, 혹은 있음직한 것들을 그린다고 했다.” ([현대시원론] 김용직 학연사 27쪽) 따라서 사실의 소재가 플롯화 된 후에는 소재와 작품과의 관계는 1:1의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문학창작법의 본질적 방법은 문장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작 구성법(플롯)에 있는 것이다. 문장은 문학창작의 재료이다. 재료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창작물이 되는 것이지 재료 자체가 창작물은 아닌 것이다.   논픽션 문학으로 분류 할 수도 있는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문학을 문학 권에 들여 놓게 된 이론적 근거는 에세이는 은 아니지만, 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수필양식의 대표적 형식 중 하나인 비평문학을 가지켜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문학을 가리켜서 곧장 논픽션이라고 하는 것은 창작문학 권내에 어렵게 한 발을 들여놓은 수필문학을 문학 권 밖으로 도로 쫒아내는 격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 같은 현대수필 문학의 개념에 의하여 만약에 수필계의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이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발언이라면 굳이 문제 삼을 것 까지는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다만 과 에 관한 이론적 정리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수필을 놓고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자신들의 문학이론적 정체성을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기존의 수필 개념은 지금도 ‘붓 가는 대로’로 되어 있다.   (2) 포스터의 구성론   포스터(E.M. Forster 1879~1970)는 먼저 옛날이야기 식의 서술법과 소설 구성법의 다른 점부터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한 사건의 서술(敍述)이고, 구성 역시 사건의 서술이지만 인과관계에 중점을 둔 것이다.” ([소설의 양상] E.M. Forster 정병조 역 신양사 94쪽) 옛날이야기의 기본 형태는 사건을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진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작문학으로서의 소설은 시간적 순서보다 인과율에 의한 구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그 실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도 죽었다”는 것은 옛날이야기 식의 서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고 하면 이것은 기본적인 구성작업이 된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가 그대로 살아 있기는 하지만 왕의 죽음과 왕비의 죽음 사이에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인과율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고차원적인 구성법은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포스터의 구성론이다. 즉,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신비를 간직한 구성법이 된다는 것이다.   ①옛날이야기 식의 서술에서는 왕의 죽음이 앞에 나왔고, ②기본적인 구성법에서도 왕의 죽음이 앞섰으나 인과율이 개입되었는데 ③신비를 간직한 구성법에서는 왕비의 죽음이 앞에 나서고, 왕의 죽음은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즉 옛날이야기 식 서술법에서는 사건과 사건이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진행 되었는데, 창조적 구성법에서는 시간적 순서가 깨어져 버리고, 그 대신에 사건과 사건 사이를 인과율이 개입하여 전개되어 간다는 것이다.   포스터는 자신의 구성론이 현대 문학의 대표적 형식인 소설 구성론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을 위한 플롯론과 다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포스터의 구성론이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고차원적인 구성법에 이를 수 있다는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있었던 사실’을 개연성의 ‘있을 법한 이야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필히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된다. 이 지점에서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신비를 간직한 고도의 구성법이 가능하게 된다는 포스터의 구성론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비극의 플롯 중에서 그는 역전(逆轉)과 발견을 제일 좋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는 그런 플롯이 가장 쾌감을 자아낸다고 본 까닭이다. (이상섭 상동 76쪽) 역전과 발견은 사실의 소재 속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리는 구성작업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식 수필의 서술법의 절대 다수는 옛날이야기 식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으로 된 글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은 창조적 구성법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창조적 구성법은 소재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야 가능한 일임에도 한국식 수필에서는 이 같은 창조적 구성법은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반해서 거의 모두가 시간적 순서에 의한 서술법의 작품들이라는 것이 기존의 수필 작법의 문제라는 뜻일 뿐이다. 이는 무엇을 말 해 주는가? 한국식 수필은 지난 1세기 동안 현대문학 이론의 창작론에 접촉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 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계의 ‘수필창작’, ‘창작수필’ 운운은 무슨 이론에 근거한 어떤 작품들에 대한 말인가?   2) 상상적 창작론   구성법이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야 말로 문학의 목적이며, 영혼이라고까지 하였다. (이상섭 동상 21쪽) 그러나 현시대의 창작론에서는 구성론과 함께 상상론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로 창작방법론으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시는 오직 상상이다.” (해즐리트)   “시는 상상의 표현이다” (셸리 이상섭 상동 153, 154쪽)   “모방은 보이는 사물을 만들어내지만 상상은 보이지 않는 사실에까지 나아가서, 그것을 실재의 표준으로 삼는다.” (플라비우스 필로스트투스 -이상섭 상동 132쪽)   이 같은 상상력이 문예창작의 중요한 방법과 능력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워즈워드도 모방의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 -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방 위에다 ‘상상의 빛깔을 입힘으로써 비속한 사물이 특이하게 나타나도록’ 했다고 말한다. - 낭만주의자들이 이 괴력을 가진 상상을 최고로 존귀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상섭 상동 62,63쪽)   그렇다면 문학창작에서 말하는 상상이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상상력은 현재의 직관에 과거의 경험을 이끌어 들여 고리로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자연이 결합시켜 놓은 것을 해체하기도 하고, 해체시켜 놓은 것을 결합하기도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앞의 지적은 최재서의 견해이고, 뒤의 것은 베이컨의 지적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상상력은 무엇과 무엇을 관련지어 고리를 걸어 엮어내는 작용을 하는가 하면 해체와 결합을 동시적으로 하는 정신적 그리고 시적 능력이다. ([21C 시 창작법] 박진환 조선문학사 71쪽)   구성이란 사건들의 배열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건들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오직 이미 있었던 사실 즉 소재에서만 와야 하는가?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현대문학의 창작론은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는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장편소설도 써 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는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장편 소설도 엮어 낼 수 있는 그 수많은 사건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대답이 바로 상상력에서 온다는 것이다.   “시인을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 내는 자인 까닭이다. 포에트(poet)라는 이름은 바로 ‘만드는 자’를 뜻한다. 운문을 지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시에 합당한 소재(상상적 사건-필자주)를 만들고 꾸며내기 때문에 그는 시인이라 불리운다. 만약 이미 만들어진 사실을 취급하고 새것을 꾸며내지 않는다면 시인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 (지랄디 친티오 -이상섭 상동 134쪽) 이미 만들어진 사실을 취급하고 새것을 꾸며내지 않는다면 시인, 즉 ‘作家’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에 해당하는 문학이 무엇인가? 논픽션 작가들인 것이다. 논픽션 작가들도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관습상의 일일 뿐이다. 문학 이론상으로는 논픽션 작가는 ‘poet’, 즉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作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의 ‘作家’가 아닌 문필가일 뿐인 것이다. 대한민국 수필가들은 작가인가 문필가일 뿐인가? 수필은 논픽션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은 침묵으로 회피하여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수필과 인품은 일치’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대로 투명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1) 상상과 공상   상상은 공상, 망상, 환상, 몽상과는 다른 것이다. 흔히 환상이나 공상, 심지어 몽상조차도 상상력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학이론에서 말하는 상상론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공상(空想)이라는 말의 뜻은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막연히 상상함.”이라고 되어 있다. 또 망상(妄想)은 ‘이치에 어그러진 생각’, 환상(幻想)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느끼는 상념’, 몽상(夢想)은 ‘꿈같은 헛된 생각을 함’이고 되어 있다. “공상은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되어 나온 기억의 한 형태에 불과할 뿐,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코울리지 [공상과 상상력] R.L. Brett저 심명호 역 서울대학출판부 61쪽)   상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질서, 즉 경험에 근거한 ‘있을 법한’ 개연성의 세계를 미루어 생각하는 정신작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상, 몽상 등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따라서 보편적 이치에 어그러진 막연한 생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문학이란 공상도, 망상도, 환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학이란 경험에 근거하여 있을 법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인 것이다. 즉 문학이란 인류의 영원한 실현 가능한 희망의 깃발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공상, 몽상 등이 상상력과 다른 것이라고 해서 문예창작과 관련이 없거나 배척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로이드는 백일몽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이명재 김흥식 157쪽) 바슐라르는 몽상 혹은 상상력의 창조적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진형준 38쪽)   (2) 문예창작법의 상상력   박진환 교수는 상상력을 실제 시창작법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① 1차적 상상 : 재생상상(기억의 단계)-경험에 근거한 예술적 상상력의 초기 단계(필자주) - 이미지를 성립시킨다.   ② 2차적 상상 : 연합상상(연상상상)-본격적인 창작단계로의 진입(필자주) - 비유를 성립시킨다.   ③ 3차적 상상 : 생산적 상상(창조적 상상)-완성적 창작 단계(필자주) - 마술적이고도 통합적으로 작용, 창조적 경로로 시를 성립시킨다. ([현대시론] 박진환 조선문학사 35쪽)   구성과 상상력의 관계를 뼈와 살의 관계로 예를 들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동물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뼈의 생김새다. 뼈의 구조가 네 발로 기어가게 되어 있으면 아무리 살을 다른 모양으로 덮어보려 해도 결국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의 모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 발로 직립하여 걷게끔 되어 있는 뼈 위에 아무리 네 발로 기는 짐승모양으로 살을 붙여도 결국은 직립하여 걷는 모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문학의 상상력과 소설문학의 상상력, 그리고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세계도 각기 다른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약에 시와 소설과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세계가 다르지 않다면 이는 짐승의 구조로 되어 있는 뼈대 위에 사람의 맨살을 입히는 결과가 될 것이고, 반대로 사람의 뼈 구조로 되어 있는 구조물에 털이 부성한 짐승의 몸을 입히는 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장르 문학의 구성법이 그 문학의 특성을 따라 다소간에 다를 수밖에 없듯이 상상력의 세계도 각기 다를 것은 당연한 일이다.   ① 시적 상상력의 세계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치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아서 모두가 정답이면서 또한 하나의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이란 어떻게든 움직이며 생활하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고금동서를 불문하고 동일한 삶의 양상이듯 시란 본질상 노래라는 사실 또한 부정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를 노래라 할 때 우리는 즉시 노랫말과 일상어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랫말은 언어 자체의 특수한 용법에 의하여 일상어와 다른 언어가 되기도 하지만 설사 일상어 그대로를 노랫말로 불러도 여전히 일상어가 아닌 노랫말이 되는 까닭은 노래에는 일상어에는 없는 음의 높고 낮음과 장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시어가 과연 일상어가 아니라면 그 같은 시어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의 세계도 당연히 시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시적 상상력의 세계는 창조적 언어 상상력의 세계라는 것이다.   시인들은 언어를 새로운 방법으로 요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날마다 똑 같은 쌀밥을 먹고 사는데 시인들은 쌀을 가지고 나무도 만들어 먹고 별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가지고 어떻게 나무도 만들어 먹고, 별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가?   정현종 시인은 ‘구름’이라는 시에서 “여러 해 전 새재 골짜기에서/구워먹은 구름 생각”을 했다고 쓰고 있다. 구름을 어떻게 구워 먹는가? 현실에서는 순 공갈빵일 뿐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가능한 일이다.왜? 시의 세계란 창조적 언어의 상상력 세계이기 때문인 것이다. 시어는 본질상 상상적 존재인 것이다.(사르트르)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언어의 상상력이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시를 감정의 표현이라고 알고 있는데 감정이나 정서만으로는 참 시 다운 시를 창작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문학의 창작론이다. 시의 본질은 창조적 언어로서의 존재론적 상상력에 있기 때문이다.   ② 허구적 서사(소설) 상상력   포스터는 ‘소설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였다. 소설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한다. 하나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구성하여 얽어 짜서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은 반드시 허구적 이야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서사는 구상작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허구적 서사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필자의 작품 중에 만원전철에서 차가 기우뚱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품에 안겼던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필자의 작품은 창작문예수필작품이므로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았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소설가는 작품 집필에 들어가기 전 구상단계에서 ‘만원 전철 여인’이 아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 다른 이야기란 상상이 가능한 천태만상의 이야기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중에서 만약에 요즘 막장 방송극 욕을 먹고 있는 천편일률적인 태생의 비밀 이야기를 또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면, 전철에서 품에 안겼던 여인은 이난성 쌍둥이의 기적적인 만남으로 설정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철에서 차가 기웃둥 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품에 안겼던 낯 선 여인에 대한 수필 문학적 감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소설적 상상력과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의 다른 점이다. 소설 서사는 사건 자체를 허구적으로 꾸며내는 상상력의 서사이고, 창작문예수필의 서사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문학적 교감이라는 상상력의 서사다.   ③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 세계는 대상ㆍ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 세계다   창작문예수필의 상상력 세계는 시적 언어 창조의 상상력 세계도 아니고, 소설적 허구적 서사 상상력의 세계도 아니다. 소설적 서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이야기라는 것이 기본 창작 양상이다. 즉 소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나 생각이 창작발상이 되는 것이 기본 창작 양식인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아닌 동물과의 관계도 있지만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라는 기본 양식의 변형이지 동물과의 관계가 소설 서사의 본령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사람뿐만이 아니고 삼라만상 모두를 대화의 상대로 삼는 창작발상의 문학예술이 있으니 곧 창작문예수필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우주 삼라만상하고도 대화를 나눈다. 삼라만상과 나누는 대화의 대표적인 형태가 무엇인가? 밤하늘의 별과, 숲속의 나무들과, 그리고 이른 아침의 새들과의 대화, 즉 사물ㆍ존재와의 교감인 것이다. 또 그 같은 외적 사물ㆍ존재와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내면하고도 대화를 나눈다.   필자가 자주 예로 들고 있는 망자와의 대화는 현실의 사실적인 대화가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부정 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누가 망자와의 대화를 놓고 ‘소설 쓰고 있네’라고 하는가? 이것이 소설적 허구 서사 상상력과 창작문예수필의 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 세계의 다른 점이다.   3) 문장 창작론   필자는 과 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필자가 말하는 문장 창작론이란 위에서 말한 창작 구성론에 의한 창조적 문장 세계를 만들어 내기 위한 ‘창작론적 문장술(術)’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장론이란 학계일반이 말하고 있는 문장론 즉 문법상의 문장론을 의미한다.   (1) 창작론과 문장론의 관계   문학의 재료는 글로 된 언어다. 즉 문장이 문학의 재료다. 문장이 문학의 재료라는 말은 나무가 의자의 재료라는 말과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가 있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명확하게 분별하고 이해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나무를 매끈하게 잘 다듬어 놓아도 의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 문장이 좋아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말 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문학을 한다면서 오직 하나의 재료가 되는 문장을 잘 다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왜 수필문학교실이라는 곳마다 그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가? 필자는 수필문학교실에서 좋은 문장을 너무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문장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는 사상에 필자는 백프로 동의한다. 필자가 불평하는 것은 수필문학교실에서 강조하는 것은 ‘좋은 문장론’ 뿐이기 때문에 그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나무가 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의자가 될 수 있는 구조물로 짜서 맞추어야지만 비로소 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문장이라도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학작품으로서의 구조를 갖춘 문장세계가 되어야지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필문학 교실이라는 곳에서는 좋은 문장만 강조하고 있으니 1백년이 지나도  작품이 생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의자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나무를 잘 다듬을 줄 아는 솜씨는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의자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의자 만들 것을 포기 할 것인가? 필자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나무를 다듬는 솜씨는 아직 좀 거칠더라도 의자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게 하는 것이 백번 나은 일이기 때문이다. 의자에는 몇 백만원짜리 고급 의자도 있지만 공원이나 등산길에서 쉬어 갈 수 있는 통나무 의자들도 있다. 통나무 의자는 자연 상태에서 크게 변형되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목재다. 그러나 의자로서의 구조를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것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설사 좋은 문장과 좋은 구조 둘 다를 갖출 수 없다 하더라도 필자는 끝까지 문학 창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세기 동안 수필문학이라는 것은 좋은 문장만 강조하다가 문장도 놓치고 문학도 놓치는 그야말로 게도 구럭도 다 놓친 격이 되고 말았다.   창작론은 문장론이 아니다. 문장론은 창작론의 필수 항목일 수는 있지만 문장법이 곧 창작법일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많은 경우 문장법은 창작론에 치어 파괴 되거나 변형, 조작되거나 무시 될 때도 있다. 이상(李箱)의 시작법에서는 문장법의 기초가 되는 띄어쓰기조차 무시되고 있다. 그리고 숫자마저 거꾸로 박아 놓고 창작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이상의 이 같은 창작법이 문장법에 어긋난다고 해서 문학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문장법과 창작론의 다른 점인 것이다.   문장은 문학의 재료다. 그러므로 좋은 문장법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문장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곧 창작법인 것이다. 시 창작은 본질적으로 기존의 일상적 문장법을 파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현대 시의 창작론이다.   (2) 창조적 문장술 “창작문학은 시에 속하는 문학으로서 그 문장 형식 여하를 불구하고 하는 창조적인 문학이 된다. 그것이 한 인물의 창조든 어떤 사건 하나의 창조든, 문장으로서 창조된 내용은 그것이 역사상의 그것에 일치하든 않든, 그것이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신의 창조에서 마련된 우주의 한 부분과 똑 같은 의의를 갖는 것이 된다.” (조연현 상동 46쪽)   조연현 교수가 말하고 있는 “문장으로 창조된”이라는 말의 ‘문장’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문장론에서 말하고 있는 문법상의 문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장 세계는 문법이 아닌 ‘문장으로 창조된 창조적 문장세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창조적 문장론의 실체가 들어난 셈이 아닌가? 즉 창조적 문장이란 문학적 대상을 구체적인 모양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형상적 문장술’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반드시 ‘있을 법한 상상적 문장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 유명한 이상의 [烏瞰圖] 첫 행은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이다. 문장법의 기본이 되는 띄어쓰기조차 파괴하고 있다. 이상의 이 같은 문장법 파괴의 문장은 무슨 문장법인가?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문장법을 파괴해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적 문학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형상적 문장술인 것이다.    
276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댓글:  조회:2231  추천:0  2018-03-25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1 보들레르와 교감            샤를르 보들레르(1821-1867)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재혼한 어머니와 독재적인 양아버지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문필가라는 직업에 대한 희망을 단념시키기 위해 가족은 19세의 그를 강제로 상선에 태워, 그는 모리스섬과 레위니옹섬을 유랑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와 그는 댄디즘의 이상을 추구,호화판 탐미생활에 빠져들고,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며 비참한 보헤미안 생활을 한다. 이때 흑백 혼혈의 무명 여배우 잔느 뒤발과 악연을 맺었으며 이는 그가 관능적인 시를 쓰는 계기가 된다.    그는 1841년서부터 1857년에 발간될 의 시편을 쓰기 시작한다. 1848년 혁명으로 신문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는 문학 비평과 예술 비평을 쓰기 시작하고, 1860년에는  이라는 산문시를 발행한다.    그러나 그의 은 발간되자마자 소송에 걸렸고 6편의 시는 종교와 풍속을 해친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으며 삭제명령과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반신마비와 실어증 상태에서 46세로 사망한다.      은 시인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룬다. 거대한 건축물처럼 일관된 의도로 구성된 이 시집은 원죄의식에 의한 고뇌, 순수미의 추구와 하강과 타락의 취미, 죽음에 대한 의식 등의 심리가 순수하고 에로틱한 사랑과 복잡하게 섞여있다    내밀한 정신성으로 일관된 은 근대시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며 현대를 열어주었다. 초판은 서시 외에 100편의 시를 수록하고 77편, 12편, 3편, 5편, 3편의 5부로 되어있다.    제목 자체가 악과 꽃을 결합시키며 모순어법을 택하고 있는 이 시집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상과 심연 사이에서, 쾌락과 추락의 유혹, 그리고 퇴폐와 증오와 고뇌 사이에서 보들레르의 내면이 겪는 모순의 아픔들을 그리고 있다. 삶이라는 커다란 악속에서 자아는 모순되게도 삶의 황홀과 '지고의 아름다움'을 찾아 줄타기를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시집 전체는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분열된 자아의 이원성의 드라마이다. 보들레는는 이렇게 서구시에서 거의 최초로 심연, 즉 심층적 자아 속으로의 탐사를 시화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은 "보들레르의 삶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것이다"라고(Maynial, 1973;317). 그러나 처절한 분열과 갈등과 모순에 찬 그의 삶과 시는 사실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보들레르는 에드가 포우의 훌륭한 번역가로서, 그에게서 언어를 구조화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낭판파, 고답파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의 시는 베르렌, 랭보, 말라르메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의 무의식의 심층은 언제나 자신의 섬세한 분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언어와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와 추종 불가한 감각과 통찰력과 상상력과 미의식은 추상성과 관능성과 음악성을 통하여 혁명적으로 시의 지평을 열었다.         자연은 사원, 거기 살아있는 기둥들은       가끔씩 혼동된 말들을 쏟아낸다.       사람은 거기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가고       숲은 그를 친숙한 눈길로 물끄러미 보네.       멀리서 섞여 어울리는 긴 메아리처럼       밤처럼 빛처럼 광막하게,       칠흑 속에 깊게 하나 되어,       향기와 색깔과 소리는 어울려 퍼지네.           어린아이 살갗처럼 풋풋하고,       오보에처럼 부드럽고 초원처럼 푸른 향기가 있고       또 썩고 짙고 강렬한 향기도 있어,         용현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사물들로 퍼져나가,       정신과 감각의 환희를 노래하네.                                             상징주의 문학이론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교감(交感 correspondance)'라는 개념이 있다. 조응 또는 만물조응(萬物照應)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사실 만물 간의 조응에에서 출발한다기보다는,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이 여러 감각 간의 내밀한 경계를 허묾으로써 시작한다. 위의 시에서 "향기는 색깔과 소리는 어울려 퍼진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감각들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된 그 무엇이 확산된다는 말이다.    감각들 사이의 의도적인 혼동은 이어서 언어의 관습 허물기, 마침내 인식 대상이나 사물들 사이의 벽 허물기로 이어진다. 이 3단계는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이제 셋째 연에서 향기는 촉감과 소리와 색깔을 지니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공감각 작용을 통한  통합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틀에 박힌 사물인식법과 감각을 바꿈으로서 가능하다. 기존의 이미지나 인식이나 감각의 형식은 이 시에는 이미 허물어져있다.    이러한 교감에는 어떤 가정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이는 현실은 내면에 존재하는 생각이나 감정이나 이상에 비하여 '거짓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상징시는 이 가상을 허물고, 외면을 이루었던 원소들을 재조합하여 또 다른 차원이나 공간을 제시하고자 한다. 위의 시에 나타난 외적 지지대, 즉 숲, 사원, 기둥 등은 이미 현실의 기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구조물들이다. 사물들은 이미 눈에 보이는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표면 뒤에 자리하는 이상적 형태들의 상징들로서, 거대한 '상징의 숲'을 이루어 낸다.    위의 시에 나타난 감각을 다루는 보들레르의 새로운 방식은 사물에 대한 다른 상상체계를 열어주었다. 사물 인식에 있어서 '감정의 자연스런 유로'라는 낭만주의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그는 사실은 감각들을 분석하고 통합하고 변형하는 작업을 밀고나간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의 뒤섞임 등, 감각들의 통합과 융해와 감각 차원의 다양화는 대상들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와도 동시에 감응하여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주적 유추관계'를 파악하기에 이른다. 시인은 관계들의 수수께끼를 읽어내는 '해독자'가 된다.    향기,색채, 음향 등 여러 가지 감각 내용들이 등가관계를 이루도록 '수평적 교감'이 즉 공감각이 이루어질 때, 시인에게는 다른 공간이 열린다. 세계의 광대한 열림이란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개안(開眼)이 되는 것이다.  열린 감각의 새 차원에서 얻은 통찰력으로 시인은 예언가처럼 사상(事象) 뒷면을 읽어내고 우주를 해석해낸다.    삶은 이제 더욱 가까이 그 본질을 드러낸다. '혼동된 말'들은 울림과 깊이로 다가오며 그것을 이해하는 자는 '상징의 숲'을 자연스러이 가로질러 지나간다. 이 새롭게 형성된 공간은 존재감이 극대화될 수 있는 감각 능력에 도달했다는 말이며, 상징의 새로운 공간에 '사람'이 익숙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감각 훈련을 통해 얻은 통찰력과 이해력이다. 시선의 힘에 의해서 공간은 확장되고 축소된다. 무한한 확산도 가능하다. 현상적 외관 저 너머 기호와 상징으로 변한 초자연적 세계- 감각을 지녔다는 것은 이미 그 통로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소통의 열쇠는 은유와 '아날로지(유추類推)' 속에 있다.    이제 사람은 우주와 "칠흑 속에 깊게 하나 되어"있다. '칠흑 속에 하나'라는 것은 무의식 심층까지도 통하는 통일이다. 시인은 하나의 작은 징조로 우주를 알아보게 된다. 이파리 하나로 우주만상을 알고 자연의 비밀스러운 흔적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삶으 내려다보며, 힘들이지 않고       말 없는 꽃들과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자여.                                                                                               (상승)        여러 감각들 간의 교감이라는 보들레르 시학의 독창적 양상이 두드러지는 시 에서, 시인은 색채와 후각을 음악과 언어와 결합시키는 정교한 모험을 시도한다.           이제 다가오네 줄기 위에 떨며       꽃송이마다 향로처럼 향기 내뿜는 시간이       소리와 향기들은 저녁 공기 속을 떠도나니       우울한 왈츠여 나른한 현기증이여!         꽃송이마다 향로처럼 향기 내뿜고       바이올린은 상심한 가슴인냥 전율하네       우울한 왈츠여 나른한 현기증이여!       하늘은 커다란 제단 같이 슬프고 아름답네.         바이올린은 상심한 가슴인양 전율하네       넓고 검은 허무를 증오하는 다정한 마음이여!       하늘은 커다란 제단 같아 슬프고 아름답네.       해는 얼어붙은 제 피 속에 빠져죽었으니..           넓고 검은 허무를 증오하는 다정한 마음은       빛나던 과거의 잔해를 모두 거둬들이네!       해는 얼어붙은 제 피 속에 빠져 죽었으니,,       내 속에 그대 추억의 성체합처럼 빛나네!                                                                                                      (저녁의 조화)        시인에게 오랜 도안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정신적 여인 사바티에Sabatier 부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이 시에서, 그는 내면 차원보다 현실 차원에서 만물조응이라는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조화(調和)'란 '소리와 향기들'이 섞여 떠돌면서 영상시키는 색채와 움직임과형태들('제단' '성체합')의 마술이 사랑에 대한 회한을 주문처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소리와 얗기들이 떠돈다'는 것은 소리와 향기가 형태들과 색채로 연결되면서 빚어내는 환기술같은 것으로, 이 환기술은 사랑에 대한 회한과 연결된다.    '팡툼(pantonm)'은 보루네오 지방이나 말라카 반도의 토착적 양식으로 낭만주의자들이 이국적 색채와 지방색을 표현하기 위해 차용해서 쓰던 4행의 시구로 이뤄진 시형을 말한다. 시에서 각 연의 2, 4행은 다음연의 1, 3행에서 반복되고, 다시 마지막 행은 시의 첫 행을 반복하며 시를 종결시키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 시는 팡툼을 엄격하게 따르지 않아 첫 행이 마지막 행에 나타나지 않으며, 그 변형이라 하겠다.    겉으로 보면 이 시는 소박한 정경 묘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석양, 꽃향기, 바이올린 소리 등의 몇 개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빛나던 과거의 잔해' 마지막의 "내 속에 그대 추억으니 성체합(聖體盒)처럼 빛나네!"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시 시는 시의 의미와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리듬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독자는 시인의 내적 춤에 동참하게 된다. 이 시에서 반복적 기법은 여타의 움직임에는 무관한듯 시인이 자신의 태도를 견지하고 자족적인 움직임을 되풀이하게 하여, 생각의 원무(圓舞)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현기증이 의식을 독점한다. 계속되는 반복으로 의식은 비틀거리지만 쉬지 못한다. 소용돌이치며 도는 양식 때문에 주의력은 이리저리 교차하는 여러 움직임들에 이끌리고 어지러워져서 어디에 정착할지 헤맨다.    시의 마지막 행은, 계속 확장되며 피할 수 없는 어지러운 윤무를 벗어날 수 있도록, 전체의 중심을 잡아준다. '그대 추억'이라는 말로써 위의 모든 말들을 확인하고 정리하여 중심을 만든 후에, 같은 생각과 말들을 시 전체로 되풀이하며 확산시키는 효과다. 시적 자아는 잠시 스스로의 생각을 확인함으로써 쓰러지지 않고 원무를 다시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행들의 음악적 배치는 시의 본질적 테마를 시행 전체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잃어버린 과거의 행복에 대한 인상을 후각, 청각, 시각을 복합하여 호소함은 자아는 이 세상에 잡혀있다는 상황을 스스로에게나 독자에게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절망의 현기증 나는 되풀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로잡힌 자의 날개'라는 생각은 시인 속에 항상 자의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으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여행의 무심한 도행으로, 쓰디쓴 심연 위로       미끄러져가는 배를 따라가는 이 새를.                (-----)           '시인'도 이 구름의 왕자와 같아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를 비웃는다.       야유로 찬 땅 위에 그리하여 유배되나니,       거인의 두 날개는 걷지도 못하게 한다.                              (알바트로스)        현실에서 이상세계는 실현될 수 없고 시인은 '쓰디쓴 심연 위'를 줄타기한다. 조롱과 경멸 속에 세상과 유리되는 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분열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인공낙원'을 통하여 위안 받고자 한다.    그의 시는 에서 볼 수 있듯이 감각의 심층을 내보여주기도 하고, 에서 처럼 정신의 불분명한 영역을 열어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에서는 현실의 불운을 시로 그린다. 시인은 또 현실과 자신에 대한 절망과 그 속에서의 희망을 피력하기도 한다.           내 청춘은 칠흑의 폭풍우,       여기 저기 빛나는 햇살 스쳐갔으나       천둥과 바람이 어찌나 휩쓸었는지       뜨락에는 몇 개 주홍빛 열매밖에 남지 않았네. (---)                                                           (적)        그러나 그에게는 개인적 상징주의보다 초월적 상징주의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그의 시들은 초월적 국면을 강조하고 현실을 넘어서 이상세계를 통찰하려 시도한다. 에서 그는 과거의 사랑에 대한 추억 뿐 아니라 잃어버린 천국을 비통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향수는 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있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집착은 찬란한 꿈이 되어 빛을 발하기도 한다. 그곳의 고요함과 화려함, 그곳의 맑은 하늘과 질서는 자주의 그의 시에서 언급된다. 이상세계는 마치 살아있는 나라인 듯 그려진다.    시인은 이렇게 현실 너머 공간을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해 전달하는 존재가 된다. 시인은 '모어'를. 즉 "말없는 꽃들과 사물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잇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나, 이 지상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언어는 이 지상과 어울리지 않는 거추장스럽고 필요 없는 알바트로스의 날개처럼, 현실에서 무용하며 무상의 것이다. 그의 시집의 많은 부분은 이처럼 이상세계를 본 자의 희망과 절망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현실은 우울한 지옥과 푸른빛을 동시에 심연처럼 숨기고 있다.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2 베를렌, 회한의 선율          상징주의는 언어의 내용보다 '언어가 낳는 효과'를 중시하는 문학경향으로, 말을 의미있게 연결시키기보다는 말이 빚어낼 수 잇는 뉘앙스를 드러내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폴 베를렌(1844-1896)은 이라는 시에서 언어의 결, 죽 뉘앙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말의 사용에 음악의 특징을 도입하려 한다. 음악의 섬세한 환기술과 유연성을 시에 도입하여 시어의 해방을 노림으로써, 그는 상징주의 언어를 풍요롭고 새롭게 한다. 관념 속에 머무는 언어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살을 지닌 언어로 빚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음악을,       그러기 위해서는 '홀수각'을 택하라.       더욱 모호하게 노래 속에 잘 녹아들며       짓누르거나 멈칫거리지 않는 홀수각을.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 없으니.                 (----)          왜냐면 우린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이다.       '색깔'이 아니라 오직 '뉘앙스'를!        오! 뉘앙스만이 오직 결합시킨다네,        꿈과 꿈을, 플릇과 뿔피리를! (---)        음악의 리듬과 환기력과 조화의 힘은 언어와 결합하여 사물과 영혼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영혼의 상태'를 조성하고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홀수각의 언어와 '회색 노래'는 모호한 미결정의 영역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시는 정형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의 확산이 된다. 시인은 묘사와 인식의 기존 틀을 지움을써, 풍경을 극복하는 힘을 지니고자 하는 것이다    베를렌은 더불어 상징주의자들은 시구의 해방을 위한 여려 실험들을 하게 된다. 홀수각의 시에 이어 시구의 다양한 '걸치기', 자유시, 구두점 없애기, 페이지 개념 바꾸기, 산문시 등, 그 시도는 다양하다. 그러나 베를렌은 '자유화시'에 대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운문의 틀을 깬 것은 아니어서, 전통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시는 대개 상징주의 작품처럼 난해하지도 않았고 일반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문학적 야망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상'을 그려내는 능력에 뛰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현재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다. 밀착이라기보다 자신이 감정 속에 매몰되어 근본적으로 감정적인 시를 썼다 하겠다. 베를렌의 삶은 랭보와의 일화를 포함하여 저주와 비참함으로 점철되어있다.    베를렌의 알콜중독은 독주 압생트를 즐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마틸드와의 만남을 계기로 의 시편들을 쓰면서 안정을 찾은 듯하였다. 그러나 1870년, 17세의 마틸드와 결혼하였지만, 당시 17세였던 랭보가 여덟 편의 시를 베를렌에게 보내왔고 베를렌은 곧 그의 시에 매료된다. 그는 랭보를 파리로 부르고, 둘의 관계는 모두의 의심을 받게 된다. 그들은 벨기에와 런던에 일지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까닭으로 시를 찾던 두 사람은 방랑 끝에 충돌하기에 이른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베를렌은 랭보에게 총으로 쏘고 체포된다. 그들의 만남은 18개월만에 불화와 상처로 끝나고 베를렌은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 있게 된다.       라는 시가 씌어진 시기는 시인이 아내와 랭보 사이에서 이혼문제와 화해의 시도 등으로 흔들리고 있던 기간이다. 이 시는 처음에는 '무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나, 라는 동명 시집 속에서는 '잊혀진 아리에타'라는 제목의 9편으로 된 연작시 중 첫 번째 시로 실려 있으며, 무제이다.                                                                                        들판에 부는 바람이                                                                                                      숨을 멎는다                                                                                                            파바르 Favart              그것은 나른한 도취.         그것은 사랑 뒤의 피로,         그것은 미풍의 애무에 일어나는         숲의 온 전율,         그것은 회색 가지들 쪽으로 퍼져가는,         작은 목소리들의 합창.           오 가녀리고 무후한 살랑거림 소리!         그것은 속삭이며 소곤거린다.         그것은 물결치는 풀밭이         내뿜은 작은 외침소리 같아...         마치 굽음 물길 아래.         조약돌이 소리죽여 구르는 소리 같아.           탄식소리 숨긴 채         비탄에 젖은 이 영혼,         그건 바로 우리의 넋이지 않니?         나의 넋, 그래, 너의 넋이지 않니?          거기서 온화한 저녁 아주 나지막이         초라한 송가가 새어나오지 않니?        랭보의 의도적 착란과 광기, 환각에 사로잡힌 방랑과 일탈과는 달리, 베를렌은 내부의 멜로디를 향해 간다. 랭보의 공격적 주제 선택과는 달리, 그는 석양, 안개, 달, 비, 추억, 노래, 회한 등 소박한 것을 즐겨 소재로 택한다.이 시는 대부분의 베를렌의 시처럼 여성적인 섬세함이 두드러지며, 시인이 말하는 "'미결정(미묘함)'이 '결정(선명함)'과 뒤섞이는 회색 노래"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이 불투명한 풍경으로 펼쳐지지만 그것은 별개의 시공간이 아니라 자아가 행복해하거나 아파하는, 자아의 서정이 투영된 극히 주관적인 풍경이다. 결코 풍경은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영혼의 상태'를 대신 그려낸다. 미세한 소리들은 모두 숨죽여 영혼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들판이라는 공간 풍경 속에는 바람조차 숨 죽이고, 넋은 귀 기울여 존재에 대한 해답을, 즉 자신에게 남아있는 길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풍경에서 아무 것도 사실은 완전히 죽은 것도 완전히 살아있는 것도 아니다. 소리와 움직임은 하나가 되어,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가녀리고 초라하게 떨고 있다. 소리에 대한 묘사가 특징인 이 시는 거의 침묵을 강요당한 영혼에 대해 소리 죽여 외치고 있는 것이다. 소리나 노래의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있다.    베를렌의 시의 특징은 이렇게 회색 풍경 속에도 있고 회색의 노래 속에도 있다.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음악에 대해 생각하게 할뿐 아리나. 각각의 시어 또한 소리와 음악에 연결되어 있다. 시인이 영혼의 상처는 그대로, 소리의 풍경으로 전이된다. 영혼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로 바로 옮겨간다. 이렇게 그의 시의 기본 요소는 소리라 하겠다. 마치 랭보에게 색깔이, 보들레르에게 향기가 그러하듯이.    그가 '색깔이 아니라 오직 뉘앙스를'이라고 외쳤을 때의 뉘앙스란 새깔보다 소리의 뉘앙스이다. 랭보의 색깔과 그의 소리 사이에서 두 시인의 기질의 차이를 읽을 수 있겠다. 랭보와의 관계가 비극으로 끝난 뒤 베를렌은 과거를 지우기 위해 의 시편들을 쓴다.           하늘은, 지붕은 위로,       너무 푸르고, 너무 고요해!       나무는, 지붕 위로,       종려잎을 흔드네.          (----)         아니 , 이런, 삶이란 저런 것,       단순하고 평온한 것을.       평화로운 웅성거림       도시에서 들려 오네.         - 오 거기 있는 너, 넌 무얼 하였지.       한 없이 울어대며,       말해 봐, 거기 잇는 너, 넌 무얼 하였지,       너의 젊음을 가지고?                             몽스에서 출감한 시인은 신앙을 엿보기도 하지만 결국 여전히 폐인상태로 비참한 삶을 마감한다. 많은 사람들은 위의 시에서 종교적 신앙의 자취를 찾아내지만, 우리는 종교적 회한보다 오히려 가슴 치는 통한과 마주하게 된다.    시의 전반 3연들을 모두 마지막 4연에 대비시킴으로써 회한은 거의 오열이 된다. 1연의 나뭇가지의 고요한 흔들림. 여기에는 생략된 2연의 종소리, 3연의 웅성거림 소리는 모두 4연의 울음소리와 대비된다. 시인의 모든 신경은 이 시에서도 소리에 집중되어있다. 1,2,3연의 억제된 리듬은 마지막 연의 파격으로, 강렬한 아픔으로 돌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도 랭보이 것과 비교하면 대단하지 않다. 나약하다 할 정도로 그의 시는 결 고운 비단과 같다. 랭보가 자신의 열로 인하여 스스로 불타고 연소하는 형이라면, "베를렌의 것은 더 밀도 있고 관대하며 역광의 아름다움 같은 휘귀하고 미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랭세,1984;158)    그는 랭보처러럼 강한 자아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 하나 하나에서 '영혼의 상태'가 실려있지 않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어들이 결합되어 빚어내는 풍경은 언제나 마음의 풍경이어서, 좀체 자연과 인간은 분리되지 못한다. 랭보처럼 풍경을 이끌거나, 보들레르처럼 풍경 속을 드나듦이 아니라. 풍경을 아파하는 것이다.         힘 잃은 여명은       들판으로 쏟아붓는다       지는 해의       우울을.       우울은       달콤한 노래로       내 마음을 흔들어       석양에 나를 잃다.       모래톱 위로 저물어가는       태양빛처럼       이상한 꿈들,       진홍빛 유령들이       펼쳐진다, 쉬임 없이 (----)                                          그의 공간이란 두 시인들처럼 거리두기가 가능한 공간이 아니고, 장식있는 배경도 아니며, 자신을 고요히 쏟아붓는 공간인 것이다. 소리, 색, 미세한 떨림이나 움직임, 빛의 변화 - 이 모두가 오직 하나만을 향하고 있다. 풍경 속에 자아는 반복되어 투사된다. 시각에 따라 변하는 태양빛에 따라 자아도 변한다. 페이르는 이런 베를렌을 '인상주의 시인'이라 하였으며 마르셀 레몽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베를렌은 그 자체가 송두리째 하나의 자연이다. 매우 섬세하고 복합적인 자연, 여러가지 영향들을 이용할 줄 알지만 즉각적으로 주어진 자연, 근원적이며 삶 그 자체에서 직접 자양을 섭취하는 독창성의 자연이다. (Raymond, 1983;31)       따라서 베를렌의 시는 상징주의의 다른 거성들의 작품들과는 다리 난해성을 거의 띠지 않는다. 소박하고 꾸밈없으며 친밀하고 서정적인 특성들은 그의 구어체 어조에서 가장 빛난다. 그는 많은 상징주의자들처험 초월을 노래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초월적 상징주의가 결여되있다는 점은 그의 시의 결함으로 볼 수 있다. 보들레르에게서 볼 스 있는 천국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결여는 그에게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사실 그의 개인적 상징주의의 특성이자 장점이라 할 것이다.    그의 명성은 시형의 완벽성이 아니라 가사 없는 노래의 더듬거리는 시들로 더해졌다. 독자에게 호소력 있었던 것은 리듬의 근저에 있는 끝없이 상처 입은 영혼, 그것의 리듬 있는 넋두리였던 것이다. 모험이란 그에게 숭고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었으며, 문학은 사실은 그의 계획 밖의 것, "소위 문학이라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의 파격시와 그의 음악은 언어의 논리보다 내적 표현을 따르는 형식이었다. 그것은 어떤 유파의 논리에 머물지 않았다. 내면을 따라간 후에야 그의 이론이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                      (----)       그대의 시는 운 좋은 모험이기를,       박하와 백리향을 꽃피워가며       아침 찬 바람 속에 퍼져가는 모험...       소의 문학이라는 것은 나머지 것이다.                                             베를렌이 "짓누르거나 멈칫거리지 않는 홀수각"을 택하라고 하는 것은 운문을 형식의 제약들에서 해방시키라는 말이다. 언어의 무용한 중량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홀수각을 택하는 것이고, 종래의 문학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를렌의 거부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어떤 몸짓이었다. 그것이 그 나름대로 상징주의에 기여한 공헌이며 프랑스 시를 자연스럽게 전통에서 해방시키는 길이었다. 그는 각운을 완전히 폐기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3. 랭보와 '견자'의 길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1871년 베를렌의 초청을 받고 파리에 갔지만, 그들의 관계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다. 랭보는 결국 1873년 브뤼셀에서 만취한 베를렌의 총에 맞게 된다. 어머니의 농장이 있는 로슈로 돌아온 랭보는 지금까지의 생활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산문시 을 쓴다. 그러나 베를렌과의 작별에 이어, 1875년경부터는 문학과 작별하며 네덜란드, 자바, 북유럽, 독일, 이탈리아, 키프로스 등을 유랑한다. 상아밀매, 무기상, 모피상을 했으며, 이미 문학과는 절연한 것이었다. 1880년에는 일자리를 찾아 홍해의 모든 항구들을 찾아다녔으며, 그 후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서 교역에 종사한다. 1891년 관절염으로 프랑스로 돌아오며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변한 채 마르세유에서 37세로 사망한다.           나는 떠나갔네, 터진 주머니에 두 주먹 지르고       외투는 다 해져 거의 보이지 않았어.       나는 하늘 아래를 갔지, 시의 여신이여! 나는 그대의 신도였다네.       오 랄라! 찬란한 사랑을 얼마나 꿈꾸었던지!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났어.       - 꿈꾸는 엄지동자처럼 나는 길목마다 시를       뿌려두었지. 숙소는 큰곰자리에 두었고       -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드럽게 사르락거렸어.         그래 나는 길 가에 앉아 별들이 소리에 귀 기울렸지,       구월 그 아름다운 저녁에, 그때 이마에는       생명수 같은 이슬 방울들이 떨어졌어.         그 저녁, 나는 환상 같은 그림자에 싸여 운을 맞추며       터진 신발 끈을 잡아당겼네       칠현금인양, 가슴 가까이 한쪽 발을 대고서!                                              발을 칠현금에 비유하고 있다. 걸어가며 엄지동자처럼, 에서 처럼, 시를 길 어귀에 쏟아둔다. 칠현금 같은 발의 걸음마다가 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자주 회자되는 랭보의 시 중 하나로서, 이미 랭보의 분방한, 인습을 뛰어넘는 자유로움과 공격적 성향이 보인다. 베를렌 같은 조심스러움이나 약함은 찾아볼 수 없다. 베를렌이 그를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고 하였듯이 거침없는 그의 행보와 꿈의 뒤를, 시는 자연스레 뒤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풍경 속에 각인된 슬픔이라든가 풍경과의 갈등의 조짐은 없다. 이 방랑기는 1870년 말에 씌어졌는데, 랭보의 글쓰기는 16세가 되기 전인 1870년에 시작되어 1875년에 끝난다.    최초의 시를 발표하고 6개월도 되지 않은 1871년 5월에 랭보는 유명한 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프랑스 시를 '운을 지닌 산문'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의 시는 이처럼 반항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반항을 꿈꾼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옛날,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포도주들이 흘러내렸던 축제였다. 어느 저녁 나는 무릎 위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 그리고 그것은 쓰디쓰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그것을 모욕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 지옥의 계절)       계속되어 이어지는 반어적 문장들의 속도는 시인의 저항과 파괴의 강도를 예측하게 한다. 그는 기존의 가치와 원칙들의 거부에서 출발하며 온갖 신성모독과 잔혹과 거짓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반항은 맹목의 것은 아니었으며, 랭보는 부정의 끝에 하나의 해결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나는 타자다. Je est un autre'라는 유명한 선언으로 제시된 해법이다. '이다'라는 불어 동사는 1인칭 'suis'가 아니라 3인칭 'est'라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뜷어볼 수 있는 '견자見者'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파괴를 통해 객관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파괴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인은 모든 감각들이 오래고도 광범위하여 논리있는 착란에 의하여 스스로 견자가 된다. 사랑과 고통과 광기의 모든 형태들, 그는 스스로를 탐색하고, 자신 속에서 모든 독들을 다 소진시켜, 그 진수만을 간직한다. 이는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적 힘을 필요로 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형벌이다. (---) 왜냐면 그는 미지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1871.5.15)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미지未知'란 보들레느나 말라르메도 추구하던 공통의 목적지로서, 정신과 언어의 새로운 지평을 엶으로써 도달 가능하다. 미지에 도달하는 것은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경작하여' '이미 풍요롭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영혼의 단련과 스스로에게 의도적인 형벌을 가함으로써, 즉 모든 감각들의 미리 계획되 의도적인 착란에 의하여, 이미 이곳에 도달하였다는 것이다.    감각과 내적 훈련을 통한 정신의 해방은 먼저 스스로 '불량소년(voyou)'이 됨으로써, 즉 종교나 기존 사유체계 등,정신과 감각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주저 없는 파괴와 항거로써 가능하다. 질서와 그것의 구속, 기성의 행복과 사랑, 윤리, 종교, 요컨대 인간 정신의 그 어떤 산물이라도 내적 혁명의 대상이었다.              나에게. 나의 광기들에 가운데 하나에 대한 이야기.       나는 오래 전서부터 가능한 모든 풍경들을 소유할 수 있다고 자부하였고, 그림과 현대시의 명성은 하찮은 것이라고 여겼다.                                                        반항과 거부에 의하여 공간은 변모될 수 있는 것이다. 베를렌처럼 그 속으로 파묻히거나 사라지는 풍경이 아니다. 자아는 풍경을소유하거나 버리거나 변화시킬 수 있다.    파괴에는 이를 명령하는 논리가 우선된다. 견자가 되는 것은 의도적 광기와 감각과 정신의 훈련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중성적이고 몰아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나는 타자다'라는 말은 주관과 객관적 진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수 있도록 통일된 경지이며, 인식의 장애물들이 정신의 힘으로 극복된 상태를 말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다.    그래서 랭보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코기토(cogito)에 맞서는 코기토를 제안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on me pense'(1871년 5월, )다. '사람들은 나를 생각한다'이거나 '나는 생각되어진다'이다. 이처럼 나는 타자다.    타자인 나는 나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고 그 전개를 성찰한다. 이 몰아적 정신과 감각의 상태에서 , 시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미래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랭보에게서 이 부분을 읽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자가 된다는 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단계지 견자가 시인은 아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 끝에 마치 무병을 앓은 후처럼 견자, 즉 '최고의 현인'이 되지만  그것으로 시인은 아니다.시인은 모음의 탄생을 체득한 자여야 한다. 랭보가 "나는 모음의 색깔들을 만들어내었다"라고 하며 "검은 A, 하얀 E, 붉은 I, 푸른 O, 초록 U"라고 하였을 때 랭보가 꿈꾸는 것은 언어를 감각적으로 재현하겠다는 단순한 꿈이 아니다. 그는 창안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빚어질 정신과 언어의 우주, 즉 새로운 창조에 대해 갈망하는 것이다.    시인은 따라서 '잠재된 탄생'을 연금술로써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언어는 '모든 감각에 적용될 수 있는 시어'이다. 이 '보편적 언어'를 찾아내는 일이야말고 연금술사의 소명이다.    랭보는 그러니까 자아의 문제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었던 베를렌의 개인적 상징주의와는 달리, 그 너머의 상징주의, 초월적 상징주의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베를렌을 만나러 가기 직전에 쓴 그의 비교적 초기의 작품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개인적 모험으로 시작하는 여행담이나 환상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을 배로 의인화시킨 표류의 이야기나 꿈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시인이 그리는 천국에 대한 인상이기도 한 것이다. 랭보의 천국은 모험과 광기 후으 움직이는 공간이지, 보들레르식의 '평온과 호화 그리고 관능'의 도피적 공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랭보는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 심연을 동시에 암시하기도 한다. 모험은 지속되지 못하고 단념 속에 다시 바다의 이면으로, 현실 속의 어두운 물로 돌아온다.           나는 항성 같은 군도를 보았네! 또 착란하는       하늘을 표류자에게 열어주는 섬들을 보았네.       - 네가 잠들고 유배되는 곳은 바닥 없는 그 밤들 속인가.       수많은 금빛 새들이여, 오 미래의 '기운'이여?         그러나 사실 나는 너무 울었다! '새벽들'은 가슴 에인다.       모든 달은 잔인하고 모든 해는 가혹하다.       쓰라린 사랑은 내게 취할 듯한 무기력을 불어넣었다.       오 나의 용골이여 깨어져라! 바다로 가야겠다!         내가 유럽의 물을 원한다면 그것은       향기로운 저녁 무렵 웅크린 채       슬픔에 찬 아이가 오월 나비처럼 덧없는       배를 띄우는 검고 차가운 물웅덩이다.                                                      ()        랭보는 당시 바다를 본 적이 없었고 보들레르처럼 인생 경험에 대한 기억도 많지 않았다. 상상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이었다. 시인은 감각의 훈련으로 절망의 심연을 뜷어보는 능력에도 도달한다. 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 착란으로 스스로를 견자로 만든 것이다. '모든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들'을 경험하여 흔히 감지되지 않는 '사물들의 언어'를 포착하는 초감각에 거의 도달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만들어내었다! - 검은 A, 하얀 E, 붉은 I, 푸른 O, 초록 U.                                                      (---)         그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연구였다. 나는 침묵을, 밤들을 썼으며,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였다. 나는 현기증들을 고정시켰다.                                                       (---)            나는 단순한 환각에 익숙해졌다. 나는 공장 대신에 회교사원을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                                                                                         ()        모음들의 색깔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은 어떤 신비로운 탄생, 즉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재현될 세계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세계란 침묵 뒤의 공간까지 아우르는 세계, 우주적 본질들의 현현(顯現)으로서의 세계이다. 이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언어는 모든 감각에다 적용될 수 있다. 새 언어에 의해서 착란은 질서로 안착된다.    그가 "나는 단순한 환각에 익숙해졌다. 나는 공장 대신에 회교 사원을 보았다."라고 했을 때, 환각 만들기라는 행위는 거부하고 파괴하였던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시란 이제 부정이 아니라 초월을 위한 방법이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 신비로운 도취 속에서 우주의 원초 속으로 환원되게 하는 말 - 이를 위하여 자아는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모험을 자청하였었다. 이 모두가 관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한 교란의 정도는 가히 파괴적이었고, 모험을 가능하게 한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부정되었던 현실이 현실을 되찾는다. 현실이 '미지'가 된다. 랭보는 이 모든 실험을 불과 몇 년 사이에 해치웠으니, 그의 반항의 강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시인은 '불을 훔쳐온 자'라는 것은 '모든 감각에 적용되는 언어'를 가진 자라는 뜻이다. 이 '보편적 언어' 또는 '우주적 언어'는 향기, 소리, 색채 등 모든 것을 융합하며,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된다. 영혼을 끄는 영혼의 언어를 갖고서 '보편적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시적 감각은 예언적 감각이 되고, 신비로운 발견의 수단이 되며, 무의식까지 탐사하는 정신의 섬세한 도구로 변한다.    비록 짧은 시간에 행해진 이 모든 실험들은 말라르메도 지적하였듯이 인내심의 결여를 보이는 듯하기도 하지만. 그의 모험의 크기는 사실 알 수 없는 또 다른 인내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의 일화까지 포함하여 그의 치열함과 그의 감각과 언어 조합력과 추진력은 아직도 신화다.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4. 말라르메와 구도의 여정          말라르메(1842 - 1898)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의 재혼, 이어 여동생 마리아의 죽음 등 가정적으로 이미 어려서 불행을 체험한 바 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과 메리 로랑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이후의 삶은 겉으로는 지극히 평범하여, 시인 스스로가 에서 '일화가 없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포우를 더  잘 읽기 위해' 런던에 머문 적도 있지만, 평생을 지방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영어 교사로 지냈다. 그 외에는 오직 시작에만 전념하였다. 죽기 2년 전 '시인들의 왕'으로 뽑힌 것, 그리고 파리의 아파트에서 문학모임 를 가졌다는 외에는, 가난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정말 랭보식의 일화나 사회적 야망은 거의 없이 평온한 삶을 살다가, 퐁텐느블로 인근 발뱅의 시골집에서 삶을 조용히 마감한다.    그는 보들레르를 읽고 지에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학적 삶의 결정적 계기를 맞는다. 고답파에서 언어 형태의 완벽성을 배웠고 에서는 자신의 내적 갈등과 비극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의 '창천(蒼天)', 즉 이상에 대한 꿈은 보들레르의 이상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도덕적이라기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의 시학은 본질적이며 관념적인 어떤 실체를 찾기를 향하여 열려있다.    "보들레르. 랭보, 베를렌의 시적 경험은 대개 모험이 주는 영감에서 왔다."고 한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란 우연스런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다. 삶의 우연과는 무관한 언어행위라고 말한다.    비록 '일화는 없었다.' 하더라도, 시인의 삶은 여러 문학적 시도들로 가득 찼다. 말년의 라는 작품은 그의 모든 언어 실험들의 종합편이자 정수들을 모아놓은 걸작으로,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시언어의 혁명을 촉발시켰다. 사망할 때까지 시인은 절대의 '책(Livre)'을 향하여 매진하였다.    그러나 "1868년과 1898년 사이에 쓴 몇 편의 시는 대단치 않은 것들이며 시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라는 것이 오랜 동안 말라르메를 보는 시각이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시언어의 체계를 정립시킨 자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말라르메는 보들레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말라르메의 절대적 상징주의는 본래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유래되어 나왔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말라르메의 절대 언어에 대한 탐구는 그의 문학을 '절대적 상징주의'라고 불리게 하였지만, 그 출발은 자아와 서로 분리된 이원성의 인식에서부터다. 아래에 실은 은 보들레르의 영향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꼽히는 시이다. "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any where out of the world!)"를 외쳤던 보들레르처럼, 그도 또한 도망치라고 외친다. 현실이 아닌 이국의 자연이 보들레르에게뿐 아니라 그에게도 계속 '여행 초대'를 하고 있었다.            오! 육체는 슬픈 것,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        달아나자! 저기로 달아나자! 새들은 알 수 없는 물거품과 하늘 사이        있음에 취해있음을 나는 느낀다!        아무 것도, 눈에 비치는 낯익은 정원도        바닷물에 젖어가는 이 마음을 붙들지 못하리        오 밤들이여! 백색이 지켜주는 빈 종이 위에        쏟아지는 램프의 고적한 빛도        아이에 젖 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겠다!        기선이여 돛을 흔들며        이국의 자연을 향해 닻을 올려라!        잔인한 희망들에 낙담하고도 '권태'는        손수건 흔드는 최후의 작별을 아직도 믿네! (---)        여기까지 보들레르의 시선과 그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권태'는 보들레르의'우울(spleen)'과 색깔이 다르다. 이미 백지에 대한 고뇌가 언급되고 있으며, 생략한 시 뒷 부분에 나오는 파선(破船)의 이미지는 말년의 에 중요한 장치로 다시 등장한다.    1864년 그는 이상세계에 대한 꿈 속으로 단순히 도피할 수만은 없음을 깨닫는다. 현실을 대체할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논리를 갖는 것이야 하겠다. 그리하여 1864년과 1865년 사이에 그는  를 포함하는, 절대시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미 그때 시인은 '정신의 도구인 언어'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라르메는 보들레르와 구분되는데, 와 다음의 를 비교해보면 두 시인이 얼마나 다르게 각자의 세계를 펼쳐갔는지 알게 된다.            순수하고 경쾌하며 아름다운 오늘은        이루지 못한 비상의 투명한 빙하가        서릿발 아래 서성이는 잊혀진 이 굳은 호수를        취한 날개짓으로 우리에게 찢어줄까!          옛날의 백조는 기억한다        불모의 겨울 권태가 번쩍였을 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노래하지 못한 까닭에 모습은        찬란하나 벗어나려 하여도 희망 없는 자가 바로 자신임을.          새는 온 목을 빼고 떨쳐버릴 것이다.        공간을 부정하나 공간이 안겨주는 이 하얀 번민을.        그러나 깃털이 묶여있는 땅에 대한 혐오는 떨치지 못한다.          자신의 순수 광휘가 이곳에 부여하는 유령이란 모습,        무용한 유형 중에 자신을 감싸는        모멸어린 차가운 꿈 속에서 굳어져간다. '백조'는.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의 하나이며, 프랑스 시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는 시로 조사된 바 있다. 앞의 시에서 '백색이 방어'해주던 원고지는 이 시에서는 '하얀 번민'으로 나타난다. 하얀 번민이란 원고지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이 느끼는 창조의 고뇌이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한 번뇌가 아니라. 자아의 위기. 글쓰기의 부정 등으로 이어지는 존재론적 번뇌다. 시인은 글쓰기의 문제를 시의 주제로 꾸준히 내세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번뇌를 시화(詩化)하겠다는 생각은 잃어버린 창조의 의미를 되찾겠다는 욕구에서 나온다. 이 꿈은 낡거나 늙지 않도록 빙하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꿈에는 절망적 모멸이 어려있다. 그것은 대중의 모멸이며 동시에 불모인 자신에 대한 모멸이다. 또한 현실 공간에 대한 모멸이며 글쓰기에 대한 모멸이다.    에서는 시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현실, 다시 말해 시인의 현실에서의 무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에서는 '이곳(celieu)'이라는 공간에 과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과 망설임이 지배한다. 공간의 무의미 때문에 번뇌가 이어진다. 공간은 삶의 공간이자 죽음의 공간이며 여기에 글쓰기의 공간이 겹쳐 있다.    그러나 이 시는 긍정적인 반전을 숨기고 있다. 백조는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한다고 한다. 백조의 몸은 호수의 물과 마침내 함께 얼어붙어, 하나의 커다란 거울이 빚어지게 된다. 목숨은 이렇게 아름다운 빙하로만 남아야 한다. 완전한 거울이란 개인이 사라져야 생성되는 것이다. 그때 진정한 언어가 탄생한다. 그리하여 최후의 노래는 최고의 노래가 된다.    시는 백조를 뜻하는 대문자의 'cygne'라는 단어로 끝난다. 백조은 '기호'를 뜻하는 불어 'signe'와 같이, 발음이 모두 /싸인/이다.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 시인 자신이 언어의 존재론에 집착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기호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아래의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로잡힌 날개짓'이다. 그러나 백조의 모습으로 재현된 기호는 상징이자 노래이다. 시인 자신이자 인간의 언어다.            오, 꿈꾸는 여인이여, 다할 길 없는 순수한        환희 속에 내가 빠져들 수 있도록,        나의 날개를 정묘한 거짓으로        그대 손 안에 간직하고 있어주오.          황혼의 서늘함이        부채질할 때마다 그대에게 밀려오고        그 사로잡힌 날개짓은        지평선을 살짝 밀어낸다.          현기증! 이제 공간은        큰 입맞춤처럼 전율한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면서 태어나려 몸부림치나.        공간은 분출하지도 진정되지도 않는다.          당신은 느끼는가 야생의 낙원이        또한 묻혀버린 웃음이        당신 입가에서 나와 전면적인        주름 밑바닥으로 스며들어버리는 것을!                           (말라르메양의 다른 부채)        시의 외적 동기는 부채질하는 단순한 움직임을 뿐이다. 이 시에는 신비나 애매한 장치 같은 것은 거의 없다. 부채질이 공간의 전율을 일으킨다는 것은 시인의 관찰이다. 부채질에 따라 지평선이 물러나거나 다가오며 공간이 전율하는 듯하지만, 이는 바람으로 사라질 뿐인 공간, 태어나지 못하고 분출하지도 솟아오르지도 못하는 공간이다. 현상과 내면에 대한 극사실적 형용이다.    부채질이라는 흔한 움직임 속에 지평선을 꿈꾸지만 그것은 곧 매몰되어 없어질 무의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공간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사실 공간이 전율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헛된 소망이 전율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 모두 '사로잡힌 날개짓'이며 관념의 생성과 소멸의 되풀이다.    2연에서는 지평선을 상상하였다가 3연에서는 이는 현실화될 수 없는 공간임을 확인하다. 그리하여 4연에서는 낙원에 대한 가정을 거두어들였는데. 생략된 5연에서는 비상의 의지는 '하얀 도약'이었으며, 그것은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움직임은 바람과 숨결의 미세한 움직임이며, 욕망이나 시선의 이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어떤 희망이, 입술 가장자리로 스미듯 사라지는 웃음처럼 사라질지라도 순수한 낙원에 대한 가정은 정당하였다는 것이다. 가정임을 알고 있음으로 처음부터 '정묘한 거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5연에서 다시 부채는 팔찌 옆에 접혀져 놓인다.    집요한 것은 공간 구성에 대한 의지다. 거짓된 희망에서 지평선으로, 빈 공간으로, 다시 일상으로 이어지는 공간 양상 - 여기에 상징의 모두가 들어있다. 공간 자신은 태어나지 못하고 전율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시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치는 상징의 미학을 묘하게 숨긴다. 숨김으 미학은 상징의 맛이 두드러지게 한다.        말라르메는 이렇게 생각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언어의 효과'를 통해 그것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한다. 언어 외적인 것은 시에서 모두 배제시켜 전적으로 '말들에게 주도권을 양도'하는 것이다. 비인칭 상태 즉 자아를 지워 텅 빈 상태를 미리 마련해놓고 암시의 기법을 그 위에 사용함으로써, 언어 스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인칭화 혹은 탈인성화란 고전주의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글 쓰는 주체의 지우기다. 이것을 그는 "시인의 화술적 사라짐"이라 한다. 앞에서 본 백조의 죽음은 시인의 죽음을 뜻한다. 이러한 죽음, 즉 인성의 사라짐에 의해 언어의 기능이 진정 생성되는 것이다.    탈인성화는 또 한편 내면의 '공(空)'을 만들어내면서, 백지상태 위에 정신 스스로가 펼쳐지게 한다.            나는 끔직한 한 해를 보낸 참이다. 나의 '생각'은 생각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순수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결과 이 오랜 번민 중에 나의 존재가 겪었던 모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행이도 나는 완전히 죽었다.(---)        다시 말해 네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이 비인칭이 되었다는 것, 나는 네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나였던 것을 통하여 스스로를 보고 스스로 발전해가는, 정신의 '우주'가 지니는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1867.5. 14; Barbier,1977,341)        이상이라는 문제를 마주하였을 때 시인은 먼저 세계 저편에는 "무(無)'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상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결코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는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즉 이상세계는 '허무' 뒤에 있다. '무'안에 무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긍정적 전환은 불교와 헤겔의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먼저 현실의 모든 '거짓된 외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상과 자신을, 다시 말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자발적으로 비운다. 그 텅 빈 '무' 위에 새로운 긍정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나는 완전히 죽어, 몰아상태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답파의 엄정한 중립주의에 도움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고답파의 객관성과도 다른 것이다. 몰아의 '공' 상태에서 정신과 우주는 자연스럽게 다시 펼쳐진다. 나는 그 전개를 바라보는 하나의 보는 '능력' 즉 시선이다. 시선은 매개체일 뿐, 인칭이 없다.    시인이 이 편지를 쓰고 몇 년 후인 1871년, 랭보는 '나는 타자이다'라고 말한다. 두 시인은 모두 주체의 위기에 대해 설파한다. 그런데 이 위기는 '미리 계획된' 것이다. 위기를 전개시키는 방법은 달랐을지라도 상징주의의 이상은 이처럼 의도적 위기와 자아의 정화 후에야만 진정 구축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상징과 상징체계란 모든 것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수 있고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을 위하여 스스로를 비우는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이처럼 새로운 세계의 구축을 겨냥한다.    그리하여 거미줄처럼 사물들의 관계 요소들이 섬세하게 그물망을 이루도록 관계의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 혹은 레이스처럼 논리의 실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 - 이처럼 탄탄한 체계들만이 무한한 확산력을 지닐 수 있다.    보를레르의 은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무한한 사물들로 퍼져나가는"확산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확산을 위하여 랭보에게는 광기와 착란이 필요하였다. 말라르메는 확산을 위하여 감각을 우선 안으로 응축시킨다. 사물에 대한 말들은 겉으로는 모두 지워진다.    아래의 시에서도 주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었거나 몰아상태일 것이다. 이 시는 1868년에 '자신에 대한 우화적 소네트'라는 제목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정하다가 20년이 지난 1887년에야 무제로 출판한다. 완전히 상징들로만 이루어졌으며, 상징주의의 난해성을 대표하는 시로서, 가장 다양하고 많은 주석이 가해졌던 시이다.            그의 맑은 손톱들은 자신의 줄마노를 아주 높이 바치고,        이 자정에 고뇌가 횃대를 떠받치고 있다        골호(骨壺)가 받아들이지 않는        '불사조'에 타버린 저녁의 꿈 몇을          빈 방, 제기단 위에는 아무 소라도 없다        소리 울리는 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은,        ('허무'가 자랑하는 유일한 이 물건을 갖고서 '주인'은        '삼도천'에 눈물 길으러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텅 빈 북쪽 유리창 가까이        물의 요정과 싸우며 불을 내던지는        아마 일각수 장식을 따라. 금빛이 죽어가고 있다        요정은 벗겨진 채, 죽은 자로 거울 속에 있다        거울 테두리가 감싸고 있는 망각 속에        섬광의 북두칠성이 그렇게 빨리 고정되고 있지만.                           ()        이 시에서도 여전히 공간 창조의 고뇌가 문제되고 있다. 여기서는 빈 방과 선반 하나, 그리고 열린 창문의 덧창밖에 없는, 그야말로 텅 빔의 미학적 풍경 자체다. 주인은 삼도천(三途川)에 눈물 길으러 갔으므로, 실제로 그가 죽었는지 확실치 않다. 거울 테두리에는 금빛이 죽어가고 잇다. 그러니까 빛도 모두 스러져가고 있다. '불사조에 타버린 꿈 몇'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인이 작품 모두를 불태웠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소라'를 가리키는 "소리 울리는공허의 폐기된 장식품"이란. 악기이자 글 쓰는 도구이다. 삼도천에 이 악기를 가지고 갔다는 부분에서 오르페우스가 그려진다.    서양의 시에서 이처럼 비어있음만을 주제로 삼고 그것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려한 작품은 많지 않다. 극도의 텅 빔이 시 전체를 지배하지만,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열린 북쪽의 덧창을 통해 보일 북두칠성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어떤 희망을 시사한다. 그것은 어떤 조화로운 탄생일 것이다. 이 해석하기 어려운 상징시는 말라르메식의 오르페우스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옛날 사람들이 '대작'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을 때기 위해 자기 집 가재도구와 지붕의 서까래를 불태웠듯이, 모든 허욕과 모든 만족감을 던져버릴 용의를 가지고 연금술사와도 같은 인내심으로, 언제나 다른 것을 꿈꾸고 시도했습니다. 어떠한 대작일지? 말하기 어렵군요, 간단히 말해 여러 권으로 된 하나의 책, 아무리 경탄스러울지라도 우연히 부딪치는 영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건축적 구성이며 미리 계획된, 책이랄 수 있는 책 말입니다. 나아가 나는 (대문자로) '책(Livre)'라고 하겠습니다.        (---)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 이야말로 시인의 단 하나의 의무이자 더할 나위 없는 문학 작업입니다. 왜냐면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적인 동시에 생생할 '책'의 리듬 자체는 이 꿈의 방정식, 혹은 '오드'와 병행하기 때문입니다.                                  (, 베를렌에게, 1885년 ; 말라르메, 1974, 662-663)          오르페우스는 말라르메의 꿈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업은 노래하는 것이다. 꿈의 방정식은 오드라고 한다. "대지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설명'이 꿈의 방정식의 해(解)인 것이다. 대문자 '책(Livre)'이다. '오드'를 통하여 '책'에 도달한다.    그는 "결국 세상은 아름다운 한 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Huret, 1984;80) 말한다. 시인의 꿈은 이토록 소박한 것이었지만 정말 소박한 것은 아니었다. 대지에 대해 설명하겠다는 꿈은 절대의 책을 완성하겠다는 크나큰 야심이다. '책'은 그에게 언어와 정신과 삶이 어우러져 용해된, 인식론적이고 존재적인 어떤 총체, 어떤 '하나'였다. 시인에게 세상의 의미는 그런 것이었다.    보들레르가 교감이라는 사물 인식법으로 새로운 문학을 열어 낭만주의와 고답파를 버리게 하였다면, 말라르메는 그를 계승하면서 언어형식의 또 다른 혁명을 낳는다. 그 결과의 하나가 라는 시다. 시인은 절대의 책을 가정하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페이지라는 형식을 버린다. 대신에 펼쳐지는 책의 (우좌가 아니라) 좌우 페이지를 합쳐서 한 '장'이라고 한다. 이 하얀 화폭 위에는 오직 하늘과 바다물밖에 그려져 있지 않다. 보들레르가 초대받고 싶어하였던 여행을 그는 거의 마지막 시도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실현시키고 있다. 그것에는 미학과 철학과 음악과 문자가 하나가 되어 있다.    베르나르는 를 '시와 산문의 종합'으로 보고 있다.(Bernard, 1988;311).            (---) 는 산문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와 산문을 나누는 칸막이를 깨고 '통합' 예술의 시도에 상응하는 총합의 양식을 발견하기 위해 당시 시인들이 시도하였던 언어 탐구들에 대한 의미있는 증언이다.(Bernard, 1988;328).        에서,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까지도 비인칭인 동시에 생생한 '책'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가 어쩌면 실험에 그칠지 몰라도, 우선은 절대의 책으로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사고의 질서이자 우주의 질서이며 언어의 질서이다. 인간은 말을 통하여 우주적 신비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자 속의 신비'를 구현하려는 이 다중의 언어 프로젝트를 통하여, 시인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두텁게 싸여진 상징체계를 생의 마지막으로 완성한다.    언어를 완성하려는 그의 의지는 언어에 모든 것을 바치고 '일화가 없는' 삶을 선택하게 하였다. 시인의 단 하나 의무란 이 땅에 대한 오르페우스식의 설명일 뿐으로, 삶의 '일화'는 모두 그 속으로 묻히면 되었던 것이다. 발뱅의 시골집에서 후두경련으로 사망하는 시간에까지 그는 아름다움 '책'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 언어에 몸을 맡긴 그의 이 모든 여정은 사제의 삶에 근접하였다. 여기서 '시라는 종교', 그리고 '언어의 사제'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19세기 후반세기의 위대한 시인들 중 가장 진정한 상징주의자"라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Peyre,1976;37), 과작의 실패한 시인이라는 평이 1950년대까지도 주류였다. 과작은 그가 나태하거나 황폐하여서가 아니라, 상징의 완전한 체계를 만들기 위한 당연한 한계였다. 얼핏 보아도 동양적 성찰에 많이 닿아있는 말라르메의 공간학은 발레리의 것과 색채와 향기가 유사해 보이지만, 그들의 여정과 가닿는 길은 달랐다.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         5. 발레리와 지중해의 명증          폴 발레리(1871-1945)는 지중해에서 태어나고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1890년대 초부터 시를 발표한다. 이 시기의 시는 후에 으로 발행된다. 그러나 발레리는1892년, '제노바의 밤'이라고 불리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위기를 겪고 시를 포기한다. 그는 1894년부터 말라르메의 화요회에 참석하며, 시는 쓰지 않고 철학과 수학, 과학 등에 매혹되면서, 과학적 정신과 예술적 정신의 결합의 상징이었던 다 빈치에 대한 글(,1895년)과, 을 발표한다. 1896년, 오래 글쓰기를 중단하게 할 두 번째의 위기를 겪은 후에 발레리는 시로 돌아온다. 기나긴 침묵은 를 발표함으로써 깨어진다. 그는 1912년 앙드레 지드와 갈리마르사의 강력한 권유에 의하여 시를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5년 뒤인 1917년 발표된 는 시인에게 확실한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사이의 침묵의 20년은 개인 비서로 일하면서 삶을 이어갔다.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에 몰두할 때 그는 시인은 건축가가 사원을 짓듯이 시작업으로 시를 건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시는 영감이 아니라 '구성(cmposition)''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포우의 훌륭한 번역자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를 따른 것이다. 20세기 시에 고전적 원칙을 복원시켰다는 평을 듣는 그는 수학적 정밀함과 우연을 배제하는 명확성과 객관성과 순수함을 갖춘 시를 쓰고자 하였다. 그의 지적이고 심미적인 시는 건축의 견고성과 음악성과 순수한 시적 이미지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는 또 뛰어난 성찰력으로 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된다.    발레리는 1945년 사망하여 고향 세트의 해변의 묘지에 묻힌다. 그가 1917년과 1922년 사이에 쓴 시집  속에 발표된 가 가장 사랑받은 작품으로 꼽힌다.      발레리는 제노바의 체류 중 번개 치는 어느 '하얀 밤'에 여럿으로 분열된 자아를 체험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감수성과 이성, 육체와 영혼, 무의식과 명철성 사이로 갈라진 심연을 보게 된다. 이 위기 이후 발레리는 지적이고 엄격한 사유를 막는다고 하여 예술활동을 중단한다. 영감이나 정념 등을 버리고 지적 활동과 내적 성찰 속에 침잠하였던 오랜 내성기간을 지낸 후에야 발레리는 심연에서 돌아온다. 그는 조금씩 시를 쓰는 즐거움과 감각적인 현실세계가 주는 새로운 충격을 받아들인다.    발레리는 인간은 감각과 현실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지적 자아는 감각적 자아를 밖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안의 모든 시는 감각 세계와 지적 세계 사이에서 시적 세계를 전개시키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자아를 보여준다.            알갱이들의 과잉을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여,        나는 자신의 발견들로 파열한        지고의 이마들을 보는 듯하다!              너희가 견뎌온 햇볕들이 비록,        오  반쯤 벌어진 석류들아,        자존으로 다져진 너희로 하여금        루비의 간막이들을 부수게 하였더라도,          또 껍질의 메마른 금빛이 비록        어떤 힘의 요구를 따라        과즙의 빨간 보석들을 터트린다 하더라도,          이 빛나는 파열은        옛날의 내 영혼에게        자신의 은밀한 구조를 그리워하게 한다.                                            ()          말라르메의 부채 연작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상징주의 시는 공허한 이상세계에 대한 그림이 아니다. 시어는 막연한 암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질긴 관찰이 있은 뒤, 바로 그것에 의해서야 그 위에 상징체계를 축조할 수 있다. 그 탄탄한 구조를 읽어내려면 독자들은 축조과정을 따라가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상징의 묘(妙)는 여기에 있으며 해독의 어려움도 여기에 있다. 위의 시도 사물에 대한 자세한 관찰로부터 출발한다. 구체성 없는 것은 시가 아니라는 듯이 석류 알갱이의 벌어짐을 천천히 묘사한다.    그러나 시의 1연에서는 '지고의 이마들'이 언급되고 마지막 연은 '은밀한 구조'라는 단어로 끝남으로써 시인의 의도가 드러난다. 금빛  껍질의  루비빛 파열 등은 객관적 묘사일 뿐 아니라, 그의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발레리는 에서 다양한 지식들의 관계와 우주체계를 과학적으로, 즉 최상의 정신력으로 파악한 다 빈치를 모범으로 그리며, 우연으로 찬 외적 세계의 논리를 거부한다. 또한 내면 의식을 탐구하여 인간 정신의 법칙을 발견하고자한 테스트씨라는 가상의 인물처럼, 스스로 의식을 주도할 수 있는 강력한 저력을 갖고자 하였다. 테스트씨는 감각적 인식을 부인하고 자의식과 지적 인식만을 인정하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러한 측면은 발레리의 사상과 작품 속에서 이원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남아있게 된다. 다 빈치와 테스트씨가 '자기 사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지적 훈련의 표상들이라면, 와 에서는 이 극단성은 화해를 향한다.      는 발레리의 와 함께 시인의 내면 성찰을 시화한 작품이다. 어느 섬에서 여명에 눈을 뜬 파르크는 방금 꾼 악몽을 계기로 자신의 내면과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순수와 관능 사이의 갈등을 회상하며 살아보려 하지만 또 다시 광란에 빠져들게 된 파르크는 죽으려 하나 죽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하며, 영혼의 각성에 전율하게 된다.    많은 이미지들과 풍부한 상징의 망, 음악성 관능의 제시와 그 극복 등은 이 시를 최고의 상징시의 하나로 불리게 하며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여기서의 파르크는 운명의 세 여신 중 막내로 탄생의 신 클로토Clotho를 가리키는데, 생명의 실을 짜는 것이 임무다.    다음은 이 시의 시작으로, 젊은 파르크가 한밤에 깨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한밤에 일어나니 모든 삶이 다시 살아나서 자아에게 말을 하고"있다.            저기 누가 울고 있는가. 단지 바람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혼자서, 지고의 금강석들과 함께?... 아니 누가 울고 있는가        이토록 나의 가까이서 내가 울려는 순간에?          여기서 화자나 화자가 들여다보는 대상 모두 나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두 개의 자아로 분리되어있다. 울고있는 것은 바람과 금강석들, 그리고 나이다. 관찰자인 나는 막 울려고 하는 순간이지만 울지 않고, 울고 있는 자연과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깨어나 이렇게 자아와 주변을 분석하려 한다.    관찰자인 자아의 눈뜸은 뱀에게 물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아의식과 욕정의 상징인 뱀에게 물림으로 인하여 파르크의 관능적 자아와 성찰적 자아는 동시에 인식된다. 나는 '명철한 정신'으로서, 이들에 대한 관찰자이다.            물 굽이치듯 나는 나를 보는 나를 보고 있었고, 시선에서        시선으로 내 깊은 숲들을 금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나를 막 문 뱀을 쫓아가고 있었다.          욕망들의 이 무슨 꿈틀거림인가. 뱀의 기는 모습이란?... 내 탐욕에서        빠져나오는 보석들의 이 무슨 혼란,        또한 명철에 대한 이 무슨 어두운 갈증!                                                     ( )        관능적 아에 가까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자아'와 성찰적 자아, 이를 지켜보는 자아 사이에서 자아의 갈등과 분열은 극에 달한다. 그리하여 화자인 나는 "나는 나를 보는 나를 보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말라르메의 앞서 본 편지에서 "나의 '생각'은 생각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라는 부분을 상기시킨다. 발레리는 그 자아를 더욱 분석한다.    말라르메가 금욕적 자세로 '공(空)'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아의 분열을 체험하였다면, 발레리의 분열은 관능적 자아의 문제가 전면화되어 더욱 미묘하다. '의식하는 의식'은 자아를 점점 의식의 심연으로 밀어넣고, 그리하여 나는 "오 위험하게도 그의 시선의 포로가 될 뻔하였다!"라고 외친다. 의식이 깨어남과 분열의 고통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사라진 나의 시선이 보고 있는 바를 안다.       검은 내 한쪽 눈은 지옥의 거소로 난 문턱이니!       나는 생각한다, 시간들은 산들바람에 내맡기고       영혼은 쓰디쓴 관목 숲에서 돌아오지 않은 채 (---)        죽음은 그러나 실제 죽음이 아니라 허구적인 죽음으로, 파르크가 새벽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었을 때, 모든 것은 존재론적 고뇌였음이 밝은 빛 속에서 밝혀진다.           (---) 내가 옷 벗은 채, 두려움 없이       이 바닷가에 와서, 치솟는 거품 들어마시고,       드넓고 웃음 띤 쓰라림을 눈으로 마신다면,       바다의 부름을 얼굴로 맞아들이며,       가장 생생한 대기 속에, 존재는 바람을 마주한다면(---)                                         ()        자아가 죽음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삶의 의지를 되찾는 이 풍경은 에서 "바람이 인다!... 살아보아야 한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삶을 초월한 논리적 결론이, 비록 우연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삶의 의지를 이기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시인의 부인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파르크의 유혹과 망설임은 시인의 자아 부정과 자아를 되찾는 과정의 번뇌를 표현한 것이다. 자아는 이제 지적 탐구의 고뇌를 극복하고, 변화로운 감각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각성을 따르고자 한다.    다양하고 시간적인 현상과 안정적이고 비시간적인 상태 사이에서 흔들림도 시인의 사고의 두 축에 기인한다. '타고난 시인' (레몽, 1984;200)이었으므로 '지적 유혹과 감성적 자질'사이에서 줄타기할 수밖에 없었던 발레리에게는, 이처럼 이원적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의 화두로 제시되었다.    발레리의 시간의 이원성에 대한 생각은 무한에 대한 관조의 세계로 다시 재현된다. 1920년 발표된 는 그의 고향 세트의 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일생 중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끌어다 쓴 최초의 시"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맑고 고요한 감각을 명상 속에서 회상한다.            비둘기들이 걷고 있는 이 고요한 지붕은        펄럭인다 소나무 사이에서 무덤 사이에서,        엄정한 자, 정오는 거기 불로써 빚어낸다        바다를, 언제고 새로 시작해있는 바다를!        오 생각 하나에 따른 보상이여,        신들의 평온을 오래 관조하는 시선이여!        여기서 비둘기는 바다에 떠있는 삼각돛을 말한다. 그러니까 지붕은 평화로운 바다를 지칭한다. 이 시에서 내적 리듬은 에서 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전체적으로 더 자연스럽고 구속을 버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시인의 사유의 발전 때문이리라.    그러나 시인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순수 자아'의 힘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그것에 의한 영구불변의 창조를 기다린다. 공허 속에서 본질과 영원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다.           오 나만을 위하여, 나 자신에게 감, 나 자신 속에서,       마음 곁에서, 시의 원천에서,       공허와 순수 사건 사이에서,       나는 나의 내면의 위대함이 메아리치기를 기다린다.       항상 앞날에 다가오는 공동(空洞)이 영혼 속에 울리게 하는,       쓰라리고 어둡고 소리 울리는 저수조여!        그럼에도 바다 앞에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시인은 거부할 수 없이 변화를 인정한다. 인식의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던 시인은 고향의 해변 묘지를 배경으로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리듬이 살아남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시인의 인성이 가장 많이 드러난 시라는 평을 받았다.            아름다운 하늘이여, 진실된 하늘이여, 변화하는 나를 보라!        그토록 대단한 자존 끝에, 이상하나 힘에 찬,        그토록 대한한 무의의 끝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나를 맡긴다 (---)        가 변화와 불변 사이, 추상과 구상 사이로 찢겨진 자아의 이원성의 드라마라면, 이 시는 드라마의 완결편이라 할 정도로 상대성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르크도 구체적 현실을 수용하고 삶의 의지를 인정하려 하였지만, 자아는 쉽게 변화를 수용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유사한 장면이지만 수용이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아니다, 아니다! .......일어서라! 계속되는 시대 속에!        부숴라,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틀을!        마셔라,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바다에서 뿜어나오는 서늘함이        내게 나의 혼을 돌려준다... 오 짜디짠 힘이여!        파도로 달려가, 거기서 생생하게 솟아오르자!                            (---)          바람이 인다!.... 살아보아야 한다!        광막한 대기는 나의 책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파도는 가루로 부서져 바위 위에 용솟음치려 하네!        눈부시게 하얘진 책장들이여 날아가라!        부숴라 파도여! 기쁨을 되찾은 물로써 부숴버려라        비둘기들이 모이 쪼던 그 고요한 지붕을!                                                   ()        앞에서 글쓰기는 불변의 진리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와 현실을 수용하는 글쓰기를 인정한다. 여기 책은 열렸다가 다시 닫힌다. 책장들은 날아간다. 현실을 버리는 글쓰기는 없는 것이다. 무한은 현실을 포용하고 펼쳐질 것이다.    생각의 변화는 시의 첫 연에 등장하였던 비둘기에 대한 묘사로도 드러난다. 비둘기는 이제 명상의 평화를 깨는 속된 호기심을 가리킨다고 한다. 비둘기든 돛이든 사실 무의미하며, 생각을 흔들 수 없다. 시가 비둘기에서 시작하여 비둘기로 끝난다는 사실은 닫힘을 말하는 것 같지만, 폐쇄를 넘어선 자존감을 마침내는 보여주는 것이다. 바다의 불안한 고요가 아니라 이제 파도와 마주할 힘을 자아는 되찾는다.    간단히 말해 파르크는 바다 앞에서 격리냐 해방이냐를 가슴 에이도록 번뇌하는 것이고, 여기서는 묘지와 바다를 앞에 두고 해방의 여지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다. 젊은 파르크는 인생의 매혹을 알게 되어 거기에 굴복하는 과정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고, 는 영구불변에 매혹되었다가 이에 저항을 느끼는 과정을 기록한다. 결국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순수와 절대에 대하여 시인이 오랜 시간 쌓아왔던 물음이 에서 어느 정도 답에 도달하는 것이다.    와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택하면서, 시인은 바다의 정화력과 포용력, 재생력을 미리 마련해놓았던 것이다. 격리된 상태 속에 도피하고자 하는 파르크의 자의식적 태도는 말라르메의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격리보다 중요한 것은 돌아와 자신의 동질성을 되찾는 일이며,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두에 시인이 다음 같은 핀다로스의 일 절을 소개하는 까닭이다. "오 나의 영혼이여, 영혼불멸을 꿈 꾸지 말고, 다만 가능성의 영역을 다 소진시켜라."        "말라르메와 같은 곳에서 출발하였지만 두 사람은 이처럼 다른 곳에 도달한다. 발레리의 시가 발레리의 사상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들 시를 비교해보면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사물과 관념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추상화 단계에 거의 도달하였다면, 그리하여 고유한 상징체계를 축조하는 변함없는 장인의 인내를 보였다면, 발레리는 다소 다른 양상이라는 것이다. 발레리는 사물에 가까이 있고 싶어한 시인이었다. 그는 사물의 매혹을, 그 구체적인 힘을 이길 수 없었고 이기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말라르메가 더 관념적인 시인이라 하겠다. 상징주의의 완성에 그가 더 가까이 있는 이유이다. 발레리는 새로운 시의 형식을 연 개척자는 아니었다." (레몽, 1984;216)     (끝)  [출처] 상징주의의 시인들 / 김경란|작성자 옥토끼    
275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댓글:  조회:2008  추천:0  2018-03-25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1. 상징주의와 음악       클로드 드뷔시        이론적 성향이 강한 말라르메는 미술보다 연극과 음악에 대한 의견을 더 많이 내놓았다. 말라르메가 주재한 화요회에는 그에 열광한 젊은 문학가, 화가, 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 거기에서 그는 언어 탐구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며 20년 연하인 드뷔시(1862-1918)와도 깊은 교우를 맺었고, 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때부터 드뷔시도 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시에 곡을 붙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가 노래의 가사와 '서정적 산문들'을 썼다는 일화는 언어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과의 관계, 시와 산문, 음악과 문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 글쓰기의 목적은 상징주의의 순환적인 글쓰기에 모든 형식적인 절차에서 해방된 인상주의를 대립시키고자한 것이었다. 그는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간의 피할 수 없는 갈등에서 멜로디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가사를 쓰면, 즉 더 유연성이 있는 산문을 쓰면, 노래의 멜로디를 음악화했을 때 소절의 유연성과 갑작스런 비약, 그리고 느릿한 주문 효과들은 이미 드뷔시 특유의 것이었으나. 가사들은 여전히 상징주의에 대한 과도한 경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순환구조, 데카당적인 매력, 신조어, 다소 인위적인 표현의 우회 등이었다.    말라르메는 화요회에서 자신의 극시  속에 잠재해있는 유머와 풍자와 감각적인 생명력에 대해서 드뷔시에게 피력한다. 이 시에 곡을 붙인 으로 드뷔시는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세련된 울림과 몽환적 분위기, 아름다운 화음 등이 일찍이 이처럼 완벽한 관현악 작품의 기본 제재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희미한 현악 반주 속에 프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변덕스럽고 난해한 멜로디는 성숙한 드뷔시 작품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하여 브뷔시는 음악에서의 '무언가를 바꾸었고,' 새로운 운율과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 이러한 일은 바그너의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상징주의자들과 교유하고 있을 초기 무렵에 드뷔시는 바그너적 취향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바그너가 물려준 소리의 유산을 확대하면서 뛰어 넘은 것이다. 리듬의 섬세함, 멜로디의 움직임, 장단조 특성의 폐지, 화음의 자유로운 확산과 연속, 분위기를 빚어내는 재능 등은 미적 감각을 새롭게하고 감수성과 섬세함을 증대시킨 것이었다.    드뷔시는 말라르메의 그 외의 시 몇 편, 베를렌과 그외 시인들의 시 등, 많은 상징주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보들레르와 릴라당에서 영감을 받아 와 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을 자신 속에서 융해시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려는 그의 특이한 시도는 말년에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그의 2집으로 된 는 피아노의 문학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얻게 된다. 음악으로 맺은 암시의 시학의 결실을 이제 역으로 드뷔시가 수용하는 것이다.    드뷔시가 에서 애용했던 침묵기법 또한 암시의 미학을 음악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바그너풍의 음악을 원하던 드뷔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상징주의 극 를 보고 감명 받아 오페라로 작곡한 것이다.(1902) 이 사장주의 극은 "포레, 쉔베르그, 시벨리우스, 등 다양한 음악가에게 영향을"(Marchal, 1993;59)을 주었다.    과 외에도 드뷔시의 ,, 1,2집, 피에르루이스의 시를 작곡한 가곡집 등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드뷔시의 음악은 모호하게 암시하는 효과를 위하여 다채롭고 난해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나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것과 어떤 풍경이나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 이 두 가지 목적만을 갖는다"(타임,1993;69)라고 드뷔시는 말한다. 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비 내리는 정원', '안개', '달빛' 등, 그의 작품 제목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물 흐르는듯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영혼의 상태을 재현하는 베를렌풍의 풍경들, 해석을 요구하는 난해한 이미지들의 이어짐, 또한 이미지들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다시 다른 이미지들로 넘나들기 - 이러한 드뷔시의 요소들은 상징주의를 음악의 차원에 도입한 것이었다. 음악에서는 드뷔시의 작품들을 상징주의라고 흔히 칭하지는 않지만, 문학에서는 이러한 상징주의를 '애매한 상징주의' 또는 '제3의 상징주의'(Marchal, 1993;6)등으로 수식한다.    일반적으로 음악의 '인상주의'는 19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상주의 음악은 풍부하고 섬세한 음색, 자유로운 형식적 구성, 분명치 않아 보이는 선율과 리듬의 윤곽, 세분화되고 연상적으로 연결된 선율, 그리고 전통적 조성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 회화의 인상주의적 특징과 유사하게, 선율이나 화성의 흐름이 유동적인 형식인 드뷔시의 음악은 인상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이 '인상주의'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벼운 피상성과 일상성을 싫어하기도 하였거니와, 자신이 회화의 인상주의를 음악에 모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한 음악은 항상 외적 인상을 내적인 표현으로 변환시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가는 "낮이나 밤, 하늘과 땅의 매혹을 알아보고, 그 분위기를 깨울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고, 이 모두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보았다. 인상주의 미학의 한계점인 피상성의 재현을 피하려함으로써 그의 음악은 상징주의의 모험에까지 근접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문학을 매춘이라고 하였고 랭보는 사기라고 하였다. 드뷔시가 "음악은 거짓 중 가장 아름다운 거짓"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는 '문학은 영광스러운 거짓'이라는 말라르메의 유명한 화두를 읽게 된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상징주의와 미술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인상주의가 약 1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빛과 색채가 변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차이 때문이었다. 빛과 색채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상주의자들도 깨닫는다. 르네상스 이래 이어졌던 사실주의의 추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음이 확고해졌던 그 즈음에, 영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으로 예술을 전달하려는 욕구와 꿈과 환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다. 그리고 꿈과 상징과 성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앙크탱Louis Anquetin이라는 두 화가는 "사상이 회화 기법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상주의를 포기한다"(타임,1993;83)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1880년대 후반의 반예술 운동을 위한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시각을 통한 분석보다는 감정의 경험에 근거한 예술을 추구했으며, 그림의 주제을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에서 찾았다.(타임, 1993;83).          그리하여 고갱과 고호등은 상징주의를 예술의 아방가르드로 부상시킨다. 이러한 1880년대 후반의 반反예술운동은 정신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과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와의 구조적 충돌 속에서, 두 세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한 것이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부르주와의 물신주의와 대중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그들의 관습이 예술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시작된 기계적 삶에서 해방되고자 하여, 감정과 욕망과 꿈과 신화를 표현하였다. 인상주의의 한계인 일상성과 피상적 재현을 버리고, 정신세계와 감정을 시각화하였다.    보들레르에게 향기, 소리, 색채는 영혼의 상태까지 전달하는 것이다. 상상력으로 재현되는 환기력 있는 시각 예술은 그에게 내재적 관념과 본질적 실재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 상징주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모방주의에서 해방되어 색채, 선, 형태로써 내적인 아름다움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집트, 원시미술, 중세 근동, 민족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다양성과 직관과 감각을 추구하였다. 원시미술에는 본능, 무의식, 꿈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었다. 미술은 이렇게 비물질적 세계와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며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섰고, 탐미적으로 흐르거나 '데카당'하게 되었다.    한편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줄 화가들을 찾게 되었는데, 위스망스는 모로와 르동을 발견하여 이들을 1884년에 발표한 자신의 소설 에 몇 페이지씩 언급한다. 모로는 상징주의를 풍요하게 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여 상징주의 문학의 확립에 기여한다.르동은 상징주의 이론을 미술에 실현시켜 상징주의 미술의 전형을 만들었고, 그의 작품은 다시 상징주의 문학에 전파되어 문학에서 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 상징주의와 미술(2)     귀스타브 모로       모로(1826-1898)는 1856년부터 4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원시 화가들과 고대의 예술, 모자이크와 비잔틴의 에나멜화에 매력을 느낀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그림은 괴이함과 환상성 등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880년경 유행한 신비로운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의 결과, 사람들은 불화(佛畵)와 이탈리아 미술이 결합된 것 같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는 그의 그림에 열광한다.   그는 그림의 기초를 문학, 철학, 고고학, 신지학 등에 두어 신화와 소설에서 주제를 얻었다. 데카당스 문인들은 그의 정교한 그림에서 전설, 신화, 복잡한 상징 팽창적인 배경과 색조 등을 읽어내고 경탄해 마지 않는다. "인도신전의 이미지에서 잔혹하고 엄숙하며 남녀양성으로 보일 만큼 모호하게 그려진 여성들과 지나치게 화려한 실내장식들은 세기말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쟝티,2002;59) 문예화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분개하며, 미술과 본질과 의미에 대해 다음처럼 한다.             물질의 외피와 피상적인 육체미 밑을 흐르는 영혼의, 정신의, 마음의, 그리고 상상의 움직임을 반영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인류가 느끼는 이들 신성한 욕구에 응답하는 저 미술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가! 이것은 신의 언어이다. (---) 나는 선과, 당초무늬(아라베스크) 등 조형예술에 허용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상을 환기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이 나의 목적이었다.(루시-스미드, 1990;68-71)          모로는 여러 가지 조형수단을 통하여 상징과 암시의 예술을 지향한 것이다. 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을 그림을 통하여 느끼게 하고자 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것,느끼는 것을 믿고 그것으로 특유의 내면 풍경을 창조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이 환기시키는 꿈과 환상이었다. 그의 인물들이 환기시키는 생각들은 개인의 내적인 섬광들을 촉발시키는 것이다. 그의 환상은 단순한 환상의 재현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의 결과였다는 점에서도 상징주의적이었다. 르동은 "모로는 생각들의 비약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형식을 다듬어내는 작가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의 나아감을 놀라운 이성으로써 인도한다(르동,1961;65)"라고 말하고 있다.    모로는 말라르메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상징주의 시운동과 관련되며 상징주의 운동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 그는"위대한 신비는 그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자연 전체는 이상과 신성함으로 채워져 모든 것이 변형된다"(루시-스미드,1990;71)라고 하며, 보다 높은 세계를 향한 고양(高揚)을 꿈꾸었고, 그 실현을 위하여 상징주의자들처럼 정교한 계획을 따라 작품을 완성하였다.    사물을 변형시키는 힘과 상상을 촉발시키는 그의 놀라운 능력은 문학을 또 다른 길로 안내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였다. 후에 그가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 초현실 주의자들은 그를 망각에서 불러낸다.등에서 그가 형상화내었던 무의식의 세계에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은 크게 매료된다. 그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였으며 20세기 회화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과 기독교와 유대주의와 비교주의를 교묘히 융합하고, 몽상의 동물들과 모세, 프로메테우스, 양성의 존재 등으로 다양한 꿈들을 전한다. 인간의 내적 감각에 대한 절대적 감수성과 문학적 소양으로 상상력을 촉발시켰던 모로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졸라는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해 다음처럼 요약한다.        모로는 사실주의에 대한 증오로 독창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가가 빠질 수 있는 최고도의 기상천외함을 가장 놀랍게 드러낸다. (---) 현대의 자연주의는, 자연을 연구하려는 예술의 노력은 분명 반작용을 초래할 터이었고 이상주의적 예술가들을 산출하게 되어있었다. 상상력 영역에서의 이 역행적인 움직임은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아주 흥미로운 특질을 지니게 된다. 그는 낭만적 정열과 안이한 배색을 경멸하였고 그림자와 빛의 대비로 화폭을 뒤덮기 위해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려 눈을 현혹시키는 붓의 뒤엉킴 따위를 경멸하였다. 그게 아니었다. 귀스타브 모로는 상징주의에 헌신한 것이다. 그는 수수께기 놀이들로 이루어진 조각그림들을 그렸고 태초의 원초적인 형태들을 다시 찾아내었으며 (---)그의 꿈들은 더 기교적이고 복잡하며 수수께끼 같다 (---)().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한 헌신은 자연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자연주의자 졸라 자신도 그 반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로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면서 상징주의를 풍부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기말의 예술과 데카당스의 한 지침이 되었고, 초현실주의를 촉발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이처럼 모로는 많은 사조들의 중심되는 경계선 위에 서서, 다양한 예술 사조의 프리즘 역활을 하였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 상징주의와 미술     오딜롱 르동         르동(1840-1916)은 1879년 석판화집  연작으로 화단에 데뷔하는데, 위스망스는 자기 소설에서 주인공이 숭배하는 예술가로 르동을 그린다. 르동은 1885년 위스망스의 소개로 말라르메와 말게 되어 급속히 친해졌으며, 시인의 사망 때까지 오랜 기간 교유한다. 말라르메는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부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말라르메, 1974;869)라고 한 바 있다. 르동은 인상주의를 강하게 부정하였으며, 그의 목판화와 석판화는 암시적 기법을 충실히 실현하게 된다.    그는 "나의 데생들은 '영감을 불러이르키는' 것이지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아무 것도 결정짓지 않는다. 그것들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미결정의 모호한 세계 속에 있게 한다" (르동,1961;27-28)라고 말한다.    말라르메는 르동에게, 화가는 시인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화가의 상상력과 시인의 환상은 결국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음악 애호가였던 르동은 상징주의자들이 문학에서 음악을 사용하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미술에 음악을 사용하여 상상적인 것들에 논리를 부여하였다.    그의 미학은 그리하여 "시각의 미학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미학에"(장티, 2002;53)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는 말한다.              암시적 예술은 음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속에 더 자유롭게, 빛나게, 전적으로 존재한다(르동, 1961;26).  암시적인 기법은 음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는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은 현실이 아니라 신비이기를, 혼의 상태와 생각을 자유로이 반영하는 것이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르동은 자신의 판화들을 유례없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의 판화들은 다양한 장면들이 덧입혀져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표현되어 있다. 이미지 안에 이미지가 내포됨으로, 신비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감상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것은 암시의 미학을 따르는 예술작품은 적극적인 감상을 요구한다. 르동의 감사에 있어서는 감상자의 해석이. 따라서 그의 내면의식이 아주 중요하다. 감상자들은 찬탄하거나 보는 것만으로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화가는 말한다.              (---) 감상자의 정신 속에 파생될 효과는 그를 허구세계로 이끌어준다. 이 허구세계의 의미는 감상자의 감수성과 모든 것을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그의 상상 능력에 따라, 커지거나 작아진다(르동,1961;27)          이러한 예술의 수용 문제를 문학에서 다루고자  하였던 말라르메의 시도를 떠올린다. 말라르메는 또한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사물을 '보는 법'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하였고, 이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서로 통하였을 것이다. 르동은 "본다는 것은 사물들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이다"(르동,1961;48,62)라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이 감상자들에게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가 지니고 있던 신비에 대한 감각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은 상징주의 문학에서와 유사한 차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르동이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상징주의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평자도 있을 정도였다. 모리스 드니도 지적했듯이, 르동이 영혼의 상태나 감정의 깊이, 내면적인 비전을 일러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상징주의 문학에서 신비를 표현하는 방식을 더욱 상상력 쪽으로 밀고 나아간다. 그는 사물에 대한 표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신비까지를 감상자에게 촉발하고자 하여, 모호성을 극대화시킨다. 그에게 신비란 관찰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형성될 어떤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상상력은 조형적 실현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나의 독자성은 보이는 것의 논리를 보이지 않는 것에 가능한 한 적용시켜, 있음직한 것이 법칙을 따라 있음직하지 않은 존재들을 인간처럼 살아있게 만드는 데 있다"(르동,1961;28) 라는 그의 우명한 주장은, 그를 초현실주의이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수긍하게 한다.    르동의 조형적 실현은 무의식이 심연에까지 가닿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도 그는 초현실성과 잘 연결된다. 그러나 그의 환상과 몽환의 세계는 뿌리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뿌리는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다. 자연의 대상을 섬세히 포착한 후에 상상적인 것의 재현이 스스로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의 예술의 원천이었다.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따라서 예술을 하였다. 나는 가시적 세계의 경이를 향하여 눈을 뜨고 예술에 임하였으며, 또 그것은 누가 무어라 하였건, 자연적인 것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겠다는 지속적인 관심에 의한 것이었다.(르동, 1961;9)          자연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며 예술을 통하여 우주적 상징으로 나아가는 것은 르동의 자연스런 여정이었다. 그는 "'부호(Code)'는 그것이 우주적 의식의 진지한 표현이 될 때 복음서를 대신할 수 있을 것"(르동, 1961;26)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상징주의 문인들의 궁극적 지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부분이다..    신비와 불안과 환상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들은 자주 문학화 되었다. 또한 르동은 '에드가 포우에게'라는 제목으로, 이 시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6점으로 된 판화집을 발행하고(1882년), 바그너를 다룬 판화를 여러 점 제작하기도 한다. 말라르메에게는 석판화집을 헌정하고, 의 판화를 제작한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3. 상징주의 극        상징주의 소설에 비교했을 때, 상징주의 극은 상징주의의 면모를 상대적으로 더욱 화려하게 구현하였다. 상징주의 극은 바그너와 말라르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도록 그들의 기여가 크다. 말라르메는 연극의 모든 장치를 배제하고 순수한 이상주의 연극을 제안한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를 단순히 무대 위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러한, '극 자체에 대한 부정' 혹은 '문학적 반연극(反演劇)'은 1890년 이후의 연극에 대단히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0년에는 릴라당의 유작 이 공연된다. 이 극은 상징주의, 낭만주의, 이상주의, 바그너 등 모든 기법을 동원한다. 나아가 일부 상징주의 극은 공감각을 무대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라는 극에서는 공연장에 향수가 뿌려지기도 한다."(Marchal,1993;127).    말라르메의 이상주의 연극 미학은 이러한 과도한 시도를 거부하였다. 무대장치는 순수 허구를 그려내려는 목적만을 지녔다. 즉 색깔과 선들에 의한 유추적 효과만을 노려, 무대는 배경과 몇 개의 유동적인 휘장들로 되어 있었을 뿐이다.    메테롤링크의 는 정신적 연극과 시적 연극을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가스를 나오게하거나 조명의 기술 등을 도입함으로써 물질적 배경들을 부정하였다. 배경은 없거나 있어도 암시적인 것이었다. 극단적인 절제로써 진실주의나 자연주의에 반대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무대는 거의 부호들로 이뤄내고자 하였다. 즉 책의 형태를 닮아가려한 것이다.    폴 클로델의 연극은 상징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정통적 상징주의는 아니었다. 그는 시를 해방시켜서 시적 연극을 펼쳐내고자 하였다. 거기서 그는 내적 탐색을 보여주거나 종교적 신비를 드러내려 하였다.     통합예술        바그너는통합 예술작품의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통합적 작품이란 그리스 연극을 모델로 연극과 음악을 결합시켜 하나로 통일된 작품이다.            각각의 예술은 자신의 힘이 한계에 도달하자마자 인접한 예술의 도음을 청하게 된다. (---) 각 예술 속에 깃들어있는 이러한 특이한 성향 (---) 그것을 나는 음악과 시의 관계 속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 이렇게 개별적인 모든 예술들을 포용하며, 그들은 또 각자 개별적으로 완성되게 하면서 그 예술들이 저체를 결합하는 예술작품을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제시하려 애썼다.(1860:Marchal,1993;159).           예술의 통합을 계획한다는 것은 연극과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원시 시절의 예술형식을 되찾겠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후에 의 공저자가 되는 에두아르 쉬레는 미래의 예술에 대해 예측한다.(1875년) '책. 박카스, 리라'라는 제하의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초의 세 자매인 시, 춤, 음악은 함께 태어났지만 오늘 날에는 분열되었다. 새로은 결합이 이룩된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확실한 기호가 될 것이고, 그 속에서는 육체, 영혼, 생각이 조화되며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마지막 통합의 수단이자 목표로, "책은 우리 시대의 주된목표이자 변별 기호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이야말로 이제 모든 것을 표상하고 흡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책'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쉬레의 글에서 나타나는 통합예술의 모습은 말라르메의 예술론 이해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의 통합예술론은 의도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극시 과 를 쓸 때. 그는 극에 대한 야심은 덮어두고 몇몇 장면들에 대한 초안으로 만족하려 하였다. 그러나 극은 그 본질적 특성상 결국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거의 종교에 닿아있는 현상으로 시인에게 다가오고, 시인은 극시의 완성에 전념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연극 미학은 신화에 기초하며, 또 그는 고전주의의 근원에서  자신의 꿈을 되찾고자 한다, 그 꿈은 쉬레의 글에서 나타난 생각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 고전주의는 넓은 의미의 고전주의였으며, 따라서 그는 바그너에 만족하지 않았다. 바그너의 통합예술은 태초의 근원의 언어에 가닿지 못하는 것으로 시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그는 바그너가 그리스 신화가 아니라 게르만 신화의 영웅들, 즉 죽은 인물들에서 동기를 찾는 점이 불만이었다.     비인칭 극         말라르메의 극에 대한 개념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를 넘어선다. 소품과 장치들로 가득 찬 사실적, 전통적 무대를 그는 거부한다. 무대는 장치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무대가 '중성적 공간'이 되어야 관객의 정신이 자유롭게 투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중성적 공간에서 추상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내고자 한다. 따라서 영웅주의적인 바그너극과 통속극을 거부한다. 그것들의 일상적 틀은 환기적이고 암시적인 효과를 죽이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비인칭 극'을 지향한 것이다. 무대 장식을 없앤 중성적 공간에는 본질만이 재현된다. 그는 을 모델로 삼는다. 거기서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냐'하는 본질적 문제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출과 모든 조역들과 단역들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환영들만 등장하는 극으로 을 읽는다. 이 모노드라마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정신의 극이다. 그러므로 을 제외하고는 어떤 연극도 시인의 생각에 맞지 않았다.     일부 상징주의자들은 말라르메의 생각을 따라 연출의 힘보다는 텍스트에 무게를 두고자 하여, "읽혀지는 희곡이 상연되는 연극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배우들의 역할은 "종종 내레이터 정도로 축소되었고 꼭두각시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장티,2002;96-97)". 이상주의 극에 대한 이러한 경도는 결국은 극에 대한 거부, 즉 반연극이었다.     극의 물질성을 확실하게 덜어주는 장르는 발레였다. 발레는 모든 장치를 버린 것으로, 말라르메는 그것을 '육체의 글쓰기'라고 하였다. 발레는 백지와 같이 중성인 무대 위에서 행해지는 '간결한 글쓰기'였다.     연극을 정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언극'이었다. 무언극은 순수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성의 공간고 무명의 배우를 결합시킨 '최초의 연극'이었다. 4. '책'과 문자예술         문자예술                        [그것이]                          수라면               별에서 나온                                                                                           그것이 존재한다면                                                                                                         빈사의 산란스러운 환시와는 다르게                                                         그것이 시작한다면 멈춘다면                                                                                        부정되었을 때 솟아나오며 나타났을 때 폐쇠되나                                                                   마침내                                                               희귀하게 퍼트려진 어떤 과잉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면                                                                                하나일지라도 합이 자명함을                                                                         그것이 비춰준다면                                     [그것은]                                                            우연           말라르메는 24페이지로 된 『주사위던지기』라는 시에서 여러 실험을 행하는데, 그 중 하나는 페이지의 개념을 깨고 있다는 점이다. 페이지를 '장(feuillet)'의 개념으로 대치시키면서,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이어지는 글쓰기를 한다. 여기에 여덟 가지 다른 활자를 배치한다. 백지는 가장 큰 캔버스가 된다. 위의 시는 아무 부분이나 옮겨본 것이다(좌우 페이지 상단 부분).     이 시, 혹은 극시는 파선의 풍경만을 보여준다. 난파선의 선장은 절망의 상황에서 주사위를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햄릿처럼 망설인다는 이야기며, 그밖에 아무런 행동도 이뤄지지 않는다. '시와 산문의 종합'(Bernard, 1988:311)이라고도 하는 이 시에서, 활자들은 감각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명상의 깊이에 따라, 음악의 강약이 표기되듯 크기와 배치가 달라진다. 시행들도 생각과 함께 움직이며, 때로 이탤릭체로 때로 로만체로 변한다.     잔잔한 물결이 흐르듯 작은 글자들로 어느 정도 규칙성을 띠던 시행들은 홀연 사라지고 백지 위에 커다란 단어 하나만 남기도 한다. 단어의 주변은 커다란 침묵이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문자의 심포니를 만들어내지만 난파 뒤에 계속되는 정적과 침묵 또한 말을 한다. 한 페이지가 완전한 공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장마다 시구 주변으로 여백이 둘러싼다. 행간에도 다양하게 여백들이 배치되어, 클로델의 말대로 '여백에 의한 생각의 분리법'(Bernard, 1988:319)을 보여준다. 침몰이라는 절망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활자들은 페이지 밑바닥에 파선 조각처럼 침전된 모습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치밀한 계산 하에 사용된 여백의 기법과 다양한 행간두기 등은 시집 전체가 가장 정교하고 창조적인 건축물, 혹은 하나의 미술작품이나 악보집으로 빚어지게 한다.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 Calligrammes』은 이러한 방식을 차용한다. 누보로망에서의 여백두기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다. 해석은 아직 많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서구 문학사상 가장 혁명적이며 난해한 문헌이다.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하리라" 라는 시의 대명제는 가장 굵은 글씨로 시집의 처음과 끝 장 모두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그 주변으로 부속 문장들이 나무의 잔가지처럼, 물결무늬처럼, 거미줄이나 레이스처럼, 악보의 음표처럼 종속된다. 대명제 주변으로 산재한 각각의 문장들은 연계되어 통합적 역동성을 보여주고, 때로 침묵을 때로 폭풍을 그린다.     이 시의 중요함은 시가 닫힌 채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다. 시집의 123장은 펼쳤다 닫았다 할 수 있는 부채를 상기시키는 구조이다. 대명제가 시집 전체를 가장 큰 문자들로써 관통한 후, 시의 마지막에는 작은 문자로 "모든 생각은 주사위 던지기를 발한다"라는 문장이 이전의 시행 전부를 요약한다.     시집 전체는 이렇게 단 두 개 문장으로 이뤄지며, 시집은 닫힌다. 그러나 마치 보들레르가 「저녁의 조화」에서 마지막 행을 통하여 순환구조를 만들어내었듯이, 마지막 문장을 통하여 시는 순환구조를 이뤄낸다.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책도 결코 닫힐 수가 없다. 생각은 다시 계속되는 것이며, 따라서 시에서 구두점은 사라진다. 언어는 확산이 될 수 잇는 가능성을 이렇게 지니게 된다. 닫아도 그 속에 바람의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쥘부채와 같이.      '책'과 극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책'에 도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랭보가 자청한 모험은 태초의 모어가 지닌 환기력을 확보하기 위한 가파른 재난이었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여정을 생각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언어는 마지막에야 '책'과 극에 도달한다. 우연이 아닌 언어의 순수역학을 따르는 책, 대문자의 책(Livre)이다.     시인은 이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책'을 꿈 꾸었다. '책'이라는 의미의 불어는 대문자로 쓰이면 성서를 뜻하기도 한다. 시인은 '책'이라는 '대작(大作)'을 구워내는 가마에 불을 때기 위하여 '연금술사처럼 인내하며', 모든 삶의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베를렌에게 고백한다. '책'은 관념상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도 존재하는 책이듯이.     '대작'이라는 꿈은 완전한 언어에 대한 꿈으로서, 언어 연금술을 전제한다. 불어로 '대작'이라는 말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의 화금석(化金石)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사위던지기』는 많은 점에서 화금석에 닿아있다. 화금석의 탄생에 의하여 진정한 모어가 우주에 확산될 수 있기를 시인은 꿈 꾸었던 것이다.     '책'의 계획은 '책'의 읽기 계획까지 포함한다. 시인은 시 낭독회에 대하여서도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책'은 고정되게 제본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낱장의 페이지들로 되어있다. 낭독자는 책을 낱장별로 따로 읽으며, 낭독한 후에 묶거나 정리함에 넣으면 또 다른 책이 된다. 낱장들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된다. 책장들의 무한한 조합을 가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은 이렇게 쓰기와 인쇄에 그치지 않고 읽기까지 포함하는 커다란 계획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글은 쓰는 자의 차원을 넘어선다. 쓰기는 더 이상 닫힌 공간에서 자족하지 않는다. 읽기의 확대이자 독자의 공간의 확대- 이제 수용의 문제가 주요 이슈로 대두된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극의 요소를 '책'에 도입하고자 한다. 시, 음악, 미술, 춤 등 여러 예술 범주들을 융합해낼 수 잇는 극처럼, 진정한 시언어는 여러 범주들이 교감과 통합을 이뤄내며 원시예술처럼 무대 위에 펼쳐져야 한다. 시의 낭독회는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 세월 분업화로 고착된 분열의 예술이 아니라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분열된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 제례(祭禮)와 예술의 통합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읽기는 이제 정신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해내는 작업이 된다. 시적 공간이 재창조되는 작업인 읽기- 읽기는 내면화된 극이다. 쓰기에서 읽기로 나아가는 것은, 내면의 시를 극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일이다. 읽기는 하나의 의식(儀式)이 된다. '책'은 그리하여 '정신의 도구'이자 '정신적 연극의 장소'로 완성된다. 여기에 시인이 말하는 '문자 속의 신비'가 빚어지는 것이다.     언어는 더 이상 자족적이지 않게 된다. 독자에 대한 의식이 전환되고 그 몫은 무한 확대된다. 독자는 이제 「알바트로스」나 낭만주의에서처럼 야유하는 자가 아니다. 독자는 참여자가 된다. 무한한 교감이 약속된다. 시인은 저주당하거나 추방당한 자가 아니다. 진정 시인은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의 핵심과 주변을 탐사하고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 꽃과 열매는 어떠하였는지, 개화와 결실 후의 역풍은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시들어갔는지, 열매 맺음이 문학과 예술이라는 드넓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시든 후에도 열매에 열매를 이어주고 있는지, 간략하게나마 상징주의의 큰 길과 소로들을 따라 가보았다.     우리는 상징주의 시의 계보에서 출발하여, 다른 사조로의 전이 양상, 즉 데카당스에서 초현실주의, 현대시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상징주의의 맥락을 살펴보았는데, 상징주의 문학의 구체적 양상은 무엇보다 시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상징주의 시에서는 우선 자유화시, 자유시, 새로운 활자배치법, 구두점의 제거, 페이지 개념의 변모 등, 다양한 시 형식의 실험에 주목하게 된다. 그 실험은 시와 산문의 통합이랄 수도 있는 산문시, 장르 간의 경계 넘기, 통합예술 등 여러 형식의 발명들로도 이어졌다. 이처럼 시를 기존의 기능과 형식에서 최대한 해방시키고자 하여, 오늘날의 시의 모습이 있게 한 것은 상징주의의 가장 현대적인 기여의 하나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의 해방과 동의어였다.     상징주의는 다양한 예술 방법의 도입과 철학의 영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이토록 풍부하게 확충시켜갔지만, 상징주의에 고유한 언어의 완성은 무엇보다 교감, 암시, 상징 등의 방법을 통한 감각과 시선의 해방에서 출발한다.     우선 보들레르의 교감 이론은 상징주의 시학을 주도하면서, 향후 시인들의 사물 읽기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 랭보의 자유로운 상상과 감각과 환상의 힘은 현대시를 향한 우상파괴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지옥으로의 하강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의 심연은 또 다른 오르페우스를 그려내었다. 그의 화려하고 고통에 찬 하강의 그늘에는, 저주와 자학 속에 완성되는 베를렌의 겸손한 선율이 있었으며, 감각과 음악과 언어의 융해와 교감이 있었다. 말라르메는 언어와 사물과 상징과 신비 등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섬세히 시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감각과 언어의 재정립을 통한 이러한 길찾기들에 비하여 발레리의 길은 조금 달랐다. 그는 말라르메의 언어철학을 토대로 순수시를 더 밀고 나아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빚어진 관념시를 제시한다. 상징 시인들의 구도의 여정들을 발레리는 지중해적 명증의 시학으로 다시 빚어냄으로써 서구 상징주의의 골격은 완성된다. 랭보의 우상파괴, 발레리의 순수시 등으로 현대시의 세계는 더욱 열리게 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방법 자체를 끝 없이 넘어서려 하였다. 그리하여 음악은 상징주의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으며 미술은 그 확산에 기여하였고, 상징주의는 다시 음악과 미술로 구현된다. 또한 상징주의자들은 특정 예술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추구는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추구였다. 말라르메는 언어의 완성을 절대의 '책'에서 보여주려 하였다. 거기서는 문자와 그림과 음악과 철학이 절묘하게 만난다. 그것은 통합언어를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문자예술은 그림문자를 지향하였고 활자법의 혁명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외양의 순수시로 자족하지 않고 일탈과 변모를 통하여 형식의 새로운 열림을 꿈 꾸는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통합예술이고자 하였다.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창조이면서 동시에 예술 스스로의 초월이고자 하였다. 랭보의 파괴가 재창조를 빠르게 그려내려 하였다면, 말라르메는 거기서 인내심의 부족을 읽어내었다. 그가 이끈 시형식의 혁명은 현대의 시와 산문들 속에서 다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의미와 색채가 어떠하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의 언어의 풍경이다. 사람은 '상징의 숲'을 걸어가고 숲은 친숙한 눈길로 그것을 지켜본다. 인간은 언제나 상징을 필요로 하고 빚어내며, 상징은 또 해독되기를 기다린다.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 늦게는 중반까지 성행하였던 일시적 조류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음에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하는 문학의 태도로서 언제나 의미 있다. 상징은 비록 여러 겹으로 두터워져도,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기만 하면 많은 것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주의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효용적 의미에서의 상징주의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적어도 표현의 한 기술이라는 측면에서도 상징주의는 살아있다.     상징주의에 대한 부정론은 상징주의의 발생 속에 배태되어있던 것이다. 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관념을 현실화한다는 문제는 시작부터 수용할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더구나 관념의 외적 형식에 무의미하게 집착할 때, 마침내는 무용한 언어 놀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 의미이든, 상징주의는 내용상 그리고 형식상 이미 대중과 유리라는 전제조건 하에 출발한 것이었다.     상징주의 선언을 기점으로 전개되었던 협의의 상징주의는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만에 끝나버린 운동이다. 상징주의는 언어에 대한 위선적 조작에 이를 수 있는 허구적 행위로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 언어 혁명의 맥을 놓치지 않고 따라 가보면, 상징주의는 끝없이 스스로를 부정, 수정, 완성시켜가려한 언어 행위였고, 상징주의가 보여주었던 형식의 실험은 오늘날의 문학 행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현실과 이상, 현실과 초현실 간의 대립 속에 오히려 안주하려 하였던 행위로 상징주의를 읽는다면 그것은 상징주의를 다 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안주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통합의 언어로 나아가고자 하면서도 상징주의는 그 의도 자체로 인하여 오히려 시인과 대중과의 유리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는 이미 상징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기(打棄)한 것은 허위로 끝난 상징주의였다하겠다. 진정한 상징주의는 언어의 혁명 혹은 점진적 수정행위와 더불어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발레리의 말대로 상징주의는 어떤 한 '유파'가 아닌 것이다.     상징주의는 또 모레아스의 「선언」에서와 같은 소문자의 상징주의와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 전기 상징주의, 후기 상징주의 등, 여러 분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진정한 상징주의는 이러한 분류를 넘어서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예술 분야와 통합되기도 하면서 확대될 수 있었고, 있어야 하였다. 모든 상징주의는 빨리 오건 늦게 오건 다시 대해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퇴조하였음에도 그것에 대한 믿음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해온 것은 언어통합의 욕구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분업의 양상이었던 언어의 장르들을 넘어설 언어가 요구되어왔던 것이다. 상징주의가 대통합을 궁극에 그리는 것은 분화된 바벨의 언어를 극복하려는 의지에서였다. 우리는 대문자의 '책'에서 언어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읽을 수 있었다. 상징주의가 남긴 긍정적 몫의 하나이다.     상징주의는 그 진행과정에 필연적으로 반동적 움직임들, 그리고 감각과 언어의 유희 속에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내재적 오류들과 부딪히기도 하였다. 의미 없는 신비 추구, 현실에서의 변화와 변혁의 욕구를 거의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세계 속의 침잠(沈潛), 지적인 메시지들에 대한 지나친 경도 등은 상징주의 스스로를 이미 새로운 글쓰기를 막는 낡은 굴레로 전환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형식주의를 버리고, 순수성이나 모호성이 아니라, 이상과 관념이 아니라, 생황의 본연과 실상으로 돌아오고자 한 문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상징주의의 원래 추구하였던 목표는 허구적 조작에 의한 상징의 창조가 아니었다. 베르렌도 말라르메도 발레리도 모로도 르동도 모두 대상에 대한, 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보았다. 그들 스스로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하였으며, 관찰 과정은 작품들 속에 섬세히 구현되었다.     더불어 기억할 것은 신비나 통합예술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더라도 상징주의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탐구라는 사실이다. 춤과 노래와 제례의식이 분리되지 않았던 태고(太古)의 하늘, 그 언어를 지표로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상징주의는 문학에서의 어떤 변형의 기술로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말라르메가 "아름다움이 꽃 피는 이전의 하늘"을 그리며, 문제는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 것"(Mallarme, 1974:880)이라고 말하였듯이, 상징주의에서의 언어탐구는 언어의 변형이 아니라 언어의 창안이고자 하였다.     그 탐구는 한 마디로 모성언어로 회귀하려는 언어의 지향성이다. 언어와 음악이, 제례와 축제가 하나이며,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던, 상징이 꽃 피던 시간, 그것에 대한 믿음과 향수- 이들이 상징주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주술적 언어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언어 주변을 떠돌고 있으므로 시 언어는 상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불어로 전개되었으나 코스모폴리탄적인 운동"(Richard, 1978:395)인 것이다.     큰 의미의 상징주의는 사조를 넘어선다. 잊지 말 것은 상징주의의 언어 화해와 대통합의 작업은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 마음에 따라, 겉과 속의 모습을 달리하며 상징주의는 언제고 전개될 것이며, 인간의 상징 또한 영속할 것이다. 이간의 상징은 과거나 미래의 현상이나 희망이나 절망과는 거리를 둔 채, 빠르게 느리게, 섬세하게 때로 거칠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거대한 페르소나를 바꾸고 또 굴러갈 것이다. [출처]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작성자 옥토끼    
274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댓글:  조회:3064  추천:0  2018-03-25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1)        1 상징주의의 정신        이상주의, 정신주의          1891년 말라르메는 상징의 신비란 "영혼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조금씩 조금씩 어떤 대상을 환기시키거나, 아니면 반대로 한 대상을 선택하여 일련의 해석 과정을 거쳐서 영혼의 어떤 상태를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글자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를 빚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함은 정신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지향을 요약하는 말이다. 상징주의는 근본적으로 물질주의에 대한 항의인 것이다. 물질주의는 졸라의 자연주의나 고답파적 사실주의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에 반대하며 반물질주의와 반자연주의로, 즉 관념과 이상이라는 정신 우선주의로 기울었다.   자연이라는 개념도 상징주의에서는 정신적 조화의 문제와 상관되는 것이었다. 조화를 언어의 세계 속에 구현하는 것, 즉 시 속에 내적이고 우주적인 질서를 다시 빚어냄으로써, 언어와 자아와 우주가 하나로 포용되는 상태, 그것이 상징주의의이상이었다. 고답파의 무관심에 가까운 "무심"자체는상징주의에서는 무용한 것이었다. 내적 상태에 몰두하였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원 너머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이었다. 초월을 위하여 "탈인성화" 가 요구되었으므로 낭만주의와도 구별된다.                낭만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자아에 두고서 그 자아의 본질을 감성과 심정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고 상징주의는 우주의 중심을 인간까지를 포괄하는 우주 자신에게로 환원시키고 그 우주의 본질을 감각과 이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한다. (김기봉, 2000; 113)          이상이라는 것은 막연한 동경이 아니었으며, 감각이나 감정 속의 안주가 아니라 스스로를 우주적 질서 속에 합일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와는 달랐다. 더구나 자연주의에서의 자연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었다.    상징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 자연주의 담론이 제시하는 생경하고 거친 현실로 축소될 수 없다는"( Marchal,1993;8)) 저항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징은 현실의 것을 기계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칠고 절망적인 현실(ici-bas) '저 너머(au-dela)의 현실을 환기하는 것이 상징의 중요한 존재의미였다.                 이제 현실의 것은 적이 되고, 철학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저 너머 세상은 모두 기꺼이 수용되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들이기 때문이다.(Marchal,1993;8).          상징주의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동반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쇼펜하우어와 헤겔과 니체의 철학은 상징주의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외에도, 기존의 진리에 의문을 표시하고 새로운 가치의 기준을 만들려 하였다는 태도 자체에서도 상징주의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와 아울러 신비와 신비주의는 상징주의 미학의 이성적 모습이자 '가장 세련된 형태'로서 '유행 현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문학은 영혼, 정신, 이데아, 본질이란 개념에 집착한다. 또한 자연주의 소설에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경하고 과장된 현실보다는 신화와 전설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2)        1 상징주의의 정신          문학의 자율성          자연주의에서 처럼 문학과 과학이 접목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주의는 언어 외적인 모든 범주들을 떨쳐내고자 한다. 이는 고답파의 예술지상주의를 계승한  측면이다. 언어는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주력한다. 문학과 언어 자체를 되찾고자 한다. 샤를르 모리스는 1891년 상징주의의 차별성을 다음처럼 강조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문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생리학이나 지리학이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되면 문학에 어떤 특이한 혼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가 가져다주는 혼동이다(중략) 사람들은 도덕이 도덕론자를 유인했던 논리적 결론을 시인들에게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란 '아름다움'외에 다른 본질적이고 자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 (Huret, 1984;94)       도구와 목적의 혼동이 자연주의의 부정적인 면의 원인이 되었거나 그것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문학이란 문학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율성과 미적 독립을 위하여 문학 외적인 목표는 모두 문학에서 배제해야 한다. 문학은 언어 자체만으로써 내적인 긴밀한 구성을, 즉 건축물처럼 '미리 계획된' 구성의 완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지향은 원래 에드가 포우를 계승한 보들레르의 지향이었다. 이러한 지향은 말라르메로, 발레리로, 다시 이어진다.     문학은 문학 자체로 존재의 근거를 지닌다. 아름다움은 진실되거나 선한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신념은 고답파에 이어 상징주의가 문학에 가져다준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다. 이미 도래한 문학의 상업주의 시대에, 문학의 시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는 문학이 이제 모순되게도 절대적으로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자비로 출판되었고, 스스로에게 비상업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말라르메는 말한다.         어쩌면 팔리면 안 될 것을 거래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팔리지 않을 때에는.       ( :Mallarme; 1974;378 )        팔리지 않는 문학이란 다시 말해 정신의 목적에 봉사하기를 희망하는 문학이었다. 어떤 목적이나 종속을 거부하였던 문학, 다시 말해 대중과의 유리遊離라는 위험까지 자청하였던 문학은 1857년 세기말까지 "이상과 절대에 목마른, 대부분은 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거의 신앙을 대신"(Marchal, 1993;10)해주고자 하였다. '문학의 사제''문학이라는 종교'라는 수식어들은 이러한 현상에서 나온 말이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3)        1 상징주의의 정신              비교주의, 난해성           사실주의 시대에 소설은 대량 인쇄권을 얻어 거대한 대중이라는 문학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상징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내밀한 시 속에서 "정신의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으며, 입문자들만 다가갈 수 있는 비교주의(秘敎主義)의 성역을 찾고자" 하였다.(Marchal, 1993;10) 비교주의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지 않은 종교의 태도를 말하므로, 상징주의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주의에 닿아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문인들이 신비주의 결사에 가입했다는 연구와 자료들이 있다. 상징주의 주변에 탄생한 데카당스도 반(反)대중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상징주의자들은 일종의 '선민의식'(Marchal, 1983;10)을 지니고 비교주의에 탐닉하며 새로운 시 언어에 대한 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고대어를 차용하거나 신조어를 만들기도 하며, 신문이나 연재소설의 일상어와 구별되는 순수한 언어의 탐구에 전념한다. 기존의 구문 구성법을 해체하거나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도 등으로도 이어지는 이러한 자세는 상징주의 문학에 필연적으로 난해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논리적 근거 하에 시작하여,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난해함은 그들에게는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난해성은 "독자의 준비 부족이나, 시인의 준비 부족에서 온다."(Mallarme, 1974;869)고 상징주의자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문 구성법과 단어 선택 등의 난해함, 거기에 더해지는 상징 자체의 난해함, 반대중주의, 비교주의,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새로운 상아탑이었고, 결국 비난와 오해를 동반하며 상징주의 쇠퇴의 중요 요인이 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언어추구의 양상 외에도 우리는 보들레르의 댄디즘과 에서 상징주의가 일반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댄디즘(dandysme)'은 19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일종의 문학적 태도로서, 타협하지 않는 예외적 삶의 양식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얻으려는 태도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보들레르는 댄디즘과 나르시즘을 연관지어 보았다. 그에게 댄디즘은 "정신주의와 극기주의에 닿아있는" 것으로, 영혼의 초월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알코올과 아시슈(hasghisch 인도 삼에서 뽑은 마약')라는 인위적 방법으로 실현된 창조의 상태인 '인공낙원'을 그가 그리는 것도 이러한 체험과 상통한다. 그것은 시적 창조의 원동력인 상상력과 인공 공간을 벼리는 일이어서,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갔다.         이러한 자세는 귀족주의보다는 고립주의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탐색과 난해성, 비교주의 등은 예술과 정신의 독자성 추구에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물질주의와 이성론과 엄정한 객관적 묘사나 무감동에 맞서서 정신의 '불확실한 영역' '미지의 영역' '불확정성'을 찾는다는 것은, 굳어버린 토대를 지우고 정신의 자율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일이었다.     상징세계는 그리하여 냉엄한 질서에 맞서서 유동성과 환상이 빚어낼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존 예술에 대한 부정은 그러므로 생성과 삶을 위한 움직임이었으며, 환상은 환상을 위한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상징주의의 이상은 일탈이나 격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 현실, 현상, 사실의 세계를 끊임없이 초월하여 '영혼의 상태'와 이상, 관념,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주의가 설혹 현실과 사실의 세계를 떠나고 벗어날지는 모르되, 현상의 세계 자체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징주의는(----) 반드시 현상을 통해서 관념과 본질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고, 또 포착된 관념과 본질이 현상 그것에 여일하게 실려서 현상 및 존재와 관념 및 본질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결함 내지 통일을 이루기를 꿈꾼다.(김기봉, 2000;110-111)              상징주의가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내재성과 독자성은 이렇듯 고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의 조화를 위한 것이었고, 궁극적 통합을 향해있었다. 통합이란 현상에서 출발하여, 현상과 이상의 모순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초월이란 허황한 구름잡기도, 세상 모두를 버리는 일도 아니었다.(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3)        2 상징주의의 미학              상징주의는 그러므로 도피 자체를 위한 이상 추구가 아니었다.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의 대안으로 이상과 절대적 관념과 형이상학을 미학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것, '지고의 미(beaute superieure)'를 표현하고 창조하는 것이 상징주의의 진정한 목표였다.     그 결과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의 상징 현상이요 상징적 존재"(김기봉, 2002-32)이게 된다. 즉 현상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징체계로서, 그것이 감추고 있는 본질적 실체에 다가서는 것이 상징주의 철학의 요체였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대상들의 현재의 외양 자체는 현실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며 ,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상은 관념을 표현하고 있거나 함축하고서 그것을 끝없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이 세계는 상징들의 거대한 덩어리, 상징의 숲으로서,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고 읽고 그것을 체험한다. 현상은 끊임 없는 해독을 요구하는 본질의 전언자(傳言者)인 것이다. '이 세상(ici-bas)'이 아니라 '저 세상(la-bas)'을 현상에 대한 관념 속에 불러일으킨다. 시인에게는 상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관념'이 예술로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철학이나 사상에 머물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주의는 언어 자체의 미학이었다. 일반 언어가 아니라 환기력 있는 언어의 추구였다. 문학은 사실적 산문을 넘어서서 상징적, 함축적, 암시적일 수 있는 힘, 순수한 환기력을 빚어내고 간직하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언어의 이러한 힘을 위하여 상징주의는 언어에서 굳어버린 관습을 지우고자 한다. 굳어진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이러한 언어탐구의 과정을 시인들은 연금술(hermetisme)에 비유하였다. 그것은 언어의 금과 은을 만드는 방법이었으며, 하나의 의식(儀式)이었다. 현자의 돌이나 지모(地母)나 절대의 언어는 동일한 신성성(神聖性)을 목표로 하였다.     상징의 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감각의 정화작업과 동시에 언어의 정화가 요구되었다. 본질적 관념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언어의 새로운 사용법이, 그 세계의 자연스런 유로(流露)를 위해서는 암시의 기법이, 암시를 위해서는 음악의 기법이 필요하였다.           교감       새로운 질서의 공간을 빚어내고 읽어내기 위해서는 감각의 정비가 필요하다. 감수성을 신선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낡은 감각들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부정, 즉 어떤 논리적 필요와 근거 하에 기존의 감각체계를 뒤흔들고 지우는 행위를 랭보는 " 모든 감각들의 오래고도 광범위하며 논리 있는 착란(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이라고 설파한다.     이는 감각의 틀을 단순히 새 것으로 바꾸자는 차원이 아니었다. 랭보는 스승이었던 이장바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인은 착란에 의하여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인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세계를 촉지하고,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낡은 시선으로는 볼 수 없고 예언자의 통찰력을 가져야한다고 하였다.     이 '보는 힘', 즉 정신의 참되고 아름다운 새 질서를 완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를 랭보는 견자(見者voyant)라 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감각의 오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착란을 통하여 견자가 되는 것, - 이는 마치 무병(巫病)을 앓고 난 뒤에 신통력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견자-시인은 스스로 자신의 제어력을 벗어나고 자신을 버린 상태에 도달한다. 이때 그는 "나는 타자다"라고  말한다.나는 죽은 것이다. 말을 하는 자는 나의 넋이 아니라 다른 자의 넋이다.      이토록 무의식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가 만나고자 하였던 감각과 인식의 또 다른 차원을 보들레르는 일찍이 랭보보다 앞서, 이라는 시에서 열어주었다.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들의 착란'이란 보들레르에게서는 감각과 감각의 경계선이 없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청각과 시각이 통합되는 것, 즉 색깔이 있는 청각(audition coloree)'등으로, 감각들이 섞이며 새로운 감각으로 변하여 또 다른 '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각과 정신이 해방되어 맞는 낯선 상태 즉 '미지(未知)'에 대한 추구를 말해준다. 그곳의 "가장 새로운, 보장된 높은 자유(mallarme 1974;363)을 위하여 무구(無垢)한 감각과 시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제 감수성과 시선이 없으면 언어는 세계를 창조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증상." 다시 말해 '공감각(共感覺)'은 여컨대 질서를 다시 빚어내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이다. 이 교감(交感)은 감각과 감각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의 세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섞인다. 그리하여 자아조차 버린다. 나는 나를 벗어나 나를 바라본다. 자아가 아니라 타자-자아인 상태에서 " 자신의 생각이 발현하는 것에 동참"한다고 랭보는 말한다(드므니에게 보낸 편지). 자아의 바깥에서 자아의 발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행복한 격리에 대해 말라르메 또한 말한다. "나는 비인칭(impersonnel)이 되었다." "내가 알던 스테판느가 더 이상 아니며", 우주적 합일을 향하여 가는 나의 능력(une aptitude)일 뿐이다"라고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논리와 언어의 우주적 합일을 위하여 그는 개인의 감성을 버리고자 한다. 그것을 시인은 '탈인성화(脫人性化)라고 한다. 일체의 감성적 여건으로부터 비인칭화 됨으로써 거짓된 감성의 한계를 초월하고, 상상의 모순을 극복할 논리를 수용한다.     말라르메와 랭보는 결국 같은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탈인성화나 자아의 의도적 의기를 통하여 그들은 정신과 언어의 격을 바꾸고자 하였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5)        2 상징주의의 미학              암시와 모호성              '암시(suggestion)'의 기법은 문학, 음악, 미술, 춤, 연극 등, 상징주의의 모든 작품에서 필요로 하는 기법이다. 상징주의자들은 대상을 묘사할 때 객관적인 언어로 윤곽있게 선명하게 그리는 일을 대상을 죽이는 일이라고 보았다. 말라르메는 "오직 암시만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명시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일이다. 시의 기쁨이란 조금씩 점쳐보는 데 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조금씩 점쳐본다는, 상징이 주는 기쁨의 여지는 지시적 언어로써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꿈이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예감하며 대상의 양상들을 따라가는 것이 언어가 주는 기쁨이다. 대상을 '통째로 취한다'는 것은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기존 언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모든 생성을 전적으로 막는 일이다.              고답파 시인들은 사물들을 통째로 취여서 그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신비감이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분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쁨이란 조금씩 풀어 나가는데 있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Mallarme, 1974;869)           "신비야말로 상징을 이루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비가 없으면 생성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신비야말로 생성의 영역이다.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상징의 목적에 반하는 일, 즉 신비로운 상상작용이나 유추작용, 환기작용을 막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꿈과 언어가 주는 기쁨을 가로막는다.     배를렌이 음악이 그려내는 모호한 영역에 집착하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음악에서의 '뉘앙스'를 시에 이식시키고자 한다. 베를렌의 모호함에 대한 추구는 랭보의 '감각들의 논리 있는 착란'이 겨낭하는 바와도 통한다. 모두 다 대상에 대한 굳어있는 의식 지우기에서 출발하여, 열린 감각과 질서를 향하겠다는 의지를 따른다. '회색 노래'란 서정적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지향이었다.              또 그대는 오해를 할 수 없도록        말을 선택하려하지 말 것.        '미묘함'이 '선명함'에 뒤섞이는        회색 노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으니.              그것은 너울 뒤의 아름다운 두 눈,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빛,        미지근한 가을 하늘에        밝은 별들의 푸른 뒤엉킴이어라!              왜냐면 우리는 '뉘앙스'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                                                                       암시기법은 그 특성상 미술에 손쉽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미술에서 암시는 신비와 거의 동의어였다. 암시의 기법은 신비의 해석이라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감상자를 더 쉽게 청할 수 있었다. 자유로운 상상과 무의식이 개입되는 감상 - 이로써 감상자는 적극적인 해석자가 된다.              르동은 암시적인 기법이란 사유를 자극하면서, 그것이 조명하고 예찬하려는 꿈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숭고한 조형 요소들을 결합시켜 빛을 발산시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호한 형식을 통해 '감상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장티, 2002;92~93)              암시는 그러므로 단순한 하나의 기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표현기법에, 그리고 사실주의 허상에 맞서는 일이다. 말라르메에 의하면 '완전히 허구적인 공간'을 빚어내는 일, 즉 기존 공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태양광선 아래 사물을 새롭게 보았던 방식과도 어쩌면 상통한다. 빛이 인상주의자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상징주의자들은 암시의 기법에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감각과 언어의 쇄신과 병행하는 것, 새로운 사물읽기와 같이 가는 것이었다. 암시법은 다르게 보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제부터 상징주의는 한 마디로 다르게 보는 법이었다.              (----) 새로운 시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상징주의자들의 덕분이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재현의 틀에서 분리시킴으로써 현대회화를 고안해내었듯이. 언어의 상징기능에 우위를 두면서 동시에, 말을 부호만이 아닌 또 다른 무엇,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향후로 확고부동해질 어떤 예술, 즉 시의 - 화가에게 색채 같고 음악가에게 소리같은 - 특수 재료로 만들면서, 우리에게 다르게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상징주의이다.(Marchal, 1993;30)           인상주의 회화에서 빛의 발견과 같은 의미를지닐 정도로,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발견은 서술이나 묘사나 설명이 아니라, 암시와 상징을 통해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단지 정확하거나 사실적인 기술 또는 함축적이거나 웅변적이기만한 기능에 머물러서는 이제 시의 언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지시어와 지시대상과의 자의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본질을 향하고 다른 우주를 창조해내야 한다. 창조가 이루어지는 때에야말로 '문자 속의 신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 순수한 '허구'가 실현되며, 글쓰기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본적으로는 세계라고 하는 상징 현상을 해독해내는 '번역자'이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특이한 상징적 기능을 지닌 언어를 빚어내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김기봉, 2000;40) 시인의 소명이란 상징을 읽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본질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계속)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6)        2 상징주의의 미학           음악           베를렌이 이라는 시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음악은 상징주의 시의 바탕을 만드는데 언어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말라르메는 "음악에서 우리의 자산을 되찾아오는 것"이 문학이라는 예술이라고 하였다.     그에게 음악은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소리 등, 음악의 기초 재료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총체"로서 마치 기악편성이나 교향악과 같은 것이다.     이 밖에도 음악은 상징주의 언어에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음악은 암시의 기법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의 신비를 빚어내는 일에 조력자 역활을 한다. 또한 음악은 시에 우연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 움직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음악은 나아가 마치 글쓰기의 직접적 도구나 재료인 것처럼 사용된다. 말라르메의 작품 에는 문자들이 악보의 음표들인 듯 배열되어 있다. 소리의 강약처럼 문자들이 크게 작게, 여러 다른 활자들로써 배치된다. 음악에서 휴지나 중지가 있듯이 백지와 텍스트 전체를 주도하기도 한다. 그가 를 악보처럼 생각하고 썼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새롭게 창조될 상징들의 조화로운 세계. 즉 언어가 빚어낼 '새로운 환경'을 위해 이처럼 음악의 도입은 필수적이었다. 상징주의 시에서 처럼 철저하게 음악을 사용한 문학은 없다. 음악에 문학을 근접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상징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보들레르는 음악을 이라는 시에 이미 차용하고 있다. 그의 라는 시는 언어와 음악과 춤의 구체적이고 정교한 융해를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언어의 기교 차원만이 아니라 시의 원론에 음악을 사용하였고, 음악의 구체적인 사용법들을 보여준다. 음악의 모방 차원을 이미 넘어, 말라르메는 '시는 더할 나위 없는 음악'이라고까지 하였다.      음악을 더욱 현실적으로 언어에 적용한 예는 베를렌에서 찾을 수 있다. 베를렌은 "여전히 그리고 언제고 음악을!"이라고 에서 외쳤다. 그는 음악을 시 속에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거창한 야망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 사용은 소박하지만 능란하다. 리듬의 도입은 그의 시에서 아주 자연스러워서 음악과 시의 리듬은 구별할 수 없도록 거의 하나가 되어있다. 이것이 그의 서정시를 완성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그의 시에서는 언어와 감정과 음악이 완전히는 분리되지 않는다.  상징주의의 방법 / 김경란 (끝)        3 상징주의의 언어           말라르메가 "시를 만드는 것은 생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들로써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르동에게 설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은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나. 여기서 시인은 문학은 문학 외적인 것을 분리하고, 상징주의는 결국 언어탐구라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 언어는 마침내 그것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여야 한다고 하였다.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언어은 죽은 언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학어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말라르메는 언어를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한다.              우리 시대의 떨쳐버릴 수 없는 욕구 중 하나는 한편으로는 날 것 혹은 직접적인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상태로, 마치 서로 다른 기능을 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말의 이중적 상태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273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댓글:  조회:1829  추천:0  2018-03-25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I. 현대성과 심미성 (……) 보들레르가 현대성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하버마스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들레르의 글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현대성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또다른 예술의 절반은 바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현대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현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정의는 무엇을 꾀하는 것일까? 분명한 점은 바로 ‘일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을 취하는 매시대의 현대 예술에서 소위 전통적인 본질인 영원성을 구원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현대적인 현재의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에피파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문장의 의도는 분명 그 글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부연 설명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현대성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지나가는 것에서도 유행이 예술적인 것을 취하게 되는 것, 그것을 유행으로부터 획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보들레르) ‘영원한 것’이 기능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이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은 단지 기능으로 남을 뿐이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의 순수한 기능 특성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서 두 차례나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 하나는 『현대적 삶의 화가』의 첫번째 장이며, 거기서 ‘시대’ ‘유행’ ‘도덕’ ‘열정’의 의미를 지닌 ‘상대적인 요소’로서 일시적인 것은 미의 ‘불변하는 요소’, 즉 ‘영원한 것’을 향유하도록 만든다고 언급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4장이며, 거기서 미의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 없이는 ‘아무 쓸모도 없는 추상적인 미의 공허함’에 빠진다고 언급되고 있다. 보들레르의 에세이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따라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정이며, 그 아름다움은 고대의 전형적인 모범에서 연역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현재 시간에서 생산된다. 이것은(하버마스 혹은 야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옮긴이) 현대 혹은 묵시적인 미래에 대한 이론적 명제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바로 고대의 고유한 ‘비밀스런 미’에 도달하는 일이 현대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들레르는 일시성과 영원성이라는 두 가지 양극적인 요소의 이중성 속에서 그 비밀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기능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예술적 요소―이 두 가지 간과될 수 없는 패러다임이 ‘영원한 것’으로 남게 되는데―의 법칙에서 말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상을 야우스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으며, 하버마스는 그러한 야우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오랜 전통 속에서 고대 혹은 고전적인 것이 지니고 있던 그 위치를 바로 영원한 것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것의 정반대인 영원한 것이 보들레르에게서는 지나간 과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야우스,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역사철학적인 관심사에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야우스는 ‘미에 대한 이성적이고도 역사적인 이론’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이론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잘못 유도된 해석이다. 따라서 야우스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을 역사철학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처럼 여기서도 보들레르의 순수미학적인 이론, 즉 현대의 일시성과 우발성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이론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즉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보들레르의 이론을 현재를 열정적으로 경험하는 역사적인 이론이라고 뒤집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 또한 보들레르의 ‘미학적 프로젝트’를 약화시키고 있는 야우스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목적은 소위 지배적인 ‘현재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다. 이것은 고대의 패러다임과 궁극적으로 결별하려 했던 보들레르의 ‘자기 정립’이라는 타탕성 있는 관점을 헤겔 식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즉 하버마스는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념을 오로지 ‘시대 성찰’이라는 범주에서만 유도해내고 있을 뿐 그 본래의 정반대적인 근본 특징, 즉 ‘비밀로 가득 찬 것’ ‘극도로 어렵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을 간직하려 했던 보들레르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현대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을 꾀하고 있다. 즉 일시적인 순간은 미래적인 현재의 진정한 과거로서 확인될 것이라는 점이다”.(하버마스) 그러나 보들레르는 현대로부터 그 본래의 비밀스런 미를 끌어내려는 심미적인 충동에 주된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즉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시대’의 모티브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심미적인 충동에 일방적으로 ‘역사이론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하버마스의 시각은 조심스럽게 파악되어야 한다. 미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보들레르는 미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각각의 현재’에 해당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모든 화가에게 현대는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이제 분명한 점은 시대성과 영원성의 활성화에 대한 보들레르의 변증법적 형상은 결코 ‘현재’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일시적인 것 혹은 현재의 모습 속에서 예술의 영원성을 구출하고자 했다. 특히 현재의 모습이 예술의 영원성을 가능케 할 경우 그것은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관련된 일시성의 주장은 아름다운 것에 명상적으로 집중하는 일을 위해 단지 기능적으로만 주어지고 있을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적인 차원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의 이중성은 인간의 분열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서, 변화하는 요소를 예술의 육체로서 파악하게 된다.”(보들레르) 아름다움을 ‘행복의 약속’이라고 목적론적으로 정의하였던 스탕달을 보들레르가 비판하였다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미의 ‘귀족주의적인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들레르는 ‘행복의 변화하는 이상’을 기준으로 삼았던 사유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미적 현대의 개념을 내세운 보들레르가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를 더이상 간과할 수 없다. 즉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토대는 역사적으로 파악된 ‘현재’라는 지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무한성’이라는 개념과 ‘전율’이라는 범주와 밀접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철학적인 매개는 진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롱기노스의 『장엄함에 관하여』를 끌어들였던 쿠르티우스(Curtius)에 대한 야우스의 비판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대성은 바로 롱기노스의 글에서 이론적으로 최초로 주어졌던 장엄함의 상상력을 통해서 조명되며, 현대적인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생각이 바로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와 야우스는 이러한 점을 오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역사철학적인 진보 도식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야우스는 한편으로 비초월적인 시대성을 지닌 스탕달 및 청년 독일파의 낭만주의 성향과 다른 한편으로 시대적인 것을 수수께끼처럼 경험했던 보들레르 사이에 놓여 있는 미묘한 차이점을 매끈하게 무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아무런 차이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나의 역사적인 단계, 즉 그 자체 이미 동일한 모양의 역사적인 단계만을 형성해내고 있다. 이러한 분석 시각이 바로 게르비누스(Gervinus) 이후의 문학사에서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 즉 심미성의 결핍인 것이다. 여기서 발전된 심미적 이론의 전망에 대해 하버마스가 못마땅해할 것이라는 점은 시간을 지양시킨 바 있던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비판하였던 그의 초기 글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 반역사적인 셸링을 명백하게 비판하며 실러, 헤겔, 마르크스, 청년 독일파에 의존하여 역사적인 주장을 제시하는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에 의해 상상화된 미와 관련하여 그 미를 은밀히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려는 필연적인 결단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하버마스는 예술을 유물론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보들레르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낙관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을 내세운 니체 이후의 ‘심미적 이론’을 마침내 비판할 수 있는 토대로서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의 이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하버마스는 니체의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헤겔에 의해 변질된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니체의 시각으로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니체를 현대성의 프로젝트가 본궤도에서 이탈하도록 만든 본래의 죄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니체를 역사철학과 예술의 보편주의적 철학을 심미적 이론으로 대체시키려 했던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II. 시간의 지양:미학적 범주의 형상화로서의 「마주친 여자에게」 마주친 여자에게 귀 따가운 길거리가 내 둘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자 하나가, 장중한 비통의 얼굴로 지나갔다, 화사로운 한 손으로 꽃무늬 장식의 옷단을 치켜들고 흔들어대면서; 조각상과도 같은 종아리로 날쌔고도 고상하게. 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 한 가닥 번개…… 그러고는 밤!―그 눈매로 나를 별안간 되살려놓고는 도망치는 미녀여, 이젠 저승에서밖엔 너를 다시는 못 보겠지? 머나먼 딴 곳에서! 너무 늦어! 어쩌면 영영! 네가 가는 곳 내가 모르고, 내가 가는 곳 네가 모르니, 오, 내가 사랑했을 너, 오, 그걸 알고 있던 너! 이 시에서는 미와 존재라는 범주와 관계하여 잃어버린 시대를 강조하는 독특한 감정이 표출되고 있다고 발터 벤야민은 밝힌 바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에서 영원한 이별은 도취의 순간과 일치하고 있다.” 벤야민은 그 순간을 ‘충격의 이미지’ ‘파국의 이미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벤야민 특유의 ‘충격’ 개념이 지닌 문제점과 그러한 논의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학적인 근거를 재차 상술할 필요 없이 우리는 그 순간이라는 시간의 동인이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충격이란 무엇일까? 『악의 꽃들』에 실려 있는 「우울과 이상」이라는 연작시에서 엿볼 수 있는 화자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우선 지각하는 자의 상황이 확인될 수 있다. 끊임없는 움직임―이것은 이미 시간적인 요소를 지시하는 것인데―에 의해 사로잡힌 이는 예기치 않게 그 어떤 것을 지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여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구분되는 지각이다. 즉 그 지각 자체가 속해 있는 범속한 장면 내에서 그녀는 범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엄하다. 또한 설혹 스쳐 지나가는 여인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느 만남과는 다르게 움직이는데, 즉 조각상처럼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간접 증거로 작용하는 여타 다른 의미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시간 자체의 메타포에 집중한다면―사라지는 것의 정반대, 즉 영원성을 대변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성 모습의 상징화 내지는 알레고리화는 다각적이며 또한 심리분석적이고도 정치학적인 차원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띨 수 있다. 예컨대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이마고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견해나 혹은 공화국에 대한 영웅적인 이념 내지는 자유 이념이 알레고리로 표현되어 있다는 등의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 시간 양식에 관한 질문과 관계해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인 점은 시간의 지각에 엄격하게 제한된 추론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슬픔이 제2제정 시대에서 잃어버린 자유를 뜻한다고 해석될 경우, 공화국에 대한 상은 그러한 해석을 포함하게 되며 결국은 믿을 만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이전 시대에 대한 체념적인 시각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적이고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무엇을 내세울지라도 그러한 해석과 상이하게 대치되는 점이 나타나게 되는데, 즉 보들레르 텍스트에서는 역사적인 시대가 아니라 시간 단계로서 파악되는 시간의 느낌에 대한 성찰 양식이 우선적인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악의 꽃들』 전체의 구조 요소인 시간의 의미론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인과 재빨리 사라진 여인이라는 두 가지 확인될 수 있는 범주를 디테일하게 기술하는 보들레르의 수법을 염두에 두면, 이 시와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2) 간의 연관성이 형성된다. 그중 산문시 「군중Les Foules」에는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의 상황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고독한 산책자로서의 시인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그 산책자는 ‘군중 속에서의 남자’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다수’에 대한 그의 일면적인 사회적 경험과도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군중 개념의 정반대인 고립(solitude)을 경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 속에서 ‘혼자’인 셈이다. 이와 같은 혼자 있는 존재 상태로 인해 시인은 다른 이들과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도취’를 경험한다. 군중 내에서의 고독은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매력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며, 그러한 고독은 비밀(mysterie)과도 같다. 여기서 고독의 발견자는 아닐지라도 고독을 이론화하였던 루소와의 구분이 불가피하며, 항상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루소의 확신에 대해 의심을 품은 바 있다. 그 차이점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측면, 즉 보들레르는 ‘자연’이라는 매개물로 정의된 루소의 고독을 단호하게 배제하였다는 사실에서 읽어낼 수 있다. 스위스 숲을 거닐던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는 파리에 있는 메닐몽탕 언덕에서의 과거 체험을 상기한다. 여기서 고독한 루소의 명상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내향화된 고독 속에서 명상하는 루소는 곧 자신을 모든 사물의 주인으로 해석한다. “고독 속에서의 명상, 자연 탐구, 세계 관찰을 통해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부단하게 사물의 주인으로 만들게 되며 달콤한 불안감으로 모든 사물의 목적과 자신의 모든 느낌의 원천을 탐지하게 된다.”(루소, 「세번째 산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와는 반대로 보들레르의 ‘고독’ 개념은 도시적인 삶 그리고 자아가 대면하게 되는 사물의 지각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는 루소의 자연관 및 고독에 대해서 늘 성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우울』의 또다른 산문시 「고독La Solitude」에서 보들레르는 루소보다는 오히려 라 브뤼예르(La Bruy뢳e)와 파스칼(Pascal)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이전 시기의 자기 도취(루소)와―17세기의 두 사상가가 언급했던―‘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차가운 에토스를 서로 대비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라 브뤼예르나 파스칼 같은 현대 이전의 보수적인 모랄리스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사유를 성찰적이고도 주관적인 차원에서 혁신시켰던 루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능한 한 루소의 사유를 넘어서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루소 극복은 다름아닌 ‘고독’을 상상력의 생산지로 파악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파리의 화려한 거리라는 외적인 세계와 다수의 군중은 단순히 다채로운 사회적인 현상 자체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풍속극의 무대, 즉 희극(Kom쉊ie)으로 향유되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군중」에서 볼 수 있듯이 ‘미지의 것’으로서 파악된 ‘무한성’의 차원이 열리고 있으며, 이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을 배회자로 파악하는 이론적인 구상은 하나의 정신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그 정신 상태는 수동적으로 현상과 마주치는 상태가 아니라 현상을 스스로 생산해내는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적인 지각 범주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 해결 차원에서 1860년 처음으로 출간된 「마주친 여자에게」가 반드시 ‘미지의 것(사람)’이라는 범주에 완전한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읽혀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점이 입증되고 있다. 더욱이 「군중」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정신 상태는 「마주친 여자에게」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들이 사랑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매우 무의미하고, 제한적이며 미약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 형용할 수 없는 향연, 그 신성한 영혼의 매음은 다르다. 시적이며 또한 연민의 정을 내보이는 이 영혼의 매음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것, 지나가는 미지의 것에 자신을 바친다.” 미지의 지나가는 여인과 마주친 사람의 시선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향연’이 다름아닌 ‘예기치 않은 미지의 것’을 시적으로 창작하는 이의 ‘향연’(시인의 글쓰기 상태―옮긴이)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충격 개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문제의 핵심, 즉 보들레르 텍스트는 미지의 것을 능동적이고도 미학적으로 구성해내는 텍스트라는 점을 놓치게 된다. 「마주친 여자에게」서 화자의 반응을 묘사하는 구절(“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도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바로 「군중」에서 아이러니컬하게 묘사된 시인의 도취된 정신 상태와 부합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간 미지의 여인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향연에 젖은 시인은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슬픔의 고통에 잠긴 고상한 여인은 일종의 정신적 자극으로서 멜랑콜리한 기호의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고독한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갖고 있는 비밀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인 ‘무한성’의 두 가지 요소가 주어지며, 그것들은 ‘애매함’의 범주와 부합된다. 경우에 따라서 그 수수께끼와 같은 여인은 슬픈 모습으로 인해 어느 미망인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즉 그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상징적인 문맥에서 읽혀질 때, 다시 말하면 묘사된 파리의 사회적 현상을 사회학적이고도 사회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당시 1850년대에 대한 지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멜랑콜리하게 구조화하는 기호의 창살로 읽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여인이라는 기호를 중심으로 지나간 미지의 여인,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미망인들Les Veuves」의 여인, 그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안드로마케(『악의 꽃들』 중 대표적인 시 「백조」에 나오는 신화적 미망인―옮긴이)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 특히 「미망인들」에서는 귀족다운 기품을 통해 자신의 주변 환경의 저속성과 대조를 이루는 어느 미망인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장엄하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지난날의 귀족 미인들의 초상화 콜렉션에서도 그녀와 비교될 정도의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고상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미망인의 모습에는 무엇보다도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완전히 혼자(absolute solitude)이고 거만한 듯한 냉엄한 스토이즘적 자세(une fierte de sto뷵ienne)를 보이며 또한 고통스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설혹 시선을 주고받는 테마가 결코 연출되지 않았을지라도, 또한 에로틱한 함축 의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어쨌든 미지의 미망인과 미지의 지나간 여인 간의 친화성은 이 시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이다. 즉 두 여인은 다름아닌 미학적이고도 정신적인 색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두 여인의 모습에는 다가가기 어려운 현상의 품위가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점은 미망인은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의 내적인 상태를 장식해주는 중심 기호라는 것이다. 그녀는 희망을 포기한 이들, 그럼에도 “그들 내부에서는 아직도 천둥의 마지막 탄식 소리가 노호하고 근심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시선으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는” 패배자들을 대변해준다.(「미망인들」) 이미 지나간 감정의 순간이 아직도 시간적으로 여전히 현존해 있다는 것은 바로 ‘노호하는’ 상태로 표시되어 있다. 「미망인들」에서 사용된 ‘천둥(orage)’이라는 단어가 「마주친 여자에게」에서 사용된 ‘회오리바람이 싹트는(ouragan)’이라는 단어와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침내 우연처럼 두 여인간의 은밀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미망인들」에는 시선 교환이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결국 시인의 의도적인 시선 포착에 관한 언급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미망인들」에서는 미망인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마주친 여자에게」와는 달리 그 산문시에서는 수수께끼가 풀려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상의 구조를 완성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수수께끼’이다. 특히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을 표현하는 핵심 코드 기호인 ‘고독한 번뇌(Douleurs solitaires)’에서 그러한 수수께끼가 발견될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은 ‘미망인’이라는 형상에 바로 슬픔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마고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시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처럼 시인의 특성은 관찰된 대상에 함축되어 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고독한 여인은 결국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의 범주인 것이다. 산문시에 나타나는 미지의 것이라는 범주와 슬픔이라는 범주는 결국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에서의 여성 모습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녀를 지각하는 시인도 마찬가지로 심미적인 지각 단위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주친 여자에게」의 장면에서 그려진 것은 단순히 즉흥시에서 엿볼 수 있는 어떤 개인들간의 조우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을 세련되게 구성하고 있는 두 범주간의 조우인 것이다.[출처]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작성자 최진연 [출처]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작성자 옥토끼
272    시, 어떻게 쓸까 -문학강의 [ 퍼온 글 임] 댓글:  조회:1681  추천:0  2018-03-25
누가 쓰셨는지  지금 작자를 모르겠네요.                                           1. 글쓰기는 말걸기이다(듣기가 읽기인 것처럼)   누구에겐가 말을 건다는 것은 첫 마디를 던진다는 것이다. 처음 몇 마디가 뒤엉켜 버리면 끝장이다. 내 후배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꺼내는 친구가 있다. ■저어, 있잖아요, 제가, 며칠 전부터 생각한 것인데요, 선배에게도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린 사항인데■■■ 그래서 그 후배가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쐐기부터 박는다. ■너, 결론부터 말해.■ 글도 마찬가지다. 모든 글쓰기는 첫 문장 쓰기이다.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사의 첫 문장은 ■호객 행위■라고 말한다.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필름도 도입부를 매우 중시한다. 리모콘이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프로그램, CF 제작자들은 강박증이 생겼다. 첫 장면에 승부를 걸어라. 처음 몇 초 안에, 시청자를 붙잡지 못하면, 채널을 바꾸기 때문이다. 모든 글은 첫 문장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 잘 쓰는 비결을 하나 공개한다. 내가 잘 아는(이름 석 자 가운데 한 자만 대도 독자들 대부분이 알 수 있는) 시인은 시를 한 편 완성하고 나면, 첫 문장을 백 번 이상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다시 읽어 본다. 첫 문장이 흡족해야 시를 발표하는 것이다. 거듭 반복한다. 첫 문장에 목숨을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쓰기)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의 시(쓰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절실한 것이며, 절실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문창과 학생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도 시(쓰기)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 것인지 명쾌하게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에 일고여덟은 ■나 자신과 대화하기 위해서■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가까운 이들과 좋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상대적으로 글쓰기와는 무관한 젊은이들에게 두 번째 질문(꿈이 있다면,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해 보라)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젊은 편집자들과 술을 마시다가 꿈을 물어 보았더니, 몇몇은 당혹스러워했고, 몇몇은 ■있는데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한둘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했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한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꿈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내 지론을 강요했다간 싸움이 날 판이었다. 나는 ■우리는 꿈꾼 것만을 이룰 수 있다■는 무하마드 유누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의 저자. 방글라데시의 대안 운동가)의 잠언을 들려 주고 싶었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왜 필요한가?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나는 이 우주 안에서 자립, 자존,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악기이기를 지향하면서도 나의 시는 아직, 수시로 무기이다(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한 문장의 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쁘게 가난을 선택할 수 있게 하소서■이다. 산업 문명으로부터 완벽하게 이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도시에서 스스로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기생의 존재■가 도시를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생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쌀 한 톨을 일궈내는 데도 삼라만상이 참여해야 한다). 야생조차도 인간 문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과학적 보고서가 있는 터에, 함부로 도시의 바깥을 상정하는 것도 유아적으로 보인다. 시를 통해 자기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동시에, 도시적 삶의 그늘로부터 한 뼘씩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아직도■ 있다면, 감히 한 권의 책을 권한다. 나탈리 골드버그가 쓴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권진욱 옮김, 한문화). 이 책을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당신은 이미 이전의 당신이 아니다. 미국의 글쓰기 지도 전문가인 나탈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러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꿈에 대해서 5분 동안 써 보십시오■.   2. 문제는 감각이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축구 경기를 보다 보면, 간혹 ■감각적인 플레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선수■라는 표현도 자주 접한다. 최상의 기량이라는 찬사다. 지난 해 6월, 월드컵 축구대회 대 폴란드 전에서 황선홍 선수가 이을용 선수의 패스를 받아 성공시킨 골 같은 경우 말이다. 황선홍은 골대를 보지 않고 슛을 날렸다. 스포츠에서는 ■감각적■이라는 수사가 극찬이지만, 시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시에서 감각적이라는 평가 앞에는 대개 ■지나치게■라는 부사가 붙는다. 감각이 승한 시는 깊이가 없다는 전통적인 잣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비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나치면 그르치는 것이 어디 감각뿐이랴. 상상력에서부터 이미지, 리듬, 관념어, 주제의식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 가운데 지나침이 허용되는 것은 없다. 나는 감각적인 시를 옹호하는 편이다. 감각없는 축구 선수가 드리블이 좋지 않듯이, 감각적 형상화가 서툰 시는 생생하지 않다. 감각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가벼운 감각이 가벼울 따름이다. 감각에는 깊이가 없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몸과 마음의 경계이다. 감각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 있는 가교이다.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한다. 실존은 감각의 실존이다. 감각의 실존 가운데 가장 앞서 가 있거나 높이 있는 것, 그러니까 감각의 극단이 시이다(■잠수함 속의 토끼■라는 비유가 있다). 감각의 제국 안에서 제왕은 단연 시각이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지할 때 사용하는 감각은 시각이 대부분이다(80퍼센트).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간다(혹은 비켜선다). 보통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쓰기는 단순한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이다. ■북쪽은 고향/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다시 풀릴 때/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른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이용악(1914-1971)의 초기 시 〈북쪽〉 전문이다. 시 속에서 국경 근처 고향을 그리워하는, 국경 너머 팔려간 여인을 염려하는 시인의 눈은 마음의 눈이다. 그 마음의 눈은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는 지경까지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이처럼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시각이 감각의 전부는 아니다. 시각은 오히려 흘러넘치고 있다. 이용악 시대의 시각과 21세기 후기 산업 시대의 시각은 크게 달라져 있다. 시각은 대량 소비 시대, 대중 문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광고와 매체를 통해 인간의 눈을 포섭해, 인간을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시각 패권주의■ 시대이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돼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소비자의 눈을 인간의 눈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 주로 시각에 의한, 시각을 위한 인지와 소통은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배제하거나 왜곡한다. 시각 과잉은 인간을 인간 자신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정현종의 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던, 그리하여 그 섬에 가고 싶어하던 시대는 행복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있는 이 시대에 인간을 시각 과잉으로부터 ■구원■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시각 패권주의에 희생당하고 있는 나머지 다른 감각을 복원하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시각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라야 활발해진다. 깊은 어둠 속에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들리는가. 제대로 맛을 낸 음식을 음미하는 미식가의 얼굴을 보라, 미식가는 눈을 감고 ■음~■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손가락도 촉감에 충실하고자 할 때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발표하는 시들에는 소리와 향기가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이 같은 변화를 시각 패권주의에 대한 시의 저항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차창룡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 〈나무 물고기〉에는 ■똥은 꽃처럼 향기로워■(〈트리베니 가트에서 누는 똥〉)라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이 시는 꽃을 똥의 차원으로 추락시킨다. (아름다운) 꽃이 상승이라면 (추한) 똥은 하강의 이미지인데, 이 상승과 하강을 똥의 형상(하강하면서도 결국은 상승을 의미하는 생김새)으로 일치시켰다가, 급기야 똥의 냄새를 꽃의 향기로 격상시킨다. 아, 얼마나 통쾌한가. 시각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꽃에서 똥의 향기를 ■맡는■ 시인의 감각이라니. 황선홍의 월드컵 첫 골에 못지 않은 ■감각적인 시■이다.     3 . 짧은 글을 읽어라   봄이여 눈을 감아라/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 병상일지 전문 5> 전문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시집이 많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시집을 받아 볼 높은 위치에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 시사주간지에서 오랫동안 문학 담당 기자를 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보도 자료■로 보내오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동료, 선후배 시인들이 ■부채의식■ 때문에 보내는 시집들도 제법 있다. 시인들은 시집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긴다. 그래서 새 시집을 펴낸 시인들은 그동안 시집을 보내온 시인들의 명단을 놓고 한 나절 넘게 주소를 쓴다. 그동안 밀린 ■시집 빚■을 갚는 것이다.   보름달은 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 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전문 우편으로 시집을 많이 받다 보니, 몇 가지 요령이 생겼다. 출판사와 시집 장정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시집 맨 처음에 실린 시를 먼저 보게 된다. 그러고 나서 시집 맨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시를 본다. 그 다음에 눈여겨보는 시가 짧은 시들이다. 시집 맨 처음과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시인은 거의 없다. 첫번째 실린 시는 시집 전체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고(서시 분위기가 많이 난다), 마지막 시는 이른바 ■앞으로의 계획■쯤에 해당한다. 이렇게 두 편의 시를 읽고 나서, 짧은 시들을 골라 읽는다. 그러니까 서너 편 정도 일별하면 시집의 높낮이를 웬만큼 측정할 수 있다. 왜 짧은 시인가? 짧은 시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짧은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파스칼이었던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쓰지 못했다■라고 말한 이가. 흔히 장시를 쓰는 데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줄 알고 있는데, 모든 장시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서너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쓰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 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은 수도승 못지 않은 삶을 살았다. 두 행짜리 하이쿠를 쓰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지켰다. 4행짜리 게송을 읊은 선승들은 또 어떻고). ■봄이여 눈을 감아라/꽃보다/우울한 것은 없다.■() ■보름달은/어둠을 깨울 수 있지만/초승달은 어둠의 벗이 되어 줍니다.■() 두 편 다 3행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짧은 시이다. 앞의 것은 김초혜 시인이 계간 2002년 겨울호에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것은 최종수 시인의 첫시집 에 실린 시이다. 짧은 시는 비수라기보다는 번개에 가깝다. 하지만 사람들은 번개와 천둥이라고 하지 않고, 천둥과 번개라고 말한다. 번개와 천둥은 사실 동시에 발생하는데, 빛보다는 소리를 더 두려워하는 모양이다. 짧은 시는 번개다. 번갯불에 벼락을 맞기도 하지만, 한참 뒤에야 세상을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를 보자. 봄은 꽃의 계절인데, 봄으로 하여금 꽃을 보지 말라고 한다. 생명의 한 절정인 꽃에서 ■우울■을 보았기 때문이다. 절정인 꽃은 곧 시들게 마련. 만개한 꽃 속에서 꽃의 죽음을 본 것이다. 짧은 시는 이처럼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온갖 고정관념(선입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뒤흔드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꽃, 기쁨)에서 죽음(우울)을 발견하는 눈! 시의 위력은 그 눈에서 나온다. 은 또 어떤가. 달을 빛의 양(동그란 정도)으로만 규정하고, 어둠을 빛으로 물리쳐야 할 악으로만 이해해 오던 우리에게 시인은 아주 새로운 견해를 제출한다. 어둠을 깨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어둠과 함께 하는 벗 또한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순간 어둠은 빛의 반대 진영에 있는 악이 아니라, 빛과 더불어 존재하는 동반자로 거듭난다. 어둠의 입장이 되어 보자. 자신에게 위압적인 큰 빛(보름달)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작은 빛(초승달)이 훨씬 더 애틋하지 않을까. 보름달이 혁명이라면 초승달은 연민(공감)의, 혹은 연대의 은유이리라. 짧은 시를 많이 읽자. 짧은 시는 서너 번 읽으면 외어진다. 그렇게 외운 시는 삶의 여러 국면, 구체적인 삶의 문제와 접점을 가지면, 시의 의미가 부풀어오른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다면 ■꽃보다 우울한 것은 없다■라고 말해 보라. 큰 것, 힘센 것만을 추구하는 선배가 있다면 어둠과 벗이 되어 주는 초승달 이야기를 꺼내 보라. 좋은 시는 짧은 시이고, 짧은 시는 우리들 구체적인 삶의 안쪽에 들어와 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이메일을 띄울 때, 외우고 있는 짧은 시를 전송해 보자. 보내는 이나 받는 이의 일상 속에서 아름다운 스파크가 일어날 것이다.                    4. 은유, 그 아슬아슬한 거리   지중해가 맑은 이유가 그 청년 때문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고 나왔을 때, 주인공 마리오에 대한 기억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말라터진 바게뜨 빵을 연상시켰던 마리오는 너무 섬약하고 또 너무 순수했다. 그가 지중해의 청정함을 지키는 정수기처럼 보였다. 마리오가, 잠시 섬에 체류하게 된 세계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속 우체부■가 되면서 시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네루다를 영웅화했다면, 네루다가 떠난 이후,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보낸 별이 반짝이는 소리까지 담은 ■녹음 편지■는 전통적인 시(활자)의 시대를 마감하는 징후로 보였다. 시위 현장에서 마리오가 스러져가는 장면은, 네루다 혹은 시의 시대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몇몇 장면만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네루다가 거두절미하고 ■메타포■라고 답하는 대목이다. 메타포, 은유. 그렇다. 은유가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은유를 빼 놓고서는 시를 쓸 수도, 읽어내기도 쉽지가 않다. 은유는 시와 시쓰기, 시읽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동력(전달 장치)이다. 직유를 거쳐 은유를 웬만큼 구사/해독할 수 있다면, 그는 괜찮은 시인/독자이다. 직유는 주종 관계이다.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라고 쓸 때(결코 좋은 비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바람은 그가 달리는 상태를 구체화하는 보조 역할에 머문다. 하지만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라는 표현에서는 약간 달라진다. ■그■와 ■바람■ 사이도 그렇게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비■와 ■쇠못■ 사이처럼 스파크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비와 쇠못 사이는 매우 먼 거리다. 일상적 차원에서 비와 쇠못은 거의 무관한 관계이다. ■비둘기는 평화다■와 같은 상징은 아예 주종 관계에서 종이 사라진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쓰이는 순간, 비둘기 고유의 정체성은 지워져 버린다. 상징은 상징에 동원되는 수단을 지워 버리는, 매우 폭력적인 비유법이다.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내세울 때, 비둘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징이 종교와 신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징은 권력의 도구이다. 직유에서 주종 관계가 희박해질 때, 나는 그것이 바로 은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직유가 술어(동사)를 거부할 때, 예컨대 ■비가 쇠못처럼 달렸다■가 아니고, ■비는 쇠못이다■로 변화할 때, 직유는 은유로 한 차원 승격한다. 그래서 나는 비유법을 자주 은유법이라고 이해한다. ■그대는 꽃이다■라고 쓸 때, 그대는 꽃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그대가 꽃을, 또는 꽃이 그대를 없애려고 하지도 않는다. 은유의 차원에서 그대와 꽃은 그대도 아니고, 꽃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은유의 위력이다. 내가 지지하는 은유는 다원주의에 바탕한 은유이다. 즉 하나의 절대적 중심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모든 존재와 의미가 각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은유이다. 직유가 수직의 상상력이라면, 은유는 수평의 상상력이다. 직유(혹은 상징)가 과거의 세계관이라면, 은유는 미래의 세계관이다. 공존, 상생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직유도 그렇지만 은유의 생명력은 비유되는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에서 나온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을 다시 불러와 보자. ■그는 바람처럼 달렸다■ 혹은 ■그는 바람이다■라고 했을 때, ■그■의 이미지가 선명해지지 않는 것은 바람이 갖고 있는 모호성 때문이다. 여기서 바람은 주어를 도와 주지도 못하고 동사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참신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직유는 구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상투성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비가 쇠못처럼 내렸다■ 혹은 ■비는 쇠못이었다■라는 표현이 위의 경우보다 조금 산뜻한 까닭은 쇠못이 갖고 있는 구체성 덕분이다. 은유를 ■A는 B이다■라고 흔히 말하는데, A와 B의 사이가 너무 가까울 때 상투성으로 전락하고, A와 B 사이가 너무 멀면 난해함으로 빠진다. 네루다와 마리오 사이의 대화를 흉내낸다면, 시란 저 A와 B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이다. 그리고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A와 B를 결합시키는 비결은 (전에도 말했지만) 평소의 관찰력과 상상력에서 나온다. A와 B를 난데없이 연결시켜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직관력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관찰과 상상의 누적이 없다면 은유의 직관은 불가능하다. 사족 같은데, 한 마디만 덧붙여야겠다(은유를 말하고 있으니까).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에 바늘을 찔러야, 풍선은 강렬하게 터진다.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풍선, 그것이 관찰과 상상의 상태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정신이다. 그렇게 깨어 있다면, 바늘(직관)은 얼마든지 있다. 불지 않은 풍선은 풍선이 아니다. 탄생 이전이거나 죽음 이후다 [출처] 시, 어떻게 쓸까 -문학강의 |작성자 최진연    
271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요약 [퍼온 글임] 댓글:  조회:4388  추천:0  2018-03-25
제1장 비평이론 요약   - 각 비평이론이 Text에서 분석해내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정신분석비평: 텍스트가 등장인물 또는 저자의 무의식, 즉 억압된 심리적 상처와 두려움,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해소되지 않은 갈등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마르크스주의비평: 사회경제체제가 어떻게 인간경험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특히, Text가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텍스트가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계급차별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여성주의비평: 텍스트가 가부장적 규범과 가치들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 가부장적 규범과 가치들의 기반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신비평: 해당 텍스트가 위대한 문학작품인가? 말하자면 텍스트 안에는 보편적인 의의를 갖는 주제와유기적인 통일성이 모두 존재하는가?   독자반응비평: 독자의 읽기 경험이 텍스트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다. 즉,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 그리고 독자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와 텍스트 사이의 관련성은 무엇인가?   구조주의비평: 우리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기본적인 구조체계(예를 들어 원형, 양식, 서사 등에 관한 구조)는 무엇인가?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텍스트의 문법을,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행동이 갖는 기능을 보여주는 일종의 공식처럼 나타내기도 한다.   해체비평: 텍스트의 자기모순을, 어떤 주제아래, 해소하지 않고 분해하면,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들과 관련하여 무엇을 알게 되는가?   신역사주의비평: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해석에 관여하는가? 특히 해당 텍스트를 낳은 문화안에서 유력하게 작용하는 담론(특정한 이데올로기들과 결부된 언어사용방식)들의 순환과정에서 텍스트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문화비평: 특별히 ‘노동계급’의 문화적 생산물(대중소설이나 영화같은 것)에 주목하고, 그것과 ‘고급’문화생산물(이를테면 정전이 된 문학작품)을 비교한다. 이때 텍스트가 수행하는 문화적 작업은 무엇인가? 즉, 텍스트가 어떻게 사회경제적 권력구조를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을 전달하고 변형시키는가?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 텍스트가 어떻게 레즈비언, 게이, 퀴어 섹슈얼리티를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이성애주의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특히 퀴어 이론의 경우 섹슈얼리티(성적지향성)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갖는 부당성을 텍스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가? cf: 젠더: 여성성, 남성성(여자답다, 남자답다). 섹슈얼리티(성적지향성)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텍스트가 어떻게 인종 및 인종적 차이를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탈식민주의비평: 텍스트가 문화적 차이(인종, 계급, 성과 젠더, 성적지향, 종교, 문화적 신념, 관습 등이 결합하여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들)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그러한 재현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비평이론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는 자체 목적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인간 경험 일반을 이해하는 지평까지도 확장시킨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이론가들은 어떤 비평이론이든 역사적 현실 속에서 생산되며, 따라서 정치적 함의를 갖기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다. 특정 비평작업이 정치적 현실에 눈 감다고 해서 정치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구조를 보호하게 될 뿐이다.   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독법은 개인이나 가족에 혼란을 가져오는 파행적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비정치적’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재현되는 파행적 사랑을, 현대 미국문화의 산물(자본주의, 가부장제, 기타 이데올로기들이 한데 맞물려 작용한 데 따른 산물)로 고찰했다면, 이는 명백히 ‘정치적’인 정신분석학적 독법이다.   해체론을 구사하여 텍스트의 의미가 결정불가능하다는 점, 다시 말해 의미가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히는 작업은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해체비평은 의 텍스트 내부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상의 모순, 곧 숨겨진 정치성을 들추어내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평가는 하나의 이론만으로 문학작품을 해석할 수도 있고, 단일 작품을 두세개 혹은 그 이상의 이론들을 활용하여 분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해당 이론과 관련된 다른 이론들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 제2장 정신분석비평     -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형식은 저자, 독자, 또는 사회전체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적 동력의 산물이다. 따라서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영화, 음악 등 모든 예술을 정신분석학적 도구들로 해석할 수 있다.   -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읽고자할 때, 어떤 정신분석학 개념이 텍스트안에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작품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1) 텍스트 안에서 주요 등장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무의식적 동기는 무엇인가? 이로써 밝혀지는 핵심문제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2) 문학작품속에서 오이디푸스적 역학관계 또는 가족 역학관계가 존재하는가? 등장인물(성인)의 행동양식을 그 사람이 어렸을 때 가족안에서 겪은 경험(작품안에서 언급된 경험)과 연관시킬 수 있는가? (3) 인간존재와 죽음 혹은 성욕 사이의 심리적 관계에 대해 작품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4) 꿈의 상징들을 통해, 화자는 무의식, 즉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억압된 상처와 두려움, 해소되지 않은 갈등 등을, 작품 속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에 어떻게 투사하는가? (5) 문학작품은 저자의 심리에 관해 무엇을 시사하는가?   1. 무의식의 기원   (1) 정신분석학적 사유의 중심개념은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을 통해 아주 어릴 때 생겨나는데, 우리가 상처와 두려움, 욕망, 갈등 등, 알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억압하여 보관하는 창고가 무의식이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담기만하는 저장소가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역동적인 실체이다.   (2) 정신분석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면, 인간은 어린시절 집안에서의 경험들로 시작되는 심리학적 이력(즉, 오이디푸스적 역학관계, 가족역학관계 등)의 직접적인 결과로 형성된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다.   (가족역학관계 사례) 우리는 상처와 두려움, 욕망, 갈등의 진짜 원인들을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방법을 찾게 되기까지, 고통스러운 경험과 감정들에 매달린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죽은 알콜중독자 아버지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사랑에 아직도 목말라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면, 냉담한 알콜중독자를 배우자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고, 그 배우자를 대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연할 수도 있으며,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내가 그 배우자로부터 원하는 관심을 얻는데 성공한다면, 둘 중 하나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경우로, 그 사람은 자기가 정말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게 결코 납득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자기의 사랑을 내게 납득시켰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경우다. 나를 배려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겪은 고통을 다시 체험하려는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있고 자식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거듭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린 시절 내내 받은 정신적 상처들을 계속 치유해 나가야 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오이디푸적 역학관계 사례)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어머니와 아직도 (무의식 안에서) 경쟁중인 여성은, 이미 여자친구가 많거나 아내가 있는 남성에게 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다른 여성에 대한 그 남성의 애착을 바탕으로 본인의 어머니와 경쟁하여 ‘이번만큼은’ 이기겠다는 다짐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도 남자를 차지하지 못할 수 있으며, 설령 차지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넘어온 남성에게 흥미를 잃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남성의 매력은 그가 다른 누군가에 매달린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물리치고 아버지의 애정을 얻는데 성공했다고 느끼는 여성 또한 이미 아내가 있거나 여자친구가 많은 남성에게 끌릴 수 있다. 왜냐면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죄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데 대해 자신을 벌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스스로를 그 남성에게 성적 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 오이디푸스적 애착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일반적인 양상은,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이른바 ‘착한여자/나쁜여자’라는 구분이 수반되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얻으려고 아버지와 아직도 (무의식) 경쟁중이라면, 나는 여성들을 어머니같은 여자(착한여자) 아니면 어머니같지 않은 여자(나쁜여자)로 분류하고 후자와만 성관계를 즐김으로써 죄의식을 달래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쁜여자란 그 자체로 간악하고 추잡하기에 어머니를 연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쁜여자를 유혹했다면 그녀를 버려야만 한다. 결혼할 만한 자격이 없는 여성, 즉 어머니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여성에게 자신이 끝없이 매달리는 것을 용납할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착한여자를 유혹한 뒤에는 두가지 일이 일어난다. 먼저 나의 영원한 맹세를 받을 자격이 없는 다른 나쁜여자들처럼 그녀 또한 나쁜여자로 치부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녀를 더럽힌데(어머니를 더럽힌 것처럼)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나머지 이를 피하고자 그녀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 방어, 불안, 핵심문제들   - 방어란 억압된 것들을 억압된 채로 유지시킴으로써, 우리가 알게 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지 못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방어기제는 선택적 지각, 선택적 기억, 부인, 회피, 전치, 투사, 퇴행 등이 있다.   선택적 지각: 감당할 수 있을 법한 것만 보고 듣게 한다. 선택적 기억: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완전히 망각토록 한다. 부인: 문제가 사라졌거나 불쾌한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게끔 만든다. 회피: 억압된 경험 또는 감정을 일깨움으로써 불안감을 가져올 법한 인물 또는 상황을 떨어져 있도록 한다. 전치: 상처, 분노 등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보다는 덜 위협적인 인물 또는 대상에 그런 감정들을 풀어버리도록 한다. 퇴행: 일시적으로 이전의 심리상태로 귀환하는 것이다. 퇴행은 억압된 경험과 감 정들을 인정하고 대처할 능동적 역전의 기회를 동반하기 때문에 유용한 치 료수단이 될 수 있다. - 방어기재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이때가 바로 ‘불안’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불안은 다음과 같은 우리의 핵심문제들을 드러낸다. 즉,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데 대한 두려움, 낮은 자부심, 오이디푸스적 고착(오이디푸스적 콤플렉스) 등이다. 예를 들면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은 각별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친밀한 관계가 상기시키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3) 죽음충동과 성욕충동   - 프로이트는 죽음을 ‘생물학적 충동’으로 보았으며, 이를 죽음충동 또는 타나토스라고 명명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존재에게는 죽음의 충동이 있으며,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스스로 삶에서 격리되려는 욕망(자살)은 죽음작업이 갖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우리가 폭력영화, 자연재해, 각종 살인 및 사고 등 죽음과 죽음작업을 재현하는 매체에 매혹되는 것은 자신과 무관한 인물이나 사건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투사시키는 것이다.   - 성욕도 ‘생물학적 충동’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충동을 에로스라 명명했고 이를 죽음충동인 타나토스와 대립시켰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성욕이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며, 어린이조차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의 단계를 거치는 성적존재로 이를 통해 우리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 성적행동은 문화의 산물이다. 성욕에 대한 사회적 원칙은 초자아의 상당부분을 구성한다. 초자아는 우리 본능과 성적에너지인 리비도를 비축해두는 이드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드는 주로 사회적 관습에 따라 금지되는 욕망들로 이루어진다. 자아는 외부세계를 경험하는 의식상의 자기로서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심판 역할을 담당한다.   (4) 꿈의 상징   - 꿈은 억압된 상처와 두려움, 죄의식이 따르는 욕망, 해소되지 못한 갈등 등을 안전하게 내보내는 출구가 된다. 꿈은 위장된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는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까지만 꿈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꿈에서 표현되는 무의식의 메시지, 즉 꿈의 근원적인 의미나 잠재내용은, 우리가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전치와 압축의 과정을 거쳐 왜곡된다.   6. 라캉의 정신분석학   - 라캉에 의하면, 유아는 생후 몇 달 동안 자신과 주변 환경을 모두 일정한 형체가 없는 파편화된 덩어리로 받아들인다. - 생후 6개월에서 8개월 사이에서 거울단계가 찾아온다. 이 단계에서 거울이나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을 통해, 형체없는 파편화된 덩어리가 아닌 온전한 전체로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는 감각을 발달시킨다. 이 거울단계에서 상상계(imaginary order)가 시작된다.   - 상상계는 유아가 말대신 이미지를 통해 경험하는 세계이다. 자신의 주변세계에 대한 완벽한 제어는 아이에게 대단한 만족감과 힘을 가져다준다. 어머니는 내가 원하는 전부이며,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전부이다. 유아에게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욕망’인 동시에, ‘어머니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중요한 시기로, 아이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 아이의 언어습득은 상징계(symbolic order)로의 진입을 뜻한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경험을 수반하며, 가장 중대한 분리는 그동안 상상계 안에서 친밀한 결합을 유지해왔던 어머니와의 분리다.   - 어머니와의 분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상실의 경험으로 일생동안 우리를 따라다닌다. 우리는 더 이상 불가능한 어머니와의 결합을 대신할 만한 크고 작은 것들(배우자, 돈, 종교, 권력, 명예 등)을 찾아 나서는 작업을 무의식적으로 계속하며, 이같은 삶을 보내게 될 영역이 상징계이다. 이런 것들을 얻게 되더라도 완벽한 충족감은 지속시킬 수 없다. 어머니와의 결합 같은 완전함과 풍요로움은 우리가 상징계에 진입하는 순간, 다시말해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의식적 경험의 세계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을 라캉은 소문자 타자(대상a)라고 부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 이후 먹어 본적이 없던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우연히 다시 맛보고는 유년기로 되돌아가는 듯 한 즐거움을 경험한다. 이때 화자에게 마들렌은 대상a라고 할 수 있다.   에서 개츠비에게는 데이지가 사는 곳의 부두 끝자락에서 반짝이는 초록색 불빛이 대상a일 것이다. 개츠비에게 초록색 불빛은 데이지를 향 한 희망뿐만 아니라 순수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속시켜 준 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 즉 대상a가 어머니와의 결합이라는 언어 이전 단계에 대한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우리에게 무의식적으로 결합의 환상을 상기시키는 사건 또는 시기는 유년기 이후에도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상실과 결여의 경험과 더불어 도래한 상징계는 우리의 정신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었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무의식의 욕망은 언제나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 즉 언어를 갖기 전에 경험한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추구한다.   라캉에 의하면, 무의식의 작동양상은 일종의 상실 또는 결여를 암시하는 두 가 지 언어작용과 닮아 있다. 바로 은유(metaphor: ‘내 사랑’은 붉은 ‘장미’다.)와 환유(metonymy: ‘왕관’을 썼다면 당연히 올바르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이다. 은유와 환유는 일종의 상실 또는 결여를 함의한다. 즉, 은유와 환유는 모두 실제 로 말하고자 하는 대상(내사랑, 왕)을 제쳐두고 그 자리에 대체물(장미, 왕관)을 가져온다.   은유는 서로 비슷하지 않은 대상들을 한데 묶는다는 점에서 무의식적 작용인 압축과 흡사하다. 내가 굶주린 사자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다면 그 사자는 현실에 서 나를 못살게 구는 인물들(직장상사 혹은 내가 빚을 지고 있는 사람 등)이 하 나로 합쳐져 나타난 대상일 것이다. 환유는 인물/사물을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다른 인물/사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전치와 흡사하다. 내가 직장 상사에게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라면 나는 애꿎게 내 자식들에게 화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은유와 환유에서 공통적으로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을 뒤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선다. 우리가 언어들 습득하는 순간,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순간, 어머 니에 대한 환상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잃어버린 대상은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다. 더 이상 자기 충족 및 제어의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계에서는 지켜야할 규칙과 따라야할 규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 라캉은 상징계가 어머니의 욕망/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교체되는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상징계의 어머니(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어머니, 즉 대문자 어머니)는 아버지(보편성을 갖는 아버지 즉 대문자 아버지)의 소유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회규칙과 금지사항을 인식하고 이로서 사회적으로 길들여지는데, 규칙과 금지사항을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존재가 대문자 아버지, 즉 권력자로서의 남성이기 때문이다.   - 언어를 갖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세계에 대한 욕망이 억압된다 해서, 이로서 무의식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자기충족 및 제어의 환상과 더불어 어머니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세계, 즉 상상계가 억압되는 것은 아니다. 상징계가 의식의 전면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상상계는 의식의 배후에 계속 존재한다.   -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와 상상계 모두 실재(the Real)를 제어하려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실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의미형성체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실재는 존재의 어떤 해석 불가능한 차원이다.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통째로 윤색하는 일종의 커튼과도 같다면 실재는 바로 그 커튼 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커튼 뒤를 볼 수 없다. 그곳에 실재가 있다는 생각에 때때로 밀려드는 불안감을 제외하면 우리는 실재와 관련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라캉은 이러한 경험을 실재의 외상(truama of the Real)이라고 부른다. 실재의 외상은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줄 뿐이다. 즉, 사회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아래 숨겨진 현실이란 우리의 능력으로 이해할수도 설명할수도 제어할수도 없는 종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7. 고전적 정신분석학과 문학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형식은 저자나 독자안에서 또는 사회전체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의 산물이다.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문학작품을 읽고자 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어떤 정신분석학 개념이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작품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아서 밀러의 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읽으면, 윌리 노먼의 과거 회상 장면에서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원인은 윌리 자신과 그의 아들이 업계에서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정신적 외상에 있다. 윌리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형에게서 버림받은 이후로 계속 자신을 괴롭혀 온 엄청난 불안감을 달래려고 성공을 바랐던 것이기 때문이다. 윌리는 否認과 회피로써 심리적 불안감을 억압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회 부적응과 직장에서의 실패를 견디는데 자신의 삶을 모두 소진시켰다. 또한 은 가족 내 심리적 역학 관계를 탐구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 가족안에서 해소되지 않은 갈등이 어떻게 일터에서 발산되고 또한 자녀들에게 대물림되는지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줄거리) 늙고, 피로에 지친 주인공의 뇌리에 쉴새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장면을 현실과 교착시켜 무대에 표현하는 극작술은 독창적이다. 주인공 윌리 로만은 원래 전원생활과 노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생하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심산으로 세일즈맨이 되었다. 30년간 오직 세일즈맨으로 살아오면서 자기 직업을 자랑으로 삼고 성실하게 일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두 아들 비프와 해피에게도 그의 신조를 불어넣으며 그들의 성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타락해 버렸고 그 자신도 오랜 세월 근무한 회사에서 몰인정하게 해고당한다. 궁지에 몰린 그는 장남에게(비프) 보험금을 남겨 줌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 주려고 매일 다투어 온 비프와 화해하던 날 밤에 자동차를 과속으로 달려 자살한다. 윌리 로먼의 장례식날 아내 린다는 집의 할부금 불입도 끝나고 모든 것이 해결된 지금, 이 집에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다고 그의 무덤을 향해 울부짖으며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8.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독법   에서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이 서사를 전개시키는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읽으면, 여주인공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파행적 사랑을 다룬 한편의 심리극이다.   톰과 데이지의 결혼생활은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 톰의 상습적인 외도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톰은 데이지를 비롯한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친밀감보다는 자기만족의 욕구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톰에게 데이지는 사회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존재이며, 톰은 육감적이고 생기넘치는 머틀 윌슨을 소유함으로써 자신만의 사내다움을 강화시키려한다. 데이지는 톰과 결혼할 무렵에는 톰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도하고 있는 톰을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톰에게 잔뜩 매달리게 된다. 친밀감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남성과 사랑에 빠진 여성은 본인도 친밀감을 두려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친밀감을 두려워하는 여성에게는,친밀감에 대한 욕망이 없는 남성처럼 안도감을 주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톰과 데이지가 공통적으로 겪는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은 낮은 자부심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부의 크기만큼이나 톰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돈과 권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그토록 열중하지 않을 것이다. 데이지도 외도하는 남성에게 푹 빠졌다는 사실은 데이지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더 나은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게다가 데이지는 모임이 있을 때마다 가식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자아를 강화하려는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에서도 데이지는 톰에게 그렇듯이 개츠비에게도 친밀감을 바라지 않는다. 데이지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톰 덕분에 누리고 있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뉴욕의 호텔 방에서 톰이 개츠비의 사회적 출신과 배경을 폭로하자 데이지는 개츠비를 향한 마음을 즉각 거두어들인다.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한 친밀감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개츠비의 궁극적인 목표는 데이지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능하고 별 볼일 없는 농사꾼인 부모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목표 그 자체라기보다, 부와 사회적 지위 획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실마리에 불과하다. “그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된 우아한 여자였다.”“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은처럼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빛을 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완벽한 여성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개츠비가 친밀감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현실에서는 이상형과는 친밀감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개츠비와 데이지의 낭만적 사랑은 해소되지 않은 모든 심리적 갈등이 극적 형식으로 가장되어 연출되고 또 반복되는 무대가 된다.   ----------------------------------------------------------- 제3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의 목표는 예술, 교육, 법 등 ‘문화적 생산물’에 작동하는 이데올로기를 확인하고, 그러한 문화적 생산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체제를 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지지하거나 약화시키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시간을 초월한 어떤 미학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수동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쓰인 시공간의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이 낳은 생산물이다. - 정신분석 비평가가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족갈등과 정신적 상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가족내 문제가 어떤 면에서 사회경제체제 및 그것이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들의 생산물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1.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들   - 경제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은 모든 유무형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 이면에 작용하는 동기이다.따라서 경제는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현실이라는 상부구조를 조건짓는 토대가 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권력의 분배와 역학관계’라는 측면에서 모든 인간활동을 설명한다.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경제적 계급의 차이는 종교, 인종, 민족, 젠더의 차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상으로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부르주아지(가진자들)가 모든 자원을 지배하는 반면,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트(못가진자들)는 육체노동에 종사하여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면서 열악한 조건에 살아가면서도 이러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2. 이데올로기의 역할   -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신념체계이며, 모든 신념체계는 문화적 조건화(Cultural conditioning)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기 마련인데,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계인식으로 생각된다.   3. 인간의 가치와 상품의 가치   - 마르크스주의의 관심은 자본주의가 인간가치에 끼치는 악영향에 관한 것으로 사람과 상품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의 가치는 인간적인 것과는 무관하며 오직 그 상품과 시장에서의 관계로만 결정된다. 상품의 가치는 사용가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교환가치 또는 사회적가치(교환가치기호: sign exchange value)에 달렸다. 자기만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인간관계를 이용하는 경우, 인간존재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상품화’는 사람이나 물건을 교환가치 또는 교환가치기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연애상대를 고를 때, 상대방이 자기에게 얼마나 돈을 쓸 것인가 즉, 상대의 교환가치를 따진다거나, 혹은 상대방이 친구들에게 얼마나 근사한 사람으로 비칠 것인지 즉, 상대의 교환가치기호를 생각하고 고른다면, 이는 연애상대를 상품화하는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가 생존해 나가려면 소비지상주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교환가치기호 획득을 우리가 주변 세상과 관계하는 주요방식이라도 되는 양 부추긴다. 자본주의 최대관심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소비재를 구매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 시장과 상품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공급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확산시킨다. 제국주의는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다른 국가를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제국주의 정부는 피지배민중들의 의식을 식민화하여 민중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세력이 원하는 방식대로 상황을 인식하게끔 만들려고 한다. 피지배 민중들은 점령자들보다 정신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점령자들과 같은 새로운 지도자들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있어야만 자신들의 모든 것이 개선될 수 있다고 그들 스스로 믿게끔 만드는 것이다.   -------------------------------------------------------- 제4장 여성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은 문학이 어떻게 여성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억압을 강화하거나 반대로 약화시키는지 점검하는 방법론이다. 중요한 것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양상으로 텍스트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우리의 인지나 동의없이 어떻게 우리를 길들이는지를 인식하는데 있다.   - 여성주의 전제들   (1)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의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으로 억압받는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억압을 지속시키는 주요 수단이다. (2)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어느 영역에서나 여성은 타자이다. 여성은 물건으로 취급 되고 하잖은 존재가 되어 주변으로 밀려난다. (3) 모든 서구문명에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전래동화를 포함한 위대한 서구 문학 정전의 형성조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 (4) 생물학이 성(남성 또는 여성)을 결정한다면, 문화는 젠더(남성적 또는 여성적)를 결정한다. 남성적인 행동이나 여성적인 행동에서 연상되는 모든 특징은 타고나 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다.   - 여성주의 이론을 활용하여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법   (1) 문학작품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아니면 약화시키는가? 강화하는 경우 텍스트가 가부장적 의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약화하는 경우 테스트가 여성주의적 의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동시에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의 경우 이데올로기들의 대립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문학작품이 어떻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등장인물의 행동이 젠더에 관한 전통적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면 그러한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아얘 관점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은가?   전통적 성역할 = 가부장적 성역할   가부장적이란 전통적 성역할을 조장함으로써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려는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적 성역할에 따르면 남성은 합리적, 강인하고, 무언가 보호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여성은 비합리적, 감정적, 연약하여 보호가 필요한 순종적인 존재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남성이 독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데 활용되어 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오래도록 여성의 몫이었던 열등한 위치는 생물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생산된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가부장적 성역할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신데렐라 역할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학대를 견디고, 자신을 구해줄 남성을 묵 묵히 기다리며, 결혼이야말로 올바른 행실에 뒤따르는 가장 바람직한 보상이라 생각하도록 함으로써 여성성을 순종성과 같은 것으로 보게끔 한다. 남성의 경우 자신의 여성이 행복한 상황을 책임지고 만들어야 할 구원자로서 남성에게 요구되는 근사한 왕자님 역할 역시 남성에게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남성은 지칠 줄 모르는 특급 부양자여야 한다는 믿음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 제5장 신비평   1. 내재적·객관적 비평으로서의 신비평   - 신비평이론가들은 꼼꼼한 읽기가 텍스트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신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 자체에서 찾아낸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을 입증하는 작업이다. 신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문학작품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자율적인(자기충족적인) 예술작품이다.   - 텍스트 안에서 만들어진 맥락과 텍스트가 제공하는 언어만이 해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비평행위를 내재적 비평이라고 했다. 신비평을 제외한 모든 비평은 외재적 비평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문학 텍스트 해석에 필요한 도구들을 텍스트 밖에서 찾는다는 의미이다.   - 신비평가가 문학 텍스트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 텍스트의 유기적 통일성을 가장 잘 규명할 수 있는 단일한 최고의 해석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의 형식요소들과 그 요소들이 생산하는 의미는 어떻게 작동하면서 텍스트의 주제 또는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뒷받침하게 되는가?   2. 문학적언어와 유기적 통일성   - 작품이 지닌 유기적 통일성(organic unity)은 신비평이론가들이 문학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하나의 작품이 유기적 통일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 안의 모든 형식요소들이 함께 작동함으로써 텍스트의 주제를 확립시킨다는 말이다. - 유기적 통일성을 갖춘 텍스트는, 삶의 복잡성을 재현하려는 문학작품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복잡성’과 인간존재가 추구하는 ‘질서’를 동시에 갖추게 된다. 텍스트의 복잡성은 다양하면서도 종종 상충되는 의미들로 만들어진다. 이런 의미들은 역설, 아이러니,애매성, 긴장 등의 네 가지 언어적 장치들을 통해 생겨난다. 이렇게 생산된 의미의 다양성과 상충성은 해당 텍스트의 주제에 이바지해야 한다. 주제의 확인이 신비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꼼꼼히 읽기(close reading)는 텍스트의 구성요소들과주제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면밀히 검증하는 독법으로서, 텍스트의 유기적통일성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살피는 것이다.   (1) 역설(paradox): 자기모순적인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물이 존재하는 실제방식을 나타내는 진술. 예) ‘참으로 살기 위해서는 참으로 죽어야 한다.’ (2) 아이러니(irony): 어떤 진술이나 사건이 그것이 발생하는 맥락 속에서 오히려 존재근거를 상실하는 경우.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이혼을 비난하지만, 그 비난은 이혼을 통해 더 많은 부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는 경우. (3) 애매성(ambiguity): 하나의 낱말이나 이미지 또는 사건이 둘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경우. 예를 들면, 어떤 작품에서 나무가 고통, 인내, 재생 등을 암시할 수 있다. (4) 긴장(tension): 텍스트안에서 서로 대립되는 성향들.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사이에서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긴장같은 언어적 장치들에 덧붙여 자주 쓰이는 비유적언어(figurative language)인 이미지, 상징, 은유, 직유는 다음과 같다. 비유적언어란 순전히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다른 의미 또는 그 이상의 여러 의미를 갖는 언어를 말한다. (0) 이미지(image):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동시에, 어떤 정서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구름은 흐린 날씨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비애감을 환기시키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1) 상징(symbol):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이미지이다. 예를 들면, 봄은 재생 또는 젊음의 상징이다. (2) 은유(metaphor): 상징은 단어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를 포괄하는데 반해, 은유는 비유 한가지 의미만을 갖는다. 예를 들면, 내 남동생은 보석이다. (3) 직유(simile): 은유만큼 직접적이거나 단호하지 않는 비유다. 예를 들면, 내 남동생은 보석같다. 내 남동생은 보석처럼 고귀하다. ---------------------------------------- 제6장 독자반응비평   - 독자반응비평이론가들의 공통된 믿음 (1) 문학작품이해에 독자의 역할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2) 독자는 문학텍스트안에서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어 낸다. 따라서 같은 텍스트라고 하더라도 독자들에 따라 상이한 독법이 나올 수 있고, 같은 독자가 같은 텍스트를 여러번 읽는 경우에도 각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 독자반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반응과정에서 텍스트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따라, 상호거래적 독자반응이론, 영향(감정)문체론,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심리적 독자반응이론, 사회적 독자반응이론으로 구분.   1. 상호거래적 독자반응이론: 텍스트와 독자사이의 거래를 분석하는 방법론.   - 로젠블랫에 의하면, 텍스트가 의미를 생산하려면 “텍스트와 독자 양쪽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텍스트는 읽는 내내 그리고 읽기가 완료된 후에도, 독자가 발전된 해석이나 완결된 해석을 위해 앞으로 되돌아가 텍스트의 일부 혹은 전체를 다시 읽게 되는 경우 청사진으로 작용한다.   볼프강 이저에 의하면, 모든 텍스트는 확정적의미와 불확정적의미를 전달한다. 확정적 의미란 활자화된 말들로 확실히 명시되어 있는 사실들을 가리킨다. 불확정적 의미는 독자에게 자기만의 해석을 창조하도록 허락하거나 유도하는 일종의 텍스트 내부의 틈새를 말한다. 작품 속 어느 시점에서 확정적 의미인줄로만 알았던 부분이 뒤에 가서 보니 불확정적으로 보이게 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읽기행위를 통해 독자가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은 텍스트에 의해 미리 구조화되어 있다. 바꾸어말하면, 텍스트 해석에 수반되는 여러 과정들을 거치면서 텍스트 자체가 직접 독자를 이끌어 간다.   2. 영향(감정) 문체론(affective stylistics)   - 영향문체론은 행, 구, 낱말 단위로 텍스트를 꼼꼼히 점검함으로써, 텍스트가 읽기 과정에서 어떻게 독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에서 독자가 최종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행하는 것을, 독자가 읽기 과정에서 경험함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이다. 텍스트는 독자가 하나하나의 낱말과 구절을 읽어나가는 내내 영향을 끼친다.   3.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주관적 독자반응이론은 “독자들의 반응이 곧 텍스트”라고 주장함으로써, 텍스트 상의 단서를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호거래적독자반응이론이나 영향문체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블라이히(David Bleich)에 의하면, 독자들의 해석이 만들어낸 의미를 초월한 문학 텍스트란 없으며, 비평가의 분석대상이 되는 텍스트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독자들에 의해 기록된 반응이다. 문학텍스트는 실제대상과 상징적 대상으로 구분된다. 실제대상은 인쇄된 지면이다. 이렇게 인쇄된 지면 또는 언어 그 자체를 누군가 읽을 때 독자의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상징적대상이다. 유일한 텍스트란 상징적 대상, 즉 독자마음속에 존재하는 텍스트이며, 이같은 텍스트만이 주관적 독자반응이론 비평가들의 분석대상이 된다. 4. 심리적 독자반응이론   노먼 홀랜드(Norman Holland): 정신분석학 개념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심리적 반응을 분석. 문학텍스트를 접할 때 나타내는 심리적 반응은 일상생활 속 사건들에 대한 심리적 반응과 동일하다. 방어기제는 텍스트를 싫어하거나 오독하도록, 아예 읽는 것 자체를 그만두도록 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이 해석이다. 텍스트가 우리의 심리적 평정을 위협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우리는 평정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어떤 식으로든 그 텍스트를 해석해야만 한다. 홀랜드의 해석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세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방어단계, 방어기제를 안정시킨 뒤, 심리적 평정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보호받으려고 해석하는 환상단계, 방어와 환상으로부터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앞의 두 단계를 마무리 해석하는 변형단계를 거치게 되는 세가지 해석의 단계가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일어나게 된다. 홀랜드에 의하면 독자들의 해석의 목적은 저자와의 감정융합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5. 사회적 독자반응 이론   사회적 독자반응이론에서는 개별독자의 순수한 주관적 반응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문학에 대한 개별적인 주관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속한 해석공동체의 산물이다. 우리가 텍스트를 읽을 때 적용하는 해석전략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것들이다. 해석공동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해 나간다. 독자들은 의식적 무의식으로 동시에 하나 이상의 해석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다른 해석공동체로 여러차례 옮길 수도 있다. 모든 독자는 텍스트를 대할 때마다 자신이 속하는 해석공동체에서 작동하는 특정 해석전략들에 따라 해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피시의 주장이다. 우리의 모든 문학적 해석은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가 가져오는 해석전략들의 결과물이다.       ----------------------------------------------- 제7장 구조주의 비평   1. 구조언어학과 구조주의 문학   - 구조주의에서 쓰이는 용어는 대부분 구조언어학에서 나온 것이다. 쇠쉬르는 언어를 제각각 변화해 온 역사를 지닌 개별 낱말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어떤 시점에서 사용되는 낱말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조체계로 파악한다.   - 언어를 지배하는 구조와, 그 구조의 표면현상들인 무수한 개별 발화들을 구별하 고자, 소쉬르는 언어의 구조를 랑그(langue), 말할 때 생겨나는 개별 발화들을 파롤(parole)이라고 명명했다. 구조주의자들에게는 랑그가 연구대상이다.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개별 문학작품들을 구조화하는 랑그, 그리고 전체적인 문학체계를 구조화하는 랑그를 탐색한다.   - 구조주의는 개별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주어진 텍스트가 좋은 문학작품인지 아닌지를 가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표면현상의 영역이자 파롤의 영역이다. 구조주의는 문학텍스트를 랑그, 즉 텍스트들로 하여금 ‘의미를 갖게끔 만드는 구조’를 탐색한다. 그 구조는 ‘문법’이라고 명명되기도 한다.   구조주의 문학연구는 구체적으로 세가지 분야에 주목한다. (1) 문학장르 구조 (2) 서사작동양상 구조 (3)문학 해석 구조가 그것이다.   2. 구조주의문학의 세가지 분야   (1) 문학장르의 구조 :   -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의 신화이론(원형비평): 신화를 구조화하는 네가지 서사양식(희극/로맨스/비극/아이러니와 풍자)은 뮈토스(mythos: 신화체계)를 통해 구조원리가 드러난다. - 프라이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두가지 방식(이상세계/현실세계)에 따라 자신의 서사적 상상력을 담아낸다. 이상세계는 풍요로움과 충족감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여름 뮈토스’라고 명명하고 ‘로맨스’장르와 결합시킨다. 로맨스는 용감하고 고결한 영웅과 아름다운 처녀가 악당의 위협을 이겨내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한다. 현실세계는 불확실성과 실패로 이루어진 세계로 ‘겨울 뮈토스’라고 명명하고 ‘아이러니와 풍자’라는 이중장르와 결합시킨다. 아이러니는 비극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세계이자, 주인공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의 복잡한 양상들로 말미암아 패배를 경험하는 세계이다. 풍자는 희극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세계이자, 인간의 어리석음, 과도함, 부조화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비극은 이상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이행을 수반하는 ‘가을 뮈토스’이다. 즉 여름뮈토스에서 겨울뮈토스로 이행하는 과정이 비극이다. 비극에서 영웅은 로맨스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우월한 존재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세계로 추락해 상실과 패배를 경험한다. 희극은 현실세계에서 이상세계로 이행을 수반하는 ‘봄의 뮈토스’이다. 즉 겨울뮈토스에서 여름뮈토스로 이행하는 과정이 희극이다. 희극의 결말은 주인공이 냉혹하고 골치 아픈 현실세계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고 인정넘치는 공간으로 이행해 가면서 마무리된다.   - 원형이란 반복되는 어떤 이미지나 인물유형, 플롯공식, 행동양식 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하나의 원형은 신화, 문학, 종교 등의 역사속에서 다양한 판본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판본이란 동일한 구조를 갖는 수없이 다양한 표면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원형비평의 목적은 서구문학전통의 근간이 되는구조원리(원형)를 탐색하는 것이 된다.   (2) 서사의 작동 양상 구조: 서사(학)의 구조   - 구조주의적 서사분석은 문학텍스트들의 내적 ‘작동’을 아주 상세한 부분까지 검토함으로써, 텍스트의 서사작용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구조를 발견하려는 작업이다. - 그레마스, 토도로프, 주네트는 서사를 구조화하는 어떤 공식을 발견한 뒤, 그 공식을 활용하여 문학의 의미, 그리고 그것과 인간 삶 사이의 관계에 관한 광범위한 질문들을 던지고자 했다. - 서사를 구조화하는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공식은 어떤 점에서 서사 일반에 관한 하나의 양식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양식은 인간의 경험 또는 인간의식 구조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가?   (3) 문학해석의 구조   - 조너선 컬러(Jonathan Culler)에 의하면 문학텍스트의 창작과 해석을 모두 지배하는 구조체계는 규칙(rule)과 약호(code)의 체계이다. 이 체계는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면화한 것으로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서구문학전통의 일부를 구성하며, 개인의 ‘문학능력(literary competence)’은 그 체계를 얼마나 내면화했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 그 체계의 주요 구성요소는 거리두기(distance), 몰개성의 관습(impersonality), 자연화(naturalization), 의미화의 규칙(signification), 은유의 일관성에 관한 규칙, 주제의 통일성에 관한 규칙 등이다. 거리두기와 몰개성의 관습: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편지나 신문이 아닌 시나 소설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순간, 허구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이 자기자신과 허구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거리는 개인의 실제경험에 관한 사실을 읽는 중임을 인지하고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 일종의 몰개성을 동반한다. 자연화: 일상적인 글에서는 보기 힘든 문학적 형식이 주는 낯섦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텍스트를 변형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 자기는 잘 익을 과일이야”라는 문장을 읽을 때, 우리는 화자가 과일 한 조각과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의 말이 은유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화 규칙: 문학작품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관한 의미있는 태도가 표명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문학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주목하게 된다. 은유의 일관성에 관한 규칙: 은유의 두가지 요소(원관념: tenor와 보조관념: vehicle)가 작품 맥락안에서 일관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원칙. 예를 들면 늙고 가난한 미국 원주민 떠돌이에 관한 이야기에서 창백한 겨울 해질녘 모습은 죽음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을 것이나, 새로운 희망찬 삶을 알리는 편안한 잠에 대한 은유로는 적절치 못하다. 주제의 통일성에 관한 규칙: 문학작품이 통일되고 일관된 주제 또는 내용을 갖고 있으라고 우리는 기대한다.   3. 구조주의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 어떤 문학 텍스트가 위대한 문학작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사가 아니며,문학적 의미를 생산하는 토대인 구조체계에 초점을 맞춘다. 1) 특정한 구조주의적 이론체계(프라이 이론 등)를 활용하여 텍스트를 장르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가? 2) 특정한 구조주의적 이론체계(그레마스 이론 등)를 활용하여 텍스트의 서사가 작동하는 양상을 분석해 보자. 해당 텍스트의 문법과 다른 유사한 텍스트의 문법 사이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가? 해당 텍스트의 문법과 그 텍스트가 생산된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추측해 볼 수 있는가? 3) 컬러의 ‘문학능력’이론에 따라 텍스트를 분석할 때,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화해야 할 해석의 규칙이나 약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제8장 해체 비평   - 1960년대 후반 자크 데리다에 의해 촉발된 해체론(deconstruction)은 1970년대 후반 문학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체론을 통해, 언어 안에 내재해 있어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지를 수월하게 알 수 있다.   1. 언어를 해체하기   - 해체론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는 모호하고 안정되지 않았으며,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 해체론에서 바라보는 언어는 기표들과 기의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언어는 오직 기표들의 사슬로 구성된다. 해체론에 따르면 내가 발화하는 기표는 내 머릿속 기표들의 사슬이며, 그 기표는 내 발화를 접한 사람의 머릿속 기표들의 사슬을 환기시킨다. - 우리가 알 수 있는 의미는 기표들의 놀이가 남기고 간 흔적(trace)뿐이다. 이 흔적은 우리가 낱말을 정의하는 바탕이기도 한 차이(differene)로 이루어진다. 붉은색이라는 낱말은 붉은 색이 아닌 모든 색의 기표의 흔적을 동반한다. 왜내면 우리는 다른 기표들과의 대조 속에서 그 낱말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색깔이 같다고 생각하면 붉은색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기표들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놀이는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하거나(deferral) 지연시킨다. - 데리다는 언어가 겉으로는 안정된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정된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하든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언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해체론은 언어를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또는 신념 및 가치체계)인 것으로 본다. 구조주의에서는 우리가 양 극단 곧 이항대립을 설정하여 경험을 개념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선이라는 낱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이를 악이라는 낱말과 대립시킨다. 데리다는 이러한 이항대립들이 어떤 위계질서로 구축되었다고 한다. 대립 쌍 가운데 어느 한쪽은 언제나 특권을 가지거나 다른 한쪽에 대해 우위를 갖도록 상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생산물(소설,영화, 수업, 재판 등) 안에서 작동하는 이항대립을 찾아내고 그 대립 쌍 가운데 어느 쪽에 특권이 부여되는지 확인하면, 그러한 문화적 생산물들로 조장되는 이데올로기와 관련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2. 세계를 해체하기   - 문화의 이데올로기들이 전달되는 경로가 언어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경로 역시 언어이다. 해체론에 따르면 언어는 우리의 ‘존재근거’가 된다. 우리 존재를 살피고 고찰하는데 나름의 언어를 갖는데 그 나름의 언어를 해체론에서 담론(discourse)이라고 한다. ‘불변의 중심개념’은 언어의 불안정성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무한의 담론만이 존재한다. 세계관이 언어로 구성된다는 이론은 서구철학을 탈중심화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3. 인간성을 해체하기   - 언어는 이데올로기들이 경쟁하는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각축장이므로, 우리 자신도 이데올로기들이 힘을 겨루는 장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의 안정된 정체성에 대한 자아상을 갖는데, 이는 문화와 공모하여 만들어낸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 또한 스스로를 안정되고 일관된 것으로 인식하려들지만, 실제로는 매우 불안정하고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말은 우리가 하나의 단일한 자아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는다. 우리는 매순간 수없이 갈등하는 믿음, 욕망, 두려움, 불안, 의도 등으로 구성되는 복합적이고 파편화된 존재다.   4. 문학을 해체하기   - 해체론을 요약하면 1) 해체론에서 언어는 표현 가능한 의미를 끊임없이 흩뿌린다는 점에서 모호하고 불안정한 동시에 역동적이다. 2) 해체론에서 인간존재는 중심도, 안정적인 의미도, 고정된 태도도 갖지 않는다.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경로가 언어인데, 언어는 모호하고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해체론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이 발명하고 스스로 자기 것이라고 믿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4) 문학의 구성요소가 언어인 이상, 문학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불안정한 동시에 역동적인 무엇이다. 어떠한 해석도 최종 해석이 될 수 없다. 저자가 텍스트를 구성할 때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독자 역시 각자의 읽기 경험을 구성할 때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환경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텍스트와 비평텍스트 모두 해체가 가능하다.   - 문학텍스트 해체의 목표는 1) 텍스트의 결정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2) 텍스트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복잡한 작동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 텍스트의 결정불가능성은 텍스트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복수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의미들의 상호 모순으로까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 해체비평가는 핵심주제와 관련하여 텍스트 안에서 모순관계를 이루는 의미를 탐색하며, 특히 텍스트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를 통해 텍스트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찾아내고 그 한계를 이해하려 한다.   5. 해체비평가가 던질만한 질문들   언어의 불안정성과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을 보여 주고자 할 때, 텍스트가 생산하는 갖가지 모순된 해석들, 그리고 어떤 문제들에 대해 텍스트가 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답을 내놓지 않는 다양한 양상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텍스트가 부추기는 것으로 보이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텍스트에 나타나는 모순의 증거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어떤 식으로 증명하는가?     ---------------------------------------- 제9장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   1. 신역사주의와 문학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 지배적인 문학 연구 방법론이었던 전통적 역사주의 비평은, 그 대상을 저자의 삶에 관한 연구 또는 작품이 집필된 역사상의 시기에 대한 연구로 한정시킴으로써, 저자가 작품을 집필하게 된 의도를 찾아내거나, 작품이 구현하고 있는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신비평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역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신비평의 입장이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란 시간을 초월한 역사 바깥의 영역에 존재하는 자율적(자기 충족적)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신역사주의는, 문학 텍스트를 주변화하는 전통적 역사주의와, 시간을 초월한 역사 바깥의 영역에 문학텍스트를 위치시키고 신성시하는 신비평을 거부했다.   - 신역사주의 비평가들은 문학텍스트를 일종의 문화적 가공물로 본다. 문학텍스트 는 그것이 생산된 문화내부를 순환하던 담론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동시에 그 담론들을 형성해 온 것이다. - 담론은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문화적 조건에 따라 형성되는 사회적 언어로서 인 간경험에 대한 특정한 이해방식을 표현한다. 신역사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권력이 갖는 복잡한 문화적 역동성을 단독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역사주의의 핵심요소   1)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역사 서술은 서사이며, 그렇기 때문에 문학비평가들이 서사를 분석할 때 활용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역사서술을 분석할 수 있다. 2) 역사는 선형적이지 않고(역사는 원인 ‘가’에서 결과 ‘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이지도 않다.(인류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3) 모든 권력은 물질적 재화의 교환, 인간존재의 교환, 문화가 생산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낳은 개념들의 교환을 통해 그 문화 안에서 순환한다. 4) 단일한 시대정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를 총체적으로(전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분석이란 역사의 전체상 가운데 일부만을 설명하는데 그치므로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5) 개인의 정체성은 역사적 사건, 텍스트, 문화적 가공물 등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낳은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동시에 그 문화를 형성한다. 6) 모든 역사분석에는 주관성이 개입된다. 역사가는 역사 해석에 관한 나름의 입장이 바로 자기 자신의 문화적 경험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 문학텍스트를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첫째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적 가공물, 이데올로기도 그것을 둘러싼 다른 무수한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가공물, 이데올리기와 관련짓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우리의 문화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므로 우리 분석에는 진정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분석은 항상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우리의 관점은 언제나주관적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한다.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에 따르면, 문학텍스트는 그 문학텍스트를 탄생시킨 문화와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또 그러한 문화들을 형성시키는 온갖 담론들의 순환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은 해당 문학텍스트가 그 담론들의 형성에 어떻게 개입되는지, 어째서 담론들의 순환은 곧 정치적 사회적 지적 경제적 권력의 순환인지, 우리가 점하는 문화적 위치는 문학/비문학텍스트 해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3. 문화비평   - 문화비평이론가들은 문화란 특정한 생산물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며, 고정된 정의 가 아닌 살아 있는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문화란 저마다 변화하고 발달하 며 상호작용하는 개별문화들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문화의 생산과정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변형시킴 으로써 어떻게 문화적 작업을 수행하는지 찾아낼 수 있다.   - 문화비평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신역사주의와 이론적 전제들을 공 유한다. 1) 문화비평은 정치적 지향을 드러내는 편이며 억압받는 집단을 지지한다. 2) 그렇기 때문에 문화비평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주의를 비롯한 정치성이 강한 이론들을 활용하여 분석작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3) 좁은 의미의 문화비평은 특히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다.   4. 문화비평과 문학   문화비평을 어떻게 문학작품에 적용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문화비평은 정전화된 문학작품들이 대중적 형식으로 각색된 사례들을 분석함으로 써, 대중적 판본들이 원작의 이데올로기적 내용들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 확인하 고자 한다. 이를테면 어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고 할 때, 그 영화가 원작 소설보 다 인간의 본질을 더욱 비극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원작 소설이 전해 주지 못하는 인간 조건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영화가 제시하는가? 영화가 원작소설의 서사에 나타나는 모호함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문화비평이 염두에 두는 또 다른 부분은, 어떤 매체의 생산물이든지간에 연예산 업에서 의도한 대로, 시청자나 관객이 그 결과물을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문화비평 이론가들의 작업은 검토 대상이 대중문화이든 고급문화이든 특정한 문화적 생산물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과정 에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제10장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   1. 레즈비언 비평   레즈비언 비평가들은 여성주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들을 다루되, 가부장적 남성의 특권이 조장한 억압뿐만 아니라, 이성애자의 특권이 조장한 억압까지 다룬다. 레즈비언의 정체성은 자신의 감정을 건강히 유지시켜주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도록 도와주는 주요 원동력을 다른 여성에게서 찾음으로 구성된다. 즉 레지비언은 여성정체화한 여성(woman-identified woman)인 것이다. 레즈비언 비평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레즈비언 문학전통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한 전통과 연결시킬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은 무엇인지, 레즈비언 특유의 글쓰기 방식이란 무엇인지, 레즈비언 작가들의 성적/감정적 지향이 그들의 문학적 표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레즈비언이 쓴 문학작품 또는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문학작품에서, 레즈비언이나 ‘남성같은’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특정 텍스트에 나타나는 성정치(sexual politics)를 분석한다.   2. 게이 비평   게이 비평가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게이 감수성(gay sensibility)이다. 게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자,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예술과 음악에 반응하고 또 이를 창조하는 방식, 문학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방식, 감정을 체험하고 바라보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게이비평가와 레즈비언비평가는 문학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식이 상당히 유사하다. 게이 시학의 구성요소 또는 게이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규정하고, 게이의 문학전통을 규명하고, 그러한 전통에 어떤 작가와 작품이 속하는지 결정하려한다. 또한 게이 비평가는 게이 감수성이 어떻게 문학적 표현에 영향을 미치는지 검토하고, 이성애적 텍스트가 어떤 식으로 동성성애적 차원을 담아낼 수 있는지 연구한다. 게이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과소평가되거나 왜곡되고 숨겨졌던 작품을 재발견하려 한다. 더 나아가 게이 비평가는 특정 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성정치를 밝히려 한다.   3. 퀴어 비평   퀴어라는 말은 비이성애자들이 모두 속할 수 있는 집단적 정체성을 제시할 포괄적 용어로서 채택되었다. 퀴어 이론에 따르면 섹슈얼리티(성적 지향성)의 범주는 동성애/이성애와 같은 단순한 대립으로 정의될 수 없다. 특정행동이나 감각, 또는 신체유형 등에 대한 선호여부로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정의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차례 달라질 수 있다. 퀴어이론은 섹슈얼리티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본다. 넓은 의미의 퀴어비평은 비이성애자의 관점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모든 문학비평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퀴어비평은 텍스트가 성적범주 등을 재현하는 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드러내는 비평이다. 즉, 텍스트안에서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범주가 무너지고 겹쳐짐에 따라 인간 섹슈얼리티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재현하는 데 실패하는 다양한 양상들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고 할 수 있다.   4.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이 공유하는 몇가지 특징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이 활용하는 텍스트상의 증거들도 비슷한 것이 많다. 동성성애적 이미지 양식이나 같은 성별을 지닌 등장인물들 사이의 성애적 만남처럼 텍스트 안에서 드러나는 명백한 단서들 말고도, 동성성애적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는 미묘한 단서들이 텍스트 안에 여럿 존재할 수 있다. 미묘한 단서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1) 동성사회적 유대(homosocial bonding): 같은 성별을 지닌 등장인물들 사이의 강한 정서적 유대를 묘사함으로써, 미묘하면서도 명백히 동성성애적일 수 있 는 어떤 동성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 게이 또는 레즈비언 기호: 두가지 형식이 있는데 첫 번째 형식은 이성애중심 문화에서 게이나 레즈비언에 대해 떠올리는 정형화된 특징들, 곧 고정관념들 로 구성된다. 두 번째 형식은 게이 또는 레즈비언 하위문화에서 자체적으로 생산된 암호화된 기호들로 구성된다. 우리의 목표는 그러한 기호들이 텍스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여 퀴어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잠재력을 창출해 내는지 분석하는데 있다. (3) 같은 성별을 지닌 분신들(Same Sex ‘doubles’): 서로 외모가 닮았거나 행동 방식이 비슷하거나 아주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같은 성별의 등장인물들로 구성된다. 게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가 특히 중시하는 부분이 성적 유사성이 라는 점에서, 서로에게 일종의 거울이미지로 기능하는 같은 성별의 인물들도 게이 레즈비언 기호로서 작동될 수 있다. (4) 관습을 거스르는(위반적) 섹슈얼리티(Transgressive sexuality): 위반적 섹슈 얼리티에 주목함으로써 전통적 이성애 규범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온 갖 종류의 위반적 섹슈얼리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 위반적 섹슈얼리티: 게이가 여자와 외도, 레즈비언이 남자와 외도, 이성애 주의자가 동성과 외도.   5. 레즈비언, 게이, 퀴어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1) 특정한 게이, 레즈비언, 퀴어 문학작품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의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작품의 주제나 등장인물 묘사같은 것으로 드러나는가? (2) 특정한 게이, 레즈비언, 퀴어 문학작품이 지니는 시학(문학적 장치 및 전략)은 무엇인가? (3) 작품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성애혐오를 담고 있는가? 작품이 이성애중심적 가치를 비판하는가? 아니면 찬양하거나 맹목적으로 수용하는가? (4) 문학텍스트가 동성애와 이성애라는 별개의 범주로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섹슈얼리티의 양상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여주는가? 이 질문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해체론적 관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퀴어 비평에 대한 좁은 의미의 이론적 정의에 대한 질문이다.   ------------------------------ 제11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1.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가들은 미국 흑인들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만드는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문학텍스트로 약화되거나 반대로 강화되는지를 분석.   2. 비판적 인종이론의 기본원리: 비판적 인종이론은 인종문제를 비롯한 인간관계전 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1) 일상적 인종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라는 말이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인 종차별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서를 극도 로 피폐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온갖 종류의 인종차별이 유색인들 에게 날마다 가해진다. 특히 인종적 소수자들의 능력을 항상 과소평가할 때 이다. (2) 이해일치: 인종차별주의는 백인에게 상당한 이득이 된다. 같은 일을 하는 백 인노동자보다 임금을 낮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흑인노동자를 착취하는 백인상 류층의 재정적 이해관계속에 인종차별주의가 가동되고 있다. (3)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종: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탈리아인과 유대인, 아일랜 드인은 백인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어떤 개인을 흑인으로 규정하는 데는 몇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든지 간에 조상 가운에 흑인 한사람만 있으면 된다. (4) 차별적 인종화: 지배사회가 변화하는 요구에 발맞춰 그때그때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다른 소수인종 집단들을 인종적 특성이란 것에 따라 정의한다. 일자리 를 놓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백인들의 경쟁상대가 될 것 같으면 그때마다 그들에게 폭력적이며 게으른 성향이 있다는 고정관념이 덧씌워졌다. (5) 상호교차성: 한 개인의 복잡한 정체성은 인종, 계급, 성, 성적 지향, 정치적 지향, 개인사 등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억압을 당하는 요인이 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경우에 차별과 마주하게 되는지 인식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6) 유색인의 목소리: 소수인종에 속한 작가나 사상가들이 백인작가나 사상가들 보다는 인종 및 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집필하고 발언할 때 좀 더 유리한 위치 를 점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소수 인종에 속한 작가나 사상가들 이 인종차별주의의 피해 당사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을 ‘유색인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그런데 ‘유색인의 목소리’는 생물 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습득되는 것이며, 인종적 억압의 경험이 인종 및 인종차별주의에 관하여 말하고 글을 쓰는 능력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인종 이상주의: 교육, 인종차별적 발언을 예방하는 규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매체의 긍정적 재현 등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변화시킴으로 인종 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 인종 현실주의: 미국에서는 인종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인종평등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며, 모든 형식의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만이 필요하다는 입장.   3.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과 작품   시학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학적 전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구술성이고, 둘째는 민속모티브이다. 구술성: 언어의 발화와 관련된 특성은 독자들에게 실제 인간의 육성을 듣는듯한 느낌을 선사함으로 문학작품에 직접성과 현장감을 불어넣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에서 구술성을 구현하는 방법은 주로 흑인 토착영어를 사용하거나 흑인들의 발화에 깃든 리듬을 모방하는 것이다. 민속모티프를 활용하면 광범위한 인물 유형과 민속활동을 작품에 등장시킬 수 있으며, 이는 이들의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4. 아프리카계 미국인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1) 아프리카인의 유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와 경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 등에 담긴 특징들에 대해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 (2)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작품 특유의 인종정치(인종억압 또는 해방과 연관된 이데올로기적 의제)는 어떤 것인가? 이를테면 해당 작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잘못된 역사적 재현을 바로잡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와 경험, 성취를 예찬하는가? 인종차별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영향을 다루는가? 아니면 백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가? (3)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작품 특유의 시학(문학적 장치 및 전략)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4) 해당 작품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5) 문학작품이 이해일치,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종, 백인의 특권 등과 같은 비판적 인종이론의 개념들을 어떻게 구체적인 실례로서 보여 주는가? (6) 백인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백인등장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상을 구축하려할 때, 아프리카적 존재 즉 흑인 등장인물, 흑인에 관한 이야기, 흑인의 어법 묘사, 아프리카나 흑인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등을 어떻게 동원하는가?                 ------------------------------------------------------------ 제12장 탈식민주의 비평   1. 탈식민 (postcolonial)이란, 일반적으로 한 국가에 대한 다른 국가의 식민지 지배가 종식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적 생산물을 분석할 때, 분석대상을 신민지배가 종식된 뒤에 나온 텍스트로만 한정하지 않으며, 식민통치의 억압과 처음 맞닥뜨리게 된 시기 이후에 쓰인 작품이라면, 발표 시기에 구애받지 않고 관심을 갖는다. 탈식민주의 비평 이론체계는, 식민주의 및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다루되, 이데올로기가 ① 피식민지인들로 하여금 식민통치 세력의 가치들을 내면화하도록 압박해 온 양상과 ② 압제자들에 맞선 피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어떻게 촉진시켜왔는지를 분석한다.   2. 탈식민주의 관련 논쟁들   (1) 백인정착식민지(캐나다와 호주같은 제2세계)의 문학이 탈식민주의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가? 유색인토착민을 진압하고 땅과 천연자원을 빼앗아간 백인정착민들은 영국을 모국으로 여겼으며, 유색토착민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포함될 수 없다는 주장과, 백인식민주체(백인정착민)들도 침략식민지의 유색인 식민주체들과 마찬가지로 이중의식(식민주체는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와, 자신이 속한 토착문화라는 상호적대적인 두 문화 사이에서 분열되는 느낌)을 경험했기 때문에,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 (2) 오늘날의 식민화는 다국적기업들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약소국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복속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수단이 달라진 것이다. (3) 경제적 지배의 직접적 결과로 나타나는 문화제국주의 문제로, 문화제국주의는 한쪽의 문화를 다른 한쪽의 문화가 ‘접수’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4) 탈식민주의 주요 관심대상은 열등한 지위에 놓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 즉 하위주체(하층민)인데, 정작 이를 다루는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은 대부분 유럽식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知的 엘리트로 학계의 지배계급에 속하고 있다. (5) 문학교육과 문학비평을 장악하고 있는 문화적 유럽중심주의가 탈식민주의 문학을, 유럽의 기준과 규범에 맞추어 해석하는, 즉 ‘식민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   2. 탈식민주의 비평과 문학의 공통적인 주제   (1) 토착민과 식민지 지배자들의 첫 대면과 토착문화의 붕괴 (2) 현지안내인을 동반하고 낯선 미개척지를 관통해 가는 외부 유럽인들의 여정 (3) 식민지지배자들이 토착민들을 열등한 존재로 대하는 타자화와 억압적 식민통치의 모든 것 (4) 식민지지배자들의 생활/문화를 모방함으로써 인정받으려는 피식민지인들의 시도 (5) 망명(피식민지인들이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거나 영국에서 방황하는 외국인이 되는 경험). (6) 독립이후의 활력과 뒤이은 환멸 (7) 개인과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으려는 투쟁과 소외, 고향이 아닌듯한 낯섦(문화적 고향 또는 소속감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 이중의식, 혼종성(둘 이상의 문화가 뒤섞인 잡종임을 체험하는 것)등과 관련된 주제들 (8) 식민지 지배이전의 과거와 연속성 확보 및 정치적 미래   3. 탈식민주의 비평가가 던질 만한 질문들: 탈식민주의이론을 활용하여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법들.   (1) 문학텍스트가 식민지지배의 여러 양상(정치적, 문화적 억압 등)들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2) 텍스트가 탈식민주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 즉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정체성 사이의 관계나 이중의식 및 혼종성에 관한 쟁점들과 관련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 (3) 텍스트가 반식민주의 저항을 북돋우거나 억누르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동력과 관련하여 무엇을 드러내는가? (4) 텍스트가 정전화된 식민주의적 작품의 인물, 주제, 假定 등에 어떻게 대응하고 또 어떤 견해를 보이는가? 정전화된 텍스트(유럽의 역사적, 허구적 기록)에 대한 기존 해석을, 탈식민주의적 텍스트가 어떻게 재구성, 폭로, 전복시키는가? (5)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여러 국가들에서 나온 다양한 문학작품들 사이에 유의미한 유사성이 존재하는가? (6) 서구 정전에 속하는 문학텍스트는 식민지 지배를 어떻게 재현함으로써 혹은 식민통치를 받는 토착민들을 어떻게 부당하게 침묵시킴으로써,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반을 약화 혹은 강화시키는가?   - 한마디로, 탈식민주의 이론의 궁극적인 목표 가운데 하나는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의 정체성(심리상태)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함으로써,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출처]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요약|작성자 옥토끼  
270    시론(詩論) / 플라톤 / 천병희 옮김 댓글:  조회:1283  추천:0  2018-03-25
시론(詩論) / 플라톤(1) /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서양의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각주(脚註)의 역사라고 한다, 서양의 시학과 예술론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과 와 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플라톤이 후세에 준 영향은 영감(靈感)과 모방(模倣)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영감을 받아 작시(作詩)했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신들이 내린 영감이 곧 남다른 지식과 신적인 권위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에서 영감과 techne(흔히 '기술' 또는 '예술'이라고 번역됨)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록 시인들의 작품이 가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영감을 받아 작시하는 만큼 자신의 행위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방의 문제는 특히 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거기서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째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模像)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模倣術)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시 또는 예술은 유희(遊戱)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와 예술이 유희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대치될 수 없는 그것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도 그에 못지 않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플라톤 자신도 가끔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과 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들이 고대 그리스를 넘어 성양 산문문학의 최고 걸잘으로 평가받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시공을 초월한 숭고한 주제들뿐만 아니라 신화(新話)와 비유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풀어나가는 표현 방법, 즉 시적 요소글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여기 옮긴 글은 플라톤의 제10권 앞부분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2) / 천병희 옮김      1     "확실히"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가 건설한 국가는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훌륭하다고 생각되지만 시에 관해서 생각할 때면 더욱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네."  "시에 관한 무엇 말씀이죠?"라고 그는 말했다.   "시 중에서도 모방적인 것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일쎄. 혼의 여러 부분이 따로따로 구분된 지금에 와서는 모방적인 시를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욱 분명히 밝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네."  "무슨 말씀이시죠?"  "우리들끼리 하는 말이네만 - 왜냐하면 자네들은 나를 비극 시인들이나 그 밖애 다른 모방 시인들에게 고발하지 않을 테니까 말일세 - 모방적인 시는 어떤 것이든 청중들의 분별력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하네. 청중들이 그에 대한 해독제로서 그것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면 말일세."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라고 그는 말했다.  "이야기하겠네"라고 나는 말했다. "비록 어릴 때부터 호메로스에 대하여 품어온 애정과 존경심이 이야기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말일세. 호메로스야말로 이들 훌륭안 비극 시인들 전부의 최초의 스승이자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떤 인간도 진리보다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되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네."  "그야 물론 그렇게 해야죠"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주게나, 아니, 그보다도 대답해주게나."  "그럼 물어주십시오."  "자네는 대체 모방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겠나? 실은 나 자신도 모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네."  "그렇다면"이라고 그는 말했다. "저는 알고 있을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날카로운 눈을 가진 자들보다 눈이 무딘 자들이 먼저 보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말일세."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선생님 앞에선 무엇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엇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선생님 자신이 보아주십시오."  "그렇다면 늘 하던 방법대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즉 우리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물 집단에 대하여 각각 하나의 이데아를 설정해오지 않았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여러 가지 집단 중에서 아무것이나 자네가 좋아하는 것을 예로 들어보세, 자네가 좋다면, 예컨데 침대나 책상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러나 이데아는 그 같은 가구들에 대하여 두 개밖에 없네, 하나는 침대의 이데아고 다른 하나는 책상의 이데아일세."  "네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보통 개개의 가구를 만드는 제작공(製作工)은 이데아를 따라서 어떤 자는 침대를, 어떤 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책상을 만들며, 다른 것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제작공 가운데 이데아 자체를 만드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말일세, 하긴 어떻게 만들 수 있겠나?"  "절대로 만들 수 없어요."  "그렇다면 자네는 다음과 같은 제작공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지 생각해보게나."  "어떤 제작공 말씀이죠?"  "개개의 제작공들이 만들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만드는 제작공 말이네."  "그는 정말 솜씨가 뒤어난 놀랄 만한 인물이군요."  "조금만 기다리게, 그러면 곧 자네는 다욱 놀랍다고 말하게 될 것이네. 왜냐하면 이 제작공은 모든 가구를 만들 뿐 아니라 땅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과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을 만들어내고, 게다가 땅과 하늘과 신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하데스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니까 말일세."  "그는"하고 그는 말했다. "정말 놀랄 만한 소피스트로군요."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하고 나는 말했다. "말해보게나, 자네에겐 그와 같은 제작공이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되나 아니면 어떤 의미에선 그와 같은 모든 것의 제작자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의미에선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나? 자네는 어떤 방법만 사용하면 자네 자신도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그것이 어떤 방법이죠?"라고 그는 말했다.  "어려운 방법이 아니네. 여러 가지 손쉬운 방법이 있네만 자네가 거울을 손에 쥐고 그것을 사방으로 돌린다면 그것에 가장 빠른 방법이네. 그러면 자네는 곧 태양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곧 대지를 만들어낼 것이며 곧 자네 자신과 다른 동물들과 가구들과 식물들과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만들어낼 것이네." "허나 그것은"하고 그는 말했다. "가상(假像)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말이야. 바로 맞추었네. 그런데 나는 화가도 역시 이와 같은 제작공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자네는 아마 그가 만드는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네. 그헣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도 역시 침대를 만드는 셈이나. 그렇지 않은가?"  "네 그도 역시 만듭니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3) / 천병희 옮김     2        "그런데 침대 제작공은 어떤가? 방금 자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우리가 침대 자체라고 부르고 있는 이데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침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일세."  "네 그렇게 말했지요."  "따라서 그가 만드는 것이 침대 자체가 아니라면 그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진실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어떤 사람이 목수나 다른 제작공의 제작물을 완전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지?"  "네 아닙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이야기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겠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제작물이 진리에 비하여 분명하지 못하다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네."  "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본보기로 하여 이 모방자가 대체 어떤 자인지 탐구해도 좋지 않을까?"  "선생님께서만 좋으시다면"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침대는 세 가지 종류가 있네. 그 중 하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것을 만든 자가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아니면 어떤 다른 자가 만들었을까?"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하나는 목수가 만든 것이네."  "네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화가가 만든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러니까 화가가 목수와 신, 이 셋이서 세 가지 종류의 침대를 관장(管掌)하고 있네."  "네 셋이서 그렇게 하고 있지요."  "그런데 신은 자연 속에 하나 이상의 침대를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하나 이상을 만들어서는 안 될 어떤 필연성이 있었는지, 아무튼 침대 자체 하나만을 만들었네. 그리고 그와 같은 침대가 두 개 또는 여러 개씩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네."  "그건 어째서 그렇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 까닭은" 하고 나는 말했다. "신이 두 개를 만들었다하더라도 이 두 침대의 이데아인 단 하나의 침대가 또다시 나타나 두 침대 대신 침대 자체가 되기 때문이네."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므로 신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어떤 특정한 침대의 어떤 특정한 침대공이 되는 대신 진실로 존재하는 침대의 제작공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본연의 침대 하나만을 만들었다고 생각되네."  "그런 것 같군요."  "따라서 우리는 신을 침대의 본연으 창조자라고 하든지 또는 그와 비슷하게 불러도 좋겠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겠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절대뿐 아니라 다른 것도 모두 본성에 따라 만들었으니까 말입니다."  "목수는 무어라고 할까? 침대 제작공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네 그렇게 부를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화가도 역시 침대 제작공이나 제작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화가를 침대의 무엇이라고 부를 작정인가?"  "제 생각으로는" 하고 그는 말했다. "앞서 말한 제작자들이 만든 것을 모방하는 모방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습니다.."  "좋았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본성으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제작물의 제작자를 모방자라고 부르는 셈이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점은 비극 작가에게도 해당될 것이네. 그도 모방자인 이상 왕(王)1)과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방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네."  "그런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모방자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된 셈이네. 그러나 화가에 관하여 이 점을 말해주게나. 화가가 모방하려 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는 것 자체인가 아니면 제작공의 제작물인가? 자네는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나?"  "제작공의 제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 제작물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나 아니면 보이든 대로 모방하나? 자네는 이 점도 밝혀야 하네."  "무슨 말씀이신가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말이네. 침대는 자네가 옆에서 보든 정면에서 보든 그 밖의 다른 방향에서 보든 그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겠지? 그 자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겉으로만 달라 보이겠지? 그리고 다른 것들도 이 점에 있어선 마찬가지겠지?"  "네, 그렇습니다. 겉으로만 달라보일 뿐 그 자체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그 점도 고찰해보게나. 회화술(繪畵術)은 개개의 대상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 가운데 어는 것을 지향하는 것인가? 즉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상을 나타내는 대로 모방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가상의 모방인가 진실의 모방인가?"  "가상의 모방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방술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네. 그리고 모방술이 무엇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마 그것이 각 대상의 조그마한 부분을 다루는데다 그 부분마저 영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네. 예컨대 화가는 우리들에게 제화공(製靴工)이나 목수나 달른 제작공들을 그려 보이겠지만 그와 같은 기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네. 그러나 만일 그가 훌륭한 화가라먼 목수를 그려 적당한 거리에서 내보임으로써 어린애들이나 어리석은 자들을 속여 그것이 진짜 목수인 것처럼 믿게 할 수는 있을 것이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여보게, 우리는 이런 종류의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온갖 제작공의 기술을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되네.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어떤 사기꾼이나 모방자를 만나 그 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 자가 전지(全知)한 인간이라고 믿게 된 것이오. 그것이 당신이 지식과 무지와 모방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오" 라고 말일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1) 여기서 '왕'이란 말은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데아의 창조자인 신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생각된다. 니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것은 가상에 불과하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4) / 천병희 옮김     3       "그러면" 하고 나는 말했다. "다음에는 비극과 비극의 지도자인 호메로스에 관하여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왜냐하면 우리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호메로스야말로 온갖 기술은 물론이고 덕과 악덕에 관계되는 인간의 모든 일과 신들의 일까지도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네.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인즉, 훌륭한 시인은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하여 자기가 작시(作詩)하고 있는 일에 관하여 잘 안 연후에 작시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시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이 시인이라는 모방자들을 만나 속임을 당한 것인지, 그들의 작품을 보고도 그것이 진실로부터 3단계나 떨어져 있으며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가상에 불과하니까 말일쎄 - 아니면 과연 이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서 훌륭한 시인들은 대중이 보기에 훌륭하게 말했다고 생각되는 일에 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인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네."  "물론 고찰해야죠" 라고 그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실물과 영상을 두 가지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영상 제작에 몰두하여 그것을 자기의 가장 좋은 소유물로서 자기 생활의 맨 앞쪽에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가 모방하는 사물에 관하여 진실로 알고 있다면 그는 모방보다는 그 실물에 열중하게 될 것 같네. 그리고 많은 훌륭한 것들을 자신에 대한 기념물로서 후세에 남기려 할 것이며, 칭찬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할 것 같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왜냐하면 명예란 점에서나 이익이란 점에서나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점에 관해서는 호메로스나 다른 시인에게 해명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세. 이를테면 우리는 그들에게 '시인들 중에서 어떤 자가 단지 의술(醫術)에 관한 말의 모방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술에 관하여 알고 있다고 한다면, 고금의 시인들 중에서 아스클레피오스2)처럼 사람의 병을 고쳤다고 전해지는 자가 있는가, 또는 아스클레피오스가 후예들을 남겼듯이 의술에 있어서 제자들을 남긴 자가 있는가?" 라고 묻지 않기로 하세. 그리고 다른 기술에 관해서도 묻지 않고 내버려두기로 하세. 그러나 우리는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즉 전쟁이나 원정(遠征)이나 국가의 통치나 인간의 교육에 관해서는 물어서 알 권리를 갖고 있네. '친애하는 호메로스여, 그대가 덕에 관해 한 발언에 있어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 즉 우리가 그렇다고 규정한 바 있는 모방자나 영상의 제작자가 아니라 진리로부터 2단계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따라서 어떤 생활 태도가 사적 및 공적 생활에서 인간을 보다 선량하게, 또는 보다 사악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면, 우리에게 말해주시오. 리쿠르고스3) 덕택으로 스파르테가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되었고 그 밖에도 많은 다른 사람들 덕택으로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된 것처럼 그대 덕택으로 훌륭한 제도를 갖게 된 나라는 어느 나라지요? 어느 나라가 그대를 훌륭한 입법자로, 자신들의 은인으로 부르고 있지요? 이탈리아와 시켈리아는 크사른다스4)를 그렇게 부르고 있고 우리는 솔론5)을 그렇게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그대를 그런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이지요? 이렇게 묻는다면 호메로스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댈 수 있을까?"  "아마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조차도 그런 일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니까 말입니다."라고 글라우콘이 말했다.  "그러면 호메로스 시대에 있었던 어떤 전쟁이 그의 지휘와 조언으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기록은 있는가?"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무가의 일에 속하는 분이라면, 그가 밀레토스의 탈레스6)나 스퀴티스의 아나카르시스7)처럼 기술이나 다른 실무에서 많은 유용한 발명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가?"  "그런 것도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공적으로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하더라도, 사적으로는 호메로스가 생존시에 어떤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그리하여 사제 간의 교분을 통하여 그를 존경하게 된 자들이 호메로스적 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생활 태도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마치 퓌타고라스가 이 때문에 크게 존경받고 있고, 그의 후계자들이 자기들의 생활 태도를 퓌타고라스적 생활 태도라고 부름으로써 오늘날도 남달리 훌륭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말일세."  "그런 이야기는 전혀 전해지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소크라테스 님, 호메로스에 관하여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호메로스의 친구인 크레오퓔소스8)는 교양이란 점에서 육(肉)의 종족이란 자신의 이름보다 거 가소로운 존재였을 테니까요. 호메로스는 생존시에 그로부터 많은 푸대접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2)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 신의 아들로 의술의 신이다. 3) 리쿠르고스는 전설적인 스파르테의 입법자이다. 헤로도토스와 플루타프코스 등이 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 크시른다스는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사람으로 그가 태어난 시켈리아 섬의 카타네 시의 입법자이다. 그 밖에도 그는 칼키스 인들이 시켈리아에 건설한 여러 식민시(市), 특히 헤기온의 입법자로 알려져 있다. 5) 솔론은 기원전 640~558년경에 활동한 아테나이의 시인이자 입법자이다. 그는 재무와 저당을 무효화하여 채무 때문에 노예로 팔렸거나 추방된 자들과 농부들을 해방시켜주고, 인신 저당을 금지함으로써 앗키케 지방에 농노제를 폐지했다. 그는 또 화폐와 저울과 척도를 개혁했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가지 제도상의 개혁을 단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기도 전에 그의 헌법은 전복되고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한 참주제가 성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1~13장 및 풀루타코스의 참조. 6) 탈레스는 그리스 자연철학의 원조로 이른바 7현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기하학과 천문학을 발전시켰다고 하며 언젠가는 일식을 예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7) 아나카르시는 그리스화 한 스키티스의 현인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그 나라의 풍속을 연구한 다음 이를 스키티스에 소개하려 했으나 스키티스 왕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는 7현인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발명을 했다고 하는데, 특히 도공의 녹로(轆轤)와 가지 난 닻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8) 크레오퀼로스는 일설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사위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 어로 '육의 종족'이란 뜻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5) / 천병희 옮김     4      "그래, 정말 그런 이야기들을 하더군"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클라우콘,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호메로스가 모방만 하는게 아니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실제로 인간을 교율하고 보다 선량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면 많은 제자들을 얻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이 아닌가? 압데라의 프로타고라9)와 케오스의 프로디코스10)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사적 교분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에게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집도 국가도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주었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지혜 덕택으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어 그들의 제자들은 그들을 어깨에 떠메고 다닐 지경이었네. 하거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덕을 향하여 인간을 이끌어줄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그들을 음유 시인으로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었을까? 오히려 황금보다도 그들에게 더 매달려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청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는 충분히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어디든지 그들이 가는 데로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선생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를 비롯한 모든 시인들은 덕에 있어서나 그 밖에 그들이 작시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나 그 영상의 모방자에 불과할 뿐 진리와는 아무런 접촉도 가지지 못한다고 규정해도 좋지 않을까? 방금 우리가 말했듯이, 화가는 제화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단지 색채와 형태로만 판단하는 자들을 위하여 제화공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낼 것이네."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인도 자신이 모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구(語句)를 통하여 개개의 기술에 어떤 색채를 입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네. 따라서 그의 말에 의하여 판단하는 자들에게는 제화술에 관해서든 전술에 관해서든 또는 다른 사물에 관해서든 운율과 율동과 화성만 붙여서 이야기하면 그것만으로 매우 훌륭하게 이야기한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본래가 아주 매력적인 것이니까. 자네는 시인의 작품이 음악적 색채를 벗어버리고 단순한 산문으로 이야기된다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네. 그런 예를 본 적이 있을 테니까 말이네."  "네,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청춘의 꽃이 시들었을 때의 성숙하긴 하나 아름답지는 못한 젊은이들의 얼굴과 비슷하지 않던가?"  "매우 닮았더군요."  "자 그럼 이 점을 생각해보게나. 영상의 제작자인 모방자는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존재자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가상에 관해서만 알고 있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럴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 반(半)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셈이니 그대로 두지 말고 충분히 고찰해보기로 하세."  "말씀을 계속하십시오."라고 그는 말했다.  "화가는 이를테면 고삐나 재갈을 그릴 수 있겠지?"  "네"  "그런데 제화공이나 놋갓장이는 그것을 만들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런데 고삐와 재갈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화가는 알고 있을까? 아니 제작지인 놋갓장이오 제혁공조차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자, 즉 기수(騎手)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째서 그럴까요?"  "어떤 것에 관해서는 이 세 가지 기술, 즉 사용하는 기술과 만드는 기술과 모방하는 기술이 있겠지."  "네"  "그런데 가구든 동물이든 행동이든 그 개별적인 우수성이나 아름다움이나 정당성은 오로지 사용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용을 위하여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니까 말일세."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물건이든 그 사용자가 가장 경험이 많은 사람이므로 사용자는 제작자에게 자기가 사용하는 물건이 어떤 점에서 사용하기 좋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점에서 나쁘게 만들어졌는지보고하게 될 것이네. 예컨대 피리 취주자는 피리 제작자에게 피리를 취주할 때 자기를 도와주는 하인이나 다름없는 자기 피리에 관하여 보고하면서 어떤 피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지시하게 될 것이고, 피리 제작자는 그의 지시에 따라 봉사를 하게 될 것이네."  "당연한 일이지요."  "따라서 한 사람은 지식을 갖고 좋은 피리와 나쁜 피리에 관하여 보고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보고를 믿고 피리를 제작하게 되겠지?"  "네 그렇습니다."  "따라서 바로 이 도구의 제작자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도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관하여 올바른 소신을 갖게 될 것이네. 그러나 사용자는 지식을 갖고 있네."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방자는 자기가 그리는 것이 아름답고 올바른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에 관하여 사용을 통하여 지식을 얻게 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도록 강요되어 그로부터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지시를 받음으로써 올바른 소신을 갖게 될 것인가?"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관해서 지식도 올바른 소신도 갖지 못할 것이네."  "아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시에 의한 모방자는 자기가 작시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놀랄 만한 지혜를 갖고 있는 것이겠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는 개개의 사물이 어떤 점에서 좋고 나쁜지 알지도 못하면서 모방을 계속할 것이네. 그는 아마도 무지한 대중에게 아름답게 보일 만한 그런 것을 모방하게 되겠지."  "그 밖에 또 무엇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점들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꽤 일치된 셈이네. 즉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모방은 일종의 유희이며 진지한 것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9) 프로타고라스는 기원전 5세기의 직업적 소피스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아테나이에 와서 페리클레스의 친구가 되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일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그는 플라톤의 에서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대화자로 등장하고 있다. 10) 프로디코스도 소크라테스 당시의 직업적 소피스트이다.    시론(詩論) / 플라톤(6) / 천병희 옮김   5       "제우스 신에 맹세코" 하고 나는 말했다. "모방이란 진리로부터 3단계 떨어져 있는 사물에 관계되는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방은 인간의 어느 부분에 대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런 말이네. 같은 크기라도 가까이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 서로 다르게 보이네."  "네, 다르게 보이지요."  "또한 같은 물건이라도 물 속에 있느냐 물 밖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사람에게는 굽어 보이기도 하고, 곧아 보이기도 하네. 또한 색에 관한 시각의 착각으로 인하여 같은 것이라도 오목하게 보이기도 하고 볼록하게 보이기도 하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모두 분명히 우리의 혼 속에 내재하고 있네. 사실 그림자 그림은 우리 본성의 이런 약점을 노리고 갖은 마술을 다 부리는 것이네. 이 점에 있어서는 요술과 그 밖에 그와 유사한 많은 손재주도 마찬가지네."  "옳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잰다든가 센다든가 저울에 단다든가 하는 일이 그와 같은 착각에 대한 가장 훌륭한 구제책으로서 발명된 것이 아니겠는가? 얼핏 보기에 더 큰 것이나, 더 작은 것이나, 더 많은 것이나, 더 무거운 것 대신에 계산한 것이나, 잰 것이나, 저울에 단 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도록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측정해보고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크다든가 더 작다든가 또는 같다는가 하는 것을 명시해주지만 이 부분에게도 때로는 같은 사물이 동시에 상반되게 보이는 때가 있네."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혼의 동일한 부분이 같은 사물에 관하여 상반된 견해들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네. 그렇게 주장했지요. 그리고 그건 옳은 주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측정된 것에 반대되는 의견을 갖는 혼의 부분은 측정된 것과 일치하는 의견을 갖는 혼의 부분과 동일한 부분일 수는 없네."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이 부분에 대립되는 부분은 우리 안에 있는 보다 열등한 부분의 하나일 것이네."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점에 관하여 동의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네. 그래서 나는 회화술(繪畵術)을 포함한 모든 모방술은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건전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은 일을 위하여 우리 안의 이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괴 교제하고 교우 관계를 맺는다고 말했던 것이네."  "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모방술은 그 자신이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것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각에 관계되는 모방술만 그런가, 아니면 우리가 시라고 부르고 있는 청각에 관계되는 모방술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라고 나는 말했다.  "시도 아마 마찬가지겠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회화에서 유추하여 얻은 개연성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시의 모방술이 접촉하는 마음의 부분에 직접 접근하여 그것이 열등한 부분인지 고상한 부분인지 살펴보기로 하세."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러면 문제를 이렇게 설정해보세. 말하자면 모방술은 강요된 것이든 자발벅인 것이든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고, 행위의 결과라고 믿어지는 행복와 불행을 모방하며,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모방하네. 그 외에 다른 것은 없겠지?"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경우에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있는가? 아니면 시각의 경우에 분열되어 같은 사물에 대하여 상반되는 견해를 동시에 자신 속에 가졌던 것처럼 행위에 있어서도 분열되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가? 생각건대, 여기에 관해서 새삼스럽게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왜냐하면 우리는 앞서 있었던 이야기들에서 우리의 혼이 그와 같이 동시에 일어나는 무수한 대립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충분한 합의를 보았으니 말일세."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합의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확실히 옳았네"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빠뜨렸던 것을 지금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  "그것이 어떤 것인데요?"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했네" 라고 나는 말했다. "즉 훌륭한 남자는 아들이나 그 밖에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던 것을 잃는 불행을 당하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잘 견뎌낼 것이라고 말일세."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이런 점을 고찰해보세. 그는 조금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만 슬픔 속에서도 절도를 지키게 될 것인지 말일세."  "후자의 경우가 사실이겠지요"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그에 관해서 이 점을 말해주게나. 자네는 그가 어느 경우에 더 완강하게 슬픔에 대항하여 싸우고 저항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즉 자기와 같은 자들이 보고 있을 때 훨씬 더 잘 견뎌낼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혼자 있게 되면, 생각건대 그는 누가 듣게 되면 부끄러워하게 될 여러 가지 말들을 거리낌없이 내뱉을 것이고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짓을 많이 행하게 될 것이네."  "예. 그렇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7) / 천병희 옮김     6       "그런 그에게 저항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이성과 법률이 아닐까? 그리고 슬픔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닐까?"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같은 것에 대하여 동시에 상반된 방향으로 이끌리는 셈이니 우리는 그 사람 안에 필연적으로 두 개의 부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   "네,확실히 그렇습니다."   " 그 한 부분은 법률이 인도하는 대로 기꺼이 따라가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지요?"   "법률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네. '불행을 당했을 땐 되도록이면 침착하고 화를 내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일이야.' 라고 말일세. 왜냐하면 그런 일에 있어서는 선악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를 내보았자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말일네. 그리고 인간사(人間事)에는 크게 중시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슬퍼하는 것은 그런 경우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네."   "무엇에 방해가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일어난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는 일과 주사위를 던질 때처럼 던져진 것에 따라 이성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택하는 대로 우리의 행동을 정리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말일세. 우리는 넘어졌다고 해서 어린애처럼 다친 데를 움켜 잡고 울고불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되네. 오히려 우리는 넘어져서 아픈 데를 되도록 빨리 치료하고 회복함으로써 의술에 의하여 탄식의 노래를 그치게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항상 혼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안 되네."   "확히 불행에 대해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와 같은 이성의 지시에 기꺼이 따를 것이네."   "네, 분명히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고통에 대한 회상과 탄식으로 이끌리게 되어 아무리 회상하고 탄식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부분은 비이성적이고 게으르고 비겁하다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네, 그렇게 불러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화를 잘 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방이 가능하지만, 현명하고 침착한 성격은 항상 자기 자신과 일치하므로 모방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모방된다고 하더라도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네. 특히 축제에 모인 군중이나 극장에 모인 잡다한 사람들에게는 말일세.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낯선 상태의 모방이니까 말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모방적 시인이 원하는 것이 분명히 대중으로부터의 명성이라면, 그는 본래부터 혼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의 지혜도 이 부분을 즐겁게 해주도록 돼 있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그는 화를 잘 내며 변덕스런 성격을 위하여 만들어졌네. 왜냐하면 이런 성격은 모방하기가 쉽기 때문이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써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것은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방적 시인도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고 같은 것을 어떤 때는 크다고 생각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생각하는 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영합하여 진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영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개개인의 영혼 안에 나쁜 국가 제도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네." "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시론(詩論) / 플라톤(8) / 천병희 옮김     7        "그러나 우리는 시에 대하여 가장 중대한 고발은 아직 제기하지 않은 셈이네. 왜냐하면 시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선량한 사람들까지도 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네."  "시가 만일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내 말을 듣고 잘 생각해보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영웅이 비탄에 빠져 장탄식을 늘어놓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괴로워서 가슴을 치는 장면을 호메로스나 다른 비극 시인이 모방할 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이에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잊고 공감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시인일수록 훌륭한 시인이라고 진지한 태도로 칭찬하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잘 견뎌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고 우리가 방금 칭찬했던 것은 여자다은 행동이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칭찬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될 그런 인간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기뻐서 칭찬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우스 신에 맹세코,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네, 자네가 문제를 이렇게 고찰한다면 말일세"라고 나는 말했다.  "어떻게 말씀이지요?"  "자네가 이런 점을 생각해본다면 말일세. 본래는 식컨 울고불고 탄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억압되어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시인들로부터 만족과 쾌감을 얻는 부분이네. 한편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하여 충분히 교욱되어 있지 못하므로 눈물이 많은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왜냐하면 그거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만의 고통이고, 또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 자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수치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얻는 쾌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남의 것을 즐기면 그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하나 연민의 정을 느끼는 부분을 남의 불행 속에서 가끄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준다면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우스꽈읏러운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네가 스스로 행한다면 부끄러워하게 될 익살을 희극 공연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듣고는 대단한 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증오하지 않는다면 자네의 행동은 연민의 정을 줄러일으켰던 장면에서 취한 행동과 똑같은 것이 될 것이네. 말하자면 이때에도 자네는 광대라는 평판이 두려워서 이성에 따라 자네의 마음 속 깊이 억제하고 있던 부분, 즉 익살을 부려보고 싶은 부분을 늧추어주었던 것이네. 그리고 자네가 거긱서 이 부분을 교만하게 만들어준다면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활 속에서 희극 배우가 되는 데까지 이뜰려가게 될 것이네."  "그야 물론이지요."라고 그는 말했다.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에 쾌락에 관해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저로서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없군요." 하고 그는 말했다.  "따라서 클라우콘, 자네가 호메로스야말로 헬라스이 교육자이므로 모든 인간사를 정돈하고 계발하는 데 있어 이 시인의 말을 들춰 배워야 하며 자신의 생활을 이 시인을 따라 정리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호메로스의 찬미자들을 만난다면 그들도 나름대로 가장 선량한 자들이므로 사랑해주고 공손히 대해주지 않으면 안 되네. 그리고 호메로스가 가장 시인다운 시인이며 비극 작가으 제1인자라는 사실도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되네. 그러나 시 가운데 국가 안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은 것은 신에 대한 찬가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한 찬사 뿐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어야만 하네, 자네가 서정시를 통해서든 서사시를 통해서든 쾌락적인 무사 여신을 받아들인다면 그 국가에는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어온 법룰과 원칙 대신 쾌락과 고통이 군림하게 될 것이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시론(詩論) / 플라톤(끝) / 천병희 옮김     8       "우리는 시에 관하여, 시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가 그때 시를 국가에서 추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았네.  이상으로 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변명된 것으로 해두세. 이성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네. 그러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11)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중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네, 대단한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시도 서정시나 그 밖에 다른 운율로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한 다음 귀국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나?"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시인이 아니지만 시인의 친구들인 시의 애호가들에게도 시를 위하여 운율이 없는 보통말로 시는 쾌락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인간 생활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할 기회를 주기로 하세. 그리고 우리는 호의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리고 하세. 시가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유익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이 됱 테니까 말일세."  "어찌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여보게, 그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 경우에는 마치 누군가를 사랑하던 사람이 그 사랑이 무익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단념하고 말 듯이 우리도 괴롭더라도 시를 단념하고 말 것이네. 이와 같은 훌륭한 국가에서 교육받은 덕택에 우리도 이와 같은 시에 대하여 애정을 품게 되었으니 시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것으로 밝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될 것이네. 그러나 시가 자신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두 번 다시 시와 유치한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시를 들을 때마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지금 이 이야기를 주문(呪文)으로 외워야 할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시를 진리와 접촉하는 진지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고, 시를 듣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국가를 염려하여 시를 경계해야 하며, 시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갖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친애하는 글라우콘이여"하고 나는 말했다. "인간이 선량하게 되느냐 아니면 사악하게 되느냐 하는 싸움은 중대하다네.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하지. 그러므로 우리는 명예나 돈이나 권력이나 특히 시에 자극되어 정의나 그 밖에 다른 덕을 소홀히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것에 따라"라고 그는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동의하리라고 믿습니다."   11) 출전은 확실하지 않다. 서정시의 1절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개'란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주인'이라는 말이 시를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플라톤 / 천병희 옮김 (끝)   
269    시 창작 실무이론 / 글 쓴이 박용찬 댓글:  조회:1820  추천:0  2018-03-16
시 창작 실무이론 / 글 쓴이 박용찬     1. 시를 쓰고서 2~3개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고치도록 노력을 합니다   2. 시는 절대적인 1인칭이다 시는 절대적인 1인칭입니다 시를 쓰고자 할 때에는 주체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내, 너의, 뭐 이런 종류의 시어들) 불필요 합니다 (예) 내 향기 담아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마라 에서 내 향기 담아 는 없어도 좋은 불필요한 말이다   3. 시의 속성을 먼저 알고 써야합니다   4. 시는 설명을 하려고 하지 말고 물처럼 흘러가도록 써야합니다 (예) 고즈넉이 내려앉고 에서 고 부드러운 미풍 산골여인 가슴 마냥 설레고 에서 고 “고" 자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해서 그런 것입니다   □ 연 나누기 – 연을 나눌 때 상투적으로 연을 나누지 말고 - 연을 나누어서 좋은지 아니면 단열시가 좋은지를 스스로 파악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면 연을 눔   □ 시의 대상 – 시는 독자를 대상으로 써야 합니다 - 독자를 의식한 후에 써야 합니다   시압축 조병화 선생님 시는 짧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 시는 가급적이면 압축하는 것이 좋습니다 - 시의 생명은 함축입니다 ․  시의 힘은 넣은 것이 아니라 빼는 것에 있습니다 ․ 시가 길어질수록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 표현의 욕심을 버리고 가급적이면 짧게 써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줘야 함   -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은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 시는 가장 경제적인 장르입니다   □ 시적 호흡 – 시의 호흡은 짧은 것, 긴 것이 있는데 - 시의 속성상 짧은 것이 많으며 - 시의 호흡이 긴 산문시에서는 길게 써보는 연습이 필요함   □ 시의 목적 – 시의 목적은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 시는 시입니다 시는 시로써 즐거움, 쾌감을 주어야 하고 - 지식이나 목적을 위주로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항일적인 글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조국이 통일되면 내 시를 안 읽어도 좋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미래를 미리 짐작하신 분입니다   - 민중 문학하는 사람들도 - 결국엔 서정시를 쓰고 있고 서정시가 시의 생명입니다     - 현대시를 씁시다 김소월, 윤동주, 김영랑, 서정주님은 세월이 흘러도 시가 남고 사랑 받고 있습니다   - 시의 객관성이 있어야합니다   - 현대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그리움이란 시를 쓸데에 그리움이란 단어를 직접 쓰지 말고 대상을 통해서 말해줍니다 - 독자들이 그리움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기는 것이 필요함 (예)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모란이 대상이 되었듯이 직접표현이 아닌 간접으로 대상으로 표현한다   - 수식어 사용을 절제합니다 (예) 별이 되는 그리움 갈 곳을 잃어 휭 한 밤바람에 에서 '휭' 이란 시어 ⇒ 수식어를 절제해야 합니다 ⇒ 너무 아름답고 효과적인 장식을 하지 맙시다   □ 시의 부호 - 미숙할수록 의문형을 많이 사용합니다 의문형은 극히 절제합시다 - 의문부호나 일반 부호사용은 시에게 무거운 언어입니다  - - 모든 부호(감탄사나.! 쉼표, 생략법..... 등등.. 물음표 ?)는 될 수 있는 대로 부호사용은 금합 니다 - 요즘은 한문 쓰고 ( ) 부호도 안 쓰고 있습니다 - 대신 주해를 달아 줍니다 - 감탄사는 시를 천박하게 합니다. 함부로 사용하지 맙시다   □ 시 낭송 - 제목과 이름을 꼭 먼저 낭송한다    □ 유사음에 대하여 - 유사 음 반복을 피합니다 - 반복법은 시를 악화시킵니다 (예) 나비가 나른다 춤추며 나른다  ⇒ "나" 자가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 의성어 의태어도 가장 불완전한 언어입니다  (예) 추적추적, 살랑살랑, 너울너울 모양을 모 ⇒ 모양을 흉내내거나 모양을 흉내내거나 소리내는 언어 가급적이면 시속에 함부로 넣지 않도록 합니다   □ 관념시 - 관념시를 쓸 때에는 생각이 많이 필요합니다 - 쉽게 풀어서 써야하며  - 사유성 관념성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너무 잘 쓰려고 하면 경직되므로 힘들지 않게 편하고 쉽게 쓰도록 노력합니다 - 시는 인격이므로 마음가짐 그대로 쓰며 자연스러움이 중요합니다   □ 시 제목 - 시의 제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 아픈 사연이란 제목과 사연이란 제목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독자들이 독자들이 읽을 때 아픈 사연 하면 벌써 아픈 사연이구나 하고 짐작하여 호기심이 떨어집니다 사 ⇒ 그러나 사연이란 제목을 쓰면 무슨 사연일까 궁금해합니다. 그러므로 시 제목 결정할 때 중 요하게 생각해서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 그러나 이토록 사연, 고구마, 바다 등 이런 명사만 사용하게 되면 시집을 낼 때에 제목이 너 무 경직되어 있어서 부드럽지 못하니까 시집 낼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길게도 써 봅니다 - 시인이 시를 쓸 때에는 뱀처럼 차갑고 불처럼 뜨겁게 써야 합니다 이성은 차갑고 감성은 뜨겁게 이 두 가지가 잘 교류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으로 치우치면 안 됨   □ 감정이입 - 시는 대상이 있어야 함 - 대상에 내 마음을 넣어 마음을 표현한 시를 감정이입이라 함  (예) 선인장 꽃이란 시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선인장꽃 ⇒ 선인장꽃이 바로 내가 되는것, 선인장을 보며 단순하게 아프다 라고 끝나서는 안되고 상상력 이 필요합니다 - 철두철미하게 창조하고 자기언어로 표현해 봅니다 상투성에서 벗어나고 탈피해야 합니다 엉뚱함도 아주 중요함 -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의 일종이란 생각으로 미적 감각을 때려 부스는 작업도 필요함   □ 비 시적 시어  (예) 산림 속 호수 깊이에 몽땅 푸른 이파리 이란 ⇒ 몽땅 이란 시어   내 맘 한 올 오날 햇살아래 세워 놓았나니 이란 ⇒ 오날이란 시어 이란   그 다음날도 햇발 햇발처럼   길 우에  ⇒ 길 우에 란 시어   - - 이처럼 깡패성 시어나 표기법에 맞지 않는 사투리, 은어를 사용할 때에는 언어에 통달한 사 람이여야 가능합니다   - 시적 허용이란 말이 있습니다 시에선 그것이 용납되는데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통달한 사람이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시로 언어를 때려부숨이 용납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그런 시어사용을 금합니다   □ 시속의 한자사용에 대하여 - 현대시는 한자 사용을 안 합니다  (예) 4월의 斷想 朴素姸 - 이름이나 제목 등 한자 사용을 금하고 꼭 써야할 경우엔 가로 안에 씀 - 한자도 무언의 무거운 언어입니다 무거운 느낌을 주는 한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 요즘 원고 청탁 시 한자 쓰지 말고 한글로 쓰라는 부탁을 많이 하는 추세입니다   □ 시를 쓸 때 - 던지는 시가 아닌 가슴에 들어오는 시를 써야합니다 - 감동적인 시가 가슴에 들어오는 시입니다 - 던지는 시란 (예) 항일시, 민중시, 사실주의적인 시를 말하는데 이런 시가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  최남선, 이광수님은 20 대에 대한민국 현대 문학의 장을 연 분들입니다 우리는 어 -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시를 쓸 것인가 나가야 할 방향을 설정해야 함   시는 설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지식의 세계가 아닙니다 시는 시입니다 시는 완성이 없습니다 시는 첨가하는 것이 아니요 빼는 것이 힘입니다     거짓없는 시가 좋습니다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가벼운 소재를 무겁게 써 봅니다 시의 공간성 시의 공간성도 좋은 것입니다     (예) 하늘에 걸어 말리 우니 저 높은 기 저 높은 기암절벽도 벙어리가 되어 섰구나 여기서 하늘과 기암절벽 사이 공간성 확보가 좋습니다   □ 표기법에 대하여 - 표기법 정말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 원고 심사 시 아무리 시 잘 써도 표기법 오류가 있으면 무조건 버립니다 - 시는 숫자, 번호, 점하나 잘 신경 써야 합니다 - 구조주의 적인 면에서 잘 생각해서 써야 합니다  (예) 콘센트에 플러그를 꼿는 순간  ⇒ ⇒ 꽂는 순간이 맞습니다.   □ 시는 절대적인 1인칭입니다 (예) 내 인생의 가해자라는 판결을 내린다  ⇒ 내.... 여기에서 '내'를 빼면 너와 나와 우리가 됩니다 더 큰 세계로 더 큰 세계로 나 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라는 말을 '내'라는 말을 안 써도 시는 1인칭이므로 독자가 다 압니다   □ 주체의식의 시 - 시는 꼭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 테마가 있는 시이지만 - 주체의식은 조심해서 써야합니다 - 좋은 시는 삶의 뿌리를 내리는 시입니다   □ 시어 함축 - 꼭 있어야 하는 시어 넣고 –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그 시어는 뺍니다 시는 방심하면 안 됩니다 (예) 하얀 백지 위에 머무는 까만 점 하나 ⇒ 어차피 까만 백지, 파란 백지는 없으니 하얀 백지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 없는 시어 사용을 금합니다 - 또한 이별, 사랑, 고독, 그리움 등 많이 사용하는 시어인데 이런 시어들은 간접적인 표현을 합 니다   - - 이별을 대신할 다른 시어가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시간이고 두시간 고민하고 생각하여 여운 을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 한자어 사용 - 고유어가 좋으냐 아니면 한자어가 좋으냐를 잘 생각해서 사용합니다 (예) 화폭에 채색된 사랑 ⇒ 채색 대신..... 물든 사랑으로 써도 됩니다 ⇒ 이것저것 넣었다 빼보고 더 좋고 어울리는 시어로 사용함   □ 존대어 - 존대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합니다 한용운 선생님은 존대어를 많이 썼습니다 (예) 흔적을 지우기 시작합니다 ⇒ 시작합니다를 시작한다로 써 봅니다 느낌이 많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 나도 아파 울었습니다 나도 아파 울었다 ⇒ 존대를 사용하므로 훨씬 애절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그러므로 존대를 쓸 것인지 아닌지 그 시의 성격을 잘 파악해서 결정함   □ 시 세계 - 시 세계는 항상 현재형입니다 - 아무리 과거의 일 이라고 하더라도 현재로 써야합니다 김소월 선생님이 현재형의 시가 많습니다   □ 시 모방은 금물 - 시는 인격입니다 - 내 시가 모자라도 자기 스타일이 있어야 합니다 - 시의 악덕은 모방 즉 닮는 것입니다 - 남의 시 절대 흉내내지 말아야 합니다 - 철저하게 내 시를 쓰고 멋있다고 따라하지 맙시다   - - 노래 가사가 시에 들어가면 지적 분위기 시적 소제의 모사성에 협의 받습니다 - - 그러나 자기는 전혀 모방한 것이 아닌데 한국적인 정서에 의해 혹 다른 시랑 같다는 협의를 받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 반복법 - 반복법은 시의 내용을 약화시킵니다 (예) 한 꺼풀에는 눈물을 한 꺼풀에는 외로움을 ⇒ 보통 사람들이 반복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 시의 내용을 약화시킵니다 - 반복법에 성공한 사람은 딱 한사람 있습니다 (예) 박두진 시인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 띄어쓰기 - 본명은 붙여씁니다 - 필명은 띄어씁니다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 제목 정할 때 - 제목도 여운이 있어야 합니다 - 제목을 보고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 제목과 시를 너무 구체화하지 않도록 합시다 - 시에 항상 여운을 남기는 것 중요합니다 (예) 편운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에 다녀오며 이런 제목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제목을 만 이 제목을 만약 시비란 제목이나 시비 앞에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독자들이 읽 독자들이 읽을 때 무슨 시비일까 하고 궁금해하지 않을까요 제목을 제목을 구체적으로 다 쓰면 아!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이구나 하고 호기심이 덜합니다    □ 의미확대 편운 조병화님의 시비 제막식에 다녀오며 에서 (예) 님이시여 한 조각 구름 타고 가시는 가 했는데 온 하늘 머리 온 하늘 머리에 이고 편운이라 하셨군요 당신의 구름 한 조각으로 천지를 감싸니 사랑이 큰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님이시여란 시어와 당신의이란 시어가 있으므로 독자들이 읽기에 조병화 선생님을 말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당신이란 시어를 빼면 의미가 확대됩니다   혹 조병 혹 조병화 선생님을 놓고 쓴 시라고 하더라도 의미를 확대하는 방향의 시를 써야 합니다  (예) 물 위에 함부로 휩쓸리는 나뭇잎이거나 종이배처럼 지구는 돌든지 멈추든지 ⇒ 여기에서 종이배처럼 직유법 (~처럼, ~같이 ~인양 등등 )을 써서 구체화하려고 하는데 구체화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 그냥 종이배로 끝나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처럼 삭제)  (예) 지구는 돌든지 멈추든지 ⇒ 지구가 도니까 멈춘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지구는 돌든지 말든지 라고 하면 어떨까요? 훨씬 느낌이 다르지요 이렇게 깊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시어를 선택합니다    □ 비유법 - 비유법 중에서 직유법이 가장 하치입니다 전에부터 너무 많이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 현대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 시속의 비어 - 비어를 쓸 것인가 안 쓸 것인가 논란이 많습니다 황금찬 선생님은 미학 주의자입니다 시는 아름답게 써야 한다고 늘 말씀하지시죠 - 그러나 시엔 구조 속에 비어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조 속에서 시적 승화되면 비어가 안됩니다 시적 타당성, 예술의 타당성이 있을 때 비어 사용은 괜찮습니다  (예) 춘향전 작품은 구조 속에서 시적 승화된 작품입니다 ⇒ 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 시가 좋다 나쁘다 판단할 때에 분석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와 직접 연관되어 좋다 또는 나쁘다 판단이 납니 다 - 시는 분석주의가 아닙니다   □ 시의 스케일 - 시도 스케일이 크게 써야합니다 - 때려 부수는 글 써 봅시다 - 시인은 누구나 자기 마음의 결이 있지만 - 시에는 자기 파괴 미의 시가 있습니다 - 얽매이지 말고 자기 시 쓰는 스타일을 파괴해 봅시다   □ 마음의 눈 - 대상에 관하여 내면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 하얀 그리움 눈처럼 쌓여진 거리   그리움을 무엇으로 그릴까 내면의 세계 내면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합니다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대상을 통해서 내 놓을 수 있는 시가 되도록 합시다 - 가장 천박한 시는 자기의 푸념이나 넑두리 늘어놓은 시입니다 시는 푸념이나 넑두리가 아닌 절실함을 써야합니다     오늘 정리를 하며 올리면서 제게도 공부가 됩니다 본인의 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보면서 타인의 시까지 함께 살펴보니 참 유익합니다   우리가 배운 2~3 가지 정도만 기억하고 실제적인 시 쓸 때에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적용이 힘든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배워야 합니다   □ 사실주의 문학 - 민중문학, 목적성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을 사실주의문학이라 함 - 민중문학의 반대는 순수문학이 아니라 반 민중문학입니다   □ 상징의 종류 - 두 개의 상징이 있는데 1. 객관적인 상징:  (예) 비둘기...평화의 상징입니다 (예) 색깔이 주는 이미지 어둠, 검정...어둠 빨강...정열, 회색...슬픔, 초록...희망 이렇게 색이 이렇게 색이 주는 이미지상징도 있습니다   2. 개인적인 상징: (예) 김현승 시인님의 시속에서 까마귀가 자주 나오는데 그 까마귀는 절대고독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상징에는 객관적인 상징과 시인의 개인적인 상징이 있습니다   □ 은유 – 현대시는 은유의 시다 라고 합니다 - 은유라 하면 알면서도 확실하게 어떤 것인지 말을 잘 못할 때가 있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 볼펜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볼펜이 우는구나 뭘 은유 하는가? 볼펜이 운다고 할 때 (인간의 상실) 볼펜은.......운다 (예) 산에는 꽃이 피는데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는데 여기서 잠재의식 속에서 꽃은 무엇일까?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은유입니다   ※ 은유란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비유가 은유입니다    (예) 내마음은 호수요 어떤 사물을 그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낱말 (예) 미련퉁이를 곰으로 키다리를 전봇대로 일컫는 것을 은유라 합니다    □ 모더니즘 - 요즘 시는 모더니즘 시라고 합니다 - 모더니즘 아닌 시가 없습니다   ※ 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취미나 유행을 좇는 경향. 로 새로운 기계문명과 도시적 감각을 중시하고, 지성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현대문 학의 한 경향.    □ 난해한 시 - 시는 어렵게 의미 있게 쓰려고 하면 안됩니다 신경림 시인님은 시인이 쓰고 시인도 모르는 시 쓰고 잘난 척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 시속의 아라비아 숫자  (예) 7월의 뜨거운 7월의 뜨거운.... 가급적 아라비아 숫자보다 한글로 쓰 한글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시엔 그러나 시엔 절대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급적)  (예) 7월의 뜨거운 여기에서 계절에 못을 박았습니다 7월의...... 그냥 여름으로 쓰면 더 포괄적입니다 가급적 시적 느낌을 테두리 두르지 맙시다   □ 시어 - 우리나라 어휘수가 풍부하지 않습니다 - 한글사전 시어가 부족합니다 한자가 .........7: 고유어가.......3 결론은 시인은 새로운 말을 만들어야 합니다     -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적극적인 자세로 -          표준말 맞춤법에 못 박지 말고 엉뚱하게 만들어 봅시다 그것이 시인의 자세입니다     - 시적 수련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 의문형 많이 사용합니다 ․  명령어 사용 많이 합니다   □ 교훈적인 시 - 조선시대 시는 가르쳐 주는 시였으나 - 시는 가르쳐 주는 분야가 아닙니다 - 교훈적인 시를 쓰기엔 시가 아깝습니다 조선시대 많이 써먹은 것이니 이젠 있는 그대로 시 써 봅시다 혹 가르쳐 주더라도 직접 표현이 아닌 간접 표현을 합시다    (예) 개들의 싸움을 보고 할아버지와 손자가 길을 가다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질문했습니다 할아버지 개들이 뭐라고 하면서 싸워요? 할아버지 말씀하시길.....!! 사람만도 못한 개놈아 하면서 싸운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이렇게 문학을 합니다   □ 시 제목 - 제목은 시의 얼굴입니다  (예)고향이란 제목이 있을 경우 정감을 줄 수 있는 다른 제목으로 써 봅니다   □ 시 흐름 - 시적 흐름의 변형 - 명사로 흘러가다가 뒤에 어투를 바꾸어 봅니다 - 지루하게 한가지 기법으로 쓰지 말고 - 여러 가지 기법으로 써 봅니다 - 시는 경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해 쓸 뿐이지 타인의 시와 비교해서 보다 좋은 시 쓰려고 하지 맙시다   □ 표기법과 시어 - 사전 따라 하지 맙시다 - 혹 표기법이 장맛비가 맞아도 (예) 장맛비 // 장맛비 보다 장마비가 훨씬 부드럽고 좋으니 시어를 장마비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시엔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 시적 진술 - 솔직한 진술도 좋은데 대상을 통해서 은유 합니다 - 21세기 시는 은유의 시입니다 - 공부 할 때는 실패를 자행해 봅시다 - 졸렬한 성공보다 위대한 실패가 좋습니다 - 실패해도 고급스럽게 실패합시다 - 거대한 것을 압축해보고 - 아무것도 아닌 것을 거대함으로 표현해 봅시다   □ 시인의 독서법 - 시인은 지식을 쌓아 놓은 것이 아니다 - 머리에 저장말고 가슴에 저장합시다 - 시인의 가슴엔 화학작용이 일어나야 합니다 - 남들은 a 할 때에 c가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 화학작용: 심리의 화학작용, 영혼의 화학작용   □ 소재주의 - 빤한 것 쓰지 말고 연습을 합시다 - 시는 소재주의가 아닌 창조적인 행위입니다 (예) 오늘은 오늘인걸 오늘은 오늘이다 -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은 과감하게 삭제합니다 (예) 개미에 대하여 쓰고 싶을 때 곤충도감 보고 쓰지 말고 직접 부딪쳐 보고 써야 합니다 소재주의 버리는데 너무 버리지 말고 약간씩만 적용합니다   □ 시 쓸 때 주의할 점 - 시 쓸 때에 실명을 안쓰는 것이 좋습니다 이유인즉 : 그 사람에게 못 박혀 버리니까 - 몇 시인지 - 계절 - 몇 월인지 이런 것은 구체적으로 쓰지 않는다   □ 너무 많이 쓴 시어는 피합니다 - 흔한 시어는 버리고 개발합시다 잉태, 고독, 사랑, 그리움, 사연, 눈물, 등등... - ~~처럼 ~~인양 등 직유법도 진보 하다는 소리들을 수 있습니다. - 흔한 것 같지만 흔하지 않는 것을 사용합니다   □ 장황하게 쓰지 않는다 - 늘어놓지 않고 뼈만 앙상한 시를 써봅시다 (예) 두 동생과 조카, 남편이   □ 정치, 경제, 사회에서 사라질 것 쓰지 맙시다 - 시의 생명은 시간성입니다 - 몇 년이면 없어지는 것 쓰지 말고 일과성, 소모성은 피합니다 - 한번 지나가 버리는 것에 대하여 쓰지 맙시다 (예) 로또의 빈 껍질 ⇒ 세월이 지나면 모르는 것 ( 롯또 복권 같은 종류)   □ 시적 흐름 - 말투를 달리 해 보는 것 아주 좋습니다 - 죽었더이다: 약간의 높임말로 시적 흐름의 변조 (예) 내동댕이쳐진 편육 껍데기에서 삭아 내린 삭아내린 자존심이 걸어나온다. 죽었더이다   □ 한자어 - 한 행에 한자어 3번 이상 들어가면 무거운 느낌 듭니다 - 이성적인 시일수록 관념어에 매달리지 말고 좀더 부드럽게 풀어서 써야 함   -옮겨온 것입니다 -
[스크랩]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글쓴이 이현숙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나의 아내에게는 장작불같은 머리카락이  여름 하늘의 마른 번개같은 생각들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범에 물린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고광도 행성의 화환과 꽃리본같은 입술이  백토 위에 남겨진 흰쥐의 족적같은 이빨이  불투명 유리와 황갈색 호박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비수에 찔린 제물의 혀가  눈을 깜빡이는 인형의 혀가  전무후무한 보석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어린아이의 글씨획같은 속눈썹이  제비둥지 가장귀같은 눈썹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유리창에 서린 김과  온실 지붕의 기와같은 관자놀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얼음 아래 돌고래의 정기를 지닌 샘과  석회질 평원같은 어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냥개비같은 손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행운의 하트 에이스같은 손가락을  베어낸 건초같은 손가락들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례 요한 축일의 밤과  쥐똥나무와 엔젤 피쉬 둥지와  담비와 너도 밤나무 열매같은 겨드랑이가 있다  밀과 방아의 혼합같은  수문과 해수 거품같은 팔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폭죽같은 다리와  시계와 절망의 몸짓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딱총나무의 목수같은 장딴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명 이니셜 같은 발이  물 마시는 작은 참새의 발 열쇠 꾸러미같은 발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미정백의 보릿단같은 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급류 하상에서의 만남같은  황금 계곡의 목구멍이  밤의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해변의 둔덕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루비 항아리같은  이슬 머금은 장미의 분광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월의 부채살같은 아랫배  거대한 발톱같은 아랫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수직으로 도망가는 새의 등이  수은의 등이  눈부신 등이 있고  잘 세공된 보석과 젖은 백묵같은  우리가 비워버린 술잔의 추락같은 목덜미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작은 곤돌라같은 엉덩이  샹들리에와 화살깃의  섬세한 균형의  하얀 공작의 우간같은 엉덩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암과 석면의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백조의 등짝같은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봄의 볼기가  글라디올러스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금 광상과 오리너구리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된 봉봉사탕과 해초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거울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보라색 갑옷과 자침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대초원의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감옥속 마실것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도끼에 패인 장작같은 눈이  물과같은 공기 대지불과같은 차원의 눈이 있다  (자유로운 결합),1931, 갈리마르 출판사  여기 내가 좋아하는 브르통의 언술을 덧 붙인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수 있는 의미 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것과  표현 불가능한것, 숭고함과 저속함이 상호 대립으로  인지 되기를 멈추는 한지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을 제거할수 있다  서정성의 발현을 좌우 하는것도 다양한 효과를 지닌  어떤 풍부한 긴장이다  때때로 작가의 개성이 거세된 엄숙한 표현은  탁월한 문장의 정련과 언어가 지닌 잠재적인 힘에의  전적인 의존 사이의 교차를 통하여 자신의 노래를  변주하여 시의 골격을 진동시키는 어떠한 감정에  갑자기 순종하는 양상을 보이기도한다  그를 고찰 하면서 빠질수 없는 단어가 있다  지루할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나마 몇자 발췌해 적어본다  자동기술  초현실주의 운동 속에서 자동기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불운의 역사였다 사실상 자동기술의 이론적 실천적  난점들은 너무나 많다( 어떻게 동질성을 확보 할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상이한 성격을 지닌 언술의 토막들이  아주 빈번하게 발견 될수 있는 자동기술된 언술 속에서  이 언술을 구성하는 제 부분의 이질성을 어떻게 극복  할것인가? 중복과 누락은 어떻게 할것인가? 연상되는 것을  무한정 기술할수 없다면 어디쯤에서 중단해야 할것인가?  청각적 인것에서 시각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대단히  난삽 할수있는 구절들을 어떻게 기술 할것인가? 등등)  그러나 이러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자동기술은  그 근거가 되는 목적 때문에 여전히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전리품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초현실주의의 특징은 잠재의식의 전언 앞에서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이 전적으로 동등 하다는 것을  선언했다는 것이며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무의식의 전언이 반드시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로  간주 되기를 그치고 자기 몫의 요구는 오로지 각자가  책임져야할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모두에게나 각자에게 비밀스런 무의식의 세계를 밝혀주는  수단 그 자체가 될수있으며 초 자연적인 것은 조금도  갖고있지 않는 이 언어를 스스로 마음껏 이용할수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절대적 가능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해 주고 싶다  죽은 놈 불알 만지듯이 너무 오래된 관념 가지고  너무 떠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브르통 이후 전세계 시단은 초현실주의로  확 덮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도 마찮가지 였고요  며칠 있다가는 엘런 식수 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즘의 이론가가 쓴 페미니즘의 이론에서  빼놓을수 없는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글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억압 되는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언어와 사상의 구조들 즉 온갖 이원론과  위계적 질서화 등에 도발적인 방식으로 의문을 던지는  글 입니다  사실 엘런식수는 너무너무 예뻣습니다  캬트린느 드뇌브 인줄 알았다니까요  캬트린느 드뇌브는 테마 창고에서 할께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 -초현실주의 운동의 영원한 맞수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구 문명과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전통적인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하려 한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정신 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념적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 차원에서 주도한 중추적 인물이 앙드레 브르통 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24년에 발표한《쉬르레알리슴 제1차 선언》에서 초현실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쉬르레알리슴: 남성 명사. 순수한 정신의 자동현상으로서, 이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간에 사고의 참다운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또 이성에 의한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이 선언문은 꿈과 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권리선언이라 할 수 있다. 브르통은 아폴리네르가 처음 사용한 ‘쉬르레알리슴’이라는 용어를 빌어, 이른바 ‘자동기술’(ecriture automatique)방법에 의해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순수한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개인적인 삶과 무의식적인 내면세계, 그리고 시를 통한 진정한 자유의 획득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 운동은 그저 미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점차 현실적인 사회로 눈을 돌려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개혁이 필요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은 시의 영역을 넘어서 미술 ․ 영화 ․ 연극 등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르로 확산되며, 나중에는 직접적인 사회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마르크스 이념에 기초한 공산당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기까지에 이른다.   20세기의 혁명적인 정신 운동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대부로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다. 다만 그가 1919년에 첫 시집《공설 전당포》를 출간한 이래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충실히 실천한《1920.자장》등을 비롯하여 환상적인 사랑의 신비를 그린 작품 등에 이르기까지 아주 고집스럽게 초현실주의의 원칙을 끝까지 준수한 ‘초현실주의의 산 역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1896년 프랑스 탱슈브레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던 중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다다이즘에 이끌렸다가 쉬르레알리슴 운동을 전개, 잡지《문학》, 《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 ․ 주재하며《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표했다. ‘자동기술법’에 의한 최초의 작품《1928.나자》를 발표하고 명실공히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 실천적 대표자가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녹는 물고기》《자유로운 결합》《연통관(連通管)》《미친 사랑》등이 있다. [출처] [스크랩]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글쓴이 이현숙|작성자 옥토끼  
267    [스크랩]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 / 천병희 옮김 댓글:  조회:4361  추천:0  2018-03-10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 / 천병희 옮김     옮긴이 서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은 공개용으로 저술된 것과 강의용으로 저술된 것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시기적으로 더 먼저, 그리고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하여 대화 형식으로 저술된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그러나 키케로가 유창한 문체를 찬양한 바 있는 이 책들은 단편만 전해지고 있을 뿐 거의 다 망실되고 없다.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세운 학교 뤼케이온에서 제자들에게 강의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으로서,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이를 편찬 간행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저술들이다.  그런데 이들 저술들은 지리멸렬하고 의미가 통하지 않으며 전후가 맞지 않는 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다. 의 텍스트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추기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교정되고 보완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증거로 1449b 21을 보면 희극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 후로는 희극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으며, 1341b 38을 보면 '카타르시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관해서는 을 참조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에는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대로 은 인류 최초의 과학자에 의하여 저술된 문예 비평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란 점에서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은 물론 시(詩)의 본질과 작시(作詩)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시도임에 틀림없다 하겠으나 아무런 전제나 배경 없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교육 및 축제와 관련해서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시가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에 관해서는 굳이 다른 자료에 의하지 않더라도 자체가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서 비극과 희극은 어디서 유래했는가(1448a 30). 플롯과 성격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놓아야 하는가(1450a 15~38). 단일한 결말을 가진 플롯과 이중의 결말을 가진 플롯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1453a 13). 비극은 어떻게 결말짓는 게 좋은가(1453a 24) 하는 것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 문체와 문법에 관한 부분(제19~22)에서는 수사학(修辭學)에 관한 여러 저술과 소피스트들, 특기 프로타고라스의 언어에 대한 고찰(1456b 15)을 상당히 참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는 제25장에서는 주로 호메로스의 작품에 대하여 제시되었던 쟁점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전개하고 있다. 서사시와 비극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수한 형식의 예술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26장에서는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는 견해, 아마도 플라톤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도 교육 문제 및 공연 문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견해들은 직접 간접으로 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기타 중요한 문제들을 취급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견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호메로스를 위시하여 시인들은 예로부터 자신들의 시에는 어떤 신적인 힘이 관여하고 있다고 즐겨 말해왔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시재(詩才)는 무사(Mousa) 여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29~32행 참조). 아르킬로코스는 영감에 관하여 알고 있었다. 핀다로스도 습득한 숙련보다 타고난 재능이 더 우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2편 및 제9편 100행 참조). 한마디로 말해서 시는 어떤 도취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플라톤도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점은 전자는 자신의 행위에 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설명을 할 수가 없는 데 반하여, 후자는 자신의 행동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교육이 보급되고 문자의 해독력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의 독서 대상, 특히 호메로스의 교육적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시의 도덕적 가치를 부정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예는 역시 플라톤이다. 그는 의 앞부분(379c~402a)에서 초보 교육을 위한 시인들, 특히 호메로스의 가치를 고찰한 다음 그의 작품 속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이보다 앞서 에서 어른들은 시를 도덕적 문제에 관한 토론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模像) 또는 영상(影像)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가 시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는 우리의 자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시들어지게 해야 할 것에다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05b~607b). 플라톤에게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잡초과 같은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은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천재' 또는 '영감(靈感)'의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거의 또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필시 그와 같은 견해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시인이 아닌 자기로서는 가급적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든, 그의 귀납적 방법이 미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든지, 또는 시가 비록 영감이나 천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하더라도 표현의 수단인 언어라는 매체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시와 작시술을 논하는 것이 철학자인 자기에게는 더 합당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을 쓴 목적은 당시의 비극 경연(競演)과 관련해서 작시술에 대한 실용적인 교시를 주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즉 드라마의 구성에 있어서 추구해야 할 점은 무엇이며 피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드라마가 추구하는 효과는 무엇이며 그와 같은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수 있는가, 극작가가 무대상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평가들이 시인에 대하여 제기하는 비난은 어떤 것이며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일종의 기술적인 교시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측면은 후세에 와서, 시는 천재 또는 영감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아니면 숙련 또는 작업에 의하여 쓰여지는가 하는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던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은 작시의 기술적인 측면을 극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플라톤의 영감론(靈感論)을 은연중 반박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시인이 모방하는 것은 진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 데, 다시 말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인 것이다.  끝으로 시는 도덕적 가치가 없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출케 하는 도덕적 기능, 즉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브레히트 이후의 서사극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지만, 나 같은 위대한 환상극의 공연을 보게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적 흥미에 끌려 작품 세계에 휘말리게 된다. 이러한 작품들의 주인공은 우리보다 어느 정도 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자신과 대동소이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감정은 우리 자신의 감정이 된다. 극이 고조됨에 따라 우리의 감정도 고조된다. 그러다가 극이 끝나 흥분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게 되면 우리는 일종의 유쾌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덕철학적 입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쾌감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전개되는 활동에 자연적으로 수반되는 정신 상태로서 활동의 선악에 따라 그에 수반되는 쾌감의 선악도 결정된다.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있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배출이 저녁마다 행해진다면 우리의 신경을 지치게 하여 오히려 역효과도 낼 수도 있을 것이나, 아테나이 인들은 1년에 한두 번씩 디오뉘소스 제전(祭典) 때에만 비극을 관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들의 감정을 좋은 방향으로 억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의 배경과 특징을 '모방'및 '카타르시스'에 대한 해설을 겸하여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은 방대한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일이므로 다음에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점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구성 요소를 논하면서 "비극의 제1원리, 즉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비극을 관람하거나 읽을 때면 우리의 흥미는 등장 인물의 성격에 집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작품에서 발견하고 싶어하는 것은 플롯의 구성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심리적 콤플렉스이며 우리는 때때로 무의식의 어두운 세계까지 투시하고 싶어한다. 플롯이 제일 중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이해가 가지 않을 뿐 아니라 비지성적이라는 느낌마져 든다. 이 점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소 완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객관적인 사고방식과 확고한 이론을 생각해보라.  비극의 목적은 관객에게 다른 예술이 제공할 수 없는 특정한 쾌감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비극이 성패도 이 목적과 관련해서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비극 작가는 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하는가? 그는 생활을 재현함으로써 관객에게 그들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는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생활을 재현한다. 물론 어느 스토리에나 사람들이 나오고 또 그들은 인간인 이상 일정한 도덕적, 지적 자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극작가는 심리학에 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심리 묘사는 극작가에게 있어서는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것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성격 묘사, 음악, 시, 장면, 멋진 대사 - 이런 것들은 물론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고 또 많은 다른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 예술이다.  아무리 훌륭한 색채가 있다 하더라도 밑그림이나 디자인 없이 그것만으로는 그림이 될 수 없듯이, 성격 묘사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플롯 없이 그것만으로 드라마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플롯은 비극에 필요불가결의 요소인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비극의 목적은 스토리를 무대 위에 올려놓은으로써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디. 지성적인 관객들은 플롯이 거의 없는 대화극에서도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나 비극의 진정한 효과는 면밀하게 구성된 스토리 없이는 도저히 산출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플롯이 제1위라는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에 관한 그의 이론 역시 현대 독자들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비극의 주인공는 우리와 대동소이하지만 우리보다 어딘가 뛰어난 데가 있어야 하고, 덕과 정의에 있어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되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명망을 누리고 있는 인물이어야 하며, 그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만 하되 그 원인이 악덕이나 사악이 아니라 어떤 과오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비극에 친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이론은 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에서 귀납적인 방법으로 추출해낸 것이다. 즉 그는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을 읽고 난 뒤 비극의 주인공에 적합한 인간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아테나이 연극 공연의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그리스 배우들은 관객의 눈에 잘 띄기 위하여 굽이 높은 반장화를 신고, 긴 의상을 입고, 확성기가 부착된 커다란 가면을 쓰고 노천 극장에서 수천명의 관객을 상대했는데,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리얼리즘은 불가능하다. 무대의 등장 인물을 일상생활의 수준으로 낮춘다는 것은 아테나이 무대 관례와는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극적 효과를 산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만 한다고 주장해놓고는 범행하기 직전에 상대방이 친구 또는 친척임을 발견하고 범행을 그만두는 플롯이 가장 훌륭한 플롯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확실히 자기당착이며, 행복한 결말에 대한 감성적인 집착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서투른 극작가의 손에서는 행복한 결말이 진정한 비극적 효과를 망쳐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불행한 결말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꼭 감상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입센이 독일 연출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의 결말을 행복한 결말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플롯을 구성하기게 따라서는 범행 직전에 상대방이 자기 친구 또는 친척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범행을 금만두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스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종일관 플롯의구성에 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을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되어야만 비극의 효과를 보다 훌륭하게 산출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의 명백한 결점 하나는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만큼 거의 드라마에 관해서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사시조차 드라마와 비교하여 간단하게 논한 다음, 서사시는 비극보다 열등한 예술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서정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서정시를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그가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한 소수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누가 시론(詩論)을 쓴다면, 물론 자신의 주의력을 드라마에만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알고 있던 그리스 문학에서는 비극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비극은 코러스 속에 서정시를 포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서사시보다 더 압축하여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시대인들은 비극이 진지한 시의 완전한 형식이라는 그의 견해에 대부분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해서는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결점은 이라스토텔레스가 드라마의 역사적 발전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저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적 기원에 역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의 최초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이 디오뉘소스 신의 예찬이라든가, 영웅 또는 반신(半神)들의 무더 위에서 행해지는 의식이라든가, 디오뉘소스 신에 대한 합창 찬미라든가, 그 밖에 다른 형태의 합창 서정시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 의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비극이 공연되던 대(大)디오뉘소스 제전만 하더라도 거국적인 종교 축제이며 이른바 비극의 기능이란 것도 서사시에 나오는 옛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하는 데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는 3대 비극 작가의 시대에 비하여 종교적 기능이 다소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비극 시인이 언제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여 이야기했고 자신이 창작한 플롯으로 새로운 유형의 비극을 시도한 시인들은 거의 언제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비극이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종교적 기원에 역점을 두지 않은 것은 비극의 종교적 기능이 그의 시대에 와서는 많이 퇴색했거나, 또는 그 자신이 이 문제에 관하여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밖에도 문체에 대한 그의 논술이 피상적이고 불충분한 점이 많다든가, 플라톤의 시의 본질로 보고 있는 '영감'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있는 등 우리의 요구에 미흡하게 느껴지는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관찰하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일반화하는 귀납적 원리에 의햐여 문예 비평이 성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행자의 도움 없이 사실상 자력으로 성취했다. 그의 교리적인 사고방식의 제한된 시야로 말미암아 그의 이론은 때로는 온당하지 않거나 혼란을 야기할 때도 있지만 서양 문예 비평사에 그의 만큼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준 책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2) / 천병희 옮김     제1장        우리의 주제는 시학(詩學)1)이므로 나는 먼저 시의 일반적 본질과 그 여러 종류와 각 종류의 기능에 관하여 말하고, 이어서 훌륭한 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플롯의 구성과 시의 구성 요소의 수와 성질과 그 밖에 이 연구 분야에 속하는 다른 사항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러면 자연적 순서에 따라 기본적인 사항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서사시와 비극, 희극과 디튀람보스2) 그리고 대부분의 피리 취주와 키타라 탄주3)는 전체적으로 볼 때 모두 모방의 양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 가지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으니,그것들이 사용하는 모방의 수단이 그 종류에 있어 상이하든지, 그 대상이 상이하든지, 그 양식이 상이하여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여 많은 사물을 모방 모사하고 - 어떤 이는 기술에 의하고, 어떤 이는 숙련에 의하여 - 다른 사람들은 음성을 사용하여 그렇게 하듯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예술들도 모두 율동과 언어와 화성(和聲)을 사용하여 모방하는데 때로는 이것들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혼합하여 사용한다.  말하자면 피리의 취주나 키타라의 연주나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들, 예컨대 목적(牧笛)4)의 취주는 화성과 율동만을 사용하고, 무용술(舞踊術)은 화성 없이 율동만으로 모방한다.5) 그것은 무용가가 동작의 율동만으로 성격과 감정과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화성 없이 언어만으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화성 없이 언어만으로 모방하는 예술이 있는데 이때 언어는 산문이 아니면 운문이며, 운문인 경우에는 상이한 운율이 혼용되기도 하고 동일한 운율만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모방에는 오늘날까지도 고유한 명칭이 없다. 우리는 소프론과 크세나르코스의 소극(笑劇)6)이나 소크라테스의 대화7)에 공통된 명칭을 붙일 수 없으며, 누가 삼절운율(三節韻律)8)이나 비가운율(悲歌韻律)9)이나 밖의 다른 운율로 이러한 것들을 모방한다 하더라도 역시 공통된 명칭은 붙일 수 없을 것이다.10)  사람들은 운율의 이름에다 '시인(詩人)'이란 말을 덧붙여 비가 시인이다, 서사 시인이다 하고 부르고 그것은 시인들이 행하는 모방의 양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이 사용하는 운율에 근거하여 붙인 공통된 명칭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의학이나 자연철학에 관한 것이라도 운문으로 쓰여졌으면 그 저자를 시인이라 부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와 엠페도클레스11) 사이에는 운율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따라서 전자는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지만 후자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철학자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카이레몬12)의 랍소디아13) 처럼 온갖 운율을 혼합하여 모방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를 시인이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끝으로 위에서 말한 모든 수단 즉 율동과 노래와 운문을 모두 사용하는 예술이 있는데, 예컨대 디튀람보스와 송가(頌歌)14)와 비극과 희극이 그렇다. 이들의 차이점은 어떤 것들은 앞서 말한 수단들을 동시에 모두 사용하고, 다른 것들은 따로따로 번갈아 사용하는 데 있다. 여러 가지 예술들의 이러한 차이점을 나는 모방 수단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부른다.   1) '시학'의 원어의 본래 뜻은 작시기술(作詩技術)이다. 그러나 이 말이 지니는 의미의 제한성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는 시학, 또는 시로도 번역했다.  2) 디튀람보스란 말의 어원은 확실치 않으나, 그리스 어에서 유래한 말이 아니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다튀람보스에 관하여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기원전 7세기 시인 아르킬로코스인데 그는 "나는 술을 마시면 디오뉘소스 신의 노래인 디튀람보스를 지휘할 수 있다"고 했다. 기타 문헌들에 의하더라도 디튀람보스는 일정한 문학적 형식을 갖추기 이전에는 디오뉘소스 신에 대한 합창가였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3)피리는 보통 디튀람보스에 사용되고 키타라(현악기 일종)는 송가(頌歌)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두 악기는 연극 공연에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이란 말의 의미인데 일단 가사 없는 음악과 가사 있는 음악으로 구분해놓고 보면 그 뜻이 명백해질 것이다. 기원전 582년부터 가사 없는 피리 경연 대회가 퓌토 경기의 일부분이 되기는 했지만, 가사 없는 음악은 무용을 동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플라톤도 가사 없는 음악은 막연한 감정을 표현할 뿐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짐승의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4) 목적(牧笛)은 피리와 유사하나 피리에 비해 원시적인 악기로 주로 목자(牧者)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5) 그리스의 음악과 무용은 현대의 음악이나 발레보다 훨씬 더 모방적이었다고 한다.  6) 소극(笑劇)은 원래 '흉내내는 극'이란 뜻인데 차차 일상행활의 여러 가지 면모를 그리는 드라마적 소묘를 의미하게 되었다. 7)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고 이를 같이 문답해 나가는 동안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대화 방식으로 철학을 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새로운 문학 형식을 낳게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때로는 드라마 형식으로 때로는 서술체로 진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다.  8) 삼절운율이란 단장(短長格) 삼절운율을 말하는데 단장격 운각(韻脚)을 중복한 것을 다시 세 번 반복한 운율이다. 9) 비가운율은 기원전 7세기 에페소스 시(市)의 칼리노스가 창안한 운율로서 장단단격 운각을 여섯 번 반복한 육절운율과 장단단격 운각을 두 번 반복한 오절운율이다. 이 운율은 주로 비가(elegy)에서 사용된 까닭에 비가운율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가란 원래 비탄의 노래라는 뜻이었으나 일찍부터 시인들은 개인적 감정이나 훈계, 기타 여러 가지 주제(기쁜일이나 슬픈 일)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운율을 사용했다  10) 고대 그리스에는 오늘날과 같은 '문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11)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 초 시켈리아의 자연철학자이다. 그의 저술은 육절운율로 된 과 퓌타고라스의 이론, 특히 윤회설을 증명한 중에서 약 450행이 남아 있다.  12) 카이레몬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아테나이의 시인이다. 그의 작품 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운율을 혼용했다는 것밖에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시의 소재가 된 켄타우로스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켄타우로스 족은 익시온과 네펠레(구름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족으로서 목과 머리와 가슴은 사람이고 나머지 부분은 말이었다. 이들은 텟살리아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라피타이 족의 왕 페이리토오스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고 가서 신부 힙포다메이아와 다른 여인들을 납치하려다가 싸움이 벌어져 졌기 때문에 펠리온 산에 있던 소굴에서 쫒겨나게 된다. 13) 랍소디아란 랍소도스가 음송하는 시를 말한다. 랍소도스는 원래 여러 노래를 하나로 꿰메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자작시를 음송하는 방랑 시인이란 뜻도 있다. 후기에 와서는 대체로 호메로스의 시를 음송함으로써 이를 후세에 전한 자들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14) 송가는 그리스의 신들, 특히 아폴론 신에 대한 의식적인 성격을 띤 찬미가로서 원래는 합창가였으나 차차 키타라 반주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테르판드로스가 쓴 송시의 재목 몇 개와 약간의 단편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3) / 천병희 옮김     제2장       모방자1)는 행동하는2)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善人)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3)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그것은 화가들의 경우도 같다. 왜냐하면 폴뤼그노토스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파우손은 우리들 이하의 악인을, 디오뉘시오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을 그렸기 때문이다.4)  앞서 말한 여러 가지 모방도 각각 이러한 차이점을 가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상이한 대상을 이와 같이 상이한 방법으로 모방함으로써 각 모방이 상이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무용이나 피리의 취주나 키타라의 탄주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가능하며, 산문이나 음악의 반주가 없는 운문에 있어서도 이러한 차이는 가능하다. 예컨대 호메로스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클레오폰은 우리와 동등한 인간을, 그리고 맨처음으로 파로디아를 쓴 타소스의 헤게몬과 의 작가 니코카레스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을 그렸던 것이다.5) 디튀람보스와 송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 있어서도, ----와 아르가스가 쓴-----6) 그리고 티모테오스와 필록세노스가 쓴7)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등장 인물들을 상이하게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비극과 희극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     1) '모방자'라는 말은 여기서는 시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용가나 배우를 의미하는 때도 있다. 소포클레스 이전까지만 해도 시인 자신이 주연 배우요, 연줄가요, 코러스를 위한 무용의 안무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말을 이렇게 애매하게 사용한 것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2) '행동하다'의 원어는 단순히 무엇을 행하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는 영어의 'act'처럼 '출연'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우에 따라 모방의 대상인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모방의 수단인 배우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3) 덕과 부덕의 원어(arete)와 (kakia)는 원래 사물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어떤 도덕적인 가치 기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4) 폴리그노토스(Polygnotos)와 디오뉘시오스(Dionysios)와 파우손(Pauson)은 모두 기원전 5세기 그리스 화가들이다. 성격 화가로 유명한 폴뤼그노토스의 그림에는 이상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셋 중에 가장 후기에 속하는 파우손의 그림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5) 클레오폰은 일상생활에서 취재한 일종의 서사시를 썼다고 하는데 이 책 22장에 그의 문장이 저속하다는 말이 나온다. 헤게몬은 타소스 섬에서 태어나 기원전 5세기 후반의 아테나이에서 활동한 작가로서 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문체로 서사시의 파로디아(parody)를 썼다고 한다. 파로디아란 고의적인 과장이나 어울리지 않는 의상, 이러한 수법을 사용한 시를 말한다. 보잘것없는 사물을 장중한 시어체로 그리는 것 역시 파로디아의 특징이다. 니코카레스는 아리스토파네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희극 작가로 생각된다. 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어원적으로 보아(deilos는 '겁이 많다'는 뜻), 어떤 겁쟁이를 주제로 한 서사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6) --- 부분은 원전이 완전이 파손된 부분이다. 앞에 있는 ----는 시인의 이름이고 뒤에 있는 ----는 송가의 제목으로 생각된다. 아르가스는 파로디아 스타일의 송가를 썼다고 한다. 7) 필록세노스와 티모테오스(제1장 주2 참조)는 둘 다 퀴클롭스 족의 한 명인 폴뤼페모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디튀람보스를 썼는데 전자는 이를 풍자적으로 취급한 증거가 있으므로 후자는 이를 진지하게 취급하여 폴뤼페모스를 이상화한 것으로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 퀴클롭스 족은 시켈리아 섬에 거주하는 거한(巨漢)들로 전해지고 있다. 제 9권 이하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4) / 천병희 옮김     제3장       이들 여러 가지 모방의 세 번째 차이는 각종 대상을 모방하는 양식에 있다. 동일한 수단으로 동일한 대상을 모방한다하더라도, 시인은  1> 호메로스가 한 것처럼 때로는 서술체로, 때로는 작중 인물이 되어 말할 수도 있고2> 그러한 변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체로만 말할 수도 있고 3> 모방자1)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연(實演)하게 할 수도 있다.2)  이와 같이 모방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수단과 대상과 양식이라는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소포클레스의 모방은 선인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호메로스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등장 인물들을 실제로 행동하는 자로서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작품들3)이 드라마라고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실제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도리스 인들4)은 자기들이 비극과 희극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희극은 메가라 인5)들이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리스 본토에 사는 메가라 인들은 메가라가 민주정체가 되었을 때6) 그곳에서 희극이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고, 시켈리아 섬에 이주한 메가라 인들은 그곳 출신인 에피카르모스7)가 키오니데스나 마그네스8)보다 훨씬 이전 사람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기들이 희극을 창안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의 도리스 인들 중에는 비극도 자기들이 창안해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9)) 그들은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komoidia(희극)와 drama(드라마)란 말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말인즉 자기들은 도시 주변의 촌락을 kome라고 하는데 아테나이 인들은 demos라 하며 komoidoi(희극배우)란 말은 이들이 음주유락(飮酒遊樂 komazein)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인기를 잃고 도시에서 쫓겨나 주변 촌락을 순회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 자기들은 행동하는 것을 dran이라고 하는데 아테나이 인들은 prattein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차이점의 수와 성질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1) '모방자'란 여기서 배우를 가리킨다. '모방자'란 말의 또 다른 뜻에 관해서는 제2장 주1)참조.  2) 이 구절은 중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의미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1 Bywater의 해석을 택하여, 번역했는데 사실 모방의 방식에 대한 이러한 분류는 플라톤(392d~394d 참조)의 분류와 일치하는 것같이 보인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와 신화 가운데 일부는 전적으로 모방에 의존하고 - 자네 말처럼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 속하네 - 일부는 시인 자신의 서술에 의존하네. 자네는 그 가장 좋은 예를 디튀람보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네. 다른 일부는 서사시와 기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의 혼합에 의존하네" 시인은 (1)(a)호메로스처럼 작중 인물이 되어 말하거나 (b)그러한 변화 없이 서술체로만 말하거나 (2)모방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실연하게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두 번째 해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크게 보아 두 가지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비극과 희극을 말한다.  4) 도리스 인들은 북방으로부터 그리스로 남하한 종족 가운데 맨 마지막 종족이다(기원전 100~1000년경) 이들은 주로 엘리스, 라케다이몬, 아르고스, 코린토스, 메가라 등지에 정착했다. 5) 메가라 인들 역시 도리스 족으로 기원전 730~550년 사이에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시켈리아 섬에 건설한 식민지는 메가라 휘블라이아 라고 불렀다.  6) 기원전 600년경 참주(僭主) 테아게네스가 추방되었을 때를 말한다. 7) 에피카르모스와 포르미스는 '신(新) 희극'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평범한 인간들의 여러 가지 성격 유형을 묘사한 풍속 희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관해서는 본서 제5장에 언급되고 있다. 에피카르모스는 기원전 5세기가 시작되 이전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키오니데스와 마그네스는 기원전 5세기 전반에 활동했다. 9) 특히 시키온 인들이 그랬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5) / 천병희 옮김     제4장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1)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 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하더라도 - 최상의 즐거음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은 봄으로써 배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사람을 그린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실물을 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기교라든가 색채라든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원인에 의하여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렬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辭 enkomion)2)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호메로스 이전의 시인들이 쓴 풍자시는 한 편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예를 들 수 없겠으나 그런 시를 쓴 시인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호메로스 이후부터는 많은 예를 들 수 있는데, 예컨데 호메로스 자신의 3)와 다른 시인들이 쓴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있다. 이를 풍자시 있어서는 단장격 시행(短長格詩行 iambeion)이 적합한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 운율이 오늘날에도 iambeion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로부터 유래한 것인데, 그 까닭은 이 운율로 서로 iambizein(풍자-욕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옛 시인들 가운데 일부는 영웅시의 작가가 되고 일부는 단장격시의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고상한 대상을 모방함에 있어서도 탁월한 시인이지만(그는 훌륭하게 작시했다는 점에서나 모방이 드라마적이란 점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인신공격이 아니라 우스꽝스런 것을 드라마화함으로써 맨 처음으로 희극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 희극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와 가 비극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비극과 회극이 등장하게 되자 시인들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이 두 가지 경향 가운데 한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어떤 시인들은 단장격 시 대신 희극의 작가가 되었고, 어떤 시인들은 서사시 대신 비극의 작가가 되었다. 그것은 새로 등장한 형식이 옛 형식보다 더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그 구성 요소4)에 있어서 충분히 발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비극 자체의 테두리 내에서, 그리고 극장과 관련하에 고찰하는 것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아무튼 비극은 처음에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했다. 희극도 마찬가지였다. 비극은 디튀람보스의 선창자(先唱者)로부터 유래했고,5) 희극은 아직도 많은 도시에 관습으로 남아있는 남근찬가(男根讚歌)의 선창자로부터 유래했다.6)  그 후 비극은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계속 개량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많은 변화를 거쳐 본연의 형식을 갖추게 된 뒤에야 비로소 비극의 발전은 정지되었다.  1)배우의 수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린 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처음인데, 그는 또한 코로스(choros)의 역할을 줄이고 대화가 드라마의 중심이 되게 했다. 2)소포클레스는 배우의 수를 세 명으로 늘리고 무대 배경을 도입했다. 3)비극은 또한 그 길이7)가 길어졌다. 비극은 사튀로스 극8)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짧은 스토리와 우스꽝스러운 조사(措辭)를 버리고 위엄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는 후기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그 운율도 장단젹(長短格)에서 단장격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장단적 사절운율9)이 사용되었던 것은 당시의 비극에는 사튀로스 극의 요소와 무용적 요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가 도입되자 자연은 스스로 이에 적합한 운율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단장격 운율10)은 대화에 가장 적합한 운율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대화할 때 대개 단장격 운율을 사용하는 데 비해 육절운율11)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믈며, 그것은 보통 어조를 이탈하였을 경우에 한한다는 사실 들 수 있다. 4)그 밖에 또 한 가지 변화는 삽화(揷畵 epeisodiion)12)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장식물13)과 그것이 첨가되게 된 경위를 일일이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일이므로 이미 설명한 것으로 해두자.   1) '두 가지 원인'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는 (1) 모방에 대한 쾌감과 (2) 타인에 의하여 모방된 것에 대하여 느끼는 쾌감이고, 다른 한가지는 (1) 모방에 대한 쾌감(여기서는 모방에 대한 쾌감 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하여 모방된 것에 대하여 느끼는 쾌감도 포함된다)과 (2) 화성과 율돌에 대한 본능이다.  2) '찬가'는 신을 찬미하는 노래이고 '찬사'는 인간을 찬양하는 노래다. 이 말의 본래 뜻이 '술잔치에서의 노래'란 점으로 미루어보아 원래는 연희 주인에 대한 찬사를 의미하던 것이 차츰 찬사 일반을 가리키게 된 것 같다. 이러한 성격의 시에 처음으로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은 시모니데스라고 한다. 3) 마르기테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나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떤 돈 많은 바보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적 서사시인데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 작(作)이라고 하나 작가와 시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4) 비극의 구성 요소에 관해서는 제6장 참조 5) 비극의 기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자료가 없어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이 디튀람보스에서, 그것도 디오뉘소스 신의 종자(從者)들인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사튀로스 극(劇)을 곁들인 디튀람보스에서 유래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릭 그들은 '염소의 노래'란 말이 '염소의 발을 가진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비극에 관한 최초의 문헌들에 나타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 디튀람보스를 부르는 자들이 담쟁이덩굴로 만든 관을 썼다는 기록은 있어도 사튀로스로 분장하고 춤추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 (2) 박퀼리데스 이전에는 디튀람보스에서 드라마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 (3) 디튀람보스의 코로스는 원형인데 반해 비극적 코로스는 직사각형이라는 점 (4) 사튀로스 극이 비극 4부작의 1부가 되기(이는 강제 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전에도 사튀로스적 요소가 없는 비극의 경연이 있었다는 점 (5) 비극에 관한 최고의 문헌에 의하더라도 비극은 디튀람보스만큼 디오뉘소스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를 보이지 않았고 당시의 사건도 영웅적인 요소가 있으면 비극의 소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점 (6) 적어도 고전기(古典期)에는 디튀람보스와 비극, 또는 비극 코로스의 구별이 엄연했다는 점. (7) 염소의 노래(tragoidia)란 말이 '염소의 발을 가진 사튀로스로 분장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란 뜻이 아니고(사튀로스 극에 나오는 사튀로스는 일부는 사람이고 일부는 말이었지 염소는 아니었다). '상(償)으로 내놓은 염소를 얻기 위하여 다투어 부르는 노래'란 뜻이거나(최초로 독립된 배우와 프롤로고스와 대화를 도입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테스피스는 상으로 염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한다), 또는 '제물로 바친 염소를 둘러싸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일 수 있다는 점을(이른바 비극이 비장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러한 견해에서 유래했다) 들어 디튀람보스와 사튀로스 극과 비극은 모두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온 것으로 보고 있다. 비극이 일종의 종교의식인 디튀람보스에서 유래했다 하더라도 비극으로서의 형태를 갖추는 데는 기원전 6세기 초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쪽에 있는 여러 도시, 특히 코린토스와 사퀴온에서 개발되기 시작한 디오뉘소스 전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영웅 전설을 소재로 한 장엄한 또는 비극적 합창 서정시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뒤 기원전 6세기 말에 테스피스가 아테나이에서 이러한 종류의 비극적 합창 서정시를 부르는 코로스를 대사를 외우는 배우와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그 초기 형태를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비극은 그 뒤 디튀람보스와 사튀로스 극과 더불어 대디오뉘소스 제전(아테나이에서 거행된 여러 가지 디오뉘소스 제전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큰 제전으로 3월 말에 개최되었다)의 일부가 됨으로써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6)komoidia란 말이 komos(야단법석을 떠는 술잔치로서 이러한 술잔치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주로 디오뉘소스 제전 때 벌어졌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komo(도시 주변의 촌락)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도리스 인들의 주장(제3장 참조)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찬성의 뜻도 반대의 뜻도 표방하고 있지 않으나 komos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희극이 남근찬가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희극이 남근찬가의 선창자에게서 유래했다는 설은 역사적 근거가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세기에는 에피카르모스의 코로스 없는 희극과 코로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테나이의 '고(古) 희극'의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전자는 에피카르모스 이후 차차 쇠퇴하여 소극으로 변질되었고, 후자는 기원전 486넌 아테나이에서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7) '길이'의 원어의 본래의 뜻은 '크기'인데 여기서는 물리적인 '길이'와 함개 '웅대함'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8) 사튀로스 극은 형식에 있어서는 비극과 유사하지만, 소재에 있어서는 전설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부분을 택하거나 또는 전설을 그로테스크하게 취급하는 드라마를 말한다. 이 드라마의 코로스가 디오뉘소스 신의 종자들인 사튀로스로 분장한 까닭에 사튀로스 극이라고 불린다. 이들의 대사와 제스처는 흔히 음란했다고 하며 이들은 또한 시킨니스라고 하는 격렬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고전기에는 비극 4부작의 제4부를 이루고 있었지만 후기에 가서는 비극 경연 전체를 통하여 단 한 편만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플리우스나 프라티나스가 사튀로스 극을 찬양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말은 그가 처음으로 사튀로스 극을 디오뉘소스 제전에 소개했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3대 비극 작가들은 모드 사튀로스 극을 썼는데 지금 온전하게 남아 있는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뿐이다. 9) 사절운율(장단격 사절운율)이란 장단젹 운각을 중복한 것을 네 번 반복한 운율을 말하는데 이 운율은 격렬한 흥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운율이다.  10) 단장격 운율(단장격 삼절운율)은 그리스 비극의 대사에 쓰이는 운율이다. 11) 육절운율은 영웅시 운율 또는 서사시 운율이라고도 불린다. 호메로스의 와 의 시행들은 모두 이 운율로 되어 있다.  12) 삽화란 코로스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삽인된 대화 부분을 말한다. '삽화의 수가 많아졌다'는 말은 근대극의 경우라면 막(幕) 또는 장(場)의 수가 많아졌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13) 의상이나 가면 따위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6) / 천병희 옮김     제5장      희극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 보통 이하의 악인의 모방이다. 이때 보통 이하의 악인이라 함은 모든 종류의 약(惡)2)과 관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종류, 즉 우스꽝스런 것과 관련해서 그런 것인데 우스꽝스런 것은 추악3)의 일종이다. 우스꽝스런 것은 남에게 고통이나 해를 끼치지 않는 일종의 실수 또는 기형이다. 비근한 예를 들면 우스꽝스런 가면은 추악하고 비뚤어졌지만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비극의 여러 가지 발전 관정과 그 창안자들이 잘 기억되고 있는 반면 희극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희극이 초기에는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정관이 희극 시인에게 코로스를 공적으로 제공한 것은 후기의 일이고 처음에는 시인 자신이 자담(自擔)했다.4) 이른바 희극 시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에 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희극이 이미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난 뒤부터였다. 누가 희극에 가면5)이나 프롤로그를 도입하고 배우의 수6)를 늘렸는가 하는 것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희극의 플롯을 구성하는 것7)은 시켈리아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것은 에피카르모스의 포르미스8)가  ----9) 아테나이의 시인들 중에는 크라테스10)가 최초로 인신공격의 형식을 버리고 보편적인 스토리, 즉 플롯을 구성하기 시작했다.11) 서사시는 장중한 운율12)로 고상한 대상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비극과 일치하지만, 1) 한 가지 운율만을 사용하며 서술체라는 점에서는 비극과 상이하다. 2) 양자는 길이13)에 있어서도 상이하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14)이나 이를 초과하지 않는 시간15)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것이 양자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비극에도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제한이 없었다. 3) 양자는 또한 구성 요소에 있어서도 상이한데 어떤 것은 양자에게 공통되고, 어떤 것은 비극에만 고유하다.16) 따라서 어떤 비극이 좋고 어떤 비극이 나쁜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서사시에 관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는 비극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가 서사시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1) 제2장 앞부분 참조  2) '악'의 원어(kakia)는 제2장 주3)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래는 사물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나 사악(邪惡)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3) '추악'의 원어는 도덕적인 의미와 심미적인 의미가 다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인에게 '추악'은 곧 '악'과 같은 뜻이다.  4) 희극이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 뒤에는, 경연에 참가하고 싶은 시인은 집정관에게 코로스의 비용을 요청했다. 그러면 집정관은 부유한 시민에게 공적으로 명하여 코로스 훈련과 장비에 드는 비용을 대게 했다. 그 비용을 부담하는 시민은 choregos라 불린다. 많은 시인이 경합할 경우 그 선발 기준이 어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희극이 국가의 공인을 받기 전에는 사비(私費)로 공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구절은 문맥상으로 보든 문헌에 따르든 시인 자신이 그 비용을 자담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실제로 비용을 누가 어떻게 조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5) 가면이 도입되기 전에는 희극에서 포도주 찌꺼기를 얼굴에 칠했다고 한다. 비극의 가면은 테스피스가 발명해낸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테스피스가 가면을 발명해냈다는 뜻이 아니라 개량했다는 뜻일 것이다.  6) 대부분의 앗테케 희극에는 세 명의 배우가 츨연한다. 그러나 와 의 어떤 부분에는 네 명 또는 다섯 명의 배우가 필요하다. 에피카르모스도 세 명의 배우를 사용했다고 한다. 7) '희극의 플롯을 구성했다' 함은 인신공격의 형식을 버리고 일반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를 취급했다는 뜻이다.  8) 에피카르모스와 포르미스에 관해서는 제3장 주7)을 보라 9) ---부분은 완전이 파손된 부분인데 문맥상으로 보아 '그곳 출신이었으니까'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0) 크라테스는 기원전 450년경부터 430년까지 할동했는데 그 당시에는 크라티노스가 가장 저명한 희곡 작가였다고 한다. 11)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견해가 현존 희극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초기 작품은 인신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만 하더라도 소크라테스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 일색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클레온이 민중선동가의 대명사이듯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의 대명사에 불과하며 이나 는 단순한 인신공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12) 서사시는 육절운율만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비극은 삼절운율과 사절운율 등을 사용하며 심지어는 서사시의 운율인 육절운율도 사용할 수 있다.(제26장 후반부 참조) 13) '길이'란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물리적인 의미의 길이, 즉 행수를 뜻할 수 있고(나 는 1만 수천 행에 달하는 데 비해, 비극은 대체로 1천행을 크게 초과하지 않는다) (2) 비극의 공연 또는 서사시의 낭송에 필요한 시간을 뜻할 수 있고(그리스 고전을 주로 책을 통해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첫 번째 가능성을 생각하기 쉬우나 보통 직접 보고 듣던 그리스 인들에게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사건의 경과 기간을 뜻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비극에도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시간적 제한이 없었다'는 말을 비극도 공연하는 데 서사시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거나, 서사시는 무제한 오래 계속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일 것이다. 가장 오래 된 비극들은 비교적 짧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4장에서 초기 비극은 짦았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길이'란 말이 사건의 경과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그것이 비극과 서사시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더 명확하게 지적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 는 모두 사건의 경과 기간이 수주일 이상씩이다. 그리고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비극에 있어서도 사건의 경과 기간은 제한되어 있지 않다. 의 사건만 하더라더 단 하루에 일어날 수 없으며, 도 상당한 기간의 경과를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14)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태양이 지상에 떠 있는 시간, 즉 12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극은 보통 동틀 녘에 시작하며 또 실제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라마 내의 사건을 위하여 12시간이면 충분하다. 15)은 날이 어두워진 뒤에 끝나고 은 동트기 전에 시작하며 는 밤에 일어난다.  16) 제6장 및 제26장 참조, 비극의 여섯 가지 구성 요소 가운데 플롯, 성격, 조사, 사상은 서사시에도 공통되나 장경(場景)과 노래는 비극에서만 불 수 있는 것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7) / 천병희 옮김     제6장       육절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1) 먼저 비극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2)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3)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4)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란 말은 율동과 화성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는 말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해서 진횅됨을 의미한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연(實演)하기 때문에, 첫째 장경(場景, 또는 배우의 분장)5)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노래와 조사(措辭)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다름 아니라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며,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6)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두 가지인데 사상과 성격이 그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과 실패도 이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다.  나는 플롯이란 말을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한편 성격은 행동자를 일정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며, 사상은 행동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또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7)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실상 모든 시인들이 이러한 요소들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드라마는 장경, 성격, 풀롯, 조사, 노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이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며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또 행동 없는 비극은 불가능하겠지만 성격 없는 비극은 가능할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작가8)들의 비극에는 성격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시인들에게 공통된 결합이다. 그것은 화가들 중에서 제욱시스를 폴뤼그노토스9)와 비교할 때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왜냐하면 폴뤼그노토스는 우수한 성격 화가인데 비해 제욱시스의 그림에는 아무런 성격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시인이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그리고 조사와 사상에 있어서 훌륭하게 손질된 일련의 대사를 차례차례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비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이 훨씬 더 훌륭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비극에서 우리를 가장 매혹하는 것은 급전(急轉)과 발견10)인데 이것들은 플롯에 속하는 부분이다. 또 한가지 증거로 작시의 초심자들이 사건의 결합보다 조사와 성격 묘사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초기 시인들11) 거의 전부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12)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며 비극이 행동자를 모방하는 것도 주로 행동을 모방하기 위해서이다. 제3은 사상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적당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사에 관한 한 이 능력은 정치학과 수사학의 연구 분야에 속한다. 왜냐하면 옛날 시인들은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정치가와 같이 말하게 했고, 오늘날의 시인들은 수사학자와 같이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13) 사상을 성격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성격은 행동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가 분명치 않을 때 그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14)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기피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말은 성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런데 사상은 무엇을 증명 또는 논박하거나 보편적인 명제(命題)를 말할 때 그 언사 속에 나타난다. 여러 가지 언어적 요소 가운데 제4의 것은 조사다. 조사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5) 언어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역할은 운문에 있어서나 산문에 있어서나 동일하다. 나머지 두 개 가운데 노래는 비극의 쾌감을 산출하는 양념16)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장경은 우리를 매혹하기는 하나 예술성이 가장 적으며 작시술과는 가장 인연이 먼 것이다. 비극의 효과는 공연이나 배우 없이도 산출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장경의 준비에 관한 한 의상계17)의 기술이 시인의 기술보다 더 유력하다.   1) 육절운동에 의한 모방, 즉 서사시에 관해서는 제23,24,26장에서 거론되고 있으나 희극에 관한 논술은 없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비극의 정의가 전개되는 제6장은 의 핵심으로 앞서 나온 장들은 비극의 정의를 위한 기초가 되는 장들이고, 뒤에 나올 장들은 이를 부연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 원의는 '양념을 친'이란 뜻이다. 4)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보아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도 여러 학자들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있으나 카타르시스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비극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비하여 퇴조하고 있는 편이다. 5) 장경의 원어가 배우의 분장만 의미하는지, 또는 무대상의 장면과 광경도 포함하는지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영역에서는 spectacle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분명히 분장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의 무대에서는 장경이라고 해보았자 배우의 분장 외에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제14장 첫부분에서는 눈에 띄는 무대상의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같이 보인다. 비극 배우들은 배역에 맞는 가면을 썼고, 긴 의상을 입었으며(적어도 아이스퀼로스 시대부터는 그랬다.) 굽이 높은 반장화를 신었다. 무대 배경은 소포클레스가 도입했다고 한다(제4장 중간 부분 참조) 6) '행동자'란 여기서는 배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제2장 주2 참조) 7) 두 가지안 조사와 노래를, 한 가지란 장경을, 세 가지란 플롯, 성격, 사상을 말한다. 8) '현대 작가'란 에우리피데스 이후의 작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 폴뤼그노토스에 관해서는 제2장 주4 참조. 제욱시스에 관해서는 제25장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남부 이탈리아의 헤라클레이아 출신 화가이다.그는 이상적인 여성미(女性美)를 그려 사람들을 경탄케 했다고 한다. 10) 급전과 발전에 관해서는 제11장과 16장에 설명이 나온다. 11) 아이스퀼로스 이전 시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12) 드라마에 있어섯의 플롯과 성격을 그림에 있어서의 밑그림과 색채에 비교하고 있다. 그림의 경우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밑그림이 잘못되면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없듯이, 드라마에 있어서도 성격 묘사와 조사가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플롯이 잘못 구성되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13) 정치학은 국가가 생기면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수사학은 비교적 후기에 생긴 학문 분야이다. 14) 의도는 등장 인물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 가장 잘 나타난다. 예컨대 복수를 택하느냐 안전을 택하느냐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때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의도를 통하여 등장 인물의 성격을 알면 그가 이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그 의도를 예측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격'은 의도를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지가 명백한 경우에는 의도는 성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맛없는 음식을 택하느냐 맛있는 음식을 택하느냐 하는 경우가 그렇다. 15) 조사에 관한 언급은 '조사란 운문의 작성을 의미한다'는 말뿐이다. 조사의 원어는 대부분의 영역본에는 'diction'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루카스는 '말을 이해힐 수 있도록 결합시키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고 말하고 있다. 16) 양념이란 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17) 의상계의 원어는 주석이나 문헌에 의하면 가면과 의상이 그의 주요, 또는 유일한 업무 분야였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8) / 천병희 옮김     제7장       비극의 여러 가지 구성 요소를 분석해보았으니 이번에는 플롯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이것이 비극의 최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극이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왜냐하면 전체 중에는 아무런 크기를 가지지 않은 전체1)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는 시초와 중간과 종말을 가지고 있다.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너무 작은 생물은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지각은 순간적이므로2) 분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또 너무 큰 생물, 이를테면 길이가 수백 척이나 되는 생물도 아름다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대상은 단번에 관찰할 수 없고, 그 통일성과 전체성이 시계(視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사물이나 생물이 일정한 크기를 가져야 하고 그 크기는 쉽게 통관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하듯이 플롯도 일정한 길이를 가져야 하는데 그 길이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  길이의 제한은 경연3)과 관람에 관계되는 한, 작시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1백 개의 비극을 경연해야 할 경우에는,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바와 같이 물시계로 시간을 재야 할 것이다.4) 그러나 사물의 성질 자체에 기인하는 제한에 관하여 말한다면, 전체를 쉽게 통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스토리가 길면 길수록 그 크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대체로 말해서 주인공의 운명이 일련의 개인적 또는 필연적 경로를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길이라면 스토리 크기의 한계로서 충분할 것이다.5)   1) 너무 작아서 구분이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전체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266a 10 참조. 2) 따라서 여러 부분들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례 감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3) 다른 디오뉘소스 제전에서 개최된 비극 경연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디오늬소스 제전에서 개최된 비극 경연에는 세 사람의 시인이 참가했고, 하루에 한 시인의 4부작(보통 비극 3편과 사튀로스 극 1편으로 된)이 공연되었다. 4)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극의 '크기'니 '길이'니 하는 말은 제5장에서 비극과 서사시를 비교해서 말할 때 사용한 '길이'란 말과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9) / 천병희 옮김   제8장         플롯의 통일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한 사람을 취급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사건이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그 중에는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통일된 행동을 이룰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전(傳)1)이나 테세우스전2)이나 이와 유사한 시를 쓴 시인들은 모두 잘못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헤라클레스가 한 사람이니까 스토리도 당연히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다른 점에 있어서도 뛰어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도 숙련에 의했든 친분에 의했든 바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는 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딧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3)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狂症)을 가장한 사건은4)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를 구성했던 것이다. 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5)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1)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영웅으로 그에 관한 전설은 서로 상관이 없는  세 가지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시는 자연히 통일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하여 쓰를 쓴 사람은 키나톤(기원전 8세기). 페에산드로스(기원전 7세기 또는 6세기), 파뉘아시스(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숙부(?)로서 기원전 460년 경에 죽었다) 등이 있다. 2) 테세우스 역시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 영웅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는 크레테의 왕녀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다이달로스가 설계한 미궁에 갇혀 있던 반인반우(伴人半牛)의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는 또한 아테나이의 전설적 건설자이기 때문에 어테나이 인들은 애국심에서 다른 데 속하는 전설도 그에게 귀속시키는 예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관한 시도 자연히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생애를 시의 소재로 택한 시인으로는 조퓌로스(기원전 6세기), 디필로스(기원전 5세기) 등이 있다. 3) 오딧세우스가 파르낫소스에 사는 외조부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엄니에 부상당했다는 이야기는 제 19권(394행 이하 및 405행 이하 참조)에 잠깐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메로스가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그가 에이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가 가진 원전에는 이 사건이 빠져 있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제16장에서 당시의 부상에서 생긴 흉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히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부분을 단순한 에피소드로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오딧세우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두고 트러이아 전쟁에 출전하고 싶지 않아서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의 친구이자 에우보이아 왕 나우폴리오스의 아들인 팔라메데스가 데리러 왔을 떼 소와 나귀를 함께 쟁기에 매고 밭을 갈며 밭이랑에다 씨앗 대신 소금을 뿌리면서 광증을 가장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에는 나오지 않고 에 나온다. 5) 하나의 이야기라 해서 반드시 '전체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0) / 천병희 옮김     제9장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사실들로부터 명백한 것은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음 운문을 쓰느냐 아니면 산문을 쓰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헤레도토스의 작품은 운문으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율이 있든 없든 그것은 역시 일종의 역사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한 사람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1)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이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고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이를테면 알키비아테스는 무엇을 행했는가 또는 무엇을 당했는가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희극의 경우에는 이는 이미 명확해진 사실이다. 왜냐하며 희극에 있어서는 개연적 사건에 의하여 플롯이 구성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맞는 임의의 이름이 등장 인물들에게 붙여지기 때문이다.2) 이것은 풍자 시인들이 특정한 개인에 대하여 시를 쓰던 것과는 다른 수법이다. 그러나 비극의 경우는 기존 인명3)에 집착하고 있다. 그 까닭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어나니 않은 것의 가능성은 아직 믿지 않지만 일어난 것은 가능성이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비극에 있어서도 유명한 이름은 한 둘 정도고 나머지는모두 가상적인 이름뿐인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유명한 이름이라고는 아예 하나도 나오지 않는 작품들도 있다. 예컨대 아가톤4)의 의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에서는 사건도, 등장 인물의 이름도 모두 시인의 창작이다. 그렇다고 쾌감이 덜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극의 소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꼭 여기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와 같은 집착은 가소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유명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은 소수뿐이고,5) 아는 사람이 소수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여러가지 사실들로부터 명백한 것은 시인6)은 모방하기 때문에 시인이요, 또 그가 모방하는 것은 행동인 이상 시인은 운율보다도 플롯의 창작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하여 시를 쓴다 하더라도 그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난 사건 중에도 개연성과 가능성의 법칙에 합치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이상 그는 이들 사건의 창직자7)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플롯8)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인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졸렬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구성하고,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에 대한 고려에서9)에서 구성한다. 경연을 위하여 작품을 쓰다 보면 우수한 시인들을 종종 무리하게 플롯을 연장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0)  그런데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러한 사건은 불의에, 그리고 상호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은 이와 같이 발생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발생할 때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 같이 보일 때 가장 놀랍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르고스에 있는 미튀스11)의 조상(彫像)이 그 조상을 국경하고 있던 미튀스의 살해자 위에 떨어져 그를 죽게 한 사건이 그 한 예이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단순한 우연지사로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플롯은 필연적으로 다른 플롯보다 훌륭하게 마련이다.   1) '철학적'이란 말 대신 '학문적'이란 말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개별적인 사실로부터 보편적인 진리를 귀납하기 때문이다. 연대기 편찬자와는 달리 시인은 인생을 알고 보편적인 원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시인은 우리에게 인간성으 변함없는 여러 가지 특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적 진실이 현실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단순한 연대기의 단계를 넘어서서 여러 가지 사건 사이의 복잡한 내면 관계를 규명한다고 할 때 우리는 과연 역사가 단순히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데 그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에서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 관계가 시의 플롯만큼 뚜렷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2) 이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이론은 실재 인물들 많이 취급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에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여기서는 가상적 인물을 통하여 당시의 여러 가지 성격 유형을 묘사하던 '신(新)희극'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신희극의 경우에는 먼저 플롯을 구성한 다음에 그 플롯에 맞는 임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이것은 비극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비극의 등장 인물들은 실재 인물들로 생각되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유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7장에서 비극 작가는 등장 인물의 이름과 삽화를 삽임하기 전에 먼저 수미일관한 플롯의 윤곽을 잡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3) '기존 인명'의 원뜻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인데 여기에는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전설적 인명과 좁은 의미의 역사적 인명이 모두 포함된다. 4) 아가톤은 3대 비극 작가의 계승자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시인이다. 그는 기원전 416년에 레이나이아 제전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는데 이 우승을 축하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가 바로 플라톤의 의 배경이다. 그는 비극 사상 처음으로 코로스로 하여금 플롯의 내용과 관계가 없는 막간가(幕間歌)를 부르게 했고(제18장 참조). 처음으로 가상적인 사건과 가상적인 등장 인물로 꾸며진 비극을 소개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40행이 못된다. 에 관해서는 이 작룸의 사건과 등장 인물이 모두 시인의 창작이라는 점만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작품은 후기 아테나이의 비극을 중기 및 신희극 사이에 교량적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5)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그리스 인들은 초보적인 교육만 받아도 시와 친숙해 질 수 있었고, 또 디오뉘소스 제전과  레이나이아 제전 때면 디오뉘소스 극장이 으례 만원을 이루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비극과 친숙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유명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은 소수 밖에 없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그리고 비극 시인과 희극 시인의 임무를 비교한 안티파네스의 유명한 단편 에도 비극의 플롯은 청중들에게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작품이 보다 그리 오래 전에 나온 것이 아니란 점을 생각한다면 그 동안 사정이 완전히 달라졋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6) 이 구절에 나오는 '시인'이란 말과 '창작자'란 말의 원어는 같다. 문맥에 따라 '시인' 또는 '창작자'라고 번역하였다. 7) 역사상 많은 사건들 중에는 시인(여기서는 형태적 의미의 역사가도 포함된다)이 그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밝힘으로써 스토리를 '창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설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8) '단순한 플롯'에 관해서는 다음 장 참조 9)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만 하더라도 시인보다는 배우(또는 심판관)의 비중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리스토렐레스 1403b 33 참조. 10) 시인들은 경연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외면하면서까지 배우들이 요구하는 발언이나 쟁점 같은 것을 무리하게 작품 속에 집어넣는 사례가 비일비배했다. 11) 플루타르코스의 에 따르면 미튀스는 기원전 4백년 경에 아르고스에서 당쟁으로 인하여 피살되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1) / 천병희 옮김     제10장        플롯에는 단순한 것도 있고 복잡한 것도 있다. 그것은 플롯이 모방하는 행동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이 앞서 규정한 바와 같이,1) 연속성2)과 통일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발견3) 없이 이루어질 때 나는 이를 단순한 행동이라고 부르고, 주인공의 운명의 변화가 급전이나 별견, 또는 이 양자를 다 수반하여 이루어질 때 복잡한 행동이라고 부른다.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해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先行事件)의 필연적 또는 개인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1) 제7장 및 제8장 참조 2) '연속성을 가진다' 함은 플롯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 즉 삽화적 사건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 3) 급전과 발전에 관해서는 다음 장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2) / 천병희 옮김     제11장       급전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변화는 앞서 말했듯이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2)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자(使者)는 오디이푸스를 기쁘게 해주고 그를 모친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줄 목적으로 왔지만, 그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또한 3)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륑케우스는 처형되기 위해서 끌려가고 타나오스는 그를 처형하기 위해서 데리고 가던 도중 이에 선행했던 사건의 결과로 후자는 죽고 전자는 구출된다.  발견이란 그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지(知)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등장 인물들이 행운의 숙명을 지녔느냐 불행의 숙명을 지녔느냐에 따라 우호 관계를 맺기도 되고 적대 관계를 맺게도 된다.4) 그런데 발견은 에 있어서와 같이 급전을 수반할 때 가장 훌륭한 것이다. 물론 이와는 다른 종류의 발견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우연한 사물5)에 관해서도 앞서 말한 바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아니했는지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플롯 및 행동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발견은 처음에 말한 발견이다. 이와 같은 발견은 급전과 결합될 때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비극이 이와 같은 행동의 모방임은 이미 규정한 바 있다 - 그리고 불행해지느냐 행복해지느냐 하는 것도 발견과 급전에 의해 야기된 사태의 변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발견은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쪽의 신분이 이미 알려져 있는 경우에는 한쪽에서만 상대방의 신분을 발견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양쪽이 모두 상대방의 신분을 별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이피게네이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오레스테스에게 발견되지만 오레스테스가 이피게네이나에게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발견이 필요했던 것이다.6)  플롯의 두 부분, 즉 급전과 발견은 이상과 같은 사항에 관한 것이다. 제3의 부분은 파토스8)다. 파토스란 무대 위헤서의 죽음, 고통, 부상 등과 같이 파괴 또는 고통을 초래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 가운데 나머지 두 부분, 즉 급전과 발견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1) 제7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불행에서 행복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뀔 수 ---'라는 구절을 말한다. 2) 소포클레스의 911~1805행 참조 오디푸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아폴론 신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코린토스를 떠난다. 그는 코린토스 왕 폴뤼보스와 왕비 메로페가 자신의 양친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유랑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어떤 삼거리에서 마차를 탄 일행과 마주쳐 서로 길을 비켜라 못 비킨다 하여 하며 언쟁을 하다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에게 채찍질을 당하여 격분하여 노인을 때려 죽인다. 그런데 그 노인은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였다. 그 뒤 오디푸스는 테바이에 가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그 공으로 테바이의 왕이 되고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그리고 라이오스가 살해될 때 도망쳐 온 라이오스의 시종은 테바이의 신왕(新王)이 라이오스임을 알고 테바이를 떠난다. 그리하여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실부(實父)를 죽이고 생모와 결혼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까지 낳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여기까지가 의 전제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코린토스에서 한 사자(使者)가 와서 폴뤼보스 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코린토스 시민들이 오이디푸스를 새왕으로 모시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오이디푸스는 아폴론 신의 예언 가운데 전반부는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나, 아직도 후반부는 실현이 가능하다면서 두려움을 표시한다. 그러나 사자는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볼뤼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가 그의 친부모가 아님을 밝힌다. 그러나 도리어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모든 진상이 밝여짐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맹인(盲人)이 되어 유랑의 길을 떠나고 이오카스테는 목매어 죽는다. 3) 는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인기 작가 테오덱테스(기원전 4세기)의 작품으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륑 케우스의 전설은 다름과 같다. 이집트 왕 아이귑토스와 다나오스는 형제 간으로 전자는 50명의 아들을 후자는 50명의 딸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귑토스의 아들은 다나오스의 딸들과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이를 완강히 반대하는 다나오스와 그의 딸들은 친족들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하여 아르고스로 달아난다, 그러자 아이귑토스의 아들들은 결혼하기 위하여 아르고스로 뒤쫓아간다. 그리하여 다나오스는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게 되지만 첫날밤에 삳대자를 모두 자살(刺殺)하도록 딸들에게 명한다, 다른 딸들은 모두 부명(父命)에 따르나 휘페름네스트라만은 상대자인 륕케우스를 죽이지 않고 도망시킨다. 이 비밀 결혼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바스라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이 아들이 발각됨에 따라 모든 비밀이 드러나게 되어 륑케우스도 체포된다. 그리하여 륑케우스가 처형되려는 순간 다나오스의 잔인무도한 처사에 분격한 아르고스 시민들은 륑케우스를 구출하고 다나오스를 죽인다. 4) 이온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여인이 자기 어머니임을 발견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참조 아이기스토스는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길보(吉報)를 전해준 자기 바로 오레스테스 자신임을 발견한다, 소포클레스의 참조. 5)  에 나오는 목걸이처럼 발견의 근거가 되는 표지(標識)를 말한다. 6)  에우리피데스의 720행 이하 참조 이피게네니아는 트로이와 전쟁 때 그리스 군의 총수였던 아가멤논의 딸이다. 그리스 군이 출범하기 위하여 아울리스 항에 집결했을 때 아가멤논은 잘못하여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였기 때문에 여신의 노여움을 산다. 그래서 아가멤논은 여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딸 이피게네이나를 여신께 제물로 바친다. 그러나 여신은 이피게네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 그녀를 납치하여 타우리케로 데리고 가 그곳에 있는 여신의 신전에서 사제(司祭)가 되게 한다. 이피게네이아의 임무는 이곳에 표류해오는 이방인들을 여신께 재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레스테스와 그의 친구 퓔라데스가 아폴론 신의 신탁에 따라 이곳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女神像)을 훔치러 왔다가 체포되어, 제몰로 바쳐지기 위하여 이피게네이아 앞으로 끌려간다. 그녀는 자기를 제물로 바쳤던 그리스 인들을 마음속으로 늘 원망하고 미워하면서도 두 청년을 보자 왠지 고향 생각이 나서 그들의 고향을 묻게 된다. 두 청년이 그리스 인임을알게 된 이피게네이나는 고향의 안부를 묻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통하여 고향에 있는 동생 오레스테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 가운데 퓔라데스가 가기로 결정된다. 그녀는 도중에 파선(破船)되어 편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 편지의 내용을 읽어준다. 그리하여 오레스테스는 그녀가 자기 누이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서 오레스테스는 자기가 그녀의 아우임을 밝히게 되는데, 그 방법이 약간 인위적이다. 그는 자기가 오레스테스임을 믿게 하기 위하여 그녀가 '황금 양 모피 이야기'를 수놓은 적이 있다는 사실과 펠롭스의 오래된 창이 그녀의 침실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6장에서 이피게네이아가 오레스테스에게 발견되는 방법은 훌륭하지만 오레스테스가 이피게네이아에게 발견되는 방법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7) 파토스에 관해서는 제13장 및 제14장에 언급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3) / 천병희 옮김     제12장1)       비극의 구성 요소로서 사용되어야 할 여러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2) 그러나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프롤로고스(Prologos)와 삽화(epeisodion)와 엑소도스(exodos)와 코로스의 노래로 구분되며, 코로스의 노래는 다시 등장가(登場歌 parodos)와 정립가(停立歌 stasimon)로 구분된다.3) 이 두가지는 모든 비극에 공통된 것이나 본무대(本舞臺)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애탄가(哀歎歌 kommos)4)는 소수의 비극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프폴로고스는 코로스의 등장가에 선행하는 비극의 전체5)부분이고, 삽화는 코로스의 전체 노래와 노래 사이에 삽입된 비극의 전체 부분이다. 엑소도스는 코로스의 마지막 노래 다음에 오는 비극의 전체 부분이다. 코로스의 노래 가운데 등장가는 코로스의 최초의 발언 전체이고, 정립가는 단단장격 운각과 장단격 운각이 사용되지 않는코로스의 노래이고,6) 애탄가는 코로스와 배우가 합창으로 부르는 비탄의 노래이다. 비극의 구성 요소로서 사용되어야 할 여러 부분에 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 있고, 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비극은 이상과 같은 여러 부분으로 구분된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제6장에서 먼저 비극의 본질을 정의하고 이어서 비극의 질적 또는 내적 구성 요소를 구분한 다음, 제7장부터 제14장까지 계속해서 플롯에 관해서 논술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논지상 본론에서 이탈한 감이 없지 않으나, 이미 의 맨 첫 구절과 맨 마지막 구절에서 비극의 질적 요소와 양적 요소의 구분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걸 보면 비극의 양적 부분에 관해서도 설명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그 위치가 좀 납득하기 어려울 뿐인데, 아마 비극의 질적 구성 요소를 구분한 제6장 다음에 있었더라면 논리상 합당한 위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실제로 하인시우스(7세기) 같은 사람은 본장은 제6장 뒤로 보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2) 제6장을 말한다. 3) '프롤로고스'는 드라마의 주제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드라마의 맨 처음에 나오는 독백 또는 대화 부분이다. 테스피스의 창안이란 걸 보면 아주 초기에 속하는 작품에서도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롤로고스라는 용어는 적어도 아리스토파네스 시대에는 통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파네스 1119행 참조. 그러나 소수이긴 하나 코로스의 등장가와 더불어 시작되는 비극도 있다. 아이스퀼로스의 및 이 그 예다.  '삽화'는 근대극의 막이나 장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원래 코로스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인 개량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코로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으며 대화 부분은 부차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개량되어 배우의 역할이 중심이 되고 코로스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삽화란 배우가 연출하는 장면과 대화를 말한다. 삽화란 말은 원래 코로스에게 무엇을 알리기 위하여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등장가'는 코로스가 자신들의 위치인 오케스트라를 향해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다.  '정립가'는 코로스가 오케스트라 위에서 부르는 노래인데 원래는 선행 삽화에 대하여 느낀 바를 읊었다. 그러나 아가톤 이후부터는 플롯의 내용과 무관한 막간가(幕間歌)로 변질되었다.(제18 참조)  엑소도스는 원래 코로스가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날 때 부르는 합창가였다. 그러나 시인들 대부분 코로스의 지휘자와 배우 간의 대화로 이를 대신했으므로, 엑소도스는 최후의 정립가 댜음에 오는 모든 장면과 대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4) '본무대'란 코로스의 자리인 오케스트라에 대하여 배우가 공연하는 무대를 말한다. 그리고 본무대 위에서 부르는 노래란 배우가 부르는 노래(여기에는 애탄가와 서정적 독창가가 포함된다)를 말한다.  '애탄가'로 번역한 kommos는 가슴을 치며 애통해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코로스와 배우(보통 한 사람이나 때에 따라서는 두 사람)간의 서정적 대화에 대한 전문 용어이다. kommos는 대부분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가이므로 나중에 모든 애도가에 대하여 kommos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5) '전체'란 말이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 '다른 부분에 의하여 중단되지 않는'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는'이란 뜻이 되겠으나 단순히 강조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는 것 같다. 6) 이 말은 현존 작품에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많은 작품에서 단단장격 및 장단적 운각을 사용하고 있는 정립가의 행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기원전 4세기의 비극에는 적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18장 마지막 부분에 3대 비극 작가 이후 코로스의 사용법이 많이 변했다는 말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4) / 천병희 옮김     제13장     방금 논의한 것에 이어서 우리는 1) 플롯을 구성함에 있어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2)어떻게 해야 비극의 효과가 산출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1)  가장 휼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된다.2)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세 가지 플롯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1) 유덕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감정도 연민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불쾌감만 자아내기 때문이다.  2) 약한 자가 불행하다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비비극적(非悲劇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극의 필요조건을 하나도 구비하고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도 없고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3) 극악한 자가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여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플롯으 구성은 인정에 호소하는 점은 있을지 모르나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된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연민의 감정도 공포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남은 것은 이들3)이 중간에 있는 인물이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4)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곧 그러한 인물인데, 그는 오이디푸스나 튀에스테스5)나 이와 동등한 가문의 저명인ㄷ물들처럼 튼 명망과 번영을 누리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플롯은 단일한 결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중의 결말을 가져서는 안 된다6). 주인공의 운명은 불해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7). 그러나 그 원인은 비행에 있어서는 안 되고 중대한 과실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우리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인물이거나. 혹은 그보다 훌륭한 인물이어야야지 그보다 열둥한 인룸이라서는 안 된다. 사실이 또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초기에 시인들은 암 스토리나 닥치는 대로 취급했으나 오늘날 가장 훌륭한 비극들은 몇몇 가문의 스토리에서 취재하고 있다. 예컨대 알크메온8)이나, 오이디푸스나, 오레스테스9)나 멜레아그로스10)나, 튀에스테스나, 텔레포스11)나 기타 무서운 일을 당했거나 저지른 인물들을 비극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보아 가장 훌륭한 비극은 이와 같은 플롯을 가진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가 그의 비극에서 이러한 원칙을 따르고, 그의 비국이 대부분 불행한 결말로 끝난다고 해서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올바른 원칙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증거로, 그러한 비극은 무대상에서 그리고 경연 때 잘하기만 하면 가장 비극적이라는 인상을 주며, 또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점에서는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12) 시인들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시인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처럼 이중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성인과 악인의 운명을 반대 방향으로 결말짓는 플롯13)의 구성을 제1위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플롯의 구성은 역시 제2위이다. 이러한 플롯의 구성이 제1위로 간주되는 것은 관중위 약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관중에 추종하여 관중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쾌감은 비극적 쾌감이 아니라 희극적 쾌감이다. 희극에 있어서는 오레스테스와 아이기스토스14)같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전해지고 있는 사람들도 종국에 가서는 친구가 되어 퇴장한고 살인자나 피살자는 산 사람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15)     1) 이 두 가지 문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플롯을 구성하고자 함은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함이고, 또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고자 함은 비극의 궁극 목적인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2) 제10장 참조 3) '이들'이란 유덕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킨다. 4) 여기서 '과실'이라고 번역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의견이 구구하다. 일부 학자들은 도덕 및 성격적인 결함을 의미하거나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또 일부 학자들은 그와 같은 도덕적인 의미 없이 단순히 판단 착오나 실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루카스(D.W, Lucas)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후자의 견해가 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이 말이 성격적인 결함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둘째. 의 이 부분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성격이 아니라 플롯이며, 또 제15장에서 성격 문제를 취급하고 있으나 어떤 결함이나 결점에 관한 언급이 없고, 셋째.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하는 을 예로 들더라도, 오이디푸스의 불행은 어떤 성격적인 결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부모를 잘못 알고 있었다는 과실에 기인하며, 넷째. 제14장에서 비극에 가장 적합하다고 추천하고 있는 상황도 오이디푸스의 그것과 같은 과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훌륭한 비극은 소수의 가문에서 취재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가문만이 비극적 과실의 공식에 맞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만약 성격적 및 도덕적 결함이 문제라면 굳이 소수의 가문에 국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14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여러 가지 플롯에서 보면 이 말은 상대방의 신분을 모르고 있다는 그런 종류의 과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5)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와 더불어 펠롭스의 아들이었다. 형제는 아버지 사후(死後) 번갈아 뮈케네를 통치하기로 약속하나 튀에스테스의 차례가 되자 아트레우스는 약속을 어기고 주권을 앙도하려 하지 않는다. 이에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의 처 아에로페를 유혹하여 주권의 상징은 황금 양 모피를 훔치다가 아트레우스에 의하여 뮈케네에서 추방된다, 아트레우스는 후일 그를 다시 불러들인 다음, 그의 자식들을 죽여 그 고기로 그를 대접한다. 튀에스테스는 이 사실을 알고 질겁하고 달아나면서 아트레우스 가(家)를 저주한다, 그는 자기 딸 펠로피아와 교합하여 아이기스토스라는 아들을 얻게 되는데, 아이기스토스는 후일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트로이아로 원정가고 없을 때 그의 처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유혹하여 그가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둘이 공모하여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후일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아이기스토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 소포클레스도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을 썼는데 단편만 남아 있다.  6) '단일한 결말'이란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고, '이중의 결말'이란 악한 자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선한 자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결말이 '단일'이냐 '이중'이냐 하는 문제는 플롯이 '단순'하냐 '복잡'하냐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7)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해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운명이 이렇게 바뀌어야만 비극의 효과를 훌륭하게 산출할 수 있다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는 제14장에서 오히려 범행 직전에 상대방이 자기 친구 또는 친척임을 발견하고는 범행을 그만두는 플롯을 가장 훌륭한 플롯이라고 칭찬하면서 의 예를 들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머리말 참조. 8) 알크메온은 암피아라오스와 에리퓔레의 아들이다. 암피아라오스는 예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테바이를 공격한 7인' 가운데 아드라스토스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출전을 거부하지만 그의 처(妻) 에리퓔레는 폴뤼네이케스의 목걸이에 매수되어 남편의 출정을 강요한다. 그래서 암피아라오스는 마지못해 떠나면서 자기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어머니를 죽일 것과, 다시 테바이를 칠 것을 아들 알크메온에게 명령한다. 그 뒤 알크메온은 아버지의 명령대로 테바이에서 전사한 7인의 아들들과 같이 테바이를 치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죽인다. 그리고 에리퀼레의 목걸이는 그 뒤에도 수많은 불행의 원인이 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작품을 쓴 시인으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가톤 등이 있다. 9) 오레스테스에 관해서는 본장 주5 참조. 10) 멜레아그로스는 칼뮈돈 왕 오이네우스와 알타이아의 아들로 그가 태어나던 날 운명의 여신들이 나타나 화덕에서 타고 있는 장작개비가 다 타고 나면 아이는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들은 어머니는 타고 있는 장작개비를 난로 속에서 끄집어내어 불을 끈 다음 조심스럽게 감추어둔다. 후일 멜레아그로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오이네우스가 아르케미스 여신에게 재물 바치기를 소홀히 하여 여신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보내 칼뮈돈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한다. 이에 멜레아그로스는 많은 영웅들을 모아 그 멧돼지를 잡게 되는데, 멧돼지의 목을 찌른 것은 그였지만 맨 먼저 부상을 입힌 것은 아칼란테라는 처녀 사냥꾼이었다. 그래서 평소부터 그녀를 연모하던 멜레아그로스는 멧돼지의 머리를 그녀에게 준다. 그러나 그의 외삼촌들이 불공평한 처사라며 이를 도로 빼앗으려 하자 그는 외삼촌들을 죽인다. 자기 오라비들이 자기 아들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알타이나는 감추어 두었던 장작개비를 불 속에 던진다. 그것이 다 타고 나자 멜레아그로스는 죽고 그녀도 자살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비극을 쓴 시인으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프뤼니코스 등이 있다.    11) 텔레포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로 뮈시아의 왕이다. 그는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로 가던 도중에 뮈시아에 상륙했을 때 아킬레우스와 싸우다가 부상당한다. 그 후 그는 부상을 입힌 자가 상처를 낫게 해 줄 것이라는 신탁에 따라 아울리스 왕으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그러나 신탁이 말한 부상을 입한 자란 아킬레우스 자신이 아니라, 그의 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슨 녹으로 상처를 고치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가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2)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결점이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a)그의 작품 에서 주인공 메데이나는 자기 자식들을 의식적으로 죽인다. 제14장 참조. b)메데이아가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에게 추방 명령을 받고 난처하게 되었을 때 선행 사건과 아무런 인과 관계도 없이 아테나이의 왕 아이게우스가 나타나 그녀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제25장 참조. c)에서 사건의 해결이 플롯 자체에 기인하지 않고 기계 장치에 의존한다. 제15장 참조. d)그의 코로스의 노래는 소포클레스의 그것에 비해 플롯과 연관성이 적다. 제18장 참조. e)그의 작품 에서 주인공 이피게네이아의 성격이 일관성이 없다. 제15장 참조. f)그의 작품 에서 플롯이 요구하지도 않는데 멜라닙페의 성격이 쓸데없이 비열하다. 제15장 참조. g)그의 작품 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멜라닙페의 성격이 여자로서는 너무 지적이다. 제15장 참조. h)그의 작품 에서 오레스테스의 신분이 플롯 자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발견되지 않고 본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밝혀진다. 제16장 참조. 13) 본장 주6 참조 14) 본장 주3 참조 15) 현존 희극에서는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5) / 천병희 옮김   제 14장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장경(場景)1)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 자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플롯은 눈으로 보지 않고 사건의 경과를 듣기만 해도 그 사건에 전율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끔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듣기만 해도 느끼게 되는 감정인 것이다. 장경에 의하여 이와 같은 효과를 산출하는 것은 비예술적이며 많은 비용이 든다. 공포를 환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기괴한 것을 보여줄 목적으로 장경을 이용하는 자들은 비극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왜냐하면 비극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쾌감을 구할 것이 아니라 비극에 고유한 쾌감만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의 쾌감은 연민과 공포에서 오는 쾌감인 바 시인은 이러한 쾌감을 모방에 의하여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사건이 무섭다는, 또는 가엾다는 인상을 주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와 같은 사건에 있어서 당사자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또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사이일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들이 서로 적대 관계에 있을 때는 피해자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그 행동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나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 점은 당사자들이 친구도 적도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비극적 사건이 친근자(親近者)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예컨대 살인이나 기타 이와 유사한 행위를 형제가 형제에게,2)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3) 혹은 어머니가 아들에게4) 혹은 아들이 어머니에게5) 행하거나 기도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아말로 시인이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따라서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오레스테스에게 피살된다든가6) 에리퀼레가 알크메온에게 피살되는7) 것과 같은 전래의 스토리는 그대로 보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전래의 소재를 올바로 취급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올바로 취급한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지 좀더 분명하게 설명해보기로 하자.  무서운 행위는 옛 시인들의 작품에서 불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행하여질 수 있다. 예컨대 에우리피데스가 메데이아로 하여금 자기 자식들을 죽이게 하는 경우가 그렇다.8)  또 자기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뒤에 나중에 가서야 친근 관계를 발견할 수도 있다.9) 예컨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의 경우가 그렇다. 여기에서는 무서운 행위가 드라마 밖에 있다. 그러나 비극 자체에 있을 수도 있다. 예컨대 아스튀마다스10)의 작품에 나오는 알크메온이나, 11) 나오는 텔레고노스의 행위가 그렇다. 제2의 가능성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고 무서운 행위를 저지르려 하다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상대방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 밖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행위는 필연적으로 실행되든지, 실행되지 않든지, 알고 하든지, 모르고 하든지, 그 중 어느 것이기 때문이다.12) 이상의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최악의 것은 알고 행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것은 불쾌감만 자아내며, 또 아무런 고통도 없기 때문에 비극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13)에서 아이몬이 크레온을 죽이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것과 같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는 그와같이 행동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은 없다. 그 다음 가는 것14)은 알고 행하려 하던 행위를 실행하는 경우다. 이보다 나은 것은 모르고 행했다가 행한 뒤에야 발견하는 경우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불쾌감을 자아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발견은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것은 마지막 경우이다. 이를테면 15)에서 메로페가 아들을 죽이려다가 아들임을 발견하고 죽이지 않는다든가, 16)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그녀의 적에게 넘겨주려다가 어머니임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18) 소수의 가문만이 비극의 소재가 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시인들이 소재를 구하다가 이러한 종류의 사건을 자신들의 플롯 속에 구현하게 된 것은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19) 그러므로 시인들은 아직도 이와 같은 무서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을 소재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플롯의 구성과 플롯이 이러한 종류의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해선 이상으로 충분히 이야기했다.     1) 제18장을 읽어 보면 극적 효과를 장면이나 분장에 의존한 작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이스퀼로스의 에 나오는 복수의 여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임부들이 유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 에서도 소의 머리를 한 이오와 오케아노스의 날개 달린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이스퀼로스만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케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1대 1로 싸우다가 둘 다 죽는다. 3) 에서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한다. 4) 알타이아는 아들 멜레아그로스를 죽인다. 제13장 주 10 참조 5) 아이스퀼로스는 과 소포클레스 및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레스테스는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6) 제13장 주5 참조 7) 제13장 주8 참조 8) 에우리피데스의 1236행 이하 참조 메데이나는 콜키스의 공주인데 황금 양 모피를 구하기 위하여 그곳을 찾아온 이아손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고국과 부모형제를 배반하고 그를 따라 그의 고국인 이올코스로 달아난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 남편을 위하여 그의 숙부 펠리아스를 죽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추방되어 코린토스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여기까지가 에우리피데스의 작 의 전제다. 그러던 어느 날 코린토스 왕 크레온이 이아손에게 메데이아와 헤어지고 자기 딸과 결혼하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원래 야심이 많은데다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이아손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메데이아의 복수가 겁이 난 크레온은 그녀와 그녀의 두 자식에게 추방 명령까지 내린다. 배은망덕한 남편의 처사에 격분한 메데이아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술과 간계(奸計)를 써서 코린토스의 공주를 죽인 다음 자기 자식들을 의식적으로 죽인다. 9) 오이디푸스는 어떤 삼거리에서 라이오스와 만나 서로 길을 비키라고 시비하다가 자기 아버지인 줄 모르고 그를 죽인다. 이 무서운 살부 행위는 비극 의 전제 부분에 속하며 비극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10) 아스튀다마스는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다작(多作)의 비극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에서 알크메온은 에리퀼레를 어머니인 줄 모르고 살해한다. 11) 텔레고노스는 오뒷세우스와 키르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를 찾아 이카케에 갔다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그를 살해한다. 이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는 는 현존하지 않으나 소포클레스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12)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대방이 누구인 알고 행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않은 제4의 가능성을 빠뜨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확실히 비극적인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3) 소포클레스의 1231행 이하 참조 오이디푸스의 아들 폴뤼네이케스는 형 또는 아우닝 에테오클레스에게서 왕위를 돌려받기 위하여 6인의 장수를 데릭 테바이로 진격했다가 에테오클레스와의 1대 1 싸움에서 둘 다 전사한다. 그러자 새로 왕이 된 크레온은 테바이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에케오클레스는 후하게 장사지내되 테바이를 치러 왔다가 죽은 폴뤼네이케스의 시체는 땅에 뭊디 말고 들에 그냥 내버려두라는 포고를 내린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혈육의 정에 끌려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들에 버려진 오라비 폴퓌네이케스의 시체를 몰래 묻어준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크레온은 그녀를 생매장 형에 처한다. 그러나 평소 그녀를 연모하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그녀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결심한다. 이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크레온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안티고네가 생매장된 곳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하이몬은 아버지를 보자 격분하여 칼을 빼들고 덤벼든다. 크레온은 놀라 도망치고 하이몬은 그 칼로 자기 가슴을 찔러 이미 목매어 죽은 안티고네의 발 아래에 쓰러진다. 14) 최악의 것 다음 가는 것, 즉 그 다음으로 나쁜 것이란 뜻이다. 15) 는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반역자 폴뤼폰테스는 멧세네 왕 크레스폰테스를 살해하고 왕비 메로페를 빼앗는다. 왕이 살해될 때 두 아들도 같이 살해되고 막내아들 아이귑토스만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조부인 아르카디아 왕 큅셀로스에게 도망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폴뤼폰테스는 이 아이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고 사방으로 수배케 한다. 많은 세월이 흘러간 뒤 이미 성인이 된 아이귑토스는 복수하기 위해서 멧세네로 돌아와 일단 적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자기는 아이큅토스를 잘 아는데 곧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한다. 이 말을 듣고 놀란 메로페는 아이귑토스에게 주의들 주기 위하여 노복(老僕) 한 명을 아르키디아로 보내는데, 그곳은 그곳대로 아이큅토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야단들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메로페는 아이귑토스를 잡아 바치겠다고 장담한 그 젊은이가 아이귑토스를 이미 죽인 것으로 단정하고 복수하기 위하여 노복을 데리고 밤에 그 젊은이의 침실로 잠입한다. 그를 죽이려고 메로페가 도끼를 쳐드는 순간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을 본 노복은 그가 바로 아이큅토스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서 그들은 힘을 모아 소기의 복수를 단행한다. 16) 제11장 주6 참조 17) 에 관해서는 작가도 작품 내용도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헬레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남편 아타마스로부터 이혼당한 네펠레는 자기 두 자녀 프릭소스와 헬레를 황금 털을 가진 날개 달린 양(羊)에 태워 콜키스로 보내는데 헬레는 도중에 바닷물에 떨어져 죽고 - 그래서 이 해협을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란 뜻)라고 부른다.  - 프릭소스는 무사히 도착한다. 이 양은 그 뒤 제우스 신에게 바쳐졌는데 이 양의 양피가 저 유명한 '황금 양 모피'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18) 제13장 참조 19) 일반적으로 경험이 이론에 앞서듯이 비극 시인들도 작시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 의하여 비극의 효과를 산출하기에 적합한 소재를 구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일 그들이 작시 이론에 의하여 작품을 썼더라면 자신들이 원하는 플롯을 무엇이나 창안해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6) / 천병희 옮김     제15장       성격에 있어서는 추구해야 할 점이 네 가지가 있다. 그 중 첫째는 성격이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1) 앞서 말했듯이2)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도를 명시할 경우 그는 성격을 가지는데 이때 의도가 선량하면 성격도 선량할 것이다. 선량한 성격은 모든 종류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자와 노예도 - 비록 전자는 열등한 존재이고 후자는 전혀 무가치한 존재이지만 - 선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격은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자도 용감할 수 있다.3) 그러나 용감하거나 똑똑한 것은 여자의 성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셋째는 작품 속에 나오는 성격이 전래의 스토리에 나오는 그 원형(原型)과 유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방금 규정한 바 있는, 성격이 선량하고 적합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넷째는 성격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일관성이 없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라면 그는 시종일관 일관성이 없어야 한다.  를롯이 요구하지도 않는 비열한 성격의 예는 4)의 메넬라오스에게나 볼 수 있고, 맞지 않고 부적합한 성격의 예는 5)나오는 오뒷세우스의 통곡과 멜라닙페6)의 변론에서 볼 수 있으며, 일관성 없는 성격의 예는 7)에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이피게네이아는 나중의 이피게네이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격에 있어서도 사건의 구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필연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의 필연적인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하며, 두 사건이 이어서 일어날 때는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도 플롯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8)나 9)에서 그리스 군의 출범이 저지당했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 장치10)에 의존해서는 안 됨이 명백하다. 기계 장치는 드라마 밖의 사건, 즉 인간이 알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이나 예언 또는 고지(告知)할 필요가 있는 미래의 사건에 한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11)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신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극 내의 사건에는 사소한 불합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가피한 경우에는 소포클레스의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비극 밖에 있어야 한다.12)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의 모방이므로 우리는 훌륭한 초상 화가들을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훌륭한 초상 화가들은 실물의 고유한 형상을 재현함에 있어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되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린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나 성미가 느린 사람이나 이와 유사한 성격상의 특징을 가진 인물로 그리되 선량한 인물로 그려야 한다. 우리는 그 예를 아가톤13)과 호메로스가 그린 아킬레우스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상과 같은 여러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밖에도 작시술에 직접 관련되는 범위 내에서의 무대 효과14)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점에 있어서도 종종 과오를 범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관해서는 이미 간행된 바 있는 저술15)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1) 비극이 소기(所期)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선량한 성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등장 인물의 말과 행동이 어떤 의도를 명시하는 경우 그는 성격을 가지게 마련이므로' 성격은 곧 의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만일 주인공이 나쁜 의도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그 결과 불행해진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황은 연민이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불쾌감만 자아낼 것이다. 그래서 제13장에서도 비극의 주인공은 악덕이나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은 원래 종교 의식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에 나오는 이아고같은 악당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엄숙한 예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제6장 참조 3) 루카스의 견해 4)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한 지 6일째 되던 날 아르고스 시민들은 모친 살해범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를 돌로 쳐 죽이기로 결정한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두 남매는 마침 트로이아 원정에서 돌아온 숙부 메넬라오스가 자신들의 행위를 변명해주리라 믿고 그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러나 가련할 정도로 비겁해진 메넬라오스가 그들의 요청을 외면한다. 5) 는 티모테오스(제1장 주2 참조)의 디튀람보스인데 이 시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의 전우들이 괴물 스퀼라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통곡한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뒷세우스 같은 영웅이 통곡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과 그러한 오뒷세우스는 우리가 전설을 통하여 알고 있는 오뒷세우스와 다르다는 점이다. 스퀼라는 멧시나 해협의 동굴에 사는 괴물인데 지나가는 선원들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호메로스는 제12권 85행 이하에서 오뒷세우스의 배가 이 해협을 통고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6) 현재 단편만이 남아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의 주인공 메라닙페는 탯살리아 왕 아이올로스의 딸로 해신(海神) 포세이돈과 교합하여 쌍둥이를 낳게 되자 이들을 외양간에 감추어두고 쇠젖을 먹여 기른다. 이 사실을 안 아이올로스가 쌍둥이를 내다버리게 하고 그녀를 감금하려 하지 그녀는 쌍둥이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라 소가 낳은 아이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교묘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 여자답지 않게 지적이란 점이다. 7) 에우리피데스의 1211행 이하 및 1306행 이하 참조. 트로이 원정군이 아울리스 항에서 순풍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아가멤논은 아르케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쏘아 죽이고 나서 여신 자신도 더 훌륭하게 쏘아 맞힐 수는 없을 것이라고 호언한다. 이에 노한 여신은 역풍을 보내 그리스 군이 출범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예언자 칼카스에게 묻자 그는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 전에는 여신의 노여움을 풀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가멤논은 중의에 따라 마지못해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는 핑계로 이피게니아를 그곳으로 데려오게 한다. 그곳에 도착하여 내막을 알게 된 이피게네이아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하다가 갑자기 심기일전하여 조국을 위하여 제물이 되기를 자원한다. 8) 에우리피데스의 1317행 참조 메데이아는 배은망덕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마술의 드레스로 먼저 자기 남편과 결혼하게 될 코린토스의 공주를 죽인 다음 이어서 자기 자식들을 죽인다. 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남편이 그녀를 잡으려고 하나 그녀는 이미 마술로 불러낸 태양신 헬리오스의 수레를 타고 공중에 떠 있다. 9)  제2권 110~206 참조, 그리스 군이 트로이아의 포위를 풀고 귀국하려 할 때 아테네의 신이 나타나 오뒷세우스를 통해서 그들의 출범을 제시한다. 10) '기계 장치'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구구하나 사람이나 신이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을 연출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기중기인 듯하다. 이이스퀼로스나 소포클레스는 기계 장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나 에우리피데스 이후부터는 많이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무대에서 사용된 기계 장치 또는 장치는 여러 종이 있는데, geranos는 아이스퀼로스가 고안해냈다고 하는 장치로 배우를 무대 위로 들어올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며, theologeion은 무대의 지붕으로 신이 등장할 때 사용되었다고 하며, ekkyklema는 집이나 신전(神殿) 내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조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에우리피데스 이후의 시인들은 사건의 해결을 플롯의 구성에 의존하지 않고 신에게 맡기는 경향이 많았다. 따라서 자연히 기계 장치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나는 신을 테우스 막스 아키나라고 부른다. 11) 예를 들면 에우리피네스의 의 첫머리에는 헤르메스 신이, 그리고 끝 부분에는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인간이 알 수 없는 일을 알려준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첫머리에도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미래사를 알려준다. 12) 제14장 주9 참조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죽음에 대하여 백방으로 조사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조사를 게을리 한다. 그리고 자기가 노상에서 죽인 노인이 라이오스가 아닐까 하고 의심조차 해보지 않은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살인 사건은 드라마가 시작되기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독자나 관객은 이 불합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13) 아가톤이 어떤 작품에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4) 장경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동작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5)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권으로 된 대화편 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7) / 천병희 옮김     제16장       발견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다.1)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말한다면 1) 맨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가장 비예술적인 것으로서 시인들이 창의(創意)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인데, 그것은 표지(標識)에 의한 발견이다. 이들 표지 가운데 일부는 '땅에서 태어난  자들이 지니고 있는 창 끝'2)이나 카르키노스3)의 4)에 나오는 '별'5)과 같이 선천적인 것이고 다른 일부는 후천적인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흉터와 같이 신체에 있는 표지이고 어떤 것은 목걸이6)이나 또는 7)에서 발견의 근거가 된 조각배처럼 외적인 것이다. 이러한 표지들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우열이 있다. 예컨대 오뒷세우스는 똑같은 흉터에 의하여 유모에게도 발견되고,8) 돼지치기에게도 발견되지만9) 그 방법이 서로 다르다. 남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지를 사용하는 발견이나 이와 유사한 발견은 모두 비예술적이다. 이에 비해 10)에서와 같이 급전의 장면에 이루어지는 발견은 훌륭하다,  2) 그 다음은 시인에 의하여 조작된 발견인데, 그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예술적이다. 예컨대 에서 오레스테스는 자기가 오레스테스임을 밝힌다. 이피게네이아는 편지에 의하여 발견되지만 오레스테스는 플롯이 아니라 시인이 요구하는 바를 스스로 말한다.11) 따라서 이것은 처음에 말한 결점과 대동소이하다. 왜냐하면 오레스테스는 어떤 표지를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2) 소포클레스의 13)에 나오는 '베틀북 소리'도 역시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3) 세 번째 것은 기억에 의한 발견인데, 그것은 무엇을 보자 지난 일이 회상되어 이로 인하여 발견되는 경우다. 예컨대 디카이오게네스14)의 에서 주인공은 초상화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또 15)에서 오뒷세우스는 키타라의 탄주를 듣고 지난 일이 생각나 눈물을 흘린다.16)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발견된다.  4) 네 번째 것은 추리에 의한 발견이다. 예컨대 17)에서 '나를 닮은 사람이 왔다 갔다, 나를 닮은 사람은 오레스테스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레스테스가 왔다갔음에 틀림없다'고 추리한다. 소피스트 폴뤼이도스가 에 관하여 제안한 것18)도 이 경우에 속한다. 왜냐하면 오레스테스가 '누이는 제물이 되었다. 나도 누이와 같이 제물이 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또 테오덱테스19)에서 '아들을 찾으로 왔다가 내가 죽는구나'라고 추리한 것이다. 에서 여인들이 어떤 장소를 보고 전에도 그곳에서 버림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자신들의 운명을 추리한 것은 모두 발견의 근거가 되었다.20)  5) 또 상대방의 오류 추리에 의한 복잡한 발견도 있다. 추리는 그 예를 21)에서 볼 수 있다. 오뒷세우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활에 대해서 자기는 그 활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활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 추리이다.  6)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소포클레스의 이나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처럼 사건 자체로부터 유발되는 발견인데, 이 경우에는 사건의 자연스런 진행에 위하여 경악이 야기된다. 왜냐하면 이피게네이아가 집으로 편지를 보내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발견만이 조작된 표지나 목걸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가는 것은 추리에 의한 발견이다.   1) 제11장 참조 2) 튀로스 왕 아게노르의 아들 카드모스는 부명(父命)에 따라 유괴 당한 누이 에우로페를 찾아나섰다가 아폴론 신의 신탁에 따라 누이 찾기를 그만두고 카드메이아(후일 테바이 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서 군신(軍神) 아레스의 용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가 아테네 여신의 지시에 따라 그 용의 이빨들을 땅에 뿌리자 땅에서 무장한 전사들이 나온다. 카드모스가 그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자, 그들은 서로 죽이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에는 5명만 남게 된다. 이 5명의 Spartoi(뿌려진 자들이란 뜻)들이 카드모스를 도와 카드메이아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후일 테바이의 귀족이 된다. 이들의 몸에는 창끝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고 한다.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크레온은 이 사마귀를 보고 아이몬과 안티고네의 자식을 알아본다. 3) 카르키노스는 기원전 4세기의 비극 시인이다. 4) 튀에스테스에 관해서는 제13장 참조 5) 탄탈로스는 신들의 전지를 시험해보기 위하여 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로 신들을 대접한다. 다른 신들은 미리 알고 먹지 않지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 때문에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여신 테메테르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어깨 부분을 먹는다. 그뒤 펠롭스는 원상복귀 되고 어깨 부분은 상아로 대치된다. 이 일이 있은 후로부터 펠롭스의 자손들은 어깨에 별 모양의 흰 반점이 있었다고 한다. 6) 현존 비극 가운데 목걸리에 의하여 발견되는 예는 에우리피데스의 에서 뿐이다. 7) 살모네우스의 딸 튀로는 해신 포세이돈과 교합하여 필리아스와 넬레우스 라는 쌍둥이을 낳게 되나 계노 시데로의 학대 때문에 쌍둥이를 조각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현재 단편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이 배를 보고 자식들을 알아본다. 8)  제19권 386~475 참조 오뒷세우스는 다년간의 유랑 끝에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에 돌아온다. 당시에는 하인을 시켜 손님의 발을 씻겨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마침 오뒷세우스의 발을 씻어주게 된 하녀는 오뒷세우스의 어릴 때의 유모였다. 유모는 그의 발을 씻다가 그가 옛날 파르낫소스 산에서 사냥하다가 멧돼지에게 부상당한 흉터를 보고 그가 주인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른바 란 의 이 부분을 말한다. 9)  제21권 205~225행 참조 오뒷세우스는 거지로 변장하고 자기 집에 머무는 동안 자기 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온갖 횡포를 부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을 죽이자면 몇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옛날부터 집에거 가축을 치던 하인들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 증거로 다리의 흉터를 보여준다. 10) 본장 주8 참조 11) 에우리피데스의 727행 이하 및 800행 이하 참조. 그리고 제11장 주6참조 12) 과 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 기준은 엄격한 감이 없지 않다. 사실 오레스케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방법은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이상 더 훌륭한 것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는 이피게네이아에게 그들의 고향집에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한다. 그런데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같은 방법은 남을 믿게 하기 위하여 표지를 제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비난하고 있다. 13) 소포클레스의 는 단편만이 남아 있는데 그 소재가 된 전설은 다음과 같다. 트라제의 왕 테레우스는 아테나이의 전설적인 왕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와 결혼하나 처제 필로멜레를 연모하게 된다. 그 뒤 그는 처제를 유혹하여 폭행한 다음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그녀의 혀를 자르고 감금한다. 그러나 필로멜레는 자신의 불행을 베로 짜서 프로크네에게 보낸다. 그래서 이 사실을 할게 딘 프로크네는 필로멜레를 찾아낸 다음 그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자기와 테레우스 사이에서 난 아들 이튀스를 죽여 그 고기로 남편을 대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테레우스가 두 자매를 죽이려 하자 제우스 신은 테레우스는 오디새가 되어 두 자매를 쫓게 하고, 필멜레는 제비가, 프로크네는 꾀꼬리가 되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게 했다. '베틀북 소리'란 직물을 짤 때 베틀의 북에서 나는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로멜라가 프로크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자신의 불행을 그려 넣은 직물을 비유해서 이른 말이다. 14) 다카이오게네스는 기원전 5세기 후반의 비극 시인인데 그의 작품 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테우크로스의 이야기에서 취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형 아이아스와 함께 그를 살라미스에서 추방한다. 그래서 그는 퀴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 살라미스를 세우고 살다가 아버지의 사후에 변장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신분이 밝혀졌다. 15) 란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 왕에게 자신의 지난 일을 이야기해주는, 의 제8권부터 제12권까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따라서 '알키노오스에게 해준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16)  제8권 521행 이하 참조 오뒷세우는 가인(歌人) 데모도코스가 자신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행한 일들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린 까닭에 신분이 밝혀진다. 17) 아이스퀼로스의 166~234행 참조 이 작품은 오레스테스가 누이 엘렉트라의 도움으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토스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향인 아르고스에 잠입한 뒤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자신의 머리털를 잘라 바친다. 이때 누이 엘렉트라가 시녀들을 데리고 제주를 바치려 오자 그는 몸을 숨긴다. 오레스테스의 머리털를 본 엘렉트라는 그것이 자기 머리털과 같은 빛깔임을 발견하고는 오레스테스가 돌아온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실제로 오레스테스가 나타나자 그녀는 자신의 추리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 18) 폴뤼이도스에 관해서는 의 다른 곳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폴뤼이돗의 제안이란 에서 오레스테스가 제물이 되려는 순간 그로 하여금 '누이는 제물이 되었다. 나도 누이와 같이 제물이 되려고 하는구나'라고 부르짖게 하면 일찍이 우울리스에서 제물이 된 적이 있는 이피게네이아는 그가 자기의 오라비임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9) 테오덱테스에 관해서는 제11장 주3 참조 20) 와 에 관해서는 달리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문맥으로 보아 이 두 경우 다 무의식 중에 큰 소리로 자신의 운명을 추리한 것이 발견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1) 도 작가와 내용을 알 수 없으나 트로이아 원정에서 귀국한 오뒷세우스가 사자(使者)로 가장하여 자기 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속이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詩學(18) / 천병희 옮김   제17장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1) 되도록이면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렇게하면 시인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모순된 점을 관과하는 일이 가장 적을 것이다. 카르키노스1)에 대한 비난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암피아라오스가  신전에서 돌아오는 장면이 문제의 장면인데2) 이 장면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무대 위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관객들은 이 사건의 모순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2) 또한 시인은 되록이면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을 실연(實演)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재능이 같은 경우에는 표현되어야 할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쪽이 더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격정과 분노는 이러한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에 의하여 가장 절실하게 그려진다. 그러므로 작시술(作詩術)은 남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이나 광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전자는 쉽사리 필요한 기분이 될 수 있고, 후자는 정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3)  3) 스토리에 관하여 말하자면, 기존의 것이든 시인 자신의 창작이든 간에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 삽화를 삽입하여 늘여야 한다. 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대체적인 윤곽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처녀가 제물로 바쳐졌다가 그녀를 제물로 바친 사람들로부터 감쪽같이 납치되어 이국(異國)으로 옮겨진다. 그곳에는 이방인들을 여신에게 제물로 자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 의식을 주관하는 여사제가 된다. 후일 여사제의 오라비가 이곳에 오게 된다. 그러나 신탁4)이 모종의 이유에서 그를 그곳에 가게 한 사실과 그가 간 목적은 플롯 밖에 있다.5) 그는 도착하자마자 체포되고 제물이 되려는 순간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그 방법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이나6) 또는 폴뤼이도스가 제안한 것처럼7) '그러니까 나도 누이처럼 제물이 될 운명이었구나'라는 있음직한 부르짖음에 의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신분을 밝힘으로써 구원받는다.  그 다음에 등장 인물들에게 적절한 이름을 붙이고 삽화를 삽입해야 한다. 이때 유의해야 할 점은 삽화들이 오레스테스가 광증으로 인하여 체포되는 삽화8)나 세정(洗淨)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삽화9)처럼 플롯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삽화가 짧으나 서사시는 삽화에 의하여 길어진다. 의 줄거리는 길지 않다. 어떤 사람이 다년간 이역(異域)에 나가 있다. 그는 늘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감시를 받고 있고 고독하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서는 아내의 구혼자들이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모의하고 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와 사진의 신분을 밝히고 적에게 덤벼든다. 그는 구원받고 적은 살해된다. 이것이 골자고 나머지는 삽화다.   1) 카르키노스에 관해서는 제16장 주3 참조 2) 암피아라오스에 관해서는 제13장 주8 참조 암피아라오스의 전설에서 취재한 카르키노스의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문맥으로 보아 카르키노스는 읽을 때 눈에 뜨지 않으나 무대 위에서는 눈에 띄는 그러한 종류와 과오를 범했던 것 같다. 3) '광기 있는 사람'이란 단순히 격정적인 사람이란 뜻인 것 같다. '쉽사리 필요한 기분이 될 수 있다'함은 작가가 감정이입의 능력을 통하여 여러 가지 역(役)에 쉽사리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정상에서 벗어난다'함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정상적인 심적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이 양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천재가 광기와 통하듯이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에우리피데스의 에 나오는 신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를 죽이지만 그 뒤부터 늘 복수의 여신들의 추격을 받는다. 복수의 여신들 중 일부는 아테네 여신의 주재 아래 아테나이의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린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고 추격을 그만두지만, 다른 일부는 계속해서 그를 추격한다. 그래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 신에게 구원을 청한다. 그래서 아폴론 신은 그에게 타우리케로 가서 그곳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女神像)을 가져오면 모든 불행으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린다. 5) '플롯 밖에 있다'함은 플롯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오레스테스는 다른 사명을 띠고도 그곳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6) 제11장 주6 참조 7) 제12장 주18 참조 8)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265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이정우 댓글:  조회:1936  추천:0  2018-02-21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 이정우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나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뛰어난 연구들을 남기기도 했다.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극복: 리좀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상은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가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들뢰즈는 책 자체도 이런 리좀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곧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기초 개념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유를 만들어나갔다. 이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며, 때문에 꼼꼼한 이해를 요한다. 이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알아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è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hétérogè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효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é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é)’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다.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dé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된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différentiation)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계(machine) ― ‘기계(機械)’는 ‘메카닉(mé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어에서의 기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ô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가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큰 기계가 배치/다양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치와 다양체  배치(agencement) ― 사물들 ―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의 ‘기계들’ ― 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고, ... 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 가 ‘배치’이다.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é) ―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뒤에서 다시 설명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 ...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야구 경기’라는 다양체).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들, ...)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론, 그것이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프랑스어 ‘multiplicité’는 ‘복수성(multiplicity)’과 ‘다양체(manifold)’로 분화시켜 번역할 수 있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는 곧 탈기관체(body without organs) 개념의 도입과 맞물린다. 다음 구절이 탈기관체 개념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는 보다 깊은 곳에서는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재현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의적]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핵심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의성, 일의성, 유비. 들뢰즈의 논의는 이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 확립되었다: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언표가 개의 존재방식, 물의 존재방식, 神의 존재방식, ...이 다 다르다는 평범한 관찰 결과를 언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표는 최상위 유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불연속성은 곧 범주들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는 다의성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들뢰즈는 범주의 사유, 즉 유와 종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달리 말해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된다. 즉 하나의 유가 유지됨으로써만 종차(種差)를 통해 대립하는 술어들이 그 유를 잔여(殘餘) 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장르, 즉 최상위 유들이 곧 범주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범주들은 ‘존재’의 하위 개념들로서 포섭되는가. 아니다. 이들은 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가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범주들은 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할 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 보다 높은 연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난항을 겪는다.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전자와 같이 일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신의 위상에 관련해 거대한 추문이 발생한다. 반면 후자처럼 다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우주의 통일성은 무너진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두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봉합한다.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다.  들뢰즈는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로 놓지 못하고(즉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의사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초월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일반적/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그래서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또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사성의 그물 안에서의 일반성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개별화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일의성의 입장이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의성의 테마는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일의적이다.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다. 달리 말해, ‘존재’라는 말에 관련해 제시된 의미들 사이에는 어떤 범주적 차이도 없다. 존재는 그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지는 것이다. 범주의 차이, 종과 유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즉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é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1)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로부터 들뢰즈가 ‘일자’의 철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디우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을 바로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univocitas’에서의 ‘uni’를 차이들을 보듬는 일자로 보는 한에서이다. 이것은 들뢰즈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을 함축한다. 이런 유의 일자의 철학은 오히려 존재의 다의성을 함축한다. 일자와 다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일자의 철학과 일의성의 철학을 혼동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오히려 일자를 제거하는 것, ‘n - 1’로 만드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의 사유로 보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일의성과 차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밖에는 없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서의” 관계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역능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때문에 철학사 연구에서 얻어낸 역능 개념과 역사 연구에서 얻어낸 배치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며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원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 多도, 라이프니츠-베르그송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일즉다(一卽多)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고’로 이어진 사물들의 ‘패치워크’이다.(‘그리고’는 단순한 외적 접속 이상의 접속의 경우들까지 포괄한다) 더구나 이 다양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변해간다. 이 다양체는 곧 ‘배치’이다. 그리고 무한한 다양체들/배치들의 그 어디에도 굵직한 선들은 그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같으면 다 같고 다르면 다 다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의 의미이다.  들뢰즈와 현대 철학  들뢰즈가 남긴 사유의 진동은 거대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의 자장(磁場)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기반한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꼬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부산남구문인협회  http://cafe.daum.net/yes56do/FH4t/298?q=
264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적 상상력[스크랩] 댓글:  조회:2047  추천:0  2018-02-20
가스통 바슐라르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활동분야  철학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 《부정(否定)의 철학》(1940)   글 올린 이 / 이충이          본문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近似的認識)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根底)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力動性) 자체를 구하는 ‘4원소(元素)’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1. 촛불의 미학     “촛불은 혼자 탄다. 불꽃은 혼자이고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이고,  또 그것은 혼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외로운 불꽃이여, 나는 홀로 있다. 불꽃은 소리를 내고, 불꽃은 투덜거린다. 불꽃은 괴로운 존재이다. ”  “산다는 것은 생성하는 것,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미래를 획득하면서 진행하는 창조의 과제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조차도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닌, ‘하나의 항구적인 이마주’, 도달해야 할 하나의 미래로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하여, 상상력과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삶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소재로 하면서 빛을 얻기 위해 항상 위를 향해 타고 있는 촛불의 불꽃과 같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들, 이리저리 찢겨지고 갈래갈래 조각난 경험들을 숙고해 보건대 내가 참으로 실존의 책상에 임하는 것은 차라리 백지 앞에서, 나의 램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 책상 위에 펼쳐진 흰 페이지 앞에서이다.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 앞을 향해서,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  노발리스가 불꽃의 수직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단장을 모두 정리해 보면, 대우주 안에서 직립하고 있는 모든 것, 수직인 모든 것은 하나의 불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動)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즉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불꽃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그의 환위명제는 다소 그 강도를 약하게 할 뿐 아주 명백하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그 자체를 구성한다. 노발리스는 이것을 역으로 이라고 쓰고 있다. 불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벌거벗은 그대로의 동물성이며 일종의 극단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식가이다. 이와 같은 아포리즘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단장(斷章)이 되고 있다는 것은 신념의 직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이 깊은 몽환 상태를 체험하여 성찰하기보다는 오히려 몽상하는 것을 통하여 증명할 수 있는 몽상의 진실이다.    각각의 생명계는 그때 특수한 불꽃의 한 타입이 된다. 메테르링크가 번역한 일부분 가운데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읽을 수 있다.  *  * 노발리스,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꽃의 배설물로 표현되어 있는 특이한 페이지를 참조할 것. 우리들은 타고 있는 존재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사이스의 사도들, 제 2권, p. 216). [동서시편]에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    2.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뿌리는 언제나 하나의 발견이다. 뿌리란 못 보는 만큼 더욱 꿈꾸게 되는 법. 실제 발견된 뿌리는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ː뿌리는 바윗덩어리이자 머릿단이고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필라멘트 같으면서도 단단한 목재가 아닌가?  3. 공간의 시학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집을 인간의 영혼에 대한 분석도구로 생각함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같은 책, 123쪽)        “때로 집은 커지고 늘어나기도 한다. 그런 집에서 살려면, 한결 더 유연한 몽상이, 한결 덜 명확히 그려진 몽상이 필요하다.”   (책 속에서, 가스통 바슐라르)              4. 몽상의 시학  5. 불의 시학의 단편들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에 관한 연구서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과학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불'에 관한 연구서로, 바슐라르 사후 26년 만인 1988년, 딸 수잔 바슐라르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보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의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불 물 공기 흙 네 가지 원소로 분류할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른바 4원소설을 펼쳤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과 마찬가지로 불의 이미지를 고찰하고 있는 책으로, 문학 상상력에 관한 바슐라르의 기나긴 연구 도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 있는 저작이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 출간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딸이자 이 책(프랑스어본)의 편집자인 수잔 바슐라르가 책머리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우선 바슐라르는 불에 관한 두 저서(『불의 정신분석』 『초의 불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존재의 양극에서 체험되는 상반된 불의 이미지, 즉 아니마의 불과 아니무스의 불을 고찰하고자 했다. 제1부에서는 아니무스의 불을, 제2부에서는 아니마의 불을 연구하려는 것이 최초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집필하는 중에 또다른 아이디어들이 생각났고 그때마다 그것을 집필 계획에 포함시켰다. 바슐라르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끝없는 몽상 덕분에 책은 점점 방대해져갔다. 수잔 바슐라르는 이런 아버지를 "영원한 학생"에 비유했다.  영원한 학생이었던 아버지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유년 시절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유년 시절을 그리워했다는 표시도, 순진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 시절의 능력, 즉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경탄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배우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에 대한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수잔 바슐라르, 「책머리에」  이런 와중에 건강이 나빠진 바슐라르는 결국 제2부를 포기하고 제1부를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피닉스에 관한 '피닉스의 시학'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불의 시학'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제쳐두고, '피닉스의 시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슐라르는 이 책 역시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딸 수잔 바슐라르가 애초에 구상한 '불의 시학' 서론과 '피닉스의 시학' 서론 그리고 '불의 시학' 제1부에 해당하는 원고를 분류·정리·편집하여 바슐라르 사후 26년이 지난 1988년 『불의 시학의 단편들』이라는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피닉스의 시학' 원고는 서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분실되었으므로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어 아쉽지만, 가스통 바슐라르가 임종 직전까지 몰두했던 불의 테마에 관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을 품은 신화적 존재들의 시적 이미지론  이 책은 서론과 '피닉스' '프로메테우스' '엠페도클레스'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슐라르는 고대 전설과 신화 속 존재들이 가진 불의 이미지에 대한 몽상에서 출발, 상승의 의지를 가진 인간존재의 정신현상을 탐구한다.  피닉스…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삶과 죽음의 변증법에서 시적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피닉스에 관한 장. 바슐라르는 유년 시절 어느 햇빛 찬란한 여름날 강가에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불새, 피닉스를 보았다. 불을 최초로 체험한 이 순간, 그는 세계관이 뒤흔들렸다고 고백한다. 이 장은 특히 피닉스가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우주적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피닉스)는 유일하다. 그는 독특하다. 그는 삶과 죽음의 마술적 순간들의 스승이며, 둥지와 장작더미의 중대한 이미지들의 기묘한 통합이다. 그는 자신의 장작더미가 불타오르는 최후의 순간에 최고의 영광에 도달한다."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주기 위해 하늘의 불을 훔친 영웅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을 주시하는 장. 바슐라르는 불의 유용성을 넘어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초인간성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 승화를 보여준다. "시적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미지들은 항상 인간의 본성을 한층 더 높여주는 정신적 행위를 가리킨다. 정신현상의 미학, 다시 말해 정신의 삶을 견고하게 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정신적 행위가 프로메테우스의 기호 아래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 에트나 산 위에서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 관한 명상. 그의 죽음은 단순히 철학사의 잡보기사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로 삶과 죽음을 숙고하고 불을 꿈꾸는 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불에 뛰어들어 죽음을 선택하는 의지의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소멸의 미학에 관한 장. "우리가 존재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철학에 대립하여, 죽음 안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철학자가 있다. 죽음 속으로 몸을 내던질 때, 엠페도클레스는 처음으로 자유롭다. 이러한 결정의 순간들은 시간의 시학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불은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꿈꾸는 사람에게, 불의 이미지는 강렬함을 전달하는 하나의 학파와도 같은 것이다.  바슐라르는 우리 존재를 불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긴장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불의 솟구침을 포착하고 불에 참여하면서 존재 자체가 불처럼 용솟음친다고 이야기한다. 바슐라르는 불의 역동성과 끝없이 상승하려는 존재의 의지를 동일하게 이해하고, 발레리, 엘리엇, 횔덜린, 니체 등 시인들의 저작들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고찰한다. 바로 여기서 몽상과 상상력이 응축된 절정의 언어미학이 탄생했다. 『불의 시학의 단편들』은 비록 완성되지 못한 저작이나, 바슐라르가 구축하고자 한 언어미학을 음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은 철학자-시인의 몽상으로 탄생한 새로운 언어와 행복하게 조우하고 높이를 향해 치닫는 몽상에 빠질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낮에서 밤, 밤에서 낮 사이, 우리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피닉스는 몇 살인가?  인생의 만년에 불사조적 망상들은 노령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은 추억을 태우며 죽는다.  그렇지만 추억을 태우면서 추억을 더욱 사랑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체험한 사랑의 영원함을  누릴 만한 자격을 얻는다"  6. 꿈꿀 권리 - 미술평론 에세이  -창조적인 화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바라보고, 드러내 준다.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목은 '모네, 샤갈, 바로끼에, 칠리다, 꼬르티, 마르쿠시스, 플로꽁을 통해 펼쳐 나가는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미술론'이다. 내가 본 부제목 가운데 단연 가장 긴 부제목이다. 부제목을 이렇게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의 작품을 통해 펼치는 바슐라르의 철학적 몽상,' 목차는 다음과 같다. 수련, 또는 여름 새벽의 놀라움 / 샤갈의 '성서(聖書) 서설 / 빛의 근원 / 원소에 자극 받은 화가 / 시몽 세갈 / 조각가 앙리 드 바로끼에 / 철(鐵)의 우주 / 어떤 물질의 몽상 / 마르쿠시스 작품에 있어서의 점과 시선 / 물질과 손 / 풍경의 역학(力學) 서설 / 알베르 플로꽁의 '끌에 관한 시론' / 환영의 성(城).  미술 작품을 놓고 펼쳐지는 바슐라르 특유의 '몽상'에 동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행히도 몽상의 레훠런스, 그러니까 미술 작품 사진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샤갈과 모네 이외의 작가 이름이 생소한 독자들도 안심할 수 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을 주제로 하는 첫 장의 시작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장의 상당 수가 사실상 아포리즘에 가깝다. 바슐라르 자신의 '의식의 흐름'을 마치 '자동 기술'해놓은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문학 작품, 예술, 신화, 종교, 철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의 분야에 걸친 바슐라르의 식견이 문장 곳곳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바슐라르의 몽상을 따라가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포인트는 그런 식견 또는 지식에 있지 않다. 표현 또는 그냥 문장에 있다. 다음은 '풍경의 역학 서설'의 한 부분. (pp.118.)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미술 작품을 보는 바슐라르의 눈은 그의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덕분에(?) 앎의 깊이가 깊지 못한 (나 같은) 독자들로서는 바슐라르의 앎을 막연하게 가늠하며 읽을 도리밖에 없다. 다행히 번역자 이가림 선생의 주석이 그러한 가늠을 돕는다. (물론 충분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원소(元素)에 자극 받은 화가'의 첫 부분. (p71.)    한편 클로드 모네는 1883년에 파리 북쪽의 마을 지베르니에 집을 빌려 정착했다. 그리고 1900년에 그 집을 사들인 뒤, 정원을 꽃밭으로 가꾸고 연못을 파 근처의 에프트강 줄기에서 물이 직접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1906년부터 그는 수련의 연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모네의 '수련'하면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대형 작품들은(파리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1916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이 시기의 모네는 개인적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소용돌이는 물론이거니와, 1911년에 두 번째 아내를 잃었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아들까지 잃었다. 더구나 모네 자신의 시력에 이상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한 모네는 오랜 친구이자 저명한 정치인인 클레망소의 물심양면의 도움과 격려로,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수련 또는 연못 풍경 연작에 착수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지베르니 저택의 정원 한쪽에 폭 12미터, 길이 20미터의 대규모 화실을 세우고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의 특징은 역시 수면에 비치는 세계와 수면 위에 떠 있는 사물(수련) 사이에 어떤 구분 또는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화폭 전체가 빛의 반영 그 자체가 된다. 경계가 없는 빛의 잔치!  최근 몇 년 사이에 미술 작품을 '알기 쉽게' 해설하는 내용의 책이 제법 자주 출간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아는 만큼 보일진대, 알면 알수록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이고, 그것도 쉽게 알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책과 함께 바로 이 책과 같은, 그러니까 깊고 내밀하며 유일무이한 사색의 자취를 담은 책도 꾸준히 출간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지.  ------------------------------------------  샤갈의 의 序說                                                              I    모든 사물에 빛과 찬란함을 투영시키는 현대의 눈, 한 화가의 눈은 이 책의 각 페이지마다에서 전설적인 역사의 어둠의 밑바닥을 바라본다. 이 살아있는 눈은 과거 속에서도 가장 위대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인 삶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바라보며, 드러내 준다. 생물들이 꿋꿋한 나무줄기와 같이 태어나 성장하고, 인간이 그대로 초인간적 존재였었던 저 확고부동한 위대한 시대를, 우리들에게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마르크 샤갈, 우주의 창조자로서 붉은색과 황토색, 짙은 청색과 엷은 청색을 배합할 줄 아는 이 화가는 낙원시대의 색깔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샤갈이 성서를 읽는다. 그러면 그의 독서는 곧바로 한줄기의 빛이 된다. 그의 화필, 그의 연필 아래서 는-자연스럽게, 아주 간단명료하게-한 권의 그림책이 되고, 한 권의 초상화집이 된다. 그리하여 여기에 인류의 가장 위대한 한 가족의 초상이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내 고독 속에서 그 '성스러운 책'에 대해 깊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 목소리가 너무 강하게 울려서 나는 언제나 선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곤 하는 것이다. 모든 선지자가 내게 있어서는 예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 이 아름다운 화집의 삽화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래된 책을 읽는다. 나는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듣는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더 명확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갈, 그 見者가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그려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샤갈은 나의 귀에 빛을 비춰 준 것이다.                                      II    형상의 창조자, 한 사람의 천재적인 화가에게 있어서, 낙원을 그리는 임무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무슨 특권일까! 아! 바라볼 줄 알고 바라보기를 좋아하는 눈에는 모든 것이 낙원인 것이다. 샤갈은 세계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알고, 특히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줄 알기 때문이다. 낙원이란 아름다운 색깔들의 세계이다. 하나의 새로운 색깔을 발명하는 것이 화가에게 있어서는 낙우너의 기쁨인 것이다! 이와같은 기쁨 속에서 화가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즉, 창조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화가마다에 자신의 낙원이 있다. 그리고 색깔을 조화시키는 것을 체득하게 된 사람은 확실히 한 세계의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낙원에 대한 모든 몽상가의 원초적 몽상에 있어서,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 모든 존재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순수하다. 모든 것은 함께 사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공중에서 헤엄치고, 날개 달린 당나귀가 새의 길동무가 되며, 우주의 청색이 모든 피조물들을 가볍게 만든다. 조금 꿈꾸어 보라. 땅 위에서 꺾여 창공 속으로 운반되어  은방울꽃에 온 몸이 향기로와, 하늘에서 그토록 잘 꿈꾼 나머지 머리 속에 한 마리 비둘기를 떠오르게 하는 초록색 당나귀처럼.    이와같이 낙원은 일종의 고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로써 표현하는 데는 숱한 詩작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샤갈의 단 한 점의 데상이 이 모든 위력을 응축시켜 버린다. 단 한 장의 그림이 끝없이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색깔이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회화야말로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낙원의 그림 앞에서 꿈꾸는 사람은 讚歌의 합창을 듣는 것이다. 형태와 색깔의 결혼식은 번식력이 강한 결합이다. 모든 존재들은 신의 손에서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고 풍부하게 화가의 화필에서 태어난다. 의 최초의 동물들은 신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어록집의 낱말들이다. 예술가는 천지창조의 추진력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예술가가 '창조한다'는 동사를 끊임없이 활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창조에 얽힌 모든 행복을 자기 것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창조하는 예술가를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기쁨인가. 왜냐하면 샤갈은 빨리 창조하기 떄문이다. 빨리 창조한다는 것은 생생하게 창조하기 위한 커다란 비결인 것이다. 생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명은 되돌아오지도 않는다. 초벌그림이란 결코 있을 수 없고, 언제나 불꽃뿐이다. 샤갈이 그리는 존재들은 모두 최초의 불꽃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정경에 있어서, 샤갈은 발랄함의 화가인 것이다. 그의 낙원은 실증나지 않는다. 새들의 비상과 더불어 무수한 눈뜸이 하늘에 울려퍼진다. 대기 전체에 날개가 돋혀 있는 것이다.   -------------------------------------------------------------    7. 불의 정신분석  8. 물과 꿈    9. 공기와 꿈  10. 물과 불  "호프만의 술은 불타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질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불이 지니고 있는 아주 남성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의 술은 낮게 가라앉게 만들며, 망각과 죽음을 가져오는 술이다. 그것은 매우 양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의 아주 여성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드커 포의 천재성은 어셔 가 저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연못 속의 잠자고 있는 물, 죽은 물에 연관되어 있다." (물과 불)  11. 불의 정신분석  12 부정의 시학  13. 순간의 시학  14. 어록  [출처]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 록색 http://cafe.daum.net/kpoetry/CU9q/114?q =  
아름답게 미친 천재, 이미지로 조합하면 見者?  - A. 랭보 퍼온 글임 0. 들어가며 아르튀르 랭보(Arthur Jean Nicolas Rimbaud·1854~1891). 짧은 37년간의 생애를 지상에 머물다간 천재. 소년의 나이에 시작해서 4년 후에 중단되는 창작활동. 나머지 생애 동안의 문학적으로 완벽한 침묵, 근동지역과 중앙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니며 다 양한 직업에 종사했던 것, 시작한 지 2년만에 원래의 출발점뿐만 아니라 이후 이루어질 문학적 전통마저 돌파해 버리고 오늘날까지도 현대시의 원조로 남아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 그 짧은 창작기간 동안의 광적인 발전 속도는 내재된 천재적 광기의 폭발이었으리. 이것이 랭보의 간략하게 뭉뚱그린 객관적 프로필이다.   랭보의 작품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핵심어는 ‘폭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正格 시구로 시작해서 탈격 자유시구로 넘어가며 거기에서 「일루미네이션」과 「지옥에서 보낸 한 철」같은 불규칙적 리듬을 가진 산문시들로 이르게 된다. 랭보의 시는 무엇보다 보들레르의 이론적인 구상들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랭보의 시는 철저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테마들은 서로 간에 간혹 막연하게 연관될 뿐, 과도할 정보로 많은 단절들을 드러낸 채 대개는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러한 시작법의 핵심은 테마와는 거의 상관없이 끓어오르는 흥분이다. 1. 방향상실 1920년 리비에르(J. Riviere)는 랭보의 시에 대해 “그의 사명은 우리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데에 있다” 라고 논평했다. 랭보의 비실재적 혼돈은 조여드는 현실로부터의 구출 시도였다. 랭보의 시들은 가혹한 타격으로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극도로 마술적인 음률을 자아내는 언어로 이루어진 만큼, 더욱 더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랭보는 때로는 초지상적인 축복 속에서 거닐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황홀경에 빠져 빛을 바라면서 저 너머의 세계로부터 도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협화적인 작품은 랭보에 대한 지극히 모순적인 평가를 초래하기도 한다. 2. 견자의 편지-공허한 초월, 비규범성의 추구, 불협화음의 리듬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 도달함’이며, 달리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자’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보들레르로부터 나온 것이며, 공허한 초월을 의미한다. 랭보는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식하여야 할 목표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비일상성, 그리고 비현실성, 전혀 다른 것 등으로 표기되기는 하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랭보의 시들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그의 시들의 현실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돌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폭발적인 욕구 자체의 방출이며, 그 결과 현실을 탈형상화시켜서 비실재적이긴 하지만 진정한 초월의 표지라고는 할 수 없는 형상들에 도달하게 된다.   랭보의 견자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편지에서 “시인은 미지의 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 자신이 환영들을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들은 그것을 직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꾼들이 나타나서 그 자신이 좌초해버린 저 지평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시인 존재는 미지의 곳으로 탈주하여 거기에서 좌절하게 되는 강력한 상상력을 무기로 세계 폭발에 참여하는 일꾼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3. 전통과의 단절 랭보의 시들은 당대와 19세기 초기의 작가들의 영향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선배들의 영향이 아닌 랭보 자신의 목소리 또한 뚜렷한 음색을 가지고 있다. 전래의 문학적 자산을 랭보는 과도하게 가열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냉각시킴으로써 완전히 다른 실체로 변형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빗대어 말하자면, 그에게는 질량 보존의 법칙이니, 원형 불변의 법칙, 만유 인력의 원리 등등의 아주 기본적인 물리학의 원칙들이 지극히 무의미한 셈이다.   랭보의 특성은 그가 읽은 작품에 가하는 강력한 변형, 그리고 전통과의 단절을 원하면서 전통에 대한 증오를 강화시키는 그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와 시대로부터의 과격한 분리가 철저하게 시행되어 과거로부터 분리라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 원인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사적인 것이다. 진정한 연속의식의 소멸, 그리고 그 대신으로 나타난 역사중의와 박물관적인 수집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과거는 19세기의 몇몇 정신적 지도자들에게 반대 방향의 힘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과거를 청산토록 했다. 그의 시구들은 고대가 희화화 되어 언급된다. 신화는 비천한 것과의 결합에 의해 고유의 품위를 상실하고 만다. 4. 현대성과 도회시 현대성에 대한 랭보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물질적인 진보와 과학적인 계몽이란 점에서는 현대성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취한다. 반면 현대성의 가혹함과 암흑성이 차갑고 어두운 시를 쓰도록 요구하는 새로운 경험을 주는 범주에 있어서만큼은 현대성을 수용한다. 이러한 역설적인 입장에서 랭보의 도회시가 생겨난다. 일를테면 「일루미네이션」 이 그 좋은 본보기 작품이다. 자극적인 상상력에 의해 창작된 형상들의 시공을 초월한 혼돈은 대도시적인 현대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 주술적으로 작용하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개념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으나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있는 직관의 표지이다. 5. 기독교 유산의 강요에 대한 저항, 「지옥에서 보낸 한철」 랭보의 시들은 기독교에의 반란을 시도하긴 하지만 결국 기독교 유산의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에서 오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랭보의 저항은 자신이 맞서고 있는 바로 그 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마는 역설적인 것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에는 그러한 자각이 표현되어 있다.   “이교도의 피가 끊어오른다, 복음은 지나가 버리고, 나는 유럽을 떠나 떠돌며, 풀을 뜯고, 사냥하며, 끓어오르는 금속처럼 독한 즙을 마시리라, 구원받은 자여.” “나는 열망으로 신을 기다리노라……. 나는 결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고통 속에서 노래했던 그런 종족에 속했을 뿐” “나는 지옥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 유산에 의한 강요를 지옥이라고 하고 있고, 그 해명할 수 없는 정신적 실존의 긴장 앞에 항복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갔던 시인은 그 미지 세계의 정체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없었고, 그 자신이 폭파시켜 버렸던 세계 앞에 침묵하면서, 내면의 죽음을 감내한다. 그에게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은 기독교 유산이었다. 기독교 유산은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다른 모든 지상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협소하게 보였다. 모든 현실과 상상 속에 불을 붙여 폭파시킴으로써 랭보는 기독교마저 찢어놓았던 것이다. 6. 인공적 자아-탈인간화 랭보의 시들에서 말을 하는 자아는 「악의 꽃」의 자아와는 달리, 작가의 인격으로 해석될 수 없다. 랭보의 자아는 앞에서 언급했던 조작적인 자기 변신, 요컨대 그의 시들의 형상 내용들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바로 상상적 문체의 산물이다. 이 자아는 어떤 가면도 쓸 수 있으며, 모든 존재 방식, 시대와 민족들로 확대될 수도 있다.   랭보는 자신의 정신적 운명을 현대성의 초개인적 상황으로부터 해석한다. “정신의 투쟁은 사나이들의 살육전처럼 잔인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더 깊이 빠져들어감으로써 더 먼 곳을 보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지만, 부드러움 속에서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몰락자가 되어야 할 시인의 운명을 옹호한다. 시인은 “이 기이한 고통이 불안정을 초래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자만심을 느껴야 한다.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그래 인간의 갈채로부터, 저속한 추구로부터 벗어나라. 그리고 날아서…….” 이것은 단순한 강령으로 그치지 않는다. 시 자체가 탈인간화 된다. 아무에게도 말을 건네지 않고 독백하면서, 청자들의 이목을 붙잡아 둘 한 마디 말도 없이, 시는 그것을 담아줄 어떠한 그릇도 존재하지 않는, 더군다나 상상적으로 구성된 자아조차도 그 주체가 없는 진술 앞에서 비켜가버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7. 극한으로의 몰입 상상의 아득한 영역으로 밀치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점차적으로 랭보 시의 주체 자리에 들어선다. ‘미지의 영역’으로 강제적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그는 보들레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늘빛 심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패배의 심연이며 아울러 “바다와 전설들이 서로 만나는 불의 샘”인 저 높은 곳에서 천사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득한 곳을 묘사하여 가까운 곳을 부각시키는 이러한 기법은 랭보의 전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식이다. 그것은 점점 더 빨라져서 때로는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이루어 지기도 한다. 흥분은 열광에 도달한다.    “나는 탑과 탑을 밧줄로, 창과 창을 화환으로, 별과 별을 황금의 사슬로 엮었다네, 그래 이제 나는 춤추노라.” 이것은 보들레르의 「일곱 늙은이들」의 마지막 시구에서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목적 없는 자들의 혼란스런 춤이다. 광막함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파괴된다. 파괴되어 흩어지는 맨 마지막 지점에 랭보의 눈물겨운 영혼이 울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상처 없는영혼이 어딘들 있으랴! 8. 취한 배 「취한 배」는 랭보의 시 중 가장 알려진 작품이다. 시 속에 나타나는 이국의 바다와 지방은 그가 가보지 않은 곳이다. 시는 그 어떠한 실제 사실들과도 연관을 맺지 않는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상상력은 드넓게 소용돌이치며 확장되는 비실재적 공간들의 열광에 찬 환영을 만들어낸다.   사건의 진행자는 한 척의 배이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명백한 사실은 사건의 경과와 동시에 시의 주체의 진행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형상 내용들에는 매우 격렬한 힘이 부여되어 있어서 배와 인간 사이의 상징적인 동일화의 전체의 운동성을 고려할 때만 가능하다.   ‘취한 배’는 유례없는 팽창 활동이다. 일시적인 머뭇거림들이 삽입되어 있긴 하지만, 그 이후에 팽창은 다시 격렬하게 진행되며, 몇군데에서는 혼돈의 폭발에 다다른다. 폭발은 문장 구성에서가 아니라 관념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념들 자체는 시연에서 시연에 걸쳐서뿐 아니라, 시행에서 시행에 걸쳐, 심지어 한 시행 안에서 요원한 것과 거친 것, 아니 거침과 요원함 위에 쌓아올리는 상상력의 홍염들이다. 9. 파괴된 현실성 그의 작품은 현실에 대한 태도와 ‘미지의 것’은 그 공허함 때문에 오히려 현실에 충격을 가하는-보들레르의 경우보다 더욱 강력한-긴장의 극이다. 현실은 그 불충분성으로 인해 공허한 초월과 대비되어 경험되기 때문에, 초월을 향한 열정은 현실성에 대한 무목적적인 파괴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파괴된 현실성은 이제 현실 전체의 불충분성과 아울러 ‘미지의 것’으로의 도달 불가능성에 대한 혼돈의 표지가 된다.   랭보 시에 나타나는 구체적 세계의 원소들에는 물과 바람이 포함된다. 이 원소들은 초기 시들에서는 통제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노호와 폭풍우, 대홍수의 무시무시한 힘이 되어 솟아오르고, 이 좌중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들은 파괴되며, “평원, 황야, 수평선은 뇌우의 붉은 옷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대상들과 사물들을 총괄해보면 그가 얼마나 불안정하게 더 넓고, 더 높고, 더 깊게 팔다리를 뻗으며,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10. 추화 추는 랭보가 그의 시구에 내포된 현실의 잔재물에 각인시킨 정신의 집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미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에는 형상에서는 아니면 언어의 가락에 있어서든 정말 ‘아름다운’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이것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추한’ 구절들과 인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와 추는 대립적인 가치들이 아니라 자극의 변이체들이다. 이들 사이의 객관적 차이는 진실과 허위의 차이처럼 제거된다. 미와 추의 밀접한 접근은 모든 요소들을 좌우하는 대비의 역동성을 산출한다. 이러한 대비의 역동성은 그러나 추 자체로부터도 산출될 수 있다. 11. 감각의 초현실성 직관 가능한 형상들은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으며, 언어에 내재한 은유의 근원적인 힘들로 인해 예전부터 시의 특권이었던 무한 자유를 넘나든다. ‘거리의 두 번 구운 과자’, ‘자신의 배위에 서 있는 왕’, ‘하늘빛의 콧물’. 이러한 형상들은 현실 자체에 존재하는 특성들을 때로는 더욱 예리하게 드러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그 기본 방향은 현실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의 역동성에 있다. 이는 형상 경계들을 혼란시키고 극단적인 것들을 강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현실성 자체를 감각적으로 자극받고 자극하는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12. 전제적 상상력 전제적 상상력은 인지하고 묘사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무제한의 창조적인 자유로서 작용한다. 자신의 내용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창출하려는 주체의 명령에 따라 현실 세계는 조각이 난다. 전제적 상상력은 공간의 질서를 전도시킨다. 예를 들면, 마차들은 하늘 위에서 달린다. 호수의 바닥에 살롱이 있고, 드높은 산정에서 대양이 출렁거린다. 철도 레일이 호텔을 통해서, 호텔 위로 달린다. 그러나 상상력은 또한  인간과 사물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도 전도시킨다.   “법무관이 그의 시계줄에 결려 있다”. 상상력은 가장 연관이 먼 것, 구체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강제로 결합시킨다. “아침 우유의 중얼거림, 지난 세기 밤의 중얼거림 때문에 죽도록 슬픔에 잠기다.”. 상상력은 실제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더 낯설게 만드는 비실재적인 색채들을 창안한다. 랭보는 불온한 세상을 이렇듯 행복을 살다 그렇게 불행하게 간 것이다. 13. 일루미네이션 제목부터가 ‘염색’과 ‘조명’을 암시하는 등 특기할 만큼 다의적이다. 작품의 내용 해석이 불가능하다. 수수께끼같은 형상들과 사건들이 지나간다. 어조는 도취와 냉혹한 단절, 단조롭게 제기되는 반복과 근거없는 말의 연결들로 교차되어 나타난다.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이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 방출의 뇌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진원지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게다가 이 시는 자아가 없는 텍스트이다. 왜냐하면 몇몇 작품에서 등장하는 자아는 견자의 편지에서 구상되었던 바의 저 인공적이고 낯선 자아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 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14. 혼효의 기법 랭보는 이제 형식 언어마저도 그의 해체적인 상상력에 부합시킨다. 그래서 그는 형식 언어를 그의 산문시와 매우 유사한 비대칭적 시구 형태로 바꾸어버린다. 이로써 랭보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보들레르를 넘어서는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은빛 그리고 구리빛 마차들 강철의 그리고 은빛의 뱃머리가 거품을 때리고, 가시덤불의 그루터기를 일으켜 세운다. 황야의 강들, 그리고 거대한 썰물의 흔적이 선회하면서 동쪽을 향하여, 숲의 기둥을 향하여, 부두의 방파제를 향하여 줄지어 지나간다. 그 모서리에 빛의 소용돌이가 부딪친다. -「바다풍경」, 전문 이 시에는 두 가지 영역이 등장한다. 바다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그러나 이 두 영역은 하나가 다른 하나 속에 뒤섞여 나타나고, 모든 일상적 구분이 제거됨으로써 서로 교차되고 잇다. 바다 풍경은 또한 동시에 육지 풍경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 이 시는 개별적인 단어군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동사들이 두 영역을 한꺼번에 지칭함으로써, 이러한 추측 가능한 발상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은유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문제는 은유가 아니라 상이한 사물들의 절대적인 동일시이다. 더 나아가서 텍스트는 바다가 아니라 거품과 썰물에 대해서, 배가 아니라 뱃머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 대신에 부분들을 지칭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었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 기법은 랭보에게서 더욱 확연하게 들어난다. 거의 언제나 사물의 부분들만을 지칭하면서 그는 파괴를 끌어들이고,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물적인 질서 전체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차분하고 간결한 짧은 시는 프랑스에서 자유시구의 결정적인 일보 전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탈현실화와 감각적 비실재성의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현대적인 혼효기법을 보여주는 첫번째 범례이다. 15. 추상시 「일루미네이션」의 전제적인 상상력은 부조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대홍수 이후」를 그 예로 들어 보자. 클로버밭의 토끼 한 마리가 거미줄을 통하여 그의 기도를 무지개에게 말한다. 마님은 피아노를 알프스 산에 세워 놓는다……. 상상력은 ‘술 던 깬 아침’에서와 같이 현란한 이미지 조작들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보들레르가 추상이라는 핵심어로 의도했던 것이다. 이 핵심어는 선과 움직임이 탈사물화한(추상적인) 직조물이 되어 형상들 위에 위치하고 잇는 랭보의 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사물들은 순수한 움직임과 기하학적인 추상으로 단순화 된다. 이 모든 것은 이미 비실재적이지만, 종결부의 절멸에 의해 그것은 더욱 더 비실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랭보는 털끝만큼의 열정도 없이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세계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의 초기시들을 낯섦으로 몰아넣었던 저항적인 탈주를 포기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낯섦 그 안에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16. 독백시 1871년 이래로 랭보의 시는 점차로 독백이 된다. 문장들은 서로 간에 더욱 밀착되고, 에피세트들은 더욱 과감하게 생략되며, 기이한 단어군들은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의 독백적인 모호함은 되는 대로 쏟아낸 배설물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따른 예술성의 산물이며, ‘미지’를 향한 채울 수 없는 열정으로 인해 기지의 것을 파헤지고 낯설게 만드는 방식만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시의 산물이다.   랭보는 후기의 한 글에서 회고하며 “나는 표현 불가능한 것을 기록했고, 소용돌이를 움켜쥐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몇 페이지 뒤에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을 덧붙인다. 서로 배치되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랭보의 모호한 시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아직 진술되지 않은 것의 모호함, 그리고 더 이상 진술할 수 없는 것의 모호함, 이 둘은 침묵의 경계선에 인접하고 있다. 천재가 천재임이 확인되기 전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17. 동역학과 언어마술 랭보 시의 긴장의 직조물은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의 에너지로부터 성립된다. 이때 음악과의 유사성은 그 음향 형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강도로 진행되는 음조, 상승과 하강의 절대운동, 집적과 방출의 교체라는 점에 있다. 여기에서부터 모호하고, 마치 허공에 말을 건네는 듯한 랭보 시의 고유한 매력이 시작된다.   그러한 동역학의 진행 방식은 산문시 「신비주의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활기찬 움직임, 그후 텍스트의 중간 지점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상승, 여기서부터는 진동하다가 정지되면서 침강하는 폭넓은 만곡선, 그러다가 앞의 문장과 분리된 ‘저 밑에서’라는 짧은 말의 만곡선을 갑작스럽게 급강하시킴으로써 종착점에 도달한다. ‘내용’이 아니라 이러한 움직임들이 시의 본질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매력이 더해지게 되는 것이다.   랭보는 ‘말의 연금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모든 자음들의 형상과 운동에 염두를 두었고, 언어에 내재된 리듬을 사용하여 조만간에 모든 의미와 연결될 수 있는 시적인 시원어를 창안하려고 생각했다.”   랭보의 마지막 작품에 들어있는 이러한 문장들은 그 어떤 극복된 단계를 암시하려고 하지만, 그가 이 마지막 작품 속에서도 언어 마술적인 창작 방식을 다양하게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시 편편들마다 그것을 소리내어 읽게 되면 모음들의 음영, 자음들 사이의 친화력이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음향 자체의 의지가 너무도 지배적이 되어서 시구나 문장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부조리하나마 그 어떤 의미만을 가지게 되는 경우에도 더욱 명백하게 입증된다. 0. 나오며 랭보의 위대함은 ‘미지의 것’ 앞에서 좌절한 고로, ‘미지의 것’에 대신하여 불러내었던 혼돈을 불가사의한 완벽의 언어로 전이시키는데 있다. 이른바 예술적 승화로 현실과의 불화를 극복한 것이다. 그는 보들레르처럼 용기 있게 미래를 예지하면서 그 자신이 천명했던 바대로, 또한 그의 세기의 운명이었던 ‘처절한 정신의 투쟁’을 수행했다.   세계와 자아를 동시에 탈형상화시키는 그의 시가 스스로를 파괴시키기 시작하는 경계에 도달했을 때, 이제 19살의 랭보는 지조 있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침묵 또한 시인 존재로서의 행위이다. 종래의 시 안에서의 극단적인 자유는 이제 시로부터의 자유가 되었다. 랭보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었던 많은 후대인들은 요컨대 침묵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배울 수도 있었을 터이다. [출처] 꽃물논술모둠 카페에서 http://www.zoglo.net/blog/update_form/jingli/347124  
262    시 창작 이론 모음 [스크랩] 댓글:  조회:3424  추천:0  2018-02-20
시 창작 이론 모음   1. 시를 쓸 때 습득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          시창작 리론 모음 A. 습득해야 할 것,  1)  시를 언어에서 출발하지 말고 '시적인 것'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황지우    2)  상상에 의한 의미의 확장조차도 기반은 '사실적 관찰'에서 출발해야한다    3) 대중성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되 건강해야 한다. 대중성이란 말로 대중에게    영합하거나 병든 미적 관념과 가치관에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4)  상투성의 탈출 - 슬픔을 슬픔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    5) 시의 서사의 은닉(이야기의 감축) - 수사적 책략으로 이야기의 결핍을 추구하는     서사양식. 이야기의 추방(생략, 압축, 절단)과 변환을 수반.    6)  시는 생략함으로써 유혹한다. 시는 정보의 과소 공급을 통해서 오히려 많은 것      을 이야기하는 언술 형식이다.    7)  '에둘러 가기'를 포기할 때, 시는 궁핍이 되고 그 존재의 광휘와 넉넉한 까다로       움을 상실한다.    8)  시는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좁게는 작품 차원에서, 넓게는 역사의 큰 문맥까      지 전체성을 지향하고 완결성을 향해 나아간다.    9)  시가 보편을 추구하면 추상에 떨어진다. 추상은 시의 지옥이다. 시가 어떤 보편      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구체성과 특수성의 힘을 통해서다.    10)  이미지의 구체성 - 몽롱하지 않음 (시의 한 방법으로서의 '애매성'은 이미지의      모호한 표현을 말함이 아니고 상상에 의한 의미의 확장 가능성을 말함이다.)    11) 시어는 추상어 보다 '구체어'를, 보편어 보다 '특수어'를 쓴다.    12)  시인의 주장은 추상적 구호 없이도 아주 절절히 한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13) 시인의 관념보다 구체를 더 지향한다.    14)  추상성 - 큰 고민 없이 어떤 '느낌'만으로 시를 채우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       다 (진정성의 결여)    15)  시는 나의 감정의 서술이 아니고 독자의 감정의 획득이다.    16) 잘된 시 좋은 시는 그것이 시인 자신의 감동에 머물지 않고 그 글을 읽는 사람     에게도 똑 같은 정서적 반응으로 자리하게 된다.    17) 시의 질을 따지는 비평적 장치들 - 시적 진술의 평면성 극복 여부, 간접 화법     의 정도와 효과, 이미지 배치법, 어사 선택의 연마도, 비유/상징 운용의 기술 수     준, 긴장/갈등의 상승적 해소와 종말    18) 시의 육체를 구성하는 세가지 == 1) 묘사와 비유로부터 발생하는 이미지 = 2)      서사의 실제적 이야기 = 3) 리듬과 어조에서 태어나는 감정 - 이은봉    19)  서정시와 음량은 늘 '아직도 작은 목소리'이다  20)  문학이 문학적 진술의 모호성이라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서 '       신비적 사유양식'을 채택하는 일과 '신비주의' 그 자체에 빠져드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다 .       - 역설적 어법을 통한 신비주의        - 은유적 신비주의    21)  아무리 아름다운 노래라도 그 노래가 이미 불리워진 노래의 변조에 지나지 않      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문학은 일차적으로 창조적 배반과 전복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22)  작가는 그것의 전범을 왜곡하고 비틀어 새로운 글쓰기의 모형을 만들어 내야       진정한 작가의 가능성을 찾게 될 것이다.    23)  '관습적 사유에 대한 반란으로서의 시'    24)  줄광대는 몸무게가 쏠리는 반대쪽으로 부채를 펼친다. - 시인의 부채는?    25)  좋은 시인은 그의 내면적 상처를 반성,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      할아는 사람이다 - 대부분 시인들은 자기의 감성적 상처를 지나치게 과장하거      나 그것을 억지로 감춤으로써, 끝내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지 못      한다    26)  나의 이야기로만 그치는 것과 나의 이야기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구      별된다.    27)  '전형화'의 문제    28)  어두운 시대, 시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상징이다. 소수인의 독점물일지라도 일      정한 긴장과 자기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문학은 암울한 시대 상황과      싸우는 유일한 부드러움이요 무기다 29)  '모더니스트'들이 사상적 빈약의 상태에서 육체의 세련미를 추구하느라 모호한      수사학적 유에 집착해 왔다면 '사실주의 자'들은 언어의 의미망에 대한 필요       이상의 집착과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에 의한 상투성에 매몰되어 왔다.    30) 시의 언어는 생리적으로 체험이나 사물의 구체를 겨냥한다.    31)  담고자하는 내용에 압도되어 언어의 힘이 과소 평가되다 보면 일종의 '스토리      텔링'이 되기 쉽다. 짜임새도 있으며 건강한 주제 의식도 살아 있는데 전체적       으로 건조하고 말과 말 사이에 탄력이 붙지 않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       선취된 관념에 구속됨    32) 서정시는 이야기 내용 또는 교설적인 측면을 가능한 한 제한해야 하는 양식이       다.    33)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수사력으로 대상이 가벼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런 은유의 세계를 버리고 되도록 평이한 표현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34) 자신이 사용하는 말에 자신의 체중이 실리고 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35) 모름지기 시란 그 핵이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있는 탓이다. 36) 민족문학의 시적 흐름이 성급한 '개념적 진술'로부터 이와 같이 완벽한 '형상화'     쪽으로 기운 것은 대단한 진화라고 불 수 있다.    37)  '80년대 민중시의 구조 중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스토리 위주'의 시적 진술이      지닌 장점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38) 자기가 겪은 체험을 그대로 시로 옮기려는 '익숙한 것'에의 유혹에서 탈피하여     체험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시작의 확보와 함께 시를 읽는 재미와 긴장을 적극     적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39)  적절한 의성, 의태어 - 정물화처럼 되버릴 가능성이 있었던 시를 동적으로 살       려 놓기도 한다.    40)  악보가 부여되지 않은 언어는 또 그것 나름의 울림을 갖는다 - 음악성 고려.    41)  서정적 주인공의 등장과 감춤.    42)  어떤 서정적 주인공을 등장시킬 것인가를 고려.   43)  민영의 초기 시 - 말을 아끼며 체험적인 이미지를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절제      되고 압축된 생략적 구도의 행간에 여백의 공간 또는 침묵의 공간이 펼쳐져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단시에서 볼 수 있는 호홉의 짧음과 이차원적      구도의 평면성에 의해 어떤 감상주의적 한계가 지적될 수있다.      (압축된 복합성이 없는 단순성의 경계)    44)  '시대와의 불화'는 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독자와의 불화'는 시인의      창조적 노력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    45)  이즈음 젊은 시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현학성와 난해취미 그리고 요설이나     수다스러움이 없어서 좋다.    46)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      서 이슬처럼 맑은 울림, 참된 시는 날카로운 외침이 아니라 그 누구도 거부할      수없는'둥근소리'여야 한다. 길고 긴 여운을 지닌 소리여야 한다.-박노해   47)  형상과 의미 혹은 상상력과 논리 사이의 끊임없는 존재론적 긴장감    48) '도구적 접근'으로 부터 '미학적 접근'으로    49) 문학이라는게 '상처보여주기'를 그 근본 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0) 대칭 또는 역설적인 삶을 받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시 또한 대칭적이거나 역설적      이다. 51) 습작 시절에는 '무엇을 하는가'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52)  에 대한 도식의 위혐 : 전형에서의 해방이 곧 인간 해방의 다의성으로       이어지는 데는 훨씬 더 민중적인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 고은의 '만인보'    53)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실험' '해체' 따위의 꼬리표를 달고 나타나는 형식      파괴의 작업이 얼마만큼 독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라기 보      다는, 그 작업이 얼마만큼 작가의 진정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혹시 겉멋부림은      아닌가라는 의문이다.    54) (그리고) 다음엔 그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삶이 우리의 현실 속의 삶      과 어떠한 관계를맺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55) '낮설게 하기'라는 문학적 기법은 이상의 이유들로 해서 문학사적 보편성을 획     득하고 있는데,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끎으로서     인간과 세계와의 발전적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다.    56)  시인은 참말로 '최초로 생각하고 최초로 보고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57)  신인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쉽게 떠오른 생각이나 글자들을 지워 버리는 것      이다. 그들은 백지 위를 너무 쉽게 달려간다.    58)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      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히 봉사를 해야 한다.  58)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59) 시란 말하고싶은 것을 다 말하지 않는 데에서, 즉 '말과 침묵 사이'에서 균형     된 어떤 탱탱한 긴장을 받기 때문이다.    60)  는, 그러나 일상의 표피적 묘사와 도시적 소품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는 '우리 시대의 위기 구조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언제나 동반돼야 한다. - 아니다 때로는 '일상에서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      한 아름다움'이 시인에 의해서 발견되고 노래될 때도 그 시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61)  시가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반성적 사유'를 자극한      다는 것이다.    62)  좋은 시인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표현할 때 조차도 심미적 거      리를 유지하며, 대상이 존재 의의를 보다 명징하게 간파하여 절제된 묘사에      이르도록 한다. 63) 시인은 언어의 도취를 위해 시를 쓰지 않고 그 언어의 도취를 깨우기 위해 시     를 쓴다. 그래서, 타락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탱하     는 타락한 언어에 대한 싸움이다. (관념화된 언어와의 싸움)    64)  문제는 경험을 어떻게 사실에 부합되게 재현하는가가 아니라, 진실로 그 경험      이 무엇인가에 대한 시적 해명이며, 그 경험의 세계를 존재의 밝음 속으로 이      끌어오는 것이다.    65)  풍자는 독자의 의식을 충격하며 그 이데올로기적 미망을 깨고 현실에 대한 재     인식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청자(聽者) 중심적인 문학적 계몽주의의 변종이다.    66)  (끊임없이 경계에 위치하며 그 경계를 지워 나가는 운동) - 이러한 운동이 그     의 시를 '도취적 내면적 담론'에 머물지 않게하며, 그의 시들을 살아있게 한다.    67)  모든 시적 언어는 논리적 언어로 요약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시적 언     어가 된다. 68) 시라는 장르가 초월의 형식이라는 미학적 명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초월은     대지의 삶에 대한 관심과 결코 불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의 구조와 지리학     에 대한 관심을 절연한 초월은 소박한 낭만주의 충동을 넘어서지 못한다.    69) 시는 부정을 목표로 하는 부정이 아니라,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70)  (시인의 태도) 부정적 사유의 힘은, 그 쉬지 않는 운동의 에너르기와 자기 갱      신에 의해서 유지된다.    71)  시는 현실의 변화를 예감할 뿐만 아니라 그 변화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 변화      의 의미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문학 형식이다.    72) 시에 있어서 미적 구조의 진정한 성취는 시적 언어의 육화(肉化)를 얻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보기 시의 경우) 시 언어의 현실감의 증대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태도가 '직설적이고 과잉된 수식어를      통해 개진됨'으로써 그 정서적 역동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73)  시에서 삶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궁극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어휘를 통해서가 아니라 시 언어의 형태적, 통사적 구조를 통해서이다.     '준엄한 정의'를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정서적인 충격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일인 것이다.    74)  경험 자체는 시가 아니며 종교적, 철학적 통찰 역시 그 자체로는 시가 아니     다. 시의 의미의 층위들은 그러한 세계관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의 만남을 계기로 화학적으로 침전된다. 시인은 흩어진 경험의 조각 가운데 선    택적으로, 어떤 것을 독특하고 중요한 것으로 부각시킨다. 경험은 정밀하게 관찰    되고 현재화된다. 시는 일상적인 경험의 변역이 아니라, 경험의 의미를 실현하는    움직임이다. 시인은 그 '경험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경험의 진    정한 주체가 된다.    75)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인      것이다.    76)  (자본주의적 모순 하에서) 시인들에게는 두 가지 싸움 방식이 부여되어 있다.    하나는 화려한 자본주의적 이미지들 안에 은폐된 추악하고 어두운 죽음의 이미    지를 투시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것인데, 이것은 행복의 신화를 깨뜨리는    대항 이미지의 창출이라고 할 만하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적 언어 양식들의    어법과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면서, 그것들의 비꼼을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77) 페러디란 무엇인가? 모든 글쓰기는 모방의 글쓰기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낯선     것이 되려는 글쓰기이다. 글쓰기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페러디의 욕망이기도 하   다. 문학 행위는 현실에 대한 일차원적 반영의 행위가 아니라. 앞선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모방과 베끼기의 행위이면서, 그 모방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점   유하려는 행위이다.    78)  (80년대에 대한 90년대의 문학의 변화) 그것은 객관적 인식에 대한 주관적 인     식의 우위, 웅변에 대한 독백의 우위, 집단적 전범에 대한 개인적인 개성의 우     위, 모방론에 대한 표현론의 우위, 당위적 진리에 대한 일상적 진실의 우위, 재     현적 진실에 대한 시적 탐구의 우위 등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을 뿐이다.    79)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직접적이고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을 때 효과성      을 띤다.    80)  형용사나 부사어가 한 행에서 반복되면 천박한 느낌을 준다.    82)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 작품은 필경 삶을 어떤 수준에서 새롭게 해주는 품격을     지향해야 하며, 모든 문체와 기법은 이를 위해 은밀한 봉사를 해야 한다.    83) 시를 짓는 사람은 언제나 개념과 감각의 상투형을 파괴하려고 대담하게 모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84)  서사와 서정의 개념은 헤겔이 정의한 대로, 자기 노출의 주관성의 표현이 서      정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세상의 객관성을 움켜잡으려는 충동에서 서사가 나      온다고 말할 수 있다.    85)  시인에게 있어 세상은 맑고 투명한 감각으로 그 미세한 생명의 숨소리조차 놓      치지 않고 품어 안아야 할 삶의 현장이지, 싸움의 대상은 결코 아니다.    86) 삼라만상을 시인 자신의 주관성 표출의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그것들의 빛나     는 개별성을 그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87)  시는 그 의식을 녹이고 삭여 예술성 짙게 형상화되어야지 생경한 구호 나열의      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88)  시의 '어조'는 작품의 외적인 경험 현실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부과된 장식이 아니라, 바로 세계와 교섭하는 방식 그 자체       인 것이다.    89)  유행에 편승하여 임시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유희정신'을 버리고 인      간 존재와 삶에대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오랫동안 속으로 묵혀서 오래 남는 시      를 쓸 수 있는 시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90) 요즈음 우리 시 일부에 유행하는 장광설, 비틀림, 무잡함에 일격을 가해 신선     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91)  그의 시에 특징적인 것은 그 어느 경우에나 시인 개인의 사적 주석 또는 감상      적 개인에 의해 사물과 인생 그것의 본래적 역동성이 훼손되는 것을 시인이      극력 피하고 있다.    92) 산문적 인식과 시적 인식의 차이 또는 산문적 표현 방식과 시적 표현 방식의       차이    93)  시가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최대의 이윤'이      아닌 '최고의 가치'와 '최고의 신실'을 추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94)  도식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 요즘 우리 시단에서 너 나할것 없이 발표하      는 소위 생태시를 보고 있자면 지난 시대에 민중시가 보여줬던 단순성과 도식      성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저버릴 수가 없다.    95) 시인들이여 좀더 복잡해지기를, 시인들이여 인간은 물론 이 세계가 얼마나 다     층적이고 잡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인식하기를, 시인들이여 그 유행 휘하에서     과감히 벗어나기를, 시인들이여 노래하는 대상이 추상적 존재가 되거나 도그마    가 되지 않기를...    96)  이번에 출간된 ooo의 시집을 보며 그가 왜 이렇게 바깥으로만 격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차분하게 내면화시키거나 좀더 입체적으로 바     라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  무엇보다도 시가 난해하지 않고 문장의 수식이 절제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작     품을 대할 수 있다. 너무 언어가 화려해지고, 절실성보다 파격성에 매달리는     이 시대의 문화적 혹은 문학적 풍토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시는 조금 진부한      듯하나 오히려 그것이 돋보인다.    98)  그러나 나는 그가 좀 더 말을 아끼며 조용하게 그의 시세계를 다듬어 나갔으      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99)  친숙함은 인식의 장애다.    100)  다시 말해서 두드러지게 노골적인 야유나 풍자를 통한 비관, 폭로속에 진정      한 전복적인 힘이 '깃들어' 있으려면 그 작품의 시적 진정성, 슬픔과도 같은      큰 긍정이 그것을 깊은 데로부터 지탱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      으면 그것은 천박한 욕설에 불과)    101)  '쉬운시'란 지시적이고 관습적인 전달성의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쉬운시란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표현의 묘'를 지니고 우리에      게 다가온 '감동'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102)  시의 공화국 안에서 시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철학적 언사에      대한 강의를 쫓아다니는 자들, 제도권과의 유희를 벌이는 자들, 시 속에 종교      적 언사를 흩뿌리는 자들, 시가 궁극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자들,      무엇 무엇이 시적 전통이라고 외치는 자들은 모두 자기 죽음을 지키려는 자들      이다. 시 공화국은 오직 '구체적 외부'만을 가질 뿐이다.    103) 진부한 일상성에 발목이 잡혀있는 의사시는 버리자 - 인식이 없는 이런 시들      은 요즘 우리의 시정신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104)  즐거리의 최소한 합리성의 참견을 물리치기 힘든 소설과는 달리, 시는 그 자       체로 완결되어 있는 비합리적 총체성을 오롯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5)  창작 주체의 최대의 적은 보편성에 머무는 것이다.    106)  시인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강하게 진술.    107)  아이러니의 제공 원인은 객관적 상황일 것. 독자가 미처 몰랐던 아이러니를       깨달을 것, 아이러니의 개인성은 공감을 얻지 못한다.    108)  대상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투적인 선입주를 버려야      한다. 상투적 선입주는 언제나 어제 본 그대로, 더구나 남들이 승인하는 그대      로만 보기 때문에 다수의 동의를 얻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날카롭고      창조적인 눈을 봉쇄하고 사물을 획일화 된 무덤속에 가두게 된다. 대상을 옳      게 표 현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109)  누보 로망은 이전 소설들이 기초하고 잇던 사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켰      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사실주의는 하나의 작품을 하나의 근거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는 미지라는 현실에 동의하며 불안한 세계를 보     여주는 것이다.--- 누보 로망은 세계와 인간의 충돌을 작품 안에서 처리한다.    사실주의는 주인공의 어려움과 갈등을 논리적으로 작품 내에서 설명한다. 하지    만 누보 로망은 책 자체가 설명이다. 누보 로망은 편안한 문학이 아니고 불편하    게 만드는 문학이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다. 사실주의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화    해 불가능한 것으로 그린다. 누보 로망은 그것을 함께 보여준다. 이런 충돌이 우    리가 쓰는 작품내에서 일어난다. 충돌이야말로 우리 일상이다. 언제나 두 가지    양극의 욕구가 충돌하고 있다. --- 누보 로망을 읽으면 독자는 능동적으로 깨    어 있다. 책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작    품이 주던 안정성, 사실성은 현대 문학에서 사라진다. 하나의 작품은 여러 가지    불가능한 요소들이 충돌하는 불안정한 장이라는 충돌을 받는다.    (알랭 로브 - 그리에)    110)  노자는 말했다. 사람들은 진흙을 빚어 꽃항아리를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쓰     이는 부분은 꽃항아리 속의 비어있는 부분이다. -- 정작 중요한 것은 비어있     는 부분일 터인데 능청이 지나쳐 여행담이 너무 수다스럽거나 여행자가 얻은    각종 지식과 풍물들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아 무거워지는 대목들은 최근 우리    문학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취약점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비어있는 부    분이 핵심이라지만 항아리의 모양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야 상품(上品)이다    111)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호악    (好惡)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優劣)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가(詩歌)    언어(言語)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 은 한 때 대학가   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놀이   터이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속세무민의 연금술   사에 자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는 없다     B.  글을 쓸 때 피해야 할 것    1)  관념의 덩어리를 날것 그대로 내뱉는 조야함의 탈피 2) 기교주의, 거친 일상적 내용, 짙은 현실주의 (위의 것들은 시의 감동을 줄인다)  3) 간접적이고 상징적이고 때로는 비틀어지고 알쏭달쏭한 표현만이 시라는 관념은          세기말적인 것에 불과하다. 4)  진부한 이미지의 오용 4)  삶에 대한 해석이 없다. 모든 것들은 단편적인 풍경이며 시인의 몇몇 나날들이     조합된 꼴라주일 뿐이다. 5)  시가 시적 자아의 삶에 기호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     고 공적언술로 이전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개인적 감상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는 작품. 6)  젊음의 고뇟길에서도 늘 거울앞에 서서 자신만을 응시하더니, 그 고뇟길에서     돌아온 나이에도 여전히 거울 앞에 앉아서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며 자기 얘기    만을 써내는 그런 시인들이 의외로 많다.   7) 비유와 상징의 상투성 또한 시인에게는 치명적이다. 잘못된 비유와 상징은 예상    치 못했던 '사막의 집'을 만들기 때문이다.  8)  메시지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상투적인 산문성. 9)  저마다 자신의 개별적인 느낌들을 누가 무어라고 하건 말건 마구 써대는 시    10)  이 시인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이 시대의 일반적인 모호함이다. 그러고 그 모    호함은 자기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좀 더 깊은 타자들과의 관    계라는 객관적 심연 속에서 우려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 (-등)의 비유가 작품의 의도를 직접 노출함으로써 시적 암시력을 잃고 말았다. 11)  사상과 실천의 심화과정 없이 주관적으로 머릿속의 관념만으로 씌어지는 것이     문학일 수 없다.  12)  지당한 사유를 반복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지루함. 13) 주제상의 육중함에 비해 그것을 지탱하는 형상적풍요가 모자라게 느껴지는경  14) 이슬방울 맺힌 청청한 풀잎의 그 식물적 생명성은 간 데 없고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어쩌고 하는 비유의 뻣뻣한 잔해만 남아 공연히 폼을 잡는다.    15) '관습적 사유'로 인해 엄청난 감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을 감동 없이 써내는 것     도 문학에서는 유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6)  갈등의 드라마가 없으면 단순성을 면치 못한다  17)  그것은 막연하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시 이전의 어떤 감정일 뿐이다. 다시금      삶의 구체적인 지형도 속에서 그 한 단면의 구체적인 드라마와 연결되어서 이      쪽 저쪽으로 뻗어나가는 긴 이야기의 한 단편으로 정확하게 그것은 자리 잡아       야 한다.  18)  아마추어 시들이 실패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꾸 설명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독자들의 인식 단계를 무시한 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과      비유의 세계를 구축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19)  죽은 관용구를 시적 변형없이 그대로 나열하는 나태.   20) '상상력'이라는 부분을 핑계삼아 문맥의 부정확을 방기하는 것은 초보의 단계      에 그쳐야 한다.  21)  언제부터인가 감각적인 낱말의 무분별한 나열이 시의 재치 같은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재치가 일방적으로 해롭다는 뜻이 아     니라, 깊이 있는 통찰력과 분명한 관점으로 탄탄한 구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     태에서의 언어감각은 한대의 패션으로 끝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22)  근시안적인 시인의 기능주의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23) 거기에는 생활의 객관적인 인식이 배제되어 있고 시를 쓰는 사람의 막연한 정      서적 체험이 모호한 관념적인 언어를 통하여 나타나 있을 뿐이다.     2.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표현  어떤 시들을 보면 시가 막연하고 모호해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는 시로서 이미 실패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시어들이 구체적 표현을 하지 못하고 아주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은 시란 어떤 대상이든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는 명제로 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암시해야 합니다. 시는 더구나 주관성이 강하기때문에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면 누구의 감동도 끌어낼 수 없다. 자기 혼자만이 아는 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정주는 (저는 서정주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땄습니다.  그래서 인용할 때 서정주님을 많이 합니다.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한 언어조직으로 짜내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실감한 대로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상상시킬까?'하는 것이다. 상상을 시키지 않고서는 우리가 실감한 어떤 시의 감동도 독자에게 전할 길이 없다.  시인이 가령 어떤 의젓한 남자를 보고 감동했다고 하자 그 의젓함으로  '기가 막히게 세계 제일로 씩씩하고 늠름하고, 엄숙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어쩌고 추상적으로 설명해 봤자, 독자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상상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구약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의젓하고 씩씩한 남자의 코를 표현하길,  '다마스커스로 향한 레바논의 수루(戍樓)와 같이....'라고 쓴다면  '아, 그래 적의 땅 다마스커스를 향해서 용감히 우뚝 솟아 있는 레바논의 수로 같이 용감한 느낌을 주는 오똑 솟은 코로구나'  하고 그 느낌을 주니, 어떤 모양임을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는 늘 독자에게 작자의 실감을 상상시킬 수 있는-' 어떻게 생겼는가?'하는 궁금증에 대답하는  구체적인 영상의 조직을 보족하는 것들로만 쓰여져야 한다.  추상이란 원래가 어디에서나 구상을 보족하기 위해서 쓰여져 온 것이다.  시에 있어서도 그 임무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상관념을 주로 해서 시라고 써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끔 보지만, 이 것은 나무 없는 그늘을 말하려는 어리석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말 그대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천사를 그리려다 짐승을 그린다'는 우는 범하지 않아야겠지요.  시를 쓸 때도 추상어나 일반어보다는 구상어와 특수어를 써서 구체적인 표현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곽재구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해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 연분홍 사랑 좀 봐.  어때요? 우리가 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단어들로만 구성되었지요?  이 시를 두고 조태일님은 "위에 인용된 시의 언어들을 살펴보면 우리들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상어들이 대부분이다.  물살, 발가락, 고사리순, 머리카락, 허벅지, 산, 눈물들은 이미 경험에 의해서 친밀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머리로 생각하기 앞서 우리들의 가슴으로, 몸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정호승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실까요?  부활절날 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사람의 발 보다  개미의 발을 씻긴다  연탄재가 버려진  달빛 아래 저 골목길  개미가 걸어간 길이  사람이 걸어간 길보다  더 아름답다.  시를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려면 묘사를 잘 해야합니다.  즉 시적 대상을 그림을 그리듯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세밀한 부분들을 잘 그려냄으로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제가 볼 때는 여기서 개미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근로자들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달동네 풍경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이어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물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어떤 사람들은 무덤 속의 어머니를 뜻한다고 하나, 저는 대지(大地)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의견이 맞던지 어머니의 무덤이나 땅으로 어머니를 대치해놓고 보면 참 구체적인 언어로 그림을 그리듯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비 오는 숲 속을 생각해보십시오.하나 하나 그 장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집이 생각나는 최하림님의 을 읽어 보자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3.  대상에 대한 표현 - 표현은 정확하게 1 * 표현은 정확하게  먼저 고려시대 쌍벽을 이루던 두 문장가 김부식과 정지 상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알기 쉽게 풀어놓은 시와 한자음을 달아놓습니다.  하루는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가 좋아서 이 구절을 내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이 거절했습니다,  그 후 김부식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시인 즉,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하루는 김부식이 봄이 되어 그 봄을 맞는 시를 지었습니다.  "버들빛 천 줄기 푸르고 柳色千絲綠(류색천사록)  복숭아꽃 만 점 붉구나." 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참 멋있는 시이지요?  그런데 느닺없이 정지상의 귀신이 나와서 김 부식의 뺨을 때리면서 "버들의 천줄기 누가 세어 보았으며,  복숭아꽃 만 점을 누가 헤아려보았느냐" 하면서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 柳色絲絲綠(류색사사록)  점점이 복숭아꽃 붉다."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 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두 시가 다 내용이 같을 뿐만 아니라 단 한 글자씩만 바꾸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만큼 시를 쓰는 글자에 중요성입니다.  시어를 쓸 때는 그만큼 표현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적당히 그냥 생각나는 말로 써버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시어를 고를 때부터 지극 정성을 드리라는 말이겠지요.  좀 설명이 길지만 이 두 표현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깁니다.  "정지상이 김부식의 따귀를 때리며 고쳐 쓴 "줄줄이 버드나무 푸르고/점점이 복숭아꽃 붉다"는 구절은  내용 면에서 김부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시는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언어표현이 아니며, 어떤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언어표현도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 시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지맘 가슴에 파고드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김부식이 표현한 '천 줄기'와 '만 점'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것을 언어로 가시화하는 시인의 태도가 안일하고 형식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푸르른 버드나무와 붉은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리뭉실 '천 줄기'와 '만 점'이라는 언어를 선택했지만  이 언어들에는 필연성, 즉 꼭 그 언어이어야만 하는 유일성이 없다.  즉 시인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적당하게 이 언어들을 씀으로써 시어의 생명인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쓴 '줄줄이'와 '점점이'는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버드나무와 복숭아꽃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살려내고 있다.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무성하게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한번 상상해 보라.  '천 줄기'라는 언어보다 '줄줄이'라는 의태어가 훨씬 더 생동감 있게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할 것이다.  또한 '줄줄이' '점점이'라는 의태어가 빚어내는 음악적인 효과까지 함께 곁들여져 버드나무의 무성한  푸르름과 복숭아꽃의 붉은 빛이 더욱 깊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비교해 볼 때, 정지상이 선택한 언어들이 대상을 표현하고 그것들을 살려내는데 성공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시어들이 빚어 낸 정확한 표현 때문인 것이다."  여러분께서 조태일의 말 그대로 생동감이 무성한 푸르름이나 붉은 꽃의 색깔이 더욱 깊고 황홀한 것까지  느껴지는가는 모르겠습니다. 또 꼭 그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어의 선택이 정확해야한다는 그의 의견만은 너무도 확실한 이야기이어서 길어도 옮겨보았습니다.     4.  대상에 대한 표현 - 표현이 정확한 시 몇 편  서정주님의 을 감상해 봅시다  좀 어려운 시인 것 같아도 시를 다루는 문학평론가라면 다 한 번씩은 다루었다 할 정도로 유명한 시이며  서정주가 23세 때 쓴 시인 것을 알면서 읽기 바랍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이며 나는 왔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어가 아닌 일상적 언어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심하여 시어로 사용하였기에 그 정확한 표현은 감동과 함께 시를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현들을 빼고 다른 언어로 대치하면 바로 시의 감동이 사라져버리는 독창적 언어체계입니다.  (팔할, 죄인, 천치, 혓바닥, 수캐 등은 이렇게 시 밖에서 볼 때는 일상에서나 흔히 쓰는 언어임을 그냥 알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시 김현승님의 를 올립니다.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시기 위해서 시의 부분을 싣지 않고 전문을 실으니 강의가  그 때문에 좀 길어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은 모르나,  플라타나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나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나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 하는 어느 날.  플라타나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참고로 위의 시에 나타나는 플라타나스의 모습은 그냥 단순한 나무의 차원이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었음을 인식하시고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 시 한 편 더 읽겠습니다.  이제무님의 입니다.  아들아 무덤은 왜 둥그런지 아느냐  무덤 둘레에 핀 꽃들  밤에 피는 무덤 위 달꽃이  오래된 약속인 양 둥그렇게  웃고 있는지 아느냐 넌  둥그런 웃음 방싯방싯 아가야  마을에서 직선으로 달려오는 길들도  이 곳에 이르러서는 한결  유순해지는 것을 보아라  둥그런 무덤 안에 한나절쯤 갇혀  생의 겸허한 페이지를 읽고  우리는 저 직선의 마을 길  삐뚤삐뚤 걸어가자꾸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날카롭게 달려오다가 논둑 냉이꽃  치마폭에 폭 빠지는 것 보며  *시인은 죽음과 슬픔 등 여러가지 어두운 무덤에서 어두운 시의 씨앗을 얻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봉분, 밤에 떠오르는 보름달, 산을 오르는 꼬부랑 길 등 곡선의 부드러움.  포용, 원만함, 겸허한 마음 등을 깨닫고 직선의 마을 길과 대비시키며 그의 시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5.  대상에 대한 표현 - 낯설게하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여러가지 문예비평이론 중에서 "낯설게하기"이론을 윤석산 교수님의 글을 옮깁니다.  문예비평이론은 너무 어려워서 외울 필요는 없구요.  그냥 한 번 읽어보시기만 하시고 필요하신 분은 잘 기록해두시기 바랍니다.  [낯설게 만들기와 이미지 및 은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초기에 시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차츰 시선을 산문 쪽으로 옮기면서 문학의 일반적 특성에 관심을 둔다.  슈클로프스키는 [기법으로서의 예술](1917)에서 시의 모든 요소와 기법은 시인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독자의 습관적 수용에 충격을 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서  '낯설게 만들기(defamiliarization)' 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 전달을 위주로 하는 산문에서 은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인 반면에 시에서는  미적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 목적 이라면서 와  를 구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시의 운율도 실상 무미건조한 생활 언어의 억양을 일그러뜨려  습관화된 청각을 자극하는 수단이라면서, 시를 비롯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새로운 인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semantic shift)'이 근본적인 목적이며 존재 이유라는 견해를 편다.  그의 이런 관점은, 예술은 우리가 모르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실을 알기 쉽게 해준다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또는 낯선 정신 세계를 단번에 도달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정신의 경제적 전략임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으로서,  '낯익음', '친숙성'은 '자동화(automatization)'로 이어져 탈언어화(脫言語化) 다시 말해 기호화(記號化)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그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테크닉은 사물을 '낯설게'하고, 형태를 어렵게 하며,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증대시킨다.  지각 과정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심미적 목적이며, 따라서 되도록 연장 시켜야 한다.  예술이란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슈클로프스키는 이 기법이 실험적인 작가들의 유희가 아니라 문학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원칙임을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예로 든다.  그는 {전쟁과 평화} 에서 오페라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무대장치를 '페인트칠한 마분지 조각들'로 묘사하고,  {부활}의 미사 장면에서 성병(聖餠)을 '조그만 빵 조각'이라고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한 걸 지적한다.  그리고, ≪홀스토머≫(Xolstomer, 말이 화자인 일인칭 화법으로 씌어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에서  말의 주인과 그 친구들의 변덕과 위선을 말(馬)의 시각에서 보고 이야기함으로서,  인간의 위선성을 새롭게 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바흐친은 '톨스토이는 낯설게 된 사물에 넋을 잃지 않았다'면서,  '사물을 낯설게 만든 것은 사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사물을 끊어 정말로 필요한 것-어떤 도덕적 가치-을 훨씬 더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해'라고 비판한다.  다시 말해, 돌을 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낯설게 된 사물을 배경으로 삼아  도덕적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가 이런 비판을 한 것은 슈클로프스키는 사물의 새로운 지각만 강조하고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이데올로기를 제거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야콥슨도 회화를 예로 들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편다.  그는 그림 같은 시각 예술에서 사실감의 표현은 상당히 자연스럽고 용이한 것으로 생각하나,  삼차의 실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으로서, 인위적 방법을 채택하며,  그 그림의 박진성은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관습적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관습적 방식이 계속되면, 마침내 '추상화'가 되고,  한문과 같은 '표의문자'로 바뀌어 핍진성(verisimilitude)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시 이그려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의 왜곡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강하게 지각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야콥슨이 내린 시적 자질(poetic quality)에 대한 정의는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 만들기와 거의 유사하다.  그는 시가 를 깨뜨림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건강을 강화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가 있다면, 슈클로프스키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 관계를 논의한 반면에,  야콥슨은 와 간의 관계로 설명하여,  현실에 대한 독자의 태도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사는 언제나 '사실' 또는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전시대의 문체에 반발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문예 사조를 사실의 왜곡이니 진실의 파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어떤 표현도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문학이 부정되는 것은 과거 낯설었던 것들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떠나 어떤 문체 또는 어떤 비유가 더 사실적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형식주의자들이 이질적인 수법을 동원하는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실을 표현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으며,  어느 쪽이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낯설은 것과 친숙한 것 가운데  어느 한쪽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희곡에서 '소외(疏外)의 기법'을 사용한다.  '소외의 기법'은 종래 연극의 경우 관객을 작품 속으로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이것이 연극임을 강조하여 몰입과 동화를 막으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사건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따져보도록 유도하기 위한 기법을 말한다     6. 시의 첫행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고비  시에 있어서 첫머리는 독자와 만나는 첫번째 고비이다. 첫머리에서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없다면 그 작품을 도대체 누가 읽어줄 것인가. 더구나 시는 20행 내외, 길어야 50행 정도이다. 그런만큼 시 독자는 인내심이 없다.  소설이라면 어느 정도 읽어나간 다음에 그 작품에 대한 판별이 서기 시작하지만 시의 경우는 그야말로 짧은 한순간의 눈길로 그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 첫머리를 특징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테크닉을 개발하게 마련이다. 아래는 그 첫머리를 유형별로 분석해 본 것이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러한 기초사항을 눈여겨 봄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첫머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 시간을 나타내는 시의 첫행은 매우 일반적이다. 특정한 시간대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흔히 4계절이나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첫행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계절 가운데는 봄이, 하루 중에는 밤이 첫행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첫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복잡하거나 충격적인 어귀를 쓰게 마련이다. 덧붙이자면 단순한 시간대는 피하는 게 현명하다.  ① 봄이에요. 노랗게 목 메이는―이태수  한밤입니다. 자연의 밤―권달웅  ② 이즈막엔―한기팔  어느 새벽―조창환  기인 밤입니다―박용래  ③ 6월 16일은―김영태  ①은 봄이나 밤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법에 변화를 가한 예라고 하겠다. 앞은 도치의 방법으로, 뒤는 점층의 방법으로 상투성을 벗어나고 있다. ②는 불특정한 시간대를 설정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상상적인 해독이 가능하도록 한 예이다. ③은 오히려 특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유인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 시의 첫행에서 시간을 제시하는 경우보다 공간을 설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빈도수를 보여준다. 자연 공간 중에서도 산이나 강이 압도적이다. 들과 골짜기, 바닷가, 또는 뜰과 나뭇가지 등등 대체로 시의 모티브가 작품 내부의 공간으로 설정되고 있다.  ① 어딘가에서―윤강로  ②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이근배  ③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 만큼한 먹오디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서정주  사시사철 눈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서는―김종털  ①은 시간의 제시 방법에서 본 바와 같이 불특정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시의 융통성을 살린 예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첫머리는 다음의 두번째 행이 더 극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준다. 또 한 시인이 여러 차례 반복 사용할 수 없다. ②는 시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제재(題材)로서 특수한 공간을 설정한 예가 된다. 허나 이 역시 자주 쓰면 상투적이고 도식적일 위험이 있다. ③은 시적 감흥을 위해서 약점을 무릅쓰고 구체적인 사항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충격을 가하고 있는 예다.  ○. 시간과 공간이 첫 행에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경우는 훨씬 효과적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결한 어휘의 구사가 요구되지만 표현상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① 지금 어드메쯤―조병화  ② 12월의 北滿 눈도 안 오고―유치환  ③ 겨울에도 비가 오는 城北洞 기슭―이명수  ④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오른  산길은내 키에 몇 자는 넉넉히도 더 자란  솔숲에 나 있었다―강희근  ①은 불특정한 시·공간을 제시함으로써 막연하고 애매한 기대감을 환기시킨다. ②와 ③은 보다 구체적이다. ②는 ‘북만주’ ③은 ‘성북동 기슭’이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이 등장함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또한 ‘눈도 안 오고’와 ‘겨울에도 비가 오는’이라는 관형어절이 특별한 정황을 암시함으로써 갈등을 예고한다. ④는 시간과 공간, 주인공이 한데 어우러진 한 대목을 도입부의 첫머리로 삼고 있어 특이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① 그윽히―허영자  귀여운―김경희  ② 그늘―김현승  누님―서정주  어머니―신석정·양명문  촛불―-황금찬  ①은 부사, 형용사 ②는 명사로 된 첫행의 예들이다. ①은 다음 행에서 어떤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의 출현이 예견되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부사나 형용사는 대체로 시의 첫행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다. 다음에 수식해야 할 어구가 예견된다는 것은 그만큼 상식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②는 다시 ‘누님·어머니’와 같은 인간 즉 유정물(有情物)과 ‘그늘·촛불’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만, ‘누님·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호격조사가 생략되므로 오히려 청각적인 기능이 강화되고, ‘그늘·촛불’과 같은 경우는 회화적인 시적 구성이 예견된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단어를 중심으로 수식된다.  ①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김소월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이은상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노천명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이병기  이번 예는 한 단어의 예 가운데 ‘누님/어머니’와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한 변형이라고 하겠다. ‘이름/조국’과 같은 추상명사를 의인화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변주가 가능해진다.  ○. 시의 첫행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① 이쯤에서 그만 下直하고 싶다―박목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김춘수  이번 예는 앞의 예들보다는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첫행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가 1인칭 즉 ‘나’로 되어 있거나 생략된 예들이다. 박목월과 유치환의 경우는 하직과 죽음이라는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박목월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관조하는 듯한 겸양에 찬 어법을, 유치환은 의지적인 어법을 사용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춘수는 나와 짐승을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② 풀이 눕는다―김수영  관이 내렸다―박목월  길손이 말없이 떠나려 하고 있다―장만영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황동규  소 한 마리를 잡기로 하였다―송정란  ○. ②의 예는 하나의 문장으로 첫행이 이루어졌으되, 그 주어가 명사어로 된 예들이다. 김수영의 예는 그 주어가 사물이고, 장만영과 황동규는 그 주어를 인간으로 하고 있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김수영의 ‘풀’은 민족 또는 민중을 상징하고 박목월의 ‘관’도 한 인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송정란은 소를 통해 시를 상징화하고 있다. 장만영은 ‘길손’이라는 불특정한 주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황동규는 ‘전봉준’이라는 역사상의 인물을 주어로 등장시키고 있다. 최근의 시에 가까울수록 특정한 시간·장소·인물이 시에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현대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의 독자적인 개성이 요구됨에 따라 보다 사적인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③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나지 않는다―서정주  사랑은 항상 늦게 온다. 사랑은 生 뒤에 온다―정현종  ○. ③의 예들은 3인칭의 주어가 추상 명사로 된 것들이다. ‘가난/사랑/목숨/산다는 것’ 등등에 대한 정의(定義)에 가까운 수사법이 이러한 예들의 근간을 이룬다. 정현종의 경우 두 개의 문장으로서 첫행을 이루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대시의 발생기에는 그 첫행이 비교적 간결한 경향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두 개 및 두 개 이상의 복합 문장이 병치되거나 또는 병렬문의 형태로 길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 시의 첫머리를 산문형으로 시작한다  ①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 꽃나무를熱心으로 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숭내를내었소―이상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백석  ○. 이밖에도 시의 첫행에 있어서 ‘사랑이 오라 하면·먼후일 당신이 찾으시면·눈 감으면·이 비 그치면’ 등 가정법이 사용되고 있다. 한때 여류 시인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관념의 심화에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다.  70년대에 들어, 우리 시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의 하나가 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다. 그 중에서도 강우식은 4행시를 보여주었고 그에 반해 산문시, 연작시가 시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가 산문시와 연작시의 형태를 보여주었다면, 박제천의 『장자시』는 연작시이자 띄어쓰기를 무시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 그와 더불어 단위 작품에도 산문시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정진규·박제천 등 60년대 시인들이 자주 쓰는 산문형 흐름은 요즘의 신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서 내용의 심화를 이루게 된다.       7.  창작강의] 몇몇 시인들이 들려주는 시작법 /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인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중국의 현대시인 아이칭의 에 나오는 제일 첫 문장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언어를 다는 저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므로 시인은 양심을 속이거나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 “표연히 흩어지거나 순간에 지나가버리는 일체의 것을 고정시켜 선명하게, 마치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이 또렷하게 독자의 면전에 드러나게” 하는 시의 기교를 함께 강조한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중국 시론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경융합론’을 펼친 왕부지의 시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情)과 경(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를 묘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양자를 자연스럽게 결합시킬 수 있어 가장자리를 남기지 않는다. 정교한 시는 정 가운데 경을 나타내고, 경 가운데 정을 나타낼 수 있다.” (류워이 지음, 이장우 옮김, )고 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이덕무도 문장이란 “굳세면서도 막힘이 없고, 시원스럽게 통하면서도 넘치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뼈가 드러나지 않고, 상세하면서도 살찌지 않아야 한다”()는 말로 조화와 통합의 문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시적인 언어를 “내적인 경험, 감정 및 사고들이 마치 외적 세계에서의 감각적 체험과 사건들인 것처럼 표현된 언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말, 진실/기교, 내용/형식, 정/경, 강함/부드러움, 내적 경험/외적 표현 등 모든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조화와 결합을 이룰 때 좋은 시가 태어나는 법이다. 심지어 시인의 재능/노력도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한 편의 시는 이처럼 시인들의 고뇌의 집적이며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일상속 느낌 그냥 흘리지말고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그렇다면 시인들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를 쓰라고 말하고 있을까? 시작법에 관한 현역 시인들의 조언을 몇 가지 경청해 보자.   강은교 시인은 첫째, 장식 없는 시를 쓰라고 한다.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으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한다.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쓸 때 발현된다는 것.   셋째,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며 시작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넷째,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으므로 늘 세상을 감동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다섯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을 가질 것을 당부한다. 정신의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에서 예술의 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익히라고 제안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 것, 무엇보다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우라고 한다.(시인이 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고 노래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끝으로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이 남달라야 한다고 매우 이색적인 의견을 제출한다. 즉 시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것! 강은교 시인다운 비결이라 하겠다.   최영철 시인은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이므로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는 게 시창작의 첫 단계라고 한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번 중얼거려 보라고,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라고 한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라고 권한다. 그 또한 자신감을 강조한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주변에서부터 찾을 것이며,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낀다고 말한다.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도 괜찮은 일이며,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이 오히려 시를 쓸 자격이 있다고 등을 두드린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운다. 늘 보게 되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시인의 눈에 붙잡히면 다음과 같은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최영철, 전문   장옥관 시인은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일상생활 속에서 다가오는 수많은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붙잡아야 감수성 훈련이 된다. 둘째,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셋째,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상상력이 커진다. 나의 관점을 버리고 대상의 눈으로 나를 보라는 것. 넷째, 자신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섯째, 가까운 곳에서 시를 찾는 눈이다.   ‘어떡하면 다르게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숨기고픈 얘기서 출발   실제로 장옥관 시인이 시로 형상화하는 소재는 대단히 특별한 것들이 아니다. 이를테면 벚꽃 아래로 지나가는 개, 자신이 누는 오줌, 포도를 껍질째 먹는 일, 아스팔트에서 본 죽은 새, 옛 애인에게서 걸려온 보험 들어 달라는 전화……. 그러나 이것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면 경이로운 존재의 실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빛을 뿜는다. 시인은 길을 걷다가 장애인을 인도하는 노란 안내선을 보며 놀랍게도 밑창으로 하나하나 핥으며 걷는 길의 등뼈를 발견한다. 신발의 밑바닥이 길을 핥는다는 통찰을 통해 시적 발상이 어떻게 발화하는지 보여주는 시다.     길에도 등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등뼈를 밟고 저기 저 사람 더듬더듬 걸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생고무 혓바닥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남김없이 일일이 다 핥아야 한다   비칠,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으로 핥아야 할 시린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전문   8.. 시창작을 위한 일곱 가지 방법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 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면  시를 쓰는 어느 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 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 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예)'따셋째 시가 처음뜻함' /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개가/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맏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네 번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 번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 번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     9.  시와 사진 구분하기       어떤 대상이 작자의 가슴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모습 그대로 내 놓았을 때는 사진이 되고 그 대상이 작자의 가슴속에서 녹아내려 제2 제3의 다른 모습이 되어 나왔을 때는 시가 된다.    그런데 시와 사진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놓고는 시라고 생각하는 이가 이 외로 너무 만은것 같다.    다시 말해 사진을 찍어 놓고는 자신이 사진사인데 시인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의 글을 점검해 보았을 때 나는 사진사 였구나 또는 시인이였구나 하고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출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웃는다. 는 사진이지만    바위가 웃는다. 는 시가되고    아기가 젖을 먹는다. 는 사진이지만    귀신이 젖을 먹는다. 는 시가되고    천을 오려 옷을 만든다는 .는 사진이지만    구름을 오려 옷을 만든다 .는 시가된다 이와 같이 사진을 녹여서 시로 만드는 연습 해 보기로하자.        예문1.산행을 갈때     (사진을 녹여서)            →(시로 만들기)     나는 산속으로 걸어간다 →산이 내품으로 걸어 들어온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청춘가를 부르는 개울물     상큼한 풀냄새               →파란 풀냄새     시원한 공기                  →굴맛나는 공기     후련해라                      →간이 녹아 내린다       예문2. 꽃을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저꽃 너무 예뻐            →저꽃은 우리아기 얼굴      무슨 말을 할것 같애    →오셨어요 인사하는 꽃      이 아름다운 향기        →내 마음을 녹이는 향기      한들 거리는 꽃           →꿈을 꾸고 있는 꽃      보드레 한 꽃잎           →아기의 살결 같은 꽃잎        예문3. 한접시 송편을 보고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잘 만들었네               →하얀 반달떡      예쁜떡                      →딸아이 눈동자 같은 떡      참기름을 바른떡        →마음을 바른떡      참말로 맛있다           →분홍색 맛이나는 떡      말랑말랑한떡            →엄마의 젖가슴 같은 떡            예문4. 물고기를 보았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펄떡펄떡 뛴다          →뱃살빼기 운동을 한다       고기입이 크다          →산봉우리를 삼킬만한 입       물결을갈라치는지느러미→지느러미로 풍금을 친다       민첩한 몸짓              →자진모리 가락으로 돌아가는 몸짓        서로 부딪친다          →신호등을 무시한 보행사고          예문5. 첫눈 내리는날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깨끗한 눈송이          →아기의 마음 같은 눈송이        너무너무 하얀눈       →이빨같이 하얀 눈        눈속으로 걷는길       →추억속으로 것는길        눈이오면 즐거워       →눈 위에서 피는 마음꽃       내가 만든 눈사람      →꿈을 꾸고 있는 눈사람     이상의 예문으로 사진사와 - 시인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되지만 아직도 어떤사물이 자신의 가슴속에 들어와 그 모습 그대로 내놓고도 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복습으로 예문을 제시해 보도록 한다.          예문6. 구름을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           →(시로 만들기)         뭉개구름                   →포도송이로 익어가는 구름         흰구름                      →하얀 옷을 입고 가는 구름         조개구름                   →손에 손잡고 가는 유치원 구름         새털구름                   →털옷을 입은 구름         검은 구름                  →상복을 입은 구름           예문7. 책을 보았을때          (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두꺼운 책                 →뚱뚱한 책          얇은 책                    →깡마른 책          그림 책                    →색깔들이 모여 사는책          국어책                     →우리말이 모여사는 세계          영어책                     →꼬부랑말이 모여 사는 세계             예문8. 바위를 보았을 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검은 바위                →검은 옷을 입은 바위           흰 바위                   →흰 옷을 입은 바위           짐승바위                 →하늘 짐승이 내려와 바위가 되었네           둑 바위                   →냇물을 가로막은 바위           거북바위                 →바다로 가다가 바위가 된 거북이              예문9. 촛불을 보았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반짝이는 촛불        →눈을 깜빡이는 촛불            혼자 있는 촛불       →혼자만의 세상            작은 촛불              →유치원 또래의 촛불            외로운 촛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촛불            촛농이 떨어지는 촛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촛불              예문10.시장엘 갔을때             (사진을 녹여)        →(시로 만들기)             분주한 거리          →삶의 교차로             복잡한 거리          →콩나물시루 같은 사람들             떠드는 소리들       →삶의 음악             외침소리              →삶의 호소             엿장수 웃음          →엿장수 얼굴에 핀 삶의 꽃     필자는 지금 쏟아져 나오는 만은 책들 중에 사진과 시를 구분하지 못하고 쓴 시들이 더 많음을  볼때 시를 너무 가볍게 보는 풍토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흔히들 한권의 책을 보아도 시 한두편 건지기가 어렵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다 그 첫 단계가 시와 사진 구분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10.  김철진 시인의 시 창작을 위한 10가지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 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 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11. 좋은 글의 이론적 조건  1) 독창성 - 소재, 시각, 표현이 보편성과 조화된 개성을 가져야 한다.  좋은 글의 절반은 글감이므로 참신한 소재를 선택함으로써 독자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 방망이 깎던 노인 ) -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 통찰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각의 독창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는 현상적 인식에서 본질적 인식을 전환, 관습적 인식에서 개성적 인식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물론 초보자의 경우 자기가 살아온 지역 과 인연이 닿는 사물을 먼저 소재로 삼는 것은 그리 허물은 아니다.  표현에 있어서의 독창성을 얻기 위해서는 참신하고 개성적인 표현을 얻어야 한다.  2) 충실성 - 충실성을 위해서는 소재와 주제가 명료해야 한다. - 독자 의 입장이 되어 읽을 거리가 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 소재를 마련 하는 데에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며 주제를 마련하는 데에는 깊은 사 고가 필요하다. 결국 내용의 충실성은 성실한 독서와 끈질긴 사색에의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3) 진실성과 성실성 -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이를 허위와 가식 없이 표출해야 한다. 허위와 가식은 설득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초보자는 흔히 자신의 미숙함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교양이나 지식, 감정을 과장하려 하거나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거창한 소재와 주제를 온갖 화려한 수식어와 난해한 개념어들로 포장하려는 것은 금물이다. 글이란 갈고 닦아야 예 술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해변시인학교 - 황금찬 시인 )  * 글쓰기는 수공업이다. - 안톤 슈낙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 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다사로운 햇살이 떨어져 을 때,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을 혼자 있게 될 때"  4) 명료성 - 평이하게 쓴다. 간결하게 쓴다. 의미의 모호성을 피한다.  예문 (1) 어젯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 성 선생님은 호랑이다.  (3) 내가 좋아하는 선배의 친구는 나를 싫어하고 있다.  (4)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는 범인을 쫓아갔다.  (5) 철수는 그날 아침 영수에게 어젯밤의 꿈이 불길하여 아무 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날 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바로 그였다.  (6) 막연한 표현을 피해야 한다. -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부적절한 비유와 상징은 글의 명료성을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객관성을 중시하는 설명이나 논증의 글에서는 비유와 상징의 구사에 더욱 주의하여야 한다. ( 논술의 경우에 매우 중요함 )  5) 정확성 - (1) 논리에 맞는 문장을 써야한다 : 적절한 어휘를 써야한다. 내용에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한다.  (2) 어법에 맞는 문장을 써야 한다 : 문법, 표준어  6) 경제성 - (1) 동의 반복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 동의 반복은 글을 산만하고 지루하게 만든다.  예문 - ①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 하나 씻어낸다.  ② 인격은 세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첫째 단계 인 무율의 단계를 거치고, 둘째 단계인 타율의 단계를 거치고, 셋째 단계인 자율의 단계를 거쳐 비로소 완성된다.  ③ 친구나 벗을 사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친하다고 한두 번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생각과 의식은 버 려야 한다. 친할수록 정확하고 어김없이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2) 불필요한 수식어나 완곡어법은 피해야 한다.  - 빙빙 돌리지 말고 핵심적인 내용을 짧고 분명하게 써야 한다.  *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말이다.  7) 정직성 - 인용할 때는 그 빌려온 사실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 직접인용 : 그대로 빌리는 경우, 간접인용 : 요지만 빌리 는 경우. 명인과 암인 ) - 표절의 비도덕성, 인용은 할 수 있는 것이다.  8) 글쓰는 상황의 고려 - 글쓰는 상황에 어울리는 성격의 글을 써야 한다. 즉, 글의 목적과 독자의 성격에 맞아야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12. 내 생각 글로 쓰기 - 10. 시 쓰기 - 3    시 창작은 사물이나 사건의 벌어지는 형태나 동작을 보고 감각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비유하여 주제를 감추고 이미지화하여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표현하는 작업이다. 흔히 감각이라는 말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하여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려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을 말한다.  감각은 시를 쓰는 사람이 관찰을 통하여 많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기를 유발시킨다. 사물이나 사건의 형태와 동작을 비유한 시를 중심으로 창작의 실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전봉건의「피아노」전문    이 작품은 감각적인 이미지로 표현된 작품이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의 손가락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가락의 움직이는 모습을 물고기가 쏟아지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는 시구에서마치 그 피아노의 선율이 들리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청각적 표현을「물고기가 쏟아진다」로 나타내어 소리를 시각화하였다. 여기에「신선한 물고기」라는 표현을 통해 생동감을 주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습 중 가장 신나게 일고 있는 파도를 집어든다. 이것이 칼날로 보이는 것만큼 화자가 느끼는 감동의 힘이 강렬하다. 이 시는 연상에 의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피아노 선율에서 물고기로 다시 바다에서 파도로 그리고 칼날」로 연결된다.   대나무 잎사귀가 칼질한다.   해가 지도록 칼질한다 달이 지도록 칼질한다 날마다 낮이 다 하도록 칼질하고 밤마다 밤이 다 새도록 칼질하다가 십년 이십년 백년 칼질하다가 대나무는 죽는다.   그렇다 대나무가 죽은 뒤 이 세상의 가장 마르고 주름진 손 하나가 와서 죽은 대나무의 뼈 단단하고 시퍼런 두 뼘만큼을 들고 바람 속을 간다. 그렇다 그 뒤 물빛보다 맑은 피리소리가 땅 끝에 선다 곧 바로 선다.   - 전봉건의「피리」전문    이 시에서 성장 과정과 멈춤 과정을 두고 이야기 한다고 본다. 성장이라 함은 대나무가 자라며 그 잎에 칼바람 세우고 살아가는 현실과, 멈춤을 통해 대나무가 죽은 그 이후의 다른 형태로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꿈으로써 나타나는 피리라는 사물을 강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드러내지 않지만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시를 통해 그렇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라 본다. 피리소리 물빛보다 맑게 울리기 위한 그 인고의 과정을 통해 소리가 소리로써의 音을 간직하기까지의 삶이 바로 서 있는 詩라고 볼 수 있다.   여태껏 시치미 따고 초록빛 몸뚱어리로 살면서 언제 삼켜두었는지 짙은 분홍빛 꽃잎을 여러 겹 겨워냈구나, 가슴을 열고 하늘 맑은 물에 묽게 녹아내는 가을 인사말 어렸을 적 바라보던 부러운 옷 색깔을  들길 따라 입은 꽃  - 졸시「과꽃」전문     봄부터 무슨 색깔을 한 꽃을 피울지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초록빛을 띤 잎 새와 가지만 싱싱하게 자랄 뿐이었다. 들길 가에 홀로 나름대로 꿈에 취했는데 그 빛이 짙은 분홍빛으로 겨워내듯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어릴 적에 잘사는 집 아이들이 입은 옷이 입고 싶어 부러워했던 그 색깔로 갈아입은 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어둠이 걷히고 가슴이 탁 트인 기분으로 아무에게나 인사를 거는 여유로운 마음은 가을이 다되도록 피어있다.    커피 한 잔에서 나오는 따뜻한 김이 엮어내는 공간으로 나의 기다림이 들어앉아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지는 그 공간이 비좁아질 때 나의 체온은 식고 있었다. 마주하고자 했던 상대가 없이 한 자리를 지키면서 얼마나 참을성 있게 지내온 건지 얼마나 아량 있게 대해온 건지 혼자 만지작거리며 측정해보는 내 마음의 깊이가 이렇게 얕았던가 보다. 내 삶의 테두리가 이렇게 좁았던가보다. 쓰디쓴 커피는 식어서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없이 나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 졸시「커피 한 잔」전문    어느 겨울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기다리면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다보았다. 높이 올라 넓은 공간을 만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식어 좁아져가는 걸 느꼈다. 마주하고자했던 상대도 오지 않고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없이 떠밀려나오는 심정을 그렸다.  그동안 지내왔던 상대에게 참을성 있게 대했는지, 아량 있게 대했는지 생활의 모습을 그려보며, 내 마음의 깊이와 내 삶의 테두리가 얕고 좁은 것을 반성하고 있다. 거피 한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시의 소재가 되고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력에 대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감각을 통한 상상력일 것이다. 창작은 상상력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따라 성공여부가 가려질 수 있다. 상상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날이 서서 예리해지지만 사용하지 않고 묵혀두면 녹이 슬어 제대로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시간이 나면 쓰고 시간이 없으면 못 쓰는 활동 자세는 시인의 사명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관찰하여 시상을 떠올리고 올바른 잣대로 냉철하게 비판하는 날을 세워야 한다   13.  논리적인 글쓰기를 위해 다음 여섯 가지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1. 글을 쓰는 능력은 사고하는 능력이다.  창의적,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면 참신한 아이디어나  설득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이란 밖에서 주어진 문제를 당연히 받아 들이고 답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든 그것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그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태도다.  또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때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고  다른 사람이 나의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그 문제에 답을 하려는 태도다.  2. 글쓰기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읽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글은 무의미하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글의 흐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항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습관이  읽기 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다.  3. 논리적인 글을 쓰려면 글을 쓰기 전에 글의 구조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글의 구조란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연관 관계다.  자신의 글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요약하는 연습이 논리적인 글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4.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좋은 글을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의 글을 꼼꼼히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읽는 게 중요하다.  또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면 사전이나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거나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의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5.글을 쓰고 난 뒤에 그 글을 반복해 읽으면서 고치는 습관이 필요하다.  좋은 글은 반복된 수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주장과 근거가 참신성과 설득력을 가지는지, 문장과 문장 또는 단락과 단락 간의  연결이 자연스러운지, 문장이 문장으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긴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지,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지, 구어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 또는 다짐의 표현을 사용하는지, 무관한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는지,  한 문장에서 한 가지 생각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지, 반복되거나 중복된 내용이 있는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 도움을 줄 수 있다.  6. 관심과 정성을 가지는 태도가 중요하다.  자신이나 타인의 생각과 글에 쏟는 관심,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세우고 수정하는데  쏟는 정성으로부터 참신하고 논리적인 생각과 글이 나올 수 있다.  -김준성, 서울대 글쓰기교실 선임연구원     14.  시 창작 강의 (2)   -2. 詩를 많이 읽어 보자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독자로서의 시읽기가 아니라 시에의 올바른 접근을 위한 정독(精讀)을 말합니다. 하루에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 무르녹은 의미와 시어에 유의하면서 음미해보는 것이 시와의 만남을 더욱 가깝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읽기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하면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요.           ① 시를 정독하라 시는 의미의 전덜이 아니라, 시 속에 함축된 의미의 암시나 상징. 그리고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정서적,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시인의 시를 통해서 시인의 미적 감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떤 독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을 읽고 간접적인 체험으로 지식과 인격을 느끼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의식으로 지식을 넓혀나가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정독은 시를 이해하는데는 가장 효과적이며 적절한 방법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의미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의 발견이나,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무엇인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감명을 받았거나 감동을 준 부분은 다시 읽고 재해석을 해보라   시집 한 권을 읽다보면(시집 한 권에는 60~70편의 시가 수록됨) 그 중에 유독 몇 편은 친근감이 가고 감동을 받는 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것이거나 내가 간직한 시적 상상력, 또는 체험 속에 곰삭은 어떤 의지가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유사성은 시와의 친숙한 정감을 불러 일으켜서 시인이 그런 체험을 어떤 방법으로 해서 시창작을 성공시키고 있느냐하는 관심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시가 마치 스스로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보며 음미하는 일이 계속되면 스스로 자신이 시작과정을 재구성해 본 것과 같이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 자신의 상상력이나 사물을 보는 시각, 그리고 표현하는 방법 등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이렇게 쓰는 것이 감동을 주는 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나도 시를 쓸 수 있겠구나하는 잠재력이 이미 발산되고 있다는 사릴에 놀랄 것입니다. ③ 마음에 새겨지는 시의 행(行)이나 연(聯)은 그냥 음미로 그칠 것이 아니라, 노트에 옮겨 써보는 일도 중요하다.   물론 외워버리면 더욱 좋겠지만 이때 옮겨 적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옮겨 적는 일이 많아지면 자신이 생각했던 시어(詩語)들을 동원하여 바꾸어 본다든지, 몇 마디를 생략해 본다든지, 또는 새로운 이미지(image)를 첨가해주는 일 등은 시창작 연습의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것들이 모작(模作)이건, 창작(創作)이건 간에 시 쓰는 행위가 될 것이며 이 행위야말로 바로 시 쓰기의 경험으로 연결되는 시적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시편들도 그냥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항상 필요합니다. 어떤 형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의식으로 접근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인내가 따라야 합니다. 1-3. 모든 것들에 대한 많은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시는 어쩌면 많은 사유에서 탄생되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곧 사유하고 사색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상력이 동반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일상생활에서부터 차원 높은 우주관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은 사유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유 속에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인생관이 있으며 일생동안 기필코 성취되어야 할 목표인 꿈과 희망도 있습니다. 시 쓰기에서 많은 사유가 필요한 점도 시인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이 사유한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빚어낸다는 뜻입니다. 이 상상력도 진실된 인생의 고민이 담겨져야 합니다. 상상은 결국 나 자신의 정서와 밀접한 관계에 놓입니다. 정서는 모든 사상(事象)에 부딪혀을 때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을 말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극이 되는 대상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으로서 또는 신체적인 변화가 뚜렸한 것으로서 일정한 상태로 지속되다가 끝나거나 다른 정신상태로 옮겨가는 의식의 과정을 말합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과 애오욕(愛惡慾)의 칠정(七情)이 우리의 오관(五官-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에서 감각을 일으키는 다섯 개의 기관)을 통하여 경험하는 정신적인 산물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의 올바른 비축을 위한 사유는 창조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르테면 '겨울나무'를 응시하면서 시적인 사유로 발전하려면 그 추운 겨울을 인내하면서 새봄의 루르름을 꿈꾸는 희망으로 바꾸어보는 사유, 즉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과 미래의 유추로 연관짓는 사유가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조병화 시인의 말을 들어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의 고독과 싸워 왔다. 그 생(生), 애(愛), 사(死) 그 존재와 생존, 그 순수허무와 그 순수고독과 싸워 왔다. 항거와 슨응, 그걸 살아오고 있는거다. 그게 나의 시이며 시론이며 존재 양상인 거다. 인간은 누구나 한정된 자기 수명을 살다 가는 거다. 그 한정된 시간을 견디고 살다간, 또 다른 세계로 이사를 가야하는 거다.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죽음이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이 나의 테마이며 나의 작업인 거다 때문에 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를 철학하기 위해서 오로지 사색해 왔을 뿐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철학, 그 발견과 창작의 철학 속에서 시를 배회했고 시의 이치를 찾았고 그것으로써 시를 써 왔다. 이와같이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모든 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보는 사유, 이러한 사유야말로 시를 쓰기 위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15.  시 창작 강의(3)   -4. 시 쓰는 연습을 많이 해 보자  처음부터 시라는 틀에 얽매이지 말고 아주 자유스러운 마음으로, 그냥 메모하는 식으로 써야 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하여 감동했던 것이나 마음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일들부터 자신의 생각으로만 하나씩 적어 봅니다.  어떤 형식에는 구애받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문체나 형식이 일기문이 되거나 편지글이 되거나 상관 없이 글로 옮겨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전번 시간에도 말한 바와같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내 생각을 가미하여 모방해보려는 의지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 부딪치는 어려운 점은 언어의 부족입니다.(이 언어문제는 다음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물론 언어뿐만 아니라 표현반법이 여러모로 서툴지만 읽고 생각한 자신의 진실을 글로 적어봄으로써 자기 세계가 열리고 시 쓰기에 대한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옛날 선배 시인들은 시인이 되기 위하여 습작 원고지 3만장 정도를 휴지가 되도록 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의 쓰라린 습작기를 거쳤던 것입니다.  시 쓰기에는 유형(有形)적인 소재이거나 무형(無形)적인 소재이거나 간에 많이 느껴본 습성이 중요하지만 이 느낌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는 느낌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란 많은 형태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 느낌이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 미적인 감정과 미적인 언어의 조화로 한 편의 시 작품이 창작되는 것입니다.  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 앞에서 하는 속임없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말처럼 어떤 소재에서 느낀 솔직하고 진지한 나의 진실이 글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시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어떻습니까. 어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히 갈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밤 하늘에 뜬 구름 사이로 흘러가듯 떠 있는 달의 모습은 얼마나 고적하고 유유합니까. 이런 달의 형상이 작품 속에서 나그네와 연관됨으로써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며 나그네의 구체적인 모습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옛말에 시이도지(詩爾志)란 말이 있습니다. 시를 쓰거나 읊조리는 것은 자기의 지닌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종호 교수는 정규 문과 대학생 조차도 우리 근대시의 고전인 (박목월, 조지후, 박두진 3인 시집)을 읽어본 경우가 희소하다고 개탄하면서 우리 문학 교육의 현실을 말하고 있어서 위의 [나그네]같은 작품은 겨우 교과서에 수록된 것을 읽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시 쓰기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하는 도움이 될까해서입니다.  고려 때 문신인 정지상과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는 서로 시적(詩敵)이었습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의 사령관이었던 김부식은 정지상이 이 난에 관련되었다하여, 평소에 시 쓰기에 있어서 숙적이었던 정지상을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 뒤 어느 봄날 김부식은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지었습니다. 봄의 정경을 잘 표현한 아름다운 시입니다.  버들은 일천 가지로 푸르고(楊柳千絲綠-양류천사록)  복숭아는 일만 송이로 붉구나(桃花萬點紅-도화만점홍)  그런데 문득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서 김부식의 빰을 갈기며 호령했습니다.  "이놈아, 버드나무가 일천 가지인지, 복숭아가 일만 송이인지 네가 세어 보았느냐? 왜 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복숭아는 송이송이 붉다(楊柳絲絲綠-양류사사록, 桃花點點紅-도화점점홍)라고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나중에 김부식은 어느 절간 화장실에서 정지상의 귀신에게 불알을 잡아당겨 죽었다는 일화가 라는 책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참 절묘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버드나무 가지의 표현이 일천 개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표현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복숭아꽃의 일만 송이보다는 점점이 그러니까 송이송이 이것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같이 시 쓰기의 연습에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언어를 매체로 해서 표현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결국 많이 읽어보고 많이 생각하며 많이 써보는 것만이  '나도 시를 쓸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하는 길일 것입니다.     16.  시 창작 강의 5   인간은 누구나 감수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가 있다. 막연하나마 어떤 정신적인 동경이나 갈망이 솟구쳐서 이를 표현해 보려는 의욕이 일어나서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데 이러한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목적이나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만,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습작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씌어진 시란 다분히 자기 본위의 일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앞날의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청춘의 감성은 대체로 자기자신의 내부적인 세계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세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안감의 표시로 봐야하며 이러한 표현의 욕구는 언젠가는 새롭게 발견되어질 미(美)의 세계에 대한 예술적 탐구정신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하이데거의 말처럼 시적인 표현 욕구는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한 내외적 세계의 조화로서 표현의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일은 사회적 불안이나 내 자신의 불안 등 여러 형태의 모순들이 보다 안정되고 보다 차원 높은 세계의 강망이나 희구, 또는 향수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시를 쓰는 즐거움의 뒤안에는 이러한 욕구나 동경에 대한 충족감이 깃들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적어도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로 창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참된 보람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요즘 시인들의 시창작 경향을 살펴보면 대체로 현실의 비합리성에 따른 위기의식의 극복과 절박한 갈증의 해소가 시적인 동기로 나타나는 예가 많은데 이는 시창작을 통해서 화해나 조화를 모색하고 정신세계의 안온을 위한 기원의 의지를 추구하려는 시의 목적의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방지원 시인의 작품 [해뜰 무렵]도 이러한 인식이 깊게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새 불을 밝히던 고깃배가  놀란 물살을 바쁘게 가르고  느린 듯 빠르게  그 찬란한 불덩이를 들어올릴 때  바다 한가운데 검게 앉은 그 사람도  바닷가의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이었을까  연한 살점 태워 하늘에 올리는 소지(燒紙)  오존층까지 오르고  그 불덩이가 세상을 돌아  노을이 될 때  우리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남기를 바란다.   과연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진솔한 목소리를 듣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자기의 정갈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를 쓰는데서 지적인 만족을 획득하는 또다른 희열을 느낄 수 가 있를 것입니다.  매슈 아놀드의 말대로 ‘시는 인생 비평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3. 시인과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다단한 사회입니다. 살아가는 일마저 다양한 형태이지만 물질문명의 팽창으로 어쩌면 정신의 활폐화가 극도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아가는 시인들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탁월한 그 무엇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시인을 예언자나 초자연적인 느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행각한 적 있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C. D 루이스는 구약성서에서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은 시인이었으며 그리스의 사람들은 시인들이 시를 쓸 때에는 어떤 신(神)에게 홀렸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접신(接神)의 경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고도로 발달된 과하문명이나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이라는 생활방식에서 시는 그 가치가 축소되고 그 기능이 감소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척박한 사회일수록 시의 가치성과 기능을 더욱 공고히 해야한다는 역설적인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문덕수 시인의 시론을 들어 봅시다. 그것은 마치 일반적으로 종교와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만큼 우주의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영역이 넓어져 가고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는 산문의 시대, 곧 소설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시의 기능이 점점 중요시되어 가고 있고 시인의 존재 이유가 더욱 절실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인은 복합적이면서 다원화된 현대 사회를 어떤 시각으로 보면서 어떻게 그 기능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문제들을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마치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인격이 전락하여 인간관계는 바로 물질적 관계로 변형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고 사회의 분열현상마저 초래되고 있는 서글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의 혹독한 아픔이며 비극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격의 파괴나 인간의 소외, 도덕의 소멸 등으로 현대인들은 불안하고 또한 고뇌의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가 고뇌의 늪으로 빠질수록 우리는 일찍이 예감할 구 없던 새로운 인류의 공동운명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자연의 파괴나 전쟁의 위험, 빈부의 차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더욱 큰 고뇌를 인류 전체의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먹구름 홀연히 천지를 덮는다  지구 저쪽에서 날아온 조전(弔電)  펼친다, 펼치면서 꿈꾼다  먹구름 속 유영하던 꿈  깨진 꿈 껍질이 풀풀한 지상에는  오오, 누군가 온몸으로 오열하는  거기, 그곳에는 찌그러진 언어 몇 개만  막숨을 몰아 쉬고  이제 피와 눈물과 마지막으로 섞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먹구름은 저승쪽으로만 몰려가고  무방비의 이 지상에서  가녀린 기원마저  시름시름 무너지고 있다  --그래, 우리 살아남을 수 있겠나.   이 시는 졸시 [不在中 . 12]의 전문입니다. 참으로 암담한 지구상의 존재들을 나름대로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은 현대 문명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이를 조화와 예지로서 화해의 가교 역할과 함께 비판적이면서도 통합하는 기능을 보유하지 않으면 언될 것입니다     17.  시창작 강의 6   ㅁ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 이제 2008년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잡다한 일상사를 정리하고 내년에는 반드시 무엇인가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시도 많이 쓰시고 이곳 ‘창작방’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그럼 전번에 이어서 운율에 대해서 좀더 알아 봅시다. ③ 음수율(syllabig system)   이 음수율은 각 시행의 음절수(音節數)를 일정하게 맞추는 운율입니다. 영시(英詩)에서는 음보(音步-metre)가 있고 한시(漢詩)에서는 다섯 글자로 맞추는 오언(五言)과 일곱 글자로 맞추는 칠언(七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형시인 시조나 가사, 기타의 신문학 초기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3 . 4조나 4 . 4조, 또는 7 . 5조 등으로 구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조선조 중기의 문인이었던 양사언의 시조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렇게 시조처럼 일정한 글자수를 맞추는 형식인데 지금 현대시에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소월의 [먼 후일]이라는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글자수의 배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시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시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어제도 오늘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그리고 한시에서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오언이나 칠언절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고로 만해 한용운의 [차영호화상(次映湖和尙)]이란 작품을 봅시다. 내용은 “시와 술로 시름하는 나입니다만 / 당신도 문장으로 늙으시네요 / 눈보라와 더불어 부쳐온 글월  / 속절없이 설레이네 오가는 두 정”이지만 우리는 오언절구라는 운율에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詩酒人多病 文章客亦老(시주인다병 문장역객로)   風雪來書字 兩情亂不少(풍설래서자 양정난불소)   역시 칠언절구도 마찬가지 입니다. 김삿갓의 시 [무제(無題)]를 보면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사각송반죽일기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주인막도무안색 오애청산도수래) 라고 하여 일곱 글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은 김삿갓이 방랑을 하다가 어느 집에서 쉬어가게 되는데 주인이 너무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대접을 하면서 어쩔줄 몰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합니다. “네 다리 소반에 놓인 죽 한 그릇 속에 하늘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떠 있구나. 주인은 도리가 아니라고 쩔쩔 매지 마시오. 나 본래 청산과 물이 비치는 것을 무척 사랑한다오” 쯤으로 알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3-1-2. 내재율(內在律)   지금까지 외형율, 그러니까 외적으로 나타나는 운율을 살폈지만 지금부터는 안으로 내재되어 확인되는 않지만 현대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내재율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내재율은 한 마디로 시의 호흡이나 템포(tempo-속도, 박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형시에서의 외형율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있기는 있으나 분명히 지적할 수 없는 속으로만 생명처럼 존재하는 시인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저변을 흐르는 언어의 억양과 색조가 빚어내는 어떤 리듬입니다. 바로 현대시에서 언어가 갖는 속성이나 기능을 종합한 무형의 리듬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내재율은 일정한 규칙이 없기 때문에 시를 쓰거나 읽으면서 스스로 체득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령 윤동주의 [서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처럼 시의 외형상의 리듬은 보이지 않지만 속살로 흐르는 시인 특유의 맥박과 호흡니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시에서 필요로 하는 내재율입니다. 다시 산문시의 형태를 갖춘 나의 졸시 [사랑법 . 9-시인의 사랑]이란 작품을 읽어 봅시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솔바람곁에 뿌리는 라일락 향기로 그대는    내게 다가 왔다. 어느 후미진 언덕배기에서 안개 속 잡풀의 흔들림을    보거나 마알간 냇물이 흰구름을 안고 치억들을 어루만지거나 아니 서   해 바닷가 갈매기 울음을 듣거나 그대 눈빛은 항상 내 가슴 깊이 안   기어 촉촉하다. 더러는 연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무지개였다가 별안간    이슬 한 모금 삼킨 주홍빛 꽃잎이었다가 스스로 앵두 입술 지그시 깨   물고 사유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순한 바람이었다가 아아 그대여, 이   제 진실로 그대에게 들려줄 수 있는 한 마디 ‘사랑해’ 그 화음이 해뜰   녘이거나 저물녘이거나 늘 함께 푸른 강물로 젖어 있다. 멀고 가까움   이 이제 지워진 그 시인의 사랑 그리고 사랑법.   이런 작품을 언뜻 보면 산문처럼 생각되지만 산문시의 형태로 표현되어서 명심해서 읽어보면 시의 맥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는 외형율보다 내재율을 중시한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비록 자유시(현대시)라 할지라도 김소월과 김영랑 등 자연파 시인들은 음악성을 강조하는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는 점도 어찌보면 시는 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  시의 이해  심상과 운율은 시를 가장 시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들에 대한 연구를 미학적 입장에서만 전개하면 내적 비평의 한 방법이 된다.  1. 심상(이미지)  (1) 심상의 의미  심상은 체험을 감각적으로 언어화한 것을 말한다. 이 때 감각적이라는 말은 심상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하다. 감각은 심상적 표현의 구별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보다 “나는 그녀를 붉디붉게 사랑했다.”가 더 심상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붉디붉게’라는 표현이 감각의 일종인 시각으로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심상의 종류  심상은 체험을 감각적으로 언어화한 것이기 때문에 심상의 종류도 감각의 종류와 같다. 보통 감각의 모든 것은 얼굴에 모여 있는데(우리가 매일처럼 다듬고 씻고 하는 이 얼굴이 감각의 집결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허망하기도 하다. ^^;) 눈, 코, 귀, 그리고 입 속의 혀, 땀구멍까지 각각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각각으로 제시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가 함께 제시되거나, 혹은 원래 가진 감각이 이동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 복합 감각: 각각의 제재에 각각의 감각이 붙은 표현. 감각이 결합되었다는 뜻으로 복합감각적 표현이라고 한다.  2) 공감각: 하나의 제재가 원래 가진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이동하는 표현.  (예시)  ①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②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③들을 때는 우레더니 보니 눈이로다.  (해설) ①은 ‘우는 줄’과 ‘달이 뜬 초가 삼간’이라는 각각의 제재에 청각과 시각이 각각 결합해 있다. 따라서 복합 감각적 심상이다. ②는 ‘태양’이라는 하나의 제재가 원래 가진 시각이 ‘울림’이라는 청각으로 이동해 있다. 따라서 공감각적 표현이다. ③은 폭포의 소리와 모습을 보고 ‘우레’라는 청각과, ‘눈’이라는 시각을 결합했다. 폭포 소리라는 제재에 청각이 결합하고 폭포의 모습이라는 제재에 시각이 결합했으므로 복합감각적 표현이다.  (3) 심상의 제시 방법  1) 심상의 제시 방법  심상의 종류는 감각의 종류만큼 많지만 심상의 제시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가른다. ‘묘사’와 ‘비유’가 그것이다. 이 때 비유는 상징을 포괄하는 것으로 광의의 비유를 의미한다. 묘사든 비유(상징)든 감각을 구체화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런 구체화된 감각은 독자의 감성을 환기하여 감동의 깊이를 더해준다.  2) 비유적 심상의 효과  비유는 감동의 깊이에 감동의 폭을 넓힌다는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진다. 비유를 하게 되면 감각이 구체화될 뿐 아니라, 함축적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공감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한국 민중이 가장 즐겨 보는 보편적인 점술서 [토정비결]은 가장 예언이 잘 적중하는 명저로 꼽힌다. 그런데 이 [토정비결]을 보면 천 가지가 안 되는 경우의 수에 모든 사람의 길흉화복이 맞추어지도록 되어 있다. 4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천 가지도 안 되는 경우의 수에 맞춘 것이 토정비결인데 적중률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해마다 이 점술서를 사 본다. 그 비법은 간단하다. 즉 모든 서술이 비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여러 경험이 다양하게 해석되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목에 꽃이 필 괘’라는 비유적 표현은 뭔가 희망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 좋은 일을 맞이한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비유적 표현이 감동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문제) 다음 시의 표현상의 특징을 잘 못 말한 것은  (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나)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먼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①(가)는 시각적 심상으로 외로움을 구체화하고 있다.  ②(나)에는 공감각적 표현이 있다.  ③(나)에는 역설적 표현이 있다.  ④(나)가 (가)보다 묘사적이다.  ⑤(가)의 ‘달빛’은 외로움과 상통한다.  (해설)  (가)는 묘사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나)는 비유적(은유적)으로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따라서 잘못된 설명은 ④이다.  (4) 심상의 해석 요령  1) 일반론적 해석 - 토정비결의 수준  한 편의 시를 독자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교과서적 해석에 따르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시를 시험 문제에 낼 수 있나 없나를 묻는 것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전자의 입장에 서면 시를 절대로 시험 문제에 낼 수가 없고 후자의 입장에 서면 시험 문제에 낼 수가 있다. 이 경우 후자가 맞다. 시의 해석은 교과서적 해석을 따라야 한다. (참고서적 해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  흔히 시가 창작되어 작가의 손을 떠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독자의 몫이라 하여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구절이나 독자가 나름대로 해석해서 자기 것으로 여기면 그만이지 시 해석의 일반론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 해석의 일반론을 따르다가 보면 시 해석이 딱딱해지고 어려워져서 결국 시에 대한 진정한 감상에 이르지 못한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의 주된 태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령, 비유적 표현의 집산지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시와 그 궤를 같이 하는 우리의 명저 [토정비결]의 한 구절을 보자. '고목에 꽃이 필 괘'라는 구절을 보고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하지 않고 그냥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기분이 나쁜 상태라고 하여, 아주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이 때 일반론적 해석의 진실은 무엇인가? 하나하나 살펴보자. 가령 '고목'은 꽃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도저히 꽃이 필 조건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목은 꽃이 피기에 적합하지 않은, 혹은 꽃이 절대로 필 수가 없는 부정적 조건이 될 것인데 여기에 꽃이 피었으니 예상 외로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일반론적 의미를 가진다.  이 일반론적 해석을 유도하고 가르치려는 것이 교과서적 해석이다. 이른 일반론적 토대를 무시하고 독자의 기분에 따라 시를 마음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시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시에 대한 모독이다.  일반론적 해석으로도 충분히 풀 수 있는 다음 문제를 보자. 즉, 토정비결을 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풀어 보고 시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요령을 알아 보자.  (문제) 보기 시에서 시행의 함축적 의미가 다른 하나는? (1999 수능 기출)  < 보 기>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約束)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①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②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③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④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⑤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해설)  점을 보러 갔는데 ‘하늘도 다 끝나가는 운세요’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 뜻에서 ①은 그 의미가 부정적이다. 나머지를 점괘 식으로 해석해 보라. ‘꽃이 빨갛게 필 괘,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움작거릴 괘,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올 괘(더구나 이 시행이 꽃이 빨갛게 필 괘라는 구절과 함께 쓰였다. ), 바람결 따라 꽃성이 (찬란히) 타오를 괘’ 어느 것 하나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다. 모두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에다가 시적 화자가 눈이 온 툰트라 동토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고려해 보라. 정답은 ①이다.  대부분 수능 출제 시들은 이렇듯 일반론적 해석, 한국 민중의 민족적 정감에 바탕을 둔 토정비결식 해석을 넘어서지 않는다. 토정비결식 해석으로 단박 풀리는 문제 하나를 더 보고 가자.  (문제) 는 ㈎의 시를 해석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 시( 박목월의 [이별가]와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지문으로 출제됨.) 의 시어 중, 이와 유사한 해석 방법을 적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1997 수능 기출 응용)  문학적 상징에는 인류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상징과 특수한 문화권에만 적용되는 상징이 있다. 이 시에 나타난 ‘길’이나 ‘가을’ 같은 것은 동서양에서 모두 자주 다루어지는 문화 소재이지만, ‘미타찰(彌撱刹)’은 불교의 전통과 관련하여 동양권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시어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 시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① 강기슭 ② 뱃머리 ③ 흰옷자라기 ④ 골짜기 ⑤ 낙엽  (해설)  박목월의 시 [이별가]는 시에 나타나 있듯이 ‘저승’으로 간 ‘너’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이다. ‘저승’에 간 ‘너’는 ‘흰옷자라기’만 펄럭거린다. 우리 민족 문화 전통에서 ‘흰 옷’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서양이 ‘검정 옷’임에 반해. 이것이 민족적 전통이다. 그러니 답은 ③이다. 일반적인 시의 해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상식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시 해석은 토정비결 수준이라고 해석하면 딱 맞다.  과연 시의 이미지가 일상적인 해석의 수준, 토정비결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가? 조금 어렵다고 판단되는 다음 문제를 풀어 보자.  (가) 자야곡(子夜曲)  이육사  수만 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잖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문제)  (가)의 흐름으로 보아 긴밀하게 연결되는 이미지끼리 묶인 것은?  ① 빛 - 꽃불 - 연기 ② 빛 - 파이프 - 무덤 (1.2점)  ③ 고향 - 자랑 - 소금 ④ 노랑나비 - 연기 - 그림자  ⑤ 연기 - 발자취 소리 - 이끼  (해설) 이육사가 지은 자야곡이다. ‘자야’란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 밤중을 가리킨다. 한 밤중에 일어나 지은 곡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한 밤중에 무슨 내용의 시를 지었을까? 일단 문면을 보니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만 봐도 한 밤중에 일어나 고향 생각이 절실해서 지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가 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파이프 담뱃불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담뱃불은 ‘꽃불’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제 상황은 대충 요약된다. 호랑나비 한 마리 오지 않는 무덤일 뿐인 현재의 고향에서 시적 화자는, 파이프 담뱃불을 보면서 ‘수만호 빛’이었던 과거의 고향을 아스라히 떠올리고 있다. 파이프 담뱃불은 회상의 매개체로 수만호 빛이었던 과거의 고향을 연상시킨다. 담뱃불=꽃불이므로 이미지 연결은 ‘꽃불’- ‘빛’으로 이어진다. 파이프에 현재 꽃불이 붙어 있으니 연기도 물론 날 것이고 그것은 고향에 대한 아스라한 추억 정도의 상징 의미를 가질 것이다. 따라서 정답은 ①이다.  시는 이렇게 일반론적이고 상식적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풀 수 있다. 일상적 시어와 시적 언어는 거의 다르지 않고 다만 전체 시의 맥락 속에서 몇 가지 사항들을 유의하면 쉽게 풀어질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이렇게 쉽고도 상식적인 입장에서 풀 수 있는 시 문제를 참고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보니까 그것을 음미하고 즐길 줄 모르고 암기해 버리고 마는 데서 발생한다. 일반론적 상식에 입각해도 충분히 풀어갈 수 있는 다음 문제도 풀어 보자.  (가)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不歸), 불귀, 다시 불귀,  삼수갑산(三水甲山)에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수갑산 가는 길은 고개의 길.  (문제)  (가)의 셋째 연에 보이는 정서와 가장 유사한 것은? ( 1994 1차 수능 기출)  ①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②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③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④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⑤ 아카시아 어린 잎사귀가 피어나는 산모롱으로  나는 혼자서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혼자였었다.  (해설)  (가)의 셋째 연에는 시적 자아의 어떤 행위가 나타나 있다. 그 밑의 시의 내용을 보면 ‘산수 갑산’에 돌아갈 수 없지만 십오 년 정분을 못잊는다는 시적 자아다. 그가 온 길을 돌아서서 다시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15년 정분을 못잊는 미련 때문에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불귀, 즉 다시 못 돌아가는 곳 아니냐.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시적 자아의 정서가 나타난 것이 (가)의 셋째 연의 정서이다. 미련과 결행 사이에 갈등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는 구절이 답이 될 것이다.  ①은 청산에 살고 싶다고 했으니 소망의 정서가 드러난다. ②는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시적 화자의 편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③은 탄식의 고개인 아리랑 고개를 넘으면서 ‘한 번 가면 못 온다’고 하여 넘어갈까 넘어가지 말까를 망설이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④눈 속 깊이에서 피어나는 꽃맹아리를 보고 목숨의 의지를 다지는 정서이고 ⑤는 혼자 걸어가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정답은 ③이다.  시의 이미지가 지닌 함축적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음 문제를 풀어보는 것도 시 문제에 대한 자신감을 길러 주는 데 기여하리라.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 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  (문제)  밑줄 친 부분의 지시 대상이 나머지 넷과 다른 하나는?(1994 2차 수능 기출)  ① 유일한 사람 ② 머슴 ③ 나 ④ 끄나풀 ⑤ 정한 몸알  (해설) 심호흡도 필요 없다. 그냥 단순히 대입해 보라. ‘정한 몸알’인 ‘그’를 위해 ‘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머슴, 끄나풀’이다. 정답은 ③이다.  2) 개성적 해석과 유추적 사고  그렇다면 독자 나름대로 해석해서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일반론적 해석을 자신의 경우로 적용해 보는 것이다. 가령, 수학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이 수학 시험을 치르기 전에 이 구절을 보고 '의외로 운 좋게 수학 시험을 잘 치르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노처녀라면 결혼 운이 생기겠구나로 해석하는 것이고 할머니라면 늦아들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요컨대 독자 나름의 시 해석에 대한 다양성은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하고 난 뒤의 이야기이지 일반론의 단계에서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과서적 해석을 참고서적 해석과는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가령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구절의 경우, 참고서는 무조건 '가난한 노래의 씨'는 독립의 의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 뒤에 나오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부르는 '결실의 노래'가 독립일 때, 유추적으로 미루어 해석된 결과일 뿐이다. 가령 '결실의 노래'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를 의미한다면 '눈 내리는 벌판'은 이별이 된 부정적 상황으로 유추되며, '노래의 씨를 뿌리는 행위'는 재회의 희망을 심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것을 꼭 독립의 의지라고 외울 필요까지는 없다. 참고서가 제시하는 이런 따위 수준까지 다 외우는 데서 시가 죽는 것이다. 시를 살려 정말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반론적 해석을 전제로 그것을 자신의 경우로 유추하여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시 해석 행위는 고차적 언어 능력인 추리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며 합리적인 상상력을 기르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이런 유추적 사고와 관련 있는 내용의 시 문제를 풀어 보자.  [다] 서시(序詩)  윤동주(尹東柱)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문제 1)  밑줄 친 부분의 시적 의미가 형상화된 시행을 다음에서 찾으면? (1995 기출)  ①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②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③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④ 흐르는 구름/머언 원뢰(遠雷)  ⑤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문제 2)  (가)시(김소월 [진달래꽃])의 (나)시의 화자가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작품에서 드러나는 태도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1999 수능 기출)  ① ㈏ : 당신은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면 절대 가지 말라고 임을 붙잡든지, 아니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미련을 남기지 않고 헤어지든지 했을 것입니다.  ② ㈎ : 떠나는 임에게 꽃을 뿌린다는 것도 소중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프면서도 그것을 안으로 삭이며 인내하는 것이 우리 여인들의 전통적인 정서가 아니던가요?  ③ ㈏ : 그런 태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차피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굳은 마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야 합니다.  ④ ㈎ : 임이 떠난다는 현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미련이 많이 남습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의 감정만으로 정리하기 힘든 게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요? 제가 했던 말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지요.  ⑤ ㈏ : 사실,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우리들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가 많지요 그럴 경우 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곤 합니다.  (문제 3)  를 참조할 때, ‘청산 별곡’의 화자와 ‘어부사시사’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2000 수능 기출)  갑: 차라리 강으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낼지언정, 어찌 희고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쓰겠는가?  을: 강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강물이 흐르면 내 발을 씻으리라.  ① (가)의 화자가 '을'이라면,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가)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나)의 화자가 '을'이라면,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나)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에 적응하여 분수를 지키며 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⑤ (가)와 (나)의 화자가 '갑'이라면,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설) 1. 먼저 밑줄 친 부분의 시적 의미를 알아 보자. 시적 화자는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라온 사람이다. 그래서 따라서 자신(잎새)에게 불어오는 조그만 부끄럼(바람)에도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내적 단련을 거쳐 순결한 삶을 유지하고자 애썼다는 것인데, 이런 구절과 관련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먼저 ①.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는단다. 바위처럼 강한 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다. ②는 바위를 깎는 대상들이다. 바위에게 닥친 외적 시련이다. ③은 자기 채찍질이다. 내적 단련과 관련이 깊다. ④는 바위가 지향하는 세계다. 거리낌 없음이나, 먼 곳을 지향하는 심리가 드러나 있다. ⑤ 역시 강력하고 의지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의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정답은 ③이다.  2. 두 시적 자아가 대화를 나눈다고 할 때 알맞은 것을 고르는 문제는 전체적으로 시를 감상하고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대조라는 것은 두 대상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고라는 것을 전제해 두면 각각의 상황을 대조적으로 해석해 내어서 응용하는 문제는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진달래꽃]의 경우, 이별의 상황이라는 부정적 상황에서 ‘가는 님’을 붙잡지 않고 있다. 이별을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있지 않다. [꽃]의 경우, 꽃이 피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이라는 부정적 상황에서 어떻게 하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진달래꽃]이 소극적이라면, [꽃]은 매우 적극적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문제를 풀어 보자. 정답은 ⑤  3. 청산별곡의 화자는 현실이 너무 괴로워 ‘청산을 택했지만, 현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삶의 고독과 비애를 느끼는 존재이다. 반면 어부사시사의 화자는 세속의 반대항인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고자 하고 있다. 에서 ‘갑’은 죽을지언정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삶의 자세를 보여 주고, ‘을’은 현실의 변화에 알맞게 대처하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므로 ③이 답이 될 수 있다. 답③  2. 운율  (1)음악성(운율)  1)반복  운율은 반복에서 온다. 음절수가 반복되면 음수율이 되고 음보(발음 등장성으로 끊은 음의 걸음걸이)가 반복되면 음보율이 된다. 특정 위치에서 음운이 반복되면 음위율(두운, 요운, 각운)이 된다. 수미쌍관의 구조도 일종의 음악성과 관련이 있다. 반복의 기본틀에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것이 수미 쌍관이기 때문이다.  (문제1)  을 처럼 고쳐썼을 때, 고쳐 쓰기를 통해 얻은 시적 효과를 가장 적절하게 평한 것은? (1999 수능 기출)     ♥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모방의 기술이다.   (필립 시드니)    ♥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이다. (워즈워드)    ♥ 시는 정에 감응하여 말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    ♥ 시는 감흥을 주고, 볼 수 있게 하고, 사귀게 하고, 원망하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   (공자)    ♥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맥리쉬)     시의 특성 ♠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 내면화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 '시적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시의 여러 요소 ♠ 4대 요소    ㉠ 의미적 요소(생각) : 시에 담긴 시인의 뜻과 생각 → '주제'    ㉡ 음악적 요소(운율)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감 → '운율'    ㉢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 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 → '형상'    ㉣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감정 반응 → '정서' ♠ 형식적 요소    ㉠ 시어(詩語) : 시에 쓰이는 언어로,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압축된 형태의 언어이다.    ㉡ 행(行) : 시에서의 한 줄을 가리킨다.    ㉢ 연(聯) : 시적 사고와 내용 전개의 단위로 하나 이상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 운율(韻律) :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이다.     시의 언어 ♠ 시어의 특성    ㉠ 시는 언어 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를 중시한다.                      *외연적 의미(지시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으로,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내포적 의미(함축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사이비(似而非)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 방식으로,                                              '가진술(假陳述)'이라고도 하며, 시어의 중요한 속성이다.          예> 사람이 술을 마신다.(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마신다. (가진술)    ㉣ 시적 자유(시적 허용)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와 사투리의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이 시에서는 허용됨.          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십니까?)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범하진)    ㉤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성질을 말하며, '모호성'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시어의 기능    ㉠ 음악적 효과(운율)를 줌.    ㉡ 이미지(심상)를 이루어 냄.    ㉢ 시의 어조를 만들어 냄.    ㉣ 시의 분위기(정조)를 형성함.    ㉤ 함축적 의미를 지님.    ㉥ 특수한 기법(반어, 역설, 풍자 등)에 의해 시적 긴장을 가져옴      운율의 개념          ⇒ 운율이란,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로,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가락(리듬감)을 말한다. ㈀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이 일정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                 두운, 요운, 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이 대표적이다. ㈁ 율(율격)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글자의 수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운율의 요소 ♠ 동일 음운의 반복 : 특정한 음(음운)을 반복하여 사용함.    ㈀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김소월의 "길") → 자음 'ㄱ'의 반복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 자음 'ㄹ'의 반복    ㈁ 모음 반복            예>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ㅗ'의 반복 ♠ 동일 음절수의 반복(음수율)      예> 한시, 시조, 가사, 창가 등이 대표적임.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 봄 바람이 / 남으로 오네.//  (김동환의 ) → 7.5조의 음수율 ♠ 일정한 음보의 반복(음보율) : 3음보, 4음보가 대표적임      예>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동지 섣달 / 꽃 본 듯이 /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 쓰리 쓰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 날 / 넘겨주소.//       (민요 ) → 3음보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함.      예①> 물새알은 / 물새알이라서 / 날개 죽지 하얀 / 물새가 된다.               산새알은 / 산새알이라서 / 머리꼭지에 빨간 댕기를 드린 / 산새가 된다.      예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a                            a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b                            a ♠ 의성어 · 의태어의 사용     예> 살랑살랑 물결 이는 냇가에 서면 / 가슴 안 여린 모래톱으로 / 그리움 사르르 밀려 들오고.        운율의 종류 ♠ 외형률 : 시의 표면에 겉으로 드러난 운율(정형률)    ㈀ 음위율 → 일정한 위치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한시 ·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으로 생기는 운율.              예> 영시와 한시에는 두드러지나, 우리 시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 음수율 → 글자의 수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3(4) · 4조,  7 · 5조 등.    ㈃ 음보율 → 일정한 음보(音步.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우리나라 전통 시가(시조, 가사, 민요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3음보, 4음보 등. ♠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운율.                 일정한 규칙없이 배열된 시어 속의 리듬으로, 시를 읽어가는 동안에 독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            지는 것으로, 행이나 연, 문체, 또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운율을 말한다.        운율의 효과 ♠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해 즐거움과 함께 깊은 인상을 준다. ♠ 일상 생활의 말에 대한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한다. ♠ 시의 의미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루어 낸다.         25.  제1강  박석구의 시작법 1.      시의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대상과 현상을 만납니다. 이런 대상과 현상의 모든 것을 세계라고 합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럼, 대상과 현상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한 편의 시로 표현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막연한 질문에 시인도 독자도 당황하는 때가 많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것들은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 방법을 구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기존 시인들의 작품을 수없이 읽고, 외우고, 자기의 작품을 끊임없이 쓰고, 지우다 보면 표현 방법이 저절로 터득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고, 그것은 지도 없이 세계여행을 떠나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시를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여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부끄럽지만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나의 해답일 뿐, 정답은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듯이 시를 쓰는 방법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인용한 모든 시는 나의 시 중에서 가려 뽑았습니다. 나의 시작 과정을 밝히는 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인용한 시들은 나의 삶 속에서 캐낸 평범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를 도구로 한 것들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가슴에 남은 이야기들을 시로 바꾸어 보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일지 모릅니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고, 쉬운 것이 옳다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시는 쉬워져야 합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니라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달나라나 별나라의 신기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의 이야기가 드러나야 됩니다. 이 글은 시를 전문으로 쓰는 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삶 이야기를 시로 바꾸어 보는 연습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를 쓰는 과정을 함께 가 보자는 생각에서 정한 것입니다. 평범한 마음으로 평범한 대상들을 가슴에 담아 시로 바꾸어 보자는 것입니다.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여행 준비  시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시에 대한 이론을 조금은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여행 준비. 이 장에서는 시의 개념, 표현 방법, 대상인식 등에 관한 것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시의 개념  예술은 어떤 대상(사물과 현상)에 대한 인식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중, 언어를 도구로 하는 것이 문학, 문학 중에서 운율을 강조하는 것이 운문, 운문의 대표적인 형태가 시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보면, 시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상은 시의 소재, 즉 글감을 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떤 대상이 당신에게 감흥을 주었다면, 그것이 시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시를 읽으면서 시의 여행을 준비해 봅시다.  하루에 한 번쯤은 혼자 걸어라.  세상 이야기들 그대로 놓아 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와라.  말이 되지 말고, 소가 되어  나에게 속삭이며 혼자 걸어라.  괴로움이 나를 따라 오거든  내가 나에게 술도 한잔 받아 주고  나를 다독이며 혼자 걸어라.  나무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면  마음은 어느 사이 푸른 들판  잊었던 꽃들이 피어나고  고향 내음새 되살아나  내 가슴을 울리는 나의 콧노래  하루에 한번쯤은  이렇게 나를 만나며 살아가거라.  - 하루에 한 번쯤은-  시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먹고사는 것, 혼자가 되어 한 번 걸어 보십시오. 발은 걸으라고 조물주가 만들어 준 것.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남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함께 걸어 보십시오. 가슴에 엉켰던 것이 녹아 내리고,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새롭게 눈을 떠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멀리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보이고, 가까이 보이던 것들이 멀리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그대로 담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과도 말없는 말로 가슴을 열 수가 있습니다.  풀과 나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 보십시오. 들판의 풍경들을 가슴 속에 그려 보십시오. 하늘을 향해 외쳐 보십시오. 당신 자신과 해가 지도록 얘기를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에 상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실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는 동안, 당신에게 감흥을 준 모든 사물과 현상, 즉 대상이 시의 소재입니다.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이것이 시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시에서의 언어를 시어라고 하는데, 이 시어들의 어울림이 운율입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은 우리의 가슴에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고,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는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슬픔일 수 있고, 눈가에 맺히는 몇 방울의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울부짖게 하는 함성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진실이란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는 사랑, 미움, 아픔, 기쁨, 슬픔을 거짓없이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 속에서 빚어지는 고독, 그리움, 방황, 울분 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왜, 우리는 진실을 표현하려 하는 걸까요? 말을 바꿔 보면, 왜, 우리는 밤을 새워 시를 쓰는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시를 읽는 걸까요?  시를 쓰는 이유는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시를 읽는 이유는 자신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표현과 감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신적 즐거움과 영혼의 정화입니다. 우리들의 삶을 맑고, 밝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에서의 웃음은 기쁨을 밝히는 것, 울음은 슬픔을 걸러 내는 것, 외침은 분노를 털어 내는 것. 결국, 웃음도, 울음도, 외침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정신적 배설작용입니다.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좋은 그림을 보면 마음이 고요해 지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그윽해 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모든 예술은 우리의 삶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들입니다.  시를 쓰는 일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시는 삶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시는 삶의 충분 조건일 뿐이지,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삶을 위해 시가 필요한 것이지, 시를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돌에다 이름을 새기기 위해  사는 것이 정말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삶  죽어 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삶. 3 -  우리는 지나치게 목적을 중시하고, 과정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과정, 그 자체입니다. 삶이 다른 목적을 가질 때, 그 삶은 진실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삶을 엮어 가는 수단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아닙니다. 그 진실을 실감나게 표현했을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2. 표현 방법  표현 방법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인식한 내용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묘사와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묘사는 대상의 현상이나 성질, 인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말하고, 진술은 그것들을 묘사하지 않고, 직접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는 이 두 방법이 알맞게 어우러져 그 모습을 드러내야 됩니다.  묘사의 종류에는 서경적 묘사, 심상적 묘사, 서사적 묘사로 나눌 수 있고, 진술은 독백적 진술, 권유적 진술, 해석적 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서경적 묘사는 보고, 느낀 것을 직접 그려내는 묘사이고, 심상적 묘사는 마음 속에 떠오르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고, 서사적 묘사는 사건이나 현상을 시간의 연속을 통해 그려내는 것입니다.  독백적 진술은 인식 주체의 독백, 고백, 반성, 회고, 기원 등을 진술하는 것이며, 권유적 진술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인식의 주체의 주장을 내세운 진술이며,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너무 말이 많아 미안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나누는 작업이 아니라 모으는 작업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묘사와 진술의 종류를 아는 것은 시의 틀을 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설명했습니다.  시에서의 묘사와 진술은 시적 자아에 의해 드러납니다. 시적 자아란 시 속에서의 인식 주체를 말합니다. 인식 주체는 1인칭인 '나'입니다. 소설에 빗대어 본다면 서술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시에서 주인공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관찰자일 수도 있고, 대상에 대한 전지적 제삼자일 수도 있습니다.  햇빛 부스러지는 아침  금낭화 속에서 기어 나오는  일곱 점박이 무당벌레  하, 요놈이, 어젯밤  산을 그렇게 울리었구나.  -산 29 -  1연이 묘사이고, 2연이 진술입니다. 1연은 한 폭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2연은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시적 자아를 통해 상대방에게 들려주듯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묘사와 진술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분하는 것은 묘사가 중심이 되었는가, 진술이 중심이 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것뿐입니다.  * 만나는 대상에서 느끼는 것을 가슴속에 그려봅시다. 만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한 것을 가슴에 대고 속삭여 봅시다. 이 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대상 인식이라고 합니다. 인식한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묘사의 시작이고, 인식한 대상에 대해 속삭여 보는 것이 진술의 시작입니다.  구태여 길게 묘사하고, 길게 진술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줄의 문장이 오히려 좋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본 후, 곧 바로 느끼고, 곧 바로 생각하는 직관, 대상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보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인식의 첫걸음입니다.     26.  제2강  박석구 시작법  '자, 떠납시다, 시의 여행을''  3. 대상 인식  대상인식은 대상에 대한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합니다. 묘사와 진술에 앞서, 우리는 먼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그것은 대상을 인식한 후에야 묘사와 진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인식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집니다. 언어로 느끼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식한 내용을 묘사와 진술이라는 표현 방법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상 인식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등의 3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대로 보기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고, 빗대어 보기는 그대로 본 것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여 보기는 그대로 보기나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인식한 것이 묘사와 진술에 의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①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입니다. 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아무 꾸밈없이 옮겨 본 것입니다. 다음은 빗대어 보기. 빗대어 보기의 열쇠는 질문.  연꽃이 무엇같이 피었습니까? 아니면, 연꽃이 무엇처럼 피었습니까?  ② 호숫가에 연꽃이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피었습니다.  글의 소재인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즉 '연꽃'이 무리를 지어 핀 것을 '줄등'에 빗대어 본 것입니다.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 대상을 빗대어 놓으면 상상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상상하여 보기의 열쇠도 질문. '왜? 어떻게?' 등의 여러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해답일 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질문이 달라질 수 있고, 질문도, 답도 시인에 따라 다양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피었습니까? 어떻게 피었습니까?  여기에서 '왜'는 이유, '어떻게'는 상황을 말합니다.  ③ 호숫가에 연꽃이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신 날의 줄등처럼 여기 저기 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꽃은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의 가슴속에 피어나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상하기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상인식입니다. 이 인식된 내용을 조금만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 연꽃이 피었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길 밝으라고  부처님 오시는 날의 줄등처럼  온 동네를 환하게 밝혀 놓고  여름이 다 가도록 피었습니다.  1행은 그대로 보기, 3행은 빗대어 보기, 2행, 4행, 5행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상상하여 보기 중, 2행은 '왜', 4행과 5행은 '어떻게'에 해당합니다.  대상인식 과정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그대로 보기는 씨앗, 빗대어 보기는 싹과 잎, 상상하여 보기는 꽃, 완성된 시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감흥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해도 당신이 감흥을 받지 않았다면, 그대로 보기나 빗대어 보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흥은 순간적이며 직관적입니다. 순간적이며 직관적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곧바로 느끼거나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감흥은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 단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씨가 싹이 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햇볕과 공기와 습도가 알맞게 어우러지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알맞게 어우러지는 순간에 감흥이 이루어집니다.  햇볕과 공기와 습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상을 볼 수 있는 당신만의 눈을 가지게 하는 경험입니다. 이때의 눈을 심미안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보고 쓴 시가 시인에 따라 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심미안을 기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됩니다. 질문을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면 그것들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쌓여 경험이 되고, 이 경험이 대상을 보는 당신만의 눈을 새롭게 해 줍니다. 이 눈이 당신만의 심미안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들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들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파랗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대로 보기. 주어진 상황을 인식하여 간단하게 옮겨 본 것입니다.  '파랗게 물들어 가는 들판'이 무엇과 같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빗대어 보는 방법이라고 했지요?  '한 장의 파란 화선지'  다음은 상상하여 보기입니다.  *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 분별력이 생기면서부터 만나는 대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집니다. 이 호기심이 상상의 시작입니다. 이 호기심은 만나는 대상에 대한 많은 의문을 낳습니다.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은 죄악을 낳지만, 의문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머리 속에 물음표가 들어가면 의심이 되지만, 가슴속에 들어가면 의문이 됩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상상입니다. 그 의문이 꼬리를 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상상하여 보기 방법은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가 있습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는 대상에 대한 질문을 통해 얻은 답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고,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인식한 대상에 경험 속의 상황이나 사물을 결합하여 상상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를 해 봅시다.  '들판이 화선지라면,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려면 당신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붓.'  당신은 붓이 되었습니다. 붓이 되었으면, 그림을 그려야 되겠지요?  '붓으로 무엇을 그리겠습니까?'  '고향.'  이것이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 그런데 모든 질문과 답은 당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똑같은 해를 보고 살면서도 햇빛을 받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볕을 쬐고 사는 사람이 있고, 햇살을 맞고 사는 사람이 있듯이 경험은 그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과 답도 이 경험에 따라 달라져서 상상의 세계도 시인에 따라 다르게 펼쳐집니다.  이젠 인식한 내용을 정리하여 줄거리를 엮어 봅시다. 줄거리를 엮을 때, 서경문, 서사문, 기행문, 반성문, 고백문, 회고문, 기도문, 서간문, 권유문, 광고문, 설명문, 논설문 등등의 틀을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글의 형식을 빌리든, 소설의 구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참고로 하여 정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3요소에 그대로 맞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줄거리를 만들어야 시의 틀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선, 소설의 구성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짧은 이야기를 엮어 봅시다.  여기에서 인물이란 행동의 주체인 나, 시적 자아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이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경은 시 속에 주어진 시대적,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시적 자아나 행동의 주체가 되는 사물이나 대상의 느낌, 생각, 행동,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 요소를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의 틀을 쉽게 짤 수 있습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에 나타난 인물, 사건, 배경을 알아낼 수 있다면 감상이 쉬어진다는 말입니다.  위의 인식한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리는 묘사와 진술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정리 과정에서도 퇴고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들판이 한 장의 파란 화선지와 같은데, 나는 붓이 되어 거기에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인물은 '나', 배경은 '들판', 사건은 '고향을 그리고 싶다'로 보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①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다듬어 봅시다.  ① 들판은 한 장의 파란 화선지  시어에 변화를 주어 다시 정리해 봅시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 오는 화선지 한 장  형용사 '파란'을 '파랗게 번져 오는'으로 고쳐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시구가 길어지면 행을 나누는 것이 좋겠지요?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②나는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리고 싶다.  이것도 생동감이 있게 바꿔 봅시다. 생동감을 주기 위해서는 형용사 '그리고 싶다'를 동사의 현재형 '그린다'로 바꾸면 됩니다. 이것도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모으면 하나의 짧은 시가 됩니다.  들판은 파랗게 번져오는  한 장의 화선지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시행의 균형이 맞지 않은 것 같지요? 그것은 1연 1행의 글자수가 다른 행에 비해 많기 때문입니다. 말을 바꾸어 보면, 1행은 3음보, 2행은 2음보의 운율로 이루어져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1행을 줄여야겠지요? 무엇을 줄일까요? '들판'이란 시어를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대신 제목은 '들판'이라고 하면 그 의미가 그대로 살아 남습니다.  들판  파랗게 번져오는  화선지 한 장  나, 붓이 되어  고향을 그린다.  1연은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본 서경적 묘사이고, 2연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 하나 더 상상해 봅시다. 앞에서는 질문을 통한 방법으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았습니다. 이젠 경험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펼쳐 봅시다.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는 그대로 본 것이나 빗대어 본 것에 당신의 경험 속의 이야기나 풍경, 또는 소재 등을 결합하여 줄거리를 엮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험이란 당신의 체험일 수도 있고, 책에서 읽은 것일 수도 있고, 남에게 들은 것일 수도 있고, 당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한 폭의 그림이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방법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쓰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두 방법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질문을 통한 상상하기도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질문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귀여운 꼬마가 그림에 그리고 있습니다. 하얀 종이 위에 풍경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해가 그려지고, 산이 그려지고, 나무가 그려졌습니다. 이젠 그 그림에 색칠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상상의 날개를 펴 봅시다. 시적 자아는 아빠. 당신이 귀여운 꼬마의 아빠가 되어 보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이것에 당신의 경험을 결합해 봅시다.  눈을 감아 봅시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경험한 것을 떠올린다는 말. 그대로 본 대상 속에 지난 날의 이야기나 풍경, 소재를 옮겨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눈을 감았습니까? 그럼, 어린 날의 언덕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논, 밭, 언덕, 나무, 날고 있는 새들이 보이지요. 그 중에 무엇을 불러오겠습니까? 새.  됐습니다. 그 중 한 마리만 불러와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날려 보십시오.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여기까지가 경험을 되살려 상상하기. 이제 중심 소재가 된 '새'를 구체화해 봅시다. 구체화도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질문을 해 봅시다.  새는 어떤 새일까요?  학.  어떤 학입니까?  종이학.  종이학은 누가 접었습니까?  아내.  '새'를 '아내가 접어놓은 학'으로 구체화하였지요?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다.  행을 나누어 정리해 봅시다.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그런데 무엇인가 빠진 것 같아 허전하지요?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을 그렸을 뿐,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어에는 음악성. 회화성, 의미성이 함께 드러나야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어의 3요소라고 합니다. 음악성은 운율, 회화성은 심상(이미지), 의미성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각, 곧 주제를 말합니다. 이 시는 의미성이 약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겨야겠지요? 이것이 퇴고입니다. 시어를 고르고, 운율을 맞추고. 이미지의 적절성을 검토하고, 주제가 잘 드러났는가를 되새겨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열쇠는 질문이라 했습니다. 꼬마는 지금 색칠을 하고 있지요? 그림을 다 그렸습니까, 그리지 못했습니까? 시를 읽어보면, 아직도 다 그리지 못했지요? 아직도 색칠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를 첨가하여 당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면 어떨까요?  꼬마가 색칠하는  그림 속으로  아내가 접어놓은  학이 날고 있구나.  아직도 다  그리지 않았는데.  1연은 마음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린 심상적 묘사, 2연은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이처럼 상상의 세계는 당신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제목은 '들판'이라고 해도 좋고 '풍경'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생각해 보니, '풍경'이 어울릴 것 같군요.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까.  * 꼬마의 '그림'은 '희망'입니다. 자기 앞에 펼쳐진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내가 '접어놓은 학'은 '동경'입니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언제나 한 발 앞서 가는 마음이지요. 그러나 아이의 삶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학을 접을 수 있는 아내의 마음도 아름답고, 그것을 지켜보는 당신의 마음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삶들이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숨쉬는 세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삶 속에서의 아름다움을 당신이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발명이 아닙니다. 이미 조물주가 마련해 준 것을 찾아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마음들이 빚어 놓은 상상의 세계에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픈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처럼 상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대상 인식이 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시상이 엮어지고, 묘사와 진술, 즉 표현 방법이 결정되고, 어느 정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며, 시적 자아의 위치와 태도, 어조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느낌과 생각)이 시의 전체분위기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인식은 시의 주춧돌이고, 시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 인식, 즉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 중,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빗대어 보기입니다. 빗대어 보기는 나무의 잎처럼 무성하고, 다양하여 상상하여 보기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을 알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뒷장에 싣겠습니다. 당신의 필요에 따라 읽으셔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이론은 시를 쓰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이론에서 벗어나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시에 대한 이론도 시의 자유를 위해 있어야 합니다.     27.  제3강 박석구 시인의 시작법  2. 여행 연습. 1  지금부터 우리는 그대로 보기와 빗대어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엮어 보거나,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보거나, 한 묶음의 생각을 털어놓는 연습을 해 봅시다. 이것이 상상하여 보기, 시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꽃을 피우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짧은 시를 써 봅시다.  이제, 상상력이라는 카메라 하나 짊어지고, 무지개 빛 마음이 머무는 곳에 렌즈를 대고 사진을 찍어 봅시다. 무지개 빛 마음이란 아름다운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에는 수많은 삶의 빛깔들이 굴절되어 있습니다. 삶의 기쁨,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아픔, 분노 등 모든 빛깔들이 스며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 빛 마음은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음입니다.  렌즈는 대상을 보는 당신의 눈, 즉 심미안을 말합니다. 필름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굴절되는 대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마음의 굴절은 그대로 보기, 빗대어 보기, 상상하여 보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상인식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굴절을 이루게 하는 직관입니다. 직관은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직관이 시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트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다시 더욱 살진 씨앗으로 돌아갑니다. 이 씨앗도 잘 정리하면 짧고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직관의 주체, 즉 인식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꽃이 웃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웃을까요? 새가 울고 있다면, 누구를 보고 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누구에게 불어오는 걸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모든 인식의 주체는 바로 당신입니다. 이때의 당신이 시적 자아입니다.  걸음을 옮깁시다, 그러나 서두르지 말고. 지금부터 당신은 만나는 대상에 대해 순간적으로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리하는 연습을 해 보는 것입니다. 시의 씨앗, 즉 직관을 모아 보자는 것입니다.  * 길  길을 걸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당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입니다. 즉 대상인식입니다. 인식한 내용을 정리해 봅시다.  정리한다는 것은 당신의 행위, 느낌, 생각을 간추린다는 말입니다. 될 수 있으면 짧게, 순서에 맞게 한 편의 이야기, 한 폭의 그림, 한 묶음의 생각으로 정리해 봅시다. 기본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시에서의 그림이나 생각도 결국에는 문자에 의한 표현이므로, 줄거리를 만들어 정리해 보자는 것입니다.  앞에서 줄거리를 엮을 때는 서경문, 서사문, 기행문, 반성문, 고백문, 회고문, 기도문, 서간문, 권유문, 광고문, 설명문, 논설문 등등의 틀을 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줄거리를 엮어 정리해 봅시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여기까지가 인식 내용 정리입니다. 서사문의 틀을 빌렸지요? 앞에서 줄거리를 엮기 위해서는 소설의 구성 3요소를 빌리자고 하였습니다.  '길'이 배경이고, '나'는 인물이고, 나머지의 느낌과 생각, '걷고 있는데' '기분이 좋았다'를 사건이라고 생각합시다.  시도 결국에는 삶의 이야기라 했습니다. 이것은 압축되어 소설과 모습을 달리하지만, 시의 내용을 유추해 보면, 거기에는 한 편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은 불안하실 겁니다.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것도 한 편의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해 봅시다. 생략할 수 있는 것은 생략해 봅시다. 이것이 압축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다.  이것을 재정리라고 이름을 붙여 봅시다. 시에서 퇴고란 모든 제작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재정리도 퇴고의 한 방법입니다. 재정리를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시의 틀이 저절로 짜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다듬어서 행을 구분하여 봅시다. 이것이 구성입니다.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연과 행을 구분하여 시의 틀을 짜는 것입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다.  어디인가 어울리지 않고 흥이 나지 않지요? 그것은 행과 행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운율이 고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낭송하기에 좋지 않다는 말이지요.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유치한 것 같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예술은 당신이 바로, 유치하다고 생각한데에서 출발했으니까. 유치하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거짓이 없다는 말과 통할 수 있으니까. 예술의 시작은 우리가 흔히, 천하게 이르는 말, '째'가 '멋'으로 변하여 발전한 것입니다.  행의 균형을 맞추어 운율을 골라 봅시다.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걷고 있는데'를 '걸었네'로 압축했습니다. 이렇게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고, 줄일 것은 줄이는 것, 이것이 퇴고입니다. 퇴고는 시에 따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는 마음으로 여러 번 낭송해 보면, 곧 고칠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의 입으로 직접 낭송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도 함께 따라 읽을 테니까.  그래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쉬움이 남지요? 아직 완결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길을 계속 걸으십시오. 이것이 시의 여행. 혼자 걷는 동안, 만나는 대상과 가슴에 밀려오는 생각들이 다음에 이어질 시어와 시구를 마련해 줍니다.  당신은 지금,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가슴에 안겨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들이 노래를 부르지요? 풀꽃들이 웃지요? 그대로 듣고, 그대로 보며 걸으십시오. 그러다 보면, 새도, 풀꽃도, 당신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아지경.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기분이 너무 좋지요?  방금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새들의 노래를 듣고, 풀꽃들의 웃음을 보며 걸으니,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다.  이것을 앞 시구의 운율에 맞춰 다듬어 봅시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네.  앞의 시구와 이어 봅시다.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너무 좋았네.  1연과 3연의 '너무'가 동어 반복이지요? 3연의 '너무'를 '더욱'으로 바꿔 옮기면 어떨까요?  길을 걸었네.  아무도 없어  너무 좋았네.  새들의 노래  풀꽃들의 웃음  나마저 사라져  더욱 좋았네.  '그대로 보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 편의 시를 완성했습니다. 표현기교는 영탄법. '너무 좋았네' '더욱 좋았네.'는 시적 자아의 즐거운 마음을 감탄조로 드러낸 것입니다. 표현 방법은 1연과 3연은 당신의 마음을 당신에게 털어놓은 독백적 진술, 2연은 서경적 묘사입니다.  어떻습니까? 짧지만 그런 대로 운율이 맞아 흥이 나지 않습니까? 흥이 나지 않으면 자꾸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다듬어져 운율에 맞을 테니까.  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하나의 이야기도 다듬으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이 아닙니다. 들판에 있는 누구나 딸 수 있는 과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는 평범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일 뿐입니다.  위에서, 시의 형식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의 형식은 행과 연을 말합니다.  행은 시인의 호흡에 따라 나누어진 시에서의 한 줄, 연은 리듬에 따라, 의미(내용)에 따라, 이미지(심상) 변화에 따라 나누는 시에서의 단락을 말합니다.  형식에 맞추었으면, 다음은 운율을 골라야 합니다. 운율은 시에서의 운과 율을 말합니다. 운은 정해진 위치에 같은 소리나 비슷한 소리가 나는 시어를 배치하는 소리의 규칙성을 말하고, 율은 시어들끼리 어울리는 가락의 규칙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에서는 운보다 율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율(가락)에는 음수율과 음보율이 중심이 됩니다. 음수율은 시어들의 규칙적인 글자수의 어울림을 말하는데 3·4조, 4·4조, 7·5조가 우리나라의 시에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음보율은 시를 낭송할 때, 끊어 읽는 반복적인 가락의 어울림으로 2음보, 3음보, 4음보가 있습니다. 이것을 규칙적으로 지키는 것 외형률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낭송하기가 좋으면 운율이 고른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우리의 정서에 맞는 가락을 익히게 되고, 나름대로의 가락을 가지게 됩니다. 거기에 맞으면 운율이 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재율이라고 합니다.  다시 연습을 시작합시다.  * 봄  봄이 왔습니다. 개나리꽃이 웃고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뻐꾸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것이 그대로 보기. 당신이 당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당신은 지금, 웃겠습니까, 울겠습니까?  빨리 대답해 보십시오. 시간이 걸리면 빗나갑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습니다. 이젠, 당신이 처한 상황에 당신의 대답을 섞어 정리해 봅시다.  봄이 와서 개나리는 웃고 있고, 뻐꾸기는 울고 있어서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동어 반복이나 의미의 중복을 피하는 것이 생략의 기본. 생략할 수 있는 것을 생략하여 봅시다.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고 있어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다시 한 번, 다듬어서 정리하여 행을 구분해 봅시다.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고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봄의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개나리는 웃고, 뻐꾸기는 울까요? 그 원인은 당신 가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웃고 싶은 맘과 울고 싶은 맘이 함께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개나리는 웃게 했고, 뻐꾸기는 울게 했습니다. 이것이 감정이입,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인식하는 대상에 옮겨 놓는 것을 말합니다.  표현 방법은 1, 2행은 봄의 풍경을 요약적으로 그려낸 서경적 묘사, 3, 4행은 당신의 마음을 고백한 독백적 진술입니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대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의인법은 대상 속에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생동감을 주는 비유법, 대조법은 상반된 시구를 대비시켜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강조법입니다.  *이른 아침  이른 아침, 당신은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슬에 몸이 점점 젖어옵니다. 그런데 새들이 자꾸만 울어댑니다.  그렇다면, 새들에게 한 마디 해야겠지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몸이 더 젖기 전에 어서 말해 보십시오.  새들아, 울지 말아라. 벌써, 이슬에 몸이 흠뻑 젖었단다.  행만 구분하면, 시가 됩니다.  새들아, 울지 말아라.  벌써, 이슬에  몸이 흠뻑 젖었단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돈호법. 돈호법은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불러 정서적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표현 기교입니다. 표현 방법은 동조, 참여, 각성을 청하는 권유적 진술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 어젯밤 꿈에 슬픈 꿈을 꾼 모양이군요? 이슬에 몸이 젖고 새소리에 맘이 젖는 걸 보니.  *부엉이  달밤의 숲 속. 부엉이 한 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다음은 상상하기. 상상하기의 열쇠는 질문이지요?  지금, 부엉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부엉이가 되어 '부엉'하고 울어 보십시오. 귀신들마저 천리 밖으로 도망을 칠 테니까. 이제 알았지요, 부엉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가 숲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정리해 봅시다.  달밤에 부엉이가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  '달밤'이 배경이고 '부엉이'가 인물이고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가 사건입니다. 시의 형식에 맞추면 금방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옮겨 봅시다.  달밤에 부엉이가  혼자서 눈을 부릅뜨고  숲을 지키고 있다.  낭송해 봅시다.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지요? 운율이 고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어를 골라야겠지요?  달이 뜨는 밤에는  부엉이 혼자서  숲을 지킨다.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하나로 어우러졌지요? 서경적 묘사란 어떤 풍경을 눈에 보이게 그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해석적 진술은 대상에 대한 인식 주체의 이해, 해석, 비판, 판단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묘사와 진술은 이처럼 하나로 녹아 어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정말, 지금 부엉이는 숲을 지키고 있을까요? 그런데 부엉이를 지켜보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습니까?     28.  제4강 박석구 시인의 시 작법  *오줌  연잎 위에 이슬이 고여 빛을 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호숫가에서 본 풍경입니다.자, 한 번 물어 봅시다. 당신이 당신에게  '이슬이 무엇처럼 빛을 내고 있습니까?'  '구슬처럼.'  다시 한 번 물어 봅시다.  만약, 연잎 위에 오줌이 고인다면, 구슬처럼 빛을 낼까요, 빛을 내지 않을까요?  대답해 보십시오. 모르겠으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이 연잎 위에 오줌을 직접 싸 보십시오. 대답이 생각났다면, 인식하기가 끝났습니다. 다음은 정리하기.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 이것도 압축입니다.  오줌도 연잎 위에 고이니,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  '오줌'을 인물, '연잎'을 배경,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를 사건이라고 생각합시다. '오줌'을 인물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생각의 전환입니다. 생각의 전환이야말로 직관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 이것이 상상의 뇌관입니다.  다듬어 봅시다. 매듭을 만들어야겠지요? 매듭을 만든다는 것은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  오줌도  연잎 위에 고이니  구슬처럼 빛을 내는구나.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알맞게 어우러진 시가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야릇한 웃음이 배어 나오지요? 이것은 풍유법, 대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서 비꼬아 보는 표현기교입니다.  '오줌'은 보조 관념, 원관념은 뒤에 숨었습니다. 무엇이 숨었을까요? 그리고 '연잎'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연잎'은 '좋은 자리, 높은 자리, 힘있는 자리, 그래서 모두가 앉고 싶은 자리'가 아닐까요? '구슬'은 '가치 있는 것'. 그렇다면, '오줌'은 '사이비' 곧 '빛 좋은 개살구'가 되겠군요. 시어의 속에 숨겨진 의미, 이것이 상징적 의미입니다.  * 단풍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어디서나 만나는 풍경이지요?  단풍은 어젯밤 무엇을 했기에 저렇게 타오를까요?  화내지 않을 정도로 은근하게 단풍에게 물어 보십시오. 무엇을 상상했기에 은근하게 물어야 되는 걸까요? 짙은 사랑 이야기 하나, 상상했지요? 이젠, 당신의 질문을 다듬어 옮겨 보십시오. 단풍에게 직접 묻는 형식으로 바꾸어 행만 구분하면, 멋진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젯밤 너는  무엇을 했기에  지금도 그렇게  타고 있느냐.  이런 때는 단풍나무의 대답은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가 당신의 가슴속을 훔쳐보려 할 테니까.  이것이 여운입니다. 질문만 던져 놓고 답을 하지 않는 것.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 스스로 찾게 하여 독자의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방법입니다.  여운을 남기는 방법에는 위와 같이 질문만 하고 대답하지 않는 방법과 시구의 한 부분을 생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방법을 문답법, 시구의 한 부분을 생략하여 여운을 남기는 방법을 생략법이라고 합니다.  표현방법은 대상에 대한 판단을 숨겨 놓은 해석적 진술입니다.  * 잔치  똥 위에서 파리 떼가 윙윙거립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풍경입니다. 이처럼 시의 소재는 어느 곳에든지 널려 있습니다. 질문을 해야겠지요?  지금, 파리들은 똥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상상하여 대답해 보십시오.  잔치.  내용을 정리해 옮겨 봅시다.  똥 위에서 파리들이 온종일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조금만 손질하여 행만 구분하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짧은 시, 그러나 너무도 긴 시.  똥 위의 파리 떼들  온종일 잔치를  벌이고 있구나.  '똥'은 무엇을 의미하고, '파리'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똥'은 '부정적인 것', '파리'는 '부정적인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파리 떼들에게 습격을 받을지 모르니까?  뭔가 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물려주지 않습니까? 가끔은 이렇게 욕을 하며 사는 것이 삶이 아닙니까? 욕도 멋지게 하면 시가 될 수 있습니다.  표현 방법은 눈에 비친 풍경을 빗대어 드러낸 서경적 묘사와 대상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해석적 진술이 어우러졌습니다. 표현기교는 풍유법과 영탄법입니다. 풍유는 원관념(어떤 대상이나 의미)을 완전히 뒤에 숨기고, 보조관념(다른 대상)만으로 숨겨진 본래의 의미(어떤 대상이나 의미)를 암시하는 비유입니다. 특징은 비판성, 교훈성, 풍자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대상을 비꼬아 놓았지요? 이것이 풍자성입니다.  이런 것이 시냐고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도 시입니다. 시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것은 특별한 것처럼 행동하는 시인들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것, 생각되는 것을 다듬어서 옮기면, 그것이 시입니다. 그리고 시는 특별해지고자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마음, 우리의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 휘파람  바람이 불어옵니다.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나무가 흔들립니다. 휘파람 소리가 납니다.  지금, 휘파람을 부는 것은 나무입니까? 바람입니까?  답을 알았다면, 인식하기가 끝납니다. 정리해 봅시다. 정리할 때는 소설의 구성 3요소를 인물, 사건, 배경을 가슴에 새기며 정리해야 합니다.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들이 몸을 흔들며 휘파람을 분다.  문장 성분의 위치를 바꿔 시의 옷을 입혀 봅시다. 문장 성분의 위치를 바꾸는 것, 이것도 퇴고의 한 방법입니다.  바람이 부니  나무들이 휘파람을 분다.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표현기교는 의인법, 표현방법은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이 하나로 어우러졌습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는 휘파람을 붑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불안하지요? 휘파람과 먹구름은 서로 상대적인 시어입니다. 휘파람은 긍정적 의미로, 먹구름은 부정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두 시어 중, 어느 시어가 전체의 분위기에 영향을 줄까요? 먹구름이지요? 왜, 그럴까요? 마음속으로 소리나지 않게 읊어 보십시오. 그러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 전체에 영향을 주는 시어가 긍정적으로 쓰였느냐, 부정적으로 쓰였느냐에 따라 그 시의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시를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어의 쓰임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시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희망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 먹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무처럼 휘파람을 부는 놈이 있으면, 그놈에게 쑥떡이나 하나 먹여줍시다.  표현기교는 의인법과 도치법, 표현방법은 독백적 진술입니다. 의인법은 대상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비유법, 도치법은 문장 성분의 순서를 바꾸어 시적 여운을 남기는 강조법입니다.  의인법을 잘 활용하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깁니다. 모든 대상을 의인화해 보십시오. 거기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당신의 가슴에 안겨 와 다정히 속삭일 것입니다.  그리고 도치법도 잘 활용하면, 멋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평범한 문장이라도 문장 순서만 바꾸면, 멋진 시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럼, '꽃이 피려고 하는데, 비가 오는구나.'를 '비가 오는구나, 꽃이 피려하는데'로 바꾸어 읽어봅시다. 느낌이 다르지요? 이것이 도치법이 주는 잔잔한 감동입니다.  * 허수아비. 1  바람이 붑니다. 허수아비가 논 가운데 홀로 서서 흔들립니다. 새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가을 들판의 풍경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허수아비는 논 가운데 홀로 서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전환이라고 했습니다. 허수아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머리 속이 아니라 가슴속에 있습니다. 답이 생각났으면, 정리하여 봅시다.  바람이 부는데, 허수아비 혼자서 새떼들을 쫓고 있다.  다듬어 봅시다.  바람이 부는데  허수아비 혼자서  새떼를 쫓고 있네.  * 지금쯤 허수아비는 들판에서 땀을 펄펄 흘리고 있을 겁니다. 그놈 덕에 우리가 배부르게 먹고사는 것이 아닐까요?  표현기교는 의인법, 표현방법은 서경적 묘사와 해석적 진술의 조화. 시어를 한번 되씹어 볼까요? 되씹어 본다는 것은 시어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보는 것. '허수아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허수아비가 아닌 다른 무엇을 나타내는 걸까요? 이것이 상징적 의미입니다. 겉에 드러난 시어의 의미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는 것, 이것이 시의 감칠맛입니다.  * 생각해 봅시다. 지금도 자기의 일터에서 땀을 펄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슬픈 이야기지만, 바로 그분들이 허수아비가 아닐까요?  * 그림자  당신은 깡말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그림자도 깡말랐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당신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자, 상상의 날개를 펴 당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겨울이 와 옷을 껴입으면, 당신의 그림자는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대답을 당신의 질문과 섞어 정리해 옮겨 봅시다. 현재시제의 문장으로 다듬어야 현장감이 있겠지요?  겨울이 와 옷을 껴입었는데도, 내 그림자는 나처럼 여전히 깡말랐다.  다시 다듬어 형식에 맞추어 봅시다.  겨울이 와  옷을 껴입었는데도  내 그림자는  여전히 깡말랐구나.  당신의 그림자는 어떤 빛깔입니까? 부처님과 예수님의 그림자는 금빛. 이젠 알겠지요, 당신 그림자의 빛깔을? 검은빛이나 회색빛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림자'가 머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깡마른 당신의 그림자'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당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아닐까요?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속아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한, 우리들의 어릿광대 같은 몸짓이 그림자가 아닐까요?  동물원에 갇혀 사는 호랑이에게 가 물어 보십시오, 가죽을 남기기 위해 죽겠느냐고. 그래서 우리도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야 하느냐고.           시어(詩語)  1   [Ⅰ]:시어(詩語) '詩는 문학의 정수(精髓)'니, '詩는 문학의 꽃'이니 하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고 듣습니다.  그 까닭은 시가 가장 짧은 형태 안에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해 나갈 '시(詩)의 요소(要素)'인 언어·운율[리듬]·이미지·비유·상징 등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 공부를 하거나 '시 짓기'를 하거나 할 때, 우리가 진실로 알아야 할 것들은 시의 기원이나 시의 정의나 시론이나 시의 분류가 아니라 바로 이제부터 공부할 시의 요소들이지요. 이 시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시 공부입니다.  그럼 제6강에서는 시에 씌어지는 언어인 시어(詩語)부터 우리 공부를 시작해 볼까요?  1. 시어(詩語)란 무엇인가?  그럼 시의 요소 중의 하나인 이 시어란 무엇일까요?  골치부터 아퍼 오지요?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쉽게 쉽게 넘어갈 테니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시어란 '시에 쓰이는 언어', '시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럼 '시에 쓰이는 언어가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활하면서 주고받는 대화에서 쓰는 말들을 시에서 쓰면 그것이 시어가 되는 것이지요. 뭐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그런데 소위 유식한 분들은 거창하게 '시는 고도의 언어 예술'이므로 '시어란 시에 동원되는 특별한 낱말과 어귀'란 뜻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들과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래서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감히 시 근처에나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시의 독자들이 자꾸 줄어들지요.  그리고 요즘 보세요. 어떤 시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시어를 의식하면서 시를 짓고 있나요? 요즘 시인들은 어떤 시어든지 자기의 시상(詩想)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되면 그 시어를 가져다 쓰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지저분한 부분이나 거슬리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제 시 제가 그리 쓰겠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옛날에는 동서양 구분 없이 시어에는 일반적인 언어와는 달리 어떤 우아함이나 고상함, 또는 장중함 같은 느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에 쓰이는 언어인 시어에서 고어(古語)나 아어(雅語) 등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별도의 성구(成句) 등도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영국의 T.그레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보통의 언어가 필요에 의해서 특수화되면서 거리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시어인데 라틴어의 완곡한 표현체인 고어체를 고쳐 놓은 것이다.'라고 한 데서도 입증되고 있지요.  그러나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의 서문에서 시의 감동적인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들은 시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요. 결국 워즈워드에 의하면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럼 우리가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그 언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공부할 기회가 오겠지만 우선 여기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비유나 상징 등으로 인하여 시어가 지니게 되는 언어의 특수한 기능 때문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직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시에 대해서 情이 뚝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2. 시어(詩語)의 함축적(含蓄的) 의미(意味)에 대하여  제목만 봐도 한자가 많아 한글 세대들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지요?  그럼 이야기나 한 자루 하며 좀 쉬어 갑시다.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김 삿갓 난고 김병연의 시 한 수 볼까요?  月白雪白天地白 (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천지가 희고]  山深水深客愁深 (산심수심객수심)  [산도 깊고 물도 깊어 객수도 깊구나]  이 얼마나 간결하게 쉬운 글자들로만 시를 지었으면서도 달빛 희게 부서지는 깊은 산 속에서 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리 잘 표현했을까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유식한 한학자들이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들로만 지은 어려운 한시들보다야 이 시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가슴을 때립니까? 그럼 한 수 더 살펴볼까요?     시어(詩語)(2)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주는구나]  人間豈有七十事(인간개유칠십사)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것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내 집에 돌아가 선 밥 먹음만 못하구나]  이 시는 김 삿갓이 한문 숫자풀이를 이용하여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 받은 나그네의 심정을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읊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십수(二十樹)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스무나무를, 삼십객(三十客)의 삼십(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으로 써서 삼십객(三十客)은 '서러운 나그네'를, 사십가(四十家)의 사십(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으로 써서 사십가(四十家)는 '망할 (놈의) 집'의 뜻을, 오십식(五十食)의 오십(五十)은 '쉰'(상한)이니 오십식(五十食)은 '쉰 밥'을, 칠십사(七十事)의 칠십(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으로 써서 칠십사(七十事)는 '이런 일'의 뜻을, 삼십식(三十食)에서는 삼십(三十)의 '서른'을 '미숙한, 선'의 뜻으로 써서 삼십식(三十食)은 '설익은 밥', 즉 '선 밥'의 뜻으로 노래한 시이지요. 그 기지와 풍자가 놀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한문 숫자인 '二十, 三十, 四十, 五十, 七十, 三十'은 모두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 이외에 또 하나의 다른 뜻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지요.  이런 것을 두고 시어의 이중성이라 하는데, 하나의 시어가 두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시어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셋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시어와 산문의 언어가 다르게 느껴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에서 그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서 화담, 박연 폭포와 더불어 송도 삼절로 불리고 있는 황진이의 시조를 살펴볼까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서 '벽계수(碧溪水)'는 '푸른 계곡 물'인 동시에 왕실 종친이었던 '벽계수'를, '명월(明月)'은 '밝은 달'과 황진이 자신의 기생 이름인 '명월'을 동시에 뜻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시어가 지니는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시어에 함축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시에서 '푸른 계곡 물'과 '밝은 달'의 의미는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로서 이런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고, '벽계수'와 '명월'처럼 이 시 속에서만 중의적으로 그 뜻을 지니는 시어의 의미를 '함축적 의미'라고 하지요.  내 설명이 어렵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내 실력이 이 정도뿐이니 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럼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장미'가 시어로 씌어졌다고 할 때, 그것이 '관상용 식물인 장미과의 낙엽 관목'을 나타내는 시어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사전적 의미'로 쓰인 것이요, 만일 '사랑하는 이에 대한 나의 정열적 사랑'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함축적 의미'로 쓰인 것이지요.  이제 시어의 '함축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합시다.  3. 시인(詩人)과 시어(詩語)  이제 시인과 시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에 사용된 언어는 모두 시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구요?  같은 대상을 두고 두 사람이 시라고 썼는데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고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시냐 아니냐의 가름은 두 사람이 사용한 시어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어를 썼다 하더라도 그 시어가 적확하게 제자리를 잡아 앉았느냐도 문제가 되고 그 대상을 표현하는데 그 시어가 최선의 시어였느냐 아니냐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시인 개인의 시적 역량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시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 관념을 뛰어넘어서 독자로 하여금 폭넓은 상상력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한 편의 시 속에서 그 시의 내용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면서 시어 하나 하나가 표현하려는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 또는 이미지를 확대시켜 우리에게 간명하게 전달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시어로 시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시인의 몫이지요.  그래서 시인에게 시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수영의 '풀'을 한 번 볼까요?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가 나오기까지 풀은 세상에 흔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1960년대 말 김수영 시인에 의해서 억압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서서 불의에 맞서 항거하는 '민중(民衆)', '민초(民草)'의 상징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풀'은 김수영 시인의 '풀'로 태어나 모두의 '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사용된 '풀'이 바로 시어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춘수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김춘수 시인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이 시인은 시어의 의미를 확대 재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나의 애송시를 찾아 그 시에 나오는 시어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비유의 효과  비유는 우리가 외출할 때 아름답게 화장을 하듯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닦아서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계 기구의 활용법을 잘 알아야 그것들을 이용하기 쉽듯이 비유의 진정한 힘과 효과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오늘까지 강의를 들으셔서, 쉽게 설명하긴 어렵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이 것이다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 상황,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  즉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관념까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지름길 입니다.  이제 우리가 학문적으로 다루니까 그렇지 시가 아니고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간재미 같은 눈, 단추구멍 같은 눈이라 한다던지,  꾀꼬리의 목소리라 하는 것, 바람처럼 사라지다라는 영화제목, 아마 말의 종류만큼 많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비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구절 말고도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알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그렇다하니,  비유는 우리에게 보다 알아먹기 좋게 하는 표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가운데 그 형식의 대부분이 시적 형식을 취한 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성경도 비유문학이라 할 정도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곁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일일이 예를 들지 않으니 여러분께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집착이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비유를 통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장황스러운 설교조의 말보다 휠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 것은 비유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의 설교도 그렇구요.  티비에 나오는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모두 다 좋은 비유를 통해 청중들이 쉽게 알아먹게 하려고 애 쓰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지요.  그렇듯 시 역시 시인의 통찰력과 인지력,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생동하는 언어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면서 독자들을 시인의 세계 속으로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의 힘  시인이 의도하는대로 비유가 시 속에서 강력히 힘을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한 기능과 에너지가 최대한 살아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좋은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비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줍니다.  비유에 의해 사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확대 심화시켜 나감으로 우리의 인습과  고정관념의 무지와 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고까지 말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가 지니는 리얼리티(사실성)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둘째)  좋은 비유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쉽게 가시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대웅님의 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술취한 아버지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딜 그렇게 올라 가세요.  낙엽 긁어 모으며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계곡  녹슨 세월의 송전탑  숨은 아들 대답하지 않는데  되돌아오는 메아리만 가슴을 태우는 山  자꾸 뭐하러 올라가세요  그게 아니다 애야 그런게 아니라고  붉은 손 흔들어 길 막는 너도밤나무  온통 아픈 울음 가득 토해내도  아버지 넘어지며 자꾸 넘어지며.....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비유이지요.  술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로 가을 산을 비유했습니다.  왜 이 시가 좋은 시가 되냐하면요.  우리는 보통 가을 산이라하는 시를 쓰거나 내용에 가을 산이 들어가게 되면, 불타오르는 산, 불꽃 같은 산, 열정, 열애 등  을 금방 떠 올리거나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만은 이 시인의 독창적인 눈으로는  아주 색다른 비유로 아버지의 술 취한 얼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 것도 술에 취해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울면서도 자꾸만 넘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초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시면서 아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만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세월의 산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늙어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습 니까?  셋째)  좋은 비유는 풍부한 시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 것은 하나의 점이나 선일까요?  평면이나 어떤 도면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비유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해집니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잘 아십니다.  보이지는 않고 코끼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꼬리나 배를 만진 사람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독자들이 그 시를 읽는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가 일단 발표되면 이젠 독자의 몫이 된다고 늘 강조하는 것은  나의 해석과 다른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복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이방)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같 밑으로 大地(대지)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좀 어려운 시이네요.그러나 분석해보지요.  여기서 원관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입니다.  그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 '짐승', '별', '정적'.'꽃씨',  '정적', '죽음','순간','머나먼 곳','내 손가락 끝' 등 여러가지이지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는 당신이란 원관념에 대해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면서 '당신'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결합하는 보조관념의 대상들까 지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비유는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지요.  시를 읽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시라면 그 것은 죽은 시 아니겠어요?  요즘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실험적인 경향이 있어 현재의 시경향을 해체시켜버리려는 의도도 있고요.  감동보다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효용론에 입각한 주장도 있지만 저는 일단 시는 감동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좋은 비유로 쓴 시는 마치 수문을 열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 우리의 감동이, 정서가 밀려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대흠의 이라는 시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다섯째)  좋은 비유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원근님의 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이슬'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맑고 투명한 것,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이 '이슬' 에서 '돛자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가게하기 위하여 돛대에 높게 펼쳐 매단 넓은 천인데,  이슬을 돛자락에 비유함으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광활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이슬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치 푸른 바다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흰 돛자락인 양 '이슬'이 한없이 크고 넓게 느껴지기 조차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좋은 비유는 시적 대상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역시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동주님의 전문입니다.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이 고향이신  이동주님의 시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시비로 서있습니다.  다음에 해남 대흥사에 가시는 분들은 주차장 앞에 이 시  비를 보시면 강의를 받던 기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지요?  그들을 여울에 몰린 은어떼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달빛에 비추인 가녀린 팔목들을 여린 삐비꽃의 하얀 속살로 비유한 것이라던지,  강강술래의 원을 하늘에 떠 있는 달무리로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비유들은  훨씬 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또한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나 '열두발 상모가 돈다'나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등의 비유는 춤을 추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할 뿐만 아니라  그 춤의 역동성을 잘 나타내주어 독자로 하여금 절정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좋은 비유가 얼마나 시를 살려주는가 위의 여러 예들로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옮겨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해 표현 한다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은 시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비유와 죽은 비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시가 아니고도  우리가 보통 잘 쓰는 죽은 비유를 몇 개 더 들어볼테니 여러분도 더 찾아보시고,  이런류의 죽은 비유를 시에 사용하시면 안되겠습니다.  -사랑의 불꽃, 교통 전쟁, 입시 지옥, 증권 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엔 아주 멋진 표현이며 살아있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은유는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되겠 지요.     죽은 비유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지요.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같은 인생",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네", " 쏜살 같은 세월"," 샛별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살결". "목석 같은  사내", "여자는 여우",남자는 늑대", "여자는 갈대""쟁반 같은 달", "사랑은 불꽃" "토끼 같은 아이들", 등은 이미 죽은 비유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습관화되고 상투화되었기 때문에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자동화된 비유,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두진의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호심)아  조태일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위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의하여 발견된 '속삭임', '울음',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때 솟아나는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 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그러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것은 당연히 시인이 관습적이고 자동화된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박인환님의 을 싣습니다. 좋은 시 올리는 것들은 모두 전문(全文)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랴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홍윤숙님의 를 읽겠습니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서 눈처럼 하얗게 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 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운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이미경님의   유달산 외곽도로 따라 갔더니  잎 지는 나무들 서 있었네  아침 안개 속에 서 있었네  나 상수리 나무 옆에 섰네  딸이여 안녕  당신도 안녕  깃털처럼 드디어 무게도 버리고  상수리 나무 한 잎으로  바스러지고 싶었네  유달산 외곽도로  외길 따라 갔더니  바다 있었네  비단 치마폭 바람에 살랑이듯  그렇게 있었네  나 목선 옆에 누웠네  효부도  현모양처도  그리고 매력을 꿈꾸던  내 여성도  신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벗어놓고 가라앉고 싶었네  머리도 가지런히 눕고 싶었네     시와 비유(比喩)-비유법을 알면 시를 절반은 쓴것  아마, 학창 시절에 배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고등학교에서 배울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드립니다.  비유법을 알면 시를 절반은 쓰신겁니다.  우선 김준오님의 『詩論』에서 비유에 관한 것들을 찾아보기로 하지요.  국내에 시론이 아주 많이 발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사에서 나온 『시론』이 제일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1)동일성의 원리  시인들은 어떤 묘사를 위해서만 이미지를 사용하진 않습니다.  비교에 의해서 관념들을 표현하고 전달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 비교가 비유적 언어, 즉 비유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룩스와 와렌의 이론이 아니고도, 비유가 일종의 비교인 이유는 반드시 이질적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수사적 용어를 사용하면 원관념(元觀念)과 보조관념의 결합을 말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미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란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거든요. 원관념을 주지(主旨),  본의(本義), 취의(趣意), 주상(主想), tener, primary meaning,으로  보조관념은 매체(媒體),유의(喩意), vihicle,secondary meaning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관념은 비유(되는)이미지 또는 의미제이고 보조관념은 비유하는 이미지 곧 재료제입니다.  이 때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의 매개어로 결합되거나  (이와 같은 비유를 직유라 합니다), 의 형태로 결합됩니다.  다시말하면 비유의 근거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 속성에 있습니다.  즉 두 사물의 동일성에 의하여 비유가 성립됩니다.  이쯤 이론 무장이 되셨으니 이제부터 하는 강의는 더욱 알아먹기 쉬우실 것입니다.  2)비유(比喩)는 시 창작의 원리  시인은 비유를 통해서 시인이 발견하고 창조한 의미나 진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시적 공간에 형성해놓기 때문에 비유는 수사적 기교나 장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시 창작의 원리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인의 상상력과 직관에서 나옵니다. 스파크처럼 빛나는 불꽃입니다.  이 비유의 빛이 사물에 가 닿을 때 사물은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들에게 경이감과 충격을 주게 됩니다.  조태일님 같은 분들은 비유를 모르는 시인은 결코 참다운 시인이 아니며,  비유 없는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을 판단할 때는 그가 사용한 비유의 힘과 그 독창성에 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 비유의 종류 비유에는 우선 직유,은유, 환유, 제유, 의인화, 풍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는 비유적 이미지를 설명할 때 이미 말씀드  렸습니다만, 여기에선 보다 세밀하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1)직유  직유는 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말합니다. 특별히 유사하지  않은 사물들을 ~같이,~처럼,~듯,~보다 등의 연결단어를 통하  여 직접 비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유의 특성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표면에 그대로 드러남으  로서 원관념의 구체성을 얻게 합니다. '목소리'라는 원관념과  '은방울'이라는 보조관념이 위에 열거한 연결단어에 의해  "은방울 같은 목소리"라는 직유의 모습을 띄우면서 '목소리'가  은방울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구체성을 얻습니다.  여기에서 보조관념은 자기의 특질이나 속성을 그대로 지니  면서 원관념의 의미나 특징, 성격,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표현  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얼마간의 유사  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유의 형태가 단순하기 때  문에 독자로 하여금 고도의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많이 요구해야 좋은 시인 것으로 볼때  직유는 은유에 뒤떨어진 비유의 방법입니다.  또한 지난 시간 연속 말씀 드렸지만, 죽은 비유는 결코 써서는  안되며, 참신성이 있고 신선한 비유를 써야 합니다.  고미경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내 몸의 깊은 안 쪽에는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 하나 살고 있네  그 강물 속 맑기가  가을 햇빛 같아야만,  그 강물 속내가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 같아야만,  그대 전체!  나에게 살포시 보여주는데  강물의 한 끝을 닦아오는 사이  허리선이 버선볼 같은 강둑에는  들꽃들 하나 둘 찾아와 서로 사랑하더니,  철철이 아기꽃들이 태어나더니,  강물은  들꽃 향기로  들꽃 그림자로 흐르네.  위의 시에서 직유의 표현을 한 번 지적해보십시오.  원관념은 '강'이 되겠구요, 보조 관념은 '버선볼'  이 되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강물'을 원관념 '가을 햇빛'과  '어린 것에게 젖물린 어미'를 보조관념으로 보는  직유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인의 시각은 결코 흔하지 않은  개성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가벼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시를 쓸 때 이렇듯 개성적인 시각으로 사물들을  포착하고 그 것들의 동일성을 발견해냄으로서 살아있는  좋은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2)은유  최문자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시적 미학  은 새로운 인식과 시적 사유에서 탄생한다. 시가 사실을  사실대로 사진 찍듯 찍어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시가  만물의 존재와 본질을 건설하는 일이나, 철저히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개인적으로 읽는 따위의 현란한 우리 문학 풍  토에서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없다." 라고 말합니다.  즉 시가 어떤 사실을 그대로 복사하듯 표현한다는 것은  다분히 비창조적이고 다만 개인적인 푸념이나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시라는 것  입니다.  은유도 그 구조가 직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되어  있으나, 직유의 ~처럼, ~같은,~ 듯이 와 같은 매개어가 없  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런 매개어가 없기 때문에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하여도 비유는 숨은 형태로 나타  나며, 여기에서 나타나는 의미도 또한 직유와 다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서로 충돌하듯 결합하고 이 때 일어  나는 상호작용은 물리적 반응이 아닌 화학적 반응을 함으  로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유란 말을 메타포(metaphor)란 영어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의미의 전이(轉移) 즉 의미의 자리  옮김이란 뜻이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뜻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은유를 가리켜 "어떤 사물에다 전혀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이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metaphor가 meta(초월)와 phora(옮김)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해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러한 은유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보면 은유에 대해" 이 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라고 말 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김광섭님의 전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白鳥(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이 시에서 마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적이고 구체적  인 수단을 통해 구상화 하였습니다. 아주 흔한 은유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물은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낙엽 한 장이 떨어지거나 물방개 한 마리만 지나가도 작은  파문이 입니다. 여기에 바람이 불거나 돌을 던지면 아주  커다란 파문이 일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물은 늘 제 원상을  회복하려는 성질이 또한 있게 마련입니다. 그 표면이 잔잔  하고 고요해지려는 것이 물의 특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구요. 우리가 '세파'  란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인생을 물결로 비유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온갖 일에 흔들리기 쉬운 마음도 물처럼  잔잔하고 고요해지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조태일님의 해설을 들어보겠습니다.  " 위 시에 나타나는 은유는 원관념인 '마음'과 보조관념인  '물결'이 각기 이질적인 대상이지만 앞에서 살펴본 유사성  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과 물결이 서로  충동하듯 결합함으로써 이 두 대상을 각기 떼어놓고 보았  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과 탄력성은 물론이거니와 불투명하  고 모호한 '마음'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며 관념에서 벗  어나 투명한 육체성까지 형성하게 된다"  오늘 은유에 대해서 공부를 하셔서 아시겠지만, 조태일님  의 말도 다 시인의 직관과 상상력에 밑바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은유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시를 살아나게 함을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좋은 시는 얼마나 좋은 은유로 구성되어 있는 시인가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기 시 몇 편을 소개해드리니, 그 시들의 은유가 어떻게  살아있는가 여러분들 스스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고은님의 을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그대 이 세상에 두고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느 날은 그릇 깨어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고욤나무 열매 떨어지면서  내가 사는 일입니다.  죽은 그대 섬겨서  나와 함께 긴 겨우살이 사는 일이  내 일입니다.  어제 눈이 내렸습니다.  그대를 내 가슴에 두고 먼 데까지 부르니  그대가 열두어 살 단발머리로 달려왔습니다.  그대와 함께 살며  어제와 오늘 눈이 내립니다.  이것이 내 일입니다.  아니 여러 사람의 일입니다.  죽은 그대라는 그리움 하나가 나라입니다.  다음은 강은교님의 입니다.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와  살(肉)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배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血)를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다음엔 『문예연구』2001, 가을호에 실린 조말선(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님의 를 읽어보겠습니다.  내 낯바닥에 내가 방사하는 눈물 내 길바닥에 내가 방료하  는 열두 시 내 손바닥에 내가 방목하는 손금 나는 또 다시  내 눈물 속으로 돌아간다 누가 전원을 내려주기만 한다면  이 엘리베이터가 허공에서 멈출텐데 매 분 매 초 절정일텐데  나는 또 다시 내 손금 속으로 돌아간다 내 심장에 내가 투석  하는 혈액 돌아오고 돌아오는 현관 내 혓바닥에 내가 굴린 말  마지막으로 허형만 교수님의 를 올립니다.  슬픔 하나가 향로 속에서 더는 타지 않기 위해 차라리  무너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곱 시간 만에 도착했다는  문상객이 머리와 외투에 덮인 하이얀 시간의 비늘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말년에 무일푼이셨던 아버지는 슬픔 하나 유산으로 남  기셨다 빛났던 날들 눈처럼 쌓였다가 서서히 얼어붙으니  그래 머쟎아 녹아 흐르리라 흘러흘러 저승 바다 넘치면  끝내 이승의 내 발목을 적시리라       제목 : 수사법 총정리   비유법(比喩法)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를 곧바로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다른 현상이나 사실을 끌어대어 표현하는 법.  1. 직유법(直喩法)   등의 말이 뒤따르거나, 따위의 말을 앞에 놓아 또는 하는 식의 비유.  ·꽃 같이 아름다운 소녀  ·보름달 같은 얼굴  ·유수(流水) 같은 세월  ·푸른 하늘이 홑이불처럼 이 골목을 덮어……  ·먹물을 끼얹은 듯 검은 하늘에……  ·묵은 역사처럼 밤이 내리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     처럼 고요하다.  · 인생은 배우와 같다.  · 물 퍼붓듯 쏟아지는 비……  ·소마냥 느린 걸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다.  ·정자의 얼굴이 달덩이같이 피었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      꽃 : 비유의 대상 - '보조 관념'     미인 : 말하려는 사실. '원관념'     꽃과 미인에는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 '아름다움'  * - (×)    2. 은유법(隱喩法)   가 아니라, 와 같이 비유하는 말과 비유되는 말을 동일한 것으로 단언하듯 표현하는 법.  ·인생은 나그네다.  ·소년은 나라의 꽃이다.(소년〓꽃)  ·호수는 커다란 비취, 물 담은 하늘  ·내 마음은 호수.  ·간디는 인도 국민에게 빛을 준 큰 별이었다.  ·백설의 피부, 밤의 장막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여신(女神)이여 !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라.  3. 의인법(擬人法) 사람 아닌 동물이나 자연을 사람인 듯 표현하는 법  ·매미가 하품을 한다.    ·굽어보는 달님  ·성난 파도                ·오월 햇빛 아래 얼굴을 붉히고 다소곳이 머리 숙인 다     알리아꽃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꽃  ·갈가에서 가는 목들을 갸우뚱거리며 웃는 코스모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나팔꽃이 방긋 웃고 있다.  ·꽃이 방긋 웃고, 버들이 손짓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4. 활유법(活喩法) 생명 없는 것을 생명이 있는 것처럼 비유하는 법.  ·소리 지르며 달리는 냇물  ·숨이 차 헐떡이면서 비단길을 기어오르는 증기 기관차  ·청산(靑山)이 훨훨 깃을 친다.  ·파도가 울부짖는다.  ·들이 가슴을 열었다.        5. 의태법(擬態法)     사물의 모양과 짓을 그대로 시늉하여 표현하는 법.    의태어(擬態語)를 쓴다. 〓 시자법(示姿法)      ·말랑말랑한 손      ·매끈매끈한 살결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다.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해는 뉘엿뉘엿 지고……      ·확 풍겨 오는 향기……      ·토실토실한 손등      ·노루가 껑충껑충 뛰어 달아난다.  6. 의성법(擬聲法)     자연계의 소리, 인간 또는 동물의 소리를 그대로 본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법.     ·학교 종이 땡땡 친다.     ·멍멍 개야 짖지 말고, 꼬꼬 닭아 울지 마라.     ·찌르릉찌르릉 비켜나세요.     ·"만세! 만세! 대한 민국 만세!"     ·뻐꾹새 뻐꾹, 까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흐흐히 히애애, 도깨비가 나타날 것만 같다.     ·바람이 윙윙 부는 밤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우지끈뚝딱하고 났다.  7. 풍유법(諷喩法)   원관념을 완전히 숨기고, 비유하는 보조 관념만 나타내되, 교훈적·풍자적이어야 한다.    속담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엉뚱한 말 속에 참뜻을 담아 본뜻을 추측하게 한다. 〓우유법(寓喩法)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 못나 보인다고 업신여기면 안된다.    ·산에 가야 범을 잡는다.               → 큰일을 하려면 어려움을 무릅써야 한다.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 일엔 뜻이 없고 분량만 재려 한다.     ·꿀 먹은 벙어리요, 침 먹은 지네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 이야기 전체가 풍유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   8. 대유법(代喩法)   (1) 제유법(提喩法) : 한 부분을 가지고 그 사물 전체를                    나타내는 법                ·빵만으론 살 수 없다 : 빵 → 식량, 식생활        ·사육신 :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 개, 하위지, 유성원        ·무슨 약주 드셨습니까? : 약주 → 모든 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들 → 조국  (2) 환유법(換喩法)    하나의 사물을 다른 명칭을 들어   비유하는 법        ·별 → 장군          ·강태공 → 낚시꾼        ·태극기(한국)가 일장기(일본)를 눌렀다.        ·무궁화 삼천리 → 대한 민국        ·바지 저고리 → 촌사람        ·밤 손님 → 도둑        ·상아탑 → 대학교  9. 중의법(重義法)     한 말에 두 가지 이상의 뜻을 포함시켜 표현하는 법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왜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벽계수 → 시냇물, 사람 이름          명월 → 달, 황진이  10. 상징법(象徵法)     비유이면서도 좀처럼 원관념을 찾아내기 힘든 표현. 추상적인 것(무형)을 구체적 사물(유형)로 암시하는 법    ·십자가 → 희생    ·비둘기 → 평화    ·낙락장송 → 절개  ·매화 → 우국 지사  * 은유법은 원관념, 보조 관념이 다 표현되지만, 상징법은  보조 관념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인을 표현하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다.  ·그녀는 꽃 같이 아름답다.  (직유)  ·순이는 한떨기 백합꽃이다. (은유)  ·그녀가 들어오니, 방 안이 꽃밭이 된다. (상징)   강조법(强調法) 문장의 인상을 강하게 만드는 표현법. 감정보다는 의미상의 강조가 주가 되는 방식이다.  1. 과장법(誇張法)    실제보다 훨씬 크게 또는 작게 표현하는 법.    ·하늘에 닿은 수풀     ·밴댕이만한 소갈머리    ·간이 콩알 만해졌다.   ·눈물의 홍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  ·쥐꼬리만한 월급    ·하루를 천추(千秋)같이 기다린다.(一日如三秋)                                         (직유, 과장)    ·백발 삼천 척       ·주먹만한 대추(직유, 과장)    ·바늘 귀만한 소견(직유, 과장)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만큼이나 힘들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    ·하늘을 찌르는 높은 산    ·노도(怒濤) 같은 진격    * 말만한 개(과장) ― 늑대만한 개(보통 표현)  2. 영탄법(嘆法)    기쁨, 슬픔, 놀라움, 무서움 따위의 감정을 높이는 방법.    감탄사, 감탄형 어미를 주로 쓰지만, 때로는 의문형을 쓰기도 한다.    ·아 ! 아름다운 하늘이여 !    ·오, 이거 얼마만인가 ?    ·어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    ·슬프다, 붓을 놓고 통곡하고 싶구나 !    ·어이할꺼나,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    ·저주받은 인생이여 !    ·그리움마저 얼어붙은 가슴인가?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  3. 반복법(反復法)    같거나 비슷한 말을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법.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멀고 먼 나라        ·깊고 깊은 바다  ·자자 손손           ·우불탕 구불탕한 길  ·솟아라, 고운 해야 솟아라.  ·문 열어라, 문 열어라, 정 도령님아.  ·쉬어 가자, 벗이여, 쉬어서 가자.  ·눈물로 적시고 또 적시어도.          4. 점층법(漸層法)    어구(語句)의 의미를 점차로 강하게, 크게, 깊게, 높게 함으로써 그 뜻이나 가락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방법.     ·내 이웃에서 시작하여 내 마을, 내 고장, 내 나라, 아니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한다.     ·가족은 사회에,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열 사람을 당한다. 열은 백을 당하고, 백은 천을 당하며, 천은 만        을 당하리라.  5. 점강법(漸降法)    뜻을 점차로 여리게, 작게, 얕게, 낮게 벌여 나가는 법.      ·책보만한 해가 손바닥만해졌다.      ·만 원이 안 되면 천 원이라도, 천 원이 안 되면 백 원, 그것도 안 되면 십 원도 좋다.  6. 대조법(對照法)    서로 상반되는 사물을 맞세워 그 중 하나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법. 한 구절의 말뿐 아니라, 한 작품 전체에도 쓰일 수 있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앉아 주고, 서서 받는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강물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퍼러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도다.      * 선(善)과 악(惡), 미(美)와 추(醜), 충(忠)과 간(奸)                                     → 작품 전체  7. 미화법(美化法)    좀 과장되게,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珠玉篇)이다.      ·화장실(化粧室) ← 변소      ·거리의 천사 ← 거지      ·부처님 가운데 토막 ← 착한 사람      ·양상 군자(梁上君子) ← 도둑      ·꽃마음 ← 아름다운 마음  8. 열거법(列擧法)  비슷한 말귀나 내용적으로 관계 있는 말귀를 늘어놓는 법.           ·유적(遺蹟)의 도시, 역사의 도시, 명승의 도시……     ·푸른 하늘과 바다와 들과 산.     ·이것들은 그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9. 억양법(抑揚法)    우선 누르고 추켜 주거나, 추켜 세운 후 눌러 버리는 법        ·얼굴은 곱지만, 마음씨가 고약하다.       ·그는 마음은 좋지만, 행실이 나쁘다.       ·그는 좀 모자라지만, 사람은 착하다.       * 일종의 대조법(對照法)이라 할 수 있다.  10. 현재법(現在法)     과거나 미래형으로 쓸 말을 현재형으로 나타내는 법.       ·검찰, 깡패 소탕에 나서다.       ·1919년 3월 1일, 삼일운동 일어나다.       ·이 도령은 춘향 앞에 섰다. 춘향은 얼굴을 붉히고         돌아선다.       ·머리 딴 계집애가 이리저리 옮아 다니며 주물렀다.          그리고는 깩깩 소리를 지르며 엄살을 한다.……비위          가 거슬려 돌아누웠다.  11. 비교법(比較法)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개념의 비슷한 것을 비교시키는 법.      ·여름 바다도 좋지만, 가을 단풍이 더 좋다.      ·달이 쟁반보다도 크다.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같은 말의 되풀이는 반복법,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면   열거법, 앞 말의 꼬리를 따면 연쇄법, 정반대의 뜻을 가     진 말을 맞세우면 대조법, 비슷한 것을 비교시키면 비교     법이 된다.  12. 연쇄법(連鎖法)     앞 말의 꼬리를 따서 그 다음 말의 머리에 놓아 표현하는법     ·고향, 고향은 가을의 동화를 들려 준다.     ·고인(故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뵈어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떨꼬.  13. 명령법(命令法)     격한 감정으로 명령하는 법. 일부러 명령하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법이다.    ·꼭 이기고 돌아오라 ! 조국의 명예를 걸고 건투하라 !    ·젊은이여, 기회는 한번뿐, 놓치지 말라.    ·힘차게 약동하라.  14. 돈강법(頓降法)     절정에서 갑자기 속도를 뚝 떨어지게 하는 법,      ·단편소설의 대단원 처리  변화법(變化法)     단조로운 문장에 변화를 주어 주의를 높이려는 법.  1. 도치법(倒置法)     문법상, 논리상으로 순서를 바꿔 놓는 법.     ·가자, 나를 부르는 고향으로.     ·그는 머뭇거렸다, 처음으로.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바보야, 넌 !"     ·"뭐라 하느냐, 남의 앞에서……"  2. 인용법(引用法)    남의 말이나 격언, 명언을 따다가 인용하는 법.  (1) 직접 인용(明引法)     따옴표 등의 표시로 선명히 인용이 드러나는 법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게을리하는 학생에게는 꼭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으니 어찌 나아가 구하지 않        을 것이랴.  (2) 간접 인용(暗引法)       따옴표 등이 없이 문장 속에 숨어 있게 표현하는 법.       ·아버지께서는 늘 게으른 사람은 꼭 고생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씀하신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더니, 네 뒷집에서 일어난         일을 몰라?      * 인용법에는 반드시 "     " 또는 '    ' 또는 …라         고, …하고, …고 등의 조사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3. 설의법(設疑法)    서술로 해도 좋은 것을 의문형으로 나타내는 법.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치의 국토라도 외적에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이래도 거리에 사람이 없다 하겠느냐?      ·저런 사람도 애국자라 할 수 있겠는가?  4. 대구법(對句法)    가락이 비슷한 글귀를 짝지어 나란히 놓아 흥취를 높이려는 법.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지혜 있는 자는 생각하고, 의로운 자는 행하고 어진자는 지킨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려라.     * 대조법은 뜻이나 내용이 대조(반대)를 이루는 데 반해 대구법은 내용은 같건 말건 가락이 비슷한 점만을       노리는 것이다.  5. 경구법(警句法)     기발한 글귀를 씀으로써 자극을 주는 법. 이가발한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 속담, 격언 등은 이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방귀 뀐 놈이 성 낸다(賊反荷杖)      ·아이 자라 어른 된다.                (아이라고 너무 욱박지르지 말라)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모름을 모른다고 함이 참으로 앎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    * 의미상으로는 경구법에 해당하는 것이 표현 양식으로     는 풍유법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6. 반어법(反語法)    표면의 말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법.    ·너 오늘 또 칭찬 받을 일을 했더구나.                            ← 꾸중 들을 짓을 하다    ·그놈 참 얄밉게도 생겼다. ← 예쁘다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했으니, 판정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 공정치 못했다.    ·과연 날씨가 좋군요. ← 눈보라 치는 날    ·어쩌면 마음씨도 그리 비단결 같은지(심술꾼에게)    ·나 말이야, 미칠 정도로 행복해서 그래. ← 비참함    ·무식한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다 알고 있다.    * 반어법에는 풍자가 있다.      ·그 우람하신 허리 하며, 굉장한 미인이시던걸.      ·무식한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7. 역설법(逆說法)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어긋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속에 진리가 담겨 있게 표현하는 법.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만세 불렀다. ← 모든 게 실패로 끝났다.    ·손님 들었다. ← 도둑 들었다.  8. 문답법(問答法)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    ·그러면 학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으로 사회에 나아갈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왜 왔는가?  이야기 하기 위해 왔다.  9. 비약법(飛躍法)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던 글을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바꾸거나, 하던 이야기를 갑자기 중단하는 법,  ·보기도 싫다는 듯이 돌아 앉아서 빈정대고 고집만 부리    던 아버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방으로 들어가며,     "여보 ! 손님이 오셨는데 밖에 세워 두는 법이 어디 있소? 건넌방으로 모시고, 고구마나 삶아요."(비약)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다 그런 걸세. 이제 그만 가세."                                                (중단)  10. 생략법(省略法)     어떤 말이 없어도 뜻의 내용이 오히려 간결해져서 함축과 여운을 지니게 하는 법.    '……'로 된 것도 생략법의 일종이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졌다고……  ·나래에 가을을 싣고 맴돌다 문득 고향.                     ('생각이 난다'를 줄임)  ·"아버지, 나 돈.('좀 줘요'를 줄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더 좋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여러분에게                           이승하(시인. 중앙대 문창과 교수)  1) 한 작품에 많은 사연을 담지 말것. 한 편의 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정서든 이미지든 하나여야 하고, 다른 모티프들은 그것이 뿜는 자장(磁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이때 시는 통일성을 얻는다.  2) 비유와 상징을 아낄 것. 비유는 아낄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오롯한 품위를 갖는다. 상징은 시인이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숨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3) 긴 시를 경계할 것. 시의 참된 맛은 행간에 있다. 행간에는 침묵의 언어와 정서의 긴장이 깃들여 있다. 긴 시는 행간을 매립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4) 시상을 풀어가는 수단으로써, 분명하게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할 것. 불투명한 관념이나 감정을 시 비슷한 문법으로 채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  5) 정서의 결을 잘 다듬을 것. 몇 번의 침전과정을 거친 그리움이라면 슬픔 따위가 개운하게 세척된 상태라야 한다. 물기가 없이 잘 마른 상태라면 더욱 좋다.  6) 구문이 거추장스러운 것, 관형구나 부사구가 무거운 것은 금기다. 줄기가 가지를 지탱하기 어렵다. 관형어나 부사어가 상쾌하게 오려진 문장은 조촐하고 산뜻하다.  7) 시로 삶의 각성이나 잠언적인 의도를 노출시키지 말것. 시는 철학이 아니라 미학이다.  [시안] 2002년 봄호에 실린 글을 축약해둔다. 시를 쓰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일들을 찬찬하게 지적해주었다. 두고 읽을만 하다.  다음은
261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스크랩] 댓글:  조회:2209  추천:0  2018-02-19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쟈끄 데리다를 읽는 사람들은 데리다식의 글 읽기에 황당할 것이고 매우 당혹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우리가 기존의-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것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우리가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하는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그렇지 않게 만드는 것이 의식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데리다적 읽기’는 우리의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진보라고 아니 적어도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조소이자 의식의 보수성을 따끔하게 꼬집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데리다의 사유 방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사고를 뒤엎고 새로운 사고로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작은 혁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혁명이라는 것이 행동의 변화이고, 사고의 변화가 행동을 낳는다면 데리다적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적 사고는 흔히 ‘해체’라고 일컬어진다. 해체라고 하는 이 난해한 용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좀 더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데리다는 이러한 용어들도, 우리의 사고의 변화에 대한 바람도 모두 해체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2. 형이상학 해체   1)후설 해체  현상작용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 말은 독일어로는 ‘Vorstellung, Präsentation, Gegenwärtigung’이다. 독일어로 ‘vorstellen’은 복합어로 ‘vor’는 ‘앞에’라는 뜻이고, ‘stellen’은 ‘자리에 놓인다, 위치시킨다’는 말이다. 이 ‘Vorstellung’은 서구철학에서 오랫동안 가장 중요한 용어였다. 서구전통철학은 이를 표상1)으로, 데카르트나 로크는 관념(ideas)으로, 밀은 표상과 개념 작용(conception)으로, 흄은 지각(perception)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이 말은 인식, 관념, 개념, 상상력, 현전, 재현(표상), 사상 등등 여러 가지 뜻으로 통용된다. 후설은 『논리적 고찰』 44장에서는 이 용어를 13가지 뜻으로 풀이했다. 데리다는 초기의 후설은 언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표상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전제한다고 본다. 즉 지각을 통한 최초의 현전작용과, 그리고 이미지 기억 혹은 표지로서의 기호 혹은 기표는 지각을 통한 직접적인 현전작용이 아니라, 현전작용을 반복하는 표상작용(Vergengenwärtigung)이라 했으며, 이를 다시 기억에 의한 정립적(setenze) 표상과 상상적 표상(phantasievorstellung)으로 구분시켰다. 이것도 모자라, 후설은 『논리적 고찰』에서 현전과(Vorstellung)과 현전작용의 내용(Verstellungsinhalt)을 다시 구별했다.2)    데리다는 우선 후설의 현상학적 직관주의를 비판한다. 후설은 표현적 지향과 지시를 엄밀히 구별한다. 지시되는 것은 나에게 완전히 제시되지 않는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에게 비가 오려 한다던가 어떤 결론이 어떤 전제로부터 논증된다던가 하는 것을 지적할 의도로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의도하는 바가 나에게 명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의도가 나에게 명백함이 없이도 그가 의도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말은 다만 나로 하여금 그가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게 해줄 뿐이다. 지시는 개개의 사물들의 지칭과 함께 괄호 쳐 짐으로써, 표현의 장에는 이상적인 의미들과 이상적인 단어 유형들만이 남아있게 된다. 현상학적으로 연구되는 바, 말과 의미에 의한 효과적 의사소통이란 없다. 현상학적 환원 안에서 영혼이 지시적으로 자신에게 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함의 방법일 뿐이다. 그러한 독백에 있어 영혼은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현전하므로 지시적 기호란 불필요할 것이다. 나는 나 자신과 상상적 대화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3) 후설이 말하듯, 상상이나 허구는 현상학의 생명을 이루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에게 현상학이 추구하는 본질 직관이 하나의 원초적 부여작용이며 그 자체로서 지각과 유사하고 상상과는 유사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감추어서는 안 된다.4) 이것이 후설 스스로 『이념들Ⅰ』에서 현상학의 ‘원리중의 원리’라고 스스로 명명하고 있는 것으로 직관주의의 원리는 현전의 형이상학을 가장 철저하고 가장 비판적으로 복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설은 우리의 인식의 원천이 근본적으로 직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식은 우리의 직관에 그렇게 주어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현된 의미가 그 어떤 대상과 관계를 가지게 될 때, 그 관계를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직관’이다.5)    후설에게 있어서는 인식기능이 의지기능 및 정서기능보다 더 우선적이다. 모든 표현들이 다소 모호하고 흔들리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주관적 표현들마저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있어서 모든 주관적 표현을 객관적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후설의 주장은 결국 모든 주관적 표현작용은 객관적 이상성을 대신할 뿐 그 자신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데리다는 모든 의사소통적 언어표현이 의미의 동일성을 가진다는 주장, 그리고 대상이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직관이야말로 인식의 원천이라는 주장, 나아가서 이처럼 존재를 현전으로서 사유하고 있는 점 등등을 현상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에 감염되어 있는 징후들로 파악한 것이다.    2)니체 해체  니체를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리에는 은폐-유희(Schleier-Spiel) 즉 여성들이 취하듯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추는 것(혹은 그 반대)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진리는 없다는 점이 진리가 된다. 또한 여성은 진리의 비진리성에 대한 명칭이다. 여성은 몰락적으로 역사하는데, 남성에 대해서,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여성은 스스로 굴복하면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러한 양의성에 전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뱉어 버리고 진리로 확정된 사태를 팽개쳐 버린다. 여성은 주고 헌신함으로써 여성이고, 남성은 취하고 소유함으로써 남성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여성은 반대로 나타난다. 여성이 주고 헌신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그녀의 소유 주권을 가상화하고 자기 소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남성들의 지배권을 삼켜버린다. 이 ‘위하여(für)' 때문에 여성은 모든 남녀 대립이 바뀌는 유보 상황을 형성한다. 장소와 가면을 끊임없이 바꾸는 일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교체 놀이에서 여성은 소유 주권을 보상받게 되는 바, 그래서 여성은 소유하는 자 즉 남성이 되고 남성은 소유를 잃어 굴종하여 여성으로 되는 이 교체놀이는 결국 여성은 남성이, 남성은 여성이 되지만 각각 부분적으로 스스로 겉치레적인 다른 편의 역할을 하는 데 이르게 되어 확정되는 것이 없다.6)    여성들은 단지 변화무쌍하고 이중적인 기반의 양식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묘사될 수도 있다 함은 여성들이 지닌 내적인 다양함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하여 니체는 여성과 여성의 작용을 서술하기 위해서 풍자, 조소, 조롱, 재치 등과 같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Éperons이 배 밑에 감추어져 있는 칼 혹은 항구에 돌출된 바위를 뜻하고, stiletto가 아주 예리한 단도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문체는 어떤 남성적인 무기이다. 문체가 남성이라면 씌어진 글은 여성이어야 한다. 문체의 다양화는 남녀의 대립을 없앤다. 다양화함은 여성 명사이다. 또한 글은 말해진 언어의 고정된 의미를 해소시키듯, 여성은 문체의 다양화로 작용한다.7) 데리다는 문체의 다양함을 니체의 위대한 양식으로 여긴다. 이로부터 텍스트의 다양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변증법과 연결시키고 있다. 주고받는다든가 혹은 소유하고 소유되는 대립은 더 이상 두 지점에 배치되지 않는다. 그 여성 혹은 그 남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에서 볼 때 여성에게는 그 작용이 여성의 작용 이상이라는 점, 또한 남성에게는 그 역할이 남성의 그것 이상이라는 점이 허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두 개의 것이 각각 자신임도 타당하다. 이런 종류의 무결정성, 개방성은 실상 변증법적 사유로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데리다는 또한 이미 언급한 소유의 바뀜 관계를 ‘자기화 과정’이라고도 부르고, 우선 변증법은 다소간 도식적인 모델에 묶여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변증법은 존재론적 결정 가능성과 동치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교체 관계에서는 제멋대로의 구조들이 생겨나는데, 이 구조들은 단계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모든 변증법이나 모든 존재론적 결정성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변증법적 사유모델이 있는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서 일정한 방향, 의미부여 등 목적론이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는 바로 이것을 논박하고 있는데 이 과정이 우연하고 잠정적인 결정/규정으로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 또한 전통적인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언어해체   1)소쉬르 해체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철학적 글쓰기 속에 있는 글쓰기의 평가 절하를 기록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글을 쓴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자들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글로 쓰고 있는 철학은 글쓰기를 기껏해야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사상과 무관하며 최악의 경우 그 사상에 방해가 되는 하나의 표현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다.8) 글쓰기는 외면적이며 물리적이고 비초월적이다. 글쓰기에 의해 제기되는 위협은 단순한 표현방법이어야만 하는 작업내용이 진술한다고 추정되는 의미에 영향을 끼치거나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철학은 글쓰기를 초월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의하며, 언어 기능의 일부를 글쓰기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말하기의 단순한 인위적 대체물이라고 글쓰기를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플라톤 등의 비난은 글쓰기를 말하기의 표현중의 하나로 취급하며 말하기로 하여금 의미와 직접적이고도 자연적인 관계를 갖게 하는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가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logocentrism)' 즉 스스로 존재한다고 즉 기반이라고 여겨지는 사상, 진리, 이성, 논리, 말씀이란 의미의 질서를 향한 철학의 방향성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하다.9) 데리다가 규정하는 문제점은 철학적 담론에서의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뿐만 아니라 경쟁하고 있는 철학들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변형들이라는 주장을 포함하게 된다.10)  『그라마톨로지』 속에서 데리다가 소쉬르를 읽는 부분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더욱 검토되고 있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발흥시킨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는 한편으로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다른 한편으로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명확한 긍정과 피할 수 없는 연루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 질 수 있다. 따라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담론이 스스로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라고 정의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사상을 표현하거나 전달하는데 도움이 될 때에만 소음은 언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기호의 본질 즉 기호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것과 기호가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중심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기호가 자의적이고 관습적이며 각자 본질적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와 구별시켜주는 차이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차이의체계라고 여겨지며, 이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의존하여 온 구분 체계의 발전으로 인도된다. 이는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langue)와 그 체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발언행위(parole), 어느 주어진 시대의 체계로서의 동시적 언어 연구와 상이한 역사적 시대의 요소 사이의 통시적 관계 연구, 체계 내에 있는 두 종류의 차이 즉 동시적 패러다임 관계와 통시적 패러다임 관계, 그리고 기호의 두 구성요소 즉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 사이의 구분을 뜻한다. 이러한 기본적 구분체계가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 체계를 명확하게 만들면서 언어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언어학적이며 기호학적인 작업계획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소리 자체는 체계에 속해 있을 수 없다고 소쉬르는 주장한다. 소리는 발언 행위 속에서 체계 단위의 표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언어체계속에는 어떤한 실증적 용어도 없이 차이만 있을 뿐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공식화이다. 공통적인 견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언어가 단어 즉 실증적인 실재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단어들이 합쳐져서 체계를 형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 서로의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에 대한 소쉬르의 분석은 그와 반대로 기호가 차이 체계의 산물이라는 결론으로 유도되고 있다. 실제로 기호는 실증적인 실재물이 전혀 아니며 그저 차이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데리다가 설명하는 것처럼, 체계가 차이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발언 행위 속에서나 체계 속에서 현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실증적인 실재물에 언어 이론이 기반을 두려는 시도를 훼손하게되기 때문이다. 언어 체계 속에 차이만 있을 뿐이라면,   차이들의 유희는 실제로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단일한 요소가 그 자체로 현전하거나, 스스로 만을 참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종합과 참조를 전제로 합니다.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여진 담론의 영역이건 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은 각 ‘요소’가 -그것이 음소이건 문자소이건 간에- 그 자신 속에 있는 연쇄망 혹은 체계의 다른 요소들의 흔적에 의거해 구성되게 합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과 망의 구조가 텍스트이며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됩니다. 개별적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체계 내에서도 그 어떤것도 단순히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흔적들의 차이와 흔적들만이 도처에 있습니다.11) 라고 데리다는 기록하고 있다. 어떤 실증적 용어도 없는 기호와 체계의 자의적 본질은 흔적일 수도 있는 실재물 이전에 있던 흔적만 있는 일종의 무한 참조 구조인 ‘제도화된 흔적’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제시해 주고 있다.12)  그리고 소쉬르의 논리전개 속에는 로고스중심주의의 확인이 있다. 소쉬르가 시작하고 있는 기호 개념 자체가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의 구분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기표는 기의에 접근하기 위해서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이 전달하는 개념이나 의미에 종속되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기호를 다른 기호와 구별하기 위해서, 물질적 변화가 언제 의미 있는지 말하기 위해서, 언어학은 기의가 출발점이 되며 기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여야만 한다. 소쉬르는 로고스중심주의적 개념을 확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분석을 로고스 중심주의 안에서 기술하고 있다. 데리다는 이러한 일이 소쉬르가 글쓰기를 언급하고 있을 때 발생한다고 한다. 소쉬르는 글쓰기를 제 2의 파생적인 지위로 추방해 버리고 있다. 소리를 언어체계에서 특별히 배제하면서 언어단위의 형식적 특성을 주장할  때에도 소쉬르는 언어분석의 대상은 문자단어와 음성단어의 조합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고 음성단어만이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말하기를 표현하는 방법 즉 언어를 공부할 때 고려될 필요가 없는 기술적 도구 또는 외부장식인 것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말하기의 기생적이며 불완전한 표현이라고 글쓰기를 취급함으로써 말하기를 특권화한다는 것은 언어의 특정 양상이나 기능 작용의 양상을 배제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거리, 부재, 오해, 무성의와 모호함이 글쓰기의 특성이라면, 글쓰기를 말하기와 구분지음으로써 말하기와 연관되어 있는 이상을 기준으로 채택하는 의사소통의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단어들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듣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에 대한 소쉬르의 논의를 특징짓는 도덕적 열정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글쓰기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언어를 ‘변장시키며’ 때때로 말하기의 역할을 ‘찬탈하기’조차 한다. ‘글쓰기의 독재’는 강력하며 교활하여서, 자연스러운 말하기 형태의 부패나 감염이 있게 된다. 글쓰기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언어학자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기의 표현이라고 추정되고 있는 글쓰기는 자신이 봉사하고 있는 체계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2)루소 해체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는 루소가 글쓰기에 적용했던 용어를 사용해서 ‘보충(supplement)’의 논리라고 명명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를 제공해주고 있다. 언어는 말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글쓰기는 말하기에 대한 보충으로 사용될 따름이라고 루소는 규정한다. 보충은 본질적이지 않은 임시증대분이며, 자체로 완성적인 어떤 것에 추가된 것이지만, 보충은 완성되기 위해서 즉 그 자체 완성된 것이라고 추정되어오던 것 속에 있는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이다. 이러한 ‘보충’의 두 가지 다른 의미는 강력한 논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두 의미 모두에 있어서 보충은 외부적인 것 즉 추가되거나 대체되는 것의 ‘본질적’ 성격에 이질적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루소는 글쓰기를 말하기에 추가되는 즉 언어의 본성에 이질적인 기교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말하기가 자체충족적이며 자연적인 충만의 상태가 아닐 경우에만 즉 글쓰기가 보충해 줄 수 있는 결여나 부재가 말하기 속에 이미 있을 경우에만 글쓰기는 말하기에 첨부될 수 있는 것이다. 루소는 현존의 파괴와 말하기의 질병이라고 글쓰기를 비난하면서도 글쓰기의 부재를 통해서 말하기에 상실되어 있던 현존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글쓰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아주 전통적인 입장을 제시한다.13)    오직 부재와 오해 등 대개 글쓰기의 속성이라고 서술되는 특성에 의해 말하기가 이미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글쓰기는  보상 즉 말하기의 보충이 될 수 있다. 데리다는 루소의 논리전개에 대해 원천적이며 자연스러운 언어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며 결코 원상보전되어 있지 않고 글쓰기에 의해 결코 만져질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 언제나 하나의 글쓰기였다는 단 한 가지 조건하에서만 글쓰기는 이차적이며 파생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루소에 있는 이러한 ‘위험한 보충’14)에 관해 데리다는 다양한 외부 보충은 정확히 보충되고 있는 것 속에 있는 부족 즉 원초적인 부족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보충을 하기 위해서 요청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글쓰기는 말하기의 보충이지만, 말하기도 이미 보충이다. 『에밀』에서 루소는 어린이들은 말하기를 자신의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신속하게 학습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행동하고 그저 혀만 움직여서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깨닫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한 보충’이란 연결 맥락을 따라가면 루소의 작품이라고 범주를 한정지을 수 있다고 믿는 바를 넘어서거나 그 후면에 있는 이러한 ‘피와 살’로 된 창조물의 실제 인생이라고 명명하는 것 속에는 글쓰기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으며, 차이의 연쇄적 관계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을 보충과 대체적 의미작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정 지속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러한 보충의 편재성은 ‘현존’과 그들의 ‘부재’ 또는 실제 사건과 허구적 사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과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내부에서 발생하며, 보충작용이나 차이에 의해 이러한 구조 특유의 결정과정으로서 가능해진다. ‘현존’은 일종의 부재의 형태이며, 실제 역사적 사건은 수많은 이론가들이 보여주려고 노력해 왔던 것처럼 허구의 특별한 형태인 것이다. 『글쓰기와 차이』에서 데리다는 말한다. 현존은 원칙이 아니라 재구성 된 것이다.  4.해체전략   1) 차연적 사유  데리다 철학의 기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연(différance)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의 「차연」에서 알파벳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본인은 첫 알파벳 a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 a는 차이(différence)에 관한 본인의 글에서 필연적으로 암시되어왔다; 또한 문자에 대한 논문이나, 그리고 범위가 각기 다른 본인의 글에서도 매우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différence)와 엇갈려 나타나기도 했다. 이 때마다 철자법칙을 준수하는 많은 독자들에 의해 디페랑스(différance)의 a는 디페랑스(différence)의 엄청난 오자로 간주되면서, 글에 관한 본인의 글 속의 글, 즉 미궁과 같은 본인의 글에서 이미 필요에 의해 a가 뜻하는 바가 암시되어왔다.15) 라고 말하며 차연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연이라는 말이 가진 뜻과 의미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왜 a라는 철자의 차이를 들고 새로운 철자로 자신의 논의를 이끌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글쓰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등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한다.    그러면 ‘차연(différance)’은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이미 앞에서도 암시된 바이지만 차연이라는 이 생경한 조어는 문자 그대로 ‘차이(différence)’와 ‘연기(délai)'의 두 가지 개념이 동시적으로 복합된 관념을 지칭하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différe라는 동사 자체가 이미 ’차이나다‘와 ’연기하다‘의 두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는데, 그런 동사의 양가적 의미를 명사화시킨 단어는 없었다. 그래서 데리다는 양가적 의미를 지닌 동사 différe의 명사화를 가리키기 위해 일반적으로 ‘차연’이라고 번역되는 'la différance'를 만들었다. 그런데 차연의 différance와 차이의 différence는 불어의 발음상에는 아무런 변별적 차이가 없고, 다지 글자상에서 a/e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16)    단적으로 말하면 차연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는 낱말도 개념도 아니다. 차연이라는 말을 구태여 분류하자면 데리다는 그것을 ‘다발(le faisceau)'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차연은 철자법상 하나의 변칙인데, 그런 변칙의 원인을 논리적 단계를 밟아 하나씩 하나씩 따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반적 체계에 속하는 성빌을 지니고 있고, 둘째로 그것은 여러 가지 실이나 의미의 줄을 다시 출발시키고 다른 것들과으 매듭을 맺게 하는 짜깁기나 교차나 얽힘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묶음‘이나 ’다발‘의 뉘앙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런 ’다발‘으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차연에서 ’a/e‘의 모음의 변별은 무슨 의미를 표시하는가. 이미 지적되었듯이 발음상 아무런 차이가 없기에, 다르게 적히고 다르게 보이지만, 발음만으로 전혀 구분이 안된다. 데리다는 무덤과 같은 ’a'를 피라미드에 비유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새로운 내세의 탄생을 준비하기 위하여 생명을 잠시 유예시키거나 연기시킨 죽음의 무덤, 사왕(死王)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 무덤은 동시에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피라미드는 삶과 죽음의 차이가 있는 곳이고, 동시에 죽음이 삶의 유예로 삶이 죽음의 연기로서 죽음 다음에 삶이 대기하고 있는 차연의 생각을 신화로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 차연이 로고스중심주의, 음성중심주의에서 이해되어질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데리다는 ‘a/e'의 문자적 변별이 소리로서 전혀 구분되지 않는 것은 차연이 음성중심주의의 세계관에서 차이의 형식적 개념과 구분될 수 없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암시한다.17) 데리다는 그런 음운론적 배경을 지닌 차연을 어떤 순간에도 현존적이거나 표명될 수 있는 것만을, 하나의 현재로서 현재의 진리 속에 현존하고 있는 존재자 만을, 현재의 현존이나 현재의 진리만을 사람들이 개진할 수 있을 뿐, 차현은 결코 현재(현존)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고 서술한다.18)    지금까지 차연의 문자가 지니는 특성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차연의 성질 그 자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차연은 유예·위임·연기·이송·우회·지연·유보 등에 의하여 지연시키는 데 있는 움직임(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차연은 내가 보류시키고자 하는 현전의 가능성의 원초적이며 공유된 통일성에 의해 선행되지 않는다. 현전을 지연시키는 것은 역으로 그로부터 현전이 그 표상·기호·흔적 속에서 알려지고 실현되는 것이다.19) 둘째로 차연의 움직임은 그것이 개별자들(Différents)을 생산하며 분화의 구조를 낳게 하는만큼 우리의 언어를 특징짓는 개념들의 모든 이항 대립 (예컨대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본다면 감성적/지성적/, 직관/의미, 자연/문화 등과 같은)의 공통된 근원이다. 공통된 근원으로서 차연은 또한 이러한 대립들이 알려지는 동일자(le même)의 요소이기도 하다.20) 셋째로 차연은 소쉬르로부터 생겨난 언어학과 그것을 모델로 삼았던 구조주의적 과학들이 모든 의미와 구조의 조건임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었던 차이(différence)들과 차별성(diacricité)의 생산이기도 하다. 넷째로 차연은 잠정적으로 차이, 혹은 존재-존재론적 차이의 이러한 전개를 명명할 것21)이다.22)  차연은 공간적 개념인 차이(différence)와 시간적 개념인 연기(délai)의 결합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적인 현재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은 결국 차이가 낳은 부산물이요, 다른 것에 연기된 관계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에 연기된 그런 관계가 바로 ‘흔적’이다. 현재가 현존적이라면, 그 흔적들은 부재적인 것일까? 그러나 흔적은 현존적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흔적은 무(無)가 아니다. 흔적은 양자택일(현존/부재)의 논리를 넘어서 있다. 대기로서의 차연은 시간적으로 차연이 흔적들의 연쇄성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말한다. 즉 대기로서의 차연은 텍스트의 세계에서 이른바 의미라는 것이 그 자체에서 절대적으로 성립할 수도 없고, 그 자체에서 자기 영역을 통괄하고 통어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닐 수가 없음을 가르쳐 준다. 그런 점에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차연은 한 시점이나 한 곳에서 요약될 수 없고 통일 될 수 없다. 교차점과 같은 차연은 그 자체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말해 온 하나의 ‘개념(le concept)’이 아니다. 데리다는 오히려 차연이 하나의 ‘반개념(le contre-concept)’이라고 규정한다. 구조주의는 통시적․역사적 성격을 등한히 하고, 공시적․구조적 성격을 가까이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러한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차연은 시간적 흔적의 연기나 유예, 저장, 반송 등과 같은 관계의 흐름을 역동적으로 파악한다.23)    차연은 흔적의 구조요, 흔적의 힘이기에, 그것이 선험성이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선험은 아니다. 흔적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환영과 같은 것이기에 그런 환영으로서의 차연은 동의어가 아닌 무수한 반개념적인 대체개념들에 의하여 문맥의 필요에 따라 달라진다. 차연의 대체적 반개념들을 보면, 유보(la reśerve)-간격(l'espacement)-소모(la dépense)-원흔적(l'archi-trace)-원문자(l'archi-écriture)-지움(l'effancement)-대기(la temporisation)-연기(le délai)-어긋남(l'écart)-보충대리(le supplément)-파르마콘(치료제/독약, le parmakon)-파르마코스(희생양, le parmakos)-코라(la chora)-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처녀막과 파열(hymen)-이중회합(기)(la séance)-표시(la marque)-시작과 흠(l'entame)-고막(le tympan)-주름(le pli)-이전의 중용(le milieu antérieur)-중간태(la voix moyenne)등이 있다.24)    흔적을 있다고 보면 그것은 ‘기념비’이고, 없다고 보면 그것은 ‘신기루’이다. 흔적은 흔적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지운다. 흔적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흔적은 생명믈 기록속에 새겨두면서도 또한 피라미드처럼 죽음의 집이다. 그래서 흔적과 차연은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리다의 주장처럼, ‘차연은 있 X다’라고 기술할 수밖에 없다. 2) 데리다의 은유   언어의 형성과정을 교환가치체계의 경제서으로 파악한 소쉬르의 통찰을 차용했던 데리다는 은유의 속성을 고리(高利)로 인한 ‘원금의 완전탕진’으로 규정한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 지불로 인한 원금의 완전 탕진과 이자가 원금에 가산됨으로 인한 원금의 무한 증식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뜻으로 파악했다. ‘원금의 완전탕진’ 즉 의미의 완전부재를 무한 의미로 간주해온 서양철학은 빈혈을 앓고 있는 신화라는 것이다.25) 백색신화26)   ①은유와 명사중심주의  ‘명사중심주의’라 할 때의 이 ‘명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정의(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에 나오는 그 명사이다. 명사중심주의의 명사는 원래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 아니라 어떤 한 사물에 속하는 이름이며, 그래서 그 사물의 ‘고유한’ 명칭이다. 이 고유 명칭은 그러므로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에 불과한 은유적 명칭과 대비된다. 이때 고유 명칭(단순 명칭)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지칭하며, 논리적 일의성을 띠는 것으로 전제된다. 논리적 일의성을 띤다는 것은 그 의미가 언제나 자기 동일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고유 명칭은 명료하고 비오류적이다. 반면 차용된 명칭으로서의 은유는 다의적이고 때로 통제 불가능한 의미 산종(산포, 흩뿌림la dissémination)27) 가능성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론은 고유명칭 이론과 그 이론을 떠받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체의 기본적 전제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아리스토테레스가 ‘좋은’은유와 ‘나쁜’은유를 구분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은유란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을 수단으로 해서 원래 지시하고자 하는 사물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리적 명칭으로서의 은유가 그 우회적 거리를 성공적으로 지나서 원래 의도되었던 의미를 명확히 지시하는 경우, 그 은유는 ‘좋은’은유라 한다. 좋은 은유란 의미의 성곡적인 자기 귀환이다. 반면 ‘나쁜’은유란 그런 의미의 자기 귀환이 실패하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의도되지 않은 효과에 의하여 의미의 재현전이 방해되는 경우에 해당한다.28) 데리다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의 기저는 현전의 존재론이자 로고스중심주의의 이념이다. 따라서 은유론은 형이상학의 반복에 불과하며, 특히 형이상학에 의하여 검토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진리 개념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계기이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적 은유 개념을 명사중심주의로 재구성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기호개념을 해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상응한다.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의 해체는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되며, 이 기표와 기의의 이분법은 여타 형이상학적 사유를 조직하는 대립적 이분법(예를들어 정신/물질, 내면/외면, 동일성/차이성 등등) 전체를 대신하고 또 반복한다. 둘째, 형이상학적 기호 개념은 기의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표의 물질성을 환원하고 배제하는 운동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형이상학적 사유 일반이 형성되는 과정, 즉 감성․우연성․특수성 등등을 배제하는 운동(가령 피타고라스의 정화, 데카르트의 회의, 헤겔의 변증법적 지양, 후설의 선험적 환원 등등)일반을 회집하고 반복한다. 형이상학의 본성에 내재하는 이 운동은 기호개념 안에서뿐만 아니라 철학이 정의하는 은유의 개념 안에서 재발견된다.    감성적 대상으로부터 차용된 말로서의 은유는 의미의 직접적 현전을 대리한다. 의미의 현전을 대리하는 대신 은유는 의미를 일단 형이하학적 영역에 머물러 있게 하여야 한다. 초감성적 의미에 대하여 이것은 일종의 소외이다. 은유에 담길 때 의미는 자기의 고향이 아닌 타향에, 자기의 집이 아닌 타인의 집에 있다. 은유란 초감성적인 것에 감성적인 복장과 집을 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대와 전세의 처지는 임시적인 것이다. 철학에서 은유적으로 지시된 의미는 궁극적으로 다시 자신의 집으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 그 복귀가 철학적 은유 개념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은 ‘형이상학’이 함축하는 ‘상’의 운동의 재반복에 불과하다. 이 운동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의 상승적 이행이며, 이 상승적 이행이란 감성적인 것이 관념적인 것으로 승화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철학 안에서 은유적 운동의 궤적은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감성적 언어의 관념적 이상화(idéalisation)이자 의미(혹은 진리)의 자기 재점유(réappropriation)과정이다.29)    ②은유와 태양중심주의  철학적 은유의 추동성이 이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한에서, 그 은유적 성격을 서술할 때 우리가 돌아가게 마련인 은유는 ‘집’의 은유이다. 철학이 현전의 존재론과 로고스중심주의에 의하여 지배되는 한에서, 의미가 은유적 표현에 내맡겨진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임대된 집(은유)에서부터 다시 자신이 원래 속하던 집(고유 명칭)으로 돌아가기위한 여정에 놓인다는 것을 말한다. 일단 문제는 그 자기 복귀의 운동이 철학적 사유 자체의 본성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 추동성임을 탈구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귀가 언제나 성공적일 수만은 없다. 의미가 은유에 내맡겨질 때부터 살게 되는 이방의 삶과 실낙원(혹은 소외)의 역사는 오히려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은유라는 수레, 의미를 태우고 있는 이 전차에는 처음부터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은유를 통하여 철학 혹은 로고스의 울타리를 논리적으로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증명한 때부터이다. 즉 은유라는 배는 고유의 항구에 정박할 수 있는 닻이 없다. 은유의 추동성이 일으키는 파동은 현전의 땅이 보이는 지점에서 다시 집안과 휴식을 방해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태양중심주의’에서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이 빛은 명료성/애매성, 밝음/어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생명/죽음 등등의 다양한 표현을 파생시키면서 거의 모든 철학적 은유들과 결합된다. 그래서 태양은 진리를 말하는 모든 철학적 은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서 이 태양을 통한 진리 은유는 모든 '은유들 중의 은유'인 것처럼 보인다.30) 은유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비가시적이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나게하고 현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게 하고, 아직 드러날 수 없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아직 고유 명칭이 부재하는 의미를 가시화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은유이다. 그런데 모든 나타남과 사라짐을 빛 속에서이다. 가장 자연스런 나타남과 사라짐은 일출과 일몰이며, 빛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양 혹은 빛의 은유는 모든 은유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특권적인 은유이다. 진리를 말하는 철학적 은유는 많은 경울 태양의 은유에 속하거나 태양의 은유로 향한다. 그런 한에서 철학적 은유는 향일성(向日性) 식물이다.    그러나 태양은 무엇보다 철학이 통제할 수 없는 마지막 감성적 요소를 말한다. 로고스는 어떤 방식으로도 태양과 빛의 은유를 배제하거나 말소할 수 없다. 그것은 빛의 은유가 철학에서 모든 은유적 운동이 수렴되는 중심인 동시에 나아가서 철학 자체의 개념31)들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이론(theoria)'라는 말 자체가 ’본다(theorein)'라는 감성적 행위에서 전융되어 굳어진 말인 것처럼, 철학의 초보적인 개념들은 많은 경우 빛의 은유로부터 태어났거나 빛의 은유로부터 자명성(自明性)을 얻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은유적 세계와 구분된 거리에서 자신의 모습을 추스르자마자 자신의 몸뚱이가 다른 비유적 언어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광합성을 통해서 형성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은유와 마찬가지로 철학은 향일성 식물이다. 바로 그것이 탈구성된 철학의 정체이다. 따라서 철학의 순수 개념과 은유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사라진다기보다는 철학의 내면 여기저기를 지난다. 철학의 몸뚱어리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은유의 흔적은 어원적 탐구와 계보학적 연대기 구성을 통해서도 여전히 말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탐구와 재구성에 개입하는 어떠한 분류의 범주도 그것이 분류하고 재현전화 시키는 은유적 전용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소 불가능한 은유의 흔적은 분명히 어떤 역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역사성은 단지 잊혀진, 그래서 로고스가 회상을 통해서 재현전화 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다. 그 역사성은 오히려 철학의 자기 의식과 정체성 자체를 조건짓는 어떤 구조적 시간에 해당한다. 나아가서 철학의 자기 의식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특정한 역사 개념 자체와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철학이 이 점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로고스 내면의 은유의 흔적과 이 흔적이 함축하는 역사성은 로고스의 무의식이다.32)    데리다는 은유로 철학 개념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생산된, 철학이 말하는 진리의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비밀스런 음모를 꾸민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사적 양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은 은유, 환유 등의 비유 장치들이 언어에 만연해 있어 진리의 전달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데리다는 이것을 은유는 항상 자체 내에서 죽음을 운반하고 이 죽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철학의 죽음이라고 하였다.33)   5. 맺음말  지금까지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개론적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데리다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후설에 대한 데리다적 철학을 살펴보았고 데리다 철학에 기저가 될 수 있었으나 역시 전통적 서구철학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니체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데리다 철학의 본격적 면모를 알 수 있었던 소시르와 루소의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철학을 알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데리다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었던 두 가지의 개념들 즉, 차연적 사유와 은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획일성,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모든 중심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던 기회가 되었으리라 본다. 데리다의 이 모든 작업이 형이상학 주체에 대한 비판이고 특히 그것이 경직되어있던 일반 사고의 변화를 초래한다면 그래서 더 이상 데리다적 사유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데리다가 의도한 바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J. 데리다, 박성찬 편역,『입장들』, 솔, 1992     ―   , 김보현 편역,『해체』, 문예출판사, 1996     ―   , 김성도 역,『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6     ―   , 김다은·황순희 공역, 『에쁘롱; 니체의 문체들』, 동문선, 1998     ―   , 허정아 역,『시네퐁주』, 민음사, 1998     ―   , 남수인 역,『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2001 J.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H. 키멜레, 박상선 편,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사회평론』제 92권 7호, 1992 이성원 엮음,『데리다 읽기』, 문학과지성사, 1997 조너던 킬러, 이만식 역, 『해체비평』, 현대미학사, 1998 김형효,『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배의용,「데리다와 형이상학 해체」, 『철학』제 43권, 1995 한상철,「데리다의 기호시학」,『철학』제 45권, 1995 허재영,「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철학의 탈주』,새길, 1995   각주 설명   1) 마음 또는 의식(意識)에 현전(現前)하는 것을 뜻하는 철학 ·심리학용어. 관념 일반을 나타내는 idea(영)의 역어(譯語)로 사용되는 수도 있으나 대개는 representation(영),  Vorstellung(독)의 역어로 사용된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어원(語源)인 라틴어 repraesentatio는 ‘다시(re) 현전케 하는 것(praesentatio)’을 의미하고, 독일어의 Vorstellung은 ‘앞에(vor) 세우는 것(stellu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표상이란 말은 적어도 근세 이후의 용법에서는 인간의식의 대상정립작용(對象定立作用) ․반성작용과 관계가 있는 대상의 측면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일체를 인간의식 안에 가두어 생각하려고 하는 근세 R.데카르트 이후의 의식내재주의적(意識內在主義的) ․주체주의적(主體主義的) 철학은 I.칸트를 이어받아 세계의 일체를 인간의식의 표상으로 해소시키는 A.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철학에서 하나의 정점(頂點)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근세의 인간중심적 주체주의철학 또는 형이상학은 바로 근세 서유럽의 합리주의적 기술문명을 낳게 한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체의 사물을 인간의식에의 반사(反射)나 반성(反省)의 양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기본적 약점과 문제성에 대한 반성이 현대철학의 최대 문제의 하나로서 다각도로 다루어진다.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2)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해체』, 문예출판사, 1996, p25. 3) 여기에서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혼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상상(력)은 중성화시키는 기능이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미지는 중성화를 돕는 중요한 보조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이 가지는 중성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결과, 후설은 모든 실제적 통화도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혼자만의 독백이 갖는 비통화적인 비지시적인 순수표현이 있다고 간주한다. 여기에서 데리다의 날렵한 반론이 개입된다. 후설이 허구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표상과 위조적이라고 간주한 실제적 경험에 관한 의식이야말로 후설이 찾는 이상성이라른 것이다. 주체의 이상성이 주체가 지니는 감각적 경험적 개별성을 버리는 것이라면 언어로 표상되는 주체야말로 주체의 이상성이다. -자끄 데리다, 앞의 책, p 26 4) 존 레웰린, 서우석․김세중 역, 『데리다의 해체주의』, 문학과 지성사, 1988, p39 5) 김용복, 「철학과 문학의 이음새-데리다의 후설 의미론 읽기」,『인문사회과학논문집』제 25권, 1996, p12 6)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한쪽은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강하고, 한쪽은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약하다는 남녀간의 전통적인 대립 관계는 아니다. 이것이 보여지고 있는 것은 예술가에서이다. 니체는 예술가를 “남성적인 어머니(männliche Mutter)”로 부르고 있다. -H. 키멜레, 박상선 편역,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 p74 7) H.키멜레, 암의 책,  p74 8) 한 예로 헤겔을 들 수 있는데 데리다에 의하면 헤겔의 기호론은 말해진 언어를 문자적 기호보다 우위에 놓고 있다. 씌어진 글은 단지 말해진 언어의 보충으로서 후자를 대신할 뿐이라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는 씌어진 글보다 정신에 가까이 있는데, 그것은 말해진 언어의 경우 어떤 자연적인 기저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기의 파장운동은 영혼의 ‘내적인 떨림’을 직접 재현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헤겔이 초기 저술에서부터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첫 문장을 시작하는 요한 복음을 애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H. 키멜레, 앞의 책, p60. 9) 데리다는 서구철학이 비이성에 대한 이성, 차이에 대한 동일성, 부재에 대한 현전을 진리의 근거로 주장해 왔다고 본다. 그런데 이처럼 동일성이 차이와의 관계에서 차이를 배체함으로써만 동일성이 될 수 있다면 동일성 자체는 그 속에 차이에 대한 배제, 억압을 지니고 있는 폭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성, 동일성, 현전에 대비되는 비이성, 차이 부재라는 그것의 타자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데리다는 서구철학의 근저가 되는 본질/현상의 이원적 대립구조에서 권력의 전략을 탐지한다. 여기에서 본질을 현상에 대해 우선적인 것, 근거로 보고 현상을 본질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본질에 특권을 부여하고 그 특권의 그 대립항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킨다. 이러한 대립구조는 가지적것/감각적인 것, 안/밖, 선/악, 진리/허위, 천상/지상, 자연/문화, 말하기/글쓰기, 자본/노동, 남성/여성, 백인/흑인 등의 이항적 대립의 짝을 만든다. 각 대립항의 한 측면은 원천적인 것이고 다른 측면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사회평론』제 92권 7호, 1992, p190 10) 로고스중심주의는 헤겔에게서 잘 설명될 수 있다. 헤겔은 『예나 시절의 시도적 체계』와 『시도적 체계Ⅱ』에서 데리다는 에테르에 대한 헤겔의 이론을 찾았는데 이것은 데리다가 말한 서구철학의 음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를 직접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에테르는 저항 없는 질료로서 거의 정신-질료이다. 말해진 언어가 자연적 기저 없이 존재하듯이 여기서는 어떤 것이 그렇게 기저 없이도 있을 수 있다.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긴 스스로-듣고- 말함(Sich-hören-sprechen)이 여기서 완전히 실현되고 있다. ‘지상의 체계’에서 유한한 질료가 생기기 이전에-이러한 유한 질료에서는 이념이 어떤 자연적 기저에 묶여 있는 바-절대 정신 혹은 신은 스스로 자신과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직접 스스로 들었다.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듣는 사람에게 음파를 전해주는 공기를 통과하는 과정없이 절대자의 말은 동시에 스스로를-듣는-것(Sich-selbst-hören)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체계 속에 있는 모든 유한적 중개 현상에 깔려 있는 운동의 순수한 형식이다. 스스로-듣고-말함은 로고스의 구조 즉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H. 키멜레, 앞의 책,p62 11) 자끄 데리다, 박성찬 편역,『입장들』, 솔, 1992, p49~50 12) 조너던 킬러, 이만식 역, 『해체비평』, 현대미학사, 1998, p110~111 13) 조너던 킬러, 앞의 책, p115 14) 예를 들어 루소는 교육을 자연에 대한 보충이라고 논하고 있다. 자연은 원칙적으로 완성되어 있는데 교육은 외부 추가가가 되는 것이다. 또한 루소는 자위행위를 위험한 보충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경우처럼 이는 정상적인 성에대한 그릇된 추가, 글쓰기가 말하기에 첨부되어 있는 것처럼 첨부된 실천이나 기교인 것이다. 1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8 16)따라서 불어로 차연, 디페랑스(différance)는 차이 디페랑스(différence)와 똑같이 발음되기 때문에, 눈으로는 식별되지만, 소리로는 e와 다른 소리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없는, 그래서 들리지 않는 a를 e에 대한 실수로 간주하고 무심히 지나가려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a를 지닌 차연(différance)에 의해 이미 사전에 기술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 차연 속에 갇혀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19 17)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3, p208 18) 차연은 현전인 동시에 부재라는 기묘한 활동이다. 그것은 현재 작용하는 동시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지우는 동시에 언젠가는 일체를 나타내려는 운동이다. -이광래,「데리다의 해체실험과 철학적 단두대」,『한국논단』제 63권, 1994, p222 19) 그런 점에서 그런 연기하는 운동보다 더 이전에 근원적인 자기 일치의 그런 통일이 선행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차연의 연기보다 더 앞선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연기하고 위임하고 우회하는 차연의 운동이 모든 현존보다 선행한다. -김형효, 앞의 책, p209 20) 우리의 모든 언어활동이 구조주의적 발상에 따라 양가적인데, 그런 양가적 발상, 이분법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기본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나에게 있어 타자다. 너는 타자나 이타자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주장하는 동일자라는 생각을 데리다는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그런 사고는 말소리중심주의의 소산이다. 데리다에 의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기 동일성을 지닌 동일자가 아니고 나는 타인인 너의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너의 타자로서의 내가 바로 데리다가 말한 le même이다. 그래서 과 은 데리다의 철학논리에서 같은 뜻이 전혀 아니다. 이런 사고논리를 위의 인용에 대입하면 같은 것은 이미 그 자체 다른 것을 전제하고 있고, 같은 것은 곧 (타자의 타자)이기에 같은 것이 대립된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포괄하지만 같은 것이 어떤 실체나 존재나 기저나 현존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같은 것은 단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효, 앞의 책, p209~210  21) 차연에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씀으로써 시작되는 몇가지 노선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노선들은 느슨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묶음’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차연은 엄격하게 말해서 단어도 개념도 아니며, 단지 잠정적인 그래픽 흔적이다. - H.키멜레, 앞의 책, p88~89 22) 자끄 데리다, 박성창 편역, 앞의 책, p31~34 요약정리. 23) 김형효, 앞의 책, p219~220 24) 김형효, 앞의 책, p227 25)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9 26) 형이상학을 가능케 한 이 우화는 자체적으로 스스로를 삭제하지만, 양피지 위에 눈에 보이지 않게 계획되어 백색 잉크로 기록되어, 여전히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자끄 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171 27) 하나의 텍스트 속에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잠재된 의미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포를 다의미적 개념이라고 명확하게 못을 박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면 산포와 다의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다의성은 한 단어에 그 의미가 아무리 다양하게 복수적이라 하더라도, 그 한 단어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해독된다는 생각과 연결되지만 종자를 흩뿌리는 산포는 하나의 정의나 또는 다원적 정의로 모여지지 않는다. -허재영,『철학의 탈주』,「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새길, 1995, p146 28) 김상환,「데리다와 은유」,『데리다 읽기』(이성원 엮음), 문학과지성사, 1997, p126 29) 김상환, 앞의 책, p129. 30) 주체를 규정한 현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가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던 것은 바로 태양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과 대조되는 진리, 로고스, 이성이다. 화폐통화체계에서 금이 최고의 가치가 되듯, 철학(은유)체계에서는 태양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자끄데리다, 김보현 편역, 앞의 책, p22 31) 철학이 은유를 정의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개념들, 그 밖에 철학을 떠받치는 진리·형상·이성 등등의 개념들을 말한다. 32) 김상환, 앞의 책, p131~132 33) 김형효, 앞의 책, p246~248 [출처] 데리다 읽기 -해체이론을 중심으로 / 외 1편|작성자 옥토끼  
‹처음  이전 42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